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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나쁜 사람 (1) (12/15)

외전 2: 나쁜 사람 (1)

이른 아침부터 피아노를 연주했다. 팔 분간의 연주를 끝내고 뒤를 돌아보자, 내 하나뿐인 관객이 팔짱을 풀고서 습관처럼 웃어 보였다. 나는 그와 마주 웃으며 오늘도 안도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나와 함께 있다. 눈부실 만큼 빛나는 단 하나의 객석에서.

***

독일, 뮌헨. 페이스 코트-오토모빌 컴퍼니 빌딩.

시곗바늘이 소리 없이 채근하고 있었다. 경도 높은 사파이어 글라스를 손끝으로 두드리던 이세정은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벌써 십오 분.

곧 임원 회의가 있고, 그 후엔 바로 외부 인사와의 점심이 약속되어 있었다. 다녀와서는 한 차례 또 미팅이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도 처리해두어야 할 서류가 제법 많았다. 한시도 쉴 틈 없는 일정이지만 그는 통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십여 분 전에 온 우채민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저 회사 앞입니다!>

<이제 자동차 보여요>

<곧 도착할 것 같아요>

<형?>

<바쁘세요?>

갑작스러운 방문 예고였다. 그러나 드문 일은 아니었다. 채민은 근방에 용무가 있을 때면 꼭 세정의 회사에도 들르곤 했다. 오늘도 회사 근처 도서관에 갈 일이 있다더니, 볼일을 마치고 오는 모양이었다.

로비에 당도하면 직원이 안내해줄 거라고 답장을 보낸 세정은 업무를 지속하며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아직 로비에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직원의 보고를 끝으로, 십오 분이 지나도록 사무실로 얼굴을 들이미는 이는 없었다. 물론 몇 초에 한 번씩 쏟아지던 문자도 끊겼다.

세정이 다시 통화를 시도해보는데, 장 실장이 컵을 가지고 막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장 실장은 책상 한쪽에 컵을 내려놓으려다가 마땅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우선 책상 끄트머리에 컵을 두고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공 기관에 보낼 서류는 따로 분류해서 한쪽에 놓고, 회의 관련 자료들은 한데 모아 세정 가까이에 두었다. 정리를 마치고 허리를 펴는 장 실장에게 세정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앉아서 하세요.”

“정리만 해둘 생각이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일이 간절한 모양인데, 여기 앉아서 좀 더 해보세요. 난 확인할 게 있어서.”

세정은 결재 서류들이 쌓이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손등으로 두드리곤 사무실 한 면에 설비된 통유리 쪽으로 걸어갔다. 열이 차단된 음울한 창으로 장 실장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희미하게 비추었다.

“저한테 맡기시면 업무 파악이 힘드실 겁니다. 곧 회의도 들어가셔야 하고….”

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휴대폰을 켜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화면에 뜬 GPS 포인트를 주시하던 그가 다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 다른 빛을 띤 시선이 유리창 너머를 쓱 훑는가 싶더니, 이내 어느 부분에서 멈추었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어딘가를 계속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세정의 뒤에서 장 실장이 난감한 어투로 물었다.

“혹시 우채민 씨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아직 전달받은 연락이 없습니다. 아마도 늦어지시는 모양이니 우선 약속을 미루고 회의 준비부터 하시죠. 연락이 오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저, 듣고 계십니까?”

장 실장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세정은 한곳만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집요한 구석이 있는 눈빛이었다. 그는 유리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창에 어깨를 댔다. 그가 자신의 말에 대꾸해주기 싫어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장 실장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 보면 애인보다 어려 보이십니다.”

세정은 유리 너머로 계속 시선을 고정한 채 그 말에만 짧게 대답해주었다.

“그건 아니죠. 채민이가 얼마나 자주 우는데.”

사실 방금 한 말처럼 채민이 그리 자주 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에 한 번 울었던 것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을 뿐. 그날따라 섹스가 많이 좋았는지 채민은 안 뺐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넣고 잔 적이 있었다. 연신 잘못했다는 소리가 들려서 얜 어디서 뭘 자꾸 잘못해오는 걸까 하고 눈을 떠보니, 채민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밤새 울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장 실장은 또 어떤 일방적인 배려를 해서 애를 울렸을까 하고 혀를 찼다. 그때, 바깥을 보고 있던 세정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제야 장 실장은 세정이 유리창 너머로 계속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장 실장이 세정의 옆으로 다가갔다.

“뭘 보시는 겁니까?”

유리창을 손으로 짚고 풍경을 눈에 담았다. 별다를 것 없는 아랫동네보다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따위에 더 시선이 갔다. 장 실장이 먹먹한 하늘을 보고 있는데 세정이 담담히 말했다.

“울보 봅니다.”

울보? 웬 뜬금없는 소리를. 그렇게 생각하던 장 실장은 순간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창 너머로 바깥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쭉 뻗은 아스팔트 도로와 정차된 자전거들, 그리고 크기를 키워서 전시된 모형 자동차. 장 실장은 그곳을 지나서 공원처럼 설비된 작은 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화사한 아이보리색 재킷을 차려입은 남자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를 발견했다. 아마도 아이보리색 재킷 쪽이 채민일 것이다. 검은 옷에 비해 몸이 유연하게 잘 빠져있었다. 저기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당장에 올라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채민이가 해코지를 당하는 것 같아서, 지금 내려갈까 생각 중이에요.”

어딜 봐서 해코지를 당하고 있다는 말이지? 장 실장은 눈을 더 좁히고 그들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이곳에선 그들의 표정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세정을 말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해코지는 아닌 듯합니다. 분위기가 나빠 보이지 않아요.”

“나빠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되게 확신하시네.”

“…….”

바깥을 좀 더 바라보던 세정이 미간을 구겼다.

“내가 가서 구해줘야겠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채민의 앞에 있던 낯선 사내가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또 뺨을 매만졌다. 동작이 제법 컸던 터라 안경이라도 맞춰야 하나 고민하던 장 실장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장 실장은 속으로 기함하며 세정의 눈치를 살폈다.

상사의 표정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표정을 표방하고 있을지라도 언제 눈이 돌아서 볼펜 같은 것을 들고 나가 놈을 찌를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총 쏴서 맞히려면 유효사거리가 얼마쯤 되어야 하죠?”

아, 총이구나……. 우리 상사님 스케일도 크시지.

“내 사격 솜씨가 좋지 않아서, 열두 발은 쏴야 할 것 같은데요.”

세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언제나처럼 끝맺음이 둥글었다. 그래서 총을 난사해서 죽이겠다는 선언이 달콤한 밀어처럼 들렸다. 장 실장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총기를 구해다 드릴 순 있지만, 구속되실 겁니다. 여긴 사방이 뚫려 있어서.”

“그래요?”

세정은 장난스럽게 낯선 사내를 총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 빵야, 빵야- 그리고 장 실장에게 그 총을 안겨주는 척을 한 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래도?”

남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말을 이렇게 끼 부리듯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장 실장이 실소를 터트리자, 대충 웃어준 세정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바깥을 응시했다. 저 두 사람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그가 몸을 돌려서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장 실장이 그 뒤를 급히 따랐다.

“왜 직접 나가십니까? 비서를 대신 보내겠습니다. 아니면 채민 씨에게 전화를 걸어….”

“안타깝게도 안 받네요.”

“…그러면 나가서 조용히 채민 씨만 데리고 오시는 겁니다.”

장 실장은 그 말만으로는 불안한지 세정의 뒤를 바짝 쫓으며 나지막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정말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더 사고 치시면 이젠 정말 감옥 가실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럼 우채민 씨는 몇 년간 일절 못 보시는 겁니다. 무언가 행동하기 전에 부디 혼자 남을 채민 씨 생각도 좀 해주시고…….”

채민의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상 세정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 사원부터 단계를 밟아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아직 C급 임원들 아래에서 경험을 쌓는 입장이었다. 이 회장은 계열사의 M&A를 통해 세정의 지분을 키우는 중이었고, 그동안 세정은 이곳에서 입지를 다지면서 차기 오너 자리에 걸맞은 몸가짐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수습 불가능한 분란을 일으키는 건 곤란했다.

“그리고 막말로 혼자 남은 채민 씨가 빵에 들어간 애인을 얌전히 기다린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입니다. 아직 젊기도 하고, 번듯한 외모도 갖추고 계시죠. 보스가 없는 사이 누굴 새로 만나거나, 만나진 않더라도 도망가거나, 도망가진 않더라도 기분 전환 겸 살짝 바람을 피울 수도 있….”

“그러면.”

세정은 장 실장의 쓸데없는 잔말을 더는 들어줄 의향이 없었으므로 귀찮은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장 실장이 잠깐 주춤한 사이, 세정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아직 타지 않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채민 씨를 사식으로 넣어줘요.”

“예?”

“마지막 만찬이나 하게.”

장 실장의 간절한 부탁을 하나도 듣지 않은 듯 상당히 장난스러운 말이었다. 장 실장은 바로 앞에서 닫힌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

우채민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움켜쥔 채로 한참을 머뭇거렸다. 무음으로 해두었기에 휴대폰이 울리진 않았으나,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정도는 쌓여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정에게 곧 가겠다고 해놓고선 계속 늦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앞의 남자가 열성적으로 말을 하고 있어서 도중에 흐름을 끊기가 미안했다. 망설이던 채민은 결국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극 분위기는 밝은데, 음악에선 이질감이 나야 해요. 사람들이 영화를 웃으면서 보다가도 음악을 듣고 기분이 나빠져야 돼요. 자기 음악을 듣고 불쾌한 기분이 나게끔 만들어야 한다니, 좀 너무하죠? 하하.”

한참을 일방적으로 떠들던 남자가 드디어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채민은 가타부타 대꾸하는 대신 눈만 껌뻑거렸다. 그 속내를 짐작하겠다는 듯 남자가 덧붙였다.

“어렵진 않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거든요.”

“예….”

채민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말끝을 흐렸다.

남자는 영화감독이었다. 이 근방에서 미팅이 있어 지나던 중에 채민을 알아보고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했다. 그는 두 차례의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건네다 다소 뜬금없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화두를 텄다. 요새 여러 도시를 누비며 영화를 촬영하는 중이라 정신이 없다느니, 여태 마음에 드는 작곡가를 만나지 못해 골치가 아프던 차였다느니, 대화의 구색을 맞추듯 깊이 없는 말들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불쑥 제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제안을 건넸다.

저예산 영화다 보니 열 곡에서 열다섯 곡 정도만 생각하고 있으며, 믹싱이나 마스터링은 엔지니어에게 맡길 테니 그저 프로듀싱만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 페이는 넉넉하게 챙겨줄 것이고, 모호한 요구를 해서 작곡가를 힘들게 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포트폴리오를 채울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채민은 두 가지 이유로 의뢰를 덥석 받기가 곤란했다. 첫 번째, 현재 논문을 쓰느라 작곡에 할애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이 남자가 의문스러워서.

남자와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독일로 유학을 와서 공부하는 동안, 남자와 교류해본 일은 극히 적었다. 남자는 다른 대학에서 영상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채민은 음대에서 작곡 과정을 밟고 있었다. 중간에 음향학에 흥미가 생겨 어떻게 안면을 익히긴 했지만, 한 번인가 두 번 만난 것이 다인 관계였다.

그런 얕은 사이이니 분명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을 텐데, 저의 무엇을 보고 대뜸 이런 제안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채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민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의 주신 건 정말… 감사드리는데요. 그런데…… 제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저한테 작곡을 부탁할 생각을 하셨어요? 차라리 저보단 음향학이나 실용 음악을 전공하신 분에게 부탁하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채민 씨 개인 채널을 봤습니다. 최근에 쇼팽 발라드 2번 올리셨죠?”

예상 밖의 답변에 채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항시 무심한 얼굴이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눈을 뜬 것이 귀여웠는지 남자는 키득거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민이 정색하자, 무안하게 왜 그러냐며 넉살 좋게 뺨도 매만졌다.

채민은 남자의 팔을 치워내며 말을 돌렸다.

“최근이라고 해 봤자 일 년 전에 올린 걸 텐데 그걸 보셨어요?”

“벌써 일 년이나 됐나? 처음 만났을 때 채널 있다고 소개해 주셨잖습니까? 그때부터 쭉 구독 중이에요. 피아노도 좋았지만, 작곡하신 곡들이 특히 인상 깊었어요.”

채민의 입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벌어졌다. 피아노 커버 영상을 인상적으로 본 사람은 많아도 자작곡에 관해 언급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영상 조회 수만 봐도 차이가 났고, 어디서든 똑같이 선보였을 때 항상 화제가 되는 것은 피아노 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피아노가 아닌 자작곡을 칭찬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하나 들어 보는데, 와… 이거는 시각적인 요소만 충족이 되면 시너지를 얻겠다 싶은 곡들이 많았거든요.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생각으로 만드신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근데, 너무 빤히 보시는 거 아니에요?”

채민을 흘끔흘끔 보던 남자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하하 웃었다.

“제 주연 배우보다 잘생기셔서 말하다가도 깜짝깜짝 놀란다고요.”

“아.”

채민이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거두자, 남자가 놀림조로 말했다.

“와, 잘생겼단 말 진짜 많이 들어 보셨나 보다.”

뭐가 그리 웃긴지 마구 킬킬거리던 남자는 채민이 별 반응이 없자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채민은 둘 곳 없는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가방을 한 번 고쳐 멨다. 짐을 짊어진 채 계속 한자리에만 서 있으려니까 어깨가 아리다. 채민은 반대쪽 어깨를 마사지하듯이 문지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빤히 본다는 소리도 듣고, 내 대화 예절이 많이 나아진 건가.

세정을 만나기 전까진 모두가 아버지처럼 싸늘하게 저를 보고 있을까 봐 쉽게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 데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최대한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려고 애썼고, 말을 경청할 때에도 바닥 대신 눈을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눈에 띄는 변화도 생겼다. 사람들의 날 선 태도가 변했다. 채민을 어려워하고 꺼림칙해하던 그들이 이제는 쉽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왔다. 다들 그를 보고 눈이 잘생겼다고 했다. 코가 예쁘다고 했다.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단지 태도를 바꾸었을 뿐인데도, 듣는 말들이 그렇게 달라졌다.

지난 일을 되새기며 채민은 턱을 한 번 쓸어보았다.

“아무튼 제 영화랑 감수성이 맞을 것 같아서 최근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확인을 안 하시더라고요. 연락처도 모르고 해서, 찾을 방법을 모색 중이었는데….”

남자의 말에 채민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이메일…. 요즘 메일을 안 봐서요. 오늘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만났으니까 됐죠, 뭐. 작곡가 몇 분에게 연락해보는 중이었는데 그건 취소해야겠네요.”

섣불리 결론지은 남자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영화를 한 작품도 만든 적이 없다더니 명함만큼은 여느 감독 못지않게 고급스러웠다. 자신의 채널을 봤다는 것에 경계가 조금 풀린 채민은 명함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다비드 한…. 다비드 한. 맞다. 이런 이름이었지.

“연락 꼭 주세요. 영화엔 음악이 정말 중요한 거 아시죠?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예. 생각해볼게요.”

“아. 한창 영화 찍는 중이니 오전 중에는 피해주시고요. 하아. 정말 힘들어서 죽을 것 같습니다.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지, 단독 주연 맡은 남배우는 싸가지가 없지…. 그 새끼, 진짜. 무명 주제에 아주 지가 톱스타지. 나중에 한 번 만나 봐요. 감당이 안 되는 새끼예요.”

내가 걔를 왜 만나……. 채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명함에서 눈을 뗐다.

“제가 요즘, 살짝 바빠서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고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채민은 고개를 꾸벅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화면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전에 남자가 “아차.” 하며 채민에게서 명함을 도로 빼앗아갔다.

“번호 하나 더 적어야 해서요. 최근에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임시로 쓰는 번호가 있거든요.”

“예.”

“여기로 연락 주세요. 페이 협상은 그때 하자고요.”

아직 한다곤 안 했는데. 채민은 남자가 펜을 꺼내 명함에 무어라 끄적거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남자는 번호 뒤에 별까지 그린 후 빙긋 웃는 낯으로 돌려주었다. 그러나 채민이 명함을 받으려는 그때, 누군가가 그것을 쓱 채갔다.

“……어.”

명함을 빼앗은 이를 돌아보기도 전에 향수의 잔향이 먼저 반겨왔다. 그리고 마주하는, 언제 봐도 반갑고 설레는 얼굴.

그에게는 남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사나움을 잘 깎아내어 만든 듯한 그 섬뜩하게 아름다운 얼굴이나, 표정이나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권위적이고 오만한 품위. 그는 명함 한 장을 손에 쥐고 있는 것뿐인데도 우아한 태가 나는 사람이었다. 채민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형.”

명함을 확인한 세정이 채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기다려도 안 오길래 데리러 왔어요.”

“아. 곧 가려고 했는데….”

채민은 머쓱하게 휴대폰을 켰다. 뒤늦게 확인한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예상한 두 통에서 딱 세 배, 여섯 통이 쌓여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화를 건 것을 보니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 많이 하셨네요.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네. 그러니까 다음부턴 빨리 와야 해요.”

세정이 명함을 돌려주며 채민의 뺨을 장난처럼 건드렸다.

“난 기다리는 건 싫어서.”

뺨에 닿은 손끝이 간지러워서 마음이 설렜다. 옆에 있는 남자는 아는 분이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떠들어대고 있는데, 채민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세정만 바라보았다. 세정이 올라가자고 고갯짓했다.

“영화 만드는 분이세요.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데, 여기서 우연히 마주쳐 가지고…. 작곡가 자리가 지금 공석이라고, 저한테 같이 작업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찍는 작품의 분위기가 제 감성이랑 맞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요. 어쩌다 보니 넋 놓고 계속 듣고 있었어요.”

세정과 함께 로비를 걸으면서, 채민은 자신이 늦어졌던 이유를 설명했다. 덤으로 다비드 한과 주고받은 대화들도 기억나는 대로 고했다. 그 사람이 영화를 찍으려고 뮌헨에 왔다는 것부터 제 영상 채널을 구독 중이라는 것, 이번에 찍는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것, 함께하는 주연 배우가 마음에 안 드는지 조금 씹었다는 것…….

세정은 그리 열렬하게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지만, 흘려들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냥 습관 같은 것이었다. 채민은 세정에게 제 이야기를 풀어놓는 순간이 좋았다.

그런데 혼자 이것저것 말하다 보니까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다비드에게 인사는 하고 왔던가? 세정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등을 돌렸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느라 주춤한 채민의 발이 순간 꼬였다. 가방의 무게가 중심을 흐트러트려서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다행히 세정이 팔목을 잡아주었고, 채민은 크게 반동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채민은 욱신거리는 팔목을 담담히 문지르며 정면을 보고 섰다.

“미안해요.”

그런 채민 쪽으로 몸을 튼 세정이 그의 팔뚝을 잡고 조심스럽게 마사지했다. 채민은 괜찮다며 한 걸음 물러났지만, 세정은 그만큼 더 가깝게 붙으며 계속 주물러주었다.

“급하게 잡느라 힘 조절을 못 했어요.”

“아니에요.”

잡아줄 때 조금 세긴 했으나, 마치 때리기라도 한 양 사과를 하니 도리어 무안할 따름이다. 제 팔이 툭 치면 부러지는 나뭇가지 같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세정이 너무 정성껏 팔을 쓰다듬어주어, 채민은 그냥 얌전히 있었다. 세정은 채민의 팔을 놓아주고 그가 메고 있는 가방을 대신 가져갔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 고마워요, 형.”

채민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뿐해진 몸을 스트레칭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어깨를 짓이기던 차였다.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다비드의 말을 듣고 있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다음부턴 몇 권씩 나눠서 빌려오든 복사를 해서 가져오든 해야지.

세정이 느끼기에도 가방이 꽤 무거웠는지, 그는 가방 안을 살피곤 “아아.” 하고 웃으며 도로 지퍼를 잠갔다. 채민이 그를 따라 웃으며 설명했다.

“복사하기엔 양이 많아서요. 그거 가지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야 돼요.”

채민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형이랑 좀 있다가요.”

“…음. 나랑 있다가요….”

예상과 달리 미묘한 반응이다. 말끝을 흐린 세정이 시계를 보았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 서 있는 비서에게 들고 있던 가방을 떠안기고, 채민에게 사무실 방향을 손짓했다. 그리고 채민의 어깨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보폭을 맞추는 것처럼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에서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분위기가 풍겼다. 사무실을 바로 앞에 두고 세정은 뜸을 들였다.

“사실, 회의 때문에 곧 가야 돼요.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어요.”

“…….”

“갑자기 말 없어지는 거 봐.”

입꼬리를 당겨서 소리 없이 웃은 세정이 사무실 문을 열어 채민을 먼저 들여보낸 후 밖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물 좀 마시고 쉬었다가, 차 불러주면 그거 타고 가요.”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소파 가장자리에 쓰러지듯 앉은 채민이 물병을 건네받으며 탄식했다. 어차피 길게 있을 것도 아니었고, 잠깐 얼굴이나 보고 갈 생각이었기는 하지만, 다비드와 대화만 하지 않았어도 세정과 더 오래 있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아쉬움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비드 말 다 무시하고 뛰어올걸. 아니, 더 일찍 출발할걸. 아예 만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막상 세정의 얼굴을 보니 헤어지기 싫었다.

채민은 입이 말라 천천히 물을 들이켰다. 그 잠깐 사이 세정이 비서실에 연락을 넣고 옆에 앉았다. 세정은 물기가 있는 채민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줬다.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점심부터 먹어요. 강요는 아닌데,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아까 보니까 몸에 힘이 없던데.”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순간 균형을 잃었던 조금 전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체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발이 꼬여서 그랬던 것뿐인데.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다. 그새 체력이 바닥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채민은 세정의 제안이니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얌전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정은 별로 정리할 필요가 없는 채민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정돈해주었다. 머리카락 개수를 세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느린 동작으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정중한 손길이다. 가만히 받고 있으면 좀 더 닿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그런 신중한 스킨십이었다. 채민은 고양이처럼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연락은 해보려고요?”

고요한 정적을 뚫고 세정이 문득 물었다. 채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그가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거두고 나서야 답했다.

“작곡…말씀이시죠?”

“네.”

“바빠서 안 될 것 같아요. 한다면 열다섯 곡은 작업해야 할 텐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거예요. 지금은… 지금은 논문을 써야죠.”

오늘도 논문에 참고할 자료를 찾기 위해 여러 도서관을 뒤지다 오지 않았나. 연구실로 돌아가면 도서관에서 빌린 자료들을 가지고 곧장 논문에 몰두할 계획이었다. 채민은 막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제 가방은요?”

세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장 실장이 세정에게 직행하려다가 채민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아래 차 대기시켜두었습니다.”

…벌써? 소파에 앉은 지 일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대체 장 실장님은 왜 이렇게 빠릿빠릿하신 거지.

채민은 엉덩이를 살짝 뗀 어정쩡한 자세로 세정의 눈치를 보았다. 미적거리며 챙길 짐조차 없어서 지금 일어나면 곧장 사무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세정이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하면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그와 좀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정은 단지 시계만 보았고, 채민은 하는 수없이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형…. 전 가보겠습니다.”

“같이 가요. 로비까지 데려다줄게요.”

세정이 채민의 어깨를 붙잡고 함께 문 쪽으로 걸었다. 하지만 장 실장의 뒤에서 웬 비서 한 명이 쑥 나오며 주춤주춤 길을 막자, 즉각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그들의 눈치를 보던 채민은 스리슬쩍 옆으로 빠지며 “저 혼자 갈게요.” 하고 말했다. 세정이 부드럽게 말했다.

“따라가면 돼요. 가방은 차에 있어요.”

“네.”

“우린 저녁에 봐요.”

더 말을 할 것처럼 머뭇대던 세정이 안녕,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분위기에 맞지 않은 그 산뜻한 인사가 재밌어 보여서 채민도 손바닥을 펼쳐서 휘저었다. 손이 맞닿지도 않았건만, 그 순간 손바닥 전체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르르했다. 채민은 손 인사와 묵례를 동시에 하는, 다소 이상한 행동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비서를 따라 걸으며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왜 별거 아닌 손 인사가 그리 기분이 좋았지. 손바닥을 한참 살피는데, 문득 약지에 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채민은 그것을 멍하니 보며 손을 휘저어봤다.

그렇지. 세정의 손에도 똑같은 반지가 있구나.

채민은 몇 번이고 혼자 손을 휘저어보았다.

***

“가까운 이탈리안 레스토랑 앞에서 세워주시면 됩니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한 채민이 뒷좌석 구석에 놓여 있는 가방을 들어 주섬주섬 멨다. 우선 세정이 제안한 대로 점심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머지않아 차가 서자, 채민은 차를 먼저 보내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이른 시간임에도 손님이 제법 차 있었다.

빈 테이블로 안내받은 그는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이 책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채민은 가방을 그 상태 그대로 놔둔 채 메뉴판을 살폈다. 심드렁하게 훑어 내리던 시선이 어느 구간에서 딱 멈추었다.

‘어, 가지.’

가지 피자가 있네.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가지 피자와 물을 주문했다. 가지는 채민이 좋아하는 식재료 중 하나였다. 없는데 찾아서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면 한 번씩 시키곤 했다.

과연 갓 나온 피자는 따뜻하고 맛있었다. 그는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먹은 후에, 먹기 전 찍어두었던 사진을 세정에게 전송했다.

<가지 피자 먹었어요>

<형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답장은 안 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로 답장을 안 주긴 하지만, 회의 중일 텐데 방해를 할 수는 없다. 채민은 물로 몇 번 더 입가심을 한 뒤 주변을 살폈다. 느긋하게 오가는 직원들. 흙이 약간 말라 있는 식물. 아직도 떼어내지 않은 선반 위의 크리스마스 장식들. 특별한 뜻 없이, 그저 휴식을 취하듯 슬슬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직원에게 돈을 내밀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일어났다.

그 후 향한 곳은 학교 내 연구실이었다.

요즘 그는 학교 내에 마련된 개인용 연구실과 집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며 논문 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논문 제출 기한까지는 앞으로 다섯 달가량이 남아 있었지만, 자칫 느긋하게 굴다간 기한 내에 못 끝낼 수도 있었다. 분량을 150쪽으로 잡아둔 것도 그렇고, 영어 말고 독어로 쓰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그렇고, 굳이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말에 쉬기 위해 평일에 몰아서 하고 있어서 더더욱 여유 부릴 새가 없었다.

그는 연구실에서 돌아와서도 집에 있는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복사한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부족한 자료는 따로 메모했으며 분석한 자료가 올바른지 2차 확인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잠깐 쉬는 시간,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며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본 채민은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세정을 발견했다. 기지개를 켜던 팔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시선을 느낀 세정이 고개를 들었다. 세정은 제게서 계속 눈을 떼지 못하는 채민에게 “나도 반가워요.” 하고 여유롭게 인사를 해주었다.

“언제 오셨어요? 전혀 몰랐어요.”

세정이 시계를 보았다.

“얼마 안 됐어요.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요.”

“아니……으음.”

채민이 대꾸하기도 전에, 세정은 보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채민이 할 일을 다 끝내기 전까진 방해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아마 세정은 정말로 단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그는 채민의 일에 관해선 언제나 그렇게 존중해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세정이 채민의 일을 반대했던 경우는 딱 한 번뿐이었다. 얼굴이 나오도록 카메라를 고정시킨 뒤에 피아노를 치고, 그 영상을 개인 채널에 업로드했을 때.

그마저도 채민이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아무도 작곡 영상을 봐주지 않아 관심을 끌어보고 싶었다고 털어놓자 화를 내던 것도 잠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라며 채민을 달래주었다.

그래도 세정의 허락과는 별개로 영상은 머지않아 모두 내려갔다. 영상들이 의도치 않게 SNS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댓글에는 <이 ㅅㄲ 싸가지 오질나게 없음>이나 <헐 저 이 오빠 아는데 온갖 호구 잡혀서 삥 뜯기고 다녔어요> 혹은 <얘 진유성 전남친 아닌가?> 라는 영상과 관련 없는 목격담들이 속출했고, 작곡에 대한 관심보다는 연예계 쪽으로만 오퍼가 수없이 들어왔다.

당시 세정은 이 사태가 굉장히 어이없다는 듯 ‘이게 우채민 씨가 하는 음악과 관련 있는 일이에요?’ 하고 물었는데, 거기서 채민은 그동안의 고집을 반성하고 얼굴이 드러난 영상을 모두 내렸다.

그게 벌써 일 년 전 일이었다.

이제 시간도 꽤 흘렀고, 슬슬 다시 영상을 올릴 때도 되었다. 오늘 아침에 다비드 한이 명함을 건네주며 개인 채널에 올린 영상을 잘 보고 있다고 했던 걸 보면 그 말고도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더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럼 주말에 영상을 찍어볼까? 물론 이번에는 얼굴이 안 나오도록 해서.

세정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채민은 뒤늦게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채민이 화들짝 놀라자, 세정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나한테 넋이 나갔네.”

아닌 줄 알면서 그렇게 농담해주니, 채민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칠 수 있었다.

“…그러게요. 하루 이틀 잘생긴 것도 아닌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요.”

“그래도 이따 보고, 지금은 논문에 집중해요.”

세정은 채민이 오늘의 분량을 얼른 끝마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채민은 순순히 화면을 보았다. 그러나 한 번 집중력이 깨졌더니 그새 논문 쓰기가 귀찮아졌다. 심지어 자꾸 초점이 흐려지는 통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동안 화면 위로 알아들을 수 없는 글자들을 써 내려가다가, 다시 세정을 곁눈질했다. 세정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저 책 재미있나? 제목을 슬쩍 보니 음악 관련 책이다. 세정이 이따금 읽는 것들은 죄 음악에 관련된 것뿐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으나, 뭐에 쓰려고 읽는 건지 궁금하긴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채민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없었다. 습득한 지식을 내색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앞으로도 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진짜 이상해.’

채민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데, 갑자기 세정이 무심한 눈으로 채민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채민과 눈이 그대로 맞부딪혔다. 머쓱해진 채민은 책상 위에 있는 아무 자료나 집어 들고 마치 이것 때문에 봤다는 양 말을 걸었다.

“형, 이거 번역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 시간 내로만 주시면 돼요.”

세정은 선뜻 자료를 받았지만, 종이를 넘겨보곤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 시간? 미안하지만 두 달은 필요한데요.”

어려울 것도 없는데 웬 두 달. 채민은 의아하게 세정이 들고 있는 자료를 살폈다. 첫 장은 짧은 제목이었는데, 두 번째 장부턴 쭉 악보였다. 음악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이 지저분한 악보를 해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잘못 건네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채민은 어색하게 웃다가 문득 정색했다.

“두 달…? 제가 십여 년 동안 배운 걸 두 달 안에 통달할 수 있다고요…?”

잠시 아무런 표정 없이 채민을 보던 세정이 불쑥 의자에 뒤통수를 푹 기대더니 웃었다. 그는 엄한 곳에서 화가 난 채민을 능숙하게 달랬다.

“이런, 우채민 씨…. 난 우채민 씨를 존경해요.”

그리고 그는 팔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갑자기 이렇게 성질부리는 걸 보니까 저녁 먹을 시간인가 봐요.”

“성질 안 부렸는데…….”

배가 고프긴 했어도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당황한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은 세정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저녁 먹고 마저 할까요?”

…어차피 집중도 안 되던 차였으니까. 채민이 맹목에 가까울 만큼 빠르게 그 손을 잡자, 세정이 단단히 움켜쥐고서 가까이 끌어당겼다. 의자가 반동했다.

***

칼바람이 마른 풀밭을 고요하게 쓸고 갔다. 간혹 새들이 풀을 헤집었고, 높이 뻗은 나무에선 후두둑 잎이 떨어졌다. 바닥에는 꽃 대신 담배꽁초와 씹다 뱉은 껌이 붙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서 산책을 나온 공원은 썩 볼 것 없는 곳이었다.

그 지루한 곳에서 두 사람은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유의미한 내용은 없었다. 이런 저녁 시간에는 보통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기 마련이었다. 채민은 바닥에 있는 무늬를 보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했고, 무릇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어디서든 흔하게 볼 법한 풀을 가리키며 무슨 종류인지 아느냐고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처음엔 풀 따위에 관심도 주지 않던 세정은 채민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계속 나무와 풀들을 툭툭 건드리자,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주었다. 잡풀의 종류부터 전나무에 얽힌 신화까지 여러 가지 정보를 말해주었다. 솔직히 내용은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세정이 좋았기에 채민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독어로 읊어주는 그의 담담한 목소리도 귀가 녹을 만큼 좋았다.

채민은 그가 말을 모두 마칠 무렵, 다른 풀을 가리키며 또 종류를 물었다. 순순히 검색해주던 세정이 갑자기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우채민 씨 어릴 때 정원 있는 집에서 살았다고 했죠?”

말을 흘리듯 듣고 있던 채민이 뒤늦게 대답했다.

“아…. 아주 잠깐이요. 옛날에 말한 건데, 기억하시네요.”

이사를 많이 다닌 것은 아니나,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당시 정원이 보이는 창 앞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곳에서 채민은 어머니가 초빙해준 선생님에게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다. 아버지처럼 훌륭한 연주자가 되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훌륭한 연주자…. 어린아이답게 아주 허황된 꿈을 좇았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마른 풀을 뜯어 만지작거렸다.

“왜 물어보셨어요?”

“어린 우채민 씨가 궁금해서? 호기심도 많고 아주 귀여웠을 텐데요. 이렇게 정원에 앉아서 나무 이름도 물어보고요.”

풀을 건드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던 채민이 뜸을 들였다. 저와 달리 서 있는 세정을 올려다보니, 그는 담배를 꺼내며 채민을 깔아보고 있었다. 세정은 종종 채민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했다. 얼굴이나 성격부터, 글자를 언제 뗐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질문도 던졌다.

예전에 과거 이야기를 해주었으니, 그도 어린 채민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알고 있을 텐데…. 어린 채민이 절대로 귀여운 성격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을 텐데…. 고민하던 채민이 말했다.

“아니에요. 전 약은 면이 있었잖아요. 제가 어릴 때 나무 이름을 물어봤다면……그냥 관심 끌고 싶어서였겠죠.”

어린 날의 채민은 그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아이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이미 질리도록 본 풀들만 한 번 더 눈으로 어루만졌다. 그러자 세정이 채민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그 손 위에 또 턱을 올린다. 그의 입술이 훅 가까이 왔다. 심드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그렇다면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지금도 관심 끌려고 물어봤잖아요. 정작 답해주니 내 말은 듣지도 않아.”

“아니에요. 다 들었어요. 저 나무 이름이…….”

……뭐였지? 세정의 달콤한 억양은 분명 기억이 나는데. 생각에 잠긴 채민을 보며 가볍게 웃은 세정이 그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채민의 턱을 잡아 돌려서 반대쪽 뺨에도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하게 스쳐 가는 입맞춤이었다. 채민은 더 해달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보채면 그가 싫어할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곧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계속 돌아다녔다. 꽃 하나 피지 않은 이곳에 볼 게 뭐가 있다고.

한동안 길을 따라 걷던 세정이 날이 풀리면 휴가를 내고 요트를 타러 가자고 했다. 요트…. 채민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요트를 좋아하진 않으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웃음치는 세정은 좋았으니까. 그는 또 여름 휴가를 내고 별장에서 죽은 듯 지내자고 했다. 채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정이 약속하는 미래가 좋았으니까. 그는 또 크리스마스 전후로 한 달간 휴가를 내고 놀자고 했다. 휴가 왜 이렇게 자주 내요. 이제 채민은 막 웃기 시작했다.

***

집에 돌아왔을 땐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수행원이 직접 가져다준 편지는 무려 이 회장의 자필 편지였다. 채민은 논문을 마저 쓰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편지 봉투를 들고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옷에 묻은 냉기를 털어낼 겨를도 없었다.

봉투의 겉면엔 멋들어진 글씨로 채민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채민은 그 이름을 빤히 쳐다봤다.

이 회장과는 삼사 주에 한 번꼴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편지가 도착하는 즉시 답장을 썼기 때문에, 편지는 끊기는 일 없이 꾸준히 이어졌다.

사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제가 적당한지,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는지, 거의 계산하다시피 해서 답장을 했다. 심지어 남지수와 배도빈에게 애인의 부모님과 편지로 대화하려는데 어떤 주제로 말을 하면 좋을까 물어보기도 했었다.

도빈에게선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섹스라이프 말해주면 내 아들 장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좋아하지>라고 답장이 와서 지워버렸고, 지수에게선 <어린 시절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대화 잘 통해>라고 와서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지만, 당시에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어휘를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만 사로잡혀서 내용 자체를 깊이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제 딴에는 최대한 단정한 글씨체로 <세정이 형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라고 써서 보냈다.

그리고 답장은 이 회장의 사무실에 들를 일이 있던 세정이 대신 가져왔다. 거기에는 <세정이 어릴 때야 참 귀여웠습니다. 몇 가지 일화들을 말해 주자면….>, <세정이는 어릴 때 동물을 사랑>, <또래 애들보다 심성이 곱고 얌전한 아이였긴 한데> 따위의 쓰다만 글들이 난무해 있었다. 아마도 세정이 이 회장에게 따로 묻지 않고, 편지로 보이는 아무거나 집어온 듯했다.

채민은 다시는 그런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오늘 온 편지를 꼼꼼하게 읽었다. 받은 편지에는 안부 두 줄, 날씨 두 줄, 그리고 덕담 네 줄이 적혀 있었다. 여전히 존댓말이었고, 딱딱한 글씨체였다. 채민은 글을 세 번 더 정독하곤 새 편지지를 잔뜩 가지고 발코니로 나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서 즉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안부를 물어주시니, 황공하고 망극합니다.>

“어디 왕한테 편지 쓰나 봐요?”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민의 머리 너머로 편지를 훔쳐본 세정이 테이블에 와인을 내려놓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 써도 돼요.”

“…형 아버지인데요. 편지 온 거 답장은 해야죠.”

“쓸 필요 없어요. 정 편지가 쓰고 싶다면 나한테 써요.”

그렇게 말한 세정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써볼까요? 우채민 씨한테.”

채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나서, 얼른 세정의 앞에 새 편지지를 밀어주었다. 와인을 병째로 들고 몇 모금 꿀꺽 마신 세정이 테이블에 굴러다니는 아무 펜이나 가져다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채민은 세정을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다 썼어요?”

“지금 막 한 자 썼어요, 우채민 씨.”

“아… 기다릴게요.”

채민은 그가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제 편지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그 틈에 세정은 편지를 빠르게 작성했다. 세정이 종이를 굳이 두 번 접어서 맞은편으로 넘겨주었다. 깊이 눈웃음을 친 채민이 굉장히 기대된다는 얼굴로 종이를 열었다. 단정한 글씨체가 먼저 보였고, 그다음에 짤막한 몇 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채민이에게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황공하고 망극해요>

두 번째 줄까지는 웃으면서 읽었는데, 세 번째 줄을 보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놀릴 정도로 이상한 표현이었나. 채민은 이 회장에게 쓰고 있던 편지를 구겨버리곤 새 편지지를 꺼냈다. 그러는 동안 세정은 두 번째 편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뭘 썼나 싶어서 그가 건네주는 편지를 바로 펼쳤다.

<나 때문에 우울해지는 우채민 씨 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서

이렇게 웃는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것을 읽는 채민이야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런 건 평소에 말로 하면 되지. 그랬다면 곧바로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었을 텐데.

첫 번째 편지에서 세정은 채민을 사랑하고 채민은 세정을 좋아한다고 표현했던 부분이나, 두 번째 편지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세정은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안타까워서 미간을 찌푸리는데, 세정이 와인을 마시며 물었다.

“답장 써줄 거죠? 하트를 많이 그려주면 좋겠어요.”

“하트에 색 채워서 그려줄게요.”

호기롭게 장담한 채민은 이 회장에게 보낼 답장 대신, 세정에게 보낼 편지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이 길어지고 또 길어지고, 문장을 수정하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느라 금방 전해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세정은 와인을 반병이나 비웠고, 이제 지루해졌는지 펜을 돌리며 채민만 쳐다보았다.

세정은 어디 한눈도 팔지 않고 계속 채민을 쳐다보았다. 그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채민은 점점 눈치가 보였다. 펜을 꽉 쥔 손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채민은 머쓱하게 펜을 내려놓았다.

“조금 더 써서 나중에 드릴게요.”

“…날 좋아한다는 말이 논문으로 작성해야 할 만큼 어려워요?”

“예?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고…. 형한테 편지를 처음 써봐서 할 말이 너무 많았어요.”

침묵하던 세정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쉽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써드릴게요. 하트도 많이 넣어서.”

좀… 유치하긴 해도. 채민은 미완의 편지를 반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미안해진 채민이 눈썹을 구겼다.

“빨리 써드릴게요.”

“알았어요.”

세정은 담담히 대꾸했다. 머뭇거리던 채민은 새 편지지를 꺼내서 종이가 꽉 차도록 하트를 그렸다. 그것을 보여주니, 세정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선납이에요.”

“선납?”

세정은 편지를 가져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그것을 두 번 접어 곁에 놓았다.

“잘 간직할게요. 아주 고마워요.”

그가 ‘아주’에 힘을 주었다. 이런 거 말고 빨리 편지나 작성하라는 것 같아서 뻘쭘해진 채민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빨리…. 음, 빨리.”

딱히 해줄 말이 없어 의미 없는 말을 되뇌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와인을 마시려고 손을 뻗던 세정이 그런 채민을 쳐다보았다. 채민의 불안함을 감지한 것처럼 가늘어진 눈으로 천천히 채민을 훑는다. 세정은 와인병을 내려놓고 몸을 살짝 틀었다. 이리 오라는 듯 채민 쪽으로 두 팔을 벌렸다.

채민은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그 품으로 기어들어 갔다. 마치 시간을 재는 타이머라도 곁에 있는 양 급박한 몸짓이었다. 무릎에 자리를 잡고 앉자, 뒤통수가 천천히 쓰다듬어진다. 곧 두 뺨이 쥐어지며 입술이 부딪혔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써요.”

그렇게 말한 세정은 장난을 치는 것처럼 쪽 뽀뽀하고 떼기를 반복했다. 채민은 “네.” 하고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아서 “으븝.” 하고 말했고, 세정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세정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안 채민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보니 서로 웃음이 나서 입술이 자꾸 어긋나게 부딪혔다. 입술 옆에 닿을 때도, 뺨에 닿을 때도, 혹은 턱에 닿을 때도 있었다.

채민이 웃느라고 입맞춤을 피하는 바람에 세 번 연속 뺨 부근에 키스를 한 세정이 이번에는 양 뺨을 단단히 붙잡고 길게 입을 맞췄다. 세정은 입술을 댄 상태로 속삭이듯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채민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허락 안 맡아도 되는데.”

“오래 할 것 같아서요. 마음의 준비 좀 하라고.”

세정은 다른 손으로 제 무릎에 올라탄 채민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에게 안겨들자 서로의 몸이 바짝 닿았다. 심장이 가까워졌다. 단단한 몸이 느껴지고, 그 특유의 향기가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좋아질 수가 있나, 전율이 일었다. 그를 온몸으로 안으면서 채민은 다짐했다. 그가 아주 감동할 만한, 그래서 우리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대단한 편지를 완성하겠다고.

여느 때와 비슷한 밤이 지나고 있었다. 눈물이 날 만큼 안정적으로.

***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비처럼 추적거렸다. 그는 지금 폭우 아래에 있었다. 아니, 밤의 다리 위에 있었다. 욕실의 조명이 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번쩍였다. 다리 위의 기억. 그 시작은 언제나 전조등…….

빗물이 어깨와 등 근육을 타고 빠르게 내려온다. 몸에 난 상처들을 건드리자 거짓말처럼 온몸이 따끔거린다. 거짓된 고통이 정신을 괴롭혔다. 잠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거품은 이미 씻겨 내려간 지 오래인데, 그는 그렇게 오래 땅을 보며 서 있었다.

***

주말 아침부터 날이 유난히 흐렸다. 간밤에 잠을 설친 세정은 암막 커튼을 쳐서 침실로 들어오는 빛을 모두 막아버렸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이따금 잠을 못 이룰 때가 있다. 채민과 함께 지내며 불면증은 많이 나아졌지만, 가끔 속절없는 짜증이 불청객처럼 정신을 침범했다. 그런 날에는 잠은 안 오고, 자해 욕구만 들었다. 자해 중독이 완치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것으로 분노를 해소해왔으니.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깊이 잠들어 있는 채민을 내려다보았다. 침대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바른 자세로 누워있는 채민은 움직임이 없어서 더욱 창백해 보였다. 순간, 깨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지금 당장 저 긴 속눈썹 아래에 붙어있는 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허리를 숙인 세정은 채민의 눈꺼풀 위로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허리를 세우고 방의 구석 자리를 쳐다보았다. 넋을 놓은 것처럼, 박제된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 뒤 그는 한숨을 쉬며 시간을 확인했다.

밤새 잠든 채민을 껴안아 보기도, 컨셉 바이크를 디자인해보기도 했다. 또 위스키를 마시기도, 채민이 매일 아침 연주해주는 피아노 앞에 앉아 하염없이 바깥을 쳐다보기도 했다. 별짓 다 해봤으나 아직도 여덟 시였다. 주말엔 꼭 늦잠을 자곤 하는 채민이 벌써 일어날 리는 없고, 그동안 뭘 해야 하지.

주말 계획은 세워두었지만 그건 다 채민과 함께여야만 할 수 있는 활동들이다. 아주 오래전, 채민이 곁에 없었던 그때엔 뭘 하며 지냈었나. 당시의 기억이 희미했다.

세정은 전신을 조여 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났다. 눈길이 느리게 침실을 훑는다.

시선은 곧 펭귄 인형을 장식해둔 유리관 쪽에서 멈추었다. 독일로 이사를 올 적, 대부분의 물건을 새로 샀지만 저 인형만은 그대로 가지고 왔다. 채민이 인형에 얽힌 추억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너무 자주 본 까닭에 정이 깊이 들어서 도저히 두고 올 수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버릴 뻔했으나, 인형은 오늘도 여전히 저기에 모셔져 있다.

“으음….”

막 인형을 꺼내기 위해 유리관의 문을 연 세정은 작게 앓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채민이 인상을 쓴 채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일어나려는 낌새였다. 세정은 유리관을 닫고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당연히 곁에 세정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처럼 채민이 눈도 뜨지 않고 물었다.

“몇 시예요?”

침대를 더듬는 손이 유달리 하얘서 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세정은 그 손을 잡아서 휴대폰을 쥐여 주었다.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말해줘요, 그냥……. 숫자 읽을 줄 아시면서.”

“내가 숫자 읽을 줄 안다고 누가 그래요.”

아, 형…. 채민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웅얼거리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세정의 얼굴이 시야에 바로 들어왔다. 자신이 일어나기 만을 기다린 듯 기쁨 같은 것이 역력하게 드러난 표정. 저 다정한 시선. 순식간에 녹아내린 채민은 졸음이 묻은 얼굴로 나른하게 웃었다. 세정이 따라 웃었다.

“잘 잤어요?”

“잘 잤어요. 그런데… 아직 여덟 시네요.”

시간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주말이니까 정오까지는 푹 잘 생각이었는데…. 더 자면 안 되나. 그러한 염원을 담아서 채민은 휴대폰과 세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멀끔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면서 졸음이 다소 깼다. 채민은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를 자세히 살폈다. 왜 얼굴에 잠기운이 하나도 없지?

“…형 오늘 몇 시간 잤어요?”

세정은 휴대폰을 두드리며 조금 생각하더니 대꾸했다.

“삼십 분 정도 잤어요.”

삼십……. 채민이 귀를 의심하며 더욱 상체를 들었다.

“왜… 왜요?”

세정은 턱을 쓸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

“기다려 봐요. 지금 이유를 만들고 있는 중이니까.”

“……저기, 형. 혹시 또 잠이 안 왔어요? 그… 한 거는 아니죠?”

선득한 예감에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지만 다급한 손길로, 세정의 손을 잡아서 소매를 걷었다. 다행히 손목은 오래된 상처 자국만 있을 뿐, 새로 그은 흔적은 없었다. 습관적으로 그 자국을 손끝으로 쓸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음. 그냥 잠을 못 자신 거구나. 제가 재워드릴까요?”

심각한 채민의 말이 세정은 그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세정은 잠깐 웃더니 채민에게 잡혀있던 팔을 빼냈다.

“그래도 밤새 재미있었어요. 우채민 씨가 자면서 계속 이랬거든요.”

세정이 허공에서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다. 그때까지도 세정의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채민이 당혹스럽게 웃었다.

“좀…… 특이한 꿈을 꿔서.”

“무슨 꿈?”

“꿈에서 피아노를 쳤거든요. 한 열 곡은 더 쳤나….”

물론 채민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을 꾸었다는 자체에 행복을 느끼는 부류가 아니다. 그의 손은 이제 아주 멀쩡해서, 연주하고 싶은 곡이라면 무엇이든 칠 수 있었다. 그가 침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제가 아침마다 형한테 피아노 쳐주잖아요. 꿈에서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연주하다 보니까 형 행동이 엄청 이상한 거예요. 막 중간중간 박수를 친다거나 환호를 한다거나 제 이름을 부른다거나. 제가 무슨 유명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버스럽게요.”

별생각 없이 운을 뗀 이야기지만, 지난밤을 되새겨보며 말하자니 꽤 재미가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처음엔 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형 리액션이 너무 재밌어서 저까지 막 신나 가지고 몇 시간 동안 연주하고 또 연주하고…… 계속 연주했어요.”

꿈에서 세정은 지금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한 번도 우울증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구김 없이 평온해 보였다. 누군가를 해치기는 해보았을까. 어둠을 경험해본 적은 있을까. 세정의 껍데기로 그러한 말투, 목소리, 표정 모두 처음 본 터라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덧 방에서 나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 채민은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며 간밤에 겪었던 꿈에 관해서 그렇게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리고 “웃기네요.” 같은 가벼운 반응을 기대하며 세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세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꼭 못 들을 말을 들은 양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내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나? 불안해진 채민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채민이 마시고 남은 물컵을 대신 받아준 세정이 어이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꿈에서 바람피웠다고, 지금.”

“……예?”

바람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것이라, 순간 넋을 놓고 그를 보았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부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기울였다.

“전 분명 꿈에 형이 나왔다고 했는데요?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딱 저랑 형만.”

과장되게 ‘아.’ 하고 탄식한 세정이 웃었다.

“그게 어떻게 나예요. 내 탈을 쓴 우채민 씨 이상형이지.”

“…….”

“구체적으로도 알려주네요. 아침부터 열 받게.”

채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상형이라니?

맹세코 이상형이라는 건 가져본 적 없었다. 굳이 이상형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지금의 세정의 모습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의 과거와 그의 상처와 그리고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그의 폭력성까지도 모두 모두 아낌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니까 만약 제게 이상형이 있다면 그건 세정 그 자체일 것이다. 채민은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해서 최대한 부정해보았다.

“저는 제 꿈에서처럼 촐싹대고, 짓궂고, 가볍고, 아주 끼 부리고 난리 난……그러니까 배도빈 같은 부류 정말 싫어합니다.”

“도빈이가 여기서 왜 나와요?”

“갑자기 생각나서요.”

“…….”

세정은 할 말을 잃었고, 채민은 그의 침묵에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 아닌데. 제가 쭉 나열한 성격에 부합하는 사람이 배도빈이라서 그냥 예를 든 것뿐이에요.”

꿈속의 남자가 제 이상형이라고 오해를 하는 상황에서 그 성격에 부합하는 현실 지인의 이름을 꺼낸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뒤늦게 후회해봤자 세정의 굳은 표정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세정은 오랜 시간 뜸을 들이다가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도빈이 형이 이상형이구나?”

“도빈이 형이라니. 저 걔 형이라고 안 부른 지 꽤 됐잖아요. 그보다 진짜로 이상형 아니에요. 저 그런 성격 정말 안 좋아해요….”

억울한 만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배도빈은 잘생기지도, 성격이 좋지도 않았다. 연인으로서 좋아할 구석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말실수 한 번 했다고 졸지에 도빈이 이상형인 사람으로 몰리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채민은 우울한 목소리를 냈다.

“형, 저…… 눈 엄청 높아요. 제 눈 하늘 끝에 있어요. 그리스 신 정도가 아니라면 눈에도 안 찹니다. 아, 그렇다고 그리스 신이 제 이상형이라는 건 아니고 굳이 형까지 갈 것도 없이 그리스 신 선에서 정리가 된다, 이런 말인데…… 저 그냥 말하지 말까요?”

채민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꾸 오해가 생기게끔 말하는 자신이 싫었다. 세정을 불편하게 하지도, 슬프게 하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으나 그를 달래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렀다. 단지 형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가 모든 의심을 거두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채민이 이대로 땅끝까지 파고 들어갈 것처럼 자신을 책망하는 사이, 그를 관찰하던 세정은 이제 대화를 그만하자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잠깐 앉아있을래요? 주스 만들어줄게요.”

“제 말 믿죠?”

“네.”

“저 배도빈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진심, 진심으로요.”

“당연히 없어야죠. 한눈팔면 곱게는 안 보낼 건데.”

기가 막힌다는 듯한 말에, 채민은 놀라서 눈을 홉떴다. 주방 깊숙이 들어간 세정이 새벽에 소분해 두었던 과일과 믹서를 꺼내왔다. 세정은 그것들을 식탁에 차례로 내려놓으며 느리게 덧붙였다.

“물론 그 상대만요.”

그는 채민을 빤히 바라보며 믹서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아주 갈아버릴 거라고.”

그가 물과 재료를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다. 블렌더가 소리를 죽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에서 빨갛게 터진 과일은 이내 즙이 되어 빙글빙글 돌았다. 채민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갈무리하며 눈을 들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네. 그럴 리가요.”

뒤늦게 대답한 채민은 경황이 없는 것처럼 어수선한 몸짓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세정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세정은 금세 얼굴을 굳히고 블렌더 안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그 얼굴에서 언뜻 피곤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가려진 짜증도 얼핏 비쳤다. 안 그래도 잠을 못 자 예민한 상태일 텐데, 괜히 꿈 이야기를 꺼내 속을 시끄럽게 했나.

그러고 보니 꿈에 정신이 팔려서 왜 잠을 못 잤는지 캐묻지도 못했구나. 채민은 이제라도 물어볼까 입을 벌렸으나, 세정은 그것에 대해 별로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채민의 앞에 주스를 내려놓고는 머리를 마저 말리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결국 한 줌의 소리도 내지 못한 채민이 자세를 바로 하며 주스를 내려다봤다. 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슬슬 문질렀다.

불면증은…… 앞으로 계속 나아지겠지. 이 세상에 한 번에 낫는 병은 없으니까. 나도 가끔 악몽 같은 걸 꾸고 나면 잠을 못 이룰 때가 있잖아.

그래도, 오늘 밤엔 꼭 안고 잘까….

컵을 그대로 들어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채민이 가까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 하늘을 보았다. 날이 흐린 것 같다. 형의 기분처럼.

***

오후 즈음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모질게 내리던지 세정이 오늘 잠을 못 잤던 이유가 이 날씨를 예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채민은 복도를 돌아다니며 활짝 열려 있는 창들을 일일이 닫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책장에서 뽑아온 악보집을 뒤적거렸다. 오랜만에 채널에 영상을 업데이트할 겸 적당한 커버곡을 연습해볼 작정이었다.

리스트 관련 논문을 쓰고 있으니 사랑의 꿈을 칠까. 그런데 이 곡은 너무 많이 쳐서. 아니면 라 캄파넬라? 이건 힘들기는 해도 치는 맛이 좋지.

신중하게 고심하던 채민은 결국 라캄을 연주하기로 했다. 일전에 암보했던 곡이지만 악보를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폈다. 그는 악보를 밀어놓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음.”

건반에 손을 댔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했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 보기도 했다. 건반을 가볍게 눌러보던 채민이 손바닥을 쫙 폈다. 손가락을 도배하다시피 낀 반지들이 은근히 걸리적거린다.

기념일도 아닌 뜬금없는 날, 세정이 하나씩 하나씩 선물한 반지들은 이제 그 숫자를 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평소에 채민은 그 반지들 중에 내키는 대로 골라서 욕심껏 끼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몇 개 빼야 할 것 같았다. 채민은 반지 두 개를 빼고 다시 건반을 눌렀다. 그러나 아직도 손을 움직이는 데 불편한 감이 있었다.

어쩌지. 리스트 곡만 아니었어도 이 정도로도 칠 수 있었을 텐데.

채민이 반지를 뺐다 꼈다 고민하는 사이, 의자 옆에 엎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채민은 반지 두 개를 더 빼내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배도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이세정이 나 죽인댔는데 뭐냐>

<너 내가 좋다고 하기라도 한 거냐?;>

채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런……. 아까 세정이 그만 이야기하자고 말을 자르길래 이번 말실수는 그냥 묻고 넘어가 주는 줄 알았다. 단지 대화만 중단했을 뿐 그의 기분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나 보다. 채민은 탄식하며 얼른 답장을 보냈다.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바로 답문이 왔다.

<발광하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본데>

채민은 다시 답을 보냈다.

<아니라니까요>

<ㅋㅋ>

<귀여운 새끼>

“귀여운 새끼….”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것을 힘주어 읽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채민은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조심히 돌아보자, 카메라 장비를 바닥에 대충 던진 세정이 제 옷을 툭툭 털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우채민 씨.”

“네.”

너무 평화롭게 대화를 청해서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채민은 그가 앉을 수 있도록 옆자리에 놓아둔 반지들을 제 주머니로 옮겼다. 카메라 장비가 든 검은 가방을 발로 민 세정이 옆에 앉았다. 세정은 채민의 어깨를 잡고 아이를 어르듯이 말했다.

“도빈이랑 연락하는 것까지는 내가 이해를 해요.”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계속 문자를 보내서.”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해를 한다고.”

“네.”

“그래도 이렇게 숨어서 문자 하지는 말아줘요. 내 기분이 어떻겠어요?”

숨어서 문자 하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대꾸하려던 채민은 조금 전 자신이 숨기듯 휴대폰을 집어넣었던 것을 떠올렸다. 기분… 기분 나빴나. 채민은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던 휴대폰을 즉시 꺼내서 세정과 제 사이에 보란 듯이 올려놓았다.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세정은 아무 말 없이 채민의 손을 잡았다. 소중한 것을 품듯이 힘을 주지 않고 잡은 채 손등을 어루만진다. 채민의 손마디를 엄지로 쓸어본 세정이 물었다.

“반지는 왜 뺐어요?”

“주머니에 있어요. 이 곡이 반지 끼고 치기엔 어려워서.”

채민은 덧붙였다.

“저 커버할 곡 정했어요. 라캄 연주하려고요.”

그는 세정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악보를 끌어왔다.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야기하며, 반지를 끼고 연주하기엔 난이도가 있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으며 세정은 잡고 있던 채민의 손을 건반 위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자.”

슬며시 웃은 채민이 나머지 손도 건반 위에 올렸다. 그가 느릿하게 첫 음을 떼었다. 세정이 옆에 바짝 붙어있기 때문에 제대로 연주하지는 못하고, 그저 산뜻하게 음을 이어갔다. 예컨대 허밍, 그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그러는 동안 세정과 제 사이에 놓아둔 휴대폰에선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아마도 배도빈일 테지만, 채민은 쳐다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지금 세정이 꿈 이야기 때문에 배도빈에게 꽂힌 것 같으니, 최대한 조심할 생각이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애인을 예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채민은 계속 손가락을 움직였다. 흥얼거림 같은 연주가 이어졌다.

***

몇 주 사이에 날이 부쩍 추워졌다. 채민은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찬 기운과 신발에 묻은 눈의 잔해를 털어내며 발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반겨주는 이가 없는 걸 보면 세정은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한인 마트까지 가서 사 온 컵라면 두 개를 아무 데나 내려놓고 점퍼를 벗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홀 커튼을 시원하게 젖혔다. 정원에 수북이 쌓인 하얀 눈이 빛을 반사해 눈부셨다. 볕이라도 맞이한 양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째 눈이 그쳤다 내렸다 반복되고 있었다. 폭설 주의보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 불쾌한 날씨. 철제 구조물 위에 듬뿍 쌓여 있는 눈을 보고 있자면 제가 치울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커튼을 칠까? 고민하는 채민의 시야에 정원 한쪽, 눌린 자국 그대로 녹지도 않고 보존되어 있는 눈 더미가 잡혔다. 아마 아침에 세정과 장난을 치다가 저렇게 된 것 같은데……. 언제 저기까지 가서 논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러 나가는 세정의 뒷모습이 아쉬워서 채민은 그에게 눈을 던지고 숨었다. 숨긴 숨었으나 제 덩치보다 작은 정원 의자 뒤에 숨은 터라 머리통이 다 보였다. 의자 뒤로 솟은 동그란 머리통을 빤히 바라본 장 실장은 장난이 길어질 것을 예감하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고, 세정은 채민을 무시하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찰나 고민하다가 그와 노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었다.

하지만 채민이 눈덩이를 단단히 뭉쳐 거의 패다시피 덤비는 바람에, 세정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한 시간 내내 처맞기만 했다. 장 실장이 “저희 상사님이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하며 진심으로 억울해했지만, 그저 노는 것에 불과했던 채민은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눈싸움이 일방적인 폭력이 된 것에 관하여 채민은 일부 억울한 구석이 있었다. 눈싸움은 서로가 서로에게 눈을 던지며 노는 놀이가 아닌가? 그러나 세정은 눈 뭉치로도 채민을 때리지 못해서 재미없게 그냥 맞아주기만 하였다.

설마 자신을 눈 뭉치로도 때리지 못할 줄이야.

몇 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은 신기함을 넘어서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는 얼마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것인가? 자신은 세정의 정서적 보호자로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마음이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채민은 눈싸움의 흔적이 가득한 정원을 계속 바라보며 가까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턱을 괸 채 아침의 일을 계속 회상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며 눈살을 찌푸리던 얼굴. 제법 큰 눈덩이를 맞고도 반격하지 못하던 손.

갑자기 세정이 형 보고 싶네……. 시간을 확인한 채민은 휴대폰을 켰다.

<어디예요?>

문자 한 통 보내놓고 느긋하게 오 분을 기다렸다. 그래도 답신이 오지 않아서 한 통을 더 보냈다.

<회사예요?>

퇴근 시간이 살짝 지난 시각이었다. 집에 오고 있는 중이라면 그를 기다리며 논문을 마저 쓰고 있을 요량이었다. 그가 오면 함께 라면을 먹고,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가야지. 하지만 바쁜 모양인지 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채민은 세정의 행방을 정확히 파악해두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한집에 있어도 눈에 닿는 곳에 없으면 궁금한데 바깥이야 오죽할까. 채민은 <형 어디세요?>, <ㅠㅠ…>, <점 하나만이라도 찍어주세요> 따위의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답장은 채민이 라면을 먹고 양치를 끝마친 뒤 작업실에 들어가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도착했다.

<회산데 곧 가요. 얼른 갈게요>

왜 메시지를 수십 통이나 보낸 거냐고 따지는 기색 없이, 간결하고 다정한 답장이었다. 보내놓고 괜스레 찔렸던 채민은 안심하며 물었다.

<네 저녁 드셨어요?>

<전 먼저 컵라면 먹어서….>

<라면? 무슨 라면?>

<한인 마트 가서 샀습닌>

<샀습니다>

채민은 휴대폰 앨범에 들어가서 아까 찍어둔 컵라면 사진을 살폈다. 먹기 바로 직전에 찍은 라면 사진이 두 장 있었다. 그는 그것을 모두 눌러서 전송했다. 그런데 보내고 나니 왠지 사진이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이 보내진 느낌이다. 역시나 누르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는지 제 얼굴 사진 하나가 끼어 있었다. 채민은 실수한 김에 요청했다.

<ㅋㅋ형도 보내주세요>

<머리 위로 큰 하트 그리면서>

아무리 개인 사무실에 있다고 하나, 그가 회사에서 사진을 찍지는 못할 거라는 사실을 채민도 알고 있었다. 채민은 세정이 무슨 말로 거절하려나 기대를 하며 논문에 집중했다.

허나, 십 분 뒤에 도착한 메시지는 의외로 사진과 함께였다. 언뜻 보니 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찍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얼굴을 담은 사진을 보내줬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놀라웠다. 무슨… 사진이지. 채민은 당황을 감추며 첨부된 것을 눌렀다. 사진이 확대되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정면을 보고 있는, 세정의 사진이었다.

평면 사진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어디 하나 빛바램 없이 훌륭했다. 앞머리를 넘긴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그리고 못된 장난을 치는 듯한 오만한 도련님 같은 표정.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나왔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보던 채민은 아래에 있는 메시지를 읽었다.

<현재 이곳은 긴급회의에 소집된 VP 이상의 간부들이 싸한 얼굴로 언쟁을 나누다 파한 공간으로, 저는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간부들의 시선을 받아 가며 저희 상사님 사진을 찍었습니다 :)

-장 준영 드림>

<덧붙이자면 저희 상사님 뒤쪽에서 이곳을 노려보고 있는 남성분이 저희 회사 보스십니다>

<하트는 그분 때문에 못 만드셨습니다>

내가 협박을 했나, 뭘 했나…. 내가 당장 사진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리기라도 한 양…. 장 실장은 세정의 잘못을 채민의 잘못으로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채민은 혼자 머쓱하여 뒷목을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는 아무도 없건만 공연히 주변을 돌아보며 작업실을 나왔다. 서늘한 복도를 터덜터덜 걸었다. 벽에 장식된, 오로지 점과 선으로만 그려진 그림들을 살피며 걷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 받은 세정의 사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 표정…. 이 표정 진짜….

‘귀엽다.’

어째서 귀엽지.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채민은 피아노 앞에 앉아서도 계속 사진을 바라봤다. 이윽고 앨범에 저장을 한 후 즐겨찾기를 해두었다. 그는 사진이 띄워진 화면을 그대로 켠 상태로 휴대폰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세정 없이 연습을 해봐야겠다. 그가 건반에 손을 올렸다.

***

채민의 집에는 피아노가 총 세 대 있었다. 작업실에 있는 디지털 피아노, 이 층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거실 홀에 있는 무광의 거대한 피아노. 그중에서 자주 쓰는 악기라면 단연 홀에 있는 피아노였다. 채광이 좋은 공간에 있어서 오래 앉아있기 좋고, 무엇보다도 소리가 깊어서 연주를 할 때면 상당히 만족감이 들었다. 채민은 아침 연주를 할 때에도 무조건 이 피아노를 사용했다.

요즘은 특히나 많이 앉아있는 편이었다. 개인 채널에 업데이트할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곡 연습에 돌입하면서, 그는 자투리 시간만 생기면 언제든 그곳에 앉아 라 캄파넬라를 연주했다.

하지만 몇 주째 연습하는 것치고 도통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진 못하고 있었다. 실력에 비해 눈이 지나치게 높아서일까. 초반 옥타브 도약이나 32분음표 부분에서 조금 삐끗하긴 했어도 금방 고쳤고, 힘 조절도 잘했으며, 페달도 잘 밟았다. 실수 없이 완주를 할 때가 많았으나, 뭔가 한 끗이 부족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표현법이 문제인가? 스킬이 부족했나?

오늘도 피아노 앞에 앉아서 혼자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던 채민은 세정에게 조언을 얻고자 고개를 돌렸다.

“어….”

옆자리가 비어 있다. 제 지루한 연습 과정을 굳이 지켜봐 달라고 세정을 옆에 앉혀두었는데, 그가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나 싶어 기다렸지만, 그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채민은 곧 포기하고 연습을 이어갔다.

그러나 두 마디도 이어가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세정 한정으로 관심병 환자였던 채민은 세정 없이는 연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채민은 그를 찾아 나섰다.

그는 서재에도, 주방에도 없었다. 현관 근처까지 나가봤음에도 찾을 수 없었다. 아예 밖으로 나가진 않았을 텐데, 어디로 갔지. 이 넓은 집을 다 둘러볼 수는 없고…. 채민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휴대폰을 챙겼는지 머지않아 연결음이 끊기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어디예요?”

채민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다른 한 손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의 초조함을 달래주듯 휴대폰 너머로 나긋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담배 피우는데.

“아, 테라스예요?”

채민은 냉장고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그는 즉시 걸음을 틀어 테라스 쪽으로 직진했다. 그러는 동안 세정이 염려를 담아 물었다.

-나 때문에 연습 중단했어요? 지금 내려갈까요?

“…형이 옆에 없으니까 연습이 안 되긴 했어요. 제가 가고 있어요.”

-바람이 세요.

마지막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전화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옮긴 것처럼 스피커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거세졌다. 채민은 걸음을 재촉했다.

테라스로 올라가자, 바로 세정의 등이 보인다. 그는 난간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눈 내리는 오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민은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섰다. 채민을 곁눈으로 확인한 세정이 난간에 걸어두었던 담요를 집었다. 몸에 찬 기운이 돌기도 전에, 어깨 위로 크고 두꺼운 담요가 덮어진다. 몸을 다 덮고도 모자람이 없는 크기였다. 복슬복슬한 털이 찬바람을 단단히 막아주었다.

세정이 담배 케이스를 흔들었다. 필래요? 표정으로 묻기에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한 개비를 빼내 입술에 물려줬다. 훅 들이마시자 불이 붙는다. 채민은 담요에 파묻혀 있는 팔을 빼내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담배를 붙잡았다.

“피아노 소리 듣기 싫어서 간 거는 아니죠?”

연기를 삼켜내며 물었다.

몇 주째 똑같은 곡만 연습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잘 안 되는 구간을 위주로 반복 학습 중이었다. 연주하는 당사자는 괜찮아도 듣는 입장에서는 괴로울 수 있었다. 더더군다나 세정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피아노를 질리도록 들어, 건반 소리라면 질색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그가 소음에 가까운 피아노 소리를 지금껏 참아준 것만 해도 굉장한 인내를 보인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정에게 자신이 피아노를 연습하는 동안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뭐한 게, 논문 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혼자 해도 상관없었지만, 피아노만큼은 세정이 꼭 지켜봐 주어야 했다. 혼자 치는 피아노가 어찌나 서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던지,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채민은 제 이기심이 미안해서 멋쩍게 웃었다. 마른 입술을 할짝거렸다. 세정이 연기를 뱉어내며 무심히 대답했다.

“정신병 걸릴 것 같기는 한데… 견딜 만해요.”

“…정말요?”

경악스러운 말이었다. 옆을 돌아보았더니, 세정이 슬쩍 웃는다. 그러나 농담의 기색은 없었다. 소음 때문에 괴롭다고, 장난으로라도 말한 적 없어서 그래도 견딜 만하니까 들어주고 있는 거겠지 생각했는데…….

“끝까지 들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채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넸다. 말투도 썩 성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안아주는 손길은 몹시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기댔다. 이 차가운 계절에 더 차가운 남자가 자신을 한껏 덥혀주고 있었다. 채민의 심장이 요동쳤다.

“편지는 쓰고 있어요?”

가까이서 들린 물음에 채민은 한 텀 늦게 대꾸했다.

“네.”

채민의 대답은 끝났는데, 세정은 그가 더 할 말이 있을 거라는 듯 잠자코 기다렸다. 채민의 눈동자가 의아하게 굴러갔다. 세정이 연기를 내뱉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서?”

“예? ……아. 열심히 쓰고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난 편지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숨어서 쓰는 거예요?”

채민은 담배를 빨다 말고 말했다.

“형이랑 있을 때는 못 쓰죠. 논문 연구하다가 조금씩 씁니다.”

“쓴 부분까지만 보여주면 되겠네요.”

“어…… 네? 안 되죠, 형.”

“안 썼네.”

“아니에요. 정말 썼어요.”

“그럼 보여줘요.”

“그건, 그건 안 돼요.”

“봐. 안 썼잖아요.”

“진짜 썼어요. 정말 확실히 썼어요. 지금 보여줄….”

편지를 가져오려고 휙 돌리던 몸을 멈추어 세웠다. 바보 아닌가. 채민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난간에 몸을 붙였다.

“진짜 안 돼요….”

채민은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세정이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그의 볼을 톡 건드렸다. 한 번으로는 부족한지 턱 아래를 또 톡 하고 쳤다.

“얼른 써줘요. 난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네. 그럴게요.”

망설이던 채민은 덧붙였다.

“참을성을… 길러보시면 좋겠어요.”

뭐라고? 과장되게 눈을 뜬 세정이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찍어 눌러 완전히 불을 꺼버리곤 손을 털었다. 그러다 아까의 말이 뒤늦게 웃겼는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우채민 씨….”

세정은 채민의 이름을 몇 번 읊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입술에 호선을 그은 채 먼 하늘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또 채민을 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혼자 담담히 있기 뭐했던 채민도 어설픈 눈웃음을 쳤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정적이 돌았다. 마치 할 말을 잃은 양 세정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피했다.

세정은 제 쪽에선 스킨십이나 애정 행각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채민이 먼저 징징거리며 달려들면 좀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애교 섞인 눈웃음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교가 서툴든, 능숙하든 무관하게.

채민은 그 점이 새삼 웃겨서 소리를 죽여 웃었다.

작게 웃으려고 목구멍을 조이다, 그만 숨이 잘못 삼켜져서 사레가 들렸다. 채민은 콜록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기침을 하느라 아래로 내린 담배를 세정이 쓱 빼갔다. 그리고 담요 밖으로 나온 팔을 잡아 안쪽으로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채민은 세정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다가 기침이 수그러들 즘에 말했다.

“추운, 게 아니고…. 사레들린 거예요.”

“그래도 이제 들어가요. 안에 있었으면 내가 갔을 텐데.”

채민은 목까지 감싸고 있던 담요를 아래로 당기고 침을 삼켰다. 세정은 이제 정말 들어갈 모양인지 재떨이를 안쪽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그를 보며 채민이 말했다.

“형 찾으려고 그냥…. 그런데 형. 저도 CCTV 보게 해주시면 안 돼요?”

세정이 의아하게 바라본다. 채민은 잔기침을 마저 털어내고 말을 이었다.

“아까 형 찾는데 집이 너무 넓은 거예요.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막했어요. 카메라라도 있으면 편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요.”

“그리고 위치 추적도 하면 안 돼요? 형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은데, 일일이 문자 하는 게 불편해서.”

그 말에 세정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앞서 한 부탁을 선뜻 수락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뜸을 들였다. 그는 대답은 않고 입술을 혀로 쓱 훑었다. 붉은 혀가 잠깐 보였다가 삼켜진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후 그는 난감한 듯 턱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네….”

“그러다 내가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으면 어떡해요?”

“…….”

“난 어디냐는 우채민 씨 문자가 그렇게 좋던데.”

설마. 그가 궁금해지지 않게 될 리가 있나. 지금도 매 순간, 매시간, 매초 세정이 궁금해 죽겠는데. 그는 채민이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니, 사랑하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채민은 이 부분에 관해서 편지에 적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우채민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채민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아니에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냐는 문자가 좋다면 몇백 통이든 보내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원래도 세정이 귀찮게 느낄까 봐 문자를 자제하고 있었으니, 몇 통 더 보내는 것이야 문제도 되지 않았다.

“들어갈까요? 채민 씨 그 소음이나 다시 들으러 가죠. 이번엔 내가 영상으로 찍어줄게요.”

“아직 영상으로 찍을 준비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정이 채민을 뒤에서 안아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심히 직진했다. 채민은 얼결에 담요에 갇힌 채로 뒤뚱뒤뚱 걷게 되었다. 꼭 펭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

하얀 손가락이 음조에 따라 바삐 움직였다. 건반 위를 부드럽게 도약하고, 그대로 미끄러져 침착하게 곡조를 짚어나간다. 깔끔한 페달링, 불필요한 기교 없이 연주되는 마지막 절정. 차분히 연주를 끝마친 채민은 실수 없이 완주했다는 안도감에 휩싸일 새도 없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이번엔 잘 찍었겠죠?”

채민은 세정의 눈치를 살피며 성급하게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시선 사이로 은근하게 묻어나오는 불신을 감추고자 입술을 꾹 물고, 카메라를 노트북에 연결시켰다. 다섯 개의 영상이 차례로 떴다. 모두 라캄을 완주하는 그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었다.

아니, 제 모습을 담았다고 말해도 될까.

채민은 꺼림칙한 얼굴로 가장 최근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이 재생될수록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기대감이 황당함으로 변해갔다. 재생되고 있는 노트북 화면 속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채민의 모습이 머리카락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영상 어딘가에서 라 캄파넬라의 피아노 곡조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영상을 찍긴 찍은 모양인데, 정작 초점은 음악을 만드는 대상이 아니라 허공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구도로 영상을 찍는 만행이 벌써 다섯 차례나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엔 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나.

채민은 속으로 식식대며 한마디 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럴 겨를도 없이 세정이 뒤에서 안아왔다. 쭈그리고 앉아있는 채민에게 바짝 붙어 앉아서, 어깨에 턱까지 올려놓았다. 갑자기 배 속이 근질거렸다. 채민은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번 것도 인터넷에 못 올려요.”

“왜요?”

“구도가…….”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고심했다. 그러다가 왜 연주 때문도 아니고 영상 구도 때문에 이리 애를 먹어야 하나 심통이 나서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상에 제가 없어요, 형. 대체 뭘 담은 거예요.”

“음악을 담았죠.”

“으음…. 얼굴은 안 나와도 제 몸의 일부라도 나와야 돼요.”

채민이 알아들었냐는 듯 고개를 약간 돌려서 제 어깨에 턱을 대고 있는 세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정은 곧바로 채민의 입술 언저리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채민이 미소를 지으려다가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한 번 더 입맞춤을 해주니, 이번에는 왼쪽 뺨을 크게 실룩거렸다.

“아…. 나 죽이려고.”

웃음기를 억누르며 세정은 채민의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동시에 채민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한동안 귀여워 죽겠다는 듯 채민을 꽉 끌어안고 있던 세정이 속삭이듯 말했다.

“누가 우채민 씨를 보내줬을까.”

채민은 달아오른 귀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신이? 운명이?”

“운명이…….”

입술로 읊조린 세정이 채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랑 또 만나줘요.”

채민의 얼굴이 어정쩡하게 굳었다. 채민은 미소를 지은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표정으로 숨을 멈추었다. 이렇게 깊은 애정이라니. 온몸이 녹아내릴 만큼 좋아서, 도리어 마음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이번 생도 힘들어했던 사람이 다음 생을 기약하고 있다. 삶을 더 바라고 있다. 연소자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가 너무 대견했다. 망설이던 채민은 결국 이렇게 대꾸했다.

“네. 형만 좋다면 꼭이요.”

“내가 우채민 씨 가족이 되어서 처음부터 예뻐해 줄게요.”

“…네?”

채민은 미간 사이를 좁히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또 애인해주면 안 돼요?”

“가족도 해주고, 애인도 해줄게요.”

“하하…. 다음 생은 더 험난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무슨 뉘앙스로 그리 말한 것인지는 알겠다. 채민은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세정의 팔을 가볍게 문질러주었다.

“아무튼 형. 저인 거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찍어줬으면 좋겠어요. 몸이 조금이라도 나와야 채널에 올릴 수 있으니까.”

세정이 한숨과 함께 팔을 풀었다. 채민은 지지대를 잃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를 양반다리로 바꾼 채민이 세정을 돌아봤다.

“…왜요?”

“난 제대로 찍었어요, 우채민 씨.”

“……아니던데.”

“다시 봐요. 몸도 다 나올 텐데.”

정말요? 채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장된 영상 중에서 하나를 클릭하고 쭉 감상했다. 하지만 영상 어디에도 채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안 찍혀있는데…….”

“여기에 찍혀있네요. 옷자락이.”

세정의 말에 채민은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과연 한구석에 채민의 바지가 조금 보이기는 했다. 바지…. 그래, 바지가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게 왜……내 몸이지?

“이건 제 몸이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바지잖아요, 이거는…. 몸은 저를 이루고 있는 형상을 말해요.”

채민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세정이 채민의 목덜미 부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채민 씨는 밖에 나갈 때 바지 안 입고 나가요?”

“입고는, 가죠.”

“그럼 집에선 벗고 있어요?”

“…아니요. 입고는 있어요.”

“샤워할 때 말곤 입고 있는데, 왜 이게 채민 씨를 이루는 형상이 아니지?”

당혹스러웠다. 채민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 한낱 바지 따위가 내 몸의 일부가 된 거지? 형이랑 섹스할 때에도 바지를 벗지 않느냐고 받아칠까 잠시 생각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해야 자주 하는 걸로 쳐줄 수 있는 채민의 기준에서는 세정과 자주 한다고 보기는 어려워서 그런 걸로 바지를 자주 벗는다고 예시를 들 수가 없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채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로써 결론이 났다. 세정은 채민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 머리카락 한 올도.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그가 순순히 찍어준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을 해야 했는데. 얼굴도 아니고 손만 나오는 거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

채민은 문득 결심한 것처럼 뒤로 넘어지듯 몸의 힘을 풀었다. 채민의 바로 뒤에 앉은 세정을 꾹 누르고,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흔들어서 그를 괴롭혔다. 졸지에 머리카락으로 공격을 받게 된 세정이 조금 인상을 쓰며 채민의 허리를 잡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틈도 없이 끌어안는다. 채민은 머리를 흔들며 계속 장난을 쳤다.

“잠깐…. 잠깐.”

목 부근으로 낮은 한숨이 내려앉는다. 순간 놀란 채민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틈을 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세정이 도착한 메시지를 읽어 내렸다.

화면을 보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길었다. 세정은 채민에게서 아예 몸을 떼어내고 계속 휴대폰을 쳐다봤다. 그는 채민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고 입술을 떼었을 때에서야 화면을 껐다.

“봤어요. 다시 이리 와요.”

세정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채민을 도로 껴안았다. 채민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세정이 제 귀에 훅 바람을 불어넣으며 장난을 치자 하려던 말도 잊고 몸을 비틀었다. 아, 형…….

***

약 일 년 만에 채민의 개인 채널에 영상이 하나 올라갔다. 제목은 . 실반지 하나만 낀 흰 손가락이 건반 위를 리듬감 있게 오가는 모습이 비스듬한 구도로 찍힌 커버 영상이었다. 영상을 소개하는 부분에는 촬영, 편집, 연주 우채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소개에서 알 수 있듯 세정이 찍어준 영상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조회 수는 빠르게 늘었고, 댓글도 적지 않게 달렸다. 일 년 만이었음에도 괜찮은 주목도였다. 채민은 초반에 달린 댓글만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논문에 집중했다.

그가 다시 영상을 떠올린 것은 나흘이 지나서였다. 여느 때와 같이 논문을 쓰던 오후, 불현듯 채널에 올린 커버곡이 떠오른 채민은 간만에 영상을 확인하러 갔다. 영상에는 그동안 댓글이 좀 쌓여있었다.

<남정현: 이젠 하다하다 손가락 보고 설레버리네;>

<융: 지금껏 수많은 라캄을 들어봤지만 이분이 가장 최고네요 구독하고 가요>

<공제범: 페달 쓰지 말고 해보지. 잘 들었습니다만 너무 감정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느낌이… 손에 힘 빼고 치는 연습을 해보세요. 좀 더 깔끔한 느낌이 날 겁니다^^>

<주원윤찬결혼함: 전공자가 아니라는 게 제일 놀랍네ㅋㅋ>

…(중략)

거침없이 커서를 내리던 손이 문득 멈추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연락 주세요.’ 라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서 조금 오래 보았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 댓글을 남긴 사람이 누구인지 감이 왔다. . 닉네임을 다시 확인한 채민은 책상을 뒤져서 먼지가 묻은 명함을 하나 찾아냈다.

보관이 허술하여 더러워진 것도 있지만, 명함은 덧대어 쓴 전화번호 때문에 원체 지저분했다. 앞자리 숫자가 다비드 한, 이라는 이름을 절반쯤 가리고 있었고, 잉크가 모자랐는지 흐리게 쓰인 부분도 있었다. 채민은 엄지손가락으로 명함을 쓱쓱 문지르다가, 지난번 세정의 회사에 놀러 갔다가 만난 그 남자의 얼굴을 희미하게 떠올려봤다.

그러고 보니 영화 음악을 작곡해달라고 했었지.

제가 만드는 음악이 좋다고 했다. 제가 그리는 감성이 취향이라고 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머릿속으로 그렸던 불분명한 멜로디가 제 음악을 듣고서 명확해졌노라고 말했다. 채널에 있는 어떤 자작곡은 너무 탐이 나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며 건넨 제안이었다.

채민도 웬만하면 제안을 수락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나지 않아 고민만 하고 있던 차, 그가 이렇게 댓글까지 남기며 적극적으로 나오자 다시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한다고 할까. 독립 영화는 일전에도 작곡해본 적 있으니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경험 쌓는 일이니 손해 보는 제안도 아닌데…….

채민은 명함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노트북에 떠 있는 논문 내용을 흘끔 보곤 싱겁게 명함을 내려놓았다. 그래. 이걸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은 논문에 시간을 쏟기도 벅찼으니까. 게다가 만약 시간이 남는다 해도, 그 시간은 세정을 위해 써야 했다.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채민이 음악을 만든답시고 취미 생활에만 몰두해 있으면, 세정의 기분이 상할 것이다.

세정이 누구 때문에 독일까지 왔는데.

채민은 머리를 휘저었다. 그는 다시 논문 쓰기에 몰두했다. 그런데 타자를 몇 번 치기도 전에 휴대폰이 진동했다. 휴대폰을 집어 화면을 보았다. 세정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늦어요. 미안>

…어. 음. 또 늦는구나. 채민은 즉각 답장하려다가, 손가락을 힘없이 내렸다.

며칠 전부터 세정의 퇴근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그는 일이 많아졌다고만 말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뉴스만 봐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반년 전 폭발 위험을 대폭 감소시킬 특수 배터리가 장착된 차라며 야심 차게 출시되었던 전기차가 근래 연달아 폭발 사고를 일으킨 이슈 때문일 것이다. 최근 그것을 피해자의 자작극으로 일축한 배터리 회사의 대처로 논란이 더욱 커지면서,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짬 내어 문자도 보내줬는데, 답장은 해줘야 했다. 채민은 성의껏 문자를 보냈다.

<괜찮아요. 조심히 오세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귀 끝을 엄지로 만지작거리던 그는 미련을 담아서 한 번 더 메시지를 작성했다.

<천천히 오세요>

그는 한 번 더 보내려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다시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오늘 분량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삼십 분이면 끝날 것 같았다.

이거 다 쓰면 다음에 뭐하지.

…내일은 또 뭐하지?

멍한 시야로 아까 내던진 명함이 걸렸다.

***

“……오전에 팀 회의 하나 있으십니다. 올핸즈 미팅은 다음 주로 미뤄져서 오후 스케줄은 따로 없습니다. 아, 심평위에서 오늘 중으로 권고가 내려오면 다시 회의가 소집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채민은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미간이 찌푸려지며, 흐리터분하던 감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곧 윙윙거리던 소음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조악하게 모여들었다.

“또 이건 무관한 이야기지만, 배윤건 실장님이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고 하시는데 어쩔까요.”

“…사적으로?”

“예.”

“아들이랑 같이요?”

딱딱한 목소리 뒤로, 낮게 끼어든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큼했다. 늦은 새벽, 잠에 젖어 통화하는 듯한 늘어지는 말투였다. 채민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느리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침실 문 앞에 기대어 선 채로 소매를 단정히 정돈하는 세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빈 씨와 회사 설립 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밥 한 끼 먹자고 하긴 했지만 아마도 도빈 씨와 화해해 볼 심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채민은 굳이 그쪽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지만, 그곳에 장 실장이 서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딱딱하면서도 묘한 울림이 있는 게,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를 통해서 말이죠. 그쪽은 내가 진심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상사님이 분란을 야기할 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만, 듣지 않으셨습니다.”

“집안이 밝아서 좋네요.”

눈을 가늘게 뜨고 읊조리던 세정이 침대 쪽 움직임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채민에게 지체 없이 걸어왔다. 세정은 막 몸을 일으키려는 채민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그를 도로 눕혔다.

“더 자요. 피곤해 보여요.”

“…….”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평소보다 많이 잤는지 머리가 무거웠다. 고개를 젓는 채민에게 세정이 말했다.

“작업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여기까지 옮겨오는 동안 한 번을 안 깨던데.”

작업실에서? 채민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러니까, 세정을 기다리며 논문을 쓰고 있다가… 조금 출출해서 냉장고를 기웃거렸고… 마땅히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서 노트북으로 웹서핑을 했고…. 그리고? 기억이 없다. 그대로 책상 한쪽에 엎드려서 잠들었나 보다.

그렇다면 꽤 일찍 자기 시작했다는 건데….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지. 세정이 출근 직전이라면 지금 여덟 시쯤 되었나.

“갈게요. 여기 있어.”

“…형, 밥은.”

밥은 먹고 가는 거냐는 질문이었는데, 세정이 잘못 알아듣고 답했다.

“준비해두라고 할게요.”

“아니요. 형이요.”

물론 먹었을 리가 없다. 채민이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만, 세정 혼자라면 그는 물 한 잔만 마시고 출근했다. 채민은 쓸데없는 질문은 넣어두고 몸을 일으켰다.

“배웅하고 싶어요. 잠시만요.”

제 쪽으로 기울이고 있는 세정의 가슴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실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장 실장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니 그가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화답을 해왔다. 그리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니건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하게 꾸민 두 남자가 꼬질꼬질한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니 상당히 게으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채민은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갔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다. 차가운 물로 정신부터 깨우고 양치를 했다.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오자, 화장실 옆에 작게 비치된 파우더 룸에 세정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뭐 해요, 형?”

“오늘 뭐 뿌릴까요?”

콘솔 위에는 네 병의 향수가 일렬로 놓여있었다. 드레스 룸의 디스플레이 선반에서 같은 브랜드의 향수로 몇 개 골라온 것 같았다. 오늘은 이 브랜드에 꽂혔나. 얼굴을 닦아낸 수건을 저 멀리 내던진 채민은 세정을 흘끔흘끔 보았다.

예쁘게 고정시킨 머리에, 주름 없이 빳빳한 셔츠, 그리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한 달에 한 번 입을까 말까 싶던 조끼까지.

“밖에 잘 보일 사람 있어요?”

“…….”

오늘따라 멋있어서 한 농담이었는데, 드물게도 말문이 막혔는지 콘솔 위를 두 손으로 짚고 있던 세정이 고개만 돌려서 채민을 보았다. 머쓱해진 채민은 얼른 가까이 다가가서 향수를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뭐가 좋지……. 채민은 우드 계열의 향수를 슬쩍 집었다가 내려놓고 끝에 있는 파란 병을 집어 건네주었다. 난 시트러스 향이 더 좋으니까.

세정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군말 없이 받았다. 그리고 목 부근에 두 번 정도 뿌린 뒤 내려놓았다.

“어때요.”

잔향이 감돌아야 제대로 향을 느껴볼 텐데, 세정은 성급하게 채민을 향해 팔을 벌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채민은 안기라는 말은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세정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세정은 제게 스며든 향기를 남김없이 공유해줄 것처럼 채민을 안고 비볐다. 향 때문에 어지러워서 눈가를 한 번 찡긋한 채민이 애써 웃었다.

“음. 좋네요.”

“정말?”

“네.”

“그러면 우채민 씨….”

세정은 채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밖에서 꼭 봐요, 우리.”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채민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녜요. 농담한 겁니다. 잘 갔다 오세요.”

“더 잘 거죠? 자고 일어나면 문자 넣어줄래요?”

세정이 시계를 톡톡 건드렸다.

“오늘은 카메라 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무슨 카메라…. 의아해하던 채민은 뒤늦게 집안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독일 집에도 카메라는 당연히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집 안에 카메라가 있는 게 너무 당연해서, 이렇듯 한 번씩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지 않나. 집 안을 들락거리는 사용인들은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카메라에 무심했고, 무의식으로라도 천장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주 교육을 잘 받은 것처럼. 그러니 채민도 집 안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그 이상한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할 수밖에.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집에 카메라가 없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세정이 그걸 떼어버리면 자신에 대한 관심이 식었나, 애정이 식었나, 오히려 걱정이 될 것 같았다. 마치 침실에 있는 펭귄 인형에 정이 든 것처럼 그것들에도 정이 깊이 들어버린 것이다. 으음…. 근데 이건……좀 이상한데. CCTV에 정이 들었다니….

“예. 그럴게요.”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며 채민은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언제쯤 오세요?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질문이 난감했나. 세정은 뜸을 들이다, 저 멀리 스토커처럼 서서 두 사람의 작별 인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장 실장을 쳐다봤다. 세정이 다시 채민을 보며 말했다.

“일찍 올게요.”

“아…. 네.”

일찍… 못 올 것 같은데. 채민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

이른 오후 즈음, 지수에게서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논문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던 차였기에 채민은 반갑게 연락을 받았다. 눈가를 가볍게 눌러서 마사지하며 의자에 기대앉자,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야, 우채민. 잘살고 있냐?

고요한 장소에 홀로 있는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몹시 쨍했다. 채민은 스피커 모드로 전환되어 있는 휴대폰 볼륨을 약간 낮추며 반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 오랜만이네. 난 졸업 논문 쓰느라…그냥 그렇게……너는? 잘 지내냐?”

-나? 나 진짜. 아 존나……. 너 배도빈 기억나냐? 그 씨발놈.

다짜고짜 쏟아진 욕설에 흠칫 놀랐다. 배도빈? 배도빈은 알지만, 그게 지수가 씨발놈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우리 학교 그 새끼 말이야. 그 또라이 새끼.

“아, 어. 왜?”

-배도빈 새끼 사업하는 거 알아?

채민은 순간,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고 있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도로 의자에 기댔다. 배도빈과 이따금 연락을 하긴 하는데, 최근엔 세정 때문에 그의 문자를 일방적으로 씹고 있어서 그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뭐, 씹지 않았다 해도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나누는 문자라고 해봤자,

<뭐해?>

<?왜요>

<?>

<여자애들한테 단체문자 보낸다는 게 너한테도 간 모양?>

<신경 꺼라>

<네>

이런 쓸모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뭘 하든 음악 관련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업이라니 신기하다. 채민은 말없이 감탄하다가 통화임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배도빈 회사 차렸냐?”

-어. 근데 아이템이 뭔 줄 아냐? 음악도 아니야. 게임이야. 친한 형들이랑 게임 회사 차렸어. 어이없지? 그럼 피아노는 왜 배웠고, 작곡은 왜 배웠대. 비싼 등록금 아깝게 학교는 왜 다녔어.

그의 목소리에서 노여움을 읽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화였다.

“어……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작곡 전공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하잖아. 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씨발!

“…왜 욕인데.”

주변이 하도 조용한 터라 찰나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채민은 떨떠름하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곁에 누구 있냐?

크게 욕을 한 것이 찔린 듯 지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목소리에 언뜻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간다. 안타까워서 한숨이 나왔다.

“아무도 없어.”

-그럴 거야. 시간 계산해서 전화한 거라고. 찌질하다 하기만 해. 그…씨…시, 히, 바알 새끼만 생각하면 진짜….

“…….”

-아무튼. 몇 주 전에 걔를 우연히 만났는데, 걔가 갑자기 뭐에 꽂혔는지 나 보고 자기랑 같이 음악 작업해 볼 생각 없냐는 거야. 평소에 남 작업물이라면 개무시하던 놈이. 아마도 내가 호구처럼 보였나 봐.

“응? 응.”

단지 배도빈의 뒷담화를 하려고 전화를 건 것인가. 지수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도 충분히 논문을 쓸 수 있을 듯해서 휴대폰을 책상 언저리에 내려놓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논문을 쭉 읽어 보고, 고칠 점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난 아무 회사나 들어갈 생각이 없단 말이야. 제대로 된 회사 들어갈 거라고. 모바일 사도 괜찮고.

“뭐? 합격했어?”

-아니. 해야지.

“아.”

-그냥 들어봐. 그런데 걔가 자꾸 돈 많이 준다고 꼬시길래 한 일 년 경험이나 쌓아보자 하고 가볍게 들어갔다? 와… 이런 개새낄 봤나. 나 존나 부려 먹잖아. 곡 작업하러 온 사람한테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고, 복사해오라고 하고. 그래도 여기까진 이해돼. 근데 뭐? 심심하니까 춤춰 보라고? 여기가 군대야?

“춤? ……그건 심하네.”

-그니까. 근데 십만 원 준대서 하긴 했어.

“…….”

-아주 내가 호구야. 또 나보고 코딩을 하래. 간단한 건 안 어려운데 왜 여태 안 배웠녜. 미쳤나 봐. 시발. 내가 존심이 있지, 여기서 썩을 인재냐?

“그럼 나와.”

-나도 나가고 싶다…. 자주 회사 옮기면 안 좋대서 버티고 있는 거야. 한 육 개월만 하고 그만둘까 봐. 짜증 나네.

채민은 어느덧 노트북에서 손을 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쩝 다시며 “그럼 나와.” 말고 다른 대꾸할 말을 찾았다. 혼자 있다 보니까 사회성이 많이 떨어진 건지 마땅히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건조하게 물었다.

“회사는 잘 돌아가?”

-신생 회산데 돌아가긴 뭐가 돌아가. 근무 시간에 배도빈 혼자 외제차 타고 돌아다니는 거 보면 이 회사 망해도 그 새낀 혼자 유유자적할 것 같아서 배만 아프지. 아주 불쾌한 놈이야.

“힘들면 여기로 올래?”

어색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채민은 책상 위에 있는 자료들을 괜히 뒤적거렸다. 스피커 너머로 잠시 침묵이 있다가, 불쑥 분노를 눌러 담은 목소리가 터졌다.

-너 있는 곳으로?

“…….”

-미쳤냐? 내가 거길 왜 가. 배도빈 피하자고 그 새끼를 봐? 나는 말이에요. 페이스 코트 제품이라면 불매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에요. 그… 레몬 초콜릿 빼고. 그거 맛있더라. 뭔 놈의 회사가 그렇게 큰지 불매를 할 수가 없네. 아무튼, 난 누가 내 멱살 잡고 협박해도 절대 안 가. 난 아직 쌓인 거 존나 많거든?

채민은 종이를 만지작대던 손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하더라도 세정이 지수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사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수는 엄연한 피해자였으니, 그를 세정과 붙여놓는 것은 사실상 2차 가해였다. 채민에게서 답이 들려오지 않자 지수가 말을 돌렸다.

-네가 오면 되잖아. 너 왜 한국 안 오냐? 교수 된 뒤에나 올 거냐?

“아냐. 나 박사 학위는 한국에서 딸 거야.”

-…그래? 그럼 곧 보겠네. 열심히 하고. 나도 일해야 한다. 지금 회사에 혼자 있거든. 쩔지?

쩔지, 라는 물음은 천연덕스러웠으나, 웃음이 나지는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한국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밤… 열두 시? 그쯤 되었을 것 같은데.

신생 회사이니 사람 몇 명이서 몸을 갈아가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조리했다. 창업 멤버인 배도빈은 일도 안 하고 놀러 다니는 것 같은데, 왜 애먼 지수의 몸이 갈려야 하는 것인가. 도빈이 해야 하는 일을 지수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매일 열두 시 넘어서 퇴근하냐?”

-그건 아니고. 오늘은 일이 많아서.

“지겹겠다.”

-일은…. 뭐, 일은 재밌지. 작곡하는 건 재밌는데…그것만 하는 건 아니니까. 너도 시간 나면 일 받아서 작곡 하나 해봐. 시간 금방 가. 아…. 내가 미쳐가네. 이딴 소리나 하고.

채민과 지수가 동시에 가볍게 웃었다.

-그래, 너 힘내고…. 이제…… 어?

갑자기 휴대폰 너머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까이서 들렸던 지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왜 다들 오셨… 예? 아, 진짜요? 이거 진짜 맛있죠. 좋기는 한데. 흠, 무슨 신종 고문도 아니고 매일 치킨을. 아무튼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들은 한데 섞여 기묘한 웃음소리를 만들어냈다. 서로 친하지 않은 이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예의상 웃어 보이는 것처럼 어색하게만 들리는 소리들. 그러나 곧 서로 농담도 하고 킬킬 웃기도 하며, 전화 너머로 계속 훔쳐 듣는 것이 미안해질 만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전화는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수가 자신을 잊은 모양이다. 채민은 인사도 못 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암전된 화면을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거나 지수가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놓인다. 비록 악덕 회사지만, 그 와중에 일은 재미있다고 하니…….

……일이 재미있다니.

난 지금 재미가 없는데. 컴퓨터 화면으로 눈길을 돌리니, 버석하고 지루한 논문이 보인다. 여러 사람과 교류해가며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는 지수와 달리, 정적이고 고요한 장소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해나가며 지루한 결과물을 만들고 있는 자신.

논문을 보고 있자면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든다. 교수가 되면, 자신도 일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걸까? 오히려 작곡할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어서 곡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닐까?

작곡과 교수를 지망하면서도 작곡 하나 못하고 있는 요즘, 지금의 의문이 단지 염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정말로 더 바빠지기 전에 작곡 한 번 해볼까.’

마침 세정의 부재로 시간이 많이 남은 차다. 채민은 지저분하게 구겨진 명함을 꺼냈다. 그는 약간의 망설임을 가지고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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