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그날로부터 1개월 보름 전 (8/14)

08. 그날로부터 1개월 보름 전

은호는 샌드위치가 담긴 종이봉투와 도우미 아주머니가 챙겨 주신 소풍 도시락을 들고 정원 한쪽 구석에 마련된 정자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눈 아래 펼쳐진 경관을 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부모님께서 애착을 느끼셨던 이유를 조금은 알 거 같아요.”

굽이친 노송 사이로 푸르른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가히 절경이었다. 이곳에서 단 며칠만 지내면 속병마저 다 사라질 것 같았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솔바람을 들이쉴 때마다 텁텁한 숨이 빠져나가고 상쾌한 공기가 폐부 가득 찼다.

경치 좋은 곳에서 그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은호는 호화롭지는 않지만 잘 가꿔진 별장 전경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은근슬쩍 윤재를 건드렸다.

“전무님은 예정된 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거잖아요.”

윤재는 침전된 피곤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아침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무슨 말을 하나, 조용히 지켜보는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전문 경영자를 세워 두고 뒤로 빠져서 한가로이 삶을 즐겨도 될 거 같은데. 전면으로 나선 이유가 뭔지 물어도 돼요?”

은호는 식사 준비를 하는 노부부에게 그러지 마시라며 몇 번을 만류했으나 한 상 가득 푸짐하게 음식을 차린 어르신의 정성마저 사양할 수는 없었다. 은호는 곰탕에 밥을 반쯤 말다 윤재의 다음 말에 수저질을 멈췄다.

“전문 경영자를 세워 두고 뒤로 빠져서 삶을 즐긴다라… 그게 겉으로는 참 쉬워 보여도 뒤로 빠지는 순간 물어 뜯겨서 너덜너덜해지거나 죽어. 전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던 거지. 큰아버지께서 불러내기도 했고.”

윤재는 그런 선례를 직접 목격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후, 기업체를 물려받지 않고 친척에게 넘겼다가 완전히 망가진 대학 동기가 있었다. 물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부모의 부재 및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인한 우울증, 기업체를 물려받고 등을 돌린 친척으로 인한 생활고까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던 동기는 지금도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하고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어려워 보였다. 윤재는 그 동기를 보며 경영 전면에 나서는 걸 선택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윤재는 2대까지 멀쩡했던 회사가 3대에서 망가지는 걸 용납할 수 없어 필사적으로 회사 일에 매달렸다. 나이도 어린 데다 이론밖에 모르는 윤재가 오래전부터 실무에 들어선 자들의 연륜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니, 남들보다 잠을 줄이고 직접 발로 뛰며 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시작했으나 신입 팀원이 둘뿐이라 거의 바닥부터 시작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네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보라는 최 회장의 채찍질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보란 듯이 성과를 만들어 냈고 팀의 규모를 불렸으며 조직을 휘어잡았고, 결국 본부장으로 치고 올라가 전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은호의 말을 곱씹던 윤재는 미지근하게 웃었다.

“뒤로 빠져서 한가로이 삶을 즐긴다는 건 한량을 말하는 건가?”

“단어가 좀 부정적이긴 한데… 거의… 비슷하죠.”

“글쎄… 목적 없는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

“목적이야, 만들면 되죠. 한량한테 물어봐요. 그들도 나름의 목적이 있거든요.”

은호의 톡 쏘는 소다 같은 발언에 수저를 들던 윤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은호는 별 뜻 없었다. 너무 빡빡하게 사는 그가 안쓰러워 농담조로 던졌을 뿐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래 뭐, 아직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제 막 들어왔으려나.”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 일이 천직인 것처럼 굴더니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은호의 둥글게 휘어진 눈매가 부드럽게 펴지며 눈꼬리가 길어졌다.

“혹시…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나요?”

먼저 식사를 마친 윤재는 들고 온 피크닉 도시락 케이스를 열어 예쁘게 깎인 사과 한 조각을 은호에게 건네주었다. 이제는 그 당시의 꿈이 기억에서 멀리 사라져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의미 없는 곳에 초점을 두고 사색에 빠졌던 윤재는 고개를 숙이면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쓸어 올렸다.

“여행을 다니고 싶었어.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경험하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그러다 좋은 아이템을 발견하면 스타트업으로 혼자 운영해 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네. 뭐, 나쁘지는 않지만.”

아쉽기는 하나 현재 삶에 만족한다는 듯 가볍게 운을 뗀 윤재는 정자 기둥에 등을 붙이고 앉아 멀리 내려다보이는 북한강에 시선을 던졌다.

“전무님은 워낙 감이 좋아서 뭘 하든 성공하셨을 거 같아요. 지금처럼요.”

건네받은 사과를 아삭아삭 씹으며 흡족하게 웃음 짓던 은호는 종아리가 저려 오자 양반다리로 접었던 다리를 쭉 펴고 윤재처럼 기둥에 등을 붙였다.

“어… 뒤에 다람쥐, 다람쥐.”

윤재가 기대고 있는 기둥 뒤로 다람쥐 한 마리가 눈치를 보며 화문석 위로 뽀르르 올라왔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다람쥐가 가까이 다가오자 놀란 윤재와 은호는 동작을 멈추고 눈동자만 굴리며 작게 속삭였다.

“과일 때문에 왔나 봐요.”

“포도알 몇 개 줘 봐요.”

은호는 다람쥐가 도망갈까 움직임 폭을 최대한 줄이고 느릿하게 도시락 통에서 포도알 네 개를 꺼내 천천히 화문석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람의 움직임에 놀라 정자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다람쥐는 눈치를 보며 가까이 접근하더니, 포도알 하나를 입에 물고 잽싸게 화문석 밖으로 도망쳤다.

“사람 손 탔나 봐요. 보통은 눈만 마주쳐도 숨기 바쁘던데, 이 녀석은 도망 안 가네.”

“어르신들이 요 근처 새랑 다람쥐 먹이를 챙겨 주다 보니 익숙한가 봐.”

“아아.”

은호가 상체를 슬며시 들고 무릎으로 기어가 정자 아래쪽을 살피니, 다람쥐가 포도 껍질을 까서 안쪽 과육만 파먹고 있었다. 하트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애정 가득한 은호의 눈빛과 마주친 다람쥐가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은호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밀며 다람쥐의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다람쥐의 식사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윤재는 남의 집 담장을 몰래 훔쳐보는 아이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바닥에 붙이고 정자 아래를 내려다보는 은호를 보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눈에는 포도알을 야무지게 까먹는 다람쥐보다, 다람쥐가 혹시나 도망갈까 싶어 몸을 최대한 낮추고 웅크린 채 지켜보는 은호가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

***

시험 직전에 본 모의고사에서 합격선을 훨씬 넘는 점수를 받아 3년간의 보상이 나오는가 싶어 잔뜩 기대했던 현준은 시험이 끝난 후 근처 근린공원의 벤치로 걸어가 들고 있던 큼지막한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아아! 씨발.”

땅이 무너져라 내뱉는 긴 한숨이 너무나 무겁고 고되었다. 시험 수준이 예년보다 훨씬 어려웠다. 답이 헷갈리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어서, 운 좋게 다 맞지 않는 이상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현준은 휴대폰으로 인강 사이트에 접속해 속속들이 올라오는 문제 복원 서비스를 체크하며 가채점을 시도했다.

“하아… 망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점수가 형편없이 낮았다. 공시생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분위기를 살펴보지만 시험이 어려웠다고 하소연하는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현준은 솟구치는 불안감에 손가락을 물어뜯다가 호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개비.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마지노선인 카드론을 최대한도로 받았지만 휴대폰 비용과 이달 카드 값을 내고 나니 손에 쥔 현금이라고는 28만 원이 전부였다.

“집주인만 아니었어도. 아오 진짜.”

집주인이 현관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아 놔서 시험을 코앞에 두고 공포심을 느낀 현준은 그날 밤 가스관을 타고 빠져나오다가 다리를 삐끗했다. 집에서 나온 현준은 지훈에게 이틀 밤만 재워 달라 요청했지만 자기도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며 단박에 거절당했고,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찜질방에서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필요한 짐만 챙겨 도망쳐 나오면서도 합격만 하면 당당히 찾아오겠다며 별렀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게 다 집주인 때문이었다. 좋은 시험 성적을 유지하다 막판에 꺾인 건 잠자리가 바뀌고 심신에 불안 요소가 생긴 탓이었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며 집주인을 욕하던 현준은 까만 액정 화면을 터치해 최근 통화 목록에서 지훈을 찾았다.

시험은 잘 봤을까? 내심 같이 망쳤길 바라는 못돼 먹은 생각이 드는 건 예전 애인 때문이었다. 합격하자마자 연락을 끊더니 고시원마저 소리소문없이 빼 버렸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현준은 두려웠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늦깎이에 시작해 집에서는 내놓은 자식이 되었고, 다시 사회로 돌아가자니 경력 단절 문제로 좋은 회사는커녕 중소기업 취업마저도 쉽지 않았다. 사회 부적응자, 낙오자라는 타이틀이 온몸을 압박하고 짓눌렀다. 현준은 부스스한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불안감을 이겨 보려 노력했다.

“……시험 잘 봤어?”

지훈과 통화가 연결되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피커 너머에서 반응하는 숨소리가 축 가라앉은 걸 보니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 가채점하는 중인데, 분위기가 간당간당해.

“……난 제대로 망했어.”

재수는 필수고, 삼수에서 원래 성공하는 거라며 주변 지인들에게 호언장담하며 다녔건만, 이제는 창피해서 술을 사 달라고 말도 못 꺼낼 처지에 놓여 버렸다. 다음 달에 빠져나갈 마이너스 통장과 카드 대출 이자는 둘째치고 당장 숙식부터 해결해야 했다. 이 상태로 본가에 내려갔다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시골 청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뙤약볕에서 종일 땀을 흘리며 일하는 건 곧 죽어도 싫었다.

현준은 숨을 한 번 삼킨 다음 눈치를 보며 애교 섞인 투로 지훈에게 졸랐다.

“지훈아, 혹시… 나 며칠만 재워 주면 안 돼?”

- …….

“여보세요?”

대답이 없어 휴대폰 액정을 살피자 어느새 통화가 끊겼다. 야 이 씹 XX.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그대로 퍼부었더니,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현준은 남을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기본 숙식조차 불투명한 상태라 눈앞이 깜깜했다.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은호와 헤어진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은호네 오피스텔 정말 괜찮은데…. 그동안 양다리를 걸치느라 일부러 은호의 집에 가는 걸 피했건만 이제는 별게 다 아까워서 죽을 맛이다.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빌고 들어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보여 주지 말아야 할 장면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너무도 많이 남발해 버렸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왜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여러 가지 변명을 들어 방어 기제를 발동해 보지만 체증처럼 답답한 속은 쉽사리 풀리질 않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냐.”

가방 안에서 짐 덩이처럼 무거운 공무원 서적을 한 권 꺼내 손끝으로 팔랑이며 책장을 넘겼다. 매년 법 개정 문제로 새로 사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는데 무용지물이란 생각이 드니 억울하고 분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근처 쓰레기통에 공무원 서적을 몽땅 버리려다가 어찌 될지 몰라 다시금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일단 술이 필요했다. 술을 마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

은호는 목구멍이 쩍쩍 갈라지는 것처럼 건조하고 불편해 손으로 목을 더듬다가 눈을 떴다. 모래알을 삼킨 것처럼 까끌까끌하고 텁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호는 맞닿은 팔의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내렸다.

엎드려 곤히 자는 윤재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은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생수 반병을 비우고 다시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 윤재의 벗는 등 위로 달빛이 곱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옆 사람이 깬 줄도 모르고 미동도 없이 곤히 잠든 걸 보니 괜스레 뿌듯했다.

윤재는 평소 잠귀가 밝은 탓에 깊은 잠을 자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은호와 같이 누우면 기절한 사람처럼 수면에 빠져들었다. 상성이 좋은 알파와 오메가일수록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준다는데, 수면도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현준과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일이었다. 은호는 기쁘게 윤재의 수면제 역할을 자청하며 피로를 씻겨 주었다.

곤히 자는 그를 한참 바라보던 은호는 윤재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거렸다. 뜨끈한 손바닥으로 고마움을 담아 위아래로 천천히 쓸었다. 나가떨어질 정도로 피곤했으면서 어떻게든 자신을 챙기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찡하게 달아올랐다.

등허리를 쓰다듬자 잠든 그의 얼굴에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데, 의식이 있다기보다는 꿈을 꾸는 것처럼 그는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원래는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식사 준비를 하겠다며 성치 않은 다리로 텃밭을 걸어가는 어르신을 보며 마음을 돌렸다.

결국 토요일 반나절 별장 데이트를 마치고 윤재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게 된 둘은 배달 음식을 먹거나 직접 요리를 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다. 라면과 계란프라이, 굽는 요리 정도만 가능한 윤재와 자취 생활 9년 차임에도 간을 보지 못하는 은호의 조합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음식에 취미가 없어 간이 싱겁거나 짜도 생존을 위해 대충 먹고 살았는데, 솜씨 좋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만드는 정성스러운 음식만 먹어 온 윤재를 만나며 자신의 음식 솜씨가 민망하게 느껴졌다. 은호는 요리에 개선 의지가 없었던 지난날이 너무도 후회되었다.

둘은 큰마음을 먹고 동영상을 보며 오므라이스를 만들었다. 만드는 데만 장장 1시간 반, 마치 10첩 반상을 마련한 것처럼 음식물 쓰레기와 설거짓거리가 쌓여 있었다. 비효율의 끝판왕. 맛이라도 없었으면 울 뻔했는데, 유명 요리사의 레시피를 따라 했더니 다행히 맛이 꽤 그럴싸했다. 하지만 둘은 효율을 문제 삼아 계속해서 배달을 시키거나 나가서 사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까지 마친 둘은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회사 일보다도 어려웠던 요리에 기운이 쪽 빠져 바닥을 뒹굴다가도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실실 웃음이 터졌다. 둘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뱃속이 간질거렸다.

하루 종일 뒹구는 게 심심해 생각 없이 메일함을 열어 본 게 화근이었다. 주말에는 쉬겠다고 했던 윤재의 말을 깜빡하고 채권 운용본부에서 보낸 감사 리포트를 확인한 은호는 서둘러 윤재를 불렀다.

등 뒤에서 은호의 허리춤을 감고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그가 모니터 내용을 확인하며 표정을 굳히더니 30분 가까이 채권 운용본부 본부장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생겼다. 단기 채권 이익률이 예상치를 하회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몇 가지의 채권 비중에 문제가 있어 향후 비중 조절을 위한 개인 면담이었다.

은호는 투자의 전반적인 흐름을 꿰뚫고 있는 윤재를 볼 때마다 새삼 우성 알파의 위력을 실감했다. 우성 알파가 피라미드 최상단에 있는 이유는 비상한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에서 일반인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우성 알파는 IQ/EQ가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높은 만큼 극악의 확률로 태어나는 존재이기도 했다. 우성 오메가와 우성 알파가 만나도 그들과 같은 우성 형질의 아이가 나올 일은 60% 확률일 정도로 낮았다. 간혹 일반 오메가와 알파 사이에서 우성 오메가나 우성 알파가 나오는 사례도 있지만, 0.01%의 몹시 희박한 확률이었다. 대부분 이런 케이스는 부유층에서 입양을 하게 되는데, 평범하게 살다가 나쁜 길로 빠져 지능 범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 시간 넘게 회사에서 들어온 리포트를 체크하는 윤재에게 은호가 투정을 부리고 나서야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쉰다고 했으면서 전투적으로 일하는 윤재를 보니 메일을 왜 열어 이리되었나 싶었다. 그 이후에는 물고 빨고, 뒹굴고의 반복이었다.

회사에서 윤재의 말이 곧 법이라면 침대 위에서는 은호가 그랬다. 먼저 늘어져 버린 은호를 씻기고 갈아입히고 말려 주기까지 한 윤재는 침대맡에 머리를 대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베개에 윤재의 얼굴 반쪽이 완벽히 묻혀 코와 입 부분이 답답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정자세로 편하게 눕히고 싶지만, 덩치 차이가 있어 윤재를 힘으로 돌려 눕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임시방편으로 코와 입술 쪽에 튀어 올라와 있는 베개 솜을 꾹꾹 누르며 공간을 확보하던 은호는 스르르 떠지는 윤재의 눈꺼풀을 보며 움직임을 멈췄다.

몽롱한 눈동자는 잠에 취해 흐릿했다. 그는 누워 있어야 할 은호가 침대에 앉아 있자 몸을 뒤집더니 팔을 뻗었다. 가까이 오라는 그의 신호에 자석처럼 몸이 따라갔다.

“왜 안 자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게 웅얼거린 그가 은호의 이마에 입술을 문대고는 다시금 눈을 감는다. 깨우긴 했지만 원하는 대로 몸을 돌려 편하게 눕게 됐으니 성공한 건가. 이불에 눌려 있던 가슴팍이 따끈따끈하게 데워져 있어 그와 살결이 닿을 때마다 같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은호는 윤재의 미세한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유성그룹 본가로 찾아온 유성창투 한 대표는 최서령에게 묵직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고고하게 목에 힘을 주고 찻잔을 들고 있던 그녀는 느릿한 시선으로 봉투를 확인하고는 팔을 뻗었다. 큐티클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와인색 손톱이 하얀색 봉투 위에서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35%를 넘기는 게 쉽지 않네요.”

한 대표가 건넨 것은 유성창투 주주명부였다. 오래전부터 상장요건을 충족했음에도 최윤재의 아버지인 최성훈의 뜻을 따라 지금까지 장외에 있는 비상장 주식이었다. 유성창투는 최성훈의 인맥 및 기관 투자자로 지분이 형성되어 있었고, 현금 배당이 확실하다 보니 군말 없이 지금까지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최서령은 완벽하게 분리된 유성창투를 유성그룹으로 다시 묶어 이미 상장된 유성그룹에 우회상장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유성그룹을 과거 전성기였던 시절로 돌릴 수 있고, 현금 자산이 탄탄한 유성창투의 자본을 손쉽게 유성그룹으로 흐르도록 구조를 바꿀 수 있었다.

여기서 최대의 걸림돌은 1대 주주인 최윤재의 지분 35%. 동생인 최영재가 17%를 가지고 있지만 우호 지분을 포함하여 총 비중 절반을 넘겨야 주총에서 뭐든 휘두를 수 있는데, 윤재의 지분율이 워낙 높다 보니 쉽지 않았다.

“최 전무 지분이 높은 것도 있지만, 워낙 실적이 좋으니 주주들이 최 전무를 밀어주는 분위기라서.”

콧대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리던 한 대표는 난색을 표하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었다.

“제인제약 4%는 메이드 해 볼 수 없을까요? 1~4% 사이의 주주들을 다 모으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

최근 최서령은 유성그룹 리조트 리뉴얼을 위해 공사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최 회장이 골프장 건립을 위해 마련해 둔 자금까지 모조리 투자했건만 개선 효과가 뚜렷하지 않아 카지노까지 확장하며 전방위 로비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인허가에서 쉽지 않아 진퇴양난에 빠진 최서령은 어떻게든 유성창투에서 현금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한 대표는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고심하는 최서령에게 객관적 지표를 보여야만 했다. 까딱하다가는 자신마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쉽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최 전무가 손대는 투자마자 실적이 너무 좋아서요. 주총에 전무직 사임을 올릴 만한 타당한 이유도 없고, 주주들이 최 전무 편이라… 지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게 좋아 보입니다.”

한 대표의 뼈아픈 충고에 최서령이 파르르 몸을 떨자, 들고 있는 주주명부가 덩달아 흔들렸다.

“B-gate 투자만 했어도…….”

그녀는 막아야 할 1차 어음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아 초조했다. 예정대로 유성창투에서 B-gate에 300억가량의 투자를 집행하면 B-gate 대표가 해외 법인으로 투자 금액을 넘긴 후, 유령 계좌와 카지노에서 돈세탁을 해 다시 유령 회사로 송금, 이후 투자처럼 유성그룹에 돈이 흐르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최서령이 B-gate 대표에게 받아야 할 금액은 200억 원이었다.

다소 위험한 계획인 데다 한 대표가 언제까지 자신의 편일지 모르기에 내역을 소상히 밝히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확실한 투자처라고, 무조건 B-gate에 투자를 밀어달라고 고집부린 최서령 때문에 내부에서 B-gate 투자로 바람을 불어주던 한 대표는 최윤재의 벽에 부딪혀 결국 노선을 틀어야 했다.

“저도 최 전무가 무슨 바람이 불어 B-gate를 포기하고 스튜디오 G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B-gate 끝까지 고수했어야지요.”

“스튜디오 G 투자에 전무 자리를 건다고 하길래, 차라리 이게 더 쉬운 길일 줄 알았습니다.”

한 대표는 최서령이 최윤재를 밀어내고 싶다는 것만 알고 있기에, 이 방법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해 뜻대로 해 보라고 최윤재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상황은 완벽히 역전되었다. 스튜디오 G가 투자 두 달 만에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하자 최윤재를 밀어내고 회사를 흔들려던 계획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답답함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서령은 최근 주주명부에서 변동 사항이 있는 회사를 짚으며 물었다.

“에이 세컨드, 여긴 뭐 하는 회사예요? 처음 들어보는데.”

“부동산 투자 쪽으로 유명한 해외 법인입니다. 주로 아시아 쪽 투자를 하는데, 국내는 처음인 거 같습니다.”

3개월 단위로 기록을 추적해 보니 지분이 1%에서 3%까지 야금야금 올라오고 있었다. 주로 1% 이상의 대주주 지분을 조용히 매입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꾸준히 매입하고 있군요.”

“아직은 미비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후를 넘어가는 해가 통창 너머로 길게 들어와 테이블 위를 넘보고 있었다. 서령은 주주명부를 테이블에 툭 던지며 불만스러운 투로 재촉했다.

“일단 제인제약 메이드 좀 해봐요.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 대표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쉬운 사람이 누군데, 갑질이나 해대고. 최윤재가 이만큼 성장하기 전, 최 회장이 대표로 세워준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성그룹의 끄나풀이 되어 버렸지만 요즘 들어 한계에 다다른 한 대표는 썩은 동아줄을 잘라내야 할지, 말지의 기로에 서 있었다.

24살 멋모르던 햇병아리 대학생 최윤재는 이제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맹수가 되어 버렸다. 회사 내에서도 대표인 자신보다 최윤재를 따르는 이사진들이 더 많았고, 주주조차도 최윤재에게 배 이상 호의적이었다. 그는 세대를 뛰어넘는 포섭력으로 조직을 부드럽게 리드하다가도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냉철하게 움직였다. 최윤재에게서 미래를 본 한 대표도 그에게 슬쩍 한 발을 걸치고 조용히 줄을 대고 있었다.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

화려하기 짝이 없는 대저택을 먼 시선으로 둘러보는 한 대표의 눈이 다소 냉소적이다. 6개월 남았다던 의사진의 말이 무색하게 2년을 버틴 최 회장이지만 이제는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한 대표에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을 찾으며, 답답함을 호소하는 최서령에게 무시하지 못할 불안감이 전염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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