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4/5)

두툼한 손가락은 따끈한 찻잔 옆 테이블을 두드리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따각, 따각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손가락의 소리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는 향을 음미하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 두었다. 도자기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에 승호는 살짝 눈을 치켜들었다가 다시 관심을 껐다.

찻잔의 브랜드가 어디였는지, 잎차가 어떤 차였는지 듣고도 기억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권승호는 티타임 이라는 취미를 가진 적이 전혀 없었다. 명절에도 일가친척들이 모여 고상하게 차를 이야기할 때 승호는 그사이에서 시큰둥하게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 내는 제 형 권승주를 보며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던 적도 얼마나 많았던가.

승호는 그렇게나 과한 관심과 기대를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뭣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야 부러움을 느꼈다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크자 농담으로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 일가친척 중 유일하게 자수성가를 이뤄 낸 아버지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호의를 표현했다. 먼 친척, 가까운 친척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봐도 번듯한 장남인 권승주에 대해 다들 과한 관심과 말을 한마디씩 얹고는 했었다. 만나는 사람은 없느냐. 언제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 사업을 이을 생각이냐 등등.

그 순간 승호는 깨달은 바가 있어 속으로만 신음성을 흘렸다. 아마도 그게 오늘 이 티타임의 시발점이었으리라. 얼마 전 친척들이 한데 모였던 자리에서 요즘 발걸음이 뜸한 권승주의 이름이 안 나왔을 리 없었다. 대번에 구겨지는 둘째 아들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못 본 척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차 마셔 봐. 좋은 거야.”

“나 이런 거 몰라. 엄마 많이 마셔.”

“얘는 참, 승주는 그래도 곧잘 알아차리더라.”

이럴 줄 알았다.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방향을 형으로 향하는 어머니를 보며 승호는 미리 대비 했다. 목선에서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는 엄마의 헤어스타일은 더할 나위 없이 고상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집에서 아들인 자신과 차를 마시는데 이렇게나 거창하게 준비를 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응접실의 낮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엄마의 화장기 있는 얼굴을 봤을 때 이미 도망쳤어야 했다. 뽀얀 진주색의 찻잔이 다시 한 번 움직이고, 그녀는 사교적인 톤으로 승호에게 말을 던졌다.

“차 들어온 거 승주도 보내 줘야겠다.”

“형이 잘도 마시겠다.”

“직접 가서 전해 줄래?”

“사람 시켜서 들려 보내.”

승호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 집에 자신이 가서 뭐 얻을 게 있다고. 있는 사람들은 이럴 때 안 보내고 뭐하자는 건지. 툴툴거리는 승호의 태도에도 엄마는 지나가는 말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꽤 상심한 듯 목소리가 작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서 보든가.”

“너희 형 요즘 문도 안 열어 줘.”

“그럼 내가 어떻게 들어가?”

“네 친구도 거기 있잖니.”

승호는 대놓고 맞은편의 엄마에게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러나 그녀는 명백한 거부 반응에도 가늘게 뜬 눈매를 휘며 다시 권유할 뿐이다.

“엄마는 우리 승호만 믿을게.”

“거기 일하는 아주머니 있잖아. 물어봐.”

“말도 마렴. 승주가 입도 뻥끗하지 말랬다고 아무 말 안 하더라.”

작게 입술을 비죽이며 대답했지만 승호도, 그리고 승호의 엄마도 그게 오히려 좋은 반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에서 재산 깨나 있는 집 치고 문제가 없는 집은 드물었고 그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입을 단속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라마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사람 사는 바닥이니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사람을 쓸 때 가장 첫 번째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입이 무거운가에 대한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작 그녀도 승주의 집을 드나드는 아주머니가 묻는 대로 술술 이야기를 한다면 바로 사람을 갈아치웠을 것이다.

전에 없이 경계가 올라간 첫째 아들의 집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결국 눈앞의 둘째 아들 뿐이었기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눈매를 곱게 휘었다. 간간히 찾아가는 것에 대해 뭐라지 않던 승주가 갑자기 왜 경계를 하기 시작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승주가 끼고 도는 것을 공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마침 그게 그녀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이 다행이었고.

“나 가면 뭐 해 줄 거야.”

“엄마 카드 줄 테니까 알아서 긁고 와.”

그 둘째 아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말이 통하는 아들이었다. 적당히 구슬릴 만한 수준이기도 했고. 차를 눈짓하는 엄마의 손짓에 승호는 식은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찻잔을 내려두었다. 연갈색의 찻물은 입 안에서 풀 맛만을 남기고 넘어갔다.

엄마에게 뭘 해 줄 거냐고 묻기는 했지만 사실 권승호는 딱히 갖고 싶은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스스로의 호기심도 불쑥 치밀어 충동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더 맞았다.

그 집에서 제멋대로 살고 있을 형제보다는 이준영이 궁금했다. 요즘의 이준영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그게 진심으로 궁금했다.

옥색 보자기로 꼭꼭 싼 다구와 차를 받아 들었지만 승호라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널찍한 침대에 누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있었다. 어차피 제 형인 권승주는 절대 그 집의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을 실천하며 승호는 제 엄마의 똑똑함에 약간 감탄했다. 확실히 이 방법이 제일 빠르고 안전할 듯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앞세우는 방법 말이다.

문자로 점심 약속을 잡은 승호는 다음날 논현동 권승주가 살고 있는 빌라의 현관 앞에서 30분도 넘게 기다렸다. 호수를 알려 주면 연결해 주겠다는 경비의 제안도 거절하고는 열리는 유리문의 바로 옆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나오는 주민마다 한 번씩 눈길을 주고 지나가기를 세 번째.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승호도 아는 얼굴이 나왔다. 무심코 옆을 본 준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승호에게서 반걸음 물러섰다.

“뭐야.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너 기다리지. 자자. 다시 들어가자.”

“들어가? 밥 먹자며.”

사람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닫히지 않은 문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승호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왔고 준영은 팔이 잡힌 채 얼떨결에 다시 들어온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버튼부터 누르고는 기대 서 있는 승호를 이상스레 보며 준영이 다가왔다. 그 표정에 승호는 오히려 당당하게 물었다.

“왜.”

“너 형한테 온다고 말하고 왔어?”

“엄마가 말했을걸. 심부름. 이거 봐. 가져다주랬어.”

코앞까지 들어 올려 흔들어지는 상자를 보면서도 준영은 마음속의 찝찝함이 다 가시질 않았다. 손에 들린 물건은 확실히 승호가 들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곱게 포장한 보자기 꾸러미라니.

하지만 방금 전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승주가 무슨 말을 했던가. 전혀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승호를 보러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만을 지어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인데 지금 승호와 집을 같이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불편했다. 진짜 연인 사이가 되기 전부터 두 사람이 사귄다고 단정하다시피 했던 사람이 권승호 아닌가. 그러나 승호에게 물으려던 말은 승호의 눈동자가 얼굴을 훑어보는 순간 증발했다. 어디를 훑어보는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너 어디 맞았냐?”

“계단에서 굴렀어.”

“어디 계단.”

“학교. 술 먹고.”

“먹지도 못하면서. 작작 좀 먹지 그랬냐.”

어디서 주먹다짐을 하고 다닌 적이 없던 이준영이었기에 승호는 순순히 대답하고는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탔다. 순간 식은땀이 난 듯 후끈해졌다가 식는 몸을 느끼며 준영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시간이 지나 옅어진 자국이 다행이었다. 검푸른 멍자국마저 빠져 흐릿한 자국은 선크림과 비비 크림을 잘 바르면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혹시 알아볼까 싶었건만 단번에 짚어 낸 승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찰나, 짧은 거리를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멈춰 섰다. 준영은 방금 전 나왔던 현관 앞에 다시 서 승호를 한 번 돌아봤다. 승호는 어서 문을 열라는 듯 권유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그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며 준영은 도어록을 누르는 대신 천천히 벨을 눌렀다. 선뜻 승호를 집 안에 들이기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명랑한 벨 소리가 울리고 한참 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가벼운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현관이 열렸다. 주말을 맞아 편안한 옷을 입고 있던 승주는 준영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그 뒤의 승호에게 천천히 눈길을 주었다. 미소가 비뚤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더 문을 크게 열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승호에게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이거 가져다주래.”

그러고 승호는 옥색의 꾸러미를 흔들었다. 그것을 보고 승주는 눈썹을 찌푸렸다.

“두고 가.”

“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 엄마가 잠깐 보고 오랬어. 요즘 아무도 안 들인다며.”

“가라고 했다.”

틈 하나 없는 목소리에 준영은 제가 잘못한 것인가 주저하며 약간 비켜섰다. 승호는 그런 두 사람의 모양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다음 순간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간다 가. 준영아. 가자. 밥 먹으면서 우리 형 사고 쳤던 거 이야기해 줄게.”

“뭐?”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승주였다. 준영은 그 눈치를 힐끔 보고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앞머리가 살랑거릴 만큼. 무슨 말도 못하며 현관 뒤로 숨을 기세의 준영을 보고 괜히 승호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형 이번에 또 뭐 했다며?”

“뭐가.”

“엄마가 그러던데. 장 비서님이 형 사고치고 사람 쓴 거 말해 줬어.”

가만히 듣고만 있는 준영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승주는 그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언제.”

“이번 달.”

“장 비서님이 잘못 전달하신거야.”

“그래. 나는 엄마가 잘못 들은 거 준영이랑 이야기할게. 형 없는데서. 가자.”

승호는 꽤나 호기롭게 말하며 현관에 서 있는 형에게 보따리를 들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지 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주는 옆에 서 있는 준영을 먼저 돌아봤다. 이상하리만치 맹렬한 시선을 받으며 준영은 이제야 후회를 했다. 역시 함께 올라오는 게 아니었다고.

“승호랑 갈 거야?”

“어… 약속은 했으니까 가야 할 거 같은…데요.”

“이거 빨리 받아. 나 준영이랑 놀러 갈 거야.”

쓸데없는 재촉으로 끼어드는 승호를 돌아보고는 다시 준영을 보고, 승주는 천천히 손을 들어 승호가 내민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듯 움켜쥐고는 집 안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들어와.”

“왜? 준영이랑 둘이 놀게.”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잇새로 하는 인사말은 목소리와 전혀 달랐지만 일단 승주는 잡고 있던 문을 놓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승주의 뒷모습을 보며 준영은 따라 들어가도 될지 잠깐 고민했다. 그 와중에 넉살 좋게 들어가려는 승호를 붙잡고는 속삭이듯 물었다.

“너 진짜 왜 왔어?”

“엄마가 형 잘 지내나 보고 오래서.”

그리고 나는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그러나 승호는 이 말은 굳이 이준영에게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마저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승호는 옆에 서 있는 준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스치듯 물었다.

“혹시 형이 때린 거 아니지?”

“뭐?”

“형이 나는 패거든. 아니면 됐어.”

그러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승호가 한 걸음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괜히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준영은 그런 승호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못하고 있다가 거실 소파에 길게 기대앉은 승주의 옆에 떨어져 앉았다. TV에서는 외국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늘 잔잔한 영화를 틀어 두던 것과 달리 요즘 승주는 국제 사회 문제에 지극히 관심이 많아 보였다.

승주는 내전 소식을 전하는 금발의 앵커보다도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승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옆모습을 보고는 준영이 스스로 찔려 먼저 사과했다.

“승호가 들어올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한 번쯤 저럴 줄 알았어.”

“진짜요?”

“대충은.”

괜히 풀이 죽은 기색의 준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려다가 승호가 그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다시 손을 거뒀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은 꽉 쥐다 못해 마디가 희게 질렸다.

불편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승주를 보고 준영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승호가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눈치가 없는지. 자리에 앉고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이리 저리 둘러보기까지 하자 승주는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뭘 그렇게 봐. 다 봤으면 나가.”

“에이. 너무한다. 나 형 집 처음 왔는데 이럴 거야? 준영아, 우리 뭐 먹을까. 치킨?”

“나는… 그냥 아무거나….”

넉살이 좋다 못해 넘쳐흐르는 대사들에 준영은 목을 움츠렸다. 치킨이라니. 이 집에서 단 한 번도 입에 넣어 본 적 없는 메뉴였다. 고소하고 기름기 넘치는 치킨의 냄새가 과연 이 집과 어울리기는 할까. 거실의 검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치킨의 모양을 상상해 봤지만 도저히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승주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했는지 인상을 팍 썼다.

“무슨 말을 듣고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어. 형 잠깐. 엄마 전화다. 나 전화 받고 올게. 치킨 시켜 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승호는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베란다로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은 그 방정맞은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승호의 손에 꼭 쥔 휴대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전화가 오기는 온 모양이었다. 테라스의 덱을 밟고 달려 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승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를 꾹 짚었다. 신경 거슬리게 하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저걸 진짜.”

“형. 앞으로 승호 같이 들어온다고 하면 안 들어올게요. 절대로.”

“너 때문 아니야. 내가 해 둔 게 있어서 그래.”

“어떤 건데요?”

“내가 지난주에 말한 거.”

지난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찬히 기억을 되짚던 준영은 떠오른 것이 있어 난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억났냐고 묻는 승주의 표정은 반대로 짓궂었다.

***

- 승주 집 들어갔어?

“응. 엄마가 시키는 대로 집 이 잡듯이 뒤졌네요.”

- 뭐 안 보이니?

“대체 뭐가.”

- 그. 승주 침실은 들어가 봤어?

“나 거기 문 열고 들어갔으면 형이 니킥으로 내 목 부러뜨렸을 거야.”

- 서재는?

“별거 없던데. 책상 있고, 책 있고, 뭐.”

- 서랍 열어 봤어?

“엄마. 엄마 둘째아들 이제 보기 싫어? 내가 그렇게 뒤지고도 살아 돌아갈 거 같아?”

- 그래. 그건 그런데… 미국 뭐 그런 거 없어? 몰래 어떻게 잘해 보지 그랬어.

“아 몰라. 그럼 엄마가 직접 오든가.”

잠깐 엄마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사이 승호는 테라스 밖의 풍경을 내다봤다. 옆 저택의 잔디밭에 꼬리를 흔들며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골든 리트리버일까. 종류를 생각하느라 정신 팔려 있는 와중에 엄마가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 어때?

“뭐가.”

- 너희 형.

“잘 지내는데.”

- 그리고… 그 준영이는?

“걔도 잘 있는 거 같아.”

- 그게 할 말이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 어떻게든 해 봐.

“엄마 아빠도 어떻게 못 하는걸 내가 무슨 수로.”

- 너희 형 미국 알아본대.

이건 좀 뜻밖의 이야기라 승호도 휴대폰을 귓가에 가까이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 회사는?”

- 대학원 간단다. 어릴 때는 가라고 해도 안 가더니 이제 가는 이유가 뭐겠어.

“준영이랑 같이 간대?”

- 알아보는 단계라 나도 몰라. 근데 안 봐도 뻔하잖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승호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미국. 대학원. 준영이….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으으음, 하고 신음성을 길게 내던 승호는 빈말처럼 툭 던졌다.

“형 진심인가 봐.”

- 너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아니. 그렇잖아. 난 솔직히 아빠가 형 패기 전까지 무슨 일 있었는지도 몰랐단 말이야. 그렇게 티도 안 나던 사람이 저러는 걸 어쩌라고.”

- 그래서. 그냥 둘까? 어휴 속 터져.

“엄마도 준영이 이용할 생각해서 나 밀어 넣은 거잖아. 왜 나한테만 그래?”

- …….

“이제 형한테 준영이가 약점인 거 엄마도 써먹었으면서.”

- 아. 됐어. 그만 말해. 그만.

“근데 어떻게 할 거야? 미 대사관에 아빠가 말하면 뭐 돼?”

- 그랬으면 진작 너부터 미국 보냈겠다.

“형 이미 자기 거 들고 나와서 회사 다니잖아. 방법이 뭐 있나.”

승호의 말에 다시 엄마는 말이 없어졌다. 승호는 테라스의 난간을 톡톡 두드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높은 빌딩은 없는 고급 주택가라 그런지 구경할 것도 많았다.

승호라고 해서 형이 뭘 들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과 차는 부모님께 받았고, 주식 지분이 어느 정도 있고, 유동 자산은 얼마나 될까. 건물도 하나 넘겨줬던 걸로 아는데. 물론 집의 재산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지만 승주는 별 미련도 없어 보였다. 집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듣지 않는 대신 깔끔하게 포기한 것으로 보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권씨 일가의 장남 권승주는 제 알아서 잘 살고도 한참을 잘 살 인물이었다. 오죽 틈이 없으면 가족들마저도 틈을 못 찾겠는가.

승호는 여기서 실질적인 문제가 떠올라 테라스를 탁 내리쳤다.

“엄마. 형이 회사 안 물려받으면 나 어쩌지. 나 회사 전혀 몰라.”

- 어이구 속이야. 너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엄마 아빠가 형만 그런 거 알려 줬으면서 그런다.”

- 너 어렸을 때 공부 좀 했으면 우리가 진작에 너 공부 시켰어!

“됐어. 형 하는 거 보면 난 싫더라.”

- 어휴. 죽자 죽어.

앓는 소리를 내는 엄마의 목소리에도 승호는 개의치 않고 웃다가 혼자 심각해졌다. 그래, 제 형 놈이 이준영에게 진심인 건 그렇다 치고. 이준영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리를 굴려 봤지만 썩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우유부단한 성격에 제 형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크게 할 수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지 싶어서.

무엇보다 진심이기는 할까. 그 진심은 어느 깊이일까. 그저 형이 말하는 걸 맹목적으로 따르는 거라면. 지금까지처럼 그랬듯이 말이다.

괜한 것을 떠올린 승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엄마의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기 시작했다.

승호는 그 후에도 한참을 테라스에서 서성거렸다. 집 안으로 다시 들어온 것은 따끈해진 휴대폰만큼이나 머리카락이 햇볕을 받아 뜨거워진 후였다. 응 응, 하며 말을 넘기던 승호가 끊길 줄 모르는 전화에 대고 먼저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서야 전화는 끊어졌다. 들어오면 카드고 뭐고 없다며 큰 소리를 치는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크게 괘념치는 않았지만 막상 준다는 카드를 안 준다니 또 섭섭하기는 했다. 그렇게 입맛을 다시며 거실로 다시 들어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는 두 사람은 아직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소 자세는 바뀐 모습으로 말이다. TV의 볼륨은 잔잔히 낮아졌고 준영은 등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 반쯤 졸다시피 앉아 있었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광경은 제 형인 권승주가 그런 준영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지나치게 생소한 광경에 그는 눈을 한 번 비비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준영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멍청하게 서 있는 승호에게 말했다. 잠든 승주 때문인지 목소리가 작았다.

“전화 다 했어?”

“형은 잘 거면 들어가서 자지 여기서 이러고 뭐하냐.”

낯간지럽게, 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정작 제 다리를 내주고 있는 준영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라서.

“너 뭐 뒤질지 걱정된다고 안 들어가다가.”

“내 치킨은.”

“알아서 시켜 먹으래.”

“…그래? 우리 형 사람 됐네.”

당장 꺼지라고 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의외였다. 승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제 형의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준영도 다시 봤다. 무표정한 얼굴이 뭘 보냐는 듯 뚱했다. 기가 막혔다. 승주를 볼 때는 뭐 뺏긴 강아지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주제에 제 표정이 어떤 줄은 알까.

괜히 끼어든 듯 불편해진 승호는 소파에 앉지 않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 간다.”

“치킨 먹는다며?”

“다음에. 괜히 움직이지 마. 저 인간 깰라. 갈게.”

“다음에는 밖에서 보자. 제발.”

“알았어.”

눈에 띄게 안도하는 준영의 모습을 보고 승호는 어이가 없다시피 했다. 이젠 아예 숨길 생각도 없다 이거지. 하지만 무슨 말을 더 얹기도 싫어 거실을 가로질러 나갔다. 현관에서 나가기 전 한번 힐끗 뒤돌아보기는 했다. 준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준영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제 형을 보고, 아무런 할 말이 없어 자리를 떴다. 집에서조차 흐트러진 모습이 없던 권승주였다. 그런 승주가 준영에게 기대듯 누워 있을 줄이야. 차라리 그 반대면 모를까.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승주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갔어?”

“갔어요.”

이렇게 대답하던 준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덧붙였다.

“민망해 죽겠다.”

“승호 어차피 다 알아.”

“그래도요.”

“이렇게 눈치 안 주면 안 갔을 거야.”

“난 앞으로 몰라요.”

“집이나 갈 것이지 무슨 전화를 한다고.”

“승호 집에서 온 전화였어요?”

“응.”

“말소리만 들리고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던데.”

“나는 무슨 말인지 아니까.”

“뭔데요.”

“유학.”

“그거였구나.”

방금 전 지나간 주제가 다시 돌아왔다. 승주의 말에 입술을 오므렸다 펴며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가게요?”

“일단 생각해 봐. 바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야.”

“네. 생각이요. 생각. 엄마한테도 물어봐야죠.”

준영에게는 아직도 얼떨떨한 일이기만 했다. 미국이라니. 생전 유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일단 승주와 함께 가는 것 자체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 아니던가. 이제 겨우 연애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준영에게는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 시원찮은 반응에 승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혼잣말이긴 한데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다 들을 정도의 크기였다.

“책임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아. 그 말 또.”

“그랬잖아.”

“형 안 자요? 자는 척한 거야?”

이제는 빠져나가는 솜씨도 꽤 늘었다. 금세 말을 돌리는 것을 보고 승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말뿐이 아닌지 준영은 제 무릎 위에 웃는 표정을 꼼꼼히 살핀다. 승주는 그런 눈동자를 마주했다. 마주 봤더니 이번에는 민망한지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게 괜히 아쉬웠다.

맹목적인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승주는 새로운 꿈을 가지고 싶어졌다. 다정함, 책임감, 애정. 그러한 감정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이 감정들을 준영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짧지 않은 삶 동안 지나치고, 또 교활하게 피해 왔던 감정이었다. 이제와 그것을 다시 마주하려 돌아섰다. 이 과정은 승주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 주는 일이기도 했다. 과거의 자신을 모조리 부정하는 일이므로. 하지만 이제 와 어쩔 것인가. 고통도 그저 순수하게 감내하기로 했다. 이준영과 함께 있으면 늘 그랬다. 현실 같지 않게 행복하다가도 가슴의 한구석이 싸하게 아려 왔다. 그것이 힘들어 멀어지려 한 적도 있었다. 그래 봤자 더한 고통만 온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았다.

승주는 가만히 손을 들어 준영의 얼굴을 더듬어 만졌다. 덧그리고, 확실하게 새기려는 듯이. TV 브라운관의 색이 비치던 눈동자가 찬찬히 아래를 향한다.

“왜요?”

“생각 중.”

“무슨 생각이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

거기서 준영은 눈만 내리고 있던 자세에서 고개를 떨어트려 승주를 마주 보았다. 다소 뚱한 표정이었던 얼굴은 설핏 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워졌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가지런한 이가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항상은 아니어도 대부분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항상은 아니야?”

“그렇다고는 말하기는 좀….”

뒷말을 흐리며 준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TV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듯하더니 다시 TV 화면으로 빠져든다. 승주는 그런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 안에 담았다. 갸름하고 둥근 턱 선도, 입술 선과 반듯하게 뻗은 콧대, 새카만 눈동자까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것을 욱여넣었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는, 그런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쉬이 나오지 않을 답이라는 것을 알아 스스로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결심을 혼자 가슴에 품고 승주는 뻑뻑한 눈을 감았다. 뒷목을 따끈하게 데우는 허벅지에 기대 잠에 빠져들었다.

긴 하루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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