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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깨비 도령 (13/24)

11. 도깨비 도령

호랑이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 호랑이는 보통의 호랑이가 아니었다. 그 어떤 호랑이가 땅속으로 꺼진단 말인가. 차라리 두더지면 이해라도 하겠다.

호랑이에게 옷자락을 물려 바닥으로 처박힐 때, 녹은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얼굴이 땅에 부딪히는 고통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그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

땅속에 들어갔음이 분명한 호랑이는 지금 녹을 물고서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빽빽하게 솟아난 나무를 요령 있게 피하는 호랑이는 속도도 줄이지 않고 앞으로 치고 달려 나갔다. 그 공원의 땅속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물론 그런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지만…….

옆을 보니 비탈길 경사 아래 조금 전까지 자리하고 있었던 공원이 보였다. 마치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는 그 공간에서는 푸른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뭉쳐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결국 땅속으로 들어가며 행한 건 작은 공간이동이었다.

호랑이가 목표한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웬 거대한 동굴 안까지 바람처럼 들어온 태무는 굴의 중간에 물었던 녹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동굴 안은 중간중간 밝혀진 마광석으로 인해 어둡지 않았다. 녹은 그제야 자신을 물고 굴로 들어온 이 호랑이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오면서 느낀 바처럼 호랑이는 말 그대로 집채만큼 컸다. 웬만한 건물 1층쯤의 높이를 가지고 있었으니, 저 녀석이 앞발을 들고 일어서면 키가 그보다 배로 뛸 거다. 황색 바탕의 검은 줄무늬는 확실히 일반 호랑이와 같았지만, 꼬리만큼은 복실하고 하얀 털로 뒤덮여 있다.

비교적 작은 동물의 모습을 하는 정령과 달리 크기가 큰 녀석들은 백이면 백 마생물이었다. 고로 이 호랑이도 정령이 아닌 마생물이리라. 이네스의 회랑 복도에서 그림으로 본 적 있는 녀석이었다. 호랑이는 검은 홍채를 빛내며 녹에게 물었다.

- 네 녀석은 누구냐.

말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마생물이라면 꽤나 나이를 먹은 놈이겠군. 공간이동을 한 것으로 보아 주술까지 부릴 수 있는 녀석 같았다. 사기 뭉치가 묻어서 빡쳤다고 했던가. 청연에게 들은 바로는 사기 뭉치에 의해 꾼이 되는 마생물은 이지가 흐린 녀석들이라고 했었으니 이 녀석이 사기에 잡아먹혀 꾼이 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납치한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까칠하게 투덜거린 녹은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오늘 길에 안정적으로 물려 와 다친 곳은 없었다.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 보여 사격을 하지 않고 그냥저냥 끌고 가는 대로 끌려왔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는 생각을 못 했는데, 다시 보니 지금이 탈출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들 하지 않는가.

물론 고리가 해제되어야 하겠지만, 녹은 손톱만큼의 희망을 품었다. 혹시 모르니 권총은 총지갑에 넣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호랑이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혹여나 숨어 있던 마법사가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버릇처럼 긴장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태무가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 가주는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가주의 냄새가 이리도 진하게 나는 거지?

“실수는 네가 했으면서 말이 많네. 여하간 네가 원한 사람도 함께 왔으니 된 거 아닌가?”

태무의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튀어나온 사람은 하필이면 도언이었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녹의 마음속에 새싹처럼 자라고 있던 탈출에 대한 희망이 구둣발에 짓이겨졌다. 새옹지마는 개뿔이었다.

태무의 등에서 내린 도언은 자연스럽게 녹에게 다가와 그를 살폈다. 그의 웃옷은 늘어나 어깨에 흘러내렸고, 옷의 등판은 태무의 이빨로 인해 뻥뻥 뚫렸다. 외투 또한 얇은 걸 입고 다니는 녹이었기에 그가 입은 웃옷들은 몽땅 다 영 못 쓰게 되어 버렸다. 태무라는 신사적인 운송 수단의 결과였다.

“덕분에 옷이 넝마가 되었군요. 그거 벗고 일단 이거라도 입고 계세요.”

도언은 자신의 얇은 반팔티를 제한 옷들을 모두 녹에게 벗어 주었다. 뻥뻥 뚫린 옷감 속으로 냉기가 차게 들어왔기에 녹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녹이 냉큼 걸레짝이 된 제 옷을 벗을 때, 태무가 소리쳤다.

- 가주의 냄새가 어째서 나나 했더니 그 고리 때문이었군! 대체 무얼 만들어 이 청년에게 걸어 둔 것이냐?

“알 거 없어.”

태무는 그의 단칼 같은 말에 입맛만 쩝 다셨다. 녹은 태무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도언이 자신을 이용해 세계수의 가지에 어떤 식을 새겼나 보군. 강력한 효과를 내는 마도구의 특성상 자신의 무언가를 제물로 만든 도구일 가능성이 컸다.

정보를 더 듣고 싶었으나 도언은 고리가 무언가 묻는 태무의 말을 냉정하게 원천 봉쇄해 버렸다. 녹이 옷을 꿰어 입자, 도언이 그의 소매를 접어 주는 데 집중하며 말했다.

“태무에게 제 위치를 알린 건 저였습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착각하고 당신을 낚아챈 모양이에요.”

- 크흠흠.

호랑이가 자신의 실수에 겸연쩍다는 듯 뒷발로 둥근 귀 뒤쪽을 벅벅 긁었다. 큰 덩치로 인해 긁는 소리가 습한 동굴에 메아리치며 울렸다. 다리 한쪽만 움직이는데 일어나는 바람은 또 얼마나 강한지, 도언의 옷이 없었다면 아무리 열이 많은 녹일지라도 으슬으슬 떨 뻔했다.

반팔 차림이 된 도언은 추위에도 떨지 않고 그 호랑이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네가 공원에서 날뛴 이유에 대해선 간단하게 들었다. 꼬리 좀 보자.”

태무는 순순하게 자신의 꼬리를 보여 주었다. 덕분에 녹은 도언과 함께 그의 꼬리를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하얀 솜털을 뭉쳐 놓은 것 같은 몽실한 꼬리 한가운데에 삿된 기운을 풍기는 검은 것이 뭉쳐져 있었다. 모양은 털실 뭉치와 비슷했으며, 꾸물거리며 꼬리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벌레 같았다. 게다가 그 검은 뭉치 주위에 붉은 피로 꼬리가 척척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 그저 사기 뭉치라면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내가 이딴 먼지에게 당해 꾼이 될 정도로 멍청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번은 좀….

“…다친 게 문제군.”

도언이 들고 있던 검을 들어 뭉치의 정 가운데를 찔렀다. 검 끝이 어딘가를 건들자마자 지렁이처럼 꿈틀대던 검은 실이, 찔린 곳을 기점으로 몽땅 빨려 들어갔다. 그 검은 뭉치는 곧 단단한 결석이 되어 태무의 꼬리에서 떨어졌다.

그 희한한 돌덩이는 바닥에 닫자마자 퍼석하고 부서져 내렸다. 도언이 잿더미가 된 그것을 밟아 가루로 만들 때까지, 녹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지가 흐린 마생물만 사기에 먹힌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리 봐도 태무는 이지가 흐린 편은 아니었다. 말도 할 수 있는 마생물이 이지가 흐린 축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인간이 아닌 마생물이 지배했을 거다.

“그도 그렇습니다만, 다친 부위 위에 있는 사기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벗겨진 마생물의 피부 위에 파고들어 버리거든요. 어찌해야 할 시기를 놓치고 꾼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제 꼬리에 기분 나쁘게 파고들려던 사기가 사라지자, 태무는 허리를 숙여 환부를 핥기 시작했다. 그가 커다란 혓바닥으로 제 피를 핥을 때마다 꼬리의 상처는 나아 갔다. 빠른 자가 치유력이었다.

- 마법사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이네스에게 보여 주는 것도 안 내켜. 이네스가 하는 외치는 소리 들어 보니 신입이 친 사고라고 하더구먼. 내참, 더 화나서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 좀 집어 던졌네. 감히 신입이 나를 던져?

오자마자 일행에게 떨어진 나무 벤치를 말하는 건가 보다. 그 벤치는 도언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지 오래였다.

- 우리 집에 있는 사기 뭉치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거늘. 내 동굴인지도 모르고 기어 들어왔다가 꼬리에 있는 사기를 보고 해제한답시고 쿡쿡 쑤셔 대니 단잠을 자고 있던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

태무는 불퉁하게 말을 이으며 부지런히도 핥았다. 덕분에 꼬리에 젖어 있던 붉은색이 빠른 속도로 빠졌다.

- 귀찮아서 경고 한번 해 줬더니 겁에 질린 녀석이 보지도 않고 날려 버리지 않겠나. 비몽사몽 한 상태여서 방어를 하지 못했네. 덕분에 떨어질 때 꼬리에서 피 좀 봤지. 나중에 그 녀석 내 얼굴 한번 보러 오라 그래. 그때까지 동굴을 옮기지 않겠네.

“그러지.”

가만히 듣고 있던 녹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동굴?”

“태무는 기분에 따라 보금자리를 옮깁니다. 많은 자가 태무를 찾고 싶어도 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지요.”

- 마법사들이야 만나는 것조차 귀찮다고. 이번 위치가 아무리 도심과 붙어 있다고 하더라도 산삼보다 더 찾기 힘들진대, 그 신입이라는 녀석은 어떻게 내 보금자리를 찾아왔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에게 혼나고, 이네스와 한 장로에게 혼나고, 그리고 또 너에게 혼날 테니 운이 나쁜 축에 속하겠지.”

- 동굴을 밝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이사가 취미가 되겠어.

도언의 말을 끝으로 일부 붉었던 꼬리를 하얗게 만든 태무는 몸을 좌우로 크게 털었다. 포메라니안과 같은 모양의 꼬리 때문인지, 녹은 앞에 있는 호랑이가 고양잇과 형태인지 갯과 형태인지 헷갈렸다.

그의 웅장한 털가죽을 구경하던 녹은, 고개를 돌려 이 어둑한 곳을 밝혀 주는 발광원을 찾았다. 동굴의 안쪽에는 밝게 빛나는 마광석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녹은 도언과 태무에게서 떨어져 마광석이 박혀 있는 벽에 다가가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장소가 계속 바뀌는 보금자리라고 하더라도, 저 두툼한 앞발을 보면 저런 마광석은 태무가 직접 한 게 아닌 듯했다. 물론 주술로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마광석 밑에 그려진 식은 주술진이 아닌 마법진이었다.

확실히 마법이 잘 들었는지, 마광석이 바위에 위화감 없이 스며들은 태가 났다. 태무는 분명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저리 단언하는 성격에 아무 마법사에게 집을 맡기진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믿을 만한 마법사가 시공해 준 건가?

믿을 만한 마법사라. 저번 꿈속에서 홍화 저에 가기 전, 사한이 믿을 만한 마법사가 있으면 데리러 오라고 했었는데. 그때 녹은 도언을 데리고 갔었다. 태무 또한 도언에게는 허물없었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도언의 솜씨일까?

마광석 주변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은 융화진이었다. 물체와 물체를 결합할 때 쓰는 비교적 가벼운 느낌의 마법이다. 녹의 마력은 봉인당했지만 마법사가 쓰는 진의 형태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물론 이런 진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웬만한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쓰는 걸 효율적이지 않다며 꺼려 했고, 이네스가 사물에 새긴 진은 마법진이 아닌 주술진이었다. 마법진과 주술진은 같은 효과를 내는 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양과 형태가 확연히 달랐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벽에 마법진을 새기는 자는 녹의 역사상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자신의 연구실에 마법진으로 떡칠을 한 인물, 나이가 어렸음에도 마법에 능통했고, 기이한 행동과 사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괴짜 녀석.

하가의 마법사, 홍이었다.

녹은, 마법진으로 인해 도언의 과거 후보로 급부상한 홍의 필체를 떠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물론 그런 방식을 굳이 홍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가능성을 부지런히 모아야 했다. 마법진의 그림은 홍이 썼던 것과는 미세하게 달랐다. 역시 홍은 아닌가?

- 나의 약점은 마법사들에게 비밀이다. 네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주께서 직접 비밀을 설명할 정도면 믿을 만한 자라는 거겠지. 부디 비밀을 지켜 주길 바란다.

태무가 어느새 다가와서 녹에게 속삭였다. 바로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녹이 귀를 손으로 덮고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이만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척이 하나도 없다니. 청연도 그렇고, 왜 이렇게 기척을 죽이고 다니는 건가. 히죽이며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태무가 녹의 커다란 행동거지에 껄껄 웃었다.

- 전후 사정 없이 데리고 온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냄새 때문에 가주인 줄 알았지 뭐냐.

“그건 괜찮아. 다친 곳도 없는데 뭐.”

쟤가 먼저 말 놓았으니까 나도 놓아도 되겠지? 태무의 뜬금없는 납치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쿨한 녹은 사소한 존대법에 신경을 썼다.

- 호탕한지고! 그리 생각해 주어서 고맙구나.

“그나저나 네가 말하는 약점이 정확히 뭔데?”

“웬만한 이지가 서린 마생물도 다친 부위에 사기가 닿으면 꾼이 될 가능성이 있단 것 말입니다. 그건 해사들도 모르는 사실이니까요.”

“해사들이 사기를 푸는 전문인 아니었어?”

- 안가에 귀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마법사니까 말이다.

단언으로 대답을 한 건 태무였다. 그 말을 들은 녹은 도언이 해사를 정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마 이네스가 해사의 무술 스승을 부탁했었을 때였다.

‘해사는 위험해요.’

그가 해사에 대해 위험하다고 했었을 때 왜 위험한가 했더니 결국 이런 이유였나. 도언 또한 마법사에 대해 완벽히 믿지는 못하는 듯했다. 아무리 같은 가문인이라도 말이다.

- 해사는 안가에서 태어난 마법사가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마법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태생이 다르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이지.

“그들이 가문원 중 태생적으로 가장 마력 이해도가 높으므로 해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교화가 완벽한 자들만 안가의 일원으로 받고 있기는 하나,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요.”

마법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현명한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경계하면 할수록 좋았다.

“이네스는 이 약점을 알아?”

“알죠. 그녀가 바로 마생물인 걸요.”

- 허나 그녀가 해사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 그들이 없다면 그녀가 정령 연구에 시간을 쏟기 힘들거든. 그놈의 씨앗 찾기는 언제 끝날는지.

익숙하고도 친하지 않은 단어가 호랑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녹은 자신이 잘 들었는지 확인받기 위해 되물었다.

“씨앗?”

- 그, 하녹…. 아, 너희 인간들은 모르겠구나.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전설로 여겨질 만하지. 이리 말하면 알려나? 세계수의 씨앗 말이다. 여하간 씨앗 찾기엔 정령이 제격이라면서 들입다 정령을 파더구나. 자네가 이네스 말하는 거 보니 만나 보았을 텐데, 그녀는 한번 관심에 들어오면 해결될 때까지 파고들어서…. 이럴 때 보면 같이 사는 해치 녀석이랑 똑같아. 아주.

이야기를 들은 녹의 숨이 멎었다. 이네스가 정령을 공부했던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이런 소리는 없었는데? 녹은 멍하니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같은 사실을 들었음에도 도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저 자식, 이네스가 정령을 연구하는 게 나 때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군.

순식간에 녹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정령에 대해 미친 듯이 연구한다고 들었는데, 그 ‘미친 듯이’의 원인이 자신이었다니. 그녀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그녀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 제 일신의 안전은 확신받지 못한다. 그녀는 녹에게 아군일까? 적일까?

녹이 불안감에 서서히 잠식되어 갈 때쯤, 도언이 나서서 불같이 치솟는 그의 불안을 잠재우려 입을 열었다.

“이네스가 씨앗을 찾는 이유는 그를 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자를 관리인으로 내세우겠습니까? 그냥, 가벼운 동경이죠.”

- 가벼운 동경은 무슨. 본 적도 없는 존재에 내 그리도 미친 듯이 열광하는 용은 처음 봤다. 안가의 사람들이 가주를 보고 열광하는 걸 다 합쳐도 그만큼이지 않을 거외다. 정령을 연구하기 위해 백 년의 시간을 넘게 썼다고 했었을 때야 살짝 미쳤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게 씨앗을 찾기 위한 여정 중 하나란 걸 알았을 때야 그녀가 완전히 미쳤다는 걸 인정했다. 하여간 집념 하고는. 용들은 항상 그렇다니까? 아, 내가 이런 얘기 했다는 건 이네스에게 비밀이다.

에잉, 쯧쯧. 태무는 혀를 차며 쉴 틈 없는 그녀의 열정에 애도를 표했다. 녹은 그런 중요한 말은 쏙 빼고 이네스가 정령에게만 미쳐 있다고 말해 준 도언을 노려봤다. 그의 눈빛에 도언은 녹의 눈을 피해 휘파람을 불며 딴청이나 피우고 있었다. 저 자식. 집 가면 보자.

- 그나저나 자네 이름은 무언고? 인사가 늦었다. 나는 태무라고 한다네.

“…김민수.”

‘태무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던 도언 또한 족쇄니 고리니 채우며 구속하는데, 이네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면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두 배로 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물론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 ❊

태무는 빛나는 마광석에 붙어 앉아 빛을 쬐며 털을 고르게 핥아 정리하고 있었다. 태무를 사기에게 구출해 주고 곧바로 왔던 곳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도언은 영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검을 들고 동굴 곳곳을 돌아다니며 허공에 검을 찔러 넣는 행동을 반복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벽에 조그마한 검은색 결정을 검 끝으로 눌러 석화시키는 중이었다.

녹은 일련의 행동을 하고 있는 도언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이네스가 정령에 미쳐 있다고 했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근데 정령에 미친 이유가 씨앗 때문이라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왜 말 안 해 줬어?”

“어차피 쓸데없는 말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안가에서 사리고 계시는데, 이런 말까지 듣는다면 당신은 이네스 앞에서 긴장으로 돌이 되고 말걸요. 이네스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아십니까? 괜히 경계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가주의 의미심장한 손님 쪽이 훨씬 대우가 나을 겁니다.”

“그 의미심장한 손님 쪽도 이네스의 경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은데….”

“만일 그녀가 당신에게 의심을 한 점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당신이 안가에 오자고 조르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괜히 골치 아픈 일은 사양하고 싶군요. 이네스가 얼마나 끈질긴데요.”

“너보다?”

“…….”

말이 없는 걸 보니 제 주제 파악을 나름 잘하고 있긴 한가 보다. 그래, 집념과 집착의 인격화라고 한다면 안도언이지 누구겠어. 녹은 목에 걸린 고리나 한 번 더 갉작였다.

도언은 그 대화를 끝으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었다. 손톱만큼의 결정을 얼마나 빠르게 지워 나가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결정을 재주도 좋게 찾아 내고 없앴다. 그러한 결정은 동굴의 안으로 갈수록 많아졌다.

“태무에게 묻은 사기만 처리하고 가면 되는 거 아니었어? 뭐 하고 있는 거야?”

“사기 뭉치의 핵을 없애고 있습니다. 태무가 해사에 짜증 낼 때 수가 불어났나 보군요. 사기는 좋지 않은 감정을 먹이로 뭉치가 증식하곤 합니다. 해사들이 달려들어 처리하느니 차라리 제가 혼자 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곧 청연이 올 터니 그때까지 녹은 쉬고 계십시오.”

녹은 도언의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서 사기의 핵이란 걸 관찰했다. 반짝이는 핵은 흑요석처럼 빛났다. 이게 그 어둑어둑한 뭉치의 씨앗이라는 거지.

하나의 결정을 응시하고 있자니, 검은 연기가 결정에서 새어 나왔다. 연기가 물체와 같은 질감으로 변해 결정을 감싸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제야 결정은 태무의 꼬리에서 봤던 사기 뭉치 형태가 되었다. 결정의 빠른 변화에 눈을 키울 때…….

퍼석-

도언이 꿈틀거리는 두꺼운 실연기를 피해 결정을 검 끝으로 눌렀다. 검은 연기는 사라졌고, 결정은 돌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히 가까이 가지 마세요. 뭉쳐지기 시작한 사기를 요령 없이 건들면 폭발합니다.”

가지가지 하는 결정이었다. 이네스는 해사란 게 소방관과 비슷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보니 폭발물 처리반에 가까웠다. 녹은 뒤로 물러나며, 도언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연기화가 시작된 결정은 요령 좋게 연기를 피하며 검을 박아 넣었고, 아직 결정만 있는 사기는 가차 없이 검으로 썰었다.

해사는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자가 뽑힌다고 했었지. 마력은 봉인당했으나 마력에 대한 이해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던 녹은 그의 작업 형태가 훤히 보였다.

보통은 실의 끝을 찾아 조심스럽게 풀어내서 결정을 삭제하는 법을 쓰겠지. 딱 보니 각이 잡혔다. 그러니까 이름을 해사라고 지은 게 아닌가. 엉켜 있는 무언가를 푸는 자들이다. 안전하긴 하나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도언과 같은 방식은 확실히 해사들이 흉내 내지 못할 만한 방식일 테다. 담대해야 하고, 신속해야 하며, 정확도가 높아야 한다. 녹에게는 그게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괜히 놀고만 있으려니 미안했던 녹은 꿈질거리며 연기를 내뿜기 시작하는 결정 하나를 구석에서 발견했다. 그는 품에서 글록을 꺼내 결정을 조준하고, 총알이 연기에 닿지 않을 타이밍에 격발했다. 결과는 깔끔한 성공이었다. 총알이 박힌 결정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쉽네.

- 내 굴에서 뭐 하는 짓이야!!

저번에 깜빡하고 소음 무시 마법을 걸지 않은 총을 가져왔던 녹은,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덕분에 총성이 동굴에 메아리치며 울렸고, 얌전했던 태무는 총을 가지고 있던 녹에게 성냈다.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어라? 나 진짜…….

호랑이 무서워했었나?

녹이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날아드는 태무를 보고 기절하기 직전 했던 생각이었다.

❊ ❊ ❊

타닥- 탁, 타닥-

모닥불이 타며 팝콘처럼 불티를 튀기는 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눈을 감아도 모닥불의 붉은 색감이 눈꺼풀을 뚫고 존재감을 뽐냈다. 녹은 이마를 찡그리다가 눈을 떴다. 자신은 동굴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눈앞에서는 모닥불 하나가 불꽃을 일렁이며 춤을 춘다. 변덕스러운 불은 명도를 달리하며 동굴 안의 빛을 삼켰다가 뱉어 냈다. 녹은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봤다. 태무의 호령을 듣고 기절했던가. 이래서야 태무를 날려 버리고 기절했다던 신입 해사와 다를 게 뭔가.

‘아니지. 걔는 마력을 한계까지 써서 기절했다고 했었지.’

자신처럼 두려움에 퓨즈가 나가지 않았단 거다. 적어도 신입은 달려오는 호랑이를 날리긴 했으니까. 위협하며 달려오는 호랑이를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했다니, 녹은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약점에 기가 찼다.

언제부터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이 사실이 마법사들 귀에 들어가면 좋아서 날뛸 모습이 눈에 훤했다. 가능한 필사적으로 감춰야지. 호랑이가 현대 도시에서 성내며 돌아다닐 가능성만 조심하면 되겠지.

“도령. 이제 들어가도 됩니까.”

웬 앳된 목소리가 동굴 바깥에서 들려왔다. 당연히 태무나 도언의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했던 예상이 완벽하게 깨졌다. 저건 또 누구야. 녹은 어리둥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와서 동굴 안을 둘러보니 자신이 있었던 태무의 동굴과 다른 곳이다. 마광석도 박혀 있지 않고, 동굴이 그리 넓어 보이지도 않았다. 가장 기함할 만한 점은 제 몸에서 마력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

녹은 손가락을 튕겨 봤다. 녹의 검지 위에 조그만 불꽃이 라이터처럼 일어났다.

‘…마력이 돌아왔잖아?’

녹은 목을 더듬었다. 시종일관 불쾌했던 나무 고리가 사라져 있었다. 발목을 구속하던 아타움 역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도언도 없고, 태무도 없고, 도언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할 자신의 조선 시대 의복 차림까지. 녹은 깨달았다.

이거 꿈이구나.

“아직입니까?”

동굴 끝에서 누군가가 궁금한 듯한 음성을 내었다. 아마 동굴 속 인물을 향해 말하는 것 같은데… 동굴에 있는 자는 자신뿐이니 정황상 저를 부르는 것이리라. 모닥불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보통 꿈이 아니었다.

‘또다시 세계수의 꿈속으로 들어와 버렸군.’

이놈의 나무 쪼가리는 또 무엇을 보여 주고 싶어서 꿈을 펼친 건가. 녹은 이 꿈속의 연도를 가늠해 보려다가, 동굴 안에서는 머리를 굴려 봐도 모르리란 걸 잘 알기에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건 소년이 누군지만 알면 언제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녹은 자신을 불렀던 자를 보기 위해 슬그머니 까치발을 들고 동굴의 입구로 다가갔다. 비단옷을 입고 있는 한 소년이 동굴의 벽에 기대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닥불이 일지 않은 동굴의 바깥은 그저 암흑이었고, 그런 암흑은 별을 발견하게 해 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모닥불에 의지해 소년을 관찰했다. 옆태가 예쁘장한 것이 아역 배우 뺨치네. 낮아지기 시작할 기미를 보이는 목소리와 남자 복식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오인할 만한 외모였다. 아이는 자신보다 어려 보였고, 역시나 소년이었으며, 자신이 본 적 있는 아이였다.

‘…미화 공자네.’

마법사들에게 쫓기고 있을 시절, 해안가에서 식신 떼를 이끌고 자신을 불렀던 소년이었다. 현대의 눈으로 보니 색다르긴 하다. 하여간 이 공자와 산속에서 하룻밤 지낸 거라면 지금이 언제인지 가늠이 되었다.

‘하가가 망하고 2년쯤 후로군.’

식신 태우고 몰려올 마법사들을 피해 공자를 납치했던 그 시점이었다. 납치한 거 변명하는 것도 귀찮아서 산에 오자마자 소년의 기억을 지웠던 일 또한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리고 왜 혼자 이곳에 있는지 되려 묻기까지.

지금은 아마 산속을 헤매기 직전에 발견한 동굴에서, 임시 보금자리의 편의를 위해 소년을 바깥에 세워 두었을 시점인가 보다. 마법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산 벌레를 쫓기 위한 마법을 풀고.

그 모든 걸 일반인 앞에서 진행할 수 없어 동굴이 안전한지 한번 보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2백 년도 훨씬 지난 일이라 기억이 흐리긴 하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별을 헤고 있었던 공자가 몸을 돌렸다. 모닥불에 비친 불빛에 공자의 눈이 또렷이 눈에 담겼다. 텅 비어 있는 눈. 맞아, 저 공자, 저런 눈을 하고 있었지. 녹은 허무히 숨만 쉬는 듯한 공자를 데리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적당한 만큼의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만 불이 필요하긴 한데, 동굴이 서늘하니 여름이라도 불가가 덥지는 않았다. 녹은 축축한 동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조금만 여기서 버티고 있다가 동이 트면 내려갑시다. 지금 여기서 움직이는 건 위험하니까요.”

공자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아이는 시종일관 표정이 없었으나, 그 밑에 옅게 깔린 음울함을 녹은 읽을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지하철역에만 나가도 볼 수 있는 음울한 면면들과는 차원이 좀 달랐다. 그들보다 더 깊은 파란색이었다.

‘어린애가 뭐 때문에 저리 죽상이지. 갑자기 산속으로 들어온 게 충격이 컸나.’

하진이의 영향인지, 기본적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녹이었으나 이 시절의 녹에게는 그들에 대한 배려가 좀 부족하긴 했었다. 전후 사정 설명도 없이 들입다 납치한 데다 곧바로 기억 소거라니. 해안가에 잘 있다가 순식간에 오밤중 산속에서 조난당한 아이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다. 심지어 아이에겐 산속에 들어온 기억이 없었다. 얼마나 황당할까.

녹은 이 당시 마력 운용도 미숙하고, 그렇기에 마법사들에게 번번이 뒤를 밟혀서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을 때였지. 이게 다 마력 교란 결계를 발명하기 전이라서 그렇다.

여하간 과거의 자신이 실수했던 것이니, 녹은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어째서 여기에 홀로 계신지 모르겠으나, 제가 책임지고 공자의 가족에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저는….”

아, 그때 이름 뭐라고 했었더라.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안 난다. 아무거나 말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

“김민수라고 합니다.”

❊ ❊ ❊

“도령, 이제 들어가도 됩니까.”

녹은 모닥불 앞에서 눈을 떴다. 자신은 동굴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동굴 바깥에서 정확히 방금 전과 같은 어투와 말로 자신을 부르는 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녹이 한탄했다.

‘아…. 이름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보통 세계수가 꿈을 보여 주는 이유는 녹에게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그리고 그걸 녹이 보게 되면 꿈에서 빠져나온다. 즉 그 과거가 꿈에서 나오는 열쇠인 것이다. 만일 겪은 과거와 다르게 행동해 그 열쇠의 순간을 맞지 못한다면, 세계수는 시간을 다시 되돌려 과거와 같은 선택을 종용한다.

그렇기에 저번 꿈에서 녹이 꿈임을 자각했어도 하진을 데리고 하가 바깥을 나가지는 못했을 거다. 이리 생각해 보니 세계수의 간섭을 피한 도언이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였다.

하여간, 이름부터 통과가 안 되었다 이거지.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

녹은 투덜거리며 공자를 데리고 오고, 통성명을 다시 시작했다. 이것 참, 김민수는 과거와 다른 이름이라 안 된다 이거지. 과거에 여기 오기 전에 들었던 마지막 이름이 뭐였더라? 녹은 기억을 뒤져 보았다. 그래도 세계수가 양심은 있는지 기억 한구석에 수납해 둔 이름 하나를 선명하게 떠올리게 해 주었다.

“저는… 동이라고 합니다. 귀공께선?”

“…그냥 공자면 됩니다.”

‘정답!!’

이름도 말하지 않는 공자의 싹수없는 답변을 뒤로한 채, 녹은 이름을 맞힌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당겼다. 이것 참, 무슨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수가 무얼 보여 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과거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것 같다.

정신을 반쯤 빼놓고 흐름에 몸을 맡기면 쉬워진다. 녹은 자신의 의식을 배제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여하간 통과했다는 기쁨에 취한 녹은 자신에게 까칠하게 가시를 세우는 공자에게 말을 걸었다.

“네, 이름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그러실 수 있죠. 이해합니다. 여하간 어쩌다가 산중에 길을 잃으신 듯한데, 원래부터 혼자셨습니까? 어디서부터 여기로 오신 겁니까.”

“…항구가 있는 곳. 온하 마을이었습니다.”

공자는 체념한 듯이 말을 텄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피하는 것이 생각이 많아 보였다. 과거에는 몰랐었는데 지금 보니까 왠지 네 살짜리 조카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놀아 주는 삼촌 같은 모습이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사이로, 어둠을 몸에 인 나비 한 마리가 때를 모르고 동굴 안으로 팔랑이며 날아왔다. 표적은 아마 공자인 듯 보였다. …근처에 마법사가 있었으면 아마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식신이 날아들었을 텐데, 한 마리뿐이면 길을 잃은 녀석이다.

미화란 거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체질이었다. 근처에 마법사가 없어도 식신이 자꾸만 튀어나오니 말이다. 녹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종을 흘겨봤다. 아무 울림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 확실히 근처에 마법사는 없어 보였다.

공자를 보니, 나비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녹은 손가락을 부딪쳐 가볍게 식신을 튀겨 없애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 바깥에 산짐승을 쫓아내는 표식을 하는 걸 깜빡했군요. 이 안은 안전할 테니, 공자께선 여기서 나오지 마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공자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말수 진짜 없네. 산짐승을 쫓아내는 표식 같은 게 있다고 믿는 거야, 귀찮아서 묻지도 않고 두는 거야? 바깥에 나가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던 녹은 주변에 결계를 치고는 날아온 식신에 청동 종이 잡지 못한 마법사가 근처에 있나 순찰하러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여기는 과거에 했던 행동이었는지, 리셋 되는 일은 없었다.

동굴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마력이 느껴지는 이 느낌, 오랜만에 겪어 보는 이 감각. 마음에 꼭 드는 타로 카드를 샀을 때보다 짜릿했다. 동굴에서 멀리 떨어져 마음껏 마력의 흐름을 감각한 녹은, 근처에 마법사가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걸 확인한 후, 허리춤에 있던 종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이때의 녹은 마력을 몸에 담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도구를 만드는 실력이 그럭저럭 볼만했다. 그들이 온다면 이 종이 먼저 발견하고 소리로 경고해 주겠지. 녹은 걸어 둔 종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동굴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크르르르….

산속에서 짐승의 경고 소리가 들렸다. 나오기 전 동굴에는 혹시 몰라 결계를 쳐 두었으니 공자는 안전하겠지. 혹시 모를 불안감에 녹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어떤 것이 땅을 구르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신음이 섞여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느새 달리고 있던 녹은 결국 마법으로 동굴 코앞에 도착했다.

동굴 앞에서는 피투성이 호랑이를 상대로 날카로운 나뭇가리를 찌르고 있는 피투성이 공자가 있었다.

아이고, 동굴에서 나오지 말라니까 말 한번 안 듣네!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어떤 난리를 쳤길래 꼴이 저런 건가. 호랑이도 만만치 않게 다친 모습을 보니 저 공자,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은근히 기강 있는 무골인가 보다. 어디서 주운 나뭇가지인지, 날카롭게 갈린 끝에 불을 붙여 호랑이를 위협하고 있었다.

‘맞아. 특이하긴 엄청 특이한 공자였지.’

저 모습 또한 과거에 있던 형태 그대로였다. 세월이 지나 빛바래고 낡은 기억을 4D로 생생하게 관전하니 저 공자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 났다.

호랑이는 횃불을 경계하며 연신 콧잔등을 찡그리고 자세를 낮췄다. 공자의 얼굴에 서린 긴장감 또한 오싹했다. 몇 번 뒹굴었는지 사이좋게 상처를 나눈 둘은 목숨을 건 긴장의 대치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더라도 녹의 눈에 공자는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공자의 단 두어 걸음 뒤에 결계를 쳐 둔 동굴이 있었다. 녹은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공자! 뒤로 천천히 물러서세요!”

당연한 대처였다. 녹이 쳐 둔 결계는 녹과 공자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보호 결계였으니까. 공자가 애써 나와서 호랑이랑 피 튀기며 싸울 줄 알았더라면 결계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을 본인만으로 한정했었을 거다. 괜히 마법사인 거 안 들키려고 설정했다가 된통 당했다.

낯선 외침이 들리자, 공자를 주시하던 호랑이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횃불이 없는 쪽이 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녹을 향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크워어어엉-

호랑이의 노성이 산을 흔들었다. 한가롭게 잠을 자고 있던 새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갔다. 일순간 녹은 몸을 굳히는 호랑이의 저주파 울음소리에 몸의 통제권을 내어 주었다.

저리 울며 달려드는 호랑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무서워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안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호랑이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리게 와 닿았다. 아, 과거에선 다친 적 없던 거 같은데. 이거 여기서 다치면 또 리셋인가. 두려움에 몸은 뻣뻣하게 굳었지만 뉴런 활동만은 유연한지 실없는 한탄이 끊이지 않았다.

크워어어어-

순간, 달려오던 호랑이가 고통 섞인 짜증을 내며 녹을 향해 날아오던 노선을 틀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호랑이의 시선에서 벗어난 녹은 그제야 딱딱한 몸의 통제권을 찾았다. 호랑이는 뒤를 돌아 다시금 공자에게 달려들었다.

보니, 그 호랑이의 등판에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횃불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그것이었다. 공자는 녹의 위험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무기를 날린 것이다. 덕분에 호랑이는 녹에게 달려드는 걸 멈췄지만, 자신에게 고통을 선사하고, 이제는 무시무시한 불도 없는 아이에게 복수를 다짐한 듯 보였다.

동굴에 들어가 있으라니까 공자는 아직도 결계 앞에 서 있었다. 호랑이가 달려들어 공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건 순식간일 거다. 어쨌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구해 준 공자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마법사인 거 들키고 나발이고 일단 구하자.’

녹은 결국, 공자에게 달려드는 호랑이를 향해 손가락을 부딪쳤다.

❊ ❊ ❊

“…….”

“…….”

동굴 안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반대로 말하면 둘러앉아 있는 그 둘 사이에는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은 거다. 공자는 공자대로 말이 없었고, 녹은 녹대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딴 곳에 가 있었다.

공자에게 달려들던 호랑이가 배트에 맞은 야구공마냥 저 먼 산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공자는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호랑이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과거에 어떻게 했었더라.’

아마도….

“하하. 이 산은 동물을 던지는 도깨비가 있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려는 짐승이 있다면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선다고들 하지요. 도깨비가 나타났다니, 운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

공자의 눈이 불신으로 짙어졌다. 아니, 이 시대의 아이면 이런 헛소리는 믿을 순진함 한 조각 정도는 남겨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들의 순수를 흐릴 유튜브도 없는 시대에서 살아가는 소년인데 왜 이렇게 안 믿는 눈초리지? 열 번 들어 봐도 믿지 못할 소리를 지껄인 녹의 생각치고 양심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공자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뻔뻔한 녹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도깨비가 도령입니까?”

“녜?”

이런, 당황으로 목소리가 새어 버렸다. 녹은 아이의 눈초리를 피하며 땅만 흘겨봤다. 그러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되물었다.

“무… 무슨 소리신지….”

“…….”

자신을 또렷이 보는 아이의 눈빛은 녹의 연기력을 허물어뜨렸다. 이 순간, 연기력을 비꼬았던 청연의 목소리가 이명이 되어 울리는 듯했다.

이어진 정적에 식은땀 한 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정적은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녹은 공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

목숨을 걸고 호랑이와 싸웠던 공자는 시종일관 차분하게 녹을 주시하고 있었다. 녹이 동굴을 나서기 전, 그의 눈을 피했던 행동과 정반대였다. 녹은 아이에게 거짓말하는 느낌이 들어-사실이었다.- 찔렸다가, 아이의 볼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고 기함했다.

호랑이를 날렸을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상처가 아이의 몸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운 비단옷은 호랑이의 발톱에 찢기는 걸 면치 못했고, 몇몇 군데는 핏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팔은 크게 다쳤는지 한쪽 소매가 온통 피에 절어 있었다. 어째서 아이의 상처를 못 봤는지 녹은 자신을 꾸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딱 봐도 엄청나게 아파 보였는데, 아이는 아픈 티도 내지 않았다. 어린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리 고통에 무딘 건가. 녹은 이마를 짚고서 결심했다. 그래, 까짓 거 도깨비. 내가 하고 만다. 녹은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네. 사실 저는 도깨비였습니다.”

녹은 공자의 볼에 흐르는 핏방울로 손을 뻗었다. 볼에 생긴 상처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지혈은 되지 않고 자꾸만 붉은 고통이 새어 나왔다. 녹의 손이 조심스레 제 볼에 닿자, 드디어 아이는 미약하게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그리고 도깨비는 생각보다 쓸 만한 요술을 부릴 줄 알죠. 알고 계셨습니까?”

녹의 손끝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볼의 생채기를 기점으로, 아이의 온몸에 나 있던 혈투의 흔적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곧 아이는 말끔해지고, 핏물을 닦은 걸레짝처럼 된 옷만이 호랑이와의 결투를 기억하게 했다.

적어도 팔 한쪽은 부러졌을 것 같았던 아이의 상처는 생각보다 얕았다. 호랑이랑 일대일로 붙었는데 상처가 이리 얕다니. 호랑이 쪽은 못해 줘도 중상이었는데.

‘뭐 하는 녀석이지.’

심지어 아이는 깨끗하게 나은 자신의 상처를 보고도 큰 반응이 없었다. 녹은 그의 반응을 물끄러미 관찰하다가 물었다.

“안 놀라십니까?”

“…놀라야만 합니까?”

“…….”

그 태연한 태도에 혹여 몰라 녹은 공자의 마력을 측정해 보았다. 역시나 마력은 하나도 감지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력 조절이 미숙한 지금 시대의 하녹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감각은 오류 없이 해낼 터이니, 이 아이는 분명 일반인이 맞았다.

담담한 그의 반응에 녹이 도리어 놀라자, 아이는 변명하듯 뱉어 냈다.

“…어차피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 투성이 아닙니까. 이 정도 일은 놀랍지도 않습니다.”

‘무슨, 다 산 노인처럼 굴지.’

녹은 치료해 주었던 손을 거두었다. 고통이 사라졌음이 분명한 아이는 감흥 없이, 떨어지는 녹의 손을 응시했다. 이렇게 특이한 애를 미화라는 특징 하나만 남기고 잊고 살았다니, 내 인생이 다사다난하긴 했구나. 녹은 호기심이 일어 공자에게 질문했다.

“공자께선 나이가 어찌 됩니까?”

“…몇일 것 같습니까?”

되물음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 몇 살일 것 같냐니. 이 대사 뭔가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눈치 없는 선배가 꼭 하는 말 탑 3에 들었던 대사 같은데. 녹은 잡념을 떨쳐 내고 공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하진이보다 조금 더 먹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이들은 금방금방 커서 가늠할 수가 없단 말이야. 하가가 뭉개진 지 2년이 넘었고, 그때 하진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대충 하진이와 동갑이라고 치고 찍어 보자.

“열넷?”

“…….”

아이는 녹의 대답을 듣고서도 대꾸가 없었다. 눈에 살짝 이채가 서린 것 같기도 했으나, 제대로 보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말이 없으니 정답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녹은 결국 되물어 보았다.

“정답입니까?”

“동이 도령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요.”

이름도 안 알려 줘, 나이도 안 알려 줘. 하여간 세계수의 씨앗인 자신보다 비밀이 많았다. 적어도 나는 기적 같은 능력이 있는 것에 이름까지 알려 주었는데 말이야. 물론 아무렇게나 지은 가명에 가짜 얼굴이긴 했지만.

어차피 봤던 마을에 데려다주면 끝나는 인연이니 천 년 묵은 산삼처럼 구는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마을로 내려가서 여기에 있던 기억이나 지우고 풀어 줘야지. 녹과 함께 있던 사실을 마법사들이 알게 된다면 가뜩이나 체질로 인해 고달플 아이의 인생이 더욱 고달파질 테다.

일단 공자의 보호자가 아이를 걱정하는 것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녹은 짧게 고민하다가 물었다.

“공자께서는 그 마을에서 사십니까?”

“아닙니다.”

“함께 온 일행이 있으십니까?”

“…있었지요.”

아이가 말하는 과거형 대답이 의문스러웠으나, 녹은 괘념치 않기로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마을에 잠시 들르셨다는 게 되는군요. 언제쯤 댁으로 돌아가십니까?”

“…저도 이젠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녹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은 납치범과 다름없으니, 비협조적으로 나와도 할 말 없는 쪽은 녹이었다. 어쨌건, 요술을 부리는 도깨비라고 소개했으니 상황을 비슷하게 꾸며서 안심을 시켜야겠다.

“날이 밝으면 공자를 그 마을로 돌려보낼 수 있을 듯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놓으세요. 제 요술은 안전하니까요. 그러니 해가 뜰 때까지 일행분들이 걱정되어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말을 다 들은 공자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마법사 없을 때 잘 돌려보낸 다음에 기억 삭제해야지. 현대의 정신을 가진 녹은 2백 여 년 전과 사고 회로가 변치 않았다.

녹은 요술로 동굴의 입구를 막았으니 산짐승이 오지 않을 것임을 공자에게 알려 안심시켰다. 공자는 그의 캐릭터대로 고개를 끄떡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후 녹에게 신경을 끈 듯한 공자는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었다. 참으로 우울한 녀석이었다.

도깨비에게 홀려 납치당했지, 호랑이와 목숨 걸고 싸웠지, 게다가 처음 보는 작자는 자신이 도깨비란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리 조용할 수 있는 걸까. 평범하게 자란 자에겐 볼 수 없을 반응이었다.

하긴, 식신이 따라붙는 체질인데 평범하게 사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하지. 녹은 그에게 삼삼한 위로를 건네다가 번개 맞듯 깨달았다.

‘잠깐, 지금 생각의 흐름이 도언과 타로집에서 만났을 때의 흐름이랑 비슷한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녹은 그 당시 도언 또한 미화 체질이 있는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녹은 지금과 정확히 같은 걱정을 그 당시의 도언에게 보냈었다.

그러고 보니 이네스가 2백 년 전쯤에 도언을 처음 만났다고 했었지. 예전에 미화 아이를 만났을 적과 이네스가 도언을 처음 만났다는 시기가 비슷해 마음속에 담아 두었었다.

녹은 꼬리를 무는 생각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콩벌레처럼 옹송그려져 있는 아이는 그 행동으로 인해 더 작아 보였다.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기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고 도언을 떠올리지 않았단 건 확실했다. 어릴 적 모습과 많이 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지.

‘혹시 이 녀석, 안도언 아니야? 이름도 안 밝히고.’

하지만 안도언이 하가의 지리를 곳곳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언은 하가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제 바로 앞에 있는 공자 연치의 아이가 도언이라면 분명 하가의 심부름꾼이었을 텐데. 하가에서는 이런 외모의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어디 보자, 자신은 안가에서 도언이 도도일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무에게 휘말렸던 거였고…. 그 전에 이 소년이 도언이라면 이자가 도도의 영물화일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었을 때 뭉뚱그리며 알려 주지 않았었지.

하지만 이자에게서 정령의 기운은 또 느껴지지 않는데…. 정령들의 마력은 일반 마법사들도 한 번 보면 알 정도로 희한했다.

세계수가 과거의 호랑이나 보여 주려고 펼쳐 둔 꿈일 줄 알았는데, 단순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빛났다. 타로 또한 세계수가 도언과 관련된 꿈으로 그 정체의 힌트를 조언해 준다고 그랬다.

녹은 몇 가지 가능성을 가늠해 보다가, 팔짱을 끼고 깜빡 선잠이 들어 버렸다. 퍼즐 맞추기가 지루하다기보다는 쌓인 피로도가 상당했다. 어차피 종도 걸어 두었고, 동굴 앞에 결계도 쳐 두었으니, 마음을 조금쯤 놓았던 것 또한 한몫하리라.

밀물처럼 들어온 수마가 녹을 덮쳤다.

❊ ❊ ❊

“……!”

녹은 몸을 일으키며 일어났다. 꾸벅이며 졸고 있었거늘, 어느새 자신은 동굴에 대자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것도 구겨져서 누워 있지 않고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 것이, 눕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손을 탄 듯했다

게다가 베개 대용으로 쓰라는 건지, 녹색 나뭇잎 무더기가 얼굴 밑에 베어져 있었다. 어쩐지 자는데 자꾸 풀 냄새가 나더라. 누가 건드리는지도 모르게 자 버렸다. 이 모든 걸 누가 했겠어. 녹은 공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안에는 장작을 태우고 있는 모닥불만이 수다스럽게 녹의 기상을 반겼다. 안쪽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니까 얘는 또 어디를 간 거란 말이더냐. 녹은 헐레벌떡 일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일출이 지났는지, 동굴 밖은 선선한 새벽 내음으로 가득 찼다. 여름 새벽은 언제나 밝았다. 녹은 공자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잠이 들었음에도 외모 변경은 또 기가 막히게 유지했나 보다.

괜히 실수하고 싶지 않은 녹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한 번 더 점검하고서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자에게 느껴지는 마력이 전무하니, 마력을 엷게 펼쳐 탐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가가 심부름꾼 아이들로 마력이 전무한 아이를 선별한 까닭이 이런 이유이리라.

결국 녹은 허리께까지 오는 덤불의 나뭇잎을 한 움큼 쥐어 내고 마력을 담아 불었다. 마력만 풀어내는 것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탐지 마법이었다. 진녹색의 동글동글한 나뭇잎은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알아서 사방으로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에서 신호가 왔다.

녹은 나뭇잎들에 담은 마력을 회수하고, 신호를 보냈던 나뭇잎의 위치를 기억해 나아갔다. 곧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들어내자, 투명하게 물살을 부수는 냇가에서 한 소년이 상의를 벗어 낸 채 발을 담그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다. 공자였다.

호랑이의 발톱에 의해 상해를 입은 상의는 흐르는 물에 담가 붉은 얼룩을 빼고서 평평한 바위에 널어 두었다. 그래, 안전하면 되었다. 어차피 오늘 지나면 안 볼 사이인데 잔소리해 봤자지.

녹은 부러 인기척을 내며 공자에게 다가섰다. 그를 느낀 공자가 녹을 향해 돌아보자, 녹은 밝게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공자.”

“도깨비 도령도 안녕하셨는지요.”

자연스럽게 나온 도깨비 호칭에 멈칫한 건 녹이었다. 공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세상 다 산 얼굴을 지루하게 표현해 내고 있었다. 여름이라고 했지만 냇가의 새벽은 서늘했다.

녹은 바위에 늘어져 있는 공자의 옷감을 한 번 쓸었다. 그러자, 찢긴 옷감은 새것처럼 기워졌고, 물에 젖어 축축했던 감촉은 버석하게 말랐다. 녹의 손길 한 번에 공자의 옷은 갓 지은 것 같은 새 옷이 되었다.

녹은 옷을 가지고 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공자에게 내밀었다.

“도깨비가 좋기는 하지요. 요술로 웬만한 건 무엇이든 이루어 내니 말입니다.”

공자는 녹에게 옷을 받아 팔을 꿰입었다. 냇물처럼 흐르듯이 한 감사 인사는 녹이 집중하지 않았으면 듣지 못할 뻔했다.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그제야 그 나이 또래의 모습이 좀 보였다. 다만 마법을 보고서도 시큰둥한 건 여전했다.

녹은 공자의 옆에 앉아 신을 벗고 냇가에 발을 담갔다. 이가 시릴 정도의 차가움이 발바닥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시리게 차가운 냇물은 그만큼 맑고 투명했다. 송사리가 그들의 발 근처에서 놀다 가는 걸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요술이란 거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좋습니까?”

공자가 덤덤히 물어봤다. 감정을 쏙 빼고 고저 없이 말하는 게 뉴스의 아나운서 같았다. 녹은 저 물음이 자신에게 공자가 하는 두 번째 질문이란 걸 깨닫고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첫 번째 질문은 자신이 몇 살일 것 같냐고 물어볼 때였다.

‘그래, 아닌 척해도 역시 놀라긴 했구나.’

“편하긴 하지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굳이 하나 꼽자면…. 번거로운 일은 굳이 몸소 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일까요? 공자께서도 술을 부리고 싶으십니까?”

공자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또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아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마력 없는 일반인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은 마법을 부리는 꿈을 꾼 적이 있을 텐데.

공자는 고개를 젓고서는 녹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녹은 자신이 공기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질문을 하기 전보다 풀이 죽은 모양새였다.

녹은 심해 바닥에 있는 돌처럼 행동하고 있는 아이가 더 가라앉기 전에 얼른 일행을 찾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자신의 마력이 이어진 신경줄 하나가 멀리서 마력을 감각해 내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순찰용으로 마을에 마법을 보낸 듯싶다.

성질 급한 마법사들은 지금쯤이면 마을에 하녹이 없는 걸 알고 흩어져서 씨앗 찾기를 했어야만 정상이었다. 하지만 나뭇잎의 감각에 따르면 그 마을에 아직 남아 있는 마법사가 있다고 한다. 마법사가 한 명도 없어야만 이동할 수 있는데.

대체 그 마법사들은 뭣 때문에 그리 꾸물거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시 그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지금은 다시 돌아갈 계획이 있긴 했지만, 녹이 마법을 쓰고 벗어났던 동네를 다시 가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는 걸 저들도 잘 알 텐데.

결국 이동을 포기한 녹은,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가 마을로 돌아갈 계획을 짰다. 아직은 공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녹은 공자에게 말했다.

“아직은 마을로 돌아갈 수 없겠군요. 좀… 사정이 있어서…. 여하간 때가 되면 얼른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아이는 역시나 자신의 귀환에 관심이 없었다. 이쯤 되니 저 아이의 사상이 궁금해졌다. 녹은 남에게는 괜한 관심 두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아이는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미화들은 다 저런가?

“공자께선 다른 이들과 확연히 다른 듯합니다. 제가 요술을 부려도 놀라지 않는 인간은 처음입니다.”

“…그렇습니까.”

호들갑까지는 아니더라도 놀라는 티도 안 내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마법에 익숙한 자처럼 굴지 않는가.

“어찌 그리 침착하신지 연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열다섯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가 하는 말치고 맹랑했고, 그만큼 진중했기에 2백 넘게 산 녹이 코웃음도 치지 못했다. 정말 임종을 앞에 두고 인생을 회고하는 노인처럼 굴고 있지 않는가. 오래 산 녹조차도 저러기 힘들었다. 녹은 자세를 바로 하고 자세히 물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녹의 인생을 통틀어도 몇 없는 일이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저는 어차피 떠나는 도깨비이니 고민이 있다면 마음껏 털어 내셔도 좋습니다.”

자신도 이런 오지랖이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혀 어쩔 수가 없었다. 공자는 녹의 말에 고개를 들어 구름만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평생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소년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말하면 들어 주실 겁니까?”

“그야 어렵지 않지요.”

“어찌하면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까?”

…뭐?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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