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왔어?”
“응! 아이고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우리 이쁜이 얼굴이야?”
“하하.”
은찬이 손을 흔들며 수민을 반겼다. 이번 학기에 몇 학점 신청하지 않은 수민 때문에 두 사람은 단 한 과목에서만 수업이 겹쳤고, 여유로운 수민에 비해 퍽 빠듯한 시간표를 짜 둔 은찬인지라 둘은 따로 약속을 하지 않으면 잘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니 수민의 반응은 결코 과한 편이 아니었다.
“늘 강의실에서만 잠깐씩 보다가 이렇게 따로 만나니까 좋다. 그렇지?”
“응. 너 완전 시간표 널널한데 뭐 하고 지내?”
“뭐…… 알다시피 네 덕분에 KBB 장학생 신청서 냈고, 일단 그거 어떻게 되나 봐서 일정을 정하려고. 그리고…….”
“남자 친구 만나는 데 다 썼지?”
“앗.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다.”
그새 연애를 시작해서인지 오늘따라 더욱 생기가 도는 얼굴을 마주한 은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KBB 건설 측에서 추가적으로 선정한 장학생은 순차적으로 결과가 도는 것 같았고, 그에 따라 수민은 아직까지 합불 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는 사람처럼 쓰며 이렇게 간헐적으로 연애를 이어 가곤 했다.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소개받았던 사람, 맞지?”
“응……. 그렇긴 한데…….”
수민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했다. 아직 연애 초인데 이렇게 그녀가 불평할 때에는 그 연애가 결코 길게 간 적이 없었다. 은찬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남자를 짧게 애도하곤 수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랄까, 조금 사람 질리게 한다고 해야 하나? 분명히 좋긴 좋은데 막 하나하나 캐물을 때면 숨이 막혀 와. 나보다 2살이나 많으면서 나잇값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 겨우 2살 차인데 그렇게 느껴져?”
2살. 이예담과 저의 나이 차이였다. 그가 재수생 위치에 있을 때만 해도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게 느껴지던 나이 차는 동등한 학생 위치로 변하자 그저 또래로만 느껴졌는데. 연하 입장에선 뭔가 다른가.
“그게…… 2살이면 사실 큰 나이 차는 아니잖아? 근데 뭐랄까, 그래도 연상이니까 은근히 느껴지는 기대감이 있잖아. 나보다는 적어도 더 어른스럽겠지, 하는 그런 것들. 나는 그런 면을 기대해서 연하는 안 만나는 거거든.”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최근에 무슨 일 있었어?”
“음. 내가 저번 주말에 가족끼리 강원도에 잠깐 여행을 다녀왔거든. 그럼 그냥 가족 여행 갔구나, 하면 되잖아? 거기서 안 멈추고 몇 시 기차로 가냐, 몇 시에 서울로 도착하냐, 거기 가서는 뭐 하고 있냐…… 계속 캐물어서 남친이 아니라 무슨 어린애 상대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 만약 이예담이 주말에 저를 만나지 않고 어디에 가게 된다면 딱 은찬도 예시 속 수민의 남자 친구처럼 행동할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수민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어 다행이었다.
“은찬아. 너도 명심해라? 나중에 여친 생겼을 때, 사사건건 다 참견하면 좀 정이 떨어질 수도 있어. 너무 좋아도 적당히 선은 지키는 게 둘 사이 긴장감도 유지시키고…… 관계를 위해 도움 되는 거 같아.”
“응……. 그럴게.”
은찬이 호록, 제 앞에 놓인 주스에 꽂힌 빨대를 쭉 빨아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저를 향해 쏟아지는 꾸짖음처럼 들렸다.
오랜만에 만난 수민과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어둑해져 있었다. 은찬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몇 번이나 연락해 오던 수민의 남자 친구는 헤어질 때가 되자 카페 근처에 도착했다며 전화를 해 왔다. 수민은 그런 그가 또 연락 왔다고 툴툴대면서도 내심 기뻐 보이기도 했다. 귀여웠다.
카페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예담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에서 멀지 않은 약속 장소 덕에 전화를 받으며 옥탑방 건물에 발을 들이자마자 쿵, 쿵, 계단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어서 와요.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어요.”
- 어서 와요.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어요.
모처럼 본가에 다녀온다던 이예담이 언제부터인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제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 준 이예담과는 달리 은찬은 작은 옥탑방 열쇠 키를 복사해 주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많이 미안해졌다.
“왜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 올 줄 알고. 집에 가 있지.”
“그냥. 아까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잖아요. 선생님이 오는 거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와서 빨리 보는 게 낫지.”
예담이 은찬의 손에 제 손을 얽고 계단 위로 끌어당겼다. 살며시 주변을 의식하던 은찬은 곧 복도 창문으로 쏟아지는 은은한 달빛 외에는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 그 손을 맞잡았다. 함께 옥탑방으로 올랐다.
몇 시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다시 보니 좋았다. 은찬은 잘난 제 남자 친구의 얼굴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커다란 손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런 은찬의 거듭되는 애정 표현을 가만히 받아 주던 예담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워낙 본가에 안 가다 보니 오늘 들은 이야기인데…….”
“응.”
은찬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예담의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다.
“전에 말했지만 원래 뉴욕에서 쭉 살다가 여기로 온 거거든요. 일가친척들 절반이 아직 미국에 있어요. 그래서 친척 결혼식이랑 집안 행사를 같이 잡게 돼서, 다음 주에 출국하게 됐어요.”
“아……. 응.”
다음 주? 당장 무슨 요일?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 궁금한 게 끝도 없이 떠올랐지만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입을 떼려 한 순간, 낮에 수민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게 다예요? 몇 시 비행기인지, 무슨 행사인지는 안 궁금해요?”
“……아니, 안 궁금해……. 별로…….”
〈연상이면 좀 여유로운 매력도 있고 해야 할 텐데 이 오빤 그게 없어. 늘 조급해 보여.〉
여유로운 매력……. 그래. 생각해 보면 제가 초반에 이예담에게서 느끼던 묘한 분위기 역시 그 특유의 여유로움에서 나왔던 것 같기도 했다. 은찬은 속사포처럼 쏟아 내고 싶은 질문을 간신히 목구멍 뒤로 삼켜 넘기며 애써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정말?”
예담이 잠시간 숨을 고르더니 입매를 어색하게 끌어 올렸다. 가만가만 은찬의 보드라운 뺨을 매만지며 애매한 미소를 띠더니, 이내 자그마한 얼굴을 끌어옴과 동시에 제 고개를 내렸다.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낮게 웃었다.
“아무튼…… 알겠어요. 얼른 다녀올게요. 한눈팔지 말고 딱 기다려요?”
“응. 알았어.”
그래. 그거면 됐지. 제 부재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은찬의 모습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얌전히 기다린다고 했으니 그거면 됐다. 제 마음과 그의 마음이 같길 바라는 건 너무나 크나큰 욕심이니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으려 했다.
애써 제 마음을 갈무리한 예담이 다시 나지막이 웃었다. 지금 제 곁에 은찬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 * *
“하……. 거기는 아직도 한밤중이네.”
은찬이 중얼거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 없는 휴대폰을 괜히 들여다보며 그간 이예담과 둘이 나누었던 문자메시지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예담
밥은 챙겨 먹었어요? 어제 오후 18:41]
[어제 오후 18:42 이제 먹으려고. 넌 이제 일어난 거야?]
[이예담
종일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아서 답장이 늦어요. 미안해요. 어제 오후 21:05]
“문자 텀이…… 너무 멀어. 하아.”
이예담이 미국으로 떠난 지 고작 사흘,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애가 달아 틈만 나면 휴대폰 문자메시지 내역을 확인하는 저와는 달리 이예담은 간간히 답장을 보내와 더욱 그랬다. 미국에서 살다 할아버지 때문에 도중에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했었으니 가족 행사 외에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며, 지인들이 많아 분명히 바쁠 걸 알면서도…… 서운했다.
〈도저히 빠질 수 있는 행사가 아니라서 가긴 가는데……. 일주일이나 못 본다니 너무 아쉬워요. 선생님은 괜찮아요? 혼자 놓고 가기 그런데.〉
〈넌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일주일 못 본다고 무슨 큰일이 날까 봐. 잘 다녀오기나 해.〉
그렇게 말해 놓고 정작 제가 어린애처럼 안달 내고 있었다.
학교로 향하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의 길목도, 다른 동기들과 함께 먹는 점심 식사도, 하준과의 과외가 끝난 이후 시간도…… 모두 너무 외롭게만 느껴졌다. 아마 눈치채지 못한 새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일상이 되어 버린 까닭일 터였다. 삶에서 이예담을 폭 떠서 덜어 내니 안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아……. 이러고 있지 말고 누구라도 만날까.”
아무도 안 만나면서 집에만 콕 박혀 있으니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걸지도. 유난히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서로가 바쁘다는 이유로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도 안부만 간간히 주고받는 아버지가 슬며시 생각났다. 모처럼 전화해 볼까. 시간을 확인하면 아직 일 중이시긴 할 텐데…….
은찬은 휴대폰 속에 저장된 아버지의 연락처를 확인하려 전화번호부 애플리케이션을 눌렀다. 아버지는 개인 회생 과정에 들어서면서 휴대폰 번호를 바꾸었고, 은찬은 그의 새로운 번호가 손에 익지 않아 늘 전화번호부 앱을 통해 전화를 하곤 했다.
“아…….”
그러자 처음 이 휴대폰을 받았을 때부터 단축키 1번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예담의 전화번호가 화면 가장 위에 떴다. 언젠가 제가 찍어 둔 그의 잠든 얼굴과 함께였다.
은찬은 곧 생각을 바꾸어 사진첩을 클릭했다. 사진첩 가득 제가 몰래 찍은 이예담 사진과 드물게 둘이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잔잔히 번지는 미소와 함께 사진들을 넘겨 보다 보니 처음으로 함께 찍었던 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을 끝으로 금세 앨범이 바닥났다. 생각보다 일상을 많이 남겨 두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동영상도 찍어 둘걸.
[이예담
잘 자요. 오전 03:38]
많이 바쁜가……. 몇 번이고 확인했던 마지막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시차와 그의 전반적인 상황 모두를 고려하더라도 답장이 지나치게 뜸하게 느껴졌다. 괜히 문자가 띄워진 화면을 가만히 문지르며 시무룩해진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분명히 이예담이 자신이 처음이라고, 이전에 사귄 여자는 없었다고 단단히 일러두긴 했지만 남자인 제 눈에도 멋져 보이는 그가 여자들 눈에 안 멋져 보일 리 없었다. 서양 여자라고 다를까. 쭉 나고 자란 곳에 간 김에 그곳에 있는 미녀들을 보고는 눈이 홱 돌아간 건 아닌지, 걱정하는 잇새에서 자꾸만 긴 한숨이 터졌다. 울적함만 늘어갔다.
“하아…….”
아무렇지 않은 척해 댔기에 이예담에게 대체 언제 오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매번 은찬의 문자에 답이 오는 건 꽤나 늦거나 매우 이른 시각이었고, 응답 없는 휴대폰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수민의 말이 떠올라 문자를 보내려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계속 캐물어서 남친이 아니라 무슨 어린애 상대하는 줄 알았다니까.〉
안 돼……. 그렇게 질리게 굴고 싶지 않았다.
은찬은 가만히 들여다보던 휴대폰을 엎어 두고 서서히 주홍빛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긴 아직도 어두컴컴하기만 하겠지. 그때 정확한 입국 시간을 물어볼걸.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았을 텐데…….
아주 잠시간 떨어져 있는 거니 오히려 자유로움까지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이예담이 없는 매일매일은 외롭기만 했다. 좁은 옥탑방이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빈자리가 컸다.
목이 멜 듯 갑갑해져 맥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산책이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생각해 옮긴 걸음이었다.
낮엔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후덥지근하게만 느껴졌던 거리는 해가 지면서 제법 선선한 바람까지 동반되어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할 때면 거닐곤 하던 거리조차 온통 이예담과 함께 걸었던 기억으로 뒤덮여 그의 숨통을 틔워 주지 못했다. 복작거리는 인파 사이에서 외로움만 증폭시킬 따름이었다.
* * *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어……!”
잠이 덜 깬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던 은찬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오늘은 시간이 났는지, 이예담이 먼저 전화를 해 왔다.
“응. 나야. 내일 온다고 했었지?”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에 마침내 끝이 보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통, 통, 침대 매트리스를 치는 발뒤꿈치마저 경쾌했다.
- 어쩌죠. 차질이 생겨서 하루 더 있다 갈 거 같아요.
“아…….”
- 실망했어요?
“아니. 고작 하루 가지고 뭘…….”
- 나는 실망했는데.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데……. 으음. 별수 있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죠, 뭐.
전화를 끊고 은찬이 축 처진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웠다. 아……. 안구가 뜨거워졌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내일이면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텨 왔는데, 더는 못 참겠다.
은찬은 그대로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뛰어간 곳은 거리가 아닌 예담의 집이었다. 그가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이라도 예담의 침대에서 익히 아는 체취와 흔적을 느끼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제 생일로 바뀐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벌컥 집 안으로 들어서자, 정적만이 흐르는 고요하고 넓은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며칠 전까지도 제집 드나들듯 했던 곳인데 혼자 발을 들이려니 조금 어색했지만, 은찬은 곧 괜한 어색함을 지우고 침실로 향했다.
네모난 창을 투과한 따사로운 햇살이 커다란 침대 위를 뒤덮고 있었다. 은찬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조심스레 이불보를 쓰다듬었다.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기대 모로 누워 가만가만, 협탁 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오후 2시. 이예담이 있는 뉴욕은 새벽 1시……. 지구 반 바퀴의 거리가 체감되는 시차였다.
“후우…….”
어느샌가 긴장을 풀고 몸을 대(大)자로 뻗은 은찬은 거꾸로 보이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쨍쨍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에 가리어질 때면 자그마한 얼굴에 드리웠던 따스한 볕이 함께 흘러갔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점차 느껴지는 그의 체취와 함께 호흡이 차분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은찬은 감았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밀어 올려 시계를 확인했다.
“얼른 사 와야겠다.”
이윽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예담이 한국에 올 때까지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전에 둘이 맛있게 먹었던 떡볶이를 해 놓고 그를 기다릴 참이었다.
“진간장은 그대로 있고…… 고춧가루도 그대로……. 채소랑 어묵, 떡만 사면 되겠다.”
저만큼이나 요리를 할 일 없는 이예담인터라 확인해 본 찬장 안의 재료들은 예전에 사 두었던 그대로였다. 필요한 재료만 추가적으로 구비해 놓고 내일 이예담이 오는 시각에 맞추어 준비하면 될 듯했다. 아무리 길지 않은 일주일이라도 그간 양식만 먹어대 매콤한 한식이 당길 테니까. 은찬은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 본 적 없지만, 듣기로는 그랬다.
은찬은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예담의 집을 나섰다. 저번과는 다르게 혼자서 도보가 가능한 마트로 향해 같은 재료들을 샀다. 시간은 훨씬 단축되고 눈치 보일 일도 없었지만 역시 이예담과 함께 장을 보는 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렇게 결론 내리자 돌아오는 길이 또 무척이나 헛헛해 괜히 연락 없는 휴대폰 액정을 만지작댔다.
* * *
“으응…….”
잠시만 눈을 감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제집보다 더 강하게 이예담의 체취가 밴 베개를 끌어안고 잠이 든 은찬은 어렴풋이 뺨을 간질이는 듯한 손길을 느끼곤 눈살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어……?”
이예담이었다. 어리둥절한 은찬이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꿈이야……?”
꿈일 터였다. 아직 이예담은 뉴욕 공항에도 도착하지 않았을 테니까. 덜 뜨인 눈을 비비며 제 눈앞의 잔상을 다시금 확인하는 은찬을 내려다본 예담이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물어왔다.
“하하.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아까 보딩 직전이었는데. 말을 덧붙이며 현실임이 분명한 온기 가득한 손가락으로 보드라운 뺨을 간질였다. 솜털이 아직 가시지 않은 발긋한 뺨은 손가락이 문지르는 대로 보송한 솜털을 세웠다.
“아니…….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은찬은 잠시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손을 뻗어 제 앞에서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끌어안았다. 따듯하고 단단한 품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왜 여기 있어요? 나 기다린 것처럼. 설마…… 내 이야기 대충 흘려들어서 오늘 오는 줄 알았던 거예요?”
예담이 제 품에 꼼지락거리며 안겨 오는 은찬을 몸을 숙여 안고서 부드러이 속삭였다. 착각이었든, 기다린 거였든 그가 제집, 제 침대에서 자신이 돌아오는 걸 맞이하는 순간이 벅찼다.
“……응.”
사실은 내일 온다고 한 걸 알고 있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다만 하루라도 먼저 네 체취를 느끼며 기다리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은찬은 어쩐지 저 혼자만 안달 난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집안일이 얽히면 바쁜 건 당연하지만, 그가 미국에서 머무른 내내 저만 동동거린 듯해서였다.
“기껏 애써서 대학까지 같은 곳으로 진학했는데 남자 친구가 나한테 너무 무심하네……. 서운하게.”
예담이 눈가를 휘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술이 맞닿는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쪽, 쪽, 부드러운 입맞춤이 연거푸 이어졌다. 그에 맞추어 은찬이 가느다랗게 몸을 떨었다.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조금 일찍 왔는데, 옷만 갈아입고 선생님 집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
가만히 자신이 퍼붓는 입맞춤을 받아 내는 은찬을 바라보던 예담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사실 미국에 있는 내내 생각한 건데요.”
“뭐……?”
은찬이 한껏 긴장한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간 연락이 뜸했던 거라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할까 두려웠다. 타액이 훑고 지나간 입술을 꾸욱 말아 물고 숨을 죽였다.
“이제 호칭 바꾸고 싶어요.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꼴리긴 하는데, 은근히 거리를 두게 만드는 거 같아서.”
“아…….”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어 왔던 터라 미처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진작 먼저 이야기 꺼낼걸. 허둥대느라 뭐가 좋을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 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형. 짧고 간결한 한 단어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응. 그렇게 해. 뭐든 좋아.”
“나도 뭐든 좋아요. 형.”
예담이 와락 은찬을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 좋아요, 형. 날짜 세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형. 하며 애틋하게 애정을 갈구하고 표현했다.
“정말 내가 좋아?”
담담한 척 하던 낯은 사라진 채였다. 초조하게 되묻는 은찬의 기색에 예담이 느릿하게 얼굴을 들었다. 조심스레 맞추어 오는 눈길에는 어떠한 장난기도 묻어나지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선뜻 입술이 열렸다.
“좋아해요. 너무너무.”
그 흔들림 없는 눈빛을 마주한 순간, 은찬은 요 며칠간 제가 곱씹으며 붙들고 있던 상념이 깨부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걱정이 무소용해지는 순간이었다.
더 좋아하면 어떤가. 더 좋아해 주면 되지.
더는 내가 그를 더 좋아하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마음의 크기를 재느라 본심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타고난 그의 배경에 지레 겁먹으며 자존심을 세우기보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결심한 듯 제 다짐을 입술 새로 쏟아냈다.
“예담아……. 전에 네가 말한 거 말이야…….”
“응? 어떤 거요. 형.”
한두 개를 말했어야 짐작하지. 예담이 실실 웃으며 얼른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 맴도는지 계속해서 형, 형, 되뇌면서.
“같이 살자던 거.”
“……아.”
막상 내뱉었지만 자신이 없는 듯, 은찬이 우물쭈물거리며 이예담의 표정을 살폈다. 정말 아직까지 같이 살고 싶을까. 괜한 이야기는 아닐까. 이미 늦은 건 아닐지 심란해 애가 탔다.
그래도…… 이제는 떨어져 있기 싫었다. 매일 밤 같은 잠자리에 들고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고 싶었다. 이따금 솟구치던 고민과 억측 따위, 자각한 제 마음 앞에선 한낱 부질없었다.
“아직도, 저기……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유효하면…….”
“그러면?”
예담이 긴장이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느덧 그의 손등을 쥔 손바닥에는 진땀마저 나고 있었다. 얼른 말하라는 것처럼 제 손아귀에 감싸인 은찬의 손을 연신 주무르는 손길이 잘게 떨렸다.
“그러면…… 같이 살자. 나랑.”
“…….”
푹, 은찬이 자그마한 얼굴을 예담의 어깨로 묻으며 중얼거렸다. 한참 동안 조용한 사위에 열 오른 얼굴을 슬며시 들어 그를 찾자, 따뜻한 손바닥이 양 뺨을 감쌌다.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입술이 소리 없이 내려와 맞물렸다.
대답을 대신하는 입맞춤이었다.
〈뒷과외〉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