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해사 (10/24)

8. 해사

그때, 둥근 목소리만 낼 것 같았던 이네스의 날카로운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덕분에 이 집 안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그녀를 향해 쏠렸다. 제 손바닥 위에 펼쳐진 그들의 추억을 바라보고 있던 녹도, 녹의 호기심 넘치는 행동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도언도, 마침 온 손님에게 내어 드릴 음료를 정하고 있던 진예도, 진예를 도와 찬장에서 컵을 꺼내고 있던 청연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이네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네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통화에 열중이었다.

“하여간 운 좋은 줄 아세요. 마침 가주님이 제 옆에 계시니까. 얼른 장소나 말하고 끊어요. 그동안 잘 잡아 두고 계시고요.”

이네스가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이네스에게 도언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꾼이 나타났어. 신입 해사가 실수해서 놓쳤나 봐. 하여간 어딘지는 알고 있으니 빨리 가 봐야지. 꾼이 산을 넘어서 도심까지 내려오기 전에.”

“꾼이 된 마생물은?”

“그림자 새.”

도언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찡그렸다. 녹이 그들의 대화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림자 새란 마생물뿐이었다.

그림자 새란, 어두운 깃털을 지닌 마생물이었는데, 그 깃털이 귀한 마법 재료로 쓰였다. 보통 그 깃털은 빛을 삼켜 가두는 용도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물론 그림자 새를 포함한 마생물 전반은 세계수가 사라지며 그 수 또한 함께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녹이 마지막으로 그 새를 본 게 백여 년 전이니 할 말 다 했다.

꾼이 무언지는 몰라도 그림자 새가 골칫덩이가 된 모양이다. 어느새 컵을 들고 다가온 청연이 물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하필 오늘 꾼이 나타날 게 뭐람.”

“꾼이 뭔데?”

“아, 녹은 모르시겠구나. 이게 안가에서 사용하는 단어라서 안가 사람이나 쓰지 다른 자들은 모르더라고요. 저희 안가에선 바깥에서는 희귀한 마생물이니 마법 식물이 많다는 건 눈치채셨죠?”

모를 수가 없었다. 이네스가 가지고 온 장바구니에 있는 바아가 그 증거였다. 그 분홍색 식물은 장바구니에서 꺼내지지도 않은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보통 바깥이라면 장바구니에 대충 쑤셔서 운송할 게 아니라 장갑까지 끼고서 조심조심 옮겨야 할 귀한 식물이었다.

‘마생물도 많다니.’

광장에서 날치를 보며 예상하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 감상이 달랐다. 물론 마생물이 마법 식물을 주식으로 삼으며 자라나긴 하지만, 보통 보이는 즉시 잡아들여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단 게 문제였다. 이곳은 대체 어떤 원리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물 대신 마력으로 자라나는 마법 식물은 자라나면서 간간이 사기를 내뿜어요. 그게 마력의 흐름과 엉켜서 결국 삿된 마력 뭉치로 변하죠. 세계수가 존재했을 적에는 식물이 뿜는 사기를 세계수와 정령들이 정화해 주었지만, 지금은 없으니 별수 있나요. 저희가 해야 할 수밖에.”

이것 참, 세계수가 정말 마력의 중심이 맞긴 했나 보다. 세계수 하나 사라지니 난리법석이다. 대체 왜 자신에게 힘을 주고 사라져 버린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녹에게 힘을 이전시킨 건 분명 본인, 아니, 본목 의지였다.

“다행히 마력이 뭉쳐진 사기 뭉치는 마력이 없는 자의 눈에도 보인답니다. 덕분에 마력 없는 주민들도 오가며 목격 시 바로 신고하죠. 해제는 마력의 이해도가 높은 마법사가 해야 하지만요. 사기 뭉치 해체 처리 마법사를 해사라고 불러요. 바깥세상의 소방관 비슷한 거죠.”

“꾼은 무슨 얘긴데?”

“해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사기 뭉치들은 상대적으로 이지가 흐린 마생물에 달라붙어요. 그리고 그 마생물은 눈 깜빡할 새 거대한 식신화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 작은 나비 한 마리도 잔병을 몰고 다니는데, 그보다 몇십 배로 큰 식신은 대체 어떤 불행을 몰고 오겠어요. 그렇게 거대 식신화가 된 마생물들을 해사들은 꾼이라고 불러요.”

과거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마생물과 결합한 거대 식신이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세계수가 사라지니, 안가의 일원들이 종의 멸종을 막기 위해 애썼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개념도 만들고 말이야.

물론 다른 가문에서는 별생각 없이 찾는 족족 해치워 버리기 바빴다. 허나 세상은 넓으니 그들의 이념 반대편에 있는 가문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없을 것 같던 그런 가문이 안가란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여기도 난리긴 하구나.”

“보통은 해사들이 뭉치를 잘 풀어서 꾼들이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어요. 꾼이 나타나면 뭉치를 해제할 때보다 몇십 배의 노력이 더 들거든요. 물론 후처리는 확실해서 도심까지 꾼이 내려오는 경우는 없어요. 그냥 해사들만 고생할 뿐이죠. 물론 가주님께서 가신다면 금방 끝나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쉽게 가려고 하진 않으시네요.”

청연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물잔을 비워 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의문스러워할 새도 없이, 이네스의 높은 목소리가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다녀오라니까? 왜 안 간다는 거야?”

“…….”

“손님이 걱정되어서 그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잘 보호하고 있을게!”

도언은 이네스의 다그침에도 입을 꾹 닫고 말이 없었다. 그때, 녹의 손 위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입체 사진이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네스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무어라 왱알거리자, 도언은 그저 팔짱을 낀 채 반대편으로 등을 돌리고 먼 산을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어? 뭔가 패턴이 바뀌었는데?”

“아, 동화되어서 그래요. 사진의 주체가 가까이 있으면 주체의 감정과 동화되어 버리거든요. 만일 그 시점에서 그 감정을 품었다면 과거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굳이 손바닥 위의 사진에서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현실에서 너무 잘 보인다. 도언은 대놓고 이네스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고, 이네스는 도언을 큰소리로 다그치고 있었다. 이네스의 목소리가 천장을 뚫을 듯하자, 진예가 둘의 눈치를 슬슬 봤다. 도언은 그런 진예를 발견하고 묵직하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청연.”

“네. 가주님.”

가주와 장로장이 대치하고 있어도 늘어지는 분위기를 고수했던 청연이 격식 있게 차렷 자세를 했다. 몸에 힘을 딱 준 모습에서 은근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가주 보좌다. 도언은 자신에게 주의를 쏟고 있는 청연을 향해 물었다.

“안가에서 올해 꾼이 나타난 빈도는?”

“제가 알기로 올해 처음입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꾼이 나타났을 때는?”

“아마… 3년 전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드물게 나타났던 꾼이 하필 오늘, 내가 손님과 이곳에 들렀을 때 때맞춰 나타난다고?”

도언이 고개를 얕게 흔들었다.

“어차피 내가 가지 않아도 꾼은 해사들이 잘 처리할 거 아니야. 그림자 새라면 그들이 버거워하는 종류도 아닐 테니, 훈련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청연.”

“네!”

“이번에 실수한 신입 해사에 대해 알아봐.”

“알겠습니다!”

청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팡이를 꺼내 들고 바람을 몸에 휘감았다. 휘감긴 바람이 사라진 곳엔 아무도 없었다. 청연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네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해사를 의심하는 거야? 해사가 뭘 위해서 그딴 짓을 벌였겠어. 정신 차려! 몇 년 만에 나오는지 모를 꾼이라고! 해사들이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그렇지 걔네들이 여기서 힘을 다 써 버리면 업무에 차질이 생긴단 말이야! 안 그래도 한 줌인 해사인데 가주가 복지에 힘 좀 쓰면 좀 좋아? 심지어 네가 가면 꾼을 잡느라 생길, 혹시 모를 불시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잖아!”

“내가 이곳에 있으면 여기서 생길 불시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겠지.”

둘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진예가 은근슬쩍 녹에게 다가와서 그의 옷자락을 끌었다. 녹은 그에 따라 허리를 숙여서 진예와 눈을 맞췄다. 똘똘한 진예가 가까워진 녹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오빠가 뭐길래 가주님이 안 가시려고 해요? 웬만해서 안가에 관련된 일은 안 빼시는 분인데. 지금 말하시는 거 들어 보면 누군가 오빠를 노리고 가주님과 떨어뜨리기 위해 꾼을 일부러 만든 뉘앙스잖아요.”

“그러게. 내가 쟤의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다.”

꾼을 처리하기 위해 혼자 간다면 남겨질 녹이 불안하고, 그렇다고 같이 가자니 그곳에서도 녹이 위험할 소지가 다분했다. 역시 아이는 도언이 현장으로 가지 않고 버티는 원인이 녹임을 알아챘다.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하지. 녹 또한 진예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으나 그 이유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녹이 도언의 무엇인지를 알아야 본인도 자유를 찾고, 본인을 수호할 힘도 찾고, 신경질적으로 예민하게 주변을 탐색하는 일상도 찾을 텐데. 도언에 대해선 솔직히 자신보다 진예가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녹의 앞에서 방금 맞은 것과 같은 바람이 일었다. 부드러운 벨벳과 같은 훈풍을 거두고 나타난 것은 청연이었다. 간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곧바로 온 청연은 그대로 도언이 명령한 의무를 행하고 보고하기 시작했다.

“신입 해사, 안가의 주원. 대략 한 달 전에 들어온 마법사로 마법사들에 의해 부모를 잃었다고 합니다. 성별은 남자. 약간 어리바리한 게 특징이나, 뭉치를 풀어내는 마법 이해력은 뛰어나 해사 총괄인 한 장로의 추천을 받고 해사단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3년 만의 신입으로, 첫 임무를 행하자마자 한 실수라고 사료됩니다. 3년 전에 꾼이 나타났을 때도 신입의 실수였단 걸 따져 봤을 때, 이번 일은 그저 해사단의 징크스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 민수 씨가 뭐라고 이리 뒤로 빼. 이제 확인했을 테니까 얼른 준비해.”

아, 민수 씨. 이 무례에 대해선 나중에 사과드릴게요. 지금 좀 바빠서. 말을 마친 이네스는 작게 속삭였다. 녹은 이네스의 말에 어설프게 웃었다. 청연의 보고까지 들은 마당에 고집을 부릴 수 없었던 도언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더니 청연에게 이곳을 부탁했다. 청연이야 기운차게 대답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녹은 물끄러미 그 흐름을 보다가 자신의 손 위로 고개를 내렸다. 손 위의 사진에서 이네스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양손을 얹고 도언을 쳐다보았고, 도언은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동화라는 시스템,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피사체인 미니미 도언은 불현듯, 고개를 올려 녹을 바라봤다.

“……?”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도언이 녹의 손바닥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마법으로 찍은 사진이 손을 이탈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기에 녹은 한껏 당황했다. 미니미 도언은 종종종 뛰며 녹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왠지 얼른 주워서 액자에다가 넣어 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녹은 그를 따라갔다. 미니미 도언과 같이 종종종 뛰다가 그가 잡힐 것 같은 거리에서 손을 뻗자-

“얼레.”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고개를 들었다. 암흑이 뒤섞인 웅대한 날개 한쪽이 바람을 가르며 녹을 향해 고속으로 다가왔다.

“-녹!!”

탕--!!

도언의 절규가 폭발음에 묻혔다.

그림자 새의 검은 날갯죽지 한쪽이 몸통과 분리되어 숲속 저 너머에 굴렀다. 녹은 주저앉은 채로, 격발의 반동에 얼얼해진 손목을 잡았다.

녹의 손에는 새의 날개를 날려 버린 글록이 자리하고 있었다. 날개와 몸통의 이음새를 정확히 노린 공격이었다. 녹의 순간 집중력과 상황 판단력, 그리고 목표물이 가까웠기에 만들어 낼 수 있던 결과였다. 1초라도 늦었어도 녹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림자 새의 어두운 깃털 안에 간간이 보이는 것은 하얗게 드러난 뼈였다. 녹이 쏜 곳은 깃털과 몸통을 잇는 가장 굵은 뼈대였다. 원래 녹이 알던 그림자 새는 참새만 한 외형에 뼈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놈의 꾼인지 무언지가 되면서 외형이 바뀐 것 같았다. 거대해진 건 차라리 녹에게는 다행이었다. 표적이 커진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떨어진 날갯죽지는 검은 아지랑이를 허공으로 피워 내고 있었다. 마력이 봉인당한 녹이라도 꾼의 부분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함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식신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리라. 날개 한쪽을 잃은 꾼은 일시적으로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놈의 절단면에선 혈액 대신 불길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그건 그렇고….

“이게 진짜 쓸모가 있을 줄은…….”

녹은 오른손을 탈탈 털며 검은 총신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안가로 떠나기 전, 오랜만에 의복다운 의복을 챙겨 입어 신이 나 팔짝 뛰는 녹에게 도언은 한 자루의 총을 건넸다. 녹이 심심할 때마다 연습하곤 했던 글록이었다. 녹은 눈썹을 모으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이걸 왜?’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바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거 챙기고 다니라고?’

‘이곳 이외의 곳에서는 항상 챙기고 다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도언은 권총을 빠르게 뽑아 조준할 수 있도록 벨트형 홀스터를 건넸다. 녹은 떨떠름하게 그를 건네받았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긴 하지만… 아까 안전한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안전한 곳이 미국이니, 마법사들의 소굴이니, 그런 곳은 아니겠지?

주변 경계가 일상이었던 녹은 도언의 말에도 가타부타 말없이 눈만 끔뻑이다가, 도언의 손 위에 있는 권총집을 낚아챘다. 확실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도언의 집에서 자신이 마력이 없단 이유로 경계를 너무 허술하게 하긴 했다. 집 밖을 나간다면 도언의 말대로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녹은 목적지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옷 속에 홀스터를 착용했다. 홀스터는 넉넉한 의복으로 인해 충분히 가려졌고, 덕분에 그 누구도 녹이 총을 소지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누군가 알아봤으면 녹은 그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도언의 충고대로 혹시 몰라 이를 챙기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했다. 녹이 자신의 손 위에 무색의 광을 빛내고 있는 글록의 그립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야, 짜식. 플라스틱 쪼가리인 줄 알았는데 꾼이라고 하는 요상한 생물의 공격도 막고 말이야. 큰 건 하나 했네. 큰 건 하나 했어.

그러나 홀로 자축할 때가 아니었다. 꾼이 된 새에게는 아직 하나의 날개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쪽 날개가 날아가 버렸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꾼은 다른 쪽 날개를 하늘로 높이 세우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아무래도 방금 공격으로 인해 녹을 적으로 인식한 듯싶었다.

꾼이 세운 날개 안 그림자에 갇힌 녹은 곧바로 머리를 차게 식히고 앉은 상태로 목표를 조준했다. 숨을 멈추고, 마치 마법을 쓰기 전과 같은 순간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날개가 다가오기 전에 끝내야만 한다. 신중한 조준 이후 이어진 격발은 빨랐다.

탕--!

쿠에에엑--!

반대편 날개가 꾼에게서 떨어짐과 동시에 그림자 새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꾼의 정수리를 깔끔하게 일렬로 가르며 내려온 자는 도언이었다. 도언은 검무를 췄을 때 보았던 검으로 꾼을 처리했다. 꾼이 다시 녹에게 달려들기 전에 민첩하게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날개가 아무리 끊어져도 자신의 고통보다는 표적의 죽음에 집중한 꾼 또한 두개골이 반으로 갈라지는 데에는 별수 없었다. 결국 꾼은 도언이 가른 중간과 녹이 떨어뜨린 두 쪽의 날개. 총 네 조각으로 갈라져 굴렀다. 시체 위의 아지랑이가 검은 구름처럼 허공을 향해 떠올랐다.

꾼의 숨이 끊어졌다는 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도언은 자신의 검을 내동댕이치며 녹을 향해 뛰어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도언은 녹의 이곳저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친 곳이 있나 확인하는 그는 꽤 부산스러웠다. 언제나 차분하던 도언의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는 떠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녹, 녹… 다친 데는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사실 녹은 꾼이 자신에게 달려들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놀랐다. 몇 초간의 위기일발의 순간도 세월로 훈련한 담력으로 차분하게 해법을 찾아 이행한 녹이었다.

하가에서 나온 이래로 녹의 인생은 도언의 집을 제외하고서는 언제나 전시였다. 아무리 마력이 봉인당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지킬 수단 하나쯤 단련하는 건 기본이었다.

아무리 거대해졌어도 사기에 이지를 먹힌 마생물이었다. 교활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마법사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쯤이야 가뿐했다. 물론, 이네스의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할 녹이 어째서 현장에 나타난 건지는 녹 자신도 몰랐지만.

녹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도언의 떨리는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야. 그만 떨어. 무슨, 나한테는 꾼이라는 그 새 새끼보다 너 새끼가 더 위험하거든? 안 다쳤으니까 그만해.”

녹은 도언의 눈동자 속에 자리하고 있는 공포를 읽어 냈다. 파랗게 질린 입술에서는 혈색을 찾기 힘들다.

아, 이거 큰일이네. 이러다가 이번이 마지막 외출이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도언은 녹의 안전을 본인에게 확인받고서는, 녹의 뒷목을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겨 안았다. 이 녀석, 손만 떨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몸 전체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다. 진심으로 녹의 죽음을 두려워한 거다.

‘녹이요. 녹은 제 악몽이자 구원이에요.’

도언이 저번에 자신에게 한 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존재가 대체 이 녀석에게 무엇이길래 이리도 진심을 내보이는 것일까. 녹은 도언의 뒷머리를 쓸어 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격하긴 되게 격하네. 내가 도언 전용 마약 같은 건 아닐까?’

아무리 꾼이 저세상을 가셨다고 하더라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녹 본인이 크게 다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적의 사체를 보고 상태는 안정되었는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를 찾았다. 하여간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녹의 배짱은 도언의 어깨 너머 옹기종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바람 위의 등불처럼 사그라들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개개별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도언과 녹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중 가장 놀라 보이는 건 이네스였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이 확장되었다. 과장 좀 보태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다.

그들의 경악을 한 몸에 받아 낸 녹은 돌연 민망해졌다. 저들의 시선을 감내하는 것보다 꾼이라는 그 새를 마력 하나 없이 도륙 내는 게 차라리 더 쉽겠다. 도언은 그들로부터 반대편을 바라보며 있어서 이 어색한 침묵은 녹만이 두 배로 수용했다. 녹은 도언을 쓸어 주는 손을 멈추고서, 헛기침을 부러 하기 시작했다.

“흠… 크흠.”

그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이네스 옆에 있던 할아버지, 한 장로가 제일 먼저 깨어나 그들에게 다가왔다. 녹은 자신을 사정없이 끌어안고 있는 도언을 눈치껏 떼어 내기 위해 힘을 썼다. 한참을 밀리지 않던 도언은, 어느새 이성이 돌아왔는지 녹에게서 떨어졌다. 한 장로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저…… 가주님. 사기가 모두 빠져나갑니다만. 저대로 놔두면 사기가 다시 뭉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떨어지면서도 녹의 어깨를 얹고 있던 도언의 손은 아직까지도 잘게 떨렸다. 녹은 도언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 주며 그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도왔다. 촛불처럼 떨리던 도언의 눈동자에 드디어 이지가 어렸다. 떨리던 손 또한 잦아들었다.

도언은 앉은 상태에서 한 손을 말아 쥐었다가 펼쳤다.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던 불길한 아지랑이는 도언의 손바닥을 향해 일률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도언은 그 아지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흡수했다. 마치 식신을 흡수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실이 풀린 스웨터가 쉬이 풀어지는 것처럼, 아지랑이가 도언에게 흡수될수록 꾼의 사체는 사라졌다. 꾼을 처리한 이후에 가장 복잡하고 짜증 나는 작업은 가주의 손에서 손쉽게 처리가 되었다.

도언이 없었더라면 여기에 있는 해사들은 그 아지랑이를 처리하기 위해 야근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네스가 직원 복지 명목으로 그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해사들은 도언에게로 사라지는 사기들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도언이 절절하게 끌어안은 저 낯선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도 도언이 비척이며 일어나기 전에나 허용된 일이었다.

“……감히 사기 뭉치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 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도언이 허공을 쥐자, 아무것도 없던 빈손에서 검 한 자루가 생겨나 그의 손에 나타났다. 서슬 퍼렇게 날이 선 진검이었다. 어느새 떨림이 잦아든 목소리는 심해 아래에 판 해저 동굴보다도 서늘했다. 거의 지옥불에서 돌아온 야차였다. 해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차라리 가주를 부르지 말고 야근이나 할 걸 하며 후회했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다.

“아니, 혼낼 거면 나를 혼내.”

덜덜 떠는 해사들 사이를 뚫고 나타난 건 노란 눈동자의 아가씨였다. 어느새 경악했던 얼굴을 지워 낸 이네스가 자못 비장하게 도언의 앞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네가 화날 만한 실수는 해사들보다는 내가 한 거니까.”

이네스가 녹을 돌아보며 사과했다.

“민수 씨가 이곳에 오게 된 건 실수였으니까. 죄송해요. 민수 씨. 저는 분명 가주님과 저만 이동하기 위한 술식을 짠 거였는데, 민수 씨까지 딸려 올 줄은… 계산 실수였나 봐요. 많이 놀라셨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지 못해 난 사고였는걸요. 저는 안전하고요.”

그렇다. 원래 녹은 이곳에 없어야 할 인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안전하고 따뜻한 집에서 청연과 진예와 함께 현장에 나간 그들이 돌아오는 걸 기다렸어야 할 몸이었다. 그러나 마법 사진에서 튀어나온 미니미 도언이 이네스가 짠 이동 술식 안에 자신을 유인했고, 자신은 말려들었다.

덕분에 도언이 검을 쓰며 꾼의 숨통을 끊는 별난 구경도 다 했다. 마법으로 처리할 줄 알았는데. 보통 식신의 경우는 물리력으로 인한 상해가 통하지 않았다. 허나 꾼이라고 불리는 돌연변이 식신은 나비 식신과 처리법이 다른 모양이다. 방금 처리한 꾼은 마력 하나 담기지 않은 녹의 총알에 어이없게 날갯죽지를 내어 주었기에 예상이 되었다.

그래서 도언이 오면 금방 끝난다 했던 것일까? 해사는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 했던 걸 기억한다. 마법사들에게 특화된 것은 마법이지 체술이 아니었다. 꾼이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모든 정황이 이해된다. 확실히 그런 꾼을 처리하려면 해사들이 꽤 땀 좀 뺐겠다 싶었다.

당사자인 녹이 자신의 잘못을 고하며 가볍게 이네스의 사과를 받아 내자, 뭐라 말을 더 얹을 수 없는 도언은 입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서늘하고 오싹한 눈빛만큼은 눈꺼풀에 감기지 않고 주변을 쏘아 낼 따름이었다. 딱딱하고, 차가우며, 날카로운 도언의 눈빛은 첨예하게 갈아 낸 지하의 종유석 같았다. 해사들은 너도나도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그의 매서운 눈빛을 온전히 마주 볼 수 있는 자는 이네스가 유일했다. 해사들이 혼나는 걸 유연하게 막아 낸 이네스는, 박수를 두어 번 치며 주변을 환기했다.

“뭐, 그렇게 된 고로. 일단 해사들은 해산. 그리고 한 장로님. 나중에 제집으로 막내 좀 보내 주세요. 아무리 신입이어도 그렇지, 실수를 그냥 넘길 수는 없죠.”

이네스가 한 장로를 향해 윙크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신입이면 그럴 수 있으니까, 보내는 시기는 가주님이 안가를 나갈 때쯤으로 할게요. 괜히 가주님의 불똥까지 튀면 신입이 너무 불쌍하니까요.”

해사를 관리하는 한 장로는 이네스의 배려에 눈물이 맺힐 뻔했다. 안 그래도 해사는 수요보다 언제나 인원이 모자란 편이었는데, 만일 도언에게 신입이 찍혔다간 과분한 직책을 맡았다고, 못하겠다며 울며 해사 일을 내팽개쳐 버릴지도 몰랐다. 심지어 지금 가주는 상당히 독이 오른 상태였다. 같이 온 저 청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로는 길게 묻지 않고 이네스를 향해 고개를 빠르게 끄떡거렸다.

“네. 안 그래도 지금쯤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겁니다. 가주님과 장로장께서 하도 안 오셔서 모시고 오라고 내려보냈거든요.”

“어머. 그럼 막내가 여기 오기 전에 얼른 집에 가는 게 막내의 정신 건강에 이롭겠네요. 지금쯤이면 이곳으로 오고 있을 테니까요. 좀 더 기다리다가 가주님이랑 마주치면 어떻게 감당해요?”

이네스는 바로 옆에 있는 도언은 보이지도 않다는 듯 언행이 거침없었다. 도언은 이네스의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녹의 옆에 딱 붙어서 생채기 하나 났나 싶어 몸을 샅샅이 훑어볼 뿐이었다. 녹은 그 시선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침내 이네스가 장로와의 대화를 끝내고 도언과 녹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네스가 해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네스의 귀에서 있었는지도 몰랐던 노란색 귀걸이가 밝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땅에서 노란색 빛무리가 나와 그들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려 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막내는 그렇다 치고, 해사장인 한 장로님의 시말서도 기대해 볼게요. 그럼, 뮤에로토.”

“컥- 이네-”

한 장로가 반박의 말을 채 내뱉기 전에, 녹과 일행은 이네스의 집에 다시 도착했다. 이네스가 마법을 행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 있던 녹은 역시 장로장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느꼈다.

공간이동은 거리에 따라 마력의 출력이 결정된다. 현장이 산이라고 했는데, 같은 고도에 있는 곳이 아니라면 좌표를 하나 더 찍어야 한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고산 지대에 나는 나무를 알아본 녹이었다. 그 정도 나무가 자라나는 곳까지 올라가려면 상당한 마력을 썼을 테다. 그런데 심지어 그녀는 지팡이도 쓰지 않았다.

물론 지팡이 없이 마법을 쓰는 건 의외로 그리 대단치 않았다. 다만 귀한 마력이 철철 흘러넘칠 뿐이다. 지팡이는 보통 체내에 있는 마력의 안정화와 마법 구현의 밀도를 올려 주는 역할을 한다. 마법사 살해 마법과 같은, 파괴력이 높은 마법일수록 지팡이는 필수였다.

녹은 언제나 자신의 마력이 봉인된 것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으나, 오늘이 특히나 더 안타까웠다. 가주의 보좌이자 가문의 이인자라는 청연조차 지팡이를 쓰는데, 이네스는 보좌도 아니면서 어째서 지팡이를 쓰지 않을까? 마력이 얼마나 많으면?

녹의 궁금증은 집에서 자신들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청연과 진예에 의해 무산되었다. 녹이 집 안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난리법석을 떨며 무사한 것인지 확인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다고요…. 가주님께서 함께이니 그리 걱정은 안 되지만…. 꾼이란 녀석들이 은근 포악해 잡기 애먹는 녀석 중 하나인데….”

“오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엄청나게 걱정했어요! 방금 도착했던 해사도 현장에 가주님과 이네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함께 갔다는 걸 모르고 계셔 가지고 더 걱정되었지 뭐예요. 무사하신 거 맞죠?”

“하여간에 노… 민수 님은 가만히 있질 못하신다니까요! 안가로 가는 수중 통로에서 차창 여실 때부터 알아봤어요!”

“어머. 차창을 여셨어?”

청연이 어디까지 우려먹을 생각인지 그놈의 차창 얘기를 또 꺼냈다. 걱정해 준 건 고맙지만 그 후에 이어진 이야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네스에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청연을 두고서 녹은 조심스럽게 그 야단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그 장소로 이끈 도언 미니미를 액자에서 찾기 시작했다.

제가 직접 집어넣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꺼냈던 장면은 액자에 수납이 잘되어 있었다. 탁자에 앉아 있는 청연과 진예, 그리고 이네스가 세상 해맑게 꺄르륵거리고 있었다. 아마 물벼락 맞은 녹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저들의 감정이 동화된 듯했다. 하하, 젠장.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재미날 일인가. 그러나 그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도언은 사진 어느 한구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진짜 도언이 녹의 옆에 튀어나와 자리했다.

“그 녀석. 꺼내 주는 이가 없어도 가끔씩 액자 바깥으로 튀어나와 산책하는 것 같더군요.”

“그럼 지금도 산책 중이란 거야?”

“그렇죠. 이네스가 찍은 사진 중에서 그 녀석만 유일하게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 밖으로 나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분이 피사체랑 똑같네.”

“이네스가 녹의 사진을 찍으면 그는 사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가 궁금해지는군요.”

녹은 상상해 보다가 관뒀다. 자신의 감정을 대신 알려 주는 자신의 사진이라니. 상상만 해도 별로. 이네스가 자신에게 사진의 감상을 물어본 것도 감상을 들은 도언의 감정을 엿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남에겐 워낙에 감정을 잘 숨기는 녀석 같으니까. 여하간 그래서 도언의 사진이 한 장뿐인 걸까? 도언이 사진 찍히기를 애써 피해서?

“근데 너 사진은 왜 한 장밖에 없어? 심지어 청연도 저리 많구만.”

“가주님은 안가에 잘 안 오셨어요. 바깥에서 보물찾기 하느라 항상 바쁘셨죠.”

도언과 녹 사이에 말총머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네스였다. 이네스는 도언이 있어야 할 액자 안을 뚫어져라 구경하는 중이었기에 녹은 그녀를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인제 보니 이네스는 자신의 눈 색과 똑같은 색깔의 둥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네스가 마법을 부릴 때 지팡이 대신 저 물건이 빛났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기에 녹은 잊지 못했다. 도언은 중간에 낀 이네스를 못마땅하다는 듯 보았지만 그녀에게 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이에 힘입어 이네스는 녹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도언의 정보를 풀었다.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는 가주님 덕분에 제가 안가의 전반을 다듬었다니까요.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통로 자체도 제가 제 취향대로 설계한 거였어요. 일각고래는 보셨나요? 통로 때문에 물벼락을 맞게 했다니 죄송해요.”

“아니…. 뭐…. 지난 일인데요. 뭐. 제가 부주의하기도 했고.”

“아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통로가 바닷속이라서 다행이죠. 혹 다시 오실 때 은하수 위를 둥둥 뜨고 있다면 그때는 창문을 조금도 열면 안 돼요. 아셨죠?”

통로에 우주가 뜨면 차창을 열지 말라는 친절한 조언을 들었다. 아무래도 안가에 오는 통로에 무엇이 나올지는 무작위인가 보다. 통로 설계 자체를 이네스가 했다고 방금 들었는데, 이 아가씨 취향이 참 독특하다. 통로의 패턴이 바다와 우주만 있는 게 아닐 것 같다는 감이 왔다.

“이제 그만 집에 가시죠. 날이 늦었습니다.”

도언의 목소리가 이네스와 녹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섰다. 도언의 말대로 어느새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네스가 아쉬운 티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날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민수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이것저것 알려 드리고 싶단 말이야. 진예도 좋아하고.”

“안 돼.”

“아, 민수 씨 어차피 길을 잃은 자 아니야? 그럼 안가에서 지내게 되실 텐데. 하루쯤 여기서 자도 상관없잖아.”

“안 된다고 했지. 그는 길을 잃은 자가 아니라 내 손님이야.”

가둬 놓고 모시는 손님이 있나. 녹은 도언의 가당치도 않은 소리에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길을 잃은 자는 또 뭐람. 안가에는 은어 같은 개념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또한 많았다. 정황상 길을 잃은 자들은 안가의 입주민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손님? 웬 손님이야? 민수 씨가 대체 누군데 너한테 손님인 건데?”

이네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물었다. 저 아가씨, 분명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물은 것일 테다. 꾼을 처리하고 도언이 자신을 끌어안을 때, 해사들 사이에서 가장 놀란 티를 숨기지 않은 자가 이네스였다. 언제쯤 이네스가 자신의 정체를 물어볼지 좀 궁금했는데 자고 가라는 건 이 질문을 위한 초석이었나.

도언은 이네스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목소리가 아닌 머뭇거림뿐이었다. 결국 도언은 이네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닫았다. 도언이 무슨 소리를 할지 한껏 기대했던 이네스가 대놓고 실망했다.

“뭐야. 말을 못 해. 여하간, 도언이는 안 된대요. 그럼 민수 씨는 어때요? 쟤는 일단 보내고, 저희끼리 놀아요. 여기서 자고 가세요!”

이네스가 조르는 폼이 진예와 비슷했다. 가주님이라고 칭하던 호칭까지 버린 이네스는 녹의 자유 의지를 명목으로 허락의 타겟을 도언에서 녹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목표물이 영 떨떠름하게 있자, 이네스가 녹의 구미가 당길 법한 말을 내밀고 흔들었다.

“도언의 예전 모습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예전 모습이라뇨?”

“안가를 만들 때의 모습 같은 거죠. 이래 봬도 신생 가문이니까요. 제가 가주님이랑 꽤 인연이 깊거든요? 가주님이 민수 씨를 대하는 모습 보면 민수 씨도 가주님에 대해서 궁금해하실 법도 한데. 왠지 그런 얘기는 가주님이 안 해 줄 것 같아서. 제 추측이 정답이죠? 아까 가주님에 대해 말할 때마다 민수 씨가 제 말에 엄청 집중하고 있던 건 아세요? 뭐, 사실 제가 민수 씨에 대해 많이 궁금해요. 하하하.”

마지막 말 때문에 고민이 되긴 하였으나 이것이 기회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녹은 이 기회를 놓치면 도언의 집에서 세계수가 던져 주는 힌트나 주워 먹으며 도언의 정체를 알아맞혀야 한단 사실을 직감했다. 꾼을 상대하며 보았던 도언의 격정은 녹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집 안에만 꽁꽁 묶어 둘 만했다.

“아니. 안 돼.”

녹을 꼬시는 이네스를 칼같이 자른 건 도언이었다. 그렇게나 단호할 수가 없다. 이네스가 곧장 툴툴대기 시작했다.

“아, 왜. 이 집이라면 안전한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게다가 손님이라며. 민수 씨. 내일 혹시 엄청 바빠요?”

“아니요.”

바쁘기는. 내일 해야 할 일은 발톱 깎기 하나밖에 없었다.

“본인도 안 바쁘다는데 네가 왜 참견이야?”

“위험해.”

“위험은 무슨 위험. 여기 안가라는 거 잊었어? 이곳을 가능한 안전하게 설계한 건 너야.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차라리 네 주변이 더 위험하겠네. 꾼 때문이라면 걱정 마. 하루 동안 아주 철통 방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집 안을 방비할 테니까.”

‘잘한다!!’

녹은 속으로 이네스를 힘껏 응원했다.

“아니라면 여기가 민수 씨 때문에 위험하단 거야? 그럴 리 없지. 너는 안가에 피해가 되는 요소가 다가오면 일체 소멸시켜 버리잖아. 그런 너가 위험 분자를 직접 데려오는 미친 짓을 할 리 없지. 그럼 문젠 없네.”

이네스는 녹이 하고 싶은 말을 후련하게 대신해 주었다. 그에 멈추지 않고 녹 또한 덧붙였다.

“맞아. 설마 장로장이란 사람의 집이 보안도 안 될 정도로 허술하진 않겠지.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그것 봐. 민수 씨도 그러겠다고 하잖아. 꾼 처리할 때 보니 감각도 있으시고, 사격도 잘하시던데. 그 정도 호신술이면 걱정 없지!”

‘여기서 이대로 집에 간다면 웬만해서 다시 나오기 힘들걸.’

가능한 이곳에서 도언과 관련된 자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녹은 목 근처를 매만졌다. 정보만 모인다면 이 고리를 해제할 시기가 조금이나마 앞당겨지겠지. 정보는 가능한 많이 모을수록 이득이었다.

녹의 외박을 반대하려는 도언과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길 바라는 이네스가 대치했다. 팽팽한 무언의 신경전에, 녹은 조심스레 자리를 옮겨 이네스의 뒤로 가서 섰다. 2:1이었다. 구석에서 진예와 놀아 주던 청연은, 괜히 불똥이 제게 튈까 슬그머니 일어서서 자리를 피했다. 덕분에 홀로 남겨진 진예가 다람쥐처럼 도도도 뛰어와 녹의 뒤에 붙어 섰다.

“꾼 처리하러 갈 때 무슨 일 있었어요? 가주님이 안가를 위험하다고 할 사람이 아닌데. 가주님이 안전에 대해 저리도 말씀하실 정도면 오빠를 되게 좋아하나 봐요.”

아이는 목소리를 줄이는 법이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청연이 진예의 말에 열고 있던 문짝을 놓친 거였다. 까치발까지 하고서 존재감을 죽인 보람이 없었다. 순식간에 집중된 시선에, 청연은 볼을 긁적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우렁차게 외친 청연은 정말 그대로 현관을 나갔다. 현관 불이 노랗게 빛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게 죽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쳐다보던 진예가 녹에게 힘을 보탰다.

“여기 되게 안전해요! 룬도 있고… 원하신다면 이네스가 결계도 칠걸요? 그 전에 이네스의 말처럼 이곳이 안가인데 뭘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아, 청연이랑 가주님도 여기서 같이 주무시면 더 안전하고요! 민수 오빠는 어차피 길을 잃은 자가 아니라면서요. 꾼도 처리했겠다, 가주님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세요?”

이네스의 말에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던 도언은, 녹이 이네스의 뒤로 가서 서자 눈을 움찔거렸고, 진예의 변론에 입술을 꿈틀거렸다. 언제나 도언을 가장 좋아하던 진예였다. 심지어 함께 사는 이네스보다 도언을 더 잘 따랐다. 그런 진예가 도언과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한테 여기 놀러 왔다고 하셨잖아요! 가주님이 일군 가문이 위험하다고 가시는 건 너무 이상하죠!”

“맞아! 내가 여기에 있다고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정 불안하면 너가 계속 붙어 있으면 될 노릇 아니야.”

“그래! 진예 말 들어 보니 한숨 돌리러 온 것 같구만! 꾼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그대로 가 버리면 얼마나 아쉬워! 내가 집 주변에 결계 짱짱하게 칠게. 밖에서 우리 집 안 보이도록! 부작용은 결계가 쳐질 동안 우리 집에서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이지만-”

“좋아.”

“뭐?”

가볍게 의견을 던졌다가 굳센 반대에 부딪혀 괜히 불타올랐던 이네스가 열변을 토하려고 할 때, 도언의 허락이 불시에 떨어졌다.

“좋다고. 대신 조금이라도 결계를 허술하게 치면 곧바로 집에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어…어…. 그래.”

이네스는 어떤 포인트가 도언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모르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진예는 하루를 더 함께 보낼 수 있다며 녹의 손을 잡고 방방 뛰고 있었다. 녹만이 도언이 허락한 결정적인 한 마디를 알아챘다.

저 녀석, 이곳이 자신의 집 안이 아니니 언제든 탈출의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 거다. 그렇기에 이네스에게 결계 부작용을 듣자마자 저렇게 나온 거라면 이해가 되었다.

도언의 추측과 다르게 녹은 지금 탈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력 봉인도 제대로 해지하지 않고 도언의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적어도 도언은 세계수의 씨앗을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한 게 아니까. 그랬다면 먹이고 재우고 꿈속까지 걱정된다며 따라오는 게 아닌, 잡자마자 죽였겠지. 그러나 바깥 상황은 다르다. 씨앗이란 게 밝혀지기만 한다면 곧바로 녹을 죽이기 위해 떼로 몰려들 거다.

지금 이네스에게 갇혀 있는 자신의 자초지종과 본명을 숨긴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마법을 쓰는 걸 보았으니 어찌 되었든 저자는 마법사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도언에게 들은 바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도언에게 청연만큼의 신임을 받는 가신은 아니란 거겠지. 분명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궁금한 점은 저자와 도언의 인연이었다. 분명 이네스는 도언의 옛날에 대해 말해 주겠다고 했다. 녹이 모르는 도언의 과거라. 탈출의 열쇠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양질의 정보였다. 기회를 얻은 김에 뽑아낼 수 있는 정보는 몽땅 뽑고 봐야 했다. 굳은 다짐으로 녹의 눈이 타올랐다.

“뭐…. 어쨌건… 하루 동안 재밌게 친목을 도모해 보죠.”

“그럽시다. 어휴. 결론이 좋은 쪽으로 나서 다행이네요? 저 그동안 차에 시동 걸고 있었는데, 다시 끄고 와야겠어요.”

이네스의 말에 대답한 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청연이었다. 그가 불쑥 튀어나와 능청스럽게 내뱉었다. 이네스는 갑자기 튀어나온 청연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에게 등을 돌리며 녹의 어깨를 감싸 이끌었다.

“하여간 쟤도 참 그렇다니까요? 가주님이랑 자신의 의견이 합치될 것 같지 않으면 아예 사라져 버리니 원. 물론, 가주님이 부르기만 하면 어쨌거나 다시 와야 할 일이지만, 참 꾸준히 도망도 잘 가요.”

“어쨌건 시키는 건 잘하긴 하잖아요. 제 최선의 의사 표현 방식이라고요.”

청연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무시하는 이네스의 뒤를 따라붙으며 변론했다. 물론 그 변론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쓸모없는 곳에 열 내는 청연을, 진예가 놀아 달라며 거실로 이끌었다. 이네스는 집 안 안쪽으로 녹을 이끌었고, 녹의 뒤에서는 묵묵히 도언이 뒤따랐다.

도언에게 둘러진 분위기를 보니 기분이 영 별로인 것 같았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잠시 바람이나 쐬러 나왔다가 이네스에게 단단히 꿰어 하룻밤을 생각지도 못하게 이곳에서 보내게 생겼으니. 물론 녹이 있는 이상 도언 또한 자연히 이곳에 묵게 되는 거였다. 이거 눈치 봐야 하는 상황인가? 도언의 발소리가 괜히 천둥 같았다.

긴 복도에 걸려 있던 액자 안은 사진에서 그림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벽면에 걸린 그림들은 모두 한 사람이 그렸는지, 비슷한 화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거친 필치로 쓱쓱 그린 투박한 목탄화였다. 그림을 잘 모르는 녹이 보기에도 제법 생생한 구석이 있었다.

화가가 인간을 그리는 것에는 취미가 없는지,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어류 등, 떠오른 동물이라면 닥치는 대로 그려 둔 건가 싶을 정도로 규칙이 없었다. 그저 흰 바탕에 덩그러니 그려져 있는 모델들은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긴 복도 장식에 용이할 만큼 조화로웠다.

복도의 끝에는 기다란 몸통을 가진 용 한 마리가 대단한 기세로 그려져 있었다. 무수한 그림들보다 단연코 기백이 강했다. 왼손에 쥐어진 여의주가 반짝이는 듯했다. 용은 가장 큰 액자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던 녹은 또 한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등에 발광석을 이고 있는 도마뱀, 꼬리가 세 갈래인 물고기, 이마에 마정석을 박고 있는 코끼리 등. 모두 녹이 과거에 보아 왔던 동물들이었다. 심지어 용은, 드래곤 계열의 마생물 일종이었다. 그림 속 모델은 정령과 마생물로 이루어졌다.

“여기 있는 그림들은 전부 직접 그리신 건가요?”

“아, 알아봐 주시네요. 네. 연구 목적으로 제가 그렸던 거였어요. 무얼 그린 건지 아시겠어요?”

“마생물과 정령 같아 보입니다.”

“어머.”

거침없이 걷던 이네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이네스는 걸음을 멈춘 후에도 한참을 허공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천장에 거미라도 있나 하고 녹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볼 정도였다. 그러나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멈춘 시계에 건전지를 넣은 것처럼, 멈췄던 이네스가 다시 작동한 것은 그로부터 몇십 초쯤 지난 후였다.

“마생물이면 몰라도 정령은 세계수가 사라진 이래로 보기 힘든 건데, 어떻게 알아보셨을까?”

이네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은 어렴풋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분명 미인의 따사로운 미소일진대 그를 보는 게 왜 이렇게 서느런지, 녹은 알지 못했다. 이네스가 녹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녹은 딱 그만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녹은 등 뒤에 있을 도언을 찾았다. 그가 잘 있음에 자신이 안도했음을 녹 본인도 알아채지 못했다.

“제가 가주님의 옛날에 대해 알려 드린다고 했죠? 안가를 세웠을 때도 가주님은 바깥을 나돌아 다니기 일쑤였고요. 청연의 말을 들어 보면 무언가를 찾아다닌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 홀로 하는 보물찾기가 재밌었나 봐요? 그게 뭘지 참 궁금했었는데….”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녹의 양 팔뚝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간다웠던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가늘게 찢어졌다. 녹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안도언의 보물이 당신이었군요?”

오랫동안 고대하던 진리를 눈앞에 둔 연금술사가 이러할까. 이네스는 녹이 충격을 받거나 말거나 새로운 발견에 대한 흥분으로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여유가 없는지, 뒷걸음질 치는 녹을 굳이 잡아채며 물었다.

“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잘못 봤나 싶었던 이네스의 동공은 여전히 파충류나 고양이의 그것이었다. 흥분에 의해 변하는 동공이라니. 이네스는 분명 일반적인 마법사는 아니었다. 이놈의 안가는 대체 어떤 인물을-사람이 맞긴 한가?- 장로장으로 올려놓은 것인가!

그녀의 황색 귀걸이가 빛을 발했다. 발밑으로 둥그렇게 진이 그려졌다. 산 넘어 산이다. 이네스는 자신을 상대로 무언가의 마법을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 묵직한 에너지가 뱀처럼 발끝부터 머리까지 빠르게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든 행동이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러웠다.

가능한 이네스를 피하고자 고개를 뒤로 빼고 있던 녹의 눈앞에, 커다랗게 펼쳐진 손이 이네스와 녹의 얼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손은 자연스레 이네스 쪽으로 다가섰고, 이네스는 시야 가득 들어찬 손등과 얼굴이 맞닿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났다. 귀걸이와 진의 빛 모두가 꺼졌다.

그 사이에 도언이 끼어들어 둘을 떼어 놓자, 녹은 자신도 모르게 도언의 뒤로 가서 숨었다. 등이 넉넉한 도언은 이 상황에서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이네스는 녹의 정체를 물었지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저 여자 정체가 대체 뭐야.’

자신의 주력 무기인 마법을 잃은 녹은 미지의 존재에 겁을 집어먹었다. 방금 잡아 버린 꾼이라는 녀석이야 단순한 데도 있고, 자신이 씨앗이든 아니든 일단 파괴부터 하는 식신이었다면, 이네스는 달랐다. 영향력의 차이였다.

게다가 잠깐이지만 오싹한 그 눈에서 내비친 한 점의 광기라니. 안도라이언과 다른 종류의 미친 자일 것 같은 예감이 불시에 스쳤다. 하여간 이놈의 안가에선 정상인 존재를 찾기가 힘들었다.

도언의 손짓에 녹의 팔뚝을 잡던 손까지 풀어낸 이네스가 뒤로 세 발자국 물러섰다. 도언이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정신 차려. 웬 무례야.”

그저 딱 한 마디면 되었다. 이네스는 그 한 마디로 놓쳤던 정신을 되찾은 듯,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이리저리 털어 내었다. 이곳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된 그 시점부터 좋아 보이지 않았던 도언의 기분은 이네스의 행동에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네스가 꾹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동공은 다시금 둥그렇게 변해 있었다. 아까 봤던 것이 급격한 분위기 변화에 했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차분한 고요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급발진이 면구스러웠는지, 헛기침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도언의 의견을 수긍하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민수 씨. 많이 놀라셨죠?”

이네스의 사과에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던 녹은 도언의 뒤에서 눈만 내밀어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사과에도 녹에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이네스는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꽁지머리 끝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변명했다.

“아무리 다양성이 존중되는 안가라 하더라도 정령에 대해 곧바로 맞히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애초에 그 개체 수가 세계수 폭발 이후 절벽 곡선을 이루며 줄어들어 버리니…. 일반적인 마법사도 요새 세대들은 정령에 대해 잘 몰라요. 그런데 바로 맞혀 버리시고…. 게다가 아까 꾼을 처리할 때, 가주님께서 보였던 반응도 처음 보는 형태였고…. 그래서 저는 민수 씨가 가주님이 그 긴 세월간 찾던 보물일 줄 알았어요.”

“…….”

이네스가 말을 잇는 동안 녹의 심장이 쫄깃해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추측은 모두 다 맞아 드는 듯했다. 이네스에 대한 녹의 경계 지수가 한층 올라갔다. 손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도언의 옷자락을 말아 쥐어 닦았다. 잡아 당겨지는 옷감에 도언이 움찔거렸지만 녹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네요. 확실히 무례였지만 아까 전에 홀로 마력 측정을 해 봤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 다시 사과드릴게요. 여하간,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마법사는 아니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수인이나 영물도 아니신 것 같고. 가주님이 보물을 찾았던 그 세월 동안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 있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요. 인간이시면서 어떻게 정령에 대해 아신 거예요? 혹시 정령을 연구하는 마법사 집안에서 자라나셨거나? 아니면 뭐 그의 후손이라거나 그런 건가?”

친절한 이네스. 자발적으로 녹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줬다. 아까 귀걸이를 빛내며 녹에게 걸었던 것이 마력 측정이었나 보다.

보통 마력 측정은 뽑은 혈액을 마법 처리해서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곧바로 마력 측정을 하는 것 또한 그녀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에 일조했다. 호기심과 반대로 본인의 의사도 없이 마력 측정을 하는 건 빼도 박도 못하는 무례가 맞긴 했다. 마법사에게 마력이란 신상 정보와 같으니까.

하여간, 녹은 경계를 지우지 않은 채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떡여 의심을 종식시켰다. 녹의 긍정에 이네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아, 되게 반갑네요. 안 그래도 저도 정령에 관해 연구하고 있던지라. 여하간 그래서 가주님의 손님 격으로 온 거구나? 혹시 정령 수색가 지망생이신가요? 우리 가문에서 바깥에 혹시 모를 정령을 찾아 데리고 오는 직무도 있거든요. 물론, 제가 그걸 만든 이래로 수색대가 단 한 번이라도 정령을 데리고 오는 일은 없었지만….”

이네스는 자신의 우중충한 실적을 회고했다. 말을 잇는 목소리 끝을 흐리며 축 처졌으나, 그녀는 다시 기운을 냈다.

“어쨌건! 어떤 사연이 있는지 묻는 건 실례니까 묻지 않을게요. 이미 민수 씨에게 무례를 많이 저질러 버려서. 가주님과 당신이 어떤 사이인지는 차차 친해지면서 듣는 걸로 하죠.”

멋대로 결론을 내고 앉았다. 녹은, 이네스와 친해질 생각을 깨끗하게 증발시켰다. 적어도 도언의 정보를 얻으려면 살살 꼬셔서 그의 정보를 추출하여야 하긴 했지만, 한순간에 그러고 싶은 마음을 깨끗하게 살라 버린 그녀의 재능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녹은 이네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녹은 이네스가 무얼 말해도 도언을 방패 삼아 그녀 앞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에 낭패감 어린 이네스가 쓰게 웃었다. 결국 이네스는 사과를 위한 미끼를 녹에게 던졌다.

“역시 사과의 한마디로는 덮을 수 없던 무례였죠? 제가 생각해도 그렇긴 하네요. 허락하지도 않은 마력 측정이라니. 흠… 사과의 뜻으로 제 정체에 대해 알려 드릴게요. 저도 허락 없이 당신의 마력 측정을 했으니 저에 대해서도 알리는 게 공평하겠죠. 눈치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일반 마법사가 아니거든요. 아, 이 정보는 안가 사람들도 잘 모르는 건데. 특별히 민수 씨에게만 알려 드리는 거예요. 어때요. 제게 당신과 친해질 기회를 주시겠어요?”

뭔, 정체를 숨기는 건 안가 놈들의 특징인가? 이네스가 녹에게 사과의 뜻으로 내민 카드는 본인의 정체였다. 투덜거렸던 속마음과는 다르게 정체라는 그것이 이네스의 비밀이라면 이 거래는 할 만했다.

어차피 녹은 이네스를 창구로 도언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왜인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녹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이네스의 호감과 의무의 난이도는 반비례했다. 심지어 그녀가 녹에게 느끼는 부채감이 크면 클수록 편해지는 건 녹이었다. 여기서 괜히 자존심 가지고 뻗대면서 좋은 기회를 걷어찰 수는 없지.

녹은 이름 모를 잡초를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말로 대답을 하지 않은 건 녹이 마지막으로 지킨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결론을 그리 내려도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신상 정보 캐내려는 짓을 눈앞에서 보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지 않는가.

녹의 소극적인 자존심 방어에도 이네스는 그저 좋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얕게 웃고는 이곳에서 가장 크게 그려진 액자 앞에 뚜벅뚜벅 다가가 섰다. 액자의 유리 표면에 찬찬히 그림을 감상하는 이네스의 모습이 비쳤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이네스는 등을 돌려 녹과 눈을 맞췄다.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가늘게 늘어져 있었다. 홍채의 끝까지 다가선 동공은 고양이 눈과 같았다. 이네스의 귀걸이가 밝게 빛났다. 그녀가 지팡이 대신 마력의 제어구로 쓰는 귀걸이였다.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바람이 일어 녹의 머리를 흩트렸다.

도언이 앞으로 손을 뻗어 녹을 뒤로 물린 후 자신 또한 뒷걸음질 쳤다. 이네스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 꽤나 심각한 건가? 녹은 도언의 얼굴을 살폈으나, 방어적인 그의 몸짓과 다르게 표정은 평온했다.

살랑 일던 바람이 돌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곧,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리 강한 바람에도 액자들은 흔들리는 일 없이 딱딱하게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는 액자를 모두 본드로 붙여 두었나? 도언의 표정을 보고 안심한 녹이 실없이 생각했다.

하긴, 액자가 바람에 흔들린다면 이네스는 녹에게 다시 빚을 지게 되는 셈일 테다. 분명 떨어진 액자에 신체의 어딘가를 얻어맞았을 테니까.

손등을 이마에 대고 강한 풍랑을 막아 내려 노력했다. 꼿꼿이 서 있던 몸이 뒤로 서서히 밀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에 녹은 몸의 중심을 다리로 집중시켜 섰다. 그놈의 정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요란할 일인가!

홀로 바람에 맞서던 녹은 순간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 등 뒤로 단단하고 따뜻한 벽이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 버티는 녹을 받쳐 주었다. 덕분에 한결 편해졌다. 녹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은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거친 기세는 곧 잦아들었다. 눈이 건조해지는 기분에 꼭 감았던 눈을 떠낸 녹은 곧바로 이네스가 있던 자리를 주시했다. 얼마나 대단한 정체인지 한번 보자.

기대와 다르게 이네스가 서 있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두 개의 주먹을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황색 구슬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녹은 구슬로 다가섰다. 녹이 구슬로 손을 뻗은 순간, 첨예한 발톱이 나타나 구슬을 낚아챘다.

이네스가 강풍을 일으키기 전에 서서 바라보았던 그 그림은 뭐였지? 분명 이 공간에서 벽면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크나큰 그림이었다. 그건 분명 한 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날카로운 기백을 두 눈에 담은 동양의 용이었다. 액자의 유리면에 비친 이네스는 강풍을 일으키기 전, 고개를 들어 용의 얼굴을 바라봤었다.

그래, 그 그림에 그려져 있던 용의 눈 또한 저렇게 세로로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반짝이는 비늘과 머리 위로 솟아난 사슴뿔, 게다가 길게 솟은 메기수염까지 완벽하게 그림과 일치했다.

그림과 눈앞의 존재가 다른 점이라고는 색깔뿐이었다. 그림이 검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데에 반해, 녹의 앞에서 구슬을 낚아챈 저 존재는 노란색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잡으려던 큼직한 황색 구슬은 여의주였다는 것을, 녹은 그때야 제대로 알아챘다.

- 이 모습은 정말 몇 명 모르는 모습이에요. 이게 제 정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복도를 가득 메운 큼지막한 황룡에게서 어디선가 많이 들어 봤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분명 이네스의 목소리였다. 뒤에 도언이 단단히 받치고 서 있어서 녹은 차마 뒷걸음질을 하지 못했다. 녹은 자신의 뒤에 도언이 있는 김에 팔꿈치로 그를 쿡쿡 찌르며 제가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확인받았다.

“…용이야? 이네스, 용이었어?”

“그렇습니다. 세계수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던 용이라고 합니다.”

진짜 용이라니. 그것도 세계수가 살아 있을 적부터 살았던 용이라니. 하가에서 나고 자라며 세계수에 용이 둥지를 틀었는지도 몰랐던 녹이니만큼, 용 또한 녹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허나 녹의 모습을 이네스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이름 또한 모를 거라고 확신하는 건 오만이었다. 애초에 하녹은 하가의 유명 인사였다. 심지어 다른 가문원까지 녹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가능한 유의할 수 있는 건 조심하는 게 나았다. 그녀에게 자기소개 할 때 본명을 밝히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이네스의 가는 동공이 예리하게 빛났다. 고양이 눈이라고 생각했던 가는 동공은 파충류의 눈이었다. 녹은 일단은 그 눈에서 그녀가 사람이 아닌 존재란 걸 눈치채긴 했다. 이네스는 도언의 대답에 꿈꾸듯 당시를 회고했다.

- 가끔씩은 그때가 그리워요. 많은 정령이 제 둥지로 놀러 왔었거든요. 그들과 갖가지 주제로 토론을 하는 건 제 용생의 낙이었답니다.

이제야 이네스에게 품었던 의문이 하나씩 풀렸다. 그녀가 혈액 채취도 하지 않고 녹의 마력을 측정했던 거라든가, 지팡이를 쓰지 않고도 마법을 썼다거나, 동공이 가늘게 찢어진 이유 따위 말이다.

용은 드래곤 계열의 마생물이었다. 정령도, 마법사도 아닌 마생물. 오래 묵어 이지가 생긴 마생물들은 곧잘 그들만의 마법을 썼다. 정령이 기적을 쓰고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특정 도구를 이용해 힘을 썼고, 마법사들은 편의상 그들이 부리는 마법을 주술이라고 지칭했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성질이 약간 달랐기 때문이다.

이네스가 술의 도구로 쓰는 매개는 여의주였다. 인간 형태일 때, 그녀가 귀에 매달고 있던 황색의 귀걸이와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여의주의 성질이 매우 비슷했다. 그녀가 술을 부릴 때마다 귀걸이가 빛난 건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제 피를 분석하지 않고서 마력을 측정했던 것도….”

- 어머. 마법사도 아니시면서 마법사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맞아요. 마법보다 주술이 상대의 통찰에 더 뛰어나니까요. 굳이 까다롭게 혈액 채취까지 할 필요 없죠.

이네스는 기다란 몸체를 둥글게 말아 똬리를 틀었다. 그녀가 공간에 꽉 찼던 제 몸을 정리한 덕에, 눈 어디를 두어도 이네스의 몸이 있던 아까와 다르게 빈 곳이 간간이 보였다. 그녀의 푸른 뿔이 천장을 긁었다. 천장은 드르륵거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 아, 역시 이 몸은 움직이기 불편하네요. 잠시만요.

아까와 같은 강한 돌풍은 불지 않았지만, 이네스의 몸체에서 강력한 빛이 발산되었다. 도언의 손이 녹의 눈을 빛으로부터 가려 주었기 때문에 번쩍이는 섬광에 눈을 찡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빛이 사그라들자, 도언은 녹의 눈을 가리며 만들었던 차양을 거두어 내었다.

이네스는 참한 아가씨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용 그림이 기세 좋게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관찰하니, 그 그림은 아무래도 이네스의 자화상인 모양이었다.

“아하하! 저는 민수 씨가 놀라서 자빠질 줄 알았는데 그 정도 임팩트는 없었나 봐요. 역시 정령학자의 후손이어서 그런가? 마생물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가 봐요?”

어느새 이네스에게 녹은 정령학자의 후손이 되어 있었다.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녹은 세계수의 지식 전반을 흡수해, 이네스의 말대로 정령과 마생물에 대해 빠삭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마력이 감지되지 않아 후손 타이틀을 얻었나 보다.

그나저나 통찰이 높은 주술의 경계망에도 녹의 마력이 감지되지 않았다니. 심지어 이네스는 세계수가 살아 있을 적부터 산 고룡인 듯한데, 그런 마생물의 경계망에서 빠져나왔다라…. 녹은 자신의 목을 더듬으며 단단한 나무 고리의 감촉을 느꼈다.

‘대체 효과가 얼마나 강한 거야.’

변신을 마치고 나니 찌뿌둥한 듯 어깨를 주무르던 이네스가 물었다.

“저에 대해 더 궁금한 거 없어요?”

“이곳으로 우리를 데려온 이유는?”

차분한 목소리가 도언에게서 흘러나왔다. 도언의 물음에 용 아가씨는 잊었던 무언가가 퍼뜩 생각이 난다는 듯 손가락을 부딪쳤다.

“아, 맞아. 민수 씨랑 친해지기 위해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원래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자신의 관심사라든가, 애장품 따위를 보여 주며 나에 대해 알리는 게 효과적이잖아. 안 그래요, 민수 씨?”

젠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자발적인 아싸의 길을 걷는 녹은 누군가와 친해지는 법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녹이 했던 친목 활동 비스무리한 거라고 해 봤자 타로집 영업이 다였다. 단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하여 최소한의 가식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뒤집어쓴 게 전부였단 말이다.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녹은 그저 어색한 미소만을 흘렸다. 이네스는 그를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녹을 향해 싱긋 웃어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도언과 녹은 드디어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제가 지금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아무래도 정령이거든요. 생존에 있어 세계수의 영향을 정령보다 덜 받는 마생물이야, 서식지만 찾아내면 한 무더기에 수두룩이니까요. 그에 비해 정령이 쓰는 기적이라든가, 삶의 방식 따위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정령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얕은 흥분이 깔려 있었다. 정령을 향한 그녀의 관심은 연구에 대한 소명 의식이 된 듯했다. 확실히 정령에 관해 이야기를 했더니 용의 눈동자마저 숨기지 못했었지. 정령을 덕질하는 마생물이라니.

잭팟이다.

녹은 그녀에게 호감을 얻을 최상의 방법을 자신도 모르게 이행하고 있었다. 호감이 서릴수록 경계는 지워지고, 경계가 지워질수록 도언에 대한 고급 정보를 얻을 확률도 높아지겠지. 때문에 그녀의 완벽한 착각이긴 해도, 정령학자의 후손이란 신분은 잭팟이었다. 녹은 아주 대차게 잭팟을 터트려 버렸다.

“그런데 민수 씨가 정령학자의 후손이라니. 그쪽 입장에서 연구한 정령의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제가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정립한 이론과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정령은 참 좋지요. 지금도 정령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답니다.”

“정령이 흥미로운 존재긴 하죠.”

이네스가 마법사가 아님을 확인한 녹은 드디어 그녀 한정으로 꼭 다물었던 말문을 텄다. 그녀의 신분이 상대의 허락 없이 마력 측정을 한 무례한 마법사에서, 상대의 허락 없이 마력 측정을 한 무례한 마생물로 격상되었기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 차이는 굉장히 컸다.

녹이 정령에 관심을 보이자 이네스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그녀는 복도 끝에 달린 방문 앞에 다가섰다. 그녀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순간, 녹이 물었다.

“지금 이네스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는 뭔가요?”

이네스가 방문을 열었다. 방문 안에는 온갖 집기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빠르게 필기한 종이들은 벽면을 가득 채웠다. 칠판에는 엄지손톱처럼 빼곡한 글씨들로 가득 차서, 초록 바탕에 흰 글씨인지, 아니면 흰 바탕에 초록 글씨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늘어진 집기들은 세월감이 느껴졌다. 골동품이 아닌 게 없어 보였다. 문을 열기 전에 홀로 뚝딱거리며 돌아다니던 집기들은, 이네스가 방문을 열자마자 재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문 근처에서 서성였던 주전자는, 멀리 있는 제자리로 찾아가기까지 힘겨운 여정임을 깨닫고는 자리를 찾아가는 걸 포기하고 홀로 픽 하고 쓰러졌다.

도언과 녹은 이네스의 발아래 굴러다니는 주전자를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네스가 제 발밑에 있는 주전자를 잡아 안아 들며 해맑게 말했다.

“영물이요! 제가 지금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하고 있는 주제는 영물이에요!”

도언이 이네스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주님의 근심 어린 한숨에도 장로장은 타격이 없는지 죽은 척하는 주전자나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고 있을 따름이었다.

영물.

그것은 정령화된 사물을 칭하는 단어였다.

“제가 여기 있는 애들에게 몽땅 다 이름을 붙여 봤어요. 이 주전자 이름은 주리. 어때요?”

“…네. 예쁘네요….”

이네스는 주리를 주전자의 자리에다가 가져다 두었다. 집기들의 제 세상이었던 방이 마침내 규칙을 찾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방 안 벽이니 테이블이니,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연구와 필기의 흔적이 홍의 오두막을 연상시켰다.

‘그러고 보니 홍도 자신의 오두막에서 정령을 연구했었지.’

사한의 특징을 꼼꼼하게 그려 내던 홍이 떠올랐다. 하녹이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 홍이 연구했던 건 영물이 아닌, 세계수에서 태어난 정령 그 자체였다.

허나 홍은 도도를 탐냈었다. 어떤 기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었지. 그 시절, 영물은커녕 정령에 대한 연구도 깊게 진행되지 않았을 적인데, 하홍은 똘똘하게도 영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세계수의 지식을 흡수하고 돌이켜본 결과 하홍의 추측은 놀랍도록 정확히 들어맞았다.

‘정말 하가의 가주 그릇이긴 했지.’

이네스의 연구실을 둘러본 도언은 책상의 의자를 빼서 녹에게 손짓했다. 과거 회상에 젖었던 녹은 대수롭지 않게 의자에 가 앉았다. 도언 역시 녹의 옆에 자리해 앉았다. 그 모든 장면을 왠지 모르게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이네스 또한 의자를 빼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애지중지하는 게 너무 잘 보이네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건, 연구하려고 해도 관찰할 수 있는 넓은 스펙트럼이 없으니 연구에 큰 난항을 겪고 있어요. 얼마나 심각하면, 보세요. 이 집기들은 영물이 아니라 영물 흉내를 내도록 주술진을 건 애들이라니까요? 이대로 이름도 붙여 주고 감정도 좀 쏟으면 언젠가는 영물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요?”

“글쎄요. 영물은 세계수의 영향 아래에서 태어나지 않나요?”

“역시, 정령학자! 맞아요. 하지만 이 물건들은 세계수 소실 사건에서 발굴해 낸 것들이랍니다. 세계수의 마력을 쐰 지독한 골동품들이죠. 하가가 폭발하기 전에는 그래도 하가에서 정령에 관해 연구한 기초 자료가 쌓여 있었을 텐데. 뭐, 목숨이라도 건진 건 다행이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이네스는 녹의 두 손을 쥐었다. 그녀의 동공이 키가 커지고 날씬해지기 시작했다. 저리 불시에 용 눈이 될 때마다 적응을 못 하겠다.

“그래도 영물에 대해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꽤 되어요. 어디 보자, 인간화된 영물은 마지막 소유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죠. 물건에 감정을 쏟은 자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 보통 그 상대는 가장 마지막 소유주거든요. 다만 그 영향이란 것이 어디까지인지 아리송한 부분이 있네요.”

도언이 지루하다는 듯 턱을 손으로 받치고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네스의 말에 흥미가 없었다. 가볍게 하품까지 하는 걸 녹은 똑똑히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신나게 강의할 뿐이다.

“제가 아는 건 영물 소유주의 재능이나, 성격이나, 아니면 외모라거나. 어디 한구석은 필수로 소유주에게 물려받는다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부분이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서요. 성별 단 하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성격에 재능에 외모까지, 쌍둥이같이 똑 닮을 수도 있고요. 혹시 영물이 물려받은 것이 또 있을까요? 민수 씨는 아시는 게 있나요?”

“기억이요.”

“기억이요?”

“네. 소유주에게 물려받는 게 기억일 수도 있어요. 소유주의 기억이요. 혹은 영물이 사물일 때의 기억을 간직할 때도 있던 것 같군요.”

“우와. 그건 새로운 사실인걸요? 정보의 출처는요?”

“음… 저희 할아버지요. 예전에 영물을 보신 적이 있다고 하셔서….”

“할아버지께선 마법사셨나 봐요.”

“뭐, 그런 셈이죠.”

졸지에 할아버지가 된 녹이었다. 사실, 녹은 영물을 하가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마 홍과 하진이 하가에 오기 전의 일이었을 거다. 영물이 된 건 하가의 가솔이 아끼던 접시였다. 그 접시는 소유주와는 반대의 성별을 타고 났었는데, 하필 그 접시가 소유주의 이상형과 꼭 닮아 버렸지 뭔가.

곧장 가솔은 짐을 꾸리고 영물과 함께 살림을 차려 버렸다. 물론, 하가의 밖에서 말이다. 그 가솔이 하가의 심부름꾼 아이였기에 기억한다. 괜히 하가에 자신의 친구를 빼앗길까 봐 접시가 영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윗선에 보고도 없이 접시 하나만 챙겨서 슬쩍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영물은 분명 자신이 접시였을 때의 기억이 있었다. 보통 바깥에서 도깨비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대부분 영물이었다.

“재밌네요! 그런 것도 알고 계시다니 대단해요! 세계수가 사라져 버려서 정말로 안타까웠겠어요. 저도 땅을 치고 있었거든요. 왜 나는 세계수가 사라지기 전에 연구하지 못했지 하면서! 혹시 또 들으신 부분이 있나요?”

많다마다. 세계수가 세상을 평정할 때부터 세계수의 영향을 받은 것들은 모두 녹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었다. 이네스가 적절히 추임새를 넣으며 열정적인 청자가 되자, 녹 또한 흥이 올라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뱉기 시작했다.

“영물도 정령의 하나라 정령처럼 기적을 쓴다는 점이요? 물론 세계수가 없어져서 사라진 기적에 그들이 무엇을 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그전에 세계수가 사라지고 영물을 포함한 정령 전반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녹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계수가 사라지고 마력을 기반으로 운용하던 생명체의 수 또한 서서히 절벽을 이루며 사라져 갔다. 마생물이 가장 풍부하게 이어져 온 데는 이곳, 안가였지만 심지어 안가라고 하더라도 녹은 정령을 본 적은 없었다.

이네스의 설명을 들어 보니 정령은 안가에서도 보기 힘든 종류인 것 같았다. 그만큼 정령은 세계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생물이었다. 세계수가 사라지면 가장 먼저 멸종될 만했다.

녹은 정령이 모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네스의 열정을 보아하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딘가에 정령이 생존해 있다는 말일까?

이네스는 녹의 의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녹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녹의 손을 감싼 이네스의 온도가 따끈따끈했다. 학구열로 데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불타는 열정을 녹에게 쏟아 냈다.

“민수 씨. 부디 여기서 오래 계셔서 알고 계시는 영물에 대한 지식을 몽땅 다 전수해 주고 가셨으면 해요. 제가 보수는 빵빵하게 드릴게요.”

“보수요?”

“거기까지. 우리는 내일 갈 거야. 과한 요구 하지 말아.”

새삼 지루해 보이던 도언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도언은 에네스가 잡은 녹의 손을 가볍게 떼어 뒀다. 뜨거운 손에 덮여 있던 녹의 손이 서늘하게 식었다. 도언은 한껏 열이 오른 이네스에게 찬물을 제대로 부어 버렸다. 그의 제지에 차게 식은 이네스가 뾰로통해서 투덜거렸다.

“네가 잘 안 도와주니까 내가 이렇게 정보에 목마른 거 아니야. 이 시대에서 정령에 대해 연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렇게 어려우면 때려치워. 내가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어.”

“쳇.”

정령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도언의 힘이 필요한가? 그러나 이네스의 불평은 도언 앞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네스 또한 도언의 손님이라고 했던 녹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더 이상 늘어질 수 없었는지, 가볍게 물러났다.

“민수 씨. 영물에 대해 알고 계신 점을 알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다음에 또 안가에 오실 거라고 믿고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딱 보니까 피로가 턱 끝까지 내려오셨네요. 많이 피곤하셨죠? 토론할 기회는 내일도 있으니까요. 최대한 늦게 가시면 되죠. 저와 어울려 주셔서 감사했어요. 얼른 결계 단단하게 칠 테니까 편히 쉬세요.”

이네스의 일방적인 토론이 막을 내렸다. 확실히 녹은 피곤에 녹아내릴 지경이긴 했다. 이네스의 폭주를 적절히 끊어 준 도언에게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가도, 도언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못 들었는데 끊긴 대화에 괘씸한 마음도 들었다. 양가적인 마음이 복합된 하루였다.

뭐, 이네스의 말대로 내일도 있으니까.

❊ ❊ ❊

“……너가 왜 여기에 있어?”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밥도 먹고, 깨끗하게 씻은 후 진예가 안내해 준 방에 들어가니, 누군가가 침대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뒤로 언제나 녹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도언이었다. 분명 도언은 진예가 다른 방으로 안내해 준 것 같았는데?

“멀쩡한 네 방 두고서 왜 여기에 있냐고.”

“기억 안 나요? 여기서 자는 조건으로 제가 당신께 붙어 있으란 조건을 내건 것은 녹이었어요.”

‘정 불안하면 너가 계속 붙어 있으면 될 노릇 아니야.’

빵!

한계치로 부풀어 오른 풍선이 한 번에 터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의 이름은 충격이리라.

‘맞아, 내가 저 자식에게 그런 말을 했었구나!’

녹은 자신이 절대 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말을 기어코 내뱉은 과거의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이네스가 결계 얘기만 꺼내길 기다렸다면 도언이 넘어갔을 것을! 조급한 마음과 벌어진 주둥아리가 피해를 불렀다.

이래서야 오랜만에 도언과 다른 곳에서 잘 수 있단 기대가 처절하게 무너져 버렸다. 샤워할 때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녹은 두 손 가득 실망감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인 걸 뭐. 도언의 집에서 자는 게 아닌 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한다.

다행히 침대는 넓은 저택에 걸맞게 넓었고, 살살 피하면 도언과 한 번도 닿지 않고 잘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녹은 슬그머니 침대의 베개를 가장자리로 옮기고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녹이 하는 꼴을 우두커니 관조하던 도언이 돌연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 이네스의 집에서 자고 가고 싶지 않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유? 그냥 내가 도망칠까 봐 그런 거 아니었어?”

도언이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딱딱하게 굳은 도언의 표정이 목소리와 어우러져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심지어 방 안은 녹이 침대에 누운 뒤에 불을 꺼,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이곳에서는 집을 순찰하는 존재가 따로 있습니다. 처음 보는 존재가 집에 출몰하면 다가가서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고 합니다. 마생물의 일종입니다만, 과연 이네스가 녹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치를 까먹었다면 낭패겠군요. 저야 면식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끼이익… 끼이익…….

그때, 꼭 닫은 문 바깥에서 나무판자가 벌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누군가 바깥에 돌아다니고 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녹은 이곳 바닥이 나무가 아닌 대리석이란 걸 깨달았다. 점점 끼익거리는 소리가 크게, 그리고 빠르게 들려왔다.

끼이익… 끼익…… 끼익… 끼익끼익끼익끼익끽끽끽-

분위기에 압도된 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가오는 소리에 다급해진 녹은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 전에 그 끔찍한 일이란 건 뭐야? 저 마생물은 뭔데?”

도언은 자신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녹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그냥 저랑 친한 척하시면 괜찮을 겁니다.”

“어떻게 하란 거야. 대체.”

녹의 심장이 발딱발딱 뛰기 시작했다. 평소의 녹이었다면 이성을 찾고 현 상황의 원인과 해법까지 빠르게 계산을 끝냈겠으나, 도언이 내레이션처럼 깔며 뿌려 둔 으스스한 분위기로 인해 공포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받았다. 확실히 도언은 분위기를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공포 영화 속 가장 먼저 죽는 인물은 분명 주위 사람의 말을 더럽게 안 처먹어서 하지 말란 건 다 하고 다니는 천방지축 캐릭터가 아니던가. 녹은 어째서 이 순간 영화 속 첫 번째 피해자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도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되려나?

도언이 밑밥을 깔지만 않았다면 녹은 분명 머리맡에 있는 총을 쥐었을 것이다. 침착하게 문을 조준하고 있었겠지. 방 안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란 녹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야, 손쉽게 도언의 페이스에 휘말려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통이라면 진저리 치며 벗어날 만도 한데 말이다. 심지어, 소름 끼치는 나무판자 소리가 귀에 파고들수록 녹은 도언에게 파고들었다.

꼬물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모양새가 어미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아기 새 같았다. 도언은 힘주어 녹의 어깨를 당겼고, 녹은 도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친한 척해야 이 고난이 지나간다고 했으니까 이 정도면 된 건가?

그러나 지척에서 울리는 오싹한 소리는 녹이 도언의 허리를 끌어안거나 말거나 커질 뿐이었다.

끽끽끽끽끽끽끽끽-

“안 멈추네요? 덜 친해 보이나 봅니다.”

도언이 낮게 속삭였다. 친한 사이끼리 뭘 했더라? 위기의 순간 빛나는 녹의 머리는 그 순간 팽팽하게 돌아갔다. 친한 사람이라곤 하진이밖에 없었는데, 하진이랑은 뭐 하고 놀았지? 아니, 어떻게 해야 친해 보이는 거지?

“아니, 그러면 여기서 뭘 더 해야-”

차라리 이름을 부르면 되나? 공황에 빠진 녹은 더는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친했던 하진이와 했던 것처럼 검을 수련하거나 알밤을 까거나 밥을 나눠 먹을 수 없던 녹은 도언의 몸통을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진이를 불렀을 적을 생각해서 같은 어조로-

“도언아. 도언아. 도언아도언아도언아!”

녹은 도언의 이름을 가능한 다정하게 내뱉고 싶었으나, 나무판자 소리가 녹의 방문 앞에서 멈추자 되려 마음만 앞서 버렸다. 껴안은 도언의 몸통을 흔드는 힘이 강해졌다. 결국에 도언의 이름을 부르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목소리에는 긴박함만 남아 점진적으로 커졌다.

쿵-

방문의 아래쪽을 무언가가 부딪쳐 왔다. 누군가 발로 차는 모양새였다.

녹은 튀어 올라가려는 몸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녹의 신경은 온통 방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크게 뜨인 눈은 튀어 나갈 듯, 방문을 연 존재를 마중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도언이 녹의 허리를 붙잡고 그의 몸을 돌려 제 허리 위로 올렸다.

높아진 시야에 가까스로 방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숙여 도언과 눈을 맞추었다. 녹의 손이 자연히 도언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녹을 올려 도언의 목울대가 강풍에 파도 일 듯 한 번 크게 울렁거렸다. 밤바다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한 도언이 갈증이 인 듯한 목소리로 녹의 부름에 답했다.

“응. 불렀어?”

그대로 녹의 뒷목을 감싼 손이 도언의 얼굴 쪽으로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녹의 얼굴은 고도가 낮아지고 입술은 도언의 입술에 착지했다. 녹의 입장에서야 완벽한 불시착이었다.

❊ ❊ ❊

아무리 공포에 잠식되었다고 하더라도 도언을 떼어 낼 정신이 있는 녹은 그를 힘껏 밀어 냈다. 도언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러자, 방문 바깥에서 무언가가 더욱 격렬하게 부딪쳐 왔다.

쿵!!

덕분에 도언을 타박하려던 걸 잊은 녹이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했다.

“아니, 이 집안사람들은 저런 소리가 나는데도 왜 다 잘 자고 있어??”

“집 안이 워낙에 넓어야 말이죠. 아마 전혀 듣지 못할 겁니다.”

쿵, 쿵!!

“녹이 저와 떨어지니까 저게 화난 거 아닙니까. 문 부서져도 이제 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도언은 말없이 행동으로 보였다. 한쪽으로 모았던 녹의 다리 하나를 잡고서 제 몸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옮겼다. 녹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도언의 골반을 다리 사이에 낀 모양새가 되었다.

어정쩡한 모습에 도언이 얕게 웃음을 흘리더니, 그대로 녹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잠시간 떨어졌던 입술이 재회했다. 녹은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도언의 얼굴 옆 침대 헤드에 손을 대었다.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도언을 제 두 팔 안에 가뒀다.

도언을 신경 써서 밀어 내자니 바깥에서 방문을 부술 기세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문 바깥 상황에 정신을 집중하자니, 도언의 혀가 얽혀 들어온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다.

도언이 말했던 ‘친한 척’에 키스가 포함된 건지 아닌지 모르지만, 방문을 두드리는 무시무시한 쿵쿵 소리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소리가 계속될수록 녹은 자꾸만 몸을 잘게 떨었고, 도언은 녹의 허리를 잡았던 두 손을 올려 그의 두 귀를 막아 주었다.

순식간에 청각이 마비되었다. 녹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감각은 혀의 미뢰 하나하나에 집중되었다. 도언과의 키스는 언제나 강렬하게 치고 나가는 부분이 있었다. 뭉근한 그 감각에 오감이 집중되니 방문 바깥의 마생물 따위 신경에서 날아가 버렸다.

녹의 귀를 막으며 그의 고개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도언은 녹의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고, 자신의 고개 또한 왼쪽으로 비틀었다. 덕분에 접합부가 아까보다 단단히 결합하며 도언의 말랑이는 혀가 더욱 깊게 들어왔다.

목 안쪽을 가득 들어찬 뜨거운 살덩이는 녹의 안을 이리저리 유영하며 그의 입천장을 긁었다. 녹의 등이 미묘하게 튀어 올랐다. 그를 놓칠 도언이 아니었다. 도언은 계속해서 천장을 긁어 나갔고, 힘이 풀린 녹은 헤드에 대고 있던 팔을 풀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도언이 막았던 청각이 풀어지자, 물에 젖은 소리가 질척이게 귀를 잠식했다. 입안에 집중된 감각은 청각과 촉각, 둘로 나누어졌으나 결국은 두 감각 모두 행위를 극대화하는 데 쓰였다.

도언의 손이 녹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손은 녹의 허리를 쓸고 지나가, 녹의 날개 뼈에 안착했다. 도언이 허리를 쓸 때 녹의 허리가 길어졌고, 등을 쓸 때는 긴장으로 굳어지느라 등이 약간 말렸다.

도언은 녹이 굳을 때마다 입천장을 쓸어 주며 녹의 몸이 녹게 했다. 도언의 예상을 정확히 맞아 들어가서, 녹은 금세 불린 미역처럼 흐물흐물해졌다.

타고나길 자극에 민감한 녹은 아니었지만, 여러 해를 홀로 버티니 자연히 감각이 높아졌다. 게다가 언제나 생존 유지를 위해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던 녹의 신체는 그에 맞춰 진화해 서서히 예민해졌다.

게다가 거기에 언제나 녹을 섬세하게 주시하는 도언까지 합쳐지니, 한 번 결합할 때마다 녹의 정신이 날아가 버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고운 밀가루 같은 녹의 허리와 등을 쓸던 도언이 불시에 앞판으로 내려와 한쪽 꼭지를 건드렸다. 순간, 녹은 맞닿았던 입술을 떼어 냈다. 처졌던 등에 힘이 들어가더니 뻣뻣하게 굳었다. 짜릿한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힉!”

자신이 씻을 때 말고는 아무도 건든 적 없던 곳이었다. 아니, 물론 등이나 허리도 매한가지긴 하다만 그렇게 관능적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숨을 들이켠 녹은 그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등을 가능한 뒤로 밀어 내었다.

재밌는 점은, 도언의 목을 둘렀던 팔은 풀지 않았단 점이다. 팔의 존재를 잊은 것 같았다. 덕분에 도언의 손길에서 빠져나가려 해도 움직일 수 있는 가동 범위가 한정된 상황에서 도망은 무리였다. 가소롭지도 않은 물러남에 도언은 그의 등을 눌러 자신에게로 가까이 데리고 왔다.

도언은 고개를 앞으로 빼 녹의 입술을 다시 훔쳤다. 감각에 이성이 질식된 녹은 순조롭게 입을 벌려 그를 환영했다. 도언은 그의 등을 눌러 자신과 밀착시킨 그대로, 남은 손으로 꼿꼿이 선 그의 가슴을 건들기 시작했다.

“…읍!”

녹의 콧속으로 강한 바람이 두 번에 걸쳐 들어갔다. 녹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도언이 서 있는 그의 꼭지를 살살 긁자 저릿한 감각이 꼬리뼈부터 위로 차올랐다. 녹은 고갯짓을 하며 그를 말렸으나, 단단히 얽힌 도언의 혀는 녹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떠나지 않는 녹에, 도언의 행동이 더욱 대담해졌다. 도언은 엄지로 뭉근히 포인트를 누르다가 은근슬쩍 돌렸다. 그에 녹은, 뒤로 빼려 노력하던 가슴을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지금 상황을 깨달았다.

‘지금 뭐 하고 있던 거지?’

엉덩이 밑에는 이미 딱딱하고 긴 무언가가 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중심 또한 다를 바가 없긴 하였으나, 녹은 가까스로 그를 무시하는 데에 성공했다. 녹은 일단 도언의 목에 본드 칠한 듯 붙어서 안 떨어졌던 팔부터 떼어 냈다.

그 뒤로 해제는 쉬웠다. 힘이 좀 빠지긴 하였으나, 녹이 진심으로 떨어지려고 하자 도언은 별말 없이 떠나는 녹을 놓아 주었다. 녹은 재빨리 도언에게서 내려왔다. 도언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많이 친해 보이긴 했나 봅니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녹은 이 일의 시발점이 된 마생물이 방문을 부술 듯 차는 소리가 어느새 사라졌단 걸 깨달았다. 도언과 혀가 얽히는 게 점점 자연스러워져서 큰일이다. 게다가 전부터 이상하게 시나브로 진도가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위기감을 느낀 녹은 이마를 짚고 긴 한숨을 뽑아냈다.

❊ ❊ ❊

“…해서, 해사에게 무술이라도 가르치면 혹시 모를 위험 상황에 더 빠르게 대처….”

방문 바깥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깔려 들려왔다. 분명 방문은 닫힌 것 같은데, 사방이 너무 고요하여 민감한 녹의 귀에는 바깥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녹은 자신이 베고 있는 것이 푹신한 베개가 아님을 깨달았다. 고개를 미약하게 돌려보니, 딱딱하고 온도감 있는 무언가가 베개 대신 뒤통수를 받치는 게 느껴졌다. 체온과 이불로 데워진 공기가 훈훈하게 주변을 감쌌다.

따뜻하고 포근한 향기는 이 잠에서 일어나기 싫게 하는 데 한몫했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그 무언가는 안온한 느낌을 주는 데에 일조했다. 편안함에 젖은 녹은 덕분에 깼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간 더 누워 있었다. 모든 요소가 녹의 아침잠을 길게 늘였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 한 장로님.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그러니까….”

따뜻한 아침의 불청객은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이네스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청이 서서히 높아졌다. 분명 방문보다 멀리 있는 공간에서 통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가까이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네스의 말소리는 포근한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편안함에 금을 냈다.

결국 눈썹을 찡그리고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깃털 같은 눈꺼풀 하나 들어 올리는 것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 힘들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넓은 가슴팍이었다. 녹이 느리게 눈만을 깜빡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고 있는 옷의 목선을 넘어 목젖, 그리고 날카로운 턱선까지 차례대로 보였다.

남자는 한쪽 팔을 녹에게 내어 준 채로 무언가를 손으로 붙잡고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녹은 그제야 자신이 베개 대신 쓰고 있는 것이 도언의 팔뚝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불편하더라! 조금 전까지 포근한 기분이 마음에 들어 기상을 미뤘던 녹은, 순식간에 그 감상을 지우개로 지워 버렸다.

녹이 손으로 바닥을 밀며 일어났다. 녹의 눌린 뒤통수에 까치가 제대로 집을 짓고 떠났다. 잠에서 깰 때마다 항상 도언의 반대쪽을 보고 일어났던 녹은, 눈뜨자마자 보이는 이 광경에 적잖이 놀랐다. 자신이 도언과 마주 보고 자고 있었다니.

“…충격이다.”

“뭐가요?”

도언은 애초에 깨어 있던 건지, 목소리에는 졸음 하나 묻어 나오지 않았다. 도언 또한 녹을 따라 일어났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했는지 비몽사몽 한 녹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뭐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벼운 웃음을 지은 도언은 녹이 제대로 잠에서 깨기 전에 재빠르게 그의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잘 잤어요?”

가벼운 자극이 온 이마를 녹이 반사적으로 매만졌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상태여서 녹은 도언의 기습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저 이마를 멍하니 둥글게 문지를 뿐이었다. 사실 녹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도언과 마주 잤다는 사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저 사실에 빠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 쓰바.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너 거기에 다리 박고 딱 기다려.”

음산한 외침이 방 바깥에서 들렸다. 명실상부 이네스의 목소리였다. 통화가 무언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펄럭이는 소리를 내며 바깥에 있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기어코 한 장로와 현피를 뜨러 간 모양이었다.

이네스의 시원한 외침은 남았던 녹의 졸음을 몰아내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가 개듯 녹의 정신이 서서히 또렷해져 갔다.

“방금 이네스가 대가리 박고 딱 기다리라고 했어?”

“아니요. 다리라고 했습니다. 여하간 오늘 한 장로가 고생 좀 하겠군요.”

아무래도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어투가 딱 그 모양새였는데. 틀려서 아쉽진 않았지만, 뭐, 깨워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녹은 주변을 돌아보며 시계를 찾았다. 시계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아침의 경계였다.

삐걱거리며 무거운 몸을 기지개를 켜 풀어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은 녹의 몸은, 더한 수면으로 피로 해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잠만 퍼질러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녹은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생긴 여유 한 조각에 도언을 돌아보았다. 항상 상의 탈의를 하고 자던 도언은 오늘만큼은 팔목까지 내려오는 긴팔을 입고 있었다. 남의 집이라고 옷을 입고 잔다니.

‘예의를 아는 놈이었군.’

어차피 방문을 닫고 있는데 예의 따져서 뭐 하나 싶었지만, 녹은 고개까지 끄떡이며 만족해 했다. 만일 도언이 평소처럼 벗고 자고 있었다면, 아침에 일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게 이놈의 맨가슴이었을 거 아니야.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나 이네스한테 아직 들을 거 있는데. 이네스는 그럼 한 장로라는 사람 만나러 간 거야?”

“정황상요?”

“그럼 언제 오는데?”

“글쎄요. 한 장로랑 한판 다 하고 나면 오지 않을까요?”

그게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는 소리다. 더 늦기 전에 들을 거 듣고 가야 하는데. 안가의 장로장 용 아가씨는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장로를 갈구러 가셨단다. 누가 이기든 얼른 끝내고 이네스가 집에 오게 해 주세요. 녹은 속으로 하늘에게 부탁했다.

“일어나셨으면 아침 드시러 나오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앳된 음성이 활기차게 들렸다. 아무래도 도언과 말소리가 샌 것 같았다. 대체 이곳 방음은 얼마나 취약한 거야. 녹은 고개를 저으며 방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는 머리를 기술적이게도 화려하게 하나로 땋은 진예가 방긋 웃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빠.”

“진예도 잘 잤어?”

“그럼요! 앗, 가주님도 여기 계셨네요! 아침 드시러 나오세요!”

진예의 인사에 도언이 한 손을 흔들며 아이에게 응답했다. 은은하게 띠고 있는 미소는 진심이었다. 가만 보면 도언도 진예에게 약한 것 같다. 진예를 인질로 고리를 풀라고 협박해 볼까?

언뜻 못된 생각이 든 녹이었지만 당연히 실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녹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에 자책하며 진예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도언이 성큼성큼 따라갔다. 인간 기차의 목적지는 아침밥이었다.

녹은 별생각 없이 진예를 따라가다가 이상한 점이 떠올라 물었다.

“오늘 학교 안 가니?”

아침에 시계를 보니 분명 9시를 넘긴 시간이었는데. 요새 초등학생들은 9시 넘어서 등교하나?

“아이참,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아, 토요일은 학교 안 가?”

“대체 언제 적 얘기하시는 거예요?”

진예가 껄껄거리며 물었다. 진예는 아홉 살이라고 했다. 분명 녹이 은둔을 끝마치고 내려왔을 적에 초등학교 아이들은 토요일에도 색색의 책가방을 메고 등교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세상이 변했나 보다.

녹이 진예를 따라 멋쩍게 웃었다. 진예는 이후에도 살갑게 녹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그나저나 밤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녹은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이네스가 오면 물을 질문이었지만, 아이라고 해서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도언이 말했던 마생물이 밤새 저택을 돌아다니는 거냐. 끼익 거리는 소리 때문에 어제 큰일 치렀다.

녹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얼굴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불현듯 치민 짜증의 원인을 째려보니 뻔뻔한 도언은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게, 어제 밤새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쟤가 자기랑 친한 척해야… 엄….”

여기까지 가다 말고 녹은 말을 멈췄다. 아이에게 어디까지 얘기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도언과 녹이 다른 방에서 밤을 보냈다고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침 인사에서 도언보고 여기에 있었냐고 물은 거 보면 말 다 했지 뭐.

진예는 방글거리는 얼굴로 녹의 말을 차분히 기다릴 따름이었다. 결국 녹은 이르려다 말고 주제의 방향을 선회했다.

“밤새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거짓말. 녹은 제 품에서 되게 잘 잤어요.”

도언이 재빠르게 다가와 녹에게 속삭였다. 참을 수 없던 녹은 발을 들어 도언의 발을 콱 밟았다. 도언은 반사적으로 발을 빼려다가 말고 그냥 밟혀 주었다. 덕분에 녹의 발은 딱딱한 대리석과 부딪혀 찌르르 울릴 일이 없었다. 잘근잘근 더 눌러 주려는데 진예가 기함했다.

“세상에! 민수 오빠! 무슨 짓이에요!”

“아, 미안. 발을 헛디뎌서.”

“두 번 헛디디다간 누구 한 명 발등 나가겠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할게.”

아픔 하나 느껴지지 않는 도언의 일상적인 말소리에 녹 또한 별 탈 없이 발을 거두었다. 녹의 주변에 둘러진 수상한 기류에 진예만 안절부절못했다. 녹은 분위기를 바꿔서 진예에게 이어 물었다.

“여하간, 그거 마생물이야? 누가 그렇다고 말해 줘서.”

“밤새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요?”

도언의 표정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진예가 되물었다. 녹이 가볍게 끄떡이자, 진예는 눈을 위로 뜨며 기억을 되새겼다.

“음… 밤새 이네스가 결계까지 쳐서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없는데. 아무리 마생물이라고 하더라도 이네스의 허락 없이는 못 들어오거든요.”

그때, 간밤에 들은 것과 같은 끼익 거리는 소리가 복도방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아침이기도 하고, 도언이 분위기를 깔아 두지도 않아서 녹은 어젯밤보다 이성의 회복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녹은 반색하며 외쳤다.

“그래, 이 소리야!”

“아하.”

진예가 무언가 깨달은 듯 다리를 접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무언가를 불러냈다.

“룬! 나 여기에 있어!”

끼익 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밤새 녹을 떨게 한 소리를 두르고 복도를 꺾고서 나타난 것은, 머리에 뿔이 달린 대형견만 한 생물이었다. 사자를 닮았으나 동글동글한 비늘이 덮여 있고, 소량의 깃털까지 제 몸에 인 특이한 생물은, 입에 문제의 나무판자를 물고 있었다.

“저건… 해치잖아.”

밤새 녹을 공포에 떨게 한 주원인은 마생물의 일종인 해치였다. 줄곧 아이에게 룬이라고 불리던 해치는, 진예를 발견하자마자 물고 있던 나무판자를 뱉고 진예에게 달려왔다. 눈물겨운 상봉이 따로 없었다. 진예가 해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하하. 룬은 가끔씩 어디선가 주운 거에 꽂혀서 집에 물고 들어와요. 흥미가 떨어지기 전까지 물고 안 놔두는 희한한 버릇이 있는 애예요. 어젯밤 사람들이 몽땅 들어가서 자 버리니,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반응해서 돌아다녔던 거 같아요.”

“그럼 저 녀석, 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보면 끔찍한 일을 저질러? 그래서 그 낯선 자가 저 해치가 아는 사람이랑 필사적으로 친한 척하면 봐주고?”

“네?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나쁜 사람이라면 아는 사람이랑 친하든 아니든 냅다 뿔로 받아 버려요.”

결국 어젯밤은 도언의 개수작이었다. 녹은 다시 한번 뒤꿈치를 살려 도언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오빠!!”

이네스의 집 안에는 진예의 비명만이 울렸다.

❊ ❊ ❊

“청연.”

아침나절 내 보이지 않던 청연이 도언의 한 마디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연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집에 방이 이렇게 많은데 잠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잔 모양이다. 아니라면 진예가 아침 먹으라고 함께 불렀겠지.

“좋은 아침이에요. 모두.”

밥을 다 먹고 식기를 세척기에 스스로 넣은 진예는, 청연이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가서 달라붙었다. 밥 먹는 내내 녹의 발치에서 녹을 향해 비비고 난리 났던 해치는 청연이 나타나자마자 그를 향해 쌩하니 달려갔다. 뒤에서 덮쳐 오는 아이의 무게와 함께, 해치 또한 청연의 발밑으로 슬라이딩하며 그를 반겼다.

“청연!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웡웡웡웡웡웡!

해치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붕붕 흔들어 댔다. 하여간에 그들에게 인기가 많아 보였다. 확실히 액자에 출현 빈도가 높은 만큼, 그들과 친밀도 또한 높은 모양이다.

위아래로 무해한 존재들이 부딪혀 오는 통에 청연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제 봤을 때 진예는 청연에게 까칠하게 구는 것 같았는데, 인제 보니 그냥 편해서 편한 대로 내뱉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에 의해 흔들리는 몸을 가까스로 멈춘 청연이 그냥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버렸다. 비슷해진 눈높이에 아이들은 더 신이 났는지 전보다 치댔지만 중심이 밑에 있으려니 청연은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청연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해치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며 진정시켰다.

“오늘은 룬도 있네. 그래. 반가워, 반가워. 그래서 가주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애들 데리고 나가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나 먹이고 와.”

도언이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주며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진예가 곧 등 뒤에서 청연의 목을 감싸던 손을 풀고서 만세를 불렀다.

“야호!! 가주님 최고!! 이네스가 그런 건 잘 안 사 준단 말이에요. 다른 것도 먹어도 돼요?”

“그래.”

아이들의 속박에서 풀려난 청연이 가까스로 도언에게 카드를 받았다. 청연은 멀뚱히 제 손에 쥐인 카드를 보다가 진예 한 번, 룬 한 번, 그리고 녹을 한 번 보았다. 청연이 남은 한 손으로 턱을 쥐고 진지한 낯을 하며 물었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애들’에 민수 씨도 포함된 겁니까?”

“내가 애냐?”

아이스크림은 무슨.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일 텐데. 애들의 후보에 자신이 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던 녹은 발끈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언에게서 그럴듯한 대답이 흐르지 않았다. 녹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언을 돌아봤다.

“…….”

도언이 분연한 기색의 녹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녹은 거기서 정말로 도언이 말한 애들 범위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야 녹이 함께 갈 수도 있다고 하니 좋아하긴 했다.

“오빠도 같이 가는 거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소개해 드릴게요!”

해치는 말없이 녹의 무릎에 얼굴을 비벼 댔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집에 있어야 이네스를 기다릴 수 있는데, 괜히 나갔다가 엇갈리면 안 된다. 녹이 손사래를 치며 의지를 피력했다.

“아니, 아니. 나는 안 나갈 거야. 셋이서 맛있는 거 먹고 와.”

“그렇다 하시는군.”

드디어 도언이 입을 열었다. 진짜 도언이 말한 ‘애들’에 자신도 껴 있던 걸까? 그때, 녹은 도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는 걸 보았다. 자신이 발끈한 모습을 보고 그가 또 장난쳤다는 걸 그때야 깨달은 녹이었다.

“너….”

“자, 얼른 가서 놀다 와. 우리가 집 보고 있을 테니.”

“넵! 안가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오겠습니다!”

“꺄!! 너무 좋아요!!”

월월월!

따지려던 말문을 도언이 낚아채 막아 버렸다. 타이밍을 놓친 녹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룬만 노려봤다. 쟤는 해치면서 왜 개 짖는 소리를 내는 걸까. 녹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했다.

인사를 한 후, 그들이 집 안을 떠나는 건 빨랐다. 이네스가 아침에 밤새 쳐 두었던 결계를 해제했는지 그들은 무리 없이 집 바깥으로 넘어갔다. 드디어 집 안에는 둘만 남았다. 시끄러움의 허리케인이 동네로 떠나 버리자 정적이 크게 들렸다.

그 조용함을 잠시간 즐기던 도언이 입을 뗐다.

“드디어 둘만 있게 되었군요. 어제는 이네스 아니면 진예가 있어서 딱히 그녀에 대해 무어라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설명이 필요해? 어차피 어제 진예가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는 거 알아서 하라던 쪽은 너였잖아.”

만일 그들을 대하는 데 주의할 점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녹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을 거다. 그놈의 ‘위험합니다’가 또 나왔겠지. 이제는 겪지 않아도 알겠다.

“그야 진예네 집에 이네스가 없을 줄 알고서 그런 거죠. 잠깐 들렀다가 바로 빠져나오려고 했었습니다만, 거기서 딱 이네스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단 녹이 가명을 쓰셔서 한시름 놓긴 했습니다.”

이야기하던 도언이 부엌으로 가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더니, 자연스럽게 커피가 담긴 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커피머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도언은 일련의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또한 이곳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 보였다.

도언이 내민 커피는 라떼였다. 그들은 커피를 가지고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어젯밤에 녹의 방에 들어간 것도 사실 그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하려고 간 거였습니다만.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말씀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이번엔 어디 맞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하하하. 죄송합니다.”

녹은 도언의 발을 한 번 더 밟을까 고민하며 식탁 밑에 눈을 두었다. 표적을 찾는 녹의 눈길이 매섭다. 도언은 발을 슬쩍 뒤로 뺐다. 살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발을 보고 녹이 눈을 올려 도언의 얼굴을 응시했다. 빙글거리는 게 평온해 보인다.

‘내 참. 봐줬다.’

“여하간 그래서, 너가 하고 싶은 말은 뭔데?”

“어제 이네스의 연구실에 가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이네스는 정령에 미쳐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포인트를 찔러 오는 도언의 말은 희한한 부분이 있었다. 어제 그녀의 연구실을 둘러봤다고 하더라도 그냥 ‘덕질 좀 한다’ 정도의 감상이었지 도언이 저렇게 진지하게 ‘미쳐 있다’는 단어를 쓸 정도는 아니던데.

녹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도언이 덧붙였다.

“보셨던 것보다 훨씬 더요. 허나 세계수가 사라진 이래로 정령의 모습은 멸절하다시피 되었습니다. 정령의 원천이 세계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녀가 녹이 씨앗임을 알게 된다면?”

잠시 생긴 대화의 공백에 녹은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그의 목이 크게 꿀렁거렸다.

“…이네스가 나 많이 싫어할까? 결과적으로는 나 때문에 정령들이 사라진 걸 텐데.”

“정확히 말하면 아예 멸종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게다가 싫어하다니. 그 반대죠. 이네스가 녹에게 좋다고 달라붙어 아주 귀찮게 할 겁니다.”

“어째서?”

자신의 추측과 전혀 다를 거라는 도언의 예상에 녹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자신이 이네스라면 자신이 애정하는 존재를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멸종 위기로 몰고 간 인물을 찢어 죽이지 못해 아쉬울 거 같은데.

“마른 줄만 알았던 바다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를 마다할 어부는 없겠죠. 이네스가 생각하기에 말라 가는 바다는 녹의 탓이 아닌 필연이었을 겁니다. 결국 그 또한 세계수의 뜻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이네스는 처음부터 정령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계수가 사라지고 난 후, 정령의 개체 수가 희박해지면서 급격한 관심을 가졌던 거였죠. 당시에 정령들은 꽤 많았으니까요.”

도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녹의 커피와 다르게 그가 마시는 건 순수한 블랙이었다. 도언의 커피 취향을 볼 때마다 녹은 이해할 수 없었다. 녹이 블랙을 마시는 경우라곤 커피에 이것저것 타는 게 귀찮았을 때가 유일했다.

“게다가 이네스는 세계수에 대한 의무감보다는 자신의 흥미에 따라 사는 마생물입니다. 잔정도 많아 어쩔 때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일 때도 있죠. 마법사에 의해 피해받은 아이를 후원하기도 하고… 여하간 그녀는 그때가 사고임을 인식하고 있어요. 아, 귀찮게 해서 녹을 죽이려 들 수는 있겠군요. 세계수의 마력과 정령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 악물고 알아내려 할 테니 말입니다.”

도언의 말을 들어 보면 이네스의 스위치는 정령이었다. 확실히, 어제 정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이 용인 걸 눈에서부터 드러냈었다. 그때는 그냥 열정이 많은 학자인갑다- 했었는데, 도언이 이렇게 진지하게 경고할 정도인 걸 보면 이네스의 정령 사랑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녹은 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계수가 사라지며 줄어든 개체는 정령뿐만 아니었다. 정령, 그다음은 마생물, 그 후에는 마법사 순으로 그 수를 줄여 나갔다. 모든 건 마력을 생산해 내는 세계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생물의 정점에 랭크된 용이라고 할지라도 그 여파를 피해 가긴 힘들었을 거다. 세계수가 사라진 이래로 몇백 년이 지났다. 세월이 지났으니 그녀의 힘도 줄어들었을진대, 이네스는 당당히 안가의 장로장에 이름을 올렸다. 그 정도로 강하단 건데.

어떻게?

게다가 안가는 마력을 지닌 동식물이 넘쳐났었지. 세계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번영했는지 알 수 없다. 다른 마법사 가문은 모두 쇠퇴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들이 마력의 존재에 한해 예민해지고 난폭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그 이전에 그들이 순하고 덤덤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걔네는 원래 태생부터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었다.

얼마 보진 않았지만, 겉으로 봤을 때 안가는 그런 쓸모없는 의식이 전무한 듯 보였다. 만일 안가의 마법사들이 선민의식으로 가득했더라면, 마생물이 장로장이 될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고, 수인 또한 이곳에서 볼 수 없었을 거다.

물론 이네스가 자신이 용인 사실을 몇 모른다고 했으니, 안가의 마법사들이 그녀의 정체를 모를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거다.

차라리 마력이 봉인당하기 전이라면 안가의 마력의 흐름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까막눈이니, 원.

녹이 그를 물어보려 입을 열 때였다.

“나왔다! 얘들아!”

이네스가 양손 가득 아이스크림이 꽉꽉 들어찬 봉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뭐야. 애들은 어디 있어?”

주위를 둘러보는 이네스는 한참이 지나도 아이들이 마중 나오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이네스의 양손에 들린 봉지엔 터질 것처럼 많은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녹은 아이스크림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봉지에 얹어진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분명 이네스는 아이스크림 잘 안 사 준다고 했었는데….”

“진예가 그랬어요?”

이네스는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 두며 물었다. 녹은 고개를 끄떡였다.

“아, 아이들은 청연이 데리고 아이스크림 사 주러 나갔어요. 진예랑, 룬이랑 함께요. 군것질할 수 있다고 되게 좋아하던데.”

“내 참.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많이 사 오는데도 부족했나? 하루에 두 개 이상 먹지 말라고 하긴 하거든요? 그게 불만인가? 애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여하간 아이스크림 드실 분 계세요? 하나씩 드세요.”

녹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언은 대꾸도 없었다. 둘의 반응을 확인한 이네스가 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쓸어 넣기 위해 냉동고 문을 열었다. 이네스는 녹의 까치집에 잠시 시선을 두더니 그에 대해 언급했다.

“어제 그리 모자로 가리신 건 얼굴이 아니라 까치의 보금자리였나 봐요? 하하하.”

녹은 자신의 뒤통수를 만지작댔다. 아, 얼른 들어가서 씻어야지 원. 부끄러워하는 녹을 귀엽게 바라본 이네스가 말을 던졌다.

“확실히 가릴 만한 얼굴이신걸요. 그만한 얼굴은 혹시 모르니 안가에 돌아다니실 땐 항상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시는 게 좋겠어요. 길을 잃은 자 중에는 아직도 바깥 마법사일 때의 까마귀 습성을 몽땅 버리지 못한 사람도 있거든요. 저희야 여기 식대로 교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귀찮은 일은 미리미리 예방하는 게 낫죠.”

“도언은 그냥 돌아다니던걸요.”

“가주님이야 뭐, 길 잃은 자들이 안가에 오자마자 가장 첫 번째로 교육받는 것이 가주님 얼굴인데요. 살겠다고 안가에 들어와 놓고 수장에게 혼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얼굴 알려 주면 알아서 사려요.”

각종 식자재로 빵빵한 냉동고 한구석에 아이스크림을 밀어 넣는 이네스를 관찰하던 도언이 물었다.

“그래서, 한 장로와 담판은?”

“당연히 내가 이겼지. 하, 당연한 결과 아니야? 한 장로도 자기가 뻗대는 상대가 누군지 몰랐나 봐. 누가 누굴 이겨? 2백 년은 부족하지. 애송이가.”

이네스가 신랄하게 대답했다. 냉동고의 비어 있는 구석을 찾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하나하나 아이스크림을 끼워 넣는 이네스와 날이 선 채 노기를 표하던 이네스의 목소리는 갭이 컸다. 아침에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더니, 결론적으로 이네스의 마음에 꼭 드는 결론을 받았나 보다.

한 장로라면 어제 꾼을 처리할 때 있던 그 할아버지인 듯한데, 그를 애송이라고 지칭하는 걸 보면 이네스보다는 어린 모양이었다. 이네스는 지금 20대 중반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어제와 다르게 자연스럽게 머리를 푸니, 새삼 대학생같이 풋풋해 보였다. 나이와 역행하는 외모라니. 이네스의 마력이 얼마나 큰 건지 가늠이 안 됐다.

“아무리 마력 감지력이 뛰어난들 꾼이 나타나 봤자 응용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는 햇병아리 마법사들뿐이잖아. 그런 해사에게 무술 좀 가르쳐 보겠다는데 왜 말려? 말리긴. 권해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야.”

“한 장로가 왜 말렸는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는 게 이유지, 뭐. 그 사람에게 부탁하느니 차라리 업무량을 두 배로 늘려서 꾼을 박멸해 버리겠다나? 하, 스승 될 인간이 안가에 하나밖에 없다니. 안가 주민들 너무 평화로운 거 아니야? 이거 회의 안건에 넣어야겠어.”

드디어 아이스크림을 몽땅 다 집어넣은 이네스가 냉동고 문을 가능한 꾹꾹 눌러 닫았다. 꽉 차 있는 내부를 감당하지 못한 냉동고는 몇 초 뒤에 퉤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뱉으며 열렸다. 이네스는 튀어나온 아이스크림을 잡았다.

“아, 큰 녀석들은 귀찮아서 술진 새기는 걸 미뤘는데 이렇게 되네. 날 잡아서 작업해야겠다.”

이네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튀어나온 아이스크림의 봉지를 터프하게 까며 중얼거렸다. 봉지가 까진 아이스크림은 이네스의 입속으로 와일드하게 들어갔다. 이네스가 발로 툭 차자 아이스크림 하나를 게워 낸 냉동고는 무리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네스는 아이스크림을 씹으며 도언에게 말했다.

“여하간 그렇게 되었다. 한 장로가 너한테 까이기 싫다고 해서 내가 대신 말해 준다고 했어. 가주님이 해사들 무술 가르치는 데 고생 좀 해라.”

“나 바빠.”

“알지. 너 바쁜 거.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별수 있나. 민수 씨. 좀 도와주시겠어요?”

“네? 뭘요?”

“다 들으셨으면서. 해사들 무술 스승이요.”

“그게 뭐요?”

“민수 씨가 좀 맡아 주시면 안 돼요?”

“저요? 제가요?”

“네. 민수 씨가요.”

녹이 이네스의 말을 뇌의 연산 과정에 집어넣어 의미를 도출하는 것보다야 도언의 반응이 빨랐다. 도언은 커피잔을 식탁에 탁 하고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왜 또 헛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머. 가주님. 말이 안 되는 건 이 세상에 없다면서요.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서 태세 전환이 빠르네요?”

“오늘 안가에서 나갈 거야. 해사들 봐 줄 시간 없어.”

“어차피 또 올 거잖아. 안 그래? 매일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하면 되는걸.”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눈빛으로 인해 허공에서 스파크가 이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감전될 지경이군. 녹은 저 없이 이루어지는 자신에 대한 논의에 끼어들어야 할 타이밍임을 깨달았다.

녹은 손바닥을 슬그머니 위로 들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저 무술 못하는데요.”

녹의 의견은 타당했다. 검을 가지고 날고 기는 도언이라면 모를까. 녹은 가끔씩 총질이나 할 줄 알지, 무술과는 거리가 있는 청년이었다. 차라리 마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고리 좀 해제해 달라고 해 줘라. 우울함이 담긴 생각을 삼켰다.

이네스는 도언을 노려보던 표정을 풀고 녹에게 유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적어도 해사들보다야 낫겠지요. 걔네들은 진짜 종이 인형이라니까요? 경험도 하나 없고요. 그에 비해 민수 씨는 적어도 사격이라도 잘하시잖아요. 꾼을 처리할 때 그 날카로운 사격 실력. 거기다 안정적인 판단 능력까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애들한테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는걸요.”

그 사격이랄 것도 도언에게 배운 건데…. 비장의 변론이 소용없어지자, 녹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네스의 마음속에서 녹은 이미 해사들의 스승으로 낙점된 것 같았다. 연무장에서 뚱땅거리지만 않으면 다행일 텐데, 참으로 대단한 안목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바쁘시다면 달에 두 번도 괜찮아요. 물론 공짜로 해 달라고 안 할게요. 무술에 자신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애들 데려다 놓고 운동장이나 뺑뺑이 시키세요. 걔네는 체력도 문제니까요. 그동안 민수 씨는 그늘이나 실내에서 쉬고 계시고요. 어때요. 어려울 거 없죠?”

“어지간히 해. 그렇게 쉬운 거면 너가 하면 되잖아.”

“너만 바쁜 줄 아니? 바깥일 때문에 잘 안 돌아오시는 잘난 가주님 덕분에 업무가 배로 늘어난 건 나거든? 진예랑 놀아 준 게 언젠지도 기억 안 나.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니? 심지어 오늘은 휴일인데, 아침나절부터 동료랑 한판 하러 갔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근로 복지에 불평을 쏘아붙이는 이네스의 기세에 도언의 눈썹이 꿈틀댔다. 오, 잠시지만 말문이 막혔다. 저런 장면은 희귀한데. 가주를 말로 패는 이네스가 대단해 보였다. 도언은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럴 거면 주민을 시켜. 가문원들 뒀다 뭐 해.”

그 말에 입을 다물어 버린 이네스가 도연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녹에게 물었다.

“보수는 충분히 드릴게요. 물론 민수 씨가 바쁘시다면야 제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한 달에 두 번도 짬이 안 날 정도로 바쁘신가요?”

“그건 아니지만….”

달에 두 번은 무슨, 녹은 하루하루가 한가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르칠 정도의 실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부담에 거절하려고 할 때, 한 줄기 섬광이 녹의 머리를 스쳤다.

‘잠깐. 이거 승낙하면 적어도 달에 두 번이라도 안도언 집에서 나올 수 있는 건가?’

물론 결정권은 전적으로 도언에게 있으나 해 볼 만한 도박이었다. 뭐, 안 된다고 하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 게다가 청연과 다르게 도언에게 대드는 장로장님도 계시니, 이만한 아군이 없었다. 한번 출사표를 던져 봐?

집에서 주기적으로 나올 기회는 드물었다. 녹의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어렸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네요.”

“그렇죠? 그렇죠??”

“거기다가 어려울 거 없이 학생들 굴리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데.”

“맞아요! 제 말이 그거라니까요? 무술이란 더 안전한 업무 처리와 공고한 안가를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곳에서 해사들의 눈치 보지 않고 그들을 굴릴 수 있는 인간들은 영 찾기가 힘들어요. 안가에 살며 해사의 도움 없이는 이리 평화로운 곳에서 살 수 없단 걸 가문원들이 너무 잘 알거든요. 진심으로 훈련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힘이 빠진단 말이에요. 밖에만 나다니는 가주님이야 잘 모르시겠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카운터 공격이었다. 그러나 발등을 찍혀도 앓는 소리 내지 않았던 것처럼 도언은 말로 맞아도 별 타격 없어 보였다. 딱히 하는 것 없이 체력이나 봐 주면 된다는 소리에 녹의 마음이 활짝 열렸다. 하가에 있을 시절, 하진이에게 구른 만큼 굴리면 되는 거 아닌가.

심지어 하가의 일상을 겪은 꿈을 꾼 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구르는 루틴까지 몽땅 다 기억난다. 그건 고스란히 이네스가 제시한 업무의 난이도가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정말 나쁜 게 하나도 없었다. 녹은 굳은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할게요.”

“와!! 감사합니다! 한시름 놨어요!”

이네스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나무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며 만세를 외쳤다. 저리 좋아할 정도로 무술 스승이 시급했던 걸까? 살다 살다 무술 스승 제안까지 받아 보고.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물론 녹은 자신이 승낙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녹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언의 반응을 살폈으나 그는 멀찍이 서서 팔짱을 끼고 녹과 이네스를 관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네스의 의견을 하나하나 묵살하던 도언은 어느새부터인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본인이 이룩하는 데 공들인 안가를 업그레이드해 준다는데 나쁠 게 있나? 녹은 자신의 희망을 가슴에 새기며 도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도언의 입가에 아스라이 걸린 미소를 발견했다.

‘어라? 기분이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네?’

가벼운 미소를 담은 도언이 입을 열었다.

“어림없는 소리.”

초승달처럼 휘어진 도언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는 그 미소만큼이나 찬란치 못했다. 차게 냉각된 목소리만이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도언의 미소에서 혹시 모를 기대 한 점을 품은 녹이었다. 가졌던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자, 녹은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울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안가에 와서 안도언에 대해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 녹은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안도언에 대해 이야기해 줄 외부인을 만날 기회는 언제 또다시 올지 몰랐다. 이네스는 이곳에서 도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몇 안 되는 인물, 아니, 용 같았다.

저런 용이 자신의 의견과 합치가 될 때 얼른 협상을 끝마쳐야 했다. 그래서 도언에게 어떻게든 다시 여기로 데려다 주리란 확신을 받아 내야만 했다. 그래, 이네스가 옆에 있는 이상 아직 드러누울 때는 아니다. 이성을 챙긴 녹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따졌다.

“왜? 왜 안 되는데?”

“해사와 엮이는 것 자체가 위험해요.”

“해사가 왜 위험한데? 이네스 말 들어 보면 그냥 체력이나 키우게 해 주는 것 같은데. 현장 나갈 일도 없어 보이고.”

“맞아. 내가 마법사도 아닌 민수 씨를 현장에다가 내보내겠어? 민수 씨는 그냥 애들이 진짜 몸을 움직이는지 아닌지 감독만 해 주면 된다니까? 어려울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없고. 안가에 출퇴근하는 게 어려우면, 민수 씨. 그냥 여기서 사세요. 여기 좋은 곳이에요.”

이네스가 제 말에 동조하며 날개를 달아 주자 녹은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기 하나 없이 산속에서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 뒤에서 자신을 구하려고 천군만마가 몰려오면 이런 기분일까?

이런 것 가지고 이리 쉽게 감동하다니. 하여간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만 하는 도언의 집에서 너무 오래 칩거한 모양이었다. 물론 녹은 마력 없이 이곳에서 살 생각이 없었다. 까딱 잘못해서 정체 탄로 나면 어떻게 하라고. 안가 사람들을 믿기 힘든 건 뒤로하고, 지금 제 마력을 쥐고 있는 도언의 손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잘 아는 녹이었다.

이네스의 동의에 탄력을 받은 녹이 그녀 몰래 도언에게 속삭였다.

“야, 나도 숨 좀 쉬고 살자. 집에만 있으려니 쓸데없는 생각에 수몰될 지경인데. 너도 나 데리고 나온 거 내 기분 환기시키려고 그랬던 거였잖아. 집에만 있다가 내가 다시 땅만 파고 있으면 어떻게 할래?”

세계수의 꿈에서 하진이를 보내 주고 제대로 땅을 파 본 적이 없는 녹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도언에게 먹힐 만한 논지를 펴려니 자연히 자신의 감정이 들먹여졌다.

사실 별생각 없이 건네본 거였다만 방금 했던 말이 자신의 미래를 먹어 버린 느낌이 든 녹이다. 원래 감이 좋은 자가 별 뜻 없이 하는 말이 곧 예지다. 아무리 마력의 도움을 받고 점사를 풀었다고 하더라도, 타로집 짬만 거진 20년을 넘게 먹은 녹에게 감이란, 눈치와 별개로 이미 몸속에 체화된 능력이었다.

녹의 속삭임을 제대로 들은 도언이었지만 그럴듯한 대꾸가 없었다. 녹 또한 이런 식의 설득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상태를 인질로 협박이라. 심지어 이곳에 데리고 온 당사자에게.

어느새 표정이 없어졌던 도언의 눈썹이 녹의 속삭임을 듣고는 꿈틀거렸다. 곧이어 작게 침음을 흘렸다. 뭔가 반응이 있다. 먹혔나? 이게 정답인가? 홈런인가?

이네스와 녹의 이목이 도언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머뭇거리던 입이 달싹이며 열리는 그 순간…….

“다녀왔습니다!! 와! 이네스 왔네?”

“어휴. 오늘따라 밖에 사람이 많더라고요? 진예 때문에 아이스크림만 한가득 샀네. 요새 아이스크림 왜 이렇게 비싸요? 진예가 비싼 걸 고른 건…가?”

두 손 가득 아이스크림이 담긴 장바구니를 든 청연과 진예, 그리고 룬이 현관문을 열고 귀가했다. 청연이 언제 가져간 건지 알뜰하게 챙긴 두 개의 장바구니 위에 재주 좋게 쌓인 통 아이스크림이 인상적이었다. 청연은 곧장 아이스크림을 냉동고에 넣으려 부엌으로 향하려다 도언 주변에 둘린 분위기를 읽고 행동을 멈췄다.

그러나 그 은근한 긴장을 민감하게 읽지 못한 진예는 발랄하게 이네스에게 인사했고, 룬은 거대한 머리로 집에 있던 사람들의 다리를 모두 한 번씩 치대며 반겼다. 제 인사를 어색한 웃음으로 받은 이네스의 표정에 진예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예와 청연의 등장에 분위기가 풀어지긴 했으나, 녹과 이네스는 여전히 도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뭐야? 지금 가주님이랑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업무 얘기야? 나 룬이랑 방으로 들어갈까?”

그때, 무언가 요란히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히 부엌에서 들렸다. 원인은 아이스크림을 얼른 냉장고에 집어넣고 이 상황에서 몸을 피하려고 했던 청연이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송연한 기운에 도언의 카드로 산 사냥감을 빠르게 정리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네스가 한가득 사 온 아이스크림이 냉동고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 온 걸 냉동고에 몽땅 쑤셔 넣으려다가 이네스가 사 온 아이스크림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참사를 이루어 냈다.

“아하하… 무슨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많담…….”

분명 진예가 자기네 집에 아이스크림 없다고 했었는데….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에 청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중얼거리는 혼잣말의 볼륨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신속하게 품속에서 지팡이를 꺼내 냉장고를 정리하는 그를 끝으로 청연에게 시선을 거둔 이네스가 답했다.

“아니, 여기 있어도 돼. 우리 어려운 얘기 하고 있는 건 아니었어. 그냥 민수 씨의 업무에 대해 조율을 하고 있었지.”

“조율은 무슨. 이분은 그런 일 안 하신다.”

도언은 이네스의 말을 칼같이 자르며 선을 그었다. 결국 도언은 녹이 해사에 관한 일을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도언의 집에 아무 수확 없이 가는 것일까. 다급해진 녹이 드러누울 각오를 하고 물었다.

“그럼 나 이곳에 오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야?”

여기는 도언의 정보에 관한 노다지였다. 놓치면 손해가 컸다. 도언은 녹의 황급함에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이거 다시 못 오는 게 맞다는 건가? 결론지은 녹은 기어이 드러눕기 위하여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려 했다. 하려는 행동이 생떼에 가까울지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녹의 순서를 선수 친 사람이 있었다.

“어머, 진예야!”

아홉 살짜리 아이가 어느새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녹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이네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의 보호자인 이네스가 허둥지둥 진예의 옆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니, 얘가 안 하던 짓을 손님들 앞에서 하네. 얼른 일어나. 가주님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이네스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땀처럼 뻘뻘 흘렀다. 진예는 그녀의 만류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 꿈쩍 않았다. 룬은 컹컹 짖으며 그런 아이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혼돈 그 자체였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리고 페이스가 저쪽으로 넘어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돌발 행동을 벌이던 진예의 입에서 드디어 농성의 이유가 흘러나왔다.

“민수 오빠 다시 온다고 얘기 듣기 전까지 안 일어날 거야.”

“얘가…! 민수 씨가 다시 못 오긴 왜 못 와. 가주님이 데리고 온 사람이면 또 올 수 있겠지!”

“몰라 몰라! 그러면 오빠가 저런 말을 왜 했겠어! 가주님!! 다시 안 데리고 올 것 같으면 저를 지르밟고 가세요!!”

진예가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도도도 뛰어 자리를 옮긴 후, 신발장 앞 냉바닥에 다시 드러누웠다. 어디서 저런 장면을 보고 들은 건지 애가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진예를 따라간 룬이 진예 옆구리에 자리를 잡고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아이 하나와 짐승 하나가 일으키는 깜찍한 시위에-물론 룬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긴 했다.- 모든 어른이 그들을 황망히 바라봤다.

아이는 상황을 빨리 읽었다. 그런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무기는 아쉽게도 생떼였다. 이렇게까지 떼를 쓴 적 없는 진예는 녹의 안가 귀환을 위해 한 몸 희생했다. 어른들에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사지로 땅을 격하게 치기까지 했다. 룬이 슬금슬금 진예와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이네스가 아이에게 붙어서 달래느라 정신없었다. 치열한 양육의 현장이었다. 이네스에게 미안하지만 녹은 진예를 응원했다. 잘한다, 진예야. 더 해, 더!! 녹은 진예의 열렬한 변호를 몸소 느끼며 도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진예가 저렇게까지 하잖아. 진짜 진예 밟고 나갈 거 아니면 빨리 애 좀 달래 봐. 곧 울겠네.”

“…대체 언제 진예에게 저만큼의 존재가 되신 겁니까.”

“낸들 아나. 너 보고 배웠나 보지. 그래도 진예가 냅다 가둬 버리는 너보다는 낫다. 애한테 좀 배워라.”

진예가 자기 대신 흥분해 준 덕분에 침착해진 녹이 도언에게 대꾸했다. 승기를 잡았다 생각했는지 은은히 기쁨이 새어 나오는 녹을 물끄러미 응시한 도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볍게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드러누운 진예에게 다가가 바닥에 주저앉고선 아이를 달랬다.

“다음에도 또 함께 올 테니까, 이만 일어나.”

“앗싸!!!”

환호성은 진예가 아닌 녹에게서 터져 나왔다. 녹의 요란법석을 끝으로 진예가 드러누운 게 언제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아이의 얼굴에 깃들었던 심통은 사르르 녹아든 지 오래였다. 진예가 일어나자, 이네스 역시 마음을 놓고 도언에게 물었다.

“그러면 민수 씨에게 해사 무술 스승 맡기는 거지?”

“아니. 다음에 또 찾아오긴 하겠지만 그건 안 돼.”

“…….”

해사를 보는 업무에 한해선 양보 없는 도언이었다. 끝까지 늘어질 줄 알았던 이네스는 다음을 기약하는 듯 가타부타 없이 물러났다. 수습된 난리에 다시 불을 붙이긴 싫은가 보다. 다만 깔끔하게 포기한 표정은 아니었다. 이 난장판으로 인해 도언과 이네스는 한 발짝씩 양보했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자는 진예와 하녹뿐이었다. 싱글벙글한 둘을 구경하던 도언이 앉았던 몸을 일으키곤 작별을 고했다.

“다들 만족하셨으면 이제 갑시다. 우리 이만 간다.”

“그래. 다음에 또 오기나 하고.”

“꼭이에요! 민수 오빠랑 꼭 같이 놀러 오세요! 적어도 한 달 안에!”

진예가 야무지게 기간까지 정했다. 도언은 고고히 침묵하며 진예의 머리나 두드려 줄 뿐이었다.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녹 또한 그 분위기에 떠날 준비를 하다가 문득 도언에 대해 아무것도 캐지 못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이네스가 도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고 했었는데! 급해진 녹은 이네스에게 불시에 물었다.

“잠깐, 잠깐. 쟤랑 어떻게 만나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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