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 양하여
3권 완결
Chapter 4.
엉망이었던 시간이 모두 꿈같이 느껴질 만큼, 놀랍도록 평안한 일상이 지속됐다. 정진우의 퍼포먼스는 첫날 다쳤던 게 액땜이라도 됐던 것처럼 순항 중이었고, 우리의 관계 역시 그랬다. 퍼포먼스가 없는 날에는 정진우가 미술관에 찾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고, 퍼포먼스가 있는 날에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 호텔에서 기다린 정진우와 저녁을 먹었다. 날씨가 좋으면 산책로를 걸었고, 싸락눈이 내리는 날에는 따뜻한 안주와 함께 술을 마셨다. 고작 일주일이 흘렀을 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나는 헐렁했던 바지가 다시 알맞게 맞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졌다. 정진우도 마찬가지였다. 베일 것같이 날카로웠던 턱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진우의 뽀얗게 살이 오른 광대를 보고 있을 때면, 가끔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날보다 따뜻한 온도에 호텔에서 함께 뒹굴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문가에 서서 패딩에 목도리까지 둘러준 정진우가 웃었다. 선배 추위 많이 타잖아요. 정진우가 나를 애 취급 하는 건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코끝까지 덮인 목도리를 조금 내리고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한잔했다. 보고만 있어도 매운 오돌뼈 볶음과 어묵 탕을 함께 시켰다. 정진우의 젓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신기할 정도로 매운 걸 잘 먹었다.
“너 독일 가서 어떻게 살았어? 이렇게 매운 거 먹고 싶어서.”
“그래서 처음에 엄청 힘들었어요. 음식도 안 맞고, 말도 안 통하고.”
그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는 정진우가 독일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가 있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왜, 언제 갔는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내 눈앞에서 사라질 수가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마치 지난 8년 동안의 시간이 정말 꿈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나는 일부러 무시했다. 우울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기엔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입가에 묻은 매운 소스를 문질러 닦아줬다. 뭐 묻었어요? 하고 동그랗게 뜬 눈이 사랑스러워서, 웃었다.
배가 찰 만큼 음식을 먹고는 또 걸었다. 밤거리와 정진우가 너무 잘 어울려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하늘, 창문, 작품 등의 무생물로 채워져 있던 내 사진첩이 다양한 정진우로 가득 채워져 갔다. 그새 제 사진을 찍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별말하지 않고 잘 나왔어요? 묻는다. 네가 잘 안 나왔을 리가 없잖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쏜살같이 지나갔다. 거리를 둘이서 정처 없이 걷다가, 호텔 앞까지 정진우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형에게 인사했다. 시간이 몇 신데 라면이야. 면발을 빨아들인 승원 형이 가자미눈을 했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뭘?”
“여자 생겼냐?”
굳어버린 목을 삐걱삐걱 돌렸다. 무슨 여자야. 모르는 척하고 방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수상한데, 한다. 열린 방문을 잡고 형을 돌아봤다. 형이 라면을 우물거리며 팔짱을 척 꼈다.
“여자가 아니면 뭐야. 요즘 혼자 어딜 그렇게 쏘다녀?”
“그냥, 뭐. 친구도 만나고.”
“친구 같은 소리 하네. 같이 산 게 몇 년인데 구라야.”
좀 억울해졌다. 내가 친구가 별로 없는 건 맞지만, 형이 내 얼마 되지 않는 인간관계를 다 알고 있는 것도 맞지만. 괜히 서운했다.
“……난 친구 좀 사귀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아 하여간 너 여자 생긴 거면 형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된다. 어?”
조영재 말고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어? 알았다고 대충 손짓했다. 그렇게 많이 티가 나나. 조심해야지. 하루에 몇 번이고 되뇌는 다짐을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옷을 벗어 걸어놓고, 책상에 놓인 캘린더를 집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습관적으로 달력을 확인했다.
어제는 달력을 뒤적거리는 나를 두고 신예림이 물었다. 요한 씨, 기다리는 날 있어? 요즘 달력 진짜 자주 보는 거 알아? 신예림의 질문 덕분에 내가 달력을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확인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좀 있으면 어머니 기일이라……. 되도 않는 변명을 주워 삼켰다. 아, 요한 씨 그럼 그날 쉬겠구나. 내 대답에 아무렇지 않게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신예림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응. 그렇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나오자 설거지하는 형의 등이 보였다. 돌아오는 휴일에 밀려있던 빨래와 대청소를 하자는 말에 잠깐 침묵했다. 나를 흘깃 보더니 왜. 하고 묻는다. 미안한데 안 되겠다고 했다. 이번엔 각자 거 알아서 해결하자. 나 그날 약속 있어. 내 대답을 들은 형이 아직 거품이 묻어 있는 손을 바지에 쓱쓱 닦으며 나를 돌아봤다.
“서요한, 너. 얼마 전에 계속 땅 팠던 거, 너. 지금 이러는 것도, 맞지?”
“뭐가. 아니야.”
“아니긴, ……알았다. 자꾸 추궁하고 안 그럴게.”
혼자 정색하고 혼자 납득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잠가놨던 수도를 튼다. 수도꼭지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좀 어리둥절해졌다. 저럴 거면 거품은 바지에 왜 닦은 거야. 물기가 묻은 식기를 털어 건조대에 쌓아놓는 등을 멍청하게 보다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사실 형이 너 고자는 아닌가 엄청 걱정하고 있었다, 야. 이제 진짜 안 캐물을 테니까 잘 만나 봐.”
“고…,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니까 잘해 보라고. 어? 내가 너 걱정 돼서 장가도 못 가.”
나도 장가 좀 가 보자. 조영재 결혼한다는 거 배 아파 죽겠다. 아, 배 아파. 들고 있던 물병을 빼앗아 마시며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간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형은 정말 조영재가 부러운 것 같았다. 날짜 잡았다며, 본인 가게로 밥 먹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하루에 한 번씩은 조영재의 결혼을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형도 누나와 오래 만났다.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만나기 시작했으니, 정말 오래 만났다.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푸른빛이 도는 천장을 응시했다.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눈앞이 깜깜해지다가, 달빛이 스며든 벽지가 보였다. 조영재, 형. 나는, 그들 모두가 부러웠다.
우울한 생각을 해서인지 아침 내내 찌뿌둥했다. 출근하자마자 메일 하나를 받았다. 처음 정진우의 인터뷰를 따 갔던 이서정의 메일이었다. 나한테까지 안 해줘도 괜찮은 일이었는데, 원고에 수정 사항이 생길 때마다 매번 메일을 공유해줬다. 최종 원고예요. 다음 달 1일 발간되는 호에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에요. 전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네요. 메일을 받을 때마다 몇 번이나 읽어본 바람에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인터뷰를 한 번 더 읽어 봤다. 저번 메일에서 거의 변동사항이 없었다. 사석과 같은 분위기로 편하게 이어나갔던 인터뷰 내용이 그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몇 가지 빠진 것은, 정진우의 회화와, 문신에 관한 이야기. 아마 정진우 측에서 요청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인터뷰 내용을 저장하고 딴 짓을 조금 했다. 뉴스를 이것저것 클릭해 보다가, 정진우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젊은 작가의 첫 국내 전시에 호평 일색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각종 SNS에 올라있는 사진까지 하나하나 보다가 정진우의 이름이 걸린 웹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게.”
아무래도 정진우 팬 사이트 같은데. 어디선가 긁어온 것 같은 정진우의 작품 이미지가 사이트 상단에 예쁘게 디자인되어 일렬로 자리해 있었다. 게시판을 하나하나 클릭할 때마다 놀라웠다. 아니, 작가가 팬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나. 정진우의 개인 홈페이지는 따로 있었다. 한때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 사이트 하단에 익숙한 개인 홈페이지 주소가 링크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정진우는 아나. 에이전시는, 모르겠지. 한국 사이튼데. 글이 몇 개 없는 걸 봐서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트 같았다. 그래도. 신기했다. 어떤 게시판에는 사진 촬영이 가능한 정진우의 퍼포먼스가 첫날부터 일자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기사에 난 사진이며, 외국 잡지를 번역해 놓은 글들도 함께 올라와 있었다.
저번 주, 추가된 퍼포먼스를 끝내고 난 뒤 미술관에서 나를 기다렸던 정진우의 양손에 아기자기한 무늬의 쇼핑백이 들려있는 걸 봤다. 제 팬이래요. 쑥스럽게 웃으면서 쿠키며 음료수, 단정한 패턴의 목도리 등을 하나하나 보여주던 얼굴이 떠올랐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황당하기도 했고, 조금 뿌듯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정진우가 사랑받고 있다는데 싫을 건 없었다. 사이트를 벗어나 일을 하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다. 팬 사이트라니. 연예인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퇴근한 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정진우의 얼굴을 마주하니 연예인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은 배가 되었다. 미리 주문해놓았다는 룸서비스를 기다리면서 계속 정진우의 얼굴을 보고, 웃고를 반복했다. 의자에 앉아 드로잉 북에 이것저것 끄적이던 정진우가 결국 펜을 놓고 나를 돌아볼 때까지, 계속해서 피식거렸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요?”
“응? 좋은 일?”
“응. 왜 자꾸 그렇게 웃어?”
일어나는 정진우에 의해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끌렸다. 침대 끝에 앉아 있던 나를 끌어안은 정진우가 앞머리를 헤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앞에 자리한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매트리스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마른 등을 감쌌다. 정수리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 근처에 머리를 비볐다. 기분 좋은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숨을 한껏 들이켰다. 정진우를 끌어안은 그대로 몸을 눕혔다. 딱 좋을 만큼의 무게가 느껴졌다. 나를 깔고 누운 정진우가 귓가에 반복해서 입을 맞췄다.
“내가 그렇게 많이 웃었어? ……별건 아니고.”
“뭔데요?”
조금 달아올라 있는 귓바퀴를 잡고 소곤거렸다. 너, 팬 많이 생겼더라. 팬 사이트도 있던데. 나에게 잡힌 귓바퀴가 점점 빨갛게 변했다. 워낙 하얘서, 달아오른 피부가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제 귀를 잡고 있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린 정진우가 나를 마주봤다. 뽀송뽀송한 양 볼에도 분홍빛이 돌았다. 복숭아 같았다.
“팬 사이트요? 저 맞아요?”
“응. 몰랐구나. 네 이름 치고 페이지 좀 넘기다 보면 나와.”
내가 내일 사무실 가서 링크 보내줄까? 내일 란 오기 전에 한번 들어가 봐. 재밌더라. 별 생각 없이 꺼낸 이야기였는데, 반응이 재미있었다. 정진우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생소해서 좀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빨개지나 보고 싶기도 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 같은 귓불을 한 정진우가 한참 내가 주워 담는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침대 위에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그럼 선배는 그거, 내 이름 검색해 보다가 안 거예요?”
“응, 그렇지?”
“일하고 있을 때 아니었어요? 일하다가 내 이름은 왜 검색해 봤어요?”
“……어?”
이번에는 정진우가 내 귓바퀴를 잡고 소곤거렸다. 일 안 하고 뭐 해요. 매일 저 검색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 봐요. 그거 선배가 만든 거죠. 그래놓고 저한테 보라고, 그러는 거죠. 다정한 목소리가 점점 웃음기를 띠고 허황된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어느새 정진우의 입을 통해 세상 다시없을 융의 팬이 되어 있었다. 사실 사이트를 만든 것 말고는 거의 틀린 말이 없어서 잠자코 뜨끈해진 얼굴만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정진우의 활동 소식을 알게 된 이후로는, 매일 이름을 검색해 보고, 매일 새로 뜬 기사가 없나, 어떤 작품을 발표했나, 이번엔 어디서 전시를 하나, 찾아봤던 게 맞았으니까. 창피한 동시에 씁쓸했다. 한껏 달아올랐던 귀에서 조금씩 열기가 빠져나갔다. 내 귓불을 잡아당기며 놀던 정진우가 별 반응이 없는 내가 재미없어 졌는지 입술에 쪽, 뽀뽀했다. 물컹한 입술이 내 입술에 짓눌렸다.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신나게 웃고 있는 얼굴이, 가슴 떨리게 예쁘면서, 미웠다.
객실로 배달된 음식을 먹으면서 돌아오는 휴관 일에 놀러가기로 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정진우는 차를 렌트하고, 유명한 식당을 알아봤다고 했다.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상기된 목소리로 노래하듯 얘기하는 정진우를 보면서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오자. 서울 밖으로 나가는 거 오랜만이지. 말해놓고 보니 나도 오랜만이었다. 군대 갔을 때 빼고는 수도권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슬슬 기대되기 시작했다. 여행다운 여행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미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얘기하다가 내일은 못 만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식사와 함께 나온 커피를 홀짝거리는 정진우에게 말했다.
“나 내일은 퇴근하고 볼일 있어. 낮에 잠깐 보고 못 만날 것 같은데.”
“그래요? 무슨 볼일?”
“영재, 아, 너 기억해? 내 동기 중에 조영재라고…….”
“네, 알아요.”
“응. 걔가 이번 봄에 결혼한다고, 남자 동기끼리 한번 모이자고 그래서.”
아아. 고개를 끄덕인 정진우가 다 마신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럼 늦게까지 마시겠네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마를 슬쩍 긁은 정진우가 나를 흘깃 보더니 테이블 모서리를 만지작거린다.
“왜?”
“……그냥. 너무 매일같이 붙어 있다가 내일은 얼마 못 본다고 그러니까. 일 끝나고 선배 한가할 때까지 란에 죽치고 있을까. 그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지, 낮에만 잠깐 보면… 좀 아쉽겠지.”
“네…….”
덩달아 이마를 긁었다. 문득 미술관에서 무슨 이유이든 너무 오래 붙어 있는 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란에서 기다리지는 말고. 내가 늦더라도, 술자리 파하면 여기로 올까.”
“정말요?”
“응. 너만 괜찮으면.”
벌떡 일어난 정진우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니트 안으로 차가운 손이 들어와 맨 등을 어루만졌다. 기다릴게요. 마주한 입술이 미소 지었다. 입술 사이를 뚫고 들어온 혀가 입 안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긴 목을 끌어안고 정진우가 더욱 깊게 들어올 수 있도록, 입을 한껏 벌렸다.
* * *
일주일 만에 승원 형과 함께 퇴근했다. 형은 아침에 사무실에서 마주치고부터 이상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기만 했다. 자기는 다 알고 있다는 시선이었다. 모르는 척했다. 자꾸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는데 왜 그러냐고 물을 수도 없고 난감했다. 괜히 자고 왔나. 그래도 아침에 덜 뜨인 눈과 까치집을 한 머리로 나를 배웅한 정진우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전시장 안에 서 있는 얼굴과 나만 알고 있는 얼굴을 혼자 비교해 보는 게 좋아서, 결국 자고 오길 잘했지라고 결론 내렸다. 좋은 침구에 파묻혀 정진우를 껴안고 잠들었던 몸은 가뿐했다. 술도 잘 들어갈 것 같았다.
승원 형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내며 도착한 가게 앞에서 손잡이에 걸린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문패를 잠시 응시했다.
[오늘 쉽니다.]
픽 웃고 유리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바쁘게 이것저것 나르던 조영재가 우리 쪽을 보더니 김수현에게 손짓한다. 김수현의 맞은편에서 희진이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아직 들어오기도 전인 나와 형에게 손을 흔드는데, 새삼 예뻤다. 김수현이 잠긴 문을 열어주며 왜 이렇게 늦었냐고 타박했다. 오랜만에 야근 안 해서 자기는 일찍 왔다고 자랑하는데, 오랜만에 제 시간에 퇴근한 게 자랑할 만한 일이구나, 싶어서 안쓰러웠다.
다섯이서 넓은 식당을 차지하고 마음껏 먹고 마셨다. 이제 날 잡았으니까 슬슬 하나씩 준비 하려면 많이 바빠지겠네. 슬쩍 건네 본 말에 희진이가 행복하게 웃었다. 술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음식을 나르는 조영재의 앞치마를 잡아당긴다. 일만 하지 말고 앉아서 너도 좀 먹어. 희진이의 머리를 기름이 묻은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영재가 바보같이 웃었다.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저렇게 좋을까 싶었다. 승원 형과 김수현이 눈꼴시다는 표정을 했다. 슬슬 풀려가는 눈으로 승원 형이 희진이와 조영재를 번갈아 가리켰다.
“너네 가고 나면 다음은 나다. 어? 미리미리 축의금 준비해 놔. 이십 미만은 안 받는다.”
“아직 쟤네 식 올리려면 세 달도 넘게 남았는데 무슨 형 축의금이야.”
투덜거리는 김수현의 머리를 쥐어박은 형이 어차피 나도 갈 건데 미리미리 한 번에 준비하라고!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놨다. 희진이가 그런 형을 안쓰럽게 보다가 오빠 진짜 결혼하고 싶은가봐, 하고 내 앞의 빈 잔을 채웠다.
“응. 영재가 너한테 프러포즈했을 때부터 장난 아니었어.”
“아…… 그랬을 것 같다.”
주정뱅이가 되어가는 형을 모르는 척한 채로 희진이와 둘이 짠하고 소주를 들이켰다. 김수현을 붙들고 늘어지던 형이 갑자기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나 가고 나면 그 다음은 서요한이야. 맞지?”
“뭐? 서요한 여자 친구 생겼어?”
김수현이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내가 저럴 줄 알았지. 난감해서 고개만 저었다. 아니야. 부정하는 말을 형이 더 큰 목소리로 덮어버렸다. 아니긴. 이빨 까지 마, 새끼야. 덩달아 난리가 난 김수현이 가세해 나를 들볶았다. 언제부터 만났냐, 어디서 만났냐, 누구냐, 난 너 고자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가 김수현의 입 안에서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피곤해졌다. 미간을 누르며 아니라고, 형이 오해한 거라고 말하는 와중에 조영재와 눈이 마주쳤다. 싱글벙글했던 입매가 찌그러져 있었다.
“…아니야, 진짜. 형이 오해한 거야.”
입 맞출 기세로 나에게 들이밀고 있던 김수현의 얼굴을 치워내며 중얼거렸다. 어, 그래? 아리까리한 표정으로 이번엔 형에게 붙어, 왜 나는 서요한 다음이냐고, 내가 형보다 먼저 장가갈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김수현만 죽어라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앞을 보기엔 조영재의 표정이 무서웠다. 옆얼굴이 따끔거렸다.
“나 담배 한 대만.”
결국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형은 김수현과 다투느라 나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몰래 나갔다 와야지. 가게에 비치되어 있는 슬리퍼를 신는데 내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누군지 확인할 생각도 안 하고 한숨부터 쉬었다.
“같이 나가.”
“너 담배 끊었,”
“담배 안 피우면 나가지도 못하냐?”
“그건 아니지…….”
이제는 누가 더 장가가기에 적합한 남자인가라는 주제로 토론 중인 김수현과 승원 형을 말리며 호탕하게 웃는 희진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급격한 온도 차에 몸을 부르르 떨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를 뱉으며 장승같이 서 있는 조영재를 힐끗 쳐다봤다. 기세 좋게 따라 나와 놓고 침묵하는 옆모습에 가볍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조영재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남자다운 얼굴이 미간을 좁힌 채다.
“너, 평생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거야?”
“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에 반문부터 터져 나왔다. 조영재가 짧은 머리를 흩트렸다.
“그니까, 그 너, 남자 좋아하는 거…….”
“…….”
“형이나 수현이한테는 얘기해도 되지 않냐. 언제까지 숨기고 살 수는 없잖아.”
멍청해진 머리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대답 없는 나를 보던 조영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너도 연애하고 그러는 게 진짜면,”
“아니야. 걱정 고맙다.”
“…….”
“근데 나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할 생각 없어. 숨기고 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고자 취급 받지 뭐. 말을 맺으며 웃었다. 조영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괜찮아. 반복해서 말했다.
“괜찮을 리가 있냐? 나는 네가 그럴 때마다, 자꾸 나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뭐?”
“네가 처음 나한테 그, 얘기했을 때 내가 그딴 식으로 반응해서 자꾸 숨는 건 아닌가.”
말을 멈춘 조영재가 내 손에 들려있는 담배를 빼앗아 연기를 한 모금 머금었다. 희진이한텐 비밀이야. 다시는 안 피울 거야. 빠르게 중얼거리며 짧아진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준다. 얼빠진 표정일 게 분명한 나를 마주본다. 언제나 똑바르게 앞을 향하던 눈이 오늘은 퍽 자신이 없어 보였다.
“너무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미안했다.”
“…….”
“그땐 나도 많이 어렸잖아.”
괜찮아. 하는 말끝이 흐려졌다. 괜히 목이 메는 기분이 들었다. 헛기침을 큼, 했다. 조영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말하고 싶은 거 하고, 좀. 남 눈치 보지 말고.”
“…눈치 안,”
“닥쳐. 너는 너무 너를 억누르고 살아. 그리고 나는, 그게 나 때문이 아닌가, 항상 너한테 미안했고.”
흘려들었던 강현의 말이 떠올랐다. 요한 씨가 좀 쉽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렇게 어렵게 사는 것처럼 보였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선택한 것들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의 반복인 인생을 살았지만, 그래도 그때 가장 최선인 길을 택했다고. 남들에겐 그게 아닌 것처럼 보였나 보다. 얼마 피우지도 못한 담배를 끄고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땅바닥을 보고 있던 조영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때문 아니야. 딱히 하고 싶은 거 억누르면서 살아야지 하면서 살았던 것도 아니야. 억눌러 보려고 해도 안 되더라. 내가 생각보다 남 눈치 잘 안 봐.”
“…….”
“나 진우랑 다시 만나.”
“뭐?”
“거 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산다니까.”
부릅뜬 눈이 웃겨서 웃었다. 그럼 그 여자 친구, 정진우, 너, 언제, 횡설수설하던 조영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덩치도 커다란 게 쭈그러져서 나를 올려다보니 배로 우스웠다.
“……아예 연애를 안 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고맙다.”
“언제, 너 아직 걔 다시 본 지 한 달밖에 안 되지 않았냐?”
“…한 달은 더 됐다.”
“그게 그거지. 어쨌든 언제부터?”
“일주일 정도 됐어.”
하, 황당한 새끼. 뭐라고 한참 혼잣말을 읊조리더니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번쩍 든다.
“다시 만나는 거면 그 새끼도 너한테 마음 있었다는 거네? 그럼 그때 왜 그 지랄을 했대?”
물음과 함께 몸까지 벌떡 일으킨다. 야, 뭐래 그 새끼가. 왜 그랬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다그치는데 할 말이 없어서 담배만 뻑뻑 피웠다. 몰라. 뭐가 힘들었대. 앞으로 잘한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조영재가 썩은 표정을 했다. 이거 호구 아니야? 나 같으면 만나자 마자 일단 한 대 치고 왜 그랬냐는 거부터 물어봤겠다. 쏘아붙이는 기세에 옆으로 밀리며 그냥 웃었다. 한참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을 하던 조영재가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 예전에 미친놈같이 굴었던 거 그 씨발 새끼는 알아?”
“욕 하지 마. 걔도 알고 있어.”
“미친놈이. 역성들 놈을 들어라. 보아하니 뭐 대충 너 그렇게 잠수 타서 나 힘들었어. 그랬겠지. 나는 너도 이해가 안 간다. 아무것도 해결 안 보고 그딴 식으로 잠수 탄 새끼랑 다시 만날 생각이 드냐? 연애하는 기분이 들어?”
이런 반응일 줄은 알았지만 속이 쓰렸다. 그래도 내 인생에 한 명쯤은 내가 정진우를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서 말한 거였는데. 그냥 흘려들어 줬으면 고마웠을 텐데.
새 담배를 하나 더 빼어 물었다.
“음. 복잡한 문제 같은 거 해결 안 해도 나름대로 행복해.”
“행복? 그게 행복한 거냐? 나는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너한테 남는 게 뭔지.”
너무 오래 얘기한 거 아닌가.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셋 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웃고 있었다. 우리 필요 없나보네.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알고 있다. 정진우와 나의 지금이 이상한 것쯤은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지나치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지난 8년간의 시간은 아예 없는 시간이 됐다. 나뿐만 아니라 정진우도, 일부러 무시한 게 맞았다. 함께하는 시간을 괜히 들쑤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은, 겁이 났겠지. 괜히 들춰내서 지금의 좋은 관계가 손쓸 틈도 없이 고꾸라질까봐. 내가 겁이 나니까, 정진우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며 비 맞은 중처럼 꿍얼거리는 조영재를 옆에 두고 짧아진 담배를 껐다.
“그럼 어떡하냐. 걔가 없으면 안 되겠는데. 걔랑 다르게 만나는 법을 모르겠는데.”
“속 터진다. 어?”
“내가 더. 네가 좀 알려줄래?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된 연앤지.”
예? 선생님? 십 년 연애하고 결혼하시는 선생님, 좀 알려 주십쇼.
질색하는 조영재의 팔을 잡고 웃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추위에 얼은 볼을 한 번 두드렸다. 나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나는 많이 웃었고, 잘 먹었다. 하루걸러 안 좋기 일쑤였던 몸이 덩치에 맞게 튼튼해졌다. 일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정진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너무 밉고, 욕심이 나서, 확 같이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아오르지만, 대체로 행복한 것 같았다. 앞으로도. 어차피 한 달이었다. 정진우는 한 달, 미뤄봤자 두 달 뒤에는 싫어도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서의 전시가 끝나고 한 달 뒤 바로 베를린에서의 전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정진우가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연락을 이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에게 언젠가 끝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대비할 수조차 없이 혼자 남겨졌던 그때와는 달랐다. 함께 있을 때 한 번, 정진우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에 무시하던 눈은,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에, 결국엔 핸드폰을 향했다.
핸드폰을 들고 나가는 등을 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인사불성이 된 승원 형과 김수현을 함께 택시 태워 집으로 보내고, 호텔로 향했다. 조영재는 끝까지 나에게 이해 안 간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후회할 거 알면서 그렇게 만나는 게 최선이냐고. 나에겐 이것이 최선이 맞았다. 격렬한 저항 끝에 결국 받아들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더 이상 내 마음을 기만하지 않는 것.
침대 헤드에 불편한 자세로 기대어 자고 있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다린다더니. 슬그머니 뜨이는 눈에 입 맞췄다. 왔어요? 부드럽고 따뜻한 볼을 토닥였다. 기다리려고 했는데. 응, 괜찮아. 자자. 웅얼거리는 입술에 입 맞췄다.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짙게 배어 있는 정진우의 냄새를 들이켰다.
사실은, 이제 정진우가 아무리 나를 피해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가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쫓아가는 나로 인해 정진우가 질색을 하는 한이 있어도, 함께하고 싶었다. 가족이고 전시고, 그까짓 거 다 때려치우고 나만 보고 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정진우가 아무리 미워도, 곁에 있고 싶었다.
비몽사몽 내 하는 양을 받아내던 정진우가 문득 나를 끌어안았다. 정진우의 가슴에 푹 안겼다. 딱딱한 가슴팍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울리는 심장소리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길고 곧은 팔 안에 갇힌 상태로 꾸물꾸물 움직여 몸을 이불 안에 뉘였다. 고른 호흡을 뱉고 있던 정진우가 옅게 웃었다.
“애기 같아.”
웃기시네. 1년 하고도 2개월이나 애기가. 마른 등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일요일에 선배 어머니 뵙고 오면…… 그냥 그때 바로 출발할까. 괜히 월요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말고. 하루 자고 오면 더 좋지 않을까. 잠에 취한 목소리가 여행 계획을 늘어놓았다. 그래, 그러자. 엄마 보고, 아줌마들이랑 점심 먹고 올 거니까 많이 안 늦을 거야. 정수리에 묻혀 있던 턱이 움직였다. 응, 그러자. 기다리고 있을게요.
잦아드는 숨소리를 들으며 함께 잠이 들었다.
* * *
오늘은 방송사에서 정진우의 작품을 취재해 가는 날이었다. 정진우 쪽에서 방송사 인터뷰를 거절한 탓에 작품만을 촬영 중인 스텝들 옆에서 대기했다. 촬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끝이 났다. 장비를 정리하는 사람들 틈에서 도록을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카메라 앞에서 작품에 관해 설명했던 리포터가 내가 건네는 도록을 받아들고 넘겨보며 신기한 듯 말을 걸었다.
“되게 젊은 작가던데. 대단하네요, 이 사람. 여기 도착하기 전에 검색해 봤더니 작품 가격이 어마어마하던데요.”
예,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우의 작품 가격은 작가의 유명세에 비해서도 꽤 높은 편이었다. 몇 차례 비공식 경매에 올라간 작품이 높은 가격에 낙찰된 탓이 컸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정진우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단 두 곳이었다. 제주에 있는 미술관과 대기업 산하의 미술관. 사실 우리 미술관에서 정진우의 전시를 하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었다. 정진우 정도의 이름값이면 더 큰 곳에서 진행할 수도 있었는데,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무심결에 웃음이 나왔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어져서.
“어쨌든 아쉽네요, 인터뷰를 못 해서.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코디님.”
“예. 들어가세요.”
촬영 팀을 배웅한 뒤 사무실로 복귀했다. 처음 발견한 뒤 재미가 붙어 심심하면 들어가 보곤 하는 정진우의 팬 사이트를 한 번 더 들어가 봤다. 어제 자 퍼포먼스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대체 언제 찍은 거래. 화질이 매우 좋았다. 정진우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보다 훨씬 질 좋은 사진들이어서 소리 죽여 웃었다. 니시카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정진우는 봤을까. 아직 안 봤다고 하면 내가 보여 줘야지. 주소를 메신저로 붙여 넣어놓는 와중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딴 짓을 하고 있는 와중이라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책상 한구석에 뒤집어놓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강현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예, 여보세요.”
-요한 씨, 란이에요? 통화 가능해요?
“네. 말씀하세요.”
담뱃갑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술관 뒤뜰로 향하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강현은 그사이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겨울 바다도 좋던데요. 요한 씨도 시간 내서 가 봐요. 작가다운 말을 건네며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낸다. 마주 웃는 와중에도 강현의 태도가 너무 평소와 같아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일을 되새겨 봐야만 했다. 어색한 기분에 눈썹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일하는 중이었을 텐데, 너무 내 얘기만 했네.
“괜찮아요.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어요.”
-그래요?
“네. 음, 하실 말씀이…….”
-아, 다른 게 아니라, 란 근처에 괜찮은 집을 하나 알게 돼서, 요한 씨랑 선재, 음, 승원 씨까지 다 시간이 맞는 날에 같이 술 한잔하는 게 어떨까 하고.
“술이요.”
어쩌지. 요즘 내 일상은 거의가 정진우에 맞춰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승원 형이 정진우와 다시 시작하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나에게 누군가 생겼다는 생각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정진우에게 거의 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미안하지만 거절하려는데 강현이 앞질러 말을 이었다.
-만약에 부담스러워서 망설이고 있는 거면,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부담스럽지는 않은데요.”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약속 잡았으면 좋겠는데.
“저기,”
-저 조만간 뉴욕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다시 한국에 오긴 하겠지만, 돌아가면 뉴욕에서 반년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란 사람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담배를 물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뉴욕으로 돌아간다고. 순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을 하겠다고 한국에 오고, 다른 나라로 돌아가고, 다시 오고 싶으면 오는 삶을 사는 게.
빨아들였던 연기를 뱉었다. 나와는 애초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좋겠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삶을 쫓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삶을 쫓다가, 쫓다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건 결국 내 쪽이 될 것이다.
“네, 선재랑 승원 형한테도 말씀하신 거예요?”
-아니, 선재는 알고, 승원 씨한테는 요한 씨가 좀 얘기해 줄래요?
“네. 그럴게요.”
이번 주는 엄마 기일도 껴 있고, 돌아오는 휴관 일에 정진우와 여행을 가는 것 때문에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다. 다음 주중으로 약속을 잡기로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럼에도.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정진우를 쫓고 싶어 안달하는 내가 무서웠다.
주말이 되자 미술관을 찾는 인파가 평일의 배는 늘었다. 일요일보단 토요일이 항상 사람이 많았는데,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요즘은 정진우의 퍼포먼스 때문이기도 했다. 토요일에 개관 시간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건 한 달이 지나며 익숙해진 풍경이 되었다.
몸을 푸는 정진우를 지켜보다가 오늘 날씨를 확인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있었다. 많이 추울 텐데. 팔에 걸쳐놓은 담요를 한 번 쓰다듬고 무전기 전원을 켰다. 오 분 후 전시장 오픈합니다. 각자 위치에서 대기해 주세요. 드넓은 전시장 한가운데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정진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발을 턴 정진우가 나에게 손짓했다.
“코디님, 잠깐 이리 좀.”
“네?”
어디 안 좋은가. 무슨 일인가 해서 부리나케 달려갔다. 정진우의 까만 눈을 들여다봤다.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안 좋은 곳은 없어보였다. 왜, 하고 물으려는데 맨손이 담요 안으로 파고들어 내 손을 꽉 쥔다. 차가운 손이 담요 안에서 내 손등에 맞닿았다. 불쑥 들어오는 찬 온도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주변을 둘러봤다. 니시카와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정진우를 노려봤다. 하지 마. 요즘 매일이 그랬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더 좋아 보이는 정진우가 내 반응은 아랑곳 않고 팔을 쓸었다.
“저 준비 다 됐어요.”
원위치로 복귀해 시간을 확인하고 무전했다. 오픈할게요. 밀려드는 사람들을 잠시 지켜보다 다음 위치로 이동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 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는 정진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못된 인간이었다. 정진우의 의전을 맡으며, 정진우를 대하는 타인의 태도가 어떠한지 피부로 느끼고, 정진우의 8년 전과는 다른 위치를 깨달을 때마다, 뿌듯함과 동시에 정진우를 누구와도 관련지을 수 없는 진창으로 처박아버리고 싶은 저열한 감정이 따라왔다.
“오늘은 어땠어요?”
“좋았지. 항상 좋았어.”
코너를 돌아 나에게 걸어온 정진우의 맨 어깨에 담요를 씌워줬다. 꽤 추운지 오들오들 떠는 몸을 감싸고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서 정진우가 옷을 껴입는 동안은 감시카메라도, 무엇도 없이 오로지 둘만 있을 수 있었다. 담요를 두른 채 돌계단에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정진우의 볼을 잡고 입을 맞췄다.
“잠깐만, 옷 가져다줄게.”
옷과 신발이 담긴 박스를 받아든 정진우가 손을 꽉 쥐었다.
“점심 아직이죠.”
“응.”
“같이 점심 먹을까요. 시간 돼요?”
시계를 확인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밥시간 안 될 것 같은데. 티가 나게 풀이 죽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남들 볼 때 스킨십 하고, 그러지 마.”
“네?”
“아까, 전시장에서. 거기엔 니시카와도 있고, 카메라도 있었어.”
정진우가 입을 딱 벌렸다. 되게 어이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렇게 의외인 이야기를 했나. 직장에서 남들 다 보는데 스킨십 하지 말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거기다 정진우와 나는 같은 남자였다. 정진우의 반응에 의문이 들었다.
“왜?”
외투를 모두 입은 정진우가 담배 있어요? 하고 묻는다.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내밀었다. 불을 붙여주고 나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마른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섹시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눈을 내리깔고 삼켰던 연기를 뱉어낸 정진우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니시카와 때문에 그런 거면,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왜?”
“니시카와는 우리 관계 알고 있어요.”
정진우는 타인이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괴리감이 들었다.
“너… 니시카와는 언제부터 안 거야.”
“저 한국 오고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알았어요. 선배도 대충 짐작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카트린한테 저에 대해 물었다고…….”
“그건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는 거예요?”
예쁘게 난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속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빨아들였던 연기를 후 뱉었다.
“문제라기보단, 앞으로 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뭘요?”
“뭐긴……. 나는 네가 너무 거침없이 구는 것 같아.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다니는 거나, 아무 때나 스킨십 하는 거나.”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우리가 남들 다 보는 데서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섹스를 한 것도 아니고. 손잡고, 옷 다 입은 상태에서 좀 만지고,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평범한 일 아니에요?”
“키스, 섹……. 어, 그래. 그렇게 보면 평범하다. 근데 어쨌든 나는 남들 보는 데선 안 그랬으면 좋겠어. 미술관에서는 더더욱. 너도, 나도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잖아. 네가 그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뭐라 반박하려는 정진우를 막았다. 정진우가 우리가 하는 게 평범한 일이라고 말을 꺼낸 순간, 정진우와 나의 관점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 우리의 관계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평범한 행동을 나눌 수 없는 관계였다. 애초에 생각이 다르니, 계속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간 싸울 게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대화가 어디까지 갈지를 짐작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싸울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 얘기 안 해도 돼. 네 말은 이해했어. 너도 나 이해하지?”
“……네.”
“그래, 고맙다. 배고프지. 밥 같이 못 먹어서 미안.”
“괜찮아요. 이따 올 거죠?”
응. 끝나고 연락할게.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들어가 봐야 하죠. 가요. 정진우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함께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길에 정진우의 팬으로 보이는 몇몇을 만났다. 작가님, 오늘도 퍼포먼스 너무 좋았어요.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정진우를 둘러싼 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정원까지 함께 나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눈들이 하나같이 반짝거렸다. 작품이 아닌 작가의 팬이 생겼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잘생겨서 그런가. 좀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고는 혼자 창피해져서 입가를 쓰다듬었다.
퇴근할 때마다 어김없이 늦는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는 승원 형을 떨쳐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선재와 셋이서 강현과의 약속을 잡는 내내 요한이 장어 먹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와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형을 종국에는 하선재마저 이상하게 쳐다봤다. 승원 형 왜 저래. 몰라 나도. 실실거리는 형을 앞에 두고 하선재와 눈으로 대화했다. 형의 각종 오지랖 속에 다음 주 수요일로 약속을 잡은 뒤 헤어졌다. 호텔에 도착해 카드키를 찍고 문을 여니 정진우가 노래를 크게 틀어놓은 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붓질을 하고 있는 등을 끌어안았다. 희게 드러난 뒷목에 입 맞췄다. 왔어요? 쥐고 있던 붓을 물통에 걸쳐 놓고 나를 마주 안는 온기가 좋아서 잠시 숨을 멈췄다.
“수채화도 해?”
“음, 안 그린 지 오래 됐는데, 좀 심심해서. 따로 작업 안 한 지 세 달 정도 됐거든요.”
오래 손 놓고 있으니까 뭐라도 그리고 싶어지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하는 말에 좋았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베를린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정진우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나도 네 스튜디오 가보고 싶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노래를 끄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을 몇 장 찍어두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에 정진우가 덩달아 핸드폰을 들고 나를 찍는다. 한참 서로를 찍다가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인가 민망해져서 슬그머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저녁을 함께 먹으며 오늘도 자고 가라고 들러붙는 정진우를 거절했다. 나도 같이 있고 싶지. 근데 내일 엄마 보러 갔다 와서 바로 너랑 출발하려면 챙길 것도 있고. 어쨌든 오늘은 좀 그래.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바로 했던 말을 철회할 뻔 했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것도 거절하니 정진우의 표정은 완전히 울상으로 변했다. 그냥 있어. 내일 나 올 때까지 그림 완성해서 보여주면 안 돼? 알았다고 끄덕이는 입을 쭉 잡아당겼다. 집에 돌아와 보니 형은 혜연 누나를 만나러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간단히 짐을 싸고 아줌마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답장을 확인하다가 정진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발견하고 웃었다.
[사실 나도 선배 어머니께 같이 가고 싶었어요. 안부 전해 줘요.]
응. 고마워. 내일 보자. 메시지를 보내고 언제 잠이 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정진우와 울고불고 하며 싸움박질을 했다. 싸움하는 내내 나는 너만 엄마 있고 중요하냐, 나도 있어, 나도 중요해. 나도 일하느라 바쁘고, 나도 네가 첫 번째가 아니야. 와 같이 유치하기 그지없는 말들을 늘어놨다. 잠이 깰 때까지 꿈은 지속적으로 변하며 나를 괴롭혔다. 폭풍우 치는 밤에 엄마가 우산도 없는 채로 나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정진우로 바뀌기도 했다. 나는, 엄마에게도, 정진우에게도 우산을 씌워줄 수 없었다. 차디찬 빗줄기에서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다. 디디고 선 자리에 발이 묶여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내가 사무치게 미웠다.
결국 제대로 못 잔 채로 납골당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무거운 머리를 꾹꾹 눌렀다. 날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엄마 기일에는 대체로 눈이 내리거나, 이상하리만치 겨울비가 잦았는데 오늘은 햇빛이 쨍쨍했다.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정류장에서 내려 납골당까지 천천히 걸었다. 이르게 도착한 아줌마들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요한이 왔네! 잘 지냈어?”
“네. 다들 건강하셨죠? 자주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숙자 아줌마에게 시선이 멎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들은 뒤로 한 번도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왁자지껄한 아줌마들에게 떠밀려 엄마를 보고,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근처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요한이 아직 결혼은 생각 없어? 여자 친구 안 만나? 묻는 말들에 적당히 대답을 하면서 숙자 아줌마를 살폈다. 막 밥을 한 술 떠먹던 아줌마와 눈이 맞았다. 눈을 굴리다 그냥 밥만 먹었다.
분위기를 망칠까 숙자 아줌마와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사실 할 얘기도 딱히 없긴 했다. 아줌마는 여전히 그래도 아버지인데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버지를 원망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나라도 아버지를 미워해야 속이 풀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만약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많이 미워하지는 말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땐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지금처럼 밉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저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의식을 차리지 못하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한 말이 그거여서 거역할 수도 없었다. 다 갈라지고 뭉개진 말투로 더듬더듬 말했던 엄마는, 그때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흡이 달리는 목으로도, 꾸역꾸역 끝까지 얘기했겠지. 언젠가 나에게까지 아버지의 연락이 닿을 걸 짐작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에게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기로 했던 곳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길 건너편에서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 정진우에게 향했다. 나는 정진우를 놓지 못하는 와중에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극했던 사랑을 배신하고, 한순간에 버린 사람이 뭐가 좋다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용서를 강요했던 엄마가 잠시 미워지기도 했다. 내 배낭을 뒷좌석에 싣고 운전하는 정진우의 옆얼굴을 홀린 듯 보며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다가 웃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더니. 내가 누구를 미워할 입장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쳐서.
예약해 놓은 호텔에 들러 짐을 풀고 바다로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와중에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주황빛과 검푸른 빛으로 빛났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바다였다. 마지막으로 바닷가에 온 기억이 까마득했다. 독일로 이민을 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좋다,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 옆에 서 있던 정진우가 나를 보고 웃었다. 고운 얼굴에 옅게 음영이 졌다. 검은 눈에 노을이 비쳐서, 바다가 그대로 정진우의 눈 속에 담긴 것 같았다. 반짝거리는 눈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에 빠르게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내 표정이 어지간히 이상했는지 정진우가 흩날리는 머리를 넘겨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냥 정진우를 끌고 어딘가 우리 둘만 있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하얀 얼굴에 고르게 난 눈썹이 아래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
“정말 어디 안 좋아요? 어머니 뵙고 와서 그런가?”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들어갈까요? 얼굴을 감싸려던 손을 물리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정진우의 팔목을 잡았다.
“배고파?”
“아니요, 아직 괜찮아요. 선배는? 배고파요? 배고파서 그래요? 뭐 먹으러 갈까?”
“아니, 나도…….”
말을 잇지 못하고 정진우를 끌었다.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둘만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정진우를 감싼 것들을 모두 벗기고, 맨몸을 만지며 정진우가 이곳에 있다는 걸 실감하고 싶었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정진우가 현실감이 없어서,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커다란 소리가 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객실 문을 급하게 닫았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정진우의 옷가지를 벗겨냈다. 그러는 동안 점차 바지 안이 답답해졌다. 이제 곧 있으면 서른인데, 고등학생도 안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옅은 색의 도톰한 입술을 찾아 입을 갖다 대며 웃었다. 영문도 모르고 내가 하는 짓을 맞추던 정진우가 어느 순간 적극적으로 혀를 섞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옷을 벗기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침대 가에 다다라 있었다. 정진우에게 밀려 주저앉은 허벅지에 차가운 면의 감촉이 닿았다. 소름이 돋았다. 뒷목을 감싸던 손이 어깨를 스쳐 가슴에 난 돌기를 세게 비틀었다. 아, 으……, 채 나오지 못한 신음이 정진우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부위가 정진우의 손길에 의해 예민해졌다. 정진우의 손이 내 몸을 지날수록 엉덩이가 움찔거리고, 허리에 힘이 풀렸다. 집요하게 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낸 정진우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 콘돔 없어요.”
“…내 가방에 있어.”
가쁜 호흡을 다스리며 나를 빤히 보는 정진우와 눈을 맞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만 섹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아서 너무 창피했다. 얼굴이며 목, 가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열이 한껏 올라 감각까지 둔해진 귀를 정진우가 덥석 물었다. 성기를 답답하게 감싸고 있던 팬티를 벗겨낸 손이 지체하지 않고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귀를 잘근잘근 씹는 이와 음낭과 항문의 중간 부분을 문지르는 손가락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목이 움츠러들고 허리가 들썩였다. 저절로 움직이는 허리를 단단히 받쳐 잡던 손이 배꼽까지 발기한 성기를 꽉 쥐었다.
“아, 아― 잠깐, 그렇게,”
“……여기는 좋은, 것 같은데.”
정진우가 보란 듯 귀두 부근을 엄지로 느리게 쓸었다. 붉게 달아올라 한껏 젖은 것을 잡고 문지르는 하얀 손이 선정적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정진우의 억누른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 떠 봐요. 선배, 나 봐요. 무시하고 고개를 시트에 박았다. 턱선을 따라 키스하던 입술이 목을 지나고, 가슴에 머무르다 유두를 꽉 깨물어 온다. 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정진우가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짓궂게 웃었다.
“나 보라고 그랬잖아요.”
“너… 으―”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성기를 잡아 흔드는 손길에 막을 새도 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힘이 잔뜩 들어간 배와 엉덩이, 허벅지가 경련했다. 음낭과 기둥 부분을 거칠게 쓰다듬던 손이 요도 구를 꾹 누르자, 참지도 못하고 정액이 울컥 새어나왔다. 두 번, 세 번 사정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사정하는 와중에도 성기를 쥐고 놔주지 않는 손에 문신이 가득한 어깨를 밀었다.
“잠깐― 놔, 놔봐…….”
사정 직후 치솟은 성감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놔, 놔 줘. 아파, 진우야. 얼마나 애원했을까, 아플 정도로 꽉 잡혀 있던 성기가 자유로워졌다. 숨을 고르며 허리를 세우려다 그대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배꼽 아래서 까만 머리통이 느리게 움직였다. 정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항문 주변을 진득하게 쓸어내린다. 힘을 잃고 흐물거리는 성기가 축축한 입 안에서 점차 심지를 세워갔다. 눈앞이 까매졌다 하얘졌다 난리도 아니었다. 다시 만난 후 처음 가지는 잠자리인데 오럴섹스라니, 얘는 정말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힘을 받은 성기를 뱉어낸 정진우가 천진하게 웃었다.
“선배 거… 너무 커서 입이 헐 것 같애.”
“하지 마…… 진짜.”
귀두 끝에 입을 맞춘 정진우가 왜, 크고, 생긴 것도 예쁘고……. 좋은데. 성기에 대고 속삭였다. 옅게 부는 입김에 딱 죽기 직전이 되었다. 그냥 정진우의 맨몸을 쓰다듬고, 끌어안고, 될 수 있으면 마음을 나누며 섹스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반복해서 느껴지는 자극에 나도 모르게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민망해서 입을 닦으며 허리를 세우려는데 거친 손바닥이 배를 눌러 일어나려는 걸 막았다. 침대 밑에 무릎 꿇고 있던 몸이 위로 슬금슬금 올라오며 내 다리를 잡아 올렸다. 정진우의 시선이 벌어진 아래를 향해 있었다. 태연한 낯을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어느새 정진우의 것도 검붉게 달아올라 배에 붙어 있었다. 하얀 몸과 검붉은 성기의 색감, 아래를 뚫어져라 관찰하는 시선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렇게… 보지 마, 좀…….”
“알아요? 선배 여기, 엄청 움찔거리는데.”
양 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정진우가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두 다리가 단단히 잡혀 벌어져 있는 채여서 뭘 어떻게 가리고 싶어도 가릴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후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다가 힘을 잃지 않고 꺼덕거리는 성기를 가리다가 결국엔 얼굴을 빈틈없이 덮었다.
“나 보라니까요.”
“창피해…….”
“안 보면 후회할 텐데.”
고개만 저었다. 후회하지 마요. 이상한 곳에서 입김이 느껴진다 싶더니 엉덩이 사이를 정진우의 혀가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서 파드득 몸을 일으켰다. 다리 사이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하지 마! 아, 으음… 으…….”
비음 섞인 소리에 입을 막았다. 심장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머리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정액으로 범벅이 된 성기며 음낭, 항문을 빠짐없이 적신 정진우가 구멍 주변을 만지던 손가락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만, 힘 좀 풀어 봐요…, 손가락 잘릴 것 같아.”
“아, 조용히 좀 해…….”
내 말은 무시한 채로 엄청 좁다, 어떻게 들어가지. 원래 이렇게 좁았나.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늘려가던 정진우가 세 개나 집어넣고 한참 내 안을 헤집던 손가락을 쑥 빼냈다. 애매하게 성감이 오른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릎 안쪽을 잡아 지 맘대로 벌리는 바람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로 움찔거리는 아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너무 뻑뻑해서 안 되겠어요.”
“그러니까 콘돔을,”
말을 멈추고 제 성기를 재빠르게 훑는 정진우를 멍하니 쳐다봤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에 내 입까지 벌어져 있는 것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정진우가 사정했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유백색 액체를 손으로 걷어낸 정진우가 엉덩이 사이에 제 정액을 듬뿍 발랐다. 내 아래에 집중하며 힐끔 얼굴을 살피는 눈초리에 몸이 굳었다.
“선배. 손.”
동시에 늘어져 있던 손 한 짝을 잡아 제 성기를 쥐게 하고 슬슬 흔든다. 약간 힘을 잃고 있던 성기가 금세 단단해졌다. 멍한 정신으로 정진우의 손에 덮여 성기를 잡고 움직이는 손을 보고만 있었다. 귓가가 멍했다. 대충 내 손과 제 성기를 겹쳐 잡고 흔들던 정진우가 급하게 다리를 잡았다.
“미안해요, 더 이상 못 참겠어.”
“……어? 악―! 아! 야 잠깐, 아파…….”
마구잡이로 아래를 뚫고 들어오는 것에 소리를 지르며 앞에 놓인 어깨를 내리쳤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싶어 했지.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 현실감이고 환상이고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성기를 삽입한 채로 쿵쿵 쳐올리는 정진우에게 흔들리는 몸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심장 소리와 아픔밖에 느껴지지 않던 감각에 순간 정진우의 거친 호흡이 섞였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감촉이 느껴졌다. 미칠 것 같았던 아픔이 어느 정도 둔하게 가라앉자 꼬리뼈를 타고 애매하게 오르는 성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아, 선배…… 요한,”
“으… 아, 조금만, 천천히…….”
조금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자 눈을 슬그머니 떠올렸다. 마주한 정진우의 얼굴은 굉장히 예뻤다. 흥분에 잠식된 얼굴이 탁한 눈으로 내 얼굴을 핥듯이 보고 있었다. 진한 시선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늘어진 다리를 붙들고 한 템포 멈췄던 정진우가 다시금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순간, 입이 절로 벌어지고 의지를 배신한 몸이 굳어 바르르 떨렸다.
“아― 이상해, 잠깐― 아, 아으…….”
“…여기, 좋아, 요? …후으, 여기가 좋아?”
“아― 응. 으…….”
예민한 곳을 반복해서 찔러오는 성기에 정신을 놓고 고개를 시트 안으로 박아 넣고 도리질 쳤다. 너무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에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찔러 넣는 성기가 평생 나가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입만 벌리고 끄, 끅 숨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목에 입술을 묻고 진득하게 빨아올린다. 빠르게 쳐올리는 정진우에게 밀려 어느새 침대 반대편으로 목이 넘어갔다. 활짝 들린 다리가 경련했다. 목을 받쳐 올려주는 정진우에게 기대 흐린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사정한 성기가 힘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이 깜빡깜빡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를 반복했다. 한참 흔들던 성기를 끝까지 찔러 넣은 정진우가 나를 끌어안고 깊은 신음을 뱉었다.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우리가 이어진 곳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뜩했다. 탈력감이 몰려왔다. 그대로 힘을 빼고 늘어지려는데 정진우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선배 거, 또 섰어.”
“일단 빼, 아…… 하지, 그만 해…으― 아아….”
함께 힘을 받은 성기를 주물거리며 정진우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여기까지가 끝인 줄 알았던 성감은 계속해서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정진우 탓에 결국 나는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발기했다 사정하기를 반복했다. 가득 찬 정액을 헤치고 처음보다 배는 수월하게 움직이는 정진우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목을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고 볼에 입술을 부비며 속삭였다.
“이…… 짐승 같은 자식.”
예쁘기만 했던 얼굴이 사나운 기세로 웃었다.
계속해서 나를 쥐어짜는 정진우 때문에 우리는 침대에서 그대로 한 번, 내 안에 가득 차버린 정액을 빼준다는 핑계로 욕실에서 두 번 더 몸을 섞었다. 나중에는 정진우가 내 몸에 손만 대도 애원이 줄줄 나왔다. 제발 그만 좀 하자……. 나 힘들어 죽겠어……. 마지막 애원은 진심이 조금 보였는지 그만 하자는 말은 무시로 일관하며 좋다는 소리만 용케 귀에 담던 정진우가 진득하니 문지르던 엉덩이를 그제야 놔 줬다. 욕실부터 침대까지 정진우에게 꼴사나운 모습으로 매달려 움직였다. 진짜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내 몸을 침대에 바르게 눕힌 정진우가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많이 힘들어요?”
“……어.”
“콘돔도 챙겨 오고, 먼저 하자고 한 건 자기면서. 왜 이렇게 몸이 약해요. 자주 아프고, 힘들고.”
그 콘돔 너는 꺼내보지도 않았잖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정진우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했다. 왜요? 뻔뻔한 물음을 던지며 뻗어 있는 손가락을 쥐고 벌린 입에 키스한다. 정진우를 알게 된 지 9년 만에 처음 아는 모습이었다. 정진우는 얼굴 가죽이 굉장히 두꺼운 인간이었다. 진득한 키스를 나누고 턱 끝에 묻은 침을 닦아주는 정진우를 어이없는 시선으로 훑다가 한숨을 푹 쉬고 매끈한 등을 가볍게 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너는 이렇게 하고 싶은 거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어.”
“…….”
“……너 진짜 참은 거야?”
고개를 뒤로 빼고 정진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내리깐 눈에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새색시 같았다.
“왜 참았어? 하고 싶었으면 얘기하지.”
“……. 그냥.”
“진짜 그냥? 말해. 왜 참았어?”
입술을 달싹거리던 정진우가 내 시선을 피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는 게 다 보였다.
“……선배가 원할 때 하고 싶었어요.”
“내가 원할 때?”
“제 감정만 밀어붙이고 싶지 않아서.”
평소보다 까끌거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은 정진우가 나를 틈 없이 꽉 끌어안았다. 정진우에게 안긴 채로 멍하니 커튼 밖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입술에 와 닿는 귓가에 입 맞췄다. 우물우물하던 정진우가 살짝 웃었다.
“어머니 생각 때문에, 많이 우울했어요?”
“……아니야.”
어머니의 부재는 지금의 나에겐 아주 익숙한 일이 되었다. 익숙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 그 정도의 일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으니 별로 우울하지도 않았다. 나에겐 네가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너의 상실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를 단숨에 미친놈으로 만들었다. 네가 어딘가로 떠난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참을 수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정진우가 안고 있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응, 그래요. 아침부터 먼 데 갔다 와서 피곤하죠.”
“……응.”
맨몸으로 느끼는 정진우는 아주 따뜻했다. 이 온기를 평생 두 손에 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자다가 배가 고파서 깼다. 아직 하늘이 파랬다. 새벽이었다.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허리에 힘을 줬다.
“……아, 악.”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입을 틀어막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뭐지, 나 괜찮은 건가. 정진우가 베개에 머리를 비비며 일어날 때까지, 입을 틀어막은 채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배에서 간헐적으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주변이 점차 밝아지고, 햇빛이 방 안을 감싸기 시작하자 정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깨어나려는 기색이 보이자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잠에 취한 눈이 스르르 뜨이고, 나를 마주 했다.
“진우야, 진우야.”
“요한…….”
눈을 감고 나를 끌어안으려는 어깨를 한 번 더 흔들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는다. 무슨 일, 있는 것 같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몸이 안 움직여…….”
가늘었던 정진우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화들짝 일어나서는 이불을 들춰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어제보다 더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붙들고 이불 좀 다시 덮어 줄래. 중얼거렸다. 정진우가 덩달아 빨개진 볼을 하고 걷었던 이불을 다시 덮어 주었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아픈 건 아닌데, 감각이… 없어.”
벌떡 일어난 정진우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정진우에게 안긴 채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소변까지 봤다. 일곱 살 난 애도 아니고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주문한 룸서비스를 기다리며 옷까지 입혀준 정진우가 엎드려 봐요, 하고 엉덩이를 두드렸다. 시키는 대로 엎드려 창가를 바라보다가 엉망이 된 침대를 가리켰다.
“저거, 이불이라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아…….”
“여기 다시는 못 오겠다. 그치.”
정액으로 범벅이 된 시트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다리를 주무르다 말고 옆에 놓인 싱글 침대를 대충 정리한 정진우가 내 곁에 다가와 앉아 귀를 매만졌다.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
“어…….”
“그것보다 배 많이 고프죠. 지금은 어때요? 일어나 볼래요?”
정진우가 부산을 떠는 동안 둔하게나마 통증이 느껴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차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정진우가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앞으론 좀 적당히 할게요. 앞으로의 바람직한 성생활을 다짐하는 정진우를 두고 음침하게 물었다.
“앞으로도 할 생각인거야?”
“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핏기가 싹 가신 채로 새하얘진 정진우를 두고 웃었다. 정말 당혹스러운 얼굴이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농담이야. 정진우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를 째려봤다. 놀랐잖아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여행다운 여행은 하지도 못한 채 호텔에만 있다가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정진우가 모는 차 안에서 뜨뜻한 시트에 눕다시피 해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듣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있잖아.”
“선배 아버지요? 그, 독일에…… 있다는?”
“응. 얼마 전에 돌아가셨대.”
차가 한 번 덜컹였다. 조심해. 안전 운전 해야지. 같이 덜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를 흘깃 내려다본 정진우가 네, 미안해요. 얌전히 대답했다.
“올해 초였나, 아프다고 계속 연락이 왔었어.”
“…아버지가요? 연락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 나는 연락이 완전히 끊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
엄마하고도 연락을 하고, 엄마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엄마 절친한 친구분이랑 계속 연락을 하고 계셨더라. 누구에게도 아버지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상하게 정진우 앞에서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자판기도 아니고 누르면 툭 튀어나오는 수준이었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잠자코 경청하며 운전대를 놓지 않는 손에 시선을 주고 말을 이었다. 파랗게 핏줄이 서 있는 하얀 손이 운전대와 잘 어울렸다.
“아프셨을 때, 계속 내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
“한 번도 들려드린 적은 없지만.”
가볍게 웃었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내가 요 근래 한 가장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라도 엄마의 마음을 짓밟은 남자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결국 돌아가셨다더라. 아무렇지도 않았어.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그냥 남이야 나한텐.”
“……네. 알고 있어요.”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
“그렇게 버려지고는 한 번 보지도 않은 사람인데도 없다고 하니까, 이제 나는 완전 고아가 됐구나. 내가 진짜 고아구나. 정말 나 혼자구나, 하는. 웃기지.”
정진우에게 이야기 하면서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됐다. 그 남자의 죽음에 전혀 슬프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끝 간 데 없이 외로웠던 이유를 찾았다. 굳이 며칠이나 지난 이야기를 지금 와서 정진우에게 꺼낸 이유도 함께.
“……선배가 왜 혼자예요.”
“…….”
“제가 있잖아요.”
나는 저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종종 직시하곤 하는 추잡한 마음에 그냥 웃었다. 정진우가 나를 조금 더 안타까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계속 나를 안쓰러워하기를. 가족도, 전시도 다 버릴 수 있을 만큼. 정진우는 모를, 평생 혼자 지고 가야 할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많이 아파요? 묻는 정진우에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집 앞에 도착했을 때쯤엔 그래도 꽤 멀쩡하게 걸을 수 있었다. 가방을 들어준다는 정진우를 만류했다. 너도 피곤하잖아, 들어가서 쉬어. 내일 보자. 삐죽거리는 입술을 붙들고 뽀뽀했다. 나 내릴게. 차 잘 갖다 주고 조심히 들어가. 더 뻗대지 않고 돌아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짐을 풀 생각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출근할 때까지도 몸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무리해도 하루만 푹 쉬면 나았는데, 그게 안 됐다. 사무실에 앉아 계속 허리를 두드렸다. 죽겠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만히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전시장을 한 번 둘러봤다. 천장과 바닥, 벽에 설치된 작품들을 훑어가다가 그림 두 점이 놓인 곳까지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 그림을 멍하니 관찰했다. 돌바닥 사이에서 핀 꽃. 기억, 사랑, 고난.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저게 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오늘 집에 가서 그림이나 한번 뜯어볼까. 생각했다. 종이에 말려 있지 않은,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작은 액자 안의 그림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제 헤어지기 전 정진우가 선물한 그림이었다. 수채화 완성하면 보여 달라고 그랬잖아요. 선물이에요. 평소 정진우의 화풍이나 작품의 느낌과는 달랐다. 수채화라 그런가. 아주 맑고, 밝은 느낌의 그림이었다. 배가 몇 척 띄워져 있는 바닷가를 그린. 해변에는 사람의 그림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바다 가는 게 너무 기대됐나 봐요.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정진우의 볼을 덥석 베어 물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가득했던 귓가를 울렸다.
* * *
한 번 잠자리를 가진 뒤라 그런지 정진우는 불도저처럼 달라붙었다.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밀어붙이곤 입술을 빨아들이는데, 그 와중에 손이 엄청 빨랐다.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린 손이 팬티 속에서 약간 힘을 받은 성기를 꺼냈다. 호흡이 딸려서 입술을 놔주지 않는 어깨를 밀고 헉헉거렸다.
“잠, …나 아직 힘들어.”
퍽 아쉽다는 얼굴이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고,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이 구음을 받아 더욱 피곤해지기까지는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늘어져 있는 내 손으로 제 것까지 달랜 정진우가 상큼하게 웃으며 포장해온 초밥을 하나둘 먹여줬다. 맛있어서 날름 받아먹으니 재미가 들렸는지 저는 입도 안 대고 먹이기만 해서 질세라 나도 먹여주었다.
초밥 두 팩을 다 비우고 나니 배가 엄청 불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일 약속을 잡은 걸 정진우에게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찰싹 달라붙어서 침대 헤드에 기대 있는 몸을 흔들었다. 한차례 사정하고, 밥도 먹어서 그런지 노곤해 보였다. 눈이 조금 풀려 있었다.
“나 내일 퇴근하고 약속 있어.”
“약속?”
“응.”
“누구랑?”
바로 말하려다 잠깐 멈췄다. 강현 이야기를 하면 정진우가 날을 세울 것 같았다. 이마를 문지르다 눈을 피하면서 최대한 작게 말했다.
“선재랑, 나 같이 사는, 그 승원 형이랑, …강 작가랑.”
“강 작가? ……강현?”
“응.”
허리를 세운 정진우가 나를 들여다봤다. 풀려있던 눈에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딴청을 피웠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선배, 나 봐요. 한다. 귀만 만지작거리니 한 손으로 턱을 쥐고 제 쪽으로 돌린다. 별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강현은 왜요?”
“이번에 만나기로 한 게 강 작가가 우리한테 대접하고 싶다고 그래서 만나는 거라.”
“대접?”
“응. 그 사람 곧 뉴욕 간대.”
볼이 짓눌리는 바람에 발음이 좀 뭉개졌다. 눈을 내리깔고 뉴욕……. 하며 내 말을 되새긴 정진우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가지 말라면 안 갈 거예요?”
“……아니. 약속인데 내 마음대로 취소하긴 좀.”
“그 사람이 선배한테 관심 있는 거 안다면서요.”
“어. …거절했어.”
“언제?”
“……예전에.”
잡힌 볼이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정진우가 볼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귓가를 쓰다듬었다.
“너무 늦게까지 마시진 마요.”
“응. 내일 술자리 파하면 여기로 올까?”
네. 늦으면 내일은 못 잘 생각해요. 협박이라고 하면서 웃는데 진심으로 무서웠다.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안 늦을게.
자정이 넘어 도착한 집에서 자고 있는 형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레 움직였다. 샤워를 마치고 깜깜한 방의 불을 켰다. 아무렇게나 끼워놓은 캔버스를 잡아 뺐다. 책상 모서리에 종이가 약간 찢어지며 빠져나왔다. 찢어진 틈새로 보이는 거친 붓 질감을 바라보다가 너덜거리는 종이를 모두 제거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여다보는 그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형태와는 약간 달랐다.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왜곡된 것 같았다. 기억 속의 꽃은 노랗고, 조금 컸는데 눈앞에 놓인 것은 아주 작았다. 정진우가 발표한 기존의 고난 시리즈와도 느낌이 약간 달랐다. 더 거칠고, 보잘것없었다. 갈라진 아스팔트의 좁은 틈에서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보려 노력하는 이름도 모를 이 꽃이, 너는 나 같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림을 빈 벽에 잘 세워두었다. 책상에 놓인 수채화와 벽에 기댄 유화가 서로 마주보고 놓여 있었다. 정진우의 흔적을 하나둘 늘려가는 기분은 조금 복잡했다.
아침을 먹는 동안엔 승원 형이 오늘 약속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마시고 죽을 거야. 내일 생각 안 할 거야. 하나마나 결과가 똑같은 다짐 중인 승원 형에게 조용히 말했다. 형이 언제 내일 생각하고 마셨어. 매번 죽잖아……. 형은 내 주변에 와글와글한 마시기만 하면 취하는 타입이었다. 나머지는 김수현과 하선재였고. 감당 안 되는 셋 중 둘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허락은 받았지만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정진우는 걱정이 무색하게 퍼포먼스가 끝나자 인사를 남기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일하는 중간 중간 나눴던 메시지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퇴근할 때에는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어깨동무를 한 채로 앞서가는 형과 하선재를 따라 강현이 알려줬던 술집으로 걸었다.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여서 그런지 거리에 색색의 불빛이 반짝여서 예뻤다.
강현이 알려준 술집은 굉장히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을 맴돌며 한참 위치를 찾다가 겨우 찾아낸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강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하게 강현을 둘러싸고 인사를 건넨 둘에 이어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잘 지냈어요, 요한 씨?”
이때다 하고 승원 형이 끼어들어 나도 모르는 내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술관에서는 용케 입을 다물고 있더니, 장소가 사석으로 변하니 다 소용없었다. 모르는 척하고 메뉴판을 훑어봤다. 하선재가 여자 친구 생겨서 지금 정신 못 차린다는 최근의 근황을 듣더니 나를 퍽 쳤다. 형 여자 친구 생겼어? 진짜? 왜 말 안 했어? 어째 반응이 하나같이 과하게 놀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나는 누구 만나면 안 되냐.”
흐뭇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승원 형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너 진짜 누구 만나는 거 맞아? ……. 뭐야 진짜. 내 표정이 퍽 어이가 없어 보였는지 형이 급하게 변명했다. 아니 나는 알고 있었지. 근데 막상 네 입으로 들으니까……. 우리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강현이 웃음기가 남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요한 씨 얼굴이 좋아 보이더라.”
“……예, 뭐.”
되는 대로 말을 뱉고 보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술과 안주와 함께 다른 곳으로 넘어간 화젯거리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정종을 들이켰다. 술 맛은 구별을 잘 못하는 편인데, 목 넘기는 게 굉장히 깔끔했다.
“여기 술 맛있죠? 그래서 이리로 오라고 한 거예요.”
감탄하는 기색을 눈치챈 강현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강현을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는데, 하선재와 승원 형이 있기도 했고, 맛있는 술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긴장된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비운 술이 네 병을 넘어갈 때쯤엔 마음을 완전히 놓고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넋 놓고 강현과 하선재의 이야기를 듣다가 핸드폰을 슬쩍 꺼내봤다. 정진우에게선 몇 시간째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다시금 불쑥 솟아올랐다. 전화라도 한번 해볼까. 핸드폰과 담배를 쥐고 나가려는데 하선재가 불쑥 외쳤다.
“진우 형 온다는데, 와도 돼?”
무슨 소리지 저게. 저에게 몰린 시선에 하선재가 빨개진 얼굴을 하고 웃었다.
“아니, 아까 퇴근할 때쯤부터 진우 형이랑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끼리 만난다니까 자기도 껴도 되냐고 해서. 안 돼?”
말을 잃은 와중 승원 형이 당연히 되지! 하고 우리를 쳐다봤다. 강현과 눈이 맞았다. 강현은 웃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인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를 한참 들여다보던 강현이 말했다.
“저도 괜찮아요. 요한 씨는?”
“요한이는 보니까 진우랑 엄청 친하던데, 당연히 되겠지. 불러, 불러.”
술이 얼큰하게 들어간 승원 형이 또다시 오지랖을 부렸다. 난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정진우가 이 자리에 끼면 굉장히 불편해질 것이다. 나는 계속 이들의 눈을 신경 써야 했고, 정진우는 나와 강현을 신경 쓸 게 뻔했으니까. 그나저나 나한텐 연락 한 번 없었으면서 하선재하고는 왜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은 건지,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뭐라 할 수도 없어 술만 들이켰다.
정진우는 하선재가 제 이야기를 한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이 잘생겨서 신경질이 나는 마음에 뿌듯한 마음이 섞여들었다. 이런 내가 어이가 없는 마음도 함께.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들어와 앉아 나에겐 시선도 안 주고 인사를 나누는 정진우를 빤히 바라봤다. 사람들을 지나 마지막으로 내 얼굴에 닿은 눈이 웃고 있었다.
“네 분 만나시는 게 좋아보여서 왔어요.”
“……네.”
“무슨 존대야, 여기선 예의 안 차려도 돼. 사실 진우가 저랑 요한이 학교 후배였더라고요. 그걸 얼마 전에 서로 얘기해서, 참. 진우 같은 작가도 후배로 둬 보고, 우리가 대학 하나는 잘 갔어? 그지 요한아?”
어어.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정진우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하선재가 왜 항상 자기만 아무것도 모르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시끌시끌해진 분위기에 강현과 나, 정진우가 앉은 자리만 조용했다. 나와 정진우를 번갈아 쳐다보는 강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별다른 말도 행동도 안 했는데, 되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진우가 강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또 뵙네요.”
“네. 작가님 퍼포먼스 보러 몇 번 갔었는데, 따로 인사할 기회가 없었어요. 반가워요.”
이후에는 나만 예민해졌고, 나만 좌불안석이었다. 무슨 짓이라도 할까 싶었던 정진우는 평온한 표정을 얼굴에 박제한 채 술만 마셨고, 강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하선재와 형, 가끔 정진우가 끼어드는 대화에 맞장구를 쳤다. 계속 마음을 졸이다 대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뱃갑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요.”
형이 앉은 자리를 헤치고 나가려는데 가장 바깥에 앉은 정진우가 함께 일어났다.
“저도.”
“……. 형이랑 선재는?”
우린 괜찮아, 아직. 이따 둘이 다녀오지 뭐. 강현을 제외한 흡연자들이 손을 저었다. 머리를 쓸며 나가려는데 뒤에서 무거운 것이 어깨 위에 얹혔다. 고개를 돌렸다. 정진우가 나에게 제 외투를 씌워주곤 앞서 나갔다.
“밖에 추워요. 옷 입고 나가요.”
정진우 너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건너다 봤다. 괜히 신경을 써서 그런 건지, 강현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어깨 위에 올려져있는 손을 치워내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아까보다 더 날이 추워져 있었다. 발을 구르며 담배를 무니 정진우가 불을 붙여주었다. 나한테는 춥다고 굳이 제 외투를 챙겨 입히더니 정작 자기는 후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너 안 추워? 괜찮아?”
“저 추위 별로 안 타서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것 같은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빨개져 있었다. 다시 벗어줄까. 하다가 가게 앞에 비치된 난로로 다가갔다. 이리 와. 도톰한 기모후드 소매를 끌어당겼다. 잠자코 끌려 와 제 담배에도 불을 붙인다. 주황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옆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여기 어떻게 왔어?”
“종종 선재랑 연락하는데, 오늘도 얘기하다가 그냥.”
“그냥? 선재랑은 무슨 연락을 그렇게 해?”
“그냥, 이런 저런. 선재가 살갑잖아요. 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그래서.”
“……. 그래.”
“…왜 반응이.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예요?”
정진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험악해지려는 분위기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네가 오면 안 되는 자리가 어디 있어.”
“…….”
“퇴근하고 너한테 연락이 계속 없어서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어.”
몸을 숙이고 무표정한 얼굴을 들여다봤다. 입매를 늘이며 웃었다.
“이렇게 와서 얼굴 빨리 보니까 좋다.”
“…….”
“너는?”
별 반응이 없어서 머쓱해지려는데 정진우가 연기를 내뿜으며 어깨를 한 번 털었다.
“저도 좋아요.”
“그래. 다행이다.”
한숨을 삼키고 담배를 마저 피웠다. 다 피운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린 정진우가 한 대만 더 피울까요. 물었다. 정진우의 외투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찾아 넘겨주었다. 불을 붙인 정진우가 눈을 내리깔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껴서 많이 불편한 거죠.”
묻는 목소리가 좀 우울해보여서 멈칫했다.
“…….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
“저 오고 나서 선배 표정이 계속 그랬어요.”
아. 입가를 쓸었다. 내가 그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됐나.
“아니야. 그냥 이건,”
“알고 있었어요. 제가 오면 선배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고, 불편해하겠구나.”
“…….”
“근데 자꾸 신경이 쓰여서…….”
정진우는 말을 마치고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렸다. 내 손등 위로 늘어진 야상 소매를 꽉 쥔다.
“선배가 저 사람 거절했다는 거 믿어요. 별다른 짓 안 해요. 그냥 괜히, 혼자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 거니까. 헤어질 때까지 분위기 잘 맞출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찡그린 미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니라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했다. 입술 안쪽을 씹었다. 정진우가 잡은 소매 끝의 주름이 조금씩 짙어졌다.
“그러니까 선배도, 조금만 편하게 생각해 보면 안 돼요?”
“뭘, 편하게…….”
“제가 선배랑 이것보다 더 붙어 있어도, 더 살갑게 굴어도, 쉽게 의심하는 사람 없어요. 자꾸 그렇게 눈치 보니까 저는…….”
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봤다. 정진우가 이 말을 하는 게 두 번째였다. 미술관에서는 정진우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 반응이 과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과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에도 이랬나. 이정도로 내가 남들 눈치를 봤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정진우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호텔에서만 만날 수는 없잖아요.”
“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느리게 들어올렸다. 담담하게 말하는 정진우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진우는 오히려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몰랐어요?”
“……뭘?”
“선배… 어디 나가기만 하면 자꾸 주변 살피고, 아니 애초에 호텔 밖에서 둘이 있는 거 안 내켜 하잖아요. 그나마 여행 갔을 때는 좀 낫나 했는데,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도 호텔에만 있게 됐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렇게, 물으려던 말이 등 뒤에서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에 목 안으로 꿀꺽 넘어갔다. 잡힌 소매를 빼내며 뒤를 돌아봤다. 승원 형이 담배를 물며 문턱을 넘고 있었다.
“아, 날씨 장난 아니네. 너네는 뭐 하는데 이렇게 안 들어와.”
“아…….”
“뭘 아… 야. 너는 그것만 입고 안 추워?”
형이 정진우의 차림새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 골병든다, 진우야. 살갑게 웃으며 형과 말상대를 하고 있는 정진우의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문신이 드러난 목도, 귀도 그랬다. 당장이라도 야상을 벗어서 입혀주고 싶었으나 유난스럽게 보일 것 같아서 그만뒀다. 차가워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정진우가 장담했던 것처럼 술자리는 아주 무난하게 지나갔다. 해를 넘기고, 다음 달 초에 뉴욕으로 간다는 강현은 남은 시간 동안 한 번 더 함께 모이자는 제안을 했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다고 외치는 이들에 휘말려 나도 얼떨결에 긍정하게 됐다. 정진우는 별다른 이견 없이 그럼 저도 끼워주시는 거예요? 하면서 살가운 표정을 했다. 편안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나만 빼고. 자리에 앉은 후로는 계속 머릿속에서 정진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던 말들이 뒤엉켜 돌아다녔다. 내가 그 정도였나. 정말 몰랐다. 정진우와 있으면 항상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그걸 누르고, 정진우에게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왜 그랬지. 그리고. 그걸 보는 정진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요한!”
멍한 귓가에 승원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데나 두고 있었던 눈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강현과 눈이 맞았다. 한 손엔 술잔을 들고 있는 채였다.
“어?”
“넌 아까부터 자꾸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벌써 취한 거 아니지? 야, 받아, 받아.”
대각선 앞에 앉은 형이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옆얼굴로 정진우의 시선이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여러 번 흔들었다.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마신 탓에 머리가 어찔했다. 입가에 힘을 주고 웃었다.
“미안, 자꾸 넋 놓고 있게 되네. 짠하려고?”
“어. 우리 강 작가 뉴욕 가서, 하는 작품 잘되고, 우리도 일한 만큼 돈 많이 벌고, 진우도 남은 전시 잘 끝내자고.”
형이 짠, 하고 술잔을 갖다 댔다. 정종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정진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더 먹기 싫으면 먹지 마요.”
“응. 아직 괜찮아.”
적당히 웃어주고 물기가 묻은 입가를 닦는데 강현과 또 눈이 맞았다. 나를 보던 눈이 슬쩍 옆으로 돌아간다. 정진우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와서 붙어 앉은 이후 강현은 자주 저런 눈을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손을 살폈다. 별다른 내색 없이 빈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검지의 세필 붓과 약지에 자리한 뫼비우스의 띠가 정진우의 손짓에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잔을 채워 주면 채워 주는 대로 기울이다 보니 평소보다 꽤 많이 마시게 되었다. 옆에 정진우가 있어서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좀 풀어진 것도 있었고,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참 마시다가 약간 무거워진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니 하선재와 승원 형이 게게 풀린 눈을 하고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걸 또 어떻게 챙기지. 머리를 맞댄 채로 비비적대는 둘을 보다가 더 마실 생각이 없는지 옆에서 빈 잔을 만지작대는 정진우를 건드렸다.
“이제 일어날까. 작가님, 일어날까요.”
강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니 머릿속에서 술이 찰랑찰랑거렸다. 취했나.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정진우와 강현의 신색은 괜찮아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앞에 놓인 마지막 잔을 들이키고 일어나려다 휘청했다. 팔과 허리로 손 두 개가 달라붙었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나를 받친 강현과 정진우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허리께에 감긴 정진우의 손이 내 옷을 꽉 쥐었다. 팔을 잡은 손을 떼어내고 바로 섰다.
“…….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동안 허리에 닿아 있던 손도 사라졌다. 걸어놓았던 외투를 입으며 하선재와 형을 깨우는 강현과 정진우를 번갈아 살폈다. 무슨 표정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 이러는 나도 답답했다.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정진우가 내 이마를 짚어왔다.
“속 답답해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이마에 닿아 있는 손을 떼어냈다. 안 보려고 했는데, 또 나도 모르게 강현을 보게 되었다. 눈이 맞아서 속으로 놀라고 있는데 정진우가 내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승원 선배랑 선재 택시 타는 것까지만 봐 주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그러게, 요한 씨는…….”
말을 멈춘 강현이 나와 정진우를 또 훑었다. 저 사람은 자꾸 왜 저러는 거야. 자꾸 저러니까 나도 신경이 더 쓰였다. 안 쓰려고 해도, 강현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때문에 자꾸 들킨 기분이 되었다.
“요한 씨는 잠깐 기다리는 게 좋겠다. 작가님, 같이 나가요.”
각각 형과 하선재를 떠안고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둘은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택시가 안 잡히나. 이리저리 굴러다녔던 머리가 종국에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기분이 되어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 하품이 나왔다.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고 테이블에 남아 있는 병을 세어 보았다. ……. 중간에 몇 번이나 자리를 정리했으니까, 정말 많이 마시긴 했다.
돌아오지 않는 둘을 기다리다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나보다.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찡그렸다.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요한 씨, 일어나요. 가야죠.”
강현이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숙였던 허리를 바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우, ……. 진우는요?”
“작가님은 잠깐 담배 한 대 피우신다고. 나가요. 바로 앞에 있을 거예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무슨 담배가 그렇게 피우고 싶어서. 무거운 눈을 깜빡이며 강현을 따라나섰다. 휘청거리는 나를 강현이 붙잡았다. 괜찮아요. 하품이 연달아 나왔다. 졸려 죽을 것 같았다. 팔꿈치를 잡은 손을 떼어내고 문을 열었다. 문 옆의 벽에 기대 있던 정진우가 문 밖으로 나서는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선배, 괜찮아요? 많이 졸려요?”
“어, 어. 괜찮아. 너는?”
“저는 멀쩡해요.”
나를 담았던 눈동자가 느릿하게 위로 올라가 강현을 마주한다. 지금 보니 눈매가 조금 사나워져 있었다.
“선배는 제가 잘 데리고 갈게요. 댁이 어디세요?”
“……. 여기서 가까워요.”
졸려 죽겠는데도 둘의 분위기가 이상한 건 단박에 알 정도로 정진우의 표정이 굳은 채였다. 맞은편에 서 있던 강현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진우와 나란히 벽에 기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했다. 왜 분위기가 이 모양이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눈이고 입이고 할 것 없이 무거워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요한 씨, 저 가요.”
예,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려는데 정진우가 늘어진 팔을 잡아당겨 제 어깨에 내 머리를 눌렀다. 짧은 시간동안 익숙해진 냄새가 느껴졌다. 뿌리칠 생각을 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졸음이 밀려왔다. 뭐라 뭐라 얘기하는 것 같은 강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정신없이 조는 사이 나는 어느새 정진우와 함께 택시 안에 앉아 있었다. 닿아 있는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익숙한 손이 볼을 토닥였다. 어디…… 집에 가?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정진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와 정진우 사이에 놓인 손이 어두운 택시 안에서 하얗게 빛났다.
가까운 거리를 달려 도착한 호텔 앞에 섰을 때는 완전히 멀쩡하진 않았지만 혼자 걸을 만은 했다. 아까는 그렇게 졸려 죽겠더니, 한 오 분 졸았다고 좀 괜찮아졌다. 나를 부축하려는 정진우를 만류하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거울 너머로 무표정한 옆얼굴을 힐끔거리다 말을 걸었다.
“피곤해?”
물음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정진우가 내 손목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객실까지 끌려가 소파에 앉혀졌다. 소파에 주저앉아 멀뚱히 정진우를 올려봤다.
“왜 그래?”
“……. 아니에요. 자요.”
“뭐야. 왜.”
혼자 할 말은 엄청 있는 것처럼 굴더니 나를 두고 나가버리려는 정진우를 잡았다. 벌떡 일어난 탓에 취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가 다시 어찔했다. 정진우가 이마 위에 흩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눈을 읽을 수 없었다. 천천히 소파에 앉는다. 잠자코 맞은편에 따라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왜 그러는데. 그냥 말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않는다. 정진우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며 초조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따져볼 틈도 없이 뭔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진짜.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내가 너무 마음이 안 좋잖아. 말해 봐, 응?”
미간을 문지른 정진우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나도 질세라 마른세수를 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해졌다.
“진우야.”
“강현은, 선배랑 언제부터 알았어요?”
“강……. 강 작가 때문에 그래? 계속 괜찮더니 왜 이제 와서,”
강현 이야기에 약간 긴장이 풀렸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얘가 이러지. 형과 하선재를 들쳐 업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둘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둘이 무슨 얘기한 거야?”
“……별말 안 했어요.”
“그래도 무슨 얘기했는지 말해봐.”
“그 사람은, 선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뜬금없는 물음에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물었다.
“무슨 말이야?”
“선배가 지금 어디 사는지,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을 때 어떤지.”
“…….”
“어떻게 연애했는지. ……또, 뭘 알아요?”
정진우의 안색은 창백했다. 나를 마주하지 않는 눈이 땅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아요. 그 정도는 서로 종종 만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지. 근데도 제가 속이 좁아서, 선배가 쉽게 자기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화가 났어요. 그리고 다른 것보다.”
“진우야.”
“저는 다른 것보다, 그 사람이 선배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입 다물고 듣고만 있어야 하는 저한테 제일 화가 났어요.”
강현에 대한 이야기인 줄만 알았더니, 다시 뜬금없는 내용으로 튀어나가는 이야기에 어깨가 솟았다. 무릎 위에서 손톱을 뜯었다.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해. 진우야,”
“그 사람한테, 저희 사이 말했어요.”
우울하게 가라앉은 눈이 바닥을 지나 우리 사이에 놓인 테이블, 손톱 주변을 쥐어뜯고 있는 내 손을 훑었다. 자꾸만 제 맘대로 널을 뛰는 이야기를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 바보 같은 소리만 냈다. 오늘 내내 눈치만 봤던 게 순식간에 쓸모없는 일이 되었다. 강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왜인지도 모르게, 그냥 허무해졌다. 내 기색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정진우가 사나운 표정으로 헛웃음을 쳤다.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돼요? 나만? 그 사람은 선배에 대해 다 아는 척 얘기해도, 나는 입 다물고 있어야 돼요? 왜? 그 사람이 하는 얘기 듣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선배는 지금 나랑 만나고 있잖아. 아무 상관없는 사람보다 왜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제가 틀린 말 했어요?”
말을 멈춘 정진우가 입술을 물었다. 옅은 색의 입술이 금세 핏기가 몰려 진하게 물들었다.
“오늘뿐만 아니라, 계속 그랬어요. 저는, 선배가 우리 사이에 겁먹고, 숨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초조해져요. 자꾸 고민하게 돼요.”
순식간에 표정을 가라앉히고 무릎에 놓인 내 손을 가져간 정진우가 주변에 거스러미가 일어난 손톱을 하나하나 둥글게 쓸었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겁을 낼까.”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할까.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까지 자기를 몰아붙이는 성격으로 바뀌었을까.”
정진우에게 세 번째로 듣는 이야기였다. 대체 왜 이야기가 이리로 돌아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던지는 정진우는 이미 제가 먼저 답을 찾은 것 같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진우의 급격한 변화에 장단을 맞출 수 없어서 눈만 굴렸다. 손톱 주변에 머물러 있던 손이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고, 깍지를 꼈다.
“선배가 이렇게 된 게,”
까만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나 때문인가.”
똑바로 나를 쳐다보는 눈에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 커튼이 걷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강 작가는, 내가 그 사람이랑 예전에 딱 한 번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얘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나봐. 별거 아니야, 별 사이도 아니었고.”
“…….”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 사람은,”
“말 돌리지 말아요.”
깍지 꼈던 손이 손목으로 올라왔다. 손목을 단단히 잡은 아귀힘이 거세졌다.
“그 사람은 이 문제랑 상관없잖아요.”
“…….”
“선배.”
정진우의 담담하게 변한 태도가 무서웠다. 차라리 아까처럼 화가 난 기색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무섭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순간부터 정진우는 작정하고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민감한 주제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흘러왔는지 도무지 정진우를 따라갈 수 없었다. 도리질을 쳤다.
“그만하자. 나 졸려.”
“……. 뭘 그만해요?”
“…….”
“왜……. 피해요?”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정진우가 잡은 팔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잘근잘근 깨물린 입술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곧 터질 것 같았다.
“선배가 자꾸 선배 주변에서 나를 배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너를 왜 밀어내.”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갔다. 멈칫한 정진우의 손에 잡힌 내 손목을 빼냈다.
“아니야. 미안. 그만하자.”
“뭐가 미안해요.”
“…….”
“선배. 왜 그래요.”
파리하게 질린 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 그만두고 창백한 볼이나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정진우는 전혀 이 대화를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엄지손가락이 따끔거려서 나도 모르게 밑을 내려다봤다. 계속해서 뜯고 있던 손톱 주변에서 피가 둥글게 솟아나오고 있었다. 정진우의 시선도 내 손톱을 향했다. 엄지를 주먹 쥔 손안으로 숨겼다. 허탈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초조해해요.”
“…….”
“이 정도 얘기 한다고 우리가,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불안해해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왜, 도대체 왜. 그냥 술자리였다. 그냥 강현과의 일은 내가 경솔했다고 사과하고 지나가면 될 문제였다. 이렇게까지 올 문제가 아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려는데 정진우의 목소리가 나를 잡았다.
“내가……. 또 도망갈까 봐?”
망설이듯 말을 뱉고는 허탈하게 웃는다. 한 번 말을 꺼내자 정진우는 거침없었다. 들쭉날쭉했던 언성이 가라앉고, 나직함을 되찾은 목소리가 객실을 울렸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말도 없이 잠적할까 봐?”
“……. 아니야”
토해내듯 부정했다. 진심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진우가 다시 그때처럼 말도 없이 잠적하리라는 생각만은 해본 적 없었다. 아직 그때의 앙금이 다 사라지지 않은 건 맞았다. 하지만, 정진우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혼란스러운 감정도 아니었다. 정진우가 지금 나에게 보내는 애정은 확실했다. 이런 애가, 잠적할 리 없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그런 갑작스러운 잠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진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가 아니에요. 맞잖아.”
“정말…… 아니야.”
“솔직히 말해 봐요. 누군가 우리 사이를 알게 되고,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내가, 또. 일언반구도 없이 떠날까봐. 그래서 그렇게 남들 시선 겁내고, 조금이라도 분위기 안 좋아지는 것 같으면 하고 싶은 말도 다 삼키고.”
내가 정진우를 웃으며 만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길게 연장하고 싶어서 했던, 나도 모르는 사이 불쑥 나오곤 했던 행동들을 붉어진 입술이 하나하나 읊었다. 정진우와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지레 겁에 질려 저질렀던 짓들이 가장 몰랐으면 싶었던 사람의 입에서 하나씩 튀어나오는 동안,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기분 좋게 웃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지고, 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나 때문,”
“아니야. 너 때문 아니야.”
“왜 여기까지 와서도, 선배는! 제발 혼자 삭이지 말고 얘기해줘요. 자꾸 숨기려고만 하지 말아요…….”
일그러진 입매에 가슴이 아팠다. 정말이었다. 정진우 때문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에 저질렀든 알면서 했든, 내가 정진우를 만나며 해왔던 모든 행동들은 다 나 때문이었다. 정진우의 슬픔에 젖은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너 잘하고 있어. 정말 너 때문 아니야. 사실은 누구한테 말해도, 다른 사람들 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가 그랬던 건.”
“…….”
“나 때문이야.”
자꾸만 똑같은 생각이 머리를 울렸다. 어느 정도 얘기하다 금세 화해하면 될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올 일이 아닌데. 항상 그랬다. 정진우와 있으면,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저, 너를 만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초조해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갖는 불쾌한 감정을 너는 몰랐으면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내 마음을 잘 숨기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단지.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꾸 너를 가두고, 나만 너를 알고 싶고, 자유로운 네가 밉고, 일 초라도 네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게 초조하고…….”
좋아서 연애하고, 둘만 생각하며 좋은 것만 보고, 자연스레 애정이 흩어져 이별을 고하고,
“그래서 그래.”
가끔 못 잊어서 사진을 들여다보고, 몇 년이 지나면 술 한잔하면서 좋았던 것들을 추억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제 이 주밖에 안 남았잖아.”
그렇게 연애하다가 헤어지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만…….”
“이 주요?”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정진우가 멍해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우리가 이 주밖에 안 남았어요?”
“…….”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악화되는 분위기에 머릿속이 점차 백지로 변했다.
“다시 만났을 때부터,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혼자 끝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야. 내가 말실수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온 말, 아니에요? 계속, 저 돌아가면 끝내려고,”
“……아니야.”
“선배. 서요한.”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고개를 휘저었다.
“정말 아니야. 정말, 진우야. 정말 아니야.”
“왜 아니라고만 해요. 왜 자꾸 도망만 가요, 왜!”
언성이 높아진 정진우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일렁이는 눈을 마주보다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냥, 너와 어떻게 하면 더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했을 뿐이다. 정진우의 표정은 내가 시도했던 것들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무지 올바른 답을 도출할 수 없는 문제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이제는, 우리는 어떻게 해도 제자리걸음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이 주가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적어도 한 달은 평온한 시간이 이어질 줄 알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던 건가. 어떻게 하는 게 너와 잘하는 연애일까. 나는, 평생 답을 낼 수 없는 걸까.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네 비행기 표 내가 끊었는데. 너 돌아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야 돼?”
“왜 제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요. 전시는, 바로 돌아올 수 있어요. 급한 일만 보고 바로 돌아오려고…….”
“돌아오면? 너희 어머니는?”
책을 읽는 것같이 어색한 말투로, 멋대로 나불거리는 입을 통제할 생각도 버리고,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툭, 툭.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던 우리 이별의 사유를 꺼내 던졌다. 결국 암묵적으로 덮어두고 있었던 일을 모조리 들춰낸 건 내 입이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진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의 반문에, 내가 지난 일을 모르는 척한 저에게 계속 화가 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화가 나는 대상은.
“저희 어머니는……. 선배한테 다시는 어떤 행동도 안 할 거예요. 그날은 조금 흥분해서,”
“그날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정말이에요. 어머니는, 본인만 탓할 분이에요. 본인이 저를 잘못 키웠다고, 저만 바로 잡으려고 하실……. 선배한테 피해가지 않을 거예요. 저도, 누가 어떻게 굴어도 다시는 힘들다고 그렇게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저만 잘하면,”
“그렇다 해도. 뭐가 달라질 게 있니.”
우리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 수 없는 나였다.
“너는 계속 너를 바로잡으려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혼자 고달플 거고, 그러다 보면, 언젠간 지치게 되겠지.”
굳어 있는 정진우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약간 벌어져 있는 입 안에서 고른 이가 빠끔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이도 잘생겼다.
“그러면, 그때는?”
“…….”
“…….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걸 생각하게 돼.”
내가 조금만 바뀌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연애를 할 수 있었다. 너는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고, 나는 주저했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너에게 사랑을 넘칠 때까지 쏟아부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변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꾸 너를… 구속하고 싶어지고, 나중에 네가 괴로워져도, 다 지쳤다고 하는 날이 와도, 너를 놔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또 마지막을 생각하고, 대비하고…….”
내가 욕심이 많아서. 내가 결국엔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잘하고 싶었다. 정진우를 손에 쥔 내가 느끼는 행복의 반만큼만이라도, 정말 잘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돼서 그래. 내가,”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깨닫고 말을 멈췄다. 약속을 잡는 게 아니었다. 애초 생각대로 정진우에게만 시간을 쏟았어야 했다. 볼품없는 마음을 고백하면서 한 가지 생각만 머리에 맴돌았다. 정진우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데. 왜 괜히 쓸데없이 약속 같은 걸 잡아서. 왜. 까만 진 위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손을 응시했다. 하얗고, 마른. 거친 손. 내가 좋아하는, 정진우의 손이 움찔 움직였다.
“사랑해요.”
사랑을 고백하는 말끝이 이리저리 갈라졌다. 테이블 위를 더듬어 가져간 내 손에 뺨을 비비며 중얼거린다. 차가웠던 손바닥이 더 찬 볼과 맞닿았다.
“선배, 사랑해요.”
“……. 알고 있어.”
“왜, 그런 말을. …그런 표정을 해요.”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정진우는 꼭 곧 버려질 것을 아는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까마득한 시절의 나와 같은. 가만 바라보는 내 눈에 제 눈을 맞추며 살짝 웃는다. 입매가 일그러져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이 흰 얼굴 위로 떠올랐다.
“왜, 다 포기해버린 사람처럼.”
“…….”
“선배도, 나 사랑하잖아요.”
중얼거리는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다. 통통한 입술을 성에 찰 때까지 물고 놔주지 않다가, 입술 밑에 자리한 점을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선배도, 나,”
“나는, 너한테 나 말고 소중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어.”
허탈했다. 이래서, 정진우가 조금만 인상을 찌푸려도 겁이 났다. 묻어둔 게 많아서, 한 번 틀어지면 걷잡을 수 없을 걸 알았기 때문에. 부단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내 가장 저열한 부분을 자진해서 드러내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마간의 희열과 자괴감, 얼마간의 기대감이 뒤섞인 채로 고개를 들었다.
“가끔 네가 백치였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어디 한군데가 모자라거나, 부족하면 좋겠다고.”
“…….”
“너를 사랑해서.”
“……요한,”
“다 거짓말이야.”
혈색이 돌아올 생각을 않는 얼굴을 보며 웃었다. 계속 몰아붙여서, 나만 있으면 어디 한군데가 불구가 돼도, 다른 소중한 건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는 정진우의 앞에서는 항상 완벽하게 솔직하진 못했다.
“나는, 네가 평생 행복하게 웃고 살았으면 좋겠어. 평범하게. 하고 싶은 그림 그리고, 작품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
“네가 그러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은 손으로 정진우의 손등을 덮었다.
“네가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게 있는지 열심히 생각해 봤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모르겠어. 그게 잘못된 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 내가 잘못했어요. 괜히 아무것도 못 하는 게 화가 나서, 그냥 선배가 원하는 대로 맞추면 되는 문제였는데 내가 괜한 이야기를.”
“아니야. 너는 잘못한 거 없어.”
그림 같은 눈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정진우를 만나고는 나만 울보 노릇을 해서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는 것은, 생각보다 더 커다란 회의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아 눈물만 뚝뚝 흘리는 정진우에게 다가갔다. 마르고, 안쓰러운 등을 끌어안아 주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네가 미운 순간에도, 어쨌든 너만 있으면 다른 불행은 쉽사리 넘길 수 있는 나처럼, 네가 네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나는 너를 갖고 싶은 만큼, 네가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 내가 미안해.”
왜 이렇게 된 건지 되새겨 봐야 소용없었다. 정진우의 우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차피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었다. 내가 정진우의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다. 정진우는 나에게 언제나 벅찼다.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싶어서, 손을 내밀었다. 정진우를 전부 갖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다. 그게 다였다.
한참을 품에 안긴 채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정진우의 숨이 고르게 변했다. 쌕쌕거리는 호흡이 턱 근처에서 울렸다. 등 뒤를 두른 손을 들어 내 입술을 만져보았다. 마구잡이로 부딪혀 오는 입술을 받아 내느라 입가가 조금 찢어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좀 부은 것 같은데. 거칠거리는 게 피딱지가 진 듯했다. 요즘 들어 입술이 멀쩡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서 옅게 웃었다. 내 기척에 곤히 잠들어 있던 정진우가 몸을 뒤척였다. 팔과 어깨 사이에 머물러 있던 작은 머리통이 가슴으로 바투 붙어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턱 근처를 간질였다. 재채기가 날 것 같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정리해 주었다. 곧 해가 뜨려는지 하늘이 푸릇했다. 이제 와서 잠을 청하기엔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정진우의 숨소리를 배경 삼아 하늘의 색이 서서히 변해가는 걸 관찰했다.
날이 밝아지려는 기미가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머리를 받치던 팔을 빼내고 출근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정진우는 깨지 않았다. 많이 피곤하겠지. 저 작은 얼굴 어디에 그 많은 눈물이 담겨 있었는지, 몇 시간을 그칠 줄도 모르고 울어 젖혔다. 나중에 가서는 저도 민망했는지, 연거푸 닦아내는 것도 소용없이 곧장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포기하고 품에 안겨 얼굴을 깊게 묻어버렸다. 이게… 왜 안 그치지.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데, 상황에 안 어울리는 걸 알면서도 조금 웃음이 났던 것 같다.
아침도 안 먹고 부지런을 떨었더니 시간이 꽤 남았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찐빵 같은 얼굴을 하고 잠든 정진우를 구경했다. 우뚝 솟은 코끝을 살짝 건드리다가 속눈썹을 쓸어보았다. 고르게 난 눈썹을 한 번 매만지고, 손등으로 볼을 살살 쓸었다. 평소 잠귀가 밝은 편인데도, 이렇게 얼굴을 주무르는 내내 한 번을 깨지 않았다. 진짜 피곤한가보네. 흰 바탕에 양 볼과 눈가가 발갛게 터 있었다. 얘도 오늘은 하루 종일 엄청 부어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확연히 보이는 불어터진 얼굴이 정진우의 가까운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못 보는 게 못내 아쉬웠다. 제일 멀쩡한 이마에 뽀뽀하고 생수 통을 냉동실에 넣어놓았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쪽지를 남기고 이르게 호텔을 나섰다.
로비를 지나 회전문을 통과하자 찬바람과 함께 가벼운 눈발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바닥을 위로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안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켜서 날씨를 확인했다. 오늘 서울은 종일 눈이 내린다는 기상 예보를 확인한 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코가 시렸다.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바람이 얼음장 같았다. 목도리 두르고 나올걸. 잠시 후회했다.
눈이 내리는 날은 평소보다 도로가 복잡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술관까지 가는 길 내내 빵빵거리는 소리가 반복해서 귀를 울렸다. 미술관 건너편에서 깜빡거리는 초록 불에 길을 빨리 건너려는데 금세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막 출발하려는 운전자에게 욕을 잔뜩 먹었다. 머쓱한 마음에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거 조금 눈을 맞았다고 머리가 축축해져 있었다. 마르면 뻗치고 난리 나겠네. 안 그래도 습기 차면 제멋대로 뻗치는 머리가 오늘은 더 할 것 같아서 조금 우울해졌다.
내가 일등일 줄 알았더니 도착한 사무실에는 하선재가 홀로 앉아 파랗게 빛나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하선재가 초췌한 안색으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일찍 출근했네.”
“어……. 새벽부터 깨서 토하다가 그냥 왔어. 다시 내가 정종을 마시나 봐라.”
“그렇게 토했어? 어떡하냐, 오늘 회의도 있는데.”
어, 오늘 목요일이지. 회의…….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하선재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쳤다.
“뭐, 약이라도 사다 줄까?”
“아니, 회의 전엔 어떻게든 나아지겠지 뭐. 그보다 나 진짜 죽을 뻔했잖아. 위장까지 같이 나오는 줄 알았어. 형은 괜찮아? 형도 상태 별론데?”
입가를 쓸었다. 평소보다 얼굴이 까칠하긴 했다.
“잠을 잘 못 자서. 티 나?”
“음, 조금? 승원 형은? 왜 혼자 와?”
“나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
옷가지를 벗어 정리하고 보조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컴퓨터 전원을 켠 뒤 책상 한구석에 밀어놓은 머그컵을 들고 일어나려는데 잠시 말이 없었던 하선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승원 형, 잘 올 수 있겠지? 전화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래야 되나.”
그 형 아직 안 일어났다에 한 표. 하선재의 성화에 떠밀려 담배를 피우러 뒤뜰로 나가며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요한아……. 이 배신자 새끼……. 너 나 놔두고 혼자 어디……. 한동안 저를 두고 내빼버린 나에게 욕을 중얼거리던 형이 점심시간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각이야 하겠지만, 멀쩡히 올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하선재와 형의 안색도 점차 제 색을 되찾아갔다. 나와 정반대였다. 회의시간 전 자꾸 노곤해지는 몸을 깨우려 찬바람을 조금 맞고 들어왔다. 이제 곧 정진우의 전시 철거와 함께 촉박하게 맞붙은 다음 전시의 세부 일정 조율을 위한 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다음 전시는 일곱 명의 비주얼 아티스트가 협업해서 진행하는 전시였다. 각 전시장마다 필요한 스크린의 수며, 가벽 설치 같은 세세하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보니 전력 문제부터 해서 작품이 들어오기 전 협의해야 할 사항 또한 많았다. 그래도 영상물 위주의 전시여서 이번 전시보다는 설치가 수월해 다행이었다. 처음 정진우의 작품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그 크기와 형태 때문에 설치의 어려움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설치를 진행하며 다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랐다. 셋업 인원이 다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미술관의 것이 된다. 최대한 안전을 기해도, 어쩔 수 없이 부상자가 발생해서 골치를 많이 썩었다. <젊은 작가전>은 초기 기획 단계부터 내가 거의 대부분을 담당하다시피 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이번에는 전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이번 전시를 준비할 때처럼 살지는 않을 거였다. 회의실을 밝히는 영상에 집중하다가 한숨을 삼켰다. 차라리 바쁜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예상보다 길게 진행됐던 회의가 끝난 후 미간을 꾹 눌렀다. 나와 상태가 완전히 역전된 하선재가 싱글싱글 웃으며 담배 피우러 가자는 손짓을 했다. 신예림, 하선재와 셋이 담배를 피우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진우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먼저 들어가.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들어갈게.”
하선재와 신예림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 정진우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다 가기도 전에 정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전화를 남겼을 때 일어난 건지 아직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통화 괜찮아요?
“응.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나보네. 괜찮아? 밥은 먹었어?”
-아니요 아직. 눈 뜨기가 너무 힘들어서……. 일어나자마자 선배가 얼려놓고 간 생수 통 대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비인지 눈인지 헷갈리는 것들이 땅을 적시는 것을 바라보며 느리게 흘러나오는 정진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간간히 들리는 헛기침에 괜히 나까지 목이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붓기 빠지면 뭐라도 먹어. 배 많이 고플 거 아니야.”
-네. 선배는?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지금 점심 얘기할 때가 아니긴 하다. 낮게 웃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편해 보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한 이야기를 정진우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거웠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통화를 이어가며 나는 오늘 했던 회의 얘기, 하선재와 승원 형의 이야기를 했다. 정진우는 내일 아침부터 니시카와와 함께 서울 근교를 돌며 좋은 나무를 찾아다닐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주일 전부터 이야기 했던 거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던 평온한 공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내일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 것 같아요. 한동안 나직하게 말을 잇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옅은 숨소리가 수화기를 채웠다. 완전히 젖어든 돌바닥을 바라보다가 우리가 평소에 전화를 어떻게 끊었더라. 생각했다. 이완됐던 어깨와 등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뭐라도 이야기해 보려고 숨을 들이켰다.
“그럼 이제,”
-요한 선배.
“…응.”
-……오늘 퇴근하고, 만날까요.
이 주 동안 우리 사이에 당연해진 만남을 제안한 정진우가 조금 웃었다. 정진우의 간단한 제안에, 통화를 끝낼 타이밍을 찾지 못하는 우리의 사이가 하루 만에 어떻게 변했는지 깨닫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이어가는 동안 잠시 기대했다. 다시 평소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정진우가 베를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때까지는. 잘하면 웃으며 배웅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진우도 내가 했던 말을 얼추 이해한 것 같으니까.
오산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을 수 없었다.
“오늘은 각자 쉬는 게 낫겠다.”
-…….
“내일 조심해서 다녀와.”
불이 꺼진 액정을 들여다봤다. 내 인생은, 정진우가 있는 시간보다 없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름대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액정 위로 처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맺혔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코앞으로 다가온 이별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정진우가 다시 내 옆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실감났다.
뚜렷한 현실감과 동시에, 뒷목이 선뜩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퇴근한 뒤 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제 너도 정력 딸리지? 너 20대 초반이 아니야, 적당히 해. 하는 승원 형의 핀잔을 듣는 둥 마는 둥 저녁을 먹고 일찍부터 자리에 누웠다. 밤을 샜더니 머리가 윙윙 울렸다. 베개에 머리를 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가 울릴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열 시간을 잤더니 오히려 몸이 무거웠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잠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30분 전쯤 정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저 이제 출발해요. 많이 늦어지면 자정 넘어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침대에 다시 앉아 메시지를 꼭꼭 씹어 읽었다. 정진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른하고, 나를 대할 때면 약간의 웃음기가 섞이는, 다정한 목소리. 뒷목을 두어 번 주무른 뒤 답장을 보냈다. 나 이제 일어났어. 운전 조심하고, 식사 거르지 말고.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씻은 뒤 형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커피를 내리며 핸드폰을 다시 확인했다. 아침풍경 속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가 빽빽한 길을 찍은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일하는 내내 정진우는 사진을 몇 장씩 보냈다. 주로 가지가 앙상한 나무들을 찍은 사진이거나, 식사를 하면서 찍었는지 맛깔나게 보이는 음식을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이 오면 부리나케 확인하고, 저장한 뒤 답장하지 않았다.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오던 사진은, 어느 순간 두 시간, 세 시간에 한 번 꼴이 되었고,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며 엎어놨던 핸드폰을 들어 보고, 씻고 나와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금이라도 답장을 보내 볼까. 생각하다 그만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누워 아무 소식이 없는 핸드폰을 괜히 건드리다가 정진우가 종일 보내왔던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정진우는 사진도 잘 찍었다. 별거 없는 나무와 숲이었는데도 구도가 감각적이었다. 설마 이것도 콩깍진가. 혼자 생각하면서 내가 수도 없이 찍어놓았던 정진우의 사진들과 정진우가 오늘 보내온 사진을 반복해 넘겨봤다. 시간 날 때 인화해서 앨범에 꽂아놔야지. 멍하니 생각했다.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은 다음 날이 되어도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추적추적 내렸다. 결국 퍼포먼스는 취소되었다. 오전 내내 퍼포먼스 취소에 따르는 부가적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에 일정 취소에 관련해 통화를 했다. 비몽사몽 정신을 영 차리지 못하는 기색으로 얼마 안 남았는데…… 아쉽네요. 하던 목소리가 일하는 내내 귀에 울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는 조금 한가해져 일하는 틈틈이 정진우의 팬 사이트와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새로 업데이트된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얼굴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얄밉게 내리는 것도, 안 내리는 것도 아닌 정도로만 오던 눈은 딱 평소 정진우의 퍼포먼스가 끝나가는 시간에 그쳤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일요일에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나까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연인, 가족, 친구 할 것 없이 미술관을 삼삼오오 찾았다. 사무실에도 싱숭생숭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결국 오후 내 큐레이터님이 사온 먹거리를 두고 수다를 떨었다. 어울려서 웃고 주섬주섬 먹을 것들을 집어 먹고 하다 보니 퇴근할 시간이 찾아왔다. 혜연 누나네 집으로 간다는 형이 크리스마스의 일정을 물어봤다.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뭐. 집에 있을까. 형은 뻔질나게 나돌던 사람이 갑작스레 집에만 처박혀 있는 게 이상한 듯했다. 가만 나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툭툭 친다. 싸웠냐? 심각한 일 아니면 어떤 게 원인이든 네가 먼저 사과해. 형 간다. 웃고 말았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와 과자, 물을 샀다. 불 꺼진 집에서 혼자 영화를 봤다. 몇 번을 봐도 재밌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를 틀어놓고 맥주를 몇 캔 마셨다. 세 편 분량의 시리즈를 모두 봤더니 머리가 다 아팠다. 식탁 위에 뒤집어 놨던 핸드폰을 의미 없이 들어봤다. 잠잠했다. 액정을 툭, 툭 건드려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맨 밑에서부터 메시지를 훑어 올라갔다. 어떤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짓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기어코 돌아, 돌아 목적지로 향하는 내 손이 초라했다.
자려고 누우면 문득문득 출처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오늘도 갑작스레 찾아온 뒷목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감에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침대에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었다. 핸드폰과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산책이라도 하고 와야 좀 나을 것 같았다. 골목을 나서고,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드문드문 이 시간까지 불을 밝힌 가게에서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악소리에 맞춰 작게 흥얼거렸다.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니 거리는 완전히 조용해져 있었다. 차마저 사라진 거리를 걷다가,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맥주 몇 캔을 샀다. 이제 들어갈까. 계속 움직였는데도 한 주 내내 지속된 추위 때문인지 볼이 꽝꽝 얼어붙었다. 외투의 깃을 세우고 목을 움츠렸다. 빠르게 코너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추워서 일단 유리문을 열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최대한 죽인다고 죽인 발소리와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우리 빌라의 2층 계단 등은 나간 지 두 달이 다 됐는데도 불이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몇 번을 집 주인에게 말했던 것 같은데, 아마 다음 달이나, 그 다음 달이 되어서야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지상층 등이 나갔는데, 반년 동안 계단까지 어두운 통로를 지나야 했다.
몇 년 사이 밤눈이 많이 어두워진 바람에 계단만 주시하며 조심조심 걸었다. 어두운 데서 구르면 큰일이었다. 크리스마스에 그런 봉변을 당하기는 싫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계단을 다 오른 뒤 고개를 들었다. 현관 앞 층계참의 센서 등이 반짝, 불을 밝혔다.
“늦었네요.”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있던 정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서 있는 내 앞으로 다가와 비닐봉지를 받아든다. 3일 못 봤다고 그새 그리워진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얼굴을 감쌌다. 살짝 휘어진 눈을 맞추다 찬기가 남은 몸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코 안에 포근한 냄새가 가득 찼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가 찡해지기를 반복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붙인 채로 나를 두르는 냄새를 정신없이 들이마시다 코끝에 닿은 목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고 까만 코트를 잡아 당겼다.
“언제부터 있었어? 나 나갔다 온 지 한 시간… 아니 한 시간 반, 너 몸이 너무 차가운데. 일단 들어와.”
“얼마 안 있었어요. 승원 선배는요? 안에 아무도 없어서, 둘이 어디 갔나 했어요.”
“어, 형은 여자 친구랑… 앉아. 따뜻한 거 마실래? 커피? 아니면, 차가…….”
왔다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횡설수설하는 나를 식탁 의자에 앉아 빤히 보던 정진우가 손을 잡아왔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부엌을 울렸다.
“보고 싶었어요.”
잡은 손을 떼어내고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맞은편에 앉았다. 정진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문득 우리 둘 다 외투도 벗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알고 난 뒤에도, 벗을 시도는 못 했다. 당황해서. 순서가 제멋대로였다. 얼굴을 문질렀다. 아직 차가웠다.
“그렇다고 이 밤중에 무턱대고 찾아오면 어떡해.”
“그래서 날 밝을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식탁 위에서 꿈질거리던 손이 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다가오는 손을 피해 역시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질 좋은 코트 소매가 손목 근처에서 달랑거렸다. 그 아래로 손목 주위를 파랗게 물든 화살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도…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저 보고 싶었죠.”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손에 닿는 의자 모서리를 꽉 쥐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정진우가 살짝 웃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나도……. 너 보고 싶었어.”
3일이었다. 8년을 견뎌놓고, 지금은 하루도 안 되어 틈만 나면 사진을 들여다보고, 화질도 안 좋은 퍼포먼스 영상을 틀어 보고, 메시지를 들여다봤다. 그렇게 통화를 많이 했는데 녹음 한 번 해놓을 생각을 못했네. 후회했다. 그것도 질릴 쯤에는 정진우의 그림을 봤다. 그림을 그리며 했을 생각을 추측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갔다. 너도 그랬을까.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테이블 위에 외롭게 놓인 손에 시선을 주었다. 짧게 잘린 손톱 근처로 껍질이 일어나 있었다. 초조하거나, 긴장하면 손톱 주변을 가만 못 놔두는 습관 때문에 내 손이 항상 저랬다. 정진우의 손은 거친 감촉과는 다르게 항상 깔끔했다. 거스러미가 일어난 손이 신경을 거슬렸다.
“너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
허벅지 밑에 숨기고 있던 손을 들어 정진우의 손톱을 쥐었다. 내가 얘를 어떻게 보내지. 내가 얘랑 어떻게 헤어지지. 사흘 못 본 것 가지고 이러는데, 내가 예전처럼 잘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거친 손가락 끝을 문질렀다. 쌍꺼풀이 진 눈매가 미세하게 찌그러졌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던 정진우가 슬쩍 웃었다.
“혼자 있으면서 많이 고민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하지.”
“너 잘못한 거 없다고 했잖아. 그냥,”
“처음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내가 선배한테 잘해야지. 앞으로 정말 잘해야지. 선배도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잘하면 언젠가 다 좋아지겠지, 했어요.”
잡힌 손을 들어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서로의 손가락이 사이사이로 맞춘 것같이 가득 들어찼다.
“선배가 날 만나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알고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지.”
평이하게 이어가는 목소리와 다르게 맞잡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힘을 줘서 더욱 꾹 잡았다.
“어떻게 하면, 선배 마음을 돌리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믿어달라고 억지 부리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이것 가지고는 도저히 선배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은데. 할 수만 있으면 선배가 그런 생각을 하기 전으로, 되도록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손의 떨림이 거세졌다. 이렇게 자책하라고 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당장이라도 크지만 마르고, 안쓰러운 몸을 끌어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정진우가 웃었다.
“제가 진짜 못됐어요.”
“아니야. 진우야, 나는.”
“저, 예정대로 베를린에 돌아갈 거예요. 정확히 언제 오겠다고 장담도 못 해요.”
알고 있었음에도, 속이 뜨거워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참아보려고 입 안을 깨물었다. 소용없었다. 정진우의 떨림에 전염이라도 된 듯이 함께 떨리는 손을 망연히 응시했다. 다물고 있는 입가의 근육이 움찔, 움직였다.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바쁜 와중에 거센 악력이 느껴졌다.
“헤어지자는 얘기도 안 할 거예요. 선배 말대로 내가 지치는 날들이 올 수도 있겠지. 그럼 선배는. 선배는 평생 안 지쳐요? 우리 같은 사람인데? 선배가 안 지치면, 저도 안 지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내가 지치면 선배도 같을 거라는 생각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혼자 사랑하는 것도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내가 정진우를 만나면서 지칠 리가 없었다. 나에겐 당연한 일인데, 정진우는 그렇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잠자코 있었다. 정진우가 옅게 한숨을 뱉었다.
“선배……. 혼자 삭이지 말아요.”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 여기 있잖아요. 나한테 얘기해줘요. 내가 하는 말이 싫으면 싫다고, 내가 진짜 이기적이고, 개자식이라고 생각하면 개자식이라고. 선배 하고 싶은 거 아무 생각 안 거치고 다 해도 괜찮아요. 그 정도로 우리 사이가 틀어지진 않아요.”
말을 마친 정진우가 시선을 내렸다. 속눈썹이 아래위로 팔랑였다.
“내가 못 미덥겠지만. 그래도, 노력해달라고 하면.”
“…….”
“제가 선배한테 너무 무리한 걸 원하는 거예요?”
무리한 것. 내가 저를 믿는 것이 무리한 일이냐고 묻는, 담담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러고 보니 공기가 어느새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야 이마에 땀이 맺혀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앉아서 무식하게 더위를 참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잡혀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이마를 훔쳤다. 내 하는 양을 보던 정진우가 하하, 웃었다.
“좀 덥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어놓는 정진우를 보고만 있다가 나도 야상을 벗어 발밑에 쌓아놓았다. 볼을 발긋하게 물들인 정진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 마실래요? 제 집에 내가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른다. 물이 찰랑거리는 유리컵 두 잔을 마르고 억센 손이 식탁 위에 내려놨다. 탁,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놓인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슬쩍 이가 나간 부분을 감쌌다.
하나가 보이기 시작하니 수평이 맞지 않아 한쪽으로 기울어져 미세하게 덜컹거리는 식탁과 의자, 모서리부터 조금씩 시트가 벗겨져 나가는 중인 수납장, 온갖 배달음식 광고가 붙어 있는 냉장고 등 부엌의 모든 세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정진우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든 것들이 창피했다.
컵 바꾸자고 한 지가 언젠데 새 걸로 진작 사놓을걸. 배달음식 먹지도 않는 거 좀 다 떼서 버려버릴걸. 형이랑 같이 싱크대 시트 새로 붙일까 얘기했던 게 일주일 전이었는데, 말 나왔을 때 해 버릴걸.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 것들인데. 차마 티는 못 내고 속으로 후회하는 동안 정진우가 꿀꺽꿀꺽 물을 들이켰다. 도드라진 목젖이 물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위아래로 요동쳤다.
“한 잔 더 줄까?”
조금이나마 환기된 분위기에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갔다. 냉장고 문을 열며 붙어 있는 스티커들을 조금씩 떼어 손안에 넣고 구겼다. 느릿느릿 물병을 꺼내며 하나둘 문에 붙은 종이 쪼가리들을 떼어내고 있는데 등 뒤로 온기가 훅 다가왔다. 종이를 쥔 손을 거친 손바닥이 덮었다. 상쾌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귓불을 간질였다. 어깨에 고개를 묻은 정진우가 열려있는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머리카락과 입김, 목에 와 닿는 볼의 열기를 느끼며 잠시 서 있었다. 들고 있는 물병을 꽉 쥐었다.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문질렀다. 내가 건네는 말들이 다시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정진우가 조금씩 몸을 붙여왔다. 다리 사이로 정진우의 발이 조금씩 들어왔다.
“내가 너한테 가지 말라고, 너 개자식이라고, 왜 나만 너를 기다려야 하냐고 하면, 네가 안 가니. 아무데도 안 가고 내 옆에만 있을 거야?”
손바닥이 슬금슬금 허리를 타고 배에 놓였다. 다리 사이로 완전히 침투한 다리가 말라서. 내리깐 눈에 비치는 정진우의 발목이 너무 가늘어서 화가 나려던 마음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았다.
“가지 마, 진우야.”
“……선배.”
“나랑 있어. 가지 마. 내 옆에만 있어.”
꼴사납게 냉장고에 이마를 붙이고 정진우가 원하는 것들을 했다. 사실은 내가 무엇보다 원하는 말들을.
“아직도 네가 가끔 밉고, 네 얼굴 보면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고, 욕이라도 잘했으면 막 욕해줄 텐데, 생각할 때가 있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내가 속이 좁아서. 다 미안해. 너 미워하던 거, 속으로 너 욕하던 거 전부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럼 뭐든 할 수 있어.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너 부족한 거 없이 호강시켜 줄게.”
미끄러운 물병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매미처럼 등 뒤에 달라붙은 정진우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파묻는 게 느껴졌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목이 간지러웠다.
“가지 마, 진우야. 그냥 나랑 있자.”
아랫배 위에 놓인 두 손이 둥글게 배를 쓸었다. 고개를 움직여 목과 어깨의 경계에 입술을 묻은 정진우가 중얼거렸다. 틈 없이 붙어오는 몸을, 등 돌려 마주 안고 더 이상 놓고 싶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오래 안 있을 거예요. 금방 올게요.”
“……. 가지 말라면 안 갈 것처럼 굴어 놓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할 말이 있어요.”
정진우가 입을 열 때마다 통통한 입술의 감촉과 입김이 목을 지속해서 간질였다.
“기다려줘요.”
“…나쁜 새끼.”
“선배 욕하는 거 섹시하다.”
어이가 없어서 발밑을 향하던 고개를 모로 틀었다. 기다렸다는 듯 정진우가 턱 끝에 입을 맞췄다.
“내가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처음부터 다른 관계를 쌓아가고 싶어요.”
말을 잇던 정진우가 완전히 고개를 들고 뺨을 비벼왔다. 배를 만지던 손이 어깨를 잡고 내 몸을 돌려 마주 안았다. 억지로 몸이 돌려지는 반동에 놓쳐버린 물통이 방바닥을 굴렀다. 냉장고와 정진우 사이에 끼어서 마른 몸에 움직일 수 없게 구속당했다. 가슴과 가슴, 다리와 다리가 맞닿았다.
문득,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 나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게요. 이번엔 약속 어기지 않을게요.”
나는, 너와 어떻게 해도, 적당히 사랑할 수 없다. 처음도 아니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언제나, 어느 때나, 나를 급습해 왔다.
“믿어줘요. 다시 시작해요, 우리.”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목이 메는 기분이 들었다. 망설이던 정진우가 한 자, 한 자,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가 베를린에서 빨리 돌아오리라고 믿는 것부터, 시작해 볼래요.”
심장이 쪼그라들고 뱃속이 찌릿했다. 눈을 들어 한쪽이 나가버린 형광등을 응시했다.
“너 돌아오면 내가 너 다시는 안 놔줄 건데.”
“좋아요.”
“네 커리어 같은 건 상관없이, 어딜 가든 하루라도 연락 안 되면 그때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너… 죽여 버릴 거야.”
이번에는 조금 늦게, 좋아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섭지. 입 안에 맴돌던 말을 내지 못하고 삼켰다. 정진우와의 끝을 아예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이야.”
늘어뜨렸던 팔을 둘러 머리를 끌어안았다. 귓바퀴와 머리카락을 한입에 물었다. 꽤 세게 깨문 탓에 나를 단단히 안고 있는 몸이 움찔했다.
“내가 너 도망갈 기회 주는 거야.”
“…….”
“다시 내 앞에 돌아오면,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바닥을 구르는 물병과 사정없이 구겨진 종이 쪼가리들을 훑다가 눈을 감았다. 닿는 곳마다 입술을 부비는 정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한가득 담겼다.
“돌아올게요.”
제 온기를 되찾은 뺨을 붙들고, 눈을 맞췄다. 별빛을 그대로 담아놓은 눈동자. 산호 빛 입술에 입 맞췄다. 정진우를 남김없이 삼키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깊게, 더욱 깊숙이.