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8/16)

6장.

깜박깜박, 서서히 잠겨 있던 의식이 고개를 들며 점멸을 반복했다. 학교 가야 하는데……. 은찬은 나른하게 닫힌 눈꺼풀을 힘을 주어 끌어 올리려다 흠칫, 무언가 평소와 다름을 감지했다. 분명히 정적이 느껴져야 할 방 안에서 저 아닌 타인의 숨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베개치고 딱딱하다 했는데, 목덜미를 견고하게 받치고 있는 건 늘 베고 자던 베개가 아니라 사람의 팔뚝이 틀림없었다. 잔근육이 덕지덕지 붙어서 무거운, 이미 제 배 위에도 올라가 있는 것과 같은 재질이다.

“…….”

은찬은 블라인드를 내린 창틈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살며시 눈을 찡그렸다. 조용히 눈꺼풀을 밀어 올리곤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배 위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팔뚝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이예담이었다. 익숙한 팔뚝, 익숙한 체향을 가진 이예담이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저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무의식으로 느껴지던 갑갑함은 제 배 위에 얹어진 굵직한 팔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

그러니까, 어제…….

〈자고 가요.〉

과외 다음날이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학교로 향하는 것쯤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거기다 숙박업소도 아니고, 친구의 자취방도 아닌, 이예담의 집에서 편하게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괜찮아. 그냥 갈게.〉

〈내가 안 괜찮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무리 너 외에 아무도 없어도 어떻게 이 집에서 자고 가?〉

〈말 그대로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응? 시간도 늦어서 이제 버스도 끊겼는데.〉

……몇 번 더 그렇게 거절을 하다 결국 이예담의 방에 와서는……. 한심했다. 기껏 한 거절이 무색하게 또 몇 번인가 붙어먹었다.

은찬은 고개를 들어 저를 받치고 있는 팔뚝에서 목을 뗐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턱과 연결된 목울대까지 얇은 핏대가 바짝 돋아나고, 아랫배가 달달 떨렸다. 조심조심 배에 얹어진 묵직한 아래팔 역시 두 손으로 잡아 옮기고, 뒤이어 반나절 내내 쑤셔져 아린 몸을 간신히 일으키려 시도했다.

“아…… 으, 읏.”

엉덩이 사이에 걸린 무언가가 물 흐르듯 이어지던 움직임을 방해했다. 허리에 힘을 주어 뻐근한 엉덩이를 들자 쑥 내려가던 이물질이 미처 끝까지 빠지지 않았다. 굳이 거북하게 상반신을 숙여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뭉툭한 귀두가 쫀득하게 좁아 든 항문 입구에 걸쳐진 것이다.

“으…… 미친…….”

이예담 이 미친놈. 밤새 제 몸 안에 자지를 넣고 자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흐, 하으으, 진짜…….”

경악도 길게 할 수 없었다. 은찬이 크게 벌어진 눈으로 제 아래를 바라보았다. 말랑말랑 풀린 접합부에 이어진 성기가 다시 부피를 부풀리고 있었다. 구멍에 낀 좆 대가리가 비비적대자 헤집어진 내벽이 경련을 시작한 탓이었다.

안 돼. 은찬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엉덩이를 슬슬 앞으로 내뺐다. 내벽이 아무렇게나 쑤석여지는데도 희미한 쾌감이 느껴져 절로 흐느끼듯 신음이 터졌다. 자지에 찰싹 들러붙는 점막과 함께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흐으읏……. 흐…… 아아…….”

하복부 근육을 바짝 조이며 아래를 밀어내자, 마침내 굵은 귀두가 빠지면서 구멍을 통해 주르륵, 내벽이 머금고 있던 거품과 체액이 쓸려 내려갔다. 삽시간에 침대 시트 위로 찐득한 유백색 웅덩이가 고여 들었다.

자지를 빼고 나서도 구멍은 여전히 헐겁게 뻐끔뻐끔 벌어진 것 같았다. 숫제 항문 구멍이 다시는 다물리지 않을까 겁이 났다. 은찬이 치덕거리는 액으로 흥건해진 엉덩이 골을 문지르면서 구멍을 조이던 찰나.

“일찍 일어났네……. 수업 몇 시라고 했죠.”

베개 밑으로 우람한 팔뚝을 집어넣은 이예담이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빽빽한 속눈썹이 올라가면서 깊고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고 일어나도 멀끔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까치집이나 눈곱 같은 것들이 이예담에게는 남의 일이기만 한 건지. 멀거니 고아한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은찬이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이럴 게 아니라 밤새 제 뒤에 성기를 꽂아 넣고 잤던 미친 짓을 지적해 줄 차례였다.

“수업이 문제가 아니라 너, 읍…….”

예담은 불쑥 길고 탄탄한 팔뚝을 뻗어 와 은찬의 뒤통수를 감쌌다. 단단한 손가락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당겨 오자, 겨우 몸을 일으켰던 것이 무색하게 은찬은 곧 다시 제가 누웠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으, 으읍…… 응……. 밤새 마른 입술이 포개지며 질척한 소리가 났다. 메말랐던 점막 곳곳이 서로의 타액으로 적셔지면서 서서히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하, 흣!”

숨을 터 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덜미 위로 축축하고 뜨끈한 것이 스쳤다. 밀도 높은 숨결이 쏟아져 목선을 간질이고, 티셔츠 사이로 들어온 손이 살갗을 은근하게 기어오르며 예민해진 피부 곳곳을 훑었다.

그새 다가온 단단한 귀두가 축축하게 젖은 살을 탁탁, 티셔츠 위로 비볐다. 응, 흐으……. 전신의 솜털이 돋아나는 듯한 소름 돋는 느낌에 은찬이 허리를 뒤챘다.

어느덧 다시 가슴께까지 올라간 티셔츠 덕에 하얀 몸 곳곳에 생겨난 붉은 흔적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예담의 옷을 입힌 터라 은찬에게는 무척이나 품이 커, 쇄골까지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밤새 물고 빤 탓에 선홍빛이 된 함몰 유두는 살짝만 건드려도 일어날 것처럼 노골적으로 부풀어 젖구멍마저 커다랬다. 예담은 제가 남긴 흔적을 새카만 눈으로 바라보면서 은찬을 쥔 손을 더더욱 제 쪽으로 힘을 실어 당겨 왔다.

“…….”

“…….”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선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잠시간 그렇게 응시하던 예담이 쪽, 가벼이 입술을 도장 찍듯 내린 뒤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 갔다.

왜인지 농밀했던 키스보다 가벼운 입맞춤이 은찬의 귓바퀴를 더 발갛게 물들였다.

* * *

“정말 알아서 간다니까. 이예담.”

“정말 같이 간다고요. 선생님.”

이예담이 조수석 차 문에 손을 올리고선 까딱, 턱짓했다. 올라간 차고 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들이쳐 그의 얼굴 윤곽을 따라 빛줄기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곧은 이마와 조각한 듯한 콧날을 따라 진 음영까지 붓으로 그린 듯 세밀해 보여, 일부러 조명을 설정하고 비추어도 이 정도 효과는 안 날 듯했다.

실랑이를 벌이다 진 은찬이 한숨을 쉬며 조수석에 올랐다. 텅, 예담이 몸을 기울여 차 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에 오르자, 조수석 발아래에 가방을 놓는 은찬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따라왔다.

“선생님 가방엔 뭐 넣고 다녀요? 왜 이렇게 무거워 보여요. 고등학생도 아니고.”

“별로 든 거 없어.”

“든 거 없는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있길래 그래요.”

은찬이 허리를 숙인 채 지익,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벌어진 가방 속엔 토익 관련 책 몇 권, 연습장, 노트북, 그리고…… 탄산음료 한 캔이 들어 있었다.

“웬 탄산음료?”

예담이 가방 구석에 눕혀져 있는 탄산음료 캔을 꺼내어 은찬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넣어 두고 잊고 있던, 서승원이 뽑아 준 캔이었다.

“어?”

“선생님 탄산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어쩌다 보니 생겨서…….”

“흐음. 그럼 내가 마셔도 돼요?”

“어?”

계속 멍청하게 어, 어, 만 반복하고 있었다. 굳이 미지근한 음료를 왜 가져간다는 건지. 당장이라도 캔을 딸 것처럼 구는 행동에 은찬이 머뭇거렸다. 서승원이 준 건데……. 별거 아니지만 남이 준 걸 그냥 막 넘겨도 되나.

“안 돼요?”

이예담이 그답지 않게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다시 손에 쥔 캔을 흔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학교까지 태워다 준다고 차 시동을 걸고 있는 차에 고작 캔 하나를 못 주겠다고 버티는 것도 좀 많이…… 치졸했다. 은찬은 결국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먹어. 뭐 별거라고…….”

“음. 잠시만요.”

예담이 기껏 맨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잠깐 학교에 다녀오는 건데 뭘 또 챙길 게 있나, 길이 막히면 영어 단어장이라도 훑어보려는 건가, 생각하던 은찬은 작게 헛웃음을 쳤다. 믿기진 않지만 쟤가 수험생이긴 한가 보다. 사고가 이렇게 흐르는 걸 보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자제하긴 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면 수능이 끝난 뒤 저와 이예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미뤄 두었던 결론을 내야 했다. 여태 자신을 거쳐 갔던 수험생들처럼 수능 직후 반짝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듬해 3월이 되면서는 서서히 서로를 잊는……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나게 되는 거겠지.

“뭐 당연한 걸 고민처럼…….”

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창에 옆머리를 기댈 때였다. 그새 집 안에 다녀온 이예담이 운전석 차 문을 열었다. 텀블러가 조수석을 건너와 눈앞에 내밀어졌다.

“뭐야?”

“탄산음료 대신 오늘 이거 마셔요.”

과외 시간마다 늘 책상 위에 오르는 생과일주스였다. 이예담이 직접 착즙한 건 아닐 테지만, 굳이 이걸 담아 오는 수고로움을 감수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주홍 빛깔이 넘실거리는 투명한 텀블러를 보자 어제 넘치도록 즙을 낸 자두들이 떠올라 사뭇 멋쩍기도 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았다. 은찬은 무릎 위에 올린 텀블러를 만지작대며 좌석에 몸을 기댔다. 어느샌가 제법 익숙해진 착석감이었다.

* * *

“선배님. 휴대폰 바꾸셨네요?”

은찬은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서승원이 옆자리 좌석을 당기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었다.

“아, 응. 부서져서…….”

몸속에 진동기를 품은 채 도서관에서 그를 맞닥뜨린 이후로 다시 만난 건 처음이었다. 은찬은 대답하면서도 내심 민망해 시선을 책상에 두며 운동화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날 이상하게 본 것 같은데……. 눈치챘을까? 설마. 아니겠지.

긴장한 아랫배가 바짝 조여 오면서 그날 그 시간, 그 열기를 고스란히 재연하는 듯했다. 점점 더워지는 숨결에 은찬이 몸을 일으켜 창가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더우세요?”

서승원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은찬은 지금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있어 누가 봐도 확연히 추위를 타는 사람처럼 보였던 까닭이었다.

“공기가…… 탁한 거 같아서.”

“아. 환기하긴 해야죠. 휴대폰 바꾼 건 어때요? 저도 마침 휴대폰 바꿀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휴대폰? 내가 기능 같은 걸 잘 몰라. 그냥 전화랑 문자, 인터넷 검색 용도로만 사용해서……. 도움이 안 되지?”

“아, 그럼…….”

지이잉.

서승원이 입을 여는 순간,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에 진동음이 울렸다. 연이어 화면에 뜨는 수민의 이름에 은찬은 잠시만, 하고 양해를 구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바짝 힘이 들어갔던 허벅지를 끌어모으며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

“응, 수민아.”

- 오늘 수업 끝나고 딱히 일 없지?

“응. 없긴 한데. 왜?”

- 저녁 같이 먹어. 넌 꼭 내가 말 꺼내야 시간 내더라. 끝나고 간만에 동방도 좀 들르고.

“아……. 좀 한가해지면 먼저 말하려고 했어.”

- 그래서 오늘 돼? 안 돼? 빨리 대답해.

다소 뻔뻔한 말투에는 웃음기가 한가득 묻어났다. 불가항력적으로 따라 끌어 올려지는 은찬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돼. 맛있는 거 먹자. 나 이번 달 과외비 들어왔어.”

전화를 끊고 옆에서 말을 붙이던 서승원을 돌아보았다.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서승원 외에도 늘 함께 다니던 강도영이며, 김강혁이며 이미 어느샌가 자리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강도영이 반가운 듯 미소 짓자마자 곧이어 교수가 들어왔다. 덩달아 눈인사를 보낸 은찬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펼쳐진 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성적 산출에서 배점이 높은 팀플을 잘 끝내선지 강의 내내 한껏 긴장이 풀렸다. 은찬은 수업 중간중간 예정된 인턴십 프로그램 자리와 추가적으로 필요한 자격증을 확인하는 여유를 부렸다. 어쩐지 그러는 와중에도 옆자리에서 진득한 시선이 꽂혀 드는 듯했지만, 지레 찔린 탓에 그 시선을 확인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너네는 오늘도 세트야?”

은찬은 교수가 강의실을 떠나자마자 일부러 강도영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잠시간이라도 있을지 모르는 침묵을 피하고 싶었다. 교재를 가방에 집어넣던 강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아. 셋이 같이 가냐고요? 이 수업 끝날 땐 늘 그렇게 되더라고요. 선배님도 오늘 세트 하실래요?”

“아, 나는…….”

“오늘 저녁에 약속 있는 거 같던데. 맞아요?”

서승원이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은찬은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애써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긍정했다.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어……. 친한 애가 동방 같이 가자고 해서. 그냥 겸사겸사.”

“오. 그 동아리 들면 저희도 친한 후배로 승격 가능한 겁니까.”

“사실 그 동아리는 잘 안 나가.”

“또 이렇게 벽을 치시고……. 슬프네요.”

강도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시늉을 했다. 어느새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강혁이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가자는 듯 툭, 툭 그의 어깨를 치며 채근하였다.

“아니, 그…… 으. 그런 게 아니라. 주식 동아리야. 딱 봐도 재미없지 않아? 나도 명단만 올려놓은 셈이라 막 권하기가 그래. 얘 아니면 거의 얼굴도 안 비쳐.”

“오. 주식 동아리 몇 개 있는 거 이름은 들어 봤는데. 코어랑 AAA, 또……. 뭐더라? 서승원. 너 기억나?”

“글쎄. 블루칩인가, 있었던 거 같은데. 3월에 홍보하던 동아리가 좀 많았어야지.”

“이 중에 있어요? 저희가 말한 후보 중에 나왔어요?”

“응. 그렇긴 한데……. 제일 인지도 낮은 거 같아. 제일 늦게 나온 거기야.”

은찬이 가방 지퍼를 잠그며 대꾸했다. 덩달아 자리를 정리한 서승원을 필두로 강도영, 김강혁도 함께 강의실을 벗어날 채비를 했다. 강의실 문밖을 나서자마자 복도 자판기 앞에 서서 부지런히 담소를 나누고 있는 수민과 마주쳤다. 역시 언제, 어디서 만나든 웬만해선 혼자가 아닌 그녀였다.

“은찬아. 내 수업이 조금 더 빨리 끝나서 어차피 같은 인문관이라 가는 김에 들렀어. 음. 그런데…….”

수민이 말꼬리를 흐리며 은찬의 뒤편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직 강의실 앞 복도를 떠나지 않은 세 사람이 힐끔힐끔 둘의 대화를 관전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유은찬 선배님이랑 수업 같이 듣는 후배예요. 서승원이라고 합니다.”

“저는 강도영이요. 얘는 김강혁이고요.”

“안구가 환해지네. 우리 은찬이한테는 미남을 끌어들이는 에너지가 있는 거 같아. 주변이 온통 꽃밭이야, 아주.”

수민이 뿌듯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한 번에 세 명을 빠르게 훑어 내린 눈동자에 보기 드문 환한 이채가 감돌았다. 잇따라 이어진 간단한 자기소개를 비롯한 유려한 말재주 덕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건축학과 삼인방과 호형호제할 기세였다. 건물을 벗어난 이후 일정을 논하다 자연스레 등장한 동아리 이야기에 가입 권유가 따라붙은 건 당연했다.

* * *

일상은 단조로우면서 평화롭게 이어졌다. 기본적인 스케줄은 학교 강의 위주로 돌아가되, 짬이 날 때마다 공모전을 준비하며 동아리 사람들과도 꽤나 친분을 쌓았다. 잇따라 이어진 잦은 동방 방문에 언제부터인지 동아리에 가입한 서승원과도 금세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고, 과외가 있는 날이면 이예담 집으로 향해 섹스…… 아니, 과외를 했다. 이후 은밀하게 따라오는 시간 또한 여전했다.

“읏. 춥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콧잔등을 스쳤다. 입술을 모아 후, 바람을 불어 보니 입김마저 뿌옇게 나타날 정도였다. 은찬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패딩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부르르, 자동으로 몸이 잘게 떨렸다.

느닷없이 한파가 들이치면 수능이라더니, 올해도 어김없이 그랬다. 어느덧 부쩍 코앞으로 다가온 수능을 체감하며 은찬이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높다란 담벼락이 둘러싼 저택에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제집 다음으로 자주 가는 장소가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딩동. 은찬은 초인종을 누른 뒤, 언덕진 길을 걸어오느라 풀려 버린 운동화 끈을 매려 몸을 숙였다.

- 누구세요.

“나야.”

과외에 늦지 않으려 급히 매듭을 지은 탓인지 끈은 엉망으로 풀려 있었다. 생각보다 운동화를 동여매는 시간이 길어졌다. 은찬은 여전히 시선을 운동화에 둔 채로 대답했다. 출입구 카메라에 제 모습이 비치진 않아도 목소리가 들릴 테니 굳이 숙인 상체를 펼 필요는 없어 보였다.

- ‘나’가 누군 줄 알고 문을 열어 줘요? 요즘 세상에 무섭게.

이게……. 저번에 방문자가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열어 준다며 한 소리를 한 이후로 이예담은 매번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곤 했다. 결국 은찬이 짜증스레 고개를 들고 얼굴을 카메라에 비추어도 한참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밖에 세워 두더니, 무의식적으로 추워, 하고 중얼거린 말 한마디에 금세 대문이 열렸다.

괜한 투덜거림이 아니라 정말 추웠다. 이제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감탄하며 살피기보단 조금이라도 빨리 따스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은찬은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거쳐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뜨끈한 훈기가 몸에 번져 빨갛게 언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미리 나와 있는 이예담 뒤편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고용인이 흘끔 은찬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해 왔다. 은찬 역시 환히 웃음 지어 답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온기에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를 냈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은찬이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예담이 꽁꽁 언 그의 손가락을 간질이면서 만지작댄 탓이었다.

“손 떼…… 라고!”

이 미친놈. 바로 뒤에 사람이 있는데 보면 어쩌려고. 은찬이 말간 미간을 구기며 손을 뒤로 빼려 하자, 예담은 오히려 손등까지 감싸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은찬은 발을 들었다가 콱, 그의 발등을 밟아 제게서 떼어 냈다.

“아야…….”

이예담은 사특하게도 인위적인 신음을 토해 내며 주방에 있던 고용인의 시선을 끌었다. 놀란 은찬이 커다란 눈을 부산스럽게 굴리며 변명했다.

“저, 저기. 아무 일도 아니에요. 쟤가 괜히 저러는 거예요…….”

실실 웃으며 그런 은찬을 바라보던 예담이 등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유유자적하게 앞서 걷는 이예담을 따르며 은찬이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더는 미로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 걸음마다 힘이 실려 있었다.

“넌 하루 종일 나한테 장난칠 생각밖에 안 하지. 만약 네가 그러는 걸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요.”

그새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예담이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렸다. 은찬은 서재 문고리를 잡은 채 내리깐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타박했다.

“매번 신박하게 장난질이잖아. 수능이 진짜 코앞인데 긴장도 안 되는지, 신기해서 묻는다. 왜 긴장은 내가 하냐고.”

“선생님 생각 하루 종일 하냐고 돌려 묻는 거죠. 자주 하긴 해요.”

“으…… 또……. 됐으니까 어젯밤에 물어보던 문제나 펴 봐.”

“아아. 그거.”

예담은 문제 이야기에 미적지근한 표정을 짓고선 책상 위로 문제집을 펼쳤다. 문제집을 끌어온 은찬이 정갈한 글씨체로 나열된 수식을 훑어보았다. 뭐라 짚어 낼 부분 없이 완벽하게 문제가 풀려 있었다. 분명 어젯밤 내내 모르겠다고 노래 부르던 문제였는데.

“뭐야. 어제 모르겠다고 사람 잠을 설치게 하더니. 결국 낮에 혼자 풀었어?”

“하다 보니, 뭐…….”

“그래? 잘했어. 사실 이 시기에는 오답노트에 정리해 둔 문제 푸는 게 제일인데 넌 이제 오답노트에 붙일 문제도 없어서 그냥 컨디션 관리나 잘하면 될 거 같아.”

“흠. 그래요.”

“딱히 더 물어볼 문제는 없었어? 그럼 이제 내가 네 시간 뺏기보다는 스스로 정리하는 데 시간 할애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은데. 그때그때 이해 안 가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탁, 은찬이 문제집을 덮으며 예담을 응시했다.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서. 오늘은 어제 네가 이해 안 되는 문제 있다고 해서 온 거거든.”

그러니까 더 봐줄 거 없으면……. 은찬은 뒷말 대신 제 가방에 슬쩍 눈길을 주었다. 단번에 다음 말을 예상한 예담이 태연하게 그다음 문제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문제 빼고도 못 푼 문제 많아요. 이거도 잘 이해 안 돼요.”

“어……? 네가 풀었던 거랑 똑같은 원리잖아. 다시 풀어 봐. 위에 문제 풀었으면 바로 풀릴 텐데.”

“글쎄. 풀어 봐야 알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문제 볼 때마다 풀이 방법이 바로바로 생각이 안 나서. 그래서 재수하나?”

어폐 가득한 말에 은찬이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며 가만히 바라보자, 곧 예담에게서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까 끝까지 잘 부탁한다는 나긋한 음성과 함께.

* * *

드디어 수능 당일. 수험생이라도 된 것처럼 은찬은 새벽 내내 잠들 수 없었다.

아무리 둘이 합의한 일이라도 해도 막판만 자제했을 뿐, 이예담과 붙어먹는 데 주력한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잠시도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어느새 동이 터 날이 파랗게 밝아 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문자라도 보내야겠다.”

은찬은 밤새 단 한 번도 감긴 적 없어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얼굴로 문자를 전송했다. 별 내용은 없었다. 그저 부담 갖지 말고 해 온 만큼만 수능을 보라는, 적당한 응원의 메시지였다.

지잉.

휴대폰을 보고 있기라도 했었는지 이예담으로부터 금세 답장이 왔다.

[이예담

네. 수능 끝나고 이따 만날 수 있어요? 오전 06:30]

수능 당일에? 친구들 안 만나나.

하긴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해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 거 같긴 했다. 그 때문인지 종종 노트북으로 화상채팅을 한다는 말도 들었고. 그래도 그렇지 일생일대의 순간에도 수능보다는 저와의 만남에 더 관심이 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건…….

“아, 제발. 연애하자는 거 아니라고, 똑똑히 들었잖아.”

또, 또 혼자 너무 멀리 갔다. 아무래도 수면 시간이 부족해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했다. 은찬은 가볍게 양 볼을 찰싹, 때리고 답장을 보냈다.

[오전 06:46 선약이 있어서 아마 저녁에 보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일단 시험 잘 보고 이따 연락 줘.]

그 연락을 마지막으로 종일 시간이 어떻게 간지 모르겠다. 수능과는 무관하게 강의도, 스터디도 그대로 진행되는 바람에 얼이 빠진 채로 하루를 보냈다.

은찬은 중간중간 시각을 확인하며 짐짓 수험생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긴장하고 떨었는데, 특히나 수학 영역에 해당하는 시간에는 1분에 한 번씩 휴대폰 시계를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대학 진학 후 매해 맡은 제자가 있었기에 새삼스러운 경험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이번 수능은 유독 긴장의 정도가 더욱 짙었다.

마지막 교시마저 지나가고, 모든 수능이 끝났음을 알리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나서야 은찬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잘 봤을까. 먼저 연락하면 부담스러울 텐데.

은찬이 망설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찰나, 지켜보기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이예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3권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