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회의실의 불을 껐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대형 TV 화면 안에서 작가 ‘융’이 알몸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앞으로 모은 양손 위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는 채였다. 본인이 나체인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마 위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까만 머리칼, 사슴 같은 목, 직각으로 뻗은 어깨 밑으로 문신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 무엇을 새겼는지 확인할 순 없지만 상반신 여기저기에 빼곡하게 글이며 그림이 채워져 있었다.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복부 아래 적나라하게 보이는 성기에도 섹슈얼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몸매여서 그런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된 게 한눈에 보이는 허벅지가 불끈 움직였다. 들려 있던 한쪽 발이 천천히 땅을 디뎠다. 아주 느린 걸음이었다.
“와. 죽이네요.”
넋을 놓은 채로 영상을 보던 김지수 팀장이 중얼거렸다. 방금 한 말이 본인의 입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분명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퍼포먼스 자체를 반대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막상 영상을 보자 마음에 들었는지, 별다른 트집은 잡지 않는다. 근데, 저렇게 나체는 좀. 우리나라에선 무리일 것 같은데. 그죠? 동의를 얻는 물음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여전히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이미 끝까지 본 뒤인 큐레이터님이 대꾸 없이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깝지, 이것들아. 하는 눈빛이었다. 눈을 감고 팀장들의 의견을 듣던 관장님이 책상을 탁 쳤다.
“저게 뉴욕에서 한 퍼포먼스라고?”
“네, 저번 달이에요.”
큐레이터님이 나직하게 답했다. 크흠.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탁 낀 관장님이 말했다.
“저대로 가자.”
“안 돼요!”
가자―와 동시에 김 팀장의 외침이 회의실을 울렸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왔나 보다.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섯 명밖에 없는 좌중을 둘러보며 김 팀장이 재차 반대의 의견을 냈다.
“이거 분명히 뒷말 나와요. 뉴욕이면 몰라도 우리나라는 안 돼.”
“김 팀장은 지금 어떤 시대에 사는 거야? 21세기야 21세기.”
저 정도 가지고 뒷말이 왜 나와. 지금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중얼거리는 큐레이터님도 저 퍼포먼스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내 손을 꼭 잡으며, 요한아. 내가 저 퍼포먼스 허가받을 수 있을까? 자신 없이 말했던 것이 문득 생각나 픽 웃었다. 홍보팀의 격렬한 반대에도 기죽지 않고 궁싯거리던 큐레이터님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죄송해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직하게 말했다. 알면 됐어. 날 보는 눈이 그렇게 말했다. 좀, 회의할 때 웃기지 말라니까. 자꾸 웃음이 나와서 말을 하기 힘들었다. 천천히 일어나 회의실의 불을 켜고 TV의 전원을 끈 뒤 말했다.
“일단, 작가 측과 속옷까지는 협의를 한 상태예요.”
“내가 김 팀장이 반대할 줄 알았다니까.”
근데, 김 팀장 봐봐, 관장님도 좋아하시는 것 같고, 송 팀장도 보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자기만 지금 이러는 거잖아. 어떻게 잘 홍보팀에서 처음부터 버무려 주면 괜찮지 않을까? 저기서 팬티만 입는다고 생각해 봐. 그것도 좀 아니지 않아?
장황하게 늘어지는 큐레이터님의 애절한 음성이 회의실을 외롭게 울렸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관장님,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고 웃고 있는 운영팀장, 도끼눈을 뜨고 안 돼요. 거시기는 가려야지! 외치는 홍보팀장을 훑은 눈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닿았다. 요한아, 망했나봐. 눈이 슬펐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작가 측과 협의를 본 게 다행이었다.
“작가 쪽에서도 생각보다 쉽게 오케이를 해서, 퍼포먼스 자체에 문제가 없다면 속옷만 입고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정은 전시 기간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총 열여덟 번을 원하고 있습니다. 해가 떠 있을 때, 사이에 하루 정도의 텀만 있으면 시간과 날짜는 상관없고, 아침에 눈이나 비가 내리면 그대로 그날 퍼포먼스는 취소할 예정이라고 했고요. 작가가 이제 이틀 후에 입국하는데, 입국한 다음 날 한 시에 미팅 잡아놨습니다. 그날 간단히 미팅 마치고 바로 동선 한 번 그려보고 싶답니다. 그리고 전시 종료까지 미술관 측에서 도우미 한 명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미술관 동선 파악이나 퍼포먼스 리허설 등 작가가 활동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보조 역할 해 줄 사람을 원하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가 작가 쪽에서 요구한 사항입니다. 작가 의전은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 한 제가 맡을 예정이에요.”
메일로 공유했던 사항을 한 번 더 읊어 주었다. 융은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다른 작가에 비해서 요구사항이 현저히 적었다. 퍼포먼스가 없었다면 요구사항 자체가 아예 전무했을 뻔도 했다. 공간 주인이 가장 잘 알지 않겠습니까. 맞추겠습니다. 작가의 예정보다 늦어진 입국으로 인해 작품이 도착하자 부랴부랴 전시 동선에 관해 세부적으로 논의했던 마지막 메일 끝부분에 쓰여 있던 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요구사항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는지 모두 조용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던 큐레이터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 오케이 한 걸로 알고 있을게요. 관장님 저 먼저 일어납니다. 요한 씨, 가자.”
큐레이터님의 뒷모습을 아니꼬운 눈으로 흘기는 김 팀장에게 슬쩍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큐레이터님과 김 팀장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잡아먹으려 들어서 아주 곤란했다. 일적으로 부딪힐 거리가 많아서 그런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웃긴 건, 회식 때는 죽이 잘 맞아서 항상 저 둘이 끝까지 남아 부어라 마셔라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간단히 홍보팀이랑 술이나 한잔하자고 말 해볼까. 둘 사이를 좀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 김 팀장은 홍보물 배포가 끝나고, 광고도 다 때린 상태에서 뜬금없이 추가된 퍼포먼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영상을 보고 입을 다물긴 했지만.
그도 그런 게 전시 오프닝 열흘 전이었다.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우리 쪽에서도 알았다. 하지만 작가들이 그럼 그렇지, 아주 쫑알쫑알 원하는 건 많아서. 망할 놈들. 욕을 욕을 하시던 큐레이터님도, 우리 팀 사람들도 이어 보내온 해당 영상을 보곤 완전히 매료된 상태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개 같은 작가여도 작품이 좋으면, 해야지 뭐. 이것이 전시기획팀의 모토였다. 관장님 아래 우리 미술관의 모토기도 했다. 작품 사이로 저만치 걸어가는 큐레이터님을 따라가며 슬쩍 말했다.
“선생님, 오늘 김 팀장님 시간 괜찮다고 하시면 저랑 승원 형이랑 시간 되는 사람들이랑 해서 술 한잔할까요?”
“김 팀장 많이 열 받은 것 같지?”
“네. 선생님이 쏘세요.”
알았어. 요한이가 쏘라면 내가 한 번 쏜다. 나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자그만 몸집으로 당차게 말하는 큐레이터님이 귀여웠다. 웃었더니 내 볼을 꽉 꼬집는다. 아파요. 볼이 늘어나 부정확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큐레이터님의 손은 실제로 굉장히 매웠다. 나도 알아. 괜히 툴툴대며 걷던 큐레이터님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와. 승원 씨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한 대만 피우고 바로 들어갈게요.”
“두 대 피워도 돼. 요즘 집에 잘 못 들어가서 피곤했지? 오늘은 딱 술 한 잔만 하고 보내줄 테니까 기획서나 잘 써.”
네, 감사해요. 큐레이터님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섰다. 우리 미술관에는 정해진 흡연구역이 없었지만 흡연자들은 직원만 출입이 가능한 미술관 뒤편 화단을 이용하곤 했다. 흡연자들이라고 해도 미술관 인원 전체에서 나와 승원 형, 같은 팀인 하선재와 신예림, 이렇게 네 명밖엔 없었다. 흡연자가 너무 소수라 뭉쳐야 산다며 금연을 금지하는 승원 형에 의해 모두 순조롭게 흡연 중이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발치에 단풍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단풍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복잡한 마음이 좀 가라앉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기획팀 회의 끝에 결국 떠맡은 의전 일을 생각하다 머리를 흩트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별거 있겠어.
갑작스레 등 뒤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손만 뒤로 돌려 옆구리를 꼬집었다. 승원 형이 아오 시발! 방정맞은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퍼포먼스 건 잘 안 됐어? 왜 이렇게 우울해.”
“아니. 잘됐어.”
그래? 막 담배를 입술에 끼운 형에게 불을 내밀었다. 후, 내뱉는 담배연기를 따라 눈을 움직였다.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팀장님 아주 열 받아 죽으려고 하겠고만?”
“아, 김 팀장님 오늘 퇴근하고 시간 어떻게 되시냐고 좀 물어봐줘. 우리 팀이랑 술 한잔하자고.”
“오늘? 나 오늘 집에 일찍 가려고 했는데?”
“집에? 집 가면 누워만 있을 거면서? 그냥 우리 팀이랑 친목이나 다져.”
씩 웃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승원 형이랑 같이 산 지도 벌써 햇수로 6년째였다. 군대 가면서 전세방을 빼버려 제대하고 갈 데가 없는 나를 받아준 게 승원 형이었다. 그때부터 형의 좁은 자취방에 세 들어 살다가, 형이 1년 먼저 졸업 후 우리 미술관에 취직한 뒤 내가 가지고 있던 전세금과 형 집에서 지원해준 돈을 합쳐 미술관 근처에 전셋집을 얻었다.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넓진 않았지만 좋았다. 형을 비롯한 동기들에겐 항상 고마웠다. 동기라고 나를 살뜰히 챙겨준 사람들이 없었으면 갈피를 못 잡던 어린 나는 진작 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승원 형과 함께 작품들 사이를 걸어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로테스크한 나무들이 천장에 걸려 있는 모습이 조금 섬뜩했다. 적막이 흐르는 미술관에는 구둣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동선을 따라 걸린 작품을 둘러보며 걷던 형이 내 쪽을 돌아봤다.
“작가 의전 네가 맡냐?”
“……응. 그렇게 됐어.”
고생해라. 등 한가운데를 토닥거리는 손길을 받으며 그냥 웃고 말았다. 고생할 거 알면 술이나 마시러 가. 가자마자 김 팀장님한테 물어보고 메신저 해. 큐레이터님이랑 술 먹기 싫다고 떼를 쓰는 형의 등을 밀어 자리로 보내고 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20XX년 란 뮤지엄 <젊은 작가展> 작가 JUNG 퍼포먼스 기획서. 굵게 표시된 제목을 한참 쳐다봤다. 별일 없겠지, 의전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잘할 거야. 한 번 더 속으로 되뇌었다. 정신을 차리려 마른세수를 했다. 절로 한숨이 터지는 건 막을 길이 없었다.
한 잔만 하자던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역시나 만나기만 하면 잡아먹으려 한 게 언제 일이었냐는 듯 술 앞에서 의기투합한 두 중년을 겨우겨우 택시 태워 보내고, 승원 형과 집까지 걸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였다. 찬바람을 맞으면서 바삐 걷다가, 문득 형이 물었다.
“융 있잖아. 우리 학교 출신이더라?”
“몰랐어?”
“나야 몰랐지. 작가 쪽에서 보내준 프로필도 최종 학력밖에 없더만. 어제 영재랑 통화할 일이 있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영재가 말해줘서 알았다, 야.”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으니 잠시 가만히 걷던 형이 내 팔을 툭툭 쳤다.
“영재가 아는 거면 너도 아는 거 아니야?”
“알지.”
“안 친했냐?”
영재는 말하는 거 보니까 안 친한 걸 넘어서 사이가 개 같은 것 같던데. 나 너한테 말은 안 했는데 그 작가 작품 좀 좋아하거든. 너 친하면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 어? 상기된 상태로 떠드는 형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나도 안 친했어. 중얼거렸다. 내 손을 떼어내며 형이 투덜댔다.
“그 작가는 성격이 얼마나 거지같으면 다 안 친했대.”
“……그러게.”
잠시 사이를 두고, 그러게. 얼마나 거지같으면. 형의 말을 되풀이했다. 형이 실없는 놈. 웃으며 말했다. 집에 도착해 형이 씻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았다. 눈을 굴려 방바닥 나무 무늬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책상과 서랍장 사이에 끼어 비죽 튀어나와 있는 캔버스까지 도달했다. 캔버스 위로 둘둘 감겨 있는 종이가 심하게 해져 있었다. 해진 종이를 찬찬히 관찰하다가 픽 웃었다.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마땅히 둘 곳도 없어 최대한 가구의 틈을 벌려 끼워 놓았던 그것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 * *
하루, 이틀. 한 시간씩 지날 때마다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둘 얹혔다. 작가를 포함한 그쪽 스텝들의 입국 시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도착했나. 지금쯤엔 식사를 하고 있을까. 뭔지도 모를 한심한 생각들만 머리에 가득한 나를 문득 깨달을 때면 습관처럼 웃음이 나왔다.
작가와의 첫 미팅 당일인 오늘은 출근을 하면서부터 정신이 산란했다. 아침부터 실수를 몇 번 했다. 요한 씨, 답지 않게 왜 그래. 나를 질책하는 큐레이터님의 날카로운 음성도 와 닿지 않았다. 담배도 늘었다. 평소엔 한 갑으로 일주일은 버텼는데, 잠깐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와 담뱃갑을 열어보니 한 개비가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틀 만에 한 갑을 다 피웠다. 몇 년이 지나도 이런 내 모습엔 적응이 안 됐다. 이제는 좀 나아졌나 싶으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오늘도 역시.
아무렇지도 않지는 못할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엉망이었다. 모든 게.
미팅 시간에 맞춰 명함을 챙겨들고 큐레이터님을 따라 나섰다. 하릴없이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작가에게 이십분 쯤 늦는다고 연락을 받았다는 큐레이터님께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로비를 거쳐, 잠겨 있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확 끼쳤다. 눈이 부셨다.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바로 떴다.
찬바람을 맞으니 울렁거렸던 속이 좀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피우려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담배 대신에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마음이 복잡한 순간이 오면 하곤 하던 자기암시도 몇 번을 중얼거렸다. 정말로 좀 괜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흙이 묻은 구둣발을 계단에 탁탁 털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걸어 회의실 앞에 섰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한 번 더 읊조린 후 셔츠 깃을 괜히 매만졌다. 문고리를 꽉 잡아보았다. 차가운 손잡이의 감촉이 내 몸의 열을 조금 식혀주었다. 차가운 쇠가 뜨거워질 때까지, 그렇게 잡고만 있었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문을 열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큐레이터님의 웃는 얼굴과, 수년이 지났음에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뒤통수가 동시에 보였다.
“요한 씨, 왔어? 내가 얘기했던, 융 씨 보조 역할 할 우리 미술관 코디네이터. 인사해요. 전시하는 동안 제일 자주 볼 사이인데.”
큐레이터님의 쾌활한 음성과 함께 나를 향하는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천천히 나를 향하는 몸이 완전히 내 눈에 담긴 순간,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굳은 손을 억지로 뒤로 돌려 더듬거리다 굳게 닫힌 문의 손잡이를 꾹 잡았다. 반짝거리는 눈이 나를 향하고, 애매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지는 동안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열까지 세면 나는 괜찮아진다.
일곱, 여덟, 아홉.
“안녕하세요, 작가님. 앞으로 자주 뵐 것 같습니다. 서요한이라고 합니다.”
창백한 얼굴의 정진우와 시선을 맞췄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 다행이었다. 인사를 한 번 건네자 다음은 수월했다. 뜨끈뜨끈해진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정진우에게 걸어가 악수를 청했다. 한참 빈손을 내밀고 있다 반응이 없는 정진우를 일별하고 큐레이터님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고개를 돌린 채로 굳어 있는 정진우의 앞에 명함을 슥 내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란 뮤지엄 전시기획팀 코디네이터 서요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작가님.”
“요한 씨가 일 잘해요. 융, 그렇지. 융 작가라고 부르면 될까요?”
천천히 돌아갔던 고개를 바로한 정진우가 나와 큐레이터님을 한 번씩 둘러봤다. 약간 내리깔고 있던 시선에 정진우가 내 명함 위를 손으로 덮어 가져가는 게 잡혔다. 명함을 쓰다듬는 손가락 사이로 언뜻 문신이 보였다. 영상 속에서 헐벗은 상체를 떠올렸다. 아팠을까. 스치듯이 든 생각을 없애버리려 엄지손톱으로 반대편 손등을 꾹 눌렀다. 잠시 뜸을 들이며 명함만 만지작거리던 정진우가 문득 손을 멈췄다.
“……정진우입니다.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 진우 씨. 그래, 융이라는 이름이 너무 어색해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한국에서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좀 어색하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수줍게 웃는 큐레이터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슬쩍 바라본 옆모습이 생기가 넘쳤다. 융은 큐레이터님이 작년 겨울부터 시작한 젊은 작가전의 기획 단계부터 굉장히 기대하던 작가 중 하나였다. 젊은 사람인데, 어떻게 살아서 이런 작품을……. 융의 설치물과 회화 몇 점을 슬라이드로 넘겨보던 큐레이터님이 멍하게 중얼거렸던 말이 그 순간엔 마음에 꽤 깊게 박혔다. 넌 정말로, 어떻게 살았을까. 정진우의 소식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미술관에서 융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접했을 때부터는 가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허물없이 물을 순 없겠지만.
분위기가 조금 정리된 후에는 퍼포먼스 일정이나 시간 등 협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에 관한 큐레이터님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중간 중간 정진우의 간략한 대답이 들렸다. 조금 성숙해졌나. 목소리가 약간 귀에 설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말들을 귀에 담으며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목소리를 대조해 보다가, 또 이러는 나를 깨닫고 생각을 멈췄다. 세 부로 인쇄해 나눠 가진 서류철에 코를 박고 내용을 반복해 살펴보았다. 내가 작성한 것들이어서 무슨 내용인지는 안 봐도 알았다. 문장의 어미까지 외울 정도가 됐을 때, 큐레이터님이 책상 위로 종이뭉치를 모아 두어 번 두드려 정리했다.
“좀 걸으면서 이야기 계속 할까요?”
진우 씨 전시 동선 확인도 제대로 못 했잖아. 말을 마치고 바람같이 밖으로 나가버린 큐레이터님을 따라 일어섰다. 약간 늦게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온기가 끼치는 듯했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급한 걸음으로 큐레이터님의 뒤에 따라 붙었다. 뒤에서 옅게 들리는 발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갉아먹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어느 순간 뒤쳐져 걷던 정진우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걸을 때마다 옷깃과 옷깃이 스쳤다. 조금 옆으로 물러났다. 로비로 내려와 시작 지점에 도착한 뒤로는 빠르게 걸었던 걸음의 속도를 줄인 큐레이터님이 정진우의 몇 점 없는 회화들을 둘러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잠깐 멀어졌던 거리가 다시금 훅 가까워졌다.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한참 동안 한 쌍이였던 눈빛이 두 쌍으로 늘어났다. 잇던 말을 멈추고 정진우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큐레이터님이 늘어져 있는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우리 요한 씨랑 아는 사이예요?”
“…우리 요한 씨요?”
모르는 척 큐레이터님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그제야 정진우에게 줬다. 역시 조금 성숙해졌나, 얼굴도. 사진이나 영상으로 봤던 것과 느낌이 달랐다. 잠깐 정진우에게 빼앗겼던 정신을 바로하고 큐레이터님에게 말했다. 큐레이터님은 정진우의 이상한 반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예전에 잠깐.”
잠깐 목이 멘 탓에 뒷말이 뭉개졌다. 똑바로 들고 있던 시선을 큐레이터님의 얼굴에서 바닥으로 급하게 내렸다. 세 쌍의 신발을 훑었다. 구두와 구두 사이 까만 운동화 한 켤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정진우가 맞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예전에? 오, 난 몰랐네? 잘 아는 사이야?”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동의를 구하며 정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어렸을 때도 저랬나. 짧은 시간 동안 표정 변화가 다양했다. 침묵을 지키는 정진우에게 꾸벅 인사했다.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싶었다. 자꾸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거렸다.
“선생님 저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따 작가님 퍼포먼스 동선 짚을 때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어, 그래. 들어가요 요한 씨.”
이따 뵙겠습니다.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큐레이터님이 정진우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고 무언가를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까. 아. 없지. 잠깐 나가서 사올까. 고민하다가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사무실까지 계단이라도 좀 걸어서 올라가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한 걸음씩 내디디며 주문을 외웠다. 잘할 수 있다. 괜찮아.
문득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쿵하고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계단을 급하게 오르는 발소리가 들린 건 거의 동시였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걸음을 서두른 것도 소용없이 팔이 세차게 잡힌 채로 타인에 의해 몸이 휙 돌아갔다. 정진우가 약간 상기된 낯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 우리?”
“…….”
“정말, 그래요?”
담배 사와야겠다 아무래도. 뜬금없는 생각이 스쳤다. 생각 뒤에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약간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팔을 빼냈다. 세차게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가님은 저를 여기까지 쫓아와서 하실 말씀이 그것밖에 없나 보네요.”
“……선배, 요한 선배.”
“정말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나봅니다, 우리.”
로비에서 뵐게요. 고개를 살짝 까닥여 인사를 건네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정진우는 다시 쫓아오진 않았다.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진우와 마주할 때까지 가슴 한쪽을 무겁게 짓누르던 이 감정의 일부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 한다고 사무실에 올라 와서는 의미 없이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만 했다. 뜻 없는 단어들이 워드 창 안을 돌아다녔다. 반 정도 채워진 글자를 모두 지우고, 빈 용지를 멍하니 보다가, 이름 하나를 적었다. 정진우. 빠르게 지웠다. 잠깐 나갔다 오려고 외투를 챙겨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컴퓨터에 띄워놓은 메신저가 반짝거렸다.
[로비로 내려와요.]
큐레이터님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바깥바람 쐬면서 생각 정리 좀 하려고 했더니. 나도 모르게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사무실에 들어온 후로 계속 산만한 나를 옆자리의 신예림이 이상한 표정으로 흘깃거렸다. 신예림과 내 사이에 놓인 파티션을 잡고 말했다.
“예림 씨, 담배 있어?”
“뭐야. 담배 피우러 가게? 그럼 나도,”
“아니. 지금은 작가 동선 밟으러 내려가야 돼.”
고생한다, 요한 씨. 안쓰럽게 말하며 가방을 뒤적거리는 신예림의 가는 팔을 응시하다가, 속으로 읊조렸다. 고생.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진우가 내 앞에서 사라진 게 벌써 8년 전이었다. 그동안 나는 뭘 하고 살았나. 정진우의 작은 몸짓에도 평정을 잃기 일쑤였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동시에 아까 마주쳤던 정진우의 마른 손가락, 떨리던 눈. 그런 것들이 함께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불쑥 화가 치밀다가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나를 잡았던 그 손이 정말 간절한 것 같아서. 우리가 처음 마주했을 때, 내가 나인 것을 확인하고 핏기가 사라져갔던 얼굴이 진심인 것 같아서. 그동안 나는,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살아서.
“여기, 나중에 갚아.”
불쑥 내 앞으로 내밀어진 손이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고마워. 하얀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들고 사무실의 문을 밀었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 그런 것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에겐 그랬다. 이미 지난 시간 동안 마음의 풍랑을 숱하게 겪어 왔다. 지금 와서 또다시 반복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로비로 향하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키가 작은 여자와, 키가 커다란 남자의 인영이 어른어른 비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정진우를 똑바로 응시하며 반복해서 다짐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한 살, 한 살, 정진우가 없는 시간 속에서 홀로 나이를 먹으며 배운 게 몇 가지 있었다. 안 되는 것에 대한 체념. 불가능한 일을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 것.
“말씀 다 마치셨어요?”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숨기는 것.
마음을 다잡자 웃을 수 있었다. 앞으로 정진우와 마주치는 건 스무 번 남짓일 것이다. 두 달, 스무 번. 아무것도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이 순간만 지나면 나는 또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잘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당연히 잘할 것이다.
“응. 진우 씨, 나는 이제 없어도 될 것 같은데, 그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큐레이터님이 말했다. 정진우를 흘깃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할게요. 들어가세요. 기특하다는 눈을 한 큐레이터님이 잠시 내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정진우가 비스듬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나와 큐레이터님을 응시했다.
“나는 가 볼게요. 젊은 사람들끼리 대화 좀 하고, 친목도 좀 다지고 그래요.”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큐레이터님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정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큐레이터님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나에게만 눈을 고정하고 있는 걸 알았다. 잠시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고요한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결국엔 피하듯 고개를 돌리는 걸 끝까지 응시했다. 미술관 바닥 어디쯤을 보던 정진우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약간의 사이를 두고 정진우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메일로는 퍼포먼스에 관해 의견 나눈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
미술관 중심부에 자리한, 부피가 큰 설치물 아래 섰다. 정진우의 작품 중 가장 무거운 설치물이었다. 높은 천장 아래로 고목의 뿌리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생명의 나무. 다 썩어가는 뿌리 앞에 자리한 이름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한참 말없이 작품을 감상했다. 정진우는 주로 무거운 작업을 즐겨 했는데, 이 생명의 나무는 정진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에 속했다. 정진우가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세상에 내놓은, 본인 무의식의 우울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
“큐레이터님과 말씀 나누셨을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이 포인트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퍼포먼스를 보내주셨던 영상 그대로 진행하실 예정이면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정문 쪽 정원까지 거리도 적당하고. 아, 저희 쪽에서 생각하고 있는 시간대는 두 시예요. 만약 두 시에 퍼포먼스를 진행하게 된다면, 개관 시간인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한정적으로 오픈해 놓고,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는 이 층을 완전히 막아놓을 예정이에요. 그렇게 되면 작가님 작업하실 때 불편하진 않을 것 같은데.”
오늘 이야기 나눴던 사항은 저희 팀 회의 후 다시 정리해서 자정 안으로 메일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작가님 말씀에 맞춰드릴 예정이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담 없이 말씀 주세요. 미동 없는 정진우의 옆에 서서 나 혼자 몇 분을 떠들었다. 이렇다 할 피드백이 없으니 준비해왔던 말도 다 떨어져갔다. 아무렇게나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떠드는 와중에 정진우가 옆으로 조금 가깝게 다가왔다. 한 발짝 물러났다. 약간 당황한 나머지 정진우에게 계속해서 건네던 말도 딱 멈춰버렸다. 나마저 입을 다무니 사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심장 뛰는 게 느껴졌다. 쿵, 쿵, 쿵. 이런 느낌을 받은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정진우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보고 싶었어요.”
정진우가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다가온 거리만큼 뒤로 물러났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수요일에 촬영감독과 같이 오신다고 했으니,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큐레이터님 성함만 알다가, 나 보조할 사람 이름이 서요한이라는 걸 알고.”
“…….”
“생각했어요. 우연히 이름이 같은 사람이겠지. 내가 그렇게 운이 좋을 리가 있나.”
정진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뻑뻑해진 눈을 깜빡였다. 나직하게 말을 잇는 정진우의 옆모습이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를 반복했다. 거칠어지려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오늘은 그럼, 여기서 마무리하는 걸로 알고 가 보겠습니다.”
“보고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가실 때까지 기다리진 못할 것 같아요. 오늘 메일로 정리한 사항에 관해서는 수요일에 오셔서 큐레이터님과 함께 다시 한 번 의논을,”
“요한 선배.”
결국 참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정진우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집요한 구석까지 있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그건 똑같았다. 울화가 치밀었다. 애써 숨을 가다듬고 짓씹듯이 한마디를 뱉었다.
“나 이제 그쪽 선배 아니에요.”
“……선배,”
“그쪽이 그렇게 만들었잖아.”
눈을 질끈 감았다. 또다시 가까이 다가오려는 정진우를 손을 들어 막았다. 두 걸음 멀어졌다. 코끝에서 맴돌던 정진우의 냄새가 조금 옅어졌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됐다.
“죄송합니다. 옛날 얘기는, 저는 이제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날카로운 이로 잘근잘근 씹혀 색이 진해진 정진우의 입술에서, 반듯한 눈썹을 지나 이마 위를 까맣게 수놓고 있는 머리칼에 시선을 멈췄다. 부드럽고, 상쾌한 것.
빈손에 한가득 정진우의 머리카락이 담기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지난 얘기를 하기엔.”
가만히 서서 나를 보는 정진우는 조금 약해 보였다. 어렸을 때는 정진우만큼 거침없고 당당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 큰 건가, 정진우가 작아진 건가. 기분이 새로웠다. 잠시간 정진우와 그 옆에 자리한 나무뿌리를 둘러보다가 돌아섰다.
“계속 둘러볼 생각이시면 필요하신 게 있을 때, 동선 밟아볼 준비가 되셨을 때 불러 주세요. 전시기획팀 사무실은 바로 위층이에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소리가 울렸다. 계속해서 등에 닿아 쫓아오는 정진우의 시선이 옅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잠겨있는 문을 열고 화단으로 나왔다. 급하게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집히는 걸 그대로 꺼내 문 채로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빼 불을 붙였다. 중간이 조금 꺾여 있는 담배를 물었다 빼고, 속 깊은 곳부터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았다. 하늘이 파랬다. 한참 하늘만 쳐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시리게 느껴졌다.
필터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털면서 안에 들어와 생명의 나무까지 천천히 걸었다. 정진우와 아무것도 제대로 얘기한 게 없었다. 당장 오픈 파티가 다음 주 월요일인데, 이럼 안 되지 싶었다. 정진우가 정신을 놓고 있다고 나까지 휩쓸리면 아무것도 안 됐다. 작가는 작가니까 그렇다 쳐도, 나는 아니었다. 전시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다.
조금 걸음을 빨리 했다. 생명의 나무 앞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는 나무뿌리며 기둥, 그림들을 지나 로비까지 걸었다. 간 건가. 허탈한 숨이 터졌다. 곧이어 마른 웃음이 따라왔다.
먼저 퇴근해서 집에 가려는 승원 형을 잡았다. 오늘은 방 안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 있긴 싫었다. 미술관과 집 중간 즈음에 위치한 포장마차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형에겐 모든 것이 고마웠지만 내가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때 함께 있어주는 것이 가장 고마웠다. 가끔 이유 없이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괴로울 때가 있었다. 한창 자다가도 눈을 뜨면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밖으로 뛰쳐나가고는 했다. 그때마다 형은 내가 누구를 찾는 줄도 모른 채 나를 잡아주었다. 집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 줄을 몰라 망연히 서 있던 나에게 외투를 건네준 것도,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고 베개만 적시던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결국 정진우를 잃었음을 인정하고 자학하던 나에게 망설임 없이 쓴 소리를 퍼부은 것도, 모두 형이었다. 내가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도록 만든 이들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 속에 정진우는 없었다.
“청승맞게 남자 둘이 무슨 술을 그렇게 퍼먹어.”
포장마차의 문을 밀고 들어온 조영재가 우리 둘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나와 승원 형 사이에 주저앉아 말없이 빈 잔에 소주를 채우고 한 번에 비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형을 잠시 쳐다봤다.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우울해 보여서, 인마. 이따 수현이도 올 거야.”
수현이는 오늘 야근해서 좀 늦는대. 슬쩍 웃었다. 김수현까지 불렀나. 이렇게 넷이 모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내일 좀 피곤해도 오늘은 늦게까지 있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영재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줬다.
“가게는 어떻게 하고 왔어.”
조영재는 대학 졸업 후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가게를 받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꽤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이라 이 시간이면 한창 바쁠 거였다. 조영재가 몰라 시발. 욕을 읊조렸다. 나이를 먹어도 저 걸은 말버릇은 고쳐지는 법이 없었다.
“오늘은 원래 일찍 들어가려고 했어. 딱 이 타이밍에 우울하냐? 운 좋은 새끼.”
“와 줘서 고맙다. 오늘은 밤 새볼까.”
싫어. 단호하게 대답하고 소주를 들이키는 조영재의 앞 접시에 골뱅이를 놔 줬다. 말은 저렇게 해도 자리가 파할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말 뒤에 숨은 진심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함께 해온 10년에 가까운 시간들이.
김수현은 새파란 안색을 하고 자정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우리 회사는 아무래도 나 죽이려는 게 분명해. 술 한 잔에 팀장 욕을, 술 한 잔에 본인을 마감지옥에 빠뜨린 클라이언트 욕을 안주 삼아 중얼거리던 김수현이 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자리에 엎어졌다. 철제 테이블에 볼을 맞대고 코까지 도롱도롱 곤다. 바지 위로 비죽 빠져나온 셔츠가 안쓰러워 마른 등을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은 승원 형 옆에서 술잔을 들던 조영재가 물었다. 담배. 쥐고 있던 라이터와 담뱃갑을 들어 올리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같이 일어난다.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너 담배 끊었잖아.”
조영재는 작년에 담배를 끊었다. 희진이 때문이었다. 지지고 볶으며 헤어지지도 않고 오래 만났다. 작년 이맘 때, 이게 마지막이라면서 함께 담배를 피우다가 조영재가 말했다. 이거 끊고 일 년 참으면 희진이가 결혼해 준대. 제대한 뒤 미친 듯이 정진우를 찾아다니는 나를 두고는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부었으면서, 자기는 희진이한테 지극정성이었다. 조금 다른가. 어쨌든 아직 프로포즈 이후로 금연한 지 일 년이 안 된 것 같은데 희진이랑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희진이가 너랑 결혼하기 싫대?”
“닥쳐. 담배 끊은 사람은 남 피우는 거 구경도 하면 안 되냐?”
“음, 되지. 희진이는 잘 지내?”
“어. 올해 가기 전에 상견례 할 거야. 다 같이 한번 보자.”
대답 대신 담배연기를 후 뱉었다. 부러웠다. 희진이와 스무 살 때 만나 사랑하고, 남부럽지 않은 연애를 하고, 수십 번 싸우고 화해하며 함께 쌓아온 시간이. 앞으로도 희진이와 함께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 믿음이.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잠시 내려다보며 말을 툭 던졌다.
“오늘, 내가 누구 만났게.”
내 옆으로 다가와 벽에 기대선 조영재의 운동화가 앞뒤로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툭 차기를 반복하던 조영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진우 만났냐.”
“응.”
“몰랐냐, 만날 거.”
“알았지.”
“근데.”
그러게. 내가 왜 이 말을 너에게 하고 있을까.
조영재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제대하고 몇 년간은 조영재의 얼굴을 보면 정진우의 이름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조영재가 정진우의 정자만 들어도 화병 날 것 같다는 말을 반복하게 된 건, 정진우가 사라진 지 4년째 되던 해였던 것 같다. 내 미련은 지구를 다섯 바퀴쯤은 넉넉히 감을 정도로 길어서, 그 미련을 알아줄 사람이 조영재밖에는 없어서, 괴롭히기도 참 많이 괴롭혔다. 조영재에게도 감정을 숨기고, 정진우를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할 수 있었던 게 언제쯤이었지.
짤막해진 담배를 끄고 기대 있던 담벼락에서 떨어졌다.
“그러게. 이젠 아무 상관없는데.”
“그래. 너도,”
잠깐 말을 멈추고 미간을 모으며 나를 노려보던 조영재가 본인의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었다.
“내가 차마 새 남자친구 만나라는 말은 못 하겠다.”
웃음이 터졌다. 빈 거리를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조영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미 했잖아. 고맙다. 노력해 볼게.”
새 남자친구. 진저리를 치는 조영재의 어깨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 미친놈아 떨어져. 조영재가 작게 속삭였다. 내심 좋으면서.
“수현이는 네가 챙겨라.”
안에서 사이좋게 뻗어 있는 승원 형과 김수현의 등을 한 대씩 치면서 말했다. 조영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김수현, 야. 야. 김수현의 등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조영재의 열띤 음성을 뒤로하고 계산을 했다.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일어난 김수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서 자. 여기까지 오느라 무리했지. 고맙다.”
“아니야, 아니 어, 맞아. 나 오늘 무리 좀 했다.”
비몽사몽간인 김수현과 조영재를 보내고 승원 형을 부축해 일어났다. 목덜미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꽤 많이 마셨나. 어영부영 집까지 와 형을 자기 방 침대에 눕혀 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잠깐 식탁에 앉아 있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무거워져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억지로 떼고 방에 들어와 옷을 꺼냈다.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아놓고 평소보다 오래 물을 맞았다. 따뜻한 물이 머리부터 떨어져 온몸을 적셨다. 더러운 것들이 씻겨 내려갔다. 문득문득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는 지저분한 감정들도 함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충전 중인 핸드폰을 켰다. 메시지가 두 개 와 있었다. 하나는 다음 달 엄마 기일에 어떻게 할 거냐는 아주머니의 메시지였다. 그냥 저는 혼자 엄마 뵙고 올게요. 바쁘시면 시간 굳이 안 맞춰도 될 것 같아요. 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국 번호 새로 만들었어요. 제 번호예요.]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표시 하나 없는 메시지인데도 보자마자 정진우인 걸 알았다. 문득 스무 살의 정진우가 생각났다. 처음 우리가 번호를 교환했을 때. 멍하니 강의실로 걷던 내 뒤에서 정진우가 나를 불렀다. 서요한 선배님. 정진우의 입에서 내 이름이 그때 처음 나왔었나.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가 그대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정진우가 핸드폰을 들고 너무 예쁘게 웃고 있어서.
선배님, 이 수업 들어요? 응. 너도? 네. 번호 알려주세요. 친하게 지내요 우리. 그래. 번호를 입력하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정진우의 마디가 굵은 손가락과 깨끗한 손톱을 홀린 듯이 훔쳐봤었다. 제 번호예요. 처음 받은 메시지를 보고, 또 보고, 닳을 때까지 보다가, 누가 볼까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곤 했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도 오늘도, 답장은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한참 핸드폰에 떠 있는 글자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처럼 분간도 못 하고 메시지만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천장을 똑바로 보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눈을 뜨고 파랗게 빛나는 벽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내가 대하는 건 과거의 정진우가 아니다. 소리 내 중얼거렸다. 다시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 * *
오픈 파티가 가까워질수록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VIP를 상대로 다시금 참석 확인을 위해 끊임없이 전화를 돌리고, 메일을 발송했다. 이 와중에 정진우와 퍼포먼스 촬영 감독인 니시카와를 상대하기 위해 몇 번이고 전시장으로 내려가야 했다. 정진우는 첫날 분간 없이 굴었던 게 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얌전했다.
“시작점은 생명의 나무부터, 퍼포먼스 종료는 정문 계단 바로 앞 왼쪽 화단으로 픽스 할게요.”
“예. 그럼 미리 말씀 드렸던 날짜는 다 괜찮으신 거죠?”
“네. 시간도 좋아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대로 홈페이지에 공지할게요. 공지 올라가고 메일 한 번 드릴 테니 확인 부탁드려요.”
잠시 정진우가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핸드폰으로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에이전시 쪽 메일 말고 따로 연락 주세요.”
“……예?”
“메시지 드렸잖아요.”
잠깐 말을 잃었다. 메시지를 보낸 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는 듯 굴더니 뜬금없는 타이밍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게 아주 당황스러웠다. 멍하니 정진우와 시선을 맞추다, 그날 메시지를 보낸 게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걸 들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반문했어야 했는데. 잠깐 머리를 굴리다 천천히 말했다.
“그동안 불편한 점이 없으셨다면 메일로 공유하는 게,”
“저한테 개인적으로 연락 주는 게, 코디님한테 많이 힘든 일이에요?”
“……그건 아니지만,”
“부탁드려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거절할 말이 없기도 했다. 이상하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진우가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왔던 짐을 정리하며 커피 한잔하실래요? 물어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이 좀 많아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아쉽네요.”
“예, 시간 되면 다음에.”
“다음에, 언제요?”
얘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하나둘 걸친 뒤 마지막으로 가방을 드는 정진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깨에 가방끈을 걸치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 바싹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태연한 척을 하고 있어도 저건, 완전히 어린애였다.
“전시 끝나고 작가님 시간 되실 때 불러주세요.”
“전시, 끝나고요.”
전시는 두 달 뒤에 끝난다. 당연히 너랑 커피 마실 시간 없다는 말이었다.
“네. 그때까진 시간이 안 날 것 같네요.”
내리깐 속눈썹이 길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정진우를 못 본 척 딴청을 피웠다. 니시카와 씨가 안 오시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뒤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진우가 내 팔을 잡아챘다.
“내일 또 올게요.”
“내일이요? 일요일 오전에 카트린, 니시카와 씨와 함께 오셔서 리허설만 몇 번 하신다고,”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바빠 죽겠는데. 한숨이 나왔다. 작가가 하겠다는데 하지 말라고는 할 수 없고,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들고 메모장을 켰다.
“내일 몇 시가 좋으세요?”
“……열두 시요.”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는 점심시간이었다. 잠깐 멈칫하다가 그대로 메모장에 시간을 적어 놓았다. 좀 일찍 먹든가, 늦게 먹든가 하지 뭐. 예, 알았습니다. 대답하고 다시 인사했다. 정진우가 인사하는 내 머리에 대고 말했다.
“점심 같이 하실래요, 내일.”
“아니요.”
“그럼 코디님 점심은 언제,”
“저 원래 점심 잘 안 먹습니다.”
작가님 점심 드셔야 하면 시간 좀 미룰까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더니 아닙니다. 사정 봐주셔서 감사해요. 정진우가 얌전히 인사해 왔다.
“아니에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최대한 작가님 편의에 맞춰드릴게요. 이번 전시 모두 굉장히 기대 중입니다.”
입에 발린 말 같았지만 사실이었다. 관장님은 한 달 전부터 전국의 지인들을 초대하기 바빴고, 가끔 큐레이터님이 사적으로 통화하시는 걸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랜만에 대형 작가 나오나봐. 대형 포털 사이트며 메이저 신문에 기사도 몇 개가 떴다.
사실 정진우에 대한 이미지가 미술계에서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얼굴로 떴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 정진우는 외국에서도 먹혔다. 잘생긴 얼굴은 어딜 가나 통한다는 걸 정진우를 보고 알았다. 하지만 정진우의 작품을 실제로 본다면 얼굴로 떴다는 소리는 더 이상 못 하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하고, 정진우의 작품은 정말로 좋았다. 가끔 어둑해진 미술관에서 처연히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을 때면 이유 없이 괴로워졌다.
설치 작품에 비해선 몇 점 없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회화도 그랬다. 나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정진우에게 대중적인 인기를 가져다 준 <고난>시리즈 중 두 점이 우리 미술관에 걸렸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깨진 돌바닥에 핀 작은 꽃들. 내 방 한구석에 박혀 있는 캔버스가 떠올랐다. 항상 버리려다 차마 버리지 못한 것. 이젠 형태도 가물가물한 그 꽃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니시카와가 돌아와 마저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얼마 후 키보드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식사는 챙겨 드세요. 내일 한 시까지 갈게요.]
이게 정말 뭐하자는 거야.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뒤집어 놓은 핸드폰에 절로 시선이 갔다. 정진우와 마주하고 난 뒤 엄청나게 늘어버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지금 정도도 나쁘지 않아. 이대로 두 달. 속으로 몇 번을 읊조렸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오늘 온다는 정진우가 문득문득 떠올라 아침부터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다 나가는데도 웬일인지 별로 밥 생각이 안 났다. 마찬가지로 오늘따라 밥 생각이 없다는 하선재와 매일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 신예림을 앞에 두고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어느 순간 이어지던 말이 끊기고 침묵이 찾아왔을 때 커피에 얼음을 한가득 타서 마시던 하선재가 내 허벅지를 툭 치며 말했다.
“오늘 융 한 시까지 온다고 했나?”
“응. 왜?”
“왜긴 왜야. 구경 가려고.”
태연하게 말하는 하선재를 잠깐 봤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밝았다. 안 바쁜가. 핸드폰을 켜고 오늘 아침 정진우가 나에게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 시 정각에 맞춰 갈게요. 오늘은 혼자예요.]
니시카와도 없고, 혼자 하는 거면 하선재 한 명쯤은 내려와서 본다고 해도 별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보니까 도착해서 삼십 분 정도는 여기저기 그냥 돌아다니던데. 한 시 반쯤 연습 시작 할 거야. 안 바빠?”
“바쁜데, 융 퍼포먼스 보고 싶어서. 형은 봤지? 어땠어?”
“그냥, 어제는 옷 다 입고 촬영 감독이랑 거의 동선만 맞춘 정도였어.”
그래? 하고 묻는 하선재의 눈이 반짝반짝 했다. 하선재는 처음부터 작가 융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무래도 제 또래의 작가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게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융의 영상을 보고 가장 열광한 것도 하선재였다. 보고 싶을 만했다. 망설이다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놨다.
“작가한테 한번 물어보고 연락할게. 아마 거절은 안 할 거야.”
“진짜? 고마워 형. 대기 타고 있을게.”
팔 한쪽에 매달려서 함박웃음을 짓는 하선재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머리도 색이 옅어 곱슬곱슬하고, 얼굴도 하얀 게 환하게 웃을 때는 한쪽 뺨에 볼우물이 짙게 패였다. 작년 하선재를 처음 봤을 땐 엄청 부잣집 도련님 같다고 생각했다. 생긴 대로 정말 부잣집 도련님인 걸 알고 나서는 그럼 그렇지 했을 정도였다. 하선재의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트렸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게 재미있었다.
“그래. 연락하면 내려 와.”
앞에서 도시락을 다 비운 신예림이 뚜껑을 닫으며 나도 보러가고 싶은데, 중얼거렸다. 한 명 오나 두 명 오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 작가가 된다고 하면 선재 씨랑 같이 내려올래? 제안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완벽하게 준비 다 갖추고 할 때 볼래.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재를 한쪽에 매단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멋대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사무실을 나섰다. 정진우가 올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로비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막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연락해볼까. 핸드폰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소식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연락 한 번 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 픽 웃다가 막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 도착했어요. 시작점에 있을게요. 2층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니 생명의 나무 앞에서 외투를 벗어 내려놓은 채로 정진우가 멀거니 앉아 있었다.
“작가님.”
“왜 그쪽에서, 아. 로비에 계셨구나. 저 기다리셨어요?”
정진우가 말을 맺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왠지 귓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대꾸하지 않으니 무릎에 손을 짚고 일어선다. 드러난 팔목이 가늘었다. 벗은 몸을 봤음에도 가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바뀐 분위기가 정진우를 연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곧 어디론가 사라질 것같이, 가느다란 분위기가 정진우의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멍하니 정진우를 아래위로 살피다가 하선재가 생각났다. 나무뿌리 주위를 돌고 있는 정진우에게 다가갔다. 내가 따라붙자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순식간에 정진우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뒷걸음질을 쳐 거리를 조금 벌린 뒤 말했다.
“작가님, 다른 코디 한 명이, 작가님이 불편하시지 않으면 오늘 연습에 참관을 원하는데 괜찮을까요?”
“아… 저는 상관없어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진우에게 꾸벅 인사했다. 하선재에게 간단히 메시지를 남겼다. 하던 거 천천히 정리하고 나와. 2층 3전시실. 고개를 드니 정진우가 나를 계속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얼굴과 아직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에 차례로 시선이 닿았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아니요.”
표정이 아닌 것 같지 않았다. 머뭇하다가 다시금 물어봤다.
“말씀하실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하시는 게,”
“제 번호, 저장했어요?”
안 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덧붙이는 대답은 작았다. 별거 아니지만 거짓말을 하는 느낌이 좋진 않았다. 내가 정말로 정진우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일이어서, 더더욱.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몸을 돌려 걷는다. 핸드폰을 꼭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천천히 걷는 정진우의 등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귓가가 화끈거렸다. 정진우가 곧장 내 핸드폰을 확인하려 들 줄 알았다. 괜히 긴장하고 있던 것이 창피했다.
한참 본인의 작품을 감상하며 걷기만 하던 정진우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작은 머리가 천천히 내 쪽을 향했다. 가만히 서서 시선으로 정진우의 등을 쫓고 있다가,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운동화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내 앞에 멈춰선 운동화를 응시했다.
“내일은 못 와요.”
뜬금없이 무슨 말인지 고민하다 다짜고짜 약속을 잡아왔던 어제가 떠올랐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우의 손이 불쑥 올라왔다. 어깨 쪽으로 다가오려는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목적을 잃고 허공에 머물던 손가락이 잠깐 움찔거렸다.
“……안 궁금해요?”
“제가 뭘, 궁금해해야…….”
얌전히 아래로 내려간 손이 제 허벅지를 툭 건드린다. 긴 손가락이 차례로 굽어들다가 주먹 쥐어지는 모양을 흘깃거렸다. 하얀 손등 위로 핏줄이 불끈 섰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작가님은 일요일에만 오셔서 리허설 진행하신다고,”
“그거 말고.”
“……네?”
“왜, 안 물어봐요?”
“예?”
정진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를, 물으려다 알아챘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정진우는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약간 빠르게, 정진우가 재차 물어왔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화의 맥락이 이상했다. 이쯤 머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저만치 뛰어버리기 일쑤였다. 정진우와 마주한 순간부터 급속도로 얇아진 신경 줄이 끊어질락 말락 가늘고 길게 팽창했다. 또다시 울컥하는 속을 다스렸다.
“제가 뭐라도 물어보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바닥의 대리석 무늬를 눈으로 셌다. 무늬 끝에 정진우의 운동화가 걸렸다. 발로 차고 싶었다. 더 이상 내 시야에 걸리지 않게, 저 멀리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작가님은 어쨌든 가실 거고, 안 오실 거고.”
“…….”
“오고 싶을 때 올 거고.”
순식간에 이 넓은 전시장이 정진우의 방으로 변했다. 혹시 정진우가 올까봐, 짐이라도 찾으러 오지 않을까. 지문이 닳도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고, 뜬눈으로 정진우를 기다렸던 밤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집마저 정진우의 것이 아니게 되고, 무력한 기분으로 남의 집이 되어버린 문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 학교에 다녀온 나를 원망했던. 어린 날들이 떠올랐다.
잔상을 쫓아내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다음 스케줄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안 오시면 원래 계획대로 일요일 오전, 열한 시. 맞죠.”
“…….”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비스듬히 서 있던 몸을 완전히 돌렸다. 그와 동시에 정진우가 내 팔을 잡았다. 커다란 손아귀에 손목이 억세게 잡혔다. 떨쳐내려 팔을 들었다. 뒤돈 시야에 정진우의 날렵한 눈매가 잡혔다. 아플 정도로 세게 잡고 있는 손과는 달리 표정은 연약했다. 우스웠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손을 떼어냈다. 정진우가 무언가 말하려는 동시에, 정진우의 뒤쪽에서 하선재가 전시장으로 막 들어오려는 걸 발견했다.
“선재 씨, 여기.”
나를 향했던 고개를 돌려 하선재 쪽을 보는 정진우의 목덜미가 붉었다. 내 귓가를 슬쩍 만져 보았다. 후끈거렸다. 재빨리 손을 내리고 가까이 다가온 하선재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작가님, 제가 아까 얘기했던, 하선재 코디네이터예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내미는 하선재를 잠깐 살피더니, 마주 악수하며 살짝 웃는다. 입꼬리가 그린 것같이 싹 올라갔다. 멍하니 정진우의 웃는 모습을 보던 하선재가 입을 딱 벌렸다.
“작가님, 너무 잘생기셨어요.”
하선재의 볼이 붉었다. 옆에 놓인 등을 나도 모르게 퍽 쳤다. 하선재와 정진우가 맞잡았던 손을 떼어내고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딴청을 피웠다. 정진우가 다시금 살짝 웃는 걸 곁눈질했다.
“감사해요. 코디님도 너무 잘생기셨어요.”
“이름 부르셔도 돼요.”
“네, 선재 씨. 저도 이름 불러주세요. 정진우예요.”
눈을 반짝거리는 하선재가 소녀 팬 같았다. 아니면 꼬리 흔드는 강아지 정도. 괜히 기분이 아니꼬웠다. 귓가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귓불을 잡아보았다.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사이좋게 마주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다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작가님 바로 시작하실 거 아니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상관없어요.”
언제 초조한 얼굴을 했냐는 듯 평온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진우가 얄미웠다. 방심할 때를 기다려 기습해 과거로 끌어들여 놓고 정작 자기는 쉽게 빠져나갔다. 습관적으로 하선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화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신난 기색으로 말을 거는 하선재의 목소리에 간간히 정진우의 나직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자꾸만 돌아보려는 몸을 억지로 고정했다. 화장실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찬물로 연거푸 세수하니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대충 휴지로 물기를 닦아낸 뒤 전시장으로 돌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걸었다. 정진우와 하선재가 커다란 나무기둥 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오셨어요?”
“예. 기다리셨어요?”
“아니에요. 이제 슬슬 시작할까 봐요.”
정진우가 몸을 일으켜 생명의 나무 근처로 가 신발을 벗었다. 벗어놓은 외투 옆에 운동화를 내려놓고 몸을 푸는 걸 지켜보았다. 옆에 선 하선재가 내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진우 형, 완전 멋있어.”
“……형?”
언제부터 형이야. 너무 놀라 하선재에게 몸을 휙 돌렸다. 하선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한 살 어리다고 하니까, 편하게 부르라고.”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형 동생 먹었지.”
부럽지? 나 이제 융이 아는 형이야. 어깨를 으쓱거리던 하선재가 곧이어 말해왔다.
“오늘 나 회사 끝나고 술도 한잔하기로 했는데.”
“술?”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언제 봤다고 형이며, 언제 봤다고 술인지 모르겠다. 작가랑 일자리에서 이렇게 형 동생 하는 것도 재주였다. 아니 그것보다, 정진우가 그런 성격인가. 어렸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쉽게, 쉽게 남들과 말을 놓거나 하는 게 매치가 안 됐다. 멍하니 돌린 시야에 정진우가 계속해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
“형도 와라.”
“뭐?”
“우리 술자리. 형도 불렀으면 좋겠다고, 진우 형이.”
헛웃음이 터졌다. 너나 많이 먹어. 말하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졌다. 하선재가 내 팔을 잡은 채로 계속해서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 왜. 같이 가자. 나도 좀 어색한데 잘됐잖아, 어? 형은 융이랑 안 친해지고 싶어? 융인데? 귓가에 닿아오는 숨이 간지러웠다. 달라붙어 오는 머리를 손으로 밀다가 정진우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힘이 빠진 틈을 타 하선재가 더욱 달라붙어 왔다. 가자, 가자.
“저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정진우의 목소리가 전시장을 울렸다. 하선재와 찰싹 붙어 있던 몸을 떼어내고 정진우에게 다가갔다. 나에게는 제멋대로 굴기만 하던 하선재도 정진우의 앞에선 얌전했다. 조금, 기가 찼다.
맨발로 로비까지 다다른 정진우를 따라 걸었다. 정진우의 퍼포먼스는 이동형이다. 대리석 위를 천천히 디디는 맨발을 보다가 핸드폰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주의사항을 적어놓았다. 동선 따라서 배치 인원이 이 정도. 나는 매일매일 정진우의 동선대로 미리 공간을 짚어가며 걸리는 것이나 위험한 건 없는지 살펴야 할 것 같았다.
미리 열어놓았던 유리문을 지나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쳤다. 정진우의 얇은 티셔츠가 펄럭거렸다. 흩날리는 티셔츠에 의해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불거져 나온 날개 뼈를 멍하니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움찔 손을 뻗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흙바닥 위에 주저앉아 무릎 꿇고 흙더미에 입을 맞추는 뒷모습에, 검붉은 흙으로 더럽혀진 마른 발에,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거의가 퇴근하고 몇 남아 있지 않은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꾸 다른 곳으로 튀는 생각 때문에 일이 진행이 안 됐다. 오늘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잡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메신저 창에서 하선재와 나눴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여덟 시, 우리 팀 사람들끼리 자주 가곤 했던 곱창집에서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환한 모니터를 앞에 두고 이마를 짚었다. 이미 퇴근한 승원 형에게 뭐하냐고 메시지를 보내 봤다. 곧장 답장이 왔다.
[나 혜연이네. 왜?]
여자 친구 만나는 줄은 몰랐는데. 이러면 오늘 형은 집에 안 들어올 가능성이 많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장한 뒤 다시 이마를 짚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여덟 시 반. 이미 만났을까. 둘이 무슨 얘기를 할까. 정말 친해졌을까. 화장실 간 사이에, 대체 어떤 대화를 했길래. 정신이 사나웠다. 결국 미술관 밖으로 나와 하선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퇴근했어?
“아니, 아직.”
핸드폰 너머가 시끄러웠다.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들이마신 연기를 뱉었다. 밤하늘에 연기가 휘날리다 곧 사라졌다. 오늘 낮, 정진우의 스러질 듯 위태로운 뒷모습이 떠올랐다.
“융이랑, 만났어?”
-당연하지. 여덟 시라고 했잖아. 진짜 안 와?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어 하얗게 빛나는 백열등을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대답했다.
“지금 갈게.”
* * *
곱창집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시끄러운 소음 너머로 나를 부르는 하선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선재가 집게를 잡은 채 나에게 손짓했다.
“금방 왔네? 올 거면서 빼긴.”
원형 테이블에 정진우와 하선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대답 대신 하선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그 옆에 앉았다. 정진우와 내 사이에 있는 빈 의자에 외투를 벗어 올려놓았다. 키 큰 남자 셋이 앉아 있으려니 4인용 테이블인데도 조금 좁은 느낌이 들었다.
“많이 먹었어?”
“아니, 형 온다니까 진우 형이 기다리자고 해서.”
신나서 떠드는 하선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선재의 손에서 집게를 받아들어 불판 위의 순대곱창을 뒤적거렸다. 배고프겠다. 먹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선재가 젓가락을 들었다. 열심히 먹느라 그런지 보조개가 깊게 들어가 있었다. 신기해서 볼을 쿡 찔렀다. 막 순대를 입에 넣던 하선재가 보조개 좀 건드리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두 분, 많이 친하신가 봐요.”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정진우가 말했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선재가 입 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킨 뒤 종알거렸다.
“처음에 저 미술관에 인턴으로 들어왔을 때, 요한 형이 많이 챙겨 줬어요.”
“아, 그래요.”
“네. 요한 형이 생긴 건 좀, 어렵고 차갑게 생겼잖아요. 근데 알고 보니까 엄청 무던하고, 다정하고, 그런 거예요.”
듣다가 조금 민망해져서 말을 잇는 하선재의 입을 막았다. 어렵지 않게 내 손을 치우고 야채와 순대를 한 젓가락 집어 우물거린다. 볼이 다람쥐처럼 부풀었다.
“어쨌든, 형도 요한 형이랑 지내다 보면 알 거예요. 요한 형 완전 진국이에요.”
정진우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쥐고 있던 술잔을 그대로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썼다. 야채를 몇 점 집어 먹으니 하선재가 깨작거리지 좀 말라고 핀잔을 줬다. 하루 종일 입맛도 없었고, 여기 순대곱창은 맛은 있는데 내 입엔 좀 매웠다. 시시콜콜 말하기도 그래서 얼버무렸다.
“난 이거면 돼. 별로 배 안 고파.”
“그럴 거면 왜 왔어, 술 마시러?”
“……어.”
아주 형편없는 대답이었다. 갑자기 자괴감이 몰려와 연거푸 술만 마셨다. 내가 진짜 여기 왜 왔지. 눈에서 떠나지 않는 정진우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의자에 놓여 있던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나 담배 좀.”
다녀와. 손을 흔드는 하선재의 어깨를 잡았다.
“너는? 생각 없어?”
“나? 난 됐어. 형 피우고 와.”
정진우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레 닥친 추위에 몸을 조금 떨었다. 안과 밖이 온도차가 상당했다. 외투를 둘러 입고 불을 붙였다. 막상 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괜히 온다고 해가지고는. 뺨을 툭툭 쳤다. 하선재 하는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다 보면 이 고역도 금방 끝날 것이다. 담배를 끄고 안으로 들어섰다.
열심히 곱창을 먹고 있는 하선재와 의자 하나를 두고 정진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정진우의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걸어가 정진우의 뒤에 섰다. 하선재가 앉으라며 손짓했다. 잠깐 고민하다 외투를 벽에 걸어놓고 하선재와 정진우의 사이에 앉았다. 셋이 붙어 앉아 있다 보니 자리가 아주 비좁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했다.
“아니, 작가님. 왜 자리 옮기셨어요.”
좁은데. 뒷말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는데 하선재와 정진우 모두 들은 것 같았다. 하선재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자리를 한 칸 옆으로 옮겼다. 이럼 됐지? 해맑게 물어오는데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자리 뺏기 게임도 아니고. 내가 또 자리를 옮기면 그때는 분위기가 아주 웃겨질 것 같아 한숨만 쉬었다. 옆에서 정진우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속에서 화가 울컥 치밀었다. 옆에서 마주 닿아오는 무릎의 감촉에 다리를 오므렸다. 의자를 조금 멀리 끌었다. 하나하나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한참 젓가락을 놀리던 하선재는 이제 배가 불렀는지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페이스가 빨라지려는 걸 제지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게 한 번 취하면 주사가 장난 아니라, 미리미리 관리해 줘야 했다. 하선재가 만류하는 내 손을 피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진우 형도, 형도 여기까지 와서 곱창엔 손도 안 대고 술만 마시는데, 왜 나는 못 마시게 해?”
정진우가 피식피식 웃었다. 하선재의 술잔에 제 술잔을 갖다 대며 마셔요, 하는 소리에 한숨이 터졌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자제력을 잃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하선재를 멀거니 보다가 또다시 닿아오는 무릎을 피해서 다리를 꼬았다. 시끄러운 와중에 정진우의 고른 숨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닿아오는 어깨와 호흡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자리가 너무 좁아 피하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하선재를 구경하며 나란히 앉아 술만 마셨다. 정진우가 내 속도에 맞추는 건지 어쩐 건지 비슷한 속도로 술잔이 비워졌다. 정진우의 앞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폭주한 하선재의 눈이 맛이 가기 일보 직전으로 변했다. 이미 맛 갔나. 좋아하는 짠도 안 하고 자작하는 꼴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저거 뒷감당을 누가 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다가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는 손가락에 시선이 멎었다. 정진우가 언제부턴가 빈자리에 팔꿈치를 받치고 머리를 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선재 씨, 귀엽네요.”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내 귀는 아직도 정진우의 목소리에만 예민했다. 간지러워지는 귀를 두어 번 턴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재는 확실히 귀여웠다. 작은 동물 같은 게.
“처음 선재 씨 봤을 때부터, 코디님이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작고, 귀엽고. 동생 같은.”
“좋아한다고 하기 보다는…….”
“약한 건가. 비슷한 거 아닌가요.”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저의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괜히 화가 났다.
“그럼 안 됩니까.”
정진우와 그대로 눈을 맞췄다. 내 눈을 빤히 보던 정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부러워서.”
머리가 멍해졌다.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심장이 귀에 달린 느낌이었다. 뭐라도 말하려 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선재의 손이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나 토할 것 같아…….”
먹다 남은 곱창 위에 토하려는 하선재를 붙들고 화장실에 갔다가, 계산하고 나와 택시 타려는데 전봇대에 토하려는 하선재의 등을 두드려 줬다가, 한적한 거리를 달리는 하선재를 잡아 왔다가, 온갖 난리를 쳤다. 지가 무슨 이봉준가 한 블록 달려놓고 보도블록 위에 쓰러져 드디어 42키로를 완주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27세 마라토너의 입을 한 번 때려주고 택시에 태웠다. 하선재를 싣고 달리는 택시 꽁무니를 지켜보다가 그대로 무릎을 짚었다. 진이 다 빠졌다.
“괜찮으세요?”
정진우가 내 등을 짚어왔다. 허리를 세워 손을 털어냈다. 마주본 채로 서 있었다. 무언가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잃어버려 눈만 굴렸다. 문득 정진우의 손이 내 머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쳐냈다. 탁 소리와 함께 정진우의 손이 물러났다. 남은 손으로 튕겨져 나간 손등을 문지르며 정진우가 웃었다.
“앞머리에, 뭐가 묻어서.”
“……아.”
머리를 슬슬 털어냈다.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단정한 운동화 코가 눈에 거슬렸다.
“그래도, 이렇게 손 대고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네, 죄송해요.”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집에 어떻게 가시냐고 물어보면 되는 일이였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마를 간질이는 앞머리를 반복해서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정진우와 아무것도 못하고 마주 서 있어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지, 잠깐 생각했다. 정진우를 부른 건 충동에 가까웠다.
“작가님.”
“네.”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정진우의 눈이 가로등 빛을 비추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반짝반짝한 눈동자는 똑같았다.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말을 멈춘 사이에 정진우가 입을 열었다.
“코디님 괜찮으시면, 술 한 잔 더 하실래요.”
눈을 피하는 정진우의 시선을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대답했다. 좋아요. 정진우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살피더니 그대로 앞서 걷는다. 약간 뒤쳐진 채로 따라 걸었다.
“아는 데 있으세요.”
“같이 온 저희 스텝들이랑 가본 곳이 있어요.”
“예.”
“멀지 않아요. 곁들여 나오는 음식이 순해서, 코디님도 잘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정진우의 등허리를 눈으로 훑었다. 순대볶음이 나에게 매운 걸 알고 있었다. 너는 왜 그런 사소한 걸 아직까지. 목이 멨다. 당장이라도 정진우의 멱살을 잡고 다그치고 싶었다. 왜 내 앞에서 사라졌어. 이제 와서 이럴 거면 왜 미리 오지 않았어. 넌, 왜.
눈을 감았다. 견딜 수 없어 크게 호흡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정진우가 안내한 곳은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어둑한 조명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자리 잡고 간단한 안주와 술을 시켰다. 그대로 한 병을 비웠다. 평소에 정종을 즐겨 마시진 않았는데 여기 술은 맛있었다. 안주도 마찬가지였다.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꼬치를 조금 집어먹다가 또 목이 막혔다.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코디님이, 안 오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정진우가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가만히 듣다가 웃었다. 내 기색을 살피던 정진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작가님은 저한테 묻기만 하시네요.”
“……코디님,”
“아니면 통보를 하거나.”
“저는,”
“아니에요.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하고 싶은 말, 있었다. 이런 말은 아니었는데 자꾸 말이 못되게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정진우를 응시했다. 가슴 한가운데를 해소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가 틀어막고 있었다.
“작가님이 그랬죠. 왜 안 물어보냐고.”
“…….”
“그거 물어보려고요.”
정진우의 손이 술잔을 감싸던 그대로 굳었다. 입맛이 썼다. 술잔을 비웠다. 안주를 뒤적거리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스무 살 생일에.”
잠깐 말을 멈췄다. 스물한 살의 내가 겪었던 고통이 생생하게 밀려왔다. 그때의 상실감이 다시금 나를 덮쳤다. 심호흡을 했다.
“어디 가셨어요.”
정진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라리 저게 나았다.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한참 말이 없더니 한숨을 쉰다. 기다릴 수 없어 재차 말했다.
“제가 기다리는 거, 모르셨어요.”
“알았어요…….”
“왜, 안 왔어요.”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내는 걸 지켜봤다. 남은 술을 털어 넣은 정진우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대답 못 하겠으면 다른 거 물어볼까요.”
“…….”
“기다리는 거 알면서 연락 한 번 못 할 만큼, 상황이 많이 힘들었나요.”
정진우가 작가로 데뷔한 후의 일은 거의 알고 있었다. 한국 나이로 스물넷이 되던 해, 정진우는 베를린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 베를린에 있는 에이전시와 정진우가 계약하기 전 상황은 몰랐다. 미술관에 취직해 융의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그거였다. 융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 정진우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겠지, 내가 멋대로 추측하고, 자위했던 지난날들이 조사를 하면 할수록 우스워졌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진 건. 마른 웃음이 터졌다. 나는 정진우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하하 웃다가 다시 물었다.
“나를 찾지 않았던 게, 그냥 작가님 의지가 맞나요.”
“……미안해요.”
한때는 정진우의 사과를 바랐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내가 다 미안했다고, 나 좀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정진우를 그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바랐던 사과를 들었는데, 기분은 더럽기만 했다.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럼,”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풍겼다. 기분이 미친 듯이 가라앉았다. 털어내려 한 번 웃었다.
“너는 그동안 다 잊고 살았니.”
정진우의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면서 말했다.
“나 보고 싶었다고 말했잖아.”
“…….”
“왜 그랬어.”
정진우의 쇄골에서 긴 목을 지나 턱 끝에 시선을 멈췄다. 입가의 점이 선명했다. 색소 옅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때 알았어요.”
“…….”
“선배 얼굴을 보니까, 내가 선배를, 다 잊고 산 줄 알았는데.”
하하 웃었다. 정진우의 손가락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갑자기 선배 얼굴을 보니까,”
정진우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무릎 위로 올려놓은 손등의 뼈가 불거져 나왔다.
“견딜 수가 없었어요…….”
채워진 술을 비워냈다. 손을 들어 정종을 한 병 더 시키고 정진우의 고개 숙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제대하고 이 년, 아니 삼 년이었나. 엉망으로 살면서 너만 찾았어. 일을 하다가도, 학교에 가다가도 네 비슷한 이름을 찾으면, 네 이름이 들리면 하던 일 다 내팽개치고 확인했어. 혹시 다른 학교 미대에 정진우라는 신입생이 들어왔나, 어딘가에 네 흔적이 남진 않았을까. 미친 듯이 찾아다녔어.”
“…….”
“그러다가 깨달았어.”
자꾸 마른 웃음이 터졌다. 입가를 한 번 쓰다듬었다.
“우린 아는 게 하나도 없었구나. 네가 갑자기 사라지면, 나는 너를 찾아낼 방법이 네 이름밖에 없구나. 적어도 네 감정, 내 감정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어느 한쪽이 놓아 버리면 다 소용없는 것들이었구나.”
정진우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애꿎은 술병만 계속 노려보았다. 많이 체념하고,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주문처럼 외곤 했던 말들이 덧없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정진우의 얼굴을 마주할수록. 얘기를 꺼내면 꺼낼수록 그때로 돌아갔다. 정진우가 사라졌을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절망, 집착, 좌절, 그 어떤 것들.
“처음엔 네가 정말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걱정했어. 그 다음엔, 너도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나한테 연락 한 번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일에 처해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살았어.”
“…….”
“넌, 어땠어.”
“저는,”
“너는, 지금 나한테 이렇게 하면 안 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 와서 정진우에게 원망을 쏟아내기엔 지난 시간이 너무 비참했다.
“너는, 나한테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야.”
“선배.”
“너는 나랑 다시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거야?”
정진우가 무언가 말하려는 걸 막았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너처럼 단념이 쉽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서 술잔만 기울였을 뿐인데 호흡이 가빠졌다. 먼 거리를 달린 것 같이 시야가 흔들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우리 어렸을 때 했던 연애, 그거 이제 끝내보려고.”
이제 와서. 우스웠다. 나는 8년 전에 했던 연애를 지금까지 혼자서 끌고 왔다. 감정은 남았는데 상대가 없어서,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가 없었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자. 네가 사라진 뒤로 나는 엄마 기일도, 생일도, 내 생일도 몰랐어. 지나고 보면 너랑 함께했던 날이었고, 또 지나고 보면 네 생일이었고, 또 지나고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고. 그렇더라. 그렇게 사는 게 제대로 된 건 아니잖아.”
가만히 눈을 내리 깐 정진우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정진우의 내리깐 눈에도 이유 없이 마음이 저렸다. 수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열없이 웃었다.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정진우가 없는 나를 견딜 수 없었고, 정진우를 그리워했고, 걱정했고, 증오했고, 결국엔 사랑했다. 나는 정진우를 사랑함으로써 겁내지 않아도 되는 모든 일들에 겁을 내곤 했다. 후회했다. 정진우를 향한 사랑이 집착과 미련으로 점철되어 원래의 형태를 잃은 걸 뒤늦게 직시한 뒤로는, 매일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나는 왜 정진우를 사랑해서. 왜 놓지를 못해서. 정진우를 다시 본 후에는, 지독하고 더러운 감정에 울화가 얹혔다. 왜 너는 내 앞에 지금에야 나타나서. 차라리 조금 더 늦게 왔으면, 정말로 다 정리할 수도 있었는데.
“나 좀 도와주라 진우야.”
간절히 말했다. 정진우가 계속해서 나에게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나도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짐작이 안 갔다. 하루하루 뼈저린 후회 속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이제 누구와도 그때 같은 거 하기 싫어.”
아직 정진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원래의 사랑은 아니어도, 나는 정진우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서 깍지 낀 내 손을 잡으려는 정진우의 손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만 건사하며 살기도 벅찼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힘든 거 하기 싫다. 너무 지쳤어. 무리야.”
“그런 게 아니라도, 그냥, 지금처럼만,”
“전시 끝나면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진우는 나를 잡진 않았다. 잠시 정진우의 단정한 머리를 내려다 봤다. 머리꼭지가 스무 살의 정진우와 같았다.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막 돌아서려는데 정진우가 급하게 중얼거렸다.
“한 번만,”
“…….”
“저한테 기회를 줘요. 한 번만.”
노력할게요. 한 번만. 정진우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애원했던 스물한 살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정진우가 어떤 표정을 했더라. 너는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다.
“미안하다. 나는 네가 너무 벅차.”
정진우를 내버려두고 술집을 나섰다. 찬바람이 얼굴로 훅 끼쳤다. 손에 쥐고 있던 얇은 목도리를 둘둘 감았다. 집까지 바쁘게 걸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빠진 숨이 목도리 안을 돌았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눈앞이 흐렸다. 목도리 밖으로 드러난 얼굴을 거칠게 비볐다.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걷는 길은 꽤 멀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옷장을 뒤졌다. 옷장 안 가장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잡아끌었다. 원래의 색을 잃고 누렇게 변한 쇼핑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옷장을 빠져나왔다.
안을 굳이 보지 않아도 뭐가 들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유행이 지난 운동화, 초라한 꽃 더미. 정진우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카드. 그대로 밖으로 나서 쓰레기장 앞에 섰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정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랬다. 쇼핑백을 쓰레기 사이로 던져 넣으면서는 웃음이 흘렀다. 이렇게 쉬운 걸 아직까지 끌어안고 살았다. 어차피 다시 신지도 못할 운동화. 누군가에게 전해줘 봤자 비웃음만 당할 게 뻔한, 허접하기 그지없는 조각을 어디에 쓴다고.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와 가구 사이에 끼인 캔버스를 잡았다. 불끈 힘이 들어갔던 손끝에 해진 종이 너머 거친 물감의 질감이 닿았다. 손가락에 힘이 풀린 건 순간이었다. 캔버스를 잡았던 손이 그대로 바닥에 닿았다. 쭈그려 앉아 캔버스 모서리를 들여다봤다. 시곗바늘이 째깍거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