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7/12)

Chapter 3.

정진우와 나의 관계는 급속도로 서먹해졌다. 되짚어 보면 내가 정진우에게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한 건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시 만났을 때부터, 나는 충분히 정진우를 거부해 왔다. 몇 번이고 말했다. 누구와도,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정진우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정진우에게 해왔던 말들은 모두가 그 순간의 진심이었다. 그동안의 내 말들이 정진우에게는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걸까. 거기다 공항에서 했던 이야기는 전과는 다르게 절절한 마음을 담지도 않았다.

굳어 있는 정진우에게 건넸던 세 마디 말은, 그냥 건조했다. 택시를 타기 위해 서둘러 가야 하기도 했고, 정진우에게 끝도 없이 휘둘리는 나에게 다소 질린 상태에서 건넨 말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정진우에게는 굉장히 와 닿았던 것 같았다. 상처를 돌보고 퍼포먼스를 재개할 때까지, 정진우는 나에게 더 이상 어떠한 접근도 시도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요. 상처를 소독하러 병원에 다니고, 다시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끝낼 때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게 편하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고작 2회를 진행했을 뿐인 정진우의 퍼포먼스는 순식간에 전시되어 있는 어떠한 작품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각종 매체에서 미술관으로 들어온 인터뷰나 취재 건이 수십 건에 달했다. 홍보팀에서 받은 리스트를 정리해 메일로 공유하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새삼 대단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정진우는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재능이 있었다.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투, 행동, 주변을 두르는 분위기 등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정진우가 정기적으로 미술관에 출입할 때마다 사무실 전체가 술렁이곤 했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치지도 않고 정진우를 향하는 나의 감정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 같았고, 정진우가 나에게 이제 와서 미련이 가득한 것처럼 구는 게 모두 이상한 일 같았다.

맨바닥에 앉아 다리에 바지를 꿰고 있는 정진우를 기다렸다. 3회째의 퍼포먼스 역시 무사히 지나갔다. 정진우가 뒤뜰로 오자마자 아직 실밥을 풀지 않은 발부터 살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진우가 내 머리 위에서 자그맣게 말했다. 괜찮다니까요. 그 뒤로는 침묵이었다. 정진우가 바스락거리며 옷을 입는 소리가 뒤뜰을 울렸다. 이 소리를 듣다 보면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다음 주에는, 실밥만 풀러 가면 되는 거지? 화요일 한 시?”

“네. 화요일이요.”

“그래. 그리고 메일 확인했겠지만, 인터뷰 건으로 잠깐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네. 지금 바로 올라갈까요?”

턱을 문지르며 잠깐 고민했다.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정진우는 퍼포먼스를 하는 날에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잠시 고민했다. 핸드폰을 켜고 메시지를 몇 번 썼다 지웠다. 망설이다 큐레이터님께 간략하게 메시지를 보낸 뒤 말했다.

“간단히 점심부터 할까.”

“…점심, 이요.”

“생각 없으면 바로 올라가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늘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정진우는 한참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 후 아주 작게, 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술관 근처 자주 가던 백반 집에서 마주 앉아 식사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우리만 조용했다. 짭조름한 찌개를 한 숟갈 떠먹었다. 정진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불안하게 널뛰던 마음이 정진우를 마주하지 않을 때와 같이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점점 아무렇지 않아졌다 . 요 며칠 정진우의 상태와는 정반대였다. 정진우는 꼭 우리가 얼마 전 헤어진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며칠 간격으로 바깥에 드러나는 정진우의 맨몸은, 살이 빠져가는 게 한눈에 확연히 보였다. 어깨뼈가 조금씩 도드라지고, 발목이 점점 가늘어졌다. 천천히 걸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목을 보고 있을 때면, 형용할 수 없이 야릇한 감정이 치밀곤 했다.

결국 이번에도 정진우는 밥을 반이나 남겼다. 제대로 식사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도 저렇게 조금 먹나. 회의실에서 인터뷰 일정을 잡으며 정진우의 후드 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가락을 힐끔거렸다. 정진우를 배웅하고 돌아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홍보팀에 전달할 문서를 작성하던 손가락이 계속해서 오타를 만들어냈다. 결국 그대로 자판을 긁어내렸다. 정진우에게 뒤흔들리는 나를 견딜 수 없어하면서, 정진우가 사정없이 휘청거리는 걸 모르는 척 구경하는 꼴이 대단했다. 정진우가 퍽 가라앉은 눈을 들어 나를 응시할 때는, 따끔한 통증을 타고 기분 나쁜 희열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치졸했다. 나는 정진우에게 가끔 한없이 치졸해졌다.

치솟는 정진우의 인기에 따라 갑작스레 밀려들어온 일을 처리하느라 강현과의 약속을 계속해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도 넘게 미루고, 미루다 보니 더 이상 미루기도 미안해졌다. 미안할 말을 하려고 잡은 약속이어서 더 그랬다. 실밥을 제거하러 진료실에 들어간 정진우를 기다리며 강현에게 연락해 저녁 약속을 잡았다. 약속에 선뜻 응하며 퇴근 시간에 맞춰 란 앞으로 오겠다는 강현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까만 다리 두 짝이 내 앞에 와서 멈췄다.

“아, 빨리 끝났네. 네네. 그럼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진우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보지. 꽤 오래 시선을 맞췄다. 문득 이렇게 오래 눈을 맞추고 있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보통은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거나, 정진우가 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요즘은, 거의 정진우가 그랬다.

“왜, 뭐 할 말 있어?”

대답 없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정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병원비를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함께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내일로 잡힌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퍼포먼스 취재와 함께 진행할 예정이라 준비해야 할 것들이 조금 있었다. 미리 받은 질문지를 정진우에게 넘기며 내일은 옷 좀 깔끔하게 입고 와. 당부했다. 말해놓고도 웃겼다. 그냥 해본 말인 게 너무 티가 나서.

호텔로 돌아갈 줄 알았던 정진우가 미술관까지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버스 타고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려는데 정진우가 내 손을 저지했다. 좀 걸어도 돼요? 정진우의 옅은 분홍빛 입술이 달싹거렸다. 머뭇거리다가 정진우에게 손짓했다.

“그럼 버스 타고 갈래? 조금만 걸으면 란 근처까지 가는 버스 있어.”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버스 안은 한산했다. 2인용 좌석에 정진우와 나란히 앉았다. 내 코트와 정진우의 야상이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부딪혔다. 야상이 닿을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버스가 덜컹이는 소리, 뒷좌석에 앉은 남자의 통화 소리, 작은 라디오 소리 사이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맴돌았다. 구름이 가득 껴 흐릿한 하늘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문득 정진우가 무릎에 올려놓았던 팔을 조금 움직였다. 정진우에게서 고개를 완전히 돌리고 있었음에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진우가 만들어내는 작은 소음이 귓가를 천둥처럼 울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손을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껴 있는 것이 수상했는데, 결국 비가 오려는 듯했다. 오늘 비 소식 없었는데. 뺨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회색 아스팔트가 점점 새까맣게 물들었다. 미술관 골목 어귀에 진입했을 때는 빗줄기가 꽤 굵어져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정진우가 갑자기 옆으로 훅 가까워졌다.

“비 많이 오네. 우산 없죠.”

“응. 이제 바로 앞인데 뭐. 빨리 가자.”

걸음을 더욱 빨리 하려는데 정진우가 내 팔을 잡았다. 그러는 동안 빗방울이 점점 거세게 몸을 때렸다. 뭐 해. 빨리 가자. 잡힌 팔을 당겼다. 정진우가 대뜸 제 야상을 벗어 내 머리 위로 씌웠다. 모자에 잠시 시선이 가려졌다. 얼굴 앞으로 늘어진 천을 잡아 올렸다. 안에 껴입은 후드를 뒤집어쓰며 빠르게 말한다. 빗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조금 커져 있었다.

“이대로 가면 코트 다 젖을 것 같은데, 곤란하잖아요. 빨리 들어가요.”

“그럼 너는,”

“저는 숙소로 가면 돼요. 내일 봐요.”

말을 마치고는 말릴 새도 없이 곧장 뒤돌아 뛰어간다. 커다란 발이 닿는 곳마다 고이기 시작하는 물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진우가 씌워준 야상에서 포근한 냄새가 났다. 정진우의 냄새였다. 나뭇가지에 고여 있던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습기에 더욱 진해진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숨을 멈추고 미술관을 향해 뛰었다.

금방 그치지 않을까 했던 비는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겨울비였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에 사무실 전체가 눅눅했다. 보조의자에 걸어놓은 야상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퇴근하자는 승원 형에게 약속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나왔다. 건물을 나서니 처마 밑에서 강현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함께 나오던 하선재가 약속 있다는 거 현이 형이었어? 하고 물었다.

“선재도 같이 퇴근했네?”

“어. 요한 형이랑 만나기로 한 거, 형이야?”

“응. 요한 씨가 나 오늘 맛있는 거 사준대.”

엥. 하선재가 이상한 감탄사를 뱉으며 나와 강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얀 뺨이 추위에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깥바람을 쐰 지 얼마나 지났다고 곧바로 새빨개진 볼이 신기해서 손을 들어 세게 꼬집었다. 악! 비명을 지른 하선재가 내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아오 진짜 볼이 남아나질 않아 형 때문에. 꼬집지 좀 마! 그나저나 나도 오늘 진우 형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둘이 만나는 줄 알았으면 같이 보자고 할걸.”

“진우? ……융?”

강현이 미술관 외관에 걸린 현수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진우의 전시 내용이 새겨져 있는 대형 현수막이 빗물에 젖어 펄럭이고 있었다. 어, 둘이 아직 본 적 없나? 내가 언제 소개시켜 줄게. 신나게 떠드는 하선재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귀를 툭툭 쳤다. 정진우랑 친해지고 싶어서 계속 작업을 걸었다는 둥, 이제야 만날 약속을 잡았다는 둥, 누가 들으면 정진우를 여자로 오해할 것 같은 말들을 한참 늘어놓던 하선재가 손을 흔들었다.

“나 먼저 가 볼게. 진우 형 전시 끝나기 전에 같이 한번 보자.”

나란히 서서 사라지는 하선재의 뒷모습을 보던 강현이 말했다.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도 된다고 그랬죠? 차 가져왔어요. 엉성하게 대답했다. 강현이 편 우산이 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손끝에 들고 있던 외투의 감촉이 느껴졌다. 바스락거리는 천이 손 안에서 구겨졌다.

엉망인 기분으로 강현의 차를 타고 서울 외곽까지 나왔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정신이 산란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외투만 계속해서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강현이 하던 말을 멈추고 야상의 출처를 물어봤다.

“그건 뭐예요? 웬 외투를 또 가지고 있어?”

“아, 이거요.”

정진우의 것이라고 말하면 되는 일인데 쉽사리 입이 안 떨어졌다. 아직 조금 축축한 소매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융, 작가 거요.”

“아, ……그걸 요한 씨가 왜,”

“좀 빌릴 일이 있어서.”

강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곱상한 손이 핸들을 돌리는 걸 지켜봤다. 음, 강현이 운전대에서 손을 놓지 않고 목소리를 끌었다.

“두 분, 전시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예?”

“융 작가랑, 요한 씨.”

“그건 왜…….”

“음, 그냥. 그런 것 같아서.”

아니면 말고. 강현이 웃었다. 강현의 옆모습을 한 번 봤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빗물이 동그랗게 맺히다 곧 창문을 긁고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하하. 덩달아 웃었다.

강현이 안내한 식당은 아주 고풍스러운 한식당이었다. 안쪽 자리에 위치한 좌식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씩 나오는 음식을 먹었다. 가방 옆에 접어놓은 야상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발끝에 닿았다. 발을 조금 오므렸다. 생선살을 발라 입 안에 넣고 꾹꾹 씹었다.

식사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계속해서 나오는 음식과 함께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이야기가 끊길 것 같으면 강현이 곧장 다른 화제를 꺼냈다. 말주변이 별로 없는 나에게 강현은 아주 좋은 대화 상대였다. 강현 덕분에 식사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가 지속됐다. 정진우의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뒷모습도, 음식을 삼키면 삼킬수록 조금씩 옅어졌다. 식사 말미에 나온 차로 입을 축이며 강현이 물었다. 자리 옮길까요? 잠깐 고민하다 그러자고 동의했다. 좋아요. 대답을 듣자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킨다. 미술관 근처로 이동하며 생각에 잠겼다. 강현의 담백한 태도가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강현이 좋은 곳을 알고 있다며 말한 곳은 정진우가 묵고 있는 호텔 바로 건너편에 있는 작은 바였다. 통유리로 된 창가에 자리 잡았다. 빗물로 얼룩진 창 사이로 호텔 건물이 반짝였다.

“요한 씨는 어떤 거 마실래요?”

“저 양주는 잘 몰라서, 추천해 주실 수 있어요?”

강현이 살짝 웃었다. 요한 씨 술 잘 마시니까, 그럼. 강현이 권하는 대로 시켜 먹은 술이 다섯 잔째에 이르자 살짝 취기가 돌았다. 아직 얼음이 가득한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얼음이 투명한 잔에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얼음 소리와 빗소리, 음악 소리에 섞여 들리던 강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술기운이 좀 도는지 소파에 몸을 묻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갈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채였다.

“……작가님.”

“네, 요한 씨.”

막상 운을 띄우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대뜸 이런 얘기를 꺼내도 되나. 분위기를 봐야 하는 일 아닌가. 정진우를 제외하고는 연애감정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한 적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는 쥐약이었다. 단 한 번 경험했던 짧은 연애도, 실수투성이였으니. 강현의 지극한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눈을 굴렸다. 앞에 앉은 강현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잘못한 거 있어요? 아까부터 자꾸 눈치를 보네.”

“…그건 아니고, 그게.”

“요한 씨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내가 맞춰볼까요?”

강현이 한 모금 남은 술을 마셨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지난번에 통화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어요.”

“…….”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걸… 후회한다든지. 내가 부담스럽다든지…….”

“…….”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꺼내겠구나.”

그래요? 강현이 잔에 있는 술을 모두 비웠다. 탁, 유리잔이 테이블과 부딪혔다. 얼굴을 문질렀다.

“작가님이 부담스럽거나, 그런 게 아니라.”

“…….”

“제가 만약,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면 작가님 같은 사람이랑 만나면 좋겠다, 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됐다. 정진우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상상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인데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나 봐요.”

“…요한 씨.”

“작가님 문제가 아니에요.”

결국 내가 문제였다. 아니, 문제가 너무 많아 어떤 것이 가장 문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뭐가 제일 문제인지를 모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탓에 내가 지금까지 끌어안고 사는 것들이 사랑이 맞는지, 미련은 아닌지, 정확히 칭할 수도 없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 이제는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작가님 같이 좋은 분이 신경 써 주실 정도로 제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고운 손이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강현이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왜 요한 씨는 자꾸, 그런 식으로 말을 할까. 경계하고, 밀어내고, 자책하고…….”

“…….”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서 요한 씨가 이런 사람이 됐을까.”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 위를 다갈색 손이 조심스레 덮었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생김새와 정반대인 거친 감촉이 닿았다. 작가의 손이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손이 예쁜 손 위로 겹쳤다. 조금 더 마디가 굵고, 손톱이 크고, 흰 바탕 위로 문신과 상처가 가득한.

강현의 손 안에 갇혀 있던 손을 천천히 빼냈다. 죄송해요. 간신히 나온 사과와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요한 씨 마음이 그런 건데.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빈 잔을 응시하던 강현이 물어왔다. 한 잔 더 마실래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번째 잔을 모두 비웠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던 강현이 문득 중얼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부러워지기는 또 처음이네.”

“……예?”

“그 사람, 아직 못 잊겠어요?”

직접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나도 모르는 새 멈추고 있던 호흡을 천천히 뱉으며 말했다.

너무 작아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아주 나직하게.

“네.”

강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아. 감탄사 같은 것을 가볍게 뱉어낸 강현이 소파에 몸을 완전히 묻었다.

“끼어들 틈이 없다, 정말.”

“…….”

“앞으로 종종 보면서, 술도 한잔하고, 식사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강현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친구 정도는, 하자고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서로 알아간 건 얼마 되지 않지만 강현에게 조금씩 인간적인 호감이 쌓이고 있는 상태였다. 종종 만나서 술도 한잔하고, 식사도 하고. 이제 아예 인연이 끊기겠구나, 좀 아쉽다. 하고 생각하는 차에 고마운 제안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거절하지 않아줘서 내가 더 고마워요.”

그 뒤로 방금 전까지 했던 이야기들이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며 점점 안심했다. 하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얼마나 감정이 무거웠으려고. 동시에 약간의 자괴감이 들었다. 첫눈에 반하고, 지금까지 그 강렬하지만 낡아버린 감정을 붙들고 있는 내가 미련했다.

거센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결국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더 샀다. 차는 두고 간다는 강현과 함께 집까지 걸었다. 집 근처로 다가갈수록 인적이 드물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간간히 이어지는 대화소리가 강현과 나의 사이를 맴돌았다. 군데군데 이가 나간 가로등 사이로 빗줄기가 비쳤다. 내일은 그치겠지. 내일까지 비가 내리면 정진우의 퍼포먼스를 취소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인터뷰는 몰라도 촬영 일정은 무조건 변경해야 했다. 이리저리 따라오는 복잡한 일들이 많았다.

빌라 안으로 들어가는 유리문 앞에 멈춰서 우산을 슬쩍 올렸다. 그림자가 진 강현의 얼굴이 어둑했다.

“같이 와주셔서 고마워요. 중간에 헤어져도 되는데.”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데요. 들어가요.”

“네. 다음에 뵐게요.”

꾸벅 인사하고 우산을 접었다. 처마 밑에 서서 문고리를 잡는데 강현이 내 이름을 불렀다.

“요한 씨.”

“예?”

“나는 요한 씨가, 이제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뭐를…….”

“경계하고, 밀어내고, 자책하고, 그러는 거.”

말을 이으며 강현도 우산을 접었다. 빗물을 슬슬 털면서 내 옆으로 다가온다. 유리문 앞에 강현과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봤다.

“안 힘들어요? 그렇게 사는 거.”

“……별로, 자책이나 그런 거 안 해요.”

“거짓말.”

내가 안 한다는데 왜……. 약간 울컥해서 강현의 옆모습을 슬쩍 올려다봤다. 뺨 한가운데 보조개가 움푹 파여 있었다.

“그날, 요한 씨가 엄청 취해서 나한테 그랬어요. 기껏 잘살아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된다고. 요한 씨 마음이, 거지같은 타이밍이 잘살도록 안 도와준다고.”

언제, 생각하다 깨달았다. 강현은 1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필름이 끊기도록 마구잡이로 술을 마시는 바람에 기억이 드문드문 했다. 내가 별소리를 다 했구나. 조영재에게도 그런 말은 한 적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오만소리를 다 했다, 싶어서 귀가 뜨거워졌다.

“나는 신기했어. 이렇게 오래 한 사람을 혼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로 있는 게. 거기다 요한 씨는 충분히 힘들어하고, 지쳐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런데도. 오늘도, 나한테 망설임 없이 대답했잖아요.”

“…….”

“그래서 그때, 요한 씨한테 나도 한 가지 털어놓은 게 있는데. 기억 안 나죠?”

기억 안 났다. 숨기고 싶었던 속을 다 까발렸다는 창피함에 빗줄기만 죽어라 쳐다봤다. 강현이 옅게 웃었다.

“뭐 이제는 알겠지만, 저도 남자 좋아해요. 나름대로 나도 비밀 공유한 건데, 다음 날부터 요한 씨가 나 티 나게 피하는 거 보고, 처음엔 동족혐오인가 싶었지. 가끔 게이 중에 그런 사람들 있거든. 와, 이 사람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싶어서 더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떠보고 그랬어요. 근데 계속 보다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그때서야 기억 못 하나, 했어.”

강현이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걸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아서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작년에는 정진우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고민 없이 이상한 사람이구나, 단정 지은 뒤 피하기부터 했다. 혼자 오해하고, 북치고 장구 치고 김칫국까지 들이켰다고 생각하니 귀의 열이 얼굴로 몰렸다.

“여러모로 아쉽네. 기억 못 하는 것 같았을 때,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굴어볼걸.”

말을 마친 뒤 들고 있던 우산을 핀다. 우산을 쓴 강현이 빗속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빗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어찌 됐든, 요한 씨가 남들한테 본인 힘든 얘기를 쉽게 할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하는 이야기예요.”

“……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나는, 요한 씨가 좀 쉽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친구로서 이 정도 얘기는 해도 되는 거죠?”

“그럼요. 고마워요.”

“그거, 주인한테 잘 가져다 줘요.”

강현이 턱 끝으로 한 손에 들고 있는 외투를 가리켰다. 집까지 걸어오며 모자가 다시 젖는 바람에 색이 진해져 있었다.

“나 진짜 갈게요. 언제 시간 내서 선재랑 술 한잔해요.”

“네. 들어가세요.”

커다란 남자가 천천히 걸어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이어져서 그런지 기분이 묘했다.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할 때, 이렇게도 흘러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지난 시간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내가 타인에게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살아왔다면, 강현처럼 나이를 먹을 수 있었을까. 하루 종일 신경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야상을 꾹 쥐었다.

날이 밝기 전에 그치길 바랐던 비는 기세를 잃지 않고 아침나절 내내 내렸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 탓에 안 그래도 추웠던 날씨가 더욱 추워졌다. 올해 초 세탁해서 옷장 안에 걸어둔 한겨울용 외투를 꺼내 입었다. 출근길에 지나치는 사람들 역시 한겨울에나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오늘 잡혀 있던 스케줄을 변경하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퍼포먼스 촬영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정해졌던 시간에 맞춰 인터뷰만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정진우에게 변경사항을 전달한 뒤 미간을 꾹 눌렀다. 언제부턴가 잠을 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정진우는 인터뷰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왔다. 미술관에 출입하고 처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진우 때문에 한바탕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정진우를 먼발치에서만 봐오던 직원들이 하나둘 일어서 악수를 청했다. 작가님, 작품 너무 좋아해요. 돌아가면서 악수를 하는데 정치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큐레이터님도 이 상황이 신기했는지 나에게 소곤거렸다. 진우 씨가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가봐?

소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멀뚱히 서 있는 정진우를 끌고 사무실을 나왔다. 회의실 문 열어줄게.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얌전히 따라오던 정진우가 시간 괜찮으면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하고 물어왔다. 혼자 보내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함께 뒤뜰로 향했다. 잠겨 있는 문을 여니 추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담배를 물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 라이터 놓고 왔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나 보다. 정진우가 대뜸 눈앞으로 라이터를 내밀었다.

“불 없으면 이거 써요.”

“어… 그래. 고맙다.”

그칠 줄 모르는 비로 인해 처마 밑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단정한 옆모습을 훔쳐봤다. 코트를 입고 있어 허전한 목을 보다가 옷장 앞에 걸어놓은 야상이 떠올랐다.

“너 야상 그거 아직 세탁을 못 해서…….”

“아. 천천히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그래. 세탁만 하고 바로 줄게.”

정진우를 다시 만나고부턴 항상 정진우가 다가오고, 내가 밀어내는 분위기가 지속됐다. 어느새 그게 익숙해졌나보다. 내 쪽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정진우가 점점 낯설었다. 정진우만 새삼스럽게 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바뀐 정진우의 태도를 대하는 나도 똑같았다. 담배를 비벼 끄는 정진우의 귀 밑으로 툭 튀어나온 턱 선을 쫓아 목,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어제 호텔까지 가면서 비를 꽤 많이 맞았을 텐데, 아프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팠으면 하선재도 만나지 않았겠지만.

“어제, 선재랑 만났다며.”

어제 정진우가 하선재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마자 말부터 툭 튀어나왔다. 약간 당황하고 있었는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정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 어, 그래…….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괜히 다리를 툭, 털었다. 나를 따라 담배를 끈 정진우가 쌩하니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반동으로 왔다, 갔다 반복하는 유리문만 쳐다봤다. 정진우의 목소리가 유리문 사이로 들렸다.

“안 들어와요?”

“어. 들어가.”

회의실까지 정진우는 땅만 보고 걸었다. 핸드폰을 꾹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약속까진 20분이 남아 있었다.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에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회의실의 문을 열고 불을 켜자 넓은 테이블 위 아침에 간단히 세팅해놓은 티백이며 다과가 보였다. 구석에 가져다 놓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가볍게 물었다.

“커피 줄까?”

“네, 감사해요.”

정진우 앞에 커피 잔을 갖다 놓고 벽에 기대서서 커피를 홀짝였다. 추위에 얼어 있던 몸이 조금씩 이완됐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렸다. 정진우의 반듯한 뒷모습을 관찰했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계속 서 계실 거예요? 다리 아프잖아요. 앉아요.”

정진우가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어차피 인터뷰어가 도착하면 앉아야 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붙어 앉고 싶지 않아 서 있었던 거였는데, 권해오니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옆자리에 앉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향수 냄새도 아닌데, 항상 냄새가 진했다. 냄새와 목소리, 색이 옅고 라인이 흐린 입술, 까만 눈동자, 입가의 점, 투박한 손, 발, 목, 어깨, 자세, 머리카락. 정진우를 이루는 특징은 너무 많아 하나하나 세어볼 엄두도 안 났다. 정진우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강렬한 이미지의 집합체였다. 조금씩 커지려는 숨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죽였다.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던 투박하고 하얀 손이 우뚝 멈췄다.

“어제 선배는 강현이랑 만났다고, 선재가.”

“……응.”

“뭐 했어요.”

“어?”

“아니, 아니에요.”

멈췄던 손을 움직여 다시 커피 잔 입구를 만지작거린다. 풍성한 속눈썹이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강현이, 선배한테 관심 있는 거. 알고 있어요?”

“…….”

“그 관심이 인간적인 호감 이상이라는 것도.”

강현과 정진우가 만난 건 나와 함께 했을 때, 딱 두 번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강현이 딱히 나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 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진우는 이상할 만큼 강현을 경계했다. 눈치가 비상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덩달아 커피 잔을 만지던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

“괜한 거 물어봐서 미안해요.”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미친 듯이 어색해졌다. 어차피 미안하다고 할 걸 괜한 말을 꺼내며 변죽만 울린 정진우가 얄미웠다. 인터뷰어는 언제 오는 거야. 시계만 반복해서 들여다봤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보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마자 닫혀있던 문이 빠끔 열렸다. 단정한 얼굴을 한 여자가 환히 웃으며 반쯤 열려있던 문을 마저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너럴 쿤스트 이서정입니다.”

“안녕하세요, 메일 드렸던 란 뮤지엄 코디네이터 서요한입니다. 이쪽이 융 작가님이고요.”

마주잡았던 손을 떼어낸 이서정이 정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작가님. 자리에 앉아 짐을 정리하는 이서정에게 차를 권했다. 차는 괜찮고, 물 한 잔만 주실 수 있을까요? 상냥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건넨 물을 단숨에 마신 이서정이 테이블 위로 깍지를 끼고 상체를 기울였다.

“인터뷰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오늘 퍼포먼스 촬영까지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밝은 말투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며 이서정이 인터뷰를 시작했다. 미리 받아놓은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작품에 관한 설명, 베를린에서 에이전시와 계약한 뒤의 행적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반복됐다.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건, 역시 뉴욕에서 끝낸 가장 최근의 전시에 관한 것들이었다. 뉴욕 전시에서 정진우는 퍼포먼스 하나와, 작품 세 점을 새로 발표했다. 모두 설치 작품이었다. 아직까지 이슈가 되고 있는 작품에 관해 질문을 하던 이서정이 갑자기 두 손을 맞댔다. 짝,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긴 한데, 작가님 퍼포먼스 얘기가 나온 김에. 누드 퍼포먼스라는 것이 한국에선 아직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잖아요. 거기다 작가님 같은 경우는, 노출된 수많은 문신이 굉장히 이슈가 되고 있어요. 혹시 그 문신에도 기존 작품이나, 퍼포먼스와 같이 의미가 있나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가던 정진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문신에 관해서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이어질 대답에 집중했다. 순간 빈 종이컵이 흰 손 안에서 우그러졌다. 일변한 정진우의 분위기에 슬쩍 눈치를 본 이서정이 말을 돌렸다.

“혹시 곤란한 질문이면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아니, 괜찮아요.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새 종이컵을 꺼내 물을 따른 정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히 심장이 조여들었다. 빈 잔에 물을 따르고 벌컥벌컥 비웠다. 정진우의 손 안에서 구겨진 종이컵이 이리저리 굴려졌다.

“사실 제 다른 작품들처럼 어떤 주관을 가지고, 보이기 위해서 한 것들은 아닌데…….”

“네, 말씀하세요.”

“처음에 문신을 새긴 건 십대 때인데, 그 당시 조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어요. 스트레스와 반항심 같은 게 섞인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새긴 거예요. 안 좋은 일이죠.”

정진우가 고등학교 때 문신을 새긴 건 단순히 상처를 커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거친 날에 베인 상처가 그리 예쁘게 아물지는 않았으니까. 단순히 상처를 커버하는 이유가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이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반항심은 뭐지. 사귀었다던 형, 나쁜 소문, 아니면. 어머니. 물을 한 모금 마신 정진우가 내 쪽을 힐끗 바라봤다. 모르는 척 손가락을 매만졌다.

“제가 독일로 스물하나에 갔는데, 그 당시가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을 때였어요. 어떻게라도 풀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스트레스의 배출구였던 셈이네요.”

“으음. 그럼 그림이나, 다른 것들의 의미는 없나요?”

“그림은……. 처음엔, 돌덩이나 자연 그대로의 나무 같은, 아무 의미 없는 그림 위주로 새겼고 그 다음에는, 기억에 남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이미지화시킨 도안 위주로 새겼던 것 같아요. 정말 제 작품이랑은 별로 관련이 없어서…….”

“작품이랑은 관련이 없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요. 도안은 작가님이 직접 그리신 건가요? 기억에 남는 것들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제가 그린 건 맞는데, 다른 질문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정진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서정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스물하나. 무심결에 넘겼던 말이 걸렸다. 정진우가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스무 살, 10월이었다. 정진우가 정확히 어느 때 독일로 건너갔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두 달은 한국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정진우의 생일 이후로도 그 커다란 대문 앞에 몇 번이고 찾아갔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쌓여있는 우편물. 그리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철문.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너는. 너의 가족들은. 그 시간 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묵혀놓았던 궁금증이 머리를 들었다. 정진우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서정이 다시금 질문해왔다.

“작가님 몸에는 그림 말고도 다른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숫자라든지. 숫자도 역시 그림처럼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새기신 건가요?

“숫자는, 정말 별거 아닌데.”

가슴에 새긴 숫자는 이제 반 이상 외우고 있었다. 하도 들여다봐서. 숫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절로 정진우의 벗은 몸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냥 작품 번호예요. 작품 번호랑, 완성한 날짜.”

“아, 그렇구나. 미공개작이 꽤 많은가 봐요? 거의 상반신 전체에 숫자가 둘러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네, 뭐. 별로 공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들도 있고. 선물한 작품도 있고.”

작품 번호. 완성 날짜. 머릿속에서 벗은 몸을 마주할 때마다 관찰했던 숫자들이 일렬로 떠다녔다. 그림과 서로 엉켜있는 다른 숫자들과는 달리 가슴 부근에는 세 줄의 숫자만이 외따로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010817110817200817

2408172908…

그 다음부터는 헷갈렸다.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간 인터뷰를 한 귀로 흘리며 번호와 날짜를 짜 맞췄다. 1, 8월 17일. 1, 18 아니, 11, 8월 17일. 20, 8월 17일. 24, 8월 17일……. 다음은 안 봐도 빤했다. 정진우는 내 생일마다 무언가를 완성했다. 왜 그것만 따로 떨어뜨려 새겼을까. 문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 내 눈치를 살폈던 정진우의 행동에 뒤늦게 화가 났다. 너는 내가 뭘 알아주길 바랐니. 제멋대로 힘들다고 다 내팽개치고 가 놓고선 어느 순간 돌아와 다 잊은 줄 알고 살았다고, 다시 찾을 생각도 없었다고 이야기한 건 내가 아니라 정진우였다. 그래놓고.

꽤 오랜 시간동안 인터뷰를 이어가던 이서정이 탁 소리를 내며 녹음기와 늘어놓은 짐들을 정리했다. 이어 들린 감사 인사에 화답하는 정진우의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못된 마음이 자꾸만 울컥거렸다. 뭘 그렸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뚜렷하게 다른 것들과 동떨어진 곳에 내 생일만 새겨놓은 게 꼭 정진우가 나에게 하는 시위 같았다. 나도 힘들었어. 떠나고 난 뒤 나도 견딜 수 없었어. 웃기지도 않았다.

인터뷰 내용 정리되면 메일 함께 공유해드릴게요. 이서정이 미술관 정문을 나서며 말했다. 미술관을 벗어나는 여자를 배웅하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직원만 출입 가능한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몸을 돌렸다. 가만히 나를 따라오던 정진우가 내 기세에 흠칫 발을 멈췄다.

“너 할 일 끝났으니까 가도 돼. 인터뷰 내용은 그쪽에서 잡지에 싣기 전에 메일로 공유해 준다고 했잖아.”

“그게, 제 코트 가지고 가려고…….”

그러고 보니 정진우는 도톰한 니트 차림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화가 나 잔뜩 부풀었던 마음이 푸시식하고 가라앉았다. 뻘쭘했다. 뒷머리를 한 번 가다듬고 회의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 따라오던 정진우가 작게 웃었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테이블에 널려있는 다과, 컵과 함께 의자에 코트가 얌전히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민망함과 열 받음, 약간의 궁금함이 뒤섞인 채로 의자 정리를 시작했다. 코트를 걸친 정진우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걸 도왔다. 얼추 정리가 됐을 때 굽혔던 허리를 피고 정진우의 까만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강현 작가가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알고 있냐고 물었지.”

복수심이 가미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문신이, 어쨌다고. 내 생일마다 완성했던 작품이, 대체 어쨌다고. 항상 나를 초조하게 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정진우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나쁜 마음인 건 알았다. 어차피 나는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알고 있어.”

정진우가 허리를 완전히 피고 나를 응시했다. 까만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겼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정진우의 깨끗한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이 추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강현이 부러웠다. 강현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상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내가 정진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강현을 만날 때마다 문득문득 들곤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었고, 정진우에게 아주 조그만 상처라도 남기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었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럴 줄 알았어요.”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몸이 굳었다.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두고 정진우가 살짝 웃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분간 없이 굴었죠. 미안했어요. 이젠 애같이 안 굴 거예요. 사생활에 대한 질문도 안 할게요. ……사적인 연락도 안 하고, 괴롭히지 않을게요.”

“…….”

“저 이제 가볼게요. 토요일에 봐요. 그날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머리를 숙이며 인사한 정진우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정진우가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당황스러웠다. 카트린이 떠난 날 이후 정진우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고리를 잡고 벌컥 열었다. 양옆을 둘러봤다. 정진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허탈한 숨이 터졌다.

정진우를 그렇게 보내고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고자 취했던 행동이 이상한 방식으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결국 일찍 잔다는 승원 형을 붙잡고 소주를 마셨다.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포장해 온 어묵 탕을 떠먹던 형이 나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야 소주가 물이야? 그렇게 마시면 위에 구멍 난다. 너 어제도 마셨잖아. 작작 마셔.”

“괜찮아, 이 정도는.”

형에게 어묵을 잡고 있던 젓가락을 내밀었다. 자. 아, 해. 형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가끔 너 또라이 짓 할 때마다 내가 심장이 철렁철렁 한다.”

어묵을 받아먹으며 형이 투덜댔다. 투덜대는 말을 흘려듣고는 실실 웃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요즘 왜 그러는 거야? 너 이렇게 우울해할 때마다 진짜 무서워.”

“뭘 무섭기까지 해.”

“…까먹었냐? 다시 말해줘? 너 제대하고 나서 어땠는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난 너 그때 진심으로 미친 줄 알았어.”

“……이거나 먹어.”

얌전히 또 받아먹더니 벌컥 성을 낸다.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소주병을 냉장고에 넣어두며 형이 일갈했다. 그것만 먹고 발이나 닦고 자라. 좋은 말 할 때. 더 마시겠다고 하면 형이 진짜 때릴 것 같아서 알았다고 손으로 원을 그렸다. 형이 저 화상. 하며 가슴을 탁탁 쳤다.

두 시가 지나자 눈이 감겼다. 얼른 씻고 방에 들어와 불을 껐다. 빨리 휴관일이 와서 좀 쉬고 싶었다. 이런저런 사고가 많아 전시 오픈을 한 이후로 휴관일이어도 쉬지를 못했다.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다. 뒷목이 뻐근했다. 침대에 누워 자기 전 마지막으로 충전기를 꽂아놨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술을 마시는 동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한 통씩 와 있었다.

[요한아, 전화를 안 받네. 많이 바쁘니? 방금 너희 아버지 부인이 이번 주가 고비라고 아줌마한테 연락을 했어.]

안 보느니만 못 한 메시지였다. 문득 내 인생 진짜 왜 이러지. 하고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삼재인가. 하는 생각도 스쳤다. 나만 이렇게 살기가 고달픈 건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답장을 하기도 싫어서 아줌마에겐 죄송하지만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두고 잠을 청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번 주가 고비라는 메시지 이후 주말이 될 때까지 아줌마한테서 다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메시지를 받은 뒤로 이틀 동안 잠을 계속해서 설쳤다. 잠이 들려고만 하면 악몽을 꿨다. 내용은 다양했다. 엄마가 나올 때도 있었고, 정진우가 나올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 남자의 얼굴을 거의 잊었기 때문이었다. 멍한 머리를 문지르며 미술관 바닥 구석구석을 살폈다. 피곤하다고 정신 놓고 있으면 또 어떤 사고가 벌어질지 몰랐다. 정진우가 다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했다.

화단까지 모두 둘러보며 거슬리는 건 치운 후 사무실로 가려다 잠깐 정신 좀 차릴 겸 걸을까. 하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 층부터 시작해 찬찬히 설치물을 관람했다. 퍼포먼스 동선 주변을 두르는 작품들 말고는 오픈 후 거의 처음으로 다시 보는 거였다. 사람들이 나직하게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제멋대로 뻗은 자연물 사이를 걸었다. 먼지가 낀 듯 답답했던 시야와 머리가 조금 시원해지는 것도 같았다. 역방향으로 전시를 관람하다 어느새 입구까지 다다랐다. 전시의 시작점에 놓인 그림 두 점을 스쳐 지나가려다 발을 멈췄다.

Die Passion : 고난

규격이 같은 그림이 같은 제목을 하고 나란히 걸려 있었다. Die Passion. 정진우 측에서는 작품의 한글명을 고난이라고 칭했다. 정진우가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회화 시리즈. 이게 총 몇 점이었지. 내 방에 아무렇게나 끼워 놓은 그림과, 정진우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이 번갈아가며 멍한 머리를 두드렸다.

사무실로 돌아와 정진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정진우의 작품에 관한 정보를 조사했다. 아직 활동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작가라 그런지 영어, 독어 사이트를 다 뒤져도 작품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다. 정진우 본인의 정보가 젊은 작가치고 굉장히 많은 것에 비해 작품의 정보는 극히 적었다. <고난> 시리즈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정진우의 작품 중 유명한 걸로는 손에 꼽는 작품인데도 그랬다. 정진우의 과거에 관한 궁금증이 다시금 머리를 쳐들고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궁금해도 어쩔 거야. 본인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내가 별수 있나. 포기하고 전시장으로 조금 일찍 나가 있으려는데 문득 나를 대하던 카트린의 의미심장한 태도가 떠올랐다. 카트린. 모니터 안에서 방향을 잃고 떠돌던 커서를 이끌어 메일 창을 열었다.

“……나도 참 가지가지 한다.”

내 혼잣말을 들은 신예림이 어? 뭐가 가지가지야? 하고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하고 메일 창을 닫았다. 전시장에 도착한 정진우가 옷을 훌렁훌렁 벗고 몸을 푸는 걸 지켜봤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나도. 무사히 퍼포먼스를 끝낸 뒤 인사를 마치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사라지는 정진우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지가지 해. 결국 사무실에 앉아 카트린에게 보내는 무례한 메일을 작성하고, 사적인 질문들이 가득한 메일을 발송하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나는 진짜 답이 없는 인간이었다.

퇴근할 때까지 카트린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오 분에 한 번 꼴로 메일 창을 띄워 놓고 새로 고침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시차가 있으니까. 카트린이 내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읽고 무시한 걸 수도 있는데 무례한 짓은 할 대로 다 해 놓고 혼자 납득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세탁소에 들러 정진우의 옷을 맡겼다. 월요일에 받으러 오라는 말과 함께 세탁 비를 지불했다. 며칠 새 밀린 집안일을 하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소주병을 따려고 했더니 승원 형이 진지하게 내 어깨를 잡고 도리질을 쳤다.

“너 지금 거의 일주일 내내 소주 까는 거 알아? 오늘은 쉬어, 좀. 내일 퇴근하고 선재랑 같이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 모레 는 진짜 쉴 수 있으니까, 어? 달리고 싶으면 내일 달려. 지금 뭐 전시 없는 기간도 아니고, 아직 한 달도 넘게 주말 없이 살아야 하는데 왜 이 타이밍에 난리야, 진짜.”

적당히 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형이 본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시하고 딸까. 하다가 그대로 소주병을 냉장고 안에 넣어 두었다. 형이 걱정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했다. 내가 우울하면 무섭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정신 나간 짓들을 조영재와 번갈아가며 감당했던 형은, 내가 무서울 만했다. 몇 년 전 겨울방학 때였나, 나라 전체에 한파가 불어 닥쳤을 즈음 새벽에 맨발로 그 당시 살던 빌라 앞에서 망연히 서 있던 내게 외투를 건네며 형이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너 이러다가 죽을까봐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형은 내가 그때로 돌아갈까 무서운 거였다. 나는,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형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눈은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이 무거운데, 정신은 말짱했다. 얼마 전부터 자리에 눕기만 하면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누운 자리에서 뒤척거리기만 반복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됐을 무렵, 베개 옆에 놔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숙자 아줌마였다. 받지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금 손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요한아.

“네. 말씀하세요.”

아줌마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싶었다. 잠을 못 자는 바람에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 네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어.

“네…… 그래요.”

-으응. 네가 아무리 싫어도, 아버지지 않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네. 감사해요.”

-그래. 아줌마가 주책이라 그래.

“아니에요. 그동안 그쪽 연락 받아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요한아.

“더 이상 그쪽에서 연락 올 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아줌마한테 항상 폐 끼치는 기분이었는데.”

요한이 너, 하고 말을 멈춘 아줌마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는 그 남자를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퍽 슬퍼 보였다. 나는, 별로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어차피 내 인생에서 없었던 사람이었다. 아줌마는 나한테 어떤 반응을 바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그 사람은 그냥 타인이었다. 타인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그 남자의 죽음에 드는 생각은, 그냥 괴롭게 죽어서 안타깝네, 그뿐이었다. 그나마도 아주 억지로 끌어낸 감정이었다.

-요한이 너, 정말.

“……네.”

-그렇게 끝까지 정 없이, 그래도 네 아버진데…….

“계속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 사람 제 아버지 아니에요.”

-…….

“오늘 좀 피곤해서, 그만 끊을게요. 엄마 기일에 봬요.”

아줌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불안하게 뛰는 가슴은 그대로였다. 어디 산에라도 올라가서 마구잡이로 소리치고 싶었다. 여기서 소리 지르면 신고 들어오지 않을까. 방바닥이라도 두들기고 싶은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왜 이제 와서 다들 나한테 난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잠시라도 가만히 놔두지 않으면, 어디 큰일이 나기라도 하나. 왜 나한테만.

웬일로 일찍 일어난 형이 아침을 차려놓고 나를 깨웠다. 까치집이 된 머리로 형과 마주앉아 토스트를 삼켰다. 까칠한 빵이 닿을 때마다 입 안 여기저기가 따끔거렸다. 양치를 하고 살피니 입 안 곳곳이 다 헐어 있었다. 며칠 잠 좀 설쳤다고. 덩치에 안 맞게 몸은 또 더럽게 약했다.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카트린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로 하기엔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으니 한국 시간으로 4시경에 전화를 하겠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키보드를 모니터 바로 앞까지 미뤄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뒤이어 사무실에 출근한 하선재가 내 얼굴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형, 무슨 일 있어? 이 질문이 오늘만 다섯 번째였다. 아무 일 없다고, 괜찮다고, 안 아프다고 하자니 이젠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눈썹을 내리며 한껏 극적인 표정을 지은 하선재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따 퇴근하고 술 한잔하자. 승원 형한테 들었어. 요즘 형 술 못 먹어서 죽은 귀신 붙었다며?

다 헐은 입이 껄끄러워서 점심 대신 우유를 한 팩 사먹었다. 뭣 좀 사다줄까? 걱정스레 물어오는데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유난에 유난을 거듭해 팀원들 얼굴을 보기가 창피했다. 다 큰 놈이 허약해 빠졌다고 생각하겠지. 우유를 쭉 들이켜고 미술관 주변을 조금 돌았다. 차가운 공기라도 마시고 있어야지, 머리가 안 돌아가서 큰일이었다. 이제는 말도 좀 느리게 나왔다. 오늘은, 미친 듯이 마시고, 미친 듯이 자야지. 내일은 아무 데도 안 나가야지. 침대 밖으로 안 나갈 거야. 하나마나한 다짐을 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세 시 반쯤 되자 가슴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숨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네 시 하고 오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나섰다. 다리가 제멋대로 꼬였다.

“여보세요.”

-요한! 카트린이에요.

“카트린, 반가워요. 메일에 답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도착한 뒤뜰에서 담배를 꺼냈다. 내가 어떤 것들을 물어봤더라. 카트린의 이야기에 대꾸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메일에는, 정진우의 <고난> 시리즈에 대한 질문과, 4년 전, 정진우가 지금의 에이전시와 어떻게 계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적었다.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으며 이리저리 주변만 맴돌던 대화가 점차 잦아들었다. 메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카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융은 잘 있나요?

“네, 퍼포먼스도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고, 메일 확인하셨겠지만 인터뷰도 진행했고요.”

-그런 것 말고. 요한이 보기에 융은 지금 어때요?

“무슨…….”

-요한의 메일을 보고, 처음엔 내가 간섭해도 되는 일인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역시 카트린은 나와 정진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약간 느릿하고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전화기를 울렸다.

-나는 지금 둘의 사이가 어떤지 전혀 짐작을 못 하고 있는 상태이니까. 요한이 내 이야기를 듣고 좋지 않은 쪽으로 판단한다면, 융에게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아요.

“…….”

-내가 요한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둘 사이가 조금은 좋은 쪽으로 바뀌게 될까요?

“그건,”

그렇다 아니다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카트린이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 후,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대답해 줄 수 있어요. 하는 긍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고난 시리즈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고난 시리즈…….

“제목의 뜻이라든지, 왜 작품 수는 여덟 점인지. 그런 것들.”

-내가 알기로는, 고난은 총 아홉 점이에요.

“…….”

-그중 한 점은, 요한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나에게 있는 것. 짐작하고 있었다. 카트린도 그것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제목이 왜…….”

-융이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는 알지 못해요.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계약할 때 그는 이미 그 그림을 네 점이나 완성해 놓은 상태였고, 당시 그 그림의 제목은 사랑.

“…사랑, 이요.”

-맞아요. 고난 시리즈는 제목이 총 두 번 바뀌었어요.

“…….”

-처음엔 기억, 다음엔 사랑, 그리고 고난.

파시온. 카트린이 말끝을 늘였다. 약간의 웃음기가 배여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베를린의 흔한 거지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로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러다가 그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계약을 진행하게 되면서 그가 우리 쪽에 단호하게 요구했던 것은 딱 하나였어요. 매년 한 점씩 완성하는 고난 시리즈는 팔지 않겠다.

“……네.”

-언젠가, 여섯 번째 고난을 완성하고 술에 잔뜩 취한 그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한 적이 있어요. 한국어와 독일어가 엉망으로 섞여서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인상 깊었던 말이 하나 있는데, 처음엔 사랑인 줄 몰랐고, 사랑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잊어버리는 것밖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 기척을 알아차린 카트린이 덩달아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바보 같은 일이에요. 다 잊어버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사람이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발표하는 일 자체가 모순이죠.

바보 같은 일이 맞았다. 사랑인 줄 몰랐다고. 자기가 하고 있던 게 사랑인 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서 잊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고. 정진우가 이렇게까지 멍청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을 줄이야.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쨍쨍한 햇빛을 받으며 흙 사이로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잡초를 셌다. 카트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융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

-바보 같고, 감정적이고, 저에게 닥친 고난에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융의 가장 큰 재능은 작가로서의 능력이 아닌 사랑받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눈가를 꾹꾹 눌렀다. 카트린에게 메일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 이런 짓을 몇 번 더 반복해야 나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항상 이렇게 후회할 짓을 알면서 저질러 왔다.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카트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웃음이 나왔다. 더 후회했겠지. 왜 그때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까. 이렇게.

카트린에게 긴 통화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카트린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정진우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혼자 외롭게 지내지는 않았겠구나. 문득 든 생각 뒤로는 더 큰 자괴감이 따라왔다. 정진우를 멍청하다고 욕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최고로 멍청했다. 카트린과 통화를 마치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흙덩이가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돌이 아니라 흙 위에 앉아 있는 것도 몰랐다. 엉덩이가 축축했다.

퇴근 길, 어깨동무를 한 형과 하선재가 내 앞에서 재잘거렸다.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술, 우리가 먹어준다! 신나 보이는 둘에겐 미안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은 내가 술을 마실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술을 마시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짐작이 안 갔다.

“미안. 오늘은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다. 나 먼저 갈게.”

멍하니 나를 보는 둘을 지나쳐 걸었다. 다다다 하는 발소리와 함께 형이 뒤에서 나를 덮쳤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너 진짜 요즘 왜 그러냐.”

“별일 아니야. 괜찮아.”

“진짜야? 나 걱정 안 해도 돼?”

응. 안 해도 돼. 어깨에 올라온 형의 팔을 잡아 내렸다. 등을 툭툭 두드렸다.

“바로 집에 갈 거면, 같이 갈래?”

“아니. 괜찮아.”

“……너 진짜 별일 아닌 거 맞지? 나 오늘 혜연이네 갈 건데, 진짜 괜찮아?”

“응. 누나네 가면 좋지 뭐. 나도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었는데 잘됐다.”

씩 웃었다. 형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등을 팡팡 두드렸다. 나 진짜 괜찮아. 선재 기다린다. 가. 형 너머로 형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하선재가 보였다. 형이 주춤주춤 하선재에게 향하면서 말했다. 너 진짜 안 괜찮은 것 같으면 말해. 언제든지. 형이 달려간다.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알았어, 고마워.

목적지를 두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머리가 완전히 굳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편한 기분이 들었다. 잠을 안 자는 게 답인가. 왠지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해가 진 거리에는 일요일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걷기도 하고, 색깔만 따라 걷기도 했다. 가볍게 뛰어 보기도 했다. 지치는 기분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하니 퇴근한 후로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사이 승원 형에게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혜연 누나네 가고 있는데 진짜 괜찮냐는 메시지였다. 괜찮아. 답장을 보내려고 세 글자를 치는데도 오타가 났다.

[진짜 고내찮아. 내일 보ㅏ.]

이정도면 알아보겠지 싶어서 그냥 보냈다. 슬슬 집에 가 볼까. 지금 상태면 죽은 듯이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한 자신감이 생겼다.

집 근처까지 찾아가는 데 길을 조금 헤맸다. 나는 꽤 멀리까지 와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정진우가 묵고 있는 호텔 앞을 지났다. 멍청하고, 이기적인 정진우.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왜 웃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웃으면서 걸었다. 집으로 통하는 골목 어귀의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물을 샀다. 내일은 집에 처박혀서 아무 데도 안 나가야지. 밥이 없으면 시켜먹고, 침대에만 있을 거야. 담뱃갑의 포장을 벗기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빨리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침대에 파묻혀서.

가벼웠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라이터를 든 손도 그대로 굳었다. 가로등 밑에서 쭈그려 앉은 창백한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얘가 왜 여기 있지. 어떻게. 텅 비어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좋아지는 것 같았던 기분이 한껏 내려앉았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배가 찌릿하고, 다 헐은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나는 곧 머리를 털었다. 아니다. 나는 앞으로 후회할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거다. 방금 다짐했다.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다. 모르는 척. 지금까지 잘해온 대로. 네가 얼마나 힘들었든, 얼마나 나를 잊으려 노력했든 성공했든 못 했든. 언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걸 깨달았든. 이젠 하등 상관없는 일이어야 했다. 내가 더 힘들었고, 내가 더 고통스러웠다. 너는 그랬다. 다 잊은 줄 알았다고. 나를 찾을 생각도 안 했다고. 그래 놓고. 이젠 무조건 네가 우선이 아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새것 그대로 바닥에 버려버렸다. 쭈그려 앉은 상태 그대로 나를 보기만 하는 정진우를 지나쳤다. 멍청하고, 이기적인 얼굴. 막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진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유리문에 비치는 정진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운동화의 밑창이 깨진 돌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는 심장소리와 맞물렸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남자의 뒷모습이 조금씩 작아졌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대로 모르는 척 들어가면.

“야.”

어깨에 걸쳐 있던 가방이 문고리에 걸려 바닥에 떨어졌다. 툭, 가방이 떨어지는 소리에 정진우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섞였다. 유리에 비친 흐릿한 모습이 아닌 실제의 정진우가 눈 안에 한가득 담겼다. 스무 살과 같고, 스무 살과 너무도 다른, 정진우.

“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정진우의 등이 크게 들썩였다. 발끝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한곳을 맴돌았다. 까만 뒤통수가 점점 넓은 어깨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선재가, 요즘 선배가 좀 이상하다고, 오늘 특히 걱정된다고, 카트린도 갑자기, 내 연락은 안 받을 거고, ……미안해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움켜쥐고 있던 신경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떨어진 가방을 주울 생각도 못한 채로 정진우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잡아 거칠게 돌렸다. 핏기가 빠진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흰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머릿속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는 나한테 뭐가 그렇게 미안해?”

귓가에 규칙적으로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울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정진우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어? 말해 봐. 무언가 말할 듯 달싹거리던 정진우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하하. 웃음이 났다. 미친놈처럼 실실거렸다.

“지금까지 멋대로 굴어놓고, 하다하다 집까지 알아내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 그게 갑자기 미안해졌어? 아니면.”

“…….”

“힘들다고 네 맘대로 나 버리고 사라진 거. 그게 미안해? 왜 대답이 없어? 말해봐.”

“…….”

“왜 말을 못 해? …너, 이럴 거면,”

코끝이 싸했다. 떨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웃고 있던 입매가 부자연스럽게 굳어갔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나 왜 버렸어?”

너무 늦어버려 오히려 우스운 물음을 던졌다.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왜.”

“…….”

“왜 버렸어?”

정진우의 코트 깃을 움켜잡았다. 손에 들어간 힘이 제어되지 않았다. 제멋대로 떨리는 손이 정진우를 움켜잡고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정진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렇게 다시 나타날 거면, 염치도 없이 미안하단 소리만 할 거면, 버리지도 말았어야지. 이렇게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전하는 숙자 아줌마의 목소리가 뜬금없이 머리를 때렸다. 그 위로 카트린의 목소리가 섞였다.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를 향한 원망인지, 내 앞에 있는 정진우를 향한 원망인지 분간이 안 가는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깊숙이 숨겨놨던, 지독한 악취가 흐르는 마음을 무작위로 끄집어 던졌다.

“나는 그냥 버리고 갔다 돌아오면 언제든 받아주는 사람이야?”

정진우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이미 내 목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의지를 배신한 목소리가, 손이, 말끝이, 마음이, 위아래로 요동치기를 반복했다.

“내가 왜 그래야 돼?”

“……그런 거,”

“아무 때나 버리고, 아무렇게나 나타나서, 사정이 있었으니 받아달라고 불쌍한 척하면, 나는 다 받아 줘야 돼?”

“……그런 거 아니에요.”

“왜 내 마음은 아무도 묻지 않아? 내 마음은 다들 몰라도 되는, 그런 거야?”

뼈가 불거져 나오도록 꽉 쥔 주먹으로 정진우의 어깨를 미친 듯이 내리쳤다. 어깨와 맞닿는 주먹이 어느 순간 형태를 짐작할 수 없게 흐려졌다. 눈을 꾹 감았다. 눈 안에 가득 차 있던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 뺨을 적셨다. 꽉 다문 입술이 부르르 진동했다. 마른기침이 터졌다.

“마음대로 버리고, 떠나고, 잘살아보려니까 다시 나타나선 맡긴 거라도 있는 것같이 지독하게 요구하고. 그러는 동안 나를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어? 내가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한 번이라도!”

“그래서,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있는 힘껏 어깨며 가슴을 내리치던 손이 정진우의 손아귀에 잡혔다. 흔들리는 시야에 정진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잡혔다. 정진우의 손가락이 내 얼굴 앞에서 멈췄다. 뺨에 닿을 듯 쭉 뻗은 손이 천천히 오므라드는 게 비쳤다. 손목을 잡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낯선 온도가 손목을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선배 말대로 내가,”

“…….”

“멋대로 사라지고, 혼자 정리하고, 잊어버리고, 다시 멋대로 나타나서…….”

귓가 근처를 맴돌던 커다란 손바닥이 뺨을 감쌌다. 역시 뜨거웠다. 열이 펄펄 나는 손이 젖은 눈가를 문질렀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리가 제 힘을 잃고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바닥이 울렁거렸다. 내가 딛고 있는 곳이 땅인지 늪인지 분간이 안 갔다.

“선배가 나한테 흔들리는 것 같으니까, 마음대로,”

“…….”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해 보려고 그랬는데,”

“……이, 개자식아.”

“나랑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선배 얼굴이 너무 지쳐보여서. 내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구나. 그때서야 실감이 나서…….”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었다.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너를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한 게 8개월이었다. 짧은 기간이었다. 잊는 데도, 8개월이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너의 얼굴만 보면 심장이 뛰고, 네 목소리가 들리면 귀가 예민해졌다. 너에게만. 스물하나에 처음 학습했던 그대로. 금치산자도 이보단 나을 거였다. 정진우를 만난 뒤로 그렇게 되뇌었던 각오가 한순간에 어이없이 스러졌다. 먼지가 되어버린 다짐과 함께 힘없이 늘어지는 머리가 딱딱한 어깨와 부딪혔다.

눈에 사슴 같은 목이 가득 찼다. 포근하고 따뜻한 냄새가 나를 둘렀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도리질 쳤다. 이 개새끼야. 너 같이 이기적이고 못돼 먹은 거. 나는, 너 같은 거. 너 같은 거 이제 안 만날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 거야. 그게 안 되면, 혼자라도 행복하게 살 거야. 웅얼거리는 내 머리 위를 정진우의 커다란 손이 덮었다. 데일 것 같은 손가락 끝이 귓바퀴에 닿았다.

불현듯, 혹시나 터질까 조심스레 억눌러 왔던 것들이 손 쓸 새도 없이 모두 새어나가며 비어 있던 마음의 구석구석을 점령했다.

또다시 버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정진우를.

“너 죽여 버릴 거야.”

“…….”

“너 내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로 인해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정진우의 어깨에 갇혀 있던 얼굴이 터질 것같이 뜨거워졌다.

“같이 있어준다며, 개새끼야. 네 입으로 그랬잖아. 같이 있어준다고.”

“……미안해요.”

“같이 있어준다고 했잖아…….”

머리 위에 놓여 있던 손이 어깨를 지나 천천히 등허리를 감쌌다. 팔을 둘러 나를 꼭 끌어안은 정진우가 속삭였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정진우의 등을 마주 안았다.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나 힘든 것 좀 알아달라고, 시위했다. 조금 더 깊숙이, 하얀 목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을 연거푸 토했다. 부드러운 살갗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그냥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행복에 뒤따라온 아픔이 너무 길고 독해서, 두드러지는 행복도 상실도 없이 그냥 사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욕심이 나는 걸 모르는 척했다. 사실은 너무 힘들었다. 8개월. 그보다 더 짧은 기간이 될지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정진우가 필요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급하게 맞물렸다.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계단을 오르며 몇 번을 넘어졌는지 기억도 안 났다. 우당탕 소리가 한 층을 오를 때마다 반복됐다. 계단을 헛디뎠던 발목이 삐었는지 시큰거렸다. 정진우의 목이며 얼굴, 머리카락, 배, 등, 손에 닿는 온갖 곳을 문지르며 올라오는 바람에 다른 곳을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에 부딪힌 몸이 통증을 호소했다. 문지방에 서서 다시금 까칠하게 껍질이 올라온 입술에 내 입술을 마구잡이로 부볐다. 어느 순간, 정진우의 냄새로 가득하던 입 안에 비릿한 냄새가 섞였다.

거칠게 문질러진 탓에 약간 부풀어 오른 정진우의 입술 한가운데 새빨갛게 피가 묻어 있었다. 핏기 없는 입술 위를 덮은 새빨간 핏물이 도착적인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을 핥았다. 따끔했다. 사이좋게 입술이나 찢어먹고. 잘하는 짓이었다. 피를 핥아 먹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정진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행동과는 정반대의, 짧고, 거친 호흡.

터진 입술이 억지로 벌려지고, 아픔과 함께 물컹한 혀가 밀려들어왔다.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시야가 흐릿했다. 미간에 힘을 주고 새까만 정진우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가능하면, 저 눈을 내가 갖고 싶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못 견디게 그립거나, 못 견디게 미울 때마다 꺼내 보고 싶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카락을 세게 쥐었다. 상쾌하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잘라서 베개 밑에 넣어두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손에 한가득 쥐고 싶었다. 목소리를 녹음해 다정하고 나른한 말투가 듣고 싶을 때면 음악 대신 틀어놓고, 거친 손바닥의 본을 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내 손과 비교해 보고 싶었다.

지독했다. 정진우를 온전히 갖고 싶은 욕심이 거칠게 들썩였다. 정진우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갖고 싶었다. 정진우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너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것이다. 산소가 부족해진 머리가 징, 울렸다. 입술 사이로 채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아니, 피인가.

밀어붙이는 나로 인해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던 정진우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집요하게 붙였던 입술을 뗐다. 두터운 코트를 젖히고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성기게 짜인 실에 얼굴이 사정없이 긁혔다. 눈과 코가 간지러웠다. 크고 거친 손바닥이 머리를 지나 목을 쥐었다. 맥박이 요동쳤다.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정신우의 어깨를 적셨다. 목을 쥐고 있던 손이 귓가를 감싸고,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정진우의 온몸을 조금씩 적시던 눈물이 피범벅이 된 입술 안으로 사라져갔다. 뜨거운 혀가 속눈썹 사이사이를 지나갔다. 무릎에 닿는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한 치의 틈도 생기지 않도록 몸을 붙였다. 가슴에 닿는 머리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두운 방 안에서 정제되지 않은 호흡만이 뒤섞였다.

목과 등을 감싸고 있던 정진우의 손이 내 허리를 쓰다듬으며 내려가 셔츠를 젖히고 헐렁한 바지 속으로 들어가 맨살을 쥐었다. 허리가 들썩였다. 어느새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정진우에게 비볐다. 흐느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진우의 니트 끝자락을 잡으려는데 몇 번 헛손질을 했다. 마침내 거슬리는 옷가지를 벗기고, 문신이 가득한 맨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후, 으으. 한참 맨살 위로 머리를 비비적대다 바지 안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손을 잡아 빼내고 허리를 세워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러 내렸다. 엉망일 게 분명할 얼굴로 집요한 시선이 와 닿았다. 시선이 닿는 눈가와 귓가, 목, 헐벗은 가슴, 팬티 속에 갇힌 성기가 동시에 후끈거렸다. 셔츠에 단추가 너무 많았다. 성기를 감싼 천이 답답했다. 결국 중간 즈음까지 단추를 푸르던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리고 정진우의 바지 버클을 쥐었다. 대충 지퍼를 내린 뒤 팬티 안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는 성기를 잡아 뺐다.

가득 찬 뒤 흘러내리기를 반복하는 눈물과, 거칠게 뛰는 심장이 사고를 방해했다. 빨리 완전히 발기시킨 성기를 내 안에 집어넣고 싶었다. 한 몸이 되고 싶었다. 분명 거친 움직임이었을 텐데도, 정진우의 성기는 착실하게 힘을 받아갔다. 핏줄이 불끈 선 검붉은 기둥 끝에 투명한 물기가 맺혔다. 예쁜 입술 사이로 신음과도 같은 호흡이 터져 나왔다. 물기를 더해가는 귀두 끝을 문지르며 한 손으로는 내 바지를 내렸다. 얇은 천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성기를 잡아 뺐다. 같은 모양을 하고 바르르 떠는 것들을 두 손으로 잡고 비볐다. 한껏 가라앉은 신음이 귓가를 울렸다.

“아, 흐으, 으―”

“―선배, 요한, 잠깐,”

내 행동을 제지하려 드는 정진우의 팔을 치워버렸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억눌린 신음과 섞였다. 딱딱하고 뜨거워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것을 잡고 엉덩이를 조금 들었다. 거슬리는 바지를 조금 더 내렸다. 엉성한 자세에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종아리의 근육이 불끈 섰다. 미끄럽고 단단한 성기를 구멍에 맞추고 몸을 내렸다. 조금 들어오는 듯 느껴지던 것이 엉덩이 골을 타고 미끄러졌다. 잘 짜인 복근 위를 깔고 앉았던 엉덩이를 다시 들었다. 한 번에 잡히지 않는 성기를 단단히 고쳐 잡고 삽입을 시도했다.

“선배…… 잠깐, 그렇게―”

왜 안 들어가지.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런 것까지 나를 안 도와 줬다. 계속해서 삽입을 시도하는 동안 단단했던 성기가 조금씩 물러져 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 잦아지나 했던 눈물이 다시 펑펑 쏟아졌다. 성기를 잡고 있던 손을 거두고 눈앞에 놓인 어깨를 주먹으로 퍽 때렸다.

“네가, 네가 좀, 어떻게 좀 해 봐. 어?”

멍하니 내 얼굴만 보고 있던 정진우가 대답 없이 팔을 들었다. 천천히 뒤통수를 감싸고 제 가슴 위로 끌어당긴다. 힘없이 끌려가며 중얼거렸다. 이거 왜 안 되는 거야. 왜, 네가 좀 잘 해 봐. 왜, 나는 이런 것도 안 되는 거야. 왜…….

시야가 갇힌 채로 주먹에 닿는 아무 곳이나 두들겼다. 내 머리를 껴안은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머리 위로 정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몇 번이고 말하는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나만큼 엉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인 진동에 마구잡이로 날뛰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눈을 깜빡였다. 기다렸다는 듯, 그치지도 않는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정진우와 나의 사이에 고였다. 문득, 내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였지. 생각했다. 눈 앞머리에서 콧대를 타고 가슴에 고이던 눈물이 멎어갈 때쯤에는 딸꾹질이 났다. 끅, 끅. 숨을 참아 봐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꽉 감싸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리고, 넓은 손바닥이 느리게 등을 쓸었다. 쓸고, 토닥이기를 반복하는 손길이 낯설어서, 마주한 몸을 꽉 끌어안았다. 빠르게 깜빡이던 눈을 완전히 감았다. 날개 뼈 근처에서 허리까지, 진득하니 쓰다듬는 손길에 딸꾹질이 언제 멈춘 줄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감고 있던 눈을 반짝 떴다.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방 안에 햇빛이 한껏 들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머리에 비해, 눈은 온전히 뜨는 게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이 아팠다. 격자무늬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멍한 귀를 두드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덮고 있는 이불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알몸으로 잠든 줄 알았는데 옷을 모두 갖춰 입고 있었다.

나는 이불 위를 수놓은 줄무늬에 시선을 두고 생각했다. 꿈이었나. 불현듯, 물속에 잠겨 있는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귀에 두런두런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고 문가를 응시했다.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 방바닥에 슬쩍 발을 디뎠다. 힘을 주자 왼쪽 발목이 따끔했다. 어제가, 꿈이 아니었나. 발목을 콕콕 찌르는 아픔이 정신을 일깨웠다. 간지러운 눈을 비비며 문고리를 잡았다. 대화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어, 일어났어?”

한참을 문 앞에서 망설이다 마음을 다잡고 문을 벌컥 열었다. 승원 형과 정진우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 쪽을 보며 손을 흔들던 승원 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야, 너 얼굴 왜 그래?”

“얼굴?”

“어. 얼굴이, …얼굴이.”

말을 잇지 못하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급하게 고개를 모로 꼰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거울 봐봐. 얼이 빠진 채로 서 있는 나를 화장실로 밀어 넣은 형이 문을 닫았다. 쟤 어디서 패싸움 하다 왔대? 눈이 왜 저래? 어제의 내 행적을 묻는 형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계속해서 간질거리는 눈을 비비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어, 내 얼굴…….

너무 놀라서 소리도 안 나왔다. 눈을 뜨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아래위로 퉁퉁 부어 있는 살덩이 가운데가 한일자로 가늘게 벌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거울에 손을 갖다 댔다. 눈으로 추정되는 부위에 손이 닿았다. 어, 진짜 내 눈이네. 거울에 닿아 있던 손을 떼어내 얼굴을 만졌다. 피딱지가 진 입술과 부을 대로 부은 눈, 꼬질꼬질한 얼굴이 그대로 만져졌다. 진짜 내 얼굴이네. 한동안 이게 진짜 내 얼굴이 맞나 확인하다가 승원 형의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정진우의 얼굴을 되새겼다. 걔는 멀쩡하던데, 왜 나만……. 무의식적으로 뺨을 더듬다 문득, 멀쩡한 신색의 정진우가 내 거지같은 꼴을 다 봤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귓가가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아, 씨…….”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가 저릴 때까지 버텼다. 어제의 일이 하나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는지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자괴감에 빠져 대답할 생각도 못했다. 머리를 감싸고 굳어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안부를 물어왔다.

“선배, 요한 선배.”

“…….”

“요한 선배. 요한 선배.”

“…….”

“요한 선배. …요한,”

“어. ……왜.”

“숟가락 얼려 놨어요. 눈에 대고 있으면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어, 그래……. 고맙다……. 나직한 목소리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얼른 나와요. 뜨끈한 얼굴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애써 외면하며 세수와 양치를 마친 뒤 화장실을 나왔다. 승원 형이 방에서 의자를 가지고 나오다가 내 꼴을 보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웃지 마.”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정진우가 건네는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이거, 양 눈에 동시에 대고 있으면 웃길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다 방법이 딱히 없어 차가운 숟가락을 눈가에 갖다 댔다. 간지러운 느낌과 따갑고 차가운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빨리 가라앉으라는 간절한 바람과 함께 눈두덩을 세게 눌렀다. 형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웃지 말라니까.”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형이 숟가락을 한 번 교체할 때가 되어서야 웃음을 멈췄다. 다시 차가워진 숟가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형 뭐야, ……언제 왔어?”

“나? 아까 한 열두 시쯤? 아까 아침에 너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문 열자마자 부엌에 진우…가 서 있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짜식이 친해졌음 친해졌다고 말을 할 것이지……. 형이 구시렁거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숟가락 하나를 떼어내고 조금 가벼워진 한쪽 눈으로 정진우를 쳐다봤다. 하얗고 말간 얼굴과 눈이 맞았다. 입술 가운데 피딱지가 져 있었다.

“진우?”

내 질문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승원 형이 손바닥으로 어깨를 팡 두드렸다. 목소리가 하늘을 나는 것이, 형은 퍽 기분이 좋아보였다.

“야, 너 자는 동안 진우랑 호칭 정리 다 했지. 그치 진우야?”

“네, 선배님.”

“선배는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참, 나. 어마어마한 친화력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선재 때도 그랬지만, 정진우의 친화력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붓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정진우는 승원 형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찬기가 가실 때마다 계속해서 숟가락을 바꿔주는 정진우와, 그런 정진우가 세기의 성자라도 되는 양 칭찬에 칭찬을 반복하는 승원 형 가운데서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정신이 사나웠다.

정진우는 결국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형과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났다. 그사이 내 눈의 붓기는 거의 빠져 있었다. 좀 멀쩡해진 낯을 회복하니 정진우의 얼굴을 그나마 태연히 마주할 수 있었다. 일어나는 정진우를 붙들고 저녁까지 먹자는 승원 형의 뒤에서 도리질을 쳤다. 나를 빤히 보던 정진우가 형에게 사양의 말을 건네는 걸 뒤로하고 방에 들어가 정진우와 내 외투를 챙겨 나왔다.

“나가자. 형, 나 세탁소 갈 건데 옷 맡길 거 있어?”

“옷? 잠깐만.”

형이 부탁한 바지 두 벌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을 여니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몸을 조금 움츠리는 사이에 정진우가 내 손에 들린 바지를 자연스레 가져갔다.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옆모습을 흘깃 보고 걸음을 옮겼다. 함께 발맞춰 걷는 운동화를 계속해서 힐끔거렸다.

세탁소에 들러 바지를 맡기고, 정진우의 외투를 찾았다. 비닐에 싸인 야상을 내밀며 말했다. 고마웠다. 덕분에 비 덜 맞았어. 정진우가 야상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세탁소 앞에서 잠시 마주보고 서 있었다.

담배 생각이 나서 외투 주머니를 뒤지다 집에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내 하는 양을 가만 보던 정진우가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세탁소 옆 골목에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내뿜으며 발에 걸리는 돌을 차내기를 반복했다. 담배를 다 피워갈 때쯤, 함께 땅바닥을 보고 있던 정진우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사적인 연락… 해도 될까요.”

깨진 돌바닥 사이로 신발 앞코를 구겨 넣었다. 금이 간 돌덩이가 발등을 타고 조금 올라왔다.

“점심이나 저녁 먹자고 해도, 괜찮을까요.”

“…….”

“란 말고, 다른 데서 보자고 해도. 선배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발짓에 의해 완전히 깨어져 나간 돌덩이를 털어냈다. 짧아진 담배를 비벼 껐다.

“저는 선배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

“내가 선배한테 잘못했던 것들. 다 만회하고 싶어요.”

8개월. 그에 반도 되지 않는 한 달 하고도 열흘 남짓의 시간.

“기회를 줘요.”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늘어져 있는 정진우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깍지 낀 손등 위로 파랗게 핏줄이 비쳤다. 손가락 사이에 자리한 문신이 언뜻 보였다. 뼈가 드러난 손등 위에, 입 맞췄다. 하얀 손이 바르르 떨리며 내 손을 꽉 쥐었다. 연결된 손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이 손을 쥐고 있는 게 단 한 달이 될지라도. 놓고 싶지 않았다.

골목에 서서 손만 붙들고 있던 우리는 다시 집까지 함께 걸었다. 평소보다 붙은 거리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등이 스쳤다. 반복해서 스치던 것이 어느 순간 내 약지를 잡았다. 손톱 끝부터 기어 올라와 손가락 사이를 지나, 손바닥 전체를 감싼다. 가슴이 미세하게 조여들었다. 빌라 앞에 선 정진우가 잡은 손을 꿈지럭거리며 인사했다.

“들어가요. 나 때문에 쉬지도 못했네, 밥도 못 먹고. 배 안 고파요?”

“응. 괜찮아. ……너는? 너도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괜찮아요, 저도. 터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옅게 쌍꺼풀진 눈이 가늘게 휘어지며 눈 밑의 살덩이가 불룩 솟아오른다. 밤풍경에 하얀 살갗만 빛났다.

스물여덟의 정진우는, 아직도 웃는 모습이 소년과 같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가 찬바람에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눈이 시리고, 신 과일을 한입 베어 물기라도 한 것처럼 코끝이 움찔거렸다. 꾹꾹 눌려 있던 감정이 자유를 찾자 앞다투어 마음 한가운데로 밀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 안 곳곳에 자리를 잡고 술렁였다.

얼마간 마주 잡은 손만 만지작거리던 정진우가 갈게요. 한 번 더 인사했다. 그거 좀 잡고 있었다고 금세 허전해진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앞으로 발을 뻗었다. 탁탁탁, 발 구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보려는 정진우의 손에 깍지를 꼈다.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호텔까지, 바래다줄까.”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술이 말했다. 고마워요. 입술을 오물거릴 때마다 까만 점이 함께 움직였다. 입술의 생김새와 같은, 달고, 부드러운 목소리. 맞잡았던 손을 풀어내고 귓불을 한 번 잡아당겼다. 뜨거웠다.

우리는 정진우가 묵고 있는 호텔 앞과 우리 집을 두 번 왕복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까지 걸으면서는, 이게 무슨 낯간지러운 짓인가, 이럴 거였으면 밥이나 먹을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화기 때 사람들도 이렇게는 안 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정진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좋았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의 안부를 묻고, 많이 추워진 날씨에 관해 말하다가, 요즘 개봉한 영화, 관심 있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무 살의 정진우와 스물여덟의 정진우는 같은 듯 달랐다. 나는 하나둘 들어오는 스물여덟의 정진우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골목 입구에서, 계속 잡고 싶었던 손을 다시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잡힌 손에 힘을 준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진짜 갈게요. 우리 이러다가 밤새겠어요.”

“응. 잘 들어가.”

“네. 들어가면 연락할게요.”

응. 주변을 재빠르게 훑고 정진우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귓가에 닿은 입술이 둥글게 모이며 쪽, 소리를 낸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정진우를 보내고 집까지 들어오며 귀를 연신 문질렀다. 문을 따고 집 안에 들어와 신발을 벗으려는데 안 그래도 거칠었던 심장이 한 번 더 크게 들썩였다. 형이 식탁에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 왜?”

“왜? 왜에?”

“어, 왜 그래.”

“세탁소 갔다 온다던 놈이 지금 전화도 안 받고 두 시간이 되도록 안 들어오는데, 왜?”

아… 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배고팠을 텐데, 저녁도 안 먹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형이 배고파 뒤지겠다, 어? 하고 한마디를 했다. 미안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더 미안했다.

“미안해, 딴 데 정신 팔려서. …치킨 사줄까? 치킨 시켜먹을래?”

“치킨은 무슨. 치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맥주도 시킬까?”

“맥주 같은 소리…… 프라이드에 양념 하나 추가. 무 많이.”

치킨과 맥주를 시켜놓고 형이 영화나 한 편 보자며 식탁에 노트북을 설치하는 동안 핸드폰을 확인했다.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뚫어져라 보고 있던 핸드폰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재빨리 반짝이는 것을 쥐고 방으로 향했다.

“나 잠깐 전화 좀. 지갑 여기 있어.”

“새삼스럽게 뭔 방까지… 알았어. 카드 이거 맞지?”

“응.”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말했다.

“잘 들어갔어?”

-네. …밥 먹으려고요?

“응. 치킨 시켰어. 너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느리게 흘러나왔다.

-맛있겠다. 저는, 니시카와도 식사가 아직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같이 먹을까, 하고 있어요.

“응. 그래. 빨리 먹고 자. ……어제 잘 못 잤지?”

-아니에요. 오랜만에 너무 푹 자서, 눈뜨고 혼자 놀랐어요.

나만 숙면을 취한 게 아니었나보다. 다행이다. 중얼거리다가 승원 형이 들어오기 전에 정진우라도 깨어 있어서 진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 집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도, 방금 전도. 감정이 격해져 주위 생각을 못 했다. 조심해야지.

안부만 묻고 끊으려던 전화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정진우의 식사 메뉴를 함께 고민하고 있는데 밖에서 형이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땀 때문에 조금 미끄러웠다. 뜨뜻해진 핸드폰을 반대 손에 들고,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이제 끊어야겠다. 식사 맛있게 하고.”

-네, 선배도요.

“응.”

-내일, 연락할게요.

“……응.”

서요한, 빨리 나와. 안 나오면 나 먼저 먹는다? 약간의 침묵 후 형이 나를 재촉하는 소리에 정진우의 목소리가 섞였다.

-고마워요.

열기가 가시지 않은 핸드폰을 붙들고 생각했다. 고맙다고. 정진우는 몰랐다. 나는 정진우를 배려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정진우를 두고도, 더 이상 참을 자신이 없어서. 만지고, 다가가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가 너무 욕심이 나서. 정진우를 향한 욕심을 계속 억누르기엔,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감사할 일이 아니었다.

식어가는 핸드폰을 침대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섰다. 포장을 다 벗겨놓은 형이 자리에 앉아서 나를 재촉했다. 빨리 앉아.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헐어 있는 입에 바삭한 치킨이 들어가는데도 맛있었다. 아, 아파. 아파. 하면서 치킨을 뜯고 있는 나와 로맨스 영화가 재생되고 있는 모니터를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던 형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좀 나아졌나보다?”

“뭐가?”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형이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집었지. 귀신같긴. 혼자 감탄하고 있는 와중에 형이 진지한 표정을 했다.

“너, 그렇게 울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어?”

“어제 너랑 진우랑 슬픈 영화 봤다며. 그래서 너 눈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러던데.”

아……. 꼬치꼬치 안 물어봐서 나 없는 사이 정진우가 대충 변명했나보다, 했는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뭐. 그랬지.

“그런 영화 좋아하지도 않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랬냐.”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그래도 오늘 보니까 좀 괜찮아진 것 같네. 맞지?”

손에 쥐고 있던 가슴살을 한입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 형이 무를 하나 집어먹었다.

“고마워, 형.”

형이 기름진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틀어놓은 영화를 배경으로 치킨을 먹는 내내 투닥거렸다. 개운하게 샤워하고, 어제에 이어 오랜만에 편한 잠에 들었다. 요 며칠 나를 괴롭혀왔던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잤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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