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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있을 수 없는 존재 (14/31)

   2. 있을 수 없는 존재

GHOST

유령, 귀신.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정도로 지극히 적은 양. 무시무시하고, 섬뜩하고, 지독한. 누구나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소외’되어 흐릿하게 떠다니는, 때로 흥밋거리에 불과한 존재.

종일 쏟아진 장맛비의 눅눅한 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방.

창문 밖에서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지만, 블라인드의 촘촘한 살을 아래로 기울여 둔 서재에는 아직도 밤의 우중충함이 고여 있었다.

남자는 어떤 조명도 밝히지 않은 채 등받이가 높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아래쪽이 불룩한 잔을 쥔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관자놀이를 받친 얼굴 역시 최면에 걸린 듯 정지해 있었다. 벗은 상체의, 느리게 오르내리는 넓은 가슴팍만이 그가 아름답게 빚어진 밀랍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증명했다.

자신의 주변으로 서서히 굳어 가는 공기를 깨뜨리며 남자가 문득 등받이에 깊이 묻고 있던 허리를 세워 앉았다.

새벽 5시 59분. 보스턴은 오후 4시경일 것이다.

시차를 계산해 본 남자는 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려 둔 채 쏘아보기만 하고 있었던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운이 좋았다. 평소보다 더 짧은 몇 번의 신호음 끝에 14시간의 시차를 지우고 반가운 목소리에 닿을 수 있었다.

무표정이라는 개념을 형태화시킨 것처럼 경직돼 있었던 남자의 얼굴에도 일시적으로나마 엷은 미소가 번졌다.

가까운 사이에서 주고받을 법한, 장난스러우면서도 두터운 애정과 신뢰가 느껴지는 인사와 안부가 잠시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상대의 시간을 뺏는 문제도 그랬지만,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안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

헛바람 같은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린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체인징(Changing)을 했습니다.”

힘겹게 각오했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자신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 스스로 되새겨 보듯 남자는 다시 또 입을 닫았다.

저쪽에서 보인 최초의 반응도 역시 침묵이었다.

“당연히 상대가 있죠. 저 혼자 노팅하고 사정한 거로 체인징이라 했겠습니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약간은 짜증스럽게, 전화기 저편의 상대에게 대꾸했다. 그리고 곧 괜한 화풀이를 후회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첫 번째 문제는… 제 의지로 한 일도 아니었고, 상대의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무감했던 남자의 얼굴은 말을 이어 갈수록 점차 무너져, 이제는 고통의 개념을 형태화한 것 같은 표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마비시키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잔을 들어 독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쩔 수 없었어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페로몬에 완전히 지배돼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체인징이 걸린 상태에서 노팅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시의 아찔함을 회상하며, 남자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핏기를 잃었다.

“그래서 제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자의 목소리는 금세 조급해졌다.

“아니요, 오메가가 아닙니다. 아니, 오메가가 아닌데… 베타도 아닙니다. 그게 두 번째 문젭니다.”

횡설수설 같은 자신의 설명이 갑갑해 남자는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저편의 말대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해 보려 심호흡을 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위스키를 몇 모금 마신 뒤, 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을 떠올렸다.

“오메가인 게 확실한데, 본인은 자신을 100퍼센트 베타라 하더군요. 사정이 있어 사실을 숨기는 건가 싶었지만, 점점 그게 아닌 것 같았어요. 자신을 분명한 베타로 알고 있었고, 판정도 그렇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특별히 페로몬이 느껴진 건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메가라 생각했습니다.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더라도 어떤 오메가든 구별해 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 주변의 어떤 알파도 그를 오메가로 감지하지 않더군요. 조금 이상했지만, 억제제를 꾸준히 복용하는 오메가일 거라고만 생각했죠. 아시다시피, 억제제를 들이붓다시피 하는 오메가라도 제가 감지하지 못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요.”

페로몬을 사용해 섹스 상대를 유혹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와 즐기는 동안에도 페로몬의 힘을 빌리는 것을 거의 혐오하듯 하는 자신을 두고, 그러다 베타가 되려는 거냐며 최인우가 빈정거렸던, 스페인식 주점에서 가진 술자리를 떠올려 본다.

기본적으로 잘 모르는 인간을 믿지 않았고, 자신이 적대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 주의였다. 상대가 알아서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하게 하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는 포함돼 있었다. 늘 그래 왔던 방식의 연장선으로 그를 대했을 뿐이었다. 유니가 주한을 데리고 왔을 때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그래 왔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한 실장에게 그림을 배웠었다는 그가, 경계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란스럽지 않게 자기 자리에서 몫을 다하는 성실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팸플릿을 봉투에 넣어 봉하는 손가락이나 전시장에 작품을 걸고 내릴 때 위를 향해 살짝 고개를 든 옆모습 같은… 단순한 움직임이 시선을 끌 만큼 미적이다 싶긴 했었다.

얼굴 생김에서도, 움직이는 몸의 선에서도, 하다못해 눈길과 목소리에서조차 방금 씻어 낸 듯 물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는, 아직도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서 성장을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고 낯가림도 있어 보였지만, 사람에게 날을 세우고 경계하지는 않았다. 최인우의 막무가내식 들이대기를 무던하게 받아넘기는 것만 해도 그랬다. 주눅이 들어 쭈뼛거리지 않는다는 것은 떳떳함을 말했다.

「저… 오메가도… 아닌데요.」

아무것도 감추거나 꾸며 내지 않는 투명한 눈으로 곤란한 듯 말하던 얼굴.

알파도 아니고 오메가도 아닌, 자신은 베타라고 했던 그때부터, 그는 남자에게 관찰과 호기심의 대상만이 아닌, 미묘하게 신경 쓰이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정말 확고하게 자신을 베타로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지금 여기에선 임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병역 의무가 면제됩니다. 현역으로 제대한 것을 서류로 분명히 확인했으니, 적어도 입대 전까지는 오메가 발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군대에서 발현했다면 정상적인 전역이 가능할 리가 없으니 거기에 더해 최근까지도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죠.”

오메가였더라도 그것을 숨기지는 않았을 거라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곧은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덜 여물었지만, 결코 흐릿하지는 않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순수한 시절의 응집 같았던 까만 눈동자.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 페로몬을 조금 개방해 봤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오메가인데, 베타라니.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얼마 만에 페로몬을 개방했었던 건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말 오메가가 아닌지,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페로몬을 흘렸었다니. 몇 번을 다시 돌이켜 봐도 소위, 답지 않은 짓이었다.

“처음 몇 번은 벽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 곧 반응을 보이더군요. 제 페로몬에 우호적인 페로몬으로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좀 더 복잡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류의 오메가이겠거니 생각했죠. 제 페로몬을 감지하고, 거기에 반응하면서도, 그게… 향수 냄새라고 생각하더군요.”

최초의 답지 않은 짓거리 후에도 페로몬 개방은 계속됐었다. 슈슈의 작품 앞에서 자신의 어깨를 향해 얼굴을 기울이며 페로몬을 향수로 의식하던, 아무 의심 없는 순수한 얼굴은 잊을 수 없었다.

상대가 자신의 페로몬을 감지한다는 사실에서 불쾌감이 아닌 전율을, 짜릿한 자극을 느낀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전화기 저편에서 전해 온 해석에 대해 남자는 느리면서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부분에서 영악을 부릴 사람은 아닙니다. 페로몬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연기를 했던 거라면 제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죠. 어쨌든 저보다 열 살 어린 상대의 연기 하나 짚어 내지 못…하겠…습니까.”

바로 그 열 살이나 어린 상대를 페로몬으로 유혹해 정신이 날아가 버릴 정도의 잠자리를 세 번이나 가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남자는 스스로 멋쩍어 잠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열 살이나 어린 상대에게 그럴 마음이 드냐며 최인우에게 면박을 줬던 일을, 그가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명 연하는 남자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물며 열 살 연하는 연애 대상으로는 물론, 잠자리 상대로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에게 문제가 좀 일어났었고, 저 역시 결코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페로몬을 이용해 잠자리를 가졌었습니다. 분명하게 반응을 보였어요. 그때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하게 제 페로몬에 반응하면서 그 자신도 왕성한 페로몬을 개방했습니다. 역시 오메가가 맞다고 확신했지만….”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더듬었던 순간의 흥분과 당혹감을 떠올리며, 남자는 입매를 굳혔다.

“애액이 없었습니다. 전혀.”

두 사람 사이에 무겁고 긴 침묵이 고여 들었다. 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를 진정시켜 잠들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삽입하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페로몬이 더 진해지더군요. 두 번째로 잠자리를 가졌을 때… 믿어 주실지 모르겠지만, 도중부터 페로몬을 전혀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홍콩으로 향할 무렵엔 이미 그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더 이상 페로몬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는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저편의 상대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 통화의 목적은 페로몬과 관련된 그의 정체에 대해, 뭐든 좋으니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신음이 새어 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넓은 집이더라도 같은 집 안에 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섹스를 망설일 것 같은, 성에 대해 조심스러워 보이는 그를 침대 위로 끌어들이기 위해, 음흉하게도, 평소의 출장과 달리 숙소를 호텔로 옮기면서까지 자신이 그와의 두 번째 잠자리를 미리부터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솔직해질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구강, 목덜미, 사타구니, 겨드랑이, 성기, 애널….”

무감한 목소리로 거기까지 열거하던 남자는 문득 자신이 저편의 상대에게 사생활을 공개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말끝을 흐렸다. 어디까지나 의사에게 진단을 받기 위해 증상을 보고하는 것과 같은 정보의 전달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는 것이 유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런 얘기까지 들으시게 해서….”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는지,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 갔다.

“땀 분비선이 발달한 곳이나 체취가 강한 곳, 점막이나 체액에서 더 진하게 감지되는 것마저 페로몬의 특성과 일치했습니다. 제 페로몬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해 평소 성격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욕에 솔직해지더군요. 삽입을 했을 때는… 이미 둘 다 페로몬에 완전히 지배돼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땐… 노팅에 체인징까지 시도한 뒤였습니다. 아무것도… 컨트롤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힘이 빠져 멍해졌다. 자책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제어할 인간다운 최후의 권리마저도 박탈당한 사람처럼 허망한 눈으로 아무 곳에나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다.

잘 기억나지 않는 흐릿한 꿈의 내용을 더듬듯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있을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침착해 보려고 했습니다. 왜 그렇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가 오메가라면 임신을 하게 될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고, 베타라면 체인징을 시도한 게 돼 버리는데…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겠습니까.”

남자는 이제 한두 모금 정도밖에 남지 않은 잔 속의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푸르스름한 핏줄이 손가락까지 이어진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훔쳐 낸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압니다. 한두 번의 체인징 시도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죠. 하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침략받아 본 적 없었던 방어벽이 너무나 간단하게 뚫린 겁니다. 그것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가장 연약한 적에게 허물어진 거란 말입니다. 제 말 아시겠어요?”

남자의 벗은 어깨와 가슴이 감정적 격양으로 더욱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더 놀라운 건, 노팅 상태에서의 사정을 경험하고도 그의 안이 멀쩡했다는 겁니다.”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이미 술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제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베타가 제 노팅을 작은 상처 하나조차 없이 견딘다구요? 두 번이나? 불가능해요. 아시잖아요. 일반 오메가는 최소 하루 이틀이라도 고생할 거고, 골든 오메가라도 버거울 겁니다. 그런데 그는….”

상대가 잠시 말을 끊었는지, 말꼬리를 뚝 잘라 내고 멈춘 남자는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머뭇거렸다.

베타가 제 노팅을 작은 상처 하나조차 없이 견딘다구요? 두 번이나?

그런 실수가 있었는데도 어째서 두 번째 삽입의 상황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힐책이 이어진 듯 남자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입술을 물었다.

첫 삽입 후 이전보다 더 강해진 페로몬의 인력을 핑계 삼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피하려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전화 저편의 상대를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침실로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대로 얌전히 잠자리에 들었을까.

확신할 수 있는 건, 비에 흠뻑 젖은 채 자신의 집 앞에서 떨고 있던 그를 본 순간부터, 그를 그렇게 만든 대상이 어떤 무엇이더라도 전부 파괴해 버리겠다는 강렬한 분노와 함께, 그 분노의 화력만큼, 그에 대한 성욕이 치솟았었다는 것이다.

존재를 휘감아 공중으로 밀어 올리는 것 같은 무섭도록 강한 분노와 성욕이 어떤 종류의 본능인지, 교육을 통해 남자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단 한 명의 오메가와 꾸준한 교류를 이어 갔을 때, 자신의 오메가에 대해 알파가 갖게 된다는 보호 본능. 적어도 그것과 가장 유사한 감각일 것이다.

현대로 오면서 더는 물리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 자체가 사라져 이제는 드문 일이 되기는 했지만, 한 오메가에게만 정조를 지킨 알파는 자신의 오메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도 망설이지 않게 된다는 알파의 특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생식과 번식을 최우선으로 하게 되는 알파·오메가의 생물학적 특성상, 임신할 수 있는 오메가의 안전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라는, 당시 성교육 담당 선생의 사무적이었던 설명이… 자신을 오직 번식만을 위한 존재로 규정짓는 것 같아서 소년 시절의 남자는 불쾌했었다.

그러나 만약 대문 앞에서 자신을 휘감았던 분노와 성욕이 오메가에 대한 알파의 보호 의지에 가까운 본능이라면, 실제로 느낀 그것은 이론에 대한 반감만큼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 자신의 눈에 그만큼이나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를 위험에서 보호하고 평온 속에서 웃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놀랍도록 단순하게 눈앞의 대상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었다.

그러한, 어울리지도 않는 희생정신에 불쾌감이 일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선, 그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자신의 오메가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의 오메가이고 아니고를 떠나 오메가도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그로 인해서 어떻게 자신의 알파 본능이 자극받을 수가 있는가.

“두 번째에는 그의 페로몬에 완전히 지배돼 끌려가다시피 노팅하고 또, 체인징했습니다. 처음의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 의식하고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노팅하고 체인징하도록 의도하고 종용하는 것 같은, 그런 페로몬이었단 말입니다. 이젠 제 페로몬이 그의 페로몬을 자극해 불러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남자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내면에 고인 찬 바람을 밀어내듯 말했다.

“도대체… 그는 뭐죠?”

그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긴 이야기를 이어 온 것 같았다.

“아니요. 아니, 아닙니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내놓은 답변에 대한 남자의 반응은 단호했다. 그는 몇 번이나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안정하고 덜 성숙된 오메가의 페로몬이요? 저 정도의 골든 알파가… 골든 오메가도 아닌, 덜 성숙된 오메가의 불안정한 페로몬에 자극받아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게, 그게 가능합니까?”

가파르게 치솟는 흥분 속에서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쌌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 그럼 저는 또 뭐죠? 제가 정말 골든 알파가 맞나요? 고스트가 맞습니까?”

머리를 감싸며 숙인 어깨가 어둠 속에서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진정하고 냉정해지려 했습니다. 몇 번이나.”

진한 후회와 자책, 앞날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갇힌 인간 특유의 절박함이 날카롭게 박힌 목소리였다.

“하지만 최근엔 그를 마주하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느낍니다. 아무 때나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마저도… 그와 몸을 겹칠 수 있는 장소와 조건만 갖춰지면 너무나 그를 원해서 미칠 것 같은 상태에 바로 돌입합니다. 그가 먼저 저에게 페로몬을 흘려보내면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죠. 몸속에 저항의 의지 자체가 없음을, 저 자신이 그의 페로몬 앞에서 한없이 무력함을….”

허벅지에 팔꿈치를 괸 채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 짓뭉개듯 자신의 하관을 쓰다듬었다.

“이런… 페로몬 따위에 점령되어 자기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발정하는… 겨우 이런 게 골든 알파고, 전 결국 이런 짐승이 되려고 그렇게 자신을 단련했던 겁니까.”

이제 남자의 목소리는 오히려 누그러져 텅 비어 있었다. 눈앞의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 역시 그랬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위로의 말에 남자는 싱거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두려운 게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거죠.”

결국 속 시원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상황에 대해 바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알파·오메가의 지식에 대해 상당히 정통한 자신조차도 풍문으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케이스였고, 저편의 상대 역시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믿을 만한 상대에게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홀가분해졌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것을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상대해야만 했다.

“9월에 전시회 일로 시카고에 가게 됐습니다. 그때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그 전에라도 뭐든… 알고 계신 게 있거나, 알아내신 게 있으면…. 네, 그럼.”

통화를 마친 후에도 남자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한참 뒤에야 허리를 펴고 눈두덩이를 누르며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위스키를 한 잔 더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간이 바 쪽으로 걸어가던 남자는 카펫 위를 가로지르는 플로어스탠드의 전선에 발이 걸렸다. 앞쪽으로 쓰러지려는 조명을 붙잡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가늘고 긴 금속은 간발의 차로 남자의 손을 비껴갔다.

허벅지와 무릎을 받치는 것으로 갓과 전구가 박살 나는 사태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실수에 남자는 이번엔 좀 더 강한 욕설을 뱉었다.

술을 가지러 가려던 것도 잊고 스탠드를 카펫 위에 눕혀 놓으며 그대로 바닥에 앉아 버렸다. 여러 번 눈을 깜빡이고 눈꺼풀에 힘을 주기를 반복하다 체념한 듯 등 뒤의 소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두려운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거라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실은 확신할 수 없었다.

더는 무엇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거울을 마주하면, 그 안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두려움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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