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정리정돈 (15/24)

13. 정리정돈

동굴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주목을 받은 남자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둥근 안경이 그의 어벙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쥔 모습을 보니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는 떨던 몸을 바로 하고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더니 콧잔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동굴 가득 피어 있는 꽃들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와. 천화가 한가득하네요. 이것들 다 바깥에는 없어서 못 먹는 것들인데.”

“너는 이 순간에도 그런 게 보이냐?”

기가 찬 청연이 타박했다. 청연의 타박을 들은 남자는 자기가 생각해도 머쓱한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푸석한 볏짚 같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신기한 게 많으니까 그렇죠.”

“곧 장로장이랑 한 장로 올 거야.”

도언이 그를 향해 단호히 통보했다.

“네에?? 저는 가주님한테 한 소리 듣고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요?”

“아무렴 그러고 끝나겠어? 한 짓이 있는데.”

청연이 말을 보태 나무랐다. 가주와 가주 보좌의 눈치를 직격으로 맞은 청년은, 처음 이곳에 내려져서 동굴 속 꽃들을 발견했을 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모든 걸 체념한 듯 울적하게 말했다.

“네… 그렇죠……. 물론 저도 모르고 한 일이었지만… 그냥 저는 정령 수색대로서 열정적으로 정령을 쫓은 것뿐인데… 아, 해사 업무를 내팽개친 건 아니고요. 단서를 따라 쫓아간 곳 중 한 군데가 하필 바깥 마법사들이 회의를 꾸렸던 장소였다니… 초대받지 못한 덕분에 타 가문원이 온통 소환되고… 그런 곳에서 저를 구출해 내시느라 가주님께서 고생이 많았죠. 일단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하고요……. 하하… 혼나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되었으니까요. 제 인생이 혼나는 건데요, 뭐 특이할 것도 없죠…….”

‘얘 왜 이렇게 우울해.’

동굴에 피어 있던 꽃들이 시들어 버릴 것 같은 음울함이다. 추적추적한 늪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한참 땅을 보며 중얼거렸던 그가 고개를 느리게 들더니, 녹을 발견했다.

“엇? 이분은 새로운 얼굴이시네요. 새로운 길을 잃은 자이신가? 안녕하세요! 저는 안가의 주원이라고 해요. 나름 사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 중에서도 사짜 직업을 갖고 있는 해사랍니다.”

그의 기분이 또다시 달라졌다. 그는 각종 방한구로 온몸을 꽁꽁 감싼 녹에게 다가가 맑게 악수를 청했다. 조금 전까지 땅 파고 들어가려고 했던 인간 맞나? 기분이 아주 온탕과 냉탕을 넘나든다.

“어… 김민수라고 합니다. 딱히 하는 일 없는 한량입니다만.”

녹은 떨떠름하게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주원이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며 반겼다.

“반가워요, 반가워요! 저도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며칠 지내본바, 이곳은 좋은 곳이랍니다! 제가 사고만 무진장 치고 다니긴 하지만요!”

“알긴 아네.”

청연이 조용하게 읊조리는 말을 녹은 똑똑히 들었다. 신입 해사 안가의 주원. 사고란 사고를 다 치고 다닌다는 녀석 아닌가. 해사 업무 중 실수해 꾼을 만들기도 했고, 태무의 굴에 침입해 자고 있던 그를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안가에 몇 번 오지 않은 녹도 들은 바로 이 정도인데, 평소에는 얼마나 더 사고를 치고 다닐까. 들어 보니 이번에도 사고를 쳤나 보다.

주원을 본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으나, 변죽이 들끓는 그의 성향을 보아하니 사고를 안 치는 게 더 힘들어 보였다. 해사들 관리는 누가 한다고 했더라. 한 장로라는 그 할아버지였나. 녹은 한 장로가 안쓰러워졌다.

“주원!!!”

동굴 끝에서 누군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의 화를 가득 품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네스였다. 이네스의 외침을 들은 주원이 어깨를 흠칫 올렸다. 2라운드 시작이군요……. 그의 목소리는 슬프게도 땅을 긁었다. 녹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줄 정도로 처량한 모양새였다.

“사고 치는 게 점점 화려해져? 응?”

어느새 당도한 이네스가 불같이 화를 냈다. 정말, 불같이. 그녀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녀가 입으로 불을 뿜지는 않았으나, 보다 더 다양한 걸 흩뿌렸다.

그녀가 소리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때때로 튀어나오는 불티는 근처 공기를 바짝 말렸고, 간간이 낙뢰가 떨어지는 소리가 근처에 들렸다. 그 소리 이후 땅이 조금씩 흔들리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어딘가에는 낙뢰, 어딘가는 화재, 또 어딘가는 심지어 눈까지 내렸다. 이곳은 하늘이 뚫려 있지 않은 동굴 안인데 말이다!

녹은, 어디서 어떤 이상 기후가 나올지 몰라 몸을 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주원을 향해 무서운 꾸지람을 지속할 뿐이었다. 청연이 어째서 이네스가 누군가를 혼내는 걸 보는 게 기운 빠진다고 했는지 확실히 알겠다. 이거, 이네스가 목표한 인물의 옆에 있단 죄로 연좌제를 받는 기분 아닌가.

어느새 주원은 불같이 화를 내는 이네스의 앞에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연신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화려하게 뒤집히는 주변에 신경 한 점 쓰지 않는 것이 숙련된 프로의 향기가 느껴졌다. 이 지경이 적응될 만큼 많이도 깨졌었구나.

바로 오른 어깨를 스치는 빗줄기에 몸을 움츠리니, 어느새 다가온 도언이 녹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인간 우비가 따로 없었다.

“여기는 이네스에게 맞기고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죠. 그래도 동굴이라고 이네스가 자제하는군요.”

“저게 자제하는 거야?”

- 그래, 자제할 거면 다른 곳에나 가서 자제할 것이지. 나는 또 이사하기 싫단 말이다!

태무가 등의 털을 바짝 세우며 한탄했다. 이 상태에서 말린답시고 이네스를 건드렸다가 괜한 불똥이 튈지 몰랐다. 그리고 그 불똥은 그녀의 감정을 더 격하게 발화시키겠지.

청연이 자신의 어깨에 묻은 우박을 털어 내며 태무를 달랬다.

“그래, 그래도 동굴이 부서질 정도로 하진 않잖아. 천화도 멀쩡하고. 저리 보여도 이성은 있는 거겠지. 조금만 더 하다 보면 그만할 거야. 곧 한 장로도 오고 하니까.”

“아이고, 장로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큰일 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타난 새로운 인물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이네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면식이 있는 할아버지였다. 화내는 이네스를 멀찍이 쳐다보며 멀거니 몸을 사리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한 장로는 온몸을 던져 그녀를 말렸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네스의 외침이 잦아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단 게 문제였지만.

도언은 저 앞의 셋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녹의 어깨를 잡고 있었기에 그를 따라 녹의 몸이 돌아간 건 당연지사였다. 그는 동굴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태무와 청연이 따랐다.

“일단 갑시다. 수습은 이네스가 알아서 할 테니.”

“저대로 놔두고 가도 되는 거야?”

“누구를 걱정하는 겁니까?”

“그야….”

부서질 것 같은 동굴에서부터 시작해서 툭 치면 울 것 같은 주원, 그리고 탈진할 정도로 이네스를 말리고 있는 한 장로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인물이라면 모든 것의 원인인 이네스밖에 없었다. 아닌가,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의 원인은 주원인가.

“이네스는 선을 잘 압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 녹은 도언의 말에 따라 동굴 바깥으로 피신했다. 바깥은 아직도 깜깜한 밤이었다. 청연이 꽁꽁 싸맨 덕분에 겨울 밤바람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꽁꽁 언 곳이라면 노출된 귀 정도.

낮은 기온에 떨어질 것처럼 붉어지는 녹의 귀를 도언이 손으로 감싸 녹여 주었다. 시린 기운을 앗아 가는 그의 손이 꽤 달가웠다. 도언의 손바닥에 닿아 오는 얼음 같은 온도에, 도언이 급히 말했다.

“청연, 얼른 집에 가야겠다.”

도언의 말에 청연이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런 그가 주문을 외울 기색이 만연해지자, 태무가 무기력하게 녹에게 물었다.

- 나는 여기서 이네스가 나올 때까지 별이나 세고 있어야겠구먼. 한량께서는 어디로 갈 겐가?

청연은 그런 그의 부숭숭한 팔을 안쓰럽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한량이란 칭호가 마음에 드는지, 태무는 민수라는 이름 대신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녹을 불렀다. 물론 녹은 그런 자잘한 호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 잘 모르겠는데. 나도 집에 가겠지. 아마?”

“그럼 다음에 또 봐!”

청연이 태무에게 하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마자 차고 어두웠던 시야가 바뀌고, 따뜻하고 온화한 장소로 한꺼번에 이동이 되었다. 도언은 그제야 녹의 귀를 감싸고 있던 자신의 손을 풀어 주었다. 데워진 집 안의 공기가 포근하니 좋았다. 도언이 제 앞에서 사라진 덕분에 녹은 자신이 온 장소를 더 잘 볼 수 있었다.

벽난로가 한쪽 구석에서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그 주홍 불빛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담요와 폭신한 카펫, 한쪽 구석에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한 트리까지 대차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도언의 집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김이 서린 시야로 인해 녹은 청연이 안경까지 씌워 주었단 사실을 기억해 냈다. 녹이 뿌예진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여긴 어디야?”

“제집이긴 한데…. 오늘만 여기서 지내고 계세요. 가주님 집이야 위치가 노출되어 버려서요. 아무리 거기에 있던 마법사들을 싹 다 털어 냈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훈훈한 실내 공기에 열이 오르고 있던 녹은 외투를 허물 벗듯 하나하나 벗으며 창밖을 보았다. 바깥에는 눈이 쌓인 정원수로 가득 들어찬 정원이 보였다. 꽤 신경을 써서 가꾼 티가 나는 정원이었다.

“너 생각보다 되게… 집을 좋아하는구나.”

최소한의 살림만 있는 도언의 집과는 딴판이다. 이렇게까지 꾸며 놓다니. 무슨 벽난로까지 있담. 외국이면 모를까 한국에서 이런 집을 보는 건 처음이다. 아기자기한 소품 또한 집 안의 아늑함을 올려 주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목조 건물만이 연출할 수 있는 아늑한 크리스마스 테마라고 해야 하나. 청연이 멋쩍게 웃으며 녹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하하. 좋잖아요. 이런 분위기. 여하간 뭐라도 드려야겠다. 코코아라도 타 드려요?”

“아니. 됐어. 그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들어나 보자.”

“별일 아닙니다. 항상 있던 습격이었죠.”

도언이 단호하게 단언했다.

“아니, 습격이란 건 아는데, 내가 묻고 싶은 건 어째서 결계를 뚫고 들어온 식신이 있는지….”

“녹이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금방 해결될 테니까 그때 동안 이곳에서 지내세요. 이곳은 이네스 집 옆입니다. 아타움은 이리 두겠습니다. 웬만해서 집에만 계시는 걸 추천드립니다만….”

“잠깐. 아타움을 이리 두겠다는 건….”

안가 내에서 한정적인 자유를 주겠다는 건가? 물론 자유를 얻어 봤자 웬만해서는 집에서 뒹굴고 지낼 녹이었지만, 도언의 너그러워진 태도에 눈을 반짝였다.

도언은 녹의 안경을 가져와서 김이 서린 안경알을 모두 빼어 냈다. 곧 알 없이 테만 남은 안경을 녹에게 씌워 주며 고개를 끄떡였다.

“네. 적어도 여기 있을 동안은 자유롭게 지내세요. 차라리 이곳이 바깥보다는 안전해졌으니까 말입니다. 대신, 돌아다닐 때 웬만해서 얼굴을 노출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마법사들 때문인가?”

“그렇죠. 물론 여기서 녹을 알아보거나 어찌할 녀석들이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만, 세상사 모르는 일 아닙니까.”

과연 그의 말대로, 안가에서 도언의 뜻에 반하는 짓을 할 간 큰 이가 있을까? 애초에 마력을 공급해 주는 단 하나의 공급원이 가주인 도언이었다. 그런 그의 힘을 강탈하려 예전에는 많이들 안가에 숨어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들 모두 식신이 되어 안가의 분수 속 마력을 채워 주었다. 물론 그런 일들은 안가의 일원을 고르는 선별과정이 개발되고 결계가 공고해지며 없어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적어도 그것만 조심한다면, 이곳에서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마법사들은 없을 겁니다.”

“가주님 말씀이 옳아요. 배 굶고 싶지 않은 가솔들은 알아서 사린답니다. 아, 가끔씩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대는 가솔들 때문에 가주님께서 이리 걱정하고 계신 걸 거예요.”

물론 그것도 도가 지나치면 세상에서 제명되지만요. 무시무시한 마지막 말을 끝으로 청연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청연에게 들으셨겠지요. 강력한 마법이 당신의 근처에서 느껴지거나, 안가 바깥으로 나갈 적에는 곧장 제 곁으로 소환되십니다. 이 점은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이번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얘기라도 해 주네. 하하. 친절하기도 해라.

“오냐. 언제는 허락받고 했다고. 위대하신 안도언 님 알아서~ 하십시오~”

녹이 설렁거리며 허리를 조아렸다. 지극히 과장된 몸짓이었다. 그 모습에 도언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바깥일 마무리도 금방 됩니다.”

“바깥일이란 게 습격과 관련된 거 말하는 거지? 아직 잔당이 남았나 봐?”

“그건 아닙니다만. 이제 슬슬 세상의 규칙이 변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바깥이 이곳과의 사상을 공유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장난치듯 가볍게 대답했지만 그 속에 담긴 저의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그를 읽은 녹은 헛웃음을 삼켰다. 세상을 바꾼다니. 사이비 교주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세계수의 힘을 가진 자신을 가두었을 때부터 느껴 왔던 거지만 이 녀석 포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하지만 그 야망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도언은 녹을 붙잡아 둠으로써 불가능의 정의가 가능의 초석이란 걸 증명했다.

안가와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세계라. 그건 분명 마법사와 식신에 의한 피해가 없는 세상일 거다. 이타적이라면 이타적일 수 있는 몽상이었다. 이타적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녹이 멈칫했다.

‘이타적?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장소를 한정된 공간에 가두었는데, 자신에게서 도언에 대해 이타적이란 평가가 나오다니. 평생 변할 것 같지 않은 마음의 변화가 낯설었다. 그래, 그동안 지내 오며 관찰한바, 본인이 좋아한다는 상대를 자기 기분만 앞세워 가둘 것 같은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목숨 걸고 녹의 꿈속으로 뛰어 들어오고, 차별 없는 이념을 가풍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룩해 낸 인물이었다.

그가 자신을 매어 둔 것이 그저 도언 본인만을 위함이 아님을 이제는 알겠다. 도언에겐 무언가 큰 계획이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어떤 인연이 얽혀 있는지는 지금껏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관계란 것도 잘 안다.

보다 깊이 얽혀 있단 것. 바로 그게 무서운 점이었다. 어차피 헤어져야 하는데, 이해가 깊어지면 작별이 괴로워진다.

‘정말로 더 정들기 전에 떨어져야 하는데 말이야.’

보통이라면 남과 부닥치며 정이 들기 전에 떠날 녹이었으나, 묶여 있는 마당에 새처럼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일단 새장이 넓어졌음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일단은 저 잠시 가주님 집에 좀 다녀올게요. 뒤처리야 애들한테 맡겨 두었으니 어찌하고 있는지 현장 감독도 할 겸 해서.”

청연이 지극히 현실적인 말을 하며 녹의 상념을 깨웠다. 도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고, 무언의 허락에 청연은 지팡이를 들었다. 녹은 사라지려는 청연을 황급히 멈춰 세웠다.

“잠깐, 얘네 집으로 간다고?”

“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내 카드! 카드 좀 가져다줘!”

목숨줄처럼 외치기에 녹이 무엇을 말할지 내심 궁금했던 청연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입력을 완료했다.

“그… 녹 님이 가지고 다니는 타로 말씀하시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가져다드릴게요. 그럼, 뮤에로토.”

그대로 번쩍하고 사라진 그 자리엔 모닥불이 타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청연은 별것도 아닌 물건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건 녹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마법 도구였다. 깃든 마력이 티 나지 않도록 뒤처리를 해 뒀기에 마법사들이 본다 해서 별문제는 없었다만 언제 어디서 써야 할 날이 올지 모르니 늘 챙기고 다녀야 했다. 남들이 시계를 습관처럼 차듯, 녹 역시 카드를 습관처럼 가지고 다녔다.

집에는 도언과 녹만 남았다. 녹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집구경을 속행했다. 일단은 여기서 지내야 한다 이거지. 둘러보던 녹은, 연말 분위기를 물씬 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했다. 이렇게 거대한 트리를 집 안에 들여놓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신세계였다. 그것도 집 크기와 맞지 않는 트리를.

녹이 그리 생각을 할 만큼 트리는 크다 못해 천장에 닿았다. 높은 트리 끝의 별장식이 낮은 천장에 꺾여, 타고 올라갈 담을 잃은 담쟁이넝쿨처럼 늘어졌다. 비좁은 곳에 욱여 있는 트리가 괴로워 보였다. 저 정도라면 그냥 천장을 마법으로 높이든가 하지. 이웃집인 이네스 집은 천장이 높다 못해 하늘에 걸려 있던데.

크리스마스의 인테리어는 캐럴로 하는 거라 알고 있던 녹에게 이리 정성이 들어간 인테리어는 신선했다. 뭐, 지팡이 몇 번 휘두르면 끝날 테니 정성이랄 것도 없긴 하겠지만.

트리 밑에 있는 스위치를 켜니 반짝이는 꼬마전구가 빛나며 분위기를 한껏 고취했다. 녹은,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거대한 양말이 걸려 있는 걸 발견하고 그를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세상에. 청연이 산타를 믿나 봐!”

도언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청연이 산타를 믿는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사실 녹도 그냥 해 본 소리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양말 안에는 반듯하게 접힌 쪽지가 느껴졌다. 녹은 얼른 손가락 끝에 걸리는 쪽지를 끄집어냈다. 산타에게 바라는 선물을 적은 쪽지인가 보다. 크리스마스까지 꽤나 남은 상황에서 쪽지를 미리 넣어 놓는다니. 어떤 간절한 소원을 적었기에…….

어느새 도언 역시 녹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닌 척하면서 쪽지에 눈을 두는 것이, 도언 역시 청연이 크리스마스 2주 전부터 넣어 두며 기다린 쪽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녹은 쪽지를 펼쳤다.

이네스랑 가주님 야근 적게 하고 청연은 나랑 더 자주 놀아 주게 해 주세요.

룬도 올해 건강하게 해 주시고, 그리고 민수 오빠가 더 많이 놀러 오게 해 주세요.

모두가 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좋겠어요.

 -진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