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향기는 마약 (11/31)

   5. 향기는 마약

그가 보내 준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홍콩의 야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한 대저택이었다. 경호 요원들이 차량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출입시키고 있던 아래쪽 입구에서부터 본채 정문 앞 계단까지 차로 2~3분 정도가 더 걸릴 정도로 부지가 넓었다.

홍콩에서 시작해 빠른 속도로 성장을 이어 가다 재작년에는 싱가포르에도 지사를 오픈해 성공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아시아 미술 시장에 큰 영향력을 가진 대형 갤러리에서 주최하는 파티였다.

“대표님하고 실장님이 예전에 같이 일하셨던 갤러리야.”

자그마한 클러치 속에 거울을 넣은 뒤 딱 소리가 나도록 입구를 닫으며 누나가 말했다.

“여기는 아마 오늘 파티하려고 빌린 곳일걸. 홍콩은 상류층 사교 문화가 활발해서 이런 곳이 꽤 있어. 결혼식 피로연이나 고급 브랜드들의 이벤트, 아니면 부자들이 파티하는 용도로 렌트만 해 주는 저택들.”

나와는 무관한 세계의 얘기였다.

한 쌍의 남녀를 상징화한 듯한 커다란 설치 미술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저택의 정문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는 도로를 따라 많은 차들이 줄지어 대기 중이었다. 페어에 참석했던 주요 갤러리들과 페어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미술 애호가들을 거의 다 초대했을 거라는 게 주한이 형의 설명이었다.

“솔직히 과시하는 거지. 아시아에도 이만한 파워를 가진 갤러리가 존재한다는 걸 전 세계 미술 관계자들에게 보여 줄 기회니까. 졸부 마인드 같긴 하지만,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하는 곳은 상대하는 고객들도 전부 대단한 갑부들이니까 자신들의 경제력이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어필할 필요가 있긴 하거든. 한 점에 수십억, 많게는 몇백억짜리 작품을 사고파는 사업이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도 다 홍보고 투자지.”

우리를 태운 차가 속도를 줄여 정차하자,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도어맨이 문을 열어 주었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그가 입구까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VIP 프리뷰 때 봤던 것과는 또 다른 슈트였다. 블랙 컬러의 슈트라 그런지 몰라도 오늘은 훨씬 더 정식으로 차려입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블랙으로 온통 절제된 슈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야성적인 에너지와 진한 성적 매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넓은 세상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어린애든, 이런 자리에 수도 없이 불려 다닌 세련된 상류층이든, 누구든 그에게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포스터에서 빠져나온 남자 주인공처럼, 슈트 차림의 그는 클래식하면서도 육감적이었다.

누나와 형의 스타일을 차례대로 칭찬한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나를 향했다. 감상하듯 전신을 훑어보는 눈길에 괜히 옷깃을 만지작거리게 됐다.

“옷, 감사합니다.”

“갑자기 참석하게 돼서 곤란했을 텐데 의상쯤은 당연히 준비해 줘야죠.”

오늘 페어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뒤 파티 참석을 위해 호텔로 돌아왔을 때, 내 방의 옷장 안에 슈트가 한 벌 걸려 있었다. 호텔 직원이 방으로 직접 찾아와 미스터 라우가 준비한 것이니 파티를 위해 입으라고 전해 주었다. 태어나 처음 입어 보는 슈트였다.

젊은 세대 중에서도 패션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브랜드의 제품인지 주한이 형은 괴성까지 질러 가면서 부러워했지만, 내가 아는 보편적인 정장보다 패셔너블한 느낌의 디자인이라 소화할 자신이 없었고 영 어색하기만 했다.

“잘 어울리네요.”

하지만 정작 이 슈트를 마련해 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나의 전신을 한눈에 담기까지 하면서.

“이거, 비싼 것 같은데….”

“머리는 유니가 해 줬어요?”

몸의 라인을 따라 착 감기는 야들야들한 슈트는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원단부터 고급스러웠기에 가격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슬쩍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을 돌릴 뿐이었다.

“네.”

정돈된 머리카락의 가장자리를 훑은 손끝으로 귓가를 슬쩍 건드리면서 그가 웃었다.

“이마를 드러냈는데 어째 더 어려 보이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였고, 또 드물게 그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 슈트와 구두의 가격에 대해 추궁하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바로 갚을 수 있는 돈도 아닐 테고, 일단은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파티장 안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다 같이 계단을 오르는데, 누나가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며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어? 뭐야, 대표님 향수 뿌렸어요?”

“…….”

두세 걸음 떨어져 뒤따르고 있던 나는 스텝이 엉켜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뭐, 조금.”

“음, 냄새 좋다. 다크한 게 아주 제 취향인데요? 근데 어차피 이거 오더메이드죠?”

가질 수 없는 그림의 떡에 대한 누나의 씁쓸한 질문에 그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향기는 공기 중에 퍼지는 물질의 분자이고, 대상을 가려 작용할 수 없는 게 당연한데, 그의 독특한 향기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멍청한 망각이 또 있을까.

지금 누나와 그의 거리처럼 저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으면 누구든 공평하게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어느 한 집에서 요리하는 카레의 냄새가 골목 전체를 허기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 냄새였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껏 ‘내가 맡는 그의 향기’에만 집중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향기를 맡는다는 것에, 싫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고 없고는 그다음의 문제였다. 그런 주제넘은 감정이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였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진 늦은 저녁이었지만, 실내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조명이 쏟아지고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이 화려하게 돋보이도록 해 주는 금빛 조명이었다.

“와… 지금까지 가 봤던 파티 중에 최고네. 대표님 얼마나 부자인 갤러리에 다녔던 거예요? 진짜 입이 안 다물어진다.”

1층의 홀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간이 바(Bar)와 라이브로 재즈곡이 연주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아직 비어 있긴 했지만 웅장하게 설치된 DJ 부스에, 완벽하게 세팅된 테이블석과 카우치석까지 골고루 갖춘 실내 장식에 누나뿐만이 아니라 형과 나도 눈이 커졌다.

“난 실장님 찾으러 가 볼게요. 실장님 따라다니면서 오늘 명함 확실히 뿌려야지. 혹시 또 아냐고. 열심히 뿌리다 보면 블로그든 SNS든 들어와 보고 내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반짝이는 검은 스팽글로 장식된 클러치 가득 명함을 챙겨 온 누나는 체인을 늘어뜨린 금색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홀 한가운데를 향해 사라졌고, 주한이 형은 어디 구석에서 적응 못 하고 있는 소심한 알파를 하나 꼬셔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을 불태워 보겠다며 2층으로 향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그와 나뿐이었다.

“음… 같이 가죠. 재미있는 자리는 아니겠지만.”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른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재미없는 자리를 더 재미없게 만들 스스로의 부족한 영어 실력과 건조한 성격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바에서 뭐 좀 마시고 있을게요. 이런 데 처음 와 본 거라, 앉아서 사람들 구경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기껏 우리 갤러리 스태프들 다 초대해 줬는데, 그러지 말고 서이현 씨라도 가서 이쪽 갤러리 측에 얼굴 좀 비춰 줘요. 인사치레만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일어나도 되니까.”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그의 말에,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옛 동료들은 1층 테이블석의 가장 중심에 모여 있었다. 그는 나를 서울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스태프라 소개했고, 남녀가 섞인 예닐곱 명의 그룹은 다들 예의 바른 미소로 나를 환영했다. 하나같이 화려하면서도 세련되게 꾸민 사람들이었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런 자리에 익숙해 보였다.

“아직 많이 어려. 그러니까 너무 짓궂은 얘기는 자제해 달라고.”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천하의 라우 위쿤이 그렇게 말하면서 감싸니까 괜히 더 괴롭혀 보고 싶네.”

자리에 앉기 전, 그가 내 등에 손을 얹으며 그들에게 좀 봐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누군가의 농담에 다들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씩 이렇게 열 살이라는 그와의 나이 차가 새삼스레 실감 날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평소에 실없이 구는 것도 아닌데, 가끔씩 싸늘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권위적이지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외모 때문인지, 평소에는 열 살이라는 차이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많이 어리니까 봐 달라는 그의 소개말이 오늘은 어쩐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위쿤하고 같이 일하는 거 어때요? 쉽지 않죠?”

현재 1급 딜러로 재직 중이라는 그의 옛 동료의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옆자리에 앉은 그를 보면서 웃었다. 다들 그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분위기였고, 질문을 한 상대도 구체적인 대답을 바라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아… 그 성질 어디 갔겠어. 예전에도 여러 명 울고 관두고 그랬었잖아. 얘기해 봐요. 지금도 거르는 거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그러죠?”

무난한 분위기 속에서 튀는 발언을 한 것은 내 왼쪽 자리에 앉은 남자였다.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느슨한 옷차림에 자유분방해 보이는 금발의 남성은 웃고 있긴 했지만, 말속에 그를 찌르려는 가시가 느껴졌다. 피식거리는 입매가 차갑게 비틀려 있었다.

“어… 잘해 주세요.”

아주 얄팍한 웃음으로 대충 감싼 적의에, 나도 모르게 상체를 조금 뒤로 빼면서 대답했다. 남자는 그쯤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이,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대놓고 상사 욕해 보겠어요. 괜찮아요. 예전에 같이 일했을 때 나도 험한 꼴 많이 당했는데, 뭐. 여기서 라우 위쿤 성질 모르는 사람 없어요.”

경직되어 가는 테이블의 분위기를 모르는 건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웃는 얼굴로 장난을 가장해 그를 깎아내리려 안달하는 남자의 얼굴에서, 이상한 초조함 같은 것이 엿보였다.

“아니요, 정말… 자상하세요.”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들을 우선시하며 나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나에게서 낯선 반항심을 끌어내기도 했던 초반의 그는 이미 내 안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그의 언행에 필요 이상의 섭섭함을 느꼈던 것은 그의 태도 때문만이 아닌 그를 보는 나의 감정이 섞인 문제이기도 했었다.

“자상? 와… 자상? 다들 들었지? 라우 위쿤이 자기 스태프에게 자상하다는데?”

그때껏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흘러내릴 것처럼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었던 남자가 상체를 꼿꼿이 세우며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파티가 시작된 지 아마 1시간 정도밖에는 지나지 않았을 텐데 남자의 옷자락이 펄럭거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누군가 좋은 말로 남자를 향해 진정하라고 말했지만, 남자는 진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상하다니, 어느 정도로요? kind? 아니면 sweet?”

“그만해. 짓궂게 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잖아.”

집요하게 이어지는 남자의 질문에, 보다 못한 그가 직접 나섰다.

“파티에서 이 정도가 짓궂다고? 에이, 너무 과보호네. 내가 알던 그 라우 위쿤이 아니야. 언제부터 그렇게 스태프한테까지 신경을 썼어?”

일일이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가 나에게 한국어로 낮게 속삭였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아, 혹시 그냥 스태프가 아닌 건가?”

술잔으로 손을 뻗던 남자가 허리를 과하게 꺾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흰자가 발갛게 충혈된 옅은 녹색 눈동자는 격렬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잖아.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나? 갤러리에서 그림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작업도 함께하나 본데?”

거의 열정적일 정도로 쉴 새 없이 그를 밀고 찔러 대는 남자의 자극 속에는 일종의 절실함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내 예감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남자는 이런 식으로라도 그가 자기를 봐 주기를 바라고, 그에게서 자기에 대한 반응을 끌어내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였지만, 세상에는 명확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쿤을 비난할 순 없겠는데? 누가 봐도 그는 매력이 넘치잖아. 매일 같이 일하면서 대시하지 않는 게 더 어렵겠어. 그런데 정말 어려 보이긴 하네. 쿤,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지?”

VIP 프리뷰에서 그를 잠시 불러 갔었던 동양인 남성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을 돌렸고, 금발의 남자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틈을 타 테이블의 화제는 요즘 홍콩에서 유행하는 동안을 위한 성형 시술로 옮겨 갔다. 나는 물론이고, 그 역시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았다.

한숨 돌리며 내 몫의 잔을 들어 샴페인으로 목을 조금 축이려는데, 금발의 남자가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내가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농담으로 한 얘기인데, 위쿤은 예전부터 이런 데에 좀 결벽적이라서요.”

좀 전보다 진정이 됐는지, 한층 낮은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홍콩은 처음이에요?”

“네.”

그를 등 뒤에 두고, 예의상 남자 쪽으로 살짝 어깨를 틀며 대답했다.

“페어 때문에 관광도 많이 못 했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에 턱을 괴는 남자는 전체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이긴 했지만, 잘 보면 섬세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헝클어진 상태에서도 반짝거리는 금발이 아름다웠다. 이런 블론드 헤어를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라 조금 신기했다. 남자가 주변에 민폐를 끼치고 있는 이런 상황에 맞지 않는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노란 기가 많이 돌지 않는 창백한 얇은 금발이 남자의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인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빅토리아 피크도 아직 못 가 봤죠? 이 시간에 언덕길 따라 드라이브하면서 보는 야경이 진짜 로맨틱한데.”

남자는 문득 눈을 빛내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 살짝 둘이 빠져나가서 가 보지 않을래요?”

남자의 진짜 관심은 엄연히 다른 곳에, 말하자면 내 등 뒤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제안은 상당히 의외였다.

내 어깨를 짚은 남자가 상체를 깊숙이 기울여 입술을 귓가에 가까이 가져왔다.

“그쪽도 엄청 따분해 보이는 것 같은데.”

“…….”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어깨 위로 뻗어져 나온 손에 의해 남자가 자신의 자리로 다시 밀려났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는 베타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몸이 가볍게 뒤로 당겨졌다. 돌아보니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좀 아까까지 언짢음을 최대한 억제하려 하던 노력이 완전히 사라진 표정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남자가 페로몬을 방출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인우 형과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남자는 결백을 증명하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상체를 뒤로 물렀다.

“오메가라고 생각한 건 아닌데. 너도 알겠지만 이건 조절되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척하면서도 남자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베타한테까지 조절 못 하고 줄줄 새어 나올 정도면 약을 먹지?”

내 팔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당기면서 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에게 경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바짝 경직되어 음절과 음절이 뚝뚝 끊어졌다.

“아, 너한테 골든이 아닌 알파는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병이었지? 누구나 너처럼 운 좋게 골든 알파가 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운 좋게?”

“…….”

거슬리는 어절을 잡아내는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고, 남자는 스스로도 건드리면 안 될 곳을 건드렸다고 느꼈는지 입을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어. 괜히 분위기만 어지럽힌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를 따라 나 역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싸구려 페로몬 냄새가 역겨운가 보지?”

남자는 끝까지 그에게서 어떤 극단의 반응을 얻어 내려 안달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찔러 대는 말과 달리 앉은 채로 그를 쏘아 올려다보는 눈은 원망과 애원의 빛으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그에게 ‘특별히’ 미움받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그것을 궁금해했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팬텀의 전시장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도 미움을 받는 쪽으로라도 좋으니 그에게 ‘특별’이 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남자가 그에게서 원하는 것도 그런 종류의 어긋난 기대감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 볼 뿐이었다.

“혼자 고상한 척하는 건 여전해. 골든이 아닌 페로몬은 역겨워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시시하게 베타인가 봐?”

그가 페로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거기에 결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남자는 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헤집어 대고 있었다. 과거에 그에게서 페로몬 때문에 심한 지적이라도 당한 적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도 생각해 봤지만, 남자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증오나 복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풀어 두었던 재킷의 버튼을 잠그며 의자를 돌아 나오던 그가 기어이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봤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어떤 온도도, 심지어 차가움조차도 없이 미적지근했다.

그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페로몬 없이는 하룻밤 상대도 유혹할 자신이 없는 주제에, 그래도 꼴에 알파라 이건가?”

혹시라도 만약 내 예감이 맞다면, 갈구하는 상대에게서 이런 반응을 끌어내며 남자가 얻게 되는 것이 대체 어떤 만족감인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자극했으면서도 난도질당한 듯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남자에게서 나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알파라도 너 같은 막장이라면 베타가 낫지. 굳이 알파니 뭐니 하는 수식이 없더라도, 이 안에 있는 어떤 누구라도 너보다는 그를 택할 것 같은데?”

“…….”

“그러니까 두 번 다시 그 싸구려 페로몬, 그에게 흘려 대지 마.”

동요 없이, 그러나 입 안에서 짓씹어 뱉어내듯 말을 마친 그는 나의 등을 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옆모습이 이 자리에 나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오메가끼리는 서로의 페로몬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알파끼리는 상대의 페로몬을 냄새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성적 흥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직 알파와 오메가만이 후각으로 감지한 서로의 페로몬으로 성적 흥분을 자극받게 되어 있었다.

상위의 골든 알파일수록 생식 능력이 강한 것은 물론, 오메가가 거부하기 어려운 강력한 페로몬을 방출할 수 있으며, 반대로 오메가의 페로몬에 대한 방어력도 뛰어났다. 오메가의 페로몬 자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돌발적 급성 발정기, 즉 러트로부터 자신을 안정적으로 보호할 수 있으므로, 본인의 의지에 따라 거의 베타에 가까운 생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페로몬과 관련해 공격력과 방어력이 동시에 높을 뿐만 아니라, 오메가와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을 민감하게 구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인우 형이 그를 오메가 감별사라고 표현했던 것도 과장은 아니었다. 그가 골든 알파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에 속해 있다면, 알파, 오메가, 베타를 구별해 내는 것쯤은 사과와 딸기, 바나나를 냄새로 구별해 내는 것 정도의 수고로움이면 충분할 테니까.

그가 페로몬에 대해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좀 전의 남자로 인해 느끼고 있을 불쾌함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그의 까다로움을 배제하더라도 남자는 지나칠 정도로 무례하게 그를 도발했었다. 오히려 그는 상당히 인내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의 응수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잔인했다며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남자와의 충돌을 막아 보려 했던 그가 끝내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도’ 나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남자가 ‘시시한 베타를 데리고 다닌다’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도발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시시한 것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으로 취급받은 것에 대한 대응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모욕을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적어도 이제 그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니었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마음의 가장자리를 달콤하게 울리는…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를 보던 남자의 눈에 비치던 복잡한 감정 때문인지, 마냥 개운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남자에 대한 동정이나 공감 같은 선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좀 더 자기중심적인 상상이었다.

이대로 그의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뒤 내가 그 남자처럼 추해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 좀 쐬죠.”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진,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앞까지 온 뒤에야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미간 사이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고, 내 눈을 제대로 보지 않긴 했지만, 청유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2층은 대부분 카우치석으로 편안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또는 커플이,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음악과 술과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1층에 비해 좀 더 어두운 조명 아래 주변을 개의치 않고 진한 키스를 나누는 남녀의 곁을 지나쳐 우리는 테라스로 나섰다.

“아….”

빅토리아 피크의 전망대에 따로 오를 것 없이 바로 발아래 홍콩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반응이 빠르거나 격렬한 편이 아닌 내 입에서도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의 풍경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별 가루를 쏟아 놓은 것처럼 도시 전체가 반짝거렸다. 문명이 빚어 놓은 인공의 빛인 줄을 알면서도 순간, 자연이 빚어 놓은 신비로운 현상의 목격자가 된 듯 압도당했다.

놀이동산에서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는 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나를 돌아보며 그가 엷게나마 미소를 보였다. 또다시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쑥스러웠지만, 이 순간 조금이나마 그를 웃게 할 수 있었다면 그걸로 좋았다.

넓은 테라스 곳곳에는 투명한 바람막이를 씌운 커다란 양초들이 은은한 조명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고, 실내와 마찬가지로 푹신한 소파들이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벽에 고정된 스피커에서는 1층에서 연주되고 있는 재즈곡이 흘러나와 눈앞의 야경에 감흥을 더하고 있었다.

이곳에 함께 온 커플인지, 아니면 이 파티장에서 급하게 결성된 오늘 밤만의 연인인지는 몰라도, 둘씩 짝을 지은 사람들이 혼잡한 파티장에서 빠져나와 밀어를 속삭이거나 진한 스킨십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는 테라스 가장 끝 쪽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곧바로 샴페인이 세팅되었다.

“전에 같이 일했던 사이인데, 예전에도 나와는 잘 안 맞았어요. 알파라는 걸 훈장처럼 여기는 사람인 데다, 회사 내에서도 페로몬 때문에 몇 번이나 문제를 일으킨 전적도 있어서 그 문제로 마찰이 있었죠. 역시나… 오늘도 조용히 넘어가질 못했네요.”

답지 않게 너무 많은 말을 쏟아 놓았다며 후회하듯 그는 미간을 한 번 강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 느낌에, 남자는 그를 적대시한다기보다 오히려 온몸으로 관심을 갈구하는 것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연애 경험이 전무한 나의 확신 없는 예감일 뿐이었다.

에어컨의 냉기가 전혀 필요 없을 만큼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테라스의 난간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의 좌석 바로 앞은 정원수가 우거져 야경이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 탓에 가장 구석진 은밀한 자리임에도 비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상체를 굽혀 허벅지 위에 팔을 괸 그의 뚜렷한 옆모습은 아직 좀 전의 일이 남긴 불쾌감을 곱씹는 듯 보였다. 뭔가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없을까, 고민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낯선 향이 코밑을 감돌았다.

향기의 근원은 분명 내 옆자리의 그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그 향기’가 아닌 다른 향이었다. 다크한 향이 취향이라고, 누나가 그렇게 표현했던 향수는 내가 알던 그의 향기와는 다른 향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깊이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그의 향수라는 점에서는 그 향이든 이 향이든 마찬가지일 텐데, 어떤 기준 때문에 그것은 싫고 이것은 괜찮은지, 나 자신에게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싫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순간 타인과 그 향을 공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한참 동안 바닥의 한 지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쓰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미안해요. 한심한 장면을 보여서. 다 큰 남자가 좀 추했죠.”

나는 단호하게 여러 번 고개를 저었다.

“페로몬 없이는 상대를 유혹하지도 못한다니. 사실… 그런 식으로 비난할 자격도 없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쥐고 있던 잔 속의 술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그가 왜 그렇게 자신을 모질게 평가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까운 친구인 인우 형조차도 그가 베타가 되려고 하는 사람처럼 페로몬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평할 정도인데.

페로몬을 둘러싸고 벌어진 좀 전의 다툼이,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적으로 몰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표님은… 페로몬 없이도 충분히 유혹하실 수 있을 거예요. 원한다면, 누구든.”

묵묵히 자신의 잔을 새롭게 채우던 그가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그를 웃게 하고자 시도해 본 농담이었는데,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발언으로 들린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의 피식거리는 웃음을 보니 일단 농담으로 전해지긴 한 것 같았다.

“네, 페로몬 같은 건 필요 없을 거예요.”

난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혼잣말처럼 영어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채워진 잔을 들어 또 절반을 바로 비워 냈다.

“대표님은 외모도 근사하고… 사업 수완도 뛰어나고… 옷차림도 늘 멋지고….”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낮지만 확실한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잦아든 웃음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혹시 지금 기분 풀어 주려고 하는 건가.”

“좀… 서툴죠?”

유치원생 수준의 일차원적인 칭찬을 열거하는 것으로 그를 위로하려 한 미숙함이 부끄러워 귓불로 열이 몰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에요. 솔직히 다 아시잖아요. 만약 모른다고 하면, 그게 더 얄미울 것 같은데요.”

슬쩍 그를 올려다보니, 눈동자에서도 입매에서도 처음의 경직과 자책의 기색이 많이 흐려져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쑥스러움은 순간이었다. 그가 나의 유치한 위로 방식을 비웃은 것도 아니었다. 비웃었다기보다 오히려… 나를 보는 시선이 좀 더 깊어져 있었다.

얼굴의 이곳저곳을 꼼꼼히 더듬어 만지듯 천천히 이동하는 눈길에 저절로 긴장이 됐다. 상대의 얼굴을 살피는 이런 방식은 그의 버릇일까.

나뭇가지를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번에는 내가 익히 알던 그 향이었다.

나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어깨는 나의 어깨와 불과 한 뼘 정도 떨어져 있었다.

“오늘은 그 향수는 안 뿌리신 줄 알았어요.”

“여러 개를 믹스했어요. 누군가와 향이 겹치는 건 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치는 것보다 더 싫으니까.”

잔을 비워 내며 그렇게 말한 그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내 쪽으로 몸의 방향을 틀어 앉았다. 탄탄하고 긴 팔이 내 등 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몸의 방향을 이쪽으로 향한 것만으로도 향기가 진해졌다. 팔을 걸친 탓에 벌려진 가슴팍에서 향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정말 내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등받이에 걸치고 있던 팔을 굽혀 그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의 끝을 가볍게 비비던 손이 귀의 가장자리를 스치며 내려가 드러난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미끄러지듯 더 깊숙이 다가온 그가 고개를 크게 꺾어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습기를 머금은 호흡만으로도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속삭이는 목소리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비밀에 대한 은유 같았다. 허스키한 저음이 배 속을 살살 긁는 듯 감미로웠다.

귓가를 가볍게 스친 그의 높은 코끝이 뺨 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나의 코끝과 닿을 때쯤 얼굴이 각도를 달리하며 기울어졌다. 아주 살짝 뒤로 몸을 당겼지만, 거부의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당황과 놀라움, 약간의 두려움으로 한 행동이었다.

입술이 스치듯 비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좀 더 깊이 꾸욱 나를 눌러 왔다. 그가 고개를 움직임일 때마다 부피감을 가진 살점이 서로 밀고 밀렸다. 그 얕은 접촉만으로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뜨겁고 건조한 그의 입술이 나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차례대로 머금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머금고 안쪽의 즙을 짜내듯 오물거리다 강하게 빨아 당긴 끝에 놓기를 반복했다.

아득히 멀어지고 아찔하게 흔들리는 감각에 손을 더듬어 그의 재킷 자락을 붙잡았다. 숨이 떨리고, 어깨와 등은 딱딱하게 굳었다 맥없이 무너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스스로를 통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면,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 있었다.

“키스는 처음이네요.”

입술이 스치는 거리에서 그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내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 밤 일을 그동안 몇 번이나 더듬어 봤었지만, 그와 입술을 겹친 장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잊은 것이 아니라, 그날의 행위에 키스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벗은 아래를 서로 비비며 사정에 도달하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키스는 생략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패닉 상태인 사람한테서 키스까지 뺏고 싶진 않았으니까.”

내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설명이었다.

한 번 더 내 아랫입술을 쪼옥, 느리게 빨아들였다 놓으며 그가 덧붙였다.

“느낌상, 첫 키스일 것 같기도 했고.”

“…….”

그가 나를 이 나이까지 키스도 해 보지 못한 숙맥이라 생각했다는 것이 어쩐지 열없어, 불쑥, 아니라며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예상이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첫 키스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일부러 키스를 억제했다는 생각을 하니, 의외의 섬세함과 자제력에 슬쩍 웃음이 나면서 조금은 긴장이 풀어지기도 했다.

내가 첫 키스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중히 아껴 왔을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높은 기준을 정해 두고 일부러 아껴 온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하고나 아무렇게나 해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기는 했다. 만약 그날 키스가 있었고, 내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아까워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판단은 옳았다. 지나친, 불필요한 배려였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마사지하듯 뒷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가 이로 내 입술 표면을 살짝 긁었다.

“그날 일, 어디까지 기억해요?”

“…….”

그날 이후 그가 보였던 태도는, 그 일을 완전히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무언의 메시지라고, 지금껏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성 경험이었고, 기계적일 정도로 무미건조했던 자위 패턴까지 바뀌어 버렸을 만큼 충격적인 자극이었다.

흥분을 부채질하던 그의 음란한 말들과 성기를 자극하던 강한 손길을 떠올리며 사정에 이르렀던 자위들을 떠올리자, 그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자, 그의 입술이 따라왔다. 입술을 깨문 이를 핥는 혀의 간지러움에 입술을 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나를 빨아들였다. 오물거리며 살점을 씹는 감각에 어깨가 안으로 굽어들었다.

“반응 보니까… 아예 기억 못 하는 건 아닌가 본데.”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 끝에 그는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삼켜졌다. 처음 서로의 입술이 닿았던 순간 이후로, 그는 내 입술에서 10초 이상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밀착된 거리에서 호흡하는 향기의 밀도는 굉장했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통해 향 그 자체를 내 안에 불어넣는 것 같았다. 그 향은 이 순간 가해지는 자극에 지난번 기억까지 불러들여 덧입히고 있었다. 아마도 나에게는 이 향기 자체가 성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도록 굳어진 모양이었다.

뒷목을 쓰다듬던 손이 어깨와 등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이 내 재킷의 버튼을 풀었다.

재킷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손이 매끄러운 셔츠 위로 가슴을 더듬어 나갔다. 아주 간단히 유두를 찾아낸 그가 중지로 돌기를 밀어 올리며 입술을 다시 겹쳐 왔다. 겹친 상태에서 좌우로, 위아래로 천천히 입술을 비비면 안쪽의 점막이 드러났고, 젖은 점막과 점막이 비벼지는 더 진한 접촉에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흘렀다.

그의 중지 아래에서 유두가 이리저리 꺾이며 점점 딱딱해지고 있었다. 유두가 단단해질수록 몸이 수축하며 그의 손길이 더 강하게 그곳을 짓이기고 빨아 주길 원하게 되는 갈증이 두려워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는 이번엔 검지와 엄지로 살점을 쥐고 아플 정도로 꺾어 비틀었다. 그런데도 아픈 게 아니라 저릿했다.

“여기. 내가 열심히 빨았던 거 기억해요? 스스로 내 입에 물려 줬었는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굽혀졌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가 이 애무와 희롱을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 의식도 해 본 적 없었던 그곳을 그가 핥고 빨며 깨물었을 때, 어떤 쾌감이 전신을 떨게 했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입술을 떠나 귓가를 맴돌던 그의 입술이 낮게, 느리게 속삭였다.

“아… 또 빨고 싶다.”

맛있게 먹었던 음식의 단맛을 떠올리듯 장난스럽게, 하지만 분명한 욕망을 담아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혈관이 움찔거리며 수축하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그런 기분’이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지난번처럼 그에게 유두를 물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미칠 것 같았다.

매달리듯 그의 재킷 자락을 움켜쥐면서 숨을 터뜨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혀가 밀려들어 왔다. 그는 기도가 막힐 정도로 자신의 혀를 깊이 밀어 넣었다. 아래턱이 벌어지고, 유연한 그의 젖은 살덩이가 입 안을 온통 휘저었다. 향기를 액체로 만들어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감아 왔다. 괜찮다고 달래듯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은 점성을 더하며 더 깊은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바지에 감싸인 따뜻한 피부 안쪽을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이제는 상체만이 아니라 허리 아래까지 움찔거리고 있었다.

“흐, 흐윽….”

키스를 더 이어 가기가 어려웠다. 도망치듯 입술을 떼면서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부끄럽게도, 반쯤 발기한 상태였다.

빨고 있던 나의 혀를 뺏긴 그가 토닥이듯 등을 안아 주며 고개를 깊이 숙여 속삭였다.

“호텔로 갈까요?”

이미 그의 향기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직접적으로 그의 살에 코를 대고 들이마시는 향기는 마약 같았다. 탐욕을 부리며 숨을 연달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낮게 욕설을 뱉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아 당겼다. 일어나려던 자세를 바꿔 다시 옆자리에 앉은 그가 깨끗하게 정돈되어 넘길 것도 없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숙인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왜 그래요. 급한 건 알지만, 그래도 장소는 옮겨야죠. 난 여기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멈출 생각은 없는데?”

“…….”

발기했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자백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셔츠의 앞섶을 벌리고 그에게 유두를 내보이는 게 쉬울 것 같았다. 고작 키스만으로 터질 듯 단단하게 부푼 성기가 원망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지금의 내 눈은 그에 대한 욕구와 갈망에 젖어 흐물거리고 있을 게 뻔했지만, 그가 내 상황을 알아채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천천히 들여다본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딪쳐 왔다.

“미안해요. 알면서 장난 좀 쳤어요. 사실 나도 지금 여유 같은 거 없으니까… 그러니까 부끄러워할 거 없어요.”

차를 대기시키라는 전화를 한 뒤, 그는 나에게 재킷을 벗게 했다. 벗은 재킷을 팔에 걸쳐 대충 아래를 가린 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재즈 피아노의 선율이 DJ의 댄스곡으로 바뀐 혼잡스러운 1층 홀을 비집고 빠져나온 우리는 손을 잡고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누나, 형과 함께 타고 온 차와 다른 차(아마도 그가 타고 왔을)가 계단 아래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를 먼저 태우고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도어맨이 채 문을 다 닫기도 전에 그가 덤벼들어 키스했다.

쏟아지는 그의 어깨와 입술을 받아 내며 앞좌석을 힐끔거리자, 그가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했다. 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의 윈도에 슬라이딩 형식의 블라인드가 드리워졌다.

문을 향해 나를 밀어붙이는 그의 힘 때문에 내 몸은 정면을 향하지 못하고 문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누워 있었다. 그 역시 점잖지 못하게 좌석 위로 반쯤 올라와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타인의 입술을 처음 알고 거기에 완전히 빠져 버린 소년처럼 그는 내 입술에 달라붙었다. 쪼듯이 수없이 여러 번 입을 맞췄고, 이로 깨물었고, 깊이 겹쳤고, 빨아들여 씹어 댔다. 내 혀 위에 자신의 혀를 비비고, 내 혀를 유인해 입 안 가득 머금고 조여 댔다.

눈을 감고 서로의 존재를 음미하는 그런 키스가 아니었다. 우리는 내내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셔츠 끝자락을 팬츠 밖으로 끄집어낸 그가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맨살에 그의 손이 닿는 감촉에 허리가 튕겨졌다. 신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입술을 맞댄 상태 그대로 그가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그리고 내 팔을 붙잡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한 뒤, 그대로 나의 등을 안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렇지 않아도 발기해 있었던 성기가 그의 몸에 바짝 밀착하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끄러움이고 뭐고, 그의 목을 더 조여 안으며 그의 아랫배에 성기를 밀어붙였다. 고환 아래쪽으로 느껴지는 그의 성기의 단단함에 어느 정도 안심하면서.

포개진 자세로 옷을 입은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혀를 얽었다. 개진개진 풀어진 눈으로 상대에 대한 욕구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의 향기는 섹시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음악이나 이성을 마비시키는 환각제처럼 나를 과감하게 만들었다.

「베타가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다면, 아마 지금쯤 우린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서 내 차 뒷좌석에서라도 서로 엉켜 있었을걸요.」

인우 형의 말이 떠올랐다.

알파나 오메가도 페로몬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상대에게 끌릴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 말 그대로였다. 골든 알파인 그와 베타인 나는 페로몬 없이도 서로에 대한 욕정에 끓어올라, 호텔 룸까지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참지 못하고 자동차 뒷좌석에서 서로에게 엉켜 있었으니까.

“방까지 가는 동안 또 참아야 한다니. 진짜 지옥 같네.”

호텔의 입구로 향하는 진입로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그가 절망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의 손은 내 엉덩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요. 5분, 아니 3분만 더 지옥을 참아 줄 수 있을까.”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얼굴 때문에 웃음이 났다. 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옷차림과 호흡으로 그의 손을 잡고 로비를 가로질렀다. 일요일 늦은 시간의 엘리베이터 홀에는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이라도 마주쳤다면, 발기한 성기를 재킷으로 가린 나는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고속 엘리베이터로 42층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분명 순식간일 텐데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지옥 같았다.

내 안에서 뭔가가 흘러넘칠 듯한 감각에, 그게 무엇이든 막아야 할 것 같아 재킷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그런 나를 그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랫배 위에서 하나로 모아진 팔이 허리를 강하게 조여 왔다. 누군가와 마주쳤다면 몸이 나빠져 제대로 설 수 없는 나를 그가 지탱해 주는 것으로 봤을 것이다.

강하게 몸을 비틀어 도망치고 싶은 기분과 이대로 뒤로 돌아 그를 마주 끌어안고 단단한 육체에 내 몸을 비벼 대고 싶은 기분이 양극단에서 동시에 나를 끌어당겼다.

전자는 아직 이성과 관성의 영역에 남은 나였고, 후자는 성욕의 충족이 가져다주는 쾌락과 본능의 영역에 눈을 뜬 새로운 나였다.

단 한 번뿐이긴 했지만, 경험상 나는, 이후의 내가 누구의 손에 끌려가기를 택할지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채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고,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거의 끌려가다시피 그를 뒤따랐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니, 그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현관 옆의 콘솔 위에 아무렇게나 카드키를 던져 놓고 긴 팔로 나의 등을 감아 안았다.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다음 순간엔 거실로 이어진 복도 벽에 등이 부딪쳤다. 하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다시 맞닿은 입술은 긴 인고 뒤에 혀끝에 떨어진 한 방울의 술처럼 달콤해, 그 외의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나 역시 그의 등에 팔을 둘러 셔츠가 구겨지도록 꽉 붙잡았다. 입술을 벌렸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나를 물었다 놓는 얼얼하고 아찔한 흡입에 온 감각이 입술에 집중되었다.

맨바닥 위에 나를 쓰러뜨릴 것처럼 덤벼드는 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소파의 등받이에 허벅지를 부딪쳤다. 그다음엔 페어 기간 내내 다 같이 모여 회의를 겸해 아침 식사를 했던 원형 식탁이 그에 의해 뒤로 밀렸다. 의자 두어 개가 쓰러졌지만 우리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읏.”

몇 번이나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하며 밀고 밀린 끝에 우리가 멈춘 막다른 곳은 전면창이었다.

맞은편으로 침사추이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42층 전면창에 나를 몰아 놓은 그는 한동안 숨을 몰아쉬며 가까운 거리에서 내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바로 눈앞에서 크게 들썩거리는 넓은 어깨는 나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가 나 보였다. 찌푸린 눈꺼풀 아래 옅은 푸른색 눈동자 속에서는 탄산이 끓는 듯했다. 그와 같은 사람도 성욕 때문에 이렇게까지 흥분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등 뒤로 차가운 유리창을 느끼며 나 역시 그가 내뿜는, 분노와도 같은 욕구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사적인 공간 속에서 밀도를 더해 짙어지는 향기를 호흡하면서.

다음 순간 고개를 꺾어 다시 깊이 겹쳐 온 입술은 눈빛과는 달리 마냥 부드러웠다. 입술을 눌렀다 떼고 눌렀다 떼는 잔 입맞춤이 쏟아졌다.

그는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목덜미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손가락을 펼쳐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매끄러운 셔츠 위에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아랫배까지 내려가, 한 손만으로도 능숙하게 벨트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브이 자 형태로 지퍼가 벌어지자마자 그의 손이 다급하게 브리프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으, 흐읏….”

성기에 감겨 오는 손가락의 감촉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물었다. 속옷 안에서 성기를 주물럭거리는 그의 커다란 손이 만들어 내는 부피감 때문에 조금씩 아래로 밀려나던 팬츠가 발목으로 툭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니, 속옷 안에서 음경을 훑는 그의 손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직접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야릇한 광경에 살갗이 욱신거렸다.

내 속옷 안으로 사라진 그의 손 자체가 은밀한 마찰과 결합을, 섹스 자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속옷 안을 더듬고 있지 않은 다른 팔로 유리창 위에 팔꿈치를 짚은 그가, 귓가에 입술을 밀착시켰다.

“지난번에도 생각한 건데.”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음경을 뿌리부터 문지르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성기가 커요.”

견고한 벽처럼 눈앞에 버티고 있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요, 이 정도면 큰 거 맞는데.”

괜히 나하고 비교할 거 없어요. 나하고 비교하면 누구라도 다 시시해지니까. ―뜨거운 혓바닥으로 귓바퀴의 굴곡을 애무하면서, 그가 짓궂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농담을 하는 것 같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래도 말의 내용은 사실이기도 했고.

젖어 들어 예민해지는 청각에 어깨를 움찔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온 사람같이 생겨가지고, 막상 벗겨 보니까 성기도 커서 왠지 밝힐 것 같고… 그걸 내 배에 막 비비고… 어후, 야하더라구요.”

다시 또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건지, 그런 말을 귓가에 속삭이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실은 말의 내용도, 그의 속삭임도, 싫지 않았다.

숙인 고개 안에서 내 눈은, 속옷 안을 훔척거리는 그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어깨가 들썩였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붙잡았다. 내 어깨 위로 유리창을 짚고 있던 그의 팔이 입을 막은 손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끌어 내렸다. 브리프 안, 깊숙한 곳에서, 그의 손끝이 고환을 툭툭 건드렸다. 허리가 움찔 비틀렸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내 건 어땠는지 얘기해 봐요. 뚫어지게 쳐다보고 그러던데.”

“…….”

“고개 들고.”

부드러운 명령의 말에 어렵게 그의 어깨에서 이마를 떼어 냈다. 쪼옥. 쪼옥. 곧바로 입술이 다가와 나를 삼키고 즙을 짜듯 압박한 뒤 놔주었다. 이젠 이 입술이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된 흡입으로 부어오른 느낌 때문에, 그가 빨고 있지 않을 때조차 그의 입술을 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숙이지 못하도록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대며 그가 코끝을 비벼 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향기를 피해 숨을 돌릴 빈틈이 전혀 없었다.

“어땠어요, 내 거.”

“흐으, 흡.”

넓은 손바닥이 고환을 지나 가랑이 사이로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호흡의 리듬이 완전히 엉켜 버렸다.

거듭 반복해 밑을 문지르는 마찰은 그 자신의 흥분을 드러내는 동시에, 아직까지 일상의 관성으로 주춤거리는 나의 흥분을 이성의 테두리 밖으로 거칠게 끌어내고 있었다.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그의 옆구리에서 어깨 위로 손을 옮겼다. 나를 위로 들어 올릴 것처럼 강한 힘으로 아래를 문지르는 그의 팔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다. 그가 자신을 많이 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한 자백을 원하는 손의 움직임은 여전히 노골적이었다. 들락거림이 빨라짐에 따라 엉거주춤 다리가 벌어졌다.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돼 버렸지만, 둘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민망한 자세가 이 행위의 성적 상징성을 말해 주는 것 같은 기분에 흥분이 고조될 뿐이었다.

“커, 컸어요….”

그리고 흥분은 기어이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그게 다예요?”

어쩐지 신나 보이는 얼굴의 그가 눈앞에서 씨익 웃고 있었다. 가랑이 사이를 드나드는 손이 연상시키는 삽입, 추삽, 섹스 같은 것들 때문에 정신이 점점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이 밑을 지나 엉덩이 뒤쪽까지 밀고 들어갈 때마다 그 힘에 몸이 들썩거렸다. 성기에서 흘러내린 선액에 젖어 축축한 손바닥은 연한 속살과 마찰을 일으키며 아래에 열을 피웠다. 저절로 뒤꿈치가 들렸다.

덤벼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솔직해지면 편해질 것이다. 괴롭힘도 멈춰 줄 것이다.

“만져 보고 싶었어요….”

자백의 시작이었다. 그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목을 더 끌어안았다.

“야하다고… 흥분된다고, 저도 생각했어요.”

그의 귀에 금기된 단어를 속삭이며 얻었던 일그러진 쾌감과 그 끝에 그가 흘려 주었던 달콤한 칭찬의 기억이 몸속 깊은 곳에서 나를 부추겼다.

“섹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서… 어둠 속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 사이가 저려서… 윽.”

자백을 중단하고 이를 물어야 했다.

회음을 비비던 그의 손이, 다물린 애널 위를 짓이기고 있었다. 안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언제 밀어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누르는 방향이 조금만 달라져도 손톱 끝이 내부를 파고들 것 같았다.

“…섹스가 뭔데요.”

“…….”

섹스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가 함부로 지껄인 말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숨소리는 씨근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내 귀를 깨물면서 이번에는 애널 주변을 살살 긁어 댔다. 배 속의 장기를 긁기라도 하는 것 같은 근원적인 근지러움에, 믿기지 않게도, 그의 목을 안은 상태에서 나는 재촉하듯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가 내 속옷을 아무렇게나 아래로 밀어냈다.

그가 주물러 대는 동안 엉망으로 젖어 버린 성기가 노출되고, 나는 그것을 옷을 입은 그의 성기 위에 스스로 비벼 댔다. 믿기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이것이 나라는 것을, 적어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온 사람같이 생겨가지고, 벗겨 보면 성기도 커서 왠지 밝힐 것 같은’ ―그게 잠자리에서의 나에 대한 그의 평가였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를 그렇게 보는 그의 시선이 싫지가 않았다.

팬츠의 앞섶이 팽팽히 당겨 완전히 불룩해지도록 그 역시 발기해 있었다.

묵직하게 솟은 부피감이 연상시키는 성기의 뚜렷한 형태에 머릿속이 노래지는 것처럼 흥분됐다. 달뜬 숨소리를 흘리며 비비적거리는 내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그가 살점을 비틀었다.

“넣고 싶어요….”

고통을 곱씹어 한 알 한 알 삼켜 내는 목소리였다.

“무슨 뜻인지 알죠? 서이현 씨 안에… 삽입하고 싶어요.”

그의 애절하고 초조한 속삭임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달싹거리자 그가 고개를 비틀어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동시에 내 선액으로 미끌거리는 손을 둔부의 틈 사이로 미끄러뜨려 애널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이 안에… 불룩하게 만들어진 곳. 찾아서 내 성기로 비벼 줘도 돼요?”

“그, 그만….”

괴로울 정도의 흥분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가 외면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쫓아오며 입술을 삼켰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 번에 집어삼켜 여러 번 빨아들였다. 그에게 삼켜지고 빨리고 헤집어지는 동안, 이제는 나 역시 그의 향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왜, 그게 섹스잖아요. 내 거는 그런 거 하라고 만들어진 거라며. 그럼 그렇게 해 드려야지.”

평소의 짧은 Fuck보다 좀 더 긴 욕설이 이어졌다. 혼미한 상태에서 흘려듣는 빠른 속도의 외국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런 내용 같았다.

살점이 아리도록 엉덩이를 움켜쥔 그가 둔부를 양쪽으로 강하게 벌려, 보이지 않는 곳의 애널을 옆으로 늘렸다.

“못 참겠어. 당장 넣고, 흔들고… 섹스해 주고 싶어.”

삽입과 사정을 원해 안달 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갈구의 대상이 나라는 것이 몸속을 욱신거리게 했다. 나 역시 그의 삽입과 사정을,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 ■ ■

어떤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정돈된 순백의 침대 위에 그가 나를 던져 놓았다. 수천 개의 깃털 속으로 몸이 꺼졌다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래는 훤히 벗은 채 셔츠만 걸친, 셔츠의 끝자락 아래로 발기한 성기를 노출한 나를 내려다보며, 침대 아래서 그가 빠르게 알몸이 되어 갔다.

따로 조명을 밝히지 않은 침실 안은 어둑했지만, 방 안의 모든 것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흥분과 고양으로 단단하게 뭉친 그의 근육들은 단련된 갑옷 같았다. 저런 근육질의 육체가 슈트를 입었을 때는 미끈해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적어도 한 사이즈는 작아 보이도록 해 준다는 고급 슈트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긴 팔다리의 비율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몸이었다.

조금도 어색해하거나 쑥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똑바로 나를 향해 서서, 몸에 걸친 마지막 옷가지인 복서 브리프 안으로 그가 손을 찔러 넣었다.

최대치로 팽팽하게 당겨진 브리프 안에서, 그의 음경은 윤곽이 뚜렷하게 잡힐 정도로 발기해 우측으로 휘어져 있었다. 브리프 안에서 스스로 성기를 쓰다듬으며, 그가 손끝으로 속옷을 밀어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브리프가 아래로 말려 내려가고, 배꼽에서부터 이어진 검은 음모 위로 반쯤 발기한 성기가 압박에서 풀려 튕겨 나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느리게 끄덕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섹스가 시작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성기였다.

지난번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저것이 반 정도밖에 발기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은 과시하듯 고환에서부터 귀두까지 성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가 무릎으로 침대 위에 올라섰다. 거리를 좁혀 오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채 한 손으로 풀어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거실에서부터 고조되었던 흥분에 그의 알몸을 본 감상이 겹쳐 더욱 그랬다.

손톱보다 작은 단추를 붙잡고 손을 떠는 나를 보면서, 그가 네 발로 매트리스 위를 기어 와 입을 맞췄다. 단추를 풀던 손을 멈추고 키스에 응했다.

“부었네요.”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다, 튕기듯 놔주면서 그가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에게 수없이 빨리고 깨물렸다는 흔적이 평소보다 부풀어 오른 뜨거움으로 입술에 남아 있었다.

“하긴. 내가 좀, 너무 빨아 대긴 했지.”

자신의 집요함을 인정하며 그가 웃었다. 하지만 반성은 아니었다. 곧바로 다시 입술이 겹쳐졌으니까.

“으, 음….”

이번에는 좀 더 밀어붙이듯 격정적이었다.

뒤로 상체를 기울여 앉아 있었던 나의 다리 아래로 허벅지를 밀어 넣으며 파고드는 무게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혀에 와서 비벼지고 엉키는 젖은 살덩이의 예측 불가한 움직임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키스는 향기를 타액에 녹여 낸 듯했고, 타액을 삼킬 때마다 그 독특한 향이 체내에 흡수돼 혈관을 타고 몸속을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후각만이 아니라 몸의 내부까지, 그의 향기에 흠뻑 젖어 들고 있었다.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중독성 강한 약물 같아서, 그가 흘려 넣어 주는 타액을 달게 삼켰다. 익숙해지거나 적응되지 않는, 최초의 충격을 내내 유지하는 그의 향기는, 후각을 뛰어넘은 영역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작용 같았다.

그 향기에 절여진 혀가 입 안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산소가 들어올 틈을 짜내기 위해 그의 혀를 압박해 빨아 댈 수밖에 없었다.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은 그가 다른 손을 더듬어 미처 풀지 못한 두어 개의 단추를 성가시다는 듯 툭 끊어내 버렸다. 곧바로 손바닥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겉은 말랑하면서도 안쪽에는 심이 뭉쳐진, 발기한 젖꼭지의 살점을 검지와 엄지 사이에 쥐고 잡아당기는 손길에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그의 목을 더 조여 안으며 벌려진 채로 겹쳐져 있는 입술을 비틀어 깊이 문질렀다. 더 강하게 애무해 주기를 조르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가 자극을 받았는지, 입 안에서 좌우로 혀를 흔들어 댔다. 음란한 휘적거림에 목 안쪽에서 신음이 끓었다.

어깨 너머로 셔츠의 한쪽이 젖혀졌다. 드러난 어깨 위를 깨문 그는 곧장 가슴으로 내려갔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말캉한 유두를 이리저리 꺾으며 간지럽혔다.

“으으….”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억제하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한 팔은 계속 그의 목을 붙잡고, 다른 한 팔을 뒤로 짚어 상체를 지탱했다.

아래에서 위로 톡톡 쳐올리기만 할 뿐, 좀처럼 원하는 만큼의 자극을 주지 않는 짓궂음에 발끝으로 시트 위를 문질러 대야 했다.

유두에 집중한 그의 풍성한 속눈썹을 내려다보다, 결국 한쪽 가슴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빳빳해진 유두가 그의 입술에 닿아 있는데도 그는 입을 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어깨를 양쪽으로 번갈아 비틀어 가며 그의 입술에 스스로 유두를 비볐다. 목을 안고 있던 손으로 단단하게 뭉친 어깨와 뒷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새삼스럽게도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 무결한 얼굴에 유두를 비빔으로써 내가 그에게 성적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섹스 시에 이루어지는 어떤 직접적인 행위보다 더 야릇하게 느껴졌다.

“해 줘요….”

솔직한 고백의 속삭임은 애절했다.

그를 품에 꼭 안듯이 더 가까이 가슴을 들이밀었다. 육감적인 입술 사이에 완전히 파묻혀 유두가 보이지 않았다. 켜켜이 쌓여 오다 거의 최대치에 오른 흥분 때문에 나는 이미 그의 부추김 없이도 경로를 이탈하고 있었다. 만지는 것만이 아니라, 만지지 않는 뜸 들임까지도 자극이 될 수 있는지 몰랐다.

“흣!”

한순간 그가 입술을 오므려 물고 있던 유두를 빨아들였다. 돌기를 쥐어 짜내듯 압축하는 강한 힘에,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고개를 젖혔다.

입술로는 꼭지를 조이면서 혀끝으로는 끄트머리를 긁어 대던 그는 곧 유륜 전체를 넓게 머금어 씹어 댔고, 민망한 마찰음이 샐 만큼 강하게 가슴을 빨아들였다.

갈증의 해소와 함께 전신을 간지럼 태우듯 자릿자릿한 쾌감이 몰려왔다. 그의 목을 안은 채 이중으로 높이 쌓아 놓은 등 뒤의 커다란 베개 위로 쓰러졌다.

그가 내 몸 위에 겹쳐지면서, 틈 없이 밀착된 전신이 만족감을 주었다. 나의 성기가 그의 윗배에 쓸렸고, 그의 성기가 안쪽 허벅지에 닿았다. 그가 허리를 돌리기 시작하자, 접촉은 곧 마찰이 되었다.

공기가 새는 소리가 삑삑거릴 만큼 열정적으로 유두를 빨면서, 그가 오른쪽 무릎을 내 허벅지 안쪽으로 넣어 바깥으로 밀어내 다리를 벌리게 했다. 단단한 허벅지가 양 엉덩이의 바깥쪽으로 파고들었다. 굵직한 성기가 회음에 바짝 밀착되었고, 아래와 아래가 맞닿자마자 그는 바로 허리를 흔들어 댔다.

당장 넣고 흔들고 싶다던, 열기 가득한 발언을 연상시키는 행위에, 나 역시 그와 성기를 통해 이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어쩔 수 없었다.

타인의 성기를 몸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느끼는 쾌감에 대해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그것을 원하는 자신이 낯설었지만, 지난번 그의 침실에서 내가 보였던 반응들을 돌아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모든 방면에서 억제하고 모른 척해 왔던 욕구들이 성적인 측면에서 비뚤게 폭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혹은 어쩌면, 그가 원하는 행위라면 무엇이든 응하고 싶은, 철없이 위험한 맹목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 역시 그를 원했다. 무언가를 더 보태거나 뺄 것도 없이 그 자체가 이 순간의 나를 지배하는 원리이고, 규칙이었다. 강제나 강요에 의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맞닿은 배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그가 벌려진 다리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어 애널 위를 더듬었다. 순간, 안고 있던 그의 목을 놓치고 어깻죽지를 아프게 비틀어 쥐었다.

“왜 꼼지락거려요.”

젖꼭지를 놓고 위로 올라온 그는 내 입술의 윤곽을 혀로 핥으며 슬쩍 웃었다. 허리를 흔들며 가랑이에 성기를 치대는 외설에 달아오른 나의 반응을 알아채고 그것을 즐기는 얼굴이었다. 언뜻 야비해 보이는 그 얼굴이 싫지 않았다.

“여기… 자꾸 움찔거리고 있잖아요. 꼭 뭘 기대하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내부에 손가락을 밀어 넣을 것처럼 입구의 살을 지그시 누르던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찌푸려진 눈꺼풀 끝에서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입구 주변을 샅샅이 더듬던 그는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예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아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 읏.”

무언가를 찾는 듯한 손길에는 질척거림이나 음란한 의도가 거의 배제되어 있었지만, 이미 민감해진 육체는 거의 의료적일 정도로 색기 없는 손길에도 흠칫거리며 떨어 댔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지. 불안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달떠 있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밑을 문지르고, 애널 주변을 특별히 더 꼼꼼하게 누르고 비비면서, 그는 미간을 모은 채 내 눈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알 것 같았다.

내가 오메가일지 모른다고, 그는 여전히 의혹을 완전히 거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에는 알파·오메가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아마도 나의 다리 사이에서 오메가의 애액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베타니까 페로몬을 아무리 흘려 봤자 쓸데없는 짓이라고.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의 입으로 금발의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으면서.

아니면, 내가 오메가이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잠자리에서도 페로몬을 사용하지 않는 알파였으니, 굳이 내가 오메가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애널 안으로 살짝 손끝만 밀어 넣어 크림을 찍어 내듯 돌려 빼는 것으로 마침내 탐색을 끝낸 그가 다리 사이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손을 바로 내 눈앞에서 혀로 핥고 냄새 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혀로 문지르며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음란한 환각을 유도하는 향기라도 흡입하는 것처럼 황홀해 보였다. 분명 아무것도 묻지 않은, 그저 손가락일 뿐인데.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자신의 손으로 내 얼굴을 뒤덮었다. 긴 손가락은 뺨을 가로질러 눈의 일부를 가렸다. 눈을 깜빡이자 그의 손가락에 속눈썹이 쓸렸다.

그대로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을 사이에 두고 내 입술을 핥았다. 입술 안으로 파고들어 뒤쪽의 점막을 건드리는 혀끝에 나 역시 환각에 빠진 듯 몽롱해졌다. 주춤거리며 혀를 내밀어 뜨겁게 젖은 그의 혀에 마주 비볐다. 그의 혀야말로 마르지 않는 향기의 젖줄 같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중지와 약지 사이에서.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듯 서로의 혀를 찾고 탐했다. 이게 뭐길래. 그의 손가락을 사이에 둔 것만으로도 키스는 더 애틋해지고 더 강한 자극성을 띠었다.

고조되는 초조함에 허리를 들썩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긁고 깨물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의 상승과 타오름을 눈에 담았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배 속이, 정확히는 애널의 안쪽이 움찔거리는 감각이 진해졌다. 가랑이와 허벅지 안쪽에 문질러지는 그의 성기는 지나치게 존재감이 분명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허리를 은근하게 비벼 올 때마다 음경의 꿈틀거림이 금방이라도 속살을 파고들 듯했다.

“흐으, 흣….”

더 깊이 비벼지고 싶은 욕구에 스스로 허리를 비트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무런 예고도 망설임도 없이 공중을 향해 발목을 들어 올려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읏.”

진지한 표정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오히려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천장을 향해 넓은 브이 자로 활짝 벌려진 다리는 이렇게 무력했었나 싶게 그에 의해 인형의 다리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고개를 깊숙이 기울여 가랑이를 들여다보는 진한 시선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지난번엔 제대로 보질 못해서.”

이 민망한 관찰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허스키했다.

“내 혀로 핥고, 성기로 드나들 곳인데, 잘 봐 두는 게 기본이죠.”

“뭐, 뭐로 핥…!”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이번에는 발목을 어깨 쪽으로 밀어 올렸다. 무릎이 굽혀지면서 몸이 반으로 접혔다. 상체를 일으키려는 힘은 발목을 찍어 누르는 무게에 의해 와해되었다.

내 무릎 사이에 내 얼굴이 있었다. 성기와 고환, 애널까지… 평소 어딘가에 늘 감춰져 있는 다리 사이가 위를 향해 훤히 공개되어 있었다. 이런 자세를 취해 본 적이 있기는 한지 기억도 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시도해 볼 일이 없는 민망한 자세에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민망함과 수치심이… 그와 내가 지극히 사적인,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행위에 몰두하고 있음을 더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디퓨저의 향처럼 방 안 전체에 내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향기에 머리가 둔해져 수치와 쾌감을 구별할 수 없게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너무 강한 향기는 두통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나른하고도 몽롱한, 그러면서도 한순간 예리하게 쾌감의 핵심을 잡아채는 감각은 두통과는 성격이 달랐지만,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거부하며 버둥거릴 틈도 없이 곧바로 그가 내 허리를 붙잡고 끌어 올렸다. 베개 위에 묻혀 있던 상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가면서, 반대로 하체는 위로 들어 올려졌다.

위를 향해 훤히 드러난 다리 사이가 그의 가슴 높이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가 고개만 조금 숙이면 마음대로 들여다보고 혀를 비빌 수 있는 위치였다.

한구석, 연약하게 남아 있는 이성의 잔재를 쥐어짰다. 이 정도 시도도 하지 않으면 행위가 끝난 뒤의 자신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는 듯이.

손을 뻗어 다리 사이를 가리는 것으로 그를 저지해 보려 했지만, 그가 좀 더 빨랐다. 고개를 숙이고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뒤집힌 고환 아래의 회음을 길게 긁었다.

“하으, 흑.”

전신을 짜릿하게 후려치는 감각에 공중에 뜬 종아리가 버둥거렸다.

“이거, 스스로 만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더 흥분되는데.”

뒤늦게 애널 위를 더듬거리는 내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면서 그가 말했다. 방해하려는 시도라면 오히려 역효과라고.

내 손가락 사이로 애널 위를 혀로 누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 장면에 대해 내가 수치심보다 더 강한 짜릿함을 느끼고 있음에 가벼운 자조가 밀려왔다.

“아직 부끄러워요?”

“흐, 흡.”

입구 위를 진하게 핥은 뒤 혓바닥 전체를 이용해 강하게 비벼 대면서, 그가 질문했다.

“걱정 마요. 금방 다 잊어버리게 될 거예요. 지난번처럼.”

그는 안으로 촘촘하게 빨려들어 가듯 다물어진 입구의 연한 피부를 이로 긁고, 물고, 깨물었다. 뻑뻑,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아들였다 놓기를 반복하는 사이 회음 전체가 그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경직되었던 애널 주변의 근육이 흐물흐물해지고, 몸이 느슨하게 벌어지는 감각이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녹여 냈다.

내 입술에 쏟아 놓았던 키스와 똑같은 과정을, 그는 나의 아래에…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부위에 반복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힘을 주어 발기시킨 혀가, 위에서 아래로, 서서히 내려와 안을 파고드는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다리 사이에서 그가 벌이는 모든 입맞춤과 흡입과 마찰, 삽입의 과정을 나 역시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체위였다.

더는 진입이 불가한 위치까지 내려간 그의 혀가 끝을 구부려 내벽을 긁으면서 빠져나왔다. 입구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상태에서 다시 또 안을 파고들었다.

“흐으으… 흐….”

다리 사이를 드나들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젖은 혀의 움직임에 시트를 틀어쥐었다. 가만히 누운 채로도 숨이 차올랐다. 거꾸로 뒤집힌 성기는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부풀어 움찔거리고 있었다.

속도를 더해 빠르게 안을 쑤시는 혀의 압박에 호흡이 더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넓은 침실은 혀와 내벽 사이의 젖은 마찰음과 신음이 뒤섞인 헐떡거림으로 가득했다.

“아, 시… 싫어… 흐읏, 그거 싫…!”

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채 내벽 안에서 날름거리며, 그가 나를 발버둥 치게 만들었다. 긁을 수 없는 곳에 가해지는 근지러운 자극에 나는 허리를 튕기며 거의 울부짖었다.

차라리 세게 문질러 달라고, 아프게 해 달라고, 잔뜩 조인 목소리로 그에게 애원했다.

애원하는 나를 초조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그는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점막을 할짝거리던 혀끝이 마침내 빠져나갔을 때, 내 가슴은 단거리를 전력으로 주파한 것처럼 빠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아직 셔츠를 완전히 다 벗지 못한 등 뒤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그가 허리를 좀 더 바짝 당겨 안으며 회음에 코와 입을 묻고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오래전에 숨겨 두었던 소중한 물건의 흔적이라도 찾는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타구니 전체를 물고 빨았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푸르게 번뜩이는 눈빛과 경직되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넓은 어깨가, 그 역시 평온하지 않음을, 이 전희로 인해 이성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말랑한 피부를 콧속으로 빨아들일 것처럼 흡입한 그가 회음에 완전히 얼굴을 묻은 그대로 눈을 치켜떠 나를 내려다봤다.

분명 이쯤에 묻어 뒀는데, 어디에도 찾는 것이 없다. ―그런 얼굴이었다.

“서이현 씨.”

“…….”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괴롭힘일까. 아니면 애무의 일부일까.

저런 잘생긴 얼굴과 듣기 좋은 목소리로 해 주기 때문에, 은밀한 부위를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이런 체위에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런 맥락 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아직 가라앉지 않은 호흡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뭡니까, 당신.”

무엇에 대해 묻는 거지.

부옇게 흐려지고 발갛게 달아오른 의식 속을 뒤적여 대답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마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에게 활짝 공개되고 문질러지고 들쑤셔지는 것으로 타올라, 더 깊이 닿기를, 더 깊은 곳이 겹쳐지고 비벼지기를 원하는, 그것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분명한 조각일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코와 입을 회음에 깊이 묻고 얼굴을 비비면서, 그가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와 입술을 번갈아 사용해 애널 주변을 잘근거리고, 높고 딱딱한 콧대로 연한 속살을 찔러 댔다.

아무래도 그는… 내 사타구니가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찰싹 붙어서 물고 빨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배 속이 움찔움찔 당기면서 나도 모르게 아래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애널 안에서 달콤한 즙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그가 또 입구를 머금고 안에 든 것을 짜내 마시듯 오물거리며 빨아들였다.

“이렇게 냄새를 풍기면서… 아니라는 거지.”

의식이 흐릿한 상태라 확신할 수 없었지만 대충 그런 내용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는 마침내 내 허리를 매트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팔을 들어 얼굴의 땀을 훔쳐 내면서 내 옆을 지나 침대의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번들거리는 그의 발기한 성기가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숨을 몰아쉬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아마도 원한다는 듯 젖어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침대 옆 협탁 서랍을 뒤져 튜브를 하나 꺼내 왔다. 젤이었다.

왼쪽 다리를 내 어깨 쪽으로 길게 뻗은 채 허리를 다시 들어 올려 나를 고쳐 안은 그는 다리 사이에 넓게 젤을 짜냈다.

“으….”

뜨겁고 축축하게 달아오른 피부 위에 닿는 약간 차가운 촉감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나를 힐끔 내려다봤을 뿐, 고환과 성기로, 둔부 사이의 골로 흘러내릴 만큼 묵묵히 젤을 듬뿍 쏟아 냈다.

금방 미지근해진 끈적한 액체가 연한 피부 위를 미끄러지는 감촉만으로도 공중에 들린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움찔거릴 때마다 모양을 달리하고 있을, 그리고 그 변화를 그의 눈앞에 전부 공개하고 있을 구멍의 입구가 훤히 그려졌지만, 반응을 멈출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사타구니 전체에 젤을 펴 바른 그는 오른쪽 엉덩이를 깨물면서 중지로 애널 입구의 한쪽을 지그시 눌렀다.

“흐읏, 흐….”

입구가 벌어지면서 액체가 흘러들어 오는 감각에 엉덩이를 양쪽으로 비틀었다. 구멍이 더 벌어지면서 젤이 새어 들어왔고, 그 틈을 타 미끈거리는 액체와 함께 손가락이 부드럽게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혀가 들어올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안에 뼈와 관절을 가진, 혀보다 더 단단하면서도 더 유연한 부위에 의해 입구가 벌려지고 내벽이 문질러지는 삽입의 감각이 또렷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입구에 턱 걸리는 느낌이 났고, 그가 손목을 한 바퀴 돌려 점막을 훑어 냈다. 간지럽히듯 손끝으로 안쪽을 살살살 긁는 감각에 둔부의 근육이 움찔거렸고, 그 움찔거림에 저절로 아래가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무의식적인 수축에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중엔, 이러면 안 돼요. 이렇게 조이면… 끊어져.”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흥분을, 흥분을 최대한 억제해 가며 내 몸을 천천히 열어 가려는 배려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무의식적 조임이 그를 자극한 것 같았다. 안을 드나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미간을 모으고 어금니를 꽉 다문 그의 표정은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은 거대한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 같았다. 허리를 안은 팔에도 힘이 들어가 살갗이 쓰릴 정도였지만, 그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단지 손가락 하나일 뿐인데, 위에서 아래로, 힘의 낭비 없이 수직으로 안을 쑤시는 빠른 속도에, 그가 손가락이 아닌 허리나 하체의 힘으로 내리누르는 것처럼 전신이 들썩거렸다.

“으으, 응… 흐읏, 흐….”

드나드는 박자에 맞춰 덜덜거리는 숨결이, 다리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음란한 드나듦을 그대로 연상시켜 외설스러웠다. 점막과 손가락 사이에 스며든 젤 때문에, 행위가 일으키는 효과음은 질퍽하고 적나라했다.

그의 신체 일부가, 입에 담을 수 없이 은밀한 부분을 통해 내 몸속을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 그가 성난 짐승처럼 큰 숨을 몰아쉬면서 내 안을 빠르게 쑤시는 행위에 몰두하고 흥분해 있다는 것.

―그것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성기가 움찔거리면서 사정 직전의 짜릿함과 비슷한 상승의 감각이 밀려왔다.

“부드럽네. 베타라는 게 말이 안 될 정도인데?”

팔꿈치를 직각으로 세워 손가락 개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안을 쑤시면서, 그는 오른쪽 엉덩이를 계속 깨물었다.

“그래도 진짜 섹스를 하려면 이걸로는 안 돼요. 더 벌어져야 돼.”

그는 이제 다급해 보였다.

나를 애무하고 아래를 여는 내내 그의 성기는 내 등을 찔러 오고 있었다. 아무리 알파의 성적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흥분 상태에서 이만큼을 버텼다면, 이젠 성기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일 게 분명했다.

그가 나의 하반신을 내려놓으며 젤을 다시 집어 들었다. 위로 들려 있을 때보다 다리를 좀 더 오므릴 수 있었다. 다리의 위치가 편안해지면서, 애널 주변 근육의 긴장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피부 위에 직접 젤을 뿌리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에 덜어 낸 젤을 그가 부드러운 속살 위에 문질러 덧발랐다.

“흐으, 으.”

계속된 애무로 완전히 예민해진 다리 사이는 그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쳤다.

좀 전보다 더 굵어진, 개수를 더한 손가락이 무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왔고, 더 많은 양의 젤을 안으로 밀어 넣기 위해 그가 내부에서 손가락을 양쪽으로 벌렸다. 숨을 크게 몰아쉬며 신음할 때마다 구멍이 움찔거리면서 찔끔찔끔 젤이 스며들었다. 그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애널이 이렇게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 으, 흐….”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점막을 둥글리며 서서히 깊이 들어서는 손끝에 허리가 들렸다.

나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점막 전체에 젤을 골고루 펴 바르듯 내벽을 더듬으면서.

나의 오른쪽 어깨 옆으로 왼쪽 다리를 길게 뻗은 상태에서, 그가 나의 두 다리를 모아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의 손이 허벅지 사이에 끼일 정도로, 이번에는 다리가 다물려졌다.

“으으으… 흐으….”

그 상태에서 깊숙이 꾸우욱 찔러 오는 손가락의 진입에 턱이 쳐들리고, 공중에 뜬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끝까지 들어온 상태임에도 더 안으로 파고들길 원하는 듯 그가 양쪽으로 번갈아 가며 반복해서 손목을 돌려 댔다.

그리고 난타가 시작됐다.

먹기 좋은 상태로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은 상태의 내부를, 빠른 속도와 강한 압력이 미친 듯 들락거렸다.

손가락이 아닌 어깨와 팔의 힘 전체로 나를 밀어 올리는 힘에, 탈수 모드의 세탁기 안에 들어간 것처럼 숨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을 곧게 펴서, 혹은 구부려서, 입구 주변에서 얕게, 혹은 주먹을 밀고 들어올 것처럼 깊숙이 퍽퍽.

방향과 깊이를 달리하며, 그러나 한결같이 빠른 속도를 유지한 채 끈질기게 아래를 공략하는 삽입에, 나는 무엇에 대한 반응인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음했다.

“하… 아, 하아윽….”

엉덩이가 들어 올려져 근육이 당겨져 있을 때보다 모든 긴장이 풀어진 채 늘어진 상태에서 삽입당하는 쪽이 훨씬 더 자극이 강했다. 근육이 느슨해져,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이물에 대해 저항할 힘이 거의 없었다.

그가 밀고 들어오면 밀고 들어오는 대로, 벌써 내부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점령당해 아래가 가득 찬 듯 낯설고도 자극적인 이물감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더듬어 오른쪽 어깨 옆으로 뻗은 그의 종아리에 팔을 감았다.

“기, 깊으… 너무 빨….”

어떤 말도 완성형이 되지 못하고 끝이 잘려 나갔다. 조절되지 않는,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숨은 변명의 여지없이 교성으로 들렸다. 흔들리며,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는 눈길에 촉촉한 물기가 배어들었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 역시 광채로 번들거렸다. 나를 흔드는 그의 오른팔에 핏줄이 뚜렷하게 일어서 있었다.

“으읍, 흡. 흡!”

한순간 손가락 끝을 구부려 어떤 지점을 강하게 짓누르며 일으키는 생소한 감각에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켰다.

짧은 번개처럼 몸속을 때린 전율에 그의 종아리에 이를 박고, 딴딴하게 뭉친 허벅지를 정신없이 문지르며 애무했다.

“미치게 하네 진짜.”

“흐읏!”

물을 가득 받은 욕조의 바닥에서 마개를 단번에 확 뽑아 버리듯, 욕설을 뱉으며 그의 손이 아래에서 쑥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빠르게 자세를 바꾸어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밀어 넣었다.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힘에 의해 다시 다리가 벌려졌고, 그 사이에 무릎을 꿇은 그가 자리를 잡았다.

벌린 허벅지를 나의 허벅지 아래로 밀어 넣으며 그가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굵기와 길이로 대강 연상할 수 있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지금 그의 페니스가 유지하고 있는 꼿꼿한 각도는 말이 되지 않았다. 땀에 젖은 무성한 음모 사이에서 솟아난 그것은 도저히 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음경의 중간쯤을 쥐고 귀두를 입구에 조준한 그는, 두툼한 귀두에서 번들거리는 쿠퍼액을 입구 주변에 여러 번 문질렀다. 마치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삽입을 가능하게 도와줄 마법의 미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그는 몇 번이나 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오래 이어진 애무로 축 늘어진 내 손을 붙잡아 당겼다. 몸을 일으킨 나는 자연스레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되었다.

반은 벗겨지고 반은 입혀진 나의 셔츠를 뒷덜미 쪽에서 잡아당겨 벗겨 내면서, 그가 쇄골과 윗가슴에 입을 맞췄다.

“아프지 않게 하려면 이 자세가 제일 좋아요. 아프지 않은 만큼만 들어가게 해 줘요. 나도 내 사이즈를 아는데, 양심이 있지. 그거면 난 불만 없어.”

내려다보는 내 눈이 불안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 손을 붙잡아 마주 비벼지고 있는 우리의 사타구니로 가져가 스스로 구멍을 더듬어 확인하도록 했다.

“봐요, 아직 벌어져 있어.”

내 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이 겹쳐져 함께 입구를 지분거리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야릇했다. 눈꺼풀이 가늘게 경련하면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가 그 부푼 가슴에 입술을 비비다 턱을 들어 나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안쪽은 더 부드러워. 기대돼서 미치겠어.”

아랫입술을 빨아들여 짓씹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꿈을 꾸듯 젖어 있었다.

무릎으로 간신히 버티고 서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췄다. 음경이 밀려나지 않도록 그가 아래에서 기둥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젖은 귀두가 입구를 벌리며 서서히 진입하는 감각은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던 부분이 외부의 힘에 의해 억지로 벌려지고 채워진다는 실감은 생생했지만, 그것이 아픔이나 고통, 불쾌감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나의 의식이 아래에 집중되지 못하도록, 그는 계속해서 키스를 유도했다.

타액을 주고받고, 혀를 비비고, 볼 안쪽의 연약한 점막을 혀끝으로 더듬는 간지러운 감각을 음미하며… 향기에 흥건하게 젖은 솜뭉치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나신은 그 자체가 향기였고, 그에 의해 핥아지고, 벌려지고, 채워져 가는 나 역시 이제는 완전한 향기의 일부였다.

우리를 둘러싼 향기의 겹이 두꺼워져 갈수록 흥분의 밀도도 촘촘해졌다. 전에 없었던 높은 강도의 성적 흥분이 일시적으로나마 모든 고통을 마비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후… 후우, 으.”

나의 찡그림, 입술을 물었다 놓치는 짧은 감탄, 한순간 무너지듯 고개를 숙이며 그의 어깨를 쥐어뜯는 쾌감의 호소까지.

자신을 받아들이며 내가 보이는 모든 반응들을 그는, 감시하고 기록하듯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의 바닥까지, 육체의 바닥이든 정신의 바닥이든, 그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가슴속이 부글거릴 정도였다.

페니스가 내 안으로 더 삼켜질 때마다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뜨며, 아… 달콤한 신음을 흘리는 그의 얼굴을 볼 때면, 감질나도록 천천히 진입하고 있는 그의 것을 단번에 푹 찔러 넣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더… 세게 빨아 줘요.”

충동을 참기 위해 그에게 고통을 요구했다. 아랫입술을 핥고 있던 그는 입술 안쪽의 점막을 아프게 깨무는 것으로 즉각 요구에 응했다.

“내가 이걸… 언제부터 기다렸을 것 같아요?”

기둥을 쥔 채 가끔씩 위로 올라와 애널 주변을 애무하고 입구를 벌려 삽입을 돕던 그의 손이, 접합된 부위를 일부러 음란하게 더듬으며 물었다.

오래 참았다고 생각한다.

테라스에서의 키스만으로 발기해 버렸던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길게 이어진 전희 내내 그는 성기로 몰린 열기를 발산하고 싶은 욕구를 억제했었으니까.

“봐요,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입술 전체를 머금고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그가 또 한 번 내 손을 아래로 이끌었다.

귀두만 들어가더라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신체의 적응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흉포해 보일 정도의 사이즈를 가진 그의 음경이 3분의 1 이상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빠듯하게 들어차는 느낌은 확실했지만 고통이 희미했기에 이 정도로 진행됐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교접 부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려 엉덩이를 내려다봤다. 그 행위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때까지 내가 스스로 움직이도록 기다리고만 있었던 그가 허리를 쳐올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신기해요? 난 잘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잘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성기를 집어삼키고 있는 애널 입구의 벌어짐을 확인하도록, 그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이어진 부위의 질척거림을 함께 더듬었다. 그 행위의 에로틱함에 허리를 들썩이며, 더 깊은 곳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내 상상력이 이렇게 빈약했었나.”

그가 슬며시 웃으며 내 안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표시했다. 웃고 있기는 했지만, 폭주하고 싶은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상상했었다는 것일까.

답변을 듣지 않아도 상상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또다시 허리가 비틀렸다.

윽. 페니스를 짓씹는 조임에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세워 아래턱을 깨물었다.

“여기부터, 내가 할게요.”

흘러내려 눈을 가린 그의 머리카락을 대신 쓸어 넘겨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사탕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낸 아이처럼, 그가 급하게 덤벼들었다. 키스와 함께 한순간 몸이 떠올랐다, 그대로 침대에 몸이 눕혀졌다.

“아프게 하느니 자위를 하고 말지. 절대 아프게 할 일 없으니까. 무서워하지 마요. 응?”

쪽, 입술 표면에 입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무거운 육체가 가슴을 누르며 매트와 등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엉덩이를 움켰다.

“참을 만큼 참았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가 둔부의 살집을 당겨 구멍을 더 늘렸다. 동시에, 불에 달궈진 두꺼운 철심을 안에 박은 듯 뜨겁고 단단한 그의 음경이 한 마디 더, 커다란 몸집을 내 안에 욱여넣었다.

“하흐, 흐, 흐으, 흡.”

호흡이 안으로 말리면서 배 속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성기를 찌부러뜨리는 듯한 압박에 내 안에 든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의 움직임이 그의 반응으로 직결되는 모습에,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실감이 생생했다.

“애들하고 같은 집에서 이러려면, 아무래도 불안했겠죠?”

“…….”

더운 숨결과 함께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아… 뒤늦게 멍한 감탄사를 흘렸다.

“아무리 방이 달라도 좀, 그렇잖아요?”

땀에 젖은 얼굴로 허리를 둥글려 하체를 찐득하게 비비면서, 그가 씩 웃었다.

늘 묵었다는 그의 아파트 대신 이 호텔을 준비한 것이 누나와 형을 위한 이벤트라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의 이런 밤을 미리부터 계획하고 호텔을 예약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같았다. 아마 반쯤은 농담이겠지.

그렇게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사이, 그가 온몸으로 나를 뒤덮으며 전신을 비벼 왔다. 두꺼운 가슴의 굴곡이 숨을 조이고, 또렷하게 쪼개진 퍽퍽한 복근에 성기가 눌렸다. 다리와 다리가 얽혀 서로를 구속했다.

나 역시 크고 작은 근육들이 굽이치는 넓은 등을 쓰다듬으며 마음껏 그를 만지고, 몸을 비틀어 음란한 마찰을 일으키는 데에 협력했다. 알몸으로 겹쳐져 서로 몸을 비비는 사이 피부가 녹아내려, 아래뿐만 아니라 전신이 질척하게 그와 뒤섞이는 듯했다.

처음에 그는 더 깊이 밀어 넣으려 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삽입된 상태에서 원을 그리듯 허리를 돌려 입구를 넓혀 갈 뿐이었다. 오히려 키스와 애무, 등과 허리, 엉덩이를 쓰다듬고 가볍게 꼬집는 장난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장난은 장난이 아니게 되고, 문질러지고 비벼지는 곳마다 진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빈틈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그는 허리를 들어 올렸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내 모든 것을 끌고 나가는 듯 내벽을 긁으며 물러섰다가 다시 양쪽으로 허리를 비틀면서 느리게 파고들었다. 단지 밀고 들어오는 것만이 아닌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차기를 반복하는 피스톤질에, 흐느끼는 것처럼 숨소리가 떨려 왔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았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상대의 얼굴에 떠오르는 삽입의 흔적을 모조리 지켜봤다.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듯이.

그의 허리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입구를 비비거나, 어깨에서부터 엉덩이까지 파도 같은 굴곡을 일으키며 꿀렁거리거나, 더 이상 밀어 넣거나 물러서지 않는 상태 그대로 잘게 털어 대기도 하며, 놀랍도록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안에서는 낯선 쾌감이 꿈틀거렸다. 치고 올라오며 확 타올랐다가 다시 멀어지는 경련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허리를 비틀리게 했다.

호소하듯 신음하며 그의 몸을 더 당겨 안았다. 경직된 뒷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불룩한 팔 근육의 윤곽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혀끝을 구부려 그의 혀에 걸어 비벼 댔다.

그의 허리가 귀두만을 남기고 빠져나갔다가, 쑤욱 밀려들어 왔다. 순간적으로 오므라들었던 내벽이 경련하며 곧 다시 벌려졌다. 저릿해지는 부위 위를 문지르며 지나가는 감각이 목을 쥐고 농락하는 것 같았다.

“흐으, 흐… 하으. 으.”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채 부끄러움도 잊고 코와 입술을 이용해 그의 향기를 흡입했다.

“내 냄새, 좋아요?”

그렇게 묻는 그의 숨소리도 고르지 못했다.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 역시 고개를 깊이 숙여 나의 귀와 목을 깨물어 댔다.

“네 냄새도… 미치게 좋아.”

상체는 나에게 바짝 붙인 채 아래만 빠르게 들썩거리면서, 그가 내 입술을 물었다.

“어디서 나는 거야? 여기?”

피가 터져 나올 것처럼 부어 버린 입술을 빨아 대며 헉헉거리는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완전히 날려 버린 상태였다. 푸른색이 희미하게 옅어진 눈동자 속에서 광채만이 번뜩거렸다.

“아니면, 여기?”

“하아, 흑.”

내 어깨를 붙잡고 아래로 당기면서 동시에 허리를 위로 밀어 올리는 힘에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 그의 귀두가 심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타구니에 그의 음모가 닿았다. 완전히 삼켜진 것이다.

몸속 가득 들어차는 압력을 더듬어 볼 틈을 주지 않고, 그는 곧바로 뒤로 빠져나갔다. 뚜렷한 형태를 그리는 귀두가, 저릿한 부위를 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곧 속도를 더해 강하게 문지르며 진입했다.

“하, 으… 그, 거기….”

그의 목을 계속 고쳐 안으며 입술을 물었다 놓치기를 반복했다. 몸 안에 불을 놓아 전신이 안으로 오그라들게 하는 것 같은 쾌감이 사지를 수축하게 했다.

미리 안을 채우고 있었던 젤과 그가 내 안에 흘려 놓았을 쿠퍼액이 뒤엉킨 끈적한 액체가 찌걱거리며 새어 나오는 소리에, 보지 않아도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삽의 장면이 생생했다. 머릿속의 모든 회로에 불이 붙어 사고가 정지되고 있었다.

“내 좆 보면 가랑이가 저리다며. 그거 가지고 섹스하니까 좋아서… 그래서 여기로 냄새 흘리는 거야? 씨발, 여기네…. 여기지?”

‘여기’를 강조할 때마다 아래를 끝까지 밀어 넣고 비벼 댄 그는 말끝에 나를 부숴 버릴 것처럼 몰아붙였다. 만약 내가 고통을 느꼈다면 폭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자비한 삽입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흔들었다.

섹스가 좋다고. 처음 알게 된, 그와 하는 섹스가 미쳐 버릴 것처럼 좋아서… 그의 냄새만으로도 몸이 욱신거리고, 그의 성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안달하게 된다고. 그의 말이 전부 맞다고. 나를 부숴 달라고.

……나는 그런 말들을 쏟아 냈다.

지난번처럼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인 것이 아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그가 나에게 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을 빨고, 그의 혀에 내 혀를 얽고, 허리를 비틀어 그의 성기를 자극하면서. 그런 믿기지 않는 말들을 지껄여 댔다.

「그의 살에 코를 대고 들이마시는 향기는 마약 같았다.」

나의 생각은 옳았다. 지난번에도, 지금도, 그와 함께 침대 위에 있는 나는 마약이라도 투약한 사람 같았다.

수치스러운 자세로 타인 앞에 가랑이를 드러내고, 음란한 속삭임에 열기를 느끼고, 또 그런 말들을 그의 귓가에 쏟아 내는 것으로 흥분하며… 본래의 자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성적 쾌락이 주는 전율에 몸을 맡긴 나의 상태는… 마약이 일으키는 작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얕고 막연한 지식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마약만이 아니라 세상에는 섹스 중독도 존재했다.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일상적인 리듬을 벗어난 변주가 주는 자극은 무엇보다 짜릿하니까.

내가 속해 있던 일상적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쏟아 놓은 말들에 그의 눈이 사납게 일렁거렸고, 깊고 거친 키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조심스러웠던 처음의 진입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제 내 몸이 완전히 열린 것을 확인한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쾌락에 약한 부위가 연속해서 비벼지는 갈증의 해소에 사정의 느낌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아랫배 사이에 갇힌 성기를 더 자극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더 끌어당겼다.

“으응, 흐. 하윽!”

다음 순간, 포악하게 목구멍을 틀어막는 그의 혀를 뱉어 내면서, 두려울 정도의 쾌락에 몸부림쳤다.

최대치로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던 음경이, 순간적으로 내벽 전체를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듯,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듯 크기를 부풀리며 확장하는 감각.

노팅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았어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배 속이 부풀면서 모든 장기가 위로 쏠리는 느낌에, 그의 혀를 밀어냈음에도 여전히 숨이 막혔다. 입을 크게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시려 애썼지만, 호흡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컥컥거릴 뿐이었다.

온몸의 혈관에 미세한 전기가 흐르듯 자릿자릿한 통증과 함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변형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 쾌감이 쿵쿵, 불길한 전개를 암시하는 효과음처럼 몸속을 울리며 가까워져 왔다.

육중한 바위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전신을 짓찧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둔탁하지만은 않은, 상상해 보지 못한 종류와 방향의 쾌락이었다.

타액이 입가로 흐르고, 확장된 동공이 공포 속에서 그를 찾았다.

본능의 명령대로, 절정의 느낌을 좇아 헉헉거리며 내 안을 헤집는 그 역시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손가락으로 안을 문질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기를 요구하듯 강압적인 성기의 삽입과 후퇴가, 빠른 속도로 나를 절정의 문턱까지 몰고 갔다.

전신이 끓어오르는 사정의 쾌감에 몸부림치며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아 깍지를 낀 채 시트 위에 내리눌렀다.

“흐으, 흑. 하흑. 으으!”

시트 위에 뒤통수를 문지르며 사정에 이르는 순간,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감각이 동시에 배 속을 때려 댔다.

알파의 사정.

내장을 난타하듯 강하게 분출된 정액은 노팅으로 빈틈없이 안을 메운 상태에서도 밖으로 새어 나올 만큼의 양이었다. 내벽이 흥건하게 젖어 들고 채워지는 느낌 속에서 나 역시 맞닿은 우리의 아랫배 사이에 정액을 쏟아 놓았다.

신음은 흐느낌에 가까웠다. 아니, 실제로 흐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꽉 눌린 채로도 전신이 덜덜 떨렸다. 아랫입술을 물고 정신없이 빨아 대는 그에게 무섭다고 속삭였다.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사정 후에도 계속해서 허리를 흔들어 쾌감을 유지하면서, 그는 내 얼굴 전체에 키스를 퍼부었다. 눈가를 유난히 정성스럽게 핥기에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에 의한 눈물이 아닌 생리적 반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을 의식하는 순간 복받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그게 정말 나에게 하는 말이 맞기는 한지. 여전히 본능에 잠식된 듯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심이 됐다. 깍지 낀 손에 마주 손가락을 얽으며 힘주어 붙잡았다.

공기 대신 후각을 마비시킬 듯 진동하는 향기를 호흡하며 아래를 맞댄 채 한참 키스에 열중했다. 노팅의 순간 들이닥쳤던 공포가 희미해졌을 때쯤, 문득 그가 모든 행위를 멈췄다.

그리고 아래로 팔을 뻗어 교접 부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재빨리 성기를 빼려 했지만, 아직 노팅 상태인 성기는 점막을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를 놓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어도, 7호 사이즈의 반지에 억지로 끼워 넣은 10호 사이즈의 손가락처럼 그는 내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알파로서의 사정이 가져다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깊이의 쾌락에 나른하게 해체되어 부유하던 그의 눈이 현실로 돌아와 차갑게 흔들렸다.

그는 강제로 페니스를 빼내기 위해 애널의 입구를 손으로 벌렸다.

낯 뜨겁게도, 안을 꽉 채우고 있던 두꺼운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힘겹게 빠져나가는 감각에도 나는 움찔거리며 오싹함을 느꼈다.

그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덤벼들어 내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을 넣어 안에 든 정액을 긁어내는 동안에도, 아직 시들지 않은 그의 성기는 꿈틀거리며 또 한 번의 자극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족히 스무 번 이상이었다. 어떤 상황을 앞에 두고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그가 베타를 대상으로 한 노팅과 사정이라는 행위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것이 이상했다.

불필요한 뒤처리라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나 역시 긴 전희 후에 이루어진 사정의 여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의 반응을 보니 후희를 즐기거나 두 번째 사정을 향한 새로운 흥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대표님은, 알파… 맞죠?”

“…….”

새삼스러운 질문이 되겠지만 서로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으니 일단은 그렇게 물었다.

“전 확실하게 베타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임신, 이라든가….”

그가 모든 것을 빼앗긴 듯 허망한 눈으로 말없이 한참 나를 응시했다. 힘없이 늘어진 듯, 삶의 초라하고 조잡한 뒷면을 마주한 듯 공허해 보이는 눈이었다. 커다랗고 견고한 그가, 순간 한없이 무력하고 연약한 소년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어떤 맑은 슬픔이 그의 눈에 고여 있었다.

“그래요…. 베타죠, 서이현 씨는.”

한참 만에야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의 눈은 멍하니 풀린 상태였다. 좀 전까지 우리가 그토록 달아올랐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내 다리 사이에서 손을 거둔 그가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문질렀다.

“아마… 안에 상처가 났을 겁니다. 베타인 서이현 씨는, 노팅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찢어지거나 쓸린 것 같은 통증이 없는지,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며 그는 내 상태를 걱정했지만, 아직까지는 아래가 얼얼한 허전함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저릿거리는 쾌감의 여운이 더 강했다. 휑하게 비어 버린 그곳을 그가 다시 꽉 막아 준다면 오히려 더 편안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염려와 달리 나는 특별한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가장 뜨거운 절정의 꼭대기에서 서로의 귓가에 외설스러운 말들을 속삭이다, 한순간 현실적인 문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상황의 전환에 몸이 움츠러들고 얼떨떨했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듯한 그에게 다가가, 나는 괜찮으니까 하던 것을 계속하자며 손을 잡아끌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성기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탈력감과 함께 전신이 가라앉는 것 같은 졸음이 몰려왔다. 체력이 방전되고 진이 빠져 버린 것이다. 지난번과 같은 증세였다.

내일이 돼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라앉고 나면, 그때 몸 상태가 어떤지 얘기해 주겠다고. 지금은 일단 특별한 건 없다고. 그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얘기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허물지는 않았다.

더 그를 설득할 수도 없게 노곤한 잠이 쏟아졌다. 내 얼굴에서 졸음의 흔적을 발견한 그가 어깨를 눌러 다시 눕게 했다.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일단 물러선 그는 내 아래 깔린 이불을 빼내 알몸 위에 덮어 준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느리게 담배를 피우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좀 더 보고 싶어 눈꺼풀을 힘주어 깜빡거렸다. 심란함 속에 그를 혼자 두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졸음은 폭력적일 정도로 나를 잡아끌고 있었다.

방금까지 열정적으로 몸을 겹쳤던 상대에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심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 같은… 그런 혼란스럽고 복잡한,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공포마저 어린 듯한 시선.

그것이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이었다.

■ ■ ■

전화벨 소리였다. 핸드폰이 아닌 전화벨 소리임을 자각하는 것으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의식했다.

눈을 뜨기 전에 머리가 먼저 잠에서 깨어났지만, 전신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한참을 엎드린 채로 끙끙거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전화벨 소리는 끈기 있게 나를 기다렸다.

눈을 떴을 때, 침대 위에는 나 혼자였고,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실내는 완전히 어두워 대강의 시간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단 전화를 받아야 했다.

“여보세요.”

팔꿈치로 침대 끝으로 기어가는 동안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었지만,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발신인은 호텔의 직원이었다. 잠깐 일어나 가볍게나마 식사를 하고 다시 자는 게 좋겠다고, 나를 깨워서 뭐라도 먹게 해 달라고… 그가 부탁했다는 내용이었다.

식욕이 있는지를 생각해 봤지만, 전혀 아니었다. 입 안이 까슬한 것뿐 아니라 모든 장기가 원래의 자리를 벗어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게다가 뒤…에는 여전히 그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묵직한 팽만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호의도, 내가 거절함으로써 그에게 부탁받은 직원이 처할 수도 있는 난처한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은 계속 그의 거실에 모여 함께 먹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지. 분명 11시에는 호텔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몇 시인 건지. 생각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거실에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되었으니 가운만 걸치고 편하게 나와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통화는 끝났지만, 한동안 수화기를 든 채로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거실에서는 이미 식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일단 몸의 상태부터 체크했다.

잠에서 깨어날수록 몸의 불편함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장기뿐만 아니라 모든 뼈마디가 어긋나 있는 것처럼 욱신욱신 저려 왔다. 심한 몸살을 앓을 때처럼 몸이 무겁게 처지는 와중에, 특히나 애널의 입구와 그 안쪽이 화끈거렸다. 다리 사이에서 독립적인 맥박이 따로 펄떡거리는 것 같았다.

그 생생한 통증이, 어쩔 수 없이 어젯밤의 정사를, 내 안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노팅과 사정에 이르렀던 그와의 열정을 연상시켜, 혼자였음에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가 한참을 긁어냈음에도 미처 다 빼내지 못한 사정의 흔적이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생경한 감각에, 으으… 신음과 함께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평소보다 훨씬 도톰하게 부어 있는 입술의 부피감에 놀라, 손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키스로 인해 입술이 부푼다는 것은, 입술이 부풀 정도로 키스를 한다는 것은, 포르노 비디오나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 내 입술은, 조금 과장하자면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그 팽팽함이 밤새 내 입술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그의 흡입과 입맞춤을 연상시켰다.

키스도 삽입도 없었던, 그래서 다음 날 아무것도 몸에 남지 않았던 지난번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 몸의 모든 부분이 어젯밤의 증거였다.

바닥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훔쳐 낸 뒤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서둘러 거실로 나갈 생각이었지만, 안에 든 것을 완전히 처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상태에서 가운을 걸쳤다. 언제 방을 나갔는지 몰라도, 그가 내 옷을 전부 보기 좋게 개켜 창가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지만, 셔츠의 아래쪽 단추가 전부 뜯겨 나간 상태라 어제 입었던 옷을 입는 것은 불가능했다.

키스와 애무를 나누는 동안 이미 선액을 흘렸던 탓에 속옷의 앞쪽이 축축했지만, 그것을 다시 집어 입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리 가운을 걸쳤다 해도 타인 앞에서 속옷을 입지 않을 용기는 없었으니까.

옷을 정리하면서 아마도 그가 젖은 속옷을 확인했을 거라 생각하니, 숨겨 둔 야한 책이라도 들킨 것처럼 낭패감이 밀려왔다. 젖은 속옷 하나에 부끄러워하기엔 그보다 더한 일들을 한 뒤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직 남아 있는 불편한 이물감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침실을 나섰다. 세로로 긴 거실 전체에 흘러넘치는 강렬한 여름 햇살을 보니 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것 같았다.

우리가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마다 도와주셨던, 그의 전속 버틀러인 중년의 남성분과 앞치마를 두른 유니폼 차림의 다른 직원 두 분이 식탁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가볍게 뭔가를 먹고 다시 자는 게 어떻겠냐던 제안과 달리, 서양식과 홍콩식의 아침 식사가 모두 차려진 식탁 위는 스푼 하나 더 올려놓을 자리도 없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식탁 옆 카트에도 다른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운을 입은 팔을 문지르며 어색함 속에 인사를 한 뒤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신선한 주스를 먼저 권하기에 직접 짠 듯 알갱이가 살아 있는 오렌지 주스를 받아 들었다. 갈증이 났었는지 단숨에 한 잔을 다 비워 냈다. 식욕이 별로 없다면 새우가 들어간 죽이나 완탕이 어떻겠냐고 물어서 완탕을 먹겠다고 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비어 있던 흰 접시 위에 뚜껑을 덮은 완탕 그릇이 놓였다.

다음엔, 식사 전에 미스터 라우와 잠깐 통화를 하겠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분이 권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이 문득 우스웠다. 아니, 어쩌면 그분을 통해 그가 권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식사의 메뉴까지 그가 지정해 주지는 않았겠지만, 버틀러분을 통해 그가 나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버틀러분이 그와 연결된 전화를 건네주었다. 업무용 전화로 보이는 심플한 디자인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도 그에게 응답하는 것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네.”

[잘… 못 잤죠?]

잘 잤냐고 의례적인 인사를 하려던 그는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머쓱해하며 말의 방향을 틀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한 번도 안 깨고 푹 잤어요.”

[몸은 어때요. 언제라도 바로 가서 진료받을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이 한국어까지는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사 이후의 몸 상태에 대해 다른 사람 앞에서 얘기한다는 것에 진땀이 났다.

“괜찮아요. 그냥 뻐근한 거 외에… 특별한 상처 같은 건 없었어요.”

완탕 그릇 옆에 놓인 따뜻하게 데워진 자기 수저를 만지작거리면서 붉어졌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 사람 앞에서 얘기하는 것뿐 아니라, 맨정신에 지금의 내 몸 상태를 그에게 얘기하는 것 역시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갈 필요 없다는 내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잠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단은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비행기는 저녁으로 바꿔 뒀어요. 일정은 버틀러가 안내해 줄 겁니다. 좀 더 쉬다가 천천히 준비해요.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나왔지만… 공항까지는 직접 데려다줄게요.]

‘처리해야 할 급한 일’ 때문에 그는 내일 귀국하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다른… 분들은요?”

[원래 일정대로 떠났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변명할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요.]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그가 적당히 내 상태에 대해 둘러대 뒀을 것이다. 아마도 지난번과 비슷하게 몸이 안 좋다는 핑계였겠지. 이로써 팬텀 안에서 나는 병치레가 잦은 약골로 완전히 굳어지겠구나 싶었다. 딱히 원치 않는 이미지였기에 씁쓸했지만, 그 외 다른 변명거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병치레는 아니었지만 몸이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었고.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도 있으니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이만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다며 말머리를 돌려 버렸다. 입맛이 없어도 꼭 배를 든든히 채우라는 말과 함께.

입맛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먹으라던, 지난번에 그가 해 줬던 말이 생각나 어떻게든 완탕 그릇이라도 비우려고 노력해 봤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 식사를 하는 상황의 어색함에 아래의 불편함이 더해져 점점 더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위벽을 살짝 달래는 정도로 식사를 끝낸 뒤 양해를 구하고 커피만 한 잔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틀러는 마사지를 받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것 역시 그의 제안이라고 했다. 마사지라도 받으면 몸이 한결 가벼워질 거라고. 호텔 스파 소속의 테라피스트를 방으로 불러 편안하게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편안함을 느낄 리 없었다.

내 상태를 예상하고, 그가 미리 마음을 써 줬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분명 고맙기는 했지만, 그와 밤을 보낸 뒤에 주어진 이런 호화로운 대우에, 뭔가가 어긋난 채로 일이 돌아가는 듯한 삐걱거림을 느꼈다.

알람을 듣지 못하고 잠들었던 것은 내 잘못이지만, 그와 밤을 보낸 뒤, 그의 호텔 룸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고, 그가 나의 몸 상태를 고려해 일정을 미리 변경해 두는… 그런 배려까지는 불필요했다. 혹시라도 이것이 자신과 밤을 보낸 상대들에게 그가 관성적으로 공평하게 베푸는 친절이라면, 더더욱 내게는 이럴 필요가 없었다. 대가를 바라고 그의 성욕에 자신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원해서 응한 잠자리였으니까.

내가 묵었던 방의 짐도 완전히 정리되어, 실장님에게 빌린 기내용 캐리어가 현관의 복도에 옮겨져 있었다. 그가 데리러 올 때까지 이 방에서 쉬고 있으라는 것이 아마도 그의 마지막 지령인 것 같았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식사를 정리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그다지 편치 않은 마음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우선 커튼을 걷으려다 그만두고 대신 조명을 조금 밝혔다.

새삼스레 둘러보는 방 안에는 이런저런 그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식장 위에 쌓인 페어 관련 자료 파일, 협탁 위의 태블릿PC와 아마도 외출 직전 벗어 두고 갔을 소파 위에 걸쳐 둔 가운까지.

그리고 창가의 테이블 위에 담배와 라이터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가 피운 것인지 재떨이에는 대여섯 개의 꽁초가 꺾여져 있었다. 그가 이만큼의 담배를 피우고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방을 벗어나는 것을 전혀 몰랐을 정도로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혹은 내가 깨지 않도록 그가 조심스럽게 움직였거나.

내가 잠든 뒤 그는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는 했을까.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혼란과 허망함, 스스로에 대한 공포가 뒤섞인 그의 연약한 눈빛이 떠올라, 몸의 시끄러움에 이어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핸드폰을 켜면 아마도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 실장님의 걱정스러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을 거고, 오늘 귀국 후에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던 모래와 형에게 연락도 해 줘야 했다. 별것도 아닌 일들임에도 지금의 내가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일들처럼 부담스러웠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맙시다. 뇌의 스위치를 그냥 탁 꺼 버리는 것처럼. 할 수 있죠?」

그날 밤 그가 해 줬던 말을 떠올리며 일단 뇌의 스위치를 꺼 버렸다.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개의 일인용 소파 중 하나에 앉아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담배는 세계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는 흔한 글로벌 기업의 제품이었다.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것이 고작 담배 한 개비에 불과하더라도 허락 없이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대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아니, 이미 그런 행동을 했으니, 나는 의외로 때에 따라 허락 없이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있는 인간이었다.

자위조차도 귀찮다는 듯 무덤덤하게 치러 냈던 자신이 뜨거운 열정과 대담함으로 그와의 결합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으니 이 정도로는 놀랍지도 않았다.

“서울에 가면 한 갑 새로 사 드릴게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실없이 중얼거리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여전히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폐가 조여드는 감각에 눈이 찌푸려졌다. 기침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매끄럽게 빨리지도 않았다.

두세 모금 빨아들인 담배를 재떨이의 홈에 걸쳐 두었다. 느리게 피어오르는 가는 연기를 바라보는 편이 더 좋았다. 각도에 따라 회색으로도, 푸른색으로도 비치는 연기는 그의 눈을 닮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생각은 그를 향했다. 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지난밤 그는 친절했고, 경험이 없는 나를 배려해 폭주하고 싶은 욕구를 인내해 주기도 했다. 내 몸에 노팅했지만, 그의 반응으로 봤을 때 그 역시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베타였으니 노팅 상태에서 사정했다고 해서 임신할 염려는 없었다. 그의 걱정과 달리 내벽에 상처를 입지도 않았으니, 거기에 대해 그가 지나친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를 염려해 미리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해 주기까지 했으니, 밤을 같이 보낸 상대로서 그는 결코 매너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을 기점으로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두 성인이 합의하에 잠자리를 가졌고, 나 자신이 그 관계를 원해 스스로 이 방까지 왔으니, 그 이상을 손에 넣지 못했다고 누구를 원망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성적 끌림에 의해 충동적으로 가진 잠자리에서 희망적인 힌트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자신을 비웃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런 세심한 친절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아무런 설명이 따라붙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런 쪽으로 경험이 부족하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 혼자 착각하고 들뜰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래서 잠시나마 멍청하고도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다면, 이 방에 혼자 남아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의 연기 속에서 그의 눈빛을 떠올리는 지금, 기분이 좀 더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미 충분히 멍청한 것 같았다.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집어 코와 입술을 묻어 봤다. 재떨이에 걸쳐 둔 담배는 어느새 필터 가까이 타들어 가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회색 재를 부드럽게 재떨이에 비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 어디에서도, 그가 벗어 두고 간 가운에서조차 더는 그의 향기를 느낄 수 없었다.

■ ■ ■

뒷좌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슈트가 아닌 캐주얼 차림이었다. 해가 모두 져 버린 시간인데 자동차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잠시 의아하기는 했지만, 가끔씩 엉뚱한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라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아직 다리 사이에 남아 있는 둔탁한 통증과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은 듯한 감각 때문에 차 안에서 자리를 잡고 앉는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삽입 섹스 뒤에 이렇게 티를 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남성 베타의 몸으로 남성 알파인 그와 관계를 가졌다는 실감이 새삼스러웠다.

도어맨이 문을 닫고 차가 출발했다. 수키킴 선생님을 뵈러 갔던 날과 같은 기사님이었다.

“미안해요.”

자동차가 호텔 주변을 완전히 벗어나 고가로 진입할 때쯤 그는 의외의 첫마디를 꺼냈다. 그를 돌아봤지만, 선글라스 안의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일 불편했을 텐데.”

“다음 날 아무 이상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이제 정말 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쉬는 동안 많이 좋아졌구요.”

지금 내 몸의 불편함과 관련해 이 이상 그의 배려를 받는 것은 솔직히 거북할 것 같았다. 그가 우려하는 만큼 불편하거나 참지 못할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원해서 함께 밤을 보냈고, 그는 연인도 아닌 나의 아래를 충분히 풀어 주고 넓혀 주며 매너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하는 것이 오히려 내가 그에게 소비된 듯한 느낌이 들게 해, 가능하다면 듣고 싶지 않았다.

“서이현 씨는 씩씩하네요. 좀 더… 흔들릴 거라 생각했는데.”

손에 든 갸름한 종이봉투로 꼬아 앉은 다리 위를 툭툭 두드리면서, 그가 나를 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서이현 씨가 씩씩한 사람이라 다행입니다.”

그가 말하는 흔들림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고백을 주고받은 뒤 마음을 전하고 확인하는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섹스와 분위기에 취하고 서로의 매력에 끌려 충동적으로 갖게 된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한 번 자고 난 뒤의 친밀감을 연애 감정으로 혼동하는 흔들림이라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섹스는 흔들림의 계기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 상태가 안정이나 평온과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었다.

“그냥…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야 하잖아요.”

좋든, 싫든.

혼잣말처럼 그렇게 덧붙이며,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는 홍콩의 시내를 내다봤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열광했던 ‘팬텀’을 타고 프린스의 를 들으며 도시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과 감정들이 각기 다른 색과 질감으로 내 안을 채우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를 알게 된 후부터 예상하고 대비할 수 없는 변수의 연속이었다. 사건만이 아니다. 그를 마주하는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키킴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번 홍콩행의 가장 큰 이벤트라 생각했었고, 룸미러 속에서 부딪치는 시선 하나에 쑥스러운 들뜸을 느꼈던 며칠 전의 나를 떠올려 본다.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자비 없이 말하자면,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얇은 천 한 겹 없이 감정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였던 자신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어젯밤의 사건이 우리의 관계에, 나를 대하는 그의 입장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그런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혼자만이 알고 있는 그 기대가 부끄러웠다.

내내 앞좌석의 등에 붙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높낮이 없는 어조로 일관하는 그의 태도 어디에서도 호감, 끌림, 애정 같은… 그런 가능성들은 찾아낼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면 빠르게 출국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조치해 뒀다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 패스트트랙이 허가된 VIP 승객임을 증명하는 간단한 서류와 일등석 티켓이었다.

“내일 하루쯤은 쉬어요. 지난번과 같은 증세를 보였다고 해 뒀으니, 다들 이해해 줄 겁니다.”

그가 둘러댄 핑계는 교묘하게 거짓과 사실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푹 쉬었어요. 내일이면 완전히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 것 같구요.”

그가 건넨 티켓에 새겨진 일등석이라는 표시에 더해, 그와 섹스한 상대로서 얻게 되는 휴일이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그의 배려를 받을수록 내 안에 쌓여 갔던 불편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호화로운 대우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서 생기는 어색함만이 아니었다. 그 친절들 속에서 나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과의 잠자리로 몸이 불편해진 상대에 대해 모른 척하지 않는 매너라는 걸 안다. 이해한다. 하지만.

매너. 친절.

그것은 언뜻 애정에 기반을 둔 말 같지만, 일정한 경계선 밖의 대상을 예의 있게 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그가 마련해 준 모든 것들이 연인을 보살피는 애정과 닮아 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 감정의 알몸이었고, 민낯이었다.

함께 잤던 상대들에게 공평하게 베푸는 친절함은 필요 없다며, 그에게 티켓을 돌려주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결말일지에 대해 생각하다 헛웃음이 흘렀다. 드라마의 주인공도 아니고….

문득 VIP 프리뷰에서 주한이 형이 가져다 놓았던 견과류를 집어 먹으며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듯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누가 이것 좀 치워 줘라. 이런 건 좋아하지도 않는데 앞에 있으면 자꾸 먹게 된다니까.」

첫 번째 잠자리가 그에게 응급 처치였다면, 어젯밤의 섹스는 아마도 견과류를 집어 먹는 행동과 비슷한 원리로 일어난 해프닝이 아니었을까.

마침 지저분한 방법으로 예민한 구석을 공격당해 불쾌했고, 마침 옆에서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쓴 것이 나였고,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섹슈얼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어쩌면 한 번 자 본 상대였다는 것이 유혹을 좀 더 쉽게 했을지도 모르고. 잠자리의 피해자인 척, 그를 문란한 사람으로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 유혹에 기꺼이 응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 인간적 호감을 갖고 있었다면, 그래서 잠자리 이후에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면, 나는 선택에 좀 더 신중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며 출국장 게이트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번 출장이 좋은 계기가 됐으면 좋겠네요.”

“…….”

나는 그를 돌아봤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것도 켜지지 않은 깜깜한 스크린을 향하고 있었다.

“그림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와 같은 노련한 남성이 충동적인 하룻밤의 섹스로 감정이 흔들릴 가능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그 답은 이미 그의 태도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밤을 보내기 전보다 더 친밀하지도, 심지어 더 차갑지도 않은 일정한 안정과 평온.

자동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선글라스를 낀 그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렌즈 뒤에서도 나를 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봐요.”

나를 보는 그의 눈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와 밤을 보낸 대가로 주어진, 사는 동안 아마 다시 앉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1A 좌석에 앉아 아래로 멀어지는 홍콩의 마지막 풍경을 내려다보며, 나는 덤덤히, 그와 관련해서는 유난히 감정이 반응을 보였던 이유에 대해 받아들였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결말을 굳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정도의 감정적 환기밖에는 없었다. 때문에, 충격적이지도, 땅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기대와 실망, 실제보다 상황을 더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답지 않은 예민함은… 안됐지만, 좋아한다는 신호였다.

여기서부터는 그를 좋아하는 것의 시작이라고, 뚜렷한 기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 기점을 알 수 없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신경 쓰였고, 때로 반발심이 일었고, 그 역시 나로 인해 자극받기를, 표정에 변화가 생기기를, 나를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랐었다.

감정은 예상보다 꽤 일찍부터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연애의 대상이 되기를 꿈꾸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부드럽고 대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더 알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저, 내가 타인에 대해 기대하고 원하는 감정을 가지게 될지 몰랐다. 하물며 그 대상으로 모두가 원하는, 관심과 호의가 향하는 정점에 있는 화려한 사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욕심을 부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내가 알던 나는, 가장 최소한의 것을 바라고 선택하는 것으로 실망이나 비참함 같은 감정의 소모를 최소화하려던 겁쟁이였으니까.

그럼 내가, 그를 원하는 것으로 용기 있는 자가 되었나.

전혀 아니었다. 감정을 제대로 의식하기도 전에 너무나 간단히 섹스의 유혹에 먼저 응하는, 자신의 새로운 면을 목도했을 뿐이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식사를 준비해도 될지 물었다. 흠 하나 없이 반듯한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 맥주를 한 잔 부탁했다. 금방 차가운 맥주 한 캔과 글라스가 간이 식탁 위에 준비되었다. 그가 살아가는 세계는 이렇듯, 모든 것이 말 한마디면 즉각 준비되는 마술 같았다.

편히 쉬라는 말과 함께 스튜어디스가 슬라이딩 도어를 닫고 사라졌다. 주변과 차단돼 혼자가 되었음에도 전혀 편안하지 않은 낯선 안락함 속에서, 잔에 따르지 않은 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애인이 아닌 상대와 잔다고 해서 다 난잡한 건 아니라며, 이 나이의 성인이 애인이 없다고 해서 자위로만 성욕을 해결할 순 없다고.

‘올드 퓨처’의 촬영 뒤에 그는 그렇게 말했었고, 누나와 형은 물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그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그때 나는, 좋아하는 상대에게도 그들이 똑같은 입장을 고수할 수 있을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상대와 잠자리를 갖는 것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때의 내 생각은 어떤 의미로는 크게 빗나간 추측이었다. 좋아하는 상대가, 타인이 아닌 나와 가진 잠자리에서도 참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이현 씨가 씩씩해서 다행이라던 그의 말이, 충동적 섹스와 연애 감정을 혼동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뜻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뒤늦게 짐작해 보며 쓰게 웃었다.

어느새 시야에서 홍콩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