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날로부터 2개월 전
전날 모의고사를 치르고 한껏 기분이 오른 현준은 지훈과 가볍게 한잔하려다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지난번 일을 마음에 담아 둔 지훈은 술이 들어가자 은호를 들먹이며 분이 풀릴 때까지 화를 쏟아내었고, 현준은 대역 죄인처럼 고분고분 말을 들어 주느라 원치 않은 술값을 전부 계산해야 했다. 마지막에는 분위기 있는 칵테일 바까지 갔는데, 이미 3차인 데다 머리끝까지 술에 취해 얼마를 긁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깨질 것처럼 쑤시는 머리통을 붙잡고 잠에서 깬 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찾았다. 어제 2차에서만 이미 10만 원을 넘겼는데 칵테일 바에서 얼마를 썼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아…….”
이마에 손을 짚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현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74,500원. 사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달 카드 사용 내역이었다. 지훈과 연애를 하며 물 쓰듯이 쓴 카드 값이 이미 140만 원을 넘겼다.
은호에게 받는 생활비로도 지훈과의 연애가 감당이 안 되어 월세로 받은 돈까지 썼지만, 그 액수마저도 넘어섰다. 마이너스 통장 잔고를 최대한도로 싹싹 빼 쓴 것도 지난달이 마지막. 하필 이 시점에 은호에게 걸려 가지고……. 현준은 최대 물주를 놓쳐 너무나도 아깝고 아쉬웠다.
해장으로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싶어 주방으로 걸어간 현준은 비어 있는 찬장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그 돈을 왜 쓴 거야. 두피를 사정없이 긁으며 뒤늦은 후회를 해 보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리 고무줄이 다 늘어져 엉덩이에 간신히 걸쳐 있는 트레이닝팬츠를 대충 끌어 올리던 중 허벅지에서 얕은 진동이 울렸다. 대출 광고인가 싶어 차단을 하려고 화면을 연 현준은 집주인의 이름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번 달도 밀렸는데 언제 입금할 거요? 그리고 계약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방 빼 줘야겠어요. 새로운 세입자 구할 거니까. 오전 8:46
순간 육성으로 욕이 터졌다. 코딱지만 한 집 가지고 갑질한다고 씩씩거려 보지만 닥친 현실은 암담했다. 무직 상태라 흔한 신용 대출마저도 불가능했고, 남은 거라고는 카드론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월 이자가 장난이 아니라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둔 상태였다.
현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를 눌렀다. 최대한 불쌍한 말투로 사정사정해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주인아저씨 안녕하세요. 미도 빌라 304호 세입잔데요.”
공손하게 시작해 보지만 상대는 이미 마음이 떠난 건지 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변명으로 넘어가려 하나 한번 들어나 보자는 느낌마저 들어 현준의 등이 절로 둥글게 말렸다.
“정말 죄송한데, 제가 공부를 하느라 돈이 없어서요. 이번 달도 보증금에서 깎으면 안 될까요?”
- 총각, 보증금이 부족한데 무슨 소리야. 매년 야금야금 빼 먹은 건 기억 못 해? 그리고 지금 석 달째야! 이러려면 이번 달에 방 빼!
벼락같은 호통에 현준이 움찔했다. 집주인은 이미 봐줄 만큼 봐주었기 때문에 더는 물러서지 않을 거라며 강하게 압박했다.
현준은 졸지에 사면초가에 놓였다. 자금줄로 여긴 은호가 빠지며 경제적인 압박에 직면하자 머리가 어수선했다.
사실 은호 몰래 바람피운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은호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현준은 이미 작년 초에 다른 사람과 만났었다. 지훈과 마찬가지로 같은 공시생이었고, 그가 현준보다 먼저 시험에 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 당시에도 매달 밀려들어 오는 카드 값을 막느라 은호에게 월세와 생활비를 받고도 보증금을 까먹었는데, 그때 일부 사용한 걸 놓치고 있었다. 현준은 목소리를 쥐어짜며 최대한 불쌍한 척 굴었다.
“주인아저씨, 사정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합격하면 밀린 것까지 한 번에 입금할게요.”
- 합격을 할지 말지 나는 모르겠고, 이번 주 안으로 입금 못 하면 방 빼서 나가요. 아, 그리고 언제 집에 있어요? 다음 세입자가 집을 보고 싶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런 후진 집에 누가 들어온다고.
현준이 이 집을 구하게 된 건, 도심치고 근처 다른 빌라보다 10% 정도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는데 살다 보니 월세가 저렴한 곳은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언덕 끝자락에 위치해 여름에는 뙤약볕에서 등산하는 기분이고, 겨울에는 빙판길에 미끄러져 자칫 허리가 나갈 수 있는 위험한 위치였다. 거기다 4년 가까이 사는 동안 관리를 하기는커녕 시설 정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늘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악덕 집주인이 있는 곳에 누가 들어온다고. 현준은 코웃음을 쳤다.
“오전에는 주로 집에 있는데요.”
- 그럼 한 시간 뒤에 갈게요.
“네? …네.”
겁주는 말이 아니었어? 단순 경고라고 생각한 현준은 한 시간 뒤에 방문한다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던 현준은 아닐 거라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씨발, 이런 낡아 빠진 곳을 누가 오겠다는 거야, 거짓말도 작작 해야지.”
아니야, 그럴 리가. 앞집도 월세 빠지는 데 한참 걸렸는데 그럴 리가 없어. 현준은 한껏 비웃다 어수선한 집 안을 주욱 훑었다. 지난주에 지훈과 뒹군 이후 주로 밖에서 만나느라 집 안이 엉망이었다.
“됐어, 누구 좋으라고 치워.”
입을 쩝쩝거리던 현준은 지갑을 챙겨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지금은 비록 컵라면에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때워야 하지만 곧 이 생활은 깔끔히 청산될 거라고 자신했다.
어제 마지막으로 본 모의고사가 합격 커트라인을 훨씬 넘어섰다. 공시 생활 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모의고사에서 죽을 쒀 불안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거란 자신감이 굽은 두 어깨를 툭툭 쳤다.
합격만 해 봐라,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 제발 있으라고 붙잡아도 나갈 테니. 현준은 이를 갈며 근처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편의점에서 아침 식사를 때우고 집으로 돌아와 행정법총론을 펼쳐 든 현준은 형광펜으로 여러 번 덧칠해가며 마지막 스퍼트를 향해 달렸다. 고지가 코앞이다. 하루빨리 이 생활을 청산하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한참을 열 올리며 공부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진짜로 집을 보러 왔다니. 그래, 정나미 뚝 떨어지게 해 줄게. 현준은 후줄근한 차림새 그대로 뭉그적거리며 걸어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방문객은 예상대로 공인중개사였는데, 그 뒤에는 상반신 전체를 뒤덮은 까만 비늘의 용 문신이 목과 손등까지 이어져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현준은 공인중개사와 함께 나타난 남자의 덩치와 인상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뒷걸음질 쳐 신발장에 등을 딱 붙였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전형적인 깍두기. 한눈에 봐도 조폭처럼 보이는 그가 음침한 목소리로 구경을 하겠다며 거실과 방을 쭉 살폈다. 현준은 이 사람이 거절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으며 짜둔 시나리오는 버틸 때까지 버텨 집주인에게 이사비를 받고 나오든가, 아니면 소송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깍두기가 세입자로 들어온다는 건 예상치 못한 최악의 변수였다.
이자가 들어오겠다고 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 대만 맞아도 바로 나가떨어질 만큼 굵고 큰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단단해 보이는 얼굴은 맷집의 흔적인지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본 그가 현준을 노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섬뜩하던지 머리카락이 주뼛주뼛 서고 오금이 저렸다. 같이 온 공인중개사가 문을 나설 때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이 집이 마음에 들겠냐고. 공실일 때나 그럴싸했지, 돼지우리처럼 난장판인 데다 험난한 언덕길 끝자락에 있는 낡은 빌라를 누가 좋아한다고.
현준은 쾌재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돈이 없으니 이번 달에는 독서실을 포기하고 집에서 공부해야 할 참이다. 행정법총론을 다시 펼친 후 오답 노트를 옆에 붙였다. 평소처럼 페이지를 달달 외우며 빨간색 볼펜으로 줄을 긋는데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방금 본 세입자가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이달 월세 어쩔 거요? 이번 주까지 입금 못 하면 바로 짐 빼요. 여기랑 계약할 테니. 오전 10:21분
아, 절망감 가득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깡으로 버티려던 마지노선마저 깍두기가 단칼에 쳐 냈다. 생각지 못한 대형 악재에 현준은 윗머리를 사정없이 흩트리며 짐승처럼 포효했다.
“아우씨, 하필 그때 찾아와서 이 사달을 만들어.”
현준은 끝까지 은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발밑에서부터 좀먹듯 번지는 불안감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
패시브 운용팀에서 들어온 ETF(Exchange Traded Fund: 상장지수펀드) 리스트를 취합하던 은호는 파티션 안으로 침범하며 들어오는 까무잡잡한 손등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 비서, 전무님 호출. 지하 주차장에서 대기해요.”
윤재와 함께 이사급 회의에 들어갔다 나온 윤 실장이 얼른 내려가 보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은호는 영문을 몰라 윤재의 오후 스케줄을 확인해 봤지만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고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저 멀리 자신의 데스크로 걸어가고 있었다. 은호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서류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이제 운전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3주 만에 운전대를 잡은 은호는 휴대폰으로 윤재의 오후 스케줄을 다시 확인했지만 추가된 외부 미팅은 없었다. 입력이 덜 된 건가 싶어 통화 목록에서 한 비서를 찾았다.
“한 비서님, 전무님 오후 스케줄 없지 않나요?”
- 어, 없는데?
“네, 알겠습니다.”
개인 약속인가. 손끝으로 눈썹을 문지르던 은호는 출입문을 통과하는 윤재를 보고 시동 버튼을 눌렀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외부 미팅 때는 주로 뒷좌석에 앉는 윤재가 조수석에 앉자 느낌이 싸했다. 마치 근무 시간에 딴짓하기 위해 도망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게 뭐예요?”
촉이 너무도 정확했다. 그가 휴대폰 화면을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국내에서 개봉한 지 막 이틀 된 영화 티켓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왜? 설마 우리 둘이 지금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냐는 의미를 담아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자, 미지근하게 웃던 그가 손톱으로 상영 시간을 되짚었다.
“35분 후 상영이야, 서둘러야 해.”
그의 말대로 상영 시간까지 35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회사에서 10분 거리지만, 주차타워에 차를 세우고 영화관까지 올라가는 시간과 입장 전에 먹거리를 구매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려면 빠듯했다.
“차 막히면 좀 늦게 들어갈 텐데, 괜찮을까요?”
“막히면 다음 거 보지 뭐.”
근무 시간에 농땡이라니, 뭔가 이래도 되나 묻고 싶은데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다른 질문을 골랐다.
“갑자기 영화는 왜요?”
“남들 하는 거 하나씩 다 해 보려고.”
목을 조이는 타이를 풀어 뒷좌석에 던진 후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 옆으로 펼친 윤재는 무덤덤한 투로 말했지만 얼굴 위로 번지는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은호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슬며시 웃었다.
“그럼, 팝콘이랑 음료수는 제가 살게요.”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여유 있게 영화관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러 개의 건물이 연결된 복합몰 구조라 영화관까지 올라가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버벅대야 했다.
간신히 영화관에 도착한 두 사람은 티켓 발권기 근처에 있는 스낵코너에서 팝콘과 음료를 주문했다. 근무 시간 이탈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의 눈치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액션 좋아하는 거죠?”
“은호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가장 무난한 거로 고른 건데.”
은호는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잡식 취향이었지만 선혈이 낭자한 공포 영화는 굳이 돈을 주고 보지 않았다. 피를 보는 것 자체가 영 꺼림칙해 전쟁 영화도 피 튀기는 장면이 나올 때면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하는 장르예요.”
무언가를 같이 해 보려고 노력하는 윤재에게 따뜻한 마음이 스며든다.
“기분 푸는 데는 액션만 한 게 없죠.”
은호가 엄지를 척 하니 내밀자, 손으로 하관을 가리며 웃던 그가 은호의 손에서 음료수 캐리어를 빼앗고 대신 가벼운 팝콘을 건넸다. 은호는 그가 애 취급을 해도 그저 수줍게 웃고 말았다.
영화관을 얼마 만에 오는 거더라. 팀 회식으로 왔던 마지막 기억마저도 2년 전의 일이라 모든 것이 흐릿했다. 현준과 연애를 시작하고 초반 두세 달은 인기 상영작을 모두 휩쓸 정도로 열심히 찾아왔었는데.
은호는 영화 중간중간 과거의 기억을 되짚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옆에 있는 윤재를 올려다보았다. 스크린에 몰입해 있던 그가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은호의 시선에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리더니 말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크린으로 눈을 돌리는 그를 따라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성큼 가까워진 틈으로 뜨끈한 열이 전달되었다. 뺨 위로 안착한 촉촉한 입술이 촉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 스크린을 쳐다보던 은호의 눈동자가 바르르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웃는 얼굴이 부드러운 색채로 물들었다.
영화관에서 나와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할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서울 도심이 한눈에 펼쳐진 전망 좋은 자리에서’라는 단서가 붙을지는 미처 몰랐다.
“여긴 프러포즈 하러 오는 곳인 줄 알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커플은 은호의 말대로 프러포즈가 한창이었다. 생화 가득한 테이블 위로 작은 보석함을 연 남성이 상대 여성에게 반지를 끼워 주는 다소 식상한 분위기랄까. 테이블마다 간격이 넓어 대화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지만 프러포즈를 받은 그녀는 남성의 말에 반응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러워요?”
은호가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자 윤재가 손가락을 튕기며 주의를 환기했다. 소리에 반응한 은호가 고개를 돌리자 윤재가 털털하게 웃고 있었다.
“부럽냐고요? 글쎄요.”
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막 나온 애피타이저용 수프를 떠먹었다.
“전망 정말 좋네요.”
한때는 저런 연인의 모습에서 미래의 자신을 떠올리며 흐뭇해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닥치지도 않은 먼 미래를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행복 회로를 돌렸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은호는 조심스러웠다. 자신과 상황이 비슷했던 현준마저도 몇 개월 만에 무덤덤해지고, 심지어는 마음이 변했는데 이 사람은 과연 얼마나 애정이 지속될까? 은호는 그가 퍼 주는 애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다가도 순간순간 삐딱선을 탔다. 사실 두려웠다. 또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온전하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게 됐다.
윤재는 은호의 마음을 이해했다. 준서와 헤어지고, 다가오는 사람이 모두 귀찮고 꺼려지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 시기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은호는 그 시간을 건너가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건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던 윤재가 무던한 목소리로 스케줄을 조정했다.
“다음 주는 저녁 미팅이 많은데, 혼자 움직일 테니 먼저 퇴근해요.”
“투자처 확인하시는 건가요?”
“관련 미팅도 있고, 주변 상황 좀 확인하느라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할 거 같아서.”
시간이 되돌기 전, 윤재는 정치권과 가깝지 않아 향후 진행될 정책 법안에 대해 놓친 이슈로 꽤나 애를 먹었다. 투자 운용본부와 주식 운용본부에서 정부의 정책 기조를 미리 전달받고는 있지만 정책 발표와의 텀이 굉장히 가까워, 최소 한 달 이상 멀리 내다보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는 최근 제주도 카지노 투자를 진행하면서 도지사를 통해 입법의 핵심 의원 두 사람을 소개받았다. 아무래도 연장자라 술자리가 길어질 확률이 높아, 은호를 데리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아스파라거스를 잘게 썰어 고기를 씹듯 오물거리던 은호가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스튜디오 G에서 우선주와 보통주를 합친다고 통일주권 메일이 왔던데요.”
“나스닥 상장 먼저 진행 후, 국내에도 우회 상장 고려하는 중이라 그래요.”
“스튜디오 G 대표님을 만나셨다 그랬죠?”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스테이크를 써느라 내리깐 눈썹이 길고도 짙었다. 조직 관리자는 일반 사원과는 달리 챙겨야 할 부분이 광범위했다. 리부팅은 할지언정, 전원이 꺼지지 않는 컴퓨터처럼. 은호는 그의 처진 눈꼬리를 보며 독백하듯 낮게 속삭였다.
“많이 피곤하겠다.”
도자기 접시를 긁는 나이프 소리와 피아노 배경음에 묻힐 줄 알았던 은호의 말을 들은 윤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금처럼 가끔 숨통 트이게 해 주면 되지.”
“……다음번엔 제가 준비할 테니, 시간만 알려 주세요.”
윤재가 한쪽 눈썹을 찡긋거렸다.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고 깍지를 낀 그는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래도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만 같았다. 그가 준비한 자리가 싫다는 게 아니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게끔 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자신이 준비하겠다는 건데 오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은호는 갑자기 바뀐 흐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윤재가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럴 리가요. 바쁘신데 저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은호는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눈꼬리를 접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를 고요하게 바라보던 윤재가 입술을 가늘게 펴며 곁에 둔 주스 잔을 손에 들었다.
“신경 쓰고 싶어. 이게 내 즐거움인데, 뺏으려 하네.”
“전무님.”
“?”
“어디 가서 개인 교습받고 오는 거 아니죠?”
풉, 사레가 들려 주스 잔을 급하게 내려놓은 윤재는 손으로 입을 막고 쿨럭였다. 깜짝 놀란 은호가 등을 두드려 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재는 손을 뻗어 괜찮다고 신호를 보내고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저는요, 전무님이 그동안 솔로였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대시는 꽤 있었어, 내가 귀찮아서 거절했지만.”
도드라진 눈썹 뼈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걸 지켜보던 은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감이 되면서도 마지막 말이 살짝 고민되는 것처럼.
“귀찮다…….”
“걱정 마요. 은호 씨는 내가 괴롭히고 싶어 죽겠으니까.”
“어떻게 괴롭힐… 아아.”
그가 짓궂게 툭 던진 말에 은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잔을 집으려다 실수로 접시에 비스듬히 올려둔 나이프를 건드려 소매에 육즙이 묻었다. 은호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졌다.
“저 이거 지우고 올게요.”
칠칠치 못하게 왜 이럴까. 은호는 의자를 살짝 뒤로 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화장실을 찾은 은호는 소매 단추를 풀며 빠르게 걸어갔다.
피와 기름얼룩이라 그런지 비누칠을 해도 애매하게 지워졌다. 마음이 급해 물을 세게 틀었더니 셔츠가 어느새 팔꿈치까지 젖어 들어갔다. 에라 모르겠다. 수전을 잠그고 곁에 있는 종이 타월을 여러 장 뽑아 젖은 셔츠를 닦아내는데 한 남자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호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어? 여기서 다 만나네.”
“아, 안녕하세요.”
지난번 밀실 경매에서 만났던 서인건설 강태오 상무.
윤재와 비슷하게 훤칠한 키에 둥그런 느낌의 부드러운 인상, 하지만 숨기지 못한 페로몬은 윤재처럼 우성 알파의 기운을 물씬 풍겼다.
어지간해서는 한 번만 보고도 얼굴과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은호가 오래간만에 실수한 인물이어서 이번에는 단번에 그의 정보가 술술 떠올랐다. 시큰둥하게 인사를 하고 타월로 셔츠를 계속 닦는 은호의 곁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제 갈 길 가면 좋으련만.
“애인이랑 분위기 잡으러 왔나 봐요?”
애인이라. 최윤재는 이미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은호 입장에서는 아직 조심스러운 데가 있어 그런 호칭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보고할 이유가 없어 비즈니스 느낌으로 잘라 말했다.
“전무님과 왔습니다.”
“최윤재 전무요.”
“네.”
“이상하네. 이런 곳에 올 분이 아닌데.”
이 사람은 누구길래 사정을 훤히 아는 것처럼 굴까.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어도 전 회사 전무님과 친분이 있는 데다, 윤재까지 알고 있는 눈치라 함부로 대하거나 대충 넘어갈 수 없었다.
그가 뱉은 말의 뜻을 파악하고자 멍하니 서 있는데, 남자가 먼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인사를 건네고는 은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고 가세요.”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끄덕인 은호는 다 젖어 버린 타월을 휴지통에 버리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윤재는 따분했던 모양인지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은호를 발견한 그가 눈매를 곱게 접어 웃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은호는 방금 전 태오가 했던 말의 의미가 궁금해 지나가는 투로 윤재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처음 오시는 건가요?”
“말했잖아, 남들이 하는 거 해 보겠다고.”
짧은 웃음 끝에 이어진 풍부하고 울림이 짙은 윤재의 목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은호는 옅게 미소를 흘리다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서인건설 강태오 상무 아세요?”
뜬금없는 이름에 미소를 띠던 그의 눈매가 반듯하게 펴졌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다시금 눈을 맞추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글쎄, 이름은 들어 봤는데.”
“따로 대화해 보신 적은 없는 거죠?”
“대화했으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지.”
“아…….”
“왜?”
윤재는 질문한 목적을 알려 달라며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 은호는 있는 그대로 말을 할까 하다, 지난번에 자신을 밀실 경매에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호되게 한 소리를 들은 윤 실장이 떠올라 대충 둘러댔다.
“어쩌다 알게 된 분인데, 그분이 전무님을 아는 거 같아서요.”
“그래?”
잘 모르는 상대가 자기를 안다는 말에 흥미가 생긴 윤재는 곧장 휴대폰을 열어 이름을 검색했다. 서인건설 강태오라. 느슨하게 뉴스와 칼럼을 뒤지던 윤재의 눈이 천천히 멈춰 한 곳에 멈춰 섰다.
그는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천천히 문지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화는 해 보지 않았지만 얼굴은 똑똑히 기억나는 인물. 윤재는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 그를 은호의 장례식에서 보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로 윤재는 급히 은호의 부모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인사 기록에는 그의 가족 연락처가 담겨 있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빈소를 마련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은호와 늘 붙어 있던 한 비서가 그가 쓰던 패턴 암호를 여러 번 본 기억이 있어 두 번 만에 휴대폰 잠금 화면을 열었고, 그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강태오는 연락을 주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보다 은호의 죽음을 빨리 알고 장례식까지 직접 찾아온 미스터리한 남자였다.
“잘 아는 사람이에요?”
당시 상황으로는 그 누구보다 은호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상대가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은호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아뇨, 전 회사 전무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는데, 저도 잘 몰라요.”
시큰둥한 은호의 반응을 보니 그쪽에서 일방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면 과거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면서 두 사람의 연결 고리가 약해진 것일지도 모르고. 윤재는 은호의 관심 없는 반응에 예민하게 세우고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후식 더 먹을래요?”
“아뇨, 더 안 들어가요.”
은호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망고 셔벗이 나왔다. 평소 본인의 취향인 셔벗이지만 은호는 티스푼으로 두어 번 떠먹고는 배가 부르다며 손을 뗐다.
“후식 배는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은호는 디저트라면 위를 늘려서라도 집어넣었지만, 이미 상영관에서부터 과식을 한 터라 더는 담을 공간이 없었다. 사실 영화관에서 팝콘을 집을 때마다 손등을 쓸어주던 윤재의 손길이 좋아 일부러 계속 먹었더니 한 통을 거의 혼자 먹어 치우게 됐다.
“그럼 일어날까?”
그가 키를 달라고 손을 뻗었다. 은호는 능청맞게 웃으며 도리질했다. 근무 시간을 이탈한 것도 찔려 죽겠는데, 그가 은호의 주 업무까지 넘보며 상하 관계를 자꾸 뒤바꾸려 해 이것만은 안 된다고 막아섰다.
집 근처에 다다를 때까지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은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왼쪽으로 틀고 빤히 바라보는 윤재의 뜨거운 시선에 은호는 한쪽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사실 집에 먼저 내려주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두 다리 멀쩡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도 꺼뜨릴 겸, 걸어갈까 봐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 버튼을 끈 은호는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때리며 튼튼한 다리라고 자랑했다.
“하, 그 뜻이 아니라…….”
은호의 깜찍한 행동에 마음이 녹아내린 윤재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허탈한 숨을 쏟았다.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은호네 집을 한 바퀴 돌려고 했다.
“아니야. 그럼 조심해서 가요.”
윤재는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그대로 삼켜 버렸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았는지 내내 흐릿했던 은호의 페로몬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가늘게 피어오르길 반복하며 윤재를 약 올리듯 자극했다. 영화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넘실거리는 페로몬이 윤재를 건드렸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버텨 왔다. 그러니 마지막에 와서 굳이 산통을 깨고 싶지 않았다.
은호는 윤재의 석연찮은 말투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정원 가로등 불빛이 차 안으로 들이쳐 그의 옷자락의 구김에 따라 깊은 음영을 만들었는데 바지 앞섶이 꽤나 두툼했다.
“전무님.”
망설임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표정에서 은호의 생각을 읽은 윤재가 단호한 말투로 잘라냈다.
“내키지도 않는데 허락하는 거 하지 마. 나도 원치 않아.”
몇 달 동안 은호를 집중해서 관찰했더니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읽혔다. 그는 늘 자신은 뒷전이고, 상대의 마음과 상태를 중시했다. 은호의 이어질 말을 차단하고 선을 긋자, 한참을 뚫어져라 윤재를 바라보던 은호가 목소리를 살짝 눌렀다.
“아뇨.”
은호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윤재에게 도망갈 틈조차 주기 싫어 은호는 그의 두 뺨을 붙잡고 잡아당기며 입술을 더듬었다. 말캉하고 촉촉한 입술 위로 타액이 섞이자 그의 입술 틈새로 열기 짙은 숨이 터져 올랐다.
“돌려보내고 후회하지 마세요.”
까맣게 너울거리는 윤재의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빼곡히 들어찼다. 그 안의 자신은 윤재를 원하고 있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은호는 눈빛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좁은 차 안에 엉겨 붙어 입술을 맞대던 윤재는 갑갑함을 느껴 안전벨트를 풀고 나가 운전석에서 은호를 들쳐 업었다.
“밤에 같이 있어 달라고, 왜 처음부터 이야기 안 했어요?”
윤재의 목덜미를 두 팔로 끌어안고 뺨을 붙인 은호가 타박하듯 물었다. 비교를 안 하려고 해도 자꾸 현준이 떠올랐다. 현준은 먼 타지로 떠난 사람처럼 은호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거의 연락 두절 상태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해 급전을 요구하거나 성욕에 달아오른 목소리로 잠자리를 요구했다. 현준에게 너무 오래 길들여진 탓일까, 참고 기다리는 윤재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뜻 들어줄 걸 아니까.”
그의 단답에 말문이 막힘과 동시에 눈시울에서 열이 올랐다. 은호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감추려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러면 어때서요. 그럼 계속 기다리려고 했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현관의 센서 등과 복도 아래에 깔린 간접 등이 우수수 켜졌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도우미 아주머니는 퇴근했고, 집 안에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윤재는 은호를 바닥으로 천천히 내린 후 신고 있던 구두를 직접 벗겼다. 한 손에 잡히는 발목이 너무도 가늘었다.
“기다리고 싶었어. 마음 편해질 때까지.”
윤재는 페로몬에 반응하는 상황에서도 최대한 성욕을 참으려 노력했다. 그는 은호의 마음이 우선이었다. 본능은 자위를 하며 버티든가, 억제 주사를 맞으면 그만이었다. 준서와 헤어지고 내내 그렇게 살아왔기에 참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건 없었다. 단지 은호가 가슴속에 파고들어 오는 바람에 평소보다 참기 힘들다는 게 문제지만.
“왜 이리 미련해요?”
“미련하다는 소리 처음 들어보는 거 같은데, …듣기 좋네.”
다시금 등허리와 무릎 아래 팔을 밀어 넣어 가볍게 안아 들자 어깨를 꽉 끌어안은 은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씻고 싶은데.”
운전대를 잡아야 하기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재 또한 운전대를 잡을 요량으로 술을 마시지 않아 오늘은 두 사람 모두 맨정신이었다. 은호는 술김에 한 처음보다 오늘이 더 떨리고 부끄러웠다.
윤재는 침실 안에 있는 샤워실 앞에 은호를 내려 주었다. 자신은 다른 욕실을 쓸 테니 편히 씻고 나오라며 돌아서는 그를 은호가 붙들었다.
“같이 씻을래요?”
윤재를 혼자 내버려 두기 싫었다. 그의 말대로 하나하나 다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부끄러움을 한가득 담은 말투에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웃는다. 윤재의 미소로 확인을 받은 은호가 그의 재킷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그 손에 윤재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내일은 주말이고 넘치는 게 시간이니, 어떻게 하는지 천천히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윤재의 재킷과 타이, 그리고 셔츠를 벗기고 나니 하의만 남았다. 군살 없이 단단한 근육으로 들어찬 상체가 다시 봐도 생소했다. 은호는 그날의 일이 꿈처럼 느껴지고 지금이 현실 같았다.
이번에는 윤재가 은호의 셔츠를 천천히 벗겼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눈앞을 암전으로 만들었다. 아랫입술을 지긋하게 누르며 들어온 입술이 더운 숨을 뿌리며 입 안을 더듬었다.
은호는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알파의 짙은 페로몬에 눈을 감았다. 혀가 질척하게 감기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윤재는 은호의 셔츠를 벗기고 버클을 풀어 바지가 분홍빛 복숭아뼈 아래로 흘러내리게 두었다. 한 꺼풀 한 꺼풀 옷을 벗을 때마다 섞이는 숨결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어느새 전라가 된 윤재가 은호의 엉덩이 아래를 조심스럽게 받쳐 안고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 후 반신욕을 즐기느라 설계부터 신경 써서 넓게 만든 이 공간을 은호와 함께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샤워부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은호가 무작정 수전을 열었다. 천장에 걸린 샤워헤드에서 차가운 물이 벼락처럼 쏟아져 놀란 윤재가 서둘러 온도를 올렸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 생쥐 꼴이 되어 버린 둘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괜찮아?”
“추워요.”
“근데 왜 그랬어.”
순식간에 쏟아진 냉기에 은호가 윤재의 몸을 끌어안았다. 점점 따뜻한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지만, 따뜻한 물보다 맞닿은 살로 열을 올리는 게 더 좋았다. 적당히 따듯해진 물이 윤재의 정수리를 타고 턱 끝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금 입술이 감겼다. 흘러내리는 물이 입 속으로 밀려들어 와도 물을 삼키며 타액을 섞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는 사이, 쏟아지는 물소리가 점점 증발하고, 은호의 귓가엔 오롯이 윤재의 숨소리만 메아리치듯 울렸다. 벌써 아랫배가 뻐근하니 당겨 왔다.
은호는 두 팔로 윤재의 목을 감았다. 그가 이마에서부터 눈두덩이, 코끝 그리고 두 뺨을 거쳐 턱까지 샅샅이 입술을 붙였다. 얼굴 위를 꼼꼼히 돌아다니며 물고 빨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쏟아졌다.
“간지러워요.”
윤재는 은호의 말랑한 귓불을 물었다가 놓기도 하고 귓속으로 더운 숨을 밀어 넣으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따뜻한 물이 쉼 없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윤재의 페로몬에 취해서 그런지 자꾸 다리가 풀려 미끄러지려 했다. 은호는 윤재의 목을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불편해서 안 되겠다.”
낮게 가라앉은 윤재의 말에 은호가 동의하듯 작은 머리통을 끄덕였다. 윤재는 팔을 뻗어 타월 여러 장으로 은호를 감싸 침실로 안고 갔다. 바스락거리는 침구에 머리가 닿자 은호가 눈앞에 있는 윤재를 사정없이 끌어안았다.
목덜미에서 풍기는 페로몬이 짙고 묵직한데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은호는 그의 왼쪽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좋아요.”
“뭐가 좋은데?”
“그냥… 전부 다.”
윤재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그는 최근 들어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 회사에선 서늘한 카리스마로 이미지가 굳어진 사람이 헤프게 웃음을 쏟아내니 은호는 그 모습이 신기했고, 그의 귀한 미소에 덩달아 따라 웃게 된다. 윤재가 은호의 목덜미에 있는 페로몬 샘을 이로 아프지 않게 물었다 놓을 때마다 은은한 재스민 향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목덜미에서 지분거리던 윤재의 입술이 쇄골을 거쳐 분홍빛 유두로 옮겨 갔다. 입에 물고 혀로 간질이자 정수리까지 흥분감이 차올랐다. 은호가 끙끙거리는 신음을 계속해서 삼키며 버티는 게 귀여워 윤재는 혀를 내밀어 빗장뼈 사이사이를 길게 그었다. 은호의 몸이 움찔거리고 시트를 붙잡고 있던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풀렸다.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데, 왜 이리 눈치 봐.”
“몰라요……. 술을 좀 마셨으면 안 그럴 텐데.”
가슴팍에서 가벼운 콧숨이 흩어졌다. 은호의 허벅지 사이에 윤재가 자리를 잡았다. 윤재가 은호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자 은호의 허리가 절로 비틀렸다.
“하… 거긴… 흣.”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성기를 감싸는 뜨겁고 축축한 온기에 은호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말초 신경까지 일어서는 감각에 몸을 움직여 침대 머리맡으로 기어 올라가고 싶었으나 이미 윤재의 두 팔에 허벅지가 붙들린 상태였다.
빨고 핥는 소리가 지극히 외설적이었다. 혀의 돌기가 선단의 얇은 표피에 달라붙어 쓸어내릴 때마다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은호의 하체 근육이 빳빳하게 굳었다. 윤재는 은호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고 애무에 전념했다.
“흐읏, 그만.”
은호가 윤재의 어깨에 손톱을 박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사정감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차마 그의 입에다 쏟아내고 싶지 않아 버텨 보지만 윤재는 돌덩이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놔주지도 않았다. 호흡까지 참고 버티던 은호는 결국 고개를 젖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점멸하듯 암전이 들이쳤다 사라졌다.
“왜…….”
상체를 일으킨 그의 입술이 번질거렸다. 현준과의 잠자리에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애무였다. 늘 급하게 밀고 들어와 자기 욕구만 채우기 급급해, 은호는 흐름을 따라가는 와중에 스스로 오르가슴을 느껴야만 했다.
눈꼬리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은호의 반짝거리는 눈물에 윤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 말까?”
등허리 아래로 들어온 윤재의 팔이 부드럽게 은호를 감싸 안고 다독였다. 나긋한 음성이 귓전에서 울려 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서요.”
부끄러움을 가득 단 속삭임에 윤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은호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입으로 삼켰다.
다시금 서로를 향해 뜨거운 숨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매달리듯 엉겨 붙는 은호의 혀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농밀하게 얽힌 혀가 은호의 정신을 빼놓는 사이 윤재의 손가락이 말랑한 엉덩이 골을 쓰다듬었다. 입구를 조금 스친 것뿐인데도 애액이 흐르고 내벽이 다음을 기대하며 꿈틀거렸다. 은호의 앓는 신음이 윤재의 입으로 삼켜지는 동안 손가락이 좁다란 내벽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흐으으.”
굵은 뼈마디 모양을 따라 안쪽이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미끈거리는 점막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착실하게 감길 때마다 윤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안쪽의 도톰하게 오른 지점을 찌르자 은호의 허리가 들썩이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절박한 손길로 윤재의 근육으로 다져진 등을 붙잡고 매달렸다.
손가락이 깊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길 여러 번 반복하는 사이, 진득하게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으로 윤재의 얼굴은 오래전부터 푹 젖어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한계에 다다른 듯 그의 핏줄이 도드라진 성기가 단단해 보였다.
다리가 활짝 열린 자세에 대한 수치심은 잊어야 했다. 그에게 한 번 몸을 열었을 때 밀려들어 오던 압박감을 생각해 본다면 부끄러움은 사치에 불과했다.
입구에 닿은 열기 가득한 살덩어리가 몸을 가르고 천천히 들어왔다. 오감이 모두 열려 몸이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렸다.
“흐흣….”
윤재는 삽입된 성기를 조여 무는 감각에 아찔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진입한 것만으로 사정감을 느낀 윤재는 아래턱에 힘을 주어 이를 질끈 물다 숨을 고른 후,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은호의 어깨 양옆에 팔을 세우고 지지대 삼아 은호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를 받아들이는 게 힘겨워 눈꼬리를 찡그리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페로몬의 밀도를 좀 더 높이자 은호의 페로몬이 반응하며 나풀거렸다. 한결 나아진 얼굴이 윤재를 바라봤다. 안아 줘요. 눈빛으로 알아들은 윤재가 은호를 부둥켜안았다.
“흐으….”
터져 나오는 숨이 은호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달아서 뇌가 절여지는 것만 같았다. 장기가 밀리는 듯한 엄청난 압박감은 점차 쾌락으로 변해갔다.
윤재는 중간중간 은호를 챙겼다. 무작정 몰아붙이지 않고 상황을 보며 천천히 몸을 썼다. 사실 움직이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어 은호의 반응이 더 중요했다.
“……봐주는 거 알고 있어요.”
윤재는 제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은호의 몸짓이 너무도 기꺼웠다. 어느새 적응이 된 은호는 등 근육을 붙잡았던 손을 내려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은호의 사정이 나아지자 윤재는 허리 짓을 하는 속도를 조금씩 올렸다.
“하읏, 좋아요.”
은호의 배 속을 가득 채운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해서 달아올랐다. 마치 온몸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피가 돌았다.
결합부 사이로 새어 나온 액체가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공명하다 귓가에 꽂히면 그것만으로도 전율이 올라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더, 더, 흐읏….”
은호가 윤재를 부추겼다. 애써 완급 조절을 하고 있는데 고삐를 풀라며 재촉하자 끝까지 붙잡고 있던 이성이 툭툭 끊어졌다. 귀두가 여린 살결을 사정없이 긁고 지나갈 때마다 은호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차오르는 사정감에 시트를 움켜쥐던 은호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팔을 뻗어 안아 달라 요구했다. 골반을 붙잡고 끝까지 밀어 넣던 윤재는 바로 은호를 감싸 안았다. 뒷머리를 받치고 등허리 아래로 손을 밀어 넣자 은호가 윤재를 절박하게 끌어안고 등 위에 손톱을 세웠다. 허리의 힘으로 계속해서 밀고 들어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은호는 손끝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힘을 주어 윤재를 붙잡았다.
몰려오는 쾌감이 해일처럼 은호를 뒤덮었다. 깊게 밀려 들어오는 성기가 모든 감각점을 짓이길 때마다 섬광이 튀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빠르게 상승하는 오르가슴에 내벽이 수축하며 안쪽을 조였다. 윤재는 어금니를 물고 허리를 튕겼다.
배 안에 가득 들어찬 성기가 점차 단단하게 몸집을 불리더니 그 끝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터져 나왔다.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던 윤재가 무게를 실어 은호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은호의 뒷머리와 등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던 은호가 몸을 떨었다. 귓가에서 그의 열기 가득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낮은 톤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호야.”
“…….”
“돌아와 줘서 고마워.”
깊고 뚜렷한 그의 눈동자는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늘 은호를 주시해 왔다. 어디서든 그가 자신을 우선순위로 챙긴 걸 알고 있는 은호는 그의 말에 턱 끝이 점점 떨려 왔다. 눈동자 위로 빼곡히 차오르던 눈물이 감당치 못하고 옆으로 흘러내렸다.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윤재의 얼굴만 선명하니 보였다.
은호는 그의 말을 현준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고맙다고 이해했지만, 윤재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시간이 되돌아오며 은호는 살아남았다. 아직 사고 날짜를 넘기지 않아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흐름은 바꿔 놨으니 예전처럼 최악의 상황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윤재는 은호의 큼지막한 눈동자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엄지로 훔쳤다.
“울지 마.”
“그러니까, 왜 울리고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 근데 웃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윤재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고 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울지 말라고 달래는 윤재의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그윽했다. 은호가 입꼬리를 올리자 윤재가 화답하듯 따라 웃었다.
“……웃는다.”
윤재는 은호를 다시금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실내를 가득 채운 두 사람의 페로몬이 공기 중에 넘실거렸다.
은호는 윤재의 페로몬을 들이마시기 위해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그가 주는 오롯한 사랑을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은호는 계속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 미도 빌라 304호 세입자가 이사비를 요구하며 문을 잠그고 버텨서 공인중개사가 집주인과 협의하여 집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 버렸습니다. 침입은 불법이지만 못 나오게 막는 건 가능하다더군요. 그랬더니 결국 그쪽에서 간밤에 짐을 두고 탈주했답니다.
봄바람의 끝물이어서 그런지 5월의 아침은 여름에 부쩍 가까운 날씨처럼 은근히 더웠다. 반팔 차림으로 정원을 거닐던 윤재는 출입구를 계속 흘긋거리며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집에 있는 거 모조리 빼서 컨테이너로 옮기고 다음 세입자 이삿짐 집어넣으라고 해요. 혹시나 그쪽에서 이삿짐 찾으러 왔다고 그러면 컨테이너 보관한 주소 알려 주라고 들어가는 세입자에게 말해 두고.”
- 네, 알겠습니다.
밀린 월세를 내지 못한 현준은 버티기를 선택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그는 현관문을 포기하고 베란다 가스관을 통해 집을 빠져나갔다.
‘시험이 내일이었네.’
시험은 쳐야 했기에 전날부터 미리 도망간 게 아닐까 추측한 윤재는 그의 비이성적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혹시라도 연락을 놓칠까 봐 휴대폰을 손에 쥐고 돌계단을 걸어 내려온 윤재는 주물 대문을 열고 길가로 걸어 나왔다. 평소 잘 입지 않는 발목이 보이는 슬랙스와 흰색 면 반팔 티를 입은 윤재는 생각 없이 신고 나온 구두를 뒤늦게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무님.”
골목길 아래에서 걸어 올라오던 은호가 윤재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올 때마다 바람결을 타고 흩날린 앞 머리카락 사이로 뽀얀 이마가 드러났다. 보조개가 움푹 팬 말간 웃음살에 윤재의 입가에도 덩달아 웃음꽃이 피었다.
“왜 여기까지 나오셨… 아.”
처음 보는 반 캐주얼 차림이 꽤 만족스러워 감상하듯 위아래로 쓸어내리던 은호의 시선이 한곳에 정착했다. 다소 언밸런스한 클래식 정장 구두. 그러니까…….
“안 그래도 바꿔 신으려고.”
윤재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은호의 허리를 감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타고 오지 왜.”
“오래간만에 강바람 쐬고 좋았는데요 뭐, 운동도 되고.”
오늘의 데이트는 지난주 내내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퇴근 후 은호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한 윤재의 조치였다. 사실 그는 어제도 시 의원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지만, 야외로 나가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으로 숙취를 빼고 대기했다. 다행히 은호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운동 좋아해?”
“아뇨.”
은호는 군살 없는 날씬한 체형이었다. 손으로 만졌을 때 근육이 잘 잡히지 않는 말랑말랑한 살이라 그다지 운동에 취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운동한다는 이야길 종종 들었던지라 윤재는 조금 의아했다.
“전무님을 상대하려니까, …운동을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어요.”
의도치 않게 잇새로 바람 빠진 웃음이 튀어 나갔다. 그러니까 유산소 운동으로 지구력을 키우겠다?
“운동을 뭐 하러 해, 필요하면 날 부르면 되는데.”
훌륭한 트레이너를 두고 뭐 하냐고 타박하듯 운을 띄우자, 은호가 정색을 하며 어름댄다. 윤재는 그 모습조차 너무도 귀여워 코끝에 주름이 잡히도록 웃었다.
“그… 그거랑 이건 좀 다르죠.”
“지구력을 기르고 싶다는 거잖아. 잘 먹고, 나만 따라오면 되는데.”
윤재의 능글맞음에 은호의 표정이 묘하게 틀어졌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웃음이 나는 상황이랄까.
“전무님 가끔 회사에 있을 때랑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시죠?”
“그래서 싫어?”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니면 됐지 뭐.”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말에 은호가 실소했다. 윤재도 그렇지만 은호 또한 처음 입사 때에 비해 많이 변화했다. 이전 회사에서 보필했던 상사가 어르신이다 보니 엄격한 생활에 젖어 있었는데, 윤재와 다니면서 대화가 많아지고, 격식을 차리지 않아 자연스럽게 또래의 나이대로 내려왔다. 모두 다 윤재가 편하게 다가와 가능했던 변화였다.
“주말에 별일 없으면 같이 있고 싶어. 옷은 사 놨으니 여기서 출근하면 되고.”
“다음 주도 계속 바쁜 거죠?”
“아마도. 그래서 주말은 가능하면 같이 있고 싶어.”
날렵한 윤재의 턱선이 최근 들어 더 각지고 도드라졌다. 3분기 투자 로드맵을 확인하느라 각 본부의 실적 체크는 물론이요, 정치권 인사와 만나고, 현재 투자로 걸려 있는 수십 군데의 회사 대표와도 미팅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이 최 회장 병문안도 잊지 않았다. 수행인인 은호도 혼자서는 일이 버거워 한 비서와 윤 실장까지 로테이션하는 걸 윤재는 모든 걸 커버하며 홀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일은 현준의 필기시험일이다. 혼자 있으면 온갖 잡생각에 빠져 땅굴을 팔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사실 은호도 그와 함께 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들고 있는 건 뭐지?”
“오는 길에 사 왔어요. 요 근처에 줄 서서 사 가는 샌드위치 가게 생겼던데.”
왼손에 들려 있는 종이 백 안에는 커피와 샌드위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은호는 사실 아침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 재료를 펼쳐놓고 계란부터 삶았지만, 소금 후추 간을 세게 해 음식을 망치게 되었다. 은호는 결국 냉장고에 재료를 도로 집어넣고 사 가는 전략을 택했다. 그래도 첫 주말 데이튼데 너무 성의 없나?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샌드위치를 잘 보이지 않게끔 뒤로 숨겨 들고 왔는데, 찔려 하는 은호와 달리 윤재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모님께서 좀 챙겨 주고 가셔서 그거까지 들고 가면 얼추 되겠다. 차에 먼저 가 있어요. 구두 갈아 신으면서 들고나올게.”
윤재가 차 키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자 잽싸게 받아 챈 은호가 운전석을 열었다. 자신이 운전할 테니 조수석에 앉으라고 손가락으로 지시까지 하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은호는 자리에 앉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윤재를 가만히 지켜보니, 눈 밑 그늘이 피곤함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하품이 나올 때마다 먼 바깥 경치에 취한 척,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지만 턱의 움직임만으로 하품하는 티가 났다.
“피곤해 보이는데, 주무세요. 도착하면 깨울게요.”
“재미없잖아, 옆에서 자면 덩달아 졸리기도 하고.”
“가서 재미있게 놀아 달라고 조를 테니 얼른요.”
요즘 누구보다도 바쁜 걸 잘 알고 있기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짠하고 애가 탔다. 윤재는 출근을 위해 차를 타면 경제 뉴스를 보거나 스케줄을 확인하며 은호와 활발히 대화를 하곤 했는데, 요즘은 차 안에서 멍하게 있거나 졸음을 이겨보려 껌을 씹는 등 누적된 피로에 지쳐 있을 때가 많았다. 반년 넘는 수행 기간 동안 차 안에서 그가 잠드는 걸 본 적이 없던 은호는 요새 들어 종종 눈을 감고 명상하듯 구는 윤재를 보며, 푹 재우고 싶은 마음에 모든 소음을 죽이고 운전을 했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희미하게 웃는 윤재에게 은호는 오른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
“얼른 자요.”
은호는 조금이라도 자 두라고 윤재를 재촉했다. 혹시 몰라 자율 주행 모드를 선택하고 전방을 보며 잠시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은호는 옆으로 들어오는 트럭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운전대를 잡았다.
“…….”
전방에 초점을 맞췄지만 시야 끄트머리로 사르르 내려앉는 고개의 움직임이 걸렸다.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느라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은호는 측은한 눈빛으로 윤재를 바라봤다. 은호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잠든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어제도 늦게까지 술을 마셨구나. 페로몬에 가려졌지만 미약하게 술 냄새가 났다.
피곤했을 텐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문 앞에서 서성이던 윤재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푹 자고 오후에 만나도 되는데 굳이. 은호는 그의 뺨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잠에서 깰까 봐 조용히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도착지까지 40여 분, 그때까지 재워보고 부족한 거 같으면 차 안에서 좀 더 재울 생각이었다. 마침 날씨마저도 청명하여 창문만 조금 열어 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온도였다.
주말 첫 데이트 장소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윤재 소유의 작은 별장이었다. 북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햇볕 잘 드는 곳에 있는 별장은 그의 부모님이 주말마다 찾아갔을 정도로 조경수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 곳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떠난 후, 증여세 문제로 불필요한 토지를 정리할 때 유일하게 남겨둔 곳이라며 같이 가 보자고 윤재가 말했을 때, 은호는 마음이 찡하게 달아올랐다.
은호는 별장에 도착했지만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기 싫어 근처 갓길에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윤재를 내려다봤다.
어쩜 자는 모습마저도 이리 반듯할까.
숱이 짙은 눈썹이 마치 매일같이 다듬은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미간 사이에 위로 쭉 뻗은 콧대가 인상을 바르게 정돈하는 느낌이었다. 은호는 벨트를 풀고 그를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하려다 그가 소리에 깰까 싶어, 상체만 조금 비틀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며 눈이 마주쳤다. 흐릿한 눈동자가 몇 번 껌뻑이며 잠기운을 몰아내는 듯하더니 몸을 틀어 주변을 확인했다.
“다 온 거 같은데 왜 안 깨우고.”
“좀 더 재우고 싶어서요.”
은호는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며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하는 윤재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금 시동 버튼을 누르고 별장 입구로 향했다. 외진 데다 외통길이다 보니 내비게이션을 찍지 않으면 찾아오기도 힘든 지역이었다.
운전석 보조 서랍에서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리모컨을 꺼내 윤재에게 건네자 능숙하게 대형 철문을 열었다.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는 사이 사택 관리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둘을 맞이했다.
“아이고 도련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어르신, 무릎은 좀 어떤가요?”
“도련님 덕분에 수술 잘 마치고 회복 중입니다.”
윤재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고 상체를 숙여 노부부와 눈높이를 맞췄다. 걸음마 하던 시절부터 그들은 곁에 있었고, 함께 해온 시간이 벌써 30년이 넘었다. 윤재에게는 돌아가신 부모님만큼 소중한 분들이었다.
“잡초 자라도록 그냥 두세요. 몸이 먼저잖아요.”
“에이, 사모님께서 얼마나 정성 들이신 공간인데, 그럴 수는 없지요.”
안부 인사가 오고 가는 동안 은호는 뒤에 서서 인사해야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노부부를 돌아가며 안아 주던 윤재가 고개를 돌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흐뭇하게 지켜보던 은호가 천천히 걸어갔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은호는 그가 자신을 직원, 혹은 비서라고 이야기할 줄 알고 대답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애인이라는 소개에 은호의 시선이 저절로 윤재에게 향했다.
왜?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실수한 게 있냐는 윤재의 눈빛에 은호가 아니라고 수줍게 웃고는 다시금 노부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은호입니다.”
“반갑습니다. 도련님. 사장님, 사모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윤재를 따라 노부부의 손을 꼭 쥔 은호는 그들의 처진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걸 얼핏 보았다. 맞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도 따스했다. 노부부는 은호의 손등을 쓸며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은호는 타지에 있는 자신의 부모님이 생각나 덩달아 눈물이 고였다.
“식사 준비하지 마세요. 챙겨 왔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윤재는 트렁크에서 과일 바구니와 건강 보조제, 고기 세트를 꺼내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별채 입구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번 주 내내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건 준비한 거야.’
비서진에게 따로 부탁하지 않았으니 그가 고른 것일 테다. 은호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것만 가득 챙겨 온 그의 마음 씀씀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직원들이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생글생글 꽃 같은 웃음을 잔뜩 달고 별장 내부를 둘러보던 은호는 조금 전 노부부를 챙기던 윤재를 떠올리며 입매를 동글게 말았다.
“전무님이 직원들 잘 챙겨주긴 해도, 회사에선 날카로운 이미지거든요.”
입사 초, 서늘하고 과묵한 첫인상에 난해한 상사를 만났다고 고민했던 시절이 아득하게 지나간다. 진짜 보는 눈이 없구나, 이렇게 자상한 사람을 꼰대 취급했으니. 과거를 추억하며 허탈하게 웃는 은호의 앞으로 그가 진입로를 막으며 한걸음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굳이 알릴 필요가 있을까?”
“이미지 쇄신에 좋잖아요.”
얼굴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을 큼지막한 손이 은호의 뺨을 감쌌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와 입을 맞추고 떨어진 윤재가 아프지 않을 만큼 가볍게 은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너만 알아주면 돼.”
그가 예고 없이 마음을 훔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며 몸 전체를 울렸다. 은호는 붉게 달아오른 낯이 부끄러워 고개를 발치 아래로 떨궜다. 태양 아래 길게 늘어진 윤재의 그림자마저 은호를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