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숨겨진 조각들
“누, 누구…?”
“도령 앞에서 화살의 방향을 바꾼 이 말이야. 내가 분명 봤는데, 화살은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어. 그런데 도령 앞에 낯선 이의 등이 보이더니 화살이 방향을 틀어 우리 옆에 박힌 거 있지. 이후 그 낯선 이는 사라져 버렸지만, 아마 그자가 우리를 구해 준 은인임에 틀림없어. 도령은 보지 못했어?”
정확한 상황 설명이었다. 하진이 도언을 본 게 확실시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거 말을 해야 하나? 녹은 자신의 옆에서 발걸음을 나란히 맞추며 걷고 있는 도언을 보았다. 도언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웬만해서 제 존재는 숨겨 주셨으면 합니다. 녹이면 몰라도 저를 알아보는 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일이 꼬일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모른 척해 주십시오. 그리고 얼른 돌아오겠습니다.”
도언은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언이 있던 자리는 완벽하게 허공이 되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녹은 가까스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하진에게 대답했다.
“음, 잘못 본 게 아닐까?”
“도령은 그자를 못 봤단 말이야? 그자가 없었으면 도령 큰일 날 뻔했어!”
“글쎄… 가만히 있었어도 화살이 우리를 비껴가지….”
“내가 요새 아무리 평소보다 감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것까지 못 볼 정도는 아니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도언의 부탁만 아니었으면 하진이에게 이것저것 다 말했을 텐데. 소량의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부탁을 받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녹은 하진의 의문에도 모른 척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 여기는 하가잖아. 마법사도 해석하지 못할 이상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니, 네가 봤다는 그 사람도 그런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해명할 수 없는 현상에 골이 난 하진은 팔짱을 끼고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그런 건가. 여하간 도령한테는 안 보였단 말이지?”
녹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떡였다. 비밀 없는 친구인 하진에게 하는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양심의 가책으로 쓰라렸다. 녹을 맹신하는 하진이 웅얼거렸다.
“화살을 쏜 녀석들도 누군가를 본 눈치는 아니었어. 만일 보였다면 우리에게 그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었겠지.”
하진은 도도를 어깨에 걸치고 안마하듯 툭툭 치며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녹은 그런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옆자리만 지켰다. 어느 순간, 녹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하진이 보이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았다. 멈춰 돌아보니, 그녀는 왔던 길을 돌아보고 있었다.
녹이 그녀의 옆에 다가가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찝찝함이 한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가온 녹에게 빠르게 말했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어. 도령. 오늘은 어차피 연무장도 찼으니까 연습은 내일로 미루자. 그리고 자신이 아닌 자를 위해 몸 날리는 건 좀 주의해. 괜히 그렇게 살다가 큰코다친다! 이따가 봐!”
말을 마치자마자 하진은 손을 크게 휘저으며 녹에게 인사하곤, 왔던 길을 거슬려 달려 나갔다. 그녀가 녹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길에 멀거니 혼자 남겨진 녹 또한 한 손에 목검을 쥐고 터덜터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세 살은 어린 아이에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하진보다 경험이 적은 건 사실이긴 하나, 그래도 오빠로서 하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지금으로써 녹이 하진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 해 봤자 도언의 정체에 대한 정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도언에 의해 막혔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괜히 힘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고 있었다.
“녹.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며칠간 들었다고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렀다. 제멋대로 나타난 사내는 왔을 때처럼 언질 없이 나타났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녹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령을 제외하고 저한테만 보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진이도 형을 본 것 같은데요. 하진이가 정령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난감한 일입니다. 혹시 몰라서 그 앞에 몸을 숨겼던 건데, 하필 그런 사고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도언이 낭패라는 듯 한쪽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확실히 그도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도 하진이가 형을 본 건 몇 초 안 되는 것 같던데요. 아, 그 전에 인사를 안 드렸네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녹이 예의 바르게 도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녹이 정중히 인사하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도언이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대답하는 목소리의 높낮이가 한층 올라갔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녹이 이렇게 나오시면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말라고 혼내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넣어 두세요.”
‘나 또 혼나야 하나?’
안 그래도 하진에게 실컷 혼난 녹은 눈치껏 허리를 더 숙였다. 자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혼나는 건 그와 별개였다. 그 누가 혼이 나는 걸 좋아하겠는가.
녹은 도언이 자신의 감사 인사에 약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혼나는 걸 피하기 위해 전보다 정중히 행동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마가 땅에 닿을 것 같았다. 도언은 그를 일으키려고 뻘뻘대다가 한숨을 쉬고는 백기를 들었다.
“하, 네. 제가 졌습니다. 날아오는 화살 앞에 달려든 무모한 짓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일어나세요.”
도언이 한 말 중 ‘무모한 짓’이란 그 단어에 감정이 실린 걸 모르는 녹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곱게 접었던 허리를 펴내었다. 좋아. 혼나는 거 피했다.
“대신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분명 녹이 끼어들어 막지 않았어도 하진은 잘 피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되었습니다. 저도 혹시 모르니 당신의 친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만…… 녹이 위험에 뛰어들 때마다 가만히 있는 게 쉽지가 않군요. 저를 위해서라도 얌전히 계십시오. 그게 녹에게 어려운 일이란 건 잘 압니다.”
도언이 딱 잘라 말했다. 며칠 봤다고 단정하듯 말하는 걸까. 녹이 남을 위해 위험에 뛰어드는 일이라고 해 봤자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었다. 녹이 생각하는 자신은 얌전했다. 시키는 거 뒷말 없이 잘하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제가 생각해도 참 얌전한 아이였다.
하지만 도언은 천하의 말괄량이가 따로 없다는 듯 대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잘 안다니. 미래의 자신은 천방지축인 것일까? 미래의 자신에 대해 그려 보고 있을 때, 도언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흠…… 볼일을 빨리 보고 왔네요. 그것도 하나 더 끌고. 그럼, 이따가 봅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언이 사라졌다. 녹은 이미 이런 식의 사라짐에 익숙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진이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도언이 말한 자는 하진이었다. 이따 보자고 하며 작별했던 하진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크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도령! 아직도 여기 있었네!”
그녀는 단숨에 녹의 앞에 도착했다. 숨조차 몰아쉬지 않은 그녀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녀가 개구지게 외쳤다.
“아직까지 안 떠났구나! 잘 서둘렀다. 도령은 여기저기 잘 증발하니까 불안했단 말이야.”
“하진아. 너가 떠난 지 일각도 채 되지 않았어.”
“흠.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가? 여하간 다행이다.”
“어디 다녀온 거야?”
“내가 이런 거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마침 장로님이 돌아다니시기에 여쭤봤지.”
“뭐라고?”
“어떤 남자가 반짝 나타나서 화살에 맞을 뻔했던 우리를 구해 주고 사라졌다고! 근데 그자를 나만 봤다고 했지. 그가 대체 누구인지 알고 있냐고 물어봤어.”
“그랬더니?”
“장로님도 모르신대! 근데 그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하홍이 몇 가지 묻더니, 며칠 전에 녹 도령이 나랑 비슷한 걸 물어봤다는 거야.”
‘이크.’
특정 인물에게만 보이는 인간형 정령. 아마 홍은 그걸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일 거다.
“그건 하홍에게 왜 물어봤었어? 혹시 내가 본 자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녹은 일순 난감해졌다. 하홍 녀석, 알아서 잘 말해 주든가. 아니면 함구하든가. 이렇게 거짓을 또 하나 만들어야 하는가. 하진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굴리던 녹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네 상태가 자꾸 홍화 저에 다녀오면 안 좋아지길래 대체 뭘 하는지 궁금해서 열매에 대해 물어봤던 것뿐이야. 홍 도련님이 세계수의 열매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했고. 그 도련님이 나에게 정령을 보여 주셨고, 나는 물고기 형태를 했던 그것들 중에서 인간이 잠깐 보인 것 같길래 도련님께 인간형 정령이 있냐고 물어봤지. 도련님은 알 수 없다고 하셨고, 본 적도 없다고 하셨어. 나는 그래서 잘못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걸.”
“도령, 정령을 봤어? 어땠어? 내가 예전에 본 정령은 분홍색깔 갈치였어! 아니, 이게 아니지. 그렇다면 도령도 잘 모른단 거지?”
녹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방금 녹은 진실을 교묘히 섞은 거짓이 신빙성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맞아. 열매가 열릴 준비를 하는 세계수의 주변에 해독하지 못하는 기적이 남발할 시기가 있다고 했어. 지금이 그때인가? 그러면 왜 나한테만 보였을까?”
“그보다 하진아. 홍화 저에서 세계수의 열매를 본 적 있어?”
“응? 세계수? 나는 홍화 저에서 가벼운 심부름만 한다니까? 세계수를 실제로 본 마법사도 하가에서 손에 꼽는데, 어찌 나 같은 심부름꾼 아이에게 순서가 돌아가겠어. 그저 홍화 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말이나 주워듣는 거지.”
하진이 요새 홍화 저에서 하는 심부름이 열매에 관한 심부름이 아닌 걸까? 말하는 폼이 거짓은 아니어 보였다.
“그럼 요새 왜 그렇게 상처가 많은 거야?”
“도령. 사실 평생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도령이 하홍에게까지 찾아가서 말할 정도면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 같아서 고백할게. 사실 내가 요새 훈련하다가 정신을 빼먹는 날이 많아져서 그때 생긴 상처야. 못난 스승의 모습 보여 주기 싫었는데 결국 고하게 되네.”
하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물없이 웃었다. 거짓말 아니냐고 반사적으로 말하려던 녹은 그녀의 거짓 없는 순수한 눈빛에 아리송해졌다.
‘정말인가?’
하진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안 될 일도 아니긴 했다. 하진은 의심이 깃들었다가 사라지고, 생겨났다 없어지는 녹의 눈동자를 보며 뒷걸음질했다.
“여하간 도령도 그자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지. 알았어. 그자에게 인사나 하고 싶었는데…… 나는 잠시 할 일이 더 남아서. 이따가 봐, 도령!”
녹이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하진은 쌩 하니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녹이 뭐라고 하기 전에 튀는 모양새였다. 이상한 점은, 하진의 그림자의 일부가 하진을 쫓아가지 않고 덩그러니 녹의 앞에 있단 점이다. 하진을 붙잡으려 했던 녹은 자신의 앞에 있는 그림자 조각에 정신이 팔려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둥그런 그림자 조각이 꿈틀거렸다. 녹은 그에 맞춰 한 발짝 뒤로 물러났으나, 튀어나온 그림자 조각이 쏜살같이 녹의 발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발부터 시작하여 다리, 허리를 지나 목까지 싸늘한 원통형 바람이 훑는 느낌에 녹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목 부근까지 올라온 그림자를 더듬어 보니 무언가가 잡혔다. 분명 자신에게 올라오고 있던 건 그림자였는데? 그림자도 부피가 있던가?
복잡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녹은 목에 감긴 그 차갑고 매끈한 무언가를 잡아 뜯었다. 허나 힘을 주고 당겨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녹은 보다 더한 힘을 주기 위해 몇 배 더 강한 악력을 행한 순간, 목에 있는 정체불명의 그림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정체를 밝혀내었다.
- 아앗! 나다, 나다. 아이야!
아는 목소리가 나왔다. 녹은 재빠르게 손을 풀어내었다. 그러자 서서히 시야를 향해 떠오르는 하얀 뱀의 둥근 머리. 하얀 머리는 녹의 코앞에서 머리를 흔들흔들 털어 내고는 감은 눈을 떠내 머리에 박힌 붉은 눈을 드러내었다.
- 하,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손이 맵기는 하구나. 오랜만이다.
홍의 오두막에서 제일 처음 만난 변덕스러운 정령, 사한이었다.
- 그간 잘 지냈느뇨? 얼굴 보니까 그때와 변한 건 없어 보이는구나.
정령은 산뜻하게 물었다. 녹은 이 뻔뻔한 정령에게 사감이 많았다. 결국 녹은 목에다가 신성한 흰 뱀을 감고서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뭐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먼저다.
“변한 건 없습니다만, 사한 때문에 제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뻔했지 않습니까.”
- 그건 미안했다. 하하. 급한 일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지 뭐냐.
사한이 능청스럽게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결국 자신이 하가에 복귀하지 못할 뻔했던 건 흰 뱀의 어떠한 착오 때문이었다고 한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올 뻔했지만, 녹은 그 응어리를 재빨리 삼켰다.
첫 만남 때도 세계수가 하가를 선택한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했던 사한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다음에 만나면 알려 준다고 했었지. 지금이 그때인가? 녹은 일단 그를 제쳐 두고 뒤로 넘어갈 정도로 놀라게 튀어나온 사한을 타박했다.
“여하간 하진이에게 언제부터 붙어 계셨던 겁니까. 하진이 그림자가 튀어나와서 제 간도 같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제가 안 놀라는 방향으로 등장하실 수는 없는 겁니까.”
- 그 전에, 네가 친해 보이던 그 아이의 말 말이다. 너는 깨끗이 신뢰하느냐?
사한은 자신을 탓하고 있던 녹의 말을 알 수 없는 언사로 끊어 냈다.
“신뢰라니요? 하진이 말씀입니까?”
- 그래, 그 아이가 홍화 저에서 한 일과 다친 이유에 대해 한 말 말이다.
“하진이는 거짓말하면 티 나는 아이입니다. 그렇기에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그 주제를 꺼내지 않는 걸 택하는 아이지요. 제가 봤을 때도 하진이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왜 물으십니까?”
- 이런, 아주 단단히 믿고 있구나.
흰 뱀이 고개를 흔들며 웃어 댔다. 그의 웃음에 녹의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피어났다. 정령은 무언가 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녹보다 하진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아니, 전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대체 뭡니까?”
- 때론 진실과 사실은 다른 법이지. 그 아이가 말한 것이 진실일 수는 있겠으나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게 대체 무슨…!”
녹의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는 건 홍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러한 대상은 방금 하나 더 늘어났다. 진실과 사실이 다르단 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진에게 초점이 맞춰진 주제에, 사한이 말해 준다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쏙 들어가 버렸다.
녹은 무슨 말이냐고 더 묻기도 전에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을의 시장가야 워낙에 특이한 생물이 공기처럼 돌아다녀서 시선을 받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마주치는 아이들의 눈이 자신의 목에 하나둘 꽂히는 걸 깨달은 녹은 경보하듯 한달음에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사한은 녹의 목에서 스르르 내려와 방의 한가운데에 똬리를 틀었다. 방 중심에 자리를 잡은 사한은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며 녹의 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치 주변을 구경하고 관찰하기 위해 태어난 뱀 같았다. 새로운 곳만 가면 정신 잃고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보는 꼴이 그러했다.
- 예상은 했지만 특혜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구나. 가주의 친자식이라도 마력이 없으면 얄짤 없다는 건가. 다른 아이들 처소도 모두 이러느냐?
“보통 아이들은 한 방에서 두 명씩 같이 지내요. 특출한 능력도 없는데 독방이면 나쁘지 않게 지내는 것일 겁니다.”
- 에잉. 그게 어찌 특혜냐. 그냥 너랑 같이 지내고 싶은 아이들이 없으니까 자동으로 그리된 게 아니더냐? 보니까 너에게 인사를 하는 아이들이 없더구나. 너 친구 없냐?
못된 뱀이 녹의 아픈 곳을 찔러 댔다. 아무리 같은 심부름꾼 아이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녹의 위치는 그들과 달리 애매했다. 녹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는 보통 그를 괴롭히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요새야 어릴 적과 달리 녹을 괴롭히는 자는 한 명 빼고 없었지만 말이다.
자신에게 제 일을 떠맡기는 게 취미였던 그 아이, 저번에 제 심부름을 녹에게 떠넘겼던 그 아이 또한 이제는 없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심부름하러 다녀온 후 며칠 뒤에 급히 독립한다고 짐을 싸 나갔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조차 모르게 조용히 출가하여 그 무리가 한동안 웅성거렸던 걸 녹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가에 뼈를 묻겠다는 야망이 넘치던 아이였기에 어째서 하가를 떠났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자꾸 건드리던 아이인지라 녹의 입장에선 그의 퇴장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여하간 그가 사라진 후, 녹을 찔러 대던 아이들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녹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입가에 가져다 대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분위기를 반전해 보려는 일련의 시도를 끝마친 후, 녹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저도 친구 있습니다. 그 친구 그림자에 숨어서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보다 하진이의 말을 믿느냐는 둥, 진실과 사실이 다른 경우가 있다는 둥. 그건 무슨 소리이십니까?”
어느새 똬리를 풀고 녹이 아무렇게나 쌓아 둔 이불 더미를 뾰족한 주둥이로 툭툭 건들고 있던 사한이었다. 사한은 이불 사이로 기어 들어가서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뱀은 이불 사이가 짐짓 마음에 드는 듯, 떠나지 않고 꾸물거리며 대답했다.
- 이불이 그리 따듯하지 않구나. 솜이 좀 죽은 것 같은데. 이제 곧 겨울이니 따뜻하게 보내야지.
모른 체하며 말을 바꾸는 꼴이 능청스러웠다. 기막힌 녹이 몇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오색의 나비가 이불을 빼곡하게 감쌌다. 3초 정도 붙어 있던 나비들은 순식간에 날아올라 천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오. 이젠 좀 쓸 만해졌구나. 솜 좀 더 넣어 봤다. 우리 귀한 분께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지.
드러난 이불은 전의 부피보다 두 배는 부풀어 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짐승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녹이었지만, 흰 뱀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인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이불 안에 있는 솜을 두 배로 틀어넣은 사한은 이불 사이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와 녹의 앞에 다가갔다.
- 어디 보자.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그래, 하진이란 아이의 발언부터겠지. 내 보금자리는 세계수의 오른 뿌리 밑 땅굴이다. 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느냐?
“……세계수를 본 적이 있다?”
- 뭔…… 당연한 소리를 정답인 듯 말하지 말아라. 들어 본 중 제일 실없는 대답이구나.
‘어쩌란 거지.’
포괄적인 질문에 확신할 수 있는 정답을 고해바쳤더니 돌아온 건 타박이었다. 어이없어진 녹은 입 다무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뱀은 더는 묻지 않고 정답을 실토했다.
- 세계수를 이용하는 하가 마법사들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단 거다. 내가 그 아이를 알고 있는 것도 그 아이가 내 집 앞에서 얼쩡거렸기 때문이지.
“네? 하지만 하진이는 세계수를 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요?”
- 그래,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 아이의 진실이 그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사들의 집이란 걸 기억해라. 기억 자체를 건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다.
녹의 머리가 댕 하니 울렸다. 그렇다면 홍화 저에 갈 때마다 하진의 기억이 삭제됐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하진은 홍화 저에서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손쉬운 심부름만 했다고 했다. 사한은 이불 밖으로 나와 바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한이 응시한 바닥에서 또다시 응집된 나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흩어지며 사라지는 나비들 사이로 눈에 익은 목검 하나가 나타났다. 잘 관리되어 매끈한 목검의 손잡이 끝에는 ‘검의 길’이란 뜻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도도?”
- 기억 소거 당한 부작용인지 뭔지 몰라도 아이가 가끔씩 세계수 주변에 이걸 잊고 가더구나. 중요해 보이는 건데 말이야. 방금도 세계수 근처에다가 떨구고 가서 돌려주려 그림자에 숨어든 거였다. 아이가 뭘 놓고 가든 나야 신경을 끄고 살았겠지만…… 숲의 아이들이 아이에게 이걸 되돌려 달라고 성화여서 말이야. 결국 아이의 근처에 슬쩍 두고 나오는 일만 해도 몇 번째인지.
녹은 목검을 들어 자세히 살폈다. 진짜 도도였다. 그러고 보니 장로와 하홍을 마주쳤다는 그녀의 손은 빈손이었지. 도도를 가족처럼 집착하는 하진이 도도를 잊고 나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마법’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선 마법의 부작용이겠지만, 여하간 하진의 기억에 무언가 적신호가 뜬 건 맞았다. 녹은 심각하게 물었다.
“그럼 왜 그들이 하진의 기억을 지운 건데요?”
- 드디어 본론이구나. 그들이 마력이 없는 아이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진행하기 때문이지. 그 실험이란 게 편안하지만은 아니한 거라서 말이다. 아이들이 실험에 거부감을 느끼기 전에 기억을 아예 삭제시키는 거지. 세계수에 열매가 열리며 이상 현상이 도드라졌어. 이상 현상을 이용해 웬만한 뻘짓은 다 하고 다니더구나.
사한이 말한 사실은 와닿지도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편안한 실험은 아니라서 기억을 삭제시킨다니. 그렇다면 하진은 대체 어떤 실험을 당한단 건가.
- 보통 거기에서 일어난 상처는 마법으로 치료해 주지만 요새는 일손이 부족해 웬만한 상처는 그냥 보내는 것 같았다.
상처가 생길 만큼의 실험이라니, 그것도 아이들을 상대로! 마법사를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말이지 비인간적인 실험이란 냄새가 폴폴 풍겼다. 말라 가는 입안에 녹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정확히 어떤 실험인데 그래요?”
하가의 마법사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대체 무엇인가. 하진이 다치고 발이 삔 것도 아닌데 자꾸 헛디디는 이유는? 사한의 말대로 모두 홍화 저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걸까? 하긴, 운동 신경으로는 누구한테 지지 않는 하진이 잡일을 하다가 자잘하게 다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했다.
녹은 진중한 얼굴로 사한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 그거야…….
그 하얀 짐승 또한 녹의 집중에 보답하듯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발화했다.
- 나도 잘 모르지.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사한의 주둥이에선 실없는 소리만 나왔다. 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이 와중에 농담하나?’
“잘 모르신다고요?”
- 그래. 잘 모른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실험이 뭐니 하셨잖아요. 잘 아시니까 그러신 거 아니에요?”
- 내가 언제 잘 안다느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느뇨? 낌새가 느껴진다는 거지 내가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 내가 정확히 그치들이 뭘 하는지 잘 알지는 못하나, 대강 무언가를 벌이고 있다는 건 예상할 수 있지. 마력이 전무한 아이들의 출현과 식신의 기이한 행동은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럼 보셨다는 거 아니에요?”
- 내 공사도 다망해서 말이다. 항상 세계수 근처에 있지 않아. 그렇기에 아이들이 우르르 있는 걸 목격한 건 단 한 번이었다. 그것도 세계수의 열매를 이용한 일을 벌이는 것 같더구나. 마력이 넘치는 이들도 세계수 근처에서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가오는 걸 쉬이 허락받지 못하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니 신기해서 좀 들여다보았지. 하지만 그날은 아이들에게 기억 소거하는 장면만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몸도 멀쩡하고 말이지.
“그럼 하진이는요? 하진이도 거기서 보셨어요?”
- 당연한 소리. 지금까지 뭘 들은 게냐. 그 녀석은 그중 더 특이해. 그 이후로도 세계수 근처에서 간간이 보여. 그것도 마법사 없이 말이야. 그리고 숲의 아이들이 말하길 다섯에 둘 정도는 이 검을 깜빡 잊고 떠나 버린다고 하더구나. 소거 마법의 부작용인 듯하다. 덕분에 나만 귀찮게 됐지.
뱀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단호한 끄떡임에서 무구함이 느껴지긴 했다. 확실히 녹의 손안에서 묵직하니 무게감을 내뿜고 있는 검이 사한의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였다.
‘기억을 잊었다고…….’
하가 안에 있는 그 나무는 저 스스로 결계를 쳐서 모습을 숨긴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권리 일체를 하 가주에게 맡겨 버린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가주의 허락을 받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세계수로 유명한 하가의 마법사들도 세계수를 직접 본 이가 손에 꼽는다. 아무리 고위 마법사들의 관심을 받는 하진이라도 세계수 근처를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갔다니. 무언가 분명 있다.
게다가 거기서 나올 때마다 기억 소거 마법을 받는다면…… 홍화 저에서 무얼 하는지 물었을 때마다 하진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가벼운 일이라고 대답했던 게 이해가 된다. 하진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가벼운 일을 한 게 아니라, 정말 아무런 기억이 없던 거다.
한참을 제 세상에서 생각에 빠져 정리하던 녹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어느새 녹의 정수리까지 올라갔던 사한의 머리가 그 반동에 통- 하고 허공에 띄워졌다가 떨어졌다. 뱀은 괜히 아픈 척을 했다.
- 아이고. 네 머리가 푹신해서 망정이지 사고 날 뻔했다! 머리 좀 조심해서 운전-
“그럼 그냥 하진이 데리고 하가를 나가는 게 훨씬 낫지 않나?”
- ……뭐라고 했느뇨?
녹은 사한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도도를 들고 닫았던 방문을 덜컥 열었다. 순식간에 찬 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훑고 녹과 사한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녹은 개의치 않았다. 사한만이 머리를 한 번 떨 뿐이었다.
녹은 신을 신고 거침없이 정면으로 나아갔다. 하얀 뱀을 머리에 인 소년의 모습은 확연히 눈길을 끌었다. 원체 눈길을 끄는 아이였다만, 보기 드문 하얀 생물까지 더해지니, 길을 나아갈수록 달라붙는 시선이 배로 증가했다.
처음과 달리, 그들의 시선을 불편해하는 건 사한이 되었다. 아이들의 이목을 한 몸에 끈 사한은 둘레둘레 돌아보며 녹의 옷 속으로 숨어 자신의 모습을 그들로부터 차단했다. 사한이 녹의 옷 속에서 외쳤다.
- 정신 빼먹고 어디를 가는 게냐!
“하진이에게 갑니다. 기억 소거를 하지 않으면 거부감이 들 정도의 실험이라는데, 좋지 않은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혹여 그러다 잘못되기 전에 지원금 받아 독립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하가는 출가하려 하는 아이들에 대해 제재를 안 하는 편이니까요.”
- 아니 그걸-
“도령! 무시무시한 기세로 어디 가?”
구석진 나무에서 마침 찾고 있던 인물이 사과 한 알을 씹으며 떨어졌다. 보아하니 하진은 나무에 올라 쉬고 있던 참에 녹을 보고 내려온 듯했다. 하진의 처소로 가기 전에 발견해서 운이 좋았다. 그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은 거기에 비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이 한적했다. 하진은 녹의 손에 들린 도도를 보고 반색하며 다가갔다.
“앗, 도도다! 내가 어디서 흘렸나? 이게 왜 도령한테 있지? 어디서 찾았어?”
어리둥절해하는 하진을 보니 확실하다. 하진은 기억을 잃은 거다. 녹은 하진에게 도도를 넘기며 마음 한구석에 있던 고민에 결단을 내렸다. 독립해야 한다!
“하진아! 우리 오늘 독립하자!”
“응?”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지. 하진의 얼굴에 피어오른 표정은 바로 그거였다. 녹은 자신이 갑자기 미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주르륵 정리하여 말했다. 수상한 홍화 저와 정령들, 그리고 자꾸만 불행이 하진에게 달라붙는 이유에 대한 추측들. 사한이란 정령의 추측 등.
진지하게 녹의 말을 듣던 하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내가 마법사들에 의해서 무슨 실험을 당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렇다니까?”
“하지만 난 진짜 홍화 저에서 가벼운 잡일들밖에 안 하는데?”
“기억 안 날 정도로. 맞지?”
“그거야 단순 반복 업무만 반복하니까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지루한 게 맞긴 하지만…… 그건 뒤로하고, 나를 세계수 근처에서 본 적이 있다고? 누가?”
“그건 이 사한이라는 정령이……!”
녹은 자신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사한을 꺼내 하진에게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어디에서도 사한이 잡히지 않았다! 당황한 녹은 상체부터 시작해서 다리까지 꼼꼼하게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리 열정적인 몸짓에도 불구하고 걸리는 건 없었다.
‘꼭 필요할 때마다 사라져요!’
“혹시 말이야…….”
그 우스운 꼴을 보던 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열매가 열리면서 별 기괴한 생물이 하가에서 튀어나온다고 했는데, 그중 요정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장난치는 걸 좋아한대. 그것도 장난칠 인간의 걱정거리를 꼭 집어서 그럴듯하게 말로 포장해 속여 넘기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도도도 요정이 마음잡고 장난치면 충분히 빼돌릴 수 있을 거 같기도 해. 혹시 도령도 요정한테 속은 거 아니야?”
“뭐?”
“그도 그럴 게 나는 진짜 세계수를 본 적도 없고 간 적도 없는걸. 홍화 저에서 기억 안 날 정도라고 했던 것도 그냥 관념적인 표현이었고…… 게다가 홍화 저에 심부름하러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걱정하지 마. 도령. 아무래도 도령이 내가 자꾸 다쳐 오는 걸 걱정하다 보니 요정이 속였나 봐.”
“아니, 정말인데……! 내가 말했던 흰 뱀은 요정이 아니라 홍 도련님 오두막에서도 봤던 정령이고, 또 너의 도도도-”
“하진아! 스승님 호출이야!”
“앗, 응! 도령. 남은 얘기는 이따가 해.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도도 찾아 줘서 고마워!”
하진의 처소 쪽에서 손을 흔들며 달려온 소녀가 그녀를 향해 소리치자, 하진 또한 손을 마주 흔들어 주며 녹에게 짤막한 인사를 하고 달려갔다. 결국 하진을 만났으나 별 소득 없이 대화가 끝나 버렸다. 녹은 멀어지는 하진의 뒷모습을 미련을 뚝뚝 흘리며 쳐다보았다.
- 내 이럴 줄 알았다. 세계수 근처는 워낙에 사기꾼 행세를 하는 생물이 많아서 말이지. 요정들이 아타움 만든다고 윙윙거리며 돌아다닐 때 알아봤다.
어느새 나타난 사한이 얄밉게 녹의 머리를 손오공의 금관처럼 감쌌다. 녹은 천천히 손을 올려 사한의 몸통을 쥐었다. 지극히 감정이 담긴 그 손짓의 속도는, 며칠 굶은 표범의 그것이었다. 일순 몸통의 중간을 잡혀 버린 사한이 녹의 의도에 따라 그의 머리에서 떼어졌다. 녹의 눈빛이 자못 살벌하다.
- 켁. 무슨 짓이느뇨……!
“필요할 때마다 안 계시네요. 혹시 진짜 하진이 말처럼 요정이라거나…….”
순간 사한의 몸뚱아리가 나비들로 화해 사라졌다. 녹은 자신의 주먹 안이 비어 가는 것에 눈썹을 올렸다.
- 진정해라. 내 참. 요정 따위랑 나랑 비교하다니. 무엄하지만 너니까 넘어가 주마. 여하간 난 전에 말했던 것처럼 정령이 맞다. 몸을 숨긴 이유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하마. 너와 달리 마법사와 교류가 많은 아이다. 괜히 내 모습을 드러내서 좋을 거 하나 없어.
“하지만 오두막에서는……!”
- 홍 말하는 거냐? 걔야 뭐, 정령에게 호의적인 편이니 상관없다. 하지만 하가의 인원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식신을 삼켜 버리는 정령들에게 호의적이긴 힘들지. 그저 마력이 넘치니 놔두는 것뿐. 그들의 눈빛을 볼 때마다 불쾌하단 말이다. 에잉.
사한이 녹의 목을 다시 감쌌다. 역시나 뱀의 질량은 느껴지지 않고 시원함 바람의 감각만이 녹의 목 주변을 지배했다. 정령들은 다 이런가?
- 여하간 저 아이를 무조건 밖으로 데리고 간다고 능사도 아니다. 마법사들이 무슨 실험을 했을 줄 알고 몸만 빠져나가느뇨? 실험에 대한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피신만 한다고 다 끝난 게 아니야.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괜히 잘못되기 전에 얼른 빼 오고 싶은데요!”
- 일단 실험이 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할 거고…… 그리고 그 실험을 해석할 유능한 마법사 한 명 또한 필요하겠구나. 혹 너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자를 아느냐?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했다.
- 믿을 만하고 실력 있는 자라. 내가 말해 놓고 웃기긴 하구나. 솔직히 믿을 만한 마법사라는 단어 자체가 수수께끼지. 내가 너에게 마법사는 믿지 말라고 한 존재이거늘.
“실력 있는 자라면 실험에 대한 정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자를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지. 실험에 대한 자료 전반을 안다고 하더라도 까막눈이면 알 수 없으니. 그러한 자를 찾아낸다면 내 도와주마.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열매 근처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점과 그 아이들의 기억을 소거시킨다는 것뿐이다. 그 실험에 대한 정보를 모아 둔 곳은 분명 하가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야. 바람의 협력을 받는다면 그 장소뿐만 아니라 정보까지 그럭저럭 알아낼 수 있을 거다.
그 말을 하는 사한에게 이미 체념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가에 잠입하여 어찌저찌 정보를 빼내 온다고 하여도 그 정보를 소화할 인물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사한이 말했던 대로 믿을 만한 마법사 자체가 모순이자 불가능이었다. 칠월의 폭설이었고, 십이월의 폭염이었다.
녹은 사한의 기색을 살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인 이 뱀은 빈말을 하지 않는 듯했다. 믿을 만한 마법사가 없어 도와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진심 같았다.
“제가 그런 자를 데려오기만 한다면 도와주시는 거죠?”
- 물론이다. 나도 마법사들이 열매를 이용해 하는 일이 인륜을 저버린 뻘짓인지 아닌지 알아…… 잠깐.
힘차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잇던 사한은 본인이 하던 말을 자르고 하늘을 응시했다. 심상치 않은 눈빛에 녹 또한 그가 올려다본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번 저잣거리 때와 똑같은 하늘이었다. 구름도, 새도, 모두 둥실둥실 떠다니는 푸른 하늘.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말까지 잃어버렸는가.
- 내가 저번에 잘못 본 게 아니었나? 언젠가 다시 오마. 그동안 믿을 만한 자를 알아보면 딱 좋겠구나.
“네? 언젠가요? 잠깐마….”
사한은 녹의 어이없는 되물음까지 듣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불시에 하늘을 보고 어리둥절하며 사라지는 꼴이 저번과 같았다. 녹이 하가 밖이 아닌 안에 있다는 것만이 다르고, 또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녹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미약하나 사한으로 인해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만일 사한이 예상한 그 실험이 진실이라면, 사한이 줄 수 있다는 도움의 크기는 클 것이다.
만일 그 실험이란 게 사실이 아니라면, 하가에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사한이 자신을 속이는 요정이라고 할지라도 하진의 안전만 확신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속아 넘어가 줄 의향이 있었다. 요모조모 녹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녹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며 ‘믿을 만한 실력 있는’ 자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분명 사한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자는…….
❊ ❊ ❊
“실험이요?”
“네. 하진이 다친 이유가 마법사들이 비밀리에 열매를 이용해 벌이는 실험 때문일 수도 있대요.”
도언은 사한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때맞춰 나타났다. 녹이 산더미처럼 쌓인 식기를 짚솔로 닦고 있을 때였다. 녹은 도언이 나타나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녹을 은근히 괴롭히던 아이가 독립한 이래로, 주변에서 녹을 괴롭히려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이들이 무엇을 오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말없이 독립한 이유를 녹의 존재와 연결해 결론지었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덕분에 녹의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이는 하진과 홍뿐이었다.
덕분에 도언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괜히 소리 죽여 입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주변에 큰 관심이 없는 녹일지라도, 아이들에게 드디어 녹이 외로움에 파묻혀 혼잣말로 없는 상대와 대화한다는 둥, 정신 나갔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녹은 편하게 도언에게 자초지종에 관해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도언이 한쪽 얼굴을 손바닥을 덮어 가리며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얘기는 윗선님께서 알려 주신 게 되겠군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녹의 대답을 들은 도언은 참담하게 눈을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이 이야기를 기억을 잃은 아이가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하진의 그림자에 사한이 숨어 있던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아직도 얼굴을 손에 비비고 있던 도언이 녹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제가 피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조합이었습니다. 그 아이와 대정령이라니요.”
도언은 자신이 그 자리를 피한 이유를 읊었지만 녹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마법사들은 보통 그림자에 숨어든 정령을 저리 쉽게 알아채나?’
아마 아닐 거다. 사한이 하진의 그림자에 숨어든 곳이 세계수 근처라고 했었다. 만일 보통의 마법사들이 정령의 기운을 저리도 쉽게 느낄 수 있는 거라면, 하진에게 기억 소거를 걸 때 이미 알아챘을 거다. 그때가 하진과 마법사가 가장 가까워질 순간이니까.
그리고 예민한 마법사들은 마법을 걸기 전 하진의 그림자에서 사한을 쫓아냈겠지. 물론 쫓겨나는 그런 짓을 대정령이라고 주장하는 사한이 감수했을 리가 없다. 완벽하게 은신했다는 소리다.
허나 도언은 그녀가 나타나기도 전에 하진과 사한을 감지하여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 한 조각의 사실만으로 그의 실력은 증명되었다. 심지어 이동 방해 결계가 쳐진 하가의 담벼락도 마법으로 손쉽게 넘었다! 결국 도언은 아는 사람 몇 없는 녹이 떠올린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믿을 만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가 사한을 피하는 게 걸리긴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시기임에는 분명했다.
‘일단은 말이라도 해 보자.’
“저기, 형. 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요.”
“뭡니까?”
“사한이 그랬는데, 실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자가 필요하대요.”
“네. 그래서요?”
“그걸 좀 형이 맡아 주시면…….”
“이런. 결국 이렇게 진행되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도언이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영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대답이었다. 아니, 거절의 말미를 들어 버렸다. 조급해진 녹은 도언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이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안녕이라고 하셨잖아요. 제 안녕은 하진의 안녕과 같아요. 하진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네? 형…….”
녹은 두 손을 모아 꼭 잡고서 애처롭게 도언의 눈을 맞췄다. 칼바람 쏟아지는 한겨울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에게 온정을 베푸는 행인을 바라보는 새끼 고양이의 눈이었다.
그 굉장한 효과에 도언은 입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다. 녹이 도언이 뒷걸음한 만큼 다가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아니, 도언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녹의 모습이었다. 결국 도언은 자기도 모르게 미약한 반경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우와!! 정말 감사해요. 형!!”
그 작은 끄떡임을 잡아내어 저 좋을 대로 해석해 버린 녹 덕분에 도언은 꼼짝없이 사한의 무리에 입성했다. 도언은 방방 뛰며 좋아하는 녹을 방해할 수 없어 그의 의도를 정정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녹의 행복을 직접 목도하며 도언은 한숨을 내뱉듯 생각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 ❊ ❊
“아니요. 이대로도 괜찮지 않습니다. 정말요.”
무수한 정보를 해소하던 녹은 피곤했는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요를 깔고 곯아떨어진 참이었다.
도언은 깊게 잠든 그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자신의 의견에 반대의 뜻을 내는 부하를 향해 대꾸했다.
“어차피 한바탕 꿈이잖아.”
“그 하녹의 꿈이라서 문제예요. 잘 아시잖아요. 그 나무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고요. 일할 때는 기계처럼 진행하시는 분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시니까 적응 안 되네요.”
방의 벽에 붙어 있는 갈색 머리칼의 청년이 있는 힘껏 툴툴댔다. 그는 일의 진행 방향이 못마땅하다는 듯 푸른 눈을 깜빡였다. 녹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주던 도언이 읊조리듯 말했다.
“이도 그저 한순간일 텐데. 녹이 행복한 꿈을 꿀 수는 없는 걸까.”
“그러다가 꿈에서 깨면 뒷감당은 어찌하시려고요. 여기서 평생 사실 거예요? 그러다가 녹 님이 자신의 꿈 안에 갇혀 있단 걸 자각이라도 하면요? 아이고~ 도언 씨, 저를 행복한 꿈속에서 헤매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실 것 같아요? 달콤한 꿈에서 날카로운 현실로 돌아오면 고통은 배라는 걸 잘 아시는 분이 그러시네요.”
도언은 제 부하, 청연의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녹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머리맡에서 이런 대화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녹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도언의 마음 한구석에 사무쳤다.
도언의 침묵에 괜히 찔린 청연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어차피 잘하실 건 아는데, 괜히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까 돌아가서 저한테 막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저도 사한 쫓아내느라고 고생한 거 알아주셔야 해요. 저 덕분에 녹 말고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잖아요.”
“아니. 사한 말고도 한 명에게 모습을 들켰다.”
“네??”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청연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자신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리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아 버린 청연이었다. 하지만 후속 조치가 무색하게 청연의 큰 소리는 녹의 귀로 들어갔다.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녹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녹이 뒤척거리며 일어나려 하자, 도언이 그의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쉬이. 괜찮습니다.”
꿈틀거리며 힘을 두고 있던 녹의 눈썹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녹은 다시 수마에 몸을 맡겼다. 손에 땀을 쥐고 그를 바라보던 청연이 도언을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되레 제가 흥분해 버렸네요.”
청연이 이마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체…… 대체 누구에게 들키신 겁니까? 다른 정령이 있었습니까?”
도언은 청연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덕분에 방 안에 들리는 건 녹의 고른 숨소리밖에 없었다. 들숨, 날숨. 쌕쌕이는 생명의 소리. 밤이 주는 안식의 평화. 그를 가만가만 듣고 있던 도언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입안에서 맴돌던 단어를 툭 내뱉었다.
“내 과거의 편린.”
❊ ❊ ❊
‘부탁을 들어드리기는 하겠으나, 조건이 있습니다. 사한과 저는 마주쳐서는 안 됩니다. 만일 사한이 저에 대해 물으신다면…… 녹이 저에 대해 뭐라고 했었죠? 아. 꿈 여행자요. 네. 하가의 꿈 여행자라고 대답해 주세요. 꽤 괜찮은 신분이군요.’
녹은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녹에게 가장 중요한 건 하진의 신변이었기에 그 이외의 것은 손쉽게 신경을 껐다.
도언이 한순간에 사라진 후, 곧이어 사한이 나타났다. 물론 도언이 의도적으로 사한이 나타날 때 사라진다는 걸 알았지만, 녹은 선택지가 없었다. 자신의 주변에 도언이 없으면 사한이 있고 사한이 없으면 도언이 있다. 사한은 도언의 존재를 모르지만 도언은 사한의 존재를 알고 있다. 녹은 자연스럽게 제 목을 감으며 나타난 하얀 뱀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저번보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네요.”
- 그렇게 되었다. 기대는 안 되지만 물어보기나 하자. 믿을 만한 사람은…….
“구했어요. 실력 보증은 확실해요. 사한 대신에 하가의 담벼락을 넘게 해 준 인물이니까요.”
- 뭐? 하가 담벼락에 결계가 있었다고? 혹시 가주의 양아들이더냐?
사한이 예상하고 말하는 자는 홍일 거다. 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가의 꿈 여행자라고 알고 있어요.”
꿈 여행자란 붕 뜨는 신분이었다. 꿈속의 과거에 물리적으로 귀속되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적을 둔 인물은 아니다. 꿈 여행자란 요정도, 정령도, 알 수 없는 세계수의 기적과 같은 현상이었다.
- 꿈 여행자? 그렇다면 미래의 하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겠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사한한테는 비밀이래요.”
뱀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불신이 순식간에 샘솟는구나. 비밀이 많은 자치고 믿을 수 있는 이는 없었거늘.
녹은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도언의 존재가 사한에게 통과되지 않으면 실험의 내용을 알아보자는 의견이 불발될 수 있었다. 하진의 신변이 최고로 중요한 녹에게는 그보다 좋지 않은 결말이 없었다.
“여행자잖아요. 말 그대로,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요. 어차피 자신이 아는 과거와 다른 흐름으로 가자마자 꿈에서 깨어나며 이곳에서 벗어날 텐데, 비밀이 많은 것도 이곳에 오래 있고 싶으신 마음이 만들어 낸 거겠죠.”
녹의 말은 모두 일리 있었다. 보통 꿈 여행자들은 그런 이유로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았다. 녹은 사한에게 말하며 의아함을 느꼈다.
‘나에게는 이름을 알려 주는데 어째서 사한에겐 숨기는 거지?’
자신은 과거의 도언을 알지 못하지만 사한은 과거의 도언을 안다는 걸까? 어차피 사한과 만나지 않겠다고 못 박아 둔 도언이었다. 그렇다면 이름 정도는 말해도 되는 게 아닌가. 대체 과거 하가에서 어떻게 지내었길래 사한에게 꽁꽁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지 모를 일이다.
도언의 정체를 추론하는 녹이 복잡한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지기 전에, 사한이 그의 정신을 날벼락같은 소리로 정신 차리게 했다.
- 그도 그렇긴 하구나. 여하간 그가 너에게만 모습을 허락한다니. 의아하긴 하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시대에 너와 친한 자라면 말이야. 꿈 여행자라면 과거의 한에게 가서 붙기 마련이니까. 보통 과거의 자신에게 붙는데 너에게 붙는 게 좀 희한하긴 하구나.
“한이요? 제가 그의 한이라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 제대로 들었구나. 여하간 너가 그 이름 모를 자의 한이라면 너의 편이긴 하겠구나. 보통 그들이 가지는 아쉬움은 못 해 줌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못 함’이 아닌 ‘못 해 줌’. 걔를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가 아닌 걔를 호강시켜 주지 못해서 한이다- 정도의 감정 말이다. 만일 부정적인 한이라면 꿈 여행자가 아닌 꿈 살해자가 별칭이 되었을 거다.
사한이 목을 타고 올라와 녹의 머리를 휘감으며 폭탄선언을 이었다.
- 여하간 너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꿈 여행자라면 비밀이 많아도 상관없겠지. 고로 지금 바로 홍화 저에 간다.
“네??”
- 꿈 여행자인데 이름을 숨긴다니. 정령의 앞에서 이름을 숨기는 자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혹 그자가 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싫다고 하였느냐.
“어, 네…….”
- 흥. 척하면 척이느뇨.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얼른 홍화 저 안으로 들어가서 자료를 확보하고 나오면 될 일이다. 꾸물거릴수록 좋지 않아. 더 이상 올 자가 없다면 바로 지금 떠난다.
“허나 적어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더 낫지….”
성격 급한 사한은 녹의 의견을 묵살했다. 아니지, 묵살하기도 전에 행동했다. 녹의 발끝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청량한 기운의 나비가 달라붙는가 싶더니,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리고 2초. 녹은 눈 속에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느끼고 슬며시 눈을 떴다.
시야를 가린 청록색 나비가 팔랑거리며 공중으로 날아갔다가 사라졌다. 녹이 서 있는 곳은 방금 전에 있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였다. 아무도 없는 거대한 가옥의 복도. 그 가운데에 녹은 사한과 함께 멀뚱히 서 있었다.
천장은 높았으며 벽벽마다 화려하게 세공된 등이 달려 있었다. 등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가치가 높아 보이는 족자가 다섯 걸음마다 하나씩 걸려 있었다. 화려한 그림과 소박한 그림의 조화로 미묘하게 어우러진 복도 풍경은 그 무수한 미술품에도 불구하고 단정했다. 다들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고 있는데 어째서 조화로운지 녹은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실내에 시선을 빼앗긴 녹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한에게 툴툴댔다.
“사한. 저번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동하기 전에 말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 다음부터는 그러도록 하마.
녹은 그의 영혼 없는 어투를 듣고 기대를 포기했다.
“그나저나 여긴… 홍화 저 안인가요?”
- 그렇다. 정보를 중한 한곳에 모아 두는 마법사들의 습성은 예로부터 변한 게 없을 테지. 아마 결계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을 거다. 일단 저쪽이 수상하니 오른쪽으로 가 보자꾸나.
녹은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일자 형태의 복도는 과장 좀 보태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고, 간간이 나 있는 문은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녹은 싸움이 일어나는 듯 큰 소리가 나는 문을 조용히 지나가며 사한에게 속삭였다.
“만약 이러다가 마법사에게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바깥으로 다시 옮겨 주실 거죠?”
- 아니? 홍화 저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데 힘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어. 힘을 보충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게다.
“네??”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마실 오듯 가볍게 넘어왔길래 당연히 손쉽게 건너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만일 사한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더라면 적어도 바깥에서 행동 방향 정도는 설정하고 오는 거였는데……! 사한은 대체 왜 이리 막무가내일까. 녹의 일이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정령은 원래 다 저런 걸까. 사한의 단언에 피로가 짙어졌다.
- 걱정하지 말거라. 네게 가벼운 은신 정도는 걸어 두었으니까. 웬만한 마법사들은 너를 코앞에서도 자각하지 못할 거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녹은 그 한마디로 더 불안해졌다.
“그렇다면 마주치는 자가 ‘웬만한’ 마법사가 아닐 때는요……?”
- ……그런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갑자기 저 두고 저번처럼 사라지시면 안 돼요.”
- 음…… 노력하마.
사한은 그 말을 끝으로 무겁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초조한 티를 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질 것 같았던 녹은 차가워진 손끝을 녹이기 위해 뒷목에 손을 대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빠른 시간 내에 복도 끝에 다다르자 사한이 감탄을 내뱉었다.
- 이야. 어쩐지 복도부터 눈 돌아가게 화려하다 했더니 이를 위한 장치였구나. 역대 열매 보유자들의 초상이다.
복도가 끝나고 펼쳐진 곳은 작은 화랑을 방불케 했다. 걸려 있는 초상은 총 다섯 점. 하가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적은 수였다. 세계수가 인정하는 가주의 재목이 극소하다는 방증이었다.
걸려 있는 초상이 서방의 태피스트리처럼 거대했다. 그 큰 그림이 걸려 있는데도 벽이 답답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화랑 자체가 시장만큼이나 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 하나 더. 초상 속 그들의 왼쪽 어깨에 모두 위엄 넘치는 하얀 매가 앉아 있었다. 다섯 마리의 매는 깃의 방향이나 부리의 모양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듯 생기 넘치는 푸른 눈을 같이 공유하고 있었다.
눈만은 그림이 아닌 진실인 것 같았다. 인물의 눈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고 새의 눈에서 생기가 느껴지는 것이 희한했다. 녹은 주변 경계도 잊고 다섯 점의 그림을 살피며 사한에게 물었다.
“매들의 눈들이 다 살아 있는 거 같은 게…… 사한?”
목에 일순 훈풍이 불어 들어왔다. 녹은 목 주변을 더듬어 봤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사라지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녹은 길 잃은 어린 양처럼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사한이 말했던 은신은 모습만 감춘다고 했다. 여기서 큰 소리로 사한을 부르면 지뢰다. 그렇다고 녹 혼자서 이 주변을 둘러본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지뢰였다.
사한이 걸어 줬다는 은신이 언제 풀릴지 몰랐다. 녹은 더듬더듬 전대 가주의 초상에서 몸을 옮겼다.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자, 원래 가려던 방향의 반대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대화 소리를 들어 보니 적어도 두 명이었다. 괜히 그들 앞에 지나가다가 은신이 풀려 버리면 큰 낭패였다. 느껴진 인기척에 반대로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들어 보니 그 목소리가 낯익었다.
“……?”
녹은 결국 조심스럽게 소란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한 발짝, 한 발짝 옮길수록 목소리는 또렷해졌고, 낯익은 존재의 음성이란 확신은 짙어졌다. 녹은 찔끔찔끔 옮기던 발걸음을 거두어 내고 대담하게 그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침 도착한 그곳에는…….
- 그래서 넌 누구인데 우리를 따라오느냔 말이다!
“하하. 윗선님께는 당해 내질 못하겠군요.”
그의 발목에 감겨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하얀 뱀 정령 사한과 무기가 없다는 듯 두 손을 가볍게 들고 있는 키 큰 사내가 기둥 뒤 구석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한의 분위기가 불같은 것과 반대로 사내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사한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들린 두 손을 속박했다.
“……형?”
“녹.”
사한이 뾰족한 가시 날을 세운 자는 도언이었다.
- 아는 자느냐.
“제가 말씀드렸던 그 사람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사한에게 붙잡힌 도언은 천연덕스럽게 인사했다. 그의 손목이 뱀의 몸통에 결박되었으나, 도언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들킨 게 아닌, 의도한 대로 들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여하간 사한에게 도언의 존재를 들킨 건 맞았다. 자신이 잘못한 건 없었으나, 녹은 살짝 불안해졌다.
‘내가 정체를 말한 것도 아니니까 아직 도와준다는 그 사실은 유효하겠지?’
녹은 사한에게 발각된 도언이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무를까 봐 조마조마했다. 사한과 마주치면 안 된다면서 홍화 저 잠행 동행에 거절하더니, 결국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 그냥 처음부터 같이 가면 좋을 일인데.
사한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도언에게 쏘아 댔다.
- 분명 나는 네가 꿈 여행자라고 들었다. 네 입으로 말해 봐라. 너는 정말 꿈 여행자가 맞느냐?
“맞지 않을까요? 사한이 세계수가 일으키는 기적 전반을 모두 잘 아시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게다가 형의 옷차림 좀 보세요. 이 시대에 볼 수 없는 복식이잖아요. 지금이 형의 과거가 맞다니까요?”
녹이 자기 의견을 피력하며 도언을 변호했다. 지금 이 순간 도언은 녹에게 하나뿐인 동아줄이었다. 그 줄이 튼튼한지 썩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을 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한은 자신의 몸통으로 감싼 도언의 손목을 전보다 더욱 조이며 날카롭게 내뱉었다.
- 허나 여행자라면 육신의 존재감이 이 시대에 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자에게는 은근한 위화감이 들어. 아직까지 나는 세계수의 가장 가까운 가지다. 꿈 여행자라면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을 거야. 대체 넌 누구냐.
사한의 긴장이 끈이 팽팽해졌다. 날붙이 하나만 슬쩍 가져다 대도 툭 하고 끊길 것만 같았다. 긴장의 끈을 조이는 만큼, 도언의 손목을 조이는 힘도 강해졌다. 도언은 자신의 손목에 느껴지는 압박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술처럼 손목에 감긴 사한을 통과하여 풀어내었다. 사한은 감겨 있던 그 모양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 꽥!
의미심장한 비명을 내지르며 사한 뭉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가 부딪히기 전에 도언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사한을 받아 내었다.
눈 깜빡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과 입맞춤할 뻔한 사한은 도언의 손안에서 경직되었던 공 모양의 자세를 풀어내곤 바닥으로 내려와 녹에게 붙었다. 그의 눈에 깃든 감정은 분명 의심이었다.
- 보았느뇨? 저자는 나의 육신이 건 속박을 풀어냈다.
도언이 한가로이 말했다.
“저를 묶어 둘 의지가 강하지 않으셨나 보죠.”
- 말도 안 되는 소리! 세계수의 의지가 가장 짙은 정령은 나이니라!
도언은 사한의 위협에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가 내렸다. 완벽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모양새였다. 그는 사한에 의해 조여져 뻐근해진 손목을 두 바퀴 돌리며 녹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녹의 어깨 위로 올라온 사한은 올가미를 돌리듯 머리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도언을 위협했다.
도언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녹에게 설명했다.
“웬만해서 정령의 육신은 정순한 세계수의 마력으로 인해 이루어지죠. 그들은 정신체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감정이 강할수록 마력이 만드는 육신의 성김이 촘촘해집니다. 의지가 강할수록 육신과 기적을 자유롭게 쓸 수 있죠.”
“기적이라면…….”
“마법사들이 말하는 마법과 비슷합니다. 마법사들이 쓰는 마력과 정령이 쓰는 마력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정령이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화려한 효과가 흔적으로 남죠.”
녹은 도언의 설명에 사한이 만들었던 나비를 떠올렸다. 보라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색도 다양했었다.
“사한이 나비 떼를 이용해 공간 이동한 이유가 있었군요. 저는 그냥 허세인 줄 알았어요.”
- 허…허세라니! 허세라니!
기가 찬 사한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얼었고, 녹은 머쓱하게 자신의 뒷머리를 쓸었다. 마법사들의 흔적 없는 마법에 익숙해진 녹이기에 떠올릴 수 있던 의견이었다.
마법을 쓰면 무형의 흔적이 남는 마법사와 달리, 정령은 시각적인 효과만 잠깐 나타날 뿐 흔적 없이 깔끔하게 기적을 끝냈다. 그렇기에 같은 효과의 힘을 쓰더라도 기적과 마법은 그 갈래가 달랐다. 물론 이건 모두 녹이 훗날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하여간 여기서 뭐 하시고 계셨어요? 사한이랑 마주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 분명 기척을 죽이고 따라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의도적으로 기척을 내어 나를 부른 거지. 그렇지 않으냐?
“윗선님의 말이 모두 옳아요.”
“그럼 왜 처음부터 저희와 함께하시지 않고…….”
“자꾸만 반대편으로 가시길래.”
오자마자 이쪽으로 흘러 들어온 건 모두 사한의 공이 컸다. 처음 도착했던 복도에서 사한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오른쪽을 지명했다. 녹은 사한의 단호함에 이끌려 그가 지명한 쪽으로 걸은 죄밖에 없었다. 애초에 낯선 이곳에서 사한 말고 믿을 만한 자가 누가 있겠냐만.
갑자기 나타난 도언이지만 행동력만 앞서는 사한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반대편이라고 하는 걸 보면 홍화 저의 구조도 아는 듯 보였다. 게다가 도언은 하가의 담벼락도 넘어 줄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혹여 불시에 고위 마법사에게 걸린다고 하더라도 퇴로는 확보되었단 생각에 녹은 안심했다. 바짝 힘이 들어갔던 녹의 어깨가 흐물거렸다.
도언은 이후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슬슬 돌아갈 때도 된 것 같고. 이 정도의 개입쯤은 눈감아 주지 않을까요?”
“누가요?”
녹의 궁금증에 도언은 그저 미소했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시죠. 그보다 이쪽입니다. 길은 사한이 안내해 주셨죠. 이 처소는 정령의 장난을 피하고자 기적을 차단하는 술식이 쓰여 있습니다. 지금껏 사한의 은신과 공간이동이 유효했던 건 사한의 의지가 술을 누를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에요.”
도언이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사한이 그의 말이 진심인지를 알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도언을 노려봤다. 그렇다고 해서 나오는 건 진실이 아니었다.
- 확실히 네 놈의 말대로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나중에 말하겠다. 나의 육신을 무시할 정도의 힘이라면 분명 세계수와 무언가 관련이 되는 거겠지. 마법사의 사특한 마력은 세계수 근처인 이곳에서 내게 큰 의미가 없으니 말이야. 적어도 곧 돌아가겠다는 네 말쯤은 믿어 주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도언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아무리 복잡한 갈래 길이 나와도 도언은 한 번 고민하는 법이 없었다. 녹은 이곳이 갈래가 나올 정도로 큰 집이라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도언이 제집인 양 휘젓고 다니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녹은 신기함을 감추지 않고 두리번거렸다. 이리도 거대한 공간이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우와. 저 홍화 저 처음 와 봐요.”
“웬만한 하가의 마법사들도 오기 힘든 곳입니다. 언제나 경비가 삼엄하죠.”
“그런데 너무 조용하네요. 뭔가 마법사들이 북적일 줄 알았는데.”
“평소라면 그렇습니다만….”
“아버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아이의 목소리에 도언의 말이 잘렸다. 도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문 앞에 섰다. 길을 안내하던 도언이 문 앞에서 멈추니, 녹 또한 방도 없이 걸음을 멈췄다. 게다가 아까 전 목소리.
“방금 홍의 목소리 같았는데? 맞지 않아요?”
분명한 홍의 목소리였다. 도언은 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문의 결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큰 소리만 새어 나올 정도로 방음이 확실했던 방에서, 모든 소리가 증폭되어 그들의 귀에 꽂혔다. 방에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바로 귀 옆에 가져다 댄 양 선명하게 들려왔다.
조곤거리는 목소리 하나와 흥분하며 씩씩대는 목소리 하나.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방 안에는 총 둘이 있었다. 위엄이 서린 묵직한 소리가 흥분한 아이를 조용히 호통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게냐.”
“하지만…….”
“어디서든 체통을 지키거라. 내가 너를 소리나 치라고 데리고 온 줄 아느냐.”
반박하려던 목소리의 주인은 확실히 홍이 맞았다. 그를 침착하게 채근하는 자는 분명 하가의 가주이자 녹의 친부일 테다. 아이는 어른의 꾸중에 성량을 줄였지만 억울함은 가시지 않았는지 빠르게 제 의견을 알렸다.
“하지만 심부름꾼 아이 가운데에서 제가 그 아이를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아이만이라도 빼 주세요!”
차분하려 노력했던 성량이 끝에 갈수록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나며 커졌다. 이에 가주는 한 번 더 호통쳤다.
“어허. 성과가 제일 성공적이란 것도 알지 않느냐. 내가 너의 욕심을 모르는 것은 아닐지나, 네 위에 가문이 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실험은 하가의 실행력 아래 실행된 것이다.”
‘실험!’
가주가 말하는 한 단어가 녹의 귀에 박혔다. 분명 가주는 실험이라고 했다. 진실은 하진보다는 사한의 손을 들어 주었다. 물론 어떤 실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가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실험이라는 행위 자체는 확실할 거다.
“아. 네. 위대한 하 가주님. 제가 열매를 얻는다면 어찌 되실지 한번 봅시다!”
홍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도언은 앞으로 돌진하는 그를 가벼운 몸짓으로 슬쩍 피했다. 홍은 씩씩대며 나아가려다 멈칫하고 도언과 녹이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눈썹이 올라간 얼굴이 무언가 기시감을 발견한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눈에는 허공일 장소를 노려봤다. 아무리 홍이라고 할지라도 들킨다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은신을 알아내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마법사.’
녹은 홍을 수식하는 한 문장을 떠올렸다. 녹은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초리에 손가락부터 몸이 긴장으로 굳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안색까지 변하고 있는 녹을 발견한 도언이 녹을 제 뒤로 밀어 넣었다. 순간 기시감이 사라졌는지, 홍은 고개를 갸웃하다 자리를 떴다.
- 찰나지만 위험할 뻔했다. 가주가 후계 하나는 기똥차게 데려왔구나.
사한이 아무렇게나 떠들었다. 녹은 멀어지는 홍의 뒷모습을 보다가 열린 문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어린 양아들의 패기 넘치는 행동에 골이 아픈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목으로 문지르는 가주가 보였다.
가주는 녹 일행을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가주의 후계인 홍조차 미약하게나마 눈치챈 기척인데, 가주면 당연히 눈치채지 않을까 했던 긴장이 무색해졌다.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에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대담하게도, 도언은 긴장으로 차가워진 녹의 손을 꼭 붙들고 문지방을 성큼 넘었다.
도언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던 건 비단 녹뿐만 아니었다. 녹의 목에 감싸져 있는 사한의 턱이 떡하니 빠지는 게 보였다. 숨어도 모자랄 판에 가주의 앞에 다가간다니. 홍은 넘어갔지만 그새 은신이 약해져 있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들킬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가주는 품속에서 지팡이를 꺼내 홍이 박차고 나간 문을 마법으로 닫자,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이 일으킨 바람이 녹의 옷깃을 흔들었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한 가주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어지러운 수식과 마법진을 노려보다가 등을 돌려 문의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온 신경이 가주의 행동에 몰린 녹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일 들킨다면 자신은 친아들이든 뭐든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홍화 저를 그 누구의 허락도 없이 침입하다니. 사주를 받은 암살자라고 몰려도 할 말 없었다.
가주는 방의 끝에 걸린 족자의 앞에 섰다. 창공을 향해 위로 솟아오르는 하얀 매가 그려져 있었다. 만일 가주가 그 앞에 서지 않았더라면 녹은 그를 발견해 내지 못했을 거다. 그 정도로 희미하고 흔한 민화였다. 전대 열매 소유주의 어깨에 달린 흰매가 몇 배 더 강렬했다.
가주는 마치 높은 가치의 미술품을 감상하듯, 거친 필치의 그림을 보다가 한 걸음, 한 걸음, 그림 앞에 다가섰다. 곧 그의 코끝이 그림에 닿을 듯한 거리가 되었다.
‘그림이 보이긴 하나?’
녹이 보기엔 충분히 기행이었다. 무엇이라도 저렇게 가까워지면 초점이 흐려져서 사물의 형태를 잘 인식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림을 감상할 때 한눈에 한 폭을 모두 담기 위해 멀리서 감상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가주는 그림 감상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족자 안에 퐁당 빠져 버렸다.
“……?”
족자가 파문을 일으키며 가주를 삼켰다. 가주가 그림 안에 흡수되자, 방 안에는 먹 향이 진하게 퍼졌다. 민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벽에 달라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서재에는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 ……뭐, 이제 다행히 아무도 없구나.
만연한 고요를 깨트린 건 사한의 한 마디였다. 사한이 심장에서부터 나온 한숨을 폭 내쉬었다. 녹의 귓가 바로 옆이기에 그 작은 짐승의 한숨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뻣뻣이 굳은 몸을 이완시켜 녹의 어깨에 고개를 늘어뜨린 사한에 녹의 긴장도 덩달아 풀렸다.
녹은 그제야 자신의 차가운 손에서 온기를 나누어 주고 있는 존재가 있단 사실을 알았다. 아직도 제 손을 붙잡고 있는 도언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접촉된 면을 통해 힘찬 피의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한 존재감이었다.
보통 꿈 여행자는 존재감을 포함한 모든 것이 흐릴 텐데, 이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고 보니 사한이 도언을 향해 꿈 여행자가 맞냐며 의심했었다. 녹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도언을 변호했지만…….
‘정말 위험한 사내면 어쩌지?’
- 나는 들키는 줄 알았다. 내 은신의 한계는 내가 잘 안다. 가주에게 들키지 않은 것도, 또 그 꼬마에게 들키지 않은 것도 모두 우연은 아니겠지.
녹의 어깨 위에서 흐물거리는 사한이 제법 또렷하게 말했다. 녹은 끓고 있는 냄비에 손이 닿은 양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 저 위험했단 거예요?”
- 아니. 저자가 어찌 처리하였는지 몰라도 넘어갔으니 위험한 건 아니지 않으냐.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대충 말하셔도 되어요?”
녹이 가자미눈을 뜨며 사한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두어 번 찔린 사한은 녹의 손가락을 피해 고개를 뒤로 빼며 어물어물 말했다.
- 그래도 결과가 잘되었으니 된 거 아니냐. 나도 하필 여기서 그들을 만날지는 몰랐지.
“허.”
무책임한 말에 기가 막혀 헛숨이 절로 나왔다. 이 정도 뒷일 생각 안 했으면 무신경함을 넘어 방임 수준이다. 도언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녹은 도언에 대한 의심을 잠시 넣어 두었다. 지금 상황에서 도언보다 더 의심받아야 하는 존재는 사한이 아닐까?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녹은 사한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잠입 자객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사한이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 그는 변명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온 것은 또 아니다. 그렇기에 홍화 저에 온 순간부터 바람에 길을 부탁했던 거였어. 내가 뱅뱅 돌아가도 되니 안전하게만 부탁했다. 어쩌다 저자의 안내만 받지 않았으면 그들을 마주치지도 않고 다 괜찮았을 거다.
사한이 도언 쪽으로 고개를 쿡쿡 찌르며 가리켰다. 변명을 듣는 녹의 눈은 이미 짜게 식었다. 사한은 흘릴 리 없는 땀이 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을 생경하게 느꼈다. 그는 얼른 주제를 바꿨다.
- 여하간, 아무도 없는 지금이 움직일 적기이니라. 여기를 보아라. 아주 연구했던 흔적이 폴폴 남아 있구나. 찾아오긴 참 잘 찾아왔어. 이제 이곳을 뒤져 보자고.
사한은 아직까지 자신을 따갑게 보고 있는 녹을 피해 내려왔다. 아직까지 잡은 손을 다리 삼아 도언에게 건너갔다. 그리고 어깨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속삭였다.
- 일단 이리 붙어 있으면 진행 속도가 더디다는 것부터 말해 줘야겠구나.
이어진 손을 겨냥한 소리였다. 녹이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팔을 조심스럽게 당기며 빼내려고 할 때마다 도언은 그만큼 힘주어 잡았다. 손을 빼고 싶다고 무언의 신호를 보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건 무언가 호신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신경을 껐던 녹이었다.
‘손을 맞잡으면 은신을 강하게 한다든지 그런 의미가 있나 보지?’
제게 호의적인 마법사가 도움의 의도 없이 손을 잡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지만 사한이 물꼬를 텄다. 사한이 말을 꺼낸 김에 손을 맞잡고 있는 게 사실 약간 불편했던 녹은 이어진 손을 들고 도언의 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무언가 마법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할 줄 알았던 도언은 녹의 기대에 미치지 않고 손을 놓아 주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이곳을 뒤져 볼까요.”
‘그냥 손 놓는 걸 잊은 건가?’
도언의 표정은 가벼웠으나 뱉은 말의 무게는 묵직했다. 녹은 그 말을 들으며 목소리에 얹어진 미약한 언짢음을 읽어 냈다. 왠지 모르게 사한에게 싸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인가?’
도언은 녹에게 온기를 나누어 준 손을 말아 쥐고 입가를 가리며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문서들로 인해 어질러진 책상을 살펴보았다. 종이들은 녹이 봤을 때 해석해 낼 수 없는 수식들과 마법진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녹은 그것을 해석하는 걸 도언에게 맡기고 이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복도까지만 하더라도 천장이 높지 않았는데, 이 방은 천장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분명 가옥의 겉모습에는 이리 높은 구조물이 없었건만, 이 가운데에 와서 보니 탑처럼 높다.
‘하긴. 마법사들의 거처에 무슨 상식이 있나.’
들어온 공간은 탑 그 자체였다. 나선형 계단이 벽을 따라 촘촘히 이어져 있었으며, 책이 꽂혀 있지 않은 벽이 없었다. 벽마다 빽빽이 들어찬 서책을 모두 살펴보는 것만 해도 일 년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고개를 길게 빼고 탑의 꼭대기를 살펴본 녹은, 가주가 사라진 민화 족자 앞에 다가섰다. 가까이서 봐도 열매의 주인 초상 때와 같은 강렬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을 통해서 가주가 사라졌었지.’
녹은 뒤를 돌아봤다. 도언과 사한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태평하게 읽고 있을 따름이다. 가주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저렇게 느긋해도 되는 걸까? 저 둘의 태도를 보니 자기 집 안방이라고 해도 되겠다.
‘나는 떨려 죽겠는데 말이야.’
고개를 가볍게 저은 녹은 족자를 유의 깊게 살펴봤다. 비상하는 하얀 매의 눈이 차갑다. 그는 민화를 바라보다 홍화 저에 있는 그림들 안에 모두 흰매가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 녹이 그려진 매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 무엇이 그리 흥미로운 거냐.
어느새 녹의 목을 감싸며 나타난 뱀이 물었다. 녹은 새어 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 방에 들어온 이래로 항상 긴장하고 있던 녹의 귀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쿵 울렸다. 사한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녹이 관찰하고 있던 매를 향해 고개를 뻗었다.
- 이런 곳에서나 볼 수 있다니. 하가의 상징치고는 대접이 영 아니란 말이야.
“하가의 상징이요?”
- 몰랐던 게냐? 저기에 그려진 녀석이 하가의 상징이다. 열매의 주인들 오른 어깨에 그려진 녀석들이지.
“세계수가 상징 아니었나요?”
- 상징은 여러 개 둘 수 있단다. 세계수와 하얀 매. 이 둘의 조합이 비로소 하가가 고유부터 가지고 있던 가문의 상징이다. 그를 알리듯 하가에 세계수와 흰매의 장식이 빼곡하게 들어찼었지.
사한의 말과 다르게 녹이 자라는 동안 본 가문의 상징은 세계수 하나였다. 굵은 줄기와 나뭇잎이 간결하게 표시된 문양. 그 문양은 정말이지 하가의 어느 곳에나 찍혀 있었다.
아이들에게 보급하는 옷의 안쪽에서부터 식기, 연무장 벽돌까지. 이런 곳까지? 싶을 정도로 작은 문양이 하가의 어디든 박혀 있었다. 어디에서도 흰매의 그림은 본 적 없었다.
평생 하가에서 산 녹이지만 매의 그림을 본 건 홍화 저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저는 자라면서 세계수 문양밖에 보지 못했어요.”
- 현 가주가 자리를 계승하며 매 장식을 모두 거두어 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거다. 어린 너라면 모를 만한 역사구나.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역사가 있었다. 하가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하진이라면 이를 알았을까? 녹은 족자에 그려진 흰매의 날갯죽지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그럼 왜 가주님이 매를 다 없앴…는지….”
녹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족자를 건들자마자 어깨 위에 있던 사한이 없어졌다. 뒤를 돌아봤지만 도언 또한 보이지 않았다. 둘이 사라졌나? 아니, 녹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만이 그 공간에서 사라진 거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무의 세계. 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홀로 이동되었다. 녹은 뒷목을 긁적였다.
“여긴 또 어디람.”
녹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아니, 캄캄하다기보다는 새까맸다. 어둠이 얼마나 짙은지, 녹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어 눈꺼풀 위를 만져 볼 정도였다. 공간은 마치 빛 한 점 들지 않는 우주 같았다.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풀과 나무 향이 가득한 냄새로 보아 어두컴컴한 이곳은 숲인가 싶었다.
멀뚱히 서 있던 녹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더듬더듬 나아가기 시작했다. 손에는 얇고 시원한 풀줄기가 매만져졌다. 녹의 손이 스칠수록 코끝을 감도는 풀의 향이 진해졌다.
“아, 진짜 어디야. 여기가.”
어차피 또 마법이란 녀석이 장난질한 결과겠지. 여기로 오기 전에 사한과 함께 있었으니 제 이동을 사한과 도언이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그동안 이 한 몸 숨길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사한이 걸어 둔 은신이 언제 풀릴지 모른다는 걱정은 녹을 움직이게 했다. 갑작스러운 공간이동에 단련이 된 녹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녹은 손끝에 만져지는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무언가를 매만졌다.
‘나무줄기……?’
나무줄기치고는 바닥에 붙어 있었다. 고로 나무뿌리가 더 정답에 가까우리라. 그 끝을 잡고 올라갈 때마다 뿌리의 크기가 상상보다 배로 커졌다. 마치 20년 된 나무를 바닥에 눕혀 놓은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만일 그나마 얄팍했던 뿌리 끝을 만져 보지 않았더라면 녹은 그대로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쓰러져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거다.
뿌리를 따라 나무의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발치에 걸리는 나무뿌리가 많아졌다. 얼기설기 얽혀 있는 나무뿌리들을 등반하듯 올라가자 마침내, 녹은 푹신푹신한 감촉의 웬 벽에 도착했다. 낙동강 오리알처럼 사방이 뚫린 곳에 멀뚱히 서 있는 것보단 이런 벽의 옆에 붙어 있는 게 안심이 되었다.
녹은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자신이 앉아 있는 게 어떤 나무의 뿌리인지 몰라도 정말이지 더럽게 컸다. 기다리다 보면 도언과 사한이 와 주지 않을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홀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판돈을 걸 만했다. 물론 그 판돈은 목숨이란 걸 녹은 잘 알고 있었건만 왜인지 모르게 느긋했다.
다리를 쭉 펴고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풍경이 같으니 뜨고 있는 게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녹은 감은 눈 위로 불빛이 비쳐 보이는 게 느껴져 감았던 한쪽 눈을 슬쩍 떠 보았다.
“……!”
얼굴 코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건 물고기 정령이었다. 팔짱 끼고 있던 녹은 자신의 얼굴과 여섯 치 거리도 되지 않은 물고기의 뾰족한 주둥이를 마주하고는, 손으로 등 뒤를 짚으며 몸을 뒤로 뺐다. 물고기는 자신에게 놀라는 녹이 마음에 드는지, 녹의 앞을 시계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녹은 미약하게 빛을 내는 물고기 정령 덕분에 어둠이 가셨다.
덕분에 녹은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거대한 나무의 뿌리이며, 뒤쪽에 벽처럼 서 있는 게 난생처음 보는 크기의 이끼 벽이란 걸 눈으로 확인했다. 녹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령의 약한 빛이 하늘까지 닿지 않는지, 높은 벽의 끝을 확인할 수 없었다.
표면은 이끼 때문에 부드럽고 폭신했다. 빛이 들지 않아 스산하기도 했다. 녹은 이끼를 손톱만큼 털어 내 보았다. 물고기 정령이 무얼 하나 가까이 오는 게 빛으로 느껴졌다. 정령이 가까이 올수록 확장된 시야에 녹은 작업을 빨리했다. 손바닥만 한 이끼가 한 움큼 떨어졌다. 보이는 건 거칠고 울퉁불퉁한…….
“……나무?”
벽 자체가 양옆으로 끝도 없이 늘어져 있길래 녹은 이게 나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나무뿌리란 점이 이상하긴 했으나, 벽 자체가 그 뿌리의 주인이라니. 나무의 지름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녹은 이끼를 제거했더니 드러난 나무껍질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두근… 두근….
녹이 황급히 손을 거뒀다. 나무에게 사람의 맥박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녹은 당연히 나무와의 어떠한 상호 작용을 기대하고 대어 본 건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 나무에서 나오자 녹은 떨떠름해졌다.
“방금 뭐였지……?”
녹은 자신이 제대로 느낀 게 맞나 확인하는 차원에서 한 번 더 나무에 손을 대어 보았다. 역시나 같은 반응이 느껴졌다. 심지어 차갑다 못해 시릴 지경이었던 이끼와 다르게 나무는 안온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끼가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한 걸까?
나무에게 나오는 온기는 녹의 얼어붙은 손을 녹여 주기에 충분했다. 한 손바닥만 한 이끼를 옆에 다시 털어 낸 녹은 손이 풀어질 때까지 나무에 두 손을 대고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랐지만 천연 난로가 따로 없었다. 아니, 마법사들의 이동 장치를 통해서 온 곳의 나무이니 천연이 아닌 마법 난로일 수도 있겠다.
손바닥이 뜨끈해질 때쯤 녹은 나무에서 손을 떼어 내었다. 떼자마자 오색의 나비가 녹이 손대었던 나무의 표면에 돌풍처럼 쏟아져 나온 것 또한, 예상한 바가 아니었다.
“……!!”
녹이 손바닥을 대고 있던 나무 표면은 분명 이만한 나비들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녹은 손목을 들어 꼭 감은 눈을 가리고 질풍 같은 나비 떼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나비들은 녹을 향해 쏟아져 나왔지만 피부에 닿는 감촉은 없었다. 그저 부드러운 바람이 몸 주위에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흩날렸던 바람이 잔잔해졌다. 녹은 팔목을 내리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이마를 들어 올렸다.
쏟아졌던 나비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나비 대신 몽글몽글한 민들레 홀씨들이 저마다의 흰빛을 은은하게 내며 공중을 부유했다. 홀씨의 빛 덕분에 어둠은 물러갔다. 녹의 머리 꼭대기에는 겨우 정령 한 마리의 빛으로 보이지 않던 무성한 나뭇가지가 하늘처럼 뻗어 있었고, 녹의 발밑에는 두꺼운 나무뿌리가 헤엄치는 고래 떼처럼 땅을 헤엄치듯 굳어 있었다.
- 안녕. 아이야.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노인인지 모를 목소리가 녹의 몸을 통해 울렸다. 녹은 그때야 자신의 앞에 있는 나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세계수?”
주변을 밝히고 있던 홀씨의 불빛이 녹의 말에 한층 강렬하게 밝아졌다. 안개처럼 끼어 있던 어둠이 덕분에 온전히 달아났다. 칠흑이었던 공간은 한낮이 되었다. 처음으로 가지는 세계수와 녹의 조우였다.
- 돌고 돌긴 했지만 결국 이곳에 도착했구나.
“돌아왔다니요?”
- 네가 여기에 온 이상 그건 중요치 않단다. 이곳에 잘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단다.
성별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수의 목소리는 묘려하고도 평범했다. 녹은 나무의 어디를 보고 대화를 진행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녹의 길을 잃은 초점만이 길 잃은 아이처럼 나무의 표면을 훑었다. 녹은 떨리는 동공만큼이나 떨리는 심장을 느끼며 물었다.
“저를 왜 기다리고 계셨는데요?”
세계수는 녹이 일평생 하가에서 살며 들었던 권위의 상징이요,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하가 사람들의 꼭대기요, 정령의 윗선인 사한의 윗선이었다. 정령이 세계수의 수족이라고 했을 때부터 그 나무에게 의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녹은 자신이 나무뿌리 위에 서 있는 것도 나무에게 실례가 아닐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인간으로 치면 허락도 없이 허벅지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닌가? 입술 위에 서 있는 건가?’
녹이 천천히 뒷걸음질하다 허벅지에 무언가 걸려 주저앉아 버렸다. 녹이 엉덩이를 댄 곳은 넓적한 잎사귀로 만든 의자였다. 의자 옆에는 두 마리의 파란 원숭이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잎사귀를 채취해 급조한 의자를 보수하고 있었다. 어느새 녹이 앉은 의자는 나뭇잎을 이용해 둘도 없이 화려한 의자로 탈바꿈하였다.
원숭이는 곧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허공을 후 불었다. 원숭이의 손끝에서 비눗방울이 자라났다. 원숭이는 자신이 손가락으로 그린 동그라미 안에 빛나는 홀씨 몇 개를 넣고 손가락을 잠갔다. 떨어진 비눗방울은 홀씨들로 인해 은은히 빛났다. 원숭이는 나무줄기를 가운데에 꽂아 풍선을 만들어 위자 위에 앉아 있는 녹에게 선물했다.
“어… 그러니까 엄…….”
당황하면 말문이 막혀 버린다. 녹은 얼결에 받아 버린 풍선을 멀뚱히 쳐다봤다.
- 아이들이 내 손님이라고 대접하려고 하는구나. 기쁘게 받으면 좋아할 거다.
“음… 고맙습니다.”
녹의 담백한 인사에 원숭이들은 그들만의 웃음소리를 내며 나무 벽을 타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파란 원숭이도 사한처럼 이곳에 터를 잡은 정령인 걸까?
‘어째서 요새 자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녹은 잠깐이지만 하가에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예전에 이런 마법적인 일들은 손에 꼽았는데…… 말이다. 이것도 그 빌어먹을 열매 때문인 걸까? 녹은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털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신 이유가…….”
- 때가 되었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네?”
- 너는 나의 힘을 담을 아이로 태어났단다. 사한에게 듣지 못했느냐.
“네??”
- 이 힘으로 세상에 균형을 맞추며 군림할 준비가 되었니?
“……네???”
귓가에 폭격처럼 꽂히는 말들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던 녹은 그저 멍청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혹시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닐까. 자신은 번개를 일으키고 땅을 가르며 야단법석을 피우는 마법사들과 다르게 아무 능력도 없는 아이일 뿐이다. 뭔지는 몰라도 저런 엄청난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녹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 맞으세요? 혹시 다른 이에게 하실 말씀을 제게 잘못 전하신 건 아닐지…….”
- 너에게 한 소리가 맞단다. 하해운의 아들, 녹아.
발음하는 이름이 정확하다. 하해운도 하가의 현 가주 이름이 정확했다. 분명 세계수는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맞았다. 설마 세계수가 어린아이를 두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녹은 그 가능성을 허공으로 던졌다.
“전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농담이시죠?”
- 나는 농담을 모른단다.
“진담이시라면 설명이 필요한데요. 하신 말씀이 대체 무슨 소리….”
- 손님이 또 왔구나.
세계수가 녹의 말을 자른 그때, 숲속에 있는 모든 나무의 잎사귀가 파르르 떨렸다. 어느새 불어난 물고기 정령은 잎사귀 대신 지느러미를 흔들어 댔고, 홀씨들은 갈지자로 허공을 빠르게 유영했다. 갑자기 바뀐 공기에 녹 또한 앉고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녹은 의자를 엄폐물로 두고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다. 허공에서 붉은 상흔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며 나타났다. 공간의 틈이 벌어진 거다. 거기서 공간의 틈을 벌리며 나온 인물은…….
- 이것 참, 거기가 여기로 연결되어 있었구나.
붉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하는 사한을 목에 감은 도언이었다.
도언과 사한은 틈새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와 흩날리는 홀씨. 그리고 그에서 나온 빛이 주변을 밝혀 주어 녹이 처음 왔을 때보다 장소 파악에 용이했다. 나무 의자 뒤에 몸을 숨기며 누가 나올지 긴장하고 있던 녹은 반가움을 표현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형!!”
녹은 홀로 있던 무인도에서 구명 배를 발견한 마음으로 한쪽 팔을 커다랗게 흔들었다. 녹이 부르는 소리에 사한과 도언이 녹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녹은 얼른 그들 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발을 놀렸다.
- 오, 엇갈리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어디 안 가고 얌전히 기다려서 다행이다. 얼른 데리고 나가…… 우와악!!
도언의 목에 감겨 있던 사한은 녹을 발견하자마자 달리는 도언에 끌려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녹이 나무뿌리에서 발을 내리기도 전에 도언은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녹은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 다람쥐라고 불렸던 하진이 심부름꾼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던 녹을 발견하고 달려올 때보다 빨랐다. 세상에서 그때의 하진이 인간 중에 제일 빠른 이겠거니, 하던 녹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녹이 도언의 달리기 실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어느새 바로 앞에 당도한 도언은 그대로 녹을 들어 올려 한 품에 안았다. 그의 달리기처럼 번개 같은 몸놀림이었다. 분명 녹은 땅에 발바닥을 대고 서 있었는데, 그 순간 발은 허공에 띄워져 있고 고개는 도언의 어깨에 얹어져 있었다.
녹은 분명 또래보다 작은 몸집이지만, 도언에게 이리 안겨 있으니 마치 시장에서 본 적 있는 큰 인형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시장에서 웬 아이가 들고 있는 커다란 호랑이 인형이 이리 안겨 있던 걸 본 적 있는 녹은 얼른 커서 이리 손쉽게 들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내다운 몸에 대한 녹의 아이다운 갈망은 끝나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자존심이 상한 녹은 얼른 내려 달라고 요구하려 했다.
“후우…….”
도언이 녹을 안고 일으키는 한숨은 무거웠다. 녹은 순간 멈칫했다. 그의 한숨에서 걱정과 안도, 다행과 심란. 모든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진심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럴까.
‘내가 뭔 일 나면 본인 신상에 이변이 생기나?’
저번에 도언을 처음 발견했을 때, 도언은 녹을 자신이 찾고 있는 미아라고 칭했다. 도언이 미래에서 온 존재라면 미래에서 우린 대체 어떤 관계였길래 이리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걸까. 그 전에 대체 도언은 현재의 누구일까.
도언의 어깨 너머로 호기심 가득하게 둘 주위를 기웃거리는 물고기 정령이 몰려들었다. 어디서 이리도 많은 물고기가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사한이 녹에게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 그래, 이놈이 격하게 반기기는 했지만 나도 반갑다.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에 은신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혼자 떨어 있으면 위험하지.
녹은 급히 고개를 뒤로 물렸다. 괜히 사한에게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커진 녹이 발을 흔들며 말했다.
“형, 좀 내려 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도언은 녹의 말을 착실히 이행했다. 짧았던 비행시간이 끝났다. 녹은 도언을 향해 고개를 올리는 도중, 숲 사이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기다란 코에 넓적한 귀. 두툼한 다리를 가진 검은 동물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녹은 그에 시선을 고정하며 뒷걸음질 쳤다. 녹의 모든 것에 예민한 도언은 놓치지 않고 녹이 보고 있는 그것을 확인했다.
“코끼리군요.”
“코끼리요?”
“정확히 말하면 코끼리의 형태를 한 마생물입니다. 세계수 근처라 별 녀석들이 다 나타나는군요.”
그의 말이 맞는 건지, 코끼리의 넓은 이마 한가운데에 호박석같이 영롱한 돌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코끼리는 온순한 큰 눈을 껌뻑이며 그들의 주위를 찬찬히 걷고 있었다.
“여하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녹이 통과한 문이 저희는 통과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수고 들어왔어요. 그 방에 누군가가 들어오기 전에 얼른 나갑시다.”
- 그래. 내 참,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네 어깨에 있던 나만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번에는 진짜 부딪혔단 말이다. 하여간 확실히 세계수로 통하는 통로 몇 개쯤은 하가에서 둘 만하지. 그렇다고 이리 코앞에다가 통로를 둘지는 몰랐지만…….
사한은 고개를 꼿꼿하게 빼 들고 잠수함에서 나온 탐사경처럼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검은 코끼리 마생물, 어느새 낮은 키의 나무 위에 올라간 파란 원숭이, 주변에 정령의 호수라도 있는 건지 허공을 헤엄치며 도언과 녹을 관찰하고 있는 물고기 정령 외에도 녹에게는 생소한 동물들이 숲에서 기웃거리며 나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사한이 말했다.
- 평소보다 어수선하구나. 특히 저 코끼리 녀석은 백 년 만에 본다. 정령에게까지 모습을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는 녀석들이 어째서 총출동한 것이냐? 평소답지 않구나.
세계수의 근처에 산다는 사한조차 이 풍경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보통 수준이 낮은 하급 정령이나 마생물들은 인간이나 마법사에게 그 자랑할 만한 호기심으로 먼저 다가서지만, 이성이란 게 깃드는 정령이나 마생물일수록 인간이나 마법사들에게 제 모습을 숨기기 바빴다. 아무리 정령들이 좋아하는 녹이 숲에 왔다고는 하지만…… 사한조차 몇 번 보지 못할 정도로 희귀한 녀석들의 수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보랏빛 새끼 여우 세 마리가 숲속에서 달려 나와 녹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얀색 꼬리가 인상적인 녀석들이었다. 녹의 발치에서 녹의 발목은 비비는 그의 귀여운 행태에, 녹은 쭈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기도 전에 자신의 이마를 녹의 손바닥에 밀어 넣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세 마리가 경쟁하듯 녹과 닿으려 했다.
녹은 그들의 천진한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도언도 있겠다, 사한도 있겠다, 게다가 귀여운 녀석들까지. 주변에 대한 경계가 풀린 녹은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녀석들은 동시에 녹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들을 끌어안고 몸을 일으킨 녹은 마치 세상을 가진 듯했다.
도언은 그에 긴박한 지금의 상황을 잠시 잊었다. 그 정도로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장면이었다. 도언은 녹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고 그의 머리를 흩트렸다. 녹은 헝클어지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두며 도언에게 물었다.
“이 녀석들은 뭐예요?”
“그 무엇이든 은혜로운 녀석들이군요.”
“네?”
사한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헛기침을 했다.
- 크흠, 여기서 살던 나조차 이 숲에 이런 녀석들이 있는지 몰랐다. 내가 살던 곳이 맞나 낯설구나. 왜 이리 변한 거지? 분명 어제만 해도 이런 숲이 아니었다. 정령들은 숨어 대기 바빴고 주변은 어두웠다. 가끔 와서 마법으로 주변을 밝히는 마법사들만 아니라면 차가운 곳이었어.
사한의 물음에 도언은 지금의 상황을 자각했다. 사랑스러운 녹에게 눈을 떼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마생물과 정령으로 인해 이곳은 점점 밀림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언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 무엇이?
“원래 어둠이 만연한 세계수 근처가 이리 밝은 이유가 무어겠습니까.”
- 그야 정령들이…….
말을 잇는 사한의 앞에 홀씨 두어 개가 냉큼 다가와 그의 눈가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홀씨들은 여전히 조명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보송보송한 털 뭉치를 머리에 단 그들은 공간에 늘어난 생명이 기쁜 듯 조도를 강하게 밝혀 내었다. 사한은 살랑이고 불규칙한 춤을 추는 그들을 알아챘다.
- 어, 이것들이 왜 지금…….
“저게 뭔데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녹이 물었다.
- 세계수의 숨결이다. 분명 세계수의 의식과 함께 나타나는 존재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요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편하겠구나. 분명 세계수가 잠든 후에 함께 사라진 것들일진대…….
“세계수가 잠들었다고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세계수가 잠드는 존재였다니?
하가에 살며 들었던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절대신과 같은 전설이었다. 마력 덩어리인 그 나무는 냉철하고 완벽한 이지로 하가를 수호해 준다고 했었다. 잠든다는 행위와 세계수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세계수는 조금 전 녹 자신과 알 수 없는 이야기까지 했던 존재였다.
- 그래, 진리를 꿰뚫는 그분은 열매가 부화할 시기에 잠깐 눈을 감는다고 하지. 하가에 살면서 이걸 모르다니, 하가에서 이런 건 안 알려 주더냐?
“몰라요. 마법사들이라면 알지도요.”
기가 차 헛숨을 뱉는 사한을 뒤로하고 녹은 그의 말을 정리했다.
‘내가 다가간 그때 깬 건가?’
녹은 잠깐 전을 회상했다. 분명 어두컴컴한 곳에서 주변이 환히 밝혀졌던 순간은 자신이 세계수에게 손을 맞대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녹은 새삼스럽게 굳게 선 그 나무를 보았다. 분명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만 해도 말을 잘하던 그는, 사한과 도언이 등장하자마자 소리를 죽였다.
도언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한낮에도 밤을 내릴 정도로 거대한 세계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도언이 녹을 보호하듯 세계수와 녹의 사이에 섰다. 나무를 보고 있던 도언은 뒤로 돌아 허리를 숙여 녹과 눈을 맞췄다.
“저자가 당신께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 세계수와 소통을 했다고??
사한이 기함하며 몸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도언에게서 떨어져 철퍽하고 바닥에 부딪혔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벌떡 일어나 녹에게 다가왔다. 그 눈에서 광기가 얕게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녹은 왠지 모르게 반응이 큰 사한의 눈치를 보았다. 말하면 큰일 나는 저주라도 있나? 내일 당장이라도 운석에 처박혀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녹에게 집중하는 건 사한뿐만 아니었다. 여기에 모인 모든 생물의 집중된 이목에 녹은 금세 부담스러워졌다.
“어, 그게… 그러니까…….”
- 아서라. 부담스러워하고 있지 않으냐. 나는 아이의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투명하지만 진하고, 짙지만 얕은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사한은 그 목소리에 턱을 빼었고, 녹은 몇십 쌍의 눈동자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나무의 구원에 해방감을 느꼈으며, 도언은 또렷한 눈으로 나무를 노려봤다.
- 눈이 매섭구나. 그런데 그런 자세는 네가 아니라 내가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
세계수는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도언의 정체를 선언했다.
- 응? 침입자 녀석아.
말의 내용은 타박이었으나 어투는 새삼 부드러웠다.
- 미미하게 흐름이 달라진 이유가 무언고 했더니 이런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구나. 덕분에 벌린 판이 대차게 깨질 뻔했다.
세계수의 말을 받은 도언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렇기에 묻습니다. 꼭 이래야만 합니까?”
그의 목소리는 세계수의 어투와 정반대였다. 말 한 자, 한 자가 호전적이다. 허공에 낙인을 찍듯 꾹꾹 누르며 말하는 모습에서 탄내가 나는 것 같았다. 사한은 감히 세계수에게 싸우자는 식으로 말하는 그에게 얼른 달라붙었다.
- 아이고, 이놈아! 네놈이 태생적으로 예의 밥 말아 먹은 놈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그러면 안 되지! 저분이 누군지 알면서 그래!
어느새 도언의 어깨 위에 자리 잡은 흰 뱀은 소리쳤다. 정령들은 보통 세계수의 수족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나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도언은 그런 사한을 가볍게 무시했다. 세계수를 향한 따가운 눈빛 또한 거두지 않았다.
사한의 호들갑과 다르게, 세계수는 도언의 태도가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그는 마치 나쁜 짓이라는 자각 없이 시장에서 간식거리 하나를 말도 없이 집어 가 버린 세 살짜리 아이를 훈육하는 양 상냥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 깨고 싶지 않은 꿈은 되려 악몽일 뿐이다. 결국 너희가 살아가야 하는 곳은 이곳이 아니지 않으냐. 꿈이란 점을 이용해 이곳저곳 손쉽게 간섭하고 다녔다는 사실은 잘 안다. 하지만 그리 쟁취한 행복이라 해 봤자 허상일 따름.
녹은 저 둘이 하는 대화를 도언의 뒤에서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사한을 살펴보니 그 또한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사한이 도언은 꿈 여행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했었다. 꿈 여행자가 아니라면 도언이 이곳으로 온 매개가 도언의 꿈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세계수는 당연하다는 듯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도언을 침입자라고 칭했지. 녹에게 현실인 이 공간이 누군가의 꿈인 걸까?
예의를 차리라는 사한의 말을 묵살한 도언은 거친 태도를 고수하며 시비를 걸 듯 물었다.
“이곳에서 나갈 열쇠는 어느 순간입니까.”
-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 숨겨 봤자 곪을 뿐이다. 더 아파지기 전에 터트려야지.
“제 정체에 대한 추측 때문에 이 판을 까신 겁니까?”
- 바로 맞혔다. 역시 똑똑하구나.
도언과 세계수의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사한과 녹은 빠르게 이어지는 대화에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기 바빴다. 그들이 하는 소리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러나 녹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저 혼자가 아님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사한은 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녹의 품에 있던 세 마리의 새끼 여우가 낑낑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녹이 땅에 놓아 주자마자 여우들은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녹의 눈앞으로 검은색 나비가 나타났다. 정령들이 기적을 쓸 때 보이던 나비와는 기운 자체가 달랐다.
정령들의 나비가 에너지를 발산하였다면, 먹으로 그린 것 같은 저 검은 나비는 기운을 수렴했다. 지나가던 물고기 정령이 입을 벌리고 녹이 보고 있던 검은 나비를 삼켰다. 눈앞에서 자연의 생태계를 경험한 녹은 눈을 끔뻑일 따름이었다.
물고기 정령이 한데 모여 세계수의 벽을 따라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먹물 나비는 물고기들이 사라지는 방향에서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잡아먹혔다. 녹이 식신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녹은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알 수 없는 장면에 녹이 한눈을 파는 사이, 세계수와 도언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 여하간, 잘도 숨어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중간에 알아챘더라면 너를 추방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여기까지 왔으니 상으로 봐주마. 실력이 좋구나.
“…….”
- 네가 나 몰래 간섭까지 하며 피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인지 잘 알겠으나,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열쇠이기 때문입니까?”
- 그래. 잘 아는구나. 아무래도 아이가 걱정되는 모양이지? 걱정 말거라. 그는 강해. 그리고 나 또한 그를 걱정한단다. 그렇기에 이런 꿈을 펼쳐 잊힌 과거를 보여 주는 거지. 지금이라도 마주하지 않으면 아이는 나아갈 수 없어. 곪은 상처부터 째야 한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고 너도 곁에 있으니 지금이 적기이지 않겠니?
도언은 할 말이 많은 듯, 그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입을 벌렸으나 곧 잇새를 꽉 물며 입을 다물었다. 이를 짓씹은 도언은 어금니의 형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도언의 목에 감긴 사한은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한 가지 더 물어도 됩니까.”
- 그래.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겠니? 다 물어보렴.
도언은 드물게 주저했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그의 말아 쥔 주먹에서는 핏줄이 도드라졌다. 도언은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묻어 둔 의문을 꺼내 들었다. 의구심이 들어도 물을 자가 없어 차마 묻지 못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꺼내 들지 못하고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었다. 그 질문이 오늘 상대를 만나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그 사건은 당신이 개입한 겁니까?”
-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구나.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열쇠 말하고 있는 겁니다.”
-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어 있어. 아이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게 내 힘을 흡수할 열쇠라는 걸 몰랐던 마법사들은 참 잘 맞아떨어지게도 웃기지도 않은 실험을 했더구나. 나는 그때 열매 때문에 잠들어 있었는데 어찌 개입할 수 있겠니. 물론 그때 아이를 부르긴 했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여하간 지금과 다르게 현재에는 내 개입이 크게 필요치 않았단다.
세계수의 말을 들은 그는 착잡한 심경을 숨겼다. 세계수는 녹을 그 자리로 부르는 것만 했다고 한다. 도언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도언은 문득 고개를 급히 들어 올렸다.
세계수가 ‘지금과 다르게’ 현재에는 개입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지금 순간 개입했단 뜻이 된다. 도언은 녹이 있어야 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어느새 녹은 사한과 함께, 길 안내를 자처하는 푸른 원숭이 정령을 따라가고 있었다. 원숭이가 가는 길 한 보 앞부터 나비들이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정령은 거리를 줄이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휙휙 바뀌는 주변 풍경이 경이로웠다.
녹은 언젠가 시장에서 구해다가 읽은 홍길동전이 생각났다. 지금 원숭이가 쓰고 있는 기적에 이름을 붙인다면 축지법이 아닐까?
- 에잉. 정말 세계수의 명령이 맞는 것이느뇨?
- 내가 거짓말을 못한다고 했던 건 자네라네.
사한과 원숭이는 가는 도중 티격태격했다. 낯선 정령을 따라갈 생각 없던 녹이 그를 따라가게 만든 것 또한 자신의 친구라는 사한의 보증 때문이었다. 게다가 원숭이가 하는 말 또한 무시하기 힘들기도 했고.
저 원숭이는 알 수 없는 대화를 듣는 데 지친 녹이 희한한 나비를 발견하고, 그 나비를 향해 모여드는 물고기 정령을 관찰하고 있을 때 나타났다. 그는 녹에게 나뭇잎 의자를 만들어 준 이 중 하나였다.
그는 살금살금 다가와 도언 몰래 녹에게만 은근히 속삭였다. 그는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 세계수님의 전언입니다. 하진이란 분이 이 근처에 계신답니다.’
그의 머리에 붙은 붉은 나비가 원숭이의 기척을 죽여 주었다. 때문에 도언은 녹에게 다가오는 한 마리 정령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원숭이가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말하고 있었기에 녹의 목소리 또한 줄어들었다.
‘하진이가요?’
‘- 네. 지금은 세계수님께서 저분과 중요한 대화를 하고 있으니 만나려면 방해하지 말고 몰래 다녀오시랍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괜히 수상한 원숭이의 말에 냉큼 대답하려던 걸 미루고 있었다. 그러자 도언의 목에서 내려와 녹에게 다가온 사한이 원숭이를 옹호했다.
‘- 이 녀석은 내 친구다. 그리고 정령은 거짓말 못 해. 세계수의 전언이란 말은 사실일 거다. 가겠느냐?’
녹은 세계수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도언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 또한 하진의 안전 때문이었다. 이곳에 하진이가 있으면 가야 하긴 하겠지만…….
‘중요한 전력을 저리 두고 가도 돼요? 거기서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어느새 녹에게 있어 ‘중요한 전력’이 되어 버린 도언이었다. 물론 녹의 의견은 합당했다. 하지만 원숭이는 완강했다.
‘- 안전은 걱정하지 마시랍니다. 세계수님께서 깨어 계신데 누가 녹 님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세계수님이 깨어 계신 거랑 제 안전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 상관 많죠. 세계수님께서는 저분보다 훨씬 미더운 분이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녹 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녹은 세계수가 정령을 이용하여 도언과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한단 사실을 알아챘다. 여기서 도언을 불러 같이 가면 어찌 되려나?
‘- 얼른 가시죠. 모든 상황에 대한 열쇠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오지 않을 기회일지 모릅니다.’
결국 마지막 말에 홀린 듯 원숭이를 따라갔다. 그게 지금 녹과 사한이 이곳에 있는 상황의 전말이었다.
원숭이의 기적을 이용해 거리를 좁히며 걸은 지 몇 분여. 세계수의 둘레는 정말이지 끝도 없을 만큼 넓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세계수는 둥근 원통형 나무가 아닌, 그저 네모난 벽이라고 칭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치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믿었던 옛사람들처럼 말이다.
가면 갈수록 검은 나비들의 수가 불어났다. 물고기들과 빛나는 솜털은 반대로 희박해졌다. 하지만 원숭이가 일으키는 나비들은 빛났고, 덕분에 어두운 길을 밝혀 주었다. 원숭이는 길을 멈추며 녹의 모습을 확인했다.
- 도착입니다. 은신은…… 잘되어 있군요.
- 그럼, 내가 은신 하나는 기가 막히지.
- 자네의 기적에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어. 아마 그 청년일 걸세. 순수한 자네의 은신이었다면 이미 깨졌을 거라네.
- 에잉. 그냥 넘어가면 어디 덧나는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정말 그들이 친구긴 친구인가 보다. 그들끼리 떠들게 내버려 둔 녹은 멈춘 장소를 둘러봤다. 이곳은 전에 있던 곳과 다르게 세계수의 숨결인 솜털이 주변을 밝히지 않았다. 허나 마법사들의 마법구가 허공에서 빛을 밝혀 주어 주변을 살피는 데 무리 없었다.
멀리서 스무 명가량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 키가 큰 성인이었지만 딱 한 명, 눈에 띄게 작은 아이가 섞여 있었다. 그 아이는 붉은 쓰개치마를 덮어 제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작은 여자아이. 녹을 등지고 서 있던 아이가 몸을 돌렸다.
……그 하얀 얼굴은 하진이었다.
“쓰개치마 같은 건 거추장스러워서 질색이라는 애가 왜…….”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관찰하던 녹의 입에 나직한 한마디가 흘렀다. 온통 검은 옷만 입고 있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동백 같은 쓰개치마를 쓴 하진은 당연 튀었다. 하얀 얼굴이 동동 뜨지 않고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녹은 평소 하진이 실용적이고 편안한 철릭을 즐겨 입었었기에, 저런 옷을 입은 건 처음 봤다. 확실히 옷의 색감이 아이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해 주었다. 허나 그 차림에도 도도는 여전히 하진의 오른손을 지키고 있었다.
녹은 상황을 잊고, 쓰개치마를 써서 앙증맞고 미려한 앵두 같은 하진이를 구경했다. 하진은 칙칙한 인간들 사이에서 완벽하게 표정을 없애고 인형처럼 서 있을 따름이다.
‘……어?’
그녀의 눈동자에서 언제나 살아 숨 쉬듯 이글거리는 불꽃이 사라졌다. 녹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한 하진을 보고 드디어 상황을 자각했다. 녹은 사한과 원숭이에게 속삭였다.
“지금 저들이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저기서 쓰개치마를 쓰고 있는 아이가 제 친구예요!”
- 그래 보이는군요. 딱 봐도 다른 이들과 다릅니다.
- 뭐 하고 있는지는 더 가까이 가 봐야 알겠는데. 하지만 내 은신이 저 정도 수의 마법사 사이에서 과연 버텨 줄지…….
자신 없는지 사한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그 태도에 괜히 마음이 달았다. 저들이 하진을 데리고만 있을 뿐 무언가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무언가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생명력 넘치던 아이의 눈빛이 저리 죽어 있지도 않을 터다. 심지어 지금의 모양새도 불길했다.
다급해진 녹은 빠르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왠지 낌새가 이상하단 말이에요. 쟤가 저렇게 얌전한 애가 아닌데…….”
녹의 존재감이 순간 강해졌다. 이를 기민하게 느낀 원숭이는 양손을 들고 녹의 앞에서 살살 흔들며 그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마치 마구간 안에서 흥분한 말들을 진정시킬 때의 모양새였다.
- 일단 진정하세요. 은신의 효과는 감정이 요동칠수록 약해집니다.
녹은 원숭이의 말에 지진이 일어난 듯한 심장을 가라앉히려 했다. 어려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들켜 버린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일단 현장을 찾았으니, 침착하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했다.
다시금 희미해진 존재감에 원숭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 일단 지금의 은신은 사한이 한 은신보다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아마 세계수님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 사내가 간섭한 것이겠지요. 지금은 그와 떨어져 있어서 효과가 줄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제 특기가 은신입니다.
원숭이는 검지를 살짝 들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어느새 원숭이의 손끝에는 붉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원숭이는 나비를 녹의 머리 위에 날려 보냈다.
- 훨씬 낫군요. 저들 사이에서 섞여도 저들은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마법이 아닌 기적에다가 녹 님은 마력이 전무하니까요.
- 오, 확실히 이이의 은신은 쓸 만하지. 세계수와 사내의 대화에 방해 없이 조용히 빠질 수 있었던 것도 다 이자의 덕분이었다.
- 자네는 은신 좀 연습하는 게 어떤가. 아주 온 마법사들에게 모습을 뽐내고 다니는 행태에 기함했네.
- 잔소리는 관둬. 솔직히 좌표만 알면 귀찮게 다리 움직이지 않아도 여기까지 순식간에 올 수 있었어.
- 다리도 없으면서 귀찮아하기는.
“……그렇다면 저는 은신 믿고 저쪽으로 가 볼게요. 멀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들리지가 않아요. 다들 조용히 해 주세요.”
사한은 녹의 한마디에 발언의 자유를 구속당했다. 원숭이도 은근히 날카로워 보이는 녹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중요한 일을 앞둔 녹은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녹은 천천히 걸으며 그들 사이로 다가갔다.
그들의 무리에 다가갈수록 웅성거림이 커지고 음성의 내용이 뚜렷해졌다.
“……열매는.”
“아직 성공한 녀석은….”
녹은 그들 사이에 있는 하진에게만 집중해서 나아갔다. 걸어가는 와중에, 녹은 희한한 기분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린 겨울 새벽 밤바람이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태풍을 일으키고, 곧이어 끓어오르는 용암이 피 대신에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통증은 없었기에 괴상했다. 녹이 심장에 이상함을 느끼고 멈췄다.
- 왜 그러느냐?
“뭔가 이상해요.”
녹은 심장 위를 더듬었다. 온과 냉의 기묘한 기운은 녹의 심장을 훑다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녹은 그를 생생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세계수의 위로, 위로 나아가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녹은 마법사 무리와의 거리를 스무 걸음쯤 남겨 둔 채, 그 기운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았던 세계수의 가지는 세계수의 숨결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고개를 위로 꺾어도 쉬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은 마법사들이 만든 빛이 시선의 길을 터 주었기에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특정한 곳에 빛의 구슬을 옹기종기 매달아 두었다. 덕분에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를 놓치려야 놓칠 수 없었다.
나무 위에서 마법사들의 빛을 쬐고 있는 건 검은 알이었다.
마력으로 만든 빛에 반사된 광택이 매끈하고도 유려했다. 게다가 알 주위에 검은 나비 다수가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다, 알에게 흡수되며 사라졌다. 불나방이 불에 삼켜지는 모양새였다.
먼 거리에 있는 이곳에서 주먹만큼 보일 정도면…… 클 것이 분명한 저것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나를 부른 존재가 저 알이 맞는데…….’
원체 시력이 좋은 녹은 알의 머리 쪽에 두꺼운 줄기 하나가 매달린 걸 확인했다. 줄기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듯, 세계수와 이어져 있었다.
“저거 설마…… 열매예요?”
- 정답.
사한이 짧게 대답했다. 그 소문이 무성한 열매가 저런 형태였다니. 게다가 검은 나비를 게걸스레 삼키는 모습도 녹이 보기엔 기괴했다. 저게 정말 치유와 장수를 선물해 주는 열매가 맞는 건가?
- 왜. 치유와 장수를 선물해 준다니까 성스럽게 생겼을 줄 알았느냐? 뭐, 대충 하얀 무언가를 상상한 것 같은 얼굴이구나.
“음…….”
같이 다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녹의 머릿속을 읽어 버리는 사한이었다.
“생긴 게 되게 알처럼 생겼네요? 처음에 정말 그냥 알인 줄 알았어요. 근데 열매한테 흡수되는 나비들은 뭐예요? 저번에 보니까 물고기 정령들도 쟤네를 먹는 것 같던데.”
- 응? 너 식신이 보이느냐?
“쟤네가 식신이에요?”
- 네. 마법사들의 마력 사냥꾼이자 수족이라고 볼 수 있죠. 여하간 세계수님의 숨결에 직접 노출되어서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감지해 내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마력이 없으셔도 보이는 거겠죠.
그 솜털에 좀 둘러싸였다고 마력을 감지해 낼 수 있다니, 참 재미있는 세상이었다.
- 열매가 저기에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열매를 이용해 무언가를 꾸미는 모양입니다. 마법사들이 마력 회로를 열매까지 이어 두었어요.
- 이것 참,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몇백 년 만에 열리는 열매를 이용하려 하는 건 확실한 것 같구나.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마력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는 원숭이가 냉철하게 판단하고 사한은 혀를 찼다. 검은 망토를 두른 마법사들은 하진을 가운데에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녹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진의 근처까지 가까이 가 살폈지만, 역시나 하진은 혼이 나간 듯, 미동도 없었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쳤다.
“그래도 성공한 자가 있지 않은가!”
“성공할 뻔한 녀석이지. 그 녀석은 나중에 다시 볼 거야.”
목소리의 주인은 흰 수염을 구름처럼 기른 한 할아버지와 검고 얇은 수염을 세필 붓으로 그려 놓은 듯 기른 한 할아버지였다. 하진이 좋아하고 따르던 신 장로와 채 장로였다. 낯이 익은 얼굴에 커다란 목소리. 녹의 주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얀 할아버지가 손에 든 종이를 툭툭 치며 반박했다. 신 장로였다.
“열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네. 곧 부화한단 말일세!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 오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야.”
“그렇기에 지금 술식을 가장 강하게 짜지 않았는가.”
“자네는 이 아이가 과연 버틸 거로 생각하는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체력이 좋은 축에 속하니 희망은 있네.”
“그 희망 하나 가지고 가장 완성형인 아이를 가지고 도박하자는 건가!”
“자네가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지 않았나.”
신 장로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검은 수염 장로, 채 장로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살갑게 그를 꼬았다.
“열매의 마력 수렴성을 인간들에게 이식한다는 발상은 분명 획기적이네. 이제 세계수의 영역 밖에 나가서도 비효율적인 식신을 이용하여 마력을 채취하지 않아도 된단 말일세. 데리고 다니는 아이들 주변으로 알아서 마력이 모여들 텐데, 마력 고갈은 곧 먼 나라 이야기가 되는 거야. 그들은 걸어 다니는 식신이 되는 거지. 그것도 우리의 마력 없이! 자네도 그를 원치 않았나?”
“처음에는 동의하긴 했다만 아이들의 수명이 너무 단축돼.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아이들을 이용하기도 전에 모두 죽어 버릴 걸세. 비효율적이란 말이네. 실험 시작하고 벌써 몇이 죽어 나갔는지 알지 않는가. 그들이 독립을 위해 출가했다고 변명하는 것도 지치네.”
“하진은 분명 버틸 거야. 언제나 그래 왔지 않는가. 부화하면 마력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사라져 버리고 마네. 그리고 부화의 낌새가 보이니, 한 명이라도 완성시키기 위해 모험할 가치가 있다네. 지금도 체력 강화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인간 식신이 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체력 강화를 씌우면 하진은 오래 살 수 있어.”
“아주 유혹적인 말만 쏟아 내는군.”
“내 말이 틀린가?”
신 장로는 눈을 감고 침묵했다. 그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들은 녹은 모든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는 점에서 큰 위험을 감지했다. 녹은 하진에게 등을 돌렸다. 앞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이 맞는 행동이고 무엇이 틀린 결정일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는 오로지 본능과 직감만을 믿었다.
지금 당장 하진이를 이들에게서 떼어 놓아야 해.
하진은 녹과 뛰어서 딱 다섯 걸음 차이였다. 녹은 달렸다. 녹이 크게 한 발자국 내디딜 때였다.
눈을 뜬 신 장로가 고개를 끄떡였다.
두 발자국 내디딜 때였다.
마법사들이 일찌감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세 발자국 내디딜 때였다.
하진의 발밑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암녹색으로 으스스하게 올라왔다.
네 발자국을 내디딜 때였다. 녹은 하진을 밀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하진의 온몸에 빈틈없이 식신이 날아와 달라붙어 버린 후였다. 철가루 통에 내던져진 자석처럼, 하진은 순식간에 검은 나비들에게 파묻혀 버렸다.
징그러운 나비들에게 잠식당한 하진의 공허한 두 눈동자만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곧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고통을 담은 끔찍한 형태로-
고요했던 숲에는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 ❊ ❊
사고.
사고는 불시에 찾아오기에 사고라고 불린다. 예상했다면 예방하고 방비하면 될 일이었다. 미세한 간과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게 곧 사고다.
이건 사고였다. 하진의 상처를 간과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현장으로 밀고 들어왔지만 힘이 부족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정보가 부족했다.
녹은 쓰러지는 하진의 몸을 받았다. 녹의 손이 닿자마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식신들이 한순간에 소멸하였다. 바닥에 빛을 토하는 마법진이 껌뻑껌뻑 숨을 죽이기 시작한다.
녹의 마음속에 혼란이 요동쳤다. 뛰어오르는 심장 박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격해지는 감정에 어느새 녹의 머리 위에 붙어 있던 붉은 나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결국 은신이 해제된 녹은 마법사들에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술식이 해제되기 시작했습니다! 열매와 연결이 끊길 위기입니다! 이제 성공이 코앞인데!”
“근방에 있는 식신이 모두 소멸했습니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고요하기만 하던 숲속이 사람들의 말로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소음이 터져 나왔다. 마법사들은 품속에서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지팡이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튀어나와 다된 실험에 재 뿌리는 녹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숲속은 순식간에 위험한 기류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정작 녹에게는 주변의 요란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식신이 모두 제거된 하진의 몸을 붙들고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하진의 상태는 자못 심각해 보였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기운이랄 게 없었다. 숨소리조차 미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되뇌면서도, 녹의 한구석에 불안이 싹텄다. 방금 들은 장로들의 이야기가 기억을 뚫고 나와 움텄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아이들을 이용하기도 전에 모두 죽어 버릴 걸세. 비효율적이란 말이네. 실험 시작하고 벌써 몇이 죽어 나갔는지 알지 않는가.’
하진은 녹의 품속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빛이 꺼졌다. 열매의 특징을 아이에게 이식하던 술식이었다. 녹의 감정에 반응한 마법진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다음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몇백 년을 대대로 이어서 연구하던 술식이었다. 마법사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가 술식 자체를 파훼하고 있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기함하는 장로들 사이에서 한 명의 인간이 튀어나왔다. 지팡이를 들고 소란에서 나온 자는 하가의 가주였다. 가주가 나오거나 말거나, 그들이 뭘 하고 있든 간에 녹은 하진이 우선이었다.
‘일단은 숨을 붙여 두는 게 먼저다.’
녹은 머리를 차게 식히기 위해 노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팡이로 자신을 향해 위협적으로 조준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는 한 마리의 파란 원숭이와 그의 머리에 둘러앉아 있는 흰 뱀을 찾았다. 어두운 먹지에 하얀 점이 튄 것처럼 지금의 녹에게는 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녹은 구명줄처럼 그들을 찾았다.
“사한!!”
이미 그들은 녹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달려오는 것보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호령이 먼저였다.
“모두 공격!”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에서 불길한 빛이 사악하게 튀었다. 붉은 빛줄기는 녹에게 뻗어 나갔다. 공격을 지휘한 자는 하가의 가주였다. 그는 미련 없이 제 핏줄의 마지막을 명했다.
마법진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실험체는 나중에 구한다 치더라도 진이 없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애초에 심부름꾼 아이란 게 실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다. 그렇기에 열매와 연결이 되는 마법진이 사라지면 그 아이들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졌다. 마법진의 수호를 그리는 가주의 머릿속에 친아들인 녹은 없었다.
실험을 지휘하던 신 장로는 그의 뒤에 서서 그의 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엄동설한보다 시렸다. 마법사들이 쏟아 내는 공격은 비단 실험을 방해한 녹만을 향한 게 아니었다.
‘신 장로님이 나를 제일 예뻐하신다니까? 마주칠 때마다 당과를 주시는데,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생각 나.’
그 옆에서 누구보다 빨리 공격 마법을 건 자는 채 장로였다. 그 역시 비장하게 녹과 하진을 향해 지팡이를 쏘고 있었다. 슬픔 한 점 묻어 나오지 않는 꼴이 신 장로와 같았다.
‘채 장로님이 도도 검집을 선물해 주셨어! 훌륭한 검에는 훌륭한 보관이 필요하다면서. 장로님은 도도의 훌륭함을 알아보셨다니까! 다들 이렇게 착하신 분들인데, 도령은 왜 그렇게 피하지 못해 안달이야?’
그녀에게 잘 대해 준다길래 정말 하진을 예뻐하는구나,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가에서 알아주는 무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니까. 콧대 높은 마법사라도 빛나는 재능에 매료되는 건 어쩔 도리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진의 말을 들으며 어쩌면 마법사들이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허나 하진을 향한 그 모든 호의는 거짓이었다. 녹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이성을 이어 주던 가느다란 뇌 속의 끈 하나가 제 몸을 삭히며 끊어졌다. 요동치는 감정을 잠재울 수 없었다.
녹은 조용한 분노를 담고서 모두를 노려봤다. 눈앞의 모든 상황이 느리게 펼쳐지는 듯했다. 그들의 공격이 녹에게 닿기 전에, 반투명 푸른 반원형의 장막이 녹과 하진을 감싸며 나타났다. 청아하고 고결한 기운이 담뿍 담긴 마법이었다.
장막은 마법사들의 일격을 단단히 막아 내고 사라졌다. 정순한 세계수의 마력 등장에 마법사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방금 세계수의 마력 아니었습니까? 저리 진하고 순수한 마력은 처음 봅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다시 공격합니까?”
“마법진이 소멸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한과 원숭이가 녹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원숭이는 마법사들을 대비한 방벽을 쳤고, 사한은 녹이 안고 있는 하진을 감싸며 올라왔다. 하진의 얼굴 위를 보며 그녀의 낯빛을 관찰하던 사한이 목소리를 굳혔다.
- 인간들에게 불행의 근원이 되는 식신이 치사량 넘게 달라붙은 건 아이에게 치명적이었다. 마력을 끌어당기는 열매의 성질을 이식하는 실험이라니… 엄청난 걸 하고 있었구나. 이에 따른 부작용을 아이가 받는 건 고려하지 않은 건가. ……정신 차려라!
사한이 불현듯 녹의 뺨을 꼬리로 찰싹 치며 소리쳤다. 마법사들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녹은 사한의 불호령에 끊어진 이성의 끈을 다시 묶었다. 어느새 온 사한은 녹의 품 안에 있는 하진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몸이 은은히 빛났다. 사한에게서 청렴한 새벽 향이 풍겼다.
- 일단 정화는 하고 있다만… 이게 잘 먹힐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동안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지만 지금 아이의 상태는 폭탄이야. 식신의 불행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있어서 조금만 이동하더라도 어찌 될지 모른다.
- 마법진에 고약할 정도의 집념이 얽혀 있습니다. 대체 여기에 몇 년의 시간을 박아 넣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이 정도 고여 있는 마력이라면 아마 선대 가주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그동안 잘도 숨겼군요. 지금 녹 님의 의지와 반응해 빠르게 녹고 있긴 하다만, 덕분에 저쪽이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있는 진이 녹 님과 관련되었다는 걸 저쪽에서 눈치챈 것 같아요. 지금이야 버티지만 …크윽. 곧 한계가 올 겁니다. 아까 전 일격을 막아 낸 방벽은 세계수께서 내린 힘이었어요.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방벽은 마법사들이 쏟아 내는 공격으로 쿵쿵거렸다. 원숭이는 저 홀로 방벽을 유지하기 힘겨워했다. 투명했던 방벽은 땅과 닿아 있는 끄트머리에서부터 천천히 나비로 화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전자가 기를 쓰고 있어도 방벽이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두가 치열했다. 기적으로 방벽을 세우는 이도, 인간 아이의 몸속에 스며든 마력을 정화하는 이도, 자기도 모르게 세계수와 융화되어 진을 지우고 있는 이도, 진을 지우는 아이를 제거하려는 이들도, 그리고 세계수의 방해를 지우며 먼 곳에서 여기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이 또한.
팽팽한 김장감 속에서 시간은 날아드는 화살과 같았다. 모든 시계 부품이 빠르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녹의 볼에 식어 가는 온기가 느리게 맞닿았다. 힘겹게 들어 올린 아이의 손가락이었다. 하진의 손가락이 녹의 볼에 닿은 순간, 녹은 시끄러운 세상이 침묵으로 멈춘 듯 보였다.
“…도령.”
“하진아!”
하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흰 뱀을 쳐다보았다. 하진이 힘없이 내뱉었다.
“이 뱀이 도령이 말한 사한이야…?”
하진의 작은 말이 부서지는 모래처럼 스러졌다. 산화하는 하진의 말을 한 톨도 빠짐없이 주워 담기 위해 모든 집중을 동원한 녹은, 하진의 말에 헐레벌떡 고개를 끄떡였다. 우습기도 한 그 모습에 하진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도령의 말이 맞았네…. 도령을 괴롭히는 못된 요정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정령이었어.”
사한의 몸에 둘린 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사한은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정화에 힘쓰고 있었다. 녹은 하진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응응. 사한은 그냥 정령도 아니야. 정령들의 윗선이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수습하고 계시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말하지 말고 쉬어.”
그러나 하진은 녹의 말에도 쉬지 못하고 무언가를 찾는지 고개를 돌리려 애썼다. 녹은 그녀가 찾는 게 도도임을 알아챘다. 다행히 도도는 녹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냉큼 주워 하진에게 건넸다. 도도를 쥐는 하진의 입꼬리가 슬쩍 당겨졌다. 녹은 그 미소를 보고 아침 이슬이 떠올랐다. 해가 높이 떠오르면 끝끝내 증발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그 가련한 존재가.
“도도…. 그래도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무슨 소리야. 곧 일어날 거라니까? 괜히 그런 소리 하지 마.”
괜한 말을 하는 하진에 녹이 초조해져 외쳤다. 녹의 품에 안긴 하진은 그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꼈다. 하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녹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진의 말이 낭떠러지처럼 위태롭게 이어졌다.
“그냥…. 내가 걱정되는 건… 도령…. 쿨럭.”
“하진아. 말하지 말고 조금만 버텨.”
녹이 하진의 손을 붙들었다. 하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하진의 고갯짓 한 번에 심장의 살점이 떨어지고 불에 지져졌다. 폐부에 들어차는 산소는 칼날이 되어 호흡기를 할퀴었다. 잔상처가 넘치는 장기가 바닷물에 담가진 것 같았다. 날카로운 고통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녀는 마지막을 직감한 듯 굴었다.
“적어도…. 도…. 도령을…. 지켜 줬으면….”
녹에게 건네는 도도를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꼭 쥐었던 그녀의 온몸에 힘이 온통 빠져나갔다. 하진의 눈 밑 그늘이 길어졌다. 마지막 부탁을 전한 그녀의 얼굴은 미묘하고도 복잡했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한 녹과 나비로 변한 방벽이 사라진 순간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망연히 품 안을 바라보는 녹에게 마법사들의 공격이 덮쳐 왔다. 누군가가 녹을 감싸 안은 것도 동시였다.
도언이었다.
마법사들의 공격이 녹의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를 향해 쏟아졌다. 물론 그들의 목표물은 녹이었지만, 그 앞에 사내가 가로막고 있는 것뿐이었다.
마법진은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소멸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집중하는 건 마법진, 그뿐이었다. 녹이 안고 있는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하진을 유독 아꼈다는 장로들을 포함한 모두가 그랬다.
녹에게 달려드는 공격은 도언이 손을 움켜쥐자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법사들은 살면서 비축한 마력을 모두 쏟아 낼 듯 쉼 없이 공격을 퍼부었지만 도언의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마법사들은 알 수 없는 현상에 애가 탔다. 갑작스레 나타난 도언이 마법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령은 예외였다. 방벽을 다시 세우려 애쓰던 원숭이는 폭격과 같은 공격을 피해 도언의 뒤로 달려왔다. 그는 거기가 안전한 곳이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앞에서 긴 그림자를 만들며 방어에 애쓰는 도언이었지만, 녹은 그의 등장을 신경 쓸 수 없었다. 그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왔다고 하더라도 녹에게는 와닿지 않았을 거다. 녹은 자신의 품에서 도도를 꼭 쥐고 늘어져 있는 하진을 천천히 흔들어 보았다.
“하진아… 하진아…….”
아무리 불러도 하진에게는 답이 없다. 녹의 움직임에 따라 기운 없는 고개만이 느리게 흔들릴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벌린 녹은, 아직도 하진을 감싸고 있는 사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사한의 몸에 빛나던 빛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힘을 많이 쓰긴 했는지, 사한은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쿵.
그와 함께 녹의 귀에 무언가가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언가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심장이리라.
떨어진 심장이 빠르게 피를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녹은 고개를 숙여 품 안의 하진을 목숨줄인 양 빈틈없이 안았다. 하진의 손끝이 하얗게 질리며 식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삶의 온기가 느껴졌다. 가볍게 감은 하진의 눈과 반대로, 녹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깜빡이기조차 못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무얼 잘못했다고? 그저 힘이 없어서? 나에게 그 무엇도 수호할 힘이 없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가? 그런 걸까? 그런 건가? 저들은 뭔데 나에게 하진을 빼앗아 간 거지? 적어도 하진인 당신들을 진심으로 따랐는데. 그 무엇을 위해서 이 작은 아이가 세상을 볼 기회를 앗아가 버린 거지? 어째서? 무엇 때문에?
대체 왜?
“갑자기 세계수에서 숨결이 쏟아져 나옵니다!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법진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습니다! 연결이 끊어집니다!”
“아무리 공격해도 닿지 않습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 같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가주님! 이대로라면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마법으로만 밝혀지던 주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발광체로 인해 환해졌다. 한들거리는 세계수가 떨어뜨리는 것은 세계수의 숨결이었다. 녹과 닿았던 곳을 시작으로 세계수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숨결은 녹의 주변에 몰려 그 크기를 부풀렸다.
녹의 마음이 격해질수록 세계수 또한 녹과 공명했다. 녹의 감정이 널뛰는 것과 동시에 마법사들의 혼란 또한 가중되었다. 실험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성과가 있기 마련이었는데, 웬 놈이 튀어나와서 다된 밥에 재를 넘어 석탄을 문대고 있었다.
심지어 조용히 잠들어 있던 세계수 또한 깨어날 기미가 엿보였다. 세계수가 깨어난다면 그가 열매를 이용한 실험을 억지로 중지시킬지 몰랐다. 이건 마법진이 소멸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였다.
진이 소멸한다 해도 그만큼의 세월을 갈아 넣어 다시 만들고 열매를 기다리면 되지만, 실험하는 현장에서 세계수가 깨어난다면 연구 성과를 모조리 압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계수만큼 변덕스럽고 억지 부리는 존재는 하가에 또 없었다.
보통은 하가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넘겨주긴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세계수를 이용한 웬만한 대소사는 세계수가 잠들어 있을 때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눈 뜨고 실험의 전반이 사라지는 꼴을 볼 수 없었다. 눈을 감은 가주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았다.
- 감정이 너무 격해졌다. 이대로라면 힘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폭발할 거야!
- 녹 님이 힘의 그릇이 맞긴 합니다만, 이런 급격한 이전이라면 주변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합니다! 진정하실 수는 없습니까??
홍이 예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마력 이외에 기적을 일으키는 평범한 힘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수의 힘을 녹에게 담는 열쇠였다. 어떤 형태의 감정이든 세계수의 주위에서 강렬하게 일으키면 세계수의 마력이 녹의 심장에 담기는 것이다. 그릇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었다.
정령들은 녹에게 감정을 조절하라는 무리한 부탁을 했다. 허나 그건 녹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녹의 주변에서 온화하게 빛나던 숨결이 위험한 기운을 띤 붉은빛으로 변했다. 녹의 눈동자 또한 숨결의 빛을 반사해 붉게 변하고 있었다. 녹을 중심으로 흐르는 기류가 역으로 방향이 바뀌고 거세졌다.
숨결과 함께 거대한 나무 또한 진동을 시작했다. 열매와 연결하는 마법진이 끓는 물에 닿은 눈인 양 속도를 올려 소멸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마법사들 또한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심지어 땅까지 울렸다. 흔들리는 지반에 공격을 퍼붓던 마법사들은 집중을 잃고 중심 잡기에 혈안이었다.
- 기다려라. 아이야! 힘을 원하는 네 소망과 감정이 격하게 힘의 회로를 뚫고 있다. 세계수의 힘은 천천히 따라 이어야 하거늘, 지금은 폭포처럼 네게 들이부어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주변이 위험하다!
사한이 소리쳤다. 역시나 녹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두 눈 가득 하진의 모습만을 담을 뿐이다. 응집되고 강렬하며, 또 청아하고 정순한 기운이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휘몰아치며 제 몸에 깃드는 게 느껴졌다. 녹 주변의 숨결은 붉다 못해 검게 변하고 있었다.
실패한 마법진에서 나는 탄내를 여름 새벽 냄새가 몰아냈다. 자꾸만 솜털을 부풀리며 몸집을 키우던 숨결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덜덜 떨고 있었다. 커다란 온기가 뒤에서부터 녹을 감싸 안으며 그의 두 손을 잡은 건 그때였다.
“녹. 진정해요. 아직 하진은 살아 있습니다.”
귓가에 나직이 읊조리는 침착한 목소리. 마법사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던 도언이었다. 녹은 제 몸을 단단히 받쳐 주는 안락한 온기에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고개를 내렸다. 쌔액거리며 숨 쉬는 하진의 소리가 들렸다.
- 엇. 분명 말로를 보았는데……?
아직도 하진을 감싸고 있던 사한이 멍청하게 뚝딱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각했다. 짧은 시간 멈칫했던 사한은 하진의 몸에 깃든 마력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점점 고르게 안정되는 숨소리에 터질 듯 부풀었던 숨결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위험한 빛을 순하게 바꾸어 냈다. 덜컹거리던 지반 또한 안정을 되찾았다.
마법사들은 그 안정을 놓치지 않고 녹을 향해 공격했으나, 공격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갈색 머리 사내가 지팡이를 꺼내 들고 방벽을 쳤기 때문이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너무 개입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지만! 정말로 거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언에게 외쳤다. 도언은 고개조차 끄떡이지 않고 녹과 하진을 주시했다. 하진은 녹의 품 안에 있었고 녹은 도언의 품 안에 있었다. 몇 분 되지 않았지만 억겁 같던 시간이 흐르고, 하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을 뜨고 다시 세상과 마주했다.
하진은 자신의 하늘에 한가득 채워진 녹의 얼굴을 확인했다. 간절함을 담은 그의 눈동자를 보고 설게 미소 지었다.
“…뭐야…? 여기 천국…?”
그녀의 힘없는 미소에 녹의 시야가 흐려졌다. 눈에 가득 담긴 물은 고이다 못해 녹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국은 아닌가 봐. 천국이라면 도령이 웃고 있을 텐데….”
흐느끼던 녹이 하진을 끌어안았다. 녹은 하진을 안고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느라 정신없었다. 녹의 어깨에 턱을 기대게 된 하진은 녹의 등 뒤에 있던 도언과 눈을 맞췄다. 하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도언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도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진이 끝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하가는 정말 기적이 넘치는 곳이네.”
하진은 녹의 팔뚝을 톡톡 건드렸다. 그 신호에 녹은 하진을 풀어 주었다. 하진은 곧장 도언의 목을 끌어 자신에게 당겨 왔다. 하진은, 맞추어진 눈높이에서 자신보다 적어도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도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힘없이 비틀대던 하진의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하진은 미련 없이 웃었다.
“괜히 기특해서 그래. 기특해서. 이런 날도 있구나. 고생이 많았네.”
도언은 그녀의 말에도 아무 말 없이 뻗친 머리나 정리할 따름이었다. 도언에게 허물없이 다가가는 하진의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느낀 녹이 눈물범벅인 얼굴을 기울였다.
아무리 아이들이 괴롭혀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던 녹이었다. 하진은 강을 이룰 것처럼 눈물을 쏟아 내던 녹이 순식간에 눈물을 쏙 집어넣는 모습이 자못 우스꽝스러웠다. 이러면 안 되는 순간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웃음을 참지 못한 하진은 몇 번 쿡쿡 흘리던 웃음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도령.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와 함께니까.”
“응?”
녹의 되물음에 하진은 대답하지 않고 도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멋지게 한탕 한 덕에 세계수가 도령에게 작별할 시간을 선물해 주셨어. 그때 그렇게 가 버린 후에 이런 기회도 없이 다시 만날 수 없었다면 많이 슬펐을 거야.”
“작별할 시간이라니? 세계수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녹이 화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하진은 속 시원하게 얘기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때는 도령을 보호해 달라고 했지만… 이제는 혼자도 강하다며? 그래도 함께해 주었으면 해. 분명 도령의 힘이 될 거야.”
하진은 손에 들린 도도를 녹에게 건네며 말했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던 하진에게서 도도를 건네받았다. 도도는 하진의 미련이었다. 미련을 녹에게 넘긴 하진은 후련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발아래 있던 진이 모두 소멸했다.
하늘은 세계수의 잎사귀로 들어찼다. 그들의 주변에서 흩날리고 있던 숨결이 이번에는 푸르게 빛났다. 숨결이 하진의 주변에 다가와 회오리치며 장관을 연출했다. 마치 꽃잎이 하진의 주변에서 원무를 추는 듯했다. 솜털들이 속도를 더해 갈수록 하진의 모습 또한 희미해져 갔다.
희미해져 가는 하진은 도언과 녹의 손을 하나씩 잡고 몸을 일으켰다. 도언과 녹 또한 하진에게 끌려 일어났다. 아직도 흐르는 녹의 눈물을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던 하진은, 도언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바라보며 돌연 뿌듯해했다.
“이렇게 멋있게 변할 줄은 몰랐는데? 마지막에 얼굴 보고 갈 수 있어서 좋다.”
하진은 도언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잡고 아래로 끌었다. 도언이 하진의 손길에 끌려와 그녀와 높이를 맞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도언의 귓가에 하진은 무어라 소곤거렸다. 얌전히 듣고 있던 도언의 눈이 커졌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녹은 듣지 못했다.
말을 마친 하진은 도언의 목을 끌어 한번 꽉 끌어안았다. 하진의 속삭임을 듣고 눈을 키운 도언 역시 그에 대응해 하진을 힘 있게 끌어안았다. 하진을 끌어안는 도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아쉬움과 고마움, 슬픔과 기쁨, 그리고 미안함. 이외에 놀랍도록 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진의 태도와 도언의 행동을 보니 그 둘은 애초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녹이 도언에게 하진을 소개하기 전부터. 대체 도언은 누구길래 하진이 저리 행동하는 걸까.
길어질 것 같은 포옹을 떼어 낸 쪽은 하진이었다.
“도령의 꿈속에 들어와 줘서 고마워. 덕분에 드디어 세계수의 의식 속에서 미련 없이 고별할 수 있게 되었어.”
하진은 등을 돌려 녹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쉬움이 묻어나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도령의 장성한 모습을 지금 보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더 바란다면 욕심이겠지.”
하진이 다가와 녹을 끌어안았다. 녹은 하진이 어째서 마지막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별? 꿈? 의식? 그딴 게 다 무슨 소리인가. 얼른 이따위 배신자들이 넘쳐나는 하가에서 나가 그들을 피해 살면 된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아니야. 그걸 왜 못 봐. 같이 살면 볼 수 있잖아. 나가면 돼. 지금 여기 정령들의 윗선인 사한도 있고, 마법을 잘 쓰는 형도 있고, 게다가 네 친구이자 버팀목인 도도도 있잖아. 같이 살아가면 돼.”
“으아아악! 마법사들이 점점 늘어나요! 저 혼자서는 힘들다고요!! 여기서 다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청연의 고함이 저편 어딘가에서 들렸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내던 청연은 가주가 호출한 마법사들의 물량이 인산인해를 이룰 만큼 많아지자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마법사들은 몇백 년을 연구해 만들어 둔 마법진이 사라져 큰 실험이 허탕이 되자 악에 받쳐 공격해 댔다.
원숭이가 다시 한번 기적을 일으켰다. 나비들이 무지개처럼 모여 방벽을 세웠다. 사한 또한 멀쩡해 보이는 하진의 상태보다 그쪽이 더 급해 보였는지 그들의 옆에 가 섰다. 사한은 공격 하나하나를 잡아 소멸시켰다.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사한은 처음 보는 게 확실한 청연에게 투덜거렸다.
- 내참. 마법을 쓰는 건 고사하고 이리도 잘 쓰니 내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아이와 있을 때 자꾸 깔짝대며 나를 꼬아 낸 건 눈감아 주마.
“죄송합니다! 저희가 몰래 돌아다니려면 윗선님께 들키지 말아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 사한이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나 저기에나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기서 저 사내의 손을 들어 준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세계수도 눈감아 주니 내 별수 있나.
“아하하하… 알아채실 줄 알았다니까요. 눈감아 주셔서 정말 감사…… 우왁!”
가주가 불시에 쏟아 낸 공격을 방어하느라 말이 끊겼다. 녹은 그제야 느닷없이 나타난 청연의 존재를 깨달았다. 세계수 가문의 수장이 날리는 공격을 손쉽게 막아 내다니. 저자도 도언 못지않은 능력자인가 보다.
치열한 접전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하진은 덤덤히 이별을 고했다.
“갈 시간이야. 마지막이 텅 빈 육신뿐인 건 한 번으로 족하지. 끝까지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이 너무 하고 싶었어. 도령. 항상 고마웠어. 언제나 고마웠어.”
녹을 안으며 닿아 오는 무게가 희미해진다. 투명하게 사라져 가는 하진에 녹은 용을 쓰며 그녀를 붙들기 위해 애썼다. 노력이 무색하게 하진의 몸은 질량감을 잃어 갔다. 하진이 녹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나의 생, 나의 분신, 나의 편린들. 도령이 깨어나도 나를 기억한다면 나는 도령 안에서 살아 있는 게 되는 거야. 깨어나서 그 시대의 행복을 찾기를.”
녹은 자신이 뭐라고 말해도 그녀가 떠날 것을 직감했다. 하진은 조용히 미소했다. 곧이어 하진은 푸른 숨결로 부서지며 사라져 버렸다. 파란 솜털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마지막은 웃음이었다.
……연신 폭격 소리로 소란했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숨결과 폭격, 세계수와 흙바닥, 마법사들과, 사한을 포함한 정령들. 그리고 하진까지. 그 모든 존재가 사라져 있었다.
녹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한 공간에 자신을 끌어안은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움츠린 몸을 들어 올렸다. 주변을 살피니, 오른쪽에는 걱정스레 자신을 주시하는 도언이, 왼쪽에는 기진맥진하며 주저앉은 청연이 보였다.
녹은 자신을 감싼 팔을 풀었다. 힘줄이 돋을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내니, 언제 들어온 건지 하나 남은 푸른 숨결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녹의 얼굴 근처에서 장난치듯 물결무늬로 움직이던 숨결은, 하얗기만 할 뿐인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숨결 하나가 시야에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쫓았다. 마침내 푸른 솜털은 녹의 시선을 벗어났다.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녹의 볼을 타고 흘렀다. 과거의 모든 존재가 사라지자 깨달았다.
이곳은
꿈속이었구나.
드디어 하진이 이야기했던 것들이 이해되었다. 처음 도언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알 수 없는 소리 또한 이해되었다. 자신이 그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기에 알 수 있었다.
도언은 미래에서 온 꿈 여행자 따위가 아니었다. 녹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리고 과거로 왔다는 표현이 차라리 맞겠다. 도언은 세계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입자였다. 그것도 세계수의 의지에 간섭할 수 있는 강력한 침입자.
어디서부터 달라진 걸까. 세계수가 보여 주는 꿈의 목적은 보편적으로, 경험했던 과거를 가감 없이 다시 보여 주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세계수가 보여 주는 꿈속에선 언제나 지금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하가의 일상과 하진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이번 꿈에서 자신은 현재의 기억을 잃고 완벽하게 열다섯의 녹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것 또한 세계수의 의도일까?
세계수는 그 과거를 녹에게 완전하게 다시 보여 주고 싶어 했지만 완벽히 재현해 내는 데는 실패했다. 도언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세계수가 감독하는 과거의 꿈에 침입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도언이 이것저것 간섭한 덕분에 하진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주먹에 있던 숨결이 사라진 허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한 조각의 솜털이 하진이 같았다. 하진을 떠나보내고서 치열하고 예민했던 일상에 그녀를 제대로 추모했던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렇기에 하진의 마지막은 피부 안쪽에서 터진 상처처럼 곪아만 갔었다. 하지만 그 아픔 또한 하진의 흔적이라고 부득불 미련처럼 이고 다녔었다.
아마 세계수는 조금은 과격한 방법으로 하진에 대한 미련을 털게 만들 의도였던 것 같았다. 물론 그 의도대로 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하진의 죽음을 정통으로 다시 목격한다면 이번에는 꽤 긴 트라우마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아, 그래. 세계수가 기억을 없앤 이유 또한 과거와 같은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구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면 녹은 어떤 수를 써서든 하진과 하가 밖으로 나갔을 거다. 그게 꿈일지라도. 그리고 그 꿈에 영원히 갇힌다고 하더라도.
왜인지 눈물이 멎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공허감을 눈물로 채우려는 듯, 녹은 눈물로 마음속 빈 공간을 채웠다. 흐르는 눈물에 고개를 바로 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하늘만을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녹의 손을 감쌌다. 눈동자만 돌려 상대를 바라보니 손을 잡은 이는 도언이었다. 도언은 메마른 손으로 녹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 주었다.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물에 도언은 녹의 작은 머리를 잡아끌어 자신의 품에 묻었다.
꿈이라는 자각과 기억은 되찾았으나, 아직까지 작은 아이의 몸인 상태로 녹은 도언에게 얼굴을 묻었다. 도언의 품에 의해 시각이 차단되니, 공허함은 깊은 슬픔으로, 허전함은 진한 아쉬움으로 변했다. 녹은 몸을 떨며 오열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세상을 홀로 섰을 때부터 자신의 눈물은 메마른 줄로만 알았다. 누군가에게 정을 주면 그는 마법사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녹을 꿰어 내는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로 인해 죽은 것보다 더한 고통을 얻을지도 모른다. 온전히 자신이 정을 주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그 때문에 묵묵히 혼자 걸어온 인생이었다. 그렇기에 하진을 마음속에서 보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까지 떠나보내면 정말로 혼자가 되어 버릴까 봐.
그러므로 그녀가 정말로 가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걸 자꾸만 뒤로 미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진이가 정말 죽었다는 걸.
게다가 그녀는 마법사보다 삶을 빨리 태워 내는 인간이었는걸. 그때 죽지 않았어도 결국 녹과의 인연은 유지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심지어 제 눈으로 그녀가 죽은 걸 보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폭주하며 세계수의 힘을 받아들인 거고.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마음조차 하진이를 보냈다. 정말 보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혼자일까?’
주저앉아 혼자 울고 있어야 할 녹이었다. 허나 지금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음을 거두어 내고 있었다. 따듯이 감싸 오는 온기는 자신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그게 왜인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녹은 자신이 심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녹은 크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해 공기를 느리게 삼키며 호흡을 조절했다. 녹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녹은 도언을 힘없이 밀었다. 도언은 미약한 힘에도 쉽게 쓸려 나갔다. 손등으로 남은 눈물을 벅벅 닦은 녹은 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