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을의 역사 (23/24)

가을의 역사

붉은 낙엽 하나가 선선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는 하늘 높이 떠오르다가 계곡물 위로 서서히 착륙했다. 계곡물은 고요한 파동을 내뿜으며 낙엽의 입수를 환영했다. 온 산들이 붉고 노란빛의 색동옷을 맞춘 그 시기, 계곡의 옆에 조그맣게 건축된 정자에서 사한이 바깥을 보며 시조를 읊듯 고즈넉하게 중얼거렸다.

- 온 뫼들이 붉게 물들었구나. 이게 바로 가을의 정취로다.

겨울잠을 대비하는 다람쥐와 청설모들이 바쁘게 도토리를 옮기고 있었고 사한은 공기 중에 섞인 도토리의 향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절경을 감상했다. 물론 최고 연장자가 즐기는 정취는 시끄러운 일행들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먼저 집었거든?”

“아니거든요? 녹 님보다는 제가 더 빨랐거든요?”

“둘 다 아니에요! 청연이랑 오빠보단 제가 빨랐죠!!”

늘어놓은 카드들 가운데 한 장의 카드를 세 명의 손이 동시에 집고서 본인 쪽으로 끌어당기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정자의 바닥엔 온갖 색깔의 카드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고요히 가을을 즐기고 싶었던 사한이 뒤를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 좀 조용히 좀 할 수 없겠느뇨? 숲속에 사는 녀석들이 모두 도망가지 않느냐!

“죄송하지만 그럴 여유 없거든요?”

눈을 이글거리는 녹이 말했고,

“걔네들은 매일 숲속에 있는데 좀만 양보해 달라고 해요!”

있는 힘껏 카드를 당기는 진예가 대답했으며,

“제가 이기면 이곳에 올 때마다 묵언 수행 하겠습니다.”

카드를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청연이 응답했다.

이네스는 그 뒤에서 그들을 보며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룬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진 도언은 보이지 않았다. 즐기고 있는 보드게임의 점수는 셋이 정확히 동률이었다. 저 한 카드로 승패가 갈린다는 뜻이다.

이 사달은 도언이 내건 한 조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사한이 가자고 졸라서 온 단풍놀이. 사한은 단풍 구경만으로도 좋아라 했지만 따라온 셋은 아니었다. 예쁜 풍경 감상도 한두 시간이지, 그를 넘어가니 영 지겨운 것이다.

사한이 안가의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에 놀러 가자고 했었을 때부터, 도언은 그동안 그 근처의 순찰이나 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워낙에 구석에 있는 정자라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사한이 발견한 걸 보니 그도 아닌 모양이다.

문제는 도언이 정기적으로 도는 숲은 꽤 컸고,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점이었다. 불운의 기운이 폴폴 나는 사기도 없고, 적대적인 마생물 또한 없었지만 산맥이 매우 가파르고 엄준했다. 관광을 올 만한 곳은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녹이나 진예를 심심하게 둔다면 분명 저를 따라오리라. 물론 둘의 능력을 알기에 크게 걱정되는 건 아니지만 진예는 곁에 두면 정신이 사나웠고, 녹은 한 바퀴만 돌아도 뻗을 걸 알기에 차라리 청연과 함께 셋이서 놀라고 보드 게임 하나를 던져 주었다.

‘이게 뭐야. 너 어디 돌아다닐 동안 우린 이거나 하고 있으라고?’

‘이긴 사람에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소원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 명 모두가 질 생각을 하고 있지 않기에 승부는 점점 과열되어 갔다. 카드가 찢어지려는 조짐이 보이자 결국 그를 지켜보던 이네스가 끼어들었다.

“자자, 다들 그만해요. 아무리 마지막 판이라지만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요. 마지막 카드가 찢어지겠어요.”

이네스의 진정에 셋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흐름을 타는 도중에도 카드에 담은 힘을 놓지 않았고, 카드는 능지처참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 어? 도언이 돌아오는구나.

그때 청연과 녹의 집중이 흩어졌다. 물론 이 순간을 진예가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포착하여 카드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성공을 손에 거머쥔 진예는 일어서서 한 손을 옆구리에 가져다 댄 후, 빛나는 황금색 카드를 허공으로 높이 들며 깔깔댔다.

“이겼다!! 그러면 가주님이 제 소원 한 가지 들어주셔야 하는 거예요. 맞죠? 그렇죠?”

“아악!! 내 휴가! 딱 한 달만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

녹이 망연히 제 빈손을 바라볼 때, 청연은 무릎을 꿇고 땅을 쳐 대며 좌절했다. 진예가 춤까지 추며 돌아오는 룬과 도언을 향해 달려갔다.

“가주님! 제가 이겼어요! 제가 이겼다고요!”

도언의 주변에서 방방 뛰기까지. 진예의 기분에 룬 역시 짖으며 아이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도언은 정자 위의 패배자들을 바라보았다. 진예에게 진 둘 모두가 영혼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룬과 함께 신나게 세레머니를 마친 진예가 도언에게 당차게 요구했다.

“저 학교 일주일만 빠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래.”

“꺄앗!! 신난다!!”

생각보다 소박한 소원이었다. 한 달짜리 휴가를 빼앗긴 청연이 울부짖었고 녹은 귀한 기회를 일주일 치 학교 결석권으로 바꾼 진예를 망연하게 쳐다봤다. 저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소원인가?

“아, 그래도 학교는 보내야 하는데!”

이마를 짚은 이네스가 탄식하는 걸 보니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진예의 보호자는 이네스였다. 그리고 진예에겐 안타깝게도 이네스는 보편적인 한국 학부모의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진예의 보호자라 하더라도 상사가 까라면 까야 하는 법. 이네스는 안가의 장로장이었고, 도언이는 가주였다. 따지고 보면 이네스는 도언을 상사로 모시는 위치에 있다 이거다.

그를 너무도 잘 아는 진예가 사악하게 웃으며 이네스를 향해 브이를 만들어 흔들었다.

“일주일 동안 오빠랑 룬이랑 놀러 다닐 거지롱. 현장 학습지 낼 거지롱!!”

- 인간으로 변한 지 몇 년 안 되었다고 듣긴 했다만 딱 그 수준이구나.

모든 일을 지켜보던 사한이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예와 같은 수준의 소원을 빌려고 했던 청연이 사한의 말을 듣고 괜히 찔려 움찔거렸다.

“근데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진예가 도언에게 묻자 도언이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내밀었다. 도언의 한 손에도 채 모두 쥐지 못할 만큼, 그 굵기가 자작나무의 몸통만 한 나뭇가지였다. 하얀 나뭇가지 위에 손바닥만 한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이건…?”

“숲속에서 발견한 나무의 가장 끝에 있는 여린 가지.”

“네? 이렇게나 큰데요?”

“마력의 여파 때문인지 비약적으로 자랐나 봐. 연구 좀 해 봐야겠어.”

영혼이 털린 청연과 녹 사이로 보드게임의 뒷정리를 하고 있던 이네스가 연구라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연구라고? 어디 봐 봐! 이거 어디에 있던 나무인데? 나 좀 데려가 줘!”

- 오호. 이렇게 큰 나무가 이쪽에 숨겨져 있었다니. 나도 좀 보고 싶구나.

사한까지 흥미를 내비쳤다. 도언은 자신이 찾아냈던 장소를 떠올렸다. 가파른 곳도 없었고, 모두와 가기도 좋을 만한 곳이었다. 나무 역시 마력을 먹은 것 빼고는 안전해 보였고. 특히 녹이 좋아할 만한 장소는 확실했다. 도언은 고개를 들어 녹에게 물었다.

“녹. 같이 가 보시겠습니까?”

“어어? 어어. 그래. 가 보자.”

아무리 소원이 걸려 있었다지만 어린애를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다니……. 그러한 충격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는 녹이 어영부영 대답했다. 진예와 룬은 물을 것도 없으니, 여기에 있는 모두와 함께 이동해야겠다.

도언은 청연을 불렀고, 곧 그들의 신형이 그곳에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사한이 원했던 아늑한 고요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 ❊ ❊

“되게 크다!! 세계수보다는 못하지만요.”

나무를 보던 진예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확실히 하진이와 함께 세계수에 종종 들렀던 기억이 남아 있는지, 세계수와 비교 역시 빼먹지 않는다.

녹 또한 펼쳐진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입을 벌렸다. 세계수보다 못하다곤 하나 이 정도 나무의 크기라면 못해도 1,500년은 살아야 한다. 이 정도 크기의 나무는 세계수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본 적 없다. 찾아보면 나오기야 하겠지만.

이네스가 신나서는 용으로 변해 나무의 꼭대기를 향해 승천했다. 나무의 구석구석에서 초록색의 다람쥐 정령이 튀어나와 처음 맞이하는 인간과 마생물, 정령을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곳곳에 나 있는 옹이구멍으로 숨기 바빴다. 그 귀여운 모습에 사한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 이야. 새로운 녀석들의 은신처가 되었구나. 아마 조금만 두면 또 다른 녀석들이 보금자리를 틀러 찾아올 거외다. 이것 참. 옛날 생각 나는구나. 세계수 님이 딱 이랬는데.

“세계수가요?”

세계수라는 걸 녹의 꿈속에서 처음 봤던 청연이 추억에 잠겨 있는 사한에게 물었다. 녹의 꿈속에서 세계수는 어두컴컴하고 무언가 스산한 느낌의 나무였다.

물론 열매를 품느라 잠에 빠지고, 하가의 마법사들이 그를 이용하느라 조성된 분위기였지만 어쨌든, 지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기에 사한의 말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 뭐, 옛날이야기다. 그분께서 너를 만들러 잠에 빠지기 전, 정령과 마생물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제 몸을 내어 주셨지.

이네스가 세계수의 꼭대기에서 둥지를 틀었다고 했었지, 참. 그 사실을 떠올린 청연이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했다. 룬과 함께 나무의 둘레를 한들한들 걸으며 굵기를 측정하던 진예가 사한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저 궁금한 거 있어요!”

- 무엇이느뇨?

“왜 세계수가 오빠를 그렇게 좋아한 거예요? 자기 힘을 모두 물려줄 만큼? 사한이 세계수의 첫 번째 나뭇가지면 그런 것도 알 거 아니에요!”

진예의 엉뚱한 질문에 녹과 도언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세계수가 저를 좋아하는 게 맞긴 하지만… 사한이 답을 알긴 할까? 녹이 고민하고 있을 때, 도언은 사한이 말하기 전에 나서서 가설을 즉답했다.

“예뻐서.”

“네?”

“녹을 봐. 예쁘잖아.”

그 순간 그곳에 있는 모두의 눈동자가 녹에게 쏠렸다. 심지어 룬까지도.

“…….”

가을바람이 싸늘하게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모두의 피부를 훑으며 체온을 낮춰 주었지만 되레 녹의 얼굴은 화끈해졌다. 아무리 도언이라도 감싸 주지 못할 만한 답변이라 해야 하나. 짜게 식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한을 대신해 진예가 반박을 제기했다.

“…그러면 마지막 하가의 안주인이 세계수의 호감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되게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녹이 예쁜 점이 그것뿐만 아니라는 증거지. 진예야. 녹은 그냥 사람 자체가 예쁜 거란다. 봤는데 어떻게 녹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게 그 나무의 감성에도 통한….”

- …아니야! 아니다! 아니야!!

신중하게 내뱉는 헛소리를 들어 주기 힘든지, 사한이 결국 끼어들어 도언을 중재했다. 사한의 하얀 꼬리가 방울뱀처럼 흔들렸다. 사한은 진정으로 도언에게 뭐라고 했다.

- 무슨, 세계수께서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느뇨!

“아니요. 나무로 보입니다만.”

도언이 당황하지 않고 반박했다. 청연이 녹의 근처로 슬그머니 가서 속삭였다.

“가주님은 저 가설에 진심이신가 봐요.”

청연이 녹을 놀리듯이 낄낄댔다. 당사자지만 이 주제에 대해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녹은 슬그머니 먼 산으로 눈을 돌렸다. 도언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씩씩댄 세계수의 대변자, 사한이 소리쳤다.

- 다들 모여! 내가 왜 세계수께서 녹에게 힘을 주셨는지 알려 줄 테니까!

“와! 이유를 아는 거예요? 역시 첫 번째 나뭇가지!”

-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저놈의 가설보단 신빙성 있으니까 잘 듣거라!

사한은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였다. 도언은 나무를 기대고 팔짱을 끼며 어디 뭐라 말하나 관전하는 자세를 취했고, 진예는 눈을 빛냈으며, 룬은 진예 밑에 엎드려 자리를 잡았고, 청연은 기적으로 펼친 평상에 녹을 앉히고 있었다. 녹은 당사자면서도 딱히 알고 싶지 않은지 영 무관심한 태도였다.

마치 할아버지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드디어 사한은 세계수의 첫 번째 역사의 줄기를 풀어냈다.

❊ ❊ ❊

세상은 강력한 힘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균형을 잡으며 성장해 왔다. 절대자라고 말해도 괜찮겠구나. 그들은 세상의 선지자로서 세상에 위험이 닥치기 전에 적절한 조치를 하여 세상의 명을 늘리는 역할을 했단다. 이 세상의 절대자는 세계수였어. 대단한 분이시지.

물론 절대자도 긴 삶의 경종을 울리는 처음은 있다.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처음은 작고 여리며 연약하지.

그 시기를 넘는 게 이 세상에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절대자의 첫 번째 시련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가 시련을 넘어야 비로소 그 세상은 든든한 중심을 가지게 되는 거지.

세계수의 처음도 그랬다. 그분은 수박만 한 씨앗으로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셨어. 웬 숲에 덩그러니 묻혀 있었지. 새로운 시작을 꿈꾸면서 말이야.

하지만 어린 절대자를 처리하기에 그만큼 좋은 시기도 없어. 다른 세계의 절대자들은 은근히 질투가 많아서 말이다. 굳이 마주칠 일이 없더라도 절대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혈안이었단다. 그리고 어린 절대자는 그들의 필연적인 표적이 되었지.

사실 세계수께선 첫 번째 시련 때 영영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숲이 잠길 정도로 폭우가 내렸거든. 타 세계의 절대자들이 합심해 벌인 짓이었지. 씨앗은 햇빛과 물로 성장을 꾀하는 법. 물만 먹으면 썩어 버릴 뿐, 자랄 수 없지. 그분 역시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 마을에 사는 인간들의 꿈에 나타나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셨지. 그러나 순식간에 불어난 하천의 물과 쏟아지는 폭우로 제 살림 챙기기 힘든 인간들이 허상 같은 꿈을 믿고 그를 도우러 그 난리에 물난리에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랬어.

덕분에 체념하고 물에 잠겨 울음으로 지새운 건 그분이셨다.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내려왔으나 떡잎조차 펼치지 못하고 소멸할 위기에 놓였으니 그 얼마나 억울하셨을까.

그때,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피신하던 수재민 하나가 씨앗이 잠긴 물구덩이 위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의미심장한 꿈이 너무도 이상했던 게지.

그 녀석은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발목을 걷고서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어. 친구들이 미쳤냐고 말렸지만 고집 하나는 대단했지. 폭우는 그치지 않아 물웅덩이는 그 크기를 점점 불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까딱하다간 불어난 강물에 휩쓸릴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어.

갑자기 물귀신이라도 든 모양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 역시 물에 휩쓸려 변을 당하기 전에 얼른 빠져나왔지. 하지만 결국 그 녀석은 물구덩이에서 수박처럼 단단한 씨앗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를 보따리에 싸 들고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랐다고 하지. 첫 번째 시련은 그의 도움을 받아 헤쳐 나갈 수 있었어.

나중에 어째서 목숨 걸고 쓸모없을 뿐인 짐을 건져 올렸냐고 물으니 차마 꿈속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무언가를 지나칠 수 없었다고 그러더구나.

그게 불어나는 물구덩이에 목숨을 걸고 수색을 할 만큼 그리도 중한 것이었을까? 솔직히 나는 이해가 좀 안 될 정도다. 그 정도로 그는 무척 물렀지만 그렇기에 세계수께선 목숨을 구했지.

❊ ❊ ❊

한창 집중해 이야기를 듣던 진예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정답! 하가의 초대 가주!”

- 정답.

“야호!”

마치 퀴즈쇼라도 된 양, 진예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쾌재를 불렀다. 별 관심 없던 녹이 진예의 말을 듣고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갑자기 선지자라니 절대자라니 세계수 찬양을 하던 옛이야기에 비중 있게 튀어나온 인간이 하가의 초대 가주란다. 하가에선 초대 가주와 세계수의 관계에 대해 뭉뚱그려 가르쳐 왔기에 이런 세세한 내용은 처음 들었다.

도언 역시 흥미가 조금 돋는지, 내내 녹만 보고 있던 고개를 사한 쪽으로 조금 비껴 틀었다.

“그럼 하가의 초대 가주랑 오빠랑 성질이 비슷해서 세계수가 오빠를 낙점한 거로군요!”

“내가 초대 가주랑 비슷해?”

씨앗을 구했다는 짧은 이야기에서 대체 무얼 찾은 건지. 진예의 당찬 확신에 녹이 물었다.

“제 삶을 걸면서까지 오지랖 넘치는 게 딱이에요! 심지어 저쪽은 같은 인간도 아닌데 구했네요!”

“대책 없이 무모한 것도 그렇습니다. 땅을 뒤지다가 씨앗이 나오지 않으면 분명 그랬겠죠. 없네? 별수 없지.”

도언까지 가세하여 덧붙였다. 심지어 도언은 그저 녹의 행동을 예측한 것 같았다. 쟤는 왜 초대 가주의 행동을 예측하는 게 아니라 내 행동을 예측하는 거람.

녹 역시 그를 정확하게 알고서 도언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도언은 그런 녹을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거로 마무리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초대와 천성이 비슷한 오빠를 낙점했던 거였군요!”

- 헛 참, 녀석도. 성질 급한 게 도언이랑 비슷하구나. 뭐 여하간….

❊ ❊ ❊

그래도 목숨 걸고 구했다고 꽤나 애지중지하더구나. 함께 있던 마을 사람들은 목숨 걸고 꺼낸 게 웬 호박 같은 거대한 씨앗이라는 사실에 비소를 감추지 못했지. 다른 사람이라면 그들의 비웃음에 부끄러워하며 씨앗을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만, 그 녀석의 고집은 대단했어.

그 녀석의 보호 덕분에 세계수 님은 평안하게 자랄 수 있었다. 세계수께선 언제나 범상치 않으셔서 묘목 역시 거대하고 컸단다.

그리고 그쯤 자라고부터는 저를 구한 그 녀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 그들은 그리 교류를 하며 서로를 친우로 여기고 세월을 보냈어.

세계수의 근처엔 그분 특유의 마력이 모이기 마련. 마생물과 세상에 없던 존재인 정령들이 태어나고, 인간들 역시 그 마력의 영향을 받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사람들 모두 그 녀석의 공을 인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가문을 만들어 세계수를 섬겼지. 어찌 보면 그가 인간들에게 힘을 준 시초니까 말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세계수의 부속인 정령들은 기적을 마음껏 썼지만 후천적으로 개발된 인간들은 타고난 마력 주머니에 담긴 마력을 몽땅 쓰면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었어. 이에 인간들은 가주에게 부탁했지.


‘우리도 정령들처럼 마법을 끝없이 쓰고 싶습니다. 정녕 한 번만 그 기쁨을 맛보고 영면에 빠져야 한단 말입니까.’

심지어 가주에게 부탁한 사람은 마력을 쥐어 짜내 병약한 아내의 치료를 도맡던 인간이었네. 미욱한 마력을 모두 써 버리자 아내의 병환이 짙어져 시름시름 앓아 갔지.

결국 가주는 세상의 규칙을 바꿀 수 없냐 세계수께 부탁했다. 모든 세상의 이치는 함부로 바꾸면 탈이 나는 법. 그러나 하나뿐인 친우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던 세계수께선 결국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정령의 기적 형태를 본뜬 식신이란 존재를 인간들에게 빌려주는 거지. 물론 불행의 인과를 꼬여 내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친우를 닮은 인간들이라면 그만한 욕심 없이, 현명하게 쓸 수 있겠지라는 헛된 확신 때문에 쉬이 빌려주었다.

그렇게 초대 가주의 지휘 아래 마법사의 존재가 탄생했다. 문제는 몇백 살까지 살았던 초대 가주가 죽은 이후부터였지. 이건 선지자인 세계수도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어. 고것이 요망하게도 세계수의 미래시를 살짝 가리고서 마지막 인사를 쏙 빼고는 재빠르게 영면에 들었다.

그래, 확실히 마지막 인사를 했으면 세계수께서 그를 어떻게든 저지했겠지. 선지자면서 그런 쪽으로는 영 떼쓰는 아이같이 변하는 걸 초대도 알았던 거지.

이후 마법사들의 기강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덕분에 마법사들이 아닌 녀석들은 그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 여기에 있는 모두가 그들의 피해자겠지.

세계수께서 식신을 회수하고 흩어진 규칙을 바로잡으면 좋으련만, 세계수께선 마법사들을 되는대로 내버려 두었지 무어냐. 간간이 열매를 내렸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그리 떠나고 난 이후 후회를 많이 하셨어. 내가 봤을 땐 부족할 거 없이 해 준 듯 보였는데 세계수께선 아니었나 보구나. 그를 그리워하며 못 해 준 것만을 되새김하셨지.

그러다 내 앞에서 다짐하셨다. 다음에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걸 몽땅 해 줘야겠다고 말이야.

❊ ❊ ❊

사한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마침표를 찍었다. 사한의 옛이야기를 듣던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한의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성격 급한 진예가 나섰다.

“…그게 끝이에요?”

- 그래.

“그게 뭐예요. 중간에 주제 바뀐 거 아니에요? 저는 세계수가 어째서 오빠에게 힘을 물려줬는지가 궁금한 건데요?”

진예가 거침없이 물었다. 도언은 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심각하게 무언가를 골몰했다. 쟤는 뭔가 알아낸 걸까.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렇다 할 생각이 없는 건 청연과 룬, 그리고 녹뿐이었다. 멀뚱멀뚱 듣고 있던 청연이 녹에게 와서 속삭였다.

“아무래도 그냥 그런 천성을 가진 사람이 세계수의 취향이었나 보죠.”

“그런 천성?”

“음…. 보상을 확신할 수 없는 도움에 진심이고, 저를 비웃었던 자들을 위해 열심이고, 여하간 제 목숨 걸고 움직이는… 말하자면 호구 스타일?”

“…내가 호구란 거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호구라고 칭하는 청연의 말에 녹이 반쪽 얼굴을 찌그러트리자, 청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수습했다. 짜증 나는 점은 녹 역시 본인이 호구라는 주장에 딱히 반박할 부분을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녹은 제 이마를 짚으며 지난 2백 년간을 떠올렸다. 괜히 식신의 이동과 마법사들의 전쟁 때문에 인간들이 피해받으면 안 된다고 힘을 숨기고 마법사들을 피해 왔던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하지만 제 마음이 편하려면 진실로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녹이 제 호구력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즈음, 바짓단 부근에서 서늘한 무언가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어느새 녹의 어깨까지 올라온 사한이 고개를 길게 빼고 진예에게 말했다.

- 그래도 세계수 님은 절대자인 동시에 선지자셨다. 물론 힘을 녹에게 주려 준비할 당시 멀리까지 선지하진 못하셨지만. 적어도 녹이 태어날 거란 사실은 알고 계셨지. 지금껏 못난 하가를 눈감아 주신 건 그를 준비한 거였어.

“제가 뭐라고 그 나무는 그렇게까지 준비를 했대요?”

세계수를 향해 아직도 영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은 녹이 꿍얼거렸다. 사실 땔감이라고 하려다가 사한의 입장을 봐서 가능한 순화해 말한 거였다. 목소리에 담긴 불만에, 사한이 고개를 돌려 녹과 눈을 맞추었다.

- 아이야.

“네?”

- 윤회의 뜻을 아느냐?

“…네?”

- 너는 그분의 유일한 친구였다. 세계수 님께선 유일한 친우인 네게 세상을 선물하려 하신 거지.

녹의 말문이 막혔다. 지금 사한의 말은… 그러니까, 환생이란 게 있다는 건가? 그리고 그 초대 가주는 설마….

기가 찬 진실에 들숨과 날숨만 간신히 반복하던 녹이 저도 모르게 도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스라한 미소를 녹에게 보내며 입을 열었다.

“천성은 다시 태어나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 세계수의 조각이 네 스스로 봉인한 기억을 되찾게 해 주기 위해 도움을 많이 줬다 들었다. 그분 나름대로 마음 쓴 거니 그리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러 복잡한 생각이 해일처럼 녹을 덮친다. 세계수를 두둔하는 사한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결국 모든 일의 시초는 나 때문이라는 거야?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전생?

❊ ❊ ❊

“…님! 녹 님!”

“…어어??”

“어느 쪽 색이 낫냐니까요?”

“어… 이쪽.”

청연이 눈앞에 무언가를 들이밀었으나 녹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충 오른쪽을 집었다.

“아, 저도 그게 녹 님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들 비슷비슷한가 봐요. 이네스에게 가져가서 금방 해 올게요!”

청연이 녹의 선택에 만족스러워하며 방문 바깥으로 총총 걸어 나갔다. 녹은 자신이 뭘 고른 건지도 모른 채 다시금 기억을 되새겼다.

‘윤회의 뜻을 아느냐?’

‘천성은 다시 태어나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너는 그분의 유일한 친구였다.’

며칠 전, 사한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자꾸만 그 진실이 녹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혼을 빼 두었다. 그러한 상태는 추석까지 이어졌다. 지금 녹은 명절을 맞이해 복작복작하게 모인 이네스의 집에서 멍을 때리는 중이었다.

안가의 추석은 이네스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청연이야 명절 모임 때마다 간간이 얼굴을 비추었지만, 바빴던 도언이 참석한 추석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얼마나 즐거워하던지. 쾌재를 부르던 이네스가 뭐라고 했더라.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었던가.

녹이 씨앗의 신분을 벗고 안가의 일원이 된 이후부터 이네스는 녹의 전용 사진 기사처럼 굴어 댔다. 물론 녹을 찍으면 사진을 절대 찍지 않으려고 했던 도언 역시 한꺼번에 건지니, 어떻게 찍어도 작품이 탄생하는 그 기회를 놓칠 이네스가 아니었다.

이네스의 한쪽 벽을 장식하던 사진의 벽은 어느새 녹과 도언의 분량이 서서히 늘어났다. 추석이라고 한복을 입은 진예와 룬이 사진에서 꺼낸 도언과 녹의 미니미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고, 그렇게 놀 수 있는 사진은 열 손가락을 넘을 정도로 이네스는 그 둘을 모델로 세운 작품 활동에 진심이었다.

물론 도언 역시 이네스의 작품 활동에 별 제재를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이네스가 알아서 커플 사진을 찍어다가 액자를 만들어 바치는데, 도언으로선 거절할 명분은 제로에 가까웠다.

테이블에 앉아 멍을 때리던 녹은 자신의 바로 옆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신의 생일에 찍었던 단체 사진이다. 모두가 웃으며 렌즈를 바라보는 그 모습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녹은, 그대로 주먹을 쥐고선 제 앞에서 펴 내었다.

꽤 많은 수의 미니미들이 녹의 손바닥에서 즐거워하며 웃고 있었다.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녹은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울상을 지었다. 마법사만 아니라면 하진이도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마법사의 시초가 결국 나라니….

“녹 씨! 가주님 등장이에요!”

그때, 이네스가 한쪽 방의 문을 열며 녹을 향해 외쳤다. 열린 문을 통해 나오는 사람으로 인해 녹의 머릿속에서 열심히 땅을 파던 삽이 저 멀리 날아갔다. 우울하게 제 손바닥 안의 미니미들이나 보던 녹은, 고개를 들고 감탄을 연발했다.

“오와아….”

거기엔 언제나 현대복을 입던 유능한 사업가는 어디에 가고 잘생긴 조선시대 무관이 서 있었다. 팔꿈치 길이의 소매를 가진 회청색 반수 답호에는 자잘한 용의 문양이 고결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안쪽으로 진한 자주색의 철릭의 소맷단이 도언의 팔목을 빈틈없이 감쌌다. 검은 허리 대대는 그의 복식에 세련됨을 더해 주었는데, 도언은 심지어 갓까지 갖춰 썼다.

호박과 흑요석이 뒤섞인 갓끈은 보기만 해도 고풍스러웠는데, 차분한 무관복과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빈 액자에 자신이 보던 미니미들을 대충 구겨 넣은 녹이 도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섰다.

도언은 무언가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선 다가온 녹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괜히 주먹을 입에 올려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선 천장 구석으로 눈을 돌려 바라보길 몇 초 후, 결국 녹과 눈을 맞춘 도언이 녹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진짜 잘 어울려. 대박. 어릴 적이나 네가 한복 입은 걸 봤지. 완전 색다르다.”

가끔씩 나들이를 갈 때 다른 색의 한복을 차려입긴 했지만 하가의 도언은 언제나 검은 철릭의 모습이었다. 지금 역시 철릭이 바탕이지만 어릴 적과 다르게 고고하고 은은한 멋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른 도언이 한복을 입은 모습을 녹이 처음 봤단 사실이다.

의상 감독을 도맡은 이네스가 도언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녹을 보고 우쭐해서 어깨를 폈다. 물론 그런 그녀 역시 치마폭이 풍성한 한복을 입고 있었고, 연노랑색과 하얀 저고리가 단아하게 그녀를 꾸며 주었다.

“자자, 이제 청연이랑 녹 씨만 갖춰 입으면 추석맞이 가족사진 촬영 준비는 끝나요. 지금 녹 씨가 고른 옷감이랑 어울리는 디자인을 잘 뽑아서 주술 걸어 놓고 왔으니까, 곧 있으면 완성될 거예요.”

“네? 제가 고른 옷감이요?”

“네? 청연이 물어보지 않았나요?”

무슨 소리인가 해서 물어보니 이네스 역시 아리송하게 답변해 왔다. 그제야 녹은 청연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자신이 대충 골라 대답해 주었다는 몇 분 전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게 옷감이었나 보다. 녹이 기억난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아. 맞아요. 그랬죠.”

그때 방 안쪽에서 주전자가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 완성되었나 보네요! 가주님은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갑시다!!”

이네스가 녹의 등 뒤를 밀었다. 이네스의 의상실로 빨려들 듯 들어간 녹은 문이 닫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언의 무사 차림을 보았다. 그리고 무사님의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의상실의 문이 닫혔다.

❊ ❊ ❊

한복으로 갈아입은 녹은 이네스의 집에서 사진을 찍고 송편을 먹는 등 한참이나 추석을 즐겼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 되자 녹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카드 게임을 하던 정자로 와서 엄지손톱보다 커 보이는 달빛을 쐬었다. 아직도 머릿속이 싱숭생숭했다.

“그렇게 계시니 정말 풍류를 즐기는 선비님 같군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말한 것처럼, 은은한 연녹색의 두루마기를 걸친 녹은 확실히 먹물 좀 먹은 문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녹이 대충 골랐던 옷감은 톤 다운된 올리브색의 원단이었고, 미적 감각이 기가 막힌 이네스는 그를 맞추어 뚝딱 선비 의상의 디자인을 완성했다. 허리춤에 달린 곡옥과 노리개가 단정함 위에 화려함 한 점을 얹어 변주를 주었다. 이네스의 집에 벗어 놓은 갓은 귀찮아서 쓰고 나오지 않았다.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녹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바로 했다. 사실 볼 것도 없이 목소리만 듣고도 도언이란 걸 알긴 했다.

“안 자고 왜 이쪽으로 왔어? 잠이 안 와?”

“저는 자러 들어간 게 아니었습니다.”

도언이 온종일 정신을 빼먹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녹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주었다. 분명 녹에게 잠시 일 때문에 방에 좀 들어가 있겠다고 했는데, 고개를 끄떡이던 녹은 아무래도 딴생각 때문에 듣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급한 업무를 끝내고 나와 보니 피곤한 모두가 자고 있었고, 웬 생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고고한 선비님께선 사라졌다. 이에 소파에 널브러져 자고 있던 청연을 깨워 이동했다. 그가 찾던 보물은 역시 이곳에 있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응. 옛날 생각 나잖아. 많이 힘들었어도 그때는 또 그때만의 향수가 있는 법이야.”

하가에서도 구석진 냇가 옆에 이만한 정자가 있었다. 그곳은 하진과 도언, 그리고 녹의 작은 아지트였다. 하가의 너무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진이가 여러 놀이를 알려 주었다.

공기, 제기, 술래잡기, 숨바꼭질에 비석치기까지. 주변의 대우에 너무 이르게 어른스러워졌던 녹이, 그때만큼은 그 나이의 아이처럼 굴 수 있었다.

“그때 참 재밌었지….”

개울가에 어둠에 물든 단풍이 파동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본 녹이 도언을 바로 봤다. 그 역시 옷은 갈아입지 않고 있는지 든든한 무관의 의복을 입고 정자 기둥에 기댄 녹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복까지 갖춰 입고 이리 있으니까 그때 같아. 어린 도언이 생각하다가 지금의 너를 보니까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뿌듯하다. 이리 멋있게 잘 커서는…. 사한과 이네스에게 고마워해야겠는걸.”

“이네스가 뭘 한 게 있다고요.”

그럼 사한은 뭘 한 게 있긴 한가 보다. 그에 피식 웃던 녹은 장성한 도언을 보고 또다시 아득한 기분에 휩싸여 말을 잃었다. 마법사만 없으면 나와 쪼개져서 살지도 않고, 하진이와 남은 도언이의 가족들도 모두 목숨 부지하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녹은 정자에 기댄 상태에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수심에 찬 얼굴로 바라봤다. 달빛이 녹의 옆모습을 환히 비추었고, 그의 얼굴에 빛이 들어옴과 동시에 반대쪽 얼굴에 어둠이 차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우수에 찬 선비 같은 그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귀할 정도로 한스럽고 아름다웠으나, 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던 도언은 그를 감상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전생의 짐까지 이고 갈 이유 없습니다.”

“응?”

“모든 일의 시초는 녹이 아니란 겁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도언은 이렇듯 녹의 허를 찔러 왔다. 자신이 지닌 고민을 녹이 말실수로도 읊조리지 않았는데, 녹만을 온종일 바라보는 도언은 척하면 척이었다.

녹은 괜히 마음을 읽힌 기분이 들어 괜히 부끄러워졌다. 열이 오른 건 아닐지 괜히 뒷목을 쓸던 녹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입 밖으로 말을 했던가?”

“척 보면 압니다. 저번에도 말했죠. 제가 녹보다 더 녹을 잘 안다고.”

녹 본인도 몰랐던 호랑이 공포증을 일러 줄 때였나. 갑자기 도언의 정체를 알아맞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때가 생각난 녹은 작게 웃었다.

정자의 그림자 안에 있던 도언이 성큼 걸어 나와 달빛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왔다. 밝은 달빛이 그의 온몸을 비춰 주었다. 달빛에 드러난 훌륭한 무사님께 녹이 선선히 대꾸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아직도 제 말을 못 믿으시나 보군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말씀하실 때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지 않습니까.”

그게 근거가 될 만한 이유인가? 도언이 어이없는 증거를 내밀었지만 그 자세가 너무도 당당해 녹은 헷갈렸다. 사실 도언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녹은 도언의 말에도 불구하고 땅을 파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녹은 하진이뿐만 아니라 마법사로 피해를 본 모든 사람에게 미묘한 부채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청연이 봤다면 저 호구력 어디 안 간다며 한탄했을 테지만 그런 일침을 놓아줄 청연은 아쉽게도 도언의 문신으로 잠들어 있었다. 대신 도언이 나섰다.

“사한이 그랬잖습니까. 절대자이자 선지자인 세계수가 이 세상을 수호했다고.”

“그랬지.”

“만일 초대가 세계수를 구하지 못했다면 이 별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이곳에서 태어나지 못했고, 결국에 저희 역시 만나지 못했겠지요.”

“…….”

“거기에다가 녹은 이미 할 만큼 했습니다. 마법사들의 식신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둔해 사셨지 않습니까.”

도언의 말대로였다. 녹이 마법사들의 눈에 띄게 된다면 그를 잡을 마력을 모으기 위해 마법사들이 무수한 식신을 풀게 될 게 뻔하니까. 마법사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지 못했던 것 역시 그들의 실종에 마법사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를 챌까 봐서였다.

괜히 인간들이 다니는 곳에 마법사들이 군단이라도 몰고 오면 피해를 보는 건 인간들뿐이었으니까.

도언이 그리 말을 했어도 녹은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도언에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녹은 등을 돌려 달을 올려다보았다. 떠난 하진이가 떠올라서 녹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그래도 그때 초대가 세계수를 구하지 않았으면 다른 선지자가 내려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초대와 친분도 없고, 그렇기에 마력을 그저 마생물과 정령들에게만 허하는 세상을 만드는 그런….

그렇다면 하진이도, 도언이도 모두 잘살고 있었을 텐데. 하진이는 그리 좋아했던 달을 오래도록 볼 수 있었을 텐데.

녹의 그림자가 쓸쓸해진다. 녹의 어깨가 내려가고 그 주변을 두른 분위기가 침몰하고 있었다. 녹의 기분을 기민하게 알아채는 도언은 녹이 하염없이 땅을 파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도언이 달을 응시하는 녹을 뒤에서 안아 왔다. 쌀쌀한 가을 밤바람이 식힌 등은 도언의 체온으로 따뜻해졌다. 도언이 고개를 녹의 어깨에 올리고는 한참 동안 그와 함께 달을 바라봤다.

“…하진이 말입니다.”

도언이 하진의 이름을 입에 담자 녹이 작게 움찔거렸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몸을 붙인 도언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역시, 하진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대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들 설득이 안 된다 했더니, 아무래도 하진이 때문에 더 그랬던 듯싶다.

“제가 세계수의 꿈속에 들어갔을 때 기억하십니까.”

세계수가 보여 주는 과거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던 그때를 말하는 걸 테다. 그때야 비로소 하진이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사라졌었다. 그때를 회상한 녹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너가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게 했던 그때 말이지.”

“…제가 시키진 않았습니다만, 크흠. 어쨌든.”

녹이 그리 회상할지는 몰랐는지, 괜히 머쓱해진 도언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 하진이와 진정한 이별을 고했죠. 당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던 하진이는 세계수로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네, 저희도 몰랐던 녹의 전생부터 그때까지 말입니다. 하진이가 떠나기 전 저에게 무어라 속삭였던 것 역시 기억하십니까?”

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죽인 하진이가 도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했던 것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도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고, 이미 도언을 알고 있는 듯한 하진의 태도에 도언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었다. 도언이 천천히 기억을 상기시키니 지금에 와서야 하진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그때 하진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어?”

달을 마주 보고 있던 녹이 몸을 돌려 이번엔 도언을 마주 봤다. 하얀 달빛이 도언의 얼굴을 희게 비춘다. 도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정자의 평평한 나무 난간 위에 녹을 올려 앉혔다. 도언이 입술을 떼었다.

“모든 진실이 드러났을 때.”

난간의 폭은 녹이 앉아도 한 뼘이 남을 만큼 충분했다. 앉은 덕분에 시야가 올라간 녹은 도언의 대답을 기다렸다. 녹을 올려보던 도언이 잠시 달에 시선을 두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건 도령의 잘못이 아니라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녹이 그 말을 듣고 굳어 버리자 도언이 아스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시 하진이가 말하는 모든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사한에 의해 밝혀지는군요.”

도언이 녹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목에 둘렀다. 녹의 폭넓은 녹빛 소맷자락이 도언의 등 뒤를 감쌌다. 한층 더 가까워지니, 녹의 눈에 소용돌이치는 심연이 잘 보였다. 도언은 잊을 수 없는 하진의 마지막 말을 이어 나갔다.

“만일 녹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을 한다면 옆에서 바로 잡아 달라고. 그리고 도언이 너는 지금껏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너를 믿고 그렇게 나아가라고.”

도언이 녹의 눈에 입술을 찍었다. 덕분에 감긴 눈에, 녹은 볼을 타고 물방울 하나가 흐르는 걸 느꼈다. 도언이 반대쪽 볼을 엄지로 쓸어 주며 얼굴을 떼고선 장난스럽게 말했다.

“여기까지 예상하다니. 누구 동생인지 몰라도 참 똑똑하지 않습니까.”

아려 오는 기억에 녹이 파들파들 떨리는 입 끝을 가까스로 올려 아스라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러게… 누구 동생인지 몰라도…. 맞는 말만 했네….”

도언이 위로하듯 조심스럽게 녹의 입술을 겹쳤다. 입가에 닿아 오는 온기를 느낀 녹은, 지금껏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걸 드디어 인정했다.

전생은 전생이고 초대는 하녹이 아니었다. 초대가 어떤 일을 했든, 그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든 자신의 책임과 관련이 없었다. 그저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펼쳐진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삶을 쟁취하는 건 제 몫이었다.

하진은 도언에게 확신을 주었고, 도언은 하녹에게 이정표가 되었다. 행복으로 직진하는 이정표였다.

자신을 위로하는 도언의 눈에 보름달이 깃들었다. 달이 깃든 도언의 눈을 보니 걱정과 우려가 사라지는 듯했다.

하진이의 말대로 도언은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마법사들을 버티고 섰던 과거의 녹보다 훨씬 강하게.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굳건히. 녹의 길잡이를 자처하며 버텼다.

달빛 아래, 도언과 숨결을 나누던 녹은, 하진과 그의 말대로 쓸데없는 책임감에서 벗어난 삶에 적응하리라 마음먹었다. 자승자박이라고 했던가. 스스로가 걸어 둔 쓸데없는 걱정과 부채감으로부터 자신을 옥죄는 사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녹은, 도언과 함께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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