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악기 하나하나 직접 골랐어요.”
간지러울 만큼 깊은 미소였다. 홀린 듯 바라보다 눈을 아래로 깔았다.
카드를 찍은 이세정이 문을 열었다. 작곡실을 확인한 순간, 나는 탄식했다. 우리 학교 메인 작곡실과는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한 곳이었다. 억대의 피아노 등의 기본 악기부터 작곡용 DAW, 녹음실, 악보도서관…….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이세정의 물음에, 속으로 수없이 감탄하던 것도 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내 표정을 확인한 이세정이 물었다.
“다시 꾸며줄까요?”
“아니요. 그럴 필욘 없는데…….”
순전히 작곡과생의 마음으로 감탄하며 구경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이 거대한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차 두 대도 돌려줘야 하는 처지에, 작곡실까지 덥석 받았다간 꼼짝없이 붙들릴 것이다. 게다가 나는…… 좀 창피했다.
“주지 마세요, 그냥….”
“…….”
거절해놓고선 이세정이 나를 노려볼까 봐 겁이 나 고개를 숙였다. 집요하게 바닥을 쳐다보고 있자니 이세정은 어렴풋한 한숨과 함께 차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세정은 운전을 하는 동안 줄곧 말이 없었다. 몇 번이고 이세정의 표정을 살폈으나 내가 읽을 수 있는 감정은 없었다. 화가 난 건가. 만약 화가 난 거라면 이 일을 계기로 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나는 창에 머리를 기댔다. 얼마나 갔을까. 이세정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내를 울렸다.
“이유 물어봐도 돼요?”
“……딱히 없습니다.”
“우채민 씨….”
“예?”
“난 왜 벽 세우는 건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내가 왜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는 마치 그것 때문에 선물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차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받을 자격 없다고 생각해서 안 받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이상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열의 아홉은 급체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으므로 운 좋은 하나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고 안에서도 바닥을 맴돌던 실력, 재능이 아예 없다는 듯 나를 떨어트린 모든 대학, 예고 졸업생치고 드물게도 실기가 아닌 성적으로 승부해서 들어온 대학, 내 실력을 조롱하던 몇몇 선배들.
열정은 사라지고 오기만 남은 상태에서 자신감은 차근차근 무너졌다. 그 와중에 들은 조롱들이 내 약한 내면을 파고들어 나를 더없이 깎아내렸다. 나는 나를 일컬어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맹신했다.
“……재능 있는 사람들도 골방에서 시작합니다. 뭣도 없는 제가 저런 곳에서. 우습기만 해요.”
이세정은 불을 붙일 듯 말 듯 뜸을 들이면서 담배를 깔아보았다. 한심한 내면을 말로써 내뱉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창피함을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다 말하고 나니까 생각만큼 부끄럽진 않았다. 어쩌면 듣는 이가 내 말에 별 관심도, 반응도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말이 끝나니 아까보다 더 지독한 침묵이 차내에 가라앉아있었다. 솔직히 내 말을 들은 이세정이 가식적으로라도 한두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줄 줄 알았다. 그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다시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그때, 차가 급히 멈추어 세워지며 몸이 격렬하게 앞으로 쏠렸다. 창에 세게 쿵, 머리를 박은 것과 동시에 이세정의 팔이 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는 잠깐 손을 떼는가 싶더니 담배를 버린 뒤에 재차 팔을 들어 나를 보호했다.
나는 몸을 움츠린 채 유리 너머를 살폈다. 지붕이 열린 빨간 차 한 대가 어느새 우리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빨간 차는 유턴 도로가 보이자마자 덜컥 속도를 줄여버리곤 왼쪽으로 차체를 틀었다. 덜컹, 차내가 크게 요동쳤다. 부딪힐 뻔한 것을 이세정이 빠르게 브레이크를 잡은 덕에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나는 꾹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심호흡을 했다. 내 가슴을 누르고 있던 이세정의 손이 한 번 들썩이더니 이내 떨어져 나갔다.
이세정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나를 힐끗 보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빨간 차를 쏘아보았는데, 당장에라도 저 스포츠카를 뒤쫓고 싶다는 눈치였다. 급히 이세정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마주 잡은 이세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쳤어요?”
“아니요.”
“다쳤는데.”
“예? 저 안 다쳤는데…….”
“주먹 쥐고 있었어요?”
이세정이 내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집게손가락에 나 있는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유리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는데 그때 손톱으로 손가락을 힘껏 찍어버린 모양이었다.
“레이싱 경기장인 줄 알았어요.”
중얼거린 이세정이 신호에 따라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도통 얼굴을 펼 생각을 않는 이세정의 눈치를 살폈다.
운전대는 인격을 변하게 한다는 말이 있었다. 제아무리 순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운전대 앞에서는 예민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물며 별로 순하지 않은 이세정은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일지, 가늠해보자니 겁부터 났다. 나는 내가 탄 차량이 부디 안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음악 어플에서 ‘화를 잠재우는 음악’을 쳐 한 곡을 재생 목록에 넣었다. 나는 이걸로도 화를 가라앉힐 수 있지만, 이세정은 어떨지 모르겠다.
음악이 잔잔하게 흘렀다. 오 분 남짓한 노래가 후반부에 접어들 때까지도 이세정의 얼굴은 도무지 펴질 줄 몰랐다. 아니, 사실 음악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세정은 연신 사방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는 데에 집중했다. 차가 곧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 순간 유난히 튀는 색채가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아까 그 빨간 차였다.
당혹스럽게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저 차는 왜 찾았는지, 정말로 보복운전을 할 셈인지, 오만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역시 이세정에겐 음악 따위가 소용이 없었다. 어제 잠깐 이세정에게 음악 심리 치료를 권유할까 고민했었는데, 역시 접어야겠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진정하라는 뜻으로 이세정의 한쪽 손을 꼭 잡았다. 이세정이 빨간 차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 아니,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요.”
“나랑 있는 게 싫어요?”
보복운전을 하러 온 주제에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지. 쉬이 대답을 못하고 있자, 이세정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 때리려는 건가.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수석 문을 잠갔다. 아니, 문은 이미 잠겨있었으니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을 못 열도록 막을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껏 쫀 것과 달리, 이세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세정이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 빨간 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후였다. 이세정은 운전석 문을 닫고 내게 컵을 내밀었다. 스푼이 꽂아진 하얀 아이스크림. 께름칙하게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아이스크림은 갑자기 왜…….”
“아까 아이스크림 보고 있지 않았어요? 놀란 것 같아서 사왔어요.”
“아.”
보복운전을 하려고 차를 쫓아온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감사합니다.”
스푼으로 크게 떠 입에 넣으며 놀란 속을 달랬다. 라벤더 향이 퍼지며 점차적으로 안정이 찾아들었다.
“맛있어요?”
“네, 드릴…….”
익숙한 음악이 귀에 꽂혔다. 아직까지 끄지 않은 휴대폰 어플에서 내 음악이 흘러나온 탓이다. 나는 스푼을 입에 물고 휴대폰을 껐다. 음악이 끊기자, 차내가 고요해졌다. 그 정적 속에서 가만히 손이 잡혔다.
이세정이 아이스크림과 함께 사온 연고를 꺼내 내 손가락에 살살 발라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손가락을 떨었다. 이세정은 ‘아파요?’라고 묻곤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연고를 바른 후에는 상처 패드까지 붙여주었는데, 그 또한 역시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부드럽게 대하는 모습만 보면 도무지 사람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긋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꽤 깔끔하게 붙여진 패드를 살폈다.
“이상해요?”
입에 스푼을 물고 있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세정이 내 입에서 스푼을 빼내 아이스크림 컵 안에 넣어주었다. 나는 이세정에게 잡혀있는 손을 슬그머니 풀며 말했다.
“다음엔 병원 가겠습니다. 안 해주셔도 돼요.”
간혹 이세정이 나를 조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려움과 떨림은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무서워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로 어영부영 만남을 가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이세정을 깊게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것만큼 난처한 것은 또 없었다. 나는 정을 떼고 싶은 거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강박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묘하게 다가온 정적을 깰만한 노래를 골랐다. 목록에 있는 것은 몇몇 빼곤 죄다 내가 만든 곡이었다. 지금 이세정에게 이 곡들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이세정에게 내가 재능이 없음을 수백 번 반복하여 말한 바가 있는데 굳이 예시표본을 내놓아서 창피를 당할 이유는 없었다. 곡들을 쓱쓱 넘기는 중에 이세정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우채민 씨는, 어릴 때부터 소음과 거리 두고 살았죠?”
의도는 모르겠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했다고 답했다. 어머니 때문에 큰 소음은 없게 하되, 생활 소음들은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아주 어릴 땐 그것이 배려임을 몰랐고, 머리가 조금 커서는 그게 그리도 귀찮을 수가 없었다. 못 되게도 말이다.
“어머니께서 큰 소리에는 놀라시니까 소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요즘으로 따지면 ASMR을 연구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음악에도 들어갔군요?”
“……아, 그러네요.”
나는 가만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나 봐요. 일단 제가 만든 곡이 저한텐 듣기로 거슬린 적은 없으니까.”
“내가 들어도 좋아요, 우채민 씨 음악은.”
“……예?”
“음악이 다정해서 좋아요, 우채민 씨.”
이세정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드럽게 내 뺨을 간지럽혔다.
말투 하나하나가 이렇게 간지러워서 어쩌지. 나는 뺨에서 올라가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느릿느릿 감았다. 자칫 얼굴이 상기될 것 같아서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내 뺨에 입을 맞춘 이세정이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대를 꺾으며, 이세정이 느긋하게 제안했다.
“저녁 먹으러 갈까요?”
“네……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린 것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은 직후였다. 방에 혼자 남아있으니 그제야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혼자 넋이 나가서는 지금껏 이세정이 하자는 대로 모두 하고 오는 길이었다. 일식집에 가서 같이 저녁도 먹고, 이세정이 준 작곡실 건물도 받고.
그러고 보니 오늘 한 일이 다 뭔가. 드라이브에, 아이스크림에, 선물에. 이건 어디로 보나 데이트였다.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어놓고 데이트를 하고 온 거였다. 왜 이토록 쉽게 이세정이 친 그물에 걸려든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제껏 제대로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불상사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당장 누나에게 달려가 내 칭찬을 해달라고 졸랐다.
“아! 왜 이래!”
누나에게 대차게 까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금방 들어가지 못하고 자꾸만 방을 뱅뱅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신입생이던 시절, 성격파탄자라고 소문난 선배가 과에서 가장 재능이 없는 순서대로 순위를 매긴 리스트를 본 적 있는데, 그때 내가 하위권이 아니라 상위권임을 알았을 때보다 더 좋았다. 아니, 잠깐만. 차근차근 손으로 꼽아보았다. 재능이 없는 순서대로 순위를 매긴 거니까, 상위권이 안 좋은 거잖아. 몇 년 만에 깨달은 진실이 심히 충격적이었으나, 곧 털어버렸다. 당장 전자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곡을 쓰고 싶은 욕구가 마구 피어올랐다.
***
이세정을 만난 다음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휴대폰으로 달력을 확인했다. 장마의 시작과 끝을 손으로 짚어보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양의 비가 내릴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장마 끝에는 태풍도 있고, 태풍 끝에는 눈도 있으니 몇 달간 이세정은 외출할 틈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세정이 눈도 싫어했었나.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밤새 작곡한 짧은 곡이 하나 있는데, 알려주고 싶었다. 뭘 받고자 하는 건 아니고……아니, 사실 칭찬해주면 좋고. 이세정에게 보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하여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물을 마시려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선 누나가 날씨 뉴스를 틀어놓고 과자를 씹어 먹고 있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거실 한가운데에 섰다. 내일도 비가 오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날이 맑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물을 꿀떡꿀떡 마셨다.
“알바 안 갔냐.”
누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휴가 가셨어.”
“너네 사장 돈 좀 벌었다니.”
“그러게. 장사 안된다더니.”
누나가 과자봉지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채널을 돌렸다. 또 뉴스였다. 일기예보를 봤으니 이만 갈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주춤하며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화면을 채운 빨간 스포츠카가 어제의 사건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낮 두 시쯤에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고, 아나운서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했다. 빨간 스포츠카. 빨갛다는 수식어 때문인지, 차종 때문인지, 섬뜩함을 느꼈다.
“이야, 저 비싼 차를 보복 운전하는 간 큰 놈도 다 있네.”
“보복운전?”
“그래, 범인은 아직 안 잡혔는데 보복성 범죄 같다고 하잖아.”
“…….”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제 그 차가 저 차가 맞나.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확인해보지. 잘 나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꺼내볼 수도 없고.
“……아.”
대뜸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다. 차 키를 꺼내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비가 쏟아지고 있는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차를 어디에 주차해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헤매야 했다.
겨우 차를 찾아서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산은 바깥에 내팽개치고 문을 쾅 닫았다. 젖은 손으로 블랙박스를 쥐었다. 블랙박스 구석구석을 누르며 SD카드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손톱으로 눌러봐도 빠져나오는 칩은 없었다. 어디 있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뉴스에 나온 스포츠카와 어제 난폭운전을 한 스포츠카를 비교해볼 수 있는데. 블랙박스를 더듬는 손길이 급박해졌다.
왜 없지.
왜 없어?
불현듯 손길을 멈추었다. 블랙박스를 내려놓고 시트에 기댔다. 차창에 부딪혀 일그러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시야를 좁히며 당황한 나머지 엉망이 된 기억을 차분히 정리해보았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뉴스에 나온 차량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차량은 디자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뉴스에 나온 차가 발견된 곳은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었다.
그러니까, 뉴스에 나온 그 사고는 이세정이 벌인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블랙박스에 메모리 카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사고를 일으킨 것 같지만. 확언하는데, 신고를 하려고 가져간 것은 아닐 것이다. 어제 그 빨간 스포츠카는 뉴스에도 나지 못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비가 오는 날 밤의 장 비서님이 떠올랐다.
‘외출할 때 어디 간다고 말하고 가는 편입니까?’
‘……아니요.’
‘친한 친구는 많습니까? 이를테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찾아줄 친구.’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 물었던 것인지 납득이 갔다. 당시 장 비서님은 내가 언제든 사라질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확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 번개가 치며, 얼굴이 찢어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머리를 싸매고 운전석에 웅크렸다. 빗방울이 무섭게 나를 다그쳤다.
이세정은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면서 계속 스포츠카를 생각했을까. 내게 약을 발라주면서 차주를 어떻게 조져야 하나 고민했을까. 다정하게 나를 봤고, 상냥하게 나를 돌봤고, 부드럽게 나를 보듬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잠시 잊고 있었다.
“미친놈.”
화가 나서 중얼거렸지만, 말투에는 악의를 담지 못했다. 그에 더욱 화가 나 다시 한번 읊조렸다.
“미친놈…….”
욕설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모를 일이었다.
***
목이 간질거렸다. 침을 삼킬 때마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이, 꼭 감기 증상의 초기 단계 같았다. 나는 약물 알레르기가 있었다. 편의점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약이 한정적이고, 약을 쓴다고 해서 잘 낫는 편이 아니라서 그동안 되도록 감기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애를 써왔었다. 성가심을 피하려면 이번에도 초기에 잡아야 했다. 차를 끓여 허겁지겁 해치웠다.
새벽에 일어난 뒤로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문자가 두 통 와 있었다. 지난밤 이세정이 보낸 문자는 넘기고, 배도빈이 보낸 문자부터 확인했다.
[넌 친구 병문안도 안 가냐]
차 한 잔을 더 따라 마시며 배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수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내가 편하냐?
다분히 악의가 담겨있는 음성이었다.
-넌 잠도 없어? 씨발, 매너를 어따 팔아먹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고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웬만하면 거의 일어나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작곡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몸 시간대가 지구 반대편에 맞춰져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은연중에 배도빈이 그런 쪽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끊을게요.”
-뭘 끊어. 한 시간 전에 겨우 잠든 사람 깨워놓고.
“늦게 주무셨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클럽.
단 두 글자였지만, 배도빈의 삶을 설명해주기에 아주 적당한 단어임은 틀림없었다.
-근데 말이야. 어제 내가 보낸 문자는 받았냐.
“지금 봤습니다.”
-네 친구 신입생 예쁜이한테 고백했다가 까였던데 가서 위로 좀 해.
“아…….”
-그 새끼 머리 깨끗한 새끼야. 다리 부러진 와중에 고백을 하더라. 나 경계하면서. 아마 지 다리 왜 부러졌는지 싹 잊어버렸을걸.
보통 때라면 여자가 대체 뭐라고 목을 매느냐며 한심하게 여겼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세정이 지수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데이트를 즐겼다.
-오늘 홀에서 제자 연주회 있는데, 같이 갈래?
“작곡과요?”
-아니, 피아노. 나 거기서 좀 더 자려고. 너도 요즘 제대로 잠 못 자고 있을 텐데 같이 가자.
확실히 요새 들어 깊이 자본 일이 드물었다. 일찍 자면 반드시 중간에 깼고, 늦게 자면 아무리 피곤해도 일찍 눈이 뜨였다. 오늘도 세 시간쯤 자다 일어난 터라 배도빈의 제안이 꽤 솔깃하게 다가왔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다면, 배도빈이 이세정과 친구 사이라는 점이었다.
-왜 말이 없냐. 빨리 대답해.
“이세정…….”
-걔가 뭐.
“말 안 하고 저희끼리 만나도 돼요?”
-그걸 왜 이세정한테 일일이 통보해야 되냐. 그리고 너 일기예보 못 봤냐? 세정이 오늘 절대 못 나와. 비혐오자 새끼. 귀여운 새끼.
배도빈이 낄낄 웃어댔다. 이세정에게 자주 맞는 것치고 무서운 기색이라곤 일절 없었다. 내가 어, 어, 하며 고민하는 사이 배도빈이 약속 시간을 전달하고 마음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
학과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학생회 소속도 아니고, 당장 학점이 부족한 처지도 아니라서 종강을 한 뒤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사실 저번 방학 때는 1시간에 10만 원씩 내며 지도 교수님께 따로 레슨을 받았었는데, 양형배 사건으로 교수님을 대면하기 껄끄러워진 터라 더욱이 학교에 갈 일이 없었다.
배도빈과는 음악홀 앞에서 만났다. 배도빈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열어보니 여성용 향수가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배도빈의 선물과 내가 사온 꽃을 같이 묶어 도우미에게 건네고, 홀 안으로 입장했다.
“후배가 여자예요?”
내 물음에 배도빈이 소책자를 펼쳐 들어 마지막 차례에 있는 여자 사진을 가리켰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마지막이네. 피아노 잘 치나 봐요.”
“아니. 학부에는 제대로 칠 줄 아는 애가 한 명도 없어.”
자긴 얼마나 잘 친다고, 묘하게 교수님 같은 발언이었다. 나는 계단을 조금 올라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바로 옆에 앉은 배도빈은 벌써부터 잘 준비에 들어갔다.
“음악 들으면 잠 잘 와. 그래서 내가 세정이 잠 못 잘 때마다 티켓 끊어주잖아.”
“세정이 형, 음악회 자주 가요?”
“이런 아마추어 음악회엔 안 오지. 데시벨 좀 올라가면 소음 취급하는데, 이런 데는 박수를 자주 치잖아. 그리고 이러지. 김준영 화이팅! 김소희 예쁘다!”
그렇게 말한 배도빈은 방금 전 내 대화를 곱씹듯이 세정이 형? 하고 조용히 읊조렸다.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당황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배도빈은 뜸을 들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번 피아노 전공 모 교수님 제자 연주회는 꽤나 어수선하게 진행되었다. 교수님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음악회치고 엉망으로 연주한 사람도 있었고, 중간에 피아노 자리를 옮긴다며 한차례 짐꾼들이 휘몰아치고 가기도 했다. 그 덕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을 푹 잔 건 배도빈뿐이었다.
음악회가 끝나자마자 배도빈은 후배를 만나러 갔다. 나는 꽃만 건네줬지만, 배도빈은 선물도 건네고 사진도 찍고 후배의 가족들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후배와 자연스레 멀어지는가 싶던 배도빈은 다른 학생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주고받았다. 심지어는 교수님과도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나는 혼자 구석에 박혀 배도빈의 친목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홀 앞에 사람이 한두 명씩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태 참았던 졸음이 서서히 달려드는 기분이었다. 정문으로 향하면서 급격하게 피곤해진 눈을 비볐다. 잠시 내 정수리 부근을 토닥이던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이 뒤통수 보니까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예?”
“몇 년 전에…… 복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복도 연습실 문이 존나 세게 열리는 거야. 아까 본 그 교수님 있지. 그 교수님 화나면 고성 지르잖아. 시끄럽게 연습실 안에 있는 애한테 그따위 연주 누가 못하냐고, 여기 있는 애 아무나 붙잡고 시켜도 너보단 잘 할 거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난리를 폈어. 솔직히 히스테리 좀 첨가 됐을걸. 어떤 교수가 피아노 좀 못 친다고 짜증을 내냐? 아무튼 그러면서 앞에 걸어가고 있는 덜떨어진 놈 뒤통수를 잡고서 네가 대신 연주해보라고 시킨 거야.”
배도빈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교수님이 다짜고짜 걔한테 ‘너 쳐봐.’ 이러니까 그놈이 존나 당황해가지고 ‘예? 저요? 저 작곡과인데.’ 이러더라. 작곡과가 치겠냐? 교수님도 그놈 작곡과인 줄 몰랐는지 좀 당황한 눈치였어. 근데 이제 와서 말 철회하면 웃기잖아. 그러니까 막무가내로 막 치라고 연습실 안으로 끌어들인 거지.”
“네.”
“그런데 걔가 그 자리에서 그 곡 완주하더라.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긴 했는데 그 곡은 전공자도 어려워하잖아. 무슨 곡이었지.”
배도빈이 허공에서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다.
“리스트의…….”
아마도 스페인 랩소디를 말하는 것 같다.
“그거 너 맞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다시 떠올리기에 몹시 민망한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 내게 잘해주던 선배들은 장난으로 위클리 곡 연주를 부탁했고, 나를 싫어하던 선배 하나는 전과를 하라고 노래를 불렀다. 전과, 전과, 전과. 나중에 가서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 결국 그 선배를 피해 군대로 도피를 해버렸다(나중에 듣기로 그 선배는 폭행 사건에 연류 되어 전과자가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넌 재능 있는 분야가 뻔히 있는데 굳이 이 길을 택했냐. 그냥 피아노 쳐.”
배도빈이 시비조로 말했다.
“그렇게 잘 치는 편도 아닌데요.”
“잘하는 건 못 한다고 하고, 못 하는 건 잘한다고 하고. 성격 진짜 이상하네. 누가 너한테 성격 이상하다고 말 안 해주냐.”
보통 성격이 이상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친해야 할 수 있는 말인데, 나는 그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을 쌓은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아니다. 갑작스레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는 내 곡이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축 처지기만 한다는 평을 늘어놓는 배도빈을 보고 있자니, 친분의 기준에 의구심이 들었다. 배도빈은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 옛날 내 곡에 악평을 쏟아냈던 어떤 선배처럼 나를 싫어해서 이런 말을 한다기엔 전혀 악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도빈을 어이없이 바라보자, 내 표정을 확인한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젠 눈 하나 깜짝 안 하네.”
“형은 일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하셨으니까 익숙해졌어요.”
“나한테 말고도 많이 들었지?”
“예.”
“너처럼 집착 심한 애도 없을 거야. 안 그렇게 생겨선 고집 세다, 진짜. 한 번 이거다 싶으면 쭉 밀고 가는 거냐.”
쭉 피아노를 쳐오다가 작곡으로 전향한 사람들은 많다. 내 경우도 비슷했다. 작곡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과외를 받아 예고를 갔고, 배워보니 재미있어서 깊이 빠졌고, 마침 피아노를 그만둬야 하는 일이 생겨 얼결에 대학까지 작곡으로 왔다.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분야지만 이제는 다른 길로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더 나은 길이 있는데 괜히 고집부리는 거, 난 별로 좋게 보이진 않아.”
“단점인 거 압니다.”
“고칠 생각은 없어?”
나는 빠르게 그만두는 편이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도 그릇된 곳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으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헤매는 편이었다. 물론 길을 쉽게 찾지는 못한다. 머리로는 이쯤에서 돌아가야지 싶다가도 발은 새로운 방향으로 걸음하고, 그러다가 결국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고. 아마 작곡도 마찬가지일 테다. 나는 계속 지치고 흔들리면서도 선뜻 발을 떼지 못할 것이다. 고집이라면 고집이었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마인드론 쉽게 못 고칠 것 같은데.”
중얼거린 배도빈이 걸음을 서둘러 정문 앞에 세워진 바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배도빈이 바이크의 몸통을 발로 툭툭 찼다.
“타. 집까지 빠르게 데려다줄게.”
“…….”
바이크의 위협은 이세정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배도빈이 내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내가 뒤로 주춤 물러나니, 배도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타기 싫냐.”
“예.”
“탄 적 없어?”
“예.”
배도빈은 입을 조금 벌린 채로 나를 빤히 보았다. 바이크를 타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놀랄 일인지 의문이었다. 시선이 너무 노골적으로 다가와 부끄러움을 느낄 무렵, 바닥에 짙은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처럼 찍히던 그림자는 곧 빠르게 번져갔다.
예정된 비였으나 깜빡 잊고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우산 사올게요.”
편의점으로 달려가 비닐우산을 집어 들었다. 우산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자마자 그 위로 핫바 두 개가 놓였다.
“내가 계산할게.”
어느새 내 옆에 선 배도빈이 계산을 마치고 전자레인지 앞으로 걸어갔다. 핫바 두 개를 돌려놓고, 전자레인지 안을 빤히 바라본다. 덩달아 나도 옆에 서서 핫바가 돌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이세정에게서 온 문자였다. 확인 버튼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머뭇거렸다.
“세정이한테 마음 접은 거 맞아?”
내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본 배도빈이 물었다.
“아까 네가 ‘세정이 형’이라고 말했잖아. 말투에 악의가 없어서 이상했어. 정말 접은 거 맞아?”
내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배도빈이 헛웃음을 삼켰다.
“미쳤네. 친구 다리 부러트린 놈을…….”
“노력하고 있어요.”
“무슨 노력. 뭘 말끝마다 노력이냐. 난 네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돼.”
“저도 제가 이해 안 돼요. 초 단위로 감정이 바뀌어요. 만난 지 별로 안 돼서 금방 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정면에서 노려보던 배도빈이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 뭘 하든 그냥 뒀는데 안 되겠다. 네가 불쌍하니까, 그래서 특별히 신경써주는 거야.”
배도빈이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보여줄게. 이세정이 망가트린 삶.”
핫바도, 비닐우산도 무엇하나 챙겨 들지 못한 채 편의점 밖으로 끌려나왔다. 나는 택시 안에 던져졌다.
***
잠에서 깨니 새벽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악몽을 꿨다. 기억은 나지 않았고, 단지 다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의 묘한 거슬림만 남아있었다. 큼큼, 욱신거리는 목을 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무언가 올라올 것처럼 버거운 속도였다. 에어컨을 켜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땀이 축축하게 손바닥을 적셨다. 휴지를 뜯어 뺨을 벅벅 닦았다. 다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났다. 내 얼굴이 가뭄에 찌든 땅처럼 쩍쩍 갈라지는 꿈이었다. 거울을 본 나는 비명을 질렀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내 얼굴에 붕대가 감겼다. 며칠 뒤 의사 선생님이 완전히 나았다며 붕대를 풀었다. 그대로였다. 나는 여전히 조각나있었다. 미친놈처럼 이게 뭐냐고 소리를 질렀더니,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피부 깨끗한데.’
얼어붙어 천천히 의사 선생님을 보았는데,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이세정이었다.
머리를 휘저어 악몽을 털어내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어져라 기침을 뱉었다. 끔찍했다. 단지 꿈을 꿨을 뿐인데도 이렇게 정신이 부서질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어떻게 견디고 있지. 아니, 견디고 있는 것이 맞을까. 지그시 눈을 감고서 어제 배도빈과 함께 갔던 병원에서 본 남자를 떠올렸다.
내가 간 곳은 일반 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이었다. 거기서 한때 술집 직원이었던 도자기를 보았다. 도자기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던 터라 먼발치에서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어떤 상태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자기의 얼굴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붕대 사이에는 천천히 끔뻑이는 눈동자가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눈이었다. 도자기는 연신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어느 순간 얼굴을 마구 긁어댔다. 붕대가 찢기자, 간호사들이 나타나 도자기의 손을 묶었다.
이상한 것은, 도자기는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에 대해서는 배도빈이 설명을 해주었는데, 도자기의 성대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다. 성대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보면 소리를 질러서 망가진 것은 아닐 테다. 경황이 없어 이유는 묻지 못했다.
‘잘 봐둬. 저게 저놈이 앞으로 살아갈 삶이고, 어쩌면 네 주변 사람들이 당할지도 모를 삶이야. 너 친구 다리 조금 부러졌다고 안심하고 있지. 그 새끼가 너 원망 안 해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 근데 저거 봐. 씨발, 저게 정상인지.’
배도빈의 말이 심장에 와 박혔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갈팡질팡해서조차 안 되는 처지였다.
이세정은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원인은 나였고,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세정과 붙어있다 보면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길 것이다. 제2의 도자기, 제3의 도자기.
‘나 세정이 존나 좋아하거든. 어렸을 때 생각하면 솔직히 불쌍하게도 생각해. 그래서 둘 사이 응원할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어. 걔가 너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애먼 사람 망가트리는 꼴은 못 보겠다. 어째 너랑 있으니까 더 심해진 느낌이야.’
이제껏 나와 이세정의 관계에 대해서 가볍게 농담하던 배도빈은 없었다. 표정이 아주 진지해서, 도리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걔는 지 물건에 기스 같은 거 내는 거 좋아해. 지 몸에도 해놨을지도 몰라. 왜 그런 걸 좋아하냐고? 씨발, 미쳐가고 있으니까. 비 오는 날 왜 못 나가냐고? 미쳐가고 있으니까! 너 아직 안 다쳤다고 안심하지 마라. 순식간에 저 꼴 난다.’
언젠가 이세정이 흠집이 난 하얀 오토바이를 보여주며 예쁘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미친놈은 원래 자기가 미친놈인 거 몰라. 근데 세정이는 기막힐 정도로 확실히 알고 있어. 그래서 어렸을 때는…… 아니다. 이런 얘기해서 뭐 해. 아무튼 넌 걔 감당 못해. 그냥 피해, 새끼야.’
현재 도자기가 살고 있는 생지옥을 본 이상, 나는 이세정을 만날 수 없었다.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블로거의 말마따나 천천히 멀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 방법은 헤어지는 법이 아닌, 내가 이세정에게 자연스레 녹아드는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이 마음 그대로 단번에 끊어낼 생각이었다. 얼굴을 몇 번 더 문지르곤 이세정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취했다.
***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맞을까 봐 병원 앞에서 보자고 한 건데, 차라리 경찰서 앞이 헤어지는 장소로는 더 적당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때리려고 하면 경찰서로 도망을 가면 될 테니까.
약속 시간까지 오 분 정도 남아있었다. 자꾸 간질거리는 목 때문에 헛구역질처럼 기침을 했다. 가슴을 좀 두드리며 병원 주변을 맴돌다 보니 가까운 곳에서 자판기를 발견했다.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놓인 음료 자판기였다. 그다지 낡아 보이지도 않았고, 편의점이나 슈퍼를 찾으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성가심을 감수해야 했기에 일단 여기서 음료를 뽑아먹기로 했다. 자판기에 현금을 넣었다.
이온 음료를 누르자, 캔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허리를 굽혀 음료를 집어 들었다.
“여기 있었어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꾸 나오려는 기침을 누르고 뒤를 돌았다. 타이를 매지 않은 하얀 셔츠가 먼저 보였고, 다음으로 자판기를 쳐다보고 있는 이세정의 눈이 보였다. 자판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살짝 깔아보는 폼이, 평소보다 더 위협적으로 비췄다. 나는 의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놓고 간 거예요.”
이세정이 단정하게 접힌 비닐우산 끝으로 쿵, 자판기를 찧었다. 작은 소음이었지만, 내 몸 바로 옆으로 우산이 지나간 터라 흠칫 놀랐다. 어느새 커진 눈으로 이세정을 쳐다보니,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안 받아요?”
떨떠름하게 우산을 받아들었다. 어제 배도빈이랑 갔던 편의점에서 산 우산이었다. 배도빈이 너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바람에 미처 챙기지 못했는데, 설마 이세정의 손에서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편의점 CCTV라도 확인한 건가. 행보는 어떻게 추적한 거지.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이세정과 슬금 눈이 마주쳤다. 머리는 아무것도 털어놓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데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졌다.
“근데, 이건 제가 산 게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도빈이가 도망을 가서, 우채민 씨한테 대신 주는 거예요.”
“……도망이요?”
이세정이 내 팔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긴장으로 인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설프게 준 힘 때문인지 곧 팔이 떨렸고, 이세정은 그런 나를 위로해주듯 천천히 팔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드럽게 대해준다고 한들 떨림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마음대로 끌고 가는 거 싫어한다고 한 적 있잖아요.”
“예, 예?”
“그래서 내가 약속했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가만 보니 이세정이 잡은 곳은 어제 배도빈에게 세게 쥐어졌던 부근이었다.
“도빈이는 내가 혼내줄게요.”
씹어 먹을 듯 뱉은 말에, 나는 호흡을 거세게 들이켰다. 목이 기침이 나올 것처럼 간질거렸다. 괜스레 목덜미를 잡았다가 떼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판기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자판기를 살폈다. 동시에, 자판기 너머로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병원에 갇혀 치료를 받고 있는 도자기가 떠올랐다. 이세정과 나 때문에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사람. 들고 있던 차가운 음료수가 햇볕 아래에서 점점 식고 있었다.
“저기, 할 말이 있습니다.”
멍하게 던져놓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 자판기에 막혀 오갈 데가 없었지만, 반걸음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세정의 눈 바로 아래 부근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져서 난감해졌다. 이번에는 뺨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시선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냥 목덜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야기했어야 했다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서 내 발끝을 노려보았다. 어떤 대답이 들려올까. 상상의 상상을 더 한 머릿속 때문에 심장은 환장할 정도로 급박하게 뛰었다.
곧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열이 바짝 오르는 기분이었다. 얼굴도 욱신거리고, 목도 아팠다.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진정하고 싶었지만, 이세정이 그동안 해놓은 짓이 있으니, 도무지 침착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랑, 그렇게 맞는 것 같지 않아요. 아, 안 맞는데 굳이 볼 필요가… 있을…….”
“왜요? 내가 이상해서?”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아니요.”
한참 침묵이 오갔다. 내가 급하게 부인한 말이, 실은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인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안다. 이세정도 그걸 알고 있으니 쉽게 말을 떼지 못하는 것일 테다.
빨리 이 순간이 지났으면 했다. 일을 다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이 상황을 견디기엔 내 몸이 지나치게 좋지 못했다. 하필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떠있어 어지러웠고, 목이 아팠다. 가만 보니 갈비뼈도 좀 아픈 것 같았다.
내 앞을 버티고 선 이세정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세정이 대번에 내가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내 시야를 차단했다.
“나 가지고 장난쳤어요?”
“장난이라니…….”
“가지고 놀다가 버리네. 웃기다.”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나올 줄 알았더니 이세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뭐가 섞여 있는 걸까. 슬픔? 처연함? 아무튼 내가 두려움을 느낄 감정은 아니었다. 그에 용기를 얻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세정과 정면으로 시선이 맞부딪혔다. 원래 목소리와 표정이 다를 수도 있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눈은,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 번도 나를 이렇게 본 적 없어서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세정이 나를 쏘아보면 이런 느낌이구나. 잔뜩 얼어붙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중에, 웬 젊은 남자가 우리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저기요. 길 좀 막지 말고 비키죠.”
내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이세정이 대뜸 자판기를 발로 찼다. 순간 나를 차는 줄 알고 몸을 움츠렸다가 커다란 굉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등 뒤로 진동이 느껴졌다.
“알아서 비켜 가지.”
이것이 내 최대 방어체계인 양 연달아 기침이 나왔다. 가슴을 짓누른 채 거칠게 호흡했다. 남자가 떠름하게 걸음을 틀었고,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나기에는 몹시 겁이 났다.
어느새 내 앞에 주저앉은 이세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를 관찰하는 건가. 눈을 감고 있어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나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데 우채민 씨.”
내 두 뺨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그대로 나를 쓰다듬으며, 이세정은 구태여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언제, 그만 만나자고 하면 놔준다고 약속한 적 있어요?”
“…….”
“말해 봐요. 기억이 안 나서 그래.”
뺨에 닿은 손길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의사로 젓는 건지, 떨림으로 흔들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입술을 안쪽으로 단단히 말았다. 너무 세게 힘을 준 탓에 입술이 아파왔다.
“고개만 젓지 말고, 말을 해보라니까.”
이세정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야.”
단순한 반말이었음에도 괜히 놀랐다. 나를 향한 분명한 분노가 느껴져 심하게 무서웠다. 무서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세정이 짓는 표정, 눈짓, 손짓, 말투, 그 모든 것이 예민하게 다가와 아프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이세정이 내 이마를 건드렸다. 흠칫 고개를 뒤로했지만, 이세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어코 내 앞머리를 잡아 넘겨주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줄곧 참고 있던 기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어쩌면 작위적일지도 모를 마른기침이었다. 목에 힘을 준 탓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땅을 쏘아보았다.
“아.”
이세정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식했다. 그러고는 내 뒤통수를 매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뒷덜미가 잡혀 고개가 올라갔다.
“우채민 씨가 감기에 걸려서, 나한테 옮길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그런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이세정이 빤히 바라본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굳어있었다. 이세정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우채민 씨를 계속 봐야겠거든.”
“…….”
“병원 가요”
“아, 아니.”
다급하게 이세정의 팔을 잡았다가 급하게 떼어냈다.
“저, 저 알레르기도 있고…… 약도 잘 안 듣고…… 그러니까 그냥 집에서 쉬면…….”
이세정이 내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밴드가 붙어있었던 집게손가락을 만졌다.
“다음엔 병원 가겠습니다.”
“…….”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자가 치료 안 좋아한다는 말로 받아들였는데, 난.”
다음엔 병원 가겠습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으니, 내가 한 말은 분명히 기억났다. 다만 그건 외상적인 부분만 놓고 한 말이었다. 겨우 감기 하나로 병원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기침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었지만,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것을 보면 이제 와서 그런 연기를 하기엔 많이 늦은 듯했다. 가슴을 다시금 부여잡았다.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이세정이 내 등을 끌어당겼다. 나를 아주 소중하게 품고서 괜찮다는 듯 토닥였다.
“입원하러 가요.”
입원? 그냥 약만 지으러 가는 게 아니었나.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 대신 이세정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건 입원해야 돼.”
***
“서둘러 입원하지 않았다면 상태가 악화됐을 겁니다.”
장 비서님의 건조한 농담을 들으며 몸을 보호하듯 둥글게 웅크렸다. 내가 진단받은 병명은 단순한 감기였다. 약물만 좀 조심하면 금방 호전되는 여름 감기. 요샌 병으로도 쳐주지 않는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덜컥 입원한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VIP 병동이라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병실에 달린 응접실만 보아도 이곳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비싼 값어치를 하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며칠 동안 이런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생전 처음 와보는 장소, 응접실에 깔려있는 경호원들, 그리고 병원에 온 뒤로 내내 말이 없는 이세정.
이세정은 침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파에 앉아있었다. 눈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깊게 상념하고 있는 듯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아까부터 줄곧 저런 태도였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머릿속을 감히 추측하고 싶진 않았으나 계속 말이 없으니 무서웠다. 마치 관심 없는 척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도 온 신경을 이세정 쪽으로 곤두세웠다.
그래서였을까. 급작스럽게 몸을 일으킨 이세정에게 놀라 티가 날 정도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손안 가득 쥐고 있던 이불을 더욱 끌어당겨 몸을 말았다. 이세정은 순식간에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장 비서님이 눈치 빠르게 옮겨다 준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차분하게 시선을 고르려고 애썼다. 마침 장 비서님이 전화가 왔다며 밖으로 나간 탓에 병실엔 이세정과 나밖에 없었다.
“다른 덴 안 아파요?”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순 당황해선 고개를 빠르게 주억거렸다. 이세정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좀 자둬요.”
자판기를 발로 차 위협하고, 협박조로 으르렁대던 사람이 다시 가면을 썼다. 무서운 것은, 이세정이 화를 내면 내는 대로, 다정하게 대해주면 대해주는 대로 내가 마음껏 휘둘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 이입한 시청자처럼. 아무래도 이세정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배우의 길로 들어서야 할 것 같다. 썩히기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세정에게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지 않기 위해 일단 눈을 감았다. 요를 정리해준 이세정이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뭘까.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손을 올려서 위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긴장하고 있는데, 내 심장께에 닿은 손이 부드럽게 나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토닥이는 손길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정한 박자가 꼭 심장 소리처럼 나를 안정시켰다. 하루 종일 놀라고 눈치 보고 조마조마하고 떠느라 곤두섰던 신경이 무뎌지자, 점차 긴장이 풀어졌다. 이세정으로 인해 불안해졌던 마음이 다시 이세정으로 인해 안정을 찾고 있었다. 좀 한심하긴 했는데, 무력함에서 벗어날 방법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일정하게 호흡했다. 의식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응접실에서 병실로 건너오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뭐 하시는…….”
잠시 말을 멈춘 장 비서님은 내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소리를 낮췄다.
“성인 남자는 그렇게 재우지 않습니다.”
내 가슴을 토닥이던 손길이 거두어졌다. 이세정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도빈이는요?”
“예, 공항경찰대에 넘겨졌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얼마쯤 걸릴 것 같아요?”
“음성 나오면 바로 풀려날 겁니다.”
“대기하고 있다가 픽업해 와요.”
도빈이? 공항경찰대? 번뜩 든 정신으로, 장 비서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을 크게 벌이시면 수습하기 힘들어집니다. 사장님 눈도 있고.”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곧 문과 함께 단절되었다. 힘겹게 눈을 떴다. 도망을 갔던 배도빈이 어떤 이유로 공항에서 붙잡힌 것 같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이세정은 제 친구에게도 가차 없었다. 이불을 단단히 뒤집어썼다. 얼른 나아서 집에 가고 싶었다.
***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이제부터 믿기로 했다. 빨리 나으려고 발버둥치니 내 몸은 점차 평화를 되찾았다. 기침은 잦아들었고, 부은 목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차분히 호전되는 증상을 확인한 의사가 마지막으로 내 몸무게를 체크했다. 의사는 체중 증량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때부터 식사 시간이 중요한 행사처럼 바뀌었다. 대체 어디에서 공수해오는 것인지 한눈에 봐도 병원식과는 거리가 먼 음식들이 매 식사 시간마다 배달되어왔다.
나는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음식에 대해 크게 호불호가 없어서 뭐든 무난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만큼은 도저히 늘릴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군대에서 당한 식고문 때문이었다. 사실 사건 자체는 내게 그리 큰 트라우마를 남기지 못했다. 중간에 사건 현장이 파해져 불상사를 면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도화살의 반대살이 낀 내 삶에서 내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이야 차고 넘쳤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 컸다. 어쨌거나 나는 그 사건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넘치지 않을 정도만 먹어도 충분하다고.
그러니까 배가 터질 듯한 기분을 느껴보는 건 극히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하루 세끼를 풍족히 챙겨 먹고 나면, 퇴근한 이세정이 간식거리를 사왔다. 알코올이 든 독일제 초콜릿 같은 취향이 갈릴 만한 디저트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좋아할 타르트 같은 것들.
오늘 사온 간식은 케이크였다. 작곡 프로그램이 깔린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놓고, 포크를 들었다. 머릿속엔 온통 살이 오를 생각밖에 없어서 그런지, 포크를 쥐는 동작이 매우 기계적이었다.
얇게 잘려 접시 위에 올라와 있는 케이크 조각을 바로 앞까지 끌어당겼다. 포크로 케이크 끝을 잘라 기대 없이 입에 넣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케이크를 한 움큼 떠 입에 쑤셔 넣었다.
“귀엽다.”
열심히 포크 질을 하는 중에, 웬 욕설이 들려왔다. 아니, 욕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이세정을 보았더니, 이세정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귀엽게 생겼어요.”
“저요?”
나는 빨대를 입에서 떼어내곤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무슨 말로 나를 녹이려고. 말로는 못할 말이 없었으니 속지 않았다. 그저 포크 질을 했다. 몸무게를 늘려 병동을 탈출하는 것만이 내 목표인 양.
“그동안 잘 안 먹어서, 먹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재차 따라붙은 이세정의 목소리가 평화롭고 고요하게 울렸다. 이세정이 내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순간 얼어붙었다가 목을 거북이처럼 굽혔다.
“뭐 좋아해요? 사올게요.”
내 뒷덜미를 잡은 손에 언제든 힘이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빨리 무엇이든 말해야 하는데. 방금 먹었던 케이크의 맛까지 잊어버리고서 고민에 빠졌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세정의 빤한 시선은 점점 더 짙어졌다.
“과일… 과일 먹고 싶습니다. 청포도랑 복숭아.”
텔레비전에서 초록색 옷을 입은 남자와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가 예능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이세정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당장 사오라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포크를 스르르 내려놓으며 뒷덜미를 매만졌다.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갔는지, 아니면 사람을 부리고 저는 혼자 응접실에 앉아있었는지 이세정은 한참 뒤에서야 과일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케이크를 옆으로 치우고 과일을 올려둔다. 깨끗이 씻은 청포도와 예쁘게 잘린 복숭아. 배가 터질 것 같았음에도 억지로 포크를 들었다.
복숭아 하나를 찍었다. 먹기 좋게 잘려있긴 했지만, 껍질은 벗겨져 있지 않았다. 껍질 부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과육 부분만 조금씩 베어 먹었다. 이세정이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잘 먹는지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상당히 난감해졌다. 두 조각쯤 먹었을까. 불시에 이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이세정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심장은 발끝까지 내려앉았고,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머릿속에서 악몽이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세정은 태연하게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스리슬쩍 손바닥을 펼쳐서 마치 피곤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칼을 들고 있는 이세정은 평소보다 일곱 배쯤 더 무서웠다.
신경이 예민해져 손목의 맥박마저 느껴질 때쯤, 이세정이 복숭아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과일을 처음 깎아보는 사람처럼 기교하나 없이 거친 동작이었다. 칼이 껍질 위를 지나칠 때마다 얼굴 가죽 같은 껍질들이 툭툭 떨어져 나갔다. 아, 울고 싶다. 억울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잘 안 우는데, 지금만큼은 너무 울고 싶었다. 내가 수상했는지 이세정이 말을 걸어왔다.
“얼굴은 왜 가리고 있어요?”
“예, 예?”
손 하나를 천천히 내려 침대를 짚었다. 아직 나를 보지 못한 이세정이 중얼대듯 말했다.
“얼굴이요.”
칼날 위를 비껴간 복숭아 껍질이 휙 날아 내 가슴 위로 떨어졌다.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경고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안 들으면 너도 이렇게 껍질이 벗겨질 거라고.
이세정이 칼을 든 손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가오는데, 나는 이번에야말로 찔리는 거구나 싶어 팔을 휘저었다.
“아.”
이세정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이세정을 곁눈질했다. 언뜻 붉은 것이 보였다. 이세정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렸더니, 과도를 들지 않은 그의 반대쪽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정이 제 팔을 일부러 찌른 건 아닐 테고, 내가 휘두른 손에 맞아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온 것은 이세정이 한숨과 비슷한 웃음을 내뱉은 직후였다.
“어, 어……어떡하지. 괜찮아요?”
당황과 두려움이 한데 섞였다. 휴대폰을 찾아드는 내 손길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아까 누나에게 오늘도 안 들어갈 거라고 연락을 하고선 근처에 놔두었었는데, 당장 찾으려고 하니까 당최 보이지가 않았다. 아, 여기 병원이었지. 나는 어처구니없이 자조하고는 호출기를 찾았다. 그런데 호출기를 누르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똑똑 울렸다. 장 비서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가 병실 분위기를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 비서님의 눈길이 이내 이세정의 팔 쪽으로 향했다.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또 무슨 짓을…….”
장 비서님이 빠르게 다가와 이세정의 손에 들린 과도를 정중히 빼앗았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
힘주어 말한 장 비서님은 꼭 그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세정이 속력을 낸 바이크 위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어 장난을 쳤을 때. 이번에도 이세정이 심한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끼어들었다.
“저기, 제가 실수로 그랬습니다. 저한테 휘두르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워서…… 죄송합니다.”
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이세정이었다. 이세정은 당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내가 우채민 씨에게 왜 이걸 휘둘러요.”
그런 생각은 일 말도 하지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세정은 연기실력이 뛰어났고, 나는 속는 것에 능숙했다. 저 표정에 또 속아 넘어가 경계를 푼다면 그때야말로 도자기처럼 박살 날 것이다. 내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이세정이 내 근처에 떨어진 복숭아 껍질을 주워 접시에 담았다.
“이것 때문에 그랬어요.”
“…….”
“칼 내려놓고 주웠어야 했는데. 많이 놀랐어요?”
“……아.”
괜한 오해였나. 쓸데없는 망상을 펼치는 바람에 남 상처나 입히고. 뒤늦은 미안함에 나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곳에 진득하니 있지 못하는 시선은 곧장 비서님에게 향했다. 장 비서님은 껍질이 벗겨진 채 접시 위를 뒹구는 복숭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 눈길이 닿자마자 입을 열었다.
“과일 깎고 계셨습니까?”
이세정에게 물어놓고, 눈은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이세정을 대신하여 답했다.
“복숭아 껍질 깎아주셨습니다.”
장 비서님은 아까보다 더 놀란 얼굴로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세정은 내가 껍질을 안 먹는 것을 보곤 과도를 가져와 직접 깎아주었다. 세심하게 챙겨주던 모습이 다 가짜라고 생각하니까 공연히 원망이 들었다.
장 비서님이 허리를 숙여 이세정의 상처를 살폈다. 덩달아 나 또한 옆에서 환부를 엿보았다. 과도에 대충 긁혔다고 보기엔 상처가 깊었다. 이세정의 반대쪽 팔을 잡으며 장 비서님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요.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의사요? 아닙니다. 호출 누르지 말고 계십시오.”
장 비서님이 급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따로 불러올 의사가 있는 건가. 단단히 닫힌 문을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몸을 일으킨 이세정에게로 눈을 돌렸다.
“씻고 올게요.”
이세정은 피가 쉴 새 없이 흐르는 팔을 붙잡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비록 많은 사람들을 망가트린 장본인이었지만, 다친 것을 보니 조금 가여워졌다. 더군다나 이건 내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서랍 안에 차곡차곡 개인 손수건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팔을 씻고 온 이세정이 나를 지나쳐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손수건으로 팔을 지혈해주었다.
“많이 아파요?”
뻔한 물음을 던졌다. 이세정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텐데…….”
“정말 괜찮아요. 자극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예?”
이세정이 창밖을 가리켰다. 언제부터였는지 비가 지독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비 내리면 긋고 싶은 충동이 좀 있거든요. 우채민 씨 덕분에 오늘은 안 그럴 것 같아서.”
이세정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도무지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세정 특유의 말투를 알고 있다. 어떨 땐 과할 정도로 늘어지고, 어떨 땐 예민하게 서 있는 말투.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이세정은 대답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마주 보고 있기 부담스러워 시선을 내렸더니, 이세정이 고개를 비틀어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이세정은 반대편 눈두덩에도 입을 맞췄다. 피로 범벅이 된 손수건을 떨어트렸다.
“아…….”
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손수건을 주웠다. 때마침 장 비서님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약품을 든 의사도 함께였다. 의사는 침대 끝에 약품을 내려놓고 상처를 치료하는 법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세정이 잘 듣지 않는듯하면 몇 번이고 똑같은 설명을 반복했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한 가르침이었다. 왜 직접 안 하시지? 제 손으로 치료를 했다면 수고스럽게 가르칠 필요가 없을 텐데.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이유가 밝혀졌다. 거즈 쓰는 법을 설명하던 의사가 실수로 팔을 잡자, 이세정이 벌레를 털어내듯 가차 없이 떼어낸 것이다. 그제야 이세정에게 심각한 결벽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내겐 거침없이 스킨십을 하는 터라 깜빡 잊고 있었다.
의사는 별다른 동요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고 나서 대기하고 있겠다며 장 비서님과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이세정이 제 팔을 들어 투명한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깜짝 놀랐다.
“제가 해드릴까요?”
“그래 줄래요?”
이세정은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나는 신중한 동작으로 환부를 소독했다. 빨리 마르라고 바람도 불어주고, 위에 상처 연고도 발랐다. 그리고 거즈를 붙인 뒤 서투르게 붕대까지 감아주었다. 제 팔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이세정이 갑자기 반대쪽 팔을 걷어붙였다. 금처럼 나 있는 흉터가 보였다.
“여기도 발라줘요.”
그 덤덤한 말에, 그곳에도 약을 발라주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발라봤자 소용없는 상천데…….”
이세정이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옅게 남은 그 흉터에도 약을 발라주었다. 혹시 연고가 셔츠에 묻을까 봐 밴드도 꼼꼼하게 붙여주었다. 내가 붙인 거지만, 꽤 완벽하게 보였다.
“다 된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셔츠를 정돈한 이세정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와 반대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오래된 상처에 뒤늦게 약을 바르고선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는 이세정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으려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이세정보단 도자기의 처지가 더 불쌍하다.
약품을 정돈하고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러곤 막 생각이 난 듯이 창가로 걸어갔다. 마구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다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
언제부터인가 내가 지독한 병원균이 된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응접실에 깔려 있는 경호원들 때문인 듯했다. 눈도 마주쳐주지 않고, 말도 걸지 않고, 일정 거리를 마지노선으로 가까이 오지 않는 사람들. 어쩌다 악보를 찾으러 응접실 쪽으로 나갈 때면 경호원들은 이야기를 급히 멈추고 나를 은근하게 곁눈질했다. 경계심이 깃든 시선이었다.
거북한 마음에 처음 몇 번 말고는 응접실 문을 열지 않았다. 이세정에게 악보가 가득 든 책장을 안쪽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하고서 쭉 병실에서만 지냈다. 병실에는 피아노도 있고, 작곡 기기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노트북도 있어서 심심할 겨를은 없었다. 내가 어찌나 꼼짝없이 병실에만 박혀있던지 이제껏 절대 휴식을 강조하던 장 비서님이 답답하지 않으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려보았다. 일부러 불협화음만 눌러서 코드를 몇 개 땄는데, 반음을 많이 썼더니 굉장히 마이너하게 들렸다. 마이너 코드를 조합해 누르고, 누르고, 누르다가 쓸 만한 것들만 종이에 적었다. 녹음을 하려고 했더니만 휴대폰이 없었다.
누군가 노크를 했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체중계를 든 간호사였다. 왜 내 병실에 들어오는 의료진은 의사 한 명, 간호사 한 명이 다일까. 병실이 이렇게 호화스러우니 의사 또한 무리로 있을 줄 알았는데.
일어나 체중을 쟀다. 간호사가 차트에 무어라 끄적거리며 ‘더 잘 먹어야 돼요.’라고 말했다. 몸무게가 좀 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부족한가. 마른 체질은 아니었으니 간호사가 대체 어디까지 원하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별로 통통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꽤 가벼웠다. 어깨를 들어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제자리걸음을 해보았다. 그동안 앉아있기만 해서 몰랐는데 몸 컨디션이 제법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감기가 완벽하게 나은 것 같아,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제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요?”
간호사의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직시했다. 얼굴이 달걀귀신처럼 새하얀 것이 꼭 어릴 적 만화책에서 본 새벽 병동 간호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 간호사는 귀신이었기 때문에 무서웠지만, 이 간호사는 귀신도 아닌데 왜 이리 무서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글쎄요.”
간호사가 그 한마디를 툭 던지곤 병실을 나갔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기본적으로 의사나 간호사를 신뢰하는 편이었는데, 저 간호사의 말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미열도 없고, 기침도 없고, 목도 아프지 않고, 심지어 너무 잘 먹어서 살도 0.5킬로그램이나 쪘다. 감기 하나로 입원해서 며칠 동안 열심히 치료를 받았는데 아직도 퇴원이 불가능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미라가 아닐까.
속으로 소심하게 반항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소파로 돌아가 앉아서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세정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입원한 목적이 감기 완치에 있었으니, 내가 다 나았음을 알면 보내줄 것이다.
나는 이세정이 올 때까지 내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웬만한 건 다 병실 내에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건드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작곡이나 클래식 악보, 다큐멘터리 따위를 보다가 불쑥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은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계속 이세정의 퇴근이 늦어지고 있었다. 회사에 미련하나 내보이지 않고 칼퇴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건지. 이세정은 삼십 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고 이세정을 반겼다.
“안 잤어요?”
이세정의 손에는 역시나 간식이 들려있었다. 양옆으로 설렁설렁 흔들리던 간식 상자가 소파 위에 대충 내려졌다. 이세정이 내 옆에 앉았다. 나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 있던 피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금껏 이세정이 오기만을 줄곧 벼르고 있던 나는 무언가를 부탁하기 전에는 그에 합당한 서론을 이끌어야 한다는 법칙을 잊어버리고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감기 다 나은 것 같습니다. 이제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러자 이세정이 의아하게 물었다.
“누가 감기 다 나았다고 했어요?”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내게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이 있었나 되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세정이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우채민 씨 아직 아파요.”
꽤나 단정적인 어조였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침도 멎었고 목도 안 아프고 체중도 좀 늘었고… 나은 것 같은데요…….”
이세정은 대답 대신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차라리 ‘아니요. 우채민 씨 아픈 거 맞아요.’ 하며 아픔을 강요했다면 반발심이 들었을 텐데, 이렇게 안타깝다는 듯 나를 어르고 달래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아픈가? 그러고 보면 왠지 열이 나는 것도 같고. 그러나 혼란이 이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 달라고 말했다. 이세정이 휴대폰에 떠 있는 현재 시간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자요.”
“그럼 내일은 퇴원해도 돼요?”
“안 아프면.”
이세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정이 이불을 덮어주곤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갑자기 떠오른 불안한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짜, 보내주겠지.
***
텔레비전 화면을 타고 불꽃이 팡팡 터졌다. 덩달아 내 마음도 터져나갔다. TV 드라마 속 연인이 불꽃놀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쏘아보며 깊은 회의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나는 왜 나가지 못하는 거지?
이세정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침 출근을 포기한 이세정은 오전 일찍부터 의사를 불러주었다. 문제는 의사가 내 몸이 아직 성치 않은 상태라는 기막힌 진단을 내린 것에 있었다. 어디로 보나 건강한 나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고, 괴상한 바이러스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이며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반항을 하고 싶었지만, 의학적 지식도 없는 내가 반항해봤자 의사를 이겨 먹을 리 만무했다.
의사가 떠나고 나서 텔레비전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아무 대화도 나누고 있지 않으니 더 화가 나 결국 이세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타이 없는 캐주얼 정장을 고집하고 있는 이세정은 의자에 늘어지게 누운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세정은 무덤덤한 얼굴을 지워내고 울적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나가고 싶습니다.”
목소리는 힘없이 비틀어졌다. 잠깐 시간을 두고 이세정이 물었다.
“왜요.”
“다 나았으니까요.”
이세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 열을 재는 시늉을 하며 강경한 어조로 다시 한번 말했다.
“다 나았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생떼 부리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면 좀 곤란해요.”
“생떼 아니에요. 진짜 다 나았는데.”
“우채민 씨가 의사예요?”
눈을 멍하게 뜨고 입술을 달싹이자, 이세정이 씩 웃었다.
“이 표정도 귀엽네.”
나랑 장난치고 싶은 건가. 과할 정도로 친절하지도, 무서울 정도로 사납지도 않은 모습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내 표정을 확인한 이세정이 미소를 거두었다. 이세정은 출근을 하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병실 문이 닫혔다.
이세정이 나가고 한참을, 미간을 좁힌 채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응접실로 나가보았다. 언제나 같이 경호원들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용기를 내 한 걸음 한 걸음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시선은 더욱더 끈덕져졌다. 처음 걸음마 하는 아기처럼 어설픈 걸음으로 마침내 응접실 문 앞까지 당도했을 때,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 내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그냥… 바람 쐬러 갑니다.”
경호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병실 안에서 꼼짝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이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잠시 정적이 이는가 싶다가 한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텄다.
“아직 안 나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 몸이 안 좋아 보여요?”
그리 날카롭게 물어본 건 아니었으나 경호원들은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오랫동안 말을 아끼던 경호원들이 아주 정중한 어투로 병실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덩치 큰 장정들이 떼로 덤벼든 탓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제 명확해졌다. 이세정은 나를 병원에 감금한 거였다. 이유는 당연히 내가 그만 만나자고 해서겠지.
내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래서 당분간 집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이 병실이 급격하게 답답해졌다. 여름 볕이 그대로 내리쬐어 너무 더웠고, 병실 안을 메우고 있는 덩치 있는 피아노 같은 것들이 눈에 거슬려졌다.
누나에게 병문안을 와달라고 해야겠다. 가족이랑 같이 나간다고 한다면 병원 사람들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휴대폰을 찾았다.
“…….”
어디 갔지. 베개도 들춰보고, 서랍도 뒤져봤지만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아.”
작곡 녹음도 휴대폰이 없어서 못하지 않았던가. 없어진 걸 알았어도 이따 찾아야지, 하고 자꾸 미루다 보니까 여태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두었던 곳이 어디인지 기억을 더듬다가 결국 병실 문을 반쯤 열었다.
“저기…… 그, 제 휴대폰 못 보셨습니까?”
경호원들은 어지간히도 연기실력이 없는지 다들 눈을 피하며 잘못을 시인했다. 대답은 충분했다. 대체 그걸 왜 숨긴 거냐고 반항심을 담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미처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에, 아까 내게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을 걸었던 경호원이 물어왔다.
“휴대폰이 없어지셨습니까?”
“네.”
“네…….”
네, 하고 늘어트린 말은 ‘안 됐네요.’라는 투였다. 경호원은 밖으로 향하는 문을 등으로 막아서며 병실 쪽을 가리켰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들어가 계십시오.”
“휴대폰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상태로 인근 중학교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라고 한다면 열 바퀴는 거뜬히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게는 무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얌전히 문을 닫았다.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갇힌 것도 모자라 휴대폰까지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리고, 괜스레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잘 휘둘리는 성격이긴 했지만 이렇게 마음대로 사람을 가둬놓을 수는 없는데. 내 힘으로 갇히는 건 좋아도 누군가 나를 가두는 건 혐오스러웠다. 집에서 한 달 내내 안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약 누군가 절대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면 한 번쯤은 집 앞 편의점이라도 나가봤을지도 몰랐다.
쿵쿵 뛰는 가슴을 손으로 차분히 짓이겼다. 여기 있는 거, 누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모를 테다.
그나저나 병실이 왜 이리 덥지. 창문을 모두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세수를 했다. 물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얼굴을 박박 문지르곤 수건으로 깨끗이 닦았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다가 무심코 거울을 본 순간, 웬 병자가 보였다. 뺨을 매만졌다. 나 진짜 아픈가. 고개를 마구 흔들고 다시 거울을 보았을 땐, 불안하게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눈을 멍하게 뜨고 입술을 달싹여보았다. 전혀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멍청해 보였다. 이세정은 내가 정말로 좋아서 귀엽게 보이는 건가. 내가 이세정이 잘생겨 보이는 것처럼? 아니, 지수의 말을 들어보면 이세정이 잘생겼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에 지금 내 경우와 비교 선상에 둘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면 이세정을 판단하기 더 수월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면의 잘생김을 판단했던 어머니처럼.
수건으로 물기 없는 얼굴을 계속 닦아냈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분노를 속 안으로 자꾸 삼키는 바람에 가슴만 들끓었다.
***
식사를 거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보통 사람들이야 한 끼나 두 끼쯤 굶어도 잘만 지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불가능한 시위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여기 사람들은 내가 밥을 거르면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든 밥을 먹이려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미안함보다 무서움이 더 컸다. 영영 갇히지 않으려는 내 나름대로의 발버둥이었으니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퇴근한 이세정은 밖에서 뭔가를 듣고 왔는지, 성큼성큼 걸어와 내가 앉아있는 소파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데, 나는 한동안 그 시선을 피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마침내 이세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러면 내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없는데.”
굳이 일을 안 하고 사치스럽게 지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와닿지 않았다.
“왜 식사 걸렀어요?”
“다들 저보고 아프다고 하니까… 진짜 아파졌어요. 속이 안 좋습니다.”
이세정이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당겨 열을 쟀다. 이세정이 하는 스킨십에선 여전히 어렴풋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세정은 경호원들 중 한 명을 시켜 내가 잘 먹을 만한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다시 내 이마를 짚는다. 나는 이세정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안 먹을래요. 밥이 안 들어가서 그래요.”
이세정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으로 내 손목 둘레를 가늠한다.
“밥 먹이고, 영양제 맞히고, 그리고 재울 거예요.”
“그러지 말고 그냥 보내주시면 안 돼요?”
이세정이 매끄러운 이마를 구겼다.
“나 지금 정말 잘해주고 있지 않아요?”
“…….”
“내가 우채민 씨를 때렸어요?”
“…아니요.”
신체적인 폭력만이 폭력인 것은 아닌데.
“이제껏 강제로 한 거 없잖아요. 겁먹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경계하진 말아요.”
“강제로 한 거 있습니다. 여기 가둬놓은 거. 그리고 연락 못 하게 휴대폰 가져간 거.”
이세정이 난감한 얼굴로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나머지 소름이 돋았다.
“많이 아픈가 보다. 자꾸 헛소리를 하네.”
간이 작았던 나는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얼마 뒤 노크소리가 들렸다. 수행원인지 경호원인지 누군가가 들어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오래 굶으셔서 혹시 무리가 갈까 봐, 죽을 좀 사왔습니다.”
남자는 사온 죽을 차례차례 풀어놓았다. 호박죽부터 송이죽까지,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이 저녁에 달려가서 사온 성의를 봐서라도 반드시 먹어야 했지만, 이세정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내미는 이세정의 손을 강경하게 거부했다.
이세정은 아주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죽 하나하나에 플라스틱 숟가락을 각각 꽂고, 내 입 근처에 하나하나 들이댔다. 내가 이 죽을 안 먹으면 저 죽을, 저 죽을 안 먹으면 또 다른 죽을. 그렇게 모든 죽을 거부했을 때, 이세정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자에게 다른 걸 사오라고 말했다.
“……진짜로 먹기 싫습니다.”
내 말에 이세정은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별로 화나 보이지 않는 표정이, 위화감을 조성했다.
남자가 새로운 음식을 사왔다. 나는 또 거부했다. 남자가 탄식했다. 나와 이세정 사이에서 괜한 고생을 하는 남자에게 미안해졌다. 언뜻 봐선 내가 일방적으로 떼를 쓰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기에 꼭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이 시위를 대체 어떻게 끝내야 하지. 이 상태로 가다간 결국 내가 질 것 같았다.
내가 네 번째 음식을 거부했을 때, 쾅 하고 거슬리는 굉음이 들렸다. 어깨를 움츠렸다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어느새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선 남자는 방금 배를 걷어차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듯 한 손으로 제 배때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많이 놀랐다. 술을 먹고 내 앞에서 도자기의 얼굴을 그어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적은 있었지만, 맨정신으로 내 앞에서 누군가를 때린 적은 처음이었다. 이세정은 늘어지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맛없는 걸 사오니까 안 먹지.”
남자는 이세정이 아닌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세정을 이 초 정도 노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깔았다. 대놓고 갑질을 해서 내게서 죄책감을 이끌어내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무거나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으려니까 삼키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결국 새벽에 먹은 걸 모두 게워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화장실에 가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화장실로 뛰어가고. 새벽 내내 고생한 탓에 몸이 약에 젖은 뇌처럼 축 늘어졌다. 의사는 달리 병명을 이야기하지 않고 링거 바늘을 꽂아주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아마도 체한 것 같았다.
이세정에게 죄책감 좀 갖게 하고 싶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그가 모처럼 아침 일찍부터 병원을 찾은 덕에 골골대는 내 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세정은 아파죽겠다는 듯이 끙끙대는 내 얼굴을 관찰하며 옆에 와 앉았다.
“병원에 있는데 왜 아파요?”
그렇게 묻는 이세정은 정말로 몰라서 묻는 사람 같았다. 나는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붙였다. 그러니까 내보내 달라니까…….
“내가 뭐 잘못하고 있나.”
이세정의 중얼거림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무서워요.”
도자기 사건 이후로 속으로 수백 번 읊었던 말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댔다.
“무서워요, 형이.”
이번에 이세정은 형이란 호칭을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양 가만히 응시했다. 이세정은 눈썹을 느리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한테 말하는 의도가 뭐예요?”
“……사람 때리고 해치고 그러는데, 너무 무서워요. 진짜 많이 건드렸잖아요. 지수랑 양형배랑 양원이랑 또…… 그, 그 술집에서 본 남자 직원분이랑…… 경호원이랑.”
이세정은 내가 나열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입술로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뜻은 아닌 듯했다. 그냥 동조해주는 거다. 내가 겁을 먹고 있으니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껏 묵혀뒀던 말을 모두 쏟았다.
“술집 직원분 만난 적 있는데, 병원에 갇혀 있었습니다. 성대도 나가 있고, 정신도 어딘가 이상했고. 아, 그 빨간 스포츠카……혹시 스포츠카 어떻게 하셨어요? 차에 블랙박스 칩이 없던데…….”
그 밖에 또 뭐가 있더라. 체감하기로는 이것보다 더 많았는데. 내가 생각에 빠진 틈을 타, 이세정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는데.”
“네?”
“아무도 안 엮이면 다칠 일이 없잖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이세정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말했다.
“우채민 씨 너무 예민해요.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걱정해주고.”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어지러움을 딛고 한숨과 함께 입술을 뗐다. 어떻게든 알아듣게 설명해보고자 했다.
“일부는 저랑 상관없는 사람들 맞아요. 그런데 아무리 남이라고 해도 저랑 엮여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하물며 평생 옷깃 하나 스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뉴스를 봐도 안타까워하는 마당에, 저랑 엮여서 인생 망친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내가 말하잖아요. 가만있어요. 아무도 만나지 말고.”
마지막 말을 이야기하는 입술은 줄곧 숨겨왔던 속내를 고백하듯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대화가 자꾸 엇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세정의 말에 반박할 거리야 많았다. 이렇게 꼼짝없이 갇혀있는데, 왜 잘못 하나 없는 경호원은 폭력을 당한 것이냐고. 당신 말에 따르면 내가 얌전히 감금당하고 있는 이 시점에선 아무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이세정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카락에 닿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무서웠다. 동시에 팔뚝의 상처가 생각나 슬펐다. 그런 내가 혐오스러웠다. 속이 울렁거리고 당장 뭐라도 올라올 것 같아, 침대를 짚은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 아무 데도 못 가요? 계속 여기 있어야 돼요?”
울먹거렸지만, 이세정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소심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도 만나고 싶습니다. 갇혀 있기 싫어요.”
이세정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한참 뒤, 이세정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 걸 공유해야 돼요?”
“……제가 언제부터 형 거였어요?”
“질질 짰을 때부터.”
이세정은 후,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내 거 안 망가지게 잘 품고 있겠다는데, 다들 자꾸 건드리잖아요. 열 받게.”
어처구니없는 말에 대꾸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장만 빠르게 뛰었다.
***
먹은 걸 토해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이틀 내내 구토로 무리한 위장은 이제 미음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덕분에 온종일 내가 먹은 거라곤 따뜻한 차와 입을 헹구다 잘못 삼킨 가글뿐이었다.
의사는 임시방편으로 영양제를 맞혀주었다. 주삿바늘이 팔 안으로 들어오자, 급격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영양제는 며칠 전에도 맞은 바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잘 받지 않았다. 잠깐 경과를 지켜보던 의사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모양이라며 바늘을 빼냈다. 조금 뒤에 다시 시도를 해보기로 하고, 의사가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세정이 노트북을 덮었다. 화면이 깨지지 않았을까 염려가 될 만큼 커다란 파열음이 병실을 울렸다. 듣기에 불편한 감이 있어 몸이 움츠러들었다. 바르르 떨리던 눈동자가 이세정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기분 어때요?”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상냥해 보였다. 말투도 여전히 부드러웠고, 표정 또한 다정했다. 어찌나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던지, 앞서 노트북을 부술 듯 닫았던 일을 주말 잔업에 대한 작은 반항이라고 포장해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이세정이 내 이마 위로 손을 짚었다. 나는 눈을 깜빡여서 어지러운 시야를 헤쳤다. 이세정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걱정과 염려가 뒤섞인 표정. 얼굴에 명백하게 남아있는 감정의 잔해에도, 나는 가장 먼저 의심을 했다. 저거 진짤까, 하고. 사실 의심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벽 같은 거였다. 이세정보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덥석 잡은 손에 가시가 잔뜩 박혀있음을 알았으면 놓아야 하는데, 기회만 보이면 그 가시를 빼내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가시에 찔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파하면서도 계속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나는 학습능력이 없는 멍청이가 분명했다.
“일어날래요?”
갑자기 이세정이 내 뒤통수 아래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나를 일으키는데, 안 그래도 사방이 빙글빙글 돌던 차에 머리까지 위로 솟으니 그야말로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왜 일어나요?”
“누워있으면 체하니까.”
이세정은 내 뒤에 베개를 넣어 받쳐주곤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내 목에 감아주었다. 마치 아기에게 턱받침을 해주듯이. 거북하기 짝이 없는 배려였다.
이세정이 숟가락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물은 왜 주는 거지. 떨떠름하게 받아먹었더니, 다시 물을 따라 건넸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던 이세정이 옆에 있던 접시를 들었다. 묽은 수프였다. 물도 겨우 먹는 처지에 수프가 입에 들어갈 리 없었다.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 건네는 손길을 거부했다. 내가 두 번이나 거부하자, 이세정이 숟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이세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경계했다. 저번처럼 애꿎은 사람들의 배를 차 협박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먹게 될 텐데, 이번에는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일부러 거부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못 먹는 거니까.
이세정의 행동을 살피며 긴장하고 있기를 한참, 이세정이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 제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눈을 가늘인 채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이 무언가를 탐독하듯 진지해 보였다. 이세정은 재차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수프를 보다 보니 먹고 싶어졌나. 문득 권태롭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별로다.”
이세정이 접시를 들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한참 뒤 다시 나타난 이세정은 새로운 접시를 들고 있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세정이 얻는 게 뭘까. 안 귀찮나.
약물 알레르기라는 거창한 핑계를 대면서 병원을 피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집에서 따로 챙김을 받았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누나와 아버지는 내게 무관심했고, 어머니는 나를 돌볼 처지가 못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단란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은 사실 그 어떤 집보다도 삭막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어머니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물론 나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이 분리된 이유도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세정의 친절이 더욱더 어색하게 다가왔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받지 못했던 것들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 충족시켜준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아닌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으로 흔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삼자에게서 제 부족한 것을 보상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단지 그걸 조금 늦게 경험했을 뿐이고.
이세정이 수프를 뜬 숟가락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먹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성의를 봐서 억지로 먹었다. 내가 얌전히 받아먹는 것이 좋아 보였는지, 이세정이 내 턱을 쓰다듬었다. 수프를 거의 비웠을 즈음에 이세정이 내 턱 아래를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들어 입을 닦아주었다. 엄연한 성인 남자로서 좀 부끄러웠다. 목에 감긴 손수건을 풀며 물었다.
“근데 저, 산책 같은 것도 못 가요?”
“산책이요? 우채민 씨, 강아지예요?”
“……사람들도 하는데, 산책.”
이세정은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대꾸 없이 병실을 나갔다. 배를 채운 탓인지 조금씩 돌던 기운이 한순간에 꺼져나갔다. 내 말을 무시한 거다.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려고.
병실에 갇혀있는 동안 생각하고 생각해보았다. 이세정은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면 소시오패스? 그들은 잔인한 반면, 이따금 우울하고 괴로운 표정을 짓기도 하는 건가. 누군가를 동정하고 배려하기도 하는 건가.
이 병실을 탈출하긴 해야 했다. 사실 병실을 벗어나려던 노력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온 바가 있었다. 음식으로 시위하던 방법, 대화로 해결하려던 방법. 전자는 도리어 병을 얻으며 실패했고, 후자는 말이 안 통해서 실패했다. 남은 방법을 꼽아보자니,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무식하게 도망치는 것. 그러나 무식한 탈출도 일단 병실을 나가야 시도해볼 수 있는 거였다. 웬만한 검사기기가 모두 특실 근처에 구비되어있던 터라 병동을 빠져나갈 적당한 핑계가 없었다.
“아.”
불현듯 이세정이 회수해간 내 소지품들이 떠올랐다. 물건들도 되찾아야 하는데. 갈수록 태산이네.
소지품이 이미 이 병실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 이세정과 장 비서님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장 비서님은 이세정의 뒤를 졸졸 따르며 부서 간 의견 조율이 안 되고 있는데 반은 사원님 탓이며, 회의에서는 부디 사익을 논하지 마시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주말 오후치고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알약을 받아먹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사수인지, 비서인지, 형 동생 관계인지, 아니면 그 세 개가 합쳐진 콤비네이션인지, 지금 두 사람은 꽤나 격의가 없어 보였다. 이세정이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마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장 비서님에게 소지품을 돌려달라고 부탁해볼까. 마침 이세정이 휴대폰을 움켜쥐고 병실 밖으로 나가버려서, 병실에는 장 비서님과 나, 둘뿐이었다. 입술을 떼었다가 붙였다가 장 비서님의 눈치를 살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장 비서님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잠을 못 주무셔서, 많이 날카로워지셨습니다. 말이 좀 험하게 나가도 이해하세요.”
“예?”
“장마철엔 불면증이 특히 심해지십니다.”
주어가 없었으나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 때문에요?”
“글쎄요. 잠자리도 문제고. 그러니까 되도록 신경에 거슬리는 짓은 자제하시고.”
“…….”
너무 편애하는 듯한 발언에 황당해졌다. 나는 어쭙잖은 말솜씨로 소지품을 뜯어내려던 본래의 계획을 철회하고, 그냥 대놓고 물었다.
“제 휴대폰 어디 있어요?”
“휴대폰이요?”
“예. 누나가 걱정할 테고…… 연락해야 합니다.”
장 비서님이 난감한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저도 웬만해서는 돌려 드리고 싶지만, 보통 이렇게 한쪽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관계에선 뒤탈이 나지 않도록 연락 수단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 원칙이라서 말입니다.”
“……그럼 지갑이라도.”
“지갑은 왜 필요하십니까?”
“그냥, 가지고 싶습니다.”
어색하고 초라한 변명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장 비서님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지갑을 집어서 내게 건넸다. 얼결에 받긴 했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귀찮아서 아무거나 던져준 거구나. 손가락으로 지갑의 질감을 확인하다가 슬쩍 신분증을 꺼내보았다. 이세정의 얼굴이 보여 깜짝 놀랐다. 시선을 돌려 나이와 생일을 쓱 훑었다. 생일 지났네. 생각보다 더 어리네. 짧은 감상을 늘어놓고서 신분증을 도로 집어넣었다.
지갑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눈을 돌리려는데, 누울 때 너무 급하게 누웠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갑자기 토기가 밀려왔다.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입을 닦고 나오자, 어느새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이세정이 내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세정은 딱히 나를 부축해주지도, 내가 침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지도 않고 단지 쳐다보기만 했다. 이세정을 피해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벽에 붙어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훑었다. 마침 드라마 남주인공이 병원에서 MRI를 찍는 장면이 비쳤다.
눈썹을 확 치켜떴다. MRI실은 이 근처에서 못 본 것 같은데.
탈출 방법을 짜던 중에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세정은 방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눈썹을 휙 치켜들었다.
***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신나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아침 회진을 온 의사의 방문에 곧바로 배가 아픈 체를 했다. 의사가 손바닥으로 배를 지그시 누르며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았다.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눈살만 찌푸리고 있자, 의사가 청진기를 들어 몸 구석구석에서 나는 소리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의사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침을 삼키며 배를 움켜쥐었다.
“아, 아파요. 폐랑 심장이랑 내장이랑…….”
몸에서 중요한 장기들을 나열하며 심각성을 어필했다. 의사의 눈치를 보아하니 너무 나간 것 같아 스리슬쩍 말을 바꿨다.
“배 안쪽이 너무, 엄청 아픕니다.”
징징거리는 소리가 조금 커지자,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열린 문틈으로 병실을 내다보았다. 나는 소리를 낮추며 의사에게 말했다.
“저, MRI 찍어봐야 할 것 같은데…….”
“MRI요?”
“예, 그거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억지스러운 요구에도 의사는 요새 구역질이 잦았던 것으로 볼 때 위쪽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상냥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러고는 간호사에게 내일 예약을 잡아놓으라고 지시했다.
“내일이요? 지금 당장 찍는 게 아닙니까?”
“위내시경 검사는 금식해야 합니다, 우채민 씨.”
“……아니요. 저 MRI로 해주세요.”
의사는 나를 당황스럽게 바라보며 두 종류의 검사는 아주 다르며, 단순한 MRI로는 위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세정이 없는 때를 노려 병실을 나가야 하는 나는 끝끝내 고개를 내저으며 MRI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시 MRI를 통해 조기에 암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남에게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린 것은 거의 처음이었는데, 너무 다급해서 그런지 미안함조차 들지 않았다. 의사가 나를 잠깐, 병실에만 갇혀 있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결국 의사는 내가 원하는 대로 MRI검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약 네 시간 동안의 금식을 명했다.
“되도록 물도 자제하세요.”
“…바로 하는 게 아니에요?”
“복부 검사는 금식이 필요합니다, 우채민 씨.”
“…….”
의사가 병실을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이쪽을 은근하게 주시하던 경호원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머리를 부여잡았다. 망했다. 계획이 어긋나버렸다. 굳이 의사가 이세정에게 직접적으로 알리지 않더라도 분명 저 밖에 있는 경호원들이 알아서 일러바칠 텐데, 그럼 어떻게 탈출하지.
역시 이세정은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서 회사에서 돌아왔다. 병실 문을 연 이세정이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있는 나를 보곤 장 비서님에게 물었다.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달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놀랐네.”
이세정이 짜증이 난 얼굴로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쏘아보았다. 장 비서님이 무감각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검사 일정이 잡혀있습니다. 우채민 씨가 따로 요구하셔서.”
“뭘.”
“MRI 말입니다.”
이세정이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숨겨진 의도를 읽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세정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세정은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쳐내고 환자복 단추를 툭툭 풀었다. 실례할게요, 하고 먼저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환자복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터라 옷을 부여잡았다. 이세정은 단추 풀기를 관두고, 대신 내 상의를 끌어올렸다. 배가 훤히 드러났다.
“여기가 아파요?”
이세정이 배 쪽을 꾹꾹 문질렀다. 고통 하나 없었으나 일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예.”
더 아픈 체를 할까 하고 짧게 신음했다. 이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배에서 손을 떼어낸 이세정이 내 이마를 쓸었다. 손목에서 차가운 향이 났다.
“검사가 불가피하겠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기가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이세정은 별말이 없었다. 식은땀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불을 단단히 덮은 채로 시간이 어서 흐르기를 기다렸다.
나는 5 분에 한 번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처음 탈출 계획을 짤 때까지만 해도, 아니, 중간에 계획이 비틀어져 다시 계획을 짤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초조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으니까. 원래 상상이 가장 즐거운 법이었다.
예약시간이 다가올수록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혼잡하게 섞여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뛸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중압감이 강해져 자꾸 약한 내면이 튀어나왔다.
그냥 탈출하지 말까. 만약 탈출에 성공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는데? 어차피 이세정을 또 만날 거잖아. 만나면 다시 갇힐지도 모르잖아…….
강박적으로 시계를 확인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의 뒤를 따르며 덜덜 떨리는 팔을 끌어안았다. 경호원을 모두 물리고 나를 따라나선 이세정이 춥냐면서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세정도 분명 복도에 가득 찬 온기를 느끼고 있을 테다. 추위로 바들바들 떨 이유가 하등 없으니 내가 이상할 만도 하건만, 이세정은 끝까지 묻지 않았다.
낮게 심호흡을 했다. 약한 마음을 집어넣고 일부러 극단적인 생각만 했다. 탈출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자. 이왕이면 이세정의 전화도 받지 말자. 아니, 휴대폰을 빼앗겼는데 어떻게 전화를 하겠어. 마침 좋은 핑곗거리도 있겠다, 당분간 집에서 꼼짝도 않고 있다가 은근슬쩍 해외로 뜰 준비를 해야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다. 휴학을 하고 해외에 숨어 있다가 적당한 때에 돌아와야겠다. 그때쯤이면 이세정도, 나도, 서로를 까맣게 잊은 후가 아닐까.
이건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생각이었으니 진짜로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말하자면, 그다지 말이 되지도 않았다. 돈도 없으면서 대체 어떻게 외국을 전전하겠다는 거야. 아버지가 사는 독일로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고작 병실 하나 벗어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다가온 불안감과 함께, 슬쩍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승강기 쪽으로 걸어갔다.
VIP 병동은 생각 이상으로 더 넓었다. 처음 입원할 때에는 패닉에 가까운 상태여서 훑어보지 못했었고, 병실에 들어서고 나서는 줄곧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서 잘 파악하지 못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 병동은 탈출이 불가능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긴, VIP병동과 일반 병동은 아예 분리된 형태였으니까.
승강기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비상계단을 힐끗거렸다. 발걸음을 틀까 말까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이세정이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 문이 닫혔다. 이세정과 나, 간호사를 삼킨 승강기가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 쪽으로 바짝 자리를 옮기곤 한 공간 안에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승강기에서 내리면 곧장 비상계단을 찾을 생각이었다. 비록 휴대폰과 지갑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 병실에 갇혀있는 것보다 차라리 집까지 걸어가는 편이 나았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승강기가 내려가며 가져다준 부유감이 꼭 내가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어지러웠다. 왜 이리 울렁거리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저 눈만 깜빡였을 뿐인데, 새로운 인격이 들어온 듯 몸이 떨렸다.
그냥 탈출하지 말까.
아니, 그럼 평생 갇혀있어야 하는데.
아니…… 아니, 아니.
도자기, 지수. 지금 하필 생각나는 사람들이 신체적인 훼손을 겪은 피해자들이어서 혹시 도망갔다가 잡혀서 어디 하나 부러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마른 입술을 축이며 발목에 힘을 주었다.
승강기가 빠르게 해당 층수를 향해 달려갔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얄팍하게나마 자리하고 있던 용기가 서서히 몸을 웅크렸다.
아니…….
아무래도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다. 한심하지만, 도망가기 무서워졌다. 내가 온전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다 접고, MRI든 CT든 찍고 와야겠다. 빠르게 열리는 승강기 문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우채민 씨.”
승강기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린 채 이세정을 돌아보았다. 이세정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호흡이 일시 멈추었다. 이세정은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나른하고도, 한편으로는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술래잡기 좋아해요.”
그 순간 이세정이 미친놈으로 보였다. 분명 탈출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왜 다리가 움직여지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승강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와 살짝 부딪혔다. 덮고 있던 담요가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아주길 기다릴 새 없이 우측으로 커브를 꺾었다. 쨍하게 내리쬐는 오후 햇볕을 마주하곤 급히 눈을 좁혔다. 분명 햇살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오한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심장이 귀 주변에 달린 기분이었다.
실로 환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영화보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더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큐를 보는 동안은 신물 나는 인간관계를 간접 경험할 필요도, 어디서 살인마가 나타날까, 공포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겁이 많아 영화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이렇게 현실 속에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경험하게 되다니 미칠 것 같았다. 숨을 헉헉 내쉬며 뛰기를 한참, 슬리퍼에 발목이 삐끗했다. 발가락을 슬리퍼 안쪽으로 단단히 밀어 넣고, 지체없이 내달렸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발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의심을 살까 봐 운동화를 신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모른 척 양말까지 챙겨 신을 것을 그랬다.
VIP 병동에는 환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음산할 정도로 조용한 병동에서 내 발소리만 탁, 탁, 울렸다. 분명 내 발소리였으나 마치 이세정의 발소리인 양 등줄기가 쭈뼛 섰다. 목 끝까지 차오른 두려움이 예민함을 불러온 탓에 불안감이 한층 더 가중되었다.
뛰고, 뛰고, 뛰었다. 걱정과 달리 도망은 퍽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특실 몇 호, 하고 화살표가 지시된 방향과 반대로 뛰면 훤히 트인 복도가 나왔고, 비밀번호가 걸린 유리문은 타이밍 좋게 간호사가 나타난 덕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건물 반대편에 있는 비상계단도 금방 찾았다. 어찌나 평탄하던지, 왜 아무도 나를 잡으러 오지 않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간간이 유도등 아래에 안내된 층수를 확인하며 단숨에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문손잡이를 잡은 내 손이 시퍼렇게 질려 마구 떨려댔다. 손에 힘을 주고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달칵. 달칵.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만 조용하게 계단을 울렸다. 왜 문이 안 열리는 거야. 혹시 잠겼나. 이번에는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끙끙거리며 당겨보았다. 조금 열렸다가 금방 닫히고, 또 조금 열렸다가 금방 닫히고, 자꾸 이런 식이었다.
겁이 났다. 설마 밖에서 쇠사슬로 감아놨나. 여기가 잠긴 거라면 다른 길을 찾아봐야 했는데, 섣부르게 움직이다가 혹여나 이세정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비밀번호가 걸린 유리문을 다시금 운 좋게 넘어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문 두드려볼까, 아니면 지하로 내려갈까. 힐끔 계단 아래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불현듯 누군가 내 옆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이세정이 한 손으로 문을 짚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세정이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좋아한다고만 했지, 하자곤 안 했는데.”
잠시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그 순간부터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어디, 어디로 도망가지. 고개를 휙휙 젓는 중에 이세정이 내 앞을 막아섰다. 도망갈 구석을 족족 차단해버리니 나로서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등이 문에 부딪혔다. 손을 더듬어서 손잡이를 턱 잡았다. 이세정이 다시 문을 지그시 눌렀다.
“어디 안 다쳤어요?”
“놔, 놔주세요. 집에, 집에 가고 싶어요.”
이세정에게서 휙 등을 지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이세정이 문을 누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힘 차이가 많이 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세정은 한 손이었고, 나는 두 손이었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문은 힘껏 열리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서러움이 몰아쳤다. 그래도, 내가 군대에서 체력으로는 중위권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키도 제법 큰 편이고.
손잡이가 덜컹거렸다. 놔줘요. 놔줘요. 놔줘요. 부탁은 입술 주변에서만 끝없이 맴돌았다. 이세정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 한숨이, 꼭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예고처럼 느껴져서 다급해졌다. 온 힘을 다해서 손잡이를 잡아당기다가 그만 놓쳐버렸다. 뒤에 있던 이세정에게 튕겨져나갔다. 이세정이 나를 잡아 고정시켜주었다. 분명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준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마치 이세정이 나를 일부러 잡았다는 양팔을 버둥거렸다.
“문…… 놔줘요.”
뒤에서 나를 안은 이세정이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더듬거렸다.
“왜 울어요?”
이세정의 물음에 손을 들어 눈가를 비벼보았다. 살짝 고인 눈물을 훔칠 새 없이 이세정의 손과 겹쳐졌다. 순간 움찔하며 팔을 떨어트렸다.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세정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나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다시 버둥거렸다. 여기서 잡히면 병실로 끌려갈 것이다. 경비는 당연히 강화될 테고, 나는 앞으로는 탈출을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팔을 쭉 뻗어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반쯤 열렸다가 손잡이를 놓치는 바람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다 이세정이 나를 안고 있어서 그런 거다. 손을 휘젓다가 실수로 이세정의 가슴을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아, 하고 신음이 들려왔다.
“칼로 긋고, 때리고… 너무하네.”
두려움이 몸을 지배한 기분이었다. 내가 칼로 그은 것을 이제껏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때리기까지 했으니까 곧 보복이 올 것이다.
이세정이 나를 놔준 틈을 타서 문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이세정이 내 가슴을 안았다. 내 턱을 붙잡고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인상을 쓴 채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지만,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는 단호하게 입안으로 침투했다.
“입에 힘주지 마요. 다쳐.”
팔을 휘저으며 이세정을 밀쳐내곤 문밖으로 탈출했다. 빛이 보였다. 로비를 가로질러 한참을 달려서야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러자 툭, 하고 입안에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인 눈물을 문질러 닦아내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쳐다보았다.
카드였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지며 허탈해졌다. 온 힘을 다해 도망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이세정이 나를 놓아준 거였다니.
카드를 집어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힘이 풀린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머릿속으로 불쑥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변덕을 부린 걸까. 내 심장을 우그러들게 만들어놓고 이렇게 카드까지 쥐여주며 나를 보낸 까닭이 뭐지. 가지고 놀다가 버린 건가?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힘이 죄다 빠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카드를 쓰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근처 매장에 들려 환자복을 갈아입은 후 택시를 탔다. 택시는 바로 집 앞에서 멈추었는데, 나는 낯익은 주차장이 보이자마자 안도감에 휩싸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내 침대를 찾았다. 온몸으로 안겨 오는 시트가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졸음이 달려들었다.
“야, 야.”
잠에서 깨어난 건 신경질적인 누나의 목소리가 연신 내 귀를 찔러댄 탓이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누나가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았다.
“왔으면 왔다고 해야지. 여기서 쥐 죽은 듯이 자고 있냐, 왜.”
눈을 떠 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반가웠는데, 그 반가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웃었다. 누나가 고갯짓했다.
“밥 먹어.”
식탁에 따뜻한 밥이 차려져 있었다. 병실에서는 그렇게 노력해도 잘 들어가지 않던 밥이 이상하게도 걸리는 기색 하나 없이 삼켜졌다. 그러고 보니 고작 집에서 한숨 잤을 뿐인데 몸이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역시 내 병의 근원은 그 빌어먹을 병실이었다.
“지수 그 자식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맨날 칠락 팔락 다니더니.”
누나가 불고기와 콩나물을 씹어대며 중얼거렸다. 나는 누나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내가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지수의 곁에서 병수발을 들다가 온 줄 알고 있었다. 진위여부를 들키지 않으려면 지수와 말을 맞춰야 하는데, 만날 수가 없으니 그저 전전긍긍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녁을 먹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발코니에 먼저 가 있던 누나가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누나랑 맞담 하게? 막장이다, 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어서 가족이랑 조용하게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내게는 지수와 가족 말곤 따로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호기롭게 발코니로 나간 것치고 누나와 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난간에 기대어 앉아 연기를 뱉어냈다.
한참 뒤에서야 누나가 나지막이 말문을 텄다.
“며칠 전에 친구 동생 봤다.”
“응?”
“너랑 동갑이야. 남자고, 군대도 다녀왔고. 그런데 애교가 장난 없더라. 왜 저렇게 애교가 많냐고 물었더니, 집안에서 막내래. 엄청 사랑받고 자랐나 봐.”
누나가 입술 끝으로 담배를 문 채 웅얼거렸다.
“같은 막낸데, 우리 집 막내는 왜 이 모양일까.”
“…….”
“나 때문인가? 엄마 때문인가? 아니면 아빠?”
술 취했나. 누나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누나가 난간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근데 그거 아냐? 너 어렸을 때 되게 관종이었어.”
“관종?”
“관심병 걸린 사람 말이야. 평범한 애들이랑 좀 달랐는데. 아무튼 사랑받기 위해 뭐든 했잖아. 너도 기억나지? 안대로 두 눈 가리고 다니던 거.”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억을 지워내려고 애쓰며 바닥에 있는 재떨이를 끌어왔다. 담배를 끄는 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몸이 움츠러들었다. 눈만 둥그렇게 뜨고 현관으로 걸어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엉금엉금 기어 발코니를 나와서 거실로 힘껏 뛰어갔다.
“누나, 열지…….”
문이 열렸다. 택배 기사였다. 물건을 받고 좋아하는 누나를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세정이 온 줄 알았다.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뜯고 있는 누나에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누나, 누가 와도 절대로 집 문 열어주지 마.”
“뭐?”
“진짜, 열어주지 마. 열기 전에 꼭 누군지 확인하고 열어.”
“…무섭게 왜 그래?”
“아무튼 진짜 열지 마.”
“너 누구한테 쫓기는 거야?”
내가 대답이 없자 누나가 고개를 돌려 박스를 여는 데에 집중했다. 덩달아 내 눈도 박스로 향했다. 비닐 포장된 캐리어였다. 집에 캐리어 많은데, 왜 또 산 거지.
“어디 여행 가?”
“내가 그놈의 성질을 죽여야 결혼을 하지. 선 봤다가 죄다 까여가지고 그냥 기분전환으로 여행이나 갔다 오게.”
“언제?”
“조만간 갈 거야. 휴가도 썼다.”
누나는 너도 갈래? 하고 물었으나, 그것이 예의상 물어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샤워나 하고자 욕실로 들어갔다.
***
집에 꼼짝없이 붙어있었다. 휴대폰만 없을 뿐이지 일상은 평범하게 돌아갔다. 작곡을 했고, 작곡이 안 될 때는 사보를 했으며, 간혹 낮잠을 잤다. 나름 바쁘게 지낸 것 같은데, 그럼에도 언제 어디서 이세정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만큼은 지울 수가 없었다. 초인종 소리에 예민해졌다.
사실 이세정을 팔꿈치로 찍고 오지 않았더라면 불편함이 반으로 줄었을지도 몰랐다. 내 그 행동은, 누가 먼저 때릴까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싸움판에서 스타트를 끊은 격이었다. 한 대 줬으니까 한 대 받지 않을까. 초조하게 누나가 사온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입을 오물거리며 괜히 얼굴을 쓸어보았다. 누군가 내 얼굴을 할퀴고 있는 듯 심하게 따가웠다. 덥기도 했다.
저녁쯤 되자 누나가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 밥숟가락을 입에 집어넣으면서도 휴대폰이 없어 허전한 왼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런 나를 힐끔거리던 누나가 물었다.
“근데 너 전화 어쨌어. 아까 전화했더니 안 받던데.”
“아, 잃어버렸어.”
“뭐? 와… 우채민. 휴대폰 이제 네 알바비로 사.”
순간, 고록담이 떠올랐다. 고록담에는 본의 아니게 잠수를 타는 중이었다. 휴대폰이 있어야 사장님께 전화를 걸 텐데, 지금으로서는 사장님의 전화번호를 따로 알아낼 방법이…… 아, 지수.
누나에게 휴대폰을 빌려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렸을 무렵,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나는 나와 한 약속을 뭐로 들었는지 누가 왔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현관으로 걸어갔고, 나만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습관적으로 인터폰 화면을 쳐다봤다. 심장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여, 열어주지 마.”
“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을 동동 굴렀다. 누나, 진짜. 혼자 자취하다가 큰일 나려고.
“누나, 나 없다고 해줘!”
전화를 끊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잠글까. 그러면 수상하게 볼 텐데. 빠르게 방을 훑어봤지만, 좁은 방 안에는 숨을 곳이 마땅히 없었다.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시 나왔다. 밖에서 누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책상 아래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항상 거슬렸던 젬베. 젬베 뒤에 숨으면 안 보일 것 같은데. 재빨리 책상 아래로 들어가 젬베와 의자로 내 몸을 숨겼다. 때마침 방문이 열렸다.
몸을 최대한 구긴 채 숨죽였다. 작은 틈으로 엿보니, 역시 이세정과 장 비서님이었다. 혹시 시선이 마주칠까 봐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재차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이세정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내 침대에 앉아있었고, 장 비서님은 쇼핑백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서 물건을 꺼내고 있었다. 장 비서님이 쇼핑백 안에서 노트북 가방을 꺼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바꿔올까요? 여기 기스가 나서 말입니다.”
“깨끗한 것보단 이쪽이 더 낫지 않아요?”
“이건 사원님 물건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흠집 난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장 비서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물건에 흠집 좀 그만 내십시오. 보기에 안 좋습니다.”
“내 거잖아요.”
“그럼 우채민 씨한테도 그러실 작정입니까.”
자칫 소리를 낼 뻔했다. 강박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심장은 더욱 세게 뜀박질을 시작했고, 손으로 눈을 짓누른 탓에 잠시 앞이 깜깜해졌다. 서서히 밝아지는 시야에 이세정의 찌푸린 얼굴이 잡혔다.
“장비서 님.”
이세정이 다음 말을 이으려고 입을 열었을 때,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니, 어디선가가 아니다. 내 근처 바닥에서 울리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그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세정이 뺨을 괸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시선이 느릿느릿 움직이더니 이내 내 쪽으로 향했다. 나는 몸을 더욱 움츠리며 눈을 피했다. 아직 눈이 안 마주쳤으니까 나를 발견한 건 아니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얼굴을 감싸고 있는 와중에도 이세정의 시선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잠시 후 이세정의 목소리가 방안을 나지막이 적셨다.
“우채민 씨는 어린애 같은 놀이를 좋아하나 봐요.”
“…….”
“맞춰주고 싶은데, 이번 건 룰을 몰라서.”
나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이세정이 휴대폰을 살폈다.
“이틀 안에 나와요. 안 나오면…….”
이세정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꾹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자, 이세정이 눈을 휘어 웃는 모습이 보였다.
“화낼 거야.”
이세정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갈까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차분하게 멀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얼굴을 비볐다.
나도 안다. 내가 정말, 머저리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왜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간 건지 내 기막힌 행동이 당혹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두려움으로 인해 심장이 급박하게 뛸 때마다 무언가에 이성이 냉큼 집어삼켜 진다. 나는 본디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성 없이 날뛰는 몸은 더욱이 자제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자꾸 움츠러들고 새하얗게 질리는 일이 잦은 탓에 머리라도 어떻게 된 모양인지, 덜떨어진 행동만 골라서 하게 되니 누군가 나더러 멍청한 놈이라고 해도 달리 받아칠 말이 없었다.
이세정 앞에서 조금이라도 이성을 찾을 수 있도록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몇 달만 아버지께 가 있을까.
힘겹게 책상 아래에서 빠져나와 이세정이 침대에 두고 간 물건을 살폈다. 내 지갑과 휴대폰, 그리고 내가 병실에서 작곡할 때 썼던 노트북. 안 그래도 해놓은 작업물이 아까워서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는데.
노트북을 한쪽에 두고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고록담 사장님으로부터 몇 개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일단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우채민?
사장님의 목소리에 위축되어 ‘예…….’ 하고 작게 대꾸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괜히 서랍을 뒤적였다.
-채민이 너 인마, 괜찮냐?
“예?”
-너 남지수랑 같이 차 타고 가다가 사고 났다며.
“……누가 그랬어요?”
-네 형이. 네가 큰 사고를 당해서 두 달 동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딱딱하게 말하더니 그냥 끊어버렸어. 얼마나 아프면 전화도 못해.
“아…….”
서랍에 있던 물건들 중 아무거나 집어 살살 매만졌다. 사장님과 통화를 한 사람은 장 비서님일 것이다.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던 물건을 뚱하게 내려다보았다. 여권이었다. 아버지께 가려면 여권이 필요했으니 따로 챙겨두어야겠다.
-사고 났으니까 일은 못 하겠지?
여권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분간은…….”
-너 없이 여대생들 어떡하냐. 아무튼 알았다. 그럼 수고해라. 그동안 일 한 건 따로 계산해서 줄게.
“감사합니다, 사장님.”
-다 나으면 전화해.
전화를 끊었다. 결국 알바에서 잘렸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술을 파는 고록담에 계속 있다가는 코가 망가진 고유성이나 도자기가 생각나 괴롭기만 할 것이다. 게다가 당분간 어딘가로 몸을 대피하고 있을 생각이라서 알바를 더 이어갈 수도 없었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여권을 바라보았다. 만료일…… 두 달 뒤. 지금 당장 출국한다고 해도 위험한 숫자였다.
***
[통화 가능하면 연락주세요.]
아버지에게 메신저를 보내놓고 사진관에 들렀다. 만기된 여권을 재발급받으려면 여권 사진을 찍어야 했다. 당일 인화를 해준다고 해서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비 오는 유리창 앞에 마주 앉아 노트북을 폈다. 우리 학교 휴학 기간을 확인했다. 마침 팔월 중까지 휴학계를 받고 있었다.
휴학계를 내고서 몇 달 동안 아버지에게 가 있을 작정이다. 아버지와 왕래하지 않은 지 몇 년이었다. 그동안 간간이 부쳐주는 생활비로만 가족의 끈을 확인하곤 했기에 오랜만에 만나면 풀 회포가 많을 것이다.
아버지의 답장은 시간이 많이 흘러서야 도착했다.
[할 말 있으면 메신저로 해라]
우리 집에서 가장 딱딱한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이고,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일 것이다. 원래 상성이 맞지 않은 사람들끼리 끌린다고 하던데,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런 종류의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몇 달 동안만 거기에서 지내도 되겠느냐고 짤막하게 요약하여 보냈다.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실례인가. 제아무리 부자 관계라고 해도 몇 년 동안 교류가 없던 아들이 갑작스럽게 같이 지내자고 한다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휴대폰을 재차 집어 들었다.
거절해도 괜찮으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에게 보낸다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문장이라 보낼까 말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배도빈에게서 연락이 왔다. 휴대폰에 뜬 배도빈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도망을 갔다가 잡혔다고 알고 있는데.
“여보세요?”
-너 어디냐?
다짜고짜 묻는 말에, 얼결에 카페 이름을 말했다. 툭,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도빈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배도빈은 치킨을 먹자면서 나를 끌고 근처 치킨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치킨은 역시 순살이었다.
“맥주 시킨다.”
그렇게 말해놓고선 배도빈은 맥주 대신 콜라를 두 병 시킨 뒤 치킨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포크 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주변을 살폈다.
“뭐 해.”
배도빈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치킨을 입에 넣었다.
“이세정 안 와.”
“세정이 형 생각한 거 아니에요.”
이틀 안에 나오지 않으면 화를 내겠다고 협박한 이세정은 정작 자신이 며칠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중이었다. 아마도 비 때문이리라. 그치지 않고 며칠간 세차게 내리는 비가 이세정을 감금시켜버린 것이다.
상처가 가득한 팔이 떠올랐다. 비가 올 때마다 긋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고 말하던, 그 무덤덤한 얼굴. 빗물에 젖어 잔뜩 일그러진 이세정의 얼굴을 보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그런데, 자해…….”
“어?”
“아니,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럼 물어보지 마.”
“예.”
배도빈은 시선을 깔고서 치킨을 먹는 데에 집중했다. 나는 배도빈이 배를 다 채울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너 병원에 갇혀 있다가 용케 탈출했다며.”
문득 말을 걸어오기에, 배도빈을 살피며 대꾸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너 혹시 죽었나 수소문하다가……. 그런데 신기하다. 나도 갇혀있었는데.”
“예?”
배도빈이 뺨을 긁적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세정이 가둔 건 아니고……. 나 공항으로 도망갔던 날 있잖아. 그날 경찰에 잡혀갔었거든. 이세정이 나 마약 소지 혐의로 신고해서.”
“예?”
치킨 무를 씹어 먹다 멍하게 되물었다.
“씨발, 미친놈이. 다른 방법도 많은데 꼭, 그런 식이야. 그것 때문에 출국 금지령 내려졌어. 공항에서 경찰들에게 잡혀서 공항경찰대 사무실로 옮겨지고, 거기서 소변 검사하고, 혈액이랑 모발 채취하고. 그리고 검사결과 기다리는데, 국과수 그 새끼들은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세월아 네월아…….”
“…….”
“당연히 음성이 나왔고. 소지품 검사에서도 마약 한 톨 발견도 안 됐으니까 일단 혐의는 벗겨진 거지. 그런데 풀려나자마자 이세정 똘마니들한테 납치를 당한 거야. 웬 차 뒷좌석에 던져졌는데, 그때 내가 딱 생각한 거지. 와, 이거 좆됐다. 나 처맞으러 가는 거구나. 순순히 처맞을 수 있겠냐? 기회 엿봐서 존나 튀었지.”
“튀었어요?”
“어, 진짜 죽을 듯이 탈주했어. 그리고 어디 갈까 고민하는데 도무지 갈 데가 없는 거야. 어디든 금방 잡힐 거 아니야.”
“그렇죠.”
“그래서 이세정 집에 들어갔어.”
이제껏 배도빈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던 나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배도빈이 키득거리며 더 들어보라고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세정 개인 자택에 숨어들었어. 마침 경비랑도 친하고, 비밀번호도 알고 있고 거리낄 건 없었거든. 거기서 며칠 먹고 자는데 씨발, 내 지갑에 현금이 없다는 게 문제였어. 카드 쓰면 위치추적 들어올 텐데 치킨이 너무 먹고 싶은 거야. 손발도 떨리고…….”
배도빈이 들고 있던 포크로 접시를 굴러다니는 치킨 조각을 툭툭 건드렸다.
“더 참고 있으면 뒤질 것 같아서, 결국 나가서 사 먹었어.”
“들켰어요?”
“아니, 알고 보니까 걘 나한테 진작 관심을 껐더라. 그냥 나 혼자 지랄발광을 한 거지. 씨발, 괜히 쫄아가지고. 뭔 생고생을 한 거야.”
나는 휴대폰을 살피면서 배도빈에게 말했다.
“그래도 저랑 만나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번엔 안 맞았어도 다음에 맞을지도 모르고.”
“괜찮아. 계속 맞다 보면 없던 쾌감이 생기거든.”
“…….”
“농담이야, 인마.”
배도빈은 치킨 마지막 조각을 내게 밀어주며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개새끼는, 내 손은 안 건드리니까.”
“손이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막대하긴 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만큼은 약간의 마지노선을 두는 거야. 내가 그거 아니었으면 걔랑 친구 하겠냐? 나랑 마인드가 완전 다른 놈인데. 걔한테 들었던 것 중에서 제일 기막혔던 말이 섹스는 짐승이나 하는 천박한 행위라고 했던 건데, 이 정도면 진짜 나랑 안 맞는 거지.”
……별 게 다 천박하네.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란 소린 아냐. 적당히 갖고 놀다가 존나 튀어버려.”
“예? 아, 네……. 근데 어떻게 튀어요?”
배도빈은 내 마지막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치킨을 입에 넣고는 다시 휴대폰을 살폈다.
[오지 마라. 와서 좋을 거 없어.]
아버지의 성정은 여전히 한결같았다. 나는 ‘그래, 실례겠지.’ 하며 애써 달래곤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까. 국외로 가기엔 돈이 없고, 국내로 가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아니, 한 번 아래로 내려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