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정진우랑 전화를 그렇게 끊어버린 뒤에는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났다. 그냥 정진우 지옥이었다. 정진우 지옥에서는 정진우가 비처럼 쏟아졌다. 정진우 홍수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허우적대다 보니 갑자기 정진우의 실물이 너무 보고 싶었다. 문득 내가 말로만 듣던 바로 그 호군가 싶었지만 호구면 뭐 어때. 하고 말았다. 나는 수치를 모르는 자였다. 조금만 이 지옥을 버티면 드디어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좋았다. 그날 이후 열흘 만이었다. 마주칠 기회가 없으니 오히려 눈만 감으면 정진우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정진우 생각만 했다. 일상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더 중증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사랑이 다 이런 건가. 감정 하나를 새롭게 배운 느낌이었다.
결국 다른 것 다 제치고 정진우 얼굴 보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중 조영재의 연락이 왔다. 8월 초에 입국하니 내 생일 전날에야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문자였다. 물어볼 건 그때 물어 보라고. 16일엔 시간 무조건 빼놓으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알았다고 답하고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 놓았다. 조영재에게서 문자가 온 뒤 몇 번 더 김수현을 재촉해 봤지만 원하는 답은 얻을 수 없었다. 김수현은 집요한 나를 지겨워하며 반복해 말할 뿐이었다. 조영재한테 들어. 난 자세히도 안 들었고, 사실인지도 몰라. 그 애매한 대답은 나를 더욱더 깊은 정진우 지옥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과외를 하는 날엔 아침 여섯 시부터 눈이 절로 떠졌다. 일찍 일어나서 씻고, 운동도 했다. 잠깐 장도 보고, 오늘 수업 분량 예습까지 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 또 정진우 생각을 했다. 이불 위에 드러누워 베개를 끌어안고 괜히 뒹굴거렸다. 고백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소리 내어 말해 보기도 했다. 내 귀가 잘 듣고, 마음에 전달 좀 잘하라는 의미였다.
아침부터 온갖 난리를 부렸더니 정진우네 집에 도착했을 즈음엔 진이 다 빠졌다. 유리문에 비치는 얼굴이 좀 퀭해 보였다. 괜히 볼을 한 번 쓰다듬고 비밀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띠, 띠, 띠, 전자음이 미친 듯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심장소리와 맞물렸다.
정진우는 어김없이 활짝 열린 문고리를 잡은 채로 현관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안녕. 인사를 하는데 내가 로봇인가 사람인가 분간이 안 됐다. 삐걱삐걱 식탁 앞에 걸어가 가방을 풀고 앉았다. 정진우가 내 전용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콸콸 따라줬다. 잔을 받아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주 없어 보였다.
“잘 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말끝에 약간 삑사리가 났다. 정진우가 진지한 얼굴을 유지해서 더 민망했다. 부엌 찬장을 봤다가, 식탁 모서리를 봤다가, 정진우의 깍지 낀 손을 봤다가, 냉장고, 싱크대, 구석에 놓인 빈 병까지 모든 공간을 스캔했다. 그동안 정진우의 시선은 변함없이 나에게 박혀 있었다.
“선배는요?”
괜히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나야 뭐. 그냥.”
그제야 옅게 웃는다.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 게 보기 좋았다. 빠르게 관찰하고, 잠깐 눈을 뗐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다시 정진우의 얼굴이었다. 그대로 눈이 맞았다. 느리게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렇게 전화 끊고, 내가 생각한 게 맞나… 혹시 아닐 수도 있나…….”
정진우가 맞잡은 손을 꼼지락댔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멀거니 보고 있었다.
“많이 고민했어요.”
초조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엄지손톱으로 다른 손을 꾹, 꾹, 누르고 있었다. 손등이 온통 손톱자국으로 빨개진 채였다.
“맞을 거야.”
“…….”
“…아마.”
빨갛게 부어오른 살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좋아해.”
정적으로 가득 찼던 세상에 불현듯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생겨났다.
긴장이 탁 풀렸다. 말하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 아니, 아니었다. 지금까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두려워하며 아무 말도 못 했었다. 어쩌면 그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쉽게 입이 열린 거였다. 비겁한 나를 또 한 번 확인하자 웃음이 좀 나왔다.
“미안해.”
계속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정작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던 사과를 했다.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나는 정진우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진우를 좋아하게 될수록 일반인의 범주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애를 점점 이상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 안 만났으면, 어쩌면 평생 안 겪고 지나갈 수도 있는 건데. 나를 만나고, 내가 정진우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정진우가 깊은 진창에 빠진 것만 같았다.
눈을 내리 깔고 있는 정진우를 그제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진우는 내가 저를 보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했다. 참고 기다렸다. 시곗바늘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온갖 소리가 번갈아 가며 내 귀를 울렸다. 정진우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아니, 느리게 보이는 거였나.
하하. 열없이 웃은 정진우가 꼬물거리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막상 들으니까, 머리가 하얘지네.”
평소 이상할 정도로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하던 정진우가 눈을 피했다. 시선을 맞출 때보다 더 묘한 기분이었다.
“그거 알아요?”
“…….”
“저 남자한테 이런 얘기 들은 거, 처음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멍해진 눈으로 정진우를 계속 쳐다봤다. 잠깐 눈을 굴리던 정진우가 드디어 나를 봤다.
“선배가 나를…….”
“…….”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이번엔 내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빨개지고 눈이 뜨거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급하게 한 손을 눈가에 갖다 댔다. 정진우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도 선배를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
“인정하긴 좀 걸렸지만, 나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나는 진짜 덩칫값을 못했다.
“좋아하는 게 맞는데. 그럼 나도 좋아한다고 얘기하면.”
“…….”
“그러면 다 되는 건가.”
정진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면 돼요?
“선배는 나랑 뭘 하고 싶어요?”
정진우와 전화했던 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막상 질문을 받으니 어려웠다. 나는 정진우랑 뭘 하고 싶은 거지.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를 좀 더 알고, 가까워지고.”
“…….”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다 끝이 나면? 금방 끝나 버리면? 정진우의 말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씩 손에서 넘치던 눈물이 점점 말라갔다. 코를 훌쩍대며 새하얀 낯의 정진우를 바라봤다.
“저는 그 끝에 뭐가 있을까. 끝내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거기까지는 상상할 엄두도 못 냈다. 정진우와 무언가를 시작하는 꿈도 요즘에야 겨우 꿨는데, 끝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진우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을 뱉으며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건 무서운데. 우리 좋았잖아요. 이대로 지낼 수는 없을까. 근데도 선배 마음이 알고 싶어서.”
정진우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미안해요.”
그대로 일어나려는 정진우를 붙잡고 급하게 말했다. 머리가 둔해진 와중에도 말은 빨랐다.
“이대로 무마하면, 우리 사이가 다시 괜찮아져?”
정진우는 이해를 잘 못 한 것 같았다.
“아닐걸.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지. 네 말처럼.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그건 안 무서워?”
“선배, 난.”
“나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끝이 어떨지도 장담할 수 없지만.”
잡고 있던 손가락을 꽉 쥐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욕심이 생겨.”
“…….”
“너랑 시작 정도는 해보고 싶다.”
손을 끌어당겨 입술을 묻고 말했다.
“노력할게.”
입술에 느껴지는 온도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나한테 기회 한 번만 줘.”
끝까지 말이 없는 정진우의 손에 대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결국 숨기지 못한 이기적인 마음을 토해냈다. 내가 잘할게. 노력할게. 한 번만. 정진우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곧이어 머리를 짙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한동안 내 머리를 쓸던 정진우가 연거푸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작게, 잘 부탁해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득 과외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정진우는 잘 부탁한다고 했었다. 곧이어 처음 술에 취해 키스했을 때, 정진우랑 야한 짓을 했을 때나,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셨을 때. 정진우를 처음 봤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까지 정진우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연달아 눈앞을 밝혔다. 모든 게 선명했다.
정진우의 손에 얼굴을 묻은 자세 그대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정진우의 손은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손이 좀 더 따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이 많이 차가우면, 내가 많이 잡아줘야지. 따뜻하게 해 줘야지. 잘 숨기지도 못할 거, 이제 마음 숨기지 말아야지. 정진우가 불안해하지 않게 많이 사랑해 줘야지. 그러다가 정진우가 내 마음에 부담을 느끼면, 그때는 잘 정리해야지. 구질거리지 말아야지. 끝없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면서 다짐했다. 더럽다고 욕 안 한 게 어디야. 어디서 보면 게이는 더럽다고,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건 정신병이라고 막 그러던데. 누구 좋아해도 막 숨기고 그러던데. 정진우는 용감하게 나를 좋아한다고까지 말해줬다. 내가 부리는 이기를 망설였을지라도 받아주었다. 나보다 훨씬 잃을 게 많은데도. 그거면 됐다. 고마웠다.
“너 손이 너무 차가워.”
원래 이랬나. 웅얼댔더니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정진우의 손바닥이 잘게 떨렸다.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역시 웃고 있었다.
“선배는, 가끔 내 동생 같아.”
동생도 없는 게 동생 타령이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이 눈이 부셔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손가락 끝을 붙잡고 놔 주질 않으니까 정진우가 다시 내 손을 끌어당겨 한 번 꽉 쥐었다. 짜릿했다.
“오늘 두 시간 동안 독일어는 한마디도 못 했네.”
정진우가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농담인가? 아마 농담이었다. 시계를 봤더니 진짜로 딱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알바 갈 때까지 같이 있을까요. 하는 물음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우가 또 웃었다. 정진우는 웃을 때마다 새롭게 잘생겨졌다. 놀라웠다.
분위기가 얼추 풀린 뒤로는 정진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또 작업실에 같이 가자는 약속도 했다. 그러는 동안 떨리고 벅찼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정진우의 나른한 목소리는 항상 내 몸과 정신을 모두 이완시켜 줬다. 이쯤 되면 거의 마약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곗바늘이 다섯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집도 못 들리고 바로 편의점으로 출근해야 할 판이었다. 대충 인사를 하고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 하니 정진우가 나를 따라 신발을 신었다.
“같이 가요.”
“고마운데, 그냥 집에 있어.”
너 피곤하잖아. 확실히 정진우의 안색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잠 잘 못 잤지? 물어보니까 정진우가 손을 뻗어 내 눈썹을 쓱, 문질렀다.
“그렇긴 한데. 나도 작업실 가려고.”
어차피 나갈 거 같이 나가면 좋잖아요. 말하며 큰 손으로 뺨을 감싼다. 기분이 이상했다. 정진우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숨을 흡 멈춘 뒤 깊게 내쉬었다. 찡한 가슴이 나아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정진우는 계속 내 머리카락을 슬쩍 건들고, 귀를 잡아 보고, 뺨을 꼬집었다. 손이 쉬지를 않았다.
“너……. 엄청 자연스럽네.”
“뭐가요?”
“그냥, …다. 안 어색해?”
나는 그래도 좀 어색한데. 약간 자신이 없어지는 기분에 목소리까지 기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정진우가 가볍게 말했다.
“우리 만나보기로 한 거, 아니에요?”
“그건… 맞지.”
“어색해하지 마요.”
나도 노력해볼 테니까. 센서 등이 켜지며 앞선 정진우의 머리카락이 노랗게 빛났다. 보이진 않았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이제 서로 만나보기로 한 거지. 그대로 정진우와 나란히 걸었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차 다니는 소리, 정진우가 간간히 웃는 소리가 합쳐졌다.
비어 있는 채로 흔들거리는 정진우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란 손끝에 입 맞추고 싶었다. 정진우가 좋았다.
편의점 앞에 도착해 정진우와 마주 손을 흔들었다. 차도를 배경으로 걷는 정진우가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한 번 돌아볼 만도 한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성큼성큼 빨리도 걸었다. 한참 보다가 나도 어깨를 폈다. 정진우는 평소에 자세가 굉장히 좋았다. 그게 눈에 보일 때면, 나도 약간 굽어 있던 어깨를 펴고 허리를 펴곤 했다. 자세도 고치고, 열심히 일해서 정진우한테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생각해 놓고도 좀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생각을 잘했었나. 어쨌든 열심히 일해야지. 돈 많이 벌어서 정진우 맛있는 거 사줘야지.
엄청 다짐해놓고 영혼 없이 카운터를 지켰다. 방학 때라 그런가, 더워져서 그런가 평소보다도 손님이 적었다. 바코드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면서 낮에 정진우와 나눴던 대화를 반추했다. 아까 말했던 남자한테 고백 받은 게 처음이 아니라던 말을 떠올렸다. 의미가 뭐였을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정진우와 같이 있으면서도 몇 번 물을까 망설였었다.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조금 더 친해지면. 정진우가 나한테 조금 더 마음을 열면 물어 봐야지.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곧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코드에 이어진 전선을 꼬았다가 풀었다가, 리본도 묶어봤다가 하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딸랑, 종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문 쪽을 확인했다. 익숙한 얼굴이 나를 보고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환하게 웃는다.
“요한 선배! 여기서 알바 했어요?”
예지가 그 짧은 거리를 다다다 달려와 카운터를 손으로 짚었다.
“응. 안녕, 예지야.”
밝은 얼굴이었다. 예지가 볼이 빨간 채로 손부채질을 했다. 그렇게 더운가. 정진우랑 같이 오느라 정신이 없어서 날씨가 어떤지도 몰랐다.
“왜 몰랐지? 저 완전 이 앞에서 자취해요.”
언제, 언제 알바 해요? 자주 와야겠다! 말을 잇는 예지는 아주 신나 보였다.
“자주 들렀다 가. 요즘 사람도 없어서 심심한데.”
“잘됐다. 저 다음 주에 잠깐 집 내려갔다가, 바로 올라올 거거든요. 이 근처에서 알바 구해서. 선배는 계속 여기 있어요? 자주 봐요.”
“집이 어딘데?”
“부산이요.”
뒤이어 사투리 티 하나도 안 나죠? 하고 예지가 뿌듯하게 말했다. 귀여웠다.
“응. 몰랐어.”
“그죠? 어쨌든. 잘됐다. 선배 저번에 저한테 밥 사준다고 해 놓고 안 사준 것도 얻어먹어야지.”
아, 그랬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가 잠시 내가 너무 바빠 보여서 말 걸어볼 틈이 없었다고 투덜댔다.
“미안해. 진짜 내가 바빠 보였어?”
“네. 엄청. 그때 종강파티 때도, 말 좀 하나 싶었는데 가버리고.”
예지가 편의점 안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예지는 같은 말을 해도 좀 더 재미있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계속 예지가 하는 말에 대꾸하고, 웃고 그랬다. 한동안 과자 코너에서 맴돌더니 살 걸 다 골랐는지 음료수 몇 개랑 주전부리 몇 개를 가져 와서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바코드를 다 찍고 말했다.
“이건 내가 사줄게. 미안하니까.”
“진짜요? 저 거절 몰라요.”
“진짜.”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봉지를 받아 들고 머뭇대더니 저 여기서 좀 더 있어도 돼요? 하고 물어온다. 잠깐 CCTV를 쳐다보다가 카운터 앞에는 말고. 했더니 작게 설치되어 있는 바 쪽으로 달려갔다. 예지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같이 웃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져 핸드폰을 꺼냈다.
[알바 두 시에 끝나나?]
정진우였다. 순식간에 입꼬리가 위로 솟는 게 느껴졌다.
[응. 너는?]
[선배 끝날 때쯤 맞춰서 갈까, 하고.]
예지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제대로 대꾸를 못 했다. 안 피곤해? 문자를 치고 있는데 잠깐 하던 말을 멈췄던 예지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여자 친구예요?”
“응?”
“핸드폰 보자마자 엄청 웃네.”
선배 광대 터질 것 같아요. 민망해서 광대를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어서 반밖에 못 가리는 게 애석했다.
“그건 아니고…….”
남자친군데…….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여자 친구 아니면 누구예요? 그새 생긴 줄 알았네.”
“애인… 있어.”
생겼어. 작게 중얼거렸다. 예지가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순식간에 시무룩해져서 저 갈게요, 하고 비척비척 나가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멍하니 예지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다가 정진우에게 보내다 만 메시지가 생각났다.
[안 피곤해?]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온다. 얘는 자판 치는 속도가 왜 이렇게 빨라…….
[괜찮아요. 두 시까지 갈게요.]
핸드폰에 떠 있는 글자들을 두 번 세 번 내려다봤다. 자꾸만 웃어서 광대가 아팠다. 예지의 광대 지적이 떠올라 안 웃으려고 해도 자꾸 입가가 제멋대로 씰룩거렸다. 같이 집 가면서, 이거라도 마시라고 해 볼까.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에너지 드링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여기는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아서 좀 아쉬웠다. 그냥 잠깐 카페 들러서 커피 사줘야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정진우랑 오늘 또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점점 심하게 신이 났다. 마법 같았다. 새벽알바와 교대한 뒤 연락 온 게 없나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맞은편 담벼락에서 정진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란빛 아래 까만 티셔츠를 입은 정진우가 손을 흔들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언제 도착 했어? 들어오지.”
“얼마 안 됐어요. 선배 곧 끝날 것 같아서.”
한 대 피울래요? 담뱃갑을 내미는데 됐다고 거절했다.
“나 담배 끊으려고.”
“왜?”
“원래 끊으려고 했었어. 잘 안 됐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정진우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옆에 서서 바닥을 툭 차며 발장난을 했다. 얇은 티셔츠 너머로 정진우의 체온이 느껴졌다. 어제까지와는 이런 것부터 달랐다. 우리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온도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자꾸만 속에서 뭔가가 울컥거렸다. 마음이 찡해졌다.
“가요.”
정진우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넋 놓고 끌려가다가 문득 엄청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들여다봤다.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났다.
“안 피곤해? 커피 사서 갈까?”
정진우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봤다. 원래도 날렵했던 턱 선이 좀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정진우가 팔을 잡고 있던 제 손을 올려 그대로 내 얼굴 한쪽을 감쌌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손바닥이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커피 마시고 싶어요?”
“너 집에 가서 바로 잘 거야?”
정진우가 잠깐 고민하는 눈을 했다.
“선배랑 같이 가면, 바로 자고.”
무슨 소리야. 얼이 빠져서 쳐다봤더니 정진우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오늘 선배 우리 집 데려가려고 했는데.”
안 돼요? 엄지손가락으로 내 광대 부분을 슬슬 쓸어내린다. 정진우의 손가락이 지나간 부근에 열이 올랐다. 벌써?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정진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고민하다가 파랗게 힘줄이 솟은 정진우의 팔뚝을 잡아 내렸다.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너 오늘 피곤하고, 나도 내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도면 쳐야 하는데, …이건 너무 빠른 것 같아.”
차마 정진우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먼 곳으로 뒀다. 잠시 후 시선 끝에 걸린 정진우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걸렸다.
“선배 진짜…….”
잠깐 말을 멈추더니 내 손을 잡아끈다. 그대로 걸어가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게 아닌가?
“그냥 같이, 내일까지 같이 있자고. 내 노트북에도 캐드는 깔려 있으니까 집 들러서 파일만 옮겨 와요.”
아.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아, 쪽팔려. 고개를 차마 들 수 없었다.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
정진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응큼해.
내가 정말 이렇게 응큼했나. 충격에 빠졌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만 어색한 걸 수도 있었다. 거의 나만 어색한 것 같았다. 옆에서 정진우는 작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아침에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우울해 보였는데 그사이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란히 걸을 때마다 팔이 스쳤다. 이 와중에도 팔이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정진우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불쑥 생각났다. 응큼해. 이런 스킨십이 좋은 것도 좀 그런 건가. 변태 같은 건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진우가 내 팔 부근을 꾹 눌렀다.
“같이 갈 거죠?”
“응?”
“집에. 대답 안 했잖아요.”
“아…….”
으응. 대답했더니 정진우가 내 어깨를 한 번 꽉 끌어안고 놔 줬다. 화끈거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에도 정진우는 스킨십에 스스럼이 없는 편이었다. 지금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문득 좀 겁이 났다. 새벽이라 사람이 얼마 없어 다행이었다.
“진우야 여기 밖인데.”
응?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얼굴에 잠깐 말을 골랐다. 그사이에 정진우는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머리를 슬슬 쓸어내린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겁 내지 마요. 하루도 안 됐는데. 여상하게 말하는 정진우가 또 다른 사람 같았다. 쟤 아까 나한테 나랑 만나는 거 무섭다고 하지 않았나. 태도가 변화무쌍하기 그지없었다. 팔색조 같은 정진우. 영화배우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얼굴이 뭐, 배우보다 잘생겼으니까.
집에 들러 아침에 일어나 작업할 파일을 메일로 옮겨 놓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파일을 옮기는 동안 정진우는 우리 집을 구경했다. 좁아서 별로 볼 것도 없는데 이것저것 만져보고, 물어보고 그랬다. 정진우의 손에서는 나도 미처 모르고 있던 물건들이 툭툭 튀어나왔는데, 냉장고 안에서 유통기한이 한 달 지난 요구르트를 꺼내어 이건 버릴까요? 물어봤을 때는 진짜 쪽팔리기도 했다.
정진우네 도착했을 땐 벌써 세 시가 지나 있었다. 막상 집에 들어오자 어색한 기분에 자리에 서서 꾸물댔더니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나에게 준다. 옷에서는 정진우 냄새가 났다. 나도 모르게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더니 정진우가 하하 웃었다. 오늘 자꾸 쪽팔린 짓만 하는 것 같았지만 정진우 웃는 건 보기가 좋아서 그냥 같이 웃었다.
“저 먼저 씻어도 돼요? 작업실에 있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앉아 있어요, 하고 티셔츠를 휙 벗는데 바로 맨살이 보여서 깜짝 놀랐다. 안 보는 척 시선을 옆에 두고 등허리를 재빨리 훑었다. 하얀 몸에 보기 좋게 근육이 붙어 있었다. 운동하나. 생각하다 옆구리에 이상한 게 보였던 것 같아서 딴 짓하는 척을 하다가 다시 쳐다봤다. 정진우는 막 욕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신했어?”
“아. 네.”
본 적 없나?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봐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고등학교 때 했어요. 하고 정진우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쿵, 방 안을 작게 울리는 문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쟤 알고 보니 양아치였나. 고등학교 때 문신을 하는 게 일반적인가. 학교를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또 물어볼 게 하나 더 생겼다. 정진우랑 같이 있을수록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리스트라도 작성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문신은 아마 한, 196번째 정도 될 거였다.
문신은 꽤 컸다. 자세히 못 봤지만 얇은 선으로 이루어진 무슨 이상한 문양이 갈비뼈 쪽에서 바지선 근처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이건 쟤 나오면 그냥 다시 물어봐야지, 하고 잠깐 천장을 봤던 것 같은데 그대로 잠이 들었었나, 정진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흐릿한 시야에 뽀얀 정진우의 얼굴이 비쳤다. 씻고 나온 정진우는 평소보다 뽀송뽀송해 아주 귀여웠다. 양 볼을 잡고 뽀뽀해 주고 싶었다.
“씻고 자요. 선배도 엄청 피곤했구나.”
“응. 몰랐는데 졸리네, 좀.”
씻으면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요즘은 보일러를 안 켜서 항상 차가운 물로 씻었는데, 오랜만에 따뜻한 물을 맞으니까 나른하고 좋았다. 노곤해진 몸으로 나오니 정진우가 침대에 누워서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 코피가 나올 뻔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침대에 누워 나를 보는 정진우의 표정이 너무 섹시해서.
“불 끄고 와요. 자자.”
홀린 듯 불을 끄고 정진우 옆에 누웠다. 막상 누우니 눈이 말똥말똥했다. 정신은 이미 자고 있는 것 같은데 가슴이 두근거려서 눈이 안 감겼다. 한참을 뒤척거렸더니 정진우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잠 안 와요?”
“그러네. 너 피곤하지.”
조금. 하고 나를 슬쩍 껴안는다.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굳어서 꼼짝하지 못하니까 정진우가 내 목덜미에 대고 푸스스 웃었다. 애기 같애. 나보다 1년 애가 웃기는 소리를 했지만 입을 떼면 이상한 소리만 나올 것 같아서 반박하지 못했다. 잠깐 뭐라고 중얼대던 정진우의 말소리가 잦아졌다. 곧이어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요즘 나는 진짜로 덩칫값을 못 했다. 목 근처에서 들리는 정진우의 숨소리에 갑자기 또 마음이 찡해지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정진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에 팔을 둘렀다. 슬쩍 새까맣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건드려 봤다. 얇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뒤척대던 정진우가 내 쪽으로 더욱 깊이 달라붙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정진우의 냄새.
* * *
우리는 둘이 함께 7월을 보냈다. 2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집에 들어간 게 채 다섯 번이 안 됐다. 정진우의 집은 개미지옥이었다. 항상 시원했고, 쾌적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오신다고 했다. 아주머니 오실 때는 바닥에 널린 것들 다 치우고 나가야 해요. 정진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욕실에서는 항상 따뜻한 물이 나왔다. 무엇보다 자기 전 정진우와 입을 맞추고, 아침에 눈을 떠 눈앞에 놓인 정진우의 자는 얼굴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행복했다.
엄마랑 둘이 있었을 땐 웃는 엄마 얼굴만 봐도 좋고 그랬다. 엄마는 자주 웃지 않았다. 가끔 웃으면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는데, 그걸 볼 때면 가슴이 항상 벅차올랐다. 그래서 그게 행복인가, 했다. 나는 행복이 정확히 어떤 건지 열일곱 살쯤 정의내릴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엔 그냥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도 있고, 날 생각해주는 사람도 있고. 조금씩 생겨난 소중한 사람들이 엄마의 자리를 대신했다. 가끔 외로움이 사무쳐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이정도면 됐지. 나름대로 만족했던 것 같다. 행복했나, 하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요즘 정진우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별로 행복하지 못했구나. 그냥 살고 있었구나.
그사이 한국에 도착한 조영재에게서 연락이 왔다. 희진이와 함께 여행하면서 돈이 모자라 엄마 돈을 좀 꿨다고, 엄마한테 돈 갚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엄마가 운영하시는 가게에서 2주간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도 16일엔 무조건 일 빼고 감. 일곱 시에 포차에서 보자. 한 뒤 바로 일 뺐지?! 하는 다급한 메시지에 잠깐 웃었다. 하여튼 귀엽기는.
하루하루가 믿을 수 없도록 평온했다. 보통 정진우는 내 스케줄에 맞춰 본인도 작업실을 나갔다. 오늘도 다섯 시쯤부터 함께 나갈 준비를 했다. 두 시간 동안 독일어로 떠들고 나가려니 좀 힘에 부쳤지만 체력왕 정진우가 쌩쌩해 보여서 나도 괜찮은 척을 했다.
“저 오늘은 좀 늦어요. 먼저 들어와서 자고 있어요.”
정진우가 잠깐 핸드폰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새 살이 조금 올라 통통해진 볼이 뽈록 튀어나와 있는 게 귀여웠다.
“언제쯤 오는데?”
“음. 모르겠네. 동 트고 올 수도 있고.”
어쩌면 내 생일 때까지 얼굴 못 보고 지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금 서운했다.
“나 내일 일찍 나가야 하는데. 회사 들러서 잠깐 다른 프로젝트 관련 파일도 받고, 도면 관련해서 얘기 좀 해야 해가지고.”
“언제 와요?”
“아마 점심 먹고 올 것 같아. 저녁엔 영재랑 수현이 만나기로 했고.”
아.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선배들 만나고.”
“응.”
“웬만하면 두 시 전엔 들어 왔으면 좋겠는데.”
“그때 집에 있어?”
“응.”
알았어. 대답했더니 내 볼을 쥐고 입을 쪽 맞춘다. 씩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새벽에 만나서 얘기 좀 하다가, 자고 일어나서 같이 엄마 보러 가자고 해 볼까.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매년 생일엔 엄마를 보러 가곤 했었다. 좀 더 자주 가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엄마 기일이나, 내 생일, 엄마 생일 때. 그나마 정기적으로 가는 게 일 년에 3일이었다. 이번엔 정진우한테 같이 가자고 해 봐야지. 처음으로 엄마를 모르는 누군가와 엄마를 보러 간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떨렸다.
동틀 때쯤 들어온다던 정진우는 할 일이 많았는지 어땠는지 내가 나갈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를 한 번 걸어 봤다. 안 받아서 작업실에서 자나, 싶었다. 애들 만나러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잠깐 봤으면 좋겠는데. 하루 제대로 안 봤다고 보고 싶었다. 요즘 떨어져 본 적이 얼마 없어서 그런가.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을 것 같고, 그랬다. 내일 아침엔 뭐 맛있는 것 좀 같이 해 먹을까. 이따 장 좀 봐 놓을까. 하루하루 팔불출력을 경신하는 것 같아서 스스로가 대단했다.
회사에서 간단한 미팅을 마친 뒤, 점심 함께하자는 걸 거절하고 서둘러서 집으로 들어왔다. 지금쯤이면 있을 줄 알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진짜 작업실에서 자나. 내일 아침에 미역국도 끓이고, 고기라도 같이 해 먹으려고 이것저것 장을 봐둔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조영재는 아주 새카맣게 타 있었다. 커다란 근육질의 몸이 새카맣기까지 하니까 좀 위협적이었다. 그 옆에 하얗고 마른 김수현이 있으니까 더 그렇게 보였다.
“너네 무슨 학부형이랑 학생 같다.”
“오자마자 존나 이쁜 소리 하네?”
조영재가 들고 있던 집게로 내가 앉은 쪽을 쿵 쳤다. 여행 다녀오더니 더 장사가 된 느낌이었다. 고기를 먹으며 조영재의 여행 이야기를 들었다. 김수현이 정말 배 아파했다. 3주 정도 여행 다녀오면 다 싸우고 헤어진다던데, 왜 너네는 아니냐고 했다가 기어이 한 대 맞고 자작하는 김수현이 웃겼다.
“너 그렇게 마시다가 집에 어떻게 가려고.”
“너네 집 가면 되지. 재워죵.”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그냥… 약속 있어.”
무슨 약속? 새벽에?! 절규하는 김수현을 무시하고 혼자 잔을 짠, 부딪쳤다. 그럼 너네 집 갈래, 영재야. 하는 김수현을 조영재가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똑바로 안 걸으면 바로 버림.”
“아, 당연하지. 내가 언제 정신 똑바로 안 차린 적 있었냐?”
호언장담을 하더니 언제나 그랬듯 열두 시도 되지 않아 김수현의 고개가 꺾였다. 얼굴이 불긋불긋한 게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뭐라고 중얼거린다. 조영재가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열두 시가 지나고, 핸드폰이 계속해서 삑삑댔다.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들이었다. 조영재가 계속해서 울리는 내 핸드폰을 보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생일 축하한다, 요한아.”
선물은 없고. 내가 이거 산다. 하는 조영재의 얼굴은 1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1년 전에도, 아무한테도 말 안 했던 생일을 혼자 알고 와서는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 그땐 생일을 따로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나, 아직도 궁금했지만 조영재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같이 새벽까지 술 마시고, 잘 들어가라고 헤어졌을 뿐이었다. 가끔 내 인생에 이런 애들이 나타나 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고맙다. 잘 먹을게.”
“더 먹을 거냐?”
“당연하지.”
진짜로 삼겹살 2인분을 더 시켰더니 욕을 들었다. 어차피 자기가 시킬 거였으면서. 그냥 웃었다. 그대로 말없이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한참 테이블만 보던 조영재가 잔에 남은 소주를 쭉 들이켰다.
“너 물어보고 싶은 거 있다며.”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궁금하더니 정진우와의 사이가 좋아진 뒤로 생각이 안 났다. 막상 조영재가 말을 꺼내니까 다시 궁금해져 젓가락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얘한테 들었는데.”
“뭐.”
“네가, 진우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했다고.”
“…….”
아오, 입 졸라 싼 새끼. 침묵했던 조영재가 술에 떡이 돼 늘어져 있는 김수현을 한 번 째려봤다.
“별로 들어봤자 좋을 거 없는데. 너 정진우랑… 친하잖아.”
“말해 봐. 안 좋은 얘기야?”
“좋은 얘기는 아니지.”
감질나게 자꾸만 뜸을 들였다. 불판 위에서 익고 있는 고기를 한 점 찍어 먹으며 재촉했다. 뭔데.
“아오 씨. 너 알지? 나 남 얘기하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그치.”
“내가 근데, 이걸 뭐라고 말해야 되냐. 아, 시발 김수현. 너무 충격적이라 그때쯤 자주 같이 있어서 그냥 말한 거였는데 그걸 말하고 다녀.”
“뭔데 진짜.”
조영재가 고기 두 점을 한 번에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고 두 병을 추가로 시켰다.
“우리 형이 뭐 이것저것 하잖아.”
“응. 근데?”
조영재의 형은 잡지에 필요한 소품 코디하는 일을 주로 했다. 조영재랑 같이 가끔 아르바이트도 해 봤는데, 재미있었다. 그 외에도 형은 인맥이 좋아 사진도 찍고, 공연도 하고, 이것저것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형 얘기를 꺼냈던 조영재가 잠깐 망설이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형 아는 사진작가가 남자 모델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도 같이 생각하다 정진우 얘기를 했어. 뭐 이런저런 사람들 사진 봤는데 정진우만 한 애들이 없더라고. 잘생기긴 존나 잘생겼잖아. 형이 처음엔 그냥 듣더라? 그래서 걔가 뭐 개인 홈페이지 같은 건 안 하고, 아무것도 알려줄 게 없어서 그냥 주워들었던 얘기들 대충 해주고, 저번에 1학년 애들끼리 같이 찍은 단체사진 찾아서 얼굴을 보여줬어.”
정진우가 얼굴 하나는 끝장이지. 다른 것도 빠지는 건 없지만. 정진우 칭찬에 혼자 실실댔다. 조영재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형이 얘를 안다는 거야. 이 새끼 말한 거냐고, 이 새끼 쓰레기라고 갑자기 욕을 하대. 그래가지고 난 잘 모르지만 내 친구랑 친한 것 같은데, 왜 그러냐고 그랬지.”
쓰레기 어쩌고 하는 말에 잠깐 정신이 나갔다 다시 돌아왔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사정이 어떻게 됐든 다짜고짜 쓰레기라고 욕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차마 티는 못 내고 소주만 마셨다. 조영재는 내 안색을 잠시 살피는가 싶더니, 자기도 소주를 쭉 들이켰다.
“괜찮냐?”
“응. 말해 봐.”
“그러니까… 그 새끼, 아니 정진우가 한 2년쯤 전에 형이 아는 소품 디자이너 작업실에서 일을 했는데, 거기 어시 형이랑 뭐, 이상한 짓을 했나봐. 작업실에서.”
“…이상한 짓?”
“아, 뭐 있잖아. 남자끼리 붙어먹다 걸렸대. 난 그 새끼 정상인줄 알았는데 호몬가. 하여간 뭐 드러운 짓을 했는데, 그걸 걔 여자 친구가 본 거야. 거기서 또 여자 친구도 만들었다더라. 하여간 잘생기고 볼 일인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잘 안 됐다. 뭔가 얘기하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영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조영재의 입을 막고 싶었다. 손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여간 그래서 그 여자애가 그거 보고 돌아가지고 거기 있던 각재랑 톱 같은 거 막 들고 난리 치고, 야밤에 경찰서에 신고 들어오고, 형도 자다가 경찰서에서 연락 와서 불려갔는데 정진우 엄마는, 야. 그 아줌마도 치맛바람 장난 아닌 것 같더라. 어쨌든 정진우 엄마대로 난리고, 정진우는 피 묻은 옷 입고 앉아 있고, 같이 붙어먹은 어시 형은 좀 많이 다쳤나봐. 전치 2주 나왔었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아니, 그만 해. 입 안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정진우는 옆구리 긁히고, 그 형은 배에 팔뚝만 한 상처 나고 삼자대면을 했는데, 그 형이랑 여자애랑 말 맞춰보니까 정황이 정진우 양다리였고, 뭐 그랬다고.”
조영재가 내 안색을 계속해서 살폈다.
“내가 너 충격 받을 것 같아서 진짜 참았는데, 그 정도면 쓰레기 맞지 않냐?”
“…….”
“뭐 정진우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알 수는 없지만 그 새끼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말 안 했겠지. 그리고 더럽게 시발, 남자끼리. 인기도 많은 새끼가. 이해가 안 되네, 남자 똥구멍이 그렇게 좋은가.”
“그만해.”
조영재가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으면 진작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조영재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말 나온 김에 내가 걔랑 너랑 붙어 다녀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냐? 네가 걔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참았는데, 어차피 다음 학기에도 그렇게 붙어 다녔으면 얘기할라 그랬어.”
“그만, 해. 영재야.”
“병신아 정신 차려. 너 걔랑 같이 다니면 진짜 더러운 꼴 볼 수도,”
“아니야.”
“아 이 병신이 정신을 못 차렸네. 아니, 그래. 누가 아예 연 끊으래? 붙어 다니는 건 좀 자제하란 말이야. 지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게이라니 시발. 존나 더럽네. 걔가 너한테도 들러붙으면 어쩌려고,”
“내가 먼저 좋아했어.”
뭐? 조영재의 표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귓가가 멍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만 선명했다.
조영재가 제 귀를 한 번 툭 건드리고, 잠깐 쓰러져 잠들어 있는 김수현을 봤다가, 나를 보며 웃었다.
“너 뭐라고 했냐?”
“…….”
“내가 잘못 들었지?”
조영재가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하고 외친 뒤 다시 한 번 웃었다.
“내가 취했나. 병신 같은 얘기를 해서 그런가. 한 병만 더 마시고,”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내가 먼저 좋아해서, 진우한테 내가 먼저 들러붙었어.”
“…뭐?”
“그래서, 네 말도 못 믿겠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조영재가 들고 있던 소주잔을 나에게 부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축축해졌다. 턱 끝에서 소주가 뚝, 떨어졌다. 앞섶이 조금 젖어드는 게 보였다.
“다시 말해 봐.”
“…내가 정진우를 좋아해서.”
“다시 말해.”
“분위기 망쳐서 미안하다.”
조영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번개같이 일어난 조영재가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린 건 순간이었다. 한쪽 얼굴이 얼얼하다가 곧이어 뜨거워졌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주먹이 무지 아팠다. 입가가 쓰라린 게 입술이 터진 것 같았다. 혀로 입술을 한 번 쓸어보았다. 술맛과 쇠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가게에서 싸움질하지 말라는 아줌마의 말과, 수군거리는 다른 테이블의 소음이 번갈아 내 귓전을 때렸다. 잠시 일어서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던 조영재가 소란에 눈을 뜨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김수현을 일으켰다. 계산이요. 조영재가 계산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가게를 나가버리는 조영재의 발을 눈으로 쫓았다.
탁, 거칠게 가게 문이 닫히고, 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주머니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 뒤 집으로 걸었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한 번 봤다. 생일 축하 문자들 사이에 정진우의 메시지가 보였다. 언제 와요? 재밌어요? 멍했다. 그냥 핸드폰만 내려다보면서 걸었다. 빨간 불인 줄도 모르고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했다. 죄송합니다. 이리저리 욕을 하는 운전자에게 계속해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영부영 사과를 중얼거리며 정진우네 집에 도착해 현관 비밀번호를 느리게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도 못 하고 계단을 걸어 올랐다. 며칠 계단 오를 일이 없었다고 그거 올라가는데 숨이 찼다. 집에 도착해 보니 정진우가 문을 열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웃으면서 말하던 정진우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터진 상처를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왜 이래요, 얼굴.”
“몰라.”
“뭘 몰라. 싸웠어요?”
“그런가.”
“일단 들어와요.”
정진우의 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중간에 못 보던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정진우가 눈썹을 살짝 내리며 웃었다.
“생일 선물인데. 선배 기분이 영 별로네.”
작업실에 갈 때마다 정진우 자리 쪽에 세워져 있던 캔버스였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더니 내 선물이었다. 아스팔트에 노랗게 꽃이 피어 있었다. 색감이 예뻤다.
정진우가 내 상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선배 생각하면서 그렸어.
고개를 돌려 옆에 자리한 정진우를 잠깐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조영재의 말들이 되풀이됐다. 내가 이상한 건가, 정진우의 과거가 원망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정진우가 많이 상처받았을 것 같아 걱정이 됐고, 순간의 충동에 의해 조영재에게 말해버린 내 경솔함이 후회스러웠을 뿐이었다. 정진우에게 사과해야 하나. 내가 멋대로 말해버렸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대로 정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괜찮아요? 하는 정진우에게 기대서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속삭였다.
“우리, 할까.”
정진우의 입술이 부딪혔다. 터진 상처가 계속해서 마음을 건드렸다. 아팠다.
나를 미는 정진우의 힘에 밀려서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발뒤꿈치에 소파가 걸렸다. 그대로 털썩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정진우가 입술을 놔주지 않으며 나를 따라 상체를 숙였다. 목 깊은 곳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던 정진우의 입술이 떨어지고, 어둡게 빛나는 정진우의 눈동자가 시선에 고였다. 정진우가 고개를 기울여 상처 난 입술을 핥았다.
“어디서, 이렇게 다치고 와서.”
정진우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곧바로 바지 위에 손을 얹고 성기를 거세게 쥔다. 손아귀의 힘에 놀라 아픈 걸 느낄 새도 없이 비명 같은 신음을 질렀다. 이 와중에 정진우의 손이 닿았던 성기가 조금씩 힘을 받는 것이 느껴져 기분이 울적해졌다. 내가 너무 우스웠다.
“누가 이랬어요?”
입을 계속해서 맞추며 물어보는데, 대답할 틈도 안 줬다. 잠깐 어깨를 밀어내려고 손을 뻗자 바로 잡아 깍지를 낀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정진우까지 나를 안 도와줬다. 찌푸린 미간을 정진우가 슬쩍 핥았다.
“먼저 하자며. 왜 인상 써요.”
설탕에 절인 것 같은 목소리가 음침하게 방안을 울렸다. 정진우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손 안에서 산뜻한 머리칼이 바스락거렸다.
“내가 너무, 우울해서.”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목소리가 듣기 싫게 이리저리 갈라져 나왔다. 내 똑바르지 못한 태도, 정진우에게 진실을 추궁하고 싶은 좁은 마음, 급한 성미, 울컥 하고 참을 줄 모르는 것, 거친 목소리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었다.
“너랑 뭐라도 하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
“웃기지. 뭐 경험도 없는 주제에, 널 보니까 그런 생각이 났어.”
정진우가 내 귓가를 매만졌다. 눈이 뜨거웠다. 평생 흘릴 눈물을 이번 해에 다 흘리나 싶을 정도로 눈물이 자주 나왔다. 눈물 하나 참지도 못했다.
“나 진짜 응큼한가봐…….”
양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제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방 안이 캄캄했다. 시계소리, 내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 정진우의 약간 거친 숨소리 등이 들렸다. 손등 위로 차가운 손바닥이 닿았다. 두 겹으로 덮인 손바닥 아래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한가득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얼굴이 축축했다. 정진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 손을 잡아서 떼어 내려고 하기에 힘을 주고 버텼다.
“힘 좀 빼 봐요.”
“추할 텐데…….”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나왔다.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두어 번 울려 봤다. 울어가지고 잘게 떨리고, 갈라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끝까지 힘을 주고 버텼더니 정진우가 내 손을 놔 줬다. 이건 또 이것대로 좀 서운했다. 대체 내 마음을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 원래 이렇게 복잡한가. 엉킨 실처럼 좀처럼 매듭을 풀 수 없었다. 한숨만 푹푹 쉬고 있으니 탁, 유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물 좀 마셔요.”
“…….”
“창피해하지 말고.”
주춤주춤 얼굴을 가렸던 손을 뗐다. 정진우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정진우의 미소를 보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바보같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게 들어가니 뜨겁게 달아올랐던 속이 진정되는 와중에 입가가 따끔거렸다. 약간 인상을 쓰자 정진우가 혀를 찼다.
“연고 발라줄게요, 잠깐만.”
서랍장을 뒤적거리는 정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어볼까. 사과할까.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 말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남자답게 사과하고 물어보자. 입을 열려는데 정진우가 연고를 찾아 보여주며 나를 향해 웃었다. 순식간에 입에 본드가 붙은 것 같았다.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희고 굳은살이 박인 정진우의 손이 내 입술을 훑고, 볼을 토닥거렸다.
“좀 진정했어요?”
“…응.”
“내가 뭐 하다 왔냐고 물어보면, 말해줄 거예요?”
“…….”
“대답.”
“…아니.”
정진우가 나한테 다 맞다고 하면. 내가 조영재에게 섣부르게 말해서 실망했다고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떡하지.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전히 정진우의 모든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진우가 정말 두 사람을 손에 쥐고 저울질을 했다고 하면.
조영재의 말을 전부 믿진 않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아는 정진우는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정진우는 절대, 우리 아빠 같은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남한테 상처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 만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진우를 원망할 리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정진우에게 그것들을 말하려 하니 갑자기 모든 게 자신이 없어졌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정진우의 실수였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내 잘못에 관해서도. 무엇을 말하건 그 끝엔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한 달도 안 되는 동안 나는 정진우와 함께 있으며 행복이 뭔지 다시 배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 모든 것을 바로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나중에.”
“…….”
“나중에 말할 수 있을 때.”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답이 없는 정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언제나 그랬듯. 역시 물어볼 순 없었다. 정진우와 만나며 미뤄두는 게 점점 많아졌다. 어디까지 선을 두고 물어봐야 하나. 어디까지 내가 정진우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모든 게 의문이었다. 정진우와 연애를 시작하면 막연히 다 좋을 줄 알았다. 실제로 지금까진 미치도록 좋았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기나. 나는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는 자격이 없나.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눈앞에서 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정진우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선배 땅 파고 있는 거 다 보인다. 더 안 물어볼게.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게.”
소파에 파묻혀 있는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정진우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통통한 입술이 이마에 짙게 닿았다. 입술을 떼고 나를 보며 웃는 정진우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보았다.
“응, 정신 차렸어. 고마워.”
정진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로 끌어안은 채로 깊은 잠에 들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일어나 보니 정진우는 간데없고 집에는 나 혼자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숙면한 내가 또 웃겼다. 핸드폰을 들어 보니 충전이 안 되어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충전기를 찾아서 꽂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림을 한 번 쓸어 보았다. 언젠가 정진우와 과외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며 돌바닥에 핀 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꽃이 안쓰럽고 기특해서 한참을 봤는데, 정진우가 그때를 기억했나. 아닐 확률이 컸지만, 마음은 멋대로 그 꽃에 나를 대입했다. 전에는 정진우가 나를 안쓰럽게 보는 게 싫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조금 더 불쌍하고, 조금 더 안쓰럽게 여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진우가 나와 헤어지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조금만, 조금만 더 망설일 수 있도록.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이었다.
그림을 이리저리 보다가 정진우가 구석에 새겨 놓은 사인을 발견했다. 영어로 간결하게 자기 성을 써 놓았다. 정진우가 해 놓아서 그런가, 사인이 멋있었다. 이건 이따 잠깐 나가는 길에 우리 집에 가져다 놔야지. 그림을 한구석에 모셔 놓고 불이 들어온 핸드폰을 들어 보았다. 몇 개의 부재중 통화와, 생일축하 메시지, 김수현이 보낸 메시지가 한 번에 떴다.
[너네 어제 무슨 일 있었음? 싸웠음?]
[왜 그래. 조영재는 뭔 말만 하면 닥치라고 하는데 넌 전화도 안 되고. 나 답답해 뒤져!!!]
[왜 너넨 생일에 싸우고 지랄이야!! ㅈㅇ자ㅣㄹㄹ]
[이거 보면 바로 전화]
조영재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잠깐 머뭇거리다 김수현에게 전화를 했다. 몇 번 신호음이 가지도 않았는데 김수현이 전화를 받고 소리를 빽 질렀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나 배터리 나가 있었어. 미안.”
-뭐야 진짜. 조영재는 욕만 미친 듯이 하고.
“…그렇구나.”
-아 몰라. 시발 나 일어나자마자 쫓겨났잖아. 꺼지라고 발로 차는데 조영재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서 몇 마디 말 좀 붙여보다 그냥 나옴. 너네 진짜 싸웠냐? 왜 싸움? 조영재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 싸울 애가 아닌데.
우리가 싸운 건가. 이게 싸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정진우와의 관계를 말한 뒤로 우리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모르겠어.”
-뭐? 뭘 몰라.
“우리가 싸운 건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렇지. 맞는 말이라서 가만히 있었더니 김수현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 내 주변에 한숨 쉬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해서. 그게 조금 웃겨서 픽 웃었더니 김수현이 열 받게 웃지 말라고 욕을 했다.
-어쨌든 오늘은 말고, 내일쯤 조영재한테 전화해 봐.
“…응.”
-그 새끼 자존심 세서 네가 먼저 안 하면 개강 때까지 너랑 말도 안 섞을 놈이야. 알지?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로 잘 풀어라.
얌전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김수현이 나와 조영재를 한 번에 욕하더니 전화를 뚝, 끊었다. 일 분도 안 되어 문자가 왔다. 개강 때까지 화해 안 하면 나하고도 함 싸워보자. 하하. 소리 내어 웃어 보았다. 답장은 따로 하지 않았다. 화해할 문제인가 이게. 싸웠는지도 모르겠고, 화해가 필요한 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영재와 어떻게든 이야기는 해야 했다. 정진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영재가 여기저기 말 전하고 다니는 애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부는 해야 했다.
침대에 앉아 부재중 전화를 남겼던 아줌마들에게 전화도 드리고, 생일축하 메시지도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진우가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일어났네요?”
“어디 다녀왔어?”
“이거 사러. 생일축하 해볼까? 둘이.”
아, 나 오늘 생일이지. 오늘 생일이 맞지. 아줌마들과 생일 얘기를 하면서도 몰랐다. 늦기 전에 엄마한테 가봐야 하는데. 씻지도 못하고 정진우에게 이끌려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생크림이 먹음직스럽게 발라져 있었다. 정진우가 노래를 불러주고, 초를 끄라고 성화를 해서 초를 후 불었다. 핸드폰을 들고 내 얼뜬 모습을 찍으며 정진우가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이따 엄마한테 갈 건데.”
“선배 어머니? 어딘데?”
“안 멀어. 알바 때문에 빨리 와야 돼서 서둘러야 할 것 같긴 한데.”
정진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을 담아 눈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까만 눈동자엔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진우의 눈동자에 어린 내가 참 볼품없었다.
“같이 갈래?”
정진우가 좀 부어 있을 내 눈가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고 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정말, 정진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함께 아침을 먹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놀라서 그대로 자빠질 뻔했다. 눈은 퉁퉁 붓고, 광대엔 노랗게 멍이 들어 있고, 입술은 다 터져서 한쪽만 부어 있었다. 정진우가 계속 이런 얼굴을 보고 있었다니. 천년의 사랑도 식을 얼굴이었다. 내 얼굴을 계속 보고 대화하면서 티를 안 낸 게 용했다. 대단한 놈. 정진우의 눈은 나를 계속해서 담으면서도 일말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사진까지 찍었다. 사진을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얘는 진짜, 배려심이 넘치는 건지 무심한 건지 분간이 잘 안 될 지경이었다.
대충 샤워를 마친 뒤 정진우에게 모자를 빌려 썼다. 맨 얼굴로는 고개를 못 들고 다닐 것 같아서였다. 모자를 빌리며 너 이 얼굴 어떻게 계속 보고 있었어. 하니까 정진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왜, 귀여운데? 했다. 순간 내가 뜨악한 얼굴을 했던 것 같다. 정진우가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덧붙여서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애매하게 어어, 하고 말았다. 상처 난 얼굴이 귀엽다고. 변태인가.
우리 집에 잠깐 들러 그림을 놓고 경기도행 버스를 탔다. 자꾸만 택시 타고 가자는 정진우를 끌고 겨우겨우 버스정류장까지 왔다. 왜, 내 돈 쓴다는데 왜 그래. 정진우의 입이 쭉 나와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 버스도 경기 버스라 편해. 거기 좀 언덕이니까, 이따가 힘들면 그때 택시 타자. 정진우의 머리를 잡고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진우가 결국엔 웃음을 터뜨리며 알았어요. 했다.
납골당은 산 중턱에 있었다. 최대한 저렴한 곳을 얻으려다 보니 경기도에서도 굉장히 외곽에 위치한 곳이 되었지만 주변 풍경이 예뻐서 좋았다. 지금도 푸릇푸릇해서 좋은데, 단풍이 들면 아주 절경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년을 바쁘게 살았으니까, 이렇게 한적한 데에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진우와 함께 엄마가 평소에 좋아하던 꽃을 한 다발 사서 올라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 이야기였다. 정진우는 거의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가끔 이야기가 끊길 때면, 예고 없이 조영재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더러운 게이. 그럴 때는 웃었다. 정진우는 내 감정변화에 좀 예민한 편이었다. 이렇게 웃다 보니 정진우가 왜 곤란할 때 미소로 무마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웃음만큼 마음을 숨기기 편한 게 없었다.
미로 같은 납골당 안에서 엄마가 자리한 곳을 찾았다. 엄마는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이 사진은 내가 갖고 있는 엄마의 사진 중 유일하게 웃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정진우가 엄마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가 엄청 미인이시네.”
“그치.”
엄마가 미인인 건 사실이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언제나 예뻤다. 독일 가기 전 아빠랑 나랑 셋이 함께 있을 때는 특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너무 환해서 그랬나, 빛이 사라지고 까맣게 재만 남은 건 순간이었다. 그게 아직까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문득, 정진우의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는 조영재의 목소리가 기습적으로 귓가를 울렸다. 숨을 참고, 찰거머리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는 말들을 털어냈다. 한참 엄마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엄마 앞에 있으면 항상 얘기가 길어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정진우가 가만히 나를 기다려 줘서 고마웠다.
“이제 됐다, 가자.”
안녕히 계세요. 나직하게 인사를 하는 정진우의 작은 머리가 사랑스러웠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손을 붙잡고 손가락에 입을 쪽 맞춘 뒤 씩 웃는다. 전부터 조금씩 느꼈는데 애가 아주 대담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조금 걸었다.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정진우랑 손장난도 치고, 같이 음료수도 사서 나눠 먹었다. 입 안 대고 마시려다 줄줄 흘리는 걸 가지고 정진우가 엄청 놀렸다. 약간 울컥 했지만 참았다. 이럴 땐 눈치를 개나 준 정진우가 계속 놀려서 결국 등을 한 대 퍽 쳤다. 맞아 놓고 뭐가 좋은지 실실 웃어서 나도 그냥 웃어버렸다.
집에 도착해 작업실 가는 정진우를 배웅하고 조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영재는 받지 않았다. 이거 보면 연락 줘. 메시지를 남겨놓았지만 개강 때까지 조영재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정진우의 집에서 머물던 나는 개강 전날이 되어서야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왔다. 개강하고 나면 매일 정진우네 집에 있긴 힘들 거였다. 서로 스케줄도 많이 다르고, 이번엔 듣는 과목도 1, 2학년 공통 전공 하나밖에 안 겹쳤다. 조금 서운했지만 언제까지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집 청소를 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정진우는 오늘 작업실에서 새벽에 온다고 했다. 하던 작품이 잘 안 풀리는지 일주일간 엄청 바빴다. 나한테 몇 번 보여주기도 했는데, 봐도 잘 모르겠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둘이 붙잡고 아무리 씨름을 해도 별다른 답이 안 나왔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많이 바쁜지 답장은 없었다.
메시지를 읽은 조영재와의 대화창과 아직 마지막 대화를 읽지 않은 정진우의 대화창을 번갈아 눌러 보았다. 이 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던 말들이 다시 생각났다. 어찌 됐든 내일은 조영재를 본다. 씻고 누워 조영재와 만나서 할 말을 속으로 정리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진운가. 생각하다 어느 순간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을 설치는 바람에 수업 첫날부터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강의실은 아직 소란스러웠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수업 시작 2분 전이었다. 길게 숨을 내뱉고 문을 열었다. 같이 듣는 사람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얼굴을 발견했다.
“요한 선배!”
예지였다. 손을 아주 당차게 흔들고 있었다.
“안녕. 이 수업 들어?”
“네. 선배도요?”
응. 고개를 끄덕였더니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예지는 항상 밝고 활기찼다. 신기할 정도였다.
“이거 듣는 사람 아무도 없어가지고 바꿀까, 했는데! 이거 조별 과제도 있대요. 우리 같이 들어요.”
“그래. 나도 너 있어서 다행이야.”
교수님이 조금 늦었다.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네 시 반에 정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저 이제 집 왔어요. 잘 자고 이따 봐요. 답장을 보낼까 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예지가 내 팔을 툭툭 쳤다.
“애인이에요?”
“…아, 응.”
완전 다 티 난다. 하고 예지가 툴툴댔다. 선배 어디서 비밀 연애는 못 하겠어요. 뜨끔했다. 정진우와 사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바로 조영재한테 말해버린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티 나?”
“네. 완전.”
아 그래……. 얼굴을 한 번 쓸었더니 예지가 내 팔을 잡으면서 얘기했다. 말할 때 사람을 건드리는 게 습관인 것 같았다.
“여자 친구 예뻐요?”
“음. 응.”
“헐. 망설이지도 않고 얘기하네. 진짜 그렇게 예뻐요?”
정진우가 예쁘긴 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가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감정변화가 어쩜 저렇게 다양한지 볼수록 신기했다. 교수님이 도착해 앞으로 강의 내용을 설명하는 동안 공책을 피고 그림 같은 것을 끄적이던 예지가 작게 속삭였다.
“사진 있어요?”
“누구?”
“여자 친구.”
있지만 보여줄 수 없었다. 아니. 하니까 다시 공책에 집중한다. 입이 조금 나온 옆모습이 귀여웠다. 한참 강의 계획을 설명하시던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이르게 마쳤다. 시간을 확인하고 천천히 공책과 필통을 정리하는 예지를 보다가 전에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밥 사준다고 한 지 반년이 지난 것 같아 좀 미안해졌다.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사 줄게.”
“진짜요? 저 사양 안 해요.”
“진짜야.”
언제 시무룩해졌냐는 듯 순식간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예지를 잠깐 얼이 빠진 채로 쳐다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예지가 왜 웃어용,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하고 함께 강의실을 나왔다. 학식 말고 밖으로 나갈까 했지만 예지가 그냥 학식 가서 사달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각자 먹을 걸 받아들고 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정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디에요? 수업 중? 저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서 학교 왔어요.]
얼마 자지도 못하고 나온 것 같아 걱정이 됐다. 나 학생식당.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학생식당 정문가에서 정진우의 얼굴이 보였다.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걸 멍하니 봤다. 배경이 학교라 그런가, 갑자기 엄청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학교에서 보는 정진우는 집에서, 집 근처에서 보던 정진우와는 또 달랐다.
“어? 오랜만이야 진우야.”
예지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정진우를 발견했다. 정진우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피곤한가.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쓸어주려 올렸던 손을 깨닫고 어색하게 내렸다.
“밥 먹었어?”
“아직. 오랜만이다, 예지야.”
“그러게. 잘 지냈어? 동기 모임 하는 덴 오지도 않고.”
“미안, 좀 바빴어. 재밌었어?”
밥 안 먹었음 시켜서 오지. 배고픈데. 예지 앞에서 어느 정도로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동기 모임이 있었구나. 일 학년 애들은 거의 모르고, 정진우와도 학교 얘기는 잘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 정현이랑 취해서 난리 나고 진짜 재밌었어. 우리 새벽까지 달렸는데,”
“그래……. 둘이 같은 수업이야?”
의자에 걸터앉아 동기모임 이야기를 하는 예지의 말을 듣던 정진우가 불쑥 나에게 물어봤다. 왜 갑자기 반말이야, 예지도 있는데. 당황스러웠다.
“뭐?”
“아. 같은 수업이에요?”
얘 뭐지. 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더니 왜? 한다. 벙쪄서 예지와 시선을 잠시 교환했다. 예지도 좀 당황한 것 같았다. 정진우가 학교에서 이런 애가 아니었을 텐데.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정진우를 살폈다. 나는 시간을 조금씩 공유하면서 정진우가 마냥 친절하고 다정한 애는 아니었다는 걸 알았지만 예지는 모를 거였다. 예지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응. 같은 교양이더라.”
“그래요?”
“응. 강의실에서 요한 선배 보고 엄청 반가웠어.”
“…그래.”
결국 예지와는 밥을 먹는 것도 안 먹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기분이 영 구려 보이는 정진우 때문이었다. 뭘 먹을 것도 아니면서 버티고 앉아 엄청 눈치를 줬다. 둘이 어영부영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밥을 먹다가 한마음이 되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 이제 배부른 것 같아.”
“어, 저도요.”
“커피 마실래, 예지야?”
예지가 정진우와 나를 한 번씩 보더니 다음에 사달라고 손을 내저었다. 굉장히 미안했다. 다음에 밥 또 사줄게. 눈빛으로 얘기했다.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예지가 잘 먹었다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정진우에게 이따 봐. 하고 사라지는 예지의 뒷모습을 보다가 정진우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렇게 기분이 별로야?”
입을 달싹거리다가 아니에요. 한다. 혼자 기분 구린 티는 다 내놓고 내가 그렇게 기분 안 좋아 보여요?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입을 딱 벌렸더니 정진우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그냥. 내가 분위기 망친 거예요?”
“아니, 뭐…….”
“그랬나보네. 미안해요.”
“나는 괜찮은데, 예지한테 사과해. 내가 저번 학기부터 밥 사준다고 해 놓고 이제야 사준 거란 말이야.”
정진우의 어깨를 두드린 뒤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정진우가 작게, 알았어요,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진우를 일으켜 같이 학교 근처 카페로 나왔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정진우의 볼이 귀여웠다.
“이따 선배랑 나랑 둘 다 전공이네.”
“…그러게.”
잠깐 잊고 있던 조영재 생각이 나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이 답답해서 커피를 쭉 들이켰다. 샌드위치를 베어 먹던 정진우가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 줬다. 답답했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밖에서 이런 건 좀…….”
정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손등을 토닥여 줬다. 학교로 같이 올라가며 끝난 뒤의 일정을 공유했다. 정진우는 바로 작업실로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저녁 먹고 알바였다. 시간 맞으면 잠깐 봐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이론 수업을 위해 강의실로 올라가는 정진우를 배웅하고 목조실로 천천히 걸었다. 조영재가 와 있을까. 수업까지는 4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있었으면 좋겠다가도, 얼굴을 마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했다. 목조실 문을 슬쩍 열어 보았다. 굳은 낯의 조영재가 테이블 쏘 근처에서 혼자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은 것 같았다.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문 쪽을 살짝 두드렸다. 조영재가 약간 숙였던 고개를 바로 해 내 쪽을 쳐다봤다.
“오랜만이다, 영재야.”
오랜만에 본 조영재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나를 한참 보던 조영재가 고개를 들고 하, 작게 웃었다. 운동화를 신은 발로 땅을 팍, 차더니 나에게 손짓한다.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조영재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자꾸 망설이며 입을 열지 않는 조영재를 가만히 기다렸다. 으아, 소리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더니 고개를 팍 쳐든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할 말?”
“그래. 뭐 그때 술에 너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든지, 정진우에 대해서 막말하는 게 싫어서 실드 치려다가 그랬다든지, 뭐…….”
“…….”
그런 종류의 말이라면 할 게 없었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조영재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그랬으면 네가 애초에 그런 거 아니라고 말을 했겠지.”
조영재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짧은 제 머리를 자꾸만 손으로 흩트린다. 괜히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조영재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였다. 미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과하기 전 조영재의 입에서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내가 한 말… 다 맞아. 그래서 그런데 영재야.”
“뭐.”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다. 아예 잊어버려 주면 더 좋고.”
“뭐?”
“그냥, 그때 네가 나한테 말했던 것들, 내가 너한테 했던 말들, 다.”
조영재가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목조실을 울렸다. 약간 열어놓은 문 틈새로 햇빛이 들어왔다. 누가 오는 건 아닌가 불안해져 문 쪽을 바라보다 순간 눈이 부셨다. 눈을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조영재가 내 어깨를 잡았다.
“넌 나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그날 분위기 망쳐서 정말 미안했다. 생일이라고 와 줬는데.”
나 때문에 네가 더러운 꼴 본 것 같아. 작게 중얼거렸다. 조영재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 개새끼. 조영재가 나직하게 욕을 읊조렸다. 꽉 쥐어진 어깨가 아팠다. 조금만 더 잡혀 있으면 멍이 들 것도 같았다. 얼굴에 멍 빠진 지 얼마나 됐다고 어깨에 또 멍이 들면 정진우가 날 뭐라고 생각할까. 어디 가서 맨날 쌈질만 하고 다닌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조영재가 내 어깨를 놓지 않은 채로 짓씹어 말했다.
“내가 시발, 너랑 그러고 헤어져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뭐 다 해 봤어.”
“…….”
“남자 좋아하는 거, 그거 고칠 수 있대 요한아.”
말문이 막혔다. 조영재의 눈은 진심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남자 좋아하는 게 병 같아?”
조영재가 눈을 홉떴다. 새카맣게 탄 얼굴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여서 표정이 웃겼다. 촌놈 같았다. 하하 웃으면서 눈가를 가렸다.
“그거 병 아니야 영재야.”
“…….”
“나 안 아파. 나 더럽지도 않아…….”
무거운 침묵이 우리를 휘감았다. 짐작은 했다. 조영재는 이런 걸 쉽게 받아들일 만한 성격이 못 됐다. 그래도, 막상 정말 이런 반응이니 서운했다. 그래. 서운한 거였다. 나는 조영재에게 더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상관없었다. 조영재가 똑같이 소중할 수 있었다. 조영재는 나와 같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너한테 이해해 달라고 안 해. 내가 정진우를 좋아해서 사과한 것도 아니야. 내가 정진우를 좋아하는 일이 너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 너도, 나를 이해는 못 해도,”
“…….”
“…그냥, 봐 주면 안 되겠냐.”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조영재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웃었다. 입맛이 썼다.
“힘들겠지. 알아.”
“…….”
“부탁할게. …다른 사람들한텐, 모르는 척해줘.”
조영재의 손을 한 번 쥐었다 놓아주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목조실의 문을 열었다. 속이 답답해서 담배 생각이 났다. 항상 끊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마음이 너무 나약했다.
“부탁해 영재야.”
등 뒤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목조실로 들어오는 골목 끝에서 동기애들 몇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다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나를 발견하고 더욱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마주 흔들어 줬다. 아직 괜찮았다. 웃을 수 있었다.
짧은 수업이 끝나고, 그대로 집에 내려가려는 나를 김수현이 잡았다. 한 손엔 조영재의 손을 움켜쥔 채였다. 조영재는 이렇다 할 말 없이 김수현의 손에 잡힌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김수현이 남은 손으로 내 팔꿈치 쪽을 꽉 잡았다
“밥 먹자.”
“…나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럼 넌 구경해.”
아주 막무가내였다. 김수현의 성화에 못 이겨 학생식당까지 끌려가 자리를 잡았다. 식판 위로 고개를 처박고 음식을 흡입하는 김수현을 구경했다. 얘 진짜 그냥 엄청 배고파서 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참 밥만 축내던 김수현이 배가 좀 찼는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김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조영재와 나는 약속한 듯 고개를 꼬고 딴청을 피웠다. 딱하고 숟가락이 식판에 부딪혔다. 김수현이 전에 없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유나 알자.”
역시나 나와 조영재는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했다. 입이 있어도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김수현이 못내 답답했는지 가슴을 쾅쾅 쳤다. 답답한 마음이 절로 전해졌다. 연기를 해도 될 만한 표현력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창가만 바라보던 조영재가 한마디를 했다.
“일단 내가 서요한한테 잘못했어.”
조영재의 옆모습이 햇살에 비쳐 흐릿했다. 김수현이 조영재를 손으로 가리키며 쟤 왜 갑자기 분위기 잡아? 입으로 물었다. 나도 몰라. 고개를 저었더니 어깨를 으쓱 한다. 우리가 입모양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짐작도 못 할 조영재가 우울함에 젖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서요한도 나한테 잘못했어.”
“……나는,”
“서요한 넌 좀 닥치고 있어. 나 정리 중이니까.”
말대로 닥치고 있었다. 조영재가 자꾸만 마른세수를 했다. 한숨도 푹푹 쉬었다. 김수현과 나는 그런 조영재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아오 씨. 짜증 나. 조영재가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대부분이 주어 없는 나와 정진우의 욕이었다.
“난 모르겠다. 일단 김수현 네가 바라는 대로 뭐 서요한이랑 화해하고, 그런 거 못 해.”
김수현이 그대로 소리를 지르려는 걸 막았다. 김수현은 정말로 답답한 눈치였다. 눈을 그대로 아래로 깔았다. 헤진 운동화 끝이 보였다. 운동화 사야겠네. 이번 달엔 군것질 줄여야겠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장담도 못 하겠다.”
조영재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바늘로 변해 귀를, 마음을 콕콕 찔렀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붕대를 감아 더 이상의 공격을 막고 싶을 정도로는 아팠다. 코가 찡해졌다. 답답함을 토로하던 김수현은 생각보다 우리의 분위기가 진지했던지 말을 잃은 채였다. 소란스러운 식당 내에서 우리 테이블만 조용했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다.
“서요한 네가 말했던 것처럼 봐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
“입 다물고 있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어. 잊어버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조영재가 입도 안 댄 식판을 들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나와 조영재를 급한 눈으로 바라보던 김수현이 결국, 요한아 나중에 연락할게. 하고 조영재를 따라 일어섰다. 순식간에 자리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외로웠다. 고개를 숙인 채 얼마나 그대로 있었을까, 갑자기 정진우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직 수업 중인가. 생각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정진우였다.
“진우야.”
-어디예요? 저 이제 수업 끝났어요. 우리 집 갈까?
“…….”
-못 들었어요? 어디예요?
정진우가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냥 듣고 있었다. 선배? 서요한? 내 이름을 연달아 부르던 정진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전화기 사이로 정진우의 숨소리를 들었다.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이완시키는 목소리. 보고 싶어 하는 줄은 어떻게 알고. 귀신같은 정진우.
-무슨 일 있어요?
“…진우야.”
-안 물어볼 테니까. 우리 집 가자. 응?
“…응.”
-좋아요. 정문에서 봐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진우와 빨리 집에 가서, 정진우를 안고, 정진우와 쓸데없는 장난을 하고, 키스하고 싶었다. 정진우가 학교 정문 쪽 벽에 기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정진우에게 도착할 즈음엔 숨이 가빠져 있었다.
“선배.”
“빨리 가자, 집에.”
정진우의 손을 잡고 뛰듯이 걸었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내 손에 얽혀 있는 정진우의 손만이 느껴졌다. 걷다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세진 오피스텔이요. 목적지를 말하고 정진우의 어깨에 고개를 깊게 묻었다. 정진우는 그런 나를 말없이 받아 주었다. 얘만 있으면 된다. 괜찮을 수 있다. 속으로 되뇌었다. 얘만 괜찮으면 돼. 그럼 돼.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정진우의 등에 딱 달라붙어 현관문을 열었다. 치근대는 나 때문에 신발도 못 벗은 채로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정진우가 허리를 약간 세우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자꾸 슬프고, 기운 없고 그래.”
다정한 음성에 따끔거리던 마음이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놓인 정진우의 목덜미에 입 맞추고, 도드라진 목젖을 물었다. 툭 튀어나온 것을 입 안에 넣고 조금씩 핥았다. 정진우의 살 냄새가 콧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이 냄새에 취해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정진우의 목젖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고개를 약간 들어 뚜렷한 턱선을 따라 입 맞추고, 입가의 점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정진우가 느릿하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이 점점 거세졌다. 잡고 있던 머리를 당겨 나와 눈을 맞춘 정진우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나… 섰는데.”
“……알아.”
거칠게 입술을 맞댔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정진우의 혀가 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이를 훑고, 혀를 감쌌다. 아래서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지 사이를 헤치고 들어온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꽉 쥐었다. 입술을 느리게 떼어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입가를 타고 뚝 떨어졌다. 정진우의 티셔츠 끝을 잡아 들춰냈다. 벗겨진 티셔츠를 아무 데나 던지고 옆구리 위를 덮은 문신을 쓸었다. 문신 부근이 우툴두툴 했다. 정진우는 옆구리 긁히고, 그 형은 배에 팔뚝만 한 상처 나고……. 조영재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정진우가 짙은 숨을 몰아쉬는 게 귓바퀴를 타고 느껴졌다. 뜨거운 입술이 귓불을 덥석 물었다.
“거기, 하지… 마.”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조금씩 힘을 받던 성기가 완전히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귀가 간지러워서 사정없이 긁고 싶었다. 정진우가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소름이 쫙 돋았다. 혀를 세워 귓구멍을 쿡 찌르며 정진우가 속삭였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선배는 귀가, 진짜 약해…….”
귓가에 바람을 후 불어넣은 정진우가 손가락으로 귓불을 느리게 문지르며 짓궂게 웃었다. 엉덩이를 약간 들어 올린 채로 굳어 있던 나의 어깨를 붙잡고 정진우가 반쯤 세웠던 허리를 완전히 들었다. 우리 신발도 안 벗고 이러고 있어. 재미있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일어나요.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서 들어 올린다. 맥없이 정진우에게 이끌려 침대로 향했다. 발기한 성기 때문에 걸음이 어색했다. 정진우가 가볍게 어깨를 밀었다. 엉덩이에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며 바지를 벗는 정진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매끈한 상체를 훑다가 바지를 내리는 손가락, 다 벗겨진 옷을 구석으로 차는 발을 홀린 듯 쳐다봤다. 정진우가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키스했다. 허리에 점점 힘이 풀렸다. 벗기다 만 티셔츠를 마저 벗기고 가슴에 작게 솟아 있는 살점을 덥석 문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민망한 소리가 터졌다.
“―아, 으, 응.”
한쪽 가슴을 정진우에게 물린 채 입술을 물었다 뗐다. 소리가 나는 게 쪽팔려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도저히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치는 내 허리를 정진우가 꽉 움켜쥐었다. 거친 손바닥이 연한 살에 닿았다. 팬티가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내 위에 올라 탄 정진우의 턱선이며 사슴 같은 목덜미, 하얀 살갗에 도드라진 돌기, 길게 자리한 문신 등을 멍한 정신으로 훑었다. 팬티 안이 꽉 차 답답했다. 정진우 역시 그런 것 같았다. 한낮의 햇빛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비췄다. 부풀었다 홀쭉해지기를 반복하는 내 배를 정진우가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절로 맞붙었다. 정진우가 느릿하게 웃으며 팬티를 슬쩍 들었다.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성기 끝이 반들반들하게 젖어 있었다. 팬티 안을 비집고 나오다 만 성기 중간에 고무줄이 걸렸다. 젖은 천이 문대지는 느낌에 팬티를 완전히 벗어버리려 손을 뻗었다. 정진우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이것 좀, 놔 봐…….”
“잠깐, 엉덩이 좀 들어 볼래요?”
달래는 듯 허리를 쓸어내리며 말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허리가 저절로 들렸다. 엉덩이에 반쯤 걸쳐져 있던 팬티를 조금 끌어내리고 갈라진 틈을 훑는 손가락에 놀라 정진우의 팔을 잡았다. 정진우가 괜찮아요. 하며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허벅지를 다독거렸다.
“알아요? 남자끼리 섹스할 때는,”
말을 이으면서 엉덩이 골을 더듬거리며 내려가는 정진우의 손가락에 숨이 막혔다. 미처 벗겨지지 않은 팬티가 자꾸만 성기를 압박했다. 슬쩍 내려다봤더니 끝에 하얗고 투명한 액체가 맺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정진우는 아직 팬티도 벗지 않은 채였다. 정진우가 더듬어 내려가던 손가락으로 구멍을 쿡 찔렀다. 신경도 안 쓰던 부위에 손가락이 닿자 허리가 퍼뜩 떨렸다.
“여기를 쓰는 거래…….”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정진우와 사귀고 나서 이것저것 찾아 봤으니까. 많이 아프겠지, 고민하다 만약 우리가 섹스를 하게 된다면 내가 받아주는 쪽이 되어야지. 다짐했었다. 정진우가 아픈 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막상 정진우가 당연하다는 듯 나를 깔고 앉은 채 내려다보니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정진우가 아픈 것보단 내가 아픈 게 나았다.
“그보다, 나 팬티 좀, 아, 아―!”
벗을래, 하는 말이 미처 나오기 전에 정진우가 묽은 점액을 뚝뚝 흘리는 내 것을 쥐고 거세게 문질렀다. 거친 손바닥이 팬티 자락과 함께 성기를 옥죄었다. 귀두 부근을 손가락이 짙게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점점 내려간 손이 팬티 안에 자리한 음낭을 쥐었다. 기둥과 음낭이 이어지는 부분을 느리게 문지르는 감각에 힘이 한계까지 들어간 허벅지가 경련했다. 정진우가 거친 숨을 흘렸다. 흐릿해진 눈에 미간을 찌푸린 정진우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쫓고 있었다.
“―아, 좀, 그만, 잠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곧추선 기둥과 음낭을 제멋대로 주무르던 손이 팬티 속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머리맡에서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진우가 한 손에는 로션을, 한 손에는 콘돔을 꺼내 들고 있었다. 콘돔을 내 배꼽 근처에 던져두더니 손바닥에 로션을 가득 짜 그대로 엉덩이 밑에 갖다 댄다. 차가운 게 닿고, 동시에 정진우의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깊숙한 곳으로 침투했다.
“잠깐, 만. 천천히,”
“……아파요?”
아프지는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물감이 이상했을 뿐이다. 고개를 저으니 내 얼굴을 살피며 조금씩 손가락의 범위를 넓혔다. 이상한 기분에 자꾸 배가 저절로 조였다. 발끝을 가만둘 수 없었다.
“…이거, 이상해.”
나 알바 가야 하는데, 몇 시지. 잠깐 딴생각이 들어서 시계를 쳐다보려 돌렸던 목이 그대로 굳었다. 정진우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서 이상한 열감이 몰려왔다. 정진우가 한참 엉덩이를 지분대던 손을 빼고 콘돔 봉지를 찢었다.
팔꿈치를 세우고 가쁜 숨을 쉬는 정진우의 하체를 바라보았다. 벗겨 줄래요? 정진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얇은 팬티 사이로 성기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손에 걸리는 천을 잡고 천천히 내리니 붉게 달아오른 성기가 퉁 하고 튀어져 나와 뻣뻣하게 선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진우 걸 한 번 쓸어 보았다. 정진우가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만.”
정진우가 핏줄이 무섭게 서 있는 성기 끝에 콘돔을 덧씌웠다. 차마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틈을 주지 않고 내 턱을 세게 쥔 채로 입을 맞춘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정진우의 발긋하게 달아오른 목 근처에서 맴돌던 손이 어깨 위로 안착했다. 정진우가 급한 몸짓으로 엉덩이 사이에 제 성기를 갖다 댔다. 살갗이 맞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미안, 나, 아플지도 모르는데… 참아 봐요.”
말투와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손가락의 감촉이 남아 있는 곳으로 정진우의 굵은 성기가 천천히 침입했다. 너무 아팠다. 각오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도 못 낸 채 입만 벌리고 있었더니 정진우가 그런 나를 눈치채고 귓가를 계속해서 애무했다. 끄, 으으, 신음도 뭣도 아닌 소리가 목을 울렸다. 한참 엉덩이를 가르고 들어오던 성기가 잠깐 멈추는 게 느껴졌다. 다 들어왔나, 잠깐 방심한 사이에 허리가 쿵, 하고 울렸다.
“―아, 악!”
“하……. 서요한,”
내 이름을 부르며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너무 아파 눈앞에서 하얗고 밝은 것들이 번쩍번쩍 튀었다. 내 비명이 계속되자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던 정진우가 입을 맞췄다. 정진우의 입술 사이로 채 나오지 못한 비명이 사라졌다.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게 이마에 맺혔다. 너무 힘들고, 허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정진우가 많이 좋아 보여서 참으려고 해 봐도, 자아를 잃은 손이 자꾸 정진우의 어깨를 밀었다. 정진우가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하, 아, 요한 선배……, 요한, 요한아.”
계속해서 내 귓가에 이름을 불어 넣다가 마침내 성기를 잡아채는 손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점점 내 것이 힘을 받는 게 느껴졌다. 쾌감과 고통이 번갈아 머리를 때렸다. 속 깊은 곳까지 한참을 쑤셔 대던 정진우의 성기가 어느 순간 끝까지 빠져 나갔다가, 한 번에 밀고 들어왔다. 한 손에 내 것을 꽉 쥔 정진우의 어깨가 조금 떨렸다. 이를 악문 신음소리가 들렸다. 끈덕지게 귀를 핥는 혀와, 성기를 아프게 쥐고 귀두 끝을 문지르는 정진우의 손길에 모르는 새 완전히 힘을 받았던 성기가 정진우와 함께 부르르 떨며 묽은 액체를 토해냈다.
“…많이 아파요?”
죽을 것 같다는 말 대신 머리를 껴안았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정진우가 내 안을 느리게 빠져나갔다. 진짜 죽겠다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는데, 막상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니 조금 아쉬웠다. 괜찮아. 다 쉬어가는 목으로 말했다. 정진우가 내 귀와 얼굴에 끊임없이 입 맞췄다.
“몇… 시지.”
쫙쫙 갈라진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정진우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아직 좀 남았어요. 좀 있다가 씻고 같이 나가자. 속삭였다. 잠깐 내 머리며 어깨, 허리를 쓰다듬던 정진우가 내 얼굴을 감싸고 물었다.
“기분은 좀 어때요?”
“……괜찮아.”
매일 괜찮대. 투덜거리는 정진우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채 가시지 않은 흥분으로 눈가가 조금 붉었다. 진짜 좀 괜찮아져서 그런 건데. 정진우와 몸을 섞으면서는 정말로 모든 상황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정진우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엔 정말, 정진우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파서도 그랬지만, 그냥 정진우의 표정, 숨, 나와 이어진 것 같은 어떤 것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섹스를 하나. 생각했다.
“진짜 괜찮아.”
“그럼 앞으로 자주 해야겠다.”
말이 안 나왔다. 자주 하기엔 내가 너무 아픈데……. 나도 모르게 흔들리는 눈으로 정진우를 빤히 봤다. 정진우가 나와 눈을 맞추다 웃음을 터트렸다. 꼭 껴안은 품이 따뜻했다. 진짜 많이 아팠구나. 미안해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으면, 뭐. 자주는 말고, 가끔 할 수 있어.
모로 누워 나를 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정진우는 조금 행복해 보였다. 입술이 진득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반복했다. 길게 숨을 내쉬었더니 얼굴 근처에 자리한 정진우의 목에 소름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정진우의 옆구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정진우의 매끈한 몸에서 이곳만 거칠었다. 거친 감촉을 손바닥으로 더듬으며 낮게 물었다.
“문신 왜 새긴 거야? 의미, 있어?”
정진우가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주었다.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햇빛이 정진우의 몸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제 씻고 알바 가야겠다, 진짜.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정진우가 말했다.
“의미 없어요. 그냥, 호기심에.”
정신이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잠깐 굳었던 몸을 물리고 다시 한 번 물어봤다.
“…고등학생이? 다른 이유는 없고?”
정진우가 저와 멀어진 턱을 잡아 입 맞추고 그대로 내 몸을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툭 튀어나온 정진우의 날개 뼈가 유려하게 움직였다. 뭉근하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정진우가 감싸고 있던 내 뒷목을 토닥였다.
“그렇지. …그냥, 호기심에.”
입을 딱 다문 정진우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나가야 하는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물먹은 것처럼 축 쳐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침대에서 벗어났다. 정진우가 속옷 옷장에서 꺼내 가요. 했다.
“……그래.”
대답하며 생각했다. 그래, 맞아. 어떤 것도 섣부르게 단정할 순 없었다. 조영재가 전해온 일이 아닌,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는 거였다. 정말 호기심으로 했을 수도 있었다. 정진우가 행복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침대에 누워 방 안을 움직이는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내가 있는 현재는 진짜였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술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진우가 거짓말을 했든, 상황을 둘러대었든, 내가 조영재의 말을 믿든, 말든. 나는 정진우를 좋아했다. 사실 복잡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진우를 좋아하고 있는 것. 그거면 되는 거였다. 다시는 몰래 의심하고, 떠보고. 그런 남자답지 않은 짓 안 해야지.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었어도 나는 정진우 편이어야지. 남자답지 못한 행동은 지금까지도 충분했다. 이제 형답게 굴어야지, 진우한테. 그제야 다시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