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 첫 만남 (11/15)

외전 - 첫 만남

김 의원과의 오찬이 있던 날이었다. 성대한 테이블 위에서 차기 대권 주자의 정치 자금을 두고 구두 계약이 오갔다. 언어는 이타적이기도, 놀라울 만큼 이기적이기도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거래가 이야기되며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논지의 중심에 약혼이 올랐다. 대상은 물론 김 의원의 독녀와 이 회장의 차남이었다. 이미 한국 지사의 대표로 세정을 낙점해놓은 이 회장은 독녀를 며느리로 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계의 영향력이 세정의 경영에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구두로 행한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두 집안에선 이른 시일 내에 세정과 경인의 만남을 주선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도련님께서 일정을 전달받으셨습니다.”

“간다고 합니까?”

“받아들이셨습니다.”

임 실장의 보고에 이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세정이 크게 반항을 한 적이 있었던가. 어릴 때야 뭣 모르고 말썽 좀 피웠다지만, 머리가 커서는 아버지 말씀은 꼬박꼬박 따라주던 아이였다. 어찌나 순하던지 이제 남을 해치는 대신 저 자신을 해치려 하는 아이였다. 그래도 약혼에 대해선 관심 하나 없던 눈치였는데. 꺼림칙함을 알아본 임 실장이 눈치 있게 물었다.

“주시해볼까요?”

“사람 더 붙입시다.”

“사람이라면…….”

이 회장이 고민했다.

“장준영이가 세정이 계속 감시하던 친구인가.”

“맞습니다.”

“세정이에겐 장준영이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장 실장은 지금 전무님 곁에 있습니다.”

“이 전무야 미련 없을 테고. 의견 한 번 물어봐서 데려옵시다. 세정이 교류하는 이는 얼마쯤 됩니까?”

“사적으로 만나는 분은 없습니다.”

여자를 만났다면 이미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아니, 보고뿐일까. 성사시키기 위해 공들이던 약혼은 당장 취소하고, 결혼 날짜부터 새로 잡아 그 여자를 묶어두었을 것이다. 설령 남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세정이 정상적으로 교류할 수만 있다면야 무엇이든 해줄 생각이었다.

“일단 알았습니다. 김경인, 그 친구랑 만나는 날까지 세정이 계속 주시하세요.”

“예.”

뒤돌아 걸으려던 임 실장이 걸음을 틀어 다시 이 회장을 쳐다보았다.

“면접 건은 어떻게 할까요.”

세정에게 슬슬 2차 면접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6학기를 마치면 바로 지사에 입사시킬 계획이었다. 학업을 하는 틈틈이 옆에 두고 가르친 터라 세정에겐 이곳 시스템이 더 익숙하겠지만, 지사 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는 모양새로 가려면 일찌감치 한국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신 이사랑 같이 지내지 않겠습니까. 신 이사에게 면접에 대해 일절 귀띔하지 말라 하시고, 블라인드로 진행합시다.”

“예.”

오너 일가의 얼굴을 모르는 임원은 없으니 따지자면 블라인드는 불가능했다. 이것은 단지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하여 내린 지시일 뿐이었다. 속말을 알아들은 임 실장이 묵례와 함께 나갔다.

***

[야 너 한국 왔다며. 어디냐? 집에 없는데]

[아주머니 안 모시냐;]

[아 너랑 엇갈렸어]

[보고 싶다. 씨발ㅜ]

도빈에게 문자가 며칠째 계속되었다. 끈질긴 매달림에도 세정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천천히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 지금, 아무런 필요 없는 교류였다.

요즘 세정은 집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기만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땅을 보고서 죽은 사람처럼 있었다. 식욕도 성욕도 수면 욕구도 없었다. 바이크를 끌고 밖으로 나가 돌아봤으나 활기를 띠는 건 그때뿐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또 시체처럼 모든 욕구를 잃었다.

보다 못한 장준영이 책을 잔뜩 사다 주었다. 밖에선 잘만 돌아다니다가 혼자 남을 때면 무기력해지는 이유가 달리 집중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세정은 한동안 활자 중독처럼 보일 만큼 책을 읽는가 싶더니 이내 내던지곤 피곤한 눈가를 비볐다. 그는 또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꼭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시한부 환자 같았다. 장준영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여자를 만나보는 건 어떻습니까.”

“……상담 받으란 것도 아니고, 여자를 만나라고.”

“상담은 이미 많이 받아보시지 않았습니까.”

세정이 대답이 없자 장준영이 달래듯 말했다.

“꼭 스킨십을 하란 소리가 아닙니다. 가벼운 대화만 나누어도 괜찮습니다.”

“난 장 비서님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반갑지 않아요.”

세정은 담담하게, 장준영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다. 장준영은 조금 시무룩하게 답했다.

“이제 곧 약혼도 하실 분이…….”

잠시 장준영을 쳐다보던 세정은 진동이 울린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속눈썹이 아래로 살며시 내려왔다. 잠을 못 자 피곤하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주기적으로 처방해주는 수면제가 효과가 없었나.

“잠은 잘 자십니까?”

“잠이야 잘 때 되면 자는 거죠.”

“약을 새로 처방해드릴까요?”

세정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이미 화면이 꺼졌을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을 새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불면증이 지속되면 일상생활도 어려워집니다. 약의 힘이라도 빌어 푹 주무시면…….”

“못다 한 잠은 조만간 해결 볼 거예요. 나는 걱정 말고, 어디 휴가라도 갔다 와요.”

세정은 휴대폰을 던져두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세정을 보는 장준영의 눈길에 의문이 서렸다. 조만간 어떻게 해결을 볼 거라는 이야기지. 불면증은 쉬이 치료될만한 병이 아닐 텐데. 혹여 수면제라도 대량으로 섭취하려는 걸까 싶어 장준영은 세정이 가지고 있는 소량의 수면제를 모두 빼앗아두었다.

그러나 장준영의 조치는 방향성이 틀렸다. 세정과 경인의 만남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장준영은 다급히 특실을 찾았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병실 안으로 발을 디디니, 바닥에 다리를 내려뜨리고서 멍하니 땅을 보고 있는 세정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몸은 환자답지 않게 건강한데 내리깐 눈길만큼은 퍽 처연했다.

“아……. 나 몸 타는 줄 알았네.”

보기와는 달리 나른한 목소리였다. 제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한 말에, 장준영은 급박하게 뛰어대는 심장께를 짓누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무슨 짓을…….”

세정은 자택에서 약물을 이용해 자살을 하려다 휴가를 착각하고 돌아온 직원에게 발견되었다. 손목 자해는 하더라도 수면제 이외의 약물엔 관심 없는 눈치라서 주변의 경계가 느슨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이게.”

“나도 무슨 짓인지 궁금하네요. 눈 뜨니 병원이네.”

“도련님!”

세정이 눈썹을 비뚤게 들어 올렸다.

“계획대로 못 한 건 난데, 왜 장 비서님이 화를 내요.”

“…….”

“난 이제부터 사흘은 또 눈 뜬 채로 지내야 돼요. 그러니까 사람 빡치게 하지 말고…….”

말하던 세정이 이를 물어 짜증을 감추었다. 그러나 이미 온 병실에 표출한 바 있는 짜증이 쉬이 감추어질 리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주삿바늘을 떼어냈다. 장준영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회장님께는 보고해야 합니다. 물론 상담도 다시 받으셔야 합니다.”

“하고 싶으면 하세요.”

사실 세정의 자살 시도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머리가 완전히 자라지 않았을 때, 두 번 정도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된 일이었고, 세정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듯 행동했기 때문에 이제 다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위 사건을 윗선에 보고하면 분명 이 회장은 세정을 다시 가두어놓으려고 할 터였다. 이 회장은 감금이 최선의 보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장준영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쥔 채로 방법을 강구했다.

“……일단 머리부터 식히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만 진정하시고,”

“지금 가장 진정해야 할 사람은 장 비서님이에요. 왜 이렇게 흥분해 있어요?”

“지금 진정이 되겠습니까? 도련님이 걱정돼서 미치겠습니다.”

세정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우스운 투로 말했다.

“날 걱정했다면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장준영은 세정의 대꾸에 잠시 넋이 나갔다. 떨리던 눈동자가 점차 가라앉았다.

세정의 자살이 완성되면, 장준영은 죽는다. 장준영의 완벽한 커리어에 거대한 오점이 하나 생긴다. 그는 세정이 대학원에 간 삼 년간 미국에서 이정우를 보좌했지만, 세정을 평생 상사로 모실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기껏 전무님을 차고 돌아왔는데, 세정이 죽어선 안 되었다. 장준영이 괴로운 듯 얼굴을 쓸었다.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또 보호하려 하실 겁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도련님 계획은 실패하셨으니 이제 제 말을 따라주세요.”

한참이 지나서도 대답이 들리지 않아 장준영은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떼어냈다. 드러난 시야에선 세정이 사나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세정이 빙긋 웃었다.

“뭘 따라요?”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평범하게 지냈으면 합니다. 이제 집에만 계시지 마시고, 밖에서 친구도 만나고…….”

“장 비서님이 말하는 친구라는 게, 뭡니까?”

“도빈 씨 말입니다.”

“도빈이?”

그렇게 물은 세정은 아까 주삿바늘을 쥐어뜯은 탓에 피가 흐르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장준영은 직접 지혈을 해주진 못하고 다만 손수건을 건네며, 기운 없는 투로 덧붙였다.

“배도빈 씨는 밝고 다정해서 곁에 두고 교류하면 회장님께서도 분명 안심하실 겁니다.”

세정은 그다지 동의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 회장의 염려가 귀찮기는 했는지 세정은 퇴원을 하자마자 며칠 전부터 [괴작도 대작으로 만드는 내 연주 솜씨 보러 올 사람?] [오랜만에 학교 놀러 올 사람?] [나 보러 졸연 올 사람?] 하며 주야장천 문자를 보내던 도빈에게 드디어 답장을 해주었다.

아트홀에 들어서는 세정의 뒤로, 경호원들이 몇 따랐다. 경호원들은 어중간한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정의 주변을 띄엄띄엄 채웠다. 그러고서 누군가 세정의 주변에 앉으려고 하면 얼른 막아 세웠다. 작곡과 졸업연주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곤 그들의 가족이나 몇몇 학생이 다였기에 다행히 그 외에도 앉을 곳은 많았다.

연주회의 막이 올랐다. 아트홀은 관객들이 간혹 정신 사납게 웅성거릴 때 말고는 비교적 조용했다. 조용한 실내에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모든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세정보다 뒤쪽에 앉은 장준영은 조마조마하게 그를 관찰했다. 혹여 무슨 돌발 행동이라도 벌일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다행히 연주회가 후반부에 접어들 때까지 그런 기미는 없었다. 다만 그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 치달았다. 연주가 막 끝났을 때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웬 남자가 몸을 숙인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남자는 장준영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세정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호원들 모두가 하나같이 험악하게 생겨 피해서 앉으려던 것이 어쩌다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았다.

“하아…….”

남자는 앉자마자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서 기침을 참아내었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추스르는 숨이 퍽 가빴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찬 기운이 흩어졌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세정의 시선이 권태롭게 정면으로 향했다.

세정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 향한 것은 도빈이 연주를 시작한 직후였다. 빠르고 강한 템포가 처음부터 몰아쳐 오자, 웬 손이 세정의 손등을 덮었다. 손은 거두어질 새도 없이 세정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내쳐내기엔 너무 고운 손이었다. 세정은 그답지 않게 당황한 눈치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연주에 푹 빠진 남자의 표정으로 보아서, 자신이 뭘 잡았는지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세정은 당혹을 거두고서, 옅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치우지.”

들리지 않은 모양인지 남자는 세정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연주에 깊이 몰두하며 제 입술을 깨물었다. 자극을 받아 더욱 붉어진 입술이 양쪽으로 길어졌다. 입술을 흘끗 곁눈질한 세정의 눈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장준영이 조마조마하게 다리를 떨었다.

세정은 다시 입을 열려다가 여전히 제 손등을 조물거리고 있는 손길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하얗고, 마르고, 예쁜 손이 조물조물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털 하나 없이 깨끗한 모양새였다. 마디마디 굵기도 적당했고, 손톱도 동그래서 예뻤다. 언제부터인가 남자의 손을 하염없이 관찰하던 세정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벌렸다. 세정은 손가락을 벌려서 남자와 얽매려다가 불현듯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제 손이 어디로 가 있는지 확인한 남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는 몇 번이고 세정을 쳐다보았다. 턱 밑을 받치고 있는 검은 마스크, 그리고 푹 눌러쓴 모자. 세정의 얼굴은 잘 안 보여도, 그가 쏘아대는 뒤늦은 분노는 확연히 느껴졌다. 사실 세정은 손에 홀린 나머지 분노 같은 것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 뜻 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남자의 당황이 엄한 망상을 만들어냈다. 남자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귀 끝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헉, 왜 만졌지. 진짜, 진짜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아이처럼 주물러대던 손길이 드디어 거두어졌다. 세정의 손에서 온기가 물러났다. 세정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씨발, 일부러 잡은 줄 알았잖아.”

쏘아보기는 했어도 분노를 담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뭐에 홀린 양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세정의 속내는 까맣게 모르는 남자만이 민망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허리를 두어 번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몸이 좀 휘청거렸다. 남자는 좁은 의자 사이를 지나기 위해 세정의 무릎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세정이 다리를 조금 펴고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걸려 또 한 번 더 휘청댔다. 남자가 세정의 어깨를 짚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화가 난 세정이 남자를 잡아채기도 전에, 그가 허리를 숙였다가 폈다. 아주 가까이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마주 본 채 있었다. 남자는 민망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짓고는 빠르게 등을 돌렸다. 미소에 시선이 못 박힌 세정의 눈길이 남자를 따라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냥 보내주시죠.”

혼자 남은 세정의 곁으로 장준영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세정은 장준영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아트홀을 급하게 빠져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쫓았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얼굴이었다. 그것이 소름 끼쳐 장준영은 몸으로 시야를 가리곤 힘을 주어 말했다.

“도련님.”

“누구예요?”

“예?”

“요정처럼 생겼네.”

그렇게 말한 세정은 한 번 더 아트홀의 출구를 쳐다보았다. 장준영이 그 이상한 말을 해석할 새 없이 멀리서 도빈이 걸어왔다. 도빈은 세정의 옆자리에 앉아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게 몇 년 만이냐, 인마.”

***

기껏 도빈을 보러 갔다 왔지만, 이 회장은 세정의 자살 기도를 쉽게 넘기지 않았다. 이 회장은 몇 번이고 전용기를 띄워서 세정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세정이 꼬박꼬박 전화만 받았을 뿐 부름에는 응하지 않자 이번에는 의사를 보내왔다. 사실 이 회장은 살가운 편이 아니었다. 세정이 첫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병은 금방 나을 거라 여기고 무관심하게 대했었다. 그땐 제 형들을 제치기에 급급해서 가족을 돌아볼 새가 없었다. 이 회장은 이제라도 제 아들들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세정과 경인의 만남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자살 사건을 겪고도 만남이 취소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이 회장의 결정이었다. 이 회장은 혹시 경인이 세정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조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세정을 픽업하여 경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장준영이 말했다. 세정은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약혼녀 분과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잘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약혼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구를 대면하든 기본적인 예의범절 정도는 갖추어야 했다. 장준영은 한국에 돌아온 이래로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안부 인사를 건네지 않은 세정에게 열과 성을 다해 예의를 가르쳐주겠노라고 다짐했다.

“물론 도련님이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만 이런 방면으로 서투시지 않습니까. 혹여 귀하게 자란 아가씨 마음에 상처를 내실까 염려됩니다.”

성별을 막론하고 세정이 사적인 관심을 준 이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랑 없이 욕구라도 채웠다면 가족들의 걱정이 이보단 적었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정말로 감정이 없는 건지 이제 다들 세정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제가 여성이라면 좀 압니다. 연애도 많이 해봤고, 결혼한 이력도 있습니다.”

부인이 죽지 않았더라면 이혼도 두 번 하지 않았을까. 부인을 잃은 이래로 줄곧 수절하고 지내고 있지만, 그게 사랑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상처 때문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발작하여 죽기 하루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와 병실에서 큰소리를 내며 싸우곤 했었으니.

“그러니까 제 말 들으시는 게…….”

장준영은 잠깐 말을 멈추고 룸미러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저만큼 잘생긴 남자를 본 일이 있던가. 제아무리 나이가 많고, 콧대가 높고, 외모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저 사람과 눈을 마주할 때면 얼마간 벙어리가 되곤 했다. 지금 하고자 하는 조언들은 아마도 저 미모 앞에선 죄다 무용지물이 될 것이 자명했다. 장준영은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도착한 곳은 고급 한정식 집이었다. 장준영은 세정을 약속된 방으로 안내했다. 룸에는 이미 경인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장준영이 보기에는 실물이 사진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들어가시죠.”

장준영이 조그맣게 속삭이며 세정을 들여보냈다. 세정이 문 너머로 막 걸음을 떼었을 때 경인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정치하실 거 아니죠? 난 그것 말곤 괜찮은데.”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자였다. 냉소가 끼어 언뜻 사납게도 보였다. 경인을 잠시 쳐다보던 세정이 천천히 걸어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의도엔 발도 안 디디죠.”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세정이 눈을 접어 웃었다. 얼결에 따라 미소를 지은 경인이 뒤늦게 웃음기를 지웠다. 기대 하나 없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준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차내에서 그랬던 것처럼 침묵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장준영은 안심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담배를 몇 개나 태웠을까. 물 한 컵 마시려고 흡연실을 나왔을 때 경인의 모습이 보였다.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밖으로 나온 듯했는데, 누군가와 통화하느라 장준영이 곁으로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성격은 뭐, 걱정한 것과 달리 친절해서요. 운동선수 느낌이 안 나서 그게 가장… 아……. 외모요.”

경인이 바닥을 보며 웃었다.

“나쁘진 않아요.”

경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바꾸었다.

“휘어잡으려고 마음먹고 갔는데 왠지 초라해져서……. 나쁜 말 하진 않았어요. 목소리가 간질간질해서 나쁜 말 한지도 잘 모르겠던데. 그러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그냥, 울렁거려서 속 뒤집어질 뻔했잖아요. 아빠한테는 잘 말씀드려주세요.”

울렁거려 속이 뒤집어질 뻔했다더니 자리는 금세 파하게 되었다. 세정을 픽업하여 본가로 향하면서, 장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룸미러를 통해 의문스러운 세정의 얼굴이 비치었다.

“약혼녀 분 말입니다. 이제 결혼하실 분인데.”

“마음에 들어요.”

거짓을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물론 사실은 아닐 것이다. 장준영은 염려를 담아 다시 입을 열었다.

“서로 원치 않는 정략결혼, 이건 다 옛날 말입니다.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회장님께선 당장 취소해주실 겁니다.”

세정은 장준영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본가로 가지 말고, 우회전해줄래요?”

세정은 요 일주일간 한숨도 자지 않고 넘긴 날이 사흘이나 됐다. 어머니는 자신이 몽유병이라는 정신적인 문제로 세정에게 불면증을 안겨준 것이 아닐까 자책하고 있지만, 사실 불면증은 세정이 이미 만성적으로 앓고 있는 병이었다. 세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피곤을 털어냈다. 그때 창밖으로 어딘가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넋을 놓은 채 인도 위를 걷고 있는, 그때 그 요정이었다.

***

“작곡과에 재학 중이고, 이름은 우채민입니다. 도련님보다 두 살 어리시고…….”

세정은 장준영의 보고를 들으며 연신 그의 말을 되뇌었다. 작곡과, 우채민, 두 살……. 세정은 마지막으로 채민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세정에게 장준영은 보고를 멈추고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혹시 그날 손을 잡은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내가 뭐, 손 때문에 그러겠어요.”

세정이 웃기는 소리라며 말을 잘랐다. 그러나 장준영은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세정의 결벽증은 병이 아니었다. 천성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대도 변하지 않을, 그의 성정이었다. 물론 세정은 누가 실수로 잡았다고 무작정 때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채민은 그를 떡 주무르듯 문지르지 않았던가. 충분히 맞을만한 이유였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학생입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시면…….”

“누가 얘더러 미래 암울하다고 했어요?”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아서요. 장준영이 입술을 깨물며 하고자 하는 말을 삼켜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장준영을 쳐다보던 세정이 다시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말 만나실 생각입니까?”

장준영의 물음에 세정이 고개를 저었다.

“얘 데리고 뭘 하겠어요, 내가.”

“그럼 왜 조사를 해달라고…….”

“이유가 있어야 부탁을 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눈을 찡긋하며 잠시 웃는듯하던 세정은 들고 있던 사진을 툭 내려두었다.

“이제 됐어요.”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듯 호기심 어린 눈빛은 이제 없었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복수할 마음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그저 이 정도의 궁금증뿐이었는지, 세정은 아예 자리를 벗어났다. 장준영이 남모를 안도를 내쉬었다.

그러나 장준영은 모르겠지만, 세정은 그 후로 생각보다 더 많이 채민을 떠올렸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상적인 생활을 하던 중에 문득, 불현듯,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었다. 대개 채민이 어색하게 웃는 장면이었다. 세정은 그렇게 모두를 녹일 듯이 웃는 남자는 처음 봤다. 자신은 불쾌했지만 저 이외의 사람들은 쉽게 넘어갈 법한 미소라고 생각했다.

세정은 한동안 종종 그 얼굴을 떠올리며 성가셔하기만 했다. 만나야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었다. 만약 그의 기억 때문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한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세정은 그를 영원히 만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세정은 주사기를 떨어트렸다. 약품이 든 주사기가 바닥을 구르다 세면대 끝에 부딪혀 멈추었다. 세정의 허탈한 시선이 약이 덜 주입된 제 팔로 향했다. 시야에는 팔은 안 보이고, 웬 남자의 미소만 떠돌았다.

분명 죽음에 미련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이가 있었다. 그전까지는 확신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세정은 주사기를 주워 세면대 뒤에 두고, 곧장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당장 채민의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 근처로 갔다. 따라 나온 경호원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채민이 사는 빌라 앞에는 바이크 한 대만이 시동도 꺼지지 않은 채 덩그러니 섰다.

세정은 찬 바람이 부는 빌라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정말 익숙지 않았다. 거기다 약물이 소량 주입된 탓에 정신이 문득문득 흐려졌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오늘 안에 나올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채민을 기다리는 일은 너무도 고된 일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한계에 도달한 세정은 집 문을 두드려 그를 끌어내선 네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 집으로 가야 할 거라고 지껄이며 납치를 해올까 고민에 휩싸였다. 다행히 머지않아 빌라 밖으로 채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민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연신 팔 등으로 눈가를 비비면서 어디든 갈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약물로 흐려진 세정의 시야에 언뜻 눈물이 비친 듯했다. 그에 자세히 들여다볼 새 없이 채민이 어딘가로 달렸다. 세정은 채민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그를 쫓았다.

얼마쯤 갔을까.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던 채민이 구석진 의자에 웅크리고 앉았다. 서러움이 묻어난 흐느낌이 간혹 들렸다. 흐느낌을 듣는 순간 따라오던 세정의 걸음이 멈추었다. 세정의 호기심은 곧 난감함으로 변했다. 우는 애와 대화하려고 온 건 아닌데. 세정은 천천히 걸어가 채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채민의 옆에 앉으니 알게 모르게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어졌다. 약물의 효력이 더욱 깊어졌다. 현기증이 돌았다. 세정은 몸을 굽힌 채 긴 호흡을 뱉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세정이 조용히 물었다.

“왜 울고 있어.”

졸업연주회에서 마주한 바 있다지만 사실상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채민은 우는 것에 급급해 놀랄 새도 없이 말했다.

“어, 어머니가 그린, 제 초상화 있거든요…… 눈도… 눈도, 눈도 안 보이면서.”

눈도 안 보이면서. 제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인가. 세정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채민이 쥐고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언뜻 보인 종이에는 과연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채민인지는 모르겠다. 그림 솜씨는 열 살 애보다 없었으니까.

“네 어머니가 널 그따위로 그려서 화났어?”

“너무…… 제가 너무 어머니한테 크, 크게 잘못을 해서.”

채민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여서 아예 얼굴을 가려버렸다. 채민의 옆모습을 관찰하고 있던 세정은 오갈 곳 없는 시선을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씹으면 금세 허물어질 것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목덜미를 지나서 하얗고 마른 손에 눈길이 닿았다.

“지, 진짜…… 큰 잘못을 해서.”

채민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의자에 박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가감 없이 떨리는 손을 보고 있자니 세정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세정은 채민의 손에 시선을 못 박고서 뱀처럼 속삭였다.

“……뭘 잘못했는데?”

서늘한 목소리에 정신이 든 것일까. 그저 울기에 벅찼던 채민이 흠칫 몸을 굳혔다. 채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세정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채민의 손목으로 향하고 있던 세정의 손이 무언가에 튕기듯 허물어졌다. 곧바로 채민이 일어났기 때문에 시선을 마주한 것은 아주 짧았지만, 세정은 그의 눈물 속에 잠식되어있는 깊은 죄악을 보았다. 어지러운 눈동자 속에서도 결코 헤맬 일 없는 강렬한 죄책감이었다.

심장이 추락하며, 약물의 기운이 올라왔다. 찬 공기에 덮인 살갗이 뜨거워졌다. 현기증이 돌았고, 시야가 흐려졌다. 주변이 온통 일렁여서 잠시 호흡하는 법을 잊었다. 그 사이 채민은 벌벌 떨며 도망을 갔다. 채민의 뒤통수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한동안 세정은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

세정은 요정을 다시 본 후로 심경이 어지러웠다. 우는 모습을 보고서는, 속된 말로 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근본은 없었다. 정말 어디서 난지 모를 감정이었다.

최근 그가 느낀 감정이라곤 오직 괴로움뿐이었으니 세정은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주간은 채민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데 시간을 소모했다. 보다 못한 장준영이 이 회장에게 지금껏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모두 보고했다. 이 회장은 채민을 당장 납치하여 세정에게 안겨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실 ‘납치’보다는 더 이성적이고 점잖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아무튼 그러한 맥락이었다.

말을 전해 들은 세정이 황당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더 볼 생각이 없는데, 웬 납치예요?”

“진행하고 있던 약혼 건도 파기하셨습니다.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아예 날 잡아서 결혼도 시켜주지, 왜.”

세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면제를 먹었다. 장준영은 한 알을 더 삼키는 세정의 입술을 곁눈질하면서 남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정이 채민에게 일말이라도 관심을 보인 이상, 두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좋은 친구로 남는다면 어떤 일도 없을 것이고, 혹여 사이가 비뚤어진다면 모두가 채민을 벼랑으로 내몰 것이다.

불쌍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세정의 표현을 빌려, 요정처럼 생긴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장준영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천천히 방을 나왔다.

<다정한 보호>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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