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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려진 정답 (16/24)

14. 가려진 정답

“그럼 민수 씨. 이곳에 계실 동안 뭐 하고 지낼 생각이세요?”

상념을 깨운 건 이네스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였다. 뭘 하고 지낼 생각이냐니. 언제까지 이곳에서 지낼 생각이냐는 질문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어차피 도언의 정체도 추측해 내었겠다. 청연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기로 결정도 했겠다. 가능한 고리의 봉인이 풀리는 범위를 시험하며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최대치나 늘릴 작정이었다.

아무리 탈출에 대한 욕망을 반쯤 모른 척하고 있다 하더라도, 홀로 받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는 고리를 해제할 방법을 계속 찾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이네스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네스는 도언과 녹의 관계도 정확히 모르고, 녹의 정체도 모르며, 녹이 도언 때문에 행동 범위가 통제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르니까. 하나라도 들키면 정체가 발각되는 건 순식간이다. 청연에게는 녹의 어린 날까지 쉽게 공개했던 도언이, 이네스에게는 녹의 정체를 숨긴 이유가 있겠지. 씨앗을 찾아다니는 광팬이라고 소개했었던가.

녹이 주저하며 입을 열지 못하자 이네스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네스는 늘어뜨려 놓은 녹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붙잡고선 랩 하듯 말을 뱉어 냈다. 어찌나 발음이 정확한지 고막을 통하지도 않고 전두엽에 직접 꽂히는 느낌이었다.

“독특한 안가의 체험을 하고 싶다며 이곳에 오셨다고 들었어요. 확실히 이곳이 바깥 마법사들의 가풍과는 다른 점이 많이 있죠. 여기서 지내실 동안 제가 민수 씨의 적응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가주님이 드디어 제게 휴가란 걸 주셨거든요! 만일 심심하시다면 해사 체험이라거나, 수색대 체험이라거나, 그도 아니라면 영물 연구나 정령 연구를 함께하는 거 어때요?”

말을 잇던 이네스의 동공이 서서히 가늘어지더니, 다시금 세로로 얄팍한 용 눈이 되어 버렸다. 이크, 연구 얘기가 나오니 이 아가씨 또 흥분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점점 녹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이네스의 행태에 따라, 녹은 고개를 뒤로 빼며 물러났다. 하여간에 열정적인 생물이다. 뭐라고 거절할지 핑계도 안 떠오른다. 이를 어찌 빠져나간담.

“네? 네? 제가 완전 심심하지 않게 해 드릴게요. 태무 말 들어 보니까 사기 뭉치도 별 고민 없이 한 번에 해제했다고 하시던데, 바깥에 계셨던 민수 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마력도 없으신 분께서 단번에 뭉치를 푸시는 거면 진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거든요. 아니, 민수 씨가 적어 주셨던 첨삭 보니까 정령에도 굉장히 해박하시고. 아, 사실 제가 민수 씨가 너무 필요….”

“그쯤 해 둬.”

언제 나타난 건지 묵직한 목소리가 이네스와 녹의 사이를 갈랐다. 목소리는 흥분했던 이네스의 머리를 차게 식혔고, 이네스는 둥근 동공으로 돌아오며 녹의 손을 놓아 주었다.

“쳇, 항상 타이밍 한번 좋게 방해만 한단 말이야.”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도언은 아침에 나갔던 말끔한 모습 그대로 녹과 이네스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와 둘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친밀해 보이는 관계라 할지라도 이네스는 기본적으로 도언의 말을 잘 들었다. 녹은, 이네스와의 사이에 끼어든 도언이 무언가를 메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뭐지?’

도언이 한쪽 어깨에 멘 물건은 조그만 빨간색 캐릭터 가방이었다. 깜찍해 보이는 캐릭터는 요술봉을 들고 있는 마법 소녀였다. 안도언이 저런 가방을 들고 있다니. 상상조차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상상 이상으로 안 어울렸다. 저리 안 어울리는 건 또 왜 메고 있어.

“다녀왔습니다!”

그때 도언의 허리 아래에서 맑게 인사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려 보니, 조그만 아이 하나가 도언의 손을 잡고 어른들을 방긋거리며 보고 있었다. 푹신해 보이는 만두 머리를 한 진예였다. 도언의 중재에 차갑게 식었던 이네스의 표정이, 진예를 보자 따뜻하게 살아났다. 이네스가 아이의 팔 아래에 손을 끼고는 들어 올려 두어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진예 왔어! 오늘 학교는 재미있었어? 나 오늘부터 휴가 받았는데, 내일 학교 빠지고 나랑 놀러 나가자!”

“우와, 진짜로??”

벌써 저들만의 공간을 구축해 낸 둘이었다. 둘의 포근한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녹은 도언의 옆구리를 두 번 찔러 도언의 머리를 소환해 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도언이 녹 쪽으로 고개를 숙이자 녹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야. 왜 둘이 같이 와?”

“오는 중에 만났습니다.”

“이네스한테 휴가 줬다는 건 무슨 소리야. 최근까지만 해도 그렇게 바빠 보였는데 꽤 한가해졌나 봐? 근데 그렇게 한가할 거면 청연은 왜 안 보여? 부르지도 못한다고 그러고.”

“청연이 보고 싶습니까? 전부터 계속 청연을 찾으시고요.”

“아니…. 뭐, 보고 싶거나 그렇다기보단….”

‘언제 올지 알아 둬야 마음의 준비라도 할 거 아니야.’

답답한 마음에 녹은 한숨을 삼켰다.

❊ ❊ ❊

진예를 학원에 데려다준다며 이네스와 진예가 사라지자, 그는 분수 위에 손등을 내밀었다. 곧 도언의 손바닥에서 검은 마석들이 끊임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언은 심심해서 공원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때, 마력 봉인 고리가 또 맛이 갔는지, 마석에 나온 마력의 기운을 잠시간이지만 읽을 수 있었다.

도언은 마법사 목숨 하나분의 마석을 분수에 쏟아 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람 한 명이 사냥 당했구나 생각했을 테지만 녹에겐 똑똑히 보였다. 도언에게 나오는 무수한 마석에서 같은 마력을 가진 마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언이 쏟은 마석은 적어도 수백이었다. 도언에게 마력을 빼앗긴 마법사 역시 수백이란 소리다. 대체 얼마나 죽인 걸까. 그리고 도언은 마석을 만들고 남은 마력을 어디에 쓰는 걸까.

“그때 가문 하나 털었다더니 수확이 괜찮았나 봐?”

마석을 쏟아 내던 걸 멈춘 도언이 손을 거두고는 녹을 표정 없이 쳐다봤다. 순간 녹은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게 있나 싶어 했던 말을 복기했다. 녹이 괜히 심각해지기 직전, 도언이 표정을 풀고서는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 가지고 수확이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몸이 간지럽군요. 이제 시작이죠.”

“이 정도가 괜찮은 수확이 아니면 뭐가 괜찮은 수확인데? 마법사들 진짜 멸종이라도 시킬 거야?”

“자, 일단 저희도 집에 갑시다. 제가 그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녹의 뒤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도언이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녹의 어깨를 감싸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는 도언에 녹이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저 멀리서 녹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크게 팔을 휘두르며 인사하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둥근 안경을 쓰고 있는 사고뭉치, 주원이었다.

만나기 껄끄러운 관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바탕 싸우고 난 친구? 자꾸 내 의견을 반대하는 직장 동료? 사고란 사고를 엄청나게 치고 다니는 사람 또한 만나기엔 피곤한 부류 중 하나다. 도언 역시 주원을 그리 생각하고 있는지, 주원을 발견하자마자 방향을 트는 모습이 낯설었다. 일단은 그의 행동에 맞춰 준 녹은 주원의 인사를 대충 받고 집으로 걸음을 향했다.

집을 비운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집은 언제나 훈훈한 공기로 덥혀져 있었다. 녹은 오늘 다시 집 밖으로 나가기란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집에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싫은 법이니라.

이 집에 볼일이 있다는 도언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2층으로 급히 올라가 버렸다. 녹은 목에 둘둘 말린 목도리나 끌러 현관 옆에 걸어 놓고는 벽난로 앞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벽난로는 장작을 새로 보충하지 않아 주어도 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벼운 마법이 걸린 것 같았다.

따끈한 불을 쬐자 급격하게 노곤해졌다. 녹은 겨울 찬 바람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바깥에서 추슬렀던 생각을 꺼내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래, 일단 도언이 하홍이라는 유력한 가능성을 얻었기도 하고, 청연이 올 때까지만이라는 유예 기간도 홀로 부여했으니, 이제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고리를 해제하고 마력을 되찾는 일에 집중하는 거다. 도언이 아무리 정답을 알려 주면 풀어 준다고 약속해도 또 그때가 닥치면 어찌 변할지 모른다.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때를 위한 보험은 필수였다.

좋은 소식 하나. 마력을 매어 둔 고리의 봉인이 서서히 풀린다는 점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적어도 반년 안에는 마력이 돌아오리라.

‘그렇지. 아무리 좋은 마도구라고 해도 내 마력을 평생 봉인하는 건 말이 안 되긴 했지.’

늘어져 있던 녹은 금방 내려올 줄 알았던 도언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자 궁금해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침실 건넛방 천장에서 사다리가 늘어져 있었다. 도언이 어디에 있는지 너무도 잘 알려 주는 지표였다.

녹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금살금 사다리를 올랐다. 해상을 염탐하는 잠망경처럼, 눈만 빼꼼 내밀어 다락 안을 살폈다. 눈에 바로 보이는 건 도언의 발, 바지, 상의,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도언과 도언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는 흰매였다.

“…….”

“…왜 올라오시지 않고요.”

나름 기척을 죽여 올라왔건만, 부질없는 시도였다. 녹은 결국 다락의 위로 올라와 도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매의 푸른 눈은 녹을 응시한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깜빡-

마력을 감지하는 마안이 다시 틔워졌다. 그러나 새는 마력이 느껴졌던 저번과 달랐다. 흘러나오는 마력이 하나도 없어 하마터면 일반 새라고 착각할 뻔했다.

도언 앞에서 그 이유를 알고자 마법을 쓰다가 도언이 고리에 더한 봉인을 걸면 귀찮아지는 건 녹이었다. 녹은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알고 있는 걸 함구하고서 입을 열었다.

“청연이 기르는 거야? 여기 있는 횃대가 이 녀석을 위해 만들어진 거였나 봐? 그냥 동물은 아닌 모양인데.”

“따지자면 심부름꾼입니다. 워낙에 이곳을 자주 드나들어서 청연이 횃대를 만들어 둔 모양이군요.”

열매를 심부름꾼으로 쓴다 이거지. 정령의 꼭대기 중 꼭대기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열매였다. 녹은 이 매가 도언의 문신에서 빠져나온 녀석임을 확신했다. 녹을 보고 조그만 머리를 쉴 새 없이 갸웃거리는 모습이 매라기보다는 비둘기 같았다.

“비둘기 같다.”

녹이 참지 않고 감상을 뱉어 내자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녀석은 도언의 팔 위에서 그 큰 날개를 펼쳐 냈다. 날개를 펴자 매의 몸집이 다섯 배는 더 커 보였다. 비둘기는 무슨, 가히 하늘의 제왕다운 위용이었다.

매가 큰 날개를 이용해 홰를 치니, 강한 바람이 일어 녹의 앞머리를 올렸다. 쏟아지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며 매가 왜 저러는지 가늠했다. 매의 눈이 뾰족해진 게 확실히 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매는 그대로 비눗방울 같은 창을 뚫고 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조금 더 관찰하고 싶었는데 곧장 사라져 버렸다. 녹은 도언의 비어 있는 팔을 보며 망연히 물었다.

“…내가 화나게 만든 거야?”

“…어차피 나갈 때였습니다.”

부정을 안 하는 걸 보니 화나긴 했나 보다. 도언은 매가 일으킨 바람 때문에 까뒤집어진 녹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할 일은 끝냈으니 저는 또 나가 봐야 합니다.”

“이네스는 휴가까지 줬다면서. 청연이랑 너만 바쁜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바쁜 게 언제쯤 없어지는데?”

“이번 일은 별일 없으면 곧 끝나겠죠. 그렇다면 녹이 그리 바라 마지않는 청연도 돌아올 겁니다.”

“아니, 내가 뭐 청연을 그렇게 찾았다고…. 그나저나 이제 됐으니까 머리에 손 좀 치워 줄래?”

머릿결을 정리해 주는 도언의 손이 떠날 생각이 없었다. 차분한 손길이 기분 나쁜 건 아니었으나, 세계수의 꿈속에서 도언과 만난 꼬맹이였을 때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때보다야 눈높이는 커졌지만 왜인지 어린애 취급받는 느낌이라 좀 별로였다.

그는 녹의 말을 들었음에도 손을 거두는 걸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이에 녹이 도언의 팔목을 잡아채 내리려 하자, 도언은 애써 정리한 녹의 머릿결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흩트려 놓았다. 당황해서 허둥댔던 녹이 드디어 도언의 팔목을 잡았다.

“너 지금 이게 무슨….”

“그냥, 지금 이렇게 녹의 머리를 만지고 있으려니 그 꿈속이 생각나서요.”

도언 역시 녹과 같은 순간을 떠올린 모양이다. 도언은 녹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녹의 한쪽 얼굴을 감싸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왔다. 도언과 녹의 눈이 지척으로 가까웠다. 당황에 굳은 녹의 표정과 미소를 참지 못한 도언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따지자면 돌멩이와 꽃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꽃이 말했다.

“녹.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돌멩이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입조차 굳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간지러운 꽃의 키스를 받았다. 그의 입맞춤이 기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 돌멩이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 ❊ ❊

도언은 항상 이르게 나갔지만 밤에는 꼬박꼬박 들어왔다. 반면 청연은 며칠이 지났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앞집 이네스는 아직까지 휴가던데, 안가에서 둘만 바빠 보였다. 청연의 귀환을 마지막 유예 기간으로 삼은 녹은, 청연이 바빠 보기가 힘들다는 사실에 자신이 안도했음을 알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버렸다.

요즘 녹은 방문을 두드리는 룬과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게 일과였다. 룬은 혼자서 잘 돌아다녔으나, 요즘엔 왜인지 녹을 불러 댔다. 오늘도 녹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는 룬을 옆에 끼고 공원이나 둘레둘레 걸었다. 해치는 목줄도 없이 너른 공원을 뛰어다녔다. 룬이 뛰어다니는 걸 눈으로 뒤쫓으며 녹은 벤치에 풀썩 주저앉아 혼잣말했다.

“집에 이네스도 있을 텐데 왜 자꾸 나한테 놀아 달라고 하는 건지 원.”

“민수 씨가 좋은가 보죠.”

혼잣말에 기대를 안 한 답변이 날아왔다. 녹이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에선 장바구니에 마법 식물을 가득 채운 주원이 쾌활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안경이 반짝하고 빛을 반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저 녀석, 굉장히 힘이 넘치는걸요.”

“아, 안녕하세요.”

녹은 그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깥에선 보물로 취급되는 식물들이 한낱 대파나 양파처럼 담겨 있는 모습이라니.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잘 안 되었다. 녹이 장바구니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챈 주원이 장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 취미가 마법 시약 제조거든요. 바깥에서는 재료 때문에 해 보지 못한 걸 이곳에서는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라니까요?”

명랑하게 말한 주원은 제 갈 길 가지 않고서 녹의 옆에 앉아 해치가 뛰노는 걸 함께 구경했다. 대화가 끊기자 괜한 어색함이 벤치 주변을 떠다녔다. 녹은 그 침묵에 볼을 긁적이다가 말을 걸었다.

“별일은 없으시죠?”

“물론이죠. 요새 사기 뭉치도 없고 워낙에 평화로워서 말이죠. 보니까 장로장님께서도 휴가시고, 보좌님께서도 안 보이는 걸 보니 휴가라도 가신 모양이에요. 민수 씨는요?”

“저도 별일은 없습니다.”

“하하. 가주님의 손님이라고 들었어요. 한량이라고 하셨으면서, 사실은 정령 학자라면서요? 안가에 정령이랄 게 없어서 아쉬우시겠어요. 마생물은 넘치지만요.”

누구에게 들었는지 묻지 않아도 그 정보의 출처를 알겠다. 이네스겠지. 그의 말에 녹이 허허실실 웃고 있을 때, 주원이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총으로 꾼을 막 작살내고 다니신다던데. 어쩜 그래요? 장로장님께서 민수 씨가 저희 해사단의 스승이 되실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네스가 꿈에 부푼 헛소리를 전파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아차. 해사단 하니 생각난 건데, 저번에 제가 어쩌다 침입한 마법사 가문에서 허공을 향해 쏘아 낸 저주에 사기 뭉치의 기운이 느껴졌던 거 있죠. 순식간에 지나긴 했어도 제가 해사인걸요. 그를 모를 리 없어요.”

“사기 뭉치요?”

“네. 사기 뭉치를 이용해 저주를 개발하다니. 요새도 저주에 힘을 쏟는 가문이 다 있네요. 허공에 저주가 날아가는 걸 보자마자 가주님과 같이 싸우던 보좌님께서 냉큼 날아가시던데. 후…. 그때 진짜 가주님 아니었으면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들이 가주님께서 노리던 사냥감이 아니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제가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르는데, 가주님께서 원래 그렇게 벌집을 쑤시면서 사냥하시나요?”

“음. 평소에는 이러진 않다고 선배들께 들었는데. 저도 얼마 온 지 안 되어서 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요새 바쁜 게 그러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서 바쁜 건가. 왜 바쁘냐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자기가 누군지 알겠냐는 말 하나뿐이니, 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추측을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던 녹은, 며칠 전 밤이 기억나 귓가가 홧홧해졌다. 공원을 돌아다니던 할머니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아이고, 해사 총각 아니누. 다행이구만. 신고 좀 해도 될는가?”

❊ ❊ ❊

주민들은 사기 뭉치를 발견하면 해사단에 신고한다고 한다. 할머니가 오가며 지나는 길목에 사기 뭉치가 있어 해사단에 신고를 넣으러 가던 중, 해사단 배지를 옷에 단 주원과 마주친 거다. 주원은 상황을 봐야 한다며 몸을 일으키며 녹에게 동행을 청했다.

“궁금하시면 같이 가 보실래요? 어차피 도심가에 있는 뭉치는 위험하지 않거든요. 제가 아직 여쭙고 싶은 것도 있고.”

갈까? 말까? 괜히 귀찮아서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주원이 녹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는 것처럼 녹 또한 주원에게 얻어 내야 할 것이 있었다. 뛰노는 룬을 불러들여 함께 가도 되냐 물었다. 그가 달려온 해치의 크기를 가늠하며 말했다.

“이 정도의 마생물이라면 괜찮아요. 사기 뭉치에 집어먹히는 건 조그만 애들이거든요. 하하, 갑자기 제가 태무 님 집에 무단 침입한 기억이 나네요. 태무 님께 들러붙은 사기가 위험하진 않지만 찝찝할 것 같아서 작업했던 건데….”

주원은 본인의 사고 리스트를 음울하게 읊었다. 아무리 태무급 마생물이라도 상처에 직접적으로 사기가 들러붙으면 위험하단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하긴, 그거 비밀이라고 했었으니. 룬도 다치지만 않으면 문제없겠지. 녹은 꼬리 치는 룬을 데리고 주원을 따라갔다.

검고 꿈틀거리는 실뭉치가 붙어 있는 곳은 빌딩의 뒷골목이었다. 해도 들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 역시 전혀 없는 것이 불길하게 꿈틀대는 저 사기 뭉치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이런, 꽤 증식했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저 혼자서 처리할 수 있어요. 이런 자잘한 것까지 보고하면 한 장로님 화내시거든요.”

주원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가방 속에 쑤셔 박고는, 가방의 작은 주머니를 열어 둥그런 외알 렌즈를 꺼냈다. 늘어진 체인 장식이 멋들어진 단안경이었다. 주원은 오른쪽 눈매에다가 단안경을 박아 넣고선 지팡이를 꺼냈다. 멀뚱히 그가 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녹에게 몸을 돌리고는 지팡이로 단안경 끝을 톡톡 두드렸다.

“사기 뭉치를 풀 때 도움이 되는 마도구예요. 그래 봤자 업그레이드된 돋보기지만요.”

말을 마친 그는 쭈그려 앉아 작업에 착수했다. 주원은 세월아 네월아 한 올, 한 올 풀고 있었다. 지팡이를 바늘 삼고 흘러나오는 사기를 실 삼아 조심스럽게 작업을 이어 갔다. 속 터지게 엉킨 전선줄을 해제하는 것 같았다.

그 느린 작업 속도는 녹에게 불안감을 심겨 주었다. 신입인 쟤한테 맡겨도 괜찮은 건가? 잘못 건들면 터진다 했는데.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는지, 주원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한 장로님께서 저에게 신입치고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했어요. 제가 해사단 중에 작업 속도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답니다.”

걱정을 종식하는 다독임이 아니라 눈치 없는 자랑이었다. 저 속도가 해사단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라면 해사단도 알 만했다. 녹은 주원 옆에 쭈그려 앉아 그가 사기를 푸는 걸 지켜봤다. 그는 집중해야 할 때임에도 발발거리며 소모적인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요새 바깥 마법사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요. 민수 씨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마법사들이 씨앗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거든요. 아, 전에 가주님이 소탕한 가문의 회의 주제가 뭐냐고 물으셨죠. 그들도 회의에서 씨앗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던걸요.”

주원의 어제 입었던 옷의 상태 따위를 건성으로 들어 주던 녹은 자신과 관련된 쓸 만한 정보에 태도를 달리했다.

“씨앗이요?”

“아, 네. 저희 세계에서 전설 같은 이야기예요. 웬 꼬마 한 명이 세계수를 터트리고 그 힘을 취해 달아났다나요. 그를 씨앗이라고 부른대요. 내 참. 본 사람도 없는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희망이랍시고 믿는다니까요. 그런 사람들 보면 예전에 연금술사 한답시고 허송세월 보냈던 인간들이 떠올라서 안타까워 죽겠어요.”

“그럼 주원 씨는 안 믿어요?”

“그럼요. 저희 세대 애들 대부분이 안 믿을걸요? 그냥, 아기 장수 우투리 같은 이야기죠, 뭐. 진짜 씨앗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안 잡힐 리가 있겠어요? 마법사들이 다들 불을 켜고 다니는데.”

세상에나. 녹은 정말이지 눈물을 훔칠 뻔했다. 씨앗을 전설로만 취급하는 신세대 마법사라니. 모든 편의를 포기하고 산속에 틀어박혀 은둔했던 보람이 이리 나타나는구나. 몇십 년만 더 정체를 숨긴다면 귀찮은 날파리들이 자신을 쫓지 않게 되는 것도 꿈이 아니리라.

“제가 정령처럼 보이는 것의 뒤를 쫓다가 얼결에 잠입해 버린 그 마법사 가문도 씨앗을 찾아내기 위한 회의를 하던 중이었어요. 씨앗에 목숨 거는 사람이 장로장님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장로장님이요? 정말 그리 씨앗에 미쳤어요? 그냥 정령 연구에만 열정을 쏟으시는 것 같던….”

“어휴, 말도 마세요. 민수 씨가 인간이어서 씨앗에 대한 말을 안 트신 모양이나 보네요. 정말로 부러운걸요.”

지팡이로 풀어내던 뭉친 사기에서 오렌지색의 불티가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용접하는 공사장에서 많이 본 모양새에, 녹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녹의 곁에 있던 룬은 그보다 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행동이 빠른 녀석이었다. 주원은 지팡이를 사기 뭉치 옆구리에 힘차게 쑤셔 박으며 물었다.

“어쿠, 죄송합니다. 안 튀셨죠?”

“맞은 곳은 없지만…. 맞으면 위험한가요?”

“위험하다기보단…. 음…. 네, 위험하네요. 혹시 모르니까 저기 멀리 떨어져 계세요.”

녹은 냉큼 주원과 멀어졌다. 다섯 걸음 정도 멀어진 거리에, 주원은 박아 넣은 지팡이를 뽑으며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한 번 실수한 주원은 뭉치에 빠져들 듯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진중한 눈과는 반대로 입은 쉬지 않았다.

“여하간, 민수 씨가 정령 학자의 후예시라면 제가 저번에 봤었던 게 어떤 정령인지 알 수도 있으시겠네요. 장로장님께 여쭤봐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만 저으셨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수색대도 함께 하고 계시다 하셨죠.”

“맞아요! 저번에 사고 한번 크게 친 징계가 그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해사 일만으로도 벅찰진대, 수색대까지 겸하라니요. 하지만 저는 성실하니 둘 다 열심히 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답니다. 하하하!”

주원이 친 사고가 하도 많아, 그가 어떤 사고를 얘기하고 있는지 특정할 수 없었다. 제가 뿌리는 경쾌한 웃음이 집중력을 떨어트릴 만한데, 주원이 작업에 임하는 눈만은 점잖기 짝이 없었다. 눈과 하관이 따로 노는 것 같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거기서도 사고를 쳐 버리고 말았네요…. 이번에는 어떻게 일이 잘 풀려서 징계까지는 안 먹었지만…. 저는 정말 정령만 보고 따라간 거라서 몰랐다고요. 거기가 가주님이 노리던 마법사 가문의 회의장일지 아닐지 알게 뭐예요. 저는 하늘만 보고 뛰었으니까요.”

“하늘만 보고 뛰었는데 거기 한가운데로 들어갔다고요? 보통 회의장은 실외가 아닌 실내 아닌가요?”

“아, 맞아요. 근데 그 가문이 독특하게 결계 하나만 대충 쳐 가지고요. 실외에서도 결계만 넘는다면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뒀지 뭐예요. 근데 제가 좀 결계 같은 거 무의식으로 뚫어 버리거든요. 정신 놓고 있었으니 도리가 있나요. 덕분에 쫓던 정령도 놓쳐 버리고…. 거기 있던 모두가 제게 지팡이를 겨누었어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나요? 트라우마가 될 지경이라고요….”

과연 그때를 회상하기가 힘든지, 그는 입꼬리를 축 내렸다. 그러나 역시나 눈은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얼굴 근육을 저리 자유롭게 사용하다니. 녹은 주원이 자신과 다르게 연기에 재능이 있을 것 같단 실없는 생각을 했다.

“여하간, 제가 목격한 정령은 하얀 새의 형태였어요. 처음에는 그저 낮게 나는 비둘기인 줄 알았는데 뭔가 미묘한 마력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마법으로 만든 건 아닌 것 같고. 따라가다 보니 검은 깃털이 간간이 섞인 게 매가 아니겠어요? 기적의 흔적은 감추었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는 확신했죠. 저거저거 정령이다.”

보통 마법사들이 정령을 쉽게 알아채는 이유는 그들이 쓰는 기적이 마법과 형태를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흡수하는 성질의 마력을 쓰는 마법사들은 발산하는 기적을 쓰는 정령을 쉬이 알아챘다. 허나 그들이 기적의 흔적을 감추면 감별하는 능력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기에 의아해진 녹이 물었다.

“기적의 흔적이 감추어졌는데 어째서 정령이라고 확신하셨나요?”

“예전에 딱 한 번 본 적 있었거든요. 그때는 그 녀석, 기적을 썼었는데…… 여하간 그 정령의 외향만큼은 잊지 않아서 잘 알아요. 그 녀석, 어떤 정령인지 아세요? 장로장님도 모르신다고 하시고…. 혹시 민수 씨가 수집한 기록에 남아 있다거나….”

“잘 모르겠네요.”

녹의 즉답에 주원이 아쉬운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게 정령의 꼭대기인 세계수의 열매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녹은 무언가가 발끝을 툭툭 치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내렸다.

검댕이같이 조그만 사기 뭉치였다. 녹은 이걸 얘기해 줘야 하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아직도 뭉치 하나 가지고 낑낑대는 주원을 보고선 조용히 허리춤의 글록을 꺼내 들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폭발한다고 했었지. 그러니 저리 신중히 작업하는 것도 오버는 아닐 거다. 녹의 글록은 태무의 일이 있고 나서 청연이 꼼꼼하게 침묵 마법을 걸어 두었기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를 제외하면 시끄럽지 않았다.

녹은 잠금장치를 풀고 가볍게 방아쇠를 당겨 사기 뭉치를 지웠다. 이 정도는 도와줘도 되겠지. 사기 뭉치를 없애고 보니 그 옆에 하나가 더 꿈틀대고 있어서 한 발 더 쏘고 삭제시켰다. 분명 처음에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주원이 작업하고 있는 저거 하나뿐이었는데, 어째 점점 늘어났다.

바닥에 총알이 박히고 탄피가 떨어지는 소리는 꽤 유난했다. 녹이 고개를 들어 주원이 보고 있나 확인했다. 괜히 들키면 해사단에 들어오라고 난리 칠 인물이 하나 더 늘어날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의 모습을 확인한 녹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총구를 그에게 겨누었다.

달그락-

탄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총성 대신 울렸다.

주원은 사기가 풀리려는 기미가 보일 때쯤부터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을 다물었다. 작업에서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기의 모든 실을 풀고, 마지막으로 마력을 담은 지팡이 끝으로 핵의 중심부를 쳤다.

챙캉-

벽에 단단히 박혀 있던 흐린 붉은색 사기의 핵이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져 깨졌다. 주원은 핵의 부스러기를 흐뭇하게 발끝으로 모으며 이 현란한 작업 과정을 모두 지켜본 손님에게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툭-

“으, 으아아악!”

쭈그렸던 몸을 다 펴기도 전에 무언가가 주원의 오른쪽에 떨어졌다. 그 정체를 확인한 주원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떨어진 것은 웬 하얀 짐승의 손뼈였다. 그 하얀 뼈는 웬만한 인간의 얼굴만큼이나 큰 것이, 일반적인 짐승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하얀 뼈 주위를 감싸며 올라오는 검은 아지랑이….

“사…사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왼쪽에서 반대쪽 손뼈가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찢어지는 듯한 비명.

찌이이익-!!

돌아보니 쥐 형상의 뼈대가 앞발을 잃고서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주원은 그 괴형태의 반대편으로 손바닥을 밀며 멀어졌다. 저건 분명 꾼이었다.

“정신 차리고 얼른 이쪽으로 뛰어요!”

곧은 목소리가 외쳤다. 다행히 주원의 반응은 빨랐다. 주원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일으켜 녹에게 달려갔다. 보통 놀랄 일이 있으면 몇십 초간 얼어붙기 마련인데 그런 것 하나 없이 대처하다니, 반사 신경 하나만큼은 놀라웠다.

주원이 꾼 아래에서 몸을 피하자마자 양발을 잃은 꾼이 서서히 기울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쭉 편 꾼의 크기는 3.5m 정도. 몇 초만 늦었어도 주원은 저 밑에 깔렸으리라.

녹에게 달려온 주원이 물었다.

“저게 뭐예요? 왜 꾼이 여기에 있는 거죠?”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해사는 주원 씨잖아요. 저는 그냥 한량일 뿐인데….”

“한량님 아니면 저 큰일 날 뻔했네요. 장로장님께서 무술 스승이니 뭐니 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하간 마법 식물을 키우는 곳에나 5년에 한 번꼴로 나오는 녀석이 어째서 여기까지 침투했는지는…. 형태를 보니 바람쥐네요. 저 녀석, 근처 산에서 떼를 이루며 사는 마생물이에요. 물론 원래 크기는 손바닥만 하지만 왜인지 꾼이 되었군요.”

꾼화가 된 마생물의 정체를 읊는 주원을 뒤로하고, 녹은 주변을 둘러보며 룬을 찾았다. 먼 곳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룬이 보이지 않았다. 주원에게 물어볼까? 하지만 자기를 해치려던 꾼까지 모를 정도로 집중해 있던 그였다. 그가 룬의 행방을 알기엔 요원해 보였다. 그는 역시 룬은 까먹었는지 쓰러진 꾼을 멀찍이 바라보며 태평하게 말했다.

“세상에, 민수 씨, 선배들이 말했을 때는 설마 했었는데 진짜 명사수시네요! 후, 일단 한 장로님께 보고해야겠어요. 꾼이 도심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야근감이네요. 저기에 있는 불쌍한 제 장바구니도 좀 수거하고요. 무서워서 저 근처에 다가갈 수 있어야죠.”

주원이 부산스럽게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냈다. 녹은, 다이얼의 단축키를 꾹 누르려는 주원의 손목을 잡고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어어, 민수 씨. 무슨 일… 우와아악!”

찌이이익-!

앞발을 잃은 바람쥐 꾼이 고개를 들고 뒷발만을 이용해 주원과 녹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달리는 모양새가 공포스러웠다. 심지어 저 쥐는 꾼화가 얼마나 된 건지 저번에 보았던 새 모양 꾼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했다. 비어 있는 안구에는 불길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뼈와 뼈를 잇는 틈틈이 듬성듬성 하얀빛의 털과, 아직까진 붙어 있는 귀의 거죽만 아니었더라면 바람쥐인지도 몰랐으리라.

녹이 그동안 사격을 아무리 죽도록 연습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백발백중은 아니었다. 작업하는 주원을 공격하는 앞발을 맞추기 위해 다섯 발의 총알을 쐈다. 그리고 아예 죽여 버리기 위해 세 발 더. 그것이 쓸모가 없지는 않아서 빠른 속도로 기어 오는 저 꾼의 갈빗대 두 대가 나가고, 두개골 중간에 총알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불도저처럼 녹을 쫓아오는 게 큰 문제였다.

장전된 열아홉 발 중 열 발의 총알을 썼다. 남은 건 아홉 발. 그러나 꾼의 약점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소모되는 무기를 남발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 다행히 발 두 개를 잃은 꾼은 속도가 더뎠고, 따돌리기는 힘들어도 격차가 좁혀지지는 않았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사람들이 없는 곳이에요? 주원 씨, 앞장이요!”

“아앗! 네! 조금만 더 가면 뒷산이 나와요! 적어도 거기는 비마법사들은 없을 거…. 우와아악!”

골목길을 꺾으려 하자 그곳에서 또 한 마리의 바람쥐 꾼이 나타났다. 그것에 의해 길이 막히자, 녹과 주원은 재빨리 뒷걸음질해 다른 쪽의 길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타난 새로운 한 마리는 주원과 녹에게 관심이 없는지, 제가 가던 길이나 계속 갈 뿐이었다. 문제는 그쪽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심가라는 점이었다.

녹은 달리던 걸 잠시 멈춰, 도심가로 가려는 꾼의 뒤통수를 총으로 맞혔다.

찌이이익!!

맞추자마자 녹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뛰었다. 남은 건 여덟 발.

힘차게 달리고 있던 주원이 기겁해 소리쳤다.

“아니, 갈 길 잘 가던 녀석한테 왜 시비 터세요? 덕분에 저희 뒤에 따라오는 녀석이 둘이나 되었는데요!”

“조용히 하고 지팡이나… 꺼내요. 저 녀석들 시야에서… 헉, 사라지지 않는 거리로 순간이동 할 수 있죠?”

안 그래도 약한 체력인데 뛰면서 말하려니 죽겠다. 분명 자신보다 말도 많은 주원이지만 뛰면서 숨이 단 한 번도 차지 않는 게 대단해 보였다. 녹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저질 체력인가, 아니면 주원의 체력이 좋은 건가에 대한 고찰을 짧게 했다.

어느새 앞발을 잃고 기어 오는 꾼을 추월한 새로운 꾼이 빠르게 속도를 좁히며 다가왔다. 녹은 달리면서 그를 향해 한 발을 더 쐈다. 다행히도 뒷발에 명중했다. 덕분에 꾼의 속도가 확연히 줄었지만, 그럼에도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남은 건 일곱 발.

“뮤에로토!”

자신이 마법사임을 드디어 깨달은 주원은 녹의 팔을 붙잡고 주문을 외웠다. 100m 정도의 격차가 덤으로 벌어졌다. 그래도 죽을 둥 살 둥 뛰어야 하는 건 똑같았다.

“이쪽으로 가면…. 사람 없는 거 진짜 맞….”

“맞아요, 맞아요! 인제 보니 저희를 미끼로 저 녀석들을 몰아가고 있는 거였군요! 5년에 한 번 볼까 말까인 꾼이 왜 둘이나 이곳에서 나타난 걸까요! 민수 씨는 아세요??”

아, 모른다니까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녹은 주원의 말에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왜 자신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꾼에 대한 전문가는 해사인 본인 아닌가. 달리다 보니 가는 길목 바로 앞에서 또 한 마리의 꾼이 보였다.

환장하겠네! 녹은 고대로 멈춰 총구를 그 녀석을 향해 겨누었다. 총성 없는 격발이 이어졌다. 뒤에 두 마리처럼 한 대 맞은 바람쥐 꾼이, 열 받았음을 온몸으로 티를 내며 주원과 녹을 향해 달려 왔다. 녹은 달리는 쥐의 발을 겨누고 한 발 더 쐈다. 위기의 순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집중력은 녹을 명중으로 이끌었다. 남은 건 다섯 발.

한쪽 발이 아작 난 쥐의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크게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가야 할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해 보니 뒤에는 꾼 두 마리, 앞에는 한 마리.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녹과 주원의 등이 자연히 맞대졌다.

“으악! 민수 씨! 뭐 하시는 거예요! 포위되었잖아요!”

“마법 써요! 마법!!”

“아, 뮤에로토!”

꾼이 점점 늘어나니 주원은 머리가 달궈지는지 자꾸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까먹는다. 하긴, 위급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다. 녹은 쓸 수 있는 마력이 사라졌고, 주원은 쓸 수 있는 뇌세포가 사라졌으니, 둘은 꽤나 합이 잘 맞았다.

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리까지 떨어졌다. 달리다 보니 드디어 산의 초입이었다. 본격적인 등산 전 뒤를 확인하니, 한 마리의 낙오된 쥐도 없이 잘들 따라오고 있었다. 눈도 없으면서 어떻게 저리 잘 알아채고 따라오는지 기특할 노릇이다.

일단은 도심에 저들이 등장하면 피해가 막대하리라. 아이들도 뛰노는 그곳이다. 녹은 저들로 인해 안가의 도심이 전대물의 한 장면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절묘한 거리 차로 산등성이를 올랐던 녹과 주원은 웬만한 굵은 나무 앞에서 멈췄다. 꾼 세 마리는 등산도 잘했다. 얻어맞은 데에 대한 복수가 마력이 넘쳐나는 광장을 가는 것보다 급했나 보다.

녹이 숨을 몰아쉬며 나무 위로 눈짓하자, 안정적이게 숨 쉬던 주원은 주문을 외쳐 녹과 함께 나무 위로 올라왔다. 바람쥐는 어디를 기어오르는 습성이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주원과 녹이 올라간 나무를 둥글게 빙빙 돌아다닐 뿐이었다. 총알 때문에 금이 간 뼈에서 올라오는 검은 아지랑이가 불쾌했다.

처음 꾼을 봤을 때는 마력이 단단히 봉인되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저 사기란 것이 어떤 형태의 마력인지 보인다. 확실히 불순한 마력이었다. 마력이 오염되면 저런 형태가 나타날까 싶은 미묘한 마력.

약이 오른 쥐들은 나무를 갉기 시작했다. 그들의 앞니는 빠르게 톱밥을 생성해 냈다. 녹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주원을 다그쳤다.

“뭐 하세요. 얼른 해사단 호출하지 않고.”

“아, 그게, 달리면서 핸드폰을 떨어트려서요.”

“마법사시잖아요.”

“아, 그것이. 여기 올라올 때 마지막 마력을 다 쥐어짜서….”

“…….”

“…….”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마법사였다.

‘해사는 분명 능력 있는 마법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들었는데.’

차게 식은 녹의 눈빛을 모자와 마스크 사이에서 잘도 발견한 주원이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마법사가 아닌 민수 씨는 잘 모르겠지만, 사기 뭉치 하나 풀 때 마력 소모가 엄청나다고요. 분수대가 근처라 많이 써도 괜찮을 줄 알았죠….”

그래, 이미 말아먹었다는데 쪼아서 무엇 하리. 점점 얇아지는 나무를 바라보던 녹은 주머니를 뒤져 타로 카드 덱 중 카드 하나를 꺼내 총 위에서 찢었다. 총에서 미미한 마력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부적을 만들 때 마법 교란 결계 부적만 만들지 않아 다행이었지.’

꽤 쓸 만해 보이는 마법 몇 개를 부적에 깃들어 놓았던 적이 있는 녹이다. 마법식 해제 부적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에 쓰인 마력은 분수대에서 꺼낸 마석으로 사용했기에 아무리 마력에 예민한 마법사래도 녹의 마력을 들킬 염려가 없었다.

녹은, 침묵 마법이 해제된 총을 하늘을 향해 쏘았다.

탕--!!

큰 총성이 울리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다양한 새들이 놀라 산을 떠났다. 이 야단법석을 들은 도심 중간에서 노란색의 둥근 물체가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이네스의 여의주였다.

“으아앗!! 여기요!!”

둥근 구슬을 발견한 주원이 몸을 일으켜 팔을 크게 휘둘렀다. 총성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이네스가 띄워 낸 여의주는 주원의 부름에 쉽게 응답했다. 여의주가 녹과 주원이 있는 나무로 빠르게 비행했다. 주원은 자신 주위를 둥둥 떠다니는 구슬이 자아가 있는 양 도움을 요청했다.

“장로장님! 산이 아닌 도심에 꾼이 나타났어요! 민수 씨가 어떻게든 유인해서 이쪽으로 몰았고요. 저 바람쥐 꾼이 나무를 다 갉아 버리기 전에 얼른 와 주세요!”

보고를 들은 여의주는 순식간에 허공에 스러져 사라졌다. 주원이 안도를 하며 나무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제 금방 오실 거예요. 아까 그거 간간이 동네를 순찰하는 장로장님의 물건이거든요.”

주원이 씨익 웃자, 그의 눈에 달린 단안경이 반짝였다. 여하간 확실히 저 아이템을 끼고 있으니 적어도 외양만큼은 마법사답긴 하다. 사기를 풀 때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하릴없이 이네스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나 요모조모 뜯어보게 되는 거다. 보통 녹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음? 뭔가 좀 위화감이….’

녹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주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아니요. 닳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근데 민수 씨 얼굴은 닳나 봐요.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민수 씨 보고 모자가 본체인 아저씨라고 부르던데.”

아무래도 꽁꽁 가린 얼굴 때문일 거다. 애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는 몰랐다. 처음 듣는 아저씨라는 소리에 크지 않은 충격을 뒤로한 녹이 대수롭지 않게 거짓 변명을 했다.

“제 얼굴에 큰 흉이 하나 있어서요.”

“흉이…. 으악!”

앉아 있던 나무가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아무래도 저 밑의 해골 나무꾼들이 자신의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이다. 이네스는 언제 오는 거람. 다급하게 나무 기둥을 붙잡는 주원을 뒤로한 채, 녹은 나무를 갉고 있는 꾼을 향해서 두 발 더 쏘았다.

탕-! 탕-!

녹의 격발에 머리 중앙을 맞은 건 가장 처음 봤던 꾼이었다. 맞은 곳의 위치가 좋았는지, 아니면 누적된 타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열심히 나무를 갉고 있던 녀석이 옆으로 픽 쓰러지며 검은 사기를 하늘로 피웠다. 나머지 두 마리의 꾼은 위협적인 사격에 작업을 멈추고 나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오! 한 마리가 가셨네요! 근데 저 사기 얼른 정화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다른 꾼이 만들어진단 말이에요!”

“그 정화 주원 씨가 어떻게 못 합니까?”

“제 마력이 고갈되어서… 하하…….”

사실 기대는 안 했다. 머릿속으로 한숨을 쉰 녹은 남은 총알이 한 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네스가 올 거 같아서 막 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말이다.

‘하, 마력만 있었으면 저 해골들 아주 압사를 시켜 버리는 건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허공에서 바닥을 향해 금색 원형의 빛 고리가 만들어졌다. 고리가 열리며 푸른 옷의 해사들이 바닥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제 명줄이 길긴 하군요!”

주원이 하늘 높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들이 지팡이를 들고 발밑을 향해 주문을 외자, 허공에서 발을 디딜 수 있는 투명한 지반이 만들어졌다. 유리 상자 같은 모양새였다. 그걸 탄 다섯 명의 해사들은 곧장 죽은 꾼 위에서 오각형으로 자리 잡았다. 지팡이로 서로를 겨누고 오망성 모양의 마법진을 하나 만들어 냈다. 나타난 진에 흐르는 마력에서 순백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사기를 정화하는 진인 듯했다.

작업의 시작은 신속했으나 과정은 지루했다. 해사가 다섯이나 붙었는데도 해사들끼리만 작업하면 저리 긴 시간이 소요되는구나. 도언이 작업했을 때는 금방이었기에 저리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건 알지 못했던 녹이었다.

다섯을 제외한 다른 해사들은 나머지 꾼들을 몰기 시작했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꾼의 사냥은 그들의 입장으로는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뚫린 허공에서 튀어나온 건 한 장로와 이네스였다. 투명한 무언가를 탄 한 장로는 얼른 주원에게 다가와 허리춤에서 웬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주원이 반사적으로 그 주머니를 받아 끄르자, 안에 가득 든 마석이 보였다.

“이놈아. 무슨 쓰다 만 문자를 보내고 있어. 그리고 쓸 거면 꾼이 나타났다는 것부터 써야지, 이 녀석아. 장로장님께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제가 장로님께 문자를 보내긴 했어요? 뭐라고 보냈는데요?”

한 장로는 답 대신에 핸드폰을 꺼내 보여 줬다. 녹 역시 슬쩍 머리를 디밀어 문자 내용을 보았다.

마력이 부족해소ㅓ 위험한데 비상사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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