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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Hidden track (16/16)

외전. Hidden track

중간고사가 끝나고 잠시 생긴 틈을 타 예담과 은찬은 3박 4일의 길지 않은 일정으로 여행을 꾸렸다. 처음엔 여행 비용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던 은찬이었지만 어차피 취업하고 나면 형이 나 먹여 살릴 거 아니냐며 천연스레 말하는 예담에게 홀랑 넘어가, 당장 눈앞의 헉 소리 나는 비용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정말, 정말 취업하면 제가 그를 책임질 것이라며.

“공항 진짜 크다…….”

은찬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인천 공항을 두리번댔다. 서울을 벗어나 최대치로 멀리 가 본 곳은 제주도인지라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인천 공항을 처음 온 건 저뿐인지, 크고 혼잡한 장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압도되어 잠시 혼미하긴 했지만 은찬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첫 해외여행에 흥분해 새벽 내내 잠을 자지 못한 채 출국하는 방법 따위를 인터넷에 검색해 본 덕에 모든 순서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고로 당황할 필요가 없다. 이예담보다 더 자연스럽게 모든 과정을 거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단단히 준비해 둔 모든 팁들은 무용했다. 인터넷에서 알려 준 것처럼 굳이 항공사 카운터 앞에서 미리 줄을 설 일이 없었고, 캐리어마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넘어간 데다, 환전 또한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제 연인의 재력을 간과한 탓이었다.

출국장을 통과해 라운지를 구경할 새도 없이 금세 보딩 시간이 다가왔다. 클래스별로 나누어진 출입구를 어색하게 통과하고 안내에 따라 기내로 오르자, 서재에 놓인 의자만큼이나 크고 푹신한 좌석이 은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내의 창문을 4개나 오롯이 혼자 독차지할 수 있는 면적이라 황송하기까지 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요.”

“응…….”

은찬과는 달리 이런 공간이 자연스러운 듯, 예담은 곧장 그를 창가 쪽으로 밀어 넣고 자리를 잡았다. 낮은 칸막이가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지만 그게 문제 될 일은 없어 보였다. 비교적 짧은 노선 때문인지 이륙을 앞두고도 그들이 탄 클래스에 추가적으로 탑승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담당하는 승무원 또한 기내식을 준비하러 자리를 비운 탓에 주변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은찬은 좌석에 달린 버튼을 이리저리 매만지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들어 본 듯한 익숙한 이름의 영화들이 줄거리와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비밀]

[영원한 비밀은 없다]

[수상한 그 남자]

[모두에게 비밀이 있다]

…….

…….

관심사가 그쪽에 있어선지 눈에 들어오는 영화들은 온통 한 주제만을 담고 있었다.

“…….”

톡, 톡, 부산스럽게 스크롤을 움직이며 영화 목록을 확인하던 은찬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예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 ……근데 어쩌다 알게 됐던 거야?”

“뭘요?”

“이제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대체 뭘…….”

“나한테 보지 있는 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처음부터 알았어? 나 처음 봤을 때 어땠는데?”

언제부터인지 외설적인 단어도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리는 은찬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고치게 해야 할지……. 잠시간 즐거운 고민을 하던 예담이 답이 흘러나오지 않는 입술을 노려보는 은찬의 시선에 조용히 웃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요?”

“갑자기가 아니라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다가도 네가 정신 못 차리게 만드니까…….”

아.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그를 물고 빤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보지’라는 단어는 거리낌 없이 말하면서도 정신없이 몰아붙인다는 말을 하면서는 무얼 생각하는지 뺨이 발그스름해지는, 모순적인 그가 몹시도 귀여워 예담이 참았던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음…….”

이제는 알려 줘도 되겠지. 날개옷을 돌려주자 곧장 하늘로 되돌아간 선녀처럼 그의 비밀을 알게 된 경위를 알려 줬다간 궁금증이 풀려 미련 없이 저를 떠날까 내내 밝히지 않았던, 그와 진득하게 엮이게 된 계기를.

예담은 선녀가 나무꾼의 과오를 따지기보다는 함께 머물러 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전래동화 속 나무꾼처럼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굳이 그에게 감출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우연한 일이었는데.”

예담은 은찬의 뒤로 분할되어 비치는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서서히 그들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이제 와 생각하지만 제법 운이 좋은 날이었다.

* * *

“아……. 왜 하필이면 지금 돌아가셨대요.”

“예담아!”

“죄송해요. 목소리가 너무 컸나요. 진심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예담이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장례식장에서 그런 태도는 보이면 안 돼. 할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니. 계속해서 주의를 주는 모친의 말을 무성의하게 흘려 넘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속상한 심경을 헤아려서라기보다는, 혹시라도 아들의 행동이 조부의 심기를 거슬러 그 몫으로 예정된 유산이 반 토막이라도 날까 걱정 돼서 하는 잔소리였다. 예담 역시 이를 잘 알아 문제였고.

한참 말을 퍼붓던 어머니가 사라지자마자 예담은 입술 사이로 담배를 끼워 넣고 고개를 숙였다. 진작 재킷을 벗어 버렸던 탓에 불을 붙이기 위한 동작에 홑으로 남은 하얀 셔츠 천이 팽팽히 딸려 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는 동작에도 셔츠에 감싸여 숨겨진 근육이 확장하는 움직임이 뚜렷했다.

두툼한 상체가 벽면에 기대지고, 뿌연 연기를 흩뜨리며 몇 번인가 담배를 빨아들였던 찰나.

“너 또…… 쫓아냈니?”

상을 당한 친척과 인사를 끝냈는지 다시 나타난 모친이 화를 참아 내듯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막 이야기 들었어. 과일 깎아서 가져가니까 허둥지둥 나갔다고 하던데! 그걸 내가 장례식장에서까지 들어야겠니?”

“아. 그랬나……. 그랬던 것도 같네요.”

“얘가 정말!”

귀찮았다.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과외 선생을 붙여 대는 제 어머니도, 보자마자 지루해지는 과외 선생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척의 장례식에 끌려온 이 순간도.

“그럼 예쁜 여자로 붙여 주든가요. 그럼 또 알아요? 꾸준히 할지.”

꼰대, 꼰대, 꼰대들의 향연이었다. 몇 번이나 갈아 치웠지만 매번 새로이 붙는 과외 선생은 복사라도 해서 붙여 넣은 듯, 신기하게도 오는 사람마다 똑같았다. 남자에, 중년으로 추정되는 연령대, 관계를 잘 터서 오래오래 이 과외를 해 먹어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비치는 얼굴까지. 그런 치들만 골라서 들여보내니 흥미가 생길 턱이 없었다.

“널 뭘 믿고 여자애를 붙여.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믿지도 않으면서 과외는 왜 시켜요.”

만약에라도 젊은 과외 선생을 붙였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 전전긍긍하던 예담 모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까딱, 짧게 고개를 끄덕인 예담은 손가락에 끼웠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미련 없이 멀어져 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모친의 잇새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이후로도 그녀는 변하지 않는 예담의 태도에 일관되던 구인 조건을 변화시켰다. 예담이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요구하던 젊고 예쁜 여자로 과외 선생을 대령시킨 것이다. 무슨 일을 치르든 후에 덮고 말지, 이대로 망나니처럼 엇나가는 아들을 책상 앞으로 앉히기라도 해야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돋보이는 선택이었다.

하나 그대로였다. ‘예쁜 여자’ 운운하던 예담은 여전히 무심한 웃음을 흘리며 여느 때와 같이 불성실한 태도를 유지했다. 갑작스레 떨어진 수능 성적이 본인의 실력이었던 것처럼, 문제집에는 손도 대지 않아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러다 이걸 그의 조부가 알기라도 하면……. 문제가 컸다.

“내가 정말 회장님한테 부끄러워서 낯을 들 수가 없어.”

할아버지를 칭하는 호칭을 보면 알 수 있듯, 예담의 모친과 조부는 등본으로 정의되지 않는 사이가 된 지 오래였다. 거듭되는 부친의 외도를 참던 어머니가 어느 날 이혼을 선언하면서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이 정리된 까닭이었다. 그와 동시에 집안에서 예담 부친의 입지는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좁아졌고, 조부의 애정은 고스란히 막냇손자인 예담에게 향했다.

예담은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을 잘 알았다. 길만 걸어도 유독 예뻐해 주던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학교에 들어가자 외모 하나만 보고 접근하는 더 많은 이들을 만났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입꼬리만 밀어 올려도 친절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던 덕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집안에서도 그런 예담을 좋을 대로 정의하고 있었다. 부모의 이혼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라는 조부의 말을 받들어 얌전히 학교를 다니기까지 했으니 그 정의에 문제 삼을 변수는 없었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예담은 주변의 긴장이 풀렸을 때, 기어코 수능을 망쳤다.

호시탐탐 저와 얼굴밖에 모르는 여자애를 엮어 유학을 보내려는 이들에 대한 반항이자, 따분한 일상이 지루해 시도한 작은 일탈이기도 했다. 생각보다는 큰 일탈이 되어 버린 것 같았지만.

“회장님. 한 번만 봐주세요. 예담이가 아무래도 아버지랑 제가 갈라선 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컸나 봐요.”

예담의 모친은 KBB 건설 지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이 성년이 되는 순간 받기로 약속된 몫이 코앞에서 날아갈 위기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그런 그녀에게 떠오른 얼굴은 민선우였다. 민 이사의 아들로, 정확한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한국대 경영대생에 적당히 눈치를 볼 줄 알아 제 아들 뒤처리에 제격이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동반 행사를 통해 부지런히 얼굴도장을 찍고 다닌 민선우는 제 위치를 알아 몸을 사릴 줄도 알았다. 어딘가 저를 깔보는 듯한 눈빛을 가진, 시건방지기 그지없는 이예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제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살길이라는 건 진작 깨닫고 있었다.

“과외 구하는 시늉이라도 해. 기왕이면 네 후배라고, 아주 애썼다고 말이야.”

아버지인 민 이사의 말을 받든 민선우는 과 후배 중 마당발로 보이는 전수민에게 선심 쓰듯 이예담 과외에 대해 넌지시 말을 흘렸다. 유복한 자신이 봐도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라 별 힘을 들일 필요 없이 곧 이 과외가 절실한 누군가가 걸어 들어올 터였다. 그러니 대강 연결해 주고, 반응이 좋지 않으면 또다시 연결해 주면 그만이다.

이예담이 가난한 고학생, 그것도 남자에 흥미를 보일 리 없으니 몇 번이고 계속될 귀찮을 일임이 불 보듯 뻔했지만 어차피 교내에서는 선심 쓰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고, KBB 건설 오너가 측에는 임원의 자제가 손자까지 신경 써 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으니 어디로 살펴보아도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 * *

복슬복슬한 연갈색 머리카락이 감싼 머리꼭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결 좋은 머리칼과 이어진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 어딘가 주눅 든 듯한 어깨가 둥글게 말려 있었다. 평소라면 말 한마디 걸지 않았을 테지만 왠지 모르게 흥미가 생긴 예담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흐음. 오늘 시범 과외 하러 온다던?”

“어…… 네…….”

숙어졌던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잔뜩 겁을 먹은 음성이 흘러나오고, 마침내 자그마한 얼굴 안에 들어찬 색이 옅은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예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건. 여태 숱하게 만나 온 과외 선생들과는 다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한마디 더 말을 걸고 싶어졌다.

“이예담이에요. 유은찬 선생님 맞으시죠?”

“아…… 응……. 반갑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 발발 떨렸다. 처음 느낀 인상 그대로였다. 피식,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에 예담이 입가를 가리자 놀란 유은찬이 둥그렇게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그 후로도 그날 내내 행해진 예담의 의도적인 행동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들이 이어졌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뺨을 붉히고서 민망해하는 모습이,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모습이…… 자꾸만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겪어본 바 없어 종잡기 어려운 충동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저 나름대로 쉽게 전달하느라 쩔쩔매는 얼굴을 바라보다 보니 항상 지루하기만 했던 과외 시간마저 빨리 흘렀다. 동성의 남자에게 느끼는 묘한 호기심을 곱씹던 예담은 반복적으로 달싹거리는 도톰한 입술을 인식하자마자 깨끗이 고민을 지웠다. 치미는 충동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선생님.”

그를 빤히 바라보던 예담이 느슨하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고민 따위 필요치 않았다. 새붉은 입술 안, 연한 속살을 희롱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니까.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만으로도 부드러운데 맞닿으면 어떨지 궁금해 단전이 다 저릿해졌다.

* * *

그냥 좀, 남자치곤 예쁘게 생긴 얼굴에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 붉은 입술이 자꾸만 신경 쓰이고 생각났다. 그런데 드물게…… 그걸 떠올리다 보니 자꾸만 시뻘건 충동이 치밀었다.

남자는 물론 여자에게도 이런 감정은 느낀 적 없었는데. 그간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먼저 달려드는 이야 많았지만 호기심에 몇 번 응하며 입술을 맞물려 본 게 다였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고, 몇 번을 맞대어 봐도 그 이상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하복부에 고이기 시작한 뭉근한 열기에 작게 실소를 터트린 예담은 제 본능을 곰곰이 되짚었다. 뭐…… 좆질은 안 해 봤어도 가끔 자위로 물을 빼 주긴 했었으니. 이건 단순한 흥미 정도로 치부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모처럼 생긴 흥미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날 이때까지 좆 한 번 쓴 적 없는 삶이 조금 무료하기도 했으니까. 아마도 새하얀 몸을 꽁꽁 감춘 옷을 벗겨 내면 덜렁거리는 좆에 금세 호기심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 보기로 했다.

“와. 진짜요? 선생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네요.”

“음…….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닌데. 너는 아직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궁금하면 더 얘기해 줄까? 사실은…….”

예담은 판을 깔아서 의도적으로 유은찬을 띄워 주었다. 평소 자신의 외모나 집단 내 위치에 대해 콤플렉스라도 있었는지 하는 말마다 감탄하며 우러러보는 척해 주자 경계는 금세 느슨해졌다. 과외 내내 눈치 보며 말을 조심하던 단계를 지나 제게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귀엽게도 형 노릇을 하려 들었다.

그렇게 지내던 와중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 한번 되짚어 봐도 일어난 모든 일들이 아귀가 탁탁 들어맞아 운이 좋은 날이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오늘 옷 빌려준 거 고마웠어. 세탁한 것도 고맙고.”

“아니에요. 뭘요. 예상했던 대로 금세 말라서 다행이에요.”

“그래. 그럼 다음 과외 시간에 보자. 숙제 열심히 하고!”

“네. 선생님.”

은찬이 집을 떠나자 초연한 낯을 지워낸 예담은 급히 제 방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치솟는 야릇한 기분에 정신이 혼미했다. 모든 계기는 한바탕 망고 주스를 엎고 제 옷까지 빌려 입었던 유은찬 때문이었다.

〈고마워. 이거 옷은…….〉

〈옷은 지금 세탁해 달라고 할게요.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제 옷이 잘 어울리네요.〉

사실 체격의 차이 때문에 결코 제 옷을 입은 유은찬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나 자신이 입곤 하던 옷에 감싸인 그의 모습에서 오는 묘한 만족감과 더불어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시선에 열이 올랐다. 아마도 젖어서 벗은 속옷 덕에 하체는 겉을 감싼 자신의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살일 터였다. 일전에 만져 본 보들보들한 감촉의 살결이 제 체취가 느껴지는 옷에 둘러싸였다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하복부가 뻐근해졌다.

“하…….”

그와의 과외가 끝나고 다시 혼자가 된 예담이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제 방에 들어섰다. 아직도 그가 남아 있는 것처럼, 방 안에 망고 주스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젖은 옷은 이미 가져갔는데…….”

이상하게 여기면서 침대로 다가갔다. 각을 세운 채 놓인 노트북은 언제부터 배터리가 닳았는지 화면이 시커멓게 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강제 종료된 건 아니겠지. 그러면 곤란한데……. 예담은 매끈한 미간을 찡그리며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이내 화면이 바뀌었다.

[종료 전, 저장 도중 끊긴 영상이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저장된 영상? 아…….”

예담은 모니터에 띄워진 확인 버튼을 누르며 과외 시작 직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 그래서? 안수현이 알겠대?

〈뭐……. 당연히 한 번에 알아듣지는 못하는데 어쨌든 여름에 미국에 안 갈 거야.〉

- 안수현은 너 온다고 여기저기 떠벌렸던데 어떡하냐. 쪽팔려서.

- 지 팔자 지가 꼰 거지 뭐. 이예담. 겨울에는 와?

〈그것도 봐서.〉

- 이 비싼 새끼. 이러다 우리가 한국 들어가야만 만나겠다?

〈음. 그럴지도……. 하하.〉

엇비슷한 집안에서 자라나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과의 대화였다. 학기가 시작되고 해외로 건너간 그들과 예담은 좀체 시간이 맞지 않아 오랜만의 화상채팅으로 회포를 풀고 있었다. 아직도 끝이 안 난 동반 유학 문제 이야기를 나누던 예담은 늘 서재에 두고 쓰곤 하던 노트북을 펼쳐 침대 매트리스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곤 지겨운 듯 몸을 모로 누웠다.

띠리링.

예담의 방문 옆 벽면에 설치된 비디오폰 화면에 기다리던 얼굴이 떴다. 유은찬이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1층 현관으로 그가 들어설 터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 뭐?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 과외.〉

- 아씨, 백수가 제일 바빠. 뭐야.

〈알아서들 흩어져.〉

- 저게…….

투덜대던 친구들이 일제히 화상 채팅방을 나가고, 예담은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미처 신경 쓰지 않은 노트북은 종료되지 않은 화상 채팅 화면을 그대로 띄우고 있었다.

“……그랬었지.”

그가 호스트로 연 회의라 자동 저장된 영상은 고스란히 노트북 하드디스크 안에 자리했을 터였다. 예담은 습관적으로 파일을 지우려다 문득 저장된 영상 길이가 지나치게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짧게 대화를 나눈지라 길어 봐야 30분 남짓 저장되어야 했는데, 해당 영상은 수 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예담은 동영상을 빨리 뒤로 감다 갑자기 등장한 모습에 잠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은찬이었다. 유은찬이 옷을 갈아입으려 제 방에 들어와서는, 하필이면 노트북 카메라가 잘 보이는 위치에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아…….”

예담은 갈등했다. 다음 장면이 몹시도 궁금했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던 탓이었다. 그간 은근슬쩍 만져 보았던 보드라운 살결도, 촉촉한 입술도, 이끌어 내 들었던 어딘가 어설프기만 한 이야기들도 아슬아슬했는데…… 좆이 달린 남자 새끼 하반신을 보고 자지가 발딱 선다면…….

“…….”

예담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방 안에서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결국 재생 버튼을 눌렀다. 본능이 이성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펼쳐진 영상에 머리꼭지가 돌아 버렸다.

“……씨발. 이게 뭐야.”

이어진 영상에 예담은 몇 번이고 제 눈을 의심하며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똑같았다. 예상한 대로 하얗게 덜렁이는 자지 아래, 예상하지 못한…… 보지가 보였다.

대체 자지 털을 깎기라도 하는 건지 아랫배부터 사타구니까지, 한 올의 털도 보이지 않는 민둥한 살결이 주는 충격에 더해 제가 미치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둔덕이 자리했다. 벌어진 야릇한 틈새 사이, 붉은 속살이 보짓물과 망고즙에 적셔져 번들거리고, 이를 닦아 낸 티슈가 마르면서 음핵에 달라붙는 과정이 적나라했다. 그 과정에서 작게 들려오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까지 합쳐지니 어느새 예담의 좆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 뭐 이런…….”

끝끝내 좆이 섰다. 그다음은 당연한 수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그가 보짓살을 닦아 내는 장면을 되감기해 재생하며 이어진 격한 자위였다.

“후…….”

예담은 샤워기 아래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 내며 번잡해진 생각을 정리했다. 본인의 성 지향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눈앞의 먹이를 두고 볼 때가 아니었다. 하는 짓이나 몸을 보아서는 떠벌리는 말은 모조리 제 경험이 아니라 몸에 달린 보지를 통해 알게 된 것임이 빤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장단을 맞추며 놀아 주는 것이 도리였다.

* * *

매일매일 같은 영상을 되돌려 본 탓에 이제는 눈만 감아도 야들야들한 보짓살이 떠올랐다. 그 조그마한 구멍에 어떤 식으로 자지를 욱여넣을지 가정하며 머릿속으로 셀 수 없이 그를 범했다. 그간 육탄공세 하듯 몸을 던져 저를 유혹했던 이성도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럴 때조차 치밀지 않던 시뻘건 욕정이 고작 모니터 화면 안의 바르작대는 동작 몇 번에 해일처럼 덮쳐들었다.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말을 믿을 수 없어 제가 파악한 양성구유에 대한 정보를 주치의에게 다시 확인한 이후, 그를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는 점점 음욕으로 짙어져 갔다. 과외가 끝날 때면 자지 표피가 부르트도록 살기둥을 쥐고 흔들어 댔지만 이제는 거기서 그칠 수 없었다. 이따위 상상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던 탓이었다. 수음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토실토실한 살 두덩을 가르고 싶은 욕망으로 뇌가 진탕 물들어 갔다.

〈은찬아. 너…… 보지 달렸잖아.〉

마침내 터뜨렸다. 비록 천에 가려져 있었지만 고스란히 느껴지는 특유의 냄새와 촉감에 제어할 정신없이 그리던 보지를 함빡 빨았다. 상상보다 훨씬 시큼한 보지 냄새와 보드라운 살점에 매몰되어 저항에도 불구하고 예담은 그를 욕심껏 탐했다.

자그마한 얼굴이 온통 진땀으로 뒤덮여서는 할딱할딱, 힘겨운 숨을 내쉬는 모습이 미치도록 꼴렸다. 붉은 과실처럼 익어 가는 두 뺨을 인지하자 더, 더, 몰아붙여 끝을 보고 싶었다.

뒷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한 번 이성이 끊어지자 도저히 행위가 멈추어지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결국 예담은 도망치듯 집을 떠난 은찬을 내버려 둔 채 민선우에게 연락했다. 이대로 그가 자신과의 과외를 그만두고 내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KBB 건설을 운운하며 민선우를 휘둘렀고, 민선우는 철저히 예상대로 행동했다. 이제 짜인 판 위에 올라간 유은찬만 예상대로 행동해 주면 됐다.

* * *

[민선우

지금 학교 근처 술집이야. 유은찬이랑 같이 있어. 술 마시는 중인데 올 거야? 오후 18:24]

“그걸 말이라고…….”

착실하게 유은찬의 행적을 보고하는 민선우 덕분에 그와 다시 조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치 않게 유은찬이 제가 덜어 놓은 술을 몽땅 들이켠 바람에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마침내 그를 가졌다.

고양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종일 마음이 들뜨고 자꾸만 생각이 났다. 모처럼 흥미로운 대상이 생겨서일까. 늘 느끼던 권태감이 어떤 느낌을 주는 감정이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보지를 맛본 뒤에는 또 다른 구멍이 궁금해졌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금세 미친 짓이라 결론 내리며 외면했지만, 벌름거리는 연분홍빛 구멍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 미친 짓을 실행할 결심을 세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은찬 역시 처음엔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그 유혹적인 구멍을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흠씬 입술로 빨아 주니 눈이 탁 풀렸다. 파르르, 하얀 엉덩이를 흔들면서 뒷구멍까지 모조리 내어 주고는 얼마나 좋았으면 제 항문을 뒷보지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씨발. 이제는 이 맛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선생님. 어때요?”

그의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멍을 흠뻑 제 씨물로 채우니 들이닥치는 희열감이 아찔했다. 온종일 그치지 않는 전율에 예담은 이 관계를 보다 공고히 하고 싶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상성이 잘 맞는 몸은 흔치 않다는 것을.

“앞으론 괜히 빼지 말고 적극적으로 즐겨 보는 건 어때요.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넌 수능도 쳐야 하고…… 거기다 난 남잔데…….”

유은찬이 얼굴을 터트릴 듯 시뻘겋게 붉혀서는 제 말을 그대로 튕겨 냈다. 잠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예담은 곧이어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들썩이는 어깨 때문에 얼굴을 기댄 핸들이 잘게 진동할 정도였다.

“하하. 선생님. 누가 연애하자고 했어요?”

생긴 것처럼 순진했다. 서로 몸이 환장하게 잘 맞으니 섹파나 하자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니. 이러고서 스물둘이나 먹다니, 여태 보지가 달린 걸 잘도 숨겼다 싶었다.

“음…….”

예담은 그렇게 되물으며 은찬을 한껏 부끄럽게 만들어 놓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른하게 눈썹을 끌어 올렸다. 예상치 못한 거절 때문일까. 제 안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으며 심장을 불규칙하게 두들기고 있었다.

단순한 열패감이라기엔 석연찮았다. 일렁이는 감정은 쉽게 정의되지 않았다.

뭐지. 이게……. 그를 알게 된 이후부터 널뛰던 기분이 오늘따라 더욱 큰 변위를 오르내렸다.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닌 귀갓길 내내 이어지던 깊은 사념은 결국 귀결을 내지 못한 채 멈추었다.

하…….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 건지. 예담이 헛숨을 터뜨리며 차에서 내렸다. 뜻하지 않게 구겨진 자존심 때문이겠거니, 대충 결론짓고 떠오르는 의문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어차피 다시 겪지 않을 문제였다.

* * *

예담은 귀두 끝만 구멍에 걸쳐 놓은 채로 엉망이 된 은찬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 위에 점점이 맺힌 땀방울과 더불어 제 손가락과 고간이 남긴 불그스름한 자국이 그를 뒤덮고 있었다. 오롯이 제가 남긴 흔적이었다.

“…….”

제 손안에 쥐어진 그의 모습에 주체할 수 없는 성욕보다 더 큰 무언가가 치밀었다. 쾌감과는 여실히 방향을 달리하는 묘한 감정이었다. 시발. 또……. 언젠가 느껴 본 적 있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감정과 결이 비슷했다.

그날 이후로도 매번 알 듯 말 듯, 애매하게 가슴을 간질이던 감정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작은 옥탑방 창문을 통해 따사롭게 들이치는 햇살이 두 사람을 감싸고, 예담은 늘 하듯 한바탕 몸을 접붙이고 나서 은찬을 제 품에 안고 있었다. 워낙에 침대가 작은 덕분에 그의 집에서는 전혀 어색한 자세가 아니었다.

팔을 뻗어 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몸을 바투 끌어안다시피 하고는 제게 시달려 지친 은찬이 눈을 감고 달뜬 숨을 내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이잉, 정적을 깨뜨리는 진동 소리에 얌전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번쩍 올라가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충만하게 채워지던 품 안이 휑하게 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예담은 뜨끈하게 붙어 오던 체온이 사라지자 아쉬워 그를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은찬은 상반신만 세운 채 저와 같은 기종의 휴대폰을 붙들고 떨리는 손으로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다.

“……공모전.”

액정으로 눈부신 일광이 반사된 탓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예담은 메시지를 확인하는 그의 표정만 연신 살폈다. 지속되는 침묵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던 찰나.

“이, 입상했대……. 와!”

그의 작은 얼굴 전체가 웃음으로 물들었다. 연이어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 수민아. 지금 확인했어?”

환하게 웃음 짓던 그가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더더욱 활짝 흐드러지게 웃었다. 아마도 같이 공모전을 준비했다는 전수민의 전화를 받고 한껏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평소라면 성가시다고 생각했을,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고음의 목소리마저도 거슬리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천천히 누르며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예담은.

“……그래. 그럼 그날 저녁에 보자. 응응.”

여전히 저를 내버려 두고 바쁜 은찬을 고요히 응시했다.

하늘거리는 머릿결이 흩날릴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순한 눈매가 접히면서 커다랗고 색이 옅은 눈동자가 모습을 감추었고, 부드러운 뺨은 한껏 복숭앗빛을 머금은 채 위로 올라붙었다. 머금으면 단내가 나는 도톰한 입술이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연신 종알거리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예담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따라 웃고 있던 제 모습을 깨달았다. 잇따라 숨을 멈추었다.

“…….”

그를 알고 난 이후부터 희뿌연 안개 속에 둘러싸여 흐릿한 잔상을 남기던 것의 정체가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이건…… 이 감정은…….

〈뒷과외〉 Hidden track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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