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2/12)

Chapter 2.

자꾸만 내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데, 나는 참 나약한 인간이었다. 기말고사 내내 엉망인 컨디션을 유지했다.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던 과제는 엉망진창으로 제출했고, 시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꾸역꾸역 아무렇게나 개판을 치고 나와 1등으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조영재를 툭툭 쳤다.

“나 담배 하나만.”

“네가 웬일이냐? 시험 망함?”

“모르겠다……. 장학금은 받겠지. 1등은 못 할 것 같아.”

조영재가 담배를 물려주며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몇 달 만에 피웠더니 약간 어지러웠다. 햇빛이 강해서 그런가. 며칠간 비만 주룩주룩 내리더니 햇빛이 쨍쨍했다. 나무그늘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이 예뻤다. 예쁘다. 중얼거렸더니 조영재가 감성적인 새끼라고 욕을 했다.

“너 다음 주 종강파티 갈 거야?”

“알바 시간 보고. 너는?”

“나야 당연히 가지. 근데 희진이가 요즘 뭐라고 해서 일찍 들어가야 될 듯.”

조영재는 다른 사람들에겐 미친개처럼 까칠했지만 여자 친구가 하는 말은 신처럼 떠받들었다. 시험 보는 동안 매일 공부하다 술만 먹었던 것 같았다. 관대의 여신인 희진이가 뭐라고 할 정도였으면 어지간했구나 싶었다. 필터까지 다 태운 담배를 끄고 조영재와 함께 일어났다. 조형 수업까지 남는 시간 동안 어디 들어가 잠이나 잘까 싶었다. 조영재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걷는데 내 가방을 건드리는 손이 느껴졌다.

“어디 가요? 시험 끝났어요?”

정진우가 햇살 아래서 환히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키스한 날 이후로 정진우를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기습적인 정진우의 환한 미소에 급격히 내려앉은 가슴께를 부여잡고 어색하게 안녕. 했다. 정진우가 가볍게 내 어깨 쪽을 붙잡았다. 조영재는 가만히 서서 나랑 정진우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시크하게 진우 안녕. 나 먼저 간다.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깨를 잡힌 뒤 그대로 굳어버려 매정히 떠나는 조영재를 잡을 수도 없었다.

“시험 끝난 거예요?”

정진우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팔뚝을 타고 어깨에 완전히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않는 손을 잡아 내리고 응. 대답했다. 정진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 팔목 쪽을 잡아 온다. 얘는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화들짝 놀라서 손목을 탈탈 털어버리니 내 힘에 떨어져 나간 자기 손을 뻘쭘하게 매만진다. 괜히 미안해져서 멀쩡한 정진우의 가슴 근처를 툭툭 털어주었다.

“뭐가 묻었네.”

“스튜디오 있다 와서 그런가. 톱밥 묻었나 봐요.”

“으응. 그랬나.”

“어디 가요? 아까 본 게 마지막 시험이었죠?”

“응. 어디 갈지는… 아직 안 정했는데.”

방금 조영재가 혼자 가 버려가지고. 우울하게 말을 끝맺었더니 정진우가 개의치 않고 이번엔 내 반팔 소매를 살짝 잡아 자기 쪽으로 끌었다. 왜? 했더니 저랑 밥 먹으러 가요. 나 아침 안 먹었어. 요즘 항상 그랬듯 역시나 밥 타령인 대답이 돌아왔다. 너랑 밥 먹으면 나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데. 어지럽게 떠도는 생각 중 쉬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머뭇대다가 얌전히 따라갔다.

정진우는 학식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학교를 벗어났다. 수업까진 많이 남긴 했지만 어디로 가나 싶었다. 쫄래쫄래 따라가다 잡힌 소매를 빼내고 나란히 섰다.

“어디 가?”

“나 이 근처에서 완전 맛있는 밥집 찾았어요. 저번에 애들이랑 같이 갔었는데, 제 동기들이요. 선배 매운 거 좋아는 해도 잘 못 먹잖아. 근데 여긴 적당히 매우면서 엄청 맛있더라고.”

“뭐 파는데?”

“이것저것. 제육도 팔고, 낙지볶음, 그냥 백반집이에요. 반찬도 깔끔하고, 가격도 싸고. 왜 이제야 알았나 싶어요. 거기 이름이 오늘의 반찬인데, 선배 몰랐어요?”

“응. 난 거의 학식이니까.”

“그럴 것 같아서. 같이 가요. 선배도 아침 안 먹었죠?”

“안 먹긴 했는데,”

“내가 살게. 같이 먹자.”

그날 이후 나도 문제지만 정진우도 엄청 문제였다. 원래도 살갑긴 했지만 요즘은 더했다. 특히 나에게 뭘 먹이지 못해 안달을 했다. 거절도 한두 번이지 매번 여기 가자, 저기 가자 제안하는데, 좋긴 해도 좀 부담스러웠다. 다른 것보다 묘하게 바뀐 태도에 자꾸 착각을 하게 되는 바람에. 이게 뭐지. 나를 지금 사육하는 건가. 이렇게 먹여서 뭐 할라고. 로 시작해서 항상 얘도 나를 좀 좋아하는 거 아니야? 로 귀결되는 생각은, 결론에 이르면 병신, 병신. 하는 자책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정진우의 태도에 하염없이 휩쓸리는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아무것도 안 됐다. 책을 펼치면 거기서 정진우의 웃는 얼굴이 튀어 나오고, 과제를 하면 뚫어놓은 구멍에서 정진우의 다정한 얼굴이 깜짝 파티를 했다. 음악을 들으면 그 위로 정진우의 목소리가 오버랩됐고, 길을 걸으면 문득 옆에서 정진우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뭘 해도 정진우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정진우의 실실거리는 옆모습을 흘낏흘낏 훔쳐보면서. 머릿속으로 안 그래도 선명하게 찍혀있는 입가의 점을 한 번 더 찍고,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그리고, 보기 좋게 솟은 콧대를, 유려하게 빠진 눈매를 그렸다. 내가 점점 미친놈이 되는 것 같았다. 망상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답이 없었다.

생각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정진우가 걸음을 멈추고 싫어요? 하며 물어왔다. 내 기색을 살피는 얼굴에 한 번 더 가슴이 내려앉는 바람에 숨을 한 번 고른 뒤 남자답게 말했다.

“내가 살게.”

“그래요? 고마워요. 미리 잘 먹을게요.”

거절 한 번 안 하고 고맙다고 해줘서 내가 더 고마웠다.

별건 못 해주지만, 나는 항상 정진우에게 커피 한 잔 사 주고, 밥 한 끼 사 주고 싶었다. 과외 하면서도 그렇고 평소에 너무 많이 얻어먹고 받아서. 정진우는 항상 같이 먹고 어어, 하는 사이에 재빨리 계산을 마치는 타입이었다. 처음에 분명 자기 돈 없다고, 그래서 돈 모아야 된다고 그랬는데 대체 어디서 돈이 샘솟나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기회가 있을 때 못 박아 놓는 게 중요했다. 미리 말 안 하면 정진우는 또 먼저 계산하고, 고맙다고 말하면 다음에 사요. 했을 테니까. 이번엔 내가 산다는 생각에 조금 신이 났다. 어디로 가면 돼? 하고 물어보니 정진우가 웃으며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직진, 직진. 했다.

도착한 식당은 정진우의 장담대로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적당히 매우면서 달달한 게 내 취향이었다. 낙지덮밥을 시켜 후후 불어 한입 먹으니 정진우가 맞죠? 하고 물어와 어, 맛있다. 대답했다. 정진우가 뿌듯하게 웃었다. 너도 먹어. 했더니 네에. 하고 같이 나온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는다. 보기 어려운 정진우의 정수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잠시 팔불출 같은 생각을 했다. 얘는 정수리까지 예쁘네. 안 예쁜 데가 없네.

결 좋은 까만 머리가 찰랑찰랑 휘날린다. 부러웠다. 나는 머리카락이 구불거려서 머리 감고 나면 항상 삐치는 거 진정시키느라 전쟁인데, 얘는 머리 말리기 좋겠다, 싶었다.

밥을 먹고는 언제나 그랬듯 카페에 갔다. 커피도 내가 사려고 했는데 정진우가 재빨리 주문을 하고 카드를 꺼내는 바람에 실패했다. 정진우가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들고 걸어왔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이 정진우를 흘끔대는 게 느껴졌다. 테이블에 커피와 함께 각종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는다.

“이건 뭐야? 언제 주문했어?”

“서비스래요.”

여상하게 말하는 정진우가 순간 대단해 보였다. 대체 어디, 어느 가게에서 누가 서비스를 커피 값보다 더 나가게 주나, 그 대단한 곳이 바로 여기인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진우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입 닥치고 커피만 마셨다. 정진우가 이것도 먹어 봐요. 많이 안 달고 맛있네. 하면서 조금씩 부셔 먹던 쿠키를 내밀었다.

“나 배불러서. 너 많이 먹어.”

왠지 정진우만 먹으라고 준 것 같아서 내가 먹기가 미안했다. 정진우는 한 번 더 권하더니 거절하니까 자기도 손을 놓는다. 먹으라고 준 건데 안 먹으면 또 미안할 것 같아서 하나씩 집어먹었다. 맛있었다.

“맛있다. 이거.”

“그죠. 여기는 커피보다 이런 게 맛있네.”

“응. 너도 먹어.”

“선배 많이 먹어요. 오늘 조형 수업인가?”

“나? 어.”

“끝나고 알바 가요?”

“그래야지.”

“저녁은? 먹고?”

“응.”

“누구랑?”

“뭐, 영재랑 수현이랑 먹지 않을까.”

정진우가 가볍게 흐음. 콧소리를 냈다.

“너는?”

“나는, 수업 끝나고 작업실 갔다가. 집에 언제 들어갈지 모르겠네.”

“……그 누나는? 괜찮아?”

“괜찮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좀 괴로워요. 얼굴 볼 때마다. …누나도 그럴 거고. 정진우가 눈가를 문지르며 웃었다. 잠시 말없이 쿠키만 씹었다. 정진우가 남은 커피를 쪽 빨아들였다.

“너네 사귀는 거, 다들 잘 모른다고 그랬나?”

“음, 네. 작업실에는 얘기 안 하고 만났어요. 얼마 안 만나기도 했고, 얘기할 타이밍도 없었고.”

“어떻게 할 거야? 작업실, 계속 나가려고?”

“모르겠어요. 일단 다음 학기 개강할 때까지는. 작가님이랑 약속해 놓은 게 있어서.”

“뭔데?”

“작게 작품 하나 해보려고요. 작가님이 제 작업 중에 몇 가지를 보셨어요. 그게 마음에 드셨나 봐요. 저한테 방학 때 시간 이용해서 뭐 하나 해보라고. 그래서.”

“방학 때도 바쁘겠네.”

“과외는 계속 할 수 있어요. 다음 주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선배는 어때요?”

좋아. 대답했다. 잠시 망설이다 빠르게 덧붙였다.

“작업 끝나면 나도 보여줄 수 있어?”

“당연하죠. 작업 과정도 봐 줘요. 코멘트도 미리 부탁할게요.”

열심히 먹어치워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응. 열정이 넘치는 정진우가 너무 빛났다. 눈이 부셨다.

학교로 돌아오면서 작업 콘셉트 이야기를 했다. 정진우는 신이 난 것 같았다. 작가님이 옆에서 종종 봐주신대요. 저는 나무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좋고, 질감이 좋아서 이번에도 나무 베이스로 작업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이어지는 정진우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림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내가 정진우와 같은 조소과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진우가 하는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 있어서. 정진우의 작업 과정을 다 볼 수 있어서.

정진우의 목소리에 응, 응. 대꾸만 해도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어느새 예대 건물 근처에 도착해서 정진우가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성큼성큼 걷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빠르게 걷다가 아는 애라도 만난 듯 잠시 멈춰 이야기를 한다. 그 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잠시 장난치더니 어깨를 퍽 얻어맞고 픽 웃는다. 내가 시력이 2.0이라도 된 건가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멍한 나를 발견하고 다시 손을 흔든다.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금만 더 보다가 들어가려고 했는데, 누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뭐 하냐.”

“아…….”

조영재였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내 얼굴과 빠르게 사라지는 정진우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다. 뭐지. 조영재의 얼굴을 살피다 이어지는 침묵에 먼저 말을 걸었다.

“너 어디 갔다 왔냐.”

“…자취방. 들어가자.”

“아. 집에 가고 싶다. 쉬고 싶다.”

“아까 나도 분명히 쉬다 나왔거든? 근데 밖에 나오자마자 그 생각함. 수업은 개뿔 편하게 좀 자고 싶다. 시험 보느라 너무 지침. 야. 이따 저녁 뭐 먹을까.”

“몰라. 지금 배불러.”

“아 의리 없는 새끼. 지 혼자 처먹었네. 이따 치킨 먹으러 가자. 너네 편의점 근처 거기.”

“옛날통닭? 거기 다섯 시에 문 여나?”

“열걸?”

알았어. 대답하고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조영재가 잠깐 침묵하다가 너 정진우랑 너무 붙어 다니는 거 아니냐? 형아 섭섭하다. 이상한 소리를 했다.

“무슨 개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나나 김수현보다 어째 학년 차이도 있는데 정진우랑 더 붙어 다녀.”

“수업이 많이 겹쳤잖아.”

“그 수업 네가 짜지 않았냐?”

잠깐 찔렸지만 쉬지 않고 부정했다.

“알잖아. 1학년 랜덤이야. 정진우 내가 안 했어. 왜, 내가 너보다 진우랑 친한 것 같아서 질투 나?”

“……개소리 하지 말고. 어쨌든 억울하면 종강파티 와라.”

저 소리를 하고 싶어서 애먼 정진우를 잡았나 보다.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그제야 정색했던 낯을 풀고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던 김수현과 치킨, 치킨 제멋대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오랜만에 내가 쏜다. 호기롭게 외쳤다가 객기 부리지 말라며 핀잔만 들었다. 웃고 말았다.

졸려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수업이 끝나자마자 조영재랑 김수현을 양옆에 달고 바람같이 치킨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치킨 두 마리를 열정적으로 뜯었다. 오랜만에 닭고기를 먹었더니 아주 맛있었다. 계산은 김수현이 했다. 과제 도와줘서 고맙다는 이유를 대기에 뒤도 안 돌아보고 고맙다고 했다. 뻔뻔한 새끼들. 자기가 계산한다고 나섰으면서 우리에게 질린 낯을 하는 김수현이 웃겼다. 흥. 코웃음을 치고 조영재와 콜라를 들고 짠, 기분 냈다. 내가 알바를 가야 해서 술을 못 먹는 게 퍽 애석한 듯했다.

“너 편의점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몰라. 일단 이번 년도는 계속하게. 점장님이 시급도 올려주셨고.”

“성실한 새끼. 이러다가 군대 가기 하루 전까지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까까머리로. 어서 오세요~ 하면서. 조영재가 목소리를 긁어 나를 흉내 냈다. 나는 목소리가 많이 허스키한 편이어서 종종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냥 어느 정도 목소리 굵은 남자애들이 한계까지 긁으면 나 같은 목소리가 났다. 어렸을 땐 이 목소리가 너무 싫었는데, 크면서 그러려니 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좀 좋아졌다. 정진우가 가끔 목소리 칭찬을 해 줘서. 과외 할 때 종종 들었다. 선배는 목소리가 묘해서 귀에 박힌다고. 정작 그렇게 말하는 정진우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콕 박혀서 곤란했지만, 어쨌든.

나와 조영재와 김수현은 셋이 나란히 다음 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기로 했다. 군대 때문이었다. 학기 초에 지나가듯이 말했더니 여자애들이 많이 서운한 눈치였다. 하지만 안 그래도 소수인 남자끼리 뭉쳐야지 별수 있나 해서 웃고 말았다. 오늘도 애들이 벌써부터 군대 가면 편지도 많이 써주고, 면회도 가 준다고 난리였다. 한 학기 남았는데, 설레발들이 수준급이었다. 그 와중에 김수현이 한술 더 떠 눈치 없이 슬기한테만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 여자애들에게 돌아가며 뺨을 맞았다. 슬기가 제일 세게 때렸다.

신나게 떠들더니 군대 얘기에 분위기가 침울해 졌다. 정진우를 만나기 전까진 그냥 신검 받고 대충 희망 날짜 맞추면서 막연하게 군대 뭐. 가면 되지, 다들 가는 건데.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도 영 아쉬웠다. 정진우는 언제 군대 가려나. 과외 시간에 만나면 슬쩍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알바를 하면서도 나는 정진우 생각을 했다. 생각을 하다 보니 정진우는 군대 언제 가는지가 진짜 궁금했다.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아니야. 갑자기 연락해서 군대 언제 가냐고 물어보는 선배가 어디 있어. 여기 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던 게 30번, 정진우의 번호를 찍었던 게 30번쯤 되었을 때, 알바가 끝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또다시 한 학기가 끝이 났다. 정진우로 가득한 학기였다. 오늘 꿈에도 정진우가 나왔다. 나한테 키스하는 꿈이었다. 꿈꾸는 동안 내내 정진우의 키스 공격에 괴롭다가, 꿈에서 깨니 팬티 앞섶이 축축해서 배로 괴로웠다. 이참에 빨래나 하자 싶어 씻으며 세탁기를 돌리고 대청소도 했다. 주변 좀 깨끗해 졌다고 금세 마음이 개운해져서 웃겼다. 밥을 먹고, 해가 질 때까지 집에 앉아서 받아온 도면을 쳤다. 계속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눈이 시려서 잠깐 천장을 보고 있었는데, 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정진우였다. 어느새 시간이 여덟 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 진우야.”

-선배 바빠요?

“음, 도면 치다가 눈 아파서 잠깐 쉬려고.”

-잠깐 나올래요? 저 사거리예요.

맥주 한잔해요.

목소리가 설탕을 한 스푼 얹은 것 같이 달달했다. 정진우의 꿀에 절인 것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맥주가 당겼다. 잠깐 머뭇대다 파일 저장을 눌러놓고 지갑과 열쇠를 집어 들었다.

“지금 나가.”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돌자 정진우가 사거리 편의점 앞에 깔린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를 보더니 손을 슬슬 흔든다. 까만 반팔 티에 까만 반바지, 까만 슬립 온, 까만 머리. 얼굴과 목덜미, 팔, 다리만 하얗게 빛났다. 급하게 나오느라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채인 내 꼴이 조금 부끄러웠다. 정진우의 앞에 도착해 보니 맥주 네 캔과 육포, 땅콩 같은 것들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앉아요. 일어나서 계속 일했던 거예요?”

“응. 기말고사 땜에 계속 미뤄놔서. 주말 동안 빨리 쳐야지.”

“진짜. 매일 제일 바쁘다.”

“너도 바쁘잖아.”

맞아요. 우리 둘 다 바쁘다. 정진우가 웃었다.

선선한 바람에 까만 머리가 흩날렸다. 가만히 정진우의 이마 근처를 보다가 물었다.

“머리 잘랐어?”

“네. 좀 긴 것 같아서.”

눈썹을 살짝 덮고 있던 앞머리가 눈썹 위로 짧아졌다. 잘생긴 눈썹이 드러나 있었다.

“머리 자른 게 낫다.”

“고마워요.”

정진우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곁눈질로 훔쳐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세상 시원했다. 말없이 그대로 맥주 한 캔을 다 비웠다.

“머리 자르고, 어디 갔다 와?”

“기말고사 끝나서 엄마한테 다녀왔어요.”

종종 하곤 했던 독일 산다는 사촌 누나를 제외한 가족 얘기는 처음이었다. 궁금해져서 비스듬하게 돌아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어머니?”

“네.”

“집에 다녀온 거야?”

“아니요. 집에는 보통 일요일 아니면 밤늦게까지 아무도 없어서… 그냥 엄마 병원이요.”

“…엄마 병원?”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바람에 쥐고 있던 땅콩을 툭 떨어뜨렸다. 땅콩이 그대로 떨어져 발치를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병원?

“네. 엄마가 치과 하셔서.”

“…아. 그 병원.”

난 또. 엄마가 아프신 줄 알고……. 중얼거렸더니 정진우가 웃으며 아니에요, 한다.

순간적으로 얘도 나 같은 상황이었을까. 맘이 쪼그라들었다. 엄마가 아플 때 그걸 지켜보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어서.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의사야?”

“네.”

“완전 생각도 못 했네.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냥 사업하세요.”

말로만 듣던 금수저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너 부자 아니라며. 순간 배신감이 들었으나 얘가 부자면 뭐, 좀 더 행복하고 좋지. 납득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꾸만 손이 가는 땅콩을 한 움큼 집었다. 짭짤하니 맛있었다.

“뭐, 형제는? 어떻게 돼?”

호구조사 하는 것처럼 느껴졌나. 정진우가 작게 웃었다. 모르는 척했다. 계속 궁금했으니까. 이참에 궁금한 걸 다 물어보고 싶었다.

“형이 하나 있는데,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나서. 별로 안 친해요.”

“아. 엄청 많이 차이 나네. 되게 늦둥이다, 너.”

“네. 근데 엄마랑 아빠가 워낙 일찍 결혼해서.”

“형은 뭐 해?”

“형도 의산데. 형은 피부과.”

그래애……? 부자구나. 말끝을 늘이며 잠깐 쳐다봤다. 정진우가 또다시 웃으며 아니에요. 손사래를 쳤다.

“근데 왜 유학 준비를 너 혼자 해?”

“엄마가, 저 유학 가는 걸 많이 반대해서요.”

“아.”

정진우 어머니의 마음이 백번 이해가 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시겠지. 저런 아들을 시차도 일곱 시간이나 나는 해외에 내놓는 게 겁이 나실 만도 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더니 정진우가 아쉬워요. 한다.

“왜?”

“선배가 독일에 있었다니까. 그냥 더 가보고 싶어져서.”

“나는 되게 작은 동네에 있었는데.”

“왜 갔던 거예요?”

잠시 침묵하다 물어봐도 돼요? 하고 조심스레 물어본다. 응. 대답하고 잠시 말을 골랐다.

“그냥, 어렸을 때라 기억은 잘 안 나고. 아빠 사업 때문에 간 거였는데.”

“아버지는, 그럼…….”

“아직 독일에 계시지. 어디 있는지는 몰라. 어쨌든, 아빠 사업 땜에 가서 몇 년 지내다가. 우리 엄마가 좀, 음. 스트레스에 약한 사람이었어. 나는 잘 몰랐지만 엄마는 적응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나봐. 다 외국인이잖아. 말도 안 통하고. 그러다가 아빠는 다른 사람이 좋아지고, 아빠의 아내가 아닌 엄마는 더 이상 말도 안 통하는 독일에서 살 수가 없었고. 나는 아빠한텐 짐이었고, 엄마한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고. 그래서 엄마랑 둘이 여기로 돌아왔어.”

잠깐 목을 축이고 이어 말했다. 흔한 얘기지.

정진우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어색한 기분에 입가를 쓸었다.

“나 진짜 괜찮아.”

“응. 알아요. 그냥, 너무 고생했다고.”

“고생은. 여기 와서 초반엔 엄마가 고생 엄청 했지. 그래서 빨리 돌아가셨나.”

“…….”

“그건 좀, 아직 힘들어.”

그냥 웃었다. 정진우에겐 솔직히 다 말하고 싶어서 말은 했는데,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싫었다. 정진우가 혹시나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할까봐 그것도 싫었다. 정진우가 마주 웃어주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정진우의 미소 한 방에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나는 정진우의 이런 면이 너무 좋았다. 좋은 걸 꼽으라면 셀 수도 없어서 항상 혼자 민망했지만. 말이 부족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맞춰주는 것 같아서. 그게 좋았다.

“맥주 더 마실래요?”

“아니야. 나 들어가서 일 더 해야 돼.”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 정진우랑 있으면 항상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눈 한 번 깜빡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 있고, 그런 식이었다.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정리했다. 같이 분리수거도 하고, 남은 육포도 정리하니 금세 자리가 깔끔해졌다.

“들어가.”

“선배 들어가는 거 보고요.”

한 번 더 들어가라고 하려다 여기서 계속 이런 거 가지고 실랑이를 하면 그림이 이상해 질 것 같아서 그만 뒀다. 손을 흔들고 뒤돌아 걸었다. 기분 탓인가, 정진우의 시선이 내 등에 붙어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화요일에 봐요.”

정진우가 말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빨리 화요일이 오기만을 바랐다.

* * *

주말은 매번 일에 쫓겨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 밤에는 종강파티가 있었다. 정작 종강하는 날까지는 애들이 기력이 없어 집에 가기 바빴고, 푹 쉬고 난 주말 뒤의 월요일이 진짜 조소과의 종강하는 날이었다.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는 감자탕 집에 일곱 시까지 모인다는 영지의 공지가 있었다. 영지가 과대로서 하는 마지막 공지였다.

다음 학기 과대는 조영재였다. 곧 군대 가는 남자 중 한 명이 무조건 하라는 여론에 떠밀려 맡은 자리였다. 나는 알바를 하는 데다가 이름뿐이지만 학생회라는 자리도 있었고, 김수현은 그냥 안 됐다. 김수현의 과대 직만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김수현은 자존심 상해했지만 별수 있나. 조용히 짜져서 여자애들의 결정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선택된 조영재는 굉장히 귀찮은 눈치였지만, 거부하려니 여자애들의 눈이 세모꼴이 된 상태여서 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남자다운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여자애들의 기세엔 속수무책이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 도면을 쳐서 넘기고, 슬슬 걸어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길어진 해가 이제야 지고 있었다. 아침만 대충 때우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가 고팠다. 걸으며 핸드폰을 계속 확인했다.

[그럼 저도 갈게요. 이따 봐요.]

[좀 늦을 것 같긴 해요. 연락할게요.]

아까 왔던 정진우의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얘도 종강파티 오나 궁금해져서 물어봤더니 도리어 나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와서 간다고 말했다. 그 뒤에 온 문자였다. 이제 방학인데도 토요일에 보고, 이틀 만에 또 보고, 내일도 본다는 생각을 하니까 진짜 너무너무 행복했다. 완전 행복한 기분으로 감자탕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진우는 진짜 이상하다. 생각만 해도 일분일초가 휙 지나가 버린다. 시간이 금이라더니, 정진우를 생각할 때는 진짜 그 말이 맞았다. 바로 지금도. 정진우를 생각하느라 엄청 빨리 도착한 감자탕집 건물 앞에서 조영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혼자였다.

“왔냐.”

“다른 애들은?”

“안에. 우리 학번은 두세 명 빼고 다 왔어.”

“빨리도 왔다. 너 오늘 일찍 가야 돼? 희진이가 일찍 가래?”

조영재가 행복하게 웃었다. 좀 징그러웠다.

“아니! 내가 오늘 아침까지 빌고 빌었지. 오늘만 놀다 오래. 너네랑 먹는 것도 다 알고, 내가 술은 먹어도 얌전하잖냐. 주사도 없고. 좀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놀다 오라고 그래서 아침 내내 빌빌대다가 바로 일어나서 깨춤 춤.”

그러니까 너도 오늘은 달리는 거야. 조영재가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달릴 생각 없는데. 내일 일찍 일어나야 돼.”

“아! 왜! 뭐 하는데.”

“그냥. 할 거 있어.”

이상하게 정진우랑 과외 하는 건 아무한테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안 한 건데, 마음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에게 정진우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괜히 찔려서 더 이상 안 물어보는데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냥, 뭐.

담배를 다 피운 조영재와 함께 감자탕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로 와글와글했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들이 요한이 왔어? 하고 여기저기서 반겨주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동기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앉자마자 여자애들이 한마디씩 했다.

“서요한 인기 터진다.”

“서요한 원래 인기 졸라 많아. 지금 많이 없어진 거야.”

“요한이가 좀 귀엽긴 하지.”

“그치. 요한이가 좀 귀엽지. 성격은 귀엽고, 얼굴은 잘생겼고. 요한이가 최고지. 조영재 김수현 저것들이 요한이 좀 배워야 하는데.”

김수현의 찢어진 눈이 더 쫙 찢어졌다. 입학할 때부터 항상 하는 이야기였는데 들을 때마다 열을 내는 게 신기했다. 아무래도 김수현의 저런 반응 때문에 애들이 더 하는 것 같았다. 괜히 내 어깨며 등을 퍽 쳐서 그냥 맞아 주었다. 몇 번 치대다가 반응이 없으니까 그냥 술이나 마신다. 그게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수현이 진저리를 쳤다.

한참을 애들이랑 떠들고, 선배들이랑 얘기하다가 후배들 자리까지 흘러왔다. 정진우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간에 문자도 보내 봤는데 답이 없었다. 많이 바쁜가. 얘기에 집중을 못 하고 시계랑 핸드폰만 흘깃거리고 있으니까 개중 그나마 친한 예지가 선배 어디 가요? 하고 물어왔다.

“그건 아닌데.”

“근데 왜 그렇게 시계를 봐요. 여기 재미없구나!”

“그건 아니고, …진우 오늘 안 오나?”

결국 물어봤다. 다른 애들이랑은 연락을 했을까 해서였다. 정진우가 안 오면 나도 빨리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모자란 잠도 좀 자고, 내일 정진우랑 만날 준비도 하고.

“그러게요, 온다고는 했는데. 모르겠어요. 걔가 온다고 하고 안 온 자리가 너무 많아서.”

한창 예지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애가 끼어들어서 정진우에 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풀어놓았다.

“진우는 안 올 만하지. 걔 학과 모임만 오면 한 번 이상은 꼭 불려 나가잖아.”

“진우가?”

“네. 진우 입학한 다음부터 우리 과 사람들한테만 다섯 번은 넘게 고백 받았을걸요?”

“……그래?”

“네. 학교에서는 수업만 하고 가버리고. 선배나 다른 사람들이랑 붙어 있으니까 잘 안 그러는 거 같은데, 과모임이나 그런데 한번 나오면 장난 아니에요. 우리끼리 내기도 해요. 일 년에 학교에서만 몇 명한테 고백 받나. 열 명 이상이다, 아니다.”

“진우 계속 여자 친구 있었잖아.”

“그래서 그나마 덜한 게 이 정도예요. 선배님 몰랐어요? 진우랑 볼 때마다 같이 있어서 엄청 친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 애는 본인도 정진우에게 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눈이 반짝거려서 진우 요즘 관심 있는 애 있대요? 선배님은 알아요? 하고 물어오는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잘 몰라.”

“그렇구나……. 그럴 것 같기도 했어요.”

“…….”

“진우가 워낙 자기 얘기 잘 안하잖아요. 선배님은 진우랑 친하니까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대단히 실망한 눈치여서 나도 모르게 사과할 뻔했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어색하게 침묵만 지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금 충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학교에서 정진우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제일 놀랐고, 정진우의 이야기를 전했던 그 애가 했던 말처럼, 정진우도 나를 그냥 수업 자주 겹치는 선배라고만 생각할 것 같아서. 좀 우울해졌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와 오는 길에 사온 담배를 물고 창가에 걸터앉았다. 아까까진 그렇게 행복했는데 지금은 기분이 바닥을 쳤다. 구겨 신은 운동화도 우울했고, 라이터 불도 우울했다. 괜히 더운 날씨에도 신경질이 났다.

“……그냥 갈까.”

“어디 가요? 집에?”

고개를 들었더니 정진우가 웃고 있었다. 매번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너도 이제 나한테 그냥 후배 할 거니까, 안 놀랄 거다. 얼굴 봤다고 안 행복할 거고. 괜히 삐뚤어진 마음으로 정진우를 잠깐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정진우가 내 옆에 걸터앉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왜 별로예요?”

“……기분 안 별로야.”

“안 별로인 게 아닌데.”

“안 별로인 게 아닌 게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게 아닌데?”

이건 뭐. 좀 어이가 없어져서 코웃음을 쳤더니 정진우가 말해주기 싫어요? 하고 물어왔다. 어쩐지 애 취급을 당한 느낌이었다. 사실 아닌 게 어쩌고 할 때부터 호구처럼 바로 기분이 풀려 있었지만, 한창 우울하다 바로 허허 웃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억지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정진우가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를 살폈다. 귀엽게.

“왜 이럴까.”

“별거 아니야. 그냥 피곤했나봐. 밥 먹었어?”

“안 먹었는데, 별로 생각 없어요.”

“그래…….”

여태까지 뭐하느라 밥도 안 먹었나, 궁금했다. 정진우랑 얘기하다 보면 궁금한 게 너무 많아졌다. 이런 게 처음이라 어디까지 물어봐야 할지도 가늠이 안 돼서, 궁금한 점이 백 개 생기면 그제야 하나 물어보고, 참을 수 없이 궁금하면 또 하나 물어보고. 그런 식이었다.

잠시 질문을 삼키느라 조용한 나를 두고 정진우가 담배연기를 후 뱉었다. 하얀 연기가 밤하늘을 갈랐다.

“집에 갈 거예요?”

“집? …그래야지. 내일 너랑 공부할 것도 있고.”

“가방 있어요?”

“나? 아니. 안 들고 왔는데.”

“그럼 지금 가요.”

“지금?”

“네. 지금.”

“아니, 애들이랑 인사도 해야 하고…….”

“그럼 인사만 하고 빨리 나와요. 기다릴게.”

“진짜 그냥 가게?”

“응. 피곤해서. 그냥 가려고.”

부쩍 정진우가 반말하는 횟수가 늘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괜히 지적하면 안 할까봐 정진우 입에서 반말이 나올 때마다 혼자서만 좋아했다. 사실 변태같이 형, 요한이 형. 하고 부르는 상상도 여러 번 했다. 어쨌든 저렇게 반말하는 것도 우리 사이가 좀 편해진 증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아니었니? 물어보고 싶었다.

정진우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자리도 좀 정리하고, 취해서 널브러져 있는 김수현도 한 번 토닥여 주고, 다른 애들한테 인사도 다 했다. 약간 맛이 간 애들이 나를 붙잡고 안 놔줘서 빠져나오느라 좀 힘이 들었다. 애들이 다 장사였다. 간신히 나와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통화 중이던 조영재가 전화기를 막고 나를 쳐다본다.

“가게?”

“어. 희진이야?”

“어. 잘 가라. 혼자 가냐?”

“그건 아니고.”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리는데 건너편 편의점에서 정진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조영재도 그쪽을 보더니 쟤랑 가냐? 하고 물어왔다. 어. 하니까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니다. 잘 가라고. 별일 없으면 이제 너 생일 때나 보겠네.”

“그렇지. 희진이랑 여행 잘 다녀와.”

조영재는 다음 주부터 희진이와 3주간 여행을 떠난다. 내 생일이 8월이니까 진짜 그때 가서야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시 전화를 붙들며 희진이와 통화하는 조영재를 내버려두고 길을 건넜다. 정진우가 횡단보도 앞에서 양손에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든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새삼,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진우의 모습에 눈을 떼지를 못했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 아직도 적응을 못 해서 이러나. 잠깐 자괴감이 들었다. 찰떡같이 정진우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떨어뜨리려 애쓰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멀거니 내가 걷는 모습만 보고 있더니 제 앞에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 껍질을 까놓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밤거리를 걸었다.

“너 단 거도 별로 안 먹으면서 웬일이야?”

차가운 아이스크림 때문에 입이 얼어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아마 정진우 귀에는 웬일이야? 가 아니라 엔일이에?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정진우가 작게 웃었다. 좀 창피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정진우가 아직 웃음기가 덜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요. 오늘은 좀 단 게 땡기네.”

정진우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옆모습이 희게 빛났다.

나는 요즘 정진우의 정면보다 옆모습이나 동그란 뒤통수를 더 많이 보는 편이었다. 정진우가 나를 안 볼 때, 먼저 걸을 때, 어딘가 걷고 있는 걸 발견할 때,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주로 내가 정진우를 훔쳐보는 순간들이 그랬다.

막상 마주보고 이야기할 때는 얼굴을 보면 머리가 점점 하얘지고, 목소리를 들으면 눈앞이 점점 까매져서 정진우의 똑바른 얼굴을 그려 보려면 자신이 없었다. 좀 아쉬웠다. 열심히 베어 먹어 반밖에 안 남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는 입술을 잠깐 훔쳐보다가 돌부리에 걸려 조금 휘청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먼 곳을 보고 있던 정진우가 팔꿈치 위쪽을 확 잡아당겼다.

“괜찮아요?”

“아… 어, 고맙다. 웬 평지에 돌덩이가 있지.”

좀 민망해서 하하 웃었다. 같이 웃어줘서 고마웠다. 정진우가 팔꿈치 즈음에 닿았던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이 닿은 곳이 후끈거렸다.

“왜 아까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요?”

“기분?”

“아까 나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가 했다. 내가 기분이 나빴어? 생각하다가 아, 그랬지. 했다. 정진우랑 얘기하고 걷다 보니 다 까먹어 버렸다. 아까 잘 얼버무렸다고 생각해서 다시 물어올 줄 몰랐기도 했고. 잠깐 고민하다가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좀 친한 것 같은데. 로 결론을 냈다.

“아까, 일학년 애들이랑 얘기하다가.”

“네.”

“그냥. 아. 너 고백 엄청 많이 받았다며.”

그냥 웃는다.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 정진우는 조금 여우같은 구석이 있었다. 말하기 싫은 질문이 들어오면 웃고 만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진우의 미소에 잠깐 멍해져 궁금했던 것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미소에 속지 않았다.

“고백 많이 받았더라?”

“누가 그래요?”

“누구지……. 어쨌든 네 동기가 그랬어.”

“그랬구나……. 뭐, 그냥.”

“아무튼 말하고 싶었던 게 이게 아니라, 걔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너 지금 맘에 들어하는 사람 있냐고. 나는 너랑 친하니까 알지 않냐고 그러는데 할 말이 딱히 없더라고.”

“으응.”

“그래서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구나, 싶다가. 우리가 그렇게 친한 건 아닌가, 싶고. 그래서 좀 우울했나.”

말하다 보니까 이상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애들끼리 이런 대화를 할 것 같진 않았다. 혼자 있었으면 머리를 쥐어뜯었을 텐데, 옆에 정진우가 있어서 티셔츠 끝자락만 미친 듯이 쥐어짰다. 정진우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 먹고 막대만 남은 내 아이스크림 바를 가리키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거 줘요.”

“이거?”

아이스크림 바를 들며 물어봤더니 네. 이런다.

“왜?”

“버리게. 줘요.”

눈이 물음표가 되었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받아서 같이 버리려고……. 그래도 일단 달라기에 줬더니 저 구석에 보이는 쓰레기봉지 더미에 나무 막대 두 개를 푹 꽂아 넣고 터덜터덜 걸어온다.

“난 지금 누구랑 연애할 생각도 없고.”

“어?”

“연애할 때 내가 무슨 이상한 점이 있었나, 고민하느라 좀 우울하고.”

무슨 소리야. 생각하다 내 말에 대한 답인 걸 깨달았다. 이 와중에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해서 덩달아 우울해졌다. 뭐, 내가 연애대상이 아닌 건 아주 잘 알았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냥 우울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걷는 정진우랑 같이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선배랑 나는.”

“…나랑 너는?”

“내 생각엔, 우리 엄청 가까운 것 같은데.”

한창 우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간질거렸다. 가까운 것 같은데. 정진우가 한 말을 입에서 한 번 굴려보았다. 친한데. 보다 더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정진우의 말대로 내가 정진우와 더 가까운, 친구보다 더 가까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가까운 것 같은데. 라니. 정진우는 얼굴도 예쁜 게 말도 예쁘게 했다.

“아니에요?”

옅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입가의 점도 입꼬리와 함께 조금 올라가 있었다.

“…맞아.”

“다행이다.”

손바닥이 간질거리고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나도 다행이야. 중얼거렸더니 잠시 말이 없던 정진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궁금한 거?”

“네. 궁금한 거 있으면, 우리 집 가면서 하나씩 물어보고, 대답해주고. 할까?”

조용한 길가에 정진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에 대해 아는 거 없어서, 서운하다며. 나도 좀 그런데.

어깨에 올라가 있는 손이 신경 쓰이고, 다정한 목소리가 내뱉는 다정한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정진우랑 있으면 항상 정신이 좀 없어지고, 종국에는 좀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지금도 그랬다. 어질어질한 머리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질문을 꺼냈다.

“왜 연애할 생각이 없어?”

“…이건 좀 어려운데.”

“궁금한 거 하나씩.”

“알았어요. 선배도 알잖아.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렇지.”

“그냥, 저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 예뻐 보이고. 나도 좋아질 것 같고. 그렇게 대부분을 만났는데 그게 잘못된 건가 싶어서요. 다 따져 봤더니 시작이 문제였나, 해서. 진지하게 생각 좀 해 보려고,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내가 누굴 진짜 좋아한 적이 있긴 했는지.

그렇게 말하는 정진우의 옆모습이 단호했다. 그거 알 때까지는 당분간 누구 만날 생각 없어요. 말을 끝맺는 게 오랜만에 되게 명확한 톤이었다. 정진우는 대부분의 말을 좀 느릿하게, 졸린 듯이 말하는데, 저러는 걸 보니 정말 그럴 생각인가보다 싶었다.

“…그래. 좋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

“이제 내 차례예요.”

“뭐, 궁금한 거 있어?”

“선배는 누구 좋아해본 적 있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라 잠시 대답을 못 했다. 너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거짓말을 하기도 싫었다. 거짓말로 얼버무리기엔 나는 정진우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적어도 나의 안녕보다 정진우의 안녕을 조금 더 바랄 만큼은.

“있지.”

“…언제?”

“질문 하나씩. 내 차례야.”

“치사하다. 말해요.”

“너 군대 언제 가?”

정진우가 갑자기 엄청 크게 웃어서 놀랐다.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거였는데, 너무 웃어서 약간 빈정이 상했다. 웃지 마. 했더니 알았어요. 하고 자꾸 웃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랬더니 알아서 멈추고 미안해요. 하고 사과를 한다.

“너무 예상 못 해서.”

“아니, 나 진짜 궁금한데. 언제 가? 나는 이번 학기 끝나고 갈 거야.”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선배 내년에 가면 나도 그때 갈까? 그래서 치솟는 광대를 억지로 내리느라 잠시 바빴다. 최대한 관심 없는 말투로 그러든가. 했더니 생각해 봐야겠다. 해서 제발 같이 다녀와서 같이 복학하자. 할 뻔했다.

“언제 그렇게 좋아해봤어요? 그리고 어떻게 알았어요?”

“너 그거 두 개,”

“주제는 하나잖아. 집도 다 와 가는데 봐줘요.”

잠깐 말을 골랐다. 정진우가 눈치를 채면 안 되니까. 한참을 말이 없다가 도착한 우리 집 앞에서 겨우 입을 뗐다.

정진우는 항상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아니, 나는 항상 정진우를 좋아해서, 곤란했다.

“…지금도 좋아해. 그냥, 알게 됐어.”

“…….”

“너무 좋아하니까 그냥. 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말하지 말걸. 가슴이 너무 저렸다.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자 너를 너무 좋아해. 바로 말하고 싶었다. 생각만 했을 땐 괜찮았는데, 이렇게나마 이야기하니까 더 분명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여태껏 나는 그냥 혼자 정진우를 좋아만 해도 되겠다. 정진우가 웃는 것만 옆에서 봐도 행복하겠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사람이 정말 이기적이라, 막상 이렇게 되니 표현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었다. 완전한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나도 모르게 나를 쳐다보는 정진우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또 마음이 들킬까봐 무서워서 도망치듯 빌라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계단을 걸어 오르며, 계단 등이 깜빡, 깜빡 점멸하는 것을 배경으로, 언젠가 그랬듯 내가 한 층을 오를 때마다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정진우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제일 소중해. 미안해.

과외를 하러 정진우네 집으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들어와 이상할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뒤로 어젯밤 일을 계속 생각했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로 표정 없이 나를 보고만 있던 정진우의 얼굴, 전보다 짧아진 머리, 각진 어깨, 약간 힘줄이 돋은 팔,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 까만 반바지, 깨끗한 운동화, 긴 종아리, 무릎.

어제의 그 상황을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후회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거라도 정진우 앞에서 이야기했다는 게, 조금 시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백하고 싶었다. 놀라웠다. 지금까지 감정을 참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나는 참을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사람이었다.

정진우를 좋아한 건 고작 4개월 남짓이었다. 마음이 깊어졌다고 느낀 건 그보다 짧았다. 근데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도착한 빌라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상 층에 머무르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예감했다. 나는 어떻게든 끝을 보겠구나. 나는 우리의 관계를 끝내 만족하지 못하겠구나. 언젠간 이 목까지 찬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토하듯 전하는 날이 오겠구나. 욕심이 많아서.

“왔어요? 들어 와요.”

집 안에 들어서니 정진우가 애매하게 서 있었다. 아마 내가 오는 걸 알고 문을 열어주려 했던 모양이다. 멋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서 좀 민망했다. 나에게 현관과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아무 때나 오라고 했지만 한 번도 집 번호는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넋을 좀 놨긴 했나보다, 싶었다.

정진우와 식탁에 마주앉아 일단 오렌지 주스를 한 컵 들이켰다. 맛있었다. 나는 맵고 짠 걸 좋아는 해도 잘 못 먹어서, 대체적으로 달고 느끼한 음식들을 즐겨 먹었다. 정진우의 냉장고엔 주스를 비롯해 어느새인가부터 나를 위한 음식들이 몇 가지씩 생겨났다. 그런 것들은 나를 항상 기쁘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오늘 A1 끝내고, A2 들어갈 차례야.”

가지고 왔던 새 교재를 내밀었다. 정진우가 받아 들면서 미리 말하지. 내가 살 수도 있었는데. 했다. 고개를 저었다.

“수업 이렇게 하면서 돈 받는 것도 미안한데.”

“그래도.”

“정 그러면 선물이라고 생각해, 선물.”

정진우가 웃었다. 이제 나는 항상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정진우의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어제 이후로 내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눈을 한참 맞추다 교재로 시선을 내리니 정진우가 펜을 딸깍거렸다.

“고마워요.”

“수업 시작.”

정진우가 웃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케 제어.

우리는 보통 수업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독일어로만 이야기했다. 평소에 독일어를 사용할 일이 없으니 과외 때만이라도 미친 듯이 써 보자, 하는 정진우의 의견이었다. 책 지문을 이해한 뒤 그에 대해 더듬더듬 말하는 정진우가 귀여웠다. 정진우가 헤매는 문장과 모르는 단어를 천천히 설명하면서 나는 내가 좀 더 독일어에 능숙해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최대한 명확하게 발음하려는 나를 정진우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정진우는 모를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기 위해 평소에 얼마나 공부했는지. 독일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한 것 같았다. 그렇게 공부한 효과는 있었다. 많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새록새록 생각났다. 정진우가 B1 수준이 되면 시험을 치게 할 생각인데 그때 나도 같이 쳐볼까, 싶었다. 정진우는 괴테 베 아인스, 나는 테스트 다프를 볼 생각이었다. 이참에 자격증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 뭐.

두 시간 동안 독일어로 떠들었더니 피곤했다. 그냥 보면 아는데 독일어로 설명을 하려니까 아주 힘들었다. 가끔씩 나도 인터넷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시계를 확인하고 책을 덮었다.

“수업 끝.”

펜 끝을 물고 있던 정진우가 나를 힐끗 보더니 자기도 책을 덮었다.

“책 하나 달라졌는데 되게 어렵네. 원래 이래요?”

“…음, 아마? B단계 가면 갑자기 난이도 확 뛰어서 더 어려울 텐데.”

정진우가 고개를 파묻었다. 무슨 유학이야. 나 그냥 한국에서 살까.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귀여워서 웃었다. 식탁에 묻었던 머리를 들고 진짜예요……. 답지 않게 우는 소리를 한다.

“나가지 말고 한국에서 살아. 나야 좋지.”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정진우의 눈동자가 약간 멍했다. 모르는 척하고 책을 챙겨 가방에 넣었더니 어… 가게요? 한다.

“아니. 좀 있다 갈 생각인데. 약속 있어?”

“…아니요.”

패기 있게 말은 던졌는데 식탁에 그냥 앉아 있자니 할 일이 없었다. 한동안 마주보고 멀뚱멀뚱 눈만 굴렸다. 어색한 침묵이 지속됐다. 여기서 그냥 간다고 하면 웃기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답지 않게 눈을 굴리던 정진우가 식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맥주 한잔할래요? 하고 제안했다.

“나 알바 가야 되는데.”

“아, 그렇지.”

어정쩡하게 일으켰던 엉덩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좀 허둥지둥하는 것 같아서 웃겼다. 한 캔 정도면, 괜찮아. 하니까 재빨리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뚜껑까지 따서 줬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동안 경직됐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제야 편하게 웃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제 잘 들어갔냐, 바로 잤냐, 뭐 그런 이야기였다. 헤어지기 전에 했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정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너 어제 어디 갔다 왔어?”

“어제?”

“응. …너 온다고 해서 내내 기다렸어.”

“아…….”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다. 잠깐 머뭇대다가 작업실 갔었어요. 저번에 말했던 작품 구체적으로 구상하려고. 한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을 푹 쉰다.

“작품 구상하다가, 현주 누나 만났어요.”

“너랑 사귀었던?”

“네. 그래서 얘기 좀 하자고 잡았더니, 그러자고 그래서 얘기하다가 좀.”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앞으로 계속 얼굴 봐야 하니까, 남은 감정 정리도 할 겸.”

그때 그렇게 끝나고 아무것도 제대로 마무리 지은 게 없는 것 같아서. 이 말도 웃기지만. 정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나에게 말했다.

“선배 좋아하는 사람…….”

“응.”

“아니다, 아니에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더니 캔을 찌그러트린다. 다 마신 내 캔과 함께 분리수거함에 버리면서 정진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제, 집 가면서.”

“응.”

“선배 생각했어요.”

“…….”

“내가 아는 서요한이 이런 사람이었나.”

“…응.”

“갑자기 좀, 낯설어서.”

이상하죠? 그렇게 묻고 싱크대 옆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집어 드는 정진우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목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너는 안 이상해.”

말하는데 약간 목이 잠겼다. 목소리 끝이 이리저리 갈라졌다. 평소보다 더 거친 톤으로 나를 보지 않는 정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상하지.”

잠시 멈춰 있던 정진우가 담배 좀. 하고 발코니로 나갔다. 식탁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책과, 그 옆을 굴러다니는 까만 볼펜을 괜히 한 번 쓰다듬었다. 양손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상해서, 그래서 미안해. 하지 못한 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내 마음엔 언제나 사과가 뒤따랐다. 그래야만 했다. 내가 정진우를 좋아해서, 나는 항상 정진우에게 미안했다.

담배를 피우는 정진우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가 가방을 들었다. 발코니 문을 열고 막 들어오는 정진우에게 말했다.

“나 작업실 한번 가 봐도 돼?”

“그럼요.”

“언제 시간 돼?”

잠시 침묵하더니 선배는요? 하고 물어온다.

“나는 너랑 과외 없고, 알바 없는 날. 낮에는 상관없어. 다 돼.”

“그럼 토요일에 같이 가요. 과외 끝나고.”

“그래.”

현관을 나서면서 정진우네 집 쪽을 한 번 쳐다봤다. 정진우가 발코니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앞에 서서 생각했다. 우리 사이를 깨고 싶지 않은데, 도무지 멈출 방법이 없는 내 마음을.

* * *

토요일이 다가올수록 학교와 집, 알바를 병행하던 지루한 시간에 활기가 찼다. 원래 정진우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 인생은 아주 단조로운 편이었다. 방학은 더더욱.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친구도 없었고, 나를 잊지 않고 종종 챙겨주시는 아줌마들을 찾아뵙거나, 알바를 하거나, 집에 있거나, 가끔 학교 근처로 찾아오는 동기들을 만나 술 한잔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학교에 입학하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얻으면서 이 동네를 떠나 본 적도 손에 꼽았다. 그러다가 정진우를 만나고, 우리 동네에 이런 맛있는 식당도 있구나. 여기엔 이렇게 예쁜 카페가 있구나. 다른 동네는 여기보다 이런 게 많구나, 저런 게 없구나. 하는 것들을 배웠다. 오늘도.

작가 작업실 같은 곳은 처음 가봐서 좀 기대됐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맞지? 했더니 정진우가 웃으며 맞아요. 대답했다.

수업을 끝내고 책을 챙긴 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정진우를 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며 담배를 태우던 정진우가 문득 내 쪽을 보면서 웃었다. 정진우는 계절에 어울리는 미소를 가졌다. 봄에는 꽃같이, 여름에는 여름밤같이 웃었다.

여름 바람이 정진우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나를 보며 웃는 얼굴. 보기 좋은 손가락에 걸린 담배를 훑다가 가슴이 아파졌다. 종종 이랬다. 누가 심장을 잡고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고통이 목까지 가득 차 숨쉬기가 어려운 기분. 잠시 숨을 몰아쉰 뒤 붙박여서 돌아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 내고 복잡한 책상 위를 의미 없이 뒤적거렸다. 복잡해 보이는 스케치가 들어간 트레이싱지가 여러 장 겹쳐져 있었다. 나무인 것 같기도 하고, 돌 같기도 한 뭔지 모를 형태가 이것저것 여러 각도에서 그려져 있었다.

“이번에 들어갈 작품이에요.”

어느새 들어온 정진우가 내 뒤에 서서 말했다. 뒷목에 소름이 쭈뼛 섰다. 고개를 슬쩍 돌려 보니 정진우의 속눈썹이 보였다.

“뭐야?”

“나무. 저번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나무 작업 할 거라고.”

“아. 그렇지. 이게 초안 잡아 놓은 거야?”

“네. 좀 더 구체화시켜 놓고 들어갈 거예요. 지금 따로 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어서.”

“따로? 뭔데?”

“그건… 완성하고 얘기해 줄게요.”

가요. 하면서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던 키를 집어 든다.

“작업실까지는 어떻게 가?”

“평소엔 버스 타고 가거나, 택시 타는데.”

“응.”

“오늘은 형 차 빌려왔어요.”

정진우가 운전하는 동안 보조석에 앉아서 약간 주름이 간 바지를 한 번 쓰다듬다가, 바닥을 한 번 비벼보고, 밖을 내다보고, 정진우의 단정한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운전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내 또래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타 봐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렇게 누가 운전하는 걸 옆에서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면허 언제 땄어?”

“졸업하자마자 땄어요. 선배는 면허 없어요?”

“응.”

“딸 생각 없어요?”

“딱히 생각 안 해봤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춘 사이 정진우가 내 쪽을 돌아봤다.

“좀 막히네. 3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래.”

“잠깐 작업실 들렀다가, 뭐 먹으러 갈래요? 근처에 아는 데 있어요.”

“좋아.”

얼마간 더 달려 도착한 작업실은 굉장히 넓었다. 한옥이었는데, 예상했던 느낌과 아주 달라서 놀랐다. 마당을 중심으로 디귿자 모양의 커다란 유리창이 설치된 넓은 작업실이 흙색으로 칠해진 간이 벽으로 중간 중간 나뉘어 있었다. 정진우가 자기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며 구석으로 날 끌고 갔다. 이번에 생겼어요. 하면서 보여주는데, 이런저런 구색이 갖추어져 있어 정진우가 조금 대단해 보였다. 그 옆으로는 화장실과 주방으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다.

다들 이리로 지나다녀서 뭐 할 때 좀 불편해요. 정진우가 설명했다.

“그 누나 자리는 있어?”

“아……. 현주 누나 자리는 저쪽이에요.”

정진우가 뭔지 모를 천 여러 뭉치가 쌓여 있는 쪽을 가리켰다. 충동적으로 물어 본건데 자리가 아주 멀어서 좀 안심이 됐다. 안심하는 내가 웃기기도 했다. 작업실에 좀 더 머물며 정진우의 책상이며 의자, 펜, 붓 등 온갖 물품을 뒤적거리다 반대편 벽에 놓인 이젤을 발견했다. 검은 천으로 덮여 있는 채였다.

“이건 뭐야?”

“이건, 음. 이리 와 봐요.”

다짜고짜 팔을 잡아끌더니 마당으로 나간다. 티 나게 말을 돌려서 저거 뭐냐고 몇 번 더 추궁했더니 마당 한편에 설치된 작은 가마를 보여주다가 완성하면 알려 줄게요. 하고 적당히 막는다. 좀 서운했지만 완성하면 알려 준다니 꼭 그래야 한다고 하고 말았다.

작업실에 있는 동안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둘이서 차를 마시며 얘기도 하다가, 마당에 앉아서 반짝거리는 별도 보다가, 흙장난도 하고,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잠깐 물장난도 했다. 젖은 머리와 옷을 말릴 겸 마당에 놓인 의자에 다시 앉아 또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진우의 웃음소리와 내 웃음소리가 섞였다. 이 시간이 못 견디게 좋았다.

저녁을 먹으러는 한정식 집에 왔다. 작업실과 가까운 거리여서 옷도 마저 말릴 겸 천천히 걸었다. 골목골목이 우리 동네와 같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고즈넉했다. 도착한 한정식집도 분위기가 비슷했다. 정진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곳에서 보냈구나. 좋았겠다, 싶어서 나도 좋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는 한정식이라는 걸 한국에 와서 오늘 처음 먹어봤다고 말하니 정진우가 놀라워했다. 이게 놀랄 일이야? 근데 봐도 잘 모르겠어. 이거 이름이 왜 한정식이야? 그랬더니 정진우가 글쎄요. 한식으로 나오는 코스요리라서 그런가. 나도 잘 몰랐네. 하며 웃었다. 반찬이 깔끔했고, 메인 요리로는 떡갈비가 나와 엄청 맛있게 먹었다. 고기를 먹다 보니 술 생각이 나서 술을 좀 시켰다. 정진우가 잠시 고민하더니 차는 두고 가야겠다고 술잔을 들었다. 맛있는 저녁엔 술이지. 마주보고 웃었다. 술 취향이 맞는 것도 정진우의 수만 가지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적당히 배부르고 적당히 취할 정도로 먹고 가게를 나섰다. 후식으로 나왔던 약과를 우물거리며 차도가 나올 때까지 걸었다.

“잘 먹었어. 네 덕에 호강한다.”

“할아버지같이 말하네.”

정진우가 애늙은이. 하고 웃었다.

“진짜 고마워서…….”

“잘 먹어줘서 나도 고마워요.”

“다음에 맛있는 집 알게 되면, 그땐 내가 너 데려가 줄게.”

그것도 고마워요. 정진우는 요즘 들어 자주 웃었다. 그게 보기 좋아서 마지막엔 나도 또 함께 웃었던 것 같다.

한동안 걸어서 우리 동네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탔다. 사람이 별로 없는 버스에서 덜컹거리는 소음들과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 차 소리 등을 듣고 있었다. 정진우는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잠이 들어 있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자꾸 꾸벅거려서 내 쪽으로 당겨 주었다. 어깨에 머리가 닿자 조금 자세를 잡더니 그대로 잠이 드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와 턱 끝에 닿는 정진우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이대로 시간이 잠시만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우야, 일어나.”

사거리 정류장 근처에 와서 정진우를 깨웠다. 움찔 놀라는 게 느껴져 안색을 살폈다.

“많이 피곤해? 어제 뭐 했어?”

“…그냥, 별거 안 했는데.”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함께 내려서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샀다.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물고 정진우가 좀 걷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까지 걸었다. 정진우는 자다가 일어난 뒤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아무 소리를 안 했다. 잠깐씩 나를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시간이 좋아서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해 머뭇거리다 나 들어간다, 하고 툭툭 쳤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보는 게 웃겼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얼굴에 진득한 시선이 떨어졌다. 한참 웃던 얼굴을 어색하게 굳혔다.

분위기가 점점 어색해졌다. 나만 느끼는 기분인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버리고,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내 손짓을 무시한 채 정진우가 가만 나를 들여다봤다. 정진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괜히 다리가 비비 꼬였다.

“왜……. 왜 안 가고 그래.”

흔들던 손으로 팔을 잡고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정진우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 다급한 기분이 든다. 죄를 짓는 것 같이, 가슴이 조여든다. 잡은 팔을 조금 더 세게 밀었다. 급해지는 나와 멈춘 정진우, 우리 사이에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느낌이다.

늘어져 있는 팔이 급작스레 움찔, 움직였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내 팔을 잡아 내린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정진우의 손아귀에 붙들렸다.

“요한 선배.”

“……응.”

한동안 말이 없다. 가만히 서서 기다려 주었다. 나를 보다가, 땅바닥을 보다가, 아직 제가 잡고 있는 내 팔을 보는 정진우의 시선을 함께 따라갔다. 잠깐 한숨을 쉬더니 헐겁게 잡았던 내 손목을 꽉 쥔다.

“나를,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고.”

“…무슨 말이야.”

“아까 마신 술이 이제 왔나.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정진우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내 눈을 향했다. 갑자기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느려졌다. 심지어는 정지한 듯도 하다. 불현듯 집 앞 가로등이 깜빡였다. 정진우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키스……. 할까요.”

정진우의 냄새가 다가왔다. 시야가 흐릿해질 때까지 시선을 맞추다가 눈을 감았다. 정진우의 커다란 손이 내 귓가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정진우의 입술이 닿았다. 내 입을 가볍게 한 번 빨더니 그대로 입술을 깊게 겹친다. 너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하얘진 머릿속에선 정진우가 나에게 한 말들만이 맴돌았다.

키스는 짧았다. 잠깐 입술을 맞댄 상태로 머물러 있던 정진우가 붙어 있던 얼굴을 떼어 냈다. 평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정진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정진우의 눈동자 속에서 길게 점멸했다. 잡고 있던 내 한쪽 팔을 놓고, 귓가를 감싸던 손을 천천히 뗀다.

그대로 나에게 물러서려는 정진우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나를 두고 정진우가 제 턱을 쓸었다. 너도, 나처럼 혼란스럽니. 나는 대체 너의 생각이 어떤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선배. 나는.”

“아까 마신 술이 이제 왔나,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두서없이 머리에 맴도는 말을 뱉었다. 후회할 것이 뻔했다. 정진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던 것을 깨달았다. 머리에 맴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앵무새처럼 정진우를 따라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후회할 거 이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빌미는 정진우가 만들지 않았냐고. 나는 잘못한 거, 없다고. 불안한 마음을 합리화했다.

“같이 있을까, 오늘.”

한참을 못 박힌 듯 마주보고 서 있었다. 정진우의 손을 그대로 이끈 건 마음속의 어떤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에게 잡혀 끌려오는 정진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현관 앞에서 키를 꺼내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열쇠가 구멍에 맞지 않고 이리저리 빗나갔다.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층계를 울렸다. 이리저리 떨리는 손을 정진우의 손이 부드럽게 감쌌다. 내 어깨 위로 정진우의 숨이 닿았다.

“내가… 열게요.”

내 손에서 열쇠를 가져가는 정진우의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그대로 힘없이 손을 내렸다. 어느새 정진우와 맞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축축하고 답답해 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영원히 잡고 있고 싶었다.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입가를 연신 매만졌다.

약간 헤매던 정진우가 문을 열고, 나를 휙 잡아당겼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정진우의 입술이 와 닿았다.

사위가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중 정진우의 입술 사이로 흐트러지는 숨, 내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의 감촉 같은 게 머리를 쾅쾅 울렸다. 정진우의 힘에 밀려 몸이 현관문에 세게 부딪혔다. 쿵, 머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정진우의 손이 내 뒷머리를 감싼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 두피를 쓰다듬는 손가락의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계속해서 입 안 여기저기를 건드는 정진우의 혀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현관에 기대서서 키스를 받다 점차 힘에 부쳐 주저앉는 나를 정진우가 집요하게 따라오며 입 안과, 입술, 뺨 등을 깨물고 핥았다. 나는 나에게 밀려오는 정진우를 감당하기에 벅차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주저앉아 얼굴을 잡힌 채로 잠깐 정진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대로 밀려나 나를 보는 정진우의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너… 좀, 하아. 심하다.”

이때다 싶어 숨을 몰아쉬는 내가 웃겼나보다. 정진우가 피식 웃더니 내 볼 주변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나를 일으킨 정진우가 대충 신발을 벗고 내 신발도 벗겨 던져버렸다. 휘청거리며 정진우를 따라 걷다 개어 놓은 이불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진우가 나를 마주 보고 앉아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시선이었다.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비비 꼬였다. 살짝 몸을 뒤치는 나의 허리께를 정진우의 손이 감쌌다.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온 얼굴이 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내가, 그랬죠.”

“…뭐?”

“선배는, 이상하게 입술이 너무 섹시해서…….”

가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정진우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뭔가 생각해볼 틈도 없이 웃음소리가 내 입속으로 사라졌다.

“…….”

급하게 부딪혀 오는 입술에 가끔씩 이가 딱, 딱, 부딪혔다. 아픈 걸 느낄 새도 없었다. 허리 쪽에 머물러 있던 정진우의 손이 내 티셔츠를 걷어들고 배를 매만졌다. 손바닥이 거칠어서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배를 쓰다듬던 손이 가슴으로 올라가 가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계속해서 입술을 물고 놔주지 않던 정진우가 뺨을 지나 귓바퀴를 깨물었다.

“아……!”

아파요? 미안. 정진우가 귀에 대고 작게 중얼댔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였으나 뭐라고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온몸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내 가슴 부근에서 머무르던 손가락이 젖꼭지를 꽉 잡았다. 잡고 있던 정진우의 티셔츠 끝자락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정진우가 계속해서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을 속삭였다. 잘 들리지 않았다. 타인과의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모든 행위에 정신이 금방 빠졌다. 머리맡에 닿은 이불에서 내가 머리를 비빌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등허리를 받치고 있던 정진우의 손이 약간 헐거운 바지 속으로 쑥 들어와 엉덩이를 쥐었다.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잠깐, 아, 진우야, 잠깐.”

급하게 정진우의 손을 제지하면서도 가슴을 계속해서 건드리는 손가락의 감각에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정진우에게 이런 뉘앙스로 이야기한 건 맞았다. 하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좀 어색하기도 했다. 정진우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잠깐 목덜미에서 고개를 떼고 나를 보던 정진우가 순식간에 내 티셔츠를 벗기고 가슴께를 물었다. 머리를 벗어난 티셔츠가 양팔에 엉겨들었다. 곧장 복잡한 생각은 휘발되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까맣게 변했다 난리가 났다.

“하, 아, 잠깐만. 기다려봐.”

정진우는 가끔씩 거칠게 숨만 내쉴 뿐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은 건 나뿐이었다. 팬티 속이 답답했다. 빨리 벗어 던지고 죽을 것 같은 사정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가끔 자위해본 적은 있어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정진우가 궁금해져 걸려 있는 티셔츠에서 팔을 빼고 내 배꼽 부근에 머물러 있는 머리카락을 잡았다. 정진우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대로 작은 뒤통수를 잡고 입술을 맞댔다. 순순히 열려 있는 입술을 열심히 핥고 빨았다. 정진우가 가볍게 웃는 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바지가 벗겨져 구석으로 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흥건히 젖은 팬티 위를 정진우가 손바닥으로 느리게 덮었다. 둥글게 쓸어 올리는 느낌에 소리도 못 내고 고개를 젖혀 입만 벌렸다. 정진우가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손가락이 젖은 천을 잡고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찔꺽대는 소리에 귓가가 달아올랐다.

“어, 선배… 선배 거,”

반쯤 벗겨진 팬티 위로 성기가 튀어 올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진우가 내 얼굴을 한 번, 선 채로 옅게 흔들리는 성기를 한 번 보더니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말했다.

엄청 크네.

너무 창피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빨개져 있을 게 분명한 얼굴을 숨겼다. 손 틈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나갔다. 잠시 신기한 듯 내 성기를 이리저리 만져보던 정진우가 손 떼 봐요. 하고 말을 걸었다.

“…싫어.”

창피해. 빠르게 중얼거렸더니 정진우가 또 웃었다.

머뭇대는 내 손 위로 정진우의 손이 덮였다. 손등 위를 넉넉하게 감싼 손가락이 하나하나 손가락 사이로 맞물린다.

“나 봐요.”

나도 창피해.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투와, 내 손을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아무렇게나 이불에 묻혀 있던 몸을 세웠다. 어느새 버클이 풀려 있는 바지 위로 정진우가 내 손을 이끌었다. 망설이다 정진우의 바지를 벗겼다. 이건, 안 벗겨요? 정진우가 귀에 대고 자꾸 속닥거렸다. 귀부터 시작해 발가락 끝까지 간지러움이 전염됐다. 정진우를 다리 사이에 놓고 까만 팬티를 마저 벗겼다. 곧게 선 커다란 성기가 튀어나와 내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꺼떡거렸다.

“누구랑… 같이 해 본적 있어요?”

정진우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도리질을 쳤더니 내가 알려줄게요. 한 뒤 제 것과 내 것을 한 손에 잡았다. 허리가 절로 들썩였다.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 헤매는 손을 정진우가 남은 손으로 잡아 자신의 어깨 위로 둘렀다. 정진우의 손짓에 의해 핏줄이 선 성기끼리 거칠게 비벼졌다. 정진우의 어깨를 쥐었다 놓기만 반복했다.

“아, 이거, 좀 이상,”

“하아. 괜찮아요.”

투명한 점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성기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정진우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귀두를 거칠게 문질렀다. 정진우의 다리 위로 올라가 있던 내 허벅지가 움찔 튀었다. 허벅지 안쪽을 느리게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춘다. 나를 관찰하는 정진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거친 숨이 입 안에서 섞였다. 거친 손바닥이 나란히 맞물려 거칠게 문대지는 기둥을 지나 귀두 끝을 진득하게 문지른다. 채 밖으로 나가지 못한 신음이 정진우의 입속에서 머물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 위로 정액이 투둑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성기를 잡은 손에 잠시 힘을 주던 정진우가 곧이어 내 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사정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대로 정진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진우가 내 머리카락과 목, 어깨, 등, 허리를 차례로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한동안 정진우의 살 냄새를 맡았다. 따뜻했다.

정진우가 구석에 놓인 티슈를 가져와 내 몸과 자기 몸을 대충 닦아내는 동안 고개를 땅바닥에 박고 침묵만 지켰다.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쾌감에 잠식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 뒤를 자괴감이 이었다. 내 옷을 차례로 입혀 주고 자기 매무새도 만진 정진우가 바닥에 마주 앉아 내 얼굴을 바라봤다. 불은 켜지 않은 채였다. 나란히 사정한 뒤 곧장 불을 켜려는 걸 내가 말렸다. 차마 환한 불빛 아래서 정진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후회, 해요?”

고개만 저었다. 정진우가 다시 물었다.

“나, 안 볼 거예요?”

또 고개를 저었다. 정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나, 어떻게 생각해요?”

좋아해.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진우가 곧바로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요.”

이게 어떤 건지. 바닥을 노려보고 있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진우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선배는… 알아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시 그대로 있던 정진우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있으면 선배는 평생 내 얼굴 안 볼 것 같아.”

나, 가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가요? 하고 한 번 더 묻는 말에는 더 약하게, 끄덕였다. 정진우가 이 고갯짓을 발견했으면 좋겠기도, 발견하지 못했으면 싶기도 했다. 정진우가 잠시 서 있더니 연락할게요. 했다. 봤구나. 현관문이 닫히고, 정진우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복도를 울리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울고 싶어졌다. 정진우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싶은 나와, 이렇게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내가 부딪혔다. 자기감정이 뭔지 모르겠다던 정진우는 나에게 희망과 동시에 깊은 자기혐오를 안겨주었다. 정진우가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정진우가 본인의 감정을 정의 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겁쟁이라고 해도 좋았다. 겁쟁이가 맞았다. 나로 인해 정진우가 남자를 좋아하는 감정을 깨우친다는 게 무서웠다. 만약 깨우치더라도, 그 계기가 나의 고백은 아니길 바랐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정진우가 나가고, 월요일 저녁까지 우리는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울리는 핸드폰을 세게 쥐었다. 이번 주 과외를 취소하는 내용의 메시지가 화면을 밝혔다. 본인의 바쁜 사정을 길게 설명한 뒤, 내가 가능한 날에 맞춰 보충을 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바뀌는 건 없었다. 글자도 그대로였고, 아무 사진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프로필도 그대로였다. 메시지를 마무리하며, 시간될 때 연락 줘요. 기다릴게요. 라고 써 놓은 것까지.

나는 정진우와 헤어지고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다 순식간에 허탈해졌다. 웃음마저 나왔다. 다시 만났을 때 고백을 하니 마니, 정진우의 의중을 살피니 마니 고민했던 지난 시간의 내가 굉장히 하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땅 끝까지 내려가 내핵을 뚫었다. 사실 딱히 정진우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마음이 그냥. 내가 정진우 생각을 일 초도 멈출 수 없었던 것처럼 정진우도 그럴 줄 알았었나보다. 생각을 하다하다 지쳐서 그래도 얼굴은 좀 보고 싶다고 결론 냈던 나처럼, 정진우도 그럴 줄 알았다. 정진우는 애매한 말만 던져놓고 갔을 뿐, 아무런 언질도 없었는데 혼자 지지고 볶고 김칫국을 마시고 난리를 쳤던 내가 우스웠다.

정진우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던 생각 번복만 수백 번을 반복했다. 정진우를 만나고 항상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해 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번복의 대가였다. 어디서 번복 대회가 열리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이런 내가 우습고, 아무리 번복에 번복을 반복해도 정진우를 좋아하는 마음은 번복이 안 된다는 것이 싫었다.

과외가 취소되며 시간이 꽤 남게 되었다. 나를 보러 학교 근처로 찾아온 김수현을 만났다. 밥 먹는 동안 김수현은 희진이와 여행을 떠난 조영재를 반찬 삼아 씹어댔다. 굉장히 부러운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렇게 부러워? 한마디 했더니 꺼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진짜 부러운가보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더니 독심술이 특기인 김수현이 속으로 말하면 모를 줄 알았냐며 젓가락을 내 쪽으로 들이댔다.

“야. 솔직히 말해봐. 너는 안 부럽냐?”

“…뭐가? 여행 간 거? 희진이랑 사귀는 거?”

“내가 김희진을 왜 부러워 해. 여자 친구 있는 거. 여자 친구랑 여행간 거.”

“별로 안 부러운데.”

“왜지? 부러워야 되는데? 너 부러워.”

“안 부러워.”

“헐? 자, 나 봐봐. 다시 잘 생각해 봐. 부러울걸?”

뒤이어 너랑 나만 애인 없잖아……. 하고 우는 소리를 한다.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냐. 영지도 없어.”

“…아. 걘 별로 위로가 안 돼.”

분위기가 약간 숙연해졌다. 이야기 나온 김에 영지 부를까? 말했더니 싫단다. 오늘은 남자끼리 모임이라고 제멋대로 정하기까지 한다.

“우리 둘밖에 없는데 모임이야?”

“그래도! 야. 너 진짜 아는 사람 없냐? 나 소개팅.”

“나 아는 사람 우리 과밖에 없는 거 알면서……. 영지 소개시켜 줄까.”

김수현이 젓가락으로 눈을 찌르려고 했다. 눈빛이 진심이었다. 실명의 위협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농담, 농담이야. 영지도 너 싫어해.”

“영지한텐 말도 꺼내지 마. 네가 아니라 내가 맞아 죽을 듯.”

“어쨌든. 기다리면 다 나타날 거야.”

서요한 여유로운 척 쩌네. 빈정거리더니 곧이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정진우도 지금 여자 친구 없지?”

김수현이 억울해하는 내내 몰래 공략하던 어묵을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한여름에 순식간에 식당 안이 냉골로 변했다. 나만 느끼는 온도였다. 아마. 김수현은 아까운 어묵을 바닥에 떨군 나를 한참 비난하더니 정진우의 여자 친구 없음을 주제로 히히덕대기 시작했다.

“하긴. 그 미친 얼굴도 여자 친구 없을 때가 있는데. 나한테 이년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치?”

“진우 여자 친구 없는 건, 네가 어떻게 알아?”

“걔 여자 친구 문제는 걔 입에서 누군가한테 전달되는 순간 소문 쫙 나.”

“아, 그래.”

“걔가 그런 거 티 잘 내나봄. 누구 만나면 핸드폰 붙들고 놓질 않고, 헤어지면 얼굴 축 쳐져서. 걔 표정만 관찰하다 헤어진 것 같은 때 노려서 고백하는 애들 졸라 많대.”

너는 걔랑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몰랐냐? 하고 김수현이 혀를 끌끌 찼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김수현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바로 정진우에게 고백했던 수많은 여자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 방향이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찔렸다. 반쯤 먹다 남긴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니 김수현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 잘 몰라.”

“뭘?”

“…정진우.”

“그래?”

김수현은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잠깐 보다가 한참 밥만 퍼먹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팍 쳐든다. 김수현의 태도에 뻘쭘함을 잊고 밥 먹는 걸 신기하게 구경하다 깜짝 놀랐다. 매일 봐도 저러고 먹는 거 신기하다고 생각한 게 들켰나. 귀신같은 자식. 뭐라 하면 바로 사과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수현이 정작 꺼낸 말은 다른 말이었다.

“야, 근데.”

“엉?”

“정진우, 내가 영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한참 동안 들고 있던 숟가락을 밥그릇에 딱딱 부딪히며 생각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문다. 조영재와 정진우의 사이에는 아무 접점이 없었다. 나 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밖에 없었다. 근데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건지 궁금했다. 남은 밥에 집중하는 김수현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영재가 무슨 얘기?”

“아. 영재가,”

또 말을 멈춘다. 뜸을 엄청 들이더니 한숨을 푹 쉬고 손을 휘휘 젓는다.

“영재한테 들어.”

“뭔데.”

“아 몰라. 넌 정진우랑 친하니까 영재한테 직접 들어.”

“그냥 말해 봐. 뭔데?”

“아 그렇게 궁금하면 조영재 올 때까지 기다려서 들으라니까? 문자 보내보든지.”

괜히 말 꺼내가지고. 중얼대더니 다시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는 걸 얄미운 눈으로 쳐다봤다. 저런 식의 김수현에게선 뭘 어떻게 구슬려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말을 꺼내지를 말든가. 핸드폰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조영재라고 이름을 검색하다가, 희진이랑 웃으면서 찍은 사진을 구경하다가, 뭐라고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한국 오면 물어볼 게 있으니 연락하라는 말만 남겼다.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밥 먹는 앞에서 대놓고 궁싯거렸더니 김수현이 닥치라고 욕을 했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서 진짜 닥치고 입을 삐죽대다가 진짜 성질난 김수현한테 결국 한 소리를 들었다. 얄미운 김수현. 진짜 말 안 해줄 거면 꺼내지를 말든가.

버스 정류장에서 김수현을 배웅해준 뒤 집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알바 시간까진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동안 도면이나 칠까, 도면 치면 담배 피고 싶을 텐데. 담배 사 놓을까, 그냥 들어갈까. 고민하며 사거리 편의점 앞에서 서성였다. 한참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결국 담배는 무슨 담배야, 생각하며 걸음을 돌렸다. 집에 들어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정진우였다.

[전화 돼요?]

잠시 망설이다 응. 하고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뭐 해요?

“…그냥.”

-그냥? 그럼……. 뭐 했어요? 지금까지.

“…그냥.”

-그것도 그냥?

“수현이 만나서 밥 먹고, 집에 왔어.”

-아, 수현 선배…….

“…너는?”

잠깐의 정적 후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꼬치꼬치 물어봐야 하나 물어봐 주네.

전화기를 통한 정진우의 목소리는 실제로 듣는 것보다 좀 더 부드럽고, 섹시하게 들렸다. 사실 정진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날 밤이 오버랩됐다. 성기를 비비던 정진우의 손가락, 방 안에 옅게 떠도는 신음 소리, 내 입술에 비벼지던 정진우의 입술 같은 것들. 눈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정진우는 무슨 생각인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 더 물었다.

“…너는, 뭐 했어?”

지금까지. 문자 한 통 보내놓고. 하지 못한 말은 속으로 삼켰다.

-작업실에서 밤샜어요.

“지금…까지?”

-어제는, 본가에 잠깐 들어갔었고.

“…….”

-그제도 작업실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조용히 울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월요일은……. 집에 있었어요.

정진우가 가볍게 웃었다.

-또 뭐, 말해줄까요.

“…….”

-…나는, 선배한테 물어볼 거 있는데.

“…뭔데?”

-대답해 줄래요?

“…….”

-그날 물어보고 싶었는데,

잠시 뜸을 들이는 것 같더니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작게, 내가 참을성이 없어요. 하고 중얼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날이라니. 나도 덩달아 깊은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땅이 진짜로 꺼질까봐 참았다.

-선배 좋아한다던 사람…….

“…….”

-나예요?

그대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다시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내 행동이 정진우의 질문에 답이 된 걸 알았다. 정진우와 어떻게든 대면하고 이야기하리라 예상했던 순간들에 이런 장면은 없었다. 대화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든 상관없도록 모든 상황에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정진우는 항상 내 예상을 무참하게 깨버렸다. 허무했다. 끙끙대면서 앓았던 고백이, 정진우의 행동에 맥없이 휘둘리는 내 감정이, 정진우에 의해 변화될 우리의 관계가.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 반짝 빛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다음 주에 봐요.]

넌 나랑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불 꺼진 핸드폰에 대고 중얼거렸다. 핸드폰이 대답을 해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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