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의문의 사내
확신에 찬 녹의 한 마디가 끝나자마자 방 안에는 칠흑과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 검은 정적 속에서 희망이 깃든 녹의 눈동자만 오롯이 빛났다. 도언은 녹의 한마디를 듣고 비몽사몽 하던 정신을 단번에 물렀다. 그 눈빛에 다시 한번 확신이 인 녹이 물었다.
“하진이인 거지? 너 하진이 맞지?”
도언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눈만 천천히 감았다가 떠 냈다. 그 행동에서 녹은 도언에게 깃들었던 하진의 조각을 하나 더 찾아내었다. 하진은 할 말을 잃을 때마다 순박한 소처럼 큰 눈을 느리게 깜빡이곤 했다. 그녀가 그리 당황한 적이 없어 그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도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녹의 되물음에 골똘히 생각하던 도언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녹이 그의 목을 끌어안는 게 먼저였다. 녹의 목소리에는 초봄과 같은 설렘이 가득했다. 녹은 도언을 허겁지겁 끌어안고서는 자신의 추리를 토해 냈다.
“그래, 나를 아는 것도, 내가 검을 배웠었다는 걸 아는 것도, 세계수가 자꾸 보여 준 꿈의 의미도, 그리고 너의 검무도!! 그리고 나를 도령이라고 부른 것까지. 모두 네가 누구인지 알려 주는 증거였어. 네가 어째서 남자에다가 마법사가 되어서 여기까지 온지는 들어 봐야 알겠지만, 어차피 이 세계는 어떤 규칙이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니까! 내 존재만 해도 그렇잖아?”
녹의 추론은 상식 밖을 벗어난 것이지만 이 장소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추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 세계란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물건이 사람 되고 인간이 마법사 되고. 거기에다가 성별을 바꾸는 건 마력이 없는 인간들조차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지, 하진이가 처음부터 남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누구든 숨겨야 할 사정이 하나쯤은 있잖아? 녹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편견 없는 사람이 되었다.
도언이 제게 이 집에서 했던 몇 가지 행동들이 녹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성난 그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라고, 애써 납득했다. 시시비비는 일단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취한 후에 따져 봐도 늦지 않다. 하진은 녹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인물이었으니까.
녹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과 몇백 년 만에 만난 친구의 존재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다. 그의 혈관에 흐르는 마력이 빠르게 녹을 휘감기 시작했다. 격해진 감정으로 인해 녹의 체내에 있는 세계수의 마력이 날뛰었다. 덕분에 녹의 마력을 통제하고 있던 나무 고리가 녹색의 스파크를 튀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캄캄했던 방 안이 나무 고리가 통제하지 못한 녹의 마력 스파크로 인해 초록빛으로 채워졌다.
도언은 가까스로 자신에게 붙은 녹을 떼어 내고, 환희에 취한 그의 눈을 큰 손으로 가렸다. 덕분에 녹의 시야는 다시 까맣게 물들었다. 자신의 눈을 가려 낸 도언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 녹은,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하진아. 도언이라는 이름은 대체 뭐야? 너가 지은 거야?”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잠깐 머리 좀 식히세요.”
그가 낮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곧이어 녹의 의식이 저만치 흐려졌다. 녹은 새벽안개처럼 뿌옇게 산화하는 의식 속에서도 고양감을 잃지 않았다. 고리에서 마지막으로 크게 파직, 녹빛이 쏟아지고 나서야 녹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녹이 하진과의 재회에 회의적이었던 건 모두 이유가 있었다. 일단 하진은 인간이었다. 인간의 수명은 마법사와 댈 것이 아니었다. 수명이 긴 마법사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짧은 수명은 인간의 입장에서 개나 고양이의 수명과 비슷한 시간이었다. 심지어 세계수가 사라진 후, 마법사의 수명 또한 꾸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진이 어찌저찌 마법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리 긴 시간 동안 노화 없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그 증명이 있는걸. 나중에 하진이 잘 설명해 주겠지. 녹은 괘념치 않기로 했다.
물론 그 이외에도 걸리는 점은 많았으나, 반대로 하진이만 지닌 공통점 또한 가득이었다. 녹은 의식을 수면의 바다 위에 띄우며 하진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에 대해 기억해 내었다.
마법 세계는 정말이지 놀라워. 하진이와 다시 만날 줄이야.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 ❊ ❊
하진이 심부름을 가서 다치는 일은 그날 이후 왕왕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 부위는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처의 범위가 어제보다 더 커지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는 듯, 하진은 어딘가에 자꾸만 상처를 달고 왔다.
물론 하진은 녹에게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필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었고, 그 덕에 의복의 길이 또한 온도가 내려갈수록 길어져 상처를 가렸기 때문에 쉽게 알아채기 힘들었다.
하진의 행동이 평소보다 이상하게 굼뜨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녹은 그녀가 다쳤다는 걸 발견해 낼 수 없었을 거다. 언제는 왼쪽 팔, 또 언제는 오른쪽 다리, 어떤 때는 허리 굽히는 걸 제대로 못하는 날 또한 있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몸놀림을 가지고 있던 하진이었다. 날이 추워질수록 뻣뻣해지는 몸놀림이 오로지 추위 때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괴물과 같은 반사 신경과 운동 신경으로 발을 헛디딘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하진은, 어느 순간부터 돌부리 하나 없는 평지에서조차 발을 헛딛기 시작했다. 하진과 함께 마당을 걷다가 발을 엇갈려 넘어지려고 하는 걸 녹이 옆에서 붙잡아 주었다. 몸치인 녹 또한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서 발을 헛디딘 적이 없었거늘. 확실히 하진의 요즘 상태가 이상했다.
녹은 자신이 하진의 오른팔을 붙잡을 때, 하진의 몸이 멈칫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썹이 일순 찡그려졌다가 펴졌다. 녹이 그녀의 얼굴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저 표정은 분명 고통을 담고 있었다. 녹은 자신이 붙잡은 하진의 팔을 얼른 놓아 주었다.
“또 어디 다친 거 아니야?”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녹은 이미 그녀의 환부가 어디인지까지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하나도 안 다쳤어.”
“거짓말한다.”
“내 몸은 도령보다 내가 잘 알거든? 그냥 오늘 피곤한데 대련까지 해서 더 피곤해진 거뿐이거든?”
“그럼 오른쪽 소매 좀 걷어 봐. 정말 말짱한지 보고 싶으니까.”
“어머. 소녀, 외간 남자에게 맨살을 보여 줄 수 없다 배웠습니다.”
하진이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는 남자들과 함께 뙤약볕의 땀방울과 서늘한 칼부림으로 진정한 우정을 다지는 그녀는 녹이 이런 식으로 몰아붙일 때마다 자신의 성별을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걱정을 끼치는 게 싫다는 건 잘 알겠지만, 하진이 이렇게 나올 때마다 녹의 속은 타들어 갔다. 자신이 그녀에게 깨알만큼이라도 의지가 되었다면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저리 필사적으로 숨겼을까?
녹의 이목구비가 점점 파랗게 물들어 가는 듯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우울을 내비치는 걸 깨달은 하진은 녹이 제 감정을 매개로 자신을 더 몰아붙이기 전에 얼른 그 자리에서 떴다. 만일 녹이 처연하게 그녀에게 부탁한다면, 하진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아아! 채 장로님이 나한테 맡기신 일이 있다는 거 깜빡했다! 도령, 먼저 가 볼게! 이따가 봐!”
하진은 그 장소를 번개처럼 빠져나갔다. 걸을 때는 삐끗삐끗하더니 저리 집중해서 달릴 때는 또 무척이나 안정적인 하진이었다. 다람쥐처럼 날쌔게 도망치는 하진의 뒷모습을 보며 녹은 그녀가 다쳤을 거라는 제 감이 확실한가 의심했다.
하지만 녹은 하진이 뜀박질하는 속도가 평소와 다르게 확연히 줄었음을 눈치챘다. 대체 심부름 가서 무엇을 하고 오는지 염려되어 몇 번이고 물었건만 하진은 저번과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냥 잡일하는 거지 뭐. 너무 가벼운 일들이라 기억도 안 나.’
하진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아닌가? 자신이 그 말을 들을 때 하진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나? 대체 심부름을 가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제대로 알려 주지를 않으니 걱정만 깊어져 갔다. 하진은 호랑이처럼 강한 아이였지만, 그럼에도 하가라는 밀림에선 그저 새끼일 따름이었다. 다친 곳을 매번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드니, 녹은 알 수 없는 상처의 정체에 대해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진짜 하진의 말처럼 대련할 때 다친 건가?’
아직 하진은 배우는 단계이고, 수업에서야 하진이 최강이 아니니 대련이 약간이라도 격해지면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일이었다. 평소에 수업에서 다친 적이 없는 하진이었기에 이리 불안한 거였지, 사실 무술을 갈고닦는 아이들에게 부상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오늘은 스승님께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진과 함께 연무장에서 무예를 갈고닦는 심부름꾼 아이 둘이 보인 건 그때였다. 저들이라면 하진과 함께 수업을 받았을 테니, 하진이 진짜 수업 중에 부상을 당한 건지 알려 줄 수 있겠지. 문제는 심부름꾼 아이들의 녹을 향한 태도였다. 녹에게 호의적인 아이들은 하가에서 하진밖에 없었다. 한 명 더 꼽으라면 아리송한 태도의 홍 정도였다.
싸늘하게 대응하는 아이들을 피하는 것보다 하진의 상태가 더 급했던 녹은 아이들의 옆으로 은근슬쩍 다가갔다.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한량처럼 걸으며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던 아이들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녹을 돌아봤다.
“아, 깜짝이야!”
“으아악!”
한 명이 녹을 보고 놀라 펄쩍 뛰자, 다른 한 명은 녹을 보지도 않고 같이 뛰었다. 녹 또한 그들의 격한 움직임에 움찔거리는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녹을 보고 하늘이 떠나라가 기함한 소년은 별것도 아닌 일에 큰 동작으로 난리 친 것이 부끄러웠는지, 괜히 얼굴을 붉히고 마른기침을 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뭔데.”
“녹인데. 하나만 묻자.”
어렸을 때야 요령 없이 그들의 괴롭힘을 받아 내었지만, 머리가 크고 나서 녹은 하진의 후광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굳이 녹이 하진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선을 지켰다. 심지어 이번에는 마법사에게 변을 당할 뻔했다가 홍에게 구출까지 받았으니, 홍이 녹을 주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아이들 내에서 한 바퀴 돌았다. 덕분에 아이들은 예전처럼 녹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물론 무예를 갈고닦는 아이들은 녹을 괴롭히기보다는 처음부터 무시하는 쪽을 고수했다. 녹이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이상 피차 서로 말을 섞는 일은 드물었고, 녹 또한 말을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들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고로 지금이 몇 번 얼굴을 본 소년들에게 말을 건 첫 번째 순간이었다. 의아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소년들에게 녹은 빠르게 물었다.
“혹시 무술 수업하면서 하진이 다친 적 있어?”
“하진? 걔가 누굴 다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본인이 다칠 만한 위인은 아닐걸?”
“맞아, 맞아. 호랑이 새끼가 따로 없다니까?”
“호랑이 새끼는 무슨. 마귀의 현신이면 몰라.”
아이들이 툴툴대며 선선히 말해 주었다. 그들의 폼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상의 원인은 확실히 심부름이군.
“그럼 너희, 요새 심부름은 어디로 가? 요새 거기 가서 무슨 일 해?”
“그런 걸 어떻게 말해?”
보통 아이들은 심부름의 내용을 함구하도록 교육받는다. 아무리 같은 식솔일지라도 언제 타 가문의 첩자가 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있는 규칙이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교육하며 길러 왔지만, 만에 하나 생길 가능성도 철저하게 규칙을 만들어 방비하는 하가였다. 오로지 하진만이, 궁금해하는 녹에게 규칙을 어기고 자기 일을 조금씩 흘렸었다. 녹은 짧게 고민하다가 한 명의 이름을 팔고 빨리 목적에 도달할 결심을 했다.
“홍 도련님께서 알아 오라고 시켰어.”
“제가 무얼 시켰다고요?”
목소리가 벼락이 되어 제게 내리꽂힐 수 있다는 것을, 녹은 그때 처음 알았다.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녹은 고개를 돌리기가 두려워졌다. 하필 자신이 큰맘 먹고 배짱 한번 부릴 때, 그때 딱 나타날 것이 무어란 말인가.
‘더럽게 안 풀리네.’
앞의 아이들은 이미 녹의 뒤를 향해 허리를 숙이기 바빴다. 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자 하니, 게다가 말의 내용을 파악하니, 녹의 뒤에서 나타난 이는 하홍임이 분명했다.
녹은 마음속으로 셋을 센 후, 삐꺽거리는 관절을 가까스로 풀어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홍이 접선을 한들한들 부치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녹은 쌀쌀해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부채를 빼앗아 미간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식은땀을 식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홍의 뒤에는 그의 호위를 맡은 아이도 함께였다.
어디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홍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해 보였다. 바람이 시원하긴 했다. 거기다 부채 바람까지 쐬고 있으니 더운 게 이상하긴 하지.
녹은 홍을 향해 허리 숙이고 있는 아이들의 옆에 다가서서 그들과 함께 깊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 일어나지.”
홍의 말에 모두가 허리를 일으켰다. 홍은 녹을 제외한 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들은 고개를 한 번 더 깊게 숙이고 그 자리를 매끄럽게 벗어났고, 남은 녹만이 홍의 눈치를 살폈다. 차라리 저들이 있었더라면 심적인 부담은 지금보다 나았을까? 아니,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다.
“제가 형님께 무언가를 시킨 적이 있었습니까?”
홍의 목소리는 평이했고 얼굴은 방긋했다.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굳이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녹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는 그 지루한 시간보다 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홍의 입이 깊게 올라갔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저들에게 알아내고 싶은 정보는 대체 무엇이기에, 저도 모르는 제가 예서 등장한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녹이 바로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가에서 심부름에 대한 정보는 각별했다. 심부름꾼 아이들 서로는 서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연히 같은 심부름을 하며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는 게 아닌 이상 말이다.
만일 정보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그날로 하가에서 퇴출이다. 실력이 없다면 고된 하가 생활이지만, 바깥에 비해선 천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는 걸 어릴 적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한 심부름꾼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홍의 말에 거짓말로 빠져나간다면 당장은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겠으나, 홍이 저들을 불러 자신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 알아내면 배로 끝장일 테다.
‘에라이. 쫒아내기야 하겠어.’
녹은 결국 홍에게 사실을 뱉어 내기로 마음먹었다. 긴장감을 떨쳐 내려 심호흡하며 흉부를 부풀리고 있을 때였다. 녹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홍이 입가를 가리고 있던 접선을 탁 접어 내며 방글거리는 입술을 떼어 냈다.
“뭐, 말씀이 길어질 것 같으니 장소부터 옮길까요. 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 ❊ ❊
하홍의 별채까지 가는 길에 녹은 평생 볼 남의 정수리는 다 봤다고 생각했다. 홍이 시야에 보이자마자 심부름꾼 아이를 포함해 마법사까지, 하가의 가솔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그들이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안쪽에서부터 허리를 숙이고 있는 가솔들이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 한 번쯤은 형님을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줄줄이 이어진 가솔들의 인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홍과 녹이 마주한 곳에서부터 홍의 별채까지는 걸어서 일각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별채에 다가설수록 사람들의 수가 드물어졌다. 그리고 담벼락을 지나 홍의 별채 마당에 들어서자 종종 보이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졌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은 녹과 홍. 그리고 홍이 호위 명목으로 데리고 다니는 심부름꾼 아이뿐이었다.
홍이 별채의 문에 다가서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사람들을 부릴 위치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넘쳐난다지만 자신의 마력을 손수 써서 별채 전체를 개조하다니. 마법사들이 홍을 괴짜라고 부르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홍은 별채의 문을 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펼쳐진 진풍경에 녹은 벌어지려는 입을 단속하기 바빴다. 바깥에서 봤을 때는 가주의 후계치고 소박한 곳에서 산다 싶을 정도로 건물의 크기가 아담했었는데, 안쪽을 보니 숲 그 자체였다.
방바닥은 온통 풀밭이었다. 홍이 어째서 마루에 올라가는데 신을 벗지 않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녹은 문 안쪽이 건물이 아니라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었나 하고 지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별채의 푸른 기와는 완벽하게 벽과 붙어 있었다. 결국 이 거대한 숲이 홍의 별채 안에 들어 있는 게 맞았다. 실내가 실외라니. 하여간 마법사란!
“너는 이제 가 봐도 좋다.”
홍이 녹의 뒤에 기립해 있던 아이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별채 담벼락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도 데리고 다니다니, 홍의 기행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달밤에 검술 수련도 했었지.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를 도련님이다. 방 꼴도 기대 이상이라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녹은 자신의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그 화려한 숲에 입성했다. 바깥은 소슬한 바람에 코가 아릴 지경인데 방 안쪽 숲은 따사로운 봄이다. 벽 하나로 공간이 달라졌다. 태양을 머금어 초록빛을 주장하는 나무들이 아름드리 온도가 높은 햇빛을 부수어서 뿌렸다. 홍이 어째서 이 날씨에 부채를 들고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응?”
심부름꾼 아이가 담벼락 바깥을 나가자마자, 허공을 떠다니는 거대한 물방울이 중력이 없는 것처럼 나무 사이사이마다 방울방울 모습을 드러냈다. 참외 한 개 정도의 물방울은 표면이 유리구슬처럼 매끄러웠으며 그 안에는 꼬리가 세 갈래인 기이한 물고기가 한 마리씩 들어가 햇살을 맞으며 게으르게 유영하고 있었다.
녹은 조심스레 발을 방 안의 숲으로 내디뎠다. 녹이 홍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느긋하던 물방울은 태도를 달리했다. 물고기들은 한데 뭉쳐 녹에게 돌진해 왔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도합 여섯 마리의 금붕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녹의 주위를 회오리치며 탐색했다. 물고기를 중심으로 모인 물방울은 녹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붙어 커다란 한 방울이 되었다가 다시 나누어지길 반복했다. 덕분에 녹은 대지 위에서 물기둥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
순식간에 거대한 물방울들에게 포위당한 녹은 물에 닿지 않기 위하여 까치발을 하고 굳어 홍에게 눈길을 주었다. 홍은 흥미롭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물고기들이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녹은 순식간에 온통 젖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고기들은 서서히 녹에게로 다가왔다. 결국 코끝에 미지근한 물방울이 닿은 녹은 아무 말 없는 무정한 방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이 물고기들은….”
“아, 실례했습니다. 원체 낯가리는 이 녀석들이 이리 적극적인 모습을 본 게 처음인지라.”
홍은 녹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기이한 물고기들을 손끝으로 물렀다. 물고기들은 홍의 손짓에 아쉬운 듯 녹에게 눈을 떼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물기둥으로 흐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물고기들은 이후 녹의 코앞까지 다가서지 않고 그저 그의 주위는 거리를 두고 배회했다. 녹은 자신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붉은 머리에 노란 꼬리를 가진 금붕어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이 금붕어들은 다 뭡니까?”
“정령입니다. 하가를 아우르는 전체가 세계수의 중심부이니 이런 아이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어찌나 까탈스럽던지 구슬려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 힘에 부치는 녀석들입니다. 사람이 마당에만 있어도 모습을 숨기는 녀석들인지라, 제 별채 주변에 사람이 사라진 지 꽤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예외인 모양입니다.”
홍이 턱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연구해 볼 만한 주제겠군요.”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마력이 없어 식신조차 보지 못하는 녹은 정령이란 존재를 처음 마주했다. 하진이의 말에 의하면 식신이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정령과 비슷하다고 했었다. 다만 성질은 정반대라고 했었지. 하지만 하진이도 주워들은 사실이라 정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바르게 대답해 주지 않았었다.
아름다운 꼬리를 늘어트린 물고기들이 숲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명화를 그려 내었다. 그렇다면 마법사들이 만드는 식신도 이리 아름다운 형태일까? 기대감은 커졌으나 마력이 없는 지금의 녹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쪽입니다.”
홍은 건물 안의 울창한 숲속을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녹이 그를 따라 문 앞에서 걸음을 떼자 닫지도 않았던 문이 알아서 덜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뒤를 돌아보니 푸른 숲속에 창호지를 바른 문 하나만 덜렁 서 있을 따름이었다.
취급을 제외하고서, 녹은 마법사 집안에서 가주의 적자로 태어났지만 이토록 신비로운 경험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간 녹이 보았던 마법이란 마력 폭발과 순간이동, 간간이 손에 촛불만 한 불을 지피는 게 전부였다. 아, 그리고 마법사 살해까지. 녹이 목격한 마법은 쪼잔하거나 아니라면 매우 과격했다.
덕분에 녹에게 지금까지 마법사란 말하며 걷는 폭약과 흉기, 연비 좋은 이동 수단 정도가 다였다. 허공에서 물을 옮기며 다니는 금붕어가 존재한다거나 마법으로 작은 건물 안에 거대한 숲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안 사실이다.
녹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어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아야.”
알싸하게 느껴지는 고통과 함께 집힌 손등 가죽이 빨갛게 일어나는 걸 보고 녹은 이곳이 정녕 현실임을 자각했다. 녹은 그제야 하가 출신이 아닌 비마법사들이 어째서 경외를 가득 담아 마법사들을 우러러보는지 십분 이해했다. 확실히 그들 말처럼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저벅이며 신발에 닿아 오는 흙 내음이 싱그럽다. 금붕어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며 녹을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정령이라고 했으니 위험하진 않겠지? 녹은 괴생물체 보는 심경으로 자신의 옆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꺼림칙하게 보았다. 물고기들은 각각 다른 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 빼면 생김이 비슷했다. 크기만 서로 약간씩 다를 뿐이었다. 분명 홍이 거두었다고 한 물고기들인데, 어째서 강아지처럼 녹 자신의 주변만 얼쩡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홍은 멈추지 않고 숲의 안쪽으로 계속하여 들어갔다. 아무리 발을 놀려도 멈추지 않는 걸음에 녹은 숲의 규모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숲은 안쪽으로 끝없이 펼쳐졌고, 점점 넓은 잎사귀를 가진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다. 숲의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기온이 서늘해졌으며 정령들의 지느러미는 활발해졌다.
‘설마 하가에서 다스리는 고을보다 규모가 큰 거 아니야?’
마법으로 고을보다 더 큰 장소를 생성해 낸다니. 녹이 이곳에 와 보지 못한 채 그런 소리를 들었더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걸음에 녹의 의심은 짙어졌다. 녹이 그 가설을 확신으로 굳힐 때쯤에야 숲 안쪽에서 오두막이 하나 나타났다. 녹은 그곳이 이 장소의 종착지이자 한계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홍은 오두막 문 앞에 도래하고서야 녹을 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가늘게 바꿔 내었다. 그는 작은 소리로 녹을 향해 투덜댔다.
“내가 오라고 할 때는 그렇게도 피하더니…….”
“네?”
“아니, 형님께 하는 말이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형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온 저치들을 향해 말한 겁니다.”
자신을 향해 있는 줄 알았던 홍의 초점이 미묘하게 엇나가 있었다. 녹은 그가 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코끝에 차가운 게 닿았다. 녹의 코에 닿은 건 물이었다. 녹은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펼쳐진 건 물 천지이자 거대한 수벽이었다. 녹은 제 앞에 펼쳐진 물의 장막에 자신이 숲 한가운데에 있는 건지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령이라는 금붕어들이 어디서 그렇게 숨어 있던 건지, 방의 초입에서 보았던 수보다 배로 늘어난 금붕어들이 허공 속에서 신명 나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물의 표면 또한 격하게 흔들렸다. 마치 폭풍에 의해 격랑이 인 듯했다.
그들의 개인 공간이 합쳐져 만들어 낸 물의 장벽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나갔다. 그 크기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커서 녹은 자신이 혹 못가에 세워진 벽에 마법으로 붙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 안에 유영하는 물고기의 수는 어림잡아도 백이 넘었다.
“다들 물러나. 나중에 오라고 할 때나 좀 빨리 오고.”
홍이 그들에게 단호히 명령했지만 그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섯 마리가 있을 때는 그래도 선선히 홍의 말을 들었었다만 모이고 모여 떼가 되다 보니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숨을 뱉은 홍이 오두막의 문을 녹에게 열어 주며 말했다.
“해가 되는 녀석들은 아닙니다. 어차피 저들은 이 오두막에 들어오는 걸 기피하니, 안으로 들어오시면 괜찮을 겁니다. 저들의 의지가 아닐지라도 그 주위에 있다 보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할 수 없지요. 자기들끼리 장난치다가 물을 바깥으로 뿌리거든요. 정령의 수가 저 정도로 불어났으니 형님께서도 얼른 들어오시지 않으면 금방 생쥐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정령들이 모여 있는 풍경은 유리벽이 없는 웅장한 수조 같았다. 녹은 괜히 호기심이 일어 손가락으로 물의 표면을 건드려 봤다. 손가락 한 마디를 물에 넣자마자 화려한 꼬리를 늘어뜨리며 유려하게 유영하던 금붕어들이 순식간에 녹의 손가락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속도감 있는 행동에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거두어 냈으나, 물고기들의 거센 움직임으로 인해 튀어나온 물 한 바가지가 녹의 얼굴에 부어졌다.
촤악-
“…….”
녹은 금세 홍이 말한 대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버렸다. 녹의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물방울을 방울방울 바닥으로 떨구었다. 녹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그 물방울을 우울하게 바라보곤 물 먹어 무거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이마를 드러내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뭐랬습니까.”
한참의 침묵 뒤에 나온 소리는 약한 타박이었다. 그 가벼운 타박에 들어 올렸던 녹의 고개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굴을 들 면목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바닥을 보고 축축한 걸음을 옮겨 홍이 열어 둔 오두막을 향했다.
금붕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둔 그 꼴이 재미있는지 녹의 얼굴 높이에서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여유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훌륭한 수중 무대였으나, 녹은 그를 보고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에는 홍의 충고는 웬만해선 듣자. 괜한 호기심이 사람의 체면을 죽인다.
“너희는 얌전히 있어.”
홍이 바깥을 향해 단단히 외치고 오두막의 문을 닫았다. 녹의 속눈썹에서 물방울 몇몇이 무겁게 아래를 향해 추락했다. 홍은 얼른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주문을 외웠다.
“예하니.”
기화열을 은근히 빼앗기며 추워지고 있던 녹이었다. 홍이 주문을 외자, 자신에게 끼얹어진 물기가 말끔히 증발하며 한 호흡을 채 끝마치기 전에 보송보송해졌다. 녹이 침울하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뭘요. 이 편이 천으로 닦아 내는 것보단 편할 테니까요. 저들이 만들어 내는 물은 해로운 게 아니니 안심하세요.”
녹은 뒤로 넘겼던 앞머리를 흩트려 이마를 덮어 내었다. 반곱슬머리가 복실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잘랐던 때가 언제더라. 녹의 머리카락은 뒷덜미를 살짝 덮고 있었다. 녹은 나중에 하진이에게 이발을 부탁할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무겁게 가라앉혔던 고개를 들었다.
“…….”
이 괴짜 도련님의 오두막이라면 안에 바닷가가 펼쳐진대도 손쉽게 고개를 끄떡일 수 있으리란 각오를 하여 그런가. 무언가를 휘갈겨 필기한 종이가 벽에 가득 붙어 있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집이었다. 책상과 의자는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넓은 상 역시 글씨로 빼곡하게 채운 종이가 이리저리 난잡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바닥은 구겨진 화선지로 가득했고 먹물은 왜인지 모르게 쏟아져서 바닥에 떨어진 하얀 종이를 먹지로 바꾸고 있었다.
청소가 습관이자 생활화된 녹에게 이러한 광경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정갈함과 깨끗함을 유지하는 집이 평범하다 생각했던 녹에게 홍의 어지러운 작은 오두막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평범한데 평범하지 않았다.
한쪽 방구석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해먹이 그 어떤 지지대 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상한 수조 안에서 어둠을 피워 내는 말미잘이 자라는 중이었고, 문 옆에는 기다랗고 잎사귀가 녹의 키만 한 식물이 바닥을 뚫고 자라나고 있었다. 그 잎사귀 뒤에는 반짝이는 보석 껍질을 등에 인 달팽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녹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데 평범하지 않기는 개뿔. 홍의 오두막은 완전 이상한 공간이었다.
홍은 난잡한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녹에게 빼 주었다.
“앉으세요. 형님. 집 안이 좀 어지럽죠?”
“……하하.”
차마 미래의 가주님께 솔직할 수 없었던 녹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제자리.”
홍이 한 마디를 외치자, 벽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이 푸른빛을 발했다. 곧바로 책상 위에 있는 잡동사니가 허공을 날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녹은 자신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는 붓 두 자루를 고개를 꺾어 피해 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괜찮은데 날아다니는 속도가 참으로 시원시원했다. 묵직한 벼루가 허공을 향해 떠오르는 걸 본 녹은 긴장을 놓지 않고 그 물건이 바닥에 붙을 때까지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홍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녹의 반대편 의자를 빼 앉았다.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 정리되고, 녹은 드디어 책상의 색이 붉은 기가 도는 진한 갈색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층 깨끗해진 집 안을 둘레둘레 둘러보던 녹이 물었다.
“여기서 지내시는 겁니까?”
“아니요. 여기는 연구실 명분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생활하는 곳은 다른 공간이죠.”
“공간이라 함은…….”
“제가 쓰는 별채 안쪽에 제가 다양한 술식을 심어 두었습니다. 제 편의대로 공간을 바꿔 주는 멋진 집이죠.”
결국 별채 안쪽의 풍경이 홍의 의지대로 바뀐다는 거다. 마법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마법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녹은 이런 술식이 얼마나 마력을 소모해 대고 또 복잡한 일인지 알 수 없었기에 무감하게 고개나 끄떡이며 반응해 주었다.
“자, 이제 대화나 해 볼까요. 형님께서 제 이름으로 얻고자 하시던 정보는 무엇이었습니까?”
올 것이 왔다. 녹은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편한 표정을 하는 홍의 눈치를 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한다. 하진이가 요새 자꾸 심부름만 했다 하면 다쳐 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겠다? 알아서 뭐 하냐는 말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도록도록. 녹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오두막에 울려 퍼졌다. 홍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일단 이름을 허락 없이 빌려 쓴 데 대한 사과가 먼저라고 결심한 녹은, 조개처럼 꼭 다물었던 입을 드디어 열었다. 그리고 사과했다.
“……으아악!”
아니, 자신의 다리를 휘감으며 올라오고 있는 무언가의 붉은 눈과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곧바로 사과했을 거다.
의자가 바닥에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우렁차다. 질량이 있는 바람이 다리를 감싸는 느낌이라 무의식적으로 확인한 거였는데, 이렇게나 어마어마한 것이 한쪽 다리를 온통 감쌀 때까지 몰랐다는 둔감함이 통탄스러웠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는 건 흰 뱀이었다. 흰 뱀은 가운데가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녹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무리 여기서 온갖 게 다 나올 것 같긴 했다지만 이런 뱀은 예상하지 못했다.
녹은 발을 힘껏 털어 내려다가 멈췄다. 괜히 이 뱀이 또 초자연적인 존재면 뒷수습을 감당하기 힘들어질 테다. 녹은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홍을 향해 후들거리는 발을 들어 올려 물었다. 홍은 이 집의 주인이니 뭔지 알고 있겠지!
“이…이게 뭡니까??”
“……그러게요?”
그러나 홍은 녹의 기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두 눈썹을 심각하게 모으며 고개를 옆으로 숙이는 그의 긴가민가한 모습을 보는 순간, 녹은 자신의 왼발을 힘껏 털었다. 그러나 털면 털수록 조여드는 힘만 강해지지 거머리 같은 뱀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녹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내버려 두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녹을 홍이 급하게 만류했다.
“형님. 진정하세요. 이 숲은 평범한 동물이 거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심지어 이 오두막에 들어오는 걸 저 또한 감지하지 못했으니, 대정령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령들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해요.”
- 해를 끼치지 못한다니, 잘 알고 있구나. 허나 나는 사정이 다르지.
시원한 음성이 귀를 거치지 않고 뇌를 통해 흘러 들어왔다. 단정하는 그 어투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녹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흰 뱀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파안대소하였다. 너무나 인간적인 행동에 녹은 진짜 꿈이 아닌지 진지하게 한 번 더 검토했다. 결국 오른손등이 빨갛게 물드는 고통을 다시 얻고서 현실임을 공고히 자각했다.
녹이 얌전히 얼어 있자 흰 뱀은 녹의 몸을 타고 느긋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이 뱀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 집의 주인 또한 여유를 잃고 진지한 눈빛으로 녹의 몸을 오르는 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팔 하나 정도 길이의 뱀은 녹의 어깨를 느슨하게 감은 뒤, 오른쪽 어깨에 턱을 올려 두고서 혀를 날름거렸다. 녹은 뱀이 닿아 온 어깨 주변에 느껴지는 바람 같은 촉각에 이 뱀은 진짜 뱀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홍의 언질처럼 대정령인 걸까?
뭐가 되었든 뱀이 자신에게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하니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홍이 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잘 영글어진 사과처럼 붉은 그의 눈을 맞추며 물어 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네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정령들의 윗선이다.
‘윗선은 또 뭐야.’
자유로운 자연에서 지낸다는 정령치고 세속적인 단어였다. 뱀은 킬킬대며 어느새 목까지 타고 올라와, 녹의 머리 꼭대기에 머리를 올렸다. 그가 닿아 오는 부피가 상쾌한 바람으로 인해 시원해졌다.
녹의 마음이 일순 평안해졌다. 뭘 어찌했는지 모르지만, 이 뱀이 녹에게 조치를 취해 한 줄기 안심을 심은 것일지도 모른다. 들어 보니 마법사들도 인간의 기억을 조작한다는데 정령이라고 못할까. 잠깐, 정령도 마법을 쓸 줄 아나?
뱀은 오두막을 둘레둘레 둘러보았다. 그는 벽에 빼곡히 붙어 있는 필기를 유의 깊게 보았다. 뱀의 붉은 눈초리에 스친 보석 달팽이가 제집을 떨며 방울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청량하고 기쁜 것이 저들은 뱀을 향해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 흥미로운 주제로구나. 너의 존재는 바깥의 아이들에게 들었다. 마법사치고 웃기는 녀석이야.
“……칭찬 감사드립니다.”
홍은 뱀에게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 아이야. 앉거라. 내가 이족 보행 하는 것들을 해칠 수는 있어도 너는 해치지 않는다.
뱀이 뾰족한 주둥이로 녹의 머리를 툭툭 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녹은 뱀의 제안에 홍을 쳐다보았고, 홍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홍의 대응에 녹은 다시 자리 잡아 앉았다.
- 이렇게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구나. 인사부터 한다는 것을…… 순서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지. 이에 대해 사과하마.
“아니, 뭐…… 괜찮습니다.”
녹 역시 홍과 같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불시에 나타난 대정령은 이토록 하 형제에게 떨떠름한 존재였다. 뱀이 하품을 떡 하고선 힘을 빼 녹의 머리 위에 길게 머리를 베었다. 낮잠이나 자러 온 듯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하얀 눈꺼풀에 감기려고 할 때, 홍이 적절하게 나서 주었다.
“저희가 뭐라고 불러 드리면 좋겠습니까?”
- 네게 알려 줄 이름 따위 없다.
“그럼 정령들의 윗선님.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내 맘이다.
“…….”
“…….”
말이 통해 먹질 않는 상대였다. 결국 뱀은 녹의 머리 위에서 눈을 감았고, 곧 머리 위에서 도롱도롱 소리가 났다. 정말 녹의 머리 위에서 잠이 들어 버렸나 보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홍은 지팡이를 꺼내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곧 뜨끈한 차가 가득 담긴 찻잔이 녹의 앞에 당도했다. 홍 또한 뱀에게 관심을 끊었는지 침착하기만 했다. 이 공간에서 녹 혼자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윗선님이 무얼 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불편해 보이진 않으시더군요. 허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이 차가 심신 안정에 제법 좋으니 어서 드십시오. 저도 한잔 마셔야겠습니다. 대정령이란 존재는 고서에만 읽었지 실제로는 처음입니다.”
“정령이 정말 해를 끼치지 못하는 생물이 맞습니까?”
‘이러다가 불시에 무는 거 아니야?’
녹은 자신이 정령의 인질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뱀의 긴 꼬리가 제 목을 가볍게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하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불안이 올라오려 하면 묵직한 기운이 그를 눌러 삼켰다. 필시 불안해야 할 상황에서 불안해하지 못하니 결과적으로 혼란이 일었다.
“일단 바깥의 물고기처럼 하급 정령은 생명에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게 확실합니다. 보통 정령들은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추측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이 없어요. 정령들은 힘이 약할수록 이성이란 게 없다시피 행동하거든요. 그러나 대정령은 처음이라 모르겠군요. 어떤 점이 일반 정령들과 다른 부분인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단 다른 정령들과 달리 말이 통한다는 건 확실한데 말이죠.”
홍은 뜨거운 노란빛의 차를 호록 마시면서 쉬는 손으로 검지를 펼쳐 내어 보였다.
‘……1을 표현한 건가?’
그가 그런 희한한 포즈를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의 머리 위에 있는 뱀이 아가리를 벌려 허공을 텁 물어 내었다. 뱀이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가 녹의 고막에 섬뜩하게 찔러 들어왔다. 녹의 시야에 머리 위에 있던 뱀의 턱이 보였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 나쁘진 않구나. 가주가 데려온 아이다워.
“……감사합니다.”
홍의 떨떠름한 감사를 들은 뱀은 녹의 머리 위에서 한 번 더 꿈속으로 빠졌다. 어찌 그리 빨리 깨고 다시 잠들 수 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홍은 방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정령은 마법사들이 마력을 채취하기 위해 만드는 식신을 먹습니다. 애써 만든 식신을 빼앗기니, 마법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죠. 그렇기에 마력이 넘쳐나서 여유로운 하가 이외에는 정령이 배척받는 존재입니다. 정령의 윗선님께서도 식신을 드시긴 하시는군요.”
“식신이 인공적인 정령과 비슷한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저들은 같은 정령을 먹는 겁니까?”
“식신이 인공적인 정령이라고요? 전혀요. 식신은 정령이라기보다는 간단한 마법으로 엮어 만든 마력 흡수체라고 보시는 게 차라리 정확할 겁니다. 마법사가 특정 마법에 의해 죽을 때 세상에 마력을 뿌리면서 소멸하는데, 여기서 뿌려지는 마력의 형태는 마법사들이 평소 마력을 흡수한 형태와 유사한 형태이죠. 왔던 형태 그대로 가는 겁니다.”
홍은 책상 끄트머리에 둘둘 말려 세워져 있던 종이 하나를 끌어와 세필 붓으로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늘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그려 넣는 그 실력이 웬만한 화공 못지않았다. 속도 또한 얼마나 빠른지 녹은 홍이 원래부터 뱀이 그려져 있던 종이를 펼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녹은 그 그림을 보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진의 처참한 그림 실력을 떠올렸다. 사람이 그리는 그림이란 게 이렇게 사실적일 수도 있구나. 홍이 그린 것을 보기 전까지 녹에게 그림이란,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증거로 정체를 알아맞혀야 하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었다.
“형님께선 정령들에게 인기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물고기들도 형님을 따라오지 못해 안달이더니 모습을 보기가 힘든 대정령까지 불러들이시고요. 정령은 세계수의 수족이라는 말도 있죠. 그들은 마력으로 명을 이어 가는 마법사들과 다르게 세계수의 의지로 생을 이어 갑니다. 그렇기에 종종 세계수 근처에 있는 오래된 물건이 정령으로 화하기도 하죠. 정령들이 형님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세계수도 형님을 좋아하실 가능성이 크겠군요.”
“세계수요?”
“그럼요. 아무리 지금 이리 지내셔도 형님께선 하가의 적통이시지 않습니까. 세계수의 마음에 들 가능성이 크죠. 마력이 없는데 정령이 붙는다는 건 처음 보는 일입니다만…… 뭐, 이곳은 세계수의 영역이니 정령이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드물지만 안 될 일은 아니죠.”
세계수의 마음에 드는 가주는 그가 내어 주는 열매를 얻고 전에 없을 강력한 힘을 얻는다고 했다. 전보다 더한 권세 또한 뒤따라오는 것이 당연하다. 세계수의 마음에 드는 이는 하가의 주인 중에서도 얼마 없어서 몇 세기에 한 번 열매가 나타날까 말까 한다 들었다. 물론 세계수의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녹은 마력이 바닥이니 열매의 주인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가가 세계수를 관리하는 가문으로 성장한 것 또한 그 나무의 의지가 한몫했다. 가장 처음 세계수에게서 열매를 받아 낸 마법사는 녹의 먼 조상이었다. 이후, 그때 얻은 힘을 독점하여 가세를 키운 것이 하가였다.
처음에 고지를 선점하면 힘의 계층이 바뀌는 일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녹의 조상들은 그를 잘 알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하가가 아닌 마법사가 세계수와의 친화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열매를 내어 주는 멍청한 일 따윈 벌이지 않았다. 자연히 주인을 잃은 그 열매는 그 시대의 가주 몫이었다.
세계수는 이러한 하가의 독점을 눈감아 주었다. 어차피 세계수가 타 가문 마법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보통 열매의 진짜 주인은 하가의 핏줄을 타고난 자였다.
홍은 말을 끝마치며 자신이 그린 뱀 그림 옆에다가 그에 관한 설명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색채, 성격, 그리고 그가 자신을 부르는 단어까지 적은 홍은 ‘*인간을 해칠 능력이 있다고 함.’이란 단어를 끝으로 뒤에 있는 상에 종이를 옮겼다.
정령이 인간을 어찌 해칠 수 있다는 거지. 궁금증이 인 녹은 먹물을 말리기 위해 종이 위에 문진을 얹는 홍의 뒤통수를 보며 물었다.
“정령이 마법도 쓸 수 있습니까?”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세계수 근처가 정령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해도 그들을 보는 건 쉽지 않거든요. 말까지 통하는 정령은 사실 저도 처음 봅니다. 보통 정령들은 자기 멋대로 놀고 사라지는 능력만 있는데…… 음, 가끔씩 물도 뿌리는군요.”
홍의 오두막까지 올 때 보았던 물고기 떼를 이야기하는 거다. 홍의 말을 듣지 않았던 녹에게 그들은 시원한 한 바가지의 물을 끼얹었었다.
“그렇다면 지금 제게 감겨 있는 이… 윗선님께서 안전한진…….”
“뭐…… 거짓말은 안 하시겠죠. 설마 하가의 영역에서 하가의 가솔을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렴요. 일단 저분께 궁금한 점이 많지만 그리 협조적이시지 않으니 우리는 우리 일을 봅시다.”
홍은 태연자약하게 녹의 빈 찻잔을 따뜻한 찻물로 채워 주고서 자리에 앉았다. 숲속이라 상쾌한 나무의 향기, 그리고 쾌적한 오두막 안의 공기와 따스한 차. 완벽하고 한가로운 다회의 시간이 연출되었다. 머리 위 하얀 정령이 도롱이는 소리에 오후의 평화로운 시간이 느긋하게 늘어졌다. 뱀에게 묶여 있어 자신이 긴장을 놓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녹은 자꾸만 풀어지는 신경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홍이 차분하게 눈을 감고 차를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는 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단정히 묶어 내린 채였다. 창으로 드는 포근한 햇살이 그에게 깃들었다.
아무리 괴짜라고 소문났다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고고한 도련님 그 자체였다. 녹은 제 짧은 반곱슬머리를 생각하며 자신도 머리를 기르면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에 대해 짧게 생각했다가 철회했다. 녹에게 머리카락이란 길러 봤자 귀찮기만 하고 쓸데도 없는 존재였다.
녹이 그의 자태를 구경하고 있을 때, 홍이 시조를 읊듯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직 제 이름을 빌려 쓰신 연유를 듣지 못하였군요.”
‘아.’
갑자기 나타난 정령의 윗선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홍에게 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말하기 전에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녹은 빠르게 그에 대한 용건을 내뱉었다.
“그 아이들이 하진이와 같은 무술 수업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진이가 요새 심부름만 가면 다쳐 오는데 본인은 심부름 중에 다친 게 아니라고 부득불 우겨 댑니다. 하진이와 같은 심부름을 하는 아이들이라면 혹시 아는 정보가 있을까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이름을 빌려 쓴 것에 대해서는 면목이 없습니다.”
자신이 궁금하다고 한들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심부름 내용은 비밀이었다. 그 전에 그 아이들이 하진이와 같은 곳에 심부름을 하러 가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냥 심부름을 하러 어디 가는지나 슬쩍 물어보고 빠지려고 했는데 하필 당사자와 딱 맞닥뜨리다니. 일이 더럽게도 안 풀렸다.
이제 녹의 입장은 홍의 손에 달렸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전후 사정을 설명했을 때는 차라리 후련했다. 그러나 홍이 미동도 없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녹의 심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부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말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비밀을 유지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비밀을 알아내려 노력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발각된 그 이후의 미래는 미지로 덧칠되어 공포감을 키워 냈다. 원래 결과를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무섭다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가의 가풍은 효과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녹의 혈관에 피가 긴장으로 빠르게 돌기 시작한 의미 없이 홍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별거 아니군요. 그런 게 궁금한 거라면 차라리 저에게 오셔서 물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아이들보다는 사정이 나을 겁니다.”
“하지만…… 심부름에 대한 전반은 함구령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리 규칙을 꼬박꼬박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장로들이 만든 규율을 따르니 좀이 쑤시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형님께선 하진이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정보를 얻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제가 아직 이 집안에서 한미한 존재이기는 하나, 약간의 정보 정도는 얻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한미한 존재라니. 정말 한미한 존재라면 장로들이 만든 규율을 경전처럼 여길 거다. 하지만 홍의 행태는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물론 홍의 그러한 안하무인에다가 제멋대로 성질은 녹에게 구사일생과 같았다.
녹은 홍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홍에게 몸을 기울인 녹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허둥지둥 전해 주었다.
“하진이는 요새 항상 홍화 저에 심부름을 하러 갑니다. 가서 하는 일은 별거 없다고 하는데 별거 없으면 다치지를 말아야지요. 심지어 하는 일이 너무 경미하여 기억조차 안 난다고 하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기억이 안 나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세 마디의 말을 한숨에 말한 녹은 폐에 부족한 숨을 채우기 위하여 심호흡했다. 자신의 연구실에 초면인 뱀이 튀어나왔을 때도 항상 침착했던 홍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홍은 보기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녹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숨을 충전한 녹은 활을 쏘듯 자신의 의문을 마저 전했다.
“혹시 심부름이라고 하고 위험한 일을 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에 대해 잘 아십니까??”
녹이 간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홍은 가까워진 녹의 얼굴을 보고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그 시간 동안 녹이 쏟아 내듯 뱉어 낸 정보를 정리한 홍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음. 하진이 다쳐서 온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다쳐 오길래 고요하신 형님께서 이리 불같이 나오시는 겁니까?”
“멍 한두 개면 말을 않지요. 무술을 하는 아이 중 그런 상처 하나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진이 달고 오는 상처는 예삿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진이 제게 상처를 숨겨서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발견한 피딱지만 하여도 몇십 개는 됩니다. 요새는 그 크기 또한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또 이상한 점이 있습니까?”
녹은 손을 펼쳐 하나하나 접으며 꼽아 보았다. 예전과 다르게 하진이 이상해진 점이라면 많았다. 하진과 교류가 잦은, 아니, 하진과만 교류하는 녹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일단 발을 헛디디는 횟수가 많아졌습니다. 아이의 운동 신경을 떠올리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벌들이 찾아와서 쏘려고 하거나 아이들이 버리기 위해 쏟아 내는 물벼락을 맞을 뻔한다거나, 종종거리는 잦은 불행 또한 달라붙는 것 같습니다. 요새 운이 영 좋지 못합니다.”
홍은 걸상의 표면을 검지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녹이 주는 단서를 헤아렸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홍에 불안감이 한층 심해진 녹이 안달하며 물어봤다.
“잦게 불려 가는 곳은 홍화 저입니다.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십니까?”
“요새 세계수에 열매가 열릴 징조가 있다는 건 저번에 들어 알고 계시겠지요.”
녹은 고개를 네 번 끄떡였다. 그 빠르기가 벌새의 날갯짓 같았다. 유의미한 단서가 나올 가능성에 녹의 성질이 급해졌다.
“홍화 저는 세계수와 가장 가까운 가옥입니다. 이 숲보다도 더요. 아이들을 데리고 홍화 저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열매와 관련한 업무를 맡기는 것 같군요.”
하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도 세계수를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자들은 손에 꼽았다. 세계수는 자신 스스로 타 가문원이 하가의 고을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다. 물론 과시하는 걸 좋아하고 자존심이 강한 마법사답게 하가의 마법사들은 그 결계를 해제하려 연구했으나 몇 세기에 걸쳐도 해제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세계수는 고을 안에서도 자신의 주위에 결계를 쳐 그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자신을 알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주에게 위임했다. 결국 가주의 허락이 없으면 하가 안에서도 세계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열매와 관련된 업무요? 그게 무엇입니까? 그 전에 정확한 정보가 맞습니까?”
“세계수는 저조차도 보기 힘든 존재입니다.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이 높으면 높을수록 세계수와 마주할 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며 가주님께서 제 출입을 제한하셔 그럽니다. 물론 이가 진실인지에 대해선 저도 좀 회의적입니다만…… 역대 세계수 관리자들은 부작용이라곤 모르는 듯 살고 있으니까요. 여하간 그를 뒤로한다 치고, 마력이 하나도 없는 아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체력과 운동 신경을 기르게 하는 것 또한 세계수에 관한 업무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열매가 자란다면 당연히 그를 돌볼 인원도 많아지는 게 순리겠지요.”
“…그렇다면 열매 때문에 벌어진 사달이라는 거군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몇백 년 동안 열리지 않았다던 그 열매는 대체 왜 지금 난답니까?”
“음….”
녹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홍을 응시했다. 어째서 녹이 자신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알아챈 홍은 눈을 사선으로 올려 그의 눈을 피했다. 평소라면 홍의 눈치를 보는 녹이었지만, 여동생처럼 돌보고 누이처럼 의지하는 하진의 안위에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만일 정말 열매로 인해 만들어진 상처라면 홍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열매는 미래의 가주인 홍의 것이니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능한 이른 시일 내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일 정말 위험한 일이라면 하진이와 함께 하가를 나올 용의가 있었다. 어차피 하가에서는 나가는 문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 지금 녹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고, 하진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으니 성인식만 빠르게 치른다면 녹이 하진을 데리고 언제든지 나갈 수는 있었다.
하가의 성인식이란 바깥의 규율과 다르게 마법사들의 특성처럼 제멋대로라 아이들을 관리하는 마법사가 가볍게 축복만 해 주면 끝이 난다. 정말이지 날치기 관례와 계례가 아닐 수 없었다.
홍에게 강요 같은 부탁을 끝마친 녹은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이 공간을 빠져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눈에 뵈는 게 없을 때 홍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마음이 편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녹은 목례를 하고 물러나려고 했다. 원래는 가 보라는 허락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 허락을 기다리다 머리가 식으면 누가 보상해 주는가. 녹은 일단 눈 감고 막 나가기로 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녹은 당차게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녹은 문을 열자마자 광활하고도 끝없는 바닷물을 마주했다. 집 아래에서 하얀 포말을 부수는 파도와 함께 멀리서 거대한 혹등고래 한 마리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철썩-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녹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말도 안 되는 풍경 앞에서 머리가 차게 식어 버린 녹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빌어먹을 마법 세계 같으니!!
엄청난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녹이 문을 열자마자 닫아 버렸다. 홍의 위치에서는 바뀐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았기에 녹이 어째서 저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홍은 복잡한 얼굴을 하는 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다…….”
“네?”
“저희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홍은 창문 바깥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빽빽이 꽂힌 나무들이 사라진 채였다. 그가 창문으로 다가서서 바깥의 바닥을 확인하니, 펼쳐진 푸른 물결이 오두막 근처를 잔잔히 철썩이고 있었다. 홍은 감흥 없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확실히 바다군요.”
“원래 이곳은 이런 곳입니까? 그… 숲이었다가 바다였다가…… 이런 거 말입니다.”
“글쎄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홍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으나 그의 뜻은 대수로웠다. 이런 기현상에 당연한 듯 익숙할 줄 알았던 홍이 저리 나와 버리자 녹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 갔다. 지금 자신도 처음 겪는 상황이라는 건가? 그럼 어찌 집에 가지?
홍이 하나밖에 없는 문을 열어 바깥의 전말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연다고 해서 바다가 숲이 되는 기적이 행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오두막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녹이 보았던 고래가 저 멀리서 숨구멍을 통해 물줄기를 뿜어냈다.
“장관인걸요. 고래는 처음 봅니다.”
귀가에 대한 걱정으로 타들어 가는 녹과 달리 홍은 저 홀로 태평했다. 물론 평생 하가에 적을 두고 살아온 녹은 고래가 아닌 바다 자체를 처음 보는 거긴 하였으나 그를 제대로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하나하나에 깜짝 놀라는 녹과 달리 홍은 처음 겪는 현상에도 유유자적했다. 한가롭게 고래를 관찰하고 있는 홍에게 물었다.
“처음이시면 큰일 난 거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뭣하면 마법으로 이동하면 될 일입니다. 이곳이 세계수 근처라 가끔 이런 알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서적에서 읽긴 했는데 실제로는 처음입니다. 그나저나 어째서 숲이 사라지고 바다가 된 건지 모르겠군요.”
홍이 쭈그려 앉아 문 앞에서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손으로 찰방대었다. 고래가 얌전히 헤엄치자 바닷물은 잠잠해져서 오두막을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홍은 마음껏 드넓은 수평선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예 대놓고 주저앉아 바깥을 구경하는 홍에 기가 찬 건 녹이었다. 마법이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저리 여유로운 거겠지? 혹시 마법을 통해 바깥으로 이동할 때 자신을 두고 홀로 떠나는 건 아니겠지?
- 정령들의 장난이구나.
웅웅거리는 뱀의 말소리가 머리를 타고 울렸다.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턱을 괴고 있던 홍이 녹의 머리 위를 돌아본 것은 동시였다. 녹 또한 자신의 머리 위를 보고 싶었으나 인체적인 한계로 자신의 정수리에 얹혀 있는 흰 뱀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뱀이 몸소 녹의 정수리에서 내려와 오른 어깨를 타고 뻗어 나왔다. 녹은 드디어 하얀 뱀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 이 녀석들이 정신 못 차리고 난리가 났군.
“정령들의 장난이라고 하신다면…… 형님께 물을 뿌린 그 아이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이 근처에 있는 정령이 그 아이들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뱀이 오두막 근처를 배회하는 고래를 응시하며 말을 던졌다.
- 어린아이일수록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감정이 넘치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일을 벌이게 되는 게 정령이지. 가르쳐야 할 게 많겠어.
뱀은 녹의 몸을 타고 내려와 찰랑대는 바닷물 앞에 다가서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이 책하듯 유유자적 헤엄치는 고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을 느낀 건지, 고래가 그 육중한 몸을 허공으로 띄워 내었다. 허공으로 띄워진 덕분에 보랏빛 고래의 모습이 정확히 보였다.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장엄한 포유류에 녹은 입을 떡 벌렸다.
홍은 녹처럼 고래를 보고 경탄할 틈이 없었다. 고래가 만든 해일이 오두막을 덮치기 전에 재빨리 지팡이를 꺼내 집 주위에 장막을 감쌌다. 고래가 바다로 떨어지며 만든 파도는 다가올수록 거대해지더니, 이내 오두막을 삼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가올수록 하늘을 덮어 가리는 파도의 위용에 홍은 지팡이를 꼭 부여잡았다. 태양까지 가릴 정도로 치솟은 파도에 뱀은 자신의 머리를 급히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를 키우던 해수가 하얀 포말이 인 끝에서부터 오색의 나비들로 화해 하늘로 날아갔다.
나비로 변해 날아간 것은 파도만이 아니었다. 드넓은 망망대해 또한 눈 깜빡할 사이에 처음 보는 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로 변해 공중으로 사라졌다.
한차례 나비들이 올라오며 시야를 가린 이후에는, 처음 오두막에 왔었을 때처럼 고요한 숲이 홍과 녹을 반겼다. 펼쳐진 바다가 사라진 것이다. 나비로 변한 바닷물은 하늘 높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홍은 고래와 바다가 장관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이게 더 장관이었다.
“…저 녀석들. 아는 건 물 뿌리는 것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상황이 끝난 지금까지 지팡이를 힘주어 잡은 홍이 먼 곳을 보며 낮게 웅얼거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던 곳은 바다가 숲으로 변할 때 헤엄칠 물이 없어 바닥에 누워 있는 고래가 있던 자리였다.
바다가 나비로 변해 증발할 때, 고래는 무수한 물고기 정령들로 화해 흩어졌다. 장난꾸러기 아이가 엄마에게 혼날 것을 예감해 자리를 피해 버리는 형국이었다. 그들은 나무 뒤로 재빠르게 숨어 봤지만 오두막 안에서 바깥 상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던 세 쌍의 눈을 피하기엔 요원했다. 흰 뱀이 녹을 바라보며 그들을 변호하듯 말했다.
- 저들도 원해서 그 꼴을 만든 건 아닐 거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내 잘 타이르마.
“윗선님 말대로라면 조금 전의 일이 정령들이 감정적이기에 일어난 현상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지낸 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런 현상은 처음 봅니다. 어째서 저들의 감정이 격해진 겁니까?”
홍이 깊은 호기심을 안고 물었다. 아이의 빛나는 홍채에는 짙은 학구열이 불탔다. 스승들이 뿌듯해할 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뱀은 그의 스승이 아니었고, 그 기세를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뱀의 태도는 시큰둥할 뿐이다.
- 내가 알려 줄 의무는 없지 않으냐.
하가에 있는 그 누구도 홍의 질문에 이리 답한 적이 있는 자가 없었다. 하가의 최고 권력자인 가주 내외조차 잠재력이 뛰어난 홍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하가에서 처음 당한 꼴이었지만 홍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말이 통하는 정령은 윗선님뿐이라 그렇습니다. 양해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실로 엄숙한 태도였다. 뱀은 차기 가주가 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이 기꺼운 모양이었다. 홍의 태도를 주시한 뱀은 녹의 몸을 타고 기어올라 그의 어깨에 자리 잡고선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 예가 밝은 아이로구나. 그런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랑을 받지.
그의 명랑한 어투에 홍이 한껏 기대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녹의 어깨 위에서 홍을 내려 보고 있던 뱀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역시 싫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다줄 터이니 따라오지 말아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녹과 뱀의 신형이 오색의 나비 떼로 변해 부서졌다. 녹과 뱀이 있던 자리에서 나타난 나비들은 꿀에 이끌리듯 오두막 안쪽에서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홍만 남겨진 오두막은 정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