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

14.

  

  “아, 흐. 윽.” 

  활짝 펼쳐진 허벅지, 종아리 곧게 뻗은 발등과 그 끝의 발가락들이 비를 맞은 풀잎처럼 떨렸다. 무릎 뒤 움푹 파인 곳에서는 땀이 고여 있다가 떨어졌다. 선연홍은 여지운의 발목을 접어 누르며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거칠게 쑤셨다. 세 개의 손가락이 한꺼번에 찔러 들어가자 야릇한 소리가 방 안 가득 찼다. 

  “다행이네요.”

  “어흐.”

  “지운씨가 스스로 와 줘서. 질질 끌려오는 것 보다, 그래도 납득하고 인정해서 스스로 오는 게 더 좋잖아요.”

  “흐으, 아, 아.”

  “뭐, 개목걸이 같은 거 걸고 끌고 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그것도 좋아 할 거잖아요.”

  “하아.”

  여지운은 제 뒤통수가 바닥에 찧는지 마는지, 등이 갈리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겪어 본 몸뚱이는 좀 더 거대하고 깊은 것을 원했다. 하지만 선연홍은 쉽게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도와 같은 쾌감. 지금은 발끝에 살짝 닿았다가 멀어지는 하얀 물거품과 같았다. 뾰족한 손가락 끝이 여지운이 느끼는 곳 근처를 찔렀다. 차라리 아예 다른 곳을 찌르는 거면 이런 기분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곳만 묘하게 비껴가는 것에 절로 허리가 들썩였다. 등과 바닥 사이에 고인 땀이 쩍쩍 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불쾌하게 느껴졌을 감각들도 안달 났다.

  “아, 흐, 야. 거, 거기 말고, 좀, 안쪽.”

  “…….”

  “선,연……, 아핫, 악. 아앗. 학!”

  선연홍이 여지운의 젖꼭지를 물어뜯었다. 핥는다든가 빠는 정도의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강하게 쥐어뜯었다. 순간적으로 아래의 간질거림을 덮을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따끔대던 눈앞은 이제 완전 흐려졌다. 여지운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안쪽을 파고드는 손가락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핀셋에 꿰어진 개구리 마냥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야, 선, 어어? 선, 연, 악! 홍.” 

  “노래 부르는 것 같네요.”

  아프, 아프다. 아파. 그만, 좀. 지금이 만약 링이고 옆에 흰 수건이 있었다면 허겁지겁 던졌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제발 누가 이 새끼 좀 떼 줘.

  작고 여린 살덩이에 열기가 몰리며 딱딱해졌다. 사내로서의 자존심이고 뭐고 눈물이 펑펑 날 정도의 고통에 여지운의 성기가 확 쪼그라들었다. 

  “근데, 씨발. 갑자기 열 받잖아요. 그래요, 뭐 이 남자, 저 남자 만날 수 있지.” 

  갑자기 뭔 소리야?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숨을 참으며 고개를 숙인 여지운의 눈 앞에  잔뜩 부은 젖꼭지와 선연홍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비스듬히 웃었다. 이제껏 환하게 웃거나 흥분 어린 미소만 봤지 이렇게 비웃는 건 처음 본 것 같다. 

  “그동안 앞으로 재미 좀 봤을 테니, 남은 인생은.”

  뒤로 쑤셔지면 되겠네. 당신, 그거 환장하잖아. 

  여지운의 귓가를 파고드는 말은 뱀의 살갗처럼 축축하고 소름 끼쳤다. 먹물처럼 까만 눈 안에는 욕정이 가득했다.

  “앗, 하악. 좀, 손. 놓, 놔.”

  선연홍이 피식 웃었다. 각진 어깨가 흔들리는 그 진동이 아래에 깔린 여지운에게까지 느껴졌다. 

  “지금, 웃겨? 웃냐?”

  “여지운씨, 그거 압니까?”

  “으…….”

  “당신요, 당황하고 불리할 때만 반말하는 거.”

  “……뭐?”

  “그거 진짜 귀여워요.”

  재밌다는 듯이 웃던 선연홍이 손을 놨다. 꽉 조여져 있던 음낭이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얼마나 세게 쥔 것인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욕을 퍼부으려던 여지운의 눈 발갛게 달아오른 선연홍이 보였다. 눈과 뺨 사이, 광대 부근이 붉었다. 저거 빡 돈 거지? 좆됐네. 여지운은 팔꿈치로 바닥을 밀며 벗어나려 했지만, 성인 남자를 허리에 얹은 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왜 도망갑니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제발, 정상, 정상적이게 하자?”

  “거짓말.”

  뭐?

  “자극적인 거 좋아하잖아요. 더 해달라고 보채는 주제에.”

  “악, 아학!” 

  끝을 오므린 네 개의 손가락이 여지운의 구멍을 밀고 들어갔다. 손가락을 감아오는 안쪽 살을 중지로 긁어내며 휘저었다. 

  “크읏.”

  내내 두드리기만 하던 곳이 파르르 떨리며 바로 반응이 왔다. 뱃속이 열기로 부글거리며 머릿속이 점점 엉망이 됐다. 여지운의 팔이 허공을 허우적댔다. 빳빳하게 벌어진 손가락, 그 끝이 희게 질려 있었다.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랐지만, 그 사람은 여지운을 더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 뜨거운 눈두덩 위에 쪼듯이 내려앉았다. 

  “뭘 벌써 웁니까?”

  “야, 잠깐.”

  “좀 아껴 두는 게 좋을 텐데. 앞으로 한참은 더 울어야 하니까.”

  “누가, 운다고, 그래?”

  “하하.” 

  웃음과 흥분이 뒤섞인 숨에 젖은 앞머리가 펄럭였다. 선연홍이 손등으로 여지운의 눈가를 눌렀다.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옆 얼굴을 타고 흘렀다. 안 운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이런 행동으로 확인하는 게 짜증 났다.

  “그렇지, 겨우 이 정도에?” 

  선연홍이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조급하게 굴었지만, 섹스할 때의 그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과 달리 막상 닥치고 보니 복잡했다. 

  “흐으, 으.” 

  “아픕니까?”

  “아, 인간적으로, 손가락은 펴, 펴지말…….”

  “정말요? 아픈 건 잠시고, 그 뒤에는 더 좋을 텐데? 그래도 하지 마요?”

  “어? 어어?”

  “강제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잖습니까? 내 욕구보다 여지운씨의 의사가 먼저입니다.”

  “지랄, 하네……. 그런 새끼가 지금 거기만 쑤시, 헉, ……고 있냐?”

  차라리 빨리 좆을 박든가.

  “아직 대답할 정신 남아 있나보네요.”

  선연홍이 여지운의 귓불을 깨물었다. 후, 뜨거운 바람이 귓구멍을 통과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어깨가 움츠러들며 귓가가 들썩였다. 그 사이에서도 아래쪽에서는 손가락이 빠르게 드나들고 있었다. 

  “근데 그거 압니까?”

  선연홍이 여지운의 성기 끝을 두드렸다. 분명 아파서 쪼그라들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바짝 서 있었다. 여지운이 경악한 얼굴로 곧추선 제 성기를 응시했다. 

  “섰네요.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렇죠?”

  그만 좀 닥쳐!

  짧게 잘린 손톱 끝이 잘게 주름진 곳을 더듬었다. 몸이 반으로 구겨진 탓에 훤히 드러난 구멍에 자극이 몰렸다. 환장할 것 같았다. 그래 선연홍이 섹스 잘하는 거, 동정인지 아닌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잘 후린다는 거, 인정한다.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항상 선도하는 쪽이었던 자신마저도 끝내는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한 것도, 그것도 인정한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걸 잊지 못해서 몽정에 자위에 별 난리를 다 쳤다는 것까지 알겠다. 그런데 자신이 고통을 좋아한다느니 쾌감이 어쩌고 하는 건 정말 이해 못 하겠다. 

  뭘, 아픈 걸 좋아하긴 뭘 좋아해. 자신도 지금 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고통을 즐기고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 아, 어? 아닌데……? 

  “아흑.”

  여지운의 눈을 깜빡였다. 하악. 확실히 좀 전 과는 다른 감정을 띤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선연홍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좋습니까?”

  “…….”

  그렇지 않아도 곧추섰던 여지운의 성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꺼떡이고 있었다.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발딱 서 있었다. 엉덩이가 쑤셔지는 것만으로…….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의 고통, 그리고 지금 가해지는 뭉근한 쾌감. 그 둘 뿐이었는데도 그의 몸뚱이는 미쳐 날뛰었다. 

  “마조히즘 있습니까. 아프다면서 왜 섭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엔 재밌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눈꼬리에 웃음을 매단 선연홍이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감기는 검은 머리카락을 멍하게 보다가 다시 한 번 가해지는 자극에 목을 움츠렸다. 선연홍의 혀가 도드라진 목울대를 느리게 핥았다. 

  “그, 싫……어.”

  “그래서?”

  “……뭐?”

  “싫은데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 라니. 설마 그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여지운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정말 그만하면 싫어할 거잖습니까.”

  “그,건…….”

  “어떻습니까. 성기 끝을 좀 더 세게 잡아줘요? 잔뜩 참고 있다가 싸면 기분 좋을 텐데.”

  “…….”

  “아니면 아래가 찢어질 정도로 박아 줄까요?”

  선연홍이 얄궂게 웃었다. 하얀 얼굴에 떠오른 야릇한 표정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지금 여지운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을 들썩이게 하고 말고 따위가 아니라 자신을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가게 해 줄 그 무엇이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내뱉었다.

  “이, 씨……발. 존나 나불거리네. 닥치고 박으라고. 아니면 꺼지든가. 진짜 좆만한 좆 갖고 되게 유, 세입니다?”

  “아하, 좆만한 좆이라니……. 되게 꼴리는 표현이네요?”

  선연홍의 얼굴에 흐르는 빛은 분명 새빨갛고 위험했다. 그것을 숨기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런 것도 좋아하잖아. 여지운.’ 딱 이 표정이었다. 안쪽 살을 헤집던 것이 빠져나갔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뜨거운 것이 치고 들어 왔다.

  “억! 흑.”

  순간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역시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쾌락이 여지운의 몸 위로 쏟아졌다. 수천 개의 유리조각이 온몸을 파고드는 느낌이지만 날카롭다기보다 좀 더 자극적이고 아찔했다. “흡,” 숨을 들이마시던 몸이 그대로 멈췄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이 꽝! 울렸다. 손끝과 발끝으로 거대한 전류가 한 번에 팍하고 터졌다. 처음이나 두 번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충격이 찾아왔다. 생각이라는 건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해  제 몸을 덮치는 감정과 감각들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으, 흐. 좋……아, 좆같, 좋, 다고.”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다시 난장판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선연홍과의 섹스는 마치 전쟁 같았다. 서로 물고 뜯고 엎고 제압되는 그런. 여지운이 선연홍의 목을 끌어당겨 키스를 했지만 그것은 키스라기보다 물어뜯는 것에 가까웠다. 그나마도 제대로 하지 못해 치아에 찍혀 피가 나고 난리였다. 선연홍은 피식 웃으며 여지운의 볼을 살짝 잡았다가 놨다.

  “으, 하앗. 아으. 으, 으흣, 흐, 좋, 하악, 씨발……!”

  “왜 이렇게 조릅니까?”

  “아흐, 거, 거기. 그래. 좀 더 세게! 아. 아앗. 하. 더 빨리, 빨, 빨리, 아.”

  스무살 초중 반 때의 임선열은 여지운을 힘겹게 견뎠다. 여지운이 언제 또 다른 사람과 놀아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품고 괴로워했다. 신뢰와 애정은 유리병 안의 모래와 같아, 한번 깨어지면 금세 사라졌다. 애정보다 미움이 앞선 것은 한순간이었다. 헤어지자는 임선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감정이라는 게 하나도 남겨 있지 않은 가벼운 대답에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지운. 난 네가 정말 싫어. 아니, 좋아해. 혹시 네가 잡아 줄까 기대한 내가 등신 같다. 네가 끔찍하게 싫고 그만큼 좋아. 네가 불행한 것은 원하지 않아. 하지만 똑같이 당했으면 좋겠어.’

  밉고, 싫고, 좋다. 임선열은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된 채 말했다. 그때 여지운이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상대방이 듣지 않는 느낌이 어떤 건지,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감정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았으면 좋겠다.’

  두 팔로 눈을 가리고 펑펑 울던 임선열이 곧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제법 또렷하고 독기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평생 기도할게, 내가 받았던, 그리고 앞으로 너를 만날 사람들이 받을 고통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하기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네 진짜 애인은 꼭 너보다 미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네 좆 함부로 못 놀리게 할 너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

  그래. 그때, 임선열이……!

  “아흑.”

  “여기서 딴 남자 이름 부르는 건, 반칙인 것 같습니다. 여지운씨.”

  양손은 깍지가 껴진 채였고, 손등에는 바닥 결 무늬가 그대로 찍혀 있었다. 어깨와 등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육체에 가해지는 모든 자극이 극대화되어 쾌감으로 끈적끈적하게 짓이겨졌다. 아주 달고 새빨간 

  “임선열, 음. 그래. 여지운씨의 남자친구였죠? 내가 당신을 쫓아다닐 때, 당신은 그 남자를 쫓아다녔잖습니까.”

  “아, 아핫, 학. 윽, 윽.”

  “뭐, 옛 남자 따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이름을 내뱉는 건, 무슨 의미 일까요? 하하, 씨발.”

  “그, 아흑. 아니고. 임선열, 임선열이……. 그, 아. 흐. 좀 더, 안쪽…….”

  임선열이 그때 내게 어떤 말을 한 줄 아느냐. 여지운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엉덩이 안쪽을 거칠게 박는 성기 때문에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곧 절정이 찾아올 것 같았다. 열 개의 발가락들이 멋대로 움직이며 손가락 사이가 간지러워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세게! 빨리! 박, 아.

  “왜 이렇게 자극합니까?”

  선연홍은 숙이고 있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올라붙은 근육들이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야, 야? 왜.”

  여지운의 자극점을 박고 있던 성기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뭉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칠던 움직임이 순간 딱 멈췄다. 눈이 멀 정도로 뜨겁고 밝고 거대하게 터지던 빛이 잦아들면서 먹구름이 일 듯 눈앞이 흐려졌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급하게 쏟아지던 숨이 느려지며 목구멍이 열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절정에 이르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끊임없이 채우고 게워내고 싶다. 빨리, 어서, 어서.

  “야, 야? 선연홍?”

  “으음.”

  “왜, 후……, 하다 말, 선연홍.” 

  선연홍이 고민하는 척 얼굴을 쓸었다. 섬세하고 넉넉한 손바닥 아래의 입술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여지운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질투가 나서요.”

  “무슨, 뭐? 질투? 질투…… 그래. 뭐, 또, 뭐가 왜?” 

  여지운이 허리를 슬금슬금 내렸다. 좀 더 강한 반응을 찾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간지럽기만 할 뿐, 감칠맛만 더해졌다. 절정을 앞두고 멈추어버린 쾌감에 눈물이 핑 돌 정도의 억울함이 찾아왔다. 이 미친 새끼가 왜 또 이러는 거지.

  “저와 섹스 중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를 정도라면, 앞으로도 같겠죠?”

  “뭐?”

  “좀 전엔 그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당신이 다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전 힘들어할 텐데. 그럴 거면 지금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뭘, 그만둬.”

  “섹스하는 거요. 여지운씨이랑.”

  선연홍은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만약 여지운이 제정신이었다면 눈 앞의 남자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성적인 생각을 못했다. 머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입이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안 해.”

  “무엇을 말입니까.” 

  여지운은 저도 모르게 하체에 힘을 줬다. 지금 와서 깔고 깔리고가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몸뚱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너, 이 새끼, 진짜. 못돼 쳐 먹…… 됐다, 됐어. 다른 새끼들이랑은 절대 섹스 안, 한다고. 그러니까, 어서.”

  “여기도, 여기도. 함부로 놀리지 않겠다는 말이겠죠?”

  선연홍이 여지운의 아래를 더듬었다. 부풀어 오른 귀두를 손끝으로 그어 내렸다. 주름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구멍은 선연홍의 성기를 한꺼번에 삼키고 있었다. 허리를 앞으로 슬쩍 밀자 끈적이는 소리와 함께 여지운의 종아리와 발등, 발가락이 쫙 펴졌다.

  “아흐.”

  선연홍은 여지운의 다리를 잡아 발목과 종아리 무릎 뒤쪽까지 입맞춤을 했다. 정 안되면 앞이라도 자극해서 절정에 이르고 싶어 성기로 손을 뻗었지만 선연홍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니 정말로 진심으로 미칠 것 같았다. 

  “섹스는 물론이고, 키스도, 손잡는 것도 안는 것도 모두 나 하고만. 뒤는 물론이거니와 앞쪽도 쓰면 안 됩니다.”

  “야! 지금 나보고 고자……, 고자 되라는 소리야? 어? 고자!”

  “이미 고자잖습니까?”

  “뭐?”

  순간적인 분노는 쾌감이나 간질거림, 안달까지 모두 잠재웠다.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을 파헤치니 짜증 나고 쪽팔렸다. 

  “다른 사람이랑 하다가 걸리면 그 사람 앞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줄 겁니다.”

  “어떤, 사람이라니. 내가 뭐 어떤 사람인데?”

  허리를 슬쩍 내리며 구멍 안을 좀 채워 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괴롭힘 당하는 거 좋아하는?”

  “미친 새끼. 그건 너지.”

  “대답해요. 얼른.”

  자발적 고자랑 후발적 고자가 같으냐? 이 훌륭한 물건을 더는 쓰지 말라니. 얘 맛을 알고 있는 애들은 어쩌라고……. 하는 생각은 선연홍이 안쪽을 찌르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자신은 왜 이렇게 쾌락에 약한 것일까?

  “……았어.”

  “네?”

  “알았……고.”

  “정확하게 말해 주겠습니까? 이건 강요도 강압도 아닙니다. 여지운씨가 선택하는 거예요.”

  지독한 새끼.

  “이 미친 새끼야. 섹스 가지고 흥정하냐?”

  “섹스뿐이겠습니까? 당신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당신이 원하는 거, 바라는 거 뭐든지 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운씨가 원하는 건 이거겠죠? 당신의 엉덩이를 벌리고 좆으로 구멍을 박는 거.” 

  “…….”

  “다른 새끼들 건 생각도 안 나죠? 서지도 않고, 자꾸 구멍만 움찔대잖아요.”

  “야! 야동 찍냐? 말하는 꼬라지가……으,흐.”

  “어쩌겠어요, 이제 좆같은 건 쓰지도 못할 텐데. 이 고자 새끼야, 앞으로도 나한테 박혀서 쾌감에 질질 싸면 돼.”

  선연홍은 아주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음란한 말을 지껄였다. 그의 숨이 닿은 곳마다 살갗이 파르르 떨렸다. 

  “대답 해봐요. 지운씨.”

  “알았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이제 좀, 제발.”

  “제발?”

  “박으라고, 새끼야.”

  “알았어요.” 

  눈을 접어 웃은 선연홍이 여지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여지운의 그렇게 바라는 대로 안쪽을 거칠게 쑤셔 박았다. 허공에서 덜렁대던 여지운의 다리가 선연홍의 허리를 감았다. 

  “왜 이렇게, 처음도 이 정도는 아흣, 아니었……, 앗,하앗.”

  머릿속이 휘발되자 남은 것은 본능이었다.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크고 거대한 감각.

  “그때와 지금 저는 변한 게 없어요. 우리의 상황도 같지요. 변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여지운의 마음.

  뺨이 물리고 키스가 퍼부어졌다. 선연홍이 여지운을 정말 잡아먹는 것처럼 깊숙이 빨았다. 땀이 줄줄 흐르는 살갗을 축축한 혀가 핥았다. 

  “여지운씨.” 

  그리고 여지운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짙은 쾌감들을 잔뜩 즐기며 기분 좋은 소리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선연홍은 오만한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제 손안에 굴러떨어진 남자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 * * 

  

  잠든 여지운의 얼굴을 보고 있는 선연홍의 시선은 싸늘하고 깊었다. 차가운 눈동자 안을 파고들면 만족과 집착, 그리고 아직 해소되지 못한 욕망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마디와 달리 보드라운 손바닥이 눈을 감은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늘어진 머리카락 끝에는 옅은 샴푸 향과 짙은 땀 냄새, 그리고 정액 냄새가 흩어 나왔다. 

  “말했습니까?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다시 본 순간까지 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습니다. 방에 처박혀서 수백, 수천 장 당신을 그렸습니다.” 

  그에게선 대답이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여지운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제게 하는 것에 가까웠다. 여지운이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가듯 선연홍 역시 주변에서 그에 관해 뭐라 떠들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미워하고 싫어하고 멀리해서 그의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길 바랐다. 

  스물의 늦여름, 여지운을 처음 본 순간 선연홍의 눈앞에 빛이 번졌다. 사실은 구름 사이로 햇볕이 고개를 내민 것이겠지만 뭐든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첫눈에 반한 게 아닐까.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두렵기도 했어요. 내 기억 속의 지운씨와 다를까 봐. 결과적으론 기우였지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이마를 스치고 매끈한 콧등을 따라 콧방울 위를 두드렸다. 선을 그리듯 내려오다 윗입술에 닿았다.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듯 하다 아랫입술을 눌렀다. 툭. 다물려 있던 살덩이들이 떨어지며 물기 어린 소리를 냈다. 숨이 바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섰던 선연홍이 불빛이 반짝이는 휴대폰을 발견하고 상체를 들었다.

  -여지운 이 씨발 새끼야, 그때는 실수였는데 그걸 떠벌리고 다녀? 진짜 한 판 붙던가. 네 뒤 뚫어 줄 테니까.

  “……정선주.”

  정선주, 정선주. 발신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선연홍의 시선이 다시 여지운에게로 향했다. 밤새 시달리다가 이제 겨우 잠이 든 남자는 눈 주변이 발그스름하게 변한 채 퉁퉁 부어 안쓰러워 보였다.

  여지운과 관계된 사람은 많았다. 지금 당장 건즈앤로즈에 가도 대부분은 이 남자를 알 것이다. 트러블, 이슈 메이커. 단순히 알고 있는 사람 말고 직접 관계된 사람도 두 손에 차고 넘친다. 여지운, 여지운의 옛 애인, 섹파, 원나잇,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 사람, 관계들. 선연홍은 그것들을 다, 모두다.

  “다 없애 버리고 싶어.” 

  그가 어떤 생각으로 여기 찾아왔는지 알았다. 이 집, 작업실 구석에서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여지운을 발견한 순간, 선연홍은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여지운이 제 발로 와줘서, 스스로, 먼저 손을 내밀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내 곁에 머물렀을 텐데요.”

  질질 끌려와 온종일 방 안에 갇혀 있게 된다든가. 가족도, 회사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을 평생 못 보고 지낸다든가 말이야. 그러니까 여지운 스스로 온 게 선연홍에게는 아주 조금 아쉽고 많이 기뻤다. 

  여지운이 눈치와 계산이 빠르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 정의를 역시 쉽게 내린다. 하지만 선연홍은 아닐 것이다. 여지운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도 오랫동안 품고 그리고 바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감정은 깊어지고, 짙어지고 또 질척해져 지금 와서는 본인조차도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 때때로 아주 위험한 감정이 선연홍을 충동질했다. 

  동경, 애정, 애착……. 그리고 그 끝에 걸쳐진 집착과 열망, 욕망, 욕정.

  선연홍에게 여지운은 처음 보는 존재였고, 그것은 애착을 만들어 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념할 수도, 할 생각도 없었다. 

  혹시 그가 다른 사랑을 만난다고 해도, 그래서 정말로 헤어지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 해 줄 수 없다. 자신은 여지운에게 해를 가하지 못할 테니, 그 상대방에게 모두 퍼부을 수밖에,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아무도 믿지 말고 경계하고, 하찮고 가볍게 생각해요. 당신에게 파고드는 건, 빼앗고 가지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지운씨는 그저 이대로 있어줘요.”

  한참이나 여지운의 얼굴을 보던 선연홍이 그의 윗입술을 빨았다가 놨다. 사실은 입안을 파고들어 혀를 감고 타액을 삼키고 싶었지만 그러면 여러 가지로 자제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존심 강한 사람이 이곳에 오기까지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쩝, 입맛을 다신 선연홍이 여지운 옆에 몸을 뉘었다. 혹시라도 깰 깨봐 아주 조심스러웠다. 

  “잘 자요. 지운씨.”

  

  * * *

  

  여지운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천장 지붕을 가로지르는 두껍고 커다란 나무 대를 보자 이곳이 선연홍의 작업실이란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요새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드디어 갈 데까지 갔구나…….”

  그동안 남부럽지 않게 놀았다고 생각한 여지운 조차 이런 식의 섹스는 해본 적이 없었다. 동정이라고 지껄이던 선연홍의 테크닉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민감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미치도록 좋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일도 있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그 감각 앞에서는 그 무엇도 필요 없었다. 끝 즈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온통 물리고 쓸린 눈가가 따가웠다. 땀과 눈물이 뒤섞여서 눈앞이 흐려졌고 몸 안의 감각은 제멋대로 엮이고 흔들리며 날뛰었다.

  선연홍은 집요했다. 집요하다는 말로는 그의 행위를 모두 표현 할 수 없었다. 육체뿐만 아니라 묘하게 압박하며 정신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다른 사람이랑은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말뿐 아니라 다른 이상한 소리도 내뱉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더 불안했다.

  여지운이 팔뚝으로 눈앞을 가렸다. 눈이 부셔서 그런 거지 절대 울컥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위로하며. 

  “하아.”

  더욱 환장인 것은 이 모든 결과가 자신이 벌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강요도 강제도 없……, 애매하긴 했지만 어쨌든 없었다. 그러니까 변명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전시회장에서 그림을 본 순간, 아 맞다, 전시회!

  “아!”

  몸을 일으킨 순간 흐윽! 숨이 턱 멈출 정도의 고통에 허리가 꼬꾸라졌다. 옆에서 뻗어 나온 손이 짜부라진 숨을 내뱉는 여지운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일어났어요? 지운씨.”

  일어났어요? 일어났어요, 일어났어요?

  늘어진 손끝은 주먹을 쥘 힘조차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여지운이 쌍욕을 내뱉었다. 쌍욕을 브런치처럼 즐긴 선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친놈아. 너 전시회에, 그림.” 

  “아. 봤습니까? 어때요. 예쁘죠?”

  “너 원래 색깔 하나만 쓴다고 하지 않았냐?” 

  임선열도 그렇게 말했고 예전 선연홍의 그림을 봤을 때도 모두 한 가지 색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시회장에 걸린 그림들은 흑백에서 시작돼 점점 여러 색이 번져 마지막 즈음에는 온갖 색으로 가득 찼었다. 마치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표현하는 것처럼.

  “그게 제 화풍이긴 하지만, 지운씨는 흑백이나 한 가지 색 따위가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색을 다 퍼부어도 당신을 표현하지는 못할 거예요.” 

  “넌 너무…….”

  “예?”

  “느끼해.”

  “와, 그건 좀 상처네요.”

  선연홍의 전시회장에서 본 그림은 남의 얼굴과 몸으로 그런 노골적인 춘화도를 그리는 새끼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한 것들로 가득했다.  

  “지운씨, 안 피곤해요?”

  선연홍 역시 지금 막 잠에서 깬 듯했지만, 눈이 붓기는커녕 여전히 반들반들했다. 늘 드러나 있던 이마 위에 머리카락이 쏟아져 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굳이 따지면 예쁜 게 좋지만, 껍데기가 최우선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이유는 뭘까, 속궁합?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들었습니까?”

  “많이 아픕니까? 마사지라도 해 줘요?”

  선연홍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잘 잤냐고 물었다. 어젯밤 미친 듯이 여지운을 몰아붙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사지는 무슨. 사람을 어제 그렇게 괴롭히고, 내가 어제 얼마나…….”

  “얼마나?”

  선연홍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얼마나?” 다시 한 번 여지운의 말을 따라 했다. 

  “얼마나…….”

  “네.”

  “……얼마나 좋았는데.”

  결국 여지운은 툭 내뱉었고 선연홍이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밑바닥까지 보여준 마당에 숨겨 봤자.

  “기쁩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선연홍씨.”

  “그럼요. 당연히, 당연히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지운씨,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 때려도 좋고, 무릎 꿇으라면 꿇고, 무슨 말을 해도 좋아요.”

  “그거 다 선연홍씨가 좋아하는 거면서 생색은 왜 냅니까.”

  “물론 그것도 맞지만, 그건 모두 지운씨여서 그렇다는 걸 이제는 알잖아요.”

  “…….”

  “여지운씨여서, 지운씨가 주는 거니까 뭐라도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짠했다. 생각해보면, 젊고, 돈도 많고, 잘생기고 몸도 좋고, 결정적으로 섹스도 잘하잖아. 물론 성적 취향이 좀, 많이 이상하고 자주 또라이 같이 굴긴 해도, 뭐.

  “지운씨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주인님이라고 말해보지 않겠……, 억!”

  “미친 새끼야. 제발 좀 닥쳐!”

  선연홍은 기어코 한 대 맞았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다.

  “내 팔자야.” 

  “팔자가 왜요? 제가 꽃팔자 만들어 주겠습니다. 제 등에 꽃을 깔아 놓을 테니 절 밟고 오세요.”

  선연홍은 여지운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변함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분노하고 질려 하던 부분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여지운의 행동을 보고 떠나는 사람은 많지만, 더 다가오고, 웃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선연홍밖에는.

  여지운의 뺨을 쓸어내리던 선연홍이 그의 어깨를 살짝 잡아당겼다. 이마 위로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직 제대로 말을 못한 것 같고, 뭔가 순서가 틀린 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말하겠습니다.”

  “헛소리하려면 아예 말을 안 했으면 좋겠는데, 가뜩이나 지금 자괴감 들거든요.”

  “물론 여지운씨가 헐떡이며 애원하는 모습도 좋지만, 그 모든 감정의 기반은 애정입니다.” 

  그때, 대학생 때. 눈앞을 덮은 무성한 머리카락 사이에서 여지운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면, 질색하겠죠?”

  “잘 알고 있네요. 첫눈에 ‘쟤랑 자고 싶다.’와 ‘반한다.’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거야말로 껍데기에 홀린 것과 다름없잖습니까?”

  “호감에서 사랑이 비롯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지운씨를 사랑…….”

  여지운이 손을 뻗어 선연홍의 입을 막았다. 상대가 진심이 되면 무거워졌다. 상대가 원하는 만큼 마음을 돌려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은 족쇄가 되고 사슬이 되었다. 여지운은 좋은 남자가 아니었고 좋은 남자인 척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니까 알아서 피해 가라고 더 드러냈다. 관계를 오래 이어 간 것은 오히려 여지운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감정의 교류 없이 그저 육체적인 것만 맞추던 사람들. 흔히 섹파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과 더 오래 만났다. 여지운에게 사랑을 말하고 진심을 토해내던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받았다. 우울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억울한 얼굴을 하고 끝내는 욕하고 떠나갔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 끝에 입맞춤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전 놓아 줄 생각도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

  “지운씨가 질색을 하면 그것도 좋고, 받아주면 더 좋습니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

  “그러니까 마음껏 퍼부어 줘요. 기쁨과 분노, 애정과 증오. 온갖 지저분한 거라도 좋으니까 그 모든 것을.”

  나에게만. 

  “미안한데 난 너 별로라서.”

  “네. 그것도 좋습니다.”

  이상한 놈이야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놀라는 자신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숨을 깊게 들이 마쉬자 먹 냄새와 종이냄새, 그리고 오래된 나무냄새가 밀려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이런 시작이 다 있을까 싶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을 이해시킬 것도 아니고 자신만 인정하고 납득하면 될 일이다. 이런 이상한 시작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역시 여러모로 말려든 것 같아서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잔뜩 눌려 있던 머리카락들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넌, 참 또라이 같아.”

  “맞아요.”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뒤통수를 가볍게 눌렀다. 

  “유학 가고 가장 후회한 게 뭔 줄 압니까? 바로 당신을 보지 못한다는 거였습니다. 지운씨의 마지막 얼굴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단순한 동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첫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사랑? 그 나이에?”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게 당신이라는 게 중요하죠. 물론 지운씨는 내가 없는 사이 미친 듯이 놀았겠지만요.”

  담담히 내뱉으며 여지운의 머리를 쓰다듬던 선연홍은 점점 말이 이어질수록 화가 난 듯 보였다. 말이 끝낼 때 즈음에는 여지운의 뒤통수를 파고 들 듯이 세게 움켜쥐었다.  

  “뭐 좋습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지 혼자 웃다가 화내다가 이제는 괜찮은 척……. 어쨌든, 과거 같은 거에 연연할 필요 없다는 건 동감.”

  “그래요. 지운씨 좆은 앞으로 딴 사람에게 쓸 일이 없을 테니까.”

  “……야. 다음에는 네 구멍 헐 때까지 박아 줄 거거든.”

  “왜 이렇게 귀엽습니까?”

  나름 심각하게 내뱉은 말도 선연홍에게는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한 듯했다. 흐뭇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여지운의 마음은 착잡했다.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내가 어디 가서 귀엽다는 말 들을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학교 다닐 때에도 저는 당신을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잘생긴 것도 인정하지만, 저한테는 뭐랄까.”

  “뭐?”

  선연홍은 대답 대신 가만히 웃어 보였다. 그는 여지운의 이마에 한 번 더 가벼운 뽀뽀를 한 뒤 일어났다. 

  “배고프죠?”

  하체를 덮고 있던 시트가 흘러내리며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여지운의 시선이 선연홍의 중심으로 향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본능.  

  저 큰 것이 자신의 몸 안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쑤셔 넣었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그때는 좀 더 조여보라고 킬킬댔는데 막상 겪어보니 성기를 몸 안에 넣는다는 자체가 대단한 거였다. 다음에는 살살 꼬셔서 반드시 올라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다음’을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다음, 다음이라. 아무래도 무덤을 파다 못해 흙까지 덮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아마도.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니면 밥 먹으러 나갈래요?”

  “이 새끼야. 밤새 뒷구멍에 좆을 꽂고 뒹굴어봐라. 그러고도 일어날 수 있으면 인정할게.”

  “아, 미안해요. 그럼 뭐 좀 사올까요?”

  “됐어. 물이나 가지고 와. 그리고 내 휴대폰 좀 줘 봐.”

  손바닥을 내밀자 선연홍이 경계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풋내나던 분위기는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본인 것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정색하는 것을 보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월요일이거든? 나 무단결근이라고.”

  아. 선연홍은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날이 섰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별거 아닌데도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변태, 스토커, 그다음엔 뭐, 집착이라도 하게?

  “여기요.”

  배터리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휴대폰에는 회사에서 온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한 가득이었다. 부장 새끼가 지랄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통이 밀려왔다.

  “일 그만두면 안 됩니까? 나랑 같이 있어요.”

  “뭔 소리 합니까? 남은 대출금이 얼만데 길거리에 나앉으라고?”

  “대출금, 그거 제가 드리면 안 할 겁니까?”

  전화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왜, 나한테 월급이라도 주려고요? 우리 집에 남은 빚 갚으려면 어쭙잖은 금액으론 안 될 텐데? 내가 그 집 산다고 얼마나 뺑이 쳤는데. 물론 지금도 거의 2/3는 은행 거지만.”

  “얼마면 됩니까?” 

  여기서 뭐 ‘얼마 줄 수 있는데요? 나 돈 필요해요.’ 하는 대사라도 쳐야 하나? 

  가소로움을 거두지 않으며 “뭐, 한 23억?”하고 내뱉었다. 머릿속은 부장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23억이면 됩니까? 그럼 회사 그만두고 제 일 봐줄래요?”

  “그쪽같이 성격 이상한 사람 일 봐주려면 23억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번화가 건물 정도는 줘야 고민이라도 해보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선연홍이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잠깐 보던 여지운이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 대리가 부장에게 돌렸다. “몸이 너무 안 좋아 도저히 출근 못하겠다. 지금 연락드려 죄송하다.” 하고 말하니 부장 새끼가 지랄을 했다. 당일 연차가 어딨냐며 난리를 치는데, “그럼 예고하고 아프냐? 오늘 아플 예정입니다. 이렇게 미리 말해야 하냐.”고 맞지랄을 했다.

  그 사이에 되돌아온 선연홍이 파일 뭉치를 여지운에게 내밀었다.

  “부장님, 지금 제 목소리 안 들리십니까? 아파서 목이 다 쉬었잖습니까? 아, 그러니까요. 아픈 걸 미리 아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짜증 나는 사람은 난데 부장님이 왜 화를 냅니까?”

  뭔데? 여지운이 입을 벙긋거리는 것을 본 선연홍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뺨과 어깨 사이에 전화기를 끼운 채로 종이를 보던 여지운이 부장과 통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야, 이거 뭐야?”

  [뭐? 여 팀장? 자네 지금 반말한 건가?] 

  부장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연차 처리해주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때맞춰 배터리가 떨어지며 전화가 끊겼다. 대충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손에 들린 종이를 조금 더 자세히 봤다.

  “이거 뭔데? 웬 건물 등기부 등본……? 설마 이거 네 거냐?”

  “네.”

  “이 건물이? 여기 있는 거 다?”

  “다.”

  등기부등본에 찍혀 있는 건물은 역세권에 있는 18층짜리 건물이었다. 다른 파일에는 한 호수가 아닌 아파트 한 동 전체, 오피스텔 건물뿐 아니라 복합 상가도 있었다. 혹시 인터넷 어디서 보고 프린트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건물 소유주 명은 모두 선연홍이 맞았다.

  “와, 어이없네.”

  여지운은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누리며 자랐다. 집에서 쫓겨났을 때도 고급 오피스텔에서 살았다. 졸업 후 탄탄한 직장에 취직해 승승장구하며 강이 내려 보이는 아파트도 샀다. 타고 다니는 차 역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외제 차였다. 또래 중에서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닭이 공작 앞에서 제 깃털을 뽐낸 것과 같지 않은가?

  “너 뭐야? 재발이야? 무슨 대기업 회장 손자라도 되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부족하게 살지 않을 정돕니다.”

  “야, 이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사는 거면, 나는 거지겠다?” 

  맨날 명품을 입고 다니는 것도, 단 한 번도 옷이 겹치지 않는 것도, 데리고 다니는 음식점 가격이 어마어마한 것을 보고 잘 살겠구나, 짐작은 했지만 이제 막 서른이 된 젊은 남자가 건물을 몇 채나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건물주야, 건물주.

  “이 중에 골라 봐요.”

  “뭘?”

  “지운씨 집 대출금은 현금으로 해결하고, 역세권 건물 주면 제 일 봐준다면서요?”

  “아니, 그건…….”

  당연히 구라지. 하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제안은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부모님 소유 건물도 있는데 일단 가지고 와볼까요? 도시 말고 시골 쪽도 있습니다.”

  “아니. 됐습니다. 됐어요.” 

  “마음에 안 듭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콧등만 매만졌다. 선연홍은 고르기만 하면 정말 소유권을 넘겨 줄 것처럼 진지했다. 젊고 잘생긴 부자 애인. 모두가 꿈꾸는 완벽한 애인일 텐데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여지운의 마음 한구석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주 예쁘고 반짝이는 버섯을 보는 것 같다. 입에 넣으면 바로 치사량의 독이 되는 그런 버섯.

  “근데, 선연홍씨. 정말 영영 출국할 생각이었습니까? 한국에 오지 않을 예정이었냐고요.” 

  이대로라면 정말로 건물을 안겨 준다고 할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선연홍 역시 그것을 알아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당황한 얼굴이 귀엽잖아. 

  “무슨 소립니까? 지운씨를 두고 제가 어딜 가요. 마쉘리 로 샤브르만 만났다가 다시 올 생각이었는데요.”

  “마쉘리를 만난다고? 그 사람이 무슨 만나고 싶어서 만나지는 사람인 줄 알아요?”

  “전 가능합니다.”

  “뜬금없이 대체 마쉘리는 왜? 그 사람 좋아했습니까?”

  “딱히 관심 없습니다만 지운씨가 마쉘리 로 샤브르를 좋아하니까 자리라도 만들어 볼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이 다른 남자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건 탐탁지 않지만, 기뻐하는 걸 보고 싶으니까요. 음, 새벽 비행기였는데, 약속을 좀 미뤄야겠네요.” 

  “뭐? 분명 임선열이……, 아. 이 개새끼.”

  아무렇지 않은 선연홍의 얼굴과 내뱉는 말들을 들은 후에야 임선열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여지운에게 질려서 미국으로 영영 돌아간 게 아니라 볼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온다는 거였다. 그것도 여지운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마쉘리와 자리를 마련하러. 

  “임선열. 만났습니까? 무슨 얘기 했는데요? 한 번 더 말할게요. 앞으로 다시는 단둘이 만나지 마세요. 지운씨 입에서 그 이름 듣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드니까요. 당신 말대로 나는 미친 새끼라 미친 짓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임선열 얘기는…….”

  “사회생활하고 싶죠? 밖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고. 그럼 얌전히 굴어요.”

  “뭔 소리야 대체. 내가 왜 내 사생활을 네게 간섭받아야 해. 미쳤냐?”

  “응. 그러니까 앞으로 둘이 만나지 말라고. 임선열이든 누구든.” 

  “…….”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선연홍은 지금까지의 선연홍과 조금 달라 보였다. 예전에는 쾌감에 젖은 여지운에게 흥분하며, 좀 더 괴롭히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여지운 자체에 집착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두 가지 감정은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던 선연홍을 완전 미친놈처럼 보이게 했다. 

  “야, 진짜.”

  “그것만 조심하면 잘 지낼 수 있어요. 물론 조심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지낼 겁니다. 좀 다른 형태겠지만.”

  “이러다가 아무하고도 만나지 말라고 하겠네.”

  “필요하면요.” 

  환하게 웃은 선연홍이 “어쨌든, 배고플 테니 뭐라도 만들어 오겠습니다. 조금만 쉬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뺨에 뽀뽀를 한 뒤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여지운이 이번에야 말로 입을 틀어막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기분이었다. 분명 어젯밤 선연홍을 보고, 섹스하고, 뭐든 좋으니까 다 퍼부어 달라는 선연홍의 말을 들었을 때 두근대던 마음은 이제 다른 의미로 쿵쿵 울리고 있었다.

  잘 한 게 맞겠지? 맞겠지, 맞을 것이다. 아마……. 불안한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눈두덩을 눌렀다. 

  “제가 요리를 잘 못 해서, 별로 차린 게 없어요. 몸이 좀 괜찮아지면 밥 먹으러 나갑시다.”

  서툴게 만든 게 분명한 소박한 밥상 옆에는 카페라테가 있었다. 뭉글뭉글한 우유 거품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유 말고 정액이면 더 보기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여기에 한 번 싸볼래요?”

  “야, 입맛 떨어지게…….”

  여지운이 제 입가를 닦는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좋아합니다.”

  “정신 병원 말고 안과에나 좀 가보십쇼.”

  9년 전 여름, 여지운을 알게 된 그날부터 선연홍의 바람은 하나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그의 곁에 머무는 사람이 되기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습니까?”

  “그냥 다 좋습니다.”

  여지운이 선연홍의 손안에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요는 얼마큼 빨리 어떤 형태로 떨어지냐의 차이였다.

  “그만 처 웃고 와서 허리나 좀 주물러 봐.”

  “네.”

  “엄한 짓 했다가는 손모가지를 부러트릴 테니까 제대로 해요.”

  “엄한 짓? 뭘 말합니까? 그리고 지운씨라면 손모가지 부러져도 괜찮습니다.”

  “……그림 그린다는 새끼가 말하는 거 봐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모습을 보니 그때 과도를 들고 설치던 때가 떠올랐다. 찔러도 된다고 했었나, 손가락을 잘라도 된다고 했던 것도 같다. 새삼스럽게 그때를 떠올리자 아무래도 어젯밤은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쟨 미친 것 같은데 앞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내 직업보다 지운씨가 더, 많이 소중할 뿐입니다.”

  “예?”

  “그러니까 내 첫 번째는 지운씨라는 말입니다. 내 첫 사랑, 나만의 히어로.” 

  살짝 올라간 입술 사이로 흩어지는 말들은 커피 위에 올라간 우유 거품만큼이나 뭉글거렸다. 원래였다면 진저리를 쳤을 정도로 어이없는 말이 오늘따라 마음속에 박히는 이유는 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회사 쉬어서 들뜬 거겠지, 뭐.”

  진지한 고백에 돌아오는 대답이 저거였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그다워서 웃음이 났다.

  “웃겨?”

  “사랑합니다.”

  “지랄.”

  “지랄 안 할 테니 손잡아 주세요.”

  여지운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선연홍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손을 잡아 달라고 말하면서 제 손을 뻗고 있지는 않았다. 손을 잡고 싶은 게 아니고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왜.”

  뚱한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여지운이 손을 내밀었다. 설마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는지 놀란 얼굴을 했다.

  “싫으면 말고.” 

  다시 거두려고 하는 손을 급하게 잡으며 곧바로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손톱 끝이 손등을 살짝 긁었다. 어이없는 얼굴을 하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디서 예쁜 척하고 난립니까?”

  “그래도 봐줄 만하지 않아요?”

  봐줄만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어울렸다. 앞머리가 눈앞까지 늘어져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예쁘장했던 선연홍은 꽃씨처럼 풋풋했다. 자신이 잘난 척을 할 때 다른 사람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겠다. 

  “선연홍씨, 진짜 재수 없는 거 압니까? 방금은 임선열보다 더 재수 없었습니다.”

  “지운씨 입에서 다른 남자 얘기 나오는 거 참기 힘들다고 얘기했는데.”

  턱이 들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가볍게 시작된 키스는 이내 입안을 점령하며 짙어졌다. 입술이 붙으며 혀가 얽혔다. 타액까지 모조리 마실 듯 질척이는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여지운이 고개를 물려도 입술이 계속 쫓아왔다. 그래도 자꾸 뒤로 물러서니 아예 뒷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질척이는 키스는 이내 싸움을 하는 것처럼 격렬해졌다.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입술 안쪽을 뜯고 혀를 누르고, 빨고 감아올리고 난리였다. 여지운 역시 선연홍의 머리카락을 손에 쥔 채 잡아당겼다. 가쁜 숨이 비어져 나올 정도로 거칠었던 키스는 두 사람의 입술이 발갛게 부풀어 오르고 나서야 끝났다. 

  “미친 새끼.”

  젖은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연신 하던 선연홍은 욕을 듣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나만. 나한테만 해줘요. 칭찬도, 욕도.”

  여지운이 어떤 말을 해도 그저 좋다고 말하며 넘겨 버리니 싸움도 안 됐다. 싸늘하고 가시 돋친 말에도 어린 애처럼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진짜, 내가 졌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여지운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의미가 없어서 감정도 없었다. 감정이 없으니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여지운이 항복을 말하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선연홍은 아주 오랫동안 그렸던 제 첫사랑의 입술을 더듬으며 오늘 밤엔 이곳에 제 것을 물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다 젖을 정도로 울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항상 좋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머릿속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어쨌든 지금은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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