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영물과 정령의 서
“가주님과 처음 만났을 때요? 아, 확실히 제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죠. 가주님의 과거를 알려 드린다고. 도언이 자기에 대해 말을 줄이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민수 씨도 궁금해하실 것 같긴 했는데…. 그렇게나 궁금하셨어요?”
이네스가 쾌활하게 묻는다. 당연하지! 그 정보 하나하나가 모여 마력을 되찾는 열쇠가 될 것이 뻔한데! 그러나 이네스에게 모든 사정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없던 녹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이네스가 눈을 굴려 녹의 옆에 있는 도언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이야기가 오가도 도언은 평온할 뿐이었다. 도언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이네스는 그것을, 과거의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어디 보자… 도언과 제가 처음 만난 건… 그러니까, 세계수가 폭발하며 하가가 터졌을 때 근처였겠네요. 제가 그 당시 하늘에 놀러 갔다 와서 참사를 피할 수 있었거든요. 하강해 보니 집이 통째로 없어져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이네스가 눈을 감고 과거를 더듬으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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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새에 터를 두고 살던 집을 잃은 이네스는 그저 허탈했다. 이네스가 몇백 년간 살았던 보금자리였는데, 순식간에 집도 절도 없게 되었다. 심지어 이네스가 살던 곳은 그냥 나무도 아닌 세계수였다. 운석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꼿꼿이 서서 종말을 지켜볼 마지막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그곳에 둥지를 튼 것이었는데….
물론 목숨을 건진 건 천만다행이었다. 하늘에서 하가 바깥의 인세 구경을 취미로 삼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땅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허허벌판이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사방이 세계수의 마력으로 가득 찼지만 세계수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고, 인간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마생물들도, 심지어 정령까지 찾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 몸을 녹여 참사를 피한 몇몇 정령들 증언으로 지금까지 어찌 된 이유인지 들어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하해운의 아들이 이 꼴을 만들어 냈다고?”
- 응. 그, 데려온 자식 말고 친자식 말이야.
“친자식이 있기는 했어? 난 애가 없어서 바깥에서 자식을 데려온 줄로만 알았는데. 자기들이랑 비슷해 보이는 애로다가.”
- 친자식의 마력이 전무하여 가주 내외가 데려온 아이가 하홍이었지. 그동안 친자식은 방치되었고.
폭사가 일어난 당시, 땅 깊숙한 곳을 헤엄치고 있었기에 참사를 피한 두더지 정령이 이네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세계수에 살면서 하가의 소식과 담쌓고 지내 온 이네스와 달리, 두더지는 하가 정령들의 마당발이었다.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이네스가 그를 만난 건 행운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마력 하나 없었다고? 마력이 하나 없는 아이가 어떻게…….”
이네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널따란 평지가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었다. 한계가 없을 것처럼 자랐던 세계수는 나뭇가지, 뿌리, 나뭇잎 등,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었고, 세계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숲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폭발로 인해 사라진 건 세계수 근처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수가 친 결계 안쪽 모두가 허허벌판이 되었다. 하가도, 그리고 하 고을도 모두 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동안 이네스가 있었던 하늘은 결계의 바깥이었기에 알아채지 못한 폭발이었다.
- 세계수 님께서 미래를 예지하고 원체 힘의 그릇으로 정해 두었던 분이었으니. 원래는 힘의 승계를 조심스럽게 이루어 냈어야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틀어져서 과격하게 힘의 전이가 진행된 것 같아.
“이게 그 결과고?”
- 그렇지. 여하간 세계수 님께서 사라지셨으니 나를 포함한 모든 정령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게 되겠군.
세계수의 지배하에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던 정령들이었다. 이네스는 생에 시간이 흐르게 되었단 사실을 덤덤히 고하는 정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덤덤함을 넘어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마치 새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았다.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이 기뻐 보이네?”
두더지가 이네스의 의아한 물음에 뾰족한 코로 제 앞의 흙을 밀어 대며 낭랑하게 답했다.
- 그렇게 보였어? 우리로서는 고장이 난 시계가 돌아가는 느낌이니까. 원래 모든 존재는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는 것 아니겠어. 지금까지 우리는 끝도 없었지만 시작도 없었어. 태어나고, 자식을 낳고, 죽음도 경험하는 마생물과는 다르지.
“그러면 여기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아이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거야? 지금 보니까 정령도 몇 보이지 않는 게 이 참사로 많이들 소멸한 것 같은데.”
- 모든 건 세계수 님의 뜻이었어. 게다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계수 님께서 선택하신 그분을 지지할 수밖에 없지. 어찌 원망할 수 있겠어. 그 안쓰럽고 사랑스러운 분을. 물론 마지막을 준비하지 못하고 가 버린 친구들은 안타깝지만, 모두 살 만큼 살았고. 원체 본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으니 호상이 아니면 뭐겠어. 하하하.
어이없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호탕하게 웃는 두더지를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이네스는 저들을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세계수가 있든 없든 필멸의 운명을 지닌 마생물과, 세계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명에 제한이 없는 정령 사이의 사상 간극이었다.
- 게다가 우리야 세계수 님의 지배하에 윤회가 허용된 몸이니까. 힘만 옮겨졌다 뿐이지, 그 힘만 있다면 언제든 세계수 님께서는 다시 태어나실 수 있잖아? 우리는 그저 그때까지 잠드는 것뿐이야. 물론 그릇께서 세계수 님께 받은 마력을 어찌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잠은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네스는 그제야 죽음에 대한 정령의 태도를 미세하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 세계수가 다시 나타난다면 정령들이 함께 깨어난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 참사로 피해를 받은 쪽은 하 고을 안의 마법사와 인간, 그리고 세계수 근처에 살았던 마생물 정도였겠군.
- 아마 용 님도 그분을 보시면 호감이 갈걸. 물론 집이 날아간 건 유감을 표한다만.
“내가? 그 아이를 보고 호감을 가진다고? 내가 왜?”
- 그래도 마생물이잖아. 우리보다는 영향을 덜 받지만 세계수의 영향을 받는 생물 중 하나고. 세계수의 지배하에 있던 생물은 자연히 그분께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물론 용 님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두더지의 추측은 확실했다. 자존심 강한 이네스가 그의 예측을 인정할 리 없었다. 얼굴도 못 본 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니,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세계수에 둥지를 틀어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세계수가 좋아서 그곳에 산 게 아니었다. 그냥 살아갈 환경이 좋다 보니 그곳에 산 것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자신은 쉽게 누군가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노을빛의 두더지는 땅 위로 머리를 들이밀며 소식을 이었다.
- 이리 휑해 보여도 마력이 없는 이들은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다. 마력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그때, 이곳에서의 기억을 지우고 결계 바깥으로 다량의 사람을 내보내는 세계수 님의 마력이 느껴졌거든. 마법사들은 쏙 빼고 말이야. 아마 하녹 님의 본능적인 마법이 아니었을까.
하녹이라. 이네스는 그제야 그의 이름을 들어 볼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인간들을 골라서 결계 바깥으로 보내는 게 가능해? 가장 강하다는 하가의 가주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
- 나도 경탄을 금치 못했다. 힘을 어찌 그리 섬세히 쓰시던지. 그 당시의 우연이 겹쳐 만든 기적일 수도 있겠으나, 일단 그분께서 만들어 낸 마법인 것만은 확실해. 거대한 힘을 조율할 재능이 있는 건 확실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분께서도 세계수 님께서 짜신 계획의 희생자일 텐데, 앞으로 간악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어찌 살아 나가실는지….
두더지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참, 이 근방을 이렇게 만들어 버릴 정도면 어지간히 정신없었을 텐데 그 순간에도 인간들의 기억까지 지우고 바깥으로 보내다니. 세계수의 마력을 기막히게 포착하는 정령의 말이니 아마 진실일 거다.
마력이 없는 상태에서 제일의 마력을 몸에 받았으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사용한 마법이 꽤 정교하다. 괜히 세계수가 선택한 아이는 아니란 건가. 이네스는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두더지에게 한 마디 건넸다.
“그럼 그 하녹은 어디로 갔는데?”
- 그건 나도 잘… 일단은 세계수 님께서 이 세상에 없는 건 확실하니 귀천하진 않으셨을걸. 마력을 노리는 마법사들에게 몸을 잘 숨겨야 할 텐데. 그래도 그분이 선택하신 분이니 오래도록 살아남으시긴 하겠지.
신처럼 받들어지는 그 나무가 선택한 아이라. 누군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인생 한번 기구할 팔자겠구만. 하해운의 아이라면 핏덩어리일 텐데.
자신의 집을 날린 아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드는 건 연민이었다. 이네스는 하녹에 대한 생각을 짧게 끝내고선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고마운 두더지에게 물었다.
“세계수도 이렇게 되었고. 이제 어디로 갈 거야?”
- 돌아다녀 봐야지. 세계수님이 없더라도 바깥에는 마법사들이 아직 많으니까. 식신이 많을 터이니 먹을 건 많아. 남은 시간 느긋하게 쓸 생각이야. 용 님은 어디로 갈 테냐? 결과적으로 세계의 마력이 줄어드니 좋은 상황은 아닐 텐데.
이네스 또한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며 두더지의 계획에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다.
“나도 돌아다녀 볼까. 하늘에서 관찰한 인세와 실제로 겪는 인세는 다를 테니까. 이참에 움직여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풍족한 환경에 엉덩이가 자연히 무거워져 세계수의 영역 밖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이네스는, 집이 사라지고 나서야 빛나는 여의주를 품고 하가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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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겪는 인세는 의외로 즐거운 곳이었다. 특히, 마법사들의 동태를 구경하는 게 제일이었다. 은근한 압박을 주며 마법 사회에 아찔한 균형을 잡아 주던 하가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자, 불문율의 규칙 또한 자연히 기화했다. 사라진 관습에 찾아온 것은 당연히 혼돈이었다.
마법사들은 제 동족을 죽고 죽이며 마력을 갈취해 나갔다. 마력 앞에서는 윤리 따위 장식품일 따름이다. 이네스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으로 멀찍이서 그들의 피 튀기는 전쟁을 구경했다. 원래 가장 재미있는 구경은 싸움 구경이라 했다. 이네스는 하릴없이 구경하던 도중에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
세계수 폭발 후, 마법사들은 초기 마력 확보를 위하여 인간들에게 관심을 끊고 그들만의 무대에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저 멀리서 있는 마법사 셋은, 마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 아이를 습격하려는 동태를 보였다.
‘아이가 마법사 같지는 않은데.’
이네스는 그들이 하는 꼴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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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노리는 아이가 바로 도언이었어요.”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이네스가 꿈꾸듯 읊조렸다. 회상하는 이네스는 아스라한 미소를 담고 눈을 감았다. 추억 회상이 즐거운 모양이다. 녹은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고, 습격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며 지을 수 있는 표정이 맞는지 의심했다.
녹의 사유를 읽은 것인지, 한순간에 미소를 지운 이네스가 도언을 똑바로 바라보며 딱딱하게 내뱉었다.
“그때는 참 귀여웠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귀염성 하나 없게 큰지 모르겠다니까요. 그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고 누가 알아보겠어요.”
이네스의 눈초리에도 도언은 타격 하나 받지 않고, 그저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을 뿐이다. 녹의 의자를 끌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본 이네스는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뱉고서는 자신도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녀가 주문을 중얼거리자, 이네스의 귀걸이가 빛나고, 부엌에서 따끈한 커피가 날아왔다. 쟁반에 담긴 커피잔은 정확히 세 잔이었다. 청연도 그러더니 이네스 역시 마력 생각 안 하고 마법을 펑펑 쓴다. 마생물 또한 마력을 연료로 주술을 부리는 게 맞을 텐데.
이네스가 커피를 녹과 도언에게 한 잔씩 돌린 후, 컵에 담긴 한 모금을 마셨다. 녹은, 손을 녹이려 커피잔을 잡았고, 도언은 커피잔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도언의 이야기만 골라 말한 그녀는 이어 회상했다.
“그때 그에게 마력 하나 느껴지지 않았었거든요. 당시 마법사들은 마력 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인간을 건들지 않았어요. 건드려 봤자 말 잘 듣는 인형을 만드는 용도지, 목숨을 노릴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쓰지 않았죠. 마력 낭비밖에 더 되겠어요? 그렇기에 그들이 기를 쓰고 인형을 만들면 모를까, 도언을 죽이려고 마법사가 셋이나 달려드는 것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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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는 그 셋이 어찌 나올지 숨죽이고 구경했다. 마법사들에게 마법이란 곧 권력이었다. 권력을 맛본 인간들이 인륜을 저버리는 건 쉬웠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에게 그런 점은 특히나 두드러졌다.
마법사들은 자신의 힘을 증대하는 일을 최고의 업으로 삼았고,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당연히 그러한 점이 돋보였다. 한마디로, 굳이 마력 하나 없는 아이를 오락으로라도 잡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걸까.
말쑥한 옷차림의 아이는 마법사들이 자신을 향해 기척을 죽이고 다가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가 골목길을 돌며 이네스의 시야 안에서 사라지자, 마법사 셋은 아이를 쫓아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들의 몸에 둘린 살기를 보면 아이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죽은 목숨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담벼락 위로 식신들이 바다처럼 쏟아져 나올 때 알아챘다. 저 정도 폭발적인 양의 식신이라면 마법사의 목숨 세 개쯤은 갈아 내어야 한다. 게다가 모든 식신에게 느껴지는 마력 또한 일치하지 않았다. 각자 개성 있는 세 개의 마력이 골고루 담겨 있었다. 적어도 세 명에 의해 만들어진 식신들이다. 아이를 쫓던 마법사의 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심지어 쏟아지는 식신의 양상 또한 희한했다. 엄청난 물량의 식신이 하늘로 넓게 퍼지는가 싶더니, 한 지점을 향해 일시에 달려들며 사라졌다. 마치 블랙홀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
이네스는 어찌 된 영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 거리에는 식신이 되어 소멸한 마법사들의 의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이와 함께 사방에 마력을 풍기던 그 수많은 식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네스는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거처를 찾은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아이는 푸른 기와를 고래처럼 지붕에 얹은 저택의 외동아들인 양 보였다. 이 일대를 지날 때 저 집의 땅을 밟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던 소문의 거부 집안이었다. 인심 또한 얼마나 후한지 근방에 배를 주린 사람이 없었고, 동냥하는 백성이 없었다.
“저 집안이 우리 마을을 살렸지. 덕분에 우리 마을은 몇 년 가뭄으로 난리인 바깥과는 사정이 좀 다르다우.”
“저런 집에서 아이가 안 생긴다고 들었을 때는 하늘도 무심하다 생각했는데, 저리 큰 친아들이 있을 줄은 몰랐지. 왜 대감댁은 그런 얘기를 그동안 한 번도 안 하고, 아이를 꼭꼭 숨기며 기른 건지 모르겠어.”
“글쎄다. 어디 바깥에서 데리고 온 아이일 수도 있지. 대감네 부부와는 다르게 미모가 출중하지 않은가. 어디 닮은 점이 있어야지. 아들 표정도 부모와 다르게 온종일 축 처진 것이 뭔 초상났나 싶었네.”
“떽. 은혜를 입은 사람이 그런 뒷말을 하면 못써. 그나저나, 처자는 어디서 온 겐가? 저 집에는 무슨 볼일이 있고?”
수소문을 해 보니, 마을 사람들 또한 진심으로 저 대감 집을 존경하는 듯했다. 십몇 년간 아이가 없는 줄 알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가 희한하긴 했으나, 대감 집에서 아들이라 소개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부모 자신들과 닮지 않은 아이를 십몇 년간 숨기고 길렀다니. 수상한 내가 솔솔 풍겼다.
인망 두텁고 다복한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보였으나 아이의 얼굴엔 언제나 표정이 없었다. 집 밖에 나가도, 집 안에 있어도, 그 어떤 일을 하건 아이는 지나치게 따분하고 또 지루해 보였다. 누가 보면 억지로 그 집 안에 묶어 놓은 모양새였다.
그의 부모처럼 보이는 이들은 언제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는데, 그의 아들로 보이는 녀석은 매 순간 우중충이니, 그 대비가 자못 인상적이었다. 이네스가 용의 모습으로 구름에 몸을 숨기고 아이를 관찰하길 며칠째, 구름 속에서 헤엄치고 있던 수달 정령과 부딪히는 일이 발생했다.
- 아야. 조심 좀 합시다? 거 구름 전세 냈소?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큰 용일지라도 기죽는 법 없이 까칠하게 나온 수달이 이네스에게 따졌다. 가만히만 있었는데 뭐라고 하다니. 세상 예민한 수달과 말씨름하는 것도 귀찮아진 이네스는 선심 쓰듯 사과를 던졌다.
- 죄송합니다.
- 다음부터 조심하소. 허, 그나저나 세계수 님이 사라지신 후 이만한 용은 또 오랜만에 보네. 이 구름 속에서 뭐 하고 계셨소? 당신도 하녹 님을 찾으시오?
- 하녹이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이네스는, 하녹이란 이름을 발언한 수달에게 그제야 고개를 돌려주었다. 이네스의 여의주보다 작은 수달은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 그래. 세계수 님의 힘을 담으신 그분 말이오. 이 일대에서 본 적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정령과 마생물, 그리고 마법사들이 몰렸소. 그분 얼굴 한번 뵙기가 쉽지 않아. 마력이 느껴진다 싶으면 곧장 사라져 버리니 원……. 물론 마법사들이 저리 많이 포진하고 있으니 그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 그자를 왜 그리 찾고 계신대요? 세계수를 돌려 달라고 농성이라도 부리려 하시나?
- 농성은 무슨!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데 이유가 있나. 그저 여름 한낮처럼 박힌 한 점의 동경인 것을.
수달은 상상만 해도 좋은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기분을 표현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폭발 직후 만났던 두더지 정령이 떠올랐다. 저것도 그가 말했던 본능적인 호감일까? 하녹에 대해 짧게 생각하고 있을 때쯤, 구름을 헤치고 두 마리의 수달이 더 튀어나왔다.
-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하녹 님 단서라도 찾으셨나?
- 아니, 이 용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말 튼 김에 몇 마디 주고받았네.
- 이야. 이만한 용은 하가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만나서 반갑네. 혹시 하가 출신이신가?
하가에 둥지가 있던 건 사실이므로, 이네스는 고개를 끄떡였다. 별 뜻 없이 알린 진실이었지만 수달들은 기함했다. 감정에 휩쓸려 펄쩍 뛰는 모습들이 이네스가 가지고 있던 늘 초연한 정령의 이미지를 뭉갰다.
- 아니, 정말 하가 출신이었어? 그렇다면 하녹 님을 본 적이 있겠구먼!
- 핫, 자네 하가 출신이었단 말인가? 하녹 님은 그 시절 때 어떠셨나!
- 이 친구야. 하가 출신이면 하가 출신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아니면 내가 하녹 님 얘기 하고 있을 때 본인 자랑이라도 했어야지!
대체 뭘 자랑해야 한단 거지. 이네스는 기세를 바꾼 수달들이 부담스러웠다.
- 이럴 게 아니지. 하녹 님과 같은 곳에서 산 용을 발견했다고 내 정령들에게 이름세.
수달들이 용 한 마리를 성마르게 채근했다. 수달 한 마리는 재빠르게 구름 밖으로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참으로 대단한 인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네스는 난처했다. 자신이 하가 출신 용이라는 사실이 왜인지 소식통에 따라 이리저리 퍼질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성가셔질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크흠… 저는 마법사들의 일에 신경 끄고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고대하시는 정보는 전혀 몰라요. 하녹이란 아이도 마법사 출신이라면서요.
- 그…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하녹 님께 관심이 없다니.
-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을지도… 용은 정령이 아니니까 말일세….
- 그래도 세계수 님의 영향을 받는 건 똑같지 않은가.
그녀의 청자 중 한 마리는 이네스의 주장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그녀가 혹여 양질의 정보를 독식하기 위해 숨긴 게 아닐까 의심하는 모양이다.
- 흠… 뭐 본룡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그렇다면 이곳에서 왜 죽치고 있었는가?
- 아, 저는….
- 아니 아니, 말하지 말게. 자네가 하가 출신이라니, 딱 알겠군. 하가에서의 인연을 만나러 온 게지?
- 인연이요?
- 스승님 말일세. 둘 다 길쭉한 것이 딱 닮았구먼. 어쩐지, 스승님께서 희한하게 저기서 움직이지 않으시는 모습이 이상했는데, 다 자네를 만나려고 그랬던 거라면 이해가 되네.
정황상 하가 출신의 무언가가 이 근처를 터로 삼은 모양이었다. 제대로 헛짚었지만 이네스는 그들의 말을 정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조그만 데 유난히 부산스러운 수달들에게서 얼른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하하. 뭐, 여하간 이만 저는 갈게요. 바빠서.
“뭐가 그리 바쁜데?”
이네스의 한쪽 귀 옆에 아이의 속삭임이 천둥처럼 울렸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파란 나비 한 마리가 귓가에서 팔랑이고 있었다.
‘이건 정령의 기적이잖아.’
이네스는 자신에게 나비를 날린 정령을 찾기 위해 대지를 굽어살폈다.
붉은 눈의 하얀 뱀을 목에 두른 대감 집 외동아들이, 구름 속에 숨은 이네스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본체 모습으로 하늘을 비상할 때, 마력이 없으면 알아채기 힘든 얇은 은신을 습관처럼 둘렀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용이라고 괜히 정령들이 몰려들면 귀찮아질 것이기 때문에 구름 속에 몸을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수달들의 경우처럼 구름 속에서 발각되는 경우는 어쩔 수 없긴 했다만.
허나 소년은 보란 듯이 이네스를 발견해 내었다. 심지어 구름 속에 숨어 있는 상태인 이네스를. 게다가 기적을 이용해 그녀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아마 이네스에게 기적을 날려 통신한 건 소년이 두르고 있는 저 정령일 테다.
아직 제대로 통찰해 보지 않았지만, 분명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마력은 없었다.
- 이런, 스승님께서 이미 알아차리셨군.
- 마법사들이 많으니 이 근처 돌아다니지 말라고 꾸중 들은 게 어제였는데, 또 잡혔다간 한 소리 듣겠어.
- 사한 님께 붙잡히기 전에 우린 이만 감세. 무운을 비네!
수달 두 마리가 구름 조각을 이끌고 잽싸게 허공을 헤엄치며 날랐다. 그들이 떠나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지상에 곧게 서 있는 아이와 하얀 뱀 한 마리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수달들이 말한 스승은 자신이 알고 있던 인사인 모양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계수에 터를 잡은 저 정령은, 정보에 해박하지 못한 이네스라고 하더라도 간간이 이름을 듣는 유명 인사였다.
사한. 정령들의 스승이자 세계수의 가장 굵은 가지. 작고 하얀 이무기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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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사한이요? 하얀 이무기라고요?”
“네. 하얀 이무기요. 왜 이리 반가워 보이시지? 혹시 아는 정령이에요?”
이야기 중간에 끼어든 녹에게 이네스가 물었다. 이네스의 표정에서 일말의 기대를 읽은 녹은 주춤했다. 녹이 도언의 정보를 캐내는 데에 관심을 두는 것처럼, 이네스 역시 녹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을 정령학자라고 알고 있었다. 말 하나 잘못했다간 녹의 위장 신분은 녹아 버릴 거다. 지금 정령학자란 신분은 해변 앞 모래성과 비슷했다. 그것도 파도 앞에 바짝 붙어 있는.
거짓말은 말실수를 낳고, 한 번 허락된 말실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신용을 덮친다. 아무리 정령학자라지만 사한이라는 정령을 아는 건 이상하긴 하지. 녹은 일단 모른 척했다.
“그냥요. 이무기라니까 신기해서.”
“어머. 용 앞에서 눈도 깜짝 안 하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재밌네요. 용보다 이무기가 더 특이한가?”
그럴 리가 있나. 녹은 어색하게 웃음이나 흘렸다. 얄짤 없이 하얀 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무기였다니. 지금까지 뱀이라고 생각한 게 이제야 괜히 미안해졌다.
물론 그 전에 사한이 어린 도언과 어째서 함께 있느냐가 가장 큰 포인트였지만.
녹은 거대한 단서를 뿌린 이네스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도언을 관찰했다. 그녀가 폭탄 같은 증거를 뱉어도 도언은 큰 타격 없어 보였다. 그저 집 안에서 공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만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확실히 지루해 보이지 않는 장면이긴 했지만-.
‘이네스 말을 듣고 있긴 한 건가?’
그렇기에 녹이 한 의심은 타당했다. 이렇게 도언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막 흘리게 놔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럴 거면 그냥 저기 가서 애들이랑 같이 놀지. 왜 괜스레 여기에 앉아 있어서 눈치 보게 만드는지 원.’
어느새 이네스는 회고하던 이야기를 접고 서쪽의 드래곤과 동쪽의 용 중 어느 쪽이 더 신비로운 마생물인지에 대해 말머리를 틀려고 했다. 녹은 그녀의 방황하는 대화 주제를 바로 잡아주었다.
“여하간, 그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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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바로 사한은 어린 정령들의 보호자를 자처한다고 하였다. 약간의 이지라도 생긴 정령 중에 사한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정령은 손에 꼽는다고 했다. 가끔씩 이네스의 둥지로 놀러 오는 정령들이 사한에 대한 애정 어린 뒷담을 나누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한다. 그들은 스승에 관한 험담의 원인이 그에 대한 지겨움이 고여서가 아닌, 애정이 어려서라는 사실을 이네스에게 언제나 강조했었다.
기척까지 죽이고 구름 속에 숨어 있는데도 한 번에 찾아 내다니. 그것만 봐도 저 이무기는 명성만큼 강한 정령인 것 같았다. 이네스는 어째서 고위 정령이 인간 아이와 함께 있는 건지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이네스는 자신을 숨긴 구름을 땅으로 끌러 내렸다. 커다란 용은 구름 속에서 꼬리가 사라지고, 길쭉한 발톱을 지닌 손은 섬섬옥수가 되었으며, 왼손에 쥐고 있던 여의주는 둥근 귀걸이로 소담스레 귓가를 장식했다. 구름이 걷히자 단아한 아가씨가 나타났다.
“안녕. 이리 나를 찾아내니, 모르는 척할 수도 없겠네. 이네스라고 해. 보다시피 용이지.”
- 그 사고 이후 이만한 마생물은 보기 힘들진대, 어디서 온 용이고? 세계수에서 왔는가?
사한이 붉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분명 이네스가 아이를 관찰할 때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정령이었다. 언제 나타났지? 까다로운 그가 아이와 붙어 있는 걸 보면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마법사를 죽인 건 사한인가?
이네스는 사한의 물음에 고개를 끄떡였다. 오오오! 꽤 반가운 모양인지 사한이 기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 이 아이가 구름 속으로 나비를 보내 달라고 했을 때는 왜인가 싶었는데, 자네를 만나기 위함이었구먼! 세계수가 사라지고 고생이 많았네.
사한이 머리를 빙빙 돌리면서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다. 듣던 것만큼 부산스러운 정령이었다. 여하간, 구름 속에 숨어 있던 자신을 발견한 건 예상외로 사한이 아닌 사한이 붙어 있는 저 아이인가 보다.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거지.
아이는 화사한 기분을 뽐내는 사한과는 다르게 서릿발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까딱하다간 고드름이 뚝뚝 떨어지겠다.
계절로 따지자면 사한은 완연한 봄이었고 아이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분명 둘은 같이 뭉쳐 있는데 비해, 분위기의 격차는 지나쳤다. 나비를 통해 이네스에게 말을 건 아이가 드디어 입을 뗐다.
“그동안 나를 왜 따라왔지?”
이네스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이는 사한도 알아채지 못한 구름 속의 자신을 은신까지 두른 형태로 발각해 내었다. 그것도 방금 처음 발견한 것도 아닌가 보다.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마력은 여전히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순이 따로 없었다.
‘날 잡아서 몰래 마력 측정해 봐야지.’
이네스는 마음속에 떠오른 무례 깃든 꿍꿍이를 숨기며 무해하게 미소를 날렸다.
“재밌을 거 같아서.”
세상에서 제일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될 그를 향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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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 가주님이 생각보다 흥미로워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아, 물론 돌이켜 보면 그 선택은 제 용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답니다. 가주님은 낯선 저를 좀 귀찮아하시긴 했지만. 뭐, 공생 관계를 인정하셨는지 나중에 가서는 별말 없으셨어요. 확실히 그게 첫 만남이었네요.”
아, 근데 진짜 그때는 참 귀여웠었는데. 적어도 외모만큼은 말이죠. 꿈꾸듯 말을 이었던 이네스는 혼잣말을 하며 회상을 마무리했다. 그녀의 혼잣말을 정확히 들은 녹은 새삼스럽게 도언을 구경했다. 이네스가 말을 잇는 내내 무신경하게 아이들이나 구경하던 도언은, 녹의 시선이 느껴지자마자 빙긋 웃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저 녀석도 귀여운 어린 시절이 있긴 했구나.’
그의 어린 모습을 상상하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존재들이야 모두 귀여운데, 찌르면 피가 나올까 싶은 저 녀석의 귀여운 어린 모습이라니. 그냥 태어날 때도 저 모습 그대로 크기만 줄여서 태어났을 것만 같은데. 우는 것 대신 빙글빙글 웃으면서, 소자, 어머님께 인사 올립니다. 하면서.
녹은 거기서 더 상상의 가지를 뻗치려다 소름이 끼칠 것 같아 관뒀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사한. 이네스의 과거 속 가장 큰 단서가 되는 존재는 사한이다. 사한이 뱀이 아니라 이무기였다는 건 뒤로하고, 도언이 사한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폭발에 휘말린 많은 정령은 사라졌고, 살아남은 정령은 손에 꼽았다. 당연히 사건의 중심부에 있던 사한 역시 그 피해를 피치 못했을 거라고 여겼던 녹이었다. 그런 그가 사건 이후에도 살아 있단 사실은 녹에게 희소식이 될 만했다.
녹은 아직도 과거를 더듬고 있는 이네스에게 사한에 관해 물어봤다.
“그럼 가주님과 함께 있던 그 정령은요? 지금도 있나요?”
“아, 역시. 정령학자라 그러신지 사한에 대해 흥미를 보이실 줄 알았어요. 정령사적으로도 사한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긴 하죠. 가주님과 함께 있던 사한은 어느 순간 제 할 일을 끝마쳤다며 땅속으로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요?”
“네.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더라니까요. 그들은 그걸 무한의 생에 찾아온 쉼표라고 표현하던걸요. 그렇기에 저는 그게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다시 생에 나오려면 그들의 의지와 세계수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세계수의 힘이라…. 대체 하녹은 어디 있을까….”
이네스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푸념하듯 독백했다. 불시에 나온 자신의 본명이다. 그를 듣고서도 녹은 표정을 자연스럽게 녹여 내는 데에 성공했다. 상념에 빠진 이네스는 짧은 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녹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개구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민수 씨는 어쩌다가 정령을 연구하게 되신 거예요? 그냥 선대가 정령학자라서?”
“아, 뭐, 그런 셈이죠.”
녹의 선대야 하가의 가주였지만, 뭐, 이 정도 거짓말쯤이야 가벼웠다.
“가업 같은 건가 보네요. 연구는 재밌으세요?”
“나름 할 만합니다.”
한번 터진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녹은 정령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연구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 옛날, 세계수의 힘을 흡수하고 마력 운용을 미숙하게 할 때마다 정령들이 어찌 알았는지 우르르 몰려왔었다. 그건 마법사들에게도 눈에 띄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와 별개로 몰려드는 정령을 피하기 바빴다.
이네스는 그런 녹의 속도 모르고 그저 가짜 젊은 학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댁으로 가시기 전에 민수 씨에게 드릴 게 있어요. 하이옌.”
그녀가 주문을 외며 귀걸이를 빛내자 나타나는 테이블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나타난 것은 법전만큼 두꺼운 책이었다. 딱딱한 갈색 하드커버의 책은 표지에 그 무엇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네스가 그것을 집어 들고 녹에게 건넸다.
“이거 민수 씨에게 한 권 드릴게요.”
책을 건네받은 녹은 생각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에 호기심이 일었다. 두께만큼이나 무거운 책의 무게는 가히 흉기로까지 쓰일 만했다. 커버에 그 무엇도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안에 적힌 내용 역시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하얬을 것이 분명한 종이들은 빛바래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나이 꽤 먹은 고서다.
녹은 책장을 넘겼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단정한 글씨체로 적힌 수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한자로, 뒤로 갈수록 한문 한글 혼용, 마지막에는 한글로 적힌 그 책의 내용은 온통 정령에 관한 기록들이었다.
글보다는 그림이 훨씬 많았는데, 그 모두 복도에서 봤었던 그림과 화풍이 같았다. 아무래도 이 책은 이네스가 정령에 대해 연구한 연구 일지 같았다.
종이는 뒤로 갈수록 덜 바랜 듯 하얬는데, 아무래도 연구할 만한 거리가 생길 때마다 이네스가 새 종이를 사이에 끼워 넣는 듯 싶었다. 정령 하나에 대한 필기는 30쪽 내외였다. 왜 이리도 분량이 많은가 보았더니 정령의 발톱 하나하나까지 확대해 섬세하게 그려서였다.
딱 봐도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인 책이었다. 돈 주고도 못 살 귀한 물건이었다. 나는 이런 걸 받을 정도로 정령에 진심이지 않은데. 이 귀한 자료는 아무래도 가짜 정령학자가 받기에는 가치가 높았다. 녹은 책을 들추어 보다 말고 고개를 올렸다.
“이거 너무 귀한 자료 같은데요. 저에겐 과분해요.”
“아니에요. 민수 씨에게 드린다고 해서 그 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걸요. 다행히 저는 주술을 쓸 수 있답니다. 민수 씨에게 드리는 건 원본의 복사본이에요. 학자끼리 정보를 교류하면 좋죠. 안 그런가요? 이게 민수 씨의 학자 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네스는 녹의 정체에 대해 한 치 의심도 없다는 듯 청량히 말을 받았다. 그녀는 순수하게 어린 인간 학자의 성취를 돕고 싶어 했다. 아무리 복사본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세월이 담겨 있는 연구본을 쉬이 내줄 수 있을 존재는 손에 꼽을 것이다.
녹은 책을 받고서 공연히 양심에 찔렸다.
“저도 뭐라도 드려야 하는데….”
“하하하. 아니에요. 민수 씨. 다음에 올 때 감상이나 한번 알려 주세요. 발품 팔아 관찰한 거긴 한데, 그중에 중간중간 한눈을 팔아 허술한 부분도 있거든요. 혹시 첨삭하고 싶은 부분 있으면 마음껏 첨삭하시고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게도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이네스는 마지막 두 마디에 진심에 진심을 얹고선 허공에 꾹꾹 눌러 말했다. 아무래도 연구본을 준 진짜 이유가 저건가 보다. 녹의 마음속 차올랐던 감동이 풍선에 바람 빠지듯 빠져나갔다.
“제가 그리 큰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괜찮아요, 괜찮아! 아까 보니까 영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아, 그렇게 부담드리는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하세요.”
이네스는 상에 있는 서적을 들어 녹의 품에 밀어 넣었다. 녹에게는 영 쓸모없는 지식의 보고가 한 품에 안겼다.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건지, 부담을 가지라는 건지.’
녹이 영 떨떠름하게 있는 걸 알아챘는지, 도언이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입을 뗀 참이었다.
“굳이 받지 않으셔도….”
“그동안 즐거운 대화였어요. 민수 씨. 다음에 금방 만날 수 있겠죠? 진예야! 가주님 가신대!”
이네스는 도언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며 그들의 등을 현관으로 떠밀었다. 진예와 룬이 우당탕하며 녹과 도언에게 우렁차게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그들은 얼떨결에 안가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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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하실 필요 없습니다.”
집에 와서 첨삭을 위한 볼펜을 찾는 녹에게 도언이 말했다.
“이네스는 그저 정령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눈 돌아간 것뿐입니다. 아무리 복사본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을 녹에게 줄 거라고 예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네스는 안가를 만들기 전, 남는 시간 대부분을 정령을 찾아다니며 관찰했거든요! 그때부터 낯이 익은 책이네요.”
녹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 필기구에 도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놈의 집구석에 있는 건 대체 뭔지. 녹에게 볼펜을 건넨 건 도언이 아닌 청연이었다. 청연에게 볼펜을 받아 책장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생각만큼 유서 깊은 책이네. 날짜는 안 쓰여 있어서 언제부터 작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딱히 이네스 부탁받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 하는 거야. 하다가 재미없으면 말아야지. 그나저나 이네스가 정령에 관심을 둔 건 너랑 만난 다음이었나 봐?”
이네스가 풀었던 이야기 안에서, 과거 속 그녀가 정령을 대하는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녹은 물음과 동시에 책장을 넘겼다.
책에 적힌 첫 번째 정령은 꼬리에 눈이 하나 더 달린 수달 정령이었다. 아마 이네스와 구름에서 만났던 그 정령이리라.
“맞습니다. 당시에 이네스는 정령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요. 뭐, 관심사란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녹은 도언의 말에 공감하며 책장을 넘겼다. 수달 이후 곧바로 하얀 뱀 형태의 그림이 나왔다. 이름 없던 수달들과 취급이 다르게 이름까지 쓰여 있는 그 뱀의 칭호는 백리 사한(白螭 巳橌)이었다. 하얀 이무기 사한.
이네스의 시점에서 관찰한 사한을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네스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흑백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관찰력 또한 엄청나서, 비늘에 새겨진 문양 등 작은 특징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사한은 어린 도언과 함께 있었다고 했었지. 하지만 세계수의 꿈속에서 사한은 도언을 못 알아봤었다. 둘이 하가가 망한 이후 처음 만났다거나, 아니라면 도언이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못 알아볼 정도로 변했거나. 둘 중 하나란 말인데.
녹은 무의식적으로 책의 귀퉁이에 적은 자신의 낙서-‘분명 하가 사람인 것 같긴 한데.’-를 보며 도언에게 물었다.
“너, 사한이랑 언제 처음 만났어?”
“언제일 것 같습니까?”
“또, 또 답답하게 군다. 왜 사한이랑 함께 다녔던 건데?”
“알려 드리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아닌데? 완전 재밌는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데?”
“저는 재미없습니다.”
“됐다. 됐어. 너한테 뭘 바라냐.”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여간에 비싸게 굴어요.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사한과 함께 있던 이유를 이네스는 알까. 다음에 만났을 때 이네스에게 제대로 물어봐야지. 먹물로 칠해진 사한의 붉은 눈을 보며 녹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참사를 피했다는 건 다행이네. 나는 틀림없이 사한이 거기에 휘말려서 소멸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때 참사라면, 세계수의 힘을 흡수했을 때 말인가요?”
도언과 녹의 대화가 흥미로운지 눈을 빛내며 얌전히 있던 청연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그 당시 기억이 잘 안 나서. 하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폭주한 이래로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거든. 완벽한 폐허. 나 이외에 아무도 남지 않았어.”
“이네스가 듣기로는 하가에 있는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고 바깥으로 피신시킨 게 녹 님이라고 하던데요? 겸사겸사 정령들도 같이 피신시킨 게 아닐까요?”
“음…. 그걸 정령들이 말해 줬다고 했었지.”
사실 녹은 그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인간들만 골라서 기억까지 지우고 바깥으로 내보냈다고?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아는 체할 수 없었던 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은 참사의 중심인 하녹이 아닌 변방 정령학자 김민수여서 그랬다.
확실히 정령들은 세계수의 마력에 제일 민감한 존재였다. 정령들이 판을 쳤던 과거, 녹이 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마력으로 마법을 찔끔 써도, 그들은 어떻게든지 바로 알고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때는 마력을 사용하는 게 어려워 마력을 섬세히 통제치 못했고, 세계수의 마력에 민감한 그들은 녹이 어떤 마법을 썼는지도 뻔히 알은체해 왔다. 물론 녹의 마력에 민감한 그들이 마법사처럼 해로운 존재는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정령들로부터 철저히 마력을 숨길 자신이 있었지만 그 당시는 몸에 처음 담게 된 마력이고, 게다가 스승이라고 부를 사람 또한 없어서 마력을 조절하기 여간 쉽지 않았다. 세계수의 지식을 흡수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여하간 참사 이후 드문드문 자신도 모르게 마법을 썼던 때가 있었다. 방대한 마법을 쓸 때마다 어설픈 마력 운용의 부작용으로 당시의 기억이 날아갔다. 마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을 이후에는 그런 적이 없어서 기억 상실을 겪은 건 몇 번 되진 않았지만 아예 없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런 거대한 마법을 썼다는 것 또한 정령들이 훗날 말해 주어서 알게 된 거였다.
그러니 정령들이 말했듯, 녹이 하가의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고 결계 바깥으로 내보냈다는 것 또한 사실이리라. 짧은 기억을 대가로 마법을 쓴 건 녹의 삶에서 두 번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방금 이네스의 말을 들음으로써 한 번이 더 추가가 되어 세 번이 되었다.
“그 난리 때 그런 섬세한 마법까지 쓰셨다니. 대단하셨네요. 역시 세계수도 아무에게나 자신의 능력을 주진 않았나 봐요.”
청연이 감탄했다. 자신이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치켜세워지니, 녹은 괜히 머쓱해졌다. 게다가 그 참사 중심에 자신이 있었는걸. 휘말린 모든 존재들에게 언제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칭찬은 영 와닿지 않았다. 물론 마법사에게 가지는 죄악감은 항상 가벼웠다.
“게다가 쓰셨다던 대형 마법도 마법과 관련 없는 이들을 구출해 내는 거였다니요. 폭발 전이라면 녹 님께서 마력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전이실 텐데, 그 와중에 그들을 생각하다니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이게 기적이 아니고 뭐겠어요? 이후 정령들이 광팬처럼 하녹 님을 찾아다닌 이유가 있다니까요? 정령 말고 마생물들 중에서 녹 님을 찾았던 이는 없었나요?”
“정령들이야 태생적으로 내 마력에 민감하니까. 그때 내가 아무리 마법을 쓰는 데 서툴러도 말이야. 정령이면 모를까, 마법사와 마생물이 눈치챌 마법을 쓸 정도로 어설프지는 않았어.”
물론 가끔씩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정체를 알고서 죽이려는 마법사들을 자비 없이 쓸어버리긴 했지만… 마력을 펑펑 쓴 그때야 곧바로 자리를 뜨면 될 일이었다.
녹은 하가 바깥에서 처음 홀로서기를 시작했던 때를 회고했다. 확실히 큰 마법을 쓸 때마다 기억이 날아간 적이 있었구나. 그런 시기도 마력을 얻은 후, 반년 내외일 정도로 짧아서 중요한 기억은 아닐 거라 생각하고 넘겼었다.
하지만 그 기억 속에서 도언과 관련된 기억이 있다면?
분명 도언은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내라고 했었지. 도언은 분명 하가의 인물 같았고 기억이 사라진 시기는 하가가 망한 직후였다. 과연 도언의 단서가 있긴 할까? 물론 지금은 물불 가리지 않고 잊힌 기억 모두를 수복하는 게 정답이긴 했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기 위해선 세계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혼자 둬도 괜찮겠어요?”
“괜찮다마다. 너랑 같이 있는 게 정신상 제일 해롭거든?”
“청연이라도….”
“됐어. 됐어. 제발 다들 꺼져라. 혼자 좀 있자!”
안가에 다녀온 이래로 도언은 녹을 혼자 두려고 해 먹질 않았다. 꼭꼭 발목에 감싸여 있는 아타움이나 목의 고리를 보면 녹이 도망갈 것 같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저 하진이를 보낸 여파가 뒤늦게 오는 걸 걱정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다르게 녹은 정말이지 괜찮았다. 오래 살아온 그에게 있어 이별이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애당초 오래 지난 일이었다. 물론 도언이 하진이인가 싶을 때, 하진이 살아 있다는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머리로는 이미 그녀가 떠났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에 큰 타격은 없었다. 그때 도언을 붙잡고 운 것도 녹에게는 상상외의 행동이었다.
도언은 자신의 등을 떠미는 녹을 미련 가득히 쳐다보기만 할 뿐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수 현관문을 열어 주고 싶었으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길어진 사슬로 인해 현관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저주받은 시시포스가 따로 없었다.
가능한 평범해 보이게 가벼운 미소까지 입가에 걸치고선 손을 흔들었다. 며칠간 집에서 청연, 아니면 도언, 아니면 그 둘 모두와 붙어 있었더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집은 혼자 있을 때가 제일이었다. 붙어 있다고 해서 그의 정체에 대한 힌트 같은 게 떨어지지도 않는다면 혼자 있는 게 가장 편했다.
도언은 녹의 목에 걸린 고리와 발목에 걸린 아타움을 차례대로 눈짓하다가 숨을 크게 내쉬고는 항복했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가고.”
가능한 돌아오지 말고. 녹은 조그마한 소망을 속으로 삼켰다. 도언이 현관을 나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웃음을 가장했던 녹의 얼굴에 진심의 미소가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가고 혼자 있는 게 그렇게 좋은가. 괜히 꿍해진 도언이 현관 문고리를 돌려 나가기 전, 녹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뭔데. 잊은 거 있냐?”
“아니, TV 말이에요.”
도언이 거실 한쪽 벽면을 스크린처럼 채우고 있는 TV 모니터를 가리켰다. 녹은 반사적으로 도언이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순간.
쪽.
“그럼 진짜 다녀오겠습니다.”
녹은 볼에 내려앉은 가벼운 감촉과 함께, 한쪽 귓가에 유난히 크게 들린 청각적 자극에 곧바로 굳어 버렸다. 도언은 녹을 가둔 충격의 얼음이 녹기 전에 현관 밖으로 피신했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녹이 삐걱대며 고개를 바로 했다.
속았다.
“하…. 저 새…. 하….”
가벼운 장난이었지만 자신이 속아 넘어간 것에 타격을 입은 녹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도언의 입술이 닿았던 볼 한쪽을 거칠게 문댄 녹은 거실로 돌아왔다. 약간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여하간 오랜만에 홀로인 집이다. 도언은 필요하면 자신이나 청연을 부르라며 핸드폰에 둘의 연락처를 남겼지만 그 둘이 필요한 날은 웬만해서는 없었다.
그리고 홀로일 때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있긴 하고. 녹의 주변에 둘이 빙빙 돌아다니면 정신이 없어서 지금까지의 상황 정리를 하기 어렵다. 녹은 저번에 청연에게 부탁했던 종이와 필기구를 꺼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필기를 하며 정리하는 게 무조건 도움이 되었다.
녹은 종이 상단에 큰 글씨로 제목을 적고, 뒤이어 번호를 매겨 가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마력을 되찾는 방법]
1. 도라이언의 정체를 맞힌다.
2. 고리를 파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