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타로
눈 내리기 시작하는 길거리는 가게마다 경쟁하듯 캐럴을 틀기 시작했고, 중심가의 큰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화려하게 연말을 일렀다. 녹이 있는 장소는 그러한 겨울의 길거리 구석, 예전부터 영업하던 그 컨테이너 안이었다.
저번 가을에, 무슨 소원을 빌고 싶기에 그리 열심히 보드게임에 참여했냐 묻는 도언에게 녹이 내민 소원은 이거였다.
‘나도 슬슬 내 컨테이너를 찾았으면 좋겠다! 이제 사람들의 카드를 읽어 주는 본업에 복귀하고 싶다!’
그 말을 들은 도언은 이게 자신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냐며 궁금해했고, 왜인지 허락을 안 해 줄 것 같았던 도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벙찐 건 녹이었다.
그러게? 내가 왜 도언이에게 허락을 받으려고 그랬지? 아무래도 감금으로 시작된 집돌이 생활이 몸에 배어 버렸었나 보다. 여하간, 덕분에 영업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오랜만의 영업에도 사람들은 녹을 기억하며 찾아왔고, 그들 덕분에 타로술사 민수, 아니, 녹의 영업은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손끝에 스치는 카드의 유연하고도 단단한 감각,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누는 그들의 사는 이야기들, 카드를 만지는 낯선 사람에게 상담하며 내보이는 진심과 그에 얽힌 감정들. 모두 녹이 그리워한 경험이었다.
일선에 있을 때는 지겨워서 몰랐는데, 이것들이 그리워질지는 몰랐다.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기분은 역시나 여전했다.
찹찹 촤라락-
남색의 벨벳 스프레드천 위에 같은 색의 타로 카드가 부채처럼 펼쳐졌다. 시험 삼아 몇 개를 뽑아서 뒤집은 녹은, 다시금 카드들을 모으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뒤섞기 시작했다.
“맛있으십니까?”
“…우웅….”
녹이 단맛의 단팥을 씹으며 질문에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컨테이너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아니, 손님보다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건 바로 붕어빵이었다. 물론 그 붕어빵보다 더 귀한 건 붕어빵을 들고 온 도언이었다.
컨테이너에 붕어빵을 들고 방문한 도언은 컨테이너에 들어오자마자 유리문에 안쪽에 설치된 커튼을 쳐서 손님이 있음을 표시했다. 물론 도언이 녹의 손님은 아니었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랴. 도언은 간간이 이리 찾아올 때마다 간식거리를 싸 들고 왔다.
처음에 녹은 커튼을 치면 손님들이 떠난다고 잔소리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선 도언이 찾아옴과 동시에 방문하는 휴식을 즐겼다. 돈이 그리 궁한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즐겨도 된다.
언제나처럼 도언은 녹의 옆자리에 자리했고,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녹을 배려한 도언이 붕어빵을 손수 녹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언의 질문에 녹이 건성으로 웅얼대며 카드를 노려봤다. 가끔씩 녹은 카드만 들면 그 안에 빠져들 것처럼 변한다.
“어? 이 카드….”
도언은 녹이 뒤집은 카드 중 눈에 익은 카드가 보여 그를 반갑게 짚었다. 나무 밑에서 주저앉아 구름이 내미는 컵 하나를 고깝게 외면하고 있는 남자가 그려진 카드였다. 도언이 이를 왜 짚었는지 궁금했던 녹은 도언이 짚은 컵 4번 카드를 꺼내 도언에게 내밀었다.
도언이 녹에게 카드를 건네받으며 피식 웃었다.
“이거 녹이 저를 귀찮아하셨을 때 나온 카드 아닙니까.”
알 수 없는 도언의 말에 입안에 있던 붕어빵을 재빨리 꿀꺽 삼킨 녹이 눈썹을 모아 천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너를 귀찮아했을 때 나온 카드라고?”
“네. 제가 좋아하는 분의 당장의 기분이 뭐냐고 물었을 때 녹이 이 카드를 뽑으셨죠.”
“아.”
드디어 케케묵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민수로서 도언을 처음 만난 이래로 도언은 자꾸만 이곳에 찾아와 카드를 봤고, 그 대다수의, 아니, 거의 전부의 질문이 도언의 짝사랑 상대에 대한 질문이었다.
당시 그 사람의 기분이 뭐냐고 물어 왔을 때 돈값도 안하는 일회성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돈은 받았으니 열심히 카드를 해석해 주었고, 알고 보니 그 감정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었다. 음. 도언의 앞에서 대놓고 너 귀찮다는 말을 했던 거구나.
“어쩔 수 있나. 그때 진짜 귀찮았나 보지. 마법사랑 엮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인간을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그렇다고 ‘학생의 그녀가 마법사고, 온갖 불행의 시초일 테니 그 마음 접으세요’라고도 말할 수 없으니 굉장히 답답했다고.”
“학생의 그녀요?”
“상대가 매력이 넘치는 아가씨 마법사인 줄만 알았지. 너는 학생인 줄 알았고.”
“매력이 넘치는 마법사 부분은 맞추셨네요. 역시 타로를 기가 막히게 읽으십니다.”
“놀리냐?”
눈을 접어 웃은 도언이 녹의 볼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가끔씩 이렇게 도언이 녹에게 하는 소소한 애정 표현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이상하게 뒤로 갈수록 격한 섹스보다 이게 더 얼굴이 화끈거렸다.
녹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도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도언은 녹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카드를 정리해 내밀었다.
“이번에도 녹의 카드가 맞힐지 궁금하네요. 저의 지금 생각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질문이 너무 포괄적인데….”
녹이 도언에게 카드 뭉치를 건네받아 습관적으로 챱챱 섞으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도언의 질문이니, 재미 삼아 해 보는 것 역시 나쁘지 않았다.
녹이 어떤 방향으로 카드를 읽을지 구상하며 고민하는 동안 도언이 점점 몸을 붙여 왔다. 묵직하게 오른쪽에 느껴지는 열기가 컨테이너의 약간 시린 공기를 막아 주었다. 쪽창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녹은 카드 석 장을 임의로 뽑아 보았다.
“컵 6번, 소드 7번, 전차…?”
과거 카드로 추억을 회상하는 카드가 나온 것까진 알겠다. 녹이 소드 7번에 그려진, 꿍꿍이가 있다는 듯 웃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얼굴이 약간 비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전차 카드와 연계가 된다는 직감이 든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를 밀어붙인다…. 대충 이런 느낌으로 읽은 녹은, 도언이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도움 카드를 임의로 한 장 더 뽑았다.
“에이스 오브 컵스….”
이게 지금 소드 7번이랑 무슨 연관이…까지 생각했을 때, 녹의 오른쪽 허벅지에서 뜨끈한 무언가의 열기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녹이 그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려 보니, 도언의 손바닥이 뭉근하게 녹의 허벅지 위에 얹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슬금슬금 바지의 중심을 향해 위로 움직였다. 녹이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놀라 방금 뽑은 카드를 살펴봤다. 하나의 컵에서 다섯 갈래의 물이 솟구쳐 오른다. 황금빛 컵이 두툼한 페니스와 일순 겹쳐 보였다.
타로에서 컵은 물의 상징. 도언의 머릿속은 지금 무언가를 적시기 위해, 소드 7번의 얼굴로 계략을 꾸미고, 전차 카드처럼 밀어붙인다는…. 녹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아무리 안쪽이 보이지 않게 유리문에 커튼을 쳤다고 해도 여기는 파티션처럼 얇은 벽을 하나 둘렀을 뿐, 무수한 사람들이 바깥에 돌아다니는 컨테이너 안인데?
“…지금 뭐 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녹의 중심을 움켜쥔 도언이 녹의 반대쪽 귓가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녹의 얼굴을 저를 향해 돌렸다. 자연히 돌아간 고개에 도언과 눈이 마주쳤다.
“제대로 읽으셨습니까? 카드가 뭐라고 합니까?”
그 말을 끝으로 눈에 불을 품은 도언이 녹의 입술을 삼켰다.
❊ ❊ ❊
테이블의 아래로 녹의 타로 카드들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컨테이너의 구석엔 녹의 바지와 속옷이 널브러져 있었고, 녹은 카드가 자리해야 할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제가 입은 니트의 끝을 입으로 물어 새어 나오는 소리를 힘주어 억누르는 중인 녹은 중심만 꺼내 놓은 도언을 받아 내고 있었다. 들어찰 때마다 벌려진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언은 책상 위에 누운 녹의 골반을 잡고 힘차게 흔들어 댔다.
“…흐읏, 흣, 응, 흐응.”
기를 쓰고 신음을 죽였지만 안으로 도언의 물건이 내벽 안쪽을 빠듯하게 채워 올 때마다 목울대에서 고인 음성이 잇새 사이로 빠져나왔다. 도언이 허리를 올릴 때마다 그 힘과 함께 몸이 위로 올라가며 테이블을 쓸었고, 뺄 때마다 붉은 내벽이 딸려 떨어지며 빠져나가는 그가 아쉽다는 듯 몸이 밑으로 내려왔다.
아무리 도언이 이곳에 올 때마다 팻말을 ‘CLOSED’로 돌려 바꾸고 커튼을 친다고 하더라도, 가끔씩 절실한 손님들은 돌아가지 않고서 유리문을 열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인기척이 들려 들렀다면서 말이다.
물론 유리문을 열 때 나는 소리로 손님이 커튼을 열기 전에 도언과 하던 가벼운 애정 행각은 정리할 시간을 벌 수는 있었으나, 단연코 여기까지 간 적은 없었다.
아무리 분위기를 탔다고 하더라도 녹은 자신의 가게 평판을 지킬 의무가 있었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컨테이너 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바깥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할 의무 역시 존재했다. 훌륭한 가게 오너 녹은 소리를 죽이며 그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었다.
“녹, 나 좀 봐요. 네? 녹.”
그러나 도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녹이 신음을 막기 위해 니트를 무는 것까지는 아무 참견이 없었으나, 고개를 돌리니 자꾸만 참견해 온다. 한참 일에 집중한 도언의 얼굴을 보면 마지막 정신을 붙잡을 자신이 없기에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렸던 건데 자꾸만 졸라 오니 곤란했다.
복슬하고 따뜻하게 팔목을 감싸는 베이지색 니트가 넉넉하게 녹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돌아간 고개에 녹이 물고 있는 니트까지 더욱 당겨 올라가, 그의 분홍빛 유륜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옷자락이 감싸고 있어 그의 목덜미를 보기는 힘들었지만, 분명 얼굴부터 시작해서 목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을 거다. 목덜미의 여린 살을 희롱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언은 드러난 유실을 건들기 시작했다.
서늘한 공기에 빳빳하게 선 녹의 유실을 엄지로 슬쩍슬쩍 건드리던 도언은 녹의 발목 한쪽을 붙잡아 발목을 감싸는 양말의 끝에서부터 내려오며 그의 종아리에 입을 맞추었다. 녹의 하얀 발끝이 기지개를 켜듯 당겨 펴졌다.
녹의 배, 젖꼭지 근처에서부터 옆구리, 그리고 허벅지 안쪽까지, 붉은 울혈이 울긋불긋 피어났다. 아무리 졸라도 도리질만 칠 뿐인 녹이 얼굴을 가린 건 아쉽지만, 일터에서 일을 벌이니 부끄러워하는 듯한 모양은 그것대로 흥취가 있었다.
녹의 심장은 평소보다 박동이 빨랐다. 아무래도 일터라는 속성, 게다가 그 일터가 길거리 한가운데라는 점 때문에 평소보다 바짝 긴장한 모양이다.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도언은 또 거절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도언은 뿌듯한 만족감이 올라옴과 동시에, 사람들 아무도 몰래 일을 치를 수 있을 거란 녹의 조그만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 결과가 지금의 사태다. 녹은 철저하게 소리의 음량을 죽이고 심장을 빠르게 내달렸다. 기특하고 귀엽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녹의 마음대로 될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서 내려가질 않던 도언은 녹이 고개를 돌려 얼굴 대신 드러난 녹의 귓바퀴를 혀로 둥글게 굴렸다.
“흣.”
녹의 어깨가 움찔대며 수축한다. 귓가는 녹의 성감 중 하나였다. 허리를 천천히 뒤로 빼낸 도언은 그의 귓가에 혀를 집어넣음과 동시에 녹의 안쪽을 깊숙하게 찔렀다.
“흐아앗!”
저도 모르게 물었던 니트를 떨어뜨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 왔다. 녹의 입술 끝과 물고 있던 니트의 끝에서 긴 은색 실이 가늘게 뽑혀 둘을 이었다. 테이블을 맞붙인 볼에 차마 니트가 흡수하지 못한 타액이 실선으로 흘렀다.
“하악-”
막혔던 숨구멍이 열리니 공기가 그를 통해 폐로 빨려 들어갔다. 공기를 한껏 채운 폐가 소리를 내기 전에, 녹은 몸을 돌려 자신의 소매를 물었다. 이번에는 고개가 돌아간 방향의 반대쪽 팔이었다.
덕분에 녹의 상체가 테이블 위에 세워졌고, 도언은 그 방향 그대로 녹의 몸을 반쯤 돌렸다. 녹의 골반이 상체와 같이 오른쪽으로 세워지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다리 한쪽이 도언의 어깨에 올려졌다. 한쪽 다리만 도언의 어깨에 걸쳐진 채로, 녹은 니트 소매 끝을 악물었다.
귀두만 걸쳐질 정도로 허리를 쭉 빼든 도언이 잘게 흔들었다. 속 시원하게 진입하지 않고 입구에서 갉작이는 두툼한 선단은 오히려 녹의 아랫배에 열을 품게 했다. 간지러운 느낌에, 녹은 몸을 웅크리고 도리질을 했고, 도언은 불시에 짓쳐 올리며 포인트를 찔러 왔다.
“으응-!”
니트를 물고 있던 턱에서 자꾸만 힘이 빠진다. 목을 울리는 소리는 막을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니트가 데시벨은 줄여 주는 유일한 수문장이었는데, 자꾸 힘이 빠져 버리니 소리가 새어 나온다.
안쪽에서 극점을 문질거리는 도언의 중심에 녹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책상을 긁기 시작했고, 도언은 제 어깨에 올려진 다리의 허벅지를 끌어당기며 힘껏 몸을 겹쳤다.
도언이 누르는 덕분에 몸이 접혀, 한쪽 옆구리와 허벅지의 넓은 면이 맞닿았다. 아까보다 깊게 찔러옴에 입을 한껏 벌리고 감각을 내지르기 직전이었다.
도언은 녹의 손가락 사이로 손을 겹쳐 꼭 잡으며 녹의 입을 제 입술로 막았다. 점점 빨라지는 피스톤질에 녹의 혀가 자꾸만 도언의 방문을 놓친다.
“흐으… 아, 으, 응.”
목에서 그르릉대는 신음이 자꾸만 새어 나온다. 녹이 음성을 죽이기 위해 열심히 애를 쓰는 게 느껴졌다.
찡그린 눈썹은 고통이 아닌 몰아치는 성감이 원인이다. 커튼도 쳐졌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가게의 평판을 위해 용쓰는 게 귀엽다. 아, 녹은 문을 잠근 걸 모르고 있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도언이 희미하게 웃으며 한쪽 어깨에 걸쳐진 녹의 다리를 잡고는, 박은 상태 그대로 빙글 돌려 녹의 몸을 돌렸다.
“도…도언…. 흣.”
책상에 누워 있던 녹이 그 위에 엎어졌다. 쾌감에 달달 떨리는 두 발이 컨테이너의 바닥을 짚는다.
도언은 녹의 두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책상 위에 올렸다. M자 모양으로 책상 위에 주저앉게 된 녹은 덕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밖에 없었다.
책상의 세로 폭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상체를 숙인다면 책상 밑으로 추락할 게 뻔했다. 결국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팔로 제 다리 사이를 짚었다. 입을 막을 만한 니트 소매는 녹이 책상을 짚음으로써 쓸 수 없게 되었다.
도언은 녹을 책상 위에 올린 이래로 자신의 두 팔을 녹의 다리 사이에 보이는 책상의 빈공간에 짚고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바꾸느라 허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쌕쌕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녹의 등이 부풀었다가 줄어들었다.
녹이 아직 입고 있는 건 약간 품이 넉넉한 털 니트였기 때문에 도언은 그 뒷모습을 보고 숨을 쉴 때마다 몸집이 부푸는 햄스터를 떠올렸다. 책상 위에 올려진 이후부터 녹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 올리지 않았다.
도언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안다. 녹의 바로 앞에 손님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기다란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민망했는지, 녹은 책상을 짚느라 힘줄이 돋은 제 손가락이나 구경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도언이 길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흐으, 흐, 으응, 응.”
자꾸만 어깨가 무너진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책상의 끝으로 자꾸만 미끄러졌다. 도언은 녹의 뒤통수에 잘게 입을 맞추며 그 아슬아슬함을 즐겼다. 거울 속에선 귀까지 빨개진 햄스터가 니트와 양말만 걸친 채로 책상 위에서 덜컹거리고 있었다.
“많이 더워요? 벗을래요?”
“으응….”
손바닥이 미끄러지는 걸 보면 많이 더운 모양이다. 마침 실내의 온도도 적당할 정도로 따끈해져, 도언은 녹의 귓가에 입을 한 번 맞춘 후, 그의 니트를 끌어 올려 벗겨 냈다. 녹은 선선히 그에 몸을 맡겼다.
사늘한 공기가 땀에 젖은 백옥을 훑는다. 달아오른 육체가 살짝 식어서 그런가. 자신의 등 뒤에서 척추를 따라 핥아 올리는 그 뜨거운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뜨거운 용암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듯, 도언의 혀가 지나간 곳은 불타오를 것처럼 달아올랐다.
“흐으….”
지나친 그 느낌에 꼬리뼈가 튀어 올라갔다. 아직도 안쪽에 품고 있던 도언의 페니스가 그 참에 극점을 스쳤다.
“으으응!”
허벅지가 푸들거리며 발가락과 손가락이 오므라들기 시작했다. 도언의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녹의 유실을 희롱했다. 덕분에 이번에는 굽혀졌던 등이 펴지며 숙였던 고개가 들렸다.
그때, 녹은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시옷 자로 찡그린 눈썹,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 촉촉하게 젖은 눈과 붉은 눈가, 발그레 물든 뺨, 열이 오른 더운 숨을 뱉는 입술, 분홍색의 유륜, 그리고 그것들이 박힌 하얀 몸을 제 뒤에서 정신없이 탐하는 도언이까지. 등을 끝까지 핥아 올라온 도언이 거울 속의 녹과 눈이 마주쳤다. 도언이 녹의 귓바퀴를 송곳니로 잘근 물어 긁으며 속삭였다.
“어때요? 내가 미칠 만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잘게 떨리던 허릿짓이 큰 낙폭을 만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으읏, 응, 핫, 흥, 흐응.”
도언이 허리를 올릴 때마다 녹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흐트러진다. 녹은 이제 소리를 참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뇌세포가 녹았는지, 시원스럽게 제 기분을 내지르고 있었다.
다행히 도언은 그 전에 청연에게 소음 결계를 쳐 두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사가 끝난 녹은 분명 컨테이너의 이사를 진지하게 생각했을 거다. 물론 지금 결계를 쳤다는 사실 역시 녹에게 알리진 않았지만.
자꾸만 무너지려는 녹의 상체에 도언이 녹의 팔뚝을 잡아 제게 끌어왔다. 덕분에 녹의 허리가 뒤로 휘어졌고, 가슴을 크게 내밀게 되었다. 이에 녹은 더 이상 고개를 숙여 거울의 자신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제 기분대로 움직이던 도언이 녹의 어깨 한쪽을 빨아올려 잘근 물어 키스마크를 남기고 있을 때였다. 흐물거리며 녹진녹진하게 녹은 녹의 몸 전신에 힘이 들어간 건, 누군가가 컨테이너의 유리문을 두드릴 때였다.
“계세요?”
“흐으….”
결계가 쳐졌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가게의 문이 잠긴지도 모르는 녹이 웬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녹의 입에서 나오던 쾌감의 소리들은 손수건으로 덮어 없애듯 한순간에 멎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풀어졌던 내벽이 강하게 수축하며 중심을 물어 왔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도언이 어금니를 씹으며 허릿짓을 멈췄다. 녹은 고개를 돌려 도언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깥에 들릴까 봐 염려되는지 속삭이지도 않는다. 두 팔뚝을 잡힌 상태에서 그리 간절하게 고개를 저어 봤자 중심부의 힘만 솟을 뿐이었다. 녹의 걱정과 정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도언은, 녹이 돌아본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겹쳤다.
“으읍-”
“자기야. 여기 문 닫혔다고 쓰여 있잖아.”
“그래도 불은 켜져 있는데…. 멀리서 이것 때문에 찾아왔는데 못 보고 가면 아쉽잖아.”
“그냥 불 끄는 걸 깜빡 잊으신 거겠지. 외출 팻말도 없는 걸 보면 오늘 영업 종료한 거 아니야?”
청각에 모으려는 집중을 도언의 혀가 자꾸 건져 가 버린다. 그래도 바깥에 있는 커플이 박스 안의 정사를 눈치챈 건 아님에 안심한 녹이었으나, 도언이 대담하게 멈추었던 허리를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감았던 눈이 절로 크게 떠진다. 심지어 도언은 녹의 극점만을 노리며 찔러 댔다. 처음에는 천천히 문지르다가, 점점 그 속도를 빠르게 바꾼다. 땀에 젖은 살갗이 부딪혀 질척이고 철퍽이는 소리가 컨테이너 안을 맴돈다.
“…흐으…. 읏.”
벗어나려고 했으나 두 팔이 붙잡혀 무게 중심이 뒤로 넘어가고, 책상 위에 다리가 모두 올라간 상태에선 허사였다. 입을 맞추고 있는 도중에도 자꾸만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입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이곳에서 장사는 끝장일 터다.
“인터넷 보니까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주인장 마음대로 영업한다나 봐.”
“배짱 장사 하네. 그렇게 해서 장사가 되나?”
“그렇게 장사해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찾아오잖아.”
“그것도 그렇다.”
대체 언제 갈 생각인지, 이곳을 찾아온 손님들은 유리문 바로 앞에서 노닥거렸다. 모든 난이도가 최상인 이 상태에서 도언은 자비 없이 노련하게 녹의 안을 찔러 댔다. 퉁퉁 솟은 녹의 페니스가 그에 따라 흔들린다. 눈치도 없는지 그간 고였던 음욕을 분출하고 싶어 난리였다.
녹과 도언의 입술이 불시에 떨어졌다.
“으으으응… 도언, 도언아, 학, 그만, 잠깐, 바깥, 으으응….”
떨어지자마자 녹이 소리를 최대한 삼킨 작은 소리로 거울 속 도언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리듬을 타던 도언의 추삽질이 멈추자, 바로 멈출 줄 몰랐던 녹의 엉덩이가 허리와 함께 바르르 떨렸다.
“그럼 오늘 다시 안 오려나?”
“아쉬우면 기다려 볼래?”
제발, 제발 가 줘!! 제발!! 살아온 삶에서 가장 간절한 순간 탑 5에 들 만한 순간이다. 녹은 어쩐지 아직도 신고 있는 양말 속의 발을 꼼지락대며 유리문을 품고 있을 커튼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됐어. 언제 올 줄 알고.”
“흐아앙!”
그 목소리를 듣고 안심하려던 그때, 도언이 기습적으로 찔러 왔다. 결국 무방비한 녹은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고, 녹은 직감했다. 방금 전의 의미심장하고 질척이는 신음은 분명 바깥에서도 들렸을 거라고. 메두사의 머리를 본 사람처럼, 녹은 소리를 낸 자신을 믿을 수 없어 굳어 버렸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오자. 언젠가는 열리겠지.”
“…흐으?”
분명 제 소리를 문 앞에서 들었을 텐데도 의문점 하나 표하지 않고 멀어지는 커플의 발소리에 녹이 의문을 표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어리숙한 그 모습에 도언이 녹을 끌어안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녹, 여기에 너무 집중하셔서 청연이 결계를 친 것도 모르셨나 봅니다!”
“…….”
도언의 말이 망치처럼 녹의 머리를 때렸다. 감을 올려 주변을 탐색하니, 확실히 기적의 흔적이 느껴졌다. 파란색의 향기. 분명 청연의 기적이었다.
지금껏 조마조마했던 이유가 사라지자 처음에 닿아 온 느낌은 안도였고, 두 번째는….
“당장 안 빼?!”
분노였다.
❊ ❊ ❊
“녹, 죄송해요. 저 좀 봐요. 네??”
도언이 말을 하건 말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뒷정리를 말끔히 끝낸 녹이 뾰로통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도 도언에게 등을 보인 채로 말이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도언은 안절부절못했다. 확실히 이야기하지 않은 건 자신의 잘못이 맞긴 했지만, 녹 역시 컨테이너 안에서 역사가 시작될 때 아무 말도 안 한 걸 보면 여기서 일을 치르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게 아니었나….
물론 할 말은 없었다. 도언은 그나마 내쫓기까진 안 한다는 점에서 안도를 찾았다. 도언이 녹의 마음을 풀기 위해 무언가를 하면 그게 뭔지 봐서 마음을 풀 터이니 얼른 뭔가를 하라는 신호였다.
최악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도언은 뭐라도 도움이 되는 게 있는가 싶어 천천히 컨테이너 안을 살폈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타로 카드들이 눈에 띄었다.
도언이 슬쩍 한 덱을 집어 섞자, 박스 안에는 카드끼리 부딪치며 명랑하게 카드 섞이는 소리가 울렸다. 녹은 결국 그 소리에 굳었던 목을 풀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해.”
“제가 녹에게 타로 봐 드릴게요.”
“…볼 수 있긴 해?”
좋아. 일단 호기심으로 꾀어냈다. 녹의 질문에 도언은 빙긋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드를 섞는 폼만은 어색하지 않았다.
도언이 카드를 섞는다면 타로가 아니라 갬블을 위한 트럼프 카드일 거라 내심 예상했던 녹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자세를 바로 했다.
도언이 타로를 한다. 좋아하는 것들만 뭉쳐진 그 광경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도언은 생각을 잘했다. 내심 마음속으로 인정한 녹은 도언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기다려 보았다.
“어디, 일단 지금 녹의 생각을 하나 뽑아 볼까요.”
도언은 고르고도 꼼꼼하게 섞은 카드의 가장 윗 장을 골라 돌려 보았다. 거짓말처럼 컵 4번 카드가 나왔다. 녹이 귀찮아하고 있다던 그 카드 말이다. 도언은 거기에서 약간 타격을 받았다.
“…제가 귀찮으시군요.”
맨 처음 녹에게 이 카드에 대한 대답을 들었을 때보다 타격이 컸다. 처음 들었던 그 당시에는 어차피 녹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 답이 어찌 나와도 유쾌할 뿐이었다. 그때에는 녹을 만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행복했으니까.
약간 침울해진 기색을 읽은 녹이 고개를 다급하게 저으며 도언이 들고 있는 카드를 빼앗았다.
“아니, 아니야. 카드를 그렇게 단면적으로 읽으면 어떻게 해. 너 카드 볼 줄 모르는구나. 봐 준대서 뭘 아는가 싶었더니.”
“그럼 정답은 뭡니까?”
도언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도언의 질문을 받은 녹은 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너가 뭘 하는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심산이네.”
“어떻게 귀찮음에서 그렇게 바뀝니까? 카드는 같은데요.”
“카드는 매개일 뿐이야. 결국 읽는 자의 능력에 따라 바뀐다고. 키워드는 절대적인 게 아니야. 어떻게 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지만, 여하간 그걸 다루는 건 카드를 읽는 사람이니까.”
“뭔가 심오하군요.”
“그렇지? 배워 보면 재밌다고.”
타로를 이야기하는 녹의 기분이 서서히 올라갔다. 마음이 더 놓인 도언은 녹에게 컵 4번을 받아 카드 덱에 넣은 후, 다시 현란하게 섞으며 물었다.
“저도 한번 배워나 볼까요”
“어디에다가 쓰려고?”
“가끔씩 녹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물으면 되지, 그런 걸 왜 얘네들한테 물어.”
“오늘처럼 녹이 저를 보려 하지도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너만 잘하면 되거든?”
녹의 말은 뾰족했지만 어투는 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그를 느낀 도언이 녹의 어깨 한쪽에 머리를 폭 기울었다.
“…잘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잘하라고.”
도언이 이마를 녹의 어깨에 애교 부리듯 비볐다. 그의 이마가 닿아 오는 기분에 녹이 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의 말랑이 녹이 말을 잠깐이나마 섞지 않을 정도로 화를 내도, 결국에는 풀어 온다. 녹에겐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도언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지금의 순간을 간직하며, 카드 한 장을 뽑아 보았다. 라고 쓰인 카드가 한 장 튀어나왔다.
카드의 사방 구석에에 동물 셋과 천사 하나의 얼굴이 구름에서 튀어나왔고, 카드의 중심에는 보라색 천으로 몸을 감싼 여자 한 명이 월계수 리스 사이에서 서 있었다. 도언은 훌륭한 타로 선생님께 방금 뽑은 카드의 뜻을 물었다.
“어? 이거 꽤 좋은 카드야.”
“카드는 좋고 나쁨을 나눌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네가 카드에게 무얼 물어보며 뽑았냐에 따라 의미가 바뀌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카드라 좋은 카드라고 해 봤다.”
“이게 무슨 뜻인지 제가 대략적으로나마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음…. 완성, 완벽, 좋은 결과, 성공….”
“정말 좋은 뜻이 많군요. 이게 나쁜 뜻으로 쓰이긴 합니까?”
“저 뜻들이 언제나 좋은 상황을 만들어 주는 건 아니니까. 완벽하다면 인간미가 없어 지루해지고, 완성이라면 과정의 즐거움을 잃게 되겠지. 대충 그런 느낌으로?”
“결국 도착점을 나타내는 카드란 말이군요.”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하고. 끝과 시작은 결국엔 같은 의미잖아?”
끝이 시작이라 말하는 녹이 카드 중에서 0번 아르카나를 뽑았다. 한 남자가 활짝 갠 얼굴로 하늘을 보며 절벽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무모하고, 그렇기에 용기 있는 인물인 바보. 시작을 나타내는 카드였다.
그를 보는 녹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모든 도전과 시도의 처음은 언제나 이렇게 바보 같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처음에 아무것도 없던 도언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가문을 일구고, 마법사를 잡고, 회사를 만들며 자신을 기다린 걸까.
그의 용기에서 언뜻 바보의 무모함이 비쳤다. 녹이 바보 카드와 제 옆의 바보를 번갈아 보며 미소하는 통에, 도언이 녹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안도언은 바보였구나.”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는 도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녹은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파안대소했다. 걱정 없이 웃는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아, 도언은 녹과 함께 그냥 웃어 버렸다.
“네. 바보였네요.”
녹이 웃는데 제가 바보라는 게 뭐가 대수랴. 까짓거 그놈의 바보 백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어떤 완성은 우려스러울 정도의 무모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두가 말리고, 모두가 걱정하는 그 무모함을 혹자는 불가능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불가능에 고민 없이 뛰어드는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보라고 말했다.
어디에서 자신의 심장 박동이 커지는지 아는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해내야만 하는지 아는 사람들.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에 솔직한 사람들. 타오르는 자신의 불꽃을 가꾸는 사람들.
그렇기에 발등에 덕지덕지 붙은 신중함을 무겁게 털고 걸음을 떼는 사람들. 무수한 실패와 좌절에 다쳐도 결국 일어나 내딛는 사람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
모두의 우려와 비웃음 속에서 그들이 결국 이루어 낸 세계를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건 기적이 아니라, 바보들이 마땅히 얻어 낸 운명이었다.
도언은 바보였다. 녹이 기억을 되찾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보처럼 기억의 고통을 품고 기다렸고, 결국은 운명을 손수 쟁취해 냈다. 불현듯 찾아온 기적이 아닌, 생을 갈아 일구어 낸 운명이었다.
출발이 없으면 도착 역시 없다. 도언이 제 안의 바보를 인정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녹과 도언의 주변을 감싼 세상은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결국 바보는 제가 그린 미래를 만들어 냈다. 세계를 쟁취해 냈다.
끝을 나타내는 세계 카드와 시작을 의미하는 바보 카드가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웃는 것 같았다. 녹의 말대로, 끝은 곧 시작이었다. 완벽히 완성된 세계 속에서 그 바보들이 원하는 걸 무엇일까. 녹과 도언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바보임을 자처한 도언과 제가 바보인지 모르는 녹은 결국에는 자신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거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행복을 향해 발을 맞춰 함께 내디딜 거다.
제 고집이 담긴 망설임 없는 한 발을.
<대충 살고 싶다, 진짜> The World.
그리고, 여러분의 The F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