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 골든의 결벽 (7/31)

   1. 골든의 결벽

평일 저녁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임에도, 좁은 도로라 그런지 연희동에서 동교동 삼거리로 이어지는 차선에는 테일램프의 붉은 등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기까지 족히 두세 번은 더 신호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다 와서 밀리네.”

주한이 형은 지루한 듯 창문에 팔꿈치를 괴며 중얼거렸다. 형과 나는 연희동 고객의 자택으로 작품을 배달한 뒤 바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여기서 내려 주셔도 되는데….”

“다 왔는데 뭐. 너 시간 급해?”

“아니요. 어차피 형이랑 누나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여기서 천천히 걸어가도 돼요.”

“어차피 내려가는 길이야. 너 아팠다고 형이랑 누나가 밥 사 주는 거?”

형의 질문에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띄게 해가 길어져, 상점들은 이제야 간판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 고깃집에서 상점 앞, 보도블록 위에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있었다.

팬텀에서는 다들 내가 아팠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정신적 충격으로 육체가 잠시 오작동을 일으키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몸에 병이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표님은 단호했다.

다음 날 늦은 오후쯤 자신의 차로 실장님 댁까지 데려다주면서, 그는 이틀을 더 쉴 것을 권했다. 권유의 형식을 띠고 있긴 했지만, 거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출근해 봤자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기만 할 거라며 완전히 회복되도록 푹 쉬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갤러리 업무에다 그날 ‘올드 퓨처’의 촬영까지 도운 탓에 무리해서 병이 났다고.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넘어가지 않는 햄버거를 억지로 먹었는데 그게 체한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변명했지만, 두 사람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런 이유 때문이든 저런 이유 때문이든, 왠지 허약한 이미지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민망했다. 실제로 내 몸은 망가진 곳 없이 멀쩡했으니까.

아니, 멀쩡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타인과의 최초의 성 경험을 가진 후, 내 몸은 이전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그의 침대 위, 그토록 낯설었던 자신을 되풀이해 돌아볼 때마다, 인간이라는 것 자체를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타인과의 성행위가 처음이었으니, 거기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보는 것도 물론 처음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상의 범주를 너무 크게 벗어난 과감함이었다. 자위를 할 때조차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을 처리하듯 효과적으로 사정에 빨리 도달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내가… 그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면서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자, 이쪽을 힐끔거리는 형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질문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그에게 조금은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 혹은 호기심을 품고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사정이었고, 우리 둘 사이에서 그 일은 응급처치 비슷한 사건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큰 충격으로 정상이 아닌 상태였고, 그는 체한 사람의 손을 따 주듯, 아니, 그것보다는 감정적으로 좀 더 복잡한 일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특별한 조치를 취해 내가 모두 잊고 휴식할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인 것이다. 그는 당황스러울 만큼 평소와 같았지만, 그런 태도 덕분에 내가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가끔씩 혼자 누워 그날 일을 더듬어 볼 때, 그의 숨결의 열기가 귓가를 데우는 것 같은 착각으로 귀를 문지를 때가 있었다. 남은 것은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 밤, 처음부터 끝까지 전신을 휘감고 있었던 강력한 향기의 잔향과.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지금은 침대에 혼자 누워 있는 것도 아닌데, 외설적인 단어를 말해 보라며 그가 귓가에 속삭였을 때처럼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남과 있는 좁은 공간에서 일어난 반응에 당황해 열이 오른 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내려다보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진동이 울리지 않도록 소거한 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가 탄 차는 여전히 고깃집 앞이었다.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안 받아?”

형이 턱짓으로 핸드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모르는 번호는 거의 안 받아서요.”

“아… 사랑의 도피 때문에?”

핸들의 아래쪽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리면서 형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확히는 사랑의 도피 플러스 서이현인가?”

“…….”

“찔리라고 한 소린 아닌데. 풀 죽지 마라, 인마.”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기에 딱히 풀이 죽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세 사람의 서울행이 모래와 형의 사랑의 도피로 완성되기 위해 내가 퇴장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거, 아직도 해결 안 된 거야?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입술의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며 미간에 힘을 모았다.

“웬만한 부모님은 이렇게까지 하면 용서해 주실 텐데. 하긴, 나도 아직 부모님하고 냉전 상태이긴 하지.”

형은 자신의 아픔을 가볍게 언급하며 피식 웃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것도 다 그 나름이더라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앞차를 따라 브레이크를 풀면서 형은 무심히 덧붙였다.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모든 부모에게 반드시 자식이 최우선인 것은 아니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식의 존재로 힘을 내는 부모도 있겠지만,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겠지만, 세상에는 그럴 수 없는 부모도 존재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아버지를 납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거실에서 내가 보인 반응은 그것이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이 아닌 줄은 알지만, 몸은 정직했다. 그 그림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환영 앞에서 몸이 보인 반응. 과거가 과거로서 봉인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두 대 정도만 더 빠졌으면 우회전할 수 있는 틈이 났을 텐데, 우리는 한 번 더 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는 아기자기한 베이커리 앞에 멈춰 섰다.

이 동네도 이제 예전 같은 한산함은 다 없어졌다며 창밖의 상점들을 둘러보는 주한이 형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매 순간 자신의 상처를 호소하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꼭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부모에게서 부정당한 상처가, 집을 나와 그들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해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한 번 더 신호가 바뀌고 우회전을 하고 나자, ‘발리에서 생긴 일’까지는 금방이었다. 형이 핸들 위로 상체를 굽혀 카페가 입점해 있는 낡은 단층 건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기였구나. 내비에도 등록 안 돼 있어서 난 어딘가 했네.”

SNS에 업데이트할 사진이나 몇 장 찍으려고 찾아오는 뜨내기손님들로 가게가 채워지는 건 싫다면서, 사장님은 포털 사이트에도 ‘발리에서 생긴 일’을 등록해 두지 않고 있었다.

“형 괜찮으면 잠깐 들어갔다 가실래요? 음료 한 잔 정도는 제가 대접할 수 있는데.”

형은 고민이 되는지 잠시 입술의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면서 카페 쪽을 힐끔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전에 밴드 같이 했던 애들하고 약속 있거든. 다음에 백유니하고 같이 한번 올게.”

“네, 꼭 오세요. 그때 제가 밥도 살게요. 나시고랭이 맛있어요.”

넓지 않은 주택가 골목이라 차를 오래 정차해 둘 수가 없었다. 태워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형은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서이현!”

돌아보니, 앞치마의 주머니에 손을 찌른 모래가 카페 앞까지 나와서 웃고 있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야?”

옆으로 다가온 모래가 주한이 형이 탄 차의 뒤꽁무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형의 차는 아니고, 팬텀의 법인 차량이었다. 영업이나 배달을 할 때 사용하는.

“갤러리에서 같이 일하는 형.”

“여기까지 태워 주신 거야? 들어와서 펀치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지.”

“그러라고 했는데… 약속이 있대.”

“다음에 같이 꼭 와. 너하고 같이 일하는 분인데 잘 보여야지.”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모래가 씩 웃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웠지만, 주한이 형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였다. 나야 팬텀 식구들을 믿고 있지만,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을 ‘발리에서 생긴 일’로 초대하라는 모래의 말을 듣고는 불안이 스쳤다. 그녀가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알았다고 대답하며 그녀를 따라 카페로 들어섰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 왔던 좀 전의 전화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나의 신상을 캐내려 하더라도, 눈치 빠른 팬텀 식구들은 요령 있게 대처해 줄 거고, 모르는 번호로 걸려 왔던 전화는 정수기나 핸드폰, 대출상품을 판매하는 전화이거나 단순히 잘못 걸린 전화일 거라고. 주문을 외듯 그렇게 불안을 덮어 버렸다.

내가 마음을 먹고 권유하면, 모래와 형은 곧 서울을 떠날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이 위태로운 평화가 불안의 무게를 버텨 주기를.

금요일 저녁이라, 카페 안은 거의 만석이었다. 그사이 발리에서 돌아오신 사장님도 주방에서 형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장님이 발리에서 새로 구입해 오셨는지, 카페의 한쪽 벽에는 새로운 보드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나의 결단을 재촉하는 독촉장처럼 느껴져서, 모른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카운터 앞의 늘 앉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우리 오늘 10시에 문 닫을 거니까 놀고 있어. 사장님이 발리에서 재밌는 거 많이 가져오셨으니까 구경시켜 줄게.”

다른 테이블에서 추가 주문을 받아 오던 모래가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는 음료를 제조하기 위해 바 안으로 이동했다.

아팠다고 형이랑 누나가 밥 사주는 거야? ―주한이 형이 놀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날의 일이나 이후에 이틀을 결근했던 것은 모래와 형에게 이야기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오늘은 ‘발리에서 생긴 일’의 회식이자 사장님의 환영회 같은 것이었고, 마침 금요일이니 얼굴도 보고 밥이나 같이 먹자고 모래와 형이 나를 초대했다. 걱정할 게 뻔한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내가 아직 그날의 충격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낼 준비가 안 되어 있기도 했다.

카페에 올 때마다 낙서장처럼 사용했던 연습장이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몇 장 남지 않았던 지난번의 노트를 떠올리자, 거기에 적혀 있던 서핑 스쿨에 대한 메모가 자연히 연상되었다. 가상의 책상 위에 또 하나의 독촉장이 툭 날아든 느낌이었다.

가상의 독촉장을 가상의 책상 서랍에 넣어 버리고, 비워진 페이지를 찾아 새 노트를 넘겼다. 낙서라는 게 다 그렇듯이,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무의식중에 손이 움직였다.

실내에는 늘 그렇듯 우쿨렐레 같은 현악기를 이용한 경쾌하면서도 느긋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손님들의 이야기 소리가 더해져 집중하기에 좋은 적당한 소음이 형성됐다.

밑그림도 없이 곧바로 얼굴선을 먼저 완성한 다음, 조끼는 물론 셔츠와 팬츠까지 갖춰 입은 몸통을 그려 넣었다. 기다란 귀는 토끼의 그것이었지만, 얼굴의 라인과 몸의 비율은 인간이었다.

케이크의 생크림 장식 같은 셔츠의 러플에 공을 들이느라 처음엔 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우연히 시선을 조금 틀었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의 액정에 수신 화면이 떠올라 있었다. 좀 아까 차 안에서 무음으로 바꿔 놓은 뒤 다시 진동 모드로 되돌리는 걸 깜빡 잊었다.

다행히 이번엔 아는 번호였다. 인우 형이었다.

편하게 통화를 하기엔 실내가 좀 시끄러워서 핸드폰을 쥐고 카페 앞 골목으로 나섰다. 입구 옆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기듯 등을 기대고 서서 전화를 연결했다.

[아까 왜 전화 안 받았어요?]

“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인우 형은 질문부터 꺼내 놓았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는데 충전할 곳이 없었거든요. 다른 사람 전화를 빌려서 걸었더니 안 받던데.]

“아….”

그게 인우 형이었구나. 안심이 되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면서 운동화 바닥을 건물의 턱에 문질렀다.

[아팠었다면서요. 괜찮아졌으면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전화했던 건데.]

언제 인우 형에게까지 소문이 났는지. 황송할 정도로 이번 주 내내 나의 결근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많이 듣고 있었다.

“대표님이 쉬라고 하셔서 결근하고 쉬긴 했는데… 그냥 가볍게 체한 거였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냉혈한이 자진해서 이틀이나 쉬라고 했으면 그냥 가벼운 게 아닌데…. 병원도 안 갔죠? 나 의사잖아요. 무료로 진료해 줄 테니까 괜찮으면 좀 봐요. 어디예요? 내가 그쪽으로 데리러 갈게요.]

뻔히 선약이 있는데도 순간 조금 망설여졌다.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아, 며칠을 지니고 있기만 했던 궁금증이 있었다.

실장님께 여쭤 볼까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화제 같았고, 같이 배달하는 동안 주한이 형에게 슬쩍 물어보려 했지만 형은 눈치가 빨라서 망설여졌다. 나와 가장 가까운 알파라면 물론 모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알파 성향에 대해 언급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인우 형이라면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였고,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가 어떤 화제든 좀 더 쉽게 꺼낼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약은 선약이었다. 걱정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선약이 있다고 제안을 거절한 뒤, 아쉬워하는 인우 형과의 통화를 끝냈다.

언뜻 가벼워 보이기만 하는 인우 형도 알면 알수록 오묘한 캐릭터였다.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나중에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경계심을 갖게 될 만큼 거의 모든 언행이 장난스러웠지만, 가끔씩 그 장난기 속에 진심을 숨겨 놓은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어디서부터가 진심이고 어디서부터가 농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딱 본인의 그림 같은 사람이었다.

작품과 본인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이 완전히 일치해서, 우습게도 나는 그것만으로도 인우 형에 대한 경계심을 처음보다 낮춘 상태였다. 바람둥이 같은 말투와 집착 없는 가벼움으로 진심을 숨길지언정, 자신이 진심을 숨기고 있다는 자체를 부정하며 진실한 척하지는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이거 뭐 그리는 거야? 사람? 토끼?”

자리로 돌아와 보니 모래가 선 채로 내 그림을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다 보니 낙서라고 하기엔 꽤 본격적으로 진행돼 버려서, 부끄러운 생각에 슬쩍 노트를 당기며 자리에 앉았다. 예전에도 그림을 남들에게 잘 보여 주는 편은 아니었다. 나에겐 일기 같은 거였으니까.

“토끼 씨야.”

“토끼 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아… 그 토끼 씨. 토끼 씨 선글라스가 멋있네.”

옆자리에 앉은 모래는 길게 다리를 뻗고 흘러나오는 음악의 음을 흥얼거렸다. 그림을 계속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사실, 펜 끝이 둔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나… 밥, 다음에 먹어도 될까?”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아닌데….”

이미 거절한 약속에 대해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체도 놀라웠지만, 인우 형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것도 난감했다. 같이 살지 않게 되면서 모래에게 얘기하지 못한 것들이 꽤 쌓여 있었구나 싶었다.

“갤러리 사람이야?”

“어… 아니야, 그냥 잊어버려.”

“뭐야… 거기 가고 싶어서 말 꺼냈던 거 아니야?”

“가고 싶은 게 아니라….”

모래는 나의 감정에 예민했다.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도 주변 사람의 감정에도 섬세하게 반응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매번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삶을 결정하는 충동적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야, 우리 사이에 뭘 숨겨?”

“아니, 정말 가고 싶어서 말 꺼낸 거 아니야. 안 갈래. 안 가고 싶어.”

“서이현.”

그녀가 일부러 무거운 힘을 주면서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부탁이니까, 제발 다른 사람들 좀 만나라. 어?”

귀찮은 스토커를 떼어 내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과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서울 와서 네가 일도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너무 좋아. 지난번에 섭섭하니 어쩌니 그런 말 했던 것 때문에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없다고. 나의 가장 큰 약점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는 두 사람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냐고.

하지만 아니었다.

대표님의 집에서 내 그림을 봤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그 그림을 보고 공포에 질려 과호흡을 일으켰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얘기는 걱정을 할까 봐 하지 못했다. 대표님과의 잠자리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변화들이 우리가 사실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는 증거인 거라고, 모자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내가 지나치게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겠지. 스물두 살의 세계에는 모래와 형, 두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텅 비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 두 사람이 나를 두고 떠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모진 사람들이 되지 못했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한 내 어깨에 관자놀이를 기대면서, 모래가 노트 위의 토끼 씨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 마음에 든다. 우리 가게에 붙여 놔도 돼?”

■ ■ ■

인우 형은 내가 있는 곳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그런 수고를 끼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내 상태는 멀쩡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홍대 부근에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위치를 얘기하자, 그럼 어디 어디에서 몇 분 뒤에 보자고 형은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쉬었다.

약속 장소는 홍대 부근에 새로 오픈한 호텔이었다. 부티크 호텔인 만큼 딱딱한 격식을 차린 공간은 아니었지만, 트렌디하고 세련됐다는 점에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비의 달걀 모양 의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형은 첫 방문이 아닌지 능숙하게 엘리베이터 홀을 찾아 15층의 바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인기 있는 곳인지, 입구에서 좌석이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언뜻 대여섯 팀, 스무 명 정도는 돼 보였다. 갑작스러운 약속이라 테이블을 예약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유니폼으로 보이는 간결한 검은 슈트를 입은 직원은 우리를 곧장 야외의 루프탑으로 안내했다.

지나가면서 슬쩍 봤던 실내도 만석이었는데, 전망 좋고 시원한 야외 루프탑에도 역시나 사람들이 넘쳐 났다. 20대부터 40, 50대까지 고객의 연령층은 다양했지만, 연령에 관계없이 다들 스타일리시한 차림이라 늘 그렇듯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게 됐다.

드레스 코드가 따로 있나 싶었지만, 인우 형도 내 옷차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나 역시 티셔츠의 낡은 소매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짜 그새 좀 말랐네.”

나의 요청으로 적당히 주문을 마친 뒤 직원을 돌려보낸 인우 형이 테이블 위에 팔을 걸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닌데….”

하다못해 몸살을 앓았던 것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사고 있으려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민망함에 손으로 얼굴을 더듬으면서 얼버무렸다.

“이래 봬도 의사잖아요. 수척해졌어요, 얼굴이. 안색도 별로고. 내가 괜히 불러냈나? 그저께부터는 출근했다고 하고, 내일 토요일이기도 해서 연락했는데.”

“몸은 정말 괜찮아요. 저야말로 안 된다고 했다가 다시 연락드리고…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먼저 보고 싶다고 연락한 건 나잖아요. 못 만난다고 낙담하고 있다가 이현 씨한테 다시 연락 와서 얼마나 신났는데. 근데 그거… 기술 같은 건 아니죠?”

“…….”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표정을 읽어 보려 애를 쓰는데, 인우 형이 어깨를 낮추면서 피식 웃었다.

“못 보는 줄 알고 있다가 보게 돼서 좋았단 얘기예요.”

평소와 같은 농담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는데, 마침 주문한 술과 안주가 서빙되었다.

주문을 받아 갔던 직원 대신 매니저 직함의 금빛 명찰을 단 남자가 와인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인우 형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대화 내용만으로 추측해 보자면, 남자는 인우 형이 원래 단골이었던 유명 바의 인기 바텐더였다가 최근에 이 바의 매니저로 스카우트된 것 같았다.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세계의 일들이라,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나를 소개하는 인우 형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팬텀이라는 말이 나오자, 매니저는 눈에 띄게 호기심이 짙어진 눈으로 나를 빠르게 훑어봤다.

대표님과 실장님,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의 개성 있는 스타일과 성격을 떠올리자, 지금의 내가 남자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예요?”

“네?”

매니저가 와인을 오픈해 첫 잔을 채워 주고 떠나자마자 건배를 제안한 인우 형은, 내가 잔에서 입술을 떼기도 전에 그렇게 물었다.

“선약이 있어서 못 본다고 했다가 다시 보자고 연락한 거. 딴 사람은 몰라도 이현 씨가 그런 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잘못 짚었어요?”

단둘이 만나자는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꿰뚫어 본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얘기를 꺼낼지 없는 말주변을 쥐어짤 필요가 없으니 잘됐다 싶기도 했다.

멍석은 깔렸지만, 용기가 좀 더 필요했다. 하다못해 술기운을 빌린 객기라도. 방금 내려놓은 잔을 들어 와인을 서너 모금 더 마셨다.

“요즘… 좀 궁금한 게 생겼는데…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마땅히 없어서요.”

맞은편의 인우 형은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얼굴로 내가 좀 더 쉽게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있었지만, ‘이건 내 친구 얘기인데…’라며 굳이 자기의 고민을 남의 이야기라고 우기는 상담자가 된 기분이었다.

“제가… 지금까지는 알파나 오메가인 분들하고 별로 대면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팬텀 주요 고객들이 거의 알파나 오메가인 분들이라….”

“흠….”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턱 끝에서 가볍게 두 손을 겹쳐 쥐고 있던 인우 형이 자세를 바꿔 와인잔의 베이스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특징에 대해서 알아 두면 앞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어설픈 핑계였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인우 형이라면 내가 핑계를 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넘어가 주거나, 짓궂게 파고들려고 하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장난기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우스갯거리로 취급할 인물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근거 없는 느낌이 아마 무의식중에 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게 했을 것이다.

“알파나 오메가 때문에 곤란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닌데….”

말로는 부정했지만,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상담의 대상을 인우 형으로 정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상황을 간파당할 것쯤은 예상했었다. 각오를 했는데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요, 물어봐요. 이현 씨가 궁금하다는데 얼마든지 지식인이 돼 줘야죠. 인터넷엔 카더라가 너무 많긴 하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인우 형은 준비가 됐다는 듯 상체를 좀 더 앞으로 기울였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자체가 충동이었던 나는 잠시 숨을 고를 틈이 필요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벌기 위해 화장실로 도망쳤지만, 팝아트적인 그림과 소품들로 강렬하게 꾸며진 화장실에서는 더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곳을 나가 이동할 장소에 대해 큰 목소리로 토론하는 내 또래의 남자들 옆에서 세수를 한 뒤 별 소득 없이 화장실을 나왔다.

그 사이 인우 형은 통화 중이었다. 누구와의 통화인지 몰라도 등받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쭉 뻗은 다리 끝의 발을 까딱이며 통화에 집중하는 표정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지금 왔네. 전화 끊어야겠다.”

나를 발견하고 등을 일으켜 세우며 통화를 끝내려던 형은 문득 짓궂은 웃음을 지으면서 통화 상대가 전화를 끊지 못하도록 불러 세웠다.

“아, 누구인지 안 궁금해? 인사라도 해.”

상대에게 그렇게 말한 인우 형은 막 자리에 앉으려는 나에게 곧장 핸드폰을 넘겼다. 얼떨결에 전화기를 받아 들긴 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화기를 들고 옥신각신하면서 전화기 너머 익명의 대상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여보세요….”

[…….]

저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테이블 너머로 인우 형을 쳐다봤지만, 형은 계속 말을 해 보라는 듯 부추기는 제스처를 해 보일 뿐이었다.

“여보세요.”

[술 마시는 겁니까?]

“아….”

감탄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멍청한 반응이 새어 나와 버렸다. 생각해 보면, 인우 형이 나를 바꿔 줄 만한 통화 상대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네… 와인 조금….”

테이블 위의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꼬리를 끊어 내는 내 모습이 꼭 변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변명을 하는 것처럼 돼 버린 것은, ‘술 마시는 겁니까’라는 그의 질문이 어딘가 책망의 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팠던… 것도 얼마 전인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텀이 길었다. 한참 만에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날 일을 입에 올리기가 망설여지는 것 같은 서걱거림이 전해졌다. 딱히 아팠던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네, 한두 잔만 마시려구요.”

그가 다시는 그날 일을 언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나를 긴장하게 했다.

이번 주 내내 팬텀에서 그는 내 눈을 쳐다보며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태도에서든 어투에서든 이전과 달라진 점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의 일은, <소외>와 과호흡, 잠자리까지… 전부 일상을 벗어난 영역에서 일어난 피치 못할 사고로 정리하면 되는 거라고, 그의 뜻이 그런 거라고,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긴장하면 자꾸 앞에 있는 걸 마시는 버릇이 있던데. 지난번에도 와인 꽤 많이 마시지 않았나?]

스페인식 주점에 갔던 날, 그는 나를 비롯한 우리 테이블의 모임 자체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었다. 하지만 내가 와인을 마신 날은 그날뿐이었다. 그의 지적대로 지금도 나는 긴장된다는 이유로 벌써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양을 마신 뒤였다.

답지 않게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나를 염려하는 듯한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 통화임에도 불구하고 뺨에 숨결이 느껴질 것 같은 호흡이었다. 가늘지만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는 모습이 연상됐다.

말이 없었다. 침묵이 무엇을 유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숨소리만을 듣고 있을 뿐인데, 다시 또 귀가 간질거리면서 어깨가 움츠러들 것 같았다. 조건반사처럼 그의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이번 주 내내 나는 불시에 덮쳐 오는 그 향의 공격을 감내해야 했었다. 그가 팬텀에 없을 때조차도 향이 후각을 스치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향은 나에게, 필연적으로 그날 밤의 성적 결합을 연상시켰다. 곤란한 일이었다.

침묵이 길어져 참지 못하고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전화기 너머에서 움직이는 기척과 함께 찰칵이는 소리, 깊게 호흡했다가 가늘게 뱉어 내는 소리가 이어졌다.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인우 형의 뒤쪽, 우리와는 높은 화단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한 쌍의 커플이 긴 셀카 타임을 갖는 동안 우리의 침묵은 계속됐다. 담배를 몇 모금 더 피운 그는 마음을 굳혔다는 듯, 그래서 오히려 가벼워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인우 좀 바꿔 줄래요?]

긴 망설임 끝에 나에게 꺼낼 이야기가 인우 형을 바꿔 달라는 내용은 아닐 것 같았는데.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거기가 어디죠? ―하다못해 지난번 실장님 댁 식탁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애 상대로는 그다지 좋은 남자가 아니라며 인우 형과의 관계에 주의를 주기라도 할 줄 알았다. 자의식 과잉인지 몰라도 그의 침묵에서는 그런 유의 말을 할 것 같은 긴장 섞인 망설임이 느껴졌던 것이다.

“네, 그럼.”

예상이 빗나간 탓에 대답이 조금 느렸다. 혼자 앞질러 기대를 품은 것 같은 열없음에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인우 형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왜는 무슨 왜야. 아트페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서 전화했다니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형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다시 꿍꿍이가 있는 듯한 미소와 함께 느슨해졌다.

“글쎄다, 난 누구처럼 페로몬에 결벽 있는 게 아니어서.”

와인잔을 빙빙 돌리고 있던 형은 남아 있던 적은 양의 와인을 전부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지나친 생각인지 몰라도, 형이 일부러 그를 도발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웃음기 띤 얼굴로 짓궂게 비꼬는 말투가 그런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정확한 통화의 내용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저기요, 미스터 라우. 뭘 걱정하는 건데? 베타에게는 페로몬이 소용이 없어요. 너 왜 그러냐, 발현 초기야? 페로몬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을 것 같고, 길을 걸어 다니기만 해도 사람들이 막 옷 벗고 덤벼들 것 같아?”

형의 잔이 비자마자 어디선가 직원이 다가와, 테이블 위 철제 바스켓에서 와인병을 꺼내 정중한 태도로 조용히 잔을 채웠다.

무릎 위에서 느슨하게 깍지를 끼고 있던 내 손이 서로 단단하게 맞물렸다. 베타. 페로몬. 내가 묻고 싶었던 주제들이 형의 입에서 먼저 나오고 있었다. 그가 형에게 어떤 말을 했기에 형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홍콩 아트페어나 신경 좀 써 줘. 나도 외국 시장에 그림 좀 팔아 보자. 끊는다.”

저쪽이 뭐라고 답변할 여유도 주지 않고, 달아나듯 통화를 끝낸 형은 핸드폰을 테이블 저쪽으로 밀어 놓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못 말리는 놈이야.”

이미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 너머에서 아직 그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이면서.

“미안해요. 갑자기 바꿔 줘서 놀랐죠?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

“이현 씨랑 단둘이 만나고 있는 거.”

그렇게 말한 형은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자랑이란, 상대가 그 내용을 부러워해야 성립될 수 있었다. 나와의 만남을 자랑하고 싶었다는 것이 혹시 진심이라면, 형은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일부러 전화를 건 형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겠구나. 엷게 웃으며 무의식적으로 앞에 놓인 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가볍게 입술만 댄 채 내려놓았다.

“좀 전에 하신 얘기….”

그리고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운을 띄웠다.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얘기를 꺼내기 좋은 타이밍 같았다.

“베타는…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없는 거죠?”

형이 다리를 겹쳐 꼬면서 팔걸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댔다.

“무슨 뜻이에요?”

“전 베타니까… 고객들이 알파나 오메가더라도 페로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일해도 되는 건가….”

웃음기를 머금은 시선으로 나를 건너보던 인우 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이현 씨, 나 좀 볼래요?”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자연스레 내민 두 손은 나에게 마주 잡기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주춤거리며 형의 손 위에 가볍게 내 손을 얹었다. 형의 손가락이 안으로 좀 더 오므라들면서 내 손을 잡아 왔다.

나를 응시하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환자의 안색에서 질병의 징후를 찾으려 하는 의사처럼, 의뢰인의 눈 속에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암시를 읽어 내려 하는 점쟁이처럼, 형은 내 양쪽 눈을 천천히 깊이 살폈다.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인우 형이 그렇게 진지해 보이는 건 처음이라 웃어 버리거나 시선을 피해 버릴 수가 없었다. 모든 좌석과 좌석 사이에는 높은 화단이 있어 다른 손님들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지만, 우리 곁을 지나가던 직원 한 명이 테이블 위로 마주 잡은 손을 보고는 내 얼굴과 형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 시선이 신경 쓰여 힐끔거렸고, 그와 거의 동시에 형이 피식 웃으며 손을 놓았다.

내 손을 놓고 대신 와인잔을 쥔 인우 형은 테이블에 기댄 채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베타가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다면.”

“…….”

“아마 지금쯤 우린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서 내 차 뒷좌석에서라도 서로 엉켜 있었을걸요.”

내가 맞게 이해한 거라면, 아마 형은 좀 전에 나를 향해 페로몬을 개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성적인 흥분은 물론, 평소와 다른 어떤 특별한 기운도 감지할 수 없었다. 내가 느낀 것은 15층 야외석을 오가는 초여름의 상쾌한 바람과 지나가던 직원의 의아함과 호기심이 섞인 시선뿐이었다.

마음에 걸리던 의문을 시원하게 풀고 싶어 충동적으로 이 자리에 나왔지만, 좀 전의 그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어느 정도 답을 알 것 같았다.

“기본적인 건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다 나오니까 알고 있겠지만… 알파·오메가의 페로몬은 단순한 향기가 아니에요. 페로몬을 전달받은 개체에게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이끌어 내는 ‘릴리서 페로몬’의 일종으로 분류되는데… 뭐, 쉽게 말하면 성 페로몬이죠.”

형은 불필요하게 전문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싶었는지, 잠시 텀을 두고 말을 고르듯 눈동자를 굴리고는, 알파·오메가 페로몬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성 페로몬.

그렇다. 사람에 따라 듣기에 조금 민망할 수는 있어도 알파·오메가의 페로몬이란 따지자면 결국 성 페로몬이었다. 상대를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유도해 관계를 맺기 위한 물질. 호감이나 관심이 아닌, 성적 흥분을 위한.

인우 형은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핸드폰 옆으로 멀찍이 밀어 놓았다. 반대로 나는 검붉은 액체를 삼켜 왜인지 모르게 조여드는 입 안과 목구멍을 축였다.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야콥슨이라는 보조 후각 기관으로 페로몬을 감지하지만, 인간은 그 기관이 완전히 퇴화했어요. 알파·오메가도 마찬가지죠.”

“그럼….”

형은 테이블에 팔을 괴며 자세를 고쳐 앉아, 와인과 함께 내왔던 견과류의 껍질을 부스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알파·오메가가 향기로 상대의 페로몬을 감지하긴 하지만, 결국 그 향이 뇌에서 일으키는 다른 효과의 결과지, 후각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아니에요. 페로몬의 향을 맡게 되면, 야콥슨 기관의 기능을 대신하는 어떤 작용이 뇌에서 일어나는 거죠. 냄새의 전달 경로를 이용하긴 하지만 단순한 후각 기능과는 뇌에서 일으키는 반응이 달라요. 베타에게 두뇌는 냄새를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곳이지, 냄새를 분석하고 그것으로 강력한 2차 작용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거든요.”

은행과 비슷한 크기에 모양도 유사한 견과류의 껍질을 완전히 부서뜨려 알몸으로 만든 인우 형은 다음 한 알을 쥐고 손안에서 잠시 이리저리 굴리며 만지작거렸다.

나의 가슴쯤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은 자기만의 향수나 감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알파인 그에게 있어, 페로몬은 다양한 기억들을 불러오는 매개일지도 모른다. 베타는 평생 겪을 필요가 없는,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페로몬의 영향으로 벌어지는 일들.

“불쾌하다, 향긋하다, 편안하다… 향에 대한 감각은 베타도 갖고 있지만, 그것이 행동을 종용한다고 보긴 어렵죠. 어떤 향을 맡고 주체할 수 없이 포악한 기분이 돼서 물건을 부순다거나, 한없이 평화로운 기분이 돼서 수면제라도 복용한 것처럼 바로 잠이 든다거나… 아니면, 억제할 수 없는 성 충동에 휩싸여서 평소의 자신이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위험한 장소에서 대담한 체위로 상대를 원하게 된다거나…. 향기만으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도출되지는 않잖아요, 베타는.”

두 번째 견과류의 껍질도 으스러뜨린 형은 매끈한 속살을 드러낸 내용물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서로 비벼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가슴에서 얼굴로 올라온 형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억제할 수 없는 성 충동에 휩싸여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극단적 행동을 보이는 자신’ ―바로 그것에 대한 혼란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

하지만 타인과의 성적인 접촉 자체가 그날이 처음이었다. 본래 나에게 내재된 기질이 그렇게 열정적인 것인지(내 기준으로는 충분히 열정적이었다. 적어도 자위 시의 나에 비해서는), 아니면 그때가 특별한 반응을 보였던 것인지,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특수한 상황이기도 했다.

다시 또 목구멍이 마르는 느낌에 와인을 찾았다.

“인간이 어떻게 1,000여 개에 불과한 후각수용체로 그 많은, 다양한 냄새들을 식별할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생리적 기초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알파·오메가의 페로몬 작용 원리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죠. 어떻게 해서 베타는 그 향조차 감지할 수 없는 건지, 거기에 대해서도 각종 실험과 가설만 난무한 상태예요. 지금의 과학이.”

알파·오메가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극단적이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등에서는 아름다운 외모와 우월한 능력을 가진(실제로 그들이 유전학적으로 베타보다 우월한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에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낭만적 존재들로 소비되었고, 뉴스에서는 기득권층 알파·오메가들의 섹스 스캔들과 상대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불안정한 알파·오메가들이 일으키는 성범죄로 인해 제어력이 부족한 골칫거리로 취급되었다.

알파·오메가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 곧 대부분의 성공한 인물이 알파·오메가라는 뜻은 아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인류는 베타였다. 베타가 ‘정상’인 세계에서 알파·오메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정립해 가며 살아가는지, 지금껏 알지 못했었다.

그들의 생리적 특별함에 흥미 본위의 호기심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건전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모래가 알파였지만, 그녀 자신이 알파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 나까지 그녀를 그저 베타처럼 대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알파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간다 해도, 오메가가 아닌 한이 형과 연인이라도, 임모래라는 사람이 알파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 건데.

인터넷에서 정보를 서칭하는 동안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던 호기심 위주의 잘못된 정보와 소설에 가까운 루머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어쩌면 현대에까지도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페로몬의 작용 원리 때문에, 그들의 존재에 로맨틱한 해석을 붙이거나 근거 없는 루머를 생산해 내는 베타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을 멈추고 지그시 응시하는 형의 시선이 나에게 어떤 감상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코팅된 종이로 만들어진 코스터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어렵네요….”

“설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의 설명은 나처럼 알파·오메가에 거의 무지한 사람도 힘들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친절했다.

“형의 설명 자체는 이해하겠는데… 그런 원리에 영향받으며 살아간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기분이라는 말에는 다 담을 수 없는, 베타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의 얘기인 것 같아서요.”

그들이 베타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생각은 아니다. 섣불리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형은 피식 웃으며 내 얘기의 심각함을 좀 더 가볍게 만들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여성이 금성에서 왔고 남성이 화성에서 왔다면, 베타는 명왕성에서 왔고, 알파·오메가는 아예 다른 태양계에서 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서로가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겠죠. 페로몬의 영향 없이 평생을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형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말 그대로였다. 신체상의 구조적인 문제로, 거기에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차이점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페로몬으로 인한 차이가 아니더라도, 국적, 문화, 나이, 소득, 직업, 교육 수준 등에 따라 인간은 수없이 다양한 계층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다른 계층의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어디에나 비일비재했다.

하나의 기준 아래에서 같은 계층의 구성원으로서 같은 이익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다가도, 또 다른 기준에서는 서로 다른 계층이 되어 반대 입장에 속하게 되는 일도 흔할 만큼, 사회는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너무 멀리까지 뻗어 가려는 생각을 되돌리려 와인을 다시 한 모금 입에 댈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진동음이 짧은 것으로 보아 메신저의 알림 같았다.

“괜찮으니까 확인해 봐요.”

급한 연락이 올 일도 없었고, 대화 중이기도 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인우 형이 먼저 핸드폰을 가리키며 확인해 보기를 권했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형은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특유의 장난기가 밴 웃음이 입술 가장자리에서 흘러넘칠 듯했다.

“뭐래요?”

“오늘 늦냐고 하시는데요.”

“흠… 집에 빨리 들어가래요? 술은 조금만 먹고?”

“아뇨, 그런 건 터치 안 하세요.”

그…렇게…늦, 진… 메신저 창에 답장을 입력하면서 형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그때까지 즐거워 보였던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라우 위쿤. 아니에요?”

“어… 실장님이신데요.”

인우 형이 어떤 근거로 발신인이 그일 거라 확신했는지 몰라도, 형은 상당히 실망한 듯 쓴 표정을 지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실장님에게서 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하신다는 말씀에 답을 보낸 뒤, 다시 핸드폰을 얌전히 뒤집어 놓았다.

기다리던 연인의 연락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풀이 죽은 사람처럼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진 형을 보다가, 애써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빨리 화제를 다시 되돌려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베타는 그럼, 절대 페로몬을 감지할 수 없는 거네요.”

형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늘어진 몸을 다시 반듯하게 세워 앉았다.

“알파·오메가의 페로몬에 노출된 베타가 그것을 황홀한 향기로 묘사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긴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판타지적인 얘기인 거고,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베타가 페로몬을 감지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이에요. 불가능.”

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으로 인우 형은 그것에 일말의 가능성도 없음을 강조했다.

후각을 이용해 전달되기는 하지만, 후각 자체로 페로몬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베타의 후각으로는 페로몬의 향기를 감지할 수조차 없다. ―인터넷에서도 대부분의 정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 의견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런 의견들의 댓글란에서는 여지없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검증된 사실을 감상적인 억측으로 왜곡하지 말라는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수컷 생쥐의 야콥슨 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 뒤 관찰했을 때, 암컷과 수컷 모두에게 성적 행위를 보였다는 결과가 있어요. 야콥슨 기관이 암컷의 페로몬에 반응해 암컷에게만 구애하도록 유도한다는 증거죠. 그만큼 성행위에 있어 페로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얘기도 되고.”

다시 바닥을 드러낸 형의 잔을 채워 주기 위해 직원이 다가온 바람에 우리의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투명한 잔을 채우는 풍부한 색감의 검붉은 액체에 무의미한 시선을 던지며, 인터넷에서 봤던 몇 개의 일화를 떠올렸다. 대부분 비슷한 패턴의 경험담들이었다. 혹은 경험담이라 주장하는 이야기들.

직장 내에 알파가 혹은 오메가가 있는데,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릴 정도로 달콤한 향이 후각을 덮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상대에게 매달렸다며, 유혹을 위한 고의적인 페로몬 방출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던 인터넷 속 베타들의 ‘경험담’이 거짓이나 과장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었는지 몰라도, 갑작스럽게 농도를 더하는 그의 향을 느끼며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극단의 쾌락에 휩싸였던 것은 분명한 나의 경험이었다.

아니면, 내 경험 역시 감상적인 해석이 투영된 베타의 허황된 소설일 뿐이었을까.

잔이 다시 채워지고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형은 곧바로 그것을 기울여, 맥주라도 되는 듯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내 쪽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베타가 어떤 알파나 오메가에게서 성적 충동을 느낀다면… 그건 그냥, 그 사람 자체에 끌리는 거겠죠. 페로몬 탓이 아니라.”

인우 형이 나의 감정을 어디까지 눈치채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예감만을 가지고 장난스럽게 떠보는 것인지, 혹은 형은 아무 의도도 없는데 나 혼자 괜히 발이 저린 것인지는 몰라도, 나 역시 내 감정에 대해 정리하고 확신할 수 없었기에, 모르는 척 와인을 흘려 넘겼다.

「긴장하면 자꾸 앞에 있는 걸 마시는 버릇이 있던데.」 ―그의 정확한 관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성별 이전에 인간이잖아요. 같이 지내다 보면 제1의 성별이나 제2의 성별에 관계없이 끌리기도 하고, 베타들끼리도 페로몬의 작용 없이도 외모에 현혹돼서 감정 없이 섹스하기도 하고…. 세상사가 그렇죠, 뭐. 꼭 페로몬을 거치지 않아도, 알파와 베타, 오메가와 베타, 알파와 오메가… 서로 눈 맞으면 연애도 하고, 원나잇도 하고… 그렇잖아요. 성별에 앞서서 다 같은 인간이니까.”

나를 책망하듯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형의 말투에서는 알파나 오메가를 성에만 사로잡힌 짐승처럼 취급하는 일부 시선에 대한 비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좀 아까 껍질을 부스러뜨렸던 견과류의 알맹이를 집어 입 속에 던져 넣으며 형이 말을 이었다.

“페로몬 활동에 의해서만 성적 욕구를 느낀다면… 그건 좀 너무 야만적이지 않아요? 야콥슨 기관이 망가지면 암컷, 수컷 안 가리고 들이대는 쥐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알파·오메가도 페로몬에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끌리기도 해요.”

페로몬을 감지할 수 없는 내가 알파인 상대에게 끌릴 수 있다면, 반대로 그들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아마도… 성적인 매력 면에서 오메가의 페로몬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슈슈 작가가 떠올랐다.

작가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어도, 그는 자체로 매력적인 한 사람이었다. 페로몬의 도움 없이도 이미 충분한 매력을 갖춘 오메가에 비하면, 개인으로서 아무리 강한 매력을 가졌더라도, 알파에게 베타는 밋밋한 흑백 영화 같지 않을까.

얼토당토않게 슈슈 작가와 나를 비교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게임이 되지 않는 상대이기 때문이 아니라(그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무엇을 위한 비교인지… 감정이 발각된 것 같아 뜨끔했기 때문이다.

“아, 대표적인 사람이 이현 씨 주변에 있네. 페로몬 없이도 성생활을 영위하는 알파.”

마시던 와인을 급하게 삼켜 내면서 인우 형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팬텀 대표.”

“…….”

“자기 말로는 잠자리 상대에게 절대 페로몬을 개방 안 한다던데요. 나야 같이 자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뭐, 라우 위쿤 정도의 외모와 영향력, 재력이면 페로몬이 필요 없기도 하겠지. 하여간 걔는 그런 거에 약간 결벽 있거든요.”

스페인풍의 주점에서 처음 와인을 마셨던 날, 그때는 지금보다 알파·오메가에 대한 지식이 더 부족했지만, 페로몬도 순환이 돼야 제 기능을 한다며, 페로몬 방출도 하고 오메가의 페로몬도 좀 쐬라는 말로 그를 놀렸던 인우 형의 얘기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실험용 쥐와는 다르고 싶은 거겠죠.”

그의 결벽 혹은 고집을 비웃는 건지 동경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형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학교 때부터 그런 쪽으론 좀 별났어요. 비공식적으로 알파·오메가 전용이나 다름없는 학교 출신이라 오히려 교내에서는 베타가 더 희귀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거긴 알파라는 특권 의식은 기본이고, 그걸 이용해 쉽게 살아 보려는 놈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근데 그놈은 꼭 알파인 게 콤플렉스인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그래서 고깝게 보는 놈들도 많았어요. 혼자 고상한 척한다고.”

슈슈 작가에 대한 글에서 들은 적 있는 얘기였다. 알파·오메가들을 위한 홍콩의 특수 학교. 그동안의 얘기들로 미루어 봤을 때, 그와 인우 형, 슈슈 작가는 모두 그 학교의 동문인 듯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를 함께 보냈던 시절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잠시 테이블 위의 어딘가를 내려다보던 형은 곧 고개를 들어 씨익 웃었다.

“근데 우습게도 페로몬에 놀아나는 게 싫어서 컨트롤 능력을 아주 열심히 익힌 덕에 최상위 골든 알파가 돼 버렸죠. 그게 아니어도 유전자부터가 알파력이 강해 조건이 좋긴 했지만, 컨트롤 능력은 유전만으로는 완성이 안 되는 거거든요. 아, 여기까진 너무 어려운 얘기인가?”

“아니요. 대강은… 들었어요.”

“혹시 권주한?”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알파·오메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원한다면 권주한의 말은 반 정도 흘려듣는 게 좋다는 충고와 함께.

“어땠어요? 나, 괜찮았어요? 지식인으로.”

약간은 잘난 척하듯 턱을 치켜들면서 그렇게 묻는 형의 질문에 웃음이 났다.

“네, 위키백과보다 훨씬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성실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아닌데, 이현 씨라 특별히 친절한 척한 거예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형의 말에 또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에게만 ‘친절한 척’을 하는 것이든 아니든, 친절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더 궁금한 건 없어요?”

그날 밤의 의혹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을 품을 이유가 없어졌지만, 그 외 아직 남아 있는 궁금증이 있긴 했다. 형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후에는 더 물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전에… 왜 저를 알파라고 생각하셨어요?”

“…….”

형의 시선과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엔 바로 은근한 미소가 나를 향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고개를 끄덕였다.

“매혹적이라고 느꼈거든.”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표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매혹적이다…. 스스로에게 그런 평가를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 정보도 없는 대상에게 그만큼 끌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오메가는 아니겠고. 그럼 당연히 알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죠, 뭐. 굳이 페로몬 방출하고 그러지 않아도 알파·오메가끼리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력 같은 게 있으니까.”

첫 만남에서부터 당황스러울 정도로 흥미와 관심을 드러냈던 형이지만, 너무 직설적이었기에 오히려 장난으로 느껴졌었다. 지금도 매혹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지한 호감인지 매혹을 느꼈다는 표현 자체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형은 바로 그 모호한 거리에서 더는 다가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건 내 입장이고, 쿤이 왜 이현 씨를 오메가라고 느낀 건지는 나도 몰라요. 그놈은 최상위 골든 알파라 알파, 오메가, 베타를 구분하는 데에는 실수라는 게 거의 없거든. 이현 씨가 그놈의 최초일 거예요.”

형의 말은 언뜻 달콤하게 들렸지만, 최초라고 해서 모든 것이 소중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오메가가 아닌 베타였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최초의 실수로 기억될 테니까.

그는 나에게 있어 최초의 성적 경험의 상대였다. 그러고 보면 서로에게 한 가지쯤은 최초를 남긴 셈이었다. 그런 싱거운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날 밤 절정의 언저리에서 두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쾌락에 빠지도록 만든 그것은, 단순한 향기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인우 형의 설명과 검증된 자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설사 그가 고의적으로 페로몬을 개방하더라도, 베타인 너는 그것에 반응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은 둘째치고 그 향조차 감지할 수 없다고.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다른 태양계에서 온 그들의 언어를, 베타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 전에 그들이 어떤 언어로 소통하는지 들을 수조차 없다.

대표님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베타에게도 페로몬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던 주한이 형의 말은 인터넷에 심심찮게 떠도는 헛소문일 뿐이었다.

게다가 잠자리 상대에게 절대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는 게 그의 철칙이고 결벽이기까지 하다면, 내가 오메가였더라도 그날 밤 그가 페로몬을 풀었을 리는 없었다. 내가 보였던 과감한 반응들은 그저 성에 대한 나 자신의 열정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이쯤이면 확률을 들먹일 게 아니라 깨끗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와의 잠자리에서 느낀, 두려울 정도로 행위에 몰두하게 만들어 쾌락을 주입했던 감각들이 페로몬의 영향은 아닌지 며칠 내내 궁금했었지만, 사실 그것이 실제로 페로몬의 탓이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스스로 인정했듯 그날 밤 그의 귀에 음담을 속삭이며 극단의 쾌락에 자신을 내맡긴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모습이었어도, 침대 위로 올라온 그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가정조차 불필요했다. 페로몬은 없었다.

그의 향기는, 그저 향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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