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호
-확진하긴 어려우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의심됩니다.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폭력성이 높습니다. 적절한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사님.
네 살 때부터 키우던 소동물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원에서 키우던 물고기였고, 이듬해엔 고양이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엔 직원들이 데려온 아이들의 눈이었다.
눈알은 어린아이가 누군가를 공격할 때 가장 상처 입히기 쉬운 부위였다. 아직 힘이 없는 세정은 아이들의 눈을 공격해서 피를 내보였고, 아이들은 사력을 다해 울면서 세정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벌써 세 명의 아이들이 이와 같은 피해를 보았지만, 그 어떤 어른도 세정을 탓하지 않았다. 죽음과 상처엔 아무런 의도가 없었으므로 조용히 덮었다. 다들 왜 잔인하게 찔렀느냐고 세정을 다그치지 않았다. 오직 주치의만이 이 사건을 문제 삼았다. 그녀는 세정의 어머니를 직접 불러서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다.
-인격 장애의 뚜렷한 치료법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물론 처방할 수 있는 약도 없고요. 아직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예방으로 극복하도록 도와주셔야 돼요. 이사님과의 교감이 가장 중요하…….
-박사님. 일하면서 저만큼 아이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 또 없습니다. 가정은 평화롭고, 아이는 문제가 없어요.
-이사님이 염려하시는 바를 압니다. 하지만 대외적인 시선 때문에 아이의 문제를 모른 체 할 수는 없습니다. 방치하시면 안 돼요.
-시선 때문이 아니라…… 모유를 일 년 반 동안이나 먹였어요. 회사, 비행기, 성당, 그리고 파크까지 어디든 데려갔어요. 방치하지 않았고, 사랑도 많이 줬습니다. 대체 아이가 왜, 어디서, 인격 장애가 생겼다는 말이에요?
-선천적인 겁니다, 이사님. 그래도 예방만 잘하신다면 걱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혜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치의를 쳐다보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져 화장이 번지기 직전에 고개를 쳐들어 눈물을 삼켰다. 혜영은 시계를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에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상담은 후에 다시 날짜를 잡을게요. 그리고 아이는…… 일단 본가로 보내서, 치료를 받든…… 해야겠죠.
혜영이 급하게 상담실을 나섰다.
이후로 본가에는 수많은 정신의가 다녀갔다. 집안사람들 중 극히 일부만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막내아들이 친 사고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의사의 정체 또한 다들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는데, 쥐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은 집안이다 보니 다들 알아서 쉬쉬하곤 했다.
세정은 어머니가 불러온 의사들에게 아주 솔직하게 제 감정을 이야기했다. 거짓말을 해서 의사를 혼란 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치료의 어려움을 겪다가 얼마 못 가 스스로 관두었다.
그러던 때에 열 번째 의사가 나타났다. 의사는 몇 가지의 지루한 검사 끝에 세정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안겨주었다.
-일주일 동안 건강하게 키워보자.
의사는 강아지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들을 적은 리스트를 세정에게 같이 넘겼다. 세정은 리스트를 읽고 나서 강아지를 키웠다. 일주일 후 강아지는 숨이 끊어진 상태로 의사에게 전달되었다.
-아이가 왜 죽었니?
-물을 주지 않았고, 높은 곳에서 떨어트렸어요.
-리스트를 읽어보지 않았구나. 리스트엔 아이를 다치게 하지 말고, 식수를 꼬박꼬박 줘야 한다고 쓰여 있었을 텐데.
-읽었어요. 그걸 제가 왜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안 했어요.
-왜냐하면 이건 과제니까.
-과제를 해오면 저한테 이득이 있나요?
-너에게 맛있는 캔디를 줄 거야. 물론 부모님께 칭찬을 받겠지.
-선생님.
세정은 악의없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캔디를 살 돈이 있어요. 칭찬도 바라지 않아요. 제가 과제를 해야 할 이유가 더 있나요?
-강아지를 죽여서 네가 얻는 이득도 없다. 이득 없이 살생하는 걸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제가 좋아해요. 하고 싶은 걸 한 거예요.
의사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있는 경우엔 무조건적으로 조기에 예방을 해야 했다. 자아가 완전히 정립된 후에는 치료가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세정은 이미 살생의 재미를 깨우친 상태라 보통의 아이들처럼 설득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의사는 세정의 돈줄을 차단하기로 했다. 회장님의 개인비서와 조용한 면담 끝에 세정에게 지급되는 용돈을 모두 끊어버렸다.
치료는 훨씬 수월해졌다. 과제를 해오면 용돈을 지급하겠다는 의사의 말에 세정은 비로소 납득했다. 사실 납득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 미묘한 표정 변화가 있었지만, 의사는 고작 여섯 살의 심경 변화를 심층적으로 파고들만큼 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의사는 세정이 과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즈음 다시 강아지를 내어주었다. 과제의 내용은 전과 같았다.
세정은 낑낑거리는 어린 강아지를 안아 들고 빈방에 던져두었다. 직원에게 물과 사료를 따로 챙겨주라고 부탁했을 뿐 그 외의 돌봄은 없었다. 입맛대로 가지고 놀 수 없으니 아예 신경을 꺼버린 것이다.
세정의 관심이 다시 강아지에게 돌아간 것은 강아지가 오롯하게 자신을 본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였다. 직원이 풀어놓았는지 강아지가 정원에서 놀고 있어, 길을 비키라고 무심결에 세게 걷어찼더니 강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꼬리를 흔들며 세정에게 돌아왔다. 멍청해 보이기도 재밌어 보이기도 했다. 호기심은 순식간에 관심으로 변했다.
세정은 한동안 계속 어린 강아지를 괴롭혔다. 지루해질 쯤에는 한 번씩 쓰다듬어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름 사냥견이라고 소문난 개가 금세 배를 깔았다.
-이건 좋아서 그러는 거야.
배를 깐 강아지를 징그럽게 쳐다보는 세정에게 도빈이 말했다. 그럼에도 세정은 강아지를 발로 굴려 일으켜 세웠다.
-애기한테 왜 그래.
도빈은 세정이 강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빈은 제집에 있는 개를 길들였던 경험을 살려서 세정의 강아지를 훈련시키기로 했다. 도빈이 내놓은 훈련 방식은 철없고 순수했다. 우선 친해져야 하니까 꽃을 선물하라는 것이나, 선물한 꽃을 자꾸 뜯어먹으니까 못 먹도록 가짜 꽃으로 다시 선물하라는 것이나.
한 번은 세정이 간식을 주려다가 강아지에게 실수로 물렸는데, 도빈이 네 서열이 낮은 것이 아니냐고 법석을 떨었다. 도빈은 너 없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저 개새끼에게 알려주라며 호랑이 탈을 쓰고 나타났다. 괴상한 가면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도빈을 보고 강아지는 당연히도 세정의 뒤에 숨었다.
결국 세정은 강아지 과제를 완벽하게 해왔다. 케이스를 열어본 의사는 건강하게 살이 오른 강아지를 확인하곤 환히 웃었다.
-그래, 개의 이름은 정했어?
-이름이요?
-계속 데리고 있을 거라면 이름을 정해줘야지.
세정은 그동안 정들었던 강아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정은 고개를 기울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세정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의사가 아이에게 과제를 잘했다며 돈을 주었다. 세정은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이상한 표정으로 돈을 받아들었다.
-한 달만 더 키워보자. 이번엔 이름도 지어줘야 돼.
-네.
순순한 세정의 대답에 의사는 뻔한 물음을 던졌다.
-왜 반항하지 않고 내 수업에 나오는 거지?
-선생님께 교육을 잘 받으면 아버지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셨거든요.
-무슨 소원을 빌 예정인데?
-누굴 없애 달라고 할 거예요.
의사가 애써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뭘 없애 달라고 할 건데?
-가끔씩 찾아오는 선생님 딸이요.
-……응?
-걔 귀찮아요.
의사의 낯이 새파래졌다. 들고 있던 펜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내 툭 떨어졌다. 마구 화를 내는 의사를 무시하고 세정은 방금 의사가 떨어트린 펜으로 제 손목을 찔렀다. 그리고 곧장 집안 어른들에게 달려가서 의사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방 밖으로 터져 나온 고성을 들은 바 있는 어른들은 세정의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서 당장 경찰을 불렀다. 지문이 찍힌 펜이 증거물로 제출된 이상 의사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의사는 당연하게도 구속되었다.
그리고 이제 쓸모없는 과제 따위에서 벗어난 세정은 아버지에게 다시 용돈을 받기 시작했다.
열한 번째 의사가 오기까지 조금의 텀이 있었다. 세정은 그동안 특실에서 손목을 치료받았다. 굳이 특실에서 지낼 필요는 없었지만, 집안은 조금 호들갑스러운 면이 있었다.
하얀 팔목을 감싼 붕대. 마치 배경처럼 서 있는 경호원들. 이따금 회진 오는 의사들. 교사가 방문하는 시간을 제하곤 병원은 삭막할 정도로 적막했다.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서늘한 감이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세정은 주어진 것들을 모두 당연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치료도 의연하게 잘 받았고, 아픈 와중에 공부도 했다. 의사들이 제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싫은 내색을 하긴 했으나 대체로 예의도 잘 갖추었다. 세정에게 너무 친근하게 굴면 경호원이 알아서 제지했으니 따지고 보면 심기가 불편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누구보다도 초조할 사람은 변호사를 선임해 법정공방을 준비하는 의사뿐이었다.
세정은 병원에서 몇 주 잘 쉬다가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사람은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도빈이었다. 세정이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가를 방문한 도빈은 자신이 데려온 개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세정이 온 줄도 모르고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제 얼굴을 핥다가 쫄래쫄래 세정의 발밑을 전전하는 개의 시선을 따라간 도빈이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도빈은 세정에게 대번에 다가가선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세정의 팔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야…… 괜찮아?
세정은 도빈을 무시하고 제 발끝으로 다가온 낯선 개를 내려다보았다. 발에 코를 가져다 대는 것조차 짜증 나, 세정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개가 더 다가오기 전에 도빈이 그 개를 힘겹게 끌어안았다. 개의 덩치가 더 커서 품 안에 다 들어오지는 않았다.
-우리 집 멍멍이야. 이름은 개고, 별명은 테어. 너네 개랑 친구하려고 데려왔어.
-내 건 어딨어?
-네 게 뭔데? 아, 애기 강아지? 강아지… 방에 있을걸?
세정은 즉시 방으로 가서 강아지를 꺼내왔다. 강아지는 안 본 사이 좀 달라져 있었다. 몸집이 조금 커져 있었으며 볼살이 빠져 턱이 꽤 가름해져 있었다. 세정은 자신을 격하게 반기는 강아지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가 턱을 쓰다듬어주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손바닥을 핥는 혀 또한 따뜻했다. 세정은 강아지의 머리를 세게 때리곤 손을 치웠다.
세정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오자, 도빈은 테어를 그 강아지와 붙여놓았다. 서로를 탐색하던 두 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섞여 놀았다. 두 짐승 사이에 어떻게든 끼고 싶어 안달하던 도빈이 다시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도빈은 이후로도 테어를 데리고 자주 놀러 왔다. 도빈이 집에 온들 피해 보는 일은 없었기에 세정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테어와 강아지는 순탄하게 친해졌다. 문제가 있다면 테어의 성정이 조금 지랄 맞았다는 것뿐이었다.
수업 하나를 듣고 휴식 시간을 갖던 세정이 먼발치에서 헥헥거리며 뛰어오는 강아지에게 팔을 벌렸다. 단숨에 세정의 품에 안긴 강아지가 꼬리를 발랑발랑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강아지가 정도도 모르고 너무 치대자, 세정이 그것을 밀어버렸다. 조금 멀어지니 강아지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상처가 있었다. 물린 잇자국으로 보건대 이건 분명 테어의 짓이었다.
다친 건 자신이 아니라 강아지였기 때문에, 세정은 이 상처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곧 신경을 꺼버리고 나머지 수업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강아지가 계속해서 절뚝거리며 걷자, 수업을 받으며 이따금 그 상처가 생각나서, 테어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왜인지 살심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정은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테어가 오는 날을 꼬박 기다렸다가 고스란히 상처를 갚아주었다. 테어의 다리에도 비슷한 상처가 생겼다.
테어의 다리에서 상처를 발견한 도빈이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세정은 손톱만 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는 도빈을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라고 말해주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도빈이 테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버렸다.
테어에게 물린 복수까지 해주었건만, 세정은 제 강아지의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았다. 다만 상처에 딱지가 들어앉았을 즈음 사정없이 떼어냈다. 그 의미 없는 행동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자지러지는 강아지의 반응에 재미가 들렸다. 세정은 강아지에게 새로운 상처를 덧입히기 시작했다. 심심하던 차에 만난 놀이였다.
얌전하던 세정이 갑작스레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양 행동하자, 그를 예의주시하던 직원 하나가 세정의 방을 몰래 염탐했다. 작은 몸이 입마개를 한 강아지의 몸에 마구 상처를 내고 있었다. 강아지는 입이 막혀 소리조차 크게 못 지르고 마구 날뛰어댔다.
-아파?
세정은 멀쩡한 강아지의 다리에 흠집을 내며 반복적으로 물었다.
-얼마나 아파?
세정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천진난만하자, 직원은 즉시 이 회장에게 보고했다. 바로 다음 날, 열한 번째 의사가 방문했다. 의사는 세정을 만나자마자 물었다.
-일본에 다녀온 뒤로 날생선 먹는 것에 재미 들렸지. 내일 가져올 테니까 같이 먹을래?
-여름엔 구운 생선도 안 먹어요.
-누가 그러라고 했어?
-엄마가 그랬어요. 엄만 결벽증이 심해서 가재도 안 먹어요. 그래서 제가 찾아봤는데, 안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의사는 세정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없이 가방을 뒤졌다. 이윽고 꺼낸 것은 노트와 펜이었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볼까?
-왜요?
-더 잡담하고 싶지만, 지금은 내 시간이야. 이제 묻는 말에 대답해야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해?
-모르겠어요.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럼, 부모님이나 동물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볼까?
-어제 엄마가 너무 덥다고 했어요. 전화로. 그리고 강아지 이름을 뭐로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형도 하나 있지? 어때. 사이가 좋아?
-모르겠어요.
-친구와 주로 뭐 하고 놀지?
-저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마지막 질문에 세정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의사는 미소를 벙글벙글 지으며 취조하듯 몰아치는 질문이 기분 나쁘냐고 물었다. 세정은 고개를 저었다.
-저 아프지 않아요. 그냥 이거 말하고 싶었어요.
두어 명도 아니고, 벌써 열한 번째 의사였다. 그동안 수많은 의사가 오고 갔으나 이제껏 세정에게 제대로 병명을 알려준 의사는 없었다. 사이코패스에게 네가 사이코패스다, 라고 해본들 소용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세정은 말도 잘 안 통하는 어린애였다. 제 병을 완벽히 알아듣기엔 세정은 아직 아는 것이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세정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뭐가 결여되어있는지, 뭘 바로잡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의문투성이인 치료를 받아야 했다.
물론 이번 의사도 세정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마음이 없었다. 이 회장이 세정의 치료에 큰 사례를 걸었는데, 의사는 그 사례금만 받으면 되었다. 의사는 세정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시금 가방을 뒤졌다. 작은 유리 케이스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과제 하나 내줄게. 전에도 해봤지?
-돈 주실 건가요?
-아니. 나는 용돈 말고 사탕을 줄 거야.
세정은 사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동그란 사탕을 흔드는 의사에게서 시선을 떼고 관심 없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의사는 픽 웃더니 사탕을 세정의 입에 밀어 넣었다. 미처 거부할 새도 없이 사탕이 삼켜졌다.
사탕을 처음 입에 댄 순간부터 몸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탕을 먹고 나면 짐승처럼 찾아들던 살심이 성질을 죽였다. 무력감이 들었고, 수면욕이 높아졌다. 결벽증은 나아졌으며, 강아지를 괴롭히고자 하는 충동은 사라졌다. 사탕은 깊은 평화를 불러 모았다.
아니, 평화라고 불러도 될까. 세정은 분명 이전과 같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대신 속에서 알게 모르게 새로운 욕망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저 사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한 알보다는 두 알이, 두 알보다는 세 알이 먹고 싶었다. 세정은 의사가 가지고 있는 사탕을 죄다 빼앗고 싶었다.
그 작은 욕구만 제한다면 세정은 충분히 정상처럼 보였다. 이후로 집안의 어떤 생명도 상처 입는 일이 없었고, 과제 하지 않겠다고 반항하는 일도 없었다. 세정은 착실하게 과제를 이행하고 대가를 받아갔다.
세정이 치료를 받은 지 두 달째, 이 회장은 의사에게 약속했던 사례금을 전달했다. 의사는 통장에 꽂힌 사례금을 보자마자 즉각 떠날 준비를 했다. 우선 언제든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짐을 모두 챙기고, 세정에게 일주일 동안 나누어 먹으라며 사탕 일곱 알을 주었다.
-어디 가는데요?
-곧 올 거야.
-멀리 가요?
-곧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세정은 마지막인 듯 작별 인사를 하는 의사를 보고 그가 더 이상 사탕을 주러 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세정은 남은 사탕을 모두 토해내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한 차례 크게 웃은 의사가 답변했다.
-다 먹으면 다시 주러 올 거야.
세정은 받은 사탕 일곱 알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에 다 먹으면 더 많이 주려나. 세정은 마당에서 놀고 있는 도빈을 데려와 사탕 일곱 알을 한꺼번에 먹였다. 도빈은 구역질을 하지 못해 응급실로 옮겨졌다. 응급실 의사는 마약 성분이 있는 우울증 치료제를 섭취했다고 의심했다. 세정에게 약을 처방한 의사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잡혀 체포되었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혜영이 큰 충격을 받아 맡은 일을 잠시 내려두고 세정을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 회장, 그러니까 세정의 치료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세정의 할아버지가 다른 저명한 정신의를 데려와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혜영은 단호히 거절했다. 혜영은 독일을 떠나있는 동안 세정의 상황을 전혀 몰랐던 것이 마음에 걸려, 이제부터라도 곁에 있으면서 사랑으로 보듬어줄 셈이었다.
그러나 세정이 그리운 것은 부모의 품 따위가 아니었다. 약을 끊게 되니까 미칠 것 같았다. 교육 프로그램도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짜증이 났고, 결벽증도 다시 생겼다. 알약 일곱 알 사건이, 그저 아무거나 주워 먹는 습관이 있는 도빈의 호기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몇몇 어른들이 또다시 붙여준 도빈조차도 환멸 났다.
-개새끼야- 이세정-
도빈은 세정이 자신에게 약을 먹인 사건 이후로 개새끼란 별명으로 그를 불렀다. 별명만 보면 분명 세정이 이상한 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럼에도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세정은 도빈이 몹시 귀찮았다. 도빈을 볼 때마다 그 약과 함께 다른 약도 섞어 먹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개새끼야-
-좀 가…….
시간을 확인한 세정이 힘없이 말했다. 세정은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빠르게 집 안을 거닐었다. 도빈이 뒤에서 팔랑팔랑 뛰어오며 세정을 계속 불렀다. 마침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 소리와 도빈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서 소음이 일었다.
-같이 놀자.
-가서 피아노나 쳐, 도빈아.
-그럼 같이 칠래?
도빈이 세정의 팔을 잡았다. 도빈은 벌레를 쫓듯 내쳐졌음에도 굴하지 않고 말했다.
-피아노 치는 거 싫으면 아줌마 연주하는 거 들으러 가자. 아줌마 연주 좋아.
-혼자 들으러 가.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도빈은 세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빙그르 웃었다. 사나운 표정과 상반되는 연약한 말투, 카랑카랑한 또래 애들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 맛없는 간식을 준 것은 너무했지만 외관만 보면 전혀 못된 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빈이 얼른 아주머니에게 가자며 팔을 덥석 잡고 끌고 갔다.
두 아이가 피아노 앞에 도달했을 때, 마침 새 곡의 첫 음이 연주되고 있었다. 도빈은 헤실헤실 웃으며 연주를 감상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은 세정뿐이었다. 물론 제 어머니의 연주가 듣기 싫어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곧 만나야 할 약물치료전담 의사가 좀 부담스러웠다.
본가의 주치의는 세정의 홈스쿨 일정을 조절해서 소아 약물 중독 치료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영과 부회장, 이 회장 모두가 동의한 사항이었으니 세정은 꼼짝없이 약물치료에 들어갔다. 치료는 너무 힘겨웠다. 의사는 강압적이었고, 원하는 사탕 같은 건 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짐승처럼 쳐다보았다.
조그만 아이의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쌓였을 즈음, 잊고 있었던 이름 없는 강아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본 강아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세정을 반겼다. 상처투성이였고, 그 상처를 낸 이가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오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세정은 주저앉아 손을 내밀었다. 강아지가 손을 핥았다.
***
우리 둥둥이. 혜영은 가끔씩 세정을 그렇게 부르며 뺨을 비비곤 했다. 태명이 친근감을 주어 애정 표현을 하는 데에 있어서 덜 거부감이 들까 싶었던 것이다. 원체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 아이다 보니까 제 쪽에서 노력해야 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정은 대체로 혜영에게만큼은 친절했다. 그리고 강아지에게도.
세정은 본가에 새로 들어온 여자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원사의 막내딸이었는데, 어머니가 여행을 간 터라 당분간 여기서 지내고 있었다. 아이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는지 심하게 괄괄해 사고가 잦았다. 물론 아이가 일으킨 사고들은 본가 막내 도련님의 사고에 비해 상당히 보잘것없었다. 접시를 깬다거나 혹은 강아지의 귀를 입에 넣고 쪽쪽 빠는 것 정도였으니까.
이번에 아이는 세정의 강아지의 주둥이 속으로 나무 막대기를 쑤셔 넣고 있었다. 강아지가 고통스럽게 낑낑거렸으나 “왜 그래, 아가야.” 하며 걱정하기만 할 뿐 손길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던 세정이 마침내 아이에게 다가갔다.
-안녕.
정원 한쪽에서 놀던 여자애가 깜짝 놀라 세정을 보았다. 이제껏 봐도 못 본 척 무시만 하던 아이가 살갑게 인사를 건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이가 떨떠름하게 몸을 일으키자, 세정이 턱에 흙이 묻었다고 알려주었다.
-고마워.
아이가 강아지에게서 손을 뗀 틈을 타서 세정이 아이의 손에서 나무 막대기를 빼앗았다. 아이가 돌려달라고 하자, 세정이 말했다.
-이럼 강아지가 아파.
-개 껌도 이렇게 먹는데?
-이건 껌이 아니라 나무야.
세정은 먹고 싶으면 네가 먹으라며, 아이의 입에 나무 막대를 처넣었다. 아이가 정원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아이는 인과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강아지를 괴롭혔기 때문에 세정이 그런 짓을 한 거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며칠 뒤 또다시 강아지를 못살게 굴었다. 세정은 왜 자꾸 자신의 것을 건드는 것인지 너무 화가 났다. 좋게 타일렀는데도 못 알아듣다니 바보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일까. 세정이 약물치료를 완전히 끝마쳤을 쯤에 일이 터졌다. 강아지가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하다가 돌연 쓰러진 것이다. 첫 구토를 했을 때부터 뻔히 보고 있었으나 대처하기까지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강아지는 뒤늦게 동물병원으로 옮겨졌다.
강아지는 아이가 뭣도 모르고 준 과일을 뭉텅이로 먹고 쓰러졌다고 했다. 아이. 이름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 근본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세정은 강아지가 걱정된다며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아이에게 다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 고양이 있지.
-응, 있어…….
-데려올래? 내 강아지가 아프니까 친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럼, 그럼! 알았어! 그럼 빨리 낫겠지?
세정은 아이가 데려온 고양이에게 공업용 접착제를 먹였다. 가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지만 고양이는 꼼짝없이 죽었다. 아이는 슬픔에 못 이겨 한 달 동안 본가에 놀러 오지 않았다. 세정에게는 다른 의미의 평화가 온 것이다. 아니, 온 줄 알았다.
아이가 사라졌지만, 세정의 마음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고양이가 죽은 그날부터 세정은 불안함에 제 강아지를 가두어놓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사료도 세정이 보는 곳에서만 먹어야 했고, 걷는 것도 세정의 허락이 있어야 걸었으며, 무는 것조차 세정이 주는 것만 물어야 했다. 보다 못한 혜영이 그런 식으로 개를 길러선 안 된다고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강아지는 점점 말라갔다. 소심해졌고, 꼬리 흔드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전에는 자주 웃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런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 참견했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한 혜영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조언했다.
-강아지를 존중해야지. 말하는 거 잘 들어주고.
-얘는 말을 못해요.
-잘 들어봐. 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뭘까? 강아지가 말하는 소리야. 지금 괴롭다고 말하고 있어.
-아.
세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혜영의 말을 오직 농담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혜영은 세정의 표정을 보고는 가엾다는 듯이 두 뺨을 쥐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 치료받으러 가야 돼.
-치료 끝났어요. 저 아프지 않아요. 전에도 안 아팠지만, 아무튼 치료 끝났으니까 더 안 아파요.
-그래, 알아. 하지만 사람들은 평범한 걸 좋아해. 아버지랑 할아버지도.
혜영은 혹여 세정이 못 알아들었을까 봐 덧붙였다.
-네가 엄마 말을 듣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다시 무서운 의사에게 널 보낼 거야. 그럼 안 되겠지?
-저 안 아픈데, 왜요?
안 아픈데 왜요? 세정이 한 번 더 물었다. 혜영은 끝까지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세정은 급작스러운 회의감에 빠졌다. 강아지를 풀어놓는다면 또 구토를 하며 쓰러질 테고, 반대로 풀어놓지 않는다면 세정은 그 쓸모없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안 아픈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갈등하느라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정확히 한 달이 지나고서 정원사의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가에 나타났다. 아직 고양이 이야기만 꺼내면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고양이의 죽음이 그저 사고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세정을 향해 악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여전히 악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세정뿐이었다. 아이가 세정의 강아지를 집요하기 탐내기 시작한 후부터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거야.
세정은 벌써 세 번째로 아이에게 강아지의 주인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강아지에게 계속 다가가자,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얘 내 거야.
-조금만 안아보면 안 돼?
아이가 멋대로 강아지를 덥석 안아 들었다. 잘 꾸며진 강아지 방이 아이의 침입으로 난장판이 된 꼴을 짜증스럽게 훑어보던 세정이 아이를 쏘아보았다.
-왜 남의 물건을 만져.
세정은 예절 교육을 누구에게 받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분노가 잇새에 잠들어 수그러드는 듯했다. 세정이 이를 더 꽉 물기 전에 혜영이 나타나 얼른 두 아이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혜영은 세정의 표정을 확인하곤 부드럽게 타일렀다.
-엄한 짓 하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신다고 했지?
-엄한 짓이 뭐예요?
-다치게 하는 행동을 말하는 거야.
받은 것을 똑같이 되갚는 행동이 어째서 ‘엄한’ 짓을 표방하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다. 세정은 분명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설령 나쁜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행동을 나쁜 행동으로 되갚아준 것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세정이 제 생각을 말했더니 혜영이 착잡하게 속눈썹을 늘어트렸다. 혜영은 꼭 이런 표정 뒤에 세정에게 의사를 붙이곤 했다. 세정이 말했다.
-안 할게요.
-……세정아.
혜영이 착잡하게 속눈썹을 늘어트렸다. 안 한다는 말이 혜영이 원하는 말이 아니었나.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세정아.
혜영이 숨 막혀 죽을 것 같단 얼굴로 세정을 끌어안았다.
-강아지는… 세정이랑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데. 키우기 힘들지 않아?
세정은 힘들지 않다고 대답했다. 더 오가는 말은 없었다.
***
-강아지 예쁘지.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었다. 세정은 공부를 하다 말고 정원에 있는 의자에 가 앉아있었다. 상당한 벌들이 꼬일 만큼 풍성히 피어난 꽃 사이에 파묻혀 세정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달리 하는 일 없이 그저 볕만 쐬는 중에 문득 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정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어머니가 있는 곳을 찾았다.
-네, 예뻐요.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며.
-아… 그게…….
-입양해줄까?
세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화가 이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누구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확인하기도 전에 혜영의 대화 상대를 눈치챘다. 정원사의 막내딸, 그 아이였다.
제 강아지를 그 망나니한테 주려는 것이었다. 설마 어머니가 그럴 줄 몰랐기에 세정은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무를 헤쳐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세정은 신경질적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인상이 써지려는 것을 몇 번이고 참았다.
그 애 때문에. 아니, 그 강아지 때문에. 아니, 그 애 때문에. 아니, 그 강아지 때문에. 어쨌든 그 둘 때문에 세정은 어머니를 잠시 미워해야 했고 이렇게 화가 나야 했다. 둘 중 하나가 계속 눈앞에 보인다면 세정은 원치 않은 감정을 지속해서 느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는 어찌 조치한다 하더라도 그 강아지를 처리할 적당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버리기도, 누구에게 입양 보내기도, 외면하기도 싫었다. 세정은 고민하다가 일단 강아지에게 목줄을 채워 방에 가두어놓았다. 그리고 혜영에게 가서 직접적으로, 강아지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세정의 불안증이 강아지 때문에 더 심해졌다고 믿는 혜영은 자신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는 듯 안타까운 눈을 하면서도 강단 있게 입양절차를 밟았다. 아직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강아지가 내일의 이별을 준비하며 목욕을 했다.
강아지는 약속대로 아이의 집으로 가버렸다. 다들 어머니가 못 됐다며 세정을 위로했지만, 그런 말이 정말로 위로가 될 리가 없었다. 세정은 몇 번이고 혜영에게 따져 물었다. 몇 번쯤 물었을까. 혜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것이 고양이를 죽인 대가라고 말했다. 대가라니. 세정은 이미 강아지를 아프게 한 아이에게 대가를 치러주었다. 그럼 대가의 대가가 아닌가. 대가의 대가는 공평하지 않았다.
세정이 일주일 동안 끈질기게 괴롭히자, 혜영은 강아지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단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와 이젠 아이의 애완동물이 된 강아지를 방문시켰다.
강아지가 자신을 보자마자 반길 줄 알았더니, 웬일인지 보는 척도 안 했다. 대신 아이에게 꼬리를 발랑발랑 흔들기 시작했다. 배도 깔았고, 손도 핥았다. 세정에겐 최근 안 해주던 일이었으므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강아지는 단 며칠 만에 세정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아이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덤으로 이름도 얻었다.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는 속도 모르고 강아지와의 술래잡기를 제안했다. 도빈도 끼어들어 놀이를 주동했다. 일단 자신들이 먼저 숨고, 그다음에 강아지가 자신들을 찾는 것이 놀이의 규칙이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치는 날씨임에도 두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오니까 강아지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신나 있었다. 세정은 빗속으로 걸어 들어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길이 천둥처럼 단숨에 내려와 강아지에게 꽂혔다. 강아지가 빗속을 뛰어다녔다. 아이에게 안기며 혀를 헥헥 내밀었다.
곁을 떠나는 것까진 봐줄 수 있었는데.
-좀 있다가 와!
정원사의 딸에게 강아지를 잠시 붙잡고 있으라고 말한 도빈이 먼저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뒤 아이가 ‘시작한다.’라고 외치며 강아지를 풀어주었다. 강아지가 도빈의 체취를 찾아 달렸다. 아이가 세정의 손을 잡으며 어서 강아지의 뒤를 따라가자고 치댔다.
세정은 중간에 강아지를 낚아채 정원의 외진 곳으로 끌고 갔다. 강아지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 후 입마개를 씌우고, 방에서 칼 하나를 가져왔다. 그곳에서 세정은 약을 먹지 않은 이래로 계속 참아왔던 살의를 드러냈다.
방법은 같았다. 물고기를 처음 죽였던 때처럼, 아이들의 눈을 처음 찔렀을 때처럼, 세정은 정제되지 않은 원망을 토해냈다.
해악은 또 다른 마약이었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독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생물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으니까.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가학행위는 계속 이어졌다. 강아지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강아지가 마치 사람처럼 울어댈 때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세정은 온 힘을 다해 심장 부근을 찔렀다. 강아지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에는 목을 찔렀다. 영면을 앞둔 처절한 단말마가 터졌다.
그때였다. 세정아! 울부짖음과 함께 웬 손이 세정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세정아! 세정아! 악다구니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돌아보니 어머니였다. 세정은 혜영의 손을 내쳤다. 혜영이 온몸으로 껴안았다. 문득 소름이 끼친 세정이 혜영의 눈을 찔렀다.
-너는 짐승을 죽인 거야.
혜영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세정을 안으려고 애썼다.
-너는 짐승을 죽인 거야. 저건 짐승 새끼야, 세정아. 세정아, 저건 강아지야. 강아지야. 그냥 강아지야.
빗물에 뒤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핏물이 혜영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광기에 사로잡혀, 죽은 것이 강아지임을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혜영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정이 눈을 깜빡였다.
-강아지야. 강아지니까 걱정하지 마, 세정아. 그냥 강아지일 뿐이야.
빗소리에 혜영의 목소리가 마구 울렸다.
멀리서 비에 흠뻑 젖은 강아지가 헥헥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혜영은 계속해서 외쳤다.
-짐승이야. 짐승이야! 그냥 짐승이야!
***
법적인 책임을 묻기엔 아이가 어렸고, 비정상적이었다. 적법대로 진행한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고작해야 심리 치료를 받고 끝날 것이다. 이 회장은 굳이 위법을 행하는 자는 아니었지만, 손자를 지키기 위해 이 일을 묻었다. 이 일이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결과는 똑같을 거라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대신 세정을 즉각 가두어 강제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흠뻑 절이다시피 안정제를 투약해서 현실과 환각의 모호한 경계선 속에서 세정을 겁박하고, 세뇌하고, 설득했다.
감금되다시피 하며 강압적으로 진행된 치료는 의외로 세정에게 적합한 방식이었다. 세정은 완치되진 않았으나 숨기는 법을 배웠다. 억누르는 법을 배웠다. 도피하는 법도 배웠다. 그즈음부터 남을 해치는 대신 자신을 가학하기 시작했다. 손목 자해. 임의적인 트라우마 생성. 바이크 공도 역주행. 그리고 자살 시도.
***
아침부터 열이 들끓는 것을 보고, 이세정은 몸이 유리로 되어있어 큰일이라고 말했다. 비꼬는 말이라기엔 간호가 지극했다. 시선에 걱정도 담겨있었다. 몸이 제 기능을 거부할 만큼 아파서 상황 같은 걸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를 돌보는 조심스러운 손길만큼은 선명히 기억이 났다.
오후쯤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을 때, 이세정은 앞으로 비 오는 날 나가지 않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를 해왔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다 빠져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침대의 머리에 푹 기댄 채로 약을 하나 먹고 또 누웠다. 그 와중에도 이불을 덮어주는 이세정에게 ‘고맙습니다.’ 하며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구토하고 싶어지면 나 불러요.”
이세정은 근처에 앉아있겠다며 침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내가 저녁때 먹을 약을 구분했다. 잘 다려진 셔츠를 입은 모습이 눈에 잔잔히 담겼다. 출근 준비를 하다가 급히 노선을 튼 모양새였다.
“몸이 이렇게 약해서 어떡해요?”
시선을 느낀 이세정이 들고 있던 것을 가만히 내려두고 말했다.
“……약한 게 아니고.”
비 한 번 맞았다고 열이 갑자기 끓을 만큼 몸이 허약하지 않다. 내가 아픈 이유는 아마도 정신적인 타격이 겸해져서가 아닐까. 어젯밤 나눈 대화들 중 녹록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어젯밤…… 어젯밤 대화는 차라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람의 과거 속을 그리 지독하게 파고들었는지.
‘겨우 거짓말 하나 한 것 때문에 평생 징징거렸다는 사람이 날 이해해보겠다고요?’
모진 말을 듣고도 어째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는지.
이세정의 과거에는 그를 연민할 구석이 없었다. 이세정의 트라우마도, 이세정의 강박증도, 모두 그가 저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나는 여태 그 허상을 가여워하고,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그것이 몹시 충격적이라서 너무 슬프고 또 창피했다. 고통스럽기도 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이불을 들추었더니 문득 묘한 고요가 의식되었다. 눈길이 당혹스럽게 흔들리다가 슬쩍 이세정에게로 향했다. 이세정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음영이 오늘따라 처량 맞았다. 태닝 하여 만들어낸 것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몇 차례 눈꺼풀 사이로 감추어졌다.
“사실 우채민 씨 잃을까 봐 겁났어요.”
사방에 만연한 고요처럼 입을 뗀 터라 덩달아 숨을 죽였다.
“죽으려면 같이 죽어야지. 이런 때를 대비해서 난 가진 것도 다 버려놨는데.”
“……저기.”
나는 배 부근에 아무렇게나 젖혀진 이불을 끌어내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도, 지수를 잃게 될까 봐, 누나를 잃…….”
“친구 잃을까 봐 무서웠던 우채민 씨 마음이랑 내 마음이랑 같아요?”
“…….”
“우채민 씨 많이 아픈 것 같으니까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목울대에 손길이 닿았다. 이세정은 부드럽게 말을 자르며, 내게 남아있는 언어들을 모두 조각냈다. 걱정이란 감정을 방패 삼아 어떤 반항도 차단했다. 나는 순순히 침대에 기어들어 가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 했다.
당장 보이는 눈길은 이렇게 우울한데,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강압적이다. 나는 이세정이 행하는 것이라면 강요라도 좋지만, 그의 과거까지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
과거를 떠올려보자니 급작스럽게 속이 울렁거렸다. 이불을 정돈하고 있는 다정한 손길을 치워내곤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뛰어가 실컷 위액을 쏟아냈다. 속이 몹시 아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네 과거가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괜한 심술을 담아서 화장실 한쪽에 주저앉았다. 아픈 티를 역력히 내고 있자니 이세정이 내 허리를 잡아 훌쩍 안아 들었다.
“열 내렸다고 했는데, 왜… 그냥 입원할래요?”
몰랐는데, 내게 주치의가 있었다. 외과 말고 내과. 얼굴도 몰랐던 주치의가 이미 한 차례 왔다 간 터라 나는 굳이 가야 하나 싶었다.
“지금 차 타는 게 더 힘듭니다.”
이세정의 목에 팔을 둘러 중심을 잡으면서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기운 없이 손을 저쪽으로 흔들자, 이세정은 순순히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나는 침대 옆에 있는 물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붕대가 감긴 손으로는 헛발질만 할 뿐이었다. 사실 손이 잔에 닿지도 않았다. 대신 물잔을 집어 든 이세정이 내 입에 가져다 댔다.
“병원에 데려다 놓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서 그래요. 나 회사 가면 우채민 씨 혼자 있을 거예요?”
“이틀 내리 아프진 않아요. 곧 나을 겁니다.”
나는 침대로 가 눕기 위해 이세정을 밀어냈다. 이세정은 버티는 대신 순순히 내려주곤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떤 염려든, 그것이 나를 오롯하게 향하고 있다면 나는 그 진심을 파헤쳐 볼 필요가 있었다. 내 가슴을 가만가만 토닥여주며 곁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상념에 빠졌다.
이세정은 끝내 강아지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그 강아지와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를 건드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건 내 좋을 대로 해석한 말이었고, 달리 말하면 이세정은 나를 제외한 주변인들에게 언제든 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불안정하고, 이세정도 그러했다. 우리가 잘 지내려면 나는 글러 먹은 간덩이부터 뜯어고쳐야 했다. 겁 많은 내가 이세정을 보듬을 수 있을까. 품을 수 있을까. 누가 나 대신 좋은 방안을 내주었으면 좋으련만.
어려운 문제를 짊어지고서 무심코 휴대폰을 쳐다봤다가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문자를 발견했다.
[넌 언제 올 거니?? 온다며???]
누나의 번호였고, 누나의 말투였다. 문자를 보자마자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근심은 날아가고 새로운 걱정이 떠올랐다. 이제 문자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된 건가. 많이 아프지는 않는 건가. 손가락은 괜찮고? 눈은?
당장에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구석이 많았다. 나는 서늘하게 얼어붙은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서 옆에 있는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이 휴대폰을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묻기에, 뻣뻣하게 입술을 열었다.
“누나…….”
“우채민 씨 호칭이 제멋대로네. 계속 형이라더니.”
“아니, 형보고 그런 게 아니고…… 누나한테서 온 문자예요. 언제 오냐고, 병원에.”
“다 나으면 데려다줄게요.”
“……저만 가는 거죠?”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세정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빤히 주시하던 눈길이 점점 가라앉았다. 눈썹은 좁혀지고, 입매에는 어색한 미소가 얹어졌다.
“난 만나면 안 돼요?”
내 침묵과 함께 잠깐 일은 정적은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가야 했을 만큼 숨 막혔다. 짧은 순간 나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이세정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이세정이 서서히 인상을 썼다. 언짢은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제법 유했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계속 소란스러울 거예요. 난 이제 더 이상 우채민 씨와 다투고 싶지 않아요.”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곰곰이 되새겨보니 이건 타협을 제안하는 말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일을 듣고 나서, 이제 이세정과는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을 테니 단념해야 하지 않을까 홀로 갈등했기 때문이다.
“우채민 씨가 뭘 두려워하는지 이젠 알아요.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간절히 원했던 한마디가 허탈하리만치 가볍게 이야기되었다. 이세정은 결국 굽혀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를 계속 이겨 먹으면서 쓸모없는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과였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울고 싶었다. 이세정을 좋아하면서도 그를 믿지 못할 내가 뻔하게 그려졌다. 나는 강단 같은 것은 없는 사람이라서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가 없었다.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를 두고, 이세정이 덧붙였다.
“대신 가족에게 날 소개해줘요.”
“…예?”
머리보다 심장이 더 빨리 알아듣곤 쿵덕쿵덕 발작하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대신이라는 단어는 상대가 제안에 긍정했을 때 붙는 말이 아니었던가. 아니, 그러면 앞서 한 말은 사과가 아니라 제안이었나? 나는 또 이세정과 거래를 해야 하나?
“아는 사람들은 다 소개해줘요. 우채민 씨가 만나는 사람들 중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겁에 질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이세정과 내 가족을 만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제 건드리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단번에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형을 누구라고 설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애인이라고 해도 좋고, 인생이라고 해도 좋아요.”
전자는 커밍아웃이고, 후자는 미친놈인데. 이세정이 내 인생이라는 말은 근본 없는 자만심일까, 아니면 선전포고일까. 내 과거도, 현재도, 미래까지도 모두 내주어야만 인생이 되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일 났다는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세정이 덧붙였다.
“나 말고 소개할 사람 있나 봐요?”
“없습니다.”
“좋아요.”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 말이 가족을 소개해주겠다는 허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세정의 대꾸는 우리의 대화가 어떤 끝맺음으로 종결된 것인가 의문을 불러올 만큼 담백했다. 대화를 살려야 할 것 같아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고 소개할 거예요?”
이세정이 먼저 물어왔다. 바로 답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지금 대답했다간 이세정과 누나의 만남이 기정사실화가 될 것 같아서 머뭇거렸다. 돌려서 거절했다고 해도 무방한 침묵이었는데, 이세정은 모른 척하며 끈질기게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축 처진 표정으로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친한…… 형.”
애인이고, 인생이고, 내가 정해둔 틀을 깨부수기에는 아직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감히 이세정을 좋아한다고 누나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리 말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친한 형? 되는대로 뱉어두고 넋 놓고 있는 내게 이세정이 되물었다. 혹시 기분이 나쁜 건가 했더니 짧게 웃고 말 뿐이었다.
“괜찮아요?”
“우채민 씨 친한 사람 없잖아요. 내가 다 확인했는데.”
부정하기에는 너무 그럴듯한 이유였고, 서러워하기에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이없는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표정이 웃겼는지 보기 좋게 휘어진 입술이 눈과 함께 살금 찌푸려졌다.
눈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런 예감에 휩싸였다. 당장 내일이면 이세정과 손을 잡고 누나의 병문안을 가게 될 것 같다고. 나는 되도록 이세정과 내 가족을 떼어놓고 싶었으므로, 조금만 더 아프기로 했다.
***
-누나 꽃 안 좋아해요.
체념 조로 내뱉은 말에 차는 꽃가게를 지나쳐 달렸다. 꽃을 안 좋아한다고 해서 병문안 선물이 아예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길로 차가 다른 가게 앞에 서는 일은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막힘 없이 곧았다. 체감하기로는 흡사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 같았다. 안전 속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안전벨트를 잡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벨트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운전자를 곁눈질했다. 이세정은 나와 몇 번 눈이 마주치자, 알아서 속력을 줄였다. 나는 그것 때문에 떠는 것이 아니라며 고갯짓했다.
“더 줄이면 기어간다고 화낼 겁니다, 다들.”
“누가 화내요.”
“……운전자들.”
“안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시비를 거는 운전자가 있다면 차로 받아버릴 거라고, 내 망상이 말했다. 당장 걱정해야 할 것들은 따로 있으면서, 내 성정이 잠시를 못 견디고 여러 가지 번민을 끌어와서 마음을 잔뜩 들쑤셔놓았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얼굴을 쓸어내리지 못하니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호흡마저도 떨리는 기분이었다.
“우채민 씨…….”
신호불이 꺼진 틈에 이세정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걱정스레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왜 떠는 거예요?”
형이 우리 누나 해칠까 봐요. 속으로 대답했을 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빠르게 회복된 내 몸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정적은 오래 이어졌다. 아무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 여겼는지, 이세정이 이를 지그시 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 질문도 안 했다는 양 다시 운전에 집중한다. 운전대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지도, 욕지거리를 하지도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쎄했다.
십 분쯤 갔을까. 문득 갓길에 차가 세워졌다. 날 선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았다. 고통이 오는 대신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바라보기가 무섭게, 이마로 운전대를 지그시 누른 이세정이 목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내가.”
된통 짜증을 내고 싶은데 내가 겁을 집어먹을까 봐 일부러 자제하는 투였다. 참고 있다는 것이 뻔히 드러난 마당에 겁이 상쇄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내게는 지금 이 말투가 더 무서워서 쭈구리처럼 움츠러들었다. 상체를 든 이세정이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서러워요? 서럽네…… 서러워 죽겠네… 우채민 씨는.”
“…….”
“내가 여기까지 맞춰줬으면 예의를 지켜줘요.”
“…죄송합니다.”
깊이 박힌 불신은 노력한다고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저 말뿐이더라도 얌전히 순종하니 더 오가는 소란은 없었다. 다만 그다지 원치 않은 반응이었는지 이세정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면을 보았다. 차는 그대로 병원을 향해 달렸다.
“들어갈래요?”
운전을 하면서 분을 모두 삭힌 건가. 내가 들어가기 용이하도록 편의점 문을 잡아준 이세정은 평소의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깊이 관찰해보지 않아도 화는 말끔히 풀린 듯 보였다. 외려 주스를 사주고, 머리를 넘겨주며 제 아량을 보여주려고 안달하지 않던가.
아량은 아량이고, 정작 중요한 내 멘탈은 여전했다. 이세정이 아무리 굽혀주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여전한 이상 우리는 계속 싸워야 했다.
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병원 복도를 걸었다. 누나의 병실에 다다를수록 잊고 있었던 초조함이 되살아났다. 나는 전전긍긍해 하며 병실 앞에서 걸음을 세웠다. 문 너머로 흘끗 살펴보니 누나는 보이지 않고 모르는 환자 몇 명만 눈에 들어왔다. 이세정을 데리고 선뜻 저 혼잡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이세정을 돌아보았다.
“당부드릴 말이 있는데, 해도 돼요?”
“해도 돼요.”
“누나한테 쓸모없는 말은……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냥 가볍게 인사 한번 하시고, 묻는 질문엔 짧게 답하시고….”
너무 명령조인 것 같아서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저한텐 어머니 같은 사람이니까 예의를 갖춰주시면 너무 고마울 것 같아요.”
“알았어요.”
이세정은 순순히 대답했다. 대답하는 텀이 상당히 짧아서 잘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좀 의심스러웠다. 나는 떨떠름하게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혹시나 하고서 재차 당부했다.
“정말 어머니처럼 대해주시면 감사할 텐데…….”
“그래요. 알아들었어요.”
어머니처럼. 자꾸 물어대는 내가 귀찮았는지 이세정이 강조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에 안심하지 않았다.
“제가 전에 누나 싫다고 했던 말은 다 잊어버리시…….”
갑자기 입을 맞춰오는 바람에 눈도 감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짧게 키스하고 끝냈다면 괜찮았을 텐데 입술이 깊이 맞물리면서 부드럽게 빨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목울대를 건드리며 쿵덕거렸다. 정신이 든 틈에 얼른 밀어냈더니 이세정이 아이처럼 짓궂게 웃었다.
“말 다했으면 이제 들어갈까요?”
내 등 뒤로 팔을 뻗은 이세정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훑었다. 사람이 꽤 있었다. 봤는지 안 봤는지 고민하기도 싫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돌아본 타이밍에 맞추어 완전히 열린 문틈으로 어수선한 병실이 보였다.
4인실치고 상당히 번잡스러웠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열린 문에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TV 채널을 가지고 싸우는 환자 가족들을 천천히 지나쳐, 병실의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커튼이 단단히 쳐진 침대 아래에 누나의 이름이 있었다. 커튼을 열기 전에 혹시 몰라 내가 왔다고 큰 소리로 알리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채민?”
깨끗하고, 멀쩡한 음성이었다. 듣기 좋은 맑은 음색이 반가워서 성급하게 커튼을 젖혔다. 누나의 조금 탄 얼굴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환자복을 입은 누나는 원래도 마른 체형이었지만 유난히 호리호리해진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심장이 마치 누나 때문이라는 양 울상을 지었다.
“누나.”
“야, 넌 재수 없게 보자마자 그렇게 인상을 쓰냐?”
“괜찮아?”
“머리가 띵해. 약 기운이 아직 안 떨어졌… 사고당한 건 난데 왜 네 몸이 더 난리가 나 있어?”
내 모습을 돌아보기도 전에 아차 싶었다. 상처 난 부위를 단단히 감고 있는 깁스의 감각이 이제야 느껴진 탓이었다. 누나를 만나기에 급급해서 얼버무릴 핑계조차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나는 명백히 당황한 눈치로 이세정을 곁눈질했다. 내 시선을 따라 이세정을 쳐다본 누나가 뜻밖의 손님을 마주한 양 나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을 데려가겠다고 문자로 미리 고해놓았으니 저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누나는 동공까지 떨어대며 이세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 빠르게 훑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시선이 다시 얼굴로 향했다. 시선이 마주하자, 이세정이 먼저 눈을 접으며 인사했다. 내가 몇 차례나 읊었던 당부에 따라 예의 바른 척 간단히 연기만 해주면 되는 일인데, 쓸데없이 눈웃음까지 덧붙이니 좀 놀랐다.
왜 마음대로 남자를 데리고 오냐고, 예의는 어디에 두고 왔냐고, 누나가 화를 낸다면 당장 데리고 나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나는 눈이 사르르 풀린 누나의 얼굴을 확인하곤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나는 나를 침대 쪽으로 끌어당겨 앉히곤 이세정을 의자로 이끌었다.
“채민이 친구 맞지. 집에 몇 번 왔었잖아.”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탈출하고 감감무소식인 나를 찾기 위해 이세정이 친히 집까지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누나는 그때의 일뿐만이 아니라, 더 이전의 일까지 들먹이면서 그와 긴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부담스러운 자리일 법도 했는데 의외로 평범하고 반듯한 대화가 오갔다.
“제대로 인사 한번 못했지, 우리. 경황도 없이 뭐, 여행? 그런 대화하기에 바빴네.”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무슨, 잠깐 보고서……. 그런데 나 기억도 안 날 텐데 어떻게 병문안 올 생각을 했어?”
“기억해요. 채민이랑 닮아서.”
이세정이 느리고 담담하게 말을 풀어내며, 나를 흘끔 보았다. 초면이라고 오버스럽게 예의를 차리지도, 그렇다고 아주 건조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런 투로 ‘채민이’라고 하니까, 왜인지 부끄러워졌다.
“에이… 어릴 적부터 닮았단 소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채민이는 아빠 닮았고, 난 완전히 엄마 닮았어. 보통 반대던데 신기하지?”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나와 닮은 턱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와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고, 나와 닮은 눈으로 웃었다. 문득 누나와 참 많이 닮았다며 사탕을 쥐여주던 누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부정하는 누나를 바라보며, 이세정은 의아하게 눈썹을 올렸다. 자칫 비뚤어질 뻔했던 눈썹이 단정하게 균형을 찾았다.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 닿았다가 다시 누나에게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마조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뭐 좀 먹을래?”
누나가 몸을 돌려 간식 상자를 뒤적거렸다. 막대 과자도 있었고, 봉지 과자도 몇 있었다. 둘러보니 다 누나가 좋아하는 간식들이었다. 누나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과자 박스를 손톱으로 꾹꾹 눌러서 뜯어내려고 애썼다. 이세정이 가져가 대신 과자를 까주었다.
“고마워.”
누나가 조그맣게 읊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왜인지 몰라 의아해했더니 눈동자가 떨리며 엉뚱한 주제로 말을 돌린다.
“그래서, 병문안 왔으면 과일이라도 사 들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하다못해 꽃 한 송이라도.”
“아…… 누나 꽃 안 좋아하잖아.”
프리저브드를 싫어했으니 그냥 꽃도 안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내린 판단이었는데, 의외로 누나가 침묵했다.
……아닌가? 누나랑 같이 산 지 오래되었지만, 감정적 교류가 그리 깊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혼자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까 문득 이세정이 품에서 웬 봉투를 꺼냈다. 누나에게 건네는 손길을 멍하니 따라갔다.
“병문안 선물이에요, 어머니.”
어머니처럼 대하라고 했지, 누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 아직 결혼도 안 한 여자에게 너무한 호칭이었다. 누나가 된통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재빨리 이세정의 어깨를 툭툭 쳐 눈치를 주었다. 다행히 누나는 봉투에 정신이 팔려 어머니란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봉투를 열어 무언가를 꺼내보고 잽싸게 집어넣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숫자가 적힌 종이를 보았다. 저건 분명 돈이었다. 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종이를 꺼내보더니 넋 놓은 얼굴로 이세정에게 물었다.
“……병문안 선물로, 이걸 주는 건 어느 나라 법이야?”
안 되겠다 싶었다. 어머니란 호칭에, 돈에…… 이세정을 계속 놔두었다가는 자잘한 사고들을 더 일으킬 듯했다. 몸 상태는 괜찮은지, 어떻게 된 일인지, 가해자 그놈은 어디에 있는지, 보험 처리는 되었는지, 누나에게 물어보아야 할 말이 산더미처럼 있었기에 나는 이만 이세정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이세정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누나와 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조금만 자리를 비켜주시면 안 될까요?”
“나가 있으라고요?”
“……네. 못 믿는 게 아니고, 정말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왜 서로 존댓말 해? 친구라며.”
끼어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누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는 봉투로 상기된 뺨을 부채질하다가, 이것이 품고 있는 0의 개수를 떠올리고는 흠칫 멈추었다. 누나가 봉투와 나, 그리고 이세정을 번갈아 보았다.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부자야? 재벌 그쪽이야?”
누나는 먼저 물어놓고 손을 휘저었다. 머리가 아프다면서 봉투를 내려놓곤, 머지않아 다시 들어 내용물을 한 차례 더 확인했다. 결국 이세정에게 돈을 돌려준 누나가 물었다.
“서른넷 안 넘지?”
딱 제 나이대로 보이는 이세정에게 가져다 붙인 나이치고 조금 많은 감이 있었다. 제발 나이가 많아라, 하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보아 왠지 누나의 속내가 짐작이 갔다. 얼굴 하며, 집안 배경 하며,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끼어들었다.
“…스물둘이야.”
이세정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마주 보지 않았다. 나는 내일 모래 마흔이 되는 누나의 애인감 후보로 이세정을 올려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는 누나를 지켜야 했다.
“정말 스물둘이야?”
이세정은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내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어처구니없는 미소를 지었다.
“더 들어 보여요?”
한순간에 새파랗게 어린 연하가 된 이세정을, 누나는 깨끗하게 놓아주었다. 단념한 눈으로 봉투를 힐끔 본다.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도 저 숫자를 본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나는 제 눈길이 계속 봉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채민이랑 계속 친구를 해달라며, 농담 한 번 건네고는 손을 뻗어 내 팔을 부여잡는다.
“그래서 넌 왜 다친 건데?”
“아, 그게…….”
나는 어쩌다 다친 거냐고 물을 준비만 되어있었다. 내 팔에 관해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누나가 다른 곳에 신경을 둔 틈을 타서 변명거리를 생각해두었어야 했는데. 거짓말을 못 하는 나로서는 어리석게도 이 순간 이세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벼락같은 눈길이 이세정에게로 향했다. 누나는 아까와 달리 사납게 물었다.
“뭔데 얠 봐. 얘가 그랬을 리도 없고.”
거짓말을 안 하는 이세정은 사실대로 그렇다고 고했다. 예의 바르게 미소를 갖추어 답한들 누나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가만히 두면 대화가 정말로 수렁으로 굴러갈 것 같았다. 내가 해명해야 할 일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날까 봐, 나는 다시 한번 이세정에게 잠시만 나가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이세정이 눈동자만 굴려 창문 쪽을 살피더니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의심을 안 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도망갈까 봐 또 경계를 하고 있다.
“여기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요?”
밥조차 제대로 못 먹는 팔을 가지고 4층가량의 건물 아래로 뛰어내려서 온전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답답한 속내를 숨기고 달래듯이 물었더니, 이세정이 나를 빤히 보다가 눈을 접어 웃었다.
“토끼 같이 생겨서.”
토끼의 점프력을 너무 맹신하는 비유였다. 내 생김새를 부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꽤 부끄러운 말을 던져놓고 이세정은 휴대폰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 받고 올게요.”
화면에 뜬 이름을 읽기도 전에 이세정이 커튼 뒤로 사라졌다. 나는 이세정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쫓다가, 모난 곳 하나 없이 잘생긴 뒤통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서야 누나에게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나처럼 이세정을 눈으로 좇던 누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너더러 뭐 같이 생겼다고?”
상기되었음이 분명한 얼굴로 모른 척 고개를 저었다. 뻔히 다 들었으면서 되물었던 건지 누나가 너더러 토끼 같이 생겼대, 하며 이세정의 말을 반복해주었다.
“그나저나 진짜 핫하다, 쟤. 섹시하게 생기지 않았어? 얼굴이랑 다르게 되게 수줍어하고, 예의 바르고, 눈웃음 살살 치고…….”
누나는 이세정이 내 팔을 이리 만들었다는 것도 잠시 잊고서 여러 연예인에 빗대어 외모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어떤 배우를 보고도 잠시라도 잘생겼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세정을 그분들과 비교하기에는 퍽 난감한 감이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세정은 연예인을 하기에는 아까운 외모였다. 저 얼굴은 집에 숨겨두고 나만 보게 해야 하지 않나.
“돈 많고, 성격도 괜찮은데, 난 쟤가 왜 너랑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너 성격 이상하잖아.”
어디 하나 허투루 생기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어째서 내 외모를 좋아하는 건지 나도 의문이기는 했다. 객관적으로 내 성격이 무난하지 않은데 어째서 내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지 그것도 의문이기는 했다. 이세정의 성격이 좋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누나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내 팔을 힐끔 본 누나가 뒤늦게 덧붙였다.
“장난이 좀 심하긴 해. 걔가 보상은 했어?”
“그 집에서 신세 지고 있어. 꾸준히 병원도 가고, 주치의도 오고.”
나를 가두어놓고 감시하는 일이 책임의 일부라면 일부였으니, 일단 그렇게 누나를 안심시켰다.
“겨우? 고소한다고 협박하면서 돈 좀 뜯어내 봐. 팔 다친 것치고 보상이 부실하다.”
“농담이지?”
“어떻게 들렸길래 농담이래. 진담이야.”
“……하하.”
나는 작위적으로 웃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내 팔을 망가트린 사람은 다른 인육 매매범이었다. 법적으로 이세정이 내 팔을 보상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 보상을 받고 싶다면 협박까지 갈 것 없이, 빵 사 먹게 몇억만 달라고 말하는 편이 더 쉬울 터였다.
“아, 맞다. 너 다친 게 쟤 때문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그 돈 받았을 텐데. 그 봉투!”
누나가 침대를 치며 후회했다. 돈을 돌려주며 목숨 또한 돌려받았다는 사실을 누나가 알아야 할 텐데. 이세정과 돈으로 엮여봤자 득보다 실이 더 클 테니까. 나는 이세정이 아직 밖에 있느냐면서 찾으러 나가려는 누나를 만류했다.
“누나…… 집 앞에 있는 차 받고 쌤쌤 하면 돼. 그 차가 내 팔보다 값어치가 세니까….”
“무슨 차.”
“집 앞에 맨날 주차되어있는 컨버터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누나는 곧 몇 달째 주차장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차 하나를 떠올려내곤 눈을 크게 떴다.
“……그거? 그 차 쟤가 너 준 거라고?”
“옆에 있는 외제차도.”
“왜? 이해가 안 되는데……. 정말 왜?”
고개를 갸우뚱하던 누나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누나는 손을 교차해 양 팔에 난 소름을 털어내면서 어서 차를 돌려줄 것을 종용했다. 아무리 돈이 썩어나는 사람이라도 목적 없이 퍼주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너 혹시 걔 발이라도 닦고 다니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걔한테 얻어맞으면서 비위 맞추고 다니는 거 아니냐고. 어쭙잖게 비서 흉내 내면서.”
누나는 나를 뭐로 보는 걸까. 살기 위해 비위를 맞춰본 적은 있지만 차 같은 것을 공짜로 얻기 위해 비위를 맞춰본 적은 없었다. 입에서 맴도는 말을 죽이고, 대체 무슨 소리냐며 웃었다.
“지금 보니 수상해. 너 팔 장난치다 그리된 거 아니지?”
“아, 아니. 맞는데. 술래잡기를 너무 격하게 해서…….”
“지랄 염병을 하는구나, 다 커서.”
누나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여느 어머니들처럼 내 등을 턱턱 때렸다. 하필 등뼈를 맞는 바람에 등짝이 온통 후끈거렸다. 아픈 티를 냈더니 한 번 더 때린다. 나는 누나를 피해서 침대에서 내려와 빈 의자에 앉았다.
“누나 몸은 괜찮아?”
나 때릴 힘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심각히 아픈 것은 아닌 듯했지만, 머리에 감긴 붕대가 자꾸 눈에 밟혔다. 다행히 보이는 것과 달리 누나는 고통이 심하지 않다면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과자를 집어 들었다. 오독 오독거리며 과자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랐어.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 횡단보도 건널 때는 차 방향 잘 보고…….”
“너나 잘해.”
“난 신호 잘 보고 다녀.”
누나만큼이나 조심성 없는 사람이 또 있을 것 같냐고, 답지 않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와중에 웬 비명이 울렸다. 사실 비명이라기에는 항의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놀라서 반쯤 닫힌 커튼을 완전히 젖혔다. 반대쪽 침대에서 누군가 주사를 안 맞겠다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상황만 눈에 담고 도로 커튼을 닫았다.
“저 사람 맨날 지랄이야.”
누나가 눈을 좁힌 채 혀를 찼다.
“어디 아프셔?”
“쟤? 눈이 좀 아프다는데, 모르겠어. 무슨 병인지.”
누나는 과자를 사정없이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다지 딱딱하지도 않은 과자를 거칠게 씹어대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서 좀 이상하긴 한데, 누나의 거침없고 대범한 성격이 부러웠다. 내가 저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세정과 더 순탄하게 풀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난 저렇게 눈 아픈 사람들 보면 불편해. 아……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좀 이상해.”
“왜 불편해?”
“그냥. 이제껏 안과도 가본 적 없으면서 괜히 트라우마로 느껴져. 볼 때마다 속도 거북하고 심장도 막 뛰고. 아아아, 진짜 불쾌해. 갑자기 병실 바꾸고 싶다, 막.”
당장 병실을 바꾸어줄 만한 능력이 없는 나는 그렇구나, 하며 공감해줄 따름이었다.
“예전에 해외 봉사단 꾸려서 간 적 있거든? 거기서 시각장애인들을 두 명인가 봤어. 보자마자 가슴이 너무 뻐근한 거야. 너 그 불쾌한 느낌 알아? 그게 너무 심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혐오감이 생기더라. 그 사람들한테.”
“…….”
누나는 어머니를 그리 가까이서 보아놓고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누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나쁜 사람으로 몰고 싶지는 않아서, 감히 충격받은 표정도 짓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나름 티를 안 낸다고 노력했는데, 누나가 보기로는 얼굴에 내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던 모양이다. 누나가 눈살을 구겼다.
“나도 알아. 나 그날 소시오패스 같았어. 다 혐오스럽고, 나조차도 혐오스러웠어.”
내가 아는 소시오패스는 그런 걸로 자책하지 않을 것이다.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나의 말을 들었을까 봐, 그래서 욕을 할까 봐, 누나의 목소리가 더 커지지 않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누나는 왜 가까이 다가오는 거냐며 내 가슴을 밀어냈다.
“넌 그런 적 없어?”
“……있었을 수도 있고.”
누나를 위해 거짓을 좀 보탰다. 누나가 가자미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하긴. 넌 어리고 철없어서 그때 기억이 별로 없겠지. 네가 내 고충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그때라니?”
“어릴 때.”
내 기억으로는 어릴 적 누나의 고충이라곤 지독하게 열중하던 공부밖에 없었다. 물론 한창 사춘기였으니 자잘한 고민거리가 있었겠지만, 적어도 집안에서만큼은 누나는 평화롭지 않았던가.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자주 맞았는데…… 누나도 그랬어?”
“내가 너니. 넌 맞을 짓을 했고.”
쏘아붙인 누나가 지난 과거를 풀어놓았다.
“아무리 관심받고 싶었어도 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는 거지. 넌 좀 적당히 했어야 됐어. 아니, 관심 얻는 법이 아예 잘못된 거지. 나 봐봐. 모난 짓 안 하고 얌전히 순종하니까 아직까지 용돈도 받고 그러는 거잖아. 그동안 너 아버지한테 용돈 받은 적 없지?”
“…….”
누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만 용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를 떠보았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누나는 지금껏 나와 비교하며 위안을 얻고 있었던 건가. 자신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하나뿐인 동생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저 대화 한 번 했을 뿐인데 속이 답답해졌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고분고분하게 살아, 바보야. 아빠한테도, 다른 사람한테도.”
모난 짓 안 하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했다가 혐오 사상을 얻은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누나는 결국 비뚠 사람이 되었고, 나는 여기서 더 비뚤어질 수 없었으므로 그 길을 따를 수 없었다.
“사랑받고 싶으면 그래야 돼. 여자도 마찬가지야. 여자가 도중에 돌아선다고 너 또 그딴 소름 돋는 짓으로 관심 끌래? 건강하게 연애하란 말이야.”
누나와의 대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일방적인 조언을 듣느라 정작 물어보아야 할 것들을 하나도 내뱉지 못했지만, 일단 집에 가고 싶었다.
도망치듯 나온 병실 밖에 이세정이 앉아있었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봐서 잘 모르겠는데, 옆에 앉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얼굴엔 달리 표정이 없었고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간간이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닿아있는 것은 아니다. 마주 보고 있지도 않다. 나는 그냥 타인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세정이 낯설어졌다.
어디까지 대화하나 지켜보자는 심산으로 문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이세정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인 여자의 모습을 보고선 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이세정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나보다 먼저 내게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우울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야기 끝났어요?”
“예.”
이세정의 어깨너머를 살폈다. 여자는 몇 번의 미련을 던지더니 떠났다. 시원하게 트인 희멀건 어깨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내 시선을 따라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본 이세정이 물었다.
“관심 있어요?”
“그냥 무슨 이야기 했을까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세정은 허공에 두 손을 올리곤 시동을 켜는 시늉을 했다.
“부릉부릉.”
일반적인 오토바이의 시동을 거는 동작이다. 바이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 같다. 웬 여자애와 카톡 좀 했다고 지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자신은 이리 당연하게 말을 하는 것일까. 무의식중에 심통이라도 낼까 봐 마음을 다스렸다.
승강기를 향해 걷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갔다. 이세정이 내 어깨를 당겨준 덕에 조심성 없이 지나치는 링거대에도, 휠체어에도 걸리는 일이 없었다.
“나, 키 커서 좋아요?”
막 승강기 앞에 도착했을 때 이세정이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나는 응? 하며 되물었다.
“바이크 선수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게 키였어요.”
“왜요?”
“중심이 안 잡히니까. 우승하고 싶었는데 키가 하루하루 계속 커가는 거죠. 일부러 우유 같은 것도 안 먹고, 성장판 닫을까 고민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어요.”
꽤 진지하게 임했었구나. 알게 된 과거가 흥미로워, 나는 지수와 한창 키를 가지고 경쟁하느라 우유를 하루에 두 팩씩 먹었다고 말을 곁들여주었다. 이세정이 그러냐고 웃었다. 흐르는 웃음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내내 이어졌다. 정수리부터 뒤통수까지, 부드럽게 쓰다듬던 이세정이 입을 열었다.
“그땐 우채민 씨 키에서 멈추기를 바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네요.”
“……제 키 아세요?”
“키만 알겠어요?”
이세정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서 붕대가 감긴 손가락을 매만졌다.
“다 알지.”
왜 하필 손을 잡고 이런 말을 하지. 나는 손가락을 펼쳐 내 손가락의 굵기를 살폈다. 붕대가 감겨있으니까 정확히 가늠은 안 되지만, 어쨌든 반지를 낀다면 이세정보다 작은 호수를 껴야 할 둘레였다. 내가 반지를 받고 싶어 쳐다보는 거라고 여겼던지 이세정이 농담했다.
“나랑 결혼해준다면 줄게요.”
나는 이세정의 농담을 모른 척했다. 주변의 소음이 크지 않았으므로 못 들었을 리 없다는 것을 이세정도 나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는 달리 서운한 기색 없이 대화를 끌고 갔다.
“열 손가락에 다 끼워줄게요. 졸부처럼.”
다들 부러워하지 않고 비웃기만 할 것이다. 손도 다물어지지 않겠지. 그렇지만 나는 어서 손이 나아야겠다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이세정이 올라간 내 입꼬리를 슬쩍 건드렸다. 내게서 미소를 지우고 저는 없던 보조개가 팰 정도로 깊이 웃었다. 순간 아득한 여명이 보이는 듯했다. 갑자기 막, 미친 듯이,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뛰어댔다. 심장이야 내가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뛰어대는 거라지만 이세정이 웃을 때 뛰어대는 것은 좀 달랐다. 그 미소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채민이 좋아 죽어.”
이세정이 어린애를 놀리듯 말했다. 반지 때문에 웃는 거 아닌데……. 목소리가 간지러워 눈썹을 조금 내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도착한 승강기에 올랐다. 나와 이세정이 차례로 오르고 나서도 뒤이어 사람들이 더 탔다. 이세정은 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가까이 쳐다보는 눈길이 오롯하다. 가슴을 밀어냈는데도 기어코 나를 쓰다듬었다. 가만두면 뽀뽀라도 시도할 것 같은 다정한 시선이다 보니 ‘저 경치 좀 볼게요.’ 하며 등을 돌렸다. 귀를 만지작거렸다. 왜 뒤를 도냐고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타고 오스스 소름을 만들어냈다. 나는 꿋꿋이, 훤히 드러난 바깥을 쏘아보았다.
사실 말하자면, 이세정이 이렇게 나를 봐줄 때마다 나는 한심한 의문에 휩싸이곤 한다.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냐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저지른 일들은 정말로 아이 하나의 잘못이냐고. 보통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이코패스의 범죄 같은 경우 어릴 적 열악한 환경을 이유로 옹호되곤 하던데, 그때마다 닥치고 깜빵이나 가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나답지 않은 생각들이었다. 또, 피해자를 의식하지 않은 철저히 나의 이기심 속에서 자라나온 속내였다.
백 억짜리 천에 난 얼룩 하나가 값어치를 떨어트릴지언정 브랜드의 이름을 바꾸어놓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세정은 여전히 내게 과분한 사람이다. 오점을 지울 수 없는 나는 그의 얼룩이 되어야 하는지, 마음을 접어야 하는지 선택해야만 했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이세정이 뒤에서 나를 안았다. 나는 움츠린 채로 바짝 긴장했다. 지금 너무 두려워, 심장이 뒤쪽까지 침범한 것일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심장 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
팔을 못 쓰면 고통보다는 불편함이 더 커서, 나중에 가서는 이까짓 깁스 없이도 잘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긴다. 나는 최대한 빨리 낫고 싶었기 때문에 그 근본 없는 충동을 억누른 채 꼬박꼬박 병원에 들렀다. 그리고 드디어, 의사 선생님의 판단하에 왼손의 깁스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이세정은 깁스를 푼 기념으로 샴페인을 사주었다. 정신 사납게 터트리는 대신 적정선을 훨씬 넘어 잔을 채워주었다. 충분히 기쁜 일이지만 대단한 일은 아닌데……. 꼭 키가 5센티미터나 자랐다고 축하받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안주 없이 술만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 께름칙하게 샴페인을 들이켰다. 내가 두 모금 째 입에 머금었을 때, 이세정은 새 술병을 열고 있었다. 나는 간의 기별도 안 가는 도수의 샴페인을 골라줘 놓고 저는 물이나 얼음을 섞지 않은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몇 잔 마셨다.
“잔 부딪혀줄래요?”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마실 생각인지 내게 건배를 요구했다. 나는 잔을 부딪쳐주며 이세정을 눈으로 흘겼다. 저건 내 팔을 핑계 삼아 양껏 술을 마시려는 수작이 아닌가.
“형…… 더 마실 거예요?”
“좀 줄까요?”
당장에라도 나누어줄 것처럼 이세정은 새로운 양주병을 열었다. 그래놓고선 새로 딴 병이 아니라, 기존에 내가 먹던 샴페인으로 내 잔을 채웠다. 새 양주는 난 한 모금도 주지 않고 저만 마셨다. 나는 잔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좀 자주 마시는 것 같죠. 형이 생각해도.”
“뭘요?”
“술이요. 매일 반주하는 사람은 진짜 처음 봅니다.”
매일 반주하는 사람이야 세상에 차고도 넘칠 것이다. 당장 주변만 보아도 배도빈도 그런 과였으니까. 그래도 처음 본다고 말해야 이세정이 알아듣고 자신을 한 번쯤 되돌아보지 않을까 싶었다.
술주정뱅이에게 맞은 적은 없지만,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 싫었다. 이세정은 특히 건강까지 염려되어 덜 마시기를 바랐다.
“반주는 일반적이고, 건강한 문화예요.”
이세정은 보란 듯이 한 잔을 쭉 마셨다. 급히 먹어 약간 어지러운지,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흔든다. 개구지게 웃은 이세정이 내 표정을 확인하곤 당혹스럽게 말했다.
“요즘 우채민 씨, 나한테 다 하지 말라고 하네.”
“……형도 저한테 그러는데.”
뱉어놓고 눈치를 살피니, 내 말이 웃겼는지 이세정이 입술을 올려가며 웃어댔다. 잔웃음을 삼킨 이세정이 먹으려던 술을 멀리 밀어놓았다.
“술 말고 차로 바꿔볼게요. 아, 차는 잘 모르는데.”
이제껏 접해본 차 이름들이 늘어진 목소리로 나열되었다. 나는 아는 차 종류는 안다 하고, 모르는 차 종류는 모른다 하며, 이세정의 말에 일일이 대꾸해주었다. 그러자 대화의 합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세정이 뺨을 괴고 다정하게 나를 들여다보았다. 올곧은 시선은 점점 낮아져서 곧 테이블의 끄트머리까지 붙여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테이블에 흐르게 두고 뺨을 붙이고 누운 모습이 너무, 너무, 예뻐 보였다.
이세정은 어린애처럼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제 머리로 끌고 갔다. 나는 이세정의 머리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부드러운 앞머리가 푹 눌려 이세정의 눈을 조금 찔렀다. 물기라도 머금은 양 씩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자니 문득 소름이 끼쳤다. 손끝을 떨며 테이블 모서리를 붙잡았다.
“누나가요. 형 섹시하게 생겼대요.”
“굳이 전달하는 이유는?”
“딱히…….”
누나의 말을 빌려서 내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지만,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이성에게는 몰라도, 동성에게 섹시하다고 하는 것이 좀 낯간지러웠다. 이세정은 빠르게 변화하는 내 표정을 곰곰이 주시하다가 문득 말했다.
“우채민 씨는 내가 어릴 적 먹었던 그 알약 같아요.”
“……무슨 뜻이에요?”
이세정이 한 손을 들어서 허공에 물결을 만들었다. 지진파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약을 먹은 뒤 온통 일그러진 공간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보고 있으면 뭔가가 흔들린다는 뜻인가 이상한 추측을 하고 있는데, 이세정이 말했다.
“삼키고 싶어요.”
무슨 식인종 같은 발언이지. 당혹스러워할 새도 없이 허리가 끌어당겨 졌다. 엎드린 채 나를 안은 이세정이 내 배 쪽에 입을 맞추고는 눈을 감았다.
“좀 잘게요. 깨워줘요.”
술을 마시고 그 자리에 엎어져 자는 사람을 숱하게 보아왔으나, 눈에 뭐가 씌었는지 이세정 한정으론 그다지 한심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놀란 표정을 지우고, 이세정의 내리깐 속눈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데도 이세정이 수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숨을 죽였다. 더 깊이 잠들면, 어찌어찌 안아 들고 침대로 옮겨주어야지.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몸을 움직이려니까 내 허리를 감은 이세정의 팔이 걸렸다. 어찌나 단단하게 안고 있던지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세게 비틀면 분명 깰 텐데. 고민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꼿꼿이 편 그대로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팠음에도 멍청이처럼 그렇게 있었다. 어느 순간 이세정의 엎드린 등을 바라보던 시야가 흐려졌다.
심한 피곤에 절어 눈을 뜨기 어려웠다. 겨우 눈을 떴을 때는 허리가 당겨 몸을 일으키기 싫었다. 속은 쓰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술 조금 먹은 것치고 과한 상태임은 틀림없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이불을 정돈했다. 막 갠 이불을 몇 번 때려주었을 때 방 안으로 이세정이 들어왔다. 타이 없는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일어났어요?”
귀에 댄 휴대폰을 잠시 떼고 내게 물은 이세정이 즉시 통화를 이어갔다. 귀 기울여 엿들어보니 집에 있는 바이크를 밖으로 옮겨달라고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밖에 주차된 바이크와 이 집에 주차된 바이크의 차이를 묻는 장 비서님의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바퀴가 다르죠.”
직접 운전하겠으니 차를 타라고 권유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끊기며 들렸다. 이세정은 대꾸하듯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시계를 건넸다. 얼결에 시계를 받아든 나는 이어 내민 그의 손목을 당혹스럽게 붙잡았다. 채워달라는 건가. 타이만큼이나 시계를 차는 일이 드물어, 좀 의아해졌다.
“오늘 누구 만나요?”
통화하는 도중이라는 것도 잊고 물었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세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세정이 내민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고는 몇 번 주물주물거렸다. 헐렁하게 채운 탓에 시계가 손목 위를 옮겨 다녔다.
“가다가 벗겨져도 모르겠어요.”
어느새 통화를 끊은 이세정이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시곗줄이 길지 않고 단단해서, 아무리 헐렁하게 찼다 한들 벗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착용감이 불편하다면야 다시 채워주어야 했다. 내가 손목을 끌어당겼더니 이세정이 부드럽게 빼내었다.
“괜찮아요.”
이세정은 그리 말해놓고 머지않고 시곗줄을 풀었다. 자신이 직접 고쳐 차려는 건가 싶었는데, 자연스럽게 제 주머니에 넣는다. 이럴 거면 왜 채워달라고 한 거지……. 이세정의 주머니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까, 그가 시계를 도로 꺼내 내게 건넸다.
“비싼 거 아니에요.”
“……달라는 뜻으로 보였어요?”
“그냥 표정이 귀여워서.”
이세정이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잦은 바이크 탑승으로 손이 아주 고운 편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손길은 녹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이세정은 손길만큼이나 부드럽게 말했다.
“손 상태 보려고 그랬어요. 잘 움직이는 거 보니까 곧 나을 것 같네요.”
“그럼 좋고요. 누나도 아픈데, 저까지 아프면 안 되니까.”
“…….”
“왜요?”
“다 나으면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응? 눈썹을 찡그린 이세정이 가지 말라고 조르면서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더니 이번에는 뺨을 간지럽혔다. 뺨을 찍어 누른 상태로 이세정이 웅얼거렸다.
“나랑 있어 줄 거죠?”
비록 의도했다 하더라도 강압하지 않고 애교 부리듯 물으니까 심장이 다 떨렸다. 나는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는 마음을 접든지 접지 않든지 모두를 위해 그의 곁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대답에 긍정한 것은 보잘것없는 미인계 때문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뭐 하십니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킷을 팔에 걸친 장 비서님이었다. 머리가 푹 젖어 앞머리가 세 묶음으로 갈라져 있다. 일부러 저런 헤어스타일을 고집한 것은 아닐 테고, 설마 비가 오나. 발 빠르게 창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은 터트려지기도, 다시 맺혀지기도 했다. 빗줄기가 꽤 굵은 모양인지 순환되는 속도가 빠르고 매서웠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 이세정의 차림새를 다시금 살펴보았다.
“……형, 오늘 출근해요?”
“주중에 출근하는 게 놀랄 일이에요?”
“아, 아니요. 비 오는데 정말 갈 건지 궁금해서…….”
이세정의 시선이 창으로 향했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이제 의미 안 두려고.”
오랜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치고 가볍기 그지없었다.
“비 때문에 우채민 씨 못 지켜주면, 그것만큼 억울한 게 어딨겠어요.”
나한테는 많은 트라우마를 안겨주어 놓고, 저는 혼자 극복했다고…? 불만을 열두 번 가져야 마땅했지만, 어떻게 보면 강제적으로 극복하게 만든 것은 나였으니 화를 내기도 뭐했다. 나는 심란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물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비 오는 날 계속 출근하시는 거예요?”
“그러겠죠.”
“눈 오는 날도?”
“차 끌기 어려운 날씨가 아니라면.”
“차 끌기 어려운 날씨라면 눈이나 비가 재해처럼 오는 날인가…….”
이세정의 눈썹이 부드럽게 구부러졌다.
“나랑 계속 있고 싶구나?”
내 말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그냥 물어본 건데. 나는 모호한 탄식을 흘리며 아까부터 없는 듯 서서 여길 지켜보고 있는 장 비서님에게 눈길을 돌렸다. 화제가 돌아갈 만한 적절한 인사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장 비서님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대화를 끊어주었다.
“차 대기시켜놓았습니다. 비 오는 날엔 바퀴 두 개보단 네 개가 낫습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이세정이 비 오는 날에 웬 바이크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지금 장 비서님의 모습처럼 앞머리가 세 가닥이 된 채 도로 위를 달릴 셈인가. 비주얼은 그렇다 쳐도 위험 요소를 생각해보자니 아찔하게 가슴이 떨려왔다. 나는 제발 안전하게 차를 타고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옷매무새를 마저 다듬는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장 비서님의 권유를 무시하고 출근하려던 이세정이 내 얼굴을 보곤 물었다.
“잘 갔다 오라고, 뭐라도 해주려고요?”
“빗길에 교통사고가 잦다는 거 형이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 드릴까 하고…….”
나를 쳐다보던 이세정이 잠깐의 침묵 끝에 웃었다.
“알았어요.”
정말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이세정이 나오지 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를 장 비서님이 재빠르게 따라나섰다. 나는 나오지 말라는 말을 분명 들었음에도 그의 눈에 밟히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방을 나왔다. 내 걸음과 이세정의 걸음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완전히 감추어졌다. 복도 중간쯤에서 덩그러니 멈추어 섰다.
집에 있는 바이크 말고, 밖에 있는 바이크를 타면 어쩌지? 장 비서님이 잘 말리시겠지? 단순한 걱정에서부터 만약 저 사람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되지, 하는 쓸데없는 불안감까지 짧은 새에 다양한 감정이 오갔다.
나는 씻을 생각도 못 하고 침대에 앉았다. 털썩 앉느라 침대 위를 손으로 받쳐야 했는데, 손바닥에 걸리는 물건이 있었다. 보지도 않고 집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휴대폰이었다. 내 것은 아니었고, 아마도 이세정의 물건.
마침 문자가 오고 있었다. 남의 휴대폰을, 그것도 이세정의 휴대폰을 손에 넣었는데, 하필 문자가 오고 있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발신인은 배도빈이었다. 열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처럼 궁금했다.
하지만 남의 휴대폰이나 훔쳐보는 못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휴대폰을 가만히 밀어두었다. 내려두기가 무섭게 문자가 하나 더 오는 소리가 들렸다.
“…….”
가만, 이 방에 설치된 카메라가 몇 대더라. 나는 충분히 사생활을 간섭받고 있었다. 내가 고통받으니까, 너도 똑같이 받으라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마인드였지만, 이런…… 모르겠다. 이참에 배도빈의 번호나 알아내야겠다. 물어볼 것도 있고.
[우채민 번호 좀]
문자는 어제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 부분으로 쭉 올렸더니 내 번호를 요구하는 배도빈의 문자가 답장 없이 덩그러니 저장되어 있었다. 내가 배도빈의 번호를 원하는 것처럼, 그도 나와 연락이 되기를 원했었나 보다. 배도빈은 두 시간 간격으로 문자를 보냈다.
[번호 줘라 우채민 꺼]
[꼬시려는 마음 좆도 없으니까 제발 번호좀요]
[번호]
[버너]
[죽었냐?]
배도빈이 여섯 번이나 문자를 보내서야 이세정은 답장을 하나 했다.
[꼬신다는게 뭐야. 네얼굴은 경쟁력이 없는데]
뒤에 [*^~^*] 이런 이모티콘을 붙였더라면 상당히 약이 올랐을 말이었다.
[세정아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나 어깨 양쪽에 보조개 있거든? 이거 우리 엄마가]
[날개 빠진 흔적이래]
[하씨발 이거존나 섹시한데 보여줄까?]
그 후로 하루 간 답장이 없었다. 문자는 다시 오늘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용건 있다고 우채민이랑]
[남자대남자로]
[씹냐?]
[존나 잘쳐먹네]
[너네집갈게]
오늘 온 문자였으니까 설마 당장 오려나. 언제 방문한다고 예정하지는 않았어도 올 거면 되도록 빨리 와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배도빈의 번호를 내 휴대폰에 옮겨 담고는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세정의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배도빈은 오지 않았다.
***
아무리 기다려도 배도빈은 집에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먼저 문자를 보냈는데, 나를 반기며 당장 오겠다는 답장보다도 조금 떨떠름한 반응이 도착했다.
[기다려봐]
뭘 기다려보라는 걸까.
[약점 잡고 있으니까]
누구의 약점을 잡는 건데?
이세정 몰래 배도빈을 만나려면 병원 검진을 하러 외출하러 나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요새 이세정은 그마저도 자신과 함께할 수 있는 주말 스케줄로 잡아놓았다. 만나려면 배도빈이 직접 내게 와야 했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다시 비가 거칠게 내리고, 이세정은 또 바이크를 타겠다고 장 비서님에게 지시하는, 조금 불편한 아침이었다. 이세정은 오늘따라 장 비서님의 눈이 퀭하고 눈그늘이 두터워 흡사 곧 죽을 사람 같으니 그의 차에 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 비서님의 얼굴에 피곤한 기운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사람의 면전 앞에서 죽을 사람이니 뭐니 하는 것은 실례가 아닌가.
아무튼 죽을 사람처럼 보이는 장 비서님이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타는 것이 바이크로 폭풍우처럼 내리는 빗속을 주행하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두 사람의 어이없는 언쟁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했다.
“……차 타고 가시면 안 될까요.”
나는 이세정의 시선을 끌어오며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 나실까 봐 무섭습니다.”
바이크는 다른 맑은 날에 타면 된다. 과거에 꽤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는 탈 것에 대해 간섭할 재간이 없다. 이세정은 이번에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세정은 나를 빤히 보는 듯싶더니만 불쑥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머리 말려줄까요?”
내 말에 확답도 않고.
이세정은 내 머리를 드라이해주고는 확답도 않고…… 확답도 않고 가버렸다.
불현듯 기어오른 불안함은 여러 가정을 타고 흘러가다가, 만약 이세정이 다친다면 어떡하지, 하는 막연한 상상으로 치달았다. 쓸데없고도, 어이없는 상상이다.
나는 좋지 않은 상상들을 죄다 떨쳐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은 없었다.
정오를 기준으로 맥없이 내리던 비가 오후에 다시 거세졌다. 이제 퇴근 시간에 가까워졌으니까 좀 그쳐야 할 텐데. 노트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작업해놓은 것들을 읽으며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휴대폰에선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빗소리와 한데 섞여 꽤 분위기 있다고 생각했다. 초침 대신 내 심장 소리가 울려서 그런 건가.
스피커의 음량을 키우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유 모를 우울함의 근원을 찾기도 전에 누가 왔다는 알림 소리가 들렸다. 속도를 내서 현관으로 가보니까 배도빈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관으로 발을 디디면서 아무도 없을 바깥을 향해 무어라 이야기를 한다.
“야, 미친.”
슬리퍼로 갈아 신은 배도빈이 나를 보자마자 전단 같은 것을 건넸다.
“이거 봐, 씨발. 초상권 침해에, 범죄자 취급에, 언제 한 번 날 잡고 이세정을…….”
전단은 배도빈의 얼굴과 간단한 신체사이즈가 적힌 수배지였다.
“관리인이 이거 보여주면서 나 출입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니까. 씨발놈이, 진짜!”
“근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관리인 약점 잡아서 들어왔어. 회사에서 잘리는 것보다 무서운 게, 가정파괴거든.”
아, 그래서 전에 문자로 약점을 잡고 있다고 했구나.
“진짜 못됐다…….”
“……이 수배지가 못돼 처먹었냐, 내가 못돼 처먹었냐?”
배도빈은 내가 최근에 들어보지 못한 험한 욕을 지껄이면서 집 안 깊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대놓고 바닥에 주사기를 집어 던졌다. 일전에 배도빈에게 건네주면서 성분을 분석해달라고 부탁했던 그 물건이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할 정도라면 대단한 물건인 듯싶어 긴장이 되었다. 나는 주사기를 주워들어 다시 건넸다.
“몰래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전.”
“어차피 들킨 마당에 도둑질 하나 했다고 뭐가 달라져. 그나저나 너 때문에 세정이랑 더 멀어진 기분이다. 아, 좆같아.”
“……세정이 형 좋아해요?”
“지금 물은 의도가 만약 그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면 너 죽인다.”
평생 남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이성애자에게 남자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들 가운데 가장 혐오적인 시선이 드러난 대답이었다. 이제껏 티를 별로 낸 적 없어 몰랐다. 나는 무안함에 쓰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배도빈은 내 표정을 보고 살짝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장난스럽게 얼버무렸다.
“웃지 마, 바보야.”
테이블로 걸어간 배도빈이 위에 주사기를 내려두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냈다. 전과 같은 불상사는 만들지 않겠다는 듯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컵에 따른다. 우선 물 한 잔을 쭉 들이켜고는 샐러드용 과일 컵을 두 개 꺼내 테이블로 가져왔다. 와인고에서 와인을 꺼내온 배도빈은 오자마자 술을 세팅했다.
나는 배도빈이 와인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주사기 성분이요.”
“어, 그거.”
배도빈이 와인을 조금 따른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넴뷰탈은 넴뷰탈인데 혼합된 거라서 딱히 뭐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냥 안락사나 자살하기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면 될걸.”
“……예?”
“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하잖아. 그게 옳지 않단 거 알면서도 저지르고. 뜻 굽히는 법이 없는 앤데 만약 걔가 죽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걸 누가 말리겠냐? 저 주사기, 오래된 거긴 해도 못 쓸 정도는 아니야. 미리 빼앗아서 다행인 거지. 이건 내가 도로 가져간다.”
배도빈은 주사기를 대충 가방에 쑤셔 넣고 와인을 마셨다. 이 와중에 향을 음미하고, 탐독하고 있다. 듣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나와 다르게 태연한 기색이었다. 나와 이세정의 사이가 가까워 자신이 소외되는 것에 대해 서운함을 표했으면서, 친구가 죽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설마 배도빈도 사이코패스인가.
“너 여기서 지내고 있으니까 네가 감시하면 되겠네.”
“……뭘요.”
“약 같은 거 반입하는지. 아, 만약 마약 하려는 기미 보이면 바로 나한테 말해라. 내가, 내 손으로 저 새끼 신고할 거니까. 지도 느껴봐야지. 날 존나 마약상으로 만들고 지는 편하게 살아? 하도 신고받아서인지 경찰들이 나 계속 의심한다니까.”
배도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뒤늦게 시계를 확인하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도빈에게 병을 쥐여주고 집 밖으로 내보냈다. 왜 엄한 곳에 심술이냐고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무시했다.
배도빈이 나간 집은 평소보다 훨씬 쓸쓸했다. 방금 전 북적하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주사기 때문에 슬퍼져서 그리 느껴지는 건지. 아무튼 이 정적이, 이세정이 사라지고 난 뒤의 그 미래를 떠올리게 만들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단지 한 사람을 좋아하기만 하는 덜떨어진 사람으로 만들어두고 저는 혼자 떠나겠다고?
그건 정말 안 되는 일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도 생각하고 있을까? 이세정이 몇 번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동요하는 건 그 순간뿐이었지, 설마 이세정의 결심이 진심이리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너무 무서운 마음에 이세정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발신음은 끈질겼다. 받을 때까지 반복했더니, 드디어 연락이 끊겼다.
-미치셨습니까?
이세정이 아니라, 장 비서님의 목소리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죄송한데, 지금 뭐 하세요?”
-안부 하나 묻자고 전화를 백 통이나 하십니까?
장 비서님은 황당한 목소리를 지우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지금 병원입니다. 바이크 사고가 나서. 제가 조금 바빠서 이만 끊겠습니다.
“……예?”
-많이 다쳐서요.
잠시만요, 라고 말할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전화를 열 번 더 해보았지만, 장 비서님은 정말로 당분간은 받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문자 한 통 넣어주지 않았다.
바이크 사고…… 바이크 사고? 바이크 사고? 누가 다쳤는지 말하지 않아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옷을 챙겨 입을 새 없이 휴대폰만 꼭 쥐고 집을 나섰다. 당장 뛰어나가려고 했더니만 웬 남자 두 명이 나를 막아 세웠다. 경호원인 것 같다. 경호원 두 명이 신발도 신지 않고 급히 나가려는 나를 뜯어보며 당혹했다.
“어디 가시려고요?”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아, 도련님께서 요즘 당신이 너무 순하다고…… 뭘 꾸미고 있는지 감시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내가 순한 거랑 일을 꾸미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이세정은 나를 꼭 자신에 대입해보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가게 해달라고 몸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힘에 못내 이겨 집 안으로 튕겨져 들어왔다.
아픈 시늉을 해도 소용없었고, 이세정이 다쳐 병원에 가야 한다고 사실대로 말해도 소용없었다. 몇 번이고 부딪혀도 경호원들은 철옹성 같은 방어를 할 뿐이었다.
어떻게 안 보내줄 수가 있지? 이세정이 병원에 있다는데.
상식적인 선에선 이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당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분노와 한 결로 이루어진 눈물이 막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내가 비 오는 날에는 뭐든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내 말은 안 듣고 일방적으로 제 말만 들어주기를 바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
나는 이세정이 자해하는 것도 싫고, 사고 나는 것도 싫다. 죽는 것은 더 싫다. 이세정을 향한 원망과 걱정이 한 데 뒤섞여 엉엉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음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건지, 내 우는 소리를 들은 경호원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당장 뛰어나가려다가 태연하게 걸어 들어오는 이세정을 보고 멈칫 섰다.
“우채민 씨,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믿어요. 또…….”
나를 눈에 담은 이세정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굳어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울어?”
“제, 제가, 그러니까…… 타, 타지, 말라고, 했는데.”
목울대를 울리며 이세정을 끌어안았다.
“타지, 타지, 말라고 해, 했는데…… 말도, 안 듣고.”
“뭘 타지 말아요?”
이세정의 어깨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내 허리를 감싸 안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뱀처럼 옭아맨 손가락은 이내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 오토바이, 오토바이요.”
“응? ……바이크 타고 안 왔어요. 차 하나 골라서 올 때, 갈 때 직접 운전했어요.”
그때서야 나는 잔뜩 찡그리고 있던 눈썹을 서서히 폈다. 그러면 바이크 사고가 아니라, 차량 사고였나.
그런데 사고라고 하기에는 이세정은 너무 멀쩡한 차림새였다. 피는커녕 물기 하나 젖지 않았을뿐더러 따로 찢어진 흔적도 없었다. 물론 살갗도 멀쩡했으며 어디 부러진 흔적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아침 모습 그대로였다.
“우채민 씨.”
이세정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지우며 걱정스럽게 나를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듣고 혼자 울고 있었어요.”
“…….”
“어쩌지…… 잠깐 나가서 바람 쐬고 올까요?”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풀렸으니 민망해야 할 텐데, 기분이 진정되지 않고 외려 더 슬프기만 했다. 나는 흐느낌을 멈추지 않고 이세정에게 엉겨 붙었다. 이세정은 엉기면 엉기는 대로 다 받아주면서 내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일단 씻을래요?”
나는 가까운 샤워실의 마른 욕조 안에 내려졌다. 내 몸을 품고도 욕조엔 여유 공간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울음에 젖은 더러운 셔츠가 눈에 들어온다. 왜 씻으라고 한 건지는 알겠는데…… 혼자 씻으라는 건지 씻겨주겠다는 건지, 만약 후자라면 거절할 심산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이세정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할 무렵, 이세정은 휙 나가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따뜻한 거예요.”
따뜻한 수건이 내 눈에 대어졌다. 이세정은 부어있을 눈부터 지그시 누르면서 서서히 뺨으로 내려갔다. 흥분해있던 것들이 천천히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세정은 여기에 있고, 나는 더 이상 서러워 울 필요가 없었다. 마사지하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길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장 비서님이 사고 났다고 해서 형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눈을 감은 채 진정된 톤으로 이야기했더니, 웃음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대꾸가 아닌, 내 말을 비웃는 소리였다. 나는 눈을 떴다.
“사고 난 거 장 비서님이에요.”
“장 비서님이요?”
“어제 밤을 새서 속이 안 좋다고 하더군요. 따로 타고 갔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장 비서님…… 장 비서님이구나. 바이크 사고가 났다고 한 건 상대방의 탈 것을 말하는 거였다. 남이 사고가 났다는데 안심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고개를 푹 숙여 안도를 숨겼다.
“……그럼 형 운전할 때 장 비서님 옆에 태워주시지.”
“왜요?”
이세정이 태연하게 물었다. 나는 내 눈덩이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이세정의 손길이 잠시라도 멈추는 일이 없도록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태워준 대가로 뭘 요구할 수 있잖아요.”
“아, 그러게요.”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쳤지만 꽤나 당황한 상태였다. 나는 허구한 날 옆에 태우고 달리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다지 친하지 않았을 때에도. 나보다 더 오래 만났을 장 비서님이 아프다는데도 절대로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못돼먹은 인성을 가지고 그동안 잘도 내게 배려를 해주었다.
“고개 들어볼래요?”
이세정의 말에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새 수건으로 목까지 닦아준 이세정이 간지럽히듯 쓰다듬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다 붉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멋대로 환자 만들어서.”
너무 오버해서 운 것 같아 민망해지던 참이었다. 나는 이세정이 들고 있는 수건을 가져가서 두 눈두덩을 마저 지압했다.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히 눈을 적시고는 수건을 내려두었을 때, 이세정이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울보 다 됐네.”
“……울보는 싫죠?”
“우채민 씨는 귀여워서 좋아요. 강아지 같아.”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어릴 적, 아주 울보였다. 감정 표현이 많았고, 관심받고 싶어 했으며, 그래서 사랑스러움을 흉내 냈다.
커가면서 표정이 점점 지워졌다. 더 이상 어릴 때만큼 울지 못했고, 관심이 두려웠으며, 그래서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변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로 되돌아온 것이다.
언젠가 배도빈이 내게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나 때문에 이세정이 더 심해졌다고. 하지만 이세정의 과거를 듣게 된 나는 이세정이 심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원래의 그로 돌아온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그는 나를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이세정은 잘살고 있는 나를 망가트린 것이 아니라 구원해준 것이고, 나는 반대로 망가져 있는 이세정을 더욱더 망가트린 것이다.
후회해야 하나. 아니면 죽으려던 걸 살려줬으니, 그럼 된 거 아니냐고 뻔뻔하게 모른 척해야 하나.
입술이 내 귓불을 훑었다. 귓불에서 내려와 목 안쪽을 찍어 누른다. 허벅지에서부터 목까지, 뱀이 타오르는 것처럼 간지럽다. 마르고 보잘것없는 손바닥을 들어, 이세정의 어깨에 올려두었다. 그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혔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쉬기가 벅찼다.
몸을 섞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세정이 나를 삼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그를 삼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접겠다고 수백 번 다짐했지만, 애초에 그건 내게는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아버지에게 관심받고 싶어 했던 어린 날의 감정을 이세정에게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에겐 단지 관심이 필요했으나 나는 이 사람을 소유하고 싶었다.
어떡하지.
이세정도 똑같은 감정일까? 이세정이 출근한 시간 동안 분리불안을 앓고 있는 집 강아지들처럼 불안해 미치겠는데 정말 똑같은 감정일까? 카메라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안심이 되는데 누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형.”
목소리가 창백했다. 나는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감추고, 정돈된 톤으로 물었다.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요.”
“강아지?”
“이름도 정해주지 않은 강아지 말하는 겁니다…….”
“그 강아지 왜요?”
이세정은 사르르 웃으며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올렸다. 겨드랑이에 잠깐 고통이 일더니 이내 허공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나를 안아 든 이세정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화장실을 나섰다.
“죽었나, 궁금해서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반으로 눌린 목소리가 이세정의 단단한 어깨 속으로 파묻혀졌다. 고민에 빠져있는 양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느긋한 걸음이 침실 쪽으로 향했을 때, 이세정은 전혀 관심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
“수명이 길다면 지금도 잘 살고 있겠죠.”
뒤통수 한 대를 강하게 맞은 듯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때는 이성을 못 차릴 만큼 집착해놓고, 지금은 관심이 없단다. 눈에 띄지 않아 마음속에서 지워진 건가. 아니면 애초에 그 정도의 마음이었나? 그럼 나는?
등과 엉덩이가 침대에 닿았다. 급히 위로 올라탄 이세정이 내 입술을 찾아들었다. 입을 벌리며 두려워했다. 나도 그렇게 버려지면 어쩌지.
가만 생각해보니 이세정을 못 믿겠다고 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버려질지도 모르는데.
“우채민 씨…….”
내 어깨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던 이세정이 문득 길고 긴 어조로 나를 불렀다.
“떨지 말고, 나를 믿어요.”
뭘 오해했는지 이세정이 그렇게 말했다. 우연이겠지만, 지금 내 심정을 달래기에 적합한 말이라서 헛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입술 안으로 삼켜졌다.
팔 하나가 내 뒷목으로 들어왔다. 이세정이 나를 끌어안고 다시 어깨에 쪽, 쪽,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혀를 쓰지 않아 진도가 더뎠다. 가빠지는 호흡에 내 숨을 맡겼다. 후, 내쉴 때마다 배꼽 아래가 떨렸다.
나는 오롯하게 이세정을 쳐다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미끄러져 손목으로, 그리고 팔로 향하여 상처를 매만졌다. 붕대에 막혀 닿지 않는 상처가 안타깝다. 나는 상처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상처는 만지지 마요.”
이세정은 내 손을 풀고서, 다시 위로 덮쳐와 입에 키스했다.
“가끔 부끄러워.”
이세정이 잇자국이 나도록 내 턱을 깨물었다.
“내 상처는…….”
“읏…….”
“외롭고, 괴로워서…….”
“하, 으……윽!”
“우채민 씨를 슬프게 할 거예요.”
눈이 지그시 감겼다가 뜨여졌다. 들어온 시야에 담긴 이세정은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저 남자가 아주 집요하고, 단단하고, 또 때론 비열하리만치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느껴졌다.
이세정은 언제나 그랬다. 강한듯하면서도 자해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신경 쓰지 않는듯하면서도 우울해했다. 생각해보면, 이세정이 정말로 강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트라우마 따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
정말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세정은 내 멘탈을 지켜줄 여력이 없다. 허구한 날 아프지 말라고 내 신체를 보듬은 이유가 다 그래서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 스스로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내가 망가지지 않고서 이세정을 단단히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그래서 만약 내가 그의 더러운 얼룩에 스며들게 된다면, 이세정은 나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세정을 끌어안고 온몸으로 매달렸다.
“형.”
“…응, 채민아.”
“형…….”
내가, 내가 지켜줄게요.
말하는 순간 얼룩진 우리가 보였다. 한데 섞여서, 아주, 아주.
아주 더러운 얼룩이었다.
<다정한 보호>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