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나쁜 사람 (2)
채민은 종종 지하실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바이크를 관찰해보곤 했다. 불면증이 극심해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애인은 그곳으로 가 바이크를 튜닝하며 시간을 때웠다. 바이크는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애인의 수면 시간에 종종 문제가 일어날수록 그것은 더욱 값어치 있게 변해갈 것이다. 채민은 그 점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늘도 지하실로 내려가 바이크를 확인한 채민은 며칠 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바이크의 자태에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는 그대로 지하실로 내려가려다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의문이 든 탓이다.
불면증이 지속되어 저 바이크가 완성되면, 형은 그 시간에 또 무엇을 할 셈일까? 새로운 클래식 바이크를 가져와서 또 튜닝을 하려나? 혹시, 그조차도 지겹다면서 예전처럼 자해를 하면 어쩌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채민은 천천히 바이크 앞으로 돌아갔다. 일렁이는 등불에 따라 그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는 차마 바이크까지는 건드리지 못하고, 대신 주변에 있는 부품들의 나사를 하나씩 빼놓기 시작했다. 애인의 불면증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대신에 바이크를 완성하는 시기나 좀 늘려놓을 생각이었다. 얼마간 작업을 반복하던 그가 손을 털며 지하실을 나갔다.
“우채민 씨.”
마침 퇴근을 하고 돌아온 세정이 복도를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채민은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흠칫 놀라 걸음을 뒤로 물렸다. 먼지가 묻은 두 손도 뒤로 감추었다. 세정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았을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채민을 지나쳐 걸었다. 시계를 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로 옷을 갈아입을 셈인 것 같았다.
세정이 사라지자 채민은 얼른 손을 씻으러 갔다. 기름이 묻은 부위를 위주로 빡빡 씻고서 거실 소파에 앉아 세정이 오기를 기다렸다. 세정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다비드의 문자였다.
<채민 씨! 곡 확인했습니다>
<감 좋은데요?>
채민은 휴대폰 화면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현재 다비드에게 피드백을 받아 가면서 작업물을 계속 수정하는 중이었다. 스케치하듯 그려낸 음악을 발송하고, 의견을 받아서 수정하고, 다시 발송하고…. 일주일 전에는 다섯 번째 음악만 따로 떼어내서 편곡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오기에 밤을 새우면서까지 작업해서 보내주었다. 방금 문자는 그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채민은 답장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답장을 기다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꼽아보았다. 이제 스케치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것 같으니까… 곡을 정돈한 뒤에… 편집 작업만 하면 되겠다. 편집을 하면서 다비드에게 또 얼마나 시달릴지….
채민은 지쳤다는 듯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대표님.”
-채민 씨! 일단 수고하셨고요. 곡이 정말 잘 빠졌어요.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편집 마무리 단계라서… 조만간 영상을 보낼 텐데요. 받으시면 채민 씨도 음악 편집 시작하시면 되는데…….
다비드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뜸을 들였다. 누운 채로 휴대폰만 귀에 붙이고 있던 채민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말씀하세요.”
-지금 채민 씨가 보내준 곡이 상당히 좋아서요. 서칭이었죠, 제목이? 그래서 그거 한 번 녹음해볼까 하는데.
다비드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서칭 포함해서 세 곡 정도만 오케스트라 섭외해서 녹음해보고 싶거든요? 그동안 여기저기 좀 알아봤는데, 되는 곳이 몇 군데가 있더라고요. 채민 씨 의견은 어때요?
“…저야 당연히 좋죠.”
워낙 저예산 영화다 보니까 녹음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아니, 만약 녹음을 한다고 치더라도 한 곡 정도만 겨우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채민의 목소리에서 들뜬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다비드가 짧게 웃었다.
-채민 씨는 보통 작곡가 분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마이너한 코드를 거침없이 사용해서 좋아요. 이게 대중음악에선 잘 안 먹히잖아요. 저 같이 이런 장르의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굉장히 반기는 데 반해서요.
실제로 학부 때 채민의 자작곡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인기가 없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크게 억울하진 않았는데, 다비드가 이렇게 말해주니까 내심 기가 살았다.
-이런 좋은 곡을 기계음으로 썩힐 순 없잖아요?
“감사합니다.”
-악보 수정해줄 수 있어요?
“네. 내일까지도 됩니다.”
-좋네요. 흠, 그럼 중간중간 연락드릴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채민은 기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슬리퍼 끄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세정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채민이 소파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기자, 세정은 조금 전 채민이 앉아있던 곳에 앉았다.
“일찍 퇴근하셨네요.”
“네. 저녁 안 먹었죠? 우리 나가서 먹어요.”
세정이 들고 있던 봉투를 채민 쪽으로 기울였다. 봉투의 겉면이 낯익었다.
“이것 먼저 보고.”
“어… 제가 준 편지 아니에요?”
세정이 보고서 감동받을 수 있도록 아주 대단한 편지를 작성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물 건너갔다. 일에 치여서 몇 주가 지나도록 편지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민은 대신 이미 배도빈이 몰래 훔쳐본 전적이 있는 습작 편지를 내놓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세정에게 보여주긴 해야 했던 편지였다. 배도빈도 본 편지를 세정이 못 보는 것은 말이 안 됐으니까.
“아직 읽지 못해서 같이 보려고요.”
“…….”
그건 좀 그런데……. 채민은 초조한 마음을 담아서 손가락을 구부려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채민의 속도 모르고 세정은 편지를 열었다. 글자 크기가 통일되지 않은 글씨들이 배열을 무너트린 채 뒤죽박죽으로 쓰인 글이었다. 한 면을 쭉 훑어본 세정이 간지럽게 웃었다.
“웃긴 글씨네.”
채민은 민망해졌다. 그 자신이 보기에도 상당한 악필이었다. 세정은 편지를 내려 보며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이 퍼졌다. 채민은 자신과 조금 떨어진 채 앉아있는 세정 쪽으로 슬며시 몸을 붙였다. 세정의 어깨 부근에 가볍게 뺨을 얹었다.
채민을 쳐다보지 않고 편지에 집중하고 있던 세정은 잠시 후 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편지의 첫 부분을 손가락으로 한 번 가리켰다가 떼어내고, 거의 마지막 단락을 손가락으로 또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제정신으로 쓴 것 같지가 않아요. 다 외모 이야기밖에 없네요?”
“……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채민이는 내가 어떻게 보여요?”
“예?”
채민은 곤란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 편지가 완성본이 아니라서 그래요. 원래 얼굴 얘기 말고 형한테 위로받았던 말이나… 설렜던 행동이나… 이런 걸 언급하려고 했어요. 편지를 제대로 썼다면 그런 걸로 쭉 채웠을 거예요. 형, 죄송해요. 편지 제대로 못 써서.”
괜찮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은 세정은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어느 한 구간만 반복해서 읽고 있는 듯했는데, 아무리 시선을 따라가 보려고 애써도 글씨가 워낙 조밀하게 쓰여 있어서 대체 어디를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초반 부분인 것 같은데….
채민이 조금 더 머리를 들이밀자, 불쑥 편지에서 시선을 뗀 세정이 그를 쳐다보았다. 방해했나… 싶은 순간, 세정이 그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세정은 채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편지 고마워요.”
말투엔 의외로 진심이 담겨있었다. 채민은 무어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그저 세정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세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세정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채민의 손을 그대로 끌어와 살폈다.
“이게 뭐죠?”
채민의 옷소매에 짙은 얼룩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채민도 그제야 얼룩을 발견했는지 허둥대며 손가락으로 지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런다고 지워질 리가 없었다. 아까 손을 씻을 때 발견했다면 옷을 갈아입었을 텐데. 아마도 바이크 부품을 만지다가 묻었을 것이다. 채민은 지우기를 포기하고 중얼거렸다.
“……뭐 먹다 흘렸다고 하면 믿어주실래요?”
“기름을 먹었어요?”
그가 여상한 투로 물었다. 채민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 네. 뭐….”
세정은 눈웃음을 치며 채민의 뒷목을 잡았다.
“어디 다시 핥아보자.”
세정이 고개를 틀어서 채민의 입술을 부드럽게 깨물었다. 혀끝으로 입술을 훑으며 천천히 입안을 파고들자, 채민이 세정의 뺨을 붙잡아 살짝 밀어서 입술을 떼어냈다.
“사실 바이크…… 가지고 놀았어요. 밑에서.”
세정이 동작을 멈추었다.
“지하실에서요?”
“네…. 형이 밤마다 가서 노는 곳이요.”
모호한 언어를 써서 말장난을 했는데, 세정은 받아주지 않았다. 다만 채민의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을 서서히 떼어내면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잠시 후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세정은 채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이고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세정이 화제를 전환시켰다.
“아까 전화는 뭐였어요?”
“그거요….”
채민의 표정이 펴졌다. 그는 자신이 작업한 영화 음악 세 곡이 오케스트라 녹음을 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보통 다 오케스트라 녹음을 하긴 하지만, 다비드의 영화 같은 경우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던 터라 녹음을 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이렇듯 하게 되어서 선물 받은 기분이라고도 덧붙였다. 시선을 바닥 언저리에 둔 채 채민의 말을 듣고 있던 세정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좋은 곡엔 투자할 가치가 있죠.”
좋은 곡…. 아까 다비드가 칭찬을 해줬을 때보다 지금 세정이 툭 던져준 이 한마디가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세정이 이번에 제가 만든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채민이 깊이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중얼거리자, 그를 빤히 보던 세정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줄 알고 따라 일어서려는데, 세정이 편지를 챙기며 통보했다.
“잠깐 지하실에 다녀올게요.”
“…갑자기 왜요?”
“우채민 씨가 뭘 만졌나 확인해보려고요.”
채민은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형 작품에 손끝 하나도 안 댔어요. 정말인데….”
“알아요. 위험한 게 있나 확인만 해보려고요. 있으면 치워놔야지.”
채민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채민이 혹 지하실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카로운 물건이라도 만질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게 세정은 세 살 아이의 부모보다도 걱정이 많았다. 저렇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도 다 신경 쓰고 걱정하니까 불면증이 낫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옷 갈아입고 있어요.”
세정은 빠른 걸음으로 지하실 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세정의 등을 보면서 채민은 떨떠름하게 이마를 매만졌다.
***
-채민 씨, 녹음 날짜 정해졌어요.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악보를 고치고 있던 채민은 예상보다 빠르게 들려온 소식에 내심 놀랐다. 다비드는 정확한 녹음 날짜와 장소를 말해주면서 덧붙였다.
-녹음 현장에 작곡가는 필참인 거 아시죠?
“네, 압니다.”
-녹음실 대여 기간이 짧아서 촉박하게 진행될 거예요. 종일 녹음해도 이해해주시고요.
종일? 채민은 머뭇거렸으나, 곧 알겠다고 대답했다. 외국인들로 구성된 계약직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장기 노동을 할 리 없으니 늦어도 저녁 무렵에는 끝이 날 터였다. 그 정도면 세정의 퇴근 시간과 얼추 맞출 수 있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바로 휴대폰 캘린더에 해당 날짜를 체크해두었다. 그리고 세정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 새로운 스케줄을 알려주었다. 세정은 일을 하던 중에 받은 듯 건조한 목소리로 간간이 맞장구만 쳐주다가, 채민의 말이 모두 끝나자 곧바로 화제를 돌려서 대화를 더 이어갔다.
-이제 뭐 할 거예요?
“악보도 손보고, 조금 놀기도 하고.”
-이제 논문은 계획에 없나 봐요?
“……하고 있어요. 마무리 단계예요.”
-졸업 못 하게 되면 미리 말해줄래요? 독일에 계속 있을 방법을 찾아보죠.
채민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겸연쩍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졸업해서 한국 갈 거예요.”
-여기 있어도 돼요. 이정우를 한국으로 보낼 방법을 찾을게요.
“하하…. 아니에요.”
채민은 가볍게 웃었다. 이정우는 세정의 친형으로, 채민과도 몇 번 만난 적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세정과 이정우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났다. 그래서 한집에서 같이 지낸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공유할 추억이 전무했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언젠가 채민은 세정에게 이정우의 나이를 물었는데, 세정은 성의 없는 태도로 모른다고 대꾸했다.
그들은 공통점도 없는 듯 보였다. 외모도, 키도, 성격도 제각기 달랐다. 성격…. 그래. 특히 성격이 말이다.
이정우는 마치 세정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성격이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으며, 예의를 알았고, 채민을 가리키며 “우리 막냇동생인가.” 하고 말할 정도로 살가웠다. 친화력도 상당했다. 다만 어느 면에서는 그가 세정보다 무서웠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웃는다. 미소 말고는 다른 표정 같은 건 없다는 듯이. 서비스업에 최적화된 로봇처럼.
그는 그런 웃는 얼굴로 세정에게 대담하게 치대곤 했다. 세정과 어떤 추억도 없으면서, 친하지도 않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친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분은 웃는 얼굴 말고 다른 표정이 있을까. 채민은 미묘한 얼굴로 뺨을 긁다가 들려오는 세정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딴생각해요?
“아뇨. 그게, 그냥 이것저것…….”
채민은 가볍게 몸을 떨면서 그와 통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
첫 녹음을 앞두고, 채민은 평소보다 조금 더 꾸몄다. 녹음실에 들어가 보는 것도 처음이고, 제 곡을 녹음해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나름대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싶었다. 그는 빳빳하게 다려진 검은 셔츠를 입었고, 값비싼 시계를 찼다. 이 정도면 되겠지…? 형이 뭐라고 하려나.
하지만 녹음실까지 데려다주겠다면서 출근도 조금 미루고 밖에서 채민을 기다리고 있던 세정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도 별말이 없었다. 세정이 오늘 왜 이리 꾸몄냐고 물어보면 절대 다비드나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갖춰 입은 것이 아니라, 단지 기분을 내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하려고 예행연습까지 해놓았는데, 당혹스러웠다. 결국 채민은 제 쪽에서 먼저 어필해 보았다.
“저 오늘 어때요?”
“귀여워요.”
“……저 옷은 어때요? 힘 좀 줘봤는데.”
“그래요?”
세정은 눈썹을 한 번 들어 보였을 뿐 달리 반응이 없었다. 채민의 차림새 어디에 힘이 들어간 것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대신에 세정은 손을 뻗어 채민의 손을 쥐었다.
“오늘 몇 시쯤 데리러 갈까요?”
“……시간을 봐야 알 것 같은데. 저녁때쯤? 늦지는 않을 걸요.”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한 것치고 채민은 녹음 첫날부터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없었다. 다비드가 회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녹음 첫날부터 이렇게 잘 풀리니 필히 기념 파티를 해야겠다면서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 몇 명과 다 함께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채민 혼자 빠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채민은 어쩔 수 없이 세정에게 연락을 넣어두고 술로 입만 축였다. 다비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채민의 옆에서 연신 하하 웃어댔다. 오늘 입은 옷이 너무 잘 어울린다느니, 시계가 참 멋지다느니, 헌팅 나가면 백 퍼센트 성공할 거라느니 죄 쓸데없는 소리였다. 그런 말들은 세정이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채민은 다비드를 외면하며 맥주만 조금씩 홀짝였다.
술자리는 지겹도록 길었다.
그리고 그 지겨운 회식은 어쩌다 보니까 녹음이 있는 날마다 반복되었다.
***
“오늘도 술 마시겠단 말이죠?”
시간을 체크하며 세정이 물었다.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고치던 채민은 머쓱하게 뒤돌아 그를 살폈다. 세정은 한쪽 눈썹만 미미하게 찌푸린 상태로 채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채민이 입술을 달싹거릴 뿐 입을 열지 못하자 세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채민 씨에게 화내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죄송해요. 대표님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
세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내가 그 대표에겐 원한이 조금 있어요.”
“…….”
“기회 봐서 따귀나 좀 때릴까 봐.”
“그러, 그러지 마세요.”
그가 농담을 했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채민은 고개를 휘저을 수밖에 없었다. 채민이 얼른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녹음이라서, 이젠 술자리 없을 거예요.”
“네. 그러길 바라요.”
“음… 그런데 형.”
채민은 옷소매를 반듯하게 정돈하다 말고 시선을 올려서 흘끔흘끔 세정을 곁눈질했다.
“형, 근데 저 누구랑 술 마시든 간섭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막상 일이 닥치니, 기억이 안 나요.”
세정의 대꾸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뭐…. 채민 또한 어느 누구와도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다짐해놓고 이렇게 끌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있는 처지니까.
“다비드가 오늘 또 술 마시자고 하면 핑계 대고 최대한 빼긴 뺄 건데……. 만약 또 술 마시러 가게 되면, 형이 데리러 와주실 거죠?”
“알았어요. 그런데 우채민 씨, 오늘은 따로 가도 될까요?”
시계를 본 세정은 휴대폰을 꺼냈다. 그동안 채민을 데려다주려고 세정이 자주 출근 시간을 늦추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채민은 알겠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세정도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잠시 번쩍였다.
세정이 사라지자, 채민은 세정과는 다른 차를 타고 녹음실로 향했다. 기사에게 적당한 곳에 세워달라고 말한 뒤에 조금 걸어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있던 다비드가 그를 반겼다. 다비드는 가장 먼저 채민의 손목 언저리를 쳐다보았다.
“어? 다르네? 오늘은 그 시계 안 차고 왔네요.”
“예? ……무슨 시계요.”
“아니에요.”
다비드는 왜인지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채민은 찜찜한 표정으로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첫 녹음 때부터 꾸준히 차고 왔었던 시계가 있는데, 그걸 말하는 건가? 설마 술 먹이고 훔쳐가려고 계획 중이었나?
“일단 녹음 들어가죠. 오늘 안에 끝나야 할 텐데요.”
채민은 그제야 대형 강당에 있는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악기를 조율하는 스태프와 지휘자, 관리원들도 훑었다. 음악이 흐르는 곳을 따라서 꼼꼼하게 설치된 각종 마이크와 녹음 장비들도 보았다. 이 수많은 사람이 제가 스케치한 음악에 색을 입힌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했다.
“충분히… 순조롭게 끝날 것 같아요.”
채민의 말에 다비드가 웃었다.
“그러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로 녹음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다비드는 역시나 기분이 최고조에 다다라선 회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한국어로 한 터라, 알아들은 사람 역시 한국어를 아는 채민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채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비드의 말을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비드는 채민의 팔을 덥석 잡고서 딱 채민만 쳐다보며 낮게 말했다.
“둘이 마셔요.”
“왜요?”
둘이, 라는 말에 인상부터 구겼더니 다비드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배우 소개시켜주려고요. 소개하는 자리에 다른 사람 끼기는 좀 그렇잖아요.”
“저는 소개 안 받아도 됩니다.”
“제가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 친구 잘생겼어요.”
그 친구가 잘생긴 거랑 저랑 대체 무슨 상관인지. 채민은 답답했지만, 다비드는 이미 그 배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구체적인 약속을 잡고 있었다. 녹음이 순탄하게 끝나서 행복에 겨워 보이는 저 얼굴을 보니까 어쩐지 또 술자리에 참석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채민은 별수 없이 세정에게 문자를 보내놓았다.
<녹음 잘 끝났는데요>
<저 또 맥주 마시러 가야 할 것 같아요….>
<데리러 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 핑계 대고 빠져나오면 되는데….>
“채민 씨! 내 차 타요. 내가 아는 곳으로 갑시다.”
채민은 다비드의 차를 얻어 타고 장소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여행객들이 많이 들르는 북적북적한 술집이었다. 주변에 관광지가 있기도 하고, 밤까지 영업하는 식당도 몇 없다 보니까 다들 이곳에 몰려든 모양이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 배우라는 남자를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널찍한 테이블을 잡아두고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비드는 채민을 데리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고 다비드를 타박한 남자가 채민을 돌아보았다. 채민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고, 잠시 채민을 훑어보던 남자는 씩 웃었다.
“좋네. 얼굴 좋아. 이러면 백 프로지.”
“그렇지?”
다비드가 킬킬 웃었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채민은 그냥 메뉴판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 갈게요>
“맥주 마실 거죠?”
다비드를 올려다보니, 그는 채민의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벌써 맥주를 시키고 있었다. 술을 받아든 다비드가 각자에게 한 병씩 나누어주었다. 채민은 맥주를 병째로 한 모금 마시곤 입맛을 다셨다.
다비드와 남자는 술을 마시며 주문할 메뉴를 토론했고, 또 그 와중에 간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박스러운 그들의 행동 때문일까. 채민은 지금 이 자리가 상당히 단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게 급박하고, 경박했으며, 성가시고, 또…… 정신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붕 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괜히 닭살이 돋아 팔을 한 번 쓸었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문득 다비드가 채민의 손목을 잡았다.
“이건 얼마짜리죠?”
“글쎄요.”
채민은 잡힌 손을 빼내었다. 다비드는 천만 원대인 거냐고 몇 번이고 묻더니 채민이 대답해주지 않자, 남자와 함께 시계의 값에 대해 토론을 했다. 이거 백만 원 선인데…. 물론 채민에게는 비싼 편이었지만, 다비드가 예상한 천만 원에 비해서는 가격대가 소박한 편이었다.
“채민 씨, 아까 올 때 무슨 기사 달린 차 타고 오지 않았어요?”
“어, 정말?”
“…….”
언제 본 거지. 일부러 기사님에게 스튜디오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달라고 한 후 걸어왔는데.
다비드와 남자는 혹시 집안에 대해 숨기는 것이 있느냐고 자꾸 캐물었다. 채민은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는 부자가 아니었고, 제 물건을 자랑하기에는 그것들은 온전히 제 물건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낯간지러웠다.
“친하게 지냅시다.”
남자가 채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채민은 일 초 정도만 잡아주고는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여전히 붕 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사람들을 훑어보았고, 채민 또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세정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십 분 내로 갈게요>
<추우니까 나와 있진 말고>
채민은 <ㅎㅎ> 라고 답장을 보내놓고, 슬며시 갈 준비를 했다. 아는 분이 근처에 왔으니 이만 가보겠다고 하면 보내줄까? 그가 속으로 이런저런 가정을 해보며 입을 떼었을 때였다.
“됐다. 됐다. 동양인이야.”
갑자기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여자들만 있는 테이블이었다. 채민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뭘까?
그들은 여자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중간에 채민 쪽을 가리키기도 했다. 난감해하던 여자들은 채민을 보고는 얼굴이 꽤 풀어졌지만, 여전히 당혹스러워했다. 채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지, 대체.
채민의 손끝이 구부러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는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채민이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곁에 여자들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다비드가 채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마치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듯이 말했다.
“채민 씨, 헌팅 성공했어요. 일본어 좀 할 줄 알아요?”
“…….”
이 미친…….
채민은 속으로 경악했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
두 남자의 얼굴은 조명 빛 아래에서 불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 톤이 높았으며, 맥주를 물처럼 들이켰고, 무언가를 마시지 않을 때는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또, 돋아 오른 닭살을 감추기 위해 간간이 자신의 귀와 목, 허벅지를 쓸었다. 그들은 흥분의 끝자락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여자들과 소통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으음… 베리 우마이… 유 노? 마이 네임… 다비드 데스… 하하! 카레시 이루노? 에이-! 아이 캔트 빌리브. 아이 돈트 바이 잇…… 하하. 호호….
채민은 두 사람의 추태를 감상하느라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뒤늦게서야 정신이 든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뒤늦은 고민에 잠겼다. 그냥 집에 일이 있다며 가버릴까? 그게…… 가장 나을 것 같은데.
그러나 채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비드가 그의 팔을 잡아서 대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채민 씨도 소개해야죠. 여성분들이 다 채민 씨만 보고 있네.”
“예?”
고개를 든 채민은 모두의 시선이 제게 꽂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은편 여자들은 특히나 명백히 호감이 담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선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저 여자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 편이 좋았다.
“채민 씨, 그…… 간단한 인사라도.”
“…….”
채민의 얼굴에 서린 난처함을 보고서 다비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곧 다비드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탄식했다. 그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채민 씨…. 그냥 채민 데스, 라고 딱 한마디만 하셔도 돼요. 아마도 채민이 일본어를 못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채민은 입술을 뗄 듯 말 듯 한참을 고민하더니, “채미에으….” 하고 대충 말했다. 그러자 용케 알아들은 여자가 “안녕하세요.” 하며 화답했다. 다비드와 남배우가 되도 않는 일본어를 한답시고 요란법석을 떨 때에도 해주지 않았던 한국어였다.
“한국어 할 줄 알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다비드의 어깨를 쥔 남배우가 어쩐지 분하다는 어투로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남배우의 분위기와 어투를 읽고서 그가 어떤 착각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채민을 보고는 또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나는 이만큼이나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알려주듯이. 그것은 다비드와 남배우가 여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제 일본어 실력을 어필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다비드는 “와… 잘생기면 끝이네. 그냥 끝이야.” 하고 중얼거렸고, 남배우는 살짝 묘해진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배우야.”
“아, 그, 그렇지. 너도 잘생겼지.”
잠시간의 침묵이 왔다. 다비드는 목을 풀고는 다시 여자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곧 두 사람은 일본어와 한국어, 영어를 섞어서 그들 나름의 소통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 번 채민에 관한 이야기로 물꼬가 트이자 여자들은 이제 그를 대화에 끼우지 않고는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계속 채민만 쳐다보았다. 이 상황은 그다지 재미가 없지만 채민의 얼굴은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아주 열렬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채민의 얼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다비드와 남배우가 하는 말을 절반쯤 무시해버렸다.
그러자 다비드와 채민이 합류하기 전부터 술을 마셨던 탓에 그들보다 살짝 더 취기가 오른 남배우가 조금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형, 저긴 여자 둘이고 우린 셋인데 밸런스가 안 맞잖아.”
“응? …에이, 여자 인원은 적은 게 나아. 그리고 채민 씨는… 채민 씨, 저 여자들한테 관심 있어요?”
“아니요.”
“그래. 없다잖아. 우리가 한 명씩 맡으면 돼.”
“그래도 한 명 더 데려오자. 저기 혼자 있는 여자는 어때.”
남배우가 일본인 여자들 몰래 다른 테이블에 앉은 여자를 턱짓했다. 그쪽을 흘끗 본 다비드가 턱을 쓸었다.
“아……. 너무 예뻐서 부담스럽다. 타보고 싶긴 한데.”
타보고 싶다는 게 뭐지…? 남배우와 숙덕거리던 다비드는 결국 이 일본인 여자들에게나 최선을 다하자고 결론을 내린 것인지 여자들에게 제 술을 마셔보라고 권하면서 재차 대화를 텄다.
다비드는 휴대폰을 꺼내서 제 SNS를 소개했다. 연락처를 대신하여 SNS 아이디를 교환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크게 관심을 주지 않자 그는 남자의 옆구리를 쑤셨다. 남배우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제 SNS를 보여준다. 여자들은 아아…… 하며 예의상 리액션을 해주었을 뿐 쉽사리 제 아이디를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비드는 또 채민을 끌어들였다.
“채민 씨, SNS 있어요?”
“안 해요.”
“예? 왜요? 아, 개인 채널 하지 않아요? 그거 보여주면 되겠네.”
채민이 미간을 좁혔지만 다비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채민의 휴대폰을 가져가서는 채널에 업로드된 피아노 영상을 틀었다. 영상에 피아노를 치는 채민의 손이 나오자, 여자들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이 주는 관심이 오로지 자신의 몫인 양 다비드는 여러 영상을 틀며 신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한동안 피아노의 선율이 테이블 주변을 부드럽게 둘러쌌다. 여자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채민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정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비드에게서 제 휴대폰을 뺏어왔다. 여자들에게 영상을 보여주며 웃고 있던 다비드가 순간 굳어진다. 그는 의아하게 채민을 보았다. 채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바쁜 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예?”
다비드는 당황하여 채민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왜요? 저희가 뭐 불편하게 했습니까?”
“아뇨. 바쁜 일이 있어서요. 누굴 만나기로 해서….”
“누굴…… 그럼 그 사람을 여기로 부르면 되죠. 같이 놀아요.”
“그러고 싶진 않아요.”
잠시 침묵하던 다비드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희가 뭐 불편하게 했어요?”
“아니라니까요.”
“채민 씨, 조금만요….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누가요. 저 여자들이……? 하나도 안 넘어온 것 같은데. 여기서 그들에게 더 공을 들인다 하여도 그들의 마음이 다비드 쪽으로 기울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기운다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세정이 나타나 이미 이 구역을 뒤집어엎은 후일 테다.
다비드가 좀 말려보라는 듯 남배우에게 눈짓했다. 남자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불현듯 여자들을 곁눈질했다. 남자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흠… 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라고 해. 가고 싶다는데.”
“왜 그래. 저 여자들 꼬신 거 채민 씨 덕이었잖아. 우리 집 가서 술 마시자 할 건데, 채민 씨 없으면 좋다고 따라나서겠다.”
“……우리만 있어도 괜찮아. 바쁘다는데 그냥 보내줘. 가고 싶다잖아.”
“아, 그래도….”
다비드는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채민을 보았다.
“이 자식이 왜 그러지…. 채민 씨 껴서 헌팅하자 할 땐 반겼으면서. 그렇죠?”
채민은 굳이 대꾸해주지 않았다. 다비드가 입맛을 쩝 다셨고, 남자는 속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채민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틀었다. 그런데 그때, 다비드가 채민이 차고 있던 시계를 순식간에 풀더니 얼른 감추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지? 왜 내 시계를…? 무슨 이유에서든 남의 시계를 빼앗는 게 말이 되나?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머릿속으로 혼란이 왔다. 채민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뭐예요?”
“조금만 있다 가요. 예? 시계는 이따 줄게요.”
“…….”
“근데 이것도 진짜 비싸 보이네요. 전에 그거 억대짜리였죠? 이것도 그 가격 즈음 됩니까?”
그렇게 말한 다비드가 시계를 제 손목에 찬 후 채민을 끌어다 앉혔다. 채민은 놀란 나머지 얼결에 앉긴 했지만 다시 합류할 생각은 아니었다. 시계고 뭐고 나가야 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에 더 있다가는 다비드에게 감정이 생길 것 같았다. 나쁜 감정이 생기면 혼내주고 싶을 테고, 그러면 여기에 일부러 눌어붙어서 모르는 척 세정을 끌어들일지도 몰랐다.
채민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였다. 문득 맞은편 여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 다비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래. 저 여자들 꼬신 거 채민 씨 덕이었잖아. 우리 집 가서 술 마시자 할 건데, 채민 씨 없으면 좋다고 따라나서겠다.’
“…….”
여자들을 두고 혼자 도망치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아까 뭘 탄다 어쩐다 하던 발언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말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정말 야비해 보였다. 채민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다비드와 남배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일본어 실력이 출중하지는 않다. 채민이 일본어를 사용한대도 저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채민은 휴대폰을 꺼내서 번역기 어플을 눌렀다. 그리고 언어를 입력한 후에 버튼을 눌렀다. 채민은 기계음의 목소리를 빌려서 처음으로 여자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저기요 저분들 사실>
<범죄자예요>
<얼른 도망가세요>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말의 의미는 여자들만 알아들은 듯했다. 채민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길 없는 다비드는 그저 신나서 외칠 따름이었다.
“아, 채민 씨! 너무하네요. 우리 기계 도움 없이 대화하기로 해놓고 참! 어쩔 수 없다. 나도 꺼내야겠어.”
다비드와 남자가 번역기 어플을 켜는 사이, 채민은 안색이 나빠진 여자들에게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음성을 들려주었다.
<저 나갈 건데 같이 도망가요>
뭐라고 번역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다급함이 전달될 만큼 훌륭한 번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자들은 불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채민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어리둥절해 했다.
“음…….”
채민이 곤란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아, 그게…… 그…….”
“……?”
여자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숙덕거렸다. 채민은 다시 상황을 천천히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휴대폰을 드는데, 문득 옆에서 다비드가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는 것이 느껴졌다. 말의 내용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터라 채민은 가리려고 했지만 다비드가 수상쩍다는 듯 장난을 걸었다.
“이봐요, 채민 씨. 아깐 여자들한테 관심 없다 해놓고 왜 마음이 바뀐 거예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예?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드는 건데요?”
채민이 대답하려는데, 남배우가 짜증을 냈다.
“아까 관심 없다 해놓고 갑자기 마음 바뀌는 게 말이 되나. 그럴 거면 아까 그 혼자 있던 여자도 같이 껴서 노는 게 나았지. 아, 갔잖아.”
“그 여자는 무슨 모델처럼 생겼던데…. 우리한테 눈길이나 주겠어?”
“형은 그렇지. 근데 난 백인이랑 많이 사귀어봤다니까.”
다비드가 허허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이 여자들도 너한테 관심 없고 채민 씨한테만 관심 주는데 백인을 꼬시기는 뭘 꼬신다 그래.”
남배우가 눈을 번뜩이며 다비드를 노려보았다. 다비드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빼며 “성격 나온다, 성격.” 하고 중얼거렸고, 남배우는 애써 눌러 참는 듯이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채민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번역기에 글을 작성했다. 그런데 다비드가 채민 쪽으로 쭉 신경을 세우고 있었는지 바로 또 훔쳐보려고 들었다.
채민은 안 되겠다 싶어서 은근슬쩍 여자들이 앉은 맞은편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번역기에 다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의 자리로 침범해 들어온 채민을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아까 채민이 말해준 것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의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비드와 남자만이 그들을 황당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왜 저기 가서 껄떡거리지. 뭐라고 떠드는 거야. 형은 알아?”
“아니…. 채민 씨, 혼자 거기 있지 말고 와요.”
채민은 대답하지 않고 번역된 글을 여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들에 관한 험담을 늘어놓고, 얼른 도망을 가라고 경고를 날린 것뿐이었는데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보더니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비드가 당황하며 두 사람을 막았다. 여자들이 기겁하며 얼른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 어디 가요? 번역기. 번역기. 어디 가요? 뭐, 뭐야. 갑자기! 채민 씨, 뭐라고 했길래 이래요.”
채민은 소지품을 챙겨 들고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채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당치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다비드는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되묻지 못했다. 그는 그저 여자들이 사라진 입구만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무력하게 달싹거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남배우였다. 남자는 채민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진짜 뭐라고 했어요?”
남자의 눈빛이 제법 사나웠다. 채민은 누군가의 악의가 담긴 눈빛을 의연히 견딜 재간이 없었기에 다가오는 시선을 슬슬 피했다. 습관적으로 목을 매만졌다. 채민이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이없다는 어조로 읊조렸다.
“아니, 씨발…. 있기 싫었으면 혼자만 가면 됐지. 왜 훼방을 놔. 돌았어?”
남자는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채민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툭툭 찔렀다. 조금 아팠던 채민이 눈살을 찌푸리자 남자가 움찔한다. 남자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것은 약자를 괴롭힐 때 동반되는 죄책감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자 혹은 대등한 적을 마주했을 때 남자가 세우는 경계심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채민이 싸움깨나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이 방금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괜히 목소리를 키웠다.
“말 좀 해보라고요. 씨발, 오랜만에 낚았는데 왜 훼방을 놓냐고.”
그의 격양된 감정을 진정시키고자 다비드가 나섰다.
“야, 됐어. 됐으니까….”
“뭐가 됐어? 난 안 됐는데?”
“……너 취했… 맥주를 그렇게 먹더니 취했네. 채민 씨, 얘가 갑자기 확 왔나 봐요. 미안합니다.”
다비드는 허허 웃으면서 남자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자는 놔보라며 다비드의 몸을 밀치고는 다시 채민에게 다가섰다. 이번에는 채민이 뒷걸음질을 쳤다. 채민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주변 모두가 이 테이블에서 터진 갈등을 의아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세정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채민은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어? 야, 거기 안 서? 대답하고 가라고.”
채민은 빠르게 문 앞까지 걸었다. 그러나 문 바로 앞에서 덜컥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채민의 어깨를 잡아챈 것이다. 채민은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
“그냥 구해주고 가고 싶었어요.”
“뭐?”
“앞에서 무슨 쓰레기 같은 수작질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앉아있는 게 가여워서 그랬습니다.”
“…쓰레기?”
불쑥 남자가 채민의 목을 낚아챘다. 숨이 컥, 막혀옴과 동시에 목에 힘이 가해졌다. 욕설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설마 모가지를 잡힐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채민의 눈꺼풀이 공포로 바르르 떨렸다.
“와, 씨발. 순간 빡쳤네. 무슨 쓰레기?”
채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 자신을 숨기고 있긴 했지만, 실은 겁이 많은 성정이었다. 누가 제게 해를 가하려고 들면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채민이 몸을 움츠리며 바들바들 떨자, 남배우는 한 번 더 움찔했다. 이번에는 경계심 때문이 아닌 듯했다. 남배우가 얼굴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리며 의아하게 눈썹을 올렸다.
“얘 뭐야…?”
중얼거리던 남배우는 이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씨발 뭔 겁이 이렇게 많아.”
목소리가 누그러진 것 같아서 곧 풀어주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오히려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가 이런 애한테…….”
분기를 담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아득했다. 채민의 눈꺼풀이 마구 떨렸다. 채민의 시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남배우와 그 뒤에서 이곳을 곤란하게 보고 있는 다비드가 눈에 들어왔다. 다비드는 눈이 마주치자 “이것 참…… 하아…….” 하며 신음만 내뱉을 뿐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난처함을 어필했다.
채민은 슬슬 숨이 막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놔달라고 남배우의 손을 비틀었다. 남배우는 힘이 후달리는 듯 이를 꽉 물고 “쓰레기? 쓰레기라 그랬냐?”라고 되뇌었다.
남자의 손을 최선을 다해 떼어놓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와중, 불현듯 어떤 장면이 채민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큽! ……으.”
비가 오는 어느 날 똑같이 목을 잡힌 적 있었다. 그 아름다운 사내에게.
그때는 지금처럼 무자비하게 목을 잡힌 것도 아니었다. 멱살 그 언저리나 조금 잡혔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보다는 그때가 훨씬 더 무서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포심으로 꽉 조여 오로지 그 형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애들 장난이다. 채민은 의연해 보려고 애썼다. 몸에 힘이 좀 도는 듯했다. 채민은 남자의 팔을 떼어내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남자가 더더욱 손아귀에 힘을 준다. 목젖까지 꽉 막힌 듯 도통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를 죽일 셈인가, 이 미친놈은.
“……으…흐.”
채민은 남배우의 팔을 부서트릴 듯이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이 빠져서 눈을 감았다.
그때 갑자기 목을 죄던 아픔이 사라진다. 채민은 무슨 일인지 알아볼 새도 없이 참고 있던 기침을 토해냈다. 허리를 굽히고, 숨을 세게 몰아쉬었다. 채민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콜록콜록, 기침을 뱉었다. 채민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누군가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였다.
채민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시선을 들었다. 제 곁에서 눈높이를 맞춰 앉은 채로 등을 쓰다듬는 남자가 보인다. 채민은 눈물방울을 더욱 떨어트리며 서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채민이 옷소매로 눈을 비비적거리자 세정이 바짝 다가가 등을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토닥거림은 한참이나 계속되었고, 채민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는 빨개진 눈으로 세정을 불렀다.
“형…… 그.”
채민은 말을 멈추었다. 그제야 세정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채민의 눈이 당혹으로 흔들렸다.
세정은 채민보다 더욱 혼란한 얼굴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넋을 놓고 채민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어떤 두려움도 보였고, 또 어떤 혐오감도 보였다. 그는 비를 맞은 사람처럼 무력하게 채민만을 보고 있었다.
이세정은 지금 어느 시간에 있는 거지? 채민은 문득 겁이 났다. 하얘진 손으로 세정을 흔들었다. 세정은 번뜩 정신이 든 듯 눈을 한 번 깜빡거리더니 잠시 채민과 눈을 맞추었다. 세정의 손이 채민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채민을 만지는 동안 세정의 속에 산재되어 있던 혼란과 두려움이 한 꺼풀씩 벗겨졌다. 문득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가 다물리고,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혐오와 살의가 그 속에 찼다.
채민은 세정의 옷자락을 쥐었다. 세정이 멈칫하고 채민을 보았다가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겠어요.”
“형….”
“우채민 씨는 지금 날 붙잡으면 안 돼요.”
물속에 잠긴 듯 숨 막히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세정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다. 채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형을 말리고 싶은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형의 멘탈이 나간 것처럼 보여서 걱정이 되었다. 채민은 아주 괜찮은데, 세정이 전혀 안 괜찮아 보여서… 그게 두려웠다.
채민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형, 일단 나가요.”
“…….”
“우리 나가서 얘기해요. 무슨 일인지 나가서 설명해드릴게요. 여기 손님들이… 다들 겁에 질려있어요.”
“저 사람들보다….”
세정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지금 너무 무서운데요, 우채민 씨.”
***
장 실장은 바닥에 눌어붙은 옥색 껌을 무료하게 관찰 중이었다. 날이 추웠고 습관적으로 담배 생각이 났다. 그러나 상사가 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건물 앞에 차를 임시 정차해둔 상태였다. 담배 따위로 한눈을 팔았다가는 순식간에 딱지가 끊길 것이다.
피곤이 밀려온다. 재킷 안쪽에서 소분해 둔 비타민 통을 꺼내 몇 알 삼켰다. 그냥…… 퇴근을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죽은 부인의 생일날이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 그 여자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바에야 여기서 우채민의 기사 노릇을 하는 편이 나았다.
우채민….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 잘생긴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권태의 껍질 속에 두려움을 숨기고 있는 남자. 세정이 실없는 말을 해도 잘 웃어주면서, 장 실장의 농담에는 “정말 재밌네요.” 하고 감정 없는 립 서비스만 해주는 남자. 그는 장 실장이 지금껏 본 적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애인 외의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요즘에는 많이 나아져서 장 실장에게도 눈을 접어 웃어줄 때가 있었으나…… 솔직히 바라지는 않는다. 누구 눈치가 보였으니.
장 실장은 아까 전 이세정이 들어갔던 식당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입구에 내려진 가림막 커튼이 고요하다. 늦어지는 것 같아 시계를 확인했다. 채민만 데리고 나온다기에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나.
스치듯 든 생각이지만 어쩐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방면으로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바로 식당을 향해 걸었다.
그가 막 가림막 커튼을 거두어내려고 할 때였다. 안쪽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그가 움찔 물러서기가 무섭게 커튼이 힘차게 젖혀졌다. 그리고 세정과 채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 실장은 무슨 일이 있느냐 다급하게 캐물으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대표님 편을 든다기보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형.”
잔뜩 겁을 집어먹은 우울한 목소리. 채민은 식당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듯이 세정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세정이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번에는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저기에는 목격자도 많고……또.”
또……. 마땅한 핑계가 없는 듯 채민이 말을 길게 끌었다.
“또…… 그것 말고도 때리면 안 되는 이유가 많았어요.”
“이유요?”
채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세정이 조용하게 묻는다. 단정한 목소리였지만, 분노가 억눌려 있었다. 세정이 턱에 힘을 주었다.
“우채민 씨가 그 새끼 가족을 죽였다고 해도, 목이 졸릴 이유는 없어요.”
“…….”
“차에 가 있어요.”
“시, 싫어요.”
“뭐가 싫어.”
“……형, 그러지 마요. 사람들 많은 곳에서 대놓고 그러시면 안 돼요. 분명히 잡혀갈 거고…… 제가 그걸 어떻게 봐요. 저 진짜 무서워요.”
채민의 설득에 세정은 그의 손등을 매만져주었다. 진정하라는 뜻 같았는데, 정작 진정해야 할 건 세정이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그렇게 아프지 않았어요. 목 많이 졸린 것도 아니고요. 아무렇지 않았어요.”
채민의 손등을 만지던 세정의 손가락이 굳는다. 그의 표정을 본 장 실장은 상황을 지켜보던 것을 그만두고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장 실장이 통화를 하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진 사이, 세정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아프지 않았다고?”
그 서늘한 물음에 채민은 흠칫 놀라 세정을 올려다보았다. 제 어떤 말이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세정이 얼굴을 냉혹하게 굳히고 있었다.
“아프지 않았다고.”
“…….”
“채민 씨…….”
말을 길게 끌던 세정이 말했다.
“채민 씨 정말 마음씨가 곱네요.”
“…….”
“그래서 네 목 조른 남자랑도 사는 거겠지.”
채민은 순간 세정의 손을 놓아버릴 뻔했다. 채민이 멍하니 바라만 보자, 세정도 아무 말 없이 그와 시선을 맞부딪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역시 세정은 아까 채민을 보고선 몇 년 전 그때의 일을 떠올렸던 거였다. 채민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안도했던 것과 달리,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을 혐오했던 것이다.
그는 가끔 이런 식이었다. 채민이 그를 지켜줘야겠다고 끊임없이 마음먹는 것도, 그가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었다. 속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채민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근데 어쩌죠. 난 걜 죽이고 싶은데.”
세정의 말에 채민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데……. 그의 불면증은 폭력에서 기인하는데…. 안 되는데…. 채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세정이 그의 등을 감쌌다. 채민은 세정에게서 벗어나려고 반항해봤지만, 세정이 손에 단단히 힘을 준 탓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결국 채민은 세정이 가자는 대로 따라가면서 입만 우물거렸다.
“형, 저, 저한테… 필요한 사람이면 건드리지 않는다 하셨죠.”
정면을 쳐다보며 세정이 눈썹만 올린다. 채민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직 영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노력한 결과물은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영화 나오기 전까진 두 사람은 건드리면 안 돼요.”
문득 세정이 어이없이 웃는다. 화가 난 듯 보였던 표정이 웃음 한 번으로 서서히 씻겨 내려갔다. 세정은 어느새 다가온 장 실장에게 차 문을 열라고 지시하곤 채민과 마주 보았다. 세정이 그의 목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붉게 난 자국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더니 울대를 쓸어본다. 채민은 움찔하지도 않고 그저 세정에게 제 목을 맡겼다.
“웃기게도 납득이 가네요.”
세정이 조용히 속삭였다.
“내 눈높이 맞춰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아주….”
“…….”
“못된 사람이고 싶나 보네.”
채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채민의 목을 몇 번이고 쓸어주던 세정이 불쑥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채민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얼결에 차 시트에 몸을 안착하게 된 채민은 한숨을 쉬며 그가 옆에 오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세정은 차 문에 팔을 기대고 있을 뿐 차에 오르지 않았다. 내리깐 속눈썹에 음영이 진다. 불안이 일었다.
“잠깐 여기 있을래요?”
“왜, 왜요…. 제 말 납득, 납득이 간다고….”
“우채민 씨 말 다 알아들었어요. 시계만 가지고 금방 올게요.”
“무슨 시계…….”
“우채민 씨가 시계를 저기에 두고 온 것 같아서.”
채민은 멍하니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왜 손목이 허전한가 생각해보던 그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저 시계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안 차고 나왔어요, 원래.”
“차고 갔어, 너.”
“…….”
“문 닫아요.”
장 실장이 눈치를 살피곤 문을 닫았다. 채민은 급히 창문을 열었지만 세정의 말에 주춤했다.
“시계만 가져올게요.”
약속하듯 말했으나 채민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세정은 경고하는 것처럼 말에 힘을 주었다.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나는.”
형. 입술을 움찔거리던 채민이 주눅이 든 것처럼 슬금슬금 물러났다. 대번에 차 문이 닫혔다.
***
이세정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다비드의 머리채와 남배우의 목덜미를 각각 움켜쥐고 끌고 갔다. 급습에 가까웠기에 두 사람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식당 중간까지 끌려갔다. 뒤늦게 정신이 든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바르작거렸지만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거세게 배가 가격당하고, 골이 띵할 만큼 폭력이 행해지자 금세 지치고 말았다. 세정은 다시 그 둘을 데리고 식당 뒤쪽으로 향했다.
탄내가 나는 공간이었다. 난롯불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나무가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그 옆에 던져진 두 사람이 배를 감싸 쥔 채 신음을 뱉었다. 세정은 두 사람의 품을 뒤졌다. 지갑과 콘돔, 종이로 된 신분증을 쳐다보던 그는 숨 가쁘게 달려온 장 실장에게 그것을 집어 던졌다. 장 실장이 용케 알아듣고 신분증만 따로 모아서 챙겨두었다.
“시, 신분증은 왜! 도, 돌려주, 돌려주십…세요.”
다비드가 숨을 컥컥 몰아쉬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세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무, 무슨…… 씨발, 이게 무슨… 저 당신 압니다. 얼굴도 알고… 어디……어디에 사는지도…….”
“그거 무섭네요, 경이 씨.”
제 본명을 들은 다비드가 암전된 것처럼 침묵하다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까 일 때문이라면 정말로…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알 만한, 허…… 흑.”
다비드는 가슴 안쪽이 아픈지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알 만한 분이 대화도 없이 이렇게 다짜고짜 머리채부터 잡으시면…… 신분증도 가져가시고…… 그러는 건 자제해야죠. 저희는 채민 씨 약속 상대분이 그쪽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더 있다 가라고… 말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걸로 사람을 이런 취급합니까?”
다비드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을 급히 덧붙였다.
“그…… 그 채민 씨에게는 사과하겠습니다. 이 친구가 술 들어가면 저랑도 곧잘… 주먹질하면서 싸웁니다. 이번엔 하필 채민 씨 목을 잡아서…… 그렇게, 그렇게 고치라고 해도 듣질 않더니.”
말하는 중간에 세정이 주먹질을 했다. 얼굴을 얻어맞은 다비드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골이 심하게 흔들렸고,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 대 더 얻어맞은 다비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흐느끼며 엎드렸다.
솔직히 무슨 말이든 지껄이면 듣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를 멈춰 세울 방법이 없었다. 그럼 계속 맞아야 하나? 왜? 왜? 다비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채민이랑 무슨 사이길래. 아니, 아니. 설령 우채민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그의 목을 조른 저 자식을 때려야 하지 않나. 왜 자신만 잡아 죽일 듯이 때리는 것인가.
주먹이 한 번 더 날아오자 다비드가 소리쳤다.
“제, 제발!”
그러자 폭력이 도중에 멈추었다.
“제발, 뭐. 웃기네…….”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다비드는 납작 엎드려 흐느꼈다. 다 큰 성인 남자 두 명이서 남자 하나 제압도 못 하고 이러고 있다는 게 너무 비참했다.
“저놈은 제, 제가 충분히 교육하겠, 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 다 제 잘못입니다.”
우채민을 때린 것은 다 저 남배우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세정은 태연하게 동조했다.
“그래. 네 잘못이지…. 몸 약한 내 동생,”
세정이 다비드의 멱살을 잡아 올려서 그의 뺨을 주먹질하듯 때리기 시작했다.
“술자리나, 데려가고.”
“허, 헉!”
뺨을 몇 대 더 얻어맞는다.
“꽃다발은!”
“허! 큭! 윽!”
“왜 줘?”
분노가 실려 있어서인지 주먹보다 아팠다. 볼이 덜덜 떨렸다. 내 동생? 내 동생? 다비드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맴돌았다. 내 동생? 친동생인가? 이 회장의 직계 비속은 아들 둘뿐일 텐데. 설마 숨겨진…. 다비드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거리며 흐르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장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렸다.
“저…. 상사님? 분명 채민 씨한텐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담백하게 탄식한 세정이 다비드의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다비드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든지 적당히 하라는 말이야.”
바닥에 이마가 쓸렸지만 그런 자잘한 상처에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다비드는 가슴을 감싸며 피를 뱉었다. 그런데 문득 소매가 말려 올라가면서 시계가 드러난다. 시계가 순간 번쩍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정이 그것을 흘끗 내려다보자 다비드가 재빠르게 알아차리곤 몸도 일으키지 못한 상태로 시계를 빼내기 시작했다.
“훔친… 것이 아닙니다. 정말 훔친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뒀다가 깜빡한 겁니다. 정말, 죄송…….”
건네려고 보니 시계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다비드는 소매로 시계를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건네 보았으나 세정은 그를 깔아보기만 했다.
“남 몸 탄 걸…… 대체 어쩌자고?”
그가 진심으로 의문스럽다는 투로 묻자 다비드는 시계를 한 번 더 닦아냈다. 다비드를 뒷골목 거지 보듯 쳐다보던 세정이 몸을 돌렸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던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팔꿈치로 바닥을 기어서 난롯불 옆에 있던 두툼한 나무토막을 집어 들더니 몸을 일으켰다.
남자와 나무토막을 번갈아 쳐다보는 세정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일었다. 그것은 광적인 분노처럼 보였다. 담담함을 표방한 얼굴에 순간 스쳐 간 살심을 읽은 장 실장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막대를 휘두를 때까지 세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정은 기어코 한 대 맞아주었고, 곧바로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리고 남자를 바닥에 눕혀놓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식식거렸다.
“순서 세워뒀으면 얌전히 있어야지. 중간에 선수를 쳐…….”
“허, 헉…… 우욱!”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평온했으나 끝이 살짝 떨렸다. 울대가 맹수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목이 졸리던 남자가 쇳소리를 내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하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본 장 실장은 세정의 곁으로 가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이는 것만큼은 안 된다고 조용히 속삭였다. 장 실장을 돌아보느라 세정이 힘을 푼 사이, 남자가 조여 든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이 개새끼…… 얼굴 기억, 했어. 고발, 고, 고소 다…… 뒈, 뒈졌다고. 씨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개새끼야!”
장 실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 솔직히, 허윽! 상도덕이 있지. 약속이 있었, 있었으면은 혼자, 나가면 됐… 흐으. 여자, 여자들은.”
남자가 침을 질질 흘렸다. 시선이 세정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허공을 배회했다. 세정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에서 힘을 뺐다. 세정이 묘한 투로 물었다.
“여자?”
“그, 그래. 여자. 헌팅한, 여자들을, 죄다 끌고 가서 씨발, 큭! 너 같음 안 빡치겠냐. 황당하니까… 그 또라이는 지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고….”
남자가 급작스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우채민을 욕하고, 우채민을 따라가려던 여자들을 욕하고, 이세정을 욕했다. 가만히 들어주던 세정이 문득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세정은 손을 털고서 악에 받쳐 제 감정을 토해내는 남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바닥에서 아까 남자가 흉기로 쓴 나무토막을 주워들었다. 그것을 쪼개어 난롯불 안에 집어넣으며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랬는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여자 때문에 그랬다니까 가엾네.”
불씨가 타닥타닥 타오른다. 타오르는 불씨 사이로 세정의 목소리가 조용조용 울렸다. 세정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기 시작했다. 남자는 시계를 풀고 본격적으로 자신을 때리려는 건가 싶어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세정은 남자의 앞에 툭, 시계를 던져줄 뿐이었다.
“우채민 때문에 좆질 못해서 어떡해.”
“흐…… 으으. 신고할까 봐 주는, 건가? 씨발, 이거 받고 입 다물까 봐, 미친 새끼야.”
“아…. 값나가는 시계는 아니야.”
세정이 발끝으로 시계를 쳐서 남자 쪽으로 바짝 보냈다. 남자가 시계에 잠시 신경이 팔린 사이, 세정은 아까 나무에 맞아 찢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손으로 눌렀다.
“그래서 네 몸이 괜찮은 등가물인 거지.”
“허, 허억! 뭐?”
“우리 적당히 교환하자고.”
세정은 난로 안에서 몸을 반만 내민 채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나무토막을 꺼내서 그대로 남자의 좆 부근에 내리찍었다. 비명조차 없는 메아리가 끔찍하게 울렸다.
***
밤은 삽시간에 찾아왔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던 채민이 시간을 확인했다. 애인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 지 어느덧 삼십 분째……. 시계만 가지고 오겠다던 그는 여태 소식이 없고, 그저 하염없이 날만 저물어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지지. 설마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채민은 만약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필히 희생양이 되었을 두 남자를 떠올렸다. 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던 세정의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만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애초에 제정신으로 한 약속 같아 보이지도 않았으니.
전화라도 해볼까. 채민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곧 세정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곤 기운 없이 팔을 떨어트렸다. 우울한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바닥을 배회했다.
‘그래서 네 목 조른 남자랑도 사는 거겠지.’
부드러운 목소리와 상반되는 냉혹한 언어였다. 자해는 중단했으나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자기혐오로 괴로워하는, 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다.
“실례합니다.”
갑자기 운전석 쪽 문이 열리는 바람에 채민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운전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를 긴장해서 바라보니 얼굴이 낯익었다. 낮게 안도하자 기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더가 내려와서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예?”
기사는 더 덧붙이는 말없이 곧장 시동을 걸었다. 그가 지체 없이 차를 출발시키자, 채민이 놀란 투로 물었다.
“무슨 오더요? 갑자기 어디 가는 겁니까?”
“병원으로 갈 겁니다.”
아픈 곳이 없는데 왜 병원에…. 그보다 세정만 저기 남겨두고 홀로 가는 건가? 채민은 급히 창밖을 돌아보았다.
“세정이 형은요?”
“걱정 마세요. 일만 마무리 지으면 바로 따라오실 겁니다.”
…일만 마무리 지으면? 그 수상쩍은 어조는 뭐냐고, 묻듯이 쳐다보는 채민에게 기사는 더 대꾸해주지 않았다. 기사의 뒤통수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채민은 불안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식당 건물이 멀어지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기사가 말한 대로 응급실이었다. 접수 후에 몇 시간의 대기를 겪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검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쾌속으로 진행되었다. 잉여 인력을 돈 주고 산 덕분에 앞 순번의 대기 환자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도 빠르게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목에 점상 출혈이 있는지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뇌전증의 가능성은 없는지 여러 방면으로 꼼꼼하게 검진받았다.
그래도 술을 약간 마신 탓에 몇몇 검사는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새벽이었다.
서늘한 집 안을 둘러본 채민이 의아하게 휴대폰을 보았다. 병원으로 곧장 따라오겠다던 세정은 검사가 다 끝나가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문자 한 통 보내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너무…… 약속을 안 지키는데. 세정이 이렇게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그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이 됐다.
채민은 우선 목과 팔다리에 붙은 습윤 밴드를 정돈하고 샤워부터 했다. 로션을 바르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물 한 잔을 느리게 마셨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휴대폰을 살폈다. 화면은 비어있었다.
세정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래서 진작 GPS를 달았어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채민은 문득 어디냐는 문자가 그렇게 좋다던 세정의 말을 떠올렸다. 사실 아까, ‘네 목 조른 남자랑도 사는 거겠지.’라며 세정이 비꼰 말 때문에 좀 주눅이 들어서 그에게 감히 문자를 보낼 생각을 못 하고 있었는데, 다소 용기가 솟았다. 채민이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 와ㅡㅡ>
<요>
<반말아니고 와요인데 잘못썼어요>
<ㅡㅡ아니고 ㅜㅜ쓴건데 잘못썼어요>
채민이 절망적으로 두 손으로 양 뺨을 쥐었다. 그는 더 변명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의식이 혼몽한 가운데, 머리카락을 만지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제 머리를 이렇게 다정하게 쓰다듬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 채민은 느긋하게 즐기다가 서서히 눈을 떴다. 시야로 잘생긴 얼굴이 들어온다. 다소 차가운 표정이었다.
채민이 눈을 뜬 걸 알았는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이 불시에 그에게 향했다. 순간, 채민의 눈이 커졌다. 눈을 확 뜬 채민이 상체에 힘을 줘서 일어나려고 하자, 세정이 어깨를 잡아 눌렀다. 채민은 일어나지 못하고 눈만 휘둥그레 뜬 채로 세정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는 거즈가 붙어있었다.
“……이마 왜 그래요?”
세정이 다쳐오는 것은 그의 예상엔 없던 일이었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상처 부위를 살피고 있는데, 채민의 뺨에 온기가 스쳤다.
“일어났어요?”
낮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는 어딘가 울적한 면이 있었다. 채민은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세정이 이마를 부드럽게 눌러 제 무릎에 올려놓는 바람에 시야각만 약간 달라진 상태로 계속 누워있어야 했다. 그의 손길은 채민의 뺨으로, 목으로, 그리고 목 뒤로 움직였다. 어젯밤 일로 생채기가 난 곳들이었다. 그가 제 상태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채민은 그의 이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얌전히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못 참고 물었다.
“이마가 왜 그래요?”
대답한 것은 막 방 안으로 들어와 탁자에 약봉지를 내려놓은 장 실장이었다.
“한 분에게 무기 비슷한 걸로 맞으셔서, 꿰맸습니다.”
“……네? ……예?”
“그분들이 시계가 탐나는지 저희 상사님을 때리지 않습니까. 결국 시계도 못 찾고, 얻어맞기나 하고. 참담합니다.”
“…….”
때리지 말라고 했지, 맞고 오라는 건 아니었는데……. 세정의 성정으로 보건대 장 실장의 말은 분명한 과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노가 일었다. 어떻게 저 얼굴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느냐고, 당장 다비드와 남배우에게 가서 따지고 싶었다. 게다가 무기로……. 무기로 사람을 패다니 미친 것인가?
채민의 머릿속에 세정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만 가득할 뿐 두 사람의 안위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보이자, 장 실장은 안심하며 조용히 나갔다.
장 실장은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며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번 일은 목격자가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SNS에 관련 글이 하나라도 올라온다면 그걸 막는 데에 또 돈깨나 써야 했을 터였다. 안 그래도 인터넷에서 <페이스 코트 막내아들은 얼굴은 집안의 유전자를 몰빵 받았는데, 그 큰아들과 다르게 인성 교육이 덜 되어서 각종 폭력 사건에 심심치 않게 연류된다>, <껍데기는 사연 있어 보이는데 자세한 사연은 듣고 싶지 않다> 같은 말들이 꽤 나도는데,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장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채민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은 거 맞아요? 그분들이 정말로 때렸어요?”
채민은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맞기만 하셨어요?”
“그럼 어디 묻어주고 왔을까 봐요?”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채민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며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이마에 붙은 거즈를 계속 바라봤다. 머리를 올려 이마를 드러내고 있어서 그런지 보지 않으려고 애써도 자꾸 눈길이 갔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또 괜히 마음이 아파 왔다. 남의 피를 잔뜩 묻히고 왔어도, 이렇게 심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은 거 맞죠? 꿰맸다던데…. 대체 어떻게 사람을 무기로 때리죠…. 신고는 하셨어요?”
“그러게, 신고할 걸 그랬어요.”
“신고해야죠. 사람 머리를 이렇게 해놨는데….”
“아아…….”
세정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럼 우채민 씨가 나 대신 갚아줄래요?”
“…제가요?”
아까 속으로 미친놈이네 뭐네 하며 두 남자를 욕하긴 했지만, 물리적 복수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채민은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입꼬리를 당겨 시원하게 웃은 세정이 제 이마를 내밀었다.
“아니면 그냥 호 해줘요.”
“아, 형….”
채민은 난색을 표하며 물러났다.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마르라고 바람을 불어줄 순 있어도, 그런 애교는 낯간지러웠다. 그건 애들이나 하는 행동이 아닌가. 채민이 해줄 기미가 없어 보이자, 세정은 몸을 뒤로 물리고 “날 거절했어요?” 하고 장난처럼 물었다. 저가 거절하고도 괜스레 머쓱해진 채민이 오갈 데 없는 시선을 세정의 이마에 고정시켰다.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저거… 흉 질 텐데. 레이저 치료는 하겠지. 치료할 거냐고 물어볼까? 그랬다가 또 제 얼굴만 중요하게 여긴다고 오해해서 ‘내 얼굴 다 그어놔도 좋아해 줄 거예요?’ 하고 물으면 어쩌지.
“내 이마는 왜 계속 봐요?”
채민은 흠칫 놀라 시선을 떨어트렸다.
“형 다친 거 걱정돼서요.”
“그럼 우채민 씨 지금 나랑 같은 마음인가?”
세정은 손을 뻗어 채민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난 우채민 씨 몸이 더 걱정되는데.”
목에 붙은 밴드의 둥근 표면이 손끝에 걸렸다. 채민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리자, 세정이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굳어졌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라앉았다. 어느새 세정은 평소 그가 자주 짓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 침묵을 지켰다. 날 선 시선이 목에 붙은 두꺼운 습윤 밴드에서 채민의 팔로 내려갔다. 한참 말이 없던 세정이 이윽고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화내서 미안했어요, 아까.”
채민은 잠깐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가 어떤 일로 사과하는지 깨닫고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잊고 있었는데.”
사실 잊고 있지는 않았다. 네 목 조른…… 그건 쉽게 잊을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나.
“잊고 있었어도 사과는 받아줘요. 아무리 화나도 우채민 씨한테 그걸 풀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채민의 눈동자가 알게 모르게 흔들렸다. 애초에 세정이 한 말은 채민보다는 세정 자신에게 더 타격이 있는 말이었다. 당시 채민은 세정의 마음만 염려했을 뿐 크게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진지한 사과에 어색함을 느꼈다.
“괜찮아요, 형.”
어쩌면 귀찮은 것처럼 보일 만큼 우물우물 대꾸한 채민은 더 할 말이 없어 미소로 때웠다.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고 잘까 하였지만, 세정은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내 자제심이 이렇게 얄팍해서, 가끔 걱정하곤 해요. 그때처럼 우채민 씨를 죽이겠다고 덤벼들면 어떻게 하나. 적어도 그때의 난 오늘 우채민 씨 목 조른 남자와 별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겠죠. 그 남자에게 화가 난 것도 분명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
“그래도 그게 분풀이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되었어요. 미안해요.”
채민은 입을 벌려놓고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 목 조른 남자랑도 사는 거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대체 언제부터 하고 있었나.
근 2년간 온통 평온한 날들 뿐이었는데, 어째서 그동안 세정의 불면증은 나아지지 않았던 것인지 드디어 깨달았다. 세정이 왜 채민을 물리적인 위험으로부터 그토록 보호하려고 애썼던 것인지 이해가 됐다. 그는 다리 위에서 있었던 그날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껏 떠올리고, 되풀이했던 것이다. 그것이 후회든 아니든 간에, 줄곧 고통을 받으면서.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혼란스러웠다. 그날 있었던 사건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할까. 기억조차도 희미할 만큼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다고 할까.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지만, 결국 언어로 변환되는 것은 없었다. 넋 놓고 있는 채민에게 세정이 말했다.
“그리고 사실 그 둘은 내가 조금 때려줬어요. 우채민 씨한테 필요한 사람이었을 텐데……. 그것도 미안해요.”
말을 끝낸 세정이 채민을 보았다. 이제 정말 채민이 말할 차례였다. 그러나 채민은 세정이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도무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다비드와 남배우를 때려줬다는 세정의 말에만 겨우 대답했다.
“괜찮아요.”
“…….”
세정이 묘한 얼굴을 했다.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그는 옅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손가락으로 셔츠를 잡아당겼다.
“좀 덥네요. 씻고 올게요.”
채민이 붙잡기도 전에 그가 방을 나갔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서야, 채민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아까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세정을 말린 이유는 그들이 제게 필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세정의 마음이 걱정되어서였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자신은 이 세상에서 오직 형만 걱정한다고…… 형을 혐오한 적 없고, 싫어지거나 질린 적도 없고, 날 해칠까 봐 두려워한 적도 없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왜 말해야 할 타이밍을 자꾸 놓치는 걸까. 빨리 입을 열었다면, 그가 오해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한숨을 쉬며 나간 세정의 얼굴을 상기하자 마음이 안 좋아졌다.
그때였다.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꺾어 창을 곁눈질하곤 다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고요한 실내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
채민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왜 난 항상 이 모양이지?
맨날 세정에게 이 말은 꼭 해줘야 하는데, 꼭 해줘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 정작 진짜로 말해준 적은 손에 꼽았다. 편지도 그랬다. 편지를 쓴다, 만다 시간만 끌었을 뿐 그에게 제대로 편지를 전달해준 적도 없었다.
그 미완성의 편지를 일찌감치 전달했더라면, 배도빈이 세정보다 먼저 편지를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세정과 머리 맞대고 편지를 썼던 그 날, 세정의 말대로 단 한 줄만이라도 써서 그에게 주었더라면, 그가 계속 편지를 달라고 독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원한 건 앞뒤로 꽉꽉 채운 편지가 아니라, 마음 한 줄이었을 테니.
‘계속 이상한 고집만 부렸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자신이 너무 멍청이 같았다. 채민은 한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팔에 붙은 밴드가 눈두덩을 차갑게 식혔다.
아직도 씻고 있나.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세정을 기다리던 채민은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세정이 자주 사용하는 욕실은 드레스 룸과 가깝게 붙어있었다. 그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 문을 휙 열어젖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샤워를 끝냈으면 곧장 침실로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황한 채민은 위층까지 올라가서 그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한동안 헤매고 나서야, 채민은 작은 거실에서 세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로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로젝터에 전원이 들어와 있고, DVD가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를 고르던 도중에 잠시 앉은 모양이었다.
왜 바로 침실로 안 온 거냐고, 물으려던 채민이 그와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세정의 이마에 거즈가 없었다. 샤워를 하다가 떼어버린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채민은 장 실장이 침실에 두고 갔던 약봉지를 떠올리고 몸을 돌렸다. 침실을 향해서 서둘러 걸었다.
약봉지 안에서 습윤 드레싱을 꺼내어 돌아왔을 때, 세정은 좀 전과 달리 일찌감치 채민의 발소리를 눈치채고 제 옆에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두드려 보였다. 채민이 옆에 앉자 세정이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의 우울은 어디에 감추어두고, 그저 다정함 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우리 여기서 영화나 볼까요?”
이쪽 거실에는 언제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홈 시어터가 꾸며져 있었다. 두 사람 중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서 고가의 장비로 꾸며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구색이 맞아 분위기가 좋았다.
“네. 근데 잠시만요.”
채민은 습윤 드레싱 박스를 열어 밴드를 꺼냈다. 세정이 눈치 있게 고개를 숙여서 이마를 대주자, 신중한 손길로 환부에 밴드를 붙였다.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주고, 잘 붙여졌나 살펴보았다.
“밴드가 좀 크지 않나요?”
“어…. 그래요?”
그러고 보니 환부에 비해 좀 큰 듯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시 떼어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줄 모르고 허공에서 손만 몇 번 까딱거리다가 뻘쭘하게 내렸다.
“귀여워.”
세정이 웃었다. 채민은 마주 웃어주었지만, 곧 입꼬리를 내렸다. 분명 아까 전 세정은 채민의 무언가에 실망해서 나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꼭, 채민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그는 일전에도 채민의 눈치를 보았었다. 배도빈 때문에 채민과 사이가 약간 어색해졌을 때, 점심을 먹은 상태로 채민과의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나와 또 점심을 먹지 않았었나. 거기에서 그는 채민이 제게 화가 난 것 같아서 걱정했었다고 말했다.
다시 떠올려보니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밴드를 다 붙이고 나니 침묵이 찾아왔다. 영화를 보자던 세정은 진짜로 볼 생각은 없었는지 바닥에 널어둔 DVD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정적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며 채민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가 아무런 의도 없이 채민을 주시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으므로 채민은 몸을 움츠리거나 해서 굳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향하는 시선을 오롯하게 느끼며, 채민이 입을 열었다.
“형….”
“네.”
세정이 채민의 어깨를 단단하게 안았다. 채민의 어깨에 제 뺨을 살며시 얹고 눈만 올려서 채민을 바라보았다. 가깝게 붙어 앉으니까 갑자기 떨려왔다. 몸에서 나는 향기도 좋고, 살 떨리게 매력적인 눈빛도 좋았다.
문득 세정이 채민의 목에 입술을 댔다. 느리게 문지르며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가 입술을 벌려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아주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꺾었을 때였다. 옅은 숨을 토해내던 채민이 그를 밀어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형, …할 말이 있는데요.”
세정이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채민은 목덜미에 남은 화끈한 감각을 되새기며 손바닥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허리를 제대로 세우고 앉았다.
“아까 말 못해서 죄송했어요. 놀라서…. 우리 그 송어 튀김 먹으면서…… 오해가 생기면 그때그때 풀기로 약속했는데.”
“네.”
“저는 대표님이랑 그 배우가 걱정돼서 형을 못 가게 말린 게 아니라, 형이 걱정돼서 말린 거였어요. 두 사람이랑 싸우다가 형 기분이 더 안 좋아질까 봐.”
“…….”
“솔직히…. 솔직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도 전 상관없어요. 전 형만 걱정이 됩니다. 그 송어 집에서 제가 말했던 것처럼요.”
세정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채민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제가 이렇게 못될 수가 있나 싶어요.”
갑자기 고해성사인가? 세정이 생각할 때였다. 채민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세정의 바로 앞으로 내려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뭐 하는 짓이냐는 듯 쳐다보는 세정의 무릎에 제 뺨을 올려놓았다.
왼쪽 무릎에 뺨을 대고 있던 채민이 뺨 아래로 뭔가가 느껴져서 오른쪽 무릎으로 옮겨갔다. 채민은 그대로 세정의 다리를 끌어안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 같아요. 아니…. 나쁜 사람이에요. 그래서 형을 만나는 거겠죠.”
이런 복종하는 자세로는 무슨 말이든 어렵지 않게 꺼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두 다리를 끌어안을 때면 마치 그만이 제 세상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가 오롯이 제 세계가 되는 순간, 그에게 못할 말은 없었다.
“형을 많이 좋아해요. 형을 좋아하는 게 누군가의 슬픔이 된대도, 상관없어요.”
애초에 세정에게 보낼 편지 하나로 몇 날 며칠 고민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많은 말보다 진실 하나만 이야기하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사랑해요, 형.”
“…….”
“그러니까… 형을 사랑하는 절, 더 믿어주세요.”
채민이 어린 짐승처럼 무릎에 제 뺨을 비비적대듯 눌렀다. 작지 않은 덩치로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이 퍽 이상하게 보일 테지만, 채민은 웅크린 몸을 풀지 않았다. 마치 그것으로 그에게 제 진심을 다 전달할 수 있다는 듯이.
그때까지도 채민의 머리통만 보던 세정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말을 이렇게 이벤트처럼 하나….”
채민이 고개를 들었다. 세정은 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귀 뒤와 턱을 한 번에 잡아 문지르던 세정이 말했다.
“우리 한 번 안아볼까요?”
채민은 무릎에 비빈 탓에 피부가 쓸려서 살짝 붉어진 뺨을 하고서, 눈을 깜빡깜빡 떴다. 그러다가 이내 세정의 무릎을 짚고 서서히 일어나서 그에게 팔을 뻗었다. 세정의 무릎에 앉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온몸으로 안았다. 채민의 목덜미에 쪽 키스해 준 세정도 마찬가지로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받쳐 안았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 채민의 어깨를 적셨다.
난 우채민 씨만 안 울면 돼요. 목 부근에서 세정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채민은 그의 품을 좀 더 파고들었다.
***
조명이 침대 위 두 사람을 은근하게 비추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비스듬히 마주 보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새벽처럼 조용했고, 웃음소리마저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낮았다. 딱딱한 책 위에 종이를 놓고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채민이 펜을 내려놓으며 불쑥 말했다.
“…그리고 형이 음악 관련 책 읽잖아요. 가끔 그 이야기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세 손가락으로 뺨을 괴고 있던 세정이 대꾸했다.
“왜 그걸 말해줘야 해요?”
“…형 자유긴 한데, 그래도 궁금해요.”
세정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채민은 그를 흘끗 보고는 등을 구부려 펜을 끼적였다.
<7. 음악 책 읽는 거 같은데 뭐 읽는지 가끔 알려주기 (개인적 궁금증입니다)>
문장을 다 쓴 후에 검토할 겸 종이를 들고 쭉 읽어 보았다. 글씨체가 다소 엉망이긴 했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채민이 다시 책 위에 종이를 올리려는데, 이제껏 채민이 적고 있는 종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정이 문득 손을 내밀었다. 채민은 고민하다가 종이를 건네주었다.
<서로 지켜줘야 할 목록>
1. 서운한 부분은 그때그때 말함 (걸쩍지근한 거라도)
2. 밤에 잠이 안 오면 한 명을 깨움
3. 우채민을 과보호하지 않음
4. ###
5. 누구에게 해를 가하면 꼭 알려주기… (대비를 해야 하니까)
6. 범죄 안 지르는 편이 더 좋긴 함
7. 음악 책 읽는 거 같은데 뭐 읽는지 가끔 알려주기 (개인적 궁금증입니다)
채민은 이번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세정은 채민이 제아무리 사랑을 퍼준다고 하여도, 불안정함 속에서 쉽게 헤어 나오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이 예민하고 충동적이고 변칙적인 남자를 깊이 사랑해주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만약 지켜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규약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위 일곱 가지의 항목은 세정과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든 방안이었다.
항목을 훑어본 세정이 네 번째 부분을 가리키며 뭐냐고 물었다.
“음……. 글자 잘못 써서 지운 거예요.”
사실 ‘랑해요.’라고 장난치듯이 썼다가 너무 유치해서 지운 거였다. 하지만 민망하게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던 채민은 불쑥 생각난 것이 있는 것처럼 펜을 잡고서 여덟 번째 항목을 채웠다.
<8.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주면 좋음>
“형이 너무 회사 얘기를 안 해서 추가해봤어요. 아무 이야기나 괜찮아요. 오늘 힘들었다… 이런 말도 좋아요.”
“난 거기서 별로 고통받지 않아요.”
고통 없는 회사 생활이라는 게 존재하나. 채민은 혼란스러웠으나 채민 이외의 것에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세정에게, 사내에서 오가는 그 날 선 공기가 별로 무겁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했다. 채민이 펜을 돌리며 잠시 아무 말이 없자, 세정이 덧붙여 말했다.
“원한다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말해줄게요. 난 요즘, 내 사무실에 운동 기구를 들여놓을까 생각 중이에요.”
“아. 덤벨 같은 거요?”
“그것도 괜찮네요.”
세정은 요즘도 꾸준히 운동을 했다. 유산소 운동부터 근력 운동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집에도 피트니스 기구들로 꾸며진 방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운동을 좋아하면서도 헬스 트레이너들처럼 헤비한 근육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탄탄하고 잘 빠져서, 보고 있으면 홀릴 정도였다. 세정은 움직임이 느려지는 게 싫기 때문에 근육을 증량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채민이 보기에도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게다가 근육을 더 증량할 생각이라면 술을 줄여야 할 텐데, 세정이 그럴 리가 없었다. 채민은 종이에 또 이렇게 적었다.
<9. 취미로 위스키 수집하는 거 어떨까요 (사는 족족 다 마시는 거 같아서요)>
그 항목 아래로 나머지 생각나는 것들로 적어나갔다.
<10. 제 피아노 소리가 싫으면 말해주세요
11. 우채민은 형이 0순위라서 형이 뭘 해도 화 안 난다는 걸 알아두기>
채민은 그 밖에도 형의 몸이 내 몸이나 마찬가지니까 조심히 써달라고, 바이크를 많이 타지 말아 달라고 적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펜을 내려두고 종이 끝을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세정이 물었다.
“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거기에 적고 있어요?”
“…뒤늦은 편지?”
“계속 써 봐요.”
채민은 웃으면서 다시 펜을 잡았다. 그런데 분명 조금 전까지는 물 흐르듯 써지던 글이 단 한 자도 써지지가 않았다. 편지라고 생각하니까 또 막힌 것이다. 대체 왜, 세정에게는 편지를 못 쓰겠는 거지. 결국 채민은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다고 말하며 펜을 내려놓았다. 채민은 자신을 어이없이 바라보는 세정을 외면하며 종이를 가지고 침대 옆으로 갔다. 적당한 곳에 종이를 대고 테이프를 붙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종이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사실 그가 이 규칙을 잘 지켜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설령 이대로 행해준다 하더라도 앞으로 그와 함께 살아갈 날이 수십 년이나 됐다. 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분명 약속을 안 지키는 날이 있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계속 노력해 간다면, 만약 둘 사이에 오해가 일어난대도 큰 문제없이 풀어낼 수 있겠지. 끊임없이 연습해왔으니까.
채민은 침대로 돌아와서 세정의 옆에 앉았다.
“형, 다른 건 몰라도 일 번은 꼭 지켜줘야 돼요.”
벽에 붙은 종이를 곁눈질한 세정은 모호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내 침대에 누우며 두 팔을 벌렸다. 채민은 그 품으로 들어가서 그의 향을 깊이 맡으며 꽉 껴안았다. 채민은 세정에게 나는 향기가 미치도록 좋았다. 그 살 내음을 맡으면 몸서리가 날 정도로 설렜다. 서로의 다리가 얽히며 다소 열감이 오르자, 채민은 혹시 오늘 하려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세정은 눈을 감고 있었고, 채민은 조금 실망하며 얼굴을 재차 그의 품에 묻었다.
열감 때문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채민이 중얼거리듯 화제를 꺼냈다.
“저 형이랑 처음 만났을 때…… 형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난 우채민 씨가 더 이상했어요.”
세정의 말에 채민은 고개를 올려 세정을 보았다. 세정은 어느새 눈을 뜬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민이 눈을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먼저 다가와서 데이트하자고 수작을 부린 것은 형인데, 왜 제게 이상하다고 하는 거지. 그러다가 우리의 첫 만남이 그보다 훨씬 전이었음을 깨닫고 탄식하며 입을 뗐다.
“저 전에 본 적이 있다고 했죠? 근데 잘 기억이 안 나요.”
“우채민 씨가 내 손을 만졌어요. 우린 어색한 사이였는데.”
“…기억이, 안 나요. 아니…….”
어렴풋이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민은 그 상태로 고개를 갸우뚱 비틀었다. 전에 아트홀에서 만났었다고 했었지. 아마도 졸업 연주회였을 테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채민은 불현듯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제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를 떠올려낼 수 있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눈만 내놓고 있었던 터라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게 쏟아졌던 그 사나운 눈빛은 분명 세정이었다. 그때 아주 기겁해서 자리를 벗어났던 기억이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그때 그 사람이 세정이 아니었을까 희미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명확하게 떠올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형, 첫 만남에 저한테 욕하셨어요?”
세정은 채민의 물음이 놀라운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채민은 곧 눈웃음을 쳤다.
“기억났어요. 우리 그때 만났죠? 그런데 그때… 제 뭘 보고 좋아하게 된 거예요?”
“당연히 외모겠죠.”
멍하니 세정을 보던 채민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 보고 꽂혔다?”
“그래서 내가 또 찾아갔잖아요. 집 앞으로.”
“…집 앞?”
혼란에 잠긴 채민에게 세정은 그저 웃어 보였다.
“내 인상이 그렇게 흐릿한가?”
“형, 언제였죠? 진짜 처음 들어요.”
“직접 기억해내라고요.”
가벼운 음을 타며 짓궂은 투로 말한 세정은 채민은 껴안고 눈을 감았다. 채민이 세정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몸을 틀었지만, 곧 단단히 자신을 안고 있는 세정의 팔에 가로막혀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채민이 숨을 낮게 깔며 눈을 감자, 세정이 눈을 떠 그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감정이 사라진 얼굴이 보인다.
채민의 서늘한 무표정은 어린 날의 세정과 닮아있지만, 그 얼굴에 감정이 피어나는 순간 채민은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오롯한 한 사람으로만 남는다. 그 무심한 얼굴이 미소로, 울음으로, 분노로 바뀌는 찰나를 사랑한다. 아마 첫 만남에 그가 미소를 짓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화를 냈다고 해도, 혐오 어린 시선을 보냈다고 해도, 세정은 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얼굴에 긍정적인 것만 남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빗속을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걸어갈 테니까.
세정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마음은 그곳까지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