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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실 (18/24)

16. 진실

- 다 된 것이냐?

사한의 물음에 녹이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을 포함해 마법과 관련된 기억을 지움과 동시에 도언이 곧 나고 자랄 집안에 대한 기억까지 조작하여 넣어 두었다. 이제 도언은 사고로 가족을 잃은 자신이 그 집안에 입양되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기억할 거다.

도언의 기억을 지운 녹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억이 조작된 도언은 가볍게 눈을 감고 있었다.

- 내 참. 확실히 마법사가 아닌 자들이 그와 관련된 세계를 감당하려면 힘들긴 하다만, 도언은 기꺼이 너를 위해 감수할 거다. 너도 알지 않느냐.

“그렇기에 이런 선택을 내린 겁니다.”

- 네가 이 녀석의 안전을 위해 이런 결정을 한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 미숙한 너의 마법이 안정된다면, 그때는 아이를 찾아와도 좋지 않느뇨? 네가 조작한 기억이야 거두면 될 일이니.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와 엮인 인간들은 모두 불행해집니다. 도언의 행복을 원한다면 그런 말씀 마세요.”

- 그건 너무 비약 아닌가. 모두 불행해진다니.

“모르시는 소리입니다.”

자신이 씨앗이라는 사실을 마법사들은 모를 거라 여겼던 녹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을 세상에서 지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목격자의 기억 역시 남기지 않았기에 후환 역시 없다 여겼다.

가끔 녹이 마법을 쓰는 장면을 목격한 마법사들은 백이면 백, 녹의 마력을 빼앗기 위해 공격해 왔다. 물론 그들은 상대를 얕본 죄로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스러졌다. 차라리 이리도 대놓고 공격하는 편이 녹은 편했다.

언제나 녹의 위에서 녹의 일신을 좌지우지했던 마법사가 제 손짓 하나에 빠르게 녹아내린다. 거기에 희열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녹은, 어쩌면 이 힘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다. 그러나 어찌 안 건지, 녹이 씨앗임을 알아챈 마법사들이 녹만을 목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놓고 공격하는 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자신의 활약으로 근처 마법사들의 씨가 마르고 있는 건가 착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공격하는 건 승산이 없단 걸 안 그들이 녹을 다른 방법으로 어찌 처리할지 논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에게 인사를 건네주신 할아버지가 마법사들의 인질로 잡혔어요. 다행히 그 할아버지는 무사히 구출해 냈습니다만…. 몇몇 마법사들은 인질을 제게 내보일 인내심이라도 있지만, 뇌가 없는 녀석들은 제 행로마다 박살을 내고 다닙니다. 저번에 갔던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어 있었어요. 그곳에는 이미 제가 없는데도요.”

저번에 갔던 마을에 큰 마력이 느껴져 급히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북적이던 인파에 활발했던 마을은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모두 새까맣게 타 버렸다. 바닥엔 시체가 나뒹굴고 하늘은 마을이 전소하며 나온 연기로 허옇게 떴다.

이미 죽음의 땅이 되어 버린 그곳에서 멀쩡한 생명은 그곳을 그리 만든 장본인 넷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타난 녹을 보고 흥분해서 떠들었다.

“봐 봐! 이렇게 하면 올 거라고 했잖아! 분명 쟤가 그 소문의 녀석이 맞다니까?”

“와. 진짜였네. 괜히 마력 낭비만 한 줄 알았는데.”

“쟤를 죽이면 진짜 세계수가 우리 것이 되는 거 맞지?”

“제대로 죽여 보면 알겠지으아아아악!!!”

그 말이 그들의 유언이었다. 마법사를 처리하는 데 이골이 난 녹은, 손짓 한 번으로 그들을 이 세상에서 희생자와 똑같이 태웠다. 마법사 넷은 불에 타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꼬다 식신으로 사라졌다. 참으로 금방 거두어지는 목숨이었다. 식신 역시 태운 녹이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 하찮은 것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을 몽땅 죽음으로 바꿔 놓았다.

녹이 자세를 낮춰 수북하게 쌓인 재를 한 줌 쥐었다. 이 마을은 살짝 스쳐 지나갈 정도로 가볍게 왔다 갔던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마법사를 죽인 적도 없었다.

거리에 누워 있는 죽은 아이의 손에는 짚으로 만든 허름한 인형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이 한 명이 찢긴 인형을 들고 목 터져라 울길래 마법으로 몰래 고쳐 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울음을 그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인형을 보는 그 모습 역시 남아 있었다.

마법사들은 즐거움이 깃든 녹의 기억을 손쉽게 미끼로 썼다.

차라리 인질을 잡는 편이 나았다. 살아 있을 때 구출하면 될 일이니까. 설마하니 자신을 부른다고 저와 얕은 인연의 마을 하나를 온통 날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마법사를 과소평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바닥의 재를 꽉 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에 지워진 이들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이런 마법사들일진대, 도언의 정체를 발견하면 어떻게 나올까. 아찔한 미래가 녹을 잠식했다. 어떻게든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감이 분명하다. 아무리 철저히 방비해도 마법사들은 이리 허를 찔러 온다. 마법사들은 상상 이상으로 인간을 하찮게 보았다.

마법사들의 힘에 대한 집착. 씨앗인 자신. 그를 종합했을 때 이는 예정된 참사였다. 마을에 있는 이들이 운이 나빠 이런 결말을 맞은 게 아니었다. 그저 그들에게 들키지 않은 도언이 운이 좋을 뿐이었다.

지금은 사한이 기적으로 돌보며 그들에게 도언을 감추고 있었지만 과연 평생토록 실수 한 점 없을까? 단 한번의 실수는 목숨의 존속과 직결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언을 지키러 그들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신이 도언의 곁에 있다면 도언은 목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거다.

어둠과 재, 그리고 죽음이 만연한 그 공간에서 널브러진 시체들을 태우며, 녹은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았다. 자신의 운명 역시 똑똑히 자각했다.

자신은 소중한 걸 만들면 안 되었다.

“몇 날 밤을 고민해 봐도 이게 최선이에요. 만일 제가 이 힘을 내려놓는 날이 찾아온다면 도언을 다시 찾겠으나, 과연 살아 있는 한 그런 날이 올까요. 감당 못 할 힘은 짐일 뿐이고, 제 짐은 제 몫이에요. 도언이에게 함께 들자 할 수 없어요. 절대 안 돼요. 절대요.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는걸요.”

이별은 단호하고 짧아야만 했다. 그래야 미련이 생기지 않기 마련이다. 도언이 자신과 함께 살면 더없이 좋겠으나 지금은 이상일 따름이었다. 그를 구분할 정신은 아직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한 점의 이성 역시 증발하겠지. 자신의 집착은 곧 대상의 파국이었다. 헤어질 정신이 남아 있을 때 떠나는 편이 누구에게든 나았다.

“저보다 더 저를 잘 돌보는 아이입니다. 자신을 돌볼 기력까지 제게 주고 있어요. 형이나 되어서 동생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지요. 이제 도언의 삶에서 걸림돌인 저는 퇴장해야 합니다.”

- 이미 너를 이 아이의 짐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차라리 짐이면 낫지요. 그 어떤 짐이 저를 이고 가는 자를 깔아뭉개 죽인답니까.”

녹의 무덤덤함은 제 고통을 숨기고자 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사한이 아무리 설득해도 녹은 제 결심을 바꿀 생각을 않는다. 심지어 녹 자신마저 자신의 슬픔을 속여 넘긴다.

- 그래. 네 결정이 그렇다면 존중하마. 하지만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와라. 나는 어떤 상황이 와도 도언을 마법사로부터 숨길 수 있으니까. 네가 와도 거뜬할 터, 자만이 아니다.

그들을 다시 찾을 리 없다는 듯, 녹이 쓸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에선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란 다짐이 깃들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리 굳건해도 녹은 도언에게 돌아올 거다. 사한은 그리 예상했다.

그동안 도언에게 보여 온 녹의 집착은 귀소 본능과 같았다. 아무리 도언의 기억을 조작해 보았자 눈속임일 뿐. 언제든 기억 속 진실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간의 성취를 보면 녹이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아무래도 제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어 저리 불안해하는 걸 테다. 자신이 뭐라고 해도 말을 들어 먹지 않을 테니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편이 모두에게 좋았다. 사실 녹의 분리 불안 치료를 위해 도언과 녹이 좀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녹의 다짐은 다시 없을 만큼 진지했지만 사한은 그를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금 떠나도 다시 도언의 곁으로 돌아오겠지. 어린아이의 치기 정도로만 생각한 사한이다. 도언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매만지던 녹은, 이제야 결심이 섰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디 도언을 잘 부탁드립니다.”

녹은, 제 시간과 신체 일부를 떼어다 맡기는 심정으로 경건히 절을 했다. 그것이 지금껏 살아온 녹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누이를 제외한 사람에게 내보이는 진심이었다. 절을 마친 녹은, 한 번 더 도언을 제 눈에 담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사한은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다. 미치기 전에 돌아올 줄 알았던 녹이 도언을 찾아오기 전에 제 기억 자체를 봉인할 줄은. 그리고 하필 기억 조작을 포함해 마법 전반이 도언에게 듣지 않을 줄은. 이에 도언이 녹을 찾기 위해 세상을 쥐 잡듯 뒤질 줄은.

예상했더라면 떠나는 녹을 그리 쉽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 ❊ ❊

“미칠 것 같아서 그랬어. 너를 잊지 않으면 내가 미쳐 버릴 것 같아서.”

하진의 죽음과 하가의 소멸은 녹에게 큰 사건이었다. 하가에서만 살아온 녹에게 하진과 도언은 제 세상의 전부였다. 하진을 잃고 도언과 분리 불안에 걸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였다.

“무의식적으로 네 근처로 향하고 마법사로부터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랬어. 네 근처로 다가가지 않으려고. 헤어질 당시에는 너를 위해 참을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저 내 치기였더라.”

감당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저 오만이었다. 그렇기에 도언의 기억만을 조작하고 본인의 기억은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도언에 대한 기억은 물리적인 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꾸만 도언이 있는 곳으로 당겨졌다.

호시탐탐 녹을 노리는 마법사들 역시 그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들이 녹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도언을 찾아낸다면 지금까지 일들이 모두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내게서 너를 지워 버렸어. 네 기억은 내가 지운 줄 알았으니까 나만 정리하면 될 줄 알았거든. 너를 여기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

“…어째서 함께 헤쳐 나가려고 하지 않은 겁니까. 대체 왜 혼자서만 모든 걸 짊어지고 가려 했어요. 제가 그걸 바랄 줄 아셨습니까.”

“당연히 네가 바라지 않을 걸 알았지. 그래서 몰래 기억을 조작했던 거고…. 그냥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내 짐은 오로지 내가 지면 되니….”

“당신은 대체….”

“안도언!! 그만 꾸물거리고 당장 들어오지 못해?”

도언이 잡고 있던 문이 안쪽으로 열리며 쩌렁쩌렁한 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이네스였다.

“한날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본인만 느긋하지, 그냥? 무슨 마음의 준비를 그리 오래 하길래 문 앞에서 허송세월… 민수 씨?”

문을 열자마자 도언을 직시하며 따박따박 잔소리하던 이네스가 녹을 발견하고서 잔소리 폭격을 멈추었다. 이네스는 혼이 나간 듯 녹을 응시하다 한쪽 눈썹을 올리며 의구심을 표했다.

“분명 가주님이 바깥으로 대피시킨다 했는데…. 민수 씨가 여기는 왜….”

이네스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말을 멈추었다. 녹에게 느껴지는 미묘한 마력. 저 정도의 극소한 흔적이라면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네스는 마력 통찰에 뛰어난 마생물이다. 도언이 마법을 썼을 리가 없으니 저 마력은 분명 민수 씨가 사용한 게 틀림없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문 너머의 도언은 눈썹과 입술 모두 일자로 만들며 표정을 굳혔다. 저거저거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하는 표정인데…. 그에 비해 민수 씨는 축 처져 있는 것이 의기소침해 보였다. 분명 인간이었던 민수 씨가 마법을 사용한 흔적을 달고서 울상을 짓고는 화가 난 도언에게 붙잡혀 왔다. 그렇다면….

“어째서 민수 씨가 마법을…. 혹시 정말로 바깥 마법사들의 스파이였던 건….”

“아니. 그건 주원.”

“뭐??”

“너가 신뢰해 마지않던 주원이었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한 번 더 말해 줘?”

“주원이라고?”

“잘 들었네.”

도언은 문 앞에서 벙찐 이네스를 치워 내고 녹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진 곳은 긴급회의가 이루어졌던 나무 위 통나무집이 아닌 웬 회의실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널따란 회의실에는 이네스 혼자밖에 없었다. 회의실 테이블에는 여러 가지 서류들이 지저분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네스의 연구실을 빼다 박은 모양새였다.

안쪽으로 들어온 도언이 들어온 뒷문을 닫으며 녹의 손을 놓아 주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뒷목을 잡는 이네스를 보니 녹의 마음이 전보다 불안해졌다. 혼란한 이네스는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걔는 길을 잃은 자일 텐데…. 안가를 배신하면 곧장 이곳으로 소환되는 식을 몸에 심고 있다고! 몇 날 며칠을 새워서 만든 마법식인데, 그걸 어떻게 피해 가?”

도언은 책상 위에 난잡하게 늘어진 서류 중 하나를 들어 올려 내용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 독특한 마법식은 내가 하가에서 가지고 온 정보를 뼈대로 개발했었지.”

“그래! 그래서 그 식의 허점은 너랑 나, 그리고 청연밖에 모르잖아.”

이 상황에서 도언이 무얼 보는지 몹시 궁금해하는 녹에게, 도언은 자신이 보던 서류를 녹에게 내밀었다. 딱 봐도 나이 꽤나 먹은 종이에 쓰인 건 사람에게 마법식을 새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마법식의 정보였다. 이네스가 앞서 얘기한 마법식은 확실히 이를 뼈대로 만든 모양이다.

설명에는 따로국밥인 마법사들을 뭉쳐 하가 제국을 더욱 공고히 만들 계획으로 만들어진 식이라 적혀 있었다.

딱 봐도 현실에 안주하고 고여 가는 하가에서 나오기 힘든 식이었다. 그러나 이를 개발한 자가 괴짜라 소문난 그라면…. 종이에 써진 익숙한 필체를 보고, 녹은 이 식을 개발한 이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아챘다. 이 마법을 개발한 건 분명…. 도언은 말을 이었다.

“그럼, 네가 만든 마법식의 뼈대를 개발한 자가 주원이라면?”

“…주원이 하홍이라는 소리야?”

이네스는 정확히 캐치했다.

“너는 알고 있었어?”

“잠입한 사람이 마법협회장이라는 것만. 정확히 누구로 변장해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주위엔 수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까.”

“누군가 잠입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단 거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하고 있었어! 내가 알았더라면 진예 데려오라고 아무한테나 안 맡겼지! 잠깐, 그럼 진예는 지금 어딨어?”

갈수록 이네스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입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도언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이네스의 동공이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완벽한 칼눈으로 변했다. 이네스의 흥분에 흘러나온 마력은 지진이라도 난 듯 회의실의 땅을 흔들었다.

“하홍이 진예에게 공유의 저주를 내렸다. 하홍에게 났던 생채기가 같은 위치에 진예에게 났어. 저주의 표식인 손등 문양까지 완벽하더군.”

“상처에 표식까지 완벽했다고??”

이네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며 말했다.

“그 녀석… 정말이지….”

도언은 주머니에서 마석을 하나 꺼낸 후, 그를 쥔 주먹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자 한쪽에 넓게 펼쳐진 하얀 벽면은 스크린이 되어 웬 장면을 띄워 냈다. 떠오른 장면은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중심부였다. 장면을 찍는 자가 제자리를 뱅 돌았는지, 화면은 그곳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끝없이 이어진 인파가 비쳤다.

외국인도, 노인도, 아이도 섞여 있다. 각양각색인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녔다. 각자의 지팡이를 꼭 쥐고 있다는 점. 그들은 모두 마법사였다. 마법사가 이리 모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별안간 인파 가운데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우글거렸던 마법사들이 홍해의 기적처럼 갈라져 길을 터 주었다. 나타난 두 사람은 진예와 하홍이었다.

진예는 볼에 생채기 하나 난 것 빼면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겁이 나는지 미약하게 몸이 떨렸다. 육체의 상태를 공유하는 저주의 술이 두 사람의 손등에 선명히 빛났다. 완벽하게 적진의 상황이 투영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상은 실시간인 모양이다. 이네스는 할아버지로 변한 하홍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쟤가 하홍이라고? 아니, 주원? 미친 거 아니야?”

“…보다시피 진예는 안전해. 위치도 알았군. 어쨌든, 네가 그를 진심으로 믿은 덕분에 그가 하홍이란 본모습을 드러낸 거지. 네가 알았더라면 하홍은 제 진짜 정체를 밝히긴커녕 우리의 경계를 알아채고 물밑 작업을 철저하게 했을 거다. 마법사들 앞에서 저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드물었겠지.”

도언의 말에 진정이 되는지, 이네스는 마력을 급속도로 갈무리하며 웅얼거렸다.

“주원을 믿은 게 아니라 내 마법식을 믿은 거거든?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하간 일주일 후면 모든 게 끝나 있겠군. 우리가 마법사들에게 먹히든지, 아니면 마법사란 존재 자체가 사라지든지.”

도언이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 둘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는 비장했다. 녹은, 그들의 대화에 의문이 들어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휙 하고 돌아가는 두 명의 머리가 다소 공격적이었다. 대화에 빠져 불타는 이네스와 차갑게 식은 도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어…. 진예를 구하면 마법사란 존재 자체가 사라지나요…?”

침묵의 이네스는 불시에 마법사가 된 청년을 못 미덥게 보다가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 한번 이자의 존재를 자신에게 설명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러나 도언은 이네스보다 녹의 질문을 우선으로 답해 주었다.

“웬만해서 당신 모르게 진행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네요. 마법사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로 모인 안가는 마법사 자체를 멸절시키는 게 오랜 숙원이었어요. 일주일 안에 결전의 날이 다가올 겁니다. 진예와 육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자신의 가장 큰 방패라는 걸 하홍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주가 유효한 이상 저희가 섣불리 그를 공격할 수 없다 생각하겠죠.”

도언은 테이블 위의 서류를 헤집다가 찾은 하나의 책을 펼쳐 녹에게 건네주었다. 역시나 홍의 필체로 정리된 내용은 공유의 저주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 상황이 도래한 원인이다.

“인간과 마법사의 육신 상태를 엮는 저주….”

“수명이 짧은 인간과 명을 공유하다니요. 하홍이 아니면 개발되지 않았을 저주죠.”

저주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함께 그에 대한 주의 사항 역시 모서리에 작게 적혀 있었다. 마법에 대해 일자무식이던 과거를 벗어난 지금에서 처음으로 홍의 개발서를 보니 확실히 하홍은 톡톡 튀는 녀석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쉬이 꺼내지 않았을 연구를 그 나이에 진행하고 있었으니. 도언이 배껴 가져온 개발서는 홍이 열두 살에 쓴 것이다.

도언은 펼친 영상의 상황을 녹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것처럼, 지금 바깥은 온 세계의 마법사들이 안가와의 전쟁을 위해 모여 있습니다. 콩가루 같은 그들이 하홍을 중심으로 모였어요. 하홍 역시 자신이 하가 출신의 마법사라는 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죠. 마법 연합이라는 얼토당토 안 되는 그룹 운영은 이에 대한 선행 연습이었습니다.”

화면에 비치는 인간들은 딱 봐도 혼혈 같은 뜨내기 마법사가 아닌, 정식 가문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의 지팡이에 새겨진 소속 가문의 인장이 눈에 띄었다. 샘솟는 의문에 녹이 입을 열었다.

“저들을 대체 어떻게 뭉치게 한 거지? 뭉치기엔 프라이드가 대단할 텐데.”

“하녹이죠.”

입을 다물고 있던 이네스가 끼어들어 답했다. 당사자인 하녹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아,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여기서 왜 또 그 이름이 튀어나와, 튀어나오길!

“안가를 하녹이 이끌고 있단 소문을 퍼트렸다고 합니다. 가주님의 강한 힘은 확실히 하녹의 그것으로 오해할 만했죠. 하, 웃기지 않아요?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하녹이 우리 가문의 가주라니요.”

몹시 불퉁한 얼굴로 도언의 대답을 가로챈 이네스는, 결국 질문의 타깃을 바꿨다.

“제가 답해 드렸으니 당신도 대답해 주세요. 김민수 씨.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누구신데 마법사가 되신 거죠? 전에는 정말 정령 학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너무 순진했죠. 거사 마지막까지도 제게 많은 걸 숨기시는 가주님이 데려오셨잖아요? 분명 가주님이 주원처럼 저에게 숨긴 인물 중 하나겠죠. 하, 민수 씨는 안가의 사람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니 대피시킨다고 했을 때 홀랑 속아 넘어갔지 뭐예요.”

이네스의 말씨가 다시금 빨라졌다. 많은 양의 추측성 정보를 단숨에 읊은 이네스는 아직도 의심스럽게 녹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죠? 당신이 마법사인데도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빼앗는 데에 동의하나요? 물론 동의하시겠죠? 그래서 가주님이 데려온 거 맞죠?”

이미 이네스는 녹을 도언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네스는 몰아붙이듯 녹의 입장을 물었으나 마법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며 살던 녹이 그녀와 반대의 길을 걸을 리 없었다.

“당연히 동의합니다만….”

“역시. 가주님이 수행 인원으로 데려온 게 맞았군요. 그럼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요? 더 이상 숨길 생각하지 말아요. 안도언, 너도 그래. 비상사태에서도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눈감아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혹시라도 저 사람이 주원과 같은 포지션이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

날 서 있는 이네스는 평소의 모습과 판이했다. 녹은,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게 안가에서 짜 놓은 판 가운데에 들어왔음을 인정했다. 이네스는 녹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으면 그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침묵하던 도언이 말을 돌리려 했다.

“내가 신원이 불명확한 사람을 여기까지….”

“수상하지 않으면 말하면 될 일 아니야! 잠깐, 저거 민수 씨 아니야?”

두 사람이 옥신각신할 때, 영상 속 하홍이 지팡이를 들고 허공에 한 얼굴을 크게 띄웠다. 그 얼굴은 녹의 얼굴과 틀림없이 일치했다.

[이자가 하녹이다! 안가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자부터 수색하도록!]

[와아아아!!!!]

일동이 환호하는 소리까지. 녹은, 자신도 모르게 제 얼굴을 더듬었다. 항상 쓰던 마스크가 만져지지 않았다. 이런. 아무래도 숲속에 있을 때 얼굴이 드러난 모양이다. 영상을 보던 이네스는 랠리를 잇는 탁구 경기의 관중같이 영상 속 얼굴과 녹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저게 아주 호외로 뿌려 버리네. 영상을 지켜보던 녹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눌린 머리를 손으로 흩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쉰 숨결이 땅에 닿을 때쯤, 녹은 이네스에게 진실을 고했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죠.”

“사실이요?”

이네스가 팔짱을 끼며 의심쩍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네스는 녹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도언이 은근히 이네스의 눈치를 봤지만 유심히 영상을 관찰하고 있는 녹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영상 속 진예의 눈가가 붉어졌다. 한바탕 크게 울어 버린 모양이다. 불온해 보이는 잔당에 둘러싸인 저 상황에서 아홉 살짜리 아이가 불안하지 않기란 힘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보이는 영상은 안가의 일원이 적진에 잠입해서 이곳에 송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걱정된 녹이 중얼거렸다.

“저기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 텐데.”

홀로 떨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진예가 영상을 찍는 자를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화면 역시 그런 아이의 행동에 놀란 듯 휘청였다. 아이는 그대로 누군가를 끌어안았고, 화면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정수리를 비추었다. 화면에 보이는 누군가의 손이 갈 길을 잃었다.

[뭐 하는 거냐. 얼른 이리 와!]

튀어 나간 진예를 향해 하홍이 외쳤다. 그러나 진예는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하홍과 함께 나타난 아이는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런데 지금은 하홍이 아이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진예가 자신의 방패이자 약점이 되어 버린 홍은 여기서 더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 편이라고 불러들여도 마법사는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몰랐다.

[거기, 너. 잠깐 따라와라.]

그렇기에 진예가 붙잡은 마법사를 부르며 그 자리에 벗어났다. 홍의 부름을 받은 자는 진예를 매달고 홍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장면은 이곳으로 실시간 전송되었다.

“지금 이 영상을 목숨 걸고 송출하고 있는 사람, 혹시 청연이야?”

화면에 비친 손모양은 청연과 확연히 달랐으나 왠지 모를 느낌에 녹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짜야?”

감으로 때려 맞혔는데 맞았다.

“위장한 모습이 진예가 한번 봤던 얼굴이라 한눈에 청연을 알아본 모양입니다. 안가의 바깥 정세가 드디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하길래 위장 잠입시켰죠.”

“드디어?”

“안가의 목표는 마법사의 멸절입니다. 한꺼번에 모아 처리하는 게 훨씬 빠르지 않습니까. 물론 진예가 납치당할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만….”

“…마치 나머지는 다 예상했다는 듯 들리네.”

“씨앗을 찾자던 마법 연합 사무장이 하홍이며 신입 해사인 것, 하홍이 당신의 모습을 알고 있던 것. 그 요소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저들이 생각하는 세계수의 씨앗은 바로 저였을 겁니다. 그런 오해는 환영이죠. 제가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도언은 지금까지의 일들이 제가 짠 판이라고 고백했다. 어쩐지 꾼들이 마을에 나타났을 때 소집된 회의에서 홀로 침착하더라. 다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녹은, 그것도 모르고 뒤집어지고 난리 났던 장로들을 떠올렸다.

감정을 가감 없이 내보이던 장로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장로들 역시 도언의 계획을 모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하홍 하나 속이자고 이네스에, 장로들까지 속인 건가. 철저하기도 했다.

“여하간, 잠입도 까다로웠습니다. 저 공간에서는 허가받지 못한 마법을 쓰면 곧장 하홍이 알아채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지금, 청연과 오감을 공유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 이상 무언가를 하려 하면 들킬 거예요.”

[당장 이리 안 와?]

[안 가! 안 가! 너랑 붙어 있을 바에 난 그냥 죽을 거야! 죽어 버릴 거라고! 으아아앙!!!]

귀를 찌르는 소리가 화면 안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마법사들이 우글대는 광장에서 셋만 있는 작은 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진예는 청연에게 들러붙어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하홍을 협박했다. 저렇게 깡이 있는 아이였다니…. 웬만한 어른들도 인질이 된 상황에서 쉬이 하지 못할 일을 아홉 살인 진예는 쉽게 해냈다.

제 목숨이 하홍의 목숨임을 잘 알았기에 먹히는 협박이었다. 밀려오는 짜증에 콧볼은 넓힌 하홍은 아이를 상대하는 것보다 진예가 달라붙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훨씬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홍은 그 마법사를 노려봤다. 덕분에 하홍의 정면이 화면 가득 들어찼다.

[이 녀석, 죽지 않게 잘 데리고 있어. 헛소리도 듣지 말고. 그리고 그만 울게 해. 탈진이라도 나면 네가 책임질 줄 알아.]

여기서 호들갑을 떨면 진예에게 뭐라도 있는 줄 알고 마법사들이 너도나도 아이를 노릴지도 몰랐다. 결국 하홍은 제 목숨줄을 일개 마법사에게 맡기는 배짱을 부렸다. 화면이 위아래로 끄떡였다. 하홍은 씩씩대며 바깥으로 나갔다. 방 안에 둘만 남자, 진예는 언제 울었냐는 듯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고 물었다.

[청연은 언제부터 여기에 있던 거야?]

허공에 반대쪽 상황을 알려 주던 화면이 투명하게 변하며 사라졌다. 도언이 꺼냈던 마석이 마력을 다해 일반 돌덩이로 변했다. 한마디로, 방전이었다.

“보셨죠? 적어도 청연이 아이의 곁에 있으니 위험할 걱정은 덜었군요.”

도언은 위험할 걱정 없다 했지만 불안은 종식되지 않았다. 하홍이 언제 진예를 마지막 패로 사용할지 모를 일이었다. 수틀렸다가 자살해 길동무로 진예를 데려가면 어쩐단 말인가. 녹은 구출 방법을 모색했다. 일단 안가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알아내는 게 먼저였다.

“저쪽에서 허가받지 않은 마법을 쓰면 홍에게 들킨다고 했지. 그렇다면 청연의 시야를 공유한 지금 쓴 건 마법이 아닌 기적이겠군. 열매의 기적인가?”

도언은 고개를 끄떡였다. 녹은 거기서 청연과 도언이 그 하얀 매의 힘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쩐지, 도언과 있었던 일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청연은 다 알고 있더라니. 이제야 그의 집에 있던 횃대의 이유가 설명되었다. 열매의 힘을 공유하다니. 청연이 도언에게 가장 믿을 수 있는 부하란 증거였다.

상황의 타개를 위해 어떤 방법이 가장 최선일지. 녹은 진예의 구출을 우선으로 머리를 굴렸다. 통상 저주라고 불리는 마법은 시전자가 아니면 풀 수 없기에 저주라고 불렸다. 녹은, 홍이 기록했다는 저주의 설명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진예와 홍이 얽혀 있는 저주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인간과 마법사의 육체 상태 동일화라니.”

녹은 한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곰곰이 정보를 해석했다. 하홍이 적어 둔 식은 몇 가지밖에 되지 않지만,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그에 대한 부작용이 선명히 보였다. 녹이 은둔할 때 이것저것 실험해 본 마법과 같은 결의 마법이기 때문이다.

“…이 식과 이 식의 결합이라면…. 확실히 일주일이 지나 저주가 해제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겠는걸. 해제하려고 들 수는 있지만 건드리는 순간 저주 대상의 명이 반절로 줄어. 하가 시절 개발한 식이랬지? 당시 얌전하기만 하던 녀석이 폭탄 같은 식을 잘도 만들어 두었군.”

“얌전이요? 놈이 당신에게 얼마나 아양을 떨었는지 잘도 속여 넘겼군요.”

“아… 아양?”

홍에 대한 신랄한 평가에 녹이 어벙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녹이 저와 그놈을 착각한 거 아닙니까. 하필 골라도 그놈이라니요.”

홍은 도언의 주변 인물에게 가면을 쓰고 대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녹에게 톡톡히 나타났다. 싸한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니. 적어도 하진이는 끝까지 홍을 경계했다. 맹물 같던 녹은 그러지 않았나 보다. 또다시 면구스러워진 녹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다 침울하게 사죄했다.

“몹쓸 착각을 해서 미안하다…. 하홍이 너를 기억하기 전에 가장 가능성 있는 하가의 인연이었어.”

“잠깐. 하가? 잠깐잠깐잠깐. 당신 진짜 하녹이에요?”

도언의 옆에 서서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나 눈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던 이네스가 끼어들었다.

“너무 조용히 있어서 있는지도 몰랐군.”

적진의 상황을 염탐할 동안 한 마디 않고 있던 이네스에게 도언이 한 소리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녹의 한 손을 낚아채고선 귀에 걸린 여의주를 빛냈다. 이네스 주변의 바닥에 스파크가 튀며 황금빛 선이 둥글게 그어졌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마력의 이동이 생생히 느껴졌다. 마력이 봉인당했던 처음에는 느끼지 못한 감각이었다. 용의 통찰이다. 마력으로 한 번 고루 훑은 이네스가 녹의 마력을 알아채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진짜잖아… 진짜였어…….”

아직까지 녹을 붙잡은 이네스의 손을 도언이 빠르게 떼어 냈다. 얼굴을 찌푸린 그는 녹의 앞에 민첩하게 섰다.

“내가 예의 없게 굴지 말라고 했지.”

“저번에 통찰했을 때는 분명 인간이었는데…. 아무리 씨앗이라지만 마음먹고 한 용의 통찰을 피할 수는…. 안도언. 이것도 너가 꾸민 짓이지.”

도언은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 웬수의 방해로 평생 찾던 존재를 눈앞에 두고 몰라봤다. 이네스가 도언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너는 내가 누구를 찾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이네스의 동공이 얇아졌다가 다시 동그랗게 부풀렸다. 폭풍 전야. 싸움 한 번 거하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녹은, 식은땀이 다 났다.

“으음… 지금 이럴 때는 아니죠. 진예도 저기에 있고… 이네스. 제 이름을 말씀드리지 못한 건 죄송해요. 여러 사정이 겹치기도 했고…. 음….”

이네스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바뀌는 눈 위에 손등을 대고서 열을 식혔다. 도언에게 화냈는데 어째서 녹이 쩔쩔매는지 모르겠다. 이네스는 열을 식혔다.

“하. 이해해요. 허락 없이 통찰한 건 죄송해요. 왜 정체를 숨기신 건지 대충 아니까. 저도 가능한 당신을 귀찮게 안…. 크흠….”

이네스가 말을 하다 말고 줄였다. 아무래도 지키지 못할 약속은 못 하는 용인가 보다. 이네스가 몇 번 헛기침하더니 태도를 달리하며 사근거렸다.

“그럼 다시 인사드릴게요. 하녹 씨.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이라면 확실히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가주님보다 믿을 만하죠.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말씀대로 지금 이럴 건 아니니, 다음에 묻도록 할게요.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이네스가 회의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커다란 통창이 길게 나 있는 복도가 나타났다.

우와아아아--!!

함성 소리가 문틈 사이로 비집고 온 방을 메웠다. 얼마나 방음이 잘 되었던 회의실인 거냐. 녹은 창문에 다가가 함성의 원인을 내려 보았다.

황무지에 끝없이 깔린 자들은 무장을 한 수인 군대였다. 광야에 펼쳐진 군대는 녹이 봐 온 안가의 주민보다 배는 되어 보였다. 간간이 인간과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이 끼어 있었으나, 확연히 눈에 띄는 자들은 당연코 수인이었다.

인간보다 몇 배 뛰어난 육체 능력을 뽐내는 이들이다. 마법사들의 핍박에 숨어 사는 저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경이로운데 군까지 이룬다니.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군과는 또 다른 느낌의 병력이었다.

각종 지상 동물을 포함해 땅속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육군과,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을 점령한 공군. 구석에 펼쳐진 거대한 연못 속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수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족한 능력은 현대식 문물로 보완하고 자신의 강점을 살리며 땀 흘려 훈련하고 있었다. 병사 개인당 낼 수 있는 속도와 정확성이 인간을 웃도는 건 당연했다. 일당백인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닌 수천, 수만이라니. 분명 모든 지도자가 염원하는 병력일 거다.

유리창을 뚫을 듯이 붙어 확인하던 녹에게, 이네스가 손을 펼쳐 그들을 소개했다.

“설마 홍이 모은 온 세상 마법사들을 저희끼리만 상대한다 생각하진 않으셨겠죠? 진정한 안가에 어서 오세요.”

녹은 입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내려다봤다.

“빠져드시겠네요.”

“느헛.”

도언의 언질에 녹은 바짝 붙어 있던 유리창과 멀어졌다. 어느새 유리창에 붙어 있던 이마가 시렸다. 이네스가 자랑스레 어깨를 폈다.

“대단하죠? 다들 이곳을 지키고, 마법사를 없애기 위해 자원한 사람들이에요. 병력이 좀 된다 싶은 분들은 빠짐없이 참여하셨답니다. 아, 저기 태무도 돌아왔군요.”

이네스가 마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조그만 녀석들부터 몸집이 큰 녀석들까지, 대형을 잘 갖추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한두 해 훈련한 게 아닌 듯했다.

“안가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저 평화로운 줄 알았는데.”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죠. 언제나 마법사와 전쟁이 날 것을 염두에 두고 훈련하고 있었어요. 수인들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 마력이 필요치 않고, 또 육체적 능력 역시 상위를 웃돌죠. 저들이 마법사와 싸움을 위해 선뜻 나서 주니 고맙기 그지없어요.”

이네스의 어투에 존중이 깃들었다. 내려 본 훈련장은 그녀의 말처럼 힘이 넘치는 수인들로 인해 흙먼지가 마르지 않았다. 문득 든 의문에 녹은, 눈썹을 세모꼴로 모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를 발견한 이네스가 물었다.

“뭔가 궁금한 게 있나요?”

“음. 꾼을 처리할 때 굳이 해사들에게 맡겨야 하나 싶어서요. 마법이 듣지 않은 꾼들은 전투가 가능한 수인이 처리하는 게 보다 효율적이지 않나요?”

“아, 물론 저번처럼 꾼이 무지막지하게 날뛰면 끝끝내 파견하긴 했겠죠. 하지만 이들은 아무래도 비장의 카드라서요. 언제 안가를 부수려는 마법사가 스며들지 모르니까 철저하게 숨겨야 해요.”

마을에 군인이 없는 편이 더 평화로워 보이잖아요. 이네스가 손끝으로 유리창을 톡톡 치며 읊조렸다.

“그래서 안가의 인원 중에서도 이곳에 선별된 자들은 철저히 비밀을 엄수한답니다. 원래 그런 자들만 선별한 거기도 하고요. 안가의 주민인 길을 잃은 자는 2차 선별 과정을 통해 데려온다면, 여기 인원은 적어도 5차 정도는 걸러야 해요. 주민들조차 인증받지 못한 자들은 이분들의 존재는 잘 모른답니다. 그들의 가족일지라도요. 처음 이런 규칙을 보고 도언에게 융통성 없다고 욕했는데, 지금 보니 선견지명 있었던 거였네요. 헛, 참.”

녹은, 연못가에서 물길의 흐름을 바꾸고 있는 비버 수인을 발견했다. 댐을 쌓아 올리는 것이 커다란 물폭탄을 제조하고 있는 듯했다. 그 비버 수인은 분명 진예와 가끔 갔던 떡볶이집 주인이었다. 주민들은 생업과 동시에 훈련에 참여하고 있었던 거다.

“안가는 세상의 규칙을 바꾸려고 모인 자들의 가문이에요. 패악을 부리는 마법사들에게서 마력을 빼앗는 목표에 진심이죠. 저희는 그 목표를 위해 군인이 된 이들을 기억하는 자들이라고 불러요.”

기억하는 자들. 저들은 애초에 마법사의 힘을 빼앗으려 모인 자들이니, 저 명칭에서 오는 기억은 분명 마법사에게 당한 기억이리라.

확실히 안가 내의 풍경은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이곳을 모르는 주민들은 그저 안가가 조용하게 굴러가고 있다고만 여길 거다. 심지어 해사들의 무술 스승을 찾을 때도 육체 능력이 확실한 저들이 아닌, 총질이나 좀 할 줄 아는 외부인인 녹에게 부탁하지 않았는가.

“저들을 내보일 수가 없어서 해사들의 스승을 찾는 데에도 애먹은 거군요. 해사에 기억하는 자가 있긴 한가요?”

“해사 중 기억하는 자로는 해사장인 한 장로가 유일해요. 만일 정말로 안가에 불온 분자가 스며든다면 그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해사거든요. 다들 착하고 좋은 애들이긴 하지만…. 걔네들은 몽땅 다 2차 정도에서 걸러져서요. 방심하다가 잘 가던 안가가 전복되는 건 한순간일 테니까요.”

확실히 이네스는 도언이 데리고 온 녹 역시 끝까지 경계했다. 녹에게 보이는 호감이 연기 같아 보이진 않았으나 외지인에게 내보이는 분명한 선이 존재했었다. 그리도 철저하게 방비하고 있다 여겼기에 주원에게 진예를 맡긴 실책이 뼈아프게 다가올 거다.

그렇기에 염원하던 녹을 만난 기쁨 역시 뒤로 미뤄 둔 이네스였다. 하지만 오랜 염원을 앞에 두고 호기심 섞인 욕망을 철저하게 가두긴 어려웠다. 씨앗이라지 않은가. 무려 도언이 보증한! 녹에게 그었던 선을 완전히 해제해 버린 이네스가 녹에게 은근히 붙어 왔다.

팔짱을 끼고 군인들이 훈련하는 걸 내려보던 도언이 그 미묘한 차이를 어찌 알았는지 녹과 이네스 사이에 어깨를 밀어 넣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동이었다. 도언이 이네스를 견제하고 있음을 모르기도 어려웠다. 기가 찬 이네스가 항의를 하려 입을 열 때였다.

“녹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마법사들에게서 마법을 빼앗는 싸움이라.”

도언은 중요한 이야기로 이네스의 시답지 않은 말을 막았다. 이네스 역시 저들이 꾸려 온 성과에 대해 씨앗인 녹의 고견을 듣고 싶어 입을 얌전히 다물었다. 마력에 관한 눈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할 그 하녹이다. 녹의 의견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녹은 주저주저하다 입술을 떼었다.

“음, 이걸 어떻게 얘기해 줘야 하나.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병력이긴 하지만….”

확실히 수인들의 체력과 무력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양의 마력과 무력의 키를 따져 본다면 무조건 마력의 승리다. 마력 앞에 물리력은 의미가 없었다. 군이 수만이라고 할지라도, 상대해야 할 마법사들의 수 역시 이보다 약간 적을 뿐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마법 연합에서 보았던 뜨내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법사들이다. 아무리 과거 마법사보다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이 줄었다 해도 그들의 잠재력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거기에 마법에 특출난 홍까지 있었으니, 안가가 대단한 병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승산을 확신하긴 힘들었다.

“상대가 마법사인 거 알고 있는 거 맞지?”

“물론이죠. 따지자면 저도 기억하는 자입니다. 그를 어찌 잊겠습니까.”

기억하는 자라는 단어에 감정이 섞인 느낌은 착각이겠지? 그 단어를 말할 때 은근히 힘을 주어 말하는 것 같기도…. 혹시 자기에 대한 기억 잃어버린 걸로 눈치 주는 건가? 물론 눈치받아도 할 말 없긴 한데…. 녹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언은 그저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마법사의 마법은 강력하죠. 그들 역시 그를 알고 긴 세월간 오직 마법 개발에만 집중했던 거고요. 반대로 말하면 마법사들에게 마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장점만 계발했지 단점은 줄일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요. 이네스가 오죽하면 해사의 무술 스승을 녹에게 맡겼겠습니까.”

그건 그랬다. 녹 역시 무술에 관해서는 쥐뿔도 몰랐는데 이네스가 보기에 그들을 가르칠 정도는 되었던가 보다. 도언은 황야 한구석에 있는 지상화 하나를 가리켰다. 마법진을 닮은 동그란 그림은 코끼리 다섯이 누우면 그럴듯하게 들어갈 만한 크기였고, 주변에 벽돌로 쳐진 담장이 그를 보존하고 있었다.

“저게 이번 전투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저 마법진만 발동시킨다면 마법사들은 한시적으로 마법을 잃습니다. 대승을 노려 볼 만하죠.”

도언은 저 그림을 마법진이라고 했다. 허나 마법진에는 그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진은 마력을 새기는 공정을 거치기에 마력이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아무리 최신식 기계라 해도 배터리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지금 저 마법진은 그러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저게 그렇게 대단한 식이라기엔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가까이 가 보시면 왜 그런지 아실 겁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그리 중요한 식이라면 꼭꼭 숨겨 둬야지, 필드에다가 떡하니 펼쳐 두면 어쩌자는 거야.”

“대단하다 해도 발동에 조건이 있어서요. 발동된 마법진은 이 땅에 접촉한 자의 마력만 온통 흡수합니다. 그것도 단 한 번만, 발동 시간은 단 20분. 그렇기에 가능한 많은 마법사가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발동하는 게 관건이죠. 그때까지 여기서 버틸 수밖에 없어요. 제가 묻는 승산이란 그겁니다. 모든 상대 전력이 이 공간에 들어올 때까지 마법진을 지키며 버틸 수 있는가.”

전술을 듣고 나니 이제야 마법사에게 마력을 빼앗는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들렸다. 가문에 있는 웬만한 마법사가 모인 거라면 그들이 마법사 사회의 주축이다. 그들만 와해하여도 마법사의 권력은 쉽게 무너지게 될 터다.

그들의 명성을 등에 업고 난리 친 조무래기 마법사들 역시 유아독존 태도를 지워 버리겠지. 도언의 말처럼 홍의 마법사들이 이 공간에 모두 들어올 때까지 기억하는 자들이 버틸 수 있냐는 게 중요했다.

“그들 목표는 내가 되었지. 그들이 나를 향해 한 번에 공격해야 승산이 보인다는 걸 알 테니까 병력 분산도 안 하겠고. 그동안 저 마법진을 지키고 희생자를 줄이는 게 관건인데…. 안가의 병력은 여기 있는 모두가 다인가요?”

이네스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빠르게 끄떡였다. 녹은 너무 낙관하지도, 그렇다고 비관하지도 않으려 노력하며 결과를 예상했다. 뜸을 들이는 녹에게 이네스가 옆에서 보챘다.

“어때요? 될 것 같나요?”

“음, 지금 안가에서 가지고 있는 카드를 모두 꺼내 쓴다면… 좋네요. 어떻게 나오든 결국 마법사들은 제가 있는 곳에 몰릴 테니까요. 승산이 있어요. 게다가….”

녹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부적 뭉치 중 남은 카드를 펼쳐 내었다. 카드 몇 장을 빼낸 녹은 엄지를 물어 새어 나온 피를 나머지 카드에 그어 정제된 식을 모두 변형했다. 모든 작업을 빠르게 끝낸 후, 녹은 손가락을 튕겨 마법진 주위 울타리에 부적을 옮기고는 덕지덕지 붙였다. 울타리에 붙지 않은 몇 장의 카드는 황야의 허공 위를 비행했다.

녹은 허리를 숙여 땅을 짚고서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손을 끌어 올렸다. 곧 마법진 주변에 투명하니 마력 교란 결계가 쳐졌고, 비행하던 카드는 빛을 내더니 황금빛으로 부서져 황야의 전역에 빛의 비가 되어 뿌려졌다. 훈련하던 전사들은 자신의 몸을 때리는 기묘한 마력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 보았다.

녹의 마력을 느낀 마생물과 마법사는 하늘에 뿌려지는 청량한 마력에 기겁했고,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수인과 인간들은 이상하게 차오르는 체력에 압도되었다. 풍부하고 청량한 세계수의 마력은 군사들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일사불란하게 소란했던 황야는 황금비를 맞고 시간이 정지라도 된 듯 고요해졌다. 마치 기적처럼.

단숨에 광대한 마법을 벌인 녹이 크게 숨을 내쉬고 이네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기억하는 자에 저도 있잖아요.”

녹은 출사표를 던졌다.

“아, 입단 테스트 같은 거 먼저 받아야 하나요?”

너무 혼자 갔나 싶던 녹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녹이 부린 마법을 목격한 이네스는 떡 벌어진 입을 통해 혼이 빠져나간 양 굴었다. 이네스가 자연스럽게 도언을 옆으로 밀어 내고 녹에게 다가서려 했다.

물론 지반에 단단히 다리를 뿌리내린 도언은 순순히 비켜 주지 않았다. 이에 접근을 포기한 이네스는 손을 뻗어 녹의 한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도언은 제 눈앞에 이어진 연결을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맞닿은 두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네스의 동그란 동공이 울렁울렁하다가 가늘게 수축한다. 이네스의 맹목적인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싹해졌다.

아무리 빈틈없이 훈련을 했다더라도 마법사들로부터 마법진을 지키며 하는 전투는 까다로웠다. 그러나 녹은, 손톱 밑 가시 같던 요소를 손쉽게 뽑아 버렸다. 마법진 주위에 설치한 결계는 얼마나 강력한지, 통찰이 특기인 이네스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거기다 몇 배는 더 강해진 병력의 무장. 저런 대광역 마법은 씨앗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 이에 이네스가 감격한 건 당연지사다.

녹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허허실실 농담을 던졌다.

“음…. 이네스.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아…. 아….”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 목소리를 들은 이네스의 감정만 격화되었다. 아직도 다물지 못하는 이네스의 입에서 더듬더듬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정…정말 너무너무 잘 오셨어요! 기억하는 자가 되어 주시겠다니요!! 정말이지, 제가 쫓던 보람이 있는….”

왜인지 점점 높아지는 악력에 녹은, 눈을 굴려 도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를 접수한 도언은 이네스가 맞잡고 있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명령했다.

“감격할 거 다 했으면 인제 그만 놓….”

쾅!

“허억!”

일순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렸다. 어디선가 먼지구름이 피어났고, 이네스를 말리려던 도언은 사라졌다. 손을 잡고 있던 이네스는 녹의 팔을 당겨 녹을 끌어안았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네스의 끌어안는 힘이 시나브로 강해져 숨이 막혀왔다. 이네스가 두서없이 내뱉는 말이 귓가에서 멀어질 정도였다. 설마 홍이 보낸 스파이라도 되는 거 아냐? 어깨를 밀어 봤자 소용없겠다는 판단하에, 녹은 손가락을 튕겨 순간이동으로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마른기침이 새어 나왔다. 무릎을 짚고 쿨럭이던 녹이 고개를 올렸다. 희뿌연 연기가 뭉실뭉실 건물의 복도를 가득 메웠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이네스는 녹이 빠져나간 제 빈손을 빠른 고갯짓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썩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네스의 격한 환영에, 녹은 희뿌연 연기 뒤에 몸을 숨기고 먼지 조각이 가득 끼얹어진 머리를 손으로 털어 내며 웅얼거렸다.

“이게 다 무슨 난리야.”

“…제가 이네스에게 정체를 숨기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 좀 아셨습니까.”

낮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녹이 고개를 돌렸다. 녹에게 이네스를 떼어 놓으려고 했던 도언이 다리를 길게 뻗고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이네스에 의해 날아간 거다. 도언의 뒤로 콘크리트 벽이 깊게 파였다. 복도를 자욱하게 가득 메운 흙먼지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거였다.

일반인이라면 분명 치명상이다. 그러나 열매의 주인인 도언은 생채기 하나 없이 먼지를 마시고 마른기침하는 게 전부였다. 이네스가 고개를 길게 빼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네스의 눈에는 어느새 광기가 넘쳤다. 이 무슨 호러인가. 녹은 재빨리 쭈그려 앉아 먼지 안개에 제 몸을 가리고는 도언에게 속삭였다.

“혹시 이네스가 나도 모르는 적군의 스파이나 뭐 그런 건 아니지? 너까지 공격할 줄은….”

“공격이라는 자각조차 없었을 겁니다. 몰입 한번 하면 저러더군요. 다른 용들도 저러는지 용을 만나 보지 못해서 모르겠네요.”

“저게 몰입이야? 몰입 두 번 했다간 사람 죽겠네! 내가 처음 정체를 밝혔을 때까지만 해도 저러진 않으셨어.”

“물론 그때야 저리 좋아할 때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거겠죠. 이네스가 좋아할 방향으로 화려하게도 힘을 쓰셨군요.”

“그냥, 나는 당장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고.”

자신이 눈뜨고 있는 앞에서 진예가 홀랑 납치되었다. 녹은 홍의 도주를 허락해 버림에 적지 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마법을 사용해 보탬이 된 건 그에 대한 속죄의 일환이었다.

“낸들 저러실 줄 알았나! 알려 주면 좋았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든 몰래 했겠지. 그리고….”

“어디 계세요? 민수 씨! 아니, 하녹 씨! 하녹 씨라고 불러도 되죠? 녹 씨!! 어라? 어디 가셨지?”

근처로 다가온 소리에 숨이 멎었다. 연기 안에서 이네스의 목소리가 괜히 공포스레 들렸다. 죽음의 숨바꼭질이 따로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해? 일단 도망친 다음에 이네스가 진정하면 다시 올까?”

“아니요. 이네스는 분명 당신을 찾을 때까지 저 상태일 겁니다.”

도망도 안 돼, 그렇다고 공격도 할 수 없었다. 청연이 이네스가 화내는 모습에 진저리쳤던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마법사들 한가운데에서 내가 바로 하녹이다! 하고 외치는 게 덜 무섭겠다. 가주를 날려 버리고 벽 일부가 파손된 주변이 보이지 않는 건지, 이네스는 녹을 찾기에 바빴다.

“어떤 부분이 역린이었던 거야, 대체.”

큼흠흠. 목을 가다듬은 도언은 그새 울상을 짓고 있는 녹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당겨 왔다. 연기 속에서 바싹 붙었기에 건너편에서 본다면 단 한 사람의 인영으로 착각할 만했다. 도언이 녹의 귓가에 입을 붙이고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녹이 세계수의 마력을 펑펑 써 대며 광역으로 축복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마법진을 지켜야 하는 문제 역시 결계로 단번에 해결하고. 거기에 기억하는 자에 입적한다고 말한 건 화룡점정이었죠.”

“아니, 겨우 그거 가지고 저렇게 흥분하시면…. 그럼 어떻게 해야 진정하셔? 금방 안 돌아오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공격을 할 수도 없고.”

“뒤집힌 역린을 다시 돌려 두어야죠.”

- 찾았다.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천장에서 내렸다. 녹과 도언이 고개를 치켜들자, 긴 목을 길게 뺀 황룡이 연기를 가르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고친 건지, 용이 들고 있는 여의주는 깨졌던 흔적 없이 깨끗하게 반짝였다.

뒤로 고개를 살짝 뺀 이네스가 그대로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뾰족한 머리를 내리꽂는 모양이 마치 창을 던지는 듯했다. 이성을 잃으니 앞뒤 생각이 없어진 이네스다. 도언이 녹을 안고 자리에 박차고 일어나 이네스를 피했다.

방금 앉아 있던 곳은 이네스가 머리를 박아 박살이 났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박살이 난 건 벽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에 오싹해졌다. 녹과 도언은 날아간 벽조각 뒤에 몸을 숨겼다. 창가를 등진 위치에 박힌 벽조각은 훌륭한 엄폐물이었다. 박살 난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몸을 식혔다. 이네스의 꼬리가 여전히 꿈틀거리며 주변을 파괴했다.

이렇게 어영부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우든 뭘 하든 일단 뭐라도 하자. 저리 두면 건물 하나가 통째로 박살이 날 거다. 녹이 마법을 쓰려고 손을 들어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자 도언이 녹의 손을 얼른 감싸 내렸다.

“잠깐요. 녹.”

얘는 마법을 쓰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말리고 앉았네. 녹이 마법을 방해한 도언을 눈으로 욕했다. 도언의 정체를 알게 된 이래로 처음 한 눈빛이었다.

“지금 이네스에게 마법 쓰면 안 돼요.”

“왜. 뭐가 문젠데.”

“이네스의 여의주요. 그녀가 그걸 잡고 있는 이상 녹의 마법은 튕겨 나갑니다. 전에 한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뭐?”

이네스가 벽에 박았던 머리를 슬슬 들어 올리자 그녀의 뿔에서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벽을 머리로 깨부수었지만 본인은 타격이 없는지, 그저 녹을 맹목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있는 황금빛 여의주가 반짝 빛났다.

“여의주가 무슨 너도 아니고, 일개 마생물의 부속인데 어떻게 그래?”

“혹시 몰라 제 피를 좀 먹였거든요. 아무리 녹이라도 한 번의 마법 정도는 반사될 겁니다.”

“그게 그렇게도 쓰인다고?”

세계수에 피를 먹여 마력을 봉인하고, 여의주에 피를 먹여 마법을 반사하고. 아주 쓰임도 많은 피였다. 도언에게 힘이 없었다면 분명 마법사에게 납치당해 죽을 때까지 피만 뽑혔으리라. 정말이지 천생 실험체 아닌가. 녹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난리다. 난리야. 대체 왜 그랬어.”

“측근을 위한 복지 일환이라고 여겨 주세요. 저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럼 다른 가벼운 마법을 써서 횟수를 줄인 다음에 재우는 건….”

“가벼운 마법이라면 가볍게 막고 끝나겠군요.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법에 들어 있는 마력의 용량이 중요한 겁니다. …조심…!!”

도언이 녹을 감싸 안고 등을 돌렸다. 몸을 숨겨 주던 엄폐물이 도언과 녹을 창 바깥으로 밀어냈다. 미처 깨지지 못한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다. 그들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이네스의 꼬리가 벽조각을 친 거다.

녹과 도언이 있던 곳은 그 많은 군사들이 훈련하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층수가 높았다. 녹은 도언의 허리를 붙잡고 몸을 띄웠다. 차라리 순간이동이 녹에게 편하긴 했으나, 도언에게 마법이 듣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해 낸 차선책이었다.

군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전장의 하늘에 둘이 둥실 떠올랐다. 체력을 채워 주던 황금비가 세계수의 마력임을 깨달은 군사들의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엇! 저기 저 사람 가주님 아니야??”

“옆에는 누구지?”

건물을 깨부수며 요란하게 나타난 가주와 낯선 남자 한 명은 모든 군사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의 외침에 이네스 역시 허공에 떠 있는 녹을 발견한 건 당연지사였다.

이네스는 녹을 따라 허공으로 비상했다. 이네스는 여전히 맛이 가 있었다.

- 녹 씨!!! 거기 계셨군요!! 하녹 씨!! 잠깐만요!!

이네스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타난 장로장에 훈련하던 군사들이 수군거렸다.

“저 용, 장로장님 아니야?”

“가주님도 함께 계시는데. 근데 장로장님이 가주님보고 하녹 씨라고 그런 거야?”

“에이, 정황상 가주님 옆에 있는 사람 이름이 하녹이겠지.”

“잠깐. 하녹이면 씨앗의 이름이잖아. 방금 우리한테 축복을 내려 준 게 저 사람이야? 세계수의 마력이라며.”

“아니, 하녹이라고? 진짜 그 하녹 말하는 거야?”

그래, 어차피 적진에 얼굴이 다 팔렸는데 여기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포기한 심정의 녹은, 달려드는 이네스를 피하며 요리조리 비행했다. 녹에게 매달려 있는 도언이 검을 소환해 빼 들었다.

하늘에 있던 새 수인 군사들은 추격전을 벌이던 그들을 피해 민첩하게 비행했다. 그들 역시 그 난리를 몸소 지켜보던 자들이었다. 독수리의 날개를 지닌 한 수인이 녹과 도언에게 붙어 왔다.

“가주님! 이게 무슨 일….”

도언은 전부 듣지도 않고 외쳤다.

“혹시 모르니 밑에 있는 녀석들 다 대피시켜!”

수인은 도언의 말에 더는 묻지 않고 날개를 내려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네스는 속도를 높였고, 녹 역시 그런 그녀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출력을 높였다. 공기가 귓가에서 찢기는 소리가 선뜩했다.

어디선가 낙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에 집중하는 녹 대신에 도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시작이군요. 저 상태의 이네스 근처는 저런 것들 때문에 위험해요. 일단 기억하는 자들이 모두 대피할 때까지만 더 높은 곳에서 시간 좀 죽이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도언의 말에 녹은 위로, 또 그 위로 계속해서 올라갔다. 이네스 역시 녹의 뒤를 바짝 쫓으면서 위로 올라섰다. 석양을 받아 붉기만 했던 구름이 이네스를 기점으로 검게 변했다.

번쩍이는 스파크가 파직거리며 튀기도 했다. 곧 번개라도 꽂을 기세였다. 도언은 꺼내 든 검으로 검은 구름을 갈랐다.

구름을 색칠한 검은색이 뭔가 했더니 이네스가 발산한 마력이었다. 도언의 검이 닿자 힘의 흐름이 검에 흡수되어 구름은 제 색을 되찾았다. 힘이 점점 빠지는지, 이네스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듦에 따라 여유를 찾은 녹이 도언에게 물었다.

“그 구름, 이네스가 주술을 건 거야?”

“아니요. 저 상태의 이네스는 주술을 쓸 정신도 없습니다. 대신 주변의 기후가 미친 듯 날뛰죠. 전에 동굴에서 주원… 아니, 하홍을 혼낼 때처럼요.”

동굴 안에서 우박과 비, 눈이 쏟아졌었던 그때를 말하는 듯했다. 지금에 비해서는 깜찍할 정도의 기후 변화였다. 이래서 청연과 태무가 그렇게 말했었구나. 이네스가 동굴이라서 참고 있다고.

근처에 있는 검은 구름을 빠짐없이 찌르던 도언이 오른쪽 허공을 가리켰다.

“물론 이건 마력으로 엮은 상황이니 제가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녀의 힘을 빼는 방법으로 가죠. 힘 있을 때나 저러지, 기운이 떨어지면 잠들거나 정신 차리거나 할 겁니다. 더 위로 올라가면 위험하니 오른쪽으로 가시죠.”

결국 방전 작전인가. 녹은 도언 말대로 방향을 틀었다. 뒤에서 이네스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바람이 쪼개지는 소리에 묻혔다. 방해물 없이 깨끗한 허공에, 녹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이네스가 꼿꼿하게 몸을 펴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불시에 사라졌다.

“…뭐야? 이네스가 없어졌어. 따돌렸나?”

“계속 앞으로 가세요. 없어진 게 아닙니다.”

속도를 줄이던 녹에게 도언이 재촉했다. 의문이 가득했지만 일단은 그의 말에 따랐다. 이네스는 사라졌을 때처럼, 불시에 녹의 뒤에 나타났다.

- 하녹 씨!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

진지하게 공포였다. 녹은 다시금 속도를 붙이며 밑을 보았다. 군사들이 모두 대피했는지, 사람으로 꽉 차 있던 대지에 사람은 없고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직선으로 비행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무리 고도가 높다고 하지만 날아온 거리를 생각하면 저 건물은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다.

거기에서 녹은, 이 공간 자체가 결계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경이 변해야 마땅하건만 경치는 처음 날아올랐을 때와 같았다.

속도를 높일수록 이네스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빈도수가 잦아졌다. 이쪽 하늘 끝과 반대쪽 하늘 끝이 포탈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틈 없이 자연스러운 걸 보니 결계였다.

“도언아. 여기 결계가 있어?”

“맞습니다. 전장으로 쓰일 곳이니만큼 바깥과 이어지면 안 되니까요. 식신 한 마리라도 나가지 못하게 꾸민 곳이죠. 이만큼 술래잡기를 했으니 이제쯤 이네스가 정신 차릴 때가 되었군요.”

밑에 있는 모두가 대피한 걸 확인한 도언이 느긋해졌다. 그가 마지막 검은 구름을 검으로 쪼갠 후, 녹의 볼에 입 맞췄다. 앞만 보던 녹이 토끼눈이 되어 도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습 공격에 성공한 도언이 눈을 접고 웃었다.

“이때까지 저 놓지 않아 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 마무리하고 오죠. 가능한 빨리 오겠습니다.”

기습 뽀뽀에 놀라 힘이 빠진 틈을 타, 도언이 녹에게 떨어져 추락했다. 그 모습에 도언과 함께 심장까지 같이 떨어지는 기분이 쿵 들었다. 방향을 틀어 도언을 구하려 했으나, 도언은 이네스의 몸 위에 정확히 안착했다. 오랜 비행에 체력이 떨어진 이네스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제 그만 돌아오지.”

중얼거린 도언이 검의 손잡이로 이네스의 목 뒤에 있는 역린을 강하게 찔렀다. 도언을 털어 내고자 거칠게 몸부림치던 용 한 마리는 금방 얌전해졌다. 맹목적인 광기가 옅어지고, 종내에는 사라졌다. 칼눈이 둥근 동공으로 돌아왔다.

- 어…. 어?

“정신 좀 차렸나?”

용을 향해 도언이 물었다. 목을 꺾어 제 등에 타고 있는 가주를 발견한 용은, 기름칠 안 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하늘을 올려봤다. 녹을 발견한 이네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 운동을 반복했다.

- 어…어어어…어으와아악!!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도언을 태운 채 빠르게 아래로 사라졌다. 땅에 도착해 인간으로 변한 후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고 도언은 그 뒤를 따라갔다. 난리인 해프닝이 이렇게 끝났다.

멀거니 허공에 떠 있던 녹은 아직도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들려왔을까. 이네스가 도언을 벽이 깨지도록 밀쳤을 때? 도언이 추락했을 때? 아니면 볼에 도언의 입술이 닿았을 때?

녹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 ❊ ❊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진 저녁 이후,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엔 별이 깃들었다. 낮에는 훈련하는 자들로 빼곡했던 황야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건물로 들어갈까 싶었던 녹은, 작전의 열쇠라는 마법진을 발견하고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이후 어두운 주변에 빛을 띄우고는 마법진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검붉은 선으로 그려진 꽤 거대한 면적의 마법진이다. 위에서 보면 작은 지상화라고 할 법했다.

“……??”

일시간 주변의 마력을 봉인한다는 마법진이기에 처음 보는 형태의 진이 그려져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니 이 마법진은 그저 증폭 마법을 약간 변형했을 뿐 별것 없었다. 게다가 마법진을 보호하는 마법을 제외하면 마력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마법진이 그리 대단한 효과를 낸다고? 의심쩍게 마법진을 내려 보던 녹은, 그를 그린 검붉은 선이 익숙하단 느낌에 손으로 선을 쓸며 중얼거렸다.

“이건….”

“제 피입니다.”

도언이 마법진 주위의 은신 결계를 뚫고 녹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자라면 결계 때문에 마법진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거다. 자신의 마법이 듣지 않는 존재라니. 이런 능력의 소유자를 손에 얻기 위해 하홍은 어린 시절 그리 부단히 연기했던가.

“하가의 성공적인 실험체에 열매를 담은 그릇까지 되더니 피에 그런 희한한 효과가 깃들더군요.”

“이네스의 여의주에도 쓰였었잖아. 그것참, 쓸모 한번 많다. 이네스는?”

“부끄러워 미치려고 하는 것만 빼면 괜찮아요. 열 좀 식히고 녹에게 사과하러 온다고 했습니다. 일단 마석으로 체력부터 회복 중이에요.”

이네스가 믿을 만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언이 녹의 정체를 그녀에게 숨긴 이유가 이해되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려나. 녹은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본인도 제 역린이 뒤집히는 순간이 언제인지 잘 압니다. 조절하고 있으니 다음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뭐, 아니라면 여의주에 먹인 피를 빼면 될 일입니다. 수면 마법이 먹힐 테니까요.”

“피 한번 참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 마법 튕겨 줘, 마력 봉인해 줘. …잠깐. 그럼 그동안 내 마력을 봉인한 것도….”

마력봉인구로 쓰인 세계수 고리가 붉었던 이유가 설마 그거였나. 도언은 고개를 끄떡였다.

“재료로 쓰이긴 했죠. 당신을 붙잡기 위해 사한과 함께 얼마나 연구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녹은 바람과 같았다. 붙잡았다 생각하면 사라지는 바람. 그러나 도언은 결국 바람을 찾는 데 성공했다. 옆에 매어 두는 것 역시 성공했다. 고리만 해제되면 바람처럼 나를 예정의 녹을,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기억하게 해 쉽게 떠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 역시 성공했다.

게다가 도언은 녹이 떠돌아다니는 이유 자체를 없앨 계획을 세웠고, 실행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 도언의 모든 삶에 녹의 자취가 있었다. 녹은 도언의 평범한 삶을 위해 그의 곁을 떠났다. 사한의 곁에 있었으니 녹이 떠난 이유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는 녹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일 자신이 도언이었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했을까? 녹은 의미 없는 가정을 잠시 해 보았다. 상상해 본 답은 선명치 못했다. 어찌 선뜻 인생을 바칠 수 있겠는가.

감상에 끌려 들어가기 전에, 녹은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 냈다. 발밑의 마법진의 선은 꽤 두꺼웠다. 몇 리터의 피가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재료가 단 한 사람의 혈액이다 보니,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진 역시 아니었다. 이를 만드는 데에 얼마의 세월이 깃들었을까.

도언이 기를 쓰고 이네스의 구름을 해제한 것도 이 진 때문이었다. 피로 그린 진은 수분에 취약했다. 마력을 넣으면 모를까, 발동 전의 마법진은 그저 피로 그린 그림일 뿐이었다. 재료가 재료다 보니 지워진 부분을 쉽게 복구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공간이 마법으로 만든 공간이라 날씨를 통제할 수 있었고, 마법진 주위로 보호마법 역시 걸려 있었지만, 용이 내리는 비는 일반적인 비와 달랐다. 혹시 모를 위험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건 언제쯤 발동할 계획이야?”

“청연에 따르면 적진의 출전은 내일모레 새벽이라고 합니다.”

“진예는?”

“청연 옆에 딱 붙어 지내고 있다는군요.”

녹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도언이 하늘을 올려 봤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그저 평범하고 건강하게만 자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제 곁에선 역시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결국 제가 이런 일을 꾸며서 휘말린 거겠지요.”

녹은 도언이 하는 말의 대상이 진예임을 알아챘다. 도언은 진예에게서 하진을 투영하고 있었다. 하진은 참사 이후에 녹을 보살피느라 도언이 잠시 뒷전으로 밀어 두었던 존재였다. 도언이 진예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릴 적 녹이 도언을 떠나며 했던 마음과 분명 일치할 거다. 녹은 도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 본인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도언의 기억을 조작하고 떠난 거니까.

이에 녹은,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진예는 분명 안전할 테니 너무 걱정 마.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안가의 염원 역시 미루지 않고 말이야.”

“하하. 그럼요. 계획대로라면 분명 그리될 겁니다.”

“아니, 안가의 모든 이가 목숨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꿈같은 소리를 하는 녹에게 도언이 드물게 되물었다. 녹이 손가락을 튕겼다. 녹이 마법진을 살피고자 주변에 띄워 두었던 빛의 구가 순식간에 땅으로 흡수되었다. 땅에 스며들자마자 어두워졌어야 할 주변이었지만, 빛의 구슬은 땅 안으로 가라앉는 와중에도 제 빛의 그림자를 지반에 띄워 냈다.

딛고 있는 지반이 땅이 아닌 물의 표면 같았다. 마치 빛나는 공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그렇게 땅 아래도 잠겼다.

이제는 새어 나오는 빛도 없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은 빛나는 구는 땅 아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워 냈다. 지반에 조명을 심은 듯, 땅에 심긴 빛의 씨앗은 주변을 물빛으로 밝혔다. 넓은 황야를 아우르는 복잡한 형식의 그림이 지면 위로 떠올랐다.

도언의 봉인 마법진은 땅 깊은 곳에 그려진 이것을 숨기는 역할 역시 겸하고 있었다. 도언의 마법진 밑으로 떠오른 그림은 녹 역시 익히 알고 있던 마법진이었다.

“내가 달리 씨앗이겠어? 여기에 내가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마법진이 숨겨져 있는 거 다 알아. 도언아. 아쉽게도 이제 나한테 숨길 수 있는 건 없다.”

발밑에서부터 나타난 마법진에 얼굴을 굳힌 도언을 보고, 녹은 한 방 먹였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나도 이제 기억하는 자잖아.”

❊ ❊ ❊

때는 녹이 도언에 대한 기억을 봉인한 이후,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공자를 만나기 전이었다.

그동안 사한은 녹의 부탁을 철저하게 이행했다. 아이가 보통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지 않았고, 그저 그 근처만을 빙빙 돌며 삿된 것으로부터 수호했다. 물론 아이의 몸에 담긴 열매는 부화의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다.

애초에 체내의 마력을 먹고 자라 부화하는 녀석인데, 마력 하나 없는 인간이 품는다고 깨어날 리가. 열매를 품은 아이는 평범하게 자랄 준비가 충분했다. 사한 역시 그런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사한의 숨바꼭질이 영원히 이어지는 듯 보였다.

녹이 걸은 기억 조작이 끝까지 먹혔다면 말이다.

그 강력한 마법이 실패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세계수와 연배가 비슷한 사한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하가 녀석들이 이행했던 뜬구름 같은 실험이 성공할 줄은….

아이에게 식신을 포함한 마력이 집결되는 형국이 실험의 결과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마력이 달라붙을 때는 세상 별걸 겪어 온 사한일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달라붙은 마력은 고스란히 아이가 담은 열매에게 깃들었고, 마력을 무럭무럭 마신 열매는 부화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열매가 부화하며 실험으로 심어진 마법 내성이 지극히 강해졌단 사실이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녹의 기억 조작은 열매가 태어나자마자 풀려났다. 숨어 아이를 보호하던 사한 역시 금방 들키고 말았다. 기억을 되찾은 아이는 뜸 들이지도 않고 짐을 싸 바깥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 새벽. 작은 소년은 보호자 없이 외딴 숲을 걷고 있었다. 곧 해가 뜬다지만 아직 볕이 들지 않은 무성한 숲엔 각종 맹수가 도사렸다. 부엉이의 스산한 울음이 어둠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소년은 거침없었다.

- 정말 이곳에 있는 게냐.

소년의 목에 하얗게 둘린 두꺼운 무언가가 꾸물거리더니, 하얀 머리를 빼 둘레둘레 고갯짓했다. 그는 사한이었다. 사한의 의심에도 아이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갈 길에만 집중하는 아이의 두 눈은 파르라니 빛났다. 사한은 아이의 걸음에 따라 통통거리는 머리를 다시 제 몸 위에 눕혔다.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사한이 대답 듣기를 포기할 때쯤, 긴장했는지 차갑게 굳은 음성이 들렸다.

“…분명 이 근처일 겁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기억을 되찾고 나서 도언은 제일 먼저 녹을 찾았다. 사한은 녹이 떠났다고만 했다. 녹이 자신을 떠난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한 역시 당시 녹의 상태를 보았을 때, 그가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도언은 녹이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제풀에 지친 그가 끝끝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어찌 기다릴 수 있느냔 말이다. 도언은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제게 일언반구 없이 떠난 녹이 괘씸하기만 했다. 심지어 그가 떠나기 전, 그와 관련된 마지막 기억은 요강으로 얻어맞고 기절한 기억이었다. 회상한 도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쨌건, 절대 깨어날 리 없던 열매가 깨어나 좋은 점이 있다면, 녹의 마력을 그 누구보다 기막히게 감지할 수 있단 거다. 열매의 원주인은 녹이었고, 열매는 그의 마력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게다가 당시 녹의 서투른 마법 역시 그를 추적하는 데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도언은 그가 마법을 쓸 때마다 그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어린 열매는 기적이 서툴렀기에 그때마다 사한을 닦달해 이동했다. 그래 봤자 발 빠른 녹이 이미 떠난 뒤였지만.

“저번에는 실패였지만, 이번에는 정말 도령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마력 흔적이 저번과 달라요. 거기다가 아직도 가느다랗게 도령의 마력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결계를 친 모양이에요.”

- 사실인지는 내가 아이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모르겠구나. 그 녀석의 마력 감지는 나보다는 열매를 담고 있는 네가 낫겠지.

한참을 지나온 도언은 나무 사이에서 땅에 무언가를 긋는 누군가의 등을 발견했다. 뒷모습이었지만 저자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언은 안색을 바꾸고는 기쁘게 외쳤다.

“보세요. 녹을 찾았지 않습니까!”

- 아이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야. 이놈아. 적어도 너는 제발 미치지 말아라.

아무리 녹의 방향대로 가리켜도 사한은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툴툴댈 따름이었다. 도언은 그런 그를 뒤로하고 녹에게 다가갔다. 지척에 도언이 있는데도 녹은 제 일에 열중했다. 사한 역시 바로 앞에 있는 녹을 여전히 발견하지 못했다.

도언은 자신이 보고 있는 녹이 혹시 자신의 염원에 따른 환상이 아닐까 의심했다. 사한은 녹을 보지 못했고, 녹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분명 녹의 마력이 맞았다. 게다가 녹의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얇은 막이 도언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분명 결계였다. 사한이 녹을 보지 못한 건 이 때문인 듯했다.

도언은 그 결계막 위에 손바닥을 조심스레 올려 두려 했지만 손은 가벼운 결계의 막을 손쉽게 통과했다. 도언은 손을 거두고 짧게 자신의 손바닥을 응시하다, 결심한 듯 한 발 뻗어 녹이 만든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희미하게만 느껴졌던 녹의 존재감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 어! 아이야! 너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느뇨?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뜬금없이 나타난 녹에게 사한이 놀라 외쳤다. 녹 역시 자신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침입한 자들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열중하던 무언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아, 사한이네요. 언제 오셨어요. 제가 여기에 있는지 어찌 아시고.”

녹의 몰골을 제대로 확인한 사한과 도언은 얼굴을 굳혔다. 엉망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꾀죄죄한 의복은 그렇다 치고, 낯빛이 푹 꺼졌다. 눈 밑 그늘이 턱 끝까지 내려온 듯한 모습과 두 눈이 게으르게 이동하는 모습은 거의 며칠간 밤을 새운 자의 몰골이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영혼이랄 게 없었다.

녹은 툭 하고 밀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다시 찾은 녹이 이런 얼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결계의 침입자를 발견한 이후에도 무언가를 그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제 마력을 담뿍 담아 땅에 금을 긋고 있었다. 그 금은 땅끝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땅이 녹의 마력으로 흠뻑 젖었다. 덕분에 결계 안에서는 어딜 가든 녹의 마력으로 넘쳐흘렀다.

“근데 그 애는 누구예요? 사한이 붙어 있을 정도면 마법사는 아닐 테고.”

녹이 자연스럽게 도언을 모른 척하기 시작했다.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저를 보고 녹이 내뱉은 첫마디에 어린 도언은 빈정이 상했다.

- 모르는 척 안 해도 된다. 이 녀석 체질이 좀 희한하게 변해서 네 마법이 먹히지 않았어.

“……?”

입만 호선을 그리며 텅 빈 미소를 보인 녹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사한이 한마디 하는 걸로는 와닿지 않나 보다.

하긴, 어찌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으랴. 자신해 마지않던 기억 조작이 도언에게 전혀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덕분에 모든 기억이 생생한 도언은 마법사와 담을 쌓고 일생을 보낼 수 없단 사실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게 녹부터 마법사였다. 그리고 도언은 녹과 인연을 끊을 생각이 죽어도 없었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지 오기가 생긴 도언은 녹에게 맞춰 보기로 했다. 이에 사한이 자세한 설명을 하기 전에 도언이 나섰다.

“하, 네. 저는 어쩌다 사한과 일면식이 있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하나 더 소개하자면 요강을 죽도록 싫어하지요. 그런데 지금 엎드려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녹은 도언 앞에서 제 마력을 마음껏 바닥에 쏟고 있었다. 마법사와 관련된 그 무엇도 도언이 겪게 해선 안 된다며 기억까지 바꿔 놓은 자치고는 모순적인 행동이었다. 물론 녹은 잘못한 게 없었다. 마력을 뽑아내는 게 인간의 눈에 보일 리가 없었으니까. 인간의 눈에는 그저 땅을 손바닥으로 쓸고 있는 기행으로만 보일 테다.

도언이 결계를 뚫고 찾아왔음에도 땅에 마력을 쏟는 걸 멈추지 않던 녹은, 제 기행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번역해서 읊어 주었다.

“소원을 그리고 있지요.”

경어까지? 아주 모르는 척을 제대로 할 셈인가 보다. 도언은 녹의 수수께끼 같은 말보다 자신에게 하는 어투에 훨씬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사한은 아닌가 보다.

- 너 이 녀석아. 아무리 그분의 마력을 몸에 담았다고 해도 그렇지. 이 부근이 네 마력으로 흠뻑 젖었구나. 얼마나 쏟아 넣은 게냐. 네가 씨앗이 아니었다면 마력 고갈로 벌써 백골이 되었을 거다. 게다가 드물게 잘 만든 네 결계가 사라지면 온 세상의 마법사가 네 마력을 맡고서 몰려들 텐데, 무슨 생각인 게냐.

“결계가 사라지기 전에 마법사들은 세상에서 없어질 거니 상관없을 겁니다.”

나사 하나 빠진 듯 대꾸하던 녹은 고개를 땅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둘이 제 옆에 없는 양 다시 마법진 그리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는 걸까. 눈이 마주친 도언과 사한은 눈빛으로 녹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제아무리 자신의 기억을 허락 없이 뚝 조작하는 파렴치한 짓을 했더라도 녹은 녹이었다. 걱정이 샘솟은 도언은 녹의 상태를 물었다.

“도령.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만, 언제 마지막으로 눈을 붙이신 겁니까?”

“모릅니다. 제가 만들고 있는 이것은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게 중요하거든요. 끊기면 말짱 꽝입니다. 저야 혼자이니 제가 몇십 명 노릇을 할 수밖에요.”

숨김없는 대답이 술술 나온다. 도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에 그려진 마법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밤새운다고 나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녹이 정신없을 만했다. 그런 상태인데도 자신을 모르는 체하다니. 철저하기도 해라.

- 대체 그 무수한 밤을 새우면서 무슨 식을 세우고 있는 게냐. 내 짧지 않은 삶을 살며 이리 많은 마력이 담긴 마법진을 본 적이 없다. 하가에서 봤던 마법진도 네가 그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소원이라니. 무슨 소리냐.

녹이 끊어져 있던 선을 마저 잇고는 땅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는 허리를 뒤로 꺾어 뻐근한 몸을 풀었다. 하늘의 달을 확인한 녹이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초승이군요. 세계수가 제게 이 마법진을 꿈속에서 처음 보여 줬을 때도 초승이었는데…. 이 마법진으로 세계수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제 안의 자신을 찾아오면 소원 하나를 들어준댔어요. 어떤 소원이든지요.”

- 무슨 그런, 세계수는 네게 힘을 주고 사라졌다. 찾아가다니 말도 안 되는….

녹이 박수를 한 번 쳤다. 기름에 불을 붙인 것처럼 순식간에 마법진이 초록색으로 타오르며 주위를 밝혔다. 야트막한 숲 전체가 커다란 녹빛 화마에 집어삼켜졌다. 잠을 자지 못해 거뭇한 녹의 눈가 위로, 텅 빈 눈동자에 광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산 전체가 굉음을 내며 움직인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마법진 구석구석에 박아 놓은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피뢰침처럼 녹의 마력을 받아먹었다. 덕분에 산을 덮는 큰 마법진에도 불구하고 녹의 마력이 골고루 스며들었다.

- 쓸데없는 마력 낭비가 아니냐!! 그만두어라!

“아뇨. 이번 한 번이 기회입니다. 제가 깨어나 있는 단 한 번 동안만 마법진을 기억나게 해 준 댔단 말입니다. 잠들어 버리면 잊어버려요. 다음에 다시 그릴 수 없습니다.”

마력이 폭포처럼 마법진 안으로 쏟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법진의 빛줄기는 공고해졌다. 사한은 녹의 마력에 짓눌려 눈을 뜨지 못했고, 도언은 마법진의 날카로운 빛에 눈을 뜰 수 없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엄청난 압도감.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곳을 직시하는 듯, 마법진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을 누르는 부담에 질식사할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미물들은 모두 땅속으로 몸을 숨겼고 새들은 하늘로 도피했다.

도언은 열매의 힘을 빌어 가까스로 눈을 떴다. 녹은 마법진과 물아일체가 되는 중이었다.

마력은 숫제 바다 밑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 녹이 마법진을 만들 때 쏟아부은 마력은 지금에 비하면 약과였다. 마법사에게 마력이란 생기 그 자체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아낌없이 들이붓는 형태는 사한이 봤을 때 자살행위였다.

“마침 사한이 왔으니 바로 발동하는 겁니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쓰러져 자고 일어났을걸요. 달을 보니 제가 한 달 동안 잠을 못 잤더라고. 하하.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 그놈의 부탁은 끝도 없이 나오는구나. 무엇이냐!

“이 거대한 마법의 대가 말입니다. 저와 합이 맞는 정령의 도움을 받는다면 대가를 줄일 수 있습니다. 세계수는 저를 주인 삼은 열매와 함께 오면 딱이랬지만, 열매는 그때 세계수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차선으로 제가 주인인 영물이 필요하지만 당연하게도 여의치 않고. 하지만 사한도 나쁘진 않죠. 좀 도와주시죠.”

- 어이구, 빨리도 말하는구나. 그래, 그 꿈속 사이비가 말한 대가가 무엇이더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사한은 녹을 타박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사이비라 칭하는 걸 보니 녹에게 마법진을 알려 준 존재가 세계수란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타박에 녹은 희미하게 미소하며 운을 뗐다.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이 마법진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대가는 제가 받는다고 했으니 저를 도왔다고 사한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와 만나는 시간 동안 잠시 잠드는 것뿐이에요.”

자신의 안위는 아무것도 아닌 양 구는 녹의 태도에 도언의 손톱이 주먹 안을 파고들었다. 괘씸죄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허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한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 아니, 이 정도 마력이라면 내가 도와줘도 가볍게 안 끝날 거 같은데…. 아직 넌 마력 조절도 서툴고, 나와의 합도 그리 깊지 않다. 까딱 잘못하다간 너의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걸 알고는 있느냐!

“물론 운이 좋으면 이 힘과 함께 저 역시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만, 가능성일 뿐이죠. 여하간 제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사한이 저를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서 죽….”

“대체 그놈의 소원이 무엇이길래 이리 나오시는 겁니까!”

천둥 같은 소리가 끼어들었다. 단단히 뿔이 난 아이는 강한 바람에도 성큼성큼 녹을 향해 다가왔다.

“사한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당신이 하려는 이것. 실패할 확률이 높다지 않습니까. 대체 어떤 소원을 위해 그리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운이 좋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무슨, 아침밥이 무언지 알려 주는 듯 이야기하는 모습이라니. 녹이 어디까지 가려는지 얌전히 지켜보자던 도언의 다짐은 철저하게 깨졌다. 녹이 도언의 질문에 자애롭게 대답해 주었다.

“마법사들의 멸족이지요.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마법사에 고통받을 일이 없을 겁니다.”

“모두요? 저를 포함한 모두요? 제 앞에서 녹이 떠난다면 저는 분명 평생 고통스러울 텐데요. 이는 아십니까?”

- 그래!! 말 한번 잘했다. 꿈속에 나타난 게 세계수인지 악귀인지도 모르는데 홀랑 넘어….

“도령에게는 죽음이 그리 쉽습니까? 분명 그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있을 겁니다!”

- 맞아!! 나는 지금도 부화한 열매 녀석에, 네가 부탁한 이 녀석까지 덤으로 돌보느라 너의 부탁을 들어줄 시간도 부족….

“왜 항상 제멋대로입니까? 제멋대로 기억을 바꾸고, 제멋대로 떠나고, 어디까지 가나 했더니, 하, 이젠 죽기까지요. 심지어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요. 말해 보세요. 하녹.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심화되는 도언의 감정에, 눈치 없이 끼어들었던 사한이 입을 다물었다. 도언을 데리고 온 사한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무니, 그제야 녹이 도언에게 반응했다.

“대관절 무슨 소리십니까? 제 이름은 어찌 아시고요. 사한이 알려 주셨습니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폼이 가관이었다. 분명 이리도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녹은 아무래도 이 같잖은 연극을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인가 보다. 도언은 허리춤에 걸린 검집에서 검을 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수 있는지 봅시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건… 도도잖아.”

도언을 모르는 척하던 녹은 도도는 아는 척을 해 왔다. 도언은 기가 찼다.

“하. 인제 그만 하시고 멈추세요. 당신이 제 기억을 멋대로 주물렀으니 저도 한 번쯤은 당신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겠죠.”

“음…. 도도가 왜 여기에…. 분명 하진이와 함께 사라졌을 텐데….”

자기는 모르면서 또 하진이는 안다 한다. 도언은 뒷목 잡기 직전이었다. 끝까지 모르쇠로 구는 하녹에 사한 역시 나섰다. 아무래도 답답하게 구는 하녹에게 한마디는 해야겠다.

- 이제 그만 모른 척해도 된다. 네가 내게 맡긴 이 녀석, 하가의 실험에 유일하게 성공한 녀석이다. 그래서 그런지 네가 심어 놓은 열매까지 부화했지 뭐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몸에 깃든 혼돈은 이 녀석에게 최고의 마방력을 주었지. 네가 도언에게 건 마법이 듣지 않은 이유다. 아무리 모르는 척을 해도 이 녀석은 너를 잊지 않았어.

사한의 말을 들을수록 녹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사한은 다시 정리해 주었다.

- 그러니까, 결국 네가 이 녀석에게 몹쓸 짓 한 거다. 아무리 안전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더라도 그건 네 마법을 들었을 때의 최선이지. 나도 이 녀석이 그런 체질인지 몰랐다니까? 까먹은 척 그만하고 얼른 사과의 포옹이나 한번 해 줘라.

사한은 마치 싸운 자식들을 건성으로 화해시키려는 부모 같았다. 그러나 농담의 기색은 어디에도 볼 수 없어 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람? 녹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든 표정이 뜻하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 어허. 내 말 못 믿는 거냐? 아니라면 우리가 어찌 네가 있는 장소를 이리도 잘 찾아왔겠느뇨. 지금 네가 친 은신 결계는 나도 모를 정도로 가장 정교한 결계이거늘. 도언에게 깃든 열매가 원주인인 너의 냄새를 기막히게 맡아서 찾아낸 것 아니겠느뇨.

“도언이요?”

- 그래. 안도언, 결국 이 녀석은 아쉽게도 너의 바람대로 마법사와 분리된 삶을 살지 못해.

“안도언?”

“네, 저요! 제 앞에서 모르는 척을 하실 거라면 하진이에 대한 얘기도 꺼내지 마셨어야죠. 아니, 도도부터 아는 척도 마셨어야죠. 제가 도도를 만들었으니까요.”

“도도를 만들어…? 도도를 만든 건 하진이 오빠인데?”

“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진이 오빠가 둘이라도 됩니까?”

마법진을 향해 광풍처럼 쏟아지던 마력이 드디어 사그라들었다. 이제 고집을 꺾은 걸까?

“아무리 녹이 저를 떨어뜨려도 저는 당신의 곁을 지킬 겁니다. 당신의 마법은 제게 듣지 않으니 떨어질 생각 하지 마시고 얼른 지금 하는 도박을 그만두시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마법이라니요.”

녹이 얼굴을 굳히고 눈썹 뼈 부근을 손목으로 지긋하게 눌렀다. 저 얼굴에 담긴 뜻은 무얼까. 고집을 관두자고 결정할 때 나오는 표정인가, 아니면 무언가가 떠오를 때 나타나는 표정인가. 녹의 표정을 누구보다 잘 읽는 도언도 이 순간만큼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해석보다 설득이 급했다.

“제 기억을 조작한 것보다 더 심한 짓입니다. 당신 없이 낯선 곳에 홀로 깨어났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그때 생각 하면…. 하. 저는 당신과 다시 만날 생각에 살아 있었어요. 제 의미는 당신이란 말입니다. 정녕 제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마법진에 들이붓던 마력이 완전히 멎었다. 지진이 인 듯 흔들렸던 땅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했고, 동쪽에서는 여명이 밝아 왔다. 한껏 혼란스러워하던 녹은 모든 행위를 멈췄다. 드디어 녹의 고집을 꺾었나. 도언은 기껍게 녹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다가오는 도언을 멍하니 보던 녹의 한쪽 코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입에도, 귀에도,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선혈이 흘렀다. 당사자인 녹은 그저 장승처럼 서 있을 따름이었다. 되레 당황한 도언이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녹!”

- 이 녀석아, 생각을 멈춰!

사한이 녹에게 달려들어 그의 이마를 긴 몸통으로 둘렀다. 사한의 몸체가 빛나더니, 일순 어디선가 나타난 나비들이 녹의 몸체를 한 번 감싸고 사라졌다. 사한의 기적을 직통으로 맞은 녹은 눈을 감고 쓰러졌다. 도언이 쓰러지는 녹의 몸을 받아 눕히며 긴박하게 물었다.

“뭡니까? 어찌 된 겁니까?”

- 얼른 조처를 해 괜찮으니 진정해라. 이건 봉인한 정신 일부를 억지로 꺼내 들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어디 좀 보자.

녹을 감싼 사한의 몸체가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도언은 별일 아니라는 사한의 선고를 간절히 기다렸다. 녹의 손을 잡은 손끝이 도언의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한참 녹의 머리를 진단한 사한이 마침내 입을 뗐다.

- 기억이 봉인되었다. 너와 관련된 기억 전반이 아교를 발라 접어 굳힌 양 딱 붙여 버렸구나. 내 참, 이 녀석 고집하고는…. 참아 봤자 2개월 가나 싶었더니만 아예 기억을 봉인해 버릴 줄은….

사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 네가 부러 너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킬 때마다 정신에 손상을 입게 될 거야. 아교 칠로 붙여놓은 걸 힘으로 잡아 뜯게 되니 그럴 수밖에. 이 마법진을 만들었다는 기억은 알아서 잊겠구나. 워낙 무리해서 말이지. 여하간 일단 너에 대한 기억을 다시 봉합하마. 응급조치다.

“녹이 저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고요?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 둘 중 하나겠지. 이 아이가 스스로 기억을 되찾게 하거나, 아니면 네가 하녹을 잊고 살아가거나. 전자를 선택한다면 인내만이 답이 될 거다. 스스로 기억을 찾는다는 것 역시 장담할 수 없어. 아무리 기다려도 평생토록 기억을 되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한의 말은 잔인하기에 사실이었다.

- 후자를 선택한다면 내가 도와주마. 기억하는 게 정 괴롭다면 잊게 해 줄 수 있어. 너에게 마법은 듣지 않더라도 너의 허락하에 기적은 듣는다고 했지. 이제는 너의 선택이다. 어떻게 할 거냐?

“저는….”

시야 한가득 쓰러진 녹의 모습이 들어찼다. 도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절대 녹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긴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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