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아무것도 모르다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게 있다. 한번 알고 나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는 감정들. 여지운에게 그것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다.
여지운의 초등학교 입학과 형의 중학교 입학식이 겹친 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아빠는 일하러, 엄마는 형의 입학식에만 간 것도, 그래서 가족과 함께 있는 아이들 틈에 여지운 혼자 덩그러니 있던 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되던 때 압도적인 표차로 학생회장이 됐다. 얼른 자랑하고 싶어 종일 근질근질했다. 여지운은 벗어 던진 신발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달려가 부모님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주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고작 초등학교 회장으로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이니? 네 형을 봐라 초, 중, 고 다 했잖니. 어서 가서 신발이나 정리해.’ 하고 말씀하셨다. 여지운은 입술을 안쪽으로 만 채 신발을 정리했다. 그들은 소풍, 운동회, 수업 참관 등 각종 모임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형의 일과 겹치면 무조건 형을 우선시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지운아, 애도 아닌데 혼자 잘할 수 있잖니.’
‘그럼 형은 애라서 엄마가 가는 거예요?’
‘지인이는, 네 아버지 뒤를 이을 장남이잖아.’
그럼, 엄마아빠에게 저는 뭔데요……? 여지운은 그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여지운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험생이 된 형은 예민해졌다. 원래 같은 층수의 방을 썼는데 수험생을 배려해 줘야 한다는 이유로 여지운은 제 방에서 쫓겨났다. 고3……. 그래, 예민할 수 있지. 이해했다. 형은 공부 잘하는 사람만 간다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졸업식, 처음으로 엄마가 온다는 소식에 여지운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참으려고 해도 입가가 자꾸 풀어져 미소가 흘렀다.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예쁘다.’고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르겠다. ‘마마보이냐, 그만해라.’라는 핀잔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리고 졸업식 날, 시간이 다 돼 가는데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졸업생 대표, 3학년 2반 여지운 학생의 졸업사가 있겠습니다.’
강당을 울리는 박수 소리를 뒤로 한 채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섰다. 아이들 뒤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가족이 보였다.
내 가족이 아닌, 남의 가족.
눈두덩이 따갑고, 뜨겁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어떻게 졸업사를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입으로는 외운 것을 기계적으로 내뱉었고 눈으로는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단상을 내려올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바쁘셔서 그럴 거야, 지금 오시고 계시겠지. 엄마에게 연락하려고 휴대폰을 열자 이미 문자가 와 있었다.
-지인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데리러 갔다. 온 김에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갈게.
몇 문장이 안 되는 그 말을 여지운은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열여섯, 작은아들의 중학교 졸업식과 22살 큰아들의 감기 중 그녀는 큰아들을 택한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게 된 것이. 고등학교 입학식 역시 당연히 찾아오지 않았고, 여지운은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열여덟의 봄, 형과 싸웠다. 계기? 아주 작고 사소했다. 태어날 때부터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장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될 자랑스러운 아들. 고작 반에서 1등이나 하는 동생과 달리 전국 등수의 뛰어난 형. 부모님의 기대, 애정. 그러니 형이 자신을 우습게 본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거의 반년을 아껴서 산 용돈으로 산 노트북을 형이 망가트린 것?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여지운은 처음으로 형에게 달려들었다. 마구잡이로 뻗은 주먹이 그의 턱 부근을 스쳤던 것도 같다. 그냥 남자애 둘이 붙여 놓으면 흔히 있는 형제간의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내 귀한 장남에게 난 상처를 본 부모님은 분노했다. 엄마의 화난 얼굴도, 아버지의 설교도 모두 아득하게 보였다. 여지운은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착한 아들, 성실한 아들이어도 저분들에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럼, 참지 말자. 혼자 이렇게 아등바등 노력하고 갈구해봤자 돌아오는 것이 차별이라면 노력하지 말자. 어차피 저 사람들에게 자신은 실패작일 텐데 상관없잖아. 막살자. 혼신의 힘을 다 했으니까 후회도 없다.
그때부터 여지운은 꾹꾹 누르고 있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고 싶은 말, 생각, 행동……. 거칠 게 없었다. 성실하고 착한 모범생의 변모에 사람들은 놀라고 타이르다가 결국 멀어졌다. 약 1년 사이에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불량아가 됐다. 미성년자 신분으로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다녀 교무실에 매일 같이 불려 갔다. 그럼에도 부모는 단 한 번도 학교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부족한 우리 아들 잘 보살펴 달라.’는 틀에 박힌 말만 할 뿐.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잘하는 건 고작 공부가 다인 형 새끼보다 더 잘났는데. 열여덟 여름, 방에서 동성 친구와 뒹구는 것을 들키고 집에서 쫓겨났다. 너 같은 호모 새끼는 내 아들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에, ‘네. 아주 고오맙습니다아.’ 소리치고 나왔다.
애초에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는 관심이라도 좋았다. 부모가 제 자식에게 주는, 부모가 형에게 주는 것과 같은 무조건 적인 애정과 신뢰를 바랐다.
* * *
“지운씨, 왜 울어요.”
따뜻한 것이 눈가를 쓸며 지나갔다. “으으.” 여지운의 입이 벌어지며 앓는 소리가 났다.
“어디 아파요? 어제 너무 몰아붙였나?”
“어흐, 아, 목 아파.”
“깼어요?”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햇살을 등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눈을 압박하는 강렬한 빛에 얼굴을 구기자 선연홍이 손 그늘을 만들어 눈앞을 가려 주었다.
“왜 울어요.”
“내가?”
울었다고? 중얼거리는 말 속에는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어젯밤, 선연홍과의 섹스는 늘 그렇듯 숨 막히고, 짙고, 깊고 좋았으며 기쁘고, 안달 났다. 그는 여지운에게 붙어 있는 것, 눈물 타액, 정액까지 모조리 핥아 먹어도 성에 차지 않은 듯 굴었다. 피멍이 들 정도로 물고 빨았다. ‘하지 마.’ 고개를 흔드는 여지운을 보며 말갛게 웃은 선연홍이 그의 허리를 잡고 끌어 올렸다. 얼굴이 시트 위에 처박히며 엉덩이만 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벌리고 그대로 성기를 처넣었다. ‘어흑!’ 등허리가 떨리며 맺혀있던 땀이 떨어졌다.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자극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온몸이 뻐근하긴 하지만 울 정도는 아닌데.
“눈 부었어요. 무서운 꿈 꿨습니까?”
무서운 꿈……. 글쎄, 가족들이 나오는 걸 무서운 꿈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불편하고 불쾌한 건 맞다. 여지운이 손등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눈꼬리 끝에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옆을 타고 주룩 흘렀다.
“그냥 하품한 거라고.”
“그래요, 아직 좀 더 자도 돼요.”
여지운을 토닥이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야, 진짜 운 거 아니라고.”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의식이 흐려진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난 늦은 오전 잠에서 깬 여지운이 기지개를 켰다. 밤새 과도하게 눌리고 뒤틀렸던 근육이 욱신댔다. 팔뚝에서부터 손가락 마디 얇은 살까지 정사 흔적이 빽빽했다. 가끔은 떡을 치는 게 아니고 먹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선연홍은 흔적에 집착했다. 침실에 들어왔던 선연홍은 여지운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잘 잤습니까?”
“음……, 피곤해.”
“미안해요, 오랜만이라 자제가 안 됐습니다.”
“오랜만? 너는 이틀 만에 한 게 오랜만이냐? 섹스 기계도 너 정도로 하면 고장 날 걸? 그리고 자제한 적이 언제 있다고 쳐 씨부려?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신랄하게 이어지는 여지운의 말에 혀를 쏙 내민 선연홍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다가와 젖은 입술로 여지운에게 입맞춤했다.
“핥았는데 됐습니까?”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여지운이 문득 제 몸을 내려다봤다. 분명 도중에 깼을 때는 홀딱 벗은 채였는데 어느새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근데 나 왜 셔츠 입고 있지? 선연홍씨가 입혔습니까?”
“예, 어디서 보니까 애인 셔츠라고……. 자신의 옷을 상대방에게 입히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음, 확실히 꼴리긴 하네요.”
애인 셔츠라니 웃기지도 않지만, 보통은 체격 차가 있는 커플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작은 쪽이 큰 쪽의 옷을 입으면 셔츠가 허벅지나 무릎 위까지 와 원피스로 보였다. 하지만 이건…….
“너랑 나랑 체격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애인셔츠는 얼어 죽을. 아니면 최소 속옷은 입혀 놔야지. 변태도 아니고 위에만 입고 아랫도리는 덜렁덜렁하는 게 정상이냐?”
여지운보다 선연홍의 키와 체격이 더 좋긴 했지만, 셔츠가 허벅지에 올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선연홍의 티는 여지운의 장골을 겨우 덮고 있을 뿐이다. 본인 셔츠를 입힌 것……. 그래, 이 유치한 행위도 이해하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 속옷, 팬티를 입히지 않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장골 근처의 셔츠는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허리께까지 올라갔다. 그러니까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성기도 노골적으로 덜렁덜렁 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극적이라는 겁니다. 지운씨가 제 셔츠를 입고, 성기를 드러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악!”
“이 답 없는 새끼야. 너나 입어!”
더는 개소리를 참지 못한 여지운이 선연홍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무릎으로 복부를 찼다. 다리가 올라가며 멍든 허벅지와 부은 구멍이 보였다. 여지운이 잠든 사이 안에 있는 정액을 긁어냈는데 그냥 놔뒀어도 좋았을 것 같다. 다리를 벌릴 때마다 정액이 질질 흐르면 참 보기 좋을 텐데.
여지운의 화가 풀릴 때까지 얌전히 굴던 선연홍이 갖고 온 봉투를 흔들었다.
“핫케이크 사왔는데, 지금 먹을래요?”
“네 면상 보니 입맛 딱 떨어졌다.”
“칭찬 고맙습니다. 우유랑 간단하게 챙겨 올 테니까 쉬고 있어요.”
* * *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왔다. 옹그리고 있던 꽃잎이 활짝 핀 거리에는 초여름 향기로 가득 찼다. 파란 하늘은 사람의 기분까지 들뜨게 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선연홍은 콧노래를 흥얼댔고, 여지운은 창틀에 팔을 괜 채 창 너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좋네요, 그렇죠?”
“그러네.”
“아니, 지운씨랑 같이 있어서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예, 좋으시겠습니다.”
“네, 아주 좋습니다.”
냉랭한 말에도 굴하지 않고 다정한 대답을 한 선연홍이 여지운의 목덜미 어느 지점을 툭 건드렸다. 셔츠 깃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지만,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움직이면 피멍처럼 짙은 울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도 꽃이 폈습니다.”
“아, 소름 돋아. 왜 그딴 식으로밖에 말 못합니까? 드라마나 영화도 그딴 대사는 안 쓸 걸.”
여지운은 팔뚝을 쓸며 진저리를 쳤고 선연홍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생글생글 웃었다.
“평일에 지운씨와 꽃놀이를 나오니 정말 기쁩니다.”
“그쪽이 하도 조르니까 귀찮아서 들어 준 겁니다.”
“네, 고마워요.”
여지운은 최근 몇 달간 선연홍 작업실을 리모델링하느라 바쁘게 지냈다. 의뢰주, 설계자가 모두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왔다. 아, 적잖은 돈을 받아먹은 사장도 기뻐했지.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미뤘던 연차를 냈다. 보통 때라면 더럽게 눈치 줬을 김부장도 사장도 흔쾌히 수락했다. 선연홍의 은근한 압력이 없었더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역시 고객이 왕이고 돈이 좋긴 하네.
여지운은 늦은 오전 느즈막이 일어나 대충 끼니를 때우고 온종일 만화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휴일을 예상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연차를 낸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선연홍이 괜찮은 전시회가 있다고 꼬셨다. 유럽작가 연합으로 구성된 설치미술 전시회로 평일에 가면 한정 기념품까지 준다고 속삭이는데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더라. 고민하는 기색이 짙은 여지운에게 “마쉘 로 샤브르 작품도 있다.”고 말했고,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전시회 둘러보고 점심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특별전이라 아마 붐비진 않을 거예요.”
“VIP? 저번에도 그렇더니, 전시회 쪽에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니면 돈 지랄?”
“둘 다. 회원 유지를 하려면 일정 금액 이상을 내야 하는 것도 맞고, 조부께서 전반적으로 이쪽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제가 한국화를 시작한 계기도 그분 때문이었으니까요. 요즘엔 몸이 좀 편찮으신데 예전에는 전시회 같은 거 곧잘 함께 봤습니다.”
그렇구나. 여지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문을 조금 더 내렸다.
선연홍이 준비하는 전시회는 항상 수준 높고 세련됐다. 여지운도 안목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역시 전공자에다가 현직 화가라 그런지 보는 눈이 달랐다. 아는 정보 또한 많아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변태 같은 취향만 아니면 진짜 완벽한데.
“괜찮았습니까?”
“네, 좋았습니다. 역시 전시회 수준도 돈지랄을 할수록 높아지네요. 일반인 상대로 하는 거랑 차원이 다르네.”
“하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식사하러 갑시다.”
머릿속이 녹을 정도로 실컷 뒹굴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취향의 전시회를 본 뒤 밥을 먹으러 간다. 나쁘지 않은 일과 였……아니, 사실 굉장히 흡족하고 마음에 드는 휴일이었다. 아직 완연한 여름이 되지 않아 햇볕은 적당히 따뜻했고 평일인 탓에 거리도 붐비지 않았다.
여지운은 드물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선연홍이 손에 깍지를 껴도 내버려뒀다. 그것을 기민하게 파악한 선연홍은 밥을 먹는 내내 여지운의 손을 잡았다가 손등과 손끝에 입맞춤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뺨을 쓸었다가 입술을 훑었다가 난리가 났다. 다 큰 성인 남성 둘이 지나친 스킨쉽이며 묘한 분위기를 내는 것에 주변에서 힐끔거렸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됩니까?”
“그럼요, 지운씨가 하는 말은 욕이라도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작년에 그 이상한 내기 할 때, 내가 끝까지 당신 필요 없었으면 그대로 떨어 질 생각이었습니까?”
여지운이 결국 선연홍을 필요로 하고 그에게 손을 내민 건 맞지만 만약 끝까지 버텼다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합니까? 내가 어떻게 했을지.”
“아니.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네. 다 먹었으면 돌아 가지?”
선연홍의 표정을 본 여지운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만 듣지 않는 게 정신 건강 상 좋을 것 같았다. 미묘하게 웃은 선연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운씨,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계산은 미리 해놨으니 차에 먼저 가 있어도 됩니다.”
“기다렸다 같이 가지 뭐.”
툭 던진 말에 선연홍이 감격한 얼굴로 여지운을 꽉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같이 갈래요? 화장실에서 섹스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변기 물에 대가리 박기 싫으면 조용히 갔다 오지?”
“네. 그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입구에 서서 담배라도 피울 생각으로 품을 뒤적이던 여지운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했다.
“아버지, 어머니.”
인생은 아무리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이런 우연은 정말 원치 않았다. 여지운은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여씨 집안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는구나.”
“…….”
오랜만에 뵌 부모님은 여전했다. 한때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모든 걸 참고, 견디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여지운이 자신을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시절이다. 하지만 그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있는 것이겠지. 부모가, 형제가 인정하지 않아도 애정을 퍼붓지 않아도 스스로 사랑하면 돼. 그 말은 여지운을 무조건 사랑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는 말이니까.
“며느리 보기 창피해서 원.”
아버지에게 신랄한 비난을 받던 여지운이 그들 뒤에 선 여자를 힐끔 봤다. 형의 아내……. 그러니까 여지운에게는 형수인데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부모님은 형의 결혼식에 오지 않길 바랐고 그 역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여지운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는 애가, 올해 서른셋이나 돼서……. 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니? 언제까지 남자랑 그럴 거야. 큰 애는 속 한 번 안 썩히고 잘 자랐는데 넌 도대체 왜 그러니? 우리 집안에 그런 사람 없는데 누굴 닮은 건지. 원.”
겨우 아버지의 잔소리가 끝났나 했더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세월이 비켜간, 아니 돈으로 세월을 억지로 멈춘 고운 얼굴엔 옅은 혐오가 배어 있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남자랑 붙어먹는다는 게 못내 창피한 모양이었다. 담배가 손바닥 안에서 구겨졌다. 지금 여지운의 몸을 휘감는 것은 구토감과 짜증이었다. 그래도 차마 부모에게 욕을 할 수는 없는지라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병원 재건축 확정됐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혹시라도 축하회에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오라고 해도 안 갈 건데요. 그런 거지 같은 축하회 하든가 말든가 관심 없다고요. 혀끝까지 밀고 나온 말을 겨우 다시 밀어 넣었다.
“우리 집안에 남자랑 붙어먹는 자식이 나온 것도 천지가 개벽할 일인데 훤한 대낮에 둘이 손잡고 제 정신이냐?”
심하게 비난한다 싶었더니 선연홍과 함께 있는 걸 보신 모양이다.
“자다가 벼락 맞아도 시원찮을 놈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게 얼마나 천벌 받을 일인지 모르는 것이냐? 동성애는 병이야, 병균을 퍼트리는 세균 덩어리란 말이다. 제정신이 아닌 것들.”
나는 생불이다, 나는 예수이며, 모든 존재를 다 굽어 살피고 사랑……하, 돌겠네.
“제정신 아닌 거 보여주면 만족하겠습니까? 그게 보고 싶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요, 아버지.”
“뭐야? 너 이 자식이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분노로 얼굴이 벌게진 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여지운이 그에게 위축됐던 것은 어렸을 때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버지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라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두 대 맞는 거야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손이 여지운의 얼굴을 내리치기 전에 선연홍이 “지운씨.”하고 그를 불렀다. 부모님과 형수, 그리고 여지운의 시선까지 한 사람에게 향했다. 빠르게 다가온 선연홍이 여지운의 옆에 섰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지운의 손을 붙잡았다. 그것도 깍지까지 꼈다. 손을 털어 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는 부모님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지운씨 부모님. 지운씨와 교제하고 있는 선연홍이라고 합니다. 우선 지운씨를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
“자네가 그러는 거, 자네 부모가 알고 있나? 남자와 그런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걸 아냐는 말일세.”
“아, 제 부모님께선…….”
“멀쩡하게 태어나서 말이야, 이런 비생산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정신과 치료라도 받게. 지운이 너도 마찬가지다. 참한 아가씨 봐 놨으니 잔 말 말고 결혼이나 해라. 그렇게라도 네 형에게 도움 돼야지.”
“지금 저 보고 형에게 도움되는 집 아가씨랑 정략결혼하라는 말입니까?”
여지운의 말에 아버지가 혀를 쯧쯧 찼다.
“네가 하는 게 대체 뭐가 있냐? 인테리언가 뭔가 한답시고 깔짝이질 않나. 옆에 그 남자도 어차피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을 거 아니냐?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면 훤한 대낮에 남자랑 손잡고 다니진 않겠지.”
여지운의 뺨이 붉어졌다. 무차별한 비난은 선연홍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정신 차리게, 부모에게 자랑은 되지 못할망정 망신은 시키지 말아야지.”
자신에게 하는 건 익숙하니까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남자와 붙어먹는 창피한 아들. 그래, 이해한다. 하지만 선연홍이 여지운의 부모에게 잘못한 건 없다. 저런 편협한 말로 상처받아야 할 이유 역시 없었다.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왜 상처 줘? 쟤는, 저 남자는……. 내가 당신들에게 그리도 구걸하던 걸 준다고. 아무 조건도 제약도 없이 그저 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퍼붓는다고. 그게 그렇게 잘 못 된 일이냐? 비난받아야 하냐고.
“그만 하시라고요. 아니면 선호 대학병원 병원장 게이 아들 여지운이 병원에 가서 난동이라도 부릴 테니까. 그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그만 하세요.”
“너, 너 이 못 돼 처먹은 것.”
“지운이 너는 아버지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니?”
어머니까지 거들자 상황은 더욱 난장판이 됐다.
“제가 못된 자식인 거 이제 아셨습니까? 내가 누구랑 뭔 지랄병을 하든 관심이나 있습니까? 지금 와서 부모랍시고 오지랖 피우지 마세요. 참기 힘드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에 번진 혐오와 분노를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해졌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폭언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선연홍에게 막말을 하는 게 창피하고 짜증 났다. 동시에 큰일 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생각보다 더 선연홍이 중요한 것 같다. 소중하다는 말 대신 중요하다는 말을 택한 건 여지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선호 대학병원? 선호 대학교 부속병원 말씀하십니까?”
높은 언성이 오가는 와중 선연홍의 목소리는 유난히 침착했다. 내내 사태를 관망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건 우리 일이니 자네는 끼어들지 말게.”
“제 조부께서 선호대학병원에서 치료 중이신데, 아실지 모르겠네요. 선희상이라고.”
두꺼운 안경 너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성격을 가진 아버지는 누가 자신의 말을 자르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실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면, 그걸 무시할 정도로 놀랐거나.
“선희상? 선 회장님을 어찌 아는가?”
“제 이름 말하지 않았습니까, 선연홍이라고.”
‘선희상, 선연홍.’ 예전 임선열이 선연홍을 알아차린 것도 이름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선’이라는 성은 드물었다.
아버지도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구나. 여지운은 30년이 훌쩍 넘어서야 깨달았다. 선희상이라는 이름을 들은 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하셨네. 선연홍의 조부가, 선희상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권력깨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자네가 선회장님 손주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웃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선 그리도 당당했던 아버지도 더 큰 권력 앞에선 하찮았다. 그 사실이 못내 웃기고 불쾌해서.
비식거리며 웃는 여지운을 흘깃 본 선연홍이 다시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더니 맞군요. 조부께서 선호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대신 재건축에 조금 도움을 드린다고 언뜻 들었습니다.”
“조금이라니, 선회장님이 아니셨다면 재건축은 꿈도 못 꿀 일이지. 항상 감사하고 있네. 자네가 손자인 줄 모르고.”
“아닙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지운씨 부모님이신데.”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여지운이 두 쌍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뭘 어쩌라고. 아버지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청년이 제 아들과 붙어먹는 호모는 분명한데 병원 재건축에 큰 도움을 주는 회장의 손주라고 생각하니 막말을 내뱉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지운씨를 낳아 준 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는데, 음…….”
선연홍이 턱을 조금 들었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반쯤 덮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자 특유의 깔보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부드럽지만은 않은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께서 ‘거긴 다 좋은데 여지인이라는 의사가 참 멍청하더라.’하고 말씀하시던데, 어느 의사분인지 아버님은 혹시 아세요?”
여지인. 여지운보다 6살 많은 형이자 부모님에겐 자랑스러운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믿음직한 자식. 그런 남자를 선연홍이 적나라하게 비웃었다.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선연홍이 쐐기 골을 박았다.
“이번에 인대 핀 제거 수술 때, 그 선생님 과실로 비골 신경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 사고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린가?”
“병원장님께서 모르셨습니까? 이런, 병원 시스템이 어떻게 되기에 의료 과실도 모르십니까?”
아버지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와 형수의 얼굴에 불안이 번졌다. 특히 어머니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두 손을 자꾸 잡았다 놓는 걸 보니 형의 의료 사고를 아버지께 숨긴 듯했다.
“여지인 의사선생님 덕에 조부께서도 병원을 옮길까 고민하시더라고요. 그런 위험하고 멍청한 의사가 있는 병원을 어찌 믿겠냐며. 제게도 의견을 구하시던데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 하군요.”
여지운의 말이라면 욕조차 달게 듣는 선연홍과 지금 선연홍은 다른 사람 같았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여지운에게 눈짓을 했다. 어서 데리고 가라는 뜻이 분명했지만 모른 척했다. 그 사이에도 선연홍은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주 생글생글 웃으면서 공격하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재밌는 구경하네. 이쯤 하면 됐겠다 싶을 때 선연홍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직 말 다 못했는데요.”
“가자고.”
“알겠습니다. 아무튼, 지운씨 아버님 어머님, 만나 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아까 말씀하시는 거 조금 들어보니 아버님 어머님껜 지운씨가 필요 없나 봐요. 잘 됐네요.”
정수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인사를 한 선연홍이 부모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저 남자가 저런 식으로 웃을 땐 항상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제발 너무 심한 개소리는 하지 마라.
“야.”
“제가 잘 모셔 가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신부 데려오면 지참금으로 돈을 준다던데 조부께 잘 말씀 드려 병원 재건축에 도움 드리는 걸로 대신하죠.”
“…….”
“그럼 이제 지운씨는 내 거니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인테리어나 깔짝인다고 말하는 걸 보니 지운씨를 하나도 모르시네요. 뭐, 좋습니다. 앞으로도 관심 두지 마세요. 가족이라고 해도 이 사람을 나눌 생각은 없으니까. 가요, 지운씨.”
여지운의 팔을 잡아챈 선연홍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멍이 들 정도로 여지운을 꽉 움켜진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타요.”
“야, 선연홍.”
“안전띠, 잘 맸습니까? 자주 가는 가게에서 새로운 와인이 들어 왔다고 연락 왔던데 거기 들렸다 집에 갑시다. 지운씨 거기 거 좋아하잖습니까?”
“선연홍.”
두 번의 부름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운전대를 세게 내리친 선연홍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왜 가만히 있습니까?”
“뭐?”
“지운씨 잘하잖습니까? 평소처럼 ‘네가 뭐라고 지껄여도 나에게는 아무 타격도 주지 않는다.’ 이런 얼굴을 했었어야죠. 왜 흔들렸어요?”
“무슨 말이야? 내가 부모님에게 지랄 안 했다고 지금 네가 나한테 지랄 하냐?”
“지운씨가 그런 표정 짓는 거, 가족이라도 싫습니다. 예? 미쳤냐고요? 네, 네. 미쳤습니다. 저 미쳤고 또라이 변태 맞습니다. 그러니까.”
멋대로 폭주하며 날뛰던 선연홍이 여지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뭔가를 말할 듯 크게 벌어졌던 입은 결국 깊은숨을 내 쉬었다. 그는 여지운의 가슴팍에 제 이마를 기댔다.
“그러니까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상처받지 마요.”
차 안은 에어컨을 틀지 않아 조금 더웠고, 살갗에는 땀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초여름이라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허공 어딘가를 보던 여지운의 시선이 제게 매달린 남자에게 향했다.
“선연홍…….”
전에 없이 우울하고 울적한 얼굴의 선연홍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안에 비치는 맹목적인 애정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예?”
“어휴, 어디서 영화 찍어요? 뭘 상처받지 마. 내가 언제 상처받았다고. 나 완전 멀쩡하거든? 그리고 네가 미친 짓 하는 게 제일 무섭다.”
“그렇지만, 지운씨 그때 상처받은 얼굴…….”
“닥쳐!”
갑작스러운 고함에 선연홍이 눈을 깜빡였다. 부모님의 폭언에 여지운이 그런 표정을 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선연홍의 생각과 다르다. 그들에 대한 기대는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의미도, 타격도 없었다. 여지운이 화났던 것은 선연홍에게 막말했기 때문이었다. 공적인 영역, 이를테면 올 초에 있었던 일 중 정아영에게 모욕을 주던 남자에게 화났던 일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인간 여지운이 아닌 팀장 여지운이었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 전은 그냥 분노였다. 아버지가 선연홍을 비난하는 게 왜 화가 났을까? 저 남자가 제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화낼 일도 없을 텐데.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걸 너무 확실히 깨달아서 당황한 것뿐이다. 상처받은 것 따위가 아니라.
“지운씨, 지운씨?”
“제발 부탁이니까, 그냥 닥치고 출발해요.”
여지운을 빤히 보던 선연홍은 이내 봐준다는 듯 시동을 걸었다. 쪽팔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한참을 있던 여지운은 출발한 지 20여 분쯤이 지났을 때 입을 열었다.
“근데 선연홍씨, 네 조부…….”
“예, 맞아요. 선호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으시는 것도 맞습니다.”
“그래? 그런 우연도 다 있네.”
“글쎄, 우연일까요? “
“우연이 아니면?”
선연홍은 대답 대신 창문을 완전히 열었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쏟아진 여름의 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여름이네요.”
“그러네.”
선연홍과 만났던 게 가을이었는데 벌써 여름이라니, 시간의 흐름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 사이 별 지랄을 다 해봤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다.
“두 달 좀 더 지나면 지운씨와 만난 지 만 9년째 되는 날이에요.”
“9년?”
“네, 9월 2일 16시 30분. A대학 미대 뒤편 공터요. 그때 지운씨가 ‘아, 존나 길 막고 있네. 뭐 하냐, 늬들?’이라고 말했죠.”
“……그땐 참 나도 어렸네.”
저런 오글대는 대사를 내가 했다니. 청춘이란 정말 무섭구나. 소름 돋는 과거에 여지운이 제 팔뚝을 쓸었다.
진저리치는 그와 달리 선연홍은 기분 좋아 보였다. 톡, 토톡. 운전대를 두드리는 손가락 역시 리듬이 실려 있었다.
“그때 지운씨 정말 멋있었습니다.”
“딱히 선연홍씨를 구해 줄 생각은 없었는데.”
거기 있는 게 선연홍이 아니었더라도, 하다못해 그곳에서 없었더라면 여지운이 선연홍을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 구해줬다, 영웅.’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됐다.
“네, 알고 있어요. 그 뒤로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수록 나를 구해 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구해 주고 말고는 아무 상관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마주했다는 게 중요하죠. 관계의 시작은 인지에서부터잖아요.”
“뭐라고?”
“하하, 지운씨를 만난 건 서사고, 지운씨를 보며 느낀 건 서정이겠죠. 이 두 개가 합쳐지니, 비로소 애착이 되지 않았겠어요?”
“서정, 서사…….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합니까?”
“맞습니다.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는 없죠. 그냥 이렇게 손잡을 수 있는 사이잖습니까, 우리.”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 중 하나가 뻗어 나와 여지운의 손 등을 덮었다. 핏줄이 불거진 하얀 손등을 한참 내려 보던 여지운이 나머지 손을 그 위에 또 겹쳤다. 여지운의 양 손바닥 사이에 갇힌 선연홍의 손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놀란 얼굴로 돌아보는 것을 외면하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봤다. 드러난 목덜미와 귀 전체가 새빨개져 있다. 집으로 향하던 차가 급정거하며 갓길로 붙었다.
“헉.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몇 번 말해. 운전을 왜 이딴 식으로 합니까? 아니면, 내가 할 테니까 비키든가.”
“지운씨가 먼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고, 내가 먼저 죽으면 지운씨를 따라다닐 겁니다. 평생.”
“지금, 귀신 돼서도 나 따라 다닐 거라고 자주 거는 거냐?”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은 내 거예요. 아무도, 누구한테도 못 넘겨줍니다. 그러니까…….”
활짝 열렸던 차 창문 역시 틈 없이 잠겼다. 그 안에서 두 남자가 뭘 하는지는 아마, 본인들만 알지 않을까.
“야! 이 미친……. 아, 아흐.”
“입 닥치지 않으면 소리 다 들릴 텐데요. 아, 이참에 창문 열까요?”
이 씨발 새끼……. 그는 정말로 창문을 다시 열려는 듯 손을 뻗었다. 기겁한 여지운이 눈물을 삼키며 선연홍의 목덜미를 끌어안았고 빙그레 웃은 선연홍이 그를 마주 안았다. 마주 닿은 살갗에서부터 끈적한 애정이 넘쳐흐르는 걸 보면 확실히 연애 중이긴 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