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붉은 폭풍
“뭐??”
“윽.”
녹은 한 음절을 외치며 벌떡 깨어났다. 순간 힘을 주며 일어나면서 정수리에 무언가를 박았고, 머리 위에서는 약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녹 또한 고통스러운 정수리를 부여잡고선 나는 소리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도언이 제 턱을 왼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녹이 일어나며 박은 게 도언의 턱인가 보다.
태무가 달려들어 기절한 이래로, 녹은 자신이 도언의 품속에서 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늘한 동굴이었지만 의외로 포근하고 개운하게 아주 잘 잤다. 아니, 기절했다가 깨어난 건가.
그 공자가 죽고 싶다고 해서 당황했었는데 그러자마자 세계수의 꿈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세계수가 보여 주고 싶어 했던 장면은 그 상황이었나 보다. 이후에 어떻게 했더라. 잘 타일러서 보냈던가. 여하간 세계수가 하필 이때 보여 준 꿈이니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다. 미화의 수는 희소하니, 이네스가 봤던 미화가 그 공자일 가능성이 컸다. 만일 진짜 그렇다면 그 공자는 도언이란 소리가 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닮은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어. 그래. 미안했다.”
녹은 자신을 내려보는 도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자신의 위로 옷가지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이래서 따뜻하게 잘 수 있었던 거였구나. 녹은 완벽하게 보온이 되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와 대비되게, 도언은 여전히 반팔 차림이었다. 안 춥나.
“나 언제부터 자고 있던 거야?”
-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한… 20분… 정도.
동굴의 구석에서 태무의 목소리가 울렸다. 태무는 동굴 한구석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발로 선 채였다. 두툼한 앞발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렇게 서 있으니까 네발로 걸어 다닐 때보다 키가 배로 커졌다. 동굴이 저만한 거구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천장이 높아 다행이었지.
“…왜 그러고 있어?”
호랑이의 음성이 잦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는지는 몰라도 꽤 힘겨워하고 있단 건 알겠다. 저건 반려견들 벌세울 때 종종 볼 수 있는 자세 아닌가. 태무 또한 힘겨워 보이는 걸 보면 저 자세가 그에게 그리 편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그만하고 내려와.”
도언이 낮게 읊조렸다. 허락이 떨어지자, 벽에서 떨어진 태무가 쏟아지듯이 앞발을 땅에 접착했다. 떨어질 때 난 쿵 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드디어 살았다는 표정이 아주 실감났다.
‘뭐야. 혹시 저만한 마생물을 진짜 강아지 훈련시키듯 벌세운 거야?’
녹이 눈을 굴리며 이 의미심장한 상황을 어림했다. 꿈틀거리는 혼잡한 미간을 본 도언이 설명하듯 덧붙였다.
“제가 하라고 안 했습니다. 찔리는 게 있는지 괜히 눈치보다 홀로 저러더군요.”
- 하지만 그만하라고 하지 않은 건 가주였다.
“하라고도 안 했어.”
- 그래, 하지 말라고도 안 했지.
태무는 저릿저릿한 앞발을 핥고 있었다. 저리 보니 진짜 고양이 같은데. 포메라니안 같은 흰색 꼬리가 좌우로 한들한들 흔들렸다. 앞발을 쭉 뻗고 기지개까지 개운하게 켠 후, 태무는 녹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 이것 참, 가주의 손님이 내 동굴에 해를 끼칠 리 없단 사실도 잊고서 달려들어 버렸구나. 미안하다. 오늘 내 너에게 사과만 하는 것 같구나. 그래도 금방 깨어나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가주 눈치 보느라 망부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목숨의 은인이구나.
‘자체적으로 벌을 설 만큼 눈치 보는 것치고 거침없이 말을 나누는데.’
태무의 사과에 얼결에 고개를 끄떡였다. 20분이라. 현재의 시간 선과 다른 세계수의 꿈에 들어가면 언제 깰지 모른다. 이번 꿈은 체감상 여섯 시간 정도 지났지만 현실에서는 20분이 지나 있다고 한다. 빨라서 다행이었다.
‘만일 더 늦었으면 또 이 녀석이 꿈속으로 따라 들어왔을지도.’
- 그나저나 기절해 버리다니. 호랑이 무서워하느냐?
녹 자신도 기다, 아니다 확신하지 못했던 명제를 기막히게 잡아내는 태무였다. 그런 태무의 물음에 대답한 건 품 안의 녹을 고쳐 안은 도언이었다.
“아주 죽일 듯이 달려들어 놓고 태평하기도 하지.”
- 아직도 심사가 꼬여 있구나. 청년은 나에게 뭐라고 안 하는데 왜 가주가 그러는지 모르겠다. 죽일 듯이 달려든 건 내가 아니라 가주가 아닌가. 나는 청년이 기절하고서 정신 차리고 방향을 틀었네. 쓰러지는 청년을 받은 가주가 내게 검을 들이밀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태무는 그때를 회상하면 오한이 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자진해서 벽에 서 있지 않았다면 가주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네.
“농담입니다. 제가 산만 한 저 녀석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녹은 보았다. 도언이 잽싸게 태무를 향해 눈초리를 날리는 것을. 그 살벌한 눈빛을 보고 난 이후에야 태무는 입을 꾹 닫았다. 순식간에 군기가 감도는 장소에서, 녹은 도언이 농담이라고 칭한 태무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예요!”
동굴의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배경 음악처럼 은은하게 깔린 룬의 짖음 또한 함께였다. 후광처럼 햇살을 등에 지고 나타난 이는 청연, 그리고 이네스와 룬이었다. 가장 먼저 그들 앞에 도래한 건 네발로 뛰는 룬이었다.
룬은 잽싸게 녹의 앞에 도착한 후, 자신보다 발이 반이나 없는 두 명의 느림보를 하찮게 바라보며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것이 못내 뿌듯한 모양이었다. 꼬리를 돌리고 있는 룬을 보고 가장 먼저 아는 체 했던 건 태무였다.
- 이거, 용네 해치구만.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룬은 대답하듯 크게 한 번 짖어 준 후, 그대로 엎드려 혀를 내밀고 숨을 골랐다. 녀석의 더운 숨이 공중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후발 주자인 청연이 반팔 차림의 도언을 보고 놀라 기함하며 지팡이를 꺼냈다.
“세상에! 가주님. 보는 사람이 다 춥네요.”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두툼한 겉옷을 소환한 후, 그에게 내밀었다. 도언은 가타부타 말없이 외투를 건네받아 입었다. 뒤따라온 이네스가 물은 것은 다른 장면에 관해서였다.
“그런데 둘은 왜 그러고 앉아 있어요?”
포근함이 주는 안락함에 취해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녹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도언의 품 안에서 그에게 등을 기대 있단 걸 깨달았다. 알아챈 그는 황급하게 도언의 무릎 위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룬이랑 눈높이가 비슷하더라. 앉아 있던 도언을 깔고 앉아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쟤랑 붙어 있는 게 익숙해지는 것 같아 큰일이다. 녹은 괜히 한번 엉덩이나 팡팡 털어 댔다.
이네스의 물음에 태무는 옳다구나 몰아붙이듯 대꾸했다. 타이밍 한번 특이했다.
- 그 마법사가 내 굴에 들어와 자는 나를 쿡쿡 찔러 대서 그런 거 아닌가.
내세운 원인 또한 특이했고.
“어머. 웃긴다. 그거랑 둘이 그러고 앉아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 그 녀석이 괜히 내 꼬리에 있는 사기 푼다고 찔러서 짜증 냈더니 사기가 불어났잖은가! 저 청년이 착하게도! 굴에 있는 사기를 풀어 준다고 도와주는 도중 큰 소리가 나서 내가 기절시켜 버렸네!
“뭐라는 거야.”
엉켜 있는 전후 상황 설명에 이네스가 차게 대꾸했다. 말씨름하는 용 아가씨와 호랑이. 용호상박이란 단어를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둘이었다. 논리 부재를 펼치며 성내는 호랑이를 흘겨보던 이네스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멈칫, 눈을 반짝였다.
“잠깐. 민수 씨가 사기 뭉치를 푸는 걸 도와주셨다고요?”
- 그렇다니까! 그놈의 해사단보다 훨씬 나아! 인재를 뽑으려면 이런 인재를 뽑게. 귀찮게 구는 마법사를 뽑지 말고!
“그걸 마법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푸셨지? 뭐로 푸셨어요?”
- 거기, 무슨 검은색 기역 모양의 도구로 폭탄을 쏘아 댔네. 사기 뭉치가 폭발하지도 않고 한 번에 스러졌어.
“세상에, 세상에! 가지고 다니시는 총을 사용했군요! 민수 씨가 사기를 푸는 데에도 재능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보통 사기 뭉치를 풀려면 마력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대체 어떤 마법사 집안에서 자라셨길래 마력이 하나도 없으시면서 마력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시지? 교육받은 해사들도 사기 하나 푸는 데 몇 시간을 끙끙거려요!”
- 그것 보게. 마법사들은 영 쓸모가 없다니까? 그 청년은 한 방이었네, 한 방!!
갑자기 죽이 잘 맞는 둘이다. 이네스가 칼눈을 숨기지 않고 녹의 두 손을 잡아 왔다. 그녀는 어둠 속 내려진 한 줄기 빛과 같은 녹에게 필사적으로 제의했다.
“민수 씨… 만약 무술 스승이 힘드시다면 아싸리, 해사단으로….”
“…….”
“…….”
“…….”
“아,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안 하면.”
이네스가 녹을 향한 러브콜을 이어 나갈수록 그녀를 보는 시선의 농도가 짙어졌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은 안가의 가주님이었다. 이네스는 짙은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에는 항복을 선언하며 녹의 손을 놓아 주었다.
“흠, 어쨌건 덕분에 태무의 굴 안에는 사기 뭉치가 몇 없네요? 이 정도면 제가 다 치울 수 있겠어요.”
청연이 지팡이를 들고 나서며 말했다. 청연의 말대로, 그들이 오기 전에 벽에 붙은 사기 뭉치를 녹이 하나, 그리고 도언이 다수 지워 버렸다. 그렇기에 처음 굴을 봤을 때 자욱했던 사기가 아주 옅어져 있었다.
“됐어. 내가 할 테니까 너희는 쉬고 있어. 내가 해사단을 관리할 시간에 벌어진 사고잖아. 하여간에 걔를 언제 일인분으로 만든다니. 사고만 안 치면 참 쓸 만한 애인데….”
이네스가 나서던 청연을 도언 쪽으로 밀어 넣으며 구시렁댔다. 곧 그녀의 귀걸이가 빛나고 남아 있던 사기 뭉치들이 천천히 풀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녹은 그녀가 얼른 업무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네스에게 도도에 대해 떠봐야 하는 사실이 많았다. 자신이 본 미화 공자와 이네스가 본 도언의 어린 시절 모습과의 공통점은 그다음 질문이었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 녹을, 청연과 도언이 지켜보고 있었다. 청연이 아무도 듣지 못하게 도언에게만 속삭였다.
“녹 님께서 사기를 푸신 거 정말이에요?”
도언이 선선히 고개를 끄떡였다. 확실히 녹은 마력 해석에 뛰어났다. 도언이 몇 번 사기를 푸는 걸 보고선 금방 따라 하다니.
하지만 녹이 착각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본인은 도언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해서 사기를 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기를 푸는 걸 본 후 깨우치고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법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사기 뭉치를 해제했다.
도언이 사기를 푸는 방법은 아무도 따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녹 님께서는….”
청연이 침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부하의 침울한 대꾸를 들은 도언의 눈빛이 깊어졌다.
…녹의 마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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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 띠리리-
지루하고 식상한 기본 벨소리가 동굴 벽에 반사되어 풍부하게 퍼졌다. 마지막 사기를 풀고 있던 전화의 주인은 전화를 받았다.
“네. 한 장로님. ……바로 가도록 하죠.”
인사하며 전화 받은 이네스는 얼굴을 매섭게 굳히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용건만 간단히 하기로서니 굉장한 속도였다. 이네스는 미안한 얼굴로 가주 일행에게 전화의 용건을 말했다.
“사고 친 신입 녀석이 깨어났대요. 저는 그 애 좀 만나 봐야겠어요. 어디, 같이 가실….”
“아니요. 아니요!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진저리를 치며 이네스의 초대를 거절한 건 의외로 가만히 있던 청연이었다. 청연은 손사래까지 치며 자신의 의견을 굳세게 피력했다. 물론 이네스는 청연이 난리를 치거나 말거나, 도언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실래요? 그러고 보니 민수 씨께서 더 오래 저희 집에 계시다 가고 싶어 하셨던 것 같은데. 근데 이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라. 물론 저에게 용건이 없으시다면 제 집에 가 계셔도 좋아요. 아니면 저와 함께 가셔도 되고요.”
“가주니임… 제발 이제 돌아가요…….”
이네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청연의 기운이 시들어 갔다. 쟤 왜 저렇게 내내 울상이래. 도언은 녹에게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얼레. 저번에는 바로 가자고 했으면서?’
선택권이 양도되자 청연의 신경이 녹에게 쏠렸다. 청연은 궂은날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강아지와 같은 모습으로 녹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두 손까지 꼭 모으고는….
이네스에게 볼일이 있는 녹으로서는 당연히 그녀를 따라가자고 하려 했으나 청연이 보내는 무언의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가기에는 또….
“모레쯤에 또 오면 되잖아요.”
“응? 그래도 돼?”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청연이 대안을 제시했다. 물론 정신없어 보이는 지금 가는 것보다야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이후 이네스를 떠보는 게 낫긴 했다. 지금 이네스를 따라가 봤자 상황 수습하는 구경만 하고 올 게 뻔했다.
게다가 마법사라는 해사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꺼려졌다. 청연이 어째서 저리 칠색 팔색 하는지 모르겠으나, 만일 후에 다시 이네스를 독대할 수 있다면 후에 오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녹이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녹과 청연은 자연스럽게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새 청연에게 어린 짐승의 눈빛을 배운 녹은, 청연에게서 복제한 그 눈빛을 도언에게 쐈다. 청연은 이미 쏘고 있었다.
그들의 무언의 요구에 도언은 한숨을 쉬며 고개나 끄떡일 따름이었다.
❊ ❊ ❊
“청연. 왜 이네스랑 신입을 보러 같이 가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녹은 어느새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고 있는 청연에게 물었다. 창밖은 이네스가 연신 말해 주던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태양이 없는 걸 보면 우리 은하는 아닌 것 같았다. 가오리 한 마리가 진공 속에서 유영하며 차를 호위했다.
은하가 걸렸을 때는 절대 창문을 열지 말라던 이네스의 충고를 기억해 내며, 녹은 창문에 손가락을 대고 별자리를 창작해 긋는 중이었다. 예전에 운전에 집중하느라 도언과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고 했던 청연은, 아직까지는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구간인지 쉬이 대답해 주었다.
“그대로 이네스랑 갔으면 진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실사로 보실 수 있을걸요. 이네스가 가는 이유가 신입한테 한 소리 대차게 하러 가는 거일 텐데. 이네스가 화내는 거 보는 것만으로 기 빨려요. 어휴…. 정말이지….”
청연은 말만 해도 질린다는 듯이 몸서리쳤다. 확실히 가주 보좌는 장로장이 화내는 걸 자주 보긴 했을 거 같다. 두 감투의 관계는 워낙에 물과 기름이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 보여도 공무에 관한 일까지 친밀도로 대충 끝내진 않을 것 같은 둘이다.
“그 신입, 진짜 눈물 쏙 빠지게 혼날 텐데. 혼나야 하는 상황이 맞긴 하지만 이네스에게 혼난다고 생각하니 좀 연민이 드네요.”
‘아마 그 녀석, 네 가주와 산군에게도 덤으로 혼날걸.’
벌써부터 동정하는 청연이었기에, 녹은 그가 안타까워할 만한 사실을 삼켰다.
어느새 깜깜했던 우주가 도시의 풍경으로 뿌옇게 개었다. 차 주위를 뱅뱅 돌던 가오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청연은 이리저리 길을 찾으며 돌다가 도언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깔끔하게 주차를 끝내고서 안전벨트도 풀지 않은 채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는-
“도착했습니다! 저는 얼른 태무에게 가 볼게요. 그 난리였는데, 굴에서 어느 곳 하나 망가진 데 있으면 귀찮아지니까요. 가능한 빨리 가는 게 좋죠. 그럼 이따가 봬요! 뮤에로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앞좌석이 텅텅 비어졌다. 그럼 거기에서 운전이나 해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녹은 대리 기사가 따로 없는 청연이 당혹스러웠다. 가주 보좌 진짜 아무나 못 하겠다.
철컥-
도언이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어벙하게 있던 녹 또한 얼른 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대체 무슨 꿈을 꾸신 겁니까?”
문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던 녹은 등 뒤에서 흘러나온 도언의 말에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도언은 팔짱을 끼고 녹을 응시하고 있었다. 꿈?
“웬 꿈같은 소리야?”
“태무의 위협에 기절하신 후, 엄청난 기세로 일어나셨잖습니까. 뭐!!라고 외치면서.”
도언은 꽤나 실감나게 성대모사까지 하며 재현했고, 그의 열연에 그때가 기억난 녹은 손을 들어 자신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뭐’ 소리 들으니까 도언의 턱에 박은 머리가 다시금 아파 오는 것 같다.
“그냥 별건 아니었고, 세계수의 꿈인 것 같았는데.”
“세계수의 꿈이요. 하가에 있을 적의 일입니까?”
“아니. 그 이후….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한 2년쯤 후? 웬 미화 공자를 만나서….”
‘아니, 잠깐. 내가 이걸 왜 다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고 있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저 녀석도 본인에 대해 그렇게나 철저히 숨기고 있는데, 저 녀석이 모르는 나의 정보를 왜 이리 쉽게 풀고 있는지 모르겠다. 녹은 말하고 있던 입을 닫아 버리고 삐딱하게 나왔다.
“비밀이거든? 정 궁금하면 너도 뭐 하나 걸어.”
“무얼 걸란 말입니까?”
“…….”
그러게. 뭘 걸라고 해야 하지. 네 정체를 걸라고 해 봤자 코웃음을 칠 게 뻔하고, 아타움을 풀어 달라고 해 봤자 무시당할 게 뻔하고, 고리를 풀어 달라고 해 봤자 어깨나 한번 으쓱할 게 뻔했다. 그 세 개 이외에는 딱히 필요한 것도 없는데.
녹은 끙끙대며 고심하다가 거절당하지 않을 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아, 페널티. 그놈의 페널티 말이야. 뭔 짓을 할 생각인지 정확하게 좀 말해 봐라. 뭔 짓을 할지 딱 정해 봐.”
꿈의 내용을 말해 주는 대가치고 싸다고 생각한다. 도언이 페널티를 말했으니, 분명 뱉은 말은 지킬 것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 시시각각 바뀐다는 점이었다. 자기가 장난처럼 묻는 거야 가벼운 입맞춤 정도로 끝났지만, 녹이 진지하게 대답할 때의 페널티는 또 다를 것이다.
도언의 정체를 맞힐 자신이 있는 녹이었지만, 그래도 한번 물어보는 게 정신상 이로울 것 같다 판단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컸다. 알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지.
거래 조건을 들은 도언의 한쪽 눈썹이 살며시 올라갔다.
“페널티요.”
“그래. 어차피 들어도 다시는 안 당할 테니까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녹은 자신감 넘치게 외쳤다. 도언은 녹의 의기양양한 태도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신다면야. 끝까지 가는 거로 할까요.”
“아니. 아니아니아니.”
뭐라는 거야. 미친 건가. 녹은 정보의 바다에서 검색한 살색의 향연을 떠올리며 급히 거절했다. 뇌의 명령도 듣지 않은 고개가 반사적으로 저어졌다. 세상에, 거기다가, 그걸, 넣는다고? 말도 안 돼. 그러나 도언은 뭐가 문제냐는 듯 녹을 응시했다.
저 차분한 얼굴. 진심인가? 녹은 지극히 본인 마음의 평화를 위해 생각을 달리해 봤다.
“끝까지 간다는 게,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넣는….”
“…….”
“…….”
“…….”
“…제길.”
그래, 그럴 리 없지. 실망하는 녹을 도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뗐다.
“그럼, 알려 드렸으니 녹도 무슨 꿈 꾸셨는지 알려 주시죠.”
녹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도언은 자신의 꿈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 해 봐야 도언이 관심 있어 하는 이 정보 하나뿐인데, 혹시 모르니 이를 이용해 보험 하나 들어 두어야겠다.
녹은 어느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 필요한 건 오히려 자신감이었다. 녹은 얼굴에 억울함을 가득 담아 무장하고서, 도언에게 자신감 넘치게 뻗댔다.
“야. 생각해 봐라. 솔직히 내가, 응? 내가 여기에 와서 진짜 얌전히 있어 줬잖아. 죽는다고 쇼한 것도 아니고 죽인다고 설친 것도 아닌데 그거 하나 틀렸다고 끝까지 가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았냐?”
“그럼 녹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조정이 필요하다. 조정!”
“그럼 그렇게 하세요.”
어라? 도언은 의외로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녹이었기에 저리 나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스턴 상태에서 풀려난 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도언에게 들이밀었다.
“넣는 거 빼고. 5분간 터치 허용.”
“너무 약한데요. 그리고 가벼운 터치 정도는 잘 때도 하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도언의 품안에서 일어나길 수차례였다. 결국 첫 번째 흥정은 실패로 끝났다. 어쩔까 고민하던 녹은 아예 힌트와 페널티를 결부시켜 거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수위 좀 올리는 대신에 힌트. 내가 알아먹을 수 있는 힌트 좀 줘.”
“그 수위라는 걸 얼마나 올릴 건지나 들어 봅시다.”
사업가 아니랄까 봐 저 자식, 손해 볼 생각을 하질 않는다. 녹은 고민하다가 두 손을 쫙 펴서 내밀었다.
“그러면 10분?”
“…….”
하긴, 그거 가지고 되겠나. 녹은 고심했다. 중요한 건 아프기 싫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엉덩이만 지켜 내면 된다, 이건데.
녹은 며칠 새 봤던 포르노를 떠올리며 아프지 않은 수준의 행위를 떠올렸다. 뻘겋고 난잡한 살색 향연에서 어떤 행위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녹은 입가를 손으로 덮고서 도언의 고간을 쳐다보았다.
“……하….”
“네?”
“핥아 주면 될 거 아니야!”
주어는 없었지만 시선이 그를 대신해 주었다. 당돌한 그의 선언에 도언의 웃음이 팝콘처럼 터졌다.
“하, 하하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정답을 맞힐 시간이 기대되네요.”
“틀릴 리는 없을 테니까 기대하지 마라.”
녹이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그럼 너도 얼른 네 정체에 대한 힌트 줘. 양심 챙기고 말해라.”
한바탕 시원하게 웃음을 뽑아낸 도언은 살짝 젖은 눈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세계수가 주는 꿈이요. 그 사건 이후 2년쯤 뒤에 미화 공자를 만났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 당시 일이 모두 기억나십니까?”
“…그건 왜?”
“그게 제 힌트입니다.”
“그게 왜 힌트야. 너가 그 공자야?”
“지금 페널티를 건 정답을 말하시는 겁니까?”
“…….”
‘…저렇게 나오니까 섣불리 물어보질 못하겠네.’
녹은 꿈 꿨던 장면 이후를 기억해 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그 우울한 공자가 죽고 싶다고 했던 이후….
힌트랍시고 공자와의 마지막을 물은 녹은, 하루 온종일 당시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성스러운 땔감님께선 그를 가엽게 여기셨나 보다. 덕분에 녹은 그날 밤, 세계수의 꿈속에 다시 접속하게 되었다.
“어찌하면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까?”
눈앞에 있는 공자의 말은 저번 꿈이 끊어졌을 타이밍과 이어졌다. 이 공자와 어떻게 마지막으로 헤어졌냐고 했었지. 그게 힌트랍시고 나온 걸 보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진실로 공자가 도언이거나, 혹은 공자와 헤어질 때쯤 도언과 만나거나. 일단 그때에 도달하기까지, 녹은 이 상황을 잇기 위해 재빨리 질문에 대한 머리를 굴렸다. 적어도 도언에 대한 생각은 비우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죽음… 죽음이라…….’
이에 녹은, 죽고 싶다 말한 공자에게 그 우울한 고백의 이유를 물었더랬다. 이에 공자는 아스라하게 말했다.
“제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무가 출신인 줄 알았는데 아주 시를 쓰네.’
공자가 초연히 답한 이유는 지극히 은유적이었다. 암호 같은 대답에 머리를 긁적인 녹은 단순히 대답했다.
“잃어버렸으면 다시 찾으면 되죠.”
“저 혼자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제 욕심만 우선하는 건 민폐 아닙니까.”
“태어난 김에 조금 더 민폐 좀 부린다고 누가 죽기라도 합니까? 공자의 말을 들어 보니 무언가 이루고 싶은 염원이 있는 듯한데…. 인간 중에선 숨만 쉰다고 살아가는 게 아닌 자들이 있지요. 욕심부리지 않고 죽어 가는 것보다야 욕심껏 살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겠습니까. 물론 제가 공자의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명줄이 긴 녹의 입장에서야 인간들의 고민이야 다 별거 아니었다. 걱정에 짧은 생을 쏟기보다는 행함에 열정을 쏟으면 참 좋을 텐데, 인간들은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니 저리 어린 녀석부터 그런 고민을 하지.
마른 나뭇가지에 타오르는 작은 불꽃처럼, 인간의 생은 짧기에 치열하고 끝이 있기에 아름답다. 이 공자가 가고 싶어 하나 욕심일까 두려워 발을 내딛지 못하는 길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길을 가든, 가지 않든, 분명 어디서나 맹렬히 혹독할 것이다.
딱 보면 알지. 마법이란 걸 눈앞에서 봤어도 놀라지도 않고 시종일관 저리 죽상인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이미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데, 포기한다고 한들 잊지 못해 마음의 병이나 안 걸리면 다행이었다.
인생사 사필귀정. 만일 정말 포기한다 해도, 그 염원이 저 공자의 길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본디 운명의 길은 인간의 집념과 감정의 향수, 망각의 부재로 만들어졌다. 본인을 누구의 자식도, 배우자도, 부모도 아닌, 그저 본인 자신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독특한 길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어린 청소년 진로 상담이나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시간 지나면 그 고민 다 부질없고 의미 없을 거다. 그 속마음은 너무 할아버지 같은 대사라 속으로 삼켰다. 거기다 그의 사정도 잘 모르면서 입 밖으로 내기에는 퍽 무례한 말이기도 했고.
어느새 공자는 물끄러미 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의 사정 하나 모르는 상태로 말해 봤자 꼰대 같은 말이었을 텐데, 내내 죽어 있던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딱딱한 잔소리를 귀담아듣다니, 노인 공경할 줄 아네. 아니지, 적어도 이 시대의 나는 노인이 아닌 건가. 공자는 다시 녹에게 물었다.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제 욕심이라며 도령을 귀찮게 한다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자의 욕망에 넘어갈 만큼 약하지 않거든요.”
공자의 질문에 바로 생각나는 건 자신을 죽이려 고군분투하는 마법사들이었다. 다 지들 멋대로 사는 족속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녹에게 모두 민폐였다. 올 테면 와보라지. 나도 욕심껏 그들을 처단하면 될 일이다.
녹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온종일 굳혔던 공자의 입가가 설핏 녹았다. 그는 녹에게 다른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령은 욕심껏 살고 계십니까?”
“저 말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맞다. 분명 녹은 과거 공자의 저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었다. 그때는 정말 혼란스러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자신의 욕심이 영면이란 사실을. 그렇기에 자신은 욕심껏 살지 못하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죽음을 말하는 어린 필멸자에게 해 주는 조언과 지극히 극점을 찍는 염원이었다.
“저에겐 그리 잘 말씀해 주셨으면서 어째서 잘 모른다 하십니까.”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게 궁금하면 너도 나처럼 살아봐라. 녹은 속으로 뱉은 혼잣말에 씁쓸해짐을 느꼈다. 인생의 목적이니 이유니 하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것에 급급했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법사가 너무 미워서,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그들에 의해 부서질 이 세상이, 태어날 수많은 하진이와 같은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어 온 인생이었다. 연민과 오지랖은 긴 인생의 지난함을 이길 만큼 거대했다. 그걸 이고 지고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니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란 게 생겨 버린 것이다.
“도령의 삶에서 욕심이 있긴 합니까?”
축 처졌던 공자의 목소리가 새의 지저귐처럼 탈바꿈해 나갔다. 공자는 자신의 고민보다 관심이 있는 게 생긴 양 굴었다. 그게 녹의 인생일 줄은 녹 또한 예상한 바가 아니었다. 세계수가 꿈을 되돌리지 않는 걸 보니, 이 비슷한 대화를 공자와 하긴 했었나 보다. 녹은 대답을 미루지 않았다.
“욕심 없는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욕심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냥, 편하게만 살면 좋겠습니다.”
“그게 도령의 욕심입니까?”
“왜요. 욕심치곤 소박해 보입니까?”
얘야. 그거 아마 열 살을 겨우 넘었을 네 욕심보다 적어도 스무 배는 더 큰 욕심일걸. 그러나 아이의 물었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지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요. 욕심껏 사는지 잘 모른다고 하시기에. 그렇다면 지금 편히 살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십니까.”
“그도 그렇게 되는군요. 한량 같은 도깨비도 사실 걱정이 많은가 봅니다.”
녹은 허허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부딪쳤다. 마을에 보냈던 나뭇잎의 순찰을 보고받기 위함이었다. 나뭇잎은 아직 몇 명의 마법사가 마을에 잔재해 있다는 사실을 일렀다. 이놈들. 대체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작정인지 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도령이 편히 살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제 주변에 깔짝거리는 다른 도깨비들이 다 없어지면 좀 편하려나? 아, 도깨비 세상도 인간 세상 못지않게 복잡하답니다. 공자께만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그중에서 제일로 호전적인 도깨비지요. 하하.”
녹은 실없는 농담을 읊조리며-이 시절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마법사들을 다 박살 내고 다녔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뭇잎으로 마을에 남은 마법사의 수를 가늠했다. 하나… 둘… 셋…. 아, 세 번째 마법사는 방금 마을을 떴다. 저 두 명의 마법사가 얼른 떠나야 공자를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을 텐데. 그래야 공자와 마지막을 고하고 그놈의 힌트란 걸 얻을 수 있을 거다.
녹의 말을 경청했던 공자는 적극적인 태도로 물어 왔다.
“그거면 됩니까?”
“…뭐, 다 같이 평화롭게 살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집중하는데 자꾸 물어 오는 통에 녹은 대충 얘기해 줬다. 다 같이 평화롭게 산다니. 차라리 세계 정복을 이루겠다는 게 더 현실성 있고 빠르겠네. 녹은 시니컬하게 생각하며 하늘에 뜬 아침 해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보자. 아침 해가 뜬 지 꽤 시간이 지났고, 공자의 일행 또한 공자가 없어진 것쯤은 알아챘을 거다. 그들의 걱정이 짙어지기 전에 얼른 가고 싶은데 깔짝거리는 마법사들이 협조란 걸 안 해 줬다. 하여간 민폐라니까. 얼른 좀 꺼졌으면.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혹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아니요. 급한 일은 없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도깨비 도령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일행분들께서 걱정을….”
“아니요. 일행은 마을에 없을 겁니다. 마을은 잠시 저 홀로 온 거였어요.”
녹은 어젯밤, 공자의 신상 조사를 할 때 일행에 대해 그가 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있었지요.’
‘…그래서 일행이 있냐고 물었을 때 과거형으로 대답을 한 거였나.’
“…그 마을 근처에 다른 마을이 있었습니까?”
수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소년을 홀로 보낼 만큼 가까운 마을이 있었던가? 물론 녹은 그 항구 마을을 처음 가 보아서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공자만이 고개를 빠르게 끄떡였다. 저리 진실하게 행동하는데 믿을 수밖에.
“그렇다면 어째서 공자 홀로 항구 마을에 오신 겁니까?”
“복잡한 생각 정리차 바다나 좀 보러….”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모습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뭘 숨기는 것처럼 저리 시원찮게 말을 하니, 원. 질풍노도의 시기를 엄하게 겪고 있나 보구먼. 혹시 가출한 건 아닌가? 삶의 목표니 뭐니 했던 게 집안의 반대와 부딪쳐 끓는 피를 이끌고 나왔다든가.
호랑이도 나뭇가지로 때려잡는 기세를 보아하니 무관이 되고 싶은데 지체 높은 공자의 집안에서는 문관을 종용한다거나. 뭐 이런 거.
녹은 이미 머릿속으로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가족 성장 드라마 한 편을 뚝딱 써 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기도 했다.
‘아니, 잠깐. 일행이 그 마을에 없다고 한다면 곧바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될 일 아니야?’
굳이 이렇게 마법사들이 다 떠날 때까지 대기하지 않아도 좋고, 게다가 공자를 일행에게 데려다줄 수도 있어서 좋은 일 아닌가.
여기가 이미 과거에 겪었던 꿈속이긴 하나, 지금이 너무 생생하기도 하고, 또 예전 일은 까먹어서 처음 겪는 양 새로웠던 녹은 진지하게 공자의 무사 귀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녹은 다시금 손을 크게 휘저으며 항구 마을에 보낸 나뭇잎을 높게 띄우고는 근처에 마을이 있는지 순찰을 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뭇잎은 곧바로 찾지 못하고 자꾸만 제자리에 헛돌았다. 왜 이렇게 못 찾아. 결국 녹은 공자에게 물었다.
“음… 그 일행이 있는 마을은 항구 마을의 옆 마을이라고 했지요. 혹 그 마을 근처에 보이는 특이한 구조물이라든가. 그런 게 있습니까?”
“어째서 그런 걸 물으십니까?”
공자가 불현듯 당돌하게 나왔다. 급작스레 저리 나오니 당혹스러운 건 녹이었다. 왜긴, 인마.
“일행께 모셔다드리려고 묻는 거지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 항구 마을에만 돌아가지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허니 장소를 좀 말해 주시죠.”
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들보다 당신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도령. 욕심껏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공자를 돌려보내고서 도언이 준 힌트를 살피기 위해 주변을 빠짐없이 순찰하려던 녹의 계획은, 공자의 고집으로 인해 어그러졌다. 얼른 돌려보내기 위해 여러모로 회유해도 공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행이 있는 마을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도 이랬던가?’
아마 그랬겠지. 세계수가 리셋하지 않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이런 흐름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니. 해안 마을에는 아직 마법사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일행이 있다는 마을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결국 공자의 바람대로 동행을 허해야 할 듯싶었다.
‘적어도 해안 마을에 마법사가 사라질 때까지만 있자.’
어차피 그들이 떠나는 건 곧일 거다. 그리고 아마 거기서 이 공자와 헤어지겠지. 도언에 대한 힌트를 얻는 건 그때일 거다. 힌트랍시고 당시의 일을 물어 오다니. 공자랑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조차 녹에겐 힘겨웠다.
애초에 2백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일신상 안전을 제외하고서 워낙에 세상만사 무심한 녹은 공자에 대해 짧은 기억만 가지고 있었다. 미화 공자와 만났다. 당시 그리 많은 식신이 인간에게 몰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하간 식신을 다 태웠다. 공자를 피신시키고 안전할 때 마을에 데려다주었다. 녹은, 그 정도 소량의 정보를 지금껏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잊어 먹었다고 결국 세계수가 보여 주긴 하는구나.’
결국 녹은, 공자와의 의견 충돌에서 잠시간 백기를 들었다.
“어휴. 이러다가 여기서 또 날밤 새우겠군요. 일단 인가로 내려갑시다. 적어도 호랑이가 출몰하는 여기보다는 안전하겠죠.”
녹의 항복에 공자는 진한 행복을 가감 없이 피워 냈다. 첫 만남 근처에는 우울했다가, 고집을 피울 때는 진중했다가, 원하는 바를 이루자 저리 행복해한다. 저런 표정을 할 줄 아는 그 누가 죽음을 염두에 둔단 말인가. 곱게 접은 두 눈에, 볼은 발갛게 상기까지 되고 설렘을 감추질 않는다.
‘어?’
녹은 공자의 저 표정에서 일말의 위화감을 느꼈다. 누군가 닮은 것 같은데? 공자는 문득 자신을 진지하게 째려보는 녹에게 미소를 지우지 않고 물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느 쪽으로 갑니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시종일관 태연한 저 태도. 거기다 꾸밈없이 드러낸 미소에 깃든 감정까지. 녹은 공자의 그것들이 그와 닮았음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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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은 도언일지도 모를 후보생 하나와 함께 인가의 주막으로 내려와 방을 두 개 잡았다. 주변에 마법사가 없는 마을을 선정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돌아다니느니 차라리 터를 잡고서 해안 마을에 마법사들이 모두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진짜 공자가 안도언인가?’
공통점이 보이니 닮지 않은 얼굴마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 모습 하나 남기지 않고 진화하는 인간들이 더러 있긴 하지. 그럼, 그럼. 방 안쪽에서 한쪽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누워 버린 녹은, 창밖에 보이는 길을 잃은 식신 하나를 핑거스냅으로 튀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계십니까?”
익숙해진 음성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왔다. 문을 여니 미화 공자의 맑게 갠 얼굴이 녹을 반겼다. 얼굴이 그새 더 폈네.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 생각입니까?”
녹은 가만히 서서 공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도언이랑 닮았나? 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헷갈리지? 녹이 자신을 쳐다보며 갸우뚱하고 있을 때, 이상한 점을 눈치챈 공자가 다시 물었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아니, 낯이 좋아 보이셔서요.”
“아, 도령 덕분입니다. 욕심껏 살아보기로 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더군요.”
‘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속없이 웃는 모습이 태평하다. 여하간 이자가 도언이든 아니든 도언이 말을 꺼냈으면 분명 힌트가 있을 거다.
굳이 과거와 비슷하게 행동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으니 그저 나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과거와 다른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다. 만일 과거가 크게 틀어질 만큼 행동을 달리한다면 분명 세계수가 꿈을 리셋할 테니까 보이는 과거가 바뀔 걱정 또한 없다.
‘그때의 나라면 이 상황에서 분명 공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회유했겠지.’
녹은 얄궂은 눈앞의 비행 청소년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문틀에 머리를 기대고 삐딱하게 섰다.
“그래서, 생각은 좀 해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원래 같이 있던 일행의 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지요?”
“제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아쉽지만 제 생각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저는 공자를 데리고 다닐 자신이 없어요. 그냥 얼른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고 좋게 좋게 끝냅시다.”
녹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섬세한 이였다면 상처받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공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저와 함께 있으면 도령도 얻는 것이 있을 겁니다.”
이런 회유를 전에도 들었던 거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어린 새싹이 어떤 깜찍한 소리를 늘어놓을지 궁금해진 녹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흘끗 내밀었다.
“일단 도령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겠죠.”
“그건 또 무슨 소리랍니까?”
“마을에 잘 있던 저를 말없이 산으로 냉큼 데리고 온 게 도령 아닙니까.”
뜨끔. 정곡을 찌르는 예측에 녹은 애써 펄떡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자동으로 자세가 바르게 고쳐졌다. 이럴 때 대화의 공백은 곧 대답이다.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녹은 배부른 사자처럼 의연하고, 참새를 낚아채는 매처럼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 아닌데요? 저, 저는 그저 밤 산보 나오다가….”
“…….”
“…….”
“…분명 도령이 그랬습니다. ‘도깨비에 홀렸냐’고. 동이 도령. 도깨비에게 홀려 한순간에 오밤중 산에서 조난한 자 앞에 도깨비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
‘논리 오지네.’
공자는 마치 상식을 알려 주듯이 침착하고 당연하다는 듯 설명했다. 다른 도깨비라고 잡아떼면 되지만 이미 기막힌 발연기로 대답해 버린 녹이었다.
공자가 물었다.
“저를 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저 아니었으면 공자는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 세계의 사고에 말려들 뻔했어요.”
녹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대신 진실을 말하며 인정했다. 솔직히 저 공자를 구하려고 한 일인데 사과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자신이 산으로 납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분명 저 공자는 안 믿을 거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이 진실이란 점이 환장할 만한 실상이었다. 어차피 마을로 데려다준 이후 공자의 기억을 지우면 될 일 아닌가.
호랑이와 싸울 정도의 미화 공자에게 녹은 자신이 마법을 부릴 줄 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아무리 공자의 기억을 지워 뒤처리했다고 하더라도 꽤 전무후무한 일일 텐데, 어째서 자신은 과거에 이런 일이 있단 사실을 잊어버린 걸까? 그리 흔한 일은 아닐 텐데. 물론 자신이 마법사가 아닌 도깨비라고 공자는 알고 있었지만….
물론 참으로 이자가 도언이라면 녹이 도깨비라 불리는 영물이 아닌,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 거다. 도언은 하가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공자가 운 좋게 저 같은 좋은 도깨비를 만나 명줄을 늘린 거였습니다. 아무리 공자가 호랑이로부터 저를 구해 주셨다고 하더라도 같이 다니긴 힘듭니다. 저 같은 호전적인 도깨비는 배고프면 인간도 잡아먹….”
“도령은 도깨비가 아니지 않습니까?”
쿵. 심장이 낭떠러지로 낙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알았지? 녹은 순간적으로 문고리에 걸어둔 청동 종을 보았다. 역시나 미동도 없었다. 주변을 넓게 탐색해도 마력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공자가…? 감에 의한 추측이 점점 선명히 사실로 변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보통 도깨비는 긴 세월을 겪은 물건이 변한 인간 아닙니까. 도깨비는 기적을 행할 때 나비들이 필히 등장합니다. 한데 도령이 기적을 행할 때마다 나비라곤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도 알고 계시는군요. 본 적 있습니까?”
도깨비라고 불리는 영물에 대해 저리 잘 아는 일반인은 드물었다. 가족 중 한 명이 마법사인 혼혈이면 모를까. 아니,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영물에 대해 아는 이는 극소했다. 하가에서 살 당시의 하홍마저도 그 사실은 몰랐을 거다.
공자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그 행동에서 그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도언과 얼굴은 다르지만, 행동과 어투가 비슷했다. 거기다가 거대한 호랑이와 붙는 객기, 마법을 보고도 놀라지도 않고, 영물에 대해 아는 것까지. 확신한 녹은 곧바로 내질렀다.
“너 이름이 뭐야. 안도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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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십니까?”
“아, 쓰바!!”
방에 홀로 누워 있던 녹이 벌떡 일어났다. 이놈의 세계수는 도와줄 것 같으면서도 도와줄 생각을 안 해요! 대차게 흐름이 바뀌니까 꿈의 중간으로 다시 돌아왔다. 녹은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난 이후 도언에게 물으면 된다. 그러려면 얼른 세계수가 정한 상황을 겪고 꿈밖으로 나가야 한다. 지금 시간대의 자신은 안도언을 전혀 모를 테니, 공자가 안도언이라는 의심을 가능한 숨기고 행동해야겠지.
그림 앞의 떡이란 게 이런 느낌인가. 만일 저 미화 공자가 진실로 어린 안도언이라면 그의 정체를 살살 꼬여 알아낼 수 있을 텐데. 현실의 안도언보다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안도언이 꾀어내기 쉽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녹은 이를 꽉 물고서 문을 벌떡 열었다. 그의 맹렬한 기세에 눈앞의 안도언 용의자는 뒷걸음질 치며 녹이 이미 알고 있던 대사를 이어 나갔다.
“언제까지 여기 있으실….”
“당장 떠납시다. 짐 챙기세요.”
“…네?”
“일행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들보다 저를 따라오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랬었….”
“빨리 안 오면 놓고 갑니다.”
녹이 문에 걸린 청동 종을 챙겨 허리춤에 달며 말했다. 공자는 냉큼 짐을 챙길 생각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준비 안 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저는 짐이 없습니다.”
공자의 손에는 그 무엇도 들려 있지 않았다. 달밤 산책 중 납치당한 대로, 고급 단벌옷이 전부인 공자였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니…. 녹은 자신이 괜히 허망해졌다. 그러나 공자의 마음은 다채롭게 차 있는지, 얼굴엔 기대가 만연했다.
녹은 그 나이 때 아이의 얼굴을 되찾은 공자를 보며 물었다.
“근데 떠나기 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저 말고 또 다른 도깨비를 언제 보신 적 있습니까?”
이네스가 기록한 영물이 도언이라면, 그 도깨비가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 어디 한번 변명이나 들어 보자.
“제가 다른 도깨비를 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증스러운 표정 봐라.’
녹이 선선히, 아니, 가히 폭발적으로 동행을 허락하자 공자는 자신이 가진 카드를 아꼈다. 이미 녹이 영물이 아닌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인데, 연기 한번 깔끔하게 잘한다. 만일 이게 첫 번째 경험이었다면 녹은 깨끗하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녹은 공자의 손목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왔다. 이후 방문을 닫고서 근방에 짧게 침묵 결계를 쳤다.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주변에 마법사가 있든 없든 조심하는 건 이미 습관이 되었다.
문에 발린 창호지의 결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공자는 무슨 소리 하냐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덜 자라 자신보다 높이는 낮지만 연기력 하나는 녹의 역량을 웃돌았다.
‘그래, 네가 그리 나온다면 나도 맞춰 주마.’
녹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서 한껏 여유를 가장했다.
“속일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저 같은 도깨비는 모르는 게 없답니다. 달리 도깨비겠습니까? 공자도 조심하세요. 도깨비한테 잡아먹히기 전에.”
“…….”
녹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자는 살짝 말아 쥔 주먹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혼신의 대사에 감명이라도 받았나. 눈에 힘을 준 공자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하다. 그러나 한참을 그러고 있던 공자는 곧,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풉.”
“…….”
“아, 죄송합니다. 왜인지 이건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뭐든지 알아보는 신비한 도깨비라는 녹의 공언에 웃음을 참지 못했나 보다.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것도 분명 쏟아지는 웃음을 참기 위한 일말의 반항이었으나, 아직 인생을 살아온 세월이 부족한지 공자는 웃음을 참아 내는 뇌내 근력이 없었다.
‘저 새끼 분명히 도언이다. 안도언이야. 이건 확실하다. 백 퍼센트다. 더 안 알아봐도 안다.’
녹은 얼굴 근육을 차분하게 풀어내려 노력하며 인자하게 미소했다.
“공자. 하나만 부탁합시다.”
“뭡니까?”
“진짜 딱 하나만 해 주시면 됩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들어 보고 생각하죠.”
녹은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부탁했다.
“……딱 한 대만 때리면 안 됩니까?”
“…….”
“진짜 딱 한 대만…. 딱 한 대면 되는데….”
“…….”
간절하게 흐린 말끝만 방 안에 울렸다.
❊ ❊ ❊
공자에게 절실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대도 때리지 못한 녹은, 약간 침울함을 간직한 채로 공자와 함께 길을 나섰다. 공자는 분명 제 욕심껏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로 녹과 함께 다니고 싶다 얘기했고 녹은 그를 허락했다. 어차피 해안 마을에 마법사가 사라질 때까지 돌려보낼 곳이 마땅치 않기도 했다.
공자의 말마따나 아무리 목숨이 위험했다고 하더라도 허락 없이 공자를 머나먼 숲속으로 옮겨다 놓은 건 녹이었다. 어떻게든 책임은 져야 했다. 안전할 때 만났던 곳에 데려다 두면 되겠지.
“그래서, 대체 어디서 도깨비를 봤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자꾸 거짓말하지 마십쇼. 저는 다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면 어디서 도깨비를 보았는지도 아시겠네요. 혼자 아시면 됐지, 왜 자꾸 물으십니까?”
철저하게 숨기는 도언에, 녹은 애꿎은 돌멩이를 하늘 멀리 차올렸다. 이렇게까지 숨기는 정보라면 억지로 들춰내 봤자 세계수가 꿈을 리셋해 버릴 게 뻔하다. 이름이 안도언이냐고 물었던 저번처럼 말이다. 그 힘이랑 한두 해 같이 사나. 척하면 척이지.
이 공자에 대해서 기억나는 건 그가 미화 체질이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분명 과거, 공자에게 도깨비에 관련한 무엇도 듣지 않았던 게 뻔했다. 무언가 들었다면 기억을 못 했을 리 없었다.
공자가 도언이든, 혹은 도언이 아니든. 여하간 처음 보는 얼굴이 맞았다. 게다가 공자를 식신에게서 구해 준 값은 이미 호랑이에게서 녹을 구해 주는 거로 갚았다. 정산할 게 없는 관계였다. 아주 깔끔했다. 이제 헤어지기만 하면 되는데 망할 마법사들은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해 먹질 않는다.
“동이 도령, 하룻밤만 더 가면 다른 마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동이 도령,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기에 냇물이 있나 봅니다. 목 좀 축일까요?”
“동이 도령, 그쪽 길이 아닌 이쪽입니다. 아무래도 지도는 제가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이 도령, 이 버섯은 먹어도 되는 겁니다. 왜인지 도령이 좋아할 것만 같지 않습니까.”
공자는 녹의 옆에서 쉼 없이 재잘댔다. 그런 그가 귀찮지도 않은 이유는, 모두 다 녹의 기분과 편의를 봐주기 위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리라. 목이 좀 마른가 싶을 때는 숨어 있던 시냇물을 찾았고, 배가 좀 고픈가 싶을 때는 숲에서 나는 보양식을 발견해 왔다.
물론, 알 수 없는 동행을 데리고 다니며 처음 펼쳐 본 지도는 자연스레 공자의 것이 되었다. 그만 졸졸 쫓아가면 되니 움직이기도 편했다. 뭐, 어차피 녹에게 목적지란 없었으니 조금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고.
가끔은 이렇게 사람과 함께하는 생활에 젖어 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아마 홀로 쓸쓸히 지냈던 과거의 녹은 생각했을 거다. 항상 얼굴을 마법으로 가장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식신이 알아서 공자를 찾아오며 알려 주니, 굳이 기감을 펼쳐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미화라는 체질은 당사자에게는 영 좋지 않아 보였으나 녹에게는 천연 마법사 탐지기가 따로 없었다.
가끔씩 비실대며 공자에게 날아오는 식신을 튀기는 것만 빼면 귀찮을 일 또한 없었다. 공자는 녹의 생활 편의를 봐주고, 녹은 식신을 없애 주고. 완벽한 상부상조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말 상대도 해 주니 외로울 틈도 없고.
‘해안 마을에 마법사들이 몽땅 다 없어졌을 때, 과거의 내가 좀 아쉬워했겠는걸.’
공자를 처음 데리고 왔던 해안 마을에 그를 풀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거기서 뻐기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동행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과거의 녹이라면 아이의 일행이 걱정하기 전에 얼른 그 마을로 보내 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겠으나, 공자가 일행이 있는 곳이 어딘지 입을 꼭 다무니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다.
지금에 와서야 그에게 진짜 일행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뭇잎에게 시켜 주변을 둘러보라 했더니 해안 마을 근처에는 이웃 마을이 없다는 보고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분명 공자는 일행이 이웃 마을에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그 일행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니, 결국 녹이 할 수 있는 건 데리고 왔던 해안 마을로 다시 내려놓고 오는 것뿐이었다.
함께 지낸 지 며칠이 지나도 공자는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왜 안 알려 주겠어. 과거의 녹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의 녹은 이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했다. 분명 안도언이겠지.
“저기, 마을이 하나 보이는군요. 오늘은 저기 갈까요.”
한 시진 전쯤에 출발해 한밤이 되었다. 공자의 완벽한 시간 분배 덕분에 또다시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편하긴 편하네.
하지만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도래했다.
“아니, 잠깐만요. 공자.”
해맑게 마을을 가리키며 걷는 공자는 녹의 만류에 걸음을 멈추었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는 아이는 역시나 무구해 보였다. 진짜 쟤가 안도언인가 싶을 정도로.
해안 마을에 보낸 나뭇잎이 드디어 마력 감지를 못하게 된 것이다. 마법사들의 철수를 뜻했다. 저 공자를 얼른 보내 주고 나도 꿈에서 깨어나야지. 괜히 더 정들기 전에 마법사들이 철수해서 다행이었다.
“저랑 먼저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딥니까?”
“여기지요.”
녹이 손가락을 부딪치자,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변했다. 부엉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숲속은 파도 소리가 만연한 모래사장이 되었고, 가득했던 숲의 향은 바다 특유의 염분기 서린 공기로 변했다.
도착하자마자 녹을 반기듯 날아온 나뭇잎은 회색빛의 분진이 되어 허공에서 스러졌다. 원래라면 최대 이틀 정도만 보낸 후 회수할 작정이었으나 이놈의 마법사들이 가 먹지를 않아서 이레를 넘게 있었다. 참 오래도 버텨 주었다.
녹은, 공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기억 소거할 생각으로 등을 돌리다가 알아챘다.
-마법사가 아직 한 마리 더 남아 있었다는 것을.
그때, 녹의 머릿속에 과거의 녹이 했던 계획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술술 들어왔다.
안 그래도 요즘 아이들로 녹을 꿰려 하는 마법사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몽땅 잡아 족쳤으나, 왜인지 모르게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나서 녹 주위에 있는 아이들이 피해를 보았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던 과거의 녹은 아무래도 이 상황을 기회로 이용한 것 같았다.
저 마법사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혼자 녹을 상대했다간 저승행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거다. 바로 앞에 있는 공자는 충분히 아이다워 보였다. 어차피 기억 소거를 하면 상처는 받지 않을 테니, 공자를 모질게 내치는 모습을 저 마법사에게 보여 주는 방식으로 마법사들에게 심겨 있던 진리를 바꿀 생각이었겠지.
하녹은 아이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그 진리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 공자는 황망히 녹을 바라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
“도령… 어차피 도령은 목적지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함께 있던 게 그리도 힘겨웠습니까?”
아니, 편하면 편했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니죠? 저를 두고 가실 거 아니죠? 그냥 잠깐 바닷바람 쐬러 오신 거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지 않았지만, 공자는 자신을 버리려 하는 부모를 대하는 양 굴었다. 보는 이가 다 애처롭고 안쓰러웠다. 그의 모습에 되레 마음이 약해졌다만 과거의 녹은 심지가 굳었다.
“도령. 절대 외롭게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저랑 함께 가요. 함께 있어요. 네?”
일주일만 함께 다닌 것치고 지나치게 절절하다. 입이 녹의 의지를 배반하고 과거를 따라 열렸다. 그는 과거와 한 치의 오차도 나지 않는 모진 말을 매섭게 내질렀다.
“심심해서 좀 놀아 줬더니. 이봐, 네 위치를 자각해.”
‘녹. 부디 지금의 위치를 자각해요.’
“너는 지금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잖아.”
‘녹은 지금 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에요.’
“알겠어? 너는 그저 장난감이었다고. 마법도 못 쓰는 인간 주제에.”
‘아시겠어요? 지금은 마법을 못 쓰잖아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석에서 이 모든 걸 목격하고 있던 마법사가 순간이동으로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무너지는 공자의 표정을 보며 녹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하여간에, 이걸 기억해 써먹다니. 어지간히도….
❊ ❊ ❊
그를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어난 녹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어난 직후 비몽사몽 하는 거야 늘상 있는 일이지만, 오늘 특히나 더 심했다. 어차피 출근도 안 하고 일할 필요도 없는 녹이니만큼, 졸린다면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으면 될 일인데 절대 다시 눕지 않는 녹이었다. 그럴 정도로 방금의 꿈은 녹에게 많은 점을 시사했다.
잠이 깰 정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라서 그런가. 이미 짐작은 했던 사실이라서 그런가. 녹은 눈을 가까스로 떠 내고 장성한 공자를 바라보고자 옆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침대 옆자리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방 바깥에서 났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방문이 열렸다. 뜨거운 머그잔 두 개를 든 도언이 요람 같은 침실에 입성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금방 잠을 몰아낸 녹에게 도언이 모닝커피를 내밀었다. 도언의 말에 탁상 위에 있는 시계를 보니 평소에 일어나자마자 마주하는 숫자보다 10분이 더 앞당겨져 있을 뿐이었다.
“타이밍도 좋다. 내가 일어난 건 어떻게 알았어?”
“들리잖아요.”
“뭐가?”
“당신이 눈뜨는 소리.”
저게 진짜일까. 차라리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을 테다. 하여간에, 안도언은 농담이랑 진담이랑 구분이 안 된다.
언제 일어나서 옷까지 멀끔하게 갈아입은 건지 그는, 재킷과 외투만 입으면 곧바로 출근할 수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핏의 정장 바지에 셔츠, 그리고 와인색 캐시미어 니트. 멀끔한 모습을 보니 오늘은 안가가 아닌 회사로 출근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진지하게 무슨 생각 해요?”
“…….”
“혹시 내 생각 하시나?”
“응.”
녹에게 당연히 무시당하리라 여겼던 도언은, 상상도 못했던 긍정에 얼결에 되물었다.
“……네?”
“네 생각 하고 있었다고.”
도언의 니트를 응시하고 있었던 시선을 위로 끌어 올렸다. 녹은 어느새 또렷하게 도언의 눈을 직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흐리멍덩한 잠을 몰아낸 눈빛은 깨끗하게 맑았다. 예상치 못한 대답과 녹의 눈빛 콤보에 도언의 귓가에 피가 몰렸다. 녹의 응시를 받으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도언이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우와…… 상상 이상으로 좋네요. 녹의 그런 말.”
“여기서 평생 네 생각만 해 보라며.”
“그건 그렇지만…. 정말 그리 말씀하시니까 당혹스러울 정도인걸요.”
도언이 빈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며 소년처럼 설게 웃었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차마 주워 담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되게 좋아하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아이처럼 표현하는 도언의 모습에 괜히 머쓱해진 건 녹이었다.
“크흠… 큼. 여하간, 너. 쪼잔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뭐,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말을 잊지 않고 담아 둔다거나…. 그리고 그대로 다시 갚아 준다거나….”
“다른 사람이 한 말이야, 그게 크게 중요합니까? 제가 담아 두는 건 당신밖에 없는걸요. 여하간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하하. 쪼잔하다니. 처음 들어 봤어요. 어감이 재미있군요.”
“재미없어, 재미없어! 재미가 정말이지 하나도 없어!!”
‘지금 나한테만 쪼잔하게 군다는 거야, 그럼?’
도언은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뒷목을 쓸었고 녹은 혈압이 올라서 자신의 뒷목을 받쳤다. 녹의 커다란 반응에, 도언은 풋풋한 눈빛을 달리하고 녹에게 성큼 다가왔다. 분위기를 일순 달리하는 것이 카멜레온 뺨쳤다.
“일어나자마자 무슨 말이실까. 왜요.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꽤 단골이 된 저 질문이 다시 튀어나왔다. 도언은 때때로 이러한 질문을 하며 녹에게 가볍게 입맞춤할 기회를 얻어 가곤 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지. 진실의 카드를 내밀 시간이었다. 녹은 손바닥을 펼쳐서, 다가오려는 도언을 막았다.
“동작 그만.”
자연스럽게 다가오던 도언은 녹의 한마디에 굳어 버렸다. 하여간 자잘한 말은 잘 듣는 도언이었다. 손짓 하나로 가볍게 한 가문을 호령하는 가주의 질주를 멈춘 녹은, 그에게 의기양양하게 단언했다.
“알아냈다.”
“…무얼요?”
“네 정체.”
“제가 누군지 알아내셨다고요?”
“그래. 얘기하면 이거랑 요거랑 풀어 주는 거 확실하지?”
녹이 커피잔을 협탁에 놓은 후, 비어진 두 손으로 각자 목과 발목 부근을 가리켰다. 도언이 꺼림칙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얼굴 보니 설마 하는 모양새다. 저런 표정을 할 정도면 분명 진심이겠지. 그를 본 녹의 기분이 상승 곡선을 이루며 가파르게 치솟았다.
“잠깐. 혹시 모르니까 기록해 둬야지. 핸드폰 어딨지? 아, 여기 있구나. 녹음 기능이… 아, 됐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 없으시던 분이 조작 한번 잘하시네요.”
“나도 녹음하는 거 하나 찾는 데 조작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거든? 집에서 이거랑 제일 많이 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보통 어르신들은 새로운 기계 조작하기 어려워하시던데….”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시비 거는 거냐?”
도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일지 어쩔지는 모르는 거죠. 대꾸하며 여유롭게 커피를 들이켜기까지. 시비 거는 건 맞다는 건가? 여하간 아무래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맞히는 것에 대해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힌트까지 줬으면서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녹은 녹음 기능이 활성화된 핸드폰을 들이밀며 말했다.
“안도언은 하녹이 자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맞히면, 하녹의 구속을 풀어 줄 것을 약속하시겠습니까?”
“약속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벌써 40초나 녹음됐잖아. 깔끔하게 끝내자, 좀?”
“이번 대답이 틀리면 받을 페널티는 알고 계시는 거죠?”
순간 빠르게 상기되지 않은 약소에 잠시 기억을 되돌려 보던 녹은, 고개를 끄떡였다. 어차피 알아맞히기만 한다면 무용지물이 될 페널티 내용이었다. 저번이야 괜히 쫄려서 물어봤으나, 확신이 있는 지금이야, 뭐.
“10분 동안 터치 가능에, 네 거 핥아 주는 거였던가?”
“기억은 잘하고 계시네요.”
“그래. 까짓거 해 준다. 대신 너도 내가 너를 알아맞히면, 곧바로 풀어 줘야 한다?”
“좋아요. 그렇다면 저도 이 기회에 확실히 약속드립니다. 제대로 알아맞히시면, 바로 풀어 드릴게요.”
꿀꺽.
방 안에서는 누군가가 침을 목 뒤로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낸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의미심장한 일말의 긴장감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녹의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여유로웠던 도언의 표정 또한 긴장으로 굳어 가기 시작했다. 목숨을 건 결투를 코앞에 둔 서부의 총잡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녹음을 끝내는 띠롱 소리가 울렸다. 이 파일이 과연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게 좋았다.
사실 곧바로 풀어 줄 거라는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갑자기 가도 되는 걸까. 하지만 마법사를 피해 다녔던 그 예전, 녹에게는 인생이 언제나 갑자기였다. 녹은 마지막으로 방을 한번 둘러봤다. 여기와도 이제 안녕이겠구나.
“잠깐. 내가 맞히게 된다면 바로 사라질 건데, 그 전에 청연이랑 작별 인사나 한번 하게 해 줘라.”
“…청연.”
침대 옆에 회색빛 정장을 차려입은 청연이 튀어나왔다. 청연에게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는 언제부터 이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이미 푸른 눈에 커다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나왔다.
“…만일 가시더라도 저랑은 연락해요. 녹 님… 대표님이랑은 연락 안 하셔도 되니까… 히익.”
흘러나오는 헛소리는 도언이 흘긋 던지는 시선 한 번에 마무리되었다. 녹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도라이언 밑에서 일하는 불쌍한 청연을 한번 둘러 안아 주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너도 저런 알 수 없는 녀석 밑에서 부하 노릇 하랴, 보좌 노릇 하랴. 고생 많았어.”
“알아주시는군요!! 으허허헝…… 녹 님!!”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전우애였다. 청연에게 인사한 덕분에 한 점의 미련까지 깔끔하게 털어 버린 녹이었다. 녹은 후련한 마음을 가지고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언 역시, 커피를 마실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협탁에 머그잔을 고이 놓아두고 팔짱을 낀 상태였다. 둘을 둘러싼 공간에 심장 소리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 열쇠를 끼워 돌릴 차례다.
“그러니까, 네 정체는.”
녹은 심호흡을 하고 자유를 향한 문장을 분절을 끊으며 발음했다.
“2백 년 전, 호랑이한테 덤벼들었던 미화 체질 공자. 맞지! 나한테 이름 안 알려 주었던, 그 해안 마을에서 식신 떼의 공격을 받았던 공자 있잖아. 이레 정도 나랑 같이 있었던! 그때 내가 쓰던 이름은 동이였고. 맞지!”
“아니, 이레 동안 없어지셨을 때 녹 님이랑 같이 계셨었어요?”
미동도 없는 도언의 옆에서 청연이 호들갑을 떨었다. 청연의 반응을 보아하니 도언에게 확답을 안 들어도 알겠다. 확신이 녹의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녹은 딱딱하게 굳히는 도언의 얼굴을 뚫듯이 집중했다. 거대한 마법을 쓸 때도 이렇게까지 집중하지 않았다.
…도언은 곧 고개를 무겁게 끄떡였다.
그 미약한 고갯짓을 보자마자, 녹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내질렀다.
“앗싸! 자유!!”
“청연.”
“네.”
“오늘 스케줄 다 취소해.”
“알겠습니다!”
어느새 말끔해진 얼굴을 한 청연이 지팡이를 꺼내 들더니,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풀리자마자 떠날 건데, 아까 그 짧은 고별만으로 만족하는 건가? 너무 깔끔한 이별에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기억하시다니, 대단한걸요. 확실히 제가 힌트랍시고 그 공자를 언급하긴 했죠. 얼굴이 그때와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보실 줄 알았는데.”
“얼굴 바꾸는 거야, 내가 인세에서 항상 하던 거니까.”
당찬 녹의 발언에 도언이 침대 위로 성큼 올라왔다. 철컥이며 벨트를 푸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벨트 안에 아타움을 푸는 열쇠라도 있나 싶었으나 그럴 리가 없었다. 커지는 불안감에 희게 질린 녹이 물었다.
“뭔데, 왜 다가오는 건데, 그 전에, 왜 그거 푸는 건데.”
“녹. 답변에 대한 명제가 틀렸습니다. 그 공자가 제가 맞지만, 저와 처음 만났을 순간은 아닌걸요.”
“뭐?”
“녹의 마력을 돌려주는 열쇠는 제 정체의 일부가 아니라 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었어요. 기억 안 납니까?”
그때, 녹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한 단어였다.
아차.
다가오는 도언의 행태에 입이 바싹 말라 가던 녹은 엉덩이 걸음으로 빠르게 뒤로 빠졌다. 어느새 침대 헤드에 등이 닿아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어진 녹은, 그럼에도 다가오는 도언에게 갈급하게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잠깐, 잠깐, 잠깐!”
풀어 달라는 말만 아니면 언제나 녹의 요구는 잘 들어주던 도언이었다만, 이 순간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잠깐 멈추라는 말을 세 번이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진 본능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녹에게 바싹 붙은 그가 드디어 녹이 말한 ‘잠깐’에 대꾸했다.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도언의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였다. 그의 목덜미에서 청량한 바디워시의 향이 뿜어져 나왔다.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 향은 덤이었다. 아쉽게도 녹은 그런 향을 감미롭게 맡을 여유가 없었다. 당황은 녹의 후각 세포까지 마비했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도언이 녹의 홍채를 응시했다, 녹은, 무언가 빠르게 진행되는 속도에 뱅뱅 도는 눈을 바로 하기 위해 애쓰며 그에게 항의했다.
“이건 아니지! 네가 너에 대한 힌트를 달라고 했을 때 준 건 그 공자와의 마지막을 기억하라고 했던 거였잖아!”
“답변을 그리 말씀하시다니, 마지막을 기억해 내셨나 봅니다.”
“그래, 그래서….”
“그래서 제게 쪼잔하지 않냐는 둥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였군요.”
정확히 말하면 쪼잔하단 소리를 많이 듣지 않냐고 물은 거였는데…… 녹은 차마 정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어쨌건!! 이건 불공정 거래지! 내가 네 정체에 대한 힌트를 달라고 했을 때 너는 당연히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한 힌트를 줬어야 맞지!”
“녹은 제 정체에 대한 힌트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힌트를 요구할 적에 녹이 그런 전제를 말씀하셨습니까?”
도언이 가증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정말로 모른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기억에는 없는데요.”
‘미친.’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구두 계약 당시, 도언에 대한 힌트를 요구한 녹은 그에 관한 세밀한 조항을 내밀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분위기상, 절차상, 도언이 잘 알고 해 주는 줄 알았지!
게다가 도언이 자신에게 물어 올 때,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한 언급이 아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언급을 살살 하며 주입했던 것 또한 자신이 착각하는 데에 한몫했다. 볼이나 이마, 손등, 때때로 입술에 하는 가벼운 입맞춤을 하기 전에 도언은 항상 ‘제가 누구인지 기억났어요?’ 따위의 질문으로 기회를 얻어 갔지, ‘저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알겠어요?’ 따위의 질문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언의 주장은 몽땅 다 일리 있었다. 확실히 신세기 들어 타로 컨테이너에서 나오지 않았던 녹은, 계약이라곤 주거 해결을 위할 때 빼고는 해 보지 않아서 남들이 이런 꼼수를 부릴지 예측조차 하지 못했다.
“이… 이건 사기 아니야??”
“하하하. 사기라니요. 계약하기에 앞서 정확한 조항 확인은 필수죠. 녹은 사업하시면 안 되겠네요.”
“너도 하면 안 돼, 이 사기꾼 놈아!”
“저는 사기 친 적 없습니다. 언제나 정당했죠. 착각한 건 녹이었어요.”
“…….”
입에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놀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게 매끄러웠다. 뭔 말을 하면 할수록 말리는 느낌도 들고. 도언은 말문이 막힌 녹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와 맞대며 카운터를 날렸다.
“제가 녹이었다면 처음 만났을 때의 정체에 대한 힌트를 달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체크메이트. 자신이 뭐라고 항의하건, 자신의 실수가 확실했기 때문에 녹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 차가운 세상살이는 몇백을 살아도 완벽하게 적응을 할 수가 없구나. 심지어 자신이 자신만만하게 확보했던 녹음 파일은 결국 자신이 겪을 페널티에 대한 복습의 역할만 했을 뿐이었다.
‘내가 왜 그런 페널티를 걸었지…. 아니, 그전에 세계수는 그럼 어째서 그때를 보여 준 거지…. 해방에 하등 의미 없는데….’
세계수가 그 꿈을 보여 주기에 당연히 해방의 열쇠가 그 공자인 줄로만 알았던 녹이었다. 여하간, 아무리 빠져나갈 구멍이 있나 고민을 해 봐도 자신이 이 게임에서 진 게 확실했다. 녹은 녹답게 결과에 쿨하게 승복했다. 다만 승복한다고 곧바로 과감해지는 건 아니었다.
“…….”
아직은 옷 속에 감추어진 도언의 중심일지라도 부푸는 형태가 너무 잘 보였다. 꺼내 보기가 무섭다. 녹이 시시각각으로 파랗게 질리자, 도언이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시야를 가려 버렸다. 어느새 도언의 손이 녹의 셔츠를 타고 들어와 그의 허리를 쓸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어찌하는지 모른다면 제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시면 됩니다.”
“뭘 따라… 힉.”
분명 녹이 입고 있던 카이비가 도언의 손짓 한 번에 침대 바깥 저 멀리 내팽개쳐졌다. 아타움에 통과되는 직조물이라니. 망할 상성이었다. 분명 카이비가 사라져 중심에 서늘하게 닿아 오던 아침 공기가 뜨끈하고 축축한 무언가로 덮였다. 도언이 녹의 중심을 삼켜 버린 거다.
경악스러운 그의 추진력은 녹의 몸을 굳히기 충분했다. 슬금슬금 밑으로 고개를 내려 보니, 도언의 정수리가 녹의 다리 사이에서 동동 떠다녔다. 그때, 중심부의 주위에 자극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잠…잠까학….”
녹이 도언을 밀어 내고자 결 좋은 머리 중심에 손을 대고 힘을 주려고 하는 찰나에, 말랑한 무언가가 중심을 섬세하게 건드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중심으로 몰린 감각에 등허리가 굽어지고 엉덩이가 뒤로 빠졌다. 그러나 물러설 곳은 없었다. 언제나 녹의 뒤에는 단단한 침대 헤드만이 성벽처럼 자리하고 있을 따름이다.
도언의 머리를 밀어 내던 녹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는 녹의 이성적인 연산에서 도출된 결괏값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행위에 어느새 뇌세포까지 녹진하게 녹아 버렸다. 여하간 자극에 쉬운 남자, 하녹이었다.
도언이 머금은 녹의 중심은 그의 혀 놀림에 따라 크기를 키워 나갔고, 그에 따라 다리를 옹송그렸다. 사탕을 빨아 먹듯 그의 중심을 안으로 흡입하던 도언이 슬쩍 녹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녹의 눈가는 붉어졌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극에 취해 이를 악물고 밭은 숨을 내쉬며 도리질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물론, 그 모습은 도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기폭제일 뿐이다.
도언은 올망이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느른하게 하얀 허벅지로 입을 옮겼다. 녹의 순간을 한순간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듯 어두운 눈을 한 도언은 녹의 중심 바로 옆 허벅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흔적을 남겼다. 하얀색과 대비되는 붉은 울혈이 설원의 동백처럼 소담히 폈다. 뜨거운 온도에서 젖어 든 중심이 차가운 공기에 닿자 그 온도가 배로 느껴졌다.
“으읏…….”
녹이 도언에게 붙잡히지 않은 남은 발끝으로 시트를 밀었다. 자신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는 도언의 시선이 어느새 음습해졌다. 시선이 올가미가 되어 자신의 어떤 부분도 붙잡아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족쇄와는 또 다른 속박이었다.
자신의 모든 은밀한 곳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그 눈빛에, 녹은 팔을 들어 올려 제 눈을 가리는 걸 선택했다. 시선이 차단되니 도언의 모습까지 차단되었고, 그러자 아까보다야 훨씬 상황이 나았다.
“아앗, 으응.”
아니, 나아진 줄 알았다. 눈을 팔목으로 가리자마자, 도언은 다시금 녹의 기둥을 삼켰고, 시각의 차단으로 인해 그 감각은 머릿속에 곧바로 그려졌다. 붉은 혀로 기둥을 둥글게 핥고, 굴곡이 진 귀두 끝부분을 살살 쓸어내리며, 뾰족하게 만든 혀끝으로 요도구를 찔러 온다. 귓가를 어지럽게 만드는 질척이는 소리는 덤이었다.
생경한 감각이 뇌를 침략해 휘젓고 다니며 난장판으로 녹여 버렸다. 살짝살짝 뾰족한 송곳니로 긴장감을 줄 적에는 튀어 오르는 몸을 막을 수 없었다. 녹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감각을 견디려 노력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감각 또한 있다는 걸, 긴 세월 살아온 녹은 처음 알았다.
어느새 빳빳하게 선 중심의 뿌리 쪽이 차가워졌다가, 곧 입속 점막의 푹신함에 잠기는 것이 반복되었다. 도언이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응, 읏, 하으, 하아.”
그저 고저의 변화만 주는 것이 아닌, 흡입하며 움직였기 때문에 이미 녹의 눈앞은 별천지였다. 고개를 들어 끝에 걸리고, 깊게 아래로 하강한다. 점점 더 속도를 올리는 그에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며 사정감이 짙어졌다. 이대로면 위험했다. 녹은 정신을 부여잡으려 노력하며 눈가를 가렸던 손을 내리고 도언의 뒷머리를 잡아채 뱉어 내게 하려 시도했다.
“잠깐, 나, 학, 이제, 으응.”
그러나 도언은 낌새를 알아채고는 녹의 허리를 붙잡고선 머금고 있던 걸 강하게 흡입하기 시작했다. 녹이 제대로 그의 머리를 떼어 놓으려고 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녹은 속수무책으로 도언의 입안에 백탁액을 배출해 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앗……!”
저절로 꼿꼿하게 펴지는 허리 역시 주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 만큼 내뱉고 난 뒤, 녹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하필 그의 입안에다가 실례를 해 버렸다. 도언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피가 귀 끝까지 몰린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녹. 나 봐요.”
흥분에 낮게 긁히는 목소리가 다리 사이에서 들려왔다. 아니, 그 존재감은 서서히 녹에게로 다가왔다. 녹은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무언가 잔뜩 묻혀 질척이는 손가락 하나가 녹의 엉덩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거기에 녹은 가렸던 손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눈물 고인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며 발갛게 물든 순진한 토끼에게, 나른함을 가장한 호랑이는 달큰한 말로 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 더 좋은 거 할래요?”
“더… 좋은… 거?”
어느새 녹의 다리 사이에서 그의 얼굴 옆까지 올라온 도언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걸쳤다. 그러나 홍채에 짙게 깔린 정염은 그가 꾸민 여유로움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차례 쾌락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댔던 가련한 녹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눈빛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도언이 가벼운 버드키스를 녹의 귓가에다가 잘게 떨어뜨리며 속삭였다. 응? 더 좋은 거요. 아까보다 훨씬 더. 유혹하는 문장들이 감미롭게 녹의 고막에 내려앉았다. 악마의 속삭임이 따로 없었다. 녹은 분위기를 타 버리긴 했지만, 미지의 경험에 대한 불안함에 선뜻 승낙하기 힘들었다.
넘어올 듯 말 듯, 거절할 듯 말 듯, 아까 전보다 좋은 거라니 겪어 보고는 싶지만, 흐름상 바지 속에 있는 도언의 잠룡이 등장할 것만 같아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녹이 아슬아슬하게 주저하는 걸 알아챈 도언은 그의 불안감 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도언은 녹의 귓바퀴를 둥글게 핥아 올리던 도언은, 그의 귓가에서 등허리가 울리도록 낮게 읊조렸다.
“계약은 잊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번은 그의 중심이 자신을 꿰뚫을 위험은 없다는 확답이다. 자신이 주저하게 된 원인이 사라지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결국 쾌락에 대한 호기심에 굴복한 녹은,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도언이 손에 쥐고 눈앞에서 흔드는 선악과를 물어 버렸다.
곧바로 위치가 바뀌었다. 녹의 위에 있던 도언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녹은 그의 허리 사이를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언제 단추가 풀린 건지 모를 녹의 셔츠는 그대로 드러난 하얀 나신을 가릴 의무를 저버린 지 오래다.
단단해진 도언의 것이 엉덩이 밑에서 너무 잘 느껴졌다. 도언은 녹의 목울대를 따라 키스하며 녹의 입술로 올라왔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두드리는 혀의 침입에, 녹은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갈 길을 찾지 못했던 두 손은 도언의 쇄골 위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깊게 얽히는 숨결을 뒤로하고 슬금슬금 질척한 무언가를 묻힌 도언의 손가락이 녹의 뒤쪽을 파고든다. 곧, 그의 밀문에 느껴지는 손가락의 감각에 녹의 몸이 파드득 올라왔다.
그러나 녹이 입술을 떼는 것보다 도언이 그의 페니스를 손에 쥐는 게 먼저였다. 도언은 쾌락의 급소를 낚아채 느리게 흔들었다. 한차례 녹의 정액이 발린 손은 그만큼 미끄러워 걸리는 부분 없이 부드럽게 중심을 쓸었다.
“으응….”
이어진 입술에서 녹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주름진 비문을 건드는 미끄러운 손가락. 녹은 파득거리며 도언과 이어진 입술을 떼어 냈다.
접었던 팔을 펴고 허리를 곧추세운 녹이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도언을 내려 보았다. 그 큰 동작에 도언은 녹의 중심을 만지는 엄지 끝으로 한껏 달아오른 녹의 끝부분을 살짝 퉁겨 냈다.
“하읏……!”
작은 손짓으로 피워 낸 찌릿한 전기가 중심부로부터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와 꽂혔다. 그 충격은 비문의 주름이 매만져진 충격을 몰아내고 녹의 허리를 녹여 냈다. 결국 녹은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가 접히고 도언의 어깨 위로 머리를 대며 상체를 쏟아 냈다.
곧장 도언의 위에 타고 올라가 엉덩이만 세운 모양새가 되었다. 확연히 벌어진 볼기에 도언은 전보다 더 손쉽게, 구멍 주변에 손가락에 묻힌 녹의 체액을 묻혔다. 녹의 더운 숨이 도언의 볼에 닿았다. 도언은 고개를 돌려 녹의 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힘 빼요.”
그러나 녹은 도리질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긴장으로 꽉 조여졌는데 어찌 힘을 빼란 말인가. 그리고 더 좋은 거라는 게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도언은 자신의 것을 쓰지 않는다고 했으나, 그렇다면 어째서 저리 뒤를 노리는 건가.
불신이 샘솟을 때마다 어찌 알았는지 녹의 부푼 페니스를 주무르는 통에 금방 생각이란 것이 휘발되었다. 도언은 녹에게 자극을 주어야 하는 때와 놓아야 하는 때를 기가 막히게도 잘 알았다.
녹은 도언의 옷을 핏줄이 솟을 정도로 하얗게 그러모아 쥐었다. 이리도 긴장하는 데 힘을 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도언은 인내할 줄 알았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언은 녹의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릴 때까지 잔키스를 이어 나갔다.
규칙적이고 다정한 그 소리에 녹의 긴장이 서서히 풀어질 때쯤, 손가락의 진입이 시작되었다. 녹아내리던 녹의 어깨가 긴장으로 솟아올랐으나, 한번 진입한 불청객은 무르지 않고 꿈질꿈질 앞으로 전진을 할 뿐이었다.
“으으…….”
이마를 도언의 옷자락에 댄 녹이 고개를 저었다. 어리광 부리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도언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의 안을 손끝으로 탐험하길 몇 분여, 어느 한 부분이 스치자…….
“흐읏!”
녹아내렸던 녹의 허릿심이 곧장 빳빳하게 굳어 상체가 세워졌다. 세우고 있던 물건 또한 전보다 더 단단해진 모양새였다. 짧지만 유달리 애탔던 보물찾기가 끝났다. 도언은 녹을 세운 그 부분을 다시 한번 힘 있게 눌렀다.
“으으응.”
퍼드덕거리는 몸이 운율 있게 흔들렸다. 녹은 자연히 들리는 턱과 달달 떨리는 허벅지를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다. 눈앞에서 폭죽이 튀었다. 도언이 자신의 것을 삼켰던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보다 더 자극적인 것이 있을까 의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말초 신경에 닿아 오는 자극은 폭격과도 같았다.
더 좋은 거 하자던 도언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언이 그에 맞춰 앞까지 쓸어 주니 앞뒤가 쟁여지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성을 포함한 정신을 하늘에 맡기고 몸과 본능에만 집중된 감각이 지나치게 격정적이었다. 자연히 녹의 허리가 흔들렸다.
자신의 위에서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몸을 흔드는 녹을 바라보는 도언의 눈 밑에 짙게 깔린 건 분명 짙은 음심이었다. 행위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맞춰, 그들의 공간을 깨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굿모닝- 굿-
적어도 9시에는 일어나고 싶어 했던 녹이 핸드폰에 설정해 둔 아침 알람 소리였다. 분위기를 깨는 핸드폰 알람에 의해 녹의 두 눈에 이성이란 게 깃들 용의가 보이자, 도언은 주먹으로 협탁 위 핸드폰을 내리쳤다.
-빠각.
“…….”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녹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친구 하나가 눈치 챙기지 못한 죄목으로 어처구니없게 사망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핸드폰의 허리를 분질러 버린 도언은 가볍게 손에 묻은 잔해 가루를 털어 내고, 다른 손으로는 한 번 더 녹의 안을 찔렀다. 불시에 공격당한 녹은 다시금 도언의 상체 위에 쓰러지듯 몸을 겹쳤다. 귓가에 가까워진 도언의 입이 열리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새로 하나 사 드리겠습니다.”
“흐앗……!”
일언반구 없이 녹의 핸드폰을 죽여 버린 도언은, 그에 대한 항의를 받지 않겠다는 듯이 녹의 전립선을 빠르게 눌러 댔다. 덕분에 녹은 제대로 된 항의도 못 하고 도언의 위에서 녹아내려야만 했다. 녹의 페니스를 쓸어 올리는 도언의 손동작 또한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흐으… 나올, 읏, 것 같… 잠…… 하아. 하윽!”
중심의 끝에서 하얀 정이 다시금 튀어 올라 도언의 옷을 어지러이 장식했다. 제 위에 얹은 생물의 사정 후 잔떨림을 느끼던 도언은, 그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와 깊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녹은 채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도언에게 숨결이 먹혀 버렸다.
좋은 건 빨리 배우는지라, 녹 또한 입안의 침입자에 대응해 꿈질꿈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술 취하기 전 맨정신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술이 아닐 뿐, 쳐올리는 끈적한 분위기에 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키스를 이어 나가며 탈력감이 느껴지는 몸을 무력하게 내리니, 배 근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단단하게 제 존재를 일렀다. 단단한 도언의 중심부에서 느껴지는 혈관 박동은 도언의 심장이 얼마나 건강하게 작동하는지를 일렀다.
한참을 녹과 숨을 나누던 도언은 한 손으로 녹의 턱을 감싸다가 엄지 하나를 빼어 녹의 입가에 서성이게 했다. 풀린 눈을 한 녹이 어리둥절함을 숨기지 않고서 게슴츠레 눈을 뜨자, 도언은 녹과 이어진 입을 떼어 내며 녹의 입에 엄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하고 부피감 있는 혀 대신 입안에 들어온 존재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혀 안쪽에 걸리는 손톱의 딱딱함이 입안의 이질감을 주었다. 도언은 온도 높은 붉은 혀 전체를 둥글게 쓸고, 치열을 매만지며, 말캉한 혀 밑까지 고루 쓸며 희롱했다. 녹은 입안에서 서서히 타액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곧,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녹의 턱을 올려 녹에게 자신의 엄지를 물린 도언이 나직하게 지시했다.
“이 세우지 말고, 빨아 봐요.”
상대를 옭아맨 다정한 지배자는,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낮게 읊었다. 마치 마법과 같은 그 말소리의 음률에, 녹은 거절하거나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순응했다. 녹의 입안은 뜨거운 온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도언의 손가락 역시 비슷한 온도였기에 입안에 들어온 존재에 차가움이나 뜨거움은 느끼지 못했다.
도언의 손가락을 둥글게 감싸고서 사탕을 빨듯 쭉쭉 빨았다. 딸려 올라온 타액을 연신 삼키며 느리게 비비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한 번 경험해 보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의외로 침대 위에서의 녹은 배운 건 잘 잊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전에 도언이 자신의 것을 핥아 주었던 패턴을 기억하며 실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열심히 배우는 학생에 의해 배를 찌르는 도언의 흉기가 조금 더 부피감을 늘려 갔다. 불편해진 녹이 엉덩이를 뒤로 빼다 그의 손가락을 뾰족한 송곳니로 살짝 물었다. 그 실수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도언의 눈치를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
“…….”
순간 둘 모두 멈춘 채 눈빛만 이어졌다. 원체 가라앉아 있던 도언의 눈이 더더욱 심해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도언이 헤드에 기댔던 고개를 빠르게 끌어 올려 몸을 일으켰다. 순간 녹의 머릿속에 들리는 단 한 문장.
잡아먹힌다-
똑똑똑똑똑똑.
녹에게 달려드는 도언을 멈추게 한 건 침대 앞, 크게 난 창문을 누군가가 단단한 무언가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무시할 수도 없게끔 커다란 소리가 규칙적으로 창을 두드렸다. 도언의 집은 적어도 30층은 넘는 높이였다. 녹에게만 꽂히던 시선이 순간 창 쪽으로 흩어졌고, 녹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뒤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은 흰 새였다.
매의 형상을 본 적 없었더라면 알비노 독수리 한 마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드문드문 검은 깃털이 섞인 매는 크게 홰를 치며 재주 좋게 공중에 떠 있었다. 도언은 성인 남성이 팔을 벌린 것 정도의 날개를 활짝 펴내며 퍼드덕거리는 하얀 방해꾼을 살심이 담긴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러나 그리 노려본들, 매는 물러서지 않고 부리로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똑똑똑똑똑.
창밖에 있는 녀석을 구경하고 있던 녹은,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쟤가 너한테 용건이 있는 모양인데.”
도언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침실의 창문을 열자 냉랭한 겨울바람을 깃털 곳곳에 인 매 한 마리가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침실로 들어온 매가 날개를 쉬게 한 것은 역시나 침대 위였다. 매는 고개를 날개 안으로 집어넣어 깃털을 골랐다.
녹이 호기심을 가지고 새를 관찰했다.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자, 매는 날개에 박았던 고개를 들고 푸르르 털고선 가슴을 내밀며 한껏 무게를 잡았다. 외형은 확실히 폼나는 모양새이긴 했으나, 그 행동 모양이 못내 작위적이어서 어설펐다. 그 사실을 매는 모르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마법과 관련 있는 새였다. 도언이 창을 열어 주는 걸 보면 그와 일면식이 있는 녀석인가 보다. 하얀 깃털과 푸른 눈의 조화는 새의 신비로움을 한껏 짙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미약하게 느껴지는…….
마력?
“무슨 일이지?”
창문을 닫은 도언은 하얀 날개를 지닌 불청객에게 차게 물었다. 녹에게 제 멋진 깃털을 뽐내던 매는, 도언이 다가오자 도언의 방향으로 통통 튀며 침대의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커다란 날개를 주체하지 못하고 걷는 모습이었다. 도언이 팔목을 내밀자, 매가 크게 홰를 치며 그 위로 뛰어들었다.
매는 도언의 팔목에 발톱을 대자마자 미미한 연기 아지랑이를 내뿜으며 도언에게 흡수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꼭 생물 같았는데, 이제 보니 매 자체가 마법인 것 같았다.
새 한 마리를 흡수한 도언은 자연스럽게 팔을 내렸다. 팔목에 앉으려 했던 매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지 수 초 후, 매가 등장한 이래로 내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고수했던 도언의 눈가가 깊어졌다. 손바닥으로 입을 덮은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언가 곤란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그 행동들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녹의 목소리에 도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태도가 부산스럽게 변했다. 그는 침실 옆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곧이어 코트를 꿰입으며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얼른 돌아오겠습니다.”
“어…어. 그래라.”
도언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녹과 침대에 있을 때와 다른 긴장이 도언의 온 신경에 곳곳이 들어찼다. 녹은 빠르게 걸어 나가는 도언을 따라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이리도 급하게 자리를 뜬 적이 없어서 괜히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움텄다. 핸드폰을 부술 만큼 그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하던 도언이었다. 그런 그가 이리 급히 나가다니.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
“뭐가 그리 급해? 위험한 일이야?”
도언이 서둘러 구두를 신는 모습을 지켜보던 녹이 평온을 가장하며 물어보았다. 허나 도언이 그 목소리에 깃든 불안감을 놓칠 리 없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애써 얼굴을 풀고선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닙니다. 얼른 올게요.”
‘아무리 봐도 별일 같은데.’
그러나 도언이 한번 말을 안 하려 마음먹은 거라면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을 잘 안다. 녹은 입씨름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곳은 마법사들로부터 안전할 거 아닌가. 아직은 그거면 되었다. 끈질기게 물어보려니 너무 바빠 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바깥 상황이 급하긴 급한가 보다. 그 매에게 대체 어떤 소식을 전해들은 건지는 몰랐지만, 도언이 자신의 옷 위로 하얗게 그려진 녹의 체액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신발까지 갖춘 도언이 급히 나가기 전에, 녹은 약간의 매너를 발휘해 친절히 고지했다.
“그 옷은 좀 벗고 가야 하지 않을까?”
“…….”
하얀 체액이 도언의 와인색 니트에 묻은 채로 말라 가고 있었다. 정신이 어찌나 없던지, 도언은 그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 위에 자켓과 코트를 급히 입고 나가려 했던 거다. 도언은 자신의 옷을 내려 보고선 얼른 니트를 벗어 현관 구석에 벗어 던져두었다. 번개 같은 행동력이었다. 도언이 입음으로써 잡지 속 상품처럼 보이던 니트는 곧바로 빨랫감으로 전락해 버렸다.
니트를 벗은 도언은 셔츠만 남았지만, 굳이 그 위에 무언가를 덧입을 여유는 없는지 급하게 외투를 다시 꿰입었다. 바빠 보이는 와중에도 녹에게 인사할 시간은 있는 모양이다. 그는 녹의 앞으로 성큼 걸어 들어와 녹이 듣기에 기습 같은 인사말로 인사를 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녹, 그래서 아직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죠?”
“…너 …읍.”
가볍게 입술을 맞댄 이후 서글서글하게 떨어졌다. 그는 시원스럽게 미소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못된 새 한 마리 때문에 좋은 시간이 끝났네요. 다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거 하죠.”
“더 좋은 거는 무슨….”
입술이 떨어진 후, 손목으로 입술을 문대는 도중 도언의 발언에 툴툴댔다. 분위기에 넘어가 뒤만 열심히 쑤셔졌다. 머리가 차게 식어 가자 도언이 분위기를 타고 자신을 꾀어내어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떠오르는 녹이었다. 물론 승낙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 좋은 거란 게 그런 건지는 몰랐다.
“안 좋았어요?”
“그거야 당연히…!”
도언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긍정하려던 녹은 대답이 나오려다 말아 버렸다. 제 머뭇거림의 의미를 읽기 위해 녹은, 다시금 도언의 질문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안 좋았냐고 물었다. 손가락이 처음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극심한 이물감에 불편했었다. 하지만 그다음엔?
어느새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녹은 자신의 홧홧한 낯빛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다 만 녹에게 도언이 대답을 채근했다.
“당연히?”
“…급하다며. 얼른 안 나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이 되었다. 나가려던 도언은 녹의 머리를 끌어 제 품 안으로 당긴 후, 강하게 끌어안았다.
“…일찍 올게요.”
녹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춘 도언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떼어 내 몸을 돌렸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면 집 밖에 나서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이 일어, 도언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집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자 있음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던 녹이었으나, 언제나 여유롭던 저 녀석이 서둘러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자 하니 어쩔 수 없이 걱정이 일었다. 무슨 일이길래 저리 급히 나가는 건지. 말이라도 하고 나갔으면 걱정은 안 할 거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했던 녹은 또다시 자신이 저 녀석에 대한 걱정을 했단 걸 깨달았다. 미운 정 들었나. 집 안에 붙잡아 두는 저런 녀석 뭐가 좋다고 걱정까지 해 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뭔가 되게 많은 일이 있긴 했지만…….
물론 사고 싶은 거 다 사게 해 주고 일할 의무 없는 완벽한 백수에, 바깥에 대한 자유만 뺀다면 대충 살게 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안가 한정이긴 하지만, 심지어 그 옛날 은둔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바깥을 많이 나갔다.
‘잠깐.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잖아?’
세끼 뭐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청소와 세탁을 포함한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며, 무엇보다 마법사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태생적으로 집돌이인 녹은 집 안에만 있는 게 그리 괴롭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노리는 마법사가 언제 이곳을 찾아올지 모르니 얼른 마력을 찾는 게 녹으로서는 정답이긴 했다.
녹은 몸을 돌려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사실 일어나자마자 몇 차례의 큰 사건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이 짙었다.
침대에 파묻힌 녹은 아까 전의 흰매를 떠올렸다. 흰매라. 하가의 상징물 중 하나였지. 도언이 그리 집착하는 첫 만남은 하가에서 일어난 게 맞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그런 형태의 마법을 쓰며 힌트를 주니 원. 물론 매에게 둘린 마력이 어떤 형태의 마력인지는 신호가 미약하기도 하고 마력이 봉인까지 되어서 잘 가늠하지 못하겠지만-
녹은 침대에 파묻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나 마력이 봉인되었었지.’
그런데 어떻게 그 매에 둘러진 마력을 느낄 수가 있었지?? 녹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자신의 타로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카드들은 녹이 잘 보이는 곳에 가지런히 정리된 덕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녹은 그중에서 마력이 봉인당하기 전, 자신이 피를 먹여 만든 붉은 타로 카드를 꺼냈다. 그중 수 장이 마력 교란 결계의 마법 부적이었다.
아무리 마력이 약하게나마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력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불안정하다면 의미가 없었다. 테스트용으로 한 마법의 마력이 집 안에 진동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봉인 역시 다시금 공고해질 가능성이 백 퍼센트였다.
녹이 꺼내 든 카드는 마력이 하나 없는 인간도 쓸 수 있는 마법 부적이었다. 녹은 그중 하나를 미련 없이 찢었다. 매를 봤을 때 미약하게 감지되던 마력은 부적을 찢어 결계를 발동할 때는 감지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력 교란 결계가 새겨진 부적이라지만 적어도 마법을 새긴 자신은 흔적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마력이 돌아오고 있는 게 맞는지 아리송해지기만 했다. 부적의 마력을 느끼지 못한 탓에 방금 펼친 결계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녹은 과거의 자신을 믿기로 했다. 이 주변에는 부적으로 인한 결계가 펼쳐졌을 거다.
녹은, 손가락 하나를 튕기며 검지를 펼쳐 보았다.
화륵-
녹의 손끝에서 붉은 불꽃이 라이터처럼 타올랐다. 곧 꺼질 듯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만 분명히 마력으로 피워 낸 불꽃이었다.
뭐야.
되잖아?
불꽃은 하얀 연기를 피워 내다가 금세 꺼졌다. 지속력이 개똥이었다. 사실 예상하긴 했다. 불꽃을 피워 냈다는 건 분명 마력을 쓸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건데, 문제는 자신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데에 있었다.
꼬마 마법사들이 가장 처음 배우는 것이 자신의 마력을 느끼는 법일 정도로 제 힘의 총량을 아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자신의 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그를 이용해 술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상한 고리 따위로 마력이 봉인당한 이래로, 녹은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기관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건 약한 마법이나마 쓸 수 있는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본 중 기본조차 할 수 없는데 대단한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을 감고 초행인 길을 걷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럴 때 차라리 지팡이라도 있었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신세기 들어 녹은, 마법 지팡이를 포함한 마법 보조 도구를 지니고 다닌 적이 없었다.
촛불 같은 불을 피워 내는 데도 불안정한 지금이라면 택도 없을 거란 걸 잘 알지만, 녹은 아타움에 마력 주입을 시도했다.
“…….”
역시 아타움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딱히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녹은 현재 발동된 부적의 효능이 더 떨어지기 전에 이 기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거울을 찾았다.
바로 위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간 녹은, 고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과 다를 게 없는 검붉은 나무 고리가 녹의 목에 걸려 있었다. 고리를 주시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 위에는 금방 꺼질 것 같은 불꽃이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고리에 녹빛 스파크가 인 것은 그때였다. 녹이 마법을 일으켰을 때, 실금 모양의 틈에서 전기처럼 마력이 파직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고리에 틈이 생긴 모양이었다. 녹은 그 틈을 주시했다. 대체 언제 생긴 거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였다. 첫째, 고리는 영구적으로 세계수의 힘을 봉인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봉인력이 약해졌다. 둘째, 가장 감정이 몰아쳤던 최근, 그러니까 도언을 하진으로 착각했을 그때, 감정에 따라 널뛰는 마력을 고리가 봉인하지 못하고 금이 갔다.
확실히 두 번째 가설이라면 도언이 어째서 머리를 식히라며 급하게 자신을 재운 건지 이해가 갔다. 봉인구가 부서지기 전에 조처를 한 거겠지. 그리고 틈이 생겼다는 생각도 못 하고 지내왔다고 한다면….
여하간 어떤 가설이든 고리의 유효 기간에 대해 도언이 모를 리 없었다.
“오… 나 한 방 먹은 건가?”
녹이 팔짱을 끼고 한쪽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좀 괘씸한데? 여하간 이런 사실을 도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매어 두기 위하여 또 어떤 카드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녀석이다. 일단 고리가 약해진 걸 알았단 사실은 혼자 알고 있자. 적어도 마력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녹이 머리를 굴리며 터벅터벅 침실로 걸어 가다 박살 난 핸드폰을 발견했다.
“…….”
두 동강이 나서 잔해가 된 핸드폰만이 협탁 위에 얌전히 누워 녹을 반기고 있었다. 아, 안도언. 게임기이자 영화관이자 시계를 저리 동강 내고 튀어 버렸다니. 말대로 더 좋은 거 안 사 주기만 해 봐라.
녹은 핸드폰에 튀어나온 작은 나사와 디스플레이 보드를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부수어진 거면 저 핸드폰 중간에 새겼던 마력 교란 결계는 당연히 해제되었겠지. 녹은,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타로 카드 상자를 내려 보았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도구는 이게 전부네.’
어떻게든 지니고 있어야겠다. 녹은 부서진 친구의 잔해를 넘어 현관으로 갔다. 보통 녹이 만든 부적은 발동 후 5분여 정도 유효했다. 물론 새끼손톱만 한 불꽃도 제대로 피워 내지 못하는 마력이면 이동 마법을 쓴다 해도 한 발자국이 최대일 거다.
현관으로 다가간 녹은 현관 앞에 쭈그려 앉고 자신의 목표가 된 철제 현관을 바라봤다. 있으나 마나 한 마력이지만 조금이라도 돌아온 건 확실히 좋은 징조였다. 곧 저기를 통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단 희망이 깃들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뭐부터 하지? 일단 마법사를 피할 결계부터 만들고, 그리고 식신이 많이 보이는 곳은 피하고, 어쩌다 마법사가 보이면 경계하는 신경질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언제나 홀로인 일상으로의 복귀다. 과거엔 마냥 좋을 것만 같던 미래다. 그러나 지금 상상해 보니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휑했다.
나간 다음에도 가끔씩 도언이나 청연이랑 연락하게 될까? 하지만 괜한 아쉬움이었다. 그 누군가와도 엮이면 안 될 운명이었다. 괜히 누군가와 엮이다가 그들이 마법사들의 인질이라도 된다면? 물론 도언을 보면 그들을 인질로 삼으면 삼았지 절대 그들에게 당할 일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더 정들기 전에 얼른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원치 않는 인연이었다. 아타움과 고리의 강제성으로 이미 인연이 되긴 하였으나 얼른 끊어 내고 제 갈 길 가야만 했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녹의 믿음은 변치 않았다. 그렇기에 고리만 해제되면 언제든 나를 마음의 준비를 한 거다. 그 길 끝에는 외로움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발가락을 의미 없이 세어 보다가, 현관 구석에 구겨져 있는 도언의 니트에 관심을 두었다. 뭐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코트를 입을 정신은 있으면서 옷에 뭐가 묻었는지 확인할 정신은 없던 건지. 녹은 그 옷을 펼쳐 보았다.
도언이 칭했던 ‘좋은 것’에 대한 흔적이 여과 없이 묻어 있었다. 멍하니 말라붙기 시작한 하얀 물방울을 쳐다보던 녹의 귓가가 불탔다. 그 매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 갔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자신이 이렇게도 분위기를 잘 타는 인간일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페널티를 제대로 다 행하지도 못했구나. 다음에 더 좋은 거 하자고 했으니 그때 시키려나. 별로일 것 같으면서도 왜인지 싫지 않은 양가감정의 충동이 서로 줄다리기를 했다. 생존을 위해 막아 두었던 욕망이 한 번 터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 나 너무 육욕에 약한 거 아닌가.’
약하게 일어난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이런 인간인지 지금까지 몰랐다. 그렇기에 낯선 자신의 욕망이 데면데면하니 어색했다. 옷의 색깔처럼 얼굴을 붉히며 자아 성찰을 하고 있던 녹은,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떠올리게 한 못된 제 체액을 지우기로 했다.
이 정도 마법은 듣겠지. 녹이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니트에 묻은 오염 물질은 깔끔하게 사라졌고, 새것과 같은 옷이 되었다. 녹은 습관적으로 그 옷을 바르게 개키며 생각했다.
‘안가의 가솔들은 마력을 자잘한 곳까지 펑펑 써먹던데.’
만일 청연이었다면 옷을 벗고 가는 게 아니라 아예 마법으로 세탁하고 나갔을 거다. 심지어 청연은 근처에 있는 컵까지 마법을 이용해 가지고 오는 최강의 귀차니즘을 뽐냈다. 도언이 안가에 쓰일 마력 전반을 가지고 온다고 그랬었지. 가솔은 펑펑 쓰게 놔두면서 자신은 굉장히 절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쯧쯧. 이래서 돈도 벌어 본 사람이 아낄 줄 안다고.”
어느새 가솔들을 이끄는 가주가 아닌, 철부지 아이들을 보살피는 가장의 이미지로 전락해 버린 안도언이었다. 그래, 가문 식구들이 그렇게 써대는데 본인이 마력을 쓸 데가 어디 있겠어. 아니면 그런 자잘한 곳에 마법을 안 쓰는 건 그저 안도언의 취향일 수도 있겠다. 도라이언 님의 머릿속을 어찌 추측하리. 차라리 천방지축 진예의 머릿속을 헤아리는 게 더 난도가 낮을 테다.
슬슬 결계의 효력이 떨어질 시간이 되었다. 남은 카드가 몇 장이었더라.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든 건 아니었지만, 만들어 두니 확실히 쓸 만하긴 했다. 도언의 정체를 맞히는 것과 다른 탈출의 해법이 나올 만한 구멍이다. 놓칠 수 없었다.
‘일단 좀 씻을까.’
일어나자마자 뭔가 많은 걸 알아낸 것 같다. 최고로 마력을 뿜어내도 불안정한 촛불 정도밖에 일으킬 수 없고, 그렇다고 식신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지금으로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간간이 부적으로 결계나 쓰면서 가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나 확인해 보자 결론 내린 녹은, 씻고 나서 아침이나 먹자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 ❊ ❊
도언의 귀가가 늦어졌지만 걱정해서 무엇하리. 아무도 없는 집 안을 만끽했던 녹은 잠들기 전까지 밥이나 잘 챙겨 먹고 혼자 놀았다. 핸드폰이 없었지만 다행히 노트북은 있었다. 그날 하루는 노트북으로 하는 웹서핑의 날이었다. 하여간 인터넷이란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 따로 없었다. 잠들기 전까지 태평하게 놀던 녹은, 피곤해질 기미가 보이자 그대로 뻗고 잠에 빠졌다.
쨍그랑--!!
녹의 단잠을 깨운 건 거실에서 나는 큰 소리였다. 큰 무언가가 깨어지는 소리. 무시무시한 소음에 이불을 거두며 벌떡 일어났다. 도언이 온 건가? 왔으면 조용히 할 것이지 요란하게 무슨 일이지.
침실 방을 열자마자 시린 겨울바람이 쌩쌩히 녹의 몸을 감쌌다. 겨울밤 영하의 온도를 그대로 지닌 바람이었다. 셔츠 한 장만 입고 다녀도 추울 리 없던 도언의 집이었건만, 지금은 한겨울인 바깥과 계절을 같이했다. 차오르는 한기에 녹은 두 팔로 자신을 감쌌다.
희한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찬 바람과 격파음의 원인을 찾았다. 반파된 통유리창에, 거실 가득 뿌려진 유리 조각 사이에서 자신의 머리를 털며 유리 조각을 털어 내고 있는 자는 청연이었다.
“멀쩡한 현관 놔두고 요란하게도 들어왔다?”
그는 녹을 확인하고 다급히 다가왔다. 여유 없는 표정이 상황의 급박함을 일렀다.
“앗, 녹 님!! 이럴 때가 아니에요. 가주님이……!!”
“안도언이 뭐?”
쿵-
곧 무언가가 현관을 부술 것처럼 위협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 집에 살면서 한 번도 있던 적이 없는 일이다. 취객이라고 치부하기엔 청연이 현관을 피해 유리창까지 깨며 들어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현관을 돌아보던 청연이 급히 말했다.
“급하니까 일단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청연은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속에 심어진 유리 조각을 털어 내며 품속 지팡이를 꺼냈다. 청연의 마법 한 번으로 셔츠 한 장 차림새였던 녹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에, 안경, 그리고 장갑과 목도리를 포함한 두꺼운 겨울옷을 껴입게 되었다. 얼굴을 꼭꼭 감싼 것이 누가 봐도 수상한 차림이었다.
“야, 무슨…. 마스크에 모자는 몰라도 안경까지는 오버 아니….”
“전혀 아니에요! 아타움!”
아타움을 외치며 지팡이를 휘두르자, 아타움은 사슬이 끊기고 얇은 실발찌로 간소화되었다.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녀석에게는 말 한 번 안 듣는 아타움인데, 도언도 아닌 청연의 명령을 듣다니. 이게 무슨….
콰앙-!
현관에서 굉음이 들렸다. 어느새 철제문에 구멍 하나가 크게 뚫렸다. 뚫린 구멍에서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집 안쪽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에 청연이 서둘러 녹을 감싸 안았다.
“꽉 잡으세요!”
깊어지던 의문은 강제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녹을 감싼 청연이 박살 난 유리창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건물 바깥으로 함께 투신하는 모양새에 비명을 삼켰다. 겨울의 찬 바람은 그나마 드러난 귀를 때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거친 가죽으로 만든 북을 찢는 소리처럼 거셌다.
녹은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에 청연의 목을 생명줄인 양 감쌌다. 청연은 낙하하는 도중 아래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곧, 바닥에 사람 다섯은 들어갈 만한 작은 포탈이 생겼다.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던 둘을 포탈의 푸른 빛무리가 날름 삼켰다. 이내 침묵만이 그 공간에 유일했다.
❊ ❊ ❊
- 이거,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은 아닌가?
공간을 울리는 음성은 낯익었다. 낯익을 수밖에, 헤어진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거다. 발아래 단단한 지반이 있음을 확인한 녹은 청연에게 떨어지며 태무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이 급히 이동한 곳은 어느 동굴 안이었다.
태무의 동굴인가? 하지만 벽에 알알이 붙어 있던 발광석이 없었다. 대신 단단한 돌 사이사이에 작달막한 푸른 꽃이 알알이 피어난 채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꽃에서 은은히 나는 빛이 동굴 안을 환히 밝혔다. 빛나는 마법 식물, 천화였다. 저번과는 다른 동굴이었다. 청연은 머리카락 속 유리 조각을 털어 내며 대꾸했다.
“바깥에서 그나마 접근성이 높은 안가의 공간이 이곳이어서 그래요. 마침 며칠 전, 태무가 이사한 보금자리가 이곳이지 뭐에요.”
아직 열려 있는 포탈을 지팡이 한 번 흔드는 것으로 지워 버린 청연은 깊게 한숨을 쉬며 숨을 골랐다.
“여하간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일 처리 도중 좀 꼬여서요. 하필 현관문 바깥에 처리하기 까다로운 식신들이 가득 붙어 있어서….”
“식신? 현관 두드리던 것들이 식신이었어?”
청연은 한숨처럼 고개를 끄떡였다. 보통 식신은 다른 존재에게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유령과 같았다. 마력을 흡수하고 불행의 인과를 심어 주는 특수한 특징만 없었더라면 LV.1짜리 나방파리보다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현관을 어떻게 두드렸지?’
“가주님이 위협받는 거야 늘상 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통상 있던 습격과는 다르네요. 마법사가 가주님 집의 현관 바로 앞쪽에 포탈을 만들고 그 희한한 식신을 보냈던 모양이에요. 주소를 어떻게 안 걸까요. 분명 사중으로 결계까지 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녹 님이 친 결계까지 포함해서요. 청연이 태무 몰래 녹에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이야기였다. 마력을 봉인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녹이 발 뻗고 잘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력의 모체를 흡수한 자신이었다. 그런 제 혈액을 재료로 만든 호부까지 끼워 넣은 결계인데 일반적인 마법사에게 발각될 리가 없지 않은가.
청연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다분히 태무를 의식한 행동이었으나, 태무는 별 관심이 없는지 하품이나 할 따름이었다.
“음. 녹 님, 거기에 결계 쳤을 때 마력을 얼마나 넣으신 거예요? 와 보니 멀쩡했던 결계가 사라졌던데요.”
“아.”
처음 도언의 오피스텔에 결계를 쳤을 때 3개월 정도의 마력을 집어넣었던 기억이 났다. 얼추 그때로부터 3개월이 지난 것 같긴 하네. 마력을 느끼지 못하니 결계가 잘 작동이 되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고리에 금이 생겨서 마력이 깜빡깜빡 느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과거의 자신이 세운 정밀한 결계를 알아챌 만큼의 마력은 아니었다.
귀를 쫑긋거리던 태무가 무겁게 내렸던 엉덩이를 들고서 슬금슬금 동굴의 바깥을 향해 어슬렁 걸어갔다. 이곳에 청연과 녹이 있든 말든 영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느긋하게 바깥 마실을 나갔고, 동굴에는 청연과 녹 둘만 남게 되었다.
“슬슬 사라질 때가 되긴 했지. 여하간, 내가 만든 결계를 제외하고서도 안가에서 짠 결계가 분명 더 있을 텐데, 그게 다 뚫렸다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아주 이를 갈았어요. 결계를 세 개 다 풀려면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닐 텐데……. 마법사들 두 명 목숨분 정도? 여하간 다들 소탕될 테니까 걱정은 마세요. 지금 가주님께서 그들을 상대로 칼춤을 추고 계시니까요. 가주님이 급하게 나가셨던 이유를 아시겠죠? 안 그래도 소탕하려고 관찰하던 가문이었거든요.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져서 일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
마지막 한 마디가 의미심장했다. 태무가 나가 버리자 속삭이던 걸 관둔 청연이 말을 이었다.
“계획대로 마법사들을 한꺼번에 소탕하던 중, 한 녀석의 낌새가 이상하잖아요. 죽으면서 하늘을 향해 강한 마력을 내쏟는데, 어휴, 심상치 않은 흐름에 가주님께서는 제게 얼른 녹 님께 가 보라 하시고. 후. 녹 님의 결계가 딱 그때 없어지다니요. 그래도 유효 기간이 지나서 사라진 거면 다행이에요. 그것들이 녹 님의 결계를 자력으로 뚫었다면 그게 훨씬 문제 되는 거거든요.”
세계수의 마력으로 짠 결계는 일개 저주 따위가 뚫을 수 없었다. 쏟아부은 마력의 고갈로 인해 사라졌다는 쪽이 훨씬 신빙성 있었다.
“당시 저도 마법사들 소탕하느라 그가 외친 주문을 듣지 못했지만, 마력의 결이 기분 더럽게 나쁜 걸 보면 저주가 확실하긴 했죠. 생각보다 체계가 잡힌 가문이었어요. 저주에 특화된 마법사도 있고 말이에요.”
“여하간, 도언은?”
“가주님이요? 신나게 때려 부수고 있죠. 오늘따라 평소보다 훨씬 더 격하시던걸요. 지금 아타움에도 변화가 있다는 걸 감지하셨을 테니, 대략 녹 님께서 이곳에 있다는 추측은 하고 계실 거예요. 제가 오늘 이래로 좀 더 바빠지겠는걸요. 멍청했던 마법사들이 이 정도로 진화하다니….”
며칠 동안 안 보여도 그러려니 해 주세요…. 야근이란 게 그렇고 수습이란 게 그렇죠, 뭐…. 웅얼거리는 청연의 말끝이 흐려지다가 끝끝내 사라졌다. 습격 패턴이 달라졌다니, 확실히 보좌의 일거리가 늘어날 테다.
녹의 결계가 시간에 따라 자연 소멸된 건 청연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건 그들이 자체적으로 도언의 집을 둘둘 감아 둔 결계의 소멸이었다.
녹은 침울해하는 청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리를 매만졌다. 이거, 들어 보니까 나 위험할 뻔했던 거였잖아? 만일 청연이 녹에게 곧장 오지 않았더라면 그 집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눈에 선했다.
“와, 그럼 나 되게 위험했던 거였네? 마력도 봉인당했는데 말야. 너가 안 왔더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잖아.”
“네? 아, 위험하긴요. 만약 그 집에 허락을 받지 못한 것들이 침입한다면 녹 님께선 자연히 가주님 곁으로 이동될걸요.”
“그건 또 어디에 걸린 마법인 건데?”
“아타움이죠.”
녹은 발목에서 찰랑대는 실발찌를 내려 보았다. 아주 별 마법을 다 발라 두었구나.
“그럼 그 집은….”
“저희가 떠난 후 해사들이 달려갔을 거예요. 저주 처리해야죠.”
그들이 못 미더운 건지, 청연은 눈을 감고서 한 번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눈을 뜬 후, 녹에게 이 공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하간 이곳은 안가와 바깥을 이어 주는 비상구 같은 곳이에요. 안가로 들어가려면 더 안쪽으로 가야 합니다. 안가에 계시는 게 위치가 노출된 바깥보다 훨씬 안전하실 거예요. 그러고 보면 태무도 참, 취향 독특해요. 통로 한복판을 보금자리라고 잡아 둔 걸 보면 말이에요.”
거침없는 청연의 말에 괜히 태무의 눈치를 보는 건 녹이었다. 다행히 태무는 그대로 바깥으로 사라졌기에 청연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청연은 빛을 내는 꽃 무더기를 슬슬 쓸어 이슬을 거두어 내고는 푹신한 그 풀 위에 철푸덕 앉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태무랑 이네스랑 사이 보셨어요? 아무리 마생물이 다른 곳보다 넘쳐나는 안가라지만, 주술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묵은 마생물은 몇 없거든요. 그중에서 그 둘은 이상하게 잘 안 맞더라고요. 진짜 용이랑 호랑이랑은 물과 기름 사이인 건지. 둘이 사이가 그런 건 상관없는데 굳이 주술 대결한답시고 가주님 좀 귀찮게 안 하면 진짜 제 묵은 소원 중 하나가 이루어지는 걸 텐데…. 가주님이 귀찮아하시면 저는 그 배로 귀찮아진단 말이에요….”
- 언제나 나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건 그 용일세! 내게 뭐라 하지 마시게!
동굴 끝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저 끝에서 귀를 바짝 세운 태무가 성큼성큼 달려왔다. 집주인 욕하고 앉아 있는 걸 태무가 들어 버렸나 보다. 달려온 태무는 등에 누군가를 태우고 있었다.
“가주님!”
청연은 태무의 노호성을 가뿐하게 무시하곤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도언은 눈 깜빡할 새에 녹과 청연 앞에 당도한 태무 위에서 단숨에 내렸다. 태무 위에서 뛰어내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도언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자신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웬 사람을 철퍼덕 던졌다. 도언의 존재감에 묻혀,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이었다. 혼이 나간 표정으로 넋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는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 하는 듯 보였다.
녹은 의문의 사내를 보며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야?”
“사고뭉치죠.”
도언이 이를 악물고 으르릉대며 대답했다. 태무와 청연이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의 조용한 동의 속에 의문의 사고뭉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