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되돌아보는 발자국
구석진 수풀 안. 한 아이가 수풀에 몸을 묻고는 목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그 고요한 시간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고 나오며 아이의 잠잠한 평화를 깼다.
“도언이 찾았다.”
나타난 자는 얼굴에 장난기를 한가득 담은 아이 한 명이었다. 이 집안의 유령 취급을 받는 하녹이다. 하녹의 옆에 있던 도언의 쌍둥이 누이가 감탄을 표했다.
“진짜 찾았네! 한번 사라지면 박혀서 나오질 않는 애를 도령은 잘도 찾아낸단 말이야. 어떻게 찾은 거야?”
“엣헴. 감이지. 감.”
그들만의 보물찾기에서 승리한 것이 못내 뿌듯한지, 녹은 팔짱을 끼고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했다. 도언은 그에 고개를 숙여 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겼다. 분명 저보다 세 살은 더 많은 도령일진대, 어째 점점 제 누이와 행동이 비슷해진다.
“어어? 웃네? 하진아. 네 오라비가 또 실없는 생각 하나 보다. 얼른 무슨 생각 하는지 좀 맞혀 봐.”
“도령도 참. 쌍생아라고 서로의 생각을 맞힐 수 있다는 건 낭설이라니까 그러네. 내가 쟤 생각을 어떻게 알아. 그랬으면 내가 도령보다 먼저 말도 없이 사라지는 얘가 어디 있는지 찾아 버리지. 안 그래?”
하진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툴툴댔다. 도언에게 내비치는 은근한 항의였다. 하진과 도언은 언제나 함께였다. 하진은 자신을 지칭할 때 ‘나’라는 대명사보다 ‘우리’라는 대명사를 즐겨 사용했고, 그래도 자연스러울 만큼 그들은 붙어 지냈다. 그렇기에 하진은 이런 도언의 독립적인 행동이 낯설었다.
간간이 몰래 사라지는 연유 또한 도언과 함께 돌아오는 말끔해진 도도가 알려 주었다. 하진은 늘 말도 없이 도도와 사라지는 도언에게 타박했다.
“도언아. 자꾸 말도 없이 도도 좀 가지고 가지 마.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넌 시간 남으면 좀 쉬라니까? 네가 만들었어도 내 검이잖아. 관리는 내가 해야지! 그 전에 도도를 가지고 가고 싶다면 나한테 일차적으로 허락부터 맡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내 거라고!”
도언은 동생의 야무진 항의를 미묘한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하진이 저리 당당하게 나오기에 정말 내버려 두었더니 자기 멋대로 손질을 해 둬서 도도를 원래의 상태로 돌리는 데에 애를 많이 먹었었다.
분명 어려울 것도 없는 손질법인데 어째서 그리 엉성하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진은 그리도 손재주가 없었다. 대신 해 주려니 그 시간에 쉬라고 성화여서 도도에 몰래 기름을 먹인 것만 해도 벌써 수차례였다.
고집 센 도언은 자신이 정한 건 웬만해서는 바꿔 먹질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옆에서 잔소리해도 또 저럴 것을 하진은 잘 알았다. 물론 하진 역시 고집은 제 오빠 못지않아 이런 미묘한 추격전이 달에 한 번은 항상 벌어졌다.
도언은 하진의 타박에도 싱겁게 웃고만 있었다. 백날 말해도 다음에 또 저럴 거라는 무언의 표현이다. 한 달쯤 뒤에도 지금이랑 똑같겠지. 그를 예감한 하진은 말해 봤자 입만 아픈 소리를 멈추고는 목검을 손질하는 도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도언이 기계적으로 검을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녹 역시 그런 도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이의 익숙한 손놀림을 구경했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이었고, 규칙적인 사포 소리는 춘곤증을 부르는 자장가였다. 이른 아침부터 고을로 심부름을 나간 하진이 도언의 어깨에 기대 잠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혹시 하진이 자는 거야?”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달다. 가볍게 눈을 감은 하진을 확인한 녹은, 목소리를 낮춰 도언에게 속삭였다. 하진은 낯선 곳에서도 쉬이 잠드는 가공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에 훈련하고, 이후 고을로 심부름을 나갔습니다. 피곤할 만했죠. 방에서 뻗은 새에 빨리 손보려고 도도를 가지고 나온 거였습니다만 금방도 들켰군요. 어찌 도령께선 저를 잘도 찾아내십니다. 이번에도 하진이가 부른 겁니까?”
“어어. 요새는 도도만 없어졌다 하면 너 좀 찾아 달라고 찾아오던걸. 둘이서 항상 묶음으로 사라진다고.”
“다음에는 도령이 절대 찾지 못하는 곳에 가 있어야겠군요. 그러니 다음에는 하진이 부탁을 해도 저 못 찾겠다 하고 그냥 방에서 쉬고 계세요. 어련히 잘 돌아갑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진이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지. 도도 관리하기 전에 하진이에게 말하고 가져오는 건 어때?”
“절대 허락 안 해 줍니다. 아마 숨기려 들걸요. 차라리 이게 낫지요. 게다가 많아 봤자 달에 한 번인데, 걱정 마세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하늘을 쩌렁하게 울리는 인사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 누가누가 더 크게 외치나 경쟁하듯 하는 거로 보아, 분명 홍이 그들의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경보와도 같은 소음 소리에 도언은 미간을 설풋 찌푸리고는 제 어깨에 선잠이 든 하진을 내려 보았다. 다행히 아이들의 외침은 아이의 단잠을 부술 정도로 강력하지 않았나 보다. 입까지 세모꼴로 벌리며 아직도 잘 자고 있었다.
도언은 기름 묻은 손을 헝겊에 잘 닦고선 어깨에 붙은 아이의 머리를 떼어내 제 무릎에 곧게 눕혔다. 덕분에 하진은 전보다 편한 숨소리를 내며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녹은 다정한 오누이의 모습을 아빠 미소를 하며 흐뭇하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녹이 하진을 보고 미소하는 걸로 착각한 도언은, 자신이 귀하게 눕힌 누이동생을 흔들어 깨워 버릴까 하는 충동이 문득 들었다.
녹과 관련되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디미는 충동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봄날의 공기는 소년의 마음을 울렁울렁하게 뒤집어 놓았다. 소중한 누이를 깨우지도, 그렇다고 녹에게 고개를 돌리라고 말하지도 못한 도언은, 들썩이는 마음에 그저 눈을 감는 걸 택했다.
“어? 너도 자려고?”
“안 잡니다.”
“근데 왜 눈 감았어.”
“…제 마음입니다.”
“에이, 잘 거 아니면 눈 좀 떠 봐. 오늘 네가 뭐 했는지나 들어 보자.”
눈치 없는 하녹은 자꾸만 도언을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하진이를 깨우지 않으려는 노고였다. 이 과정에서 자꾸만 몸을 붙여 와서, 도언은 눈을 더욱 힘껏 감았다. 하녹은 이런 식으로 도언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하진이와 자신을 쌍으로 묶어서 동생 취급을 하는 것 같았다.
그의 특별한 취급이 기꺼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개운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에게 그보다 더 남다른 취급을 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샘솟았다.
도언은 자꾸만 맑은 머릿속을 흐리게 만드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질문에만 집중하려 했다. 하녹의 질문에 집중한다는 것이 하녹에게 신경 쓴다는 것과 별반 다를 건 없었으나, 여하간 도언은 녹에게 신경 끄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오늘 아침에 훈련 끝나고….”
“오늘 아침에 훈련 끝나고?”
“저 소음의 주범이 찾아왔습니다.”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소가주에게 하는 우렁찬 인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도언이 소음이라 힐난하는 소리는 분명 저것이리라.
“응? 하홍 말이야?”
“네. 그 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태세에 하녹이 성큼 얼굴을 붙였다. 도언은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상태였기에 숨이 좀 멎는 것 말고는 큰 타격은 없었다. 코끝에서 진한 나무 냄새가 진하게 살랑였다. 녹에게는 항상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났다.
“쟤가 왜 찾아왔는데?”
“…좀 떨어지시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흥미에 잠식되어 자신이 도언에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단 걸 깨달은 하녹이 어른 한 발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멀어졌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도언이 눈을 떴다. 멀리도 떨어진 걸 보면 어지간히도 궁금했나 보다.
“자신의 호위가 되지 않겠냐며 물어 왔습니다.”
“호위? 자기가 호위가 대체 뭐가 필요해? 자기 가문에서. 심지어 본인도 마법사면서.”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보라더군요.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좋다 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승낙했어?”
“아니요. 하홍이 제시한 보상 모두 저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홍의 말대로라면 자신을 영입하고 싶은 이유는 수업 도중 가장 성취가 좋고 잠재력이 높아서라고 했었다. 하지만 호위 명목으로 데려간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하녹의 말처럼 마법사가 떼로 덤빈다고 하더라도 멀쩡할 하홍이 어째서 비마법사 아이를 호위로 들일 생각을 했는지조차 이상한 상황이었다.
호위란 것은, 보통 대상자의 곁에 종일 붙어 있어야 함을 뜻했다. 참으로 호위를 바랐다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무술 스승을 영입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홍을 두려워할지라도 말이다. 홍의 의중을 모두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도언은 그가 정말 호위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쯤은 쉽게 읽었다.
“그랬더니 돌아갔어?”
“네. 혹여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라더군요. 대가로 뭐든 준다고 했습니다.”
“이야, 말만 들었는데 진짜 소문처럼 특이한 도련님일세? 마법사가 아닌 자의 의사를 묻는 마법사는 또 처음이네.”
“거부권을 주니 다행이죠.”
도언은 자신의 무릎에 누워 있는 하진과, 그 옆의 녹을 바라보았다. 이 고요한 밀림에서 자신이 호위해야 할 자는 이 둘뿐이었다. 심지어 하진이보단 하녹을 더 신경 써야 했다. 하진이야 무술에 일취월장이고 마법사들의 호감이 쉬이 사지만, 하녹은 그저 숨 쉬고 걸어 다니는 말랑콩떡이 따로 없었다.
가능한 하녹과 붙어 다니면서 주변을 경계해야지.
그러나 그런 다짐을 뒤로한 채, 도언이 하홍의 호위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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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저 높은 곳에 달린 검은 열매. 그 바로 밑 대지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 앞에 한 남자와 아이만이 남아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저보다 몇 배는 더 살아온 남자에게 아이는 지지 않고 제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오십 명분의 마력이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마법사를 갈아 넣었다. 아무리 하가라지만 마법을 부릴 줄 아는 바깥 마법사들의 수를 명분 없이 줄일 수는 없어.”
“저는 아버지께서 그들의 눈치를 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들이 모두 힘을 합해 덤벼도 우리 가문에는 못 당해 내지 않습니까.”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볼 성싶으냐. 내가 경계하는 건 세계수 자체이다. 세계수가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계획을 만행이라 여기면 우리는 마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단 걸 알지 않으냐.”
“그러니 얼른 밀어붙여야죠. 이 실험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세계수의 눈치 따위 보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언제까지고 저 나무에게 마력 관장을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열매가 부화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시는 분께서 너무 몸을 사리십니다.”
크게 대꾸하던 아이는 마법진의 상태를 살폈다. 자신보다 몇 배는 덜 산 아이에게 나무람을 들은 하가의 가주는 반박하지 못하고 혀만 찰 뿐이었다. 하홍의 모든 말이 옳았다. 세계의 규칙을 바꾸는 이 실험에 마법사 오십 명분의 마력이면 차라리 싼 값이었다.
마력과 식신을 끌어당기는 열매의 자력을 아이들에게 이식하는 이 실험은 하홍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마력 하나 없이 아이들을 이용하여 마력 사냥을 이룰 수 있는, 손 안 대고 코 풀기 위해 하는 발명이었으나 실험의 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는 세계수가 변덕을 부려 마법사들에게 식신을 빼앗을 때에 대한 대비였다.
태초부터 식신이란 세계수가 인간에게 마력 채취를 허락하여 얻게 된 일시적인 힘에 불과했다. 마력을 스스로 채취하지 못하는 마법사들은 타고난 마력을 다 쓰면 더는 마법을 누리지 못했었다. 그를 안타깝게 여긴 하가의 초대 가주가 세계수에게 부탁해 빌린 권능이 식신이었다.
그렇기에 세계수가 거두고 싶다고 한다면 언제든 마법사들은 마법을 잃게 될 수 있었다. 식신을 사용해 마력을 채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법사들은 식신의 권능을 세계수에게 빌린 게 아닌, 자신의 것이라 착각했다. 스러지지 않는 하가의 권력을 위해 하가의 가주들이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하가를 전설적인 조상이 존재하는 열매 보유 가문 정도로 여겼다. 그것만으로 그들이 하가에 기어오를 일은 없었으나, 세계수가 언제 식신을 빼앗아 갈지 모를 일이었다. 만일 하가가 하는 행태를 보다 못한 세계수가 하가 소속 마법사들의 식신만을 빼앗아 간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겠지. 그는 하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 판도가 바뀌다 못해 부서지는 걸 뜻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하가의 후계자들은 가주가 되기 전 그 사실부터 교육받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이란 세계수의 의지 아래 언제든 스러질 수 있는 힘이란 걸 기억하라.’
이 교육을 받은 하가의 가주들은, 처음에는 언제든 식신이 사라질 수 있을 거란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인정하고 겸손해했다. 하지만 그 교육은 세월이 흐를수록 어찌하면 식신을 진정한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과제로 변질되었다. 이번 대의 가주인 하해운 역시 비슷한 고민을 이어 갔으나, 바깥에서 데려온 자식인 하홍의 의견을 듣고 고뇌의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의 힘이 이다지도 커졌는데, 그 힘의 주도권조차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마침 열매가 열리며 세계수가 잠에 빠져들었다지요. 지금이 이 숙제를 해결할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일은 비상한 하홍의 머리로 인해 현실적인 계획으로 탈바꿈해 나갔다. 아들에게 한 소리 들은 가주이건만, 마법진을 살피는 하홍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했다.
만일 하홍의 머리가 이리 비상하지 않거나 또 다른 자식인 하녹의 마력이 0에 수렴하지 않았더라면 하홍을 바깥에서 데리고 와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는 일 따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바깥에서 실수해 낳은 아이의 생존 따위, 아내가 허락지 않았겠지.
녹의 마력이 없다는 사실은 홍에게 행운이었다. 그리고 이리 범상치 않은 아들을 얻을 수 있는 가주에게도 행운으로 작용했다.
“일단 열매의 힘을 일반인에게 의식하는 걸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흐름을 통해 세계수의 모든 힘을 또 다른 유기체에게 충분히 이식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제가 열매를 취하기 직전에 모든 작업을 끝내야 해요. 그때면 세계수가 깨어날 테니까. 허니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래. 결국 저 열매는 네 몫으로 달린 것이 확실할 테니 말이다. 세계수가 깨어나기 직전에 열매에서 깨어날 종속 정령 또한 취하고, 그의 마력 역시 취하니. 이 세상의 패권은 세계수가 아닌 우리가 가지게 될 것이 확실하구나.”
가주의 후련한 웃음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내내 고민하던 일을 굴러 들어온 복덩이가 뿌리째 뽑아낸다니, 그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나. 자신의 아들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거란 사실을 여실히 믿는 그였다. 그러나 홍은 그의 믿음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공한 실험체를 반드시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홍은 제 아비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아니, 믿긴 했다. 그의 짧은 식견과 좁은 그릇을 말이다. 열매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에 분해 가문의 상징 중 하나인 흰매를 상징에서 아예 말소시켜 버릴 정도의 그다. 그런 그라면 분명 열매의 주인이 될 자신에게 하가의 모든 것을 전승해 주지 않을 테다.
바깥에서 자라던 자신도 그의 필요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이쪽으로 삶을 옮겼다. 물론 이쪽 생활이 지나치게 꼭 맞다 보니 불만은 없었지만, 그 강제 행동은 가주의 행동 방식을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주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믿는 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그릇의 크기를 충분히 증명해 주었다.
가주가 홍에게 모든 걸 가르쳐 주지 않은 것처럼 홍 역시 가주에게 모든 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예를 들면, 마력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마법을 튕기거나 무효화시킬 수 있는 특징이 알 상태의 열매껍질에 있다거나, 그리고 그러한 특징은 실험이 성공만 한다면 실험체에게 고스란히 이식된다거나 하는 일이다.
만일 성공만 한다면 그 실험체는 하가 내의 권력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그런 존재를 눈 뜨고 아비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물론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기에 이 실험에서 몇 명의 아이가 죽을지는 몰랐으나, 그건 실험을 이어 나가는 데에 있어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마력이 없는 아이는 바깥에서 구하면 되었다. 아무리 바깥에서 나고 자랐던 하홍일지라도 그는 태생적으로 마법사였고 그렇기에 그들의 사상을 정확히 공유했다.
마력이 없는 아이들을 바깥에서 심부름꾼 명목으로 끌어들이고 있긴 하나 아직도 진전이 없다. 실험이 성공할 확률은 마법진에 부은 마력과 실험체의 조건에 따라 높아진다.
계획을 만족해하는 가주를 보니 오십 명분의 마력은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 거고. 충분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진 아이들을 점찍어서 자신의 편으로 회유해야만 한다. 성공한 실험체는 마법으로도 정신 조종을 못 하니, 진심으로 자신에게 감복할 만한 인물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하홍은 성공체 후보로 안도언이란 아이를 점찍었다.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데.’
저번에는 무작정 좋은 조건을 들이밀며 호위라는 명분을 내밀어 보았다. 명령은 반감이 쌓일 수 있으니 절대 금물이다. 꼭 자신의 의지대로 호위직을 맡아야만 한다. 다른 심부름꾼 아이들이 침을 질질 흘릴 만한 조건을 여러모로 나열했으나 목석같은 녀석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거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그 녀석이 유일하게 목매는 것이 자신의 동생과 하녹이라고 했던가. 접근 방법만 달리하면 그를 제 옆으로 데려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테다.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상, 자신이 그의 은인이 된다면 빠르게 충성을 맹세하겠지. 하홍은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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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 곧바로 계략을 이행했다.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의 정신을 건드린 후, 그중 한 명에게 도언과 하진에게 심부름을 전하라 명령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오누이가 인질이 될 녹과 함께 있을 때를 노렸다.
마법사에게서 명령을 하달받은 하진은 별 의심 없이 몸을 일으켜 떠났으나 항상 주변을 경계하는 도언은 제 동생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다.
명령을 전달한 마법사의 눈빛이 미묘하게 불쾌하단 느낌에, 동생을 먼저 보낸 도언은 무언가를 놓고 왔다는 핑계로 다시 냇가로 돌아갔다. 별일 아닐 수도 있고, 얼른 오라는 심부름을 둘 모두가 무시할 수는 없으니 저가 심부름에 늦더라도 홀로 돌아가 확인하기로 결정한 거다. 그리고 거기에서 녹이 납치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
순식간에 사라진 둘의 모습에 도언은 머리가 멍해졌다. 녹을 데리고 간 자는 같은 심부름꾼도 아닌 마법사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장소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마법을 가진 자를 자신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녹을 데려간 마법사가 녹에게 합당한 볼일이 있었다면 말을 하고서 데리고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녹의 뒤에서 덮치듯 사라졌다. 기겁한 녹을 똑똑히 보았다. 분명 합의되지 않은 이동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리 몰래 데리고 갔다면 홍화 저로 가라는 심부름 또한 그 마법사가 지어낸 거짓말일 가능성 역시 컸다. 어떻게든 행동해야 했지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도언의 귓가에 들리는 홍을 향한 아이들의 인사 소리는 구원의 종소리였다.
도언은 아이들의 인사 소리를 향해 숨 가쁘게 뛰었다. 다행히 하홍은 이 근처에 있었다. 그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까? 그런 고민은 나중 일이다. 도언은 홍의 앞에 달려 나가 그의 길을 가로막으며 경황없이 말했다.
“소가주님. 사람-, 사람 하나만 구해 주십시오.”
“사람이라니?”
“이곳의 마법사가 사람 한 명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가 누구고, 어디로 갔는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어허. 이곳에서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간 큰 자가 어디에 있겠느냐. 별일 아닐 테니 진정 좀 하거라.”
도언에게 호감을 밝혔던 홍이었으나, 그의 부탁을 쉬이 들어주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급한 도언은 그저 외쳤다.
“호위든 뭐든 전부 할 테니까요! 하녹부터 구해 주십시오!”
홍은 계획대로 된 상황에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도언은 그렇게 그의 하나밖에 없는 호위가 되었다.
이후 도언은 홍과 붙어 있는 시간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명목뿐인 호위라 하더라도 호위이긴 호위였기 때문이다. 옆에 없으면 어색할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던 쌍둥이 오라비가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사라져 버리니, 하진은 이를 굉장히 마땅치 않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홍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 걔가 호위가 뭐가 필요하다고 널 데려가?”
“안하진. 말조심.”
“아, 왜! 어차피 여기는 우리밖에 없잖아!”
공사가 다망한 하홍이라도 밤만 되면 도언을 돌려보냈고, 자기 전 그 짧은 시간만이 오누이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때였다. 혹시 모를 눈과 귀를 차단하기 위해서 오누이는 평범한 자라면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높은 나무 위에서 만났다. 하진은 뭘 이렇게까지 하냐며 툴툴댔지만 하진의 말버릇을 보니 그 선택은 정답이었다.
뛰어난 신체 조건과 운동 신경을 가진 그들에게 그곳은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진은 그 짧은 만남의 시간마다 도언을 만나러 가서 하홍을 불평했다. 도언 역시 하진의 말에 말없이 동의했지만, 대놓고 입 밖에 꺼내 동생을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령과 너가 안전하니 되었어. 적어도 내가 하홍에게 붙어 있는 이래로는 쓸데없는 시비가 붙지는 않잖아. 만약 소가주가 나서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다면 또 어떤 시비에 휩쓸릴지 모를 일이야. 적어도 도령만큼은 말이지.”
“그건 그렇지만… 너 진짜 걔한테 뇌물 같은 거라도 줬어? 걔가 공기 취급 하던 도령한테 형님, 형님 거리면서 붙어 올 때마다 나는 너무 소름 끼쳐. 거기에다가 거의 너를 독점하다시피 하잖아! 전에 도도까지 달라고 했을 때 나는 혈압 올라서 쓰러질 뻔했다니까? 분명 너가 만들었다는 소리 듣자마자 그랬을 거야. 내 말이 틀려?”
“…….”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에 도언은 입을 닫았다. 하진이 말한 것처럼 왜인지 모르게 홍은 자신에게 관심이 지대했다. 확실히 수상할 일이었다. 자신의 주변 인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그 모습 역시 도언은 호감이 아닌 의심으로 작용했다. 이에 도언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말머리를 돌리는 걸 택했다.
“…어쨌건, 도령이나 너한테는 별일 없는 거 확실하지?”
“그럼! 도령이 무술을 배워 호신하는 것보다 우리가 열심히 지켜 주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은 거 빼면 별 문제없어.”
“너란 애는 적당히가 없어서 걱정이야. 저번에 소가주 따라 너희 훈련 봤을 때는 도령도 곧잘 하던걸.”
“너는 그게 ‘곧잘’ 하는 거로 보여?”
하진이 곧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끊어 말했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교육에 대한 투지로 불타올랐다. 내일 역시 하녹에게 무술을 가르쳐 줄 날이라고 했었던가. 며칠 전, 스치듯 멀리서 봤던 하녹은 녹초가 되어 목검을 지팡이 대신 짚으며 노인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고 있었다. 그를 그리 만든 범인이 누구라는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오는 답이었다.
“그래서, 그놈의 호위라는 건 언제까지 할 작정인데?”
“글쎄.”
기약 없는 언약은 할 수 없었기에 도언은 또다시 두루뭉술한 화법을 택했다. 그 대답에 속 터진 하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도언은 나무에서 뛰어내리고는 소리쳤다.
“밤이 늦었다. 잘 자.”
안도언- 너!! 소리를 치려던 하진은 한밤중임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도언은 하진이 쫓아오기 전에 달려 나가며 회상했다.
‘네가 내 호위를 맡을 동안에는 적어도 여기서 네 주변인에 대한 안전은 책임져 주마.’
하홍이 하는 말들은 어딘가 꺼림칙했으나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호위는 녹을 구하기 위해 내건 조건이었다. 거기서 또 호위의 조건으로 무언가를 주겠다는 걸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홍의 내건 조건은 도언이 바라 마지않는 것이기도 했다.
심부름을 나갔던 아이들 중 몇몇은 바깥에서 좋은 인연을 만났다며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몇몇의 아이들은 인사도 없이 독립하기도 했다.
남겨진 아이들은 작별 없이 떠난 그들에게 섭섭한 감정만 들었지 그 사실 자체를 의심치 않았다. 믿을 만한 하가에서 알려 준 사실이기 때문이다. 떠돌던 자신들에게 집도 주고 밥도 주고 교육의 기회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는 하가인데, 설마 애들 가지고 뭘 하겠어? 하가에 다시 올 정신이 없을 정도로 정말 좋은 인연이라도 만났나 보지.
그러나 도언은 마법사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쉽게 마법을 부리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니. 언제 무엇이 터져도 이상할 리 없었다. 아이들이 인사 없이 사라진 이유가 독립이 아닌, 마법사들로 인한 실종이라면? 실제로 녹이 화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제대로 알 수 없다면 한시라도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자신의 불안이 그저 노파심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언은 하가에서 삶을 이어 나갈수록 목숨을 건 줄타기를 한다는 꺼림칙한 감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하가는 알 수 없고 위험한 시한폭탄과 같다는 사실을 인지한 오빠와 다르게, 이곳에서 평화만을 느낀 동생은 하가에 가진 이미지가 정반대였다. 하진에게는 하녹 납치 사건이 가장 크고, 또 유일한 사건 축에 속했다.
적어도 동생이 심적으로 편안히 이곳에 있길 바라는 도언은 동생에게 그런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다. 하진은 자신들을 거두어 준 하가를 좋아했고, 앞서 말했듯 도언의 꺼림칙한 추측이 기우일 가능성 역시 컸다. 얼른 자라 하가에서 독립하면 자연히 사라질 찝찝함이었다.
그리고 며칠간 하진의 말을 들어 보니 제 주변인을 지켜 준다는 하홍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녹을 괴롭히는 심부름꾼 아이들까지 하녹을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이곳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면 되었다.
하진이야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가만두지 않을 테고, 게다가 하홍의 눈치에 마법사들이 위험한 심부름은 시키지 않겠지. 그 말은 곧, 하진이 다른 아이들처럼 순식간에 증발할 일은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하홍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감이 잘 잡히지 않으니 나이가 찰 때까지 충분히 몸을 사렸다가 독립하는 게 도언의 계획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경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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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내 연구실이다. 어때, 재밌는 게 많지 않으냐?”
“그렇군요.”
“저기는 정령의 요람이라 불리는 호수가 있지. 언젠가 한번 같이 가 보자. 어때, 좋지?”
“그렇습니다.”
“이것도 밍숭맹숭, 저것도 맹맹. 어찌 된 게 관심 있는 게 하나 없어 보이는구나.”
홍은 도언에게 마법사라도 신기해할 만한 하가의 이곳저곳을 소개했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신묘한 것들과 멀어져 평화롭게 사는 게 도언의 관심의 전부였다. 이에 도언은 그저 호위라는 명목에 맞게 주변만 경계하며 무료한 시간을 죽였다. 얼마나 지루한지, 때때로 사건이나 하나 일어나면 차라리 낫겠단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 누가 하가의 소가주를 하가 내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인가. 평화롭고 심심한 시간이 이어졌다. 언젠가는 홍이 열의 넘치게 검을 배워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혹시 검을 사사받고 싶어서 호위 명목으로 데리고 다니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검술을 시범 보일 때면 하홍의 눈은 언제나 검 끝이 아닌 자신을 바라봤다. 마치 쓸 만한 무기인지 아닌지 감정하는 눈으로. 이를 눈치챈 도언 역시 하홍에게 신뢰 한 조각 내어 주지 않았다.
“오늘은 나와 갈 곳이 있다.”
어느 날 아침. 하홍은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기색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홍은 들리지 않는 대꾸에 물끄러미 도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어딘지 궁금하지 않으냐? 어찌 반응이 없어.”
“그것이 어디든 따를 뿐입니다.”
도언에게서 나오는 대답에 홍이 흡족한 듯 안색을 풀었다. 절제된 대답은 단단했으나 충심이라기엔 온기가 없었다. 그러나 홍은 그 대답을 충심의 일환이라 생각했다. 붙어서 잘해 준 결과가 이렇게 나오는구나. 단단히 착각한 홍이 너그럽게 말했다.
“오늘은 내 오두막 뒤편으로 가 볼 거야. 세계수를 보여 주마.”
간간이 데려가곤 했던 홍의 별채 안을 말하는 건가. 도언은 건물 안에 펼쳐진 숲을 회상했다. 아무래도 그 희한했던 숲이 세계수로 가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홍은 도언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도언은 감흥 없이 고개만을 끄떡이며 그 기대를 박살냈다. 지극히 심심한 반응이었다.
“하가의 마법사들도 보기 힘든 세계수를 보여 준다는데, 영 흥미가 없어 보이는구나.”
홍의 말대로, 도언은 모두가 경애해 마지않는 세계수에 대한 동경이 바닥이었다. 그저 자신이 쓸 수 있는 무예, 그리고 하진과 하녹만이 제 세계의 일부였다. 하홍이 회유하기 까다롭기 그지없는 인재였다.
“뭐, 되었다. 형님은 잘 계시냐?”
하홍이 녹의 안부를 물어 왔다. 세계수에 대한 말을 할 때 세상 무심하던 도언의 눈빛에 파도가 쳤다. 몸은 경거망동하지 않았으나 눈빛은 망둥이가 따로 없었다.
“소가주님 덕분에….”
“됐다. 알기도 쉽구나. 하여간 일단 가자. 세계수 근처에 누군가 오면 귀찮아진다. 아무도 없는 오늘이 적기야.”
홍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앞서 걸었다. 하홍의 이동 마법진 덕분에 세계수 근처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마법진을 넘자마자 쏟아지는 어둠에 홍은 작은 불빛을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도언은 그제야 웬 나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꺾어도 나무는 끝을 보여 주지 않았다. 위용을 뽐내는 이것이 필시 그 대단한 세계수이리라.
“이쪽이다.”
홍은 바닥에 큼직하게 그려진 그림 앞으로 도언을 이끌었다. 복잡한 수식이 얽혀 있는 마법진은, 몇 개월간 홍을 따라다녔던 도언 역시 처음 보는 크기였다. 세계수와 맞닿은 붉은 마법진 위에는 웬 매끈하고 커다란 열매 하나가 나무에 열려 있었다. 꼭 알처럼 생긴 생김새였다.
“간단한 확인 한번 해 볼까. 이 진에 손을 대보거라.”
마법진이 그려진 바닥에 손바닥을 대니, 홍이 지팡이를 들어 마법진을 몇 번 툭툭 쳤다. 그러자 도언이 손을 댄 곳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푸르게 염색되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하홍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역시 너는….”
“적합자로군!”
아무도 없었던 숲 한구석에서 기쁨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홍과 같은 환희를 얼굴에 담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가의 가주였다.
드물게 당황한 낯빛의 홍이 도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겨 그를 제 뒤로 감추었다. 도언의 손이 마법진에서 떨어지자 마법진은 금방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아버지께서 어찌…. 지금이라면 회의에 들어가셔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꿈자리가 좋아서 말이다. 해석이나 제대로 해 보려고 열매 근처에 터를 잡았지. 확실히 꿈이 잘 맞기는 해. 이런 장면도 보고 말이다. 그 아이를 왜 그리 끼고 다니는가 했더니. 아주 깜찍하게도 숨겼구나.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이쪽이 아닌 다른 쪽에게 공을 들였지 뭐냐.”
“아버지께서 무엇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적합자라니요?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홍이 맹랑하게 시치미를 떼자 가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버지겠죠.”
고오오. 바람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도언은 그들이 말하는 적합자가 자신임을 알았다. 그놈의 적합자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홍이 쓸모도 없는 호위를 제게 맡긴 이유이리라.
“내 참. 어쩐지. 네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더구나. 물론 네가 발견한 다른 적합자가 있을지 확인을 해야겠지만. 얼른 장로들 소집해서 내일 바로 실험을 시작하는 게 좋겠어. 분명 저 아이 다음으로 네가 관심을 가지는 아이가 하녹….”
“알 수 없는 소리 그만하시죠. 저희는 바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홍이 가주의 말을 자르고는 등을 돌렸다. 아무리 홍이라지만 가주의 앞에서 저리 독단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배짱이 대단했다.
“…그래. 바쁜 거 마무리하고 내일 홍화 저로 오거라.”
아들의 반항에 타격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가주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도언을 응시했다. 그는 도언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역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홍은 고개를 한번 끄떡이고는 지팡이를 휘둘러 도언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왔다. 가주의 질긴 시선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도언에게 붙어 있었다. 그 진득한 시선을 가까스로 떼어 내고 홍과 함께 바깥을 향해 떠났다
적합자니, 실험체니, 무엇보다 하녹이라는 이름을 들어 버렸다. 마법사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었는데, 하필이면 가주의 입에 그 이름이 담겼다. 초조해진 도언은 홍에게 드물게 질문을 했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적합자가 대체 무엇입니까?”
“아하. 아버지께서 너를 불안하게 만들었구나.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그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거지. 잠깐 마법이나 구경시켜 주려고 했던 건데, 단단히 오해하셨구나. 내일 내가 아버지께 설명하면 될 일이다. 아, 내일 너는 나를 따라올 필요 없다. 저잣거리에 가서 내가 일러 주는 거나 사 와라.”
홍은 그리 말했지만 신경을 쓸 일이 있고 안 쓸 일이 있었다. 가주는 실험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고, 그 단어의 어감은 확실히 좋은 울림이 아니었다. 말도 없이 독립했다며 사라지는 심부름꾼 아이들과 이를 연관 짓는 건 확실히 군걱정이 아니었다.
가주의 등장에 허둥대던 홍은 숲을 빠져나가자 여유를 되찾았다. 도언 역시 홍의 대답에 이견이 없는 듯 유순히 굴었다. 그의 태도에 홍이 안심한 건 당연지사다. 아무도 없을 때 실험에 대한 도언의 적합성을 슬쩍 확인만 하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가주가 있었다니.
그러나 내일 가주에게 말을 잘하면 될 일이었다. 가주를 말로써 회유하고 속여 넘기는 건 자신 있었다. 도언은 자신만이 아는 성공체여만 했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고개를 가볍게 숙인 도언은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몸을 움직였다. 홍은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그걸 어떻게 믿나. 기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가주는 바로 내일 예의 그 실험을 시작할 거라 했다. 그게 무엇인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가능한 빨리 겉모습만 낙원인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독립하고 싶다고 해도 나가게 해 주긴 할까? 어찌해야 탈 없이 셋이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도언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가능한 빠르게, 하지만 성급하지 않게 진행해야 했다. 정보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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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 문외한인 도언이었지만 홍을 따라다니니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자연히 늘어났다. 무엇보다 자주 가던 홍의 오두막에는 그가 정리하고 발명한 수식이 한가득이다.
지루하게 홍의 근처에 서 있던 도언에게, 하홍은 부탁도 안 한 마법 지식을 가득 설명하며 그에게 주입했다. 그때마다 도언은 원치 않는 지식이 뇌 속에 욱여넣어지는 느낌에 괴로워했다.
차라리 가만히 놔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지만 그를 곧이곧대로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당시에는 눈을 부릅뜨고 있느라 고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졸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의 맞춤 수업 덕분에 마법에 대한 까막눈에서는 탈출했으니까.
홍이 없을 시기를 틈타 도언은 홍의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홍의 별채로 향하는 그를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은 건 행운이다. 계속 홍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호위한 보람이 있었다.
도언은 별채 안에 있는 홍의 오두막에 들어가 그가 원치 않는 수업에서 외우지 못한 정리를 통째로 베끼기 시작했다. 분명 가주가 언급한 실험에 홍의 힘이 보태졌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한 톨의 정보라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정령, 개발한 마법, 마생물, 심지어 열매에 대한 연구까지. 독자적인 연구에 대한 홍의 정리는 교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중 눈에 익숙한 마법진의 정보를 발견했다. 방금 봤던 세계수 앞 마법진과 형태가 같았다. 역시 하홍이 그 실험에 가담하긴 한 모양이다. 도언은 그 정보를 특히나 꼼꼼하게 적어 내렸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자신들이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하가에 적을 두지 않는 자의 힘이 필요했다. 정신없이 옮겨 적던 도언은 특별히 진하게 눌러 쓴 한 뱀의 그림을 발견했다.
윗선 : 본인을 정령들의 윗선이라고 지칭하는 거로 보아 상급 정령일 가능성이 높음. 흰 비늘에 붉은 눈. 기적을 자유자재로 사용함. 마법사에게 비호의적인 태도로 일관. 하녹에게 호의적인 건지 마법사가 아닌 자에게 호의적인 건지 아직 알 수 없음. 힘의 깊이를 측정할 수 없음. *인간을 해칠 능력이 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