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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화 공자 (12/24)

10. 미화 공자

하가의 마법사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녹은 그 참사 이후 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얼굴을 바꾸고, 가끔씩 마력도 질질 흘리면서 말이다. 풍부하다 못해 넘치는 이 마력을 제대로 제어하는 법은 녹이 부딪치며 알아내어야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소문이 샜는지, 아무리 얼굴이나 육체의 연령대를 바꾸고, 심지어 성별을 바꿨을 때도 마법사들은 기가 막히게 녹의 정체를 알고 공격해 왔다.

기습하는 자도, 회유하는 자도 있었다. 혹은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며 감정을 꾸며 내는 자 또한 존재했다. 녹은, 마법사들이 저 하나를 죽이기 위하여 얼마나 창의적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하필 세계수가 사라진 이후 얼마 되지도 않을 때여서 세계에 잔류하는 마력은 풍족했다. 그는 곧, 수준 높은 마법사들의 수가 많다는 걸 의미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엉성한 초보 마법사 녹을 잡기 위하여 언젠가는 마법사들이 떼거지로 몰려들 때도 있었다. 마력을 조절하는 데에 서툴렀던 녹은, 그 주위를 몽땅 다 날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큰 마법을 쓰고 나서는 부작용으로 기억이 좀 날아가 버렸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당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은 녹에 의해 모두 죽었다. 짧은 기억 소실 정도야 목숨값보다는 쌌다.

때는 세계수로부터 힘을 흡수하고 나서 2년이 지난 후였다.

몇 년 후엔 약관의 나이에 도달할 그 당시의 녹은 그나마 마법을 이용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전처럼 큰 마법을 써도 기억 소실이라는 부작용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마력 흔적을 처리하는 데에는 아직 노련치 못했다.

그렇기에 여의치 않게 마력이 크게 사용되는 마법을 부린 이후에는 냉큼 그 자리를 떴다. 뭔가 귀찮아질 것 같을 때마다 위치를 바꾸는 신출귀몰한 녹이기에 마법사들은 그의 행로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도 잘도 찾아 공격해 대니, 재주도 좋았다.

“동이, 너한테 사냥감이 간다! 잘 잡아!”

“잘 몰기나 해!”

“야, 옆으로 새잖아! 중심 잘 잡아!”

녹은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서 사내아이들이 바지를 걷고 물고기를 몰며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바위 위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이글거리는 태양을 가려 주었다.

냇가 옆에서는 하진이만 한 여자아이가 들풀을 꺾으면서 놀고 있었다. 나무 주위에도 저만한 들풀은 많았는데, 자신이 바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늘로 들어오기 어색한지, 아이는 작열하는 햇살로 등을 익히고 있었다.

녹은 사내아이들의 놀이에서 제외된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얘야. 냇가에 들어서지 않을 거라면 뜨겁게 거기서 놀지 말고 여기 그늘 안에서 놀아라.”

낯선 자가 자신을 호명할지 몰랐는지, 아이는 토끼 눈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송골송골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덥기는 엄청 덥나 보구먼.’

아이는 쉬이 녹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인가 보다. 내가 자리를 비키면 이쪽에서 놀겠지, 생각한 녹은 자리를 뜨기 위해 바위에서 내려오려 할 때였다.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린 꽃수집이 의미가 있었는지, 모양새가 꽤 나는 들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아이는 주춤주춤 다가와서는 떠나려는 녹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오신 분이세요?”

아이의 호기심 곁든 물음에, 녹은 떠나려던 마음을 접고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순진한 눈망울을 한 아이는 드디어 녹과 같은 나무 그늘에 몸을 담았다. 녹은 아무도 모르게 실바람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그래도 정령의 탐지에 걸리진 않겠지.’

실바람은 아이의 땀방울을 식히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세한 마력 조절에 성공한 녹은. 아이를 향해 개구지게 대답했다.

“어디서 왔을 것 같아?”

“…모르겠는데. 한양인가?”

“어째서?”

“그런 옷은 한양 출신만 입는 거 아닌가요?”

녹은 아이의 말에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 봤다. 오는 길에 대충 눈에 안 띄는 인물의 외양을 복사했던 거였는데, 이곳은 이런 옷차림조차 눈에 띌 정도로 지나치게 오지였나 보다.

외모를 다른 이로 바꾸자마자 온 이곳은 녹이 허공으로 돌을 차서 나온 방향으로 이백 리 떨어진 곳이었다. 녹은 그런 방식으로 다음 행선지를 정하곤 했다.

“이것 참, 네 말대로라면 나라의 온 곳이 한양이겠구나.”

녹은 입꼬리를 씨익 당겼고, 낯선 이가 자신을 놀리는 걸 깨달은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쭈그려 앉았다. 이크, 아이의 섬세한 마음에 상처 냈나? 싶었던 녹은 괜한 걱정에 아이를 건네 봤다.

녹의 걱정과 다르게 아이는 바위 주변에 피어 있는 꽃을 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이는 방금 대화를 잊은 듯이 금방 집중하기 시작했다. 허나 아이는 생각보다 수다쟁이였는지, 침묵은 짧았다.

“저기서 그물을 잡고 있는 자가 제 오라비예요. 꼭 저만 빼놓고 친구들이랑 논다니까요? 내가 사내가 아니라고 안 끼워 주는 건지. 유치하기 짝이 없어요.”

낯을 가린다고 생각했던 아이였지만, 말을 한 번 섞으니 경계는 금세 사라졌다. 경계를 쉬이 무너뜨리는 걸 보니 이곳이 시골이긴 한가 보다. 녹은 그저 아이의 말이나 경청해 줄 따름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녹에 대한 아이의 호감은 하늘까지 닿았다.

“그래서 우리 마을에는 왜 오신 거예요? 이 두메에 볼일이 있을 리는 없고. 이 근처에 다른 마을로 가려면 닷새는 걸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적어도 하룻밤은 여기서 보내야 하실 텐데, 잘 곳 없으면 우리 집에 오세요!”

“아니, 괜찮아. 목적지까지 부지런히 가야 하거든. 여기인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그곳까지 한참 남았구나.”

“어디 가시는데요?”

“나를 쫓는 자가 없는 곳.”

그가 쫓기는 처지란 걸 들었음에도 아이에게 그건 중요치 않아 보였다.

“이 오지에 누가 오겠어요? 이제 슬슬 해가 떨어질 텐데요. 우리 집 감자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맛있어요! 우리 집에서 묵으시면 제일 맛있는 감자를 드실 수 있을걸요? 한입 먹고 놀라 뒤집어지실지도 몰라요!”

아이는 만들던 꽃다발마저 내팽개치고 녹을 꼬드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대체 무엇이 아이를 이리 끈질기게 만든 건지.

심지어 지금은 정오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해가 넘어갈 때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소녀가 내는 요란함에 냇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물을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의 오라버니가 휘적휘적 물을 가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네? 네? 좋잖아요. 시원한 마루에서 찐 감자나 먹고. 근데, 이름이 뭐예요?”

아이는 다가와서 녹의 두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미소가 일순 기괴하게 비틀어졌다. 두 눈동자에 담았던 아이다운 순진함이 공허하게 텅 비었다. 아이는 바위로 올라와 녹의 두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소녀의 오빠를 포함한 아이들이 몰려왔다.

“난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분은 누구고?”

아이가 놓쳐 버린 꽃다발은 어지럽게 땅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다가온 아이들은 그 꽃들을 스스럼없이 밟으며 부스러기로 만들었다. 난이라고 불린 여자아이는 괴상한 표정 그대로 오라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몰라. 말씀을 안 하시네. 왜 안 하시지?”

“왜겠어.”

다가온 아이들이 목을 옆으로 꺾고 깔깔댔다. 목각 인형이 애써 움직이는 듯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여자아이의 질문에 대꾸한 아이가 괴이하게 말을 이었다.

“그 하녹이니까 그렇지.”

오라비의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돌려 녹과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최대로 당겼다.

“대체 우리가 여기 있단 건 언제부터 안 걸까?”

그 말을 신호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소름 끼치는 빛이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튀어나왔다. 녹이 숨을 들이쉴 때 그들의 주변에 보호막이 둘러졌고, 내쉴 때 온 공격을 막은 보호막이 사라졌다.

“아, 언제 나오나 했다.”

녹이 자조하듯 헛웃음을 흘렸다. 녹은 두 번째 공격이 오기 전에, 자신의 팔을 아직도 틀어쥐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봐라. 내가 갈 곳은 여기가 아니야.”

이곳은 나를 쫓는 자들이 있으니까. 녹은 끝말을 삼켰다. 그들의 은신은 훌륭했으나 아이들에게 마법을 건 순간 깨졌다. 숨어 있는 마법사는 총 넷이었다.

자신만 그들의 공격에서 빠져나왔다면 아이들이 대신 해를 입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녹이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잘 안 마법사들이 아이들을 이용한 거겠지.

아이들을 이동시키려는 와중에도 마법사들의 폭격은 이어졌다. 하가의 마법사들이 진을 없애려는 자신을 저지하기 전에 했던 모습과 유사했다.

다행히 그때와 달리 녹은 그들에 대항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에 걸린 아이들의 마법을 풀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까지 완벽히 한 녹은 몸을 일으켰다.

녹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의 일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멀찍한 곳에서 표적을 잃은 마법사 중 하나는 당혹을 감추지 않았다가, 공격을 멈추고 얼른 녹의 마력을 읽는 데에 집중했다. 큰 바위에서부터 흘려진 녹빛 마력은 청명한 기운을 흘리며 사방팔방 튀었다.

오른쪽 나무 위에 흔적을 남겼다가, 왼쪽 냇가 바위 뒤, 그리고 민가의 지붕까지 짧은 순간 많은 곳에도 마력을 뿌리며 다녔다. 심지어 녹의 마력 흔적은 선명치도 않았다.

그대로 여기와 정반대의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기에 그의 흔적을 읽는 건 중요한 작업이었다. 게다가 함께 온 마법사 중에 자신이 탐지에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다. 자연히 탐지는 자신의 임무였다. 마법사는 온 정신을 그의 흔적을 쫓는 데에 집중했다.

선명한 한 줄기의 마력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마법사는 화색을 띠며 그 근처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일단 그 근처로 가서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게 낫겠다.

그러니까… 하녹의 마력이 뚜렷한 곳은….

내 뒤?

“알아차리는 게 제일 늦네.”

뒤를 돌아본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하녹을 향해 공격한 것 또한 반사적이었다. 그러나 녹은, 그의 지팡이 끝에 튀어나온 마법 빛줄기를 한 손으로 무난하게 잡아내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마법사가 떨든 말든 관심 없는 것처럼 자신이 잡은 마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디 보자. 이 정도 마력밖에 없으니까 아이들을 이용해 그 정도밖에 못 하지. 이쪽 가문에서는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닌가? 그래도 접근법은 참신했어.”

녹은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내뿜는 마법사를 지루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내뱉는 공격은 녹에게 닿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단시간 강한 마력 소모로 인해 마법사가 지쳐 공격을 멈췄을 때다.

“이제 할 만큼 했나 봐? 유언은 없지?”

녹은 자신이 잡고 있던 빛줄기를 마법사를 향해 성의 없이 던졌다.

하늘은 빼곡한 검은 나비로 채워졌다. 네 번째였다.

“하여간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녹은 하늘로 날아드는 식신을 손짓 한 번으로 불을 붙였다. 곧 식신 떼는 불티를 튀며 서서히 소멸했다. 보통 마법사라면 옳다구나 하며 식신을 마력으로 화해 흡수했을 거다.

허나 녹이 마력이 궁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풀어 주자니 그들이 일으키는 불행의 인과가 엄청났다. 식신을 태우는 건 궁여지책이었다.

마지막 한 마리의 나비까지 깔끔하게 불살라진 걸 확인한 녹은, 자신의 마력을 감지한 정령들이 꼬이기 전에 자리를 이동했다. 처음 보는 참새 한 마리가 잽싸게 꼬이기는 했으나- -아니, 녹 님 아니세요! 세상에! 세상에!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라니 제가 계를 타긴…- 한 마리 정도야 애교지.

마력 흔적이 쏟아지는 큰 마법을 쓰기 싫어서 부러 그들이 사용한 마력을 이용하여 소멸시켰으나, 이놈의 정령들은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 식신을 불태울 때 쓴 마력이 탐지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어벙하게 있다가 녹의 마력을 맡고 몰려온 정령들에게 파묻힐 뻔했다. 아주 이곳저곳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피곤해 죽겠다.

물론 정령들에게는 녹이 마법사들에게 유명한 것과 반대의 의미로 유명하지만… 자신의 기색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정령들이 자신에게 살심이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녹은 초면인 자신에게 친한 척하는 데에 특화된 정령들과, 큰 마력의 이동을 느낀 마법사들이 모이기 전에 그 마을에서 사라지기로 했다. 녹은 땅으로 꺼지며 사라졌고, 참새 정령의 아쉬움 섞인 탄식만이 그 자리에 낭랑히 울렸다.

그 마을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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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이용한 마법사들이 몽땅 죽은 이후에도 마법사들은 아이들을 이용해서 녹에게 접근해 왔다. 분명 빠져나가는 쥐새끼 없이 잘 처리했거늘, 대체 어디서 아이들에게는 곁을 내어 준다는 정보가 샜는지 모르겠다.

“도련님이 잘도 드시네. 여기엔 혼자 오셨수?”

숨 쉬듯 평범한 얼굴로 위장을 한 녹은 가장 가까운 주막에서 주문한 국밥에 코를 박고 마시고 있었다. 종일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녹은 대충 주모에게 고개를 끄떡여 주며 우물거리는 입을 쉬게 하지 않았다.

“주모! 나 왔어!”

“어이구, 오랜만에 오셨네들!”

새로운 얼굴에 호기심을 뿜어내던 주모는 단골들이 나타나자 관심을 그쪽으로 옮겼다. 녹의 입장에서야 편했다. 주모의 관심에 부담을 느끼던 그였기에 단골들에게 마음속으로 심심한 감사를 전했다.

이곳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항구 주변에 사는 사람답게 쾌활하고 외부인에게 텃세를 부리지 않았다.

바닷가에 나 있는 항구를 통해 외국 상인이 들어오거나, 혹은 소규모의 무역품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다른 곳보다야 다양한 복식을 보니 마치 하가의 저잣거리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을 구경하는 것 또한 녹에겐 쏠쏠한 재미였다.

이곳에 온 이래로 주변에 마력이 탐지되는지 항상 경계했다. 이 근처에 느껴지는 마력은 없지만 혹시 모른다. 그들의 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는 추세였으니까.

‘일반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이용할지는 몰랐단 말이지.’

녹은 조금 전을 회상하며 앞으로 진화할 그들의 범죄적 가능성에 대해 고루한 상상을 했다. 그들이 앞으로 행할 참신한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에잉, 씨앗 쫓는 마법사 아무나 못 하겠네.’

녹은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들이마시며 채운 뱃가죽을 땅땅 두드렸다. 마법사가 주변에 있든 없든 일단은 점심을 먹어 배를 채웠다. 하루 목표 세 가지 중 하나는 달성한 거다. 물론 나머지 두 개는 저녁 먹기와 살아남기다.

녹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열었다. 언제나 쾌활한 이곳 사람들은 목소리마저 높고 낭랑했기에 큰 무리 없이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백성들의 입에서 희한하고 기묘한 괴담이 들릴 시에 녹은 지체 않고 자리를 떴다. 보통 그런 일들은 마법사와 관련된 일이 열에 아홉이었으며, 그 이야기가 들리는 곳은 녹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녹의 목적지는 무조건 마법사가 없는 곳이었으니까.

“…서쪽 상인이 가져온 연지란 게 아주 신통방통….”

“…그 집 아들이 장가….”

“…자네, 결혼은 대체 언제….”

“…이립이 지나도록 한 게 대체….”

들으니 모두 다 평화롭고 지루한 잔소리뿐이다. 물론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렇다 할 흥미로운 소식은 보통 사람들이 술 마시는 장소에서 펼쳐지니 이곳이 가장 제격이었다.

심지어 자신들끼리 히히덕거리는 저 손님들 옆에 술병을 하나씩 끼고 있었다. 이 마을에 기방이 없다면 분명 이곳이 정보 수집의 최전방일 테다. 괴담은 들리지 않았다. 녹은 그들의 소소하고 평범한 오지랖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 없는 듯하니 이 마을에서 하루 정도 묵어도 되지 않을까. 녹은 밥값을 치르기 위해 주모를 부를 적이었다.

“주모, 여기 계산….”

“그 공자 얼굴 한번 잘났지. 마을 처자들이 온통 모였다니까?”

“아무래도 혼자 온 거 같지?”

주막을 스쳐 지나가는 소녀들의 재잘거림에 녹은 주모를 부르려던 손을 거두고 일순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봤다. 음, 확실히 저들이 하는 소리가 내 얘기는 아니겠군. 마법으로 한 위장이 완벽하단 걸 깨달은 녹은 만족스럽게 주모를 불렀다.

“주모!! 여기 계산 좀 합시다!”

“배에서 내리는데 뒤에서 후광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있어야지.”

“얘 주접떠는 거 봐라. 아주 넋이 나갔네.”

“너도 보면 내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알걸?”

“그래그래, 그래서 지금 그 공자님 보러 가는 거잖아. 허풍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 보자.”

댕기 머리를 길게 늘인 아이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빨리했다. 소녀들의 심금을 울리는 유명 인사가 납신 모양이다.

‘웬만해서 저 방향으로 가지 말아야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꼭 식신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 마을에 보이는 식신은 사람들의 인구 밀도에 비해 적었으나, 언제 불어날지 모를 일이니 웬만해서는 사람이 드문 곳만 골라 다니는 게 낫겠지.

녹은 주모에게 값을 셈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드디어 일으켰다. 그녀에게 하루치 방값 또한 함께 건네주었다.

드디어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다! 녹은 사방이 막힌 곳에서 잘 수 있단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요새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건지 마법사들이 희한하게 잘 쫓아와서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없던 녹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큼직큼직한 이동을 몇 번이고 했으니 위험이 분명 그리 크지 않을 거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떠다니는 식신의 양도 미미하고, 들리는 괴담도 없으며, 거기다가 바다의 파도 소리는 심신의 안정까지 가져다주었다.

살아남기에 휴가가 있을 리 없었으나 때때로 판돈이 제대로 터진 것처럼 마을에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없는 날 또한 있었다. 녹은 오늘이 바로 그날이길 간절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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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히 씻은 녹은 마력을 감지해 내는 종을 창가에 매달아 둔 이후 빌린 방에서 대자로 뻗어 낮잠부터 잤다. 이틀 만에 청해 본 잠이다. 하루하루가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요새가 특히 그랬다.

덕분에 줄어든 마법사들의 수 또한 한 무더기는 될 것이다. 하가에서 나온 후 피 끓는 청년이 된 녹은 자신을 공격하는 마법사들을 봐주지 않았다. 내 목숨을 노릴 만한 배짱이라면 제 목을 내놓을 각오 정도는 있겠지.

그들은 뭉쳐 다니며 녹을 사냥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자신들의 목이 녹에게 훤히 내보인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어째서 녹이 씨앗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걸까. 하녹이 씨앗이기 전에 그 나무의 마력을 온통 흡수한 마법사라는 사실을 진정 모르는 걸까?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녹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마력 감지 마도구는 녹이 자는 순간에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물건이기에 정확도는 보증했다.

‘진짜 이 근처에 마법사가 없긴 한가 보네.’

하지만 저것만 믿기에는 아무래도 흉흉한 세상이었다. 언젠가는 마력을 기막히게 가리는 결계라도 개발해야겠다. 그러면 마법사들도 자신을 구별하는 데 애 좀 먹겠지.

지금이야 대마법사가 몇은 있어서 결계를 만든다 해도 그리 큰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세계수가 사라졌으니 대마법사가 사용할 마력 또한 자연히 고갈되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실력이 하향 평준화가 되기만 한다면…. 어쩌면 대충 사는 게 꿈이 아닐지도 몰랐다.

‘언젠가 꼭 만들고 만다.’

희망 부푼 생각은 녹의 잠을 몰아내었다. 바깥을 봐서는 한밤인 듯했다. 조용한 와중에 파도 소리만이 마을의 고요를 몰아내었다. 녹은 바람이나 쐬기로 하고서 문을 열었다. 이 얼마 만의 평화란 말이냐.

다행히 하늘은 맑았고, 운 좋게 보름날이었다. 달빛 덕분에 주변이 어둡지 않다는 것 또한 녹이 밤 산책을 결심한 한 가지 이유였다.

식신이 가장 활발할 때 또한 밤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식신은 점심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많아졌을 뿐이지, 엄청나게 불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한 명이라도 주위에 있었다면 이 정도 소량의 식신을 뿌릴 리 없지. 주변에 마법사가 없다는 반증이었다.

‘그래,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녹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바다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세계수의 마력을 온통 흡수하고 적응할 1년 정도는 정말이지 천방지축으로 튀며 마법사들을 피해 다녔기에 전국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잔잔한 마음을 가지고 바다를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마력 제어도 전보다는 훨씬 능숙히 해낼 수 있었고, 주변에 마법사도 없어서 목숨에 위협을 받을 일 또한 없었다.

보름달은 넓은 바다에 제 그림자를 담갔다. 하가에서 이리도 끝없이 펼쳐진 물을 본 적이 있었는가? 하홍의 오두막에서 본 정령들의 물가는 바다에 가까운 연못이었지, 진실로 바다는 아니었다.

녹은 한 줌의 평화를 즐기며 느리게 걸었다. 짧은 평화지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저기….”

누군가가 앳된 목소리와 함께 녹의 어깨를 잡았다.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녹은 그 낯선 자에게 퍼뜩 물러나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존재를 확인했다.

녹의 어깨를 쥔 유령 같은 자는 미려한 얼굴의 웬 공자였다.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높으신 집안의 자제 같았다. 지학(*15세)을 넘지 않아 보이는 그 공자는 어른들도 어둡고 고요해 나가기 꺼린다는 오밤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며 홀로 서 있었다.

‘…그렇지. 세상이 나를 편하게 내버려 둘 리 없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재앙이라 표현해도 알맞을 정도의 식신들이 떼를 지어 소년의 등 뒤에서 달려드는 걸 보며 녹은 한탄했다.

사특한 나비들이 떼로 몰려와 녹을 덮치려 했다. 아니, 저들이 덮치려는 쪽은 아마 녹 앞의 소년일 것이다. 저런 식신들에게 걸릴 만큼 녹의 마력 조절이 미숙하진 않았다.

녹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녹의 옷자락이 펄럭임과 동시에 나비 떼의 중심부에서부터 마력을 담은 화력이 폭발하듯 피어났다. 나비들은 목표를 집어삼키지도 못하고 불티로 스러져 갔다.

한밤이기에 그 불길은 강렬했다. 게다가 빛의 세기 또한 눈이 아플 정도로 부셨다. 식신이 평소보다 빠르게 몸을 태우며 사라져 갔다.

녹을 붙잡았던 소년은 어떤 난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챘다. 하긴, 무시하기도 힘들다. 뒤에서 쏘아져 나오는 불빛이 녹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으니까. 소년이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돌아본 풍경은 누군가 바닷가에서 일으킨 모닥불 따위가 아닌, 캄캄한 산중이었다. 바다도 아닌, 산.

“…….”

전말은 이랬다.

사실 공간이동으로 산에 소년을 데리고 온 건 녹의 의지였다. 녹은 식신 떼가 소년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걸 확인한 후, 반사적으로 그들을 태우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마법은 정확하게 먹혀서 식신을 빠르게 태웠다. 문제는 녹이 마력 조절에 실패했다는 점에 있다. 식신을 처리할 때도 기막히게 마력 조절을 해야 정령이니 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을 텐데, 어째 몇 번을 연습해도 저 정도 양의 식신을 태울 때는 통제 안 되게 마력이 질질 샜다.

게다가 이번 습격 때는 조절을 할 새도 없이 기습에 대비하느라 마력을 아주 그냥 내질러 버렸다. 이 정도면 정령은 물론이고 마법사들 또한 낌새를 알아채고 모일 것이다. 곧 자신을 찾는 마법사와 마법사가 아닌 것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겠지.

만일 거기서 혼자만 날랐다면 분명 이 공자는 큰 화를 면치 못했으리라. 녹은 자신을 향해 바닷가에서 무지갯빛으로 발광하며 떠오르는 불가사리 정령을 보고, 길게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이자와 함께 먼 곳으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허리춤에 있는 작은 청동 종은 공간이동을 한 후에야 진동이 멎었다. 사실 앞뒤 생각 없이 공간이동을 한 것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종이 제 몸을 빠르게 흔드는 데에서도 기인했다.

역시 냄새 하나는 기막히게 맡는 마법사들이었다. 자신의 마력에는 반응하지 않도록 설계했으니, 종이 울리는 의미는 다른 마법사가 다가온다는 경고의 역할이었다.

‘뭐, 일단은 피하긴 했는데. 이 공자를 어찌한다.’

물론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데리고 오긴 했지만, 데리고 온 후가 문제였다.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궤변이 먹힐까. 고뇌 좀 해 볼까 하던 녹은 그냥 편하게 가기로 했다. 기억 좀 지우고 뻔뻔하게 나가지 뭐. 어차피 마법사니 뭐니 말해도 못 알아들을 거 아닌가. 그리고 그걸 말할 생각이 없기도 했다.

녹은 공자를 관찰했다. 보통 자신이 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처음 이동하게 된 사람들은 경황없어하며 공황에 빠지는데, 눈앞의 공자는 주변을 침착하게 둘러볼 뿐이었다. 옷 또한 기품이 흐르는 것이 확실히 지체 높은 가문의 자식인 듯했다. 마을 소녀들이 웅성거렸던 원인이 그임을 녹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혹시 지금이 꿈인 줄 아나?’

녹은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이 마력을 가진 인물인지 확인했다. 허나 아무리 봐도 그에게 풍기는 마력은 전무했다. 그렇다면 마법사가 아니라는 건데.

‘아니면 마법사가 내민 새로운 미끼일 수도.’

확실히 오밤중에 나이도 어려 보이는 아이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것도 이상하고, 식신이 그를 향해 달려든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 녹이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말로만 듣던 미화인가.

‘확실히 외모로만 보면 그럴듯하긴 한데….’

뭐, 공자가 미화라면 그의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에 대한 애도는 좀 하겠으나, 녹을 노리는 마법사의 간계와는 관계가 없었다.

‘뭐가 되었든 일단 기억부터 지우고 수습하자.’

“공자.”

녹의 부름에 아이는 녹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녹 또한 그 공자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마력은 최소한으로. 눈 깜빡할 새 장소가 이동되고 식신을 태운 부분을 중점적으로 삭제하자. 녹은 마법을 걸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짧은 마법을 건 이후, 소년은 녹을 응시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보통 기억 소거를 진행한다면 그 마법을 당한 사람은 기억의 재정립을 하기 위해 잠시간 몸이 멈춘다. 눈이 흐려지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 군다.

몸이 굳은 걸 보니 마법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녹의 예상과는 반대로 어둠 속에서 녹을 응시하는 소년의 눈이 잠시간 반짝였고, 녹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차피 짧은 기억을 지웠으니 영혼이 빠져나간 듯 구는 것도 긴 시간은 아니겠지. 녹은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땅에 착지할 정도의 시간 이후에 소년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공자. 공자. 정신이 듭니까?”

“…정신은 항상 있습니다.”

쯧쯧. 그래, 방금 어떤 마법에 걸려서 정신이 날아갔는지 기억이 날아갔는지 넌들 어찌 알겠니. 소년에 대한 녹의 마음은 측은함만이 가득했다.

녹이 지운 기억은 분명 공자가 자신을 불렀던 시점을 기준으로 일각 전부터 지금의 산에 도착한 직후까지다. 그렇기에 뻔뻔하게 나올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산중이군요.”

‘그래도 주변 파악은 끝내주게 하긴 했네.’

아무리 보름이라도 이곳은 나무로 무성한 산의 한가운데였다. 나무들이 기를 쓰고 부신 달빛을 차단하기 위해 나뭇잎을 펼쳐 내었다. 뜬금없이 이동한 장소가 환경까지 주변 파악을 방해하는 데 특화되었음에도 소년은 무리 없이 파악해 냈다.

녹은 마음속으로 그를 향해 삼삼한 칭찬을 한 후,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홀로 이 오밤중에는 여기에 무슨 일이십니까?”

“…….”

소년은 말이 없었다. 이해는 한다. 바닷가를 걷던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겠지. 허나 희한한 점은 따로 있었다. 시종일관 침착하던 소년은 녹의 물음을 끝으로 황망함을 숨기지 않고, 녹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삼켜 내었다.

보통 마력이 충분한 마법사들은 밤눈 또한 밝기 때문에 어두워도 주변 구분을 잘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두우면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어두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녹의 눈을 직시했다. 착각인가? 뭐, 여기까진 착각이라고 하자.

녹이 기이함을 느낀 건 다른 부분에서다. 아이가 왜 이리도 차분하지? 겁에 질려서 말도 안 나오는 건가? 다 큰 어른이라 하여도 이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녹은 지레짐작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지금 바로 그 마을로 돌아가는 건 좀 힘들다. 어차피 성질 급한 마법사들은 녹이 그 자리에서 달음박질친 걸 확인하고서 하룻밤 안에 흩어질 것이다. 그들이 녹을 쫓으려 아무리 최대로 마력을 쏟아 이동해도, 녹이 도착한 곳에 한참을 못 미친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가끔 그걸 모르는 멍청이들이 자신의 마력 양을 생각 못 하고 녹을 따라가다가 마력 고갈로 제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하는 일이 빈번했기에 퍼지게 된 정보였다. 공자와 피신한 지금 위치 또한 그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이곳에서 지낸 후 소년을 마을로 돌려보내야겠다. 적어도 마법사들이 그 마을에서 모두 철수할 때까지만이라도 말이다. 녹은 땅에서 나뭇잎 하나를 주워 하늘에 대고 마력을 담아 불었다.

나뭇잎은 팔랑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뭇잎은 방금까지 녹과 소년이 있던 해양 마을에 도착해 그 주변의 마력을 탐지하고 사라질 것이다.

마법사가 마을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이의 부모가 좀 걱정을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변사체로 발견되는 것보다는 하룻밤 실종이 더 좋은 방향이겠지. 운이 좋다면 아침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이가 진실로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녹은 태연하게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어째서 이런 험준한 곳에 나이도 어려 보이는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은 위험하니 저와 같이 가시지요. 그동안 어디 사는 뉘신지나 들어 봅시다.”

“…허.”

아이의 입에서 바람이 샜다. 그래, 지금 상황이 와닿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겠지. 어이없을 정도로 정신 챙기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녹은 길 잃은 어린양을 안심시키기 위해 덧붙였다.

“아무래도 도깨비에게 홀린 듯한데, 저와 마주쳐서 다행입니다. 저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오밤중 산군에게 물려 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외람된 말이나 그 짐승의 울음소리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산 전체를 울리는 것이 가히 산신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는데요?”

❊ ❊ ❊

월월월!!

“이네스. 룬이 너 찾아.”

연구실 문이 열리고 우렁찬 룬의 목청소리와 함께 도언이 들어왔다. 이네스를 찾는다는 도언의 말과는 다르게, 룬은 문이 열리자마자 녹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며 주변을 뱅뱅 도는 룬은 두툼한 앞발을 앉아 있는 녹의 허벅지 위에 턱 하니 올려 두었다. 꼬리가 일으키는 바람이 시원했다.

녹은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친한 척하는 룬의 머리나 몇 번 쓰다듬어 주며 이네스가 얘기해 준 미화에 대해 떠올렸다. 미화 체질의 존재는 흔치 않아서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왔다. 녹이 처음 발견한 미화와 이네스가 도언과 처음 만났을 때는 희한하게도 대충 시기가 맞았다.

게다가 미화와 도언은 식신을 끌어들인다는 특징을 공유했지. 왠지 그 사실이 녹에게 떠나지 않았다. 과연 이 공통점은 우연일까? 일단 이네스에게 정보를 더 비벼 봐야겠다.

“룬이 나를 찾기는. 가주님이 민수 씨 찾는 거겠죠. 룬은 그냥 가주님 따라온 김에 방문이나 두드린 거고. 쟤는 문에다가 몸통 박치기 하지 말라니까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네. 여하간, 진예는요?”

“학원 갈 시간이라고 하던데.”

“아. 맞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진예가 학원도 다녀요?”

“학원이라고 해 봤자 일주일에 한 번인걸요. 그것도 진예가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는 거라. 뭐, 제가 이 시간에 집에 없기도 하고요.”

마법과 평화가 공존하는 안가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가, 아이의 사교육 이야기는 그런 안가에 비해서 넘치게 현실적이었다. 이네스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서 말을 뱉었다.

“진예가 학원에 갈 시간이면, 저도 이제 슬슬 나가 봐야 할 시간이겠네요. 사실 저도 잠깐 들른 거라. 오늘은 언제 가실 거예요?”

“이따가요.”

“지금.”

겹친 오디오는 의견이 달랐다. 이에 녹과 도언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겼다.

“제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계셔도 돼요. 언제나요.”

이네스는 그중 도언의 말은 못 들은 양 굴었다. 이번에도 이네스가 든든한 아군이 되려나 싶은 기대에 녹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자신감이 넘쳐 당차기까지 보이는 그의 얼굴에 도언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쏘냐. 아무리 진예가 없더라도 이네스가 도언을 잘 구슬려 주기만 한다면….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얼른 가 봐야겠다. 민수 씨. 이따가 봐요! 뮤에로토.”

“네? 잠깐만요. 이네….”

믿음직한 아군이 되어 굳건하게 등 뒤를 지켜 줄 줄 알았던 이네스는 제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더니 순식간에 귀걸이를 빛내며 땅으로 꺼졌다. 전조 없이 이리 사라질 줄 몰랐다. 이네스가 사라지자 연구실은 썰렁한 한기가 감도는 듯했다.

‘…적어도 쟤한테 확답받기 전까지는 가지 말아 줬으면….’

녹은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이네스를 잘 구슬려서 빼내야 할 정보가 산더미인데!

“그렇게 급한 일인가….”

“해사 훈련을 도맡는다고 했으니까요. 지금은 그녀가 정한 집합 시간으로부터 15분이 늦은 시간입니다.”

도언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알려 주었다. 녹이 정보통이 된 그를 흘겨봤다.

“잘도 아네.”

“보고는 받으니까요.”

앞발을 포개고 거기에 머리를 얹은 룬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자신과 함께 사는 자가 사라져도 이 녀석은 흥분하지를 않는다. 오히려 이네스가 사라지고 가장 격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녹이었다. 진예도, 이네스도 없고, 룬은 도움도 안 되니 이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함께 주장해 줄 입은 오로지 녹 자신뿐이었다.

“이제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얼른 가시죠.”

“집보다는 여기가 더 할 거 많거든?”

“이네스에게 책을 전해 줬으니까 끝난 거 아닙니까? 분명 여기 오기 전, 책을 직접 전해 준 후에 집에 바로 오겠다고 말한 건 녹이었습니다만.”

기억력도 좋다. 확실히 그냥 간다고 하면 안 보내 줄 것 같아서 책만 주고 바로 온다는 전제 조건을 붙인 건 녹이었다. 쓸데없이 칼 같긴. 이네스가 자신과 함께 싸워 주기만 한다면 엎을 수 있는 가벼운 조건으로 봤건만, 그녀가 증발해 버리는 건 녹의 계획에 없었다.

“또 여기서 남은 할 일이 있습니까?”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는 듯, 도언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게 물어보니까 할 말이 없는데? 뭘 해야 한다고 하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녹은 자신의 발치에 늘어져 있는 룬을 보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룬이랑 놀아 줘야 해.”

“…….”

“…….”

룬은 녹의 말을 알아듣고는 벌떡 일어나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정말 해치인지 개인지 모를 만한 풍경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이유였지만 녹은 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금세 한쪽 무릎을 접고 룬의 등을 쓰다듬으며 룬에 대한 자신의 효용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 룬도 집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하….”

“…이네스가 있어야 녹의 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단서 찾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리야?”

“저와 공유한 시간이 길어 보이는 지인을 녹이 놓치실 리가 없죠. 이네스라면 모를까, 녹은 나서서 친목을 도모하는 성격도 아니니까요.”

“설마 이네스한테서 나랑 나눈 대화 같은 것도 보고받냐?”

녹이 이네스를 마음속의 정보원으로 삼은 걸 역시나 알고 있는 도언이었다. 하긴, 여기에 온 이래로 녹은 이네스와 대화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녹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도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도언은 녹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후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리고선 위풍당당하게 호언장담했다.

“녹이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아는 거야 쉽죠. 이 세상에서 녹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자는 접니다. 심지어 녹보다도요.”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개그 좀 칠 줄 아는구나.”

장난이나 칠 줄 알지 이런 종류의 개그는 안 칠 줄 알았는데. 아주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게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녹의 불신 가득한 표정은 헛웃음 한 점을 흘려보냈다. 도언은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하듯 녹에 대한 상세 정보를 읊기 시작했다.

“하녹, 하해운의 장남, 출생지 조선, 7월 13일생, 단 거 좋아하고, 타로 카드 좋아하고, 집에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설렁설렁 살고 싶고, 귀엽고, 가장 중요한 기억은 날아갔으며, 마법사 혐오하고, 녹색 좋아하고, 당황하면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굳으며, 태연한 연기를 할 때면 말을 더듬고, 눈치 없고, 근데 또 감은 좋고, 쿡방 보는 거 좋아하고, 나비목에 속한 곤충 전반을 싫어하고, 돈 좋아하고, 호랑이 무서워하고, 예쁘고, 눈에 띄는 거 싫어하고, 깜찍….”

“그만그만그만!”

일률적인 어투로 줄줄이 뱉어 내는 걸 보아하니 기인 열전에 나가도 될 것 같다. 어디까지 하나 궁금했던 녹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스탑을 외쳤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보이는 도언은 녹의 외침에 아쉬운 듯 입을 닫아 냈다.

“안도언 좋아하고.”

기어코 한마디를 낼름 뱉고서 말이다.

녹은 들을 가치도 없는 마지막 말을 무시하며 도언이 말한 문장 가운데 제일 걸리적거리는 문장을 짚어 냈다.

“호랑이를 무서워한다고? 내가 예전엔 마법사도 한 번에 도륙하면서 다닌 사람이야. 무슨 호랑이를 무서워해. 말이 되냐? 딴 사람이랑 착각이나 하지 마시지.”

“그것 보세요. 녹보다 제가 녹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언이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와, 틀릴 리가 없다는 저런 태도라니. 그의 재수 없음이 지금 이 순간 특히나 빛났다.

‘내가 왜 얘의 헛소리를 들어 주고 있지.’

녹은 헛소리하는 도언에게 관심을 끊고 룬이나 주무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온몸을 이용해 녹과 맞닿으려 노력하던 룬이 벌떡 일어나 녹의 뒤로 달려갔다. 반사적으로 룬이 달려 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녹 님. 호랑이 무서워하세요?”

“………넌 좀… 기척 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조차 낼 수 없다. 녹은 제 뒤에서 기척 없이 튀어나온 청연 때문에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도언의 집에서도 그렇더니 왜 이렇게 유령처럼 나타나는 건지 알 수 없다.

룬이 녹과 떨어진 이유는 청연 때문이었다. 청연에게 한껏 아는 척했던 룬은 만족한 듯, 다시금 녹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세상에서 제일 놀란 것 같은 녹의 태도에 청연은 뒷목을 겸연쩍게 매만지며 사과했다.

“아이고,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아차, 어쨌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아직 여기 계셔서 다행이에요. 이네스가 가주님 좀 모시고 오랬어요!”

“이네스가?”

온종일 보이지 않던 청연은 아무래도 안가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아마 이네스와 함께 있었겠지. 이네스는 집에서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언을 찾는 걸까. 호출을 부르는 청연의 폼이 다급했다.

“지금 공원에서 태무가 가주님 부르라면서 날뛰고 있대요!”

“공원에서?”

“태무는 또 누군데?”

“일단 가시죠! 저도 자세한 건 못 들었고, 위급 상황이란 것만 들었어요. 룬, 너도 같이 가자!”

월!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 전후설명을 날려 버린 청연은 지팡이를 꺼내 들고 주문을 외웠다. 그가 주문을 끝마치자마자 시야가 변했다. 인간 셋과 짐승 하나는 분수가 멋진 안가의 공원에 도착했다.

“거기 벤치 날아가요!!!”

서걱-

도착하자마자 기다란 벤치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언제 꺼낸 건지, 도언은 검을 빠르게 발도해 벤치의 중간을 갈랐다. 날아오던 벤치는 두 덩이로 나뉘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뿐하게 벤치를 자른 도언은 녹을 제 뒤로 밀어 넣었다.

이 공원이라면 지금쯤 주민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주민들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에서 푸른 단체복을 입은 해사만이 지팡이를 땅 쪽으로 내려 경계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이네스 역시 긴장 서린 얼굴로 자세를 낮춰 땅을 짚고 있을 따름이었다.

도언이 벤치를 가른 이후 공원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해서, 벤치가 대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공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주 일행에게 조심하란 경고를 날린 해사 한 명만이 달려와 막 도착한 그들을 환영했다.

“금방 오셔서 다행입니다! 신입 녀석이 장로장님 오기 전에 사고를 거하게 쳤습니다, 사기를 푼다고 들어갔던 장소가 하필 태무의 굴이어서… 태무 꼬리에 사기 뭉치가 좀 묻었나 봅니다. 그걸 기어이 풀겠다고 거길 기어 들어가서는….”

“태무가 이곳까지 나와 있는 이유는.”

“놀란 태무가 호령하듯 울자 놀란 신입이 마법으로 가능한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력을 쥐어짰나 봐요. 저희도 설마 여기까지 날아갔을지 몰랐죠. 덕분에 낮잠 자다가 여기까지 내던져진 태무만 머리끝까지 화났어요. 꼬리에 사기 뭉치까지 엉켜 있어서 그 성격이 더 심해졌고요.”

“그 신입은.”

“태무를 날려 버리고 실신했습니다. 마력을 한계치까지 다 써서요.”

“아이고, 신입이라면 전에 사고 쳐서 꾼 만든 걔 아니에요? 대단한 사고뭉치가 입단했네요.”

청연이 신입의 전적을 상기시켜 주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이 공간에 있는 모든 마법사가 가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집중한 채 땅만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엄청난 비상사태긴 한가 보다.

전말을 전해 들은 도언은 이마를 찡그렸다. 도언은 자신의 뒤에서 상황파악을 하는 녹에게 시선을 던지며 청연에게 명령했다.

“집에 먼저 가 있어. 정리하고 갈 테니까.”

“그러게요. 태무가 얽혀 있는 위급 상황이라길래 그냥 떼 좀 쓰는 수준인 줄 알았는데, 사기가 꼬리에 묻었다니. 위험한 상황이긴 하군요.”

도언은 대꾸 없이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검은 무리 없이 부드럽게 땅속으로 들어갔다. 녹은 이 장소에서 빼곡하게 들어찬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청연은 기민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녹의 시야를 가렸다.

“일단 저희는 돌아가죠. 여기 있어 봤자 의미가 없어요. 돌아가서 설명해 드릴게요. 뮤에로-”

“태무 튀어나와요!!”

청연이 주문을 채 끝내기 전에 땅속에서 튀어나온 건 거대한 짐승이었다. 짐승은 집채만 한 풍채를 자랑하며 녹을 향해 튀어 올랐다. 녹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총을 꺼내 들어 발포하려 했다.

그 호랑이의 순둥한 눈만 보지 않았더라면-

녹을 낚아챈 호랑이의 등가죽을 잡은 건, 땅에 박혀 있던 검을 뽑고 달려든 도언이었다. 호랑이는 그들을 낚아채고선,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는 공원을 정적으로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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