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새로운 시대
녹은 눈을 떴다.
푹신하고 하얀 이불, 목에 거슬리게 갉작거리는 나무 고리, 발목에 달린 아타움, 게다가 옆에서 녹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던 도언까지. 모두가 녹의 기억대로였다. 녹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대체 얼마나 자고 있던 거야.”
“제가 들어간 건 하루 하고도 반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아무리 깨워도 깨어나지 않으시기에.”
“세계수 몰래 들어가느라 혼났다고요.”
어느새 나타나 툴툴거리기까지 하는 청연까지. 청연은 지팡이를 헐레벌떡 꺼내 요리조리 흔들어 보며 자신의 지팡이에 흠이 생겼는지 확인했다. 매끈한 나무 지팡이는 언제나처럼 광이 났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청연이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얼빠진 저 표정을 보니 이곳이 현실이 맞았다. 청연이 핸드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다행히 저희가 들어간 이래로 꿈속 시간선은 빨라졌네요. 다섯 시간밖에 안 지났어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모두 세계수의 꿈이었다니. 보통 세계수의 꿈은 꿈인 것을 자각하기 마련인데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온전히 융화되어 버렸다. 꿈속의 자신은 완벽히 그때의 자신이었다.
지금 보니 청연과 도언의 옷 모두 꿈속에서 봤던 옷과 일치했다. 편한 니트와 청바지 차림. 꿈속의 자신은 저 옷을 보고 굉장히 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신체 나이와 옷, 지금까지의 기억 모두를 잊은 자신과 완벽하게 대조되었다. 녹은 꿈속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들에 의문이 들어 물었다.
“대체 어떻게 세계수가 설계한 곳에 들어온 거야. 그 옷은 또 왜 같아. 정신만 들어온 거 아니었어?”
“육신 없인 세계수의 설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신만 녹의 꿈에 들어갔다면 세계수에게 걸릴 것이 자명해요.”
“그럼 몸까지 한꺼번에 다 들어왔단 말이야?”
도언은 말이 없었으나 그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헛 참.”
녹은 기가 찼다. 보통, 사람의 정신에 접속한다고 하면 육신은 현실에 두고 정신만 들어가는 게 보편적이었다. 아무리 정신 속에서 대미지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에 있는 육신이 중심을 잡아 주기 때문이다.
정신이 과도한 타격을 입기 전에 육신이 알아서 현실로 정신을 소환하는 거다. 그 대처는 반사 신경과 비슷했다.
하지만 몸을 현실에 두지 않고 온전히 다 들어왔을 시에는 문제가 된다. 사람의 꿈속에 갇혀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또, 꿈속에서 육신이 상하면 현실로 돌아와도 그 상처를 공유한다. 정신 세계에서 죽어 버리면 그대로 골로 가는 거다.
심지어 세계수의 지배 아래 태어난 꿈이니 세계수에게 들켜 버리면 행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꿈속에서 간섭은 물론 마법까지 쓸 수 없을지도 몰랐다. 마법 없는 마법사는 호신에 치명적이었다.
거기서라도 끝나면 다행이게. 꿈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어련히 꿈에서 깰 텐데. 그들로선 위험했던 도박이었다.
“제가 얼마나 말렸는지 알아요?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고 그랬는데 가주님이 막무가내잖아요. 차라리 꿈 여행자면 말을 안 하지. 우리는 세계수의 말대로 침입자나 다름없었어요. 가능한 은신을 깔끔하게 하고 싶었는데, 정령이면 몰라도 녹이 아닌 자에게 들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청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확실히 그들은 녹을 만나기 위해 녹의 꿈속에 침입한 거였다. 꿈으로 들어올 때, 세계수의 힘을 나누어 받은 정령은 몰라도 녹 외의 인간들에겐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철저하게 은신했다. 아무리 하진이 녹과 절친한 사이라고 해도 당연히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큰 오판이었지만.
심지어 죽었던 하진은 도언의 간섭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이래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까지 전했다. 그곳이 꿈속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일을 세계수가 알려 준 듯했다.
도언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간섭을 허용해 준 건 세계수의 의지였다. 하진이 가기 전에 말했던, 이 시간이 세계수가 준 작별의 기회라고 했던 건 사실이었다.
녹은 혀를 차려다가 삼키고 도언에게 물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어련히 과거 한 번 더 상기한 후에 안전히 꿈속에서 나올 텐데, 굳이 목숨까지 걸고 들어온 이유가 뭐야?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었다며.”
“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순간 기억나십니까?”
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계수가 존재했을 적 동안의 지혜를 온전히 물려받은 녹이었지만 도언의 정체는 추측되는 게 없었다. 이에 시간이 지나며 마법의 한계가 한차례 부서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녹은, 하진의 죽음을 과거에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언의 정체를 그녀로 추측했었지.
아마 세계수는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려 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필 하진이 죽는 그 끔찍한 순간을 다시 보여 주려고 한 걸 보면 세계수가 녹에게 과거를 내보이며 가르치려고 했던 사실은 한 가지.
이미 다가온 죽음은 마법으로도 무를 수 없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하필 그 순간 이래로 세계수의 꿈에 빠졌다니. 세계수가 녹에게 말하려는 메시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진이 아니란 걸 보여 주고 싶어 했겠죠.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도언은 ‘그 순간’이라며 하진의 죽음을 에둘러 말했다. 확실히 맞았다. 세계수가 꿈에서 현실로 나가는 문의 열쇠로 ‘그 순간’을 지명했다. 하진의 죽음을 보고 도언과 그녀가 동일인이 아님을 확인해야만 꿈에서 나갈 수 있었다.
녹은 도언이 하는 소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고작 그를 피하게 해 주려고 목숨 걸고 쫓아왔단 말인가. 고저 없이 덤덤하게 말하는 도언의 말소리가 담백하다. 도언의 옆에 있는 청연은 울상을 지으며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굉장히 위험한 여행을 하고 왔는지를 녹에게 어필했다.
‘정말 저게 목숨까지 건 이유인가?’
녹은 청연을 향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없이 물었다. 청연은 모터가 돌아가는 양 고개를 위아래로 빠르게 끄떡였다. 고개를 끄떡이는 속도를 조금만 더 올리면 바람까지 일으켜질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이유가 그것이었다는 게 어지간히 억울했나 보다.
“녹 님이 어련히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말했는데도 막무가내셔서요…. 너무 기회비용이 크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저러셔서… 하, 회사 경영하면서 그렇게 기회비용 따지길 좋아하시는 분이 리스크 큰 도박을 하시려 드니 뒷목 잡을 뻔… 아하하. 여하간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길어지는 청연의 말에 도언이 그를 한 번 흘끗 봤을 뿐이지만, 청연은 알아서 꼬리를 말고 태세를 전환했다. 도언은 깨갱거리는 청연을 뒤로하고 녹에게 식사를 물었다. 그제야 녹은 자신이 꿈속을 헤매는 동안 현실에서는 무엇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딱히 무언가를 먹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엑! 안 되는데! 배고프실까 봐 엄청 맛있는 거로 준비했단 말이에요!”
녹이 밥맛 없다는 데 호들갑을 떠는 건 청연이었다. 청연이 침실 문을 열자마자 바깥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가 자극적이었다. 김치를 기본으로 칼칼하게 끓인 김치찌개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꿈 밖에 나온 후 긴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그리 준비한 건지 모를 일이다.
입맛 도는 데 필살기 같은 김치찌개 냄새를 맡아도 녹은 영 식사가 끌리지 않았다. 하진을 드디어 보내 준 기분이 들어, 일어난 이래로 내내 헛헛했다.
과거 하진을 보낸 이후 찾아오지 않았던 공허함이었다. 그때는 세계수의 힘을 모두 끌어온 직후였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한숨 돌릴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하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 왔다.
자신의 강한 힘은 되려 녹의 약점이었다. 약점을 숨기려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가. 마음껏 슬퍼하는 것조차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이었다. 여유가 없을 때, 심지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을 때는 언제나 목숨이 1순위였다.
망연히 하진을 떠올리던 녹은 입을 열었다.
“밥은 됐고. 술 없냐?”
술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 ❊ ❊
“빈속에 술 마시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나서 소주병을 휘감아 회오리를 만들고 뚜껑을 돌려 까는 청연과 소주잔을 내미는 녹은 도언이 내뱉는 못마땅함이 들리지 않았다. 녹의 의견에 따라 도언 앞에서 합법적으로 일탈할 기회에 청연은 이미 눈이 돌아갔다. 녹이야 애초에 도언의 말을 잘 듣지도 않았다. 그런 엄마 잔소리 같은 소리를 들을까 보냐.
“김치찌개엔 역시 소주죠! 가주님 댁에는 와인이랑 맥주밖에 없다니까요! 아, 맥주 좀 꺼낼까요? 소맥 좋아하세요?”
“당연하지. 난 다 좋으니까 술 창고 있으면 다 털어 와.”
“캬. 뭘 좀 아시네. 주도를 어디서 배우신 건지 몰라도 좋은 스승 밑에서 배우셨나 봅디다!”
술에 입도 대지 않았는데 청연은 벌써부터 취한 것 같았다. 청연은 맥주잔을 마법으로 찬장에서 꺼내 와 절묘한 비율로 술을 말기 시작했다. 왜인 건지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그가 제일 신났다. 도언은 얕게 한숨을 쉬더니, 헬렐레 술을 마는 푸른 눈의 청년을 노려봤다.
청연은 술을 말고 있어 도언의 눈빛을 보지 못했지만 날카로운 기운이 자신의 얼굴에 쏟아지는 건 알아챘다. 만면에 웃음을 편 그대로 맥주를 들이붓는 도중 굳어 버렸다. 청연의 움직임이 기름칠 안 한 로봇처럼 삐꺽댔다. 도언은 녹의 등 뒤에 있었기에 녹은 행복해 보이던 청연이 어째서 저러는지 알지 못했다.
몽글몽글 솟아오른 솜사탕에 물이라도 뿌린 듯 텐션이 확 죽어 버린 청연은 얌전히 만 술잔을 녹 앞에 두었다. 나머지 한 잔은 이미 청연의 앞에 있었다. 녹은 비어 있는 잔 하나를 보고 물었다.
“왜 말다 말아. 하나 더 말아.”
“대표님…… 아니지, 가주님은 소맥 안 드신단 말이에요.”
“뭐야. 너 이 좋은 걸 안 마셔?”
녹은 벽에 등을 기대며 둘이 하는 꼴을 관전하고 있던 도언을 돌아보았다. 도언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튀어나오려는 잔소리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게 선연했다. 녹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도언을 불렀다. 부르면 잘 오긴 하는 도언은 냉큼 녹의 옆에 와 앉았다.
“그럼 내가 말아 줘야겠네.”
녹은 빈 잔과 소주, 맥주를 자신의 앞에 끌어와 말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율이 이상했다. 녹은 맥주 베이스에 소주 한 잔이 아닌, 그 반대로 주조하기 시작했다. 바라보던 청연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사악한 미소를 걸친 녹이 도언에게 삐딱하게 술잔을 내밀었다.
“이게 또 맛이거든? 우리, 해야 할 말 남았으니까 드시면서 하시죠? 형?”
녹의 말에 움찔한 도언은 녹이 준 술잔을 제게 끌어왔다.
“생각해 보니 되게 좋아하던데. 굳이 호칭 정정도 안 하고 말이야.”
“제가 언제 녹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고 보니 너 몇 살이냐?”
도언은 녹이 꿈속 과거에서 있을 때 녹보다 하가의 구조를 더 잘 알았었다. 심지어 녹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을 다녔지. 세계수 숲에서부터 홍화 저는 또 어떻고. 도언이 하가에 인연이 있다는 증거이리라. 생각보다 깊은 인연일지도 몰랐다. 웬만한 마법사들도 모를 만한 곳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니…….
여하간 녹은 지금까지 이 미친 마법사 도언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마법사라고는 자신밖에 없겠다고 확신해 온 녹이었다.
세계수가 사라지니 자연히 마력이 줄었다. 이는 마법사들의 수명 또한 자연스럽게 줄었다는 뜻이 된다. 마법사의 수명은 보통 그자의 마력의 양으로 결정되곤 하니까.
세계수가 있던 예전이라면 마법사들의 평균 수명이 100+a 정도였겠지만, 세계수가 사라지니 100살을 넘는 자가 드물었다. 이는 그 시절에 있던 자 중 녹의 얼굴을 본 이는 현재 웬만해서는 다 죽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하가라면 하진이 죽었을 때 녹이 폭주하며 고을까지 터트려 버렸다. 혹여 타고나길 많은 마력으로 수명이 많은 자가 하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녹은 지금까지 산 마법사 중 자신이 제일 나이가 많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상태였다. 마법사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 이는 녹의 역사에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리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도언은 언제나 녹에게 존대를 썼다. 위치를 자각하라며 녹에게 협박 비스름한 걸 했을 때조차 도언은 존댓말을 고수했다. 그렇기에 유교 사상에 찌든 녹은 당연히 도언이 연하라고 생각했었다.
도언은 녹의 물음에 침묵을 지키다가 아리송하게 물었다.
“몇 살일 거 같습니까?”
“그걸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야. 당연히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가를 아주 제 안방처럼 돌아다니는 걸 보니 아닐 수도 있을 거 같고…….”
“제가 녹보다 연상이면 형이라고 계속 불러 주시는 겁니까?”
“지랄 났다. 꺼져.”
“역시 그때가 마지막이었군요.”
부러 도언이 침울한 척 고개를 저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답을 미루는 꼴이 애초부터 속 시원하게 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 내가 답을 들을 인간이 너밖에 없을 줄 아나.
녹은 포커스를 도언에서 청연으로 옮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녹의 시선을 느낀 청연이 슬그머니 도언의 눈치를 보며 잔을 들어 올렸다.
“……하하. 일단 마시죠. 하하하. 짠 하세요. 짠!”
“그래서 쟤가 나보다 나이 많냐? 너라면 알 거 아니야.”
“하하하…….”
청연이 말꼬리를 늘였다. 청연이 들어 올린 술잔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식은땀을 쏟고 싶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자기 앞에 있는 둘 중 아무도 건배를 위해 잔을 들어 올리지 않았지만, 청연은 꿋꿋하게 제 잔을 그들의 앞에 끌어와 부딪쳤다. 식탁 바닥에 붙어 있는 잔 두 개를 차례로 부딪치는 청연의 잔이 공연히 처량해 보였다.
두 잔을 차례대로 부딪친 청연은 아무도 받아 주지 않는 건배에 홀로 자작했다. 왠지 얼른 취하는 게 나을 것 같단 직감이 청연의 속에서 피어올랐다. 얼른 취해서 술김에 퇴근하든가 해야지, 원.
“녹이 저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말 안 해 줄 것처럼 뜸 들이던 도언이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 세계 최고 연장자 마법사 타이틀을 지켜 냈다는 생각에 녹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냐?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형 소리를 너무 좋아하더라. 근데 인마, 왜 너는 나한테 형이라고 안 불러. 내가 너보다 나이 많다며.”
도언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거렸다. 기대도 안 했지만 그 표정에 발끈한 녹은 잔을 들어 얌전한 도언의 잔에 건배했다.
“야. 적셔.”
유리잔이 부딪치며 난 짠 소리만이 눈치 없이 발랄했다.
❊ ❊ ❊
아무리 소주와 맥주의 비율이 뒤바뀐 술을 말아 주어도 도언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마는 족족 원샷하는 기염까지 토해 내었다. 녹의 술은 청연이 말고, 도언의 술은 녹이 마는 이상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소맥을 연거푸 마시는 게 걱정되었는지 중간에 도언은 녹의 술을 마는 청연에게서 술병을 빼앗았으나, 녹은 다시 도언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청연에게 넘겼다.
“아, 얘가 만드는 거 맛있단 말이야. 내 걱정 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세요?”
“조하요. 조하요. 제가 또 소뭭 하놔는 귀가 뫅히게 말죠.”
“그래. 아마 자격증 같은 거 있을 거야. 소맥 자격증 이딴 거.”
“영광…영광이눼여. 하하하.”
“눈도 파랗고, 머리도 갈색이고. 외국인처럼 생겼는데 어쩌다가 안가 보좌가 된 거냐? 쟤랑 무슨 관계길래. 진짜 친척 같은 거라도 돼?”
“아… 머, 녹 님이 그 얘기 물으니까 웃기…….”
술술 넘어가는 술에 청연의 눈은 이미 빙글빙글 돌았다. 돌기만 한 게 아니라 말하다 말고 식탁에다가 머리를 박았다. 청연의 앞에 늘어진 음식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고른 숨소리를 보아하니 청연은 그대로 잠에 빠진 듯했다. 이 일련의 사태는 모두 청연이 무리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쩐지 자작하더라.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이 몇 병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열 병까지는 눈으로 셌었던 거 같은데… 이제는 세기도 귀찮다.
한 명 갔고. 이제 그 자리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도언과 녹뿐이었다. 아니, 조금 취한 사람은 도언, 그리고 약간 제정신인 사람은 녹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청연의 숨소리가 점진적으로 커지다 못해 이내 소음이 되어 가는 걸 보니 피곤하긴 했나 보다. 도언이 쓰러진 청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자려면 들어가서 자.”
“거의 정신을 잃은 수준 같은데 쟤가 네 말이 들리겠….”
쓰러진 줄 알았던 청연이 도언의 목소리에 반응해 벌떡 일어났다. 한 손을 벌떡 들고서 씩씩하게 외쳤다.
“구럼 저 먼저 들어과 보궸슴미다!”
청연은 지팡이도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땅으로 꺼지며 급하게도 사라졌다.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로 진행되는 전개에 녹은 눈만 끔뻑였다. 둘만 남은 집에서 도언은 침착하게 물었다.
“녹도 이제 그만하시고 가시죠.”
“아니. 아직 더 할 수 있거든? 너는 언제 취하냐?”
“글쎄요. 제가 취한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취한 적 없지 않을까요?”
평소보다 길어진 도언의 말을 들어 보니 그가 완벽하게 제정신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적어도 녹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녹은 그보다 훨씬 취한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도언을 조금이라도 취하게 만든 노고를 저 홀로 치하했다.
꾸준히 소주를 맥주잔에 맥주 따르듯 따른 보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하진을 보낸 마음이 공허해 술 생각이 났지만 소주를 잘 받아 마시는 도언의 모습을 보고 술자리의 이유를 바꿨다. 취하게 만들면 자기 정체에 대한 힌트를 술김에 던지지 않을까?
아무리 도언과 과거에 같은 시대를 공유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진이 아니란 걸 안 이상 피해 다녀야 할 귀찮은 마법사일 따름이다. 녹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도언을 취하게 한다고 무리했나. 폐부에서 알코올 향이 깊이 뿌려져 나왔다.
“너, 하진이랑은 무슨 사이야? 하진이가 가기 전에 너한테 뭐라고 말했어?”
“너무 직구 아닙니까?”
“앗.”
실수했다. 좀 돌려 말하면서 함정이나 파려고 했었는데, 알코올에 절여진 녹의 뇌로는 그런 고차원적인 신경 활동은 무리였다. 도언은 역시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제길.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세계수는 너란 침입자가 간섭해서 꿈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했어. 게다가 확실히 내가 겪은 과거가 끝으로 갈수록 달라졌고. 가장 궁금한 건 하진이가 떠나기 전에 했던 행동이야. 하진이는 그곳이 꿈인지 아는 양 행동했어. 이것도 너랑 관련 있는 거야?”
과거에 갇힌 꿈속 인물이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다. 아무리 세계수가 허락하고 그동안 있던 일을 알려 줬다고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언은 한손으로 얼굴을 괴고, 남은 손 검지로 식탁을 툭툭 건드린다. 해야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도언이 입을 열었다.
“…녹이 세계수의 힘을 끌어들일 당시 하진의 의식 중 일부가 그 힘에 흡수된 듯합니다. 아마 꿈속 하진이 살아났을 시점에서는 꿈속 과거의 아이가 아닌, 정말 그녀 본인이었겠죠. 꿈인지 알았던 저는 약간만 간섭했을 뿐입니다. 물론 중간에 세계수가 방해하긴 했습니다만.”
확실히 실제 과거였다면 하진이 눈을 감은 후 깨어날 일은 없었다. 그대로 세상을 떠난 후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었지. 꿈이 그린 과거와 진실된 과거가 다른 걸 보면 이가 도언의 힘이 맞긴 한가 보다. 그렇다면 하진이 떠나기 전에 하진 본인이 도언에게 할 말이 있었다는 건데…. 게다가 도언보고 기특하다고 했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한다. 생각할수록 미로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쨌건 그렇다면 정말 하진이의 의지였단 말이 되는 거네.”
“그렇죠. 이번에 세계수의 힘에 얽혀 빠져나가지 못했던 그녀의 조각이 이번 기회에 자유를 찾은 듯 보입니다.”
녹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과거에 하진을 마법사의 희생양으로 보낸 후 마음의 응어리가 깊었었나 보다. 그 사실은 본인인 녹 또한 몰랐었다. 혹시 마음속으로 하진을 보내지 못한 것도 세계수의 힘이 짠 거미줄에 그녀의 일부가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게다가 그 힘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하진은 죽은 후에도 온전히 편히 쉬지 못했었구나.
시원섭섭한 기분이다. 하지만 그녀의 일부가 꿈에 걸려 있었기에 그녀가 죽은 후에 제대로 된 이별을 나눌 수 있었던 거겠지. 물론 도언이 없었더라면 하진을 보내지 못함과 동시에 그녀의 죽음을 다시 한번 겪었으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진은 분명 ‘침입자가 온 김에 세계수가 이 순간을 허락해 주었다’고 했다. 세계수의 변덕이라고 하더라도, 도언의 공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도언의 정체가 무엇이었든, 목숨 걸고 꿈속에 들어와 간섭으로 하진을 드디어 보냈다는 건 사실이었다.
녹은 남은 소주를 맥주잔에 콸콸 부었다. 그리고 자신이 채운 그 잔을 꿀꺽꿀꺽 넘겼다. 도언은 깜짝 놀라 빼앗으려 했으나 잔은 이미 빈 후였다. 녹이 맥주잔에 소주를 채우기에 자신의 잔이라고 생각했거늘 오산이었다. 녹은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탕.
“……와 줘서 고마웠다.”
“네?”
도언이 드물게 되물었다. 말이 끝나고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는 폼이, 지금 자기가 들은 말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술의 힘을 빌린 녹은 되묻는 도언에게 대답했다.
“와 줘서 고마웠다고. 이런 건 한 번에 좀 알아들어라.”
“녹… 지금 저한테 고맙다고 하신 겁니까?”
“제대로 들었구만 뭘 또 묻고 그래.”
“와…….”
녹의 뜻을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한 도언은 제대로 얼떨떨해 보였다. 그는 얕게 감탄사를 뱉으며 입가를 쓰다듬었다.
“저는 지금까지의 기억을 가진 녹이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꿈속 어린 시절의 녹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나 때문에 목숨까지 걸었다는데, 이거랑은 별개로 감사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
녹이 여전히 목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나무 고리를 매만졌다. 이것 때문에 마법을 못 쓴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지지만 어쩌겠나. 자신도 잊지 말라는 듯 발목의 아타움이 절그럭거렸다. 괜히 짜증 나서 사슬을 콱 밟아 주었다. 아타움이 신경질 내듯 웅웅거렸다.
‘감사 인사 취소할까.’
하지만 도언이 개입했기에 세계수에 갇힌 줄도 모르던 하진을 보내 주었으니 인사를 하는 게 도리에는 맞았다. 녹이 품은 도리에 관한 규율은 법전이 되어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법전은 은혜를 입었으면 적어도 인사는 꼭 하라고 일렀다. 물론 도언의 원래 의도는 녹이 하진의 마지막을 보기 전에 꿈에서 데리고 나오는 거였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잘되었다.
만일 육신을 보험으로 정신만 녹의 꿈속에 침입했다면 세계수의 힘에게 들켜 무언가 간섭하기도 전에 튕겨 나갔을 거다. 물론, 세계수의 꿈은 육신을 가지고 들어와도 간섭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듯 녹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도언은 그의 앞에 비워진 술잔을 보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이게 바로 술의 순기능인가 봅니다.”
“됐거든?”
젓가락을 들고 청연이 날라 바친 두부 김치를 뒤적이던 녹에게 도언이 성큼 다가왔다. 식탁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렸다. 두부를 집어 먹다가 코앞까지 가까워진 도언의 얼굴에 고개를 뒤로 내뺐다.
잘난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찼다. 분명 같이 마신 술인데 도언이 다가오니 술 냄새는커녕 옷감에 심긴 섬유 유연제 향이 훅 끼쳤다.
그러고 보니 꿈속 과거에서도 저 비슷한 냄새 달고 다녔었지. 고소한 풍미를 풍기며 입안에서 뭉개지던 두부의 맛이 괜한 긴장으로 인해 서서히 맛을 잃어 갔다. 감각이 위험 신호를 내는 걸 보면 모든 세포가 술에 절여지진 않았나 보다.
“뭐야. 뭔데.”
“말로만 고맙다고 하실 겁니까?”
도언은 포착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녹은 굳이 묻지 않아도 도언이 감사 인사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되었다.
녹은 순식간에 젓가락을 놓고 의자를 잡아끌어 벽에 붙었다. 한 손의 길이만큼 맞닿아 있던 얼굴이 한 팔의 길이만큼 떨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 거리 유지하자? 고맙다는 마음까지 증발해 버리기 전에.”
흘겨보는 녹의 눈초리에 도언은 어깨나 한 번 하늘로 끌어다 내릴 뿐이었다. 꿈속을 겪지 않았던 예전에는 이러면 녹이 진저리 쳤었는데, 이젠 흘겨보는 수준에서 끝나서 다행이었다. 이것 또한 술 때문일까?
“그래도 어릴 적 녹은 형이라고 하며 곧잘 따르는 게 귀여웠는데. 약간 아쉽긴 합니다.”
“그럼 이것들 풀고 거기 가서 살아, 새끼야. 그리고 다시 오지 마라? 응?”
녹이 열정적으로 제 목을 가리켰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며 아타움 또한 도언에게 내밀었다.
“취중 진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본심을 숨기십니까?”
“너는 이게 내 본심이 아닌 거로 보이냐?”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쟤 진짜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괜스레 귀찮아져서 말을 삼켰다. 가능한 도언과 멀리 떨어지며 식탁의 끝에 도착한 녹은 자신의 빈 술잔에 다시 소주를 채웠다.
따르다 보니 빈 병이 되어 하나 더 깠다. 맥주잔에 맥주 대신 채워진 소주의 위상이 대단했다. 녹이 잔으로 손을 뻗자, 도언이 낚아채 한달음에 마셔 버렸다.
“뭐, 예상치 못했지만 저도 하진과 마지막을 제대로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하진의 이야기가 나오자, 녹은 자신의 술을 빼앗아 마신 걸 항의할 생각을 잊어버렸다. 테이블모서리에 붙어 있다시피 했던 녹은 슬금슬금 식탁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하진을 말하는 도언의 표정이 씁쓸하단 걸 눈치챘다. 어느새 도언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깊어졌다.
이미 마지막에 하진이 도언을 보고 반가운 티를 풍겨서 둘이 아는 사이란 건 알고 있었다. 허나 도언의 입에서 직접 그 관계에 대해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진을 안다면 분명 자신과 동시대 사람인 게 분명한데. 분명 세계수를 흡수하며 주변을 다 터트렸을 텐데. 어떻게 된 걸까. 도언은 하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일까?
분명 그 참사 이후 녹 혼자 남겨진 이래로 정확한 정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기는 했다. 아니면 정말로 그들은 꿈속에서 처음 만난 걸지도 몰랐다. 그, 날아오던 화살이 하진을 향했을 때처럼. 아니지, 그렇다면 하진이 도언을 향해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는 말을 한 게 또 이해되지 않는다.
“흠…….”
여기까지 머리를 굴린 것도 알코올에 절여져 헬렐레 하는 녹에게는 기적이었다. 팽팽 돌아가던 맷돌이 그 가속을 이기지 못하고 어처구니를 날려 버렸다. 그래. 나중에 생각하자. 도언을 취하게 할 작정이었던 녹은 되려 자신이 당한 사실을 인정하고 정신노동 파업을 선포했다. 이렇게 된 거 술이나 더 마시자.
녹이 소주병을 들어 올려 맥주잔을 채웠다. 도언은 놀라지도 않고 그 잔을 자신에게로 끌어온다. 그리고 네 모금 안에 잔을 비웠다. 자신이 마시려고 따른 술이었다. 눈 뜨고 코를 대체 몇 번 베인 건가. 녹은 참지 않았다. 주먹을 쥐고 상을 한번 내리쳤다.
“그거 내 건데 왜 자꾸 너가 마시는데!”
도언은 대꾸도 않고 남은 소주병을 눈으로 세었다. 빨리 마시고 퇴근하고 싶었던 청연으로 인해 다량의 소주병이 눈앞에서 옆구리를 바닥에 뉘이고 구르고 있었다. 절제하지 않고 일단 꺼내 본 술의 수가 과했다. 많은 수의 병을 몽땅 다 비우고 남은 술은 딱 한 병. 녹의 모습은 적어도 겉보기는 멀쩡해 보인다. 발음도 나름 정확하고.
“녹. 술 잘합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나랑 붙어서 멀쩡한 사람은 또 없을걸? 부족하니까 더 시켜. 아직 안 취했으니까.”
술 취한 사람에게 해 봤자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는데, 괜히 물었다. 취한 청연이 가장 잘하는 거짓말 세 가지가 그거 아닌가. 나 안 취헤써여. 더 마쉴 수 이써요. 나 술 좔해여. 그와 레퍼토리가 매우 비슷했다.
“…….”
도언은 듣지도 않고 테이블을 정리하려 일어났다. 상 위에 있는 빈 접시들이 치워지고 공간이 나타나자마자 녹은 슬라임처럼 빈 테이블에 팔을 기대며 늘어졌다. 그대로 웅얼웅얼거린다.
“그래도 누구랑 이렇게 술 마신 적 처음이란 말이야. 좀 더 마시면 안 되는 거야?”
상을 치우던 도언의 손이 멈칫, 일시 정지 되었다. 청연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모습에서 숙련도가 느껴졌었는데, 처음이었다니?
“……그런 것치고 너무 자연스럽게 노시지 않으셨습니까?”
“요즘 세상이 뭔가 꼭 해 봐야 알게 되는 세상은 아니지. 나 프리미엄 유저야.”
핸드폰 없다던 녹은 정말로 유튜브 프리미엄 유저였다. 직접적으로 인간들과 부대끼는 것에 부담을 느낀 녹은 동영상을 보며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관찰했다.
핸드폰이 없는 녹은 집에 있던 컴퓨터를 활용해 동영상 감상을 했었다. 작은 화면보다 널찍한 것이 훨씬 좋았다. 언젠가 한 번쯤 타로 유튜버로 활동 한번 해 볼까 하는 자그마한 소망도 가지고 있었다.
“아, 채널명은 민수타로……!!”
숨을 들이켜며 테이블에 쏟았던 몸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일으켰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한쪽 손은 허리에, 다른 쪽은 검지를 펼쳐 하늘로 찌른다. 갑작스레 마주한 녹의 오버스러운 자세에 도언이 벙쪘다. 분명 취했다. 발음만 멀쩡하지, 녹은 분명 취한 것이다.
말에도 두서가 없고…… 프리미엄 유저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홀로 웅얼거리다 갑자기 웬 채널명을 외치질 않나. 겉보기엔 정말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해롱거리고 있었구나. 혹시 모르니 도언은 녹을 일단 눕힌 다음에 뒤처리해야겠다고 정했다. 언제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 넘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마음을 먹은 도언은 들고 있던 접시를 놓고서 녹에게 다가갔다. 도언이 다가가도 녹은 자신이 지은 희한한 포즈를 고수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표정 보니까 맑게 개었다. 하진이 완전히 떠나갔으니 한동안은 우울하겠다 싶었는데, 차라리 술을 마셔서 다행인 걸까. 도언은 하늘을 찌르는 녹의 손을 아래로 내리며 생각했다.
천장에 닿을 기세로 찌르던 한 손이 내려간 녹은 불현듯 도언을 올려 봤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녹의 눈동자는 총기를 잃지 않았다. 그 투명함에 도언이 홀린 듯 멈추었다.
몇 초간의 눈 맞춤이 이어졌다. 먼저 행동한 것은 눈빛 하나로 가주의 몸에 스턴을 건 녹이었다. 녹은 그대로 도언의 멱살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었다. 덕분에 엉거주춤 숙여진 도언의 고개가 녹의 얼굴 가까이 붙었다.
녹이 그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예측할 수 없는 주정뱅이에게 잡힌 가련한 희생양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주정뱅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산해야 할 페널티가 있었지. 너는 하진이 아니었으니까. 너한테 맡기면 괜히 이상한 짓 더 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냥 해 버려야겠다. 이걸로 페널티 정산 끝이다?”
제 시야에 녹의 얼굴이 들어차는 만큼 도언의 눈 또한 커져 갔다.
꿈속에서 나왔더니 다른 꿈에 갇힌 걸까? 아니, 분명 이곳은 꿈이 아니었다. 도언의 니트 자락을 멱살 잡듯 움켜쥐고 눈을 감고 있는 녹은 분명 꿈속이 아닌 현실에 존재했다. 도언은 녹처럼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녹의 얼굴만을 혼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얼음 상태로 돌입한 도언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눈을 감은 녹은 맞댄 입술을 홀로 꿈질꿈질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약하게 끝나면 도언이 그놈의 페널티란 걸 무효로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경한 그 감각에 자연히 도언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마까지 찌푸리며 자신이 처음 페널티 받았을 때를 떠올리던 녹은, 그때의 도언을 그대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웬만해서 입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녹의 혀가 빼꼼하고 시린 공기 중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따뜻한 다른 동굴을 찾아 들어왔다. 물론 그 동굴은 자신의 동굴이 아니었다.
“……!”
자신만의 장소에 깜찍한 뱀 한 마리가 따뜻한 곳을 찾아 쳐들어왔다. 나른하게 하순 안쪽을 핥는 말랑한 녀석이 잠들어 있던 다른 뱀을 건드렸다. 닿아 오는 몽글한 그 감각이 열쇠였다. 도언이 정신을 차릴, 아니, 정신을 놓아 버릴.
얌전히 겨울잠 자던 녀석은 낯선 이의 침입에 흉포하게 변했다. 녹의 혀를 안쪽으로 끌어옴과 동시에 녹의 입 안쪽 공간 또한 침입해 자신으로 채웠다. 더 안으로,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은 욕구 때문에 도언이 녹을 몰아붙였다.
혀가 목구멍 안쪽을 간질임과 동시에 다가오는 도언의 몸에, 녹은 잡았던 도언의 멱살을 풀고 목에 손을 감았다. 술에 취한 이성은 복잡한 연산 과정 없이 오로지 제 육신의 안정과 쾌락만을 좇았다.
“……으응.”
밀려나는 육신에 뒤통수가 벽에 닿았다. 모든 감각이 입술에, 혀에, 입천장에, 목구멍에 집중된 것 같았다. 이 이외의 생각은 허락하지 않았다. 술의 도움으로 한 가닥 남은 이성의 끈마저 놓아 버린 녹은 거리낄 게 없었다.
녹은 자신의 장소에 들어온 도언의 것을 본능적으로 둥글게 굴리며 끌어당겼다. 도언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서서히 녹의 고개 또한 천장으로 들렸다. 녹은 반대로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녹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힘껏 꺾였다.
이에 도언은 숨결이 이어진 채로 녹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림과 동시에 들린 녹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무릎을 세워 벽에 고정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릎으로 만든 간이 의자에 녹을 태웠다. 눈높이가 맞춰짐과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꺾였던 녹의 고개 또한 편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저 입만 이어진 것뿐인데 왜 이렇게 자극적인 걸까. 녹은 알 수 없었다. 도언의 무릎에 앉혀진 덕분에 바닥에서 살짝 떨어진 발가락은 그가 제 입천장을 건들수록 곱아들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도언의 손은 녹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페널티니 뭐니, 잠깐만 비슷하게 흉내 내고 빠져나가려고 했던 녹은 저도 모르게 제대로 감겨 버렸다. 흐름을 타니 끊을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끊을 타이밍은 무슨, ‘끊다’라는 단어는 이미 녹의 무의식을 나타낸 바닷속 깊은 곳에 수장된 지 오래다.
도언에게서 목을 긁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키스에 집중하던 녹은 짐승들이 으레 내고는 하는 그 소리가 너무 가까워서 괜히 놀라 움찔거렸다. 아무리 미약한 몸짓이라고 하더라도 맞닿은 상태에서는 큰 동작으로 보이기 마련이라, 그르릉거리며 이어 가던 도언은 녹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입술을 떼어 내었다.
하필 녹이 도언의 안에 상주하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그의 입안을 유영하던 녹은 갑자기 떨어진 그에 재빠른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녹의 혀는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차가운 공기에 자신을 전시하고 있었다. 녹은 무슨 일인지 알아내기 위해 감았던 눈을 반쯤 떠내었다.
감각에 휩쓸린 여파로 몽롱하게 반쯤 떠낸 눈, 내민 선홍빛 혀, 곰실거리는 칠흑빛 머리칼은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 위에 떨어지며 대조를 이루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뺨은 고운 복숭앗빛이다. 셔츠 안쪽으로 보일 듯 말 듯 하얗게 빛나는 목덜미에 자연히 침이 넘어갔다.
그저 바라만 보기도 힘들어졌다. 도언은 자신의 무릎 위에서 중심이 흐트러진 그를 다시금 추슬러 올리며 녹의 목덜미를 약하게 짓씹었다.
“으응…….”
낯선 감각은 지나칠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녹은 꼬이는 몸을 자제하도록 애썼다. 도언의 목둘레에 감은 손은 어느새 등으로 옮겨져 그의 니트 자락에 박혔다. 녹의 고개가 도언의 머리가 박힌 목덜미 쪽과 반대쪽으로 늘어지며 멀어졌다. 덕분에 도언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도언은 놓치지 않고 아래서 위로 느른하게 핥았다.
녹은 도언이 자신의 목덜미에 용암을 뿌리며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행로에 잊을 수 없는 감각의 표식을 남기며 올라온 도언은, 그대로 녹의 귀 뒤를 건드리다가 귓바퀴로 무대를 옮겼다.
며칠, 몇 년, 아니, 셀 수 없을 시간을 굶었지만 도언은 배부른 사자를 가장했다. 녹의 둥근 귀를 한 바퀴 훑은 도언은 그의 다른 구멍에 두툼한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고막에 차오르는 젖은 소리와 끈적거리는 감각에, 고개를 미약하게 저은 녹은 몸을 옹송그리며 안쪽으로 모았다.
“……하악.”
공기가 목구멍을 긁으며 폐부로 빨려 들어갔다. 땅에 떨어지던 다리가 몸통 가까이 왔고, 도언의 등에 박았던 손은 도언을 밀어 냈다. 그러나 등 뒤에 있는 벽은 녹이 밀어 낸 힘만큼 녹의 등을 밀어 낼 뿐이었다.
아무리 도리질을 쳐도 도언은 녹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등이 곱아들었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점점 심해지는 도리질에 도언이 결국 고개를 떼어 냈다.
“하아, 하아…….”
몰아치는 자극의 속박에서 벗어난 녹이 숨을 헐떡였다. 눈가가 맺힌 눈물로 반짝였다. 바닥만을 멀거니 사선으로 바라보며 숨을 진정시켰다. 가슴께가 부풀었다 줄어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몰아붙인 도언에게서 아무 액션이 없는 걸 깨닫고 눈동자만 굴려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
도언은 녹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녹의 허리와 무릎 뒤를 안아 한 번에 들어 올렸다. 헛숨을 삼키려는 녹의 시도는 도언이 그의 입술을 삼키며 불발되었다. 도언은 녹을 안고 침실로 성큼성큼 데리고 갔다. 침실로 가는 몇 걸음의 그 거리가 도언에게는 만리장성보다 길었다는 걸 녹은 알까.
침실은 불도 켜지 않아 깜깜했다. 도언은 녹과 입을 맞추며 침대 매트리스 위로 조심스레 녹을 올려놓았다. 건드리면 곧바로 터져 버릴 것 같은 비눗방울을 다루는 것 같았다. 녹이 제대로 누운 걸 확인한 도언이 따라 올라왔다.
그는 자신의 니트를 잡아 한 번에 벗었다. 금세 맨살이 드러났다. 차가운 공기에 시릴 법도 하건만,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은 시린 주변의 공기마저 덥혔다.
도언은 그대로 녹의 셔츠 단추로 손을 내렸다.
“……?”
고른 숨소리와 규칙적인 가슴의 부풀림에 위화감이 느껴진 도언은 녹을 살폈다. 거기엔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에 빠져 버린 주정뱅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 ❊ ❊
“으으… 머리 아…….”
녹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떴다. 뇌를 포크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에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게 바로 숙취인가.’
녹은 제대로 된 숙취를 격통으로 받았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혼술 할 때도 소주 다섯 병은 쉽게 넘겼건만. 그때도 숙취라곤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눈을 감고 어지럽게 보이는 세상을 정리한 녹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그러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어, 녹 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청연이 반갑게 인사하며 식탁에 밥을 차려 주었다. 고봉밥 한 공기와 청양고추를 넣고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 녹이 이 순간 제일 원했던 메뉴였다.
녹은 냉큼 테이블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떠내었다. 부글거리던 속이 칼칼한 국물로 시원하게 해장 되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스파이나 범죄자의 자백도 받아 낼 맛이었다.
녹이 코를 박을 기세로 전투적으로 아침을 먹으며 해장하고 있을 때, 도언은 그의 옆에서 태블릿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멈추고 녹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한 그릇을 몽땅 비우고 청연에게 더 달라며 빈 그릇을 넘긴 녹이 제 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의 의미를 물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어제 기억이 나긴 하십니까?”
“기억? 음….”
도언의 물음에 녹은 찬찬히 생각하기 위해 눈을 굴리다, 숙취로 깨지려는 머리에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연과 신나게 건배하고, 도언에게 소주와 맥주를 환상의 비율로 섞어서 내민 것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올리려 노력할수록 머리만 아파졌다. 녹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내가 어제 뭔 말 했어?”
“……유튜버 민수타로는 기억나십니까.”
“어? 그거 내 예비 예명인데. 내가 그런 얘기도 했어? 그냥 가볍게 해 볼까 생각했던 건데 귀찮아서 안 했거든. 술 취해서 그 소리까지 할 정도였으면 내가 꽤나 진심이었나 보다. 몰랐네. 나도.”
도언은 숨을 크게 쉬며 눈을 감고 고개를 양옆으로 두 번 저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쟤가 저렇게 반응하는 거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청연이 떠다 준 국그릇을 받아 들며 끝났다. 다시 정신없이 국을 퍼마시던 녹이 이마를 구기며 머리를 짚었다.
“아, 야…… 머리 진짜 아프네. 내가 숙취는 처음이라. 쟤는 딱 봐도 괜찮은 것 같고. 너는 어제 완전히 꼴아서 제일 먼저 갔잖아. 가장 떡이 됐으면서 나보다 멀쩡해 보인다?”
녹의 투덜거림에 청연이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아이고, 숙취 있었어요? 말씀하시지. 제가 편하게 해 드릴게요.”
청연이 녹을 향해 지팡이를 조준하며 무어라 읊조렸다. 양치 후 얼음물을 마신 것 같은 시린 상쾌함이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나아지는 상황에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발끝부터 녹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녹은 곧,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녹은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집 안 전체에 울리는 비명이 단말마처럼 오싹하다. 옆에 있던 도언이 앉아 있던 식탁에서 덜컹 일어나 녹에게 한달음에 다가갔다. 도언이 엎어진 녹의 등에 손을 얹고 물었다.
“녹. 무슨 일이에요.”
“으으으…….”
도언이 그에게 뭐를 물어도 녹은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도언의 눈에 녹은 이미 기절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도언은 녹의 어깨를 감싸 그의 상태를 살피며 굳은 얼굴로 청연을 보았다.
청연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의 지팡이를 살펴보았다. 걸었던 게 숙취 해소 마법이 아닌 정신 공격 마법이었던가? 아니, 아무리 기억을 복기해도 청연이 녹에게 건 것은 숙취 해소 마법이 맞았다. 분명 실수하지 않았다.
허나 청연을 쏘아보는 도언의 눈빛은 묵직했다. 도언의 낌새를 알아챈 청연이 자신이 그에게 죽기 전에 양 손바닥을 보여 주며 고개를 연신 도리질했다.
“저는 진짜 숙취만 제거한 건데… 어제 먹은 알코올만 날렸다고요. 진짜예요.”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녹은 그들의 이야기가 귓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확실히 청연은 실력 좋은 마법사였다. 알코올을 빼며 같이 빼도 좋을 법한 기억까지 같이 떠오르게 해 주다니….
‘그러고 보니 정산해야 할 페널티가 있었지. 너는 하진이 아니었으니까. 너한테 맡기면 괜히 이상한 짓 더 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냥 해 버려야겠다. 이걸로 페널티 정산 끝이다?’
정녕 자신이 한 말이란 말인가. 술기운이 모두 가셔 맑아진 정신은 어젯밤 기억을 또렷하게 상영해 주었다. 인간 사회 미디어, 혹은 사회 뉴스 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 중 하나인 ‘술김에’를 경험하게 해 주다니.
녹은 술김에 그랬다는 말을 볼 때마다 코웃음 쳤다. 그놈의 술김에가 뭐라고. 아무리 평소에 순한 양이라고 하더라도 술만 마시면 개가 된다는 건 애초에 그놈 본성이 개란 뜻이다. 술김에 한 실수다? 아니? 평소에 그런 욕망을 품은 적이 있으니까 이성을 놓은 김에 고삐를 놓아 버린 거겠지!
그러면 술김에 그런 일을 대놓고 도언에게 한 자신은?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리 대담한 짓을 벌였지? 도언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언젠가 페널티 운운하며 녹에게 무엇을 할지 모른단 뜻이다. 그를 간파한 녹은 자신이 먼저 페널티란 걸 해결하면 더 이상 도언이 자기에게 추근댈 이유 자체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데, 술과 분위기의 힘은 대단했다. 끊어 내기는 칼 같은 녹이 끊을 타이밍을 놓친 것만으로도 그 힘이 ‘대단하다’란 형용사를 가져갈 자격이 충분했다.
‘그놈의 술!!’
녹은 자신이 그 대사에 진심으로 공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주량이 센 녹이었다. 기억을 잃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신 것도 처음이었는데, 처음부터 친 사고가 엄청났다. 녹은 이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를 어쩐다. 계속 모르는 척해야 하나.
“어디 아파요? 녹. 괜찮아요? 제 말 들리십니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드디어 들렸다. 청연까지 가세해 녹에게 걱정을 쏟아 낸다.
“괜찮아요? 이를 어쩌지? 분명 술에 의한 효과만 지웠는데……!”
술로 이루어 낸 망각까지 지워 버리다니. 고맙기도 하다. 양옆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둘을 느끼니 정신이란 게 없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자.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쥐어뜯던 녹이 갑자기 일어났다.
“아니, 별일 아니야. 그냥. 머릿속이 너무 개운해진 김에 소리 한번 질러 봤다. 하하.”
유난이란 유난은 다 떨어 놓고 별일 아니라는 녹의 말에 청연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예요. 갑자기 어그로 끄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괜찮으신 겁니까?”
청연의 말은 쌈박하게 씹혔다. 도언을 향해 고개를 성의 없이 몇 번 끄떡거린 녹은, 의자에서 내려와 청연의 몸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어. 그냥 몸만 과하게 가뿐해졌다. 하.하. 이 녀석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쓸데없이 능력 좋네. 하.하.하. 고맙다. 참. 하.하.하.”
떠올리지만 않으면 흑역사가 될 리도 없던 기억이 덕분에 선명해졌다. 청연의 몸을 툭툭 치던 녹은, 점점 실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을 실어 버렸다. 끊어 발음하는 웃음에 어두운 원망이 느껴졌다.
“아야, 아야. 그만 치세요. 아프다고요.”
몸을 움츠리며 녹의 손길을 피해 버리는 청연에 녹은 손을 거두고 방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밥 다 먹었고, 숙취는 없어졌지만 피곤하긴 하니까 들어가서 좀 더 잔다. 굳이 들어오지 마라. 더 잘 거니까.”
최대한 여유를 가장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청연은 녹의 감정 실린 공격을 받은 부위를 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닫힌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옆에 있는 도언에게 들으라는 듯 물었다.
“제가 녹 님한테 뭐 잘못한 거 없죠?”
“…….”
“아, 진짜 모르겠네. 갑자기 왜 저러시지? 과거에서 이별을 겪으셔서 아직 힘드신가?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렀어도 하진의 의지가 세계수의 힘 속에 존재한 이상, 제대로 보내 드린 건 이번이 처음이실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어제 술 생각 난다고 하신 것도, 오늘 이상한 행동 하신 것도 이해를 못 할 건 아니네요. 녹 님이 아끼던 분이셨잖아요. 물론 가주님도….”
청연은 말을 하다 말고 도언의 눈치를 보았다. 방문을 바라보는 도언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여간 두 분이 은근히 비슷하단 말이야. 청연은 한숨을 삼켰다.
❊ ❊ ❊
잘 찾지도 않던 술 생각이 난 건 하진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펑펑 울고서도 심장에 구멍 뚫린 듯 허전한 느낌이 들어 공연히 술을 찾았다. 말없이 함께 심장에서 살고 있던 친구가 정말로 방을 뺀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멍하니 있으면 계속 축 처져 있을 것만 같아서 술을 찾은 거였는데. 물론 술이 그 구멍을 채워 주진 않았지만 잠시 잊게 해 주긴 했다.
녹은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꽉 여몄다. 어젯밤 일은 녹의 머릿속에 눌러앉아 버렸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애를 써 봐도 그 시뻘겋고 위험한 경험이 자꾸만 상기되어 미치겠다. 붉은 혀라든가, 짙어진 숨결이라든가, 귀를 울리는 소리라든가. 불을 품은 손이라든가!!
원래대로라면 한동안 과거에서 온 여파로 공허했을 거 같은데, 그를 그리워하고 추억할 여유조차 술김에 빼앗겼다. 그놈의 술김에. 술김에!!
똑, 똑.
꽉 닫은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노크하고 들어올 인물은 청연밖에 없었다. 녹은 문 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침울하게 대답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자가 저벅이며 녹에게 다가왔다. 침대 옆 원형 테이블에 트레이를 하나 내려놓는다. 녹이 무언고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앙증맞은 옥수수 콘과 함께 푸릇한 양상추, 특제 소스와 치즈, 블루베리 잼이 한껏 들어가 녹의 취향을 저격한 샌드위치가 접시 위에 소담히 담겨 있었다. 옆에 있는 컵은 향긋한 라떼 향을 풍겼다. 완벽했다.
이곳에 온 이래로 한 번 먹고 가끔 생각났던 것이다. 숙취에 해롱거렸다면 쳐다도 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놈의 은혜로운 알코올 작용이 모두 날아가서 그런지, 샌드위치를 보자마자 입에서 침이 고였다.
심장에 있던 허무함은 배 속으로 전이되었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꼬르륵거리기 직전의 생체 시계를 보니 점심때긴 한가 보다. 머릿속이 하도 시끄러워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청연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자신의 점심을 챙겨 주러 들어왔나 보다. 그래, 이 시간이면 도언은 출근하러 갔겠지. 차라리 얼굴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다행이군 그래. 녹은 자신을 감싼 이불을 풀기 위해 손에 힘을 뺄 참이었다.
접시를 내려놓은 자는 아무 말도 않고, 떠나지도 않고 기립해 서 있었다. 의문을 느낀 녹이 이불 고치 속에서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암막 커튼을 쳐 어두컴컴한 침실에 의해, 열린 방문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은 그를 역광으로 비추었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며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녹의 감상이었다. 머릿속에 거주하는 도언을 내쫓기 위해 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도언은 태산처럼 침대 옆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헉.”
피하고 싶은 인물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났다. 흘러내리려던 이불을 다시 추슬러 올리고 완벽하게 그 속에 숨어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엎어졌다. 완벽한 침대 위 고치가 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완성된 하얀 고치는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대신 도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녹은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지금 얼굴 보면 이 후유증이 더 길게 갈 것 같다. 머리 위로 붉은 경광등이 삐용삐용 울려 댔다. 이불로 도언의 시야를 차단하니 한층 마음이 나아졌다.
녹의 등 뒤로 누군가의 손이 내려앉았다. 녹은 주인의 뜻과 반대로 크게 튀어 오르려는 몸을 매트리스 위로 내리누르느라 혼났다. 질 좋은 침대는 도언이 침대 위에 올라와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모르게 했다. 기척도 없이 온 도언은 이불을 토닥이기만 했다.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악몽이라면 악몽이지.’
도언은 침대 위에서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멍하니 천장이나 바라보던 녹이 악몽을 꿔서 그렇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이불 속에 숨어 버린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한 걸까? 악몽은커녕 한숨도 못 잤다. 가만 보면 쟤도 참 악몽에 집착한다. 녹은 그저 우울하게 대답했다.
“……혼자 있을래.”
이불을 두드려 주던 손이 멈췄다. 이후 긴 침묵의 시간이 도래했다. 녹은 입을 열 생각이 없었고, 도언 또한 입을 다물어 버리니, 침실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호흡으로 부풀었다가 수축하는 하얀 고치는 영 기운이 없었다.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어제 술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그리 활발할 수 없었는데. 어제는 술로 슬픔을 마취시켰다고 한다면, 그 격통이 맨정신인 지금에서야 오는 걸까. 도언은 녹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시간은 약이다. 그 약이라는 시간을 드디어 맞고 있는 녹이었다. 일상처럼 목숨을 위협받았기 때문에 온전히 슬퍼할 여유 또한 없었으리라. 게다가 녹의 심장에 흡수된 하진의 일부 또한 드디어 공허로 날아가기도 했고. 도언의 눈에 이불 고치는 슬픔에 절어 있었다. 이대로 집에만 있으면 기분이 나아지긴 할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도언은 녹이 이불을 박차고 나와 버릴 한마디를 내뱉었다.
“외출하시겠습니까?”
“헐. 대박.”
마침 뒤따라 들어오고 있던 청연이 도언의 제의를 듣고서 한마디 했다. 녹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완벽한 한마디였다. 이불 속에 파묻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언이 말을 바꿀까, 녹은 이불을 거두고서 벌떡 일어나 도언에게 물었다.
“정말?”
“네.”
“진짜지?”
“그럼요.”
듣고 또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녹은 도언이 진심인지 파악하느라 표정 관리도 못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언의 얼굴은 변화 없는 포커페이스일 따름이었다.
결국 초점을 뒤에 있는 청연에게로 옮겨 가니 그의 표정만큼은 살아 있었다. 다물지 못하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토끼 눈을 뜬 것이 청연도 몰랐나 보다. 짜고 속이는 건 아니란 소리군. 입을 가린 손을 느린 동작으로 내린 청연은 다시 감탄을 뱉어 냈다.
“대박.”
“대박이지.”
“대박이네요.”
“대박이라니까?”
청연까지 저렇게 나올 정도면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 도언은 나가게 해 준다고 했다. 냉큼 침대에서 내려온 녹이 청연의 손을 붙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오른쪽, 왼쪽, 흔들흔들하는 것이 신명 게이지가 끝까지 올라 찬 듯했다. 청연 역시 활짝 편 녹의 기분에 전이 되어, 둘은 한동안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나갈 수 있다네~ 나갈 수 있다네~”
“크흠.”
정체불명의 노래를 부르는 녹과 함께 기쁨을 나누던 청연은 도언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기립했다. 흐물거리던 청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날카로워졌다.
청연이 차렷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청연의 손을 붙잡았던 녹의 손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 떴다. 도언은 그들의 춤사위를 삐딱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도 된다는 말은 제가 했는데 왜 청연과 춤추시는 겁니까?”
도언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삐질. 온도가 내려간 그의 목소리에 청연의 땀방울이 소리를 내며 흘렀다. 녹에게 말했지만 도언은 청연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연은 필사적으로 흐린 눈을 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아, 이 방에 괜히 왔어.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은 법이었다.
“그럼 내가 병 주고 약 준 놈한테 가야겠냐? 너 아니었으면 고작 외출에 이렇게 기뻐할 일도 없었거든?”
도언이 한 번 한 말을 무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녹은 대차게 뻗댔다. 역시 도언은 녹의 말에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녹이 뻗대는 동안에도 도언은 청연을 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청연의 등이 긴장으로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도언은 고저 없이 그를 향해 한마디 했다.
“보고.”
“옙!! 지금까지 이 근방에 있는 마법 연합원은 대부분 소탕되었습니다! 다른 연합원들은 우리가 아닌 타 가문의 공격이라고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 구역에 있는 연합원은 대부분 소멸하였지만,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몇 명은 구역을 이탈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신원은 현재 파악하고 있습니다!”
힘차게 내뱉는 보고가 우렁차다. 마법 연합이라면 그, 도언이 도륙 내고 있었던 뜨내기 마법사들 집단 아닌가? 도언이 들었냐는 듯 녹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도언이 만든 눈빛 감옥에서 벗어난 청연의 얕은 한숨 소리가 가까이 있던 녹에게 들렸다. 열심히 때려잡고 있었구나. 그들 모두 도언이 때려잡은 걸까?
도언은 말했다.
“들었죠? 지금 나가시면 위험해요.”
“내가? 누구 때문에. 너 때문에?”
“연합원 때문이죠. 녹 얼굴 좀 생각해요. 탐이 안 나게 생겼나.”
“하.”
기가 찬 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와 버렸다. 녹은 목을 도언에게 내밀며 나무 고리를 가리켰다.
“이것만 없으면 걔네들 하나도 위험하지 않거든? 얼굴은 바꾸면 되는 거고 마력은 지우면 되는 거거든? 너가 이것만 풀어 주면 되는 거거든?”
도언은 그들이 녹을 탐내는 이유로 세계수의 씨앗이 아니라 얼굴 부분을 짚었지만 녹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도언은 되려 마법사들이 모두 탐낼 만한 얼굴을 하고서 화려하게 웃었다.
“제가 왜요?”
“환장하겠네.”
녹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저놈의 안도라이언. 열 내는 것도 지친다. 그래, 꿈을 목숨까지 걸고 쫓아올 때부터… 아니, 아예 여기 가뒀을 때부터 알아봤다. 지금은 여기서 만족해야 하나.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가게야 해 준다니까… 아주 지 멋대로인 도언은 나무 고리를 풀 수 없는 이유를 읊었다.
“그거 풀어 주면 녹은 또 제 앞에서 사라져 버리실 거잖아요.”
기회인가. 여기서 말을 잘하면 풀게 해 줄지도 몰랐다. 꿈속에서 그래도 좀 친해진 것 같으니까.
물론 녹은 마법만 쓸 수 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 버릴 생각이었다. 도언의 정체가 개인적으로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하진이도 아니라는데 상관없지 않나 싶다. 하지만 진심을 그대로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서는 그간 살면서 갈고 닦아 온 혼신의 연기가 필요했다. 진심처럼 보이려면 순발력 또한 필요하다. 대화 속 공백은 독이다. 그렇기에 녹은 도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꾸했다. 정말 진심처럼 보이도록- 씨알아, 먹혀라!
“아, 아…아니거든? 안 사라질 거거든?”
또렷한 시선은 도언의 눈을 피하지 않는 걸 성공했으나, 눈동자 대신 흔들리는 목소리가 문제였다. 어느새 긴장이 풀린 청연이 감탄했다.
“와. 녹 님. 배우는 못 하시겠네요. 얼굴은 완전 합격인데. 아쉽다.”
연기가 씨알도 안 먹혔다. 민수의 얼굴로 영업할 때는 연기가 숨 쉬듯 자연스러웠었는데,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니 연기의 텐션이 무너졌다. 못 봐줄 연기였다고, 청연이 옆에서 속삭이며 확인 사살까지 착실하게 해 주었다. 굳이 부탁하지도 않은 연기 평가해 줘서 아주 눈물이 다 나도록 고마웠다.
도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리를 풀어 달라는 녹의 주장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나가는 건 괜찮지만 안전한 곳을 저와 함께 나가야 합니다.”
“안전한 곳?”
“아무래도 위험 분자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네가 제일 위험해.’
녹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어차피 말해 봤자 입만 아플 터였다. 대신 자신의 자유의 대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 정체를 알아맞히면 풀어 준단 거, 유효한 거 맞지?”
“물론입니다. 제가 한 말은 지켜요.”
“그래. 곧 그놈의 수수께끼를 꼭 풀 테니까 딱 기다리고만 있어라.”
“와아. 기대되네요.”
도언이 감흥 없이 대꾸했다. 내뱉는 말에 영혼이란 없었다. 그에 술 취해서 도언에게 했던 실수를 그새 잊어버린 녹은 신경질적으로 협탁 위 샌드위치를 잡아 한 입 물었다. 샌드위치는 짜증 나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달았다.
❊ ❊ ❊
녹은 달리는 차 안에서 카시트에 몸을 묻고 나무 고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불퉁한 얼굴이 입술을 불쑥 내밀고 있었다. 한껏 불량하게 다리까지 꼬고 늘어진 녹의 발목에 은색의 실 발찌가 찰랑거렸다. 발목에서 아예 해제되지 않은 아타움이다.
‘나가려면 이것도 빼 줘야지.’
‘아. 그건 이렇게 하면 됩니다.’
녹이 내민 발을 부드럽게 잡은 도언이 아타움의 옆면을 쓸었다. 그러자 기다랗고 거추장스러웠던 사슬이 사라지고, 족쇄는 얇은 은색의 실고리가 되어 녹의 발목을 장식했다.
그저 사슬만 떼어 주면 이게 무슨 전자 발찌 비주얼이냐고 생지랄을 떨면서 등을 바닥에 대고 드러누우려고 했는데, 괜히 아쉬웠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면 아타움을 풀어 줄지 누가 알겠는가. 그게 풀리면 일단 속박의 자물쇠 하나는 풀리는 거였다. 탈출 난이도가 반은 줄었을 텐데.
밖에 나왔는데도 결국은 두 개 중 무엇 하나 해제하지 못했다. 녹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녹은 자신의 옆자리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열심히 태블릿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도언이 보였다. 태블릿 액정을 살펴보니, 빨간색, 파란색, 녹색으로 되어 있는 그래프가 어지럽게 산을 그리고 있었다.
금방 흥미를 잃은 녹이 차창 밖을 쳐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거리는 차의 속력에 맞추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턱을 괴고서 빠르게 뒤로 넘어가는 가로수를 구경하던 녹이 물었다.
“근데 왜 차 타고 다녀? 마법으로 한 번에 가면 좋잖아.”
“녹 님께서 오랜만에 나왔는데 바깥 구경 좀 하시라고요.”
운전석에서 나온 목소리 하나가 도언 대신 답해 주었다. 운전대를 잡은 자는 청연이었다. 되지도 않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고 있다니, 대체 가주 보좌의 업무는 어디까지일까. 회상해 보니, 도언이 자신에게 돈가스를 사 주었을 때 도언을 데리러 온 기사가 갈색 머리를 했던 것도 같다.
대학생으로 보였던 도언의 잠재 재력에 대해 감탄하느라 기사를 그리 주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아마 그는 청연이 맞았을 거다. 여하간 덕분에 차창 바깥의 풍경을 실컷 구경하고 있으니 됐나?
계속 하늘 위에서만 보던 바깥은 이리 바로 옆에서 보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래서 뭐든 잃어 봐야 그게 소중한지 안다니까. 거리를 걸으며 출근할 때는 그냥 지긋지긋했었는데. 녹은 바지 주머니에 있는 타로 상자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도언은 녹이 외출한다고 하니 바지도 주고 따닷한 외투도 주었다. 한 번 외출했으니 외출권이 뚫린 게 아닐까?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올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녹은 하릴없이 바깥만 바라보았다.
“근데 안전한 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거야? 바깥에 마법사들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곳이 있긴 해?”
대답은 녹의 옆에서 흘러나왔다.
“그럼요. 꽤나 꽁꽁 숨겨 두었거든요.”
대답한 도언이 태블릿의 커버를 탁 덮었다.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려던 녹은 창밖의 풍경이 1분쯤 전에 왔던 곳이란 걸 발견해 냈다. 1분 전에 왔던 곳은 또 그때로부터 1분 전에 왔던 골목이었다. 다시 말해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있었다.
“왜 자꾸 왔던 곳 또 와? 길 잃었냐? 내비라도 켜. 뒀다 뭐 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던 녹이 청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길 잃은 사람답지 않게 청연은 느긋했다.
“조금만 더 가면 나와요. 바깥 구경 좀 하고 계세요.”
‘계속 빙빙 돌면서 뭐라는 거야.’
청연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녹의 눈이 순간 두 배로 커졌다. 햇살이 비쳤던 차 안은 터널을 지나가는 양 삽시간에 어두컴컴해졌다.
가오리.
가오리였다. 말 그대로 거대한 가오리가 차에 비치는 햇살을 막아 버렸다. 가오리가 지나간 이후, 햇살이 물결처럼 부서져 차 안을 유영했다. 아니, 유영하는 건 차 자체였다. 골목을 뱅뱅 돌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녹이 탄 차는 잠수함처럼 바다 안을 나아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녹이 코를 차창에 딱 붙이고 바깥을 바라봤다. 차 안은 움직이는 아쿠아리움이 따로 없었다. 거북이니, 가오리니, 저 먼 곳에서는 돌고래까지 보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거리였었는데?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는 낯선 자동차의 등장에도 달아나지 않고 해류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갑오징어 한 마리만이 먹물을 뿌리며 달아났다.
차는 갑오징어가 뿌린 먹물을 헤치고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차는 햇살이 비추는 곳만 헤엄치며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차 안에 빛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청연이 신나서 설명했다.
“이 근처에서 특정 마법을 건 차를 타고서 패턴에 맞게 돌면 통로가 나타나거든요. 물론 꼭 이런 통로만 있는 건 아니지만요.”
딱히 바닷속을 들어가 볼 생각이 없던 녹은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가끔 보았던 바다 안은 녹에게 별세계 그 자체였다. 마법사인 녹은 바다나 하늘과 영 친하지 못했다. 굳이 이동 수단을 타고 그 둘을 통해 오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 번 손가락이나 튕기는 것만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녹이었다. 구태여 체력 낭비에 주변에 마법사가 있는지 신경 쓰는 정신 노동까지 하며 운송 수단에 몸을 누일 이유가 없었다.
가는 거리와 쓰는 마력은 비례하기 때문에 요즘의 웬만한 마법사들은 보통 마법보다는 인간의 운송 수단을 선호한다고 하지만, 마력이 넘쳤던 녹으로서는 딱히 고려해야 할 사항은 아니었던 거다.
애초에 어마어마한 집돌이인 녹은 애써 그 긴 거리를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볼 장 다 봤다고 생각한 녹은 가능한 집에서 평화롭게 뒹굴거리는 게 인생의 목표요, 삶의 의미였다. 안전 마법을 떡칠한 집에 있을 때만큼은 모든 것에 신경 끄고 대충 살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진짜 그리 살면 영양분 공급을 받지 못한 주린 배가 엄청나게 잔소리해 대지만…….
그렇게 두 손바닥과 코끝은 창에 대고 빠져들 것처럼 해저 탐험을 하던 녹은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여기서 창문 내리면 어떻게 돼?”
“글쎄요. 궁금하면 한번 해 보세요.”
녹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바다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를 눈여겨보던 도언이 나직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도언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녹은 창에 붙였던 코를 떼어 냈다.
‘진심인가?’
도언의 정신 나간 소리를 들은 청연 또한 별말 없이 운전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보통 도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마다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는 청연일진대, 아무 반응 없는 걸 보면 도언이 한 말이 상식선의 수준인가 보다.
아마 지금 여기도 진짜 바다 안이 아닌 마법이 만들어 낸 환상일 가능성이 컸다. 청연을 보라. 밑에 도로가 없는데도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은가.
쓸데없이 궁금해진 녹은 차창을 내렸다.
냉기를 머금은 물이 들어와 녹을 날름 삼켰다.
❊ ❊ ❊
“…정말로 창을 내리실 줄은 몰랐는데요.”
“…….”
‘죽일까?’
자기가 내려 보라고 했으면서 진짜 내릴 줄 몰랐단다. 녹은 솟구치는 살심을 다스려 눌렀다. 도언의 장난질에 대차게 낚여 버렸다. 진짜 바닷물이 차 안으로 들어올지 몰랐다. 덕분에 얼굴에 정통으로 물벼락을 맞아 버렸다.
푹 젖은 녹 때문에, 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차는 멈춰서 전진하지 못했다. 브레이크를 밟은 청연이 호들갑을 떨며 지팡이를 꺼내 차 안의 바닷물을 빼고, 생쥐 꼴이 된 녹 또한 말려 주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치시면 어떻게 해요!”
할 말이 없어진 녹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고수하다가 억울해져서 잔소리하는 청연에게 한 마디 던졌다.
“쟤가 헛소리하는 거였으면 네가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적어도 여기 운전할 때는 집중해야 하거든요? 집중하면 딱히 뭐가 들리지도 않는다고요. 가주님이 하신 말이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분별하셨어야죠!”
“…….”
운전하느라 집중하고 있어서 대화를 못 들었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녹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닫았다. 도언만이 옆에서 쿡쿡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녹은 그런 그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야. 웃냐? 웃어?”
“아, 죄송합니다. 물벼락 맞으실 때 모습이 자꾸 생각나 버려서.”
‘저 자식을 어떻게 조지지?’
뒷수습을 다 한 청연은 멈춘 차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청연이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뒷좌석의 사고뭉치들에게 당부했다.
“이제 곧 도착이니까 그때까지 제발 얌전히들 계세요. 제가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 아닌 거 맞죠? 그렇죠?”
“…….”
녹은 정말이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녹을 주시한 옆자리의 사내는 다시금 쿡쿡댔다. 녹은 그 얄미운 녀석의 구두를 콱 밟아 주었다. 도언이 밟힌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올려 이글거리는 녹의 눈과 마주했다.
“……아야.”
그리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적선하듯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라고 밟은 게 아프지도 않나 보다. 그래, 웃음이라도 멈췄으니 다행인 건가.
녹은 감정을 담아 한 번 더 발을 꾹 눌러 준 후, 자신의 발을 회수했다. 팔짱을 끼고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짠 내 가득 품은 물벼락을 한 번 맞았더니 바깥을 쳐다보기가 싫어졌다.
녹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데 도언이 눈치도 없이 녹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녹이 어깨를 털어 내며 도언의 손가락을 튕겨 냈다. 그러나 도언은 포기하지 않고 녹을 불렀다.
“녹, 녹.”
“…….”
“눈 떠 봐요.”
“아, 왜.”
“저기 좀 보십시오.”
괜히 또 궁금해진 녹은 결국 슬며시 도언 방향의 한쪽 눈을 떴다. 도언은 녹 쪽의 창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떴는지 몰랐을 정도로 틈새만을 만들어 눈을 뜬 녹은, 다시금 반대편 눈을 은밀히 떠냈다.
궁금하긴 한데 물벼락을 맞게 한 도언의 말을 듣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택한 방법이었다. 대충 확인하고 흥미를 끊어 버려야지. 하지만 녹은 그러지 못했다.
“우와. 저게 뭐야?”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녹은 창에 눈을 가까이 대고서 바다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펼쳐진 것은 나선형의 기다란 엄니를 코 위치에 박은 일각고래의 떼였다.
극지방에서만 산다고 알려진 동물이 여기서 발견된다고? 분명 방금 창을 열어 바닷물을 맞았을 때는 얼음을 깨부순 듯한 온도의 극해 물이 아니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야?’
바다 안으로 햇살이 들어와 무지개를 그려 내었다. 무지갯빛 햇살을 맞은 일각고래는 매끈한 몸을 반짝이며 제 갈 길을 나아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빛은, 마치 밤하늘의 오로라를 연상시켰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오는 길에 아주 별일이 다 있었어요.”
청연이 잊지도 않고 푸념했다. 녹이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일각고래의 수중 쇼를 관찰하고 있을 때, 물을 통과하지 않은 강한 햇살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물속을 유영하던 일각고래가 사라졌다. 아니, 그 물 자체가 사라졌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금 지상으로 돌아온 거다. 차는 부드럽게 멈추었다.
도언이 냉큼 내려 차 문을 열어 주자 녹은 홀린 듯 나와 섰다. 바다를 헤치며 도착한 곳은 도시의 한 광장이자 공원이었다. 밤하늘 은하수를 쏟아 내는 분수대를 기점으로 들어선 광장에는 아이들이 까르륵거리며 지팡이를 들고 날아다녔다.
그들의 보호자들은 분수대 밑에서 그들에게 조심히 놀라는 당부를 쏟아 내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열이 바짝 오른 아이를 아이의 엄마가 달래고 있었다.
“나도 날고 싶어!”
“우리는 마력이 없는 인간이잖니. 나중에 아빠 오시면 저것보다 더 높이 날려 달라고 해.”
아이는 엄마의 말에 수긍한 듯 날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아빠 오시기만 하면 내가 제일 높이 날 수 있거든?? 두고 봐!”
“아, 희진이 아빠는 부양 마법 기술자잖아.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겨 먹냐!”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게임이나 같이 하든지!”
아이는 마법사와 인간 사이의 자녀인 듯했다. 마법사 하프는 미약한 마력이라도 타고난 아이와 마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인간, 둘로 나뉘기 마련이었다. 저 아이는 아마 후자인가 보다.
마력이 없는 아이와 마법사 아이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노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녹의 역사에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고, 단 한 번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유모차를 끌며 돌아다니는 주민 중 한 명은 북슬북슬한 하얀 털과 늘어진 귀를 가진 토끼 수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동물과 인간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한 모습의 수인족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다.
마법사가 이 세상의 패권을 지배한 이래로 자신을 보호해 줄 숲을 찾아 떠난 종족으로, 하가에 있었을 때조차 마주쳐 본 적 없는 종족이었다. 마법사들은 마력도 없고 인간들에게도 배척당하는 수인들을 노예처럼 다루었었다. 저렇게 마법사와 정답게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다도 아닌데 허공을 날아다니는 날치의 날개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녹색과 붉은색의 보색 조화로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날치는 비둘기 대신에 공원을 지배했다. 세계수가 녹에게 흡수된 이래로 씨가 말랐다고 생각했던 마생물 중 한 종류였다. 저 날치 이외에도 공원은 각종 마생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꿈꾸는 듯 희한한 광장 뒤로는 빌딩 숲이 이어졌다. 돌아다니는 주민, 마법을 쓰는 아이들, 그리고 마생물을 빼면 이곳은 의심할 여지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한 도시였다. 평화롭고, 또 평온했다.
있을 수 없는 광경에 바닷속을 구경했을 때보다 가슴이 뛰었다. 물과 기름이 섞인 곳이 여기일까. 상식을 깨 버리는 곳이었다. 공간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던 녹에게, 도언이 손을 펼치며 공간을 소개했다.
“안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녹은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현대에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유한재가 되어 버린 마력을 마법사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다녔다. 자신이 애써 얻은 귀한 가치인 마력의 소유주인 거다. 게다가 튀기만 하면 눈치를 주는 하가도 없어졌겠다,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가문의 마법사들은 곧장 인간 세계를 마법으로 주무를 큰 꿈을 품었다.
하지만 세계수가 없어진 지금 마법사들은 가문끼리 파벌을 나누어 서로를 견제했기에 그 꿈은 어떤 가문에서도 이루어 낼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있던 거였다.
세계수가 있던 과거에는 하가가 권력을 독식했다. 그런 하가는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인간들의 것으로 남았었다. 타 가문 마법사가 인간을 가지고 비윤리적인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하가에서는 크게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자면서 질서를 수호하지 않았다.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들 또한 마법사들을 건들지 않았다.
세계수가 없어진 지금, 모든 가문에서 씨앗의 소유 가문이 되길 원했다. 하가의 힘을 들은 젊은 마법사들은 자기 가문이 하가의 권력을 이어받길 꿈꿨다. 그들의 욕심은 세월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몸집을 불려서, 명실상부 자신들이 신인 세계를 꿈꿨다. 그 과정에서 씨앗의 존재는 필수였다.
물론 정말 녹이 그들에게 잡혀 버리면, 그들은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리라. 타 종족에게는 지독한 디스토피아가 될 그런 세계를. 딱히 삶에 미련이라곤 없는 녹이 죽지도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사수하는 이유였다.
힘에 의한 차별을 낳아 대는 마법사들이기에 마법사와 다른 종족이 끼어 있는 이런 모습은 꿈속이라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도언은 이곳이 안가라고 했다. 과거 하가처럼 안가에 소속된 주민이 모여서 사는 곳인가 보다.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는 녹에게, 도언이 캡모자를 하나 씌워 주었다. 푹 들어가는 캡모자가 햇살을 막는 차양이 되어 녹의 얼굴을 가렸다. 도언은 그것도 부족해 보이는지, 녹이 입은 외투의 모자까지 덮어씌워 주었다. 녹이 자신의 머리에 자꾸 무언가를 씌우는 도언의 손을 밀어 냈다.
“아, 뭐야.”
“이렇게라도 해야죠. 여기는 보증되지 않은 마법사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란 게 있는 거니까요.”
도언의 말에서 마법사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느껴졌다. 그의 말을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여기는 바깥이니까. 아무리 저리 평화로워 보여도 저들 중 마법사가 있는 이상 그들의 마음속이 깨끗하단 보장이 없었다.
녹은 결국 도언이 하란 꼴 그대로 얼굴을 푹 가려 내고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야 속 하늘의 절반이 캡모자에 의해 가려졌다. 뭐, 그래도 일단은 집을 나온 바깥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녹은 광장의 중심으로 걸어가 은하수 같은 무언가를 물 대신 쏟아 내는 분수대를 올려다보았다.
검고 매끈한 액체에는 반짝이는 것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찰랑이는 표면에 손을 넣어 봤지만 닿아 오는 건 차가운 액체가 아닌, 연기 같은 뿌연 허공이었다.
“마력입니다. 보통 주민들은 여기서 부족한 마력을 채우곤 하죠.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지금이 마침 그 시간인가 보군요.”
어느새 다가온 도언이 설명해 주었다. 마력 분수라고? 이곳은 정말 타 가문과 다르게 마력이 넘쳐나는구나. 녹은 자신의 마력이 봉인당해 마력의 기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청연의 말에 의하면 안가의 마력 보충은 모두 도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했었다. 이만한 규모의 가문에 홀로 마력을 공급하고, 또 그게 유지가 된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이렇게 마력이 풍족하면 식신 또한 운용할 일이 없긴 하겠지. 지금은 안 보이지만 분명 이곳에는 실제로도 식신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을 거다. 인간에게 불행의 인과를 심어 주는 식신이 날아다니는데 인간과의 공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능력이 있긴 하네. 녹은 분수를 감상하는 도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도언이 녹과 눈을 맞추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왜요. 눈을 못 뗄 정도로 잘생겼어요?”
돌연 씨익 웃는다. 녹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등 뒤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 한 발소리가 서서히 크게 들려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나 싶어 녹이 뒤를 돌아보려는데…….
“우왁!”
누군가 달리던 추진력을 이용해 녹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 탓에 녹은 엎어질 뻔한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까딱하다간 저 마력 분수에 몸이 진창 빠질 뻔했다. 오늘은 이미 차가운 해수로 세수를 했기에 무언가에 몸을 담그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은 작은 습격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래를 들여다보니, 까만 정수리가 눈에 보였다. 빨간 캐릭터 책가방을 등에 인 습격자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웬 여자아이였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았던 아이가 고개를 올렸다. 덕분에 녹과 눈이 마주쳤다. 녹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에서 반짝이는 은하수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이 오빠는 누구야?”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닌가?’
물끄러미 아이를 보던 녹은 청연과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묻는 무언의 항의다. 도언은 기가 찬 듯 헛숨만 내뱉고 있었고, 청연은 다가와서 녹에게 붙어 있는 아이를 냉큼 녹과 떼어 놓으며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꾸중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렇게 뒤에서 사람 덮치는 거 아니다. 위험했잖아.”
“알고 있으니까 나 가르치려 들지 마.”
“…….”
제법 성깔 있는 아이였다. 알고 있다면서 냉큼 달려든 모습도 그렇고…… 아이는 자신의 대답에 어안이 벙벙한 청연의 등 뒤로 옮겨 갔다. 스스럼없어 보이는 것이 청연과 일면식이 있는 아이인 것 같았다. 소녀는 청연에게 업힌 상태에서 한 손을 들어 녹에게 흔들었다.
“안녕! 나는 진예라고 해요.”
“어, 어… 그래. 안녕.”
진예의 높게 묶은 검은색 말총머리가 찰랑거렸다. 진예가 까르르 웃으며 청연의 목을 당겼다. 청연이 고통스러워하며 아이의 손을 떼어 냈다. 청연의 목을 잡고 있던 아이는 청연이 손을 떼어 내자마자 뚝 떨어졌다. 갑자기 떨어져도 진예는 삐끗거리지도 않고 중심을 잡아 착지했다.
진예는 도도도 달려 도언에게 손을 뻗었다. 도언은 그런 아이를 안아 올렸다. 폼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진예는 떨어지지 않도록 도언의 목을 두르고서는 녹에게 집중했다.
“오빠. 저는 제 이름 말했는데 오빠는 왜 자기소개 안 해 줘요? 이런 인사 같은 건 학교에서 배우거든요?”
“어…엄…… 그걸 몰랐네. 미안.”
이곳이 안가, 마법사 동네인 만큼 녹은 자신의 본명 노출을 꺼렸다. 아무리 녹의 이름을 아는 도언과 청연이 아이와 친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도언의 말처럼 혹시란 게 있는 거다. 매사 신경 써서 조심했던 녹의 인생관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지금은 마력 봉인이 되어 있어서 아이가 마법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마법사 마을이니까.
도언 역시 그런 녹의 마음을 알아채고 진예에게 말했다.
“곤란해하시잖아. 그만.”
새로운 얼굴에 흥분하던 아이는 도언의 한마디에 금방 시무룩하게 변했다.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을 내리까는 게 몹시 아쉬워 보였다. 청연에게 꾸중 들었을 때와 극명히 다른 반응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할 생각이 전혀 없던 녹의 마음도 움직이는 시무룩이었다. 본명을 알리기는 어렵지만 이거라면…….
“나는 김민수라고 해.”
녹이 이름을 소개하자마자 아이의 얼굴에 금방 햇살이 돈다. 녹은 이런 나이의 여자아이들에게 약했다. 하가에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런 아이를 볼 때마다 하진이 생각나는 걸 어쩌겠는가. 평생 이런 아이들에게 약할 것 같았다. 도언의 몸을 타고 주르륵 내려온 진예는 금방 녹의 앞에 당도했다.
“가주님께서 직접 데리고 온 사람은 처음이에요! 오빠도 길을 잃은 자예요?”
“응?”
“이제 여기 사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놀러 오신 거예요? 그럼 저랑 놀아요!”
청연이 녹 대신에 목을 쓸며 진예에게 대꾸했다.
“우리 놀러 온 거 아니다.”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이네스 보러 왔어?”
“……아니.”
“그럼 놀러 온 거 맞잖아!”
작은 아이의 말에 푸른 눈의 갈색 머리 청년이 맥을 못 추린다. 녹은 그들의 만담을 듣다가 슬쩍 빠져서 도언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도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찔렀다.
“쟤 누구야?”
“주민 아이 중 하나입니다. 이곳 관리인과 함께 사는 아이예요.”
청연이 도언의 보좌라면 분명 가문의 이인자일 텐데, 가문의 이인자를 쥐락펴락하는 저 아이의 정체는 뭘까. 청연이 봐준다고 하기엔 진심으로 쩔쩔매는 것 같은데. 마법사인가? 원체 마법사의 겉모습은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녹이 저들 몰래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입을 가리고 도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언가 몰래 할 말이 있는 듯하다. 이에 도언은 녹이 편하도록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녹은 도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럼 저 아이도 마법사야?”
“아닙니다. 진예는 마법을 못 해요.”
그래서 청연에게 저렇게 겁도 없이 까부는 건가? 확실히 마법사끼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곳은 마법사끼리도 목숨을 걸 서열이 없어 보이는 곳이긴 하다만.
청연과 만담을 찍고 있던 진예가 도언에게 붙어 있는 녹을 발견하고 그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응? 응? 오빠. 오늘 놀러 온 거면 나랑 같이 놀아 줘요.”
“아, 얘가 원래 이렇게 누군가에게 붙어 대는 애가 아닌데. 녹… 아니, 민수 님이 마음에 드나 봐요.”
청연의 말은 사실인지, 그에게는 항상 날카롭게 대꾸하던 진예가 아무 말 없었다. 부끄러운 듯 수줍게 고개까지 숙인다. 녹의 얼굴은 캡모자에 후드, 이중으로 가려져 있는데 아이는 뭘 보고 이러는 걸까.
아이의 과한 애정 공세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녹에게, 침묵을 고수하던 도언이 슬쩍 말했다.
“녹 마음대로 하세요. 불편하면 진예 마음 상하지 않게 제가 잘 말할 테니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진예 말대로 이곳에 정말 놀러 온 거니까요.”
갑자기 행로의 키를 자신에게 쥐여 준다. 좀 부담스러워진 녹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음…. 안 될 건…. 없겠지.”
“야호!!”
녹의 대답에 아이의 작은 두 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나갔다. 녹은 그저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쩌면 마지막 외출이 될지도 모르는 귀한 시간이지만, 이런 아이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하진이 또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이는 투명하니 맑았다. 아이는 좋아라 하며 방방 뛰다가 녹의 손을 잡았다.
“여기는 처음이신 거 같으니까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가주님이랑 청연보다야 제가 더 잘 알걸요? 저는 여기서 살기까지 하니까요!”
진예가 광장을 빠져나가는 길로 녹을 이끌었다. 녹은 작은 천하장사에게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 흥분에 신난 아이와 다르게 뒤쪽의 두 남자는 차분하기만 했다.
청연은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어깨만 으쓱했고, 도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들은 앞서가는 녹과 진예를 따라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진예와 함께하는 이 선택이 맞는 것도 같다. 그래, 이곳이 안가라고 한다면 가주보다야 실거주민이 훨씬 더 잘 알 테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저 녀석들에게 안내를 받았으리라.
아이가 끼면 경계가 조금쯤은 허술해지겠지. 여기서 온 이래로 도언의 시선에 내내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부수적으로는 진예가 집 안에서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얼굴보다야 훨씬 낫다. 한 200% 정도 더.
실로 오랜만에 꿈이 아닌 현실에서 청연과 도언을 제외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녹이었다. 진예는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고 처음 보는 녹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어린 참새처럼 연신 재잘거렸다. 아이는 스스럼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학교에서는요, 이철원 걔가 장난이 너무 심해서 선생님한테 혼났는데, 왜 혼났냐면 점심시간에 나온 미트볼을 총알 대신에 막 던지려고 들고….”
아이는 정말로 아이다웠다. 아이의 생생한 이야기에 빠진 녹은 어느새 진심으로 진예의 학교생활을 듣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하가에서 나고 자라고, 좀 커서는 홀로 돌아다닌 녹에게 학교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딱히 궁금한 곳도 아니었거늘, 진예가 하도 재밌게 조잘거리니 학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하진이에게 수업 이야기를 들었던 때가 생각이 나기도 하고. 녹은 진예에게 물었다.
“학교가 재미있나 봐.”
“그럼요! 언제나 재밌는 곳이라니까요? 근데 다른 애들은 학교 다니기 귀찮다고 불평해요. 저는 괜찮은데 모습을 바꿔야 하는 아이들은 중간중간에 마력을 넣어 외모를 인간으로 유지해야만 하거든요.”
“마력으로 외모를 유지한다고?”
“수인족 아이들이요! 며칠 전에 수현이가 학교에서 낮잠 자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꼬리가 나올 뻔했다지 뭐예요. 예전에는 귀가 나와 버린 아이가 있었대요. 장난감 머리띠라고 변명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게요. 긴 주둥이가 튀어나왔어 봐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아, 물론 그러면 어른들 불러와야 해요. 엄청난 사고 중 하나니까요.”
돌연 나오는 마력 이야기에 녹은 의아해했다. 이 정도 규모의 가문이라면 분명 학교 또한 부지 내에 있을 법도 한데, 진예의 말은 이곳 부지에 있는 학교를 말하는 게 아닌 듯 들렸다. 이 부지만 하더라도 인간과 어딘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런 곳에 있는 학교라면 아이들이 외모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한 진예 대신에 뒤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도언이 설명해 주었다.
“안가의 아이들은 바깥의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훈련을 합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만 갇혀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보통 저희가 만든 마법은 정교해서, 바깥 가문의 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요새 타 가문 마법사들 수준이 어지간히 떨어졌어야 말이죠.”
마력이 점점 줄어드니까요. 청연이 첨언했다. 녹은 작은 헤라클레스에게 여전히 끌려다니며 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바깥에서 학교 다니는 거야? 비마법사와 함께?”
“그럼요. 적응해야죠. 안전을 이유로 아이들의 겪을 세상의 넓이를 한정해 버리는 건 못할 일 아닙니까. 마법을 건 아이들에게 바깥이 그리 위험한 것도 아니고요.”
도언이 자신의 교육관을 흘렸다. 거기에서 지극한 모순을 느낀 녹은, 진예에게 끌려가면서도 도언에게 제 목을 들이밀며 따졌다. 목에 있는 얇은 나무 고리는 녹이 엎어 쓴 후드 자락에 의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녹의 행위가 무얼 가리키는지는 도언도, 청연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일신의 안전을 이유로 남의 세상의 넓이를 한정한 표본이 누구였더라?”
“글쎄요. 그게 누굽니까?”
“너잖아, 이 색….”
순간 앞으로 이끌던 힘이 멈추었다. 앞만 보고 잘 걷던 아이는 어느 순간 높아지는 녹의 언성에 멈춰서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언에게 시원하게 한 바가지 욕을 뽑아내려던 녹의 입이 바위처럼 무거워졌다. 아이 앞에서는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금방 배워 버리니까.
영리한 아이는 녹이 도언에게 좋지 않은 사감을 가지고 있단 걸 어투에서 눈치챘나 보다. 해맑던 아이의 얼굴에 한 점 어둠이 흘러 들어왔다. 진예가 도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냥 아는 사람 이상인가 보다.
이런. 녹은 낭패감이 어렸다. 진예 덕분에 녹에게 욕먹는 걸 피한 도언이 얄밉게 물었다.
“제가 뭘 했다고요?”
“가주님께서 오빠한테 뭐 했어요?”
“어엄….”
녹이 말을 늘이자 한 점밖에 없던 진예 얼굴 위의 구름은 어느새 울상으로 진화했다. 녹은 정말이지 한 게 없었으나,-한 거라고는 도언을 아이 앞에서 욕하려다 만 것뿐이었다.- 아이의 얼굴에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진예는 자신에게만 제 슬픈 얼굴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대답을 더 미루다간 아이의 눈에서 비가 내릴 것 같은 느낌에 녹은 가능한 재빨리 자신의 주장을 부정했다.
“아니아니, 쟤가 한 건 뭐 없어. 걱정하지 마.”
“정말요? 가주님이 오빠 괴롭힌 거 아니죠?”
“엄…….”
눈을 꾹 감고서 끄떡이는 고개가 천근처럼 무겁다. 녹은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아이의 웃음을 위해 이 한 진실 희생했다. 녹은 마음속 대나무숲에서나 두 손을 모아 외치는 상상을 했다. 얘야. 너희 가주가 나 엄청 괴롭힌다! 가끔 날 위한답시고 또라이짓 하긴 하지만, 어쨌건 나 괴롭혀!!
녹의 묵직한 주억거림을 본 진예는 얼굴에 금세 구름이 개었다.
“다행이에요! 저는 두 사람 다 좋아하니까, 둘이 사이가 좋았으면 했거든요!”
그게 너가 울먹일 정도의 소망이니? 녹은 튀어나오려는 의문을 쓰게 삼켰다. 하긴, 어린아이가 뭘 알겠어.
원래 아이란 존재는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을 판단할 때도 자신에게 대하는 그 태도 하나만을 맹신한다. 그게 아이가 그자를 판단하는 정보의 전부여서 그렇다. 좋게 말하면 순수했고, 나쁘게 말하면 순진했다. 하진이도 하가에서 자신에게 잘해 주던 장로들을 좋아했다. 그거 생각하니 속이 좀 쓰렸다.
도언의 뒤에서 튀어나온 청연이 자신을 가리키며 진예에게 물었다.
“나는? 나는? 나도 좋아해?”
“하는 거 봐서.”
“허. 나도 너 하는 거 볼 거거든? 너만 보냐?”
진예의 시니컬한 대답에 청연이 기가 차서 대답했다. 초면인 녹보다 당연히 오래 보아 왔을 청연을 대하는 온도가 지극히 낮다. 아니, 사실 진예가 녹에게 대하는 태도가 처음 본 사람치고 따뜻하다 못해 불탔긴 했다. 녹은 애랑 똑같은 수준으로 나오는 청연을 타박했다.
“너는 무슨, 나이를 그렇게 먹고 애랑 맞먹으려고 드냐? 곧 있으면 정신 나이 회춘하겠네.”
“아, 민수 님이 진예를 모르셔서 하는 소리거든요, 그거? 그리고 여기 오는 길에 애처럼 잠시도 얌전히 있지 못해서 거하게 사고 친 분께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네요!”
“무슨 그게 거하게 사고 칠 정도….”
“오빠, 여기 오는 길에 사고 쳤어요? 무슨 사고요?”
“어엄….”
“하필 바닷길이 열렸는데 차창을 열어 버리신 거 있지. 통로 창문을 여는 사람이 더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청연이 그새 고해바쳤다. 청연의 고자질에 진예가 배를 잡고 까르륵 웃는다. 녹은 거기서 도언의 장난이 시발점이었다고 말해 줄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세상에! 홀딱 젖었겠네요!”
‘그래, 웃어라. 웃어.’
도언은 진예의 옆에서 웃음을 흘렸다. 아이가 웃는 건 참겠는데, 도언까지 진예 옆에서 실실거리니 짜증 났다. 발이나 한 번 더 밟아 주고 싶었지만 진예가 보고 있었다. 어른의 하찮고도 더러운 복수를 자라나는 새싹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도언도 그를 눈치챘는지 진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얄밉게 녹의 속을 긁어 댔다.
“진예는 이동 중에 그런 위험한 짓 하면 안 된다.”
“당연하죠! 철원이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걸요?”
‘안도언 진짜 죽인다.’
정말이지 주먹이 울었다. 진예의 손을 잡은 반대쪽 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한참을 웃은 진예는 걸음을 재개했다. 명랑하게 걷는 진예를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아이의 걸음이 딱 멈췄다.
“앗!”
진예가 웬 가게를 가리켰다. 붉은 차양을 창문에 매달아 둔 가게엔 ‘예은이네 떡볶이집’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넓게 뚫린 창문을 열고 붉은 떡볶이를 주걱으로 뒤적이는 주인은 비버 수인이었다. 떡볶이의 매콤한 향은 바람을 타고 진예의 예리한 후각에 발각되었다.
방앗간을 봐 버린 아기 참새에 의해 성인 남자 셋과 여아 한 명은 떡볶이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기에 이르렀다.
❊ ❊ ❊
진예와 청연이 나란히 앉아 떡볶이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오히려 마신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한 모양새였다. 분명 굶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열심히들 먹는지 모르겠다. 강한 매콤함에 진예의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을 녹이 티슈로 닦아 주었다.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다 체할라.”
“네!”
진예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녹은 떡 두어 개를 집어 먹다가, 전투적인 청연과 진예의 기세에 젓가락을 내렸다. 사실 그렇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도언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말했다.
“상냥하시네요.”
“그냥 뭐, 하진이가 생각나서.”
도언의 젓가락은 거의 새것처럼 깨끗했다. 도언은 아까부터 떡볶이가 아닌 녹을 구경하는 게 목적인 사람처럼 굴었다.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한 녹이 괜히 물었다.
“근데 진예는 누구랑 살아? 이렇게 옆길로 새도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셔?”
“괜찮아요, 괜찮아. 연락 안 해도 되어요. 저는 지금 저기 저 사람이랑 같이 사니까요!”
접시에 코를 박을 정도로 흡입하고 있던 진예가 창 바깥을 가리켰다.
가게의 바깥에서 진예를 발견하고 다가온 여자는 진예와 똑같이 머리를 높게 묶은 검은 머리 아가씨였다.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여기서 놀고 있었어?”
그녀는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든 채였는데, 장바구니에서 튀어나온 독특한 식물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분홍색 잎줄기와 초록색 꽃술이 특징인 마법 약재 바아. 아타움이나 카이비급은 아니지만, 그 또한 마법사들이 소중한 마력을 써서 마법으로 운반하는 몇 안 되는 물품 중 하나였다. 진예에게 다가온 여자처럼 대놓고 드러내며 가지고 다닐 수 없었다. 저렇게 전시하듯 가지고 다녀도 그 누구도 털어 가지 않는다니, 안가는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동네란 말인가.
녹이 그녀의 장바구니에서 충격받은 걸 뒤로하고, 진예는 얼른 집에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있었냐는 말에 야물게 대답했다.
“여기가 처음이신 손님도 있는데, 내 맛집은 꼭 소개해 드려야 도리지!”
어느새 떡볶이는 바닥을 보였다. 청연이 하나 남은 떡을 집으려던 찰나, 아이는 그 마지막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 녹에게 내밀었다. 청연은 자신이 집어야 했던 떡이 포크에 매여 녹에게 포르르 날아가는 걸 어이없게 지켜보았다.
“이거 드세요. 부족하시면 말씀하시고요.”
“어어…. 고마워.”
녹이 아이가 건넨 포크를 잡으려 손을 내밀자, 진예가 손을 무르며 절레절레 고갯짓했다. 그러고는 따라 하라는 듯이 입을 벌리며 소리를 내었다.
“아~”
분홍빛으로 물든 볼살은 아이가 입을 벌려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하는 무언의 요구에 녹 또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이를 따라 입을 벌리자 달큰한 떡볶이 하나가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진예는 녹이 떡볶이를 우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다는 듯 헤헤 웃었다. 아이와 보호자가 뒤바뀐 양상이었다. 그 누가 이들이 처음 본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머. 얘가 먹을 걸 양보하는 애가 아닌데. 처음 오셨다는 이쪽은 누구길래 우리 진예가 이리 좋아하실까?”
조용히 앉아서 그들의 포크 전쟁을 관망하는 도언과 눈인사를 한 그녀는, 테이블 한쪽에 장바구니를 두고 비어 있는 손으로 녹에게 악수를 건넸다.
“이네스라고 불러 주세요. 진예와 함께 살고 있죠.”
내밀어진 손에, 앉아서 떡이나 씹고 있던 녹 또한 벌떡 일어나 그녀와 눈을 맞추고 악수를 했다.
“김민수라고 합니다.”
따뜻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의 손은 약간의 서늘함을 풍기고 있었다. 한국인스러운 외모와 다르게 이 젊은 아가씨의 눈만은 이름처럼 이국적인 노란색이었는데, 녹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몸을 움츠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려 보이는 외양과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만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연륜을 새기고 있었다.
현재 마력이 봉인되어 그녀의 마력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상당한 실력자일 테다. 녹의 이런 직감은 대부분 맞아 들어갔다. 이네스가 눈을 접고 웃자, 녹은 자신이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는 걸 알아챘다. 녹은 곧바로 손을 놓고 뒷목을 쓸었다.
“아, 죄송합니다. 진예 언니분께서 너무 미인이시라.”
“어머.”
기분 나쁠 리 없는 칭찬에 이네스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녹 또한 마주 허허 웃었다. 언니는 무슨, 저런 눈을 할 정도면 분명 진예의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넉살은 긴 시간 동안 진작 터득한 녹이었다. 오랜 타로 영업의 세월은 녹을 사회적 인간으로 키워 내기에 충분했다.
불시에 칭찬을 받은 이네스는 진예에게 치근덕댔다. 허리를 숙여 진예의 눈높이에 맞춘 이네스는, 곧장 팔꿈치로 진예의 옆구리를 폭폭 찌르며 녹의 말을 상기시켰다.
“진예야, 들었어? 나보고 네 언니냐는데?”
“웨엑.”
“웨엑.”
잘 있던 진예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혓바닥을 내민다. 진예 옆에 앉은 청연 또한 같은 반응을 보였다. 표정과 소리가 굉장히 흡사했다. 이자와 함께 사는 진예의 장난스러운 반응이야 그렇다 치고, 청연까지 저럴 줄은 몰랐다. 진예와 가까워 보이는 만큼 이네스와도 가까운가? 그들의 과장된 반응에 미소를 지었던 이네스가 입술을 살짝 들어 악다문 이를 보여 주며 웅얼거렸다.
“느들 드 지베그스 보즈.”
그 말 한마디에 청연과 진예가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역시 대단한 기백이다.
“하하하. 어리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떡볶이도 다 드셨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희 집으로 오세요. 진예가 이렇게까지 나올 정도면 이다음 코스는 분명 우리 집일 텐데. 아닌가요?”
“어…. 맞습니다.”
“가주님과 함께 계시는 거 보면 가주님 손님일 텐데, 그렇다면 저희의 손님이기도 하죠. 안 그래도 가주님 뵈러 가려고 했었거든요. 찾아오신 덕분에 가주님 찾느라 발품 팔지 않아도 되어서 기분은 좋네요. 저 양반이 워낙에 신출귀몰해서요.”
“이네스는 안가의 총괄 관리인이거든요! 저래 보여도 장로장이에요!”
“오오.”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던 청연이 이네스의 정체를 밝혀냈다. 녹은 새삼스럽게 그녀를 다시 보았다. 동그랗게 모은 입이 저절로 감탄을 표했다. 그런 녹의 반응이 쑥스러운지, 이네스는 청연을 타박했다.
“아이, 그런 말을 해서 뭐 해.”
그러나 핀잔을 주는 말과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만면 미소가 떠 있었다. 이네스의 청순한 외모와 더불어 그 모습은 꼭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녹은 그 장면을 보고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쩐지 눈빛에 새겨진 기백이 장난 아니더라.’
하가에서도 고을 총괄 관리인이 있었다. 보통 그 감투는 장로장이 썼었는데, 장로 중 가장 마력이 높은 자가 장로장을 맡는 건 순리였다. 장로장이 관리인의 감투를 쓰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안가 또한 하가와 같은 로직으로 가문이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저 아가씨가 장로 중에서 가장 마력이 높은 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마법사겠지?
특이한 문화를 가진 안가의 장로장이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얼굴이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름은 하녹이 아닌 김민수라고 하자. 어차피 마력은 봉인당해 그녀가 느낄 수 없을 테니. 심지어 청연도 진예 앞에서 자신을 민수라고 불렀다. 내 뜻에 맞춰 준단 거겠지.
녹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로 다짐했다.
❊ ❊ ❊
“이쪽은 약재 가게고요, 저쪽은 마법 소품 가게고요….”
진예가 다시금 녹에게 조잘거리며 길을 소개해 주었다. 시끌벅적한 이곳은 시장이었다. 애써 찾아온 게 아니라, 진예의 집으로 가기 위해선 시장을 통과해야만 했다. 세련된 동네의 외관과 다르게 이곳만큼은 재래시장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법과 관련된 물품을 파는 것이다.
겨울이 다가오매 시장 안에는 별 장식품이 떠다니고, 따뜻한 핫초코 향이 어디를 가든 풍겼다. 가게의 좌판에 늘어져 있는, 사도 영 쓸모없을 것 같은 마법 물품은 요새에 보기 힘든 것이다.
저기서 파는 자동으로 찍히는 도장이라든가, 자아가 있는 듯 하늘을 떠다니며 감정 표현을 하는 인형 등을 귀한 마력까지 써 가며 만드는 마법사는 근래에 없었다.-청연은 예외였다.- 현시대의 마법사라면 이 풍경을 보고 뒷목 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비유하자면, 귀한 석유로 쓸데없이 벽화를 그리는 꼴이랄까.
마법 물품은 그렇다 쳐도 약재 시장은 놀랄 만했다. 마력으로만 가꾸어야 해 재배 방식이 까다로운 식물을 한낱 배추 팔듯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네스의 장바구니 안에 있는 바아 또한 까다로운 보안 없이 좌판에 그저 하릴없이 늘어놓아져 있었다.
시장의 신비로운 분위기 전체가 하가의 저잣거리 풍경과 비슷했다. 안가는 마치 세계수가 사라지기 이전의 시간을 품어 간직한 듯했다. 녹은 시장을 구경하느라 자꾸만 돌아가는 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장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는 꼴이 마치 사한 같았다. 하가에서 살았던 시절, 사한이 시장을 이리 볼 때까지만 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본인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의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했다.
진예에게 끌려다니는 녹이 시장 구경을 하는 동안, 뒤에서는 이네스와 도언이 간이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어 보니 구호니, 구조니 하는 단어가 들렸다. 녹이 시장 구경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로 집중하려고 한 순간, 청연이 녹을 향해 입을 뗐다.
“꽤나 평화로운 곳이죠?”
“…그러게. 수인은 내가 어렸을 때도 보기 힘든 자들이었는데, 여기는 그냥 마을 주민이네.”
“안가는 마법사들로 인해 피해를 받은 자들로 구성되었거든요. 마법사, 인간, 혼혈인 떠돌이들, 수인, 마생물 등, 마법사로 인해 목숨에 위협을 받으면 찾아오는 곳이 여기예요.”
녹은 그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마법사들로 인해 피해받은 자들을 모아 둔 곳이라니. 보통 그런 자들은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끝없이 의심하기 마련이었다. 녹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런 자들의 신임을 얻어 한곳에 모아 둔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게다가 나자마자 박혀 있는 사상을 바꾸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터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기적이 안가에서는 당연하단 듯 벌어지고 있었다.
“하하. 어떻게 그런 일이 있냐는 표정이시네요. 가주님과 이네스가 열심히 일하긴 하셨죠. 덕분에 제 뼈도 갈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초창기 때만 생각하면… 어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니까 뭔가가 되긴 하더라고요. 안가의 구조 활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이리도 모여 사니 마법사 외 타 종족에게 불행의 씨앗이 되는 식신을 만드는 건 당연히 금지죠.”
어느새 진예는 녹의 손을 놓고 시장 구석에 있는 장난감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난감이나 떡볶이에 홀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청연이 진예를 물끄러미 보고는 말했다.
“이네스는 가끔씩 마법사에 의해 피해받은 아이들을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곤 하거든요.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사에게 해를 당한 자들은 넘치니까요.”
청연이 말하는 걸 보아하니, 진예 또한 마법사에 의해 피해받은 아이 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들에 의해 부모를 잃은 걸까? 어쩐지, 가문의 관리인을 도맡아 하는 대마법사가 마법 하나 쓰지 못하는 인간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게 이상했는데 그런 이면이 숨겨져 있었던 거다.
진예는 장난감 가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저를 향해 잇몸을 드러내며 짖는 강아지 인형을 보고 있었다. 아이의 뒷모습에서 전에는 감지하지 못한 쓸쓸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 ❊ ❊
“이곳이에요! 얼른 들어오세요!”
진예는 집을 가리켜 보이며 방방 뛰었다. 녹에게 제 보금자리를 안내해 주어서 기쁜가 보다. 녹은 진예에게 웃어 준 후, 대문도 없는 그곳을 들어갔다.
구석진 곳을 돌고 돌아 마침내 도착한 곳은 아담해 보이는 한 주택이었다. 붉은색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정원에 심긴 사과나무 한 그루에는 수확의 철이 다 되었는지 붉은 사과가 곱게 영글어 있었다.
농작물은 사과뿐인지, 정원에는 갖가지 꽃나무들이 즐비했다. 집 바깥의 큰 고목에는 기다란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근처에 이웃집은 없는 걸로 보아, 이 그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만했다.
가문의 장로장이 사는 곳이라길래 휘황찬란한 저택일 거라고 생각했던 녹은, 생각보다 아늑한 외관에 자신이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뒤편에는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주택의 앞쪽에는 장미, 개나리, 벚나무까지. 어지간히도 꽃을 좋아하는구나. 앞서갔던 진예는 집의 뒤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원의 구석에서는 청연과 이네스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물없어 보였던 그 둘의 사이는 확실히 어색함이 없었다. 이네스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자 청연이 질색하는 꼴이 웃겼다.
하가에서 보던 장로장과 보좌의 사이를 귀엽게 풀어놓은 사이 같다고 해야 하나. 하가에서 두 직책의 사이가 시뻘겋게 불타는 석탄과 같다면, 이곳에서 이네스와 청연의 사이는 살짝 그을려 말랑해진 마시멜로 같았다.
무조건 가주의 편에 서는 보좌와 가문의 편에 서는 장로장은 사사건건 들어맞질 않았다. 웬만해서 그 의견 합의가 완만히 되지 않는 것이다. 보좌는 가주 개인을 위한 복지를 부르짖고 장로장은 가문 전체를 위한 이점을 부르짖으니, 애초에 시스템적으로 합이 잘 맞을 수 없는 관계였다. 안가에 대한 단어가 몇 흘러나오는 걸 보면 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둘에게서 관심을 끊은 녹은 정원을 마저 구경하기 시작했다. 꽃나무로 점철된 집은 그렇다 치고, 주변에 가까운 이웃집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했다. 키가 녹의 허리만 한 정원수로 대략적인 울타리를 조경해 두었기에 대문이 없었다. 어쩐지 자꾸만 진예가 구석으로 이끌더라니.
‘이런 곳에 집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두리번거리며 정원을 구경하는 녹의 옆으로 도언이 다가와 섰다. 작은 언쟁을 벌이고 있는 이네스와 청연과 반대로,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의 가주님께 녹은 입을 뗐다.
“생각보다 집이 구석에 있네. 그리고 작고. 장로장이라고 해서 대궐만 할 줄 알았거든. 생각보다 검소하셔.”
“바깥쪽은 그렇죠. 안쪽으로 들어가 보시면 생각이 좀 달라지실 겁니다.”
“안쪽?”
녹의 되물음에 도언이 대답하기도 전에, 집 뒤편으로 사라졌던 진예가 다시금 튀어나왔다. 무엇이 그리 아까운지, 아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통통한 볼이 불퉁한 표정으로 인해 부풀었다.
“아, 오빠한테 룬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얘가 산책하러 나갔는지 없어졌어요. 언제 올지 모르겠는데.”
룬이라.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인가 보다. 녹은 무릎을 굽혀 진예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로 진예를 달래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기회가 이번 한 번뿐인 것도 아니잖아.”
“그렇죠?? 그런 거죠?”
내밀렸던 진예의 입술이 쏙 들어갔다. 그새 기분이 좋아진 진예는 집의 문을 열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녹에게 도언이 물었다. 감정이 스미지 않은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기회가 이번 한 번뿐인 것도 아닌 건 진실입니까, 아니면 그저 녹의 바람입니까?”
“어. 진실. 너 나 거짓말쟁이로 만들면 안 된다. 알겠지?”
그 포인트를 짚어 낼 줄이야. 녹은 공연스레 긴장되어서 목에 걸린 나무 고리를 매만졌다. 일단 아이에게 배짱 있게 지르긴 했다만, 제 자유란 사실 자신이 아닌 도언의 손에 달린 것을 잘 알았다. 오늘 이렇게 나와서 안가를 둘러보는 것 또한 도언의 제안이 없었으면 하지 못했을 거였다. 녹의 넉살에 도언은 별 대꾸 없이 입꼬리만을 당길 뿐이었다.
‘아, 다음에 또 나와도 된다는 거야, 뭐야.’
“얼른 들어오세요!”
집에 들어오는 것에 가장 진심인 진예가 문을 열고 멀거니 서 있는 어른 네 명을 향해 소리쳤다. 진예의 외침에 각자 딴생각을 하느라 바빴던 네 명은 걸음을 옮겼다. 녹 또한 그들을 따라 현관 안으로 입성했다.
“어어…….”
높은 천장에 목소리가 울렸다. 바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내가 녹의 눈앞에 펼쳐졌다. 집의 외관은 그리 넓어 보이지도 않았고 왠지 벽난로가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의 포근한 집이었는데 안쪽은 대궐이 따로 없었다.
도언의 집보다 배로 커 보이는 실내 공간에 녹은 현관에서부터 질렸다. 거실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녹은 이네스를 보고 검소하다고 했던 말을 조용히 철회했다. 이렇게까지 넓을 일인가? 청소만 귀찮아질 텐데?
녹의 이런 걱정을 아는 건지, 천장 한쪽 구석에서는 타조 깃털 먼지떨이가 날아다니며 천장을 쓸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촉촉할 정도로 젖은 물걸레가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을 닦고 있었다. 마력을 충전해서 쓰는 마도구다. 물건 하나하나에 정교한 진을 그려 넣어야 하므로 마법을 한 번 썼으면 썼지, 마법사들도 귀찮아서 잘 안 만드는 도구였다.
‘이런 느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홀로 돌아다니는 도구들과 바깥과 외양이 매우 다른 집. 데자뷰를 느낀 건 착각이 아니다. 하가에 있을 당시 하홍의 오두막을 보았을 때의 감상과 비슷했다. 거실의 벽 한쪽 면에는 작은 액자들이 벽면 하나를 꽉 채웠는데, 진예가 지금보다 약간 더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 점점 커 가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물론 사진 또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창문을 통해 보듯 사진에 공간감이 있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쑥 들어갈 것 같은 생생함이었다. 사진 속 인물이 생기 있게 움직였다. 정말 창을 통해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지나간 과거에 큰 애착이 없는 마법사들이기에 사진술은 그만큼 발전이 더뎠다. 아니, 그런 곳에 쓸 만한 마력이 없다는 게 맞는 소리겠다. 그렇기에 녹은 이런 형태의 마법이 걸린 사진을 처음 본다. 안가의 장로장도 청연처럼 마력을 펑펑 써 대는구나. 아니면 그저 이곳 주민만의 특성일 수도 있겠다.
사진 안에서 진예는 함박눈을 맞으며 청연과 눈싸움을 했고, 이네스와 수영을 했으며, 이네스와 청연이 체스를 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예는 어느 사진에서나 보였고, 그 이후로 이네스의 지분이 월등히 높았으며, 간간이 청연이 사진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장로장과 보좌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허물없었다.
도언은 액자를 구경하는 그런 녹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어 천천히 걷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에게 이 독특한 벽면은 그리 큰 구경거리가 아닌 듯했다.
“민수 씨. 이거 봐요.”
사진을 찬찬히 구경하던 녹의 옆에 이네스가 다가와 구석에 있던 사진 위에 손바닥을 대고 낚아채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움직이는 사진이 있던 액자는 비워져 하얀 벽면이 되었고, 대신 사진에 담겼던 장면은 이네스가 녹의 앞에서 펼친 손 위에서 생명이 담겨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피규어 같은 진예와 이네스, 그리고 청연은 이네스의 손 위에서 정교한 홀로그램처럼 입체를 입고 움직였다.
그들은 한 테이블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별 특이한 점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뭘 보라는 건지 몰라 멀거니 그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자, 곧이어 한 인물이 이네스의 손바닥 위에 나타나 나머지 하나 남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표정이 없는 그 인물은 도언이었다.
“가주님은 바빠서요. 제가 사진 찍는 게 취미라, 찍은 사진이 한쪽 벽을 채울 정도로 많은데 가주님을 찍은 사진은 이거 하나밖에 없다니까요? 이것 참, 사진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가주님이 이리 희귀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죠.”
이네스의 손바닥 안에서, 진예는 도언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도언은 몇 번 대꾸해 주는 게 다였다. 진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언은 그 사이에 섞이지 못한 듯 보였다. 손바닥 위 도언은 홀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안도언답게 논다.’
왁자지껄하게 있던 허공 속 사진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되감기 한 것처럼 처음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런 형태의 사진은 처음 보네요. 이네스가 만든 건가요?”
“맞아요. 이거 말고도 저기서 홀로 돌아다니고 있는 물건들 모두 제가 손 좀 봤죠. 그런 거에 관심이 많거든요. 어쨌건 방금 본 사진에 대한 감상은요?”
이네스는 입체 사진을 펼친 손을 주먹 쥐고서 다시금 액자 안에다가 넣는 시늉을 했다. 비어 있던 액자는 공간감이 생기며 창문 느낌의 사진으로 변했다. 뜬금없이 감상을 묻는 그 질문의 의도를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녹의 대답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모양인지 목소리에서 흥분마저 느껴진다. 녹은 출제자의 의도를 예상하며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도언이 나온 사진은 그거 하나라고 했었지. 움직이는 사진 자체에 대한 감상은 그녀의 의도에서 벗어난 걸 테다. 그런 녹의 뒤로, 도언이 성큼 그들에게 다가서서 녹의 고민을 끊어 주었다.
“별 쓸데없는 거 묻지 말지. 그리고 이건 네 것이 아닌가?”
“어머.”
도언이 건넨 핸드폰은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이네스는 냉큼 도언에게 폰을 받아 발신인을 확인했다. 녹 또한 재빠르게 핸드폰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한 장로’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한 장로? 어디서 들었던 거 같은데. 녹이 기억 속에서 한 장로라는 명을 더듬는 사이, 이네스는 짧게 울렸던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세요?”
이네스가 통화를 하는 사이, 녹은 이네스가 방금 집어넣은 액자로 다가가 이네스의 손짓을 따라 했다. 도언이 유일하게 있다는 액자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마력도 봉인당했기에 기대도 안 하고 별생각 없이 한 거다. 하지만 녹이 그 시늉을 하자마자 액자가 하얗게 비워졌다.
“……??”
녹은 조심스럽게 손을 펼쳐 보았다. 이네스의 손 위에서 놀고 있던 네 사람이 정확히 녹의 손 위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다. 정말 이렇게 될 거라고 기대도 안 했기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손 위에서 그들이 하는 꼴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그걸 놓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