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허리가 욱신거리고 엉덩이에는 아직까지 이물감이 남아 있었다. 딱히 앉을 자리가 없는 편의점에서 계속해 카운터를 지키려니 아주 고역이었다. 이럴 때는 일 분이 일 년 같았다. 겨우 시계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누가 허리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는 느낌에 조금이라도 편해 보려고 엉덩이를 뒤로 뺐다. 아무래도 근육이 놀란 것 같았다. 허리를 붙잡고, 음료수라도 하나 마실까. 생각했다. 자정을 넘겼으니 이제 담배 사러 오는 사람 말고는 올 사람도 딱히 없을 것이다.
“요한― 선배.”
내 이름에 요상한 음을 붙여 부르며 예지가 들어왔다. 뒤로 뺐던 엉덩이를 바로 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인사했다.
“안녕, 예지야. 이제 들어가?”
“네. 애들이랑 밥 먹고 맥주 한잔하다가, 들어가는데 선배 생각이 나잖아요. 그래가지고 뭐라도 하나 살까, 와 봤어요.”
애가 참 살가웠다. 뭐 먹고 싶어? 여기 있는 건 내가 사줄게. 오전의 미안함을 담아 말했더니, 예지가 손사래를 쳤다. 여기 다 몇천 원 안 해. 사줄게. 그럼 고마워요, 대답하던 예지가 갑자기 억울하다는 듯 카운터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짝 소리가 났다. 손바닥이 되게 아플 것 같았다.
“아니, 오늘도! 제가 뭐 선배한테 못 할 짓 했어요?!”
“네가? 나한테?”
“네! 오후에 저희 전공이었거든요. 강의실 들어오자마자 진우가 막, 너 요한 선배한테 밥 얻어먹고 다니지 말라고, 걔 그거 말투 있죠. 그 나긋나긋한 말투로 뭔 잔소리를 진짜.”
정진우의 흉내를 내다가 저 순식간에 선배 등쳐먹는 애 됐어요. 우는 소리를 하는 예지의 목에 핏대가 섰다. 많이 억울한 것 같았다. 아니 근데 걔는 다른 것도 아니고 무슨 학식 가지고 그랬대. 나도 그 정도 돈은 있는데. 따지고 보니 사귀고 난 뒤부터 정진우한테 매번 얻어먹었던 것 같다. 정진우가 너무 자연스럽게 계산을 했고, 나도 여러 일로 복잡해서 신경을 못 쓴 채로 넘어갔는데 그래서 그랬나. 언제 정진우를 붙잡고 나 돈 엄청 없진 않다고, 좀 아껴야겠지만 살만 하다고 말해봐야지, 다짐했다. 걔가 얼굴만 덜 잘생겼어도 진짜 바로 욕 나갔다고 열변을 토하는 예지를 달랬다.
“진우가 내 사정이 안 좋은 걸 알아서 그랬나봐. 괜히 내가 미안하네.”
“아니, 선배가 또 그렇게 말하면 제가 할 말이 없잖아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예지의 울상이 더욱 심해져 좀 당황했다. 나는 가끔 여자애들이 너무 어려웠다. 잠깐 말을 골랐다.
“다음에 또 사줄 수 있다고. 진우한텐 내가 한 번 말할게, 그러지 말라고.”
혹시 사이가 틀어질까 하는 노파심에 싸우지 말고. 작게 덧붙였다. 알아들었는지 예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걔랑 어떻게 싸워요. 저 다른 애들한테 죽어요. 걔가 저희 사이에서 어떤 존잰지 알아요?”
일학년 애들이 정진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항상 궁금했다. 걔가 무슨 존잰데? 최대한 안 궁금한 척을 하면서 물어봤다.
“못 먹는 감. 그림의 떡.”
예지의 얼굴이 단호했다. ……진우는 알아? 그랬더니, 저도 몰라요. 알든지 말든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왜 못 먹는 감이야?”
“그게, 저번 학기에 그 누구였지. 무용과 걔랑 헤어지고 한동안 계속 애들이 진우한테 고백하고 차이고 장난 아니었어요. 그때 소소하게 우리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가, 다음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고백하고 차이고 반복하면서 쟤는 진짜 우리한테 못 먹는 감이구나. 그냥 눈만 즐거워야겠구나. 누가 채가면 배 아프니까 동기끼리라도 진우는 성역으로 놓고 보호해주자. 아무튼 그랬어요. 진우가 얼굴도 그렇지만 성격이 원래 좀, 선배도 알죠? 왠지 비밀스러운데 그 와중에 여지 주는 게 장난 아니니까. 막 혼자만 여유로워 보이는 것도 있고. 애들이 거기 혹해가지고, 아주……. 차인지 한참 됐는데도 아직 좋아하는 애들 많아요.”
근데 전 진우 잘생긴 건 몰라도 좋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하고 씩 웃는다. 그렇구나. 정진우가 인기가 많은 게 뿌듯하기도 했고, 모두가 정진우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하니까 다행이기도 했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아서 정진우를 좋아하면, 그건 나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랬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그치, 선배 여자 친구 있지, 엄청 예쁘지……. 중얼거리며 음료수 코너로 향해 요구르트 한 줄을 집어 카운터에 턱 내려놓는다.
“이것만 먹고 싶어? 더 골라. 더 사줄게.”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더니 예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저 다이어트 하려고요. 말을 하는 예지는 엄청 작고 말랐다. 뺄 살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몰라 쳐다봤더니 다이어트 해서 예뻐질 거예요. 한다.
“그래, 근데 지금도 좋은 것 같아.”
광대를 씰룩거리다 나를 째려보는데, 영문을 몰랐지만 귀여웠다. 슬슬 웃으니까 선배 진짜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그러지 마요. 중얼중얼거리더니 조금만 더 있다 가도 돼요? 물어온다. 여기 말고, 저기 바 가서 있으면. 했더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에 가서 손에 든 것 중 맨 앞에 자리한 요구르트에 빨대를 쿡 찍어 마신다. 오는 손님도 딱히 없고 해서 요구르트 마시는 예지를 구경하며 각자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저희 교양 있잖아요. 아마 다음 주에 바로 조별 과제 나올 거예요. 시험을 매번 피피티로 대체하는 교수님이라 과제도 일찍 내준다고 하더라고요. 선배 저랑 꼭 같은 조 해야 해요?”
“응. 나야말로 너한테 한 번 더 부탁하려고 했어. 같이 하자고.”
헤헤 웃더니 어느새 다섯 번째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는 걸 같이 웃으면서 봤다. 나한테 동생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 것 같았다. 동생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힘들긴 하겠지만 덜 외로웠을 텐데. 내가 많이 챙겨 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요구르트만 먹고 갈 줄 알았던 예지는 두 시가 다 되어 갈 때까지 편의점 구석에 서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가지 않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말을 엄청 잘해서, 예지가 하는 이야기에 휩쓸렸더니 아픈 것도 잠깐 까먹을 수 있었다. 한참 예지가 하는 말을 듣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해야겠다, 생각했다. 새벽이면 아무리 거리가 조용해도 여자애한테 위험했다. 예지한테 30분 정도만 있다가 데려다 준다고 말하려는데, 편의점 문이 열리고 정진우가 들어왔다.
“…예지네?”
“어, 진우야. 너 이 근처 살아? 아니지 않아?”
정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언제부터 있었어? 나? 한 시간 좀 넘었나? 나에게는 시선도 안 주고 예지한테 성큼성큼 걸어가 얘기하는 걸 가만히 서서 구경했다. 집에서 자다 나온 건지 눈이 좀 부어 있었다. 작업실 간다더니, 안 갔나 보네. 피곤할 만도 했다. 나도 알바 나오는 게 의무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정진우와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 예지와 뭐라고 얘기하던 정진우가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어차피 나는 정진우가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정진우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이 마주쳤다. 예지를 향해 약간 굽혔던 허리를 들고 정진우가 나에게 말했다.
“예지 데려다 주고 올게요.”
이제 거의 두 시였다. 조금 있으면 새벽 알바와 교대하는데 기다렸다 같이 가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려다 말았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였더니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예지를 데리고 바람같이 사라진다. 악몽 꿨나. 하루 종일 정진우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대충 자리를 정리하며 있다가, 곧 출근한 새벽 알바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창고에서 옷을 갈아입고 편의점을 나왔다. 날씨가 쌀쌀해져 팔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가볍게 입고 있던 티셔츠를 슬슬 문지르며 정진우를 기다렸다. 갑자기 바람이 쌩 불었다. 편의점 지붕 아래서 발을 앞뒤로 움직였다. 바람이 찼다. 문득 골목 끝에서 정진우의 실루엣이 보였다. 참 신기했다. 정진우의 그림자만 봐도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저를 기다리던 나를 발견하고 걸음이 빨라진다. 뛰듯이 걸어와 내 머리를 슬쩍 걷어 넘기며 정진우가 말했다. 추웠죠? 안에서 기다리지. 그대로 나란히 집까지 걸었다.
“같이 가지. 나 너네 나가고 바로 끝났어.”
“피곤하잖아.”
허리, 많이 아프지 않아요? 정진우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내 허리를 슬쩍 감쌌다. 손을 재빨리 쳐내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웃으면서, 아무도 없어요. 한다.
“그래도 그러지 마. 심장 떨려.”
“알았어요. 우리 집 가자. 마사지 해줄게.”
아까 허리에 좋은 마사지 찾아 봤어요. 조근조근 말하는 정진우가 못 견디게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집 가서 있는 힘껏 꼬집어 줘야지. 양 볼이 빨개지면 굉장히 귀여울 것이다. 사진 한 장 찍어 둬야지. 생각만 해도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 * *
안 그러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방학 때같이 정진우네 집에서 사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더웠던 날씨가 선선하게 변하더니, 얇게 입으면 추워지기 시작한 건 순간이었다. 정진우와 함께 보내는 세 번째 계절이 찾아 왔다. 여전히 조영재는 나에게 쌀쌀맞았고, 나와 조영재 사이에서 김수현만 고군분투했다. 내가 너네만 보면 말라 죽어. 하면서 밥을 마시는데, 말라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사이 개강총회다 뭐다 해서 술자리가 몇 번 있었다. 대충 자리에 껴서 술 마시고, 편의점을 지키고, 학교 갔다가, 도면 쳐서 메일링 하고, 정진우와 과외를 하고, 밥 먹고, 술 마시고, 안고, 입 맞추고, 함께 잠이 들고, 가끔씩은 가볍게 서로의 것을 만져 주기도 했다. 안에 들어오는 건 너무 힘들어. 언젠가 나란히 사정한 뒤 지나가듯 말했더니 알아서 별로 하려는 시도 자체를 안 했다. 바쁜 것 좀 끝나면 한번 하자고 해 볼까. 일단 그러려면 코앞으로 닥친 중간고사부터 잘 해결해야 했다. 시험으로 정신없어지기 전에 교양 피피티 준비부터 미리 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지와 학교 카페에 마주 앉아 계획을 짰다.
대충 서로 가능한 날짜와 발표할 내용을 맞추고, 예지가 오후 수업이 있다고 해서 수업 시간까지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한참 예지가 하는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는데, 누가 등 뒤에서 팔로 내 목을 감쌌다. 막 한 모금 머금은 커피를 목으로 넘기려다 컥 했더니 낮게 웃는다. 정진우였다.
“과제해요?”
“응. 끝났어. 너는?”
정진우의 시선이 빨대를 씹으면서 진우야 안녕. 손을 흔드는 예지를 일별하고 나를 향했다.
“나 잠깐 갈 데가 있어서.”
“너 이따 수업이잖아.”
“오늘 수업 못 갈 것 같아.”
예지의 시선이 우리를 훑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우리를 번갈아보더니 테이블 한구석에 밀어놓았던 공책을 챙긴다. 저 이제 가볼게요. 인사를 마친 뒤 바쁘게 사라지는 예지를 뒤로하고 정진우에게 손짓을 했다. 예지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아 목이 말랐는지 내 커피를 마신다.
“어디 가는데?”
“저도 잘 몰라요. 집안일.”
집안일? 궁금했지만 정진우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그래. 했다. 한 번에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린 정진우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오늘 집에도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선배 우리 집으로 가 있을 거예요?”
“너 없으면 굳이 갈 필요는 없지.”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에 잠긴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다. 정진우의 얼굴은 기본적으로 모난 데 없이 잘생겼지만, 저렇게 눈을 깔고 있을 때는 청순한 느낌이 들었다. 색소 옅은 입술이 꾹 다물렸다가 벌어지는 걸 넋 놓고 쳐다봤다. 큰일이었다. 정진우와 만나면 만날수록 정진우에게 넋 놓는 횟수가 잦아졌다.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울까. 문득 궁금했다. 네가 늙고, 내가 늙으면.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져 있을까. 만약 우리가 늙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정진우는 여전히 예쁠 것이다.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예쁜 정진우 할아버지. 정진우가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우리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진우가 밑으로 깔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또렷한 눈매가 나를 향했다.
“……오늘 새벽에, 집에 갈 테니까.”
“새벽에?”
“응. 집에 있어요.”
순간적으로 정진우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진우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 기다려줘요.”
“……알았어.”
어딘가 턱 막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대답했다. 정진우가 좋아요. 하며 일어났다. 선배 지금 집 갈 거예요? 물어보는 말에 그제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황이 웃겼다. 얼마나 좋아하면 사람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일 수 있지. 진짜 그 순간이 영화처럼 흘러갔다. 정진우를 혼자 좋아할 때보다 더 난리였다. 주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진우의 내리깐 눈이나, 부드럽게 울리던 목소리를 곱씹고 있었다. 나란히 걷던 정진우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엄마?”
엄마? 정진우를 한 번 봤다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학교 정문 근처에 세단을 세워 놓고, 어떤 여자가 내리고 있었다. 차림이 고급스러웠다.
“엄마?”
“……네. 엄마가 왜 여기까지 왔지.”
사모님같이 보이는 여자가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내 든 채 잠깐 두리번거리더니 정진우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정진우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내 어깨를 한 번 쓸었다.
“집까지 같이 가려고 그랬는데. 안 되겠네.”
이따 봐요. 인사를 남기고 빠르게 걷는 정진우의 등을 바라봤다. 인사라도 시켜 주지. 좀 서운했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정진우의 등을 쫓다가 내 쪽을 바라보는 정진우의 어머니와 시선이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했다. 아니었나. 가까이 다가간 정진우의 등을 쓰는 아주머니는 내 인사를 못 본 것 같았다. 정진우의 고개가 슬쩍 나를 향했다가 돌아갔다. 차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잠깐 마주친 것 같은 아주머니의 눈이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 * *
꿈을 꿨다. 알바를 끝내고 정진우의 집에 들어오니 시간이 두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씻고 침대에 누울 땐 세 시였다. 정진우는 언제 들어오지. 잠깐 전화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억이 끊겼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이상한 곳에 떨어져 있었다. 온통 하얗고, 바닥이 구름 위를 밟는 듯 푹신했다. 한참을 걸었다. 걷다 보니 어떤 여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구지? 뒷모습이 익숙했다. 긴 머리가 구불거리고, 몸이 곧장 쓰러질 것 같이 가녀렸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엄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대로 돌아 나를 볼 것 같았던 여자가 가차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나와 점점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은, 내가 아무리 뛰어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 목이 터져라 불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를 안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애써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뻗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호흡이 턱 끝까지 몰렸다. 엄마, 점점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엄마는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굴이 뜨거웠다. 잠깐 멈춰 호흡을 고르고 다시 뛰어보려는데, 무언가 나에게 달려 들어왔다. 떨쳐내려 있는 힘껏 몸을 버둥거렸다. 둔중하게 나를 감싸 안은 그것이 내 어깨며 머리칼, 얼굴을 압박했다. 그러지 마. 나 좀 놔줘……. 종국엔 눈물이 쏟아졌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안 가는 상태에서 눈물만 선명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불현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온 힘을 다해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진우가 내 어깨를 잡은 채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 진우야.”
얼굴이 축축했다. 진짜로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진우가 내 얼굴을 진득하게 매만졌다. 이미 젖은 손으론 내 눈물을 전부 닦을 순 없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길게 했다. 눈가만 계속해서 쓰다듬던 정진우가 나에게 안겨들었다.
“무슨 꿈을 꿔서, 그렇게 울어요.”
멍한 정신을 추스르려고 한참 눈을 감았다 떴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칠흑같이 까만 건 똑같았다. 늘어뜨렸던 사지를 조금씩 긴장시킨 뒤 정진우의 등을 감싸 안았다.
“……엄마가,”
정진우의 머리꼭지를 매만졌다. 머리카락이 조금 차가웠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손바닥에 닿는 카디건의 감촉이 거칠었다. 카디건 안으로 손을 넣어 정진우의 체온을 느꼈다.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엄마가, 내가 아무리 달려도, 멈추지 않고…….”
말끝이 조금 떨렸다. 정진우의 느린 숨이 귓가에 닿았다. 벗어나고 싶었던 무게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정진우라서 그런 것이다.
“너는 나한테 그러지 마, 진우야.”
대답 없이 나를 바투 끌어안는 정진우에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막 꿈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감정 조절이 잘 안 됐다.
“나 버리고 가지 마…….”
“그런 말 하지 마요. 내가 왜 선배를 두고 가요.”
걸러지지 않은 내 감정에 정진우가 부담스러울까 걱정이 됐다. 차분한 대답을 듣게 되자 그제야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입술에 와 닿는 정진우의 귓불을 한 번 깨물었다. 정진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게 좋았다.
정진우를 단단히 안고 난 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햇빛 아래 눈 감은 정진우의 얼굴이 보였다. 약간 벌어진 입에서 쌔액, 아기 같은 숨소리가 났다. 정진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를 벗어났다. 잘 움직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깜빡거렸다. 조금 부었나보다. 욕실로 들어가 얼굴을 확인해 보니 많이 부어 있었다.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찬바람 쐬며 좀 걷다가 학교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꿈을 꿔서 그런지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애들과 장난을 쳐도, 웃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우울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알바도 없는 날이었다. 정진우에게 뭐할 거냐고 물으니 작업실에 간다고 했다. 조영재와 그렇게 된 이후로 조금 소원해진 김수현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정진우가 없으면 나는 혼자구나. 새삼 깨달았다. 우울하게 캠퍼스를 걷다가 일학년 애들이랑 같이 있는 예지를 발견했다. 미뤄뒀던 밥이나 사줄까. 하고 물어보니 시간 많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지가 가보고 싶었다는 우리 집 근처 치킨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집에 들어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벽 한가운데 자리한 그림을 보다가, 천장에 달린 형광등을 노려보다가, 했다. 도면 쳐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엄마에 관한 악몽을 꾸곤 했는데 이런 꿈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웃던 엄마가 아프거나, 갑자기 눈을 감거나, 울거나. 그랬다. 그 땐 우는 엄마를 달래주기도, 아픈 엄마의 이마를 쓸기도 했다. 오늘은 꿈에서도 엄마를 잡을 수가 없어서, 그게 너무 심란했다.
한동안 우울함에 젖어 있다 약속 시간 맞춰 천천히 집을 나섰다. 예지와 만나기로 한 치킨 집까지 걷는데 정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집이에요? 저녁 먹었어요?]
걷다가 멈추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오늘 예지 밥 사주기로 해서 만나러 가는 중. 넌?]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뜨더니 바로 전화가 온다. 전화를 받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예지랑 왜 만나요?
“응? 아까 집에 오는데 잠깐 만나서, 사준다고 했지.”
정진우의 목소리가 굉장히 날카로웠다.
-왜 선배가 밥을 사줘요?
할 말이 없었다. 왜냐니, 그야 후배니까……. 말끝을 흐렸다. 정진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후배면 다 밥도 사주고 그래요?
정진우가 이상하게 예지와 관련 되면 날카로운 걸 알았다. 과제 때문에 만날 때도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곤 했다. 괜히 좀 미안해지기도 했고, 다른 애들 만날 땐 안 그러면서 왜 예지만 가지고 그러나 싶기도 했다.
“너 예지랑 뭐 안 좋아? 왜 그래, 예지 좋은 애,”
-지금 그리로 갈게요.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치킨집 이름을 말하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안 그래도 우울했는데 정진우의 태도에 기분이 땅을 쳤다. 예지 앞에선 티 내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예지를 만나 치킨을 뜯었다. 이 와중에도 치킨은 맛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니까 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예지가 맥주 한 잔 시켜도 돼요? 물어봐서 나란히 맥주도 시켰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결국에는 정진우 이야기로 돌아왔다. 예지와 접점이 정진우밖에 없어서 그런가, 내가 정진우 생각밖에 없어서 그런가. 모를 일이었다. 예지가 열심히 닭다리를 뜯다가 말했다.
“선배는 근데 진우랑 어떻게 친해진 거예요?”
학교에서 진우랑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선배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예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 조금 뿌듯했다. 그러면서 걱정도 됐다. 학교 사람들이랑 친해져야 나중에 나가서 편할 텐데. 정진우 성격에 친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됐다.
“선배들은 몰라도, 너네랑은 안 친해?”
“네. 저희하고도 안 친해요. 진우가 학교 밖에서 뭐 하는지도 잘 모르고, 걔가 연락이 잘 안 되니까. 학교에서 만나면 얘기하고, 수업 같이 듣고. 아마 다른 애들도 그게 다일걸요?”
예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정진우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진우를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각자의 과거나, 현재, 미래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보통 그때그때의 감정이나, 상황. 바로 앞으로 닥친 일들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나는 정진우가 하는 얘기를 듣거나, 맞장구치거나, 그게 전부였다. 서로 동기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우리가 만난 게 벌써 3개월 정도인데, 심한가. 싶었다.
사실 아직도 정진우에게 질문하는 게 어렵고 두려웠다. 정진우를 만나면서 내가 사람을 대하는 게 많이 서툴구나 하고 느꼈다. 어디까지, 어떻게 생각을 나누고 공감해야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참 예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울리는 종소리에 문가를 쳐다봤다.
“진우야 왔어?”
예지가 여기야, 하고 정진우를 불렀다. 정진우가 무표정한 낯을 하고 걸어와 비어 있는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때부터는 개강 초의 상황이 되풀이됐다. 뭐 시킬래? 하면 괜찮아요. 하고 입을 꾹 다무는데, 예지와 둘이서 눈치를 심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정적 속에서 가만히 가슴살을 뜯던 예지가 깨끗해진 닭 뼈를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놓인 정진우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할래, 진우야?”
예지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난다. 미안해요. 잠깐 진우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예지가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정진우의 태도를 봤을 때 아무래도 둘이 무슨 일이 있었지, 싶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제발 잘 좀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예지와 정진우는 꽤 길게 이야기했다. 조금씩 집어먹었던 치킨이 바닥을 보일 무렵 찬바람과 함께 들어온 둘은 각자 생각이 많아보였다. 우울한 안색으로 날개를 잡고 깨작거리던 예지가 갑자기 다 먹지 않은 닭 날개를 내려놓고 가방을 챙겼다.
“미안해요 요한 선배. 저 먼저 가 볼게요.”
미안해 진우야. 이어지는 말은 아주 작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정진우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정진우는 미동이 없었다. 일어나는 애를 보지도 않고 잘 가, 하는데 나라도 마중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지를 따라 일어났다.
“선배는 그냥 여기 있어요.”
엉거주춤 일어난 허벅지를 꾹 누르며 정진우가 말했다. 그사이 예지는 치킨 집을 빠르게 나갔다. 얼이 빠진 채로 예지가 사라진 문과 정진우를 번갈아 봤다. 약간,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대체 너 예지한테 왜 그러는 거야.”
정진우가 마른 얼굴을 한 번 쓸고 나를 봤다.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몰라요? 내가 예지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까칠한 말에 울컥해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앉아 있는 정진우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서자마자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인다.
“네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예지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날카로운 정진우 때문에 고민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저 말고 다른 애랑 친한 것 같아 질투하나,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정진우는 영지나, 슬기 같은 애들이랑 있을 때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했다. 질투를 한다고 해도 왜 예지만인지, 왜 예지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진짜 몰라요?”
“몰라.”
“예지가― 아, 진짜.”
머리를 짜증스럽게 흩트린다.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팔짱을 끼고 쳐다봤더니 아직 장초를 비벼 끈 뒤 내 팔을 잡고 성큼성큼 걷는다.
“얘기 해 봐.”
“……몰라요. 내가 예민했나 봐요.”
선배 오늘 우울한 거 아는데, 미안해요. 정진우가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덜컥 사과를 받으니 화가 나려던 마음이 또 풀썩 가라앉았다. 그대로 집까지 함께 걸었다. 예지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까 싶기도 했고, 사과까지 한 정진우를 더 건드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항상 이런 것이 어려웠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정진우가 나를 싫다고 할까봐, 한 발짝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 정진우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고민했다. 내가 마음을 조금만 편하게 먹으면 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물기가 남은 얼굴로 나오는 정진우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침대를 툭툭 쳤다. 얌전히 다가와 옆에 앉는다. 정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항상, 어려워.”
“…….”
“너랑 이런 타이밍에선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그런 게.”
정진우가 침을 삼킬 때마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느끼다가 정진우에게 조금 더 파고들었다.
“약속 하나 하자.”
“무슨 약속.”
“그냥 앞으로 좀, 서로 기분 나쁠 것 같은 상황이 와도, 싸우게 되더라도, 무서워하지 말고 다 얘기하는 거.”
스스로를 향한 다짐 같은 말을 하면서도 내가 조금 우스웠다. 나는 정진우에게 이미 솔직하지 못했다. 앓고, 의심하고, 결국엔 묻어두고. 모든 것을 혼자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정진우에게는 내가 하지 못한 걸 요구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 일은, 제가 말하기 좀 그런 게 있어요.”
“…….”
“예지 개인적인 일이여서. 내가 예지 불편해하는 거 많이 티 나는 건 나도 알았어요.”
내 얼굴을 잡고 정진우가 입을 맞췄다. 쪽, 입 맞추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안 그러려고 해 볼게요. 그니까 선배도, 나랑 약속 하나 해요.”
“…무슨 약속?”
“혼자 우울해하지 마요.”
못 견디게 슬픈 일이 있을 땐, 나한테 말해 줘요. 그러지 못할 걸 알면서 대답했다. 응.
이래 놓고 우리는 중간고사까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하지 못했다. 뭐라도 천천히 얘기 좀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따라줬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뭔가 풀어보려고 생각하면 외부의 사정이 우리에게 닥쳐왔다. 나는 나대로 밀린 과제와 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정진우는 작업실 일에다가 요즘 부쩍 집에 불려가는 횟수가 잦아들어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무슨 심각한 일이 있는 건지 집에 다녀올 때마다 핼쑥한 낯을 하고 나에게 파고들며 다 때려치우고 우리 같이 어디 도망갈까. 장난처럼 묻곤 했다. 많이 힘든 것 같아서 언젠가는 그냥 집에서 통학하는 게 어떻겠냐고 정진우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니에요.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안쓰러웠다.
서로 약속을 한 뒤로 정진우는 예지에 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셋이 있게 되어도 그랬다. 오히려 치킨집에서 무슨 말을 한 건지 예지가 이상했다. 둘이 과제를 할 때면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 이야기의 주제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애가 생각할 게 많은 건지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세계로 떠나버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표하고 맛있는 거나 사줄까. 생각만 하고 있다가 발표를 무사히 마친 뒤 예지에게 제안했다.
“오늘 시간 돼? 네 시쯤.”
예지가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이상한 눈길이었다. 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시간 된다고 하면 밥이라도 사 먹이면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영 이상했다.
“오늘, 왜요?”
“왜긴. 발표도 잘했고, 시험도 끝났는데 너 시간 되면 밥 사주려고.”
한참 고민하던 예지가 가방을 챙기며 고마워요, 인사했다. 고기 먹을까? 포차에서 보자. 네 시에 포차에서 보자는 약속을 잡고 예지와 헤어졌다. 시험이 여럿 죽이는 것 같았다. 잠을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예지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보다가, 샌드위치를 사들고 목조실로 향했다. 아직 수업이 시작하려면 한참 남아서, 비는 시간을 이용해 정진우의 생일 선물을 만들 생각이었다. 정진우의 생일이 벌써 다음 주였다. 생각해 뒀던 걸 만들려면 부지런히 작업해야 했다.
무거운 목조실의 문을 열자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조영재였다. 다시 돌아 나갈까, 순간적으로 몸을 돌렸다가 그것도 이상하지 싶어 태연한 척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라인더와 사포, 사두었던 두꺼운 나무를 챙겨와 자리를 잡고 깎기 시작했다. 한동안 목조실에는 조영재가 암쏘를 이용해 나무를 자르는 소리와 내 그라인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뭐 만드냐?”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그대로 그라인더질을 손에다가 할 뻔했다. 아, 깜짝이야. 쌩 돌아가는 날의 전원을 끄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영재가 뻘쭘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진우 생일 선물.”
그대로 토 나올 것 같다는 표정이 된 조영재와 멀뚱히 시선을 맞추다가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이렇게 크게 웃은 것 같았다. 눈물까지 핑 돌았다. 한참을 웃다가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다, 영재야.”
제자리로 돌아가며 꿍얼거리는 조영재를 따라갔다. 언젠가부터 목조실에 버려져 있었던 낚시의자를 가져와 조영재의 근처에 앉았다. 조영재는 내 뜬금없는 인사에 별말이 없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조영재는 정말 사람이 싫으면 쳐다보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굳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 건 조영재 나름의 노력해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이해는 못 해도 나를 포기하진 않겠다는, 그런 의사표시.
“너랑 친구할 수 있어서, 나는 너무 행복해.”
소름이 돋았다는 듯 어깨를 북북 문지르는 조영재가 귀여웠다. 간질거리는 말인 걸 알았다. 하는 나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정말 말해주고 싶었다. 나에게 조영재와 김수현이 어떤 존재인지. 정진우와 만나면서 서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걸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다. 정진우에겐 아직 적용이 안 됐지만 조영재에겐 할 수 있었다. 조영재의 널따란 등판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렇게 마음이 가벼운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잘 해볼게. 고마워 영재야.”
손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다가 주섬주섬 그라인더를 가져와 조영재 근처에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각재만 자르던 조영재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점심 먹었냐? 아니, 샌드위치 사왔어. 같이 먹을래? 엉. 나 하나만.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조영재가 너무 고마웠다.
평소보다 수업이 좀 일찍 끝나서 포차에 앉아 예지를 기다렸다. 네 시 정각이 되자 예지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우리 말고 한 테이블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뭐 시킬까? 너 먹고 싶은 걸로 시키자.”
“그럼, 갈매기살이요.”
갈매기살 3인분과 밥, 된장찌개를 시키고 멀거니 앉아 있었다. 항상 대화거리가 많던 예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정적이 흘렀다. 술이라도 있으면 좀 나아질까. 곧바로 알바를 가야 하는 게 아쉬웠다. 빠르게 나온 고기를 불판 위에 얹고 굴려줬다. 고기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많이 바빴어? 시험이 이번에 빡셌나봐.”
정진우가 하는 걸 봤을 땐 전공은 별로 안 빡센 것 같았는데, 예지가 교양 운이 없나 싶었다. 예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네. 하고 대답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기운이 아주 없었다. 입술을 뜯는 게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 시험 끝났으니까, 기운 내고 많이 먹어.”
먹고 모자라면 더 시키자. 고개를 끄덕이는 예지의 앞에 다 익은 고기를 몇 점 놔 주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조영재와의 일 때문에 그런지 갈매기살이 아주 꿀맛이었다. 한참 먹다가 깨작거리는 예지를 발견하고 좀 민망해졌다.
“별로 안 땡겨? 괜히 고기 먹자고 했나.”
“아니에요. 맛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예지의 밥그릇은 아직 하얬다. 얘가 나 배려해서 고기 시켰나. 그냥 막창 시킬걸 그랬나. 예지가 전에 막창 킬러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색하게 밥만 축내다가 생각보다 이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먹을래? 막창 시킬까? 해도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계산대 앞에 서서 고민하다가 먼저 나가있는 예지를 따라 나서며 한 번 더 물어봤다.
“커피 한잔하고 갈래?”
“네. 감사합니다.”
그대로 편의점 근처 카페까지 걸었다. 커피 두 잔을 시킨 뒤 예지가 앉은 자리로 가 맞은편에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예지의 얼굴이 좀 마른 것도 같았다.
“진짜 뭐 고민 있어? 내가 들어도 되는 거면, 말해 봐. 나 듣는 거 잘해.”
우울한 표정이 안쓰러웠다. 동생 같은 애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러 다녀올 때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예지가 제 앞에 놓인 라떼를 쭉 들이키더니 요한 선배, 하고 나를 불렀다.
“어? 말해 봐.”
“선배는, 여자 친구 있는 사람 좋아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자 친구 있는 사람. 내가 1학기 때 했던 짓이었다.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 친구가 있어?”
네.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몇 달 전을 반추해 봤을 때 예지가 저렇게 힘든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이해가 됐다. 그런 종류의 일은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주 안타까웠다.
“진우가 말한 것도 있고, 접어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갑자기 정진우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동기 좋아하나, 싶었다. 정진우가 반대하나. 걔는 왜 오지랖이지. 예지가 천천히 꺼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로 쥐고 있던 커피 잔을 두드리던 예지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선배.”
커피를 마시려다 잔을 든 채로 잠깐 굳었다. 머리가 멍했다. 너무 뜻밖이라 내가 들은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네가, 나를?”
“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지의 눈이 네가 방금 들은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불현 듯 정진우가 불쾌해했던 상황들이 떠올랐다. 예지의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 못 하겠다고 이야기하던 정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구나, 정진우는.
“어, 일단 고마워. 근데,”
“알아요. 선배 여자 친구 있는 거. 많이 좋아하는 거.”
그냥, 말이라도 해보고 접으려고요. 우울한 안색의 예지를 달래려다, 여기서 내가 뭔가 말을 하면 상황이 이상해질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커피를 마시던 예지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진우가 엄청 뭐라고 한 거 알아요?”
“진우가?”
“네. 걔가 여자 친구 있는 사람한테 그만 들이대라고, 아주.”
정진우가 예지의 감정을 안 뒤로 혼자 끙끙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입가가 움찔거렸다. 웃음이 날 것 같아 꾹 참았다. 방금 전에 고백을 들었는데, 웃어버리면 그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정진우의 볼을 꼬집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애꿎은 커피 잔만 쥐어뜯고 있었다.
“그때 치킨집에서도, 진우가 그러는 거예요.”
“치킨집? …아.”
“선배가 제 마음 알면 많이 힘들 거라고, 여자 친구 있는 사람한테 괜히 고백해서 심란하게 하지 말고 조용히 마음 접으라고.”
얼굴도 모르는 선배 여자 친구한테 예의 지키라는 둥 하는데 지가 뭔가 싶기도 하고, 사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요. 예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정진우를 생각했다. 이럴 땐 알바 가기가 너무 싫었다. 정진우의 걱정처럼 별로 힘들진 않았다. 예지한테 조금 미안하긴 했다. 그리고 가서 정진우를 끌어안고, 사랑해주고 싶었다.
“말이라도 하니까 후련하다.”
웃는 예지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었다. 누군가에게 고백 같은 걸 받아보는 게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예지가 부산을 떨며 선배 알바 가아죠. 먼저 일어나요. 하며 나를 일으켰다.
“어, 어. 그래. 전공 때 봐.”
예지에게 등 떠밀려 카페를 나섰다. 예지에겐 미안했지만 편의점까지 걸으면서도, 알바를 하면서도 온통 정진우 생각밖에 안 났다. 사람이 없을 때 정진우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집에 언제 올 거야?]
여느 때처럼 곧바로 메시지를 읽고 답장을 준다. 이 타이밍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왜요? 선배 끝날 때 맞춰서 편의점으로 갈까?]
응. 답장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빨리 정진우를 보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니 정진우가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 씩 웃었다. 정진우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다 같이 웃어주었다. 빨리 가자. 답지 않게 재촉하니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는다. 집 가서 얘기해 줄게. 제일 먼저 정진우에게 조영재의 일을 얘기하고 싶었다. 사이가 안 좋은 이유를 다 털어놓을 순 없으니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고민하면서 걸었다.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정진우와 식탁에 앉았다. 시원한 맥주를 앞에 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영재랑, 사이가 좀 안 좋았어.”
“영재 선배랑?”
“응.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근데 오늘 영재랑, 좀 풀린 것 같아서.”
너무 좋아. 모든 게 서툴었지만 정진우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내가 겪었던 상황이나 감정을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한참 말을 끊었다, 이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너. 예지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신나서 말을 잇다가 예지 이야기까지 나왔다. 예지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었는데 하여간 입이 방정이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어요?”
“응. 그래서 네가 그렇게 예민했구나. 했어.”
맥주를 한 모금 머금은 정진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게 굉장히 섹시했다. 내일 수업만 없었으면 내가 정진우를 그대로 덮치고 싶을 정도였다. 정진우가 맥주 캔을 잡은 내 손 위로 제 손을 덮었다. 키에 비해서도 정진우는 유독 손이 크고 길어서 내 손이 다 덮였다.
“동기 중에 모르는 애 없어요. 예지가 선배 좋아하는 거.”
그것까진 몰랐다. 신나있던 마음이 정진우의 나직한 목소리에 푹 가라앉았다. 정진우에게 잡힌 손을 조금 꾸물거렸다. 정진우가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선배는 예지한테 과하게 친절하지, 수업만 가면 선배랑 예지랑 엮으려고 난리지. 내가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없지. 좀, 스트레스였어요.”
“……내가 예지한테 그렇게 친절했어?”
“네. 이제 알았으면 안 그러면 되는데, 선배 좀 조심해요.”
“뭘?”
“선배는 너무 다른 사람들한테 다정해요. …특히 여자한테.”
다정왕 정진우가 자기 생각은 못하고 나를 지적해 왔다. 잠시 말문이 막혀 있다가 잡혀 있던 내 손을 빼내고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인 정진우의 손가락을 잡았다.
“네가 그렇게 느꼈으면, 조심할게.”
“알았어요.”
“근데, 너는 몰라도 나는, 여자애들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는 정진우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또 감이 안 잡히기 시작했다.
“여자애들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정진우의 손가락을 끌어당겼다. 손가락 마디 부분을 살살 긁다가, 깍지를 꼈다.
“네가 뭔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면, 걱정하지 말라고.”
“잠깐, 나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깍지 껴진 손을 풀어내며 정진우가 연달아 물어왔다. 나는 몰라도 선배는? 그게 뭐야? 내가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정진우는 바이일지도 모르는 이성애자이고 나는 일말의 여지가 없는 게이였다. 예지만 해도 그랬다. 예지는 나에게 연애상대가 아니었다. 정진우는 본인이 여자를 만나서 잘 모르나본데, 여자는 애초에 내 연애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랐기도 했다. 예지가 나를 좋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조차 못 했다. 우리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너는, 지금 나를 만나고 있어도 여자랑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니잖아.”
“…….”
“나는 아니야.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음. 여자는 내 연애상대가 될 수 없어. 절대로.”
“그래서? 선배는 나 만나면서 계속 내가 여자랑 뭐가 있을까봐 걱정했어요?”
갑자기 얘기가 왜 그리로 튀나 몰랐다. 당황스러웠다. 정진우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건가. 조영재의 일을 얘기하려던 게 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잠깐 머리가 아파져서 이마를 짚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너랑 나는 시작부터,”
“그게 뭐가 아니야. 선배는 지금 나를 아예 단정 짓고 있잖아. 내가 지금은 선배를 만나고 있어도 언젠간 여자를 만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끊고 정진우가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한 이야기가 왜 그렇게까지 비약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정진우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할 말 있어요? 물어오는 말투에 약간 화가 났다.
“너 왜 말을 그렇게 해. 내가 한 말은 그게 아니라.”
“말해 봐요.”
“너는 지금까지 여자만 만나 왔고, 그런 게,”
“내가 여자만 만나 봤다고 언제 그랬어요?”
뭐? 나오지 못한 물음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너, 나 말고도 다른 남자 만나본 적 있어?”
“네. 있어요.”
그러고 보니 종종 정진우의 언행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처음 만나는 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기도 했다. 조영재의 이야기가 또다시 머리를 스쳤다. 잊을 만하면 자꾸 떠오르는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너무 쪼잔했다. 말이 나온 김에 다 물어보고 털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화가 난 상태라 그런가,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다.
“언제?”
“고등학교 때요.”
“누구랑?”
“…그것까지 말해야 해요?”
솔직하기로 했잖아. 말해줘.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아주 작게, 속삭이는 것처럼 나왔다. 나를 보는 정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진우가 잠깐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알았어요. 말했다.
“그때 소품실에서 일했었는데, 같이 일했던 작업실 형이요.”
“……왜?”
“…뭘 왜야. 그냥, 만나게 됐어요.”
“그래. 그럼, 왜 헤어졌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시야에 걸리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재빨리 손을 아래로 내려 정진우의 시선에서 감췄다. 차마 정진우를 마주볼 수가 없어서 눈을 아래로 깔았다. 목이 탔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그만뒀다. 정진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천년 같았다.
“그 형이 바람 피웠어요.”
“뭐? 그 여자는…….”
“여자?”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말부터 튀어 나왔다.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의아하게 나를 살피던 정진우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심장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슨 소리예요? 여자?”
“아, 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말이 안 나왔다. 더듬거리듯, 들었어. 한마디만 뱉었다.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던 정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좀. 하고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집에 담배 냄새 배는 거 싫다고 항상 발코니로 나가던 애가 저러니 너무 무서웠다.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요?”
“…….”
“말해 봐요.”
“너랑 그, 형이랑, 작업실에서 있는 걸 당시 네 여자 친구가 보고, 이성이 나가서…….”
정진우가 하, 하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대충 싱크대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내 앞에 와 다시 앉는다.
“그래서, 그걸 언제 들었어요?”
“꽤, 됐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자신이 없었다. 정진우에게 바로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자신이 없어서였다. 내가 들은 소문이 백 퍼센트 거짓일 수도 있다는 자신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정진우를 향한 내 마음이 똑같은 크기일 수 있다는 자신이. 내가 정진우를 두고 했던 수많은 비겁한 생각들이 비수가 되어서 날아왔다. 너무 창피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선배도 그 소문을 믿었어요?”
“…….”
“솔직하자고 말했으면서.”
정진우가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방에서 외투를 챙겨 입는 소리가 났다.
“전 사귀는 사람 두고 다른 사람 만난 적 없어요.”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내가 했던 모든 고민이 후회가 됐다. 바로 말해 볼걸. 정진우를 믿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볼걸. 아무리 자책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진우의 상처받은 눈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침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정진우는 그 새벽에 어디로 간 건지 소식이 없었다. 학교로 향하면서 계속해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오는 상태에서 통화버튼부터 눌렀다. 이렇게 넘어갈 순 없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보고, 참고, 결국엔 찝찝한 상태로 다시 만나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닥친 처음을 잘 해결해 나가고 싶었다. 핸드폰에 떠 있는 정진우의 이름을 한참 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수화기에서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때부터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가장 좋아하는 이론 수업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 중간 중간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여전히 정진우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결국 교수님이 뭐라고 지적도 하셨던 것 같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백치가 된 것처럼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결국 수업이 끝나고 부리나케 정진우의 집으로 달려왔다. 나가기 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서 정진우를 기다리다가, 알바를 갔다. 계산을 하면서, 비어 있는 식품 코너를 채우면서도 실수의 연속이었다.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 한 번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이제는 전화를 걸기도 무서웠다. 자꾸만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는 통화음이 마치 나를 거부하는 정진우의 마음 같았다. 알바가 끝나고, 정진우의 집으로 갈까 하다가 우리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 걸으면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꼬박 하루였다. 연락이 되지 않은 게. 이불도 깔지 않고 냉한 바닥에 누워서 눈이 빠지게 핸드폰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맨바닥에서 잠이 들어 그런지 온몸이 뻐근했다. 잠결에도 꽉 쥐고 놓지 않았던 핸드폰을 켜 보았다.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문자 몇 개가 와 있었다.
[말도 없이 나가버려서 미안해요.]
[핸드폰 꺼져 있었던 것도.]
[이따 우리 집에서 볼까요.]
[보고 싶어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정진우의 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거지같던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매번 이러니 이젠 내가 병신 같기도 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정진우에게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내놓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어젠 입맛이 없어서 하루 종일 굶었는데, 정말 신기하게 정진우의 문자를 보자마자 배가 고팠다.
어제의 내 모습이 다른 애들도 이상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내 안녕을 물어봤다. 어제 어디 아팠어? 하는 말에 그냥 웃음으로 답했다. 아프긴 아팠다. 몸 말고 마음이. 그 아픈 마음이 어느 정도 사라지니 나의 불신으로 인해 정진우가 받았을 상처가 더욱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과부터 해야지. 내 실수로 인한 정진우의 상처가 언제 사라질지는 몰랐다. 그때까지 사과해야지.
그 새벽, 그런 일이 있고, 정진우가 나간 이후로 아침까지 괴로워하다가, 결국엔 안심했다. 정말 아니구나. 그냥 소문이 이상하게 난 거구나. 정진우에게 조금이나마 그 일을 부정하는 말을 들으니 항상 무거웠던 못난 마음 한구석이 완전히 가벼워졌다. 다 털어버린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 걸 나도 알지 못했다. 잘한다고 했는데. 노력한다고. 우리가 만난 뒤로 나는 항상 정진우를 의심했고, 혼자 괴로워했다. 그 시간들이 너무 미안했다. 일단 얼굴부터 보고 싶었다. 다시 얼굴을 보고, 정진우의 서늘하고 커다란 손에 깍지 끼고 나면 사과든 무슨 말이든 나올 거였다. 언제나 그랬듯 정진우는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그 말이 얼마나 서툴고 어설프든지 인내심을 갖고 들어줄 것이다.
수업이 끝난 뒤 학교를 나서려는데 정진우에게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조금 늦는다는 문자였다. 열 시쯤엔 도착할 거예요.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놓은 뒤 걸음을 돌려서 목조실로 향했다. 정진우에게 줄 생일 선물을 완성해 놓고 집에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형태가 어느 정도 잡힌 나무를 들고 조각했다. 노란색을 베이스로 여러 가지 톤으로 물들인 다양한 질감의 천들을 한데 잡아서 모양을 냈다. 나무색으로 칠한 조각 위로 천들이 꽃처럼 피었다. 어떻게 보면 화려했고, 어떻게 보면 소담했다. 정진우 같았다. 내 운동화를 사는 김에 조금씩 모아놓은 돈 일부를 털어서 장만한 운동화와 함께 선물할 계획이었다. 만날 까만 옷만 입는 정진우가 하얀 신발을 신는 게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샀는데, 꽤 마음에 들었다. 정진우를 볼 때마다 미리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릴 정도로 그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벌써부터 잘 어울렸다.
정진우에게 줄 선물을 다 만들고 나니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여덟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내려가야지. 정진우에게 아직은 보여줄 수 없으니 우리 과 건물에 들려 사물함에 잘 모셔놓고 학교를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단풍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정진우네 오피스텔 앞에 서서 위를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열 시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왔나. 핸드폰을 확인해 봤다.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이제 정진우를 마주하려니 가슴이 조금 술렁거렸다. 진정 좀 하려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번호 키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음식 냄새가 풍겼다.
“아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정진우와 나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앞치마를 곱게 맨 아주머니가 웃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정진우의 엄마였다. 나와 마주친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 어, 할 말을 찾지 못해서 멍하니 아주머니만 바라보다 입을 열려는데,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을 풀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우리 진우 친군가 보네? 나 진우 엄마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들어와요. 너무 자연스럽게 손짓을 하셔서 홀린 듯 들어갔다. 멀뚱히 서 있으니 아주머니가 내 팔을 잡고 주방으로 이끌었다.
“여기 앉아 있어요. 진우가 어제부터 연락이 안 돼서 와 봤는데, 진우 친구를 다 만나네.”
“……아, 네.”
“학생은 이름이 뭐야?”
당황한 나머지 아직 이름도 말씀드리지 못한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살피며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처음 만난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살가운 표정이었다. 정진우가 엄마를 닮았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실례인 것도 모르고 한참 바라봤다. 아까 마주쳤을 때 내가 웃고 계신 걸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아, 서요한입니다. 먼저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아니야. 잠깐 거기 앉아 있어요.”
정진우의 말대로 아주머니는 열 살 차이의 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젊어 보였다. 인덕션 위에 올려놓은 냄비 근처에서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진우랑 많이 친한가봐? 집 비밀번호도 알고 있고.”
멍하니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엄마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에, 예. 어설프게 나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진우의 엄마한텐 좀 잘 보이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텄다는 생각에 좀 우울해졌다.
“진우랑 과외를 해서요. 과외 시작할 때 진우가 알려줬어요.”
“……과외? 독일어?”
“네.”
“독일어 전공이에요?”
“아니요. 진우랑 같은 괍니다.”
“그래요? 독일어는 어디서 배웠어?”
아주머니의 뒷모습에서는 정진우와 나 둘이서 있을 때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엄마의 분위기였다. 잠깐 정진우가 부러웠다. 내가 궁금한지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아주머니의 등이 따스해 보였다. 대답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대답해드려야지. 좀 똘똘해 보일 수 있도록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어렸을 때 살았습니다. 독일에서.”
“어, 그래요. 부모님은 뭐 하셔?”
“…두 분 다 안 계십니다.”
아, 미안해요. 사과하는 아주머니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부모님 관련해서 말을 하면 항상 이런 분위기가 됐다. 말하는 나는 괜찮은데, 사과 받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 잠시간 침묵하셨던 아주머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우가 집에 오면 친구 얘기를 워낙 안 해서……. 집에서 정진우가 어떻게 있을지 궁금했지만 꼬치꼬치 물어보면 괜히 이상해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시던 게 다 됐는지 불을 끈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벗어 식탁에 내려놓으며 나를 곁눈으로 바라봤다.
“지금은 혼자 살아요?”
“네, 혼자 삽니다.”
“어디서?”
“이 근처 빌라에 전세방 얻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긴 자주 오나봐?”
집이 진우 혼자 사는 것 같진 않은데, 얘가 현주랑 헤어지고 여자 친구 없는 것 같더니 언제 만들었나 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주머니가 어떤 부분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내 물건이 뭐가 있었지. 떠올려 봤다. 사실 둘 다 남자라 정진우랑 내 것이 쉽게 구분되진 않을 거였다. 옷이나, 속옷, 양말 같은 것 말고, 뭐가 있지. 칫솔. 조금씩 늘어난 식기. 얼마 전 사다놓은 내 사이즈의 슬리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자주 안 온다고 잡아뗄까, 고민하던 찰나에 아주머니가 주방을 나서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진우 기다릴까 했는데, 친구랑 약속 있는 거면 난 먼저 갈게요.”
“아, …조금 있으면 진우 올 것 같은데. 기다리셔도,”
“아니야. 진우 걔는 엄마 연락은 안 받으면서 친구랑은 연락이 됐나 보네?”
애가 전화기도 꺼져 있고, 걱정돼서 와 본 거예요. 진우 오면 엄마한테 전화 한 통 하라고 말해 줘요. 어느새 외투를 챙겨 입고 가방을 들고 계신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다. 현관 앞까지라도 배웅하려고 신발을 신었더니 그냥 있어요. 하고 아주머니가 내 어깨를 살짝 짚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서서 문이 닫히는 걸 구경만 했다.
현관 밖으로 띵 하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아주머니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지. 괜찮은 건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소파에 앉아 아주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겼다. 별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던 것 같다. 세 번, 네 번씩 기억을 돌려 본 뒤 그제야 안심했다.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괜찮겠지. 시종일관 웃고 있었던 아주머니의 얼굴을 한 번 더 떠올린 뒤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괜찮겠지.
정진우는 먼저 보냈던 문자대로 딱 열 시 정각에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무슨 냄새예요? 하고 물어보는 얼굴이 조금 수척해서 가슴이 아팠다.
“어, 부엌에 찌개랑 반찬거리 있어. 너희 엄마 왔다 가셨어.”
“……엄마요?”
“어. 집에 오자마자 딱 마주쳐서 완전 놀랐어.”
“엄마랑 마주쳤어요? …엄마가 무슨 말 안 했어요?”
“너희 어머니? 아니. 그냥 친구냐고 하셔서 그렇다고 하고, 뭐 어디 사냐, 너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냐. 그런 거 물어보셨는데.”
“다른 얘기는? 이상한 점 없었어요?”
“응. 그냥 좀 얘기하다가, 친구랑 놀 거면 먼저 가 보신다고. 아, 너 엄마한테 연락 드려. 걱정하시더라.”
정진우가 이상할 정도로 꼬치꼬치 물어봤다. 왜 그래? 물었더니 대답은 안 하고 곧장 부엌으로 향한다. 따라가 봤다. 아주머니가 만들어놓고 가신 찌개며 반찬거리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정진우에게 다가가 마른 등을 끌어안았다. 맨투맨 위로 불거져 나온 날개 뼈에 입술을 묻었다.
“미안해.”
정진우의 느린 숨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맨투맨 위로 전해지는 정진우의 체온을 느꼈다.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선배가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문, 저도 알고 있었어요.”
공연 하는 사람들은 아마 거의 다 알고 있을걸. 워낙 대단했어야지. 정진우가 나직한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이후, 처음으로 긴 대화를 할 것 같았다. 등 돌린 있던 정진우가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고 부엌을 나왔다. 나보다 키가 약간 큰 정진우에게 안긴 채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정진우가 내 가슴께에 귀를 대고 말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소문이라 진짜 억울했는데.”
“…….”
“난 또 그거를 그때 사귀었던 형 친구한테 한 대 맞으면서 들었거든.”
웃기지. 정진우의 웃음소리가 가슴 위에서 울렸다. 정진우가 얼굴을 돌려 티셔츠 위로 내 유두 부근을 살짝 깨물었다. 티셔츠 한쪽이 정진우의 침과 숨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얼굴 아는 사람들한테라도 그거 아니라고, 소문 완전 반대로 났다고 정정하려고 했지.”
“……그런데?”
“근데. 그 형이 우리 학교 앞에 찾아와서, 울면서 비는 거야.”
정진우의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께에 머물던 정진우가 고개를 올려서 내 목에 입 맞췄다. 목을 타고 턱 선까지 올라온 얼굴이 턱 끝에 입술을 묻었다.
“나는 어차피 공연 일 안 할 거니까, 한 번만 입 다물고 있어 달라고. 아웃팅 당한 것도 힘든데, 양다리 걸친 것까지 밝혀지면 자기 한국에 못 있는다고.”
“…….”
“그러면서 넌 어차피 이거 아니라도 이상한 소문 많이 돌지 않냐고. 웃기더라. 여섯 살이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무릎 꿇고 울면서 비는데. 이게 현실인가 싶기도 하고.”
고등학생 정진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이상한 소문이 돌고, 화제의 중심에 있어본 적이 없어서 짐작은 잘 안 갔다. 정진우를 백 퍼센트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그게 슬펐다.
“내가 그 형 왜 만났게.”
“…….”
“엊그제 선배 말에 화가 났는데, 왜 그렇게 화가 났나 혼자 생각해 보니까, 정곡을 좀 찔렸어.”
“……내 말?”
“응. 선배 말이 맞아. 나 여자 만날 수 있고, 선배나 그 형이랑은 다르고. 그런 거 맞아.”
이로 귓불을 잘근잘근 씹던 정진우가 잠시 웃었다. 솜털 같은 웃음소리에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그 형 만날 때도, 그랬어. 그냥 남자가 나 좋아한다는데 거부감은 없고. 마침 좀 궁금하기도 했고. 한번 만나볼까. 그냥 가볍게 생각했어.”
“…….”
“그래서 몰랐지. 형은 선배처럼 남자밖에 못 만나는데, 나랑 만나면서 혹시 남자 좋아하는 거 들키면 어떡하나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대. 근데 나는 믿을 수가 없었대. 어차피 나는 들켜도, 그냥 다른 여자 만나고,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억지로 안 되는 스킨십도 하면서 그 누나를 만났대.”
정진우가 고개를 들고 내 코끝을 깨물었다. 예쁘게 웃는 정진우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눈가로 입술이 다가왔다. 감은 눈을 따라서 입술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정진우가 한숨처럼 말했다.
“선배는 나한테 그러지 마…….”
“…….”
“선배가 그러면, 나는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힘들 것 같아.”
정진우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뺨과 뺨이 맞닿았다. 좀 더 닿아 있고 싶었다. 정진우와 한 몸이 되고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나도 안 그럴게. 선배가 불안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나는 너한테 못 그래. ……내가 어떻게 그래.”
“응. 알아요. 나도 어디 안 가.”
내 머리칼에 입 맞추며 정진우가 말했다. 언젠가 악몽에서 깬 뒤 내가 정진우에게 애원했던 게 생각났다. 넌 나 버리지 마. 나 버리고 가지 마. 정진우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에게 확신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다른 이들과 같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정진우를 바라봤던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정진우는 나 같지 않겠지, 나랑 헤어져도 잘살겠지. 지레 겁먹고 있었다. 정진우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움직이는 속눈썹이 볼을 간질였다. 용감한 정진우. 정진우는 항상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줬다. 그게 힘든 일인 걸 알았다.
“같이 있자. 계속.”
나에게 몸을 붙이고 있는 정진우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아팠다.
통통한 입술이 계속해서 내 얼굴로 떨어졌다. 간지러워서 조금 웃었다. 정진우도 같이 웃었나, 볼록 튀어나온 볼 살이 둥글게 내 뺨에 닿았다. 어떨 땐 나보다 형 같다가도 이럴 땐 애 같았다. 정진우의 애 같은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찡해졌다. 나에게 전해져 오는 온기가 너무 좋아서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멈췄으면 좋겠다고 잠시 하늘에 빌었다.
침대에 누워서 정진우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정진우의 생일에 같이 할 것들을 속으로 정리했다. 우선 정진우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물어봐야 했다. 학교와 집에 각각 모셔놓은 생일 선물을 생각하니 웃음이 비죽 비어져 나왔다. 정진우가 기뻐해줬으면. 정진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아주 뿌듯하겠지. 주책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진우가 너무 좋은걸.
팬티 한 장 걸친 채 맨몸으로 나온 정진우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언제나 눈에 걸렸던 문신을 쓰다듬었다. 많이 아팠겠지. 고등학생 정진우가 안쓰러웠다. 정진우가 내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얘는 스킨십을 엄청 좋아하고, 또 능숙해서, 치대는 몸을 받아낼 때마다 아주 감사했다. 나는 사실 남들과 진득하니 신체적 접촉을 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정진우를 안고,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몰라서 주저하다 보면 어느새 정진우가 먼저 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고, 허리를 끌어안고는 했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아주 궁합이 좋았다.
“너, 다음 주 토요일에 생일이잖아.”
“응. 같이 있을까?”
먼저 물어와 주는 정진우가 너무 기특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나는 정진우를 대할 때 가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건가, 느끼곤 했다. 얘가 뭘 하든 잘됐으면 좋겠고, 좋은 것만 봤으면 좋겠고, 생각이 너무 기특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다 이런 감정을 느낄까. 사람은 정말 대단했다. 정진우의 머리에 입술을 묻고 응, 웅얼거렸다. 정진우가 잠시 소리 내어 웃었다.
“잠깐 집에 갔다가 늦지 않게 올게요.”
“으응.”
“저녁 같이 먹자.”
으응. 대답만 반복했다. 정진우가 나를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제 위에 나를 올려놓고 엉덩이를 툭툭 친다. 정진우의 손길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허리가 찌릿했다.
“씻고 나와요.”
“으응.”
“……선배, 섰는데.”
“으응.”
“만져 줄까?”
아아니. 하고 벌떡 일어났다. 오늘 정진우와 섹스를 하고 싶진 않았다. 세울 거 다 세워 놓고 이러는 것도 웃기긴 했지만.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는 내 뒤통수에 정진우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닿았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오전 수업을 마친 뒤 김수현, 조영재와 밥을 먹었다. 조영재와 서먹해진 지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기분이 새로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돈가스를 조지고 있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물어봤다.
“맛있어?”
돈가스를 마시던 김수현이 콜록거렸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나를 비난하는 김수현의 입가에 돈가스가 붙어 있는 게 굉장히 안쓰러워 보였다. 휴지를 내밀었다. 내 손에서 휴지를 휙 가져간 조영재가 본인의 입을 닦으며 툴툴댔다.
“김수현 저거 이따 오후 수업 때 먹을 거야.”
“아아.”
고개를 끄덕이고 내 돈가스에 집중했다. 김수현이 제 입을 한 번 쓸더니 조영재를 맹렬하게 째려보았다. 조영재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돈가스를 썰어서 입에 넣다가 웃음이 터졌다.
“오늘 서요한 왜 저러냐.”
“몰라. 오늘만이 아니야. 쟤 요즘 나사 빼고 다님. 저번엔 나한테 뭐랬는지 아냐? 너랑 친구할 수 있어서, 나는 너무 행복해.”
김수현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손가락질했다. 내 흉내를 내는 조영재가 이럴 땐 아주 얄미웠다. 보물처럼 꼭 쥐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은 채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던 김수현이 소리쳤다.
“왜 나한텐 그런 말 안 해!?”
조영재가 김수현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흘겨봤다. 진지한 얼굴로 말해주었다. 수현아, 너랑 친구할 수 있어서 난 너무 행복하다.
말해달라고 해서 해줬더니 김수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징그러워. 소름이 돋은 듯 팔뚝을 문지르는 김수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돈가스 체할까봐 진심이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오후 수업이 있는 조영재와 김수현을 배웅하고 집으로 내려왔다. 며칠 정신이 사나워서 받아 두었던 도면을 하나도 치지 못했다. 알바 가기 전까지 부리나케 해야 했다. 한창 집중해서 도면을 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진우의 이름만 떠도 스멀스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 왜?”
-집이에요?
“응. 우리 집.”
-으응. 알바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요.
“알았어.”
-아, 그리고 나 다음 주 금요일에 가족 보러 가려고.
수화기를 통해 듣는 정진우의 목소리가 조금 신나 보였다. 덩달아 신났다. 왜? 물어보니 하하 웃는다.
-생일에 선배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네 생일날?”
-응. 엄마한테 전화하는 김에 얘기 했더니 그러라고 하네.
정진우와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바보 같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참 종알종알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정진우가 문득 물었다.
-그때, 우리 같이 어디라도 가 볼까?
“어디?”
-선배는 가고 싶은 데 없어요?
고민했다. 내가 가고 싶은 데. 사실 정진우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래도 물어봤으니까. 어디 가자고 할까. 한국에 와서는 서울 주변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어디가 좋은지를 잘 몰랐다. 정진우에게 넌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물어보았다. 정진우가 잠시 말을 끌더니, 춘천 다녀올까요. 하고 물어왔다.
“춘천? 가본 적 있어?”
-작년에 갔다 왔는데, 가깝고 좋더라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놀다 오자.
좋아. 너랑은 어딜 가도 좋을 것 같아. 아직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뱉기엔 좀 창피했다. 그냥 마음을 담아서 대답했다. 응.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진작 말할걸. 조금만 덜 겁먹고 대화를 시도했으면 우리는 조금 더 일찍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다. 어영부영 흘려버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아냐, 지금부터 잘하면 돼. 내가 아무 것도 못 한 시간만큼, 그보다 더 정진우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온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더 길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진우의 생일이 점점 다가올수록 마음이 술렁거렸다. 여행 가기 전날처럼 들떴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독일로의 이민이 대강 정해진 뒤 우리 가족은 몇 달 동안 가서 정착할 준비를 했다. 엄마를 따라 짐도 싸 보고, 아빠가 누군가와 전화하는 것도 엿들으면서 꼭 요즘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잠을 자려고 하면 눈이 말똥거리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비행기를 탈 땐 내가 정말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에 감격했던 것 같다. 찔끔 나온 눈물을 손으로 비벼 닦고,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가 손가락을 잡은 내 손등을 토닥였던가.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독일에서 살 때의 기억은 전부 흐릿했다.
주말에는 정진우와 함께 춘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형 차를 빌려 온다는 걸 말렸다. 나 기차 타보고 싶어. 정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키스했다. 입술이 달았다.
정진우의 생일 전날이 되면서부터는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 이러다가 심장병 걸리는 거 아니야. 약간 진지해졌다.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정진우의 생일선물을 우리 집까지 옮겨 놓았다. 알바 끝나고 들어가는 길에 잠깐 들려 운동화와 함께 정진우의 집에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편의점에 사람이 붐볐다. 한창 정신없이 일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바쁘니 시간이 빨리 가서 좋았다. 한산해진 김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진우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저 가족 보러 왔어요. 내일 아침에 갈게요.]
[우리 집에서 자고 있어요. 일찍 갈게.]
알았어. 대답하고 휘파람을 휘휘 불었다. 나는 휘파람을 굉장히 못 불었다. 정진우의 문자는 나를 휘파람 고수로 만들었다. 처음 정진우를 봤을 땐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정진우와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화해하고, 생일을 함께 보내고, 여행을 가고. 마법 같았다. 가끔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뺨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현실을 살고 있었다. 정진우와 함께.
편의점 가는 길에 선물가게에 들러 구입했던 커다란 쇼핑백 안에 선물을 채워 넣고 정진우의 집으로 향했다. 자기 전에 카드도 쓸 생각이었다.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해, 진우야. 너의 서른 번째, 마흔 번째 생일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씻고 식탁에 앉아 노트 위에 계속해서 써 내려가던 글을 펜으로 북북 그었다. 내용이 정진우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았다. 고민하다가 그냥 담백하게 쓰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 빈 카드에 정성들여 글자를 써 넣었다.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해, 진우야. -요한>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쇼핑백 한구석에 카드를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정진우가 오면, 끌어안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 줘야지. 정진우의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정진우의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정진우의 생일에는, 걔 생일이라 그런가 알람이 없어도 눈이 반짝 떠졌다. 기분이 좋아서, 막 웃으면서 일어났다. 열 시였다. 많이 잤네. 정진우가 아직 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언제 올 수 있냐는 문자를 하나 남겨놓았다. 씻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직 잠잠했다. 늦잠 자나. 생각하며 집에서 밥 맛있게 먹고 오겠지만, 나도 뭔가 해주고 싶어 미역국을 끓였다.
내 생일마다, 엄마 생일마다 항상 끓여 먹고는 해서 미역국 하나는 곧잘 했다. 내 생일 때 정진우도 맛있게 먹었으니 이번에도 맛있게 먹을 것이다. 간단히 점심을 함께하려고 음식 냄새에 슬슬 배가 고파지려는 걸 참았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다가, 책도 좀 보고. 정진우의 책상 위를 뒤적거려 보기도 했다. 라이트박스 위에 트레이싱지가 여전히 널려 있었다. 지금 작업실에서 하고 있는 작품이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끝나면 가장 먼저 보여주기로 약속했다. 휘갈긴 글씨에서 정진우의 성격이 보였다. 괜히 애틋해져 글씨를 한 번 쓰다듬었다.
아늑한 방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왜 안 오지. 이렇게 늦을 거면 연락을 했을 텐데. 슬슬 정진우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핸드폰 화면을 잠시 보다가 정진우의 이름을 누르고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한참 신호음만 가다가 결국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한 번 더 걸어보았다. 받지 않았다. 책상 위를 손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쓸었다. 얇은 종이가 몇 장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번 더 걸어보았다. 역시 받지 않았다. 무슨 바쁜 일이 생겼나. 소파로 돌아가 몸을 묻었다가, 오 분도 안 되어 벌떡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보았다. 정진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면 손을 흔들어주려고 골목 끝만 바라보았다. 선물을 전해줄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깥바람을 조금 쐬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발코니에 나온 게 잘못이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창문을 닫은 뒤 방 안에 들어왔다. 정진우의 카디건을 걸치며 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내가 저렇게 오래 있었나. 흥분해서 추운 줄도 몰랐나보다. 흘러내리는 소매를 잠깐 걷어 올리고, 잠깐 고민하다 이번엔 밖으로 나갔다. 슬리퍼에 맨발을 대충 꿰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핸드폰을 챙기지 않은 걸 깨달았다.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내버려두고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손에 꼭 쥐었다. 혹시 정진우에게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까.
집 앞을 한동안 서성였다. 잠깐 근처 편의점에 들러 담배도 사 왔다. 항상 끊으려고 하는데, 잘 안 됐다. 의지박약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담배가 가장 생각났다. 지금처럼. 사온 담뱃갑의 포장을 벗기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오랜만에 피웠더니 머리가 약간 띵했다. 까만 화면을 유지하고 있는 핸드폰을 켜고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막 꺼진 액정에 뜬 시간을 속으로 되새겼다. 다섯 시 반. 정진우가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분명 일찍 온다고 쓰여 있었다. 이렇게 늦을 거면 어떻게든 연락을 줬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후로는 초조했다. 사고가 났나. 아니야. 집에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어.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꾸만 드는 안 좋은 생각들을 털어버리려 머리를 세차게 저어보았다. 한 번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니 자꾸만 담배가 당겼다. 두 개비째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연기를 마셨다. 불꽃이 타들어 가는 걸 멍하니 보다가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보았다. 받지 않았다.
저물어가던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밤이 되었다. 전원 버튼을 꾹 누르니 핸드폰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아홉 시였다. 얼마나 전화를 걸어 보았는지, 배터리가 거의 나가기 직전이었다. 추위에 하얗게 질린 손이 오므라든 채로 잘 펴지지 않았다. 발에는 감각이 없었다. 양말 신고 나올걸. 잠깐 실없는 생각을 했다. 담뱃갑을 열어보았다.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아까 산 건데, 얼마나 피웠나 싶어서 잠깐 웃음이 나왔다.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방에 들어와 충전기를 꽂아 놓고 지갑을 챙겼다. 정진우의 집이 어디라고 했더라. 충전이 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조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영재야. 1학년 애들 집 주소 지금 알 수 있는 방법 없냐. 아니면 집 전화번호나.”
-지금? 왜?
“……잠깐, 필요해서.”
-나야 모르지. 네가 학생회니까 더 잘 알 거 아니야.
아.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었으면 내가 학생회인 것도 까먹고 과대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유를 묻는 조영재에게 나중에 연락한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충전기와 핸드폰을 마저 챙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학생회실에 학년별 연락처가 있었다.
학교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몰랐다. 학생회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혹시 정말로 오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어떡하지. 나한테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 뭐가 있지. 각종 어두운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몇 번 손을 삐끗한 뒤 문을 열고 뛰어들어 철제 서랍을 하나둘 열어보았다. 맨 마지막 칸에 종이뭉치가 있었다. 완전히 빼내고 한 장씩 들췄다. 일 학년, 일 학년. 정진우의 이름을 확인했다. 집 전화번호는 적혀 있지 않았다. 주소를 외웠다. 서울시 XX구 XX동……. 대충 열려 있는 서랍에 종이를 구겨 넣고 학생회 실을 나섰다. 학교를 내려오며 지갑을 확인했다. 오천 원. 택시 타기엔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내가 지금 현금 카드에 얼마가 남았지. 은행에 들러 이만 원을 뽑았다. 오늘따라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초조하게 손을 흔들었다. 얼마 후 내 앞에 멈춘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씀드린 뒤 전화를 한 번 더 걸어보았다.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멍하니 듣다가 음성이 끊긴 걸 알고 핸드폰을 두드려 봤다. 배터리가 나간 채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런 것까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택시에서 내려 뛰고 싶었다. 정진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일 분 일 초가 지옥 같았다.
고즈넉한 동네에 차를 세운 기사님에게 만 오천 원을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시려는데 기다릴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여긴가. 담이 높은 주택이었다. 급해서 일단 정진우네 집까지 왔는데, 막상 대문 앞에 서니 어떻게 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오버하는 건가. 정진우는 아무 일도 없는데.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미 꺼져버린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진우가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걱정돼서 와 봤다고 하자. 마음먹은 뒤 초인종을 누르고 조금 기다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더 꾹 눌러봤다.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랑 어디 간 건가. 핸드폰 챙기는 걸 잊었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손가락에 힘을 주고 눌러 보았다. 조용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 담벼락에 주저앉았다. 조금 허탈해져서 하하 웃다가, 정말 사고가 나서 가족들이 다 거기 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어졌던 몸이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가족과 어디를 갔든, 정말로, 아니겠지만, 사고가 났든 다른 일이 있었든 정진우의 얼굴을 봐야 이 불안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그대로 대문 근처에 앉아서 누구라도 오기를 기다리다가, 핸드폰 생각이 나서 근처 편의점을 찾아 충전을 맡기고 집 앞에 다시 돌아와 앉았다. 한나절 연락 안 된 것 가지고, 다 큰 남자앤데. 오바야. 소리 내 말해 보았다. 웃어보기도 했다.
충전을 맡긴 핸드폰을 찾아서 전원을 눌러 보았다.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핸드폰만 바라보며 정진우의 집까지 걸었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조영재에게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내가 연락처 물은 걸 두고 이유를 추궁하는 메시지였다. 다른 게 없나 일일이 확인을 하고,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정진우의 생일이 막 지나고 있었다. 열두 시 일 분으로 바뀐 시계를 멍하니 보다가, 꺼진 액정을 다시 켜서 또 보다가, 결국엔 아무도 오지 않는 집 앞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집에서 기다리자. 기다리다 보면 무슨 연락이든 오겠지. 혹시나 싶어서 편의점에 들러 펜을 하나 빌렸다. 주머니를 털어 나온 영수증 뒷면에 이름과 연락처, 간략한 내용을 적은 뒤 정진우네 집으로 돌아가 우체통에 넣어 놓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떤 연락이든 오겠지. 버스를 타고 최대한 집과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 걸었다. 집에 들어가면 정진우가 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쌩 쇼야. 손을 들어 얼굴을 찰싹 내리쳤다. 무서운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 한다. 정진우에겐 어떤 나쁜 일도 없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해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 내가 나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신발을 벗으려다, 내가 슬리퍼 차림이었던 걸 이제야 알아챘다. 발등에 피가 맺혀 있었다. 하하. 열없이 웃었다. 터벅터벅 걸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커피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그곳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문득 오늘 정진우와 다녀오기로 한 춘천 생각이 났다. 춘천. 저번 주, 정진우와 웃으면서 했던 대화가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졌다.
알바 가기 전까지 핸드폰만 보다가 알바 시간에 맞춰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루만 기다리면 어떤 소식이든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모른 채로 시간을 채우고 비척비척 걸어서 다시 정진우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었다. 이틀째 불을 켠 채로 뒀다는 것이 생각났다. 형광등을 끄고 쓰러지듯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한숨도 못 자서 그런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핸드폰 전원을 눌러 봤다가, 정진우에게 한 번 더 전화를 걸어 봤다가를 반복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핸드폰만 보던 눈이 빠질 듯이 아파졌고, 목이 칼칼했다. 살갗에 천이 스칠 때마다 조금씩 아팠다.
학교에 갈 때쯤엔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업 시작도 상관 안 한 채로 학과 사무실에 달려갔다. 조교님은 뭔가 알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조교님이 웃으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요한! 웬일이야?”
“안녕하세요. 저,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혹시 저희 과 1학년 정진우 소식 들은 거 없으세요?”
“진우? 아니?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교님이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이틀 동안 연락이 안 돼서요. 라고 얘기하면 나를 미친놈으로 생각하겠지. 지금 미친놈이 맞긴 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둘러댔다.
“아, 아니에요. 혹시 진우 소식 알게 되시면 저한테 말 좀 해주세요.”
“그래, 그래. 알았어.”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학과사무실을 나섰다. 오후에 1학년 전공이 있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오늘도 정진우를 못 보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정진우네 집에 한 번 더 가볼까. 혹시 부모님도 집에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정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이상한 생각만 자꾸 하는 머리를 퍽 때렸다. 귀가 윙윙 울렸다. 숨이 좀 뜨거운가, 싶을 때 1학년 애들이 한명씩 들어와 인사했다. 강의실 안에 모여 있는 애들을 잡고 말했다.
“혹시 너희 중에 주말에 진우랑 연락한 애 있어?”
“진우요? 아니요?”
“토요일에 진우 생일이어서 축하 연락하려고 했는데, 진우 전화 안 받던데.”
왜요? 물어보는 애들을 뒤로 하고 학교를 나섰다. 정신없이 달려 집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초조하게 정진우가 움직였을 동선을 생각해 봤다. 대강 짐작 가는 곳 근처의 병원을 하나하나 검색하고 전화를 돌렸다. 한동안 질문만 반복했다. 예, 여보세요. 거기 혹시 지난 주 토요일에 정진우라는 사람이 접수한 적 있나요?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의, 스무 살인데, 생년월일은 XX년 10월 28일, 아, 예.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시 정진우네 부모님이 계시나 가 볼까. 주소가 뭐였더라. 가물가물했다. 문득 알바 가야 하는데. 하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이 세 겹, 네 겹으로 흔들렸다. 여섯 시가 지나 있었다. 늦었다.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누가 머릿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잠깐 눈을 감고 통증을 가라앉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의 진동을 느끼고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진우야?”
-뭔 개소리야. 야 서요한 너 왜 수업도 안 오고,
시끄럽게 울리는 조영재의 목소리를 듣다가 핸드폰을 손에서 툭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는데 갑자기 손등에 물방울이 툭툭 맺혔다. 조용한 핸드폰을 건드려 봤다. 아직 통화 중이었다. 어느새 조용해진 핸드폰을 들고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영재야.”
-너 뭐야. 왜 그래.
“진우한테, 무슨, 무슨 일이 생겼나봐…….”
-뭐? 야 너 어디야.
“진우, 진우가 어디에도 없어. 진우가,”
-야, 서요한 정신 차리고 너 어디냐고.
“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몰라. 어디에도 없어.”
-집? 너 정진우네 집이야?
“진짜 사고라도 난 거면, 나 어떡해?”
-정진우네 집이 어디야, 시발. 야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뚝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영재야 나 어떡해야 하냐. 영재야, 나, 진우가…….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턱에 한참을 맺혀 있다 허벅지 위로 자국을 남기며 스며드는 물방울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엄마가 눈감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 마른 손목,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삭은 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 가장 큰 공포감이 또다시 나를 엄습했다.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을 퍽, 두드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비틀비틀 걸었다. 정진우네 집에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막 밖으로 나서는데,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조영재와 마주쳤다. 조영재의 상기된 얼굴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정면에 위치한 형광등의 파리한 불빛이 눈을 직격했다. 잠깐 눈살을 찌푸리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생각했다. 정진우.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이었다. 팔에는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다. 핸드폰부터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바늘이 뜯긴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일 층 로비를 걷다가 안내 센터를 발견하고 잠깐 멈췄다. 여기가 어딘지부터 물어봐야지. 그래야 정진우네 집을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막 들어가려는데 거센 힘으로 누군가 내 팔을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뒤를 휙 돌아보았다. 화난 얼굴의 조영재가 시야에 잡혔다.
“야 이 시발 미친놈아.”
“잠깐, 나 저기서 뭐 좀 물어보게 놔 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힘겹게 말을 마치자 조영재가 내 팔을 낚아챈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조영재를 떨쳐내려고 팔을 흔들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다짜고짜 나를 끌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조영재의 팔을 자유로운 손으로 퍽 때렸다.
“좀 놔 봐. 나 물어볼 거,”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무슨 소리야, 잠깐,”
“제정신이 아니니까 지금 꼬박 하루 만에 눈 떠서 이 지랄하는 거겠지.”
“……하루?”
조영재가 뭐라고 욕을 하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조영재에게 이끌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7층을 누른 조영재가 나를 한심한 눈으로 훑었다.
“그래 병신아. 미친놈이 감기 걸려서 기절을 하냐?”
“내 핸드폰, 어디 있어?”
입을 딱 벌리고 나를 보는 조영재의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연락 온 데 없어?”
“……일단 따라와.”
조영재에게 끌려 병실까지 돌아왔다. 문을 여니 환자들이 나를 이상한 놈 보듯이 흘깃댔다. 비어 있는 침대를 보니 그럴 만했다. 하얀 천 한편에 피 칠이 되어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 불렀어요. 옆 침대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조영재가 나를 퍽 밀어 침대에 앉히고 보조침대에 앉았다.
“네가 지금 왜 이러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진우가,”
“정진우 무사한가보다.”
조영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뭐? 네가 어떻게, 물어보려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멀뚱히 조영재를 보고 있었다. 나를 한참 보던 조영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 학교 가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조교님도 찾아 갔었어.”
“…….”
“아침에 정진우네 엄마가 왔다 갔었대.”
“진우네, 어머니가,”
“자세히는 조교님이 말 안 해줬고, 정진우 자퇴한다는데.”
너한테 연락 온 건 없어. 조영재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진우의 이름을 눌러 보았다. 핸드폰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심스레 귓가에 가져다댔다. 정진우의 번호가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종료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다. 똑같았다. 조영재의 욕설이 가까워졌다가, 곧 멀어졌다. 메시지 함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병실 한가운데 앉아 있었고, 앞에선 조영재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눈을 한 번 더 감았다가 떴다.
정진우가 아무 데도 없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