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비 (2)-2화 (8/15)

“괜찮습니다.”

이세정은 정말로 해줄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시선을 돌렸다. 문득 눈길을 멈추어 한참이나 바라보기에, 무엇을 보나 했더니 전시된 펭귄 인형이었다. 왜 보는지는 모르겠다. 이세정은 대단한 추억에라도 잠겨있는 양 끈질기게 주시하고만 있었다. 나는 이세정이 한눈판 틈을 타서 밥을 흡입했다.

“우채민 씨.”

나는 밥을 몰아넣다 말고 눈동자만 움직여 이세정을 보았다. 이세정은 여전히 펭귄을 보고 있었는데, 곧이어 내게 돌린 시선에는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담겨있었다. 시선만으로도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세정은 뒤늦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형이 부르셨는데, 먼저.”

“그전부터 나한테 하려고 했던 말 있잖아요.”

나는 눈을 크게 떠 의아함을 표했다. 감조차 잡지 못하는 내게 이세정이 천천히 팔을 뻗어왔다. 테이블에 얹어둔 내 팔을 잡는다. 깁스를 따라 훑어 올라가면서 그가 이어 말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나한테 해달라고 말해요.”

“…….”

“우채민 씨가 나를 껴안고 애원하지 않아도, 나는 해줄 거예요.”

그제야 이세정이 내 팔을 망가트린 남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 관한 거라면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마주친 곳은 경찰서 안이었다. 그는 분명 철장 신세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잘못의 대가를 치른 사람에게 이 이상의 조치는 필요 없었다.

“똑같이 돌려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윤리적으로 위배 되는 일이라.”

이세정은 어째서 윤리 따위를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조소와 같은 웃음으로 으응? 하며 우스움을 표했다.

“우채민 씨 손으로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아직 밥도 채 소화되지 않은 상태라 체할 것 같았다. 내가 손등으로 입을 막고 당혹스러움을 표했더니 빤히 바라보는 이세정의 낯이 좀 난감하게 변했다. 이세정은 나를 당황스럽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면서 달래듯이 내 팔을 쓰다듬었다. 팔을 쓰다듬던 손은 이어 내 머리로 향했다. 바늘로 꿰맨 상처 부근을 손가락으로 느릿느릿 더듬는 느낌이 났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이었다. 나는 혹 이 상처도 타인에 의해 입은 피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봐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

“이건 저 혼자 계단 굴러서 그런 겁니다.”

“어쩌다?”

“누가 쫓아오는데 계단을 못 봤어요.”

“그래도, 너무 급하게 달린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던 게, 그전부터 계속,”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이세정은 왜 더 말을 잇지 않느냐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고개를 젓자, 이세정이 달래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다 말해주려고 했잖아요. 그땐 경황이 없어 못 들었어요. 말해줘요, 지금.”

“…….”

이세정을 오랜만에 마주한 날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 있었다. 무엇이든 말하고 싶었고, 어떻게든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왜 다쳤는지 누가 다치게 했는지 징징거리며 다 불어버리면서 복수를 바라는 건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나는 못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정말.”

그 말을 끝으로 단단히 입을 다물었더니 조금 더 기다려주던 이세정이 테이블에 있는 티슈를 뽑아서 내게 건넸다. 그리고 이내 의자에 몸을 기대었는데, 눈을 가늘인 태가 위협적이라 눈치가 보였다.

“난 거짓말 하는 사람 싫어요.”

“…….”

거짓말 아닌데……. 나는 티슈로 입을 닦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괜한 의심을 사 은연중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일까. 이 집에 온 뒤로 처음으로 꿈을 꿨다.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없었지만 나는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봉사를 하는 거라고 했다. 곧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신체 일부를 나눠줘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럼 뭐 해, 내가 죽는데. 꿈에서도 부조리함을 알고 있었기에 있는 힘껏 도망쳤다. 그러나 곧 잡혔다. 그는 당장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며 내 두 손부터 잘라냈다.

자고 일어나니 심장이 뜀박질하고 있었다. 흐르고 있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혈압을 좀 재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내릴 폭우에 대비하듯 시원치 못한 비였다. 밖에 나간대도 젖지 않을 것 같은 날씨였지만, 악몽을 꾸고 난 뒤 예민해진 터라 커튼을 내려버렸다.

나는 욱신거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사는 잘 치료만 받는다면 힘줄이야 다시 붙는다고 말해주었다. 피아니스트였다면 안타까웠을 일이지만 피아노를 취미로 둔 작곡과 학생이니까 괜찮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손이 낫는다면 다시 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말에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와 서러움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미련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나 보다.

솔직히, 솔직히,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해서 작곡을 하게 된 것도 아니고.

몇 년간 꼼짝없이 숨기고 있던 진심이 비죽 나오려던 찰나, 나는 재빨리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이 손을 망가트린 사람. 마지막으로 본 곳이 경찰서 안이었으니 그 남자는 분명 절차대로 빵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 무리는 뭐 하는 사람들일까. 단지 동네를 주름잡고 싶어 하는 조폭이었을 뿐이었을까. 아니면 전문적으로 납치를 하는 사람인가. 내게 상해를 입혔던 그 남자만 보면 뭐 그냥저냥 동네 건달인가 싶지만, 그 우두머리가 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들인 것 같던데.

보통 원한이 있어도 금방 잊어버리곤 한다지만 꿈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 남자 생각이 도무지 떨쳐지지 않았다. 지속되는 고통 때문에 자꾸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원하는 게 있다면 나한테 해달라고 말해요.’

‘우채민 씨가 나를 껴안고 애원하지 않아도, 나는 해줄 거예요.’

침대에 웅크려서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이세정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지만, 왜 그런 제안을 한 것일까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 자신이 비뚤어져 있듯, 나 또한 비뚤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순순히 대답했다면 정말 똑같이 복수해줄 생각이었던가?

눈을 다섯 번쯤 깜빡거렸다. 생각과 상식이 점점 바뀌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나한테 해달라고 말해요.’

‘전에는 물어보지 않고 해줬잖아요.’

‘우채민 씨가 나를 껴안고 애원하지 않아도, 나는 해줄 거예요.’

‘전에는 안 물어봤잖아.’

그렇다면 반대로,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다면 조치하지 않을 생각인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천장을 보았다. 천장엔 거울 같은 것은 달려있지 않았는데, 나는 내 얼굴이 보였다. 볼썽사납게 얼룩덜룩했다. 보기에 거북해 눈을 감았다.

***

“저 나갔다 와도 될까요.”

웬 상자 하나를 들고 방에 들른 장 비서님에게 나는 물었다. 장 비서님과 통할 어떠한 연락수단도 없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눈에 보인 김에 단숨에 물어야 했다.

“여행지에서 신세 진 사람이 있는데, 갚을 게 있어서요.”

말하면서 예상했던 대로 바로 거절당했다. 나는 일단 거절부터 해놓고 의아해하는 장 비서님에게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저 손 다쳤을 때 먹여주고 재워준 아이가 있습니다. 찜질방 집 막내딸인데, 초등학생이고.”

“아, 초등학생이요…….”

나는 지효가 내게 해줬던 구체적인 일들을 나열했다. 차비를 하라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여줬다는 대목에서 장 비서님이 어이없다는 듯 말을 잘라내었다.

“구체적인 주소를 보내준다면 알아서 사례하겠습니다.”

“…지효뿐만이 아닙니다.”

찜질방 집주인 아주머니, 찜질방 집주인 아주머니의 여동생……. 사례하는 데에 덜 받는 이가 없도록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던 사람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횟집 아저씨에 대해서는 말할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나를 인신매매하려고 했던 남자들을 고자질하면서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도,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던 애매한 인물이라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 그 남자들은 근방에서 유명한 건달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 횟집에 자주 나타났고, 여러 문제들도 많이 일으켜서 찾기 쉬우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장 비서님이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한테 사례에 관해 말하는 것 맞습니까?”

“……예?”

“채민 씨 다치게 만든 남자들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지 묻는 겁니다.”

나는 잠시 서글픈 얼굴로 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니 장 비서님이 고개를 저었다.

“사과받으려고 물은 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표정이 이래서.”

장 비서님은 딱딱함을 좀 풀어보려는지 입꼬리를 양쪽으로 끌어당겨 씩 웃었다. 좀 기괴해 보였다.

“아무튼 다음에 도망칠 땐 제게 미리 언질해주십시오. 좋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인신매매 집단이 내 손을 망가트린 것도 모자라서 나를 납치하려고 했다고 분명히 말을 했음에도 놀라는 시늉도 않는다. 이세정의 곁에 있으면서 범죄에 무뎌진 것이 아니라면 이런 반응은 결코 타당하지 않았다. 사이코패스란 거, 옮기도 하는 건가 싶었다.

“혹시 제 일 알고 계셨습니까?”

장 비서님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친 건 정말 몰랐습니다.”

놀라고 분노할 만큼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은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슬픈 일이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내 팔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사례금은 제 통장에서 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잔고에 몇 억 정도 있습니까?”

사례금을 억 단위로 생각해본 적 없었던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저 이십만 원 안팎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 방금 깨달았는데 내 통장에는 돈이 없다. 도망가기 전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뽑아놓고 싹 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알아서 하겠다는 말조차 못하고 입만 달싹거리자, 장 비서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럼 이거, 확인 좀 해보십시오

장 비서님이 아까 침대에 올려두었던 상자를 가리켰다. 내 소지품이라고 했으니 기껏해야 도망 중에 입은 옷이나 모자 따위일 것이다. 나는 무심하게 상자를 열려다가 펭귄 앞발 같은 두 손으로는 상자같이 기본적인 것도 못 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둥대는 두 손을 다소 우습게 쳐다본 장 비서님이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 앞에선 큰 상처도 작은 상처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예?”

장 비서님이 미소를 지었다.

“이게 어떻게 넘어진 수준인가 하고.”

자세히 물어볼 새도 없이, 장 비서님이 상자를 열어주었다. 나는 멍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가 열어준 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상자 안에는 여권과 노트북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지금 나온 이 여권이 나 아닌 다른 누구의 것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아하게 한 장을 펼쳤다. 그리고 꼼꼼한 시선으로 여권 속 멍청한 얼굴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밀항이라도 하셨나 했습니다.”

“아…….”

해외로 도피한 척 휴대폰을 누나의 캐리어에 딸려 보내놓고, 여권은 이세정에게 맡겼었나 보다. 내가 미친다. 이따위로 할 거면 얌전히 그의 곁에 있을 것을 그랬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나는 여권을 애써 무시하고 이어 노트북을 들었다. 멍청하게 둘러보다가 곧 이 노트북이 어딘가 익숙한 것 같다는 생각에 빠졌다. 디자인도, 구성도 묘하게 눈에 익었다. 나는 겉면에서 작은 흠집을 발견하고 억눌린 숨을 내쉬었다. 내가 중고로 싸게 팔았던 노트북이다. 발이 달렸는지 다시 내게로 왔다.

“앞으론 가져다 팔지 마시죠. 꽤 귀찮았습니다.”

넋 놓고 있는 내게 장 비서님이 말했다. 나는 죄지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노트북에서 pulses가 흐르고 있다. 모티브는 작은 맥. 선율은 조금씩 변화되어 서로와 엇갈리고 겹쳐진다.

하나로 시작한 선율은 이내 다수가 되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지기 때문에 제법 동질적이다. 어둡고 조용하게 가라앉은 맥박 소리는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표방한다.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겐 빈틈을 주고, 그리고 나에겐 안정을 준다. 기분은 나아가고, 손도 아프지 않고. 나는 이 상태 그대로 낮잠이나 잘까 하고 이불을 끌어왔다. 노크 소리가 타이밍 좋게 여유를 끊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실내임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뒤로 넘겼다. 손에는 캐리어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나머지 한 손으로 문대신 벽을 두드려 노크하는 모습이 퍽 장난스러웠다. 나는 남자가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고 나서야 정체를 깨달았다. 배도빈이었다.

“아…….”

내 탄식에 배도빈이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선글라스의 다리를 접으면서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렸다.

“세정이 사람 차별하는 거 졸라 서럽다. 누군 도망가면 잡아주지도 않더니.”

“형, 안녕하세요.”

배도빈은 내 인사를 씹고, 끌고 오던 캐리어를 쭉 밀었다. 캐리어가 방을 부드럽게 가로질러 침대 옆에서 멈추었다. 캐리어를 먼저 보내놓고 배도빈이 창 앞으로 가 커튼을 활짝 젖혔다. 창문도 시원하게 열어버린다. 거침없이 쏟아지던 비바람이 방안으로 침투했다. 침대가 창문과 가까이 닿아있지 않아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시트가 죄다 젖어버렸을 것이다.

“난 비 오는 날이 좋더라.”

마지막 장마니까 실컷 만끽하라는 배도빈의 말에 나는 직접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이 방은 이세정의 방이었고, 이 침대 또한 이세정의 침대였으니 깨끗하게 쓰고 돌려주어야 했다. 오자마자 남의 방을 막 어지럽히는 배도빈의 추태에 기분이 나빠졌다.

“왜 오신 거예요?”

“세정이가 지 형 결혼식을 제쳤거든. 간단히 있었던 일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 나를 보는데, 너 때문에 제 형 결혼식에도 안 간 것이 아니냐는 듯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죄책감 같은 감정이 가슴 한쪽을 긁어댔다. 나는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눈길을 피했다. 배도빈은 어디 앉을 데가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저기 테이블 앞에 앉으면 되지 않나……. 나는 뒤로 좀 물러났다. 머리 판에 머리가 닿았다.

“결혼식의 꽃이 뭔 줄 아냐?”

“…뭐예요?”

“신랑 신부 친구들. 시발, 근데 가니까 웬 아저씨들만 있는 거야. 내가 정우 형이 정략결혼을 했단 걸 간과했던 거지.”

결혼식에서 어떤 상대를 찾기엔 아직 나이가 어리지 않나 싶었다. 요즘 다들 결혼을 늦게 하는 추세이기에 나이대가 우리보다야 있을 테니까. 그래도 연상의 여자를 찾으러 남의 결혼식을 어슬렁거리는 거라면 납득은 된다. 지수가 꼭 그랬다. 그러고 보면 지수와 배도빈은 일정 부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왜 웃냐?”

배도빈의 물음에 나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거두어냈다. 나를 떨떠름하게 보던 배도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앉아있다가 식 끝나고 인사하러 갔는데, 솔직히 정우 형이랑 몇 번 만난 적은 없어도 꽤 친하거든. 정우 형은 진짜, 사람이 따뜻해. 따뜻한 남자야.”

따뜻하다는 성격의 갈래에는 여러 종류가 존재하지만, 배도빈의 표정으로 보건대 어쩐지 이정우가 정말로 바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말이다.

“나 보자마자 동생 안 와서 아쉽다고 하는데 괜히 내가 죄책감이 드는 거야. 그래서 형님, 오늘은 제가 동생 해드리겠습니다, 이랬더니 웃으면서 그러라고……. 뭐, 돌아다니면서 형님 동생 행세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신부 쪽 친지 몇 명에게 내가 세정이가 되어있더라.”

이세정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배도빈과 착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 기준으론 이세정과 배도빈은 분위기조차 닮지 않았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벽이 있다고 한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해는 푸셨어요?”

“오해랄 게 뭐가 있지. 거기 여자들한테 내 얼굴 어필해 뒀으니까 혼담 같은 거 많이 들어올 거야.”

“…….”

“왜?”

“세정이 형 얼굴이 더 많이 들어올 텐데.”

나는 담담히 말하면서 속으로, 무슨 혼담 같은 소리냐고 원망을 토해냈다.

“너 말 다했냐?”

배도빈은 자신이 어디가 걔보다 못 생겼냐며, 어디 그 입으로 마음껏 나불거려 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내 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걘 너무 악마처럼 생겼잖아. 내가 걔 얼굴 보고 자라서 나쁜 길로 빠진 거라니까. 거울을 자주 봤어야 했는데. 난 천사처럼 생겼으니까.”

숨이 막힐 듯 말을 빠르게 뱉어내면서 고개를 들이민다. 나는 주춤주춤 뒤로 밀려나다가 안 되겠다 싶어 홀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아래에는 아까 배도빈이 가지고 들어온 캐리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내가 캐리어와 배도빈을 번갈아 바라보자,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가 장난을 멈추고 설명했다.

“나 여기서 지내려고.”

“왜요?”

“심심하기도 하고, 사모님도 보고 싶고. 야, 넌 몰라도 된다. 방 안내나 해줘.”

“……저 모르는데. 집.”

나는 이 집에서 손님으로서 지내고 있었다. 몇 개의 방이 있는지도 모르는데다가 집 구조 또한 알지 못했다. 배도빈은 자신보다 더 집에 관해 무지할 나를 억지로 끌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쳐 바이크가 전시된 방들을 기웃거린다. 함부로 바이크들을 만져대기에 저러다 실수로 쓰러트려 큰 사달이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내 속은 짐작도 못 하고, 배도빈이 한눈에 반했다며 검은 바이크의 고정 장치를 제거했다. 나는 바이크를 슬슬 뒤로 빼내는 배도빈의 등을 두드렸다. 깁스에 맞은 배도빈이 아프다고 짜증을 냈다.

“바이크 몇 개 가져가도 화 안 내.”

“바이크 많이 아끼던데…….”

샤워도 시켜주고.

“아끼는 거랑 집착하는 거랑, 왜 같은 선상에 두는 거야?”

“같을 수도 있죠.”

“봐봐. 전시된 바이크 몇 개 없어지지 않았냐?”

배도빈의 말에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성질이 날 때마다 하나씩 없애버려서 이 정도밖에 남지 않은 건지, 아니면 바이크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수집을 멈춘 건지, 눈에 띄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내가 말리기를 관두자, 실실 웃은 배도빈이 너도 바이크 하나 고르라며 내 팔을 잡아 아무 바이크의 핸들을 쥐게 했다. 오른손이 움푹 눌려 고통이 일었다. 오늘 아침에 오른손에 댄 부목을 더 작은 것으로 바꾸었는데, 그럼에도 결코 호전된 상태는 아니라서 조심해야 했다. 내가 신음을 내니 배도빈이 미안하다며 손을 떼어냈다. 뻔히 붕대가 감겨있는데 깜빡했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나 따위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음이 확실했다.

“너무하네. 좀 도망갔다고 애 손을 이렇게 부숴놓아…….”

“…….”

“못 도망가게 할 거면 다리부터 부러트려야지,”

“……이거 세정이 형이 한 거 아닙니다.”

“그럼 다른 데 물었냐?”

배도빈이 내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종아리 부근까지 샅샅이 훑었다. 아무리 찾아도 상처가 없는 것이 이상했는지 종래에는 내 바지까지 내리려고 들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발로 걷어차자 빗겨 맞은 배도빈이 당혹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왜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안 맞았어요, 아직. 저 세정 형이 화내기 전에 그냥 자수해서…….”

“……자수했다고?”

나는 배도빈의 입에서 나온 자수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단어는 내가 먼저 썼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어감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것도 아니고, 어찌 보면 피해자로서 도망간 건데.

“도망갔다가 힘들어서, 아 씨발 그냥 도덕심 버리고 돈 많은 새끼 밑에서 꿀이나 빨자. 이런 마인드가 생긴 거야?”

전혀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해명할 수 있을 정도로 딱 떨어진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제대로 답하지도 못할 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빈은 뭐 이런 애가 다 있을까 하는 표정으로 바이크를 만지작거리며 복도로 끌고 나갔다.

“넌 도망갈 의지가 없는 것 같아.”

“…….”

“내 말이 우습지, 그냥…….”

우스운 게 아니다. 주변의 시선을 우습게 생각했다면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애처럼 보이기 싫어 조언을 따랐는데, 결론적으로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더 생각했다가는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을듯하여 배도빈이 밀고 있는 바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크는 거침없이 복도를 직진하고 있었다. 바닥이 바퀴에 상처 입지 않을까 불안했다. 배도빈은 내 속도 모르고 바이크를 휙 틀어서 걷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잘 거다.”

배도빈은 바이크를 어느 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내 침실에만 침대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침대가 있었다. 물론 침대뿐이었다. 들어서 있는 다른 가구는 없었다. 배도빈은 내게서 캐리어를 받아들고는 손을 흔들었다.

“잘 자라.”

문이 쾅, 닫혔다. 멍하니 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야.”

배도빈은 목만 쏙 내놓고 물었다.

“근데 어쩌다 다쳤냐?”

나는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않고 닫았다. 나를 무심히 바라보던 배도빈이 ‘나 화병 나서 죽으면 너 때문인 줄 알아라.’라고 단조롭게 이야기하며 다시금 문을 닫아버렸다. 한참을 문을 보고 있자니 입이 썼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

비에 잠겨있는 것 같다. 숨만 안 막힐 뿐이지 호수에 갇힌 것처럼 눈꺼풀이 쳐졌다. 병원에서 다녀오는 길, 전경이 보이지 않는 창을 바라보며 나는 이따금 꾸벅꾸벅 졸았다.

붕대가 오늘따라 꽉 조이는 느낌이었다. 빠르게 나아가는듯하면서도 좀처럼 낫지 않는다며 병원에서 부목 위에 붕대를 더 덧대주면서 되도록 손을 사용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손은 밥 먹을 때, 샤워할 때, 그때 말곤 많이 쓰지 않는다고 했더니 왜 샤워를 내 손으로 하느냐고 의사가 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부탁할 처지가 못 되었다.

덜컹거림조차 없는 차 안에서 나는 깁스한 손을 위로 들어보았다. 부목을 댄 손 또한 천장을 향해 쭉 뻗었다. 내 상처의 심각성만 깨닫고 힘없이 다시 내렸을 때, 갑자기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 사고가 떠올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가 서 기사님이 아무 말이 없는 것이 이상해서, 다시 시선을 올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본가에 다 와 가는 중에 누군가 차 앞으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웬 젊은 남자가 앞 유리창을 두드리며 차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곧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뭐, 뭐예요?”

마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더니 서 기사님이 말했다.

“운전 똑바로 안 해? 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내가 의문을 표하지 않아도, 서 기사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이 집안의 일이라면 나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나았다. 찝찝했지만 조용히 서 기사님의 말에 수긍했다.

차는 다시 본가를 향해 달려갔다.

오후쯤 비가 그쳤다. 정원에는 볕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세정이 올 때까지 정원을 산책하던 나는 그를 맞이하기도 전에 금방 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으로 음악을 틀고서 지진처럼 떨려오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갔고, 그래서 상황이 종료됐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있을 생각만 하면 뭔가 좀 서운함 비슷한 감정들이 밀려 들어온다. 감정은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한 끗 차이였으므로 서운함이 아니라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죄진 것이 있다는 양 말이다.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더워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더운 몸이라도 식힐 셈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을 가득 채우고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두 팔엔 방수 커버가 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좀 더 차가운 물로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얼음이라도 채워 넣었어야 했는데. 속이 답답한 나머지 심호흡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몸을 숙여 턱까지 집어넣었다.

그때 문밖에서 희미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따금 일하시는 분이 수건을 놓아주곤 했기에 나는 생각도 않고 들어오셔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막 퇴근을 마치고 이 집으로 새로이 출근한 이세정이었다. 이세정은 욕조에 잠겨있는 나를 탐탁지 않게 내려다보다가 욕조의 온도를 체크해보고는, 근처에 대충 앉았다. 낮은 욕조 때문에 시선이 나를 깔아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이세정의 목소리가 여름밤 악기 소리처럼 잔잔하게 다가왔다. 조용조용하게 물어본 터라 목소리에 서린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냥 묻는 건데, 시위하는 거예요?”

“……저 더워서.”

당혹스러운 나머지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나는 물속으로 몸을 좀 더 집어넣고 눈꺼풀을 바르르 떨어댔다. 열이 바짝 올랐다. 실내 온도가 보통 사람들이 쾌적함을 느낄 만큼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알지만 몸에 열이 많은 사람에겐 그보다 더 낮은 온도가 필요했다. 나는 물장구를 치듯 손부채 질을 했다. 물방울이 이세정의 뺨에 살짝 튀었다. 이세정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위 많이 타지 않았나…….”

그제야 왜 이세정이 시위라는 말을 갖다 붙였는지 깨달았다. 이세정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일부러 반신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와 줘요. 감기 걸릴까 봐 걱정돼요.”

이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주춤거리며 바라보았다.

“가 계시면 제가 알아서 몸 닦고 나갈게요.”

“병원에서 손 사용하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닦아줄 테니까 나와요.”

아침 진료 보고가 이세정에게 넘어간 모양이다. 분명 의사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하시기는 했으나 나는 손에 최대한 힘을 주지 않고 샤워를 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니 괜찮았다. 나는 주변에 있는 타월을 끌어와, 붕대도 모자라 방수 커버까지 씌워진 손으로도 워시를 잘만 묻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품이 묻은 타월을 이세정이 빼앗아 들었다.

“씻는 거 하나로 이러지 말아요. 그만하고 나한테 안겨요.”

목욕탕에 가도 아무렇지 않았던 나다. 벗은 상태로 누굴 의식해본 적 없지만, 이번엔 그다지 대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벗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이세정의 얼굴을 보면 부끄러운 티를 내는 것이 오히려 더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이세정에게 팔이 잡힌 채로 욕조 밖으로 나왔다. 방수 커버가 아주 컸던 터라 뭔가를 잘 가려주었다.

이세정은 내 몸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어깨부터 가슴으로, 가슴에서 등 쪽으로 옮겨갔다. 골 깊은 등뼈를 문지를 때에는 어깨를 끌어안고서 허리를 따라 미끄러졌다. 타월이 이내 골반에 닿았다. 분명 누굴 씻겨본 적 없을 테고, 전에 장 비서님이 바이크 세차시키듯 난리를 펴놓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었지만, 처음 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솜씨였다. 그렇지만 가만히 받고 있기는 민망했던 터라 나는 표정관리도 못 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샤워실이 좁아서 등이 금세 벽에 부딪혔다.

막 허리 부근을 거품으로 비벼대던 이세정이 내 등이 벽과 하나가 되자, 벽에 팔을 붙여 나를 가둔 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내려온 속눈썹이 기가 막히도록 예뻤다. 살짝 물기에 젖은 입술이 열리는 과정마저도 모두 아름다웠다.

“씻기 싫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벽에서 등을 떼어냈다. 그 틈에 나를 안다시피 허리를 당긴 이세정이 내 엉덩이를 문질렀다. 나는 이세정의 어깨에 손을 올려둔 채 어쩔 줄 모르고 시선만 마구 흔들었다. 바싹 마른 입안을 축이며 아무거나 물었다.

“뭐 하다 오셨어요?”

오전에 비가 왔기 때문에 회사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빈 시간 동안 뭘 했나 궁금했다. 이세정은 대답도 않고 타월을 잠시 내게 건네주었다. 옷에 거품이 묻는 것이 거슬렸는지 셔츠를 대충 걷는다. 드러난 팔에는 기다란 자국이 있었다.

“우채민 씨가 부탁했던 일 들어주느라.”

이세정은 타월을 돌려받으며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들어왔다. 거품이 가랑이 사이를 헤집었다. 나는 의도 없는 손길에도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성질이 나서 잠이 와야 말이죠.”

이세정이 내 한쪽 다리를 잡아 위로 구부렸다. 무릎이 굽혀지며 배에 닿을 듯했다. 팔에 끼운 큼지막한 방수 커버가 성기를 가려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자세가 수치스러웠다. 나 대신 이세정이 무릎을 굽혔다면 덜 부끄러웠을까. 그가 내게 꼭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는데, 보통 다리에 비누칠을 해줄 때는 씻겨주는 사람이 숙이니까. 나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부탁했던 일이요?”

“손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복수해달라고 했잖아요.”

담담히 내뱉은 이세정의 말에 나는 대번에 미간을 좁혔다. 침이 삼켜지고 심장이 발광하듯 뛰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샤워기를 틀던 이세정이 한쪽 눈썹에 힘을 주었다.

“장 비서님에게.”

눈을 가늘인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세정이 샤워기를 내 몸에 가져다 댔다. 비눗물이 서슴없이 씻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이 내 어깨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팔뚝을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길은 곧 허리와 골반으로 향했는데, 나는 바닥을 쳐다보느라 그에 신경을 둘 새가 없었다. 이세정이 춥냐면서 물을 더 따뜻하게 조절했다.

“뭐 하셨어요?”

온도를 맞추고 다시 내게 샤워기를 댄 이세정에게 물었다.

“뭘 해요?”

“……어떻게, 하셨냐고. 그 사람들.”

목소리가 떨린다. 눈에 힘을 주었다. 이세정이 가만히 바라본다. 그냥 똑같이 해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천진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바닥에는 물에 젖은 거품이 마구 엉켜 회오리치고 있었다.

“우채민 씨.”

이세정이 나를 불렀다. 낮은 투로 느리게 속삭인다.

“기분 이상하네.”

샤워기의 헤드가 내 뒷목으로 향했다. 뒷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퍽 난잡하다. 온수임이 분명한데, 나는 아직도 찬 욕조 안에 웅크려 있다는 듯이 오들오들 떨었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세정이 내 팔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꼭 내가 나쁜 짓 한 것 같잖아요, 그렇게 굴면.”

“…….”

이세정의 셔츠가 나처럼 푹 젖어갔다. 셔츠는 과하지 않고 적당히 잡힌 팔 근육을 따라 바짝 달라붙었다. 나 못지않게 흠뻑 젖은 손이 들어 올려졌다. 이세정이 내 뺨을 상냥하게 만지작거렸다. 정신 차려요.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음을 삼켰다.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지내는 방과 먼 곳에서 목욕을 한 터라 2층 거실을 지나야 했다. 건너가는 중에 조잡한 선율이 들려 뭔가 했더니 배도빈이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마구 두드리며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세정의 어머니가 휠체어에 앉아서, 소음을 감상하고 있었다. 귀가 예민한 어머니를 위해 항상 잔잔한 음악만 들려주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겐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남자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그 힘부터가 달랐는데, 배도빈의 피아노는 특히나 더 그랬다. 안 그래도 넘치는 힘으로 강렬한 곡을 연주함에도 사모님은 전혀 거슬리지 않는 듯 보였다. 이제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아버지의 섬세한 연주가 더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편견이었나. 우리 가족이 유독 어머니를 과보호했나…….

표정에서부터 우울함이 드러나 있을 나는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굉장히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지 피아노 소리가 좀 거슬리기도 했고. 조심히 뒤를 돌아 내 침실로 돌아왔다.

***

아침부터 깁스한 손이 간질거렸다. 긁고 싶어서 미칠 뻔했다. 아침 진료를 온 의사에게 이에 대해 말했더니 그녀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깁스를 새로 해주었다. 그러나 집에 오자마자 또다시 가려움증에 시달렸다. 의사에게 너무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도 다녀왔겠다, 오늘도 낮잠이나 잘 셈으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장 비서님이었다.

“지시하신 대로 사례했습니다. 성함이 나이 오름차순으로 임지효, 구화정, 구계숙, 안완영 씨 맞으십니까?”

임지효 빼고는 모르는 이름들이다. 그렇지만 장 비서님이 하는 일이었으니 얼추 맞을 것이다.

“사례 얼마나 하셨는지 알려주시면 차차 갚겠습니다.”

그날 샤워를 하면서 이세정과 대화한 이후, 나는 되도록 이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싶었으므로 대충 대답해주고 입을 다물었다.

“……뭘 갚기까지 하시려고.”

장 비서님이 픽 웃었다. 그러고는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제공해 주었는지 차례차례 이야기했는데, 문득 묘한 눈으로 입을 다시더니 반갑지 않은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우채민 씨를 다치게 했다는 그분은…….”

“…….”

“어디 아프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뒤늦게 표정을 풀어보려고 했는데, 이미 장 비서님은 내 언짢음을 눈치챈 듯 보였다. 장 비서님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손이 너무 간지러워서 장 비서님이 보지 못하도록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마구 비벼댔다. 안에 햄스터나 토끼 같은 동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들썩거리는 이불을 힐끔 본 장 비서님이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겠다며 방을 나섰다. 나는 장 비서님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팔을 꺼내 꾹꾹 눌렀다. 피가 날 정도로 주무르다 보니 팔은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이번에는 손가락이 문제였다. 짜증 나니까 가렵고, 가려우니까 짜증 난다. 음악을 틀어봤으나 소용없었다.

축 엎어져 바닥을 보고 있자니 문득 배도빈이 떠오른다. 솔직히 잘생긴 손은 아니다. 단단하고, 힘 있는 손이다. 그 단단함으로 건반 하나하나를 힘주어 눌러 이따금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스트레스 풀기에 제격이다.

밖으로 나가보았다. 물론 배도빈은 없었다. 홀로 2층 거실의 피아노 앞으로 갔다. 멍하니 피아노 건반을 쳐다보았다. 두 손을 올려두었다. 뭘 연주해야 하지. 한동안 손만 바르르 떨어대다가 BWV846을 연주했다. 도망가서 꾼 꿈속에서 아버지가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그때 들은 음악이었다. 정말로 그 당시에 아버지가 이 곡을 연주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미 꿈이 과거 기억을 덮어씌워 버려서 세세한 설정들이 마구 뒤섞여버린 탓이었다. 단지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나는 화목한 가정의 유일한 어둠이었다. 나로 인해 어머니는 시력을 잃었다.

연주곡을 라흐마니노프의 곡으로 바꾸었다. 아니, 사실 어느 곡을 쳐도 도저히 음악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연주라기에는 그저 손가락을 건반에 내려치고 있는 것뿐이었다. 배도빈을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다섯 손가락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붕대에 묶인 채로 뭉텅이로 치고 있는 것이라서 연주는 당연히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도빈아, 이모도 불러주지.”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휠체어에 탄 이세정의 어머니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대형 강아지가 있었는데, 강아지는 뒤쪽에서 뛰어오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로 몸을 돌려 얼른 따라오라는 듯 꼬리짓 했다. 아주머니는 상황을 확인하곤 곧바로 이세정의 어머니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아…….’ 하고 탄식했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 우채민입니다.”

“알아요. 알아요. 아니, 어떡하지…… 미안해요. 내가 눈이 안 보여서.”

어머니는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따로 반응하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당연히 도빈이인 줄 알았어요.”

이세정의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휠체어를 끌었다. 어머니와 조금씩 가까워졌다.

“눈이 안 보이니까 귀가 예민해졌어요. 멀리서 들어도 이게 그냥 레코드인지 직접 연주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갈 정도라니까요.”

“제 연주가 너무 엉망이었죠. 손이 다쳐서…….”

“……다친 손으로 연주해도 돼요?”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머뭇거리다가 거의 나아가는 중이라고 거짓말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심상치 않은 눈길을 보내시긴 했지만 내가 제발 침묵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눈길을 보내자 떫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분명 거의 나아가는 중이라고 했지만, 어감상으론 거의 다 나았다고 들린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잘되었다며, 자신에게도 연주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난처하게 뜸을 들이다가 음 몇 개를 소멸시키겠다는 말을 편곡하겠다는 말로 대신하고는 곡을 연주했다. 이번에는 손에 힘을 빼고 한 음 한 음 눈치를 봐가면서 눌렀다. 이 괴음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어 마무리는 빠르게 지었다.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말아줘요. 외부에선 모르는 이야기예요.”

뭐 이따위 연주를 할 수 있느냐고 말할 줄 알았더니 딴소리다. 내가 곡을 연주하는 내내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내 의아함을 감으로 때려 맞췄는지 어머니가 제 눈을 가리켰다. 나는 조금 길게 탄식했다. 인터넷으로 사모님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검색해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모두 알고 있는 정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인터넷에 나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어머니는 첫 만남부터 내게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알았다고 약속하면서도 왜 비밀로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목소리에 남은 찝찝함을 기가 막히게 눈치챈 어머니가 정성 들여 설명해주었다.

“눈이 다친 이유를 알리고 싶지 않아요. 비밀이란 건 불씨와 함께 지펴지는 거니까. 일단 기사가 하나 나면 여기저기서 그동안 털어놓을 기회가 없어 입만 다물고 있던 증인들이 하나둘 나올 거예요. 괜한 말 나오게 하기 싫네요, 나는. 그것만 아니었다면 나도 숨기지 않았을 거예요. 눈 좀 안 보이면 어때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초조한 낯이었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어머니는 내가 어디 가서 주둥이 가볍게 나불거릴까 봐 걱정이 되는 듯했다. 나는 건반을 만지작거리다가 사모님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우리 어머니도 시각장애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세정의 어머니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자꾸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치는 시늉을 했다. 원래 피아노를 치던 분이었는지 손가락이 다 맞았다.

“어머니 잘 대해주세요.”

그냥 한 말일 텐데 어쩐지 폭력적으로 들렸다. 할 수 없는 것을 강요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껏 수천 번은 더 들은 말이라서 거북했던 걸까. 내가 당혹스럽게 웃자, 이세정의 어머니가 덧붙여 말했다.

“완전히 눈이 안 보이기까지 난 조금의 텀이 있었어요. 먼저 한쪽 눈이 다쳤고, 합병증이 오면서 다른 한쪽도 서서히 망가졌어요. 이식 수술도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서 꼼짝없이 받아들여야 했죠. 그래서 그동안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준비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시야가 어두워졌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안정을 찾기가 쉬웠어요.”

“…….”

“하지만 나처럼 그런 과정 없이 갑자기 세상을 못 보게 되면 온갖 괴로움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일 거예요. 그러면서 자존감은 아주 낮아지죠. 눈이 보였을 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한다든가, 화를 낸다든가. 그렇게 다른 가족들을 괴롭히고…….”

나는 깜짝 놀라 예의 없이 말을 끊었다.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되게 밝고 긍정적인 분이셨어요.”

“…….”

“정말이에요.”

“……미안해요, 채민 씨.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흘려들어요.”

이세정의 어머니는 말을 취소했지만, 나는 여전히 찜찜했다. 우리 어머니는 눈이 보였을 때 했던 행동, 그러니까 영화관에 간다든가 뷰가 좋은 레스토랑에 간다거나 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했다. 이게 남들에겐 자존감이 낮은 증거로 비칠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그랬다. 내가 영화를 보고 싶어 해서 같이 가줬고, 내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고 싶어 해서 그렇게 했다.

사실 어렸을 때는 사고가 짧기 때문에 서운한 점도 많았다. 작게는 내가 갑작스레 달려들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점부터 크게는 졸업식에 와주지 않는 점까지. 그렇지만 그건 내가 어린 마음에 한 크나큰 잘못이었다. 어머니는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시야가 보이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도움을 받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 있게 했다.

“사모님.”

문득 휴대폰을 내려다본 도우미 아주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이세정의 어머니를 불렀다.

“이제 내려가실래요? 혹시 저번처럼 도련님이 갑자기 나타나실까 봐서요. 이오 얼른 숨기시고…….”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붙잡았다가 뒤늦게 나를 쳐다보았다.

“도련님한텐 강아지 집에 있다는 거 비밀로 해줘요.”

왜 이세정에게 강아지의 존재를 숨기는 거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알겠다고 답했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강아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난 가볼 테니까 푹 쉬면서 손 치료받아요.”

두 사람이 승강기를 이용해 자리를 뜨자, 잊고 있었던 가려움증이 올라왔다. 긁다가, 긁다가 안 되겠어서 건반에 손을 올렸다.

피아노를 마음껏 친 보람이 있었다. 소름 끼치고, 짜증 나고, 답답할 만큼 피부를 뒤집었던 가려움증이 마침내 사라졌다. 대신 상처 부위가 온통 화끈거렸다.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등가교환이었다. 샤워하고 난 뒤라 더욱이 발광하는 손을 붙잡고,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고통을 잊을 수 있을 만한 영화를 찾았다.

지수와 함께 봤던 닳고 닳은 영화를 감상했다. 이 영화에는 지수가 ‘우리 형’이라고 부르는 캐릭터가 나온다. 사실 다른 형들은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형’이라고 불리지만 이 형은 간혹 ‘멍청이’나 ‘아 저 돌대가리 새끼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엄한 장면에서 키득거리다가 눈꺼풀이 무거워 잠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저녁이었다. 이세정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그를 보기엔 겁이 났다. 다른 누구 때문은 아니고, 나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끌어온 뒤 팔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시야를 차단하고도 취한 사람처럼 실실거렸다. 한동안 계속 오디오만 듣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깼다. 사실 내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깼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 꿈에서 웬 여자가 비명을 질렀는데, 일어나보니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이든 천둥이든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기 전에 열어둔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으스스한 것일지도 몰랐다. 창문만 얼른 닫고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막 몸을 웅크리려던 찰나,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번개가 방안을 번쩍 휘저어놓았다. 꿈을 꾼 것이 아니었다. 꿈에서 들은 거라고 여겼던 비명은 실은 누군가가 내지른 진짜 울분이었다. 이 새벽에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방 입구 쪽을 힐끔 확인했다. 입구는 그저 까맣기만 했다. 꼭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경계하며 이불로 몸을 감쌌다. 곧이어 다시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흡사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가슴이 뜨끔 내려앉았다.

비명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다른 목소리들이 덩달아 선명해졌다.

밖에서 누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나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숱하게 고민했다. 번개 때문에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준 채 고민하던 때에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아, 아, 안 보여!”

솜털이 쭈뼛쭈뼛 섰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다 이내 방문 앞에 섰다. 방문 앞에서 두 팔을 흔드는 그림자는 바람에 휘날리는 광대 같았다. 한 번의 번개로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의 모습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여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가 도중에 사람들에게 잡혀 흰자를 까뒤집었다.

‘그동안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준비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시야가 어두워졌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안정을 찾기가 쉬웠어요.’

제 손목을 물어뜯고 집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여기서 이세정의 어머니를 해치는 사람은 그 자신뿐인데도 안내견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있다는 듯 똑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강아지는 어머니의 비명에 놀라고, 어머니는 강아지의 비명에 놀라며 서로의 목을 혹사시켰다. 빗소리까지 잡아먹는 그 소음 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집안의 치부를 들켰다고, 모두가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취한대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깊은 고름이었다. 나는 외면할 수도 직면할 수도 없어, 그들이 어머니를 끌고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들이 모두 소멸되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당장 내려와 방을 가로질렀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어떻게 문 앞까지 다다랐다. 나는 허공에서 팔을 강박적으로 흔들었다. 문이 어딨지?

아, 문 없지.

왜 문 없지?

스르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문이 있었다면 어머니의 괴로움을 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눈이 안 보인다며 괴성을 지르는 그 끔찍함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으므로 이렇게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없었기에 나는 누가 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상대는 거리낌 없이 방으로 들어왔고, 바로 근처에서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세웠다. 겁 많은 나는 그것 좀 외면해보겠다고 기를 쓰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가지 않는 상대의 정체가 궁금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이세정이 가만히 나를 주시했다. 무표정으로 보였으나 이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건지 여유로운 모습은 아니었다. 이내 내게서 눈을 뗀 이세정은 이불이 구겨진 채로 널려있는 침대를 한 번 보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

“미안해요. 여기서 재우는 게 아니었는데.”

잊고 있었다며 나를 끌어당기는데, 나는 고민도 안고 단숨에 안기었다. 이세정이 나를 받쳐 들고 침대로 가 눕혔다. 나를 놓아줄 때 바짝 다가온 얼굴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듯, 좋지 않은 경험을 되뇌듯 굳어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이세정이 내 가슴을 토닥거렸다.

“……뭐, 뭐,”

나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뭐, 뭐예요, 형? ……저, 저… 아, 아니.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사과했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세정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다시 가슴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드러난 그의 표정엔 상냥이라곤 없었는데 나는 어쩐지 다정한 것도 같다고 느꼈다. 손길이 부드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댄 탓에 그렇게 믿고 싶어진 걸까. 비정상적인 내 심장 박동을 눈치챈 이세정이 노트북을 치우고 옆에 누웠다. 내게 병균이 있다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한결 나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 가슴에 올라가 있는 이세정의 손에 깁스한 팔을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세정을 관찰했다.

빗소리만 가득한 어두운 방, 이세정의 얼굴에 내가 비췄다. 나는 지금 몹시 떨고 있었고, 이세정은 언제 당혹했냐는 듯 초연할 정도로 무표정이었다. 생김새도 다르고 상황에 따라 내보이는 반응 또한 다르다. 그럴 리 없을 텐데도, 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 우리가 같은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대신해 울 듯 몰아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나 다른 과 가고 싶은데 또 전과가 안 된대.”

눈을 뜨자마자 내 방을 찾아든 사람은 배도빈이었다. 어젯밤 내 방 앞에서의 소란을 전해 들었는지 배도빈은 내가 매우 놀라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티 나게 챙겨주니 좀 거북했다. 나보다 더 신경 써줘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배도빈은 내 침대 한 면을 다 차지하고 누워서 계속 한탄을 늘어놓았다.

“나 같은 사람은 작곡이랑 안 맞아. 바이올린이나 할 걸 그랬다.”

“…….”

“바이올린이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아서 안 배웠거든. 대신 가야금을 배웠지.”

“……형은 꿈이 뭐예요?”

“부족한 게 없는데 꿈이 있을 리가 있나.”

배도빈이 바닥에 웅크려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빙그르 웃었다.

“난 다 이뤘거든. 어렸을 때.”

“부럽습니다.”

“근데 너 괜찮냐?”

“예?”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눈썹을 세워 의문했다. 배도빈은 그저 으쓱하곤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그만 가려는 건가 싶었더니 베개를 세워서 다시 눕는다.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신 내가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하느라 젖은 앞머리에서 물이 흘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가정부 아주머니가 아침을 가지고 올라왔다.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은근히 살피면서 잠을 잘 잤느냐고 물었다. 잘 자기는커녕 심장이 두근거리는 불쾌감 때문에 일찍이 잠에서 깨기까지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화끈거리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죽을 떠먹는 내 앞으로 배도빈이 앉더니 숟가락으로 제 몫의 죽을 휘휘 저었다. 배도빈은 안에 장식된 녹두를 남김없이 골라서 내 죽그릇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내가 쏘아보자 배도빈이 변명했다.

“알레르기 있어.”

“그럼 간 녹두는 먹어도 괜찮아요? 이거 녹두죽인데.”

“야, 알갱이도 안 보이는 새끼들이 내 피부를 망가트릴 수 있을 것 같냐? 그러지 말고 뼈나 먹어, 멍멍아.”

배도빈이 내 입에 닭 다리를 쑤셔 넣었다. 이어 닭 다리 하나를 더 내 입에 쑤셔 넣곤 낄낄거렸다. 그러다가 방으로 들어온 이세정에게 뒷목이 잡혀서 의자 채로 뒤로 기울어졌다. 배도빈이 허공에 두 팔을 휘저어 중심을 잡았다.

“도빈아, 나가서 먹어.”

“……어딜 잡냐? 형한테 예의 좀 갖춰줘라.”

이세정이 어이없이 쳐다보자 배도빈이 의자를 끌어 도로 테이블 앞으로 가며 말했다.

“내가 이틀 형이잖아.”

“나가서 먹어.”

“……아. 밥 잘 처먹고 있는데.”

성질을 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죽그릇과 숟가락만 달랑 챙겨 든 배도빈은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지 이세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가 한숨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이세정이 내 앞자리를 채웠다. 어쩐지 화난 얼굴이었다. 말은 않고 빤히 쳐다만 보는데, 나는 내가 어젯밤에 자면서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의아해졌다. 이세정이 내가 잠든 줄 알고 중간에 방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실수를 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퉁퉁 부은 손으로 죽만 줄기차게 저어댔다.

“회사 다녀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무슨 준비를요?”

이세정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목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내 집으로 데려가려고요. 여긴 불편할 것 같아서.”

나는 대꾸도 않고 뭉그적대었다. 말뿐이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가 이 집에서 이세정의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나는 괜찮아도, 어머니가 나를 보려고 하지 않을 텐데.

바쁘다는 듯 시계를 확인해놓고 이세정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죽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숟가락마저 가져가선 죽을 작게 펐다. 바람을 불어 식힌 죽을 내게 내밀었다. 죽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그 행동을 반복한 이세정이 손수 입을 닦아주었다. 동작에는 답지 않게 성급함이 있었다.

“짐 정리하기 전에 병원부터 가요.”

원래 검진 때문에 며칠에 한 번꼴로 아침마다 병원에 가곤 했으니까 지시는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분노에 잠겨있는 듯 목소리가 억눌려 있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세정은 시선을 그대로 내려 내 팔을 노려보았다.

“평생 병원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나는 아, 하고 팔을 감쌌다. 어제 피아노를 치는 나를 심상치 않은 눈길로 보던 그 아주머니께서 결국 고발을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비밀이 지켜지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가 상체를 웅크린 채 깁스한 손을 무안히 매만지자, 이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다란 눈매가 몹시 사나웠다.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로 군건지 들어나 볼까요?”

“…….”

“우채민 씨한테 내가 얼마나 우스운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어떤 점 때문에 내게 화가 났을까 속으로 추측해보았다. 단지 내가 다쳤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내 고통을 담보삼아 저를 겁박한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나빴던 걸까.

“목소리가 비싸네.”

“아…… 아닙니다.”

“멍청한 짓은 내 앞에서만 해요, 우채민 씨. 뒷수작으로 사람 빡치게 하지 말고.”

목소리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미 화가 난 상태에서 말까지 사납게 하려니까 더 분노가 치솟았는지, 이세정은 평소와 다르게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여과되지 않은 화를 쏟아냈다.

이세정의 분노에 단련되어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찬 눈길만으로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눈만 멍청히 끔뻑거렸다. 입술을 꾹 물었다가 눈 아래를 떨면서 문 입술을 풀었다.

“아…….”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날 것 그대로 터져 나왔다.

“아, 그, 그게…….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손이 너무 간지러워서…….”

막상 입을 여니까 오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마음이 커져서,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형 신경을 거슬리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제가 굳이 그래서 얻을 것도 없고……. 형이 손 때문에 화내실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제가 의도하고 그러겠어요. 정말 아니에요.”

내 조잡한 변명이 가소로운 모양이었다. 이세정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대는 다리를 꾹 쥔 채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정말로, 일부러 손을 다치게 한 건 아니에요.”

“우채민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비틀린 웃음기가 있었다.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세정이 테이블에 있는 포크를 들어서, 제 손등을 찔렀다.

“이게 일부러 그런 거고,”

세 줄로 움푹 팬 손등에 날이 더 깊숙이 박히기도 전에 빼내어, 손의 악력 때문에 구겨진 포크를 테이블에 던지듯 놓았다.

“이게 실수로 그런 거예요.”

“…….”

포크 끝에는 물론 피가 묻어 있었다. 목에서 소리가 걸렸다. 미친 건가? 말을 더 뱉기도 전에 눈물부터 떨어졌다.

“안 그래도 미쳐버리겠으니까 보태지 마요, 제발.”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다 떨어트렸다. 나도 정말 울고 싶지 않은데, 벼랑까지 떨어진 겁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울음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

‘이것도 일종의 자해예요. 안 하시는 게 좋겠죠.’

내 손을 치료해주며 담당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이었다.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자해는 나보다 더 정신 나가고, 겁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아까의 이세정처럼 말이다. 내 연주는 이세정이 한 짓에 비하면 훨씬 점잖은 일이었으니, 피아노 좀 친 것 가지고 여러 곳에서 소란스러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팔을 쳐다보았다. 붕대에 단단히 매여 있는 손을 앞뒤로 뒤집어보았다. 진통제를 맞아 이제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왠지 손 빼고 다 아픈 것 같다.

“뭐야. 이 굼벵인.”

목소리와 함께 급습한 배도빈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전과 다르게 노크도 없이 내 방에 쳐들어와 놓고는 버르장머리 없이 형이 왔는데 누워 있다며 혼을 냈다. 우리 대학엔 재수생들이 많기 때문에 한두 살 정도는 말 까고 지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기껏 나를 일으켜놓고 배도빈은 방 근처를 살피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나를 등지고 있으면서도 내 궁금증을 안다는 듯 배도빈은 여기에 문을 달 예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문을 달아야 할지 진지하게 살피는 모습이 꼭 시공업자 같았다.

“세정이 형이 여기 문 달 거라고 했어요?”

내 물음에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사모님이.”

“왜요?”

“너 어제 봤잖아.”

모든 궁금증을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굳이 더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눕혔다. 시트에 몸을 웅크린 채로 어떤 문을 달아야 할지 고민하는 배도빈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어젠 마냥 여유롭고 인자해 보였던 어머니의 발작이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그에 따른 후유증 때문일 것이다. 준비를 충분히 했기 때문에 눈이 완전히 어두워져도 평온할 수 있었다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그 어느 경우에라도 절망을 홀로 짊어질 수가 없다. 어머니의 말은 거짓이 아니지만, 최면에 가까운 말이었다. 원망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나 억누르는 거다. 왜냐하면, 아니 아마도, 눈을 어둡게 한 건 제 아들일 테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이세정이 사모님의 사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머니가 그런 표정으로 이세정의 방에 들렀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침실 입구 앞을 서성이던 배도빈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여기 회전문 달 거야.”

“어머니 다치면 어떡해요…….”

“그럼 회전문 전에 이쯤에다가 문 하나 더 달까.”

배도빈이 침실 밖으로 나가 복도 어디쯤을 가리켰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제가 불편해요.”

“어차피 너 오늘 세정이 집 갈 거잖아. 심심하면 놀러 갈 거니까 자리 잘 잡고 있어.”

“저 별로 재미없어요……. 차라리 여자 친구랑 노세요, 형.”

여자 친구란 말에 배도빈이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벌써 헤어졌는지 생각도 못 했단 얼굴이었다. 배도빈이든 지수든 여자를 잘만 갈아치우는 것 같다. 물론 지수의 경우엔 갈아치운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차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쨌거나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았으니까. 나도 좀만 주변에 관심을 가졌다면 인기가 많았을까? 이세정이 나더러 잘생겼다고 했으니 저들보다 인기가 많지 않았을까?

이세정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팔등으로 마른 눈가를 비벼댔다. 나는 지수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쯤 지수가 퇴원을 했을까 물어보니까 배도빈은 좁혀진 눈살을 풀며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기야 지수의 근황을 배도빈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시답잖은 물음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다행히 반갑지 않은 침묵이 찾아오기 전에, 아주머니가 배도빈을 불렀다. 아주머니는 배도빈을 데리고 가면서 나를 은근하게 곁눈질했다.

“계속 여기 계실 거죠?”

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눈치였다. 약속 시간까지는 방 안에 틀어박힐 예정이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중에 유명한 작곡가가 된다면 각기 다른 날 내린 빗소리를 녹음해서 10만 원에 팔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창조경제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돈도 벌고, 음악도 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로 만든 음악이 새삼 괜찮아 보였다.

이세정이 왔다는 소식에 음악 듣기를 중단하고 내 단출한 짐을 간단히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자, 휠체어를 탄 사모님과 곧장 맞닥트렸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내가 인사하기 전에 손가락 하나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대체 왜 나온 거냐는 듯 눈초리가 사나웠다. 아까 그 아주머니께서 왜 내게 그런 물음을 던졌던 것인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사모님을 지나쳐갔다. 그러나 옆에서 쫄래쫄래 걷고 있는 강아지는 도무지 나를 조용히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사모님에게 무슨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도우미 아주머니가 난감한 듯 답했다.

“막내 아드님 손님이 나오셨네요.”

“……채민 씨.”

“아, 안녕하세요.”

나는 멈추어 서서 이세정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썩 반갑지 않은 얼굴로 내 안부를 물었다. 나를 불편해하는 상대와 대화를 오래 이어갈 순 없었다. 나는 적당히 말을 끊고 눈치 있게 빠져주었다. 정원을 걸으며 마른 목울대에 힘을 주었다. 정원은 푹 젖은 가을처럼 고요했다. 나는 정원 깊숙한 곳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있는 배도빈을 발견하고 다가가려다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배도빈의 앞에 이세정이 서 있었다.

***

쿠페의 승차감이 좋았다. 조수석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긴 채 몸을 빳빳이 들고 있었다. 차내는 제습기 소리 말곤 고요했다. 졸음이 올만도 하건만 가슴이 바깥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가만있지 않아, 외려 땀이 고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슬금 옆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은 담배 대신 막대 사탕을 물고서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그렇게 소외 받았는데 얼마나 서러우시겠냐.’

이세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멋대로 그가 아까 전 배도빈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두고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어느 틈엔가 어머니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넌 안 와서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챙겨주시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일가친척들 시선 때문에 줄곧 호텔방에서만 지내시고, 결혼하는 며느리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스트레스가 오죽 심하셨겠어.’

나를 찾느라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 보호해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있었을 어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느냐고, 나무라는 목소리는 엉뚱하게도 나를 할퀴었다.

이세정의 어머니의 발작은 결코 예고되지 않은 수순이 아니었다. 마음은 몸과 다르게 씻어내기 어려운 곳이다. 훈련을 통해 비관을 완벽히 비워냈다고 말하다가도 금세 낙망하고야 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쌓일 만도 했다. 게다가 그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해줄 만한 사람이 곁에 없다면 발작까지 가는 것이야 시간문제였다. 이세정도 그런 어머니를 알았기 때문인지, 배도빈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의 잔류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았다.

“치료는 잘 받았어요?”

“뭐가…… 아, 손이요.”

나는 신경이 쏠리자마자 거짓말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내 팔보다야 이세정의 손등이 더 문제였다. 손목이나 팔 등 긴 옷을 입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만 상처를 냈던 전과 다르게 손등에 선명하게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운전대에 얹어진, 치료받지 않은 상처를 보자니 정말 미친 건가 싶었다. 자칫 힘줄 같은 것이 끊어지면 나처럼 손을 사용하지 못할 텐데 그런 걱정은 일절 안 하니 어쩌면 좋을까 싶었다.

이세정은 신호가 걸린 틈에 내게로 팔을 뻗어서, 깁스한 팔을 만지작거렸다. 손은 그대로 올라가 내 뒷목을 주물렀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팔이요, 아니면 뒷목이요? 이세정이 나름 힘을 주어 주무른 덕에 뒷목이 너무 당겨왔다. 내가 거북이처럼 고개를 숙이자, 이세정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제대로 치료받았어요? 상처 난 곳은 무리 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대꾸했다. 이렇게 부드럽게 물으면서도 언제 지나가는 죄 없는 차량을 박고서 화를 낼지 몰랐기에 눈치는 계속 살폈다. 눈길이 자꾸 그의 손등으로 향했다. 포크 질을 했던 당시를 떠올리자니 고통이 전이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난 아직도 우채민 씨가 이해가 안 돼요.”

운전대를 부드럽게 꺾으며 이세정이 운을 떼었다.

“심리학 관련해서 조언을 좀 구해봤어요. 그래서 우채민 씨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알고는 있어요. 다만 그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인지 의문이에요.”

“…….”

“서운하게 들리겠지만 심리 치료가 필요해요, 지금 상태론.”

“……저, 저를 정신병동에 가두겠다고요?”

“우채민 씨가 거길 왜 들어가요?”

내가 너무 꼬아 들었나. 놀란 가슴을 달래며 침을 삼켰다.

“안정될 때까지 나랑 같이 있어요.”

안정이니 뭐니, 자꾸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다 붙이니 굳이 병동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병자로 낙인찍힌 기분이다. 가려워 견딜 수 없어 연주를 한 나는 정신 나간 사람이고, 화난다고 제 손등을 포크로 찌른 그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인가. 눈썹을 문지르며 말없이 불만을 표출하던 나는 조그맣게 말했다.

“저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단 거예요?”

“제 심리가 불안정하다던가, 이런 오해들에 관해 하는 말이에요.”

“오해라고 생각해요?”

“……오해예요. 저는 단지, 제가…… 죄책감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그냥 그 때문에 잠깐 괴로웠던 것뿐이었어요.”

장 비서님에게 사례에 대한 말을 꺼내는 척, 도망가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지껄였다. 내 징징거림이 이세정에게 닿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세정이 나 대신 그 남자를 혼내줄 것을 알고 있었다.

손이 너무 아파서, 미워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런 주제에 이상해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이세정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장 비서님을 통해 음습하게 흘렸다. 욕실에서 이세정이 이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잔인한 행동을 한 건지 그저 역겹기만 했다. 내 잔인함은 비록 복수에서 나온 거라지만 이세정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이에 대해 말했더니 이세정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크게 당하면 복수심이 이는 게 당연한 거예요.”

그리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나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화가 나면 그대로 표출하고 눈에 거슬리면 사람을 해치는 것……. 내가 도망갔던 이유는 그의 폭력성 때문이었으므로, 이세정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사사한들 찝찝하고 불쾌하고 원망스럽기만 할 뿐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이세정의 방을 급습해, 내가 아닌 이세정을 향해 원망을 토해내던 어머니를 겪은 터라 나는 그를 책망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세정을 원망하는 대신 우울하게 나를 탓했다.

“형 생각은 알겠지만, 이건 제 문제예요. 그냥 제가 느끼기로는…… 제가 너무 나쁜 사람인 것 같아요.”

돌아보면 나는 사실 나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내 가족, 내 친구……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이세정이 처음 양형배와 양원에게 복수를 해주었을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놓고선 단지 신경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내 주변 사람을 해친 이세정에게 화를 냈다. 모순이라면 모순이었다.

이기적이란 말을 싫어한다. 그 말이 내게는 성격이 못되고 비뚠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채민이 쟤 좀 징그러워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누나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모나 보이지 않기 위해 연기했다. 이세정은 그 연기에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너는 사이코고, 나는 아니고. 너는 나쁘고, 나는 착하고.

비록 나를 복수 쪽으로 몰아가기는 했으나, 제 어머니를 위해 방문을 없앤 이세정이 어쩌면 나보다 나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였다면 본가의 방문을 꽁꽁 걸어 잠갔을 것이다. 열어두지 않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몇 단의 잠금장치를 이용해 단단히 봉했을 것이다. 나는 죄악감을 마주 보는 것이 너무 버겁고, 힘들고, 무섭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세정의 팔에 남은 흔적을 돌아보았다. 만약 내게 남아있는 죄악감을 온전히 마주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정말 괴로울 것 같았다.

***

이세정의 자택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사만 해놓고 쭉 본가에서 살다가 완전히 몸까지 옮겨간 건 최근의 일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구가 불편할 정도로 생략되어 있었다. 소파는 물론이거니와 여분의 침대 또한 없었다. 내 방문이 갑자기 정해진 일정이었으니 침대 들여놓을 시간조차 없었을 터였다. 나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말했다.

“……침대같이 써도 돼요.”

함께 침대에 누웠을 때,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이세정과 살 맞대고 단란하기에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남아있었지만, 침대가 하나밖에 없다면야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이세정은 별로 그러지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이랑 같이 못 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안다. 왜 나는 당연히도 이세정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처음에는 스킨십도 싫어했는데.

그래도 싫다는 감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터라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나를 몰아세웠던 그 싸늘함까지 와닿아 주눅이 들기도 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빤히 보던 이세정이 물었다.

“나랑 같이 자고 싶어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혹시 오해할까 봐 미소는 풀지 않고 대답했다. 문득 이세정이 묘하게 마주 웃더니 눈을 짓궂게 가늘였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일단 들어와요.”

이세정은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갔다. 본가의 이세정의 방, 그러니까 내가 아까까지 늘어져 있던 그 방이랑 구조나 가구 배치가 거의 비슷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문이 달려있다는 것뿐이었다. 아, 전시된 펭귄 인형과 테이블도 없었다. 그런데 테이블은 나 때문에 잠시 들여놓은 가구니까.

이세정은 내가 가져온 얼마 안 되는 짐을 정리했다. 노트북은 침대 위에 두었고, 지갑과 여권은 서랍 안에 넣었다. 짐은 그게 다였으니 금방 정리가 끝났다.

“저녁 먹었어요?”

이세정의 물음에 나는 목이 마르다고 동문서답했다. 주방을 알려주면 찾아가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보다 먼저 이세정이 나가 빨대를 꽂은 물잔을 들고 돌아왔다. 나를 침대에 앉히고 빨대를 손으로 고정해 내 입가에 들이댄다. 얌전히 물을 쪽쪽 빨아 마셨다. 목을 축이고 빨대를 혀로 밀어내자 이세정이 물 잔을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저녁은?”

“일찍 먹었습니다.”

“그래요. 이제 씻을래요?”

“아…… 네.”

순순히 답하면서도 당황했다. 나 더럽나? 이미 샤워를 한 상태이기도 했고 그 뒤로 땀도 흘리지 않아서 몸이 쾌적한 상태였다. 심지어 발 상태 또한 좋았다. 그렇지만 이세정의 눈에 깔끔하게 보이지 않는다면야 몇 번이고 씻어야 했다. 얼른 샤워실로 향하려다가 도중에 붙잡혔다.

“갈아입을 옷은 안 가져가요?”

이세정은 나를 끌고서 드레스룸으로 데려갔다. 되도록 편안 옷들이 모아져 있는 곳에서 나는 직접 옷을 골랐다. 무난하게 검은색을 골랐더니 이세정이 생각도 않고 넘겨주었다. 나는 이어 속옷 또한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 그대로 가져가려고 했더니만 이세정이 색감이 예쁜 빨간색 속옷을 대신 집어주었다.

“이게 더 어울려요.”

“아, 네…….”

나는 속옷을 팔에 걸쳤다. 빨간색은 한 번도 입어본 적 없었다. 어울린다고 했으니 일단 입어보고 거울에 비춰서, 이세정의 안목을 확인해볼 생각이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직진하여, 씻겨주겠다며 이세정이 따라오기 전에 은근슬쩍 문을 잠갔다. 달칵, 단단히 잠겼는지 확인하고 뒤를 돌았다.

그때였다.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바로 열려는데 붕대 때문에 미끄러워 잘 열리지 않았다. 내가 꾸물거리고 있자, 노크 소리가 거세졌다.

“우채민 씨.”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삼 초도 채 지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참을성이 저리 얄팍해진 것일까. 나는 지금 여는 중이라고 되뇌며 서둘러 문고리를 돌렸다. 드디어 잠금장치가 풀리자, 바깥쪽에서 잡아당겼는지 문짝이 신경질적으로 젖혀졌다.

“문…… 잠그지 말고 샤워해요. 안 훔쳐보니까.”

나는 대답하기에 앞서, 입을 벌린 채로 이세정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부어있는 손이 격한 노크 탓에 잔뜩 터져있었다. 심장이 막 뜀박질했다.

“형…… 병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병원이요?”

“아, 그…… 정신병원 말고, 그냥 병원이요.”

“정신병원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어요.”

표정없이 말한 이세정이 손가락을 구부려 제 손등을 쳐다보았다.

“아… 좀 아픈데.”

눈앞에서 손목을 그어놓고 아무렇지 않았던 그였다. 얼마나 아픈 건지 이세정은 약을 바르고 올 테니 샤워하고 있으라고 말하곤 뒤돌아갔다. 뒷모습이 까마득하게 멀어져서야 나는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나는 불편한 팔로 빠르게 옷을 벗고, 방수 커버를 입으로 물어 힘겹게 끼웠다. 욕조에 물을 채웠다. 모락모락 김을 뱉으며 채워지고 있는 욕조를 바라보았다. 이세정의 손이 눈에 선해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온도를 낮추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일사병에 걸린 것처럼 시선이 울렁거렸다. 두려움이나 설렘으로 뛰어본 적은 있지만, 이건 그보다 더 비정상적이었다. 성급하게 욕조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숙였다. 발광하는 심장은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결국 몇 분 안 있어 대충 몸만 닦고 나와서, 이세정을 찾았다. 이세정은 약을 바르기는커녕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벌써 다 씻었어요?”

“형 약 발라주고 씻으려고…….”

지긋한 눈길에는 의혹이 담겨있었다. 입술로 물고 있던 담배가 떼어지며 연기가 올랐다. 담배를 비벼 끈 이세정이 가까이 다가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눈을 접어 웃는 얼굴에, 홀린 것처럼 다가갔다.

“형 약 발라주려고?”

굳이 되물어보는 이세정의 맞은편에 죄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앉았다. 내미는 손을 잡으려고 다가갔다. 나보다 앞서 내 팔을 잡은 이세정이 물었다.

“어떻게 발라줄 거예요? 손이 이런데.”

“아…….”

“괜찮으니까 씻고 와요.”

기분이 좋은 듯 다정하게 말했지만 말마따나 다시 씻으러 갈 수 없었다. 아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일단 나왔으니까 온 김에 치료해주고 가고 싶었다. 나는 욕실로 돌아가는 척하며 약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상자를 본 이세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졌다.

“내가 하겠다고 했는데…….”

“그냥 잠깐만.”

“우채민 씨…… 나 팔 병신 아니에요.”

놀라 쳐다보았더니 이세정이 고개를 저었다. 단어를 다시 골라 말하겠다는 듯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이세정이 억눌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가 있어요. 손길이 싫은 게 아니라, 우채민 씨가 그 손으로 누굴 치료해주겠단 건지 황당해서 그래요.”

“…….”

“도망가 놓고 왜 날 걱정하는 건지 우습기도 하고….”

“아…….”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

이세정이 몸을 일으켰다. 내 등을 토닥여 걸으라고 말한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이세정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이세정은 욕실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는 내가 들어갈 때까지 지켜볼 거라는 양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우선 욕실에 들어가 문을 살짝만 닫아두었다.

욕조로 걸어가며 옷을 벗었다. 멍한 얼굴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도망가 놓고 자신을 걱정하는 일이 잘못된 거라는 말이 좀 충격적이었다. 이제껏 이세정의 속에 숨어 있던 온갖 짜증을 눈치챈 기분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나는 불안하게 이를 물었다.

어젯밤에 잠을 푹 못 자 알게 모르게 피곤이 누적되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잠에 들고 싶어 억지로 눈을 감고 있자니 금세 정신을 놓아버리게 된 것이거나. 실내 온도도 적당했고, 샤워를 해 몸도 노긋노긋해서, 나는 금방 잠에 들었다. 중간에 누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바람 같은 것을 가져다 대었으나 눈꺼풀이 무거워 쉬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꿈을 꿨는데, 온통 어둠 속이었다. 주변이 새카만 터라 사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불을 켜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위치는 없었고, 다만 세로로 가는 빛 한줄기가 어느 한 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빤히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빛 속에 눈을 들이댔다. 빛 속으로 우리 집의 복도가 일부 보였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실망하며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려서는 아무 곳에나 주저앉았다. 바닥에는 찬 물기가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잠에서 깨며 반사적으로 팔을 쥐었다. 깊은 물 속에 잠기고 있는 것처럼 거센 수압이 팔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아…….”

미처 다물지 못한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가고, 나는 팔을 잡고 버둥거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직 새벽이었다. 나는 발가락 끝을 둥글게 말고 오싹한 몸을 잠재우려고 애썼다. 침이 마르고, 허리가 비틀렸다. 나는 계속 침대 위를 구르다가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엉덩이와 머리가 바닥에 쿵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음이 제법 컸던 모양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세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은 다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서, 채민아, 하고 나를 흔든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 나는 이세정의 목에 팔을 감고 아프다고 울먹였다. 잘 못 알아들었는지 내 입술을 주시하던 이세정이 당혹스럽게 물었다.

“아프다고?”

“아, 아프, 아…….”

“잠시만.”

이세정은 굳은 얼굴로 부목을 댄 손을 빤히 확인했다. 나는 부목을 댄 손마저 이세정의 목에 두르고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우는 소리를 냈다. 이세정이 나를 안아 들었다.

결국 응급실에 갔다. 고통의 발병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의사는 내가 스트레스가 심해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스트레스. 아무 데나 갖다 붙여도 그럴듯한 핑곗거리다. 이세정은 의사의 말을 별로 귀 기울여 듣는 눈치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문득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땐 갇혔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간호받는 기분을 만끽할 새가 없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나는 한 번도 그런 식의 간호를 받아본 적 없었다. 걱정을 담은 눈길을 받아본 적도 거의 없었다.

“괜찮아요?”

내 옆에 앉아 연신 단정한 눈썹을 찌푸리던 이세정이 물었다.

“……예.”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예, 지금은 거의 괜찮아요.”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몇 안 될 텐데, 저 눈길은 도무지 다른 곳으로 향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부터 아팠어요?”

“모르겠습니다.”

꽤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실은 잘 모른다. 고통이야 이따금 찾아오는 것이니 첫 시작이라면 좀 더 오래전 이야기부터 꺼내야 했다. 흐지부지 대답한 말에 이세정은 추측하기 어려운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이제 보니 좀 이상한 표정이다. 단순히 나를 걱정한다기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섞여 있었다.

“정말….”

이세정은 무슨 말을 할 듯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는데, 내가 그랬어요?”

“……아니에요. 제가 집에만 있는데 무슨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우채민 씨,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이세정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끝끝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세정은 저 스스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는 듯했다. 이왕이면 아주 자잘한 잘못이라도 꺼내어 뜯어보다가, 문득 미안해져 나한테 남아있던 짜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가 생각하는 모습이 묘하게 만족스러워 이제 팔 따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쓴 미소를 지었더니, 그걸 본 이세정이 내 턱을 문질렀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침이 되어 응급실에서 다시 자택으로 옮겨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슬슬 눈꺼풀이 가라앉았다. 밤에 잠을 못 자 졸음이 오는 시점이었다. 나도 이렇게 피곤한데 이세정은 오죽할까. 조금 있다가 회사도 가야 할 텐데. 걱정을 담아 이세정을 바라보니,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눈을 맞추어줄 뿐이었다. 피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곤에 젖은 모습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출근 안 하십니까?”

아침부터 집을 방문한 장 비서님이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채근했다. 출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 준비는커녕 옷을 갈아입지 않은 모습에 상당히 답답한 듯 한쪽 발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이세정은 장 비서님의 손목을 끌어와 똑같이 시계를 확인했다.

“휴가 쓸까 하는데. 7일 정도.”

장 비서님이 입매를 비뚤게 기울였다. 잔소리가 당장에라도 쏟아질 법도 하건만 간신히 참아낸다. 대신 내게로 눈을 돌리면서 너 때문이구나? 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이세정이 갑자기 휴가를 쓸 줄 몰랐는데. 억울한 나머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장 비서님이 한숨을 쉬었다.

“앞으론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그럴게요.”

장 비서님은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장 비서님이 가자마자 나는 의아한 투로 이세정에게 물었다.

“…휴가 혹시 저 때문에 썼어요?”

“우채민 씨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지금.”

만약 집안일에 관하여 말한 거라면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이세정은 밥을 차리거나, 빨래를 돌리거나 하는 기본적인 일들을 할 수 있어 저리 말하는 것인가. 손 다친 나나, 손 안 다친 이세정이나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은데. 별로 티 낸 것도 아닌듯한데 이세정은 내 표정이 묻고 있는 의문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는다.

“졸려 보이는데, 잘래요?”

“아…… 네.”

응급실에서 잠을 제대로 못 자, 졸음이 오기는 했다. 나는 침대로 가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천천히 뒤따라온 이세정이 생각에 잠긴 듯 침대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며칠 전 실밥을 푼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몹시 다정했다.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뻘쭘함에 이불을 목까지 뒤집어썼더니 이세정이 이불을 치우고는 내 옆에 누웠다. 한 팔을 쭉 뻗어 손짓하는 것으로 보아 제 품으로 들어오라는 것 같았다.

“…….”

먼저 품을 내준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재빠르게 지우고는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이세정의 팔을 베고 눕자, 이세정이 팔꿈치를 굽혀서 나를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마른 침이 삼켜졌다. 나는 숨도 못 쉬고 그만 굳어버렸다.

그렇게 오 분쯤 지났을까. 나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부목을 댄 팔을 슬쩍 이세정의 가슴에 올려보았다. 이세정은 그걸 힐끔 보았을 뿐 별말이 없었다. 나는 몸을 주춤주춤 이세정에게 붙였다.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솔직히 말해서 엉엉 울며 전화를 걸 때까지만 해도 이세정이 싸늘하게 나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만나면 손부터 올릴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상기하고서도 말이다. 이세정이 나를 위해 했던 그 수많은 미친 짓을 사랑으로 치환해보자면, 내가 도망을 간대도 언제든 용서해줄 정도의 아량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으리라고 여겼었다.

예상외로 다시 만난 이세정은 서운할 정도로 모질었지만, 내가 아파하는 것이 보기에 안 좋았던 모양인지 다시 품을 내주는 모습에 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묘한 안심이 들었다. 이세정은 냉정하진 못하는 사람이다. 제 어머니의 발작을 외면하지 않고, 배도빈을 곁에 두고 있고,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잘해준다. 마치 우리 아버지처럼.

나는 이세정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꿈틀거렸다. 이세정이 그만 움직이라는 듯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며 나를 밀어낼까 봐 나는 그대로 꼼짝 않고 눈을 감았다. 헛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기침이 몇 번 나왔다.

***

늦은 아침엔 가지 요리를 먹었다. 뭘 좋아하냐고 묻기에 라면이랑 가지 탕수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처음 보는 젊은 남자분이 빠르게 가지 샐러드와 가지 탕수를 만들어준 것이다. 남자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런 건지, 푹 잔 덕에 입맛이 좋았던 건지 막 일어난 것치고 음식이 잘 들어갔다. 포크로 탕수를 찍은 이세정이 식탁 너머로 팔을 뻗어 내게 건넸다. 내가 받아먹으며 맛있다고 한마디 했더니 두 번째 탕수는 제 입에 넣었다.

“……맛있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니 눈치 볼 일은 아니었지만, 맛있다고 한 말에 왠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다. 이세정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술을 마셨는데, 정오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도수가 세보였다.

“도빈이 형은 술 없으면 밥 못 먹는대요.”

나는 그렇게 운을 띄우며 병을 께름칙하게 쳐다보았다. 한 모금 더 입에 머금은 이세정이 슬쩍 미소를 띠었다.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딱히 기억은 안 나고…….”

“걔는 알코올 중독자고, 나는 그냥 먹는 거예요.”

배도빈을 욕하는 말이 꽤나 웃겼다. 내가 소리 내어 웃었더니 이세정이 가지를 건넸다. 나는 입으로 받아먹으며 다시 한번 웃음을 삼켰다.

“둘 차이가 뭐예요?”

“도빈이는 못 마시면 손발을 떨고, 나는 못 마시면 아쉬워하죠.”

“뭔가…… 도빈 형이랑 지수랑 잘 맞을 것 같아요.”

지수는 사람을 가려가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양형배였대도 처음 몇 분만 불퉁하게 앉아있을 뿐 금세 희희낙락 소맥을 말아주겠다고 외쳐댔을 터였다. 둘의 조합이 괜찮은 것 같아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단순히 눈썹을 들어 올린 것뿐인 이세정의 작은 동작에 입술을 끌어모았다. 식탁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나는 샐러드를 우물우물 씹으며 이세정의 눈치를 살폈다. 적당한 때에 물 잔을 미뤄준 이세정을 다시금 힐끔 살펴본 나는 빨대를 빨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지수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상대방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오래도록 머뭇거리다가 꺼낸 이야기에 이세정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못 알아차린 듯 의문을 표했다.

“지수랑 저랑 닮은 점이 꽤 있어요. 이야기 들으시면…….”

“채민 씨를 더 잘 알게 돼요?”

“……아마도.”

이세정이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가 닮았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 설명해줄래요?”

“일단…….”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떠오르는 구석이 없었다. 잠자코 기다려주던 이세정이 우선 일어나자며 나를 욕실로 데려갔다. 이세정은 나를 앞에 세우고, 칫솔에 치약을 묻혔다. 칫솔 위로 적당히 짜내어진 치약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올랐다.

“지수랑 저랑 둘 다 솔이 다 덮일 만큼 치약을 듬뿍 짭니다.”

이세정이 주춤 멈추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내 턱을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느리게 내 입술을 훑었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 다물어진 이가 벌어지며 단단한 칫솔이 밀려들어 왔다. 둥근 혀가 뒤로 빼 내어졌다. 양치질까지 대신해 줄은 생각도 못 해 당혹한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 벌려볼래요?”

그렇게 물은 이세정이 내 턱을 쥔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내 의지인지 아닌지 빠르게 입술이 더욱 열렸다.

“우채민 씬 입이 작아서, 조금 더 벌려야 돼요.”

“이게 테테치에요.”

“이게 최대예요?”

“네.”

부족한가 싶어 입을 벌린 상태에서 양옆으로 쭉 찢었다. 얼굴이 우습게 변했는지 이세정의 입술이 얼마간 호선을 띄웠다. 이세정이 내 턱을 더욱 들어 올리고는 다시 양치질에 열중했다. 치약이 자꾸 목 뒤로 넘어갈 듯했다. 삼키지 않으려고 조마조마하며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잘생겼다. 할 줄 아는 언어가 그뿐이라는 듯 나오는 것들이라곤 죄다 단순한 감상이다. 그의 길고 긴 속눈썹…… 하며 유치한 언어 몇 자 읊을 만도 하건만 쳐다보고 있으면 하염없이 빠져서 세세한 곳까지는 뜯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눈만 본대도 일렁거렸다. 심장이 너무 뛰어 가슴 한쪽이 찌를 듯이 아팠다.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의 얼굴을 더듬으며 양치질을 시켜주던 기억이다. 그땐 특별히 드는 감정이 없어 어떠한 사고도 하지 않고 넘어갔었다. 이제 와 다시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당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오롯이 다정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애정을 받는 어머니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반대로, 이세정이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폭력을 받던 나 같은 기분이었을까. 상황이 전복된 지금, 놀랍게도 나는 이 상황에 거부감이 없었다. 분명 피해자로서 경험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다정함을 받는 당사자가 되어보니 피해를 받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 같은 것은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전의 그 이기적인 애로 돌아갈 것 같아 겁이 났다. 비극적 결말을 초래했던 내 비뚤어진 마음이 드러나서, 모두가 나를 떠날 것 같아 무서웠다.

***

객관적으로 봐도 이 방은 너무 휑한 것 같았다. 침대와 협탁 그리고 조명. 이세정의 방을 이루고 있는 전부이다. 나는 창가 옆을 서성이다가 뒤로 조금 물러났다. 바닥을 바라보며 가상의 물건을 하나 만들어냈다. 허공에 대충 삐뚤삐뚤한 네모를 그렸다. 이쯤에 뭘 두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인형도 이곳으로 옮겨올까요?”

내 옆으로 다가온 이세정이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 유리관 인형을 둘 자리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채민 씨 집착 같은 거 있죠.”

“아, 아니요.”

“다른 데 쓰지 말고, 나한테 다 주면 안 되나.”

그렇게 말하며 이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도 들어있었고 어설픈 애교도 있었지만, 결코 연약해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깔며 조그맣게 말했다.

“진짜 없습니다. 그냥 본 거예요.”

“그냥 본 게 아닌데.”

“……저 어렸을 때요. 여섯 살이었나? 나이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갑작스럽게 서두를 떼자 이세정이 나를 깔아보았다.

“엄청 아낀다고 생각했던 비디오가 있었는데, 그걸 어머니가 밟아 넘어져가지고 아버지가 싹 다 버렸거든요? 근데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어요.”

“그 비디오 구해달라고 떼쓰는 거예요?”

“아, 아니… 꼬아 듣지 마세요……. 그냥 제 애정에 집착은 기반 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펭귄 다큐멘터리를 즐겨볼 뿐이지 아이템에 관해 수집욕이 있지는 않다. 다만 창가 옆자리가 너무 허전하여 장식이 있으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어떤 비디온데요?”

“펭귄이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아가는 내용이에요. 다큐멘터리랑 다르게 집이 있고, 대신 적은 없고…….”

어떤 내용인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지 이세정은 가늠해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건가 했더니 애니메이션 제목을 물어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제목을 말해주면서도 심장을 지진처럼 떨어댔다. 허투루 물어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제목을 들은 이세정은 구해올 테니 같이 볼까 하고 제안했다.

“아… 보고 싶으세요?”

“기대하고 있어요. 우채민 씨 표정이 좋아서.”

“아….”

비디오를 버린 이후로 그에 대해 한 번도 상기해본 적 없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물건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쓸모없는 감정 소모처럼 느껴졌던 까닭도 있지만, 그보단 그때의 우울함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비디오는 사실 내 손으로 갖다 버렸다. 비디오를 본 뒤 거실에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걸 어머니가 밟아 크게 넘어졌다. 나는 화가 난 아버지를 뒤로하고 비디오를 한 움큼씩 품에 안아 바깥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야 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번째 책임이었다.

애니메이션은 오후쯤에 도착했다. 마치 한 세트라는 양 TV와 소파도 도착했다. 덕분에 소파에 앉아 큰 화면으로 애니메이션을 관람할 수 있었다. 설치 기사들이 가자마자 재생 버튼을 누른 나는 옛날 것임에도 결코 나쁘지 않은 화질에 좀 놀랐다. 두 손으로 어렵사리 쥐고 있던 리모컨이 쑥 빠져나갔다. 리모컨을 옆에 잘 둔 이세정이 내 팔을 치우곤 어깨를 감싸 안았다.

화면에 제목이 떠올랐다. 이어 머리카락 없는 동물들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였다.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물속으로 뛰어든다. 나는 무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고 있다가 내 턱을 붙잡은 이세정 쪽으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이세정은 내 턱을 닫아주곤 장난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집중이 안 되기 시작했다. 머리 없는 동물들이 싸움질을 시작했으나 시선이 자꾸 화면을 비껴갔다. 누군가와 이걸 같이 보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더군다나 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자 두 명이서.

화면을 권태롭게 쳐다보던 이세정이 문득 눈썹을 들어 올렸다. 궁금한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우채민 씨.”

이세정이 쫑알쫑알 떠들어대는 놈들을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영어도, 불어도, 독어도, 스페인이나 터키 쪽도 아니고.”

“아…….”

“그리고 c언어도 아니고.”

“예.”

“뭘까요, 저게.”

“옹알옹알… 거리는…….”

“아직 한 살이래요?”

나는 당황했다. 저 동물들은 사람의 언어를 할 줄 모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옹알이 같은 그들의 말을 하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TV 속 다른 동물들이 이따금 사람의 언어를 하기는 했지만, 이 프로는 언어 고증이 확실한데 어쩌겠는가. 남의 옹알이나 보고 앉아있는 이 상황이 웃겼던 걸까. 언어의 정체를 알게 된 이세정이 놀리듯 물었다.

“우채민 씨는 몇 살?”

내가 무안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자, 이세정이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털 없는 짐승들은 매끄러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위험한 곳으로 올라가다가 지구 온난화 때문에 뚝뚝 떨어지는 얼음에 갇힌다. 어릴 때 봤던 감정은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저 비슷한 경험이 떠오른 탓에 나도 모르게 되감기 해서 얼음 안에 갇힌 동물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내 볼을 문지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과일 먹을래요?”

“……집중해서 보다가 먹으면 안 될까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이세정이 우스워했다.

“우채민 씨가 집중해야 하는 건 여기에 나밖에 없는데?”

“……아, 네. 먹고 싶어요.”

“가져올게요.”

일어나 가져온 것은 껍질이 싹 벗겨진 복숭아였다. 복숭아를 보자마자 한번 놀라고, 포크를 보고 두 번 놀랐지만 마치 안 놀란 척 연기했다. 물론 내 연기력을 형편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마, 맛있어 보여서.”

나는 초조하게 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벌렸다. 포크로 복숭아를 찍은 이세정이 입을 벌리고 있는 나를 보곤 맹랑하다는 듯 눈썹을 치켰다. 당연히 먹여주겠거니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나간 듯하다. 내가 입을 다물고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리자, 이세정이 과일을 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복숭아를 입에 물며 포크를 달라고 손을 뻗었다. 이세정은 제 쪽으로 뻗은 내 손을 피했다.

“포크 잘못 사용했다가 다치면 어떡해요.”

형이 갖고 있는 게 더 위험한데…….

“여기에 찔리면 피아노보다 더 아플 거예요.”

“피아노는…… 이제 연주 안 하겠습니다.”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다면 내가 대신 쳐줄게요.”

습관적으로 깁스한 팔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놀라 물었다.

“칠 줄 아세요?”

“아니요. 배워야지.”

“아…….”

“좋아하지 않지만, 만약 듣고 싶다면 열심히 배워볼게요.”

이세정이 이왕이면 어려운 곡으로 쳐보고 싶다며, 개구지게 웃었다. 솔직히 그런 친절은 내게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 중 건반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아버지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말, 취소하라는 표정인데….”

“아, 아니에요……. 그보다 이것 좀.”

화면은 펭귄이 얼음에 갇힌 그대로 멈추어져 있었다. 리모컨이 작다 보니 버튼이 쉬이 눌리지가 않았다. 나는 도움을 청하며 이세정에게 리모컨을 건넸다. 잠시 뒤 주인공 캐릭터의 깍깍대는 울음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나는 혹시 이세정이 펭귄이 왜 울고 있는지 잊었을까 봐 굳이 설명해주었다.

“얼음에 갇혀서 우는 장면이에요.”

“얼음이 부서지면 깔려 죽겠네요.”

“예. 그것도 있고, 갇혀서 무서운 것 같아요.”

“왜 갇혀서 무서워요?”

“……갇히면 무섭죠. 저도 어디 갇히면 무서운데.”

“갇힌 적 있었어요?”

이세정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니,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야 했다.

“몇 년 전에 승강기가 고장 나서 갇혔던 적이 있는데 그땐 당장 생사를 장담할 수 없어 무서웠어요. 추락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벌 받느라 화장실에 갇혔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단지 깜깜하고 답답해서 무서웠어요.”

말하면서, 천천히 변화되는 상대의 표정을 관찰했다. 나는 복숭아 하나를 오물오물 씹으며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비틀었다가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이세정은 어느새 화면으로 눈을 돌려 얼음 안에서 구조된 펭귄을 보고 있었다. 나는 고민을 많이 한 것치고 가벼운 투로 몇 마디 붙였다.

“그런데 형이,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겁을 느끼는 기준은 다 다르니까.”

“누가 벌줬어요?”

“예?”

이세정은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누가 벌줬다며.”

“벌을 받은 게 아니라. 그건 실수로 한 말이고. 그냥 그땐 역지사지해보느라 들어간 거예요. 제가 좀… 잘못한 게 많아서…….”

“무슨 잘못을 했어요?”

“철, 없고 못되고…… 그런 애들이 할만한.”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뻘쭘하게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을 제지하려는지 내 두 팔 사이를 가른 이세정이 내 손을 붙잡았다. 문득 이세정의 팔에 조각되어있는 흉터들이 만져졌다. 이세정은 내가 깁스 사이로 삐져나온 손가락으로 제 흉터를 만지든가 말든가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레이저 치료는 못 해주더라도 약이라도 발라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뭘 감당하기에는 어린 나이이다. 뭐, 나쁜 일을 의연하게 감당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나이는 둘째 치더라도 스스로 자해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우울감이나 절망감의 정도가 본인의 정신력에서 오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그 자신에겐 없을 텐데.

나는 눈치만 살피다가 이세정의 어깨에 조심히 머리를 기댔다. 단단한 어깨는 딱딱해서 불편하기 그지없었으나 그쪽에서 내 어깨를 안아 끌어당겨 주니 나름 기댈만했다. 이세정이 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손은 점점 올라와 턱 주변에서 멈추어 서서 또다시 주물럭거렸다. 뺨과 턱, 그리고 목덜미를 슬슬 매만지더니 다시 턱을 붙잡았다. 어깨에 올라 있던 머리가 떼어지고 내 턱이 이세정 쪽으로 돌려졌다. 턱 주변을 부드럽게 만져대는 손길은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이세정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어쩌면 호들갑스럽게 비춰질 정도로 눈꺼풀을 끔뻑거리다가 코가 살짝 닿았을 즈음 고개를 돌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이세정이 불쑥 웃었다.

“야.”

갑작스러운 반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이세정이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자마자 뒤통수를 끌어당긴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에 힘을 풀고 눈을 꾹 감았다.

***

샤워는 조금, 아주 조금 개운치 못했다. 전과 다르게 옷을 입은 상태로 이세정은 머리만 감겨주었다. 제 나름대로 부드럽게 한다고 한 것 같으나 숍 직원들이 얼마나 능숙하게 머리를 감겨주었는지 깨닫는 계기만 되었다. 나는 몇 번이고 샴푸가 침투한 눈을 꾹꾹 짜내듯이 깜빡거렸다. 욕실에서 차마 말은 못하고 얼마나 고통을 삼켰는지 모른다.

몸을 마저 씻고 방으로 들어오니 이세정은 없었다. 나는 이세정을 찾아 천천히 집 안을 거닐었다. 저녁이라 그런지 집 안엔 고요가 끼어있었다. 이 넓은 집 안에 나 혼자 있다는 것은 꽤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당장 거실로 향하려다 위층으로 가는 계단이 눈에 보여 홀린 듯이 걸음을 틀었다.

위층에는 바이크 세 대 정도가 전시되어 있었다. 내 눈썰미로는 이것이 얼마나 비싼 바이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아끼는 것들만 우선적으로 가져온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허투루 튜닝하지 않았다는 듯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나는 바이크를 조금 더 구경해보다가 뒤쪽으로 넘어가 어수선하게 엎어진 물건을 바로 일으켰다.

아, 책이었다.

책을 따라가다 보니 책장이 나왔다. 저 사람은 책을 안 읽을 사람, 저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은 사람……. 당장 나조차도 책과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기에 사람을 그런 식으로 판단해 본 적은 없지만, 이세정의 집에 책이 있다는 것에 놀라움이 일었다. 나는 일단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아래층 침실로 가져갔다. 이걸 정말 읽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침실엔 여전히 이세정이 없었다. 직접 찾아볼 셈으로 거실로 나가니, 사람보다도 옅은 연기가 먼저 나를 덮쳤다.

나는 거실 소파에 늘어진 이세정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간간이 휴대폰에 낮은 목소리를 흘린다. 찌푸리는 눈썹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것이 거슬리는지 이따금 앞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자선사업은 세금 떼어먹을 때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심성이 그리 고우시니 비서 일은 못 하시겠어요.”

목소리에 짜증이 끼어있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이세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알았어요. 낯짝이나 보죠.”

시선이 정면에서 부딪히자, 이세정이 천천히 팔을 흔들어 연기를 흩어냈다.

“샤워 다 했어요?”

“…네.”

“안 추워요?”

이세정은 전화를 끊고 나를 침실로 데려갔다. 두 어깨를 잡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여 데려갔는데, 왼쪽 어깨에 닿은 감각이 딱딱하여 확인해보았더니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집에 전화를 안 한 지 시간이 꽤 되었다. 아무리 누나가 이런 방면으론 무심하다고 하나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걱정 하나 안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연락을 하려면 휴대폰이 필요했다. 노트북으로 메신저를 깔아 연락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인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냥 당당히 달라고 할까 말까 고민했다.

“책은 뭐예요?”

침대에 엎어져 있는 책을 보며 이세정이 물었다.

“이거 위층에서 가져온 건데……. 책 읽으시냐고 물어보려고…….”

“아. 민망하네. 최근엔 안 읽는데.”

이세정이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볼래요?”

침대에 앉은 이세정이 옆으로 오라고 고갯짓했다. 나는 침대 끝에 무릎을 대고 이세정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서, 그와 같은 방향으로 앉았다. 어깨가 살며시 닿았다. 기대도 될까. 기대도 되겠지. 나는 어깨에 기대면서도, 혹 이세정이 나를 불편하게 여길까 봐 목에 힘을 주었다. 이세정은 내가 기댄 줄도 모를 것이다.

상처가 있어도 고운 손이 책을 고요하게 넘겼다. 물론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물었다.

“지금은 안 읽는다 했어도, 그전에는 자주 보셨어요?”

이세정은 앞 페이지를 넘겼다가 뒤 페이지를 넘겼다가,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말했다.

“집에 오면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할 만한 걸 찾아야 했어요.”

“적성엔 맞으셨어요?”

“뭐든 지속하면 적성이 되는 거죠.”

이세정은 책을 다시 첫 페이지로 넘겼다. 여전히 집중이 안 되어 장을 넘기는 이세정의 손만 들여다보았다. 피아노를 치면 예쁠 손이다. 나는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피아노를 치면 예쁜 손이었다. 지금은 유리 때문에 망가졌겠지만 아무튼 그전에는 그랬다.

낫겠지? 반쯤은 내가 자처한 일인데도 어쩔 수 없이 후회가 들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몸을 웅크린 상태로 이세정 쪽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이세정의 어깨에 내 머리가 닿았다. 곧게 펼쳐져 있던 책이 흔들렸다.

책이 바닥으로 던져졌다. 이세정은 내 가슴을 안아 고스란히 제 앞으로 데려와선, 품에 넣었다. 기분 나쁘게 뛰어대는 심장 부근에 손바닥을 올려두고 조심스럽게 토닥거린다. 내가 등을 기댄 탓에 내 목덜미에 그의 코가 닿았다. 이세정은 어깨 근처를 입술로 살짝 짓이기며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나랑 이렇게 안고 있어요?”

“…….”

“언제까지?”

“한 시간만…….”

“내가 그렇게 좋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세정은 다시 가슴을 토닥였다. 손이 부드럽게 내려와 배 부근을 쓰다듬었다. 밥을 많이 먹지 않아 배가 나와 있지는 않았다. 다만 긴장 때문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조금 더 내려와 아랫배를 지분거렸다.

“그럼 왜 도망간 거지?”

세우고 있던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도망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 당장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외면하듯 고개를 비틀었다. 코웃음을 친 이세정이 느긋하게 말을 돌렸다.

“내가 왜 반했는지 알려줄까요?”

나는 참고 있던 호흡을 떨어트리며 즉시 뒤를 돌아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예?”

“종이 쥐고 울고 있었어요.”

“…….”

“집 근처에서. 무슨 잘못을 했길래 울고 있었어요?”

종이? 집 근처? 울어? 나는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세정이 힌트를 더해주었다.

“종이엔 우채민 씨가 그려져 있었어요. 우채민 씨 맞나. 아마 맞을걸.”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목 끝에서 떨려댔다. 기억은 흐려졌다가 단번에 선명해져 나를 옥죄었다. 어떤 기억을 말하는 건지 거짓말처럼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다만 당혹스러운 것은 그 옆에 이세정이 있었냐는 거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게 하면 기억이라도 난다는 것처럼 아주 필사적이었다.

“기억났어요?”

나는 눈을 가늘인 상태에서 인상까지 찌푸렸다.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누가 뱀처럼 속삭였다.

‘뭘 잘못했는데?’

아…….

나는 팔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기억은 난다. 나는 울고 있었고, 옆에 그로 추정되는 누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안 해준 답변을 지금이라고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더니, 이세정이 혹할 만한 제안을 했다.

“말해주면 내 이야기 해줄게.”

***

검진을 마치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호에 걸린 동안, 이세정은 운전대 위에 손끝을 부딪쳤다. 예전부터 해오던 습관이었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지 그 모양 그대로 제 품 속에 손을 넣었다. 담배 케이스를 꺼낸 이세정은 한 개비 밀어 내 쪽으로 건넸다가 나를 힐끔 보곤 도로 집어넣었다. 마침 담배가 고팠던 나는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

“환자한테 흡연은 권유하고 싶지 않아요.”

“아…….”

“줄까요, 그냥?”

“주시면 좋죠.”

도중에 말을 멈추고 도로에 뛰어든 새 두 마리를 보았다. 운전을 하던 이세정은 분명 녹색 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중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새가 다시 날아올라서야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정말 평범하게 이루어진 장면이었는데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조심히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왜요?”

“예?”

“뭐가 예?”

“…….”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호선을 그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더니 이세정이 담배 케이스를 마저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막대 사탕을 꺼내선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사탕 하나는 나 주고, 두 번째는 제 입에 넣었다. 입안에 포도 향이 달게 찼다. 나는 뺨을 볼록하게 만들고 차창으로 눈을 돌렸다.

***

휴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유리 밖으로 비치는 하늘엔 볕은 없고 오직 구름만 끼어있었다. 아래로 내려앉은 도시 불빛은 유난히 어둑어둑했다. 바깥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져온 듯, 집 안도 종일 우중충하기만 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이세정이 집 안에 있는 커튼과 블라인드를 죄다 내려버린 탓일지도 몰랐다.

불을 켜도 어두운 실내에서 이세정과 막대 과자로 탑을 쌓았다. 가슴 높이까지 올라간 과자 탑은 균형이 잘 잡혀 흔들리지도 않았다. 비 오기 직전 예민해지는 동물처럼 딱딱한 얼굴이던 이세정은 마찬가지로 막대 과자를 하나 올리면서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테이블에 두 팔을 곱게 올린 채 과자를 입에 물었다. 입으로 머금어 탑 위에 올렸다.

그러나 그저 탑을 높게 올리는 것이 룰의 전부인 게임 특성상 차례는 금방 돌아왔고, 돌아올수록 탑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나는 가슴 높이에서 목 높이, 목 높이에서 입술 높이까지 올라가는 탑이 힘겨워 계속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과자 하나 올려보겠다고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세정이 이 게임에 패널티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문득 제안했다.

“입으로 물어서 날 줘요. 그러면 내가 대신 올려줄게요.”

“그럼 게임이 안 되는데요.”

“게임에 내기라도 걸었어요?”

“…전 건 줄 알았습니다. 이거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거.”

지나가는 투였으나 아까 이긴 사람에겐 뭘 해주는 거냐고 먼저 묻지 않았던가. 지수와 내기 게임을 하도 많이 한 터라 나는 그게 당연히 내기를 전제하고 물은 말이겠거니 싶었다. 이세정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떠 불편함을 표출했다.

“또 무슨 소원을 빌려고요.”

“그걸 미리 말해주면…….”

재미가 없는데. 속삭이듯 끝맺은 내 말에 이세정이 네모나고 긴 과자를 만지작거렸다. 이세정은 이내 과자를 탑으로 가져가 끝으로 툭 건드렸다. 공들여 만든 탑이 모조리 무너져버렸다.

“이제 어떻게 되는데?”

“…….”

“소원이 뭐예요?”

소원에 목숨이라도 걸었나. 이세정은 꼭 내가 소원만 언급하면 궁금해서 안달하곤 했다. 뜸을 들인대도 달리 이득이 없을 것 같아 나는 테이블 옆에 곱게 놓인 이세정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누나한테 전화하고 싶습니다.”

이세정은 흩어져 있는 과자를 하나하나 가운데로 모으며 내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눈썹은 어쩐지 비딱한 내면을 대변하는 것도 같았다. 들어주겠지? 조마조마하게 반응을 지켜보면서도 왜인지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왜 난 가족한테 연락하는 것조차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누나 번호 불러줄래요?”

이세정이 휴대폰을 끌어왔다.

“예?”

놀라다 못해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순순하게 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망가고, 다쳐오고, 자해하고, 이런 것들에 지쳐버렸나. 아니면 날씨가 궂어 맛이 간 상태인가. 나는 팔을 쭉 뻗어 이세정의 뺨을 더듬거리다가 의아한 눈빛에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누나의 번호를 불러주었다.

휴대폰에 번호를 받아 적은 이세정이 지체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방에 가서 혼자 통화하고 싶었지만, 이세정은 내게 건네주지 않고 스피커로 변환시켰다. 연결 신호음이 적나라하게 울렸다. 통화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 듣겠다는 거였다. 덕분에 나는 통화음이 끊기기 직전까지 어떤 식으로 순화하여 말해야 할까 골머리를 앓았다.

한참 있어 연결 음이 끊겼다. 숨과 함께 입술을 연 나는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설기도 한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얼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메시지였다.

“다시 한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세정은 군말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누나는 받지 않았다.

“바쁜가 봅니다.”

야근을 한다면 아직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두 통이나 했으니 부재중 전화를 보고 나중에라도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 내가 미련 섞인 눈으로 휴대폰을 힐끔거리자 이세정이 다정하게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전화 오면 알려줄게요.”

만들어진 것처럼 지어진 미소가 갑자기 들린 후두두 소리에 반동하듯 거두어졌다. 불쾌하게 어둡기만 하던 하늘에서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박이 내리는 것처럼 비는 거칠게 창을 두드렸다. 창을 닫고 온 이세정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늘어진 물뱀처럼 테이블에 웅크린다. 적당히 싫은 척했으면 모른 체 했을 텐데, 이건 뭐 비가 몹시 싫으니까 알아달라는 투정이 아닌가.

“비가 왜 싫으세요?”

이세정이 원하는 물음을 던져주며, 일전에도 해본 적 있는 질문인 것 같아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가운 테이블에 뺨을 댄 이세정이 답했다.

“비 오는 날 어머니가 내게 세뇌한 게 있어요. 그 기억이 불쾌해서.”

순순히 내놓은 대답은 직설적이고도 아리송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우채민 씨 이야기는 안 하고, 내 이야기만 들을 거예요?”

“…….”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에요. 가끔 날 안타깝게 보던데, 그런 징그러운 종류도 아니고.”

말문이 막혔다. 이따금 이세정의 상처를 바라보며 그가 가지고 있을 상처에 대해 가늠해본 바가 있었다. 이세정도 힘겨운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신체 손상은 비교도 안 되는 심리적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당혹스럽게 바라보자, 이세정이 테이블에서 뺨을 떼고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고 들어갈래요?”

“네?”

“더 놀고 싶다면, 나랑 침대에서 놀아요.”

침대에서 놀자는 말의 의도를 뜯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세정에게 다른 엄한 뜻은 없을 테니까. 나는 얌전하게 따라나섰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이세정이 머리를 말려주었다. 더운 바람이 부드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손길이 상당히 다정하여, 자꾸 뺨을 비볐더니 나를 슬슬 뒤로 끌고 가 침대에 앉혔다. 그대로 나를 깔아본 이세정은 이번에는 앞머리를 문질렀다.

“다 말랐어요.”

깜빡 잠에 빠질 것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있기를 한참, 드라이어 소리가 멈추었다. 단단한 팔에 허리가 감싸인 나는 힘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이세정의 얼굴이 있었다. 이세정은 내가 입고 있는 가운을 만지작거리더니 매여 있던 리본을 잡아당겼다. 줄이 쑥 풀리고 감추어 있던 속살이 드러났다. 양쪽 어깨를 잡아 가운을 벗겨 낸 이세정이 침대에 곱게 개어있는 반팔티를 들었다.

“팔 들어볼래요?”

우선 내 두 팔을 꿴 뒤 머리 쪽을 잡아당겨 옷을 씌웠다. 티가 쑥 말려 들어가 배 아래로 내려왔다. 다시 침대에 털썩 앉으니, 이세정은 이번에는 반바지를 다리에 차례로 꿰어주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이세정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안 귀찮으세요?”

안 귀찮다고 말할 것을 알면서 또 그리 물었다. 사실 한 번쯤은 그냥, 묻고 싶은 말이었다. 병원에 강제 입원시켜두고 나를 수고스럽게 돌봐주던 이세정에게.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에게. 비서로서의 책무 이외의 것들을 케어하고 있는 장 비서님에게.

누군가를 세심하게 돌보는 일이 생각보다 더 귀찮고 힘든 일임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이따금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가족인데도 그랬다. 가족인데도.

“왜? 부담스러워서 또 도망가고 싶어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해요.”

이세정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트레이닝 바지를 허리까지 올리며 단정하게 정돈해주었다.

“내가 좋다고 하면 좋은 거예요.”

“…….”

형의 오만함이 부러웠다. 그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오롯한 집착이 부러웠고, 가지고 있는 사랑이 부러웠다. 나도 형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악한 자가 되고 싶었다.

샤워가 개운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옷까지 갖추어 입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발을 교차해 흔들려다 자꾸 바닥을 긁는 발 때문에 그냥 침대로 올라갔다. 이세정은 드라이어와 가운만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내 옆에 앉았다.

“아직 누나한테 연락 없어요?”

나는 이세정이 쥐고 있는 휴대폰을 보며 물었다. 이세정이 휴대폰을 힐끔 보곤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가끔 모르는 번호라며 안 받을 때가 있는데……. 문자 한 통 남겨도 될까요?”

이세정은 휴대폰을 느리게 쥐었다가 풀며 뜸을 들였다. 귀찮게 굴어 짜증이 난 건가 싶었는데, 얼마 안 있어 메시지 함에 들어가 내가 원하는 대로 문자를 보내주었다.

“……지수한테 통화 한 통 해도 돼요?”

이번에도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세정은 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꾹 눌러 깜빡이더니 표정과는 다르게 또 순순히 휴대폰을 켰다.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어 도리어 어색할 정도였다. 나는 지수의 번호를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마지막 숫자를 누른 이세정이 갑자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런데 우채민 씨.”

“예?”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그럼 빨리 보내고 잘까요?”

“내가 머리 아픈 게 중요해요, 친구에게 시답잖은 연락을 보내는 게 중요해요?”

“……형이요.”

“나도.”

‘이세정은 휴대폰을 던져두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해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미련은 쉬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곁눈질하다가 하는 수없이 이세정의 옆에 누웠다. 곧 조명이 낮춰졌다.

빗소리가 적막을 거두었다. 희미한 빗소리를 들으면서 시간을 재었다. 이 정도 텀이면 되었을까. 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뒤집어쓴 채로 이세정 쪽으로 향했다. 이불을 같이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세정은 자신은 뭘 뒤집어쓰고 자면 답답하다며, 슬그머니 나를 밀어냈다. 왜인지 이불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이세정이 내 표정을 보고 한마디를 더 붙였다.

“우채민 씨 푹 자라고.”

“형 안 뒤척이시잖아요.”

“잠버릇 때문이 아니라…… 아니. 오늘은 좀 나쁠 것 같아요.”

“……저 안 뒤척이고 자는 법 압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이세정의 목과 팔을 잠들기 좋은 자세로 교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 어딘가에 던져져 있을 휴대폰을 더듬어 찾아냈다. 희미한 빗소리를 잡아먹을 정도의 크기로 클래식을 틀고서 이세정의 몸을 두어 번 토닥였다.

“자주 해봤는데, 이 음악이 가장 좋아요.”

“와, 친절해라.”

건조하게 말한 이세정이 이내 짧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리 오라며 나를 끌어당겼다. 내 뒤통수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머리카락 부근에 입술을 댔다.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먹는 시늉을 한다. 이세정은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어두운 조명을 완전히 껐다. 이제 주변은 클래식 음악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잠에서 깬 것은 곁이 비어있다는 느낌이 든 후였다. 처음엔 눈도 뜨지 않고 옆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더듬었다. 그러다 방을 빠져나가는 발소리를 듣고 번뜩 눈을 떴다. 고개를 드니 이세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담배라도 피우러 가나.

잠을 잘 자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소용이 없었나 보다. 어느새 클래식도 멈추어 있었다. 나는 몸을 바로 눕혀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아보았더니 잠은 안 오고 춥기만 했다. 나는 주변을 더듬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왔다.

“…….”

천장은 그저 까맣기만 하다. 눈을 감아도 까맸고, 눈을 떠도 까맸다. 아무래도 나도 옆에 가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와야겠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이세정을 찾아 온 집안을 뒤졌다. 비 때문인지, 시간 때문인지 자욱한 어둠이 깔려 행방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불빛을 발견했다. 빛은 어느 욕실 쪽에 나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식식, 무언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는 거겠지. 지금 들어가면 예의가 아니지. 대체 화장실에서 뭘 하면 그런 쇳소리가 날 수 있는 건지 짐작 가는 구석도 없으면서 나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밖으로 흘러나왔다. 바짝 굳어있던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작은 두드림이었던 것 같은데 깁스가 워낙 단단하다 보니 반쯤 열려 있던 문이 이내 활짝 젖혀졌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것은 세면대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세정이었다. 나는 당장 말을 걸려다가 별안간 세면대 쪽으로 뻗고 있는 이세정의 팔로 시선이 향했다. 사선으로 그어진 선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다…….”

다쳤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 밤에 그럴 리가 없었다. 갑자기 어디 유리라도 깨부수며 난동을 피운 것이 아닌 이상 저런 상처는 우연히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이세정은 화장실에 들어오려다가 얼어붙은 나를 보곤 물을 틀어 제 상처를 씻어냈다. 핏물이 세면대에 고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만 보곤 급히 화장실을 나왔다. 인지하지 못했는데 심장이 발작하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너무 불쾌한 떨림이었다.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간 나는 서랍 속을 뒤져보았다. 내 소지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시 침실에서 나와 드레스룸으로 가려다가 돌아오는 이세정과 부딪혔다. 한시가 급했다. 이세정의 몸을 밀다시피 하고서 다시 뛰었다. 팔이 덥석 잡혔다.

“어디 가요?”

어쩐지 화난 음성이었다. 나는 이세정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고 다급히 걸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이세정에게 팔이 잡혀 방으로 끌려들어 가야 했다. 이세정은 나를 내던지다시피 침대 옆에 세워놓았다. 붙잡은 내 팔은 놓지 않았다.

“이 밤에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아니…….”

눈썹이 좀 더 내려갔다.

“또 도망가려고?”

왜 또 도망을 언급하는 거지? 내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세정은 내 팔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나는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우선 눈가부터 일그러뜨리고, 시선을 떨어트려 이세정의 팔 부근을 바라보았다. 지혈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새 피가 맺혀 있었다. 피가 즙 짜내듯 흐르던 터라 나는 이세정이 팔에 더 힘을 주지 못하도록 혼신을 다해 잡혀있는 몸을 비틀어 빼냈다. 이세정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얌전한 척하다가 내가 조금만 뭘 하면 아 맞다, 저 새낀 미친놈이었지……. 이러면서 도망가는 게 우채민 씨 방식이에요?”

“……아니요. 그, 그런 게 아니라.”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변명해보려고 애썼다.

“잘해주는 거 아, 아는데요. 아니, 도망가려던 게 아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매에 주눅이 들어 뒷걸음질을 치다가 협탁을 툭 쳤다. 협탁 위에 있던 컵이 흔들거리더니 내가 잡을 새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째앵! 컵 깨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잡힌 팔을 놓아보려고 마구 버둥거렸다. 이세정은 점점 화가 나는 듯 보였다.

“알고 만나는 거 아니에요?”

화를 억누르는 것처럼 말이 잇새에 씹혀있었다.

“이럴 거면 왜 나한테 안겼어.”

“자, 잠깐…….”

나는 귀를 막고 깨진 컵에서 최대한 달아났다. 유리 조각들을 피해서 거실로 도망쳤다. 나를 뒤따라온 이세정이 어깨를 쥐어 잡았다.

“여기가 출구로 보여요?”

이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는데. 어디로 나가게.”

“그, 그 컵, 컵…….”

“똑바로 말해줄래요?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

“그게…… 그.”

나는 당장에라도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아 목덜미를 부여잡고, 방 쪽을 가리켰다. 이세정이 고개를 돌리면 그 틈을 타서 숨이라도 양껏 쉴 생각이었는데, 그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입을 열었다.

“흐……윽.”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신음만 껄떡거렸다. 나는 한동안 흐느끼기만 하다가 긴 호흡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커, 컵이랑요. 접시 깨지는 소리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 그런데 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고…손수건을 가지러 가, 간 거였어요. 형, 형 지혈 때문에.”

너무 울먹거리며 이야기해서, 잘 알아들었을지 걱정이었다.

“지혈해주려고?”

“흐, 예.”

이세정은 칼집이 나 있는 손목을 들어 올려 확인했다. 나 또한 그것을 확인했다. 참혹했다. 나는 눈두덩을 비비며 말했다.

“정말 도망은 생각도 안, 했습니다.”

“…….”

“정말이에요.”

“……알았어요.”

정말 알아들은 것이 맞을까. 나는 따가운 눈가를 문지르며 연신 그를 곁눈질했다.

“앞으론 그러지 마요. 이건 친절도 뭣도 아니에요.”

“……예…흐, 네.”

오해가 풀린 것이 맞겠지. 문득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언제 묻은 건지 모를 핏자국이 점처럼 찍힌 팔로 눈을 비비면서 다리를 서서히 구부렸다. 미처 자리에 주저앉기 전에 이세정이 내 팔을 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다신 뛰지 마요.”

“…….”

“우채민 씨가 뛰면, 내가 잡게 되잖아요.”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흐느끼듯 안 간다고 몇 번이고 확신을 주어서야, 이세정은 굳은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눈물을 질질 흘려대는 나를 주시하며 내 뺨을 문지른다. 이세정은 그제야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다 알아들었으니까, 조금만 울어요.”

나지막한 목소리. 나는 조금만 더 크게 우는 소리를 냈다.

***

잠에서 깨어나니 눈이 피곤했다. 나는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다가 옆자리를 힐끔 보았다. 새벽과 달리 옆에는 이세정이 누워있었다. 새벽 다툼으로 지친 건지, 팔을 그은 탓인지 내가 부스럭거려도 깨지 않았다. 나는 굼벵이처럼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가 흘끗 바닥을 보았다. 유리 조각 하나 없이 말끔했다. 마치 어젯밤 일이 꿈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침실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나를 위해 이세정이 유리 조각을 치워주었다. 잘 치웠을 거라 믿지만 혹시 몰라 조심조심 걸었다. 나는 침실을 빠져나와 아침 출근을 온 사람에게 혹시 약 상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약을 받아 침실로 들어왔다.

이불을 덮고 있지 않아 다친 부위가 쉽게 보였다. 이세정의 팔 아래에 큰 천을 깔고 약 뚜껑을 열었다. 열 손가락이 다 써지지 않아 한참을 낑낑거리다, 발을 써야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발로 연 약을 발라주는 건 좀 그런데.

“열어줄까요?”

문득 들린 목소리에 놀라 이세정을 보았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이세정이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고 있었다. 이리 내라고 손짓한다. 내가 건넨 약 뚜껑을 간단히 열어주고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이세정이 따준 약을 받아들자마자 그의 팔에 대고 꾹 짰다. 물컹하게 짜낸 약이 조금 많이, 상처에 얹어졌다.

“하루 만에 낫겠어요.”

이세정의 말에 나는 당황하며 거즈 끝으로 약을 덜어냈다. 그리고 치덕치덕 거리는 약 위로 흉터 밴드를 붙였다. 하나로는 모자라 세 개쯤 이어 붙였다. 치료를 마치고 보니 팔이 지저분해져 있었다.

“나 일어나도 돼요?”

“네.”

이세정이 몸을 일으켜 제 팔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손이 다쳐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는데도 잘 치료했다며 중얼거린다. 내 머리가 부드럽게 헤집어졌다. 문득 이세정이 손을 조금 내려 뺨을 만지작거렸다.

“눈 부었어요.”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어 웃은 이세정이 내 눈가를 엄지로 문질러 주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로 들어간다.

침대엔 정리되지 않은 약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거의 새것과 같았던 약이 반쯤 쥐어짜 있었고, 밴드의 잔해들이 정신 사납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약들을 정리하다가 손을 힘없이 내렸다. 침대 아래 다리를 내리고 앉아,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부유하는 것처럼 떠 있었다.

“…….”

사람은 다 자기 자신이 불쌍하다. 미움받기만 한 사람들은 자기 연민이 특히 더 심하다. 일종의 보호 작용이다. 나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나를 감싸기에 급급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이세정이란 사람은 좀, 궁금해졌다. 그의 속내와, 그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궁금해졌다.

‘말해주면 내 이야기 해줄게.’

속을 들으려면 나부터 꺼내 보여야 했다. 나쁜 짓으로는 나보다 이세정이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으니 내 잘못을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상대적으로 내 잘못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고…….

***

잘게 간 얼음 위로 망고가 올라있었다. 깍둑 썬 망고 사이에는 아이스크림이 얹어있었고, 나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스푼으로 위쪽에서부터 조금씩 긁어내렸다. 얌체같이 퍼서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넣던 그때 테이블에 툭, 병이 올려졌다. 맞은편에 앉은 이세정이 소주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가져오라고 했죠?”

소주를 먹자고 제안했었다. 지난번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나기는 했지만, 제정신이 아니어야 내 말을 흘리듯 가볍게 들어줄 것 같았다. 나는 먹던 빙수를 옆으로 조금 밀어두고 소주의 뚜껑을 돌렸다. 단단히 맞물려 있는 뚜껑은 내 반의 반절의 힘으로는 도저히 따지지 않았다.

“따줄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뚜껑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따준다는데 굳이 거절한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양 이세정이 어리둥절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쩌면 손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을 주어 병을 딴 뒤에, 이세정의 잔부터 채웠다. 이어 내 잔을 채웠는데, 꼴꼴 흐르는 술을 바라보는 이세정의 호선을 그린 입술이 벌써부터 흐릿했다. 나는 병을 내려두고 눈을 비볐다.

소주를 빨대로 마실 수는 없어 두 손으로 컵을 들었다. 들기야 어렵지 않게 들었지만 입에 대어 기울이는 순간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속까지 쓰린 듯해 인상을 썼다. 망고를 한입 넣었다. 두 볼때기가 차가웠다.

오롯한 시선이 느껴져 건너편을 힐끗 보았더니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소주병을 힘겹게 들어 이세정의 잔을 재차 채워주었다. 이세정이 술을 단번에 털어 넣자 망고를 푼 숟가락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이세정은 받아먹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물었다.

“뭐 해요?”

“형 팔 아프잖아요.”

테이블에 얹은 이세정의 팔이 조금 주춤했다. 이세정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서….”

“당분간 팔 사용하지 마요.”

원래 팔에 상처가 많은 사람임은 알고 있었다. 이제 와 배려를 하는 것도 웃겼으나 당장 그 일을 목격했는데 마냥 모른 체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걱정한 만큼 이세정이 자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거라는 듯 안타까운 눈으로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이세정이 내 손을 피했다가 제 쪽에서 다가와 꼭 쥐었다. 방금 내가 그랬듯, 이세정도 내 팔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팔이 아프긴 하네요.”

“많이 아파요?”

“얼마나 아프냐면…… 팔 다친 우채민 씨, 부려 먹어야 할 만큼 아파요.”

비꼬는 거구나. 나는 무안해져 그저 술 한 잔을 마셨다. 얼음과 망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쑥쑥 섞어 빙수를 한입 먹고 다시 소주를 마셨다. 내가 술을 마실 동안 이세정은 할 일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다 포도를 제 앞으로 가져가 알알이 분리했다.

포도 껍질을 싫어하나. 전에 복숭아 껍질을 깎아준 것이 생각나, 나는 포도를 가져와 한 올 한 올 옷을 벗겼다. 고작 하나 벗기는 것뿐이었는데도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말끔하게 벗겨진 포도를 건넸더니 이세정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건넨 포도를 받아먹으면서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4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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