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불행의 종말
“절대, 안 됩니다.”
녹이 마법진을 소환할 때까지만 해도 입을 꼭 닫고 있던 도언은, 누가 볼세라 건물의 작은 방으로 녹을 데리고 갔을 때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녹을 카우치에 앉히고서 그의 어깨를 잡고는 한 음절씩 무겁게 내뱉었다.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마법은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도언의 흥분이 지나쳤다. 노려보는 안광은 또 얼마나 뜨거운지, 녹은 자신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어 뚫린 곳이 없나 확인할 정도였다. 매끈한 얼굴을 확인한 녹은,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인 채로 그의 진정을 도모했다.
“워워,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고….”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저것만 발동하면 안가의 목표도 단숨에 이루는 거라니까? 세계수가 소원을 들어준다 했잖아. 그렇다면 덕분에 저주로 엮인 진예 역시 안전할 테고. 전쟁이 순식간에 끝나기까지. 다 좋잖아. 대체 그 좋은 마법진을 왜 숨기고 있었어? 사방에 결계까지 쳐 놓고 말이야. 그대로 까먹을 뻔했잖아. 이야, 못 찾아서 없어진 줄만 알았네.”
“분명 녹이 이럴 테니까요.”
도언이 열로 들끓던 눈을 감고 차갑게 대답했다. 과열되고 있던 주변은 한순간에 냉골이 되었다.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바꿔 버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다.
“하나만 물읍시다. 정말 진심입니까?”
등줄기를 잇는 서늘함이 녹을 나무랐다. 녹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벽지를 바라보았다. 아, 벽지의 저 무늬, 왠지 토끼와 닮았다.
“발동을 제지할 당시 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결심으로 당신을 떠나보냈는지 모르실 겁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억지로 다그칠 수 없죠. 괴롭다고 당신을 잊는 건 말이 안 되었습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살아가 볼까 결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당신을 다시 마주친 후 결정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도언을 아무것도 모르는 공자라 여겼을 때 말하는 걸 거다. 목소리만큼은 떨림이 없었지만, 녹의 어깨를 잡은 악력이 점점 강해졌다. 어깨에 올려져 있는 도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도언아, 힘 좀….”
“그저 마법사를 세상에서 지우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곳에 안가를 세워 마법진을 숨기지 않았겠죠.”
빌어먹을. 도언이 낮게 욕지거리를 삼켰다. 당시 녹이 온 힘을 다해 만든 마법진이니만큼 강력해서 그를 없애고 싶어도 제 피를 이용해 숨기는 게 최선이었다.
“당신이 이를 발견만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든 일단 발동부터 했을 거 아닙니까. 대가가 자신의 무엇이 되었든, 녹은 상관하지 않았겠죠.”
녹의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도언은 신통하게도 알아맞혔다. 녹 역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앞뒤 재지 않고 냉큼 발동시켰을 거다. 소원을 이루기만 한다면 자신이 죽어 세계수가 난다고 해도 마법사들은 마법을 부리지 못할 거 아닌가. 그렇다면 살아서 그 힘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한 당시는 도언의 기억을 봉인한 직후였다. 녹은, 정신 차리면 자석처럼 도언 주위로 이끌리는 자신을 참기 힘들어 그를 아예 제 인생에서 지웠다. 도언이 자신을 기억할 거라는 의심이 한 점도 없었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무거운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니, 녹은 무너져 내렸다.
세계수가 자신을 만나는 조건으로 소원을 이루어 준다 했던 것 역시 녹의 그런 상태 때문이었다. 제가 선택한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는커녕 죽니 마니 하니, 소원이라도 이루어 준다 하면 삶의 의지를 다지리라 여겼다.
그 마법진을 발동하는 데에 녹을 도와줄 정령이 없다면 세계수조차 녹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래도 그거라도 안 하면 녹이 부러져 버릴지도 모르니 세계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운이 좋으면 부작용이 없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도언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녹에게 하나하나 알려 주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드디어 당신 안에 숨겨 있던 저를 되찾으셨습니다. 제가 이룬 모든 건 당신의 안녕을 위해 꾸린 것들이에요. 이제 마지막 단계만 밟는다면 마법사들의 횡포는 사라질 겁니다. 당신이 신경을 쓸 틈도 없이 진행될 일이란 말입니다.”
확실히 도언은 거사가 진행되기 전, 이곳에서부터 멀리 녹을 보내려고 했었다. 녹이 전력에 추가된다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수월하게 진행됨을 안가의 가주가 모를 리 없음에도 그러했다.
“이걸 발동한다고요. 어찌 그리 쉽게 말씀하십니까? 설마 제가 당신이 지불할 대가를 까먹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라면 안가의 희생에 비해 당신의 목숨이 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말씀해 보세요. 얼른요.”
아무렇지 않게 본인을 내던지는 행태에, 도언이 녹을 다그쳤다. 녹이 만든 마법진은 도언이 짜놓은 경우의 수에 발을 담가 본 적조차 없었다. 그 대가로 녹이 무엇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험으로 녹을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에 열이 오르는 도언에 비해 녹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건지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어깨에 붙은 도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힘주어 떼어 내던 녹이 도언의 다그침에 웅얼거렸다.
“발동 조건으로 기억 몇 조각이지 설마 목숨까지는 안 갈….”
“사한도 없고, 당신을 주인으로 여기는 정령도 없습니다. 목숨까지 안 갈지 확신하십니까?”
“…아니, 그래도 그것보다 확실하게 완승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다고…. 진예까지 납치된 마당에 말이야.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았고, 앞으로 남겨질 애들이 마법사에게 고통만 받지 않는다면 여기까지가 내 역할….”
아무리 생각해도 효율적인 방법을 두고 빙빙 둘러 가려는 안가의 가주에게 되도 않는 설득을 지껄이던 녹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제 무릎 위로 물 한 방울이 똑- 하니 떨어졌다. 도언의 뺨에서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도언은 표정의 변화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붉게 물든 눈과 떨어지는 물방울만 없었다면 아무도 도언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도언의 눈물을 본 녹 역시 당황으로 얼룩졌다.
어느새 녹의 어깨를 붙잡던 도언의 손힘이 눈에 띄게 빠졌다.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흐르며 녹의 바짓단을 적셨다. 네 방울째의 눈물이 떨어지고 나서야 굳었던 몸이 풀린 녹은, 얼른 도언의 볼을 감싸 엄지로 눈물을 허겁지겁 닦아 주었다.
“아니, 갑자기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녀석이.”
위로에 재능이 없는 녹이 안 하느니 만도 못한 말을 서툴게 내뱉었다. 아무리 녹이 도언의 볼을 닦아도 퐁퐁 솟은 눈물은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울고 있는 눈과 다르게 단 한 점의 떨림도 없는 도언의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제가 앞서 했던 모든 말은 사실입니다. 만일 당신의 목숨이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열쇠라고 하더라도 저는 세상을 택하지 못합니다. 제 진정한 세상은 언제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세상이 본인 귀한 줄 모른답니다. 제게서 또 본인을 빼앗겠답니다.”
눈물 때문에 어룽거리는 시야에도 불구하고, 도언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또다시 저를 당신의 역사에서 버리실 거냐고 묻는 겁니다. 모든 시간을 포기해도 될 만큼 제가 그렇게 당신께 아무 존재도 아닙니까? 저는 대체 당신께 어떤 존재입니까.”
담담한 어투와 다르게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 아릴 정도로 처연했다. 제가 지닌 상처를 가감 없이 내보이는 도언은 애달팠다. 도언은 지금껏 녹을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갔다. 기억도 봉인하고 제멋대로인 자신의 황제를 붙잡아 두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그가 기억을 되찾기만 한다면, 녹은 자신의 곁을 다시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 역시 도언에게 있었다.
그러나 녹이 말하는 걸 지금 보니 잘못 생각했나 보다.
도언을 생각한다면 저리 쉽게 자신을 내던지지 못할 거다. 그러나 녹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희생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아무런 거리낌조차 없었다. 저런 단언을 하며 제게 상처를 주는 자인데도, 도언은 녹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선택을 후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평생토록 녹을 알게 된 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운명을 확신한 도언은 쉽게 본인을 바치려 하는 녹에게 눈물이 날 만큼 화가 났다.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던 자신의 본심을 내비치며 녹을 다그쳤다. 이에 녹은, 천천히 고갯짓했다.
“아니야… 내가 너를 버리다니… 그게 무슨…. 정말 미안하다. 내가 내 생각만 했어. 마법진은 건들지 않을게.”
무언가를 가지지 않겠다는 강박을 지니고 살았던 녹이었다. 관계 역시 그 무언가에 포함되었다. 마법사들의 공격과 그에 따른 인과는 저 홀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아무리 외롭고 고되며, 자신의 감정을 나눌 친우 한 명 없어도 차라리 나았다. 자신만 견디면 된다. 그러면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은 오로지 저 하나뿐일 거다. 그를 진리로 삼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람이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찌 홀로 설 수 있겠는가. 외로움에 사무칠 때쯤 도언이 나타났다. 그는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녹을 붙잡았다. 그리 부드러운 방법은 아니었다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분명 녹은 참지 못하고 도망갔을 거다.
도언은 녹이 그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온기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 결국 녹은 자신이 걱정하던 바대로 상황이 흘러갔음을 알았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곁을 내어 주지 않을 거란 굳은 다짐은 이미 녹아내려 발치를 적셨다.
탐욕이든, 동경이든, 세계수의 힘만이 제 존재 가치를 결정했던 세상에서 도언은 유일하게 자신을 제대로 바라봐 준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를 지키면 지켰지 버릴 자격이 없었다.
그저 이런 방향으로 지키면 될 줄 알았다. 이 방향이 맞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건 모든 걸 기억하는 도언에게 크나큰 상처였다.
아무도 곁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지 않아서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자신만 희생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은 곧 자신을 소중히 하는 상대의 희생이 될 수 있었다. 타인의 마음에 깃든 이상, 이미 자신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만 울어. 내 참, 너가 이렇게 나오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남에게는 약한 모습 한번 보여 주지 않는 그는 녹의 앞에서 단단한 갑옷을 벗었다. 무엇이 그리 서글픈지 도언의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녹은, 서 있는 도언을 잡아채 카우치에 쓰러트렸다.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내비치는 도언의 위에 올라 아직도 흐르고 있는 눈물을 쓸어 주었다.
“네가 내게 어떤 존재냐고.”
녹은 자신이 다가설수록 자연히 감기는 도언의 눈 위에 키스했다. 사과까지 하고는 마법진 발동 역시 안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도언은 여전히 서러운가 보다. 찡그리지도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린다. 대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기에 우는 순간까지 표정이 없는 건지.
도언의 위에 몸을 겹치고 그의 눈물을 간질이는 입맞춤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고 있자니, 도언의 불퉁하려 노력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 하십니까? 이게 혹시 이승의 마지막 인사라면 사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이 숙였던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켰다. 도언이 딱딱한 얼굴로 녹을 올려 보고 있었다. 녹은 도언의 기가 막힌 한 소리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뭐 그렇게 하냐.”
“언제나 제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은 좀 억울하다. 내 죽음을 내가 가볍게 여겼으면 그리 구질구질하게 마법사들을 피하면서 살지도 않았어.”
“그건 당신의 죽음을 중히 여긴 게 아니라 세계수의 재림을 중히 여기신 거겠죠. 당신이 죽는다고 세계수가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지금껏 이리 열심히 살아왔겠습니까?”
“…….”
미쳤네. 대체 어떻게 알았지. 괜스레 찔려 뜨끔한 마음은 위기를 대처할 반사 신경 또한 먹어 치워 버렸다.
“하.”
녹이 아무 말 못 하자, 도언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이 왠지 꾸중처럼 들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도언이 가볍게 누웠던 상체를 일으켰다. 도언의 몸 위에 있던 녹의 몸이 기울어졌지만, 도언은 그의 등을 안정적으로 받쳤다. 아직도 도언의 위에 있는 녹과 앉은 도언의 눈높이가 대충 맞아 들어갔다. 한바탕 눈물을 흘린 도언은 아직도 말문을 잃은 녹에게 단단히 일렀다.
“방금 당신이 만든 마법진은 건들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랬지.”
“한 번에 끝날 획기적인 방법을 놔두고 어째서 돌아간다 말씀하신 겁니까?”
“그야, 도언이 너의 얘기를 들어 보니까….”
“제 말이 당신에게 그리 영향이 있었습니까? 제가 뭐라고요. 당신에게 저는 그저 안가의 수장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그저 하진이의 오빠라거나. 혹은 안전을 이유 삼아 당신을 가두고 자유를 빼앗은 파렴치한일지도….”
도언은 말을 내뱉을수록 자기 자신이 상처받고 있었다. 놔두면 끝없이 터져 나오겠다. 녹은, 도언의 주장에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대신에 도언의 목을 재빨리 감싸고 입술을 겹쳐 그의 말을 막았다.
단번에 자학의 말을 쏟는 입을 봉인하고 도언의 못된 생각 역시 한 번에 증발시켰다. 이는 예상보다 효과가 뛰어났다. 녹은, 도언의 벌어지는 눈꺼풀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탐험에 집중했다.
기억을 찾기 전 종종 도언에게 입을 맞추던 녹은 기억을 되찾은 이후에도 그에 거리낌이 없었다. 도언이 언제부터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도언의 굳은 혀를 쿡쿡 찌르며 스치던 녹은, 그대로 떨어져 개구지게 물었다.
“어떤 멍청이가 파렴치한한테 먼저 이런 걸 하겠어. 안 그래?”
“…….”
진자운동을 하는 도언의 홍채를 보니 확실히 자기 비하는 몰아낸 듯 보였다. 도언은 항상 기습에 약했다. 녹이 도언을 깜짝 놀라게 할 때마다 도언은 자신의 진심을 숨김없이 내보였다. 바로 지금처럼.
녹의 기습에 탈출했던 도언의 영혼이 육신으로 귀환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는지, 도언이 보여 주는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재빠르게 본인의 입을 막고는 귀 끝까지 빨개졌다. 녹이 입술을 가린 도언의 손등에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
“볼 장 다 본 사이에 왜 그런 반응이야? 누가 보면 내가 파렴치한인 줄 알겠어.”
도언의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기억을 되찾은 녹이 키스하는 건 또 다른 모양이다. 순진하게 구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은근히 유쾌했다. 녹은,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선 쿡쿡거리며 저번에 봤던 타로점을 떠올렸다.
이제야 전에 보았던 타로가 이해되었다. 도언이 녹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카드를 뽑았을 때, 과거를 나타내는 카드에는 열 개의 칼이 꽂혀 죽은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도언을 잊음으로써 도언의 마음을 카드의 그림처럼 난도질한 건 녹이었다.
상대의 허락 없이 기억을 휘두르는 게 얼마나 무례한지 잘 안다. 기억은 온전히 도언의 것이었고, 그를 조작하는 건 어찌 보면 도둑질이다. 아프지 말라는 속 편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유산이 될지도 모르는 추억을 앗아 갔다.
그러나 도언은 녹을 잊지 않고 기억의 고통을 그대로 버텼다. 심지어 녹을 자신의 별로 여겨주었다. 어둠 속에서 동경처럼 박힌 그 반짝임 말이다.
녹은 살아오며 철저하고 처절하게 외톨이로 지냈다. 자신과 사람들이 엮일 무수한 가능성을 죽이며 살아왔다. 이미 엮였던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지웠다. 그것이 그들을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며, 그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어찌 보면 마법사보다 더 폭력적인 건 녹, 자신일지도 몰랐다.
도언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과분했다. 그가 이룬 모든 것, 그리고 그가 바꿀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 아무와도 엮이지 않고 홀로 살아왔다고 여겼거늘, 자신을 이리도 열망하는 자가 세상에 존재했다.
도언에게 녹은 해쳐야 할 존재거나 그저 우러러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하녹 그 자체였다. 그에 녹은, 처음으로 자신이 씨앗이 아닌 자신으로서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실감했다. 씨앗 이전의 자신을 기억하는 이도 도언이 유일했다.
모든 점에서 도언은 녹의 일생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너가 내게 어떤 존재냐고 물었었지.”
녹이 도언과 맞닿았던 이마를 떼고는 도언의 코끝에 입 맞췄다. 가벼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불같이 화를 내던 도언은 어느새 다른 의미로 녹에게 몰입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게 보였다.
녹이 도언을 끌어안으며 그의 목덜미를 느른하게 핥아 올렸다. 종착지는 그의 귀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녹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보다 많은 의미가 담긴 존재지만, 일단은 이런 일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해 둘까.”
“…이건 반칙 아닙니까. 왜 하필 지금….”
“반칙은 무슨, 그렇게 치면 네가 지금까지 나한테 벌인 모든 일이 반칙이거든?”
도언은 반칙처럼 스며들었다. 몇 달간의 도언의 집살이가 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만일 녹이 기억을 찾아 식신 떼에 습격당한 도언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더라면, 자연히 도언 역시 녹을 제집에 둘 이유를 잃게 될 터다. 그리고 도언을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녹은 도언에게 그저 고마움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저 그런 감정으로 마무리 짓기에는 도언과 함께했던 최근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 참, 어릴 적 가족처럼 자랐던 동생이라 여겼다면 으레 선부터 그어 두었을 텐데, 제가 그 도언임을 감추고 다가오니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감정이라니. 처음에는 도언의 정체에 대해 계속 생각하느라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싶어 긴가민가했다. 스킨십이 거리낌 없어졌을 때는 제 변화에 대해 큰 경계를 안 했고, 드디어 그와 몸을 제대로 섞었을 때는 무언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정말이지 나쁘지 않았거든.
이것만은 우등생인 녹이 도언의 귓바퀴를 혀로 천천히 쓸어 올렸다. 젖은 소리가 도언의 귀를 타고 척추 끝까지 짜릿하게 도달했다.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은 녹을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던 도언이, 결국에는 그를 끌어안고는 녹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도언 본인이 녹을 이끌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질척이며 자극하는 소리에, 도언의 중심이 서서히 솟아오르는 게 녹의 엉덩이 사이로 느껴졌다. 녹이 허리를 슬쩍 위아래로 흔들며 그의 중심을 문질렀다.
“……!”
자신을 크게 끌어안은 존재가 육지에 나온 물고기마냥 퍼드덕거리는 모양이 재밌었다. 대담해진 녹은, 도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한 손을 풀어 담대하게 도언의 중심께로 가지고 갔다. 옷가지에 숨겨진 그의 중심을 꺼내는 것까지 일사천리였다. 조언이 자신에게 하는 걸 몇 번 경험해 봤을 뿐, 한 번도 하지 못했을 텐데, 빠르게도 배웠다.
“윽… 잠깐만요, 녹….”
숨겨진 도언의 중심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도언이 녹을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잠깐만이라는 대사는 항상 내 몫 아니었나? 도언의 간청에 녹에게 은근한 정복욕이 돋아 뿌리 깊은 곳부터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녹은 도언의 부탁을 못 들은 체하며 손을 추켜올렸다. 도언이 이를 악물고 등을 동그랗게 말았다. 제 안쪽으로 녹을 성마르게 끌어안았다. 녹은 지금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도언에게 베풀어진 한 모금의 오아시스였다.
녹은 제 손으로 도언의 숨소리를 연주했다. 녹의 손가락 끝에서 그의 숨결이 강도를 달리했다. 가속도를 붙여 빠르게 피치를 올리던 녹은, 순간 손을 멈추고는 남은 손으로 도언의 가슴을 밀어 냈다.
“……?”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도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붉어진 얼굴로 녹을 올려 보았다.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었던 그의 팔은, 녹의 작은 힘으로 풀린 지 오래였다. 어느새 정염에 젖은 남자가 제 밑에서 저를 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일생을 바치며 저를 기다려 온 남자였다. 그 영원과도 같은 호의를 거절할 명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녹은, 변치 않고 기다린 그에게 그리도 원하는 걸 주고 싶었다. 녹이 급히 바지를 끌러 속옷과 함께 내렸다. 그 어떤 물리적 자극도 없었지만, 이미 녹의 것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방 안에서 녹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청량히 울렸다. 그와 동시에 도언의 위에서 자리를 잡던 녹이 순식간에 그의 중심 위로 주저앉았다.
“흐으읏-”
“…!! 녹!!”
도언이 멈추라고 말릴 틈도 없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무엇도 적시지 않고 풀지도 않은 메마른 곳이었다. 준비 과정 없이 흉기가 들어서기에는 절대 불가했으나, 녹은 꿀떡꿀떡 도언의 흉기를 무리 없이 삼켜냈다. 녹의 꼬리뼈가 도언의 고환에 닿을 정도까지 깊숙이도 박아 내렸다.
녹이 이리 대범하고 신속하게 움직일지 몰랐던 도언은 그를 빼지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도 못하는 채로 허공을 더듬으며 허둥지둥했다. 허둥거리는 도언 때문에 도언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고, 녹은 그에 맞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녹이 끙끙대며 도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 작은 몸짓에 도언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 꽁 하니 얼었던 도언은 할딱이는 녹의 등을 더듬더듬 쓸어 주며 물었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당신은 대체….”
“…나 마법사잖아. 하앗, 안 아프니까… 잠깐만 가만히 있어.”
마법으로 빠르게 아래의 준비를 마친 녹이었으나, 최대로 부푼 그의 것을 담아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한마디에 도언은 지뢰라도 밟은 듯, 녹의 등을 쓸던 손짓까지 흠칫하며 멈췄다. 녹은, 망부석이 된 도언에 만족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마법으로 고통을 없애고 안쪽까지 빠르게 적셨으나 안쪽에서 늘어나는 부피감은 뱃속을 사정없이 압박했다.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작은 새가 지친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을 즈음, 녹이 퍼드덕 척추를 세웠다. 녹의 명령에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도언은 아직까지 얼어 있었지만 그의 중심은 도언의 통제 밖에 있었다. 안에서 꺼떡이며 꿈질대는 용 한마리가 녹의 안에서 미묘하게 부피를 늘렸다. 원망스러웠지만 도언의 잘못이 아닌 걸 너무 잘 아니 탓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꿈질거리며 식은땀을 쏟던 녹은, 적응할 만한 시간이 되자 천천히 허리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돌처럼 굳어 있는 도언 역시 참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지 관자놀이에 구슬땀이 맺혔다.
녹이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날 때 붉은 내벽이 함께 딸려 오는 기분이었다. 귀두가 비문의 끝에 걸리기까지 천길 같던 상승이 마침내 끝났다. 허벅지가 더 후들거리기 전에 녹은 빠르게 하강했다.
“흐으응!”
“…으윽.”
살짝 곱아 있던 등이 하강과 동시에 곧게 펴지며 가슴이 열렸다. 단지 두 번만 꽂힌 것뿐인데 왜 이리 기력이 쇠하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녹은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쉬기 위해 이마를 도언의 어깨 위에 쓰러지듯 대고 심호흡을 했다.
녹의 흉부가 크게 부풀었다가 줄어들었다. 숨만 제대로 쉰다면 모를까 이어진 곳 역시 그의 숨결에 따라 꾸물떡댔다. 모든 신경이 중심에 모인 양 예민한 도언이 그를 무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는 숫제 고문과도 같았다. 어떤 행동이 제 품 안에서 작게 바르작대는 황제를 위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녹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래야만 하나? 아니, 말만 그렇지 힘겨워 보이는데 내가 도와주면 일사천리 아닌가? 아니다, 그래도 녹이 알아서 하는 게 그가 최대한 고생을 덜어 줄 방법이 아닐까? 아무리 마법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한 장로의 비약도 쓰지 않았는데. 아니야, 한 장로의 비약보다는 녹의 마법 실력이 더 나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니지, 녹이 내뱉은 소리에 고통은 없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미치겠군. 그 전에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거지?
두서없는 도언의 잡념은 적응을 마친 녹이 꼬리뼈를 살짝 들어 올리자 뇌를 끓는 한 조각의 이명과 함께 녹아 버렸다. 아랫입술을 깨문 녹이 동시에 도언에게 붙어 오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 순간, 깨끗하게 지워진 도언의 머릿속에서 단 한 마디가 강하게 피어올랐다.
그 모든 게 뭐가 중요하겠어.
도언은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곧, 그는 녹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서는 그대로 녹을 끌어 올렸다.
“으으응!”
도언의 어깨를 짚던 녹의 손이 그의 가슴에 안착했다.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간 자극을 참느라 짓씹은 입술에 삐죽이 튀어나온 송곳니가 사랑스럽다. 자극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지만, 그건 도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상상은 달콤했지만 현실은 지독하리만큼 끈적이고 중독적일 만큼 위험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이어진 순간은 짧았다. 격한 호흡으로 마른 입안에 침을 삼키기도 전에 도언은 녹을 내리눌렀다. 단단한 끝이 붉고 쫀득한 내벽을 헤쳐 나가며 녹의 극점을 찔렀다. 녹이 자지러지기도 전에 도언은 그를 다시금 추켜올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하강. 이번에도 포인트는 정확했다.
“흐아앙! 흐읏, 흥, 아앗!”
쉴 틈 없이 내뱉어지는 숨에 입 안쪽이 사막처럼 버석거렸다. 철퍽대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내벽 안쪽이 간지러웠고, 도언은 그곳이 어딘지 어찌 알고 자신의 중심으로 시원스레 긁어 주었다. 쾌감이 터질 때마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곱아들었던 발가락이 곧게 펴졌고, 무언가 붙잡지 않으면 쉬이도 꺾여 버리는 허리 때문에 떨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녹은 도언의 등 쪽 옷가지를 절벽 위 동아줄마냥 그러쥐었다. 시소를 탄 듯, 흔들리는 시야에 비친 풍경이 매섭게 바뀌었다.
녹은 드러난 자신의 중심을 무언가에 문지르고 싶어, 도언의 배에 닿기 위해 허리를 흔들었다. 제 스스로 제 안에 도언을 채우고 빼내며 쾌감을 채웠다.
목선이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꺾었다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가서는 붉게 물든 눈가가 적셔지기도 했다. 자꾸만 손톱이 도언의 등으로 박혀 들어갔다. 몰아치는 감각에 꼭 감은 눈을 가까스로 떠 보니, 도언이 흔들리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격동 속에서 눈이 마주치니 다가오는 건 그의 입술이었다.
두툼한 혀가 입안 가득 채워졌다. 위와 아래 모두 빠듯하게 채워지는 느낌은 충만했다. 녹은, 제 다리로 도언을 끌어당겨 속박했다. 아래가 빠듯하게 채워지는 것처럼 제 심장에 상대를 채우고 싶다. 갈증인지, 가려움인지 모를 성마른 어떠한 느낌이 도언을 원했다. 그가 마음에 채워지면 묵은 괴로움과 외로움이 해갈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녹은 도언을 자신에게 채우듯 힘주어 그를 안았다.
둘의 움직임이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젖은 입구에서 나는 질척이는 소리와 이성을 잃은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힘주어 그러모은 옷가지가 녹의 손안에 한가득 말려 들어갔다. 절정에 치달으며 부족한 산소에, 녹은 이어진 입술을 떼고선 영원할 것 같던 키스에서 자유를 되찾았다. 차가운 공기가 달게 폐를 채웠다.
“하악, 하, 흐읏, 응, 핫, 하으아아앗!!”
“…크읏.”
새된 소리가 녹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한 느낌에 팔딱이는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었다. 짧지 않은 파정의 순간이었다. 도언 역시 녹과 동시에 절정을 맞이했는지, 짧은 신음을 끝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안쪽에서 꿀렁이며 요동치는 중심이 느껴졌다. 자연히 천장을 바라보던 녹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떨어졌지만 도언은 그런 그를 안정적으로 받아 내었다. 서로의 귓가에 상대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쾌감의 잔류감에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도언이었다. 도언은 축 처진 녹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며 아직도 꽂혀 있던 그를 들어 올려 빼내 고쳐 안았다.
“흐응…!”
아직도 쾌감에 잠수하고 있던 녹이 퍼드덕거렸다. 따뜻하고 점성 있는 액체가 아래로 흐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에 대한 감상을 떠올리기엔 이미 뇌가 진탕 녹아내렸다.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마법이 있다지만 어쩌자고 이런 일을 그렇게 무식하게….”
일은 일이고, 타박은 타박이던 도언은 붉게 물들어 꼼질거리는 녹에게 결국 잔소리를 잇지 못했다. 내 참, 사랑스러움 치사량이다. 한숨과 함께 잔소리를 털어 낸 도언은 붉게 물든 녹의 목덜미며, 귓가에 키스를 퍼부었다.
탈력감에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던 녹은, 그의 폭격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다. 풀린 눈으로 벽지의 문양을 의미 없이 그어 보던 녹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도언이 입 맞추는 걸 끝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듣지 않는다니요?”
“도언이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말이야. 들으나 마나 하면서 울기만 하고….”
“울기만 한다니….”
자신을 울보로 취급하는 행태에 도언은 적잖이 당황했다. 집이 불에 탈 때 입은 화상으로 고통받을 때조차 울지 않았던 도언이다. 살면서 처음 받아 보는 취급이었다. 녹은, 우는 아이를 어르듯 도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그래도 지금은 그쳐서 다행이네.”
“…허.”
기가 찼지만 도언은 말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어쨌건 녹의 앞에서 운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숨을 크게 고른 녹은 비실대며 도언에게 겹쳤던 몸을 떼어 냈다. 어이가 없는 듯한 도언의 표정이 선명했다. 그에 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쨌건, 내가 이 세상에서 맘 편히 이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내가 위험한 걸 나보다 더 못 견디는 유일한 존재기도 하고. 고맙다. 미안하고.”
“…녹….”
어이없어하던 도언의 얼굴에서 감격이 차올랐다. 녹은, 솔직히 진심을 가득 내보인 그 표정을 보고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 있는 건 가시밭길이 따로 없었다. 피투성이 발이 될 게 뻔한 그 길을 기쁘게 걸을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도언이 그를 증명해 주었다. 그가 내내 내보인 건 진심이었다. 세상을 바꿀 계획 역시 진심이었다.
도언은 녹이 걸을 가시밭길을 가꾸고 일구어 꽃밭으로 만드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가시밭을 걷는 녹이 신발을 신어도 불안해할 걸 잘 알았기에 아예 세상을 바꾸려 했다. 평범한 자라면 쉬이 맘먹지도 못할 엄청난 일이었다. 마법사 때문에 불안해하는 녹 역시 행하지 못할 일이었다.
도언이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갈았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동료를 모으고, 가문을 이루고,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 모든 계획은 현실성까지 갖추었다.
녹은, 손가락을 튕겨 뒷정리를 깔끔하게 해냈다. 어느새 보송해진 비문과 내벽, 그리고 옷가지를 확인하고는 도언의 품에서 자리를 벗어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감격에 차 있는 도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은 일이 끝난 다음에 할게. 그들이 언제 몰려온다고 했지? 분명 내일모….”
“반나절 뒤입니다.”
“뭐?? 내일모레 새벽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 말씀 안 드렸군요.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방금 청연이 일러 왔습니다.”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녹에게 한 줌 있던 여유가 사라졌다. 기억하는 자들에게 마법사들을 맡기는 건 큰 걱정이 되지 않았다. 완벽한 훈련에 완벽한 결계까지. 능력 있는 정보원 역시 그들의 승률을 높여 주었다. 문제는 진예였다. 녹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안다는 듯, 도언이 그를 안심시켰다.
“진예에겐 청연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여기 일이 너무 잘되어서 홍이 자살이라도 하면 그게 또 문제잖아. 육신 공유 저주라는 거. 인간이 명을 다하면 마법사가 죽는단 건 반대로 말하면 마법사가 명을 다하면 인간 역시 죽는단 거 아니야?”
목소리가 점점 떨려 왔다. 자신이 이곳에 없었다면 진예가 납치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음울한 자괴감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니 얼굴이 자연히 일그러졌다. 해바라기 같은 진예의 웃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홍에게 붙잡혀 울먹이던 진예의 모습 또한 함께 어룽졌다.
“진예는 정말 안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네스가 지금처럼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녹은 조용히 도언이 말한 ‘가만히’의 의미를 되짚기 시작했다. 물불 안 가리고 용으로 변해 폭주하는 게 이네스에게는 ‘가만히’의 범주에 들어가는 걸까? 상식 밖의 개념을 상식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녹의 머릿속을 꿰뚫은 도언이 이해를 위해 첨언했다.
“물론 녹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지만, 그때 말고 진예의 소식을 전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 이네스가 폭주했습니까?”
어렵게 떠올릴 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주원에 관한 언질을 미리 해 주지 않은 도언을 타박할 뿐이었다.
“분노든 환희든, 강한 감정은 그녀를 폭주하게 만들죠. 일반적이라면 녹이 씨앗이라는 사실보다 자신이 돌보는 아이가 위험하다는 사실이 훨씬 더 충격일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진예가 납치당했다는 사실보다는 당신이 씨앗이라는 사실에 폭주했죠.”
맞는 말이었다. 진예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들은 이네스는 화를 내긴 했지만 매우 이성적이었다. 반면 저가 씨앗이라고 밝혔을 때는 이성을 잃고 용이 될 정도로 폭주했었다.
“이네스 역시 진예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녀가 당신의 정체보다 진예의 안전에 관심이 없을 만큼 아이를 가벼이 여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지. 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이에게 보여 준 사랑이 거짓이라면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 없을 거다. 도언의 말을 들어 보니 확실히 납치라는 위중한 사항에 이네스가 크게 흥분하지 않았었다. 정말 진예는 괜찮은 걸까?
“하지만 중요한 건 홍이 걸어 둔 저주잖아. 인간과 마법사의 명을 공유하는 저주. 일주일 동안은 발동자 역시 해제할 수 없다며. 만일 내일 결전에서 혹시라도 홍이 죽거나 다친다면….”
살다 살다 적이라 인식한 자의 명줄 걱정을 다 해 보는 날이 왔다.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이런 거지 같은 경험도 다 해 보고 말이야. 그러나 도언은 녹의 우려는 큰일이 아니라는 듯 굴었다.
“네. 그 점이 여기에서 제일 중요하죠.”
“그래. 내 걱정도 그건데….”
“녹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가 착각하는 점이요. 아, 어쩌면 말입니다. 녹이 만든 그 마법진. 어쩌면 당신의 희생 한 점 없이 발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도언은 가능성 하나를 가볍게 제시했다. 녹은, 이후로 이어진 도언의 설명에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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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홍은 하가의 재림을 꿈꾸는 마법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숨겨진 가문인 안가를 쳐서 세계수를 확보한 후 하가를 재건한다. 그리고 그를 도운 자들은 모두 하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침 흘릴 만한 정보였다.
이에 내로라하는 각지의 마법사들이 홍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가주는 물론이고 가문에서 한 가닥 한다는 마법사들까지 빠짐없이 모였다. 물론 사람의 꿍꿍이는 각양각색이라, 하홍을 죽이고 그의 마력을 취하려 모인 자들 또한 심심찮게 보였다.
그러나 홍을 죽이려 모인 마법사들은 그를 함부로 건들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주장하는 꿈같은 미래와 단단한 기백에 백이면 백 홀려 버렸다. 모두를 홀리는 마법 같은 그 일에 마력은 필요 없었다. 세계수의 존재를 증명하며 콩가루 같던 각지의 마법사들을 끌어모은 것 역시 하홍이었다. 웬만한 이해 사항이 한 치 오차도 없이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기에 마법사들이 집합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하홍은 제 능력을 입증했다.
세계수의 힘은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었다. 허나 마법사들이 모이지 않으면 씨앗을 치는 것은 꿈에도 못 꿨다. 하지만 지금은 하녹 정도는 비벼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마법사들이 모였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마법사를 모은 하홍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
그가 안가에 직접 잠입하여 양질의 정보를 취한 것 역시 마법사들이 그를 따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가의 그 하홍이라는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그가 가지고 있는 마법학적 지식 역시 따라올 자가 없었다.
안가를 칠 작전을 나가기 전, 하홍은 모두를 불러서 격려하며 사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연설 역시 빼놓지 않았다.
‘하녹 제거가 무조건 최우선이다. 마력을 배분받아 사용하는 가문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보다 힘이 약해. 세계수 찬탈은 걱정 말고 우선은 하녹부터 제거하도록!!’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계수의 마력을 노리는 세계의 마법사들은 허공으로 손을 내지르며 환호했다.
마법으로 실제 모습을 감춰 젊은 외형이 많은 마법사들이었지만, 하가 최후의 가주라고 주장하는 저 마법사만큼은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꼿꼿이 선 그의 자세와 눈에서는 대단한 기상이 느껴졌다. 게다가 여기에 모인 마법사 중에서 저자의 마력이 가장 많은 것 역시 증명된 사실이다. 하홍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있었다. 마법 사회를 다시 한번 전성기로 이끌 혁명의 불꽃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안가 잠입과 탐색의 임무를 맡은 마법사 역시 저 불꽃과 세계수의 재림에 홀려 하홍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 획을 긋는 어제의 연설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심지어 하홍은, 자신이 안가에 투입되기 전에 따로 불러 격려의 말까지 건네주었다.
‘자네가 맡은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잘 해내 주리라 믿네.’
그에게 임명된 주된 임무는 하녹의 위치 추적과 안가로 들어갈 게이트 확보였다. 탐색 마법사는 하홍의 단단한 신뢰에 어깨를 태산처럼 폈다. 마법사로 태어나 서로가 서로를 뒤통수치는 데 익숙했기에 저런 신뢰는 처음 받아 본다. 그리고 저를 단단히 믿는 자가 그 대단한 하홍이란 사실은 뜻깊었다.
바깥에서 허락받지 않은 자가 그나마 쉽게 안가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는 천화가 가득 피어 있는 동굴, 단 하나였다. 바깥에서 귀해 마지않던 천화를 보자마자 욕심이 솟았으나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탐욕에 홀릴 때가 아니었다. 하홍이 벌려 준 결계의 틈에 비집고 들어선 마법사는, 그곳에서 천화를 채집하던 안가의 마법사 하나를 기습했다.
기습당한 안가의 일원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그가 채집하고 있던 천화가 땅에 가득 흩어졌다. 얼마나 많이 뜯었는지 귀한 꽃이 한 수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그의 마력을 취하고 싶었으나, 그 정도로 큰 마법을 쓴다면 마력 파동으로 인해 백이면 백 잠입이 들통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 마음을 물렀다.
마법사는 하홍이 건네주었던 물약을 마시고 지팡이를 꺼내 자신에게 그의 외형을 입혔다. 마력 흔적을 깔끔하게 지워 주는 물약이랬으니 아무리 그 하녹이라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감쪽같이 변장한 그는 쓰러진 자를 구석진 곳에 잘 숨겨 두고는 땅에 떨어진 꽃들과 그의 마력을 적당히 가지고 나왔다.
동굴을 지나오니 나오는 건 숲이었다. 하홍에게 들은 바대로 안가 내부는 지극히 평범했다. 숲길 아래에 광장이 보이길래 냉큼 마법으로 다가섰다. 사람들이 가득했을 게 분명한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모두가 대피한 듯 보였다.
“어! 병철아! 안 그래도 말 전해 들었다. 천화는 많이 땄어?”
누군가가 신중히 주변을 탐색하는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마법사를 병철이라 부르는 가문원은 그가 침입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허물없이 말을 걸었다.
“에게. 그게 다야? 내가 하녹 님께 부탁받았으면 아예 동굴의 씨를 말려 버렸을 텐데.”
목표의 이름이 들렸다. 변장한 자가 하녹의 심부름을 하던 마법사였다니. 운이 좋았다. 꽃다발을 구경하던 가문원이 그에게 푸념했다.
“이야. 내가 그 근처를 순찰할걸. 그럼 하녹 님 눈에 띌 수 있었을 텐데. 넌 말을 걸어 봤으니 알 거 아니냐. 어땠어? 정말 소문대로 멋지디? 잘생겼어? 아니, 목소리, 목소리는 어때. 그것보다 그분의 마력 느껴 본 적 있어? 어차피 너는 곧 다시 볼 테니까, 나 싸인 한 장만 받아 주면 안 되냐? 설마 그 수상한 마스크 모자 씨가 그 하녹 님일 거라고는….”
“병철 씨?”
“허억…!!”
조잘대며 말 잘하던 가문원의 숨이 갑작스레 넘어갔다. 광장에 타깃이 나타난 탓이다. 분명 하홍이 보여 준 하녹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조금쯤을 헤매리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이르게 그를 찾아냈다.
“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해요. 누가 병철 씨라면 분명 한 수레 뜯어 올 거란 소리를 들어서 깜짝 놀라 가지고….”
“그렇다고 이리 직접 나오시다니요…! 지금 꾼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리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에, 실물은 처음… 아니, 맨 얼굴이 처음… 아니, 그냥 전설이 처음….”
주접이란 주접은 가문원이 다 떨었다. 괜스레 자신도 부끄러워진 잠입 마법사는 그로부터 한 발짝 물러섰다. 하녹은 물러나는 그에게서 한 다발의 꽃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감사라니요. 제가 직접 하지 않아 죄송한 걸요. 저 대신 고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라도 드려야 하는데 제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아, 잠깐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해사분들께도 진행 상황 설명은 필요하니까, 일단 병철 씨만 따라오시죠.”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작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녹이 방심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마법사를 소환해 일시에 그를 덮치는 거였다. 물론 하녹이 혼자 있을 때가 적기다. 자신과 하녹 둘만 남을 때보다 더 좋은 시기란 없었다. 서두르는 하녹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 하는 그때, 안가의 가문원이 잠입 마법사의 배를 찌르며 빠르게 속삭였다.
“야, 싸인싸인싸인싸인싸인.”
눈이 벌게져서는 쏘아붙이는 꼴이 다급했다.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잠입 마법사는 이해되지 않는 그 모습을 관망하며 대꾸 없이 자리를 떴다. 저자도 마법사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씨앗을 죽여 세계수를 틔울 생각도 안 하고 꼬리를 흔드는 건지, 원. 차라리 뒤통수를 치기 위한 작전이라 한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울적하고 간절한 가문원의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하녹은 천화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음, 한 장로가 적어도 병철 씨가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는 분이라 하셔서. 사실이네요. 이렇게 뿌리 하나하나 손상하지 않고 캘 수 있는 마법사는 드물 텐데.”
제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칭찬에 잠입 마법사는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무슨 대꾸를 할지 모르겠을 땐 침묵이 최선이다. 하녹 앞에서는 무엇이든 조심해야만 했다. 찰나의 방심에 승패가 달렸다.
하녹은 그를 데리고 자꾸만 도심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간간이 보이는 푸른 망토를 입은 자들이 눈을 빛내며 그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들은 자꾸만 자신의 친구 병철에게 은밀히 하녹의 싸인을 부탁해 왔다.- 모두 묵묵부답으로 반응하고는 갈 길이나 부지런히 걸었다.
“여기입니다.”
하녹은 웬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문을 열자 드러난 건 건물이 아닌, 사막화가 진행되어 가는 황야였다. 그 판판하고 마른 들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들의 출입구인 초록색 문짝만 덩그러니 광야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문안으로 들어온 하녹은 몇 걸음 더 걸은 후, 들판의 흙을 신코로 아무렇게나 팠다. 그러고는 가져온 꽃을 대충 박아 넣고서는 다시금 흙을 신코로 대충 덮었다. 원예 지식이 아주 바닥인지 물도 뿌리지 않았다. 마른땅에 힘없이 박힌 고급 마법 재료가 비실댔다.
“천화 주변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그 마법은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미신 아십니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미신이었다. 잠입 마법사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하녹이 이 수준의 미신을 믿는다는 건 좀 의외였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는 녹이었다.
“아, 제가 믿는 건 아니고. 그냥, 이네스가 하도 성화여서요. 여하간 준비도 끝났으니 이제 돌아갑시다.”
“…이곳은 뭐 하는 곳입니까?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별다른 곳은 아닙니다. 한 여섯 시간… 정도 후에나 쓰일 공간이지요. 그동안은 모두 다른 곳에 있어요. 여하간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나갑시다. 어찌 보면 천화도 깜짝 선물이라… 하하. 이 넓은 곳에 둘만 있으려니 표류한 것 같네요. 그럼 나가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음?”
블랙홀이 나타나 온 빛을 삼킨 것마냥, 옅게 석양이 지던 광야가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였다. 마법사의 트인 눈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하홍이 준 암흑탄을 하녹 몰래 흘린 잠입 마법사는 행동에 속도를 높였다. 하녹 앞에서 마법을 쓰면 분명히 걸릴 터이니 가능한 마법 도구를 쓴다. 그것이 하홍의 지론이었고, 마법사는 차근히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겨우 한 명만 힘겹게 통과할 수 있던 안가의 결계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존재했다. 바깥쪽에서 침입은 힘겨워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게이트를 여는 건 조금의 잔재주만 있으면 쉽단 점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안가에 잠입해 결계를 연구한 하홍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다. 이에, 하홍은 잠입 마법사에게 바깥과 이어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마법 도구를 맡겼다.
마법사는 재빠르게 품 안의 종이를 반으로 찢었다. 종이와 함께 공간이 소리 없이 찢겼고, 그 구멍을 통해 어둠에 훈련된 마법사 군대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 은신의 부적을 몸에 두른 채로 하녹의 주변을 감쌌다.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씨앗을 노리는 마법사들이 어둠 속에서 둥글게 그를 가두었다. 몇백의 마법사들이 숨을 죽이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웬만해서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건 자신들이다.
암흑탄이 힘을 다해 빛이 돌아올 때가 기점이었다. 모든 마법사가 어둠보다 캄캄한 어둠에 몸을 숨기고 지시를 기다렸다. 잠입 마법사 역시 그들 틈에 섞여 씨앗이 트일 역사적인 순간을 누구보다 고대했다. 녹을 죽이기 위해 자존심 접어 가며 훈련받은 모든 이의 염원 역시 같았다. 암흑이 걷힐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암흑이 내려앉은 지 3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다.
땅, 하늘, 모든 공간을 빈틈없이 메운 수백의 사람들이 구심점이 된 하녹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모두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집중했다.
어둠이 걷혔다. 상상하지도 못한 어둠에 날을 세운 녹이 보였다. 시야가 개는 게 신호였다. 모두는 그를 향해 마법을 쏘았다.
으아아악!
역사가 바뀌는 비명이 광야에 울려 퍼졌다.
❊ ❊ ❊
꾼들과 사기가 나타난 혼란을 틈타 진예를 재운 후 사기의 근처로 데려다 둔 자는 홍이었다. 강력한 마력 교란 결계라도 인간인 아이에겐 통하지 않으리라 여겨 행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일은 홍의 계획대로 되었다. 진예의 실종을 핑계로 이네스의 의심도 받지 않고 숲속으로 들어와 녹과 마주쳤다. 본인에게 저주를 거는 건 계획에 없었지만, 도언까지 제거했다. 좋게 풀렸으니 된 거 아닌가.
모든 마법사를 안가로 출전시킨 이후 홍은 정신 마법을 걸어 아이가 알고 있는 안가의 모든 것을 불게 했다. 장로장의 집에 사는 아이이니 안가에 대한 정보량 또한 많이 가지고 있을 거다. 마법에 걸린 아이는 손쉽게 안가의 정보를 뱉었다.
그중에 마석 저장고가 장로장의 집에 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빠르게 혼자 다녀오면 될 일이건만, 하필 그 용의 집은 아이에게만 문을 열어 주었다. 결국 홍은 습격으로 안가가 혼비백산할 때를 노리기로 했다. 잠입 시킨 부하가 녹을 홀로 접선해 따라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안가의 결계를 찢고 침입했다.
안가의 광장 위 공간이 갈라지고, 노인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진예의 뒤를 따르는 하홍과 텅 빈 눈의 진예였다.
마법에 걸린 아이가 앞장서서 광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마주치는 마법사가 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죽이리라 결심한 하홍은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놈의 저주만 아니었다면 이런 꼬마 따위 벌써 죽었을 텐데. 일주일 뒤 저주를 풀 수 있으니 딱 그때까지만 참고 죽여 버려야지. 아이가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던 부하는 이미 이곳에 파견된 지 오래였다.
아무리 많은 마법사를 모았다고 하지만 과연 그들이 녹의 습격에 성공할지는 회의적인 홍이었다. 세계수가 소멸한 지 2백 년이 지났다. 그 세월은 마법사들의 마력을 쇠약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지금 녹을 습격하는 그들은 예전에나 한자리하던 마법사들이었다. 그렇기에 홍은 보험과 함께 다른 꾀를 내었다.
안가가 가지고 있는 마석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명 그걸 모아 둔 곳이 있을 터다. 그를 회수하기만 한다면 승산이 훨씬 높아질 거다. 자신의 합류는 마석을 챙긴 이후에도 충분하다. 그때면 전투는 다른 양상을 보이겠지. 만일 실패한다더라도 안가에서 모아 둔 마석을 얻고 사라지면 본전은 찾는 거다.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있다.
결계가 찢겨도 달려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안가에 쓸 만한 모두가 습격에 방어하러 갔다는 방증이었다. 당연히 마을의 한복판에서 일을 벌일 줄 알았는데, 임무를 맡은 녀석은 꽤 신중했다.
광장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혼란을 주는 것만으로 반은 성공한 거다. 홍은 지니고 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안가에 처음 잠입하는 마법사의 손에 쥐여 준 교신 도구였다. 펼쳐진 회중시계는 전투의 진행 상황을 보여 주었다.
안가에 투입된 마법사의 절반이 사라졌다.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를 수인 군단이 나타나 마법사들을 공격했다. 수인들의 목표는 오로지 마법사들의 지팡이였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들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하녹이었다.
침입자들에게 하녹은 재앙이었다. 마법사 대여섯이 한 번에 모여 주문을 외웠지만, 녹에게 해를 가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삭제되기 일쑤였다. 하녹은 가끔 검을 소환해 마법을 가르고, 수인과 마법사들이 뒤엉킨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적군들만 찾아 제거했다. 회중시계에 비친 그 모습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역으로 실감이 났다.
역시나 하는 마음에 홍은 눈을 꾹 감았다. 일격의 기습은 실패했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것이 그 대가였다. 모인 전력이 아깝기는 하다만, 사실 저 전력으로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녹의 발을 묶어 놓은 것만으로도 저들은 쓸모를 다했다.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야만 했다.
전장에 도언 역시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제가 마지막에 한 공격이 먹혔으리라. 마석을 털기 최적의 시기였다.
홍은 서두르던 중, 분수 앞에서 진예를 불러 세웠다.
“잠깐.”
홍의 한마디에 진예의 걸음이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멈췄다. 분명 아이는 마을에 있는 분수보다 제집에 있는 마석이 훨씬 많다고 고백했으나 조금이라도 더 챙기는 편이 나았다. 홍은 분수대 앞으로 가 지팡이를 휘저었다.
분수대에 있는 모든 마석이 떠올라 홍이 펼쳐 놓은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가방 안에 마석이 끝도 없이 담겼다.
“어이고, 거, 댁은 뉘시기에 안가의 사유 재산을 그리 마음껏 가져가는 겁니까.”
해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분수대를 향해 다가왔다. 해사로서 잠입했던 시간이 있는 홍 역시 익히 아는 자였다. 그를 확인한 홍은 긴장에 뻣뻣이 굳었던 몸을 풀었다. 녹도, 도언도 아닌 안가의 마법사 하나 해결하는 것쯤은 껌 씹기보다 쉬웠다.
“혹시 동굴에서 저를 친 사람이 당신입니까? 혹이 무지막지하게 났다고요. 해사단 유니폼도 막 갈취하시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병철이란 이름이던가. 하는 말을 보니 잠입에 이용당한 모양이다. 해사가 홍에게 지팡이를 겨누며 다가왔다.
“계속 누워 있으면 좋았을걸. 괜히 체력 좋고 눈치 없어서 명줄이 짧아졌군.”
홍이 지팡이의 방향을 틀어 그에게 겨누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혹이 난 머리를 매만지던 그의 낯빛이 바뀌었다. 홍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살해 주문을 외웠다.
“나이타.”
날카로운 마법이 지팡이에서 튀어나왔다. 퍽 소리와 함께 광장에 깔린 벽돌이 깨져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켰다. 곧장 해사의 식신을 회수하려고 준비했던 홍이었으나 그 무엇도 날아들지 않았다. 식신 대신에 자욱한 먼지를 뚫고 나온 건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내 명줄? 네 명줄이 아니라?”
저쪽에서 신명 나게 싸우고 있어야 할 녹이 한 손에 홍의 마법을 움켜쥐고는 개운하게 물었다.
“하홍. 우리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지?”
녹의 손에서 홍의 마법 줄기가 위험하게 파직 거리고 있었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에서 가장 마법 실력이 높다 자자한 홍이었다. 그런 홍의 마법을 저리 손쉽게 제압하다니, 과연 씨앗다웠다. 홍은 진예 앞에 팔을 뻗어 녹과 거리를 유지한 채 뒤로 물러섰다. 하녹이 저자로 변장한 걸 알아채지 못한 건 실책이었다.
홍은 천천히 지팡이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도망갈 생각이 뻔히 보였다. 녹이 손안의 마법을 풀어 없애며 당장이라도 사라질 기세의 홍을 진정시켰다.
“농담이야. 농담. 네가 진예랑 엮여 있는데 내가 어찌 너를 죽일 수 있겠어.”
“어째서 여기에… 분명 지금 마법사들과 싸우고 있을 텐데….”
“아, 그거. 나로 변한 도언이. 만일 전장에서 내가 보이지 않았다면 너는 이곳으로 올 생각조차 안 했겠지. 그 누가 하녹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안가에 홀로 머리를 들이밀 생각을 하겠어. 아무리 괴짜로 소문난 너라도 정체가 들통난 이상 못하지.”
제길. 분명 직통으로 마법에 맞았는데 살아 있었다니. 안도언 그놈의 명줄이 참 질기기도 하다. 불사의 능력이라도 얻었나. 물론 불평보다 도주가 급했던 홍은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바깥으로 나갈 경로를 계산했다.
모든 마법사가 자신을 찾으러 온대도 홍은 그들로부터 제 몸을 숨길 능력과 자신이 충분했다. 안가의 마력을 노리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혈혈단신의 홍이 지금껏 살아남은 건, 비단 그의 실력뿐만이 아니라 무시하지 못할 은신 능력 덕도 컸다.
심지어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네스의 검증도 통과해 해사가 된 전적도 있는 홍이었다. 그렇기에 홍은 도주에 자신 있었다. 물론, 그 뒤를 쫓는 자가 명실상부 일인자 하녹만 아니라면 말이다. 홍은 오돌오돌 까칠해진 팔뚝을 쓸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타나신 겁니까.”
“당연히 진예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지.”
마법에 걸려 아직도 텅 빈 눈을 하는 진예였다. 진예는 홍의 목숨줄이었다. 녹 앞에서 특히 그랬다. 달라고 넘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마석이 아깝지만 목숨보다 중한 건 아니다. 녹이 마음을 바꿔 아이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면 살아날 가능성은 더욱 적어졌다. 홍은 그대로 지팡이를 들어 올려 안가를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 잠깐. 지금 진예를 넘기면 무엇을 하든, 네가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 너를 죽이지 않을게. 지금 주변에 있는 자는 모두 물렀고, 안에서 벌어지는 난전에 누구도 이 근처로 오지 않을 거다. 나한테서만 도망가면 너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거야.”
진실인가. 홍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이 근방에 감지되는 생명체는 없었다. 거기에다 보이는 즉시 죽이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 역시 아이만을 데리러 왔다는 녹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했다. 자신을 죽인다면 아이 역시 죽을 테니 말이다. 아이와 엮인 목숨은 아무리 녹이라도 일주일 동안은 풀 수 없었다.
“웃기는 소리 마시죠. 어차피 아이와 내 목숨이 공유되는 건 같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바꿔 아이를 죽인다면 나 역시 꼼짝없이 죽게 된단 말입니다.”
“일주일 뒤면 저주를 풀 수 있다며. 그때 동안 상처 하나 없이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마. 뭣 하면 죽음을 건 맹세라도 할게. 진예만 보내 줘.”
“…제정신입니까?”
“그래야 믿을 거 아니야.”
죽음을 건 맹세. 말 그대로 깨트리면 죽는다. 기간은 맹세를 한 마법사가 죽거나, 맹세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질 때까지. 마력의 부담 역시 크기 때문에 웬만해서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다.
다른 마법사에게 사냥당할 위기의 마법사가 당장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타 마법사의 수족으로 들어간다고 맹세할 때나 쓰였다. 맹세는 그만큼 일방적이고 불평등했다. 그렇기에 스스로 거는 저주 취급을 받은 지 오래였다.
아이를 내주는 조건으로 맹세까지 한다니.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홍은 녹의 제안이 정말로 순수한 의도인지 가늠했다. 확실히 저 힘을 가지고도 마법사와 대적해 싸우느니 등신처럼 몸이나 숨긴 녀석이라면 진심일지도 몰랐다.
홍이 혼란스러워할 때 녹은 행동으로 보였다. 녹이 손가락 끝에 마력을 담고 허공에 죽음을 건 맹세의 계약서를 그리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나온 청아한 마력이 잉크 역할을 대신했다.
“어디 보자. 첫 번째. 적어도 하홍의 저주가 풀릴 일주일 동안 진예에게 상처 하나도 나지 않게 보호한다. 두 번째, 진예를 안전하게 인도받았을 때, 홍을 죽이지 않는다.”
손가락 끝에서 문자가 써졌다. 마법의 특이한 형태 하며, 느껴지는 공식 하며. 확실히 죽음을 건 맹세가 맞았다. 정말 진심인 거다. 이번이 기회라면 사용할 수 있는 한 방울까지도 쥐어짜서 받아 내어야 한다. 홍은 배짱을 부리기 시작했다.
“더 쓰시죠. 영구적으로 홍을 죽이지도 않고 쫓지도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하홍에 대한 정보를 발설치 않는다. 녹의 눈앞에서 홍이 죽게 된다면, 녹 역시 죽음을 같이한다.”
“쓰지. 대신 모든 건 너가 진예를 안전히 넘기고 안가에서 나갈 때부터 이행된다.”
녹이 홍의 제시한 의견 모두를 묵묵히 써 내려갔다. 영구라는 단어는 배짱 한번 부려 본 건데 녹은 순순히 응했다. 아이를 넘겨야 하는 조건부 맹세였지만, 이 정도 조건이라면 의심이 갈 정도로 좋은 조건이 맞았다.
녹이 허공에 떠오른 문구 위에 손을 펼쳐 낸 뒤 그대로 강하게 마력을 심었다. 강력한 세계수의 마력이다. 마력의 파동이 마법을 중심으로 넘치게 출렁댔다. 그려진 푸른 문자가 한 올, 한 올 풀리더니 수십 개의 리본처럼 넓게 펴져 녹의 심장을 향해 쏟아졌다. 그때 쏟아지는 바람의 무게감에 홍의 발이 뒤로 밀릴 정도였다.
바람은 터져 나오는 마력을 싣고 홍을 쓸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세계수의 마력이었다. 문자에서 나온 마법이 모두 녹의 심장에 안착하자 날뛰던 대기가 잠잠해졌다.
녹의 손등에 맹세의 표식이 푸르게 새겨졌다. 어지러운 문자로 그려진 저 문양. 확실히 죽음을 건 맹세가 맞았다. 바로 앞에서 벌인 마법에는 속임수가 있을 수 없었다. 녹은 진심이었다.
“하, 하. 하하하하! 정말 이 인간 아이 하나 때문에 씨앗이 귀한 목숨을 걸었다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홍의 입장에선 로또 맞은 거다. 맹세의 기간이 영구적이라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 홍이 아무리 녹을 공격하더라도 녹은 홍을 공격할 수 없었다.
물론 홀로 공격해 봤자 마력만 날리겠지만. 홍은 녹이 제 마법을 한 손으로 쥐어 없애는 걸 잊지 않았다. 사람을 모아 기습해야만 승산이 있었다.
눈물이 맺히도록 웃어젖힌 홍은 마른손으로 젖은 눈가를 닦고서는 제 팔 뒤로 물렸던 진예를 끌어와 녹에게 등을 떠밀었다.
“그 귀하신 씨앗께서 제 목숨을 보장해 주신다니, 얼른 아이부터 넘깁니다.”
녹이 다가서 진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진예는 하급 복종 마법에 걸린 듯 멍한 시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친 곳은 볼에 난 생채기 이외에 없어 보였다. 하홍이 제 목숨처럼 지키긴 한 모양이다. 말 그대로 진예가 하홍의 목숨줄이긴 했다.
“나가기 전에 마석이나 좀 더 털고 가야겠습니다. 인간 아이가 저장고까지 안내해 준다 했는데. 얼른 안내를 속행하라고 하십시오.”
뜻밖의 수확에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 홍이 지팡이로 제 목을 겨누며 말했다. 이에 녹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잘도 써먹는구나.”
“써먹을 수 있을 때 써먹지 않는 건 멍청한 겁니다.”
“…눈감아 주도록 하지.”
“그럼 장로장의 집으로 같이 갑시다. 아직 저는 아이가 필요하니까요.”
홍이 자리를 옮기고, 녹은 그 뒤를 진예의 손을 잡고 따랐다. 슬쩍 본 진예의 손등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은 건재했다. 앞서 걷던 홍이 운을 뗐다.
“아,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안도언은 어떻게 마법사가 된 겁니까? 분명 마력 하나 없는 인간이었는데.”
홍은 도언이 마법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기를 풀거나, 걸린 마법을 해제하거나, 마법사들을 기막히게 잘 사냥한다거나. 확실히 도언이 행한 일들은 마법사라도 쉬이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녹은 벌써 그런 걸 물을 배짱을 찾은 홍이 어이없어서 물었다.
“이 마당에 그게 그리도 중요한가?”
“제가 설계한 실험을 받고 있던 아이들입니다. 어찌 향후가 궁금치 않겠습니까. 하가로 그 아이들을 애써 끌어들인 보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 당연하죠.”
“애써?”
녹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통 하가에 심부름꾼으로 오는 아이들은 모두 집도 절도 없는 고아였다. 배를 굶고 있는 아이들은 편히 잘 곳과 먹을 것에 쉬이 몸을 내맡겼다. 홍이 애써라는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홍은 녹의 손등에 단단히 박힌 속박의 저주를 보더니, 일신 안전에 대한 확신이 공고해졌는지 비뚜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마력을 관할하던 시절, 마력 하나 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은 극소했죠. 그들을 고아들로 충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셨습니까.”
녹은 걸음을 멈췄다. 불현듯 깨달은 진실에 심장이 오그라들고 숨이 막혀 왔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손끝을 본 홍은 짙고 어두운 웃음을 흘렸다.
“집에 불을 지르고 아이들의 방문을 제외한 모든 방문의 문을 단단히 잠그라 했습니다. 기분에 따라 다른 방법을 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가 편하죠. 죽음의 공포가 강해지니까. 거기에 치료도 해 주고 보살펴 주기까지 하는 자가 나타나면 사냥감의 충성은 이미 얻은 거나 다름없죠. 아, 이거 안도언에게 말할 겁니까? 말해도 되긴 하지만 말한다면 당신이 죽겠네요. 저에 대한 일을 발설하지 않으리란 맹세까지 하셨으니.”
자신이 행했던 일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익을 위해 인간의 불행쯤 아무것도 아니라 여긴다. 저런 뼛속까지 마법사인 놈을 마법사들과 다른 괴짜라고 생각했다니…. 녹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표정 좋네요. 세계수의 힘을 홀랑 먹고 내뺀 당신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게 내 소원이었거든. 안도언, 그놈의 충성을 얻기 위해 당신 앞에서 아양을 떨 때마다 얼마나 역겨웠는지 아십니까.”
말을 마친 홍이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
“하가의 수치에게 형님이라고까지 말했다니. 거의 모든 걸 내려놓은 거나 진배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쯧. 뭐, 당신을 이용한 덕분에 호위 명목으로 그를 제 곁에 두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여하간 실험의 성패 여부가 불투명해 보험으로 그놈이 깎은 목검이나 가지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성공체에 비해 새 발의 피지만 뭐, 영물도 쓸 만하니까요. 그놈의 동생은 그 장난감 같은 검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안 내놓는지. 그냥 죽여 버리고 가져오고 싶어서 혼났다니까요?”
목숨을 보장받은 홍은 신난다는 듯 나불대길 멈추지 않았다. 녹은 잠시나마 홍을 도언으로 착각한 자신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주인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영물이라니요. 그 목검은 그게 될 여지가 충분했죠. 그나저나 그 장난감은 폭발 때 함께 사라진 겁니까? 영물이 기어코 되었는지 한번 보고 싶었는데.”
홍이 지휘하듯 지팡이를 흔들어 댔다. 자신은 녹의 불행을 지휘하는 지휘자였다. 씨앗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제 불행의 원인을 처치하지 못하는 씨앗은 얼마나 약 오를까. 아직도 녹의 손등에는 맹세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한번 보면 되잖아.”
여린 목소리 하나가 둘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홍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누군가의 팔을 먼저 발견했다. 익숙한 소매였고, 익숙한 팔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쥐고 있는 지팡이며, 손등에 그려진 황금색 저주의 표시 역시, 홍에게는 너무나 익숙했다.
그건-
잘려진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으아아아악!!”
떨어진 제 신체의 일부에 뒤늦게 고통이 따랐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이명이 거슬리게 귓가를 잠식했다. 떨어진 팔의 절단면에는 피가 아닌 식신이 하나하나 피어올라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무릎을 꿇고 절단면을 손으로 감싼 홍이 핏발 선 눈으로 진예를 찾았다. 내 팔이 떨어졌다면 분명 그 아이도….
찾기도 전에 홍 앞에 누군가가 다가섰다. 홍의 시야에 등장한 그는 두 손을 허리에 대고선 허리를 숙여 홍과 눈을 맞췄다.
“내 연기가 좀 뛰어나긴 했지. 근데 듣자 듣자 하니 참을 수 없어서 말이야. 하진이가 화마에서 제 가족을 지키지 못한 걸로 밤마다 얼마나 슬퍼했는데.”
그는 홍의 앞에서 저주의 표식이 사라진 깨끗한 손을 펴고 허공에 보라색 나비를 피워 냈다. 명실상부한 정령의 기적이었다. 피워 낸 나비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가 발랄하게 물었다.
“네가 가지고 싶어 했던 그 장난감한테 죽는 기분은 어때? 말해 줄래?”
죽음과 가까운 홍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듯 구는 그는 진예였다. 진예의 손에서 피어난 나비가 팔랑팔랑 홍을 향해 날았다. 진예의 손에서 파르라니 투명했던 보라색은 홍의 근처로 갈수록 잿빛이 덧입혀졌다. 나비의 행로에는 검은 마력이 뚝뚝 떨어졌다.
나비는 느리게 좌우로 허공을 하나하나 밟아 갔다. 지극히 불길한 기적이 홍을 향해 날아왔다. 한 손을 잃은 홍은, 남은 한 손과 다리로 엉덩이를 땅에서 끌어 뒤로, 뒤로 물러났다. 식은땀이 코끝에서 떨어졌다. 홍은 절단된 신체의 아픔도 잊고 사라진 지팡이를 찾았다. 마침 발견한 지팡이는 하필 저 멀리 땅에서 구르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나비는 이미 코앞에서 겁먹은 홍을 유린하듯 살랑였다.
“응? 말해 달라니까? 이 도도에게 말이야.”
나비가 살랑대며 홍의 한쪽 관자놀이에 안착했다. 홍의 마력이 나비에게 흡수되어 빠져나갔다. 남은 한 손으로 나비를 털어 보려 쥐어뜯었지만, 어느새 제게 앉아 있던 나비는 사라졌다. 관자놀이에 그대로 흡수된 거다.
저 녀석이 도도라니? 그럼 내 상처와 함께 아이의 볼에 나타난 생채기는 뭐지? 손등에 나타난 저주의 문양은 또 뭐고? 아이의 손등에 있던 저주의 문양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홍은 문양이 새겨진 자신의 오른팔을 확인했다. 날아간 손등은 아무 문양 없이 깨끗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정령이면 먹힐 리 없던 저주다. 진예가 빙그레 친절을 발휘했다.
“이해가 안 되나 봐. 내 특기가 눈속임이거든. 네가 내게 쓴 마법을 읽는 것쯤이야 쉽지. 손등에 그려진 문양이랑 풍기는 마력이 감쪽같았지?”
진예가 생채기 난 자신의 볼을 쓱 문지르자 생채기 역시 말끔히 사라졌다.
“네 정리병 덕분에 네가 만든 마법은 모두 숙지하고 있다고. 저주의 증거로 어떤 문양이 떠오르는지도.”
홍의 관자놀이에 검은 나비 문양이 내려앉았다. 매끈한 눈썹 옆을 매만지며 진예를 올려 보았다. 아이는 재밌는 예능을 시청하듯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았다. 이럴 수는 없다. 언제나 쥐를 쫓는 고양이 쪽은 자신이었다.
홍은 급히 녹을 찾았다. 녹의 손등에는 아직도 맹세가 선연했다.
“형님. 형님! 제가 안가에서 나갈 때까지 저를 지켜 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불길한 기적 좀 치워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형님도 죽게 되지 않습니까!”
“…글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간 역겨웠다던 형님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멀찍이 서서 둘을 관망하던 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직 너는 안가에 있단 걸 잊었나 보군.”
‘대신 모든 건 너가 진예를 안전히 넘기고 안가에서 나갈 때부터 이행된다.’
떠오른 녹의 목소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제가 얻는 게 많은 조항이라 녹이 그런 조건을 내걸었을 때만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예가 인간이기만 했어도 빈틈없는 조약이었다. 진예는 그들의 짧은 대화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너가 우리를 가지고 놀았던 것처럼 나도 너를 가지고 놀아 볼까 했는데, 다 귀찮아졌어. 죽게 될 기분도 말 안 하는 거 보니까 궁금한 것도 없고. 저승에서 하진이한테 된통 혼나기나 해라.”
“잠깐, 잠까…으아악!!”
진예가 손가락을 부딪치자, 홍은 발끝부터 바스락 말라 갔다. 마치 나비 문양이 흡혈을 하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문양의 색은 짙어지고, 홍의 몸은 수분이 날아가 미라의 형상이 되어 갔다. 홍은 뼈만 남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살아 있었다. 그가 녹을 향해 손을 힘겹게 뻗었다.
“그으어….”
“와, 씨앗의 마력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나 봐요. 그렇게 많은 자의 목숨을 실험 명목으로 앗아 갔으면서, 제 목숨은 또 더럽게도 생각하네요.”
진예가 손을 뻗어 관자놀이에 새겨진 나비 문양을 건드렸다. 조금씩 움직임을 이어 가던 홍은 그 작은 손짓 하나에 파스스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제 이름 하나에 벌벌 떨 세계를 원했던 하홍은 그렇게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홍은 녹이 방심하기만을 노렸으면서, 자신의 능력은 자만했다. 정보력 역시 능력이었다. 그가 주원으로 지낸 몇 개월 동안 진예가 영물임을 몰라봤던 게 패착이었다. 홍의 저주는 애초에 되어먹지 않았다. 진예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홍의 손등에 묶인 문양도, 볼에 난 생채기 역시 모두 진예가 꾸민 깜찍한 장난이었다. 진예가 도도임을 알고 있던 도언과 이네스는 그 말썽꾸러기가 일부러 홍을 따라갔단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를 몰랐던 건 홍과 녹, 둘뿐이었다.
“흥. 장난감이라니. 내 본체를 장난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네스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네.”
진예가 홍에게 쓴 기적은 정령 중 영물만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마법사의 마력을 빼앗고 결정화할 수 있는 모양이 꼭 마법사와 유사했다. 그 능력은 홍이 영물을 탐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홍의 옷가지와 섞인 모래 더미 안을 파헤친 진예는 홍옥보다 붉은, 주먹만 한 크기의 마석을 찾아냈다.
“찾았다! 이야. 확실히 강하긴 한가 보네요. 흡수된 마력이 강할수록 붉어지거든요. 이건 나중에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런 마력의 마법사를 한 큐에 보내 버리다니. 오빠 아니었으면 절대 못 했을 거예요! 와, 제가 도도인 걸 들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하기만 하네요.”
진예가 재잘대며 여의주만 한 마석을 자신의 작은 가방 안에 넣었다. 진예는 저 홀로 떠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이 싸늘했다. 진예가 녹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기 시작했다.
“엄… 제게 이런 기회를 넘겨주셔서 감사해요. 하진이에 대한 복수는 제 염원이었거든요.”
기회를 넘겼다는 말은 말 그대로였다. 진예는 녹이 맹세할 때까지만 해도 녹이 너무 오래 살아 드디어 미친 걸까 의심했다. 녹이 진예의 손을 맞잡았을 때에서야 녹의 의도를 꿰뚫었다. 그는 홍을 한 번에 보내 버릴 만한 마력을 홍 모르게 진예에게 넘기고 있었다. 진예의 정체를 몰랐다면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놀라 마법에 빠진 척 연기하던 걸 멈출 뻔했다. 조심스레 올려 보니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진예는 녹의 의도를 알아챘다. 하진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자들에 대한 복수는 진예의 오랜 염원이 맞았다. 녹은 최선을 다해 진예의 염원을 도우며 복수의 기회를 양보했다.
오랜 염원을 끝낸 뒤, 녹은 진예에게 그럴듯한 반응 없이 싸늘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음…. 왜 화나셨지. 혹시 잃어버렸던 기억을 다 못 찾았다든지….”
“아니, 기억은 모두 찾았어.”
“와, 잘됐다! 아~주 예전에 사한이랑 가주님이 오빠의 기억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했었을 때 오빠 진짜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죽을 뻔했거든요. 오빠 뇌 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지금 보니 저놈이 좋은 일 하나 하고 가긴 했네요. 오빠 기억을 되찾게 해 줬으니까!”
진예가 하홍의 옷가지만 남은 곳을 가리키며 기뻐했다. 한숨을 쉰 녹은,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미 내가 하녹이란 걸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죠. 저는 도도일 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영물인걸요. 그리고 굳이 얼굴 안 봐도 알겠는걸요. 가주님이 그렇게 붙어 계시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진예가 똘똘하게 대답했다. 제 할 말 다 하는 모습에서 하진이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행동이 이리도 비슷하니 도언이 진예를 그리 대했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누이가 따로 없었다. 녹은 못다 한 꾸중을 하기 전, 진예의 변명이라도 듣기 위해 운을 뗐다.
“영물이면서 어째서 홍의 저주에 걸린 척하고 따라 들어간 거야? 까딱하다간 위험할 뻔했잖아.”
“으음…. 청연도 있었고 전혀 위험하지 않은데….”
“진예야.”
“…그냥, 저도 기억하는 자의 일원으로 무언가 하고 싶었어요. 오빠는 모르셨겠지만 무술에서만큼은 제가 청연을 이길 정도인걸요. 거기다가 인간도 아니라 다치기도 힘들고, 인간 아이의 모습이라 사람들이 방심도 많이 하고, 그리고 뭣 하면 저 한 몸 빼 올 양의 세계수 마력도 있으니까…. 예전에 사한이 열매 쓰라고 나눠 준 마력을 제가 조금 가지고 있거든요.”
세계수의 수족이라 불리는 정령들이 기적을 부리려면 오로지 세계수의 마력이 필요했다. 마법사들의 마력은 정령에게 생명 유지를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누가 스파게티를 무기로 쓸 수 있겠는가.
세계수와 함께 공기 중 부유하는 세계수의 마력이 사라지니 정령은 힘이 없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령을 흡수하면 세계수의 마력을 얻을 수 있단 헛소문이 마법사들 사이에서 돌아 정령 사냥이 성행했다. 이에 정령들은 세계수가 부활해 힘이 재기할 때를 기약하며 기나긴 잠에 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진예가 숨겨진 정령이란 걸 마법사들이 알게 된다면? 아무리 안가의 주민들이 믿을 만한 자들이라지만 혹시 몰랐다. 이에 이네스와 도언은 진예를 인간이라 꾸며 데리고 있기에 이른다. 주원으로 분한 하홍의 경우만 봐도 그건 잘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하홍이 경계하지도 않고 제게 정보를 흘리더라고요. 역시 이 모습이 편해요.”
진예의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까딱하다간 사지가 될 수 있는 곳에 아이 혼자 단신으로 뛰어들다니…….
“음. 제가 안전한 건 진짜인데…. 위험했더라면 가주님이나 이네스가 저를 걱정했겠죠. 그 둘이 저 걱정한 적 있었어요?”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나에게 네가 도도라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어?”
“그냥, 오빠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말하면 더 기뻐하실 거 같아서….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괜히 말했다가 오빠가 가주님과 저의 관계 추측하느라 머리가 깨지면 어떻게 해요? 그때 정말 오빠가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내가 세계수와 만나는 진을 그릴 때인가. 진예는 그때의 회상이 정말 끔찍했는지 울상을 지었다. 당시 도언이 저를 기억해 내라며 하진과 도도를 말했을 적에는 확실히 기억에서 놓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기억이 돌아오니 그때의 고통 역시 선명해졌다.
헌데 고통을 당한 본인보다 보는 자들이 훨씬 괴로웠나 보다. 단 한번의 시도만 하고 잠시지만 도언이 자신을 쫓지 않겠다 결심했다는 게 그 반증이었다.
“거기다가 이네스가 오빠 정체에 대해 항상 궁금해했는걸요. 오빠가 도도를 안다고 해 보세요. 이네스가 어떻게 나올지…. 혹시 이네스에게 오빠 정체 알려 줬어요?”
“…….”
“어쿠. 고생하셨겠네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예는 침묵에서 긍정을 읽어 냈다. 하녹을 알아본 이네스가 어찌 나올지 진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여하간, 얼른 가야 해요. 침입한 그들은 진짜가 아니거든요. 먼젓번에 안가의 힘을 뺀 후, 진짜는 뒤에 따로 와요. 어찌했는지 청연이 지휘관으로 차출되어서 가주님께 정보는 계속 가고 있긴 하겠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피해자가 많이 생길지도 몰라요. 아, 그 전에….”
녹의 소맷부리를 잡아끌던 진예가 녹에게 몸을 틀었다. 한쪽 손을 제 심장 위에 올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경건히 예의를 차리는 아이의 모습에 당황한 건 녹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얼른 일어나, 진예야. 무릎에 흙 묻….”
“저도 가주님 못지않게 당신이 기억을 되찾으시길 고대하고 있었어요. 제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 ❊ ❊
청명한 하늘에 조각구름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유난히도 맑은 날씨다. 예쁜 색종이와 같은 풍경에 나비 한 마리가 끼어들었다. 하늘이 밝기에 나비의 검은 몸체는 두드러졌다. 나비는 허공을 한 바퀴 그리고는 고도를 낮춰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우글거리는 식신 떼 사이로 말이다.
평화로운 하늘과 다르게 대지 위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화산이 참았던 용암을 내뱉듯 마법사의 사체에 나온 식신이 쉬지 않고 하늘 위로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였다. 잠입 마법사가 설치한 포탈에서 마법사가 끝없이 나오고, 반대편의 이네스가 펼친 포탈에서 기억하는 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
주술로 변장한 도언을 녹으로 착각한 마법사들은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마법을 소나기처럼 쏟아 내었고, 그대로 공격이 튕겨진 덕분에 3분지 1 정도의 마법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도언은 해를 입지 않고, 되려 공격한 본인들이 당하기만 했다. 이미 광야엔 식신으로 가득 차올랐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형태에 마법사들은 공격을 머뭇거렸다. 도언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출격을 명령했다.
“전군, 전진.”
우와아아아-!!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식신의 수에, 식신을 볼 수 있는 자들은 시야 확보가 어려워 전투 불능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도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차근히 마법사들을 족족 썰어 내었다. 도언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백의 식신이 피어올랐다. 녹의 모습으로 하는 활약에 적군은 우왕좌왕 소리쳤다.
“씨앗이 저런 식으로 나올 거란 말은 없었는데-! 검만 쓰는데도 우리가 열세라니!”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도 없었거든-! 이리 많은 수의 병사가 있다는 말도 없었고-! 뭐야 대체!”
“이 새끼들 왜 마법을 먹여도 안 죽어?”
녹에게 축복을 받은 수인들은 마법에 쉽게 스러지지 않았다. 이에 수인들은 더욱 대담한 전법을 펼쳤고, 이에 대비하지 않은 마법사들은 쉽게 목숨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내가 하홍이고 나발이고 믿지 말자고 했잖아! 너가 손해 볼 거 없다며!”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러고-억!”
“저기에 지원군 온다! 조금만 버텨!”
마법사 하나가 하늘을 보고 메시아의 강림을 본 마냥 외쳤다. 길고 거칠게 찢긴 한 줄기의 상흔이 하늘에 그어졌다. 거대한 눈이 눈꺼풀을 뜨는 것처럼 틈이 벌어졌다. 쩌적거리며 공간이 벌어지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호수가 열린 틈새 사이로 펼쳐졌다.
홍이 준비한 결정타는 저거였다. 그를 본 도언의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모든 건 계획대로. 이 땅을 밟는 자들이 최대한 많아질 때. 그때가 마법진을 발동할 기회였다. 기회는 단 한 번. 도언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가볍게 튕겨 내며 적군을 베었다. 녹의 외형을 하고 있으려니 확실히 근방의 공격이 도언에게 몰렸다.
틈새에 있는 저들이 전장에 합류하게 된다면 기억하는 자들이 얼마나 희생될지 몰랐다. 그러니 가장 희생자가 적을 타이밍에 맞춰 마법진 발동을 해야 했다. 빠르게 도는 피를 차게 식힌 도언은 마음속으로 그 시기를 가늠했다. 마법사들이 드디어 틈새에서 쏟아졌다. 틈새에서 뛰어나온 첫 번째 마법사가 식신의 구름을 뚫고 땅에 발을 내릴 그때였다.
“으아아악!!”
식신으로 어두컴컴하던 주변이 불시에 환해졌다. 하늘을 메운 식신은 어딘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타올라 사라졌다. 식신으로 가득 찬 하늘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거꾸로 뒤집힌 채 허공에 떠올라 불바다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식신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마법사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틈새 안에 남은 마법사들은 불지옥 속에서 들리는 동료의 비명에 뒷걸음질 쳤다.
저 정도의 식신을 한 번에 처리할 압도적인 마력. 마치 작은 태양을 만들어 둔 것 같은 이질감. 그 어떤 마법사도 저런 마법을 쓰지 못한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하녹이다.”
누군가의 작은 읊조림이 모두의 귀에 울렸다. 지금껏 검을 들고 싸웠던 하녹이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모르겠으나 드디어 마법이란 칼을 빼 들었다. 마법을 쓰지 않은 방금 전까진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이런 자를 죽이려고 했다고? 무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이에 반대로, 기억하는 자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하녹 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 남김없이 처리하자!”
“우리의 가족을 앗아 간 악마들이다! 자비는 있을 수 없다!”
마법사들은 멀리 있는 녹을 죽이는 것보다는 눈앞의 수인들의 공격에 집중해야 했다. 덕분에 도언 주변에는 아군만으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아군의 손속은 빨라졌고, 적군의 마법은 느려졌다. 도언은 보다 격하게 내뿜는 아군들의 전의를 느끼며 어딘가에 있을 녹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뭘 그렇게 웃어? 내 얼굴로 웃는 걸 보니 재밌긴 하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검을 어깨에 걸친 녹이 스스로 도언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 마력을 숨기지 않고 순간이동 해서 이곳으로 올 정도로 녹은 이 공간에서 제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 모두가 저에 대해 알기도 했고, 이곳에서 발생한 식신은 바깥세상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벌써부터 보이는 승기에 도언이 실없이 비식거렸다.
“이래서야 마법진을 준비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좋지, 뭘 그래. 마석 킵할 수도 있고. 그나저나 진예에 대해 입 다물고 있는 꼴이 깜찍하더라?”
“하하. 녹에게 깜찍하다는 소리까지 듣다니. 제가 오늘 계를 탔나 보군요.”
“말을 말자.”
녹은 가볍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고개를 들어 전장을 보았다. 아직까지 하늘의 틈새에는 많은 마법사들이 남아 있었다.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며. 인간들을 인질로 삼아 나를 끌어낼 계획이라는데.”
“도도가 말해 줬나 보군요. 네. 청연에게 보고받았습니다. 이번 습격이 실패한다면 남은 놈들이 당신을 안가의 바깥으로 끌어내겠죠. 녹은 인간들 사이에서 온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끝내는 게 맞겠지?”
녹이 손가락을 튕겼다. 광야 전역을 기준으로 그려진 초록빛의 마법진이 모래 아래 떠올랐다. 저들이 딛고 있는 땅에서 부신 빛이 흘러나와도 군사들은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발을 떼는 마법사들과 대조되었다.
녹이 어깨 위에 얹어 둔 도도를 내렸다. 주인이 아닌 자에게는 제 본체를 보이지 않을 거라 다짐하던 녀석이다. 녹의 손에 있는 목검의 본체를 보니 도도가 녹을 주인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도도에 흐르는 마력이 녹처럼 청량했다. 녹은 마법으로 군사들의 전투를 은근히 도우며,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 도도에 마력을 담았다.
세계수를 대면하는 마법진. 분명 합이 잘 맞는 정령의 도움을 받아야 별 탈 없이 발동할 수 있다 했다. 원래라면 녹이 주인이 되었어야 할 열매가 그 열쇠 역할을 했겠지만, 이미 열매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합이 잘 맞을 정령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바로 녹을 주인 삼은 도도였다.
그러나 도언은 여전히 걱정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녹을 주인 삼았다 하더라도 열매가 아닌데, 괜찮을까 하는 일말의 근심이다. 이에 별일 아니라는 듯, 녹이 가볍게 미소를 걸치고 도언의 머리를 흩트렸다.
“얼굴 굳은 것 봐라. 들어가기만 한다면 안 죽어. 나무가 눈앞에 있는 나를 죽게 놔두기야 하겠니.”
“확신하십….”
“하여간, 그 나무가 양심 있으면 보호해 주겠지. 꿈속에 제멋대로 가두고, 마주쳐도 모른 체하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난리도 아니다. 몸 성히 잘 다녀올 테니 걱정 마라.”
“저기다! 하녹이다!”
“하녹이 둘이다!”
힘겹게 공격을 막아 내던 마법사의 외침이 들렸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를 못한 종자였다. 마법사는 녹을 향해 공격했지만 녹은 대수롭지 않게 튕겨 내었다. 마법을 쏘아 낸 마법사는 식신으로 스러져 사라졌다.
“오랜만에 눈치 보지 않고 마법을 쓰니 속이 시원하긴 하네. 여하간, 뒤를 맡길게. 간다.”
“…성히 다녀오십시오.”
“하하. 성히 다녀오십시오가 뭐야. 하여간에 안도언. 진짜.”
녹의 모습을 하고 새삼 진지하게 저런 말 하는 도언이 뻘하게 웃겼다. 정말이지, 도도도 함께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지 모르겠다. 녹은 시야가 같아진 김에 도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녹이 짓궂게 이를 드러내며 눈을 접었다.
진지하던 얼굴이 녹의 미소에 어벙해졌다. 즉시 도언의 몸집이 커지며 녹의 외형에서 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네스가 걸어 준 주술이 풀린 거다. 어떤 감정이 격해졌기에 이리된 걸까.
다만 멍한 표정만은 도언의 얼굴이나 녹의 얼굴이나 똑같이 얼빠져 보였다. 도언의 얼굴로 보는 저 표정이 제 얼굴로 보는 표정보다 더 귀엽긴 했다. 귀엽다고 했는데도 거부감이 안 들다니. 하여간, 돈가스 사 준다고 꼬여 냈을 때까지만 해도 도언에 대한 감상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는데 말이야.
더 미룰 수 없던 녹이 도언의 까만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곤 도언의 멱살을 잡아 당겨 입술을 삼켰다. 이에 얼빠졌던 도언의 눈이 훨씬 커진 건 당연지사였다. 주변의 술렁임이 커졌으나, 신경 쓰지 않은 녹은 쾌활히 인사했다.
“네 말대로 성히 다녀올게.”
할 말을 잃은 도언을 끝으로 웃음기를 거둔 녹이 도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땅과 검 끝이 만날 때 섬광탄이 터지듯 강력한 빛이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찔러 들어왔다. 눈을 찡그린 도언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녹만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도도를 마법진 중심으로 찔러 넣고선 염원을 담아 마법을 시도했다. 도도에 마력이 차오를수록 땅 위의 마법진이 밝아지고 녹의 마력이 근방을 뒤덮었다.
녹의 의식 역시 폭발하는 마력에 삼켜졌다.
❊ ❊ ❊
녹은 그저 하얗기만 한 공간에서 눈을 떴다. 이곳에 들어올 열쇠가 된 도도 역시 제 손에 없었다. 저 홀로 제 속으로 떨어진 거다.
-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아이야.
상황 파악을 할까 했을 때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세계수의 목소리였다.
사설 따위 집어치운 녹이 단숨에 말했다.
“여기까지 오면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거 기억하십니까?”
- 기억하다마다. 나는 여기까지 너를 보낼 정령이 단연코 열매인 줄만 알았단다. 그 열매는 내가 네게 보내는 선물 같은 아이였어. 네가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할 아이였지. 너와 잘 맞도록 설계했는데 인간 아이에게 홀랑 줘 버리고 말이야.
정말 공들인 정령이었는지, 세계수가 드물게 투덜댔다. 하얀 날개를 광활히 펼치던 하얀 매가 떠올랐다. 도언의 정령이 된 지 오래인 그 정령은 몇 번 보지 않았지만 볼 때마다 표정이 좀…어벙하고 어설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설마 잘 맞는다는 게 닮았단 소리는 아니겠지? 녹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체 내가 세계수에게 어떻게 보였길래….’
- 열매의 주인이 되었다면 영원의 안식을 원하지도 않았을 터, 혼자가 아니니 그 당시 네가 지금껏 걸어온 길보다 훨씬 살기 편했으리란 건 당연하다. 그 아이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었느냐.
“물론입니다. 도언을 살리는 것 대신 열매의 소유를 선택했더라면… 이 좋은 기회에 죽음을 빌지도 모를 일이군요. 마법사가 영원히 오지도 듣지도 닿지도 못하는 곳에서의 영면 말입니다.”
- 이런. 그렇다면 내가 그 인간 아이에게 고마워해야겠구나. 너를 지금껏 살려 왔으니 말이다.
온화한 음성이 부드럽게 공간에 울렸다.
- 그래. 이곳에 온 목적이 나와 이야기만 하러 온 건 아닐 테지. 네 소원은 무엇이니?
드디어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소원이 뭐겠어, 당연히 불행의 종말이지!
❊ ❊ ❊
전장을 가득 메운 섬광이 서서히 숨을 죽였다. 녹은 그 자세 그대로 도도에 몸을 기대 평온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에 빠진 듯 고통 없는 모습을 보니 마법은 성공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늘 녹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적진이 제일 먼저 알아챘다. 심지어 도언의 변신 역시 풀려 진짜 하녹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사기가 떨어졌대도 이 순간을 그냥 놓칠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근방에 있던 마법사들은 상대하던 자를 뿌리치고 하녹에게 마법을 쏘았다. 그러나 마력의 질주는 녹에게 닿지 못했다. 마법은 도언의 검에 갈라졌고, 그들은 괜한 마력 낭비만 한 꼴이 되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할 자는 녹이 아니었다. 지천에 널린 수인들이 그들의 일신을 위협했다. 사선을 걷고 있는 전장에서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지 못한 말로는 한결같아서 전장에 펼쳐진 식신의 수가 늘어만 갔다.
모든 전쟁터가 그렇듯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녹이 적군의 수를 대폭 줄였기에 안가는 큰 우세를 차지했다. 녹을 없애기 위한 마법에 마력을 다량 소진한 마법사들은 안가의 밥이 될 뿐이었다.
하늘의 끝에서 황룡이 한 마리 날아와 도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전장의 상황을 살펴본 이네스가 혀를 찼다.
- 이제는 상대편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무슨, 상대하고 싶어도 상대하기 전에 식신으로 변해 버리니…. 하여간 하녹 씨는 접속 잘하셨대? 어? 잠깐, 하녹 씨가 들고 있는 저거 도도잖아? 도도가 진짜 주인을 찾은….
“얼른 녹 주변에 결계 쳐. 지금까지는 장난이었으니까.”
- 무슨, 놀랄 틈도 안 주네. 하녹 씨가 대번에 정리해서 마무리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장난….
콰아아앙-!
툴툴거리면서도 여의주를 들어 결계를 준비하던 도중, 하늘에서 들리는 폭격음에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들이 침입했던 반대편 하늘에서 하늘을 둘로 가르는 균열이 일어났다. 나타난 균열에 의해 마치 하늘 가운데에 지평선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처음 하늘에 그어진 침입자들의 틈새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그 균열이 아가리를 벌리듯 서서히 벌어졌다. 그 공간 안에서 나온 커다란 함성이 전장을 채웠다. 지금까지와 다른, 바다를 이룰 정도의 마법사들이 틈새 안쪽에 빼곡히 포진해 있었다.
안가의 결계를 해제하는 데 어설프지도, 그렇다고 마력을 낭비하지도 않는 깔끔한 실력. 모두가 세상에 숨어 지내던 고위 마법사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개미굴 같은 틈에서 기어 나와 개미 떼처럼 쏟아졌다. 지원군을 포기하던 마법사들은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수의 마법사들의 출현에 다시금 희망을 품고 환호했다.
마법사가 쏟아 내리는 하늘의 틈새에서 한 마리의 하얀 새가 나타나 바람을 가르며 도언의 팔로 날아왔다. 도언의 팔뚝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에게 흡수된 새를 본 이네스가 성마르게 설명을 재촉했다.
- 대체 왜 열매가 왔지? 청연이 저 속에서 위험했었나?
흡수된 열매는 청연이 잠입해 모은 정보를 즉각 도언에게 전달해 주었다. 정보를 모두 읽은 도언이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청연의 무사를 일렀다. 도언은 매서운 기세로 검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하홍이 한 건 했군. 저들은 하홍의 반대 세력이다.”
그들은 하홍이 모은 자들이 아니었다. 홍의 마법사들은 그를 모르는 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실 그들에게는 나타난 마법사들의 소속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들이 안가를 적대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틈새에선 정말이지 온 세상의 마법사가 다 튀어나오듯 했다. 고위 마법사인 그들은 하홍의 급조한 군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홍은 저에게 회유당하지 않은 마법사들에겐 다른 전법을 썼다. 세계수의 재림 이후 너희는 다시 하가 아래에 무릎 꿇게 될 거라며 도발한 거다. 도발이 보기 좋게 먹혀들어 갔는지, 결과가 저거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자가 마법진의 가운데에 있는 녹을 발견했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진 않아도 입이 찢어져라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물론, 저들의 목표는 녹이야.”
결계를 친 이네스가 다급히 녹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어 그들의 시야에 녹을 차단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녹을 본 이후였다. 틈새에서 튀어나온 자들이 허공에 서서 지팡이를 일시에 들어 올렸다.
그들이 마력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심각성을 알아챈 안가의 병사들이 삼삼오오 이네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타난 상대의 수는 기억하는 자들을 합친 것보다 배로 많았다. 그들이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언이 준비한 마법진은 그들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빼앗는 효과였다. 효과를 보려면 저들이 이 땅에 발을 디뎌야만 했으나 저들은 허공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언은 주변의 마력을 힘껏 흡수하며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저들이 준비하는 마법에 맞는다면 마법사는 한순간에 소멸하고 마력이 없는 자들은 그 폭발에 휘말리고 말리라. 여기에서 나서야 하는 건 마법을 튕겨 내고, 또 흡수할 수 있는 도언 자신이었다.
물론 저 정도의 마법 앞에서 홀로 얼마나 버텨 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다. 그저, 모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모든 이가 긴장하며 하늘의 군단을 보았다. 그들의 수장이 들어 올렸던 팔을 크게 내렸다. 날아드는 별똥별처럼, 그들은 일시에 이네스에게 감싸진 녹을 향해 마법을 쏘았다. 일사불란한 마법의 줄기는 한데 모여 달리는 기차만큼 커져 광폭하게 날아들었다. 도언은 선두에 서서 저를 향해 돌진하는 마법을 꼿꼿이 바라봤다. 강렬한 돌풍을 동반한 마법이 도언의 코앞까지 왔다. 자리를 움직일 수 없던 이네스가 외쳤다.
- 안도언!!!
팔랑.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법을 응시한 도언은 제 앞에 날갯짓하며 순간 날아가는 푸른 나비를 보았다. 동시에 도언의 코앞에서 저주의 기차가 멈췄다. 숨죽여 보던 주변에서 웅성웅성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언이 멀뚱히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한치 앞에서 멈춘 마법은 유리가 조각나듯 산산이 깨져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흩어졌다. 그렇게 보였다. 마법은 각양각색의 나비 떼로 순식간에 변해 하늘로 비상했기 때문이다.
“…기적이다.”
뒤에 있던 누군가가 그를 보고 웅얼거렸다. 나비의 형태는 분명 기적의 증거였다. 마법사가 모아 쏜 대형 마법은 정령의 기적으로 신묘하게 변했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어어……?”
여기저기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력을 가진 모든 마법사들의 정수리에서 검은 형태의 마력이 뽑아져 나오더니, 그대로 휘황찬란한 나비로 변해 날아갔다. 나비를 몸에서 보낸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아무리 휘둘러도 마법을 쓰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 몸에서 마력이 사라졌어!”
“분명 하녹의 사술이겠지! 정신 차리고 얼른 식신으로 마력 보충해! 마법사가 이리 모인 지금이 기회라고!!”
“그게 되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으아악!! 일단 뛰어!!”
이제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뭐해진 그들 중 눈치가 빠른 자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발을 놀렸다. 마법의 은혜가 기적으로 변해 마법사의 곁을 떠났다.
녹의 근처를 단단히 둘러 지킨 기억하는 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서로를 바라봤다.
“하녹 님이 해냈다.”
“하녹 님이… 하녹 님이 해냈다!!”
“마법이 사라졌다!!”
그들은 얼싸안고 방방 뛰기까지 했다. 마법이 없는 마법사는 인간이나 진배없었다.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마법 지팡이는 이제 나뭇조각이나 다름없었다. 마법이 사라진 마법사들은 살기 위해 달리느라 체통 없었다. 허공에서 마법을 이용해 떠 있던 마법사들은 낙사하느라 정신없었다.
정말이지 그리듯이 완벽한 승리였다. 기억하는 자들은 복수를 성공했고, 처음부터 도언이 그들의 다수를 상대하며 폭격하듯 병력을 줄였기에 힘겨운 싸움 또한 아니었다. 세계수와 녹의 의식을 이어 주던 발밑의 마법진은 불이 꺼진 지 오래였다.
도언은 기뻐하는 자들을 헤치며 이네스에게 달려갔다. 이네스의 눈에선 눈물이 물풍선처럼 뚝뚝 떨어졌다. 도언은 안가의 염원이 이루어진 감격에 잠식된 이네스의 비늘을 두드렸다. 이네스는 아직도 녹을 똬리를 틀어 감싸고 있었다.
“녹은. 얼른 녹 좀 보여 봐.”
마법이 사라진 이제는 안전하다. 도언의 말에 이네스가 똬리를 풀며 천천히 날아올랐다.
“녹!!”
녹을 발견한 도언이 얼굴을 찡그리며 달려 나갔다.
녹이 쓰러져 있었다.
❊ ❊ ❊
“너 그거 알아? 밤마다 아이들을 홀리는 요정이 튀어나온대. 요정을 따라나선 모두가 실종되었다지 뭐야.”
여름 초저녁. 하가의 심부름꾼 아이들은 냇가 근처 평평한 바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더위를 식혔다. 한 아이가 무시무시한 어투로 조곤조곤 운을 떼자 모여 앉아 있던 아이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쏠렸다.
그때, 녹 역시 무겁게 내려앉고 있는 더위를 피해 갯가 구석에 앉아 발을 담그고 있었다. 아이들은 녹을 본체만체했지만 녹은 그런 아이들의 무시가 편했다. 그러나 들리는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어린 녹은 아닌 척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에이, 요정 가지고 뭘. 나는 밤에 혼자 찍히는 발자국을 본 적 있어.”
“오, 나는 내 얼굴이랑 똑같은 녀석이 하가 바깥을 향해 가는 걸 본 적 있는데.”
“나는 눈을 깜빡이는 물고기! 나도 그 물고기가 귀신인가 싶었는데 지나가던 어르신이 그러더라고. 마생물이 장난치는 거라고.”
“흑몽호라는 악질 요정은 들어 봤어? 가장 무서워하는 걸 보여 주고 공포에 떠는 인간을 삼켜 버린다잖아. 생긴 것도 검은 호랑이 모양이라, 나는 그 모습만 봐도 무서워 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해준이, 네가 들은 요정도 대충 이런 것 중 하나겠지. 공포에 말려 죽이는 요정에 비해 실종 정도는 귀여운 축 아니야?”
웬만한 괴담에 이골이 나 있는 하가의 아이들이다. 괴담의 장을 연 녀석의 이야기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아이들이 진실로 하는 목격담은 간접적으로 들은 소문보다 몰입감이 상당했다.
애써 꺼낸 것이 별거 아닌 이야기로 치부될 위기에, 서두를 꺼낸 아이가 여유 없이 반박했다.
“이번 달에 벌써 아이 중 두 명이 홀려 사라졌대. 요정이 홀려서 데리고 간 거지. 장로님 중 한 분이 실종된 아이들 일로 심각하게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 그냥, 알아 두면 좋잖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이후, 그들은 일상의 쓸데없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이만큼 더위를 식혔다 싶은 녹은 몸을 일으켜 구석에 있는 숲을 향해 걸었다. 갯가에서 녹의 방까지 오는 이 지름길은 녹만이 알고 있다. 아이들은 나무가 너무 빼곡해 어두운 숲속에 들어오는 걸 꺼렸고, 어른들은 산행에 영 관심이 없었다.
‘너무 어둑해지기 전에 가야겠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다. 숲은 이미 이른 저녁을 맞았다. 빠르게 돌아가려던 도중에 낯선 인기척이 지름길 안쪽에서 느껴졌다. 인기척이라니.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녹이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녹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향해 다가갔다.
‘쟤는…?’
웬 아이 한 명이 반딧불 같은 조그만 무언가를 쫒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반딧불을 잡기 위해 들어온 건가? 하지만 반딧불이라기엔 빛의 형태가 이상했다. 이 세상에서 파란빛을 내는 반딧불은 없었다. 거기에 자세히 보니 형태도 곤충이 아닌 것 같고….
‘저거 설마 애들이 말한 요정인가?’
아이를 홀리는 요정이라면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들은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녹은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얘야! 얘야!”
아무리 소리쳐도 아이는 듣지 못하는지 요정을 따라갔다. 아무래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장난을 좋아하는 요정이지만 그 강도는 개체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가볍게 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심하게는 목숨까지 위험한 장난을 걸어왔다.
녹은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 항상 마주했던 숲이 미로 같았다. 아이를 따라가고, 또 따라가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자신은 뛰고 있고 자신보다 작은 아이는 걷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이것 역시 요정의 장난이 확실했다. 된통 걸렸구나. 녹은 쉬지 않고 달렸다. 어느 순간, 아이와 녹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졌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 짜내 아이를 향해 전력질주 했다. 지척까지 다가선 녹은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억, 허억, 헉.”
드디어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안도감에 남은 손으로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여 숨을 몰아쉬며 쉬었다. 다행히 아이는 녹이 저를 붙잡자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어쩌다 홀린 거람. 일단 붙잡았으니 얼른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보통 요정에게 홀리면 꿈꾸는 듯 멍한 상태가 된다. 몸에 딱히 힘이랄 게 없어지니 데리고 나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거다.
호흡을 고른 녹이 몸을 일으켰다.
“응?”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헌데 아이의 상태가 예상과 달랐다. 잠을 못 잤는지, 어린아이치고 눈 밑이 퀭했지만 눈빛만큼은 총명하니 빛났다. 눈에 띄게 사랑스럽게 생긴 아이는 아무리 주변에 관심 없는 녹일지라도 알고 있는 인사였다.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귀동냥으로나 듣던 녹은 소문의 아이를 이리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정체에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아이의 옆에 있는 요정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요정에게 홀렸다면 마치 인형처럼 초점이 없을 텐데 저 또렷한 초점은 뭐란 말인가. 피곤에 절어 보이는 것만 빼면 지극히 정상 같아 보이지 않는가.
이제는 보랏빛을 한 요정이 신경질적으로 둥둥 떠다녔다. 날개 없는 소인간의 모습인 그는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요정 본인인 모양이다. 그가 팔짱을 끼고 녹을 못마땅하게 내려 봤다.
- 아, 어떻게 따라온 거지? 헤매 좀 보라고 숲을 돌리고 또 돌렸는데. 너 혹시 마법사냐?
“…….”
왜 이런 분위기지? 혹시 오지랖을 부린 걸까? 떠오른 가설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못된 요정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 잠깐. 홀리지 않았다면 지금 저 요정을 따라온 녀석, 의도적으로 내 부름을 무시한 건가?
이 공간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녹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아이는 저를 불러 세운 녹을 파악하느라 그랬다. 요정은 그를 보고 사납게 말했다.
- 대답 안 해? 대체 왜 따라온 건데.
뻘쭘한 상황을 타개한 건 역시나 요정이었다. 비집고 들어오는 음성에 녹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저기….”
문득 녹이 말을 멈췄다. 아이의 뒤쪽 수풀에서 노란 무언가가 반짝였다. 저게 뭔가 싶었던 녹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주시했다. 예의 그 노란 것은 금방 사라졌다. 말을 하다 말고 한눈을 파는 녹에게 아이가 차갑게 말을 걸었다.
“이곳은 무슨 일입니까.”
아이의 목소리만큼은 건조했다. 어이없는 그 물음에 빛나는 눈알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었다.
아이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요정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 했던 녹은, 제 옆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저를 보는 요정 때문에 질문을 삼켰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간 평생 숲을 헤매게 될지도 몰랐다. 결국 나오는 말은 생뚱맞기 그지없었다.
“그냥, 길을 잃어서…. 길을 좀 물을까 싶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무언가를 숨긴 수풀이 미묘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아이에게 대꾸하며 다시금 그쪽을 주시했다. 수풀이 움직임을 멈췄다. 다람쥐 같은 건가?
방심할 때, 수풀에서 큰 그림자가 아이의 뒤를 향해 튀어 올랐다. 사나워 보이는 흰 송곳니, 파르라니 살기가 솟은 맹수의 눈, 하얀 줄무늬를 등에 두르고 있는 검은 가죽. 저건 분명….
‘흑몽호라는 악질 요정은 들어 봤어? 가장 무서워하는 걸 보여 주고 공포감에 말려 죽인다잖아. 생긴 것도 검은 호랑이 모양이라, 나는 그 모습만 봐도 무서워 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갯가에서 아이들이 나눴던 괴담이 떠올랐다. 무언가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녹은 아이를 옆으로 힘껏 밀쳐 냈다. 아이를 노리던 호랑이는 그대로 녹의 어깨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희뿌연 연기가 되어 녹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흑몽호를 피하지 못한 녹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 이런… 쯧쯧. 저 녀석은 이 근방에 하나 남은 녀석인데. 하필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빼앗아 갔네. 아쉽겠다. 도언아. 흑몽호가 죽은 가족 꿈을 보여 줄 유일한 녀석인데 말이야.
녹에게 밀쳐져 쓰러졌던 도언이 몸을 일으켰다. 요정은 시시덕거리며 쓰러진 녹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도언이 녹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 앉고는 제 기회를 앗아 간 그의 상태를 살폈다. 사정없이 찡그린 그의 미간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악문 잇새에는 고통을 참아 내는 신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요정은 흑몽호가 보고 싶은 존재를 보여 주는 꿈의 요정이라고 했다. 그리운 존재를 만나면 벅차지 않나? 그런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인데 행복해하기는커녕 괴로워만 보였다.
“그리운 무언가를 만나는데 왜 이렇게나 고통스러워 보여?”
- 그러게.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한번 볼까?
꿈을 엿볼 수 있는 요정이 녹의 귀 안에서 연기 한 뭉텅이를 뽑아냈다. 뭉게뭉게 피어난 연기는 장면을 띄우며 녹의 꿈을 보여 주었다.
연기 속에서 녹은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수천의 호랑이가 그를 뒤쫓았다. 주변은 몸을 숨길 곳도 없는 황야.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는 중이었다.
흑몽호가 보고 싶은 꿈을 보여 줄 줄만 알았던 도언은 생사를 넘나드는 녹의 뜀박질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게 이자의 그리운 장면이라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도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아, 이 녀석. 살면서 그닥 두려운 기억이 없었나 봐. 재미없네. 그게 없으면 흑몽호는 저렇게 호랑이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서 뼈째로 삼키는데.
요정이 심드렁해져 말을 이었다.
- 나는 저런 것보다 신선한 걸 보고 싶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너가 흑몽호로 부모님의 꿈을 꿀 수 있다고 했잖아. 분명 네가 나에게 흑몽호로 부모님을 한 번 더 보여 줄 수 있다고 했었어.”
- 보여 줄 수 있지. 너가 가장 두려워하는 기억이 불타고 있는 집에서 부모님을 챙기지 못하고 나온 거잖아. 방에 갇힌 아버지가 문틈에서 동생 먼저 데리고 나가라고 그랬다며.
상황과 요정의 말에 빠르게 상황 파악한 도언의 머리가 댕 하니 울렸다. 그렇다면 보여 준다고 했던 부모님의 모습은….
- 아, 더 무서워하라고 그 인간들의 고통에 찬 모습을 부각해서 보여 줄 수는 있겠네. 그러면 공포는 더 커질 테니 흑몽호도 좋아할 거야. 저 녀석. 공포를 주식 삼는 녀석이니.
어차피 도언을 흑몽호에 밀어 넣는 걸 공친 요정이다. 이제는 속이는 걸 관두었는지 숨기지 않고 악랄하게 낄낄댔다. 속았단 걸 알아챈 도언의 절망을 보는 것도 재밌긴 했다. 그의 악몽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나쁘지 않았다.
- 여하간 저 녀석, 공포로 심력을 다 쏟으면 그대로 죽을 건데. 아마 꿈속에서 호랑이한테 잡히면 끝일걸? 넌 어떻게 할 거지?
도언은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얼른 하가의 어른들에게 구명을 부탁해야 했다. 마법사들이니까 뭐라도 조치해 주겠지! 깔깔 웃는 요정이 주변에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늦었다간 자신 때문에 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요정의 달콤한 말에 꾀어 넘어가다니. 모든 게 제 무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언은 과거의 순진을 통렬히 원망했다.
- 네가 숲 바깥에서 사람을 마주칠 때, 여기에 있는 건 인간일까? 아니면 시체일까? 깔깔깔!
얼른 쓰러진 녹을 일으켜 바위에 등을 기대게 했다. 꿈을 엿보며 남은 시간을 가늠할 시간조차 없었다. 도언은 뛰기 위해 녹의 몸을 급히 둘러업었다. 어린 날 세 살 차이는 컸다. 꼬마가 저보다 큰 형을 업으려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는, 요정은 귀 아프게 낄낄댔다.
-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그냥 몸이라도 편하게 그거 여기에다가 내려 두고 너 혼자라도… 어?
업은 몸에서 점점 무게가 덜어졌다. 땅에 끌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더니 녹이 우뚝 섰다. 일어날 리 없던 녀석이 몸을 일으키는 통에 요정이 벙벙한 반응을 보였다. 꿈을 보여 주던 연기는 이미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다.
녹이 연기가 나왔던 귓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얼굴을 찡그렸다.
-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요정은 자력으로 흑몽호에게 깨어난 아이를 경악스럽게 주시했다. 모두의 긴장 속에서 녹이 입을 열었다.
- 가능한 내 주위에 터를 잡은 아이들을 쫓아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감히 이 아이의 목숨까지 가지고 놀아?
녹이 새삼 하찮게 요정을 내리깔며 말했다. 녹의 목소리가 일전 들었던 것과 달라졌음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아챘다. 투명하고도 짙은 목소리였다. 바위가 날카로운 칼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시냇물이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목소리를 타고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모를 리 없는 청량한 마력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마력이 없는 도언은 느낄 수 없었으나, 요정은 그 목소리를 듣고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 당신이… 여긴 어떻게….
- 잠시 몸 좀 빌렸다. 지켜볼 수가 있어야지. 하필 건든 아이가 이 아이라니. 장난이 지나쳤다. 그대 때문에 요정이란 요정은 이곳에서 몽땅 내쫓을 테니 그런 줄 알아라.
- 잠깐, 세계….
- 너는 쫓겨나는 저들과 다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 저들에게 비난받을 걱정은 말거라.
제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요정은 파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들을 나무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요정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없어졌다. 세상에 사라져 버린 그를 말리지 않은 죄로 하가에서 몽땅 추방된 거다. 세계수의 등장으로 떠들썩했던 숲은 요정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가만히 고요를 즐기던 녹의 몸은 천천히 무너졌다. 정신을 차린 도언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녹은 눈을 감고 쓰러져 있었다. 도언이 그를 애타게 흔들며 깨웠다.
“도령, 도령!!”
“…으으.”
도언의 거친 부름에 녹이 눈을 떴다. 끔찍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뛴 덕택인지 괜히 다리가 저려 왔다. 녹은 식은땀으로 푹 젖은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살폈다.
저를 깨운 건 요정의 뒤를 따르던 아이였다. 그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누워 있는가 기억을 되짚던 녹이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나 살아 있는 거 맞나? 흑몽호에게 집어삼켜졌는데?”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울음기 섞인 앳된 목소리가 긴박하게 물어 왔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아이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녹은 고개를 급히 끄떡였다. 안심한 아이가 녹을 와락 안아 왔다.
아이의 조그만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게 느껴졌다. 배신에, 구명에, 무섭게 몰아치는 진행에 떠는 아이는 열이 올라 알맞게 따듯했다. 녹은 제 어깨가 아이의 눈물로 서서히 젖어오는 걸 느꼈다. 긴장이 풀렸는지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그래, 얼마 오지도 않았는데 하가가 이런 곳이란 걸 얘가 어찌 알았겠어.’
아이부터 진정시킨 후에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야겠다. 녹은 저를 끌어안은 사내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언질했다.
“꼬마야. 다음에는 이상한 거 따라가지 말아라. 누가 부르면 좀 듣고. 큰일 날 뻔했다고.”
그러자 되레 아이의 흐느낌이 심해졌다. 이크, 꾸짖음처럼 들렸을까. 바로 진정하긴 글렀다 싶다.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드니 나무의 잎사귀 사이로 어느새 어둠 한 조각 깃든 게 보였다. 그리고 불쑥 나타난 웬 남자의 얼굴.
“이때 녹 정말 멋졌는데. 녹은 저를 구하며 무슨 생각 하셨나요?”
이번엔 또 뭐야. 고개를 젖힌 상태에서 눈만 끔벅였다. 튀어나온 남자가 빙글빙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담으며 녹을 내려 봤다. 밤의 반짝임 같은 사내였다. 참, 숲에 별게 다 나온다 싶었다. 무릎을 꿇어 녹과 눈을 맞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함께 돌아가죠. 당신이 구한 세상으로.”
❊ ❊ ❊
번쩍.
“오빠!!”
“억.”
녹이 눈을 뜨자마자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제 몸 위를 덮쳐 왔다. 억소리가 절로 났다. 장기가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는 감각이 적나라하게 녹을 깨웠다. 녹을 덮친 주범은 인간으로 변한 도도, 진예였다.
“일어나실 때까지 룬이랑 열심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각보다 금방 나오셨네요!”
“…그래. 도도구나. 너는 괜찮아? 그때 마력 정말 많이 흘려보냈는데….”
“완전히 말짱해요! 세계수의 마력만큼 저희 정령들에게 좋은 게 어디 있다고요!”
월월! 명랑한 아이의 목소리를 끝으로 룬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진예와 같이 온 모양이다.
“여하간 그걸 끝으로 가주님이랑 청연이 오빠 꿈속에 들어가서는 한참이나 나오질 않아서… 어어?”
진예의 몸이 허공으로 들려졌다. 녹을 깔고 앉아 있는 진예를 거두어 간 자는 도언이었다. 가벼워짐에 고마움을 느낀 녹이 몸을 일으켰다. 안전하게 몸을 감싸는 푹신한 시트와 이불, 그리고 진예의 기운찬 모습을 보니 세계수가 마법사에게 마법을 빼앗아 달라는 그 소원을 확실하게 들어주긴 했나 보다.
도언은 아이에게 그건 예의가 아니라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곧바로 교육하는 모습이 아이의 보호자와 다름없어 보였다. 진예가 도도라면 나이 꽤나 먹었을 텐데 아직도 교육에 열을 올리다니. 괜한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예에게 한소리 한 도언이 녹에게 몸을 돌렸다.
“배고프진 않으십니까? 진예 말대로 오랫동안 잠들어 계셨습니다.”
“넌 하여간 진짜 한국인 맞다. 어찌 밥부터 챙기는 게 변하질 않네.”
녹의 대답에 도언 역시 비식 입꼬리를 올렸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하지만 확인을 받을 때까지 평화로워서 안 되었다. 녹이 전쟁의 결과를 물었다.
“그래서 상황은? 어떻게 되었어?”
도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도언의 뒤에서 갈색 머리의 청년이 불쑥 나타나 도언 대신 보고하기 시작했다. 푸른 눈 가득 생기를 담은 그는 하홍 밑에서 잠입을 하고 있던 청연이었다.
“물론 잘되었죠! 마법사들은 마법을 잃었어요. 마력에 기대 타고난 수명보다 오래 살았던 마법사들은 그대로 소멸했고요.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는 대부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요. 제 힘이 사라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자들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요. 마법 없이도 살아가고 싶어 하는 돌연변이들은 어찌 처리할지 안가의 주민들이 투표로 의견을 모으고 있어요. 아무래도 지금 흐름으로는 재판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고요. 아, 이리 안전하게 다시 뵈니 좋네요! 하여간 진예 이 사고뭉치 때문에 얼마나….”
“청연의 말대로 걱정하실 필요 없이 잘되고 있습니다. 녹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도중 쓰러지셔서 놀랐습니다.”
도언이 청연의 사설을 자르고 들어왔다. 녹은 제 주먹을 신중히 쥐었다 폈다. 이후, 손가락 하나를 펼쳐 녹색의 나비 하나를 만들어 냈다. 나비는 식신과 정반대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나비는 날개를 펼쳐 팔랑이다가 천장 부근에서 사라졌다. 청연이 사라진 나비의 기운을 읽고 중얼거렸다.
“저건….”
“기적이잖아요!”
진예가 청연의 흐린 말끝을 받아 이었다. 바로 알아맞히다니. 진예가 확실히 정령은 정령인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정령은 기적의 감지에 강했다.
“세계수는 내 소원대로 세계의 규칙을 바꿔 준다 했어. 마법사에게 마력과 식신을 빼앗으니 나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거고. 대신 그는 내게 기적을 허락했지. 게다가 봐, 공기 중에 세계수의 마력이 가득하잖아?”
녹이 말하는 대로였다. 녹에게 집중되었던 세계수의 마력은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갔다. 이제는 녹이 없는 곳에서도 그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수가 내게서 빠져나왔어. 선물이 짐이 될지는 몰랐다나. 이제 나는 잠재력만 무식하게 많은… 전직 씨앗일 뿐이지.”
이제 녹이 죽어도 그 자리에 씨앗이 움트는 일 따위는 사라졌다. 세계수는 녹과 헤어지기 전 자신은 잘게 부서져 공기 중에 녹아 있을 거라 녹에게 일렀다.
담겼던 힘이 부서지며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에 퍼져 나갔다. 미친. 진작에 좀 이러지. 어차피 다시는 세계수를 못 만나는 마당에 욕해서 좋을 것도 없다. 제 몸에 담겼던 마력이 퍼져 나가는 걸 느끼며 녹은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욕을 필사적으로 눌러 참았다.
물론 세계수 역시 할 말은 있었다. 마법사들 위에서 군림하며 행복하라 녹에게 힘을 맡긴 거였는데, 그건 인간과 공생을 중시하는 녹이 이룰 수 없었다. 좀 버티면 권력의 행복을 깨닫겠지 했건만 죽을 만큼 싫다 하니 제가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굳이 기적을 허락하다니. 하여간 거의 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알 수 없이 특이해. 그 나무.”
녹은 쓸데없는 자비에 헛웃음을 흘렸다. 마법사가 다 사라진 지금에서야 힘을 사용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녹은 언제나 그들을 대적할 때라거나, 숨을 때, 혹은 식신을 없앨 때나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계수가 너와 첫 만남을 마지막 꿈으로 보여 줄지는 또 몰랐다. 하여간 마지막까지 조용히 가 먹지를 않는다니까. 하필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을 때 푹 재워 버리면 어떻게 해. 위험하게.”
어찌 보면 세계수의 마지막 고집이었다. 저와 함께라면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도언과 첫 만남 때 세계수가 녹의 몸을 빌려 나타나 구해 줬었다.
그때가 녹의 몸에 세계수가 깃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마 제가 녹을 구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보여 준 꿈이 아니었을까. 당시 어찌 된 영문이었는지 도언에게 물어도 그 역시 정확히 몰라 녹에게 알려 주지 못했으니까. 세계수가 제 몸을 빌려 저를 구했는지 꿈에라도 알았겠는가. 지금껏 흑몽호의 악몽에서 벗어난 걸 하가에서 일어난 기현상 중 하나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녹이었다.
하여간, 세계수는 세상을 움직이는 주축이면서 생색 한번 확실했다. 이번 일로 그 나무가 좋은 뜻으로 자신을 그릇으로 임명했다는 걸 알게 되긴 했다. 최선의 자기방어는 힘에서 나오는 권력이었다. 세계수는 녹에게 그걸 선물해 주고 싶었던 거다. 물론 녹이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라 방법이 좀 잘못되긴 했지만….
“하여간, 마력에 기대 살았던 녀석들 모두 녹았다며.”
“그랬죠.”
지금 보니 녹이 기적을 다루지 못했다면 녹 역시 그들과 함께 소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야 좀 살 만한 세상이 되었는데 말이야. 그대로 가기엔 확실히 억울하긴 하지. 이제야 세계수가 손톱만큼 고마워졌다.
“그러고 보니 도언이 너는 인간이잖아. 어떻게 지금껏 살아 있는 거야?”
“녹이 제게 준 열매 덕택이죠. 세계수가 녹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맞춤 선물이니만큼 녹과 열매는 수명을 함께합니다. 열매에 기대 사는 저 역시 열매와 명이 같고요.”
아, 안 그래도 세계수가 말했던 적이 있다. 열매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파트너라고. 지금 이 방 안에 그 하얀 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언의 등 뒤에서 문신 형태로 쉬고 있나? 한번 물어나 볼까.
“어허. 진예야. 그거 위험해.”
도언이 엄한 목소리로 진예에게 한 소리 했다. 무슨 일인고 하니, 진예가 구석에 있던 유리 음료수병을 가지고 룬과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도언의 말을 듣고 그새 얌전히 꼬리를 내린 룬과 진예였다. 그 모습에 녹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적진에 진예가 납치되어도 걱정 하나 하지 않던 애가 무슨. 어쨌건 그렇게 보니까 도언이 너 진짜 진예 아빠 같다.”
“가주님은 제 아빠 맞죠. 가주님이 저를 만들지 않았다면 저는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가주님.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녹은, 진예의 물음을 듣고 미묘하게 찌푸리는 도언의 이마를 놓치지 않았다. 이리 장난을 거는 걸 보니 확실히 진예는 하진이의 넋을 본뜬 도도가 맞았다.
진예는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이며 도언이 어떤 반응을 할지 잔뜩 기대했다. 녹 역시 이 즐거운 상황에 힘을 보탰다.
“그래. 도언아. 어차피 네가 도도를 만들었으니 결국 진예도 네 딸이나 다름없다. 너가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 아니야.”
“어어? 그럼 저도 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옆에 있던 청연이 끼어들며 녹에게 물었다. 도언을 놀리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한 녹이었으나 이건 좀 주춤했다. 도언과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데, 다 큰 성인 남성을 도언의 아들로 붙여 주기에는 장난이라도 양심이 좀 찔린달까.
‘그 전에 왜 나한테 그걸 묻는 거지.’
할 말을 잠시 찾지 못한 녹이 뒷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음. 뭐, 도언이는 좋겠네. 아들도 생기고 딸도 생겨서.”
결국 놀려 먹는 걸 선택한 녹이었다. 녹의 떨떠름한 장난에 청연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시옷 자로 만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주님 얘기가 왜 나와요? 저는 녹 님 말한 건데요?”
“나? 갑자기 내가 왜 나와.”
“녹 님이 없었으면 저도 태어나지 못했으니까 그렇죠?”
“너는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알차게 하냐?”
“어라? 뭐지? 가주님이 말씀 안 해 주셨어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청연이 물어봤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고개를 돌려 도언에게 표정으로 물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니 씨익 웃은 도언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도언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새하얀 깃털을 가진 하얀 매가 녹의 앞에서 정지 비행을 하고 있었다. 매가 푸른 눈을 깜빡이며 부리를 열었다.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새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 제가 열매라는 사실요!
“…….”
흰매가, 아니, 청연이 퍼드덕거리다가 도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어쩐지 저 새의 눈이 왠지 누군가랑 비슷해 보인다 했더니 그게 청연이었나. 청연과 도언은 당연히 열매를 매개로 통신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청연이 열매여서 그런 식의 통신이 가능했던 거였다.
“…아니….”
“아들 생긴 거 축하드립니다.”
도언이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새는 도언의 어깨 위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새하얀 깃털을 뽐냈다.
녹은 그 모습에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열매는 마법을 쓸 수 있나? 당연히 정령이라 못 쓰는 줄 알았는데. 하, 이제는 놀라는 것도 지친다. 아주 뒤죽박죽. 이 세상에 믿을 게 하나 없었다.
“아오, 피곤해. 더 있어? 더 있으면 지금 말해. 모아 뒀다가 한 번에 놀라게.”
- 놀랄 만한 일이요? 아, 선물! 주민들이 보낸 놀랄 만한 양의 선물이랑 편지가 녹 님 앞으로 와서는, 일단 한곳에….
“녹 씨! 깨어나셨군요!!”
이네스가 방문을 열고 달려오며 허겁지겁 녹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왔다. 녹의 무사 귀환에 크게 감격한 모양인지 이네스의 눈가는 촉촉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도도도, 아니, 진예도 그렇고요. 겨우 만난 녹 씨가 그렇게 세계수의 의식에 매몰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네스. 혹시 당신 사한 아니죠?”
“네…네?”
상상도 못한 녹의 첫마디에 이네스가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당황을 숨기지 않는 그 모습에 녹의 의심은 깊어졌다.
둘의 형태는 확실히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래, 사한이 이무기라고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 이무기는 용이 되고….
주문이 필요 없는 정령과 달리 마생물과 마법사는 주문으로 마력을 표출했다. 하지만 청연도 정령이면서 마법을 부리고 영물도 아니면서 인간으로 변하고. 사한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사한과 만났다고 했던 과거야, 거짓말일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지금껏 진예가 아홉 살인 줄 알았던 녹의 불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의심이 그득 담긴 질문에 이네스는 상황 파악을 위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배시시 웃는 진예와 도언의 어깨에 앉은 청연. …왜 저렇게 나오는지 알 만했다.
“아하. 청연.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정령은 영물을 제외하고 청연이 유일해요. 마법을 쓰는 것 역시도요. 세계수의 마력이 희박해지니 기적 대신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바로 적응해버리던걸요. 거기다 주인이 체질 때문에 알차게 모은 마력을 알차게 쓰기까지. 역시 세계수의 열매는 달라요. 확실히 연구 대상… 아니, 이게 아니지. 여하간 지금은 온천지가 세계수의 마력이니, 이제 청연도 마법 대신 기적을 쓰겠죠. 그리고 아무리 비슷하게 길쭉길쭉하다지만 그 꼬장꼬장한 사한 녀석과 제가 동일 인물이라뇨. 색깔도 다른데요.”
이네스가 손사래까지 치며 부지런히 부정했다. 그러나 녹은 아직도 따가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에 이네스가 필사적으로 본인을 변호했다.
“게다가 만일 제가 사한이었다면, 본인 자체가 정령이니 영물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저는 그냥 진예 친구나 만들어 주려고 영물을 찾은 거였는데…. 아! 결정적으로 당신을 몰라볼 리 없었겠죠! 그 난리도 안 쳤을 테고요.”
마지막 주장은 확실히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에 녹은, 그녀에 대한 의심을 손쉽게 지웠다. 다시 생각하니 제 주장이 헛소리였음을 안 녹은 괜히 부끄러워져 헛기침했다. 하긴, 마법을 부리든 기적을 부리든, 그게 다 그냥 정령도 아닌 열매니까 가능했겠지.
“어쨌건, 세계수의 마력이 온 세상 구석구석 퍼졌어요. 정령들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는걸요. 여하간 그간 일에 대해선 가주님에게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녹은 방금 했던 설명을 그대로 이네스에게 들려주었다. 간간이 고개를 끄떡이며 진지하게 듣던 이네스가 턱을 매만지며 분석했다.
“그럼 하녹 씨는 씨앗도, 마법사도 아닌 독특한 존재로 남게 되었네요.”
“그런 셈이죠.”
“흠. 잠시 통찰해 봐도 될까요?”
이네스가 손을 내밀기에 녹 역시 거리낌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귀걸이가 밝게 빛나며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력이 온몸을 훑는 잠시간의 시간이 끝나고, 이네스는 진단 결과를 상세히 고했다.
“음. 아무리 세계수의 힘이 빠져나갔다지만 세계수의 힘을 담은 홈은 남아 있어요. 시간을 들여 마력을 담기만 한다면 전과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겠는걸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죠.”
전과 같은 힘까지는 기대도 안 한 녹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필요 없긴 하지만… 목숨을 노리는 자들도 사라졌고 하니 좋은 게 좋은 건가?
“그보다 깨셨으면 잠시 이리로 와 보시겠어요? 재밌는 거 보여 드릴게요.”
의사 모드를 끝낸 이네스가 발코니로 향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사늘한 밤바람이 기분 좋게 방 안을 마실 왔다가 산뜻함을 남기고 나갔다. 얼음 내가 묻은 봄바람이었다. 녹이 이불을 걷어 내고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급히 일어나느라 옆에서 도언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챘다. 한껏 걱정을 담고 있는 얼굴로 물끄러미 내민 손이 공연히 웃겨, 녹은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투명하게 전해졌다.
“사흘 정도 굶어도 쓰러지지는 않더라. 걱정 말아.”
“사흘만 지난 줄 아십니까. 지금 바깥은 벌써 봄-.”
“하녹 씨! 여기예요!”
“예, 갑니다!”
이네스의 재촉에 도언은 할 말을 삼키고 녹은 걸음을 빨리했다. 누워 있던 곳이 대체 어디였는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여유가 생긴 녹이다. 청연의 집도 아니고, 도언의 집도, 이네스의 집도 아닌 새로운 낯선 공간이었다. 일단 테라스까지 걷는 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기는 굉장히 넓었다.
까만 밤하늘을 배경 삼은 이네스가 발코니에 서서 얼른 나오라고 손짓했다. 대체 뭘 보여 주려고 저렇게 신났는지 모를 일이다. 이네스가 바깥쪽을 향해 손짓하길래 녹 역시 가까이 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 폭죽이 터졌다.
우와아아아아--!!
폭죽 소리마저 덮어 버리는 함성은 땅에서 터져 나왔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이 녹을 발견하고는 한일전 결승골이라도 넣은 듯 환호하기 시작했다. 아래를 보던 녹이 그 모습 그대로 굳어 뒷걸음질로 방 안에 들어왔다.
“저게 지금….”
“녹 씨가 마법사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린 건 비밀이 아니라서요. 바깥에 있는 저 사람들이 녹 씨가 깨어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먼 곳에는 캠핑존까지 설치해 뒀을 정도라니까요? 일찍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함성 소리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세상 살면서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저를 향해 환호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은 채 훅 들어오니 괜히 부담이 쌓였다. 아무래도 무대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얼른 인사해 주세요! 영웅님!”
이네스가 되려 흥분해 재촉했다. 녹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데록데록 굴러갔다. 아, 저기에 다시 나가라고?
“의무는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아도, 아예 안 해도 괜찮고요. 조용한 곳이 필요합니까?”
따뜻하고 큰 손이 뒤에서 어깨를 감싸 왔다. 도언은 정확히 녹이 필요한 걸 제시했다. 함성 속에 빠진 듯 사방이 소란했으나 도언의 말만큼은 그에 묻히지 않았다. 녹은 도언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도언이 이네스를 보고 희미하게 승리자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 도언의 어깨에 있는 청연이 크게 날개를 펼쳐 보였다. 이네스가 그 뜻을 알아채고 냉큼 방 안쪽으로 달려오며 손을 뻗었다.
“안도언! 너 지금,”
“청연.”
그러나 달려온 이네스가 잡은 건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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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대 공포증 같은 거 있나 봐.”
도언과 함께 도착한 곳은 거대한 고목의 위였다. 안가의 뒤쪽, 야트막한 산의 가장 높은 고도에 있는 나무인지 안가의 전경이 대부분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환호하는 광장 또한 보였다. 그 앞에 있는 건물이 녹이 누워 있던 건물인가 보다.
“정리될 때쯤에 모여들기 시작하더군요. 안가 바깥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자들 역시 섞여 있습니다. 세계수의 마력이 느껴지니 너도 나도 원인을 찾았던 거겠지요. 이 노고를 모두가 알아야 한다며 이네스가 여기저기 파발을 보낸 것도 저기에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도언의 어깨 위에 있던 청연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녹은 굵은 가지 위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기댔다. 반짝이는 별들과 안가 건물의 불빛이 한눈에 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광장을 제외하면 주변은 고요했다.
“진짜 끝난 건가? 실감이 안 나네.”
녹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리 없다. 도언 역시 녹의 옆에 주저앉고는 등 뒤로 팔을 빼내 기댔다.
“곧 나게 되실 겁니다. 거짓이 아니니까요.”
도언이 뒤로 기댔던 손을 깨끗하게 털고선 녹에게 내민 손에 녹이 멀뚱히 그를 보았다. 도언이 부드럽게 웃으며 제안했다.
“이제 같이 나아가 보죠.”
“어디로?”
“녹이 바라 마지않던 행복하고 평범한, 그런 대단한 일상으로.”
누군가가 내미는 손을 잡는 게 괜히 어색했다. 언제나 혼자인 인생이었다.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만들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런 삶 끝에 한 남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초했던 외로움은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
녹은, 도언의 손을 위에 제 손을 띄우고는 머뭇거렸다. 도언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허공을 한참 더듬던 녹은 마침내 도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도언은 그제야 녹의 손을 마주 잡고는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도언의 어깨에 턱을 기대게 된 녹이었다. 도언에게 묵은 감격이 격하게 쏟아져 나왔다.
“당신이 저를 잡았네요. 당신이요.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껏 본인을 포기하지 않아 줘서, 오늘까지 버텨 줘서 진실로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숨이 멈췄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도언은 손쉽게 꿰뚫었다.
큰 힘은 축복이라고 모두가 그랬다. 모두가 세계수의 힘을 가진 자는 편히 살 거라고 착각을 했다. 어디선가 그 선망의 힘을 펑펑 써 대며 즐겁게 살 거라고. 허나 나는 그저 버텨 내야 할 짐일 뿐이었다.
힘의 대가는 내가 인간들을 외면할수록 가벼워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 버렸다.
나는 세상에 밀려 들어올 불행을 온몸을 다해 막아 냈던 수문장이었다. 입안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로 이를 악물고 세상을 버텼다. 세계수는 그를 막는 데 쓰라고 이 힘을 주지 않았지만, 내가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터지는 건 나뿐만 아니라 세상이기에 평생 바늘을 심장에 담고 살아왔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고통이었다.
아무도 내게 세상을 짊어지라고 하지 않았다. 결국 이건 내 고집이자 내가 내게 걸어 둔 형벌이었다. 제우스의 명령도 아닌데 스스로 지구를 짊어지는 아틀라스라니. 그 얼마나 답답하고 우스운가. 항상 무거워지기만 하는 책임을 등딱지처럼 몸에 이고 느리고도 느리게 살아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죄벌 같은 내 고집에서 나를 끄집어낸 건 도언의 고집이었다. 도언을 까맣게 잊고 살던 나였는데, 적어도 나로 인해 받는 고통을 잊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기억까지 지웠던 나였는데,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나의 운명에 대항해 투쟁했다. 나조차도 버거워 감히 하지 않았던 그 일을 결국 해냈다.
나를 감싸 오는 온기를 느끼고 있자니 이제야 모든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이 실감 났다. 영혼을 죄이던 사슬이 사라지니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그 구속이 사라질 쯤이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삶을 버티는 게 일이었다. 나는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언젠가 볕이 들 거란 희망조차 내겐 사치였다. 그냥, 그렇게 어둠을 홀로 걸어왔었다. 짐을 무겁게 이고 한 걸음씩 내딛던 나는 지루한 어둠을 버텼다.
그런 내게 도언이 나타나 비어 있던 내 손을 잡아끌어 여명으로 인도했다. 어느새 한 몸 같던 짐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빛이 너무 눈부셔 눈물이 났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버텨 줘서 고맙다는 도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저 그의 목을 힘주어 끌어안을 뿐이었다. 찌꺼기처럼 쌓았던 내 아둔한 의무가 눈을 통해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어룽지는 시야에, 하늘에 박힌 별들이 아롱아롱 춤을 췄다. 도언의 어깨가 젖어 들수록 이상하게 후련했다.
씨앗처럼 웅크리고만 있던 내 삶은 이제야 비로소 피어났다.
<대충 살고 싶다, 진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