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D-day
한 대표의 집무실은 동남향 최고층에 위치해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쨍한 날에는 실내로 들이치는 빛 때문에 종일 블라인드를 내려놔야 했다. 아침에는 국지성 소나기가 예보된 대로 짙은 먹구름이 군데군데 끼어 있었지만, 구름의 기류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점심 무렵부터는 옅은 층구름과 광량이 센 햇빛이 집무실 내부를 점령하듯 밀고 들어왔다.
햇볕의 따스한 기운과 대조되는 서늘한 기류가 서령의 방문 이후부터 집무실을 감돌았다. 자리에 앉은 지 10여 분이 지났지만 서령이 딱히 이렇다 할 말 없이 고민에 빠져 있자, 자리의 주인인 한 대표는 난처함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마른기침을 연속으로 내뱉었다. 남의 일터에 찾아와 무게 잡는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 죽겠다는 항의였다.
서령은 한 대표의 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꼬고 있던 다리를 펴서 한쪽으로 붙였다. 평소 당당함과 오만함의 결정체인 그녀가 초조한 심리를 가감 없이 노출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서령은 낮게 숨 고르기를 하다 한 대표를 향해 저자세로 목소리를 낮췄다.
“한 대표님께서 한 번만 힘써 주시면 좋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제가 대표이긴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실세는 따로 있는걸요.”
대표 권한으로 돈을 융통할 수 있기는 하나, 까딱 잘못하면 횡령으로 오인당하기 십상이었다. 더군다나 실질적 권한은 최윤재가 갖고 있어서, 아무리 현금이 산처럼 쌓여 있다 한들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서령도 한 대표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절박하다 보니 자꾸 아버지인 최 회장 라인의 사람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소식 없나요?”
“네, 없습니다.”
“하…….”
리조트 공사 대금 문제로 돌렸던 1차 어음 상환 시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당장 급한 1차의 불을 꺼도, 두 달 뒤 2차 어음 상환이 대기하고 있어 점점 목을 조이는 형국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면 주가 폭락은 물론이요. 주주총회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날아들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현재 유성그룹 주가는 3년 전부터 하향 곡선을 타고 점점 떨어지더니 52주째 최저가를 계속 갱신하며 바닥을 치고 있었다.
“김 이사도, 강 상무도 오늘 바쁘다고 빠지는 걸 보니…….”
한 대표와 함께 4자 대면을 하며, 신뢰를 이끌어내려 했던 서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특히나 이 자리를 뭉개 버린 건 강태오 상무였다. 강태오의 단호한 거절이 소문난 건지, 다른 건설사도 싸늘한 입장을 보이며 뒤로 빠졌고, 제인제약의 김 이사마저도 소문을 듣고 상황을 재는 것처럼 대기를 걸어 버렸다. 분노한 서령은 비난의 화살을 강태오에게 몰았다.
“그나저나 최윤재가 안 보이던데.”
“아, 어제부터 건강상의 문제로 재택근무 중입니다만, 회의는 모두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디가 아프길래.”
“박 비서 말로는 이석증이 심해 그렇다고 합니다.”
이석증이라는 말에 최서령은 아쉬움의 탄식을 쏟아냈다. 몸 어디가 크게 다치거나 망가져 장외로 밀려나면 좋으련만, 병가를 내고서도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으니.
“근데…….”
“…….”
“저희 박 비서한테 들어 보니, 최 전무가 수행 비서인 유은호라는 직원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군요.”
한 달 남은 어음을 막을 방도를 찾느라 혈안이 된 서령에게 솔깃한 정보였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눈빛으로 엄중하게 따져 묻자, 잠시 고민하던 한 대표가 최서령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애인 관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애인 관계요?”
서령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눈빛은 새로운 먹잇감을 포착한 것처럼 형형히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전 애인이었던 이준서와 페로몬이 비슷해 혹시나 했는데.
“이건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유 비서의 페로몬이 근래 들어 바뀌었다고도…….”
“각인을 말하는 건가요?”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페로몬이 바뀌었다는 말에 아연해진 서령은 환희에 젖었다가 곧 냉정함을 유지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박 비서 믿을 만한가요?”
“네.”
“그럼 조금 더 확인해 주세요.”
최윤재는 처음으로 사귄 이준서와도 쉽게 헤어졌다. 그래서 둘 사이에 이간질을 놓으며 깊게 관여하려 했던 서령은 그 당시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대표 말대로 둘 사이에 각인이 이루어졌다면 최윤재의 약점을 틀어쥘 절호의 기회였다.
한 대표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최서령은 비릿한 웃음을 짓다, 엘리베이터에 반사되어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며 표정을 지웠다.
유은호가 쓸 만한 카드이긴 하지만 당장 급한 건 1차 어음을 막을 현금이었다. 최서령은 며칠 전에 메일로 은밀한 연락 한 통을 받았다. 상대는 그동안 줄을 되고 싶어도 쉽지 않던 에이 세컨드였다. 관계자는 서령에게 유성창투의 주식을 매도할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 서령은 상황이 긍정적으로 돌아갈 줄 알고 유성창투의 주식 매도를 고려치 않았다. 하지만 강태오의 거절로 다시금 유동성 위기를 겪게 되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유성창투 주식을 팔아야만 했다. 그녀는 현 상황에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비 앞에서 대기 중이던 세단에 올라탄 서령은 넋이 나간 것처럼 한참을 고민한 끝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영재야.”
서령의 하나뿐인 남동생 최영재는 최측근만 아는 자폐 스펙트럼 환자였다. 다행히 어린 시절에 빠르게 알아차리고 치료를 시작한 케이스라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자폐 성향이 옅은 편이었고, 안 좋은 부분을 빠르게 소거시키며 꾸준히 심리 치료를 병행했다. 그 덕분에 남들이 볼 때는 그저 수줍음 많고 소극적이며, 무언가 꽂히는 것이 생기면 집착을 한다는 것 정도로 인식하지만, 그만큼이 되기까지 주위에서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윤재가 팀장으로 첫발을 내딛던 시절, 사회생활을 그럭저럭할 수 있게 된 최영재를 전무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실적 저하로 회사를 내리막길 걷게 만들어 이사회 및 주주들에게 직위 해제를 당했다. 영재는 소거되었던 자폐 본능이 다시 올라와 불안함이 극점을 찍는 등 사회와 점점 격리되는 양상을 보였다.
현재 그는 유성그룹의 전무 자리에 있지만 거의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를 따르는 조직과 직원은 없었으며, 해당 조직의 리더 부재로 모럴 해저드가 일어나는 등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서령은 영재의 실질적 보호자였고, 최영재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절대 권력자였다.
“미안한데 안 되겠어. 네가 가진 주식, 일부 정리하자.”
최윤재를 흔들어 바닥으로 내치기 위해서는 영재의 주식을 끝까지 가져가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유성그룹부터 살려야 했다. 서령은 에이 세컨드 대표를 만나 유성창투를 공격적으로 사들이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
8개월 전, 그날이 돌아왔다.
윤재는 은호를 티 나지 않게 밀착 감시하며 분 단위로 시간을 확인했다. 살면서 이렇게 시간을 많이 확인한 적이 있던가. 윤재는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마치 자신을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져 속이 새카맣게 탔다.
은호는 3일 내내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 의외로 순순히 허락했지만, 그 직후 옷가지가 부족하다며 금방 오피스텔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윤재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은호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에 가는 것을 막고 자신의 옷을 꺼내준 윤재를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눈앞에서 윤재가 자꾸 휘청거리자 더는 오피스텔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 됐다.”
과거 은호의 교통사고 시간이 지나갔다. 정확히 몇 시 몇 분인지는 모르나 점심 직전이라고만 기억한 윤재는 정오를 넘기자 큰 숨을 쏟아내며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가 됐는데요?”
혼잣말로 조용히 한 말이었는데 그걸 그새 들은 건지, 키노트를 작업 중이던 은호가 고개를 들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 그게… 이번 총괄 투자본부에서 올라온 스타트업 투자 결정.”
윤재는 가까이 다가와 모니터를 훑는 은호 때문에 등허리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느 곳으로 하시려고요?”
“어?”
윤재는 회사를 딱 집어 말해 주기에는 사실 고민한 바가 없어 투자 항목 중에 점찍어 놓고 있는 분야를 선택했다. 당분간 주력으로 투자할 방향이었다.
“인플루언서 마켓 플레이스 쪽이 아무래도 좋을 거 같아.”
은호가 투자 이유를 알고 싶은 듯 모니터를 확인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구원 투수처럼 도우미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전무님, 점심 드세요.”
다행이다. 이 말을 오늘만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다. 윤재는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호를 일으켰다. 어지럼증은 괜찮냐고 묻는 은호의 질문에 이젠 다 나은 거 같다는 나이롱환자 같은 말을 던지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녁이 지나고 안심 단계로 넘어간 윤재는 윤 실장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 받는 도중,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점심 직전, 회사 앞 6차선 도로에서 트럭과 버스의 추돌 사고로 승객 중 일부가 병원으로 실려 갔으며, 최서령이 오전에 한 대표실에 방문했었다는 내용이었다. 윤재는 두 가지 사실에 집중하며 회귀 전 오늘을 되짚었다.
결국, 은호가 빠졌어도 그날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8개월 전 그날도 최서령이 회사에 방문했다는 소리인가. 당시 윤재는 정신이 없어 서령의 방문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때 은호의 사고는 현준의 충격적인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서령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윤재는 서령의 방문이 이번에 추가된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도 있었던 사건인지 자못 궁금했다.
윤재는 윤 실장과 통화를 끝낸 뒤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먼저 잠든 은호의 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탠드의 노란 불빛 아래 은호의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선이 고운 얼굴 안에 오목조목 붙은 이목구비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때는 가까이 두고도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윤재는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결핍된 감정이 은호로 인해 점점 채워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다음 날 아침, 은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윤재는 생수 한 병을 들고 테라스로 걸어갔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잠든 은호는 밤잠을 자는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윤재는 테라스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근처 테이블 의자에 앉아 강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연락 주셨군요.
태오는 윤재로부터 연락이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한껏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본격적으로 할 이야기가 많은 거 같은데, 어찌할까요?”
그의 말대로 은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윤재가 3일을 함께하고 있었기에 사고가 날 위험도는 제로에 가까웠고,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태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하지만 윤 실장 다음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핵심 인물인 데다 회귀 전 윤재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 설령 나중에 적이 된다고 할지라도 당장은 손을 잡아야 했다.
-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본 후, 다시 연락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태오는 윤재의 빠른 피드백에 정중한 투로 시간을 미뤘다. 뭔가 늦추려고 하는 눈치에 윤재의 답이 끊어지자, 태오는 돌아가는 사정을 조심히 풀었다.
- 최서령 부사장이 유성창투 주식을 일부 매각할 것 같습니다.
“……에이 세컨드로 말입니까?”
- 네, 주식 양수 양도가 끝난 뒤에 뵈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현금 줄이 막히자 마지막 카드를 쓰는 건가. 윤재는 최영재의 지분 몇 프로가 에이 세컨드로 넘어갈지 궁금했다.
윤재는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며 최악과 최상의 시나리오를 순차적으로 머릿속에 세워 뒀다. 시간의 흐름이 거친 유속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