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와주지 않는 세상
짧게 고민한 민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 집에만 결계 쳐서 뭐 하나.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오는 고양이도 인터넷에서는 비일비재하던데. 하물며 나비는 고양이보다 기동성이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란 건 결코 아니었다.
까짓 거 힘쓰는 김에 더 쓰자. 민수는 이 건물 전체에 결계를 치고 가자 다짐했다. 고로 민수는 이 늦은 시간에 도언의 제안에 응할 이유가 사라졌다.
“아니요. 시간도 늦었고.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도언은 민수의 말에 더 붙잡지 않았다. 민수는 도언과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괜한 잔소리를 하나 더 내뱉었다.
“손님. 오면서도 말했지만 웬만해서 밤에 안 돌아다니시는 게 좋아요. 손님은 밤에 사고 잘 나는 운이니까요. 돌아다니고 싶으시면 석양이 내릴 때까지가 좋겠네요. 알겠죠?”
민수는 도언에게 그리 말하면서도 제가 어이가 없었다. 요즘은 학원 뺑뺑이 돌리는 초등학생이 자정까지 집에 안 돌아가는 게 기본이라던데, 다 큰 사내에게 일찍 좀 다니라는 조언이라니. 심지어 해가 다 내리기 전에 집에 가라는 건 선을 넘었다. 그러나 말을 한 민수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조언에도 도언은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고분고분한 대답에 민수는 도언이 더욱 딱해졌다. 제가 낯선 이에게 이런 조언을 받으면 저런 반응은커녕 백 퍼센트 무시하고 소금 뿌릴 게 뻔했다. 제가 생각해도 과한 조언이었다. 물론 정말 걱정되어 말하는 거지만, 그 속사정을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저 미친 소리가 따로 없을 텐데 말이야.
어차피 도언이 제 조언을 따라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게 어딘가. 민수는 이 집 근처에 마력 교란 결계를 평소보다 더 튼튼하게 설치하고 가리라 다짐했다. 이 건실한 청년이 마법사의 예비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제 말이 좀 과했죠. 요새 이 주변이 더 흉흉해서 그래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요. 안 그래도 밤에 사건이 잘 벌어지시는 분인데.”
도언은 당부하는 민수를 쳐다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도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초점이 흐려졌다.
“……손님?”
정신이 팔린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민수가 도언을 불렀다. 그에 도언은 정말이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민수 씨도 조심해서 가세요.”
민수는 인사하며 걸음을 옮겼다. 도언은 그런 민수의 뒷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정말…….
한참을.
❊ ❊ ❊
민수는 결계를 칠 준비를 했다. 어차피 눈속임밖에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식신들에게는 꽤 효과적일 테다. 건물 밖으로 나온 민수는 건물을 둥글게 돌며 그곳을 기점으로 네 방위에 표식을 남기고 차게 식을 아스팔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건물 전체를 덮을 생각을 하던 민수였기에 방대한 마력이 사용되었다. 마법 내용이 마력 교란 결계이긴 하지만, 그 마법을 쓰는 순간 마력 흔적은 필연으로 발생한다. 이를테면 총이 발사되는 순간 사격수의 소매에 묻는 이산화질소 같은 거다. 초연 반응과 비슷한 그 순간을 식신이 알아채기 전에 그 흔적을 지울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민수는 기감을 이용해 그 근처에 있는 나비 다섯 마리를 감각해 내었다. 다행히 이 건물은 아까 그 미친 마법사들의 회의장과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나비는 평소에 보이는 물량이다.
민수는 눈을 감고 나비가 제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한 마리가 떠났다…… 세 마리가 사방으로 퍼지며 가 버렸다…… 나머지 한 마리가 허공으로 사라졌을 때.
‘지금이다.’
민수는 아스팔트에 대었던 두 손을 무겁게 들어 올려 그대로 하늘로 뻗어 내었다. 민수가 만든 마력장은 하늘로 뻗어 올라가, 건물 전체를 뒤덮었다. 근 50년 만에 민수가 사용한 가장 큰 마법이었다. 물론 마법은 깔끔하게 성공했다.
민수는 큰 마법 흔적을 식신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흩어 내어 지웠다. 그리고 제 뒷주머니에서 타로를 꺼내 덱에서 네 장을 뽑아 펼쳤다. 위력이 가볍다면 상관없지만 이 정도 범위의 마법을 사용할 때, 그리고 그 효력을 오랜 시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수의 힘이 담긴 마법 현물이 필요했다.
제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물건은 그 자체만으로 제 시간과 마력이 깃들기에 마법을 유지시키는 매개로는 타로 카드가 적합했다. 민수는 엄지를 송곳니로 찢어 네 장의 카드 뒷면에 일직선으로 그었다. 붉은 선혈이 카드의 중심부에 쭉 그려졌다.
물을 흡수하지 않는 맨질맨질한 재질의 카드였으나, 민수의 피가 닿자 카드의 온 색깔이 붉게 변했다. 제 생력을 집어넣어 마법 도구에 가까워진 이 카드를 민수는 편의상 부적이라고 불렀다. 민수는 건물을 돌며 담의 붉은 벽돌 사이에 카드를 말아서 쑤셔 넣었다. 이번 부적은 흐르는 마력의 시간을 붙잡아 마법의 효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네 개의 카드를 일정한 간격으로 모두 쑤셔 넣은 민수는 그제야 제가 만든 마법 결계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광범위한 마법을 하다 보니 힘이 너무 들어갔다. 이 정도면 식신은 물론이고 마법사들이 정신 차리고 집중해도 건물의 위치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할 거다.
마법사들은 마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들에게 살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오감보다는 육감이었다. 마법사의 육감이란 마력 그 자체이다. 뭐, 마력보다 오감에 집중하는 마법사라면 건물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거다. 물론 그런 마법사를 민수는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핸드폰이랑 건물, 그래도 이중으로 마법을 걸어 놨으니 식신이 손님을 발견하지 못하겠지?’
민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제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십여 분쯤 길을 걷자, 거리 곳곳에 마법사들이 튀어나와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 목숨을 거두라는 결론이 난 망할 회의가 끝났나 보다. 평상복을 입고 있는 마법사는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제 친구의 마력을 집어삼킨 바보 트리오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거리를 뒤지고 있을까?’
세계수의 씨앗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 주변을 뒤지라고 하던 셋이었다. 덕분에 위험할 뻔했던 도언을 제 집에 잘 수납하고 서비스로 결계까지 쳐 주었다. 그들만 없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마주칠 뻔한 마법사들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한 연합원이 습격을 받아 죽은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정말 그 트리오는 제 친구가 살해당한 사건을 입 다물 생각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유력한 용의자가 민수 자신이었기에 나오는 어이없는 대처였다.
‘이럴 때는 연합에 말해 물량으로 수사하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될 텐데. 아니지. 어차피 나는 발견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말 안 하는 게 노동력 절약 면에서 나은가.’
세계수의 힘을 담은 민수는 극소한 마력이라도 쉽게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가 원하면 마법사와 마주치지 않고 거리를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민수는 지금 또한 마법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멀리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민수도 방심할 수 없었다. 마법사를 살해하고 그 마력을 흡수하지도 않고 떠나는 괴짜 마법사가 근처에 있다. 심지어 제 흔적도 단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름 끼쳤다. 큰 파란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민수는 이 공간을 떠나 이사할 때가 되었는가 가늠했다.
‘아, 집 계약이 1년이나 더 남았는데.’
민수가 걱정하는 건 마법사들의 반란도, 제 목숨도 아닌 부동산 계약이었다. 세계수가 괜히 세계수겠는가. 마법사들이 떼로 덤벼도 민수 한 명에게 못 당했다. 하지만 그들이 떼로 덤비면 또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한다. 힘겨루기 문제가 아닌 짜증의 문제였다.
밥 먹을 때 초파리가 한 마리만 윙윙거려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놈의 마법사들은 초파리만 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곳곳에서 끈질기게 목숨을 노려 온다. 만일 그들에게 정체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제 이야기가 전설처럼 구전될 때까지 다시 산속에 결계를 치고 몇백 년을 살아야 한다.
민수가 숨지 않고 전면으로 나서면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따로 떨어져 사는 마법사들이 민수 때문에 집합할 테니 그들이 내뿜는 식신에 고생할 일반인 생각 해야 하지, 일반인으로 분장해 저를 암살하려고 노력하는 마법사들 때문에 신경도 항상 곤두세워야 하고. 대체 언제쯤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대충 살아도 되는 건지.
민수는 하늘을 향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차디찬 새벽 공기가 민수의 폐부 깊숙이 박혔다가 민수의 체온에 덥혀져 밖으로 나왔다.
‘이사를 하게 된다면 집 위치 보고…… 수도 전기 상태 확인하고…… 근처에 마법사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그 전에 전세 계약부터 파기해야 하는데…….’
따지면 따질수록 귀찮아졌다. 그 바보 트리오가 연합에 알리지 않고 끝까지 잘 숨기면 언젠가 그들 모두 이곳에서 떠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이상한 괴짜 마법사 살인마도. 민수의 머릿속에서 행복 회로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도언도 걱정이었다. 민수가 항상 도언의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으니 그를 향한 마법사와 식신을 쫓아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사까지 하라고 하면 그땐 분명히 미친 사람으로 보겠지.’
이미 도언에게서 정상인 취급받을 기대는 저버린 민수였다. 민수는 꼭 이렇게 마법사에게 박해받는 존재에게 마음이 쓰여서 문제였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 없는 민수는 마법사에게 피해를 받는 존재를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다.
차라리 산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계수를 향한 마법사들의 관심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을 때가 스트레스는 덜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 짓을 하라고 하면 못했다. 이미 도심가만이 느낄 수 있는 편의와 인터넷 속도에 매료된 도시 사람 김민수였다.
‘그들이 이곳을 떠날 때까지 조금만 더 봐줘야 하나.’
민수는 도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도언이 어찌 되든 제 한 몸만 쏙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지만, 참 그게 안 되었다. 도언이 식신들이 달라붙는 일반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리 마음이 쓰였다.
민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으로 바꾼 제 외모를 풀어냈다. 민수의 마력이 많긴 하지만 그를 종일 유지하고 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민수는 집에 오자마자 불을 켜고 소파에 대자로 누웠다. 기지개를 쭉 켜니, 팔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절로 났다.
“난리다. 난리야.”
마법사들 사이에 잠입해 신경을 세웠던 민수는 녹초가 되었다. 적어도 며칠간은 이 근처에서 마법사들이 범람할 테니, 민수는 운동이라도 해서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다짐했다. 마법사들이 대체 언제 제집으로 돌아갈까. 그것보다 마법사 살인마는 대체 누굴까. 이리저리 어지러운 잡념이 민수를 괴롭혔다.
골치 아파진 민수는 씻기 위해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향해 지척지척 걸어갔다.
민수는 샤워하고, 양치하고, 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울은 현관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올 때 뒤를 돌지 않으면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도언이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을 마주쳤을 때 민수 씨라고 불러서 습관적으로 바꾼 줄 알았다.
결국, 민수의 집에 들어온 건 김민수의 외형이 아닌 최선우의 외형이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피곤함에 굴복해 정신없이 깊은 수마에 빠졌다.
❊ ❊ ❊
다음 날, 깨끗한 한낮이었다. 출근하던 민수가 상쾌한 가을 공기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드니 오랜만에 청명하고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정말 구름 한 점 없었다. 완벽했다.
……오점처럼 하늘을 돌아다니고 있는 식신 한 마리만 뺀다면.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식신은 여전히 민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날아다니는 식신이 어느 순간 한 마리가 더 추가되었다. 평균적으로 마력이 극소한 낮에 마주치는 식신의 수는 많아 봐야 세 마리 이하였다. 낮에 움직이는 식신을 만들고 유지하는 건 마력이 높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었다. 그런데 두 마리가 이 대낮에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회의장에 모였던 마법사들이 모두 뜨내기는 아닌 건가.
그 식신 중 한 마리는 어제 민수가 설치했던 결계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제가 완성한 마법에 의심은 하지 않는 민수였으나, 쟤가 향하는 방향이 도언의 오피스텔 쪽이니 괜히 걱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는 출근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도언의 오피스텔에 들러 결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민수의 머리 꼭대기에 있던 식신은 민수와 길을 같이하다가, 중간부터 길을 돌려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그러면 그렇지.’
나비가 오피스텔로 가다가 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는 걸 확인한 민수는 그대로 출근할 수도 있었으나,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그냥 오피스텔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온 김에 확인 한 번 한다고 손해 볼 건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식신이 도언에게 끌리는 것은 그가 풍기는 마력이 아닌 외모 때문이기에 그가 얌전히 집에만 있는다면 식신의 눈에 띌 일도 없다.
식신에 대해 희한한 점이 하나 있다면 식신은 마력을 모으는 마법사의 도구에 불과하면서 오감 중 시각으로 감각해야 하는 아름다움에 미쳐 있다는 거다. 외모에 대한 마법사들의 취향은 다 다를 텐데, 주인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식신의 취향은 어째서 그리 오차 없이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2백 년 전에도 그렇더니…… 하긴, 취향 이상의 외모라는 게 있긴 하지.
민수는 도언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오피스텔 전체를 덮는 얇은 푸른색 막은 민수의 마력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자 중에 시전자인 민수만이 보이는 민수만의 결계다. 다른 마법사의 눈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민수가 호부처럼 오피스텔의 벽에 끼워 둔 카드 역시 튼튼하게 잘 박혀 있었다. 이 카드 덕분에 유지 시간이 길어진 결계는 적어도 3개월 정도까지는 민수의 마력 없이 잘 발휘될 것이다. 민수는 카드가 박힌 벽돌 위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벽돌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진다.
‘내 가게 근처에도 부적 붙여서 유지 시간 좀 늘려 줄걸’
부적을 만드는 데 필요한 두 가지. 마법사인 민수의 피와 민수가 항상 지니고 다녀 마력과 시간이 고여 있는 물건이다. 그 재료에 마땅한 물건은 역시 타로 카드였다.
78장의 타로 한 덱 중 한 장의 카드라도 사라지면 그 가치가 0이 된다. 민수는 손에 익은 카드를 갈아 치우는 게 못내 아쉬워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을 때 결계에 간간이 마력을 집어넣는 것으로 가게 주변의 결계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도언의 오피스텔은 항상 자신이 있는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게처럼 출석하며 결계의 마력을 보수할 수도 없으니, 민수로서는 큰 결심을 하고 카드로 부적을 만든 거다. 민수는 제 주머니에 잘 수납되어 있는 카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네 장이나 쓴 이 카드로 점을 풀 수 없으니 이건 가지고 다니면서 부적으로 써먹자.
담벼락에 박혀 있던 모든 카드를 체크한 민수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봤다. 식신처럼 허공에 뿌려져 있는 마력을 체크하며 다니는 민수는 어제 도언을 데려다주며 이 오피스텔에는 마법사가 살지 않는 걸 확인했다. 아니었으면 식신을 쫓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거다.
웬만해서는 마법사랑 엮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민수가 이 근처에 집과 가게를 연 것 또한 마법사와 함께, 흐르는 마력이 그리 없는 곳이어서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곳보다는 식신의 수가 적다는 거다. 민수는 하늘에서 두 마리에서 네 마리로 불어난 식신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제 일이 있었던 후부터 마법사들이 상주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쩔까. 그동안 식신도 불어날 테고. 뭐, 뭣 하면 다 버리고 튀어 버리면 될 일인데 문제는 우리의 어린양, 도언이었다. 민수가 도언 생각을 하며 오피스텔 담의 외벽을 쓸고 있을 때였다.
“어, 민수 씨. 안녕하세요.”
오피스텔의 현관에서 튀어나온 도언이 민수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민수는 벽에서 얼른 손을 떼고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손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민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 집에 친 결계 상태 좀 확인하러 왔습니다, 하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민수는 도언의 등장에 대답을 미루어 두고 하늘을 확인했다. 네 마리의 식신은 어느새 다른 공간으로 간 건지, 아니면 지닌 마력이 몽땅 소진되어 사라진 건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확인한 민수는 도언의 질문에 대답했다.
“출근 전에 좀 산책하다 보니까 여기네요.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민수의 물음에 도언은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민수 씨가 데려다주시기까지 했는데요. 출근하시는 길인가 봐요.”
“예에, 뭐…….”
민수는 순간적으로 도언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오피스텔의 옆 건물에서 마법사 둘이 이야기를 하며 나왔기 때문이었다. 제가 어제 마법 연합에서 위장한 자, 선우와 그의 친구 잔챙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혁민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정장을 차려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민수는 그들의 너무나 일반인처럼 보이는 외모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저도 마침 그쪽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같이 가시죠.”
“예에…… 그러시죠.”
민수는 도언이 건넨 말에도 설렁설렁 대답하며 그들을 계속 응시했다. 식신이 주로 밤에 돌아다니는 것처럼, 마법사들의 주 활동 시간대도 밤이다. 마력이 그나마 충만할 때가 낮보다는 밤이기 때문이다. 식신을 뿌릴 때도, 뿌린다고 지들이 알아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약간의 신경이라도 걸쳐 놓아야 했기에 대개 마법사들은 식신이 움직일 동안 깨어 있었다.
주인을 위해 마력을 모으는 식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 또한 마법사들의 마력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하루 중 마력이 가장 충만할 시기인 해 질 녘에 식신을 가장 많이 만들어 낸다.
자신을 만들어 낸 제 주인이 자고 있으면 식신 또한 자 버리거나 소멸해 버린다. 그렇다면 혹시 저들이 아까 발견했던 식신의 주인일까? 마법사는 보통 야행성 생활을 즐겨 하기에 떠오른 추측이었다.
그러나 보기에는 마력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낮에도 식신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저들의 마력보다 적어도 네 배는 많아야만 한다. 뜨내기일수록 밤에만 생활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정체가 뭘까. 마력은 적은데 낮에 활동하는 마법사라니.
“아시는 분이신가요?”
도언이 마법사들을 함께 쳐다보며 물었다. 민수는 도언의 말에 제가 너무 뚫어지게 마법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저는 고개까지 뒤로 꺾어 가며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민수는 머리를 짧게 털어 내었다. 그리고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니, 아는 사람인가 했는데 아닌가 보네요.”
“그 아는 사람이 악연인가 봐요.”
“네?”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요.”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민수는 도언의 말에 뜨끔했다. 저도 모르게 마법사들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어쩌다 가게에 찾아온 마법사를 상대할 때 이를 악물고 표정 관리를 했었던 민수는 더욱 표정 관리에 열을 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괜히 저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 걸 마법사들에게 들켰다가 기분 나빠진 마법사들이 저를 향해 뭔 일을 할지 몰랐다.
저의 기분을 나쁘게 한 일반인을 상대로 마법사들이 하는 패악을 잘 아는 민수였다. 마법사들은 제힘이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범위라는 걸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가볍게는 골절에서부터 심하게는 사망까지, 복수라고 하기에는 과한 상황을 꾸며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들에게는 마력이 곧 권력이었다. 하여간 인간 생명 경시의 정점을 찍는 자들이다.
그들과 얽혀서 좋은 적은 없었다. 마법사를 피할수록 생활은 윤택해진다. 민수가 만든 지론이자 진리였다.
민수는 제 옆의, 식신의 사랑을 받는 불쌍한 어린양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쌍하기만 했다. 달라붙는 식신 때문에 인생이 꼬여도 더럽게 꼬였을 텐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마법사라니. 그 마법사와의 인연에서 악마 카드까지 떠 버렸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건데…… 부디 그 마법사가 양심은 있어서 기억 소거 마법이라도 걸어 주었으면 좋겠다.
금방 눈썹을 모으고 아랫입술을 올리며 안쓰러운 표정을 한 민수가 표정 관리를 하며 도언에게 물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손님은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친구가 집으로 찾아온다고 해서요.”
“친구라면 그분?”
민수는 단골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도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걔는 아니고. 여하간 저희 집을 못 찾겠다고 난리여서요. 이사할 때 딱 한 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새 까먹어 버렸나 봐요. 주소를 알려 줘도 못 찾겠다고 하니 원. 뭐, 안내해 줘야죠.”
스마트폰으로 지도도 상세하게 나오는데 길을 잃다니. 웬만해서 길치가 생기기 힘든 요즘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가끔 있었다. 본인이 어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발은 계속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 소위 길치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스마트폰에 떠오른 지도 따위 한낱 어지러운 그림에 불과했다. 하여간 인간들은 다양한 군상이 많아서 참 재미있었다.
물론 마법사도 모두가 다 획일적인 캐릭터들은 아니긴 하지만 힘을 추구하는 습성이 워낙에 비슷해서인지 지루하고 위험했다. 지루하면 안전하고 위험하면 재미있다는 공식을 깨는 수준이 아니라 아작을 내 버린 마법사들이다.
이 어린양이 좋아하는 그녀는 이 근처가 떠돌이들로 난리인 걸 알까? 카드로 알아보는 제 정보를 숨길 정도면 마력이 높은 축에 속할 테니, 이 근처에 살 거면 잘 알 거다. 민수는 진심으로 궁금한 걸 도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손님께서 좋아하시는 그분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나요?”
“글쎄요.”
그녀에 대한 질문에 도언이 가던 길을 멈추고는, 왔던 길을 뒤돌아보았다. 민수가 보았던 마법사들이 길의 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도언은 길의 끝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잘 지내게 해 드려야죠.”
‘그게 마음대로 되나.’
본인의 정체를 까먹은 상대를 잘 지내게 해 드린다니. 어떻게 한다는 건지 민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가 혹시 도언을 기억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든가. 그런 상황인가? 저런 대사는 상대의 가까운 사람만 할 수 있는 대사 아닌가? 괜한 호기심이 일어 버린 민수는 도언에게 다시 물었다.
“아, 결국 두 분께서 만나기로 하셨나 보네요.”
민수의 말에 도언이 입술만을 움직여 호선을 그리며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민수 또한 도언의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민수는 도언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도언은 침묵만을 고수했다. 의미심장한 침묵에 민수는 자신이 헛짚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럼 그런 말은 왜 한 거야?’
도언이 잘 지내게 해야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민수의 타로를 튕겨 낸 실력 있는 마법사가 아닌 도언 자신이었다. 어차피 민수의 점괘를 방어할 마력이 있다면 그녀는 도언의 엄호를 받지 않고서도 잘 지낼 거다. 도언과 마법사, 그 둘 중 누군가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면 그쪽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언이었다.
상대 마법사가 대체 이 인연을 어떻게 다룰지 기대가 되긴 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둘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상대 마법사는 가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법을 포기해야 할 텐데. 자신의 점괘를 튕겨 낼 정도면 마력이 선천적으로 적은 떠돌이 출신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때,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 있던 도언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제가 다시 다가서는 중입니다.”
“아, 뭐, 잘됐네요. 이제 손님을 기억하시던가요.”
“아니요. 상상조차 못 하시는 건지, 아니면 아예 과거에서 지워 버리신 건지. 못 알아채시더군요.”
민수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려는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주 답답해 죽겠다. 제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의 상대면 차라리 툭툭 털어 내고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 같은데.
과거 인연이 있던 인간을 마법사가 잊어버린 경우라면 그건 인간이 마법사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가끔 질 낮은 마법사들은 저에게 홀린 인간들을 그저 이족보행을 하는 모르모트로 쓴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잘 알고 있는 민수다.
“음…… 그냥 그 김에 다른 사람 만나 보시는 건 어때요?”
“인연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도언이 민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읊었다. 저건 분명 돈가스집에서 풀이했던 점사였다. 도언은 민수의 말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품어 두고 있었나 보다.
‘아,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을걸. 왜 그때 카드를 펼쳐서.’
물론 민수의 점괘는 인연이라고 나와 있었다. 상대는 도언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도언 자신을 그자에게 옭아매는 건 도언 자신이었다. 결국 그때 나왔던 악마 카드는 도언의 강한 염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도언이 깔끔하게 포기하면 인연의 끈은 놓인다는 소리다.
‘점에 갇히는 인간군상으로 보이지는 않아 보이는데.’
가끔 자신의 운명을 제가 들었던 점사에 끼워 맞춰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 이런 현상은 사주팔자를 본 사람들에 의해 많이 나타난다. 제가 가지고 태어난 여덟 글자를 풀어내 제 운명을 추측하는 그 학문 말이다.
제 운명에 대해 풀어 준 말들을 맹신해 버리면 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점사를 풀어 준 자들의 말만 믿고 그쪽만 바라보는 거다. 이래서 어린 시절 사주를 안 보는 게 좋다고 사람들이 누누이 말한다. 괜히 들었다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가 한정되어 버리면 손해 보는 건 본인이니까.
민수는 그런 사람들을 제 운명에 울타리를 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들은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게 제일이었다. 마력 없이 태어난 것만으로도 마력만 생각하는 마법사보다 더 높은 자유를 누리며 인생을 꾸릴 수 있는데, 그를 버리면 아깝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점집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민수였다. 참 독특한 타로집 사장이었다.
민수는 새삼스럽게 도언을 살펴봤다. 도언은 올곧게 앞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보름 내내 출석했던 단골이 친구인 이유인가. 왜 친구들끼리 쌍으로 어려운 사랑을 하는 걸까. 민수는 결국 참견해 버렸다.
“인연이라는 건 끈 같은 거죠. 쌍방으로 그 끈을 잡고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들이 먹고사는 거거든요. 상대분께서 손님을 잊었다고 하셨는데도 강한 인연 카드인 악마가 나온 건 다 손님의 의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님께서 어떤 능력을 지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지를 커버할 능력이 있으므로 강한 속박 카드가 나온 거예요. 물론 그 능력의 끝이 행복일지 아니면 그저 집착일지는 아직 알 수 없겠지만요.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사랑이고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네요. 절대 쉽지 않아요.”
민수가 타로집에서 손님에게 점괘를 전하며 이리 길게 말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차피 인간들만의 사건 사고인데 마법사인 민수로서는 귀여운 수준의 일들뿐이었다. 하지만 도언의 상대는 마법사다. 그것도 꽤 강한. 심지어 인간 쪽에서 먼저 마법사와 엮이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조언은 애써 할 만했다.
“운명이 인연을 이끈다고 하지만 인연을 이끄는 건 개인이고, 운명을 꾸리는 건 본인이에요. 너무 힘들면 놓아주세요.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민수는 제가 도언에게 하는 말이 스스로도 점점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타로가 내어 준 결과와 정확히 180도로 상충되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타로는 마법사와 도언이 인연이라고 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력한 인연. 그렇지만 가만둘 수가 있어야지.
타로에서 곧 죽는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일반인이 마법사와 인연이 있다고 죽게 되는 건 아니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는 생존 확률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 내가 진짜 듣기 싫어할 소리만 골라서 하는 걸 텐데.’
민수는 흘끗 도언의 눈치를 봤다. 도언은 민수의 권유에도 미미한 미소를 띠며 잔잔히 말할 뿐이었다.
“제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평생 인연이라는 거군요.”
‘그 포인트가 아닌데……!!’
제가 듣고 싶은 대로 들어 버리는 도언의 태도에 민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저런 고집도 식신이 더럽게 꼬이는 체질 때문에 만들어진 걸까? 민수는 영업시간도 아닌데 괜히 입 아프게 긴말했다고 후회했다.
하긴, 도언이 누구의 조언을 들을 만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처음부터 그의 눈에 항상 확신이 차 있었다. 그렇기에 점 자체를 잘 믿는 사람 같지 않았다. 카드도 대충 뽑고, 카드를 해석할 때 다른 손님과 다르게 카드에 눈을 두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제 주관이 확실한데 대체 타로는 왜 보러 온 거지.’
도언은 심지어 한 번은 네 배나 준다고 제안까지 했다. 심심풀이의 목적을 제외하자면 사람들은 보통 도저히 답이 안 나올 때나 타로를 보러 온다. 의외로 고학력자가 손님으로 많이 오기도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세상사 운칠기삼이라 했나. 본인이 할 만큼의 3할은 채운 걸 확신하는데 나머지 7할의 운이 언제 오는지 물으러 오는 거다.
알 수 없는 도언의 행보에 의아해하고 있던 중, 골목길에서 도언이 멈췄다.
“이제 저는 이쪽으로 가 보아야 해서. 다음에 또 봅시다. 민수 씨.”
“아, 네. 안녕히 가세요.”
민수는 도언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몸을 돌려 가게를 향해 나아갔다. 또 보자니. 가게에 또 온다는 걸까. 도언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제가 알아봐 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타로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민수의 가게에 올 이유가 없을 텐데. 하여간 희한한 인간이었다.
가게로 향하는 길, 주변에 마법사들의 마력이 몇몇 감지되었다. 쟤네들은 잠도 없나. 분명 마력도 얼마 없는 잔챙이들인데 어째서 마력을 보기 힘든 한낮에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필시 마법 연합인지 뭔지와 관련이 있을 거다.
민수를 쫓던 바보 트리오가 민수에 대해서 보고하지 않고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만 않으면 저들도 이곳에서 자리를 옮기지 않을까?
애초에 이곳은 민수가 심혈을 기울여서 정한 생활 공간이다. 마력이 진짜, 전혀, 단 한 군데도 솟아 나오지 않는 신기한 땅이었다. 시간이 고이면 마력이 모였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만 하더라도 거기서 내뿜는 마력이 은은히 있을진대, 이 근방은 정말이지 새로운 것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민수가 서울 한복판에서 거의 신도시급의 無마력 지구를 찾아내었을 때,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가.
근처에 꽤 전통 있는 대학교가 있었지만 근처라고 해 봤자 버스로 다섯 정거장은 가야 하는 거리였다. 고로, 마법사들이 민수의 눈에 띄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곳에 시간이 모여 마력이 고일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있어야 했다. 그때까지 눈먼 식신은 몰라도 마법사들은 안 볼 생각하고 터를 잡은 거였는데, 마법사들이 의도적으로 모인 거면 민수의 이런 노력도 말짱 꽝이다.
민수의 주변에 있는 마법사의 기척은 적어도 다섯 명 이상. 아까 전에 봤던 선우와 잔챙이를 포함한 수다. 그들이 뿌려 대는 마력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어떻게 마력을 두르는 게 저리 미숙할 수가 있지?’
뜨내기인 떠돌이들이 연합의 대부분일 거라는 사실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째서 이들을 전통 있는 가문에 입적시키지 않고 따로 연합을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연합이란 것도 미쳐 돌아가는 것 같던데 말야. 회의 중에 술을 나누어 주는 단체가 이 세상에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가장 처음 제 타로집에 손님으로 왔었던 그 마법사는 이 정도로 어설프지는 않았는데. 민수는 손님으로 왔던 그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렇게 비명횡사해 버릴 줄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건 그 정신없는 연합이 아니라 의문의 마법사 살인마였다. 이렇게 조용히 제 마력을 숨기고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마법사 살인마라고 하더라도 민수를 알아채지 못할 거다. 그리고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민수는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그자도 마법사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민수가 이리 조심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미 제 심장을 노리는 마법사들의 밥이 되어 있을 거다.
민수는 다시 한번 제 앞날을 경계해야겠다 다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 안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제발 마법사 사회가 하루빨리 ‘세계수’라는 존재를 환상이자 전설로 여겨 주길.
민수가 죽어 그 시체를 땅에 묻으면 곧바로 세계수가 발아된다. 그리고 그 나무를 차지하는 가문이 마법사 세계를 지배한다. 말이 좋아 마법사 세계를 지배하는 거지, 결과적으로 넘치는 마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힘을 가진 마법사들은 제힘만큼 잔인해진다. 그 말로가 얼마나 끔찍한지 아는 민수는 오늘도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언제쯤 편히 죽을 수 있나.’
오랜 세월 동안 마법사들을 피해 제 목숨을 보전하는 걸 목표로 삼았던 민수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내가 전생에 대체 무슨 업보를 가지고 태어나서는…….’
가슴이 답답해진 민수는 괜히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편히 죽는 거 안 바랄 테니까 편하게라도 살 수 있게 해 줘라!”
며칠 뒤, 출근한 민수는 제 주머니에서 붉은색의 카드를 한 장 꺼냈다. 제 피를 타로 카드에 발라 만들었던 호부다.
민수는 가게의 장판을 들어 올려 붉은 카드를 넣고서 다시 덮고는 짧게 마력을 집어넣었다. 이로써 민수가 항상 신경 쓰지 않아도 마력 교란 결계가 단단해질 것이다. 호부 덕분에 결계를 유지하느라 썼던 신경을 평소보다 반만 쓸 수 있었다.
민수는 제 주머니에 있는 타로를 두고서 가게 서랍에서 며칠 전에 깠던 새 카드를 하나 꺼냈다. 다섯 장으로 민수가 부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제가 지닌 타로는 이미 다섯 장이 소실되었다. 타로 카드 한 벌은 한 세계다. 카드를 하나만 잃어버려도 그 카드 덱은 쓸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민수는 새 카드를 펼치며 빠르게 카드의 수를 세었다. 누락된 카드가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나서 잘 정리해 책상의 한쪽 구석에다가 두었다. 민수는 제 주머니에 느껴지는 오래된 카드의 감촉을 느꼈다. 이곳에 이사하고 나서 영업할 때 항상 썼던 카드였는데, 이 카드가 일선에서 이렇게 은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주머니에서 낡은 카드를 꺼내어 보았다. 카드를 감쌌던 카드 상자는 곳곳이 상하여 제 하얀 종이 속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는 약간 찢겨 있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험하게 사용한 티가 팍팍 났다. 괜히 감상에 잠기기에도 미안해진 민수는 낡은 카드 상자를 다시 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드르륵-
“여기 영업하나요?”
그때, 새로운 손님이 민수의 가게에 들어왔다. 민수는 영업용 스마일을 얼굴에 내걸었다.
“네, 어서 오세요.”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민수는 하루의 영업을 끝내기로 하고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평소보다 손님이 많았던 하루였다. 카드 한 번 더 뽑아 보자는 괜한 진상도 없었고, 이별에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련한 손님도 없었다. 오늘은 주로 가볍게 재미 삼아 보러 오는 학생들과 사업을 해도 될지 말지를 물어보는 큰손 손님이 주를 이루었다. 상상 이상으로 많이 찾아오는 불륜 커플 또한 오늘은 오지 않았다. 시작은 꽤 완벽한 하루였다.
주변에 점점 늘어나는 마법사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낮에는 네댓 명 보이더니, 해가 기울수록 그 수를 점점 더 불려 나갔다. 환장할 지경이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마법사의 수와 당연하게도 비례해야 할 식신이 평소보다 더 적다는 것이다. 마력이 가장 충만한 시간인 해 질 녘조차 나비의 수가 훨씬 적어졌다. 며칠 전과 확연히 다른 상황이다.
마법사 수는 많아지는데 식신의 수가 적어지다니. 이건 마치 지구상에 살아 숨 쉬는 인구의 수는 점점 불어나는데 지구의 환경 오염도는 점점 낮아진다는 비유와 비슷했다. 민수에게 있어 식신은 환경 호르몬을 내뿜는 발암 물질이자 니코틴과 타르보다 더 해로운 존재였다. 말하자면 백해무익!
민수는 마치 6월에 함박눈이 내리는 것과 같은 이 이상한 상황에서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마법사는 많은데 그 상징인 나비는 없다. 파리는 많은데 구더기가 없다. 시험 삼아 돌리는 프로그램은 많은데 버그가 없다. 이상했다.
모든 것이 우연일까? 아니. 절대 아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는 주변 마법사들 경계하랴, 식신이 없는 상황의 인과를 추측하랴-식신이 많았으면 많은 대로 민수의 멘탈이 무너졌을 거다. 바퀴벌레가 길거리 사방에 날아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낮에도 돌아다니는 잔챙이 마법사, 마법 연합원에 대해 생각하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므로 오늘 민수에게 찾아온 손님들이 비교적 가벼운 질문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되는 TMI를 남발하여 선을 넘어 손님들의 원성을 샀다.
민수는 제 아들의 진로에 대해서 물어보러 온 중년의 여성에게 남편분이 본인 몰래 오토바이를 구매하였다는 딴소리에, 남자 친구가 생길 수 있을까에 대해 물어보러 온 10대 소녀에게 지금 연애가 문제가 아니라 수직으로 하락한 네 영어 성적이 더 중요하다든지, 어디에 땅을 살까 물어보러 온 할아버지에게 기대와 다르게 땅을 살 돈이 곧 없어질 것과 같은 말을 떠벌려 버렸다.
우락부락한 미술학도였던 단골 때는 그나마 나름의 필터링을 거치곤 했다. 허나 오늘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되는 정보를 숨길 센스가 정신과 함께 날아갔다. 나온 괘를 적절하게 필터링하여 푸는 것 또한 타로리더의 자질이었건만, 민수는 자꾸 실수했다. 일하는 도중에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런 손님들은 잘 구슬리면 단골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겠지만 민수의 태도가 문제였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 정보를 흘리듯 건성으로 말하니, 듣는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악담하는 것으로 오해하며 씩씩대고 나갔다. 손님에게 집중하려고만 하면 가게 주변으로 마법사가 지나다니니, 손님에 집중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도 민수는 정확도 높은 정보만을 알려 주었다.
애초에 아들의 진로 때문에 왔다던 중년 여성은 그 오토바이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들의 진로에 도움이 되는 학원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연애운을 물어보던 소녀는 영어 캠프에서 이상형을 만난다. 할아버지야 뭐, 할머니에게 들켜 비상금 자체를 회수당하니 어디 땅을 사야 할지 물어봐도 의미가 없었다.
모두 다 씩씩대며 나갔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떡일 거다. 물론 그 전에 민수에게 소리를 질러 놓은 것이 있어서 다시 찾아오진 않겠지만 말이다. 여러 고객이 지른 소리에 지친 고막을 휴식하던 민수는 마지막 손님에게 결정타를 맞았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다신 안 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피아노를 치고 싶다던 청년에게 피아노를 잡으면 대박도 중박도 못 친다고, 그렇다고 하던 공부를 쭉 하면 쪽박은 겨우 면한다고 하니 짜증 나서 나가 버렸다. 저 청년은 피아노보다는 성악을 해야 중박 이상일 텐데. 소리 지르는 걸 보니 굳이 카드를 안 뽑아도 알 수 있는 재능이었다. 성악 하라는 소리를 듣지도 않고 나가 버리다니.
‘부디 다른 곳에서 삽질이나 안 했으면 좋겠군.’
오늘따라 저녁 손님들이 많이 예민하다. 손님들이 민수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군 적 없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럴까. 민수가 새끼손가락으로 따가운 귀를 후비며 생각했다.
‘점괘는 정확하게 나오는 것 같은데…… 새로운 카드라 아직 나랑 합이 잘 안 맞는 건가?’
본인의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는 인정은 죽어도 안 하는 민수였다. 성악을 해야만 하는 청년이 나가고 곧바로 가게의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 손님을 마지막으로 가게 정리를 하려고 했었던 민수는 문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나가시던 분의 기분이 영 좋지 못하시네요? 싸우기라도 하셨나요?”
오랜만에 보는 어린양이었다. 도언은 자연스럽게 민수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 제 오른손에 있던 트레이에서 모카 프라푸치노를 꺼내 민수에게 내밀었다. 도언이 음료를 내밀기에 민수는 일단 받았다.
“어, 이건…….”
“저번에 저 집까지 데려다준 거에 대한 보답 중 하나죠. 덕분에 늦은 밤 안전하게 왔어요.”
그 누가 기습해도 다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건장하고 단단한 남자가 대꾸했다. 도언 본인은 트레이에서 아메리카노를 꺼내 마셨다. 이런 자잘한 선물 같은 거, 민수는 매우 좋아했다. 민수는 감사 인사를 하며 도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까 손님이야 뭐, 별거 아니에요. 가끔씩 따가운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요.”
“보통 진실이 가장 아픈 법이죠.”
“그렇네요. 가끔씩이 아니군요.”
민수가 프라푸치노에 있는 휘핑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도언과 밥을 먹은 적은 있어도 커피는 마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제 취향에 꼭 맞는 음료를 사 온 걸까. 민수는 빨대를 통해 올라오는 진한 자바칩과 차갑고 달콤한 모카 음료의 하모니를 느끼며 말없이 행복해했다. 오늘 온종일 신경 쓰느라 쌓였던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어휴, 이게 피로 회복제네요.”
민수의 감탄에 도언이 얕게 웃었다. 웃고 있는 도언의 얼굴은 형광등이 따로 없었다. 자체발광이란 글자를 저 혼자서 독식하고 있구나 싶었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빛을 내기는…….’
도언이 간이 필요하다며 저리 웃어 준다면 상대방은 분명 저 미소에 그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주었을 거다. 물론 그 상대방에 민수는 해당하지 않았다. 원래 오래 살면 모든 것에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애초에 미에 관심 없는 수더분한 본성 또한 그에 한몫했다.
민수는 휘핑크림과 음료를 뒤섞으며 도언에게 물었다.
“손님, 이번에는 핸드폰 가지고 있으시죠?”
도언은 말없이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민수만 볼 수 있는 마법진이 핸드폰 위에 둥둥 떠다녔다. 분명 민수가 마력 교란 결계를 짜내 심어 두었던 폰이 확실했다. 민수는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잘하고 계시네요. 잘 좀 가지고 다니세요. 저번처럼 놓고 다니시지 말고.”
식신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식신보다 더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괜히 도언에 반한 마법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마법사가 도언의 뇌를 엉망으로 만들고 제 하인으로 부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게 무섭다.
“여차하면 신고하셔야죠.”
“유념하겠습니다.”
마법사들에게 걸리면 경찰이고 뭐고 다 필요 없지만 그래도 민수는 괜한 의심을 피하고자 덧붙였다. 도언 또한 순둥하게 고개를 끄떡이며 대꾸했다.
“그래서 오늘은 음료수 전해 주시러 오신 건가요? 뭐 궁금한 거라도 있으세요?”
“궁금한 거요….”
도언이 짧게 말을 흐렸다. 준비된 질문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프라푸치노나 사 주러 온 걸까?
순간, 민수는 가게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미약한 마력을 감지했다.
처음에는 그냥 이 근방에 돌아다니는 마법사인가 싶었다. 하지만 부적까지 넣어 교란을 강화한 마법은 웬만한 마법사들의 눈에 절대 띄지 않았다.
마력 교란 결계란 마력을 지닌 자들이 결계가 쳐진 공간을 탐색할 수 없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결계 안에 있는 공간이 블러 처리를 한 듯 존재감이 뿌옇게 되기에 마법사들은 정확하게 공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저 마력은…….
대체 뭐지?
민수의 손끝이 차게 식었다. 다가오는 존재로 인해 온 신경이 곤두섰다. 작았던 존재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제힘이 발각된 적은 민수가 결계를 발명한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저 위치에서 발각된다는 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뜻. 세계수의 마력으로 짠 교란 결계를 발견할 정도의 마법사라니. 대체 누구인 거지? 만약 발각된다면 인간들은 어떻게되는거지아니그전에나부터여기서사라져야다른자들이안전한게아닐까괜히또여기가전쟁터가되….
쾅-!
그때 민수의 앞에 있는 책상이 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제 세상에 빠져서 패닉 직전에 갔던 민수는 갑자기 들리는 커다란 쿵 소리에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킬 뻔했다. 정신을 다잡고 소리의 원인을 살피자 도언의 커다란 손이 책상의 한가운데에 있는 걸 발견했다. 도언이 책상을 제 손으로 내리친 거다.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카드 덱이 도언이 만든 진동으로 조금씩 자리가 옮겨졌다. 덕분에 제 세상에서 빠져나온 민수는 눈썹을 이마 한가운데로 모으며 도언을 쳐다보았다.
도언은 제 손바닥을 책상에서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기가 돌아다녀서.”
“……잡았나요?”
“뭐, 그런 거 같네요.”
도언은 제 손바닥조차 확인하지 않고 말했다. 민수는 곽티슈 한 장을 뽑아 도언에게 건넸다. 티슈 한 장을 건네받은 도언은 역시나 손바닥을 보지도 않고 제 오른손을 쓱 닦았다. 도언이 잡았다는 모기의 으스러진 잔해를 보여 주지 않아서 진짜 모기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민수는 얼른 다시 집중을 하고 가게를 향해 다가오는 마력 감지를 시도했다.
‘……어?’
민수는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게를 향해 오던 마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소멸하여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곳을 향해 똑바로 오는 걸 감지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증발해 버리다니.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식신이야 목표가 있을 때만 일직선으로 비행하는 습성이 있으니 식신일 린 만무했다. 가끔씩 그럴 때가 있었다. 극미한 마력을 지닌 개라든가, 고양이, 혹은 인간들이 향하는 제 갈 길의 방향이 우연히 민수의 가게 쪽일 때. 민수는 식신보다 마력 감지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왕왕 있는 해프닝이었다.
민수는 이번에는 자신이 예민했다는 걸 인정했다. 갑자기 마력 감지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오는 길에 식신에게 걸려 마력을 빼앗겼기 때문이리라. 긴장을 푼 민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 몸을 늘어뜨렸다.
“……잡아 주셔서 감사하네요.”
민수는 도언에게 대충 대꾸해 주고 타로 덱을 꺼내 능숙하게 셔플했다.
민수라고 이렇게 약한 마력까지 일일이 감지해서 긴장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신호들이 언제 변해 저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에 하나, 민수가 방심이라도 해서 그들의 습격이 성공한다면 지구는 곧바로 마법사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들이 마력을 취하기 위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아는 민수는 때때로 제 목숨에 달린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이런 순간 가장 크게 느껴졌다.
잔뜩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사실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바퀴벌레를 발견해서 살충제와 고무장갑, 때려죽일 두꺼운 책까지 몽땅 찾아 장비하고 긴장하며 다가갔더니 바퀴벌레가 아니라 머리카락 뭉쳐 놓은 거일 때가 이런 느낌일까. 인간들에게 있어 바퀴벌레야 혐오라는 정신적인 타격만 주지만 민수에게 있어 마법사들은 거기에 더해 신체적 타격까지 준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수는 놀란 마음을 카드를 섞으며 진정시켰다.
“그래서 묻고 싶으신 게 뭐라고 하셨죠?”
도언은 일상적인 어조로 평이하게 대답했다.
“민수 씨 퇴근 언제 하세요?”
도언의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카드를 섞는 바빴던 손이 멈췄다.
‘얘 또 왜 이래.’
되묻기도 지친 민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언을 보았다. 도언은 그 눈초리를 받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날도 어둑해지고, 이제 슬슬 퇴근하실 시간 같던데.”
“뭐…… 이제 가게 접을 때가 되긴 했습니다만.”
“밤이 되면 주변이 흉흉하다고 하셨잖아요. 너무 늦게 퇴근하시는 거 아니에요?”
인간이 마법사를 걱정해 주다니. 고양이가 범 걱정해 주는 소리 하고 있다. 도언의 기색을 살펴보니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언이 손님이 아니라 그저 놀러 온 거란 생각에 민수는 섞던 카드를 카드 상자에 집어넣고서 책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손님이랑 다르게 괴한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답니다. 전 걱정 마세요. 그리고 꼭! 핸드폰 잃어버리지 마시고요.”
지금은 밤이다. 민수가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던 건 도언이었다. 사실 민수도 도언이 제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도 안 하긴 했다. 부모 말도 안 듣는 피 끓는 청춘이 생판 남의 말은 듣기야 하겠어. 제가 마법을 걸어 둔 핸드폰이나 잘 가지고 다니면 되었다.
도언이 민수의 말에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 줬다. 핸드폰 위로 제가 박아 넣은 마법이 마법진의 형태가 되어 푸르게 떠올라 빛났다. 마법 시전자인 민수에게만 보이는 표식이었다.
도언이 잘 가지고 다니는 거에 만족한 민수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 주고 다시 안쪽 주머니에 폰을 넣은 도언은 민수에게 물었다.
“민수 씨, 핸드폰은 왜 없어요?”
“핸드폰이요?”
“네. 전에 번호 없다고 하셨잖아요.”
‘아, 마법 연합원들 뒤를 쫓을 때 그랬었던가?’
도언이 말하는 건 분명 도언의 핸드폰에 결계를 심어 넣을 때 했던 말일 거다. 실제로 민수는 핸드폰이 없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건 핸드폰이 아닌 타로 한 덱뿐이었다.
“딱히 그걸로 연락할 사람도 없고 해서 안 만들었어요.”
핸드폰 산다고 통신사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았다. 손님이 없을 때 책이나 뒤적이며 읽는 민수에게 인터넷은 집에 있는 데스크탑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삶이었다. 누가 민수를 21세기에 사는 현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인의 심장인 스마트폰도 없는데 말이다.
“연락할 사람이 있다면 만드실 건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애초에 민수는 연락할 사람이란 존재가 제 인생에서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민수 본인의 앞날 챙기기도 바쁘다. 게다가 괜히 누군가와 연락할 정도로 정을 쌓다가 마법사에게 들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마법사들이 민수의 친구로 분장하여 민수를 함정에 빠뜨릴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 친구를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민수 씨, 그럼 집에서는 뭐 하세요?”
‘얘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민수는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너무나도 외로워서 아무나 붙잡고 친구 하자는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식신까지 꿰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면 분명 인간들도 심각하게 꼬일 것이 자명했다.
민수는 도언이 제게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타로라는 매개를 다루는 사람이 신기한가? 아니, 타로에는 흥미가 없어 보이던데. 그렇다면 정말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도언의 체질을 생각해 봤을 때, 사람들을 좋아하는 건 그에게 있어 썩 좋지 못했다. 식신이 꼬이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식신에 의해 사람들에게 배신을 많이 당한다. 민수는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의 신상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내담자의 카드를 읽는 과정에서 카드가 다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법사를 사랑한다는 이 불쌍한 청년에 대해서는 카드가 쉽게 알려 주지 않았다.
결국 민수는 도언이 건넨 질문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김에 그에게 말을 돌려 질문했다.
“아니, 그보다 손님. 친구 많으세요?”
“친구 말입니까?”
친구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언을 여기로 소개해 준 단골 또한 도언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는가. 민수는 도언의 대답을 다 듣지 않고 걱정을 담아 충고했다.
“손님이 여기 몇 번 오신 김에 말씀드리는 건데, 손님은 웬만해서 사람이랑 자주 만나는 걸 지양하는 편이 좋아요. 조금 더 보태자면 혼자 일하는 직업이 맞고요.”
생명체가 바글거릴수록 식신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다. 이 말뜻은,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도언은 필연적으로 식신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민수가 핸드폰에 마법을 심어 주었지만 그 마법 또한 한계가 있었다. 마력은 소모재였다. 민수가 마력을 주기적으로 충전하며 돌보지 않는다면 도언은 저 스스로가 스스로를 돌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수가 생각하기에 도언 스스로를 돌보는 과정에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지 않기’와 ‘사람들 많이 마주치지 않기’ 또한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식신이 별로 없는 낮에는 그나마 밤보다는 괜찮다.
“친구분 만날 거면 밤보다는 낮에 만나시는 게 낫겠고…… 그리고 실내에서 일하는 직업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출퇴근은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다니시는 게 좋아요. 대중교통은 사람 많으니까요. 골동품점도 안 가시는 게 좋겠고….”
저번에 본가에서 기사 딸린 외제차가 도언을 데리러 왔을 때를 생각하면 민수의 걱정은 의미 없겠지만, 민수는 노파심에 덧붙였다. 민수의 눈에 눈앞의 어린양은 완벽한 식신의 먹잇감이었다. 물론 그가 길거리 타로집 사장의 말을 얼마나 잘 챙겨 들을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말은 해 두는 편이 찝찝하지 않았다.
민수가 저 편하자고 하는 말이기에 내용은 정제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담자가 묻지도 않는 걸 말하는 건 간섭이었다. 오늘 하루 화를 내며 나갔던 손님들의 상담처럼, 민수는 도언이 궁금해하지도 않은 진로 상황을 추천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도언이 저더러 은둔형 외톨이나 되라는 거냐고 화내도 할 말 없었다.
하지만 도언은 민수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았다. 제 질문을 대차게 잘라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수가 말을 하면 할수록 고개를 끄떡이며 경청했다. 그렇기에 민수가 신나서 더 얘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땅과 하늘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부디 마법사의 마수에 걸려들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라.’
물론 도언이 좋아한다는 그 마법사를 단념하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의 앞길은 마법사와 얽혀 있을 테지만. 그 마법사의 마력을 보아하니 가문에 입적되지 않은 떠돌이 마법사는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마력이 적은 떠돌이 마법사면 카드로 그의 과거를 읽는 거, 매우 가능이다.
과연 도언은 그녀에게서 사랑을 쟁취할 수 있을까. 사랑을 쟁취하기 전에 목숨을 쟁취당하는 건 아닐까. 그들 사이에서 악마 카드가 떠 버려 이래저래 걱정된다.
민수는 도언에게 더 좋은 앞날을 영위하는 다양한 방법을 추천해 줬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어 보면 헛소리기가 다분했다.
민수를 유심히 보며 저를 향한 충고를 모두 경청한 도언은 다른 질문을 하였다.
“민수 씨가 하시는 말씀 유념하겠습니다. 카드로 봐 주실 만한 질문이 하나 떠올랐는데 봐 주시겠습니까? 제가 좋아한다던 그분,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계시나요?”
“감정이요? 감정 같은 건 그저 순간일 뿐이라 돈 내시는 의미가 없을 텐데요.”
“괜찮아요. 한번 봐 주세요.”
‘차라리 로또를 사지.’
도언이 지갑에서 오천 원 짜리를 꺼내 민수에게 내밀었다. 입금 완료. 순간의 감정은 사건의 인과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 굳이 여러 장 뽑을 필요가 없었다. 민수는 넣었던 카드를 다시 꺼내 섞고는 화려하게 펼쳤다.
“한 장만 뽑아 보세요.”
도언이 중간에 있는 카드를 한 장 뽑았다.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의 카드가 나왔다. 남자의 바닥에는 컵 세 개가 세워져 있었고, 팔 달린 구름이 남자에게 컵을 하나 내밀고 있었다. 남자는 그 컵을 못마땅하다는 듯 외면하고 있는 카드였다.
민수는 카드 속에 있는 남자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다 말했다.
“귀찮아하고 계시네요.”
“…네?”
되묻던 도언이 잠시 후, 허리를 접고 등을 떨어 댔다. 그는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입에 대고 웃음을 쿡쿡 참고 있었다. 상대가 지금 귀찮아하고 있는 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상대의 앞뒤 상황 다 모르면서 현재 상대의 감정만 듣고 저리 웃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분께서 지금 뭐 하고 계시는지 아시나 봐요.”
민수의 질문에 도언은 숨을 가다듬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도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요.”
민수는 그자가 사람이 아니라 마법사라고 정정해 주고 싶은 욕망을 내리눌렀다. 민수는 마법사를 사람 취급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도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 마법사의 일정을 어떻게 아는 걸까.’
좋아한다고 했던 그 사람이 완벽한 관종이여서 SNS에 자신의 스케줄을 빼곡히 올리기라도 하는 걸까? 부모의 한쪽이 인간인 떠돌이 마법사면 몰라도 웬만한 마법사들은 인간들에게 제 정보를 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한낱 인간인 도언이 그녀의 소식을 이리 잘 아는 걸까?
괜히 궁금해져 물었다.
“그분 SNS 같은 거라도 보시나요?”
“SNS요?”
“그냥. 손님께서 그분이 뭐 하시는지 잘 아시는 거 같아서요.”
도언이 입가에 능선을 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민수를 바라보는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글쎄요. 민수 씨는 SNS 같은 거 하세요?”
“저야 뭐, 핸드폰도 없는데요.”
민수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제가 가진 게 빈손임을 알렸다. SNS라니. 분명 민수에게 스마트폰이 있더라도 그런 건 안 했을 거다. 불특정 다수와 교류라. 그리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을 가진 민수는 아무리 세상이 발전하고 네트워크가 발달해도 혼자가 편했다.
입가를 올린 도언은 눈가까지 곱게 접었다. 주변에 식신이나, 마법사에게 보여 주기 무서운 미소였다. 인간들이라면 넋 놓고 쳐다보았겠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민수였다. 민수는 그려 낸 듯한 미소를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도언은 민수에게 대답했다.
“그분도 SNS 안 하신다네요.”
“아. 그래요?”
“핸드폰도 없다고 하시던데.”
‘아니, 그럼 어떻게 소식을 알고 있는 거야? 뒷조사라도 했나?’
도언은 뒷조사를 할 만한 충분한 재력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물론 돈이 없어도 급하면 빚을 내서라도 알아봤겠지. 그나저나 상대가 핸드폰이 없다니. 물론 핸드폰이 할 수 있는 건 마법으로도 몽땅 대체 가능하나, 웬만해서는 인간들의 발명품을 쓰는 게 마력 소비 측면에서 효율이 높았다.
그냥 철벽 친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과연 도언의 얼굴을 지닌 이에게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인간을 장난감으로 아는 마법사들이라면 때깔 좋은 장난감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데 얼씨구나 하고 좋아했겠지. 그렇다면 그 마법사가 진짜 핸드폰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왜 안 만드는 걸까.
민수는, 핸드폰이 없는 상대의 스케줄을 알고 있는 도언을 수상하게 바라보다가 멈췄다. 아니, 오해일 수도 있지. 설마 도언이 뒷조사를 정말 했겠나. 단정하긴 이르다. 민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아아…… 그럼 만나서 얘기를 나누셨나 보구나.”
“전보다 많이 하긴 했죠.”
‘역시.’
뒷조사를 한 건 아니겠구나. 민수는 속으로 오해했던 걸 속으로 가볍게 사과했다. 그래, 마법사를 알아봐 달라며 뒷조사까지 하는 건 도언의 입장에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굳이 뒷돈까지 써 가며 마법사와 엮이려고 발악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 귀한 목숨을 하수구에 들이붓는 것과 같았다. 도언에게 말을 건네는 민수의 목소리가 한 톤 밝아졌다.
“그럼 그분께서 드디어 손님을 기억하셨나 보구나!”
“아니요.”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민수는 혼돈 속에 제 몸을 뉘였으나, 곧 털어 냈다. 알아서 하겠지 뭐. 마법사와 그리 엮이고 싶어 하는 게 안쓰럽긴 하나, 이미 도언의 오피스텔 주변에 결계를 친 거로 민수는 할 만큼 했다. 심지어 핸드폰까지 결계를 걸어 두었다. 거기다가 쫓아오는 식신 퇴치까지. 돈가스와 모카 프라푸치노를 얻어먹은 것치고 민수는 정말이지 넘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민수는 제가 도언에게 해 준 목록을 찬찬히 손꼽아 보다가 깨달았다.
‘잠깐. 핸드폰을 계속 가지고 다닌 상태에서 마법사를 만난다면 그자가 도언을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핸드폰에다가 심어 둔 결계는 요새 자주 보이는 떠돌이 마법사나 식신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허나 민수가 만든 부적을 붙여 강화한 결계가 아니니 효과가 약하긴 하다. 강한 마력을 가진 자가 보면 미묘한 불편함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
그런 도언을 알아채다니, 역시 도언이 좋아하는 마법사는 잔챙이급의 마력을 지니지 않았나 보구나. 한 명 보기도 힘든 그런 급의 마법사를 대체 어디서 만난 걸까.
‘출몰 장소 알아보고 절대로 피해서 다녀야지.’
다짐한 민수는 그 사람과 보통 어디서 만나는지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가게 바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 셋만 아니면 말이다.
“…요새 나비들이 잘 안 보이네.”
“그러게. 그래도 연합원이 많이 모여서 밤에 나비들이 많이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너희 중에 해 질 녘 말고 식신 만든 사람 있어?”
“아, 나 있어. 세원이 마력 흡수한 뒤로 한번 해 보긴 했지. 그런데 만들자마자….”
가게 옆을 스쳐 지나가는 세 명의 무리는 제 친구의 마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먹어 버린 바보 트리오였다. 오늘도 역시 그들은 제 고유의 마력을 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도 두르고 다녔다. 친구의 것을 취해 늘어난 마력만큼 마력을 제 몸에 퍼부어 두르며 펑펑 낭비했다.
그들이 의견을 나누며 하는 ‘마법사와 식신의 반비례 사태’에 대한 토론은 민수가 홀로 추측하는 것보다는 영양가 있어 보였다. 지금 제 보금자리 주변이 왜 이렇게 개판 났는지 알아봐야 할 참이다.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일념이 민수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민수는 곧바로 그들에게 신경을 집중하며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펼쳐져 있던 카드를 수납하고 꽂아 두기만 하면 되었기에 가게 정리는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끝났다. 문제는 민수의 앞에서 민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도언이었다. 민수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제 본론부터 질렀다.
“손님. 이제 영업시간 끝났습니다. 제가 갑자기 좀 급한 일이 있던 게 생각나서.”
민수는 도언에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민수가 급하게 일어났으나 도언은 뚝심 있게 자리를 지켰다. 민수는 도언을 향해 눈썹을 추켜세웠다. 가게 주인이 가게 접을 시간이라는데 왜 안 일어나지?
“제 질문에 대한 상담은 벌써 끝났나요?”
민수는 도언의 한 마디에 급하게 열쇠를 챙기다 말고 얼어붙었다. 생각해 보니 오천 원을 받고 뽑은 카드는 단 한 장이었다. 답만 해 준다고 끝이 아닌데 이 철학을 잊어버렸다. 정신없어서 몰랐다. 한 장만 뽑고 오천 원을 앗아 간다니, 민수 본인이 생각해도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도언은 느긋하게 다리까지 꼬며 민수의 말을 기다렸다.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수가 잘못한 게 맞았다. 커뮤니티에 ‘돈 날로 먹는 타로 가게’라는 타이틀로 게시글이 올라와도 할 말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시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유익한 정보를 뿌릴 것 같은 바보 트리오가 멀어져갔다. 민수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도언을 보았다. 도언이 인터넷에 별점 0개의 후기를 올릴 만한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임감 넘치는 사장으로서 사후 처리는 필요했다.
“다음에 돈 안 받고 질문 세 개 더 들어 드릴게요. 오늘만 봐주세요. 진짜 급해서요.”
그제야 도언은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수는 도언이 가게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불부터 껐다. 민수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누가 보면 집에 불이라도 난 줄 알 거다.
“전에도 이런 일 있었던 것 같은데….”
도언이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민수의 정신은 온통 바보 트리오가 갔던 방향에만 꽂혀 있었다. 민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가게의 자물쇠를 채웠다. 민수는 바지 주머니에 몇 장 없는 타로 카드와 열쇠를 넣고서 도언에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손님, 다음에 또 봐요.”
민수의 인사에 도언이 대꾸도 하기 전에 민수는 그들에게 붙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그들을 발견하고 나서 시간이 그리 흐르지 않았으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마법사들은 요새 앉아만 있던 민수를 운동시키는 데 일조했다. 제 트레이너가 따로 없는 마법사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내며 이를 꽉 물었다.
‘아주, 이런 데에라도, 도움이, 되어 주어서, 고오맙기도 하다.’
그들이 흘린 마력을 따라갔다. 아무리 길이 갈라져 있어도 그들이 낭비하며 흩뿌린 마력 때문에 민수는 그들을 쉽게 추적할 수 있었다. 길바닥에 뿌려진 마력은 시간이 지나면 식신에 의해 사라진다.
어차피 지금은 주변의 마법사 수에 비해 식신의 수가 역대로 적었으나 얼른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을 추적하고 있으려니 익숙한 골목이 나왔다. 민수는 달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캄캄한 분위기가 스산하게 감돌았다. 간격이 있는 가로등이 깜빡깜빡거리며 제 빛을 회수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달리던 민수가 드디어 발걸음을 멈췄다. 기름칠이 되지 않아 열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철제문 앞에서 세 사람의 흔적이 멎었다. 철제문 위에 있는 칵테일 모양의 네온사인. 그 바보 트리오는 회의장으로 썼던 이곳을 제 아지트로 삼아 버린 모양이다.
가게 안쪽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역시나 셋. 안에 있는 마법사는 아까 그 셋뿐인 듯했다. 민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밑으로 내려갔다. 지하에 발을 대고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마력을 가진 자는 구석에 자리를 잡은 저 셋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인간들이었다.
‘이 구석에 가게가 있는데도 장사가 되긴 하는구나.’
민수는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 트리오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제 주변에 침묵 결계를 두르고 비밀 이야기 중이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 있어도 비밀은 비밀인가 보다. 결계 안에 있는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바보 트리오는 민수가 저들 모르게 결계에 조용히 구멍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다른 자라면 보지 못할 결계가 마력에 민감한 민수에게는 실체화 되어서 보였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가 친 결계라도 민수는 감지할 수 있었다. 덤으로 파훼까지도 민수에게 있어 껌이었다.
대마법사의 결계도 손쉽게 뚫어 버리는 그이기에 떠돌이 마법사의 결계는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었다. 심지어 결계의 짜임이 정교하지도 못했다. 확실히 떠돌이들의 마법이 가문에 입적한 마법사의 마법보다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연합에서 결계 촘촘하게 짜기 같은 건 안 알려 줬나 보지.’
민수는 손가락을 들어 그들이 얼기설기 어설프게 엮어 세운 침묵 결계를 살짝 그었다. 곧바로 민수에게 그들의 말이 들렸다.
“이번에 연합원이 몇 명 죽었다고?”
‘연합원이 또 죽었다고?’
인간들에 비해 손이 귀한 마법사다. 거기에다 보수적인 가문의 마법사는 자식에게 물려주는 마력을 위하여 더욱 강한 상대를 찾아 배우자로 맞이한다. 하지만 강한 상대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적은 마력을 가진 상대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풍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손이 귀한 마법사들의 가문에서 가끔씩 호전적인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자꾸만 마력을 걸고 뜨자고 해 버리니, 차라리 그 호전적인 자가 약하면 그자만 죽고 끝나겠지만 강하다면 문제가 된다.
안 그래도 수가 적은 마법사들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며 자멸해 버리면 남는 것은 멸문이다.
그렇기에 전통 있는 가문에서는 마법사끼리의 싸움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보통 마법사들의 마력 쟁탈전은 당사자 둘과 입회인 둘, 최소 네 명의 인원이 있어야 진행되었다.
만일 그 수가 적다고 한다면 가문의 윗선에 허락을 받아 진행해야 한다.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수까지 채우지 못하면 습격에 의한 살인으로 간주, 피해자의 마력을 흡수한 쪽을 가문의 이름으로 처리한다.
민수는 예전부터 이 점이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 명만 짜고 치면 윗선에 결재를 받지 않아도 마음껏 마법사를 죽일 수 있다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지 않은가. 허나 마법사들은 괘념치 않아 했다.
물론 입회인 두 명을 모으는 것 또한 마법사 사회에서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입회인이라는 것에도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마법 싸움이 상대방의 동의 없이 벌어졌다는 것이 밝혀지면 입회인도 함께 같은 강도의 처벌을 받는다. 그 처벌이란, 역시나 죽음이다.
‘마법 연합이라는 떠돌이 연합이 과연 그 전통을 이어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수는 이미 회의 전에 술이나 마시는 이 허접한 연합에 기대를 완전히 놓은 상태였다.
“연합원 둘이 한꺼번에 죽었다던데. 세원이가 죽은 후에 말이야.”
“둘이나? 연합원끼리 마력 걸고 싸웠나?”
“그랬으면 사무장님이 우리 호출했겠냐. 용의자가 안 나오고 있어. 지금.”
“맞아. 호출하자마자 마력 검사당해서 기분이 별로였어. 가자마자 바늘부터 들이밀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마법사들의 마력 측정을 하는 방법은 보편적으로 혈액 검사다. 혈액에 함유된 마력을 측정하는 식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때 개인적인 특징이 담긴 마력이 흘러나오기는 하나 시전자가 지닌 마력의 총량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물론 세계수의 마력을 쓰는 민수는 굳이 그들의 혈액을 채취하지 않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마력의 양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세 명 중 유일한 여자가 마시던 맥주병을 테이블에 소리 내어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세원이랑 결투 떴다고 해서 용의 선상에 올랐었나 봐.”
마법사들이 마력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이 벌어지면 적어도 윗선에 보고는 한다. 입회인만 있다면 선대결 후보고도 허락해 주는 편이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연합원 둘이 살해당한 사건은 누군가의 보고도 없었나 보다.
“누가 죽었대?”
“이름은 모르겠어. 근데 어제부로 행정부랑 관리과랑 구인 홍보 하던데.”
“너희들은 범인이 누구인 것 같아?”
“일단 연합 사람들은 아니지 않을까? 굳이 몰래 살해할 이유가 뭐겠어. 게다가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대결했다고 보고하면 되잖아. 갑자기 불어난 마력은 어차피 사무장님에게 걸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야, 범인은 씨앗이라니까? 난 너희가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콩트 하냐?”
바보 트리오 중 햄스터를 닮은 남자가 일순간 버럭 화냈다. 민수는 그의 말을 듣고 안색을 굳혔다. 제가 한 건 그저 마법사들을 피해서 장사한 것밖에 없는데, 어느새 마법사를 셋이나 죽인 파렴치한이 되어 가고 있었다. 차라리 정말 제가 죽였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민수는 억울했으나 그렇다고 해명하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그때, 가게 한쪽에 있던 무대 위로 한 여자가 올라가서 일렉 기타를 들어 올렸다. 마이크로 관객들과 소통하는 듯하더니, 이어서 쨍 하니 시끄러운 기타 소리가 민수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가게 안 한 줌의 관객들이 그녀의 연주에 환호했다. 민수 옆에 있던 바보 트리오는 순식간에 소란해진 그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 이런 데였어?”
“기타 불태울까?”
“아서라. 지하다.”
침묵 결계는 바깥쪽에서 안쪽의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안에서 바깥쪽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 또한 이 부산스러움을 여과 없이 듣는 중이었다. 결국 바보 트리오 중 한 명이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침묵 결계를 하나 더 쳤다. 이번에는 바깥 소리를 안 들리게 하는 결계였다.
인간들 사이에서 대놓고 마법을 부린 거였으나, 이 공간에서 그 셋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민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만약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빛이 나는 장난감인 줄 알겠지. 과학이 진화할수록 마법사들 또한 대담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민수는 저들이 덧씌운 결계를 끌어와 저를 그 결계 안으로 집어넣었다. 잔챙이 바보 트리오는 역시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어설프게 짜여 있는데 알아차리는 게 용하긴 하지. 가지고 있는 마력 양에 따라서 마법의 섬세함 또한 달라지기 마련이다.
양쪽으로 쳐진 결계가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나자 그 셋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노이즈 캔슬링이다.
“사무장님께서는 연합원이 아닌 다른 마법사들에게 씨앗이 여기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지.”
“당연한 거 아니냐? 다른 가문에서 알게 되었어 봐. 이미 여기는 마법사들로 가득 찼을 거다.”
“사무장님께 듣기 전까진 씨앗이 실제로 존재한단 것도 몰랐다고. 세계수의 씨앗이라니…… 그냥 박혁거세나 주몽 이야기급의 신화인 줄만 알았는데…… 솔직히 나는 세계수의 나뭇잎이라고 상품 걸어 놓은 것도 연합에서 짜고 사기 친 건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실존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던 씨앗이 갑자기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유는 또 뭐야?”
‘나 아니라니까!!’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고 있던 민수로서 엄청나게 답답한 말이었다. 민수는 저를 죽이려고 했던 마법사만 죽였다. 현대에는 저를 알아보는 마법사도 없었고, 그렇기에 최근 들어서는 죽인 마법사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조용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데……!’
가게가 필요 이상으로 입소문을 타면 곧장 이사해 버렸던 민수였다. 마법사를 피해 은둔하는 자에게 대중의 과한 관심은 좋지 않았다.
“근데 그 씨앗을 어떻게 찾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글쎄다. 알려 준 게 있어야지.”
햄스터 같은 남자가 손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나! 나!! 나 연합이 알려 준 씨앗에 대한 정보 다 외웠잖아.”
“그건 못 외우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마력이 강대하고 청량하다. 이 한 줄이 무슨 귀한 정보라고.”
민수는 난리 통이었던 연합 회의에서 홀로 고고하게 맨정신이었던 사무장을 떠올렸다. 정말 조직이 알고 있는 정보가 그뿐이면 마음을 놓겠지만, 그자가 연합원에게 정보를 모두 말해 줬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연합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미세한 정보만을 제공했을 게 틀림없다.
‘그런 정보만 풀었으면서 나를 어떻게 잡으라는 거지.’
“아니, 씨앗이 식신들을 다 소멸시키면서 다니나? 식신을 만들어 풀면 사라지고 만들어 풀면 사라지잖아. 언제 이런 적이 있었어?”
“하긴. 이 일대가 다 그렇더라.”
“웬만한 연합원들이 결국 밤까지 식신이 돌아다니게 만들지 않잖아. 낮까지 식신 풀어놓던 사무장님도 요새는 해 질 녘만 반짝 만들고 회수하시던데.”
“와,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사무장님께 호출당한 김에 가서 봤다.”
식신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현상은 연합원도 모르는 점이었나 보다. 연합원은 알 거로 생각해서 가게까지 접고 헐레벌떡 따라왔건만, 얻은 정보라곤 웬 미친놈이 연합 마법사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식과 그 미친놈의 용의자가 자신이라는 것뿐이었다.
“어쨌건, 너희 사무장님한테 불려 가서 무슨 소리 들은 거 있어?”
안경을 낀 남자의 말에 여자가 손바닥을 가볍게 들며 말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곧바로 하늘 위로 신호를 보내라는 거. 괜히 나대다가 죽지 말래.”
“나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똑같은 말씀 하셨다. 너는?”
“다를 게 있겠냐. 나도 똑같은 소리 들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10초 정도의 간략한 침묵을 이어 나갔다. 침묵을 깬 건 병맥주의 주둥이를 들어 몇 모금 시원하게 들이켠 여자였다.
“신호 보내는 거 자체가 나대는 거 아니야? 씨앗이 마법 신호를 못 알아챌 리 없지. 신호를 보낸 후에 씨앗한테 죽으란 거잖아.”
“에이 설마…….”
“사무장이 우리의 목숨을 정말 귀히 여기고 있다면, 수상한 자가 보일 때 바로 자리를 피하라고 했었겠지. 내 말이 틀려?”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자였다. 확실히 연합 사무장은 연합원을 아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민수가 봤을 때 사무장의 목표는 오직 씨앗인 민수 자신이었다. 그를 위해 마법사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사무장님이 우리 목숨을 개떡으로 아신다고?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데?”
기가 찬 목소리가 여자의 옆에서 들렸다. 여자를 제외한 둘은 사무장이라는 그 할아버지에 대한 신뢰감이 높은 모양이다. 제삼자인 민수가 들어도 여자의 말은 설득력 있었는데, 나머지가 부득불 부정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여자는 그의 질문에 침묵했다.
“왜 잘 털다가 멈췄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딱히 없는 거지?”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시비조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앞에서 다 말한 거 아닌가? 민수는 저들이 제 스스로 기억 소거 마법을 걸었던 장면을 제가 놓쳤는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결계를 친 이래로 마법을 쓴 적이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충성심이 아닐 수 없다. 침묵을 고수했던 여자는 남자의 말에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씹어 내듯 뱉었다.
“우리 중에 내가 사무장에게 마지막으로 불려 간 사람이었잖아. 마력 검사 다 끝내고 나서 사무장이 웃었어. 웃었다고. ‘이번에는 그럼 정말 씨앗의 짓일 확률이 높겠군요’라고 읊조리는 걸 똑똑히 들었다니까? 연합원이 둘 죽었는데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야?”
맥주병을 비운 여자는 벌떡 일어나서 바로 걸어갔다. 남겨진 두 남자는 다른 술을 주문하기 위해 튀어 나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진짜인가?”
“……쟤가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사무장을 포함한 연합원이 대차게 헛짚긴 했어도 그들의 예상대로 민수가 여기 근처에서 사는 건 확실했다. 마법사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건 관심 없었다. 문제는 그 원인이 민수 자신이 되는 경우라는 거지. 처음 마법사 한 명만 죽었더라면 저 바보 트리오가 알아서 정보를 막아 주었을 텐데, 그 이상한 마법사 사냥꾼은 대체 어떤 마법사길래 이리 활개를 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여하간 분명 귀찮아질게 뻔했다. 민수는 바보 트리오의 말을 엿들으며 다짐했다.
‘가게 접고 여기 떠야겠다.’
1년 남은 집 계약이 골치 아팠지만 괜히 버텨서 좋을 건 없었다. 연합이 정보 통제를 못해서 온 세상에 있는 마법사가 여기로 모이면 그건 또 그것대로 지옥이었다. 민수는 홀로 심각해져서 이제는 거의 콘서트를 벌이는 무대 위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민수가 시켰던 맥주는 한 모금도 줄어들지 않고 홀로 병에 맺힌 물방울만 바닥으로 떨궈 냈다.
바에서 맥주를 가져와 돌아온 여자가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차 있던 목소리가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언제 기분이 좋아진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한껏 발랄해진 목소리로 제 친구를 향해 말했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 세원이가 여자 꼬실 때 들어갔던 점집 사장 아니야?”
……민수가 듣기에 그 내용은 그녀의 목소리처럼 발랄하지 않았다.
“어. 맞냐? 나는 기억도 안 난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햐. 너 눈썰미도 좋다. 어떻게 저렇게 흔하게 생긴 사람을 알아보냐. 그것도 흘끗 봤으면서.”
민수는 남자 두 명이 본인을 보며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대화가 다 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은 채 민수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무대 위를 빠져들 듯 보고 있는 척하던 민수는 무대 위를 전보다 더 열중해서 쳐다봤다. 누가 보면 무대에 무아지경으로 빠진 것처럼 보였다. 민수의 왼쪽에서 꽂히는 세 쌍의 눈동자가 따갑다.
“나 저렇게 생긴 사람 길거리에서 오늘만 네 번째 봤다.”
“오. 나는 여섯 번째쯤 본 거 같아.”
“저 사람도 그럼 그 점집 사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맞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라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평범한 외형인데, 이렇게 한 번에 알아보다니. 게다가 여자는 타로 가게에 있던 친구를 꺼낼 때 민수를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이 전부였다. 정말 알아본 걸까, 아니면 흔하게 생긴 김에 때려 맞힌 걸까.
“아니야. 맞는 거 같아. 내가 그 순간 얼마나 유심히 봤는데. 너희 내 순간 기억력 무시 못 하는 거 잘 알지?”
여자의 말이 사실인지 남자들이 대꾸를 못 했다. 안경 쓴 남자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 남자 본 기억조차 없어서 뭐라고 못하겠다. 그 가게에 세원이랑, 세원이가 꼬시고 있던 여자랑, 그리고 엄청나게 잘생긴 인간 한 명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한 명이 더 있었어?”
남자는 제 옆에 앉은 친구에게 물었다. 그 또한 기억나지 않는지 대꾸 없이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존재감이 없기로서니 자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기억 못 할 줄이야. 물론 이 모든 건 민수의 바람대로였다.
이토록 존재감 없는 평범한 외모라니. 제 연구의 성과를 본 것 같아서 박수라도 치고 싶었으나, 여자 마법사가 문제였다. 대체 어떤 점에서 제가 가게 사장이라는 걸 확신하는 걸까.
그건 민수만 궁금했던 게 아니었던 거 같다. 남자가 여자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너는 어떻게 알아봤는데?”
“그때 입었던 옷이랑 똑같은 옷 입고 있잖아.”
민수는 제 참담한 심경을 숨기기 위해 이마를 손끝으로 살짝 짚고 눈을 감았다. 제가 그때와 오늘, 같은 옷을 입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냥 빨래하고…… 굴러다니는 옷 몇 개 주워 입고…… 옷가지가 몇 벌 없는 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같은 옷을 입고 나왔을 게 뭐란 말인가. 민수는 이마를 손으로 짚어 자신의 눈을 저들에게 숨기는 김에 슬쩍 눈을 내리깔고 제 옷을 보았다.
카멜 색의 반팔 티셔츠였다. 심플하게 한 줄 레터링 된 것 빼면 눈에 띄는 점도 없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입고 돌아다니는 옷 아닌가? 민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남자 중 한 명이 여자에게 물어봤다.
“저 옷이 뭐? 그렇게 튀는 옷도 아닌데? 너는 저런 것도 세세히 다 기억하고 다니냐?”
“아니, 반팔이잖아. 날이 꽤 쌀쌀해졌는데 요새 저런 반팔 입는 사람 못 봤어. 저번에 가게에서도 저 사람만 혼자 반팔 입고 있어서 기억한단 말이야.”
‘젠장.’
몸에 열이 많아 추위를 그리 잘 타지 않는 민수는 가을 중순까지 반팔을 고수했다. 그래도 이 정도 날씨면 반팔 입은 사람들이 많지 않나 싶었지만 그건 민수만의 착각이었다. 요새 이런 반팔 입는 사람 못 봤다니. 민수는 그걸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럴 거면 다른 얼굴을 씌우고 나올걸.’
고민해 봤자 이미 늦었다. 이미 그들은 민수의 인상을 각인해 버렸다. 심지어 바로 옆 테이블이었다. 옆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을 민수는 철저하게 모른 척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민수는 무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들은 바로 옆에서 신명 나게 민수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렇게 안 춥나 봐?”
“나는 괜히 감기 걸릴까 봐 둘둘 싸매고 왔는데. 부럽네.”
“감기 걸리면 마법 쓰면 되잖아. 왜 그렇게 꽁꽁 싸매고 왔어?”
“마법 쓰려면 마력 써야 하잖아.”
“야, 저 사람 무대에 빠져서 못 나오는 것 좀 봐. 진짜 음악만 들으러 왔나 봐.”
“그러게. 여기에 혼자 올 정도면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쓸데없는 잡담으로 민수의 신상에 대해 추측하던 그들이었다. 사무장 이야기를 하며 화를 내고 바로 가 버렸던 여자가 제일 신났다. 그 셋 중에서 민수에게 가장 관심이 많아 보였던 것은 단연코 여자 마법사였다.
‘왜 나한테 저런 관심을….’
존재감이 너무 희미해 입고 온 반팔에게조차 존재감이 밀렸던 민수였다. 여자의 높은 텐션이 이해되지 않았다.
곧 민수의 궁금증이 여자의 한 마디로 풀렸다.
“그때 저 사람 옆에 앉아 있던 남자, 되게 잘생겼던데. 회의 가는 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꼬셨을 텐데 놓쳐서 되게 아쉬웠거든. 이렇게 기회가 또 오네.”
납득. 민수는 여자의 말에 납득하고야 말았다. 그 당시에, 그러니까 인간을 꼬시고 있던 마법사에게 타로를 봐 줬을 때 제 옆에 도언이 앉았었다.
도언은 식신마저 꾀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나비 떼가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도 2,500마리의 나비가 날아들었다고 했었지. 식신은 마법사의 일부이다. 일부조차 그러는데 마법사는 얼마나 더 할까.
여자가 생글생글하게 말하자, 안경을 쓴 남자가 여자를 말렸다.
“야야, 너 거기 있던 사람 꼬시면 세원이랑 비슷한 취급 받는 거 아니냐? 어디 사람이 없어서 그 애들 장난 같은 점집에서 본 사람을 꼬셔. 꼬시기는. 차라리 클럽을 가라.”
햄스터를 닮은 남자는 여자를 향해 버럭 했다.
“아,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없냐. 분명 주변에 그 인간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게 분명하거든? 네 근처에? 굳이 클럽 갈 필요도 없어. 주변에 있다니까?”
그들의 소리를 못 듣는 척하느라 시선을 무대에 꽂아 둔 민수는 대화하는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버럭 한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잘 알겠다. 여자는 그 둘의 충고를 무시했다.
“아, 그만한 얼굴이 어디 흔한지 알아? 얼마나 대단한 얼굴인지 너희도 안 잊었으면서 왜 뭐라고 그래? 그 얼굴 때문에 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며. 너희 둘 다.”
여자의 논리정연한 말에 남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꿈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걔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게 뭐야. 장난감이 인격이란 게 있어? 그냥 그 남자에게 그 누구의 표식도 묻어 있지 않았으니, 아직 걔를 찜한 사람 자체는 없던 거야. 내가 먼저 찜해 왔어야 했는데. 회의가 바빠서 그걸 못 하고 나왔네.”
여자의 안광이 강렬하게 민수의 광대를 핥았다.
“뭐, 곧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때 찜하면 되지 뭐.”
여자가 말하는 찜이란 건 마법사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놀이였다. 제 취향에 꼭 맞게 생긴 인간이 있으면 마법으로 조종하며 가지고 논다.
물론 이 ‘가지고 논다’라는 정의는 마법사마다 다르다. 성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고문을 하며 고통에 찬 그들의 표정을 즐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아아주 가끔씩 정말 친구 사이로 건전하게 데리고 노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희박했다.
저들에게 일반인은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긴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여하간 마법사들은 다른 마법사와 제 장난감을 공유하는 걸 원치 않았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하면 제 마력을 써 제 것이라고 표식을 해 놓는 것이다. 물론 장난감의 주인이 누구로 바뀔지는 표식에 묻힌 마력의 양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었다.
장난감에 묻힌 마력의 크기에 따라서 장난감의 소유주가 유동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이다. 마력이 적은 자가 아무리 장난감을 선점했다고 하더라도 마력이 많은 자가 와서 마력을 먹어 버리면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게임에서 지력을 올려야 강화되는 마법사란 직업과 다르게 실제 마법사는 그 누구보다 힘이 법이요, 깡패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도언이 마법사나 식신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그리 노력했건만, 그 찰나에 저들이 도언을 머릿속에 집어넣었으리라고는…… 이건 민수의 불찰이었다.
저들이 도언을 발견할 당시에 그의 핸드폰에 마력 교란 결계를 심어 두지 않았고, 또 가게에 결계를 일시적으로 해지했기에 도언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마음먹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환경이었다.
도언이 저번처럼 핸드폰을 놓고 다니지만 않으면 그래도 마법사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의 표적이 되는 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불행이었다. 차라리 식신의 표적이 되는 게 훨씬 나았다. 식신이야 사고나 병으로 끝나지만…….
‘쟤네한테 걸리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다반사라고.’
어차피 이 근처가 마법 연합이라는 곳의 집결지가 되면서 도언이 얼굴을 들키는 것 또한 시간문제긴 했다. 민수가 결계를 핸드폰에 심지 않았다면 말이다!!
도언과 인연인 그 마법사는 꽤나 고위 마법사인 것 같던데, 그리고 들어 보니 둘이 만난 것 같기도 하던데, 왜 도언에게 표식하지 않았지? 인간에게 마력을 쏘여 표식을 하는 것 정도는 마법사들에게 장난 같은 일이라 마력을 아낄 이유가 없을 텐데. 도언의 얼굴이 취향이 아니었나?
차라리 민수는 저들이 도언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그 고위 마법사가 먼저 도언을 찜해 주길 바랐었다. 그러면 저 마법사도 도언에게 둘러져 있는 표식에 깨갱 하고 돌아갔을 것 아닌가. 어차피 이용당할 거면 도언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게 훨씬 나은 결말 아닐까?
‘아니, 아니, 어쨌건 이용당하지 않는게 최고지.’
확실히 민수의 생각대로 마법사와 전혀 관계없는 삶이 베스트긴 하지만, 그리 눈에 띄는 외모면 산속에 박혀 살지 않는 이상 마법사와 엮일 확률이 높아진다. 장난감으로든, 평생의 반려로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민수는 도언의 핸드폰에 있는 결계를 더 강화하고 제가 지닌 타로를 이용하여 부적을 만들어 도언에게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도언이 민수가 내미는 수상한 붉은 카드를 항상 가지고 다녀 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않겠는가. 돈가스도 사 주고 먹을 것도 줬는데.
도언의 폰에 가볍게 걸어 둔 결계는 고위 마법사에게는 그리 큰 효과가 없다. 하지만 민수가 만든 부적까지 지니고 다니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테다. 그만큼 민수의 피로 만든 부적의 마법 증폭 효과는 상당했다. 이게 다 세계수의 본질적인 힘이었다.
도언이 핸드폰에 걸린 결계에다 카드까지 들고 다닐 때의 부작용이라면 뜨내기 마법사를 넘어서 도언이 인연이 되고 싶다던 그 고위 마법사도 도언을 못 알아볼 확률이 커진다는 거다. 그건 민수가 생각하기에 부차적인 요소다. 못 알아보는 겸사겸사 둘이 잘 안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물론 그 전에 쟤네부터 따돌려야겠지만.’
저 셋은 아직 민수와 도언의 관계를 두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친구일 거다, 동업자일 거다. 말들이 많았다. 저 여자가 기어코 민수에게 말을 걸 생각인가 보다.
민수는 저들이 제게 다시 관심을 두기 전에 일어나서 사라질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결계 근처에 가면 결계 때문에 저 바보 트리오는 민수를 찾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한 민수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아니, 떴을 것이다.
“혼자 오셨어요?”
여자 마법사가 결국 민수의 테이블로 넘어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여자가 민수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치며 말을 걸었다. 무대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이던 민수의 얼굴이 옆 테이블로 돌아갔다. 덕분에 바보 트리오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남자 둘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민수에게 말을 거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 햄스터를 닮은 남자는 이해를 하나 나머지 한 명은 대체 왜 저런 표정인 거지. 타로집 하는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 기분이 별론가.
여자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으나 민수는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했다. 민수가 이자들이 설치한 침묵 결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민수는 제게 말을 건 그녀를 향해 제 귓가를 톡톡 건드렸다.
민수의 행동을 알아들은 여자는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제 친구들에게 말했다.
“야, 아무나 결계 좀 해제시켜 봐. 이 인간이랑 대화란 걸 해야겠으니까.”
“아, 네가 쳤으면서 왜 우리보고 해제하래. 네가 해. 그냥.”
“쓰읍.”
여자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자 햄스터를 닮은 남자 쪽이 툴툴대면서 제 손을 외투 품 안에 넣었다. 남자가 웅얼거리자 외투 안쪽이 번쩍거렸다. 그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마법을 걸어 결계를 해제했다. 남이 봤을 때는 외투 안쪽에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거로 보였다. 민수가 그를 보고 있는 걸 의식한 행동 같았다.
지금 세상에 인간 몰래 마법을 쓰려고 노력하는 마법사가 있다니. 어차피 지팡이 끝이 번쩍거리는 거 요새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쓸 텐데. 장난감인지 진짜 마법사의 지팡이인지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대담함이 부족한 건가.
하지만 그의 마법 실력은 그의 소심함처럼 섬세했다. 마력을 깔끔하게 되돌려 놓는 실력이 일품이었다. 애초에 그다지 촘촘하게 짜이지 않았던 것 또한 그가 깨끗하게 결계를 해제시키는 데에 한몫했다.
남자가 품속의 지팡이를 번쩍거리자마자 민수의 귀에 시끄러운 소리가 왕왕 울렸다. 이젠 진짜로 바보 트리오의 목소리가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실력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던 여자가 민수의 귀에 바짝 제 입을 붙이고 같은 말을 이었다. 소음을 뚫고 고막에 꽂히는 소리가 또렷하다.
“혼자 오셨어요?”
민수는 그녀에게 그저 고개나 끄떡여 주었다. 그에 여자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누가 보면 민수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민수는 그녀가 저를 통해 도언을 꼬시려는 실상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다.
제게 도언이라는 젯밥을 기대하는 여자는 저 셋 중에 분위기가 가장 밝아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중에서 제일 날뛰며 사무장이 우리를 물로 보니 불로 보니 했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사무장에 대한 근심은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오로지 미래에 이루어지는 도언과의 만남뿐이었다. 이리 단순할 데가.
“저 밴드 좋아하시나 봐요.”
여자가 민수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무대 위를 턱짓했다. 무대 위에는 어느새 일렉을 치고 있던 여자가 내려가고 웬 밴드가 열정적인 비트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민수는 실상 바보 트리오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무대 위에 집중을 못 했지만 시선은 무대 위를 고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이 보았을 때는 그저 민수가 무대를 불타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으리라. 심지어 혼자 왔다고 하니 더더욱.
이곳은 마법 연합의 회의장으로 쓰일 때는 영락없는 클럽이었지만 실상은 그저 라이브 바였다. 춤을 추러 오는 사람이 아닌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로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온 사람은 민수 한 명뿐이었다. 민수에게 말을 건 마법사처럼 민수를 매니아로 오해할 만했다.
예상치 못한 이 마법사와의 대화에 민수의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지만 찰나였다. 민수는 마음을 다잡고 평범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밴드의 소리를 결계를 해제하고 나서야 처음 들은 민수는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은 답변을 했다.
“그냥 보는 거죠.”
“그냥 보시는 거면서 그렇게나 집중하고 계신 거였어요?”
여자가 박수를 치며 까르륵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사춘기 소녀가 따로 없다. 여자는 이제 아예 제 맥주를 민수의 테이블로 옮겨 오기까지 했다. 이 얼굴로 다닌 이래로 존재감이 없는 걸 자부심으로 삼았던 민수는 여자의 적극적인 행태가 낯설었다.
이게 다 도언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속이 조금 끓었다. 가게에서 도언이 민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단 것만으로 저를 유심히 지켜보고 말을 거는 마법사가 있을 정도라니. 도언이 지금까지 그들에게 걸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남은 게 용하다.
여자가 본격적으로 민수에게 작업을 걸었다.
“혼자 오셨으면 저랑 같이 놀아요.”
“아니, 저기에 일행이 있으신 것 같은데.”
민수는 옆 테이블의 남자 두 명을 고갯짓했다. 결계를 해제하자 고막에 직격 되는 헤비메탈 소리에 안경 쓴 남자는 귀를 막고 있었고, 또 한 남자는 민수를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봐. 저 남자가 이 여자 좋아하는 거 확실하다니까.
그를 아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여자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속삭였다.
“쟤네들은 쟤네들끼리 놀라고 해요. 쟤네 사이에 혼자 있는 게 얼마나 외로운데요. 쟤네 커플이거든요. 이것참. 저는 커플 노는 데 껴서 피곤한 솔로랍니다.”
상상도 못한 기상천외한 여자의 말에 민수는 눈썹을 올리며 남자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연속적으로 쨍쨍거리는 드럼의 심벌즈 소리가 데시벨을 최대치로 올리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침묵 결계를 해제한 남자 마법사들은 이 여자 마법사가 저들의 관계를 뭐라고 정의했는지 듣지 못했다. 물론 저 남자 둘의 온도 차를 느껴 보았을 때, 여자의 설명은 진실이 아니었다.
민수는 저를 타오르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남자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피곤함이 더해졌다. 민수는 햄스터 남자와의 눈빛 교환에서 겨우 눈을 떼고 거절의 말을 내비쳤다.
“아니요. 아쉽게 제가 이제 가 봐야 할 시간이라.”
‘나가자마자 마력 교란 걸어 둬야겠다.’
아무리 도언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핸드폰만 잘 가지고 있으면 이들은 민수의 교란 결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수의 가게도 부적으로 강력하게 힘을 실어 준 결계와 함께하고 있으니, 민수가 결계를 해제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가게에 찾아올 리 없다.
아무리 이 여자가 도언에 집착한다고 하더라도 씨앗의 존재와 마법사 사냥꾼이 나타난 지금은 이들에게 있어 위급 상황이다. 이 상황만 잘 빠져나온다면 도언은 쉽게 잊을 게 뻔했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니요.”
“좋아하는 사람은요?”
“없습니다.”
여자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마음속에 자리를 내어 준 사람이 없는데 감히 인간 주제에 나를 거절하다니. 민수는 여자의 얼굴에 쓰여 있는 문구를 읽어 버렸다. 귀엽던 인상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그 급격한 변화에 민수는 몸을 움찔하려던 걸 가까스로 참았다. 민수는 여자의 제안에 거절했으나 여자는 민수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뿔싸.’
쿨하지 못한 종족 1위가 마법사인 걸 모르는 게 아니었으면서 왜 바로 거절을 했지. 차라리 여자의 제안에 응하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것을.
여자는 기어코 제 품속에서 젓가락만 한 나무 막대기를 꺼냈다. 여자의 지팡이를 보는 순간 대차게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민수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웠다. 민수는 여자가 외울 마법 주문에 방어를 대비했다. 지팡이를 몇 번 휘휘 휘두른 여자가 민수에게 지팡이를 들이대며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알다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그 누가 마법사의 지팡이로 볼까. 이 정도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니. 이 떠돌이 마법사는 민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급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이번에 친구 마력을 잡아먹으면서 조금 더 등급이 올랐으려나. 민수는 지팡이의 끝을 보며 답했다.
“나뭇가지요.”
“하. 하. 하. 맞아요.”
끊어서 웃는 폼이 심상치 않다. 제 귀한 지팡이를 나뭇가지라고 칭한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마음에 안 들면 지팡이를 빨리 바꾸든지. 평범한 인간의 시선으로 본다면 영락없는 나뭇가지였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뭐, 천 년 묵은 유니콘 뿔을 달빛 칼로 5천 번 깎고 이슬 먹은 세계수 나뭇잎으로 만 번 사포질해서 만든 눈부신 지팡이처럼 보인다고 해야 통과하려나?
제 심장이 세계수의 힘 자체인 민수는 지팡이를 매개로 제 마력을 끌어다 쓰는 마법사들의 지팡이 부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민수로선 마법을 사용하는 데 지팡이는 전혀 필요 없어서 그런 거였다. 장비가 필요 없는 자에게 장비 부심이 무슨 소용이랴. 장비 부심을 이해할 수 없는 건 강한 힘을 지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여자가 든 지팡이의 끝이 하얗게 빛났다. 여자는 끝이 빛나는 지팡이를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휘둘렀다. 소심하게 품속에서 마법을 발동한 옆 테이블의 남자와 대비되는 자세였다. 곧이어 여자가 주문을 읊었다.
“오규리사나.”
곧바로 카메라에 플래시 터진 듯 가게 전체가 하얀빛으로 1초간 번쩍 빛났다. 공연을 즐기던 사람들이 빛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탐색했지만 이미 여자가 재빠르게 제 지팡이를 품속에 넣은 이후였다.
민수는 제게 쏘아진 마법을 눈 깜빡할 새에 흩트리며 방어했다. 오규리사나. 가벼운 하급 복종 주문이었다. 피지배인의 목숨을 걸 만한 명령이 아니라면 웬만해서 시전자의 말을 모두 듣게 되는 주문이다. 보통 인간들에게서 진실을 캐낼 때 유용히 쓰이는 마법이었다.
민수는 애들 장난 같은 마법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마법에 걸린 척했다. 저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있을 텐데, 진실로 마법에 안 걸린 걸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오규리사나 정도라면 민수에게 해가 될 명령은 하지 않을 거다. 그 정도의 강력한 강제성이 있는 주문이 아니었다.
여자는 민수의 눈앞에 제 손바닥을 왔다 갔다 하며 동공을 검사했다.
“잘 먹혔나?”
옆 테이블에 앉았던 햄스터를 닮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가게 안은 어느새 적당한 데시벨의 음악이 흐르고 있어서 그의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야, 너는 조심성도 없어!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리지도 않고 마법을 쓰냐! 그것도 지팡이 자랑까지 하고!”
“뭐 어때서 그래. 누가 발견하더라도 그냥 빛나는 나뭇가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겠지. 뭐. 이 인간도 나뭇가지라고 했었잖아. 이럴 때일수록 대담해야 의심 사지 않는 법이야.”
“그러다가 이 중에 가문의 마법사라도 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너 참 오래 살겠다. 내 몫까지 살아 주렴. 쯧쯧.”
여자가 성내는 남자를 비꽜다. 그 잔소리가 귀찮은지 여자는 짜증 내는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민수에게 물었다.
“테스트나 해 보자. 쟤 못생긴 거 같아?”
“네.”
질문을 듣자마자 답변을 하는 건 오규리사나의 특징이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볼 때, 여자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마 긍정일 것이다. 그리고 민수의 추측은 정확했다. 민수에게 나오는 즉답에 여자가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마법이 잘 먹었나 봐. 진실을 고하는 걸 보니!”
“저 새끼 가게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불태우고 만다.”
불시에 못생긴 사람이 된 남자가 이를 갈았다. 민수는 그냥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다.
정신을 놓고 진행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었으나 그러면 안 되었다. 민수는 어떻게든 이 인간들에게서 비교적 잡음 없이 벗어나고 싶었다.
민수가 바보 트리오라고 별칭을 붙일 정도로 어수룩한 자들이었다. 분명 빈틈은 보일 거다. 민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일행이 못생겼다는 민수의 즉답에 여자는 배를 잡고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기까지 하며 웃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안경 쓴 남자 마법사가 여자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무리 세원이 마력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불안정하단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얼른 실속 있는 질문만 하고 끝내.”
“아, 잘 알고 있어. 하여간 너희는 나한테 잔소리만 한다니까. 세원이가 잔소리 안 해서 좋았는데~”
여자가 꽤 그리워하는 어투로 세원이라는 마법사를 추억했다. 누가 그녀를 세원이란 마법사의 마력을 두 번째로 많이 잡아먹은 자로 볼까. 저 셋 중 제일 먼저 제 친구의 마력을 잡아가고 연합에 알리지 말잔 계략을 꾸민 자는 안경 쓴 남자, 그자 뒤에서 바로 죽은 마법사의 마력을 회수한 자는 바로 이 여자였다. 민수가 못생겼다고 말했던 남자 마법사가 셋 중에 제일 여렸다.
여자는 민수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너, 이 근처에서 점 보는 사람이지?”
저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거짓말해서 뭐 하리. 민수는 이다음부터는 꼭 반팔티에서 탈출해 외투라도 입고 다니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민수의 끄떡임에 여자가 주먹을 쥐고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며 제 흥분을 일렀다.
“맞지! 맞잖아! 신난다! 빨리 그 남자랑 만나고 싶어!”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발까지 동동 구를 기세였다. 여자는 희열에 찬 얼굴로 제 친구들을 돌아봤다. 안경 쓴 자가 고개를 주억거리곤 박수까지 치며 여자의 눈썰미를 칭찬했다.
“그래. 너의 이 정도 집착이면 그 남자도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다.”
햄스터를 닮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정말이지 대놓고 제 감정을 티 내는 데에 도가 튼 자였다. 여자는 제 친구들의 반응을 한 번씩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민수를 바라봤다.
“너 예전에…… 그러니까, 이번 주 수요일 날 밤에 네 옆에 함께 앉아 있었던 그 잘생긴 친구 좀 여기로 불러 봐.”
곧바로 본론이다. 여자의 눈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여자는 민수가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 도언을 부르게 되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민수가 오규리사나에 걸렸다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기대와는 다르게 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왜!!”
여자가 민수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민수는 도언의 연락처가 없었다. 그것뿐이랴. 핸드폰 자체 또한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마법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걸 왜 말해 줘?
“그분은 제 친구가 아니라 손님입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분이셨어요. 연락처를 모릅니다.”
“와하하하!! 오규리사나 때문에 마력을 그렇게 쓰고 물 먹었네! 소득 없이 끝나서 어쩌냐!!”
답지 않게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여자에게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여자는 차게 식은 눈초리로 그를 보다가 제 핸드폰을 민수를 향해 내밀었다.
“그럼 너 번호 좀 찍어 봐. 근처에서 그 남자가 또 오면 곧바로 연락해. 알았어?”
“와. 너도 진짜 가지가지 한다. 그런 남자가 점 한 번 봤다고 해서 단골이겠냐? 아마 그때 가게에 들어온 것도 일회성이겠지.”
비웃고 있던 햄스터 남자가 꽤나 합리적인 추론을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추리는 틀렸다. 이미 도언의 친구가 쓰고 있던 단골 타이틀을 도언이 가져간 지 오래였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신빙성을 느꼈는지 민수에게 물었다.
“정말 그 사람 그날 이후로 본 적 없어?”
“네.”
입에 침도 안 바른 민수야 당연하게도 본 적 없다고 이야기했다. 마법사에게 진실을 이야기할쏘냐. 민수는 이 실없는 상황에 어울려 주며 빠져나갈 각을 재고 있었다. 연합에 관해 좀 더 영양가 있는 말을 하는 건 아닐까 기대하며 연기를 이어 갔더니, 저들이 내뱉는 말은 영 실없었다.
“이 마법이 수확 없는 건 잘 알았으니 나 대신 하나만 물어봐 줘라.”
햄스터 닮은 남자가 여자에게 부탁했다.
“뭔데?”
“쟤 가게 주소 좀 알려 달라고 해 줘. 불태우려면 주소는 알아야지.”
“너 정말 얘가 너 못생겼다고 해서 가게 불태우려고?”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해.”
“죽이는 것보다 불태우는 게 더 마력 손실이 적어서 그런 거 아니야. 어디서 착한 척이야.”
“아니거든. 쟤가 가게에 있을 때 문 잠가 버리고 통째로 불태울 수도 있잖아.”
“그럼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냐? 나 같으면 차라리 달리는 차의 방향을 틀어서 사고사로 처리한다.”
‘그냥 다 죽일까?’
가문에 적을 둔 것도 아닌, 떠돌이에 불과한 반쪽짜리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쓰레기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떠돌이라면 분명 인간들 사이에서 자란 마법사가 대다수일 텐데, 어떻게 저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순혈 마법사와 같은 사상이 있는 걸까. 연합이 세뇌라도 했나?
연합에 있는 마법사들 전부가 떼로 덤벼도 민수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다 죽이고 난 후의 문제는 다른 가문이 이 사태에 대해 눈치채고 민수를 쫓아올 가능성이었다. 저를 눈앞에 두고 민수의 목숨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잔챙이들 앞에서 민수는 잠시뿐이지만 진심으로 살심이 솟았었다.
어차피 제가 그 신원 미상의 마법사 사냥꾼 용의자로 낙인찍히지 않았는가. 억울하지 않으려면 저도 몇 명 죽여야 하는 게 아닐까? 민수는 찰나에 생각했다.
‘됐다. 그냥 여기 뜨자.’
괜히 귀찮은 일에 얽혀서 좋았던 적이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민수는 이 지역을 떠날 때가 도래한 것을 직감했다.
도언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여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남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입을 열 때였다. 그때 민수는 제 눈에 초점을 깃들게 했다. 시선을 허공의 먼지에서 무대 위로 옮기니 초점이 돌아오게 연기하는 건 쉬웠다. 민수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고 말했다.
“어… 그러니까…… 나뭇가지 말씀하시고 계셨죠?”
“…….”
“…….”
민수는 어지러운 듯 제 머리까지 살짝 흔들었다. 완벽한 연기였다. 세월이 적립해 준 스킬 포인트로 차근히 연기력을 찍은 보람이 있었다. 만나는 사람 모두 공적 관계인 민수는 일상이 연기였다. 그 연기력은 아는 걸 모르는 척할 때 특히나 빛났다. 옆 테이블에 앉은 둘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음으로 수군댔다.
“이야. 금방 깬 것 봐. 쟤 세원이 마력 먹은 애 맞냐?”
“지속 시간 진짜 짧다. 어디 가서 쟤 내 친구라고 하고 다니지 말아야지.”
낮은 소리로 수군댔으나 성량은 그대로였기에 그 둘의 대화가 여자를 넘어 민수에게까지 들렸다. 마법사에게 마법의 지속 시간 또한 능력의 일환으로 치부된다. 쏟아 내는 마력을 얼마나 정교한 형태로 주조해서 상대에게 쏘아 내는가, 그런 과정에서 낭비되는 마력이 없을수록 마법의 지속 시간은 늘어난다. 민수가 깨어난 시간은 평균 떠돌이의 마법 지속 시간에 한참 못 미쳤다. 여자는 친구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소리쳤다.
“다 닥쳐!”
여자는 미련 없이 민수의 옆자리에서 일어나 바를 향해 갔다. 옆 테이블의 남자 마법사들은 그런 여자를 보며 끌끌 혀를 차고 있었다.
‘이때다.’
민수는 여자가 걸음을 옮기자 본인 또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뒤통수에 박히는 두 쌍의 눈빛이 매섭다. 화장실과 출구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만약 민수가 출입구의 방향으로 몸을 옮겼다면 저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는 저 마법사들이 민수를 잡을 것 같다는 촉에 화장실로 몸을 틀었다.
민수가 화장실 문을 닫을 때까지 그들은 민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환장하겠군.’
민수는 화장실 한 칸의 문을 잠그고 제 뒷주머니를 뒤져 카드 상자를 꺼냈다. 혹시 몰라 집에서 남은 카드를 모두 부적으로 만든 보람이 있었다. 제작 과정에서 피를 신나게 쓴 덕분에 빈혈이 올 뻔했단 점 빼고는 부적 더미의 완성은 꽤나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민수는 붉은 카드 더미에서 삼각형 모양이 하얗게 박혀 있는 카드 한 장을 꺼내 뽑았다.
이 부적에 새겨 넣은 삼각형 모양 교란 결계의 효과는, 마법을 쓸 때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마력을 가려 주는 것이다. 이 부적은 이를테면 어렸을 때 다들 한 번쯤 해 봤던, 밤늦게 몰컴 할 때 새어 나오는 빛을 차단하기 위해 덮어 두는 얇은 이불과 같았다.
부적을 쓰지 않고 더욱 정교한 결계를 칠 수 있는 민수였으나, 문제는 교란 결계를 만드는 그 찰나에도 마력 흔적이 새어 나온다는 점이다. 민감하고 예민한 대마법사의 식신이라면 눈치챌 것이다. 그렇기에 마력을 쓰지 않아도 활성화되는 교란 결계 부적을 만들었다. 이 정도 물건이라면 마력이 하나도 없는 인간도 결계를 칠 수 있었다.
활성화할 때는 카드의 귀퉁이만 찢어 버리면 된다. 마력을 불어넣어 마력 흔적을 남길 필요도 없다. 활성화하는 데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오늘처럼 마법사의 바로 옆에 있을 때 마력 흔적 없이 마법을 쓰기 좋다. 민수가 꽤 고민해서 만든 부적이었다.
‘어차피 쟤네들은 부적 같은 거 안 쓰고 바로 결계를 쳐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지만.’
하지만 긴 시간 살아오며 생긴 인생관이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셋째도 조심인 민수의 입장에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민수는 붉은 뒷면의 타로를 잇새로 물었다. 그리고 화장실 걸쇠를 푼 손으로 잇새의 카드를 잡아당겨 쫙 찢으며, 남은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부딪쳐 공간이동을 시도했다.
민수가 찢은 카드는 공교롭게도 자유를 뜻하는 0번 아르카나, 바보 카드였다. 자유를 향해 봇짐 싸고 떠나는 인물의 카드가 기묘하게 민수와 겹쳐 보였다.
카드를 찢자 주변으로 결계가 생성되었고, 동시에 민수의 신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장실에는 시끄러운 바깥과 대비되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 ❊ ❊
민수는 한순간에 4km는 떨어져 있던 바의 화장실에서 제집으로 공간 이동을 마쳤다. 목이 탔던 민수는 냉장고를 열어 깡 생수를 집고는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500ml짜리 생수를 그 자리에서 한 병 다 비우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빈 생수통을 휴지통에 거칠게 던졌다.
텅-!
“뭐 같잖은 것들이 까불고 앉았어.”
저런 것들이 더 까불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떠야겠다. 민수는 짜증을 내며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등 뒤 창문에서 무수한 나비 떼가 민수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곳 근처에서 나와 하늘을 뒤덮고 있었던 걸 눈치채지 못했다.
또 다른 마법사의 죽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민수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제 방을 둘러봤다. 혼자라면 괜찮지만 둘이 살기에는 좁을 듯한 방 한 칸짜리 집이었다. 그동안 전세 계약만 바뀌면 이사했던 민수가 처음으로 계약 연장을 고려할 정도로 위치가 좋은 집이었다. 이 주변에 보이는 마법사가 사는 동안에 세 명이 채 안 되었던, 정말이지 최적의 위치.
허나 이제는 마법 연합이라는 개똥 같은 떠돌이 마법사 연합이 이곳에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거리 어디를 봐도 마법사를 발견하기가 쉬워졌다. 민수는 일어나서 비몽사몽 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어디로 이사 갈 것인지 머리를 굴렸다.
‘가장 첫 번째 순위가 주변에 마법사가 별로 없는 곳…… 두 번째 고려해야 할 점은 식신들이 안 몰리는 곳…….’
가능한 이곳에 붙어 있으려고 했는데 세상이 도와주지를 않는구나. 괜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얼른 이곳을 떠야지. 민수는 생각난 김에 오늘 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세 계약이야 뭐…… 집주인에게 전화해 보고, 가게는 지금 가서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급하게 떠날 생각은 없었는데.’
적어도 바보 트리오가 제 친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다른 마법사들에게 흘리지 않고 잘 막아 두면 될 일이었다. 그들이 씨앗이 없는 걸 확인하고 다른 장소로 옮길 때까지 쥐 죽은 듯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어제의 이야기를 들어 본바, 정체불명의 마법사 사냥꾼은 바보 트리오의 친구만 건드린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마법 연합이 알게 되었다는 거다. 졸지에 그들에게 있어 마법사 사냥꾼이 된 우리의 세계수 씨앗, 민수는 더 이상 그 이상하고도 정의로운 자가 제 영역을 파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이사 가자. 웬만해서 오늘.’
하지만 그와 충돌해 봤자 좋을 건 또 없었기 때문에 민수는 제 몸을 피하는 걸 선택했다. 이 근처에 정 붙은 것도 딱히 없는 민수는 지어진 짐이 없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빠른 행동력에 의한 잦은 이사 또한 마법사들이 그간 민수를 찾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민수는 제 얼굴을 마법으로 위장하고 다시금 마력 흔적을 갈무리했다. 웬만해서 제 몸을 기점으로 마력 교란 결계는 치지 않았지만, 이미 어제 바보 트리오에 얼굴도장 단단히 찍혔으니 오늘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재수 없게 그들과 마주치면 귀찮아진다.
자신의 몸 주변에 결계까지 말끔하게 두른 후 민수는 집 밖을 나섰다. 오후 2시. 늦은 점심시간이다. 가는 길에 마법사를 네 명이나 봤다. 하지만 여전히 희한하게도 식신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현상 또한 연합에서 의도한 건 아니라고 했었지.’
영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 바보 트리오는 그래도 연합원들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민수에게 충실하게 알려 주었다. 그들의 본의로 알려 준 사실은 아니었지만 민수가 마음먹으면 그들의 의도 따위 대수랴.
민수는 주변을 경계하며 가게로 나아갔다. 골목길에 들어선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곧 짧둥하게 잘린 가로수 옆으로 조그마한 컨테이너가 보였다. 민수의 가게 뒤편이었다. 민수는 가게를 보자 다시 한번 감상에 잠겼다.
‘오늘이 가게를 보는 마지막 날이겠구나.’
“야, 봄? 봤음??”
“당연하지!! 다시 돌아가서 볼래?”
“그러자. 그러자. 개좋다.”
민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던 대학생 두 명이 빙글 돌아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민수는 그들이 어째서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민수의 가게를 주의 깊게 주시하며 걷고 있다는 걸 보고 저들이 호들갑을 떤 게 제 가게와 관련되었단 걸 알아챘다.
‘뭐지?’
민수는 가게의 뒤편에서 문을 향해 빙글 돌았다. 그러자 아닌 척하며 민수의 가게를 보고 있던 대학생들과 함께 가게 앞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도언이었다.
대학생들은 민수의 가게를 본 게 아니라 민수의 가게 앞에서 서 있던 도언을 보고 호들갑을 떤 것이었다. 민수가 도언에게 다가가자, 도언이 통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서 제 주머니에 넣었다.
민수는 찰나에 도언 핸드폰 위의 마법진을 확인했다. 제가 새긴 마법진이 핸드폰 위에 둥둥 떠다녔다. 마력 교란 결계는 도언의 핸드폰에 이상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가게 주변에 부적을 달아 둔 결계까지 있으니, 이곳 근처가 도언에게는 피난처나 다름없다. 민수는 제가 떠나기 전에 도언의 집과 핸드폰에 교란 결계를 이어 나갈 마력을 더 충전하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도언이 가게에 붙어 있는 오픈 시간을 가리켰다.
[open 13:00]
클로즈 시간은 붙여 놓지 않은 게 민수다웠다. 오픈 시간만 잘 지키면 되지 뭐. 퇴근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원칙인 민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오픈 시간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오픈 시간은 1시라고 써 두었으면서 2시에 기어 나오다니. 민수는 소비자의 합리적인 항의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기다리고 계실 줄은… 오래 기다리셨어요?”
“한 시간 정도면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죠.”
“아이고, 죄송합니다.”
민수는 멋쩍게 뒷목을 긁었다.
‘오픈 시간부터 서 있던 거야?’
여태까지 타로집을 운영하면서 문이 닫혀 있는데 열릴 때까지 기다린 손님은 도언이 처음이었다. 민수가 보기에 도언이 그렇게 중요하고 급한 질문을 하러 오는 것도 아니었다.
평일 대낮에 한 시간의 시간을 쓴다니, 도언은 절대 직장인일 리가 없었다. 저번에 대학생 단골이 친구라고 했으니 도언도 그 학교 대학생인가? 남에게 관심이 없던 민수는 이쯤 되니 도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누구길래 이런 데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 대체.
도언은 지금도 저번처럼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청바지에 맨투맨, 그리고 운동화까지. 기다리며 더웠던 건지 팔을 거두어 낸 맨투맨은 도언의 단단한 팔을 보여 주었다. 거기다가 완벽한 얼굴까지.
민수는 자물쇠를 허둥지둥 풀었다. 선선한 날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닌가? 춥거나 더웠으면 괜히 한 시간이나 기다리지도 않고 가셨으려나? 민수는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쪽창을 열어 환기했다.
“얼른 들어오세요.”
오늘은 딱히 영업할 생각이 없던 민수의 계획은 이러했다. 그저 가게나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고, 정리할 거 정리하고, 가게랑 결계 회수하고, 그리고 바로 집주인이랑 전화해서 집 계약에 대해 문의하고…….
손님이 가게 앞에 서 있지 않았다면 그럴 생각이었을 거다. 그러나 떠오르는 단골 다크호스 도언은 가게 앞에서 저를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어제가 마지막 영업이었다고 되돌려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이분이 내 마지막 손님인가.’
도언이 가게에 들어와 손님 의자에 앉았다. 민수는 티 안 나게 도언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값을 해 주어야 했다. 그 생각 덕분에 민수의 마음속에 부담감이 들어섰다.
부디, 도언이 가벼운 질문을 하기를 바랐다. 저번에 돈가스집에서 했던 질문은 그 상대 마법사에게 너무 무거운 주제여서 민수가 알아내기 힘들었다.
“오픈 시간 때부터 밖에 계셨어요?”
“네. 민수 씨와 연락할 수단이 없다 보니 별수 없었습니다.”
“아이고, 이것참…….”
민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하는 장사가 타로가 아닌 전국구에 소문난 맛집인가?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민수 씨가 저번에 질문 세 개를 더 받아 주신다고 하셨죠.”
“아차.”
그런 말을 했었지.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망각의 자각 소리를 막지 못했다. 도언이 민수의 아차 소리를 듣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런, 적어도 기억 못 한 티는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대차게 티 내 버렸다.
민수는 괜히 콧망울을 만지작거리며 뻔뻔하게 대응했다.
“아, 죄송해요. 집에 가스 밸브를 잠그는 걸 깜빡한 것 같아서.”
민수는 인덕션을 썼다. 하지만 그 정도쯤의 거짓말은 이만큼의 임기응변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도언이 진심으로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도언은 민수의 말에 태클을 걸 생각은 없는지 눈을 슬쩍 감고 고개를 미약하게 흔들었다.
그 바보 트리오를 쫓을 때, 도언에게 다음에 오면 세 가지의 질문을 더 들어 준다고 하며 집으로 돌려보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지간히 정신이 없어야 말이지.’
“한 시간씩이나 기다리시고……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대신 하나 더 봐 드릴게요. 다 해서 네 개요. 오늘도 그분에 대한 질문인가요?”
“그렇죠.”
와. 이쯤 되면 코 꿰인 쪽은 도언이 아니라 그 고위 마법사였다. 민수가 아무리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해도 도언은 그 마법사를 잊지 않았다. 저 잘생긴 얼굴이면 인생 살기 편할 텐데. 아, 아닌가? 민수는 도언이 식신 때문에 이제까지의 삶이 엄청나게 불편했을 거란 걸 깨달았다. 그래도 보니까 돈도 많은 것 같은데, 제 인생 제가 꼬는 거 아닌가 싶었다.
민수는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 낀 손을 인중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미디어에 나온 완벽한 점쟁이 포즈의 표본이었다. 책상 위에 수정 구슬만 하나 올려져 있으면 보다 완벽하겠으나 민수는 그런 잡다구리한 건 사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나요.”
“그 사람이요. 지금은 제 시야에 있지만 언제 또 사라질지 불안하군요. 그 사람의 생각을 대강이라도 알 수 있습니까? 지금 사시는 곳을 떠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요.”
민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여러 카드 중에서 아기자기한 그림이 돋보이는 덱을 꺼냈다. 마지막 손님이니 새로운 카드나 보여 줘야겠다. 민수가 꺼낸 카드는 유니버셜 덱이었지만, 평소에 쓰던 것과 다른 그림이었다. 해석 또한 미묘하게 달라졌다. 카드가 섞이는 소리가 찹찹 신명 나게 컨테이너를 울렸다. 민수는 테이블 위로 부채꼴로 카드를 펼쳤다.
“일단 그분이 떠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볼까요. 한 장만 뽑아 주세요.”
도언은 가장 오른쪽에 있는 카드 한 장을 뽑아서 주었다. 민수가 그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한 남자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고 있는 카드다. 남자의 뒤에 세계 지도가 배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배 위에 있는 여섯 개의 검이 방위를 나타내는 듯 교차하여 있었다. 누가 봐도 이동수를 나타내는 카드, 검 6번 카드였다.
“오. 확실히 떠날 생각 하고 계시는데요.”
‘이미 머릿속에 떠날 생각 낭낭한데?’
민수의 답을 들은 도언의 얼굴이 굳었다. 민수는 그를 보고서 걔 좀 잊으라고 오지랖을 또다시 떨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다 관뒀다. 알아서 하겠지.
그 마법사도 어지간히 움직이는 괴짜구나. 웬만한 마법사들은 제 영역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민수는 카드를 회수해 다시 섞으며 덧붙였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떠나실 생각 하는 대략적인 날짜 같은 거죠.”
민수의 제안에 도언은 흔쾌히, 아니, 빠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 속도에서 그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하긴, 그리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말도 없이 떠나고 싶어 한다면 누구라도 여유가 없어지겠지.
마법사가 과연 한낱 범인(凡人)에게 제 위치를 알려 주는 수고를 하고 이동하겠나. 아마 같은 마법사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장소를 뜰 거다.
그래도 도언이 바라보는 그 마법사가 떠나니 마니 하는 생각 정도는 엿보는 걸 허락해 주어서 다행이다. 아직까지는 카드가 대답을 해 주었다. 과연 언제 떠날지도 허락해 주었을까?
‘풀려라, 풀려라, 풀려라.’
의문이 풀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민수는 속으로 되뇌며 카드를 뽑았다.
뽑은 카드는 석 장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민수는 자신이 석 장을 뽑았다. 첫 번째 장은 한 달 이내, 두 번째는 한 달 초과 6개월 이내, 세 번째 장은 6개월 초과 1년 이내다. 언제부터 이 마법사가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 생각을 도언에게는 역시나 말해 주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서 좋아하는 티는 안 냈나?’
분명 저번에 그자와 도언이 통성명은 했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저런 얼굴이 저 좋다는 티를 낼 때 옳다구나, 하고 장난감으로 제 마력을 점철해 두었을 텐데. 그자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닌가?
도언은 안 그래도 식신과 마법사들이 대차게 꼬이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강하고 인간다운 마법사가 도언의 근처에 있으면 그들은 도언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다운’ 마법사가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물론, 민수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제가 인간다운 마법사였다.
민수는 테이블에 늘어진 석 장의 카드를 훑어보았다. 일단 첫 번째 카드인 한 달 이내에 간다는 카드. 이 카드에서 이동수가 뜨면 그자는 분명 한 달 이내에 도언의 근처를 뜰 생각이 있다는 거다. 민수는 첫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
그 카드를 본 민수는 뒤집지 않은 다른 카드 두 장을 보지도 않고 다시 카드 덱에 넣었다. 그런 민수에 도언이 고개를 미약하게 기울였다. 다른 카드 두 장을 확인하지 않아 의아한 눈치였다. 민수는 도언에게 뒤집은 첫 장의 카드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이 카드 보세요. 이 카드는 제가 한 달 이내에 그분께서 떠날 생각이 있냐 없냐를 생각하면서 뽑은 카드거든요?”
민수가 내민 카드는 한 남자가 붉은 갈기의 백색 말 두 마리가 이끄는 전차를 탄 카드였다. 오른손에 쥔 푸른 지팡이가 인상적이었다. 그 남자의 양쪽 어깨에는 초승달과 하현달이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배경의 카드가 떡 하고 떠 버렸다. 7번 메이저 아르카나, 전차 카드다.
“이게 나온 거면 딱히 다른 두 장의 카드 안 봐도 돼요. 이분 확실히 이번 한 달 안에 떠날 생각 하고 계시네. 이건 확실해. 결단력이 넘치시는 분이네요. 이 정도면 이번 주 내에 떠나실 수도……?”
전차 카드. 이것만큼 이동수가 크게 나타나는 카드도 없다. 이 카드가 나오는 상황의 단점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뒤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단력은 강하지만 준비가 허술할 수 있다.
민수는 카드의 그림 요소를 하나하나 짚어 주며 설명을 마쳤다. 도언은 민수가 읽는 카드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진중한 눈과 손으로 감싼 입은, 캐주얼한 복장과 타로집이라는 장소만 아니었으면 몇십억짜리 계약서를 검토하는 CEO의 그것이었다.
설명을 마친 민수는 카드를 다시 덱에 집어넣고선 빠르게 섞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리딩에 민수는 더 알아보기로 했다. 정확히는, 알아보는 범위를 더 좁히는 거다. 이번에는 한 달 이내 정확히 언제 떠나는지를 생각해 볼까.
‘언제 떠나시나요~ 언제 떠나나~’
머릿속으로 괜한 멜로디까지 붙이며 집중하고 흥얼거렸다. 일단 이번 주 내를 뜻하는 카드를 뽑아 보자고 다짐한 민수는 카드 덱의 중간에서 다시 카드 한 장을 착 하고 뽑아냈다.
“오.”
민수는 뽑힌 카드를 보고 감탄했다. 도언은 민수가 입을 열 때까지 보채지 않고 기다렸다. 민수는 도언에게 제가 뽑은 카드를 보여 주었다.
왕관을 쓴 한 기사가 흑마를 타고 불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펄럭이는 망토가 남자의 위엄에 보탬이 되었다. 오른손에는 말의 고삐를 쥐고, 왼손에는 붉은 횃불을 들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이너 코트 아르카나, 나이트 오브 완즈. 지팡이의 기사 카드다. 이번 것은 전차 카드보다 더 붉은 색감이 카드 안에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이거이거, 잘하면 오늘 밤에 떠나실 수도 있겠어요.”
전차 카드 이후에 지팡이의 기사 카드라니. 뒤도 안 돌아보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폼이 매섭다. 민수는 제 앞에 놓인 붉은 카드 두 장을 나란히 정리해 놓았다.
“모르긴 몰라도 성격 참 급하신 분이네요. 원래 이런 성격이신가?”
“…….”
도언은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혀 답답한 숨을 뱉어 낼 뿐이었다. 민수는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조금쯤은 추측할 수 있었다.
자기가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심지어 둘의 과거를 기억하는 건 도언뿐. 게다가 도언은 이 마법사가 떠날 생각을 하는 걸 지금까지 몰랐으니, 그녀의 인생에서 도언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도언은 꽤 긴 시간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수는 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쪽창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사람 한 명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 없을 때를 자각하는 순간은 그 얼마나 아플까. 쪽창 너머로 가을바람을 탄 잠자리 하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갔다.
“그럼…….”
도언의 목소리에 민수도 잡념을 떨치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도언의 말아 쥔 주먹이 자못 비장했다.
“그분이 왜 떠나고 싶어 하시는지도 알 수 있습니까?”
도언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순간적으로 민수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무속인 집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카드로는 읽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었다. 저리도 궁금한 거라면 타로보다는 무속인의 집에 가서 더 디테일하게 알아보는 쪽이 좋을 텐데.
물론 거기 간다고 하더라도 무속인이 그 이유를 알아낸다는 보장은 없었다. 도언이 이유를 찾는 그녀는 마법사니까. 민수가 그녀의 정보를 이렇게라도 알 수 있는 이유는 저 또한 마법사여서 그렇다. 마법사가 아닌 무속인이라면 알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흠…….”
침음을 삼킨 민수는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민수가 가끔씩 즐겨 썼던 동물 조언 카드다. 민수는 카드를 섞고 펼쳤다.
“한 장만 골라 보세요.”
도언이 뽑아서 준 한 장의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초록색 개구리가 카드에 떴다. 개구리의 오른손에 감겨 있는 동그란 구슬이 눈에 띈다. 민수는 카드를 보며 제 생각을 읽었다.
“음…… 이분 주변이 아주 어지러우신가 보네요?? 잡동사니 같은 게 늘어져 있어서 정신없어 보이는데……. 아마 그 꼴 보기 싫어서 떠나시는 것 같네요. 그분의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어서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어요.”
도언은 민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주변 정리가 다 되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단 겁니까?”
갑작스러운 행동에 민수는 일어난 도언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붙인 민수 때문에 민수의 의자가 뒤로 2cm쯤 밀려났다.
“그건 저도 잘 모르죠…….”
“감사합니다. 남은 질문은 다음에 와서 할게요. 또 봐요.”
‘뭐 저렇게 급발진이지.’
돈가스 먹으러 가자고 할 때도 그렇더니, 행동력 하나는 죽여주는 도언이었다. 민수는 전차와 지팡이 기사 카드를 내려다보며 혹시 도언이 좋아한단 사람이란 게 도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자기 카드를 자기가 뽑았나?
‘저 손님한테 몇 가지 공짜 질문이 남았더라?’
민수는 손님이 카드를 한 번 뽑아 보는 걸 질문 하나로 쳤다. 도언은 카드를 두 번 뽑았으니 질문은 두 개가 남았다. 그래도 약속인데, 도언이 질문을 다 쓸 때까지만 여기에 남아 있을까? 요새 하루가 멀다 하며 출석을 해 대니,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도언의 질문을 모두 받고 가게 문을 닫을 수 있을 거다.
민수는 결국 이 지역을 떠날 계획을 충동적으로 며칠간 연장했다. 그동안 일이나 할까. 민수는 비척비척 일어나서 가게 문 앞에 붙어 있는 팻말을 돌렸다.
[OPEN]
❊ ❊ ❊
오늘도 생각보다 긴 하루였다. 근무를 마친 민수는 퇴근하는 길에 휘영청 뜬 보름달을 지켜보았다. 오래 산 민수의 입장에서 긴 하루는 선호할 게 못 되었다. 어차피 오래 사는데 하루가 길면 그만큼 피곤해질 뿐이다. 민수는 도언을 식신 떼로부터 구해 준 이래로 계속 긴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식신 떼를 불태워서 인해 마법 연합인지 나발인지가 민수가 사는 지역으로 왔다. 오늘만 해도 목격한 마법사는 다섯 명이 넘었다. 원래 마법사가 없어서 민수가 터로 잡은 곳이었는데, 지역의 초심이 변질되어도 한참 변질되었다. 민수는 가능한 빨리 도언이 남은 질문을 모두 털어 내 주었으면 했다.
민수는 달에서 눈을 떼고 길을 걸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강렬하게 민수를 비추었다. 눈이 부실 지경이다. 달빛을 쐬며 걷고 있던 민수는 곧 제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는 걸 확인했다.
‘구름인가.’
민수는 고개를 들어 달을 확인했다. 검은 밤하늘에 달이 땅에서 하늘로 흐르는 검은 폭포수에 가려져 있었다. 아니, 저건 하늘로 솟구치는 물줄기가 아니었다. 지상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검은 나비 떼들. 식신의 향연이 달빛을 가리고 있던 거다!
“……!”
마법사들끼리 싸우는 건가? 혹시 모르니 확인해 봐야겠다. 어쩐지 이 주변에서 평소보다 강한 마력의 향이 느껴진다 했다. 저쪽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으나, 민수에게는 제가 만든 교란 결계 부적이 있었다. 잦아들고 있는 나비의 위치에서 눈을 떼지 않은 민수는 카드를 찢곤 손가락을 부딪쳐 그 장소로 이동했다.
“…….”
좌표를 잘 정했는지 민수는 골목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나비들이 공간이동을 하기 전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민수는 나비가 날아가는 장소로 달렸다. 골목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굳어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손님!!”
도언이었다. 그의 뒷모습에 가려져 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싸움에 일반인 목격자라니!! 민수는 도언의 앞으로 한달음에 다가가 가로막고 섰다. 민수가 세계수고 아니고 나발이고, 최우선으로 도언을 대피시켜야 했다.
민수가 도언에게 걸어 준 교란 마법은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이리 많은 식신이 있으면 발견될 수밖에 없다. 조용히 상황만 지켜보려던 민수의 계획이 틀어졌다. 민수는 다급하게 제 앞을 확인했다.
마법사의 시체 두 구가 벽에 늘어져 있었다. 한 명은 목이 잘렸는지 목에서부터 나비가 날아갔다. 머리는 이미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또 한 명은 몸 반쪽이 아예 날아갔다. 이 둘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마법사의 위치를 알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민수는 그들의 시체에서 나온 식신의 방향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하늘로 치솟던 식신이 모두 바닥에 붙어서 빠르게 민수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부터 이쪽 방향으로 오던 중이었다. 민수는 그들의 흐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식신은 한 남자의 손바닥으로 향했고, 그의 손바닥으로 흡수되며 사라졌다. 마치 그의 손바닥이 식신을 무자비하게 삼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도언이었다.
“…….”
민수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낯이 서서히 창백해져 갔다. 민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 뭐야.”
“이런. 들켰네요.”
민수의 떨리는 음성과는 반대로 여유 넘치는 목소리. 민수는 제 손님이었던 믿을 수 없는 자를 향해 손가락을 부딪쳤다. 누군지 모르겠으니 기절이라도 시키자. 그러나 도언은 쓰러지는 대신 한가롭게 말했다.
“오랜만이라고요. 하녹.”
도언의 말을 끝으로 민수의 시야가 스르르 감기며 몸이 무너져 내렸다.
녹. 하녹. 그것은 민수가 제 마음 깊은 곳에 파묻어 버린 자신의 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