소설리스트

3권-12화 (12/18)

12.

  

  노인네는 해담 건축과 여지운에게 일을 맡기겠다고 했지만 정해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확정된 거라고는 건물을 지을 부지 뿐. 

  보통은 고객 인터뷰를 바탕으로 선호 요소를 분석하고 인터뷰와 회의를 거쳐 도면 작성, 3D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시공사 및 전반적인 진행을 모두 선택해야 하니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다음날 출근한 정아영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죄송하다는 사과에 그건 정아영씨 탓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3팀 구성원이었고, 여지운이 팀장인 이상 그 일에 관한 책임 역시 있었다. 일을 분배하고 검토하는 것도, 수습과 정리도 팀장의 몫이었다. 특히 이번 같은 경우에는 정아영보다 여지운이 더 흥분했다. 

  “정아영씨가 뭘 했습니까? 전적으로 그 진상의 잘못이고, 그다음은 적당하게 수습하지 못한 내 잘못입니다.” 

  묘하게 조용한 팀원들 사이에서 유독 감동한 이대리가 손뼉을 쳤고 박주임과 서태경이 엄지손을 치켜들었다. 

  

  

  

  -지운씨, 카술레 잘하는 집이 있는데 오늘은 거기서 식사해요. 

  오후 업무가 시작될 즈음 선연홍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이틀 전 차에서 깨 도망치듯 집으로 간 이후 처음 보는 거였다. 도망치듯이 집으로, 도망치듯……. 사실 그때는 도망친 게 맞았다.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제멋대로 굴었었는데 요즘은 휩쓸리고 끌려 다녔다. 목에 개 줄이 묶인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길게 이어진 줄 끝을 잡고 있는 건 아마도……. 

  속이 답답해 책상에 굴러다니는 사탕을 먹었지만 상쾌하기는커녕 미묘한 단맛 때문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결국은 휴지에 뱉어 쓰레기통에 던지고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네, 벌써 기다려집니다. 이 마음은 지운씨를 만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커지겠죠. 회사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얜 버터를 처먹었나.”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 회사 앞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선연홍은 여지운의 행동반경을 아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에 녹아 있었다. 일상, 일상이란 말이지.

  정말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연홍은 여지운을 보고서 손을 흔들었다. 그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고생했습니다, 이거 받아요.”

  “선연홍씨는 좋겠습니다.”

  “예?”

  “처 놀아서요.”

  비아냥 섞인 말에 선연홍이 웃었다. 여지운을 오랜만에 봐서 무척 기분이 좋은 듯 두 손으로 뺨을 살짝 감쌌다가 놨다. 

  “멋대로 만지지 마십쇼.” 

  탁. 팔을 치워내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황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 정도로는 안 아픈데, 좀 더 세게 때려도 됩니다.”

  “좆이나 까세요.”

  “정말 까도 됩니까?”

  “……그나저나 필요 없다는데 왜 또 꽃다발입니까? 차라리 돈으로 주든가.”

  “그래요. 그럼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요.”

  “쪼잔하게 천 원, 오천 원 주려면 아예 말고.”

  “제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보다 어서 타요. 생각보다 차가 막혀서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의미 없이 보던 여지운이 문득 아주 원초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선연홍은 욕먹으면 좋아하고 더 해달라고 흥분했다. 씨발도, 개새끼라는 말에도 기뻐하고 수줍게 웃었다. 욕 듣는 것에 흥분하고, 기뻐하는 미친놈이니까 닭살 돋거나 간질간질한 말은 싫어하지 않을까? 이게 얼마나 병신 같은 생각인지 알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몰리게 되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연홍씨.”

  “예, 말씀하세요.”

  “저는 선연홍씨 보고 싶었는데, 선연홍 씨는 어, 어땠습……?”

  끼익. 아주 안전하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옆으로 꺾이며 몸이 훅 쏠렸다. 

  “뭡니까? 뒈지려면 혼자 뒈지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위험하게.” 

  “저도,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예?”

  차 안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도로에는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았고 빛이라고는 옆 차선에서 번쩍이는 헤드라이트가 전부였다. 마침 지나가는 차량 빛에 선연홍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선연홍을 비난하며 소리치려던 여지운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지운씨?”

  “갑시다.”

  “지운씨, 저는…….”

  “배고픕니다. 닥치고 출발이나 하시죠.”

  “……그래요.” 

  뭔가 말을 하려던 선연홍은 한숨 같은 미소를 지었고, 여지운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외면했다.

  선연홍이 데려온 곳은 음식점이라기보다 잘 꾸민 주택을 연상시켰다. 정성 들여 돌본 티가 나는 정원이라든가, 입구에 세워진 우체통, 흔들의자 같은 소품들이 아기자기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앉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말린 꽃과 구절초가 꽂혀 있었다. 구절초, 흔히 토끼풀이라고 하는 작고 꽃잎들이 둥근 모양으로 촘촘하게 피어난 꽃이었다. 그걸 뽑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얇고 가느다란 줄기로 감싸면 꽃반지가 완성된다. 어렸을 때 얼기설기 엮인 걸 엄마 손에 끼워 줬더니, ‘왜 이렇게 무의미한 짓을 하니,’하는 답이 돌아왔다.

  “지운씨?”

  “아…….”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질투 나게요.”

  음식점 안은 따뜻했다. 꼭 온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품, 음식, 흐르는 음악 같은 것들이 그랬다. 어느 하나 튀는 것 없이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냥 회사일.”

  “아, 잘 해결 돼서 다행입니다. 거봐요. 뭐랬습니까. 지운씨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연홍씨, 정말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정신과 검사 한번 받아보지 않을래요? 같이 갑시다. 내일이라도 괜찮습니다.”

  “네, 지운씨가 함께 가준다면 그깟 검사가 뭡니까. 아니면 같은 병실에 입원이라도 할까요? 병원에서 연애해도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테이블 위의 꽃병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던 여지운이 등 뒤에서 울리는 “선생님.”이라는 소리에 손을 다시 내려놨다. 뒤로 향하는 선연홍의 시선을 따라 여지운 역시 고개를 돌렸다. 

  우연은 어쩜 이리 쓸데없고 얄궂을까.  

  “……임선열.”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선생님께서 최근 이곳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번 방문했었는데 이제야 뵙네요. 혹시 잠시 앉아도 될까요?” 

  임선열은 여지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선연홍을 향해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했다. ‘이제야 뵙네요.’라는 말에서 그가 일부러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갈 길이나 가지?”

  임선열은 여지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콧방귀를 끼면서 선연홍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여지운의 기억 속 임선열은 다람쥐처럼 밝고, 귀여웠다. 그리고 헤어질 때 즈음에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했었다. 물론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니 성격이 바뀐 것은 이해하겠지만 이건 너무 바뀐 것 같은데.  

  “야, 임선열.”

  여지운이 다시 한 번 불렀지만, 그는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얼굴로 한번 힐끔 본 게 다였다. 

  “선생님. 전시회 준비는 잘 되고 계신가요?”

  “……전시회?” 

  처음 듣는 소리에 여지운이 그 말을 되 뇌였다. 선연홍은 미묘한 얼굴을 한 채 여지운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전시회?”

  두 사람 중 누구도 여지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둘 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정확히는 임선열이 일방적으로 선연홍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지만. 

  “평소 선생님 팬으로서 이번 전시회 너무 기대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첫 전시회 아닌가요? 우리 갤러리에서 맡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선생님.”

  “임선열씨, 그 건은…….”

  으음. 여지운이 턱을 쓸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 선연홍은 임선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임선열이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주최한다는 걸 보면 그 사이에 무슨 얘기라도 있었던 것 같다.

  “하하. 이것 참. 두 사람이 작당하는 줄도 몰랐네요.”

  여지운은 전시회에서 임선열에게 명함을 건넸지만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리고 여지운도 그 사실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당장 닥친 일도 여러 개인데 만나기 전까지는 기억도 나지 않던 사람까지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작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잠깐. 작당? 쥐고 있던 포크를 놓은 여지운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작가와 미술관 직원이 개인전에 관한 연락을 하는 것을 작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굉장히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 않은가. 애초에 선연홍이 누구랑 뭘 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선연홍이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

  그의 시선은 접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다른 것들로 가득했다. 기분이 왜 나쁜지 같은 쓸데없고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느라 뺨에 쏟아지는 시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띠던 미소가 사라진 선연홍의 얼굴은 차갑고 단단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엇갈렸다. 나지막한 바이올린 소리가 흐르는 음식점 안에는 식은 음식들과 불편한 침묵이 가득했다.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임선열이 “근데, 여지운.”하고 입을 열었다.

  “이건 선생님과 내 일인데 네가 왜 그렇게 흥분해? 네가 뭐라고.”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얼굴이 구겨지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흥분? 무슨 흥분. 흥분한 건 오히려 임선열 너인 것 같은데? 멋대로 앉아서 멋대로 나불거리고. 네 덕에 음식 맛 뚝 떨어졌네. 참 고맙다.”

  임선열이 짜증 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말하다 보니까 더 화가 나서 끝에는 거의 씹어내듯이 내뱉고 있었다. 임선열은 욕을 내뱉고 싶어 했으나 선연홍을 의식한 듯 멈칫했다. 

  “말하는 본새 하고는. 너는 어쩜 변한 게 없냐?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건 하나도 신경 안 쓰지? 너만 잘났고, 네 감정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은 여전하네.”

  “이기심?”

  “나한테 이러는 거 보면 선생님에게 어떻게 할지 상상이 된다. 선생님은 네가 그렇게 대해도 될 분 아니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너랑 얘기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관심 좀 꺼.”

  “야. 너나 관심 좀 꺼. 그리고 선연홍은 나랑 먼저 앉아 있었…….”

  다고. 라고 말하려던 여지운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웃긴지 깨닫고 입을 닫았다. 지금 이것은 마치 선연홍을 사이에 두고 서로 ‘내꺼야, 내꺼야.’ 하고 싸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누군가가 뒤통수를 빡 하고 때린 것처럼 얼얼했다. 선연홍은 부추기지도, 말리지도 않고 마치 이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임선열도 짜증 났지만 이상할 정도로 아무 반응 없이 관망만 하는 선연홍도 화가 났다. 만족하고 있던 일상이 확실하게 어그러지고 있는 이 느낌은, 징조는 좋지 않았다.

  “그래. 어디 ‘우리 선생님’과 쎄쎄쎄라도 하든지. 그리고 선연홍씨, 당신도 오매불망 당신만 바라는 팬하고 재밌게 노십쇼.” 

  “여지운,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혀를 차는 소리와, 옆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을 외면한 채 일어섰다. 이런 상황 자체가 너무 어이없어서 여지운이 제 뺨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쳤다. 짝. 단단한 손바닥이 뺨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며 차진 소리를 냈다. 

  정신 차리자. 여지운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선생님.”

  여지운이 나간 출입문을 보고 있다가 선연홍을 힐끔 보는 임선열의 모습은 마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어……?”

  화났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선연홍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전시회 건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벽을 두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굳어 있던 얼굴이 변할 때는 여지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다. 그는 단편적으로 이어지는 여지운의 대학 시절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화력이 좋은 임선열조차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무서운 남자가 지금 입을 벌려 웃고 있었다. 여지운이 사라진 쪽을 보던 시선이 획 돌아 제게로 왔을 때 임선열이 입을 열었다.

  “전 정말 선생님 오랜 팬이었어요.” 

  “……그래서요?”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전환해보려 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예?”

  “그 얘기를 나한테 왜 합니까?”

  “…….”

  작가 선연홍은 주로 담묵화를 그렸는데 검은 먹을 제외하고 쓰는 색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세상은 하얀 종이와 먹 그리고 한 가지 색채가 다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그 색 자체, 또는 그 색이 표현하는 주제에 집중하게 됐다. 유명세에 비해 신상 노출이 적어 우연이 아니었다면 만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선생님. 죄송해요. 여지운 쟤는 10년이 다 돼 가는데도 변한 게 하나 없네요. 대학 때부터 얼마나 이기적인…….”

  “압니다.”

  “예?”

  제 말을 툭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임선열이 눈을 깜빡였다. 

  “선생님?”

  압니다. 선연홍은 그 한마디를 내뱉은 뒤 멈추고 있던 나이프 질을 시작했다. 탄탄한 근육이 오밀조밀 자리 잡은 팔과 그 끝의 손가락들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스테이크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다. 후추와 소금으로만 밑간을 해 심심하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원재료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주방장의 솜씨가 좋아서인지 담백함이 잘 살아 있다. 하지만 선연홍은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지운.”

  “네?”

  “여지운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임선열이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댔다.

  “당신보다 더. 그러니 내 앞에서 그런 말은 삼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좋겠습니다. 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그 안의 내용은 천 조각을 마구잡이로 찢은 것처럼 거칠었다.

  “임선열씨, 지갑 줘요.”

  “예? 아, 여기 있습니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선연홍이 임선열에게서 지갑을 건네받았다. 반들반들 광택이 나는 표면이나 실밥을 보니 꽤 오랫동안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중하게 쓴 티가 나는 임선열의 것과 달리 여지운의 지갑은 선연홍이 사준 신상이었다. 교제 초반, 조금의 사양도 없이 선연홍이 내미는 지갑을 냉큼 잡아챘다. ‘이거 뭐냐?’하고 묻는 것에 반해 눈과 입 근육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혹시 이딴 싸구려 지갑 같은 걸 사주는 거냐며 뺨이라도 때려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정 반대의 반응에 침묵했었다. 하지만 싸늘한 눈매와 달리 움실대는 뺨이 신기하고 귀여워서 한참이나 봤었다.

  “귀여웠지.”

  알 수 없는 말을 툭 내뱉던 선연홍이 임선열의 지갑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각이 지고 네모난, 손바닥 정도의 빳빳한 종이는 여지운의 명함이었다.

  “임선열씨에게는 필요 없을 테니, 가지고 가겠습니다.”

  “…….”

  “여지운씨에 관한 건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마세요. 긍정도 부정도 말고,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십시오.” 

  어느새 미소를 거둔 선연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보자는 그 흔한 인사치레 하나 없이 돌아선 뒷모습은 단호함이 엿보였다. 원 주인들이 떠난 테이블에는 임선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저 둘 대체, 뭐야?”

  

  * * *

  

  천적이라는 게 있을까. 생각 없이 샤워기 물을 틀었던 여지운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찬물에 몸을 퍼덕였다. 차갑고 따가운 물줄기가 몸뚱이를 때리듯이 처덕처덕 달라붙었다.

  “아, 차가워.”

  닭살이 확 돋을 정도의 차가운 물벼락은 머릿속을 휘젓고 있던 쓸데없는 생각을 한순간에 몰아냈다. 찬 물방울들을 털어내며 뜨거운 물을 틀었다.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건지 모르겠다. 선연홍이 그 선연홍인 줄 모르고 만났던 것? 근데 과거의 선연홍이 어쨌든지 알 게 뭔가. 그럼,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어서 호텔 예약한 일?

  그 사달이 일어난 후, 두 달간 만나자는 말에 응했던 게 문제 일 수도 있었겠다. 어두운 밤하늘에 유독 도드라진 하얀 얼굴은 도깨비불을 본 것처럼 이성을 흐려 놓았다. 마치 홀린 것같았다. 그리고 선연홍의 작업실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 온갖 욕정이 묻어나던 그 그림을 보는 게, 술 처마시고 부르는 것도. 

  생각해보니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선연홍이 얼마나 대단하고 유명한지는 궁금하지 않다. 임선열과 무슨 작업을 하는지 여부야말로 관심 없다.

  여지운은 이제껏 하얀 분필로 슥슥, 마음속에 선을 하나 그어 놨다. 그 선을 넘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밀어냈다. 누군가가 사생활에 끼어드는 것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경계하고 잘라냈다. 하지만 요즘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확립된 가치관이 아닌 ‘왜, 어째서.’와 같은 불완전한 물음뿐이었다. 선연홍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본인이 그 남자에게 하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유를 묻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젖은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이 콧등을 따라 내려오다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좁은 샤워부스는 뿌연 김으로 가득 차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선연홍과 약속한 날까지는 앞으로 3주가 좀 덜 남았다. 그냥 여기서 다 때려치울까? 아니. 그건 지는 것 같아서 싫다.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쓸데없는 것에 모든 것을 걸기도 했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도출하지 못한 채 욕실을 나왔다.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지며 머뭇대던 여지운의 손이 휴대전화를 집었다.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뱃속이 뒤틀렸다. 

  “진짜, 뭐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둘이 뭘 하든, 막말로 지금 어디 모텔에서 뒹굴고 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밥이나 먹자.”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느라 뭘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배고파서 이렇게 예민한 거다.” 하고 중얼거리며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선연홍이 사다 놓은 재료들로 가득했다. 냉장실, 냉장고, 하다못해 와인 셀러에는 온갖 종류의 와인이 가득했다. 여지운은 요리를 잘 하지도 않았고, 집에서 뭘 챙겨 먹는 일도 드물었다. 그걸 선연홍도 아니까 여지운만 보면 온갖 음식점에 데려가서 밥을 먹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냉장고를 채워놔도 버리는 게 태반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 * *

  

  “여지운입니다.”

  [선연홍입니다. 지운씨? 어젯밤 그렇게 가고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바빴습니다.”

  [그렇습니까, 오랜만에 지운씨 목소리 들으니까 기쁘네요.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데리러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야근하십니까?]

  “선약?”

  되묻는 말에 예민함이 묻어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정말 예민하기 때문일까? 여지운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볼펜이 종이 위에서 의미 없이 춤추고 있었다. 

  [음, 전시회 건으로 임선열씨와 약속이 있어요. 지운씨, 제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오. 듣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소한 일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와 뭘 하든 그건 개인 사정이죠.”

  [지운씨?]

  말을 툭 내놓고 나니 너무 날카로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한 것은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인데. 책상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이야기를 끝내면 저녁 10시쯤 될 것 같은데 혹시 그때는…….]

  “됐습니다.”

  [그럼 이틀 뒤, 토요일은 어떻습니까? 사실, 지운씨에게 보여 줄 것도 있고, 봐줬으면 하는 것도 있습니다. 괜찮으면 제 작업실에서 봐도 될까요?]

  “작업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여지운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팀원들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익숙하게 흘려 넘겼다. 

  [그냥 정말로 보고 싶은 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으니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정말 뭔가를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입 안쪽 살이 치아에 씹혔다. 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짓이겨진 살덩이 위에 혀가 닿자 따가웠다. 

  [전시회 준비 때문에 당분간은 지금처럼 연락을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운씨, 지운씨가 평소 말하는 ‘지랄하네.’가 뭔지 보고 싶지 않으면 곧장 집으로 가요.]

  “뭐라고?”

  [내가 모를 거 같습니까? 그러니까 개수작하지 말고 집으로 바로 가라고요. 저녁 꼭 챙겨 먹어요. 또 연락할게요.]

  새카맣게 변한 휴대 전화기를 내려 보는 여지운의 얼굴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그리고 그 후로 정말 연락 없는 선연홍을 대신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1층 로비에서 누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혹시나 했던 여지운이 방문자의 얼굴을 보고 어이없는 숨을 토했다. 상대방 역시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임선열,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 이렇게 얼굴 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오고 싶진 않았거든. 이 근처에 왔다가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오고 싶진 않았지만, 얘기 좀 하고 싶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너만 바쁘냐? 나도 바빠. 오래는 안 뺏어.”

  “너한테 오래 할애할 시간도 없다.”

  캔 커피를 앞에 각자 놓은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봤다. 못마땅함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은 과거의 잔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애틋함이 없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왜 왔냐?”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로 시작된 임선열의 이야기는 모조리 선연홍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천재인지 따위의. 그 이야기 속의 선연홍은 여지운이 아는 그 선연홍이 아닌 것 같았다. 

  “야, 임선열. 멋있고 대단한 선생님의 실체가 변태라는 건 알고 있냐?

  “선생님 정도 외모와 능력이면 변태여도 상관없지 않아?”

  딱히 어떤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임선열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오히려 잘 됐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그 변태 선생님이랑 잘해보고 싶은데, 네가 좀 도와주든가.”

  대학교 때 임선열은 이성애자였다. 적어도 여지운이 그를 꼬셔서 떡치기 전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 얘기를 하는 보통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지운이 꾀어내기 전에는.

  “임선열, 너 게이였냐?”

  “…….”

  입을 다문 임선열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려 애썼다.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여지운의 모습에 넌덜머리가 났다. 그는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겨우겨우 내뱉었다.

  “여지운. 잊었어?”

  “뭐?”

  “네가 내 인생 꼬아 놨잖아.”

  “그게 왜 내 탓이냐?”

  “물론, 네게 넘어간 것도 나고, 내가 그런 성향이 있었던 것도 맞겠지. 하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있던 감정이었어.”

  “…….”

  “그걸 억지로 끄집어내서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든 게 누군데. 뭐? 게이였냐고? 진짜 씹새끼다. 너.”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지금은 확실해졌다. 임선열은 여지운을 싫어하고 있었다. 평탄하고 평범하던 자신을 꾀어내어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헤어진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 너였어.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선생님, 어제 말이야 여지운 네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지에 관해 말씀하시더라.”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울음 섞인 비난을 퍼부었던 것도 모두 임선열이었다. 여지운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외면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뭐? 선연홍이?”

  “너 왜 이렇게 흥분 하냐? 저번에도 그러더니.”

  “둘이서 내 욕을 하고 다니는데 그럼 하하호호 웃으랴?”

  “그거 네 트레이드마크잖아. 사람 말 귓등으로도 안 듣고 무시하는 거. ‘그거, 네 감정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야지, 왜 나한테 말 해.’하고 나한테 말 한 거 기억 안나?”

  “야. 임선열.”

  “너만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은 버려야 할 쓰레기로 여기는 거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많이 바뀐 것 같다. 야.” 

  우그러진 캔이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졌다. “오, 성공.” 임선열이 손을 탈탈 털고 일어섰다. 황당한 얼굴로 올려 보고 있는 여지운의 얼굴이 꽤 고소했다.

  “선생님이랑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게 도와줄 거라 믿는다. 너한테는 선생님도 나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끼리 잘해 볼게.”

  임선열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지만, 그 안에는 즐거움보다 적의가 더 짙었다. 

  “난 선생님이 변태든 뭐든 상관없어. 아,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선생님은 너 따위가 그렇게 대해도 될 분이 아니니까 자중 좀 해줬으면 좋겠다. 너 같은 쓰레기랑은 어울리지 않는 분이니까.”

  아주 가뿐하고 홀가분하게 떠난 임선열과 달리 여지운의 얼굴에는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거미줄처럼 번져 있었다.

  

  *  *  *

  

  주말에는 보통 늦게까지 자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눈이 저절로 떠졌다. 블라인드 틈 사이로 어스름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6시쯤 됐을까. 아직 해가 짧으니 생각보다 더 늦은 시간일 수도 있겠다. 다시 눈을 감았던 여지운은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일어섰다. 눈 안에 모래를 뿌려 놓은 뻑뻑하고 따가웠지만 잠은 이미 다 깨서 누워 있어봤자 잡생각만 들었다. 거울을 보니 눈 밑이 조금 거뭇하다. 손끝으로 다크서클을 훑다가 눈 끝을 잡고 찍 내려 봤다.  선연홍이 웃으면 이렇게 되던데.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가 쳐진 모습은 상당히 덜떨어져 보였다.

  “못 생겼네. 때려치워라, 그냥.”

  턱을 끝을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여지운이 세면대 위의 일회용 면도기를 집었다. 

  “아.”

  날이 좀 무뎌 보여 생각 없이 손끝으로 훑었는데 따끔한 감각과 함께 살갗이 벌어지며 벌건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빨았다. 혀끝에 닿는 비린 맛은 익숙했다. 오래지 않은 과거, 살점이 너덜거릴 정도로 혀를 세게 깨물렸음에도 선연홍은 태연했다. 그대로 여지운의 턱을 움켜쥐고 숨을 막았다. 벌어진 입안으로 핏물에 젖은 혀가 뱀처럼 기어들어 왔었다. 비린 맛, 피 맛. 

  손가락에 난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벌건 속살이 보이는데 어쩐지 뒷목이 간지러워졌다. 휴지를 풀어내고 반창고를 붙였다. 

  옷장을 열고 둘러보다가 선연홍을 만나는데 왜 이렇게 신경 쓰나 싶은 생각이 들어 구석에 처박힌 후줄근한 셔츠를 입었다. 전신 거울을 보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니트와 코트를 걸쳐 입고 나섰다. 데리러 오겠다는 선연홍의 제안은 거절했다. 그랬더니 ‘빨리 보고 싶지만, 안전운전 하라.’는 답이 왔다. 그대로 휴대전화기를 조수석에 던지고 운전대를 잡았다. 

  딱히 일찍 갈 생각은 없었는데 오늘따라 도로가 너무 한산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각보다 4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아, 왠지 조급하게 온 것 같아서 들어가기 싫은데. 차마 문을 두드리지는 못한 그 앞을 서성이던 여지운이 갑자기 열리는 문에 깜짝 놀랐다. 

  “뭐야?”

  벌어지더니 문 사이로 흰 얼굴이 빼꼼히 솟아올랐다. 여지운을 보며 웃는 얼굴은 활짝 핀 복숭아꽃 같았다. 

  “안 들어오고, 집 앞에서 뭐합니까?”

  “……이거 자동문입니까? 오래됐다면서요? 뭔 자동으로 열리고 난리야?”

  “제가 연 겁니다.”

  “내가 온건 어떻게 알고?”

  “글쎄요, 사랑의 힘인가?” 

  선연홍이 답지 않게 장난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는 여지운의 뺨을 살짝 쓸었다가 벌어진 코트 단추를 하나하나 여몄다.

  “왜 이렇게 다 열고 다녀요, 섹시하게. 목선이 드러나니까 빨고 싶잖아요.”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미친 새끼 같네요.”

  “보고 싶었습니다.”

  “징그럽게 왜 이럽니까?”

  “전시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만나러 가고 싶었습니다. 내 모든 이유는 여지운씨인데 그걸 참아야 하니 힘들었습니다.”

  “아주 혼자 영화를 찍으시네요. 어디서 나오는 대사입니까?” 

  뚱하니 내뱉는 말에도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선연홍이 다짜고짜 여지운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몸이 많이 찹니다. 눈물을 흘리면 일시적으로 체온이 올라간다고 해요.”

  “그렇습니까? 근데 남자가 울 일이…….”

  “뒷구멍에 제 성기를 박은 채로 질질 짜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뭐?”

  “춥겠다, 얼른 들어갑시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손을 붙잡고 끌었다. 

  “그건 그렇고 옷 꼬라지가 그게 뭡니까?” 

  오늘따라 선연홍이 좀 달라 보인다 싶었는데 가만 보니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빳빳하게 선 깃이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 폭이 넓은 소매는 사극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허리에 붉은 띠까지 야무지게 두른 모습을 보니 쟤도 참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촬영이 있어서요.” 

  “촬영?”

  “네, 일단 들어와요.”

  선연홍은 혼자가 아니었다. 얌전히 다리를 모은 채 대청마루 끝에 앉아 있던 임선열이 두 사람, 정확히는 여지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선열?”

  “여기서 보네.”

  임선열과 헤어진 후 10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다. 동창회 같은 것도 안 갔고 딱히 연락하는 친구도 없었으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우연은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일어났다. 그것도 꽤 안 좋은 쪽으로. 

  “잠시만 앉아 계세요. 금방 카페라테 만들어 올 테니까.”

  선연홍을 힐끗 보던 여지운의 시선이, 그가 사라지자마자 불량 학생처럼 삐딱하게 선 임선열에게 향했다. 

  “너야말로 여기 웬일이냐? 주말까지 일 하나 보네. 능력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냐?”

  “능력이 있어서겠지. 선생님을 우리 미술관에 모신 사람도 나니까.”

  임선열이 앉아 있던 자리 주변에는 팸플릿 시안과 수첩과 볼펜이 있었고, 촬영용 카메라도 보였다.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진짜 거지같은 타이밍에 왔네. 하긴 여지운이 그렇지.”

  신랄한 얼굴을 한 임선열이 카메라를 들어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돌려 보았다. 

  “선생님 진짜 잘생겼다.”

  적의는 금세 동경과 존경으로 변모했다. 

  임선열 저게 진짜 거지같은 게 뭔지 몰라서 막 지껄이는 것 같은데, 진짜 거지같은 게 뭔지 보여 줘? 어느새 여지운이 머릿속은 임선열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고, 카메라를 박살 내는 장면에까지 이르렀다. 

  “지운씨, 오래 기다렸죠?”

  선연홍은 기묘한 대치를 하는 두 사람을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여지운에게 컵을 내밀었다.

  “전시회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됐습니다. 지운씨 오기 전에 보내려고 했는데 겹치게 됐네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대답 없이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쳐 앉은 여지운이 얼굴을 구겼다.

  “바닥이 왜 이리 차가워.” 

  “춥습니까? 잠시 만요.”

  무심코 중얼거린 것을 들었는지 선연홍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품을 뒤적이다가 무심코 임선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질린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제멋대로다.”

  “이게 뭔 제멋대로야. 내가 달라고 했냐? 지가 멋대로 준다고 기어들어 간 건데.”

  “그것도 네가 다……!”

  “지운씨, 이거 밑에 깔아요.”

  “선생님, 오셨어요?” 

  털을 잔뜩 세운 살쾡이 같던 임선열은 선연홍을 발견하고 꼬리를 내렸다. 그 같잖은 모습을 비웃으며 방석을 깔았다. 차갑고 딱딱한 기운 대신 폭신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엉덩이를 감쌌다.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됩니다.”

  주제가 어떻고, 그림 간격은 어떠며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이상했다. 임선열이 상체를 기울여 선연홍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는 이제 겨우 한 뼘, 누가 주둥이 들이대면 뽀뽀라도 하겠네. 

  철컥, 조용하고 고즈넉한 공간에 울리는 쇳소리는 제법 크고 날카로웠다. 여지운이 도끼눈을 뜨는 임선열을 못 본척하며 필터 끝에 불을 붙였다.

  “야. 넌 그림 그리는 곳에서 담배가 피우고 싶냐? 여기 귀한 게 얼마나 많은데 잘못하다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너 평생 일해도 못 갚아.” 

  “피우고 싶은데? 그리고 평생은 무슨, 오바도 작작해라. 좀.”

  임선열은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어 했으나, “임선열씨, 이 작품은…….”하는 선연홍의 말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꼬리까지 흔들겠네. 선생님, 저 좀 예뻐해 주세요. 멍멍.”

  선연홍이 팸플릿을 보느라 고개를 숙인 사이 임선열이 여지운을 노려봤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가운뎃손가락을 흔들자 어이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에 아랑곳없이 치켜든 엄지를 들고 뒤집었다. 

  “검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자로 표…….”

  고개를 든 선연홍은 여지운의 손가락을 잠시 보다가 임선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선열씨.”

  “네, 선생님.”

  “검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해주시고 한자로만 표기해 주면 됩니다. 그리고 작가명은 따로 넣지 말고 제목만 부각 해 주세요.”

  “네.”

  임선열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선연홍의 말을 받아 적었다.

  “내게는 중요한 전시회니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선생님.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결정은 다 된 것 같으니, 이만 가보세요.”

  “아, 선생님. 실례가 안 된다면 작업실 구경…….”

  “실례 맞습니다. 임선열씨.”

  싸늘 얼굴을 하고 그보다 더 쌀쌀하게 내뱉는 말에 임선열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픽, 비웃는 소리가 들렸는지 임선열이 눈을 치켜떴다. 가소롭다는 얼굴의 여지운이 어깨를 으쓱하자 임선열이 곧바로 손가락 욕을 했다.

  “임선열씨?”

  “아……. 네, 선생님. 정말 가 볼게요.” 

  선연홍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임선열이 대문을 열고 사라지자마자 허리를 굽혀 여지운의 턱을 움켜쥐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담배가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왜, 불이라도 낼까 봐?”

  “불내고 싶으면, 내도 됩니다.”  

  “…….”

  “이 집이 불에 타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지운이 담배를 빨아 당겼다. 뺨이 홀쭉해지며 입술이 둥글게 오므라들었다. 여지운이 제 뺨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를 향해 연기를 뿜어냈다. 한 번. 또 한 번. 여지운이 입을 열자 그 안에는 뭉글한 연기가 가득했다. 후, 흩어내기도 전에, 입술이 맞붙고 혀가 섞였다. 

  삼켜지지 못 한 연기가 목안에서 걸렸다. 눈두덩이 따끔해지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선연홍을 떼어내기 위해 뻗어진 팔은 어느새 깍지가 끼워져 있었다. 위에서 누르고 있으니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매캐한 담배 연기에 콧속이 매워지며 눈알이 붉어졌다. 

  “후, 하.”

  입안을 헤집던 혀는 이제 눈가를 핥고 있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마시듯이 빨다가 쪽쪽 입맞춤을 했다. 

  “이 새끼가, 사람을 죽이려고.” 

  “역시 실물이 좋네요. 뭘 어떻게 해도 표현이 안 됩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는 마루에 반쯤 눕다시피 한 여지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우습지도 않은 행태에 제게 내밀어 진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배고프죠?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오늘은 작업실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선연홍 역시 요리에 그다지 취미가 없어 자연스럽게 반찬은 계란 프라이, 김, 소시지 부침처럼 만들기 쉬운 것들로 차려졌다. 

  “많이 어설프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밥을 차려준 건 처음이라 쑥스럽네요.” 

  “징그러우니까 귀여운 척하지는 말지.”

  “그 말은, 귀엽게 느껴진다는 뜻일까요?”

  상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대답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꼴에 잡곡밥을 했는지 흰 밥알 중간마다 다른 곡물이 섞여 있었다. 여지운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둘이 나 몰래 내 욕하고 다닙니까?”

  “예?”

  “내가 얼마나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인지 임선열에게 하소연했다면서요.”

  “하지만 지운씨, 그건 칭찬이었습니다. 당신의 도도함이나 오만함, 혹은 무례함까지 제게는 너무 사랑스러우니까요.”

  젓가락으로 계란 프라이를 반으로 가르자 노른자가 툭 터졌다. 어디를 봐도 잘 했다곤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하려는 티가 났다. 

  “근데, 임선열은 왜 만나요. 왜 그렇게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녀. 좆같게.”

  “좆, 뭐? 지금 나한테 한 말 입니까?”

  “아, 밥 다 먹었네요? 후식 가지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선연홍이 과일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식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지운이 선연홍을 발견하자마자 담배를 비벼 껐다. 조금 전, 연기를 삼키게 했다고 곧바로 경계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던 선연홍이 문득 여지운의 손가락에 둘둘 감긴 반창고를 응시했다.

  “손가락은 왜 다쳤습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제야 물어보네요.”

  “아, 면도기에.” 

  “저런, 조심하지. 좀 봐요.” 

  제법 깊게 난 상처 덕분에 반창고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선연홍은 아주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지운의 손가락에 감긴 것을 풀었다. “으.” 거즈 부분에 딱 달라붙어 있던 살이 떨어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여지운의 이가 위아래로 딱 달라붙으며 앓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어떻습니까?”

  “으, 어떻긴 뭐, 아? 야!”

  반질반질한 손톱 끝이 상처를 눌렀다. 겨우 붙어 있던 살갗이 쩍 갈라지며 피가 났다. 바로 눈앞에서 생살이 후벼 파이는 모습에 온 몸의 털이 쭈뼛 섰다.

  “손 씻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 아악.”

  “아파요?” 

  아파요? 허고 묻는 선연홍의 얼굴은 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여지운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이 벌어지며 그 안으로 파고드는 고통이 이성을 흐려 놨다.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아흑, 씨발, 대체……, 왜 이러는, 윽.”

  “예뻐서요, 귀여워서요, 좋아서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고, 아팠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덜덜 떨리는 손끝을 보는 선연홍의 얼굴은 안타까워 보였고, 또 들떠 보였다. 

  “하, 아.”

  무자비하게 휘젓던 손톱이 떨어지고 난 자리에는 혀가 닿았다. 뜨거운 점막이 손가락을 감싸고 뾰족한 혀끝이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간지러움과 따가움 중 어떤 것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여지운의 손가락과 목이 함께 움츠러들었다. 잇자국이 날 정도로 손가락 관절을 세게 깨물자 여지운은 더는 참지 못했다.

  “아프, 아, 아프다고, 아프다고 이 씨발 새끼야!” 

  쟁반을 들어 선연홍의 머리를 후려쳤다. 쏟아진 과도와 과일이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쟁반으로 처맞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던 선연홍은 여지운의 손가락이 제가 만족할 때 즘 돼서야 입을 뗐다. 예민하고 자극적인 고통에 귀 끝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쁜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얼마나 많이 빨았는지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은 이미 피가 멎어 있었다. 

  “사과 먹을래요? 요리는 잘 못 해도 과일은 잘 깎습니다.” 

  바닥에 구르는 사과를 집어 든 선연홍이 여지운을 향해 말했다. 상처를 헤집고 게걸스럽게 핥던 남자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다정하고 상냥하게 웃었다. 이제는 좀 무섭기까지 하다.

  “왜 그렇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요. 나 몰래 둘이 만난 것도 짜증 나는데, 내 앞에서 누가 정답게 눈빛을 주고받으랍니까?”

  “눈빛을 주고받아? 설마, 임선열 말하는 겁니까?”

  임선열과 서로 노려보며 눈으로 욕을 하는 것을 보고 정답게 눈빛을 주고받았다고 여겼다면 정신 병원과 함께 안과에도 가봐야 할 듯싶다. 주먹을 쥐었던 여지운이 손가락에 말려드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피는 멎었지만 아픈 건 여전했다.

  “아, 내 손가락. 선연홍씨 상처가 이렇게 헤집어져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지 궁금하네요.”

  “궁금합니까? 그럼 해볼래요?”

  사과 대신 과도를 집어 든 선연홍이 여지운에게 내밀었다. 

  “……예?”

  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 여지운에게 직접 쥐여주기까지 했다. 형광등에 반사된 날붙이는 면도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날카롭고 위험해 보였다. 

  “자, 그걸로 제 손 찔러 봐요. 붓을 쥐어야 하니 가능하면 왼손……. 음, 지운씨가 원하면 오른손도 좋아요.”

  스스럼없이 제 팔을 내놓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림 그린다며, 화가라며. 근데 그렇게 쉽게 손을 내주다니. 이 칼로 얼마나 어떻게 할 줄 알고. 

  “잘, 못하다가는 손가락……이 잘릴 수도 있습니다. 센 척하지 마십쇼.”

  “상관없는데. 손가락 잘려서 지운씨가 내 옆에 있어 준다면. 자, 뭐합니까?”

  칼끝이 손바닥을 꾹 눌렀다. 날카로운 칼끝이 구심점을 만들며 손바닥 살갗이 조여들었다. 

  “어서 안 찌르고.”

  그가 다가온 만큼 여지운이 물러섰다. 

  “상처가 헤집어져도 그렇게 여유로운 척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안 했습니까? 해봐요. 내가 어떻게 할지.”

  “……미쳤, 씨발.” 

  찰그랑. 결국, 바닥에 내팽개친 칼을 다시 집어든 선연홍이 빙그레 웃었다.

  “사과, 먹을래요?”

  모르겠다. 정말.

  

  * * *

  

  아주 예쁘게 깎인 사과는 아무도 먹지 않아 결국 갈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좀 전 그 장면을 보고 도무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시회는 2주일 뒤 금요일부터 그다음 주 일요일까지입니다. 한국에서는 열 생각이 없었던 전시회를 연 이유는 여지운씨이니 꼭 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선연홍이 조금 쑥스러운 듯 웃었고, 반대로 여지운의 얼굴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2주 뒤 일요일이라면, 선연홍씨와 했던 좆같은 약속의 마지막 날이군요. 드디어.”

  두 달은 생각만큼 빨랐고 생각보다 느렸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이 지리멸렬하고 폭풍 같은 시간이 끝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느새 선연홍은 여지운의 일상이 되어 그를 흔들고 있었다. 

  “내 승리겠군요. 선연홍씨가 먼저 말한 거니 약속은 기억하고 있죠? 내 앞에서 꺼지겠다는 것 말입니다.”

  “물론이지요. 그보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쪽으로 불렀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거?”

  그나저나 저 한복 좀 벗으면 안 되나. 여지운의 시선이 길게 늘어진 고름에 향했다.

  “그 두루마기 같은 거 벗으면 안 됩니까? 무슨 역사체험도 아니고.” 

  “아, 그럼 지운씨가 벗겨주겠습니까? 여기, 옷고름을 잡고 잡아당기면 됩니다. 그러면 전 그 보답으로 지운씨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쑤셔 주겠습니다. 어때요?”

  “그래서 보여주고 싶은 게 뭐라고요?” 

  반응을 보여 봤자 재미있어할 뿐이라는 것은 이미 파악했다. 이제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됐다. 흘리듯 소리 없는 미소를 지은 선연홍이 문갑을 열었다. 돌돌 말려있는 있는 종이뭉치 중 가장 앞쪽에 있는 것을 꺼내 내밀었다. 

  “뭡니까?”

  그림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푸른 기와집, 겨울바람에 딸랑이는 풍경 소리와 싸한 먹 냄새가 가득한 방 안. 모든 게 그날 상황과 겹쳤다. 그 요상한 그림을 본 날과.

  “지운씨가 봐주셨으면 합니다. 야한 그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연홍은 처음 보는 표정을 한 채 여지운을 응시했다. 주인님 어쩌고저쩌고 개소리할 때처럼 뺨이 상기 돼 있었고 들뜬 기색이 가득했지만, 성적인 욕망이라기보다 풋내에 가까웠다. 경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그림을 펼쳤던 여지운이 한참, 아주 한참만에야 입을 뗐다.

  “……선연홍씨는, 내가 좋습니까?”

  “네.”

  “왜요?” 

  설마 여지운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선연홍이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선연홍씨도 미친 새끼지만 솔직히 나도 성격이 좋다고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건즈앤로즈에 가서 아무나 잡고 나에 관해 물어봐요. 십중팔구는 쓰레기라고 대답할 겁니다.”

  “음?”

  “내겐 형이 한 명 있습니다. 누가 봐도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죠. 학창시절 전교 1등은 우스웠고 명문대에 수석 입학해서 지금은 아버지 병원에서 재직 중이에요.”

  “…….”

  “나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등바등 해봤자 그들에게 나는 그저 모자란 둘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그걸 열여덟 살이 돼서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진작 깨달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그 이후로는 착한 척, 성실한 척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지운의 시선은 그림 속 남자의 얼굴에 닿아 있었지만 보고 있다기보다 그저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아, 씨발. 그래, 인생은 욕망이다.’ 착한 아들 노릇을 때려치우고 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고등학생 때 남자랑 뒹굴다가 집에서 쫓겨난 것을 시작으로 그냥 내 좆대로 살았습니다.”

  “지운씨.” 

  가장 길게 한 연애는 6개월 남짓이었다.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순하고 착했던 남자도 여지운과 헤어질 즈음에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너 같은 새끼는 숨 쉬는 것도 아깝다는 욕을 퍼부었고, 지금은 여지운의 대표적인 안티 중 한 명이었다.

  “근데도 내가 좋습니까? 왜요?” 

  “이유가 꼭 필요한가요? 내게는 여지운씨가 얼마나 쓰레기든지, 좆대로 살든지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환영합니다. 당신이 가진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혼자 독차지하고 싶을 정도로요.”

  선연홍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에 번진 것은 깊고 단단한 집착이었다. 

  “그러니까 더 쓰레기로 살아 주십시오. 아무도 당신을 넘보지 않게.”

  선연홍을 보던 여지운이 다시 제가 펼쳐 들고 있는 그림을 내려 봤다. 저번처럼 짙은 욕망이 넘실거리는 야릇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눈을 떼기 어려웠다. 입안에 고여 있던 타액을 삼켰다. 쓰고 깔깔했다.

  “그만합시다.”

  “네?”

  어느 순간부터 부풀어 오르던 감정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커져 있었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크리스마스, 그리고 선연홍의 제의를 받던 밤. 머릿속에서 울리던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컸다. 

  왜? 어느 순간부터 여지운은 끊임없이 이유를 찾고 있었다. 마치 그 이유를 찾으면 끝낼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만약, 이유가 없다면.

  “그만 하자고요. 약속이고 내기고 뭐고. 씨발, 좆같으니까 그만하자고!”

  “지운씨?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닙니다. 싫다고 말했잖습니까. 나는 정말……. 후, 이유를 설명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군요. 그냥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주시죠. 그만, 그만. 서로 몰랐던 때로 돌아갑시다. 선연홍씨.” 

  갈기갈기 찢긴 그림이 여지운의 발아래에 흩어졌다. 제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망설임 없이 망가트린 여지운이 길게 숨을 내 쉬었다. 부풀어 오른 가슴이 낮아지며 입김이 녹아내렸다.

  “당신이나 나나 좋은 경험은 아니었잖습니까? 그러니까 다시는 보는 일 없도록 합시다.”

  더는, 더는 못 해먹겠다. 

  거침없는 손길로 문을 열었던 여지운이 강하게 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가 걸음을 옮겼다. 

  “여지운씨.”

  “놔!”

  여지운이 제 어깨를 잡는 선연홍의 팔을 뿌리쳤다. 어깨가 뒤틀리며 근육이 조여들었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대문을 넘어가는 발은, 망설임이 없었다.

  차에 올라탄 여지운이 도망치듯 출발했다.

  “후.”

  운전대가 거칠게 돌며 갓길에 차가 멈췄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그 사이에 선연홍으로부터 30통이 넘는 전화가 와 있었다. 한 사람 이름으로 도배된 휴대폰을 내려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탁, 툭. 조수석 창틀에 부딪혔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대로 운전대에 고개를 처박았다. 빡. 이마고 콧등이고 욱신욱신 아팠다. 

  “…….”

  아, 모르겠다. 뭐, 못 해먹겠는데 어떻게 하라고. 여기서 그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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