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과외 2권
3장.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노려보자 유유자적하게 멀어져 간 이예담은 곧 1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길쭉한 팔 길이 덕택에 들어가지 않고 문턱에 서서도 손쉽게 보송보송한 수건을 꺼내곤 팔뚝에 건 채 다가왔다. 여전히 한가롭고 나른한 기색이었다.
“젖은 거 이걸로 닦아요.”
“……고마워.”
수건을 건네받으며 고맙다고 중얼거렸지만 아직까지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은찬은 뾰족하게 변한 눈으로 이예담을 흘겨보며 이를 갈았다. 저걸 그냥…….
생각 같아선 흠씬 패 버리고 싶었다. 매번 저만 여유를 가지곤 아등바등하는 사람을 놀려 먹는 데에 재미를 들인 것 같아 잘난 콧대를 꺾어 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신은 을이었다. 그것도 을 중의 을, 월급을 가불받아 목줄을 내어 준 을.
그러니 이예담의 복부를 가격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저 두꺼운 몸에 주먹을 내리꽂았다간 떡이 되는 건 이예담이 아니라 제가 될 확률이 높았다. 벌써부터 눈앞에 비참한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후…….”
은찬은 열패감을 삭이며 소파에 앉아 짙은 한숨을 흘렸다. 잠자코 입술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해 냈다. 그런 은찬을 응시하던 예담은 발걸음을 옮기다 생각난 듯 아, 하고 입술을 뗐다.
“그런데 선생님. 요즘 너무 자주 늦는다고 생각 안 해요? 끽해야 몇 분이지만 쌓이고 쌓이면 몇 분이 아니게 되는 거, 그거 선생님이 자주 하는 말 아닌가.”
어느새 옅게 어려 있던 웃음기는 지워진 채였다.
〈풀기 귀찮아도 한 문제만 풀어 봐. 이런 게 쌓이고 쌓이면 한 문제가 아니라 네 실력이 되는 거야.〉
“아…….”
꼰대처럼 잔소리할 때 제가 자주 쓰는 말이다.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은찬은 잔뜩 젖은 머리칼을 닦던 수건을 무릎 위에 얹고선 눈을 내리깔았다. 미처 물기가 덜 닦인 속눈썹에서 똑, 똑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져 상기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혹감에 삐꺽거리는 동작이 어색했다. 은찬은 흔들리는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수건 끄트머리를 만지작대며 웅얼거렸다.
“그랬지. 미안. 요즘 자주 늦었던 거 같아. 정말 미안해.”
“…….”
잔뜩 위축된 은찬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예담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천천히 소파에 기다란 몸을 기대며 흐음, 하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계속 들어 줄 테니까 변명해 보라는 듯이.
“오늘은 갑자기 비가 와서……. 아니다,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다 내가 잘못한 부분이야. 네 말이 맞아.”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이예담으로부터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종종 희미한 미소가 어리던 얼굴은 생각에 잠긴 채 무표정한 낯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요가 빚은 초조함으로 은찬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런 일 없게 할게. 정말.”
“…….”
변함없이 묵묵부답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이 과외 지속에 대한 고민을 의미할까 봐 속이 탔다.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다면 미리 받아 썼던 과외비는, 앞으로 필요한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저번에 일했다가 그만둔 삼겹살집에 사정하면 받아 줄까. 불과 며칠 일하다 그만뒀는데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그사이 돈 좀 모으셨냐고 물어보면 될까. 그 길 역시 요원해 보이는데.
엉킨 실타래처럼 요란하게 돌아가는 가정들에 은찬은 무의식적으로 또다시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던 예담이 이를 발견하곤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선생님, 또.”
“어……?”
예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찬에게로 다가갔다. 닦다 말아 뺨과 목선에 남아 있는 물기를 바라보며 혀로 아랫입술을 한번 축였다. 그러곤 은찬이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가져와 투명하게 맺혔던 물방울을 닦아 준 다음,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왜 자꾸 몸에 상처 내고 그래요.”
단단한 손끝이 심란한 입술 표면 위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몸을 물릴 거라 예상했는데, 머릿속을 종횡무진하는 불행한 상상만으로도 버거웠던 은찬에게선 어떠한 거부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담은 은찬에게 정해진 선을 확인하듯 연신 씹어 대 엉망이 된 입술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조용하게 숨만 내쉴 뿐, 은찬은 미동하지 않았다.
“…….”
“…….”
색색 얕은 숨결만 내뱉으며 얌전히 제 손길을 받아 내는 은찬에게 예담은 아이를 어르듯 속삭였다.
“딱히 결론은 없어요.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나는 선생님 오는 시간만 기다리는데 선생님은 내가 뒷전인 거 같으니까. 서운해서.”
닦아 낸 빗물이 무색하게 은찬의 손바닥 안으로 다시 진득한 땀이 차기 시작했다. 버겁게 내리치던 자극으로 인한 잔열감이 맴도는 몸은 이예담 앞에서 무력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뜨겁게 조여 왔던 탓이다.
“……미안. 이제 약속 시간 잘 지킬게.”
“그렇게까지 죄인처럼 굴 건 없어요. 선생님답지 않게.”
누가 분위기를 이렇게 이끌었는데. 인과관계를 따지면 제 잘못이 맞긴 하지만 언제 냉랭하게 굴었냐는 듯, 상냥하게 대해 주는 기색에 오히려 서러움이 몰려왔다. 은찬은 이예담을 곁눈질하며 말문을 닫았다.
“…….”
“선생님, 오늘 저녁은 먹고 왔어요?”
“어? 어…….”
“거짓말. 밥부터 먹고 시작해요.”
“진짜 먹었는데…….”
“너무하네. 난 같이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또 먹어요.”
“……알았어.”
저녁 식사를 챙길 새가 있을 리 없었다. 못 이기는 척 재촉하는 이예담에게 이끌려 도착한 다이닝룸에는 오늘도 제 취향을 반영한 다양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머뭇거리는 와중에도 음식을 보자 위장은 펄떡펄떡 반응했다. 종일 굶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여사님이 퇴근하는 와중에도 선생님 밥 먹는 거 봐야 한다고 아쉬워했던 거 알아요?”
“어?”
“선생님이 잘 먹는다고 엄청 좋아하셨는데. 오늘도 순 나보다는 선생님 위주 반찬이잖아요.”
“아……. 그러실 필요 없는데.”
“그럴 필요 없기는. 괜히 예의 차리지 말고 편하게 먹어요. 선생님한테 과외 하는 날은 기대되는 날이었으면 하니까.”
“……챙겨 줘서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러고 보면 과외에 늦는 날도 저녁 식사는 늘 함께였다. 이예담의 말처럼 제가 평소에 섭취하기 힘든 수준의 찬으로 차려진 밥상이 제공되는 데다 누가 들어도 높다고 말할 만한 급여, 종종 속을 알 수 없게 굴긴 해도 대체로 예의를 갖춘 과외 학생…… 이 모든 삼박자가 어우러진 과외는 흔치 않았다.
그와의 접촉을 원치 않았던 때라면 몰라도 이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분명 기꺼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이미 제 몸은 충분히 기꺼워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몇 번 수저를 움직이다 보니 첨예했던 기류는 누그러지고 어느새 평소와 같이 예사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이어 가게 됐다. 은찬은 달라진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가고 싶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공부는 잘되어 가?”
잘 안될 리 없었다. 매번 가져오는 문제마다 막힘없이 풀어내고 최근 치른 모의고사에서도 역시 1등급을 받았으니까. 이예담은 과외 첫날 테스트했던 것보다 월등히 나아진 실력으로 매번 좋은 결과를 내고 있었다.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하긴 암만 평소에 날고 기었어도 수능 당일에 컨디션이 안 좋으면 미끄러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렇게 돈 많은 집이면 해외 대학에 보낼 법도 한데 그리하지 않은 건 아마 다시 수능을 보면 될 것 같아서였을까.
뭐가 됐든 괜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을 심란하게 만드는 말이 될 것 같아 은찬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을 밥과 함께 목구멍 뒤로 삼켜 넘겼다.
“누가 가르치는데 잘 안 되어 가겠어요. 안 그래요? 선생님.”
“아……. 그, 그치. 그렇지.”
예전 같으면 이예담이 이렇게 능청을 떨 때마다 더 큰 소리로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전처럼 호들갑을 떨 수도, 허세를 부릴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예담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일 테다.
거기다 그 비밀을 공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꾸만 이예담에게 놀아나기까지 하니 긴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게 다…….
“아 참, 선생님. 다음번엔 대게 찜 괜찮아요? 게가 은근히 알레르기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서.”
계속되는 은찬의 생각을 끊고 예담이 접시를 밀어 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쉴 새 없이 은찬의 젓가락이 향하던 옥돔구이가 담긴 접시였다. 이렇게 제 마음 내킬 때는 한없이 자상하기만 해 나무랄 데가 없는 게 이예담이었다. 다음번 과외 저녁 식사 전에 세심하게 알레르기 여부까지 물어 주고…….
어, 다음번? 문득 해야 할 일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저기, 예담……아. 다음 과외일 말이야. 혹시 하루만 미루면 안 될까?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그냥, 가능할까 해서.”
오늘도 늦은 주제에 과외 시간 변경까지 요구하려니 낯이 뜨거웠다. 그래도 다음번 만남엔 무조건 밥 한 끼 하자며 팀플을 함께하는 삼인방에게 몇 번이고 말을 흘린 터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예담에겐 오늘 종일 넙죽 엎드려야 할 테니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후배들 앞에서 면이라도 세우고 싶었다.
“안 될 건 없지만 왜요? 이유는 알고 싶은데.”
예담이 숟가락을 식탁 위로 내려놓으며 은찬을 지긋하게 응시했다. 톡, 톡 습관처럼 식탁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 리듬이 규칙적이었다.
“아, 그게. 학교 과제 때문에……. 시험 대체라 좀 빠듯해서. 무조건은 아니고, 가능하면 해 달라는 거야. 가능하면.”
일순 굳은 듯했던 표정이 온화하게 바뀌고, 그에 알맞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어요. 선생님 사정이 그렇다면…… 그럼 그다음 날로 해요.”
“미안……. 내가 나중에 꼭 보답할게.”
“보답이요? 어떻게 하게요.”
“수능 끝나면 맛있는 밥 사 줄게. 진짜 맛있는 걸로.”
도리어 밥은 제가 매번 얻어먹고 있으면서. 심지어 지금 앉아 있는 식탁 앞에서 그런 소릴 하다니 스스로 내뱉고도 기가 막혔다. 거기다 물질적으로 이예담에게 뭔가를 해 준다는 게 가당키나 한 전제일까. 제가 뱉은 말이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실소가 다 나왔다.
“흐음. 밥은 안 당기는데요. 다른 거라면 모를까.”
차분한 음성이지만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어느새 소리 없는 미소가 번진 예담에 은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대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미덕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