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봄의 손님(외전) (21/24)

봄의 손님

찾아온 봄바람은 안가의 숲을 꽃들로 물들였다. 뭉게구름이 몇 점 흘러가는 파란 하늘에선 하얀 새가 넓은 날개를 펼쳐 헤엄쳤고, 벛꽃잎이 섞인 분홍 바람이 그 모습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희진이가 선생님한테 1+1은 어째서 2냐고 물었더니….”

넓게 깔아 둔 돗자리. 벚꽃 놀이를 나온 진예가 이네스에게 조잘대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네스는 아무리 아이가 실없는 소리를 해도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바람은 부드럽고 아이의 목소리는 평화롭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얀 매 청연은 자유로우며 녹이 베고 있는 도언의 무릎은 딱딱했다. 이게 바로 벚꽃 놀이의 참맛인가. 주변에 가끔씩 찾아드는 정령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아주 명당이로세.

맥주 몇 캔을 마시고 알딸딸한 기분이 된 녹이 눈을 감고 달콤한 바람을 양껏 들이마셨다. 안가의 결계 바깥은 연일 미세먼지로 가득하다던데, 안가는 그 영향을 받지 않는지 공기가 깨끗했다.

녹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도언의 손길은 안 그래도 노곤했던 녹을 아예 흐물흐물 녹여 버렸다.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게 진정 쉬는 거라 했던가.

기를 쓰고 막아야 할 적군도 없고, 정체를 목숨 걸고 숨겨야 할 이유도 없으니, 이 정도면 녹에게 백 점짜리 휴가였다.

“어? 파란색 토끼다! 이네스! 처음 보는 파란 토끼야! 정령!!”

“뭐?? 어디로 갔어??”

한참 제 이야기를 풀어놓던 진예가 풀숲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네스가 허둥지둥하며 진예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지만 예의 그 토끼는 이미 사라진 채였다. 이네스와 진예가 별말 없이 벌떡 일어나 돗자리 바깥의 신발을 꿰어 신었다.

사실 이번 꽃놀이의 목적은 이네스의 연구에 있었다. 세계수의 마력이 세상에 풍부해지자 잠들었던 정령들이 하나둘 깨어나 기지개를 폈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정령들은 일신의 위협 없이 인간들의 눈에 제 몸을 숨기며 생활했다.

정령들에게 있어 가장 편안한 장소라 하면 당연하게 안가였다. 몸을 굳이 숨길 수고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세계수의 마력 역시 제일 풍부하니, 안가는 정령들의 수도가 되어 버렸다. 이에 아직도 정령 연구 의지를 불태우는 이네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즉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안가에서 처음 보는 정령들의 데이터를 모으는 데에 푹 빠진 이네스는, 대화가 통하는 정령에게 물어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인터뷰하기에 이른다.

물론 수줍음이 많은 정령들에게 정보를 뽑아내려면 긴 추격 이후에도 설득을 해야만 했다. 진예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연구의 진척은 더뎠으리라. 정령은 마생물보다는 같은 정령인 영물에게 마음을 쉽게 열었다.

“진예야.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겠어?”

“그쯤이야 쉽지!”

거기에 같은 정령이니 진예가 다른 정령을 추격하는 데 귀재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네스가 접힌 신발 뒤축을 손가락으로 걸어 펼치며 도언과 녹을 향해 외쳤다.

“우리 좀 다녀올게요!”

“이네스. 올 때 이것도.”

도언이 이네스를 향해 빈 맥주캔을 흔들어 보였다. 바빠 죽겠는데 심부름까지 시키는 도언에게 이네스가 한껏 성을 냈다.

“어휴. 바쁜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고 싶니? 네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건 일면식 없는 새인가 보지?”

“청연은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럼 한가해 보이는 너는?”

“여길 봐.”

도언이 제 무릎을 베고 가볍게 눈을 감은 녹을 가리켰다. 누가 봐도 곤히 자는 모양새였다. 따지려던 이네스의 말문조차 막힐 정도로 이유가 너무나 타당했다.

“이네스! 토끼가 점점 멀어진단 말이야!”

진예가 이네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네스는 이마를 짚고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마디 하고 진예와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

“사 왔을 때 맥주 식어도 모른다!”

사람 둘이 수풀을 헤치고 총총 멀어졌다. 재잘대던 아이와 이네스가 사라지니 숲의 중심에 들리는 건 산들바람이 귓가에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움직이기 귀찮아서 입을 다물고 있던 녹이 눈을 떴다.

“나 안 자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녹과 눈이 마주친 도언이 허리를 숙여 녹의 볼에 입을 맞추며 영 변명 같은 진실을 고했다.

“저도 이네스에게 녹이 잔다는 소리는 안 했습니다.”

“그게 뭐야.”

도언이 녹의 볼에 입술을 맞댄 채 속삭이자 간지러워진 녹이 쿡쿡대며 대꾸했다. 녹의 둥근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은 도언 역시 그와 웃음을 함께했다.

“덕분에 둘만 남을 시간이 길어졌으니 좋죠. 안 그렇습니까?”

담백했던 도언의 대꾸가 순식간에 음험해졌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녹이 고개를 뒤로 젖히자, 도언은 그대로 이마에 있던 입술을 옮겨 녹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게 쏟아지는 도언의 붉음이 녹의 점막을 비비며 침범했다.

혀뿌리를 삼킬 듯 거칠게 흡입하며 숨결을 빼앗다가도, 푹신한 혀 밑을 뾰족하게 세운 설단으로 찌르고 둥글게 굴릴 때는 매끄럽고 조심스럽게 탐험한다. 그에 빼앗긴 호흡을 찾으려 하면 그대로 빨아들이며 제 공간으로 녹을 부르는 것이다. 질척이는 액체는 공기 대신 입안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슨했던 신경줄이 누군가가 양옆에서 잡아당긴 듯 팽팽해졌다. 아마 그 누군가는 도언이리라. 혈관 속에 흐르는 알코올은 그 변화의 감각을 예민하게 세웠다. 아랫배가 뭉근하게 당겨 오는 기분에 귓바퀴가 불타는 게 느껴졌다.

술을 마셨지만 아직 정신머리는 있었다. 아무것도 막혀 있지 않은 야외에서 이런 입맞춤이라니. 길거리가 제 안방인 양 굴었던 커플들을 발견하면 한숨 쉬듯 눈을 감아 버리거나 자리를 옮겼던 녹이기에 자신이 주체가 되는 건 그로서는 너무한 일이었다.

물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숲이라고 하지만 언제 이네스랑 진예가 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사이에서 일을 치르려니 영 편치 못했다.

흥분과 함께 불안도 함께 차오르던 녹은 도언의 등을 퍽퍽 쳤다. 연분홍 꽃비 속에서 꽃놀이보다 즐거운 녹의 점막을 즐거이 탐미하던 도언은 입을 떼고선 녹이 하는 무언의 주장에 항변했다.

“누군가가 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훌륭한 정찰병이 있거든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도언은 다시금 녹의 안으로 들어왔다. 상냥한 움직임과 미미하게 피에 도는 술기운은 평소의 생각 방식을 마비시켰다. 자신이 정신머리는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도언은 녹의 정신머리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서서히 열리고 녹의 가장 연한 부분을 더듬는 도언이 녹녹하게 쏟아졌다. 입천장을 시작으로 볼의 여린 살갗, 그리고 혀의 밑과 그 기둥까지 면밀히 탐색하는 그 움직임은 건들면 깨지는 얄팍한 얼음 파편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감질나는 건 녹이었다. 청연의 정찰도 있겠다, 방금 전처럼 시원하게 지를 것이지 참새처럼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인가.

선 앞에서 서면 주저하지만 그를 넘는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는 녹이 벌떡 일어났다. 녹의 돌발 행동에 느른하게 풀어졌던 도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돌린 녹은 자연히 일으켜진 도언의 셔츠자락을 붙잡고 사나이답게 입술을 부딪쳤다. 녹의 기습을 대비하지 못한 도언이 뒤로 넘어갔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 돗자리 위에 흩뿌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언의 위를 덮친 녹은 도언의 안으로 강하게 밀고 들어갔다. 마법사처럼 유연하게 녹의 입안을 간질이던 도언의 혀도 놀랐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까짓거 도언이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움직이면 된다. 굳게 다짐한 녹은 마치 전쟁통에서 몇 없는 구호품을 사수해야 하는 가장의 태도와 흡사했다.

놀란 건 잠깐이지만 녹의 꿈질거림이 귀여워 움직임을 멈췄던 도언은 슬그머니 두 손으로 녹을 감싸 안으며 그의 애정을 받았다. 별로 안 마신 것 같았는데, 녹은 생각보다 많이 마셨나 보다.

도언이 뒤로 넘어가며 쓰러진 맥주캔이 한 가득이었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반쯤 차 있었는지 돗자리 위에 술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도언의 옷자락을 위협했다. 도언의 옷깃을 잡고 키스를 퍼붓던 녹은 한 손을 바닥으로 옮겨 몸을 지탱하도록 자세를 바꿨다.

그러는 도중 쏟아진 맥주가 손에 묻었나 보다. 녹은 감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부딪쳤다. 무지갯빛 나비 떼가 허공에서 나타나더니 먹음직스러운 꽃인 양 쓰레기 위로 그 몸을 내려앉았다.

그러곤 쓰레기들과 함께 깔끔하게 사라졌다. 녹의 손에 묻은 맥주까지도 가지고 사라져, 이 공간에 둘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깨끗하게 소멸되었다.

화려한 효과만 빼면 기적 역시 쓸 만하다니까. 내천 자를 그리던 미간은 돗자리 위에 걸리적거리는 게 모두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편안해졌다.

“흡!”

허나 어느새 상의 속으로 들어온 도언의 손이 슬쩍 제 유실을 건드리자 녹의 미간에는 다시금 주름이 졌다. 한쪽 눈을 찡그린 녹이 슬그머니 반대쪽 눈을 열었다. 가득 눈에 들어찬 도언의 얼굴을 뒤로 하란 하늘이 보였다.

분명 도언의 위에 있었으니 바닥이 보였어야 할 텐데, 어느새 도언이 녹의 위에 있었다. 언제 자세를 바꿨는지 모를 일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소리 없이 자세를 바꾸는 게 세계 제일의 마술사라고 해도 믿겠다.

녹의 여린 소리에 대담해진 도언이 무릎으로 녹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중심을 은근히 누르며 자극했다. 그에 녹이 움츠리자, 그의 옷자락을 크게 들추어냈다. 살갗을 스치며 지나가는 고운 봄바람에 녹의 유실이 바짝 섰다.

도언은 녹의 볼을 입술로 눌러 찍으며 그의 불타는 귓가에 정착했다. 물컹하고 두꺼운 그의 혀가 녹의 귓속을 희롱하기 시작했고, 녹은 반대쪽 고개를 바닥에 바짝 붙이며 잇새를 물었다. 질척이는 물소리가 마음껏 한쪽 귓가를 유린했다.

“읏, 흣.”

청각과 촉각이 녹의 아랫배에 불을 지른다. 간지러움이 주는 자극을 참고자 녹이 입술을 깨물고는 그 틈새로 숨을 삼켰다. 하얀 이의 짓씹음에 녹의 아랫입술이 붉게 물들었다. 녹의 소리가 높아질수록 본인의 입술을 씹는 악력 역시 높아져 갔다.

도언의 한쪽 손이 얕은 신음을 내는 녹의 입가를 어루만지다가 그의 입속으로 엄지를 집어넣었다. 녹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잘근 씹으며 입안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도언의 검지가 하나 더 들어와 말캉한 녹의 혀를 매만졌다. 단단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연약한 부위를 가지고 놀았다. 도언의 손가락이 타액으로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한번 빨아 봐요.”

도언이 속삭이며 녹의 귀 뒤 여린 살을 송곳니로 슬쩍 씹자, 숨을 들이켠 녹이 입안의 침입자를 강하게 빨아 당겼다. 수축된 입 안의 공간이 손가락과 혀에 딱 맞추어졌다. 도언은 느긋하게 혀 밑의 가장 여린 살을 매만지고선, 귀 뒤에 붙였던 입술을 떼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도언은 충분히 적셔진 손가락을 녹의 입에서 떼어 냈다. 가는 은사가 더운 숨과 함께 뱉어져 나왔다. 도언은 동굴에서 방금 나온 엄지를 녹의 유실에 문질렀다. 금방 차가워진 타액이 예민한 부분에 닿으니 녹이 일순 몸서리쳤다.

때마침 하늘에서 떨어진 벚꽃잎 한 장이 녹의 유실에 내려앉았다. 녹의 목덜미를 잘근 씹던 도언은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바라봤다. 하얀 몸과 고운 꽃잎의 대비감이 안 그래도 동하던 마음을 갈급하게 만들었다.

도언의 젖은 손이 녹의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녹의 중심은 이미 꼿꼿해져 도언을 반갑게 마중하고 있었다. 도언이 꽃잎이 붙은 녹의 유실을 한꺼번에 삼켜 유륜을 따라 살며시 굴리며 녹의 중심을 움켜쥐었다.

“흐으응!!”

녹이 자지러지며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바닥과 꼭 붙어 있던 등이 자연히 돗자리와 멀어졌다. 얼굴을 찌푸리며 밭은 숨을 허공에 뿌린 녹이 안면에 쏘이는 무언가의 시선에 꼭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 …….

“…….”

달궈지던 심장이 급격하게 식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 식는 걸 넘어 가슴의 중심에서 펄떡여야 할 심장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녹은 제 코앞에서 보이는 뱀의 송곳니를 보며 심장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녹의 다섯 치쯤 앞, 누군가가 머리에 붉은 나비를 이고서 입과 붉은 눈을 상하로 떡 벌렸다. 떨리는 눈동자는 마치 사실 지구는 둥글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는 확인을 받은 중세 시대 사람과 유사했다.

- …….

깨끗한 봄날, 사한이 찾아왔다.

❊ ❊ ❊

- 우애…. 그저 우애인 줄로만 알았거늘….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사한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정신이 갈 곳을 잃은 뱀을 앞에 둔 녹은 괜스레 면구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려 2백 년 만에 보는 은인이다. 사한은 녹이 없는 동안 도언이 힘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징징대는 것에 지나지 않던 자신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기까지 한 사한은 녹에게 있어 은인과 다름없었다. 과장 좀 보태 혼란스러운 시기의 보호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점잖은 모습으로 다시 봐도 부족할 마당에 하필 이런 때에 나타날 게 무어란 말인가. 사한의 떡 벌어진 입에서 보이는 송곳니를 보는 순간 술기운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엄한 장면을 부모님에게 들킨다면 이런 기분일까. 무릎을 꿇고 않은 녹은 도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누가 오면 청연이 알려 준다며.”

“그 녀석에게 정령은 그 ‘누군가’에 들어 있지 않았나 봅니다.”

그게 말이 돼? 녹은 소리치려던 걸 가까스로 참았다. 깊숙한 곳에 결계를 쳐 두며 마법사로부터 위치를 숨긴 안가였지만 마법사의 존재가 사라지자 결계는 의미를 잃었다. 이에 이네스는 정령이 안가에 많이들 찾아오길 바라며 그들이 알아챌 수 있도록 결계를 약하게 풀었고, 이네스의 뜻은 정령들에게 잘 먹혀들었다.

덕분에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정령들은 안가에서 야생동물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물론 찾아오는 대부분의 정령들은 하급에 불과하기에 이지가 크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청연 역시 다가오는 사한이 그중 하나라고 여기고 보고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한이 하고 있는 은신 또한 그에 한몫했다.

사한 앞에서 쩔쩔매는 건 녹뿐이었는지,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도언은 팔짱을 낀 손가락을 까딱이며 불퉁함을 표출했다. 그는 모로 보나 반항기가 그득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녹과 대비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한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동안 녹의 고개는 가을 햇볕에 벼가 영글듯 무거워진다. 녹의 고개가 바닥에 닿기 전에 도언이 움직였다.

도언은 사한에게 다가서 숲의 날벌레가 적어도 다섯 번은 들어갔다 나온 사한의 입을 손수 닫아 주었다. 우애 뭐시기 웅얼거리던 사한의 눈에 드디어 초점이 돌아왔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사한은 아직도 도언에게 닫혀 있는 머리를 힘 있게 흔들어 입의 봉인을 풀었다.

- 내가 언제 정신을 놨다고 그래. 이 예의 밥 말아먹은 녀석아. 오랜만에 봤으면 무례하게 굴지 말고 인사부터 해야 할 거 아니냐.

“인사를 한들 들리기나 했겠습니까. 여하간 오랜만입니다.”

- 크흠…. 큼. 그래. 오랜만이다. 몰라보게 컸구나. 청연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정말 네가 도언인지 몰랐을 게다.

사한은 정말 도언이 자립할 만할 때까지만 곁에 있어 장성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세상에 담긴 세계수의 마력이 풍부해지자 잠에서 깨어난 사한은, 세계수의 마력이 가장 많이 응집되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다른 정령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으니 그곳에 가면 녹이나 도언을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고 그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정령 정도는 찾아올 수 있도록 설치한 희미한 결계 안에서 녹의 기운을 찾는 건 그들이 어디 있을지 추측하는 것보다 손쉬웠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오랜만에 본 녹이 사방이 뚫려 있는 곳에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웬 썩을 놈에게 깔려 있지 않은가.

혹시 이 녀석. 담고 있던 마력이 사라져서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건가? 정령에게 사정을 대충 들은 사한은 녹을 구해 줄 요량으로 다급하게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녹을 덮친 미친놈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열매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런 열매의 기운을 뿜을 수 있는 건 세상에서 단 한 명뿐. 오는 길에 만난 정령들은 도언과 녹의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는데….

- 웬 놈이 녹을 잡아먹는 줄 알고 당장에 달려왔는데 그놈이 너였다니….

“잡…잡아먹….”

사한의 언어 선택에 녹의 얼굴에 푸른 기가 돌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서늘한 감각이다. 사한이 뭐라고 말하거나 말거나, 도언은 녹의 어깨를 끌어 제게 붙였다. 잡아먹는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기는커녕 그대로 받아쳤다.

“저는 아직 배고픈데요. 나머지 인사는 이따 하면 안 되겠습니까?”

사한과 녹은 도언의 대꾸에 기가 찼다. 두 개의 입에서 할 말을 잃게 만들다니. 참 대단한 재주가 있는 도언이었다.

사한은 재빨리 녹의 표정을 살폈다. 녹에게 큰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합의하에 벌인 일인가 보다. 그에 또 다시 충격을 받은 사한의 입이 서서히 벌어질 때였다.

표정만으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 도가 튼 사한이었다. 저를 보고 또다시 충격에 빠지기 일보 직전인 표정에, 얼굴에 피가 몰린 녹만 달라붙은 도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 내며 사한을 향해 어설프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사한. 그동안 동면에 들었다고 이네스에게 들었어요.”

나락으로 복귀할 정신이 녹의 한마디에 다시 돌아왔다. 사한은 보다 먼저 반가운 이름에 반응했다.

- 오. 그 이름 역시 오랜만에 듣는구나. 맞아. 그간 좀 자고 있었다. 내가 깨어났으니 이지를 지닌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깨어나겠지. 그나저나 너는 어떠느뇨. 저놈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느냐?

“도언이요. 도도를 만든 하진이 오빠.”

- 잘 알고 있구나. 봉인이 영구히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는데. 어디, 봉인이 풀리는 과정에서 몸 상한 곳은 없느냐?

사한은 걱정을 담뿍 담아 물었다. 스스로 봉인한 기억이 억지로 풀린다면 녹에게 어떤 예후가 나타날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한이었다. 도언의 존재를 억지로 일깨우려고 했을 때 녹이 받은 고통이란…. 아직도 그때를 회상하면 끔찍해 치가 떨릴 정도였다.

다행히 녹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한의 걱정을 풀어 주었다.

“네. 누군가가 억지로 풀어 버린 게 아니니까요.”

사한이 질린다는 듯 도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 억지로 푼 게 아니라니. 대체 어떤 상황을 꾸몄기에 그 봉인을 스스로 풀었단 말이냐. 보통 의지로는 절대 풀릴 리가 없는 강도였거늘. 아이 혼자였다면 절대 풀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계산된 상황에서 풀렸다는 말이 되는 건데…. 그런 상황을 꾸미다니. 안도언 녀석이 무서운 놈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내 정녕 몰랐지.

“칭찬 감사합니다.”

사한이 자신을 보고 소름이 돋거나 말거나, 사한을 빨리 어디론가 보내 버리고 녹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뿐인 도언의 대답은 연신 영혼이 없었다. 그러나 몇백 년 만에 재회한 사한과 녹은 그 자리를 빨리 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뭐, 저 녀석은 이네스와 청연이 함께 있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만, 내가 동면에 들어갈 때 가장 걱정했던 자는 아이야, 너였다. 물론 열매의 이름을 청연이라고 지을 때부터 도언이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어찌 세상이 그리 쉬울 수가 있겠느뇨. 여하간 잘되어서 다행이구나. 물론 그 끝이 이런 관계일 줄은 내 예상 못 했지만….

사한이 녹의 목덜미를 아득하게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옷깃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붉은 자국은 도언이 방금 만들어 둔 울혈이었다. 눈빛의 목적지를 읽은 녹이 은근슬쩍 손을 올려 목덜미를 가리려고 할 때, 도언이 올라가는 손을 붙잡고 제게 당겼다.

당겨지는 힘에 녹의 몸이 도언에게 쏠렸다. 도언은 제게 기울어지는 몸을 놓치지 않고 드러난 키스마크를 재빨리 핥고 떨어졌다. 덕분에 녹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흐익!”

녹이 몸서리를 치며 떨어지려 하자 도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녹을 제 다리 사이로 끌어와 그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다리를 얽어 녹이 빠져나갈 틈을 없애기까지.

꼼짝없이 갇힌 상태가 된 녹의 눈이 사한과 도언의 사이에서 핑핑 돌았다. 도언은 그의 머리카락을 턱으로 쓰다듬으며 사한에게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끝이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했다니요. 사한의 눈치 역시 녹과 동급인 모양입니다.”

“잠깐. 잠깐! 도언아. 앞에 사한이… 그러니까 좀 떨어져… 흐앗!”

도언이 녹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도언의 손이 자연스럽게 녹의 셔츠 안을 파고들 때부터 사한은 눈을 감아 버려 이후로 들리는 쪽쪽 소리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 잘 지낸다니 되었다….

“…청연의 이름이 무슨 뜻인데 그래요?”

사한은 녹의 물음에 감았던 눈을 떴다. 녹이 도언의 입을 한 손으로 막고 저 멀리 밀어 버린 후 옷 속에 있던 도언의 손목 역시 붙잡아 빼내느라 애쓰고 있었다. 도언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건 실패한 모양이다. 그러나 대답도 듣기 전에 사한보다 먼저 누군가가 하늘에서 외쳤다.

- 사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늘에서 하강한 하얀 매는 땅에 닿기 전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후, 무릎을 꿇고 앉아 사한과 눈높이를 맞췄다.

청연이 저렇게 누군가를 반기는 모습은 처음이다. 없는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붕붕대는 게 눈에 선연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군요! 은신은 왜 하신 거예요! 덕분에 감지조차 못했네요! 그나저나 제가 사한이 일어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 그래. 욘석아. 잘 있었냐?

사한의 본디 역할은 분명 가장 강력한 정령이 될 열매의 스승이었다. 재회를 저리도 반기다니. 아무래도 청연이 부화한 이래로 제 의무를 잊지 않고 살뜰하게 보살폈나 보다.

“말도 마세요. 사한이 없을 때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사한이 없으려니 가주님이랑 이네스가 제동 장치 없이 날뛰어서는 아주 세상을 하나 창조하려 들지 않나. 덕분에 제가 완전 힘들어 죽….”

사한을 보자마자 눈에 뵈는 거 없이 상사의 만행을 이르던 청연은 오른쪽 볼을 따갑게 찌르는 시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린 도언을 발견하고는 잽싸게 말을 틀었다.

“아, 도도! 도도가 영물이 되었어요. 세계수의 마력이 희미해서 영물이 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사한이 그랬잖아요. 세계수의 마력이 풍부한 녹의 근처라면 분명 도도 역시 영물이 되어 나타날 거라면서요. 그걸 딱 맞히다니. 역시 세계수의 첫 번째 나뭇가지는 다르다니까요?”

- 오오. 그 녀석이 드디어 영물이 되었구나. 역시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그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냐?

“지금 이네스랑 같이 산을 뒤지고 있어요. 근처에 있으니까 한번 가 보실래요?”

- 그래. 지금껏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나중에 듣고 도도 녀석이 어찌 변했는지부터 봐야겠구나. 급할 거 없으니까. 허나 나랑 달리 저 녀석은 급해 보이니 자리를 피하는 게 맞겠다.

“에… 뭐. 그렇죠. 뭐. 하하.”

청연이 그들을 보고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녹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누군가 대놓고 언급하니 생각보다 파급력이 강했다. 심지어 별생각 없던 청연까지 거기에 동조하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눈이 마주친 김에 도언이 청연에게 말없이 지령을 내렸다.

돌아올 거면 가능한 늦게 돌아와. 아니, 그냥 싹 끌고 가서 다시 오지 마. 이 주변에 정령도 오지 못하게 결계도 치고.

어이구. 며칠 굶은 사자 같은 살벌한 저 눈빛 봐라.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반응한 청연은 사한을 데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청연의 쫀쫀한 결계가 주변에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을 때쯤 녹이 도언에게 잔소리했다.

“손님이 왔을 때는 그래도 좀 점잖아져야지. 그 누구도 아닌 사한인… 흣.”

얕은 방어에도 꾸준하게 녹의 옷 속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녹의 유실을 양옆으로 붙잡고 빙글 돌렸다. 몸을 크게 펄떡인 녹은 더 이상 잔소리를 잇지 못했지만 도언은 녹의 의도를 무시하지 않고 대꾸했다.

“분위기 보고 눈치껏 빠지면 손님 대접을 해 줬을 텐데요. 그리고 사한이니까 최대한 점잖게 나온 겁니다. 안 그랬으면 청연까지 부르지도 않았어요.”

도언은 야들한 녹의 뒷덜미를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녹의 귓바퀴가 머리 위에서 흩날리는 벚꽃잎보다 더 붉었다. 품속에서 얌전하게 움찔거리기만 하는 모습을 보니, 사한이 나타나고서 알코올과 함께 대담함도 증발해 버린 모양이다.

도언이 실실거리며 푹신한 녹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는 가슴을 희롱하던 한쪽 손을 내려 그의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반쯤 선 녹의 물건이 잡힌다. 녹이 기겁하며 도언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으아. 잠깐. 잠깐만. 읏.”

그가 잠깐, 하고 외칠 때 멈추면 기회는 없다. 도언이 중심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자, 녹은 무릎을 붙이며 말도 없이 도리질을 친다. 녹이 도언의 손목을 붙잡으며 제지하자 도언이 음산하게 속삭였다.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정령이 또 찾아오기 전에 차라리 한 번 빼고 끝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지를 가진 대정령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데요. 이대로 멈추면 힘들기만 합니다.”

틀렸다. 도언은 어떻게든 여기서 한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럴 거면 빨리 협조하고 끝내는 게 나았다. 확실히 정령은 오감에 특출났고 호기심이 강했다. 숲속에서 희한한 소리가 들리면 그쪽으로 직진할 거다. 갑자기 사한이 나타난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녹은 끙끙대며 가능한 소리를 참으려 노력했다.

그 행동이 사람을 더욱 동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어차피 청연의 결계로 정령은 이 근처에 오지 못하지만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협잡꾼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도언이었고 순진한 녹은 그에 홀랑 넘어갔다. 도언이 주는 자극은 청연의 결계를 알아챌 신경을 마비시켰다.

녹이 다리를 모으니 벗기기가 수월하다. 꼬리뼈가 들리는가 하더니 다리에 걸쳐졌던 모든 것이 소리 소문 없이 돗자리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다. 어느새 셔츠의 단추 역시 모두 풀려 양옆으로 헤집어졌다.

꽃비들이 녹의 하얀 몸을 가볍게 터치하고 날아가는 게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달아오른 몸은 그만큼 예민해져 모든 순간을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볼 안쪽을 씹고 있던 녹이 자신을 순식간에 반라로 만든 도언의 과한 행동에 항의했다.

“한 번 빼는데 뭘 이렇게… 흐으읏.”

녹이 제정신을 차리려 하자 도언은 꿈질꿈질 액체를 뿜어내는 녹의 요도구를 손톱으로 슬쩍 긁었다. 짜릿한 충격이 척추를 통해 녹의 뇌에 직격했다. 고개가 도언의 어깨 위로 젖혀졌다. 분홍색 꽃잎으로 수놓인 파란 창공은 절경이었으나 녹은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이 붉었다.

“녹만 가는 건 치사하지 않습니까.”

도언의 남은 한손이 녹의 밀부를 더듬었다. 손은 언제 무언가로 적셨는지 미끌한 액체로 범벅이었다. 마법사는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했지만 그 이전에 만든 마도구들은 아직도 그 효능이 유효했다. 도언은 한 장로가 즐거운 밤을 보내라며 만들었던 젤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요긴하게 쓰였다.

자, 즐거운 낮을 보낼 시간이다.

덕분에 손가락이 녹의 밀부를 뚫고서 손쉽게 안을 헤집었다. 그 손짓은 녹의 머리 역시 엉망으로 헤집었기 때문에 녹은 모든 옷이 사라진 것에 대한 제대로 된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은 착실하게 길을 뚫고 내벽을 가르며 올라왔다. 녹의 몸 안 속속들이 안 지 오래된 도언은 헤매지 않고 곧장 녹의 포인트를 눌러 대며 손가락을 둥글게 돌렸다. 가슴을 내밀며 뒤로 젖혔던 녹의 등이 이번에는 앞으로 곱아들었다. 녹의 중심이 크게 날뛴다. 앞과 뒤가 사정없이 괴롭혀지는 감각은 지우개가 되어 모든 잡념을 지워 버렸다.

“으핫, 앗, 앙, 으으, 읏, 흣.”

몰아치는 감각에 편승한 의식은 제 몸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였다. 튀어 오르고, 펄떡이고, 움찔거렸다. 젤은 내벽과 밀부를 보호하는 한편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배로 느끼게 도와주었다. 거기에 내벽 구석의 스팟까지 흠뻑 적셔지니 입술을 아무리 깨물어도 나오는 소리를 참을 수가 없다.

단단한 도언의 손길이 지나치는 곳마다 홧홧해졌다. 녹이 느낄 만한 곳만 찔러 대던 도언이 포인트와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손가락 추삽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근방에서 꿈질거리는 것이다.

갉작이는 손가락은 가려움을 채워 주지 못했다. 손가락은 어느새 떨어져 나가고, 그 위치를 언젠지도 모르게 튀어나온 도언의 중심이 채웠다. 중심의 선단이 구멍에 맞자마자, 도언은 녹을 살짝 내리눌러, 페니스의 끝만 들어가게 만들었다.

“히익-!”

입구가 거대한 마개로 꽉 막힌 기분이었다. 도언은 허리를 잘게 쳐올려 입구 쪽을 긁었다. 그러나 깊이 채워지고 싶었던 녹은, 도언의 허벅지를 잡고 한꺼번에 허리를 눌렀다.

“흐윽-”

배 속이 끝까지 채워지며 스팟을 찍었다. 도언은 가만히 그가 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적응하기 위해 멈추고선 숨을 헐떡인 녹은 골반을 밑으로 내리눌러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 끙끙댔다. 그러나 아무리 엉덩이를 내리누르고 비틀어 보아도 닿지 않았다.

딱 한 치만 더, 조금만 더 간다면 닿을 수 있는데…! 조급증이 인 녹은 도언의 허벅지를 쥐고 상하로 허리를 놀렸다. 붙어 있던 무릎은 어느새 벌어져 햇살이 녹의 하얀 몸 구석구석을 비추도록 허했다.

하늘로 솟으면 페니스에 가해지는 압력이 강해지고, 뒤로 빠지면 배 속으로 자극이 채워졌다. 녹은 젤이 밀부를 뚫고 나와 녹의 엉덩이와 도언의 고환을 적셨다. 녹의 허리 놀림에 따라 찰싹이는 소리가 벚나무 밑에서 울려 퍼졌다.

“흐으으….”

리듬을 타며 즐기던 녹의 허리를 도언이 붙잡아 멈추게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녹이 항의의 뜻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도언의 행동이 우선이었다.

도언은 제 무릎 위에 눕듯이 앉아 있던 녹의 겨드랑이를 들어 돗자리와 닿아 있던 벚나무의 기둥을 붙잡도록 일으켰다. 그대로 녹의 허리를 잡아 쭉 빼니, 녹은 나무를 두손으로 짚고서 엉덩이만 내미는 야살스러운 자세가 완성되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세우던 녹이 나무를 지지대로 삼아 허물어지려는 몸을 지탱하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일단은 즐기고 있는데 말도 없이 빼낸 데에 대한 항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고개는 도언을 보려던 시도가 무색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뒤에서부터 제 모양을 내벽에 각인시키듯 천천히 진입하는 중심이 빠져나간 공허를 채웠다.

도언이 녹의 골반을 잡고는 그대로 뒤로 당겼고, 마법 젤로 적응이 완료된 녹의 내벽은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도언의 중심을 기껍게 감싸 주었다.

“흐아앗!”

“……녹.”

언제나 조심스럽게 진입하던 평소와는 달랐다. 나무껍질을 붙잡던 손의 힘까지 풀어져 가까스로 팔을 나무에 기대 상체를 지지했다. 떨어지려는 다리는 도언이 붙잡아 세우고, 기댄 팔에 이마를 대고 뒤에서 몰아치는 감각을 녹은 인내했다.

진입은 급하게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피스톤질 역시 거칠게 다가왔다. 도언의 중심에 의해 열린 길이 다시 닫힐 새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그리 닿고 싶어 애쓰던 녹의 포인트는 숨을 평안히 쉴 틈도 없이 찔러지고 긁혀졌다.

귀두의 오목한 부분은 진입할 때 포인트를 퉁기며 밀려 들어왔고, 빠져나갈 때 갈고리처럼 긁으며 빠져나갔다. 맑은 타액이 턱을 따라 흘러 발등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팔등에 얹어 있던 고개가 밑으로 떨어진다. 치솟는 녹의 날개뼈 위에 입을 맞춘 도언이 땅으로 떨어지려는 녹의 상체를 두 손으로 옭아매 안는다. 드러난 목덜미에 코를 묻고 녹의 체향을 한껏 들이켠 후, 새빨간 도장을 하나 더 찍는다.

“흐읏, 앗, 으읏, 응, 아아, 앗!”

시간이 지나도 속도는 멈출 생각을 않는다. 일순 안으로 말렸던 녹의 몸이 척추를 중심으로 도언에게 넘어가며 반대로 펼쳐졌다. 녹은 가슴을 한껏 내미느라 길어진 목덜미를 느끼며 뒤통수를 도언의 어깨에 기대고 열망을 터트렸다. 투박하고 강한 리듬에 부풀대로 부푼 녹의 중심에서 하얀 불꽃이 튀어나와 나무를 적셨다. 나무껍질에 방울방울 맺힌 그의 정은 끈적한 꼬리를 남기며 땅으로 느리게 기어갔다.

녹이 터트리자, 몰아치는 도언의 추삽질 역시 순간적으로 멈췄다. 녹이 도언에게 등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턱에 흐르는 것이 타액인지 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늘은 분홍 벚꽃으로 빼곡했다. 붉은 감각이 요동치는 이곳과 다르게 머리 위만은 동심처럼 순수했다.

“하아… 하아….”

평화로웠던 꽃놀이가 무색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그냥 나도 벚꽃 놀이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벚나무는 제 밑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인간들이 정사를 나누든 카드놀이를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꽃비만 흘릴 뿐이다.

녹의 상체를 한팔로 안은 도언이 녹에게서 제 일부를 천천히 빼기 시작했다.

“흐읏…….”

밀부에서 걸린 귀두 끝을 마지막으로 모두 빠져나갔을 때, 나무를 짚고 있던 몸이 돌려졌다. 나무에 등을 기대자 입으로 밀려오는 도언의 진한 입맞춤. 녹은 습관처럼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진득한 후희를 나눴다. 아니,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녹의 한쪽 허벅지를 팔에 끼워 넣은 도언이 그대로 꽂아 오지만 않았으면 정말이지 그리 생각했을 거다.

“…으읍…!”

후희가 아니었어?? 어쩐지 빠져나갈 때조차 도언의 심지는 꺼지지 않고 단단했었다. 그를 기억한 녹은 눈을 홉떴으나 도언은 2차전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녹은 제 몸을 지탱하는 한쪽 발을 가까스로 세워 까치발을 만들며 도언을 받아 냈다. 그의 목에 감은 팔이 떨어지면 아슬아슬한 몸의 균형은 무너지고 말 거다. 상상만으로 오싹해지는 감각에 녹은 도언을 목숨줄처럼 붙잡고 그를 받았다.

어깨가 솟았다가, 떨어졌다가. 허릿짓에 따라 녹의 등이 움직였다. 녹의 얼굴은 도언의 어깨에 묻어 보이지 않았다. 한 팔로 안은 녹의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내뱉는 신음과 함께 쫙 편 발등이 그의 상태를 대변했다. 도언은 거친 나무에 등을 비비고 있는 그 상태가 그 와중에도 걱정되는지, 고개를 숙여 녹의 등 뒤로 한 팔을 넣고 제 쪽으로 끌어왔다.

옮겨지는 무게중심에 녹이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안았던 녹의 허벅지를 추켜올린다. 덕분에 가까스로 땅을 짚던 한쪽 발이 들리고 엄지발가락 하나만 부들대며 땅에 닿았다.

“도…윽, 도언아, 잠깐, 학, 지금 뭐 하는….”

“괜찮아요. 다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 아읏!”

불안한 자세에 녹이 사색이 되어 물었지만 도언은 말없이 무릎을 살짝 굽혀 녹의 남은 허벅지를 끌어안아 제 허리에 둘렀다. 땅에 닿아야 할 발 두 쪽이 모두 공중에 떠 도언의 허리를 감쌌다. 바닥에 땅이 닿지 않는 위태로움에 녹이 눈을 홉뜨고는 도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조였다. 녹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린 도언은 녹의 밀부에 귀두를 뺀 뒤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진입을 시도했다.

“으아아….”

두툼한 살덩이가 욕망처럼 밀려 들어온다. 중력과 무게 때문에 더없을 만큼 깊숙이 들어와 배 속을 빼곡하게 채웠다. 천천히 내린 하강에 녹의 턱이 하늘 높이 들렸고, 도언은 드러난 녹의 목울대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그의 젖은 턱을 정성스레 핥았다. 마침내 녹의 엉덩이가 도언의 고환 끝에 닿을 때까지 내려갔다. 닿은 적 없던 곳까지 빠듯하게 채워지니 녹의 입이 다물어질 틈이 없다.

“으으응….”

녹의 엉덩이를 감싸던 도언은 제 손을 하나씩 빼내어 그의 허벅지 안쪽을 감싸 올린다. 자세 역시 그에 따라 불안정하게 아슬아슬해진다. 녹이 허겁지겁 도언의 목을 끌어안자마자 도언의 허리가 튕겨 올랐다.

“흐앗!”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곳을 찔릴 때마다 하늘로 비상하고 짧은 정상을 찍고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도언이 다시금 포인트를 눌러 온다. 처음에는 감을 잡는 듯 이리저리 천천히 움직이던 것이, 적응이 된 이래로 미친 듯이 찍어 올린다.

“으아! 으앗! 앙! 흐앙! 핫! 으응! 읏!”

이 공간에서 하늘거리는 벚꽃비만이 평화롭다. 접합부가 녹아내린 젤에 의해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었다. 찔꺽이는 소리와 함께 지칠 줄 모르는 도언을 그렇게도 녹을 올려쳤다. 실신할 정도로 흐느끼던 녹은 도언의 어깨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떨어뜨렸다. 끔찍하게도 자극적인 이 감각에서 멀어지고자 도언을 밀어 낸다면 분명 추락할 것 같았다.

녹은 도언과 꼭 붙어선 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감각을 폭격처럼 꽂는 도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약간의 깨물림 정도로 헛웃음도 안 나는 건지, 아니라면 따끔한 아픔에 자극을 건드린 건지, 도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금껏 짧고 빠르게 치고 빠지는 형국이었다면, 이제 도언은 길게 빼서 고환이 녹의 밀부에 닿을 정도로 한꺼번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낙폭의 차가 깊어지자 신음만 흐느끼던 녹이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잠, 도언, 으흑, 흑, 도, 도언아, 앗, 핫.”

도언의 목울대에서 그르렁거리는 울림이 들렸다. 깊숙한 삽입이 이어지자 도언을 껴안았던 녹의 팔이 쭉 펴지며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도언은 허리를 퉁겨 녹을 고쳐 안아 자세를 안정감 있게 바꾸며 마지막을 향해 내달렸다.

“흐앗! 으으! 응! 아앗!!”

순간 녹의 안에 있던 중심의 끝이 단단해졌고, 그대로 따듯한 액체가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녹 역시 제 씨앗을 도언의 옷이 파정했다. 기나긴 고난과 쾌락의 끝이 드디어 났다. 녹의 팔에 힘이 풀리려는 걸 도언이 그의 등을 끌어 고쳐 안았다. 녹이 도언의 어깨에 턱을 얹고 쌔액쌔액 숨을 몰아쉬었다.

도언은 그의 관자놀이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그대로 돗자리에 앉았다. 몸이 축 처진 녹의 모습은 더위에 늘어진 햄스터 같았다. 도언은 녹의 등을 도닥이며 녹과 이어 있던 결합부를 빼냈다.

“…흐윽….”

마지막까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간 도언의 물건에 녹이 움찔 신음을 흘렸다. 밀부에서 떨어지는 끈적거리는 액체의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했다. 조금 쉬다가 기적으로 뒤처리라도 해야지. 다짐한 녹이 이를 악물고 도언에게 드디어 항의했다.

“너… 한 번만이라며… 나는 두 번이었거든…?”

소리를 내지르느라 한껏 잠긴 목소리가 원망을 뱉어 냈다. 아직도 관자놀이에 뽀뽀 세례를 뿜던 도언이 발칙하게 변명했다.

“저는 한 번이었습니다. 뭐, 그동안 걱정하신 것처럼 아무도 안 왔으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잠시만요. 도언이 제 윗옷을 벗어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흐르는 녹의 아래를 훔치다가, 손가락을 넣어 그를 긁어냈다. 쉴 틈 없는 마찰로 인해 예민해진 내벽은 녹에게 달큼한 목소리를 흘리게 만들었다.

“흐응….”

소리가 흐르자마자 도언의 중심이 움찔 발끈하는 게 허벅지 밑에서 느껴졌다. 녹이 절로 기겁했다.

“만약에 여기서 또 하면 사람이 아니다…. 이따 내가 할 테니까 냅둬.”

“어찌 그럽니까. 그냥 가만히 계세요.”

도언이 건드리는 게 훨씬 힘들다는 걸 알기나 할까. 뭐라고 말하기도 귀찮아진 녹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도언은 손가락으로 구멍을 휘저으며 제 정액을 긁었고, 내벽을 채웠던 액체가 울컥이며 밑으로 떨어지는 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녹의 얕은 떨림을 도언은 기꺼이 즐기며 뒷정리를 마저 이었다.

“청연과 일행들이 만났군요. 아무래도 다시 이곳으로 오지는 않을 듯합니다. 저희도 슬슬 내려가 볼까요.”

어투가 지나치게 밝다. 진을 쏙 빼놓고는 본인은 쌩쌩한 것 역시 얄미워 죽겠다. 말없이 어깨만 부들대고 있자니 도언이 가볍게 물었다.

“아니면 꽃놀이 좀 더 하다가 갈까요?”

“…….”

꽃놀이를 이 이상 더 했다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녹은 도언의 맨살에 이마를 부비며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이제 아무리 긁어도 씨물이 나오지 않았다. 도언은 녹의 밑을 깨끗하게 닦으며 녹을 추슬러 안았다. 녹의 심장이 어린 짐승의 심장처럼 발딱거리는 게 붙인 가슴에서 느껴졌다.

도언은 그저 녹의 뒷덜미를 도닥이며 꽃잎의 춤사위를 응시했다. 녹의 심장이 진정을 하면 일어나자. 지금처럼 한가하고 만족으로 충만할 때는 흔치 않았다. 도언이 홀로 평화를 즐기고 있을 때, 녹의 등이 크게 부푸는가 싶더니 깊은 숨을 내뱉는다. 그러고는 입을 떼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뭡니까?”

“청연 이름 뜻이 대체 뭐야?”

생각보다 실없는 질문이 나왔다. 지친 와중에 결연히 뱉은 질문이 그거라니. 난데없고도 뜬금없는 질문에 도언의 몸이 웃음으로 떨렸다. 숨을 죽이고 웃은 도언은 입가에 미소가 번진 그대로 녹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셨습니까?”

“아니, 그냥. 사한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가 좀 궁금해서…. 너가 청연의 이름을 지었어?”

“그렇죠. 아무래도 주인이 이름을 선물하는 건 보편적이니까요.”

도언은 눈을 감고 그때를 회상했다. 열매 부화 직후, 녹의 부탁대로 몸을 숨기고 도언의 주위를 맴돌던 사한은 환희로 발광했고 도언에게 열매의 이름을 종용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열매가 부화하자마자 녹이 봉인했던 도언의 기억 역시 깨어났다. 광풍처럼 휘몰아친 기억은 도언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했다.

사한에게 설명을 듣는 게 먼저였다. 기억을 찾은 도언에게 사한은 기겁하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도언은 그를 차분하게 들으며 손안에 나타난 새끼 새와 멀뚱히 눈을 맞췄다. 그 새의 푸른 눈은 녹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기에 세계수의 열매라는 데에서 그 뜻 역시 깊었다.

‘이 새라면 녹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한은 그 귀하고 역사적인 순간에서 녹을 찾는 도언에게 질린다는 듯 몸서리쳤다.

결국 이렇게 녹에 대한 기억을 찾게 되는구나. 사한은 씁쓸함을 삼키며 하지만 그의 질문만은 착실히 답해 주었다.

‘힘의 근본은 같으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겠다만…. 그 아이가 작정하고 숨으면 어찌 될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여하간 얼른 이름부터 지어 주자. 열매라고 부르는 건 너무 정이 없지 않느뇨.’

‘…그렇다면 청연(靑聯)으로 하겠습니다.’

‘청연?’

‘네. 청연이요.’

푸를 청에 이을 연. 당시 도언에게 전설적인 존재라 불리는 열매란 녹과 맞닿아 있는 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흐리던 삶의 목표가 열매가 깨어나고 기억을 일깨움으로써 명확히 정립되었다. 도언은 작은 새를 눈에 담으며 다짐했다.

나를 밀어 낼 거라면 내게 그 무엇도 남기면 안 됐지. 이걸 남기고 간 이상 나는 반드시 당신을 찾고서 곁을 지킬 거다. 홀로 불행을 견디지 않도록. 홀로 외롭지 않도록.

회상을 마친 도언은 녹의 복슬한 머리에 코를 묻고 조용히 말씨를 흘렸다.

“…진정 저를 떠나려 했다면 제게 많을 걸 남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뭐? 내가 뭘 남겨?”

“아닙니다. 여하간 청연 덕분에 당신을 수월하게 찾은 건 사실이죠. 당신과 이어져 있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니까요.”

“…그러면 청연이 아니라 녹연이라고 지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하하, 그게 포인트입니까? 녹색이나 푸른색이나 제겐 모두 당신의 색입니다.”

아직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녹에게 도언은 입술 도장을 찍고는 그를 끌어안으며 뒤로 넘어갔다. 으앗! 덕분에 도언의 위로 쓰러진 녹이 얕게 비명을 질렀다. 청명한 웃음을 흘린 도언은 품 안의 제 여름을 보았다.

짧지만 강렬한 빛을 뿜어냈던 녹에게 홀리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예감은 예지가 되었다. 지금껏 제 푸름을 감추며 살아가느라 애썼던 녹이었다. 이제는 녹이 제 열기를 감추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녹의 생명력이 빛날수록 나의 세상 역시 광명했다. 청연이 나의 권속이라면 나는 녹의 예속이었다. 그를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어둠을 내쫓았다. 뜨거운 여름을 가두던 음울한 구름 역시 사라졌다. 드러난 태양은 온 땅에 생명을 일으켰다. 모든 녹음이 푸른 아우성을 내질렀다. 명징한 하늘은 달콤하게 개었다.

녹의 뒤로 꽃잎이 쏟아진다. 찬란한 절경은 남아나지 않을 듯했던 심장을 다시 한번 뒤흔든다. 나는 그에게 입을 맞췄고 그는 내게 순순히 공간을 내어 주었다.

나의 삶이 나를 허했다.

나의 의지가 나를 허했다.

나의 소원이 나를 허했다.

내 모든 것이 나를 허했다.

돌고 돌아 나의 하늘은 나를 허했다.

이보다 더 지독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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