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모처럼 혼자인 주말, 여지운은 오랜만에 동네 카페에 앉아 있었다. 통유리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따가울 만도 했지만, 에어컨 덕분에 덥진 않았다. 원래라면 당연한 듯 따라붙었을 선연홍은 본가에 일이 있다고 일찌감치 나갔다. 스토커처럼 미친 듯이 들러붙던 남자 없이 혼자 있으려니 어색함마저 느껴졌다. 예전의 그였다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 클럽에서 건진 남자와 다음날까지 원 없이 뒹굴었을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구멍을 헤집고 박는 건 여지운이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생각됐던 생활이 1년도 채 안 돼서 변했다. 이 일상을 익숙하게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하긴, 자신이 아니면 선연홍 같은 놈을 누가 감당할까. 그 새끼 눈 돌아 갈 때 보면 진짜 미친놈인데. 그런 새끼를 건사했으니 이 정도면 자신은 인류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플라스틱 컵을 흔들자 자글자글한 얼음들이 저들끼리 부딪혔다. 가끔은 이런 한가한 것도 좋구나. 기지개를 켠 후 휴대 전화기를 열어보니 당연한 듯이 선연홍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간단한 답장을 하고 그에게 빌린 [섹스 체위와 인체]라는 제목의 책을 읽던 여지운은 “지운씨.”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지운씨.”
“어?”
언뜻 들었을 때는 선연홍인 줄 알았으나, 눈앞의 남자는 그보다 좀 더 작고 동글동글했다.
“백선우씨?”
“밖에서 다 보네요. 잠깐 앉아도 돼요?”
“그러게 건즈앤로즈가 아닌 곳에서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앉아요.”
웃는 얼굴의 백선우를 보다가 그 옆에 선 동행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40대 초 중반쯤 됐을까? 백선우보다 손가락 한 마디쯤 크고 여지운과 엇비슷한 중년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뭐야? 왜 꼴아 봐? 여지운 역시 싸가지 없다, 차가워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저 남자도 장난 아니었다.
“연화 형, 앉아요.”
어느새 앉은 백선우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선우야.”
“앉으라고요.”
“그래…….”
여지운과 남자의 무의미한 기 싸움은 백선우의 중재와 함께 멈췄지만, 여지운은 이미 빈정 상한 뒤였고 상대방도 딱히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짜고짜 노려보던데, 싸우자는 뜻 아니었습니까?”
“미안해요, 지운씨. 우리 형이 실례했네요.”
백선우의 사과에 남자의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 “연화 형.” 단호한 백선우의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백선우가 남자의 턱을 잡고 제게로 돌렸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중년 남자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뭐하는 거야? 그들을 보는 여지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기묘한 기시감은 무엇일까.
“형. 사과해야지.”
“……미안합니다. 내가 원래 인상이 좀 그래서. 딱히 싸우자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남자는 본인 말대로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이나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이 가뜩이나 거칠었는데 이 날씨에 검은 양복까지 쫙 빼입다 보니 영락없는 조폭이었다. 못생긴 건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에 어려 보이는 백선우와 같이 있으니 삼촌과 조카 정도로 보였다.
“우리 형이 낯을 좀 많이 가려요. 지운씨가 이해 좀 해줘요.”
“딱히 낯을 많이 가리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뭐, 아무튼 오랜만입니다.”
“요새 바쁜가 봐요? 가게에 안 온 지 좀 됐죠?”
건즈앤로즈에 마지막으로 들렸을 때가 선연홍과 잠깐 헤어지고 고자가 됐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백선우가 없었으니 마지막으로 얼굴 본 건 좆같은 정선주와 마주쳤을 때다.
“4개월 정도 됐나요?”
그 사이 늦겨울은 초여름이 되었고, 선연홍은 그때와 좀 다른 의미로 여지운의 옆에 있었다.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네,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지운씨와 이렇게 오래 못 봤던 적은 처음이라 사실 좀 궁금했거든요. 수온이도 물어보고.”
“왜, 내가 없으니까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까?”
여지운은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다리를 꼬았다. 질문 형태였지만, 그는 이미 ‘내가 없으면 건즈앤로즈에 사람이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 는 표정을 한 채였다. 오랜만에 보는 거만한 행태에 백선우가 웃었다.
“여지운씨의 자신감은 오랜만에 봐도 변함이 없네요.”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이죠.”
“네네. 뭐, 그렇긴 하죠. 지운씨와 연홍씨 둘 다 보이지 않으니 다들 궁금한가 봐요. 지금 온갖 소문이 다 돌아요.”
“나랑……, 누구요? 연홍씨? 그 남자는 누굽니까? 나 없는 사이 등장한 뉴 페이스?”
연홍이라는 새끼는 누구야. 여지운은 딱 이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매끄럽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가며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의 백선우가 여지운을 살폈다. 지금 저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궁금한 듯했다.
“백선우씨?”
“와, 설마 농담 하나 했더니 진짜 진심이네. 여지운씨나 선연홍씨 둘 다 대단하네요.”
“지금 딴 사람 얘기하다가 선연홍 얘기를 왜……. 아, 아!”
여지운은 그제야 백선우가 말한 ‘연홍’씨가 선연홍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단 한 번도 그를 이름으로 부른 척 없다는 것 역시 알아차렸다. 연홍, 동그라미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부드럽게 보이지만 어쩐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타인의 입에서 듣는 그 이름은 생각보다 더 생소했다. 선연홍을 향해 ‘연홍.’이라고 부르는 상상을 하던 여지운이 팔뚝을 쓸었다. 질색한 표정이 잘 드러났는지 백선우가 웃었다.
“그래도 헤어졌다고 말하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만나나 봐요? 지금 건즈앤로즈에는 ‘두 사람이 쫑났다.’, ‘여지운의 성질머리를 더는 참지 못한 선연홍이 그를 죽였다.’, ‘구남친이 찾아와 막장 치정극을 찍는다.’ 등등 온갖 소문이 다 도는데. 정작 두 사람은 평화롭네요.”
“별 거지 같은 소문이……. 거기 인간들도 여전하네.”
“보다 더 자극적인 게 필요하니까요 근데 누군가를 이렇게 오래 만나는 거, 처음 아니에요? 적어도 내가 지운씨를 알게 된 이후로는 없는 것 같은데.”
“저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짚신…… 음, 죄송.”
“짚신도 짝이 있다고요?”
죄송은 무슨. 일부러 말한 게 분명하면서도 실수인 척 고개를 까딱이는 게 가증스럽다. 재수 없긴 한데 이상하게 짜증 나지 않았다.
“지운씨가 성격이 좀 터프……하잖아요?”
“더럽다고 말해도 됩니다.”
“더럽잖아요.”
백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긍정했고, 여지운이 그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선우야.”
“연화 형, 나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 왜 이렇게 보채?”
“그게 아니고…….”
연화 형인지 뭔지 하는 중년 조폭은 널따란 어깨를 옹송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름이긴 하지만 저렇게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덥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두툼한 손이 백선우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을 무심히 보던 여지운이 백선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근데 지금 바에서 여지운씨 두고 판 벌어진 거 알아요?”
“설마 ‘여지운이 정말 선연홍에게 죽었나.’ 같은 겁니까?”
“그건 뜬소문에 불과하고, 지금 건 사실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고 할까.”
“뭡니까?”
백선우가 짓궂게 웃었다. 저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땐 대체적으로 당사자에겐 좋지 경우가 대부분이라 괜히 불안했다.
“여지운씨가 작년 연말에 선연홍씨에게 보였던 모습과, 올 초 정선주씨를 상대로 보였던 모습 말이에요.”
작년이라고 하면, 여지운이 선연홍의 무릎에 좆을 세웠던 좆같은 날이었고, 정선주와의 일은 정선주의 좆을 무릎으로 농락했던 일을 말하는 것일 텐데. 새삼스럽게 그 얘기는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 여지운의 의문을 알아챈 백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하의 여지운이 깔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때 그 일로 쏙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여지운씨와 선연홍씨 중에 누가 위고 아래인지에 대한 내기로 떠들썩해요.”
“나랑 선연홍이? 거기 안 간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딴 내기를 한다고?”
“둘 다 유명하잖아요. 그리고 여지운씨 같은 이슈메이커가 없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근데 진짜 몰랐어요? 판 벌어진 지 꽤 됐는데.”
이슈메이커. 그만큼 여지운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을까. 그와 관련된 소문만 해도 두 손을 넘었으며 그중 몇 개는 아직도 회자 될 만큼 유명했다. 무난하고 맨송맨송한 것보다, 매력 있는 쓰레기가 낫다는 게 여지운의 지론이었고, 착실히 이행했었다.
“갔어야 알지,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연락하는 사람 없어요? 지운씨는 애인 있어도 아무하고나 연락하고 놀아 났잖……, 진짜 없어요?”
이번에는 정말 놀랐는지 백선우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달싹이더니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날름, 빠져나오는 혀를 보는 조폭 중년의 눈빛은 한 대 칠 것처럼 살벌했다. 왜 저렇게 쳐다봐. 미간을 찡그리던 여지운이 끄덕였다.
“내가 잘나서 불안한가 보죠. 그 새끼……, 크음. 선연홍씨가 보기보다 집착이 강하거든요.”
“그렇군요. 예쁘게 생겼는데 또 그런 면이 있네. 하긴, 얼굴만 봐서 그 사람을 파악하긴 힘들죠.”
“그건 백선우씨도 마찬가지고.”
여지운의 대답에 눈을 둥그렇게 떴던 백선우가 곧 어깨를 떨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이나 웃다가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아,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났네.”
백선우의 옆에 앉은 조폭이 어딘지 모르게 넋 나간 얼굴로 그의 손을 감쌌다.
손을 왜 저렇게 잡는 거지?
“근데 당연히 지운씨가 위겠죠? 예전에 말했잖아요.”
“예……?”
선연홍과 교제 초반, 선연홍이 완전 맛 간 또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시절 백선우에게 ‘뒤를 개통해 신세계를 보여주겠다.’하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뒤를 뚫려서 신세계를 접한 게 선연홍이 아닌 여지운이라는 것만 빼면…….
“아니에요?”
“맞는데요.”
맞는데요. 하고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여지운은 상황이 좆같이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백선우 저 새끼 오늘따라 왜 저래. 오랜만에 본 백선우는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좀 더 얄궂고 짓궂었다.
“와……. 여지운씨 오늘따라 좀 다르게 보이네요. 그 남자가 왜 그러는지 알겠네.”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백선우의 팔을 조폭이 잡아끌었다.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선우야.”
“걱정 마, 형. 그래도 난 형을 제일 사랑하니까.”
눈꼬리를 접어 다정하게 웃은 백선우가 조폭의 뺨을 쓸었다. 보드라운 선을 그리는 얼굴과 달리 그의 손등에는 찢기고 꿰맨 상처로 가득했다. 백선우의 손길에 조폭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미청년과 중년 아저씨 사이에선 나올 수 없는 멜랑콜리한 분위기에 여지운의 표정이 점점 해괴해졌다. 문득, 백선우에게 8년 된 애인이 있다던 이수온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아무래도 저 중년 조폭이 백선우의 애인인 듯했다. 백선우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연락처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초에 딱히 관심도 없었지만, 지금 모습은 확실히 놀랍다.
“선우야, 나 화장실…….”
“참아.”
조폭의 듬직한 어깨가 내려앉으며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코끝을 타고 흐른 땀이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졌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데 참으라는 건 또 뭐야? 그리고 저 아저씨는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그냥 가면 되지 그걸 왜 묻는 거지? 여지운의 시선이 무릎을 꽉 조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조폭에게 향했다가 백선우에게 옮겨갔다. 그는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 끝에 매달린 건 만족이었다.
아, 정상이 아닌 새끼들이 왜 이리 많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듯 미친놈이 곁에 있으니 미친놈들만 모이는 것 같다. 아니면, 이제야 파악한 제가 등신이거나. 어느 쪽이든 백선우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이상한 새끼인 듯하다.
“할 얘기 다 했으면 그만 가시죠, 백선우씨? 옆에 분도 불편 해 보이는데.”
하지만 여지운은 백선우와 저 남자가 변태 같은 짓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남의 연애사는 더더욱 관심 없다. 당장 자신 옆에 있는 또라이 새끼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다른 또라이에게 관심 둘 여력이 없거든.
“왜, 애인이 보면 혼나기라도 할 것 같아요?”
“뭐라고요? 무슨 그딴 말을…….”
그 말에 발끈하며 일어서던 여지운은 마침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말엔 진동이나 무음으로 바꿔 놓는데 오늘은 선연홍이 하도 지랄하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얌전히 집에 있을래요, 아니면 폰 켜놓고 외출할래요?’
여지운은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선연홍의 강냉이를 털었다. 그는 벌건 멍이 올라오는 턱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니면,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뒷구멍을 쑤셔 주길 바랍니까? 그래도 나갈 수 있나 볼까요? 지운씨?’
희대의 개소리에도 무표정을 고수하니 이번에는 팔을 꼭 붙든 채 사정을 했다.
‘지운씨가 너무 멋있어서 제가 도저히 안심이 안 돼요.’
선연홍은 의도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여지운에게 들러붙었다. 저게 이제는 미인계도 쓰네. 내가 넘어 갈 줄 아냐? 하고 비웃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대폰을 켜고 있더라. 씨발.
“지운씨, 애인한테 연락 온 것 같은데.”
오늘 아침 일을 생각하던 여지운은 백선우의 목소리에 전화기를 내려 봤다. 그의 말 대로 선연홍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여지운입니다.”
[지운씨, 잘 지냈습니까?]
“……얼굴 본 지 4시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4시간이 제게는 400년 같습니다.]
“지랄하려고 전화한 거면 이만 끊겠습니다.”
뚝. 여지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다시 벨이 울렸다.
“왜 또 전화해.”
[진짜로 끊다니, 와. 박력 터지네요. 멋있습니다.]
“개소리하면 끊는다고 말했지?”
[알았습니다. 본론만 말할 테니까 끊지 마요. 저녁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식사 같이합시다.]
“저녁?”
[네, 예약해놨어요. 근데 지운씨 왜 그렇게 조용히 얘기해요? 혹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나?]
여지운은 반사적으로 앞에 앉은 사람들을 봤다. 조폭의 턱에 난 수염을 손끝으로 긁고 있던 백선우가 방실방실 웃었다. 애완 고양이를 어르는 것 같은 동작에도 조폭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은가 보지, 여지운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동안 수화기 너머 남자의 흥분은 점점 더 커졌다.
[진짭니까? 야아, 여지운씨 살만해졌나 봅니다? 내가 딴 남자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사람 말을 좆같이 들어요. 예?]
“…….”
[지금 어딥니까, 왜 대답 안 해요?]
“지금 좆같이 구는 게 누군데, 이게 어디서 어쭙잖은 의부증 행세야.”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어딘지 말하라고. 내가 못 찾아낼 것 같아서 그럽니까?]
선연홍의 질투는 기가 막히고, 어이없고, 짜증 나고 같잖았으며 웃겼다.
“백선우씨랑 백선우씨 애인이랑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딘지 알면 뭐 어쩌게?”
[백선우? 건즈앤로즈 바텐더요?]
“그래.”
[으음.]
귀를 파고드는 숨에는 탐탁지 않음이 녹아났다. 하지만 이 정도가 선연홍의 개지랄을 봐 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 챈 남자가 [지운씨.]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혹시 곤란한 상황일까 걱정한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오해는 무슨 얼어 죽을 오해. 작게 말했다고 이 정돈데 안 받았으면 아예 칼춤 췄겠네.
눈앞에 두 사람은 여지운이 있거나 말거나 서로 손잡고 쓰다듬고 난리였다. 특히 조폭은 백선우의 손이 닿을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몸을 떨어댔다. 바에서 보던 영업용 미소가 아닌 저 짓궂어 보이는 얼굴이 아마도 백선우의 본 모습인 것 같다. 기묘한 형태긴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
“…….”
두 사람을 보다가 남은 커피를 입안에 다 털어 넣었다. 선연홍은 여지운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잘 듣기 위해 전화기를 귀에 딱 댄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은 여지운이 입을 열었다.
“야.”
[네.]
“언제 와.”
[네?]
“빨리 와.”
[…….]
선연홍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까만 액정 위로 뚱한 얼굴이 비쳤지만, 화가 났다고 하기에는 좀 더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쑥스러움에 가까운. 여지운의 시선이 테이블 어딘가를 부유했다.
“청춘이네요.”
여지운이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선연홍에게 말하는지 줄곧 지켜보던 백선우가 툭 내뱉었다. 고작 세 살 차이면서 청춘 타령을 하는 게 어이없었다.
“지운씨, 20분 가까이 멍하게 있었던 거 알아요? 연애 초라서 그런가, 애정이 넘치네.”
“적당히 하세요.”
나지막한 경고에 백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반응 없는 그를 대신해 옆에 앉은 조폭이 여지운을 노려봤다. 여지운 역시 지지 않고 살벌한 눈빛을 받아쳤다. 금세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백선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형.”
“선우야, 저런 놈이 너 우습게 보는데 왜 가만히 있어.”
“저런 놈? 형씨, 지금 나 말하는 거?”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던데.”
뭐 마려운 사람처럼 허벅지를 비비면서 간절하게 백선우를 보던 남자는 여지운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내 성질머리가 보통인지 아닌지 오늘 처음 본 그쪽이 어찌 알고 지껄이는 겁니까?”
“첫인상이라는 게 있지. 대화라는 건 상대방과 하는 아주 직접적인 감정 교류인데 개소리니 지랄이니 하는 걸 보면 알지 않나?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말리고 싶군.”
여지운은 제가 성질이 더럽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겨우 일부분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뭐라고. 선연홍이 여지운을 비난하는 게 아닌 이상 모두 참견이고 오지랖일 뿐이다.
“이것 보세요, 아저씨. 설사 내 성질머리가 뭐 어떻든 그쪽이 무슨 상관입니까?”
“맞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평가라니, 오만하군요.”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여지운이 뒤를 돌았다. 대체 언제 온 것인지 모를 남자가 여지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선연홍?”
그는 여지운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여지운을 보는 눈 안에는 별빛 같은 애정이 가득했다.
“잘 있었어요?”
“여긴 어떻게 왔냐?”
“지운씨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듣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요. 가족 모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왔습니다. 잘했죠? 칭찬해줘요.”
선연홍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여지운의 옆에 앉았다. 그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다고? 아니, 애초에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머릿속을 휘젓는 의문을 뱉어내려던 찰나 조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댁이 이 남자 애인인가?”
“네, 애인입니다.”
“말투나 말하는 걸 보니 타인을 우습게 알고 건방 떠는 게 일상화됐던데. 딱 봐도 고생길이 훤하겠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여지운을 보던 남자는 선연홍을 향해서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와, 어이가 없네. 고생하는 게 누군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닌 게 누군데. 여지운은 정말 억울해서 당나귀 귀라도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많은 감정과 심정이 담긴 숨을 내뱉으며 조폭을 노려봤다.
“뭘 안다고 아까부터 개소리야. 이것 보세요. 내 욕하지 마십쇼. 차라리…….”
“차라리?”
“얘 욕을 하던가.”
삐죽 솟은 손가락이 옆을 향했다. 졸지에 여지운에게서 지적받은 선연홍이 눈을 깜빡이다 조용하게 웃었다.
“그래요, 차라리 날 욕하세요. 사실 지운씨를 제외한 사람에게 욕 듣는 거 굉장히 불쾌한데, 그래도 지운씨를 욕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여지운의 손을 선연홍이 감쌌다. 주먹을 쥐고 있는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기어코 깍지를 끼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을 했다.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는 조폭을 보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좀 전 자신도 저런 얼굴로 백선우와 조폭을 본 것 같은데.
“선연홍이라고 했나? 보아하니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군.”
“내 정신 상태를 그쪽이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당신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진 않고.”
여지운을 대신 해 선연홍이 받아쳤다.
“그쪽? 나보다 어려 보이는 데 예의가 없군. 끼리끼리라는 건가?”
“당신도 내가 당신 애인 욕하면 화날 거잖아.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여지운이 보통 선연홍과 만날 때 다른 사람이 끼어든 적은 없다. 그나마 임선열이 전부였는데 그땐 작가와 큐레이터로 만나서 그런지 갑을 관계가 확실해 보였다. 그가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과 지극히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걸 보는 건 처음 같다. 가끔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긴 해도 대부분 순종적인 남자가 한눈에 봐도 저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놓는 걸 보니 신기했다.
“요새 애들은 버릇이 없네.”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버릇 운운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버릇부터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선연홍 말하는 싸가지 보소.
조금 더 딱딱해지는 공기를 가른 것은 이번에도 백선우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자자, 그만.” 하고 손뼉을 짝 쳤다.
“형이 잘 못 한 게 맞으니까 사과 해. 그리고 선연홍씨도 너무 가시 세우지 마세요. 우리 형 소심하거든요.”
“……소심?”
“여지운씨랑 만나더니 비슷해지셨네요? 아니면, 지금이 본 모습이고 여지운씨 앞에서만 온순한 척하나?”
백선우를 위해 나섰던 조폭은 되레 타박이 돌아오자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조금 전 호랑이 같던 기세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형.”
백선우의 손이 의자 뒤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폭의 등허리라도 훑는 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남자답게 각진 턱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얼굴에 열기가 몰렸다. 꾹 감은 눈 주위로 미세한 주름이 자리 잡았다. 험상궂게 생긴 중년 남자가 온몸을 배배 꼬는 모습은 충분히 이상했지만 여지운도, 선연홍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다 다음에 봐요.”
후두둑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등장했던 백선우와 그의 연인은 축축하게 젖은 땅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럼 지운씨. 좀 이르지만, 저녁 먹으러 갈래요?”
두 사람이 사라진 문을 보고 있던 여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 나 다음 주부터 바빠질 것 같아.”
“또?”
“또.”
“이번에도 회사 일입니까?”
“어.”
으음, 물이 반쯤 남은 컵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선연홍이 “이참에.”하고 입을 열었다.
“지운씨네 회사 인수할까요? 사장으로 앉혀 줄게요.”
“너 금수저인 거 아니까 재벌 놀이 좀 그만 해. 우리 회사가 구멍가게냐, 사장으로 앉히네 마네 하게.”
“음……, 지운씨라면 바로 승낙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지운씨라면’이라는 말 앞에는 ‘돈을 좋아하는’ 혹은 ‘잘난 척하길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어 있을 것이다. 사실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 딱히 반발할 생각은 안 들었다.
“그 깐깐한 노인네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별수 있나.”
“누구?”
차가운 날붙이를 쥔 채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던 손이 순간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이어졌다. 선연홍은 잘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야. 칼 들고 설치지 말라고 미리 말해 주는데, 완전 쭈그렁 할배 고객이거든? 1,000억을 줘도 싫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럼 2,000억은?”
“뭐?”
“2,000억, 3,000억 주면 만날 생각입니까?”
“아, 존나 귀찮게 구네. 세상 하늘 별 달, 땅,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니……,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걸 다 갖다 바쳐도 그 할배는 아니야.”
음식점에서 쓰는 포크와 나이프는 비교적 무디지만 마음먹고 흉기로 쓰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여지운은 선연홍이 다른 개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빵을 집어 그의 입안에 처넣었다.
“근데 그쪽 업계는 원래 그렇게 바쁩니까? 연말 연초에도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했잖아요.”
“여름에는 그나마 한가한 편인데, 알다시피 내가 좀 많이 잘나서.”
“지운씨가 잘났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게 다 능력 있는 애인을 둔 애환이라고 생각하십쇼. 선연홍씨.”
“……네?”
“뭘 그렇게 놀랍니까?”
대수롭지 않게 밥을 먹던 여지운은 놀란 목소리로 되묻는 선연홍을 쳐다봤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애인, 그렇죠. 애인이죠.”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를 잠시 보던 여지운이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선연홍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멀끔하게 고정됐던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이마를 덮었다.
“너.”
“네?”
“머리 내리고 다녀라. 그게 더……, 음, 괜찮아.”
차마, 그게 더 예쁘다라는 말까지는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저 잘생겼습니까?”
메인 메뉴를 다 먹고, 디저트로 나온 티라미스까지 먹고 난 다음에야 나온 물음에 곧바로 “아니.”하고 말했다. 물음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부정의 말에 선연홍이 웃었다.
“넌 그럭저럭 봐 줄 만한 거지. 잘 생긴 건 나고.”
“그건 맞는 말입니다. 지운씨가 더 멋있죠.”
여지운은 가끔 눈앞 남자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헷갈렸다.
“진심입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의심 가득 한 눈빛으로 보기에. 음, 식사 다 했으면 나갈까요?”
겨울이었다면 벌써 어린 어둠이 내려앉았을 텐데 바람이 따뜻해지면서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선연홍이 차 키를 누르자 근처에서 ‘삑’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였다.
“집에 바로 갈 거면 데려다 줄게요.”
“집 말고.”
“말고?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건즈앤로즈.”
아주 오랜만에 그 단어를 내뱉으며 여지운은 몸을 이완시켰다. 혹시라도 선연홍이 길에서 지랄하면 바로 제압할 생각으로 주먹도 꽉 쥐었다. 상황에 따라선 불알을 찰 의향도 있었다.
“좋습니다.”
“뭐?”
하지만 그는 아주 가뿐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고 되물은 것은 오히려 여지운이었다.
“가요.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들려야지 생각했습니다.”
“왜? 선연홍씨가 거기 들릴 이유가 뭔데요?”
선연홍은 조수석 문을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랑 함께 가는 건 당연 한거고. 또, 다른 새끼……으음, 다른 사람들이랑 지나칠 정도로 가깝게 붙어있거나 말을 주고받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면요.”
* * *
선연홍과 그 난리를 치면서 교제를 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나갔다. 그 사이에 건즈앤로즈에 가고 싶다든가 다른 남자와 떡을 쳐야겠다, 심지어 구멍에 좆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지운이 섹스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다가는 죽겠다, 고작 세 살 차인데 체력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지, 복상사하는 거 아냐? 선연홍 걸 뒤에 꽂고 죽다니, 정말 싫다.’ 등등의 생각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였다.
침대 위에서의 선연홍은, 어디서 약이라도 처맞고 왔는지 도무지 지치지 않았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격렬한 섹스를 하다가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분명 자는데, 자꾸 숨이 가빠지고 흥분됐다. 겨우 눈을 떠보면 여전히 선연홍이 여지운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잡아 벌리며 신 나게 박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미치겠는데 귓가에는 온갖 음담패설이 흘러들어 왔다. 땀에 젖어 반짝이는 얼굴로 새빨간 말을 늘여놓으며 정신을 홀리는데, 여지운이 이제껏 알고 있던 섹스의 정의가 바뀔 정도였다. 선연홍과의 섹스는 이성이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숨을 온전히 쉬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정신이, 육체가 녹아내렸다.
“지운씨 진짜 오랜만에 왔네요. 얼굴 다 잊겠어요. 어, 선연홍씨까지?”
불과 몇 시간 전에 봤음에도 오랜만에 보는 척하는 백선우에게 마주 웃은 여지운이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이수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숨을 들이켜자 여전히 텁텁하고 퇴폐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시선 역시 꽂혔다. 그 사이 인테리어를 바꿨는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담배 그을림 자국과 정액, 그리고 핏자국으로 지저분했던 벽 역시 현대적인 감각의 블랙 타일로 바뀌어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는 채도가 낮은 회색으로 통일했다. 전체적으로 깔끔해진 공간에 흡족했다.
“맥주 한 병 주고, 얘는 음료수.”
물기가 맺힌 차가운 맥주 한 병과 캔 음료가 나란히 놓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도수가 꽤 높은 와인을 마셨는데 거기에 맥주를 퍼부으니 속이 부대꼈다. 음료수를 홀짝이던 선연홍이 얼굴을 구기는 여지운을 걱정스레 살폈다.
“지운씨, 괜찮아요?”
“아직은.”
여지운은 바 테이블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서 있었고, 선연홍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말끔히 올렸던 머리가 눈썹 밑까지 내려온 선연홍은 언뜻 대학생으로도 보였다. 그를 잠시 보다가 바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긴 오랜만에 와도 여전하네.”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엔 흥분과 흥미, 그리고 시기 질투가 함께 섞여 있었다. 근거 없는 가십과 소문은 단물이 잔뜩 든 껌과 다를 바 없다. 신나게 씹다가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그런 것. 그러니까 사람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나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있지 않은가. 평일이라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온갖 감정이 뒤엉킨 시선은 충분히 노골적이었다. 혼자 있을 때도 느꼈지만 선연홍과 함께 있으니 이건 완전 우리 안의 원숭이 저리가라였다.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마시고 같은 걸로 주문했다.
“여기 같은 걸로 하나 더 주세요.”
“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정선주씨가 찾더라고요.”
“왜? 맥주병으로 쑤시는 게 지겹대요?”
“글쎄요, 지운씨가 자기 연락 안 받는다고 길길이 날뛰던데. 가만 보면 그 사람도 참 대단해요. 그 때 그런 일을 겪고도 맨날 여기 오던걸요?”
“애초에 받은 적도 없는데 새삼스럽게 연락 안 받는다고 날뛰는 건 뭐야. 그리고 그 새끼 원래 뻔뻔해서 그럽니다.”
여지운이 백선우의 말을 비웃었다. 정선주는 정말 짜증 나는 새끼지만 나름 도움이 됐으니 다음에 만나면 표면에 작은 돌기가 난 맥주병을 선물할 예정이었다. 뒷구멍 쑤셔도 안 깨지게 튼튼한 걸로 준비해야겠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선연홍이 여지운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수군대는 소리가 좀 더 커졌다. 몇 년 동안 여기 드나들며 온갖 지저분한 소문과 상황에 엮였던 여지운과 달리 그는 아직 보송보송한 뉴 페이스였다. 지금 두 사람이 연애 중이라는 걸 다 알 텐데 선연홍을 보는 시선엔 호감이 가득했다. 평소에는 둘만 있으니 잘 몰랐는데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두고 보니 확실히 도드라진다. 예전에는 그냥 화사하다는 느낌이 전부였다면 지금은 그것보다 좀 더 목구멍이 간지럽다고 할까?
“이것 좀 봐요. 제가 만든 겁니다.”
가지런히 모은 선연홍의 손바닥 위에는 맥주병 뚜껑에 달린 얇은 쇠줄을 둥글게 구부려 만든, 반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조잡한 조형물이 있었다.
“지운씨 구멍같이 예쁜 동그라미지 않아요?”
여지운은 개소리를 하는 선연홍의 불알을 차는 대신 병뚜껑 반지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의 새끼손가락에 쑤셔 넣었다. 남들에 비해 곧긴 하지만 남자라 그런지 다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 마디에 걸렸다. 그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선연홍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금 저한테 끼워 준 겁니까? 이거 프러포즈입니까?”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값비싼 보석을 살 수 있는 남자가 허접한 뚜껑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담긴 애정을 모를 순 없었다. 아,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여지운은 지금 이 갈증을 해결 해 줄 뭔가가 필요했다.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연홍의 멱살을 잡고 당겼다.
“지운씨?”
의문 어린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선연홍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따끔거리는 피 맛과 함께 시작된 키스는 민감하고 예민한 살덩이들이 딱 들러붙으며 격해졌다. 피 맛이 나는 키스는 오랜만이네. 왜 얘랑은 항상 이런 거칠고 본능적인 키스만 하게 되는 걸까.
“음, 지운, 씨.”
선연홍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아래로 당기자 그의 고개가 들리며 목덜미가 드러났다. 반짝이는 조명을 등진 여지운이 선연홍의 입술을 빨았다. 흐르지 못한 신음과 타액, 그리고 여러 감정이 맞물리며 야한 소리를 자아냈다. 머리가죽이 뜯길 정도로 세게 잡아당기던 손은 어느새 뒷목을 쓸었다. 선연홍은 고개를 바짝 들고 키스를 받으며 여지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위치 때문인지 여지운이 일방적으로 퍼붓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혀를 빨고 씹고 섞을수록 목구멍에서 숨이 부풀었다. 흥분은 붉은 기운으로 변해 그의 뺨과 광대 부근에 번져 있었다. 살짝 감았다가 치켜뜬 여지운의 시선 끝으로 선연홍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가 걸렸다.
이거, 내 거니까 꺼져. 젖은 혀들이 엉키며 그 사이에서 흐른 타액이 입안을 채웠다. 여지운이 선연홍의 뺨을 쓸며 속삭였다.
“삼켜.”
꿀꺽. 울대뼈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여지운이 선연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네.”
주위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그대로 둘 다 옷 벗고 공개 섹스해라.”, “생중계로 보여 달라.” 는 말에 비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그랬더니 곧바로 웃음 섞인 욕설이 날아왔다. 쓰레기니 뭐니 해도 여전히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선연홍은 가쁜 숨을 색색 내뱉으며 달아 오른 뺨을 삭혔다. 숨죽인 채 보고 있던 이수온이 입을 열었다.
“어……. 두 분 중 누가 위 쪽이냐를 두고 말이 많았거든요. 근데 오늘 보니까 아무래도 여지운씨가 탑 같은데 맞죠? 소문대로 잘해요? 뭉개질 정도로……막 그래요?”
여지운이 순간 흠칫했다. 그는 미친 소리를 나불대는 이수온의 입에 주먹을 처넣고 싶었다.
닥쳐! 닥치라고!! 특유의 거만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던 여지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연홍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당기던 손바닥에는 땀이 배기 시작했고, 키스를 퍼붓던 입은 초조함에 말려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몰려 있었다. 그들은 선연홍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 상황으로만 유추해보면 누가 봐도 여지운의 승리였다. 그 정도로 조금 전의 키스는 야했고, 강렬했고, 압도적이었다.
“이수온씨……!”
하지만 그것은 조금만 건드려도 폭상 망하는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다. 선연홍이 여지운을 돌아봤다
“……”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여지운이었다. 꼬리를 말았다고 해도 좋다. 적어도 여기에서 선연홍이 ‘사실은 여지운이 깔린다. 허벅지에 멍이 들 정도로 세게 박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성기를 아슬아슬할 정도로 세게 쥐는 걸 좋아한다.’ 같은 말만 하지 않는다면.
“지운씨, 여지운씨. 여지운씨가 날…….”
선연홍이 입을 열 수록 여지운의 긴장감은 점점 높아졌다. 얼굴은 물론이고 등 뒤까지 식은땀이 축축했다.
“선……, 야. 선연홍.”
“여지운씨의 허리놀림, 예술이죠.”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밤하늘에 뜬 하얀 초승달 같이 휘었다. 우와아. 이수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 번도 누구와 경험이 없는 스물한 살 어린 청년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잘해요?”
“물론입니다. 어찌나 격렬하고 강한지 할 때마다 제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니까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하긴 뭐가 여지운씨랑 관련 된 소문만 들어 봐도…….”
선연홍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장단을 맞추다 못해 상모돌리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한시름 놨다. 여지운은 인중에 맺힌 땀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좀 잘하지. 선연홍도 정신을 못 차린다잖아. 이수온씨 잘 들었죠?”
터질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 잦아들었다. 여지운은 뺨 근육을 끌어당기며 여유로운 척 웃었지만, 사실은 경련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이쯤 하면 소문은 일단락됐겠지. 계속 여기 있다가는 제 명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연홍, 가자. 오늘도 눈물 펑펑 쏟게 해 줄 테니까.”
“눈물 펑펑 쏟게 해준다니. 그것참, 기대되네요.”
“…….”
“아주, 아주 기대됩니다. 지운씨.”
선여홍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올라가자 여지운이 씹어놨던 상처가 벌어졌다. 매끈한 입술 위에 맺히는 핏방울들을 보고 있으니 그 언젠 가의 기억이 덧씌워졌다. ‘아무래도 저는, 여지운씨의 주인님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하고 말 했다. 그 뒤는 뭐, 난장판이었지. 지금 선연홍은 그때와 똑 닮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몸뚱이가 긴장하며 소름이 쫙 돋았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좀 봐달라고 할까? 펠라 해줄 테니 퉁 치자고? 씨발, 내가 어쩌다가 이런 걱정까지.
하지만 유리로 만들어진 관이나마 사람들에게 여전히 오만한 제왕으로 비친다면 괜찮다. 괜, 괜찮아.
“여기 잘 봐놔요. 이제 다시는 올 일 없을 테니까.”
어느새 여지운의 어깨를 감싼 선연홍의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말처럼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 여지운은 백선우와 이수온, 그리고 옛 섹파들과 애인 등 익숙한 얼굴을 훑은 뒤 인사 하나 없이 나갔다. 따라나가던 선연홍이 문득 자리에 멈춰서 이수온을 돌아봤다.
“여지운씨, 핥아 먹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죠. 하지만 보여줄 생각 없으니 꿈에서도, 상상도 무엇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네?”
“생각 같아서는 여기 있는 사람들 눈알 다 뽑아버리고 싶네. 하하.”
다정하게 웃으며 사람들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다던 남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인의 손을 맞잡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