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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한과 만나기로 한 곳은 뮌헨의 한 그리스 음식점으로,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채민은 도착하자마자 식당의 외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고풍스러운 멋이라곤 조금도 없이, 그저 조잡하게만 꾸며진 건물. 쓰러져 있는 조명이나 투박한 LED 간판 따위가 사진 속에서 더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확실히 외부인을 타깃으로 한 식당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떠들썩한 소리가 순간 귀를 울렸다. 관광지와는 동떨어진 곳에 있어 한적할 줄 알았더니 손님이 제법 많다. 채민은 내심 놀란 얼굴로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이 혼자 앉아있는 동양인 남자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만나려는 사람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웬 남자 하나가 한쪽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채민은 당연히 저 사람이 그때 세정의 회사 앞에서 만났던 남자겠거니 하고 적잖이 반가운 얼굴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자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소파와 라탄 의자가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다. 다비드가 소파 앞에 서 있었기에 채민은 그 반대편으로 가 인사했다. 다비드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야아, 겨우 뵙네요? 반가워요.”
“네. 언제 오셨어요? 제가 많이 늦었나 봐요.”
“아뇨. 제가 빨리 온 거예요. 미리 와서 이것저것 준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메뉴도 보고요.”
다비드는 제 몫의 메뉴판을 펼쳐 채민 쪽으로 쓱 밀었다. 주문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방금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보여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가벼운 손짓이었다. 채민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를 대충 훑었다. 채민이 그 짧은 사이 음료 쪽 메뉴를 깊게 살폈다는 걸 예리하게 캐치한 다비드가 물었다.
“일단 맥주 두 병 시킬까요?”
“전 물 한 병이면 돼요.”
다비드는 맥주 두 병과 물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주문한 것이 나오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꿀꺽꿀꺽 마셨다. 채민도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물이 들어가니 미미하게 자리 잡고 있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채민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식당의 내부를 살폈다.
“여긴 외곽이라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꽤 있네요.”
“여기가 맛집으로 소문났거든요. 저도 자주 옵니다.”
“아…. 이따 메뉴 고를 때 추천해주시면 되겠네요.”
채민의 말에 다비드가 입꼬리를 씩 올리고 메뉴판을 끌어왔다.
“추천이라. 혹시 비건인가요? 세미? 오징어는 드시나?”
“채식 안 합니다. 고기도, 해산물도 좋아해요.”
“오케이. 그럼 우리 네 개 정도 시킵시다. 두 개, 두 개 해서 나눠 먹으면 되겠어요.”
“…예? 다 못 먹을 텐데요.”
“제가 잘 먹습니다. 그리고 여기.”
그는 자세를 낮추며 소곤소곤 말했다.
“쥐꼬리만큼 나와서 음식 한두 개론 배도 안 차요.”
아아. 채민은 눈썹을 올렸다. 다비드는 저번에 무슨 음식을 시켰는데 양이 적어서 다섯 번이나 더 주문해야 했다며 혀를 찼다. 그 과장된 투덜거림이 웃겼던 채민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며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자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채민의 옆선이 다비드의 눈에 들어왔다.
코가 잘생긴 남자는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다던데, 옆 선이 특히 예술적이었다. 여자깨나 후리고 다녔을 법한 까리한 외모였다. 다비드는 제 턱을 문지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봐도 봐도 잘생겼네요, 채민 씨는.”
다비드가 대놓고 칭찬을 했음에도 채민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질리도록 들어서 지겨워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잘생겼다, 예쁘다, 귀엽다 하는 말들은 세정이 해주지 않으면 그냥 감흥이 없었다. 채민은 담담히 말했다.
“…대표님도 잘생기셨습니다.”
거짓말도 자꾸 하다 보니 느는 것 같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없던 뻔뻔함도 생겨서 이제는 곧잘 마음에도 없는 말을 구사해내곤 했다. 다른 언어를 쓰면서 거침없어진 부분도 있었고.
“아, 그래요? 한국 사람들이 보기엔 좀 괜찮은 스타일인가? 여기선 통 여자친구가 안 생기네.”
“글쎄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잘 몰라서.”
“보통 여자한테 인기 있겠다 없겠다는, 같은 남자가 봐도 알지 않아요?”
지금 여기서 한국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만한 얼굴인지 아닌지 평가해달라는 건가. 남 외모야 어떻게 생겼든 전혀 관심 없는 채민은 얼굴 하나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로 남들과 그리 다르지 않게 생긴 남자의 얼굴을 몇 번이고 뜯어봐야 했다.
“인기 많으실 것 같아요.”
잘 모르겠지만.
“하하, 됐어요, 됐어. 흐음…… 일단 시킬까요?”
다비드가 맥주로 입을 축이곤 메뉴판을 집었다.
“다 잘 먹는다고 했으니까….”
다비드는 직원을 불러서 주문을 했다. 한참 뒤, 테이블에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채워졌다. 큼지막한 피타와 수블라키, 새우와 생선 요리, 샐러드, 감자튀김, 이어서 문어까지. 심지어 디저트는 나중에 나온다고 했다. 다비드가 다 먹는다고 했으니 문제 될 건 없지만, 물병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아서 좀 불편하기는 했다. 채민은 물병을 제 옆자리에 내려놓고 식기를 들었다.
“제가 사는 거니까 마음 놓고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이래 봬도 여기 어-엄청 비쌉니다. 이번 달 용돈 탕진할 예정이에요.”
남자의 말에 채민은 포크를 들려던 손을 주춤했다.
“…반반 낼까요?”
그러자 남자가 킬킬 웃었다.
“농담이었어요. 같이 일하자고 꼬시러 나온 입장에서 반반은.”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대학원생이 돈이 어디 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채민의 손목을 흘끔 보면서 그런 소리를 한 것으로 보아 실없는 말임이 분명했다. 채민은 머쓱해 하며 시계를 차고 있는 손목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음식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비드는 샐러드를 국수처럼 먹었고, 채민은 앞에 있는 감자튀김을 두 개씩 집어먹었다. 기름진 음식이 입에 들어오자 입맛이 돌면서 몰랐던 허기가 진다. 아침 일찍부터 급하게 나가는 세정의 입에 주스를 물려주기 바빠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그런데 형은 뭘 좀 먹었을까. 아침에, 세정은 제 입에 들어온 빨대보다도 오늘 다비드와 만나기로 했다는 채민의 말에 더 관심을 두었다. 주스를 받아 들지 않고 채민만 쳐다보았을 정도로.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시선을 피하던 눈.
그는 채민을 쏘아보고 싶을 땐 대신 다른 곳을 노려보았다. 다비드와의 약속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였다.
“아, 채민 씨.”
“예?”
상념에서 깨어난 채민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회사 앞에서 만났었나? 그랬죠, 아마.”
다비드가 음식을 마저 씹어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나서 명함 뺏어갔던 그분, 누구예요? 그 회사 다니시는 것 같던데.”
“……왜 물으세요?”
“음.”
자신이 세정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도 아닐 텐데 묻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채민은 물로 입을 헹구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비드는 바로 용건을 말하는 대신 식기를 매만지며 뜸을 들였다. 입술을 물었다가 떼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분 참 잘생겼다며 시답잖은 말이나 늘어놓을 줄 알았기에, 수상쩍은 그의 태도에 공연히 긴장이 되었다. 뜸 들이며 하는 말치고 좋은 말은 없었으니.
“그……. 인터넷에 그,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는데 언젠가 기사 하나를 봐서.”
“네.”
“혹시 그분 페이스 코트 회장님 아들인가요? 바이크 선수.”
채민은 속으로 안도했다. 사실 세정이 언제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범죄들을 많이 저지른 탓에, 누군가 세정을 두고 의문스러운 표정이라도 짓는다면 혹시 사건 목격자인가 하고 괜히 긴장이 되고는 했다. 사실상 그들이 세정을 보는 이유는 잘생겨서거나, 혹은 뉴스에서 본 얼굴이라서였을 뿐인데.
“제가 무슨 기업 회장님 차남까지 기억하고 그럴 만큼 사회 뉴스를 열성적으로 보는 편은 아닌데, 그분 얼굴이 아시다시피 한 번 보면 잊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그분 관련 뉴스 자체가 다 평범한 게 없어서…….”
“……네.”
채민은 어색한 얼굴로 동의했다.
“그건 그렇죠.”
“……근데,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학교 선배입니다.”
학교 선후배 사이로 만난 건 아니라고 해도, 같은 학교를 졸업했으니 아주 거짓을 말한 건 아니다. 채민의 담담한 말에 다비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학교 선배랑 그렇게 친해지나. 회사까지 왔다 갔다 하고.”
“그러게요. 그냥 대화도 잘 통하고….”
사실 잘 통하진 않지만.
“취미도 맞고….”
사실 서로의 취미를 무시하는 편이지만.
“성격도 맞아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저도 신기해요.”
시선을 피하며 물을 마셨다. 자꾸 목이 말랐다. 다비드는 채민의 말로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지 썩 시원찮은 얼굴이었다. 그가 자꾸 채민의 시계를 곁눈질했다.
“보통 재벌이 일반인이랑 친해지지는 않던데. 그런 거 보면 채민 씨 집안도 어느 정도 사는가 본데요. 끼리끼리라잖아요. 유유상종….”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평범합니다.”
아버지의 수입은 차치하고서라도, 누나의 월급으로도 채민은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대학생 때야 화성학 과외나 야간 술집 알바를 해서 용돈 벌이를 했지만 고등학생 때는 입시에 바빠 그런 일은 일절 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마다 누나가 용돈을 풍족하게 주었다. 그러니 잘 사는 집안은 아니어도 평범함 언저리에 있는 집안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다비드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하였으나 일단 말을 고르려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 틈에 채민은 화제를 전환시켰다.
“맛있네요, 여기.”
“그렇죠?”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배우 하나 데리고 영화 찍고 있거든요. 그 배우가 추천해준 곳이에요.”
“그렇구나.”
“걔랑 저랑 촬영 끝나면 맛집 탐방하러 다니고 그러는데. 어후. 고집이 세서 지 먹고 싶은 걸 무조건 먹어야 돼요.”
“그 영화, 주연 배우 한 명만 데리고 찍는 건가요?”
“예. 원톱물이죠.”
“캐스팅 꽤나 고심했겠는데요.”
채민의 말에 다비드가 어쩐지 씁쓸한 낯으로 픽 웃었다.
“고심은커녕 고생만 했습니다. 시나리오를 보곤 다들 거절하더군요. 아, 읽어 보실래요?”
다비드는 가방에서 무슨 서류 같은 것들을 뭉텅이로 꺼내 채민에게 건넸다. 두꺼운 시나리오 앞장에는 <설경>이라고 제목이 단출하게 적혀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주인공의 대사가 꽤 많았다. 그것도 거의 독백이었다. 무슨 정신에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채민은 평범한 이야기보다는 이런 기이한 이야기를 더 좋아했으므로 왠지 흥미가 생겼다. 집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보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앞에서부터 한 장씩 넘겨보았다. 글은 제법 잘 읽혔다.
채민이 이야기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다비드는 “엉? 볼만해요?” 하고 떠름하게 묻는가 싶더니 이내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일평생 그의 작품을 이렇게 열심히 읽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설경>의 주연 배우조차도 초반에 조금 보다가 덮었다. 다비드는 음식 먹는 것도 잊고 채민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그가 어디쯤 읽었을까 궁금해져서 조심스럽게 채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러나 채민이 단호하게 “저리 가세요.” 하고 말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저 작품을 읽는 채민의 얼굴만 멍청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는 매우 길었으므로 식사 자리가 파할 무렵까지 글을 다 읽기란 어려웠다. 채민은 남은 건 집에 가서 꼭 읽겠다고 말하곤 가방을 챙겨 등에 멨다. 그리고 그제야 채민은 이번 자리에서 계약에 관하여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민이 난감하게 다비드를 돌아보았다.
“계약 이야기는 제가 시나리오 다 읽고 난 다음에 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게 순서잖아요. 나갑시다, 우리. 뭐 타고 왔어요?”
“네, 저는….”
채민이 도중 입을 다물었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왔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아까 분명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고 말한 바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지하철 타고 왔습니다.”
“저 차 있어요. 데려다줄게요.”
“정말 고맙지만… 그래도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요.”
“예? 왜요.”
“지하철 타는 걸 좋아해요.”
채민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래서 다비드는 그럴 수도 있구나, 납득했다.
“그럼 같이 지하철 탑시다.”
“왜요? 차 있다면서요.”
순간 경계심이 담긴 눈빛을 쏠 뻔한 채민은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굳이 안 그래도 된다며 고개를 내젓자, 다비드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수줍은 듯이 답했다.
“아까 채민 씨가 읽은 설경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안 될까요?”
“……아직 덜 읽었는데요.”
“괜찮아요. 읽은 분량까지만 얘기해도 되는데.”
다비드는 어쩐지 들떠 보였다. 그래서 딱 잘라서 거절하기가 민망했다. 더더군다나 그는 제 창작곡을 잘 들어준 사람이 아닌가. 채민은 발걸음을 돌리며 천천히 역을 향해 걸었다. 다비드가 신나서 채민을 따라왔다.
“어때요. 영상으로 만들면 잘 될 것 같아요?”
“아직 덜 읽어서 그건 모르겠고, 주인공이 웃겨서 재밌어요.”
“그렇죠. 웃기죠. 근데 어느 부분이 웃깁니까? 듣고 싶어서 그래요.”
여기서 웃기다는 것은 유머러스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온다는 뜻이었다. 채민은 그 말을 어떻게 돌려서 말해야 할까 고민하며 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문득 꽃을 늘어놓은 가게가 보였다. 이제 슬슬 닫으려는 모양인지, 점원은 화분을 하나씩 가게 안쪽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채민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지나가다가 꽃가게가 보이면, 세정의 생각이 났다. 세정에게 사주고 싶었다. 세정은 꽃을 받으면 항상 꽃 위에 제 뺨을 대고 비비면서 끼를 부려주곤 했다. 오늘 다비드와 약속이 있단 제 말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꽃을 주면 또 그렇게 애교를 부려줄까?
상상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 채민은 아무래도 꽃을 사야 할 것 같아서 걸음을 틀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다비드를 보고 머뭇거렸다. 지금 꽃을 사겠다고 하면 누구에게 줄 거냐고 물을 것 같은데. 채민이 꽃가게 앞에 멈추어 선 채 다비드를 흘끔거리자, 그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가게와 채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비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는 한참을 혼자 갈등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남자한테 꽃을 선물해본 적이 없어서. 뭐, 우리 다시 만난 것도 기념할 겸, 큰맘 먹고 사드리겠습니다.”
“…예?”
“무슨 꽃 좋아하세요?”
“예? 아니요. 사달라고 안 했는데요.”
“그렇게 간절히 봐놓고. 와아, 남자한테 꽃을 다 사주네, 내가. 기다려 봐요.”
다비드는 채민의 만류를 듣는 둥 마는 둥 서둘러 꽃집으로 갔다. 다급히 다비드의 옷깃을 잡으려던 채민의 손이 허공에서 배회하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채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황당했다. 졸업식도 아니면서, 애인 아닌 다른 사람에게 꽃을 받는 이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다비드도 그걸 아니까 저리 묘한 표정으로 꽃집에 들어간 것일 터다.
채민이 고뇌에 휩싸인 사이, 다비드가 빨간 장미 다발을 가지고 채민에게 돌아왔다. 큰 고심 없이 대충 고른 티가 나는 꽃이었다. 채민은 꺼림칙한 얼굴로 장미 다발을 받았다.
“설경 읽고 계약서 잘 봐주십사 하는 차원에서 주는 서비스예요. 하하. 꽃을 다발로 들고 지하철 타려니 엄청 쪽팔리겠어요?”
자주 그래 봤으니 쪽팔릴 건 없었다. 하지만 이걸 들고 집에 들어갈 생각에 몹시 두려워졌다. 채민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가 손을 흔들었다.
“같이 걷다가 게이로 오해받기 전에 전 먼저 갈게요. 시나리오 다 읽으면 연락 주세요.”
다비드와는 그 길로 헤어졌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쉰 채민은 그대로 기사를 불렀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채민은 내내 이 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남에게 받은 꽃을 재활용하여 세정에게 줄 수도 없고…. 그건 쓰레기니까.
그냥 버릴까.
그래, 버려야겠다. 세정이 이상한 오해를 하기 전에. 다비드에게는 미안했지만, 꽃을 버리는 편이 그의 신상에도 이로울 것이다.
집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채민은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꽃을 버릴 장소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불쑥, 옆쪽에서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아침의 그 짜증은 죄다 잊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채민에게 꽃을 내밀고 있었다.
향기가 물씬 밀려오며 푸른 것이 눈앞에 가득 찼다. 푸른 꽃 뒤로 하얗고 노란 꽃들이 보인다. 색이 잘 조화된 꽃다발이었다. 얼결에 품에 안았다. 꽤나 싱싱해서 다발 아래로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세정은 채민에게 꽃을 주고 나서야 그가 다른 손에 빨간 장미를 들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의문스럽게 장미를 쳐다보다가 제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게 줄 선물이냐고 물었다.
본디라면 그랬을 터다. 항상 세정이 꽃을 사오면 채민은 안 사오고, 채민이 꽃을 사오면 세정은 안 사오는 날만 있었던 터라 오늘 대망의 꽃 교환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안타까웠다. 채민은 차마 자신 있게 장미를 내밀지 못하고 뒤로 숨겼다.
“왜 숨겨요?”
채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수전증이라도 있는 듯 양손이 떨려왔다. 채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받은 거라서요.”
“누구한테? ……아.”
아, 하는 목소리가 낮았다. 채민이 오늘 누구와 만나고 왔는지 깨달은 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풀려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세정은 표정을 굳힌 채 꽃다발을 쳐다보다가, 우선 들어가자며 채민의 어깨를 안았다. 채민은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며 연신 눈치를 살폈다.
“오늘 정말 일찍 오셨네요.”
“우채민 씨를 기다려 보고 싶어서요. 계속 우채민 씨가 날 기다렸으니까.”
분명 듣기 좋은 말인데, 목소리가 딱딱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채민은 세정이 준 꽃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는 척했다.
“형, 이거 향이 좋아요.”
“그래요?”
“네. 이거 제일 좋은 화병에 꽂아둘게요.”
“그럼 그 꽃은?”
세정이 손으로 직접 가리키지 않았지만, 채민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채민이 머뭇거리는 사이, 세정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건 저기 꽂아두면 되겠어요.”
어떤 꽃병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돌려보니, 쓰레기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버릴 생각이었는데, 세정이 그걸 지적한 뒤에야 버리려니까 왠지 마지못해 버리려는 모양새가 되었다.
“응?”
머뭇거리는 채민을 세정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채민은 쓰레기통으로 다가가며 변명처럼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거 버리려고 했거든요.”
“네.”
“진짜예요. 진짜… 버릴 생각으로….”
“아아.”
세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밖에서 버리고 왔어야죠.”
맞다…. 맞는 소리라서 할 말이 없었다. 차에 타기 전에 버리든가, 받은 자리에서 버렸어야 했다. 아니, 아예 받지 말았어야 했다.
채민은 부디 세정의 기분이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장미 다발을 쓰레기통 안에 가차 없이 던져 넣었다. 장미가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고 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지워진다. 그러나 세정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 그 통을 바라보기만 했고, 마음이 불안해진 채민은 슬며시 세정의 팔을 잡고 아무 말이나 꺼냈다.
“……오늘 이야기 잘하고 왔어요. 들어보니까 영화가… 괜찮더라고요.”
“네.”
“그래서… 아마 하게 될 것 같은데…….”
“네.”
“……네.”
다비드와 작업하게 될 것 같다고, 이 분위기에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하려던 말을 삼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그 얼굴을 본 세정이 곤란한 듯 제 이마를 눌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을 내뱉은 세정은 표정을 풀고는 채민의 뺨을 쓰다듬었다.
“원하는 건 해야죠.”
“…네.”
그제야 채민의 표정도 풀어졌다. 채민은 안도하며, 꽃을 넣을 화병을 고르자며 세정을 잡아끌었다.
***
<설경>은 조울증 환자가 보호자를 잃고, 홀로 겨울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인디 영화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라 함은 단연 조울증이지만, 처음부터 주인공의 병명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기이한 사건들을 거듭하여 터트리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병에 대해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는 형식이다. 그 예로 채민도,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야 그때까지 했던 주인공의 모든 이상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채민은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훑었다. 어쩐지 다비드가 왜 자신에게 작곡을 맡겼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작품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불쾌한 기시감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묘하고 야릇한, 그래서 왠지 모르게 불쾌해지는 그 역설적인 감각을. 우습게도 그것은 채민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음악이었다.
한 번 감을 잡고 나니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채민은 바로 다음 날에 계약서를 받았고, 며칠 후에 날인을 했다. 그리고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계약서를 쓴 것치고 막상 들어간 작업은 영 쉽지가 않았다. 감독의 지나친 참견 때문이었다. 사실 영화 음악이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감독의 의견이 최우선 되는 작업이긴 했다. 음악 안에 채민의 견해는 일절 넣을 수 없으며, 오로지 감독의 판단과 지시로만 음악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쓰고 있기는 하나, 제 음악은 될 수 없는 작업물인 거다.
오늘도 채민은 아침부터 다비드와 통화를 하며, 그의 일방적인 지시사항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일정 부분에서 다비드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채민은 이게 한국말이 맞는지 머릿속으로 번역기를 돌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언어 능력이 조금 부족해서 그런데, 툭 하면 부러질 것 같은 막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영혼의 관조자가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자꾸 물어서.”
다비드는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겠다면서 이번에는 현상계와 물자체에 관한 화제로 빠졌다. 가만 듣고 있자니 더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채민은 분명 <설경>의 주인공 영태가 꿈에서도 조증과 울증을 번갈아 앓느냐고 한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그 질문이 어째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다비드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눈이 풀리면서 사물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보였다. 채민은 고개를 휘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다비드의 말은 세정이 하는 바이크 이야기보다도 더 지루한 것 같았다. 세정의 이야기는 이해가 잘 안 가도 그의 얼굴 보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지금 다비드의 말은 못 알아듣는 것은 자신이면서 도리어 화자에게 화가 났다.
그래도 제 무지함을 남한테 돌리면 안 되지. 속으로 중얼거린 채민이 펜을 들어 낙서를 끄적거렸다. 낙서라곤 했지만 사실 다비드의 말을 두서없이 받아 적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필기를 하니까 뭐 좀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필기에 여념이 없어 호응이 적어졌기 때문일까. 다비드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이 멈춘 타이밍에 글씨 옆에다가 도깨비 그림을 그려 넣고 있던 채민이 뒤늦게 깜짝 놀라 말했다.
“얘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잘 듣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하셔도 되는데.”
-아니. 곡 어디까지 만들었나 궁금해서요. 꿈 이야길 물은 걸 보면, 꽤 진행된 것 같은데.
“아… 작업물이요?”
채민은 당황해서 애꿎은 종이를 뒤적거렸다. 쓰다만 편지 조각들과 낙서 가득한 종이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진다. 채민은 다시 종이를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감이 잘 안 잡혀서 진도가 안 나갑니다. 형태는 완성해뒀는데 그건 들려드리기가 좀….”
-일단 줘보세요. 그래야 방향성을 잡아드리죠. 근데 미디 뭐 써요?
“예? 갑자기 왜요?”
-어제 시퀀서 바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잘 적응했나 하고.
“아니요. 좀 복잡해서요.”
다비드는 즉각 무슨 프로그램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에 답해주던 채민이 문득 몸을 틀어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작업실 안으로 세정이 들어오고 있었다. 주말 아침부터 어디를 가려는 것인지 머리를 넘겨 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채민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그거라면 제가 가르쳐줄 수 있는데. 제가 그런 쪽으로 애들 많이 가르쳐봤거든요.
다비드의 말에도 채민은 세정을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 주말인데 출근을 하려는 건가. 설마 놀러 가는 건 아니겠지. 친구가 있나?
-채민 씨?
채민은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다비드의 목소리에 뒤늦게 답했다.
“아, 그러셨군요.”
-통화로 주고받기도 불편하고, 만나서 가르쳐 줄까요?
“아…. 아니요. 그럼 제가 불편하죠.”
-빠르게 가르쳐줄 수 있어요. 술 한 잔 하면서 배우면….
“기억에 남는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그래도….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다비드의 말에 대충대충 대답해주면서, 눈으로는 세정을 끈질기게 주시했다. 세정은 그 외모만큼이나 우아한 걸음걸이로 순식간에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가 손목을 몇 번 돌려 시계가 잘 채워졌는지 확인해보며 채민에게 물었다.
“통화 중에 미안한데, 잠깐 시간 돼요?”
그 순간까지도 휴대폰에서는 같이 술을 마시자며 친근한 투로 말하는 다비드의 목소리가 조금 큰 음성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채민은 행여나 이 불경한 대화가 새어 나갈까 봐 걱정이 되어 손바닥으로 휴대폰을 덥석 틀어막았다. 그런다고 소리가 작아질 리 없었으니, 그것은 그저 오해만 불러오고 말 쓸데없는 행동에 불과했다. 세정의 시선이 휴대폰을 감싸고 있는 채민의 손으로 향했다가 다시 채민의 얼굴로 옮겨졌다. 채민은 천천히 손바닥을 떼어내며 머쓱하게 웃었다. 다행히 세정은 그 이상스러운 행동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가기 전에 인사나 잠깐 하려고요. 안 되면 그냥 있어요.”
“아니, 아니에요. 시간 돼요.”
채민은 귓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리고 물었다.
“형 어디 외출하려고요? 주말 출근 이제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묻고 싶으면 전화는 끊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아, 네.”
채민은 화면을 보지도 않고 손가락 감각만으로 전화를 대충 끊었다. 그런데 무슨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갑자기 다비드의 목소리가 커졌다.
-우리 배우랑 셋이 술 어때요? 채민 씨 술 잘 마셔요? 새벽 늦게까지 영업하는 곳 몇 군데 알아놨는….
채민은 속으로 기겁하며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무슨 악귀라도 붙은 양 휴대폰을 멀리 던져놓았다.
“아, 휴대폰 바꿔야겠다. 이제 말해도 돼요. 형, 어디 가신다고 했죠?”
“방금 누가 술 먹자고 하지 않았어요?”
“어? 누가, 언제요? 저는… 저는 못 들었는데.”
“같이 들었잖아요.”
“아뇨?”
“우채민 씨한테 꽃 준 남자죠, 그거.”
“제가 꽃을… 남한테 받은 적 있나? 모르겠는데요.”
썩 능청스럽지 못한 어투인 데다가 쓸데없이 목소리만 컸다. 잠시 침묵한 세정이 긴장으로 굳어진 채민의 뻣뻣한 몸을 훑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도 보았다. 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누굴 지키고 있는 거예요? 우채민 씨 본인이야, 그 전화야.”
“…….”
당연히……. 그 어느 쪽이라기보다는, 그냥 형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건데. 그게 제일 큰데……. 채민이 대답하지 못하자, 세정이 미간 사이를 좁혔다.
“내가 우채민 씨가 누구랑 술을 마신다고, 화낸 적 있었나.”
채민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 적은 없다. 왜냐면 채민은 학생 때를 제외하곤 남과 사사롭게 어울려 다닌 적이 없으니까. 세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완벽하게 아웃사이더로 지냈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세정이 채민의 친구 문제로 화를 낼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채민이 남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하면 세정이 분노할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는 채민이 다비드와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도 혼자 화를 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뻔뻔스레 ‘네가 누구랑 술 마신다고, 내가 언제 화낸 적 있었나.’ 하고 물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없으시죠.”
하지만 채민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세정은 드디어 그에게서 눈을 떼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일 적으로 만나는 건 괜찮다는 말이에요.”
“…예.”
“그래도 우리 선은 넘지 마요. 술 마시더라도 나한테 연락은 해주고.”
선은 넘지 말라는 말이 이해가 안 돼서 고개를 갸웃했다. 선이라 하면 뭘 뜻하는 거지. 다비드와 공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사사롭게 친구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면 친구가 되도 좋지만, 그 선을 넘어 더 친밀한 감정 교류를 쌓지는 말라는 것인가? 그 어느 쪽이든 세정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채민은 다비드와 이 이상으로 친하게 지낼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다비드뿐만이 아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사사롭게 연락하고 지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전 앞으로도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실 생각이 없어요.”
채민은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그런데 호언장담을 한 것치고 상대가 영 반응이 없다. 채민은 눈을 도르르 굴리며 그를 흘끔거렸다. 그의 묘한 눈길과 바로 마주쳤다.
“내가 우채민 씨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니죠?”
너무 의외의 말이라서 잠깐 굳어졌다. 이따금 보이는 그의 연약한 단면. 사랑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래서 괴로운 사람. 채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전 단지…. 형한테 붙어있는 거예요.”
“정말?”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채민은 어쩐지 그가 기뻐 보인다고 생각했다. 채민은 세정을 대신해서 눈이 찡긋하게 구겨질 만큼 깊이 미소 지었다. 그러자 세정이 살짝 놀란 듯한 얼굴로 따라 웃더니 몸을 틀었다.
“나가서 이야기해요.”
두 사람은 함께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세정이 아직 외출 준비가 덜 되었다면서 넥타이핀을 찾았다. 채민은 그의 뒤를 얼른 따라가서 직접 핀을 골라주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담배 케이스도 찾아주고, 우드 향이 나는 향수를 꺼내 직접 제 손목에 뿌린 뒤 세정의 목덜미에 살포시 눌러주기도 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세정도 채민이 계속 이것저것 챙겨주니까 나중에 가서는 “이것도 채민이가 해주려고요?” 하고 꺼림칙한 놀림조로 물었다.
드디어 외출 준비가 끝이 나고, 두 사람은 집 밖으로 나와 차를 향해 걸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채민은 드디어 세정이 어디에 가는지 들을 수 있었는데, 주말을 맞아 부모님과 도빈의 가족들이 함께하는 점심 약속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전에 말한 적 있죠?”
“네. 들었어요. 생각나요.”
며칠 전 세정은 이 말을 해주며 자신과 함께 갈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채민은 한참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세정의 가족만 있는 자리면 모르겠는데, 도빈의 가족이 함께 있는 자리라면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껴 있어 봤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럴 바에야 집에 틀어박혀서 작업하고 있는 게 나았다.
잠시 채민을 쳐다보던 세정은 직접 차 문을 열었다. 그는 차내로 들어가기 전, 다시 채민을 보았다. 채민은 왜 그런가 싶어서 웃었다.
“집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오늘 외출할 일 없어요?”
“예? 네. 나갈 일은 딱히…. 저 술 마시러 안 나가요.”
“그걸 걱정하는 건 아니고. 일단 알았어요. 그럼 집에 있다가, 누가 찾아온다거나 하면 나한테 전화해 줄래요?”
“…누가 찾아와요?”
세정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채민은 이상스럽다 생각했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세정에게 스치듯 짧게, 입맞춤을 해줬다. 인사를 받고 차에 오른 세정이 지체 없이 멀어졌다.
채민은 세정이 한 말의 의미를 이른 저녁 즈음 깨닫게 되었다.
한참 작업에 몰두하던 중, 보안팀에서 연락이 왔다. 수상한 사람을 잡아놓았는데, 이 사람이 채민과 안면이 있다고 주장하여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고자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수상한 사람을 묘사하는 경비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채민이 아는 사람이었다. 이름 석 자에 더욱 확신한 채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들여보내 달라고 말했다.
“후우, 시발.”
도빈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욕부터 지껄였다. 뛰어왔는지 뺨과 이마는 젖어있고, 호흡은 약간 가빠 보이는 모습이었다. 더워죽겠다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는 도빈에게 채민은 차 한 잔을 대접했다. 덥다는 사람에게 뜨거운 음료를 주는 건 무슨 센스냐고 일갈한 도빈은 이내 차를 물처럼 마셔버리곤 소파에 늘어졌다.
“담 넘으려고 했는데 경비한테…. 후우. 걸려 가지고, 한참 뛰었어.”
채민은 집을 두르고 있는 담장을 떠올려보았다. 그게 넘을 수 있는 담이던가. 암벽 등반을 해야 하는 수준일 텐데. 게다가 담 근처는 나무들과 가시덤불이 울창하게 뻗어 있어서 그냥 걷기도 까다로운 곳이었다.
내심 감탄하던 채민은 막 생각이 난 듯 휴대폰을 들었다. 아침에 세정은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집에 누가 찾아오면 제게 연락을 넣어달라고 했었다. 세정의 번호를 누르자,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소파에 축 늘어져 있던 도빈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이어 휴대폰을 귀에 붙이는 채민에게 도빈은 눈을 부라려 보였다.
“뭐 하냐. 네 형아한테 이르려고?”
그 비꼬는 말에도 채민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도빈이 우채민 진짜 약았다 어쩐다, 으르렁대며 휴대폰을 단번에 빼앗아갔다. 어차피 채민이 이르지 않아도 이곳 경비가 알아서 다 그에게 보고할 텐데. 경비에게 잡혀 세상 화려하게 등장해놓고, 몰래 온 손님 행세라도 할 셈인가. 휴대폰을 돌려달라고 손을 뻗는 채민을 등지고 도빈은 전화를 끊기 위해 엄지를 움직였다. 그때, 수신음이 끊겼다.
-네, 우채민 씨.
소리 없이 한숨을 쉰 도빈이 다시 몸을 틀어서 채민의 귀에 휴대폰을 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총기 모양을 만들어 채민의 목에 겨누었다. 손가락 총 따위 전혀 무섭지 않았던 채민은 어쩌라고? 하는 시선으로 도빈을 쳐다보았다. 도빈은 이번에는 총 모양을 약간 변형해서 제 입술 위에 붙이고 제발 입 다물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채민 씨.
눈살을 찌푸린 채민이 입을 열었다.
“예, 형…. 저녁은 드셨어요?”
-혹시 옆에 도빈이 있어요?
제 목소리가 어디 이상했나? ‘혹시’라는, 확신하지 못하는 단어를 썼으니 카메라를 본 것은 아닐 텐데. 약간의 텀을 두고서 채민이 도빈의 눈치를 살피며 이마를 긁적였다.
“……그, 글쎄요.”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채민의 동공이 흔들리기가 무섭게 도빈이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자식 거짓말 겁나 못하네. 됐다, 됐어. 어차피….”
그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수십 대의 카메라를 훑으며 혀를 찬다.
“몰래 왔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우채민 너 도벽 있냐? 무슨 카메라가 집 밖보다 집 안에 더 많아.”
도빈은 채민의 품으로 공놀이하듯 가볍게 휴대폰을 던졌다. 그리고 소파로 가선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웠다. 애초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세정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채민은 도빈에게 썩 미안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맞은편으로 가 앉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면 물이나 한 잔 떠와.”
“형이 떠 와요….”
“미안하다면서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인다?”
채민은 어쩔 수 없이 물을 가져오기 위해 일어났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원하는 것을 들어주다가 세정이 올 때까지 도빈의 시중만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냉장고 앞에 서서 세정에게 <형 죄송합니다. 배도빈은 금방 보낼게요>라고 문자를 보낸 채민은 물 한 잔을 받쳐 들고 도빈에게 돌아왔다.
도빈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잔을 받아 들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채민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가족 모임은 다 끝났어요?”
채민의 물음에 도빈은 그를 힐끔 보고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 오랜만에 아버지 만나서. 밥 먹고. 혼나고… 체하고.”
“아…. 근데 세정이 형이랑은 왜 같이 안 왔어요?”
“글쎄. 회장님 따라 어디 가던데. 근데 같이 왔으면 난 못 들어왔을걸. 걔가 나더러 여기 오기만 해보라던데.”
도빈이 낄낄 웃었다. 하하…. 어색하게 맞장구쳐준 채민은 답장이 왔나 하고 휴대폰을 곁눈질했다. 화면은 아직 꺼져있었다. 그동안 물 한 잔을 다 비운 도빈이 입술을 닦으며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너 요즘 내 문자 족족 씹더라. 아주 행복한가 봐?”
“…죄송해요. 음, 형은 회사 차리셨다면서요. 지수가 그러던데.”
“난 투자만 했지. 그것 때문에 거지 돼서 이제 빌어먹고 살잖아. 피곤해 죽겠다.”
채민은 도빈이 근무 시간에 외제차를 타고서 유유자적 놀러 다니는 통에 배가 아파 죽겠다고 투덜거리던 지수의 말을 떠올려봤다. 채민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아하……. 그럼 좀 쉬세요.”
더는 할 말도 없고 해서 채민은 스리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랬더니 도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가 이게 끝이냐?”
채민은 도빈보다 더 놀랐다.
“…그러면요?”
“나랑 더 놀자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저 좀 바쁜….”
“나한테 몇 분도 아까워? 와… 난 너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서럽다.”
도빈은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우는 시늉을 했다. 채민은 당혹했다. 친구? ……친구라고. 채민의 친구는 한국에 있는 지수가 다라서, 누군가의 입에서 친구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세정이 형 말고 저도 친구예요?”
“당연하지. 뭐, 우선순위로 치면 넌 한 삼백일 번째 친구긴 한데.”
“…….”
“내 톡친구가 삼천 명 정도 있어. 그 중에선 네가 상위권이지.”
삼천? 채널을 운영하나.
“와서 다시 앉아.”
채민은 소파에 도로 앉았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세정의 메시지가 떴다.
<아버지가 우채민 씨한테 줄 편지가 있다고 해서. 가지고 금방 가요>
아, 편지. 그새 답장받을 때가 되었나 보다. 난 세정이 형에게 몇 줄 못 썼는데.
채민은 <넵> 하고 답장을 보낸 뒤 도빈을 쳐다보았다. 도빈은 놀자고 해놓고선 휴대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에 열중한 것처럼 신중한 표정이었다.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길 기다리던 채민은 못 참고 물었다.
“형, 우리 뭐 하고 놀까요?”
“끝말잇기나 할까? 나 잘하거든.”
“저 그냥 들어갈게요.”
“알았어. 앉아봐. 내가 요즘 배우는 게 있어. 관상 봐줄게.”
“예?”
도빈이 휴대폰을 들어서 화면과 채민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화면에 관상 풀이집이라도 떠 있는 모양인데, 채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더니, 도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흠…. 너는 가정 환경이 별로 좋지 못하고, 어, 약간…… 수명이 짧으며, 머리가 나빠.”
“…뭐야.”
“뭐긴 뭐야. 지어낸 거지. 비행기에서 이거 공부했거든.”
그래도 단기간에 배운 것치고 꽤 용하지 않느냐며, 도빈은 제 머리통을 두드렸다. 그는 점을 보는 데 재미가 들렸는지 계속 휴대폰을 노려보면서 채민의 인생을 점치려고 애썼다. 여자 운이 좋다, 여자 만나면 결혼해서 백년해로도 가능하다, 인생에 귀인이 있다, 그게 바로 나다, 등등 죄 쓸데없는 소리였다. 없는 수염을 매만지며 도사처럼 굴던 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안 좋아. 관상도 안 좋은데, 이름도 안 좋아. 넌 이름을 바꿔야 돼. 우 씨가 뭐가 있지.”
채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민하던 도빈이 말했다.
“우래기 어때?”
“…우채민 쓰레기 합친 거예요?”
“울 애기.”
“……하하. 재밌네요. 아주.”
“오. 또 생각났어. 이건 진짜 감탄 나오는 이름이야.”
“뭔데요?”
“우와.”
도빈은 저 혼자 말하고 저 혼자 쪼갰다.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이 집 안의 어느 누구도 도빈처럼 크게 웃는 사람이 없어서 퍽 신선하게 보였다. 채민은 동의한다는 듯 끄덕여주었다.
“알았어요. 이제 저 볼일 볼게요. 형은 놀고 계세요.”
“어디 가…. 안 웃겨?”
“…뭐.”
“너라도 웃어줘라. 아까 이세정한테 드립쳤는데 존나 쏘아보더라.”
채민은 도빈을 뒤로한 채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음악 작업 일정이 촉박했다. 이런 자투리 시간도 영리하게 활용해야 했다. 도빈은 작업실로 향하는 채민의 뒤를 따라오면서 자꾸 안 웃기냐고 물어댔다. 서른이 저러니까 좀 웃기긴 했다.
작업실의 불은 켜져 있었다. 음악 장비 역시 전원 버튼이 들어와 있었다. 작업실 의자에 앉아서 어질러진 물건들을 대충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도빈이 작업실에 들어와 있는 고가의 최신 장비들을 기웃거렸다. 그는 건반에 손을 올리고 빠르게 쳐봤다. 날렵한 솜씨였다.
“건반 좋네. 언제 샀어?”
“최근에 세정이 형이 사주셨어요.”
“왜? 원래 없었어?”
“아니요. 있긴 있었는데, 형이 바꿔주셨습니다. 저 영화 음악 작곡한다고 하니까, 사주고 싶으셨나 봐요.”
“무슨 영화?”
“이거.”
채민이 시나리오를 건네주자, 도빈은 자긴 글자를 안 읽은 지 몇 년이 돼서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다는 한심한 소리와 함께 시나리오를 대충 훑고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장비에 관심을 보였다. 작업에 매진하려던 채민은 그가 옆에서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신경이 쓰여서 이건 얼마고 이건 무슨 기능이 있는지 짧게 짧게 설명을 해주었다.
“부럽다. 나도 비싼 장비 갖고 싶은데. 흐음.”
그렇게 읊조린 도빈은 생각에 휩싸인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야. 이세정이 네 가족한테 잘해주냐?”
“아, 네…… 대체로.”
“그래? 그럼 나 너 호적에 넣어줘라. 너 가족 누구 비냐? 엄마 없지? 이제부터 날 어머니라고 불러.”
되게…. 자연스러운 패드립이네.
“어머니 해봐. 어머니.”
“…….”
입을 다문 채민은 작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도빈의 깐족거림은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도빈은 계속 말을 시켰고, 결국 화가 난 채민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눈웃음을 치며 자신을 보고 있는 도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의 표정 어디에도 짓궂음은 없었고, 오히려 무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냥, 자신을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것 같았다.
친구처럼 느껴졌다.
채민은 졌다는 듯 도빈을 향해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채민이 본격적으로 대화에 끼어 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도빈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너 저번에….”
“어. 형. 잠시만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놀라서 얼른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다비드였다.
<진짜 술 안 마셔요? 우리 배우랑 친목 도모합시다. 예?>
채민의 휴대폰 화면을 자연스럽게 훔쳐본 도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영화감독님이요. 자꾸 쓸데없이 술 마시자고…….”
“그냥 마셔.”
“좀….”
“왜. 게이래?”
“예? 절대 아닐 걸요.”
“그럼 왜.”
그냥 형이 싫어할까 봐. 아니, 싫어할 게 분명하니까. 채민은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고, 도빈은 점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가 걱정이지. 설령 게이라고 해도 뭐. 너 남자 끌어당기는 매력 존나 없거든?”
“그게 아니라.”
“우채민 도끼병 말기네.”
“아니….”
채민은 답답해져서 인상을 썼다.
“형, 제가 형 진짜로, 싫어한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거 말 되게 심하게 하네.”
“형이 더 심하죠….”
“너 이세정한테도 이러냐?”
“세정이 형은 형처럼 안 그럽니다.”
“내가 뭘? 아, 됐다. 꺼져.”
도빈은 골이 아프다는 듯 의자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났다고 금세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채민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서. 너 나 오랜만에 봤잖아. 나한테 궁금한 얘기는 없냐?”
전혀 없었다. 쥐어짜 내 보려고 했지만, 그의 이야기라면 사소한 것 하나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채민은 머리를 굴렸고, 어렵사리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지수는 잘 지내요?”
“잘 지내든가, 말든가.”
“음…… 그렇구나. 음……. 형 여자친구는 있어요?”
“몇 명 있는지를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
채민의 반응을 본 도빈이 키득거렸다. 봉긋하게 올라온 애교살에 까만 점이 도드라졌다.
“농담이야. 여친 없어.”
“어? 왜 몇 년째 안 만나요?”
“몇 년이라니? 네가 나 여친 없을 때만 물어본 게 아니고?”
“원래 형은 꾸준히 있었잖아요.”
“글쎄. 요즘 좀 그렇다. 짜릿한 연애가 하고 싶은데.”
짜릿한 연애라는 게 뭘까. 언제 수틀려서 제 팔을 그을지 모를 애인과의 연애?
채민이 고민하고 있는데, 도빈이 셔츠를 뒤적거리며 담배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지 바지 주머니도 뒤적거렸다. 채민은 이거라도 괜찮겠냐며 제 담배를 꺼내 건넸다. 도빈은 그걸 받아 입에 물었다. 채민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자, 도빈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몸을 뒤로 물리고 연기를 빨아들이면서도 눈을 떼지 않기에 채민은 왜 계속 보냐고 어색하게 웃었다. 문득 도빈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우채민.”
짙은 연기가 채민의 이름 모양으로 흩어졌다. 채민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랑 바람피울래?”
도빈은 마치 악마처럼, 철딱서니 없는 미소를 지었다.
“되게 짜릿할 텐데.”
소름 끼치는 정적이 이어졌다. 잠시 사고가 마비되었던 채민은 과연…… 엄청나게 짜릿한 연애가 될 것 같기는 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다급하게 일어났는지 다리가 의자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어디 가냐?”
“……어디든지 형 없는 곳으로요.”
“와…. 나 까였어.”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도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세정이 채민의 이상형 문제로 기분이 안 좋았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고 해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작업실을 뛰쳐나간 채민을 뒤로하고, 도빈은 태연자약하게 작업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탑처럼 쌓여있는 종이 뭉치와 놓이지 말아야 할 곳에 놓인 개인 물품들. 먼지만 없을 뿐이지 실상 아주 더러운 방이었다. 이세정이 왜 이 더러움을 가만 놔두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혀를 쯧 찬 도빈은 그만 나가려다가 작곡 기기 옆쪽에 모여 있는 영양제를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얜 환자도 아니고, 이걸 다 먹나.
가까이서 보니 별 종류가 다 있었다. 도빈은 그중, 비타민C 한 통을 열어 보려다가 그 옆에 놓인 검은 상자에 눈길이 갔다. 혹 그것도 영양제인가 싶어 슬쩍 열어보았다. 그러나 상자엔 웬 사진만 가득이었다.
동물원이라도 갔다 왔는지 어중간한 덩치의 희멀건 펭귄들이 수두룩했다. 개중에는 눈깔이 반 돈 것처럼 부리부리한 인상의 펭귄도 있었는데, 그 옆에 채민이 서서 억지로 웃고 있었다. 뭔가 옆에 있는 펭귄을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도빈은 사진은 내려두고 사진 속에 파묻혀 있는 종이를 꺼냈다.
<사랑하는 세정이 형에게>
편지? 우채민 편지인가? 어디까지나 사생활 침해였으나, 상자를 연 것부터가 이미 침해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다. 도빈은 생각 없이 읽어 내렸다.
<형은 정말 잘생겼어요. 우아한 분위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귀티가 흘러요. 눈을 반쯤 뜨면 남들은 그저 졸려 보일 뿐인데 형은 퇴폐적이고 섹시한 느낌이 납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완벽하게 생길 수 있는지 궁금해요. 전에 의사 선생님이 왔을 때 슬쩍 물어봤는데, 형 얼굴 비율이 완벽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얼굴만 좋아하는 건 아닌데…. 형 피부도 좋아요. 피부가 사춘기도 안 온 십 대 같아요.>
‘…뭐지, 이 새낀?’
<근데 진짜 제가 형 얼굴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굴 다 그어놔도 좋아해 줄 거냐고 묻지 마세요. 처음에 형 얼굴 감흥 없이 봤던 거 기억하시죠? 전 진짜 형 친절한 성격에 반한 건데. 아무튼 형 너무 귀엽고…….
아, 그리고 그 유리관 펭귄도 질투하지 마세요. 쨉…? 도 안 됩니다. 형이 더 좋아요….>
도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로 한쪽 눈썹을 올렸다.
<형이 제대로 티비에 얼굴을 비추면 세계적으로 큰 파란이 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진짜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요! 혹시나 인터뷰 같은 걸 했다가 다들 형의 진심을 곡해해서 들으면 어떡해요. 물론 형이 말실수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도빈은 더 읽지 못하고 편지를 내려놓았다.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는 깊은 고뇌에 잠겨선 상자에 있는 다른 편지를 열어보았다.
<사랑하는 채민이에게.
나를 좋아해 줘서…….>
이번에야말로 더 읽지 못하고 당장 상자 속으로 편지를 던져 넣었다. 사랑하는 채민…. 사랑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이건 분명 세정이 채민에게 쓴 편지였다. 채민의 편지를 볼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세정의 편지를 보자마자 사생활을 엿본 것 같은 깊은 죄악감이 생기면서 괜히 봤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는 난감한 마음에 얼른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뒤늦게 다른 물건들을 보는 시늉을 했지만, 당황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는 비타민 몇 개를 털어먹곤 즉시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비타민을 빠르게 씹어 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새 어디로 숨었는지 채민은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겁보 새끼. 농담 좀 했다고 겁을 먹고 숨어버린 모양이다. 그 간덩이로 어떻게 세정의 곁에 있으면서 저따위 편지를 받아냈는지 희한할 따름이었다.
편지를 생각하자니 솜털이 쭈뼛 섰다. 머리를 강타한 싸한 충격에 아직도 얼얼할 정도다. 편지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우고자 고개를 흔든 그가 복도 끝에 있는 화병을 별생각 없이 만졌다. 화병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있었다. 무슨 꽃이 이렇게 다양하게 있지. 그는 곳곳에 구조물처럼 설치된 화병들을 하나씩 하나씩 구경하다가 어느새 주방까지 다다랐다.
온 김에 뭘 좀 먹을까.
일단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마시고, 식재료를 뒤져보았다. 냉장고엔 별게 없어서 식료품 창고에도 갔다 왔다. 그러나 당장 먹을 만한 식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요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라면 손님인 그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나, 솔직히 채민이 제대로 된 요리를 내놓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보나 마나 요 몇 년간 씻을 때 말곤 손에 물을 묻힌 적도 없을 것이다. 편지를 몰래 본 것도 미안하고 하니까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재료를 찾아보던 도빈은 인상을 썼다.
여기서 밥하시는 분은 요리하고 남은 재료들은 죄 불태우시는지? 도빈이 그나마 찾아낸 재료는 당근과 가지뿐이었다. 도빈은 특히 가지를 노려보았다. 냉장고에서 가지잼을 발견했을 때부터 싸하다 싶었더니 집에 웬 이것만 잔뜩이다.
도빈은 가지 두 개를 양손에 각각 들고서 뭘 만들어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때였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기, 형…….”
뒤로 돌아보자, 어쩐지 우울한 낯으로 서 있는 채민이 보였다. 또 어디서 혼자 땅을 파다가 온 듯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싶어 대답하지 않았더니, 채민은 다짜고짜 주방에 설치되어 있는 몇 개의 카메라들을 가리켰다.
“카메라… 있는 거 아시죠?”
그가 가리킨 곳엔 눈 땡글한 카메라들이 모습을 숨기지도 않은 채 도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시발, 가지 같은 걸 훔쳐간다고……. 얼마나 가지에 미쳐있으면 이걸로 예민을 떨지. 도빈은 질리는 기분으로 가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안 가져가.”
“뭘 안 가져가요? 형, 그 카메라가요…. 여기에도 있고, 거실에도 있고, 작업실에도 있어요. 없는 곳이 없어요….”
“한탄이야, 경고야. 안 훔쳐간다니까.”
채민은 억울해하는 도빈의 말을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채민은 식탁에 있는 가지를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며 이 집에 카메라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 경고성 발언을 되뇌다가, 깜짝 놀라서 가지를 쳐다보았다. 채민이 이 가지가 왜 여기에 있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빈을 보았다. 그가 표정 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 작업실은 음악 만드는 곳이라서 음성 녹음이 안 되긴 하는데, 다른 곳은 다 되니까요. 형 말 좀…. 앞으로 말조심 좀 해주세요.”
도빈은 그제야 채민이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빈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작업실에서 채민에게 농담했던 일을 떠올렸다.
“너 그거 고민하다가 온 거냐?”
“네.”
“고민할 일도 참 많아.”
“장난인 건 알지만… 세정이 형은 못 받아들일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주세요.”
채민의 차분한 목소리가 고요한 주방에 내려앉았다. 뇌를 거치지도 않고 한 농담에 저렇게 진지한 충고가 돌아오다니. 마치 아까 모임에서 만난 세정에게 “우래기 어때, 우래기.” 하고 농담했다가 그에게 가끔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답을 들었을 때처럼 한없이 무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건 가끔이란 말을 꼬투리 잡아 받아칠 말이라도 있었는데, 이 말엔 뭐라고 대꾸해야 하나.
“알았어.”
도빈은 일단 말을 툭 뱉고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알려진대도 걔가 딱히 화내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러자 채민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럼요?”
“뭐가 그럼요냐?”
“그럼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는 말씀이세요?”
“걔도 상황 봐가면서 때려. 내가 그냥 한 말 가지고 화낼 애가 아니라고.”
도빈은 세정에게 발로 걷어차인 적은 있어도, 정도 이상으로 폭력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의 압력으로 약을 처먹은 적은 있어도 칼로 쑤셔진 적은 없었다. 세정은 대체로 도빈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굳이 때려야겠다는 충동 자체를 못 느끼는 듯했다.
어쨌거나 이제껏 심하게 맞은 적이 없으니, 세정이 반 돌아서 자신을 때리는 장면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채민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도빈을 보고 있었다. 애먼 사람이 세정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얼마나 지겹도록 보았길래 벌써 저리 겁을 집어먹은 것인가. 그를 짠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채민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세정이 형이 화낼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세요….”
“아니, 뭘 또…. 걔 작은 일로 나 때린 적 없어.”
도빈은 이상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왜인지 자신이 대답할수록 채민의 기분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원래부터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애였지만, 지금의 이 대화는 특히나 모르겠다. 더 대화해봤자 그 속을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화제를 전환했다.
“맞다. 내가 아까 네 작업실에서 그 까만 상자 열어봤거든? 미안.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편지 좀 봤다.”
채민의 눈이 밤비처럼 커졌다. 그는 그 상태로 눈을 끔뻑거리더니, 까만 상자에 무슨 편지가 들어있는지 기억이 난 듯 아… 하고 바보처럼 탄식했다. 방금까지 도빈을 불결하게 쳐다보던 표정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괜찮아요. 그거는, 보내려고 쓴 게 아니라서.”
“보낼 편지가 아니야?”
“아, 네. 몇 개 써서 그중에서 가장 나은 걸로 주려고요.”
“아하, 그래……. 그 이상한 편지는 제발 차선으로 둬라.”
“…이상했어요?”
도빈은 뻘쭘하게 눈썹을 긁었다. 이상하기는, 이세정 편지가 더 이상했지. 도빈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 그리고 또 다른 편지 봤는데. 이세정이 너한테 써준.”
“…….”
“미안. 한두 줄 봤어. 별로 안 봤어.”
별로 안 보긴 무슨. 두 줄이면 거의 다 본 건데. 그 짧은 편지에 구경할 게 뭐가 있다고 훔쳐본 걸까. 채민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아챈 도빈이 뻔뻔하게 덧붙였다.
“어쩔 수 없이 본 거라고. 나도 이세정이 쓴 편지인 거 알았으면 보지도 않았어. 아…. 생각하니까 소름 돋아. 내 형제 사생활 훔쳐본 느낌도 들고….”
도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에 가지가 있길래 생각 없이 잡아채서 만지작거렸다. 그는 투덜거리다 말고 잠시 가지에 눈길을 주었다. 이걸로 무슨 요리를 하지. 튀기면 맛있으려나. 도빈은 일단 가지를 씻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채민이 통 말이 없는 게 이상해서 흘끗 그를 돌아보았다. 채민은 도빈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채민을 안 지 몇 년은 됐지만, 저런 눈빛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얌전한 표정으로 눈만 불량스러운 것이, 심히 같잖아 보였다. 불현듯 채민이 중얼거렸다.
“…내 형제?”
그게 뭐. 도빈은 채민을 의아하게 보고 있다가 가지를 흔들었다.
“편지 본 것도 미안하고, 요리해줄 테니까 앉아있어라. 너 이거 좋아하지?”
“아, 아니요.”
채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가지에 꽂혔다. 뭔데 저렇게 간절하게 보는 거지. 도빈의 눈이 가늘어지는데, 채민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채민은 가지를 쥐고 있는 도빈의 손안으로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어 주먹을 풀은 뒤에 가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가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걸로 뭐 하시게요.”
“재료가 이것밖에 없다니까?”
채민은 더 있을 걸요… 하고 얼버무리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괜스레 머리와 뺨을 만지작거렸다. 펠라를 싫어하는 애인을 위해 연습을 하려고 사놓은 건데, 이걸 재료로 쓸 수는 없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살을 찌푸린 채, 다양한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세정이 형이 오면서 뭐 사오지 않을까요? 일단 기다려 보고요.”
“내가 요리하면 된다니까. 해서 셋이 먹자고.”
“셋이…? 형, 언제 가려고요.”
“이세정 보고.”
아까 봤으면서. 채민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도빈은 무시했다. 도빈은 다른 재료들을 찾으려고 다시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꾸준히 요리를 했다.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누구 한 끼 먹일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채민은 썩 기대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존나 맛있게 해준다니까? 이세정도 좋아할걸.”
“세정이 형한테 요리해준 적 있어요?”
“아니. 난 여자한테만 해줘.”
“여자한테만 해주는데, 왜 저희한테 해준다는 거예요.”
“어, 그렇게 계속 시비 걸어라.”
찔끔한 채민이 입을 다물고, 냉장고를 뒤지는 도빈의 모습을 멍청하게 주시했다. 도빈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채민의 시선이 점점 짙어졌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떤 물결이 일렁였다. 속이 뻑적지근하면서 뒤통수가 당겨왔고, 심장도 두근두근 뛰었다. 이 거슬리는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도빈과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될 듯하다. 채민은 불쑥 도빈의 팔을 잡고 세게 힘을 주어서 끌어당겼다.
“뭐, 뭐 해.”
난데없이 등이 밀쳐진 도빈이 한껏 당황한 채 뒤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채민은 더 힘을 가해서 그를 거실까지 끌고 갔다. 도빈은 거실에 다다라서야 채민의 손을 잡아떼고 멈추어 섰다.
“형, 죄송해요.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네가 컨디션이 안 좋은데, 뭐?”
“내일 오시면 안 될까요?”
“내일 떠나는데 뭘 내일 와. 놔 봐. 나더러 나가라고? 이세정은 보고 갈게.”
채민은 순간 욱한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천천히 마른 입술을 축였다. 도빈은 소파에 걸려있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가 채민의 표정을 보곤 주춤했다. 순간 눈을 크게 뜬 도빈이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너 설마 지금 화났냐?”
“……제가요?”
“모르는 척하는 건 뭐야. 화나 있는데.”
도빈의 눈동자에 흥미가 일었다. 그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채민에게 걸어왔다. 혹 제 미간이 찌푸려졌나 싶어 표정을 펴 보려고 노력하던 채민이 걸음을 주춤주춤 뒤로 물렸다. 뒤늦게 웃는 얼굴을 해 보인다. 그러나 도빈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고, 채민은 눈을 피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내가 화났냐 물어보니까 재밌다고 대답을 하네…….”
“딱히 화난 건 아닌데.”
도빈은 고개를 돌려서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한 채민을 슬그머니 깔아보았다. 채민은 그런 도빈과 시선을 마주하며 제 감정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단지,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을 뿐이다.
“진짜 화난 건 아니고요…….”
“화난 건 아닌데요…….”
“그냥…….”
“그냐앙….”
“따라 하지 마시고….”
채민은 한쪽 발바닥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제 불안함을 내보였다. 자꾸 당겨오는 뒤통수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참 뜸만 들이다가, 도빈의 참을성이 바닥을 보일 즈음 입을 열었다.
“형이랑 세정이 형이랑 친해 보여서 좀. 흠, 조금 그랬나 봐요.”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채민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도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새삼?”
“그렇기는 한데.”
채민은 하하… 늘어지는 웃음을 뱉었고, 도빈은 이 대화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대체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다. 이세정이랑 내가 친한데, 왜 네가 신경이 쓰이냔 말이야. 그러던 도빈은 한순간에 목이 졸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도빈은 일평생 이렇게 당황한 역사가 없었다.
“너 설마 지, 질투하냐?”
“…….”
“너 씨발, 나 가지고 질투를…. 이 씹. 너. 이세정이랑… 나랑…….”
도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혼란으로 물든다. 그가 몸을 주춤주춤 뒤로 물렸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워 보였다. 채민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아.’
채민이 탄성을 내뱉었다. 가려운 곳을 긁은 듯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맞다. 질투. 아까부터 가슴께를 거슬리게 긁어대던 이 불쾌한 감정은 바로 질투심이었다. 상대가 도빈이라서 쉬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아주 명백한 감정이었다.
채민은 왠지 비참해져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형, 죄송해요. 그게요…….”
채민은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형이 자꾸 ‘내 형제’ 하면서 소유욕을 드러내시고…….”
“소, 소, 소유…소…….”
이 새끼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일평생 들어왔던 말들 가운데 가장 황당했다. 어찌나 황당한지 분노가 일 정도였다. 그는 몸을 뒤로 물리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딱딱한 바닥에 엉덩이와 허리가 차례로 부딪히자 심한 타격이 왔다. 허나 마음의 타격이 더 극심했다.
“그리고 형이…. 바람피우자 어쩌자 해놓고도 당연히 세정이 형한텐 안 혼날 것처럼…. 무슨 자신감인지. 저는 그게 친분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조금 기분이…….”
“너 미쳤어?”
속삭임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입을 벌린 채 공기만 들이마시던 도빈이 벌떡 일어났다.
“너는…. 너는 진짜…. 와, 할 말이 없네? 됐다. 나 간다.”
이에 대해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도빈은 외투를 마저 입고, 채민에게 한 차례 눈을 부라려준 후 등을 돌렸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마자 채민의 별 밤 같은 눈과는 다른, 서늘한 눈과 정면으로 맞부딪힌다. 언제 왔는지 세정이 지척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 어. 안녕.”
도빈은 어색한 인사를 마친 후 지체하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도빈의 팔을 잡아 세울 것처럼 손을 뻗은 세정은 곧 마음을 바꾸고 채민에게 걸어왔다. 채민은 세정을 본 순간부터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얼굴에 미미하게 남은 꺼림칙함까지는 완전히 덜어내지 못해서, 얼굴이 몹시 이상해 보였다. 채민이 꾸벅 인사를 했다.
“형, 다녀오셨어요. 저녁 드셨어요? 저 배고픈데, 같이 저녁 드실래요? 저녁은 제가 만들게요.”
제 말이 조금 빠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만큼, 채민은 멀어지는 도빈의 뒷모습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걸음을 옆으로 옮겨서 채민의 시야를 방해한 세정이 말했다.
“…뭘 하겠다고요? 됐어요.”
“그럼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요?”
“나가는 건 나가는 건데…… 잠시만요. 도빈이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세정은 들고 있던 하얀 봉투를 채민에게 건넨 뒤 도빈이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봉투엔 분명 회장님의 답장이 들어있겠지만, 채민은 그 봉투를 바닥에 던져버리곤 세정의 앞을 막아섰다.
“왜요? 도빈, 그 왜요?”
“왜 바람피우잔 얘기가 나왔는지 물어보려고요.”
하마터면 세정의 앞에서 한숨을 쉴 뻔했다. 역시 들었구나. 세정이 근처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채민은 그가 어디까지 들었을지 불안했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채민은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그건 제가 답할 수 있어요.”
그 발언을 듣게 한 것은 명백히 채민의 실수였다. 제아무리 세정이 그 순간에 나타날 줄 몰랐다고 해도,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됐다. 채민은 책임을 지고 말을 수습해야 했다.
“뭘 오해했는지는 짐작이 가는데요. 진짜 아니에요. 바람 이야기가 나온 건, 도빈…분이… 형이랑 바람피우겠다고 해서.”
애인에게 더 이상 거짓말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여기에는 도빈의 안위가 달려있으니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제가 낸 꾀에 제가 더 기분이 나빴다. 장난으로라도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던진 채민은 무안함을 상쇄하고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정의 눈이 알 듯 말 듯 하게 가늘어진다.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도빈이가 나랑 바람피우겠다고 했다고요?”
“네.”
도빈이 형, 미안해요. 채민은 시선을 발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래도 도빈의 입장에선 자신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세정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한쪽 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죄책감을 억눌렀다.
그때,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온 세정의 발이 슬쩍 움직였다. 급히 고개를 들었다. 세정이 어딘가로 가려는 듯이 몸을 틀고 있었다. 도빈에게 가려는 줄 알고 당장 막아서려는데, 세정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채민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그거는 거기 잠시 둔 건데……. 저 주세요.”
봉투를 받아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에는 작은 글씨로 몇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지금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편지를 접어 도로 봉투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세정은 완전히 채민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우채민 씨.”
“아, 네.”
“나한테 올 답장은 없어요?”
채민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세정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 줄이어도 괜찮다니까.”
“쓰고는 있어요. 형. 근데…….”
그의 재촉 아닌 재촉에 난감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 회장님의 답장을 건네주며 제 답장도 재촉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게으른 사람 보듯 쳐다볼 거라는 것도 짐작했다. 하지만 새로 쓰고 있는 편지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데, 어떡한단 말인가. 세정에게 해야 할 말이 많았고, 드러내야 할 마음이 깊었다. 아마 앞으로 몇 주 동안은 편지를 계속 붙잡고 있을 듯했다.
이미 써둔 편지가 있긴 한데 우선 그것부터 보여줘야 하나. 하지만 그건 실패작이나 마찬가지인데. 고심하던 그가 말했다.
“하나 써둔 게 있어요. 그런데 그건 도빈… 그분이 별로래요. 며칠 내로 다시 제대로 써서 드릴게요.”
“……도빈이가 봤어요?”
왜 제 애인이 자신에게 써준 편지를 애먼 삼자가 보고 간 건지, 세정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오늘 와서, 정말 다양하게 하고 갔네요.”
“…….”
“바람피운다는 말도 하고.”
편지와 연관하여 또 바람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세정이 이를 짓씹으며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채민은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세요?”
“도빈이랑 대화하고 올게요.”
“혀, 형. 편지도 실수로 본 거고, 바람피우자고 한 것도 저한테 한 게 아니고 형한테 한 건데……. 형한텐 별 게 아니잖아요. 바람, 그걸 가지고 화를 낼 거면 차라리 제가…….”
“우채민 씨.”
채민의 말을 부드럽게 가로막으며, 세정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채민은 눈을 크게 떴다.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세정은 채민의 한쪽 뺨을 다정하게 감싸고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닌 게 아니에요.”
“…….”
“내가 그렇게 쉬워 보이는데…….”
세정의 가늘어진 눈에 순간 불길이 이는 듯 보였다.
“내가 가진 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요.”
채민이 미처 잡기도 전에 세정이 등을 돌렸다. 채민은 그를 빠르게 쫓아가려다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저 자신이 우스워지는 것보다 채민이 우습게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저 자신이 쉬워 보이는 것보다 채민이 남들에게 쉬운 사람이 되는 게 싫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화를 내준 사람을, 내가…. 내가 감히 어떻게 말리라고. 깊게 한숨을 쉰 채민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무언가가 잘못됐다. 그것은 요즘 채민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었다.
불안증이 있는 사람처럼 좁은 연구실 안을 서성거리던 채민은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의자에 털썩 앉았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책상에 팔을 괸 채로, 도르르 굴러가는 펜을 멍한 눈길로 따라갔다. 펜이 휴대폰에 톡 부딪히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막 불이 들어온 휴대폰으로 향했다.
화면에는 메시지가 하나 떠 있었다. 지수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번이 열세 번째 메시지던가. 그는 휴대폰을 완전히 켜서 메시지들을 위로 쭉쭉 올렸다.
<오늘도 놀다가 칼퇴한 배씨>
…(생략)
<다시 재등장한 배씨>
<또 치킨….>
<시발>
<닭을저렇게 사랑하는데>
<그냥 닭이됐으면좋겠어>
메시지에는 온통 배도빈 이야기뿐이었다. 도빈이 무슨 행동을 했고 어떤 발언을 했는지까지는 세세하게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텍스트만으로도 도빈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바람’ 발언을 해놓고도 세정에게 잡히지 않고 한국으로 떴으니, 마음이 편할 만도 하지…. 덕분에 난 이렇게 심란한데. 채민은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미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근래에 세정은 많이 예민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빈이 분란을 야기하고 도망간 그날부터 줄곧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이따금 있던 불면증이 심해져서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았고, 담배도 평소보다 자주 피웠다. 아직 자해를 하진 않았지만, 우울증이 그 언저리까지는 도달한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 때문에.
그날 세정은 도빈과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기어코 채민을 등지고 걸었다. 채민은 그런 세정을 최선을 다해서 말렸다. 그의 앞을 막아서며 껴안기도 했고, 바이크 튜닝이나 하러 가자며 다른 곳으로 그를 이끌기도 했다. 그래.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형…. 형……. 그러지 마요.’
채민이 세정의 옷소매를 붙잡고서 한숨을 쉬듯 말했을 때, 세정이 돌아보며 지었던 그 눈빛이 여태 잊히지 않았다. 제 말의 그 어디에서 열이 받았는지. 그 허망한 눈. 분노와 절망. 물론 채민을 향해 쏘아진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세정 자신에게로 향하는 분노였고, 괴로움이었다.
그때 세정은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멈추었다. 더 이상 도빈을 찾으러 가려고 하지 않았고, 채민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시 그가 무슨 감정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날 자신이 정확히 어떤 잘못을 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세정은 홀로 우울한 와중에도 채민에게 너무나 다정했고, 채민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벽처럼 느껴져서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채민은 뜨거워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할 일 없이 벽 따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가 문득 결심한 것처럼 휴대폰을 꺼냈다. 즉각 세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점심 드셨어요?>
평소와 같은 질문. 여상한 말투. 이 텍스트 한 줄에서 설마 제 어색함이 보이진 않겠지. 그는 입맛을 다시며 보낸 메시지를 연신 읽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계속 본다고 답장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니고, 점심이나 먹으면서 기다릴 셈이었다. 그는 짐을 챙겨서 빠르게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학교 식당이 질릴 때면 이곳으로 종종 점심을 먹으러 오곤 했다. 그는 물부터 주문해놓고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송어…. 송어를 먹을까. 오랜만에 생선이 먹고 싶긴 한데, 여긴 한 마리가 통째로 튀겨서 나와서….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진동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든 채민은 화면에 뜬 세정의 이름을 보고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네.”
우선 뱉어놓고 목을 가다듬었다.
“네, 형….”
-점심 먹었어요?
“지금 먹으려고요. 식당 왔어요.”
-누구랑?
“네? 저 혼자예요.”
채민의 말에 세정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뭘까…. 안부 차 전화했는데, 이제 할 말이 떨어졌나. 채민이 괜히 목을 푸는 사이 세정이 물었다.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요?
일말의 예민함도 드러나지 않은, 그저 부드럽기만 한 목소리였다. 멈칫한 채민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예…… 저는 좋아요.”
-먼저 먹고 있어도 되니까, 늦어도 기다려줘요.
“네. 그럼요.”
전화를 끊자마자 채민은 세정에게 레스토랑 주소를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셀프 카메라 모드로 바꾸어 제 모습을 비춰가면서 열심히 머리를 정돈했다. 세정과 평일 점심을 함께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분명 평소였다면 설렜을 텐데 오늘은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기분도 껄끄러웠다. 전화 너머로는 느낄 수 없는, 그의 우울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채민이 한 자리를 더 맡기 위해 맥주 두 병을 시키곤 물만 홀짝거리고 있을 때, 세정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부를 채 훑지도 않고 곧바로 채민의 자리를 찾았다. 마찬가지로 세정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그의 등장을 눈치챈 채민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늦었어요.”
셔츠에 코트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옷이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맞은편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채민은 그의 얼굴에 은근하게 숨어있을 예민함을 찾아보느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고, 세정은 그 집요한 시선을 무던한 눈길로 맞받아치며 미소를 지었다.
“우채민 씨.”
채민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뭐 드실래요?”
테이블을 흘끗 본 세정이 새 메뉴판을 받아 들며 말했다.
“왜 날 기다렸어요? 먹고 있지.”
“형이랑 같이 먹고 싶어서.”
세정이 가볍게 눈썹을 올렸다가 내리며, 테이블을 짚고 있는 채민의 한쪽 팔을 쓱 쓸어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메뉴판을 대충 넘겼다. 채민도 얼른 메뉴를 살폈다.
“저는 생선튀김 먹을게요.”
먼저 메뉴를 고른 채민은 세정의 의사를 물어보려다가 멈칫했다. 형은 이런 곳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을 텐데, 입맛에 맞을까. 물론 세정은 음식에 대한 호오가 전혀 없었다. 맛이 있어도, 취향이 아니어도 내색 없이 그냥 먹었다. 오히려 술에 더 민감한 듯 보였다. 단맛이 강한 위스키는 바로 갖다버리는 편이니까. 그러나 미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이런 싼 식당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예로 탐독이라도 하듯 진지한 얼굴로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던 세정은 이렇게 말했다.
“채민 씨, 집에서 점심 먹을 생각은 없어요? 학교와 멀지도 않은데.”
채민은 머쓱하게 대꾸했다.
“……역시 여긴 좀 그런가요? 형한테 별론가.”
“나 말고 우채민 씨한테. 여긴 소음도 심하고.”
세정은 말을 다 끝맺지도 않고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 어떤 점이 문제인 건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난 뭘 먹어도 괜찮지만, 우채민 씨는 영양소를 다 챙겨서 먹어야 해요. 한 끼 한 끼, 다.”
“네.”
“평소에도 라면을 자주 사 먹잖아요. 그러다가 아프면 어떡해요.”
채민은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은 잘 돌보지 않는 세정에게 건강으로 잔소리를 들으니까 웃겼다. 물론 그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채민은 몇몇 약에 알레르기가 있었고, 그래서 병에 걸리면 치료하기가 까다로웠다. 그래도 각종 영양제도 챙겨 먹고 있고, 주기마다 건강검진도 받고 있고, 알레르기 치료도 꾸준히 받으면서 건강 관리에 힘쓰고 있지 않나. 이렇듯 과하게 건강을 챙기고 있는데, 설마 라면 몇 번 먹었다고 병에 걸릴 리가.
“형, 저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죽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우채민 씨가 고통을 느낀다는 게 싫다는 거지. …난 그거 못 봐요.”
채민은 자신이 병자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지속하는 게 너무 머쓱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저도 고통은 싫으니까…. 제가 느끼기 전에 형이 죽여주시면 되겠네요…….”
채민이 말을 끌자, 세정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참.”
이상한 애네……. 중얼거린 그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메뉴판을 보다가 결국 채민과 같은 음식으로 골랐다.
메뉴를 주문하자 채민은 드디어 세정과 같이 외식을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채민이 아까부터 애써 올리고 있던 입꼬리에 힘을 풀고 세정을 쳐다보자, 맥주를 마시던 세정이 슬쩍 웃어주었다. 채민은 불쑥 물었다.
“형…. 기분은 괜찮아요?”
“기분?”
대수롭지 않게 물은 세정이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가, 돌연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며 재차 물었다.
“…지금 내 기분을 물은 거예요?”
“네. 오늘 기분 괜찮은가 하고.”
“…왜?”
“네?”
“내가 우채민 씨한테 기분 나쁜 티를 냈나?”
“……아, 아니요. 말 그대로 기분 괜찮은지, 안부 차 물었어요.”
어이없다는 듯이 한 번 웃은 세정이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제대로 풀어서 설명해줘요.”
세정이 너무 진지하게 대꾸해서, 가볍게 물었던 채민은 덜컥 겁이 났다. 채민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그냥…. 그게….”
다행히 더 곤란해지기 전에 요리가 나왔다. 한숨을 돌린 채민은 이따 이야기하자고 얼버무리곤 재빨리 식기를 들었다. 그는 나이프로 생선을 분해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깔끔히 잘리지 않아서 그냥 적당히 쑤셔 입에 넣기부터 했다. 그렇게 먹고 있는데, 문득 접시가 바뀌었다. 깔끔하게 발라진 생선이 앞에 놓이고, 채민이 들쑤셔놓은 생선이 세정의 앞으로 갔다. 채민은 접시를 한 번, 세정을 한 번 번갈아 보며 머뭇대다가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는 와중에 세정을 보니, 그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간간이 맥주만 마시고 있었다. 직원이 다가와서 문제가 있느냐, 불편한 게 있으면 다시 요리를 해오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먹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채민은 불현듯 무슨 가정이 떠올랐다.
“……형, 혹시… 점심 드시고 오셨어요?”
세정과는 점심시간이 다 끝날 무렵에 만났다. 가능성이 있었다.
“설마 겹 약속을 잡으신 건 아니죠?”
“겹 약속은 아니고, 그쪽 일정 마무리하고 온 거죠.”
“그 일정이 점심 약속이었고요? 형, 다음부턴 그러지 마요…. 불편해요.”
그러자 세정은 놀랐다는 듯이 눈만 살짝 치켜떴다.
“우채민 씨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달려왔는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요.”
가벼운 책망이 섞인 말이었다. 애교로 비치기에는 목소리에 성의가 없었다. 순간 멍해진 채민은 죄송해요, 하고 웅얼거리며 괜히 포크로 접시를 뒤적거렸다. 발라진 살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화난 와중에도 내가 보고 싶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요즘 잠도 못 잘 정도로 내게 화나 있으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지.
채민은 말없이 생선을 깨작거렸다. 잠시 그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던 세정이 느리게 말을 꺼냈다.
“우채민 씨, 이제 말해 봐요. 왜 내 기분을 살핀 건지.”
“예? 아니에요.”
“우채민 씨.”
다정하지만, 분명 강요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채민은 시선만 들었을 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정은 끈질기게 기다렸고, 깊이 숨을 내쉰 채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요즘 형이……. 화나신 것 같아서.”
세정이 채민의 손을 쳐다보았다. 포크를 쥐고 있던 채민의 손에 다소 힘이 실렸다.
“요즘 잠도 못 자고, 우울해 보여요. 제가 배도빈한테 가지 말라고 막 말렸을 때, 엄청 화났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줄곧 너무 예민해 보이셔서 제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분은 그래서 물은 거예요.”
“화나지 않았어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로 대답한 세정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보이는 채민에게 덧붙여주었다.
“난 오히려, 우채민 씨가 화났다고 생각했는데.”
채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의 말이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제가요? 형, 저는 화 하나도 안 났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대체 어딜 보고…….”
빠른 속도로 말을 하던 채민이 급히 말을 멈추었다. 아, 그때인가. 세정을 말리면서 한숨을 쉬었을 때. 그 모습이 세정에게는 화난 것처럼 보였나.
“그때는…. 형 그때는 그냥…. 형이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요.”
“내가 왜요?”
“형은 배도빈 가족들이랑 관계가 깊잖아요. 배도빈 해코지하다가 걸리면 어떡해요? 분명 사이가 안 좋아질 텐데….”
정말로, 도빈이 걱정되어 세정을 말린 것이 아니었다. 이젠 세정이 해치는 누군가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저 세정이 다른 누군가를 해치다가 피해를 입을까 봐, 그 점만 염려가 될 뿐이었다. 자신을 이기적이고 나쁜 새끼라고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양심도, 도덕심도 버린 마당에 그까짓 비난쯤이야….
“저는 형만 걱정돼요. 배도빈한테 못 가게 말린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세정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채민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했다. 굳은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그 얼굴을 보며 채민은 중얼거렸다.
“오해하셨구나…. 진작 물어볼 걸 그랬네요. 빨리 풀 수 있는 문제였는데.”
채민은 그가 겉으로는 자비 없이 냉혈해 보이더라도, 실은 애인의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연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떤 말을 들어도 상처 하나 받지 않을 것 같은 그는, 실은 채민의 싸늘함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채민의 분노를 받아내기 힘겨워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채민이 그를 더 보살폈어야 했다. 그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보호했어야 했다. 채민은 후회했다.
“또 오해하고 있는 건 없죠?”
대답 대신 느리게 한숨을 내쉰 세정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세정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채민을 내려다보았고, 채민은 그 눈빛에 얽힌 어떤 감정도 읽지 못하고 그저 읊조렸다.
“있으면 그때그때 다 말해주셔야 돼요. 제가 다… 풀어드릴게요.”
“네.”
“아무튼, 전 화나지 않았으니까. 음….”
채민은 쥐고 있던 포크를 놓으며 조금 웃었다.
“이제 기분 괜찮은 거 맞죠?”
세정은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우채민 씨, 내 눈치 안 봐도 돼요.”
채민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