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단 한 가지 원인 (4/24)

3. 단 한 가지 원인

“녹!! 하녹!! 당장 일어나지 못해?”

누군가 녹이 덮고 있던 얇은 홑이불을 잡아 끌어냈다. 녹은 잠결에 누군가 잡아채는 제 이불을 끌어당기며 바르작대었다. 그때, 녹의 얼굴에 차디찬 냉수 한 바가지가 시원하게 떨어졌다.

“……!!”

척추까지 시린 기운에 녹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누워서 자고 있던 녹은 자리에서 펄떡 일어났다. 얼음보다 시린 물방울이 턱선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녹은 제 턱 끝에서 젖은 상의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상황 파악을 했다.

‘여기가 어디지?’

녹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주변은 그에게 있어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이며 노란 벽지. 그리고 끓는 온돌바닥. 제 이불을 거두어 내는 건 머리를 길게 땋고 반반한 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이었다.

“허.”

녹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녹의 입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부서졌다. 방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방구석은 고드름보다도 시리게 찼다. 녹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그마한 손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녹은 제게 얼음장 같은 물을 쏟아부어 버린 소년을 올려 보았다. 소년이 눈썹을 찡그리며 위협했다.

“뭘 그렇게 봐. 버러지 같은 게.”

저 싸가지 없는 말투. 분명 녹이 하가에서 자랐을 적, 녹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가솔 중 한 명이었다. 녹은 이 엿 같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혹시 내가 마법으로 타임 리프 같은 걸 했나? 아니, 마법으로는 타임 리프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꿈이군.’

녹은 종종 자각몽을 꾸었다. 아마 도언에게 제 진명을 들었기 때문에 이 개 같은 기억이 꿈을 통해 되살아났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녹은 제 얼굴에서 아직 뚝뚝 떨어지는 물을 훔쳐 내었다.

안 그래도 시린 공기인데 그보다 더 차가운 냉찜질을 아침부터 했다. 얼굴이 시리다 못해 열감이 느껴졌다. 꿈에서 깰 만한 자극적인 경험인데, 이놈의 꿈은 이 정도의 경험만으로 자신을 현실로 보내 주지 않았다.

‘꿈에서 깨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은가.’

분명 현생에서 도언의 모습을 보고 기절했었지. 꿈에서 깬 후 펼쳐질 상황이 예상되지 않는다. 녹은 개 같지만 알고 있는 과거를 꿈꾸며 현생을 미루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현실을 이어 나가는 것보다 더 나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자, 녹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이 녹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쳤다.

“억.”

“이놈아. 정신 차렸으면 얼른 나와! 오늘 빨래해야 해.”

꿈이면서 아픔까지 리얼하게 느껴진다. 마력이 있는 자가 꾸는 꿈은 이게 문제다. 굳이 살리지 않아도 되는 오감을 기깔나게 살려 두었다는 점. 길몽이면 상관없지만 악몽이면 문제가 된다. 그리고 녹에게 제 과거는 악몽이 따로 없었다. 고로 녹은 이번 꿈은 악몽이 당첨되었다.

보통 루시드 드림, 자각몽이라 하면 제가 원하는 대로 주조할 수 있는 꿈이다. 그러나 이번 꿈은 일반적인 자각몽이 아니라 세계수가 녹에게 보여 주는 기억이었다. 녹이 원할 때 꾸는 게 아닌 자각몽은 세계수가 녹에게 보여 주고 싶은 그의 과거를 끝없이 재생시켰다. 가끔 무언가가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할 때마다 세계수의 핵은 기억 속에서 꼭꼭 숨겨 두었던 과거를 꺼내 녹에게 보여 주었다.

꿈을 꾸다 보면 잊었던 것이 기억났다. 세계수는 녹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기에 이 과거를 꿈에서 펼쳐 준 걸까. 세계수가 만들어 낸 꿈은 쓸데없이 재현의 질이 좋아서 온 감각을 모두 느낄 수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녹은 꿈에 대해 상기하며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소년에게 뒤통수를 한 대 더 맞았다.

퍽-

“아야.”

“머리도 녹슬었냐? 이름값 그만하고 얼른 정신 차려.”

얼얼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녹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소년을 한 번 노려봤다. 꿈속에서라도 복수할까 싶어서 마력을 살짝 담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저를 노려보며 손가락을 딱딱 튕기는 녹을 하찮게 쳐다봤다.

“뭐. 인마. 나 없앨 좋은 생각이라도 났냐?”

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지금 이리 어려져 있어서 혹시나 했다. 하지만 세계수는 역시나 녹에게 어린 시절을 리얼하게 보여 주기 위하여 그의 마력 또한 어릴 때와 똑같이 돌려놓았다.

“오늘따라 평소와 다르게 미적거린다? 마력도 없는 놈이 왜 드러눕고 있냐? 배 진짜 째 주랴?”

이곳에는 지닌 마력이 힘이자 권력이었다. 마력이 한 방울도 없었던 녹은 더 이상 뻗대지 않고 냉큼 일어났다. 시린 물을 맞은 뺨이 녹의 온기를 앗아 갔다. 빌어먹을 세계수는 그때의 추위도 정확하게 구현해 냈다.

‘꿈이면 꿈답게 감각은 좀 죽여 줘라. 좀.’

일어나 양손으로 팔뚝을 비비며 미진한 열기로나마 추위를 가시게 하려고 노력했다. 온돌바닥이 그나마 뜨끈해서 절대 일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봐도 영 반갑지 않은 자식이 저를 반겨 주고 있었다.

“빨리 나와서 준비해. 마력이 하나도 없으면 부지런하기라도 해야지. 네가 가주님의 아들이라고 뭐라고 된 것 같아?”

‘맞아. 쟤네는 매일 저랬지.’

마력이 권력인 마법사 사회에서 마력이 없이 태어나는 아이는 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까,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 말이다. 이 시대에는 마법사들이 일반인을 현대보다 더 심하게 취급했다. 현대에도 수틀리면 일반인들을 그냥 죽여 버리는 마법사일진대, 그보다 심하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이 되겠는가?

하지만 하가는 마력이 일절 없는 일반인 고아를 받아 제 심부름꾼으로 키워 내고 있었다. 마력이 없으므로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세계수를 노리는 라이벌 가문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하 가문 마법사들이 그들을 위해 마법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겨울은 춥게 나고, 여름은 덥게 났다. 그나마 최소한의 보온 장치는 해 주었다. 이를테면 온돌 같은 거 말이다. 고로 하가에서는 인간들에 대한 취급이 다른 가문에서보다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만일 하가에서 심부름꾼 아이들을 위해 온돌 등 각종 최소한의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면, 녹 또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다.

가주와 본처 사이에서 난 적자인 녹은 태어나서부터 마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 마력이 없으면 없는 자식 취급하는 게 보통인 이 사회에서 녹은 당연 먹이 피라미드의 최하위권에 속해 있었다. 아비와 어미는 녹이 마력이 없다는 걸 안 후론 들여다보지조차 않았다.

이름이라도 하나 얻은 게 다행일 정도랄까. 물론, 이름은 마력 측정을 하기 전에 어미의 태중에 받은 이름이었다. 가주도 그렇고 본처도 그렇고, 매우 뛰어난 마법사였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난 아이가 마력이 하나도, 정말이지 털끝만큼도 없는 아이라니. 그들의 상실감은 외면으로써 발휘되었다. 죽이지나 않아 다행이었다.

“자, 이게 네 몫이다.”

의복을 가득 껴입고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녹을 깨우던 소년이 바구니 한가득 생활 빨래와 빨랫방망이를 녹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는 분명 소년과 나누어 해야 하는 양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녹에게 제 몫의 빨래를 몽땅 넘겼다.

녹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빨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 저 자식 예전부터 패 주고 싶었는데. 지금 어차피 꿈이니까 좀 패면 안 되나? 어쨌든 언젠가 깨잖아.’

녹의 눈에 번쩍하고 살심이 일었으나 가까스로 충동을 억제했다. 세계수가 보여 주는 꿈이라면 언제 깰지 몰랐다. 괜히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여기서 일주일 지난 후 꿈에서 깨면 낭패였다.

가끔씩 집안의 식솔들이 이런 식으로 녹을 괴롭혔다. 높으신 나리의 시중을 들며 받은 스트레스를 그들의 자식인 녹에게 푸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처벌 또한 받지 않고, 심지어 녹의 얼굴은 주인마님을 꼭 빼닮았으니. 성격이 날카롭다고 소문난 주인마님에게 식솔들이 패악질이라도 한 번 당하게 되면 그날은 곧 녹의 제삿날이었다.

잊고 싶은 과거가 자꾸 흘러 들어온다. 왜 세계수는 이런 과거를 상기시키는 걸까. 녹은 빨래바구니를 힘겹게 받들며 부들거리고 있는 제 조막만 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이만큼 작고, 또 저 녀석이 나를 괴롭혔던 시기라면……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열네 살 이전일 거다.

방치되었던 녹은 성장기 때 잘 챙겨 먹지 않아 발육이 또래보다 매우 늦었다. 그렇기에 제 신체를 보고 나이를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녹에게 제 몫의 빨래까지 맡긴 소년은 콧노래를 부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아…….”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무섭도록 하얗다.

‘와. 이 시대 진짜 추웠네. 현대 문명 만세다.’

녹은 속으로 꿍얼거리며 냇가로 발을 옮겼다. 저택 옆에 길게 뻗어 있는 냇가는 하 가문이 즐겨 쓰는 물줄기였다. 가깝고, 또 물 또한 깨끗해서 쓰임에 무리가 없었다. 금방 냇가에 도착한 녹은 꽝꽝 언 냇물 줄기에 입을 벌렸다.

“어…….”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제가 마력만 잘 가지고 있었어도 이런 냇물쯤이야…… 아니, 애초에 빨랫방망이를 두드리지 않아도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손쉽게 빨래를 끝냈을 텐데.

‘마법 만세 만만세다.’

아까까지 현대 문명을 찬송했던 녹은 태세를 바꿔 마법을 찬양했다. 녹은 냇가에 바구니를 내팽개치고선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마법도 못 쓰고, 그렇다고 현대 문명도 못 쓰는 녹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자식. 이럴 줄 알고서 나한테 다 맡겼나.”

물론 이럴 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런 추위에 녹에게 제 몫을 다 떠넘길 녀석이긴 했다. 녹은 괜히 빨랫방망이를 집어다가 돌처럼 얼어붙은 냇물을 꽝꽝 쳐 댔다. 얼마나 단단히 얼어붙었는지, 녹이 방망이로 물가를 깰수록 하얗게 얼음알갱이만 부서졌다. 조그마한 아이가 몇십 센티는 넘을 듯한 얼음을 깨기엔 요원해 보였다.

“녹 도령! 여기서 뭐 해?”

그때, 뒤에서 한 여자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녹에게 다가왔다. 그 시절 유일하게 녹의 힘이 되어 준 심부름꾼 아이였다. 녹은 오랜만에 보는 아이의 말간 얼굴에 꿈에 대한 불만이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악몽이 아니었구나.’

추억 속에만 묻어진 얼굴이었다. 녹은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이는 이 시린 날씨에도 목검을 쥐고 있었다. 장갑을 끼긴 하였으나 이 칼바람을 막기에 녹의 눈에 역부족으로 보였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보온 마법을 걸어 주었을 텐데…….’

아이는 제게 다가와 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령. 표정이 왜 그래? 그런 표정은 나한테 하는 게 아니라 저 빨래 더미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높이가 만년설을 가진 산과 다름이 없네!”

그리고 까르르 웃었다. 녹 또한 그녀를 따라 흰 눈처럼 웃었다. 아무리 몸이 고돼도 이런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버틸 만했다.

“하진아. 이 추운 날 방에 있지 왜 여기까지 나왔어.”

“도령이 낑낑거리는 모습 보고서 우리가 달려왔지! 잘했지? 같이하자.”

아이, 하진은 제가 쥐고 있던 목검을 녹에게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얗게 숨결이 부서졌다. 하진은 제 목검을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심지어 목검에게 이름까지 붙여 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마워.”

녹이 하진에게 고개를 끄떡였다.

‘항상 나를 도와주는 고마운….’

❊ ❊ ❊

“허억-”

녹은 제게 덮여 있는 이불을 거두어 내며 잠에서 깨었다. 제가 여동생처럼 아꼈던 하진에 대한 꿈. 정말이지 피도 안 마른 시절의 이야기였다. 세계수는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 기억을 녹에게서 발굴해 낸 건지 몰랐다. 녹은 오른손으로 눈가를 덮고 가쁜 숨을 골랐다.

“이제 일어나셨네요.”

녹의 침대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녹은 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이불을 걷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날카로워 보이는 은테 안경을 끼고 서류를 들고 있던 안도언과 눈이 마주쳤다. 도언은 안경을 벗으며 침대 옆 탁상에 서류와 함께 두었다.

녹은 제가 보고 있는 저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봤던 제 손님과 같은 사람인가에 대해 짧게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언은 항상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자신을 만나러 왔기에 도언은 녹에게 아주 잘생긴 대학생과 같은 이미지였다. 대학교 표지를 장식하는 모델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각 잡힌 검은 정장에 머리는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겼다. 심지어 풍기는 분위기 또한 달라졌다. 그를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경고음이 본능처럼 머릿속을 타고 윙윙 울렸다.

“불편하신 점은 없죠?”

서류를 읽고 있던 도언이 서류를 탁상에 두며 녹에게 물었다. 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제가 앉아 있는 커다란 침대를 필두로 어둑어둑한 암막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도언이 녹의 대답을 기다리며 은은하게 빛을 뿜던 탁상 조명을 끄고 천장 조명을 밝혔다. 방이 환한 조명으로 채워졌다. 더욱 주변이 잘 보이게 된 건 당연지사다.

‘이거 지금 꿈인가?’

녹은 제가 잠들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복기했다. 그러니까…… 거리에서 식신이 날아들어서…… 그쪽으로 갔더니 도언이 마법사들의 시체 앞에서 식신을 손으로 삼키고…….

‘식신을 손으로 삼키고?’

상황 파악을 끝낸 녹은 제 몸을 침대 헤드에 바짝 붙였다. 아직 여유롭게 입가를 풀고 있는 도언에게 질문했다.

“여기가 어디야.”

“제집이죠.”

“내가 왜 여기에 있어?”

“제가 데려왔으니까요.”

“왜 데려왔는데?”

“제가 데려오고 싶었으니까요.”

뱅뱅 도는 대화에 어이없어진 녹은 바로 공간이동을 해서 빠져나갈까 하다가 관뒀다. 정황상 마법사를 죽이고 다닌 건 도언이 맞는 듯했다. 분명 마력을 확인해 봤을 때는 마력이 한 방울도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어차피 언제든 마법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니 일단 질문을 해서 정보를 캐는 게 먼저다.

“넌 뭔데?”

“안도언이요.”

“내가 그딴 걸 궁금해하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아, 그런가요? 몰랐네요.”

도언은 녹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였으나 그 모든 답은 녹이 원하는 정보와 비껴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답하면서 웃는 꼬라지를 보니 분명 도언 또한 눈치가 없어서 저리 말한 건 아닐 테다.

녹이 추측하기에 분명 저 안도언이라는 자는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는 이와 관련이 있을 거다. 분명 은둔을 끝낸 후에 그 이름을 쓴 적이 없으니 이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제가 세계수 핵의 그릇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죽이면 그곳에서 세계수가 자라난단 사실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렇다면 저를 세계수의 터로 잡은 곳에 데려가서 죽일 생각인가?

녹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마법사였다. 그 어떤 마법사가 세계수에 대적할 수 있으랴. 고로, 곧바로 저를 죽이지 않고 데려온 행위는 도언의 자만이었다. 저자의 정체가 마법사든, 마법사의 수하든, 제 능력을 과신하고 녹을 만만히 보면 그 끝은 언제나 죽음이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를 제대로 알려 주기 전에 뒷배부터 알아볼까.’

결국 녹은 도언의 멱살을 잡기 위해 몸을 끌었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저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경고등이 울려도 녹은 그를 무시해도 별 탈 없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시했다. 그리고 도언의 셔츠 깃을 쥐기 위해 몸을 움직인 순간-

절그럭.

“……?”

도언의 목줄기를 향해 뻗은 손이 불길한 금속음에 저지당하고 멈췄다. 분명 녹의 발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녹은 제게 가볍게 덮여 있던 이불을 휙 하고 들춰내었다. 거기에는 제 발목을 차갑게 감싼 은색의 족쇄가 걸려 있었다.

“이게 뭐야?”

“족쇄죠.”

“이게 왜 내 발에 달려 있는 건데?”

“도망가시지 마시라고요.”

제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녹은 제가 당차게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언은 지금 세계수의 마력을 지닌 녹을 상대로 족쇄 따위로 구속하려고 한다. 지나가던 정령이 웃을 노릇이었다. 그 누가 마법사를 인간의 물리적인 도구 따위로 잡아 두나. 그것도 최강의 마법사를.

녹은 결국, 마법으로 위협을 하든 뭘 하든 간에 도언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하여 마법을 부리는 걸 보여 주기로 결정했다. 평소 때 같으면 주변에 마법사가 있을까 조심조심해서 썼던 마법이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까짓 거 어차피 자신의 이름이 하녹인 걸 들킨 마당에 마법을 안 쓰는 것도 웃기다.

녹은 도언의 뒤로 이동하기 위해 손가락을 부딪쳤다. 발목 또한 무거운 족쇄에서 풀려나 가벼….

“어?”

손가락을 부딪쳐 족쇄에서 벗어나 공간 이동을 했어야만 했던 녹의 신체는 여전히 침대 위에 머물러 있었다. 당황한 녹은 연달아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딱- 딱-!!

그러나 단 한 번도 녹의 의도대로 마법이 듣지 않았다. 녹은 제가 발산한 마력이 어딘가로 흡수되어 소멸하는 기분을 느꼈다. 녹은 한 번 더 손가락을 부딪쳐 마법을 걸었다. 그러나 역시 마법이 듣지 않았다. 자신에서 나온 마력이 구체화되지 않고 자신의 목줄기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녹은 마력의 흐름을 따라 제 목을 더듬어 보았다.

“……!”

제 목에 무언가 둥글고 단단한 고리가 걸려 있었다. 주변에 거울이 없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따뜻한 결이 주는 느낌을 보아하니 차가운 금속의 물질은 아니었다. 경도가 높아 보이지도 않았다. 매만져 보니 미세한 탄성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녹은 목에 걸린 이 고리가 제 마법을 흩트려 놓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세상의 고대 유물 창고라고 불리던 하가에서도 이런 귀물은 보지 못했다. 마법사의 마력을 쓰지 못하게 봉인하다니. 덕분에 녹은 영락없는 일반인이 되었다. 어쩐지, 일어난 후부터 항상 제 주변에 감지되었던 미약한 마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세계수 핵을 제 몸에 담은 이후부터 단 한 순간도 넘치는 마력을 쓰지 못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녹은 제가 안타까워했던 일반인과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실감했다. 녹이 멍하니 제 목에 걸린 고리를 더듬었다.

“……바깥은 위험하니까 여기에 있어요.”

침대 옆에 있던 도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녹은 도언의 대사를 제가 잘 들은 게 맞는지 의심되었다. 바깥은 위험하니까 여기에 있어요?? 바깥은 위험하니까 여기에 있어?

도언이 등장하기 전까지 녹은, 아니, 민수는 인간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정말 잘 지내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들끓어도 자신의 넘치는 마력으로 제 한 몸은 간수할 자신이 넘쳤다. 갑자기 민수에게서 숨겨 두었던 녹을 꺼내게 한 건 도언이었다.

녹의 유일한 무기인 마법을 빼앗아 들고 위험하다며 방에 족쇄까지 채우면서 가만히 있으란다. 어이가 없는 녹은 도언에게 제 목에 걸린 고리를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지랄 마. 네가 제일 위험하거든? 빨리 이거나 풀어.”

“그건 안 되죠.”

기대도 안 했다.

‘손님’에서 ‘너’로 호칭이 격하된 도언은 단칼에 녹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에 녹은 제 목의 고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부러뜨리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러나 이놈의 고리는 미스릴로 만들었는지, 새끼손가락만 한 두께면서도 부러지지 않았다.

‘설마 진짜 미스릴 같은 거로 만든 건가?’

두께는 확실히 얇았지만, 거울이 없어 제 목을 감싼 것을 보지 못하는 녹은 그 고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녹은 그렇게 한참을 제 목에 걸린 고리와 씨름했다. 목에는 정체가 뭔지 모르는 마력 억제구, 발목에는 허접하다고 생각했던 족쇄, 그리고 정말이지 누군지 예측할 수 없는 도언까지.

완벽하게 환장할 만한 상황이었다.

손끝이 빨개지도록 애쓰던 녹은 결국 포기하고 도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솔직히 방심했다. 저를 상대로 제힘을 과신한 마법사들의 말로가 비참하다고 했었지만, 저의 힘을 과신한 건 도리어 녹 자신이었다. 세계수의 마력을 구속하는 레벨의 마력 억제구가 있는 건 고사하고, 제 마법이 듣지 않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도언과 대치했을 때 곧바로 공간이동을 한 게 아니라 수면 마법을 걸었지.

‘그냥 저 인간의 배후와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뿐인데.’

설마 마법사보다, 아니, 저보다 더한 인간이 있을 줄은…… 이 세상의 정점은 누가 뭐래도 세계수였다. 아무리 숨쉬는 마생물 중 가장 마력이 강하다고 소문난 드래곤이 하가에 등장해도 한낱 마력 덩어리 식물인 세계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예의를 차렸다.

‘그럼 쟤의 정체가 대체 뭐지?’

지금으로써 도언은 녹에게 제 정체를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정체가 뭐냐고 물어도 도언은 제 이름 석 자만 녹의 고막에 때려 박을 뿐이었다. 녹이 고리와 힘차게 씨름하는 걸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도언은 녹의 질문에 녹에게 다가왔다.

녹은 도언이 제게 다가옴에 긴장하고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도언이 점점 다가올수록 녹은 예전에 하가에서 하진에게 배웠던 호신술을 뇌 속 깊은 곳에서 뒤지고 있었다. 그때는 마력이 없어서 꽤 열심히 배웠었는데, 세계수의 힘을 담은 이후부터는 필요가 없어서 잊어버렸다. 그러지 말걸.

하지만 녹의 긴장에도 무색하게 도언은 녹의 이마에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어지럽게 퍼져 있던 머리카락을 쓸며 정리해 주었다. 그 의식을 마친 도언은 녹의 눈에 눈을 맞추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녹이 저를 기억해 낸다면.”

“뭐?”

“녹이 저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낸다면 풀어 드릴게요.”

“기억? 내가 너를?”

“네.”

‘내가 쟤랑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녹은 제 기억력이 짧은 편이 아니라고 자부했었다. 특히 마법사에 관련된 기억은 한 번 뇌 속에 입력되면 잊지 않았다. 도언은 지극히도 마법사에 관련된 인물이었다.

‘저런 인간을 내가 잊었다고?’

녹은 도언과 처음 본 날을 상기했다. 혹시 그 어마무시한 나비 떼가 도언을 습격할 때 말하는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식신이 저 인간을 습격한 게 맞았나 의문이 든다. 녹이 정신을 잃기 전에 분명 도언은 제 손바닥으로 식신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때 괜히 끼어들었었나?’

그래서 이렇게 대차게 엮인 걸까? 뭐, 일단 녹은 이거라도 뱉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식신 떼가 뭉쳐서 너를 습격했을 때 말하는 거야?”

우물쭈물하던 녹이 오물오물 무슨 말을 하는지 조용히 기다렸던 도언은 녹의 대답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걸 말 안 했네요. 틀렸을 때는 페널티 있어요.”

“페널…….”

녹은 도언에게 페널티가 무엇인지 되묻지 못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도언이 녹의 뒷목을 잡아당겨 입술을 삼켰기 때문이다.

도언의 숨이 제 입을 통해 넘어왔을 때에서야 녹은 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녹이 느리게 눈을 세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었다.

“……!”

녹은 머리를 힘껏 뒤로 젖혔으나 뒷머리를 큰 손으로 꽉 잡은 도언의 손길에 의해 저지당했다. 아무리 뒤로 고개를 당겨 보아도 도언의 얼굴과 멀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녹은 손으로 도언을 힘껏 밀쳐 내려 했으나 그것 또한 시도로 끝이 났다. 도언은 뒷머리를 잡고 있던 손까지 내려 녹의 양쪽 손목을 하나씩 결박했다.

도언의 양손이 녹의 양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녹의 뒷머리는 자유였다. 그걸 기회 삼아 녹은 머리를 뒤로 뺐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미 도언이 다가오기 전에 제 몸을 침대 헤드에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뒤에 닿아 오는 헤드 보드의 딱딱함. 정신을 차려 보니 도언은 어느새 녹의 몸 위에 올라타 속박하고 있었다.

언제 침대 위로 올라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양 손목은 헤드 보드에 붙어 있어 저항조차 못 했다. 도언이 불시에 습격한 것도 힘껏 저항하지 못한 이유에 한몫하리라. 녹의 다급했던 바깥쪽 상황과는 다르게 도언은 느리게 녹의 입안을 유영했다. 여유롭게 치열까지 세세하게 훑은 도언이 마침내 녹의 입술에 맞닿았던 자신의 입을 떼었다.

“……이제 숨 쉬는 게 어때요?”

녹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도언의 말에 충격으로 막혔던 기도가 뻥 하고 뚫렸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았던 폐가 어지간히 답답했던지 호흡기는 신선한 공기를 삼키느라 분주했다. 녹은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얼굴로 제 눈앞의 사내를 노려봤다.

녹이 숨 쉬는 걸 확인한 도언이 깔끔하게 한 번 더 버드 키스를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다가왔다. 하지만 녹은 그가 다가오기 전에 무릎을 올려 찼다.

퍽-

족쇄가 끌려오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적막했던 방 안을 울렸다. 범상치 않은 소리가 나며 녹의 무릎이 단단한 도언의 배에 명중했다. 분명 명중이었다. 그러나 도언은 억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도언은 녹에게 자신의 배를 내어 주고서야 물러났다.

녹이 참았던 숨을 가쁘게 쉬며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도언에게 잡혔던 손목이 붉게 변했다. 멈췄던 뇌가 산소의 공급을 받아 활발하게 돌아갔다. 드디어 산소를 공급받은 녹의 뇌세포 또한 일을 했다.

“뭐 하는 짓이야.”

“페널티라고 했잖아요. 틀렸다고요. 나비 떼가 습격했을 때라…… 그때를 기억해서 상 받아야 하는 건 녹이 아니라 저 아니에요? 정교하게도 기억 소거까지 하셨으면서.”

도언이 침대 밑에 내려와 서서 정장의 깃을 잡고 가볍게 당겨 펼치자 곧 주름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이 되었다. 녹에게 있는 힘껏 맞은 배가 아프지도 않은지, 누가 봐도 괜찮은 모습이었다. 누가 도언을 방금 전에 배를 가격당한 사람이라고 보겠어.

녹이 제일 충격받은 건 제가 키스 당한 상황도, 제게 맞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도언의 태도도 아니었다.

‘내 마법이 안 들었다고?’

솔직히 방금 나비 떼에게 습격당한 일화를 얘기한 건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에 가까웠다. 녹에게 있어 도언과의 최초의 기억은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가 첫 만남이 아니란다.

“녹의 마법이 제대로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식신으로부터 절 구해 주는 장면을 평생 기억하지 못할 뻔했잖아요.”

……분명 녹이 도언의 마력을 체크할 때, 몇 번이고 말했듯 명실상부하게 도언의 마력은 0에 수렴했다. 그렇다고 도언이 마력 교란 결계라거나 그런 걸 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력 교란 결계는 녹이 필요해서 제가 개발한, 자신밖에 모르던 마법이었다.

마법사들은 제 마력을 뽐내려 하면 했지 제 마력을 쓰면서까지 제가 지닌 힘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력 교란이 필요 없는 세계가 마법사 사회였다. 녹은 마법사 사회에서 은둔하던 세월 동안 새로운 마법 개발을 주력으로 삼고 하루하루를 버텨 냈었다.

개발한 마법 중에 가장 유용한 건 물론 마법 교란 결계었다. 산에 내려와서 결계를 쳤더니 식신이 얼씬도 않는 그 모습에서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가. 녹은 은둔을 끝낸 후 교류를 했던 마법사가 없었다. 고로 이 마법은 오로지 녹만 알고 있단 소리가 된다. 심지어 교란 마법은 가벼운 눈속임이었다. 교란 마법을 썼다고 하더라도 녹이 작정하고 마력을 알아보려고 하면 못 알아낼 리 없었다.

게다가 세계수의 눈을 피해 마력을 숨길 수 있다는 소리는 또 들어 보지 못했다. 마력에 대한 감각이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이가 녹이었다. 마법사가 아무리 마력을 숨기려 애를 써도 같은 마법사 앞에서라면 모를까 녹의 앞에서는 말짱 도루묵이었다. 요모조모 도언은 녹이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튀어 나간 존재였다.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미스터리한 일들은 거의 마법사에 의해 일어났고, 세계수의 핵으로 인해 민수 또한 마법사들이 알고 있는 건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세계수 핵에 담긴 지혜가 깃든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진리를 꿰고 있다는 세계수 앞에서도 도언의 정체란 알 수 없었다. 녹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 최강 생물인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녹의 마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려 세계수의 마력으로 짜낸 마법이기 때문이다.

마침 도언은 핸드폰을 품속에서 꺼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녹이 저를 위해 결계까지 쳐 준 건 정말 감사했던 일이지만…… 이게 있으려니 부하들이 저를 못 찾아서요. 이건 여기에다가 둘게요? 심심하면 그거 가지고 놀고 있어요.”

도언은 책상 옆 탁상에 핸드폰을 얌전히 올려 두었다. 녹은 긴장을 풀지 않고 도언이 꺼내 준 핸드폰을 흘겨보았다. 분명 녹이 결계를 걸었던 그 휴대 전화가 맞았다. 하지만 제가 친 결계식이 핸드폰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저게 내 결계의 매개 맞아?”

도언이 말을 다르게 하며 핸드폰을 건넨 이유가 없을 것 같긴 하나, 아무리 봐도 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물어보았다. 도언은 녹의 질문에 제 목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지금 녹은 마법 못 써요. 마력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일절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자신이 건 마법조차. 목에 걸린 게 녹의 마력을 흡수해 버리거든요. 지금 녹은 마법사가 아니니까 괜한 시도 하지 마요.”

도언이 친절하게 녹이 마력을 쓰지 못한단 걸 확인해 주었다. 녹은 제 목을 더듬어 정체불명의 고리를 만졌다.

“이게 뭔데?”

“녹이 저에게 키스해 주시면 알려 드릴게요.”

“…….”

‘말을 말자.’

결국 녹은 침대 끝에 더욱 바짝 붙어 도언을 매섭게 노려보며 경계했다. 녹은 제 목에 걸린 걸 더듬으며 다른 질문을 했다.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뭔데 내 마법이 듣지 않는 거지?”

“그걸 알아내는 게 녹의 일이죠. 녹은 이미 알고 있어요.”

‘환장하겠네.’

도언은 자꾸 녹이 알고 있다는 소리만 했다. 하지만 녹 본인이 모르겠다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녹은 단언컨대, 정말, 정말로, 진짜로 도언을 그 골목에서 처음 봤다.

녹은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모든 상황이 제게 불리했다. 정보도 없고, 힘도 없고, 게다가 발은 구속당했다. 그 상태에서, 심지어 같은 공간에 페널티 운운하며 제게 키스한 또라이와 함께 있었다.

녹은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납치당했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을 방영하는 걸 흥미롭게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상대를 자극하면 안 된다고 했었지. 녹은 가능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딜을 하기 위해 차분하게 입술을 뗐다.

“내가 마법을 못 쓴다면 발까지 묶을 필요는 없었잖아. 그럼 이거라도 풀어 줘.”

녹은 제 발목을 가리켰다. 슬쩍 만져 보니 금속 특유의 차가운 온도가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그러나 발목 안쪽에 닿아 오는 면은 따뜻하기만 했다. 은빛으로 빛났으나 보는 각도에 따라 진줏빛 광택이 돌았다. 지금 보니 이는 분명 마력이 담긴 마광석, 아타움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 도구를 주조할 때 자주 찾는 광석이다. 물론 자주 찾는 것치고 물량이 부족해서 그 옛날에는 아타움을 두고 가문끼리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마법사들이 한도 초과하는 양으로 만들어 낸 갖은 식신 때문에 인간 세계가 아주 개박살이 났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등 세계 각국의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전쟁이 발발하는 실상을 알고 보면 모두 마법사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마 제1차 세계 대전이 아타움을 건 마법사들의 싸움으로 인해 발발했던 전쟁이었을 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타움을 두고 싸운다는 소식이 녹에게 들리지 않았다. 평화의 시대였다.

녹은 그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잠잠해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었기에, 가문의 수장이 모여서 평화 협정 따위를 썼단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평화 협정에도 불구하고 아타움은 마법사 싸움의 잦은 원인이 되었다. 수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희귀한 광물에 세계수 나뭇잎에 반사된 햇볕을 쬐어야지만 아타움이 비로소 완성될진대, 세계수 핵이 사라진 지금은 하급의 아타움만이 생산되고 있었다. 심지어 세계수의 부재로 생산이 곧 중단될 위기에 놓인 1급 멸종 위기 광물이었다.

‘이 정도 광택이면…… 적어도 하가에서 가지고 나와야 하는 정도인데…….’

당연하게도 아타움은 그 예전에 세계수를 관리하던 하가에서 생산해 내었다. 그렇다면 이 아타움 또한 거기서 얻어 온 걸까?

아니, 그 전에 그 귀한 광물을 지팡이 따위에 갈아 넣지 않고 녹의 발목에 걸어 두었단 사실에 기함했다.

일반 철이라면 도끼를 찍어 누르면 끊어질 테지만 아타움은 아타움만이 끊어 낼 수 있었다. 이건 또 상등품이니 웬만한 하급 아타움으로 끊어지지 않을 거다. 또는 세계수의 마력이 담긴 무언가가 끊어 낸다거나. 세계수 마력 덩어리인 녹은 제 마법이면 한순간에 끊어 낼 금속 앞에서 쩔쩔맸다. 마력을 쓰지 못하니 눈이 먼 느낌이었다.

도언은 족쇄라도 풀어 달라는 녹의 부탁을 단박에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죠. 녹이 어디로 튈지 모른단 걸 제가 잘 아는데.”

마치 자신을 잘 안다는 듯 말하는 도언의 태도에 녹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네가 뭘 아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정말 줄줄이 제 신상을 욀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김민수요? 이번 이름은 어디서 본 거예요. 이번에는 무슨 간판 같은 데에서 따오셨나? 저번에도 본인이 쓸 만한 이름 대충 짓더니.”

“…….”

녹이 이 지역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본 간판인 ‘김민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름을 따온 걸 한 번에 맞혔다. 심지어 저번 운운하는 걸 보니 정말 이 지역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정말 제가 도언과 언제 처음 만난 거지? 녹의 동공에서 진도 8.0의 지진이 일었다.

둘만 있는 방에서 도언만 홀로 여유로웠다. 도언이 노리는 건 세계수의 씨앗으로서 녹이 아닌 사람으로서 녹 자체인 것 같았다. 심지어 페널티라고 했던 게 키스라니. 대체 무슨 관계였던 건지. 문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뇌다.

도언이 착각한 게 아닐까? 사고 회로를 돌려 보았지만 도언은 제가 여기에 살기 전을 아는 눈치다. 제 본명을 알고 있던 마법사는 거의 다 죽었을 테다. 게다가 몸에 마력도 감지되지 않는 인간이고. 녹이 생각하기에 도언은 수상하기로는 백여 가지를 꼽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도언은 혼란스러워 하는 녹에게 읊조렸다.

“어쨌건 첫날이니까 페널티는 가볍게. 다음에도 추측해 봐요. 저도 녹이 말하는 제 정체가 궁금하니까.”

“네가 말한 페널티가… 그…… 방금 전에 그거냐?”

“제가 말했잖아요.”

도언이 그 말을 끝으로 녹에게 다가섰다. 그가 다가오니 그 특유의 무거운 체향이 머스크 향과 섞여 녹의 후각에 각인되었다. 녹 또한 마법사인지라 육감에 제 모든 감각을 얹어 살아왔다. 그러나 그 육감인 마력이 차단된 지금, 쓰지 않던 오감이 더한 자극이 되어 녹에게 닿았다. 무거운 향과 함께 여유롭게 녹의 오감에 들어온 도언이 눈을 내리깔고 녹의 귓가에 속삭였다.

“첫날이니까 페널티는 가볍게…라고.”

“이거 순 미친 새끼 아냐.”

녹의 목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도언은 녹의 경악을 예상한 듯 느긋했다. 아니, 저 남자는 오늘 종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도언은 눈을 곱게 접었다.

“네. 저 미쳤어요. 녹이 저를 미치게 했잖아요.”

녹도 도언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분명 녹은 도언을 이 지역에서 처음 본다. 아니, 사실 지금 어디 지역에 박혀 있는 집구석에서 묶여 있는 건지 모르지만, 여하간 녹은 도언을 몰랐다.

녹이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녹 본인의 죽음이었다. 그렇기에 키스라는 페널티는 자신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키스라니…… 심지어 그것보다 더한 게 다음에 기다리고 있다니! 전혀 상상조차 못 한 전개라 녹은 혼돈 속에 빠졌다. 이 한 몸의 안전이 문제가 아니었다. 잘하면 정신적인 데미지로 세상 하직할 수도 있었다.

‘이러다가 스트레스받아서 죽는 거 아닐까?’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빠르게 자신의 마법을 되찾고 이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법이 빼앗긴 상태에서 아타움으로 만든 족쇄까지 차고 있으니, 녹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탈출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녹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도언의 말과 행동을 곱씹어 봤다. 그러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도언의 알 수 없는 행보와 납치 콜라보에 자극받아 침착하지 못하고 제 억울한 점을 토로했다.

“와, 씨. 진짜 억울하네. 내가 너를 미치게 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나 누군가한테 영향 주는 거 되게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야, 내 좌우명이….”

“…세계가 종말할 때까지 가늘고 오래 살자. 맞죠? 사람이 엮일수록 인생이 굵어진다며 싫어했잖아요.”

도언은 녹의 말을 끊어 받아 이었다. 녹은 말문이 막혔다. 저건 분명 자신의 좌우명이 맞았다. 녹은 도언을 모르는데 도언은 녹의 사소한 사실을 자꾸만 내뱉는다. 제 진명을 알고 가명 어쩌구 할 때도 그렇더니, 이래서야 도언이 정신 나간 게 아니라 진실로 자신을 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녹은 제 좌우명을 마지막 은둔을 끝낸 후에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뱉은 적이 없었다. 물론 필기구로 쓴 적조차 없다. 그렇다면 도언과 만난 시기는 그보다 전이란 말인가?

제 좌우명을 읊는 도언에 머뭇거리던 녹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너 혹시 내 뒷조사라도….”

“하. 당신이 어디 뒷조사한다고 캐내질 인물입니까? 그랬으면 이미 3차 세계 대전은 21세기 오기 전에 일어나고도 남았어요.”

도언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다. 세계수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민수의 행방이 알려지게 된다면, 분명 모든 가문에서 앞다투어 식신을 풀 것이다. 그리고 녹을 찾아 대겠지.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건 인간밖에 없다. 아타움을 위해 싸웠던 그 가벼운 가문 대전만으로도 세계 대전쟁이 발발했다.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도언이 세계수를 노리고 녹을 납치한 건 아니라는 직감이었다. 세계수의 마력을 노렸다면 정신을 잃었을 때가 녹의 마지막 순간이었겠지. 녹은 침착하게 이런 점을 추론해 냈다.

“힌트라도 좀 줘 봐. 뭘 알아야지 뭐라도 떠오르든 할 거 아니야.”

녹은 도언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도언은 녹의 요구에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저는 녹에게 단 한 번의 거짓말도 한 적 없어요.”

“…….”

“…….”

“……그게 끝이야?”

“뭘 더 바라요?”

도언은 녹의 발목이 매인 사슬의 끝을 순식간에 잡아당겼다.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있던 녹은 발목에 묶인 사슬에 딸려 와 침대에 눕혀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당황한 녹이 팔꿈치로 지탱해 제 상체를 들어 올리려고 하였으나, 도언의 손에 제지당했다. 도언의 손이 반쯤 일으킨 녹의 상체를 지그시 누르며 침대 위에 고정했다. 녹은 본능적으로 도언을 향해 주먹을 날렸으나 미수로 그쳤다. 그가 가볍게 피하고 녹의 손목마저 끌어모아 한 손으로 움켜쥐며 녹의 머리 위로 속박했기 때문이다.

체급부터 차이 나는 자에게 제 모든 신체를 구속당하니 녹은 발버둥조차 칠 수 없었다. 녹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언을 노려보았다.

“이거….”

“녹. 부디 지금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요.”

도언은 낮게 흐르듯 말을 던졌다. 시종일관 얼음처럼 차분한 그의 태도가 이곳에 온 뒤로 한결같이 열 내고 있던 녹과 대비되었다. 도언은 녹의 뭐 하나는 뚫어 버릴 것 같은 안광을 시리게 받아 챘다.

“녹은 지금 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에요.”

“……윽.”

“아시겠어요? 지금은 마법을 못 쓰잖아요.”

눈 깜빡할 새 이 공간이 긴장으로 들어찼다. 도언이 녹의 손목에 경고하듯 힘을 더 죄고 풀어 주었다. 도언의 손에서 풀려난 녹은 덫에 걸렸다가 해방된 참새처럼 그와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침대 헤드에 딱 붙었다. 붉어진 손목을 매만지며 도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 또 미친 짓을 할지 몰랐다.

도언은 저를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녹을 향해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아직 처리를 못다 한 일이 있어서 이만. 이따가 또 봐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도언은 드디어 녹의 곁에서 물러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도언이 녹에게 멀어져도 꽝 얼어붙은 분위기는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언은 느릿하게 문을 향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아.”

도언이 문 쪽으로 걷다 말고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녹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얌전히 제 곁에서 떠날 줄 알았던 사내가 몸을 돌리니, 녹은 움찔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녹.”

‘저, 저… 저 미친놈이…….’

녹은 제 등허리에 있는 베개를 잡아다가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말을 하는 도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기 때문이다. 순간, 녹은 도언이 제 가게에 드나들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무구한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도언이 문손잡이를 당겨 열며 한 마디 더 했다.

“제 평생을 녹 생각만 했으니, 녹도 이제 내 생각만 해 봐요.”

도언은 미소를 잔상처럼 남기며 문을 닫았다.

“…….”

드디어. 드디어 도언이 녹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녹은 멍하니 도언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마법만 되찾으면 저 새끼부터 조진다. 무조건이다.”

녹이 낮게 읊조리는 말은 그의 통제 외의 것이었다. 미친 새끼는 매가 약이었다. 녹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거칠게 흩트려냈다. 자신을 자극하던 인물도 사라졌으니, 이제는 머리를 차갑게 냉각시킬 때가 왔다. 녹은 침대 바깥으로 발바닥을 내렸다. 절그럭거리며 따라오는 사슬이 기분 나쁘기 그지없다.

녹은 사슬을 놔두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도언에게 정신적으로 시달리느라 여기가 어디인지에 대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마법사들의 유일한 표적이 되어 목숨을 위협받았을 시절, 그때는 항상 주변을 경계하며 사느라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주변 파악부터 습관적으로 하곤 했었는데. 결계를 개발한 이후부터 그동안 너무 평화로워서 그러한 습관이 싹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저놈한테 붙잡힌 건가.’

녹은 주변을 살피며 지독한 자기반성을 했다. 너무 안일하게 살았다. 마법 연합이라는 터무니없는 떠돌이 모임이 나왔을 때 그들에게만 집중하느라 더 세밀한 곳을 바라보지 못했다.

녹은 연합원을 죽인 자는 혼자라고 단정 지은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마법사들이다. 그들이 팀을 모아 마법사를 죽였다면 마력을 흡수하지 않은 채 퍼져 나가게 두지 않았을 거다. 적어도 한 명쯤은 희생자의 마력을 흡수했겠지. 그리 먹음직스럽고 먹어도 탈이 없는 먹이를 눈앞에 두고서 지나칠 수 있는 마법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마력에 관심 없는 단 한 명의 괴짜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고, 범인이 한 명뿐이라면 방심해도 위험하지 않을 거란 판단을 했었다. 힘을 담고서도 미숙했던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급습을 당한다 하더라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 있었다니…… 그 점이 아무리 생각해도 안일했다.

도언에게 감지되는 마력은 없었지만 그를 바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마법사 시체에서 식신을 흡수하고 있었다. 타인의 식신을 잡아다 응축해 구슬을 만들어 마력을 흡수하는 보통의 방법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 피해자의 식신들은 도언이 마법을 부리지 않아도 그에게 다가가 빨려 들어갔었다. 심지어 그는 지팡이도 없었다! 정말 마법사가 맞나?

“…….”

여기까지 생각하던 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언이 언제 올지 모른다. 적어도 이 공간에 대한 파악은 끝내야만 했다. 녹은 큰 침대 하나만 덜렁 있는 삭막한 침실을 훑어보았다. 탁상 테이블에는 도언이 꺼낸 스마트폰만이 남겨져 있다. 침대 바로 옆에 미닫이문이 있길래 문을 끌어 열어 보았다.

짧은 복도 끝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녹이 그곳에 다가가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욕실이었다. 욕실이 쓸데없이 넓었다. 둘레둘레 둘러보던 녹은 화장실의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거울이 비추어진 건 김민수의 모습이 아닌 하녹의 모습이었다.

예상은 했다. 제가 마법을 쓸 수 없는데 어떻게 김민수의 외형이 유지되겠는가. 쓰러지기 전에 입었던 옷과 정확히 같은 차림인 녹은 제가 입고 있는 옷이 사소하게 불편했다. 거울 속에 있는 녹은 바지도, 긴팔도, 모두 약간씩 짧아진 옷을 입고 있었다. 김민수의 사이즈대로 옷을 사서 입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그건 부차적인 불편함이다. 녹은 거울에 저를 가까이 대며 목을 들이밀어 보았다. 목에 걸려 있는 마력 구속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녹은 거울에 비추는 제 목에 걸린 고리를 찬찬히 살피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녹의 목에 있는 건 정교하게 깎아 놓은 나무 고리였다. 검은 나무 테만이 검붉은 색의 나무 고리를 장식했기에 전체적으로 심플했다. 색깔이 기억과 달라 이상했으나 녹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세계수였다. 세계수 나무만이 가진 특이한 물결무늬의 나무 테가 이 나무 고리가 세계수로 만들어졌음을 알려 주었다.

마력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녹은 핵이 사라져 그저 평범한 나무로 변질된 세계수의 파편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그 나무 파편에 담긴 마력은 없었지만, 그 나무 자체가 마력을 담았던 그릇이었기에 세계수의 시간을 샐 틈 없이 담아내었다. 그리고 녹은 그 시간에 담긴 마력의 흔적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마력을 빼앗긴 지금은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투명하고 맑은 갈색빛을 띠어야 하는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어째서 불길한 검붉은 색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긴, 원래부터 세계수 나무 쪼가리에 자신의 마력까지 봉인하는 능력이 있다는 건 녹 자신 또한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분명 이 검붉은 무언가를 세계수의 나뭇가지에 후처리한 것 같았다.

녹은 고리를 천천히 돌리며 매만져 보았다. 혹시 이음새라도 있으면 거기가 틈일 테니까. 그러나 역시나 이음새가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나무 고리에 녹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것만 없애면 되는 건데.’

녹이 무슨 제천대성도 아니고. 아니, 차라리 손오공이면 머리에 금관이라도 쓰지. 목에는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색을 지닌 나무 고리나 덜렁 달려 있다. 가치로만 따진다면 아무래도 나무보단 금 쪽이 더 낫지.

거울을 보며 혼자 잡념에 빠져 있던 녹은 요새 금값에 대해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금이든 나무든 무엇이 대수랴. 일단 자신을 위해 파괴해야 하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녹은 거울을 보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부딪쳐 마법으로 가벼운 빛을 만들어 보았다.

딱-

그러나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원래였다면 제 손가락 위에서 둥근 빛의 구체가 밝게 빛났어야만 했다. 그러나 녹의 손가락 위에는 그저 공기만이 떠돌 뿐이었다. 조금 더 강한 마법을 구상하며 손가락을 부딪쳐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풀이 죽은 녹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화장실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자신의 목에 달린 것이 세계수라는 건 잘 알겠는데, 대체 어떤 처리를 했기에 핵이 사라져 보통 나뭇가지가 돼야 했던 세계수가 성인 남성의 힘에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건지.

‘이거 알려 달라고 하면 또 키스니 뭐니 미친 소리 해 대겠지?’

그 짧은 시간 생각보다 도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녹이었다. 녹의 추측대로, 도언은 일말의 단서도 공짜로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도언은 녹이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 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가를 받아야 하고, 그 대가는 녹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라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제천대성의 금관과 같은 효과를 주는 목 위의 나무 고리를 뒤로하고 녹은 일단 이 집 안을 탐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녹은 침실로 돌아와 사슬을 당기며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방 옆에 딸린 욕실까지는 무리 없이 도착하는 길이였으나, 침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일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게 다 쓸데없이 넓은 침실 때문이다.

침대랑 탁상밖에 없는 황량한 공간이면서 굳이 이렇게 넓은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문은 침대의 아래쪽에 있었고, 문 앞까지는 무리가 없겠지만 나가고 나서 다섯 걸음 정도밖에 갈 수 없는 길이의 사슬이었다.

“……정말 이 정도 길이면 이 방에서 나갈 수 없겠는데?”

녹은 쭈그려 앉아 사슬을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진줏빛 광택이 도는 사슬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녹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침실의 문손잡이를 잡고 돌린 녹은 그대로 앞으로 나가 침실을 빠져나왔다. 다섯 걸음. 다섯 걸음에서 녹의 족쇄가 챙 하고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녹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쭈그려 앉아 사슬과 족쇄를 바라봤다.

“……야. 그래도 진짜 이 정도만 돌아다니게 하는 거면 너무 쪼잔하지 않냐? 보니까 네 주인이 안도언 같은데. 너가 이렇게 쪼잔하게 굴면 걔도 같이 쪼잔해지는 거다? 알아서 좀 잘 판단해 봐.”

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슬이 하얀빛으로 빛났다. 마치 녹의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즉시 현상이 일어났다. 녹은 사슬이 꼬마전구처럼 몇 번 발광하며 깜빡이고 꺼진 걸 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앞으로 다시 전진했다.

아까 전처럼 발에 채이는 일 없이 사슬은 부드럽게 늘어났다. 녹은 그제야 콧노래를 부를 여유가 조금쯤은 생겼다. 도언이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에 제약을 걸어 두진 않았나 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나 질량이었다. 아타움으로 만든 사슬과 족쇄의 질량은 그 부피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다. 이것 또한 도언의 뜻이리라.

마광석 아타움. 아다만티움을 세계수 나뭇잎에 반사된 햇빛에 만 일 동안 쏘여야 만들어지는 광석이었다.

광물의 특징으로는 물리적인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줄어드는 것도, 늘어나는 것 또한 마음대로다. 심지어 이 광물은 무언가 형태만 잡힌다면 자아가 생긴 것처럼 행동했다. 이 특이한 마광석은 자신이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에게만 제 소유권을 맡겼다.

점점 더 도언에 대한 정체가 미궁 속으로 빠졌다. 이만한 밀도와 부피의 아타움이면 이 사슬을 차지하기 위해 세계 대전이 다시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녹은 아타움과 대거리 아닌 대거리를 하여 이동의 자유를 얻어 낸 후, 집 안 탐색을 시작했다. 언젠가는 분명 나갈 기회가 생길 거다. 그때를 대비해 이 주변 수색은 당연히 해야 한다. 하가를 멸문시키고서 마력 흔적을 한 톨 남기지 않고 갈무리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어딘가를 이동할 때마다 해 온 그 짓을 또다시 하려니 속이 쓰렸다.

괜히 목에 걸린 나무 고리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낸 녹은 제 걸음마다 늘어나는 아타움을 발로 끌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실 밖은 곧바로 거실이었고, 넓은 창 쪽으로 다가가 바라보니 야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빌딩의 야경이 지나치게 밝게 빛났다.

‘여기는 내가 전에 결계 쳐 두었던 그 오피스텔 같은데?’

녹은 차갑게 식은 유리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바깥 구경을 했다. 확실히 이곳은 녹의 집과 은근히 가까운 도언의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그 오피스텔을 볼 때마다 저기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알게 되네. 쓸데없이 넓었구나. 녹은 혀를 찼다.

마력이 억제되니 창문 밖에서 한두 마리씩은 돌아다니던 식신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식신이 진짜 바깥에 없는 걸까, 아니면 그저 녹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걸까? 한동안 깊은 하늘을 바라보던 녹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둑어둑한 실내가 달빛과 건물의 반사된 빛만을 의지해 은은하게 빛났다.

녹은 괜히 제 발목을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달렸다. 현관문을 찾는 건 쉬웠다. 혼자 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넓은 집이었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 찾아낸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

챙강-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종이보다 가볍던 아타움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자비롭게 늘어나던 길이조차 녹이 현관문에 닿지 않을 길이만 허락했다.

“하긴. 이 정도는 해야지 아타움이지. 이게 없었으면 나를 혼자 여기에 두었겠어.”

녹은 그저 한숨만을 푹 쉬었다. 일단 집 안의 불을 온통 켜고서 집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탈출할 실마리는 정말로 없는 건지, 쓸 만한 정보는 무엇인지.

“하. 바깥에서만 봐도 쓸데없이 넓어 보이긴 했는데 이 정도였다니. 진짜 심각하게 넓은 거잖아.”

아무리 뒤져 봐도 영 쓸데 있는 게 없다. 모든 방문은 보란 듯이 열려 있었고, 숨기는 것은 그 무엇도 없어 보였다. 모든 서랍장을 뒤졌고 모든 찬장을 뒤졌다. 분명 도언이 사는 집 같았는데 생각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녹은 냉장고가 물과 술로만 채워져 있는 걸 보고 경악했다. 아무리 집이 좋으면 뭐 하나, 이리 내실이 없는 것을!!

그렇게 녹이 집 안을 뒤진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녹은 냉장고 문을 열고 냉기를 느끼며, 신경을 너무 썼는지 배고파졌단 사실을 깨달았다.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와. 집에 먹을 게 이렇게 없나.”

녹은 그대로 거실에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그대로 소파 위에 몸을 던져 누워 버린 녹은 손등을 눈에 대고 집 안에서 발견한 것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만년필은 왜 있는 거며, 컴퓨터도 없고. 냉장고에도 먹을 게 없으며, 빌딩의 층수는 또 높아 보이고. 영 사용감 없는 가구들만 집 안을 어둡게 채웠다.

‘이 자식 진짜 여기에 사는 거 맞나? 막 별장같이 쓰는 집 아니야?’

녹의 추론은 합리적이었다. 이 넓은 집은 녹의 조그만 스위트 홈보다도 살림이 적었다. 마치 내일 아침에 포장 이사를 해야 하는 집과 같았다. 커다란 가전과 가구 등 있을 건 다 있었으나, 소모품은 욕실 용품과 마실 것밖에 없다는 게 이 집의 문제였다. 그나마 채워져 있는 거라곤 드레스룸이 전부였다. 그것 빼고는 도무지 사람이 사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게 없으니 찾을 수 있는 단서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탈출하냐…….”

녹이 고개를 들고 웅얼거렸다. 괜히 천장만 끝없이 높아 보였다. 이런 집은 얼마나 할까. 예전에 마법사들이 세계수를 잊고 하녹을 모두 잊을 때까지 살아남는다면 자신은 본격적으로 인세에 정착해 돈을 벌 생각이었다.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천장이 높은 이런 집도 사고, 사람들이랑 교류도 하면서…….

핵폭탄과 같은 세계수의 핵을 담기 전에 녹은 분명 친구도 있던 밝은 아이였다. 모두 하진이 덕분이다. 하진이가 자칫 어둡게 자라날 수도 있었을 녹의 곁을 지켜 주었다. 하진이는 참 착하고 용감했었다. 하진이는…….

세 시간 동안 집 안 곳곳을 뒤진 녹은 그대로 잠든지도 모르게 혼몽히 의식을 흐렸다.

❊ ❊ ❊

어두컴컴한 새벽. 나갈 때와 똑같은 모습의 도언은 칠흑 같은 밤에서야 집에 도착했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하지만 확실히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실내에서 도언을 반겨 주는 건 바깥을 닮은 어둠이 아닌, 밝디밝은 거실 등의 빛이었다.

“…….”

도언은 소파 위에서 손등으로 제 눈을 덮고 잠이 든 녹을 발견했다. 피곤했는지 자신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깊은 수마에 빠져 있었다. 새근새근 거리는 숨소리가 도언의 귓가에 닿았다. 도언은 거실 등을 끄자, 달빛이 녹을 푸르게 비추었다.

안 그래도 신비로웠던 녹의 미모가 푸른 달빛에 의해 배로 묘해졌다. 녹은 항상 그랬다. 언제나, 언제나 그 신비로움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했고, 평범한 인간으로 위장하며 지냈다. 언제든 그가 원하면 떠났고, 사라졌고, 숨어 버렸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신화 속에 나오는 바람처럼.

도언은 적어도 자신이 마법사를 죽이는 모습을 녹에게 들키지만 않았으면 그냥 그가 평범하게 살게 두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이곳을 떠나려고 하기 전까진, 도언 또한 녹의 주위에서 그의 안전을 지키며 그렇게 살아갔겠지. 녹과의 새로운 관계를 쌓으며 말이다. 하지만 들켜 버렸고 그가 놀라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잡아 두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빌어먹을 마법 연합 때문에 녹을 붙잡아 두어야 할 시기가 생각보다 빨라졌다.

녹에게는 많이 피곤한 하루였을 거다. 도언이 녹이 깬 걸 확인하고 나간 건 한밤중이었다. 녹은 자신의 성격상 아무리 불안해도 수면과 식사는 꼭 챙겼었다. 도언은 오늘 일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녹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집에 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녹은 배고파지기 전에 잠들었나 보다.

요령껏 잡아 두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녹이었다. 세계수의 힘을 담은 그를 언제까지 저렇게 묶어 둘 수 있을지 도언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도언이 아타움을 녹에게 달아 둔 것도 혹시 모를 그 안전성에 기인해서였다. 녹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던 도언은 그의 앞머리를 쓸며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녹의 뒷목과 허리에 손을 넣어 힘들이지도 않고 그를 들어 올렸다. 떨어지려는 녹의 고개를 품에 고쳐 안았다. 처음 들어 올릴 때, 불편한지 뒤척였던 녹 또한 고쳐진 자세가 편한지 다시 고른 숨을 내뱉었다. 그의 발목에서 딸려 온 사슬이 절그럭거렸다. 도언은 사슬을 향해 조용히 말을 던졌다.

“별일은?”

사슬이 밝게 두어 번 웅웅거리며 빛을 내었다. 대답이 평화로운 걸 보니 녹이 혼자 있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보다. 도언은 녹이 깰까 조심스럽게 자리를 침실로 옮겼다. 녹의 가볍게 감긴 눈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빛났다.

“이젠 놓치지 않을 겁니다.”

도언은 제 품에 안긴 녹을 가까이 끌어와 그의 짧은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그는 제가 지켜야 할 유일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는 낮게 웅얼거렸다.

“절대로.”

❊ ❊ ❊

“으아아아악!”

녹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이불을 걷고 아래를 보니, 딱딱한 팔이 자신의 배를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녹은 다급하게 그 팔을 따라가 주인을 확인해 봤다. 그 팔의 주인은 역시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있는 인물. 도언이었다.

도언이 녹의 비명에 굳게 감았던 눈을 번쩍 떠 내었다. 녹은 그때 자신의 배에 감긴 팔을 풀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어찌나 단단히 감겨 있는지, 녹이 아무리 기를 써도 배에 둘린 팔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억.”

심지어 방금 더 조여졌다. 도언은 그를 한 번 더 힘 있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기상을 녹에게 알렸다. 그러곤 상체를 일으킨 녹을 끌어와 다시 침대에 눕히는 데 성공했다. 어쩔 수 없는 물리력의 차이로 녹은 결국 떼어 내었던 귀를 다시 베개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바짝 다가선 도언이 녹의 다른쪽 귀에 속삭였다.

“잘 잤어요?”

녹은 자신의 등 뒤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도언과 꽉 맞물렸다는 걸 체온으로 알았다. 일어나자마자 놀라서 심장이 사정없이 마라톤을 한 듯 널뛰는 게 느껴졌다.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과는 다르게 녹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 모든 상황에 놀라 당황한 녹이 새벽녘 헤드라이트 앞에 있는 도로 위 고라니처럼 꽝 하니 얼어 있자, 드디어 도언은 녹을 다시 한번 꽉 안은 후 풀어 주었다. 녹의 배에 아나콘다처럼 감겨 있던 도언의 단단한 팔이 사라졌다.

녹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 침대 바깥에 떨어지는 데 성공했다. 안전거리 확보 완료.

녹은 침대 바깥에 떨어지자마자 헐레벌떡 일어서 벽에 제 몸을 붙였다. 아주 재빠른 녹과 다르게 도언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자신의 몸을 일으켜 내었다.

마지막에 본 것과 다르게 헝클어진 앞머리가 이마를 덮은 그는, 녹이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어려 보였다. 자다 일어난 것은 그의 완벽한 얼굴에 전혀 흠이 되지 못했다. 항상 빈틈없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 나른함이 더해져 더욱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그는 웃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완벽하게 짜인 근육이 그의 상체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째서 자신이 저자와 한 침대에서 일어났는가. 이뿐이었다.

녹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부딪쳐 마법을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자신의 상태를 기억해 내고는 벽에 더욱 바짝 붙었다. 도언은 녹을 보고 삵을 만난 토끼를 떠올렸다.

녹은 도언을 보고 부들부들 떨지는 않았으나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한껏 경계하는 폼이 딱 토끼와 닮았다. 짧은 상념을 마친 도언은 얼굴에서 잠을 완전히 몰아낸 채 녹에게 다시 한번 서글서글하게 물었다.

“녹. 잘 잤어요?”

그제야 녹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 끝부터 점점 빨개져 마침내 정수리까지 홍당무가 된 녹이 소리쳤다.

“잘 잤겠냐!!”

녹이 씩씩대며 도언에게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제집이니까 여기 있죠.”

단조로운 도언의 말에 녹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지. 맞지. 도언의 집이니까 도언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거겠지.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먼저 들어와서 자는 곳은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녹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꼴이 너무나 한만해 보여서 녹은 자신이 이렇게 놀라는 게 잘못된 것인지 잠시간 헷갈렸다.

머릿속으로 짧은 알고리즘을 그려 낸 녹은 제가 정상임을 대뇌에 확답받았다. 녹은 따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여기서 먼저 자고 있는데 너는 인간적으로 딴 데 가서 자야 하는 거 아니냐? 집도 넓고 잘 곳도 많은 것 같더만.”

“녹은 어제 소파에서 주무시고 계시던데요. 그래서 여기로 데려온 김에 그냥 같이 잤죠. 문제 될 거 있나요?”

“있지, 있지! 다 문제지! 문제가 없는 게 없지!”

녹은 성난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 발을 들어 발을 굴렀다. 한쪽 발꿈치로 바닥을 쾅쾅 찍는 행태 덕분에 자신의 모습이 더욱 토끼를 연상시켰다는 걸 녹은 몰랐다. 하가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도 이렇게 짜증 난 적은 없었다. 그때는 마땅히 해야 했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녹은 자신의 짜증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필 바닥을 구르는 발이 족쇄가 있는 쪽이었는지 시끄럽게 귓가에서 사슬 소리가 절그럭댔다. 녹은 곧바로 그 발을 멈추고 다른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도언은 그런 녹을 그저 귀엽게만 바라봤다. 그 표정을 읽은 녹은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마법만 있다면……!

도언은 녹 쪽으로 돌아누워 턱을 한 손으로 괴고 녹이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씩씩대던 녹이 발 구름을 멈출 때쯤에 그는 가볍게 웃으며 무겁던 입을 열었다.

“하하. 녹. 저한테 뭘 바라요. 그냥 익숙해지세요. 아니면 빨리 저랑 언제 만났는지 기억해 내시든가요.”

‘저 새끼 저거저거, 지가 누군지 알아맞히지 않으면 매일 저런다는 건가??’

그 말을 빠르게 해석한 녹은 열 뻗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람들과 교류를 극히 제한하며 살아온 녹이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상대와 엮인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분명 녹은 말을 했지만 상대편에서 들어 먹질 않았다. 보통 이럴 때마다 녹은 그냥 자리를 피해 버리지만, 여기는 피할 자리도 없었다!

‘말이 통해야 이겨 먹든 하지.’

하녹은 한 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때, 녹의 머릿속에 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한 구절이 흘러 들어왔다.

‘납치를 당했을 때, 최대한 범인을 자극하지 마세요. 범인이 밥 주면 밥 잘 먹고 구출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탈출 확률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꼬르륵-

녹의 배에서 항해하는 뱃고동이 울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리고 그 경적 소리는 얼마나 큰지, 침실을 가득 메웠다. 도언이 들은 것 또한 당연지사다.

도언은 자신의 뱃고동 소리를 듣고는 쩡 하니 얼어붙은 녹을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밥부터 먹죠.”

❊ ❊ ❊

녹은 부엌에 차려진 밥반찬을 가능한 입안에 가득 담으며 먹고 있었다. 누가 보면 한 끼가 아닌 며칠 굶은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녹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가능한 배부르게 먹고 힘을 비축해 두어야 해.’

언제 탈출의 기회가 생길지 몰랐다. 그런데 먹지 않아 기력을 떨어트린다는 건 보았던 다큐의 조언을 떠나 녹이 생각했을 때도 멍청한 짓이었다. 가운 하나를 걸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언이 녹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있나요? 녹이 왔을 때 마법으로 한 번 씻기긴 했는데.”

양 볼 가득 하얀 쌀밥을 밀어 넣고 있던 녹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밥알이 기도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불편한 점이야 많지. 녹은 종이 파쇄기처럼 밥알을 갈아 내 삼키고, 물까지 한 모금 야무지게 들이켠 후 손을 펼쳐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일단, 너가 제일 불편하고, 족쇄도 불편하고, 족쇄 때문에 바지 갈아입는 것도 불편할 것 같고, 줄어든 옷도 불편하고, 이것들 때문에 씻지 못한다는 점이 불편하고, 마법을 못 쓰는 게 불편하고, 마력을 느끼지 못해 불….”

“아. 옷.”

앞으로 나열할 불편한 점이 서른 개는 더 남았던 녹의 말을 도언이 끊어 내었다. 도언은 녹의 한 치씩은 줄어든 옷을 쳐다보았다. 김민수의 외양에 맞추어 산 옷이었다. 하녹은 김민수보다 팔다리가 더 긴 체형이었다. 덕분에 약간씩 줄어든 옷이 불편했다. 아니, 그전에 이 옷은 민수의 외출복이었다. 집에서 활동하는 데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녹은 따뜻한 물로 씻는 걸 좋아했죠. 제 주변 마법사들이 다 마법으로 씻어서 깜빡했네요.”

“야, 나 지금 너 때문에 마법도 못 쓰거든?”

주변 마법사가 마법으로 씻어 내는 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일단 녹이 마법을 쓸 수 없는데 말야.

“잠시만요. 편한 옷 가져올게요.”

도언은 잠시 기다려 보라는 말과 함께 방에서 자신의 옷 세 벌을 꺼내 와 녹에게 하나하나 보여 주었다. 확실히 체격이 더 큰 탓에 도언의 옷은 녹이 입으면 흘러내리게 생겼다.

도언이 가져온 옷은 도언의 검은색 후드티와, 하얀 셔츠, 그리고 버건디색 맨투맨이었다. 녹의 앞에 펼쳐 놓은 옷 세 장은 녹의 선택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저리 큰 사이즈라면 적어도 옷이 짧아 불편할 일은 없겠지만…… 아니, 그를 넘어 옷에 파묻힐 정도긴 하겠지만…… 녹은 짧은 제 바지의 밑단을 보며 도언에게 의문스럽게 물었다.

“바지는 어딨어?”

그러자 도언이 녹보다 더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 되물었다.

“족쇄 때문에 불편하시다면서요?”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녹에게는 백해무익한 마법사들이 세상을 돌아다닌단 사실이 그러했고, 잘 살고 있는 나비를 잡아 시체를 전시하여 눈요깃거리로 만드는 인간들이 그러했으며, 회의 전에 술을 진탕 마시며 놀았던 마법 연합이 그러했다. 하긴, 세상이 뜻대로 되면 그게 현실이겠어. 그냥 꿈이지.

그러나 녹은 지금이 현실이라고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이는 방금 도언이 의문스럽게 되물은 질문과 깊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도언이 녹이 한 질문으로 되물음으로써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설마 내가 이해한 뜻이 맞나?’

만약 맞다면 현실의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맞나? 꿈인가? 녹은 떨리는 목소리로 도언에게 그 말의 진의를 물었다.

“……바지 불편한 거랑 여기에 바지가 없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예 안 입으면 안 불편할 거 아니에요.”

해사한 표정의 도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녹은 그 얘기를 듣고 도언이 한 소리가 자신이 이해한 대로 정신 나간 게 맞았구나, 확답을 받았다. 그러니까… 도언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저거나 입고 바지 입지 말라고?”

“네.”

잘 아시네요. 따위의 말을 뒤이어 말하는 도언이 가증스럽다. 여기 온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녹의 뒷목이 저리지 않을 때가 없었다. 순식간에 오르는 혈압에 녹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도언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 말했다.

“그편이 족쇄가 있는 채로도 입고 벗기 편할 거 아니에요.”

‘납치범을 자극하지 말 것. 납치범을 자극하지 말 것.’

그 한 마디로 녹의 머릿속에서, 세계수의 씨앗을 납치할 정도의 수준 높은 마법사에서 파렴치한 납치범으로 도언의 수준이 격하되었다. 하지만 저런 녀석도 녹의 힘을 봉인할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하니, 어떻게 해서든 방심하게 해 틈을 만들어야 한다.

녹은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사람 취급 좀…….”

“제가 언제 녹을 동물 취급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인간 된 체면이란 게…….”

“어차피 녹은 여기서만 있을 거잖아요. 체면 차릴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니! 그냥 내가 싫다고!!”

결국 녹이 폭발했다. 녹은 도언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제 성질대로 질러 버렸다. 숟가락을 들고 일어나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성량을 최대한 끌어모아 뱉어 낸 거다. 도언은 녹의 폭발에 한 손으로 턱을 잡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그 바지 평생 입고 싶으세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문제 될 게 있나?”

“차라리 내가 옷 갈아입을 때마다 네가 아타움을 풀어주면 될 거 아니야.”

뒤늦게 자신이 소리 지른 걸 깨달은 녹이 부드럽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도언은 녹의 말에 깨달은 듯 단발성 감탄을 질렀다.

“아.”

‘됐나?’

솔직히 녹의 입장에서는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도언을 부르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지의 존재를 사수할 수만 있다면 귀찮음 따위가 대수랴. 족쇄를 살펴보니 열쇠 구멍조차 없었다.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아타움이기에 가능한 구조였다.

이런 구조라면 아타움의 주인일 도언만이 족쇄를 풀어낼 수 있었다. 세계수의 마력만 있으면 이런 아타움 따위 단번에 끊어 낼 수 있을 텐데……! 녹은 제 목에 걸린 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녹의 제안에 짧게 고민하던 도언이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떼었다.

“제가 왜요?”

“뭐?”

도언은 늘어놓은 옷 세 벌 중 가운데에 있는 하얀 셔츠를 들어 올렸다. 꽤 두툼하고 부드러운 재질의 셔츠였다. 도언은 열 내느라 식탁에서 일어난 녹의 앞에 셔츠를 대어 보았다. 셔츠는 넉넉해, 녹의 허벅지를 충분히 덮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움직일 때 불편할 일도 없을 거 같고.”

도언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어 녹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녹은 도언의 지나칠 정도의 당당함에 어이가 가출한 상태였다. 머릿속이 빵 하고 터져 이리저리 산재된 말을 골라내느라 녹이 스턴 상태에 걸린 찰나를 도언은 놓치지 않았다.

도언은 일단 녹의 손에 들린 숟가락부터 빼어 내었다. 그리고 도언은 녹의 팔도 꿰게 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걸친 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냈다.

곧 녹이 도언의 셔츠에 팔도 꿰지 않고 파묻힌 꼴이 되었다. 녹이 어버버 거리고 있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언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낮게 외쳤다.

“청연.”

그의 부름에 도언의 뒤에서 한 명의 사람이 튀어나왔다. 녹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그를 보고 몸을 움츠렸다. 조용히 튀어나온 점이나, 그의 손에 들린 은빛의 지팡이나, 요모조모 봐도 저자는 꽤 상위 마법사였다.

도언에게 청연이라고 불린 그는 고동색의 머리카락과 푸른 홍채를 지니고 있었다. 그 눈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검은 동공은 블랙홀로 착각할 만했다. 꽤 젊어 보이는 묘한 분위기의 사내가 딱딱한 회색 정장을 입고 도언의 뒤에 나타났다. 이 장소에 소환된 청연이라고 불린 마법사는 자신을 보지 않고 아직도 녹을 바라보고 있는 도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지팡이를 들어 녹을 가리키고 말했다.

“하이옌.”

그의 지팡이 끝에서 초록색 섬광이 튀어나와 녹을 감쌌다. 녹은 자신을 감싸는 눈부신 빛에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순간, 시원한 바람이 자신의 온몸을 훑은 기분이 들었다.

빛이 사라지고, 녹이 게슴츠레 눈을 떠 보니 자신의 바지, 속옷, 그리고 웃옷까지 사라져 있었다. 팔이 꿰이지 못한 채 두 팔만 덩그러니 바닥을 향해 떨어진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있을 따름이었다.

녹은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을 당하면 몸이 굳는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아닌가? 처음이 아니었나? 이곳에 와서 대체 얼마나 몸이 굳었지?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나체에 와이셔츠만 입게 된 녹은 제 아래를 확인했다.

매끈하게 맨살이 드러난 다리가 녹에게 말하는 듯했다.

‘포기하면 편해.’

녹은 자신의 발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꼴을 보고 떨고 있는 녹은 그의 활화산과 같은 마음과 다르게 청초해 보이기만 했다. 그의 몸에 걸린 미약한 진동이 새벽녘 이슬처럼 그를 더욱 가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게 한 건 녹의 뛰어난 외모가 한몫했다. 도언은 그런 녹을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확실히 좋군. 알려 준 녀석한테 뭣 좀 줘야겠어.”

청연은 도언의 말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한 장로의 의견이었습니다. 무얼 준비할까요?”

“마력이나 좀 나눠 줘.”

“알겠습니다.”

청연은 지팡이를 짚고 하늘을 향해 쏘며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는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조용히 사라졌다. 도언은 아직까지 떨고 있는 녹에게 말했다.

“녹. 팔을 꿰는 게 더 편할걸요?”

“나가 죽어. 이 자식아!”

녹은 한 대 칠 요량으로 도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도언의 말대로 팔이 셔츠의 안쪽에 갇힌 채라, 쓸 수 있는 손이 없었다. 녹은 결국 씩씩대며 안쪽에서 팔을 하나하나 꿰입었다. 도언의 셔츠 자락이 녹의 손 대부분을 덮었다.

작게 웃은 도언이 녹에게 다가와 팔을 접어 주었다.

“그래도 이러면 씻기에는 편할 거 아니에요. 집 온도도 따뜻하게 해 두었으니까 춥지는 않을 거예요.”

녹의 발목에 걸린 사슬이 도언의 말에 그렇다는 듯 웅웅거리며 울렸다. 하지만 녹은 도언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날까. 마법을 찾으면 어떻게 복수해야 하는 거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미래만이 녹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도언이 와이셔츠의 소매를 접자 녹의 손이 드러났다. 도언은 드러난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빠른 전개에 혼을 놓고 있던 녹은 손에서 들리는 짧게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손을 빼어 냈다. 도언은 덩그러니 남은 자신의 손을 흘끗 보고선 커피잔을 들고 일어났다.

“뭐 더 먹을래요?”

“됐거든?”

참, 녹의 입장에서 도언은 한가롭기도 했다. 하긴, 지 일이 아닌데 혼란스러울 게 뭐 있겠어. 녹은 얼른 옷 돌려 달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니 이 집에서 이 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자신의 미래가 상상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뻗대? 말아? 뻗댈까? 말까?’

무슨 자신이 전래 동화 속 선녀도 아니고. 옷을 몽땅 빼앗을 건 무어냔 말이다. 어차피 아타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여기서 뻗대다가 주변의 경계가 더 강화되면 어떻게 하지?’

원래부터 제가 있는 이 주변의 경계는 수치를 더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강하다는 걸 모르는 녹이었다.

녹은 납치 특집 다큐를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걸 한탄했다. 사실 좀 보다가 2부 시작한다며 광고가 나오는 순간 채널을 돌려 버렸다. 봐 보았자 의미가 없어 보였거든. 세계수의 마력을 담은 자신의 인생에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신이 거기서 들은 조언이라곤 납치범의 말을 잘 들어서 방심하게 만들라는 것 하나뿐이다.

소매를 걷어 손이 들어난 하얀 셔츠, 거기에 한 발에는 구속의 상징. 녹은 앞으로의 선택지를 두고 고심하느라 침울하게 있을 따름이었다. 귀라도 있다면 축 처져 있지 않을까. 녹은 드러난 자신의 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개를 한껏 숙인 탓에 흰 와이셔츠 사이로 녹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띄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짧게 뒤덮었다. 하얀색과 검정색의 콘트라스트. 흑백의 시각적 대비가 녹의 하얀 목을 자극적이게 부각했다. 거기에 아무리 단추를 잠갔어도 큼직한 셔츠에 녹의 보드라운 한쪽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드러났다. 쭉 뻗은 뽀얀 종아리까지 진지하게 그를 감상하던 도언은 녹에게 성큼 다가왔다. 녹이 자신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지는 걸 느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뭐야.”

“녹. 저 누군지 알겠어요?”

도언이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서 사흘간 갇힌 자가 말라 가는 연못을 찾은 눈빛으로 물었다. 도언은 녹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고, 녹은 그를 피해 천천히 물러났다. 야생에서 맹수를 만나면 뒤를 돌아 피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던가. 녹은 몸을 뒤로 물렸지만 결국 엉덩이에 식탁이 걸렸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도언은 셔츠만 입은 녹을 식탁과 저 사이에 두 팔로 가두었다. 녹의 머리 위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윙윙 시끄럽게 울려 댔다. 페널티니 뭐니 할 때로부터 만으로 하루도 채 안 지났다. 그때에 비해 녹이 도언에 대해 뭘 더 알겠는가. 청연이라는 부하가 있는 것? 셔츠만 입히는 희한한 취향이 있는 것? 다 도언의 정체를 알아내기엔 쓸모없이 미미한 단서들뿐이다.

무의식 속 경고등의 소리에 머뭇거릴 만도 한데, 녹은 그런 것도 없이 자신의 하늘을 덮친 거대한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도언이 녹의 양 볼을 감싸고 한쪽 볼에 입을 맞춘 후 물러났다.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치고는 가벼운 입맞춤이다. 도언이 깔끔하게 물러나자, 녹의 긴장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도언이 녹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트렸다. 그러고는 내려놓은 커피잔을 들고 식탁의 반대편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앉았다. 우와. 긴장했네.

녹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려 도언을 보았다. 도언은 태블릿 PC로 희한한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녹의 시선을 느낀 도언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녹은 버벅이며 물었다.

“방금 뭐야?”

“페널티죠.”

“다…다음에는 더 심한 거 한다며.”

“바랐어요?”

녹은 핸드폰 진동처럼 짧고 빠르고 정확하게 고개를 저었다. 격한 고갯짓에 녹의 앞머리가 허공을 유영했다. 이것참, 심장이 쫄깃해서 살 수 있어야지. 일단 밥그릇은 다 비우고 후일을 도모하자. 녹은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다시 식탁에 앉았다. 그냥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버릴까 생각도 했었지만, 아침밥은 빌어먹게도 맛이 좋았다. 녹이 긴 세월 자취하며 먹었던 밥 중에서 제일이었다. 이런 몹쓸 밥 같으니.

괜히 볼뽀뽀 한 번으로 밥을 포기하기에는 끝 맛이 썼다. 뭘 어떻게 알아서 이렇게 녹의 입맛에 딱 맞는 밥을 준비한 걸까. 땀이 뻘뻘 나는 40도의 한여름에도 이 식탁 앞에서라면 입맛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결국 녹은 숟가락을 들었고, 도언은 그의 단순함을 보고 짧게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평화로이 흘러간, 첫 감금 날 아침이었다.

❊ ❊ ❊

녹은 밥을 야무지게 다 먹고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가능한 빨리 자신의 마법을 되찾아야겠다. 페널티라는 게 도언이 내킬 때마다 줄 수 있는 거였다니. 적어도 질문에 대한 답을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 정도는 자신에게 있을 줄 알았는데.

모른다고 하면 예의 페널티라는 게 없을 줄 알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니라면 정말 집중해서 짧은 시간 안에 탈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사실 자신을 매어 두는 이런 목걸이를 개발하는 자라면 일반적인 마법사보다는 능력이 있을 것이고, 게다가 그 귀한 아타움까지 이용한 것으로 보아 죽일 생각은 없는 거겠지.

이곳이 안전한지 아닌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세계수의 핵을 담고 있는 자신인데, 조무래기 마법사들이 침범하도록 경계를 허술하게 하진 않겠지’라는 게 녹의 추론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론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도언은 청연을 제외한 사람을 절대 이 집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언은 부엌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녹은 통화 내용의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귀를 쫑끗 세웠다. 이 집에서 녹이 집중해야만 하는 건 안도언이었다. 그에게서만이 탈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대충 들어 보니 도언은 영어로 경영 용어를 쏟아 내는 중이었다. 녹 또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외국어와 담쌓고 지낸 건 아니었기 때문에 무리 없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쟤 진짜 뭐 하는 애야?’

아무리 들어 봐도 경제니 매출이니 주식이니 따위의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매직이니 매지션이니, 마법사와 관련된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아 녹은 한숨을 폭 쉬며 두 손을 겹친 손가락에 이마를 대었다. 그런 그의 시야에 오렌지 주스 잔이 쓱 하고 들어왔다. 갑자기 드러난 실루엣에 놀란 녹이 고개를 들었다. 녹에 주스 잔을 내민 건 어느새 나타난 청연이었다.

“드십시오.”

녹은 제게 주스 잔을 내밀고 있는 청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형형히 빛났다. 저 눈빛. 녹은 그의 눈에서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기억에 없는 자일 텐데.

‘저자와 내가 어디서 본 적 있나?’

아리송함이 온몸을 지배하는 감각에 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연이 녹의 앞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 번 더 찰랑거리자, 그제야 녹은 그가 내민 주스 잔을 받아 들었다.

주홍빛 도는 액체의 찰랑거리는 표면을 바라보던 녹이 청연에게 물었다.

“근데 누구?”

청연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제 왼 가슴에 대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가주님의 보좌, 청연이라고 합니다. 가주님께서 녹 님이 불편하신 점 없게 잘 보필하라 명하셨습니다. 무언가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도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창구가 여기 하나 더 있었군. 녹은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다가 청연에게 말을 꺼냈다.

“나 불편한 거 하나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녹은 고민하지도 않고 도언이 있는 부엌을 가리켰다.

“저 새끼.”

“…….”

거실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부엌에서만 도언의 영어가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자신의 주인을 저가 어찌하리오. 청연은 녹의 요구에 땀만 뻘뻘 흘릴 따름이었다. 물론 녹 또한 도언의 보좌라고 했던 청연이 도언을 어떻게 해 주리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다. 빠르게 포기한 녹은 청연에게 다른 불편한 점을 말했다.

“저게 안 된다면 나 옷 좀 어떻게 해 줘라. 이거 입고 돌아다니기 불편하단 말이야.”

“가주님께서 자신의 옷 방에 있는 옷을 마음껏 입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게 문제일까?”

녹은 자신의 휑한 아랫도리를 청연에게 가리켰다. 청연이 빠르게 알아듣고는 품속에서 예의 그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아, 그거라면. 하이옌.”

녹의 앞에 각종 속옷이 곱게 접혀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녹이 거실에 개켜 있는 옷들을 보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딱 봐도 자신의 사이즈와 맞아 보였다. 눈을 반짝이며 펼쳐보던 녹이 일순 실망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옷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족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이게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게…….”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이비로 만든 옷들이니까요.”

“카이비??”

카이비는 아타움과 한 쌍이 되는 직조물이었다. 아타움 가공 과정을 구경하러 오는 요정들이, 아다만티움에 반사된 빛을 잡아 자신의 기운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천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햇빛에 바짝 마른 카이비가 아타움에 통과된다는 점이다.

녹은 카이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로 잡고 입어 보았다. 역시나 카이비는 족쇄와 사슬에 통과되어 편안하게 그의 하부를 감쌌다. 요정이 만든 천이라서 그런지 착용감 한번 끝내줬다.

아무리 오랜 산 녹이라도, 카이비로 옷을 만들어 입는 미친 사람이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쓸데없이 다이아몬드로 빼곡하게 장식한 속옷을 입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카이비는 보통 물에 적신 채 아타움을 감싸 마력의 증발을 예방하고 충전하는 용도로 쓰였다. 속옷이나 바지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만큼 아타움과 같이 세계수가 사라진 마법사 세계에서는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물에 젖은 카이비와 다르게 뽀송하게 마른 카이비는 아타움에게 있어 물리적 요건을 아예 무시했다. 보통 카이비는 아타움을 지닌 마법사들이 안경 닦이 수준의 천 조각을 구해다가 관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만큼 가치가 높았거든. 근데 이걸로 속옷 따위나 만들다니.

‘뭐, 돈지랄, 아니, 마력 지랄을 한다고 해도 그게 내 마력인가.’

“어떤 미친놈이 카이비로 옷을 지어 입어? 차라리 옷 입을 때마다 아타움을 풀어 주면 될 거 아니야.”

청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먼 산을 바라봤다. 저 모습을 보니 카이비로 속옷을 지어 녹에게 주라는 건 누가 봐도 도언의 지시였다. 청연은 허허실실 높낮이 없이 대답했다.

“저는 가주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아니, 뭐, 됐어. 처음부터 주면 좀 좋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자신의 외모에 영 대단한 감상 없는 녹은 기본만 한다면 옷차림에 관대했다. 녹에게 기본이란 역시 속옷이었다. 게다가 남자만 있는데 뭐, 가끔 가던 공중목욕탕에서는 옷조차 없이 돌아다녔다. 그럭저럭 넘어가려고 했는데 청연이 쓸데없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가주님께서 장난이 좀 심하신 분이라…….”

“…….”

“…….”

청연이 도언을 변호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목이 탔던 녹은 청연이 주었던 오렌지 주스를 한입에 원샷하곤 멀뚱히 서 있는 청연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 뭐, 저 자식이 자기 얘기를 안 하니 알 수 있어야지. 어디 한번 너한테나 물어보자. 안도언이 가주라고 했지? 어디 가주야?”

“이름처럼 안가의 가주십니다.”

마법사 사회에서 가문이 있는 마법사란 인간 세상에서 대기업에 합격한 청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가문원도 아닌 가주라. 하긴, 귀한 마법 재료를 녹의 기준에서 헛되게 쓰고, 심지어 자신에게 마력을 한 방울도 탐색 당하지 않은 미스테리한 인물이 일반적인 마법사일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녹이 세계수의 핵을 삼킨 아이라는 소식이 마법사 세계에 전방위적으로 퍼지자, 가장 열정적으로 자신을 쫓았던 건 안가가 아닌 다른 가문이었다. 아무리 뒤져도 안가란 기억에 없었다. 아타움과 카이비를 이렇게 막 쓸 정도의 가문이 녹의 머릿속에 없다니. 있을 수 없는 노릇인데……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던 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단서에 눈을 감았다.

‘이만한 귀물을 속옷 따위에 쓰는 가문을 내가 모른다고…….’

신생 가문인가? 아니, 아무리 신생이라도 이만한 물건을 가주 마음대로 쓰는 정도의 가문이라면 때때로 마법사 사회의 이슈를 체크하는 녹이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도언은 녹의 진명을 알았다. 그렇다면 원래 있던 가문이 힘을 숨긴 건가? 세계수의 힘을 가진 아이를 잡으러 오지도 않고서? 순간적으로 녹의 눈이 홉떠졌다. 생각의 속도에 자신을 태운 녹이 청연에게 물었다.

“쟤가 언제부터 가주였어?”

청연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한…… 백 년쯤 된 것 같군요.”

백 년. 마력의 중심이던 세계수가 사라짐으로 인해 마법사들의 수명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마력에 의해 수명의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력의 양에 따라 노화의 속도 또한 달라졌다. 녹은 아직도 통화하고 있는 도언을 생각했다. 캐주얼한 옷을 입으니 대학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어려 보였었다. 일단 최소 나이가 백 년이라고. 마력 한 톨 안 느껴졌던 녀석이.

‘백 년. 백 년이라.’

백 년 전에 녹은 분명 교란 결계 개발을 막 끝내고 가끔 하산하여 인세를 돌아다닐 때였다. 그러고 보니 도언은 제가 가명을 쓰고 다녔단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럼 그때 만난 건가? 녹은 청연에게 물었다.

“그…그 뭐라고 불러야 하지.”

“청연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래. 청연. 네 주인이랑 나랑 언제 처음 만난지 알아?”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대답해 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일단은 내뱉어 봤다. 녹의 질문을 들은 청연의 눈이 순식간에 깊어졌다. 청연의 표정은 없었으나 녹은 그 눈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고서 확신했다.

“잘 모릅니다.”

뭔가 알고 있구나.

녹의 목표가 도언에서 청연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도언보다는 만만해 보이는데, 얘는 틀렸다고 해서 페널티니 뭐니 그런 얘기 안 할 거 아니야. 눈을 반짝인 녹이 청연을 구워삶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통성명은 하셨나요?”

도언이 통화를 끝내고 부엌에서 거실로 나와 버렸다. 제 주인의 등장에 청연은 도언보다 한 발짝 더 물러나 녹과의 대화 종식을 일렀다.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기회가 또 오겠지. 괜한 도언의 출현에 녹은 팔짱을 끼고 한쪽 발로 바닥만 쾅쾅 찍었다. 고개 또한 도언의 반대편으로 돌렸다. 누가 봐도 기분 상했다.

녹의 모습에 청연과 도언은 서로를 마주 봤다. 청연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저와 있을 때 아무 일도 없었음을 알렸다. 역시 밥 먹을 때 일을 벌인 건 좀 심했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단 하나의 밥알조차 허용치 않고 싹싹 긁어 드시던데. 도언은 짧게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하곤 물꼬를 텄다.

“저에 대해 알려 드릴게요.”

절호의 기회!

녹은 온몸으로 불만을 발산하던 걸 집어삼켰다. 과장되게 도언을 향해 돌아간 고개와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웠다. 물론 부담스럽다는 건 청연의 시선에서였고, 도언의 입장에서야 기꺼울 뿐이었다. 녹은 핵심을 찔러 왔다.

“너랑 나랑 언제 만났어?”

“너무 쉽게 가려고 하시네요.”

도언이 얕게 웃었다. 역시 이 정도의 강도는 알려 주지 않는구나. 알아서 정보의 수위를 조절해야 함을 깨달았다. 녹은 가벼운 것부터 하기로 했다. 일단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랐으니까.

“그럼 방금 통화 뭐야? 너 회사 갖고 있는 거 있어?”

도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당연히 고개를 저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끄떡이다니. 녹은 대놓고 기함했다.

“헐.”

녹이 이렇게 놀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법사들은 인간들의 생산 활동에 무관한 일만 골라 했다. 그렇기에 인간들 생활에 깊게 스며들지 못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마법으로 기억을 조작하거나 빼앗기만 하면 될 일이니, 귀찮게 인간 세상에서 노동할 이유가 없었다. 일반적인 마법사의 이념 아래 사는 이들에게 화폐는 무가치했다.

도언의 통화를 몇 마디 들어 보니 정말 착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가주씩이나 되는 애가 회사 운영을 한다고? 그렇게까지 심심한가? 회사 운영이라는 게 일반인의 입장에서 좋아 보일지 몰라도 회사원보다 더 높은 강도의 일을 수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지루하고 힘든 거 싫어하는 마법사들이 굳이 나서서 할 만한 자리는 아니란 거다. 부야 빼앗으면 되고, 권력이야 마법만 쓰면 알아서 갖다 바쳐질 텐데 뭐 하러?

녹은 참지 않고 물어보았다.

“왜?”

“길은 닦아 놓아야죠.”

“길? 무슨 길?”

“마법 없이 살 길이요.”

‘마법 없이 살 길?’

녹은 무언가 엄청난 단서를 들은 듯했다. 마법사 가문의 가주가 마법 없이 살 길을 도모한다고? 마력을 강화할 만한 길을 파면 팠지 마법 없는 대안을 판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마법 없이 살아야 하는데?”

단조롭게 녹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던 도언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청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언은 청연에게 전해 받은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녹에게 주었다. 녹은 일단 도언이 무언가를 내밀길래 무의식적으로 받았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녹의 손에 들린 건 검은색의 신용 카드였다.

“누군가 입버릇처럼 말해서요. ‘식신이 결국 불행의 원인이다. 마법사만 사라지면 훨씬 살 만할 텐데’라고.”

‘누군진 몰라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카드의 일련번호를 의미 없이 훑고 있던 녹이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면 도언은 그자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마력을 채취하는 식신을 덜 만들려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건가? 도언은 자신이 건넨 카드를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녹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번 돈 쓰는 재미도 좀 보고요. 그거 가지고 쓰고 싶은 거 다 쓰세요.”

인세에 살아가며 녹은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었다. 가진 게 많으면 떠나기가 힘들다는 게 그의 큰 이유였다. 그런 그의 손에 갑자기 쥐인 블랙 카드.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그……?’

회사를 언제부터 경영한 건지 모르겠지만 텅텅 빈집과 다르게 꽤나 내실 있는 회사인 듯하다.

언젠가 녹이 출근하기 싫은 날 겨우겨우 일어나 비척비척 출근하며 상상한 적이 있었다.

‘돈만 많으면 집에서 나오지 않고 평생 살 텐데.’

엄청난 집돌이였던 녹은 바깥에 나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먹을 것만 잘 온다면 하루가 뭐야, 한 달은 뚝딱이지. 그런 기회가 지금 눈앞에 생긴 거다. 그동안 그 무엇이건 애착하는 존재는 녹에게 독으로 다가왔다. 장소, 사람, 시간. 그 모든 것들이 녹의 약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야 뭐, 위기를 기회로 삼아 조금쯤은 누려도 되지 않을까? 페널티라는 걸로 도언이 그에 대한 대가도 착실히 받아 가고 있잖아. 이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을 줄 알았던 꿈이 실현되기 직전이자 녹의 입꼬리가 주인의 의도와 반대로 올라가려고 나댔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녹이 표정을 관리하고 카드를 셔츠의 앞주머니에 고이 수납했다.

‘이걸로 타로나 더 사야겠다. 아예 종류별로 사야지.’

마음껏 쓸 수 있는 돈이 생기자마자 타로를 떠올린 녹은, 생각보다 자신이 타로에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평소 ‘돈 많이 벌면 컴퓨터나 크게 게이밍으로 맞춰서 쿡방이나 마음껏 봐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현실로 닥치니 상상과는 계획이 많이 틀어진다. 역시 계획과 현실은 달라. 하지만 녹에게는 시간과 돈이 있었다. 까짓거 둘 다 하면 되지 뭐. 녹의 머릿속에서 사야 할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났다.

어차피 마력은 봉인되었고 집에는 있는 게 없다. 발에는 아타움까지. 그렇다면 가능한 이 집에 빠르게 적응하고 즐길 건 다 즐기는 편이 이로웠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생활에 너무 빠지지 말 것. 잠시 머물렀다 갈 호텔 정도로만 생각할 것. 녹이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다짐했던 문구를 마음으로 다시 읊었다. 애초에 녹의 뜻대로 옮긴 주거지가 아니기도 했다.

녹은 예전부터 찜해 둔 타로 카드를 헤아려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아차. 내 바지에 부적 뭉치 있는데.’

녹의 바지 주머니에 곱게 누워 있는 타로 카드 한 덱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분명 녹이 마력을 봉인 당하기 전에 만들었던 타로 부적이 있었다. 하루 날 잡아서 부적 만드느라고 빈혈 올 뻔한 거 생각하면…… 하여간 녹이 만든 부적은 이미 마력을 집어넣어 만들었기 때문에 마력이 하나도 없는 일반인의 손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되었다.

대체로 마력 교란 결계 부적이지만, 몇 가지는 혹시 몰라 쓸 만한 가벼운 마법을 따로 빼 부적을 썼던 게 있었는데. 녹은 자신이 무슨 부적을 만들었는지 떠올려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 바지 주머니에 타로 카드 한 덱이 있을 건데. 그거라도 좀 줘라.”

도언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냥 그걸로 새로 하나 사세요. 많이 낡아 보이던데.”

‘낡은 건 또 언제 본 거냐.’

그래도 헌 카드 정도는 바로 줄 줄 알았는데 바로 막혔다. 녹은 도언의 단호한 말에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벌리고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린 도언이 청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청연이 주머니를 뒤져 지팡이를 꺼내더니 하이옌을 외치며 붉은 카드 뭉치를 꺼내었다. 청연에게 카드 뭉치를 건네받은 도언이 녹에게 뭉치를 건네주었다.

꽤 돌고 돌아 받았지만 일단은 이거라도 받은 게 어딘가. 녹은 박스를 열어 카드를 꺼내 훑어봤다. 붉은 뒷면을 가진 카드들이 나와 녹을 반겼다. 이것참, 어차피 다 일회성으로 소모해서 써야 사용되는 부적이건만 이리 보니 너무 반가웠다. 녹이 하나하나 카드를 보며 흐뭇하게 감상했다.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쓰냐. 낯선 타지에 오래된 친구를 만난 느낌이라고 하면 되려나.

이걸 잘 이용하면 탈출의 기회가 오는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다. 저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카드에 마법이 걸려 있단 걸 들킨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 전에 목의 고리부터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만 하지만…….

도언에게 블랙 카드를 건네받았을 때에도 간신히 참아 낸 입꼬리가 결국 주체할 수 없이 풀렸다. 싱글싱글 웃으며 카드가 몇 장 남았는지 세었다. 잃어버린 카드 하나 없이 완벽했다. 녹은 자신의 앞주머니에 있었던 블랙 카드를 타로 상자에 그대로 수납하고 상자를 손에 쥐었다.

“아, 그리고.”

도언이 청연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청연이 품에서 카드 몇 벌을 더 꺼냈다. 모두 다 녹이 가게에서 쓰던 카드였다. 도언이 청연에게 카드를 받아 녹에게 건네주었다. 녹의 눈에서 반짝임이 한층 더 짙어졌다. 도언이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김민수 씨가 제일 관심 있어 하는 게 이건 것 같아서.”

맞지. 맞지. 도언의 말이 맞지. 꽤 오랜 시간 인간 세상에서 제 밥줄을 책임졌던 카드들이다. 이 험한 세상을 함께하는 전우와 같달까. 녹은 이들을 두고 잠시 새 카드를 사려고 상상했던 자신이 미워졌다. 미안하다. 얘들아. 한눈 안 팔게.

녹은 그중에서 부적으로 만든 유니버셜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쓴 카드인 동물 오라클 카드를 꺼냈다. 비버 카드 가운데에 살짝 스크래치 난 것도, 버팔로 카드 뒷면에 녹만 알아볼 수 있는 흠집이 살며시 난 것도, 모두 다 민수일 적에 쓰던 제 카드가 맞았다. 녹은 민수가 된 마음으로 괜히 몇 번 섞고 한 장을 뽑아 보았다.

카드를 뒤집으니 나오는 건 화려한 나비 카드. 그를 보고 식신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거다.

‘왜 지금 이게 나왔지?’

녹은 나비를 뚫어져라 보며 식신을 되뇌었다.

‘식신… 식신…… 아!’

녹이 무지갯빛의 나비 카드를 도언에게 보여 주며 입을 떼었다.

“이거 보니까 떠오른 건데, 마법 없이 살 길을 도모한 이유가 식신이 불행의 원인이어서라고 했었지. 그럼 너는 식신 안 만들어?”

“그럼요. 우리 가문 사람들은 식신 만드는 거 금지예요.”

마법사한테 식신 만드는 걸 금지하다니. 이건 사회인에게 돈 버는 걸 금지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럼 걔네들은 어떻게 먹고살라는 거지? 녹은 머리를 굴릴수록 기울어지는 자신의 고개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마력을 모으는 거지?’

퀘스천 마크를 대놓고 드러낸 녹의 행동에 도언은 친절하게 덧붙였다.

“널린 게 마법사잖아요.”

“……!”

마법사를 죽여 부족한 마력을 얻는다는 건가? 그게 가능한가? 같은 가문에서의 결투가 아닌 다른 가문의 마법사를 죽인 거라면 단 한 명만 죽여도 마법사 사회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리는 게 룰이다. 근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대체 안가란 어떻게 되어 먹은 가문이란 말인가.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도언은 녹이 묻는 말마다 술술 대답했다. 녹은 기세를 몰아 질문을 또 던졌다.

“그것도 누군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에 기인한 가풍이야?”

“그렇죠.”

“그게 누군데?”

녹은 그 똘똘한 진리를 깨달은 마법사가 대체 누군지, 현자 칭호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저 홀로 결정했다. 도언은 괜히 녹의 눈을 보고 눈을 접어 웃었다. 아, 안도언표 형광등 웃음이 또 나왔다.

“민수 씨가 저한테 카드 봐 줬던 그분이죠.”

아, 그분. 그 괴짜 마법사. 도언과 지독하게 엮였던, 악마 카드까지 떴던 그 마법사. 그 사람이 도언을 완전히 잊었다고 했었지. 녹은 머릿속으로 악마 카드를 그려 보며 그가 민수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강한 구속을 나타내는 악마 카드는 사슬이 그려진 게 특징이다. 잠깐.

‘사슬?’

도언이 했던 말이자 탈출의 전제인 ‘녹이 저를 기억해 낸다면’, 악마 카드에 그려진 구속의 상징, 게다가 녹의 발목에 자리 잡은 족쇄와 사슬. 더 이상 못 알아채기가 힘든 단서들이 드디어 녹의 뇌 속에서 퍼즐을 맞춰 갔다. 녹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거 혹시…….

“나야??”

‘……좋아하시는 분인가 보네요?’

‘……그분께서 숨어 버리셨네요. 잠수라도 하셨나?’

‘……귀찮아하고 계시네요.’

‘……모르긴 몰라도 성격 참 급하신 분이네요. 원래 이런 성격이신가?’

주마등. 그건 분명 주마등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녹은 도언이 자신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는 걸 보고 주마등이라는 걸 경험했다. 뇌 속에 저장되었던 필름이 촤르락 펼쳐지며 겪었던 기억들을 녹에게 보여 주었다. 물론, 보여 준 장면이 녹의 생애가 아닌 도언에게 점사를 풀이해 준 내용이란 점에서 일반적인 주마등과는 차이가 있었다. 저 모든 말은 녹 자신이 도언에게 해 주었던 말이고, 녹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도언이 궁금해했던 질문, 도언의 질문에 해 주었던 대답 그 모든 게 녹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였다니. 녹은 돈가스집에서 도언이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보다 저를 왜 잊었는지가 제일 궁금하네요. 그런 것도 나옵니까?’

거기에 대한 카드들이 몽땅 다 난리가 났었지. 그렇게까지 답이 안 나오는 카드들은 마법사인 녹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녹은 상대 마법사가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걸 무의식적으로 잠가 둔 줄 알았는데, 그 마법사가 녹 자신이었다니.

그렇다면 정말로 녹이 도언을 잊은 게 확실하다. 만일 도언이 혼자 녹이 자신을 잊었다고 꿈꾸고 있는 거라면 카드가 알려 줬었겠지. 하지만 카드는 순서대로 나오며 답을 알려 주길 거부했다. 심지어 도언은 그자와 악마 카드의 인연이 떴었다. 녹의 발에서 족쇄가 절그럭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피력했다.

청연은 녹이 이제야 눈치챘단 사실을 알아내곤 녹 몰래 도언에게 속삭였다.

“설마 지금 알아채신 겁니까?”

도언이 단 한 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 놀랍고도 어이없는 사실에 청연은 이마에 손을 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들어도 말문이 막힐 정도의 눈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공간에 오고 나서 곧바로 알아챘을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눈치챌 줄이야.

녹 몰래 작게 말했다고 했지만, 녹의 귓가에 청연의 물음이 똑똑히 들렸다. 이에 녹은 청연에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도 내 상황 되면 못 알아챘을걸! 내 인생에 저런 놈은 없었단 말이야. 심지어 재는 나한테 타로 보러 올 때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질문만 했지 그게 나라고 얘기도 안 해 줬다고.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내 기억에 진짜 없는데!!”

“……네. 그렇네요.”

청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의 동의는 누가 봐도 진심이 아니었다. 녹은 청연이 자신의 말이 길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할 용도로 동의하는 걸 알아챘다. 그래도 이런 눈치는 있는 녹이었다. 녹 또한 굳이 청연을 열심히 설득시킬 열정까진 없어서 그냥 넘어갔다.

‘잠깐. 도언이 궁금해했던 그 마법사가 핸드폰도 없고 SNS도 안 한다고 했었지.’

그것도 녹이 핸드폰도 없고 SNS도 안 한다는 말을 도언에게 한 직후에 도언이 알려 준 사실이었다. 아주 농락을 당했구나. 아주 갖고 놀았어. 또다시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녹은 도언이 준 블랙 카드로 혈압약부터 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도언은 진짜 저를 말려서 죽일 작정인 걸까?

“어쨌건, 그분 덕분에 우리 가문은 이렇게 가풍을 이어 갔습니다.”

녹 때문에 안가라는 가문의 가풍이 결정될 정도라니, 대체 과거의 녹은 도언과 만나서 무슨 일을 벌이고 다녔던 것이며, 어째서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인가.

‘언제 이렇게 남의 인생에 대차게 엮인 거지.’

하가를 말아 드신 후, 녹은 가벼운 삶을 지향하며 살았다. 여기서 가벼운 삶이란 도언이 말한 대로 가늘고 길게 사는 걸 뜻했다. 삶에 인연이 묶일수록 점점 미련이 생긴다. 자신의 목숨이 세계의 당락을 결정할 정도로 중한 녹에게 미련은 독이었다.

녹 혼자만의 독이었으면 몰라, 세상의 독이었다. 녹은 이미 자신의 목숨이 세상의 운명을 크게 뒤흔드는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실로 막중한 책임이었다. 생에 미련을 남게 하지 않기 위해 인간관계도 사적으로는 만든 적이 없었다.

‘대체 언제 만난 거야.’

분명 청연이 그랬다. 도언이 안가의 가주가 된 지 백여 년이 지났다고. 그렇다면 백 년 전에 만났다는 건가? 아니, 아니지. 도언이 가주가 된 이후에 좀 지나서 가풍을 바꿨을 수도 있잖아. 그 전에 만난 것일 수도 있고. 만일 그렇다면 특정 시기를 확정 지을 수 없어 또 미궁 속으로 빠진다.

솔직히 본인이 안가의 가풍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녹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도언이라는 인물 또한 녹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도언은 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녹의 좌우명이나 본명, 게다가 정체까지. 힌트를 달라고 해도 들어먹질 않으니 원.

지금까지 녹이 도언에 대해 아는 점은 다 모아 봤자 채 열 가지가 되지 않는다. 녹은 짧은 시간 내에 머릿속으로 도언에 대해 번호를 매기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마법사 가문 안가의 가주이다.-이 안가라는 데에 대해서는 녹이 잘 모른다- 둘째, 하녹의 정체를 안다. 셋째, 하녹이 가명을 대충 짓는다는 사실과 좌우명을 안다. 넷째, 하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녹 때문에 미쳤다고 했다. 그와 별개로 실제로 미친놈인 것 같긴 하다. 다섯째, 마법사들을 죽이면서 다니는 괴짜다.

여섯째, 녹의 마법이 듣지 않는다. 교란 결계조차도 듣지 않는 것 같다. 만일 들었다면 자기 집조차 찾아가기 힘들었겠지.-제일 말도 안 되는 점이다. 마법사가 맞나?- 일곱째, 회사 운영한다. 돈 많아 보인다. 마법 없이 살 길을 깔아 놓기 위해 돈을 번다고 했다. 여덟째, 세계수 핵을 쓰는 녹의 마력을 봉인할 마구와 아타움 및 카이비 등,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의 귀물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이 모든 게 다른 가문에서는 가보로 물려줄 만한 귀물이다. 아홉째, 녹을 좋아한다고 했다.

심지어 세계수 또한 녹에게 특정한 꿈을 보여 주었다. 그것도 이곳으로 오자마자. 세계수가 보여 주는 꿈은 심심하면 꾸는 자각몽의 수준이 아니다. 녹이 하가에 있을 때와 도언과 관계가 있는 걸까?

거기에 무의식을 들여다 보여 주는 타로 또한 연인 카드와 악마 카드만을 비추어 보여 주었으니 아홉째가 틀린 사실은 아닐 거다. 생각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든단 말이야. 게다가 기억해 낼 때까지 가둔다는 전제 자체가 녹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긴, 미친놈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이해하면 미친놈이지.

녹은 진짜 열심히 살았다. 남과 엮이지 않으려고 산속에서 얼마나 열심히 숨어 살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대차게 엮인 걸까. 심지어 녹 자신이 모르는 새 다른 가문의 가풍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라니. 녹의 좌우명과 정반대 쪽으로 대차게 열심히 달리고 있었던 거다. 그것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잠깐. 그러면 저 자식 나한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녹의 기억으로 처음 만난 건 식신의 떼가 도언을 습격하는 걸 구해 주었을 때였다. 지금에 와서는 습격을 받은 게 아니라 식신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괜히 끼어들 때가 아니었는데 끼어들어 버렸다는 건 자명했다.

그다음에는 친구랍시고 단골이 도언을 녹의 가게에 데리고 왔었다. 식신 떼의 흡수를 막고 기억 소거를 했던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그 친구라는 사람은 분명히 인간이었고, 자신도 모르게 불륜 상대가 되었던 가련한 대학생이었다. 그 단골이 도언을 보고 친구라고 말했을 때는 한 치의 거짓 없는 눈이었는데……?

“잠깐. 너 우리 집 단골 인간이 친구라고 했었잖아. 그, 그, 자기도 모르게 불륜 상대 되었던 그 학생 말이야.”

“조작했죠.”

“……기억을?”

“잘 아시네요.”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하지만 자연스럽게 녹에게 접근한다는 그 목적을 위해 했던 도언의 선택은 훌륭했다. 만일 그냥 홀로 찾아왔으면 녹의 의심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 측정을 할 때 마력이 없는 점을 보아 겉으로 대놓고 경계하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찜찜한 마음에 경계했겠지.

그 찜찜함이 지속되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불시에 이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름간 왔던 단골이 진심으로 자신의 친구라고 말해 주는데 당연히 의심할 생각을 못 했다. 정말 우연인 줄 알았으니까.

녹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기억 조작을 한 후 마력 흔적까지 깔끔하게 지웠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 의도적인 접근이 맞다는 거지.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느낌에 녹은 자신의 이마를 왼손으로 짚었다. 그나마 다행은 녹을 좋아한다고 하긴 했으니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점인가.

“녹. 오늘은 뭐 할 거예요?”

메테오와 같은 위력의 정보만을 냅다 녹에게 내리꽂은 도언이 물었다.

“집구석에 박혀서 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돈이나 쓰는 거지.”

녹이 신용 카드가 든 타로 카드 상자를 흔들며 대답했다. 비어 있는 집구석에 세간이나 채워야겠다 생각한 녹은 집을 모델로 이리저리 구상하기 시작했다.

저기엔 이거 넣고 여기엔 저거 넣고. 여기에 있는 한 그래도 목숨에는 지장 없겠다고 결론 내린 녹은 적응이 빨랐다. 도언을 믿는다기보다는 이곳에 설치했던 자신의 결계를 믿었다. 이상하게 결계가 안 먹히는 도언이 마법사를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이곳이 다른 마법사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넌 언제 나갈 건데?”

“왜 제가 나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절그럭.

도언의 즉답에 녹은 움찔 다리를 저에게 끌어왔다. 덕분에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존재감 있게 나타났다. 오늘 안 나간다는 건가? 온종일 불편해서 어떻게 살지? 아닌가, 차라리 같이 있는 게 과거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은가? 녹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느라 시선이 분주해졌다.

‘공사다망해 보이는 애가 왜 저런 말을…….’

“하하. 걱정 마세요. 곧 나갈 거니까.”

또 속았다. 녹을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나 보다. 도언이 손에 있는 나머지 커피를 마시며 거실에서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그가 사라지기 전, 녹이 청연에게 턱짓하며 도언에게 물었다.

“그럼 쟤도 같이 나가?”

“뭐, 그렇죠?”

“쟤는 좀 놓고 가.”

이번에는 청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요?”

청연은 자신이 녹에게 지목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분명 집에 혼자 있는 거 좋아하신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물론, 청연이 아는 대로 녹은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한다. 허나 그것도 상황 나름이지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도언에게 물어 봤자 선 넘는 질문은 칼같이 차단할 걸 너무나도 잘 아니, 그에 비해 반응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청연을 두고 가라고 넌지시 건네 보았다. 물론 결정은 도언이 한다.

녹이 도언을 대놓고 보며 대놓고 눈치를 살폈다. 분명 눈치를 살피는 게 맞았지만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노려보는 거로 오해할 수도 있을 만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녹의 왼쪽 눈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라고 해’. 오른쪽 눈도 말했다. ‘여기에다가 두고 간다고 해’. 눈빛이 심각하게 이글거려서 도언의 얼굴이 뚫릴 지경이었다.

도언이 녹의 눈빛을 맞받아치며 대꾸했다.

“왜요?”

“심심해서.”

혼자 몇 날 며칠을 있어도 조금의 심심함도 느끼지 않던 녹이었다. 그렇다고 ‘정보나 좀 빼내려고’ 따위의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거짓말한 보람도 없이 도언은 녹의 속내를 알았다. 아주 훤했다.

“흠…….”

도언은 녹의 제안에 턱을 쓰다듬으면서 청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청연이 도언에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제발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청연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자신은 도언이 있는 장소에서만 녹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자신이 도언의 시야 안에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갑자기 녹과 둘이 남게 될 수도 있다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녹에게 무슨 일 생기면 진땀 빼는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고갯짓에서 도언은 결정했다.

“뭐, 나쁘지는 않겠군요. 녹의 적응도 도울 겸.”

청연은 아무 말 못하고 깊게 두 눈을 감았다. 도언이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종일 젓가락 위의 유리구슬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녹을 대해야 한다니. 청연은 흐르는 탄식을 애써 삼켰다. 이와 반대로 녹은 도언의 결정에 양 주먹을 당기며 짧게 세레머니를 했다.

‘앗싸, 정보원 획득!!’

도언은 그들의 상반된 반응을 보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 ❊ ❊

도언이 집을 나선 후, 청연과 녹 둘만이 집에 남게 되었다. 청연이 소파에 앉아 있는 녹의 옆에서 뻣뻣하게 기립해 있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청연의 사지에 힘이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누가 보면 기다란 나무토막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필사적으로 녹과 눈을 피하며 벽의 무늬를 집중해 관찰하고 있는 청연이었다.

“내가 너 잡아먹냐?”

“아닙…아닙니다!!”

차렷 자세를 바로 고치며 청연이 허공을 향해 외쳤다. 군기가 바싹 든 병아리 군인 같았다. 분명 처음 녹에게 말을 걸었을 때는 이보다 더 여유 있던 것 같은데, 도언이 사라지자 어미 잃은 강아지가 따로 없다.

청연의 여유 없는 모습은 녹이 환영할 만했다. 사람이 여유가 없으면 실수를 부른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단연코 말실수다. 보통 여과 없는 말이 실수로 나타난다. 여과가 없다는 건 꾸밈없다는 말이 된다. 곧 말실수는 그가 생각하는 진실이며, 녹에게는 단서가 될 터였다.

대놓고 질문하면 분명 눈치를 채고 답변에 주의를 기울이겠지. 이런 정보를 캐낼 때는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해 서서히 강도를 올려 나가는 게 좋았다. 무얼로 물꼬를 틀까 고민하다가 청연이 꺼내 쓰던 지팡이가 떠올랐다. 잠깐 보았을 때도 꽤 상등품의 물건이었다. 거기다가 가주의 보좌라면 분명 고위 마법사일 거다.

녹이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면 지팡이를 보지 않고도 청연의 실력을 한눈에 가늠했을 텐데. 괜히 아쉬운 마음에 녹은 제 목에 걸린 고리를 갉작였다. 나무 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청연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냥, 물건 사려면 여기 주소도 알아야 하고, 그리고 너가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하라고 했었잖아. 괜한 짓 안 할 테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라.”

“넵.”

“근데 너 안도언이랑 어떤 관계야?”

“가주님과 보좌의 관계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몇 촌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건 잘 모릅니다.”

그의 갈색 머리가 눈동자와 함께 흔들렸다. 이렇게 보니 눈도 파랗고 머리도 짙은 갈색인 것이 한국 출신은 아닌 걸로 보였다. 그런데 이름은 청연이라.

보통 마법사 가문은 가주의 피가 섞인 구성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청연과 도언은 먼 친척일까? 그렇게 무거운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청연이 알려 주려고 들지를 않는다. 뭐, 사실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가문 마법사는 필연적으로 떠돌이 마법사보다 마력의 양이 높았고, 그런 가문 마법사가 인내와 고통으로 수련을 이어 나가게 된다면 대마법사의 길이 열리게 된다. 보통 가주는 대마법사였으며 가주 바로 다음으로 뛰어난 가문의 마법사가 가주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그렇기에 보좌 또한 대마법사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확실히 섬세하고 손쉽게 마력을 컨트롤하는 걸 보면 일반 가문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았다. 지긋이 쏘이는 녹의 눈길에 청연은 홀로 떨며 이 시간이 얼른 지나기를 바랐다.

녹은 자신의 눈치를 지나칠 정도로 보는 청연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들은 녹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고, 하가에선 대마법사는 고사하고 마력이 하나도 없던 심부름꾼 아이조차 녹을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가주의 보좌까지 하는 실력 있는 마법사가 녹의 눈치를 보다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가에 있었을 때는 어땠더라. 마법사들이 녹을 그저 공기처럼 대했던 것 같은데. 그래, 괴롭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체만체하는 게 훨씬 나았다. 물론 그 당시 그들 또한 처음부터 녹을 그리 대한 건 아니었다. 모두 일련의 사건 이후에 얻은 가벼운 존재감이었다. 녹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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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에서 가주의 아들로 태어난 녹은 마력 테스트에서 마력을 하나도 담지 못하는 자란 것임이 밝혀졌다. 가주의 자식이 마법사가 아니라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적자로서 가주의 후계까지 기대한 아이였기에 실망은 배가 되어 녹의 부모를 덮쳤다. 곧바로 녹의 부모는 아들을 돌보지 않았고, 녹은 하가의 평범한 심부름꾼 아이처럼 자라났다.

다행인 점은 하가에서 심부름꾼 아이들에 대한 복지가 뛰어났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 무언가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가 있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나이가 차면 가문 밖으로 출가를 보내기에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꽤 인간적인 처우였다. 고아로 남겨져 심부름꾼이 된 하가의 아이들은 가문에서 지원받은 재주를 토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녹이 어릴 적에 하가에 들어온 하진이 또한 재주가 있는 아이였다. 하진이의 재주는 검이었다. 하가에서는 심부름꾼 아이들이 가지는 재주 중에서 ‘무’에 대한 것을 가장 높게 쳐주었다. 그렇기에 검을 잘 다루는 하진이가 마법사들의 눈에 잘 띄는 건 필연이었다. 아이는 고위 마법사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조무래기 마법사들조차 일반인인 하진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심부름꾼 아이들에게도,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잘 섞이지 못했던 녹에게 자신의 곁을 내어 준 건 하진이뿐이었다. 그날 또한 하진이가 녹을 도와주어 잡일이 일찍 끝났던 날이었다. 두 아이는 냇가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홍색 부드러운 꽃비가 내리고 샛노란색 봉우리가 터지는, 그런 따사로운 오후였다.

“…그래서 그때 사부님께서 검을 날리셨는데, 도망가려던 쥐의 앞에 콱! 하고 박힌 거 있지. 정말로 깜짝 놀랐다니까?”

하진은 그날 배웠던 검술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녹에게 재잘재잘하던 중이었다. 하진과 같이 검술 수업을 듣는 여자아이는 없다고 했다. 이는 하가에서 검에 재능이 있는 여자아이는 하진이 유일하단 걸 뜻했다. 하진은 냇가 옆에 자신이 둔 목검을 들고 하늘을 향해 찔렀다. 허리에 손을 얹은 모습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다음에 사부님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겠어. 그리고 녹 도령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곳에 터를 지어 살아야지. 우리랑 같이 살 거지? 도령?”

“당연하지.”

녹은 하진을 향해서 햇살처럼 웃었다. 녹은 언제나 차가운 온도로 사람을 대했으나 하진에게만큼은 예외였다. 눈부신 그의 모습에 하진은 검을 양손으로 모아 잡고 자신에게 끌며 얼굴을 붉혔다. 숙인 고개에 드러난 뒷덜미까지 붉었다.

“도령이 마법도 없고 그렇다고 검도 잘 다루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이리 밝은 미소가 있으니 걱정 없겠다. 적들에게 한 번 웃어 주면 그들은 움직이지 못할 거야. 그때 도망치면 될걸?”

“말도 안 되는 소릴.”

“아니, 진짜라니까? 물론 그 전에 적들이 도령을 노리지 않게 하는 게 최고겠지만 말이야.”

하진이 녹의 옆에 목검과 함께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저 목검은 하진의 오빠가 하진에게 깎아 주었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하진은 제 목검을 목숨처럼 귀히 여겼다. 하진 자신은 털썩 주저앉았지만, 목검만큼은 조심스럽게 제 옆에 두었다.

“그래도 나에게 이곳은 검도 가르쳐 주고, 밥도 주고. 게다가 녹 도령도 있고! 참 좋은 곳이네. 가족들 모두와 함께 이곳에 왔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게…….”

하가의 심부름꾼 아이들은 모두 고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하진의 가족이 모두 살아 있었다면 이곳에 왔을 일도 없을 터였다. 녹은 하진의 말에 공감해 주었지만, 깊은 마음속 한 켠으로는 그들이 세상을 떠나 하진이 자신의 곁으로 올 수 있음에 감사했다.

때때로 자신의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깨닫고 자책하고 반성하기를 여러 번이었다만, 하진이 제 곁에 있어 다행이라는 그런 생각은 쉬이 녹에게 떠나지 않았다.

졸졸 흐르는 냇가를 구경하고 있을 때, 아무도 없던 녹과 하진의 뒤에서 누군가 얕은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하가의 마법사였다. 그는 앉아서 쉬고 있는 하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심부름이다. 곧바로 홍화 저에 가도록.”

하진에게 불시에 심부름이 맡겨졌다. 그날 또한 다른 날과 비슷했기에 하진은 의심 없이 일어나 몸을 털었다. 그리고 목검까지 야무지게 챙긴 후, 어깨에 걸치고 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다녀올게!”

녹 또한 기분 좋은 미소로 손을 흔들며 하진을 배웅했다. 하진이 사라질 때까지 마법사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보통, 마법사들은 아이들에게 지시만 옮기고 곧바로 사라진다. 녹은 아직도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마법사가 이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

그때, 마법사가 한 손으로 녹을 낚아챘다. 그는 왼손에 숨겨 둔 지팡이를 들고 작게 주문을 웅얼거렸다. 마법사의 지팡이 끝에 나온 섬광이 시냇가를 강렬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섬광이 사라진 자리엔 그 누구도 없었다.

냇가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만이 속없이 평화롭게 졸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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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에게 아름다움은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무기요, 약한 자에게 아름다움은 자신을 좀먹게 하는 독이었다. 필연적으로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강한 자의 노리개가 되거나, 혹은 사람들의 독이 선 말에 자신을 깎아 일찍이 생을 마감하겠지.

아쉽게도 하가에서의 녹은 최약체에 속했다. 마력도 없는데 검술도, 체술도 영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태어난 곳이 아쉽게도 마법사 가문이라는 데에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도의적 양심 따위 기대할 수 없는, 오로지 힘만을 인정해 주는 마법사들이다. 마법도 못 쓰고 그렇다고 강하지도 않은 녹이 기껏해야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은 가문의 안주인을 빼닮은 외모뿐이었다.

다른 자에게 장점이 될지도 몰랐던 외모는 녹에게 와서 커다란 단점이 되었다. 권력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권력을 담을 주제가 되지 못하여 쫓겨난, 힘이 없고 아름다운 자.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녹의 외모는 적자생존의 마법 세계에서 생존과 직결되었다.

녹이 자라 온 동안 그를 괴롭힌 건 심부름꾼 아이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심부름꾼 아이 중에서 강한 편에 속하는 하진이가 아이들에게 눈치를 주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끝난 거였다. 마법사들은 녹을 데면데면하게 바라봤다. 가주님 내외가 분명 친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건들면 변덕처럼 자신들을 처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녹이 그럭저럭 클 때까지 가주 내외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녹을 찾지 않았고, 하가의 마법사들도 점점 이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녹을 건드려도 괜찮겠구나!!’

모두 침만 흘리고 있을 때, 때마침 하진이에게 미소를 보여 준 녹을 본 한 마법사가 충동적으로 녹을 데리고 구석으로 사라진 것이다.

녹은 마법사의 공간이동에 불시에 당했다. 어찌 보면 납치라고 봐도 좋았다.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지팡이를 들고 있던 마법사와 녹은 어느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몸을 드러냈다. 녹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마법사 쪽이 더 빨랐다.

“사메하이.”

녹에게 침묵 마법을 건 것이다. 덕분에 녹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소리를 지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그 마법사는 보다 더 넓게 침묵 결계를 펼쳤다.

범위는 이 공간. 그러니까, 누군가의 방 안이었다. 마법사는 녹에게 침묵 마법을 걸고서 풀어 주었기 때문에 녹은 바닥을 발로 밀며 벽에 붙는 데 성공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이상 도움을 구하기엔 글렀다. 심지어 이 방 안에는 처음 자신을 데려온 마법사 한 명뿐만이 아니었다.

“햐. 진짜 데려올 줄은 몰랐네. 겁도 없다. 그래도 가주님 아들인데.”

“가주님 아들은 무슨. 가주님이 아들 취급했으면 저렇게 막 자라게 냅뒀겠냐? 됐어. 이미 내놓은 자식이야. 아니, 자식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그래도 마님 자식이긴 하네. 어떻게 저렇게 똑 닮았냐.”

“방금 웃는 거 보고 못 참겠어서 데려왔다. 좀 냅둘 생각이었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하진은 녹의 미소가 적들을 멈추게 하는 무기라고 했었지만 그건 아이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아름다운 꽃은 일찍이 꺾이고 힘없는 나비는 박제되어 전시된다. 녹 또한 마법사들에게는 그런 존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불시에 당한 일이지만 심부름꾼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한 짬밥 덕분인지, 녹은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 있는 건 마법사 셋. 녹은 침묵 마법이 걸려 있으며 출구는 저들의 등 뒤에 있는 방문 하나. 이곳은 하가의 가솔들이 지내는 숙소다. 저 방문을 제외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는 자신의 뒤에 있는 창문 하나. 하지만 저들은 마법을 쓸 줄 알았다. 마법의 마 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심부름꾼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

그들은 녹을 앞에 두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일 치르려고 데려왔냐?”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내가 뭣 하러 데려왔겠어?”

“아서라. 아서. 괜히 잘못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너는 내가 마법사인 거 모르냐? 기억 소거 하면 되지.”

녹을 데려왔던 마법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휘두르며 대답했다. 하얀 빛무리가 지팡이의 끝을 따라 퍼졌다. 지팡이 끝에 밝은 빛의 리본이 달린 모양새였다. 마법사는 어린애 장난과 같은 마법으로 자신이 마법사임을 과시했다.

“아직 기억 소거 배울 단계 안 되었잖아. 괜히 그러다가 쟤 머리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내가 그것까지 생각해야 해?”

“뭐, 그건 맞는 말이지.”

“쟤한테 눈독 들이는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데. 차라리 잘됐어. 마지막보단 먼저가 낫지. 괜히 기다리다가 망가질지도 모르잖아.”

‘일 났군.’

심부름꾼 아이들이 녹에게 하는 건 말 그대로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난이 아니었다. 녹을 데려온 마법사가 손바닥을 들어 올려 선서하듯 나머지 둘에게 말을 던졌다.

“고로, 제가 데려왔으니 제가 먼저 맛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저희는 순서나 정하고 있겠습니다~”

장난치듯 대꾸한 마법사 둘이 뒤로 빠졌다. 녹을 이곳으로 데려온 마법사가 무릎걸음으로 녹에게 다가왔다. 그의 음흉한 웃음이 마치 끈적이는 침을 뚝뚝 흘리는 구렁이 같았다. 녹은 그의 동공이 소름 끼치게 세로로 찢어져 있다는 착각을 했다.

“가주님이 된 것 같은 느낌을 한번 맛봐 보실까.”

그의 손이 녹에게 서서히 뻗어져 갔다. 녹이 그를 발로 차려고 할 때…….

“으아아아아악!”

방문 쪽에서 순서를 정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였다. 녹에게 뻗어지던 손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녹에게 다가오던 구렁이 마법사의 머리가 깔끔하게 잘려 오른쪽으로 나뒹굴었다. 그 머리통에 박힌 마지막 미소가 더럽게도 끔찍했다. 녹은 마법으로 죽은 자를 처음 봤다. 마력이 하나도 없는 녹은 식신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마법사의 짧은 목줄기 위로 검은 나비가 용솟음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람의 목이 떨어졌는데 피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나머지 몸뚱어리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었다.

하지만 나비가 보이지 않기에, 게다가 눈앞을 가렸던 머리가 땅에 떨어진 덕분에 시야는 확보되었다. 목 떨어진 몸의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순서를 기다렸던 마법사가 엉덩이걸음으로 물러나며 열린 방문을 경악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오른쪽 마법사의 목이 떨어지고, 또 왼쪽 마법사의 목 또한 뒤이어 떨어졌다.

녹의 앞에 있는 목이 없는 몸뚱이도 스르르 왼편으로 쓰러졌다. 덕분에 시야가 확 트이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자를 볼 수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타나 마법사 셋을 해 처먹은 자는 어린 마법사였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녹을 향해 겨냥하며 중얼거렸다. 녹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공기파에 눈을 꼭 감았으나 그가 겨냥한 것은 녹의 뒤에 있던 창문이었다. 창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한차례의 강풍이 방 안을 훑고 창문 밖으로 나갔다.

“아, 이제야 좀 방 안이 보이네.”

방 안에 꽉 차 있던 식신을 창밖으로 몰아낸 어린 마법사가 후련하게 말했다. 자신의 시야를 확보한 그는 차게 시린 눈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사라져 가는 시체는 세 구,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소년 하나. 어린 마법사는 저벅이며 방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들의 마력까지 흡수하는 건 좀, 제 취향에 맞지 않아서요.”

그는 녹보다 어려 보였다. 아니, 사실 실제로 녹보다 어리기도 했다. 녹은 이 아이를 알았다. 하가에서 이 아이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아이는 녹의 앞에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고서 지팡이를 들어 녹에게 걸린 침묵 마법을 해제했다. 그는 나머지 비어 있는 손으로 녹을 향해 악수하듯 내밀었다.

그는 소문난 괴짜이자 타고난 마력으로 하가 다음 가주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 중인 인물.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하녹의 동생, 하홍이었다.

❊ ❊ ❊

장래가 유망하고 창창하며 가문 사람 모두의 존중을 받는 홍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쓴 것 또한 녹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 취급은 바라지도 않았다. 애초에 녹과는 피 한 점 섞이지 않은 아이였다.

근처 가문에서 그의 잠재력을 보고는 후계로 데려왔다고 했다. 말을 섞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물론 그런 점이 홍이 가지고 있는 괴짜라는 칭호에 더욱 신빙성을 불어넣어 주기는 했다.

그는 녹과 짧게 악수를 하고 방을 떠났고, 녹 또한 비척비척 일어나 그 끔찍한 장소에서 벗어났다. 이후 이에 대한 소문이 파란으로 일었다.

홍이 마법사 셋을 쓱 해 드신 이후로, 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하가의 마법사들은 녹을 완벽하게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홍이 갑자기 나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원체 변덕이 잦은 마법사들이다. 타고난 마력으로 보자면 가주 다음가는 홍은 하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심부름을 다녀오고서 그 소식을 접한 하진은 차갑게 분노했다. 심부름꾼 아이들이 녹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 때마다 속 터져 하며 했던 토끼 발구름 또한 하지 않았다. 녹은 그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씹어 먹을 씨발새끼들, 내가 죽였어야 하는데.”

녹은 하진의 입에서 이리 험한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예쁘장한 여자아이의 입에서 시장통에 어슬렁거리는 시정잡배의 말이 나오니, 녹은 잠시간 인지 부조화가 왔다. 저런 말을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으드득-

하진이에게서 이 가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녹은 하진이 저도 모르게 돌을 주워 씹고 있나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만일 정말로 분을 삭이기 위해 돌을 주워 입에 넣었다면, 그 돌은 이미 하진의 입속에서 분쇄되어 흙이 되었으리라.

“도령은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맞다니까. 정말 괜찮아. 걔네들이 내 몸에 손끝 하나 안 댔어.”

방으로 끌고 올 때 마법사가 입을 가리긴 했지만, 그 정도까지 세밀하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무섭게 화내고 있는 하진이었다. 만약 녹이 그 얘기를 했더라면 하진은 그들의 옷가지라도 찾아 검으로 그 천 조각을 기어코 찢어발겼을 것이다. 사실 그러겠다는 것을 녹이 열다섯 번은 말리던 중이었다.

하진은 그들이 죽은 것을 기꺼워했지만, 그들의 시체가 남지 않은 것에 대해선 아쉬워했다.

“시체는 왜?”

“내가 검으로 도륙을 내야 분이 좀 풀릴 것 같으니까 그렇지! 무슨 마법사들은 죽음이 그래? 시체도 안 남아서 검으로 채 썰 수도 없잖아!”

도무지 흥분이 잦아들지 않는지 하진은 크게 한번 발을 굴렀다. 얼마나 박력이 넘치던지, 하진의 발이 닿은 흙바닥에서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녹은 그 풍경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왜인지 모르게 하홍이 나선 이상 앞으로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순간, 하진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었다. 그리고 녹을 떠나 공터의 중간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녹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을 떠난 하진을 의아하게 관찰했다. 하진은 공터의 중간에 서서 자신의 보물인 목검을 빼 들었다. 검을 들고 검의 초식을 읊으며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하진의 검무는 부드러웠고, 날카로웠으며, 예리했다. 검의 기역 자도 모르는 녹이 보아도 그녀의 검무는 퍽 아름답고 또 강력하며 강렬했다. 하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그녀다웠다. 하진은 진지하게 검무에 임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부서지는 꽃잎들이 하진의 검무에 봄으로 물들였다. 그녀의 짧은 머리가 꽃처럼 흩어졌다. 그 위로 내리는 꽃비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1초와 같았던 검무를 끝마쳤다.

녹은 그 검무가 끝날 때까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가 녹을 향해 외쳤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이보다 세 배의 실력을 늘리겠어. 그 누구도 도령을 손대지 못하도록. 그리고 도령의 털끝 하나 건드는 녀석들을 다 도륙 내어야지. 그리고 도령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우리가 알려 줄게. 적어도 두 달 안에 방금 내가 했던 거 따라 할 수 있도록 말이야. 혹시 모르니까!”

……이후 하진의 지도 아래 녹의 체술 및 검술 수업이 시작되었다. 녹이 썩 훌륭한 제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님. 녹 님?”

“어……? 어.”

녹은 청연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들은 막 거실의 인테리어를 바꾸던 중이었다. 청연은 녹의 주문대로 거실 TV 옆에 붉은 바탕에 하얀 점박이가 있는, 마치 테마파크에서나 볼 수 있던 거대한 버섯을 피워 내었다. 그것도 TV 양옆으로 하나씩.

“이 정도면 됩니까?”

녹은 청연이 피워 낸 버섯에서 멀리 떨어져 마치 명화를 감상하듯 진지한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바뀐 초록색 벽지와 각종 알록달록한 소품들이 어우러져, 거실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테마파크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무채색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예전 집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좋네. 너 진짜 실력 있구나.”

어느새 거실은 청연의 마법으로 뽀짝하게 바뀌는 중이었다. 모두 녹의 주문이었다. 녹은 블랙 카드로 가구나 몇 개 살까 하다가 자신의 옆에 부릴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굳이 배송까지 힘들게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청연은 녹의 얼토당토않은 주문을 모두 홀로 수용하고 있었다.

“정말 좋으신 거 맞습니까?”

청연은 자신이 만든 이 진풍경에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제 실력에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이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녹을 확신할 수 없는 듯했다. 사실, 녹 또한 이렇게 정신없는 인테리어는 취향이 아니었다. 무슨 집이 이래. 놀이공원도 아니고. 하지만 도언을 골탕 먹일 수 있다면야, 취향이 아닌 인테리어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겠어. 심지어 도언은 하녹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이 정도쯤은 참아 주겠지!

“그럼, 그럼! 아주 딱 좋아. 이제 다른 방으로 가 볼까?”

그렇게 청연을 끌고 가 드레스룸을 분홍과 보라가 조화를 이루는 소녀 방으로 탈바꿈하러 갔다. 지금 청연에게 내실 있는 무언가를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 일단은 같이 시간이나 보내면서 경계를 좀 풀어야겠단 결정이 만든 풍경이었다.

유니콘은 벽지에서 뛰놀게끔 움직이는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연에게 상세히 주문을 마친 녹은 낮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을 쓰는 건 청연인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오색찬란한 인테리어에 기운을 빼앗기는 느낌이다.

청연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녹의 주문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해 내었다. 대체 얼마만큼의 마력이 있으면 피곤한 기색이 하나도 없는 걸까. 침실부터 시작해서 빈방 두어 개, 그리고 지금의 드레스 룸까지. 지금까지 방을 통째로 몇 개나 바꿨지만 청연은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소리를 모르는 듯했다. 하긴, 가주의 보좌라면 저 정도는 해야 하겠지.

녹은 나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고는, 움직이는 유니콘 인형을 두 개째 만들어 내고 있던 청연에게 물었다.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라고까지는 안 했는데. 판 좀 깔아 주니까 자기가 더 열정을 불태우며 열심인 청연이었다.

“안가의 가솔들은 식신을 만들지 않고 마법사들을 잡으면서 마력을 보충한다고 했었지.”

“그랬지요.”

“근데 다른 가문의 마법사들이 안 들고 일어나?”

이번에 만든 유니콘 인형은 너무 활발한 성격이었는지, 만들자마자 청연의 손에서 튀어 나갔다. 청연은 그 녀석을 잡으려다가 헛손질을 하고선 비어져 있는 왼손을 보며 허망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많이 잡는 것도 아닌걸요. 보통 마법사 사냥은 저희의 의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법사들은 보통 가주님께서…… 으아악! 그거 건들면 안 돼!”

청연이 마지막에 만들어 냈던 유니콘 인형이 어지간히 말괄량이었나 보다. 시계가 담긴 서랍을 봉제선이 도드라진 둥근 입으로 문대며 헤집어 놓던 유니콘 인형이 청연에게 딱 걸렸다. 도망가려던 인형을 잡기 위해 달리려다 자신이 마법사임을 자각한 청연은, 지팡이를 들고 그 인형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나이에넷.”

곧바로 금색 그물이 튀어나와 인형을 휘감았다. 버둥거리는 인형은 청연의 품에 안착했다. 한숨을 내쉰 청연이 지팡이를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인형은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녹은 인형을 향해 달라고 손짓했다. 청연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망아지를 녹에게 건넸다. 은근히 큰 크기에 인형의 큰 머리 위로 녹은 제 머리를 얹었다.

꽤 편했다. 그리고 인형 성격도 나쁘지 않았고. 촉감 또한 쫄깃하고 부드러웠다. 이게 요새 유행한다는 그 찹쌀 인형인가. 청연이 집을 뜨기 전에 이 인형이 다시 움직이게 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러면 도언이 더 환장하겠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녹이었다. 청연만 홀로 식은땀을 닦아 내는 시늉을 하며 녹에게 대꾸했다.

“보통 가주님께서 다른 마법사에게 습격당할 때나 그 마법사들을 잡죠. 그렇게 되면 결국 정당방위 아닙니까. 저희가 그들에게 따지지 않는 것만 해도 그들은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그 말 좀 희한한데? 안도언만 마법사를 잡는다는 듯이 들리잖아.”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럼 너를 포함한 다른 가문 구성원들은 어떻게 마력을 보충한다는 거야?”

“가주님 덕을 좀 많이 보죠. 안가는 가주님 없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게 말이 돼??”

식신을 만들지 않는다기에 식신 이외의 방법으로 마력을 보충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다른 마법사들을 때려잡는다길래 그 방법으로 보충하나 싶었더니, 마법사들을 잡는 게 도언뿐이란다. 게다가 마법사들이 도언을 통해 부족한 마력을 보충한다니!

자존심 높고 이해타산이 밝은 마법사들이다. 가주라고 하더라도 가솔들은 가주에 대한 존중 정도만 가지지 충성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세계 최고라고 착각하는 족속들인데 누군가를 우러러봐 봤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는다. 그런 자들일진대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참아 낼까? 녹의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마법사들의 자존심은 그렇다 쳐도, 도언 혼자서 가솔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마력을 수급한다고?

“말이 안 될 건 뭡니까.”

보좌라더니 말하는 것도 비슷하네. 청연이 도언이 할 만한 말을 하고 보라색 갈기가 휘날리는 분홍색 페가수스를 만들어 냈다. 날개를 몇 번 퍼덕이던 페가수스 인형은 곧바로 비행을 시작했다. 청연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페가수스를 뿌듯하게 보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한 청연의 대답에 녹은 물었다.

“가솔이 얼마나 되는데? 막 열 명 정도만 있고 그런 거 아니야?”

“그것보다 배로 더 있죠. 하하하. 열 명 가지고 동아리면 모를까, 가문이라고 칭할 수 있겠어요? 날아다니고 있는 쟤도 웃겠네요.”

청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행을 멈춘 페가수스가 바닥으로 내려와 배를 접으며 떨었다. 저거 웃는 건가? 참, 청연의 말귀도 잘 알아듣는구나. 말의 귓가에 달린 귀가 장식이 아니었나 보다.

“그럼 도언이 습격을 온종일 당한다거나…….”

김민수로 타로집을 할 때 도언이 그랬었다. 밤에 차에 치일 뻔했다거나, 이상한 사람에게 칼에 찔릴 뻔했다거나, 그런 적이 많다고. 그게 다 도언을 노리는 마법사들이라고 한다면 말이 된다. 순전히 식신이 많이 달라붙어서 그런 줄 알았지 뭐야.

“에이. 간이 배 밖에 나온 마법사가 그리 많이 있지는 않습니다. 정말 가끔 일어나는 이벤트죠. 그리고 이번 같은 일은 처음이었어요. 이번처럼 가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마법사 사냥을 나선 적은 전에 한 번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적극적인 마법사 사냥…… 마법 연합인지 뭔지 말하는 거야?”

“잘 아시고 계시네요?”

알다마다. 그 안쪽에 침투까지 했는데. 그 회의에 잠입하려고 애꿎은 인물을 기절시키고 기억을 꺼내서 섬세하게 조작하느라 애 좀 먹었다. 중간중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분명 자신이 회의에 다녀왔다고 생각했을 거다.

“뭐, 이 근처에 마법사들이 오는 것도 희한한 일이긴 했죠. 이 근처는 모두 안가가 관리하는 땅이거든요.”

“안가가 관리하는 땅이라고?”

“네. 정확히 말하면 가주님의 회사가 매입한 땅이라고 해야 하나요. 마력이 새어 나오는 건물이나 물건들을 싹 다 다른 곳으로 이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마력이 없으니 마력을 사냥하는 마법사들이 없어지는 것도 당연한 순리죠.”

녹이 이 근처를 보금자리로 설정한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마력이 전무한 유일한 서울의 땅이어서! 덕분에 마법사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마법 연합에 의해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했던 결정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칠 정도로 아쉬웠었다.

“왜 그렇게 관리하는 건데? 마법사 가문이 관리하는 땅인데 마력이 넘치면 좀 좋아?”

“저희야 식신을 만들면 안 되기도 하고…. 또….”

청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녹을 바라보았다. 녹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의 푸른 눈을 보며 눈썹을 모았다. 왜 말을 하다 말까.

절그럭-

조용히 있던 족쇄가 한 번 떨리며 자신의 존재를 미약하게 알렸다. 왜 아타움이 혼자 움직이는 걸까. 녹은 시선을 제 발밑으로 옮기고서 사슬을 바라봤다. 진줏빛 광택이 도는 회색의 광물이 살짝 빛났다가 꺼졌다. 참 다시 생각해도 이딴 구속품에 아타움씩이나 쓴 도언이 이해가 되지 않는- 갑자기 녹의 뇌에 어떤 사실이 섬광처럼 스쳤다.

“잠깐. 설마 그것도 나 때문이야?”

“오.”

청연이 손으로 심장 위를 살포시 누르며 있는 힘껏 놀란 척을 했다. 의도적으로 크게 키운 눈이 가증스러웠다.

“이번에는 눈치가 좀 빠르시네요.”

청연이 확답을 해 주었다. 분명 처음 둘만 남겨졌을 때는 군기가 빠릿빠릿하게 들었던 청연이었는데, 그새 녹이 편해지기라도 한 건지 스스럼없이 녹을 놀려 댔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근처를 마력이 하나 없는 장소로 만든 게 녹 때문이란다. 이 근처라는 게 대체 얼마만큼의 땅덩어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녹이 마력을 측정했을 때, 자신의 집을 기점으로 사방의 지평선 어딜 봐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땅 위에 마력을 조절하며 녹이 꼬이기를 기다렸단 소리인가.

“나를 찾기 위해 이런 땅을 조성한 거라면…… 그러면 왜 내가 이사 오고 나서 바로 나를 찾아오지 못했지?”

“녹 님의 결계가 심각하게 뛰어났기 때문이죠. 저희야 뭐, 그런 결계가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으니까요.”

결국에는 녹이 쓸데없이 도언과 식신 사이에 끼어듦으로써 들켰다는 게 된다. 갑자기 띵해지는 머리에 녹이 손목으로 이마를 눌렀다.

“헛. 참.”

이 장소에서 청연만이 녹의 반응에 조용히 미소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녹과 청연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셔츠 비를 맞고서 끝이 났다.

“으앗! 너도 사고 칠래?”

페가수스 인형이 옷걸이를 헤집고 허공에 옷가지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청연은 또 자신이 마법사인 것을 잊고 허공에 떠 있는 인형을 잡기 위해 두 팔을 흔들었다. 인형들은 장난꾸러기가 따로 없었다.

❊ ❊ ❊

도언은 집 문을 열자 나타난 진풍경에 입을 굳게 다물고서 한쪽 눈썹을 올렸다. 중간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건 화려하고 푸른 스파클링 비즈들로 장식된 거대한 거울이었다. 거울의 우측 하단에 사랑스럽게 윙크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인어공주가 무표정의 도언을 맞이했다. 간간이 박힌 진주알과 불가사리 모형이 보기만 해도 시원한 심해의 프린세스 캐슬이었다.

“…….”

무채색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도언은 지금 이 공간에서 완벽하게 이방인이었다. 도언이 오른쪽을 흘끗 보니, 거실에는 잔디까지 깔려 있었다. 큰 시계를 메고 모노클까지 한 흰색 토끼 인형이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폼이 자연스럽다.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지도 않았건만 소파 옆에 박힌 노란색 데이지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잔디 곳곳에는 트럼프 카드가 박혀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기가 무서울 정도의 인테리어 변화였다. 도언이 이 장소에 적응하기 위하여 현관에 멀뚱히 서 있을 때였다.

도언의 품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파고들어갔다. 반사적으로 가볍고 폭신한 그것을 받아 낸 도언이 자신에게 달려든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검은 플라스틱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것은 뿔 달린 망아지 인형이었다. 도언은 자신을 절절하게 올려 보고 있는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곧 현관 앞으로 유니콘 인형을 쫓던 녹이 달려왔다.

“아, 왔냐? 어쩐지 저 녀석이 날뛰더라. 어때. 내 취향대로 좀 바꿔 봤다.”

청연이 그 뒤를 조용히 따라 나왔다. 도언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것이 사고 친 개새끼 같았다. 이 진풍경을 만든 자가 누구인지는 오래 생각 안 해도 답이 나왔다. 녹이 양팔을 펼치며 도언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welcome to 환상의 나라 magic land.”

영어와 한국어가 뒤죽박죽인 이상한 언어를 읊고선 밝게 웃는 그를 보며 도언은 한 마디만을 뱉어 냈다.

“헛, 참.”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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