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비 (3)
“미치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이세정이 말했다.
“안 줘도 돼요, 우채민 씨. 먹으려고 벗기는 거 아니에요.”
“아…….”
“손 사용하지 말고 있어요.”
이세정이 술이나 마시라며 잔을 채워주었다. 나는 술잔으로 입을 가렸다.
한 병 정도 비웠을까. 살짝 취기가 올랐다. 시야가 흐려지는 듯해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잔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이 눈에 들어왔다. 붕대에 꼼꼼히 감긴 손은 꼭 새의 날개를 연상케 했다. 나는 손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형 그런데, 도로에 참새 있다고 대뜸 서버리면 다른 차들은…… 혼란스럽겠죠?”
이세정은 소주 뚜껑의 이음새 부분을 이리저리 꼬고 있다가, 나를 보았다.
“새는 어차피 위로 날아가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뭐라 하는 건 아닙니다.”
비싼 외제차를 타고 있어 클랙슨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도로 한복판에 갑자기 선 터라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차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도로에서 새 때문에 선 이세정이 이해 안 되는 동시에 되기도 하던 터라 말은 안 하고 있었는데, 실수를 번복하기 이전에 한 번쯤은 꼬집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생각이 난 김에 말해주었다. 나는 일단 저질러놓고, 내 얼굴에 끈덕지게 붙는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포도 한 알을 입에 물고 소주를 마셨다.
이세정은 테이블을 보며 침묵했다. 아마도 내가 한 말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일 테다. 신경을 돌리기 위해 이세정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머리 예뻐요. 펌 들어간 거.”
이세정이 제 머리를 만졌다.
“펌이요?”
“앞머리. 펌.”
“안 했는데. 아, 이거. 드라이한 거예요.”
“스스로요? 아… 난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뭐 있는지 한 번 꼽아볼게요. 나는 다섯 손가락을 다 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손이 이래서 혼자 밥 먹을 수 있어요, 혼자 샤워할 수 있어요, 혼자 옷 입을 수 있어요, 같은 기본적인 일들조차도 언급할 수 없었다. 손을 내렸다.
“지수한테 맨날 신세 지고, 누나한테 폐 끼치고…… 맨날 그러거든요.”
“…….”
“형한텐 안 그럴게요.”
말뿐이더라도 아니라고 말해줄 줄 알았더니 이세정은 거절하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소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이세정이 몸을 움직여 내게서 병을 빼앗아 들었다.
“말하고 싶은 게 뭐예요. 그거 들으려고 여기 앉아있는 거 아니에요?”
“아…….”
“아.”
“……왜 자꾸 반말하세요?”
도망갔다가 돌아온 순간부터 툭툭 내뱉는 횟수가 하나둘 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말을 조금씩 섞어 사용하는 것은 봐줄 수 있었으나, 완전히 말이 짧아지는 것은 조금 불편했다. 말을 놓다가 또 무엇까지 놓아버릴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반말을 했어요?”
“지금 말고, 계속…….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존댓말도 배려의 지표예요?”
내게서 빼앗은 병을 매만지며 이세정이 조용히 물었다. 굳이 ‘도’라고 붙인 것을 보면 다른 배려를 실천하고 있다는 뜻인가.
“내가 말이라도 줄이면 짜증 나요? 그럼 또 피아노 치면서 처량 맞은 음악가 흉내라도 낼 생각인가.”
이세정이 농담했다. 술에 젖어있어서 그런지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골이 잠시 띵했다.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앞으로 소주가 더 채워졌다. 나는 소주를 따른 잔을 두 손으로 곱게 쥐었다. 입에 대고 잔을 기울이려다, 잔이 미끄러져 술과 함께 떨어졌다.
“아.”
단단한 잔이라 깨지진 않았지만, 술이 옷을 다 적셨다. 나는 젖은 반팔 티를 팔락이며 어떻게 하냐는 듯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이 눈썹을 느리게 올리며 대꾸했다.
“벗어, 그럼.”
“벗어도 돼요?”
“다 벗어도 돼요.”
“취하셨어요?”
나는 이세정이 들고 있는 병을 보았다. 어느새 술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 잔 안 마신 것 같은데 내가 안 본 사이 알게 모르게 소주를 흡입한 모양이다.
“병째로 마시지 말고, 잔에 따라 줄게요.”
나는 새로운 병을 따곤 이세정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이세정은 잔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다가 내가 더 못 따르도록 할 셈인지 잔의 주둥이가 아래로 향하도록 엎어두었다. 그 기이한 행태를 주시하던 내 눈이 가늘어졌다. 잔에 있는 술은 다 먹고 엎어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엎어둔 것일까? 저 정도면 꽤 많이 취한 듯싶은데. 나는 괜찮으냐는 듯 이세정의 얼굴 앞에 손을 휘저어보았다. 눈동자가 손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취했구나.
나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 포도를 집었다. 한 알은 이세정의 입에 물려주고 한 알은 내 입에 넣었다. 포도를 씹어 먹으며 이세정을 가만 바라보았다. 한참을 눈만 맞추다가 입을 열었다.
“도자기 이름 기억나요?”
내 물음에 이세정이 되물었다.
“어떤 도자기요?”
“정신병원에 있는 도자기 분이요. 저는 이름도 모릅니다.”
“알아올까요?”
“……그럼 너무 기만하는 것 같아서.”
입술로 중얼거리며 이세정을 힐끔 보니 그는 관심 없는 눈치였다. 술에 취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는 몸을 축 내리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저 예고 작곡으로 가서 공부하는 도중에, 옛날에 저 가르친 피아노 교수님께서 연락 오신 적이 있습니다.”
한숨과 함께 드디어 이야기를 텄다. 부디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테이블을 구르는 포도를 잡아 껍질을 만지작거렸다.
“나보고 버클리 가재요. 피아노 다시 하면 갈 수 있대요. 내가 피아노를 네 살 때부터 시작했나. 진짜 전부였거든요. 좀 흔들렸는데, 거절했어요. 그리고…… 그러고 나서 매 순간을 후회했어요.”
잘 듣고 있나 굳이 고개를 들어 이세정을 보았다. 이세정은 제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픈가 싶어 손을 뻗어 이세정의 팔 위로 얹었다. 팔을 토닥거렸다.
“형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 피아노 진짜 잘 쳐요. 진짜, 진짜, 잘 칩니다. 도빈이 형이 피아노에 부심 부리던데, 내가 그거보다 잘했어요. 내 재능을 모르지 않아요.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뻔히 있는데 포기해야 했어요. 모른 척했어야 했어요. 안 그러면 너무 아쉬워지니까. 아쉬워서 죽을 것 같아지니까.”
“…….”
“제가 왜 작곡해도 안 느는지 아세요?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재능이 없어 안 느는 것일 텐데 괜히 관심 타령을 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그리고 테이블에 손을 두드리며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다. 손을 쏘아본 이세정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를 하는 데에 급급했다.
“뭐 굳이 말하자면 싫은 건 아니고, 사실 모르겠어요. 제가 작곡에 집착해서 좋아하게 된 걸까요, 아니면 좋아해서 집착하는 걸까요? 그럼 아직도 피아노가 좋은 건 내 미련인가요?”
이세정은 내 징징거림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말을 끊었다.
“횡설수설하고 있어요. 알아듣기 힘들어요.”
“죄송합니다.”
“왜 그만뒀는데요?”
“아. 아…… 아. 그냥, 졸업식에 가족이 와줬으면 했어요. 초등학생 졸업식 날 가족들이랑 사진 찍는 애들 사이에 혼자 있었는데, 너무 쪽팔리고 외롭고 그랬습니다. 사실 그땐 어머니가 하필 아파가지고……. 안 온 거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그 창피한 기억을 한 번 더 갖고 싶지는 않아서, 중학교 졸업식 날은 꼭 왔으면 했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아버지는 바빠서 못 오신다고 했고, 누나는 회사 때문에 못 온다 했고, 어머니는 혼자 찾아올 수 있을지 불분명한 데다가 병원 예약까지 잡혀있으셨고.”
나 또 혼자 졸업해야 하는구나, 하고 우울감에 빠져있을 때 지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친척 형과 이모까지 온다며 투덜거리는 문자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다니는 병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텀을 두고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정말 예약이 되어있는 거냐고, 한번 알아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병원 측에 확인을 한 뒤에 아주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게 돌아왔다.
‘정말 예약이 취소됐대요? 잘 됐다. 아버지한테는 병원에 간다고 말하고, 제 졸업식에 꼭 와주세요.’
어머니께 학교의 위치를 설명하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학교는 어머니가 쉽게 들락날락하는 병원과 근접해있어, 스스로 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시간 맞춰 학교 앞으로 나와 있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껴안으며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직접 예약을 취소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담당 의사가 어머니에게 누가 예약을 취소했다고,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 길에 어머니가 뺑소니를 당하셨어요. 중3이면 머리가 자랄 만큼 자란 겁니다. 철없는 치기로 한 게 아니라, 제가 그냥 인성이 그 정도인 거예요.”
마치 나 스스로를 위로하듯, 나는 이세정의 팔을 대신 쓰다듬고 있다가 우는 그의 모습을 보곤 흠칫 놀랐다.
“왜, 왜 울어요?”
“지금 우는 게 누굴까요.”
어쩐지 우스운 목소리로 이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주었다. 나는 맑은 시야로 이세정을 보고 나서야 그가 아니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깜빡거려서 눈물을 떨어트렸다. 팔로 눈가를 문지르곤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버지 때문에 강제적으로 피아노를 그만두고 나서도 내가 왜 포기해야 하는지 불만이 있었어요. 누가 콩쿠르에서 뭘 탔고, 연주회를 열었고, 이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열이 뻗쳤어요. 마치 그게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는 양 뻔뻔하게 화가 났어요.”
물론 추악하기 짝이 없는 속내는 오래가지 않았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생전에 가지고 다녔던 스케치북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엔 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신장이 안 좋아 나를 낳을 때 피 투석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안구 질환으로 시력도 잃었다. 어머니는 내 아기 때 모습밖에 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나를 흡사하게 그려낸 모습에,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모든 죄책감을 토해냈다. 그 그림을 당장 접어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구석 자리에 숨겨두고서도, 피아노에 관하여 절망과 후회가 몰아칠 때마다 내가 왜 포기했어야만 했는지 그림을 떠올리곤 했다. 그럼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더한 파도로 일렁이는 파도를 덮었다.
“나는 악하고 싶지 않아요. 원래 나쁜 사람도, 죽을 때까지 성향을 숨기고 지내면 착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날 다 드러낼 필요는 없잖아요. 내 이기심 같은 건 숨기면 되잖아요. 복수하고 싶은 거, 내가 더 갖고 싶은 거, 굳이 안 드러내고 살아도 되잖아요.”
나는 이세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다들 숨기는 게 아닐까요?…… 제가 너무 이해받으려고 했어요?”
어쩐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세정에게 멍하니 물었다. 이세정은 그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서 잔에 소주를 따랐다.
“우채민 씨, 손 다치게 한 사람, 나한테 일렀잖아요.”
“……예.”
“그리고 너무 괴로워하길래 뭐 좀 사연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별거 없어서 당황했어요. 똑같이 갚아주고 싶은 건 누구나 그렇죠. 이기적인 건 다들 갖고 있어요.”
이세정이 내게 술잔을 건넸다.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기운 없이 잔을 내려두었다.
“우채민 씨가 착하고 여려서, 죄책감의 기준이 낮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잘못했다고 고해성사하고. 나한텐 우습기만 한데.”
착하단다. 미쳤네, 미쳤어. 나는 테이블에 재차 뺨을 대며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이세정의 뺨을 꾹 눌렀다.
“그건 형이 못된 건데.”
제 뺨을 꼬집는 내 손을 잡아챈 이세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딱딱한 깁스가 아프지도 않은지 살살 매만지다가 내 옆에 같이 뺨을 대고 마주 보았다. 뺨에 대고 있던 내 손이 자연히 떨어져 나갔다.
나는 이세정의 눈을 바라보며 그의 불안증에 관해서 생각했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 떨쳐내지 못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버스 사고처럼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떨쳐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뺑소니에 대한 내 트라우마는 죄책감이란 감정에 뿌리를 내린 깊고 짙은 병이었다.
자연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평생 품고 갈 수밖에 없는 병이 있다. 죄악을 판단하는 건 법이지만, 죄악감을 판단하는 건 오롯이 내 자신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졌고, 그것을 떨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세정도 나와 비슷한 병을 품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 실은 내 안에선 이미 그를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이세정을 내 거울이라 생각했다. 다르지만, 닮기도 했다. 둘 다 누군가의 세상을 앗았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했다. 내가 그에게 끌린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동질감 때문이었으나 결국 나는 내게 필요한 사람에게 빠져든 것이다. 나는 이세정을 거울삼아서 지난날을 위로받고, 또 반대로 반성하고 있었다. 나는 왜 내 감정에만 급급해서 어머니를 배려하지 못했던 걸까. 왜 졸업식에 오라고 투정을 부렸던 걸까. 뭐 그런 것들.
“형, 이야기해줘야죠.”
“일단 네 이야기는 재미없었어.”
“반말하지 말라니까…….”
내 말에 이세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세정이 지은 미소가 점점 흐릿해질 무렵, 그가 내 눈을 가렸다. 나는 눈꺼풀로 이세정의 손을 간지럽히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유감이 올라오며 어둠이 찾아왔다. 아, 물어봐야 하는데……. 나는 죄책감에 마음속으로 자해하고 있었어요. 형도 그런가요? 하고 물어봐야 되는데. 입술은 달싹거리다 힘없이 닫혔다.
숨소리 하나 없는 적막이 온 듯했다. 분명 이세정의 손은 내 눈가를 누르고 있는데,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무서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때맞춰 깊고, 느리고, 낮은 목소리가 적막을 비집었다.
“사람이라도 죽인 줄 알고, 기대했어요.”
기대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치고 말에는 실망감 같은 건 없었다. 입술에 무언가 촉, 하고 닿았다가 떨어졌다. 낮게 고동하던 가슴이 점점 가빠왔다.
“내 이야기하면 분명 도망갈 텐데……. 어쩌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는 말투였다. 나는 이세정이 차단하고 있는 시야를 거두기 위해 얼굴에 손을 올렸다. 의외로 손은 쉽게 풀어지며 내 목덜미로 향했다. 차지 않은 손끝으로 목덜미를 은근하게 건드린다. 엄지로 누른 살결을 따라 배로 미끄러져선, 옷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내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자, 의자가 돌려지며 테이블의 옆모서리에 등이 닿았다. 나는 훤히 트인 시야로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뭐 하려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입술이 다가왔다. 주춤 뒤로 향한 팔이 병 같은 것들을 건드렸다. 여러 개가 굴러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째앵……. 온몸을 살벌하게 조여 올 만큼 겁나는 소리가 울렸다. 입술이 부드럽게 빨려 아래를 내려다볼 새가 없었지만, 의자 아래 깨진 조각들이 널려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나는 몸을 덜덜 떨면서 입술을 피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려고 애썼다. 그러자 내 뺨을 쥐고서 이마를 붙인 이세정이 가만히 속삭였다.
“우채민 씨.”
“…….”
“내 생각엔 이제 안 보일 것 같아요, 그거.”
이세정은 나를 달래듯이 눈가에 한 번, 뺨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다시 입술이 부드럽게 눌렸고, 어깨가 단단히 잡혔다. 온몸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잘못 발을 디뎠다간 온 핏줄이 발딱 설 테다. 상상으로 다가온 고통이 나를 상처 입혔다. 한 번 맛본 경험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는데, 입술이 부드럽게 눌리며 뾰족이 올라온 내 신경을 잠재웠다. 어깨부터 팔 언저리까지, 손가락의 단단한 뼈마디가 몇 번이고 나를 쓰다듬었다. 위로하는 것처럼 벌벌 떠는 내 팔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노골적인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숨소리가 잦아들었을 즈음 허리가 들려 어딘가에 눕혀졌다. 차갑고 딱딱한 것이 엉덩이와 등, 뒤통수에 차례로 닿았다.
틈 없이 좁혀진 그와 나 사이에 숨 가쁜 호흡이 잇따랐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정도로 힘 있게 혀를 빨아올린 이세정이 내 입술을 덮었다. 입술 채로 물어뜯으면서 손으로 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는 목 부근을 손가락을 세워 위협하더니, 이내 쇄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옷 위로 유두가 문질러졌다. 젖꼭지가 매끈한 셔츠에 쓸려 사정없이 흔들렸다. 읏… 이가 고르지 못하게 다물리며 몸서리쳐졌다. 보이지 않는 유륜을 문지르던 손가락은 배꼽 언저리까지 내려와 허리 부근을 잡았다. 셔츠를 천천히 말아 올리면서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로 살결을 부드럽게 누르고 느린 동작으로 목선을 따라 움직인다. 눈꺼풀이 바르르 흔들렸다. 목에 힘이 들어가 등골까지 뻣뻣해졌다. 테이블 아래 어떤 것이 깨져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랑, 뭐, 할 거예요?”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입술에 집중하다 보니 신음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토해내며 이를 꽉 물었다. 목덜미에서 허리까지 온 가슴을 쪼아 먹던 이세정이 허리가 밴딩으로 된 내 반바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흘긋 살폈다. 대답이 필요하냐는 것처럼 반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내린다. 잠시 떼어진 입술이 아래쪽으로 다가섰다.
“뭐, 흐, 으!”
드로즈 위로 입술이 겹쳐졌다. 긴장하고 있던 그것이 움찔 놀랐다. 수치심에 비틀린 신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다리를 움직이다가 허벅지에 걸쳐있는 반바지를 놓쳐버렸다. 바지가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울상을 짓다시피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를 비틀어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더니 이세정이 부드럽게 물었다.
“도망갈 거예요?”
내게 한 다른 수많은 말보다도, 도망이라는 단어를 포함 시킨 이 말 한마디는 너무도 분명한 적대를 포함 시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좁은 시야로 내려다본 이세정은 흥분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이 아닌, 싸늘한 집착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책망하고, 탓하고, 비틀린 채 쳐다본다. 괴상야릇한 이 분위기에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 남은 취기까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저, 저랑 자고 싶어요?”
“우채민 씨.”
어느 쪽이 더 술에 취한 건지는 몰라도, 내가 보는 것과 이세정이 짓고 있는 것 중 어느 것 하나에도 거짓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술의 힘을 빌려 하나 둘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나한테 신뢰를 줘요.”
속삭인 이세정이 내 다리를 그러쥐었다. 이세정은 흥분해서 나를 덮치는 게 아니라 그저 필요에 의해 내 몸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도망갔다가 돌아온 뒤로 이세정은 한 번도 나를 믿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돌아온 뒤 나누었던 대화 어디에서도, 이세정은 믿는다는 말을 한 적이 없지 않던가.
그래도, 도망갔던 일에 내가 얼마나 많은 사과를 했는데…….
사과 하나로는 신뢰가 생기지 않는 건가. 내가 얼마만큼 뒷걸음질 쳐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날 울면서 이세정에게 전화를 건 순간부터, 나는 그의 품 말고는 갈 곳이 없어졌다. 내 외로움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반쯤 일으키고 있던 상체를 도로 눕혔다. 힘을 잃은 두 다리가 힘없이 테이블 아래로 뻗어졌다.
“아…!”
내 두 다리를 잡아 양옆으로 벌린 이세정이 드로즈 위로 입술을 댔다. 불룩 튀어나온 것을 덥석 물고서 쭙쭙 빨아댄다. 입술이 꾹 다물어지며 눈가가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러면 또 도망간다고 의심을 할까 봐 그런 소리는 벙긋도 할 수 없었다.
“흐으……읏.”
속옷의 겉면과 입술로 비벼지는 탓에 성기가 아팠다. 엉덩이의 근육이 수축했다. 엉덩이로 테이블을 꾹 누르며 허리를 들었다. 날 것의 감각이 몰아쳐 온 탓에 나는 허리를 계속 반동시켰다.
드로즈가 조금 끌어내려 졌다. 골반 쪽을 입술로 꾹 누른 이세정이 혀를 써 애무했다. 꺼칠한 느낌 없이 단지 유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모든 힘을 쏟아내어 주먹을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도 내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드로즈는 살살 더 내려갔다. 낮게 선 것이 속옷에 걸렸다가 반동하여 튀어나왔다. 속옷은 손끝에 걸려 허벅지로, 종아리로, 발목으로 쭉 내려갔다. 속옷을 끌어내리며 쓰다듬는 손길에 온몸이 바싹 조여 왔다.
내 것에 낯선 이의 손길이 처음 닿았다. 허벅지 안쪽을 입으로 애무하며, 이세정이 내 것을 쥐었다. 위아래로 느리게 만져대며, 입술로는 사타구니를 쯥, 빨았다. 짙은 키스가 이어질 때마다 허벅지가 진동하듯 떨려왔다. 눈에 거슬릴 만큼 커다란 동작이었다.
하지 말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으니 끙끙거리는 소리로 대신했다. 그동안 입술은 허벅지 안쪽을 열심히 씹어대다가 옆으로 옮겨가 내 것을 기둥부터 머금었다. 무릎이 굽혀 세워졌다. 나는 고난이라도 만난 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이 순간을 견뎌내는 데에 열중했다. 허리가 마구 비틀리려고 했다.
“으, 응, 으…….”
엉덩이로 키스를 이어가려던 이세정이 내 묘한 항의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다리가 차분히 놓아지며 이세정이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우채민 씨가 강아지 소리를 내면…….”
“…….”
“나는 멍멍이랑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어요?”
“죄송해요.”
이세정이 내 눈가에 쪽 키스했다. 입맞춤을 받은 한쪽 눈을 반사적으로 감았다가 뜬 나는 이세정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일렁이는 눈동자는 너무도 덤덤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욕정 같은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빨았다. 입을 대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끌어당겨 진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내 입안을 파고들어 혀를 쑤셔 넣은 이세정이 내 두 다리를 단단히 잡고, 바짝 당겼다. 허벅지를 그러쥔 손이 다시 내 것에 향했다.
뻣뻣하기만 한 성기의 표면이 어느새 미끌미끌해졌다. 손가락으로 요도부터 기둥 아래까지 만지작거릴 때마다 피가 꿀떡거리며 몰렸다. 흔들지 않았는데 액이 질질 나와서 너무 수치스러웠다. 가끔 혼자 위로를 해도 이렇게 몸서리쳐질 만큼 전신이 오싹하지는 않았다. 괴롭게 인상을 쓰며 어긋난 호흡을 하던 그때,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이 향했다. 손은 마구잡이로 침입하기보다는 엉덩이를 양옆으로 잡아당겨 구멍부터 벌려놓았다. 마사지하듯 안쪽을 문지르다가 조금은 거칠게 밀어 들어왔다.
“윽!”
아까 멍멍이처럼 짖지 말라고 했었다. 내가 소리를 내면 싫어할까 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벌릴 수 없었다. 이세정은 내 안으로 긁는 것처럼 파고들면서 가슴에 입술을 댔다. 혀와 이를 써서 유두를 껌처럼 씹어댔다. 유두가 벌겋게 올라서자, 퉁퉁 부은 것을 입술의 여린 살로 부드럽게 눌렀다. 나는 두 눈을 단단히 감고서 까만 어둠을 쏘아보았다. 그동안 구멍 내부가 제법 늘어났다. 아무리 부드럽게 해준다 해도 젤 없이 안 될 줄 알았더니 기어코 손가락 몇 개가 찐득하게 오갔다.
“으, 읍…….”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삐져나갔다. 내가 소리를 냈기 때문인지 문득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는 허리를 바짝 굳히고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꺼풀은 덜덜 떨리며 이세정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눈길이 맞닿자, 멈추었던 손가락이 다시 내벽을 긁었다.
“내가 강간해요?”
당혹스러운 투로 물었지만, 표정만은 건조했다. 이세정은 나를 달래려는 건지 나머지 한 손으로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애무를 한다기에는 성적인 의도가 없었다. 다정한 손길임에도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 것은 내가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반쯤 일으킨 내 것이 움찔 떨렸다. 이세정은 내 허벅지를 그러쥔 손에 힘을 주고 위쪽으로 잡아당겼다. 엉덩이가 들려 올라가며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자세가 되었다. 나는 놓아달라는 뜻으로 잡힌 다리를 버둥거렸다. 주름을 쑤셔대던 이세정이 내 다리를 쥔 손에 힘을 주고서 바짝 붙었다.
“쉿.”
조르지도 말고 재촉하지도 말라고, 담담히 나를 달랜다. 분명 겉으론 여유가 넘쳐 보였지만, 바지와 속옷을 차례로 끌어 제 것을 꺼내는 과정에서 눈이 가늘어졌다. 입구 근처에 묵직한 무언가가 닿았다. 나는 침을 삼키며 엉덩이에 바짝 힘을 주었다. 엉덩이 살을 한 움큼 쥔 이세정이 양쪽으로 당기자 다물고 있던 주름이 단번에 벌어졌다. 바람 같은 것이 들어오기도 전에 거대한 성기가 뜨겁게 밀려왔다.
“…아.”
이세정이 내 허리를 잡아 끝까지 밀어 넣었다. 실수로 문짝 같은 데에 손을 찧었을 때처럼 단지 짧은 신음을 내뱉은 이세정과 다르게, 나는 목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숨이 꿀떡꿀떡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반으로 쪼개며 들어오는 성기를 받았다. 목에 힘을 준 탓인지 한참 뒤에서야 컥, 컥 하며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튀어나왔다. 살기 위해 몸을 비틀면서 주변을 팔로 한껏 훑었다. 누워있는 곳이 테이블이라 잡히는 거라곤 컵이나 접시밖에 없었다. 컵은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져 쨍그랑하고 마구 깨져댔다. 미처 두려움에 빨려 들어가기도 전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조금 더 들어왔다. 다 들어온 줄 알았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아, 아! 윽!”
배 쪽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내벽을 비집은 성기는 조금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한 번에 치고 들어왔다. 비 온 뒤 창문처럼 시야가 흐렸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날렵한 턱선뿐이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얼굴이 고통으로 짓뭉개졌다. 내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안심시키려고 하는 듯했는데, 안심은커녕 눈물이 막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혀, 윽! 아……흣!”
단단한 허벅지에 몸이 착 붙었다가 떼어지고, 다시 착 달라붙었다. 치켜든 엉덩이가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지나친 헛소리에 불과한 말이지만, 몸속에 들어선 성기의 핏줄 하나하나가 울긋불긋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허벅지가 덜덜 떨려 다리가 가누어지지 않아서, 이세정의 허리를 감았다. 그러자 내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이 테이블을 대신 짚어 몸을 더욱 붙여왔다. 내 양옆에 버티고 선 팔에 힘줄이 세워졌다. 핏줄이 올라올 때마다 성기가 광폭하게 내부를 찔렀다.
“으윽! 읍, 흣! 흐읏.”
내 것이 음낭을 턱턱 두드렸다. 뒤는 단지 아프기만 했는데, 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 쾌락을 찾는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성기를 잠재우고자 다리를 좀 더 들어 올리고, 깁스한 손으로 내 것을 만졌다.
“천박하게 굴지 말아요.”
이세정이 나를 달래며 내 손을 쥐었다. 내가 뭘 천박하게 군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잇새로 흐느낌을 뱉어내며 유두를 아프지 않게 씹어대는 입술을 따라 허리를 치켜들었다. 엉덩이골 사이가 움찔움찔 떨렸다. 어찌나 거대한 것이 침입했던지 골에 차마 힘을 줄 수는 없었으나, 대신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여서 몸의 부담을 줄였다.
“아…….”
이세정이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짧게 입을 열었다. 성급하게 흔들리던 것이 속도를 줄이더니, 이세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세정이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탄식과 함께 긴 호흡을 내뱉었다.
“꼴린다.”
삽입이 느리게 오가며 이세정이 다시 유두를 빨았다. 혀를 세워 간지럽히는데, 한없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이세정의 등을 팔로 감싸 안았다가 금세 풀어대고, 또 허리를 두 팔로 움켜쥐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쳐버렸다. 깔짝거리는 내가 거슬렸는지 이세정이 가슴을 아프게 씹었다.
“흣, 아……! 앗! 형……하, 하지 마요.”
내 고개가 치켜졌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쇄골과 목에 길게 입맞춤하며, 이세정은 뭘 하지 않아야 하냐고 물었다. 이세정이 무슨 말을 가지고 묻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엉덩이에 허벅지가 붙으며 퍽퍽 격렬한 삽입이 시작됐다.
“아흣! 앗! 윽! 윽!”
아까 내가 만지려다 제지당했던 내 것을 쥔다. 액을 싸고 있는 성기를 문지르는 손가락이 퍽 단단했다. 마디가 예쁘고 딱딱해서, 금세 사정할 것만 같았다. 나올 것 같다고 한마디 했더니, 이세정이 뿌리의 불룩한 부근을 손으로 압박했다. 덕분에 사정감이 잦아들었지만 이런 친절은 필요 없었다.
“으으…… 응! 읏! 그, 그만.”
압박하지 말라고 이세정의 손등을 두드렸다. 내 것에서 손을 뗀 이세정이 문득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몸 안에서 성기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내가 말한 그만은 그 그만이 아닌데. 무력한 허탈감이 휘몰아치기 무섭게, 나를 안아 들고 테이블 아래로 향했다. 나는 바닥이 아닌 의자 위로 무릎이 꿇려졌다. 이세정이 내 상체를 테이블 위로 엎드리게 했다. 깁스한 팔로 얼굴을 베고 누워 가만가만 호흡했다. 숨에서는 아직 옅은 흥분이 남아있었다.
성기가 빠져나간 지 얼마 안 되어, 구멍 안으로 찬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원래의 모양으로 오므려지기 전에 이세정이 내 허리를 잡아 푹 쑤셔 넣었다. 마치 처음 받아들이는 양 컥 소리와 함께 숨이 잠시 끊겼다. 테이블에 바짝 엎드려 흐느낌에 가까운 숨을 죽였다.
“아파요?”
늦은 감이 있는 물음이었다. 이세정은 내 등을 누르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내 등을 꾹 누른 손이 지탱 점이 되었는지 내 골 사이를 삽입하는 힘이 더욱 거세졌다. 아픈 것보다,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대답 대신 팔꿈치로 테이블 위를 기어갔다. 내 다리를 잡아 쭉 끌어내린 이세정이 재차 밀어붙였다.
“앗, 흑, 으……흣! 윽!”
“아파서 어떡해.”
“아, 아니, 우윽!”
가슴을 더듬던 이세정이 내 뒤로 바짝 올라타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입술과 혀로 지그시 문지르는 탓에 몹시 따가웠다. 목을 움츠렸다가 편 나는 고개를 비틀어 뺐다. 입술은 자연스레 옮겨가 내 귓가에 쪽쪽, 키스를 했다.
성기가 뿌리 끝까지 치고 들어올 때마다 내 것이 바르르 떨리며 벌떡벌떡 섰다. 그에 허리가 난동했다. 첫 경험으로 인한 낯선 감각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강렬해서, 정신을 차리려고 할수록 외려 더 난잡해질 뿐이었다. 끅끅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더니 가까운 곳에서 젖은 숨소리가 들렸다. 테이블에 이마를 붙인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허리를 움직이다가, 흥분에 낮게 잠긴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성적으로 초월하던 사람이 못내 이겨 내뱉은 소리가 듣기에 매우 좋았다.
“흣, 으응…… 형, 읏.”
이세정은 한계까지 쑤셔 박으면서 내 등과 어깨 곳곳에 잇자국을 내놓았다. 단순히 물어뜯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잘근잘근 씹어댔다. 기어코 내 턱선과 귀까지 씹어댄 이세정이 성기를 위로 들어 쳤다. 나는 욱욱, 소리를 내며 곧 죽어버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성기가 뱃속까지 탐하고 있어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등에 힘을 준 채 두 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 아……하아, 아윽! 읏! 읏!”
“터진, 김에, 약속 하나 할래요?”
말이 귓가에 채 담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내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세정이 내 엉덩이를 살살 토닥거리고는 방금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듣고 있어요? 약속 하나, 하자고.”
“후으, 응……하앗, 읏!”
“한 번 더 도망가면…….”
손가락이 유두 부근을 문지르다가 배꼽 아래로 내려가, 내 것을 쥐었다. 액을 떨어트리던 성기를 손으로 마구 지분거렸다. 둔탁하게 엉덩이를 두드리는 소리 하며, 거칠게 주물럭거리는 손길 하며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진심으로, 죽일 거예요.”
“으읏……! 아!”
쿠퍼액이 기둥을 타고 질질 흘렀다. 내 것이 마지막으로 크게 요동쳤을 때, 이세정이 내 양쪽 엉덩이를 쥐고 이미 성기에 맞춰서 벌어진 구멍을 좁게 닫았다. 내부가 한껏 수축한 상태에서 삽입을 했다. 고통과 괴로움이 점액처럼 달라붙었다. 잠시 뒤 뱃속에서 꿈틀거리던 성기가 우뚝 멈추었다. 온 내벽으로 단단히 감싸고 있던 물건이 말로 채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과 함께 멀어졌다. 나는 인상을 펴지 못한 채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노골적인 탈력감이 느껴졌다.
***
나는 일어나자마자 갈라진 목을 축였다. 물을 잘못 마셔 사레가 걸려서, 몇 번 기침을 토해냈다. 셔츠를 입고 방으로 들어온 이세정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옆에 앉아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쥐어짜내 듯 기침을 토해내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그 뒤 고개를 들어 올렸더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세정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결을 따라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힘을 주어 끌어당겨서 눈가에 입 맞췄다.
“더 잘래요?”
이세정은 휴대폰 시계를 비춰주었다. 이른 오전이었고, 일찍 일어나 활동하기에는 몸이 아팠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이세정의 옷차림을 보고 의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 시선을 따라 제 차림을 훑어본 이세정이 입을 열었다.
“휴가 끝났어요.”
“아…….”
“일곱 시쯤 올 텐데, 그동안 뭐 하고 있을 거예요?”
물음에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항상 하던 것들만 떠올랐다. 뭐, 영화나 다큐나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좀 더 색다른 거 없을까 고민하다가 잠을 더 자서 숙취를 헤친 후에 노트북으로 외국어 강의나 듣겠다고 말했다.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봐도 돼요?”
“…뭘 봐요?”
“우채민 씨 예쁜 얼굴.”
이세정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한 터라 한동안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말 해석에 집중한 사이, 이세정이 나를 당겨 안아서 구겨진 셔츠를 펴주었다. 구깃구깃하게 접힌 팔 부근을 만져주고는 이마에 쪽 입 맞추고, 턱선을 따라 입 맞추고, 귓불에 입 맞췄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셔츠를 위로 올렸다. 내 허리와 배, 그리고 가슴까지 올려 훑어본 이세정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입꼬리는 끝까지 다 올라가다 말고 제자리를 찾았다.
“뭐 하면서 지낼까 궁금해서 그래요.”
“회사에 있을 시간에, 제가 하는 걸 어떻게 보겠다는 말이에요?”
하루 종일 영상 통화라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달리 방법이 없을 듯했다. 나는 혹시 이번 기회에 휴대폰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고 이세정의 손을 곁눈질했다. 이세정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여기 카메라 설치해도 돼요?”
“카메라요?”
막 일어난 터라 아직 뇌가 멍한 상태였다. 대놓고 감시하겠다고 말했지만, 속에 잘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시선보다야 카메라가 낫지 싶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설치하려고…….”
“여기랑 저기.”
이세정이 침실 천장의 두 군데를 각각 가리켰다. 두 곳만 설치하려는 건가. 이 정도 설치라면 질색하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이세정은 약간의 텀을 두고서 계속해서 어느 공간을 가리켰다. 옅게 가라앉아 있던 잠기운이 조금씩 물러갔다. 나는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빠르게 옮겼다. 이세정은 카메라가 설치될 공간을 빠짐없이 알려주겠다는 듯 나를 품에 안아 들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허공에 높이 뜬 상태로 이리저리로 눈을 끔뻑거렸다. 허리나 엉덩이를 쑤셔오던 고통이 잠시 물러갔을 만큼, 당혹스러웠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해도 돼요?”
거실 한 면만 해도 일곱 대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어디에, 얼마나 설치할 건지 이미 구체적인 계획을 잡아놓은 것으로 보아 이것이 꽤 집요하게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세정은 결코 강요가 아니라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거절해도 되는 문제인지 고민했다.
“꼭 해야 됩니까?”
“우채민 씨 혼자 있다가 다치면 어떻게 해요?”
부드럽고, 다정하게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이세정이 나를 안고 있던 터라 아래로 힐끗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도 얼굴이 바로 보였다.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나는 어제의 일이 떠올라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어깨가 떨렸다.
“귀엽게, 뭐야.”
이세정이 천천히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리에 무게가 실리며 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나는 아프지 않은 척 이세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카메라를 너무 많이 설치하는 것 같은데.”
“우채민 씨, 사각지대에서 쓰러지면 내가 어떻게 알아차리겠어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이세정이 내 걱정을 핑계 삼아 감시하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세워놓는 것보다 카메라의 시선이 낫기도 했고, 내게 직접 허락을 구한다는 것이 기특하기도 해서 알았다고 중얼거렸다.
이세정이 헛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세정이 출근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카메라 장비를 등에 멘 설치 기사들이 여럿 다녀갔다. 그들은 이세정이 내게 예고해준 장소에 정확히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들이 가고 나서 나는 멍하게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대놓고 예고한 뒤에 카메라를 설치하니, 거부감은 덜했다. 다만 그럼에도 카메라는 카메라였기에 공연히 의식되었다. 앞머리를 예쁘게 흩트리고는 카메라를 한 번, 다시 뒷머리를 정돈하고 카메라를 한 번, 쳐다보았다. 일자로 곧게 편 허리가 찌를 듯이 당겨왔다.
……생활관도 아닌데 군기가 잡혀있을 필요가 있을까.
문득 든 생각에 나는 힘을 빼고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듯했지만 나름 카메라를 의식한 각도였다. 침을 삼키며 목에 힘을 주었다. 눈꺼풀을 끔뻑끔뻑 낙타처럼 움직이다가 힐끗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카메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안 본 양 눈을 아래로 깔았다.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심장이 마구 뛰어댈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른 침이 삼켜지며 가슴이 시끄럽게 요동쳤다. 물러진 틈을 타서 쓸데없는 기억까지 여럿 비집고 들어왔다.
협탁 위에 놓인 물을 끝까지 다 마시고 다시 누웠다. 침대는 적당히 단단해서, 허리가 아래로 들어가지 않게 받쳐주었다. 불현듯 나는 몸을 천천히 돌려 부목을 댄 손으로 허리를 만지작거려보았다. 허리에서 내려가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대놓고 쓰다듬으면 좀 민망하니까 이불 아래에서 몰래 만졌다.
뭐야, 엉덩이 부은 것 같은데.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손으로 아래를 더듬으며 울상을 지었다가, 엉덩이는 원래 부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얼굴을 폈다. 손을 가만 옆에 얹어두고 천장을 보았다. 착각으로 인한 무안함은 이내 서러움으로 변모했다.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아니면 유사 행위에서 그칠 줄 알았더니 대뜸 깔린 탓일까. 이세정이 옆에 있었다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고요히 혼자 있는 내 속에선 불필요한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속으로 끙끙거리며 괴로움을 죽이던 나는 못 참겠다는 듯 베개 아래로 얼굴을 쑤셔 박았다. 뭣 모를 감정을 표출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났다. 머리를 들어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난 기계 소리인가 했는데, 천장 구석에 설치된 카메라만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 카메라가 눈에 들어오니 또 한껏 의식되었다. 나는 재차 뻣뻣하게 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이러다 퇴근 시간까지 꼼짝 않고 있겠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천천히 돌아다녔다. 설치 기사들의 틈에서 어디 어디에 카메라가 달리고 있는 것인지 빠짐없이 확인했었다. 화각의 범위는 잘 모르겠지만 사각지대가 없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영리하게 배치해놓은 모양인지 언뜻 보는 것만으로는 사각지대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방을 뒤져보다가 이럼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머지않아 바깥 일정이 생겼다. 병원을 가자며 서 기사님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이세정의 옷을 훔쳐 입고서 집을 나섰다.
차가 달리는 동안, 한 뼘 정도 큰 티셔츠가 이상하지는 않은지 찬찬히 확인해보았다. 이세정은 내 옷을 사주려는 생각 따윈 별로 없는 듯했다. 나는 몸에 잘 맞는 옷이 좋아서, 새로 주지 않을 거면 집에 있는 옷이라도 가져오고 싶었다. 알게 모르게 아끼는 옷 몇 벌이 생각났다. 몇 벌을 돌려 입어도 괜찮으니 그것만이라도 가져오면 안 되겠느냐고 말해볼까.
창가 너머로 녹색 표지판이 몇 지나갔다. 개중엔 우리 집을 가리키는 화살표도 있었다. 문득 누나가 보고 싶어졌다. 누나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그리웠고, 나를 쏘아보고 깔아보는 눈빛도 그리웠다.
“……아.”
“예?”
내 탄식을 들은 서 기사님이 되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창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누나에게 문자를 남겨달라고 이세정에게 요청한 뒤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답장이 오면 먼저 말해주겠다던 이세정이 여태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또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뭐가 따라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서 기사님이 룸미러를 통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목소리엔 겁이 깔려있었고, 그에 나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덩달아 놀라 이마에 힘을 주었다.
“예?”
서 기사님은 뒤를 힐끔거리며 눈가를 찡그리고 있는 나를 보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아니, 안 옵니다.”
“……온다고 하셨잖아요.”
“안 옵니다.”
서 기사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기껏해야 경호 차량이 따라오는 거겠거니 했더니 이상한 반응이다. 불쑥 의심이 든 나는 느리게 몸을 돌려 뒤쪽을 쳐다보았다. 매서운 눈썰미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평범해 보일 뿐 수상한 차량을 달리 가려내지 못했다.
며칠에 한 번꼴로 병원에 들르기 때문에 오늘은 따로 치료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대신 의사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서 흉터를 어떻게 없애야 할까 건조한 대화를 나누었다. 의사는 손이 완전히 나으면 레이저 치료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비포 애프터 사진 자료를 보여줬는데, 사진이 합성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치료 몇 달이면 말끔히 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의 치료에 미리 감사를 표하곤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다시 차에 오르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좌변기 뚜껑을 덮고 앉았다. 굳이 문을 닫지는 않았는데 누가 들어오는 것 같아서 발등을 이용해 문을 닫았다. 불편한 손으로 잠금장치까지 걸었다.
왜 허리가 아직까지 아프지. 의사 앞에 앉아있는데, 허리가 아파서 죽을 뻔했다. 괜찮은 척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나는 팔을 힘겹게 꺾어서 허리를 주물럭거렸다. 큰 것이 안에 들어왔었던 것 같기는 한데, 사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하다. 쓸데없는 궁금증이긴 한데 모양이 예뻤는지 라도 확인해볼 걸 그랬다.
“저기요.”
막 한숨을 내쉬던 나는 문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허리를 만지던 손을 툭 떨어트렸다. 하마터면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나한테 건넨 말은 아니겠지……. 애써 모른 척하려는데, 문짝이 흔들리며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노크 소리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주먹이 문을 사정없이 두드릴 때마다 나는 흠칫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심장이 마구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커버 위에서 내려와 벽 뒤로 몸을 붙였다. 낯선 이는 내 겁을 눈치챈 듯이 ‘나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하고 짜증을 냈다. 짜증에 안도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숨을 죽이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할 말 있어요. 잠깐이면 됩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대화를 사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나를 아는 사람일 텐데, 노크와 함께 들린 목소리는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애써도 낯설기만 했다. 작곡을 한다고 사람 목소리를 잘 구분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우선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뒤를 돌아서 커버 위로 발을 올렸다. 되도록 소리가 나지 않도록 커버를 조용히 밟고 올라서서, 문 너머로 사람을 확인해보았다. 몰래 보고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낯선 이는 내려오려는 나를 황급히 붙잡았다.
“내 얼굴 좀 봐요. 나 모르겠어요?”
반쯤 구부러졌던 무릎이 서서히 일어났다. 언뜻 부딪힌 눈길이 생각보다 간절하여 의아해졌다. 나는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 턱이 각져있고, 눈썹이 위로 솟구쳐 있으며, 눈매가 가늘었다. 간단한 특징을 잡아낸 후 모든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하면 죽일 기세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고…….’ 하며 뜸을 들여놓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남자는 힌트를 주겠다는 듯이 어떤 동작을 취했다. 제자리에서 마구 달리는 모습이었다.
“……그냥 어디서 봤는지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당신 경호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가 아니고요. 제가 당신 도망갔을 때 경호했다고요.”
당장 관심을 끌려고 한 말이라기엔 진지한 투였다. 도망은 나 혼자 갔다가 왔는데, 경호를 어떻게 했다는 거지.
“궁금하면 이 문 좀 열어봐요.”
“거기서 말해주시면,”
“지금 당신 사정 봐주게 생겼어요? 열어봐요. 짜증 나니까.”
안 그래도 노크 소리 때문에 심장이 다 떨리는데, 협박까지 하니까 무서웠다. 내가 서서히 무릎을 굽히자 남자가 두 손바닥을 펼쳐 마구 흔들어댔다.
“들어가지 마요. 들어가지 마! 진짜 할 말 있습니다.”
겁박이 안 되니 우는 시늉을 한다. 당혹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불편해진 것도 잠시, 곧 어떤 기억이 겹쳐 보였다. 나는 남자를 빤히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언젠가 저런 표정을 지은 사람이 내게 간절한 눈길을 보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걸까. 나를 여행지에서 경호했다던 말에 관해서도 궁금하고, 낯도 익은 것 같아서 변기 커버 위에서 내려왔다. 내가 저를 무시하는 줄로 착각한 남자가 화장실 떠나가라 노크를 했다.
“저기…!”
칸막이를 열어 남자를 마주 보았다. 막 주먹을 휘두르려던 남자가 손을 서서히 거두었다.
외출 후 뒤늦게 오늘의 날씨를 확인했다. 체감 온도가 높다 했더니, 역시나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나간 것이 후회되는 날씨였다. 달라붙은 더위를 떨쳐내기 위해 샤워할 준비를 했다. 제일 먼저 속옷을 챙기고 욕실을 골랐다. 침실 쪽은 구조가 불편해서 혼자 샤워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고, 이세정이 자해하는 데에 썼던 욕실은 그냥 피하고 싶었다. 나는 적당한 욕실을 찾아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위층 구석 화장실까지 도달했다.
여긴 처음 오는 곳이었다. 바닥에 물이 바싹 말라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아무도 들른 적이 없는 장소인 듯했다. 무슨 영역 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안 쓰는 욕실을 더럽혀도 될까 갈등이 됐다. 나는 샤워는 포기하고,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았다.
땀에 젖어 눌러 붙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머리가 느긋하게 자라는 편이었는데, 다듬지 않은 지 꽤 되어서 그런지 앞머리가 눈을 찌를 듯했다. 남자답게 머리를 바싹 잘라볼까. 군대 가기 전처럼 자르면 좀 사나워 보일 텐데. 사나워 보이면 최소한 무시 받지는 않겠지. 나는 앞머리를 한 줌 쥐어서 쭉 당겼다가 스르르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배를 까 보았다. 근육을 만들까 생각하는 중에, 내 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얇은 티가 펄럭이며 말려 내려갔다. 손이 당혹스럽게 세면대 위에 닿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끔뻑거렸다.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잠결에 타투라도 한 줄 알았다. 나는 세면대 끝에 내려놓은 속옷을 어깨에 걸치고는 수건을 꺼내왔다. 더운 뺨을 식히고자 수건에 물을 묻혔는데, 물을 짜내려다가 굳었다. 어떻게 짜내지.
“…….”
세면대 한구석에 수건을 엎어두고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물기가 조금 빠질듯하더니 금세 흡수되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제자리인 터라 젖은 수건을 그냥 얼굴에 가져다 댔다.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찌푸려진 표정을 거칠게 지워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꾸 열이 올렸다. 이리 열불이 나는 이유를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벌벌 떨리는 팔을 허탈하게 보다가, 들고 있던 수건을 세면대에 철퍼덕 던져버렸다. 무릎을 구부려서 주저앉았다. 입술에 힘을 준 채 이를 지그시 문 그때, 세면대 뒤쪽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뒤쪽에 있는 물건을 꺼내왔다.
주사기였다. 약품이 들어있는 주사기. 정확히 어떤 용도인지도 모르고 심장부터 내려앉았다. 혹시 더 있나 해서 네모난 세면대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수상한 물건은 이뿐이었다. 주사기를 좀 흔들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주사기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가정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여긴 이세정의 집이었고, 여기 있는 물건들 모두가 그의 것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용도로 가져온 걸까. 골 아픈 문제에 치달은 터라 아까의 짜증은 가신 지 오래였다. 나는 일단 제자리에 돌려놓고 물건의 정체를 파악해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이세정은 말해주지 않을 것이고, 장 비서님도 마찬가지였다. 배도빈한테 물어볼까. 나보단 인맥이 넓을 테니 약품의 이름을 알아오는 것쯤은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양파 볶는 냄새를 따라 주방으로 향하면서 카메라를 기웃거렸다. 대단한 걸 발견한 사람처럼 께름칙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표정관리를 했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물건이, 단지 이세정의 집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궁금해졌다. 배도빈을 만나 물어보고 싶었는데 솔직히 이세정이 순순히 허락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짜장면 만드는 중입니다.”
주방을 기웃거리는 나를 알아차린 주방장님이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까 내가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켜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미소로 응답하고는 식탁에 앉았다. 팔이 이래선 예의상이라도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한참 후,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조금 더 신선한 재료가 든 짜장면이 식탁에 내려졌다. 나를 배려했던 것인지 알맞게 비벼져 있는 것은 물론 잘게 잘려있었다.
“감사합니다. 맛있을 것 같아요.”
수저로 듬뿍 퍼서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는 와중에 흠칫 수저질을 멈추었다. 눈앞에 어제의 일이 흐리게 그려졌다. 어차피 주방장님은 저 할 일을 하러 들어가 여기에 없으니, 나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조급한 걸음으로 거실로 걸어갔다.
나 혼자서는 저 테이블에서 못 먹을 것 같다. 하필 저기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소파에 앉은 나는 TV 채널을 뉴스로 돌리고 짜장면을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저 아나운서, 목소리 예쁘다. 기업 비리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나가고, 여름 더위에 대해선 중요하게 다루는 뉴스에서 볼거리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단무지를 씹었다. 그러다 불현듯 어디서 많이 보던 학교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였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교수의 폭행과 횡령, 티켓 강매 관련으로 비리가 터진 듯했다.
아, 나도 티켓 강매당한 적 있던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정말로 강매를 당한 것인가 아직도 헷갈렸다. 교수가 내모는 눈치에 몰렸다고 한들, 티켓을 산 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이었으니까.
티켓 강매 같은 건 폭행처럼 명확한 증거가 남지 않는다. 구매하지 않으면 교수가 불이익을 준다고들 하는데 그건 다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갈리는 이야기였다. 대놓고 F를 준다거나 하며 괴롭히는 것은 아니니 티켓을 안 사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다고 주장해도 피해망상이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당하는 입장에선 갈취나 다름없고, 겉으로 보기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터라 만약 폭행이나 횡령 건이 같이 터지지 않았다면 수면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느 교수인진 모르겠지만 이참에 벌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 이걸 내가 말할 입장이던가. 나는 이세정을 데리고 있는데. 입안에 있는 것을 억지로 삼키고서 착잡하게 입맛을 다셨다.
곁에 이세정을 두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잘잘못을 모두 묵과하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나는 오래도록 숨겨왔던 과오를 이세정에게 고백하고서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했으므로, 누굴 심판할 권리 같은 건 없었다. 그건 너무 뻔뻔하고, 양심 없는 짓이었다.
양심. 아니, 나는 양심까지 버리지 않았나. 대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뭐지. 어머니에게 행한 죄악과 이제부터 이고 가야 할 이세정의 죄악. 내게 남은 거라곤 기껏해야 그뿐이었다.
따져보면 대부분을 뺏기고 대신 어두운 짐을 챙긴 나와 다르게, 이세정은 별로 포기한 것들이 없었다. 이세정은 자신의 결여를 핑계 삼아서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겁박하고, 강요했을 뿐이었다. 이게 나란 사람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나는 충분히 이세정을 받아주었을 것이다. 나는 외롭고 싶지 않고, 끌려다니는 것을 혐오하는 부류도 아니니까. 다만 내 주변 사람들을 가지고 하는 협박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내 사람들도 중요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망가트리는 사람이, 아니, 타인의 삶까지 갈 것 없이 내 손을 망가트린 사람이 내 주변 사람은 지켜줄 거라는 생각은 그저 모순일 뿐이었다. 나는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장실에서 들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자신을 경호원이라고 소개했다. 낯선 곳에 정착한 내 생활을 확인하고, 간접적으로 괴롭히고, 필요하다면 보호하는 경호원. 소개부터가 장황하고 정신없는 터라,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들은 내 행로를 모두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탄 택시와 지하철, 걸음, 그리고 기차까지. 눈길은 처음부터 이어졌으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세정은 내가 여행지에서 어떤 험한 일을 겪었는지 경호원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시발, 황당하죠.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는데, 그게 터무니없었다고요. 다치면 안 되는데, 일자리는 자르래요. 추우면 안 되는데, 숙소에서 쫓아내래요. 배고프면 안 되는데, 돈 같은 거 쥐여주지 말래요. 완전 도라이예요, 도라이.’
‘저 노력 많이 했거든요. 내가 무슨 경찰도 아니고, 그 조폭들에 관한 것들도 다 조사해놨어요.’
‘놈들이 거기 횟집 사모 납치한 겁니다. 중국 재벌들이랑 연계된 인육 매매하는 놈들인데, 원래 같이 여행 왔던 아들 쪽 잡으려고 했다가 아들은 혼자 빠져나가고 아줌마 하나만 잡혔던 거죠. 납치범들이 목격자를 가만두겠습니까? 건달인 척하면서 자꾸 횟집을 들락날락 거리다가 찾는 아들은 안 오고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아들 행세를 하니까 진짠가? 하고 접근했던 거예요. 위험할 뻔했어요.’
남자의 벌게진 눈가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선명한 핏빛 눈이었다. 남자는 경호 일을 하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모든 부조리들을 세세하게 말해주면서, 이렇게 노력했는데 제집이 망했더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내 손을 망가트린 분풀이가 애꿎은 경호원들에게 향했다며 분에 겨워하기도 했다.
‘제가 뭘 해드려야 돼요?’
거기에 대고 나는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실제로 나는 경호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빚을 청산해줄 수 없으며, 그의 깨진 관계를 재정립시켜줄 수 없었다. 하물며 이세정에게 앞서 이야기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청할 수도 없었다. 모든 진실을 다 듣고 난 뒤로도 호구처럼 배신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내가 이세정에게 따지고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슬프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애써 눌러놓았던 억울함이 비집고 올라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
카메라의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블랙박스는 며칠에 한 번씩 자동으로 지워지곤 했으니 혹시 이 카메라도 그런 류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은 괜찮지만 내 모습이 영구적으로 저장되는 것은 좀 꺼려졌다. 나는 사진 찍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방문이 열렸다. 침대에 축 늘어져선 마우스 커서를 하염없이 움직이고만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비틀었다. 문을 쥔 채로 이세정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일어나기 위해 팔꿈치에 힘을 주었다. 다리를 밀어 올려 무릎을 꿇고 허리를 들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막 문 쪽을 쳐다보았을 땐, 이세정은 이미 없었다.
나는 이세정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인터넷 창을 정리했다. 전원을 끈 뒤 조심히 덮었다.
“뭐 먹었어요?”
재차 문을 연 이세정은 드물게도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눈길을 주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어차피 내가 먹은 것들을 다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세정은 내가 답할 때까지 주시하겠다는 듯이 끈질기게 쳐다보았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야채 주스랑 짜장면 먹었습니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니요.”
“같이 먹을래요?”
이세정은 내 등을 토닥여 나를 주방으로 데려갔다. 원래 냉면을 먹을까 했다가 내가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어서 다시 한식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나한테 점심에 뭘 먹었냐고 한 삼 초 전에 물어본 것 같은데, 어떻게 삼 초 만에 준비한 건지 굳이 의아함을 표하지는 않았다.
식탁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기서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척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세정이 고개를 기울여서 내 표정을 빤히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자, 이세정이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예? 아, 저 인터넷 보고 있었어요. 그…….”
뭘 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을 이으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예 뜸을 들이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말할 것처럼 했다가 그만둔 터라 시선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카메라 저거, 제품 찾아보느라.”
“왜요. 하나 사게요?”
“아니요. 메모리가 얼마나 저장되는지 확인해보려고.”
이세정은 응? 하며 눈썹을 들었다.
“저 담겨 있잖아요. 저장된 거 삭제해주실 거죠… 막, 일별로 저장해놓고 그러시면,”
“아.”
이세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겠다며 웃었다.
“우채민 씨 품는 건 나로 족해요.”
“예?”
“어디도 흔적 같은 건 남기고 싶지 않아요.”
“…….”
이세정이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 뺨을 문질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안심보다도 꺼림칙했다.
밥을 먹으면서, 남자가 내게 했던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숱하게 고민했다. 내 팔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내몬 이세정이 나를 보호하지 못했던 경호원에게 했던 해코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뭐, 굳이 남자의 일이 아니더라도 팔 사건은 충분히 원망할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시도해도 이세정의 얼굴만 보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갔다. 애(완)인도 아니고 눈치를 볼 것은 다 뭘까.
“팔 좀 가만두면 안 돼요?”
“예?”
나는 의아하게 되물으며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팔을 초조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깁스한 팔 좀 쓰다듬는다고 상처가 덧나지는 않을 테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손을 떼어냈다. 싱겁게 떨어져 나간 손이 좀 떨렸다. 나는 붕대에 단단히 감긴 팔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팔을 망가트리는 데에 일조한 저 사람이 지금 내 걱정을 하고 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나를 놀리는 건지. 만약 연기라면 너무 무서울 것이고, 진심이라면 더욱 무서울 것이다. 갑자기 웃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이세정이 눈썹을 구부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다가 문득 터져 나온 눈물을 참기 위해 눈과 입술에 힘을 주었다.
“웃다가 울어요?”
“아니요. 안 울어요.”
“곧 흐를 것 같은데.”
목소리를 내면 눈물이 뺨 아래로 흘러내릴까 봐 속삭이는 투로 ‘안 웁니다.’라고 말했다. 밥 먹을 때 술 먹지 말라니까. 또 상에 술을 곁들여선 홀짝이던 이세정이 당혹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세정은 잔을 저리 밀어놓고, 나를 주시했다. 눈동자가 어찌할 바 모르고 흔들리고 있었다.
“조울증이에요, 아니면 내가 은연중에 상처 주는 말을 했어요?”
“…….”
“둘 다구나.”
“아닙니다.”
고개를 저어 부정을 표했지만, 이세정은 벌써 자신의 어떤 언행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얼굴을 보자니 서러움이 복받쳤다. 목이 떨렸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감정을 추슬렀다. 숨소리가 옅어지자, 이세정이 물었다.
“……다 울었어요?”
“…예.”
“내가 울린 거예요?”
전후 상황도 모르면서 눈치는 빨랐다. 그런데 방금은 운 게 아니고 화낸 거였다. 화도 내본 사람이 낸다고, 이렇게 분노가 차오를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도망갈 수도 없고. 나는 눈을 비벼 눈물을 마저 닦아냈다.
“그래서. 사과할까요?”
“무슨 사과요.”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것 같은데, 사과라도 하면 우채민 씨 편해질까 하고.”
마음 같아서는 사과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감정 없는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목소리에 우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제가 왜 좋은지 물어봐도 돼요?”
“외모랑 성격이 마음에 들어요.”
날 좋아하긴 하느냐고 먼저 물었어야 했을까, 후회하기 전에 이세정이 대답했다. 깊은 생각도 않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내가 우니까 일단 맞춰주려는 속셈인 듯했다. 이세정은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우는 것도 예쁘고…….”
“형은 내 죄책감이 좋은 거예요? 내 눈물엔 죄책감이 있다고 전에 그러셨어요.”
굳이 대답해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이세정은 버릇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뭘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제 죄책감이란 게, 약점처럼 보이셨나 궁금합니다.”
“…….”
“보기에 내가 되게 낮아 보이시나요? 함부로 해도 괜찮아 보이세요?”
“……우채민 씨.”
이세정은 조용하고 낮게 나를 얼렀다.
“우는 이유가 있을 테고, 난 그걸 듣고 싶어요.”
“왜 저 함부로 대하세요…….”
조그만 목소리로 한 투정에 괜히 내가 더 서러워져서, 다시 눈물이 났다. 이번엔 정말 울고 싶지 않아서 온 힘을 다해 참아냈다. 일그러진 얼굴로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저 아끼고 좋아해 주세요. 저도 그럴 테니까.”
“내가 함부로 대하고 있어요?”
나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상황을 인위적으로 불행하게 몰고 간 것은 분명 날 쉽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내가 좀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면, 이세정이 나를 더 아꼈다면 그런 짓은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이 못내 슬퍼 자꾸만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이세정은 내가 평소 제 태도를 꼬집어 따지는 중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여행지에서 사람을 시켜 나를 괴롭혔던 일은 전혀 생각도 못 하고, 그저 평소 내게 했던 행동에 관해 말을 했다.
“욕도 안 했고, 폭력도 안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게 대했단 거예요?”
“직접 손댔다는 게 아니라, 저한테 배려가 부족했다는 말이에요.”
“배려?”
이세정은 어이없는 눈치였다.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귀찮다는 듯이 단조로운 어투로 말했다.
“우채민 씨와 함께 있으면 항상 이성보단 감정이 앞서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화나면 화내고, 짜증 나면 짜증 냈나 봐요. 미안해요.”
“…….”
“더 할까요?”
아무 감정 없이 말하는데, 이게 어떻게 사과지. 나는 다친 팔을 들어 보였다. 따지는 어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팔이 다친 건 도망간 내 탓이에요?”
“응?”
“내가 도망갔으니까. 그래서 인과응보 당한 거예요?”
이세정의 눈썹이 서서히 내려갔다. 내가 우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 한순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이세정은 내 시선을 피해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다가 ‘잠시만.’ 하고는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통화 한 통 하고 온다더니, 삼십 분이 지나도록 식탁은 비워져 있었다. 밥은 다 먹었고, 속이 타 와인도 몇 모금 마셨다. 하염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쓱 꺼내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들었다. 라이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불을 붙이곤 옅게 올라온 불길을 살폈다. 세기를 조절하니 불길이 커졌다 줄어졌다 반복되었다.
갑자기 뚜껑이 탁 닫혔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쑥 빠져나갔다. 빼낸 담배를 제 입에 대신 문 이세정이 옆자리에 앉았다. 몸은 나를 보며 앉았으면서 고개만 돌려 연기의 방향을 반대쪽으로 향하게 만든다.
무슨 전화를 그리 급박하게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유쾌한 통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세정은 연기를 내뱉으며 몇 번이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 복잡한 심경을 좀 알아달라고 일부러 티를 내는 것처럼.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나랑 심각한 대화를 나누다 말고 도중에 통화를 하러 사라진 이세정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우채민 씨.”
이세정의 부름에 시선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뚱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이세정이 담배를 내려두고 내 양쪽 뺨에 손을 올렸다.
“누굴 만났어요?”
“……오늘 밖에서요?”
“알아봤지만 모르겠어요. 의사 한 분과 이야기한 게 다라면서요.”
“내가 누굴 만났는지가 중요하세요?”
이세정은 내 뺨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뺨에 닿는 열 손가락이 초조하고 불편한 심리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세정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감정이 모두 느껴졌다.
“산책하러 갈래요?”
“…….”
“싫어요?”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내리고 있던 눈길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세정이 뺨에 둔 손을 내 뒷목으로 옮겨서 살살 쓰다듬었다. 서늘한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면서도 손길만은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눈을 믿어야 할지, 그의 행동을 믿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목을 뒤로 빼서 얼굴에 닿은 손길을 내쳐버렸다.
“옷 갈아입을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산책으로 적합한 옷을 고르는 도중에 어느새 뒤쪽에서 나타난 이세정이 옷 하나를 내 앞에 대어보았다. 대충 고른 것 같은데, 추천해준 것들을 보면 스타일이 확고했다. 색이 특이하지 않고, 무늬가 없고,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특히 별 무늬나 주머니가 달린 옷은 꼴사납다고 싫어했다. 나는 추천해준 것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티를 골라 입고는 거울에 비춰보았다. 오버 핏이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주말에 쇼핑할래요?”
제 옷이 크단 걸 그제야 알아차린 듯 이세정이 물었다. 나는 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팔 다 나으면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드물게도 이세정은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저가 잘못해도 뻔뻔하게 나를 탓하던 사람이 이것만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외면한 채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산책하러 가자고 해놓고 도착한 곳은 다리 근처였다. 천천히 대교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너편 도시 불빛이 유난히 밝았다. 차를 타고 한참 달린 줄 알았더니, 다시 보니 걸어왔어도 괜찮았을 거리였다. 중간에 차가운 맥주 하나 사느라 뜸을 들였던 일이 시간을 지체시켰던 모양이다.
나는 이세정이 따준 병맥주를 조심히 들고 몇 모금 마셨다. 늦은 저녁임에도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찬 맥주는 더위를 잠시 상쇄시켜주는 듯싶더니 금세 땀을 몰고 왔다. 내가 이렇게 더운데 이세정은 얼마나 더울까 싶어서, 화난 것도 잊고 맥주를 넘겨주었다.
“집 안은 날씨 좋았는데.”
과열되었던 대화가 장소를 바꿈으로써 누그러지는 효과를 바랐더라면 실패한 것 같다. 집에서나 차에서 느끼지 못했던 더위가 지속적으로 닥쳐오는 터라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대체 바람은 왜 불지 않는 것일까. 속으로 한탄하며 도중에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다리의 난간에 두 팔을 올리자, 이세정이 맥주병을 내 뺨에 대어 더위를 식혀주었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곳은 주로 울분에 휩싸였을 때 혼자 오는 곳이 아닌가. 자살을 실행하진 않더라도 그런 가정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을 때 말이다.
“떨어져 죽기에 좋아 보여요?”
난간에 두 팔을 기대고 베고 누운 이세정이 조용히 물었다. 팔에 얼굴을 기댄 터라 눈만 겨우 보였다. 나는 뒤를 돌아 도로를 달리는 차를 힐끗, 그리고 다리 아래를 힐끗 쳐다보곤 답했다.
“차에 치여 자살하는 사람들 이해 안 가요. 민폐잖아요. 죽을 거면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시신 건져내는 건요?”
“아…….”
강물에서 시신을 찾아 수습해야 하는 경찰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정작 죽을 수 있는 장소도, 방법도, 마땅히 없었다. 나는 까만 강물을 주시하다가 고소공포증이 일어날 것 같아서 뒤를 돌았다.
“민폐 안 끼치고 죽을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이 있을까요?”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고통 없이 죽는 법도 알고 있어요.”
“뭔데요?”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이세정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정말 간단한 방법이라.”
이세정은 난간에 기대고 있던 팔을 내리고, 몸을 돌려서 나와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멍하니 차들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이세정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앞에 가만히 세워둔다. 나는 앉지도, 맥주를 나누어 마시지도 않았다. 그저 이세정을 내려다보며 할 말 있으면 얼른 하라고 채근했다. 이세정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난 다쳐올 줄 몰랐어요.”
차분히 털어놓은 말에 나는 그랬을 테다, 하고 무감각하게 동조했다. 만약 일부러 내 팔을 망가트려 놓고 그 조폭을 응징했던 거라면 나는 약속이고 뭐고 이세정으로부터 당장 도망가야 했다. 아니, 이 강물로 뛰어내려야 했다.
“나도 하나 자를까요?”
이세정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손을 다친 것처럼 저도 손가락을 자를까 묻는 것이다. 그 말이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웃음도 나지 않았다.
“진심이에요, 아니면 위협이에요?”
“진심이에요.”
“형의 진심은 항상 저한테 위협이 됩니다.”
무슨 속셈으로 이딴 말을 하는 건지 무섭기만 했다. 나는 답지 않게 이세정에게 톡 쏴놓고는 ‘그러지 마세요, 제발.’ 하고 소심하게 덧붙였다. 농담이 진담이 되곤 하는 사람이라서 정말로 손이라도 자를까 봐 겁이 났다. 아, 손……. 이세정은 이미 손목 자해를 통해 제 불안함을 표출하지 않았던가. 그게 죄책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실래요?”
이세정이 병을 흔들었다. 나는 반 모금 정도 입에 물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 겨우 삼켰다. 술이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입이 왠지 텁텁했다. 허리를 굽혀 이세정에게 병을 건네주었더니 그가 내 손목을 잡아 옆에 앉혔다. 나는 팔을 세게 뿌리치고 도로 일어났다가, 눈치를 살피곤 살금 옆에 자리를 잡았다.
혼자 난리 치는 내 모습이 보기에 이상했을 텐데 이세정은 별말이 없었다. 다만 턱을 괸 채로 맥주병을 만지작거렸다. 이세정이 하는 행동들 가운데 사실 쓸데없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저 행위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듯이 잔뜩 긴장했다.
“나 어렸을 때…….”
이세정이 문득 운을 뗐다.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가 낮은 울림을 주어 어깨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강아지한테 집착한 적 있는데, 끝이 안 좋았어요.”
“…….”
“이번엔 잘해보고 싶어요.”
“……전 그 개가 아니에요.”
“난 그 개랑 안 잤어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의 다짐을 하기 전에, 이미 일어났던 일에 관해 진심으로 뉘우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내가 안심을 하고 곁에 있지.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세운 무릎에 뺨을 댔다. 이세정이 손가락으로 내 뺨을 툭 건드렸다.
“내가 싫어졌어요?”
말투는 가벼웠으나 말 속에 우울감이 배어있었다. 나는 혼 좀 나보라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았다고 오해한 이세정이 내 뒷목을 만졌다. 손이 조금 더 올라오더니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대로 끌어당긴다. 이마를 맞댄 이세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럼 어떻게 해요. 놔줄까요?”
“……예?”
이세정은 남을 떠보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물음에 당혹한 내 표정을 확인하곤, 방금 전 내 침묵이 단순한 시위였음을 곧장 알아차렸다. 가까이에서 마주친 눈이 요사하게 가라앉았다.
“대뜸 좋아했다면 서운할 뻔했어요.”
나는 맥주를 가져와 물 마시듯 마셨다. 몇 모금 숨도 안 쉬고 들이키자, 곧 바닥이 드러났다. 나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마시곤 바닥에 병을 굴렸다. 병이 데굴데굴 굴러가 이세정의 무릎에 닿았다. 이세정이 병을 세워놓고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 싫어하지 마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채민 씨는 날 책임져야 돼요.”
책임지란 말, 전에도 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하도 터무니없던 말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듣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체 뭘 책임져야 하느냐고 물었다.
“날 살렸잖아요. 몇 번이나.”
무슨 소리지. 나는 영문을 몰라 미소를 지었다.
“왜… 우스워?”
“……아, 아니요. 제가 언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일 년 전에 그랬고. 그리고 매 순간이 그래요.”
이세정은 다정하게 내 뒤통수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집착하는 건 내가 더 싫어요. 지겹고, 괴롭고, 쓸모없는 감정 소비를 하죠. 그러기 싫어서 그만두자 다짐했는데, 우채민 씨가 나한테 연락했어요. 내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언제? 라는 의문이 들기 전에, 비가 몰아쳐 오는 그날이 떠올랐다. 아찔한 레이싱을 경험한 뒤 비를 피해 들어간 그 레스토랑. 빗소리는 심장 박동처럼 창을 두드리고, 주변을 채운 목소리들은 죄다 조곤조곤하고, 앞에 앉은 그 남자는 어딘가 위태롭고. 나와의 대화에 거북한 점이 있었는지 이세정이 며칠간 연락을 끊는 바람에 상당히 애가 탔었다.
“나한테 미련을 줬어요. 그래놓고 자꾸 도망가려고 해서 괴로웠어요.”
“내 잘못이에요?”
“내 잘못이에요. 팔에 관해선 사과할게요. 난 우채민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도중에 말을 멈춘 이세정이 내 팔을 보았다.
“그 팔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까칠하게 대했다면 미안해요.”
고작 이런 말 따위가 얼마나 위안이 된다고, 조금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도 싶었다.
“우채민 씨가 떠나면 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신을 책임지라고, 이세정이 말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나도 모르게 이세정의 어깨를 토닥거리려다가 주춤 손길을 치웠다. 애써 바닥을 쏘아보았다.
“나 화가 안 풀리는데…….”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요?”
“저……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우채민 씨는 왜 항상 부탁을 그리 어렵게 해요?”
나는 눈썹을 비뚤게 구겼다.
“형의 귀는 상황에 따라 닫혔다 열렸다 하잖아요.”
“…….”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서.”
픽 웃은 이세정이 무슨 부탁인지 말하라고 했다. 어떤 말이든 들어줄 것처럼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나는 이세정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빼내어 흔들어 보였다. 손에 힘이 없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흔들던 것을 멈추고 두 손으로 조심히 잡았더니, 이세정이 물었다.
“휴대폰 사줄까요?”
“제 휴대폰 돌려받고 싶어요.”
“난 우채민 씨 휴대폰 가져간 적 없는데.”
나는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떴다가 아, 하고 탄식했다. 휴대폰은 아마도 누나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 집부터 가야 할 것 같다. 간 김에 여전히 연락이 안 되는 누나 소식도 듣고, 휴대폰도 찾고.
“휴대폰 사줄게요.”
“아니요. 그냥 집에 갔다 오면…….”
이세정 딴에는 티 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눈치 없는 나조차 알아차릴 만큼 명백한 짜증이 얼굴에 비쳤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래놓고선 왜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냐고, 할 말 있으면 해도 된다고, 느긋하게 채근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그냥 집에 갔다 오면.’라는 부분에서 내 요구를 알아차렸을 터. 이세정이 일부러 무시하는 거라고 밖에는 이 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제 필요에 따라 귀를 닫았다가 여는 거, 맞는 것 같은데. 나는 주눅이 들어 조그맣게 말했다.
“휴대폰 사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누나와 아버지, 지수, 그리고 이세정의 것이 다였다. 다시 말해 연락할 수 있는 번호도 그 네 개가 다라는 소리였다. 내 인간관계가 정상적인 편은 아니었으니 더 연락할 번호도 없었지만, 이건 기분의 문제였다.
내 표정이 신경이 쓰였던지 이세정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요?”
“…….”
“……응? 왜 승질이 나 있어요. 귀엽게.”
이세정이 내 정수리 부근을 뺨으로 비볐다. 저 혼자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나는 목을 움츠려 스킨십을 풀어내곤 이세정을 올려다보았다. 점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순간 추워질 만큼 시린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 담았다.
“…….”
날 몰아가는 것 같지 않으냐고, 그리 물으려다가 할 말을 죄다 잊었다. 지독하게 외로워 보이는 얼굴이 겹쳐진다. 그래. 이 얼굴은 나랑 아주 닮았다니까. 얠 상처 입히면 내가 상처받게 될까 두려워질 만큼 너무 닮았다니까.
성질났던 것들이 사라졌다. 응어리는 남아있지만, 이걸 풀기엔 상당히 복잡하다. 귀찮기도 하고, 감정 소모하기도 싫고 해서 그냥 두기로 했다. 나는 이세정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축 늘어졌다.
“필요한 거…… 필요한 거 생각났어요.”
“뭔데요?”
“배도빈이요.”
“……예?”
“물어볼 게 있습니다.”
욕실에서 발견한 주사기에 관해 알아내야 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세정이 죽는다, 산다, 하며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생각이 났다. 그 주사기가 영양제일 리는 없으니까, 위험한 거라면 빨리 알고 싶었다.
배도빈을 집에 초대하기 위해서 온갖 핑곗거리를 끌어모았다. 배도빈이 배웠다던 가야금, 뉴스에 나온 음대 모 교수, 브랜드 치킨, 눈 밑에 점. 개중에는 굳이 배도빈과 대화하지 않아도 되는 주제도 있었고, 대화해봤자 별로 영양가 없는 주제도 있었다. 특히 눈 밑에 있는 점을 만져보고 싶다는 것은 얼핏 듣기로도 이상한 소리였다. 내 마지막 대목에서 이세정은 제 심정을 티 내지 않는 선에서 굳이 만나야 하느냐고, 통화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눈 밑에 점은 전화상으로는 만질 수가 없어서.”
“핑계가 이상하단 거,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거죠?”
거짓에 능숙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진짜 의도가 듣고 싶어요.”
“…….”
“말 안 해줄 테고, 말해 달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고.”
이세정이 휴대폰을 켰다. 배도빈에게 전화를 건 뒤, 통화 소리를 못 듣도록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멀어지는 이세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이세정이 나를 곁눈하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잠시 후 짧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이세정이 말했다.
“도빈이 아파서 입원해 있대요.”
“정말요? 어디가 아프대요?”
당장 만나잔 것도 아니고, 몸이 나으면 만나도 되는 일이었다. 단순한 감기 정도라면 사흘이나 일주일 뒤로 미룰 셈이었다.
“큰 병이래요?”
“말기래요.”
믿을 수 없어 말을 잃었다. 간암 말기, 폐암 말기, 대장암 말기. 어느 암 뒤에 가져다 붙여도 위협적인 단어였다. 죽음은 그림자도 없이 찾아올 때가 있다지만 그래도 너무 뜬금없었다. 좀, 아니, 많이 걱정되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세정의 마음이 다칠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나는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태연스러운 시선이 다가왔다.
“왜 그렇게 봐요?”
“……도빈 형이 걱정돼서.”
“왜 도빈이가 걱정돼요?”
나는 내 사람들을 아끼는 만큼 이세정의 사람들도 아껴주고 싶었다. 제 친구의 고통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세정이 지금 내 심정을 알 리가 없으니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세정은 어서 집에 가자며 나를 끌어당겼다.
***
“뭐냐, 그 눈은.”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한 오후. 이세정은 제 친구가 아픈 대도 걱정할 줄 모른다고, 혼자 슬퍼했던 일이 무색하게도 배도빈은 멀끔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아파서 입원했다고 한 지 며칠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당혹스럽게 뒷걸음질을 치면서 배도빈의 모습을 시야에 온전히 담았다. 큰 박스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체력이 꽤 있는 듯했다. 얼굴색도 좋고, 몸에 달리 이상도 없어 보인다. 병원에서 급하게 나온 옷차림도 아니라서 나는 입원을 했던 건 맞는지조차 의심이 되었다.
“형, 말기라고 했잖아요.”
겨우 입을 뗐더니 배도빈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무슨 말기.”
“무슨…… 병 말기. 왜 병원에 안 있고, 여기 있어요?”
“아, 그거. 감기 말기. 시발, 감기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죽다 살아났네.”
배도빈은 하도 아파서 주사를 양팔에 하나씩 꼽아 두 배의 영양제를 맞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병실 침대에 묶일 뻔했다고 털어놓으며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집 안으로 발을 디뎠는데, 나는 이세정과 이야기된 일인가 하고 카메라를 힐끔거렸다.
“너 나 보고 싶었다며.”
“……세정이 형이 이야기해줬어요?”
“아니, 그냥 한 소린데. 진짜 나 보고 싶었냐? 세정이가 먼저 안부 물어본 게 처음이라 놀라서 낫자마자 달려온 거야.”
배도빈은 이 집 구조가 익숙한지 성큼성큼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식자재가 든 박스를 주방에 내려놓고 다시 거실로 향한다. 새로 생긴 소파를 한 번 만져보고, TV를 한 번 만져보더니 이내 소파에 길게 누워 리모컨을 조종했다. 나는 그 밑에 앉아서 배도빈을 돌아보았다. 권태롭게 눈꺼풀을 내리고서 하품을 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형, 왜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세정이 보러.”
“저는요?”
“내가 널 왜 보러와.”
무심하게 답한 배도빈이 티비 채널을 돌리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그거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엄연히 꼬시는 멘트야. 자제해.”
방금 전 내가 한 말이 꼬시는 멘트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말이 꼬시는 멘트가 되려면 우리가 이성 관계이거나 배도빈이 게이여야 했는데, 두 가지 조건 중 그 무엇도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세정이 형한테 도빈 형 초대하자고 말했거든요. 세정이 형이 그 말 했나 하고.”
“안 했어. 나 왜 보자고 했는데?”
“가야금에 대해 물어보려고요.”
“뭐?”
나는 태연한 척 입을 열며, 카메라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돈 아낀다고 일반 관찰 카메라만 설치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분명 음성까지 들어갈 텐데, 그렇다면 주사기에 관해서 어떻게 말을 끄집어내야 이세정이 눈치채지 못할까 고민이 되었다.
“무슨 가야금.”
“가야금은 보편적이진 않지만, 대중적인 악기잖아요. 예고 나온 특수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접해볼 기회도 꽤 있고. 그러다 보니 관심이 생겼는데, 마침 형이 배웠다고 하시니까.”
나는 말을 하면서 같이 욕실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했다. 배도빈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세정이 오기 전까지 할 일은 해두어야 했다. 번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나는 마실 것을 주겠다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나를 바짝 뒤따라온 배도빈이 ‘집주인이세요?’ 하고 비꼬았다.
“나 주스 먹을래.”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배도빈이 먹을 만한 주스는 없었다.
“주스가 없는데.”
“그럼 만들어주면 되겠네.”
주스 레시피도 모를뿐더러 손이 아파 칼질조차 하지 못한다. 내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더니, 배도빈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불리할 때만 불쌍한 척을 하냐, 넌?”
“만들어 드릴게요.”
“됐다.”
배도빈이 과일을 꺼내와, 적당히 썰어 모두 갈아버렸다. 저만의 야채 주스 만드는 레시피가 있는 건가 했더니 여기에 닭 가슴살을 넣어도 되냐고 자신 없는 투로 묻는다. 나는 닭 가슴살을 넣어도 괜찮은지 잘 모르겠으며, 만약 괜찮다고 해도 닭 가슴살이 집에 없어 넣을 수 없다고 답하며 간 주스를 직접 컵에 따랐다.
“드세요.”
배도빈에게 컵을 건넸다가 받아들이려는 손길을 흠칫 피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주스를 쏟지. 그래야 주사기가 있는 그 욕실로 끌고 들어갈 텐데. 내가 계속 컵을 건네기를 망설이자, 배도빈이 이상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뭐 하냐?”
“정말 죄송한데, 먹여 드려도 될까요?”
“뭔 그딴 미친 말을 그렇게 예의 바르게 해?”
배도빈은 컵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내가 힘을 주고 있다가 허무하게 놓아버리니 균형이 흔들리며 주스가 쏟아졌다. 검은 주스는 배도빈의 옷을 찐득하게 적셨다.
“괜찮으세요?”
“…아주 좋아 죽네?”
나는 어서 욕실로 가서 씻자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투덜거리는 배도빈을 끌고 가느라 진땀이 다 났다. 배도빈이 내가 원하는 대로 쉽게 행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자꾸 몸을 버티는 바람에 2층 욕실로 들어섰을 무렵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욕실에 내팽개쳐진 배도빈이 나를 깔아본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빨리해.”
“뭘요?”
“날 이런 으슥한 곳까지 끌고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참고로 난 선빵은 안 날려. 법정에서 불리해지니까.”
“그러려고 온 게 아니고요…….”
나는 다시 스리슬쩍 배도빈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 힘을 주자, 배도빈은 쉽게 세면대 앞까지 끌려갔다. 나는 세면대에 있는 주사기를 찾아내 배도빈에게 내밀었다.
“나 감기 걸렸다고, 영양제 챙겨준 건 아니겠고.”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아. 부탁 안 들어주면 그걸로 찌르겠다고 위협하는 건가?”
“이거…… 성분 좀 알 수 있을까 해서.”
배도빈은 그제야 주사기를 받아들었다. 주사기를 이리저리 훑어보기도, 흔들어보기도 한다. 소용없단 걸 알면서도 냄새도 한번 맡아본다.
“어디서 났는데?”
“여기 욕실에서요. 딱 이 자리.”
“멍멍이 거냐?”
“예.”
“이거 오래된 거 같은데. 이 새낀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배도빈은 주머니에 주사기를 쑤셔 넣고는 당장 욕실 밖으로 나서기 위해 몸을 틀었다. 나는 다급히 배도빈의 뒷목을 붙잡아 돌렸다. 어처구니없던 나머지 말을 잃은 그에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너 나 빡치게 하려고 불렀지. 말로 해, 말로. 어디서 찌질하게 복수야.”
배도빈의 옷을 세면대 아래로 끌어당겼다. 주스 자국이 묻은 곳에 집중적으로 물을 댄 후 손으로 벅벅 닦으려고 했는데, 손이 이래서 마음껏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배도빈이 내 손을 내치고는 능숙한 솜씨로 옷을 비벼 닦았다. 검붉은 액체가 물감처럼 부스러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냥 나가면 의심할까 봐. 세탁비는 따로 청구해주시면 제가 갚을게요. 두 배로.”
“세 배로 갚아라, 인마.”
“예. 세 배로.”
세탁비가 오만 원이라고 하면 십오만 원, 십만 원이라고 하면 삼십 만원인데, 이건 강탈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차피 부탁을 들어주는 비용도 있으니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나는 속으로 페이가 센 알바 장소를 되새겨보면서 욕실 밖으로 나왔다.
“…….”
문 앞에 이세정이 서 있어서 간 떨어질 뻔했다. 이세정은 나를 한 번, 내 뒤를 한 번 쳐다보더니 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 둘이서 화장실에서 나오다니, 오해는 안 하더라도 이상한 상황인 것은 맞았다.
“왜 안 나가고 있어.”
뒤에서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배도빈은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내 등을 밀쳐대다가 어느 순간 굳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꼼짝없이 얼어버린 원인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야, 일찍 왔네.”
“일곱 시야, 도빈아.”
나는 조용히 말하는 이세정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배도빈의 주머니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욕실 안에서 나눈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왠지 불안해서, 아픈 것처럼 팔을 문지르며 이세정의 시선을 끌어왔다. 내 팔에 관심을 쏟는 이세정을 두고, 배도빈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눈짓했다. 기껏 연기까지 해주었건만, 배도빈은 내 염려 따위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저녁을 만들어주겠다면서 주방으로 향했다.
안 만들어줘도 괜찮은데.
“언제 놀러 왔어요?”
배도빈의 뒷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이세정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좀 전에. 아프다는 게 감기였대요. 심각했는데 다 나았고. 이제 괜찮다고 해서.”
“아, 나았어요? 다행이다.”
건조하게 대꾸한 이세정이 말을 이었다.
“저게 불쑥 찾아오는 게 불편하다면 경비에게 말해둘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전 좋아요.”
“좋아요?”
“…….”
“좋다고 했어요, 지금?”
이세정은 배도빈의 잔상이라도 남아있다는 듯 방금 전 그가 서 있었던 곳을 쳐다보았다. 빤히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한 듯싶은데, 괜히 해명하려다가 불씨만 키울까 봐 입술을 깨물어 말을 삼켰다. 작은 고통이 일은 입술에 손가락이 들어왔다. 이세정은 내 입속으로 엄지손가락을 넣었다가 뺐다.
“저녁 먹을까요?”
이세정이 내 어깨에 부드럽게 팔을 올렸다. 나를 주방 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배도빈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염려를 표했다. 카메라를 돌려보면 될 텐데. 욕실만 제외하곤 다 설치되어 있으니까.
“오늘 힘들었어요?”
달리 피곤해 보이진 않았으나, 말을 돌리기 위해 그렇게 물었다. 이세정은 자신의 안색이 그리 안 좋아 보이냐면서 제 얼굴을 더듬었다.
“회사 때문은 아니고, 여러 가지로. 저녁 뭐 먹을까요?”
“도빈 형이 뭐 준비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빈이에게 한 번 더 형 소리하면, 가서 쫓아낼 거예요.”
“…….”
그럼 뭐라고 하지. 지칭하는 단어를 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이세정은 옷을 갈아입고 온다며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 홀로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방에선 배도빈이 생닭을 썰고 있었다. 탁! 탁! 하고 어설픈 소리가 났다. 닭을 써는 솜씨가 능숙하지 못해,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일었다. 뭘 하려고 그러지. 천천히 다가가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널린 재료들을 보고 추측하건대 아마도 치킨을 만들 셈인 것 같았다. 며칠에 한 번 꼴로 치킨을 시킨다더니, 만들어 먹기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아, 이거 칼 이상한데.”
배도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닭의 몸통에서 칼날을 빼냈다. 날이 생각 외로 무디다면서 시험 삼아 도마에 몇 번이고 쳐대었다. 그리고 다시 닭을 잘라보았는데,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팔에 힘줄이 돋았다. 저렇게 무식하게 온 힘을 다해서 썰어대는데 어째서 잘 썰어지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다. 아니…… 칼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저건 주로 과일을 깎을 때 사용하는 칼이었다.
“왜 그렇게 보냐.”
문득 내 시선을 느낀 배도빈이 뚱하게 물었다.
“왜 손님으로 와서 요리하나 하고요.”
“원래 이거 하려고 왔어. 혼자 먹기 외로워서.”
“아…….”
“요즘 막 결혼하고 싶더라. 나이도 안 찼는데.”
입술로 중얼거리던 배도빈이 문득 내게 지긋한 눈길을 보냈다. 시선이 아래로 훑어 내려가더니 이내 내 목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나는 얼른 목덜미를 움츠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거, 이거.”
배도빈이 눈앞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흔들어 보이곤 한쪽에 고이 놓아두었다.
“너 누나 있지. 결혼했냐?”
“결혼했습니다.”
“아, 그래? 예쁘냐?”
“결혼했다니까요…….”
“너랑 닮았어?”
“예.”
“아, 그럼 안 되겠다.”
너 내 스타일 아니야. 배도빈이 덧붙였다. 다행이었다, 내가 배도빈의 스타일이 아니라서. 누나는 좀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했다. 배도빈은 바람기가 다분하여 여자를 힘들게 할 상이었다.
탁! 다시 닭을 자르는 소리가 났다. 놀라울 만큼 잘 잘리는 부위가 있는가 하면 껌처럼 질긴 부위도 있었다. 과도로 이만큼 부위를 분리해낸 것도 대단하다 싶었다.
“저기…….”
“아, 왜 안 잘리냐.”
나는 다른 칼로 바꾸어주려고 목을 길게 빼고 사방을 기웃거렸다. 어디에 칼이 있는지 찾고 있는 와중에 배도빈이 내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날의 끝이 얼굴 쪽으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짝 얼어붙었다. 날이 잘 드는지 보자며 키득거리는 것으로 보아서 딴에는 장난을 치는 것 같았는데,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눈물이 고였다. 도저히 장난을 받아줄 수가 없어서 뒤를 돌아 이세정을 찾았다. 마침 환복을 마친 이세정이 주방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이세정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 와중에도, 어리광부리는 것으로 오해할까 두려워 끌어안지는 못했다.
“왜 울어요?”
이세정은 놀란 눈으로 내 눈가를 문질러 주곤 상황을 확인했다. 이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러는지 알았다는 듯 으르듯 입술을 뗐다.
“도빈아…….”
“그냥 놀아주려고. 난 걔가 이렇게 개복치인 줄 몰랐…….”
살아가면서 축적해놓은 수많은 기억 가운데 지우고 싶은 장면들은 주로 창피한 순간들이었다. 절망에 도달해본 적 없었을 때엔 그러했다. 만약 지금 기억 하나를 지울 수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도자기를 택할 것이다. 도자기의 기억이, 도자기의 존재가, 나를 너무 힘들게 만들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해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어김없이 두려워졌다.
이세정은 나를 달래듯이 내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쓰다듬어주었다. 문지르는 손길이 조심스러워, 잠시 눈을 감았다. 소등되었다가 켜진 시야에 이세정의 시선이 잡혔다. 온전히 나를 쳐다보면서 내 뺨과 눈 아래, 그리고 귀 등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린다. 발광하던 심장이 늪에 빠지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세상이 잠잠히 소등되는 것 같았다.
“짜증 나네.”
머리 근처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트라우마도 그 사람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
“이건 뭐, 다 무서워해서.”
이세정은 내 눈가에 쪽, 입을 맞추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들고, 슬슬 앞으로 움직였다. 마주 본 채로 안고 있던 터라 이세정이 앞으로 오면 올수록 나는 그만큼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세정의 허리에 팔을 둘러 중심을 잡곤 그가 이끄는 대로 계속 이동했다.
“뭐 하고 있었어?”
어느 순간 멈추어 선 이세정이 내 뒤쪽을 향해 물었다.
“치킨 자르고…… 야, 나 미안하다 했다. 사과했는데도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치킨 자르는 데에 쓰이는 칼은 아닌 것 같은데.”
“약간 장인처럼 보이려고. 장인들은 다 이런 특이한 칼을 쓰잖아.”
“잘 잘리겠어?”
잠깐의 침묵 끝에 웬 신음이 들렸다. 내 시야엔 이세정만 담겨있었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충분히 자르겠네.”
“씨발, 장난하냐.”
욕설에 놀라 뒤를 돌아보려고 했더니, 이세정이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뻣뻣하게 서 있어야 했다.
“그걸 왜 내 피부에 확인해? 와, 나 이…… 아, 혈압 올라.”
나는 다시 한번 몸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이세정이 순순히 밀려났다. 뒤를 돌아보자, 흐르는 물에 팔뚝을 씻어내고 있는 배도빈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핏물이 개수대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 팔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살벌하여 내가 괜히 미안해졌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이냐? 존나 아프네. 내가 쟤를 왜 멍멍이 새끼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드디어 기억났다.”
배도빈은 당사자를 바로 앞에 두고도 서슴없이 삿대질을 했다.
“나 어렸을 때, 쟤가 나한테 약 먹였거든. 얼마만큼 먹였냐면,”
배도빈은 두 손을 둥글게 구부려서 원을 만들고는 ‘이만큼? 이만큼?’ 하며 부피를 늘려갔다. 어릴 적 어떤 일이 있었건 말건 지금 중요한 건 상처였다. 나는 다급하게 연고와 밴드를 찾아 발걸음을 돌렸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세정이 제 팔을 잡아 원의 부피를 줄여주자, 배도빈은 즐거웠던 옛 추억을 떠올리듯 키득키득 웃어댔다.
“내가 그런 일은 다 잊고, 쟤 갇혔던 것만 생각했던 거지. 따지고 보면 불쌍한 놈이 아닌데 왜 그땐 그렇게 생각했을까? 추억 미화인가.”
뭐 그리 재밌는 말이라고, 목소리엔 짙은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이 다 싸해지도록 화를 내지 않았던가. 어째서 제 팔을 그은 사람에게 이리 쉽게 화가 풀리는 거지? 혹시 아까의 상처가 내 환각이었나 하고 배도빈의 팔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옅게 그어진 사선을 따라 핏방울이 점점이 맺혀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요?”
이 기묘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이세정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내 이마에 손등을 올리고 열을 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금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눈길이 서서히 좁혀졌다. 아무래도 이세정은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것 같다. 주변에서 오냐오냐해주니까 이렇게 되지.
***
하루의 시작은 일기예보였다. 이세정은 전화를 걸어 날씨 예보를 확인해서 비가 저녁에 온다거나 혹은 안 온다는 확신이 들면 외출하곤 했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제발 비가 쏟아져서 이세정이 회사에 안 갔으면 싶었다. 혼자 있기 외로웠을뿐더러 만약 나갔다가 비 때문에 안 들어올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기우에 불과한 가정이었지만, 오늘 보니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일곱 시쯤 내린다던 비가 조금 이르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이세정은 퇴근하지 않았고, 집 안엔 나뿐이었다. 나는 허망하게 빗물이 내리치는 창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이어 천둥 번개도 수반되었다. 곧 그치겠지. 가지고 있던 희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녹아 없어졌다.
“…….”
요즘 하는 일이라곤 종일 이세정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오늘 못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황망해졌다.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창가를 서성였다. 정말 안 올 셈이냐고 물어볼까. 주머니에 무심코 손을 집어넣으려다가 휴대폰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다른 방도가 없을까. 사방을 둘러보던 내 눈에 문득 카메라가 잡혔다. 쭈뼛거리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서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아니다. 카메라에 대고 말을 걸기엔 내 존엄성이 걸린다. 지켜보는 이가 누구든 나를 어이없이 생각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을 행하고 싶지 않았기에 미련 섞인 얼굴을 치우고 현관 근처로 가서 주저앉았다. 딱히 이세정을 기다리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거기 앉아서 저녁 메뉴를 생각해보았다. 하필 오늘 주방장님이 쉬는 날이라서 혼자 해먹어야 했다. 이왕이면 비 오는 날 어울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예를 들어 치즈 케이크 같은.
성의 없이 몇 가지 음식을 생각해보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허리가 결려서 뒤척이다 새우잠 자듯 몸을 구부렸다. 무릎을 위로 세우자 자세가 좀 편해졌다. 나는 벽을 베고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몸이 부유하고 있었다. 다리가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자마자 눈을 떴다. 눈앞에 이세정의 얼굴이 있었다. 목선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서 주변을 훑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벽이나 천장 따위가 보였다. 나는 이세정에게 들려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자는 척해요. 좀 더 안고 있게.”
이세정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말마따나 눈을 감았다가 번뜩 든 생각에 다시 눈을 떴다.
“비 그쳤어요?”
“아직 와요.”
이세정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나는 부드러운 어딘가에 눕혀졌다. 곧 목 뒤로 베개가 받쳐지고, 이불이 덮어졌다. 나는 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도 창을 힐끔 보았다.
“그럼 어떻게 오셨어요?”
“차를 타고 왔어요.”
“어떻게 차 타고 오셨어요?”
“차 문을 열고, 좌석에 오른 뒤에, 다시 닫으면 돼요.”
그게 아니고…… 비 오는 날 차 타고 왔다는 것이 너무 정상적인 행동이라서. 차 와이퍼를 떼고, 비 오는 날 외출하지 않고, 자해를 일삼는 사람이다. 빗줄기를 뚫고서 집에 왔다는 사실이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무슨 표정으로 쳐다보았는지, 나를 내려다본 이세정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우채민 씨가 바닥에서 자고 있어서, 걱정이 됐어요. 지하주차장 이용해서 왔으니까…… 뭐 뿌렸어요?”
이세정이 허리를 숙여서 내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가 움찔하자 조금 물러섰는데, 가까이서 쳐다보는 눈동자가 당혹스럽게 흔들렸다.
“아, 샤워했구나.”
“예, 좀 더워서. 이젠 괜찮아요.”
나는 이불을 들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여덟 시였다. 아무래도 저녁 먹기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도로 눕기도, 놀기도 애매한 시간이라서 뭐 하지, 하고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이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휴대폰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주실 줄 몰랐는데.”
눈을 비비벼 남아있는 졸음을 털어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휴대폰에 한 사람 한 사람 연락처를 저장했다. 막 지수의 번호까지 저장을 끝마쳤을 때 이세정이 또 무언가를 밀어주었다. 케이크였다. 아까 치즈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입으로 발설한 적은 없는데. 정확히 치즈 케이크를 사온 것은 아니어도 케이크가 반가워, 입꼬리에 미소를 매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더 있어요.”
이세정은 팔을 뻗어 인형 하나를 끌어왔다. 웬 동그란 눈과 마주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내 몸만 한 펭귄 인형인가 했더니 원근법 때문인 듯했다. 고개를 뒤로 빼자 작고 귀여운 인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녕.”
이세정은 무심하지만 다정한 어조로 인사하며, 인형의 뒷목을 눌렀다. 이세정 대신 꾸벅 고개를 숙인 인형의 고개가 잠깐 앞뒤로 반동했다.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니었다. 인형 말고 이세정이. 흐흐, 하고 흐르듯 웃었더니 이세정이 그대로 인형을 안겨주었다.
이런 거 가지고 놀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다. 내 나이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맞춰주기 위해서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케이크 잘라올까요?”
반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은 이세정이 상자를 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이세정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인형을 내려놓았다. 유치원으로 강제 워프를 탄 기분이었다. 물론 그래서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세정의 관심이 싫을 리가 없었다.
입이 좀 쓴 듯해 입맛을 다시는 중에, 시선이 우연히 창에 닿았다. 비 내리는 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우울감 같은 건 단번에 씻어내려 줄 것 같은 화풍 같은 산수였다. 이 비를 보고도 우울함을 덧대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세정처럼.
나는 초콜릿, 마카롱, 피스타치오 같은 견과류와 케이크를 가지런히 담아 가져온 이세정에게 물었다.
“나가서 먹을까요, 우리?”
“여기 불편해요?”
“소파에서……영화 보면서 먹고 싶어서.”
이세정이 접시를 소파 앞에 내려주자마자 나는 리모컨을 들었다. 영화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로맨스는 즐기기에 난감하고, 예술 영화는 지루해서 안 좋아하며, 특히 음악 영화 같은 경우엔 보다가 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정통 SF나 미국이 세상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히어로 물은 꽤 재밌게 보는 편이었다. 히어로물을 보자고 했는데 놀랍게도 이세정은 무슨 영화인지 못 알아들었다. 나도 지수의 추천으로 보게 된 터라 아직 초급 단계였지만 히어로 영화의 재미를 전파하기 위해서 첫 시리즈부터 틀었다.
사운드가 거친 영화 한 편 틀어놓고, 들리지 않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서 케이크를 먹었다. 내가 단 것을 이렇게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간식은 너무 맛있었다. 뜻밖의 낮잠으로 피곤은 사라졌고, 옆의 남자는…… 나만 보고 있고.
“영화 안 보세요?”
내 물음에 이세정은 군말 없이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무안해져서 포크를 내려두고, 입술을 핥았다. 내가 너무 돼지처럼 먹었나. 눈치가 보여 간식 먹기를 중단하니까 손이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봤던 영화를 즐겨보는 취미는 없었기에 나는 영화를 보는 척하면서 이세정을 곁눈질했다. 어느새 이세정은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를 감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쳐다보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달리 표정이 없었다.
날 보지 말고 영화를 보라고 주의를 줘 놓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 쪽에서 먼저 주의를 끌려던 찰나, 이세정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절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음울한 빗줄기와 마주했다.
“기대도 됩니다.”
이세정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적나라한 눈빛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두 눈이 온전히 내게로 오면 부담스럽고,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끌어오고 싶어 안달한다. 감정의 방향이 몹시 이질적이었다.
“기대도 돼요? 라고 물은 게 아니고, 기대도 돼요, 하고 허락한 거예요?”
“예.”
“나 졸려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내 트라우마를 들쑤시는 칼은 피하면 그만이나, 비는 숨길 수조차 없다. 커튼 자락에 감추면 소리가 들리고, 창문을 단단히 잠그면 습한 기운이 비를 떠올리게끔 한다. 내가 비를 다 감싸 안을 수가 없으니 대신 그를 감싸줄 생각이다.
이세정은 잠시 웃더니 내 어깨를 끌어당겨 목 근처에 제 머리를 기댔다.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비적거린다. 온전히 내게 의지한 그의 머리를 보는 순간 묘한 희열이 드리워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머리를 감싸주려고 손을 들었다. 그보다 먼저 이세정이 내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내더니, 이번에는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건 제가 기대는 건데요.”
당혹하며 입을 열었다. 이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우채민 씨 키가 아담해서 기대기 불편해요.”
“……저 아담하단 소리 들을 만큼,”
어이가 없어서 말을 중단했다. 버티려던 나를, 이세정이 다시 품에 안았다.
번개 때문에 사방이 사납게 번뜩였다. TV 화면에선 아는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세정에게 온전히 몸을 기댄 상태로 아까 받은 휴대폰을 꺼냈다. 저장한 번호들을 쭉 훑어보았다. 우선 지수와 누나에게 차례로 안부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내려다가 손가락을 구부린 상태로 한동안 멈추었다.
속이 왜 이리 쓰리지. 나는 아버지에게 잘 지내고 계시냐고 조심스러운 문자를 보내놓고 손을 뻗어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묽은 액이 터졌다. 손을 입으로 막고 한 번에 삼킨 나는 속에 담아둘까 고민하던 말을 털어냈다.
“이 초콜릿은 형이 다 드실래요?”
“맛이 없어요?”
“아니요. 형한테 양보하고 싶습니다.”
“…맛이 없구나? 다음엔 다른 거로 가져올게요.”
이세정이 좋아하는 간식인가. 나 때문에 멀리할 필요는 없는데. 나는 너무 맛있다고 중얼거리며 초콜릿 하나를 입에 더 넣었다. 실소와 함께 화면으로 눈을 돌린 이세정에게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 초콜릿, 어머니가 좋아했던 거라 싫어요.”
“어머니를 싫어했어요?”
“아니요. 사랑했고, 존경했고, 그리고 부러워했죠. 그런데 나는 날 더 사랑했나 봐요.”
나는 오래전의 감정에 취해서 깊은 생각도 않고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김질해보면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내 이야기를 다 들었다면 어머니를 싫어했냐는 물음을 던질 수 없을 텐데. 나는 당혹스럽게 말했다.
“전에 제 고백, 귀담아 안 들으셨죠. 그때 다 말했던 것 같은데.”
“한 귀로 흘려주면 고맙지 않아요?”
“마음은 편하네요.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나는 두 뺨을 손으로 세게 문질렀다. 입가에 띤 미소를 지워내고 입맛을 다셨다. 표정관리를 하던 중에 진동 소리가 들려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에게서 답장이 와있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드러움을 빙자한 차가운 답장이었다.
급한 일이란 건 어느 정도 수준의 일을 말하는 걸까.
나는 휴대폰을 내려두고 이세정의 어깨에 재차 머리를 기댔다. 고개는 화면을 향해있지만, 감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세정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내가 좀 더 엉겨 붙었더니 이세정이 자세를 교정하는 척하며 나를 떼어냈다. 그래놓고 제 쪽에서 먼저 끌어당겼다. 내가 적극적으로 엉기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영화 재밌어요?”
이세정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세정은 그렇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추천해준 영화니까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서 리모컨을 들었다.
“지루하면 다른 거 볼까요?”
“뭘 틀어놓든 똑같을 것 같아요.”
이세정이 마카롱 반 조각으로 내 입술을 눌렀다. 혀 위로 조각이 밀려 들어왔다. 입안에 단 향이 퍼지기도 전에 이세정이 맛있냐고 물었다. 먹고 있는 간식보다 더 달게 웃는 모습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언제까지고 못 박혀있을 것만 같던 시선이 번개 한 번으로 흐트러졌다. 카메라 셔터처럼 찰나의 순간, 목 아래로 음영이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이세정에게서 눈을 떼고 그에게 얼굴을 비볐다. 번개가 목소리를 갉아먹은 듯이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까이서 체향을 맡고 있자니 어떤 말이든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오랜 정적 끝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아버지랑 누나가 밉네요, 갑자기.”
“혼내줘요?”
“……아니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닙니다.”
“혼내줄 수 있어요.”
내가 동의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듯 어조가 단정적이었다. 나는 놀라 말했다.
“형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전 이제 불만 같은 건 다 삼켜야 돼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왜 나한테 불만을 토로하는 거예요?”
“…….”
말하면서 이상한 점을 알았는지, 이세정은 금방 물러났다.
“알았어요. 안 따져도 돼요.”
그럼에도 내가 입을 벌린 채 멍하게 주시하고 있자, 이세정이 내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간지러워 목을 구부렸다가 폈다. 찌푸려진 눈썹은 펴지지 않았다.
***
이제는 적응된 줄 알았는데, 이전에 한 이세정의 ‘혼내줄까요?’라는 말이 나를 좀 불안하게 만들었다. 괜한 걱정인 걸 알면서도 가족의 소식을 끊임없이 확인해보았다. 누나가 연락이 안 되는 것도 불안하고, 아버지의 답장이 짧은 것도 불안했다. 이것도 병인 것 같다. 의심병.
“우채민 씨 아버지가….”
병원에서 붕대를 푼 날, 이세정은 상처에 좋은 과일이라며 딸기를 사다 주었다. 빨갛게 익은 체리는 덤이었다. 나는 딸기보다는 체리를 더 많이 먹었는데, 씨를 빼는 과정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이세정에게 놀라서 그 상태로 얼어버렸다.
“……예?”
“피아노 가르쳐줬어요?”
“아…… 아주 어릴 때는 가르쳐줬죠. 그런데 왜 물으세요?”
“물어보면 안 돼요?”
“…….”
내 가족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 나는 좁혀지려는 눈가에 힘을 주고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는데, 이세정의 눈에는 퍽 부자연스러워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세정이 고개를 비뚤게 기울이고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죄송해요. 제가 좀 예민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나는 엄한 사람을 의심했던 일이 미안해져 우물쭈물하며 이세정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향초에 불을 피우던 이세정이 제 목을 슬쩍 내려다보고는 내 입에 체리를 넣어주었다. 꼭지를 따지 않았는지 입안에서 이물감이 씹혔다. 빼내려고 혀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뭣 모르고 씹다가 반으로 잘린 건가. 아무리 찾아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어요?”
“체리 꼭지 먹은 것 같아서.”
“아.”
이세정이 입을 벌리라고 말했다. 입안에 체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세정이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힘을 주자, 입술이 덜덜 떨리며 열렸다. 이세정이 내 입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안을 다 휘저어놓을 셈인 듯했다.
“그, 그냥 삼킬게요.”
“왜요? 빼줄게요. 아.”
“아니다. 그냥 뱉을게요.”
당혹스럽게 물러나던 손이 테이블에 켜놓은 향초에 잠시 닿았다. 뜨거워 죽을 것 같아 뒷걸음질을 쳤다.
“저런, 괜찮아요?”
“네…….”
나는 팔 끝까지 올라온 뜨거움을 상쇄시키고자 손 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거두고 창에 뺨을 붙였다. 팔도 붙였다. 이틀째 진득하게 내리고 있는 비가 마치 내 눈물처럼 창 아래로 미끄러졌다.
등 뒤로 체온이 느껴졌다. 뒤에서 내 배를 끌어안은 이세정이 내 손을 쥐었다. 귀한 물건을 쥔 것 마냥 조심조심 내 손을 문질렀다.
“내 손 조심히 써요.”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손인데 왜 제 손이라고 하는지, 묻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우는 것만 같던 하늘이 까마득해졌다. 그런데 내 주머니 안에 불쑥 손이 들어와서 다시 눈을 떠야 했다. 이세정은 내 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혹시 문자 왔어요?”
“주머니에 뭘 집어넣고 다니나 했더니. 왔네요, 문자. 볼래요?”
최근에 지수와 다시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이세정에게 허락을 맡았는데, 황당한 어투로 친구와 대화 나누는 것을 왜 일일이 검사받느냐는 대답을 받고부터는 찝찝함은 내려두고 마음 편히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뭐, 사실 이렇게 내 휴대폰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불안감이 오르기는 했다. 나는 구석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켰다.
“왜 숨어서 봐요?”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내 수상한 행태에 의심이 든 이세정이 나를 따라오며 낮게 물었다. 비 오는 날 왜 이리 팔팔한 건지 모르겠다. 그동안 기운 없어 괴로운 척했으면서.
“숨은 게 아니고…… 그냥 편한 자리 찾아서.”
그렇게 말하며 나도 모르게 카메라 쪽으로 눈길이 향했다. 내 시선을 따라간 이세정이 한마디 했다.
“숨어서 할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거랑.”
“그거가 아니라, 지수인데요.”
소심하게 중얼거리면서 휴대폰을 내려다본 나는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지수에게서 온 문자가 아니었다. 몇 주 만에 온 누나의 답장이었다. 한 달간 연락 안 하고 지낸 적도 있었으니 오래 연락을 끊었던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이세정 때문에 누나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던 차라서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혹시 채민이니? 나 진선인데, 네 누나 수술했어. 넌 연락 안 되고 아저씨는 못 온다고 해서 내가 보호자 역할 하고 있거든… 그런데 채민이 맞지?]
텍스트를 읽는 순간 심장이 성급하게 추락했다. 진선이라는 이름은 기억 속에 없지만 아마도 누나의 친구일 것이다.
[네 누나 오토바이에 부딪혀서 사고 났는데 어디서 뭐 하는 거야ㅠ 채민이 맞으면 연락 줘.]
진짜 웃긴 게, 나는 이 순간 가장 먼저 이세정이 떠올랐다. 최근에 이세정이 누나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곤 ‘혼내줄까요?’하고 농담 식으로 대꾸했던 일이 다라는 사실을 상기하고서도 말이다. 깊은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이세정을 쳐다보았다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단 걸 느꼈는지 이세정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저희 누나… 누나가 교통사고 당했대요.”
“아.”
이세정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결혼 소식을 들은 듯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러고서 달리 덧붙이는 말은 없었다. 이세정은 지인의 사고를 대하는 적절한 자세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 병원 가봐야겠습니다.”
“지금?”
“형은 집에 계세요. 전 지금 가고 싶습니다.”
아예 소식을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이미 누나의 사고를 접한 상태에서 모른 척 밤을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혹여 이세정이 붙잡을까 봐 조급하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역시나 몇 발자국 걷지 못해 이세정이 내 팔을 붙잡아왔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형 없을 때는 항상 병원도 혼자 갔고…….”
“아직 차도 대기 안 됐어요.”
“그냥 대중교통 타고…… 아.”
나는 몸을 틀어 방으로 들어갔다. 지갑을 꺼내와 출구를 향해 빠르게 걸으면서 혹시 몰라 지갑 안을 살폈다. 지폐는 없었고, 다만 교통 카드 하나만 있었다. 잔액이 얼마 남아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약 한 푼도 없다면 어떻게 하지.
이세정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는 입장에서 뻔뻔하게 돈을 빌리기 뭐했다. 길가다 돈이라도 줍겠지 싶은 마음으로 그냥 가려는데 이세정이 버스를 탈 생각이냐고 나지막이 물었다.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흠칫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선뜻 버스에 오르기엔 마음이 아직 단련되지 못했다. 누나가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서 만약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면 걸어가고,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거리라면 지하철을 이용해야겠다.
“카드 줄까요? 택시 타고 가요.”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지갑을 흔들었다. 언뜻 시야로 보이는 이세정은 묘한 표정이었다. 이세정은 눈만 똑바로 뜨고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냥 차 대기시켜둘게요.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괜찮습니다.”
“…….”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매에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대체 뭐가 의심스러운 건지, 이세정은 내가 물러난 만큼 다가와서 알 듯 모를 듯 나를 위협했다. 바짝 긴장한 나머지 호흡이 딸렸다. 이세정은 겁에 질려 축 처진 나를 보고서 난감하게 웃었다.
“나 떼어놓고 혼자 병원 가는 것도 모자라서 차까지 거절하면 내가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
“도망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상식적으로.”
“예? 아니요. 그럼 돈 받을게요. 차도 대기 시켜주…!”
“차도 안 타고, 택시도 안 탈 거면 뭘 탈 거예요? 버스?”
“버스는 제가,”
“못 타는 거 알아요. 그럼 걸어갈 거예요?”
나는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누나의 걱정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배려를 해줬으면 싶었다. 백 번 봐주어 배려는 못 해주더라도 이상한 대화로 시간을 끌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 내가 버스를 타든 택시를 타든, 어쨌든 병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형 너무 이상해요. 형이 이상하단 소리가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질질 끌었다간 이세정이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 나를 안 보내줄 것 같았다. 나는 달래는 것처럼 이세정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비가 와서 예민해진 것 같으니까 얼른 쉬라고, 아니, 그냥 자라고 자장가 몇 줄을 성급히 읊었다. 어이없는 눈빛을 마주하고도 자장가를 멈추지 않았다. 어설픈 쇼가 끝나자, 이세정이 내 뒷목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가가 자장가도 불러주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문밖으로 단숨에 다리를 내밀었다.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해 반동하듯 이세정을 돌아보았다. 이세정의 어떤 발언이 뒤늦게 내 발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저 버스 못 타는 거 알고 계셨어요?”
“예.”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전 말해준 기억이 없어요.”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에 관한 가정이 수백 가지 떠올랐고, 그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가정을 뽑아놓은 상태였으니까.
“……버스 사고 두 번 겪었습니다. 혹시 둘 다 형이 그랬어요?”
“그랬어요.”
대답은 산뜻하여, 마치 화낼 만한 거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지금 이세정이 짓고 있는 표정 또한 속죄라는 명목의 감정이 없어서 내가 예민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속에서부터 울분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형은…… 형은 뒤에서 공작해두고 물어보면 다 알려주시네요. 친절해라……. 정말 한 번도 저를 끝까지 속인 적이 없으세요.”
“…….”
“왜 거짓말 안 하세요? 그럼 제가 속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나를 엿 먹이려고, 나를 환장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친절하게 다 말해줄 리가 없었다. 거짓도 나쁜 거지만 이것도 뻔뻔하고 오만한 행동이었다. 아니다, 아닌 것 같다. 거짓말이 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방어 체계라면 이세정은 정말로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거였다. 어떻게 되어 먹은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열어보고 싶었다.
나는 이세정이 제 잘못을 순순히 고하고, 인정하고, 사과를 해서, 분명 달라진 듯하다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그런데 이세정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나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대기하고 있는 승강기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전에, 이세정이 따라 올랐다.
“우채민 씨 버스 사고로 다치지 않았어요. 왜 화를 내는 거예요?”
저 말은 궤변에 불과했다. 다르게 말해 내가 여행지에서 다치지 않았다면 이세정은 내게 행했던 모든 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나는 눈살을 일그러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이세정의 팔을 잡았다.
“저 형 너무 좋아해요. 그러니까 그만 이야기해요.”
이세정은 내 말에 답답함을 느낀 듯했다. 저 답답함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당장의 설득이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율하지 않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서 기사님이 기다리는 주차장 말고, 로비로 향했다. 승강기가 내려가는 동안 침묵하던 이세정이 문득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우채민 씨 입맛대로 날 재단시키고 있잖아요. 그럼 방향을 알려줘야지.”
“재단이요…….”
자신은 양보하고 있는데, 나 혼자 마구 떼를 쓰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내가 너무 못돼먹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로비를 나와 아까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진선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누나의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눈물을 삼키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우채민이라고…….”
[아, 그래. 채민이 맞구나]
가라앉은 내 목소리와 상반되는 밝은 음성이었다. 진선 누나는 우리 누나가 입원해 있는 병원 이름을 알려주면서 누나를 친 오토바이 운전자가 아주 ‘못돼먹어서’ 피해자의 과실로 몰고 가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누나가 빨간 불에 성급하게 건넜다면 과실 맞을 텐데…… 하고 멍하니 생각하는 중에 문득 여전히 곁에 서 있는 이세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정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전화가 뚝 끊겼다.
“저 병원 갔다 와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냥 지나가게 해주세요.”
나는 이세정에게서 조심히 휴대폰을 돌려받고는 로비의 문을 빠져나갔다.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이세정이 눈썹에 단단히 힘을 주고 내 앞을 막아섰다.
“가르쳐달라고 하면 입을 다물고, 뒤로 미뤄요.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단정한 눈썹 아래로 서늘한 눈매가 보였다. 내가 자꾸 따지고 드는 이 상황에 환멸이 다 난다는 얼굴이었다. 비뚠 시선은 찌르듯이 다그쳤고, 나는 또 나만 잘못한 것처럼 구석에 몰렸다.
“울게, 또…….”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세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이세정이 아니라, 꼭 다른 이세정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우는 모습에 반했다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울면 곤란해요.”
나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뒤를 돌았다. 마침 바람이 불었다. 넓게 갠 시야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들어찼다. 아, 여기 바깥이지. 문 열고 나와 놓고 깜빡 잊고 있었다.
“우채민 씨…… 도망가려고 판 짜는 게 눈에 보이는데,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어요.”
“……형이 저희 누나 다치게 했죠?”
내가 토해내듯 터트렸더니, 이세정은 어처구니없다는 태도로 눈썹을 구부렸다.
“일부러, 교통사고 내셨죠. 누나 죽게 하려고. 형 진짜 밉네요.”
“…….”
“형도 황당하죠. 안 한 일 몰아붙이는데 너무 억울하시죠. 저도 너무 억울해요.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나는 저기 내리는 비처럼 서럽게 울었다. 갈증이 두려워 이제껏 참고 있었던 눈물을 모두 흘려버렸다. 울음 때문에 목울대가 다 떨렸다. 알아듣기 힘든 말투가 공명하여 나왔다.
“왜 저만 끌려다녀야 돼요? 제가 잘못을 꼬집어주면 형은 순순히 사과하시지만, 제가 오히려 죄인 같습니다. 감시당하고, 협박당하고, 늘 미안해해야 하고. 왜 절 장난감처럼 대하세요.”
“우채민 씨, 어느 누가 제 장난감을 위해 굽혀줘요. 난 우채민 씨가 필요로 하는 말과 행동을 모두 해줬어요.”
“제 주변 사람은 건드리시잖아요. 형이 ‘혼내줄까요?’ 하고 물어보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정말 그럴까 봐요. 형 옆에 있으면 누나가 다칠까 봐, 아버지가 어떻게 될까 봐, 지수가 또 사라질까 봐 무서워요.”
나는 이세정이 또 이상한 말로 나를 휘두르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형이 아무리 제게 친절히 대해준다고 해도, 절 상처 입힐 권리는 없어요.”
“어디까지 맞춰줘야 돼요?”
이세정은 지수에게 연락한다고 하면 화부터 나지만 이제껏 티 안 내고 있지 않았냐고, 내 뺨을 때린 아버지를 어떻게 손봐줄까 재고 있었지만 내가 싫다고 해서 일단 넘기지 않았느냐고, 줄곧 숨겨왔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아 당혹스럽게 물었다.
“……혼내준다는 말, 진심이셨어요?”
“모르고 대답했어요?”
“…….”
“날 대체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단지 참는 것뿐이에요. 멋대로 내 병을 만들어서 고치려고 하지 말아요. 이따금…….”
이세정이 내 양 뺨을 부드럽게 쥐었다. 뺨을 쥔 양쪽 손가락이 제각기 다른 형태로 바들바들 떨렸다. 당장에라도 힘을 줄 것처럼 손끝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세정의 손끝이 목덜미로 향하고 있단 걸 깨닫고 뒷걸음질을 쳤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낼 새 없이 물었다.
“이따금 죽이고 싶어져요?”
내 뺨에서 손을 거둔 이세정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화를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내 물음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 또 도망가면 죽인다고 했는데…… 도망가든 안 가든 죽으니까.”
나는 울먹거리며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전 그럼 도망갈래요.”
나는 뒤를 돌아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총알처럼 쏟아지는 비였다. 비는 두피와 뺨, 목, 어깨를 가감 없이 때렸다. 셔츠가 너저분하게 달라붙었다. 몇 발자국 걷지 못해 눈알이 아파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가에 묻은 빗물을 벅벅 훔쳐내고는 뒤를 돌았다. 오가는 차 몇 대와 표지판이 보였다. 이세정은 없었다.
홧김에 친 도망이었다. 나는 당장 죽더라도 의미 있게 죽고 싶었지, 웬 예쁜 미친놈에게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다. 비가 그치면 이세정은 언제나 그랬듯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 그 전에 멀리, 멀리 도망가야 했다. 겁에 질려 몸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달렸다.
얼마쯤 갔을까. 덜컥 걸음이 멈추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잠식하여 오던 두려움이 불쑥 나를 뒤흔든 까닭이다. 도발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도발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화나게 해서는 안 되었는데. 차분하게 그를 설득했어야 했는데.
가까이서 들린 차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숨이 가빠졌다. 앞이 깜깜해졌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잡힐 것이 뻔한 도망이었다. 이미 먼 거리를 지나온 터라 돌아갈 수 없었을뿐더러 이제 와 잘못을 빌기란 어려웠다. 현기증이 극심해졌다. 머리를 붙잡고 눈깔을 굴렸다. 일단 비를 피하자. 비를 피해 머리를 식히고서 생각을 해보자. 나는 길을 건널 셈으로 주차되어있는 트럭을 향해 단숨에 뛰었다.
빠앙.
정차 중이라고 생각했던 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전조등에 눈이 부셨다. 아차 소리도 못 해보고 동공을 열었다. 이미 도로 위로 도약해버린 다리를 무를 수 없었다.
꼼짝없이 부딪힌다. 비와 함께 세게……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다리가 움직였다. 팔이 붙잡혀 팽팽하게 당겨졌다. 도약하려던 다리가 허무하게 인도로 끌려갔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심장을 움켜쥐었다. 멎어버린 것만 같던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고 있었다. 거친 호흡을 더 내뱉을 새도 없이 멱살이 잡혔다. 나만큼이나 흠뻑 젖은 얼굴이 보였다. 비에 젖어 더욱 아름다워진 남자가 광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정신 나갔어?”
잔뜩 흐트러진 머리 아래로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급하게 달려온 듯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이세정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멱살을 풀어 달아났다. 차에 치일 뻔한 건 사고지만 그는 재난이었다. 재난을 피해서 어디든 발이 닿는 곳으로 뛰었다. 얼마 못 가 잡혔다.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으며 척추에 고통이 일었다. 눈가가 일그러지며, 위협적으로 다가온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눈빛에 당연히도 오한이 들었다.
“나를…… 이따위로 농락하고.”
이세정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딱딱한 난간에 닿은 내 등허리에 냉기가 달라붙었다. 뒤로 칼바람이 분 탓일까. 정신없이 달려온 터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서 있는 이 다리는 까마득한 높이였다.
“나를 버리고 갈 만큼, 그렇게 내가 싫었어요?”
이세정은 내 허리를 꺾을 듯이 난간에 나를 밀어붙였다. 멱살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벗어나기 위해 반항을 하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더니 날카로운 빗물이 내 얼굴을 마구 때렸다. 때아닌 구역감이 올라왔다.
“흐, 윽……으.”
잡힌 멱살이 빳빳해졌다. 작은 위협이라기엔 죄어오는 고통이 제법 있었다. 흥분한 것에 비해선 작은 힘이었지만, 나는 이세정의 미약한 힘이나마 견디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흔들렸다. 고통스러워서 고개를 비틀었더니, 이세정이 눈을 가늘였다.
“우채민 씨, 괴로워요?”
“형…….”
이세정은 자신이 더 괴로운 듯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를 다 부숴놓고 혼자 괴로워?”
닭 모가지 비틀 듯 내 목덜미가 흔들렸다. 골이 쪼개질 것 같았다. 쏘아보는 눈빛에 한없이 작아져서 몸을 웅크리려고 했다. 그의 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대체 누가 누굴 부순 거냐고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죽일 듯이 노려보네. 난 아까워서 그따위로 굴지도 못했는데.”
등은 단단한 난간에 더욱 짓눌러졌고, 목은 뒤로 접혀 힘없이 고꾸라졌다. 덕분에 빗물이 얼굴 위로 난잡하게 쏟아졌다.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숨구멍이 막혀서 약 먹은 쥐처럼 몸을 배배 꼬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으! 읍!”
난간 아래가 까마득한 높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세정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등이 온통 오싹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화, 화나면 이렇게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도망을 안갑, 윽!”
“내가 화나면…… 언제 이따위로 굴었어요.”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있었다.
“생각 좀 해봐요. 내가 널 언제 건드렸냐고.”
날 선 물음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손을 댔나 하면 물론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세정은 저 자신을 해치면 해쳤지, 나를 해친 적은 없었다.
“나는 우채민 씨를 건드릴 수 없어요.”
이세정이 손에 힘을 주었다. 목이 더욱 졸렸다. 지금 이건 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문득 내 목에선 어떠한 체온도 안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멱살이라고 해봤자 이세정은 내 살갗이 아닌, 내가 입고 있는 셔츠를 잡고 있었다. 셔츠가 조여 괴로운 것이지 목이 졸려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우채민 씨한텐 손댈 수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목 조르면 고통스러울까 봐 겁이 나는데. 우채민 씬 작고…….”
말마따나 이 순간에조차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이세정은 눈살을 찡그렸다.
“약하고,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데.”
“…….”
“그런데…… 내가 대체 뭘 했단 거예요? 왜 날 피해요.”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헉!”
“왜 날 비참하게 만들어.”
팔은 미련 없이 곧았으면서 손은 하얗게 질려 떨리고 있었다. 불안정했다. 불안정한 그에게 불안정하게 매달려있는 나 또한 불안정했다. 눈동자가 뒤집어지며 당장 기절을 한 대도 모를 두려움이 전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세정이 당장에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너무 무서웠다.
“흐, 혀, 형…… 형. 잠깐만요.”
다리 아래엔 도로가 있었다. 떨어지면 틀림없이 즉사할 것이다. 언젠가 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은 민폐라고 말한 적 있었는데 죽음 앞에서 그딴 것은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그저 무서워서 돌 것만 같았다.
“자, 장난 그만하고…….”
“무슨 장난……. 우채민 씨 지금 나랑 장난치고 있어요?”
“미, 미안해요. 죄송해요, 형. 제발… 제발 놓, 놓고…… 놓고 얘기해요.”
“왜, 내가 놓으면 죽을까 봐 무서워요?”
“무, 무섭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이세정의 눈썹이 아래쪽으로 구부러졌다.
“저, 정말로 죽일 생각 아니잖아요. 왜 위협해요. 제발 그러지 마요, 혀, 형.”
나는 애원하듯이 내 목을 쥐고 있는 이세정의 손을 토닥거렸다.
“나,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까 자동차로부, 부터 구해주지 말았어야죠……. 이 빗속을 단숨에 건너와 놓고, 읏, 날 증오하는 척하지 마셨어야죠.”
내 말을 듣는 시늉도 않고, 이세정이 나를 뒤로 밀었다. 머리가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나는 뒷목에 뻣뻣이 힘을 주었다.
“우채민 씨를 죽이는 상상을 수백 번 했지. 다만 이렇게는 아니었어요. 난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우채민 씨 목숨을 가져가고 싶었어요. 고통에 찬 비명을 생각하면, 화딱지가 나. 분명 후회할 텐데. 시체든 뭐든 보면서 후회할 텐데.”
무슨 미친 소리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에 억지로 힘을 주어 쇳소리라도 내었다. 듣기 싫은 목소리로 이세정의 말을 잘랐다.
“아, 아니에요. 저, 저, 정말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아요. 아깐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한 소리잖아요.”
“왜, 왜 확신을 하세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 그만큼 무섭다는 거잖아요. 나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다듬지 않은 사나운 말투가 그대로 내 말을 잘랐다. 어조가 한층 격양되어 있었다.
“스스로 차에 뛰어든 순간부터 나를 떠난 거잖아. 이게 어떻게 단순한 반항이지?”
“나, 나는 차에 스스로 뛰어든 적…!”
“해야 할 일이 많아? 거기에 나는 있나?”
“……혀, 형.”
이세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목소리가 음울하게 씹혀졌다.
“널 만나는 동안 내 자존심이 다 상했어. 계속 봐주고, 계속 걱정해주고, 왜 나 혼자만 이래. 왜 너는 나한테서 계속 도망가.”
“…….”
“왜 함부로 대하는 거냐고 했지. 내가 널 어떻게 함부로 대해!”
“…….”
“너 때문에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워. 네가 죽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
이세정이 내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으려고 했다. 넋 놓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이세정의 손을 놓으면 내 몸은 꼼짝없이 다리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나는 남은 자존심을 털어내었다.
“형… 형! 사, 살려주세요.”
애원 조로 말했다. 나를 진심으로 죽이려 했단 것에 실망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살아있어 봤자 괴롭힘만 당할 거, 삶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나는 이세정에게 온몸으로 매달렸다.
“살려주세요. 형.”
“같이 가줄게요.”
서늘한 목소리가 내게로 떨어졌다.
“아, 아니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니까…….”
“우채민 씰 떨어트리고, 몸을 다 섭취할 거예요. 다 먹어버려서, 여기에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 죽을래요.”
“형……제발 살려, 살려주세요….”
“지금 안 죽이면 내가 돌 것 같아서 그래요. 평생 괴롭고 싶어요?”
“왜, 왜……펴, 평생 괴로워요? 형 안 괴로울 거예요.”
나는 아무 말이나 했다.
“지, 지금 비도 오는데. 비 좀 보세요. 지금, 지금 형은, 지금 트라우마 한가운데에 서 있잖아요. 지금 나 때문에 비까지 무시했잖아요. 더욱이 나를 없애선 안 되지 않아요?”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말하면서 내게 새삼 와닿았다. 그렇게 싫어하던 비도 무시하고 나를 찾아왔을 만큼, 그렇게 간절했나. 이세정이 빗속에 있는 모습은 지극히 이질적이었다. 나는 이세정의 팔을 연신 쓰다듬었다.
“형…… 저 정말 죽고 싶지 않아요. 형 괴롭게 안 할게요. 죄송, 죄송해요. 안 도망갈게요. 봐주세요…….”
어쩌면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마구 웅얼거렸다. 그러면서 이세정을 껴안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이세정이 손을 풀지 않아, 대신 팔에 애타게 매달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세정은 나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가만히 바라만 본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내 입술 부근으로, 다시 코로, 눈썹 위로, 머리카락으로, 그리고 쭉 미끄러져서 목으로 향했다.
눈길이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날 동안 빗속에 파묻혀 본 적 없을 이세정은 당연한 수순처럼 얼어붙었다. 살갗에 닿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진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형, 많이 좋아해요.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정말로 날 좋아하면 얌전히 죽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세정이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절 좋아하시면 살려주세요…….”
이세정의 눈길이 사납게 빛났다. 그러나 그래놓고선 손에서 완전히 힘을 풀어주어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난간 안쪽으로 내팽개쳐졌다. 바닥에 엉덩이가 닿자마자 죄어있던 목덜미를 붙잡고 켁켁거렸다. 한껏 먹은 빗물을 뱉어냈다. 잔기침까지 모두 털어낸 뒤엔 고개를 푹 숙이고 고된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과 함께 침, 그리고 헛구역질이 반복적으로 튀어나왔다.
“헉…! 헉!”
숨쉬기에 급급한 내 앞으로 이세정이 주저앉았다.
“어디 봐요.”
광기는 사라지고 이성적인 분노만 남은 목소리였다. 피곤한 듯 제 얼굴을 문지르며 이세정이 내 등을 두드렸다. 기침을 하도록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토악질하려던 것을 멈추고 아까 하려다 못한 말을 꺼냈다.
“……자살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트럭이 달리고 있단 걸 못 보고 뛰어든 거였어요.”
“트럭 기사 죽여 버리기 전에 조용히 있어요.”
“…….”
말투를 정돈하지 않고 받아친 이세정이 고개를 돌렸다. 대놓고 안도한다거나 내가 오해를 했구나 하며 미안해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어쩐지 다시 내 목을 조르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목이 너무 아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숨 쉬는 것에 열중했다.
이번 장마 한 철 지겹도록 들었던 빗소리가 정신 사납게 나를 몰아붙였다. 토할 것 같았다. 먹은 것 없는 다른 때엔 위액만 나올 테니 괜찮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안 그래도 온갖 추한 꼴을 다 보였으면서 그의 앞에서 구토까지 쏟고 싶지는 않았다. 난간에 머리를 기댄 채로 와들와들 떨었다. 몸을 구부렸다.
시선이 느껴져서 눈길을 돌렸다. 이세정이 나를 싸늘히 보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한 짓이 다 뭐지.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자니 서러운 의문이 하나 들었다. 내 주변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반항했다가 도리어 내가 죽을 뻔했다. 결국 이번 도망으로도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괜한 눈물이 났다. 옛날엔 억울해서 우는 거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 자주 울어 그따위 핑계로는 내 눈물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전조도 없이 울자, 이세정이 표정만큼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이번만은 얌전히 숨죽이고 있어요. 짜증 나니까.”
“으, 흡…”
“우채민 씨.”
“…예, 흐.”
“우채민 씨.”
“…….”
조그만 욕설이 들려온 것 같다. 빗소리에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흠칫 놀라서 입술을 씹어 울음을 억지로 멈추었다. 앞니로는 울음을 다 막을 수 없어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몸을 둥그렇게 만 채로 몸이 아무리 들썩거려도 소리만은 꾹 감추었다.
“아….”
위에서 잔뜩 짜증이 난 탄식이 들려왔다. 이세정은 내 턱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았으니까 나 좀 볼래요?”
“…….”
“미안해요. 그만 울어요. 지금 울면 내가 너무 혼란스러워요.”
자꾸 짜내지 말고……. 이세정이 덧붙인 말에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오는 건데. 눈물은 짜낸다고 나오지 않는다. 나는 팔을 사용해서 눈물을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아 수십 번 반복하다가 비 때문임을 뒤늦게 깨닫고 손을 내렸다.
실소 같은 웃음을 터트린 이세정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정적이 인 가운데 빗소리만 계속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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