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13/14)

외전 1

카프리섬 언덕에 위치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의 외관은 흡사 중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장엄하고도 고풍스러웠다.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아름드리나무가 저택 뒤를 빽빽하게 둘러싸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다.

카프리섬에서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던 은호와 윤재는 인터넷에서 저택의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둘은 아름다운 결혼식을 위한 숙소로 기꺼이 저택을 선택했다.

며칠 전부터 카프리섬에 와 있던 두 사람은 결혼식 전날 저녁에 도착한 은호의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했다. 오랜 비행에 지친 아이들과 희수가 먼저 일어난 뒤에도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결혼 앞둔 사람한테 무슨 술이야.”

“알았어! 딱 한 잔만.”

은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첫째 형에게 달려들었다. 반나절 후면 결혼식을 진행할 텐데 윤재를 데리고 술판을 벌이려는 분위기가 감지되어 은호가 차단막을 쳤다. 이렇게 눈치 없던 형이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은 덤이다.

“네가 매제 생긴 기쁨을 알아?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다고.”

“오늘 늦게 도착했으면 빨리 자야지 무슨…….”

“안 그래도 한 잔만 하고 잘 거거든.”

한 잔이란 말에 은호도 더는 날을 세우지 않았지만, 주의 깊게 확인해야 했다. 원래 술이라는 게 한 잔 들어가면 한 잔 더 마시고 싶고, 그러다 보면 술병이 바닥나고, 자기가 취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마셔야 만족감이 생긴다.

은호는 술꾼은 아니었지만 분위기에 취해 마시는 술자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배 속의 꼬물이 때문에 다섯 달이 다 되어 가도록 금주 중이라 술자리에 끼지 못해 심통이 나서 떼를 부리고 있었다.

첫째 형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있는 은호를 슬쩍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우리 은호, 잔소리 대마왕이지?”

“그렇긴 한데… 제 눈에는 귀엽습니다.”

“원래 신혼 때는 다 그렇다고 하지만 정말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네, 씌었어.”

첫째 형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윤재의 멀끔한 낯을 이리저리 살폈다. 분명 뉴스 기사에 오르내리는 그 얼굴이 맞는데, 어쩌다 우리 은호에게 단단히 빠졌나.

“형, 왜 그렇게 우리 윤재 씨 쳐다보는데?”

“그냥 신기해서.”

“신기할 게 뭐 있는데?”

“너한테 무슨 매력을 느꼈는지 궁금하잖아.”

투덕거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슬그머니 윤재에게로 향한다. 식사를 마치고 와인 잔을 비우던 윤재는 뜨겁게 날아드는 눈빛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존재 자체가 매력입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말만 할 것 같은 차가운 사람이 저런 느끼한 말을 태연하게 하다니. 뿌듯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은호가 옆에서 엄지를 날리자 첫째 형은 술맛이 떨어졌다며 손을 휘저었다.

“아, 진짜. 둘 다 올라가!”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 흐드러지게 웃고 말았다.

윤재는 빈 잔을 옆에 내려놓고 은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올라가 보겠다는 깍듯한 인사에 첫째 형이 손을 흔들려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사한 모습으로 내일 만나자며 윤재를 토닥여 주는 두툼한 손에서 뜨끈한 열이 올라왔다.

“여기까지 와서 술판이야, 피로연도 아니고.”

2층으로 올라가던 은호는 민망한 나머지 괜한 불만을 토로했다. 형이면 형답게 진중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깃털처럼 가벼운 대화만 오고 가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윤재라서 더더욱 그랬다.

“좋으니까 그러지.”

윤재가 첫째 형의 편을 들어 줬다. 은호는 겉으로는 화가 안 풀린 척 굴면서도 내심 고마웠다. 윤재는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반 박자 느릿하게 움직이는데, 가족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은호는 늘 진심으로 자신과 가족들을 대하는 윤재의 태도에 점점 선명한 결심이 들었다. 이 사람을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사랑해야겠다고.

“은호야.”

2층 통로에서 갈색 카디건을 걸친 희수가 은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실 물을 찾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그녀는 올라오는 은호와 윤재를 보곤 환하게 웃어 주었다. 희수가 두 팔을 벌리자 은호가 익숙하게 그녀의 품속으로 날아들었다. 어느덧 은호는 그녀를 내려다 볼만큼 장성했지만, 희수의 품에 안길 땐 철없던 어린 시절 꼬마가 되어 버린다.

“네가 이만큼 컸다는 게 엄마는 믿기지 않네.”

형들과 터울이 지는 늦둥이로 태어나 여러 사람 손을 타고 자란 막내가 내일이면 결혼을 하고,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간다고 생각을 하니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희수는 은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맙다. 은호야.”

희수는 은호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윤재와 눈을 맞추었다. 세월 탓에 축 처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웃음 지을 때마다, 눈주름이 좀 더 깊고 진하게 그어졌다.

“최 서방도 이리 오게.”

희수가 감고 있던 팔을 풀자 은호가 뒤로 빠지며 윤재가 성큼 다가왔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훤칠한 윤재가 희수를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윤재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회사도 회사지만,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 잘 챙겼으면 좋겠어.”

“…….”

“은호랑 행복하게 살게.”

그녀는 은호의 짝으로 윤재가 나타났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못했다. 자라온 환경이 너무도 달라 분명 탈이 날 거라고 믿었다. 윤재는 희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설득 작업에 나섰고, 결국 누구보다 은호를 사랑하는 진실한 그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돌아섰다. 윤재는 온전히 은호 하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솔직함이 무기였다. 희수는 그 이후로 윤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식당을 경영하는 그녀는 대표라는 위치가 얼마나 고된 자리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매일같이 윤재를 걱정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일 때문에 건강을 잃을까 마음이 쓰였다. 희수는 은호에게 윤재를 잘 챙겨 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은호는 테라스 밖으로 펼쳐진 근사한 야경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울창한 수풀 위로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과 조각처럼 흩뿌려진 별빛을 넋 놓고 바라보던 은호는 손잡이를 붙잡고 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전신을 강타하는 서늘한 바람에 몸을 움츠린 은호는 고개를 돌려 윤재에게 물었다.

“강 상무님은 내일 성당으로 곧장 오는 거죠.”

“응. 바깥바람 차다, 이리 와 봐.”

윤재는 추위도 많이 타면서 얇은 긴팔 한 장으로 테라스로 나서는 은호를 붙잡았다. 낮고 감미로운 음성이 은호의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윤재는 침대 위에 펼쳐 놓은 앙고라 망토를 은호의 몸에 두르고 단추까지 끼운 뒤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함께 테라스로 나서는 윤재는 정작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안 추워요?”

“열 많은 거 알잖아. 아니면 이렇게 하면 되겠네.”

등 뒤로 다가온 윤재가 은호를 감싸며 테라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숲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건물 벽을 타고 올라왔다. 폐부 가득 밀려들어 오는 냉기를 머금으며 호흡을 조절하던 은호는 귓속으로 흘러드는 익숙한 음악에 입꼬리를 올렸다.

“Fly me to the moon이다.”

은호는 근처 저택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늑한 밤하늘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음률에 절로 몸이 풀렸다. 때마침 구름 사이로 비친 달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은은하게 쏟아졌다.

“이 노래 정말 좋아하거든요.”

뒤로 돌아선 은호가 윤재를 마주 보더니, 손을 맞잡고 깍지를 꼈다. 춤을 추자며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자 은호를 유심히 관찰하던 윤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춤출 줄 알아?”

“딱 봐도 몸치잖아요. 못 춰요.”

“몸치 아닌데?”

키득거리는 은호에게 윤재가 성큼 다가왔다. 갈색 눈망울 위로 테라스의 불빛이 번져 흘렀다. 천천히, 그리고 더 가까이. 내뱉는 숨이 상대에게 스칠 만큼 얼굴을 가까이 붙이자 자석처럼 따라붙는 입술이 빈틈없이 겹쳐졌다. 윤재의 말랑한 혀가 은호의 입 안을 더듬을 때마다 얽힌 입술 틈새로 뜨끈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키스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은호의 손을 맞잡고 있던 윤재는 어느새 은호의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지며 천천히 몸을 떼어낸 은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에 비친 윤재는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하고 듬직했다.

“……문득 떠올라서 그러는데요.”

“응.”

“내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예요?"

뜬금없는 기습 질문에 지그시 눈을 맞추던 윤재가 손을 들어 은호의 하얀 뺨을 매만졌다.

“음… 면접 날. 화장실.”

“진짜요? 그럼 첫 만남에 호감을 가진 거예요?”

사실 은호를 보고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회귀 8개월 전부터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차곡차곡 쌓인 기억이 은호를 호감 상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윤재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은호에게 굳이 믿기 힘든 회귀 이야기를 들려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좋은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응, 한눈에 내 거라고 점찍고 싶었어.”

은호는 윤재의 말을 되뇌다 지나간 기억 속에서 현준을 끄집어냈다. 처음부터 호감이었으니 애인의 존재를 알면서도 들이대고,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현준을 믿지 말라는 다소 엉뚱한 말을 했던 건가? 은호는 당시 밑도 끝도 없이 현준을 나쁘게 평가하며 경고하던 윤재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 정말 미안했어요.”

“뭐가?”

“못 볼 꼴 많이 보였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의 말이 다 맞았다는 사실이 다소 충격이었다. 애인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던 은호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현준을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마음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은호 자신도 어설픈 양다리 상태여서 할 말은 없지만, 첫 연애 상대였던 현준에게 느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호감 가는 다른 상대가 생겼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고 헤어짐을 통보했다면 좋았을 텐데, 현금지급기처럼 자신을 이용하고자 계속 옆에 붙여둔 그의 행동 자체가 너무도 씁쓸했다.

윤재는 은호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응, 내 말 진짜 안 들었지.”

“…….”

“고집불통에 청개구리 행동까지 했으니.”

“세상에, 기억하고 있다 곱씹는 거 봐. 뒤끝 있었어.”

안 그래도 미안해 죽겠는데, 콕 집어서 놀리니 은근 배알이 꼴렸다. 은호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삐딱선 타듯 눈썹을 추켜세우자 당황한 윤재가 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농담이에요, 농담. 알아요. 진짜 대책 없었던 거.”

윤재가 당황하는 걸 능청스럽게 지켜볼 여유까지는 없었다. 은호는 윤재의 뺨을 붙잡고 동그랗게 모은 입술을 그의 붉은 입술에 안착시켰다. 은호의 생글거리는 눈웃음에 윤재의 굳은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잡아 줘서 고마워요.”

바닷바람에 은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윤재가 정돈하듯 가지런히 쓸어내렸다. 큼지막한 손이 은호의 차갑게 식은 손을 붙잡아 조물조물했다.

“벌써 차가워졌어. 어서 들어가자.”

***

소렌토 해안을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잠을 깬 은호는 쏟아지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재를 보며 피시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 위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컨디션은 어때?”

“괜찮아요.”

“괜찮은 게 아니라 아주 좋아야 하는데.”

윤재의 나른한 음성이 이마를 타고 턱 언저리로 흘러내렸다. 은호는 윤재의 손을 붙잡아 아랫배 위에 얹었다. 아기 배처럼 조금 솟아오른 배 속엔 어느덧 20주 차에 접어든 꼬물이가 꿈지럭거렸다. 윤재는 손바닥을 툭툭 치는 섬약한 감각을 느끼며 교감하듯 살살 배를 쓸었다.

“신기하게 자고 일어나면 활발하게 움직이더라고요.”

이탈리아로 오기 직전 들른 산부인과에서 은호와 윤재는 꼬물이의 성별을 확인했다.

“분홍색 옷이 예쁘겠네요.”

담당 의사 선생님의 말에 윤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은호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진료실 복도에서 말이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과장된 행동을 하지 않는 윤재는 요즘 들어 나사가 풀린 것처럼 인간미가 넘쳤다.

은호는 최근 꼬물이의 태몽을 꿨다. 쪽빛으로 물든 싱그럽기 그지없는 풀숲을 걷던 은호의 앞에 얕은 시냇가가 나타났는데, 피라미와 송사리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비단 금붕어 한 마리가 은호의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살랑살랑 다가왔다.

레이스처럼 풍성하고도 긴 꼬리가 자신을 봐 달라는 것처럼 하늘거렸다. 은호는 화려한 금붕어의 자태에 반해 물속으로 슬며시 손을 밀어 넣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던 조그마한 녀석은 겁도 없이 은호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깨문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 전해졌다. 은호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덕분에 눈뜨면 바로 휘발되곤 하던 꿈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은호는 직감으로 태몽임을 깨달았다.

은호는 배를 톡톡 때리며 건강히 잘 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꼬물이 때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배고프대요.”

은호의 말 한마디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윤재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뭐 먹을까?”

“말하면 눈앞에 차려줄 거예요?”

“그럼.”

자신 있어 하는 윤재의 말을 가볍게 묵살한 은호는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먹고 싶은 걸 윤재가 잘못 가져다줄까 봐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걸 기다렸다가는 예식에 늦을지도 모른다.

올리브가 잔뜩 들어간 건강 샐러드와 칼조네, 레모네이드로 아침을 해결한 둘은 가족들과 함께 카프리섬 언덕 끝에 위치한 작은 성당으로 이동했다.

초겨울에 접어들었지만 지중해 날씨는 한국의 가을처럼 선선했다. 두 사람이 걷고 있는 가로수 사이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화사하게 쏟아졌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성당의 첨탑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무 아래 그늘진 곳으로 이동한 윤재는 은호의 손을 붙잡고 성당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갈 때마다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성스럽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마음을 정화했다.

층고가 높은 천장 곳곳엔 신에 대한 열망 가득한 화려한 그림과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 작품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천장 아래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오색의 햇살이 어두운 실내를 부드럽고 은은하게 비추었다. 미색 슈트를 입은 은호와 짙은 회색 슈트를 입은 윤재가 제단 앞 좌석에 한 뼘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았다.

세례명이 있는 은호와 달리 윤재는 세례명이 없어 이탈리아로 오기 전 가까스로 부여받았다. 둘은 이미 합법적인 부부 사이였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은호를 데리고 돌아갔던 다음날, 윤재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호와 함께 구청을 찾아가 혼인 신고를 마쳤다.

이탈리아에서의 결혼식 하객은 은호의 가족과 태오, 올리비아가 전부였다. 윤 실장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제단 근처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의자에 삼삼오오 모인 하객은 윤재와 은호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르간의 깊이 있고도 엄숙한 음률이 성당 내부를 감쳐돌 즈음 두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 백색 제의복의 신부님이 제단 위에 올라섰다. 희끗희끗한 머릿결을 곱게 뒤로 넘긴 신부님은 콧등으로 내려온 안경을 천천히 올리며 제단 아래 앉아 있는 윤재와 은호에게 눈을 맞췄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신부님의 얼굴 주름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부드럽게 패었다.

주례 신부님의 혼배 미사가 이어지자 실내는 더욱 고요해졌다.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는 하객은 제단에 시선을 집중했다.

“Sposi, giurate di sposarvi.”

(신랑, 신부, 혼인을 서약하십시오.)

두 사람은 제단 앞으로 나와 혼인서에 서명했다. 윤재의 왼쪽 가슴팍에 달린 은방울꽃 부토니아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은호는 고개를 돌려 윤재를 올려다봤다. 반듯하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의 너른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듬직하고 근사해 보였다.

“Siamo qui riuniti oggi per vedere i due diventare uno.”

(우리는 오늘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걸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백발 성성한 주름진 얼굴의 신부님은 앞에 있는 윤재와 은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온화하고 기품 있는 미소로 둘에게 물었다.

“Vi promettete di amarvi e rispettarvi a vicenda per il resto della vostra vita davanti a Dio?”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생 서로를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약속합니까?)

“Sì, lo prometto.”

(네, 약속합니다.)

축성을 받은 반지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연결 고리 역할을 한 소중한 반지를 앞에 두고 둘은 그동안의 기억을 짧게 회상했다. 10개월 사이, 꽤나 많은 일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반지를 들어 서로의 왼쪽 약지에 천천히 끼워 주었다. 로마 숫자로 섬세하게 음각 처리된 반지가 손마디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Vivrò amandoti, rispettendoti, considerandoti e seguendoti sempre.”

(당신을 언제나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끼고 따르며 살겠습니다.)

신성한 의식 속에 서로를 마주 본 두 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눈물이 날 만큼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눈빛이 미래를 약속한다. 혼배 미사가 끝나고 하객들 사이를 걸어 나오며 윤재와 은호는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조도가 낮은 장엄하고도 엄숙한 길 끝에는 환한 햇빛을 받아 눈이 시릴 만큼 밝게 빛나는 성당의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은호의 가족과 태오, 올리비아 그리고 두 사람을 축복해 주러 온 마을 사람들까지. 은호와 윤재는 쌀알을 던지며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들 앞에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사랑해.”

살랑이는 머리카락이 허공을 나풀거린다.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은호에게 윤재의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천천히 닿아 오는 입술이 부드럽고 너무도 따스했다.

같은 이불 속에 누워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고, 또다시 뜨는 태양을 함께 맞이하는 삶을 이루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삶.

지금 두 사람 앞에

찬란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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