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농담 (2)(2권) (4/15)

1. 농담 (2)

나는 머리에 손을 올려보았다. 이세정이 나눠준 온기가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머리에서 손을 뗐다. 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빈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문득, 소름이 끼칠 만큼 고요한 정적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울렸다. 너무 조용해서 외려 무서웠다.

불안하게 서성이다 우선 차 키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을 만한 일이 필요하다. 서랍 안에 차 키를 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리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책상 아래에 쑤셔 박혀있는 젬베 하나가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젬베를 옆으로 치워내고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빈 오선지를 보고 있자니 갑갑했던 심장이 조금 풀려오는 기분이었다. 생각 없이 음자리표를 삽입했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음악은 모방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세정을 모방해보는 거다.

***

[뭐 해요?]

[일해요. 우채민 씨는?]

[저 공부하러 가려고요]

[이따 봐요]

확실히 이세정의 답장은 내가 만족스러울 만큼 빨라졌다. 이세정과 내가 각각 두 통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문자를 보내도 도무지 씹는 법이 없었다. 보태어 공부를 많이 안 한 것치고 시험을 잘 치기까지 한 나는 몹시 기분이 좋은 나머지 하마터면 ‘예.’라고 답장을 보낼 뻔했다. 충동을 겨우 눌렀다.

[저 새벽까지 공부해야 돼요u-u]

[u-u 이게 뭐예요?]

[우는 표정uu]

[옆에 앉아만 있을게요]

이세정이 보낸 문자를 확인하며, 과연 공부가 잘될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설령 이세정이 회사에서 못다 한 잔일을 가져와 그에 몰두한다고 해도, 내 쪽에서 말을 걸어 주의력을 분산시켜버릴지도 몰랐다. 얼른 점심을 먹고 공부할 셈으로 캠퍼스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저쪽에서 누군가 눈에 들어왔다. 바위 아래에 앉아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새 좀 친해졌다고, 나는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배도빈은 바닥을 기는 개미에게서 빵조각을 빼앗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개미에게 최대한 닿지 않으려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빵만 집어 들어선 조금 멀게 두었다. 개미는 천천히 기어서 다시 빵을 향해 다가갔다.

“……뭐 하세요.”

“심심해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몸을 돌렸더니, 배도빈이 단숨에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나랑 놀아줄래?”

“공부 안 하세요?”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사줄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마침 나도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갈 참이었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가서 먹자. 너 뭐 먹고 싶냐? 참고로 난 한 달에 열여섯 번 정도 치킨을 먹어.”

“……치킨 먹자는 소리 아니에요?”

“가자.”

배도빈이 나를 데리고 향한 곳은 학교와 밀접해 있는 치킨집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마주 보고 앉자마자 배도빈이 순살 한 마리와 맥주 두 잔을 시켰다. 대낮부터 무슨 술인지, 건배를 강요하는 배도빈에게 대충 맞춰주고 입만 축였다.

배도빈은 잘 먹고, 많이 먹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치킨을 두 개씩 입에 넣는 폼이 한두 번 먹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나를 경계하여 식탐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나는 선뜻 치킨 조각을 집어 먹지 못하고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내 시선을 느낀 배도빈이 물었다. 그래놓고 대답을 듣지도 않고 치킨 한 마리와 맥주 1,500cc, 그리고 소주 세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저 형이랑 같이 술 먹을 생각 없습니다.”

“난 치킨 먹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테이블에 치킨보다 술이 더 많아요.”

“난 술 없이 밥 못 먹어.”

테이블 위로 술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벌써부터 벅차 왔다. 배도빈의 주량이 매우 셌으면 했다. 저번처럼 배도빈이 또 술주정을 부린다면 아마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내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배도빈은 거침없이 술을 흡입했다. 두 번째 소주병을 깐 배도빈이 중얼거렸다.

“세상에선 없어서는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어.”

“예?”

배도빈은 내 잔과 제 잔을 각각 채웠다. 그러고 나서 잔을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그중에서 술 먹고 섹스하는 게 최고지. 건배할까? 건강한 성생활을 위하여!”

90년대 회사원들 술자리에서 흔히 들을 법한 말투가, 잔잔한 음악을 뚫고 우렁차게 울렸다. 주변 테이블에서 힐끗힐끗 이쪽을 곁눈질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창피해졌다. 이 형은 왜 갈수록 미쳐가는 것 같지. 맨정신으로는 이 상황을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서 소주를 쭉 들이켰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이상 이곳으로 향하지 않을 때까지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막 소맥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는데, 조금 가라앉은 배도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넌 대단하다. 어떻게 스킨십도 없이 연애할 수 있냐?”

소맥을 제조하다 말고 되물었다.

“예?”

“아, 연애는 아닌가. 아무튼 에이섹슈얼이랑 데이트해보니까 어때?”

순간 에이섹슈얼이 뭔가 싶었다. 멍청하게 배도빈을 쳐다보다가 일전에 지수가 한 말을 되새겼다.

‘좋아하는 감정을 느낄 수는 있는데, 성행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뭐 종류가 있대. 가벼운 스킨십은 괜찮은 사람, 그마저도 싫은 사람, 사랑해야만 섹스가 가능한 사람, 애인에게 맞춰주려고 섹스하는 사람.’

내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배도빈이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왜 모르는 눈치지. 아는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인지 잘…….”

“가끔 삶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는 부류의 사람이 몇 있잖아. 이세정은 그게 좀 심해. 그게 성적인 부분까지 연결된 케이스야. 섹스는커녕 팔도 못 잡게 하는 놈인데, 어떻게 그렇게 꼭 안고 있었냐? 나 잘못 본 줄 알았다.”

이세정과 입맞춤을 나눴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나를 막, 덮쳤는데? 목을 이렇게, 이렇게, 막, 했는데?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당시 이세정의 눈빛에서 본 건 분명 성적인 욕망이었다. 아무래도 배도빈은 이세정에 대해 잘 아는 척 떠들 뿐, 정작 제대로 아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밖에 없는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 술까지 마셨으니 더더욱 제정신이 아니겠지. 그냥 흘려듣기로 했다. 소맥을 한 잔 더 마셨다. 오늘따라 술이 잘 받는 것 같다.

“아, 추워. 나갈래?”

술만 잔뜩 마셨을 뿐 순살 치킨은 세 조각도 채 먹지 못했는데, 배도빈이 내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원래가 배려가 결여되어있는 사람이지만, 술이 들어가니 더욱 저 마음대로였다. 많이 취했나. 슬쩍 배도빈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배도빈이 나를 곁눈질하곤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치킨집 밖으로 나오자 열기가 쏟아졌다. 배도빈은 아깐 춥다더니, 이번에는 덥다고 난리였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앞서 걷다가 인형 뽑기 매장 앞에 섰다. 배도빈은 다짜고짜 매장 앞에 있는 큰 기계에 돈을 쑤셔 넣었다. 이 술주정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지 몰라 당혹스럽게 서 있는 와중에 이세정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뭐 좀 먹었어요?]

[네. 치킨 먹었ㅅ어요]

휴대폰을 집어넣고 배도빈의 뒤로 갔다. 배도빈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옆에 두더니, 스틱을 잡았다. 우아한 선율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아가 예쁜 인형 뽑아줄게요.”

나는 기계 안을 더 잘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배도빈은 품에서 빠져나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인형 뽑기에 집중했다. 익숙하게 손을 움직여 탁탁탁! 하고 어느 방향으로 스틱을 세게 치더니 단숨에 노란 인형을 뽑았다. 배도빈이 허리를 숙여 인형을 꺼냈다. 운이 엄청 좋았는지, 똑같은 인형이 두 개나 있었다.

“봤냐. 신의 컨트롤.”

“오… 두 개나 뽑으셨네요.”

“하나 뽑았는데 무슨 소리야. 그런데 너 인형 뽑는 거 처음 보냐? 왜 그리 신기하게 봐.”

“지금까지 해본 적 없습니다. 신기해요.”

“해볼래?”

“예.”

“이런 건 아무나 못 뽑는데.”

배도빈이 옆으로 비켜주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스틱을 쥐었다. 크레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인형을 잡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끝이 났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배도빈이 쉽게 뽑아서 나 또한 쉬울 줄 알았는데, 설마 크레인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줄은 몰랐다.

다시 시도를 해보았다. 도전도 도전이었지만, 아까부터 눈에 띄는 인형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펭귄. 저건 아델리 펭귄이 분명했다. 아델리는 아주 포악해서, 기계 안에 갇혀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빨리 구해서 남극으로 보내주어야 했다.

“내 만 원 네가 다 쓰냐.”

배도빈의 말을 무시하고 크레인을 조작했다. 이번에는 분명 완벽하게 잡았는데, 출구로 가던 도중 떨어졌다. 눈을 가늘게 좁히며 펭귄을 노려보았다.

“역시 반항기 있는 아델리 펭귄이 확실한데…….”

손목을 풀곤 다시 스틱을 잡았다가 불현듯 들린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배도빈이 숨넘어갈 듯 웃고 있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웃는 것도 너무 과했다.

“계속보다 보니까 귀엽네.”

배도빈이 얼굴에 남아있는 웃음기를 천천히 거두어내며 휴대폰을 쓱 내밀었다.

“남자 번호 좀 따보자.”

인형 뽑기 기계와 배도빈의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일단 스틱에서 손을 떼고 번호를 찍어주었다.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본 배도빈이 다시 찍으라고 말했다. 지워졌나 싶어 다시 찍어주었다. 배도빈이 묘하게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멍청아, 취했냐.”

“안 취했습니다. 몇 잔 안 마셨는데.”

“번호 불러.”

입으로 한 자 한 자 불러주며 배도빈이 번호를 받아 적는 모습을 못 미덥게 지켜보았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잘 적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자 보냈다.”

배도빈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못 보던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내 번호야. 배도빈의 말에 연락처에 따로 저장을 했다. 그리고 화면을 끄려는데, 뒤늦게 또 다른 문자가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세정의 문자였다.

[만나요. 공부 어디서 하고 있어요?]

[저공부하려고했는데 잠깐인형뽑기중이에요.]

근처에 보이는 간판 세 개를 원문 그대로 입력하고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제는 집중해서 펭귄 구출에 돌입해야 할 때였다. 아까 스틱을 조작하던 배도빈의 손길을 떠올리며 최대한 고수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펭귄은 호락호락하게 잡혀주지 않았다.

결국 만 원을 깔끔히 날려버렸다.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이 나를 왕따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럴 리가 없었다. 지갑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며 펭귄을 쏘아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툭툭 쳤다. 배도빈인 줄 알고 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가 깜짝 놀랐다.

“너 집에 있는 거 아니었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지수가 혀를 두어 번 찼다.

“도서관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뭐야, 너 술 냄새나. 설마 술 퍼마셨냐?”

“아, 배도빈 형이랑 치킨 먹고 같이 노는 중이었어.”

“배도빈? 배도빈이 어디 있는데?”

지수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어디에도 배도빈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뽑기에 빠진 사이 집에 간 모양이었다.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잠깐 걱정이 들었다.

“시험공부는 어쩌고 학교 근처에서 이러고 있어. 이제 공부고 뭐고 때려치웠냐.”

“……그게.”

“그게 뭐.”

“배도빈이 날 도박의 길로 빠트렸어.”

나는 인형 뽑기 기계 안에 있는 펭귄 인형을 가리켰다.

“저거 갖고 싶어.”

“비켜봐.”

나를 밀어낸 지수가 오천 원을 집어넣었다. 지폐를 빨아들이던 기계가 짓궂게도 혀를 날름거렸다. 눈살을 한 번 찌푸렸다가 눈꺼풀이 무거워 잠깐 눈을 감았다.

“잡았다.”

눈을 번뜩 떴다. 허리를 숙여 인형을 꺼내온 지수가 하얀 강아지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아까 혀를 날름거리던 기계와 지금 지수의 모습이 잠깐 오버랩 되었다.

“벌써? 어떻게 이러지. 왜 나만 못 뽑냐.”

“이것도 재능이다, 인마.”

“근데 왜 펭귄은 안 뽑아주냐.”

“저건 좀 깊숙이 있잖아. 너도 쉬운 거 도전해.”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씨발, 진짜.”

“내가 뽑을래. 비켜봐.”

“내 돈이다?”

스틱을 잡았다. 이를 악물고 크레인을 움직이는 데에 한껏 집중력을 발휘했다. 바로 옆에서 내가 인형을 뽑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수가 느릿느릿 말했다.

“시험 끝나면 나랑 찜질방 가자.”

“굳이 왜.”

“술도 같이 안 먹어주면서 드럽게 튕기네. 우리 항상 찜질방 갔잖아. 시험 끝날 때마다 가고, 나 가출할 때마다 가고, 군대 제대하고 가고.”

지수가 나열한 추억에 대해 가만히 회고를 해보니, 인형을 뽑다 말고 웃음이 났다. 지수가 가출을 해 우리 집에 왔을 당시의 몰골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 탓이다. 내가 혼자서 키득거리고 있자, 흠칫 놀란 지수가 제 가슴을 교차해 가렸다.

“너 같이 샤워하다가 나 덮치면 죽는다.”

“네 얼굴 좀 봐라.”

내 말에, 지수가 버럭 노성을 내질렀다.

“씨발, 뒤져? 너 요즘 들어서 부쩍 사람 외모 가지고 뭐라고 한다? 너 때문에 내 자존감이 박살 나고 있어.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데.”

지수가 홀로 주절대는 사이에 나는 벌써 돈을 다 써버렸다. 인형 뽑기는 진짜 쓸데없고 바보 같은 놀이다.

“만 원 좀 더 넣어줘.”

“넌 절대 도박에는 손대지 마라. 잘 걸려들 것 같아.”

지수가 나중에 갚으라며 만 원하고도 오천 원을 더 넣어주었다. 나는 다시 펭귄을 구출하기 위한 기나긴 사투를 벌였다. 한곳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내가 퍽 신기해 보였는지 간혹 사람들이 나를 힐끗거렸다.

또 인형을 못 뽑았다. 나는 작곡에만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인형 뽑기에도 재능이 없나 보다.

“나 이거 뽑기 전까지 집에 안 간다.”

“우채민 가끔 또라이 같아.”

스틱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목이 아렸다. 양쪽 손목을 돌리며 잠깐 펭귄에서 시선을 뗐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고등학생 한 무리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며 내 뒤를 지나쳤다. 배려 없이 걷는 한 남학생의 팔에 등이 거세게 갈겨졌다. 비틀거릴 뻔한 나를 끌어당긴 지수가 내 뒤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시발, 저 새끼들이.”

“야, 놔라.”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 지수가 거세게 팔을 떼어냈다.

“내가 왜 널 지켜줬지. 소름 끼치…….”

나는 옷을 툭툭 털어 구겨진 셔츠를 바로 하면서 갑작스레 말을 멈춘 지수를 힐끔거렸다. 지수는 내 어깨너머를 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지수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았다.

내 뒤에 이세정이 서 있었다. 이세정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장 비서님에게 건네곤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그 사이 지수가 귀신이라도 본 양 내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나는 이세정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키스했던 일이 꿈처럼 떠올라 수줍게 인사했지만, 이세정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내 걸음처럼, 이세정의 입매도 느리게 움직였다. 화났나. 왜 화가 났지. 나는 조금 무서운 마음에 뒷걸음질을 치다가 인형 뽑기 기계에 엉덩이가 부딪혔다.

“다쳐요.”

이세정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기계로부터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저거 누구예요?”

“친구예요.”

“친구랑 지금까지 같이 있었어요?”

정확히는 배도빈과 같이 있다가 지수로 갈아탄 거였다. 정정해주기 위해 입을 벌렸다.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이세정이 내 목 부근에 코를 댔다. 간지러워 눈살을 찌푸렸다. 이세정은 호선을 그린 입술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술 마셨어요?”

“안 마시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억지로 먹였어요?”

주어 없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언급하지 않은 배도빈에 대해 묻는 건지, 아니면 지수와 같이 술을 마셨다고 착각한 건지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자꾸만 이세정이 두 명으로 보여 생각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왜 이러지. 머리를 세게 흔들곤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돌연 시야에 스틱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인형 뽑기 횟수가 남아있었다.

이세정에게 양해를 구하곤 인형 뽑기 기계와 마주 보고 섰다. 인형을 뽑는 데에 다시금 돌입했다. 그리고 연달아 실패, 실패, 실패. 마지막 기회가 하나 남은 시점에서, 나는 몹시 서러워졌다. 내게 펭귄을 구할 힘을 달라는 의미로 이세정을 쳐다보니, 그가 슬쩍 웃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짓는 미소는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세정의 분위기만 봐서는 인형 뽑기를 당장 중단해야 했지만, 나는 이미 펭귄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아있는 상태였다. 크레인이 펭귄을 잡았다가 입구로 향하기 전에 놓아버렸다. 내가 봤다. 분명히 봤다. 저거, 일부러 놓은 거다. 놓친 것이 아니라 놓은 거다. 요망한 크레인…….

어쨌거나 한 자리에서 합계 삼만 원이 날아간 셈이었다. 시무룩하게 펭귄을 보고 있는데, 이세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 비서님, 지폐 있어요?”

장 비서님이 말없이 다가와 투입구에 만 원짜리 지폐를 넣어주었다. 나는 또다시 생긴 기회에 감사 인사를 하곤 스틱을 잡았다.

“애네, 애.”

옆에서 들린 읊조림에 잠깐 이세정을 쳐다봤다. 이세정이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나는 마주 웃어주곤 다시 인형 뽑는 데에 매진했다.

또다시 만 원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그만 포기해야 할까. 재능 없는 사람은 죽으라는 걸까. 실패만 계속되니 이제는 스틱 잡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문득 이세정이 물어왔다.

“뽑아줄까요?”

힘없이 대꾸했다.

“이건 제가 뽑아야 의미가 있는 거라서…….”

“뭘 뽑으려고?”

“저거요. 펭귄.”

펭귄을 유심히 바라본 이세정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뭘 하려나 궁금했으나, 게임이 시작된 뒤였기에 일단 인형을 뽑는 데에 집중했다. 막 인형을 떨어트렸을 때, 별안간 매장 주인이 나타났다.

“잠깐 점검 좀 합시다.”

뜬금없이 웬 점검을 하겠다는 건지, 주인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주인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를 뜯어냈다. 그러는 사이 이세정이 나를 데리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세정은 주인이 기계를 손볼 동안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펭귄이 없는 다른 기계에는 손대고 싶은 마음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빨리 펭귄 구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됩니다.”

“공장으로 가겠네요.”

무심하게 대꾸한 이세정이 내 한쪽 뺨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놓았다.

“술 마시고 어떻게 공부하려고 그래요.”

“할 수 있어요.”

취한 것도 아닌데, 왜 보는 사람마다 걱정을 하는 건지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주량을 초과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나는 내 두 뺨을 쥔 채로 조금 문질러보았다.

“시험 끝나고 만날 거죠?”

이세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저 지수랑 찜질방 가기로 했습니다. 안 가면 또 삐져서…….”

“어디요?”

“찜질방이요.”

품에서 케이스를 꺼내 든 이세정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세정은 장 비서님에게 익숙하게 불 시중을 받고는 연기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뭐 하는 곳이에요?”

“아, 그냥 뜨거운 밤 보내는 곳이에요.”

“…….”

“깨끗이 목욕하고, 뜨거운 방으로 들어가서 눕는 거예요. 자면서 땀도 뺄 수 있어서 작년까지 지수랑 자주 갔었어요.”

말을 잃어버린 듯 한참 동안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세정이 담배를 빼내며 한마디 했다.

“친구랑 사이가 좋네요.”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웃었다. 사이가 좋기는 했다. 항상 지수가 일방적으로 삐지고, 화를 내서 그렇지. 이제껏 참을성 있게 지수의 성격을 받아주고 있는 내 인내심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아, 그런데 아까 전 지수는 왜 그렇게 놀라서 달아났던 거지? 연락을 해봐야 하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는데, 주인이 다 끝났다며 나를 불렀다. 벌써 점검을 마친 모양이었다. 나는 단숨에 매장 밖으로 나와 뽑기 기계 앞에 섰다.

조심스럽게 스틱을 쥐었다. 마지막 기회가 하나 남아있는 시점이었다. 이것마저도 실패하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뜨자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스틱을 움직이는 손길이 긴장으로 조금씩 떨려왔다. 크레인이 펭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펭귄의 바로 위에서 나는 버튼을 꾹 눌렀다. 입을 벌린 크레인이 펭귄의 몸통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바깥으로 꺼내주었다.

“……어?”

왜 이리 간단하지.

“우와, 저 뽑았어요.”

얼떨떨한 나머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천천히 주저앉아 입구에 손을 집어넣었다.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꺼내보니 분명한 펭귄이었다. 우선 둥근 머리를 미친 듯이 쓰다듬으며 펭귄을 귀여워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펭귄 주둥이를 주물럭거렸는데, 담배 연기가 가까워졌다. 기계에 몸을 기댄 이세정이 근처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던져 넣었다.

“일어나요.”

이세정이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주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나는 손대신 인형을 건넸다. 이세정은 제 손에 들어온 펭귄을 내려다보았다.

“힘들게 뽑았는데, 왜 날 줘요?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면서.”

“잘생겨서요.”

찡그리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은 이세정이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손을 잡고 일어났다.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죠. 지수?”

이세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지수, 라고 정확히 말해주었다.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펭귄을 구했더니 몹시 피곤했다.

“남지수…….”

***

마지막 시험이 끝난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렸다. 비는 삼 일째 그치지 않았다. 이세정을 만나지 못하는 그 지루한 시간 동안, 나는 작곡 프로그램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단순한 피아노곡을 기획했기 때문에 투자한 시간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온종일 제자리걸음이었다. 두통약을 달고 사는 사람처럼 머리를 싸매며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사람을 모방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빗소리는 내 안에 얄팍하게 자리한 영감만 일깨워줄 뿐 누군가의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이세정을 연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문득 비 오는 날 밤, 레스토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고, 왜 사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죽을 결심을 수억 번 한 사람들.’

또, 치킨집에서 들은 배도빈의 말도.

‘가끔 삶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는 부류의 사람이 몇 있잖아. 이세정은 그게 좀 심해.’

그리고 이세정의 손목에 깊게 자리한 상처. 그 작위적인 상처는 어떤 각도로 생각해도 자해 흔적이었다. 물론 그걸 알고 있다고 해서 이세정에게 상처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궁금하기는 했다. 나는 얼마나 불완전한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하고. 내가 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생각만큼 결핍된 사람은 아니었으면 했다.

갑자기 이세정에게 연락이 하고 싶어졌다. 휴대폰을 들어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뻔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이세정은 십 분쯤 뒤에서야 답장이 왔다.

[일해요]

[못 나가지 않아요?]

[집에서]

장 비서님이 기어코 일거리를 들고 집으로 찾아갔구나. 왠지 문자 안에 우울함이 녹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귀여웠다. 아무래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도입이 잘 어울릴 것 같다. 나는 피아노로 걸어가 코드를 몇 개 따봤다.

알바를 다녀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급하게 우산을 샀다. 투덕, 우산 위로 굵은 빗줄기가 숨 가쁘게 떨어졌다. 우산 위로 달라붙는 물방울을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비에 질려가고 있었다. 이세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오전에 오든 오후에 오든 비가 오기만 하면 약속을 취소해버리니까. 만약 이세정의 차에 와이퍼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이세정이 나를 만나기 귀찮아서 일부러 컨셉을 잡은 것이 아닐까 하고 우울의 끝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보고 싶은데 내가 찾아가야 하나. 그런데 집을 모르잖아. 물기가 하나도 털리지 않은 우산을 옆구리에 끼고서 뒤를 돌았다. 그때, 뒤에서 뾰족한 손톱이 달려들어 내 입을 막았다.

“꼼짝 마.”

입술을 짓누르는 손을 가만히 잡아 내리며 위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회식했어?”

감지센서가 작동하며 계단 등이 켜졌다. 내 손을 뿌리친 누나가 산발이 된 머리를 앞뒤로 흐느적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혹시 넘어져 다칠까 봐 누나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계단 중간에 선 누나가 돌연 멈추어 서더니 피난 유도 등의 동작을 따라 했다.

“……왜 그래?”

“나 오늘 차였다.”

다시 계단을 오르던 누나가 맨정신으로는 절대 말하지 않았을 비밀을 풀어놓았다. 속에 담긴 슬픔의 크기만큼 목소리가 아주 무거웠다.

“남자친구 있었어?”

“아니…… 선보기 전에 그냥 호감 있는 상대에게 대시해봤거든.”

“아…….”

“불쌍해하지 마. 나 없어 보이잖아.”

누나가 까칠하게 쏘아댔다. 나는 먼저 현관으로 달려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활짝 열어주자, 누나가 현관 앞에서부터 구두를 벗으면서 들어갔다.

“그나저나 옆집 연놈들, 아침에 업체 직원들이랑 싸우고 있더라.”

“어, 진짜?”

“왜 싸우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상황 보니까 다 철수하려는 거 같아. 옆집 놈들이 어지간히 괴롭혔나 봐. 어우, 당분간 공사 안 할 것 같아서 속 시원해.”

아… 소음, 나쁘진 않았는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덜어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가 지수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지수와의 찜질방 일정은 이미 취소된 지 오래였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적당한 찜질방 세 곳이 모두 짜기라도 한 듯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수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아쉬운 대로 PC방에 갔었다. 물론 게임을 즐기지 않는 나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전화했냐?”

상대방이 받자마자 물었다. 지수는 입에 무언가를 잔뜩 집어넣은 상태인지 우물거리며 답했다.

-너 내일 시간 있지?

“왜?”

-내일 저녁쯤에 만나자. 할 말 있어.

내일은 비가 안 오는 날이었다. 오전에 이세정은 회사에 갈 테고, 그러면 오후밖에 만날 시간이 없었다. 거절할 셈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알바 할 때 했어야지.”

-그런 가벼운 이야기 아냐, 인마.

나는 떨떠름하게 전화를 끊으며 용건을 가늠해보았다. 혹시 돈을 빌리려는 건가. 어렴풋이 채권자가 되어 지수를 휘어잡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지수의 용건은 실내포차로 들어서는 몰골에서부터 티가 났다. 여행용 캐리어 두 개를 들고 휘적휘적 걸어와서는 투박한 의자 아래에 툭 던져놓는다. 캐리어 두 개가 겹친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

“설마 가출했냐?”

“나 혼자 자취하는데 무슨 가출이냐? 나 못 씻었다. 근처 사우나 딱 두 개 있는데, 며칠째 휴업이야.”

“우리 집 근처도 그러더니…… 근데 굳이 사우나에는 왜 가. 집에서 씻어.”

“물난리야, 물난리. 주인집에서 공사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동안 너희 집 좀 가 있으려고.”

할 말이 있다는 게, 부탁이 아니라 통보를 하려는 것이었을 줄이야. 일단 어묵탕과 소주를 시킨 뒤에 지수의 잔에만 소주를 따라주었다. 내게서 소주병을 빼앗아 든 지수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내 잔을 채웠다. 그러다 문득 옆 테이블로 고개를 돌려 인공 비가 축축하게 내리고 있는 천막을 쳐다보았다.

“근데 씨발, 저건 또 뭐야. 빗소리가 나네. 비 진짜 질린다, 질려.”

“빨리 먹고 우리 집 가 있어. 나 만날 사람 있다.”

“누구. 나랑 약속 잡아놓고 또 누굴 만…… 설마 걔?”

지수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잖아. 걔는 뭔가 싸한 게 있다니까. 내가 내 여자 보는 눈은 없어도 남의 여자……아니, 남의 남자 보는 눈은 있거든. 걘 좀 이상해. 아닌 것 같아.”

지수가 둥그런 어묵 하나를 들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말투가 점점 어눌해졌다.

“그런 눈빛 맛 간 새끼랑 만나는 거 아니야. 그때 나 진짜 죽일 듯이 쏘아봤다고.”

“질투했던 거였으면 좋겠다.”

“씨발? 좋냐?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 소개시켜줄게.”

“누굴 소개시켜주게.”

황당하게 되물었더니, 지수가 먹던 어묵을 내려놓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게. 너 여자 못 만나? 그거 고쳐지는 거 아니야? 병원 가서 약 좀 먹어봐. 나을지도 몰라.”

“무식한 새끼네.”

“뭐라 그랬냐. 어쨌거나 걔는 아니야.”

지수를 무시하고 이세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사 언제 끝나요? 늦게라도 이세정을 만나려고 일부러 술 한 잔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세정은 장 비서님에게 잡혀 있는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도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크 레이서로 활동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회사에서 일하는 편이 나로서는 더 좋지만, 야근 하나만큼은 정말 싫었다. 야근을 할 필요 없는 사람한테 일부러 야근을 시키는 장 비서님은 더 싫었다. 애초에 일반 사원한테 왜 비서가 달려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걔랑 문자 하지?”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지수가 멋대로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지수는 화면을 살피다 말고 중얼거렸다.

“고유성?”

지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런 애랑 평범하게 연애하라고. 굳이 얘 아니라도 예쁜 여자는 엄청 많아. 아, 함경윤은 건들지 말고.”

대체 뭘 보고 하는 말인가 하고 지수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웬 메신저 방이 떠 있었다.

[오빠ㅋㅋㅋ이거 봐요ㅋㅋㅋ웃긴 사진ㅋㅋ]

고유성이라는, 같이 알바 하는 여자애에게서 온 메신저였다. 내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방이 만들어졌는데, 그로부터 가끔씩 웃긴 사진을 보내오곤 했다. 유머코드가 다른지 평소에는 별로 웃기지 않아 간단하게 ‘ㅋㅋ’ 로만 답장을 하곤 했지만, 이번에 보낸 사진은 꽤 웃겨서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키읔을 두 개 더 붙인 ‘ㅋㅋㅋㅋ’ 로 답장을 보냈다.

“근데 고유성 얘 같이 알바하는 애 맞지?”

“응.”

“귀엽게 생기지 않았냐?”

“모르겠어.”

고유성을 떠올려보았다. 떠오르는 얼굴이 잔상처럼 흐릿했다. 두어 번 본 사람은 대부분 다 기억하는 편이었으나 그 사람들을 외모적으로 평가를 해본 일은 드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이세정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수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세정과 되도록 맑은 정신으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저번처럼 이세정에게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겁이 났던 이유가 더 컸다. 지수는 혼자 먹는 술이 무슨 맛이 있느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주문한 소주를 깨끗이 비워냈다. 한 병을 더 시키려는 지수를 만류하고 당장 몸을 일으켰다. 지수는 따악 한 병, 따악 한 병 하며 연신 딱따구리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세정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내 말에, 정신을 번뜩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잊지 않고 캐리어 두 개를 챙겨 든 지수가 비틀거리며 걸었다.

“내가 계산할게.”

당장 씻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주제에 뭘 계산하겠다는 건지. 먼저 계산을 끝내고 와 지수가 질질 끌고 있는 캐리어 중 하나를 뺏어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습관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한 서울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숨을 후 들이마셨다. 습하고 더운 기운만 달라붙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단단히 쥔 채로 지수를 돌아보았다. 지수는 바닥을 노려보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갈지자로 걷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남지수, 우리 집 어딘지 알지?”

“갈 수 있다. 캐리어 줘봐.”

지수에게 캐리어 손잡이를 쥐여주며 염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누나한테 너 온다고 아직 말 안 했는데 어쩌냐.”

“좀 처맞고 말지, 뭐. 간다!”

지수는 인사를 할 셈인지 손을 번뜩 들었다. 들고 있던 캐리어가 던져지며 바닥을 굴렀다. 때마침 마른기침을 뱉으며 바로 옆을 걸어가던 남자가 캐리어 앞바퀴에 정강이를 맞고 휘청거렸다.

“아! 쒸이…… 왜 치냐아. 서럽게에.”

남자가 벌건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너냐?”

“죄송합니다. 다치셨어요?”

남자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곤 캐리어를 주워들었다. 남자는 사람을 죽이고 죄송하다고 하면 끝이냐며 역정을 냈다. 억울하게 시비가 걸린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이쪽에서 잘못한 경우였기 때문에 남자의 화가 풀릴 때까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문제는 지수의 의리가 엉뚱한 곳에서 발동된 것이다. 지수는 자신이 잘못을 해놓고 사과는커녕 도리어 화를 냈다. 그러자 가만가만 성질을 죽일 기미를 보였던 남자의 화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남자는 표정과 다르게 우는 시늉을 했다.

“길거리 깡패도 아니고…… 서럽게 그럴래, 증말.”

남자가 내 팔목을 쥐었다. 뼈를 잡아 부술 듯 세게 쥔 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고통을 삼키고 있는데, 남자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직급이 대리지, 직업이 대리야? 나한테 목줄이라도 채웠… 아!”

갑자기 남자가 배를 감싸며 뒷걸음질을 쳤다. 장정들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알아보기도 전에, 누군가 뒤에서 내 가슴을 안고 끌어당겼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완전히 몸을 비틀어 이세정과 마주 보았다.

“저거랑 자주 술 마시네요.”

잠깐 지수 쪽으로 눈길을 준 이세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대면한 것처럼 이세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세정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급작스러운 스킨십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 눈치를 살폈다. 지수는 주변에 던져져 있는 캐리어 두 개를 모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고, 남자는 장정들에게 둘러싸여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 시선들이 죄다 그 소동에 쏠린 터라 누구도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이가 없었다.

“차로 갈래요?”

이세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경호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저분들은…….”

“잘 타이르고 올 거예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가는 길도 같은데, 지수도 같이 태워달라고 할까. 목을 뒤로 빼고 지수가 어디쯤 있는지 확인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선 지수가 마지막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버스도 알맞게 탔고, 중간에 엉뚱한 사람에게 시비만 걸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우리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수에게서 신경을 끄고 아까 잡힌 팔을 살살 매만졌다. 큰 동작을 취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세정이 물었다.

“아파요?”

“아니요.”

단호하게 대답했으나 이세정은 내 팔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이세정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혹시 병원에 가자고 할까 봐 얼른 말을 돌렸다.

“누가 팔 세게 잡는 거 싫어요.”

“다들 싫어하죠.”

“예, 그렇긴 한데 저는 자주 잡히는 편이라…… 요즘 뭐만 하면 팔부터 잡는 거 같아요. 저희 누나는 힘이 약하니까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힘도 세면서 무자비하게 막 잡아대요.”

“아무도 못 잡게 해줄게요.”

이세정이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최대한 깊게 들어가 이세정이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세정이 못다 한 말을 뱉었다.

“우채민 씨 함부로 잡으면 혼내줄게요.”

혼낸다는 표현의 어감이 귀여워서 좀 웃었다. 긴장 같은 것이 풀어지며, 나는 이세정에게 재미있는 사진을 보여주기로 했다. 고유성과의 대화방으로 들어가 이세정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세정은 무표정으로 화면을 직시하다가 물었다.

“나 놀리는 거예요?”

“예?”

화면을 끌어와 확인해보니, 내가 보여준 것은 사진이 아니라 대화방이었다.

“아… 이걸 보여주려던 게 아니었는데.”

“대화할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이것도 질투인가 하여 기분이 이상했다. 고유성은 나에게 어떤 호감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괜한 곳에 주먹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일단 대화방을 삭제했다. 이세정은 탐탁지 않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느릿느릿 설명했다. 우선 일을 했고, 중간중간 펭귄 문제에 대해 보고를 받았고, 시간이 남으면 바이크를 분해했어요. 이세정이 나열한 일들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다.

“펭귄이요?”

“펭귄 수입해오려고 했는데, 허가를 안 해주네요. 몰래 키울래요?”

“…….”

농담을 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얼굴 또한 진지했다. 펭귄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이 불법만 아니었다면 진작 데려왔을 기세였다. 아니, 뒤이어 한 제안으로 볼 때 이미 무슨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 갑자기 펭귄 한 마리가 깍깍대며 우리 집 문을 두드릴까 봐 겁이 났다.

“저 펭귄 안 좋아해요. 그 인형 뽑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은데, 술 취하면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까.”

“안 좋아하는 것치고 집착이 대단하던데.”

“제가 술 마시면 이상한 거에 집착이 좀 심해져서…… 쓸데없는 농담도 많이 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설득하기 위해 오버하여 말했다. 이세정은 그제야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대화가 끊긴 사이 펭귄을 데려오려고 했던 이세정의 행동을 곱씹었다. 아까는 당혹스러움에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를 위해 자잘한 일들을 기억하고 실행한다는 것이 좀 귀엽게 느껴졌다. 혼자 웃음을 참고 있자 이세정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는 입을 맞춰도 되느냐고 물었다.

“얼마나 하려고 허락까지 맡아요?”

한쪽 손으로 시트를 짚고서 고개를 올렸다. 그 순간 운전석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차, 서 기사님을 생각하지 못했다. 서 기사님은 우리를 배려해주려는 것인지 문을 닫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제야 주차되어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우리 집 주변이었다.

“어딜 봐요.”

이세정의 채근에, 고개를 돌려 입술을 부딪쳤다. 여린 살덩이가 맞닿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부드럽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한 번 더 해도 돼요?”

내 물음에, 눈을 짓궂게 가늘인 이세정이 담배 케이스를 옆에 대충 던져두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 뒤통수를 헝클어트리다시피 잡아 입을 맞췄다.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이세정은 실컷 입을 맞춰줬다. 혀가 들어오거나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 그냥 몇 번이고 입을 맞춰줬다. 입술이 닿는 것만으로도 부을 것 같다고 느껴질 때쯤 이세정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늦기 전에 보게 되어 다행이에요.”

이세정이 한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아득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 계속 있어 줄 거죠?”

이세정은 애교처럼 입을 한 번 맞추곤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음에도 왠지 더웠다. 창문을 열고서 울렁이는 속을 달랬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술기운에 젖어있는 지수였다. 지수는 주차된 차들을 지나쳐 내가 사는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지수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꽤 시간이 흘러서야 이세정이 느리게 입을 뗐다.

“저게 뭐지.”

“아… 지수 집이 수도 공사에 들어가서 당분간 저희 집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우채민 씨.”

“네.”

이세정은 나를 불러놓고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한참이나 이세정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다가, 침묵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습관인 양 미소를 지은 이세정의 입꼬리가 어설프게 흔들렸다. 제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 본다고 하더라도 저 표정을 좋은 쪽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수가 내 집에서 지내는 것에 짜증이 났나. 지수의 말에 의하면, 지난번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나를 안았을 때 이세정이 사람 하나를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봤다고 했다. 나는 지수는 전혀 질투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뜻으로 말했다.

“지수는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족?”

이세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거두어졌다.

“무슨 가족?”

가족에도 종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대답을 못하자, 이세정이 짜증스럽게 다른 곳을 쏘아보았다. 나를 쏘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세정이 눈에 힘을 풀었다. 시선은 머지않아 다시 나에게 향했다.

“언제 가는데요?”

“글쎄요…….”

지수 성격상 일찍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다 누나 하기에 달린 것이다.

***

지수가 우리 집에 눌러산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이쯤 되면 지수의 집이 수도 공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허물고 새로 짓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수는 거실 한가운데에 드러누워서 야구 중계를 보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가끔 앨범 프로젝트를 하러 집을 나가기도 했으나, 반나절 이상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넌 왜 집에만 있냐?”

옷매무새를 다듬다 말고 물었더니, 지수가 물이 끓어오르는 냄비 안에 라면을 넣으며 말했다.

“여자 친구가 없잖아. 소개해주든가.”

“내가 아는 여자가 어딨어.”

“얼굴 좀 써먹으면 안 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옷도 잘 입었고 시계도 잘 찼는데 무언가 부족한 것 같다. 혹시 머리 때문인가. 이세정은 머리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매일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주는 편이었다. 반면에 내 머리는 항상 똑같았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위로 올려보았다.

“비비크림이라도 바르지 그러냐.”

갑작스럽게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어느새 지수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거울을 얼마나 보는 거야. 나가. 나 급해.”

“알았어.”

우선 대답 먼저 해놓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한숨을 쉰 지수가 내 팔목을 잡아 화장실 밖으로 끌고 갔다.

“나 씨발, 진짜 급하다니까. 방에 거울 있잖아. 그거 봐.”

“나 머리 올릴까?”

“잘 올릴 자신 없으면 그냥 있어라.”

“…응.”

“라면 불 좀 꺼줘.”

지수가 화장실 문을 닫았다. 나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주방으로 갔다. 주방 가득 라면 냄새가 퍼져있었다. 즉시 불을 끄고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저었다. 뿌연 연기가 올라오며 침샘을 자극했다. 한 젓가락만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오려면 아직 멀었어요?]

이세정의 문자였다. 주말을 맞아 이세정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었다. 벌써 집 앞까지 도착했나. 지갑만 챙겨 들고 얼른 집 문을 나섰다.

이세정과 향한 곳은 뷰가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며칠 전 연락이 와선 다짜고짜 메뉴를 선정하라는 말에 무난하게 고른 스테이크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미식가가 아니기 때문일까. 앞서 나온 요리들을 먹을 때만 하더라도 상류층의 입맛은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스테이크는 꽤 괜찮았다. 다만 먹을 때마다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라면이 생각났다. 스테이크와 라면을 비교하며 물을 마시는 중에, 내 표정을 읽은 이세정이 물었다.

“맛이 없어요?”

“아니요. 맛있습니다.”

가늘어진 눈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그러니까 우채민 씨 좋아하는 거 먹자고 했는데.”

“그래도 같이 먹는 거니까요. 제가 기껏 골랐는데, 입맛에 안 맞으시면 어떡해요.”

“우채민 씨, 나는 선호하는 음식이 따로 없어요. 굳이 맞춰주지 않아도 돼요.”

원래 다 잘 먹으니까 아무 데나 가도 된다고 하지 않나. 어느 쪽으로든 메뉴를 고르는 내 부담을 덜어주는 말임은 틀림없었다. 다음에는 진짜 편의점으로 컵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할까 고민하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줄 거 있어요.”

이세정이 품에서 검은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케이스를 끌어와 열어보니, 또 차 키였다. 이로써 학자금 대출도 받지 않은 내 밑으로 엄청난 빚이 생겨버렸다. 그래도 이미 한 번 받아봤다고 그 새 면역이 된 것인지 처음만큼 심장이 떨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까 집 앞 주차장에서 본 화려한 스포츠카가 설마 내 거였나. 기존에 받은 차 바로 옆에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이 나를 견제하려고 일부러 옆에 주차한 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나는 선물을 차마 챙기지 못하고 손을 뗐다.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고백할 거 있습니다. 저 운전 못 합니다.”

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 이세정이 덧붙였다.

“기사를 붙여줄게요.”

“……아니요. 어차피 거의 대부분 집에만 붙어있어서요. 나갈 일이 별로 없어요. 게다가 저도 그만큼 해드려야 하니까 부담되고.”

“왜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해요?”

그야 그게 예의니까. 물론 내가 예의범절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나, 아직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막 받는 것이 좀 속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세정이 다시 밀어준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도 주고 싶어서 그래요.”

“인형 줬잖아요. 유리관에 전시해놨으니까 다음에 보러 와요.”

농담한 거겠지? 일단 차 키를 주머니에 넣고 이걸 또 어디에 숨겨야 할지, 남들은 이해 못 할 걱정에 빠졌다.

***

아침부터 누나에게 식충이 취급을 받으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지수는 하루 종일 화가 나 있었다. 밥을 먹다가 뒤통수에 혹이 난 것 같다고 투덜투덜, 차를 마시다가 검사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투덜투덜, 텔레비전을 보다가 머리가 아파 눕기 불편하다며 투덜투덜. 원래 자주 삐지는 애라서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데, 계속되는 투덜거림에 괜히 나까지 짜증이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한 번도 뜯지 않은 조립 퍼즐을 꺼내왔다.

“어린애냐.”

지수는 내가 바닥에 쏟아놓은 조립 퍼즐 판들을 훑어보았다.

“이거 맞추면서 심신을 안정시켜.”

“난 만들기에 소질이 없어, 인마.”

지수는 싫다는 말을 되뇌면서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안에서 사탕을 빼내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놓고, 퍼즐 상자 겉면에 그려진 그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예술의 전당이네.”

“그거 비슷해. 다 맞추면 엄청 예쁠걸.”

“아, 귀찮게. 그냥 3D 프린터 돌리자.”

퍼즐 맞추기를 지수에게 일임한 나는 홀로 소파 위로 올라앉았다. 그러나 리모컨을 붙잡기도 전에 지수에게 팔이 잡혀 다시 소파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지수는 찢어진 판을 들고 있었다.

“이거 찢어졌는데, 어쩌냐?”

“일부러 그랬냐?”

“요즘 힘이 넘쳐서 그래. 이럴 때 하필 여자 친구가 없네.”

운동하는 동작을 흉내 내던 지수가 별안간 미간 사이를 좁히고서 나를 쏘아보았다. 왠지 눈빛에 불순함이 가득한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소파로 올라갔다. 지수는 대번에 나를 따라와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넌 야동 볼 때 남자 중심으로 봐?”

“뭐냐.”

“나 봐봐. 이 근육 보면 막 흥분되고 그러냐?”

지수가 한쪽 팔을 추켜세워 알통에 힘을 주었다. 근육이 애매하게 솟아올랐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한 남자들은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팔 근육이 드러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대충 말했다.

“응, 그래.”

“흥분하지 마, 이 개새끼야!”

어쩌라는 거지. 매운 손바닥으로 팔을 빗겨 맞아서인지 기분 나쁜 고통이 일었다. 나는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지수가 더 세게 나를 때렸다. 나는 그보다 더 세게 때리고는, 목덜미를 잡아채려는 지수를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급히 문을 닫으려고 했는데, 문틈으로 팔 하나가 들어왔다. 자칫 지수의 팔이 부러질까 염려되어 힘을 풀었다가, 도리어 지수가 힘을 주는 바람에 문이 활짝 열렸다. 지수가 방안으로 쳐들어왔다. 허리를 숙여 지수의 손을 피하곤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아랫집을 배려하지 않는 거친 발걸음이 우당탕탕 울렸다. 바닥을 내려찍는 걸음의 간격으로 추측해보건대 정말로 무서운 속도였다. 지수가 달리기 하나만으로 체육부장을 맡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아예 집 밖으로 나와 야외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는 차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쳐나갔다. 달리고 있는 와중에 내 소유의(그렇게 표현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제차 두 대가 차선 끝에서 딱 버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 뒤에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나와 반대로 보닛 앞에 선 지수가 잡히기만 해보라며 낄낄거렸다. 스물다섯 먹은 남자 둘이 술래잡기를 하며 웃고 있음을 누나가 알게 된다면 한심하게 볼 게 뻔했다. 요즘 초등학생들도 이렇게 안 논다고 들었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덜컥 멈추어 섰다. 지수는 여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기어코 나를 잡아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아프다고 끙끙거렸지만, 무려 두 번을 더 쳤다. 지수는 아마 나를 왜 잡으러 뛰어다녔는지, 왜 나를 때린 건지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지수의 어깨를 밀어내며 막 진동이 온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진동은 하나였는데, 메시지는 이세정과 배도빈에게서 각각 한 통씩 와있었다. 일단 배도빈의 문자는 무시하고 이세정의 문자부터 확인했다.

[친구 갔어요?]

요 근래 못해도 이틀에 한 번꼴은 이세정과 만남을 가졌다. 당장 어제저녁만 하더라도 같이 식사를 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차로 자리를 옮겨 또 이야기하고, 집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이세정은 스쳐 지나가는 투로라도 지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그것도 문자를 통해 물어보다니 매우 이상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아니면 줄곧 참고 있다가 이제야 터트린 건가? 나는 과연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지 갈등했다. 지수를 가리켜 ‘저거’라고 부르질 않나, 지수가 내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노려보질 않나, 여하튼 지수를 향한 감정이 썩 좋지만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집에 지수를 오래 들여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분 나빠 할지도 몰랐다.

“업뎃 각이다.”

지수는 처음 보는 외제차가 있다며 차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댔다. 지수의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여졌다.

[갔습니다.]

보내고 나서야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휘어 감기 시작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답장을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배도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놀래?]

배도빈에게서 문자가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처음 보내는 문자치고 친구라도 되는 양 격의가 없었다. 괜찮다고 답장을 쓰고 있는 와중에 이세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안 갔잖아요.]

몹시 놀랐다. 어떻게 알았기에 이렇게 확신조로 책망하는 걸까. 설마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나.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탈래요? 검은 차]

나는 잽싸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차장을 훑었다. 수많은 차량이 주차되어있는 야외 주차장에서 이세정이 탄 차는 단연 돋보였다. 각 맞춰 정렬된 차들 가운데 혼자만 툭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를 보니, 아까 달리면서 손으로 보닛을 짚은 적 있는 차인 것 같았다. 망아지처럼 뛰놀던 그때의 행동이 떠올라 몹시 창피해졌다.

마치 차 주인 양 여전히 셀카에 빠져있는 지수를 두고 검은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 밖으로 나온 이세정은 오늘도 어김없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익숙하게 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퇴근하는 길에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이대로 데이트 하러 갈 생각인데, 부담스러우면 집에 다시 들어가도 좋아요.”

나는 뛰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매만졌다. 옷만 갈아입고 나온다고 할까. 옷을 갈아입는 김에 머리도 정리하고, 운동화도 갈아 신고, 시계도 차고, 미백 기능이 없는 선크림도 좀 바르고, 왁스도…… 생각하다 보니 끝이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도 차 사진을 찍어대는 데에 여념이 없는 지수에게 이세정이랑 데이트를 하러 갈 테니 잘 있으라고 굳이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동시에 이세정이 내 손등을 덮었다. 손등을 매만지는 손길은 무서울 정도로 다정했다. 너무 지나치면 외려 거리감이 생기는 걸까. 그저 손을 잡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이세정을 향해 무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세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는 데에 재밌었어요. 달리고, 잡히고, 웃고, 때리고…… 때리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세정이 내 등 뒤, 그러니까 엉덩이 쪽을 쳐다보았다.

“유치원을 다녀본 적 없어서 유치원생들이 어떻게 노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우채민 씨처럼 놀 것 같아요.”

“…….”

“정말 재밌었어요.”

이세정은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순간 아까 주차장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지수와 술래잡기를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다 목격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너무 민망했다.

“…….”

침묵으로 일관하자 이세정이 깍지를 꼈다.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엄지손가락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은 나보다는 자신을 달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부분이 성질을 자극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냥 기분을 풀어주고자 이세정의 팔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가 뗐다.

“무슨 생각하세요?”

내 물음에 이세정은 단단히 잡고 있는 두 손을 보며 조용히 답했다.

“우채민 씨 엉덩이를 때린 친구에 대해 생각 중이에요. 발로, 세게, 걷어찼잖아요. 세 번이나.”

아, 화가 난 포인트가 거기였을 줄이야.

“우채민 씨가 한 거짓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어요.”

가만 보니 화가 날만 했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집에 지수가 있다고 하면 싫어하실까 봐.”

“그동안 친구 이야기는 피했어요. 말해봤자 친구가 당장 집에 가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굳이 반박할 필요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만약 이세정이 직접적으로 지수가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요구해왔어도 나는 지수를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고집이 아니라 의리였고, 습관이었다. 오래 만난 것도 지수고, 더 정이 쌓인 것도 지수인데 이세정의 한마디에 그를 내보낼 이유가 없었다.

이세정에게 지수를 좋아해 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질투를 이유로 우정을 갈라놓지는 않았으면 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이세정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깍지를 푼 이세정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조만간 지낼 곳이 생기겠죠.”

이세정은 화가 다 풀렸다는 듯 내 손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아주 상냥했다.

***

“야, 밖에 겁나 어수선해.”

누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소파에 백을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지수 따위야 일말도 남자로 보이지 않는지 대담하게도 거실 한복판에서 블라우스 단추를 훌훌 풀었다. 지수는 ‘어머, 바바리맨.’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인상을 쓰며 소파에 놓인 백을 가져와 지수의 얼굴을 이중으로 가렸다. 다른 집 누나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동생이니까 앞에서 벗을 수 있다고 쳐도, 지수의 앞에서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아이로 보여도 그렇지. 아니, 지수도 누나 앞에서 옷을 훌훌 벗으니까 쌤쌤이인가. 지수는 얼굴을 짓뭉개는 이 백 좀 치우라며 내 팔을 밀쳐내며 아까 누나가 한 말에 관해 대꾸했다.

“어수선하다니?”

“요즘 따라 차들도 많이 지나다니고, 수상한 놈들도 몇 보이고.”

“수상한 놈들이 몇 보인다니, 누나 혹시 형사세요?”

키득거리던 지수가 누나의 눈치를 보곤 소리를 낮추었다.

“밖에는 주차장이잖아. 차들이 오가는 것도 당연한 거지.”

“아니. 주차할 생각 없어 보이는 차들 말…… 그런데 너 아직도 안 갔니? 혹시 집을 새로 짓고 있는 거야?”

“돈 줄게. 좀만 있자.”

지수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누나에게 주었다. 누나가 지수를 혐오하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 전 재산이니까 이걸로 맛있는 거…… 알았다, 알았어. 나 나갈 거야.”

“언제.”

“내일. 아니, 그다음 날. 아니, 삼 일 뒤? 아, 알았어! 나가긴 나갈 건데,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누나가 지수에게 한눈을 판 사이, 나는 재빨리 다큐멘터리를 결제했다. 집에서 독재자처럼 구는 누나는 내 돈조차 제 손아귀에서 마음대로 굴리려고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결제하려는 나를 볼 때마다 돈이 아깝다며 잔소리를 해대서 이렇게 몰래몰래 눈치를 살피며 행동해야 했다.

리모컨을 꾹꾹 눌러 소리를 작게 줄이곤 한 번 더 누나를 곁눈질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수를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누나는 어느덧 집에 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유에 대해 털어놓는 지수의 목소리에 얌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씨발, 그뿐만이 아니야. 자고 있는데 갑자기 슥- 슥- 소리가 나는 거야.”

“허.”

“무슨 소린지 짐작 가? 진짜 긴장한 채로 불을 딱 켰는데 슉! 슉! 하고 까만 게!”

“어우, 징그러워. 넌 그런 곳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잤냐?”

“그러니까. 좀만 있게 해줘.”

지수가 누나에게 아양을 떨어댔다. 지수의 말이 마음을 움직였는지 누나가 야식을 해주겠다며 지수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눈을 돌리고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아마도 지수가 앞으로 일주일은 더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지수는 다음 날 앨범 프로젝트에 참여하러 간다며 외출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수의 가출은 무려 나흘이나 지속되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내가 먼저 지수에게 연락을 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소중하고 가장 친한 친구임은 분명하지만 사사롭게 각자의 행보를 보고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가족에게 ‘뭐 해?’라고 먼저 메신저를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수가 이틀이나 집에 안 들어왔음에도 프로젝트 모임을 마치고 술을 마시러 갔다가 어느 집에 정착했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이상함을 느낀 건 고록담에 다녀온 뒤부터였다. 알바를 펑크 낸 지수에게 이틀 만에 연락을 넣어보던 도중에 내 바로 옆에 있는 두 알바생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끊기지 않는 전화 연결 신호음을 바탕으로, 사고가 나서 코가 망가졌다는 고유성의 소식이 프레이즈처럼 달라붙었다. 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사실 고유성과 깊은 유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싹싹하게 굴기도 하고 이름도 예뻐서 괜찮게 생각하고 있는 동생 중 한 명이었다. 이제 막 친해지는가 싶던 애가 갑자기 그런 사고를 당했다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지수가 떠올랐다. 혹시 얘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작은 의문은 전화를 걸 때마다 도무지 끊기지 않는 신호음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누나가 요즘 집 밖에 수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지수의 행방을 찾아 이틀 동안 여러 곳을 다녀왔다. 그리고 알아낸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지수는 본가나 자취집에 들리지 않았고, 프로젝트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으며, 주변 지인들에게 제 행방을 발설한 적도 없었다. 함부로 꺼내기 민감한 사항이었으나, 나는 혹시 지수가 험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도 받지 않고 나흘 내내 모습을 감추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답을 내리자마자 불안함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실종되었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과거의 트라우마와 겹쳐 더욱 예민해졌다. 요즘 들어 왜 이리 계속 잔인하고 무서운 일들만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슬금슬금 간을 보고 있던 불행이 어느 순간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직접적으로 내게 피해를 입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여파에라도 휩쓸릴 것 같았다.

우선 지수를 찾아야 했다. 몇 년 전 실종신고 접수를 하러 갔을 때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했던 경찰 말고, 이세정에게 도움을 요청해보기로 했다. 제아무리 지수를 미워했다고 해도 이세정은 분명 지수를 찾는 데에 힘을 보태줄 것이다. 실종자를 모른 척할 만큼 잔인한 성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즉시 휴대폰을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화면이 전환되었다. 배도빈에게서 온 전화였다.

-잘 지내냐.

“……네, 뭐.”

-너 친구 찾고 다닌다며.

“소문났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조용히 물으면서도 어느 경로로 소문을 입수한 것인지 대충 짐작을 했다. 지수를 찾으려고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 행방을 물어봤었다.

-너, 네 친구랑 사귀냐? 집착이 진짜 대단해.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세요. 그냥 실종된 것 같아서…….”

-실종?

배도빈이 흥미로운 목소리를 냈다. 기분이 나빠졌다.

-실종이었냐? 와, 며칠?

“제가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알아봐 줄까?

전화를 끊으려다가 주춤했다.

“정말이에요?”

-이래 봬도 우리 아버지가 흥신소 하시거든. 찾는 건 간단해.

“…….”

-농-담-

뭐지. 아저씨인가. 심각한 와중에 웃음이 났다. 웃기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서 소파에 길게 누웠다. 배도빈이 내 기를 다 빨아들였는지 이세정과 통화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세정에게 문자를 한 통 보내놓았다. 와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이번에는 ‘ㅠㅠ’도 붙였다.

한참 후 우리 집에 도착한 이세정은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평소와 달리 타이와 재킷을 갖춘 상태였는데 시계는 없었다. 이세정은 깔끔히 드러난 이마를 구기며 나를 깔아보았다.

“……뭐예요?”

이세정은 내 어깨너머로 집을 둘러보다가 내게 이리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달리 요구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단단한 팔이 내 등을 감쌌다. 그러고는 다른 팔로 내 엉덩이를 받쳐 들더니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 몸무게를 그대로 떠안고도 흔들림이 없어서 나는 그저 이세정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소파 위에 내려졌다. 언젠가 받은 꽃다발처럼 작위적인 향기가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향수까지 뿌린 이세정을 당혹스럽게 쳐다보았다.

“혹시 어디 가세요?”

지수는 사라졌고, 고유성은 코가 망가졌다. 지수가 고유성처럼 잘못되었을까 봐 무서웠던 나는 이세정마저 사라질까 봐 불안했다. 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세정이 내 앞에 한쪽 무릎만 구부리고 앉아 부드럽게 말했다.

“며칠 본사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주기적으로 아버지가 부르시거든요.”

“얼마 동안이요?”

“사흘이요. 같이 갈래요? 다들 좋아하실 거예요.”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지수의 일만 아니었다면 분명 따라나섰을 것이다. 이세정과 떨어지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도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타이밍이 안 좋았다. 나는 지수의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세정과 웃고 떠들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눈물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들이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다녀오세요.”

나를 끈질기게 관찰하던 이세정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이세정의 얼굴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이세정은, 그러니까 내게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던 이세정은 지금 내 상황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것이 의아스러워 아랫입술을 좀 떨었다. 내가 꽤 괜찮은 표정을 짓고 있나.

“지수가 사라졌습니다.”

시험 삼아 내놓은 말에도 이세정은 눈썹 하나 구기지 않았다.

“연락도 안 되고, 집에도 안 들어와요. 며칠 전에 외출한 뒤로 소식이 완전히 끊겨서… 본가에도 안 왔다고 하고… 무슨 일 당했을까 봐 불안합니다. 가출을 일삼던 애지만 저한테까지 연락을 끊은 적은 없거든요.”

이세정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 동조해주지 않지? 왜 위로해주지 않지? 왜 더 궁금해하지 않지? 지수가 실종된 것을 두고 잘되었다고 말하면 어쩌지? 불안감에서 온 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혹시 몰라 내가 왜 이렇게 슬퍼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들어 설명해주었다.

“몇 년 전에 어머니를 잃었어요. 아버지는 슬픔에 못 이겨 저희 곁을 떠나셨고, 두 분의 자리를 지수가 대신 채워줬어요. 지수는 가족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친구를 가리켜 얘는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라고 말하는 것과 무게가 다릅니다. 진짜 가족이에요.”

내 뺨을 만지고 있는 이세정의 손을 꼭 쥐었다.

“가족을 또 잃고 싶지 않아요. 찾아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이에요. 마지막 말은 속삭임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지수의 본가를 찾아가 지수의 실종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경찰서에 가서 실종 신고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수를 찾을 동안 애를 태울 지수의 가족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어머니의 일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이세정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세정은 한숨을 쉬며 내 뺨에서 손을 뗐다. 두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가족…… 지겹네요, 가족.”

이세정이 내 허벅지 바로 옆에 제 팔을 걸쳐두었다. 조금 힘을 주어 누르자, 소파 한 부분이 움푹 꺼졌다. 내 오른쪽 허벅지가 옆으로 쏠렸다.

“친구가 사라진 건 우채민 씨 때문이 아니잖아요. 조급해할 이유도,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없어요.”

“……죄책감이 아니라, 그냥 걱정되는 건데요.”

“시체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듣기만 해도 살벌한 말이,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흘러나왔다. 내가 이세정을 멍하니 쳐다보았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공감이 안 돼요.”

느긋함을 표방하고 있는 목소리엔 우울하고 괴로운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그러니까 울어 봐요.”

“……예?”

“우채민 씨가 울면, 내가 들어줄지도 모르죠.”

부탁에 조건을 붙이니 서운했다. 더군다나 이건 다른 문제도 아니고, 실종 문제인데.

“형도 가족이 있잖아요. 왜 공감이 안 돼요?”

“우채민 씨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 왜 형이라고 불러요.”

“…….”

“나도 가족이에요? 우채민 씨는 아무나 붙잡고 가족이라고 하나 봐요.”

“……그럼 뭐라고 해요. 이세정이라고 해요? 아니면 그냥 야라고 부를까요?”

나는 더듬더듬 받아치고 나서 고개를 숙였다. 언쟁에는 영양가가 없었다. 나는 위로를 받고 싶은 거지, 말싸움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말싸움의 요지는 형이라고 부르냐, 안 부르냐가 아니었다. 이세정은 내가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을 가리켜 가족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지수의 실종에 정신이 팔려 그 점을 꼬집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실종 따위는 뒤로하고 엄한 곳에만 트집을 잡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세정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 혼자 지수를 찾아내야 했다. 믿고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라 너무나도 서러워졌다. 억울하지 않았음에도 눈물이 났다. 눈물은 참고 있던 만큼 급하게 쏟아졌다. 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인 채로 내리는 족족 훔치어댔다. 울라고 말한 것은 이세정이었으나,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은 세 번째로 보는 건데.”

이세정의 손이 내 턱과 뺨을 감쌌다. 빵떡이 되어 눈만 끔뻑거렸다. 세 번째? 나는 이세정의 앞에서 두 번밖에 울지 않았는데.

“그땐 나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죠.”

“…….”

“지금은 뭘까. 좀 불쾌하네요.”

이세정이 손으로 닦지 말라면서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들여 무턱대고 눈가를 문질렀다. 언제까지고 쏟아질 듯하던 눈물이 서서히 그쳐갔다.

나는 계속 마사지를 하면서 손 틈으로 이세정을 엿보았다. 흐린 시야로, 마찬가지로 흐린 미소가 비추었다. 내가 엿보고 있단 걸 눈치챈 듯 내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내린다.

“다른 곳에선 울지 마요. 나처럼 우채민 씨 우는 모습에 반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

“친구는 만나게 해줄게요.”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세정이 눈물 젖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쉬고 있어요.”

딱딱한 목소리로 못해도 삼일 안에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해주었다. 나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일…… 삼일…… 입안으로 몇 번이고 굴려보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이세정이 독일에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소식을 물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배도빈이었다. 아버지가 흥신소 일을 한다느니 하며 장난만 치기에 부탁을 해놓고도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가져다줄 줄은 정말로 생각도 못 했다.

나는 배도빈과 마주 보고 앉아서 그가 찍어온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는 호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로 잠을 자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단지 보기만 했음에도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돈이 어디 있었대요?”

분노를 누르며 배도빈에게 물었다. 배도빈은 내 눈을 피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미쳐가지고 통장에 있는 돈 쏟아붓고 있나 보지.”

“어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분노가 지속된다면 틀림없이 울화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심호흡을 하곤 물었다.

“어디 호텔이에요?”

“굳이 찾아가야 되냐. 아직 다리도 안 나았…….”

“예?”

역력하게 당황한 표정을 지은 배도빈이 제 다리를 부여잡았다.

“아아…… 아파라. 며칠 전부터 자꾸 다리가 쑤시네.”

나는 배도빈에게서 눈을 떼고 턱을 괴었다.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이제껏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허탈함이 밀려왔다. 이럴 거면 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걸까.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상한 심보가 발동되었던 건가?

지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나와 누나에게 빠진 것이 있는 듯했다. 바퀴벌레 이야기를 듣고 잠깐 잘해주긴 했지만, 누나는 지수를 몇 번이고 쫓아내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지수를 외면했었다. 어쩌면 집 밖으로 쫓아내려는 누나도 밉고, 그런 누나를 말리지 않은 나도 미워서 이런 일을 벌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음에도, 지수는 여전히 환장할 만큼 한심했다.

“어디 호텔인지 안 알려줘도 될 것 같아요. 당분간 안 보고 싶습니다.”

“그러려고 했다.”

뚱하게 대꾸한 배도빈이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쩐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배도빈의 기분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감사하다는 말만 두어 번 반복했다.

***

[저녁에 같이 술 마실래요?]

이세정은 어제쯤 독일에서 돌아왔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연락이 없어 당장의 핑곗거리를 찾다보니, 떠오른 것이 어느 날 그가 했던 제안이었다. 같이 만나서, 지수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떼를 써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에 격양되었던, 그날의 감정을 내려놓고 단둘이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세정의 답장은 내가 한참 작곡에 빠져있을 무렵 도착했다. 진동이 연달아 울리기에 전화를 받았더니, 이세정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친구는 잊어버렸어요?

이렇게 목소리에서 직접적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으므로, 나는 꽤 신이 났다.

“지수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배도빈 형이 찾아줬습니다. 지수가 호텔방에 누워서 잘 자고 있는 사진을 보여줬는데, 걱정할만한 일은 없었던 모양이에요.”

잠시 말이 없던 이세정이 곧 실소를 터트렸다.

-그 사진 누가 찍었는지 알아요?

“……여자?”

-우채민 씨 단순해서 좋네요.

이세정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나는 내가 단순하게 보일 만큼 어설픈 일을 했는지 돌아보았다. 수그러들었던 걱정이 슬그머니 머리를 추어올릴 때쯤 이세정이 물었다.

-도빈이는 왜 만났어요?

“……아.”

-번호 있어요?

“아, 네…… 저번에 받았습니다.”

-일단 만나요. 저녁에 차 보낼게요.

전화를 끊고서 생각했다. 그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알아요? 이세정의 물음을 곱씹어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만약 배도빈이 직접 찍었다고 한다면 배도빈은 어떻게 지수의 호텔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걸까. 설마 배도빈과 지수가 서로 내통하고 있었던 건가. 안 친한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지수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지수를 대신해서 배도빈에게 문자를 보내놓았다.

[형, 지수 지내는 호텔 알려주세요.]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마우스를 쥐었다.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한두 시간 만이라도 작곡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끊긴 흐름을 바로 이어갈 능력이 없어서, 지금까지 쓴 곡을 들어보았다. 책상에 놓아둔 초콜릿을 씹으며 멍하니 듣다가 도중에 중단했다. 뭘까. 이 실험적이라고 포장해줄 수 없을 만큼 난해한 곡은.

작곡은 영감과 계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본디 후자가 발달하였는데, 발달한 만큼 감이 좋지 못했다. 아마 학부에서 가장 감각적이지 못한 사람이 나일 것이다. 이세정과 만나면서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모두 구겨 넣으면서도 내 식대로 정돈하지 못하니 이런 곡이나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손봐줄 구석이 없는 곡을 들으며 고민하다가 우선 나갈 준비를 했다.

***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룸 안으로 들어가며, 테이블 위에 빼곡한 술들을 훑어보았다. 원래 먼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술값을 내는 건데, 저것들을 모두 지불했다간 당장 빚더미에 올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소파로 걸어가 앉으려다가 문득 한기를 느꼈다. 접시를 들고 있는 직원에게 에어컨을 꺼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에어컨을 껐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직원의 피부가 꼭 도자기를 연상케 했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직원의 얼굴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얼굴 면적이 널찍한 도자기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정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잘 지냈어요?”

내 어깨를 바짝 끌어당긴다. 차가운 향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한기와 함께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이세정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세정은 가장 가까이 있는 술의 마개를 개봉했다. 엎어져 있는 잔을 바로 하고, 얼음도 넣지 않고 술을 따랐다. 나는 조명을 받아 붉은빛을 내는 술을 쳐다보다가 슬쩍 얼음을 집어넣었다. 나를 본 이세정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고는 병을 더 기울여 잔을 가득 채워선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가까이서 본 술은 꼭 취하기 위해 먹는 것 같았다. 도수는 답도 없이 세고, 비싸기는 엄청 비싸고.

“이거 먹으면 바로 갈 것 같아요.”

“내가 좀 마실까요?”

넘칠 듯 말 듯 위태롭게 잔을 든 이세정이 순식간에 반을 마셨다. 그리고 내게 돌려주었는데, 나는 두 손으로 잔을 받들어 향을 맡아보았다. 고개를 돌려 한 번 기침했다. 알코올이 아주 강하게 끼쳐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쉬이 입에 대기 꺼려지는 향이었다. 찔끔 마셔보았다. 술이 넘겨지며 목이 타들어 갈 듯 화끈거렸다. 목뿐만이 아니었다. 가슴까지 발딱거렸다.

“뭐, 탔습니까?”

“이건 내가 마실게요.”

이세정은 내가 남긴 술을 말끔히 해치웠다. 그러고는 새 잔을 들어 새로운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얼음도 있었고, 섞어 마시는 음료도 있었다. 내가 그걸 세 모금 정도 마시니, 이세정은 또 새로운 술 마개를 개봉했다. 맛 기행이라도 떠나자는 소리인가. 여러 술을 돌려 마시는 것도 물론 이상했지만 나는 세 모금, 이세정은 한 잔, 하며 주고받는 것은 더 이상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아니라 이세정이 먼저 취할 듯했다.

그러나 한 모금이 열 번 반복되면 열 모금이 되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세정의 가슴에 머리를 찧는 횟수가 잦아졌다.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잔을 꿀떡꿀떡 삼키곤 과일을 씹었다. 몸의 부담을 가장 덜 받는 안주가 과일뿐이었다.

한창 이세정에게 안겨있다시피 기대서 과일을 베어 먹는 중에, 주머니 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는 흐린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내가 좀 생각을 해봤거든… 아무래도 만나야겠다. 할 말 있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배, 도, 빈.”

이름을 중얼거리곤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문득 이세정이 내 뺨에 키스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이세정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러자 이세정이 입을 맞춰왔다. 가볍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점점 길어졌다. 호흡과 함께 입을 벌렸다.

정신없이 입술이 빨렸다. 목을 감싸자 허리가 감겼다. 순식간에 이세정의 무릎 위로 올라갔고, 다시 빨렸다.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세세하게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냥 몰아치고 있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목덜미가 깨물렸다. 보통 때와 달리 많이 따가웠다. 그래서 나도 물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세정만큼 세게 깨물지는 못했다. 이세정이 다시 나를 깨물었다.

“아……아파요.”

“아파?”

“아파요.”

나는 이세정의 목 부근에 입술을 댄 채로 그가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었다.

“왜 옷을 벗기지.”

이세정의 목소리에는 짜증인지 난감함인지 모를 것이 있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며 고개를 내렸다. 두 개 정도 풀었을 뿐인데 셔츠 속이 조금 보였다. 셔츠 안에 무슨 상처가 있는지 궁금했었다. 아직까지는 상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더 풀어볼까. 잠겨있는 단추를 덥석 잡았는데, 이세정이 다시 내게 키스했다. 잠깐 입술이 떼어진 틈에 이세정을 밀었다.

“저 과일 먹고 싶어요.”

“응?”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다 잊어버리고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과일 먹고 싶어요.”

내 말이 주의 깊게 들을 만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세정은 과일을 시켜주었다. 방 안으로 도자기가 들어왔다가 과일 접시를 놓고 다시 나갔다. 나는 직원의 뒷모습을 흐린 시야로 쏘아보았다.

“저 직원분 되게 피부 좋아요. 처음 봐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매끈한 피부.”

“뭐라고?”

“피부 좋아요.”

이세정의 뺨을 매만졌다. 이세정의 피부도 아주 좋았다. 그 점을 꼬집어 말했다.

“피부 좋아요. 진짜 좋아요.”

“그 직원이요?”

“직원도 좋아요. 도자기 같아요. 처음 봤을 때 도자기인 줄 알았어요.”

이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만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피부가 깨끗해서 좋아요.”

“직원이요?”

“깨끗해요.”

“그 남자?”

물론 처음에는 도자기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지금 내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이세정이었다. 왜 자꾸 그 도자기를 들먹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깨끗하다니까요.”

“그 남자.”

“아니…….”

이세정이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뺨을 차분히 문지르며 말했다.

“세수하고 와요.”

목소리는 취기에 늘어진 양 아주 느렸다. 나는 내 뺨을 만져보았다.

“저 더러워요?”

“아니. 술 좀 깨고 와요.”

이세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를 잡아먹은 술을 털어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휘적휘적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대번에 따라붙은 지배인이 나를 화장실까지 안내해주었다.

세면대 앞에 서자마자 머리를 처박았다. 뺨 위로 미지근한 물이 줄줄 흘렀다. 세수인지 물고문인지,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한쪽에 비치된 수건을 꺼내 벅벅 닦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잊지 않고 노크를 했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문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괴로움으로 점칠 된 비명을 내지르며, 남자가 두 가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밖에 할 줄 아는 말이 없다는 듯이, 간절하고도 기계적인 울음이었다. 나는 눈을 끔뻑끔뻑 거렸다. 확실히 취기를 털어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술에 잡아먹힌 상태인가?

살려주세요. 비명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나는 반동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남자의 목을 잡고 있던 이세정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혀서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피부 안 깨끗한데, 우채민 씨.”

남자의 낯가죽이 열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갈라진 틈으로 피가 솟구쳐 줄줄 흐르고 있었다. 사실 얼마나 그은 건지는 잘 모른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세정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었고, 남자는 잘못을 빌고 있었다는 거였다. 내가 취한 건지, 이세정이 취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세정의 부름에 이내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우채민 씨 친구 보고 싶다고 했죠.”

목소리는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어찌나 평화롭게 제 이야기를 지속해나가던지, 고성을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자꾸 징징거려서 어디 뒀는데. 그걸 도빈이가 말했어.”

“…….”

“지금 데려올까요? 나머지 다리도 같이 부러뜨리고, 우채민 씨 경각심도 챙기고.”

“……왜.”

내 목소리가 나오다 말고 도중에 끊겼다. 흡사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분명 내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왜, 왜 그래요.”

이세정이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칼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질나서.”

이세정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제 이세정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다. 잡혀서는 안 됐다. 어찌 되었건 한 번 손이 닿으면, 이 상황을 믿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결국 나는 등을 돌려 도망쳤다. 자꾸 다리에 힘이 풀렸으나 멈추어 서지 않았다.

달리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과 타협하려고 애썼다. 내가 많이 취한 건가?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다른 사람을 이세정으로 착각한 거 아닐까? 그래, 그래. 나는 술에 잔뜩 취한 거다. 헛것이 보일 만큼. 헛소리가 들릴 만큼.

등허리를 비추던 빛이 서서히 밝아올 때쯤, 불현듯 내가 한숨도 자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새 뜬 눈으로 악몽을 꿨다. 너덜너덜해진 피부와 찢어진 입술, 긋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방증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눈. 그 끔찍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하여 상영된 탓에 진저리를 치며 몇 번이고 고쳐 눕기를 반복했었다.

이세정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술에 취하면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키기 쉽다는 것은 안다. 학과 선배들 중 술버릇이 나쁜 몇몇은 진탕 취한 날마다 어김없이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타인의 얼굴을 수십 갈래로 갈라놓는 실수를 범한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실수라는 테두리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다분히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평소 내재하고 있는 악심에서 나온 잔인함이었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지잉.

마치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었다는 듯 진동은 아득한 곳에서부터 다그쳐 왔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다며 기시감에 휩싸인 채, 침대를 더듬거렸다. 베개 옆에서 차가운 기계 덩어리가 잡혔다. 혹시 이세정에게서 연락이 왔을까 봐 화면은 쳐다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움직여 진동을 껐다.

징- 징- 징- 징- 징.

손가락을 몇 번이나 더듬거렸음에도 진동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빨라지고 있는 듯했다. 덩달아 조급해져 미친 듯이 팔을 흔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어서 휴대폰을 꺼야 하는데 버튼이 어디 있지.

징! 징! 징! 징! 징!

진동 소리는 커져만 갔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와 달리 선명한 천장이 보였다. 진동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추운 기가 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멍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밤을 새웠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선 못할 상상이 없으니 눈도 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자꾸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들을 회고하며,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지나쳐왔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잠을 잤던 거지. 이 상황으로 추측건대 꿈에서 느낀 그 기시감이 다시금 나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분명 이 꿈을 꾸기 전에도 비슷한 꿈을 꿨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진동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었고, 그러던 와중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깼더니 또 다른 진동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진동을 끄려다가 또 잠에서 깼다. 나는 계속해서 연속적인 악몽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상황도 연계된 꿈의 한 부분인가.

내가 사고하고, 기억하는 시간에 큰 분열이 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기억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저 꿈일 뿐이지? 사실 이세정과 함께 간 술집에서 깜빡 잠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잠에 들기 전의 상황과 악몽이 묘하게 이어져서, 악몽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은?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들은 모두 끔찍한 악몽에 불과한 건가. 이세정이 벌인 충격적인 일 모두가?

지잉- 지잉- 지잉.

또 진동이 울렸다. 앞서 경험했던 모든 꿈들의 첫 도입과 비슷한 장면이었으나, 소리만큼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추위에 떨리는 손 때문에 화면에 뜬 이름이 길게 번졌다. 차분하게 한 자 한 자 읊어보았다.

“배, 도, 빈.”

지겹게도, 또 기시감이 일었다. 손끝에 여실히 남아있는 공포를 털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귀에 댔다.

-우채민.

“네, 형.”

한숨과 같은 대답을 내보내며 방문을 열었다. 배도빈은 잘 잤냐는 쓸데없는 인사말을 몇 개 던지더니, 망설임이 가득한 투로 서두를 뗐다.

-어제 내가 좀 속인 게 있는데…….

그러고는 답지 않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배도빈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물을 마셨다. 물통을 내려놓고 식탁에 엎드릴 때까지도 목소리는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풀고 식탁에 뺨을 댔다. 잠시 후 귓가 근처에서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사실 네 친구, 호텔이 아니라 병원에 있다. 다리 한쪽이 부러졌거든.

배도빈의 목소리와 이세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겹쳐 들렸다.

-우발적인 사고는 아니고……이세정이 일부러 부러트렸어. 양형배와 양원 사건 있지? 그것도 이세정이 했다. 말릴 방법 없어. 경찰도 소용없고, 이세정 가족들에게 말해봤자 조치 못 해줘. 오히려 널 없애려고 할걸.

“…….”

-세정이 가족들은 누가 죽든 관심 없어. 세정이만 보호해. 그러니까…….

“형.”

눈가를 비볐다.

“형, 제 꿈에서 나가요.”

-뭐?

전화를 끊고서 눈을 감았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꿈속에 있는 모양이다.

다시 진동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진동이 울리면 꿈이 반복될 것이다. 이대로 하염없이 반복된 꿈속에서 살다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시간으로 돌아가, 이세정의 무릎 위에서 깼으면 한다. 이세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는 무서운 꿈을 꿨다고 칭얼거리는 거다.

악몽이 아니라 악몽 같은 현실이라고 온 사고가 외치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기어코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

하루가 더 지났다. 아직 무언가를 실감하기엔 고통스러웠으나, 언제까지고 방구석에 갇혀서 나 자신을 연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외출 준비에 서둘렀다. 지수를 만나러 갈 참이었다.

배도빈이 가르쳐준 병원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버스로 몇 정거장, 도보로 몇 분, 다시 버스로 몇 정거장. 타야 할 버스를 확인하고 정류장에 앉았다.

정오의 따뜻한 햇볕에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이 무거웠는데, 눈꺼풀만큼은 쉬이 내려앉지 않았다. 부유하듯 정신이 반쯤 떠 있는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바로 앞에 그림자가 졌다. 덩달아 시야에 구둣발이 들어왔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 앞에 선 사람은 꼼짝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 비서님이었다. 마치 이세정이라도 마주한 양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 비서님이 무감각한 표정을 거두어내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 길입니까.”

“저, 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으나, 말을 더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세정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들었을 장 비서님에게 내 행보를 함부로 발설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빤히 보던 장 비서님이 몸을 비틀어 검은 차를 가리켰다.

“타세요. 병원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이미 내 행선지를 알고 있구나. 빳빳하게 긴장한 탓에 목덜미가 아렸다. 검은 차를 빠르게 훑고는 시선을 돌렸다. 창이 짙어서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세정이 타고 있다면 병원에 가는 내내 숨을 참고 있다가 질식사를 할지도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타야 합니다.”

장 비서님은 내 거절에도 물러서지 않고 외려 단호하게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차로 가는 한걸음 한걸음에 두려움이 지그시 밟혀왔다. 전쟁터로 향하는 양다리가 떨렸다.

차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더 무서웠다. 왤까. 이세정도 없는데. 항상 앉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세정 대신 장 비서님이 옆자리를 채웠다. 차가 출발했다.

차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병원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길 끝에 이세정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했다. 피하고 싶은 건지, 보고 싶은 건지 걷잡을 수 없이 한심한 내면이 계속 나를 채찍질했다. 그래, 나는 아직까지도 이세정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타당한 이유를 찾는 중이었다. 내게는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절실히 필요했다.

“많이 취한 상태였습니다, 세정이.”

장 비서님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나는 장 비서님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낯가죽을 찢어발기는 일을 벌이지 않았을 터. 그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닐 텐데도 이리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장 비서님이 내 편으로 돌아설 일은 끝까지 없을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 곧바로 지수의 병실을 찾았다. 지수는 1인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바로 지수에게 다가가려다가 묘한 느낌에 이끌려 침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세정이 보고 있던 종이를 탁, 내려놓았다. 곧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날 술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뒷걸음질 쳤다. 이세정이 보낸 차에 순순히 오른 것이 무색하게도, 막상 맞닥뜨린 이세정이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복도로 나왔다. 데스크 쪽으로 향하려던 걸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디 가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민했다. 이대로 도망갈까? 그럼 병실에 혼자 남은 지수는?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뺀 채 스르르 등을 돌렸다. 이세정의 가슴 부근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잠깐, 음료수 좀 사오려고요.”

바로 반응이 들려오지 않아 슬쩍 시선을 올렸다. 이세정은 나를 무덤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은 상상력을 극대화 시켜 두려움만 끌어올릴 뿐이었다. 금방 눈을 깔고 발을 돌렸다. 긴장한 나머지 박자를 맞추지 못한 발이 엉켜, 빠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차트를 들고 걸어가던 간호사에게 부딪힐 뻔했으나, 그보다 먼저 이세정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를 품에 가둔 채 등을 토닥거린다. 마치 내가 간호사와 부딪힐 뻔해서 많이 놀랐을 거라는 듯이.

전날 이세정이 보여준 칼질에 비하면 고작 이런 일로 걱정하는 일이 우스울 지경이다. 부디 이세정이 그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다. 가슴을 슬그머니 밀어내자, 이세정이 지수의 병실 쪽을 힐끗 보았다.

“친구 만나러 왔어요?”

지수가 화두에 오르자,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이세정은 말을 안 하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언제까지고 삭히고 있을 수만은 없는 문제라서 덜덜 떨며 입을 벌렸다.

“어제요.”

“네.”

“어제, 어제요.”

“네, 우채민 씨. 어제요.”

나는 괜히 이세정의 성질을 건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많이, 취하셨어요?”

이세정은 짐짓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대답했다.

“술을 급하게 먹긴 했어요.”

“아…… 그래서 얼굴을, 막…….”

“얼굴을 막?”

이세정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곧 내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 남자도 우채민 씨 가족이었어요?”

“…….”

“이상하다. 우채민 씨랑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일 텐데.”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넋을 놓았다.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주먹질을 하고도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한 남자의 인생을 망쳐놨으니 적어도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내가 왜 그랬을까요. 술김에 그런 것 같은데, 놀랐어요? 미안해요. 적어도 이렇게만 말해줬어도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이제까지 느꼈던 의문들이 하나둘 끼워 맞춰지고 있었다. 내가 억지로 외면했던 배도빈의 경고, 강아지를 죽이려고 했던 차도에서의 행동, 비 오는 날 나가지 않는 이상한 강박관념, 사람의 손길을 닿는 것을 꺼리던 태도, 망설임 없이 그은 듯한 손목의 상처.

이세정은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감정은 머리로 판단하고 도덕과 양심은 존재하지 않으며 배려는 오로지 학습된 선에서만 하는, 말하자면…… 결함 같은 것들.

물론 그럼에도 의문은 남아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염려하는 이세정의 마음에 반했다. 정말로 그때 본 것들이 모두 허상이었을까. 이세정을 좋아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낸 착각이었을까.

“우채민 씨.”

심한 충격 때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나에게 이세정이 어쩐지 즐거운 눈치로 물었다.

“이제 내 말이 좀 들려요?”

“…….”

이세정의 손길이 잠시 내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바람이 지나치는 것처럼 부드럽게 흐트러트리더니,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빠르게 나를 지나쳐 걸었다. 멍하게 내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가슴도 한 번 더듬어보았다. 심장이 마구 뜀박질하고 있었다. 의문 하나가 벼락같은 속도로 머리를 내리찍었다.

무서워서 뛰는 거겠지.

순간 겁이 났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무엇일까 봐.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병실로 들어갔다. 유성 매직 뚜껑을 입에 문 지수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깁스를 한 제 다리에 글자를 새겼다. 지수야.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펜 끝으로 다리를 툭툭 칠뿐이었다. 대체 무슨 글자를 쓰는 건가 해서 내려다보니, 삐뚤삐뚤한 글씨로 ‘그 새끼 갔냐?’라는 질문이 적혀있었다.

“갔어.”

내 대꾸에, 지수가 안도하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우채민, 우리 그냥 절교하자.”

“……왜.”

“왜애애? 나 지금 잘못 들었냐? 왜애애애?”

지수는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양팔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더니 들썩대는 침대의 반동을 딛고 벌떡 상체를 들어 올렸다.

“너 오기 전에 그 새끼가 뭐라고 한 줄 아냐?”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어. 지가 내 다리 부러뜨려 놓고 존나 관심 한 줌 안 주더라. 내 인생에서 그런 미친놈은 처음이야.”

지수가 유성 매직 뚜껑을 닫고는 베개 위로 집어 던졌다.

“내가 확신하는데, 걔 사이코패스야. 병원이든 감옥이든 빨리 처넣어서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해야 돼. 아, 재벌이지. 납치당했을 때 보니까 재벌이더만. 미친놈이 왜 재벌로 태어나가지고! 그 새끼 가족들한테 찌를까?”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배도빈의 말에 의하면, 다들 이세정을 보호하는 데에만 염두를 두고 있다고 했으니까.

“병신아, 남자를 좋아할 거면 나처럼 듬직하고, 어? 정상적인 사람을 좋아해야지. 웬 사이코패스한테 걸려서.”

왜 지수의 다리에만 붕대가 감겨있지. 머리도 다친 것 같은데. 가만가만 지수의 머리를 쓸어주자, 지수가 매섭게 내 손길을 내쳤다.

“그나저나 나 다친 거 함경윤한테 슬쩍 흘렸냐?”

“번호 몰라.”

“메신저는 폼이야? 빨리 병문안 좀 와달라고 해.”

여자 친구도 아니면서 무슨 병문안. 어쨌거나 지수가 다친 건 나 때문이니,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창에서 함경윤의 이름을 찾아 들어갔다.

[저기, 지수 지금 병원에 있는데…….]

문득 고유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고유성의 사고도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괜한 걱정이라도, 지금은 연락 하나라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화면을 토닥이던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결국 메신저를 보내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보냈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수는 별다른 말 없이 나를 지그시 쏘아보기만 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지수야,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

분명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수였으나, 왜인지 지수는 몹시 서운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내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지수가 조용히 말했다.

“이별하고 와.”

“…….”

“근데 이별하다가 너 어디 묻히는 거 아니냐.”

겁이 나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수를 쳐다보았다. 저가 말을 뱉어놓고 덩달아 겁이 났는지 지수 또한 눈살을 구겼다.

집에 돌아올 때에도 어김없이 에스코트가 있었다. 끝끝내 타지 않겠다고 버텼으나 검은 차는 지겹도록 따라붙었다. 결국 두 사람의 눈길에 못내 이겨 이세정의 세력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서 기사님의 눈치를 한 번, 장 비서님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곤 두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한숨을 쉬었다.

장 비서님은 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찌나 끈덕지던지, 현관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어디선가 지켜보는 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얼른 문을 닫고는 방문까지 닫아버렸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으레 그러하듯 컴퓨터 앞에 앉아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가슴이 떨리고, 역겨움에 신물이 났고, 이유 없이 초조했다. 지금 느끼는 이 초조함은 정체 모를 살인마가 나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하는지 갈등하는 부분에서 작용하는 감정과 얼추 비슷했다.

잠시겠지만, 지수와 이별했다. 다 이세정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이 그리 행복할 수 없었는데,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졌다. 이세정 때문에 친구를 잃었고, 의도치 않게 몇몇 사람들의 인생을 박살 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서울 지경이었다. 나는 신경증 환자처럼 작곡하던 악보를 지워버렸다. 차마 한 번에는 지우지 못하고, 프레이즈마다 끊어 지웠다. 내가 만든 음들이 하나둘 소멸했다. 내 힘으로 구성 짓고 관계한, 내가 생성한 모든 음들이 허상처럼 날아갔다. 이상한 곡이 완성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세정이 좋아서.

찔끔 나온 눈물을 금방 지워버렸다. 더 있다가는 엉엉 울 것 같아 급히 방 밖으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결제해둔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사자든 호랑이든 닥치는 대로 감상했다. 그러나 맹수들이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장면에서 몇 번이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꺼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돌아, 돌아 수백 번은 더 본 펭귄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펭귄이 뒤뚱거리며 유빙 위를 걸어가는 장면이 비쳤다.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린 신경을 뒤로하고, 눈만 화면에 고정시킨 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몇 시간 동안 다큐멘터리를 멍하니 돌려보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의 끝은 역시 이세정이었다.

이세정은 말하자면 스쿠아나 물개, 범고래, 혹은 표범 해표의 포지션이었다. 제아무리 포악한 성향이 유사하다고 해도, 아델리 펭귄으로는 쳐줄 수 없었다. 이세정은 그냥, 모든 사람들의 천적이었다. 처음부터 천적임을 알았다면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이세정을 계속 만난다면 나는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겁에 질려 나조차 무너지고 말 테다.

이 전까지만 해도 진짜 좋았는데…….

데이트했던 일들이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히지 않고 이쯤에서 점잖게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먼 훗날 이세정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쁜 기억은 무뎌지고 오직 첫사랑의 설렘만 떠오를 것이다. 이번에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간혹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숨 쉴 틈 없이 울어댔다. 펭귄이 우는 소리와 내가 우는 소리가 교묘하게 겹쳐졌다. 슬퍼서 눈물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울다 보니 더 서러워졌다. 그때, 현관 근처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기로 한 건 주말이고, 연락은 꾸준히 하고 있어. 모르겠어.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은데.”

오늘따라 누나의 퇴근이 빨랐다. 누나가 왔으니 이제 그만 울어야 하는데, 눈물은 외려 더 쏟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현관에서 부스럭대던 누나가 단숨에 거실로 걸어왔다.

“잠깐만, 나 동생한테 할 말 있어서. 야, 우채민. 오늘 외식…… 너 왜 울어?”

누나가 휴대폰을 든 채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 때문에 운다고 할 수 없어 속히 핑계를 생각해냈다.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비벼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물을 거두어내자, 펭귄이 뒤뚱거리고 있는 화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페, 펭귄이 너무 불쌍해서. 터전 잃, 잃어……버려…….”

눈물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하기 어려웠다. 누나는 ‘그래.’ 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하더니, 휴대폰을 귀에 대고 멈췄던 대화를 이어갔다.

“응?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아무래도 내 동생 조만간 짐 싸서 남극 기지로 갈 것 같거든. 아니, 많이 미친 것 같아 보이진 않고.”

누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억울해서 우는 거라고 덧붙여 말해줘야 하는데. 다시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만큼 이별 또한 해본 적 없었다. 마음을 쉽게 접을 수 있을까. 그 달콤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펭귄이 우는 소리를 키우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런데, 그저 서럽기만 하던 와중에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이별 어떻게 하지.

‘이별하다가 너 어디 묻히는 거 아니냐.’

어떻게 하지.

***

[줄 거 있어요. 나올래요?]

내가 한결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면, 일상의 한 부분처럼 다가왔을 문자였다. 이세정은 언제나 그렇듯 먼저 만나자는 제의를 해왔고, 그것은 역시나 명령조가 아니었다. 이제껏 깜빡 속아 넘어갔던 이유도 상냥한 말투의 영향이 컸다.

답장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난밤 모 블로그를 뒤지다가 안전한 이별에 관한 정보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무심해질 때쯤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 이것이 정보 글의 주 맥락이었으므로 나는 블로거의 말마따나 당분간 이세정과 연락하는 텀을 늦출 생각이었다.

답장은 두 시간 뒤로 미루고 우선 청소부터 했다. 그러나 두 시간은 퍽 긴 시간이었다. 이미 각이 맞춰져 있는 물건들을 재정비하면서, 눈으로 힐끔힐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이따금 전화가 오는 휴대폰 화면을 볼 때마다 심장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려왔다. 아무것도 아닌 세 글자가 복합적이고 괴로운 감정을 끌어모았다. 아마도 준비가 안 된 것은 나인 것 같다. 휴대폰을 멀리 던져버리고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전화는 한참 후에 다시 불빛을 냈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전화를 하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더한 화를 불러일으킬까 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퇴근한 누나가 구두를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나는 거실 바닥에 생각 없이 가방을 던져놓고 주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누나가 제 가방에 등을 맞아 끙끙거리는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기서 뭐 해?”

“그냥 있어.”

“뭘 그냥 있어? 너 요즘 이상하다.”

누나는 생수 한 병을 꺼내와 소파에 앉았다.

“밖에 잘생긴 애 있는 거 아냐? 방금 보고 들어오는 길인데 깜짝 놀랐다, 야.”

누나에게 잘생겼다는 칭찬을 듣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남의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나도 약간 호기심이 돌았다.

“난 그렇게 성깔 있게 생긴 남자가 좋더라. 너무 어린 게 아쉬워. 십 년만 젊었어도 번호 물어봤을 텐데.”

“그래?”

“오토바이 가져온 것 같은데, 저 닮아서 오토바이도 잘 생겼더라.”

누나의 마지막 말에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이세정이 떠올랐다. 세상에 바이크 운전자가 이세정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나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잘생긴 바이크 운전자는 그리 흔치 않았다. 아마도.

나는 혹시 몰라 밖으로 나가보았다. 빌라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세정의 모습이 보였다. 이세정은 오토바이는 옆에 세워두고, 주차된 차 보닛 위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이세정에게 다가가며 대체 얼마나 나를 기다렸던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처음 문자가 왔을 때의 시간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게 한 셈이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별로 안 됐어요.”

평온한 어조로 대꾸한 이세정이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정리했다. 나는 아닌 척 뒷걸음질을 치며 이세정의 표정을 살폈다. 오래 기다려서 화난 표정은 아니다. 그러나 속내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아닌 터라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같이 갈 데가 있어요.”

“어디…….”

나도 모르게 이세정이 끌고 온 바이크 뒷자리를 쳐다보았다. 바이크는 2인승이 아니었다. 따로 차를 가져온 것도 아닌 듯한데 어떻게 가자는 것인지 의문이 떠올랐다. 바이크에서 시선을 떼자, 나처럼 바이크 뒷자리를 살피고 있던 이세정이 힘주어 미소를 지었다.

“타고 싶어요?”

“아니요! 탈 데도 없고.”

너무 강경하게 거절을 했나 싶어 뒤이어 변명을 붙였지만, 만약 뒷좌석이 있었다고 해도 절대 타지 않았을 것이다. 뒷자리를 쳐다본 것은, 그저 이세정이 언젠가는 나를 뒤에 태우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탈 수 있는데. 잠깐 태워줄까요?”

그 부드러운 물음에 대뜸 겁부터 집어먹었다. 바이크에 오른 이세정이 내게 손짓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 아무렇지 않은 손짓이 새삼 강압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주춤주춤 바이크 앞까지 걸어갔다. 이세정이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내가 빳빳하게 긴장을 하기도 전에 ‘지금 안을 거니까 놀라지 마요.’라고 예고를 해주었다.

이세정이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분명 키가 큰 편이었는데 가볍게 들려 이세정의 바로 앞에 앉혀졌다. 좁은 시트에 두 명이서 같이 앉으려면 서로 바짝 붙어 앉아야 했다. 나는 혹시 떨어질까 봐 두 다리를 바닥에 단단히 붙인 채 마주 보고 있는 이세정의 어깨를 짚었다. 이세정이 빙긋 웃더니 내 허리를 안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차가운 향수 냄새가 끼쳐오며 심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악몽 같은, 그날의 이세정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목 부근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달리면 위험하겠지…….”

나를 안은 상태로 달리는 모습을 잠깐 시뮬레이션해본 모양이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세정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이제 내려와도 될까요.”

이세정은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뒤집었다.

“왜, 왜요?”

“생채기 이제 없네요. 다행이다.”

“예…….”

일단 수긍해놓고 내가 손바닥을 다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자전거가 바로 앞을 지나간 탓에 넘어져 다친 일을 말하는 건가. 그건 너무 오래된 일인데. 나는 손을 슬슬 빼냈다.

“이제 내려가도 됩니까?”

“내려가서 차에 탈래요?”

차? 땅을 밟으며 이세정을 돌아보았다. 이세정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차 키였다.

“오늘은 내가 우채민 씨 기사 해줄게요.”

이세정이 차 키를 허공에 세우자, 바로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이세정이 내게 처음으로 선물했던 차가 보였다. 시승 한 번 해본 적 없는 차를 이세정과 같이 타게 되었다. 잘 두었다가 이별이 가능할 쯤에 돌려주려고 했는데. 얼떨떨하게 차에 올랐다.

***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어딘가를 향해 질주했다. 차가 워낙 조용한 소음을 내고 있어, 서로 대화 한마디 없는 차내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창을 필름 삼아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입마개를 찬 개가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개의 힘에 못 이긴 주인은 질질 끌려다녔고, 결국 누군가와 부딪혔다. 주인이 주춤한 사이 비둘기가 멀리 날아올랐다. 비둘기는 전선 위에 올라앉았다. 그 전선 밑에는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가만 보니 꼬마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컵과 똑같은 것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근처에 잘 나가는 아이스크림 매장이 있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 봐요?”

옆에서 이세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아무것도 안 봅니다.”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렸다. 이세정은 고개를 완전히 돌려 방금 전까지 내가 봤던 것들을 모조리 확인했다. 나는 마치 추운 척 창문을 닫아버렸다. 이세정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끝끝내 무시했다.

“다 왔어요, 우채민 씨.”

오래 달리지 않아 차가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이세정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남자에게 차 키를 건넸다. 그리고 천천히 조수석 문을 향해 걸어왔다. 아마도 차 문을 직접 열어주기 위함인 듯했다. 나는 유리 너머로 이세정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초조하게 곁눈질하다가 결국 모른 척 먼저 차 문을 열었다. 이제 이세정에게 배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차 문이 반쯤 열렸을까. 막 차 밖으로 다리를 빼내려는데, 갑자기 문이 어떤 힘에 의해 쾅, 닫혀버렸다. 흡사 거센 바람이 분 것처럼 매서운 힘이었다. 나는 멍하니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차 문을 열어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덜덜 떨며 이세정의 손을 잡았다.

이세정이 나를 데려간 곳은 경비가 삼엄한 건물 안이었다. 아까 전 이세정의 행동 때문에 겁에 질려있던 나는 승강기에 오를 때까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어디 가는 겁니까.”

“작곡실이요. 우채민 씨 작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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