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다시, 바다로 (28/31)

   4. 다시, 바다로

밤이 되자 눈은 거의 녹아내렸다. 제설차가 다니기 전, 사람들이 도로의 가장자리에 쌓아 놓은 눈더미만이 때 탄 모습으로 군데군데 아직 뭉쳐 있었다. 그런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리 약속한 대로, 라우는 ‘뚜’에서 조금 떨어진 리모델링 공사 중인 상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택 없는 은색 자동차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그는, 외투를 걸치지 않은 검은색의 가벼운 캐시미어 니트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이현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내내 ‘뚜’의 출입문을 주시하고 있었던 건지, 라우 역시 좁은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다가오는 이현을 바라보며 담배의 불씨를 꺼뜨리고, 조수석의 문을 열어 내부의 재떨이에 꽁초를 버렸다.

라우 앞에 선 이현은 그의 어깨 너머로 차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이거, 대표님 차예요?”

라우는 조금 뜸을 들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선팅된 자동차는 고급 브랜드의 차량이기는 해도 파리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델로, 특별히 눈에 띌 만큼의 화려한 대형 세단은 아니었다. 그라면 분명 더 상위의 모델을 구입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본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아서 이현은 얼굴에 조금 열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안에서 기다리시지 그랬어요. 추운데.”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좀 전에 나왔어.”

딱히 잘못된 점이 없는 이현의 코트 깃을 괜히 한 번 정리해 주며, 라우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이에요?”

“…….”

소개해 줄 때까지 못 기다리겠다는 듯, 이현의 등 뒤에 두어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소년이 불쑥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면서 이현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라우는 그렇지 않아도 네 정체가 궁금했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소년과 이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같은 모임의 니콜라스예요.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일찍 가 봐야 한다고 했더니 궁금하다면서 소개해 달라고…. 이 녀석이 막무가내라….”

‘남자친구’라는 대목에서 귓불이 붉어지며 말을 흐리는 이현과 달리, 얼굴이 확 밝아진 라우는 딱딱한 표정을 지우고 흔쾌히 닉에게 악수를 청하며 간단히 영어로 인사했다.

“반가워요. 라우 위쿤이에요.”

반면에 닉은 눈치를 살피듯 그를 힐끔거리며 머뭇머뭇 손을 맞잡았다.

라우의 시선이 이현의 상박에 바짝 밀착한 닉의 어깨에 잠시 고정되었다.

“뭐… 형도 잘생겼으니까.”

그를 직접 보고는 분명 위축된 것 같은데도 아닌 척 쿨한 척 애를 쓰는 닉을 돌아보며 이현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근데 형, 이 사람은 좀 수상할 정도로 잘생겼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사기꾼 아니면 바람둥이라고 우리 아버지가….”

“닉,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다며.”

목소리를 낮춰 닉에게 주의를 주는 이현을 신기한 듯이 보고 있던 라우는, 마주 보고 서 있던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자리로 당기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상할 정도로 잘생겼다는 말은 칭찬으로 들을게요. 근데 사기꾼은 몰라도 바람둥이는 절대 아니니까, 그쪽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라우의 표정과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닉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면 그렇다고 얘기를 해 주지 그랬냐고 닉이 붉어진 얼굴로 원망을 쏟아 냈다. 하지만 이현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니 미리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잖아. 이제 됐지?”

닉의 어깨를 돌려세운 이현은 ‘뚜’가 있는 방향으로 그 등을 떠밀었다. “Adieu!”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라우에게 뒤를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인 닉은 도망치듯 ‘뚜’의 출입문 안으로 사라졌다.

실례를 범한 것은 닉인데, 이현은 자꾸만 자신의 얼굴이 더워졌다.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셨죠?”

“10대잖아요. 그리고… 서이현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던데, 뭐.”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라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청바지의 뒷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으로 이현의 등을 부드럽게 당기며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반대편 운전석 쪽으로 건너가 차에 오른 그는 안전벨트를 채우며 말했다.

“항상 동생이고 막내인 서이현만 알다가, 형인 서이현을 보니까 신선하기도 했고.”

“며칠 있으면 저도 이제 스물넷인데요.”

“그렇지. 스물넷.”

시동을 걸기 전, 그가 몸을 옆으로 틀어 이현을 바라보았다. 팔을 뻗어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매만져 주면서 그는 스물넷…이라고 다시 한번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내가 서이현의 스물셋을 함께할 기회를 통째로 날려 버렸으니까.”

“…….”

퍼뜩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이현의 기색을 살피는 그는, 자기도 모르게 꺼낸 말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이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분위기를 전환하려, 그는 시동을 걸면서 일부러 더 명랑한 투로 화제를 바꾸었다.

“니콜라스, 그 모델이죠? <컬러풀 고스트스> 연작의 세 번째 작품.”

“어… 음. 네.”

우회전 뒤에 곧바로 뒤이어 우회전을 연속하기 위해 핸들을 돌리면서 라우는 이쪽을 짧게 돌아보았다.

“발표하는 작품들. 내가 구입할 수는 없었어도, 전부 체크는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어딘가에서 자신의 활동을 지켜봐 주고 있을 거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잡아 오기는 했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지켜보고 있었다.

이현은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만 잘근거렸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방황이 심했었나 봐요. 아직 어린데도 모임에 가입한 걸 보면.”

“오메가라는 거… 바로 아시겠어요?”

이현의 질문에 라우는 특별히 대답하지 않은 채 전방을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그는 유전자 분석 결과보다 더 정확한 오메가 감별사라고, 과거의 인우가 그렇게 말했었다. 게다가 알파·오메가에 대해 제법 단단한 지식을 갖추게 된 지금은, 이현 역시도 라우 정도의 골든 알파는 페로몬 없이도 상대의 성별을 거의 실패 없이 구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베타인 자신을 계속해서 오메가로 추측했던 이유도 이제는 안다. 말로는 여전히 딱딱하기만 했던 과거 어느 시점의 라우가 자신에게 드러냈던 향기들. 그 자체가 자신을 향한 관심과 끌림의 표현이었다는 것도.

<컬러풀 고스트스> 시리즈의 모델은 모두 ‘늦은 발현’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한 번쯤은 자신을 괴물로 여기며 좌절의 끝에 발을 담가 본 사람들.

지난 초가을, 닉은 드디어 가족에게 발현 사실을 알렸다. 그 후 계속 아버지와 단절된 관계를 지속하다 최근에야 드디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보의 상당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완고하기만 했던 닉의 아버지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알아 가려 조금씩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노력이 빚은 작은 결실로, 닉은 오늘 파티에 온 가족과 함께 참석했었다.

닉의 아버지는 파티 내내 긴장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본인의 기준에 ‘정상적인 남성’처럼 보이는 남성 오메가들을 만나 보고는 어느 정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알파와 오메가가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남성과 여성 두 종류의 성별로만 사람을 분류하며, 그 안에서도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을 엄격하게 규정하는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는 어쩌면 그것이 최선의 수용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계속 남성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하며 현재의 상태를 체념하는 것.

하지만 몇 년 뒤에는, 다음 세대에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이 갖춰질 수 있기를 바라며, ‘늦은 발현’을 비롯한 단체들과 개인들은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내용을 차분히 이야기하는 사이, 자동차는 어느새 마레 지구를 벗어나 왼쪽으로 운하를 두고 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네 주변을 맴돌긴 했어도 유니에게 네 소식을 캐묻거나 뒤를 밟지는 않았거든. 그런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어.”

아침에 이현에게서 간략한 설명만 들었던 라우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이현이 ‘늦은 발현’의 회원이 된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임에 적응하는 것뿐 아니라 보보가 파리 생활 자체를 많이 도와줬어요. 서울에서 쿤이 와서, 그래서 조금 일찍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실은 보보도 쿤을 보고 싶어 했구요. 같이 오지 그랬냐고….”

“그러게. 초대 좀 해 주지 그랬어요.”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 오늘은, 대표님 눈이 그렇기도 했고.”

“음, 눈은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래도 지금의 서이현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면 나야 너무 영광이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그렇게 얘기하는 라우가 빈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와 달리 ‘뚜’에서 ‘더 핸즈’까지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줄어드는 거리가 아쉽기만 했다.

늦은 시간이라 ‘더 핸즈’ 앞 도로에는 이미 빼곡하게 주차가 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골목의 초입에 임시로 차를 세운 뒤에도 둘 중 누구도 선뜻 차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상대를 향해 몸을 틀어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시간만 끌던 끝에, 이현은 그가 자신에게 먼저 뭔가를 제안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올라갔다 가실래요?”

라우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될까?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세요?”

“……아니.”

이현의 되물음에 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가 곁에 있는 이상, 흥분 상태로 인해 피로를 느낄 새가 없었다.

10여 분 만에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섰다. 라우는 코트를 걸치며 이현이 서 있는 보도블록 쪽으로 걸어왔다. ‘뚜’가 있던 마레의 골목보다 인적이 드물고 눈이 좀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골목의 폭이 좁아 해가 충분히 들지 않는 탓이었다.

이현의 앞에 멈춰 선 라우는 장갑을 끼지 않은 이현의 두 손을 쥐고 손등을 쓰다듬었다.

“항상 목도리도 장갑도 하지 않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었어.”

“…….”

숨어서 지켜보았던 자신에 대한 얘기임을 알고, 이현은 시선을 내리깔며 웃어 보였다.

“여기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아서 괜찮았어요.”

자신이 느끼는 추위에조차 자책하며 아파했을 라우의 시간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당기며 다가왔다. 코끝이 먼저 서로 닿고 조심스럽게 입술이 겹쳐졌다. 좀 전까지 자동차 안에 있었던 탓에 입술은 따뜻했다. 그의 손을 힘주어 붙잡자,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면서 입술이 더 깊게 겹쳐졌다. 간지럽게 점막이 비벼지는 감촉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목 안쪽에서 울린 나지막한 신음에, 라우의 몸에서 일순간 확 피어오르는 페로몬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도장을 찍듯 마지막으로 입술을 꾹 누른 그가 허리를 세우고 이현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흠, 갈까요.”

가볍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목을 가다듬는 얼굴이 어색했다. 야한 기분이 든 것을 감추려 하는, 서툰 소년처럼 조심스러워하는 그가 낯설고 신기했다.

조금 빤히 올려다봤는지, ‘더 핸즈’ 방향으로 손을 끌면서 그가 쑥스러움을 숨기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입술 사이에 갇힌 웃음마저도 능숙한 성인 남성보다는 덜 여문 소년을 연상시켰다.

이현에게서도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왜 웃는 건데, 어?”

그가 팔을 확 잡아당겨 간지럽히듯 허리를 안았다.

“대표님이… 먼저 웃으니까.”

이현은 옆구리를 비틀면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간지러웠다. 늦은 밤이었기에 너무 큰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상체를 한껏 굽혀 겨우 그의 팔에서 벗어난 이현은, 흘러내린 가방의 어깨끈을 고쳐 메고는, 그의 손을 당기며 ‘더 핸즈’ 쪽을 향해 뒤로 걸었다. 그가 순순히 끌려왔다. 서로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도 눈을 떼지 않았다.

“서이현! 대표님!”

“…….”

익숙한 목소리였고, 동시에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현은 걸음을 멈추고 ‘더 핸즈’ 방향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계단에 올라선 유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셸도 함께였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이현은 등 뒤의 그를 돌아보았다. 숨기기엔 조금… 많이 큰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잡은 손부터 놓으려고 했지만 라우는 오히려 단단히 힘을 주어 손바닥을 겹쳐 왔다. 그리고 이현을 당기며 앞장섰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유니가 이전의 두 사람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설명해야 할 사연이 너무 길었다.

라우는 분명 그동안 파리와 서울을 오갔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고 했었다. 게다가 유니는 자신과 라우의 관계가 최소한 잠정적으로는 중단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그와 손을 잡고 밤거리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남들의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상황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뚜’에 갔다 오는 길이야?”

“어… 으, 응.”

하지만 이현을 향해 다 안다는 듯 잘됐다는 듯 씩 웃어 보이는 그녀는 일이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라우에 대해서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그녀와 미셸이 그렇듯, 그가 자주 이현을 ‘더 핸즈’ 앞까지 데려다주었던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미셸이죠?”

“네,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요. 반가워요.”

소개를 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인사를 나눈 라우와 미셸은 유니에 대해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짓궂은 얘기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장난기가 발동한 그가 자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들을 미셸에게 털어놓을 것이 걱정됐는지, 유니는 라우의 어깨를 밀어 돌려세우고는 계단 위를 향해 등을 떠밀었다.

“자, 서로 데이트 방해하지 말자구요. 먼저 들어가세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고 있던 이현은 미셸과 비쥬를 나누고 계단을 올랐다.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 건지 얼떨떨했지만 일단 어색하지 않게 상황을 넘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계단 아래의 미셸에게 손을 흔드는 그를 옆에 세워 두고 이현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파리의 오래된 아파트들도 1층 현관에는 도어록을 많이 설치하는 추세였지만, ‘더 핸즈’는 여전히 열쇠를 고수하고 있었다.

육중한 1층 출입문을 안쪽으로 밀어내며 등으로 문을 밀고 선 이현은 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는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로비로 들어섰다. 침침한 조명이 밝혀진 홀의 중심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늦은 밤이라 전시실의 문은 전부 잠겨 있었고, 오래 돌아볼 것도 없는 좁은 로비였다.

이현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메인 전시실의 닫힌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그의 팔꿈치를 끌었다.

“방에 마실 게 아무것도 없어요. 2층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방이 있거든요. 잠깐 들러요.”

두 개 정도의 방을 터서 확장 공사를 한 탓에, 난방을 하지 않은 주방은 실외처럼 써늘했다.

불을 밝힌 이현이 가방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내 ‘벤, 맥주 두 병 빌릴게요.’라는 메모를 남기는 동안, 라우는 간소한 주방 이곳저곳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메모를 마친 이현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두 병 꺼내고, 손잡이 옆에 포스트잇을 붙여 두었다.

“사람들과 많이 친한가 봐.”

벽에 붙여 놓은 주방 이용 규칙을 읽고 있던 그가 어느 틈에 곁으로 바짝 다가와 메모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친해졌죠. 1년도 넘게 이곳에 있었으니까.”

“흠.”

어쩌면 그는 사교적이지 않은 자신의 성격까지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니가 함께 이곳으로 오긴 했어도 보호자처럼 내내 따라다닐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이 도시에 흡수되지 못하고, 외롭게 겉도는 자신을 상상하며 더 많이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염려는 염려일 뿐이었고, 메모를 남겨 두고 맥주를 빌려 마시는 융통성을 발휘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안심하는 것 같았다. 예전의 이현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마시지 않는 쪽을 택했을 테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메모 위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그는 한편으로는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다. 혼자서도 이현이 잘 적응하고 지냈다는 사실이 씁쓸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 터였다.

길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이 이전보다 더 긴밀하게 전해져 왔다. 그렇기에 이현은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그를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올라가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의 코트 소매를 당기며 이현은 속삭이듯 말했다.

아파트는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이현이 방문을 여는 동안, 라우는 맥주 두 병을 한 손에 쥐고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이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기숙사에 몰래 데이트 상대를 데리고 온 대학생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떨렸다. 상대가 그였으니까.

“대표님이 준비해 주셨던 서울의 스튜디오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허름하고 좁아요.”

“…….”

“그래도 필요한 건 전부 갖춰져 있고, 전 여기서 충분히 잘 지냈으니까…. 보고 나서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문고리를 앞으로 조금 당긴 상태에서 이현은 미리 다짐을 받으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변명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곧 어깨에 힘을 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분의 무게로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문에서부터 정면의 창문까지 좁고 긴 직사각형 형태의 방은 문 앞에 서서 한눈에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가능했다.

“가구나 짐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넓은데?”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거리는 그는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그가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이었구나.”

책상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들키지 않도록 골목 안쪽에 서서 이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어쩌면 그는 어떤 창문이 이현의 것일지 점쳐 보았었는지도 모르겠다.

벽에 붙여 세워 두었던 등받이가 없는 보조 의자를 하나 끌어오고 책상을 테이블 삼아 나란히 앉았다. 컵받침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목제 책상에는 금방 동그랗게 맥주병의 모양대로 물 자국이 남았다.

“실은, 마레로 데리러 가기 전에 먼저 유니를 만났었어.”

“아….”

“좀 전 같은 상황이라도 생기면 네가 당황할 것 같아서 먼저 얘기해 두려고.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런 상황이 닥칠 줄은 몰랐네.”

이현을 돌아보며 웃은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맥주병의 표면을 쓰다듬는 그의 길고 정갈한 손가락에 시선을 주며 이현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1년 만에 만나서는 보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너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그것부터 묻더라.”

맥주병을 한 손에 감아쥐고 엄지로 병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 녀석, 분명히 너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겠지. 혹시라도 상처를 건드리는 꼴이 될까 봐. 나와 가끔 통화할 때도 파리에 정말 안 올 거냐고 돌려서 묻긴 했지만, 우리 관계에 대해서 정면으로 파고들진 못했거든.”

그의 예상대로였다.

“자세한…. 체인징 얘기는 하지 않았어. 그건 너의 동의를 얻은 후에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냥 간략히… 내가 너에게 아주 큰 잘못을 해서 보러 올 자격이 없었다고, 그렇게만 얘기해 뒀어.”

이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얘기’라고 뭉뚱그리려다 체인징이라고 정확하게 정정하는 그의 의도를, 스스로 잘못을 축소하지 않으려는 각오를 알 것 같았다.

그가 맥주병에서 손을 떼고, 물기 묻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손을 늘어뜨렸다.

“이젠 다시 사귀는 거냐고. 유니가 그렇게 묻는데….”

“…….”

“그 말에 설레더라.”

피식거리며 조소하는 그는 설렘을 느끼는 것에조차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의 갈등이 바로 곁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현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

“대표님이 얼마나 저를 찾아오고 싶었을지, 전 알아요.”

라우가 이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제가 여기서 그린 그림들을 직접 확인하고, 소장하고 싶었을 거라는 것두요.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대표님은… 제 그림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자였으니까.”

책상 위에 남은 물기를 응시하며 이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 책상 앞에 앉아 그가 피우는 것과 같은 담배를 피우며 그리움의 일부라도 해소해 보려 애썼던 날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찾아와서, 제 얼굴을 보고 수없이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라우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감정이 빠르게 부풀어 오를 것 같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용서를 구할 수 없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설득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내려놓은 채 그저 기다려야만 했던 시간들이… 다른 게 아니라, 아위에게는 그 시간들이 일종의 징벌이었을 거라는 거… 알아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이현은 힘든 고비를 갓 넘긴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충격과 슬픔이 침전물을 뒤흔들어 부옇게 흐려 놓았던 내면이 서서히 본래의 투명도를 찾아 가고,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을 때까지. 그동안 오래 생각했었다.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우습게도, 라우 역시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워하며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 그것이었다.

다짐을 굳히듯 입술을 한 번 꾹 다물었다 놓은 이현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평소대로 돌아온 푸른색 눈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을 것 같다고 재촉하지 않았고, 사랑한다며 보채지 않았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

라우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라우는 이현의 두 눈을 한쪽씩 천천히 공들여 바라보았다. 이전의 습관 그대로.

한꺼번에 여러 개의 알약을 삼키듯 힘겹게 마른침을 넘긴 그가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알파 판정을 받으면서 거의 동시에 고스트로 판명됐었고… 자신을 통제하고 욕구를 다스려 억제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한 훈련이 시작됐었어. 알파인 것도 모자라 고스트이기까지 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아무리 주변 어른들이 애정으로 대해 줘도, 자신을 억누르고 욕구를 축소시키는 방법에만 집중해 성장기를 보내다 보니… 무의식중에라도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

대단하지 않은 얘기인 것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이현은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집중했다.

“나에게 타인을 해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해도…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고….”

원한 적도 없는 ‘능력’으로 인해 세상에서 자신을 분리해야 했던 과거를 응시하듯, 반투명한 초록색 병 너머에 흐릿한 시선을 주고 있던 그가, 자세를 바꾸어 앉으며 태도를 환기했다.

“그런 훈련들이 부당하고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니야. 오히려 필수적이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실제로… 베타를 오메가로 만들 수 있다는 건, 상대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

고스트로 판명된 순간부터, 사는 곳을 옮기고 학교생활을 중단하고 소수의 측근들과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노력했지만… 가장 두려워했고 가장 피하고자 했던 일은 결국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자신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실패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이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스스로를 피해자로 몰아가려는 약간의 이기심만 보태진다면, 그런 식의 사고방식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저, 그런 시간들이 한 방향으로 흘러 내 안에 고이고 고이다 보니… 나중에는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유령으로 여기게 되더라는, 그런 얘기인 거지.”

희미하게, 쓰게 웃어 보인 그는 병을 들어 맥주를 서너 모금 마셨다. 무겁게 맺혀 있던 물방울이 병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리다 그의 청바지 위로 떨어졌다. 불길한 뒷맛을 가진 사이렌 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부터 나타나 더 먼 곳으로 멀어져 갔다.

이현은 물방울이 그의 허벅지에 남긴 진한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페로몬에 휘둘려 굴복하는 것을 아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소년 시절부터 스스로를 얼마나 엄격하게 통제해 왔는지 알아요.”

스페인식 주점에서 가졌던 술자리에서 인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던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었다. 페로몬을 억제하는 알파. 거기에 어느 정도의 인내가 필요한지 무지했었다. 스위치를 켜고 끄듯 간단한 일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극도의 졸음이나 허기를 버티는 고통과 비슷하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었다. 배앓이 중의 갑작스러운 배변 욕구를 참아 내야 하는 고통에 비유한 학자도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거나 더 멋진 외모를 갖고 싶은… 부수적 욕구가 아닌, 알파와 오메가에게 페로몬은 본능과 생존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였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페로몬에 맞서 처절하게 싸워 온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그러니까… 아위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었어요.”

이현을 마주 보는 라우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믿기지 않는 놀라운 현상을 코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페로몬에 무너져 나를 체인징한 것이 라우 위쿤이란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방향을 잃고 눈이 멀어 저지른 실수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차분하게 돌아봤을 때, 좀 더 정확하게 상황을 볼 수 있었어요. 페로몬을 무기와 변명 삼아 휘두르고 다니는…. 라우 위쿤은 적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제 그는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스턴에서 얘기했던… 대표님이 남들과 다른 이유.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 같은 고독을 느껴 왔던 이유…. 단지 알파여서가 아니라 고스트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가 저지른 잘못과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이 삶 전체에 걸쳐 무겁게 지고 왔을 고독에 대한 생각으로 이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그러나 정에 이끌려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내린 결정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사실도 아니었다.

이현은 고개를 숙였다.

“…….”

라우가 의자를 끌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무심히 내려 둔 이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포개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느슨한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쥐고, 물기 묻은 손바닥으로 손등 전체를 뒤덮었다.

얼굴을 보면 더는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이현은 하나로 겹쳐진 두 개의 손에만 의식을 집중했다.

“사실… 다시 사귀는 거냐는 유니의 말을 들었을 때, 설레기도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어.”

“…….”

의외의 방향에서 시작된 그의 이야기가 이현을 긴장시켰다.

“설레는 동시에, 어떤 불편한 감각이 마음속에서 달그락거리더라.”

조심스럽게 손등을 뒤덮고 있었던 그의 손이 조금 더 강한 힘을 담아 이현을 움켰다.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떨림과 함께 서서히 꺼뜨리는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젯밤에 일어난 일도, 지금 이렇게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도, 여전히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시간 동안 너와의 미래를 그려 보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는 뜻은 아니야. 네가 받아 주지 않더라도 나는 너에게 속해 있다는 말은 이전보다 내 안에서 더 견고해졌고, 너에 대한 사랑은 페로몬의 농간과는 무관하다는 것도 더욱 분명해진 시간이었어.”

그가 자신을 봐 달라는 듯 이현의 손을 잡지 않은 왼팔을 뻗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쪽으로 살짝 당기는 힘에 이현은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삽입을 한 뒤에는 인력으로 체인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거, 너와 나 사이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 넌 알고 있을 거야. 그걸 알고도 우리 관계의 재생을 결정해 준 네 각오의 무게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야. 단지 나를 용서해 주고 이전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돌리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런 관계를… 사귀는 사이라고만 규정하는 것은 부족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침착하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묘한 흥분이 서서히 겹겹이 그를 둘러싸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현의 왼쪽 어깨 뒤쪽으로 그의 오른쪽 어깨가 겹쳐졌다. 왼쪽 관자놀이에 그의 흐트러진 호흡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다. 어깨에 얹었던 손이 이현의 턱 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가슴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마치… 남자친구를 그냥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그 말이… 우리에게 딱 맞는다고 느껴지지가 않았어.”

턱 끝을 쓰다듬던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긴 라우는 테이블 위에서 그대로 쥐고 있던 이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기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나의 디디가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그래서… 사랑할 가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무너지는 자신을 봐야 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거야. 발현 이후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해 왔던 것들이 허무한 상대에 의해 휴지 조각이 돼 버린다면….”

라우는 고개를 숙인 채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이현을 돌아보았다.

“내 방어벽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람이 너라서… 정말 많이 감사해. 나에게는, 너여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 많아.”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상대의 존재감은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실수가 있었고, 실망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본질적인 충족과 행복을 위해 서로가 절실했다. 그 역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과 달리, 서로를 사랑하는 이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너무 많았다.

이현은 자신의 손등을 엄지로 쓸고 있는 라우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사귀는 사이로 규정하는 것이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조금 교제해 보다가 그래도 안 될 것 같으면 그때 가서 완전한 이별을 결정하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관계의 재생을 택한 것이 아닌 것도 맞다.

돌아보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 줘서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다.

“대표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버지의 침묵에 대한 제 대응은 침묵이었어요. 지금의 저에게 거리를 두고서라도 상황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면, 그건… 대표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시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은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과 비등했다. 자신을 둘러싼 침묵을 부드럽게 걷어 내고, 일어나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리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도록 해 준 것은 라우였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만 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를 주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절실했던 선물을 주기도 한 사람. 이상한 사람.

아마 라우에게도 자신은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누구와도 관계되지 않도록 높고 견고한 성벽 안에서 혼자 살아가던, 무적의 야수.

어떤 대포도 어떤 장수도 뚫을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다고 알려진 성벽 한쪽을 모래성처럼 가볍게 허물고 들어오는 침입자의 등장에 진땀을 흘리며 허둥거리는 야수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현은 피식 웃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그가 이유를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이현이 웃어서인지 라우 역시 이유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이현은 그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한 나라에서 찾아온 침입자였다. 가장 애타게 필요로 했던 것을 선물로 가지고 온.

■ ■ ■

파리 내의 여느 갤러리들과 마찬가지로 ‘더 핸즈’ 역시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파티를 개최하고 있기는 해도, 24일 밤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따로 사는 독신자들뿐이었다. 프랑스에서 성탄절은 여전히 가족과 함께 보내는 명절이라는 인식이 강한 이유였다.

“이래서야 작년하고 다를 게 없네.”

“어차피 공짜로 술만 마실 수 있으면 아무 상관도 없지 않아요, 벤은?”

벤의 푸념에 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같은 섬세한 예술가를 뭐로 보고.”

벤은 반발했다.

“술과 음악만 있다고 파티냐? 서로 탐색하는 시선, 팽팽하게 오가는 성적 긴장감! 그런 게 없잖아.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사람들끼리 그런 게 생기겠냐고.”

“섬세함 같은 소리 하시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차는 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벤은 파티 장소로 변신한 전시실 안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벤의 푸념과는 다르게 전시실을 채운 대부분이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갤러리의 초대를 받은 소액 후원자들과 자주 들러 주는 방문객들 외에 직접 티켓을 구매해 찾아온 입장객들도 꽤 많았다.

‘더 핸즈’의 파티는 생 마르탱 운하 주변의 예술가들과 파리의 힙스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서이현, 이현.”

“어, 응?”

“지금 막 들어온 저 사람, 괜찮지 않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깨를 흔드는 벤을 돌아보며 이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장감에 잠시 대화의 흐름을 놓쳤을 뿐 딱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까부터 자꾸 시계만 보고. 너 올해는 일찍 빠져나갈 생각 하지 마. 이번엔 내가 꼭 너 취할 때까지… 오, 갓.”

이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던 벤이 말을 멈추고 신을 찾았다.

“내 성적 긴장감, 저기 있네.”

벤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고정시킨 출입문 쪽에 라우가 있었다. 이현은 얼마 남지 않은 손안의 와인으로 입술을 축였다.

“저 남자가 여길 어떻게 왔지? 뭐야, 리드와 아는 사이인가 본데? 후원자 중 한 명이었나? 딱 봐도 보통 럭셔리가 아니긴 한데… 저런 사람이 이런 날, ‘더 핸즈’ 파티에는 왜?”

거의 이현의 목을 조를 듯 팔을 세게 감으며 벤은 빠르게 중얼거렸다. 평소의 그보다 훨씬 여유를 잃은 모습이었다.

“이쪽으로 오잖아? 혹시 날 알아본 건가?”

“벤… 저기, 그게 아니라….”

이현은 설명하려 했지만 이미 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재빨리 매무새를 다듬은 벤은 잔에 반 정도 남아 있던 와인을 단번에 모두 비워 버렸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다가오는 라우는 한 사람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거리를 좁혀 올수록 그 시선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가 점차 분명해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특히 더 멋지네.”

이현의 앞에 멈춰 선 라우는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뺨에 키스했다. 당황과 충격으로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벤과 준의 얼굴을 곁눈으로 살피며 이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스킨십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라우의 가슴을 슬그머니 밀어내면서 이현은 헛기침으로 목을 풀었다.

“여기는 라우 위쿤. 서울에서 온 내… 남자친구고.”

벤과 준의 눈이 좀 전보다 더 커졌다. 잔을 비워 놓지 않았더라면 벤은 와인을 쏟아 버렸을지도 몰랐다.

“이쪽 두 사람은… ‘더 핸즈’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벤과 준이에요.”

이현의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곁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라우는 준을 소개하자 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아, 준! 옆방에서 지낸다는…. 반가워요.”

“형이… 제 얘길 했어요?”

“홍콩 출신의 동생이 옆방에 있다고 얘기해 주긴 했는데, 상상한 것보다 더 어려 보이네요. 그런 나이에 벌써 ‘더 핸즈’의 지원을 받을 정도라니 실력이 대단하겠어요.”

준만 한 나이의 소년들에게 어리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현은 그가 일부러 준의 어린 나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의 어디에서도 짓궂은 장난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벤 슈바이거입니다. 이거, 여기서 이렇게 또 보네요.”

“…네?”

어색하게 굳은 준과 라우의 악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벤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 벤이… 운하 옆 카페에서 쿤을 몇 번 봤었나 봐요.”

“아….”

이현에게서 설명을 들은 라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벤의 손을 맞잡았다.

“남자친구가 있다고는 하는데, 1년 넘게 한 번도 나타나질 않아서 우리끼리는 이현이 지어낸 얘기인가 했죠. 연인이 있다는 말로 연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고 그림에 집중하려는 건가 했거든요.”

벤의 말에 라우는 ‘그랬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돌아봤다. 이현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와인을 삼키기 위해 잔을 기울였다.

“물론 저는 연인이 있다고 해서 가능성도 차단된 거라 생각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지만요.”

벤이 덧붙인 말에 라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벤이 아무리 껄렁한 척을 해도, 상대가 있는 사람, 그것도 자신의 연인에게 대시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이현도 잘 알았다. 하지만 평소의 관심 대상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더 짓궂게 굴지 않는 벤의 태도가 신경이 쓰였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서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현이 여기에 오기 전까지 소속돼 있던 갤러리이기도 하죠. 유니와도 같이 일했었구요.”

화제가 나온 김에 라우는 자연스럽게 안주머니에서 케이스를 꺼내 두 사람에게 명함을 건넸다.

“사실 연인만큼 작품을 맡기기에 믿음직한 사람은 없죠. 작품의 이해도나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잘 아시겠지만, 이 바닥에도 워낙 남을 벗겨 먹으려는 날강도들이 많으니까요. 최상의 파트너십입니다. 같은 예술가로서 이현이 부럽네요.”

진지한 시선으로 명함을 살펴본 벤은 라우가 아닌 이현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근데, 연인들은 보통 이런 날, 단둘이서 보내고 싶어 하지 않나? 오랜만에 만난 거라면 더 그럴 것 같은데….”

“음, 솔직히 저야 그러고 싶었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준의 말에 라우가 즉답했다.

벤과 준의 놀란 시선이 또 한 번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며, 이현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어색함을 모면하려 했지만, 잔은 비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연애가 심심하도록 담백하고, 지루하도록 덤덤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연애의 대상도 비슷한 사람을 선택할 거라고.

“하지만 이현에게 중요한 자리를 함께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뭐… 단둘이 보내기 위한 계획은 이 뒤에 따로 있기도 하구요.”

그가 허리를 감은 팔을 좀 더 조이며 이현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인사보다는 좀 더 진하게 느껴지는 키스에, 이번엔 벤과 준이 와인을 마시는 척 시선을 돌렸다.

“저기, 와인… 갖다 드릴까요? 한 종류밖에 없어서 선택권은 없지만….”

“괜찮아. 술은 나중에 마셔도 되니까… 좀 더 같이 있어 줘.”

관자놀이에 키스한 라우는 그대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두 팔로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옆구리에서 가볍게 깍지를 끼며 이현을 그 안에 가두었다.

정중한 파티가 아닌 만큼 그 정도의 스킨십, 아니 그 이상의 스킨십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작년의 경험을 되짚어 보자면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전시실 곳곳에서 섹스 직전의 진한 애무들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연인임을 드러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탓에 이현은 자꾸만 몸이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우리 둘이 있을 때처럼 생각해요. 아무도 신경 안 써.”

그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뺨을 간질이는 상쾌한 숨결과 어깨에 닿은 가슴과 다정한 낮은 목소리에, 목 뒤쪽으로 가벼운 소름이 일어난 것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라우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준은 물론이고 그 자유분방한 벤마저도 계속해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저,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

목소리가 들린 왼쪽으로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벤과 준, 이현과 라우가 2 대 2로 마주 보고 선 구도의 테두리 안으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발을 디밀었다. 30대 초반, 라우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고, 라우의 몸도 이현에게서 어느 정도 물러났다.

“<컬러풀 고스트스> 시리즈의 이현 씨죠?”

“네.”

“반가워요. 작품의 팬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악수를 나누는 이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처음 서울을 떠나오던 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 아래 반 정도 드러난 목덜미도 햇볕에 자극된 것처럼 빨갰다.

그런 이현의 귓바퀴와 뒷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라우의 시선이 이번엔 벤과 준을 향했다. 팬과의 만남에 쑥스러워하는 이현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닌지, 두 사람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세 명과 커플도 간단히 서로 소개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대화는 자연히 커플과 이현 중심으로 이어졌다.

“사실 저희가 전시회는 이곳저곳 많이 다녀도 미술품 구입에는 지금까지 전혀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럴 만큼 자금 상황이 넉넉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처음으로 우리 집 거실에 걸어 두고 싶다고 느낀 그림이 이현 씨 작품이었어요.”

여자의 말을 들은 이현은 두드러진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나직하게 흐르는 감탄이 그가 적잖이 감동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작품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소장 기회는 번번이 놓쳤어도 매번 신작 발표하실 때마다 꼭 갤러리에 들러서 감상하고 있어요. 가장 최근 작품은 개인적으로 특히 더 좋아해서 전시 기간 동안 열 번 가까이 보러 오기도 했었구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기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건축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던 두 사람은, 이현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이고 솔직한 감상을 짧게 들려주었다. 유명 미술 잡지에 실린, 뜻조차도 모호한 현학적 표현이 난무하는 평론을 읽을 때보다 이현은 더 진지했다. 이현이 그림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도 잡지보다는 거리에, 이웃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저희가 7년 동안 동거를 해 오다가 내년에 결혼할 계획이거든요. 결혼하면서 옮기게 될 새집에는 이현 씨 작품을 거는 게 목표니까, 행운을 빌어 주세요.”

“와… 결혼, 축하드려요.”

이현의 말에 두 사람은 뜻밖의 축하를 받은 것 같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여자가 남자친구의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이미 오래 함께한 뒤에 자연스럽게 그냥 흘러가듯이 결정이 된 거라서 딱히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이현 씨에게 축하받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며 이현은 문득 옆자리에 선 라우를 의식했다.

홍콩으로 출장을 갔던 여름. 한 가족에게 선택받았던 인우의 그림에 부러움을 느꼈던 자신이 지금은 이런 감사한 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 옆에서 침묵을 침묵으로 삼키려 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미래였다. 자신의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깨에 부드럽게 올려지는 손에 뒤를 돌아보니, 라우가 손길보다 더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얘기 나눠요. 내가 와인 좀 더 갖다줄게요.”

이현의 빈 잔을 손안에서 자연스럽게 거두어 가 막 몸을 돌리려던 라우는 벤과 눈이 마주쳤다.

“슈퍼스타의 애인이라는 게 원래 외로운 역할이죠. 이현은 지금 ‘더 핸즈’의 간판스타나 마찬가지라서요.”

웃으며 얘기하는 벤에게 마찬가지로 짧게 웃어 보인 라우는 빠르게 무리를 벗어났다.

파티를 위해 임시로 코너에 마련된 바에 빈 잔을 내려놓은 그는 높은 스툴에 걸터앉았다. 이현의 말대로 술은 한 종류의 와인만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듯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바 직원에게 와인을 한 잔 부탁했다.

와인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한 손으로 턱을 넓게 문지르며 바에 팔꿈치를 괴고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 너머로 등 뒤를 바라보았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 사이로 이현의 뒷모습과 옆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현은 처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자신의 작품을 아껴 주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현을 바라보던 라우는 와인이 준비됐다는 이야기에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와인을 맥주처럼 단숨에 반이나 비워 버렸다.

이현은 어떻게 느꼈는지 몰라도 오늘 이곳에 도착해 자신이 보였던 어색한 행동들이 후회스러웠다. 겉보기에는 이상할 것 없는, 특히나 이곳 파리에서는 대담한 축에 낄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현은 아직 사람들 앞에서의 스킨십을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이현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당돌하게도 그에게 호감을 드러냈다는 옆방의 어린애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깨끗이 인정하자면, 관계의 깊이와 진지함을 그들에게 증명하고 과시하고 싶다는… 유치한 욕구였다.

하지만 답지 않은 행동을 했던 진짜 이유, 자리를 벗어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긴장으로 목이 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인 라우는 슈트 재킷의 가슴을 더듬어 안에 든 부피감을 확인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절반의 와인을 전부 비워 냈다.

잔을 채 내려놓기 전에 누군가 등 뒤에서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제가 초대해 놓고….”

라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좌석 부분이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의자를 회전시켜 이현과 마주 보았다.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그의 두 손을 끝 쪽만 살짝 붙잡아 엄지로 손톱을 쓰다듬었다.

“남자친구가 슈퍼스타인데 이 정도로 불평하면 안 되지.”

이현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으며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두 잔의 와인이 새로 서빙되고, 두 사람은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아 잔을 부딪쳤다.

“난 남자친구라는 말이 왜 이렇게 좋을까? 사귀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고 얘기했었지만… 그거랑은 별개야.”

진지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듯 얘기하는 라우의 옆모습에, 이현은 웃으며 와인잔의 얇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홍콩에서… 메일 주소 교환하자고 했던, 암스테르담에서 온 남자에게 네가 뭐라고 했었는지. 혹시 기억해?”

“그건… 딱히 대표님을 의식해서 한 말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특별히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라우는 그의 솔직한 반응이 사랑스러웠다.

“알아.”

“…….”

“넌 그런 쪽으로 그렇게 영악하게 계산할 사람이 아니란 거,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라우는 와인잔을 만지는 이현의 손에 슬그머니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알면서도 좋았던 거야.”

“…….”

“누군가의 남자친구로 오해를 받았는데… 왜 불쾌하거나 찜찜하지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는지….”

당시의 감정을 상기하듯 라우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푸른 눈이 이현을 향했다. 오늘 그의 눈은 파도가 잠잠한 날의 바다 같았다.

“사실은, 그냥 기분이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날아갈 것 같았어.”

“몰랐어요….”

“그때의 나도 몰랐어.”

라우가 이현과 맞닿은 쪽의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툭 얹듯이 손을 올렸다. 단련된 팔과 커다란 손이 전하는 무게는 묵직했다. 어깨를 거슬러 올라가 뒷목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라우는 이현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한 실장이 데려온 임시 알바생에게 정신없이 빠져서 전혀 나답지 않은 미친 짓을 벌이게 되고… 그가 이렇게, 나라는 사람과 내 삶 전체의 방향까지 바꿔 버리는 존재가 될 줄은.”

유니가 미셸에게 소개받아 섭외한 DJ가 비트가 강한 음악을 플레이시키고 있었다. 고조되는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깨와 어깨, 무릎과 무릎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는 서로의 얼굴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이현의 얼굴을 시선으로 꼼꼼히 더듬던 라우는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그런 뒤 자신의 아랫입술로 이현의 입술을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정한 시간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지금 몰래 빠져나갈까?”

■ ■ ■

크리스마스 카운트까지는 ‘더 핸즈’에서 시간을 보낸 뒤 파티를 빠져나와, 시립현대미술관 앞쪽에서 센강 너머로 새벽 1시에 흰색 조명을 밝히는 ‘화이트 에펠’을 보자는 것이 두 사람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더 핸즈’ 앞으로 마중 나왔던 세단은 이딸리앙 가에서 콩코드 광장 쪽으로 더 내려가지 않고, 방돔 광장이 있는 방향으로 좌회전을 해 뻬 가로 진입했다. 광장을 지나 튈르리 공원을 왼쪽으로 끼고 가도 크게 돌아가는 길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팔각형 모양의 방돔 광장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속도를 낮춘 세단은 한 호텔 앞에서 멈춰 섰다.

“…….”

이현은 왼쪽에 나란히 앉은 라우를 돌아봤지만 그는 웃기만 할 뿐 설명이 따로 없었다.

연한 베이지색의 유니폼 코트를 입은 도어맨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이현은 반대쪽에서 내려서는 라우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트렁크 쪽으로 차를 빙 돌아온 라우가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 손을 잡고 호텔 내부로 들어섰다.

호화로운 로비에는 우아한 대형 트리가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과한 장식을 배제했음에도, 그렇기에 더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트리였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파티에서 나왔으니까 바에서 잠깐 위스키라도 한잔하려는 건가.

은은한 조명이 불을 밝힌 긴 복도를 한 걸음 정도 앞서 걸어가는 라우의 등을 바라보며 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레스토랑과 바를 모두 지나쳤다. 성인 네 명이 겨우 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라우는 좀 전에 지나온 복도에 깔려 있던 카펫과 같은 로열블루색의 카드키를 꺼내 들었다.

안내가 필요한지 묻는 직원에게 그가 괜찮다고 사양한 뒤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둘이 되자 이현은 그제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슬쩍 당기며 물었다.

“에펠은… 안 가는 거예요?”

그가 느슨하게 벽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화이트 에펠을 꼭 함께 보고 싶었던 건가?”

만약 그랬던 거라면 큰일이라는 표정이었다.

이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라우는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6층 복도에는 아래층 로비의 복도와 똑같은 좋은 향기가 감돌았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으면서 이현은 홍콩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둘 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손을 꽉 잡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었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친 듯이 뒤엉켜 거실을 엉망으로 만들었었다.

바로 며칠 전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 같기도 한 기억을 더듬는 사이, 숫자 대신 룸의 이름이 적힌 방 앞에서 그가 문을 열었다. 아마도 그는 오후에 먼저 이곳에 와서 미리 체크인을 해 둔 것 같았다.

호텔과는 인연이 없는 이현이라도 파리에서 1년 넘게 생활하면서 그 존재를 모르기가 힘들 만큼 유명한, 이 도시의 여러 상징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닌 호텔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비싼 투숙 비용에 대해 동료들이 떠들어 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미안해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그의 노력을 단지 금전의 문제로만 치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 아는데,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와….”

이번만큼은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고 마음먹긴 했지만, 현관 너머 하나의 문을 더 열고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선 순간, 노력할 필요도 없이 감탄이 흘러나왔다.

상앗빛을 기본으로 차분하면서도 생기 있는 옅은 에메랄드 컬러의 가구들을 배치한 공간은, 건물이 세워진 18세기의 한 장면 속으로 발을 들인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라우는 이현의 반응에 일단 안심한 눈치였다.

“테라스로 나가서 잠깐 야경 좀 볼까?”

“테라스도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이현의 손을 잡아끄는 라우는 이현보다 더 들뜬 것처럼 보였다.

“방돔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거든.”

호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 무감해질 정도로 이런 곳에 많이 드나들어 봤을 것 같은 그의 상기된 모습에 이현은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소파 세트 앞을 지나 두세 개의 계단을 오른 그가 테라스로 이어진 문을 양쪽으로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라우는 마침 이 방에 테라스가 딸려 있으니 한번 둘러보자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열 명 이상이 만찬을 할 수도 있는 커다란 식탁까지 갖춘 넓은 테라스에는 키가 큰 야외용 히터 두 대가 빨갛게 열기를 내고 있었고, 기역 자 형태로 꺾인 테라스의 구조에 맞춘 크림색의 푹신한 소파 앞 테이블에 풍성한 생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투명한 바람막이 갓을 씌운 커다란 초들이 테라스 곳곳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누가 보더라도 연인인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게 분명한 달콤한 분위기였다. 이현은 어쩐지 귀 뒤쪽이 간지러웠다.

“크리스마스라서… 일부러 준비하신 거예요?”

“웃지 마. 나도 지금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그가 뒤에서 이현의 허리를 껴안으며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함께 쑥스러워해 준 덕분에 이현은 조금 편안해질 수 있었다. 라우는 분명 자신보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적극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런 식의 낭만적 이벤트를 스스로 즐길 성격은 아니었다.

“네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그래서 나름대로 최소한으로만 준비한 거야.”

이현은 어깨에 턱을 올린 그의 뺨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날 위해서라는 거 알아요.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쑥스럽지만… 부담스럽거나 싫은 거하고는 달라요. 제가, 리액션이 좀 없죠?”

이번엔 라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연인 사이에만 키스할 수 있는 목덜미 깊은 안쪽에 입을 맞췄다.

“그런 거 바라지 않아. 상관없어.”

“고마워요…. 정말 예뻐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현을 안은 팔에 지그시 힘을 준 채 라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중에도 그렇게 말해 줬으면 좋겠다.”

혼잣말처럼 빠르게 중얼거린 얘기라 정확하지는 않았다. 쑥스러워 죽을 것 같은데 샴페인이라도 마시자며, 그가 서둘러 소파 쪽으로 손을 끄는 바람에 말뜻을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두 대의 히터에서 타오르는 가스 열 덕분에 자정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그다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샴페인의 첫 모금을 마신 뒤, 라우가 이현의 코트 깃 안으로 손을 넣어 바깥쪽으로 슬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갤러리에서 봤을 때부터 말해 주고 싶었는데. 옷, 여전히 잘 어울려.”

학생풍의 낡은 코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슬림한 핏의 고급스러운 슈트는, 초대된 파티에 입고 오라며 홍콩에서 라우가 선물해 줬던 것이었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잘 입었어요.”

이현의 말에 라우는 웃어 보였다. 밝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물질을 포함해 시간과 애정과 삶 전체를 주고 싶어 한다는 진심을 알기에, 이현은 이 순간 그가 느끼고 있을 자책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자신의 맨손에 추워하고, 자신의 낡은 코트 하나까지도 죄스럽게 느끼는 사람.

그것이 모든 감정을 물질로 치환하려는 속물근성을 기반으로 한 시도일 뿐이었다면, 지금 그의 아픈 미소에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지끈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난 처음부터 너를 오메가라 생각했었어.”

히터에서 튀어 오른 불꽃이 산소와 만나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정적 속에서, 라우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확실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베타라고 하는 네 말도 믿지 못했었지. 숨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넌 정말 베타였고, 적어도 오메가가 아니었고, 그런데도 나는 네 페로몬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고… 심지어 네 페로몬은 점점 더 강해지고 분명해졌었어. 넌 나에게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세계였고, 위협적인 동시에 거부할 수 없이 신비롭고 매혹적인 미지였어.”

이야기를 멈춘 라우가 옆을 돌아보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페로몬만 얘기하는 게 아닌 거… 알지?”

이현은 허벅지 위에서 긴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짧게 웃었다.

“네 페로몬 앞에서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지금까지의 자신을 잃는다는 생각에 공포스럽고 거부감이 드는 동시에… 드디어 해방될 수 있다는 안도를 느끼기도 했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방어할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게… 이상하게, 그게 안심이 되더라.”

허리를 굽혀 두 팔을 무릎 위에 걸친 그는 테이블 위의 풍성한 자나 장미 다발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고스트인 자신이 싫으면서도 유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동차들을 사 모으고, 내 갤러리에 팬텀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의미에 집착해 왔던 모순도 비슷한 거겠지. 거부하고 싶어도 그것 때문에 외로웠어도… 결국은 그게 나니까.”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던 잔을 들어 기포가 가득한 황금빛 액체를 반 정도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이현을 돌아본 라우의 눈은 희미하기만 한 빛 속에서도 푸르게 타고 있었다.

“너는 아버지의 일에 대한 자신의 처신이 비겁했다고 얘기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만… 넌 그 상황을 계속 괴로워했고 거기에 무감해지지 않았어. 그리고 결국은 달라지려 했고, 달라졌지. 아버지가 먼저 상처를 줬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려 하지 않았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만의 속도로 묵묵히 삶을 통과해 나가려는 너의 몸짓이 나에게 얼마나 투명하게 빛나 보이는지, 너는 모를 거야.”

이현이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오메가가 된다는 실체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애썼던 것처럼, 라우 역시도 이전의 조급함을 버리고, 가장 핵심에 남은 진실만을 가지고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합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님의 체인징은 명백한 잘못이었어요.”

“…….”

흠칫 몸을 굽히는 그의 긴장이 느껴졌다. 이현은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단 그 부분은 분명히 해 둔 뒤에 생각해 봤어요. 만약… 대표님이 자신의 정체와 체인징 가능성에 대해 먼저 얘기했다면 어땠을까.”

옆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간절한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없이 20년 이상을 살았으면서도, 그 없이 보낸 1년 남짓한 시간은 매 순간 더는 못 버틸 것 같은 극한이었다.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기만 하면, 그 고통이 바로 해소될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가장 두려웠던 건, 사랑에 빠진 상태의 감상적 충동에만 의존해 그를 용서하고, 두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사랑의 감정이 덜 여문 상태였다면 어쩌면 겁을 먹고 도망갔을지도 모르죠. 반대로 사랑이 깊어진 상태였다면… 그런 얘기를 왜 이제야 꺼내는 거냐고 원망했을지도 모르구요. 일어나지 않은 과거의 가능성이기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잘 모르겠다는 결론밖에는 내릴 수가 없었어요.”

“…….”

“그 뒤에 제가 느낀 건…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들이라는 거예요. 아위가 주었던 사랑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다는 것.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고, 아직 더 이 사랑에 희망을 걸어 보고 싶은 기대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그제야 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충격과 당황과 슬픔이 가라앉은 내면에 조용히 떠오른 진심은… 그거였어요.”

감정의 표면만을 건드려 물결을 일으키는 현상이 아닌, 깊은 근원지를 흔들어 물길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사랑임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숨 쉬는 것조차 멈춘 듯, 감정을 극도로 억누르고 있는 라우의 눈빛은 자신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네가 장소나 형식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우리 둘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거야.”

라우의 차분한 목소리에 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적어도 아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장소에서 너에게 청혼하고 싶었어.”

“…….”

이현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하듯 가늘어졌다. 그리고 쥐고 있던 잔을 더듬더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이 순간을 추억하고 싶을 때,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곳이길 바라서….”

말을 마친 라우는 오른손을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어, 손바닥 위에 올라가는 크기의 아담한 상자를 하나 꺼내었다. 기둥의 형태로 길게 타오르는 히터의 불길이 그의 얼굴 위에서 붉게 일렁거렸다.

그의 긴장이 눈에 보였다. 힘주어 입술을 다문 얼굴 근육이 경직돼 있었다.

“네가 받아 주지 않아도 나를 너에게 줄 수밖에 없다고 이미 고백했지만…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게… 겨우 이거야.”

“…….”

자신이 준비한 것이 너무나 초라해 미안하다는 눈으로,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자신의 모든 것임을 호소하는 눈으로, 그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상자를 여는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이현은, 지금부터 그가 하려고 하는 행위 자체보다, 그가 손을 떨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놀랐다.

가장자리에서부터 손톱만큼 안으로 들어간 위치에 세로로 촘촘한 바느질 디테일을 가미한 검은색 가죽 상자였다. 겉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골드 컬러의 테두리가 상자 내부의 삼면을 감싸고 있었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중앙부의 쿠션 주위로 사각의 얇은 금색 테두리가 한 번 더 둘려져 있고… 두 개의 같은 반지가 쿠션 사이의 틈에 나란히 몸을 묻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플래티넘의 반지는 아주 심플한 디자인이었음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묵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한 반지가 아닌, 무거운 약속의 증거 역할을 수행하는 반지임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역시도 취향이 요란한 편은 전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여러 반지를 앞에 두고 고심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직은 이 반지가 전하는 의미보다, 이것을 열심히 골랐을 그의 정성이 더 상상하기 쉬웠다.

“반지를 한 쌍으로 준비했지만, 너는 이 반지에 대해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가질 필요가 없어.”

바짝 긴장해 있었던 태도와 달리 그의 말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현이 내용물을 잘 볼 수 있도록 상자의 내부를 이쪽으로 돌려 무릎 위에 내려놓은 그는 오른손으로 이현의 왼쪽 어깨를 쓰다듬었다.

“지금 나는… 이 반지를 함께 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반지를 낄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려는 거야. 내가… 너의 것이라는 표시와, 내 약속의 증명으로.”

팔을 타고 내려간 손이 소파 위에 가볍게 올려 두었던 이현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함께 껴 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이현은 기다렸다.

“서이현.”

그가 눈에 띄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잘못 사랑해서, 너를 상처 입히고 외롭게 했지만….”

“…….”

“내가 너를 원하는 형태로 곁에 두게 되더라도, 그 방식이 너를 아프게 한다면 결국 나에게도 그것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알아.”

손등에 겹쳐진 그의 손이 뜨거웠다.

“네가 자신의 육체와 인생을 건 각오를 하면서까지 나에게 걸어 준 희망을, 내 모든 것을 다해 지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 있을까.”

“…….”

깊은 속에서부터 감정에 열이 가해지고 있었다. 못 박힌 듯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의 진심의 무게를 그대로 전부 받아 내 달라고, 받아서 부수어 버리든 버려 버리든 모두 너의 손에 맡기고 너의 처분에 따르겠다고. 삶 전체로 부딪쳐 오는 그의 진심에, 머리로 의식하기도 전에 본능으로 몸이 떨렸다.

이현은 상자 속 두 개의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와 체인징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찼었다. 막연하게라도 결혼을 그려 볼 여유도 없었고, 연애와 관련된 쪽으로 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지도 않았다. 좋고 싫고 이전에 이현에게는 아직 고려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주제였다.

아마도 라우는 자신의 그런 상황을 미리 짐작했을 것이다.

이 청혼이 또 다른 구속이나 부담이 돼 버리지 않도록, 답을 내려야 하는 또 다른 과제가 되지 않도록, 방법을 숙고했을 것이다.

시카고에서, 이현을 잃고 싶지 않은 초조함에 불쑥 꺼내 놓았던 결혼 얘기와는 전혀 달랐다.

이현은 천천히 눈을 들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은 순간의 불꽃같은 감정에 심취한 로맨틱한 감상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와도 같은, 숨기지 않는 눈이었다.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과열되었던 감정을 덜어 내고 또 덜어 낸 끝에 손에 넣은, 겸허하기까지 한 마지막 진실로서, 상대에게 기꺼이 자진하여 구속되기를 원하는 성숙한 남성의 눈이기도 했다.

“이런 반지만으로는 아무런 강제력도 법적 효력도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실질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지. 이 반지를 본 사람들은, 내가 이미 진지한 관계에 속해 있고, 그 사람의 소유임을 드러내고 싶어 할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테니까. 쉽게 말해서, 이걸 끼는 순간 난 실질적으로는 유부남인 거야.”

붙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라우는 일부러 웃으며 농담조로 이야기했지만, 이현의 표정을 풀 수는 없었다.

이현은 그의 진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손에 겹친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반쪽짜리 결혼을… 하자는 거예요?”

“…….”

“나는 미혼이고… 아위는 내 것인, 그런 이상한 결혼을요?”

“그래, 그런 이상한 결혼. 하지만 결혼의 보편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어. 우리에게 필요한 형태로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고, 거기에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시야에 들어온 반지는 똑같은 모양을 한 한 쌍이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자신의 약지에 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가 이현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얼굴을 보면 울 것 같아서 이현은 입술을 깨물고 손을 피하려 했지만… 뺨을 감싼 두 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너는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경험을 해. 네 몫의 반지에 대해 결론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생각하려 할 필요도 없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언젠가, 이 반지를 끼고 싶다는 생각이 네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때….”

“…….”

“그때 우리, 결혼하자.”

먼 훗날의 얘기라도, 결혼을 청하는 문장을 발화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바랜 듯 가녀린 핑크빛의 자나 장미에 라벤더와 라넌큘러스, 유칼립투스 등을 섞어, 수수한 듯 청초하고 풍성하게 장식한 센터 피스에서는 내내 꽃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다른 강렬한 향이 그 외 모든 향기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그때까지는 나만의 결혼으로도 충분하고 과분해.”

그가 향기를 풀고 있었다.

디디의 페로몬에 굴복해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반응해 버린 고스트의 페로몬이 아닌, 골든 알파인 그가 스스로 제어를 풀고 개방한 페로몬이었다.

이현은 뺨을 감싼 그의 팔목을 잡아끌어 내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게 뭐예요. 그건 너무… 왜, 그렇게까지….”

그건 당신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표현이 그의 진심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 애써 삼켜 냈다.

구속되고 싶지만 구속하고 싶지는 않다는 그의 이상한 구혼은, 동정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

상대의 손에 반지를 끼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소유라는 표식을 자신의 손가락 위에 이식함으로써, 그는 지금… 자신의 평생을 이현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며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는… 변화를 겪지 않고 평범한 베타로 살아갈 수 있었어. 자신이 디디라는 것도 평생 모를 수 있었겠지. 네가 해 준 결심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오히려 나는 지금… 이 반지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고 너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네가 손해인 거야, 바보야.”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피식 웃음이 새었고, 동시에 눈물도 흘러 버렸다.

왜 눈물을 참으려 했던 건지, 이현은 문득 의아해졌다. 흐르는 대로 눈물을 그냥 흘려 버렸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뺨 위로 흐른 눈물을 삼키듯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슴과 가슴이, 뺨과 뺨이 꼭 맞닿도록 끌어안았다.

“서이현. 이현아, 사랑해.”

인간의 감정과 이성은 물론이고, 알파와 고스트의 본능까지 전부 동원해서, 나 자신도 부정하고 가두어 두었던 내면의 내면, 본능의 본능까지도….

“내 전부가 너를 사랑하고 있어.”

청각이 아닌 가슴에 수를 놓는 것 같은 피와 살 같은 말들이었다. 이현은 눈을 감으며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의 사랑이 자신의 사랑보다 낮고 부족하다고.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손가락을 굽혀 그의 재킷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향기에 묻혀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절히 원해 왔던 것 같은 변화가, 가까운 미래로, 현재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사랑해요. 그리고, 사랑할게요.”

■ ■ ■

파리발, 인천행. AF0268편.

예정 시간보다 24분 늦은 06시 19분 터미널 도착.

공항의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바람이 덤벼들어 코트 자락을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한 해를 단 며칠 남겨 두고 본격적인 한겨울로 향하는 서울의 날씨는 혹독했다.

가지고 있던 머플러와 장갑을 이현에게 주고 오면서 보온에 신경을 쓰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이곳에 비하면 파리의 날씨는 봄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라우는 오른쪽 주머니 안에서는 핸드폰을 꽉 쥐고 왼쪽 주머니 안에서는 엄지로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릴 뿐, 코트의 깃을 단단히 여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캐리어도 없이 보스턴백 하나뿐인 단출한 짐을 든 기사를 뒤따르던 라우는, 차가 눈에 띄자 곧바로 걸음을 재촉해 그를 앞질렀다. 느긋하게 통화를 하고 싶어, 비행기가 완전히 착륙한 순간부터 전화를 걸고 싶었던 것을 계속 참았던 탓에 더는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도착하셨어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음이 채 두 번을 넘기기 전에 이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응, 지금 막 차에 탔어.”

이현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그제야 라우는 어깨의 힘을 풀고 따뜻한 좌석에 느슨하게 기댈 수 있었다. 그를 떠나 한국에 돌아오고 나면, 그곳에서의 일들은 전부 없었던 일이 돼 버릴 것 같은 불안이 있었다.

[피곤하시겠어요. 비행기에서 좀 잤어요?]

“음… 아니. 한숨도 못 잤어.”

[왜요.]

이현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파리에서의 일들이 다 꿈 같아서 들떠 있기도 했고, 집에 가면 서이현이 보내 준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잠이 안 오더라.”

[…….]

전화기 너머에서 이현은 말이 없었지만 그가 엷게 웃는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차라도 한 잔 만들어 책상 앞에 앉았는지, 테이블에 뭔가를 내려놓는 소리와 마룻바닥에 의자를 끄는 소리 등이 차례로 들려왔다. 그런 자잘한 소음들마저도 듣기 좋았다.

자동차가 영종대교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밖으로 서해를 바라보고 있던 라우는 왼손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겨우 공항 안에서 이동하는 동안에도 이 반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선을 받았는지, 넌 모를 거야.”

항공사 카운터에서, 출국 수속을 밟는 동안, 보딩을 기다리는 라운지에서, 또 비행기에 탄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남녀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서 손가락으로 옮겨 갔는지. 그리고 그들의 표정 변화로 짐작하건대, 이 조그만 반지 하나가 얼마나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는지에 대해, 라우는 평소보다 좀 더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에는 몰랐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지.”

[몰랐다는 말이 더 얄미운데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아님,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익숙해진 건가….]

마지막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이현의 작아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라우는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이젠 내가 그 시선이 필요해진 거야.”

[…….]

“반지를 꼈다는 걸 누가 좀 알아줬으면 했거든. 그래서 사람들을 살피다 보니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거지.”

반지라는 단어가 연거푸 등장하는 심상치 않은 대화의 내용에, 뒷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을 보이는 법이 없는 기사마저 흠칫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제가 대표님에게 준 반지라고 생각하겠어요.]

“네가 준 거지. 낄 수 있도록 네가 허락해 준 거니까.”

[…….]

“서이현, 우리 약속 기억하지? 내가 이렇게 행복해하고 있으니까 죄책감 느끼지 마.”

[네. 그럴게요.]

“당분간 직접 운전하는 건 피해야 할 정도로 지금 정신 못 차리고 들떠 있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이현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이현이 어떤 압박도 받지 않길 원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오면, 그는 스스로 나머지 하나의 반지를 상자에서 꺼낼 것이다. 자신을 용서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때까지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으면 그뿐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앞으로 평생을 해 나갈 일이었다. 조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통화를 마치고 전화기 너머에서 이현이 사라지고 나자 라우는 조금 초조해졌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현의 선물이 무엇일지, 기대를 넘어 거의 두려울 정도였다.

주차장 문이 열리는 동안 잠시 정차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차에서 내려섰다. 약 11시간의 비행은 어떻게 참았나 싶게 여유가 없었다. 차보다 먼저 주차장으로 들어간 라우는 이현이 사용했던 지하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

지하는 계속 자신이 직접 청소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주인 없이 오래 비워진 공간들이 으레 그렇듯 이곳이 스산해지는 것이 싫어서, 이곳에 내려와 책을 읽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가끔은 혼자 목욕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곳에서 혼자 잠드는 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며칠 집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렇게 애를 써서 관리해도 걷어 낼 수가 없었던 눅눅한 어둠이 녹아내리고, 이현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시절처럼 흰 햇살이 공간에 가득했다.

그렇게 서둘렀던 것도 잊고 잠시 스튜디오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라우는 소리 없이 웃으며 왼손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사이 습관이 돼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위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올라가 거실의 입구에서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다. 소파 옆, 식당과 거실을 나누는 벽에 꼼꼼하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기대 서 있었다.

막상 눈앞에 두고 나니 아까워서 선뜻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거실 입구에 선 채로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용물을 알 수 없어도, 포장된 상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들썩거렸다. 그의 선물이 그림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아서 더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커피를 내려 괜히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한참 시간을 보낸 뒤, 오후가 되어서야 라우는 포장을 열어 보았다.

“으음….”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실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라우는 허리를 약간 숙이고 어깨를 좁히며 미간을 바짝 모았다.

눈 오는 파리의 밤거리에서 자신을 발견한 이현이 망설임 없이 웃어 주었던 이유. 그리고 곧바로 눈물을 보이며 가지 말라고 붙잡아 주었던 이유.

상자 안에는 두 개의 캔버스가 짝을 이루고 있었다.

가로세로가 각각 약 1미터 정도인 두 캔버스에는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 낸 것인가 싶을 만큼 두 작품은 정교하게 일치했다. 여러 재료와 다양한 톤의 푸른색을 사용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 낸 푸른색 이미지였다.

똑같은 색을 조합해 같은 작품을 똑같이 복제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작한 작가 본인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그리는 쪽을 택하겠다고 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창작에 대한 부담이 없는 대신 상당한 인내와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앞쪽의 첫 번째 작품을 천천히 살펴본 후 두 번째 작품을 제대로 마주한 후에야, 라우는 그 푸른색 이미지가 바다라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 작품과 달리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수영 팬츠만 입은 채 서핑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

그림 속 인물은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었지만, 발리에서 보았던 모래처럼, 그가 바다 위에서 느끼고 있는 자유로움이 전해져왔다.

그것이 서이현이 보는 라우 위쿤이었다.

자유를 주는, 자신을 받아주는 바다와도 같다고. 이현은 그렇게 표현해 주었지만, 라우의 생각은 반대였다.

난해한 푸른색 이미지가 바다로 보이도록 해 주는 것, 형태 없는 유령에게 색을 입히는 것은… 사람이었다. 보드를 띄우고 파도에 올라탄 사람이 있어서 바다는 바다일 수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이름을 붙여 불러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유령은 형태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현이 자신을 자유롭게 한 것이다.

두 작품을 나란히 세워 놓고 한참을 응시하고 있던 라우는 상자 안에서 나온 봉투를 개봉했다. 이현이 직접 겉면에 그림을 그린 듯한 엽서 크기의 카드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컬러풀 고스트> ― 그와 나’.

‘컬러풀 고스트스’에서 ‘s’를 지워 낸 단수형의 제목이 눈을 끌었다.

카드에 긴 이야기를 적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스스로에게 가장 편안한 언어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었으니까.

몸을 낮춰 그림 앞에 무릎을 꿇은 라우는 인어의 비늘 같은 푸른색 결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이현이 떠난 후, 물기 없이 바싹 마른 모래 같았던 거실 가득, 푸른 물결과 흰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라우는 반지를 낀 왼손을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 ■ ■

“대표님. 대표님?”

“어.”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시계와 반지를 번갈아 보고 있던 라우는, 옆자리의 주한이 바로 귓가까지 다가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원두 거래처 후보지요. 제가 다섯 군데로 추려 놨는데 공사 기간 동안 같이 좀 둘러보시자구요. 안 듣고 계셨죠?”

“아… 미안. 다른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다른 생각요? 반지 보면서 멍때리고 계셨잖아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막내들이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웃기면 그냥 웃어라, 이놈들아.”

체념하듯 그렇게 말한 라우는, 일부러 체중을 실어 주한의 어깨를 내리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있어. 잠깐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식당을 빠져나가는 등 뒤에서 녀석들이 ‘담배는 핑계일 게 뻔하다’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라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이기도 했고, 듣기 나쁜 것도 아니었다.

기온은 낮아도 한낮이라 현관 앞 테라스에는 햇빛이 충분했다. 한국 시각으로 정확히 2시가 된 것을 확인한 라우는 통화를 연결했다.

“좋은 아침.”

전화기 너머에서 아직 잠에 취한 이현이 눈을 비비며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음… 쿤은… 좋은 오후요.]

“아, 권주한한테 잔소리를 듣고 있는 오후야.”

엄살을 부리듯 얘기하며 테라스 난간 앞에 서서 청바지 뒷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스터디 모임 중이에요? ]

“어. 처음엔 신입들 데리고 선배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건가 했는데, 지켜보니까 제법 진지해.”

공사 덕분에 유급 휴가를 세 달이나 쓰게 됐는데 손 놓고 놀기만 할 수는 없다며, 올해 초부터 주한은 재작년에 입사한 두 명의 막내와 미술계 최신 동향에 대해 공부하는 모임을 일주일에 한 번씩 갖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 사 마시는 돈도 아끼겠다고 우리 집 빌려 달라더니, 지금 짜장면 시켜 먹고 있어.”

투덜거리는 라우의 말에 이현의 목소리에서도 웃음기가 묻어났다.

[형 요즘 커피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구요.]

주한은 지난달부터 커피 공부도 시작했다.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을 위한 비용은 팬텀에서 지원하고 있긴 했지만, 본인의 열정도 예상보다 더 대단했다.

“돌아온 탕자 아들을 보는 기분이지. 요즘 제법 의지가 돼.”

[누나랑 떨어지게 되면서 사실 형 걱정 많이 했었는데, 다행이에요.]

“그러게. 그 녀석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자만이었나 봐.”

한쪽 어깨를 높이 추켜 핸드폰을 고정시킨 라우가 담배를 꺼내며 피식 웃자, 이현이 따라 웃었다. 이제 이현은 어느 정도 잠이 깬 것 같았다.

[저, 어젯밤에 말씀 못 드렸는데. 2주일 후에 새로운 작품 전시될 것 같아요.]

“그래?”

말끝을 높이 올린 라우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입술에서 끌어 내리며 차갑게 얼어붙은 야외용 의자를 끌어 걸터앉았다.

[보러 와 주실래요? 우리 못 본 지도 한 달쯤 됐으니까….]

“보고 싶다고 얘기하는 거야?”

안에서부터 가득 차올라 더는 담아 둘 곳이 없어 넘쳐흐르는 미소를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이현이 막힘없이 또박또박 얘기했다.

[네, 보고 싶어요. 여기로 와 주시면 좋겠어요.]

“…….”

자기 귀를 의심하며 순간적으로 얼굴에서 웃음기까지 사라졌던 라우는, 다음 순간에는 무너지듯 테이블 위에 팔을 베고 엎드렸다.

“지금 방금, 네 페로몬 냄새 맡은 것 같았어.”

[…….]

이번에는 건너편에서 말이 없어졌다. 뒷목과 귓바퀴까지 빨갛게 물들었을 이현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라우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보고 싶었다. 이제 곧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보고 싶었다.

“그럼, 전시 일정도 대략 잡혔고… 어떤 작품인지 이제는 들을 수 있는 건가? 소재나 주제 둘 중 하나라도 얘기해 줘. 응? <컬러풀 고스트스>의 다음 작품일까?”

[음… 그건 아니에요.]

“그래?”

[네, 그리고 아마 이것도 연작으로 이어질 것 같아요.]

“궁금하다.”

[어린 구름이 자기 방을 떠나 막 여행을 시작하려고 하는 그림인데… 그리다 보니까 실제로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모습도 그려 보고 싶더라구요.]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을 이현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라우는 소리 없이 혀로 입술을 축인 뒤 손바닥으로 입술 주변을 넓게 쓸었다.

이현이 스스로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라우는 느낄 수 있었다.

좁은 방을 떠나 여행을 시작하려는 어린 구름.

이현은 이제 그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언어를 완전히 되찾은 것이다.

라우는 자세를 바꾸어 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새 작품도 완성됐으니까 하는 얘기인데….”

귀 기울이는 이현의 호흡이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1억에 대해서 그동안 생각해 봤어.”

[…….]

“이번 작품부터는 나에게 돈을 보내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어.”

예상대로 이현은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다른 일들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때 당시 이미 집 앞에서 떨고 있는 널 본 순간 눈이 돌 정도였고, 너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뭐든 돕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그런 마음 한구석에는 이 일로 너를 조금이라도 더 나에게 묶어 둘 수 있을지 모른다는 계산도 분명 존재했어. 그래서 나에게는 이 돈이… 떳떳하지가 않아. 그동안 보내왔었던 돈에도 전혀 손대지 못했어. 발리에서 보내온 돈도 마찬가지고. 그건… 내 몫이 아닌 것 같았거든.”

라우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왼손에서 빛나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 손의 반지가 조금이라도 더 떳떳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지금까지 보내 줬던 돈에 내가 나머지를 채워서 ‘늦은 발현’ 같은 단체들에 그 1억을 기부하는 게 어떨까 해. 성별 간의 이해를 촉구하고, 성별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단체들로 몇 군데 추려 놓긴 했거든.”

[아….]

“나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거야. 형질 때문에 겪어야 하는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서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으니까.”

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라우는 볕을 쏘이며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고마워요. 저에게도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에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방식으로 ‘늦게 발현’한 사람일 테니까.]

이현의 말에 라우는 소리 없이 입술만을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이것으로 뭔가를 다 벗어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다.

통화를 마친 라우는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쉬며 굳어 있던 어깨를 낮추었다.

하루에 몇 번씩 짧은 통화로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가 잠들기 전,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지만… 이현과의 통화에는 여전히 약간의 긴장이 필요했다.

이현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에게 빚을 진 기분 때문이 아니다. 두 번 다시는 그를 잘못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편안함을 가장해 느슨해지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라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넓은 전면창 너머로, 이전에 <소외>가 걸렸던 자리를 차지한 <컬러풀 고스트>의 다채로운 푸른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소외>에 그랬던 것처럼, 라우는 지금도 여전히 집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질문을 빼놓지 않고 있었다.

「혹시 이 그림에서 뭐가 보여요?」

하지만 더 이상 정답을 얘기하는 사람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이미 그 사람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답도 오답도 없음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식상한 표현이라도, 사실이 그랬다.

같은 그림을 바라보더라도 각자 자신의 경험, 감정, 욕망을 투영하기에 감상은 모두 달랐다. 이제는 그 다름을 듣는 것이, 다양한 컬러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거실 안의 그림을 바라보며 버릇처럼 왼손의 반지를 엄지로 쓸던 라우는, 문득 이미 자신이 이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음을 느꼈다.

언젠가의 이현이 말했었다.

「변하고 싶어요. 변해 버리고 싶어요.」

그리고 라우 자신이 그에게 말했었다.

「나도 그래요. 나도 변해 버리고 싶거든. 완전히 다른 존재로.」

그건 오랜 바람인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체념하고 받아들였던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날 밤 라우는 자신의 침실로 찾아온 이현을 거부하지 않았었다. 그가 모든 것을 부수고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존재이기를 무의식중에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이현 씨가 변하게 해 줄래요?」

그리고 이현은 결국 자신을 변하게 했다.

긴 숙면 뒤의 아침처럼 몸이 가벼웠다. 반짝거리는, 수만 개의 세밀하고 고운 입자가 자신을 감싸 안는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이현의 향기였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완결. 외전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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